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2008년 설교모음)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주일예배설교 2008/1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2 주일오후예배(2008/10/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3 (주일예배설교 2008/10/12)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4 주일오후예배(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5 (주일예배설교 2008/10/19)
1. 하나님의 소원 (말1:8~10) 2008. 10. 5 주일오전 1
2. 씨 뿌리고 기름을 짤지라도 (미 6:14~15) 2008. 10. 5 주일오후 11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6 주일오후예배(2008/10/19)
3. 만나주시는 예배자 (사 66:2~4) 2008. 10. 12 주일오전 1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7 (주일예배설교 2008/10/26)
4. 하나님 없는 번영 (시 106:15) 2008. 10. 12 주일오후 29
5. 뿌리 없는 섬김에 취하지 말라 (마 7:22~23) 2008. 10. 19 주일오전 33
6. 경외치 않는 자의 껍질뿐인 삶 (학 1:5~6) 2008. 10. 19 주일오후 43
7. 설교자, 하나님의 목소리 (눅 20:9~15) 2008. 10. 26 주일오전 48
8. 참된 예배로 나아가자 (롬12:1) 2008. 11. 9 주일오전 5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주일예배설교 2008/1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2 주일오후예배(2008/10/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3 (주일예배설교 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4 주일오후예배(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5 (주일예배설교 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6 주일오후예배(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7 (주일예배설교 2008/10/26)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8 (주일예배설교 2008/1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하나님의 소원
말 1:8-10
I. 본문의 배경
II. 하나님의 소원 : 성전문을 닫는 것
A. 경외의 상실
B. 하나님을 막 보는 예배
C. 예배와 삶
1. 두 예배
2. 공적 예배의 중요성
III. 결론 : 거짓 예배를 떠나라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3
만나주시는 예배자
사 66:2下-4
I. 본문해설
II. 만나주시는 예배자(2절)
A. 가난한 마음
B. 통회하는 심령
C. 말씀 앞에 떠는 자
III. 하나님을 모욕하는 예배자(3절)
A. 쓸모없는 제물
B. 쓸모없는 마음
1. 자기고집
2. 가증한 기쁨
IV. 심판하시는 하나님(4절)
A. 유혹받게 버려두심
B. 심판 받게 하심
V. 결론: 부르시는 하나님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5
뿌리없는 섬김에 취하지 말라
마 7:22-23
I. 본문해설
II. 섬김을 판단하심
A. 사람들의 기억
B. 그리스도의 판단
III. 섬김의 뿌리-그리스도를 앎
A. ‘아는 것’과 ‘섬기는 것’
B. 예배와 섬김
IV. 결론
배교적인 예배에서 돌이키라 7
설교자, 하나님의 목소리
눅 20:14-15
I. 유대인이 복음을 거절한 방법
- 설교자의 권위를 의심함
II.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본 설교자
A.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
B. 설교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사랑
1. 설교자의 고난
2. 하나님의 사랑
C. 설교자는 죽어도 설교는 남는다.
III. 결론과 적용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8
참된 예배로 나아가자
롬 12:1
I. 본문해설
II. 좁은 예배와 넓은 예배
III. 복음적인 통합: 영적 예배
A. 구약: 헌제와 제물
B. 신약: 마음과 몸
IV. 참된 영적 예배를 위하여
A.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음
-두 가지 본받음
① “세상”을 본받음 : 옛 본성의 움직임
② “예수”를 본받음 : 새 본성의 움직임
B. 영적 변화를 받음
C. 마음을 새롭게 함
V. 결론: 참된 예배로 나아가자.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주일예배설교 2008/1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2 주일오후예배(2008/10/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3 (주일예배설교 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4 주일오후예배(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5 (주일예배설교 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6 주일오후예배(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7 (주일예배설교 2008/10/26)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8 (주일예배설교 2008/11/9)
1.하나님의 소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8-10)
I. 본문 배경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 시대 마지막 성경을 기록하여 남겼습니다. 주전 4세기경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이미 6세기에 마지막 남아있던 유다마저 망하고 바벨론과 메대, 바사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어버린 것보다도 더 심각한 불행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그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경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이들의 마음속에선 이미 하나님을 떠났고 헛된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 부분까지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전반은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부패한 모습은 위로는 제사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는 일반백성들과 백성의 두목과 지도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패하였고 썩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나고 더러운 상처로 가득 곪아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는 병자의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회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속생활, 종교, 모든 것들이 철저하게 썩어있었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이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선택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완전히 상실한 가운데 이어지는 부패한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기 선지자를 하나님은 보내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나의 사자’라고 하는 뜻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사자로 이 선지자는 왔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썩어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패와 무기력한 삶의 한복판에 있는 문제의 근원을 지적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가 부패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구속주인 것을 온 땅과 만방에 알려 그들로 창조목적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모든 민족가운데 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널리 펼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비록 껍질로서의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목적은 좌절되지도 않고 포기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메대, 바사로 이어지는 세계와의 움직임 속에서 나라는 망하여 흩어졌지만, 흩어진 그 백성들이 여호와를 아는 참된 신앙을 그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므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교의 기회로 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각자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지극히 세속적인 백성들과 추호도 구별되지 않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로 정치로부터 종교, 사회, 문화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구석도 성한 곳이 없어서 어디부터 손써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선지자는 이 모든 사회적인 부패와 타락의 근본적인 원인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에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이 이스라엘이라면 그 선택하신 백성들을 통치하시는 중심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율법과 온 땅을 향한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그 왕위가 있는 보좌가 있는 땅을 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맞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온 세상의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핵심적인 장소로서 성전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에게 이스라엘 백성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백성들이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고 당신의 온 자비와 은총을 그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므로 언약을 맺으신 그 은혜 안에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독특한 거룩한 삶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는 아니하시는 매우 특별한 은총의 역사를 이스라엘에게 베푸셨으니 그것은 바로 당신의 임재의 영광을 수시로 그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에 하나님이 성막 위에 임재 하였던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는 구름과 불기둥으로 나타났고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들어간 후에 성전을 통해서 만나게 될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었으며 멀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교회에 임재 해 계시는 영광을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II. 하나님의 소원 : 성전 문을 닫는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시고 거기서 당신의 백성들을 만나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현저하게 욕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뜻밖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 마음 안에 있는 간절한 소원을 표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있어 성전의 문을 닫아 버렸으며 좋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문에 대못을 박고 어느 인간도 그 예배당에 임할 수 없도록 빈 성전으로 내버려 두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A. 경외의 상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로서 그 하나님을 향한 경외를 상실한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경외심이 없이는 그 모든 것들은 헛된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던 고대근동사회에서 이 제사는 이스라엘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이방 백성들도 이런 제사의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제사제도는 원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위로는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그 위로는 아담이 타락한 직후 아담과 그의 자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 제사가 이방 사람들에게 들어가서 자기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왜곡된 것이 바로 이방의 제사입니다. 이 한반도에서 우리들이 드리던 조상들의 제사제도였던 것입니다.
당시 고대근동에서 많은 이방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제사의 개념은 뇌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신들로부터 큰 축복이나 도덕성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관이라고 하는 것은 신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제사의 음식을 먹기 위해서 걸근대는 그런 종류의 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제 때 드려주지 않으면 골을 부리고 심술을 부려서 인간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파멸을 가져오는 그런 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전전긍긍하며 신들을 분노하지 않도록 달래는 일에 앞장을 섰고 그 일이 바로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제사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방의 제사의 개념이 이스라엘 성전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은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충심으로 제사를 드릴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집안 식구도 먹기 힘든 병든 짐승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눈멀어서 사람들도 불결하게 여겨 잡아먹지 않는 그런 막된 짐승을 하나님 앞에 바치며 그것을 제사라고 올렸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 하였나이까 말하는도다”(말1:6) 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외쳤습니다.
‘경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두려운 마음입니다. 나와는 비교될 수 없는 온 땅과 하늘 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무엇으로도 그 질적인 격차를 좁힐 수 없는 그 위대하심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며 땅에 엎드려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첫 번째 요소입니다. 그분의 임재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자기 같은 인간은 티끌일 뿐이라고 고백하며, 나의 생명과 나의 존재와 이 세계와 모든 이 땅의 영광이 오직 그분께 의존한다고 고백하는 그 진실한 경배, 그것이 바로 예배의 첫 번째 정신입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런 두려움만 있다면 우리는 이방의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아첨하기 위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외의 또 다른 요소가 있으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이끌림입니다. 두려우면서도 그 분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고 두려우면서도 가까이 하고 싶은 하나님, 나를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나를 위해 자기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이 땅을 창조하신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하신 그 위대한 사랑과 총체적인 목적을 묵상하며 자기 같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게 되는 것, 하나님의 더 큰 사랑 속으로 이끌려들어 그 달콤함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 사랑의 이끌림이 바로 경건의 두 번째 요소입니다.
바로 이런 두 마음,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예배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상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의 엄위와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고 깔보는 태도로 하나님 앞에 제사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향한 어떤 사랑도 없이 예배를 드렸으니 이들은 그저 종교적인 의무를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B. 하나님을 막 보는 예배
이것이 오늘 여러분들의 예배의 모습이 아니냐고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몇 주째 저는 설교자로서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심경을 나날이 보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막 보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엎드려 강대에서 기도하면서 과연 이렇게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이 오실까? 라는 마음을 설교자에게 갖게 하는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극장에도 십 분전에 가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바쁘고 큰 일이 있길래 예배가 이미 시작되었는데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만약에 어떤 황제가 여러분들을 당신을 알현하도록 초청했는데 그 자리에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들어오지도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길래 여러분들은 2시간도 안 되는 예배시간에 담대하게 일어나 목을 뻣뻣하게 들고 걸어 나가는 것은 어디서 배운 것입니까? 만약에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여러분들이 안하무인격으로 일어나고 문을 박차고 나간다면 성문을 나가기 전에 목이 잘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황제의 위엄을 모두 합해도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화관에 늦게 들어갔을 때 여러분들은 고개를 숙이고 혹시 다른 사람의 영화 관람을 방해할까봐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자기 자리를 찾는 많은 지각한 관람객들을 볼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 화면에 뜨는 주연 배우만도 못한 하나님입니까? 여기에 앉은 거룩한 성도는 5-6천 원씩 돈을 내고 영화관에 앉아서 즐기려고 하는 관람객들만 못한 사람들이냐고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저는 13주 동안 여러분들에게 ‘사랑’을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주 저는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설교를 들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막보는 막된 예배, 추호의 경외심이 없는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는 저의 이 예배는 말할 수없는 하나님을 향한 수치인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건강을 해치리만치 학문에 열중했습니다. 공부를 해서 이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소망은 교수직을 집어던지는 순간에 함께 버렸습니다. 단연코 양심을 걸고 나의 모든 학문적인 탐구는 그대들과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양떼들을 위한 것입니다. 금주에 심각한 회의를 느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을까? 내 새끼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데, 이렇게 파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 설교자의 인생이 병든 교회를 재고품처럼 남기고 시간 속에서 촛불처럼 꺼져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한 주간 내내 눈물이 비 오듯 흘렀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신앙생활 하지 않으려면 나를 자유롭게 놓아주십시오. 진리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가고 싶습니다. 예배시간에 아무런 시간 개념 없이 아무렇게나 들어오고 추호의 가책이 없는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면서 저는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예배시간 구석구석에서 편안한 의자에 기대어 졸고 있는 여러분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죽고 싶게 만들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러한 예배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막보는 것입니다. ‘이 정도 예배드리면 되었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그러시겠어. 복도 안 주시면서’ 이것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있는 언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여기저기서 졸고 있는 그 모습은 저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없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이 누구입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배드리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과연 하나님을 위한 예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절반이상은 지난 한 주간 동안 단 한 마디도 이 예배를 위해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대다수는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여러분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목회자를 위해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고 예배에 나와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제가 핵심을 말해 드릴까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왠지 찝찝한 그 기분을 떨쳐 버리기 위한 양심의 자유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으면 여러분들은 이미 그것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더 이상 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런 식의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소원이 있기는 있는 겁니까?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이 예배에는 무엇 때문에 나옵니까? 이 교회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의무적으로 참석해서 드리는 헌금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저는 여러분들이 교회를 떠나면 다 팔아버리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부채를 짊어지고 힘들 길을 걸어가야 합니까? 8년 전에 이름 모를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집을 파고 자기의 전세를 빼고 심지어는 오랫동안 모았던 퇴직금들을 털어서 예배당을 여기에 건축한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그 일에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진실한 소원이 있습니까? 여러분들 마음속에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은 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 교회에 있는 동안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의 누가 저에게 뭐라고 말해도 이 점에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거슬리고자 하는 사람은 죽도록 이 교회에서 저와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삶속에 복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깔보고 막보는 방식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 예비 되고 준비된 아까운 시간이 아니라 눈먼 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당에 바치는 그 헌금은 더러운 여러분들의 허물이 많은 돈입니다. 마음을 바치지 않는데 그 돈이 어떻게 깨끗할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가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말2:3) 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이 모든 일들의 재앙은 여러분들에게서 멎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까지도 재앙으로 남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맞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예배를 드리지만 나는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르리라 선지자가 말라기 2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결단을 하십시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으면 교회와 기독교 신앙을 떠나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선택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약에 추호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신앙이 남아 있다면 신앙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처럼 행동하고 주님이 계신 것처럼 예배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만약에 그것도 양단간에 확정할 수 없다면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가르쳐 달라고 교회에 비십시오. 이 3가지 중 어느 하나도 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면적인 도전입니다. 무엇을 믿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막 보는지 저는 묻고 싶습니다.
C. 예배와 삶
정확하게 16년 전이었습니다. 저는 17년 전에 서울 시내에서 6-700명 교인이 모이는 당시에 50년 된 교회에서 전도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배시간마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지 앞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일 2부 시간에 550명 내지 600명이 예배를 드리는데 그중 80%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절반은 자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예배시간에 주보에 낙서를 하면서 필담을 하는 사람들, 귓속말로 소곤거리는 사람들, 다리를 벌리고 입을 벌리고 자는 사람들, 교인도 고개를 숙이고 설교자인 목사님도 설교 원고를 읽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예배 순서가 23가지인데 정확하게 65분에 끝났습니다. 안 끝나면 끝나도록 무조건 맞추어 버립니다. 예배가 끝났는데 하나님 만났으면 만나서 반성을 하며 기도하고, 못 만났으면 왜 하나님은 예배 속에서 내게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엎드려야 되잖아요. 설교자가 나가기도 전에 교회당 통로는 교인들로 꽉 차는데 이것은 예배가 끝난 것이 아니라 영화 상영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식당으로 뛰어가서 줄을 서거나 아니면 바쁘게 걸어 나가는데 그래봐야 식구들과 외식하거나 집에 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누워 거실에서 TV 보는 것입니다. 전 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신학교수, 전도사로서 거기에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만약에 오신다면 제가 제일 먼저 가서 오시지 말라고 간청을 드렸을 겁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런 쓰레기 같은 예배를 드리는 곳에 나타나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저의 마음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수치였습니다.
그런 교회 모습의 어떤 부분들이 저의 목회지에서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침통한 마음으로 몇 주를 지냈습니다. 특별히 지난 주간은 그랬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제가 일생을 살면서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영광은 구원받고 하나님을 만난 여러분들이고 이 교회가 저의 첫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모습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그 교회를 비난했던 것을 깊이 후회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저에게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봐라, 재고품 같이 병든 이 교회가 바로 네 모습이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배시간에 무엇이 바쁜지 벌떡 일어나서 걸어가는 사람, 늦게 와도 추호의 뉘우침이 없는 담대한 사람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 어떤 깨달음도 없이 골난 얼굴로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핏기 없는 성도들의 얼굴들, 이것들이 설교자 저 한 사람만의 작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제가 어떻게 긍휼히 여기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충심으로 나아와 통회하고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우리를 위해서 아까운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가장 사랑하는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던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배는 그렇게 하나님 없는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사람은 섬긴다고 분주하게 돌아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 저 사람하고 부딪히면서 그의 섬김의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지체의 가슴에 칼을 꽂고 피를 흘리게 합니다. 그런 식의 섬김이 하나님 앞에 열납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모두 하나님 없이 자기 좋아서 하는 자기 일입니다. 세상에서는 믿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판치고 자기 보람을 위해서 살았는데 이번에는 무대가 교회로 바뀌었을 뿐이지 죄의 지배를 받는 그의 본성은 추호도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미명하에 교회의 몸을 더럽히고 하나님 일을 한다는 미명하에 형제를 정죄하고 미움의 칼을 갈아서 교회를 더럽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의 몸에 약을 바르며 또 한쪽을 칼로 찌르는 것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식의 행동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자기처럼 똑같은 짓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가당하기나 한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갔을 때에 여러분들이 행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나를 섬긴 것이라고 인정을 받을 것 같습니까?
마태복음 7장을 보십시오.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런 저런 일로 하나님을 일평생 섬겼고 그 섬긴 것에 대한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나는 너희를 모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경배의 정신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모든 섬김은 거짓인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삶을 보시기 바랍니다.
1. 두 예배
오늘날 기독교가 얼마나 욕을 먹고 있는지 여러분 아시죠?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릅니다. 거기에는 억울한 측면도 있지만 그러나 오늘날 성도의 삶이 얼마나 형편없이 무너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드리는 삶이 사실을 하나님 앞에 예배로 올려 져야 할 영역입니다. 그것이 넓은 의미의 삶의 예배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두 가지가 있는데 사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입니다. 공적인 예배의 샘이 마르면 삶의 예배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 믿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서 당치도 않은 못된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나라가 정권을 잡고 자기 교회, 자기 구역, 자기 모교에 있는 측근들을 세워서 온 나라의 질서를 잡으려고 하고 그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합니다. 기독교가 세력을 형성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형성한 세력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모욕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지도자들의 본은 여러분들에게 놀랍게 가슴을 파고들어서 그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불감증에 걸린 채 이 세상에서 바쁘게 살아갑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나요? 여러분들이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실패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삶으로서 하나님 앞에 성공할 것 같으냐고 저는 묻는 것입니다.
2. 공적 예배의 중요성
공적인 예배를 산 위에 있는 저수지라고 할 것 같으면 개인적인 예배는 거기에서 흘러오는 실개천입니다. 목회자인 나에게 여러분들의 경건 생활이 느껴집니다.
여러분들이 개인적인 예배의 생활, 은밀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거기에 자기를 비춰보고 자기의 심령을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 이런 개인적인 제사는 아무데서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공적인 예배를 막 드리고 하나님을 막보는 사람들이 개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면 성경을 다시 써야 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 중의 절반이상은 지난 한 주간 동안 1시간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영혼들을 짊어지고 기도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과 많은 일군들조차도 그런 점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렇게 짧은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하나님을 찾아도 되고 말아도 되는 개인의 삶속에서 은밀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천사가 와서 웃을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영적으로나 마음에 있어서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떠난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없는 삶을 살다가 오니 엄숙하게 드리는 이 예배가 여러분들 적성에 맞을 리가 없습니다. 10시에 나오는 여러분들의 모든 소망은 예배가 빨리 끝나는 것입니다. 아닙니까? 저는 그렇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참된 예배의 정신으로 경배하면 한 사람이 모이는 것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 정반대일 경우에는 모이면 모일수록 그것은 수치인 것입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이 중생한 사람이 맞습니까? 중생한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영광 앞에 엎드리는 감각이 있습니다.
13주 동안 설교되었던 고린도전서 13장의 강론은 적어도 저의 10년간의 몸부림치는 연구와 구도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분간 설교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혼자 조용히 글로 써서 전 세계의 목마른 사람들에게 출판해버리고 말겠습니다.
III. 결론 : 거짓 예배를 떠나라
여러분들이 거짓 예배를 떠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영혼에 끊임없는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씨를 뿌리면 싹이 나지 않을 것이며 싹이 났다면 메뚜기가 와서 먹어 버릴 것이며 메뚜기가 남기고 갔다면 커다란 풍재가 들어서 여러분 삶속에서 아무것도 거둘 열매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번영한다면 그 번영은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찾은 신앙입니까? 우리는 모두 한때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고 마음과 모든 사상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종자들이었습니다.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이 운명적으로 그런 삶을 살다가 하나님 없이 지옥 불에 던질 운명들이었습니다. 우리의 공로나 의로움이 티끌만큼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이 세상에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믿어지지 않는 복음이 우리 마음속에 믿어지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갈 곳이 수없이 많았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저는 여기에 교회를 세웠고 여러분들을 만났습니다. 복음을 발견하고도 다른 길을 가고 싶지만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방황하고 길을 발견했어도 그 길로 갈 힘이 없어 주저앉아 있는 여러분들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마치 다윗에게 눈먼 자, 원한이 맺힌 자, 빚진 자, 상심한 자들을 모아주신 것처럼 저는 하잘것없는 사람이었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났고 그 큰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우리의 옛 삶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소박한 소원을 품었습니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그러나 지금 여러분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집어던지며 언제까지 우리가 이런 것을 먹고 살아야 되냐고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진리도 예배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목적을 붙잡은 것도 아니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속절없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귀만 높아져서 다른 교회 가서 설교를 들을 수 없다고 자랑스럽게 목회자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으니 다음부터는 그런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도대체 여러분들의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떠나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믿음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따라오던 사람들, 걸어가는 길은 약속의 땅을 향하는데 마음은 애굽에 가있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두 엎드려져서 죽어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만난 하나님인데 여러분들의 인생을 그렇게 끝내고 싶으십니까?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선택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 것처럼 믿어지지 않으면 믿도록 도와달라고 무릎을 꿇는 구도자의 마음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여기도 없고 아무 곳에도 없다고 믿으면 무신론자로 사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비결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택한 영혼이면 어떤 전도자를 만나서 다시 돌아올 것이고 아니면 영원히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는 성도라면 여러분들이 태도를 바꾸십시오. 이 교회에 있는 동안에는 저는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나를 원수처럼 여겨도 저는 여기서 바른 도를 가르칠 것입니다.
거짓 예배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왕년에 받은 은혜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다 흘러갔고 지금 여러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마음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를 지극히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을 보이십시오.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주일예배설교 2008/1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2 주일오후예배(2008/10/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3 (주일예배설교 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4 주일오후예배(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5 (주일예배설교 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6 주일오후예배(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7 (주일예배설교 2008/10/26)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8 (주일예배설교 2008/11/9)
2.씨 뿌리고 기름을 짤지라도
“네가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속이 항상 빌 것이며 네가 감추나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네가 씨를 뿌리나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을 밟으나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미6:14-15)
미가 선지자는 8세기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는 특별히 가난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었기 때문에 몰인정한 부자들에 대한 탄핵이 이어졌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고민하는 내용이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고민하시는 내용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대면하고 있는 이 6장에서 여러분 중 누구라도 다 알 수 있는 성경구절 하나가 미가서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이 유명한 이야기가 담긴 구절입니다. 웃지 못할 일은 많은 사람이 여기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찬송)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부른다는 것입니다. 부르는 사람은 감격하며 부르지만 사실 성경의 본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미가는 그렇게 고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제사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 앞에 무엇으로 제사를 드릴까? 번제물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나갈까? 그냥 숫양 천마리쯤 드려? 아니면 기름을 수만말 짜가지고 가져 갈까? 아니면 내가 죄를 지었는데 내 아들 한번 불태워 볼까? 이것은 이방 제사에서의 속죄 의식과 관련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시뻘겋게 단 쇳덩어리 속에 자기 자식을 넣어서 뚜껑을 닫아 불태워서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에게 임하는 진노를 면해 보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우리 자식 신학교 보내 볼까 하는것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죄를 지었으면 자기가 불 속으로 들어가야지 왜 세끼를 가져다 태워드리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가 선지자가 철저히 비웃으면서 비난하는 장면입니다.
최근 들어서 이 성경 구절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이 만큼이라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과연 요즘 교인들이 자기 안에 있는 이 많은 죄를 가지고 내 자식을 어떻게 해서 죄를 용서 받아 볼까 하는 이런 생각이나 하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아가면서 일년된 송아지를 드릴까? 내친김에 천천의 숫양을 가져다 바칠까? 누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예배에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미가가 피를 토하듯이 외치던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날 우리 시대보다 훨씬 났다 라는 결론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그렇지 못하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다 이렇게 짓 밟아 놓고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죠? 역설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면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마실 것인가 별로 염려를 안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으니까... 진짜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충만하게 될 때
(찬송)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를 않노라
아무 상관 없습니다. 왕의 음식을 먹고 황제의 잠자리를 누려도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형벌과 같은 고통일 것이고 주님을 섬길수만 있다면 조악한 음식과 불편한 잠자리에서도 그는 만족을 누릴것입니다. 예배를 이 지경으로 짓 밟아 결국은 선지자로부터 치열한 탄핵을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끊어진 이들의 관심은 예배를 짓 밟아 버린 이 배교에 가까운 이들의 영적인 무관심은 오히려 자기의 육신에 대해서는 아주 열심히 움직이게끔 그들을 변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씨를 뿌리며 추수하고 싶어 했습니다. 감람을 밟으며 그 열매에서 기름을 짜고 싶어했고 포도주의 틀을 밟으며 술을 마시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선지자는 말합니다. 네가 씨를 뿌리지만 추수할 수 없을 것이다. 기름을 내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주 틀을 밟지만 술이 네 술이 안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화) 십여년 전에 저는 농사를 지어 본 적은 없지만 너무 가슴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곡식이 지금쯤 되면 탱탱하게 쌀알을 형성하는 물이 벼 이삭에 꽉 차게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 가을 따가운 햇살아래 그것이 영글어서 여러분들이 먹는 딱딱한 쌀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냉애가 확 덮쳤습니다. 그만 액체 상태로 있던 그 낱알들이 전부 다 얼어 버렸습니다. 그때를 잊혀지지 않습니다. 텔레비젼에 그 현장을 중계해 주는데 어느 농부가 자기 들판에 나와서 낱알을 손으로 만지다가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두 다리를 뻗고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일년 내내 농사를 지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천둥과 번개의 위험을 무릎쓰고 비가 쏟아 지면 들길을 뛰어 나가 물꼬를 트고 그리고 해충을 방제하고 열심히 애를 썻는데 그래서 이제 영글게 되었는데 냉애가 닥쳐서 쌀알이 모두 죽어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 통곡하는 그 마음이 바로 농심입니다.
교회는 포도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포도원을 이루게 하시고 맡겨 주신 것은 줄기 가지가 뻗어서 그래서 특상품의 포도로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이 포도원을 여기에 세우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디에 흩어져 살든지 명품 포도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여기에 보내어 때로는 물질로 때로는 눈물로 말씀을 전하거나 교회를 섬기면서 그렇게 포도원을 가꾸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배 밑창에서 노를 젖는 노예 같은 일꾼들이었고 주님이 친히 선장처럼 교회를 이끌어 오셨고 그분은 포도원의 주인이셨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정말 애정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 보려고 몸부림치던 모든 일들은 여러분들에게 있어 눈물 나도록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예배를 그렇게 드리면 여러분들에게 행복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씨를 뿌려도 어떠한 열매도 거두지 못할 것이고 몸이 부서지게 일해도 여러분들은 단 한그릇의 기름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땡볕에 포도밭을 가꾸느라고 비참하게 수고해도 단 한잔의 포도주도 마실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상입니다. 나를 가볍게 여기는 자를 나도 가볍게 여기고 나를 중히 여기는 그를 나도 소중히 여기리 라는 것이 주님의 생각입니다. 이 세상에 산다고 하는 모든 인생의 날들이 시련인 날들이 없겠지만 우리는 지금 바로 매우 중요한 시기를 영적으로 지나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이 애쓰고 사업에 힘을 내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번영을 누리기 위해 힘쓰고 애 쓴다고 할지라도 예배를 그렇게 드리고 있는 한 여러분들의 삶에는 어떠한 축복도 없습니다. 대오각성 하시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깊이 뉘우치고 추호도 이 이야기를 목회자의 하소연이라거나 아니면 객기로 여기지 말고 주님이 친히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경고라고 생각하고 넓은 의미의 예배부터 시작해서 가장 좁은 의미의 예배,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드리는 개인적인 예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여러분들의 예배 생활이 썩고 병들었는지를 진지하게 살피고 아프더라도 이 지점쯤에서 칼로 도려내려고 하는 결단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경고 없이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시거나 뉘우치는 마음 없이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고 공평한 분입니다. 거스르는 자에게는 무서운 분이시고 뉘우치고 돌아오는 자에게는 한 없이 자비로운 하나님 이십니다. 요즘 여러분들의 표정을 보면 한마디로 하나님께 싫증난 표정입니다. 신앙에 지겹고 하나님께 대해 싫증난 사람들, 마음에는 바람기가 가득 들었지만 할 수 없이 자식 생각해서 아내와 살아 주는 남편처럼 그렇게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것이 목회자에게 느껴 집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이면 매일 눈물을 흘리며 사택까지 갑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32평짜리 아파트 하나를 마련해 주었읍니다만 추호도 기쁘지 않습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행복을 느낀지가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심방을 하거나 여러분들을 만나 보면 너무 가엾습니다. 무거운 인생의 짊을 지고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살아 보려고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보면 교회에 와서 여러분들 위로해 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합당하지 않은 인간의 큰 위로 보다는 하나님의 작은 채찍이 훨씬 훌륭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경회를 준비 하면서도 신이 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이야기 하는데 교인의 40%정도 밖에 참석을 안한다고 합니다. 나는 솔직히 여러분들에게 먹이기 위해서 몇천명 집회도 마다하고 안가는데 꼭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부르는데 많습니다. 전 세계에서 한주도 안 비우고 다닐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이렇게 교인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경회를 강사 한번 안부르고 15년 동안 일년에 네 번씩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보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운데 그런데 해결의 길은 여러분들이 주님을 제대로 경외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해결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싫다고 하는데 내가 심방을 가서 여러분들의 등을 두드리면서 문제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하면 하나님이 "이 자식이!"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답은 없습니다. 수 없이 방황하고 돌아와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시고 그리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언제나 상한 마음으로 주님을 찿는 사람들 그들만이 주님을 만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총체적인 개혁을 촉구 합니다. 무엇 보다도 여러분들의 삶에 대대적인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 주를 여러분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 월요일에 일어나 새벽에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몸이 부서지는것 같아서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주일이면 7시간을 설교를 합니다. 제가 못 나오는 날 여러분들이 더 많이 나와서 기도해 줄 수는 없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어떻게 하든지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정말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어두운 세상의 빛처럼 그렇게 살게 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선을 행할 힘이 없으면 은혜를 주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없으면 지혜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예배의 생활을 여러분 스스로 현재의 예배 생활에 대해서 심각하게 반성하고 그렇게밖에 예배 드리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며 자기를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로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여러분 가엾습니다. 젊은이들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고 하루 하루 살아가는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천원 한 장 쓰면서도 그런 성도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문제는 거기에 있지만 해결은 거기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문제가 무엇이든지간에 문제는 여러개이지만 답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님께로 돌아 와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기울여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여전히 우리의 시련이 남아 있으면 그 시련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더 많이 의지 하면서 주님의 형상을 회복해 갈 것이고 주님이 우리를 평탄할 길로 인도하시면 그곳에서 우리는 번영한 가운데 주님을 섬기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뿌려도 주님과 함께 뿌리고 밟아도 주님과 함께 밟으며 그래서 그 결실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런 일체의 삶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목매어도 세상에는 여러분 친구 없습니다.
(찬송)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주님께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주일예배설교 2008/1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2 주일오후예배(2008/10/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3 (주일예배설교 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4 주일오후예배(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5 (주일예배설교 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6 주일오후예배(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7 (주일예배설교 2008/10/26)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8 (주일예배설교 2008/11/9)
3.만나주시는 예배자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사 66:2下~4)
I. 본문 해설
이사야는 주전 7세기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이사야서를 쓰면서 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고 40장 이후부터 이어지는 후반부에서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있을 회복을 예언하였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인 66장의 문맥은 이스라엘이 이후의 역사 속에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인데 그 바벨론 포로 70년 후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때 일어날 성전의 수축, 수축된 그 성전 속에서 드리는 예배,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이 나타날 것인지를 미리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사야 66장의 문맥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예언하고 있는 예언자적 현재 형태의 문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으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후에 고국으로 귀향하게 됩니다.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원하는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지어도 좋다는 명령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아래 오랫동안 터 붙이고 살았던 바벨론 포로의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비어있는 땅이 아니라 이미 이방나라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것은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람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70년 동안 정들었던 자기 삶의 기반을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올라가서 처음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수축했을 때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전의 기초공사를 하면서 노인들은 이전의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그 초라한 지대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젊은이들은 이제 우리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한다는 기쁨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동안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믿음으로 은혜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신앙의 감격과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위험을 무릎 쓰고 성전을 수축하고 그곳에서 올리는 감격적인 예배의 기쁨은 사라지고 점점 그 백성들은 핏기 없는 차가운 예배생활로 하나님 마음에 고통을 다시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각성과 함께 깨어 일어났던 삶의 경건이 무너지고 다시 타락과 죄에 물들어가는 그들의 삶의 연장이었습니다. 삶을 능가하는 예배가 없고 예배를 넘어서는 삶이 없는 진실한 증거를 이들의 역사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이사야 선지자는 미리 내다보면서 하나님 앞에 생명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II. 만나주시는 예배자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예배자는 누구입니까?
A. 가난한 마음
2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여기서 ‘권고하다’라는 말은 타이른다는 뜻이 아니라 방문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카파드(פָּקַד)입니다. “내가 너희를 찾아오리니” 그런 뜻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고 말씀을 인하여 떠는 그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을 못 만나는 예배인데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오십니다. 그에게 큰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어떤 마음? 가난한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가난해 보셨습니까? 가난한 사람은 남의 도움에 대해서 절실합니다. 습관적으로 남의 도움을 받는데 아주 익숙해진 거지 근성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가난한 마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남에게 빌어먹는 정신일 뿐입니다. 걸근대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난한 마음은 그런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공로로는 도저히 주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의지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의 손에 이끌려 봄철이면 대공원에 놀러 많이 갑니다. 그 아이가 주위의 풍경에 이끌리고 예쁜 동물들을 보고 즐거워하고 장난감을 만지고 놀다가 부모를 잃어버리면 손에 든 사탕, 풍선 다 던져버리고 입술이 새파랗게 되어 엄마를 부릅니다. 좋은 구경도 신기한 동물도 맛있는 사탕도 이 아이에겐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난한 마음, 오늘 예배드리는 이것이 나의 인생에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큰 구속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 같은 죄인이 드리는 이 예배가 얼마나 감사할까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눈이 나빠서 군대에 갔다가 도로 왔습니다. 처음 캄캄한 밤중에 논산에 떨어졌을 때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그야말로 논이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캄캄한 밤중에 이끌려서 들어가고 일주일 동안 정신없이 그 속에서 생활했는데 수요일이 되어도 예배당에 갈 수 없고 금요일이 되어도 예배당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에 예배당에 갔습니다. 조그만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풍금소리가 들리는데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 한 번의 예배가 일생동안 잊어지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의 어떤 사람들은 한 번 예배를 드리고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예배당에 나옵니까? 습관적인 지각, 주차장에서 주차위원들과 싸우는 몰상식함, 차를 몰고 와서 아무데나 세워놓고 주위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동네 사람들에게 개독교 예수쟁이라고 욕먹는 유치한 시민생활, 그런 속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습니까? 정말 가난한 마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발자국도 더 내 인생의 길을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는 그런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단 한 시간이라도 있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주시고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주님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통째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B. 통회하는 심령
이런 가난한 마음을 가질 때 그는 통회하는 심령이 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심령”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신앙의 깊은 핵심적인 자리를 가리킵니다. 껍데기만 예수 믿는 사람들, 인공위성이 지구의 주위를 수 만 바퀴 돌았지만 한 번도 지구와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교회당을 들락거리면서 수없이 예수님 주위를 맴돌았지만 한 번도 주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통회하는 심령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누가 여러분들을 비난 할까요? 마음에도 없는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그런 예배 안 드렸다는 것으로 하나님이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어차피 통회하는 심령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진정으로 드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레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후에 자기 죄의 문제를 제사로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한 나라의 제왕이었습니다. 제사장도 많았고 소와 양도 무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니 하나님이 제물을 기뻐하셨더라면 나는 드렸을 것이라 그리고는 전혀 다른 제물을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사실을 영혼의 깊은 어두움과 거기에서 헤어 나오려는 몸부림 속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통렬하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깊이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그것은 통회하는 심령에게 주어집니다. 몇 십 억짜리 파이프 오르간을 놓고 드리는 예배에서 주님이 주시는 것 아닙니다. 고매한 학문을 가진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 아닙니다. 깊이 통회하는 심령, 하나님 앞에 예배 속에서 만나는 주님의 거룩함 때문에 주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주시는 예배자의 조건입니다. 한주일 동안을 다행히 신문에 안 나고 경찰서에 끌려가서 취조 안 받고 여러분들이 살았어도 차라리 죄짓고 고통을 받아서 주일에는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고 자기가 지은 이 큰 죄 때문에 자신은 정말 주님의 마음에 못을 박았다고 생각하며 통회하는 사람이 주님을 더 빨리 만납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이 예배가 끝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서 성도들이 떠나가든지 말든지 그 자리에 앉아서 눈물에 흠뻑 젖게 회개해 본적이 언제입니까? 드라마를 보면서 흘린 눈물은 있어도 거룩한 하나님 만나고 흘린 눈물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통회하는 심령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C. 말씀 앞에 떠는 자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예배자는 그래서 하나님 말씀 앞에 떠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떠는 이 떨림은 파괴적인 떨림이 있고 건설적인 떨림이 있습니다. 파괴적인 떨림은 노예적인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며 느끼는 공포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을 더 완강하게 거부하고 도망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건설적인 떨림은 그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비록 죄가 많고 감히 주님 앞에 설 수 없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꼭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떨림입니다.
캐나다에서 목사 시험을 보는데 시험이 다 끝나고 어느 젊은 강도사에게 노회 목사님이 질문했습니다. 유능하게 다 대답했는데 연세 드신 목사님이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가 되려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너같이 죄도 많이 짓고 위선자가 어떻게 감히 목사가 될 수 있겠느냐고 당신에게 손가락질하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침묵이 면접 시험장에서 한참 흘렀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강도사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습니다. “오, 주여!” 그때 목사님이 “당신은 합격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 충분히 완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 앞에 미동도 하지 않는 불신앙의 고집, 믿으려고 하는데 잘 안 믿어지는 것은 죄가 작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예 하나님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굳게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앙의 고집입니다. 우상숭배보다 더 무서운 죄입니다. 결국은 지옥은 안 믿는 자들의 고향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자들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우상숭배는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결과일 뿐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믿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일주일 동안의 삶은 곤고하고 내 영혼은 병들었지만 내가 오늘 주님의 말씀 앞에 떨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사모함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주님이 만나주시는 예배자가 되기를 갈망하며 ‘비록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흔들어 놓았으면 좋겠어요. 나도 어찌할 수 없으니 믿음이 없는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흔들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흔들릴 대로 흔들리며 살던 약하디 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배당에 와서는 견고하고 확실하게 굳센지 저는 궁금합니다.
목회자의 최고의 위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그 말씀 앞에 떨리고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앞에 떠는 사람, 그 말씀 앞에서 자기가 티끌 같은 인간인데 하나님 앞에 대적했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움으로 떠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찾아주시는 것입니다.
III. 하나님을 모욕하는 예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를 미리 바라보시면서 하나님 앞에 감격을 잃어버린 형식적인 예배 앞에서 이들을 통해 받으시는 당신의 모욕을 말씀하십니다.
A. 쓸모없는 재물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예배자들의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소를 잡고 어린 양을 드리고 분향을 올리는 모든 것들은 쓸데없는 재물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그 당시에는 제사였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 되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제사가 있을 수 없으니 이는 미래의 그리스도를 통해 그 고난의 속죄의 피를 통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받을 것임을 예표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소를 죽이는 것과 어린양을 잡는 것, 정성껏 향을 피워 주님 앞에 올리는 향기로운 제사는 제사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는 끔찍하게도 이렇게 소를 죽이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고 어린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개를 죽여 모가지를 꺾는 것이고 주님 앞에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의 모습은 돼지에 피를 바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분향은 우상을 향한 찬송이라고 지적하셨는데 이 모든 살인, 개, 돼지의 피, 우상을 향한 찬송은 이교도들의 끔찍한 우상숭배의 전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가져다 바치는 이 모든 예물, 정성껏 드리는 모든 제사가 하나님 앞에 이교도의 돼지의 피를 바른 더러운 예배라고 진멸하시며 이들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A. 쓸모없는 마음
무엇 때문일까요? 이들의 제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성스럽고 아주 꼼꼼하고 세심하게 율법을 따라서 전통적으로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모든 제물은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러분들에게는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이런 비유를 생각해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들을 초청했습니다. 여러분들을 많이 존경한다고 공손히 인사하면서 자신의 집에 와서 식사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더니 고래등과 같은 커다란 기와집이었습니다. 아름답고 큰 육중한 문이 열리자 예쁘게 한복을 차려입은 집주인 내외가 맨발로 뛰어나와 마당에까지 내려와서 공손하게 절했습니다. 그들이 입은 한복은 아주 고급스러웠습니다. 정성껏 단장한 모습은 대갓집 영감다웠습니다. 아주 예의 바르게 여러분들을 인도해서 크고 넓은 대청마루를 지나고 문간방을 지나서 그 집 주인 이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안방으로 여러분을 모셔들었습니다. 아주 깨끗하게 청소되고 훌륭한 안방이었습니다. 커다란 안방에 비단으로 수를 놓은 큰 방석 세 개를 놓고 여러분들을 가장 좋은 자리에 좌정하고 두 부부가 앉았습니다. 하인 네 사람에 의해서 떡 벌어지게 차려진 교자상이 무겁고 휘어질듯이 들려서 안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바깥에서는 풍악을 울리는 소리까지 들려왔습니다. 가야금 거문고 소리에 맞춰서 드디어 식사가 시작될 예정이었습니다. 커다란 교자상 위에 놓인 하나하나의 반찬마다 모두 아름다운 도자기의 뚜껑이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드시옵소서.” 여러분들은 밥을 먹기 위해 제일 먼저 숟가락을 들고 감사한 마음으로 밥뚜껑을 열었습니다. 아름다운 사기그릇의 뚜껑을 열자 똥이 가득 들었습니다. 국을 먹기 위해 뚜껑을 열었더니 오줌이었습니다. 반찬을 먹기 위해 열었더니 토한 것이었습니다. 또 반찬을 먹기 위해 열었더니 이번에는 내장에서 쏟아져 나온 똥 찌꺼기였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아름다운 대갓집, 마당까지 뛰어나온 예쁜 한복을 입은 부부, 공손한 인사, 아름다운 음악소리, 훌륭한 안방, 네 명의 잘 차려입은 하인들에게 들려나온 교자상, 그런 것들이 오히려 여러분들에 대한 더 큰 모독으로 비치지 않겠습니까?
이런 예배를 그렇게 드리는 사람들을 향해 느끼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제일 싫어하는 살인, 개의 모가지를 뿌려 트리는 것, 돼지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치를 떨듯이 싫어한 것이었습니다. 중간사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큰 폭동이 왜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돼지 피를 발랐습니다. 민족적인 폭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린 제물은 쓸모없는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쓸모없는 제물은 쓸모없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이 쓸모없는 마음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자기 고집이었고 또 하나는 가증한 기쁨이었습니다.
1. 자기 고집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은 하나님 앞에 정성껏 큰 소를 잡았고 어린양을 죽였으며 정성껏 분향을 올렸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습니다.
제사를 어떻게 드리는 지 아십니까? 헌제자가 자기의 죄를 위해 제물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거기에 손을 얹고 간절한 기도로 참회하는 헌제자의 죄를 짐승에게 옮겨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짐승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정말 진실한 신앙심으로 제사를 드리러 나오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기르던 어린양, 자기를 알아보고 기어오르는 어린양을 제사장이 기도해서 자기의 모든 죄를 어린양에게 옮기고 그를 찔러서 피 흘리고 내장이 산발하게 찢어져서 죽어가는 어린양을 보면서 껌 씹을 수 있겠어요? 껌 씹으면서 ‘양 새끼 또 하나 죽는구나.’ 이럴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시계를 보면서 ‘이놈의 제사 언제나 끝나나?’ 빨리 가서 밥 먹어야 되는데 그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정상적인 헌제자라면 그 양이 죽임을 당하고 산산이 파헤쳐지고 불 위에 올라서 그것들이 연기가 되어 타오르고 있을 때 피와 내쳐진 내장과 자욱한 연기 속에서 통곡하며 울지 않았겠어요?
헌제자 자신은 죽은 적이 없는데 애매한 소만 죽입니까? 자기는 꺾어진 적이 없는데 애매한 짐승의 목을 꺾습니까? 자기는 절대로 불에 타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분향만 올리는 것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앙생활의 꺾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를 목회한지 15년이 지났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예배당을 나가는 여러분들을 보면 저는 눈물이 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렇게 자기 꺾임이 없는 속에서 드리는 예배가 티끌만큼이라도 하나님 앞에 상납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중에 장로가 되고 싶은 사람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마지막 날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껍데기입니다. 교회에서 명함 내놓고 싶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 있는데 그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기보다는 담임목사 주위에서 빙빙 돌고 싶어 하는 사람들 있는데 지푸라기와 같은 것입니다. 설령 제가 약해서 그대들을 많이 의지하고 좋아한다고 칩시다. 둘이 돌아다니면서 밥이나 먹고 놀러나 다니면 마지막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런 것이 그렇게 좋으세요?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제물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10년, 20년 몇 십 년 동안 너무너무 정들었던 교회였는데 견딜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을 안고 1년 전, 혹은 5년 전, 10년 전에 열린 교회 문을 두드리며 여기서 신앙생활을 하겠노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때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오랫동안 사귀었던 성도들과의 인간적인 정, 그런 모든 것을 다 감수하면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여기에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오지 않았습니까?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이 옛날에 그 교회에 상처를 주고 떠났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이곳에서 반복할 때 역시 그 종자는 말릴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진리에 의한 본성의 끊임없는 변화만이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지, 좋은 설교를 따라 이 교회 저 교회 떠돌아다니는 영적인 비렁뱅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서 좋은 날 볼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예전에는 핑계 댈 것이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진리가 없네요. 진리가 있는 교회로 가겠습니다.’ 그 교회에 못을 박고 떠나 왔습니다. 지금은 왜 그러십니까? 이번에는 또 말을 바꾸겠지요? ‘진리는 있는데 목회자가 인정머리가 없네요. 말씀은 있는데 성도들이 사랑이 없네요.’ 그러면 여러분, 다음은 어떤 교회를 찾으시렵니까? 서너 번 반복하고 나면 여러분 인생에 황혼이 옵니다. 주님 보시기에 여러분들은 한 번도 예배드린 적이 없는 사람으로 비칠 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으십니까? 아프지만 들으세요. 여러분들의 어떤 분들은 그래도 이 교회에서 하며 버티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나이에 내가 어디에 가서 뭔 좋은 꼴을 보겠다고…아무데서나 눌러 앉아 인생을 마쳐야지’ 그것이 견고한 신앙생활입니까? 소 잡아먹은 귀신의 신앙입니까? 하나님하고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신앙 생활하는 분들은 열린 교회의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들러붙어서 20-30년 살다가 장례식을 하든지 길거리에서 방황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임금 삼고 살던 사람이 이번에는 교회 와서 그렇게 사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역사의 비탈길에서 외쳤던 그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너희는 택하라 저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이방신에게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여호와를 섬기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인간적으로도 그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사상에 하나님이 없으면 떠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서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이 예배당에 남아서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를 선택하며 일체의 깨어짐과 꺾임이 없이 고집스러운 삶을 살아가서 주님의 교회에 못을 박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사라지는 곳에서는 언제나 자기의 영광과 유혹을 위한 욕심이 고개를 들게 마련입니다. 그런 쓸모없는 마음이 이들이 드리는 모든 예배를 허위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꺾임이 없는 신앙생활은 바로 하나님 없던 생각에 의해서도 바뀔 줄 모르는 편견과 아집, 굳어진 마음의 감정, 자기 고집대로 살겠다는 그런 움직이지 않는 꿋꿋한 완고함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부서지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2. 가증한 기쁨
이스라엘의 모든 드리는 소와 어린양과 분향을 이교도의 돼지 피와 모가지 꺾인 개로 만들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쓸모없는 마음속에서 가증한 기쁨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궁금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도대체 무엇이 기쁜지 묻고 싶습니다. 어떤 것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세상의 향락이 기쁘던가요? 아니면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받는 물질적인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즐거움이 되던가요? 어떤 것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기쁨입니까? 만약에 기쁨이 없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참 한심한 인생입니다.
‘가증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매우 특징적인 표현입니다. ‘가증하다’라고 하는 이 말은 십계명 중 일, 이계명과 필연적으로 연관이 있습니다. 일계명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계명이고 이계명은 그것들을 형상을 빚어 만들어 거기에 경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가증은 바로 그 계명을 어기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 가증한 기쁨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우상에게 돌리면서 얻는 기쁨이고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한 우상숭배를 통해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무당집에 가서 절한 적도 없고 절에 가서 무릎을 꿇은 적도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잘났다.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우상숭배는 그런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이 무엇인지 압니까?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탐심은 골로새서에 의하면 우상숭배입니다.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을 어기면 다시 첫 번째 계명으로 돌아갑니다. 십계명은 위, 아래 일자로 되어있는 계명이 아니라 원통형의 계명입니다. 마지막 계명을 어기면 첫 번째 계명을 불순종한 것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모든 계명들을 지키는 방향으로 삶이 편성이 되고 자기를 사랑하면 이 모든 계명들을 짓밟는 삶이 되는 겁니다. 다행히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우상숭배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증한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그의 모든 예배를 쓸모없는 예배를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지루하게 견디는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간다면 천국은 그야말로 지겨운 곳이 될 것입니다. 거기서 늘 예배드리고 늘 하나님 찬송하는 것이 본업입니다. 어떻게 그 천국에서 지내시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 이렇게 가증한 예배를 드리고 가증한 기쁨을 찾으면서 껍질 밖에 없는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존 칼빈 선생님이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들은 마치 밤을 따서 속을 파먹고 껍데기만 하나님께 바치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놀랍게 그들의 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숨겨진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미 어떤 사람들에겐 그 속에 있는 영혼의 깊이 곪고 썩은 것들이 드러나서 더러운 추문으로 소문이 나고 그 삶속에서 하나님을 버린 배교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추문이 일어납니다. 이 모두 하나님 아닌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은 이유인 것입니다.
Ⅳ.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을 모욕하는 예배자들은 겉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해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해 사단의 계교가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어디를 가든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를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커다란 재앙입니다. 병자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인심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이 아니고 위중한 환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복은 좋은 요리사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독수리의 눈과 사자의 심장, 여인의 손길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병세를 예리하게 보고 필요하면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두개골을 톱으로 뚜껑을 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는 지극히 사랑하는 엄마의 손길 같은 세밀한 솜씨로 뇌 속에 있는 종양들을 베어낼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싫으시겠죠? 그것이 싫다면 여러분들은 교회를 잘못 선택했습니다. 몇 주간 동안 견디기 힘든 영혼의 고통을 느끼면서 저는 새삼 결심했습니다. 제가 죽든지 이 교회에서 떠나가지 않는 한 한치도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나를 원수처럼 여기고 달려들어도 저는 한치도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다수는 수많은 사람이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사람이라도 그것이 다수인 것입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의 목회를 보고 욕하며 떠날 것입니다. 실제로 이 교회 역사에는 그런 인간들이 많았습니다. 한때에는 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펑펑 울던 인간들이 마지막에 똥 같은 예배를 드리다가 떠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나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을 거슬리는 사람들에게는 밤톨만큼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거슬려 사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기 연민이고 자기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보이시고 당신을 향해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인자하심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유혹받게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A. 유혹받게 버려두심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가장 나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주님을 막보는 것 같은 그런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버려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완전하게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가 한계에 오게 되면 여러분들을 다른 방식으로 돌이키게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시는데 유혹을 받게 내버려두십니다.
두 가지 방법으로 일어나는데 첫째는 여러분 가운데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은혜를 다 소진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채워주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와서 마음이 닫히고 졸고 예배를 드려도 티끌 같은 은혜가 없다고 생각되면 목회자를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시고 여러분들의 영혼 안에 남은 은혜를 모두 소멸시켜 버리시려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은혜를 다 쏟아버리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16-17살 밖에 안 된 아이들이 여러분들과 똑같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요즘 30-40분에 예배가 끝나고 길어봐야 60분이지만 그 아이들은 나한테 90분씩 설교를 들었습니다. 듣고 나면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아이들은 회개하다가 까무러쳤습니다. 그러고 나면 영혼의 큰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렇게 못합니다. 나이든 집사님 한분이 계시는데 양쪽 옆에서 두 아이가 통회 자복하다가 의자에서 미끄러져 쓰러질 정도가 되는데 거기서 자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 되면 이것은 연약해서 자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그 속에 들어와서 남은 은혜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일말의 순종과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그것까지도 싹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눈을 지그시 감고 어금니를 꽉 깨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전도사는 다 압니다. ‘이 자식 또 시작이구나.’ 그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 교회 그만두는 순간까지 한발자국도 뒤로 안 물러났습니다. 많이 기도해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5년 뒤 어느 기도원에 제가 설교하러 갔습니다. 겨울 추운 날이었는데 그래도 햇볕이 따갑게 내려쬐이는 2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기서 어떤 사람이 “전도사님” 하고 옵니다. 생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얼굴은 반쪽이고 바짝 마른 하얗게 창백한 얼굴로 다가옵니다. 마주보고도 “누구세요?” 그랬습니다. 그때 거기서 푹 자던 집사님이었습니다. “아니 집사님 여기 왜 와 계세요?” “목사님 제가 장암 말기입니다. 의사는 한 달이 남았다는데 여기서 주님께 마지막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너무 가엾어서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잔디밭 위에서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결국 죽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예배시간에 졸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 암에 걸려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받을 수 있는 영혼의 유익의 기회가 하나님 앞에 마지막으로 주어졌는데 그것을 발로 차고 어두운 인생의 마지막 마무리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은 은혜를 소진시키실 뿐 아니라 억제하는 은혜를 거둡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게 지혜로운 방법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따라서 죄를 짓지 못하도록 수없는 수단으로 죄를 짓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 그것들이 이상하게 모두 사라지면서 마음먹은 대로 다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억제하시는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억제하시는 은혜의 교리는 어떤 것이냐면 비탈길에 차를 세워놓았는데 사이드 브레이크가 작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브레이크를 꽉 밟고 있으라고 하고 옆에 있는 사람이 뛰어 내려가서 돌멩이를 바쳐놓습니다. 그러면 비탈에서도 끄떡없이 차가 서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음은 힘 있게 죄로 기울어지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작동 못하도록 무엇인가 환경이나 다른 것을 사용해서 돌을 받혀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도저히 기회를 주어도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바퀴에 고여 있는 돌멩이를 발로 차 버리십니다. 그러면 그 차는 무서운 힘으로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서 닥치는 대로 들이받으면서 엄청난 파괴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못 만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살인하고 간통하고 명예 훼손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못하게 막으시는 겁니다. 여러 번 기회를 주어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발로 차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신다고 생각하지만 원래 충분히 죄를 지을 수 있는 포악한 상태가 계속되었는데 막혀 있다가 어느 순간에 풀어지면서 쏜살같이 내려 달리는 것입니다. 20톤짜리 트럭이 언덕을 내려가면서 집과 전신주, 가게, 노점상을 들이 막으면서 600미터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좋은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호하셨다가 끝까지 깨닫지 않으니까 확 빼 버리시는 겁니다. 마음 생긴 대로 그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직장이 떨어지고 사업이 망하고 집에 화재가 나고 아이들이 병들고 자기가 사형선고를 받고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려고 마음을 먹으면 놀랍게 쏟아지던 예배의 은혜가 딱 끊어지면서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B. 심판받게 하심
두 번째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방법은 심판을 받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 이것을 성경에 묘사하기를 ‘무서운 것이 너희에게 임하게 할 것이라’
무서운 것은 사람마다 틀립니다.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에게 명예를 더럽히고 추문에 말려드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짖어대든지 ‘나는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하나님이 물질을 뺏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다 필요 없어. 우리 부부만 사이좋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아내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 될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들이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없이 잘 나가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어느 한순간에 일시에 무너지게 하면서 오랫동안 예배 속에서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많은 기회를 주셨던 그것을 하나님 앞에 흘려보낸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당하게 갚으시는 것입니다.
Ⅴ. 결론 : 부르시는 하나님
주님은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불행히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수없이 불렀지만 이들은 대답하지 않았고 수없이 반복해서 말씀하셨지만 이들은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품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당신을 대신해서 여러분들의 지성에 하나님의 생각을 보이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깊이 돌이키십시오.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은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완고하게 이 길을 가다가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큰 환난을 만나거나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여러분들의 목회자가 눈물로 호소하던 이 광경을 기억하십시오. 꿈에서라도 내 소리를 듣고 돌아오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주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효도가 무엇입니까? 당뇨병 걸린 어머님께 사탕 사다드리는 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 부모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봐 밤에 입술을 꽉 깨물고 진통을 느끼면서도 돌아누워서 신음하는 아버지의 관절을 염려하고 그 신경통을 헤아릴 수 있는 자식의 마음이 효도의 마음입니다.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마음에 감추고 속앓이를 하는 어머님의 심중에 있는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 가시를 빼어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유산이나 노리는 것이 효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려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효도하는 생활이에요, 아니면 부모를 막 보는 생활이에요. 여러분들의 어머니는 교회이고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말하기를 교회를 어머니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것 관심 있어요? 교회의 아픔, 목회자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예배시간마다 눈물을 흘릴까? “지난 주일에 우리가 헌금도 많이 했는데 왜 목사님은 울면서 사택을 걸어갔대? 생활비를 올려달라는 거야?” 최소한도 이렇게 생각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나기만 하면 지체들을 헐뜯고 만나기만 하면 평화를 깨뜨리고 하나님 없는 열심을 가지고 일한다고 자기 따라 하지 않는 지체들의 가슴에 칼 베이는 것이 어머니인 교회의 마음을 헤아리는 새끼의 자세입니까? 대답해보십시오. 아무리 막 되먹은 자식, 조직폭력배라도 칼을 든 강도와 맨손으로 격투해서 두개골을 깨뜨려 쓰러뜨릴 수 있는 폭압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자식새끼라도 가냘픈 어머니가 따귀를 때리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 힘을 에미에게 폭력을 해서 한줌밖에 안 되는 어미를 꺾어 쓰러뜨린다면 그것이 동물이지 인간일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총 가진 경찰, 칼 가진 군인이 없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막 되게 행동하면 여러분들은 천국과 아무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는 주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교회에 담긴 어머니의 마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나타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강요하는 사람 없고 무서운 것 없어도 내 마음을 녹이는 예수 사랑 때문에 나의 옛길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새 길을 걷는 사람,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성의 두 눈으로는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그 위대한 하나님의 아버지 사랑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느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 둘 곳 없는 생애와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을 찢으시는 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깊이 생각하고 인격적인 신앙생활로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주일예배설교 2008/1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2 주일오후예배(2008/10/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3 (주일예배설교 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4 주일오후예배(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5 (주일예배설교 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6 주일오후예배(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7 (주일예배설교 2008/10/26)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8 (주일예배설교 2008/11/9)
4.하나님 없는 번영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시106:15)
이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며 살던때를 회고하면서 지은 시편입니다. 우리들은 이 시편속에서 하나님의 큰 섭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우리는 종종 잊기 쉬운 그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번영하고 잘 되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아주 기뻐하시는 표현으로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우리를 기뻐하시는 표현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하시는 그런 종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의 것을 특별섭리의 복이라면 두 번째 것은 일반섭리의 복이라고 할까요? 그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때에 하나님을 많이 원망하고 불신앙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은 다 굶어서 먹을 것이 없게 되었을 그런 위기에 직면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 주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들판에서 거두어다가 그것으로 과자도 구워먹고 떡도 해 먹을 수 있는 그러한 하늘의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것에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얼마 되지 않아서 그 감격이 변하여 불평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은 맛대가리도 없는 만나 우리는 이것만 처 먹고 살아야 하나?" 하면서 고기도, 고기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하소연을 합니다. 하나님이 혼내실 줄 알았는데 놀랍게 메추라기를 보내셔서 발목에 파지기까지 메추라기를 보내니까 여러분 메추라기 못 먹어 보셨죠? 조금 큰 병아리 만합니다. 그런데 먹을만 합니다. 그것을 해서 꺼억 하고 배부르게 먹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런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사람들이 계속 이럴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고 나는 이미 우리를 정말 고기 못 먹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메추라기를 주셨나 보다 하는데 성경은 뭐라고 하냐면 '잇 사이에 고기가 있을 때에 멸망을 당했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저희에게 요구하는 것을 주셨을지라도'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주셨다고 해서 반드시 그 줄 사람을 사랑하는 표시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뭐냐면 욕심이 성취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욕심대로 할 때 그 욕심이 그냥 성취되게 내버려 두십니다. 그때에는 어떻게 보면 득의한것 같이 득의만만하게 자기가 원하던 것을 얻어내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성취를 얻어서 아주 번영을 이루도록 내버려 두시는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경건한 백성들에게 자주 경고하신 말씀이 "악인의 번영을 부러워하지 말거라"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악인에게도 번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러워하지 말아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저희의 번영은 아침에 밴 풀과 같다. 풀이 신기한 것이 잔디밭을 기계가 깍으면서 잔디를 깍는데 수많은 풀들이 머리가 짤린 것처럼 쏟아지는데 굉장히 지저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빗자루질로 치우는 정원사는 아무도 없습니다. 내버려 두면 아침에 깍으면 지저분해 보이는데 점심 지나면 이 풀들이 전부다 말라서 검풀처럼 되고 몇일이 지나면 그 사이사이로 다 떨어져서 오히려 그것이 거름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밴 풀의 운명입니다. 금방 탁 짤라 놓았을때는 성성한 것 같지만 햇빛이 비추면 뿌리를 박고 있는 풀은 성성하게 자라지만 밴 풀은 허무하게 마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지푸라기처럼 가느다랗게 되어서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인의 번영의 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되고 이런 사람들이 그렇게 욕심을 잘 이룰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을 열심히 믿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사는 것이 오히려 피곤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데 결국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그런 악인의 번영이 결코 인생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또렷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도 때로는 번영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나 은혜에서 멀어졌는데 그 멀어진 상태에서 번영을 하게 되면 마음이 미끄러진 사람보다 더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굳어지게 되는 것이 실패를 통해서 굳어지는 때가 있고 성공을 통해 굳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것은 성공속에서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그런 번영속에서 결국은 그것이 절대로 자기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뚜렷이 보여 주어서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보다 더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려고 은혜에서 멀어진 혹은 아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인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번영하게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자의 번영은 신자의 번영과 틀립니다. 불신자는 영혼이 죽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번영을 하면서 그 번영속에서 종종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삶의 허무를 느끼기도 하지 않습니까?
(예화) 그래서 돈 많고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그렇게 자살하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도 말씀 드렸지만 우리나라의 유명한 그룹의 회장인데 제가 다니던 교회하고 마주 붙어 있었는데 자살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살아 계십니다. 부엌에서 칼을 가지고 와서 안방에서 웃통을 벗고 자기배를 수없이 찌른 것입니다. 얼마나 사는 것이 괴로우면 그 큰집에 살면서 그 당시 그집이 50억 이라고 했습니다. 20년전 이야기입니다. 경호원까지 두고 그렇게 사는데 그것이 얼마나 괴로우면 그랬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의 불신자들의 마음은 완전히 굳어 있어서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자는 번영해도 마음의 참된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잠시지 참된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때문인가 하면 파리한 영혼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이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도다' 하나님은 당신 사랑하는 자들에게 돈을 주고 물질을 주고 번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다 더 깊고 풍성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의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자꾸 그런 외적인 것에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은혜가 떨어지면 그런것들을 대게 부러워하게 됩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그런것들을 자랑하게 되고...
그런데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결국 뭐냐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영혼이 생기와 힘을 잃어 버린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이 뭐냐면 영혼은 생기와 힘을 잃어 버리면 생기와 힘이 솟아 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생기와 힘을 잃어버린다는 표현, 영혼이 파리해 졌다 파리하다는 것은 먹지도 못하고 피골이 상접해서 자기 손도 움질일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한 일을 행한 것에 있어서만 그런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파리해 질수록 힘이 나는 것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역설입니다. 그래서 죄와 은혜는 이런 역설적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죄를 은혜의 결핍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가 결핍되었다는 것은 은혜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예를 들면 공기가 있는데 공기를 다 없에 버리면 진공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기의 결핍이 됩니다. 그러면 은혜를 다 제외해 버리면 은혜가 빠져나간 자리만큼 결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핍이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활발하게 악을 행하고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결핍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쓰려던 책에도 그런것을 썻는데 게으른 사람들은 늘 누워있기를 좋아합니다.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그리고 드러누워서 리모콘으로 툭툭 누르면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습니다. "야! 일어나 공부 좀 해라" 하니까 "힘들어요" "일 좀 하러 나가야지" "아니에요 저는 지금 기운이 하나도 없어요" "너는 그렇게 인생을 사는데 열의가 없냐?" "예 저는 열정도 없구요 진짜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어요" 그리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툭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툭 툭 툭 뚜드려도 안나오는 것입니다. 리모콘을 아무리 해도 안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이 사람이 엄청 부지런해 지는 것입니다. 벌떡 일어나 그것을 메고 전파상으로 뜁니다. 그래서 가서 고쳐놓고 보아야지만 속이 시원한 것입니다. 엄청난 열정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뭐냐면 영혼이 파리할수록 그런 일을 잘하는 것입니다. 보면 은혜가 떨어지면 노는것 그 다음에 은혜 없이도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잘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되십니까? 은혜가 떨어지면 은혜없이 할수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열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하는 일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는 파리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향한 뜨거운 기도, 말씀에 대한 간절한 갈망, 예배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 지체에 대한 뜨거운 섬김 이런것들은 전부다 영혼으로 하는 것입니다. 파리한 영혼들은 그런것을 할 수 없습니다. 육욕에 흐르는 사람, 방탕, 그리고 신나게 노는것 이런것들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가 맘 먹은대로 우리의 삶이 번영하고 순조롭게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고 할지라도 절대 그것을 가지고 교만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찿을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번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영혼은 파리하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해야할 가장 시급한 것은 영혼을 그 파리하면서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큰 사랑과 은혜안에 있을 때 변화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변화된 삶에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순서인 것입니다. 주님은 매순간 우리로 하여금 이런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파리한 영혼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아무런 선한 것을 행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셔서 충만한 영혼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혼이 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관심 자체가 좀 깊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주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할 때 주님이 주신 많은 축복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쓰일 수 있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할것 같으면 그것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쪽으로 쓰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파리한 나의 영혼이 나의 인생에 제일 큰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고 영혼의 이 궁핍한 상태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주일예배설교 2008/1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2 주일오후예배(2008/10/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3 (주일예배설교 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4 주일오후예배(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5 (주일예배설교 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6 주일오후예배(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7 (주일예배설교 2008/10/26)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8 (주일예배설교 2008/11/9)
5.뿌리 없는 섬김에 취하지 말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I. 본문 해설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고 갈망하는 절실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사모하고 목마른 마음이야말로 예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만나는 아주 중요한 예배자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의 갈급함과 하나님을 뵈옵는 그리움이 없이 예배에 참석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너무나 자신을 신뢰하는 안전감으로 차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자기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그 이상 무엇인가 절실한 은혜가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미 내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서 또 다른 은혜를 받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부요한 마음이 예배자의 정신을 썩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처방전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거짓 선지자들을 경고하신 산상수훈 중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당시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있어서 하나님과는 제대로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다니며 양떼를 늑탈하고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거짓 선지자들 뿐 아니라 거짓 신자의 잘못된 신앙생활의 원리를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거짓 신자는 이름만 다를 뿐이고 지위만 틀릴 뿐이지 실제 그들의 영적인 본질, 하나님이 없는 삶의 진정한 모습은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이 교훈을 통해서 우리가 참된 예배자인지 다시 한 번 살펴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교회 안에는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가 섞여 있습니다. 마치 밭에 가라지와 이삭이 함께 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 안에는 진정한 교회에 속하는 참된 신자와 보이는 교회 안에 속하는 거짓 신자들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그러한 상태를 오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II. 섬김을 판단하심
오늘 성경에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주님을 충분히 섬겼다고 주장하는 거짓 신앙인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심판하고 판단하시는 날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그날에” 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날이 꼭 우주적인 종말의 날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주적으로 이러한 심판을 하시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개별적으로 그들을 판단하시므로 그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그것은 겉모습이고 진정으로 그들의 섬김은 우리 주님과 상관이 없는 뿌리가 잘린 섬김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A. 사람들의 기억
오늘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억 속에 있는 섬김의 이력들을 말합니다. 그 사람들의 기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권능을 행하였다고 주님께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행했기 때문에 그것이 곧 우리 하나님께 대한 섬김이라고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런저런 일로 주님께 봉사한다고 하면서 그 일이 교회에서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 일을 거들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며 이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외양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섬김은 하나님께 대한 관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의 판단
그리스도의 판단은 사람들의 기억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을 섬겼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들을 내어 쫓고 권능을 행하고 이런 일을 했다고 말할 적에 “너희는 그런 것 한적 없다. 너희가 언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언제 귀신을 내어 쫓고 언제 권능을 행하였느냐 거짓말 마라. 너희들은 그런 일을 한적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일들을 한 것을 예수님도 알고 계셨지만 그 일을 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태도였습니다. 너희들이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내어 쫓으므로 사람들을 섬기고 권능을 행해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의 관심이 관계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이들의 섬김은 뿌리가 잘린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섬김은 성도의 가장 소중한 삶의 열매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섬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님을 섬기는 것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무위도식하는 것입니다. 나는 중생의 본성에 관한한 진정으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생의 본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가 과연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살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에서는 아무것도 안 섬기지만 일생동안 직업 활동하면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에서 주님을 그렇게 만나고 감격하는 자기 영혼의 고향인 이 교회에서 주님을 위해서 섬길 일들이 많은데 거기에 대한 사랑이 없고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 사람이 자기의 직업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개념은 주서들은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교회,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이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듯이 눈에 당장 보이는 교회에서 하여야 할 영혼에 대한 수많은 섬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지체들의 희생하는 노고에도 불구하고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사람이 직업 활동을 통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럴 것입니다. “너는 왜 아무것도 안 섬겼냐?” “하나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꼭 교회에서 일해야 하나님을 섬깁니까? 제가 교회에서는 아무것도 안 했지만 일평생 직업 활동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주님은 “밥 벌어 먹으려고 섬겼지 언제 네가 날 섬긴 적이 있었느냐? 네가 단 한 달이라도 월급 받지 않고 일한 적이 있느냐? 그것이 어떻게 날 위한 섬김이냐? 밥벌이지.”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해외에 있는 신학교에 운영 때문에 다녀왔습니다. 도저히 갈 상황이 안 되는데 밤 비행기 타고 갔다가 이틀 만에 밤 비행기로 왔습니다. 이틀 동안 회의를 하다가 주저앉아서 울고 싶었습니다. 너무너무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는 오늘 예배드리는 상당수의 성도들이 무위도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말할 것입니다. 예배를 참석해서 자리를 메워주고 헌금도 하고 갑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신 희생과 그 사랑을 안 많은 성도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수고 속에 지어진 예배당,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섬기는 그 무명의 섬김의 희생 위에 군림하면서 여러분들이 도대체 이 교회에 보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가운데 상당수는 무위도식하며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 다니며 인원수 한 사람 올려주는 것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여러분들의 예배 참석에 대해서 감격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감격하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 같은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예배당을 가득 메우고, 예배당을 가득 채워서 서서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저는 오히려 슬퍼 울지언정 대견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섬김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필수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고난을 받고 주를 위해 애쓰는 이 섬김에서 멀어져 나온 가운데 잠시 육신의 안일과 편안함을 위하여 여러분들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안정된 길을 걸어가고 희생이 없는 삶을 살지만 마지막 날에는 그 모든 안일했던 삶이 주 앞에 섰을 때 확 벌거벗겨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부끄러운 부분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일평생 주님을 섬겼던 성도들은 아름다운 세마포 옷을 입고 주님을 찬송할 때 여러분들은 벗은 몸이 부끄러워 어느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부끄러운 곳을 가릴 한조각의 천을 찾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 있습니까? 섬기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적어낸 교회의 각 부서에서 요청하는 사람 수가 교인의 총 수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섬겨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이 무엇을 한 것이 있습니까? 교역자도 내 보내고 직원들도 많이 내 보내고 목사님 잘 하셨다고 하며 어떤 성도는 펑펑 울었습니다. 드디어 ‘우리 목사님이 제 정신을 차리셨구나.’라고 말입니다. 토요일에 여러분들이 청소하지 않아서 외주 주어 용역업체 직원들이 청소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여기가 직장이라면 그런 식으로 섬겼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할까요? 한사람, 두 사람씩 다시 사람들을 늘려야 될 입장입니다. 이번에는 여러분들이 말하지 마십시오. 내일이라도 당장 “회개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성도들이 수천 명인데 용역회사 직원들이 와서 청소를 합니까?”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청소하면 저는 내일 계약해지하고 여러분들에게 청소를 맡기겠습니다. 안 하지 않습니까? 귀하신 몸이기 때문에 토요일 고귀한 시간에 나와서 봉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무위도식이란 말이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삶속에서 절대로 과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들 말하지 마십시오. 장로님도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일하지 않으면 저는 해야겠습니다. 무너져가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더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심지어 동네에서 ‘아이들의 신앙을 생각해서라도 교회는 열린 교회를 나가야 된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수요일, 금요일, 주일에 아이들을 데리고만 오면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많은 신학생들이 와서 얼마 안 되는 장학금을 받고 열심히 봉사해서 여러분들의 자녀를 신앙으로 길렀습니다. 지출이 너무 많아 교회가 섬김의 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하기에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러분들이 섬겨주지 않아 주일 오후에는 아이들이 교회 마당을 배회하고 교회당 골목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수요일에는 아이들이 거의 방치되고 금요일에는 돌볼 사람이 없습니다. 맨 처음에는 여러분들이 모두 자원해서 수요일엔 아이 가진 자모들이 봉사하겠다고 적어 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서류들이 행정실에 남아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요? 다시 사람을 사서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가르쳐서 주님의 사람으로 길러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옛날처럼 어른 예배시간에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 골목 저 골목 몰려다니며 아이들이 나쁜 것을 배우고 예배시간마다 방치되어 부모의 마음은 은혜에 젖고 아이들의 가슴은 예배를 드리면 돌같이 굳어져서 함께 손잡고 돌아가는 그런 귀가 길을 만들까요?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도대체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고 여러분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울고 싶을 정도로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생활하면서 5시간 이상 자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넓은 의미의 삶에서 주님을 거의 섬기기 않다가 온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주님이 얼마나 낯선 분이겠으며 주님을 섬기고 진정으로 경배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겠습니까?
진정한 섬김이 어떻게 출발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향한 그 큰 은혜를 깨닫지 않습니까? 자기와 같이 더러운 인간, 자기의 지은 모든 죄를 그리스도 예수께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짓이기듯이 죽이시는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보면서 거기가 바로 자기가 매달려야 될 자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그렇게 멸망 받아야 할 자기 같이 더러운 죄인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의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는 사랑 때문에 거기에서 경건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주님 때문에 자기가 누리고 있는 생명과 이 모든 것이 주님께 빚진 것이며 주님을 섬겨야 되겠다고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섬김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에 대한 경건의 뿌리가 없이 섬기는 사람들이 오늘 성경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통해서 그들을 아시고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므로 주님의 마음에 우리가 기억되고 주님의 이름이 우리의 마음에 아로새겨지는데 이런 사랑의 비밀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것도 안 섬기는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경건의 뿌리가 없이 제 멋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심에 빠져있는 하찮은 교인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III. 섬김의 뿌리, 그리스도를 앎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저렇게 당신을 섬겼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난 너희를 모르노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섬김의 뿌리가 그리스도를 아는데서 부터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A. '아는 것'과 '섬기는 것'
아는 것과 섬기는 것은 이처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주님을 알게 할 수 없습니다. 일은 일을 알게 할 뿐이지 일은 주님을 알게 하는 힘이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향한 그런 은혜가 없이는 주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주님을 압니다. 은사를 받아도 귀신을 내어 쫓고 예언을 하고 선지자 노릇하고 권능을 행하는 은사를 받아도 그것은 주님을 알게 할 수 없습니다. 일을 알게 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알게 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요, 주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은 오직 은혜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의 삶이 무엇일까요? 한편으로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고 알고 기뻐하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면서 내가 알게 된 그 분을 더 사랑하고 더 사랑하니까 주님께서 나에게 당신을 보여주셔서 주님을 더 많이 알게 하시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내 마음 속에 점점 더 자랍니다. 이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이 너무나 커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사랑 받은 은혜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백하면서 그 사랑이 시키는 대로 그 사랑의 법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섬기는 것이 없으니 아는 것이 있을 리 없고 아는 것이 없으니 섬기는 것이 조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는 소위 평신도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여러분들이 원했습니다. 교역자 중심으로 거의 9년 가까이 교회를 운영해 왔습니다. 맨바닥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교회를 세워 왔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중에 전혀 그렇지 않은 교역자도 몇 명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헌신을 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희생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7-8년이 될 때까지 일주일씩 휴가를 주어도 그것을 다 쓰는 교역자들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여러분들이 우리 평신도는 무엇입니까? 우리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러자고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평신도 사역의 대 시대를 열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목회는 훨씬 힘들어졌습니다. 교역자처럼 여러분들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우리 모두 가야하는 길입니다.
“一人百步는 不如 百人一步라” 한사람이 혼자 백발자국을 떼는 것은 백사람이 함께 손잡고 한발자국을 옮겨 놓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각자 맡은 자리에서 함께 섬김이 어우러져서 더디더라고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기꺼이 이 일을 해 냅니다. 그러나 나는 아주 탁월하게 주님을 향한 경건 속에서 섬기기 전에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미천했지만 영혼을 맡겨 주니까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교회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구하며 교회를 섬겼던 소수의 성도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섬김을 통해 주님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돌로 만든 조각 작품에 눈물이 흘러도 그 사람 눈에서는 눈물이 흘릴 것 같지 않던 사람들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이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자기가 얼마나 미력한 인간인지를 알며 흘리는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섬김의 뿌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법이 아닙니다. 잘한다고 엉덩이 두드려주면 신이 나서 일을 하지만 조금이라도 소홀히 대하면 언제든지 심통이 나서 하나님의 일을 발로 차 버리는 막 되먹은 직분자들,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좀 한답시고 자기처럼 따라오지 않는 지체들을 향해서 악한 마음을 품는 포악한 섬기는 이들, 하나님을 향해 자기는 깨뜨려지는 것이 없으면서 항상 이름 내는 자리, 마음 쓰는 직분자들, 예배는 하나님 앞에 똥 바르는 예배를 드리면서 장로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예배시간에 늘 와서 졸고 돌아다니면서 악한 말로 성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 권사 되고 싶어 하는 교인들, 이것이 도대체 뿌리가 잘린 섬김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나는 심지어 여러분들이 섬기면서 상당히 중요한 직분을 가지고 열심히 섬기면서 현장에서 여러분들이 하는 하나님 없는 행동들을 보면서 이 사람이 정말 중생한 사람이 맞나? 목회자로서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게 하는 순간들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인데 배짱 안 내킨다고 함부로 발로 차 버리고 마음에 내키면 사람들을 규합해서 하는 척 하고 배짱 틀리면 언제든지 집어 던지면서 하는 말이 나는 직분에 사심 없습니다. 직분에 사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존재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면서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복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드리는 이 예배가 명백한 아첨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향한 안타깝고 분노하는 마음을 십분의 일도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예배생활을 하고 알량하게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 여러분들이 마지막에 주님 앞에 무슨 열매를 얻으려고 합니까? 주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맡겨진 자신의 직분에 관해서 아랑곳하지 않고 일하지도 않을 사람이 직분을 왜 받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게 해놓고는 자기도 안 섬기고 다른 사람도 섬길 수 없게 하나님의 일을 방치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명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조는 것입니다.
또 열심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오고 그 법에 의해서질서가 잡혀진 것이라면 항상 자기가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있고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는 지체들을 보면 자기처럼 섬길 수 없게 하는 연약함을 보고 슬퍼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고 그렇게 때문에 그도 함께 붙들고 이 길을 가야한다는 사랑의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에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만 예수님의 섬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장애자들, 눈먼 자들, 저는 자들, 정신병 들려 가족들에게 조차 버림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품에 안겼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주님이 그 사랑을 알고 섬김의 길에 동참했습니다. 섬기면 얼마나 섬긴다고 쥐꼬리만큼 섬기고 자기처럼 하지 않는 성도들을 욕하고 무시하고 깔보고 심지어는 교역자에게 대들고 도대체 어느 복음이 여러분들에게 그런 신앙생활을 가르쳐주었습니까? 대답해보십시오. 그런 속에서 나온 열심이 진정으로 경건에 불붙여진 열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목회자는 목회자라는 이유 때문에 언제까지 그런 너절한 성도들의 등을 두드리고 엉덩이를 두드리며 섬김을 아부하면서 이 목회의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까?
섬김 속에 나타나는 끊임없는 언쟁과 논란, 다툼, 시기, 질투, 원망 이런 모든 것들은 비록 그 섬김의 뿌리가 경건으로부터 잘려버린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 일 안하고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온순하고 은혜 안에 있던 성도가 믿음 생활하는 것이 가상해서 주님이 교회의 직분을 맡겨주시고 일을 맡겨주셨더니 이번에는 아주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섬긴다고 칩시다. 그 섬김에 눈물이 있습니까? 섬겼을 때에는 자기에게 섬길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 있다면 여러분처럼 섬기지 못하는 성도들에 대해서 무시하고 하찮게 여길 수 있습니까? 얼마나 대단하게 섬겼길래 그렇습니까? 자신, 하나 아니면 교회가 무너질 것처럼 그렇게 위세를 떨며 섬기는 것도 결국은 목회자의 칭찬이나 지체들이 알아주는 것이나 들려오는 자기 자신의 자부심에서 오는 무한한 박수소리 때문에 흥에 취해서 하는 일들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을 예수님께서 예배에 참석해도 피나게 섬겼는데 놀랍게도 예배시간에는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것입니다.
B. 예배와 섬김
한 사람이 드리는 예배는 섬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배는 섬기는 사람의 마음을 능가할 수 없고 섬김은 예배 속에서 받은 은혜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훌륭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진정한 예배 없이 섬김에 실패했다면 불충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예배에서 하나님도 못 만나고 섬김을 훌륭하게 완수했다면 하나님 없이 섬긴 자기 의가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뿌리 없는 섬김에 취하며 살기에는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구속이 너무나 값진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속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후배가 있는데 너무 훌륭합니다. 젊은 나이에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대개 신앙이 별로 없는데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인격적으로도 순전하여 목사님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실까하며 기대에 부풀었다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사역을 시작하려고 학위를 마치고 고국에 들어온 지 불과 며칠 만에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역에 거의 도착해서 몸을 내밀었는데 전봇대에 머리가 부딪혀서 즉사했습니다. 목사님이 한동안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 순전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재능 있고 영리하고 학식이 깊고 이제 하나님을 위해 큰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을 그렇게 데려갈 수 있을까? 한동안 기도가 안 될 정도로 마음에 갈등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다 몇 달 만에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깨닫는 그 순간 자기는 너무 기쁘고 하나님 찬송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훌륭한 사람 없어도 나는 충분히 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에게 여러분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과대망상증입니다. 주님은 당신 스스로 자기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종처럼 행하라. 자기 일을 감당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일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섬기다가 담임목사가 덜 알아주는 것이 대단합니까? 성도들이 박수갈채 안 보내는 것이 대단해요? 기왕 섬기는 똑같은 일인데 그럴 듯한 직책하나 주지 않는 것이 대단해요? 직책을 줄 때 할 수 있는 그 일을 직책 없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못하는 일들입니까? 결국 삶의 모든 섬김의 뿌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있지 않는 것입니다. 섬김의 뿌리가 그리스도께 있는 사람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고난이 있고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위로가 있습니다. 나에게 일을 맡긴 담임 목사가 날 알아주지 않아도 성도들이 나보고 잘 섬긴다고 박수쳐주지 않아도 사람들이 때로는 나의 많은 희생을 왜곡해서 오히려 나의 허물이라고 들추어내어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모든 일들을 주님이 아십니다. 섬기면서 고난이 오고 칭찬 대신 모욕이 진실은 왜곡되고 오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접대신 비난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의 편에서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괴로움을 능가하는 은밀한 기쁨이 있습니다. 눈을 뜨면 섬김의 모든 현장이 가시밭길처럼 다가와도 조용히 물러가 눈을 감고 그 아픔을 주님께 아뢰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사람들이 다 대접해주지 않아도 괴로울수록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주님은 내 마음을 아시죠?’ 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섬김입니다.
그런 섬김의 진실한 현장이 있는 사람은 예배에 목숨을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받는 은혜가 아니면 그 가시밭길 같은 섬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주님이 걸어가셨던 그 섬김의 길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그 길을 가깝게 걸어가며 본뜹니다. 주님 사랑하는 경건의 뿌리에서 잘린 섬김에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생은 있지만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깊은 고난은 없습니다. 고난은 받을수록 거룩해지고 주님을 닮아가지만 고생은 할수록 인간이 거칠어지고 야비해집니다.
Ⅳ. 결론
그렇게 주님을 단 마음으로 섬기는 자기를 구원해주시고 사랑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희생에 깊은 감격 속에서 내가 힘에 넘치도록 숨이 박히도록 고생하고 일하고 있지만 나는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의 빛 아래서 생각할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예전에 핍박자요, 폭행자였던 나를 충성스럽게 여겨서 주님의 교회 한 모퉁이를 수종들게 해주시는 이것만으로도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섬김 때문에 교만해 질 수 있겠습니까? 제일 무서운 사람이 주일에 지극히 설치면서 교회를 섬기고 예배시간에는 방탕한 마음으로 졸고 부주의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시한폭탄입니다. 언젠가 반드시 그 더러운 변화되지 않는 혈기들을 섬김의 현장에서 쏟아놓아서 많은 성도들로 피눈물 흘리게 하는 인물들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뿌리가 잘린 섬김에 취하면서 살아왔든지 아니면 무위도식하면서 아예 그나마도 없는 삶을 살아왔다든지 결국 이것은 여러분들이 개혁해야 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제 여러분들에게 조금도 미안하지 않고 성도들이 안 섬겼기 때문에 사람을 불러서 교회를 섬겼던 것, 정정당당하게 공개하겠습니다. 언제나 공개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동의회 때 충격을 받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런 섬김의 현장이 없다면 여러분들이 깊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다시 섬기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시간에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뺀질거리면서 살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내려 누르는 돌덩이 같은 눈꺼풀을 위로 올려 채우고 자세를 흔들면서 은혜를 받아보려고 해도 하나님 빗겨 가십니다.
주님은 예배시간에만 하나님 찾으려고 하는 사람 원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주님을 찾고 그 은혜를 구하는 목마른 성도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힘을 다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섬겼기 때문에 자신의 자원은 유한하고 자기의 힘으로는 이 엄청난 섬김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주님이 부어주시는 오늘의 이 은혜가 아니면 일주일을 섬길 수가 없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의 뿌리가 내린 섬김의 현장이 없는 사람들, 혹은 경건의 뿌리 없어도 거들먹거리며 육적인 동기에 의해서 섬김을 가장하고 자기 자신을 섬김에 취해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은혜를 구한다고 칩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가 왜 필요합니까? 아무것도 안 섬기고 무위도식하는데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무위도식이 안 됩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는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찔러 주님을 위해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일평생 새벽 4시에 일어나서 8시까지 말씀과 기도로 사역을 준비했던 로버트 매리 맥체인은 새벽에 일어나서 우유 배달부의 종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우유를 팔려는 인간보다 주님을 찾으려는 내가 게을렀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 삶의 현장이 없는 사람들이 일대 각오를 하고 예배시간에 은혜를 받겠다고 칩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왜 은혜를 주셔야 됩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묻지 않겠습니까? “네 삶이 개떡 같은데 은혜를 주면 어디에다 그 은혜를 바를래?”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무것도 섬기는 것 없이 무위도식하는데 무위도식하는 것은 내가 은혜를 안 주어도 저절로 되는 것이란다.” 주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정말 은혜가 필요합니까? 뿌리가 잘린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은혜가 필요합니까? 혈기와 육정으로 그 일을 해 나가면 되는 것이고 장소와 교회일 뿐이지 세상에서 하던 그 육신의 짓대로 교회에 와서 행동하면 되는데 거기에 무슨 은혜가 필요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뿌리가 잘린 섬김에 취한 사람들, 무위도식한 사람들이 예배당에 와서 아무리 졸린 눈을 부릅뜨고 몇 번씩 앉았다 일어났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빗겨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배교적인 예배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배교적인 예배에서 돌이켜 주님이 받으심 직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에서 대대적인 개혁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은 영역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돌이켜서야 합니다. 무위도식하려면 무위도식하기에 좋은 환경을 찾으십시오. 여러분들이 돌이켜 설 때까지 저는 여러분들을 견책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배나무에 사과 열매를 매달아 두었다고 해서 실로 매달린 그 사과가 배나무를 사과나무로 바꾸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마음에도 없이 여러 가지 다른 동기로 이 일 저 일로 섬기는 여러분들을 담임목사는 어깨를 두드리고 성도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도 하나님은 비웃고 계실 것입니다.
뿌리가 잘린 섬김,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재앙입니다. 무위도식하는 섬김이 없는 신앙생활은 그것은 더 저주받은 신앙생활입니다. 똑바로 하십시오. 정신 바짝 차리고 복음의 원리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겨야 할지를 올바로 아십시오. 그것이 지금이라고 여러분들이 이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켜서 주님을 만나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주일예배설교 2008/1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2 주일오후예배(2008/10/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3 (주일예배설교 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4 주일오후예배(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5 (주일예배설교 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6 주일오후예배(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7 (주일예배설교 2008/10/26)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8 (주일예배설교 2008/11/9)
6.경외치 않는 자의 껍질뿐인 삶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학1:5-6)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지만 여러 가지 많은 난관 끝에 성전이 완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는데 그 이후에 성전을 다시 계속 공사를 해서 완공을 시킬 여건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이 황무하게 되었는데도 자신들은 잘 지은 집에서 살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다 라고 변명을 하면서 그들은 성전의 건축을 연기 하였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 싫었던 것입니다. 이때 학개라는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러므로 나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성전을 짓다가 어쩔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그것이 중단되는 상황이 이르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된 시점에서 이들이 하나님 앞에, 만약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환경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고 또 그 환경이 열리자마자 기꺼이 헌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 일을 접어 버렸고 그리고 상황에 핑계를 대면서 그들은 이기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결국은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자 그들의 모든 마음의 관심은 자신들의 잇속을 차리는데에 급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잇속을 차리기 위해서 전심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가장 우선적으로 여기며 추구했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았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그들이 드리는 예배 그리고 그들이 드리는 제사와 많은 절기는 마음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 대해 학개 선지자는 심각하게 경고하면서 하나님이 이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그런 큰 은혜를 회고하면서 너희들이 누구의 은혜로 이제껏까지 잘 살고 지냈는지 회고해 보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은 결국 하나님 중심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결국 자기 생각이 중심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결국 자기 사랑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속에서 겉모양만으로 하나님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실은 앞으로는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처럼 계속해서 그들의 삶이 핍절해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남는다는 뜻은 명백히 하나님께서 자기의 교회를 위해 애쓰고 하여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도 거기에 헌신하지 않으니 이제 그들은 희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건축을 하려면 헌금도 해야하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도 베어 와야 하고 자기의 생업을 접고 성전을 건축하는 이 일에 헌신해야 될텐데 성전 건축이 지연된 것은 이들에게 매우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헌신에 들어갈 많은 노력과 재물, 시간 그리고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되지 않고 하나님의 집도 가난해지고 자기도 가난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잘 다듬고 깍아서 집을 세우고 이렇게 노력하고 봉사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 시간에 자기를 위해서 많이 씨를 뿌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돌아오는 수입은 매우 적었습니다. 자기를 배부르게 하여서 끊임없이 먹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배부르지 못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자신들을 호사스럽게 하고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많은 옷을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고 열심히 남의 집 일을 해서 삯을 받아서 부지런히 돈을 모았지만 구멍에 뚫어진 전대에 넣어진 것처럼 돈은 줄줄줄 새고 마지막에 가보니까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고 하나님을 섬길것을 절약한 가운데 자신을 위해 애쓴것이 마지막에 돌아 온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였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그 사랑을 알게되면 어떻게하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희생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계획이 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주님을 많이 섬겨도 고난의 길을 갈 수 있고 그리고 많이 섬기고 희생하는데도 그가 마지막에는 순교의 길을 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영혼에는, 정신에는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보다도 더 뛰어난 것을 주셔서 희생을 갚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심각하게 잘못되었고 영혼의 심각한 위기가 왔는데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정신이 팔려서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는 종종 우리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오는 순간이 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일정도 멈추고 우리의 생활의 계획도 이미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내가 아파서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의식이 간곳이 없어지고 심지어는 의사가 생명이 위독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나의 스케줄, 나의 시간 계획 그리고 나의 할일, 내 즐거움을 찿아서 이루고자 하는 많은 계획들 그 까짓것들이 무슨 쓸데가 있습니까? 다 살아 있으니까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고 또 어떤 것들은 살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숨이 간데가 없는데 그 까짓것이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여성들이 곱게 화장하고 입술을 바르고 그 다음에 눈썹을 그리고 있는 여성을 본 일이 있습니까? 수술실에 누워 얼굴에 맛사지 하는 여성을 본 적이 있습니까? 내일 아침이면 죽을지 모르는 환자가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이런것들은 이미 사치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위기인데 우리의 육신은 자연적인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살아 있어서 그 생명이 정신으로 기억하게 하고 사물들을 보고 식별하게 하고 음식을 먹어 입을 분별하게하고 입술이 놀리고 그리고 박자에 맞쳐서 씹는것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먹어서 삼켜서 들여보내면 위는 기다렸다는듯이 그것을 주물러서 창자에서 단물을 빨아 먹고 그리고 나머지 찌꺼기는 변을 통해서 밖으로 내 보내는데 똥덩어리가 밀려서 창자의 밖으로 나오는 것도 생명이 있으니까 생명의 기운이 그것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볼때는 기쁘고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어떤 사람을 볼때는 짜증이 나고 지겹고 하는 감정의 변화도 자연적인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 생명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 생명이 없다면 죽은 것이지만 그 생명이 있기는 있는데 거의 고사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런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인 식물인간의 상태가 아닙니까? 생명의 기운이 없기 때문에 생각도 할 수 없고 보기 싫은 사람이 곁에 와도 불쾌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눈을 감고 숨만 헐떡거리면서 쉬고 있고 어떠한 음식물도 소화시키지 못하도록 가만히 시체가 된체 누워 있어서 가녀린 육체의 생명을 이어가는 인간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것이 바로 죽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의 육체가 만약에 그러하다면 영혼에도 그런 생명이 있을 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영생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져서 그것이 우리에게 떠나지 않지만 여러분들이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면 죽지는 않지만 거의 고사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에는 육체의 생명을 주셔서, 자연적인 생명을 주셔서 사람 구실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많은 재산과 권력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이제껏 살아온 인생이 많은 사람들 앞에 박수갈채를 받은 인생이었다고 할지라도 육체적으로 그렇게 누워서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는 무의식의 상태가 되면 우리는 그를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도 이렇게 움직입니다. 육체의 눈은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예쁜것을 보면 눈을 깜박거리면서 좋아하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고 그 거룩함을 발견하고 그 순결함을 발견하게 될 때 그 하나님의 속성을 발견함으로서 영혼을 기뻐 떨고 전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눈은 글을 배운 사람들은 글씨를 알아보고 눈을 깜박거리며 그 의미를 머릿속에 새기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보고 그 진리속에 숨겨져 있는 주님의 진실한 성품을 발견하고 그것을 영혼에 새깁니다. 우리의 육체로는 음식을 입으로 질겅질겅 씹고 그리고 넘겨서 위가 그것들을 소화해 내지만 영혼은 생명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으로 섭취해야 하고 그것들을 지성안에서 영혼안에서 소화해 냄으로서 그의 영혼에 피와 살이 되게 합니다. 이런 작용들이 활발하려면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의 삶과 없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현저하게 다른지 생각해 보십시요. 생명이 모자란 사람들의 삶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해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생명이 모자라서 거의 죽어가고 그리고 변이 흘러 나오고 의식도 없고 침은 질질 흐르고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눈꺼풀이 넘어 가는데 그 사람의 육체적인 생명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아름답겠습니까?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산 것이 아닙니다. 진짜 살아 있기 위해서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영혼의 기능들이 영혼의 생명의 힘을 입어서 활발하게 움직일 때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영혼은 죽은 상태가 되어서 거의 활동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가 되어서 그런 결과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육체는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고 죽음으로 가깝게 되면 육체는 동작을 멈춥니다. 그런데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육체가 생명을 점점 잃어 버리게 되면 모든 욕망도 함께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링겔로 연명하고 있는 사람이 성욕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출세욕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인간에게 복수 하고 싶은 야망이 있겠습니까? 생명이 사라져 가는 것과 함께 모든 육체의 죄를 이루던 강력한 욕망도 함께 쇠잔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은혜의 결핍된 놀라운 증거를 드러내며 정신과 마음 안에서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혼이 죽어 있는 자에게는 죽은 행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연적으로 죽은 사람에게는 죽은 행실이라는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육체의 생명이 끊어지고 죽었는데 무슨 죽은 행실을 행합니까? 영혼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것만큼 자기를 향해 죽은 것이고 자기를 향해 살아 있는 것만큼 하나님에 대해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이 주님을 만나는 예배도 드리지 못한체 여러분들이 형식뿐인 신앙생활을 이어가게 되면 이미 여러분들이 예배당에서는 조용히 있지만 여러분들의 삶속에서는 아주 활발하게 죽은 행실을 토해 놓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우리의 위기라고 아니할 수 있겠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그들이 비록 어마어마한 헌금을 하고 엄청난 일을 이루어도 죽은 교회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내가 교회를 옮길 때 마다 들었던 예화인데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입니다. 예배시간마다 교인들의 70%가 잠니다. 목회자로서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그 예배의 현장에 하나님이 없다고 몇 년동안 확신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냥 기도할 뿐이지... 놀랍게 교회를 옮길 때 헌금을 하는데 안수집사 하고 장로님들이 전부 다 합쳐서 40명 정도 되는데 필요한 돈이 50억이었는데 하루 저녁 광고하고 몇주 후에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헌금을 했는데 30명에서 25억의 헌금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600명이 헌금을 했는데 또 25억이 나오고 해서 50억이 불과 몇주 사이에 간단하게 나왔습니다. 나는 그때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내가 목회해 보니까 안되던데... 그 사람들보다 훨씬 살아 있는 예배를 드렸는데도 안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거기야 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아닙니다. 해방촌 여러분들 다 아시죠. 그렇게 돈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때 제가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아니어도 가능하구나. 그 사람을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본성을 변화 시키는 강력한 은혜가 아니어도 가능하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그 놀라운 은혜는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저와 여러분 같이 돈도 없고 능력도 별로 없고 진리에 대해 탁월한 재능도 별로 없는 지식도 제대로 별로 없는 사람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은혜는 목숨을 걸고 마지막에 우리들이 받아야 하는 유일한 유산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은혜에 목마르지 않아 하는 것은 결국은 그 자체가 커다란 질병인 것입니다. 마치 병든 사람이 음식을 싫어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열여섯살 때 제가 아주 가난한 동네에 살았는데 거기 뒷집에 처녀가 한명 살았습니다. 제 나이 또래 되는데 폐결핵이 걸렸습니다. 가난하고 하니까 제대로 약도 못먹고 말라 가는데 제가 보기에 20킬로그램 정도 될까 할 정도로 바짝 말라가는데 절대로 밥을 먹지 않습니다. 죽었을 것입니다. 제가 확인은 못했지만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은혜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열심히 하는 일은 결국 마지막에 진리의 빛을 떠나서 자기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을 보니까 남 보다 좀더 추수를 해서 좀 넉넉히 먹고 살아 보려고 열심히 씨를 뿌렸습니다만 거두어 들이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쨎든 퍼 먹어서 한번 탄탄한 체력을 가지고 오래 살아 보려고 했는데 아무리 먹어도 배부름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순서가 바뀐 사람들이 도달하는 마지막 종점입니다. 내일 이라도 여러분들이 원하면 이런 설교 그만두고 아주 마음에 위로가 되고 훈훈하고 따뜻해지는 설교 할 수 있습니다. 설마 이만큼 살아 왔는데 여러분들에게 설교 몇십번 할 재료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깊이 자기의 소위를 돌아보고 그리고 온전한 신앙으로 되돌아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손해인것 같아도 가장 이익을 얻는 길이고 그것이 가장 힘든 길인것 같아도 편안한 길을 가는 것이고 돌아 가는것 같아도 사실은 가장 질러서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요.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많이 빗나가면 좁은 의미에서 예배속에 하나님께로부터 영혼을 살리시는 이런 모든 놀라운 은혜 같은 것들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이상하게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은 쳐다도 안본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래 가는 것은 매우 나쁜 것이고 그리고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은 각성을 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물러나 있다면 물러나 있으니까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물러나 있으니까 다시 돌이키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주일예배설교 2008/1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2 주일오후예배(2008/10/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3 (주일예배설교 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4 주일오후예배(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5 (주일예배설교 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6 주일오후예배(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7 (주일예배설교 2008/10/26)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8 (주일예배설교 2008/11/9)
7.설교자, 하나님의 목소리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눅 20:14~15)
I. 본문 해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진리를 가르치는데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주신이가 누구인지 말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독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그대들에게 한 질문을 할 텐데 대답을 해 보거라. 만약에 대답을 하면 나도 대답을 주리라.”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성전에서 이런 대화가 오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놀라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마지막 선지자인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냐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냐” 다시 말해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냐 보통사람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라고 대답을 한다면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전하신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러니 만약에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라라고 하면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를 바로 내가 전하려고 왔는데 너희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대답할 것이고, 만약에 “세례 요한은 선지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백성들이 모두 세례 요한이 참 선지자로 알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세례 요한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부인하면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을 돌로 칠 것 같은 위협을 이들 스스로 느꼈습니다. 이와 같은 대화가 오고간 후에 예수님이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마음씨 좋은 포도원 주인이 있었는데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딸 때가 되고 주위에 울타리를 둘러서 안전하게 해 주고 살 집뿐 아니라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그런 시설과 망대까지 만들어 놓고 오갈 데 없는 농부들에게 세로 주었습니다. 이 농부들은 아주 놀라운 감격 속에서 포도원에 들어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큰 혜택을 입은 농부들이 거기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이제는 포도원을 빌려 쓰고 있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룰 약속한 시점이 왔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종을 보내어 포도원 소출 중 얼마를 소작으로 바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농부들이 주인의 전갈을 가지고 오는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냈던 것입니다. 다시 두 번째 다른 종을 보냈더니 심히 때리고 능욕해서 빈손으로 돌려보냈고 세 번째 종을 보내니 피투성이가 되도록 상하게 하고 결국은 빈손으로 내어 쫓아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이 종들을 보내니까 이 사람들이 말을 안 들어서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면 아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소작료를 바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농부들이 아들이 오는 것을 보며 저 사람이 바로 아버지에게 우리의 포도원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아들이니 죽여보리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고 하여 살인을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목적이 무엇이고 그 백성들을 목적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하여 어떻게 당신의 말씀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선명한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도 없이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자리 잡고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다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리방황하던 포로와 같던 백성들이 그 발달한 나라에 들어가 이민족을 타파하고 거기에서 나라를 세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심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저 주신 것을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준 것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좋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백성의 독특한 삶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셨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진리의 빛을 열방 가운데 드러내어 그들도 하나님께 돌아오시게 하기 위하여 이런 일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신약시대로 넘어오면 구원의 은혜와 신자가 그런 구원을 받은 후에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삶의 방식과 의무에 대한 성찰로 우리를 이끌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거저 주어 누리게 하셨던 것처럼 또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악마에게 노예가 되어 죄와 진노의 자식으로 살아가던 우리들을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위대한 능력과 힘으로 건져내어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이 모든 복락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 자신에게로부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전에는 진리의 빛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 진리의 빛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행복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진리를 함께 알고 사랑하는 공동체인 교회의 한 지체가 되도록 우리를 접붙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공로가 없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해지는 삼위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자신들이 누리게 살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또한 일평생 죄 가운데 태어나 불의를 행하다가 멸망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 눈을 뜨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가 무엇인지, 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영혼도, 참 사랑도 몰라 시간 가운데 태어나 살다가 허무한 것에 굴복하며 죽어 갈 비참한 인생들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로 하여금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향해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빛 안에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혜택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런 모든 영적인 혜택들은 결코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겨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었으니 마치 포도원 농부들이 포도원을 거저 선물로 받고 거기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도록 허락해준 주인의 호의를 입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농부들은 커다란 호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주인의 은혜를 모르고 심지어 주인이 보낸 당신의 아들을 죽여 버리고 주인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보내었던 착한 종들을 핍박해서 피 흘리게 만들었고 죽도록 때렸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 사람들이 처음 주인이 자신에게 베풀어 줄 때에는 그 모든 것을 은혜로 알았지만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사라지고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욕망들이 농부들의 마음속에 가득하게 되자 거기에서 소작을 붙여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땅에 주인 행세를 하고 싶어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II. 비정상적인 교회생활
오늘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비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진리와 관련된 종교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후로 특히 죄를 짓고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떠나간 후에는 인간의 불행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때에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의 모든 고통이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한 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먹고 입고 마실 것이 충분한 때에도 인간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불행은 지식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학문의 발전을 통해 많은 교육을 통해 지식을 인간들에게 넣어주어도 그 발달한 지식을 가지고 문명은 구가하며 살지라도 그 지식 때문에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쉬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에 맴돌았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인간은 누구이고 나는 어떤 사람이며 무슨 목적을 가지고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잠시 세상을 살다가 죽으면 그 후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참으로 선이 무엇이고 악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깊은 고민들이 인류 역사에서 사람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떠나고 영혼의 어둠이 찾아와 진리를 향하여 지성의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은 스스로 이성의 힘으로 이런 질문들에 답할 수 없었고 이런 것을 스스로 찾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설령, 어떤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죄로 말미암아 그들의 지성과 영혼이 너무나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그 세찬 진리의 빗줄기를 인간의 타락한 지성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이래저래 자신의 갈 바를 모르고 먹고 마시고 방황하며 살게 되었고 그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원수 맺은 가운데 이 세상에서 진노와 불신앙의 자식들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멸망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뛰어난 인간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하나님께서는 알 수 있는 길을 남겨두셨습니다.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이후에 한 가족을 선택하시고 또 한 민족을 선택하시고 급기야는 나라를 선택하셔서 이루게 하셨으니 이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이런 모든 질문들에 대한 지식을 성경을 통해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모든 지식을 친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몸소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 진리들을 우리들을 위해 더 쉽게 해석하시고 자신의 온 삶으로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참 진리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진리를 알 수 없고 알아도 돌아올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 대신 그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에게 참 진리의 빛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 비추는 빛, 곧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진리의 길로 돌아올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신적인 기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십시오. 도대체 어느 인간들이 교회에 모이면서 진리에 관심 있는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어떤 인간들도 교회에서 이 진리를 궁금해 하는 인간들은 없습니다. 진리와는 상관이 없이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몇 해 전에 강남에 다니는 많은 교인들을 대상으로 앙케이드를 하였다고 합니다. 교회 다니는 교인 가운데 90%가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 교회에 출석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미친 짓입니까? 교회에 와서 무슨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저의 경험에 의하면 차라리 교회 와서 얻는 마음의 위로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즐거운 낙을 누리는 것이 아마 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그 위로 있다면 그것은 참 진리에 의한 위로일 것이요, 진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말미암는 위안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위안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질병 상태에서 죽어가는 환자에게 놓아준 진통제 하나 정도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의 비극은 진리와 상관없는 교회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등진 교회생활은 결국은 하나님과 맞서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다가 죽어간 허무한 철학자들은 같지 않은 이성, 자기의 머리 하나를 가지고 이 진리를 찾아보려다가 모두 시궁창에 빠졌지만 교회에는 하나님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주셔서 인간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그 진리들을 믿음을 통해 깨닫게 하시므로 우리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능력으로는 추론해 갈 수 없는 것들을 성령의 찬란한 빛으로 우리에게 개명하여 그 진리의 빛을 보도록 우리의 지성을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깨달은 진리와 성령을 통해 조명을 받아 알게 된 진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들을 우리의 이성으로 조직화하며 한편으로는 믿고 한편으로는 깨달으며 진리의 말씀이 성경을 붙들고 이 모든 질문에 답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모든 종교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해서 한없이 긍지를 느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특별히 이단과 이성주의적인 신앙에 빠지지 않고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앙인이 된 것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지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긍심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고 그 진리를 알고자하는 자들이 지금 저의 말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마음의 위안이나 위해서 자신의 몸에 배인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습관에 의해서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교회생활 속에서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신학교에 가겠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몸담고 있는 교단의 신학교는 들어가기 위해서 삼수, 사수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합니다. 고시 공부도 아닌데 왜 그럴까요? 교회 역사를 보면 참 놀랍습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강력한 설교자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설교되고 진리의 높은 표준이 제시될 때에는 신학교에 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주의 종들 만나기가 매우 귀합니다. 그런데 한물 빠져나가서 교회가 타락하고 강단에서 진리가 선포되지 않고 교회생활이 무슨 동호회 모임쯤 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 가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전자의 경우에는 진리를 전하는 표준이 너무 높고 뛰어나기 때문에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저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으랴?’ 하고 감히 소명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단에서 하는 설교가 진리를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고 너나 나나 세상 오가는 이야기들이나 주고받는 수준이 될 경우에는 하나의 직업의 한 방편으로서 신학교에 가서 제도를 따라서 목사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종이란 감각이 없습니다. 제가 엊그제도 신학교에 가서 “그대들 중의 절반은 소명하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개중에는 중생했는지가 의심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신학교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고 헌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제대로 된 종들이 나와야지만 여러분 후손들이 진리의 맛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III.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
하나님이 설교자를 보내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보낸 것입니다. 누구든지 강단에 올라와서 한 시간 떠든다고 해서 설교자가 아닌 것입니다.
설교자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종들이 그러했던 것들처럼 하나님 곁에 있다 온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선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진리의 세계를 안 사람이어야 합니다. 전문적으로 진리를 알기 위해서 탐구하고 하나님과의 심오한 교통 속에 끊임없이 살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자기의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주님의 심정과 그 음성을 듣고 그것을 충실한 하나님의 종의 심정으로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결코 성도의 편일 수 없습니다. 그는 누구의 편일 수도 없고 오직 진리의 편이니 굳이 편을 따진다면 하나님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강림하게 하셔서 진리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대해서 눈을 뜨고 하나님과 사이에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그에게 그 시대를 향한 말씀을 주십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백성들에게 와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라고 외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눈물로, 혹은 분노로 호소하였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목사는 그 선지자의 후예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도 마음 깊은 고통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시대의 많은 교회들 속에 이 진리를 전하는 것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지 않는 설교자들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과 세상이 가져다준 지식과 시대의 사상으로 진리의 말씀을 대신하게 합니다. 일리는 있지만 진리는 없는 강설(講說)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깨닫도록 지식의 빛을 주지 못하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고 그런 교회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은 기독교 신앙의 미로에서 방황을 하고 있는 모습이 오늘도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삼으셔서 여러분처럼 교회에 모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은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사랑에 의하여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아버지 앞에 변화되어서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는 마치 포도원을 거저 공급받은 농부들처럼 감격했습니다. 주님을 몰라서 이 세상에서 무지와 죄 가운데 방황하다가 진리의 밝은 빛을 보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은 정말로 감격하고 말할 수 없이 기쁜 마음으로 신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모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어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을 가르고 비쳐오는 찬란한 진리의 빛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 그 큰 사랑을 상실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감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맛이 없는 만나라고 불평하며 하나님 앞에 원망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죄 때문이었습니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불신자 안에 역사하고 있는 끔찍한 죄와 동질의 것이고 그 죄의 목적은 신자 안에 있든 불신자 안에 있든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런 죄가 사람들 마음 안에 자라게 되자 그 죄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심히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신자의 영혼 안에 들어온 죄의 특징은 하나님이 세우신 영혼과 마음의 질서들을 뒤엎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지성을 현혹시키고 마음을 더러운 타락에 부추겨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이 세운 질서도 못 보게 만들고 자기 밖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도 어기고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기능이 바로 죄가 하는 혼란스러운 역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진리로부터 아주 멀어진 가운데 육신만을 사랑하며 이기적인 욕망에 빠져 마치 이렇게 베풀어주신 모든 구원의 은혜가 자신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뻐기고 감사할 줄 모르고 은혜에 담긴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이 살아갑니다. 내버려두면 분명히 그들이 받은 구원은 부끄럽게 될 것이고 그들이 한때는 거듭나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았어도 이후에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살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방책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 설교자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수시로 떠나는 진리를 생각나게 만들고 자신의 지성의 빛으로는 언제나 자기 사랑에 감염되어서 객관적으로 자기를 올바로 볼 수 없는 인간들에게 참다운 진리의 빛을 비춰 그들로 하여금 진실이 무엇이고 진리를 떠난 그들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더러움에 오염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이 세상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광은 유명한 지위나 학위, 그의 저명한 학술과 지식 이 모든 것들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왔다고 하는 숨길 수 없는 영혼과 지성의 특징, 그의 모든 인격과 그들의 영혼 속에 아로새겨진 진리에 대한 깊은 인상과 그 진리대로 자신이 살뿐 아니라 이 모든 회중들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야 되겠다고 하는 비장의 결단과 하나님의 기운이 스쳐지나간 비상한 하늘의 힘, 이것이 바로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특징지어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결코 진리의 성경을 놓고 밥그릇이나 들고 이 세상에 나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는 진리와 함께 살고 진리와 함께 고뇌하고 진리에 부합하기 위해서 자신이 고민하고 그 진리에 합치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성도들에게 세워질 기회를 얻으면 자신이 고뇌하고 만났던 진리의 찬란한 빛을 쏟아놓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 설교자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시대에 교회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교회당이나 많은 헌금이나 선교나 열정이나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이런 설교자들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많이 보내주셔서 악한 죄인들이 그 설교를 들으며 가슴을 찢고 회개하고 죽어도 회개하지 않을 죄인들이 마음의 악한 칼을 드러내고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교회에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에 모이는 수많은 인간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하나님 얼굴에 똥칠하게 될 것이며 교회의 십자가는 꺾이고 인간의 모든 사상과 인간은 이 이상의 승리의 깃발만이 교회에 나부껴 결국 교회는 하나님의 참다운 영광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이 장난인 줄 알고 있는 이 세대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기독교인들에게 저는 감히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경고합니다. 진리에 상관없이 사는 그대들의 삶이 이후에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 지를 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싫증난 감정들이 예배 속에서 아주 분명하고 현격하게 드러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설교를 같지 않게 여기는 오늘날의 풍조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설교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나는 설교자지만 여러분에게 정직하게 말합니다. 모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설교가 사람의 사상을 설교하고 있는 동안에는 여러분들은 순종할 필요도 없고 순종해서도 안 됩니다. 설교가 자기 자랑이나 하고 이 세상에서 타락한 인간들이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며 살아가는 세상적인 처세술이나 가르쳐주고 있는 동안에는 여러분들이 거기에 무릎을 꿇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있는 동안, 진리와 연속성을 가지고 그 진리를 사람의 언어로 그 시대의 말로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한 그것은 진리입니다. 다만 성경은 원천적인 진리이고 설교자의 그 설교는 파생적인 진리일 뿐입니다. 똑같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니 거기에 복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신 나가고 얼빠진 교인들이 자기 듣기 좋은 소리 듣기 위하여 끊임없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방황하면서 자기가 적응할 곳을 찾습니다. 적응은 무슨 적응입니까?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깨뜨려져서 피를 흘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죽은 심령을 가지고 어디에 가서 적응하면 거기가 죄악의 구렁텅이지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성도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들은 불행하게도 이렇게 외치는 설교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신앙 생활하는 수많은 사람과 교회를 기웃거리며 거기에서 무엇인가 여기에서 발견하지 못한 진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기웃거리며 살아가는데 진리를 그런 곳에서 찾게 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정직히 하나님 앞에 선 마음인지 다시 한 번 돌아보기 바랍니다.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가는 길을 인정해주고 예수님도 오셔서 여러분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여러분들 인생, 가는 길을 훼방 놓지 않고 도와주기를 바라며 ‘꿈은 내가 꿀 테니 주님은 도와주기나 하십시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교회생활을 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여러분들의 몫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훨훨 날아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다가 지옥에서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나니”라고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농부들을 자기 포도원에 들인 이 주인이 소작료를 받기 위해서 자기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종은 오랫동안 주인 곁에서 충성을 다하고 정말 주인을 위해서 온갖 헌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전갈을 들려서 보냈더니 실컷 두들겨 맞고 피멍이 들어 왔습니다. 주인이 진짜 이 종을 사랑하다면 그 다음엔 군대를 이끌고 가야 하지 않아요? 놀랍게 그 정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때려서 피멍이 들을 뿐 아니라 온갖 욕설을 퍼부어 인간 이하로 모욕을 해서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무사들을 데리고 길을 떠나야 되지 않아요? 세 번 째 종을 보냈더니 이번에는 실컷 두들겨서 피투성이가 되어 보냈습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 종은 선지자요, 선지자인데 도대체 이 종들은 무엇인가? 주인의 집에서 일평생 주인을 사랑하고 봉사했는데 마지막에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주인은 얻어맞고 실려 들어오니까 다른 종을 보내고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오니까 그 다음 또 다른 종을 보내고 답이 안 나옵니다. 어느 순간에 그 종들을 보아서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포도원은 구원의 은혜요, 교회의 축복이고 농부는 예수 믿은 여러분이고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죽은 아들은 예수님이시라는 사실도 말입니다. 죽어간 종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Ⅳ.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어떻게 되었습니까?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드셨습니다. 구약에만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 있는 사도들과 많은 주의 종들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기쁜 소식으로 증거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희를 너무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혀 오게 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주신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수많은 말씀의 종들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급기야는 피 흘리며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당신의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능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능과 탄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을 목회자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그렇게 애매한 말이 없습니다. 무엇이 목회입니까? 목회라고 하는 기능은 많은 일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가지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하고 성도들은 그 진리를 깨닫고 함께 고민하며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목회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목회의 기능이 교회 안에 있다 할지라도 진리는 그 모든 것들을 의미 있게 만드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 원천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설교는 바로 그것을 예배의 시간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전해주므로 진리를 깨달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 생명이 흐르게 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고 설교자가 보냄을 받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바쁘게 돌아치고 움직이면서 예배는 죽은 자와 같이 드리고 진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 감화가 없이 태만한 예배생활이 이어집니다. 그런 사람이 전도를 한다고 하는데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도(道)를 전하는 것인데 도대체 무슨 도를 전하고 싶을까요? 자기도 싫어하는 그 도를, 도가 울려 퍼질 때 졸고 자고 배교에 가까운 예배를 드리는 인간이 과연 도(道)를 전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선교를 한다고 하는데 ‘선(宣)’하는 ‘교(敎)’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을 ‘교(敎)’하는 것이 선교이고 그 진리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믿는 신앙의 도리를 내가 기뻐하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하고 이 세상에 있는 만방에 전파하는 것이 선교일진대 자기가 예배 중에 기뻐할 줄 모르는 그 진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한다면 도대체 그 선교의 열정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천사도 자다가 웃을 일 아닙니까? 자기는 그 진리를 기뻐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진리를 전하고 싶어 한다. m 진리를 받아서 그들이 참 진리를 알고 아주 기뻐하게 될 때 과연 그가 그들과 함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그 모임이 바로 이 모임인데,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진리를 즐거워 할 줄 모르는 그 사람이 피부색이 틀린 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는 유독 그 일을 여기서는 못하는 일을 거기서는 할 수 있다는 간증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신앙적인 기만이고 종교적인 사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설교자를 교회에 보내신 이유는 성경을 여러분들에게 주신 이유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도록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가르치고 돌보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많은 일들이 있지만 그 어떤 것도 본질적인 사명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본질적이 아닌 사명으로부터 그는 멀리 떨어져야 합니다. 본질적인 사명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거기에 깊이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진리를 깨닫는 일에 마음에 얽매임이 없이 헌신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해야 하고 설교자는 그렇게 깨달은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죄지을 가능성도 없이 무흠하게 이 일을 수행했지만 그러나 설교자는 유흠한 인간이고 한때는 여러분의 형제였습니다. 똑같이 낙심하고 좌절하고 시름에 잠기고 때로는 정욕에 시달리는 똑같이 연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불림 받은 매우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그 일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설교의 도구이고 말씀을 전해주시는 방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설교자는 의지할 대상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우리가 그분을 의지할 만 하였지만 설교자는 의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설교자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사상이 농축된 것이 바로 설교자를 위한 성도의 애끓는 기도입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들 중의 상당수는 목회자를 위해 거의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오늘 일주일 동안 단 한 번도 설교자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그런 중 어떤 사람은 오늘도 설교에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보기에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잔재주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온 마음을 다하여 진리를 진리답게 선포하고 자신의 변화와 성도들의 참된 변화를 통해 교회가 참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도록 헌신한 사람이 설교자요, 목회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성도들이 사소한 일로 자기 교회 목회자와 부딪히고 심지어는 마음속에 깊은 원망을 품고 미워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도전하는 것은 마치 물을 길어먹을 수 있는 샘에 오줌을 누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 여러분들의 이 교회에서의 생활과 믿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각각 생각은 틀리고 우리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조금씩 달라도 우리에게는 일치를 이룰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빛이 선명하게 목회자를 통해 예배 속에, 설교 속에 비추게 될 때에 그 설교 앞에, 말씀 앞에 목회자도 깨뜨려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성도들도 깨뜨려져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가끔 불순종의 길을 걷는 죄인들이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리의 빛 안으로 들어오게 될 때에 교회는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진리로 말미암는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목회자에게 도전하고 목회자와 마음이 상하고 서로 깨뜨려진 목양의 관계를 가지고 살 정도로 그렇게 중요하고 엄청난 일이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저는 반문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듣지 않는 자신의 방종하고 배교에 가까운 예배의 태도를 합리화시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에게 그런 사람이 있어서 제가 여러분들을 책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인격에서 나오는 설교를 내가 어떻게 듣겠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매이지 않습니다. 진리 앞에 무릎을 꿇어본 사람들은 진리의 힘을 알고 진리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그 사랑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Ⅴ. 결론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어쨌든 요즘 들어 여러분들의 예배생활은 매우 잘못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여야 할 중요한 의무는 진리가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진리에 대한 궁금증,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 그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맛보고자 하는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교회에 몸을 담고 사는 동안 목회자가 이 두 가지 일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며 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은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진정한 의무입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여러분들은 나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설교자가 매주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단에 오를 때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돈을 달라고 합니까? 예쁜 옷을 사 달라고 합니까? 경치 좋은 곳에 관광을 시켜달라고 합니까?
설교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은 여러분들이 진리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에게 박수치지 않아도 하나님께 열광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은혜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잠시 전에 들은 설교가 누가 한 설교인지 잊어버려도 설교자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깊이 자신을 돌아보고 이후 남은 생애에 여러분들의 교회생활이 진리가 중심이 되도록 장로하고 권사 하는 재미로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닙니다. 진리의 참 맛이 교회생활에 중심이 되어 날마다 빛으로 오는 진리의 빛 앞에서 진리를 따라 살면서 고난을 받을 때는 위로를 받고 진리를 거스를 때는 그 빛에 책망을 받으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가운데 여러분들은 많이 미끄러지지 않고 하늘가는 밝은 길을 따라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 (주일예배설교 2008/1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2 주일오후예배(2008/10/05)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3 (주일예배설교 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4 주일오후예배(2008/10/12)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5 (주일예배설교 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6 주일오후예배(2008/10/19)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7 (주일예배설교 2008/10/26)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8 (주일예배설교 2008/11/9)
8.참된 예배로 나아가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I. 본문 해설
사도는 전반부에서 기독교의 위대한 교리들을 장엄하게 제시한 후에 12장부터 그 교리를 실제의 삶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이 12장 이후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인 교훈들을 도입하는 머리에 바로 예배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사도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우리의 삶 전체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이것이야말로 참된 영적예배라고 사도는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II. 좁은 예배와 넓은 예배
우리는 여기서 또 다시 좁은 예배와 넓은 예배의 일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일에 시간을 정해놓고 모이는 이 정규적인 공적인 예배는 좁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와서 땅에 몰두하며 살았던 우리의 마음을 하늘을 향해 들고 거룩한 삼위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 영광의 빛 앞에서 우리의 추한 죄악을 회개하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가 아니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용납 될 수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의 찬란한 빛 앞에서 우리는 볼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떠 소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회할 때 사죄의 은혜가 주어지고 힘을 잃은 자들에겐 또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은혜의 힘을 공급해 주셔서 회복시키는 경험을 예배 속에서 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큰 은혜와 자비를 그의 임재 속에서, 예배 안에서 만나고 예배당 문을 나설 때에는 지난 한 주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오늘 만난 주님을 생각하며 그 예배의 정신을 구현하며 살고자 다짐하게 됩니다. 이런 좁은 의미의 예배의 성공은 삶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예배가 넓은 의미의 예배 속에서도 그대로 구현되는 것이 우리 예배의 이상입니다.
몇 해 전 잡지를 보았더니 500년 째 조상의 불씨를 간직하며 내려오는 어느 한 집안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성냥이나 또 다른 불을 피우는 수단들이 없었기 때문에 불씨를 조상으로부터 간직해서 그것을 보존하는 것이 그 집 며느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그 재를 파고 헤쳐서 불씨를 꺼내어 불을 붙여 아침밥을 짓고 저녁에 밥을 짓고 밤에 다시 그 불씨를 다시 항아리에 간직하여 은밀한 곳에 넣어 두었다가 그 다음날 다시 그 불을 사용하는 것이 500년 동안 이조시대 때부터 해 왔습니다. 만약에 불씨를 꺼뜨리면 그 며느리는 쫓겨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당시에 굉장히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집에 불씨를 얻으러 다녀야 하는데 그것은 집안의 굉장한 수치였습니다. 그 집 며느리는 21세기에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그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서 도시에 살면서도 장작을 때는 아궁이를 만들어서 불씨를 계속 담습니다. 할머니가 말하기를 며느리가 아직까지는 하지만 이 불씨가 언제까지 갈 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말로 인터뷰기사를 끝내고 있습니다.
주일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은혜의 불씨를 마음에 간직하고 가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 마음의 불씨에서 불을 붙여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우리의 실제적인 삶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과 분명한 만남이 있고 그 진리와 은혜의 불씨가 있을 때 그 불이 일주일 동안 우리의 전 삶에 불 붙여져서 영혼의 불길처럼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 섬기는 은혜의 불꽃이 피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분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다온 사람은 예배에 나와 하나님의 큰 위로와 사랑, 감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랑과 은혜, 감화를 경험하면서 드리는 예배는 감사의 눈물이 있고, 위로의 눈물이 있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독점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기쁨의 증거가 있는 감격적인 예배가 되지 않겠어요?
만약에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 때, 일주일의 삶이 불순종과 죄로 얼룩지고 하나님의 어떤 은혜도 구하지 않는 육욕적이고 감각적인 그런 생활로 얼룩진 한 주간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산 다음에 드리는 예배가 어떻게 간절하고 열렬한 예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배에서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지루함과 싫증,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는 마음은 일주일 동안 하나님을 향하여 냉담한 마음으로 살았던 하나님 없는 삶의 증거입니다. 일주일의 삶은 볼 수 없지만 성도들이 모두 드리는 예배 속에서 그들이 흩어져 살았던 개인적인 한 주간의 삶이 어떤 수준의 것이었는지를 아주 명백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이처럼 좁은 예배와 넓은 예배는 순환적인 관계를 가지고 하나는 또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하나는 또 다른 하나의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일주일 동안 실패하고 불순종한 삶이었다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겠네요?’ 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살던 사람이 승리의 생활을 보고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만약에 실패했으면 예배의 시간에 나아와 자기의 불순종과 죄악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통회하고 깨뜨려지는 마음을 훌륭하게 산 사람의 일주일의 삶 못지않게 훌륭한 산제사로 받으셔서 그들에게 용서를 주시고 곤고한 영혼에게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셔서 하나님 앞에 새 삶을 살게 합니다.
문제는 만약에 우리가 일주일 동안 분투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당연히 잘못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깊은 회개, 깨어진 심령이 예배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예배를 망치고, 망친 그 예배는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서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는 가운데 우리에게는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속에서 그 예배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진리의 사모함을 가지고 깨달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한 주간 동안을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III. 복음적인 통합: 영적 예배
그런데 오늘 성경은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를 복음적으로 통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입니다. 영적 예배에 대해서 사도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구약에 있어서의 제사와 신약에 있어서의 예배를 하나로 묶으면서 복음적인 통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예배요, 영적인 제사인 것입니다.
A. 구약 : 헌제와 제물
구약시대에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3가지 요소가 필요했습니다. 헌제자와 헌제자가 바치는 제물, 그 제사를 수행해주는 제사장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헌제자와 제물의 관계였습니다. 즉,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와 제물 사이에 불일치가 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참된 영적 제사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물은 항상 율법의 규칙을 따라서 정해진 대로 드렸습니다. 그 제물이 흠 없고 깨끗한 훌륭한 제물이고 그 제물이 훌륭한 제물일수록 헌제자가 그 제물과 부합되는 예배의 정신을 갖지 않은 사람일 때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제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 훌륭하면 헌제자도 훌륭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헌제자가 제사를 드리는 그 순간의 사람됨은 제사를 드리는 그 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기 전까지 살아온 삶과 헌제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헌제자의 사람됨은 그의 행실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고 그의 행실은 또한 그의 사람됨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웅변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 헌제자는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된 사람이고 악한 사람인데 제물만 훌륭했다면 예쁜 그릇에 담긴 똥과 같아서 하나님에게 모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래, 어차피 나 같은 인간 예배드려도 하나님은 쳐다도 안 보고 설교자는 말하기를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나는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하는데 그럼 관두지.’ 예배를 집어치웠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마음은 안 나오고 몸이라도 나올 때는 하나님 눈치라도 봤었는데 아예 집어치우는 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막 보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살아도 항상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이 따뜻하게 잘 대해주고 돈도 잘 벌어다주고 아내 대접을 해주면 그 사람 아내 된 것이 자랑스럽고 기쁘고 남편이 사랑스럽습니다. 남편이 항상 그렇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잘 못해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같이 살려면 참아야 합니다. 어느 날 요즘 태도가 바뀌었다고 하며 이성 친구가 생겼다고 말을 하면 부부관계를 끝내자는 것이 됩니다. 마음에 없어도 눈치라도 보면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싫어하시지만 하나님을 막 보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 시간에 야단을 맞으면서도 나오면 하나님은 고통스럽지만 눈치라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어치우면 하나님을 향해서 고무신 거꾸로 신는 것이고 안 돌아오면 배교입니다.
구약에서도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절기를 지킨다, 난 괴롭다. 제물을 바친다. 나는 다 싫다고 하는 것은 제물과 헌제자와 안 맞는 다는 것입니다. 드리던 제물을 집어치워야 하겠습니까? 헌제자가 바뀌어야 하겠습니까? 명백한 것입니다. 형식적인 제사, 예배에 대해서 책망을 받으면 제물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제물에 어울리지 않은 헌제자 자신이 바뀌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구약의 제사는 열려있었습니다. 속죄의 제사입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고 이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가슴 아파하고 잠시나마 ‘나에게 이 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가슴에 못 박았구나’라고 참회하며 제사를 올릴 때 그 제물에 부합하는 삶은 못 살아도 참회의 마음이 그를 제물에 부합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그를 용납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의 제사가 영적인 예배가 되었던 방식입니다.
B. 신약 : 마음과 몸
이것이 신약에서는 영적 예배로 실현이 됩니다. 헌제자와 제물로 관계 지어졌던 구약의 제사는 신약에 와서는 마음과 몸의 유비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으로 여기 예배에 나아왔습니다. 훌륭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성경은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몸과 일치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충분히 교회에 나올 여건이 되는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터넷 켜 놓고 예배를 드리고 이것으로서 예배에 나오는 의무를 대신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의 습관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이 되어야지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한 교회에서 한 성도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대신하는 것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드리면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여기에 나와 있는 몸으로 드리는 좁은 의미의 예배 시간에 참여하는 것에 어울리는 예배의 정신으로 가득 찬 신자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둘이 합치가 되어 하나님을 찾을 때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영적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살았던 삶이 바로 몸을 우리의 영혼과 마음이 하나님을 위해 썼던 것처럼 영혼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끌고 와서 몸과 영혼이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위엄 앞에서 회개하고 사랑 앞에서 참회하고 용서를 빌고 다시 은혜를 받고 진리를 깨닫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좁은 의미의 예배로 우리를 데려 가는 것입니다. 예배의 영적인 순환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점점 더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의 영향력이 삶 전체에 미치고 삶 전체 속에서 분투하며 살던 예배의 정신이 공적인 예배 속에서 구체화되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복음적인 것입니다.
참된 영적인 예배가 여러분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의 태도를 보며 몇 달 동안 고민하고 심각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바로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여러분들의 삶은 우리 각자 가서 확인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예배의 수준만큼이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물러나가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살든지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정확하게 그 예배를 보면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지 그 정도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리스도의 그 탁월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고 진리의 빛을 많이 받은 여러분들이 그런 식의 삶을 사는 것을 하나님이 참고 보실 수 있겠습니까? 기뻐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극상품의 포도를 맺기 위해서 이 세상의 온갖 혜택을 다 주어 여러분들을 포도나무로 심으셨는데 들포도만 맺어서 상품으로 아무 가치가 없는 포도를 맺으며 그 땅을 더럽히고 있는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서 주님의 마음에 어떤 느낌도 없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아버지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살기 위해 예배하고 또 예배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예배는 일주일 동안의 삶을 위한 자원을 마련하는 것이요, 일주일 동안의 삶은 한 번의 예배를 성공적으로 드리기 위한 철저한 예배 준비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순환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며 끊임없는 연약함 속에 좌절하고 넘어지면서도 예배 속에서, 삶속에서 끊임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Ⅳ. 참된 영적 예배를 위하여
사도는 이런 참된 영적인 예배를 위해서 우리에게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A.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음-두 가지 본받음
첫째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본받다’라고 되어있는 희랍어 단어는 쑤쓰케마티조(συσχηματίξο)인데 이것은 어떤 틀에 물건을 찍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구리 같은 것을 녹여 틀에 부어 일정한 형상을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붕어빵 틀에 밀가루 물을 부어 붕어를 구어 냅니다. 만드는 시간도 틀리고 사람도 틀린데 그 틀에 밀가루 물을 부으면 항상 똑같은 붕어가 나옵니다.
인간은 오직 두 개의 틀에 의해서만 찍힙니다. 하나는 세상의 틀에 의해서 찍히고, 하나는 그리스도의 틀에 의해서 찍힙니다. 세상의 틀에 의해서 찍히고 은혜의 틀에 의해서 찍힙니다. 은혜의 틀에 찍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지만 세상의 틀에 찍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파괴합니다. 오직 세상을 본받든지 예수를 본받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나이도 틀리고 삶의 상황도 다르고 성별도 다른데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놀라운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은혜의 틀은 그 사람들을 똑같은 형상으로 찍어내기 때문에 그 형상이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토요일이면 중학생들이 오후에 기도하러 교육관 6층에 올라옵니다. 가끔 대화를 시도합니다. 이제 13-16살인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대화를 해보면 성도의 냄새가 납니다. 은혜를 받은 아이들입니다. 제가 주일학교 사역을 해본 경험에 의하면 3-4학년만 되어도 애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성도의 냄새가 납니다. 냄새의 질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건한 어른 성도들에게서 나는 냄새와 같습니다. buffet식당에 가보면 무순이 있습니다. 하나를 입에 넣고 씹으면 놀랍게 무맛과 똑같은 쌉쌀한 맛이 납니다. 모양은 무와 전혀 틀리지만 그 싹이 자라면 무 뿌리를 만들고 무 줄기를 만듭니다. 무의 쌉쌀한 맛이 그 작은 순에도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게는 그런 일치가 있습니다. 예수 닮은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화가 진전될수록 이 형상은 또렷하게 예수 닮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를 본받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도를 예수 충분히 본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또 한편으로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세상에 의해 틀이 찍히게 됩니다. 그러면 나이는 다르고 세대는 차이가 나고 성별은 같지 않아도 그들이 세상에 의하여 틀이 찍힐 때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양상은 틀립니다. 어린 아이들이 은혜 생활하다 미끄러지면 그 아이들이 사기를 치고 신문에 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은혜에서 미끄러졌다고 해서 숙제 안 하고 엄마 지갑에서 돈 훔치고 게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대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흐르지는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은혜에서 미끄러지면 같은 그 세대에 어울리는 쪽으로 갑니다. 어른들이 은혜에서 떨어지면 어른들 쪽으로 미끄러져서 가는데 방향은 모두 똑같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사람이 달라도 은혜를 받으면 똑같이 예수의 냄새가 나듯이 은혜에서 멀어지면 세대가 누구이든지 어느 세대에 속했든지 똑같이 세상냄새, 사람냄새가 납니다. 아이들도 은혜에서 미끄러지면 똑같이 추해집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선생님을 존경하고 예배에 나오는 것을 기뻐하던 아이들이 어느 한순간에 차갑게 바뀌고 영혼이 고통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 의해서 틀 찍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의해서 틀 찍혀지는 자가 되지 말아라하고 사도바울이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서 아름다운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헌제자의 지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세상에 의해서 틀 찍히는 자가 되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틀에 찍히지 않도록 항거하고 거슬리면서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의 형상 찍히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인간 안에는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B. 영적 변화를 받음
사도바울이 영적인 변화를 받으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영적 변화는 육적 변화의 반대입니다. 육적 변화는 육체의 변화입니다. 영적인 변화는 영혼의 변화입니다.
영혼이 변화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혼은 물질처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도 영혼은 볼 수 없습니다. 영혼이 인간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의하여 파악되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영혼은 본질이 무엇입니까?
영혼은 움직이는 힘입니다. 어떤 것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는 힘입니다. 그 힘이 영혼이며 그것은 영혼의 본질입니다. 영혼의 힘이 항상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이 힘이 작용합니다. 그런데 영혼의 힘은 힘의 방향이 있습니다. 그 방향은 하나님이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항상 선으로 기울어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죄를 지은 다음에는 악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생하게 되면 이것이 균형을 잡을 수도 있고 어느 쪽으로든지 변화될 수 있는 가변성을 도입하게 됩니다. 그런 영혼의 힘이 문제가 되는 것은 힘의 크기도 문제가 되지만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힘의 방향입니다. 그것이 선한 방향으로 힘이 작용할 수도 있고 악한 방향 쪽으로 기울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영혼의 변화라는 것은 악한 방향으로 기울던 영혼의 힘의 방향을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영혼의 힘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변화는 인간이 도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만이 그 영혼에 직접적인 영적인 힘을 행사하시므로 영혼의 힘의 방향을 바꾸어놓으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점에 있어서 불가항력적입니다.
문제는 영혼의 힘의 선하고 악한 방향은 반드시 그 사람의 마음에 투영됩니다. 마음에 영혼의 힘의 방향이 선하면 이것이 투영되어 마음에 선한 성향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영혼의 힘의 방향은 내가 직접 볼 수 없어도 마음에서의 성향의 방향은 내게 파악됩니다. 마음의 성향의 방향이 선한 쪽으로 움직이게 되면 거기에서 나오는 많은 행동들이 다양하지만 방향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선한 방향을 가리키게 됩니다. 영혼의 힘의 방향과 마음의 성향, 산출되는 인간의 많은 행동들의 도덕적인 방향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잠시는 불일치한 것처럼 보이는 적이 있어도 그것은 예외적이고 궁극적으로는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이 선한 자는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느니라는 것입니다.
영혼은 우리가 볼 수 없고 직접 알 수 없고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것이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이지만 마음은 놀랍게도 하나님과 인간인 내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간들이 만났다고 하는 것은 산에서나 들판에서나 바다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 정신과 물질인 육체가 만나고 의식되는 지점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죄의 자리이기도 하고 신앙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경건의 자리인 동시에 욕망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선한 의지가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고 악한 의지가 발휘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고향은 영혼이고 모든 행동들의 고향은 마음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이 못 보지만 그가 하는 일정한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남도 추측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영혼의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은 그의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점집을 갔는데 점을 한참 쳐 주더니 “넌 여기 왜 왔어?” 짜증을 내며 “예수 믿지?” 하더니 예수 믿는 사람이 여기는 왜 왔냐고 하면서 다시 오지 말라고 하더니 예수 믿는 사람은 팔자가 없고 운명에 의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답니다. 점쟁이도 압니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 마음에 있는 본성, 우리의 영혼의 방향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면 이것은 운명입니다. 불신자들은 운명이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신자의 경우 언제든지 그 영혼은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면 바꾸어놓으실 수 있습니다. 불결하기 짝이 없이 너절하던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 수도 있고 영혼의 선한 방향이 악한 방향으로 바꾸게 되면 정결하게 삶을 살던 사람이 아주 너절한 삶을 사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악한 방향에서 선한 방향으로 바꾸어 놓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이지만 선한 것에서 악한 것으로 바뀌는 것은 자동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만 거두시면 자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그것이 본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들을 제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그 은혜 때문에 은혜가 작용해서 영혼의 힘의 방향이 선한 쪽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영혼의 변화에 작용인(作用因)이 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하나님이 영혼의 선한 방향을 악한 방향으로 바꿔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작용을 거두면 자동으로 그 힘에 의해서 영혼이 악한 방향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것은 결함인(缺陷因)이라고 부릅니다. 힘의 영향력이 없기 때문에 본래의 힘으로 돌아가서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혼의 변화입니다.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면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본성도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본성이 선한 방향으로 바뀌기는 힘듭니다. 악한 방향으로 바뀌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선한 방향으로 바뀌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놀라운 영혼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 영혼의 변화 안에서 마음은 거룩하게 하나님을 좇고 삶으로 주께 복종하며 삶의 전 영역에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변화도 알고 보면 우리의 힘으로 직접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 신자의 영혼의 방향을 확 바꾸어 놓으시고 밤에 잘 때까지도 악한 인간이었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선한 인간으로 바뀌었다는 일은 없습니다.
C. 마음을 새롭게 함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요구입니다. 영혼의 참된 변화는 마음에 투영되고 마음은 삶으로 결과가 되어 나타나는데 결국은 마음이 중심에 있어서 위로는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아래는 삶의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경에 영혼을 돌이키라, 영혼을 새롭게 하라, 영혼을 정결케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명령이 마음을 돌이키라, 마음을 정결케 하라,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나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은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마음 전체가 우리의 것인 것처럼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마음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주인이시지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노예처럼 사용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지팡이처럼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주인이시면서도 하나님이 이 마음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마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주권을 박탈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완전히 기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도 주인이시고 우리도 주인입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놀랍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사실은 우리도 은혜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치를 이루며 나아가게 됩니다.
신자의 마음이 평화를 누릴 때는 나누어지지 않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신자는 내면에 완전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거기에서 떠나가게 되면 마음 속 자체에 아주 심한 갈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서 시대를 분별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선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 전체를 영적 제사로 드리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LA 근처에서 집회를 마치고 공원에 갔습니다. sequoia라고 하는 나무가 아주 많이 심겨져 있는 숲이었고 한 3,000m 되는 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Giant sequoia Forest 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들어가 보니 입이 벌어질 정도의 어마어마한 나무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거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제가 본 sequoia 원목 중에서 제일 큰 나무는 12사람의 성인이 손을 맞잡아야지만 나무 하나를 감쌀 수 있었습니다. 높이가 한 120m 정도 되고 나무 나이가 3,200년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나무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습니다. 나무가 워낙 커서 쓰러져도 그것을 옮기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쓰러진 나무 옆에 서보니 내가 그 나무 지름의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몇 백 년이고 거기서 서서히 썩어가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도 sequoia 숲을 방문했을 때 쓰러진 나무를 보면서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저렇게 거대한 나무가 왜 쓰러졌을까? 나무가 120m쯤 올라가면 뿌리가 사방 45m 정도까지 펼쳐진다고 합니다. 거의 500m 가까이 뿌리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런 뿌리가 받히고 있는데 어떻게 힘없이 쓰러진 나무가 여기저기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부러 쓰러뜨린 것이 아니라 뿌리가 끊어진 가운데 툭 하고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작심을 하고 그 비밀을 알아보려고 숲을 산책하면서 쓰러진 나무들, 나이가 많은 sequoia 나무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아주 중대한 사실들을 발견했습니다. 나무가 서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제일 먼저 징조가 따로 있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얼굴에 제일 먼저 나타납니다. 운동을 해서 신체가 젊은이처럼 건장해도 얼굴은 삭았습니다. 나무는 나이가 들어 늙으면서 꼭대기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밑둥에 나타납니다. 땅위에 올라온 부분이 구멍이 뚫리기 시작합니다. 나이가 어린 나무에는 안 나타나는데 나이가 들면 공간이 뚫리면서 구멍이 뚫립니다. 짐승들이 살기 좋고 들어가서 갉아 먹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밑둥부터 조직의 촘촘함이 노화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벌레가 나무를 파먹을 때 위보다 밑둥이 잘 팔 수 있습니다. 벌레들의 공격을 받고 공간이 점점 넓어집니다. 바람이 불 때 밑부분이 많이 침식되었으면 수 십 톤이나 되는 나무가 조금만 흔들리면 자체 무게가 너무 크기 때문에 쓰러질 때 나무가 뿌리 채 올라오면서 뿌리가 끊어지면서 나무가 드러눕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어마어마한 sequoia 나무가 뿌리가 45m까지 뻗어나가는데 깊이는 겨우 3~6 feet 밖에 안 됩니다. 어마어마한 거목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교회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에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교회에서 장로가 되어 권한을 행사하며 교회를 섬깁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일들이 자기의 손을 통해서 결정됩니다. 은퇴를 합니다. 뒷방 노인네처럼 됩니다. 한 교회에서 목사로 섬길 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목사님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만 은퇴하고 나면 손주나 보는 뒷방 신세가 됩니다. 그것은 커다란 변화이지만 놀랍게도 신앙의 본질적인 변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선교에 올인 하다가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베트남 선교에 전념하다가 중국 선교에 올인 했는데 잘못 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선교에 힘쓰다가 복지로 방향을 바꾸어서 다른 정책을 쓰다가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항상 무너지는 것은 이미 다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본질을 소홀히 여길 때 교회든 개인의 삶이든 무너지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렬한 정신, 참회의 눈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 매일매일 순종하는 삶, 자기를 성찰하는 정신 이런 것들은 누구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묻혀있는 밑둥과 같은 것입니다. 회사 다니다가 사업을 했다거나 사업을 했다가 회사를 하고 장가를 갔다가 아내가 죽고 혼자되었다고 해서 신앙이 밑둥부터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기본적인 것들을 게을리 하거나 아무렇게나 잘못되도록 방치할 때 인생 전체가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에 모든 성도가 와서 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회개하고 진리를 사모하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 위로를 경험하고 새로운 회복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각하고 십자가 은혜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는 놀라운 영혼의 쇄신은 이런 것들을 가져다주는 작용으로서의 예배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 사업하다가 잘못해도 교회 무너지지 않습니다. 몇 사람이 떠나고 심지어는 절반이 다른 교회 더 좋은 교회 있다고 떠나도 교회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을 무시하게 될 때 교회는 어마어마한 힘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교회 역사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마음을 기울이며 어떻게 살아야할 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끊임없이 신앙은 본질로 돌아가서 본질이 묶여야 합니다. 예배는 가장 본질적인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지난 8번의 설교 속에서 받았던 뼈아픈 책망과 심각한 경고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런 신앙의 실패가 여러분 삶속에서 되풀이 되지 않도록 경성해야 합니다.
Ⅴ. 결론 : 참된 예배로 나아가자
우리의 삶의 정체를 묶어 참된 예배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는 참된 예배가 되기까지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좁은 의미의 예배 안에서 참회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정신을 잇는 진리와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이 예배,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의 증거, 이런 것들이 예배 속에서 풍성하게 나타나도록 하나님 앞에서 분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예배를 우리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 물려주어서 세상이 변화면 변할수록 여기서는 불변하는 진리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헌신할 사람들이 나오도록 그렇게 살아가게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따라 살아갈 때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혹과 핍박이 올 때 신앙을 지키며 살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교회 출석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2-3세기를 살았던 위대한 교부 중 한사람이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인을 혹독하게 핍박하는 로마의 시민사회에 대해서 외쳤습니다. “당신들이 때리면 우리는 맞을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당신들을 때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찌르면, 죽이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도 그 일로 인하여 여러분들에게 복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적하지 마십시오.” 그런 담대함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 예배 속에서 만나는 거룩한 하나님 은혜의 세계와 진리의 증거들 그것이 우리를 예수 형상 닮도록 틀 지어 줄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녹녹하게 변화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에 영향을 받고 변화되기 보다는 우리에게 임한 하늘의 자원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갈 용기와 담력을 얻게 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더욱 더 예배에 마음을 모으고 주님을 만났던 처음 예배의 정신으로 돌아가기를 온전히 힘써야 하고 일주일의 삶이 예배의 정신에 부합하도록 온 마음을 바쳐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성도의 행복한 삶임을 가슴에 아로새기기를 바랍니다.
배교적 예배에서 돌이키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