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특징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시 67:4)
이어서 4절에서는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추어졌을 때 넘치는 은혜와 도를 땅의 모든 거민들에게,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십니다. 그러면서 4절이 등장하는데 4절의 내용은 바로 그 때에 그런 통치를 받은 백성들에게, 주의 도를 따른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렸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을 때 그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넘치는 신령한 은혜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의 질을 나타냅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외적인 틀을 넘어서 우물이 넘쳐흐르는 것처럼, 온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흐를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기쁨은 원래 하나님의 교회에 넘치도록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이제는 그 기쁨이 도가 전해지고 구원이 전해져서 하나님의 품을 돌아오게 된 수많은 민족과 열방들에게 다시 그 기쁨이 넘쳐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참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 때문에만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창조된 사람들이 그 하나님 바깥에서 기쁨을 얻으려는 데서 모든 죄악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저는 젊었을 때는 취미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취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도 쓸데가 정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이런 기계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든지, 옷에는 관심이 있다고 해도 기껏해야 티셔츠정도였고 바지는 치수가 너무 커서 사러가기도 싫었습니다. 사이즈가 없다고도 하고 마네킹이 입은 것은 너무 예쁜데 내가 입으면 아니고, 웃옷은 나를 많이 가려주니까 좀 나았을 정도이지 크게 몰두한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번 돈으로 책을 샀습니다. 나중에 이쪽으로 이사 온 후에 몇 년 지나고 나서는 교회에서 책을 사주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도 교회에서 사주게 되었으니 더더욱 돈을 쓸 일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기뻐하는 어떤 일에 꽂히면 거기에 돈이 들어갑니다. 여자들이 미용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돈이 그쪽으로 갑니다. 레저에 대해서 눈을 뜨면 등산 장비부터 시작해서 스틱 하나에 100만원씩 하는 것도 삽니다. 그런 것에 돈을 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 안에서 합당한 즐거움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이 이야기했듯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정말 하나님이 이런 맛을 내실 수도 있구나! 정말 감사하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모두 미식가이고 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 어쩌다가 가서 먹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서 그런 파인 다이닝에 갈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분수에 넘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교인을 가르칠 때 너무 음울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면 안 됩니다. 초창기에는 저에게 그런 성향이 상당 부분 있었습니다. 청교도에 빠지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만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즐거워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커다란 질서 안에서 벗어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지나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박물관장이 와서 큐레이션을 했습니다. 제 짐작으로 65세는 되셨는데 너무 고우신 분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부자이고 손에는 자동차 키를 들고 있는데 벤츠입니다. 그 정도의 돈이 있으니까 큰 미술관을 지으면서 지대를 높이기 위해서 쏟아 부은 흙만 트럭 1600대 분량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각품 하나에 아파트 한 채씩 하는 것을 사서 모으고 전시공간을 꾸민 것입니다. 가끔 TV에서 보면 나이가 몇 살이라고 나오는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예쁜 여자가 나오는데 물론 태어나기도 예쁘게 태어났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미친 듯이 일주일 동안 새벽기도를 나오고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자기 얼굴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너는 왜 게을러서 그렇게 못하느냐?”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물질도 함께 흐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에 넘쳐서 사람들에게 선교되어서 그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그렇게 더 확장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되겠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넘치는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그때 나타난 인격적인 표징 중에 굉장히 중요한 것은 성령이 충만했을 때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을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속의 이치를 깨달은 후에 찾아오는 것은 진짜 구원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찾아오는 결과는 넘치는 기쁨입니다. 로이든 존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Unspeakable joy”,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너희가 즐거워하나니” 했던 것처럼, 말로 다 할 수 없는 넘치는 기쁨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회의 열매입니다.
내가 목양하는 지체들에게 기쁨이 넘치지 않는 전도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명절 끝 날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리라” 여기서 ‘배’는 진짜 ‘배’가 아니라 ‘스프링크나’, ‘영혼의 좌소’입니다.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지난번에 빌립보서 1장을 하면서 스프링크나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거기에서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느끼는 기쁨은 스프링크나에서 나오는 기쁨은 아닙니다. 물론 칼빈의 경우에는 그것을 깊이 적용하면서 “이런 맛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그리고 인간에게 이런 지혜를 주셔서 다양한 맛의 음식을 혼합하고 시간의 순서를 따라 만들고 관리하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맛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가!” 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찬송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그 아름다우심을 찬송하고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호수에서 어우러지는 한 폭의 풍경이 물 위에 비치는 아름다움을 보면서 얼마나 하나님은 아름다우신지, 인간이 예술을 통해서 찾아낼 수 있는 기쁨의 요소는 얼마나 방대한지를 생각하면서 그 감각의 즐거움을 스프링크나까지 가져가는 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영적인 깊이입니다. 그것은 지성의 깊이를 통해 전달되는 신앙의 깊이입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아름다움이 아직도 여전히 이 세계 속에, 인간의 본성 안에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은혜를 받을 때만 목이 메는 것이 아닙니다.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호수에 비친 한 그루의 소나무를 보면서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모든 사물들에 대한 감각과 이 모든 인간의 오성들이 전체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면서 그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물처럼 쏟아 부어 주시니까 그 영적인 물이 흘러넘치면서 이방에게까지 흘러가서 그들이 그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속에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경험하는 것이 기쁨이고 그 기쁨은 기본적으로 주님의 얼굴빛을 뵈옵는 신령함에서 시작됩니다. 시작된 그것이 넘쳐흐르면서 자신이 접하는 이 모든 세계와 사실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샘에서 넘쳐흐르는 아름다움과 기쁨이 모든 만물들을 적시면서 그 모든 것이 존재함으로써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특히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 전서, 후서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넘치는 고난을 받는 성도들이 충만한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소망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을 충만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것도 사랑입니다. 그런 충만함을 느끼면서 신령한 하나님의 기쁨이 넘쳐나게 될 때 그 기쁨은 자신의 삶의 사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해석하는 원리가 됩니다. 신앙이 없을 때는 조금 어려움이 생기면 “아, 인생이 더럽게 꼬이네. 저 마누라 때문이야. 저놈의 남편 때문이야.” 생각을 하는데, 주님을 깊이 만나고 신령한 기쁨을 깨닫고 보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지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을 열어주시고 나를 넘치도록 사랑하신다는 것이 믿어지면서 그 기쁨이 삶에 대한 해석을 주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져서 기쁜 사람이 사물을 해석하는 것과 슬프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해석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고통당한 사람에게는 노래가 쓰디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너무 괴로운 사람에 노래가 쓰디쓴 것입니다. “마음이 즐거운 사람은 날마다 잔치하느니라” 기쁜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날마다 잔치합니다.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의 통치를 경험하고 그 은혜의 통치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할 때 눈물과 탄식, 고통과 아픔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령한 고통은 신령한 기쁨과 공존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비밀입니다. 기도할 때는 가슴 아프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충만한 기쁨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음울한 마음을 목회하지 말고 기쁨으로 목회해야 합니다. 넘치는 기쁨의 삶에서, 그 기쁨이 먹고 입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에서 오는 기쁨이 아닌 넘치는 기쁨을 경험하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의 한 국면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이것은 ‘샤파트’, ‘미슈파트’와 관련됩니다.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어서 재판하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정의(justice)’를 정의하기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원제 정해주신 몫으로 돌려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의는 누구를 쳐서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자를 제 자리에 돌려놓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돌려놓고 싶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이 사람이 고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을 억누르고 지배하지만 자기 자신도 할당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는 위에서 짓밟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이 짓밟힘을 당하며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의는 압제당하는 사람에게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압제하는 사람에게도 자기 위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성경적으로 정의와 사랑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정의는 사랑에 의해서 완성되고 정의의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전심으로 사랑을 추구하게 되면 정의의 개념을 무시할 수 없고 정의의 개념을 올바르게 찾으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그 정의의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두 번째 국면입니다. 그 정의는 자신 안에서 실현됩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회심시키셔서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돌아오게 할 때는 제일 먼저 세워지는 것은 놀라운 질서입니다. 질서가 세워집니다. 그런 질서가 세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회심이 아닙니다.
회심은 그 질서를 이탈해서 살던 자신에 대한 뼈저린 후회이고, 회심은 그런 질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질서에 어긋났던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그 참된 질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무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적, 철학적인 회심입니다. 그렇게 돌아갑니다. 돌아간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이 원래 있던 곳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끔 여러분이 깨닫는다고 할 때 사람들이 귀담아 듣습니다. “내가 정말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할 때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왜? 그런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의 어떤 부분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그것은 완전히 제가 잘못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흔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백번 일어난다고 해도 말로 하는 것이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게 하는 것이 정의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자기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도를 알릴 때 백성에게 나타나는 것은 기쁨과 정의입니다. 그 기쁨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영광의 빛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자신들의 교회를 통해서 넘쳐 흘러가서 사람들에게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이 즐거워하고 기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회를 볼 때 깊게 낙담하게 하는 현실들을 봅니다.
대한항공 김창진 사무장에게 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1심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변호비용은 피고인인 부담한다고 했는데 대충 들어간 돈이 3000만원이라고 합니다. 죽도록 고통당하고 공황장애까지 겪고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고 죽을 결심까지 하면서 3년이 넘도록 세월이 지나고 사무장에서 팀원으로 강등되었는데 배상금액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마음속에서 분노합니다. 사람들 속에 어떤 공평을 반영하는 판결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번에 JTBC 채널에서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방영중입니다. 8회까지 했는데 끝까지 볼 작정입니다. 사회고발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서울대 의예과 입학을 조건으로 하고 1년 과외비가 아파트 한 채 값입니다. 대사를 종합해볼 때 12억에서 15억 정도입니다. 고 1때부터 과외를 받으면 세 채의 값이 됩니다. 36억에서 40억 정도 되는 과외비를 주고 합격하면 돈을 받지만 못 들어가면 환불해 주는 것입니다. 그 선생님은 여태까지 기록이 100%입니다.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보고 학생을 받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맥을 동원해서 학적부를 다 조작합니다. 원하는 조직을 동원해서 학생장을 시키기도 하고 뭐든지 다 합니다. 그렇게 내신도 조작을 합니다.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깊이 공감합니다. 100% 사실은 아니겠지만 상당 부분 사실일 것입니다. 강남쪽에서 입시를 담당하는 사람이 그 각본을 수정하며 도운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보면서 우리는 부와 권력이 세습되는 것을 봅니다. 사법시험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 저는 분노합니다. 거의 절망적인 수준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너무 가슴 아픈 것입니다. 자신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것의 특징이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이 이 세상의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하고 마음이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마음이 청결해지는 것입니다. 불공평하고 굽은 세상을 보면서 그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지 않고 가슴 아프지 않은 것은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진실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나야 합니다. 어떻게 사회가 이럴 수가 있을까, 이것이 나라인가! 하는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아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지 않은 백성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 갈망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 ‘공의’”입니다. 이처럼 주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이 흘러넘쳐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열매들을 바라보고 누리는 기쁨과 일치를 이루며 나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땅 위에 나라들을 다스릴 것임이니이다”에서 ‘나라들’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모든 나라들입니다. 히브리어로 ‘고임’인데, 복수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방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그 나라들을 하나님이 다스릴 것을 말합니다. ‘통치’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통치가 아닙니다. “너희 까불면 죽여버린다!” 하고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보다 넘치는 증오로 사람들을 난도질해서 죽이면 사람들은 무서워서 죄를 못 지을 것입니다. 그것은 ‘공포’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그 나라가 진정으로 좋은 나라임을 입증할 수가 없습니다. 왕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한 놈들을 잡아 죽여서 사람들이 법을 어기면 안 되겠다는 공포심을 갖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좋은 나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이 ‘통치’가 아닙니다. 심판은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 공정한 형벌을 내리고 선을 행한 사람들에게 공정한 상을 주는 것이 공평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데 통치는 그보다 훨씬 더 detail한 개념입니다. 언젠가 북한에서 죄를 지으면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고사포 총을 쏴서 사형시키는 것을 목격한 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사람이 위에서부터 액체가 되어서 주르륵 흘러내린답니다. 그런 것을 가족들이 보게 하고 모든 백성들이 보는 곳에서 할 때 사람들에게 임하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북한에서는 통치가 곧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들에게 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이 나라에서 죽는 것이구나!” 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나라가 발전할까?”, “이 나라가 제일 사람다운 나라가 되게 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이런 것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왕의 통치입니다. 왕이 통치하는 그 통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왕의 마음을 가지고 이 나라 전체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조화를 찾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들이 온 백성들의 뼛속 깊숙이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개인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분명히 나는 김남준에 불과한데 그리스도 교회의 한 몸이 되어서 오우진이 겪는 고통 때문에 내가 아파하면서 새벽에 울고, 박재헌에게 일어난 기쁜 일 때문에 내가 함께 즐거워하고, 이 성도가 겪고 있는 괴로움 때문에 내가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가 된 삶입니다. 나라와 백성이 그런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 하나하나가 보이지 않는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왕이신 그분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이 말한 대로 두려워 떨면서 죄를 안 지으려고 벌벌 떠는 마음과 함께 아주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이 보이는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창의성이라는 창작성의 은사적으로 많이 주신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넘칠 때, 꼭 하고자 하는 의욕이 충만할 때 모든 인간은 창의적인 도전을 합니다. 왜? 현실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침체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미끄러진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도대체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끊임없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데 설악산 오색그린야드에서 교역자회의를 했을 때였습니다. “자네 의견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저는 의견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해서 새벽 3시까지 혼났습니다. “너는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냐? 어떻게 자기와 관련된 이 중차대한 일에 대해서 의견이 없느냐? 그것은 영혼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의견이 없을 수가 있느냐? 내가 원하는 답을 토해내라는 것이 아니라 네 문제이니까 네 문제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해보라고 묻는데 의견이 없다고 하느냐?” 하고 새벽 3시까지 혼났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더 웃기는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잊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의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교구 사역과 부서 사역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 지체들을 통치하고 계신다고 볼 때 그 통치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어두운 요소들이 그것에 대해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까?” 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그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누군가가 울어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가 사랑이라는 맥락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진리에 대해서 어두울까? 정말 가슴이 아프다. 저렇게 오래 세월을 신앙생활 했는데 저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빛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 쓰라린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회의 함정은 자신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서 자기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 통치를 받게 하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받아야 할 절실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 통치에 복종하는 즐거움이 없으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고 눈물겨워 하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목회자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면 그가 하고 있는 일은 허위입니다. 허위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집어치우고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면서 그 통치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미안합니다. “정말 저 교역자는 여성 4교구 팀장들 같으면 진짜 좋겠다.” 거기에 눈물이 있습니다. 전도사님 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눈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무감이지만 자기 신앙에서 나오는 의무감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자기 자신이 받음으로써 그 통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면서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미래에 투사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얼굴빛을 보게 해 주시고 그렇게 해서 주님의 도를 땅의 거민 안에, 구원을 온 나라에 알려주십시오. 그렇게 할 때, 온 백성이 그 도와 구원 안에 들어온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모든 민족들 속에 정의를 이루실 것이고 또 땅 위에 있는 모든 나라를 다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이것을 한편으로는 현재적으로 자신이 누리고 그 안에서 그것이 미래에 투사되어서 그 전망이 미래에 실현될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먼 나라에서 그 족속들이 주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도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넘치는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회의 비전입니다.
지난 겨울에 여기에서 들었던 말씀이 “목회가 무엇인가?”라면 여기에서는 “그 목회가 실현될 때 어떠한 비전이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넘어서 수많은 나라와 민족을 넘어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루어지는 비전입니다. 그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선교를 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질서를 교회 속에서 보고 경험하고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비전을 가지고 그 질서에 현저하게 어긋나는 곳에 가서 그 질서를 되돌려 놓으면서 일평생을 수고하며 사는 것입니다. 목회는 원래 그런 것입니다.
수많은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목회의 환경을 통해서 만족을 찾고 싶어 합니다. 교회가 목회자를 이해해주고 후원해주고 밀어주는 것 등등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이 땅에서 영원히 외로운 존재입니다. 이것을 자신의 운명처럼 생각하면서 가슴에 새기고 성도들과 함께 은혜의 세계 안에서 기뻐하고 그 나라가 실현되는 기쁨을 자기 안에서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이 똑같이 찬송합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3절과 5절에서 나오는 것은 삽입구라고 보면 됩니다. 시인의 가슴 속에 늘 있던 기도제목이 이 기도를 드리면 “툭!”하고 삽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다가, “오! 주님만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는 것처럼 평소에 진심으로 있던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에 대한 갈망이 후렴어구로 나온 것입니다. 의미는 3절에 나오는 것과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 그 비전에 사람이 사로잡혀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쁨, 정의, 통치, 이것이 우리의 목회를 통해서 구현되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의 코멘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인이 기쁨을 찾을 때 그 기쁨을 찾는 것만큼 영혼이 병든 상태를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고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은 하나님과 동떨어져서 그 자체가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먹는 기쁨, 마시는 즐거움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 따로 존재하는 기쁨의 질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우리 안에 있는 지혜의 빛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