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와 예배
(2008년 설교모음)
신자와 예배1 (주일예배설교 2008/3/31)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예배드리는 태도는 삶의 태도입니다(요4:23) 2008.3.30 주일오전 1
2.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요4:23) 2008.4.6 주일오전 9
신자와 예배2 (주일예배설교 2008/4/6)
3.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요4:24) 2008.4.13 주일오전 16
4. 상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시51:16-17) 2008.4.20 주일오전 22
5. 설교자 그는 누구인가?(눅20:14-15) 2008.4.27 주일오전 28
1.예배드리는 태도는 삶의 태도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모든 죄인들의 마음속에는 공통된 열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 자연스러운 발로이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고자하는 열망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이 아니란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자와 예배3 (주일예배설교 2008/4/13)
오늘 여기에 보면 사마리아 우물가에 유명한 여자가 나옵니다. 그는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자기의 남편이 아닌 내연의 관계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도 깨달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속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기쁨이 생겨났습니다. 그때 이 여자의 관심은 이제 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옮아갔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했는데 당신 유대인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믿어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 그런데 지금이다. 너희가 진정으로 예배하는 방법이 있는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한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참으로 경배하고자 할 때 그것은 예배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흔히 이 구절을 생각할 때에 ‘신령한 예배는 건성으로 드리지 말고 진정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성경이 이렇게 10시 혹은 11시에 모여 1시간이나 1시간 30분 드리는 주일 정규 예배만을 예배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배라고 하는 단어는 사실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예배라고 하는 단어는 ‘밭을 갈다, 섬기다’라고 하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이 단어에서 종이라는 명사, 섬김이라는 명사도 오게 됩니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두 가지 예배를 말합니다. 하나는 넓은 의미의 예배이고 또 하나는 좁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는 우리 삶 전체로서의 예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삶 전체를 포괄하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생활뿐 아니라 직장생활, 일반적인 우리의 모든 생활, 심지어는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생각과 정신의 작용들까지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넓은 의미의 예배와 함께 좁은 의미의 예배도 말합니다. 그 좁은 의미의 예배는 형식을 갖추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사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로 나뉩니다. 사적인 예배는 가정예배, 혹은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은 모두 훌륭한 사적인 예배입니다. 성경은 이 모든 사적인 예배보다도 공적인 예배의 중요성을 훨씬 더 강조합니다. 공적인 예배는 곧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들이 함께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공식적인 예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공적인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적인 예배보다도 공적인 예배가 성경에서 강조되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한 곳에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하는 사실을 장소적으로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불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성은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함께 하나님을 경험할 때 우리가 하나의 언약 공동체 안에 있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되고 미디어가 발전해서 유비 쿼터스 시대가 도래 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이 중요성은 파괴되지 않고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가능합니다. 인터넷이 바로 되는 휴대폰이 있으니까 열린교회 홈피에 들어와서 지금 인터넷에 접속하면 들고 다니는 작은 핸드폰에서도 예배드리는 우리의 예배와 똑같은 광경을 보면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보조적이고 불가피한 수단이지 이것들로 인해서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습관을 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말세가 될 때에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어떤 습관같이 그리하지 말고 오직 그날이 가까워 옴을 볼수록 더욱 더 격려하고 모이도록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주일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신자로서 아주 중요한 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삶으로서 넓은 의미의 예배와 공적인 예배, 좁은 의미로서의 예배의 관계는 저수지와 산 아래 펼쳐진 넓은 논밭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즉, 저수지의 물이 마르면 아래에 있는 모든 산하의 논밭들이 결국은 가물게 되듯이 공적인 예배,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넓은 의미의 삶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 올바로 드려질 수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예배는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무시하고는 어느 하나를 하나님 앞에 제대로 드릴 수가 없다는 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삶의 모든 예배는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훌륭한 제사입니다. 그런 삶의 모든 방면에서 일주일동안 분투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다가 승리한 사람들은 모든 승리하게 한 원천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된 후에 비로소 그가 드리는 정성스러운 이 좁은 의미의 주일 예배는 하나님 앞에 훌륭한 신앙의 표현이 되어 그 작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열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므로 다시 일주일 동안 넓은 의미의 예배를 승리하면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완전히 일치될 때 이것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영적인 예배의 훌륭한 모형이었습니다. 이 제사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는데 밖으로는 제사에 관한 모든 법도를 준수하는 것이었고 안으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 정성스러운 제물이어야 했고 그 제물이 정성스러운 것처럼 제물을 바치는 헌제자의 마음의 세계와 제물의 정성스러움이 일치를 이룰 때에 이것이 하나님 앞에 열납 되는 제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벨은 바로 이런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던 것입니다. 제사를 받으심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자도 하나님이 함께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삶의 모든 방면에서 승리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지 못하면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리멸렬하게 마치 예배 끝나는 것이 예배의 목표인 것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린 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사람이 되어 예배당을 나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 짓밟히듯이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여러분들을 만나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처럼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는 떼어 놓을 수 없이 밀접한 관계에 있고 어디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함께 순환하고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 은혜를 열렬히 간구하면서 예배를 드려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 보십시오. 넓은 의미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순종하는 향기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못 만나고 있다면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진리를 따라서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써 보십시오. 좁은 의미의 예배, 주일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서 충분히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신자에게는 바로 이렇게 두 예배다 교통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예배는 어느 하나를 먼저 택할 것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삶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을 개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제사입니다. 인간에게는 이 예배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배로 꽉 차지 못하고 마음은 거짓과 하나님께 대한 싫증으로 꽉 차있는데 예배만 아주 아름답고 예쁘게 드리기 위해 신경을 쓴다면 그것은 악한 사람의 손에 들린 피 흘리는 제물과 같습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자신이 깊이 참회하고 새로워져서 마음이 그 피 떨어지는 정성스러운 제물에 어울리는 마음이 되어서 제사 드리는 제물과 제사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일치를 이룰 때 우리들은 이것을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진실한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싫증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고 지루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썩은 마음인데 제물만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제물을 포기하고 제물도 자기 마음에 맞는 썩은 제물을 준비했다고 칩시다. 이것은 마음과 제물 사이에 일치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진실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막보는 것으로서 위선보다도 매우 나쁜 행태의 예배인 것입니다.
신자와 예배4 (주일예배설교 2008/4/20)
오늘날은 주일 예배 정도는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다가 보면 피할 수 없이 주일을 지키기 어려운 사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들은 주일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 위해서 순교를 불사하며 주일을 지킨 것을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주일을 지켜야 하는 것은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벌 받을 것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에도 없는 주일 예배를 꾸역꾸역 나오는 사람들의 동기를 캐보면 이렇게라도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일주일 동안 늘 마음이 찜찜하고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예배에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바로 우상에게 드리는 제사의 방식입니다. 살아계시고 거룩한 인격적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이 예배가 의무라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마음이 바쳐지지 않아도 이 의무는 준수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것입니다. 이 의무를 내팽겨 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막 대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맡았는데 마음이 그 사명을 못 따라가면 회개하고 분발해서 마음이 그 사명에 합치해야지 마음이 사명을 못 따르니까 사명을 버려야지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의무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온 사랑을 바쳐서 예배드리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몸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주일에 예배 안 나오는 것은 매우 노골적인 하나님을 향한 반항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막 보면서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면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우롱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한번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해서 천벌을 받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만큼 위험한 곳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습니다. 어떤 중요한 일이 있어 주일 예배를 쉽게 결석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고 막 보면서 하나님 앞에 어떤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진실하게 마음을 울리면서 흘러나올 수가 있을까요?
종교 혹은 신앙이라고 번역되는 영어의 religion의 어원이 어디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가장 신뢰할만한 의견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입니다. 그는 라틴어 religio 라고 하는 것이 ‘ligare의 묶다’라는 말에서 왔다고 봅니다. ‘re’ 가 붙어서 '다시 묶다' 종교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하나님께 다시 묶이고, 다시 묶이는 것을 통해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의 특성입니다.
그렇게 자주자주 묶이지 않으면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의 비밀을 보고 산을 옮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결국 미끄러져 가는 영혼을 자신도 어찌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그 마음이 따라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중대한 의무입니다. 이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보이는 예배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이 지루하고 싫증나면 여러분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예배 나오기 싫어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뵈옵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향해 권고하시는 진리에 대해서 반항하는 마음이 들고 있다면 하나님과 한번 붙어보고 싶은 그러한 막된 마음이 여러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대한 아무런 개념이 없이 피할 수 없는 일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예배를 지각하는 것은 하나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태도도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20년 전에 사역했던 교회의 예배 태도 이야기
예배시간에 보십시오. 몸은 여기 나와 있지만 졸고 있는 사람, 영혼은 집의 침상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어쩌다 한번 조는 것은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습관적으로 계속 조는 것은 영혼이 심각한 중병에 걸린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돌이켜 서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설교를 했을 때 사역 내내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셨습니다. 예배시간에는 늘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깊은 감격이 있었습니다. 지체들은 어린 영혼이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 했습니다 예배시간이면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끊임없이 졸고 있는 집사님이 한분 있었습니다. 예배 나와서 감사기도 드리는 순간부터 졸기 시작합니다. 열렬하게 찬양을 하며 옆의 아이들이 펑펑 우는 데도 몸을 못 가누고 조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졸리면 일어나세요.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서서 예배드리세요. 졸 것 같으면 가운데 앉지 말고 통로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서 예배를 드리세요. 마음속에서 예배를 드려도 항상 남들이 받는 영혼의 깊은 변화,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깎아 내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역이 끝났고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분을 위해서 우리들이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안 되었습니다. 6-7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기도원에서 설교 부탁을 하여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끝나고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전도사님 하며 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벙거지를 쓰고 쪼그만 사람이 옵니다. 몇 해 전에 예배드릴 때 졸던 집사님입니다. 얼굴이 창백하고 몸은 1/3로 줄어들었습니다. 병 고침 받으려고 기도원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장암이었습니다. 상당 기간 동안 버틴 것인데 죽음의 기운이 온 몸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불과 얼마 안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 사람이 예배시간에 졸았기 때문에 천벌을 받아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시니까 정하신 때에 불러 가셨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때가 그분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때 정신 차리고 돌이켜서 사랑하는 지체들처럼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었다면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설령 죽음의 날이 정해져 있어서 하나님이 불러 가셨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비참한 마음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충만한 사랑의 마음속에서 연합되어 하나님께로 가지 않았을까요? 결국 예배에 있어서 실패는 반드시 삶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사라지고 식어지기 시작하면서 여러분의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기 시작합니다. 농사지어도 열매 맺지 못하고 부지런히 힘쓰고 애쓰고 몸부림쳐도 전대는 뚫려 벌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지출이 생깁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의 영혼에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2시간도 안 되는 예배에 왜 그렇게 사람들이 부산스러워요? 힘들 정도로 부산스럽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야지요. 예배드리는 시간 내내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시고 싶겠지요. 넓은 의미의 예배를 승리하고 온 사람들만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지치고 실패하고 죄 지은 사람들은 잘 살 때까지는 하나님 못 만나는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 속에서 실패하고 지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예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삶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예배가 개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는데도 하나님 앞에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오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많은 인생, 소중한 기회, 내게 주신 많은 은혜와 자원들 낭비하면서 죄 짓고 악하게 살고 믿음의 싸움에서 수시로 양보하며 패배했을 때 그것이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주님 앞에 나와서 용서를 구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되지요. 오히려 그 사람은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살았으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제가 좀 살았거든요? 주님도 보셨지요?”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됩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잘 살 수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어떤 마음이 생기냐면 참회하는 마음은 없을지 모르지만 감사하는 마음 이 쓸모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왜 이렇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걸까?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대해 주실 만한 선한 것이 티끌만큼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인데 왜 이렇게 선하게 대우해 주시는 것일까? 일주일 동안 나의 나 된 것, 일주일 동안 내가 주님의 자녀로 살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우리 주님의 은혜입니다. 아멘 그러면서 그것이 바로 감사의 제사입니다. 통회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제물이 2개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하나님 앞에 드려도 다 드린 것은 아닙니다. 집에 남아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모두 주께 드린다고 해도 일부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드린 사람은 모든 것을 드린 사람입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 못 만날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은 여러분 형편을 모르지만 지하실에 있을 때는 성도가 많지 않으니까 다 알았습니다. 어느 형제가 예수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회심하니까 열심히 예배를 드립니다. 우울해진 사람은 애인이었습니다. 예수 믿지 않을 때는 주일마다 만나 데이트를 했는데 형제가 예수를 만나고 나니 자기를 안 만나주고 교회 오면 날 만날 수 있다고 하여 교회에 마지못해 와 보니 장난이 아닙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있어야 하는데 예수 믿을 마음도 없는 사람이 한 두 번이야 하겠지만 매주 얼마나 지겹겠어요. 그런데다 옆에 앉아 잡니다. 졸지 말라고 쿡쿡 치니 스트레스도 받지요. 나에게 면담을 하자고 하더니 저 형제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따라 할 수가 없으니 포기하겠다고 하며 마음이 자기에게서 떠났다고 합니다. 예배 시간에 쿡쿡 찌르는 것도 너무 자존심 상하고 주일마다 이른 아침부터 어둑어둑할 때까지 있다가 흩어져 갈 때는 너무 창피한 마음이 들고 저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내가 둘을 불러놓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 꼭 계시는데 못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문제가 있어 못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문제가 있어 못 만나는 것이니 이렇게 해라. 자매는 한 달만 교회 나오는데 하나님을 못 만나면 마음대로 가라고 했습니다. 수요예배나 주일 오후예배는 안 나와도 되니 주일 오전예배 4번만 나오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형제는 자매에게 절대로 한 달 동안 예수 똑바로 믿으라든지 교회 가자라든가 졸지 말라고 옆구리 찌르지 말라고 하고 떨어져 앉으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만 하라고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하나님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예배시간에 와서 똑바로 앉아서 나만 쳐다보고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4번 예배 드렸는데도 하나님 못 만나면 놔 줄 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둘째 주 예배시간에 통곡을 하고 울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십니다. 믿음 안에서 결혼하고 잘 삽니다.
예배시간에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은 예배의 목표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인데 목표는 하나님 만나는 것입니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입니다. 그러나 공군의 목표와 해병대의 목표는 틀립니다. 공군의 목표는 제공권을 장악해서 공격해오는 적을 위해서 공격하고 공격하는 우리 군대를 적기가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공군의 임무이지만 해병대의 임무는 적 해안에 배를 대고 수많은 병사들을 상륙시켜서 거점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공병대의 목적도 전쟁에서 승리이지만 공병대는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를 놓는 것이 목표입니다.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배가 끝날 때 하나님을 만났으면 감격 때문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다 가야하고 못 만났으면 억울해서 왜 안 만나주시는 것일까? 회개를 해야 될 것이지 뭐가 급해서 설교자도 나가기 전에 백절 튀듯이 문을 가로막고 그 사람들의 어깨를 헤집으면서 설교자가 빠져나가야 될 정도로 영화관 끝난 풍경이지 예배 끝난 풍경이 아닙니다. 틀린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태도와 마음이 올바르지 않으면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예배드리는 태도와 마음이 올바를수록 예배를 거듭 드리면 드릴수록 마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서 못된 인간들은 수시로 미끄러졌다가 일 년에 한번 정도 나오는 막된 신자들이 못된 것이 아닙니다. 못된 짓 할 시간도 없습니다.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개 막 된 교인들은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졸더라도 교회에 가서 조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드리며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집회를 갔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은혜를 받으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데 설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산을 떨며 돌아다니고 웃옷을 벗었다 입었다 다리를 꼬았다 풀었다 하며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뒤집으면 저렇게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안 찾으시느니라. 이렇게 저렇게가 무엇입니까? 예배드리는 방식입니다. 예배에 대한 올바른 태도, 방식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의 신앙생활 전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세요. 예배드리는 태도가 제멋대로이기 시작하면 마음은 높아지기 시작하고 아주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예배의 많은 태도가 예배에서 하나님 만나는 것을 결정합니다. 그것은 태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깊이 회개하고 방종한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했던 것들은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고쳐야 합니다. 어디 가서 주님을 섬기든지 간에 예배자가 아닌 사람의 모든 섬김은 자기만족입니다.
선교의 위대한 비전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자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피땀을 흘리며 복음을 전한 것,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피 흘리며 죽어갔던 것,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수많은 여러분 같은 사람들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세상을 꿈꾸면서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길거리에 가서 예수 믿으라고 전하는데 그 사람을 어떤 사람 만들고 싶습니까? 자기는 하나님 앞에 싫증 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사람을 교회에 불러다가 무엇을 그 사람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까? 깊이 돌이키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으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깨닫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여러분들이 부흥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와 예배 1
신자와 예배1 (주일예배설교 2008/3/31)
신자와 예배2 (주일예배설교 2008/4/6)
신자와 예배3 (주일예배설교 2008/4/13)
신자와 예배4 (주일예배설교 2008/4/20)
신자와 예배5 (주일예배설교 2008/4/27)
2.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예배에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두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와 성령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세속적으로 하지 말고 신령하게 건성으로 드리지 말고 진심으로 이런 의미를 가진 것처럼 생각됩니다. 사실은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래 희랍어 성경에는 “그 영과 그 진리 안에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렇게 드리는 예배는 진리와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이유는 분명해졌습니다. 영, 곧 성령과 진리, 곧 참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없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이 진리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삶의 이치가 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에도 법도가 있지만 이것은 진리라기보다는 일리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법도가 있고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어디에든지 당신의 흔적을 남겨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미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만을 보아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이 무엇인지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모든 지식을 성경으로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입니다. 진리는 창조 세계 어디에도 묻어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은 성경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창조 하신 세계 속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흔적들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인 것,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할 인간이라고 하는 것,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에 참되고 영원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경을 통해 그 진리를 깨닫고 진리의 화신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직접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이 창조 세계 안에 있는 많은 아름다움들을 우리는 그 안에서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진리가 선포되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에 그 빛이 비췰 때 진리대로 산 사람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만족과 위로를 주지만 진리와 상관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 진리의 빛이 비췰 때 자신을 정죄하고 자신의 삶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리의 말씀이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시간에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 진리의 말씀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 될 때에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직무는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관심사가 여기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과 여기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에 더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말씀을 받고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으로 만족을 주는 요리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말씀의 빛으로 발견하고 치료해서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게 만들어주는 의사와 같은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한 교회를 목회하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고 이끌고 나아가는 그러한 지도자이어야 합니다. 행정과 여러 가지 많은 사무도 이해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교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날 같이 복잡한 시대에는 세상이 교회에 원하는 바가 워낙 많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의 일에 교회가 관여하도록 요청을 받습니다. 이 모든 일들에 있어서 목회자는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훌륭하게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를 수행하지 않으면 목회자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전달자인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진리를 전달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가 모든 것을 다 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신의 목회 사역의 성공과 이 세상에서의 많은 성과에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 안에서 행복해하는 삶을 사는 사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목회자가 그 일을 위해서 가장 헌신된 삶을 살도록 모든 여건과 편의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만을 탐구하기에 여유가 없는 목회의 상황,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담기고 그 진리 앞에서 그 진리의 가르침을 따라 살도록 몸부림치는 그런 개인적인 진리에 대한 헌신이 허락되지 않고 마음을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하고 번민과 상심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은 자신들이 길어 먹어야 할 우물에 오물을 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교회에 진리를 보내실 때 당신이 세우신 종들의 그 마음 안에 진리를 가득 담게 하시므로 그것들을 회중 가운데 예배를 통해 전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설교를 하는 것이며 일주일에 한 번하는 이 설교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달하는 참된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일주일 동안의 삶이 그 진리를 찾고 그 진리에 목마르고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런 피나는 일주일이 아니면 한 번씩 외치는 진리의 말씀이 참 진리가 되기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바로 이렇게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적용하고 성도들이 살기 원하는 그런 삶을 자신이 먼저 구도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목회자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그 진리에 전심할 수 있도록 돕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의 형편을 보십시오. 예배당은 많이 있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전하지만 점점 시대가 바뀌면서 앉아 있는 사람들도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고 말씀을 전할 사람들도 진리는 이제 이 시대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마음을 받기보다는 여기 이렇게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분명하고 선명한 진리의 선포가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이렇게 믿고 저 사람은 저렇게 믿어서 사람들이 볼 때에 사람들은 예배당에 모이지만 그들에게는 통일된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처한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인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든 진리가 대중화된 시절은 없었고 언제든지 이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진리의 말씀을 전하셨지만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왔고 어떤 사람들은 그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강퍅해져 예수를 죽일 기회를 찾았습니다. 진리의 힘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우선적인 힘은 진리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내면의 상태가 어떠하고 하나님을 향해 자신이 어떠한 심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진리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마음속에 있었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함은 진리에 대한 싫어하므로 나타나고 연약하고 부족하여 죄 가운데 살지만 그 진리이신 하나님을 찾아가고 싶은 갈증과 마음은 진리가 선포될 때 그 진리를 들으면서 부서지는 그의 심령 안에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정말 오늘날 우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많이 기도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조국교회의 강단입니다. 진리에 붙잡힌 설교자, 그것을 토해 놓되 목회의 성공이나 성도들의 모이는 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토해 놓을 수밖에 없는 그 어떤 불이 뼈 속까지 사무쳐서 그것을 토해 놓는 것이 바로 설교이어야 합니다. TV를 켜면 늘 들을 수 있는 아침마당 같은 이야기들, 민방위 교육 시간에 들을 수 있는 그러한 내용들, 어디든지 라디오를 켜면 명사들의 특강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세상 살고 자녀 키우고 부부가 싸움하지 않고 사는 방법들을 가지고는 결코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형 인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침에는 도저히 못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하는 야밤형 인간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에는 저녁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형 인간이 되었든 야밤형 인간이 되었든지 간에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일반적인 이야기들은 그 사람을 야밤형 인간에서 아침형 인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이 위대한 힘은 그런 강의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이 그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그 마음 안에 있는 악과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어 그것이 마지막 자기에게 몰고 올 인생의 결과와 위험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깨뜨려지고 변화되는 자기 갱신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이지만 예배시간이면 이치에 맞는 이야기들을 듣고 감동을 받고 혹은 감동 없이 돌아가지만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왔던 것처럼 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에 몸담고 있더라도 어차피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난을 이기며 어떤 진리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의 힘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인간 중심의 기독교 신앙이 아주 널리 팽배해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셔야 되겠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해야 되겠습니까?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 답은 인간의 경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만날 때 우리는 그 진리를 통해서 삶의 상황은 다르고 우리가 처한 입장은 각기 상이해도 통일되게 하나님을 향해 사는 지혜로운 인생의 길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예배를 드리며 특히 설교를 통해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깨뜨려지고 깊이 변화되어서 예전에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하고 예전에는 나 좋아 살던 인생을 하나님 기쁘시게 하고 예전에 포기할 수 없었던 것들을 기꺼이 버리며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사는 사람으로 바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거만한 태도로 예배당에 나아와 한 사람으로부터 들려오는 인생을 사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듣고 필요하면 참고하고 싶어 하는 그런 태도들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설교가 매력을 잃었습니다. 무엇인가 듣기 싫은 이야기를 길게만 떠버리면 우리가 즐기는 말이 설교하는 것이냐 설교하지마라고 말합니다. 이제 설교가 그런 수준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올바르게 섬기지 못한 많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그 값을 치룰 지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는 세상에 있는 금과 은이 여기도 있다고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한 곳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소유 한다’라고 하는 말은 진리가 들어있는 성경책이 교회 안내 대에 비치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진리를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설교자의 마음속에 그 진리가 불타고 있고 그 설교를 들은 모든 성도들의 마음 안에 이 성경의 진리가 불타고 있어서 그들의 마음과 삶을 그 진리로 채우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을 그 진리를 가르치고 그 진리에 영향을 끼쳐서 진리로 돌아오게 하고 자신도 그 진리를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그런 삶이 바로 참된 진리가 교회 안에 가득한 삶입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를 읽고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6개월 노력을 하였는데도 하나님을 못 만난 예화
아무리 정성껏 예배를 준비하고 모든 것을 갖추고 예배의 바다에 빠질 준비가 끝나고 신발까지 벗었어도 누가 밀어주지 않으면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예배시간에 없으면 모든 준비를 갖추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예배의 중심이 아닌 교회의 예화
예배를 드릴 때는 집중해서 말씀을 들어야지만 이해가 가능합니다. 왜 우리가 예배를 이렇게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졸음이 가득한 가운데 침묵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지성과 모든 감각을 집중시킨 가운데 들어야 될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시간에 집중되지 않은 예배의 태도는 마치 흔들리는 컵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주전자의 물이 가득해서 물을 잔에 부으려고 해도 아래 잔을 든 사람의 손이 흔들려서 끊임없이 움직인다면 그것들의 일부만 잔에 담기거나 아무것도 담기지 않기 마련입니다. 예배시간에 산만한 것은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졸고 마음을 확 풀어 나태하게 만들고 산만하여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못 만나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 예수님이 그들과 만나주신다고 하는 말씀은 바로 그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지성 안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은 어떤 마술적이고 어떤 매우 인간의 의지와 지성을 초월하는 신비의 경험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신뢰하기 어려운 영적 체험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우리의 지성에 다가오셔서 당신을 알려주시고 우리의 지성의 이해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죄 때문에 분노하게도 되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하게도 됩니다. 새로운 깨달음에 전율하며 우리의 온 몸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기도 하고 또 자신이 지은 죄가 생각나서 치를 떨며 뉘우치게도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이해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안하무인의 태도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가장 지체가 높은 어떤 분 앞에 갔을 때 그런 식의 태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윗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는 그 분의 눈동자를 쳐다보든지 꾸지람을 들을 때는 두 번째 단추를 쳐다보라고 우리는 어려서 배웠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공경과 하나님께 대한 애정을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는 태도를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 말의 의미를 새기는데 있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 이면에 담겨져서 그 말씀을 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마음도 함께 느끼려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태도가 예배시간 내내 견지되어야 합니다. 요즘 같은 자유분방한 시대에는 이런 사람의 충고가 어림도 없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서 예배시간의 자세는 부동자세이기를 권하는 것입니다. 건들건들 하는 태도 말고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앉아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한순간도 하나님이 복주시지 않으면 설교자가 부르짖는 것과 여기 정자세로 앉아서 귀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 아무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그 시간에도 영혼으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깨닫지 못하기가 무지한 나귀와 같사오니 이 시간에도 주님이 나의 어두운 지성을 열어 주님의 말씀에 이치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해 떠나가기 쉬운 나의 마음을 그 진리에 붙잡아 매셔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해 달라고 끊임없이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지성 속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큰 뜻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은 들음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이해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교도들의 영적인 체험과 기독교의 영적인 체험의 차이점은 이교도들은 그들의 영혼과 신이 접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분명한 체험은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한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접속하시되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지극한 신비 가운데 영혼과 영혼이 접선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가지고 인간의 말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 자신에 관한 지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진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되고 그 말씀의 깨달음 안에서 우리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그러한 노력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그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지만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배를 계속 드리게 되면 그 마음 정반대로 굳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은 이 세상 속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늘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사람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지난주에도 그 자리에서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보니까 누구든지 자기 자리가 있어서 그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어느 날 예배당에 왔는데 그 자리에 남이 앉아 있으면 왠지 오늘은 은혜를 못 받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만납니까?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까?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사람들 통해서 듣고 이해한 대로 이야기합니다.
5년 전에 어느 부부의 남편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4학년 된 아들이 오후예배에서 은혜 받고 아버지에게 교회 등록을 권유한 이야기
어느 자매가 집중하여 말씀을 듣다가 은혜를 받은 이야기
제가 숨을 거두면서도 마지막에 유언할 이야기는 집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못 만난다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도 그렇게 살고 기도하고 오되 예배시간에 바로 그 정신으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온전히 집중해야 합니다. 토요일 밤 늦게까지 명화극장 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벌써 주일을 범하는 것입니다. 토요일에 마음을 잘 다스리고 푹 쉰 다음에 최상의 육체의 상태로서 예배당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자신의 지성과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잘 안되면 날 노려보세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해 보세요. 설교자는 일주일 동안 다른 일 하지 않고 진리를 발견하고 찾기 위해서 온 마음을 다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늘 말씀드립니다. 절대 건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입니다. 나는 항상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매일 저 탄광 깊은 막장에 내려가서 외로움 속에서 작은 등불하나 의지하고 곡괭이로 탄을 캐어서 들고 나와야지만 주일에 불을 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제가 6개월만 이 일을 놓아 버린다면 여러분들은 나의 설교가 현저하게 변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매일매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가득 내리는 만나를 먹으며 하루를 연명했던 것처럼 나도 역시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아침마다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일주일마다 그 진리의 광산에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진리의 말씀으로 여러분 앞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온 마음을 다하고 성도들은 일주일 동안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예배시간에 와서는 그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자하는 간절한 갈망으로 온 마음을 다해 그 진리를 이해하려고 힘쓰는 집중된 예배, 거기에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가 정말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감격으로 다가오고 넘어졌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넘어진 날 일으키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가슴을 울리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은 받은 바 그 큰 용서의 은혜 때문에 주님 뜻대로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고난을 받기 위해 살았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온 자신들의 삶을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 십자가의 놀라운 감화 때문에 다시 그런 삶을 살기로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악한 자를 이기며 믿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진리가 있는 예배로 다가오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도 이러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예배에 집중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가정예배를 길게 드리지 말고 15분을 드려도 자녀들이 진리의 말씀 앞에서 올바른 자세로 똑바로 앉아서 아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을 깨달으려고 하는 그 집중된 예배의 자세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예배생활 속에서 매번 주님을 만나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자와 예배 1
신자와 예배1 (주일예배설교 2008/3/31)
신자와 예배2 (주일예배설교 2008/4/6)
신자와 예배3 (주일예배설교 2008/4/13)
신자와 예배4 (주일예배설교 2008/4/20)
신자와 예배5 (주일예배설교 2008/4/27)
3.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예배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예배 속에서 즐기는 요소와 느끼는 요소들이 많이 도입되어 있습니다. 한 번의 예배를 축제처럼 드리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자고 제안합니다. 그 안에서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함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예배에 스스로 몰입하여 거기서 무엇인가를 느끼려고 하고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은 신약 예배정신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예배를 드릴 때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관은 이방 종교의 신과 확연하게 구별됩니다. 이방의 많은 종교들은 신이 이 세상 가운데 가득 있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은 그 신과 교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카톨릭에서도 미사에 참석하면 참석하는 사람이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입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미사에 많이 참석하면 그만큼 많은 은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에 주입되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견해를 따르자면 기독교의 신관은 언어를 가지고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므로 인간과 교제하신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의 신관과 확연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언어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상념을 접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자 하는 그런 종류의 영성 훈련, 관상의 기도, 하나님을 직접 뵈옵겠다고 하는 무념무상의 몰아적인 도치, 이런 것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참된 기도와 예배가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하심에 있어 언어를 가지고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인간의 상상이나 감정의 몰입 속에서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언어를 가지고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고 인간은 언어화된 진리를 이해함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예배의 아주 중요한 정신인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렇게 언어를 가지고 찾아오시는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는데 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핵심은 바로 언어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이며 이해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의 단순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연적인 것들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 우리의 이성의 이치로는 다 깨달아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실들입니다. 이천년 전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죽음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것, 지금도 그 피로 죄인들을 용서해 주신다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진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없고 성령님이 오셔서 그 언어 가운데 우리의 이해의 작용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런 깨달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거룩하시며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 인간은 유한하고 불결하고 일시적인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도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기초로 성령님을 매개로 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유한한 인간 안에 무한하신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교통해 주실 때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무한한 성품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만나게 됩니다. 죄를 지었지만 참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만 연약한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성령의 매개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들은 침묵 속에 고요히 드리는 예배 속에서 이것이 예배의 경건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경건은 단지 침묵 속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주인이신 자기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병들고 연약한 인간이 강한 하나님을 뵈옵습니다. 외로운 자가 그들을 위로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 어떻게 침묵만이 흐르는 예배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그곳에는 반드시 우리의 정서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립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이 뛰거나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으로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 성령 안에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는 이런 강한 정서의 움직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듯이 예배시간에 경험하는 모든 정서의 움직임이 곧 성령의 역사 때문이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생각합니다. 예배시간에 눈물을 많이 흘리고 기뻐하는 사람이 어째 삶이 저렇게 바뀌지 않을까? 물론 그 사람이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지만 워낙 뿌리 깊은 패역한 성향 때문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슬려 살므로 삶이 형편없이 계속 될 수 있고 성화의 진전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배시간마다 만나는 그 정서의 격렬한 움직임이 참 성령으로 말미암는 변화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본성 그 안에 이미 외부의 어떤 사물들과 접촉할 때 사람으로 마음이 움직이고 분노로 마음이 출렁거리고 고통으로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 그러한 성향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분노하고 사랑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고 말할 수 없이 기뻐하는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본성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성령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예배 안에서 무엇인가를 체험하려고만 한다면 많은 악기를 동원하고 열렬한 노래를 부르고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자극적인 명상과 분위기들을 사용해서 얼마든지 웃게도 울게도 분노하게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영혼 안에서 영혼의 변화와 함께 일어나는 작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이해를 타고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됩니다. 진리의 대한 깨달음이 없는 감정의 출렁거리는 움직임은 신뢰할 수 없는 움직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속에서 우리의 가장 가슴에 새겨야 할 우리의 의무는 이 예배 안에서 제일 먼저 우리의 마음을 드리되 마음 안에 있는 지성의 작용을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는 지성의 명민함, 쇄락한 정신의 상태 속에서 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자신을 바치려고 하는 그 마음이 예배자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성령은 바로 이러한 작용과 이해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인간의 이해를 통해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은혜의 세계에 대한 비밀들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밤 중에서도 지금 흔히 구할 수 있는 주먹만한 서양 밤들은 깎아 놓으면 고구마보다도 맛이 없는 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옛날 우리 야산에서 따는 토종밤은 크기는 조그맣지만 그것을 까서 씹으면 그 맛이 양밤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 밤이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얼른 입에 넣습니다. 열심히 좌측 볼에서 우측 볼로 오가면서 열심히 굴려보고 빨아봅니다. 하루 종일 빨았는데 아무 맛도 없습니다. ‘퉤’ 하고 뱉고서는 ‘거짓말, 무슨 밤이 이렇게 맛이 없어.’ 그러나 그것은 먹는 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실컷 빨고 뱉어봐야 입 안 가득 고이는 맛은 밤 껍질에 붙어 있는 먼지의 맛밖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습니다. 엄마가 ‘얘야 밤은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란다. 이렇게 먹는 거란다.’ 밤의 껍질을 다 벗겨서 아주 노랗고 반짝반짝하는 밤을 입에 넣어줍니다. 작은 밤을 꽉 깨물 때 입 안에서 밤이 어금니 두 개 사이에서 찌그러지면서 과즙이 나옵니다. 탱탱한 밤알이 씹히면서 과육들이 흩어지면서 즙들을 혓바닥 사이로 흘려보냅니다. 그때 우리는 아직까지도 밤을 씹으면서 ‘엄마 하나 더 줘.’ 이것이 바로 밤을 맛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정자세로 앉아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헌신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이거고 저것은 저거라고 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 인간의 이성으로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그것을 안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선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느 정도 우리의 이성으로 할 수 있지만 진리 속에 담긴 맛을 보게 하는 것, 그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하나님의 마음까지 느끼는 것, 그 진리를 주셔서 우리를 사람답게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의 그 뜨거운 사랑을 우리들이 직접 느끼게 만들어주는 이것은 성령의 매개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예배시간에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적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예배자의 태도가 아니라 강의실에 있는 학생의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는 좋은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적고 싶으면 집에 가서 테잎 들어놓고 적으면 됩니다. 이 시간은 예배의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예배시간은 아무리 지성이 헌신한다고 하더라도 단지 정보가 전달되는 시간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 지성 안에 역사할 것이라고 하는 기대,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내적인 기도, 설교자가 천사의 말을 하고 내가 천사처럼 그것을 알아듣는다고 할지라도 성령이 오셔서 그 진리의 맛을 느끼게 해주시고 은혜의 드넓은 세계로 나를 데려가셔서 사랑을 알게 하시지 않는다면 예배의 시간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초조함, 그것 때문에 마음에서 끊임없이 드리는 기도, 이것이 바로 예배자에게 꼭 필요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자이상의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영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차갑게 전달되는 지식은 지성을 통해 이해되고 나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지만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진리 앞에 그 거룩하심과 자기의 죄악 됨을 함께 발견하고 뉘우치게 될 때 우리는 오히려 그 지식 안에서 겸손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일주일의 모든 삶에서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이렇게 예배자의 마음에 역사하지 않을 때에는 허공을 치는 것처럼 들리던 평범한 알아들을 수 없는, 알아들어도 그 의미를 느낄 수 없었던 언어들을 힘있게 우리 마음속에 다가오게 만들어서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강한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우리의 지성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영혼, 우리의 전 본성을 바꾸어 놓는 위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진리를 깨달을 때 하나님은 그 깨달음 안에서 성령을 매개로 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 은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의해서 감동을 받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전 본성이 움직여서 생생하게 활동하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마땅히 행하여 할 의무를 이행 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은혜를 못 받았을 때는 하나님께 대하여 섭섭한 것이 많습니다. 해 주시는 것도 별로 없고 은혜 받은 사람 보면 저 인간이 나보다 무엇이 낫길래 차별 대우하시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해 주어야 될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의 큰 감화가 이 사람의 심령을 움직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의무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닫고 나면 가슴이 저립니다. 하나님께 섭섭해서 마음이 절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큰 사랑에 비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한 것이 무엇이 있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나 주 위해 바친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깨닫게 되고 마음속에서 선한 의지가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창조의 목적에 맞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악한 의지는 자기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더러운 자기 사랑의 욕구입니다. 이것들이 사라지고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의무에 충실하게 살아오지 못한 회개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자 하나님께 구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12년 전에 충무에 집회를 갔습니다. 급히 부산으로 이동해야 할 일정이었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니까 주최 측에서 헬기를 타게 해 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네비게이션을 처음 보았습니다. 충무에서 부산을 입력하니 빨간 줄이 나타났습니다. 그 줄을 따라 가면서 이탈하면 항로를 수정하여 가면서 25분 만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지 GPS로 조종사들이 정확하게 운항을 합니다.
우리가 항상 잘 삽니까? 우리가 항상 똑바른 인생길을 걸어갑니까? 이미 우리 안에는 타락한 후에는 똑바로 걸어갈 수 없는 필연성이 생겨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부분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것들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모질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나를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면서 자기만족을 위해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숙명적인 존재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진리의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의무에서 이탈했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이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 없이 혼자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데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으며 예배를 드릴 때 임재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이 은혜를 보내시고 그의 마음과 본성을 새롭게 함으로 죽었던 심령을 살아나게 하시고 병들었던 심령을 치료하십니다. 동토의 땅같이 얼어붙었던 그 마음에 다시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새싹들이 돋게 하나님이 생명의 변화를 불러일으켜 줍니다. 은혜가 없었을 때에는 알았어도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고 나니까 그 사랑의 감화 때문에 힘이 생겨서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의무를 따라 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 놓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질병은 어제 없다가 오늘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식습관과 환경, 생활습관이 누적된 가운데 서서히 쌓여오다가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이 병 증상으로 더 이상 품고 있지 못해 증상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 질병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십자가 그늘아래서 그 하나님의 자비에 감격하던 착한 성도가 돌아서서 결국 사고를 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잘못 살 때가 있습니다. 알아도 그렇게 안 살 때가 있습니다. 또 알아도 그렇게 살려고 하지만 살 수 있는 힘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방치하면 세월이 지나면서 참 성도로서는 도저히 걸아갈 수 없는 그런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꽤 오래되었습니다. 방배동에 있을 때였습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를 그만 두고 온지가 2-3년이 지났는데도 해마다 구정 때가 되면 가르치던 학생들이 우리 집에 세배한다고 찾아왔습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왔으니 그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생활해야지 옛 사람을 잊지 못해 찾아오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반가웠습니다. 윷놀이를 하며 신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재미있게 놀다 저녁이 되어 간다고 일어났습니다. 순간 그렇게 마음이 슬프고 허전할 수가 없어 일어나는 학생들에게 예배드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 학생들 가르칠 때 철야기도하며 늘 부르던 찬송을 불렀습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설교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40분 정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정말 잠간 흘렀습니다. 끝나고 났는데 주님이 푸근하게 우리 사이에 임재하고 계신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살도록 함께 기도하자고 하는데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우리 각 사람을 깊이 감화시키니까 우리가 함께 있을 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큰 사랑, 우리 같이 불학무도하고 흉악한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잊지 말고 살아야 하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이 사랑을 간직하고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야지 하는 감화가 그 어린 학생들 마음속에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런 것들이 일주일에 한번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지 않습니까?
6일은 타락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뜨겁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식어버리고 하나님을 등지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수요예배가 있고 새벽예배가 있습니다. 집에서 성경을 펴고 읽는 개인적인 예배가 있습니다. 그 속에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시는 분, 성령님입니다. 살 힘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비상할 힘을 주시는 분, 성령님입니다. 무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지성을 확 열어 찬란한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는 분, 성령님입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예배 중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우리 가운데 오시도록 열렬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일주일만 간절히 기도하다 오면 다음 주 예배가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변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신자와 예배 1
신자와 예배1 (주일예배설교 2008/3/31)
신자와 예배2 (주일예배설교 2008/4/6)
신자와 예배3 (주일예배설교 2008/4/13)
신자와 예배4 (주일예배설교 2008/4/20)
신자와 예배5 (주일예배설교 2008/4/27)
4.상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잘 준비된 설교와 선명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성령의 강한 은혜의 역사가 있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올바른 하나님의 진리가 성령의 큰 능력 속에서 선포된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 받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간절한 갈망이 없다면 그 예배 속에서 그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사방으로 찾으시며 온 마음으로 당신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주시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주셨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통째로 주셨습니다. 거기에서 가난하다고 하는 말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갈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 다윗은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의 길을 걸어온 인물이었습니다. 이 시를 적을 때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권력과 재물, 명예를 한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사람은 고통과 상처가 많은 일생을 살아온 인물이었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형제들로부터도 따뜻한 고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는 자신의 신앙의 세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부부 간에 결속은 별로 없었고 자식들이라고 낳았지만 칼로 찌르는 것처럼 자식들의 불화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고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고자 하는 반역의 도당들이 쳐들어오게 되었는데 그 괴수가 자기 속으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껏 인생에 있어서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영혼의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이전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아올 때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영혼의 깊고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게 되었고 죽음의 위협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기름 부어 세우실 때에 하나님이 부어주셨던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큰 위협을 느꼈고 부름의 기쁨을 모두 상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사랑으로 가득 찼던 아름다운 사람 다윗의 마음은 마치 줄이 끊어진 악기의 통처럼 조화를 잃은 가락들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으로 차 있던 그의 마음은 육욕에 불타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지난 일이었고 한 마리의 상처받은 양이 되어서 어둡고 캄캄한 길, 가시밭길을 헤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벤자민 B. 워필드라고 하는 20C 최고의 칼빈주의 신학자 중 한사람은 이 부분을 해설하는 가운데 자신의 죄로 인해 다윗은 깊은 영혼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지만 하나님은 그 칠흑 같은 영혼의 어둠 속에서 찬란한 복음의 빛을 발견하게 해 주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즉각 죄를 지었을 때 해결해 오던 자신의 종교 생활의 방식대로 제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고 수많은 짐승과 재산이 있었으며 왕이 제사를 드리고자 하면 언제든지 봉사해 줄 수 있는 많은 제사장들이 성전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짐승을 잡아 하나님 앞에 여러 차례 제사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제사를 드리면 그토록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자기를 찾아와 주시던 임재의 경험을 다시는 되풀이 할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양과 황소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도 자욱한 연기와 피 튀기는 제사의 현장 속에서 마음을 때리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차가운 거절이었습니다. 그는 보다 더 깊은 영혼의 어둠 속으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이 그 영혼의 어둠 속에서 새롭게 발견한 사실, 곧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 중요한 깨달음은 언제 그에게 임했을까요?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고 군주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실질적으로 세운 사람이었고 왕에 제위 하는 동안에 혁혁한 치적을 이루어 주위의 많은 나라를 복속시키고 후손들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실현했던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깊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죄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단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나타나서 직설적으로 다윗이 행한 일이 죄였다는 사실과 그것을 인해 하나님이 다윗과 그의 왕국을 슬퍼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일개의 선지자에 불과 했으니 왕인 다윗은 그를 옥에 가둘 수도 있었고 죽일 권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의 이 같은 지적을 받는 순간 그 자리에 엎드렸습니다. 왕으로서의 모든 체통과 위엄을 버리고 선지자의 지적 앞에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그 사람은 더 이상 왕이 아닌 하나님 앞에 자신과 하나님과 관계를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한 사람의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깊은 참회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밤마다 눈물로 요를 적시고 그 흐르는 눈물로 침상을 띄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먹고 마시는 음식과 물이 곧, 슬픔과 애통이었으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간들을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와 눈물 속에서 보내었습니다. 그때 이 시인의 어둔 영혼 속에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제사 자체는 하나님을 기쁘게도 못하고 슬프게 하지도 못하는 것으로서 문제는 그 제사를 하나님의 바치는 헌제자의 마음이 그 제물에 상합하는 마음이 될 때에만 하나님이 그 제사를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물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을 죽여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산 제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라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상한 심령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상한 심령은 히브리어 표현대로 하자면 깨어진 마음입니다. 혹은 깨어진 심령입니다. 그것도 마치 그릇 같은 것들이 깨뜨려지듯이 조각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시인은 그렇게 깨뜨려지지 않은 마음으로 드리는 그 공교롭고 정성스런 모든 제사로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마음과 생각 안에 있는 단단한 완고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가까이 다가가면 우리는 잘 치대인 반죽과 같아서 언제든지 주님의 생각과 뜻에 의하여 빚어지지만 그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은 죄에 굳어지고 우리의 생각은 편견 속에 딱딱해지고 우리의 의지는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완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서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쉽게 움직이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따라서는 쉽사리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 다윗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서 마음의 이런 굳음 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움직여도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고 하나님이 당신의 생각을 말씀을 통해 보여주셔도 생각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없는 완고함이 마음 안에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수없이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 신문 지상에 오르내릴 만한 죄를 짓지 않고 경찰에 추격을 받아야 하는 범법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이 일주일을 산다면 그 마음은 굳어짐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예배가 아무리 진리가 울려 퍼지고 성령님이 예배 중에 역사하시는 예배라고 할지라도 결코 여러분들은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배 중에서 각 사람의 마음속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시인 다윗은 정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수많은 짐승이 그 성전에서 피 흘리고 죽어갔지만 진정으로 죽여야 할 것이 자기 안에 있는 심령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 나단의 말씀에 의한 지적이 있고난 직후에 그는 비로소 자신이 깊이 가책을 받고 깨뜨려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자신이 지은 그 큰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용납해주시는 비범한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지극히 외롭고 마음 둘 곳 없는 생애를 산 사람이었습니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도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죄로 여기셨습니다. 더욱이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자신을 신뢰하는 충성스런 부하 우레아를 죽였습니다. 죄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죄를 불러들여야 했고 결국 이것은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과오였습니다. 그가 지은 큰 죄는 만약에 자기의 백성이 그런 죄를 저질렀더라면 능히 사형에 처했을 끔찍한 죄였습니다. 이제 그의 인생은 끝난 것 같았고 커다란 영혼의 떨림과 위협이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는 한 때 하나님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전임자인 사울에게서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실 때 그가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는 광경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자기에게도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과 떨림이 밀려왔습니다. 하나님과 교제에서 오는 달콤함과 그 모든 행복은 전적으로 박탈되었습니다. 차가운 거절감과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흐르는 무서운 침묵과 밤이나 낮이나 끊임없이 몰아치는 양심의 가책만이 그의 의식 속에 가득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는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은 은혜 언약 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두 가지 무한한 축복을 약속 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대로 순종하려고 할 때에 진심으로 구하기만 하면 베풀어 주시는 무한한 능력과 죄를 지었을 때 진심으로 참회하면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무한한 사죄의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시인은 선지자의 지적 앞에 자기를 낮추고 어린 아이처럼 깊이 통회하였습니다. 마치 둑이 터지면서 가득 찼던 물이 쏟아져 버린 것같이 억제 할 수 없었던 그의 마음 안에 있던 양심의 가책과 죄에 대한 자각이 선지자의 지적을 통하여 강물같이 쏟아졌고 그는 온통 스스로 자신을 어찌할 수 없는 큰 슬픔에 잠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임할지도 모르는 나쁜 일,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한미한 가문에 별 볼일 없는 양이나 치는 하찮은 목동이었던 자신을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불러주신 하나님의 선택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도 인정해 주지 않고 형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한 자식이요, 형제였으나 하나님은 모든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잘 것 없는 준수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는 항상 가슴에 이 사실을 새겼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름을 부어 정권을 창출하고자 하였지만 그를 돕는 사람은 돈 많은 부자, 권세 있는 인물들도 아니었고 병들고 빚지고 억눌리고 한 맺힌 그런 민중들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전 이후 누구에게도 주신 적이 없었던 이스라엘 왕국의 큰 번영과 영광을 다윗에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사울에게서 너를 구원하여 네 주인의 나라를 너에게 주었고 그의 처들을 너의 품에 주었으며 만약에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부족하였더라면 나는 너에게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 큰 은혜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셨는데 자신이 그 하나님을 배신했다고 하는 그 자기 절망에서 오는 참회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게 비록 높은 지위, 사람들의 수많은 박수갈채, 나를 사랑해주는 수많은 사람들, 좋은 집, 넉넉한 물질생활이 내게 없어도 그것이 내 마음에 만족을 줄 때에는 우리는 범죄 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받은 은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매우 컸습니다만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껏 세운 것은 세상의 나라였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왕국을 세워 주셨고 그는 사람이 만들어준 황금의 면류관을 쓴 군주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서 우리를 쇠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들의 상속자들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신자의 삶에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으로 만족을 얻지 않고 이 모든 세계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랑으로 그의 마음이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거룩한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뼈아픈 지적이 그의 가슴을 찌를 때에 그것은 마치 물이 가득 들어있는 가죽 주머니를 찢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칼로 자기를 째는 것은 큰 고통이었으나 그것과 함께 그의 마음에 고여 있던 더러운 피 고름은 토하듯이 쏟아져 나왔고 그의 모든 죄가 쏟아져 나오자 예전에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소시 적에 그 맑은 피 같은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서 다시 솟아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살아있는 제사였습니다.
기대하는 바도 없이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갈망도 없이 주일마다 의무감에서 드리는 이런 예배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갈망, 이 예배에서 주님을 만나고 오늘 이 세상을 하직할 지도 모른다는 그런 종말론적인 자세가 소수입니다. 비록 선명한 진리가 울려 퍼지고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여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참회하며 그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사람,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 드릴 최고의 예물이 준비된 것입니다. 설교자의 재주를 믿고 예배의 요행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깊은 자각 속에서 나의 이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절실한 사모함이 있다면 그는 주님을 만납니다.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못 만나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인용하여도 영감이 마르지 않는 성경의 한 예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특별한 헌신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잘 드리고 기도시간을 지키고 경건한 생활을 하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성전으로 올라갔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을 만나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죄인이었습니다. 세금을 늑탈하고 재물을 빼앗고 동족들에게 몹쓸 짓을 해서 인간이 아니라고 낙인이 찍혔고 그것이 죄라는 것을 자신의 양심이 스스로에게 증거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자부심 속에서 기도할 때 이 세리는 격식을 깨도 같은 유대인이었지만 고개를 떨군채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을 치는 이유는 우리들이 회개를 하거나 양심에 큰 가책을 느끼게 되면 피의 흐름이 탁해지면서 심장이 압박을 느끼게 됩니다. 호흡이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때에 가슴을 두드리면 진정이 되고 통증이 멎습니다. 이 시인이 가슴을 두드렸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으로 억누를 수 없는 고통이 그의 마음은 물론 육체에까지 다다랐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내게 은혜를 주십시오. 나에게 능력을 주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부끄럽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구원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없이 눈물만 흘리면서 그는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가 높으신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천천의 수양과 기름을 주께 드릴까? 아니면 내 몸에 낳은 내 자식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칠까?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아 여호와께서 너에게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보이셨는데 이는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가장 훌륭한 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절대적인 그 애정의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 훌륭한 제물이 되겠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데도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바칠 수 있는 제물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물인데 그들은 이미 세상에 마음이 더러워졌고 정욕에 탕류의 마음이 불결해졌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이 이미 가득 차 있었으니 그들은 무엇을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까? 그것이 깨뜨려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가장 훌륭한 제사였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향기가 있나요? 우리의 예배에 향기가 있습니까?
존경하는 선생님이나 훌륭한 인물을 만나고 잠시 차를 마시고 돌아서 나와도 오랫동안 그 아름다운 인격의 향기가 우리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하물며 예배 속에서 우리와 대면하시는 분은 그 모든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고 사랑스러우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아름다우시고 순결하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그분을 만난 향취가 여러분의 지성 안에 가슴 안에 고여 있습니까? 그 달콤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까?
죄인인 한 여자가 식사하시는 예수께 와서 향유를 부을 때 온 집안에 그 향기가 가득하였습니다. 가지고 있는 봉함된 그 옥합을 깨뜨리기 전에는 향유가 예수 그리스도께 부어질 수 없었고 부어질 수 없었을 때 분명히 그 집안에 향유는 있었지만 향취는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깊이 상한 마음으로 깨뜨려진 심령으로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며 곤고한 심령에는 주님의 은혜가 부어질 것이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어둠 속을 방황하던 그 사람의 정신에는 하나님의 선명한 인도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상한 심령을 주님 앞에 제물로 드려 주님 만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자와 예배 1
신자와 예배1 (주일예배설교 2008/3/31)
신자와 예배2 (주일예배설교 2008/4/6)
신자와 예배3 (주일예배설교 2008/4/13)
신자와 예배4 (주일예배설교 2008/4/20)
신자와 예배5 (주일예배설교 2008/4/27)
5.설교자, 그는 누구인가?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눅20:14-15)
최근에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신천지라는 이단에서 여러 모로 해도 안 되니까 선교전략을 바꿔 기존의 교회에 자기네 교인을 들여보내서 다른 사람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자꾸 부산을 떨고 방해하는 역할을 시킨답니다. 정신없이 졸아서 자신이 혹시라도 그 설교를 들으며 은혜 받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하고 들락날락하고 성경을 넘기고 부산을 떨어 사람들이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애를 데리고 와서 자꾸 울려서 교인들이 설교를 못 듣게 하는 역할을 한답니다. 놀랍게도 이렇게 침투한 한 사람이 발견되어 조치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계속 졸고 부산을 떨면 거기에서 파송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일평생 마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목회자일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간에 교회만 있고 목회자가 없는 교회는 없을 테니까 거기서 교인들은 자꾸 갈리고 변해도 목회자는 어디를 가든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참 중요합니다. 부모를 잘못 만나서 불행해졌어도 목회자를 잘 만나면 인생이 다시 피어납니다. 물론 목회자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를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냐?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7년 전에 제가 교리반을 하면서 거기 모인 30명 사람들에게 목회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열린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많이 깨달은 다음에 알게 된 것으로 답을 하면 다 똑같을 테니까 그러지 말고 여기 오기 전에 신앙생활을 할 때 ‘사람이 그대보고 목회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라고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답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오는 이야기들이 제 각각 이었습니다. 교회 행정의 책임자,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 외부의 사람들에 대해서 교회를 대신하는 대표자, 선교를 위한 전략가 등등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어른이라고도 합니다. 사실은 그것들도 목회자의 한 그림일 수는 있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목회자는 진리를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설교자라는 것입니다.
목회라는 말이 오늘날 보면 애매합니다. 목회가 무엇입니까? 이번에 교회를 부분적으로 수리를 했는데 이런 것들 지휘하는 것도 목회입니다. 일한 사람들 돈 제때 주는 것도 목회 아닐까요? 교인이 늘어나면 어디다 땅을 살까? 고민하는 것도 목회의 일종이 아닐까요? 교인들도 다 가난한데 어떻게 하나 하면서 헌금하게 하는 것도 목회자입니다. 헌금하라고 소리소리 질렀는데 헌금이 안 들어오면 목회를 못하는 것이고 헌금이 잘 들어오면 목회를 잘하는 것이라고 합디다. 말썽부리는 사람 혼내주는 것도 목회겠죠? 상처 받고 괴로운 사람 쓰다듬어주고 눈물로 기도해주는 것도 목회일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건축 디자인 금융 토지 부동산 거래부터 시작해서 인사 조직 행정 경제 사회봉사 복음 전도 수없이 많은 것들이 목회 영역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부차적인 것입니다. 모든 목회의 기능은 사실은 너무 복잡하고 전 세계에서 한 가지 직업이 이렇게 다양한 재능을 요구하는 직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늘 이야기합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다 전문가이고 아주 탁월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다가 목회자가 아픈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음식도 가리면 안 됩니다. 말 같은 밥통을 가져야 합니다. 늘 목회자는 자신들보다 모두 더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존경을 받습니다. 나도 내가 만족스럽지 않은데 교인들이 날 만족스러워 할까?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목회라는 것은 회(會)를 목(牧)하는 것입니다. 원래 목이라고 하는 것은 목동들이 양을 친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양떼들이 모여야 목회이고 목양이고 있는 것이지 모이지 않으면 사실은 목회가 안 되는 것이고 모였다고 하더라도 양이 아니고 살쾡이들이 잔뜩 모였다면 우리들이 목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짐승을 치는 것이 목축이라고 하지만 호랑이를 100마리 우리에 넣고 키우는 것도 목축업이 될까요? 아마도 안 될 것입니다. 맹수들이므로. 무슨 뜻이냐면 신자가 되어야지만 비로소 목회가 가능한 것입니다. 신자도 안 되었는데 하나님이 누구관대 복종하겠으며 목회자가 어느 인간인데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고 거기에 굴복하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제 좋은 대로 살아가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진리에 승복하는 사람이 되느냐 이것입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를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그 선포를 통해서 거두어들인 사람들이 말씀 안에서 잘 자라가게 하려고 하니 공간도 필요하고 그러니까 건축도 알아야 되고 공간이 필요하고 공간이 기왕이면 소박하면서도 예뻐야 하니 디자인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고 그렇게 하려니까 돈을 빌려와야 하니 금융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후인가 하는 것은 분명해집니다.
설교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목적은 바로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목회자가 사람이 좋고 학벌이 뛰어나고 얼굴도 잘 생기고 건강하고 그러면 더 말할 나위 없겠죠? 한 가지가 없으며 그 모든 좋은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전달해야 할 진리, 그것이 설교자의 가슴속에 불타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지어 놓았습니다. 여기에는 포도원을 지어놓고 세를 주었다고 하는데 같은 기사인 마태복음에 보면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구유를 놓고 모든 설비를 다 갖추어 놓고 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빌려 준 것으로 나타납니다. 소작을 준 것입니다. 소작을 받은 사람들의 임무는 열심히 포도원에서 농사를 지은 다음에 거기에 합당하게 소득을 거두면 그 소득의 소작료를 주인에게 주는 것이 도리입니다. 때가 되어서 주인이 소작료를 받아 오도록 당신의 종들을 보내었습니다.
이사야서 5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도원이라 하나님이 그 포도원을 만들고 의와 공평을 원하셨지만 그들이 악하게 부르짖음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 비유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을 때 여기에 나오는 포도원의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명백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설교자를 보내신 이유는 여러분들을 위로하고 돌보기 위해서만 보낸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어서 하나님 앞에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설교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비유를 맞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시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서 그분의 성품에 맞게 살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그 한계 안에서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모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올바르게 살게 되면 인간은 그 안에서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설교자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는 칼이나 돈이나 세상의 권력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에게 있는 유일한 자산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백성들에게 잘 가르쳐 주는 것이 설교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이유이고 설교자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세 들어 살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통해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바쳐야 할 소작료입니다.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설교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이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번영과 행복, 이 세상나라의 번창함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융성함, 온 땅과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땅 끝에서부터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든지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설교자가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비록 높은 학위나 이 세상에 뛰어난 지식이 좀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는 열심을 지닌 사람이면 훌륭한 설교자입니다. 그가 비록 아주 유능한 사람이어서 교회를 탁월하게 경영하고 사회사업을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일이 없다면 그는 사람 보기에는 매우 중요한 목회자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설교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설교자를 향해서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섬김은 잘 듣는 것입니다. 귀와 마음을 기울여 경청하고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진리가 자신의 마음과 삶에 대해 내리는 판단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힘입어서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움과 공평의 열매를 맺는 것이 성도인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이런 설교자들의 고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많은 종들을 포도원에 보내었지만 그 종들은 때리고 상하게 함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마태복음의 같은 기사에 보면 더 많은 종들이 모욕과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고난입니다. 진리는 그 진리를 사모하고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진리의 빛이지만 그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하지 않고 굽은 삶을 고집하는 사람에게 그 진리는 매우 미운 물건입니다. 그 진리는 모든 사람들을 행복으로 인도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진리가 선포되는 교회에서도 불행한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될 때 어떤 때는 우리 마음이 이 진리에 그렇게 끌려서 감격과 기쁨, 눈물과 위로, 평안이 밀려오는가 하면 어떤 때는 이 진리가 그렇게 귀찮고 지루하고 심지어는 마음속에 반감까지 불러일으키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진리가 날마다 바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바라보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가 늘 변하고 바뀌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침에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 햇살은 아름답기 짝이 없지만 눈병이 난 사람에게 그 빛살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고 식욕이 왕성할 때에는 그렇게 맛이 있던 음식도 병이 들고 입맛이 사라지게 되면 한 숟갈 먹는 것이 죽는 것처럼 고통스럽기도 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3년 전에 편도선 수술했던 기억이 잊어지지 않습니다. 양쪽의 편도선을 잘라내고 나니까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을 먹는 것입니다. 의사는 먹어야 회복이 된다고 많이 먹으라고 하는데 미음이라도 한 숟갈 먹으려면 자지러지듯이 고통을 해야 합니다. 음식이 들어가며 상처를 건드리며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달 만에 8kg이 빠졌습니다. 너무너무 힘이 듭니다. 그때에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갖다 놓아도 맛이 느껴지지 않고 저것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 얼마나 목에 고통을 줄까? 이것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는 항상 아름답고 좋은 것이지만 영혼과 마음이 병들어 있을 때 그 진리는 고통입니다. 진리는 변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 때에는 진리가 우리를 칭찬해주고 그 진리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을 때에는 진리는 우리에게 거치는 돌이 되고 찌르는 칼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살 때 자신도 그 진리에 부합되는 삶을 살려는 몸부림을 칠 때에는 큰 위로와 생명의 근원이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이 진리는 자신을 찌르는 칼이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런 점에서 타협을 해서는 안 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설교자는 요리사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유능하고 좋은 의사일수록 잠시 환자를 편하게 하는 일에 마음을 쓰는 대신 오래도록 건강해지는 비결을 강구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르기도 하고 찢기도 하고 끊어내기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항상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종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포도원을 지어놓고 울타리를 두르고 포도즙을 짜는 기계까지 설치해놓고 들어와 살기만 하면 되게 했을 때에 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고마움과 감사로 넘쳐났을 것이고 때가 되면 소득의 일부를 나에게 소작료로 내라고 할 때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며 우리에게 이렇게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신 자비로운 주인이신데 우리가 그 정도야 못 하겠습니까? 드려야지요. 아마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의 마음은 변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주인은 연락이 없고 이 땅이 자신의 땅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 종들이 와서 소출 얼마를 내 놓으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포도 수확을 한 것 일부를 주인에게 드리는 것이 아깝다기보다는 자기 땅인 줄 알고 살았는데 소출을 내놓으라고 하니 이 땅 주인이 우리가 아니라 따로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아들도 죽여 상속자가 없이 만들어 그 땅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종들을 때리고 심지어는 죽여 버린 이유는 단지 그 해에 포도 소출 중 일부를 주인에게 보따리 싸서 보내는 것이 아까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포도밭 전체를 자기가 차지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여러분, 설교자가 진리의 말씀을 설교할 때에 그 진리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봉사하라고 말할 때 봉사하지 않는 이유,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 힘쓰라고 권면할 때 성경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자체가 힘들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자기인데 하나님에 의해서도 간섭받기 싫다고 하는 이 포도원 악한 농부들의 마음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처음 포도원을 받았을 때의 마음이 아닌 것처럼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 마음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고 아무 희망도 없이 살던 인간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예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참회할 그때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 앞에 통째로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죄를 위해 고난 받고 죽으셨으니 이제는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이제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다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의와 공평의 열매를 맺으면서 사는 순종하는 삶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기쁨이었고 나같이 볼품없는 인간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큰 위로요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사랑이 식자 진리가 싫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이 종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능욕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김이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는 설교자가 진리를 전하고 있는 한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는 목회자에 대해서 열리고 사랑하는 마음과 비례합니다. 진리에 대한 참다운 경험이 없이도 목회자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되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은 별로 좋은 인간관계가 아닙니다. 그가 진리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선포하고 자기들에게만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증거하고 전파하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되기를 위해 비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진리를 통해 변화된 성도의 마음이요, 모습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목회자와 부딪히고 상처를 받고 다투고 미워하고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목회자들을 향한 원망과 미움이 가득 차 있는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가슴이 하나님의 진리와는 거리가 먼 가슴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더 할 수 없는 권위와 능력과 사랑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셨으니 세상의 어떤 설교자가 예수님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리는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에게는 그 진리가 말할 수 없는 생수요, 기쁨이지만 어둠 속에 있고 진리대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 진리가 정말 싫은 것입니다. 그 진리를 듣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하나님 거절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듣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기쁘게 경배하게 됩니다.
3-4년 전에 어떤 수녀님이 영혼이 곤고하고 괴로웠을 때 방송설교를 듣고 회복된 이야기
진리의 힘이 그렇게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설교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의 힘으로는 더듬어 알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매우 특별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보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보다 더 높은 학벌과 학위를 가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보다 더 인생의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만나지 못한 더 크신 하나님을 만났고 여러분들이 아직 알지 못한 더 깊은 진리를 깨달아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사람, 우리들은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크고 넓은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설교자입니다. 그의 인생의 가치는 얼마나 큰 교회를 목회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목회자들을 평가할 때 교인이 많이 있는 교회의 목회자를 더 많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교회의 목회자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생각을 갖게 되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오히려 설교자의 영광은 그런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의 영광과 권위는 그가 개인적으로 진리를 깊이 만나고 그 진리에 붙잡히고 진리에 목마르고 진리를 사랑하고 자신이 진리에 합치하게 살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진리에 합치하게 되기를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마음이 목회에 동기가 된 사람이 진정한 말씀의 종으로서의 가치입니다. 연구를 하고 탐구하는 것은 이런 진리의 사람이 되어가는 한 방편입니다.
여러분들도 진리를 찾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찾겠습니까? 매일 진리에 대해 묵상하지만 전적으로 여러분들이 깨달은 진리를 전문적으로 조직화하여 스스로 섭취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보내어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해서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서 성도들 사랑하기 때문에 목회한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가 가슴에 깊이 붙잡힌 것입니다.
신학교에 간 것을 하나님이 환경으로 응답해주셨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소명이라는 것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진리를 만나고 진리에 깊이 붙잡혀서 그 진리가 주는 기쁨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이런 진리의 아름다움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이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때 가슴이 떨려서 다른 일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 이것이 너무나 가슴에 넘치기 때문에 도저히 다른 일을 하면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이고 그 부르심이 설교자의 소명입니다. 사람들을 섬기는 중심이 진리를 통해서 사람들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끊임없이 진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성도들로 진리를 탐구하게 하고 그 진리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떨며 기뻐하고 자신이 그 진리에 합치한 삶을 살려고 부단히 그 자신과 씨름하고 설교자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죄성을 가지고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고 살아가면서도 생각 속에서, 행위 속에서 끊임없이 죄를 짓는 연약한 모든 성도들과 똑같은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끊임없이 이 진리대로 살기를 사모하고 거룩해서 때로는 실패한 뼈 절인 경험 때문에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고 때로는 승리하고 이긴 경험 때문에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고 자기의 온 몸을 교재로 삼아서 진리대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설교자의 삶이요, 목회자의 삶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교회는 항상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으로만 가득 차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기만 하다면 진리를 외치는 모든 설교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왕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항상 이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좋아했지만 지금은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그 진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는 항상 찌르는 칼이요, 귀찮은 존재인 것입니다. 어느 청교도의 글을 보니 하나님이 한 도시를 심판하실 때에는 일평생 진리를 전한 목회자들을 하나씩 불러 가신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라고 합니다.
한 18년 전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동의가 안 되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가르치는 것이잖아요?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어차피 죽으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죽어간 수많은 구약의 선지자들, 신약에서도 이 진리를 외치다가 죽어간 많은 설교자들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의 종들을 보내었는데 능욕을 하고 실컷 때렸습니다. 돌아오는데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보내지 말아야지요. 아니면 두 번째 보낼 때에는 군대들을 동원해서 함께 보내어 손만 대도 예전에 이 종들을 때렸던 놈들은 요절을 내고 감히 건드리지 못하도록 무사들을 호위하여 이 주인이 보내야 할 능력이 있었는데도 실컷 두들겨 맞고 오니 그 다음 사람 보내고 죽었는데 그 다음 사람 또 보내었습니다. 도대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실까? 이 종들은 평생 자기 소유도 없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인을 사랑해서 주인 곁에서 일평생 주인의 기쁨을 위해 봉사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왜 주인은 이 사람들을 이렇게 대접하는 것일까? 밤에 이 본문을 보면서 깊은 괴로움에 잠겼습니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깨닫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종들을 많이 사랑하시지만 방황하는 이 세상의 양떼들은 하나님이 더 많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종들이 끊임없이 죽어가면서도 종들이 보냄을 받았던 것은 그들을 죽게 내 버려두시는 하나님의 무자비함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돌이키지 않고 완고하게 있는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양떼들을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종들을 비명 속에 가게 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아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 사랑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성도가 고민을 털어놓고 기쁘게 돌아가면서 “목사님, 우리가 이렇게 괴롭고 힘들 때는 목사님에게 이야기하는데 목사님은 누구에게 가서 이야기를 합니까?” 할 사람이 없습니다. 설교자는 성도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다루십니다. 이 세상에 선악이 공존하는 동안에는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외로움과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연약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그를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다루십니다. 괴롭고 힘든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직접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와 위로 속에서 또 다시 거절 받는 진리를 선포할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행복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성도들이 제공해주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죠? 요한 사도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나에게 더 큰 기쁨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행복은 성도들이 그 진리를 통해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통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설교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때로는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진리의 빛들을 깨닫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일이 목회자의 할 일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정신과 영혼 속에 일어나서 값지긴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투쟁의 과정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의 가슴 속에 늘 진리가 울려 퍼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이 세상에서 안락하고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 도전과 견디기 힘든 괴롬이 있어서 이 세상에 정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주의 진리를 전하다 죽어간 많은 주인의 종들은 아마 하늘나라에서 더 큰 위로와 큰 상급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탐구하고 진리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치고 그 진리들을 가공해서 성도들에게 가르쳐주는 그 일에 온전하게 헌신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성심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 진리를 받고 그 진리 안에서 기뻐하고 변화되어 가는 것이 여러분들의 가장 큰 의무이요, 사명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이 성경에 보면 결국은 종들은 이렇게 외치다가 죽어 갔는데 뒤에 보니 예수님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무슨 뜻이냐면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지나가면 그 사람은 죽고 사라져도 설교는 남아서 많은 성도들의 가슴속에 울려 퍼지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들은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하나님께 요구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가서 모두 말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왜 그렇게 졸았는지 주님 앞에 변명해야 합니다. 진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울려 퍼졌는데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 진리를 그렇게 공정하고 분명하게 설교했는데도 여러분들이 마음을 바꾸고 진리의 빛 안에서 노력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명명백백하게 하나님 앞에 변명해야 합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왜 내가 나의 종을 변하여 방황하고 곤궁한 네 영혼을 위하여 진리를 전해 주었지만 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너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었지만 왜 받은 바 그 진리를 붙들고 살지 않았느냐고 물으실 때에 여러분들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럴 듯한 이유를 하나님 앞에 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진리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의롭고 올바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은 굽은 사랑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굽은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리를 깨닫는 사람에게 항상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14년을 설교했는데 앞으로 몇 년이나 설교를 더할 수 있을까? 살아있는 날 동안에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주님이 내게 준 드넓은 진리의 세계, 내가 본 그 아름다운 진리의 바다, 비할 수 없이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위엄과 큰 능력, 아름다운 긍휼 그것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 중에 아주 작은 일부분만 말하고 죽을 것이고 나머지는 제 가슴에 묻고 하나님께 갈 것입니다. 힘닿는 대로 이것들을 쏟아 놓고자 하지만 그러나 그 쏟아 놓은 것이 주님이 내게 주신 것 중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생명 있는 날 동안 목회자는 온 마음으로 진리를 흔들림 없이 정직하게 온 마음으로 전파하고 “네가 내 마음과 가슴에 있는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구나. 세상 사람들이 너를 모두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진리의 주인인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그 말을 들을 수 있게 사는 것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건강과 생명이 있는 날 동안에 내가 발견한 진리를 전하고 여러분들은 그 진리를 듣고 변화 받는 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 그것이 내가 좀 더 이 세상에 살아야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신자와 예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