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도를 땅 위에 알리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67:2-3)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은 하나님이 은혜를 당신의 자녀에게 베푸심으로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핵심은 바로 여호와의 얼굴빛을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얼굴은 하나님의 인격이고 빛은 그의 거룩과 영광의 광채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변함없는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만방에 펼쳐 온 세계를 하나님의 통치아래 살게 하는 것인데 그 위대한 비전이 제일먼저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변화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장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얼굴빛을 비쳐 주셔서 그 얼굴빛이 어떤 효과를 가져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입니다. ‘주의 도’는 ‘주의 구원’과 짝이고 그리고 땅 위에는 모든 나라에게와 짝을 이룹니다. 그리고 ‘알리소서’ 는 이 둘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주의 도는 무엇일까요? ‘데레크’인데 ‘길’입니다. 크고 작은 모든 길을 포함하지만 ‘오라크’ 라는 또다른 히브리 단어가 가리키는 길보다는 큰 길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 길을 히브리어 성경은 “땅 안에 알리소서” 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의 용례를 쭉 집어보면 이 ‘길’은 자연적인 명사로 사용되면 일반적인 길을 가리키지만 이것이 은유적으로 나타나면 이것은 ‘인간이 사는 삶의 방식, 삶의 도리’를 뜻합니다. 그러면 그 인간의 삶의 도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삶의 길이 있고 이방백성은 이방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길이 있습니다. 이방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길이 민족마다 나라마다 각기 다른데 그런 다른 길들을 걸어가는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따라 사는 길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간절히 비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백성들을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시는지 그 길을 땅(에레츠) 안에서 한정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땅입니다. 혹은 에레츠가 ‘검’ 이란 뜻도 되니까 ‘땅위에 사는 모든 인간들에게 주님의 도를 알리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도는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에서 우리들이 동북아 철학에서 도라고 할 때 그 도는 인간의 경험 세계를 초월해서 있는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원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 원리는 언제나 사람들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서 개인의 의식적인 삶과 인간을 초월하는 세계에까지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를 깨우친 사람은 삶의 방식이 남달라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남달라지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도를 깨우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도는 끝없이 넓고 끝없이 깊기 때문에 인간이 무엇을 깨달았다고 해도 완전한 것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그 심오한 도를 끊임없이 깨달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사물 모두를 움직이는 도가 그 사람의 언행심사 사람들과의 관계 심지어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하나, 식물까지도 돌보고 다루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도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도를 깨닫지 못하면 그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도는 성경에서는 결국 하나님의 초월적인 진리에 입각해서 인간에게 마땅히 걸어가고 인간에게 살아가야갈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 제시해주신 길이 인간에게 있고, 인간은 그 길을 인식하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진리를 터득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길이 너무나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남다른 삶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나의 삶이 무도한 삶이구나.’ 그리고 ‘나도 저런 도를 따라서 사는 것이 참 부럽다. 나도 저런 도를 따라 살수 있다면 행복 할 텐데.’ 라고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게 주의 도의 뜻입니다.
시인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주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춰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지금과는 현저하게 다르게 해 주시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렇게 달라진 우리의 인생의 길을 통해서 이 온 땅 거민들 온 땅의 인간들 위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주님이 보여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그리스인의 삶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그리고 왜 교인들이 우리가 가르치는 것과는 현저히 다른 삶을 살아갈까? 그리고 왜 우리의 많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의 삶은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답이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의 빛나는 영광과 거룩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모두 예외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심정은 무제한의 순종입니다. 그것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는 바로 이렇게 이 교인들에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고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주의 도를 따라 살게 되고 그리고 자신들만 이 길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를 따라서 사는 행복한 길을 걸어가도록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도 선교도 마찬가지로 자칫 잘못하면 사업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사업을 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는 도에 대한 깊은 감동이 선교사 속에 없으면 그가 하는 선교는 그냥 사업일 뿐입니다. 목회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여러분들이 말한 것처럼 ‘일을 열심히 하면서 내가 왜 일을 하고 있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등등의 고민은 결국 마음과 생각이 분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피하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넘치는 사랑, 인격적인 교제에서 오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의 빛. 이런 것들을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으면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여러분들이 경험하면서 그런 것들이 모든 사역의 동기들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비롯되도록 그렇게 깊이깊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시인은 그런 의미에서 주의 도를 땅위의 모든 만민들 속에 알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의 동기고 그담에 선교의 동기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넓게 보면 자신의 시대의 하나의 보편교회에 그리고 좁게 보면 자신이 목양하는 교회위에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베풀어주셔서 그 속에서 성도들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영광과 거룩함의 찬란한 빛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빛이 자신의 마음에 가득 채워서 다른 세상에 있는 빛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을 본받는 이 세상의 영광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런 영광을 끊임없이 갈망합니다. 그래서 더 높아지고자 하고 더 많이 갖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받고 싶어 하고 그러한 욕망들이 결국은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또 다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갈망이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길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 이 길을 걸어갈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는 열망이 그게 전도고 선교고 영혼을 돌보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의 문제를 나의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여기게 만들어 주는 그 힘이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참된 주체를 갖게 만들지만 나와 너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체의 의식을 갖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 없는 것이 내가 결핍한 것이고, 저 사람에게 넘치는 것이 내게 넘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아픔이 사랑이 있으면 자신의 아픔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의 도는 인간의 삶의 도리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이 온 땅의 거민들 속에서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바로 그런 길을 따라서 살도록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의 의지 자체가 지식과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 하나 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과 짝을 이루면서 발전을 합니다. 그래서 “주의 도는 주의 구원으로 땅 안에서는”이 “모든 나라 안에서” 라고 발전을 합니다. 점진적인 데코법이라고 합니다. 그럼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주의 구원이 어떤 점에서 주의 도와 짝을 이루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신약시대에 보는 것 같은 풍부한 영적인 구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구속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아직까지 계시가 거기에까지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주의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야샤’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럼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서 예수를 비롯해서 여호수아 호세아 등등의 모든 말들이 파생되어 나옵니다.
구약에서 기본적으로 ‘구원’은 철저하게 언약관계를 상정합니다. 하나님이 물론 세계 모든 만민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요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세계적 구원에 대한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놓고 보면 이 67편이 어느 시기에 써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보면 이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주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을 모든 어려움에서 구출하고 그들을 선택하시고 구출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주의 구원 그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애굽의 치하에서 아주 비참한 종노릇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셨는지를 생각하면 구원에 대한 그림이 그려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나오는 모든 구원의 개념은 그 그림에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으로 돌아가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등등 믿음의 조상들에게서도 구원의 그림자들이 안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대의 백성들이 우리를 구원하신 여호와라고 할 때 그 구원의 그림은 항상 출애굽의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그림이 그려집니까? 우선 노예생활이 운명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개선될 여지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 필연적인 종살이였는데 어느 신도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시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잊혀 지지 않는 위대한 사건은 열 번의 커다란 재앙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이것을 느끼기 전에 먼저 느낀 것은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구나.’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애굽에 살면서 이미 태양신이나 바위산 물고기나 이런 신들에 대한 풍부한 관념들을 이미 애굽사람과 함께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런 모든 잡신적인 생각들을 부순 것이 하나님만이 온 땅과 만물위에 유일하신 신인데 애굽에서 우리들이 생각하고 애굽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구원하면 바로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독점적으로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 능력으로 자신들을 건져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수리가 새끼를 업어 나른 것같이 하나님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누구도 헤치지 못 하게끔 하나님이 가나안까지 막아주셨습니다. 그것이 열왕기상에 있는 그림입니다.
그 절정을 이루는 것은 홍해사건입니다. 홍해가 갈라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는 구원될 길이 보이지 않는데 전대미문의 기적이 일어나면서 홍해가 갈라져 좌위에 벽처럼 물이서고 그 사이 마른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넙니다. 그리고 애굽의 병거들이 따라올 때 물이 다시 합쳐지면서 미리암의 북소리에 맞춰서 장엄한 이스라엘의 성가대의 찬양이 울려 퍼지는데 출애굽 15장에 나오는 구원의 노래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라고 할 때 그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입니다. 하나님이 홀로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시고 큰 능력으로 자기가 선택한 백성들을 신실한 약속의 언약을 따라서 그들을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주의 구원이라고 하는 개념은 구원이라는 이야기를 시편에서 할 때 이 시를 낭송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그렸던 그림은 바로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위대한 능력과 영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서 우리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셔서 출애굽 시키시고 마지막에 그 출애굽의 마지막 열매가 가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 두 개는 구분되기도 하지만 분리될 수도 없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는 것으로 완성입니다. 그렇게 해서 상상할 수 없는 권능으로 종살이하던 사람들을 가나안땅에 한복판에 열강과 어깨를 겨누는 한 나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러한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알리소서’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다트’인데, 두 구절이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소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린다’고 하는 말은 지난시간에 설교한 것과 같이 경험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단지 ‘땅에 있는 거민들에게 통고하시고 거민에 있는 백성들에게 알리소서.’ 하는 그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나면 ‘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나라구나.’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독특하게 명령하시는 또 다른 종루의 삶의 방식이 있구나.’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이방인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지식이 그 사람들 속에 역사해서 그들도 구원에 이르기에 갈망하는 위대한 선교적인 비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지파에 구분도 나오지 않고 이스라엘에 매인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거나 이스라엘을 적수로 보면서 이야기하는 노래만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 주님의 구원을 하나님은 구원을 통해서 당신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그 구원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엄위와 그리고 영광을 경험했다면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에게 와서 이 구원이 하나의 그림자였고 이것이 지시했던 실체가 어떤 것이었는지 신약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을 경험한 모든 신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신 영광을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를 통해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와 사망가운데서 건져내셔서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충만한 구속의 은혜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면서 살게 하실 때 그 지성을 압도하는 그 찬란한 영광의 빛에 대한 압도하는 영향력은 구약의 사람들이 홍해가 찢어지는 것을 보면서 느꼈던 것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이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주여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해 주시고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그 도를 하나님이 이 온 땅에 알리시고 또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의 방법을 온 땅에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그들이 그것을 경험하고 깨달은 후에는 그들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것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이런 비전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마음속에 그러한 불타는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소소한 행복에만 만족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삶으로 자기 자신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열정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열정은 바로 이렇게 주님을 만나는 데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물과 같습니다. 그 우물에 물이 항상 가득 넘칠 때 동네 아낙들과 어린아이들 아저씨들이 모두 와서 그 물을 떠서 그 물을 가지고 가서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목욕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밥을 해먹고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야채를 씻어서 반찬도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김치를 담그고 어떤 사람은 그 물을 이용해서 밀가루로 빵을 만들기도 합니다. 결국은 그렇게 사람들 하나하나 이 왕국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야할 삶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런 삶을 살게끔 추동 하는 그 모든 힘이 결국은 교회의 주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삶에 있어서 부흥을 구해야할 일입니다. 부흥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과 5절에 후렴구가 두 번 반복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됩니다. 앞에 나오는 ‘나라’는 ‘고임’이라는 단어이고 뒤에 나오는 ‘민족’은 ‘얌’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위에 나오는 ‘고임’은 말하자면 체제로서의 국가개념이라면 밑에 있는 단어는 씨족들을 확장한 족속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 안에도 여러 민족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구약에서 나라 그러면 ‘고임’인데 ‘높아지다.’라고 하는 ‘가바’에서 온 명사입니다. 기본적으로 ‘나라’는 이미 교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해서 그렇게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애굽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나라들이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그 구원이 모든 나라에 알게 하셔서 모든 나라가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태도를 갖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발전된 선교 비전이 3절에 나오는데 그것은 “찬송하게 하시며” “찬송하게 하시옵소서.”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라는 신이 저렇게 위대한 일을 해 냈다더라. 두렵구나!’ ‘우리가 만약에 저 여호와가 함께하는 이스라엘과 싸운다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그 이스라엘을 통해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 하나님이 자기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서 결국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위대한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해달라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가지고 있었던 선교적인 비전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사람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구약 속에서 높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주의 율법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할 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흘러서 그 말씀이 온 땅을 두루 적시면서 온 나라를 예루살렘화한 그래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영광을 높여드려야 할 그 전범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발견하고 온 땅이 예루살렘 같아지는 것이 그들의 선교적인 이상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온 땅과 만민을 향해 비쳐져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민족들이 복수로 나오는데 헤아릴 수 없는 유명한 나라의 민족들로부터 시작해서 진짜 몇 명되지 않는 아주 소수민족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주님을 찬송하게하고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찬송하게 반복해서 두 번을 이야기하니까 이 시인의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래처럼 두 번 후렴구로 3절과 5절에서 반복되면서 운을 마치는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교회에 은혜를 주시고 당신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함과 영광의 빛을 비쳐주시지 않는다면 교회는 결코 그 교회에게 준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사명은 지식의 사명입니다. 알게 하는 사명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고통은 결국은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 풍부한 지식을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온 땅의 만민들에게 알리는데 알리는 방식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먼저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 은혜가 넘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과 만민에게 전해지게 하시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씀사역 우리의 목회사역은 결국 한 곳에서 우리가 그 일을 하지만 한곳에서 한 그 일이 흐르고 넘쳐져 온 땅과 만민들 위에 펼쳐져서 이 복음이 팽만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선교적인 이상입니다. 그래서 또 그 말씀을 듣고 변화된 나라와 민족들이 우리처럼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의 얼굴빛을 보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도 똑같이 주의 도를 온 땅에 그리고 주의 구원을 온 나라들 위에 알려주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에 동참하면서 세계는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선교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