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주심과 경외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67:6-7)
오늘 본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이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요소는 ‘땅이 소산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범한 표현은 아닙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를 경고하면서 주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 있을 때도 똑같은 경고를 하였습니다. “너희들이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기고 불순종하여 범죄 하게 되면 땅이 소산을 내지 않을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흉년이 드는 것을 구약시대처럼 그런 정도 수준에서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가 해석해야 되겠느냐는 것은 좀 별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서 하나님이 아직 신학적으로 미성숙한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는 가장 좋은 방법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는 전쟁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왕 자신을 치셔서 병들거나 죽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바로 땅이 소산을 내지 아니하므로 기근을 겪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이 땅은 ‘에레츠’라는 히브리단어입니다. 아마 구약에 나오는 모든 단어들 가운데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에레츠’라는 단어의 전망에서 보면 그것은 하늘과 대조되는 땅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과 땅위에 있는 것, 땅을 토대로 생명을 이어가는 모든 것들이 One Body, 즉 하나의 몸입니다. 그야말로 신토불이의 사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땅의 운명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땅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맨 처음 인간이 타락할 때부터 아주 명백하였습니다. 아담이 범죄 하였을 때 땅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이 두신 생명나무 실과를 가지고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그 생명나무 실과 역시 하나님의 분부에 따라 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땅 자체에게 그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은 아담의 도덕적인 책임에 대해서 나무 그 자신이 그것을 공감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과 나무를 땅과 더불어서 책임을 인간에게 묻고 그 결과인 고통에 모두 동참하도록 하나님이 규정하신 것은 창조부터 신토불이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심판의 결과를 보면 땅과 사람이 그리고 땅위에 있는 모든 만물이 One Body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과 다른 차원의 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으니까 그 저주가 만약에 절대적인 저주였다면 땅도 완전히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땅은 어떠한 소산을 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은총을 남겨두셔서 땅이 소산을 냅니다. 그 소산의 원리는 넓게 보면 하나님이 이방의 민족의 땅에 풍년이 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만 이것은 자연법칙이 기본적으로 적용되기도 하지만 적당한 시기에 비를 내리고 좋은 종자를 때 맞춰 심고, 백성들이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특히 좋은 토질에서 그렇게 농사를 지을 때 풍성한 곡식이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아닌 나라에도 하나님이 흉년이 들게 하십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먼 나라로 갔는데 그곳에 흉년이 들었던 것 같은 것들은 자연적인 현상만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라들을 심판하실 때 흔히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그 사건이 항상 중요한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대하 7장에서도 솔로몬성전 낙성식 때 이미 예고되었던 것처럼 이미 솔로몬도 주님께 분부를 받아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악을 행하고 여호와를 버리고 멀리 떠나면 그러면 하나님이 어떠한 징벌을 내리실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끄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중요한 것은 바로 흉년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땅이 소산을 내지 아니하고 깜부기가 와서 먹어버리거나 혹은 메뚜기 떼가 와서 먹어버리는 그런 재앙이 예고되는 것입니다. 그런 재앙들이 실제로 요엘에서도 다시 예고되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땅이 소산을 내어주었다는 것은 그렇게 평범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농사에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혹시 어려운 날에 농산물이 무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손해가 나도 직불보조금을 주면서 농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국방과 같이 매우 중요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적으로 본다면 지금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쌀 1가마니의 가격이 190,000원 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국제가격으로 보면 훨씬 더 좋은 쌀의 가격이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벼농사 짓는 논을 다 갈아엎어서 다른 산업을 하고 사다먹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쌀을 수입하는 나라와 외교적이고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문제가 얽히고 전 세계 곡물의 거의 80% 이상을 업자들이 장악하고 있는데 이들이 농간을 부리기 시작하면 곡물가격은 미친 듯이 폭등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석유가 그렇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될 것입니다. 석유는 줄일 수 있지만 농산물은 사람들이 줄여서 소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땅이 소산을 제대로 내어준다는 것 그것이 이방사람들에게도 하늘의 복이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하는, 아니면 하나님이 인내하고 계시다는, 하나님이 신실하다고 하는 매우 중요한 증표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것들이 과거로 나오는데 이것의 시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언적인 과거로써 그때 일어날 일을 그 당시에 이동한 사람으로서 이미 땅이 소산을 낸 것을 보는 관점으로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어 동사가 현재, 미래, 과거가 없고 완결과 미완결만 있기 때문에 이런 문장 구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땅의 소산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을 주시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을 주시리니’가 6절과 7절에서 중첩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땅의 소산을 내어주신 것 자체가 복이지만 그렇게 사시사철과 절기를 따라서 주님이 풍성한 곡식을 열매 맺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목을 누리고 샬롬을 누리고 있는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부으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얼굴의 경험과 그 영광과 거룩함의 빛의 경험이 교회에 부어집니다. 그 부어진 것이 이제 넘쳐서 그것이 여러 나라에게 우물이 쏟아져서 넘치듯이 흘러갑니다. 그렇게 된 사람들이 결국은 주의 도가 무엇인지 주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리고 그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그렇게 찬송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 특징이 세 가지가 나오는데 기쁨, 말할 수 없는 기쁨, 정의,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확장된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을 구분 없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으로 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그 땅의 소산을 내어주게 하셨는데 그런 땅의 소산을 풍부하게 내게 해주신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샬롬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럴 경우에는 그 자체가 이미 받고 있는 복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받게 될 복에 대한 하나의 싸인(sign)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오랫동안 가물었던 하늘을 열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제때에 내리셔서 이렇게 많은 곡식들을 풍성하게 거두게 하셨으니 이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그리고 열방의 많은 나라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복을 받습니다.’ ‘그렇게 복을 받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그 속에서 다시 복을 주시리라는 이야기는 그 복은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이 누릴 복의 일부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살만해진 것 그것이 결코 복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더 많은 은혜와 복을 주셔서 그를 행복하고 복되게 하실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넘치는 행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복은 끝이 없습니다. 때로는 지금 우리가 필요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통합적인 개념입니다.
이야기를 하면 좀 복잡해지겠지만 간단하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고 순수한 본체이시지만 당신 자신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서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보이는 물적인 세계에서까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령한 천상의 세계와 맞짝을 이루는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셨고 지상의 세계는 인간의 영혼 이외에 모두 물질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통로 삼아서 우리의 지성과 의지 안에 하나님을 알고 행할 수 있도록 하시고, 인간은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아니하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주님의 은혜의 인격적 도움으로써 이 세계를 형성하고 구성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전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발전된 모습들은 눈으로 볼 수 있게끔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허접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는데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놀랍게 새사람이 되었을 때 그가 변화된 사람임은 그가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행위는 대부분 관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적이든 사람과 관계적이든 관계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관계가 변화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변화되었을 때 관계가 변화되고 변화된 모습이 관계 속에 나타나고 변화된 이 관계의 태도가 또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면서 결국은 그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의 방법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이미 처음부터 여기서 처음이라는 것은 물질세계를 만들 때부터 당신 자신이 영의 세계에서만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물질로 이루어진 이 세계 안에서도 나타나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복은 영혼과 물질사이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복을 가리키는 ‘베라카’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큰 ‘베라카’의 복은 절대로 ‘아쉐르’의 복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1절에서 이야기하는 주님의 은혜, 여호와의 얼굴빛이 ‘아쉐르’라고 한다면 이 ‘아쉐르’가 넘쳐나면서 이 ‘아쉐르’를 품은 ‘베라카’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방사람들이 받는 복을 ‘아쉐르’라고 부르지는 않고 ‘베라카’라고 부릅니다. 그런 ‘베라카’는 ‘아쉐르’를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보디발의 집이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모든 단어는 ‘베라카’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베라카는 애굽사람인 보디발의 집에는 ‘베라카’겠지만 그 ‘베라카’가 가능하게 했던 것은 요셉 안에 있던 ‘아쉐르’였습니다. 그 ‘아쉐르’가 ‘베라카’의 복으로 나타나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그 ‘베라카’의 복을 통해서 심지어 바로 조차도 너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그 ‘베라카’의 복을 통해서 ‘아쉐르’의 복의 근원으로 추론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선교라고 할 때 그것은 복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부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복이 되고, 모든 복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물질의 복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껍질이고 추적해 들어가는 계단일 뿐이고 마지막에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부모로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더라.’ ‘워낙 재능이 있어서 엄청난 돈을 긁어모았다더라.’ 그런 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베라카’의 복들을 통해서 들어가 보았더니 그런 ‘베라카’의 복 한복판에 ‘아쉐르’의 복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샬롬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그때에 그들은 복의 가장자리에서 곡괭이로 그 복을 캐기를 원하지 않고 그 복의 광구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에 의한 선교입니다. 그래서 다마스 윌라드 라는 사람이 자신의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사명은 행복한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이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 때 그 자체가 하나의 웅장한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고든콘웰을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매우 큰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인천에서 오던 차인지 가던 차인지 프라이드 차 한 대가 까불고 이러 저리 운전하다가 그 프라이드를 피하기 위해서 차들이 부딪히면서 여러 명이 죽었습니다. 불타고 그랬습니다. 11중 추돌사고가 났습니다. 거기에서 도저히 회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일 정도로 부상을 입고 죽음으로 가던 사람 중의 한사람이 고든콘웰신학교 교수였습니다. 거기 지체들의 이야기가 그 사랑하는 남편이 제자들과 함께 가서 사고를 당했는데 그리고 날아든 비보는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6개월이 넘게 지났을 때였는데 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6개월 그 어간 사이에 갔습니다. 3달에서 6개월 사이인가? 약간 안 되었을 때인가? 그때 남편이 비행기에 실려서 고든콘웰에 와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몸 전체를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고 식물인간 상태에서 와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고든콘웰에 있는 모든 지체들이 너무 충격과 감동을 받았던 것이 남편이 거의 치명적인 사고를 당해서 식물인간처럼 되었는데 그때 보여준 그 부인의 눈물 한 방울 없는 아주 침착한 태도 오히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격려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큰 뜻이 있을 것이다. 동요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잃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많은 것을 얻겠지만 그것이 그 사람에게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의 마지막 비전을 이야기합니다.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이제 욕심이 더 생겼습니다. 앞에서는 나라와 민족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게 해달라고 간구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땅의 끝이 그렇게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시가 쓰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우주관을 생각해야지만 이 구절이 잘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주관은 코페르니쿠스 이후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우주관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땅이 이렇게 평평하다고 보았고 바닷물이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이 위에는 지붕이 잘 두드려서 금속을 편 것과 같은 상태로 지붕이 높이 매달려 있는데 그 지붕이 땅을 덮고 있으면서 또 하늘과 땅 사이에는 틈이 있어서 넘치는 물들이 쟁반처럼 밖으로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해와 달은 하나님이 공중으로 펼쳐진 그 평평한 판 그것을 ‘나키아’ 라고 불렀는데 ‘나키아’는 ‘낙카’라는 동사에서 온 피동명사입니다. ‘두드리다’ 입니다. 그래서 쇠 같은 것을 한없이 두드려서 그 쇠를 펼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말로 ‘Sky’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펼치시고 그 ‘나카아’에 하나님이 매다십니다. 달과 별들 이 모든 것들을 매다시고 그 매단 것들을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Heaven은 또 다른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주관입니다. 그러면 땅 끝은 무엇입니까? 물이 흘러갈 수 있는 마지막 끝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땅 끝을 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 끝에서 사람들이 살리는 없습니다. 땅 끝은 모두 다 물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 끝이라는 말이 ‘캐츠’라는 단어인데 끝이라는 말은 물리적으로 진짜 끝을 의미하기도 하고 아니면 자기의 상상 속에서 ‘더 이상은 아닌’ ‘성질이 다른’ 혹은 ‘없는’ 그 마지막을 끝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결국 이 끝은 이렇게 물리적으로 물이 쏟아져 내리는 쟁반 같은 땅위의 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사는 그 모든 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후자입니다. 관심이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마지막지점 거기가 끝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온 유다와 땅 끝까지 이르러’ 라고 할 때 그 개념이 이런 구약적인 끝의 개념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입니다.’ 그 땅에 사람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쳐서 열방과 수많은 나라들을 변화시키고 그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들어온 나라들이 기쁨과 정의와 통치를 즐거워하도록 만들고 그 일들이 마지막에 이 땅에 맺힌 하나님의 저주가 풀려서 그래서 땅의 소산들이 가득하게 되고 그것을 즐거워하게 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런 복이 아직까지도 이 여호와의 도와 구원의 소식이 미치지 않은 인간이 사는 마지막 땅 끝에까지 전해져서 온 세상이 예루살렘 같은 복을 누리는 그것이 바로 구약의 시인이 그리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망이었고 신약의 교회는 이런 전망을 기독론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 은혜 안에서 주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뵈옵고 그래서 인생의 도가 달라지고 구원 받은 사람들이 되고 그래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믿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 이 도와 구원이 전해지고 이것 때문에 모든 민족들이 주님을 찬양하게 되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과 모든 열방이 기쁨과 정의와 통치 받는 삶을 누리게 되고 이것이 더 멀리 퍼져서 저주를 받고 열매를 결실치 못했던 땅들이 결실을 거두고 열매를 맺고 풍성한 소출로 그 영혼이 잘된 것처럼 그들의 삶에도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그렇게 되면서 하나님께 돌아간 모든 백성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는 그 소식이 땅 끝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져서 그래서 온 땅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여호와의 복에 참여하고 영원무궁토록 그의 기쁨과 그의 정의를 실현하며 그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나라가 되는 것 그 일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데이비드 웰즈 박사의 두 번의 편지를 받았는데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나는 전 세계를 다니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 중에는 탁월한 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쓰던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도 제 마음에는 그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우리만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 비전을 주셔서 우리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의 일생은, 성도의 일생은 어때야 하겠습니까? 평범하게 살다가 죽기에는 아까운 인생입니다. 어떻게 얻은 구원입니까? 다시 태어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의식으로 태어나겠지만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비전을 품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