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교역자 스터디)
(201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1강 2010.3.9 교역자스터디 1
1-2강 2010.3.20 교역자스터디 31
2-1강 2010.3.27 교역자스터디 68
2-2강 2010.4.3 교역자스터디 91
3강 2010.4.17 교역자스터디 125
4-1강 2010.4.24 교역자스터디 132
4-2강 2010.5.1 교역자스터디 155
5-1강 2010.5.15 교역자스터디 174
5-2강 2010.5.29 교역자스터디 182
6강 2010.6.11 교역자스터디 192
1-1강
질문 : 사랑이라는 용어가 세 개가 나오는데, 희랍어에는 5개 정도 나오는데, 아가페(agape), 까리따스(caritas), 딜리게레(diligere). 전체 아모르(amor)라는 단어를 쓰셨고, 그것에 대한 반응이 까리따스(caritas) 인데, 딜리게르와 까리따스(caritas), 까리따스(caritas)는 분명히 대상들 인간들 사이에서 까리따스(caritas)를 분명히 적용하는데, 용어들의 정확한 용매가 무엇인지 궁금하더라고요.
답
아모르(amor), 아가페(agape), 딜리게레(diligere) 이렇게 있었죠. 좋은 질문이에요. 아모르는 가장 넓은 형태의 사랑을 총체적으로 가리켜요. 그 다음에 딜리게레(diligere)는 인간이 인격체를 사랑하는 것을 가리켜요. 그 다음에 아가페(agape)는 하나님의 사랑이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페(agape)이고, 그래서 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agape)의 사랑은 이렇게 삼위일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도록 이렇게 엑스트라라고 하죠. 외부 지향적이라고 번역하면 좋은데, 외부 지향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외부 지향적으로 흘러나와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사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 때에는 조건이 있는데 이게 뭐냐하면 영혼을 가진 피조물이에요. 인간이죠. 그 다음에 까리따스(caritas)는 여기에 있는 인간이 아가페(agape)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나님과 그 다음에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되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까리따스(caritas)에요. 까리따스(caritas)는 이제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랑하는 것인데,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후행적 사랑이야. 후행적 사랑. 그래서 이것은 아가페(agape)는 하나님 안에서 자아 생산적 사랑인데, 자아 생산적 사랑인데 비해서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은 후행적 사랑이야.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이 나오는 거야. 여기서 희랍어 성경에 보면 사실은 아가파오라고 하잖아요. 아가파오라는 말이 까리따스(caritas)라는 이런 것들이 없어.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형성해오는가 하면 까리따스(caritas)라는 이것이 결국 어떤 식으로 형성되었는가 하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서도 나오지만, 중세에 형성된 사랑의 개념이에요. 그래서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작품속에서도 아가페(agape)도 까리따스(caritas)라 쓰고, 그 다음에 까리따스(caritas)도 까리따스(caritas)라 쓰고 이렇게 섞여서 사용이 돼요. 그래서 도덕적 통치인가 맨 앞에 보면, 그 하나님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영원한 사랑이여 할 때, ‘까리따스(caritas) 아르떼르 나이’ 라고 나오거든, 하나님의 사랑이 ‘아르데르 나’ 라고 나오거든,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까르따스라 묘사한다 이거죠. 그런데 후에 이러한 것들을 구분을 짓게 돼요. 이러한 것들을 왜 차용을 했는가 하면 굉장히 설명하기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 안에서 이 사랑이 결국은 인간이 선행하는,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데, 이 선행하는 하나님의 아가페(agape)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게 선행이에요. 선행했기 때문에 인간이 이제 이 사람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랑을 가지고, 그 다음에 이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사랑을 하는데, 이게 하나님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여기에 있는 또 다른 타인들이에요. 타인들, 이러한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사랑하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후행적인 사랑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 까리따스(caritas)의 대상이 인간뿐이냐. 인간뿐이냐 아니면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들 까지도 포함하는것이냐는 질문이 나오는데, 그냥 보편적인 주장은 오늘 새벽에 설교했듯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과 그 다음에 자연 만물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각각 디맨션 이 다르듯이 이 이러한 까르따스의 사랑을 갖게 될 때에 이모든 자연 피조물들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영혼을 가진 사람에 대한 사랑과 동률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그런 자비를 입는다 보는 거죠. 그런 정도로 봐요. 결국 후행하는 사랑이 돼요. 그게 무엇인가 하면 만약에 인간이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나름대로의 에로스의 사랑이 있잖아요. 이게 에로틱, 에로영화 그런거 할 때 에로가 아니라, 원래 여기에는 그러한 뜻이 없어요. 인간대 인간의 사랑이에요. 인 대 인의 사랑. 그러면 이게 결국은 타락한 인간이라도 이러한 에로스가 있는데 이 까르따스는 이러한 에로스와 아가페(agape)를 이렇게 지평통합을 이루는 개념이에요. 그러면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잘 들어봐요. 이렇게 되는 거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하나님을 장소적으로 한정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잘 봐요. 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하나님 홀로 이렇게 계셨을 때에는 그러면 공간도 없고 시간도 없잖아요. 영원속이잖아. 영원속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는데, 창조하시는 세계, 창조하시는 세계를 창조하시는데, 이것 자체가 결국은 무슨 세계인가 하면 감각 세계잖아. 감각 세계. 감각적인 세계잖아. 그러면 이러한 감각적인 세계가 지상 세계이고, 또 창조하셨는데 또 하나의 세계가 영적 세계잖아. 영적 세계. 그러면 잘봐요. 여기에 하나님의 존재가 있다고 할 때, 그러면 이 하나님이 계시는 이 영원과 이러한 차원과 그 다음에 영적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있는 세계의 디맨션 차원이 똑같을 수가 없잖아. 만약에 똑같지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여기에 천상의 세계에 만들어진 영적인 존재, 천사와 같은 존재들 사이에 구별이 없어지잖아.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 존재론적인 문제인데, 여기에 여기에 무엇 무엇이 있다. 이러한 것들까지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지마. 머리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이해만 하면 되고, 무엇 무엇이 있다고 하잖아. 그때 여기에 칼, 그 다음에 공기, 그 다음에 사랑, 이러한 주어가 들어간다고 치자 이거야. 그럴 때에 칼이 있다할 때에 공간과, 공기가 있다고 할 때에 생각하는 공간과 사랑이 있다고 생각할 때의 그 사랑이 있는 장소성, 이 모든 것들은 각각 다른 개념으로 다가오잖아. 이해 안돼? 이해 되죠?
그 다음에 그러면 여기를 C라고 본다 이거야. 그러면 결국은 이 세계도 창조할 때 이러한 감각적인 우리가 이야기하는 지금 크기, 부피,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 하지만, 여기에 영적 존재가 있다고 하고 그 영적 존재는 피조물로서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면 결국은 무엇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있는 장소성, 장소성을 생각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있다고 할 때 하는 장소성과 다른 장소성이죠. 그러면 이제 이것은 너무 시간이 없으니까 이것은 빼놓을게. A와 B는 빼놓고 C만 가지고 이야기할게. 우리 세계만 가지고. 그러면 결국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안한 담론 공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나오는 거야. 공간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는 흔히 공간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공간이 이렇게 비어 있는 것이고 그 속에다가 하나님께서 공간을 만들어 놓고, 만물들을 창조한 것으로 생각되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고, 공간 그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데, 공간 그 자체가 하나님이 피조하신 것들로 꽉 차있기 때문에 그것이 감각적 특성을 지니기 위해서 공간속에 존재하는 거야.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조하신 것들로 꽉 차여져 있는 것이 공간이 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달도 매달고, 별도 매달고, 그 다음에 칼도 만드시고 인간도 만드시고 이렇게 만드신 거지. 이렇게 A와 B사이에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도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이 각각 다른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준으로 볼 때 여기가 비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거야. 이 전체가 하나님의 창조물로 꽉 찼고, 이 꽉 찬 창조물을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의 감각, 이것을 대상일반이라 하는데 크기, 색깔, 길이 등등 그러한 감각에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인간의 감각에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요소를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것을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하신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들 그 자체를 공간이라 부른다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이렇게 공간을 만드시고 공간 안에 있는 이러한 것들이 존재할 때, 이것은 B의 존재방식과도 다르고, A의 존재방식과도 다른 거예요.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돼잖아요. 좋은 얘기 생각이 났어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봅시다. 이렇게. 여기에서 이렇게 한 줄이 빛이 들어오잖아. 이게 프리즘이야. 이렇게 빛이 들어오면 여기서는 빛 자체가 보이지 않잖아. 색깔도 없고 빛깔도 없고 크기, 모양, 길이가 없으니까. 그런데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빛이 분광되잖아요. 이렇게. 이렇게 빛이 분광되면서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이렇게 빛이 분광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해도 좋고,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좋겠지. 하나님의 속성이 이 피조세계를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속성이 다른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가시적인 것은 관찰자가 둘인데, 뭐냐하면 피조물들 자신이 관찰자이고, 그 보다 더 우등하게는 하나님 자신이 관찰자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세계를 통해서, 이 두 피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 당신 자신을 보시며 즐거워 하는 거라 이거야.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공간이 만들어지고, 이러한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하나님의 속성이 전달되는데 그 전달되는 방식이 뭐냐하면 관계에요. 관계 맺으심. 이것에 의해서 전달이 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언약관계 속으로 사람을 부르신 것은 당신 자신을 프리즘처럼 싹 통과해서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의 성품을 아주 찬란하게 보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 이거야. 물론 언약관계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인간들이나 모든 사물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시지만, 그러나 그렇게 인간을 통해서 그러한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시는 거지. 그런데 특별히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구속의 계획을 이루시고자 하실 때에 그 타락한 인간의 구원계획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신적 작정이라고 하는 Divine Decree. 이것은 더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프리즘 역할을 하는 거야. 그 찬란한 빛이 아까 이야기 했듯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뿜어내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여준다 이거야. 그러면 더 연장해요. 이렇게 해서 여기에 있는 인간들이 좀더 확장할게. 여기에 있는 이러한 인간들이 이러한 구원하는 빛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게 돼. 이렇게 알게 돼. 이렇게 이 사람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인간도 알게 되고, 저 인간도 알게 되고, 그 다음에 이 사람도 알게 되요. 이렇게 알게 될 때에 이 알게 되는 아가페(agape) 사랑에, 아가페(agape) 사랑을 받는 거 아니야, 그지. 이 사랑을 받으면 이 아가페(agape) 사랑은 반드시 후행하는 사랑을 뒤따르게 만들어요.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없는 거야. 이것이 첫 번째 회심이라 보는 거지. 왜냐하면 중생 그 자체가 두 가지 강력한 변화를 동반한다고 했죠. 시험좀 봅시다. 중생이 무엇을 동반한다고 했지? 두 개를, 두 가지 변화가 뭐야, 중생이 도입하는 두 가지 변화가 첫째 무슨 변화? 그러니까 어떻게 하냐 하면 암기 안돼있는 지식은 끈 떨어진 가방이야.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항상 시간을 내서 암기를 해야 해. 뭐야 이게. 중생의 커다란 변화가 뭐야. 무슨론적 변화, 무슨론적 변화. 그렇게 두 개가 도입된다고 수없이 이야기 했잖아. 뭐야? 목사님 뭐야? 내가 아주 그냥 지루할 정도로 반복했어. 존재론적 변화, 어 이제 나오네. 그 다음이 뭐야, 이신론적 변화.. 강윤석 목사가 대답했는데,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대답해봐. 여기. 답을 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다시 답을 안할꺼 아니야. 그러니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존재론적 변화가 뭐야. 중생과 함께 도입되는 존재론적 변화가 뭐야.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주도면밀하게 하나를 배우면 그렇게 의식없이 배운 9개보다 주도면밀하게 배운 한가지가 훨씬 더 나은 거야. 그러니까 돌이킴에서도 다 나오고, 수없이 설교한 것인데 존재론적 변화는 성향의 변화야. 왜냐하면 존재의 본질이 성향이기 때문에, 그러면 성향은 어떤 성향의 변화라는 거야? 순종은 사랑의 결과니까, 사랑이라는 성향이 생겨나니까 새롭게 생겨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방향을 바꾸는 거야.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사랑하던 인간이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이 심겨지는 거야. 이것을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피직컬 오퍼레이션 이렇게도 이야기하고, 물리적 작용이 아니라 힘적 작용이야. 힘적 작용. 영혼에 하나님이,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던 인간을 막 설득해 가지고 스스로 ‘야, 이래서 안되겠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돌이킨다고 보는 것은 펠라기우스나, 소키누스나 아니면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의 생각이에요. 인간에게는 자기를 돌이킬 수 있다는 능력이 없다고 보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던 인간을 하나님이 힘으로 이렇게 붙들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심어버리는 거야. 그게 중생의 가장 변화, 존재론적인 변화야. 그 다음에 이신론적 변화는 뭐냐 하면, 이것은 신미와 관계 있는 것인데, 이신론적 변화가 뭐라고 했어? 뭐라고?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되고 외워야돼. 그래서 임목사는 교역자 전체를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방안을 살펴봐. 성도들은 물어보면 탁탁 대답하던데, 어떻게 할려고 해. 이게 뭐냐하면 아름다움과 관계되는 거야. 그래서 뭔가 하면 얘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중생과 함께 도입된 영혼의 기능의 변화로 말미암아서 보게 되는거야. 이 아름다움을 신미라고 이야기 하잖아.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만 꼼꼼히 들으면서 메모를 해도 좋단말야. 그래서 해서 노트를 하나 해서 쭉 정리를 해놔. 그러면 언제든지 그것을 가르칠 수 있잖아. 그래서 이 중요한 개념들을 머릿속에 암기해가지고 있을 때, 저쪽 설교할 때도 왔다갔다 하면서 왔다갔다 하면서 설교가 펼쳐지고, 가르침이 펼쳐지는 거야. 그래서 인식론적 변화가 일어나. 그래서 신미를 보게 되는 거야.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면, 관상한다는 말을 쓰기도 하고 잘 안 쓰는데, 하나님의 신미를 말하자면 알 수 있는 그러한 인식론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피조 모든 만물속에 묻어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신미를 반영하고 있겠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있을 것 아니야, 왜냐하면 여기서도 교회가 이미타치오,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이라며. 그렇잖아. 진짜 용갈이는 못 가져도 용갈이 만든 인형을 가졌을 때 아이들이 그것을 보면서 판타치에서 본 용갈이를 생각을 하면서 기뻐하고 좋아하듯이 아바타를 보고 좋아하듯이 그러한 닮음이 있을거 아니야. 닮음. 그지? 그러면 그것들을 얘전에는 그것을 못 보던 사람들이 이렇게 됨으로써 이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단 말이야. 물론 얘전에도 희미하게는 있지. 그런데 이렇게 잘 봐요. 이렇게 자연 세계 속에 나와있는 이떠한 아름다움은 본거야. 그러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산에 올라가서 “야, 진짜 좋다” 심지어 술 한잔 먹으면 “조물주가 참 허다하시구나” 이러한 생각을 하잖아. 그런데 문제는 궁극적인 원천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거야. 알 수가 없는 거야. 이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지. 있다고 보잖아. 원천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보는 거야. 그런데 이것을 귀납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연역해 나오는 거야. 그래서 이 하나님을 만나고 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니까 그것들이 이렇게 흘러나와서 이렇게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이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런데 이 미의 본질이 질서란 말이야. 질서. 그래서 이것을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거야. 자 그러면 어떻게 돼? 이렇게 되면 아가페(agape)의 사랑을 받았을 때, 그때에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데, 피조물 가운데 가장 이 신미를 가장 아주 탁월하게 본뜨고 있는게 있어.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란 말이야. 인간 중에서도 인간 영혼안에 있는 ‘이마고 데이’(Imago Dei)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야.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에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닮아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에요. 감각적인 모든 것들보다도 천상과 지상을 통틀어서 하나님을 가장 닮은 이미타치오(Imitatio), 모상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사람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거야. 이러한 이유로. 이러한 이유로 발견하게 될 때에 결국 뭐냐 하면 이 사람이 이 사람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되면서 선행하는 아가페(agape)의 사랑에 대해서 후행적으로 반응을 하게 되는 까르따스(caritas)의 사랑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게 결국은 자기를 사랑해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온안에 있는 이마고 데이를 보면서 사랑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이 있는데 율법이 결국은 요체가 뭡니까 그랬더니 하나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다 이거야. 이 자체가 뭐냐 하면 아가페(agape)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까르따스가 포괄해야 할 대상들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되는 거야. 이 안에 원수들도 들어있고, 친구들도 있고,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들어 있는 거야. 그러면 이렇게 사랑하게 될 때, 잘 들어봐요. 이렇게 사랑하게 되죠.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온전히 사랑을 받을 때에 이 사람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게 되는 거야. 쉽게 이야기 하면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포기하는 거야. 그것은 결국 행복해 질 수 없어.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아가페(agape)의 사랑이 반응으로서의 까르따스의 사랑을 통해서 바깥으로 분출해 나가는데 최대의 방해가 되는 것이 결국은 자기애 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거야. 물론 이것은 부당한 자기애. 부당한 자기애 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거야. 결국 참다운 자기애는 휴머니즘과 기독교의 관계와 똑같이 참다운 자기애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때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거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참으로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며, 자기를 진정으로 미워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올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될 때 이러한 연결들이 이루어지게 되잖아. 그럴 때 결국은 수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그려 놓으면, 사람이 공간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와서 그래서 사람들 속에 회귀하여서 그렇게 흐르고 흘러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거야. 이것이 이 개념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설명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회귀적 사랑이다라는 의미에요. 전 우주를 휘돌아서 하나님 당신자신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때에 이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이렇게 살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자원들을 이 사람에게 주시잖아. 영적인 차원에서도 자원을 주시고, 육적인 차원에서도 자원을 주시잖아. 그러면 이러한 자원들이 사랑이 이렇게 흘러가게 되면, 받은 바 자원 그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가서 그 사람들의 죄와 결국은 인간의 불행과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라고 하는 그것 자체가 자원의 부족 때문에 오는 거잖아. 그것들을 펼쳐 나가는 역할을 하는데, 그게 이 두 자원 모두가 같이 그러한 일들을 한다 이거야. 우리는 이제 한쪽으로만 치우치기 쉽잖아. 그래서 흘러나가면서 자기를 최종적 소비의 터미널로 삼지 않는거야.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그렇게 됨으로써 레카프탈레치오 교리에서 이야기 했던 인류 전체를 하나님이 맨 처음에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라고 하는 고백을 가능하게 했던 그러한 사랑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일체된 한 몸으로서의 인류를 창조하셨던 계획이 이러한 식으로 구속사 안에서 성취되는 거라는 말이야. 그래서 큰 얼개를 가지고 보면 별거 아니에요. 그런데 얼개가 안들어오면 뜬금없어 보일 수 있는 거죠.
자, 질문있어요?
질문: 결국에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창조했는데, 창조한 인간이 타락해서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셔서 모든 것들이 더 확장되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이제 전체적인 것은 다 이해가 되었는데, 거기에서의 그 구속을 이루는데, 구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어떻게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분출하는데, 회복된 인간으로 분출하는데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답
지난번에도 다 다뤘지. 그 문제는 잘 체계적으로 잘 다룬 것이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라고 하는 사경회때 한 거예요.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이것이 사실은 지금 한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인간에게 베풀어 줘도, 인간이 그것에 대해서 반응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에 이렇게 서 계신데, 십자가라고 보면 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 그 다음에 죄에 대하여 차마 보지 못하는 공의, 이것을 합하여 우리는 거룩함이라 이야기 할 수 있잖아. 하나님의 이 거룩함이 인간에게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렇게 제시된 것이 바로 'incanation'이야.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그리스도가 보여주시는 핵심적인 것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대게 몇 가지로 이야기하지? 그리스도의 성육신한 이유를 이야기 해봐요.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죠? 수 없이 이야기 했는데, 첫째,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거야.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지 않으면 죽으실 수 없기 때문이지, 그것이 첫 번째야. 두 번째가 뭐지? 모본을 위해서 오신 거지. 수없이 이야기 나온 거잖아. 모본을 보이기 위해서 예수님이 내려오신 거잖아.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목적으로까지 이야기하기엔 희미하긴 하지만, 그 성육신하신 결과로 말미암아 인성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에 대해서 누리게 된 중요한 지식적인 유익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배웠다고 했지? 순종을 배웠단 말이야. 이것을 설명하면서 여러분들이 어려웠다고 이야기하는데, 지난번에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있잖아. 그것을 꼼꼼히 공부를 해야 돼. 그래서 진짜 열심히 공부해야 해. 다 만들어서 줬는데, 여러분들 하기 싫어도 여러분들 양떼들 위해서 해야지. 어떻게 할려고 그래?
순종을 이야기 했는데, 순종을 배웠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지난번에도 이야기 했는데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나오고, 배웠다고 하는 것은 무지하거나 결함이 있었다거나 순종안하려 했는데 점점 순종하게 됐다고 하는 그런 뜻이라기 보다, 실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신성을 인성 밑에 감추셨기 때문에 그렇게보면 예수님도 모르는 것이 있으셨잖아. 도성인신한 기간동안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렇게 될 때에 결국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서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도 새로운 사실로 체득해 나아가셨던 거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인간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체율이 훨씬 더 깊어졌다고 보는 거야. 긍휼이 깊어졌다고 보는 거야. 대게의 경우 두 가지를 보는 거죠. 그래서 가장 중심이 십자가 사건이야. 인간에 여기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두 가지 요소가 나온다 했잖아.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는 두 가지 요소, 그래서 여기서 경건이 생긴다고 했잖아. ‘삐에따스’가. 그 경건이 생겨나게 하는 그 요소가 뭐라는 거야. 이것을 <경건의 비밀 그리스도>에서 다뤘잖아.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이거야. 그래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이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삐에따스(pietas)의 시초라 이거야. 경건. 이 경건이 심겨진다는 말과, 신애가 심겨진다는 말과, 아까 이야기한 존재론적인 변화와 다 같은 이야기란 말이야. 이게 경건이 바로 이거야.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그것을 이렇게 보여주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죽으셔서 결국은 지금 설명하려고 하는 영생의 관계로 우리를 도입하시고, 모본을 보이시는데 결국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찬란하게 보이도록 인간에게 현시되었다 보는 거죠. 그래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구약은 음성만 나오는 거였는데, 신약에서 칼라 영화가 나오면서 그 밑에 자막까지 달리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도성인신이다 말했잖아. 그래서 인간은 이 모든 것을 뛰어 넘어서 다른 사물들을 일반 섭리하시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봐야 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서 봐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을 핑계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죄인이라는 감각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다. 이렇게 설명했잖아. 그래서 하나 하나의 시리즈들이 벽돌처럼 다 연결이 되니까 공부를 해. 아무래도 안되겠다. 대책을 세워야지.
그 다음에 이야기 할게. 그러면 이 설명은 끝났고, 여기에서 이제 영생의 개념이 나와요. 이것도 사실은 설명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것은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하겠습니다.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디를 보냐 하면, 제일 먼저 인간으로서의 신자의 삶 제목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신자의 삶, 그 다음에 인간의 의무를 기억함, 알아감, 사랑함, 그 다음에 이렇게 나오죠. 그래서 이제 26페이지로 넘어가게 되면, 우리가 분열된 복음주의가 아니라 26페이지로 가보면 이 목사 읽어봐.
26페이지
인간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즐거워해야 할 대상과 그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대상을 나뉘는 것이지, 인간이 참으로 즐거워해야 할 대상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사물들이 아니라, 영원히 있으며 불변하며 완전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 이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원래는 없었으나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죽고 소멸하여 걸국 무無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며 그것을 즐거워하고자 하는 인간은 항상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상실하게 되므로 끊임없는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들은 즐거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용해야 할 대상이어야 합니다. 혹시 사랑하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즐거워하는 데 기여하는 한도 안에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의 질서가 전복된 것은 악입니다.
즐거원하다 그러잖아요. 이것을 향유라는 말로 써요. 그런데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진정으로 최종적으로 즐거움을 누린다고 하는데, 향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쓰는 향유와 다른 거예요. 향유의 개념을 누가 이야기 해볼 수 있는 사람, 사람이 어떤 것을 사랑할 때, 이것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을 얻기 위한 또 다른 목적일 때, 요 B는 프로이의 대상이 되죠. 이 위기는 더 이상 없어. 그럴 때 프로이 한다고 이야기 하고, 사랑하는 것, 누리는 것, 요거는 프로이. 그리고 이거는 뭐냐 하면 모텐디라고 이야기 해. 사용한다. 내가 늘 쓰던 말이 그거잖아. 형제가 자매에게, 야 나 너 너무 사랑해, 정말? , 너무 사랑해, 죽을 때까지 사랑할꺼야, 왜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니네 아버지가 부자잖아. 라고 하면 안된다고 몇 번 설명했잖아. 그러면 이 자매가 여기에 있는 거고, 얘네 아버지의 돈이 여기에 있는 거야. 엄격하게 따지면 돈도 여기에 있는 거지, 궁극적으로. 이렇게 계속 올라가면 마지막에는 결국 자기 Sefl 의 문제로 가는 거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자기의 모든 죄가 결국은 아모르수이 자기 사랑으로 보는 거야. 그렇게 보게 되는 거잖아.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즐거워한다, 누린다, 향유한다 같은 말인데, 이것은 뭐냐하면 그것을 사랑하는 더 이상의 이유가 없는 최종적인 사랑. 그것을 누림(frui)이라 이야기하고, 그것이 잘들어요.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가치의 질서와 그 다음에 사랑 질서가 인간에게 있어서 일치를 이루게 될 때에 그때 인간이 행복해 지게 되는거라 이거야. 그런데 대부분 어떻게 돼? 가치가 점복되잖아. 그래서 어떻게 돼? 여기에 인간이 있어. 여기에서 어떠한 이런 물질을 사랑한다고 치자 이거야. 그래서 굉장히 강력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 사랑이라는 특성 자체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거야. 그지? 그런데 이것을 T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없다가 존재하게 된 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변해. 결국은 다시 없는 것으로 사라지는 거야. 결국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러면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거란 말이야. 이때 인간은 결국 사랑하는 이것이 진정으로 유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현재 있다고 하더라도 이 개념에서 있는데, 계속해서 이것이 변전하게 되는 거야. 변전하게 돼서 이것이 무로 돌아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거지. 시작이 무였고, 마지막 돌아가는 것도 무인 것, 결국은 지금 있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 돌아가는 것이 무인 것은 성경의 판단으로 보면 무라 이거야. 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허무요, 악이 되는 거란 말이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그런 말을 하죠.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것이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이 아닌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마지막 그때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뭐야? 하나님이잖아. 하나님은 영원히 계속 계셨고, 언제든지 유가 아니신적이 없는 거야. 항상 유이신 분이에요. 그런데 사랑 자체가 이렇게 영원의 특성이에요. 영원 그 자체가 사랑이에요. 그 문제를 어디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는가 보면, <도덕적 통치>에서 보면, 영원과 사랑이라는 문제를 시간과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다루었잖아.
공부해야지. 공부해서 남줘? 여러분 나중에 목회 할텐데, 확실하게 아는 것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야. 그래서 강단에 올라가서 어떠한 설명을 했을 때, 설교할 내용만 아는 것은 아는게 아니야. 항상 이렇게 되어야 해. 이게 설교해야 될 내용이에요. 그때에 이것이 확신이 있고, 힘찰 수 있는거예요. 그렇게 해야지.
이렇게 영원속에 있는 것이 사랑인데, 결국 이러한 사랑이 어울리는 것은 신, 하나님 밖에 없는 거지. 이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지복이시잖아.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들만이 이 복에 참여하고 복의 효과를 누리게 되는 거지. 이 복은 세상의 복과는 달라서 많이 누릴 때 후유증이 생긴다든지, 문제가 생겨나는 그런게 아니라 이거야. 그래서 인간을 너무 사랑하는 것도 안 좋은 거지. 사랑하는 여자하고 다 죽어가는데 결혼해서, 영화배우와 결혼했잖아. 그것이 아름다워 보이긴 하지만, 그것도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허무한거야. 인간에게 그렇게 메인 사랑이 되어서는 안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자기 엄마가 죽었을 때 통탄하면서 ‘인간의 일이 이가지도 나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심히 못마땅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통탄하는 장면이 나오잖아.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된다 이거지.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된단 말이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를 ‘사랑의 신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고, 사실은 이게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해해야 할 근본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느 거예요.
그러면 이제 영생이란, 그래서 결국은 사랑해야 할 사물, 사물이라는 것은 심지어 하나님까지 다 들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생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존재에 대한 대치어로 보면 돼. 그러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처음 만들어 질 때부터 하나님 의존적으로 만들어 졌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인간이 육체는 땅으로부터 자원을 공급 받고, 그것도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인데, 그것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내려주시는 거야. 그런데 이제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자원에 의해, 하늘 자원에 의해서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건데, 이것은 간적접인 방식으로 주워지고, 섭리 속에서. 이것들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주워지는 거예요. 하늘에서 식탁이 메달려서 내려오는 것은 아니잖아. 가서 벌어서 사먹어야 하고, 구제해서 먹어야 되고 그러는 것이니까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게 육적인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방법인데, 이것은 직접 하나님이 주시는 거란 말이야. 사람을 통해 주신다고 할 때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거라 이거야. Spiritual Blessing 이라고 이야기 하잖아.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하늘 자원이 끊어졌던 인간이 이것을 다시 회복하는 사건이 이게 결국은 말하자면, 구원을 얻는 사건이라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영생의 개념을 여기에서 몇 가지로 설명하는데, 고유한 의미에서는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키는 거고, 그렇게 보는데, 사실은 그렇게 보면 버림받은 사람도 영원히 사는 거잖아. 존재 자체가 소멸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보는 거고. 그런데 이것이 이제 3가지로 내가 이야기 했는데, 둘이네. 적용한 의미는 결국은 삼위와의 교통을 통한 거지.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 영적 교통을 통해서 이제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인간에게 이 영원을 하나님이 심어주신 거죠. 이것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는 거죠. 진리를 통해서, 진리를 사용해서 은혜로 나타나는 거죠.
여기에서 계속해서 솟아나는 것이 뭐냐하면 사랑이야. 사랑. 이 사랑이 결국은 까르따스(caritas)의 사랑이야. 까르따스(caritas)의 사랑이 바로 은혜의 결과야. 이 사랑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은혜의 정의가 뭐야. 은혜라 그럴 때 신학적으로 몇 카테고리가 있다고 했어? 카테고리가 뭐야? 첫째는 뭐냐하면, 값없이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호의를 가리켜서 은혜라 이야기했잖아. 객관적인 개념이지.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맞춰서, 구원의 방도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 자체를 은혜라고 부르는 거야. 마지막 세 번째가 뭐냐하면, 주관적인 의미에서 부르는 게 있는데, 그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정의가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의무를 실행하도록 하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란 말이야. 하나님 사랑의 감화가 지향하는 바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지향하는 점을 놓쳐 버리면 이게 자기 만족적 신앙이 되어 버리는 거야.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립보서 1장 31절에서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은 결국 뭐야? 의무로 돌아가게 하는 거야. 의무. 하나님의 사랑을 의무와 항상 밀접하게 연관시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인간안에 경험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경험은 인간을 의무로 돌아가게 해서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자체를 이루어가는 것에 이바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거야. 여기서 공급을 받는 거지.
그래서 이제 이 영생은 원래 하나님 안에 있는 거잖아. 그죠? 하나님 안에.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이시니까,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인데,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는 없는 거야. 만약에 이러한 영원한 생명이 구원받은 인간에게 미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덕 입은, 하나님이 주신 그 자체가 영원적 성질이라기 보다는 인간과 계속 관계를 맺으심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덕 입힘으로 그 사람이 이러한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자신 안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게 되는 거야. 그래서 이러한 영원한 생명이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데, 이 영원한 사랑이 사람 누구에게나 있지만, 이것이 번성하게 된 상태, 쇄약하게 된 상태, 이러한 많은 등급들이 나타나게 되는 거야. 이것을 청교도 신학자들이 ‘Degree of Grace'라고 설명했던 거야. ’은혜의 등급‘을 이야기 한 거야. 목회의 목표는 이 은혜의 등급을 최상으로 끌어 올리게 하는 거야. 그래서 이 은혜의 등급이 최상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데, 이것은 은혜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함께 성장하는 거야. 은혜와 지식, 두 가지가 알레데이아(aletheia), 카리스(charis) 두 가지의 성장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 실질적인 성장이라 이거야. 그렇게 하면서 이렇게 성장하며 나아가는 거야. 그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거야. 그래서 이름을 잊어 버렸는데,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인데, 그 사람이 이렇게 봤어요. 그리스도의 지체가 누구냐 볼 때에, 첫째는 뭐냐하면,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진실하게 중생한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나 이것은 원리적이다. 그러면 상태가 나쁜 사람들은 제외된단 말이죠. 왜냐하면 사람이 은혜가 떨어져서, 은혜의 세계가 허물어 졌을 때, 사랑의 질서가 허물어 졌을 때 실제로 그 사람이 교회에 달라붙어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이바지 하느냐, 이바지를 못한다 이거야. 그래서 상태가 나쁜 사람은 실제로 도움이 안된다는 거지.
군인이 군대를 갔는데, 치질에 걸리고 류마티스가 걸리고 못움직인다 이거야. 군대 숫자에는 인원이 들어갔는데 전쟁에 내보낼 수가 없는 거야. 침대에 누워있기 때문에. 그러면 이것은 전투병의 숫자에서 빼버려야 하는 거야.
그러면 목회는 결국은 이러한 원리적으로뿐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이렇게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계획을 사랑의 확장을 통해서 이렇게 뻗어 나갈 수 있는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전달자들을, 진리와 사랑의 전달자들을 만들어 내어서 결국은 궁극적으로 교회가 확장되어가는 데에 이바지하는 이러한 전투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이게 목회의 판도를 보여주는 거야. 그것을 위해서 온전함에 이루도록 더 많이 희생하고 수고하여야 할 그러한 인간의 본분을 보여주는 거란 말이야.
자, 10페이지를 보면, 앞에 나오는 내용들은 다 읽으면 되는 내용들이고요, 그 다음에 10페이지에 보면, 첫째로는 둘째로 다 이해되는 것이고, 까리따스(caritas)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 말로 지순애至純礙 이렇게 옮깁니다. 그 다음에 사랑의 교통, 이것도 이해되고, 그 다음에 ‘totus Christus’의 개념이 나오죠. 이제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정립한 교리인데, 영어로는 Whole Christ라고 이야기해요.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아니 교회는 참되게 회심해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 있잖아. 그것을 성찬을 베푼다든지 그리스도의 참된 몸을 규정할 때에는 그러한 것들을 칼같이 나눠야 하지만, 실제의 영혼을 돌보고 섬기는데 있어서는 유형 교회안에 들어와 있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잠정적으로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보고 그리고 섬겨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totus Christus’의 교리에요. 이러한 것들이 바로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으로 가능하게 되죠. 그래서 이것을 삼중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교회와 신자의 연합, 신자와 신자의 연합 차원에서 살펴본다는 이야기이고, 그 다음에 쭉 내려가서 6번에 가면, 신자의 성화에 대한 이해, 이게 그 칼빈의 사상에서 많이 언급되는 것인데,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아까 강윤석 목사도 이야기 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10페이지 위에서 셋째 줄 보면, [그때까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교회의 몸에 접붙여진 지체들로서 살아갑니다. 그들의 중생도, 성화도, 섬김도, 영광도 모두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의 것으로서 삼위 하나님께 봉헌됩니다.] 라고 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서 하나님께 봉헌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자의 개인적인 성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성화다 이렇게 봐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온전히 성화되면 공동체적 지평 속에서 성례전적으로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바쳐지는 것이 된다는 것이에요. 이해되죠?
그 다음에 이제 삼위 안에 있는 사랑으로 들어가면, 사실 여기에서 나오는 12, 13, 14, 15, 16, 17페이지부터 시작해서 그 18페이지 C번의 바로 위까지는 사실은 개혁주의자들은 사실 이러한 논의들을 잘 안합니다. 그리고 이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가운데도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논의들을 하는데, 왜냐하면 이 논의 자체가 이제 형의 상학적이고, 그래서 관심사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계속 관심사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여기에 그 이제 하나님이 계시잖아, 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설명한대로 이제 당신 자신의 존재와 당신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데, 그게 하나는 천상의 세계를 통해서 또 다른 방식으로 드러 내시고, 이제 지상 세계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데, 각각 다른 차원으로 드러내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까 나타나는 아름다움도 종류가 다르겠죠.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얼굴 이쁜 사람을 봤을 때에 기분이 좋잖아. 그러한 사람을 봤을 때에 기분이 좋은 느낌이 드는 것과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을 봤을 때에 기분 좋음이 느끼는 것은 똑같은 좋음인데 다른 차원의 행복감을 우리에게 주잖아. 이해 돼죠? 그러한 것처럼 만약 그 사람이 얼굴도 예쁜데, 성질이 거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예쁜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강하게 끌림을 갖게 되잖아. 그렇듯이 각각 다른 것들이 이렇게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매개적 수단이 되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지금 인간은 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이렇게 있잖아.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이러한 영원에 속한 하나님이 영원에 속한 이 하나님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도록 들어오는 것은, 가시적인 세계에 들어왔을 때에 인간에게 이해가 된다 이거죠. 그래서 여기는 이렇게 모르는 거예요. 건너뛰고 여기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나 또 다른 사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이 하나님의 어떠하신 성품을 관계 맺으심 속에서 그 관계 맺은 것들에 대해서 그것을 대하시는 방식과 태도를 보면서 추측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라 이거죠.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여기에서 논의를 막하면서 번쇄적으로 가던 중세철학에서는 여기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거든. 이 부분을. 왜냐하면 B라고 하는 부분은 A의 자연스러운 반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아까 프리즘의 예를 들었지만, 이렇게 프리즘의 예를 들었지만 이것들은 사실은 본질이 아니다 이렇게 보는 거죠. 사실 말은 맞잖아요. 빨, 주, 노, 초, 파, 남, 보 현란하게 춤을 추지만, 사실 이것은 여기에 있는 빛의 요소는 아니잖아. 프리즘을 통과했기 때문에 파장이 생겨난거죠. 그렇죠? 사실은 이것은 본질이 아니야, 이것이 본질이잖아. 이것을 여기에서 훨씬 더 관심을 갖는 거야. 담론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될 때에 이것은 굉장히 철학으로 기울여질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것이 너무 번쇄적으로 치우쳤다고 보고, 여기는 거의 거론을 안합니다. 기독교 강령에 보면,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담론이 안 나와요. 삼위일체에 대한 담론이 안나와요. 그래서 멀러 교수와 같은 분이 이야기 하기로는 자기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체 나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들이 나올 때에는 이단들을 이야기 할 때에 그것은 틀렸다고 이야기할 때에 삼위일체가 나오지, 조직적으로 삼위일체를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세워서 나오는 교리는 없다. 그렇게 이제 그러한 것은 없다고 보는 거죠. 이유는 중세의 카톨릭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과 대동소이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나중에 가면서 조정이 되면서 여기를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들이 잃어나기는 해요. 보완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제, 그렇지만 나는 이제 이렇게 생각합니다. 뭐냐하면 믿음으로써 이렇게 보는 거예요. 중세에서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면, 잘들어요. 하나님을 만나면 믿음의 빛 아래서 모든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 아날로기아 피데(analogia fide)야.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지?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 존재의 유비지, 존재의 유비가 뭐야 임 목사,
우리의 존재를 근거로 해서 그 이전에 제 일의 원인자를 찾는다든지, 조물주를 찾는다든지...
내가 잊혀지지 않는 예를 들어줄게. 이렇게 생각하면 돼. 우리들이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나?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잖아. 여기에는 하나님 아버지는 안 보이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 아버지가 있잖아.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야. 여기에 이렇게 수염이 나있는 아버지가 이렇게 있어. 아버지의 모습이 어쨌든 이렇게 되어 있을 거잖아. 여기는 삶의 태도라든지, 성품이라든지 다 있잖아. 이렇게 해서 어떻게 보는가 하면,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보고, 사람 아버지야. 그지? 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는 몰라, 이게 만난 적이 없으니까 모르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여기에서 사람 아버지가 있는데 잘 들어요. 사람 아버지가 있는데, 아버지가 술을 먹고 가끔 애들을 패, 그러면 그것은 참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잖아. 그지? 그럼 떼어내. 아버지면 돈 좀 벌어서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는데, 능력이 없어. 무능해. 그것은 아니잖아. 어쨌든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못 채워주신다고 한다면 아니잖아. 그래서 또 떼어내. 아버지가 늘 실수를 해, 그렇다면 이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떼어내. 방탕해, 이것도 떼어내 이렇게해서 계속 떼어나가면 어떠한 아버지로서는 더 이상 빼낼 수 없는 참된 아버지 상이 나올 것 아냐. 그렇게 상정할 수 있잖아. 유한하지만 상정할 수 있잖아. 이렇게 해내면 이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거야. 이게 바로 존재의 유비야. 무조건 여기서 뭐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닮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아닌 것을, 부정의 방식이야. 부정의 방식으로 아닌 것들을 다 사상해 내면 이렇게 아버지를 유추해 나갈 수 있다는 거야. 그게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야. 그러한 점에서 이런 것들은 이렇게 이것들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간다면, 결국 뭐냐하면 자연 신학의 존재를 폭 넓게 인정하게 된다 이거지. 인간의 이성이 충분히 발휘되면 여기에서 점프에서 알게 되는 것은 뭐를 통해서 알게되는거야? 계시와 신앙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인데, 이게 뭐야, 이성과 추론을 통해서 알게 되는거야. 이것이 이것을 충분히 대치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머리 나쁜 사람들에게는 신앙이 필요하고, 머리 좋은 사람들에게는 이성이 충분하면 된다고 보는 거죠. 그런데 사실은 이러한 것들은 이러한 이론들은 뭐를 간과한거냐 하면, 어떤 영적인 특성들, 믿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특성들을 무시 한거예요. 그러한 것을 존오웬 같은 사람,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신앙론에서 아주 유능하게 공격을 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러한 사상은 루터 사상을 본받은 거예요. 루터가 뭐냐하면 선행은 우리의 영혼을 바꿔 놓지 못하지만,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본질적으로 변화 시킵니다. 그게 이신칭의이니까. 우리의 영혼안에 아까 이야기한 그러한 성향을 이러한 성향을 도입하는 거야. 본질적인 변화를 도입하는 거야.
<질문> 아날로기아(analogia)로 모든 것을 보게 되면, 그 쪽에 대한 어떤 우려가 생기는데요. 신의 속성도 기쁨이나 슬픔이나 즐거움이나 분노나 이러한 것은 원래 없는데, 인간의 편에서 유비로 표현하다 보니까 웨스트민스터 신학문서 신의 속성에서 무정을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원래 없는 것인데 하나님에게는 없는 것이지만, 인간에게 표현하다 보니까 유비로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되고,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도 유비로써 상정을 하고 살펴가야 한다고 한다면, 객관적인 계시 자체가 하나의 유비로써 남을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커다란 우려가 생겨나거든요. 역사 위에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받지 않고 인간의 유한한 인식이 있다라고 하는 근거 하에 유비로써 모든 것을 다 해석을 해낸다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시자체가 굉장히 커다란 위협을 받지 않을까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될수도 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어커머데이션(acomodation)에 대한 문제인데, 이게 결국 뭐냐하면 그렇게 따지면,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 안되는게 뭐냐하면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은 완전하고 불변하고 그 다음에 영원하시잖아요. 그리고 아까 이야기 했듯이 아파데(afade)한 분이라 이거야, 그래서 결국 파데(fade)되지 않아. 그래서 스스로 분노하시지도 않고, 뭐 그 도덕적 통치에서 이야기, 정동되는 분이 아니다 이거야. 정동되는 분이 아니라고 봐야 되는 거야. 그래서 문제는 뭐냐 하면 여기에 있는 이 인간이 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결국은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이 안에 갇힌 상태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야. 왜냐하면 구원의 역사든, 창조든, 뭐든지 간에 전부다 다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오게 되는 거니까,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시간과 공간을 떼어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이거야. 그리고 이것은 아파데(afade)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할 때, 시간과 공간안에 존재할 때 하나님은 여기에서 당신 자신이 진노하시는 분으로도 나타나고, 기뻐하시는 분으로도 나타나고, 그 다음에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정동된 분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거야. 인간에 느껴지게 되는 거죠. 정동이 있으신 분으로서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거야. 이 범위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 뿐이야. 그러니까 이러한 범위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 뿐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이 영원하고 불변하고 완전하신 분이시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속에 계시되어 나타나실 때에는 진노하고, 기뻐하고, 정동이 있으신 분으로 나타나느냐, 이것을 어커머데이션(acomodation)이라고 보는 거야. 이것을 인간에게 맞추어 주시는 거야. 맞춤이라는 뜻인데 인간에 맞추어 주시는 거야.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면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맞추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이해를 해야 하는 거지. 우리가 그러한 속에서 각종 계시들을 주어지게 되는거지. 진노만 하더라도 진노는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잖아. 질투같은 것도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잖아.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이시다 이러한 식으로 묘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도 논쟁들이 많이 일어나요. 결국은 에오노미아와 같은 사람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쟁이었는데, 이게 하나님은 ~이다 하면 안된다 이거지. 이것 자체는 오이코노미아(Oikonia)의 언어이지, 데올로기아(theologia)의 언어가 아니다 이거야.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속의 섭리의 이야기이지 이렇게 하면 안된다 이거야. 이제 대부분은 그렇게까지 사랑안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보는 거죠. 그래서 존재 자체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렇게 보고, 다만 그러한 사랑이 시공간 안에서 나타났을 때, 그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서 이 사랑은 질투라는 국면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기쁨이라는 국면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거죠.
<질문> 저것은 연역적인 방법인데, 계시 자체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간다는 측면에서 볼 때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제한적이지 않을까요? 제한적이고 왜곡될 수 있고, 그러한 부분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요?
그러니까 아까 설명하다 만게 이거잖아.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찾아갈수 있다라고 보는 것이 존재의 유비인데, 개혁파 신학에서는 이것을 믿지 않는다 이거야. 이렇게 못 쫓아가게 된다는 거야. 이렇게 가게 되지, 이렇게 못 쫓아 간다 이거야. 왜냐하면 이것들을 유추해내는 과정 자체를 우리가 완벽하게 신뢰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해서 도달하게 되는 것을 못본다 이거야. 결국 아날로기아 피데(analogia fide)에다가 나오는데,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고, 이 하나님을 믿게 되고 받아들이게 될 때,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속에서 하나님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아까 이야기 한게 뭐냐하면, 계시 얘기가 나왔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만 만나고 나면 모든 것들은 인간이 각자 해석할 때, 사물들을 해석해서 올바르게 하나님과 질서속에 정의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것도 믿지 않는거야. 왜냐하면 이 사람 자신이 순수 객관의 상태가 아니라 이 안에 있는 수많은 월드뷰(world view)라든지, 세계관이라든지 왜곡된 인간의 지성이라든지 아집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이 수 없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올바른 질서를 지을 수 없다라고 보는 거야.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이렇게 계시의 도움을 받는 거지. 그래서 움직일 수 없도록 이 계시는 명제로 작용을 하고, 나머지 부분들이 이성적인 추론에 의해 채워져 갈 때, 이것이 하나의 사상의 얼개를 형성하게 된다고 보는 거예요.
<질문> 목사님, 저게 지금 한 명이 올라가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거잖아요. 그러한 점에서 거듭난 사람과 비거듭나는 사람의 차이점들과,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이것은 올라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실 때에 믿는 사람이 아니면 못가는거야. 그러니까 신앙의 유비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신앙이 아니면 이렇게 못되는 거지.
<질문> 저희가 이제 부교역자들과 논의한 것이었는데요, 구조와 방향에 있어서 죄가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창조하신 창조물들, 도덕적 피조물들 통상 개념 안에서 구조 자체가 철학 안에서는 무너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든요, 기독교 철학 안에서는. 신학안에서는 구조 자체까지도.
<김남준 목사님> 무슨 구조? 무슨 구조?
<질문> 하나님의 형상, 창조 세계의 질서와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죄가 들어왔을 때...
<김남준 목사님> 이렇은 그렇게 생각하면 되요. 핑계할 수 없을 만큼은 명백하게,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을 만큼은 명백하게, 계시를 믿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하지는 않게, 이렇게 주어지는 거야.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이거야, 머리에 담아둬. 하나님이 안계시다, 이렇게는 절대로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그러나 계시와 신앙이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는 분명하지 않도록 불명하게 주어지는 거야. 한계를 정확하게 쭉 거야 되요.
하나님이 없다고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그 다음에 계시와 신앙이 필요없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불분명하게 그렇게 주어지는 거야.
<질문> 거듭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갈 수 있는데,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신자가 신앙의 유비를 유추해 나가면서도 갈 수 있다라는 것인지,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인지.
<김남준 목사님> 신앙과 계시의 도움 없이는 안된다 이거야. 신앙과 계시의 도움 없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핑계 못하는 것. 그것이 한계야. 그 대신 여기서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인간들을 심판하시는 정당성이 확보가 되는 거야.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주어지는 거야.
<질문> 계시 자체는 천상 세계에 대하여 매우 극소수로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데, 대부분의 계시의 내용이 지상 세계와 관련된 용어들로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그 천상세계는 아무래도 계시가 드문 드문 있다 보니까 이성의 추론들이 많이 작용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고, 거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되는 것인가 의문점이 드는 거거든요.
<김남준 목사님> 그렇죠. 결론은 뭐냐 하면 이 아랫것을 설명하기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골격만, 그것만은 가지고 있어야 해요. 지금 오늘날의 신앙이 잘 못하고 있는 것이 그 부분을 다 허물어 버리는 거야. 그래서 어제 멀러 같이 공부하던 친구 하나가 이야기 한게 뭐냐하면, 신학을 하는데 철학이 필요없다라고 이야기하는게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대신 철학이 신학을 대치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지. 그래서 멀러 교수의 책이 안읽히는 이유가, 중세 철학을 먼저 해야해, 중세 철학을. 중세 철학을 안하고 역사신학을 한다는 것이 실감이 별로 안나겠지만 불가능한 거야. 그래서 중세 철학을 어느 정도라도 윤곽을 뜨고 그 다음에 사유의 폭을 넓혀야 되고, 그 사유의 폭을 넓히려면 결국은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최소한의 논의를 여기서 해본거야. 그래서 설명을 한번 해보는거라 이거지.
그러면 사실은 이 질문은 아우구스티누스도 진지하게 던진 진문이야.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것을 계사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다라고 이야기 하려면 이것은 계속해서 밤에는 하나님이 사랑이시지만, 낮에는 아니시다라고 한다면 이 명제 자체가 성립을 안하는 거야. 이 자체가 뭐냐하면 어떠한 상황에도 통용될 수 있는 영원적인 특성을 가져야지만 이 명제가 성립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무슨 문제가 나오냐 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이 자체가 결국은 뭐냐 하면 관계성을 토대로 해야지만 성립되는 거야.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창조하셔서 더 넓게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해와 달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인간들을 창조하셔서 하나님이 인간들과 관계를 가리셨는데, 하나님이 인간과 이렇게 관계를 가지셨다 이거야. 그러한 관계는 사랑의 관계였다 이거지.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 이렇게 성립이 된다면 그러면 지금 이것을 이렇게 그으면, 결국 시간과 공간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고, 이것은 영원이잖아. 그러면 만약에 영원 속에서는 이 명제가 성립이 안되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물들이 생겨날 때만 하나님이 사랑이실 수 있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이 명제가 성립을 안한다 이거야.
예를 들면 강윤석 목사가 진실하다고 하면, 여기서도 학교에서도 집에가서도 진실해야지. 교회와서는 진실한데, 집에 가서는 안 진실하고 학교가서 사기치고 그러면 그게 is 라는 말로 연결 될 수 없잖아. 강윤석 is truthful. 이렇게 되려면 여건과 공간, 시간 상관없이 연속성을 이루어야 된다 이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본질적으로 오히려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안에 계신 분이고 시간 안에는 당신이 계신 존재의 효과를 나타내니는 것 아니야. 그러니까 더더욱 is라는 계사로 이어지는 명제가 성립되려면 이 자체가 계속해서 하나님이 사랑할 대상을 갖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이셔야 된다 이러한 이야가 되는 거지.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관계성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만물 이전에도 사랑이실 수 있느냐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거야.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는 신앙이 적고 한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던져질 수 있는 질문이거든, 그러니까 이러한 논의를 한번쯤 해주는게 믿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치워버리는 일들을 한다, 나 나름대로 잠재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나 특별히 조나단 에드워의 영향이 끼쳐 졌겠지만, 에드워즈는 이 문제를 이야기 합니다. 나는 나름대로 이 문제를 독창적으로 풀어 본거야.
이렇게 해서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보는 거야. 그래서 이제 기본적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이제 하나라고 놓고 보고 설명하는 것과 그 다음에 셋이라 놓고 설명하는 것 이러한 방법이 있거든요. 학자들마다 각각 자기가 선택하는바가 다르긴 한데, 이제 너무 먼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바르트 같은 사람을 예를 들자면, 칼 바르트 같은 사람을 예를 들자면 하나라는 것을 중요하게 중심점으로 놓고 설명이라고 해요. 그런데 여기에서 셋이라는 것을 잘 설명을 못해 그래서 어떻게 말하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반복이라고 이야기해, repetition이라고 이야기하는거야. 성자는 이것의 반복, 성령은 또 이것의 반복이라고 보는 거야. 그래서 칼 바르트의 이것은 양태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러한 것들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 몰트만인데, 몰트만은 이렇게 안보고, 하나님을 먼저 하나라고 보고 그래서 하나의 신성으로 보고 그리고 이 신성이 각각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이렇게 부여되어 일체를 이룸으로써 한 하나님이 되셨다 이렇게 설명해. 하나의 신적 본질이 삼위에게 부여되었다고 이렇게 보는 거야. 이러한 문장도 보면 잘못하면 사신론으로 떨어지는 거야. 왜냐하면 이 본질은 따로 있고 그 다음에 본질이 주어지는데 주어지기 전에 공통 본질인 이 본질은 뭐냐, 그래서 까딱 잘못하면 사신론으로 떨어져요. 그래서 이것에 대한 대안이 헤르반 바빙크 같은 것인데 이러한 방법은 상당히 건전하게 생각을 해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일단 셋으로 출발을 하는 거예요. 셋으로부터 이렇게 셋의 인격이 있고 그 다음에 셋의 인격이 그 다음에 하나의 신적 본질로 연결된다고 보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의 신적 본질로 이것은 상당히 동방 교회적인 설명을 모티프로 하는 것인데, 바빙크는 이제 동방교회 설명과 서방교회의 난점들을 조화를 이루어요. 어떻게 했냐 하면,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가 위격이다 보는 거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위격과 상관없이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야. 하나님은 위격 안에서 존재하신다. 그런데 어떻게 되는가 하면 파란거 설명했듯이 단일한 신적 본질로 존재하는거야. 단일한 신적 본질로. 일체라는 것을 물리적으로 일체라 생각하면 안되고 본질에 있어서 일체가 생각하는 거야. 삼위 일체라 그러잖아. 여기 신적 본질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이게 위격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거야. 다르게 존재하시는게 아니라. 이해 되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놓고 봐야 한다는 거야. 이렇게 하나의 본질을 이루는 거야. 이것을 페리쿼레시스, 침투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유통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신적 본질을 깨닫게 되는 거야. 이 사람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위격을 하나님의 존재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다, 위격의 개념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이 이제 가장 개혁적인 입장이라 보는 거예요.
사실은 바빙크가 마지막 신학자에요. 마지막 신학자. 이렇게 설명을 하는 거야. 그러면 이제, 됐죠? 이것을 여기에 그대로 가지로 들어와봐요.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이잖아. 그러면 이렇게 이해를 처음부터 해야 된다는 거야. 하나의 신적 본질속에서 이렇게 된다 말이지. 이러한 신적 본질이 하나인 속에서, 아예 하나님 자신이 위격 바깥에서 존재하지 않으시고, 위격 안에서만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할 때 이러한 존재는 결국은 하나님의 인격이 몇이야? 인격이 몇이냐고?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신거야. 세 인격이 바로 위격이야. 위격이 인격이라 이거야. 페르소나. 이 위격이 다르면 인격도 다른 거야. 만약 이것을 인정을 해야지만 무엇이 가능하냐 하면 성 삼위의 교통이 가능해지는 거야. 인격이기 때문에 교통이 서로 가능해지는 거야. 삼위일체의 신비야. 세 인격인데 그것이 삼신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야. 만약에 세 인격을 할 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는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격은 다른 것들의 유비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야. 물론 우리는 인간이지만 본질은 각각 다르다고 봐야지. 그래서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인격을 구성하는 거잖아. 여기에서는 아니다 이거지. 결국 삼위가 교통을 하게 되는 거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관계가 이게 결국 사랑의 결과라 보는 거는 거죠. 에드워즈는 생명이라 보는 거죠. 사랑과 생명은 결국 같은 것인데 어떤 면에서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을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세계 창조가 하나님 자신이 속박받았다는 면에서 필연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특성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 세계 창조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보는 거예요. 이러한 생명과 사랑은 끊임없는 산출을 지향하기 때문에 사랑 자체가 관계를 맺고자 하는 특성으로 나타는 거지. 사람이 사랑이 많으면, 사랑이 식으면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 들어서 자폐증 같이 되고, 사랑이 많으면 오지랖이 넓어지면서 온갖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돌아봐야 할 사람이 많아 지는 거야. 이게 사랑의 확장이란 말이야. 이렇게 설명을 해야 하는 거지. 그래서 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 어떤 일과 관계를 맺을 때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어떻게 맺는가 하면 성부가 혹은 성자가, 성령이 주도적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어떤 성부가 관계를 갖으신다고 할 때, 나머지 두 위는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설명 여러번 했잖아, 이러한 식으로 되는 거야.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는데 왜 서로 사랑하실까. 이것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수 있지만, 명제로 받아들이면 되지만, 굳이 이것을 설명한다고 한다면 나는 둘로 보는데 그게 뭐냐 하면 각 위의 아름다우심 때문이다. 미는 결국 완전성이에요. 이 완전성 자체가 결국 거룩함이에요. 거룩함의 두 요소가 뭐라고 가르쳐 주었죠? 존재적 초월성 그리고 뭐지? 도덕적.... 미학적 견지에서 보면 이것은 아름다움이란 말이야. 그런데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첫째 뭐라고 했지? 개별적 사물의 아름다움과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미 이렇게 정리를 했잖아. 결국은 여기에 하나님을 대입시키면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개별적인 위로서 성자가 보시기에 성자는 더 이상 아름다우실 수 없는 최고의 무한한 아름다움으로써 완전하신 거야. 그래서 이 성부는 성자,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최고의 조화를 이루시는 분이지. 그래서 결국은 개별적 위의 완전성과 상위 안에서 완전성 이것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사랑하시는 거야. 이러한 사랑이 결국은 시공간 안에서 스며 들어서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게 하는 거야. 그래서 인간이 바로 이렇게 서로의 완전성과 질서의 아름다움 안에서 서로 아름다움을 보면서 사랑하도록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신 거야.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하면 굉장히 길지만, <도덕적통치>의 자발적 박애적 사랑, 목적적 사랑, 그러한 부분들을 읽어봐. 그러면 설명을 덧붙일 수 있어. 그러면 넘어가요. 넘어가.
각주 1번은 이해할 수 있겠지? 그 다음에 14번으로 넘어가면 14페이지 15페이지 다 설명했어요. 17페이지로 넘어가면 자, 읽어봐요. 읽어봐.
<책 본문>
B. 사랑의 방식 : 서로에게 수단이 되지 않으심
둘째로 삼위 하나님 안에서 교통하시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교통의 본질인 사랑은 각 위가 서로에게 수단이 되지 않는 방식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각 위는 서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통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더 높은 목표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위가 스스로 존재하시고 오나전하시며 충족하신 하나님이시라는데 기인합니다.
사랑은 “어떤 대상을 궁극적으로 목적으로 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것은 곧 ’누림‘fruid 인데, 이 누림은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더 높은 목표가 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김남준 목사님-거기 줄치세요. 그게 누림에 대한 형이 상학적인 정의에요. 그 다음, 이 누림의 대상은, 사랑의 대상은 많아도 되는데, 이 누림의 대상은 하나여야만 되는 거에요. 하나님 때문에 사랑할 이유가 없는 것을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결국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거란 말이야. 그 다음..>
<책 본문>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궁극적 누림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거나 자기 자신 뿐입니다. 후자를 우리는 ‘자기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지성적 피조물에게 있어서 사랑은 언제나 자기가 생각하는 존재의 질서를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의 질서는 곧 그가 생각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판단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치의 판단에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김남준 목사님-이렇게 때문에 사실은 칼빈이나 마스트리히트나 개혁파 사람들이 중생을 자꾸 지성하고 연결시키려고 시도했던 거예요. 그것을 무조건 중세적으로 비판하면 안되는 거예요. 논리적인 근거가 탄탄하게 있는 거야. 왜냐하면 지성이 깨어나지 않으면 가치의 질서를 제대로 볼수가 없는 거야. 지난번 논문 줬지? 마스트리히트 논문 줬죠? 안읽었지? 자, 그 다음. >
하나님 자신이 모든 존재의 질서에 있어서 최고이시고,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심에 있어 도구가 되지 않으시니, 삼위 간의 사랑이 바로 서로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각 위는 결코 서로에게 보다 더 높은 대상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랑받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삼위간의 사랑도 결국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하나님은 존재와 가치에 있어서 최고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능가하는 또 다른 존재의 목표를 가지고 셰시지 않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이 피조물에게 있어서 최고의 사랑이 되는 거야. 자기 사랑은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사랑은 인간에게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나타나는 거야. 이해해? 자, 그 다음에
<책 본문>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 자신에게서 시작되어, 당신 자신 때문에 계속되며, 당신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를 합치시키시는 자충족적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사랑은 최종적인 목표에 대한 궁극적인 누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들을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고 즐거워 하시는 수단으로 삼으시지만, 당신 자신은 그들 누구에게도 수단이 되실 수 없는 존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위탁하신 인간 안에 부여하신 사랑도 바로 이런 사랑이었습니다. 곧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모든 사랑을 이 궁극적 사랑의 목표이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랑하도록 사용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러한 사랑 안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의 방식만이 존재의 올바른 질서를 따르는 것이며, 그 안에서 인간의 사랑은 참으로 그 사랑이 유래한 원천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교통애(交通愛, amor socialis)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으로부터 이탈한 모든 방식의 사랑은 인간을 참된 행복으로 데려가지 못하는데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사랑은 단절애(斷絶愛, amor pravitus, 혹은 ‘사적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참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사랑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자, 이 개념이 뭐냐하면 이러한 개념이거든. 여기에서 그림은 지웠는데, 여기다 여기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인간들에게 이렇게 아가페 사랑이 주어질 때 이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써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이 나온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이 나오면, 이렇게 될 때 자기는 무화 되는 거야. 자기가 무화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아가페(agape)의 사랑에 대해 까리따스(caritas)로 반응했는데, 이 까리따스(caritas)를 통해서 사람들은 아가페(agape)를 알게 되는 거야. 그렇게 아가페(agape)를 알게 되면 그 아가페(agape)에 대한 반응은 또 다시 까리따스(caritas)가 되는 거지. 그러면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아가페(agape)의 사랑이 까리따스(caritas)를 통해서 누군가로 흘러가게 되잖아. 그러면 자기가 베푼 것은 까리따스(caritas)인데, 이 사람이 받은 것은 아가페(agape)의 사랑이 되는 거야. 이해되죠? 그러면 아가페(agape)의 사랑은 다시 까리따스(caritas)로 반응하게 되지?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그러면 이렇게 계속해서 흘러가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이러한 사랑을 우리가 지순애라고 할 때, 지순애는 교통애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거야. 흘러까니까. 그래서 이것을 아모르 소키아리스(amore socialis)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야. 소키아리스(socialis)가 이제 society가 거기서 온거거든. 사회적 사랑이라고 카톨릭에서 번역을 하는데, 사회적 사랑은 아니고 교통애라고 봐야 하는 거야. 교통애. 이렇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거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교통애를 이야기 하는 거야. 그래서 끊임없이 흐르는 거야. 끊임없이 흐르는 이 과정 전체가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과정이라 이거야. 자기 사랑의 과정.
자 그 다음에 조금더 설명할게. 그 다음에 뭐가 나오냐 하면, 그 다음에 설명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단절애 인데, 잘봐요. 자 이렇게 될 때 이 사람 하나를 확대해 보자. 이 인간 하나를 확대해 보면, 어떤 존재가 될까? 이 사람을 확대해 보면 어떤 존재가 될까? 이렇게 되지 않겠어? 인간이 있는데 인간이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있잖아.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일단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접붙여 졌다라고 본다면 일단 자기 사랑에 대해서는 깨뜨려진 사람이야, 이렇게. 그래서 기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주인삼으며 살아가게 되는 거야. 왜냐하면 사랑하는 그 대상이 자기 주인이니까. 결국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살아가게 되는 거지. 왜,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고 그리스도냐, 묻지마. 복잡하니까. 왜냐하면 그 삼위 하나님이 그 사랑이 보이도록 하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니까, 그래서 그렇게 됐다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이 사람이 미완의 사람이야. 그래서 여기에 뭐냐하면 여전히 두 개의 본성이 싸우는 거야. 이게 말하자면,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제가 되는 사항이야. 하나는 자기 사랑, 자기애의 본성이 남아있는 거야. 여기에. 그리고 그 다음에 뭐가 있는가 하면 신의 본성이 동시에 있는거야 두 개가. 이것이 결국은 계속해서 왕좌를 다투는 거야. 이게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다룬 내용이잖아. 그러니까 상태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잖아, 그치? 그러면 만약에 이것이 상태가 나쁠 때는 어떻게 되는가. 이 자기 사랑을 중심에 자기애를 딱 놓고 그 다음에 자기애에서 범주를 펼쳐나가는 거야. 이게 결국은 여기 서있는 기준점이 되는 거야. 왕국의 기준점이 되는 거야. 그런데 이제 거듭난 사람안의 자기애는 한계가 있는데 항구적이지 않아.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신의 경향이 어떠한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아. 그래서 심지어 악을 행할 때도 무슨 의지로 죄를 짓는다고? 무슨 의지로 죄를 짓는다고? 신자가 죄를 지을 때와 불신자가 죄를 지을 때의 의지에 있어서 무슨 차이가 있는거야?
대답 - 불신자는 완전한 자신의 전인적 의지로 하지만, 신자는 갈등이 있는 채로..
<김남준 목사님>
조금 더 정돈된 말로, 단일 의지와 복합 의지라 하는 거야. 말로 설명하면 길잖아, 용어로 설명하면 되는 거야. 단일 의지와 복합 의지. 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온 내용이야. 공부를 좀 해. 저자도 26번을 읽었는데. 이렇게 해서 단일 의지와 복합 의지라는 문제가 나오는데, 이것은 언젠가는 꺾어져. 꺾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에 이것들이 펼쳐져 나가잖아. 자기 중심축으로 이렇게 사랑이 펼쳐질 때 여기에 혜택받는 많은 사람들이 나올 것 아니야, 그것도 사랑이니까. 펼쳐져 남잖아. 마지막에 결국은 이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회귀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야. 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 해서, 조폭 두목도 조직원 관리하잖아. 자기가 쓰고 싶은 돈을 똘마니에게 주잖아. 그것은 뭐냐 하면, 똘마니의 행복을 빌어서가 아니라 이것 먹고 조직에 충성해서 나를 세워달라 그거 아니야.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사애라고 부르는 거야. 사애. 사적 사랑이라 부르는 거야. 나는 이것을 사애 보다는 단절애라고 부른다 했죠.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이러한 것을 통해서 많은 자원들을 주실 때에 그것이 여기에서 멈추는 거야. 자기 자신을 이 자원들을 사용해서 그것들을 즐거워하는 최종적인 종착역으로 사용하고 싶어하는 거야. 지지난주 설교 시간에 이야기 했잖아. 그래서 여기에서 소진해서 없애 버리는 거야. 흘러들어가지 못하는 거지. 그러면 결국은 소진해서 없어지는 것들을 이것들은 어떻게 되냐 하면 이 하나님이 하셔야 될 것들을 자기가 중간에서 가로챈다는 거야.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악이라 부르는 거야. 이러한 것들이 힘차게 흐를 때, 힘차게 흐를 때 교회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이 되고 교회 자체에 일그러진 모습들이 피어나게 되고 인간 자신의 일그러졌던 형상들이 펼쳐지게 되고 더욱 강력한 힘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장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거야.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말하는 선교라 이거야. 전도이고.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성장이라 이거야. 그래서 여기 단절애와 교통애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 다음에 이제, 사랑의 목적이라 나오는데 거기에 읽어봐. 더 읽어봐.
<책 본문>
셋째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자신의 지혜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무엇과 무엇으로 창조하시죠? 말씀과 능력으로 창조하셨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당연하지. 무엇으로 창조하시지? 지혜가 먼저 나오는 거야.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신거지. 그러면 뭔가 하면, 지혜와 사랑의 본질이 뭔지 잘 생각해 보라 이거지. 지혜의 가장 본질은 자기 지식이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란 말야. 사랑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이것이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당신 자신을 아는 이러한 지식들이 있잖아요. 하나님 당신 자신을 아는 지식들이 이 세계 속에 펼쳐지는 거야. 펼쳐진 이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거야. 이것을 과정 신학자들은 창조의 과정 자체가 하나님이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보는 거야. 당신도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배워가야 될 필요성이 있는 존재라 보는 거지. 진화론적 신관이야. 그러한 것들이 이제 우리 현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매혹적이지. 그래서 설명이 잘 되는 거야. 구약에서 왜 하나님이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냐, 아직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 자체가 성숙해지셔서, 그 성숙은 하나님 자신의 부족 때문이라기 보다는 인간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될지에 대하여 관계 속에서 그렇게 성장하는 거라고 보는 거야. 이렇게. 이러한 것들을 이렇게 하는데, 이러한 피조물들이나 모든 것들을 시공간 속에서 펼치시는데, 이 동기 자체가 한없는 사랑이라고 보는 거야. 그래서 아까 이야기 했듯이 하나님의 많은 속성들이 있는데, 속성들이 하나님 자신이 정동되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아파데(afade)한 존재이라고 다 이야기 하지만, 사랑에 관하여서는 상당히 논란이 많아. 결국 역사적으로 보면 어거스틴의 생각이 훨씬 승리로 끝나요. 왜냐하면 에오노미아의 입장 같이 이것을 사랑이다 어떤 것들이 전부 관계로 설명하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오이코노미아(Oikonia)의 언어이고, 데올로기아(theologia)의 언어가 아니다라고 다 쳐버리면 마지막에 스토아 철학에서 그리는 신과 성경에서 그리는 신이 일치를 이루는 거야. 그렇게 되면 안되는 거야. 그러면 또 너무 철학으로 기울어지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사랑을 설명하는 거야. 하나님 자신은 당신 자신을 앎에 있어서 모자람이 있겠어, 없겠어? 그게 바로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의 근거가 되는 거야.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 자신을 사랑함에 있어서 불완전하실 수 있겠어, 없겠어?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무한히 사랑 하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보는 거야. 그래서 시공간 속에서 펼쳐나가는 것이야.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 있는 거야.
그러면 이제 19페이지로 넘어갑시다. 넘어가고, 읽어봐. 첫째로는 거기.
<책 본문>
첫째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지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들이 도덕적 목적을 이루도록 그들을 통치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롯한 도덕적 피조물들을 도덕적 의지를 가지고 통치하지 아니하신다면,
<김남준 목사님>
도덕적 피조물은 지성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이에요. 이성적 피조물이라고도 하는데, 지성적 피조물이에요. 천사들까지 포함하는 거예요. 그 다음.
<책 본문>
이 세계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도덕적 목적을 따라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표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덕적 목표를 따라 세상을 통치하심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의도를 따라 만물을 다스리도록 작정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의 도덕적 목적을 계시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당신의 의지를 보여 주셔야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른 것이며, 이 지혜를 이루어 나가시는 모든 방식들이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모든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이 바로 이러한 사랑의 나타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최고선’最高善, Summum Bonnum이시기에 당신 이외의 모든 만물들과 관계를 맺으실 때 그분의 ‘선함’ bonitas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자신은 무한히 완전하시기에 누구에게도 덕을 입으실 필요가 없으시지만, 당신을 제외한 모든 만물들은 완전하지 않기에 무한히 완전하신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게끔 존재하고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선함을 덕 입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만물이 하나님을 의존한다라고 할 때, 그분께 덕을 입는 거예요. 그분 덕분에. 그 다음에.
<책 본문>
그 선함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를 따라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그 통치 안에서 자신의 존재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모든 사물들에게 복주시고, 쉼과 행복을 얻게 하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사랑 안에 있는 지혜를 따라 존재 할 때 인간을 비롯한 만물은 가장 선한 존재의 상태를 유지하게 되고 자신도 아름답고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사랑으로써 이 지혜를 이루어 가십니다.
2. 지혜를 이루시는 방법
둘째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도덕적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당신의 지혜를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된 만물에 대한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심에 있어서 지혜를 사용하시지만, 이 지혜는 사랑 안에서 행사됩니다. 또한 그렇게 그 지혜를 이루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도덕적 통치를 실현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성취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십니다. 삼위안에 있는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삼위가 사랑으로 교통하시는 것처럼 인간과 만물이 당신 자신과 교통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 사랑으로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이루시는 것을 우리는 두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a. 목표의 합치 :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심
<김남준 목사님>
이것은 뭐냐하면, 아까 설명한 건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지금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는데 내일은 당신 자신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하거나 그렇게 될 수 없다 이거죠. 그것을 목표의 합치라 이야기하는 거야. 그 다음에.
<책 본문>
첫째로, 목표의 합치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하나님 자신에게 사랑의 근거가 된다면, 이러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목표의 합치를 이룹니다. 그래서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우심으로 말미암아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당신 자신의 사랑의 근거가 되지만 그 근거가 당신 자신 안에 있기 때문에 자발적 사랑이 되고 박애적 사랑이 되는 거야. 이해돼죠? 그 다음.
<책 본문>
삼위 안에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우심으로 말미암아 각 위가 함께 사랑으로 교통하시고 이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천지창조의 경륜이 일치하게 수행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 자신의 통치를 실현하여 영광을 돌리도록 인간과 만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순결하신 영이신 하나님은 아무 구성요소도 없이 존재하는 분이시며 이것을 하나님의 단순성 simplicatas Dei 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섞임과 혼합이 없는 단순하신 분이기에, 그런 청결한 마음으로 찾아오는 자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청결한 마음으로 하난미을 뵈오며, 불변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으로부터 공정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교통 안에서 이루어진 목표의 합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이 순결해 질 때, 하나님의 단순성을 가장 본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 그 때에 텅빈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꽉 찬 상태가 되는데, 그 사랑으로 꽉 찼을 때, 불의를 보면 분노하게 되고 비참한 사람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비진리를 보면 그것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고 그 다음에 진리를 발견하면 자기 것으로 삼고 싶은 것과 같은 다양한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처럼 보인다 이거야.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되는 거야. 하나님이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incomprehensible, 파악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에요. 이게 뭐냐 하면 단순성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때 이야기 했죠. 우리들이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할 때, 이러한 그림은 조직신학에서 신학교 다닐 때에 가끔 봤잖아요. 그리고 이 가운데는 동그랗게 파가지고, 영원한 속성, 불유통적 속성과 유통적 속성을 집어 놓잖아. 이렇게 하나님이 된 것처럼 묘사하는데, 이것은 틀린 묘사라 이거죠. 이렇게 되어서 이렇게 됐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인간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각각 A로부터 B로부터 C로부터 각각 다른 속성, 사랑, 자비, 긍휼 뭐 이러한 것들이 내려와서 관계를 맺는다고 보는 것은 넌센스다 이거야. 생각나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에서 생각나지? 자 이렇게 여기에서 이러한 분이신데 다양한 인간들과 관계를 갖으시잖아. 이렇게 무릎꿇고 기도하는 자도 있고, 춤추고 까부는 사람도 있다 이거야. 이러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 사랑으로 진노로 이렇게 해서 여기는 저 뭐야 선으로 이러한 사람의 경우에는 공의로 이러한 식으로 나타난다 이거야. 이것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봤다고 해서 이 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있나 찾아봐서는 안된다는 거야. 이러한 상태인데, 잘 들어봐요. 이러한 하나님의 삼위 일체 사랑을 경험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어떤 인간이 깊이 변화를 얻게 되었어요. 이 내면의 상태가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 할 때,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게 될 때에 이 사람이 사랑으로 꽉 차있는데, 설명할 수 없는 단순한, 단순성의 상태로 되는 거야. 단순성의 상태. 똑같이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이 자체는 설명할 수 없는 단순성이기는 하지만, 여기도 막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볼 때 여기서 정의로운 분노가 확 솟구치는 거지. 이러한 사랑이 없을 땐, 분노가 안생겨나는 거야. 그럴수도 있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러고 싶은 마음인데 분노가 막 생겨나는 거야. 여기는 또 이러한 사람이 있어. 여기서 또 사랑이 생겨나고 진노가 생겨나고 등등의 것들이 계속 생겨나는 이 꼴하고 상당히 담지 않았냐. 그치?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수는 없지만, 상당히 많이 닮잖아. 그래서 이게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순전한 마음이라는 거야. 이러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 단순성들이 이러한 것들을 여러 가지로 표현했지만, 율법과 관련해서 표현을 하게 되는 거야. 율법과 관련될 때 이러한 것들이 온전한 삶으로 나타나는 거야. 온전한 삶으로. 그래서 칼빈이 뭐라 했냐면, “ ”(33:48부분) 온전함, whole 그러한 뜻이거든. intergaral 전일적이고 순전하고, 순수하고, 온전한 전체적인 상태가 된다는 거야. 여기에서 holiness라는 말이 온거야. holiness은 wholeness야. 두 개가 일치를 이루는 거야.
자 그 다음.
<책 본문>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사랑으로써 자신의 존재목적을 하나님의 뜻과 합치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사랑하는 자신과 사랑받는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목표의 차이로 희생과 자기 포기가 필요하지만, 삼위 하나님은 서로에 대하여 상충되는 존재목적을 갖고 계시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b. 인간의 행복 : 삼위 하나님의 지혜에 합치함
둘째로, 인간의 행복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사랑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합치된 존재가 되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ㅇ비니다. 하나님은 당신 밖의 만물들을 지혜와 사랑으로 다루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지혜이시니, 그 안에서 천지창조가 계획되고 이루어졌으며, 타락한 인류의 구원도 그 안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었습니다. 또한 이로써 인간의 구속을 통하여 창조의 목적이 회복되고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당신의 영원한 지혜를 시간세계 안에서 펼치시되, 당신은 영원하고 무한한 사랑으로써 이 일을 행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안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써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각자에게 합당한 존재와 작용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창조되어 그 의도된 대로 존재하고, 또한 그 지혜를 따라 자기에게 합당한 작용을 함으로써 쉼과 평안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맞는 존재가 되고 그에게 의도된 바대로 행함으로써 만물의 보편적 존재질서와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서 쉼과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지혜로써 이 모든 일을 정하셨으며, 또한 사랑으로써 그 지혜를 이루신다는 사실이고, 참으로 인간은 그 사랑과 지혜로써 거기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19세기에 미국에서 기독교 신앙안에서 인간이 행복을 찾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것이냐에 대한 큰 논쟁이 벌여져요.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뭐냐하면 두 가지 자체는 분리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행복해 지는 것은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자기 회귀적 사랑 안에 있을 때에, 인간은 결국 참답게 행복해지는 것인데, 그것을 현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 그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그 아가페(agape) 사랑의 충실한 통로가 되도록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으로 자기를 유통할 때,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 안에서 가장 적합한 자리를 갖고, 그리고 가장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믿어야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포기하게 될 때에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그러한 목표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이제 어거스틴이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그려내자면, 이렇게 되는 거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참답게 자기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자기를 사랑함으로써 결국은 인간이 자기를 참답게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적어놔요. 적어놨다가 가르쳐줘요. 그렇게 해서 이것을 가르침이 풍부해지려면 뭐냐하면 내가 뭘 쓰려고 하게? “ ”-(38:48부분)살아야 할 양태, 가르쳐야 할 풍부함. 이게 뭐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살고, 그렇게 가르치면 무지해도 각주 못써도 막 가르침이 풍부해진다 이거야. 그래서 한주간 동안에 기도많이 하면서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 회귀적 사랑 속에서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렇게 잘못했던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다시 자기 자신이 희생하고 흘러가려고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은혜를 받으면 제목 몇 개 적어가지고 쫙 눈감고 설명을 해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의미의,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 ”(40:13부분)-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안에서 쉼을 누리면서 쉼을 주면서 그렇게 살다가 우리의 육신은 이슬처럼 사라지고 우리의 영혼은 최고의 아름다운 상태로 그러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그 사랑의 연합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그것이 신자의 일생이고, 목회자의 일생도 그와 다르지 않다 얘기에요. 자, 은혜가 됩니까.
1-2강
22페이지 인간으로서 신자의 삶으로 넘어가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에서는 사랑이라는 근원을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 내에서의 교통에서 찾고, 사랑의 원천을, 그래서 그러한 사랑을 염두 해 두고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신자의 삶은 어떠한 것인지 여기에서 다루고 있어요. 자, 22페이지 넘어가서 우리 김경혜 전도사님 읽어주세요.
<본문 내용>
신자는 교회의 지체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의 한 피조물입니다. 그가 하나님에 의하여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존재에 있어서 구별되며, 또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그분을 대신하여 다스리고 가꾸도록 위임되었다는 점에서 더욱이 그 지위가 다른 사물들과 구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주지 않으신 영혼을 부여하심으로 당신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닮은 지혜와 사랑으로써 만물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도덕적 목적을 따라 세상을 다스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목적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의 근원일 뿐 아니라 자신과 만물이 속한 세계의 근원이시며 또한 그들을 향해 도덕적 목적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그분을 알고 경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의무에 관해서 알아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자, 아우구스티누스가 Solioquies라는 작품이 있어요. 독백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Solioquies라는 책이에요. 독백이라고 번역이 됐는데, 이 책은 뭐냐 하면 자신의 영혼과 이성 두 개에서 서로 대화하는 거예요. 영혼과 이성과 대화하게 되어 있어요. 거기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해요. 이성이 이제 니가 무엇을 알고 싶으냐 하니까 대답하는 게 뭐냐 하면, 나는 하나님과 나의 영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 이외에 알고 싶은 게 있느냐 영원이 물어봤어요. 나는 필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나의 영원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거예요. 그것이 내가 알고 싶은 전부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이것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근본적으로 인간이 알아야 할 대상이 하나님과 그다음에 자신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이 두 관계가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관계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이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부이긴 한데,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영혼이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자체가 인간의 몸이라고 하는 것 속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몸과 연장선상에 있는 이 모든 사물 세계 속에 이렇게 존재한다 이거죠. 그래서 인간의 존재를 보면 인간이 이렇게 존재가 있는데, 인간이 참 독특한 것이 뭐냐하면 영혼이 있고 육체가 있어요. 이 영혼은 하나님 닮은 영적 존재이고, 육체는 사물이라, 물질이라 이거예요. 그러면 육체가 완전히 물질이냐, 그렇지는 또 않아요. 그래서 이게 영혼과 육체 사이에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어요. 여기에 인간의 마음이라는 function이라는게 작용을 해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면, 인간의 마음을 뭐라 그랬냐 하면 인간의 마음을 divinity, 신성과 humanity, 인성이 만나는 것이다. 누가 이것은 뭐야 너무 내재주의적인 해석이 아니냐 그러는데, 그게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신성에게 들어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의미에서 신성적 요소와 인간의 마음과 교통한다는 인성적 요소가 인간의 마음에서 만나는 거예요. 여기에서 생겨나는 각종 은혜의 작용들이 있잖아. 은혜가 뭐라고 했지? 누구한테 물어볼까. 은혜가 뭐야.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의무를 행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키시는 선한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에요. 그것은 humanity한 것이 아니라 divinity한 거잖아. 그치. 그러한 divinity한 영향이 하나님의 영향이 여기에 미쳐서 그래서 그것들이 결국은 그 영향에 와서 그것들이 작용되어 나타나는 것이 humanity안에서 나타나는 거야. 이러한 아주 탁월한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 밖에 없는 거야. 인간 밖에. 모든 사물 속에는 영적인 요소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식물도 생명이 끊어졌다, 아직 살아있다는 이러한 표현을 쓰잖아요. 그러면 식물이 살아 있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서 살아 있다 라고 하는 생물의 작용은 두 가지를 반드시 내포해야 돼요.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외부에 대한 반응이에요. 환경에 대한 반응이고, 그 다음에 자기 자체 안에 있는 Metabolism이라고 하는데, 신진 대사라고 해요. 신진대사를 일으켜요. 자기 조절 작용이라고 해요. 이것 두 개는 생명의 요건이야. 그런데 식물과 동물은 이 두 개에 대한 작용의 차원이 훨씬 더 높죠. 그런데 Metabolism에 대한 작용, 외부에 대한 작용 이러한 것들은 굉장히 영적인 요소잖아.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일인데, 어느 산인지 이름은 잃어버렸는데, 이렇게 나무가 무지하게 커요. 500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나무인데 나무테가 쭉 되어 있어요. 나무테마다 세계 역사를 써 놨어요. 놀라운데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그 부분을 확대를 해 놨는데 나무결 자체가 틀려요. 그래서 나무결 이라는 게 진하게 된 것은 겨울에 생겨난 것이고, 이쪽 많이 자란 부분은 여름에 생겨 난거잖아. 이게 어떤 그 재앙이 있거나 아니면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거나 하면 나이테가 반영을 해요. 그게 어떻게 알고 2차 대전이 일어났다고 해서 미국에 폭탄이 떨어진 것은 아니잖아. 나무는 그것을 세계의 역사를 알고 있다 이거야. 이러한 것들은 굉장히 신기한 요소 아니야?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저작 속에서 굉장히 어려운 말을 하나 찾아내요. ‘Sprit'이에요. ‘Sprit'은 우리가 영이라고 하잖아. 이것을 모든 것에 다 사용해요. 나무에도 ‘Sprit'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정령숭배 사상처럼 보이는데, 그러한 개념이 아니야. 번역하기 굉장히 어려운 단어야. 정신이라 번역을 해야 하는데, 아주 독특하고 어려운 단어야. 그런데 그러한 생명을 하게 하는 것, 이러한 ‘Sprit’의 궁극적인 원천은 결국 하나님이 다스리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설명이 있는 거잖아. 그런데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이야기를 해요. “인간으로서 알아야 할 대상이 있다.” 여기에서 Solioquies에서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고, 알아야 할 대상이 뭐냐 하면, 지의 대상이 뭐냐 할 때 첫째는 하나님,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인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이 인간 안에서 ‘나’라고 하는 개별적 인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이 ‘나’라고 하는 개별적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인간 일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으로 같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고 하는 개별적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도움이 안되고, 반대로 ‘나’에 대한 이해가 있어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 ‘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그 다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세계,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 그래서 어떻게 되죠? 이것은 문사철로 대변되는 인문학의 대상이 되는 거야. 문사철이라 그러죠? 뭐지?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변 되는 것. 법, 사회학 모두 여기에 들어가는 거야. 자연 세계, 자연학에 들어가는 거야. 이것은 어떻게 될까. 이것이 인간이 알아야 할 대상이라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는 같이 보겠습니다. 자, 인간의 의무에 대해서 들어갑니다. 그 다음,
이 신학을 통해서는 전체적인 목적을 알고, 인문학을 통해서는 그 목적에 반응하는 인간을 알고, 자연학을 통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에 반응하면서 살 때에 도구들로 사용될 것들을 알아서, 왜냐하면 이 사람이 살아간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 인간들 속에서 ‘나’라고 하는 개별자로서 이 자연세계에서 주어진 자원들을 사용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이잖아. 삶을 산다는 게 먹어야 살잖아. 자연세계에서 나오는 거잖아. 그렇잖아. 삶이잖아. 그러니까 삶 자체가 이 세 가지를 밀접하게 오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느 하나를 배제하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거야. 그래서 내가 신학 공부의 목적이 뭐라고 했죠? 누가 우리 대답할까, 이성호 목사님, 신학공부의 목적이 뭐라고 했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의 교리, 그것이 바로 신학이라. 신학 공부의 목적은 비베레아드데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through Christ, 그리스도를 통하여. in Sprit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게 가장 훌륭한 답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스트리히트가 이야기 했고, 이렇게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야기 했고, 이렇게는 내가 이야기 한 거예요. 그래서 종합해서 내가 이야기 한게 가장 완전성이 높죠. 삼위일체적인 답이라 이거야. 너무 명쾌해. 너무너무 명쾌해. 그래서 마스트리히트가 자기의 책, 맨 첫 번째 조직 신학책에서 신학의 목적을 이야기 했는데,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라고 할 때에 이것은 정신이 번뜩 뜨이게 하는 명제에요. 그게 뭐냐 하면 이제껏 역사 속에서 논의되었던 모든 철학에서 고민하였던 것을 한마디로 해결해주는 거죠.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니까, 아드데움이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결론을 내는 거죠. 그래서 제가 사실은 몇년전부터 에드워즈를 공부하고 나서 철학과 신학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거든요. 멀러의 테재를 공부하고 3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서 긍정적으로 내리는 결론이 뭐냐 하면 철학에 대한 앎 없이, 철학의 도움 없이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말도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에요. 그러니까 종교개혁자들이 철학을 멀리 하고 경계했던 것은 알았기 때문에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알고 경계하는 것과 모르고 경계하는 것은 택도 없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깊이 있는 문제를 가지고 짧은 시간에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들은 진지하게 지성적인 고민을 해야 해요. 이번에도 새벽에 나와서 월요일날 메타피지컬 가르쳐 보니까 우리는 전혀 머리 자체가 정돈이 안 되어 있어. 그러니 이제 말하자면 신학이 담겨지기가 굉장히 어려운 거죠. 여러분,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어려운 책들은 절대로 안 읽는 거야. 그러니까 맨 예화 부스러기나 가지고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게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어쨌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 그 다음에 우리들이 좀더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동물에게는 마음이 없는 것인지, 또 하나는 하나님이 항상 말씀하시면서 영혼을 말씀하시는데, 영혼이 곧 하나님의 형상인지. 퀴리라고 하는 것은 형상 개념에서 어떻게 봐야 하는지..
<김남준 목사님>
우선 동물에게서 마음이 있는지 물었는데, 없다 라고 봐야하는 게 맞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는 지, 정, 의 모든 것들이 함께 만나 이 속에서 작용이 일어나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번 주가 파고 들어가면 굉장히 복잡한 문제에요. 왜 그러냐 하면, 가시고기가 어떻게 하는지 알죠? 결국 자식을 낳아놓고, 암놈은 도망가요, 수놈이 계속해서 부화할 때까지 물질을 해서 부화할 때까지 기다리고, 먹지도 않고 물질을 해서 새끼가 부화할 때까지 외부의 침범을 막아주고, 물질로 계속해서 산소를 갈아줘서 이것이 썩지 않고 고기가 부화하도록 만들어 준단 말이지. 부화한 다음에 이것이 물질을 하도 해서 이게 결국은 목숨을 잃고 쓰러져요. 날개가 너덜너덜 해지게 됩니다. 지느러미가. 그러면 새끼들이 이것을 뜯어 먹고 다시 일주일쯤 살아. 그러면 이제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인간이 자식에게 할 수 있잖아. 안하는 못된 부모도 있지만 하는 부모가 있잖아. 부모가 자식에게 A라는 행동을 할 때에 그 의미를 알면서 하는 거야. 그런데 의미를 알면서 한다고 그렇게 알 수 없는 거야. 프로그램 되어 있는 어떠한 범상에 의해서 우리가 배설작용을 하듯이 그와 유사하게 하는 거라 이거야. 그렇기 때문에 마음 자체를 영혼의 길이라 보아야 되는 거야. 영혼이 길이 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거야. 그러한 종류의 마음은 없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 다음에 그러면 순수하게 그거냐. 그게 아니라 이러한 본성도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거야. 이러한 본능적인 본능 같은 거 있잖아. 이렇게 인간은 이러한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안에 속한 존재이고, 이러한 면은 자연 만물 안에 속한 존재임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거야. 그게 이러한 내용이야.
그 다음에 형상? 마음과 형상? 형상?
<질문자>
형상과 영혼 특히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영혼 구원.
<김남준 목사님>
어, 이것은 하도 정신이 없으니까, 이 형상을 아주 초 간단하게 생각할 것이 뭐냐 하면 영혼 안에 있는 이성의 기능이라는 거야. 이성 이라기보다는 정확하게 지성의 기능. 믿음도 받아들이니까. 지성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이것이 전통적으로 교부들과 개혁자들이 보아오던 형상의 가장 proper한 개념이야. 여기서 이제 좀더 나아가서 논의들이 자연적 형상, 도덕적 현상, 초자연적 형상 이렇게 나뉘어 지긴 하지만, 일단 지성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일단 믿지 않는 사람에는 어떻게 될까요. 그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죽어있는 거죠.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여전히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왜 그러냐 하면, 여기에 이러한 형상이 있다고 쳐. 그런데 죽어 있어. 이것은 살아날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형상이에요. 이것이 살아난다고. 중생이잖아요. 그렇죠? 이것은 이것에 대한 필연성은 하나님만이 아시잖아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보면 이것이 죽어있는 것과 살아있는 것 사이에 가능태로서 되어 있으면 이렇게 살아있는 것으로, 죽어있는 것 안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보잖아.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면 인간이 caritas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사물들을 보는 것 같은 마음으로 본다 이거예요. 그렇게 될 때 죽어있는 이 사람도 지금 여기에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살리시면 다시 살아나게 될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어떤 아름다운 모습을 투영시켜서 볼 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러한 의미에서 이 사랑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영적으로는 죽었지만, 넓은 의미의 이러한 자연적 형상은 아직도 살아있고 또 이렇게 살아날 가능태로서의 형상이기 때문에 이 형상을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써, 넓은 의미에서 이렇게 본다 이거야. 그래서 그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 자체가, 전에 설명했잖아. 칼빈의 경우에는 아주 아름답게 어떻게 인간을 향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caritas의 사랑이 있는 사람이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이 인간의 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사람의 형상을 보도록 만들어 준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 사랑의 그것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이 피조 세계에서 가장 하나님을 닮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일직선상으로 연장선상으로 설명하는데, 칼빈의 독특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해석의 원용을 한 거예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작품속에서 그러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에, 그 안에 형제 이외의 누가 있겠습니까. 형제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될 때에 그 안에 하나님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세련된 형상의 개념으로 설명한 사람이 칼빈이라 이거야. 그래서 늘 이야기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를 잘 이해해야지만, 칼빈을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에요.
그 다음에 보면 밑에 의무가 나오는데, 그 다음 읽어보세요.
<본문 내용>
신자는 교회의 한 지체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다음과 같은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며, 또한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록 불신자로서 아직 그리스도께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인간의 의무로부터 멀어질수록 그의 삶은 죄로 인해 더욱 비참해지며, 고통 가운데 있게 됩니다. 물론 비중생자들이 영혼의 변화 없이 단지 정신활동만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를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의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기억함
첫째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본래적으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게 이제 종교의 씨, 칼빈이 이야기하는 종교의 씨를 이야기하는 것이야.
<본문 내용>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게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김남준 목사님>
이것은 양심과 자연 계시를 통해서 입증되는 되는 것이죠? 그것의 한계는 어디 까지라 그랬지? 자, 우리 지난 시간에 공부했잖아. 곽 전도사. 학생이 뭐한 거야. 질문까지 했잖아, 지난 시간에? 이야기해봐.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기에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기에, 그러나 모른다고 핑계하기에는 불가능하게 마치 분명하게 그것이 바로 종교의 씨, 자연계시의 한계라 이거야. 그래서 외워야해. 메모하면서 외워야해. 외우지 않은 지식은 끈 떨어진 가방이야. 외워야해. 얼마나 설교할 때 좋은데 외우면 쭉쭉 전개해 나가면서, 힘을 얻게 되지. 그 다음 계속 읽어요.
<본문 내용>
비록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들의 영혼이 어두움으로 가득 차고, 생각은 허탄한 데 굴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혼 안에 당신을 향한 기억의 씨를 남겨 두셨으니, 이로써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찾고 그분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 불안을 떨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영혼 안에 심겨진 기억의 씨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자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인간이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마음의 평안이 오잖아. 사람이 사랑 할 때나, 혹은 자기 자신이 집중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이 있다거나 그러잖아. 이때에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 사랑하는 것의 모상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러한 효과가 나타나는 거야. 그러나 이제 사랑의 대상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 그러한 불안을 떨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되고 영원한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거야. 그 다음,
<본문 내용>
인간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지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초기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인간이 참된 행복으로 가는 첫 걸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창조주 하나님의 신성이 남아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교제의 사랑으로 들어가기에 충분치는 않은데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피조물 자체가 지니고 있는 신성의 충만한 아름다움과 영광이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 남아있다 할지라도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눈멂으로 말미암아,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그 아름다움 너머에 있는 하나님 당신과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의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기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성경이 필요합니다. 성경이야말로 인간을 하나님에 관한 가장 분명한 기억으로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인간의 그 기억을 이끌어 내는 것이 종교개혁의 목적이야. Education, 거기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대게 합의를 보는데, educare, 이끌어내다에서 왔을 것이다라고 봐요. 그래서 기억 속에 이미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 거예요. 그것이 교육이에요. 그런데 무엇이 기억되고 있는지를 사람에게 생각나게 해주는 가장 좋은 자극제가 있는데 그게 바로 성경이에요. 성경의 진리 자체는 인간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인데, 죄로 말미암아 망각되어진 것들을 이제 그 생각나게 해주는데, 예를 들면 이거잖아. 몽타주 사진 있잖아. 탁 보고 지나갔어. 이것을 자기 스스로 재연할 수 없잖아. 그때 뭐야 몽타주 사진을 보여 주잖아. 얼굴 모양이 어떻습니까. 얼굴 형체를 보여줘, 수백개를. 저런 계란 형입니다. 입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그러면서 수백개의 입의 모양을 붙여주는 거야. 비슷합니다. 눈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코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머리의 모양은, 그러면서 가장 근접한 것을 찾아내는 거지. 아, 저 사람이에요. 그러한 몽타주 사진이 성경이라 생각하면 돼.
자, 그 다음에 이제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인간의 지성으로 인식하면서 하나님께로 들어가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이 두 가지인데, 결국은 주관적인 인간의 기능의 타락과 지성적인 지식의 기능적인 타락과 피조물 자체가 본랭의 하나님을 들어낼 수 있는 영광을 상당 부분 상실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 다음, 그 다음 사람.
<본문 내용>
2. 알아감
둘째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남겨두신 당신에 대한 기억을 성경의 계시와 이성의 추론을 통해 명료화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보다 분명한 지식을 갖게 되고, 그 지식의 빛 아래서 자신의 존재와 본분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는 것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는데,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있잖아. 제일 중요한 게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거든요. 그게 왜냐하면 들어봐요. 자, 인간이 태어나면 누구든지 간에 인간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잖아요. 없을 수가 없잖아. 그 다음에 이제 나라고 하는 개별적인 지식도 가지고 있잖아요. 태어나면서부터 만나는 숟가락, 밥, 나무, 풀, 돌, 공기 이러한 것들에 대한 자연 사물에 대한 지식도 가지고 있잖아요. 그 모습이 이렇게 쪼가리쪼가리 다 흩어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얘기냐하면 존재의 질서가 난립한 상태야, 마음속에서. 이 존재의 질서는 곧 가치의 질서거든. 이러한 것들이 난립해 있는 상태인데, 여기에서 이러한 것들을 사물을 본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거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그때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자기 자리를 찾게 되는 거야. 이 지식이 으뜸 되는 지식이 되는 이유가, 파편처럼 흩어진 모든 인간과 자기 자신, 사물들에 대한 질서를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야. 그래서 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를 다시 새우게 되는 거야.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생기냐 하면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에 대한 의미를 올바르게 알게 된다 이거야. 그때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인간, 그 다음에 타인 이웃, 자연 사물들 이러한 것 속에서 나는 어떻게 여기에 있나, 그리고 사용해야 할 것과 그 다음에 향유해야 할 것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한 질서가 생겨나게 된다 이거야.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중요하다. 그 다음.
<본문 내용>
하나님을 바로 알 때 그는 우주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자리를 찾게 되며, 자신의 분수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인간이 하나님 자신을 합당한 방식으로 잘 알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삼위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장 분명하게 계시되었으니, 그리스도를 앎으로 삼위 하나님을 알게 될 뿐 아니라 그분과의 교통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아는데 있어서도 성경이 가장 훌륭한 안내서가 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것은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되는 거야. 인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리시는 성경을 썼는데, 성경을 쓰는 펜이 그리스도라 생각하면 되는 거야.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수많은 사연들이 나오는 거야.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원천이 되는 거지.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 그 다음에 성령이시잖아. 이렇게 그리스도에 의해서 인간에게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상세한 계시와 설명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인간에게 전달이 된 거야. 그러니까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계시된 성육신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찾아갈 때,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자,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뭘 뜻한다고 했죠? 두 가지.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에 대해서 안다는 거야. 왜냐하면 이게 시간세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시간세계안에서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우리들이 알게 되는 거야. 속성이라는 것 자체가 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나지 않는 거야. 예를 들면 긍휼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이 있어야지만 이 속성, 하나님이 불쌍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셔야지만, 긍휼이라는 속성이 드러난다. 다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이라고요? 속성과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에 대해서 아는 거예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속성과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이다. 또 다른 말로 이렇게 할 수 있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죠. 지식. 존재에 대한 지식, 속성에 대한 지식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죠.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지식일 것이고, 이것은 선험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이지. 우리가 인간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때에 이것은 속성과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이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 그 다음
<본문 내용>
그러므로 인간은 성경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보여주시는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한 만남을 통하여 그분을 알아갈수록 신자는 삼위 하나님과 사랑의 연합을 더욱 깊이 이룰 수 있습니다.
3. 사랑함
셋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한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그 것에 고착하여 그를 끊임없이 즐거워하고자 하는 마음과 영혼의 움직임이기에,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은 하나일 수 밖에 없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것이 바로 사랑의 한 정의죠.
<본문 내용>
다른 모든 사물들을 향한 사랑은 그 궁극적인 대상을 누리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자기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것은 예를 들자면, 옛날에 어느 가수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 그랬잖아. 설교를 그러한 식으로 하면 안된다 이거야. 그러면 한없는 그 설명이 되는 거야. 이렇게 핵심을 찔러서 모든 요소들을 다 포함하고 어떠한 경우에든지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 드러내야 된다 이거야. 사랑은 눈물의 씨앗입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면 안되지, 이야기 하면 안되지. 그 김명철 변호사가 최근에 책을 하나 썼잖아. 삼성을 다시 생각한다. 뭐라 했냐면, 여러분 목사님들 잘 기억을 해둬요. 절대 분에 넘치는 영광을 받으려고 하거나 그 다음에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은 이익에 눈을 뜨면 안돼요. 그러면 반드시 실패하게 돼. 그 사람이 쓴 책을 이야기 하겠어요. 이건희씨가 생일이었대나, 회갑이었대. 그래서 집안에서 지인들을 초청해서 작은 파티가 아니라 성대하겠지? 집안에 왔으니까 수천명이 모이는 것은 아니고, 아주 친밀한 사람들 모아놓고 파티를 열었대. 방송계에서 누가 유명하냐, 그러니까 아무개가 유명합니다. 와서 사회좀 보라 그래라. 다 아니까 이건희씨가 부르는데 안 갈 사람 어디 있겠어요. 너도 나도 다 가는데, 이건희씨가 나훈아를 좋아한대. 나훈아씨한테 우리 이건희 회장이 이렇게 이렇게 행사가 있는데, 이러한 이러한 시간에 당신 와서 노래좀 불러 달라고. 그러면 왔겠냐 안왔겠냐. 가수들에게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식사 시간에 한잔 마실 때, 포도주가 천만원짜리라고 하는데, 그것은 만약 자네가 가수라면 가겠어, 안가겠어? 가야겠지. 그리고 가면 돈을 얼마나 주겠어? 그래서 전화했더니 전화를 받더니만, 여보시오. 대중가요 가수는 대중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 개인 앞에서 부르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 대중 가요 가수만도 못한 목사들이 우리 나라에 너무나도 많아. 대중 가요 가수는 대중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김대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거지 개인앞에서 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말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대중 가요 가수이지만, 내가 개인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딴따라입니다, 탁 그러는거야. 그래서 김명철 변호사가 그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누가 안오겠어, 그분하고 관계를 가져서 나쁠 것이 뭐가 있겠어. 유명한 연예인, 클래식, 가수, 전부 다 예, 하고 돌격앞으로 했는데 이 사람은, 참 이러한 이야기 들으면서 목사인 나에게도 이러한 기가 있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지. 그러면서 옛날에 전두환 대통령 정권 뒤엎고 나서 줄줄이 가서 예배 드렸지. 누구 하나 우리는 독재자 앞에서 예배 인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그러한 생각을 해보는 거지. 자 그다음.
<본문 내용>
인간의 참된 행복은 자기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본분이며, 하나님을 사라앟지 아니하고는 참으로 이러한 쉼과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넘어가겠습니다. 26페이지.
<본문 내용>
인간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즐거워해야 할 대상과 그 즐거움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대상으로 나뉘는 것이니, 인간이 참으로 즐거워해야 할 대상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사물들이 아니라, 영원히 있으며 불변하며 완전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 이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원래는 없었으나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죽고 소멸하여 결국 무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며 그것을 즐거워하고자 하는 인간은 항상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상실하게 되므로 끊임없는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즐거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용해야 할 대상이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즐거워하다는 뭐냐하면 누림이에요. 누림.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이제 더 이상의 목적이 없는 최종적 사랑의 상태를 가리키는 거예요. 누림이라는 것. 누림. 그래서 각주 5번에도 나오죠.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을 끊임없이 제시하지만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버린다.” 이게 무슨 뜻이죠? 결국은 영원한 하나님 이외에는 모든 것들이 영원한 사물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기원과. 여기서 하나님이라면 여기에 어떤 사물이 있다고 쳐요. 사물이 있잖아. 그래서 사랑하게 되잖아. 이것을 사랑하게 되는 원인도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그리고 이것을 사랑하는 목적도 하나님으로부터 가게 될 때, 이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이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사라지게 되거나 없어져도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것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고통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도 이러한 것에 속하는 거잖아.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라, 우리가 사랑하자. 사랑하되 그 분 안에서 사랑하자꾸나.” 그렇게 우리를 부르는 거야. 그 분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면, 우리 중 누구도 잃어버릴 것이 없나니,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수없이 하등한 거야. 이게 목표가 되게 되면 끊임없이 인간은 출렁거리게 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되면 안되는 거야. 이것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 때문에, 원인, 목적. 기원, 그 다음에 목적. 기원, 목적 이렇게 해서 끊임없이 바뀌어 끼고 사라져도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것은 오히려 있고 사라지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죠. 어떤 경우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구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구나를 깨닫게 되는 거죠. 변화되는 것을 통해서 아, 하나님은 진짜 불변하는 구나. 배신을 당하면서, 아, 하나님은 신실하시구나. 정반대의 것을 끊임없이 깨닫게 되는 거야. 또 동일한 것들을 깨닫게 되는 거지. 이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아, 사람이 이렇게 사랑을 하니 이 사람의 사랑이 원인이 되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더 많이 사랑하실까. 동의적으로 혹은 동류적으로 그리고 반의적으로 혹은 반류적으로 서로 유비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든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거야. 이러한 구조로 가게 되는 거야. 그러면 오히려 수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많은 것들이 아름다운 거야. 아프긴 해도. 왜냐하면 하나 하나 나타날 때마다, 잘 들어요. 하나 하나가 나타날 때마다 이 속에서 나타나는 관계의 형상들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경험들을, A는 A를 가르쳐주는 거야. 이것이 사라질 때마다 alpha라고 하는 경험은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A' 라고 하는 경험을 나타내 주는 거야. 그러니까 이것이 어떠한 것들이 지나가고 사라지던지 간에 이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자기에게 온 하나님에 대한 앎의 원천으로 돌아가게 하고, 목적을또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거야. 그래서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불변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거야. 악하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고통받기 때문에 지복이신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고, 결핍이 있기 때문에 풍족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또 무엇인가 공급하게 되면, 넉넉함 때문에 이 넉넉함을 가져다 주신 원천적인 넉넉함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이렇게 끊임없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야. 이해가 돼? 그다음.
<본문 내용>
인간에게 이러한 사랑의 질서를 가장 잘 가르쳐 주는 안내서가 성경입니다. 이러한 삶을 향한 구체적인 생활의 법칙이 무엇인지,
<김남준 목사님>
여기서부터 성경 이야기가 나오죠. 그래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그러한 사랑의 질서를 가르쳐 준다. 악이 뭐예요? 악의 형이상학적 본체가 뭐예요? 악이 뭐냐니까. 악. 선의 반대, 선의 결핍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죠. 인간 속에서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는 evil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외워놔요. 입력해 놔요. 그릇된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것. 이게 바로 evil이에요. 그릇된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것. 오르도 아모리스. 그릇된 사라으이 질서를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이에요. 선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 깨어짐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자기가 깨뜨려질 때에 무엇과 무엇에 대한 깨뜨려짐이지? 자기의에 대한 깨어짐, 죄에 대한 사랑의 깨어짐. 두 개에 대한 깨어짐이죠? 이 두 개가 나뉘어 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두 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거든. 자기 의도 사실은 사랑의 또 다른 측면이야. 왜냐하면, 사랑하는 것이 자랑꺼리 이기 때문에,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은 결국엔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야. 죄에 대한 사랑이야. 이게 깨뜨려져서 결국은 올바른 질서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거야. 그것이 바로 성화야. 자, 기독교 교육의 최고의 목표가 뭐라고 가르쳐줬지? 뭐라 그랬어요? 그것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면 뭐라고 그랬어요? 인간의 의무와 관련해서. 기독교 교육과 모든 목양, 모든 설교,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화와 관련되어 이야기하자면, 인간에게 무엇을 심어주고자 하는 거야? 중생과 모든 회심까지 다 포함하는 거야. 모든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 모두를 포함하는 거야. 뭐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형상 회복. 아, 이게 무슨 얘기인가 하면, 틀린 것은 하나도 없잖아. 그리고 맞는 것도 하나도 없잖아. 이것은 인간의 의무와 관련하여 이야기 하자고 했잖아. 결국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 실행과, 구원 실행인데,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해서 실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이바지 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 목양이잖아. 인간을 타락에서 구원하여서 참 사람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인데 이게 어그러진 인간을 돕기 위해 목양을 하는 거 아냐, 결국엔. 그러면 궁극적으로 마지막 목표는 뭐냐하면, 창조의 목적이지. 그것인데 설명하면 인간론과 관련지어서 생각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메모를 해, 적어.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가 그가 좋아하는 성향이 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결국은 이 모든 인간의 구원과 목양의 마지막 목표에요.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 있는 것이지.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야 할 인간의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 그 사람 자신에게도 기쁨의 성향이 되는 것, 그것이 결국은 마지막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거야. 그리고 목양은 바로 그 일을 돕는 거라 이거야. 방해하는 요소가 너무나 많잖아. 그러한 상황속에서 분투하면서 살아가고 목양을 하게 되는 거지.
<본문 내용>
B. 인간의 구원 : 사랑의 완성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구원은 곧 하나님 사랑의 완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구원은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창조의 지혜를 따라 인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지혜는 개별적으로 인간존재를 향한 지혜이지만, 그 지혜는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계획과 나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적으로는 모든 창조세계의 일부분이지만, 도덕적으로는 그 모든 창조된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돌보고 가꾸도록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창조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이 필요합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다 알지 못하는 사랑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앎이 필요하고, 또 그 지혜를 창조세계에 구현해 갈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지혜와 사랑을 각 피조물 하나하나에 대하여 적용하고,
<김남준 목사님>
똑같아요.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기 계시잖아. 하나님이 여기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무엇과 무엇으로 창조하셨다고 했죠? 하나님의 ‘영원한’이라는 단어를 항상 붙어야 해. ‘영원한’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시잖아? 이것은 지성에 해당되는 거고, 이것은 의지에 해당되는 거야. 사랑 그자체가 의지이거든.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을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로 본 거야. 의지의 나타남, 이것이 바로 창조 세계에 나타난 영광이라 보는 거야. 이러한 지식과 사랑으로서 모든 창조 세계가 창조되잖아. 이렇게 다양하게 창조가 되잖아요.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인류가 있고, 또 뭐가 있어요? 인류도 있고 자기 자신도 있고, 그 다음에 영혼에 대한 앎도 있고, 자연 세계에 대한 앎도 있고 등등이 다 있잖아. 그런데 이제 이러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어쨌든 인간이 사용하는거 아니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경우에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해요. 인간, 즉 덕 좋게 이야기 해서 인간의 영혼이 결국에는 도구인가. 도구인가 아니면 목적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해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한 도구인가, 목적인가를 고민해요. 처음에는 이쪽을 택하게 돼요. 철학에 많이 기울여지죠? 나중에 이쪽을 택하게 돼요. 그러면 인간의 목적이라 할 때 이것은 분명하게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불멸성과 관련지어서 봐야 된다 이거야. 올바르게 해석을 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거야. 오늘날 이야기하는 인도주의적인 사랑 그것이 목적이다 그러한 뜻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참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안에 포함된다 그렇게 보는 거야. 그때에 이것은 목적으로서의 기능을 본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어쨌든, 이렇게 많은 것들이 대부분 사용되어 지잖아. 여기에 인간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는 인간이 이렇게 있어서 이 인간이 이제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신 것들을 이 안에서 다시 수렴해서 이것들을 사용하는 거죠. 그래서 이것들을 새로운 질서로서 이것들을 토해 놓는 거야. 새 질서. 새 질서로서 이것들을 정돈해 내는 거죠.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선한 질서들을 만드는 거야. 사람이든지 사물이든지 간에 이러한 일들을 하기 위해 인간이 지음을 받고 능력없는 인간을 구원해 주신 것인데, 이러한 것들을 함에 있어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지혜와 그 다음에 뭐지? 사랑이란 말이에요. 이것은 결국 지성과 관련이 되고 이것은 의와 관련이 돼. 그런데 지성과 관련된 근본을 뭐라고 하죠? 지혜의 근본이 뭐라고요? 그렇지 하나님을 향하여 경외하는 거야. 경건해 가는 거야. 하나님을 경배하고 두려워한다. 핵심이 뭐야, 이게? 두 가지가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끌리는 사랑이에요. 이것이 바로 지혜에요. 그리고 이것이 사랑. 이 두 가지가 계속 주어지게 되는 것이지. 이것이 결국은 우리 열린교회 목회에서 계속적으로 되어 왔던 커다란 두 기둥이 뭐지? 객관적인 진리와 영. 목양에 있어서 커다란 두 가지 뭐지?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 이러한 식으로 표현하지. 지식과 성령. 다 이렇게 두 기둥이 나아가는 거야. 두 기둥이 이렇게 이렇게 연결이 되고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거야. 창조의 하나님의 창조 세계, 그 자체가 둘에 의해서 이어지는 것이고, 이 둘의 나타남이 세계관이라 이거야. 이것들이 목양에서나 예배에서나 기도에서나. 기도에서도 나타난다 이거야. 율법의 깨달음이 없는 기도는 가증함이라. 그러니까 정확하고 객관적인 지식의 빛이 있고, 그리고 자신이 깨달아야 되는 거야. 진실해지는 것도 마찬가지잖아.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이 있고 나를 거기에 부합시켜야 되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할 수 있는 힘을 성령이 주시는 거잖아. 그래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진실해 질 수가 없는 거야. 자기 자신을 통로할 수는 있는데, 진실해 질수는 없는 거야. 그렇게 해서 이 두 개의 기둥이 계속 기도, 설교도 마찬가지잖아. 설교의 중요한 중대한 두 가지 직무가 뭐야? 진리를 올바르게 가르치고 그 안에 영으로 역사해서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 그거잖아. 이 두 가지 기둥이 농축된 형태로 기독교의 모든 사역속에서 스며들고 심지어 우리 자신도 이 두 가지가 스며드는 거예요. 그래서 정확한 교리의 지식, 그리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역사하시는 은혜 이렇게 두 개의 기둥이 나아가는 것이 전체적인 모상이라 이거야. 이것을 성육신 안에서도 보여주시는 거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역시 진리와 은혜안에서. 성육신 자신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 두 가지의 확신이야. 그러면서 구원사 전체, 아니, 세계 역사 전체 자연 과학을 풀어가는 모든 원리가 바로 이 두 개의 기둥이야. 객관적인 진리와 주관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영의 역사, 이 두가지를 가지고 쭉 풀어가는 거야. 모든 게 그렇게 되는 거야. 자, 그 다음
<본문 내용>
또 그 모든 피조물들을 합당한 지혜와 능력으로 질서 있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교통을 통하여 인간의 본분을 다 할 수 있는 자원을 공급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교통이 있어 이러한 자원들을 공급하셨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자, 그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 사람.
<본문 내용>
영적인 의미 : ‘아버지와 그리스도를 아는 것’
첫째로 영생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4).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 신애 사상의..
<김남준 목사님>
신애 사상, 신애 사상이 그게 뭐냐 하면, 신애. 하나님 사랑. 그 다음.
<본문 내용>
신애 사상의 핵심이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은 곧 그분에 대한 지식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고유한 의미와 적용된 의미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고유한 의미는 영원히 사는 것이에요. 죽음의 기운이 침투하지 않는, 침투하지 못하는 영원히 사는 것, 끊임없는 생명의 솟아남, 그것이에요. 제가 6살 때 치과에 가고 48년 만에 치과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2년 만에 치과를 갔는데 의사가 그래요. 몰라보게 치아를 잘 관리하셨다고. 그런데 이러 이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잇몸이 계속 내려 앉아. 그래서 이뿌리가 자꾸 뒤에서 드러나. 그래서 오면서 그랬어. 이제 죽음의 기운이 이빨에도 서서히 스며드는 구나. 영생은 이러한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게 하는 거야. 그래서 이러한 영생에 가까울 때에 모든 것이 다 아름다운 거예요. 자매들은 언제가 제일 아름답지? 곽 전도사, 몇 살 때 쯤이 제일 아름다워? 우리 이슬이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 18, 19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 세수만 하고 와도 얼굴이 뽀얗고 예뻐. 그런데 나중에는 변장을 안하면 볼수가 없는 거야.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가서 그래. 몇 년전에 간사 수련회를 갔는데, 김기성 형제가 밤중에 도착해서 새벽에 모이니까 자매들이 세수하고 얼굴에 화장을 하나도 안하고 쭉 모였는데 아침에 심각하게 새벽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목사님, 왜. 저 앞에 있는 아줌마들 누구에요? 죽음의 기운을 화장이 가려준다. 화장품이 영어로 뭔지 아니? cosmetics에요. cosmos에서 온 거예요. 질서야. 질서 없는 얼굴, 질서 있는 얼굴. 얼굴에 질서가 없으면서도 화장을 안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야. 오만한 자는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지. 그래서 이제 읽어봐요.
<본문 내용>
인간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로서 죄와 그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시간 세계 안에서 창조된 당시의 완전삼을 상실한 채로 늙어가고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이미 영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것은 영생, 영생 아니에요. 인간의 수명을 계속적으로 연장시킬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싫어. 왜냐하면 뇌 세포같은 것은 계속 파괴되어서 세포가 다른 것은 다 살아나는데, 뇌 세포는 한번 죽으면 살아나지 않아요. 그래서 뇌 세포가 계속 파괴되어서 그 지능이 열등해 지는 그러한 몸을 끌어안고 생리적으로만 오래 산다고 할 때, 삶의 질이 어떻겠는가. 그러한 것은 영생이라고 볼 수 없다 이거야.
<본문 내용>
영생은 완전함 속에서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당연하죠. 완전한 생명의 끊임없는 넘침. 그것이 바로 영생이에요.
<본문 내용>
b. 적용한 의미: 삼위와의 교통을 통한 공급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것이 개혁파 스콜라주의에서 논의 많이 되었던 것인데, 하나님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보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생명이라고 하는 자체는 무엇인가 하면 소멸되거나 멸절되거나 죽지 않도록 계속 어떠한 영향력과 기운이 생명적 요소가 계속 발산되는 것을 의미하는 거거든요. 그것이 다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의존해서 생명을 부여 받게 되는 거잖아. 그래서 다른 모든 것들의 생명은 전기와 같아. 전원이 차단되면 없는 거야. 하나님 자신은 이렇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명력이시면서 이 생명력을 누구에게로부터 공급받지 않고 당신 자신이 이 생명이 원인이 되셔서 계속해서 솟아나시는 거야. 이 생명이 아니시라면 사랑이실 수 없는 거야. 왜냐하면 사랑 그 자체가 끊임없는 이러한 작용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은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거죠. 그래서 인간의 영혼이 좋은 상태가 하나님의 이러한 자가성, 자가성을 갖는 거야. 가는 가동한다 이거예요. 자가성을 담는 거야. 어떻게 되냐 하면 이 속에서 사랑의 에너지가 떨어지면,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것도 없어. 제가 가장 힘들 때 우리 집사람한테 나를 즐겁게 하면 즐거워할 때 최악의 경우 쓰는 말이 그래, 여보 나는 가고 싶은 데도 없고, 만나고 싶은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어. 가장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이지. 이 안에 에너지가 넘치면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거야. 그래서 선교에 대한 생각까지도 뻗쳐 나가는 거야. 교회는 그러한 에너지를 계속 사람들에게 불어 넣어 주어서 진짜 제대로 된 영생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인데, 그게 바로 <목자와 양>에서 배운 풍성한 삶의 핵심이 그 생명의 충만이 넘쳐남이야. 그러면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이러한 하나님의 자가성을 상당히 많이 본뜨는 거야. 이것은 하나의 느낌이지. 심지어는 그러한 생명력을 누구로부터 공급받는 거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 받죠. 그런데 이상한 게 뭐냐 하면, 찬송을 부를 때 뭐라 하는가 하면, 내 안에서 샘 솟는 기쁨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자가성이에요. 자가성. 자가성. 이렇게 써요. 가동한다고 할 때 쓰는 거예요. 이 속에서 내 안에서 계속 샘 솟는다고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내 안에서 샘 솟는다고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을 어떻게 해요? 그게 바로 풍성한 삶의 본질이다 이거야. 그 다음.
<본문 내용>
둘째로는 영생의 적용한 의미는 삼위와의 교통을 통한 공급입니다. 영생은 단지 시간 세계 속에서 수학적인 길이의 끝없는 연장이 아닙니다. 영생은 영원히 살되 다른 존재의 방식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김남준 목사님>
거기 줄쳐요. ‘영생은 영원히 살되 다른 존재의 방식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몸이 계속 오래 사는 것 그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산다. 그 다음에.
<본문 내용>
무엇보다 이 영생의 근거는 불멸하도록 창조된 인간의 영혼 안에 있습니다. 거기서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불멸하도록 창조하셨으며,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후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은 계속됩니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영혼으로 완전성을 잃어버리고 본래의 아름다움에서 멀어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완전하게 고치셔서 영생불멸 하게 하십니다. 모든 영혼이 그 본래의 아름다운 완전함을 회복하는 것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각하며 사랑하게 된 영혼들만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통해 그 완전함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구원받은 이후 성화의 과정과 마지막 영화를 통해 그 완전함에 이르게 하시고, 영원히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생은 이러한 세계를 향하여 유보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죄와 슬픔이 가득하고 창조의 질서를 잃어버렸지만 이 시간 세계 안에서도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적용한 의미에 해당됩니다.
영생의 적용한 의미의 핵심은 삼위와의 교통을 통한 자원의 공급입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연합을 통한 생명의 누림이며, 인간 존재에 필요한 신령한 은혜들을 공급받음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내적 자원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교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혼을 향해서는 직접적으로 이런 신령한 자원을 공급해 주시지만, 일반섭리 속에서 그 삼위와의 교통을 반영하게 하셔서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새로운 질서 속에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공급하십니다.
이렇게 두 자원으로 육체와 영혼의 필요를 채우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창조의 목적에 맞게 도덕적으로 통치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서 창조하신 세상을 돌보도록 부르셨다면 그 일의 성취를 위한 자질들과 능력, 도구들을 주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창조 목적을 따라 존재하기 위하여 자원을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는 이러한 자원의 고갈과 공급의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반대로 영생은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를 통하여 그분의 생명과 이러한 자원들을 공급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도를 따라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도록 그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존재와 삶 속에 구현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삶을 살게 하는 삼위와의 교통이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를 발견하고 그 지혜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피조세계 안에 완성하고 또 즐거워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산다는 뜻이에요. 자, 그 다음에 이제 영생의 도구. 그 다음 사람.
<본문 내용>
둘째로, 영생의 도구입니다. 영생은 지식과 사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처음 시작은 중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지식과 사랑을 심으심으로써 시작되고,
<김남준 목사님>
중생과 도입되는 두 가지 변화가 뭐라고 했지? 이신론적 변화와 인식론적인 변화. 그 본질이 뭐야?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인식능력을 회복시키시는 것.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지? 존재론적인 변화. 그 본질이 뭐지? 성향의 변화. 어떤 변화지? 자기 사랑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방향을 변화시키는 것. 그래서 없던 사랑의 성향이 인간에게 주어지고, 있던 사랑의 성향이 파괴되는 것. 그래서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사랑의 성향이 방향을 바꾼다는 것. 성향이 바뀌면 존재도 바뀌게 되는 거야. 존재가 그 존재가 아닌 거야.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할때에 핵심적인 의미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인간의 성향이 바뀌게 된 것을 의미해. 그 다음.
<본문 내용>
이후에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통도 지식과 사랑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과 그 지혜를 알고, 은혜를 통하여 사랑으로 감화 받음으로써 영생의 실재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은 이 둘을 소유하는 것이고 성화는 그 지식과 사랑의 성장이며,
<김남준 목사님>
거기 줄 치세요. 영생은 이 둘을 소유하는 것이고, 성화는 그 지식과 사랑의 성장이며, 영화는 이러한 지식과 사랑의 최종적 완성이다. 영은 이 둘을 소유하는 것인데, 중생은 이것이 시작되는 것이고, 성화는 이것이 성장하는 것이고, 영화는 그것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정리하면 돼. 중생이 빠졌는데, 앞에 나오지만 심기는 것, 이러한 지식과 사랑이 심기는 것, 성화는 그것이 성장하는 것. 영화는 그것이 완성되는 것. 그 다음
<본문 내용>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자기 밖의 존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록 창조되었으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창조의 지혜를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랑의 본질을 인간에게 부여하셔야 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러한 사랑이 뭐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세 본성. 그 다음에
<본문 내용>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기사랑에 빠진 존재가 되었으니, 인간은 이러한 사랑의 본성을 따라 참다운 사랑의 대상을 찾기에 목마른 자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지순의 충만한 사랑이 아니면 공허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핵심은 지식과 사랑이며, 신자의 삶은 이 지식과 사랑을 완성해 나갑니다.
<김남준 목사님> 거기 줄 치세요. 중요한 결론이에요.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사랑안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히례를 구현하는 존재로서 이 지식과 사랑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것이 곧 영생이다는 것이죠. 그러면 목회적으로 어떻게 해야 겠어요? 두 가지에 충실하도록 구현해 나가야 겠죠? 그 다음에.
<본문 내용>
C. 신자의 삼위일체적 삶
인간의 행복은 소유에서 옵니다. 시간에 매여 사라지고 소멸하거나 변전하지 않으며, 상실의 두려움이 없는 또한 악이 없는 완전하고 영원한 선, 그것을 소유하고 누림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유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 온전함을 잃어버린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신자의 영혼은 사실상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 있다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는 중생을 통하여 전적으로 변화되었고 그의 영혼의 힘과 경향성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여 사랑하는 질서로 재편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자안에도 잔존하는 죄성이 있어서 끊임없이 영혼의 순전함을 위협합니다. 그리하여 그 영혼이 온전함을 잃어버리게 하고 또한 중생과 함께 받아들였던 사랑의 질서들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합니다. 끊임없는 자기사랑과 육욕들이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삼위일체적 삶이 필요합니다.
1. 회개함
첫째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자신이 지은 죄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의 전향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그 죄를 싫어하며, 배향하였던 하나님께로 전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항상 자기 깨어짐의 경험을 동반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된 부패성을 발견하고, 그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자신을 미워하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려는 믿음은 갖는 것, 이것이 회개의 핵심입니다. 이를 통하여 신자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키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안에 합당하지 않은 사랑의 질서를 재편하게 됩니다.
이러한 회개는 그의 영혼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어 순수한 지성을 갖게 하여, 참으로 사랑하여야 할 것과 단지 사용하여야 할 것들을 옳게 분별하게 합니다. 감각적 사물의 아름다움에 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판단을 따라 이 둘을 구분하여 가치 없는 것들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이제 두 번째 단락에서는 회개가 지성에 영향을 끼치는 거예요. 순수 지성에 대한 설명을 <도덕적 통치> 옆에다 갖다 놓고, 뒤져서 찾아내도록 해. 자 그 다음에.
<본문 내용>
끊임없이 가치 있는 것들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과 삶을 정향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정향, 그래서 세 개의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배향,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이 돌이켜 서는 거예요. 그것을 뭐라 하는가 aversio라 하죠. 이러한 인간이 돌아 서는 거야. 그것을 전향이라 이야기 하잖아요. 이것을 회심이라 이야기 해. conversio. 그 다음에 이렇게 되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에는 강한 힘이 필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잘 봐. 여기 하나님이 있잖아. 여기 인간이 있고 이렇게 이렇게 가. 이게 배향의 삶이야. 배향의 삶을 이리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겠지. 이러한 힘이 하나님의 신적 힘이 작용하는 거야. 이것을 이제 개혁파 정통신학에서는 physical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물리적인이 아니라 힘적인이야. 영혼에 가해지는 힘적인 작용을 통해서 이게 이렇게 해서 배향하던 사람이 이렇게 전향을 하게 되는 거야. 여기에서 우리들이 회심이라고 부르잖아. conversio. 자 이렇게 됐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여기에서 이 놓여있는 상황 자체가 삶의 상황이 세상이야. 세상이 유혹하는 것도 힘이고, 핍박도 힘이고, 강한 힘이 가해지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게 이렇게 못살게 하는 거야. 그런데 이 사람 안에 있는 유전자도 남아 있어. 남아있는 유전자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등지려고 하는 자기 사랑의 유전자야. 자기애의 유전자, 이것에 의해서 이렇게 살도록 계속해서 힘으로 작용하는 거지. 그러면 이러한 힘의 작용에 방해를 받지 않고 올곧게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해서는 이 자체가 끊임없이 공급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거야. 이것이 실제적으로 사랑의 힘이라는 거야. 이것들이 영원안에서 끊임없이 가해지지 않으면 이러한 길을 따라 살수가 없는 거야. 생각해 보세요.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 오는데, 사람이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큰 힘이 필요하지. 굳건한 힘이 필요한 거지. 엄청난 힘이 필요한 거야. 그래서 올바르게 가로 막는 것을, 나는 이제 라틴어에는 적당한 말이 없는데, 정향이라고 해. 이게 이제 일관성 있는 성도의 삶. 정향의 삶이란 거야. 이러한 정향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의 빛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이 계속해서 인간에게 주어질 때 그러한 힘으로써 정향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야.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지식의 밝은 빛과 은혜의 강력한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이러한 회개의 실천은 지상에서 신자로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행해야 할 것이니 이는 신자가 비록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거듭나고 새로운 본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옛사람을 짊어지고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구현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방해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통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자신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회개는 기도 속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를 부복하는 진실한 기도 속에서 창조주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스스로에게 행동으로써 상기시키는 것이며, 그 앞에서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신의 죄와 불결을 발견하고 그것을 슬퍼함으로써 그의 영혼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고개를 돌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참회의 기도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는 전진하고, 그분을 등졌던 길에서는 돌이키게 되는 것이니, 한 인간이 회개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2. 쇄신됨
둘째로, 쇄신됨입니다. 이는 중생을 통하여 새롭게 된 영혼이 자신에게 고유하지 않은 것에서 구별되어 영혼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의 성화에 있어서, 이것은 진실한 회개의 분리되지 않는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구원하신 신자들의 영혼을 끊임없이 아름답게 하시어 당신이 처음 창조하신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으니 인간존재 자체가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라면, 그 아무것도 아닌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모든 외적인 영화와 영광이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인간 전체의 아름다움은 무엇에 대한 아름다움이라고? 영원의 아름다움. 그리고 한 인간 존재의 가치는 무엇에 의해 결정된다고? 선한 의지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래서 목회하면서 현혹되지마. 좋은 학교 나온 거, 돈 많은 거, 그 다음에 무슨 사회 특수 직에 종사하는 거, 이러한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이 현혹되면 안돼. 본질을 볼 수 있는 마음이 목회자에게 있어서 그러한 사람들이 일부러 다가오게 하면 안되지만, 그러한 마음이 있어서 사람들이 사람을 바라보는 또 다른 견해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거야. 다시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무엇에 대한 아름다움? 영원의 아름다움. 한 인간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 올치 잘했어. 그 다음
<본문 내용>
a. 쇄신과 영혼의 아름다움
영혼의 쇄신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니 하나님에게 있어서 인간존재의 가치는 영혼과 정신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쇄신, renovatio라는 말이 나오죠. renovation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오는데, 이건 뭐냐하면 없는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덕지덕지 붙은 것들을 떼어 냄으로써 원래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최대한의 생명과 완전함을, 최대한의 생명을 나타내고, 완전함을 향하여 발전되도록 하는 그것이 쇄신의 목적이에요.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과 세계의 목적을 구현하고 주님의 본부를 따라 창조세계를 가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가 없이 영혼만 있는 존재를 인간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육체는 벗어버릴 육체이며,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모두 완성된 그 날에 우리들이 입을 육체는 이렇게 죄와 부패, 결핍과 고통에 종속되는 육체 아닙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것이 우리가 육체를 미워한다고 할 때, 육체가 물질이라는 이유 때문에, 잘 정리해놔요. 인간이 육체를 미워한다 그럴 때 그 육체를 미워하는 이유가 물질이라는 이유 때문에 미워하면 안돼. 거기에 붙어있는 죄성, 그것 때문에 미워해야 해. 그것과 결별지을 수 없는 육체의 속성을 미워하는 거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 세계 때문에, 모순이 어디에 존재하냐 하면, 인간이 육체를 미워하는데, 이것이 플라톤이 생각했었던 것처럼 물질이기 때문에 만약에 미워하고, 이것이 영을 제한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것을 미워한다고 하면 이것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물질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된다 이거야.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영혼이 주이지만, 영혼이 주된 것이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은 총 포괄적인 사랑이어야 된다 이거야. 육체와 영혼을 아우르는 사랑이어야 된다 이거야. 그때 진정으로 그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 볼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물질의 세계 이 자체는 아주 아름다운 것이라고 봐야 되는 거야.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과 아름다운 속성을 이 피조 세계 속에 새겨 놓으신 것, 그러한 점에서 우리 육체도 아주 소중한 거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봐야 하는 거야. 물질 자체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야? 사라져 간다는 것 자체에 물질은 아름다움이 있는 거야. 다만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 만큼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냐 생각할 때에 불멸하는 영혼이나 영혼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불변하신 하나님과 가치를 비교해가면 된다 이거지. 그러한 점에서 잠재적인 가치를 기억해야 된다는 거지.
<질문>
궁금한점이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모양이 바뀌었던 것인데 단지 나중에 영광의 몸으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활용하여서 만들어내실 것이다. 육체 안에도 죄성이 있고 벗어버릴 육체이지만, 어짜피 영혼도 완전한 영혼이 아니라 죄성이 있는 영혼이기 때문에 모든 죄성을 육체에게만 귀속시키고 영혼은 죄가 없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
<김남준 목사님>
우리가 문제가 되는게, 항상 terminology 문제가 되는게 그래서 우리들이 육체라고 이야기 할 때, 이것을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물질로서의 육체와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인간의 영혼 안에 깃들여 있는 순수한 영의 요소와 대치되는 개념으로서의 그 영혼의 부패성을 함께 이야기하는 거야. 육체라는 말 그 자체가 함께 들어있는 거야. 그 두 개를 같이 이야기해야 되는 거야. 항상 용어를 사용할 때는 terminology를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것은 한정을 짓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야. 우리들이 성경적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육에 속한 것은 육이요, 영에 속한 것은 영이라. 육신을 좇는 자는 그렇게 나오잖아요. 육신을 좇는 자는 죽을 것이요 나오잖아. 이것은 단순한 물질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거든. 그러면 왜 그렇게 이야기 하는가 하면 잘들어요. 왜 그렇게 설명하냐 하면 영원 안에 있는, 개혁파 정통 주의자들은 영원 안에 있는 기능들을 이렇게 나눴거든, 우등한 기능과 열등한 기능으로 이렇게 나눴어요. 이렇게. 우등한 기능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등등의 진리를 아는 기능, 초자연적 기능이라면, 먹고 싸고 더 좋은 것들을 보고 싶어하는 이러한 것들은 열등한 것들이잖아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의 몸이 이렇게 있을 때 육체가 이 열등한 기능이 육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거야. 왜냐하면 짐승도 배고프면 먹고 싸잖아. 짐슴도 욕구를 느끼잖아. 짐승이 욕구를 느끼지 않으면 뭐, 움직이겠어? 욕구를 느끼니까 사냥도 하는 거잖아. 육체와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 거야. 그러면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감화를 받으면서, 이 기능이 이 기능에 의해 침범되지 않도록 순수하게 보호되고 이것에 의해서 이러한 것들이 통재가 되어야 해. 이것이 바로 육신을 따르지 않는 삶이야. 그런데 이러한 기능이 깨뜨려지면, 육신을 따르는 삶을 사는 거거든. 그러니까 육신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러한 것들을 포괄해서 단순하게 물질이라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실은 물질과 영혼이 확연하게 구별이 됩니까. 물질은 존재론적으로는 물질 안에 인간의 영이 섞일 수 없기 때문에 확연히 구별이 되죠. 우리의 영혼은 머리카락이나 콧구멍이나 살 갖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이 영혼이 서로 작용한다 라고 할 때, 그게 나누기가 굉장히 어려워지는 거죠. 그러면 뭐냐 하면, 예를 들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작용이잖아. 배가 안고파. 밤새도록 기도해도 힘이 안 들어. 이것은 육체적인 작용이잖아. 이게 어떻게 구분이 되냐 이거야. 어떻게 구분이 되. 막 흐른다 이거야. 그러니까 여기에서 육신이라고 이야기할 때 성경에서는 할 수 없이 이러한 개념을 포괄해서 이야기 하게 되는 거라 이거야. 그래서 육신에 속한 지체를 땅에 속한 지체를 끊임없이 죽여라. 그 지체라는 말도 육신에 속한 지체라고 하는 것이거든. 이러한 욕망이 일어나는 이러한 열등한 영혼의 작용 자체가 물질인 이 육체의 작용과 밀접하게 동물적 작용과 연결되어 있는 거라는 거야. 이것을 이렇게 지혜롭게 보는 거지. 그러면 만약에 영원한 것이냐 문제가 나왔는데, 영원하죠.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물질은 불변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물질의 총량은 불변이야. 물질의 총량은 불변이야. 물질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물질 보존의 법칙이잖아. 원소에서 다시 뭉쳐져서 가시적인 사물로 사물에서 다시 분해되어서 다시 원소로 이렇게 회귀할 뿐이지, 총량은 변하는게 아니에요. 그러면 이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럴 뿐이지, 우리가 뭐 죽어서 뼈 가루가 되어서 다 없어져도 원소가 남아있는 거죠. 하나님께서 모으셔서 다시 물질의 몸을 창조하시고, 그 물질은 하나님의 덕 입음으로 말미암아 불변하게 되는 거죠. 그때에도 정확하게 물질이죠.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러한 물질은 아니죠.
<질문>
영혼의 우등한 기능은 죄로부터 자유로운가.
<김남준 목사님>
자유롭지 않고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니까.
<질문>
영향을 안 받더라도, 그 자체 그 자체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이 심겨져 있다라고 봐야 하는데,
<김남준 목사님>
그럴 수 없지. 죄의 영향은 <죄와 은혜의 지혜> 교리에서 이야기 했잖아. 죄의 영향은 총제적이야.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야. 이렇게 벗어날 수 없는 거 이거지. 문제는 뭐냐 하면, 우등한 기능의 죄가 미치는 방식과 열등한 기능의 미치는 방향이 다르다 이거지. 무슨 얘기인지 알죠?
<질문>
성경에서 말하는 사르크스(σὰρξ, sarx), 육체라고 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소마(σώμα, soma)가 아니라, 정욕과 관련된.
<김남준 목사님>
그렇게 쓸때도 있고 안 쓸때도 있어. 예를 들자면, 이렇게 되잖아. 이게 예수 그리스도에서 이것을 쓰거든. 그때에는 죄와 상관이 없는 거야. ὁ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와 상관이 없는 거야. 대부분의 다른 한 인간들에게 사르크스(σὰρξ, sarx)하면, 함께 맞물려서 이야기하는 거지. 육신이라고 할 때에 마지막으로 부활 할 때 회복되어야 할 육신이라고 할 때는 사실은 이러한 육신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죄로 말미암는 이러한 부정적인 작용과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의 그러한 물질 상태라고 봐야 되는 거죠. 그때에 그 물질 상태는 지금의 물질 상태와는 현저히 다르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보면 알 수 있잖아요. 그러한 종류의 물질일 것이다라고 보는 거죠.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신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날마다 그 영혼이 쇄신 되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영혼의 쇄신으로 가시적 사물들의 표상에 매여 사랑함으로 창조의 목적을 이탈하는 일을 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영혼 자신은 그렇게 됨으로써만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 안에는 스스로 완전함으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 완전성을 논함에 있어서 영혼의 완전함은 정지적 개념이고, 영혼의 온전함은 이행적 개념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줄 치세요. 그래서 영혼의 완전함은 정지적 개념이고, 영혼의 온전함은 이행적 개념이다.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이러한 완전함 속에서야 영혼은 아름다울 수 있는데, 하나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영혼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며, 애성에 당신의 사랑을 느끼게 하시고, 의성에 당신의 뜻을 행하며 살 능력을 주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애성이 뭐냐고, 지성이 뭐냐고 질의가 나올 수 있어요. 지성은 지식 자체와 그 다음에 지적인 능력. 애성과 의성은 내가 만든 개념인데,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에게 사랑을 주셨을까, 아니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만 주셨을까. 둘 다 주신 거죠. 그러니까 그 사랑, 하나님이 부여해 준 사랑 그 자체와 사랑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사랑의 능력,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애성이라고 보는 거지. 의성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의지를 주셨을까 안 주셨을까. 당연하죠. 사랑을 주셨으니까. 사랑은 또 하나의 의지이니까, 그래서 주어진 의지와 의지 능력 그 자체를 가리키는 거죠. 의지의 능력. 그래서 사랑의 능력은 어떤게 있다고 했지? 기억을 하는 사람 없겠지. 뭐가 있다고 했지? 애호 능력과 혐오 능력.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애호하고, 그 다음에 추해 보이는 것은 밀치고 싫어하는 혐오 능력이에요. 자 그다음에.
<본문 내용>
완전하게 창조된 영혼은 끊임없이 온전하게 되어 본래의 완전함에 이르고 싶어하며, 이렇게 되지 않고서는 영혼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결코 쉼과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도 그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불순종과 죄 가운데 살아갈 때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쇄신의 은총을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즐겨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신의 쇄신을 위하여 은총을 구하는 사람들은 추루하던 영혼에게 돌이켜 아름다운 영혼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창조목적에 순종하며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b. 두 회복 : 순결과 감화
이러한 영혼의 쇄신은 두 가지 핵심적인 작용으로 이루어집니다. 소극적인 작용과 적극적인 작용이 그것입니다. 첫째로 소극적으로는 영혼의 순결의 회복이니, 이는 곧 영혼의 불결을 떨어내는 것입니다. 영혼의 존재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으로 존재함에 있어 육체를 살아있고 또 살아가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혼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지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영혼의 존재 목적은 두 가지인데, 육체를 살아있고 살아가게 하는 것. 살아있고라는 것은 하등한 능력을 가리키는 거지. 살아가게 하는 것은 뭐냐하면, 삶 자체를 영위해 나가는 도덕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거지. 또 하나는 하나님 안에서 지복을 누리는 것. 그 다음에.
<본문 내용>
영혼이 이러한 자신의 고유한 존재목적을 따라서
<김남준 목사님>
두 가지 줄치세요. 영혼이 이러한 존재의 목적 두 가지. 그 다음.
<본문 내용>
영혼이 이러한 자신의 고유한 존재목적을 따라서 작용하기를 원한다면 영혼의 고유한 본질들이 최고도로 기능하고 고유한 목적을 따라 작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이러한 작용은 영혼과 마음 안에 존재하고 작용하는 불결로 말미암아 방해 받습니다. 영혼의 쇄신은 영혼 자신에 고유하지 않은 것들을 털어내고 그것들로부터 스스로 분리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적극적으로는 사랑의 감화이니, 이는 인간존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받을 때에라야 자신이 감당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며 창조목적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영혼의 쇄신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삼위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감화를 통하여 인간의 선한 의지가 불러일으켜지고, 사랑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게 됩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도 쇄신이 있지만, 이는 자연적 본성의 쇄신일 뿐이며 영혼의 근본적인 쇄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경건한 사람들의 경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과 시련 속에서 그들을 행복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비참과 억압 속에서 그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한 것은 영혼의 쇄신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이니이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24-25).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그러므로 신자는 이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을 진리와 성령으로써 쇄신함으로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살게 되고, 그로 인하여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쇄신된 영혼 안에서 그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애성에 사랑을 부으시며 의지에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날마다 자신의 영혼이 거룩한 방식으로 쇄신되는 것은 구원을 통해 이루어진 삼위 하나님과의 보다 충만한 교재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비결이며,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신자의 삶입니다.
3. 발견함
셋째로 발견함입니다. 이는 회개를 통한 자기 깨어짐과 영혼의 쇄신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지식의 발견의 최종적 목적은 모든 진리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신 것들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당신 자신을 더 많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분이 하나님을 향한 앎이고, 그 앎이 깊어질수록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와 창조의 목적을 잘 이해하게 될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통치의 주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데서 자라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두 가지 어두움과 더불어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관적인 어두움과 객관적인 어두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주관적인 어두움은 뭐야, 자 빨리빨리.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 다 나오는 거지? 주관적인 어두움은 뭐야? 누가 대답할까? 객관적 어두움은 뭐야? 내적인 어두움은 spritual darkness에서 오는 거야. 이것은 뭐냐 하면, 영혼이 올바르지 않은 것들에 대해 집착하고, 사랑함으로써 도입되는 어두움이야. 그 다음에 객관적인 어두음은 뭐야? intellectio blindness야. 지적인 눈 멂이란 말이야. 그건 뭐야? 어떤 거야? 가르쳐주면, 물러갈 어두움이야. 지식이 전달되면 물러갈 어두움이야. 그래서 시인이 뭐라 그랬지? 시편 199편에서 나의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할 때에, 눈이 감겨져 있는 상태가 객관적인 어두움의 상태야. 내 죄악으로 인하여 내가 눈 멀었나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어두움의 상태란 말이죠. 말도 구유를 알고,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도다. 이것은 뭐야, 주관적인 어두움이지. 율법을 다 주었는데도 모르잖아. 정리를 해 나가야 돼. 이 다음에 뭘로 목회를 해 나가려고 해... 훤하게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 다음
전자는 죄를 사랑하는 데서 오는 내적인 어두움이고, 후자는 지식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갖게 되는 지성의 어두움입니다.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어두움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여도 그렇게 될 수 없는 속박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맡기신 그 계획을 따라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는 이 세상을 맡기신 그 계획을 따라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는 끊임없이 모든 종류의 어두움을 미워함으로 자신이 빛에 속한 자녀임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신자의 삶에 있어 두 빛은 두 가지를 은유하는 것이니, 하나는 윤리적인 삶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거기 줄치세요. 우리는 후자에 대해서는 잘 생각을 안 하지. 너희는 세상의 빛 된 삶을 살아야 해. religion의 삶만 이야기 하는 건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둘 다. 이 하나님의 지혜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 이 <자기 깨어짐>에서 현자로서의 삶, 그것을 이야기 하면서 2장인가 3장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들을 여러분들이 읽어봐야 해. 공부 많이 해야 돼. 자, 그 다음.
후자가 없이는 전자는 불가능한데, 이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윤리적인 삶은 세상이 기준으로 세운 윤리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지혜를 따르는 윤리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처럼 끊임없이 회개하고 영혼이 쇄신되어 감으로써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또 무엇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아갑니다. 이 과정이 바로 하나님을 발견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발견되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신자가 찾는 진리는 단지 사색에 의해서 찾을 수 있는, 움직이지도 않고 생명도 없는 객관적 실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진리는 살아있는 생명에 있어서, 신자는 끊임없이 그 진리에게서 비치는 빛과 생명, 사랑을 통해 자신이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발견됨으로써 진리를 찾아가고 또 그 진리와 합일됨으로 자신의 존재에 합당한 진실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Ⅴ.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신자의 행복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그를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셨는데, 이는 교회 안에서 그런 행복을 보존할 뿐 아니라 증진하게 하심으로써 다른 지체들과 함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셔서 이 세상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없이 신자일 수 없는 것처럼, 또한 교회의 지체됨 없이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즉각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심으로 그분의 몸의 일부가 되게 하시고, 그 몸을 통하여 신자 개개인의 존재목적을 성취해가게 하십니다.
A.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신자를 삼위와의 교통 속으로 불러들이시되 그를 개인으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공동체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마 6:9)
신자가 구원을 통해 삼위 하나님과 이루는 그 교통은 곧 교회가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갖는 신적 사랑의 교통입니다. 그 안에서 이미 구원 받았으나 아직 온전케 되지 못한 신자를 온전함에 이르도록 보양 받게 하십니다. 그 교통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교회와의 연합이 있고, 그 연합 안에서 자신을 참된 신자로 세우기에 필요한 수많은 자원들과 섬김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리함으로 묘목과 같은 자들을 교회라는 산 속에서 온갖 돌봄을 받으며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그가 자신의 성장과 받은 은혜를 따라 다른 지체들을 형제로 부르며 교회의 품 안에서 하늘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데, 이는 그들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각 지체가 되어 사랑의 일치 속에서 신자 각자를 부르신 그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가시기 위함입니다.
신자는 교회의 지체이며, 그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모든 사랑과 지혜를 공동체 속에서 배우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온전한 신자가 되어가고 교회도 또한 온전한 교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온전한 지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교회 안에서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공동체적으로 실현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참으로 진실한 신자로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목회자와 성숙한 지체들을 통해 보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B.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심으로 사랑 안에 자라게 하십니다. 이 사랑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향한 사랑이며, 그 머리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누리는 사랑의 교통에서 자비가 비롯됩니다. 그 자비와 사랑 안에서 교회는 공동체적으로 삼위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의 본을 따라 지순의 사랑으로 연합되는데, 이 사랑 안에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사랑의 연합을 이루게 하시고 진리를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 안에 있는 삼위 하나님의 지혜의 모상입니다.
세계와 인간을 향한 모든 지혜가 삼위 하나님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과의 교통을 통해 교회에 주십니다. 이미 주신 진리에 담긴 부요한 의미를 끊임없는 사랑 속에 조명을 통하여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 지혜를 실행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실행하시고, 그것이 다시 교회에 위탁이 되어서 하나님이 교회를 다루시는 그 경륜 안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사랑이 드러난다 이거예요. 그 다음.
<본문 내용>
그리하여 교회로 하여금 그 찬란한 진리의 빛 아래서 하나님이 인간과 교회와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과 목적을 발견하게 하시고 사랑 안에서 그것들을 성취해 감으로 능히 하나님 자신의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이런 지혜를 교회와 상관없이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사랑과 지혜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속에서 배우게 하심으로 그 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더욱 결속되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삼위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누리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을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지혜로 알게 하시며, 그 지혜를 따라 세상과 만물을 섬김에 있어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반영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 태어남과 자라남,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까지 떨어질 수 없는 운명체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 다음 과는 어디까지이지? 2장 전체를 한번에 한다고? 다 못할 것 같은데, 57페이지까지 하는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2-1강
자, 그 다음에 43쪽입니다. 여기에서 목차를 보시면 삼위가 함께 세우신 교회가 나오죠. 그렇게 하고 삼위가 함께 하시는 교회라고 나오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신자의 삶이 삼위일체와의 교제라고 해서 영생이 지난번에 영생에 관한 이야기를 했죠. 영생의 시작, 성도의 사랑, 그 다음에 사랑의 근거 그 다음에 사랑의 목적 그 다음에 아가페와 까리따스, 그 다음의 미완성의 교회. 분량이 상당히 많아요. 내가 생각해도 진짜 많네요. 찰떡같이 잘 소화해서 잘 가르치세요. 우선 첫 번째를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요문제와 관련해서 염두해 두어야 할 교리적 이해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삼위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이 이제 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관계를 맺으시기 때문에 드러나는 거야. 왜냐 하면, 삼위하나님 안에서 관계를 맺으신다는 이야기는 지난시간에 했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게 아니잖아요. 영원속에서 하나님 자신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게 되는 거죠. 관계라는 것은 결국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요. 우선 자연만물들과의 관계도 되고, 그리고 인관과의 관계를 통해서 더 잘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번 사경회때 이야기 하겠지만,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교회에요. 교회. 이 교회를 통해서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계시고 모든 인간들 구원받은 인간들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교회라고 하는 하나의 범주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 사경회때 나오는 교회의 아름다움과 성도의 행복이라고 하는 그것이 그러한 문제들을 다루게 되어요. 그러면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데, 이 가운데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어느 한 위가 이렇게 피조물과 관계를 맺을 때, 이 피조물과 관계를 맺는 것은 항상 어느 한 위가 있어요. 어느 한 위가 피조물과 이렇게 주도적으로 관계를 맺는데, 나머지 두 위가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이것은 무엇과 관련되었는가 하면 삼위일체론에서 우리들이 아버지가 그리고 아들을 낳으시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이 나오시잖아요. 그렇죠. 그때에 이것이 마치 하나님의 하나의 신적 실체가 있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떨어져 나와서 이게 아들이 되고, 여기에서 이렇게 떨어져 나와서 이렇게 해서 성령이 되고 이렇게 이렇게 되는 것처럼 이해를 하면 안된다 이거죠. 이렇게 놓고 이렇게 놓고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이것은 실체가 동일하다. 즉 동일한데 이것은 신적 본질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안돼요. 이렇게 되면 희랍에서 만신전이라고 있잖아. 만신전. 그러면 만신전 같은데 보면 수없이 많은 신들을 저기 두고 있잖아. 그 사람들 조차도 신의 본성은 동일하다고 보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삼위일체론에서 교정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셋으로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 그래야지만 인격적인 교류가 가능해지니까 일체라는 말은 이 본질만 일체라고 말하면 된다고 이렇게 설명하면 안된다. 그러면 뭐냐. 이것은 삼신론이 되는 거야. 지난주에 이야기 했듯이 만약에 신적본질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사신론이 되는 거야. 이러한 식으로 설명하면 안된다는 거야.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 같은 경우는 뭐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이렇게 삼위로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이라 보는 거야. 그래서 이제 이레네우스나 성도들은 어려울지 모르겠는데, 이것은 사실은 삼위일체론과 연관되어있는 거야. 이것을 다 구역원들에게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참고로 알아두라 이거야. 이러한 기회가 아니면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까. 이레나이우스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했는가 하면, 사람 속에 생각이 있잖아요. 생각이 이렇게 있는데 언젠가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있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발화되잖아. 생각이 말이 된다 이거지. 그래서 이것을 성부, 이것을 성자 이러한 관계로 봐야 된다는 거야. 로고스라는 의미가 바로 그러한 의미다. 그래서 결국은 이 두 가지가 사실은 떨어져있지만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것은 신미학적 모델이라고 부르는 거야. 신미학적 모델이라고 부르는 거야. 이렇게 말하면 안된다. 그래서 이제 자, 그것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면 결국 무슨 일에 관여하든지 한 위가 관여해도 나머지 위가 배제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창조 같은 경우, 성부가 우선적으로 관위하게 되죠. 성자, 성령도 함께 참여하게 되는 거죠. 구속에서는 아들이, 이때에도 성부와 성령이 관여하게 되는 거죠. 구속의 적용이라고 하는 믿음에 있어서는 어떻게 되죠? 영이죠.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여전히 관여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해서 다른 두 위가 절대로 배제되지 않는 가운데 제가 늘 이야기하는 삼각형 이론이 나오는 거죠.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 이거죠. 그런데 이제 이렇게 되는데, 역시 그러면 어떻게 되죠? 창조에 있어서도 우리들이 세 가지 전치사를 이야기 했잖아요. 성부에 의해서, 그 다음에 성자를 통해서, 그 다음에 성령 안에서. 이렇게 됐잖아요. 이렇게. 그러면 똑같이 그러면 여기에서 이게 만약에 창조 세계라고 그러자. 창조 세계. 그 다음에 그리고 구속자가 진전되어서 교회라고 설정을 해보자. 교회. 교회. 이 교회는 결국은 뭐지? 재창조된 세계, 재창조 세계로 가는 이행이에요. 이행. 그러니까 당연히 이렇게 창조에 있어서 삼위가 관위했으면 당연히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대도 삼위가 관위하실 것이고, 당연히 교회를 창조하시는 것도 삼위가 함께 관위하시는 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이 교회도 역시 똑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이루시는데 교회를 이루시는 것 만 삼위가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이루심 이것만 삼위의 관여지. 관여가 이루심만이 아니라 교회와의 교통이죠. 교통. 그 다음에 교회뿐만 아니라 성도들 간의 교통, 이것도 역시 삼위가 개입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되게? 맨 처음에 영원 전에 삼위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통하시고,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이 창조를 통하여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고 그 다음에 다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관계를 맺으시고, 구속이 들어오죠. 그러면 이러한 이야기가 되는 거죠. 하나님이 창조세계나 교회와 관계를 맺으신 것은 이러한 영원 안에서 삼위의 교통을 흉내낸 거라잖아. 그러면 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들간의 교통도 역시 삼위 하나님의 교통의 모상을 본뜨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교회가 순결해지기를 원하고 사랑으로 가득차기를 원하고 이렇게 되어 가는 것은 결국은 뭐예요? 이러한 식으로 교통을 세상으로까지 확대되어 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신적인 계획이라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확장해 나아가는 거야. 맨 뒤에 가서 나오는게 선교가 사랑의 확장이다. 그것이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관념입니다. 성경적인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의미의 성장이에요. 그러한 정도를 염두해 두면 앞부분이 이해가 잘 되리라 봅니다.
우선 삼위가 함께 세우신 교회, 구원하시는 성부, 사랑이에요, 사랑. 읽어보죠.
<본문>
1. 구원하시는 성부 : 사랑
첫째로, 구원하시는 성부의 사랑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경험에 의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두 기관이 있으니, 가정과 교회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국가, 국가 문제가 나오는데 국가는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직접 세우셨다기 보다는 인간의 불신앙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죠. 그래서 호세아에서 나오죠. 내가 진노함으로 왕으로 주었고, 분노함으로 폐하였노라. 국가가 이렇게 국가라고 하는 제도 그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신정국가 시절에도 국가의 형태가 나오잖아요. 그 국가 자체가 나중에 종교개혁자들의 율법과 복음관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 이해가 잘되는데, 우리의 외적으로 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하나님의 법을 우리가 육체를 통해서 바깥으로 이렇게 행사하잖아.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 내가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하면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육체의 도움 없이 못하잖아. 죽은 다음에 전도 못해. 그렇게 하잖아. 그렇게 육체의 도움을 받고, 또 예를 들면 그것은 안 되는데 그것은 악한 거지 내릴 때, 그 마음이 판단을 내릴 때, 그것이 몸에 영향을 미쳐서 악한 행동을 안하게 하고 불법한 행동을 그치게 하잖아. 그게 육체가 하는 거잖아. 그렇게 교회는 그 교회는 그의 영혼이고 국가는 그 몸이 된다. 국회에서 한 설교가 바로 그 이야기야. 그게 바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라는 거야. 그러한 국가의 형태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그것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두 개가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졌는데, 일치가 이제 나중에 와서 나뉘어 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왕정 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던 거예요. 세상의 나라와 틀린 점이 뭐냐 하면 그렇게 창, 칼을 가지고 국권으로 통치하는 커다란 주관자가 없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공동 생활 속에서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정국가의 이상이거든. 그래서 왕의 보위가 없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한 표가 되었던 거야.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기 한거지. 그것이 문제가 되는 거야. 그 다음에.
<본문>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이라고 불리지만, 이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계획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통해서 그 설립이 계획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심판에 따라 이미 사망에 넘겨진 인간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것은 그분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세워지기로 계획된 기관입니다.
교회를 향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셨으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참된 행복과 안식으로부터 멀어져 고통하는 인간들을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2. 희생하시는 성자 : 은혜
둘째로, 희생하시는 성자의 은혜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여기에서 창조의 경우에 잘 들어보세요. 잘들어야 해요. 창조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는 것과 구속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하는 것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mediatorship, 중보자직의 문제에요. 그래서 창조에 있어서 중보자가 이르는 방식과 구속에 있어서 중보자가 되시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또 세계의 완성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에서는 완성이라는 말이 없지만, 그러나 이제 타락한 세계의 부패한 상태가 종식된다는 의미에서 완성을 이야기 할 수 있거든요. 완성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중보자직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거예요. 본질에 있어서는 일치하지만, 그러나 그 밖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거죠. 창조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중보자라고 하는 것은 구속에 있어서 중보자가 되신다는 이러한 의미가 아니라 친히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창조사역에 직접, 당사자가 되시는 거죠. 그게 바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아까 이레나이우스의 생각처럼 하나님은 창조에 대한 생각이 있었고 그 다음에 창조의 생각 자체가 말로 발화된 것이라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결국 생각과 말의 차이는 거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신 거예요. 이레나이우스가 하나님이 두 손으로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성부, 성자와 성령이시다 한 것도 단순한 도구적 기능으로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에요. 예를 들면 두손이 있고 생각만 없으면 도자기를 빚을 수 있겠어요? 빚을 수 없어요. 창조물들이 나오기 위해서는 생각과 조선이 필요하듯이 그러한 의미에서 말한 거예요. 이해되죠? 구속에 있어서 중보자직은 그렇게 아버지의 권위로 그렇게 아버지 당사자처럼, 당사자와 함께 창조하신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뭐예요? 그게 바로 희생이에요. 인간들의 죄를 지시고 죽으시는 그 희생. 이것이 구속에 있어서 중보의 특징이요. 희생하시는 성자의 은혜다 얘기에요. 좀 더 해보죠. 읽어봐요.
<본문>
스스로 그 죄에 대해여 대가를 치를 수 없는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속죄의 희생을 감당하신 분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진 구원 계획을 따라 성자는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빌 2:6-11).
성자는 자원하시는 희생으로써, 죄의 속박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지상 생애는 죄인들을 위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하나님이신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나타났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구원 받은 신자들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바로 이러한 연합인 교회가 다시 삼위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셨고 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 구원받을 자기의 백성들 사이에 화목을 이루신 것입니다(요일 4:1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나 공로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딛 3:5).
3. 믿게 하시는 성령 : 교통
셋째로, 믿게 하시는 성령의 교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계획된 인간 구원을 위하여 성자께서 희생의 속죄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자의 희생하시는 구원사역을, 믿음을 통하여 신자들 안에 적용하여 실제로 구원받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고전12:!3, 엡2:19). 성령 하나님은 죄인의 마음에 감화를 주셔서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 공로를 받아들이게 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를 사랑하게 만드십니다. 또한 그렇게 신자가 된 사람들 안에 계실뿐 아니라 교회 안에 계셔서 그들을 하나의 교회로 연합되게 하십니다. 교회는 이렇게 성령의 역사 안에서 구원 받고 하나로 연합된 무리들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후로도 신자 안에 계시고 교회 안에 계셔서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은혜를 주셔서 선한 의지로써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나는 이것을 준비할 때, 교회라는 것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 했는데, 아마 어느 정도의 철학적 사유가 필요해요. 그때에 그 아름다운 것들이, 제가 아마 아우구스티누스와 에드워즈를 몰랐더라면 이 교회론이 이렇게 아름답게 지금처럼 빛이 나갈 수가 없어요. 사실은 사람이 말이 많아질 때가 언제냐. 강성경 전도사, 언제 말이 많아져? 아니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야.
(대답) 좋은 것을 말하고 싶을 때.
아, 그렇지. 술취했을 때도 그래요. 말이 많아져. 좋은 것을 말고 싶을 때뿐만 아니라 또 말이 많아질 때가 있어. 열받을 때 말이 많아져. 그런데 좋은 것을 봤을 때가 말이 많아져. 그런데 교회론이 분량이 매우 작아. 조직신학에서 교회론이 분량이 굉장히 작아. 이 이야기가 무슨 얘기인가 하면, 아름다움을 많이 못 본거야. 이게 오늘날 뿐 아니라 개신교신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약점이야. 그래서 그 나는 이 교회론을 제대로 하려면,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고대 교부서부터 차례대로 다 봐야해. 삼위일체론도 보면 오늘날은 대게 2세기 변증가들부터 탁 시작을 하거든. 그것 아니고 사도로부터 가고, 성경에도 나와있지만 클레멘트나 이러한 속사도 교구부터 시작을 해야 해요. 폴리캅이나. 거기에는 완성되고 뚜렷한 형태로 나오지는 않아. 그렇지만 그 존재의 씨들이 쫙 뿌려져 있어요. 그 제자들로 내려오면 이레나이우스나 이러한 사람들 아니야. 이그나티우스 이러한 사람들 거쳐서 그 다음에 속사도 교구 이후에 고대 교구들 거기 쭉 보면서 추적해 나가는 거야. 아주 아름다운 형태들을 보게 되는 거야. 이제 그러한 것들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한 사람이 아무구스티누스야. 그리고 토툴리안 같은 경우도 이레나이우스나 토툴리안 같은 경우는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을 중요한 작품만이라도 읽는 것이 좋아요. 아주 교회에 대한 보편교회에 대한 아름다움, 그것에 대한 찬탄과 그 수천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읽으면 사랑이 아주 그렇게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절절히 느껴지는 거예요. 거기에 이렇게 안디옥 교회, 로마교회 그런 교회는 없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보편 교회에 대한 이방인이나 자유인이나 모든 교회가 가슴이 절절히 느껴질 정도의 이러한 사랑, 아름다움을 보니까 그 사랑을 느끼는 거야. 그러니까 말이 많아지는 거야. 교회론은 굉장히 길어요, 분량이. 복음서를 설교하든, 시편을 설교하든, 무엇을 설교하든지 간에 주석을 하든지 간에 보편교회에 대한 것, 뜨거운 사랑이에요. 그 제가 한번 그 총신에 가서 대표기도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홈커밍대회가서 천만원 냈더니 기도를 시켜주더라고요. 기도를 하고 왔는데, 온지 얼마 안되어서 교회사 교수에게 전화가 왔어요. 아, 기도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그 기도가 뭐였었는가 하면, 히폴리투스를 읽으면서 내가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제 그대로 따라한 것은 아니지만, 히폴리투스가 느꼈던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가슴에 품고 기도를 했거든요, 굉장히 웅장하게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들려줄께요. 아주 웅장하게, 그것을 히폴리투스는 갈라져 나간 사람이잖아. 아마 복권이 안되었을거야. 열교자 취급을 받았었는데, 반대로 찢겨져 나갔는데 찢어져 나간 것 자체가 뭐냐 하면 참다운 보편교회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에요. 종교개혁자들이 갈라져 나온 것을 그러한 시각으로 봐야 해요. 그들은 열교자라고 부르지만, 그러한 교회에 대한 마음. 절절하게 그리는 거예요. 이러한 것들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면 성령님이에요. 성령님. 그래서 설명을 하자면, 이렇게 되잖아. 이렇게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와 삼위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 거야, 이렇게. 조나단 에드워즈가 왜 교리를 배워야 하나에서 다섯 번째가 뭐냐 하면, 재밌으니까. 그게 교리를 배워야 하는 이유였어요. 얼마나 재미있어요? 이런 거 하라고 태어난거야. 이런 거 하라고 하나님이 머리를 위에다가 달아서 내보내신 거지. 이게 디자인 때문에 이런게 아니란 말이야. 이게 실내 장식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이제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는데 성자를 통해서 그리고 성부에 의해서 성령 안에서 어쨌든 성부, 성자, 성령님의 관여 하심으로 교회를 이루시잖아. 그런데 잘 생각해봐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시지만, 이게 교회를 구속하실 때에는 이러한 형태가 되실지 모르지만, 구속이 교회와의 연합 속에서 실행 될 때에는 자리가 바뀌는 거야. 이렇게. 주도적인 역할들을 하시는 거죠.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속죄하심, 구속의 공로 때문에 이 것 안에서 성령이 어떻게 관여 하시는가 하면, 여기에 있는 수많은 인생들이 있잖아. 교회학교에서 말이지 이러한 것을 잘 정리해서 아이들 용으로 만들어 가지고 가르쳐야 해. 보다 풍부한 그림으로 아이들 가슴속에 다가서도록 교회론을 가르쳐야 된단 말이지. 그게 교회를 사랑하는 비결이에요. 이렇게 되잖아요. 잘 생각해 봐요. 이 사람들이 원래 여기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한 때 너희는 외인이요 이방인이요 약속이 있었던 외인이었던 자라. 그런데 이들을 불러들이신 방식이 무엇이냐 하면, 보이지 않는 이러한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예정하심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들을 믿게 하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믿음의 시작도 성령을 말미암아서 시작이 되고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이 그렇게 된 사람들이 이러한 식으로 그리스도께 모두 개인적으로 결합되어 있잖아. 이것도 사실은 교회와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이러한 영적인 연합, 이러한 연합 때문에 이러한 연합이 이루어진 거죠. 성도 개개인이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은 늘 이야기 했지만, 머리이신 예수께 자기가 최초로 접붙여진다기 보다는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됨으로써 그리스도께 접붙여 지는 거잖아. 이것도 최초, 최초의 믿음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교회와 하나님과의 원리적인 연합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그 연합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개별적인 연합도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이루어진 연합속에서 사람들이 사랑의 교통을 누리는 것도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 양연식 목사가 질문을 했잖아요. 성부와 성자가 서로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는 나오는데, 성령이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는 안나옵니까. 성령이 이 사랑 자체야. 그러니까 특별히 성령이 성부를 사랑하시고, 성자가 성령을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랑 그 안에 계신 거야. 이게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미학적 모델로 이야기했던 이해, 지성이죠. 이해와 그 다음에 사랑과 그 다음에 의지, 이렇게 설명한 모델이 바로 그거야. 그 다음에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자체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 하지. 아는 자, 알려진 자, 앎 자체 이러한 식으로 묘사하게 되는 거지. 신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모델이에요. 그래서 이것이 만약에 성부라면 이것은 성자고 성령이고 이러한 식으로 되는 거지. 이것 두 개가 나뉘어 질수가 없잖아. 왜냐 하면 이해하지 않고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의 욕구가 없는데 거기에 의지가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설명이 되는 거야.
(질문) 어거스틴이요, 신미학적 유비로서 기억, 이해, 의지를 이야기 하는데요.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 이해와 사랑과 의지하면 지, 정, 의가 들어가는데.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한다고,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예를 들면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자체로 이러한 식으로 되고. 기억, 이해, 의지 되잖아. 기억하니까 이해를 하는 거지.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한 질문을 하잖아. 행복하다는 것을 내가 안다 이거야. 니가 그것을 가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을 행복이라는 것을 아냐. 행복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 아니옵나이까. 진리를 발견했을 때 아하 하는 것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 아니냐. 이해는 기억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럼 그 다음에 이해를 하고 무엇을 이해하는데서 욕망이 생겨나고 그것들을 어떻게 행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나잖아. 의지라고 하잖아. 이해하지 않는데서 욕구가 생겨나겠냐는 거야. 그러니까 그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의 확장된 것만을 갔다가 이야기 했다고 말하면 안되고 다양하게 이야기를 해요. 이렇게이렇게도 이야기하고 이렇게이렇게도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사랑 자체 이러한 시각으로 여러 가지 analogy를 이야기 하는데, 여러 가지가 다 똑같아요. 떼어놓을 수 없는 이 속에서의 신미학적 작용들을 보는 거야. 좀 더 설명을 하자면,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야. 우리들이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그 다음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물들을 보면서 이렇게 보면 이 관계는 이렇게 보이잖아요. 가시적이에요. 이 사물을 하나님이 관계 맺고 있으시다는 것이 보이잖아요.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것이 보여 안보여? 아까도 누가 이야기 했잖아.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서 그렇게 보이잖아. 이러한 사물들과 하나님과이 맺고 계시는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A라는 성품은 어떤 식으로 시행이 되는 구나. 이것을 알게 되잖아. 이것을 뭐라고 했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요체라고 이야기 했잖아.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은 어디냐 거슬러 올라가면 이것을 모르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이 하나님을 직접 이러한 성품을 비추게 하신 그 하나님의 존재는 무엇이냐라고 할 때에는 이것은 모르는거라 이거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존재의 유비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잖아. 어려워요. 이 문제가. 이렇게 되잖아. 똑같이. 잘 들어봐요. 이렇게 보는 거예요. 여기에 이렇게 사물들이 있다고 보자. 여기에 내가 있어. 전부다가 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그런데 내가 관계를 맺어. 그러면 나의 영혼이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없어? 알 수 있잖아요. 성향이라든가, 예를 들면 고기를 보는데 막 군침이 돈다든가 아, 내 안에는 고기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구나. 등등의 그러한 이야기 할 때 있지, 뭐라 그러는가 하면, 제가요 사실 제가 몰랐는데요, 언어를 해보니까요 제가 굉장히 언어를 잘하는 소질이 있는 것 같았어요. 지난번에 방송에 들으니까 조혜련이라는 개그우먼이 6개월만에 일본말로 방송, 코메디를 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것이 나에게 있는가봐요. 어쨌든 가시적으로 드러나잖아요. 그러면 니 영혼은 뭐냐 라고 할 때 역시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스트리히티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단순성, simplicity tas야. 하나님의 단순성을 가장 많이 흉내낸 존재가 인간의 영혼이다라고 보는 거야.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이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자기 자신을 안다고 이야기한 바가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자신에 대한 무지를 동반하게 되어요. 그래서 자신이, 그런데 자신을 관찰함으로써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에요. 오늘날의 그 대신 굉장히 종교적이게 되는 거죠. 심리학을 많이 하게 되면, 심리학 자체가 종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이어 져요. 그래서 내면의 세계를 계속 들여다 보면, 종교화 된다고 복음주의의 동향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설명했잖아요. 이것이에요.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 여러개를 사용하는데 이야기하는 것은 다 똑같은 것이다.
그 다음에 이제 넘어가요. 더 할 이야기는 있는데 넘어가요. 넘어가고. 삼위가 함께 하시는 교회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이제 양 목사가 앞부분만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본문>
B. 삼위가 함께 하시는 예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처럼 성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 그리고 성령의 교통 안에서 세워졌기에 하나님께 있어서 교회는 말할 수 없어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개인적인 것인 줄로만 알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의 경험조차 이미 공동체 안에서의 체험입니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공동체적인 사랑으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비롯한 수많은 가르침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마6:9) 이러한 가르침은 사도 바울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롬1:7, 고전1:3, 고후 1:2).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아무리 깊이 경험하였다 할지라도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지체들과 함께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가 경험한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온전한 경험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은 다시 세 가지 방식으로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이게 뭐냐 하면 복음서를 특히 읽어보면, 서신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특히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 대해서 사용하실 때에 두 가지 방식으로 말씀하시는데, 당신과 우리를 하나로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실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주기도문 같은 것, 우리에게 주옵시고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잖아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우리를 2인칭으로 지칭하실 때가 있어요. 그때 항상 복수에요. 너희의. 하나의 동아리로 보시는 거예요. 그것이에요. 예수님의 이러한 그 이세상에 하나님과 관련된 당신과 관련된 신자들을 공동체적으로 바라보시는 이 안목은 구약에 기반을 둔 거예요. 구약에 기반을 두었는데, 구약 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 자체에 기반을 둔 거예요. 그게 뭐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의 커다란 body를 보시고, 창조하셨어요. 이번에 그것 한번 읽어봐. 마크 데버하고 제임스페커, 십자가를 아는 지식을 했었거든요. 번역이 지금 약간 문제가 있어서 나보고 추천서 써달라고 하는데, 전부 번역을 고쳐줬어요. 뒤에 보면 해제를 내가 썼어요. 그거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나와요. 동방교회의 속죄관과 서방교회의 속죄관이 어떻게 다른지, 아주 중요한 문제에요. 그것을 꼭 읽어보세요. 그 책을 한권씩 사면 좋을 것 같아요. 쉬운 책은 아닌데 그래도 한번 읽어서 패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에요. 고난주간에 읽으면 좋을 거예요.
그래서 이제 잘들어봐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국가의 형태가 거의 없었잖아요. 왕, 이렇게 체제로 이루어진 것은, 천부장, 백부장 이러한 것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국가 체제라 보기에는 어렵잖아요. 그러면서도 하나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력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냐 하면, 뭘까. 그렇게 거기에는 중대한 잡족들까지 들어가잖아. 그것을 말하자면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강력한 unity가 있었다고 이야기 하면 안되는 거야. 그 구약에서. 그러면 그렇게 다양한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주던 힘이 어디 있었던 것 같아? 응? 굉장히 중요한데, 부흥에서 다 이야기 했는데. 언약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데, 언약안에 있는 하나님의 관계인데 그 이스라엘에 대한 배교자들이 역사에 보면 속출하잖아. 그래서 이스라엘에게서 갈려져 나가잖아. 그러한 상황들은 설명이 안되잖아. 결국 뭐냐 하면, 객관적으로는 언약안에 있는 관계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주관적으로는 그 백성들이 함께 같은 곳에서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야.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unity의 factical한 source예요. 그래서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되는 강력한 비결이 뭐냐 하면, 동시에 프로그램을 만들고, 교회 로고를 만들고, 집집마다 문패를 똑같은 것을 붙이고, 심지어 수련회 가서 유니폼을 똑같은 것을 입힌다고 해서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같은 동일한 백성이라고 하는 강력한 그것에 들어가요.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은혜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사역을 하다보면 함께 모였을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부흥이 있어야지만 교회 공동체성이 아주 아름답게 나타나는 거야. 그래서 이제 그 다음에 성도의 계획안에서 나오는데, 에드워즈는 한번 읽어보자.
<본문>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상은 대단히 큰 노력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와 참 신앙을 전복시키고자 끊임없이 폭력적인 박해를 가져왔다. 그리고 교회와 참 신앙을 전복시키고자 끊임없이 폭력적인 박해를 가해왔다. 그리고 교회와 기독교는 파멸 가까이까지 가기도 하였고, 육천년의 대부분의 시기들을 통하여 거의 삼켜지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을 명확히 보여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의 역사를 숙고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존재해 온 어떠한 것들보다도 더욱 기적적이고 경이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구상에 교회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해 온 다른 것은 없다.
<김남준 목사님>
그 육천년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지구창조 4천년을 믿었기 때문에 6천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자,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성부의 계획안에서, 교회는 있고 어떻게 되었죠?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니까. 자 곽혜정 전도사 그리스도의 삼중적 머리되심이 뭐죠? 머리되심의 삼중적 국면이 뭐라고? 박숙현 뭐야? 새가족 공부에서 다 가르치잖아. 유기체적 통치, 유기체적 섬김, 유기체적 생명. 생명이 제일 먼저고, 유기체적 생명, 유기체적 통치, 유기체적 섬김. 이렇게 되는 거야. 잘했어요. 그렇게 해서 성자의 통치안에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 성자의 통치안에 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잘들어봐요. 성령을 많이 받으면,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거야. 성령을 사랑하게 되는게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거야. 성령은 목표 자체가 당신이 그러한 식으로 사랑을 받는게 목표가 아니야.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누가 한국 교회 유명한 목사님께서 “옛날에는 성부 하나님도 충분히 공경했고, 예수도 사랑했으니까 성령님 소외당하고 계십니다. 균형잡기 위해서 성령을 열심히 사랑합시다.” 이러한 해설에서 오는 웃긴 것이 되는 거야.
그래서 성령을 많이 받으면 결국 그리스도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야.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그러하니라. 우리도 예수님의 증인이고 그 다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셨는데, 순종하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것도 되지만, 성령이 오셔서 순종하는 사람들 안에 있는 성령님도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해서 다시 두 가지만 나오죠. 48페이지에 넘어가면 둘째 단락에 이중적으로 머리가 되시느니라. 어떤 의미에서 섬김은 통치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이야. 그래서 이중적으로 머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명을 주시는 구주가 되심으로 머리가 되십니다. 그 다음에, 통치를 하심으로써 머리가 되십니다. 성령의 위로. 그것 한번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본문>
성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성자 하나님은 은혜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위로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영원히 신자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들 안에 거하시어 그들로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며 그들의 위로가 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니리”(요14:16)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보는 중보자이고, 혜는 은혜혜자인데, Helper에요. 사는 Teacher예요. 이렇게 되죠. 우리가 만든거예요. 아직은 국어 사전에 안나와요. 그 다음에.
<본문>
“그리사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물론 교회를 향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위로만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인간들의 마음에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믿어지게 하십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화되게 하여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고, 이미 믿은 신자들의 마음을 쇄신하시는 것 역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가 자기 깨어짐을 통해 거룩해지도록 하시고, 교회에 은사와 능력을 주셔서 교회의 존재목적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사랑하게 도우십니다.
신자들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격려하시어 선한 일에 힘쓰게 하심으로써 창조와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게 하시는 일,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죄인들의 어두운 영혼을 계명하시고 지성을 조명하시는 일, 신자들의 마음을 감화하셔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치 있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시는 일도 성령의 사역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게 영어로 consolation인데, 이것을 성령의 역할로 아주 우등하게 부각시킨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면, 청교도들이에요. 청교도들은 굉장히 불안정한 시대에 있었잖아요. 여기에 나오는 거예요. 자기를 사용하셔서 구속 목적을 성취하게 하시는 것,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 지성을 조명하시는 것,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전부다 다 위로로 이렇게 수렴된다고 보는 거야. 그래서 이제 청교도 작품에 consolation이라는 주제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러고 보니까 그거 한번 하면 좋겠네요. 위로. 이번에 저기 <싫증>이 지금 대박으로 갈 그러한 위기에 있다고 보고를 받았는데요. 일주일만에 2만부를 찍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교보같은 데에는 깔지도 않았는데, 어저께 나한테 기쁜 보고를 하는데 그래서 생명의 말씀사에 가서 서고에 들어가서 설교 시리즈를 다 조사하고 갔어요. 그 다음에 가장 열열히 내고 싶은 책이 <개념없는 그대에게>. 위로. 위로가 되잖아요. 힘들었는데 위로가 됩니다. 성령님의 위로죠. 그 다음에 넘어가겠습니다. 신자의 삶, 이것을 어떻게 보냐 하면, 잘 보세요. 이제 이렇게 코스를 만들어서 제가 꿈꾸고 있는 것이 여러분들이 잘 따라와 줘야 하는데, 이제 좀 성경공부, 교리공부반을 잘 만들어서 고급반을 넘어가면 이렇게 교회론 특강, 삼위일체론 특강 이러한 식으로 해서 이러한 것이 얼마나 재미있겠어. 이렇게 하면서 삼위일체론과 교회론을 같이 배워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에요. 삼위일체론을 신론속에서 삼위일체를 막 다루잖아. 사면으로 계속 가는 거야. 그럴 수 밖에 없는 거야. 그렇게 하면 안되고, 가르침 그 자체를 교회론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론으로 연결지어야 해. 그래서 항상 삼위일체론을 이야기 할 때는 신론속에서만 다루지 말고 이것을 세계와의 관계속에서 다루어야 되는데, 이게 이제 교회와의 관계속에서 삼위일체론을 다루어 가면, 이 삼위일체론이 아주 practical한 교리가 되는 거야. 생각해 보세요. 엘리뇨 현상이 일어나서 쓰나미가 밀려온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가 나에게는 더 중요한 거야. 쓰나미 밀려와봐야 나에게는 육체밖에 안죽지만, 하나님의 존재가 어떠한 분이신가. 성품이 어떠한 분이신가는 오늘 살아가는 나의 삶 하고 직결되는 거죠. 그러한 점에서 이것을 파악하는 거예요. 그래서 20세기가 신론의 시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80년대는 교회론과 성령론. 그러다가 이제 2000년대에 와서 교회론과 성령론 하다가 신론의 시대로 들어오게 된 거예요. 화려하게 삼위일체가 부활하는 거야. 그래서 굉장히 아름다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정말로. 여기에는 이제 서론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이거예요. 구원의 삼위일체적 의미는 뭐냐. 구원의 삼위일체적 의미는 결국 인간이라는게 있잖아.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인간이라는게 있으면 인간의 삶의 모양이 어떠하든지 결국은 세가지로밖에 설명이 안되는거야. 배향, 전향, 정향, 이게 결국 aversio. 요게 바로 뭐라 그랬죠? 회심이에요. 회심. 회심은 무엇과 무엇으로 이루어진다? 정확하게 이야기해야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이 두가지로 이루어지죠. 이것이 회심을 이루는 거야. 그 다음에 정향의 삶이에요. 정향의 본질은 뭐죠? 목회의 두가지 목표가 뭐라고 했죠? 그렇지. conversio의 보존이에요. 그러면 이제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결국은 이렇게 전향하게 하는 것은 뭐가 작용해야지 되는 거야? 이게 힘이 없이는 안되는 거야. physical한 작용이라고 하잖아. physical operation 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힘적이라고 번역을 해요. 물리적이라고 하는데, 힘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의 힘이야. 은혜의 힘. 은혜가 conversio시켜서 돌아오게 하는데, 그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정향의 삶을 사는게 문제야. 더 어려운 거야. 사실은. 회심을 일으키는 목회도 어렵지만 그것을 보전하게 하는 것은 더 어려운거야. 더 어려운거야. 왜냐하면 인간이 끊임없이 마음이 찢어지면서 변하는데, 그것을 탐구해내면서 그것을 해야되니까 끊임없는 2가지가 필요한 거야. 끊임없는 지식의 빛과 끊임없는 은혜의 열, 이 두가지가 작용이 되어 쏟아부어질 때 이 정향이 유지되는 거죠. 이 신자안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이 신자안에 있는 이 은혜가 상실 될 때에 죄의 힘은 어마어마한 파괴의 힘을 가지고 다시 배향하는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잖아. 정향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힘을 요구하는 거란 말이야. 여기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게 되는 거예요. 이러한 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정향의 삶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의 삶이 결국에는 둘 중의 하나인데, 이렇게해서 이러한 인간들이 여기에 배향하던 인간들이, 여기 A야. 배향하던 인간들이 돌아오게 되요. 어떻게 해서? B를 통해서 전향을 통해서 돌아오게 되는 거야. 정향을 삶을살아. 이게 C. 그래서 한쪽을 향해 계속 걸어가게 되는 거야. 계속 정향의 삶을 살도록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걸어가는 거야. 그러면 과연 이러한 식으로 정향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것이 얼마나 자기들 안에는 이러한 삶을 계속하게 하는 힘적 원천이 없는 거예요. 힘적 원천이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것들을 정향의 삶을 유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이 뭐냐 하면, 이렇게 된 사람들이 결국에는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 교회들을 이렇게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심으로써 그래서 실제적인 힘과 능력을 계속해서 이들에게 부어 주심으로써 정향의 삶을 살게 하는 거야. 이것을 나는 무엇으로 보았는가 하면, 삼위일체와의 교제. Societas cum Trinitate, 삼위와의 교제 이것이 구원의 삼위일체적 의미에요. 그래서 삼위일체 관점에서 보면 구원의 의미가 뭐냐, 죄이서부터 구원을 받아서 해방된거다라고 보는 것은 인간론적 관점이에요. 그런데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을 얘기했잖아. 이 그림이 더 잘 보여서 아니면, 이 그림이 잘 보여. 이쪽에서 본거잖아. 이렇게 본거잖아. 그런데 이 그림은 틀림이 없잖아. 뭔지는 잘 모르겠는거야. 그런데 이것은 이쪽에서 본 거야. 뭔지 잘 알겠는거야. 나무토막 그려놓은 것이구나. 그러면 뭐냐 하면, 이것은 한면만 보여, 그런데 이것은 세면이 보이니까 아 이게 뭐구나 잘 알겠는거야. 이해 되죠? 그러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아까 이야기 했던 것처럼,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 나무토막을 구원이라고 치자. 이것을 이렇게 한쪽에서만 보지 말고, 인간론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신론적인 삼위일체적인 의미에서 교회론적인 의미에서, 기독론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보자. 교회론적인 의미에서 구원론적인 의미에서 그 다음에 기독론적인 의미에서 신론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바라볼 때에 아 우리의 구원이 야 정말 그러한 거구나. 야 정말 아름답다 드러나게 되는 거죠. 사람들이 그런 것 있잖아요. 인간론적인 구원론을 극단화 시키니까, 구원의 문제점이 나타나는 거야. 아, 목사님, 그러면 한번 구원받은 것을 하나님이 취소할 수 있습니까. 아, 그래요. 끝까지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요?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지. 그러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었구나. 하나님도 우리를 어쩔 수 없구나 이상하고 희귀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예요. 인간론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거죠. 그러나 다양한 관점에서 보게 되면 이러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결국은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지는 거야. 신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분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이러한 말씀 나오죠. 아버지와 아들과 누구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가 나오잖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3자인데, εἰς ὄνομα라고 나오잖아. 그런데 이게 단수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3자인데, 어느 하나의 이름이라는 거야. τὸ. 이동이잖아. 이러한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하나의 이름이에요.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아주 중요한 프로텍스트가 뭐냐 하면, 하나에요. 하나의 이름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구원론의 의미에요. 이것에 결국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인데, 신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신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작이야.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 자체가 삼위와의 교제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더 진전시켜 볼까. 삼위 안에서 구원받은 신자가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삼위 하나님을 흉내내는 거야. 그분 가신 것을 따라가는 거야. 이 안에서 성도들이 연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 그것 자체가 삼위하나님안에 있는 교통을 본받는 거야. 이러한식으로 신론적으로 아주 풍부한 부분이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삼위일체론 없이는 교회론이 설명이 안되는 거야. 그러니까 아주 건조하고 가서 가서 한번 확인해봐. 교의학에서 기독론이 제일 짧아. 대부분 다 성례에 집중되어 있어. 이러한 것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청교도들의 작품들도 똑같이 이러한 한계들을 가지고 있는 거야. 깊이 안들어갑니다. 깊이 고민해야 할 것들이에요. 그래서 학문의 질이라는 것 자체가 이게 insight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막 퍼져가는 거야. 이러한 이야기는 너무 내 자랑이 될까봐서 걱정이 되는데, 여러분은 나에게 저기 스틸마투트 예수 설명 들었죠? 강의 들었죠? 안들었어요? 여기해 했나? 영국에 가서 했는데 내가 주장한 학설은 소수설입니다. 그렇게 비슷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거의 난 못봤어요. 나는 핍박설은 절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할례의 표식이 어디있는지 알죠? 바울이 너희들은 그 고추의 지금 흔적이 있다고 자랑하냐? 나는 등대기에 있다. 그러한 식으로 말했을지 없다 이거예요. 나 채찍 맞은 거 봐라. 등대기에 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말고 나는 고추에도 있고 등대기에도 있다고 이야기해야 하잖아. 나는 그러한 가능성은 문학은 조금만 알아도 그러한 가능성은 없단 말이죠. 그것을 천천히 설명을 했어요. 거기에 누가 왔었는가 하면 영국 런던의 신약학 교수가 와있어요. 끝나서 나를 만나자고 해요. 어디서 찾아냈냐고 해요. 나는 찾은 것 아니다. 성경을 읽고 사유해서 그리고 로마시대의 노예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스티그마티제이션을 보았다. 그러면서 목사님, Ph.D 논문감입니다. 자기가 딱 그것을 듣는 순간 필이 딱 오드래요. 그것을 전기에서 논문 어디 발표했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했다고 우리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완성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탁월한 Ph.D라는 거예요. 자기는 듣는 순간에 전개가 된다는 거예요. 형상 이론으로서. 그래서 설득이 되었습니까. 충분이 되었습니다. 충분히 설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 이 신앙의 체험은 무지하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엊그제 독일에 갔을 때, 정경화 부부 만났잖아. 이야기하지 마라. 너 여기도 기도 많이 하고 이 교회가면 너는 열린교회 교인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여기 있는 동안에 그 교회에 가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봉사해라. 3년동안 열린교회 잊어버려도 좋으니까 여기있는 동안 열심히 섬기도록 해라.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며 살도록 해라.
그래서 결국 성화의 삶은 삼위 하나님을 흉내내는 거예요. 그것은 거룩한 거예요. 그런데 이게 Societas 교제가 없이는 이럴 수 없는 힘이나 자원들이 교회의 형식적인 제도나 사람들의 마음이나 죄인들 속에서는 나오지가 않는다 이거야. 나올 수가 없는 거란 이야기야.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삼위일체와의 교통 이것이 결국에는 시작되는 것이 이게 전향, 회심이고 그것들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게 결국에는 conversio의 보존이란 말이에요. 회심을 보존하는 것이야 목회하는데 있어서. 그것은 결국에는 하나님과의 연합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이야. 그래서 객관적으로는 언약이 있고, 주관적으로는 그 언약을 보존하는 은혜가 있는 거야. 그렇게 하면서 이것이 실재를 이루며 살아가게 해 줄 때, 하나님과의 Societas없이는 불가능한 거야. 아름답잖아. 나는 막 펑펑 울정도로 감격을 했었던 부분이야, 이 부분이. 완전히 새로운 교회론의 지평을 보는 그러한 거야. 이게 사실은 교부들에게 있어서 끊임없이 흘려 내려오던 위에 세워지는 모든 교회론의 자양분이었다고 밑에 깔려진 부분이. 이러한 것들을 다 잘라내 버리고 거기에다가 세우려 하니까 그렇게 교회론이 건조한 거야. 20세기 책들의 교회론을 봐봐요. 뭐. 스펄전이 이야기 한 것처럼 특별한 흠은 찾아 낼 수 없지만 그러나 왠지 가슴에 다가오는 거야. 이것을 우리 삶속에서 막 녹여내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거야. 이게 진짜 교회의 신학, 사랑의 신학이에요. 그게 바로 50페이지에 나오는 A부분을 이야기한 거야. 그래서 이제 구조를 보면 이렇게 되잖아. 삼위와의 교제의 시각이라 이야기라 나오잖아. 이 전도사님 한번 읽어보세요.
<본문>
우리는 구원받은 신자들이 누리는 행복이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행의 실재가 바로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영생은 단지 죽지 않고 오래도록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의 참된 의미는 그 반대인 영사를 생각하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체에 있어서 죽음은 소멸이나 멸절을 통해 비존재가 되는 것일 수 있어서는 그런 종류의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보십시오.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도록 창조되었고, 이는 신자의 경우이든 불신자의 경우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은 불멸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육체는 소멸되고 멸절되지만, 후에는 모두 새로운 형상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런 데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이나 지옥에 던져진 영혼들을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에 영생의 상태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생의 의미는 이것이니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김남준 목사님>
그곳 줄치세요.
<본문>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속에서 무한한 하늘 지원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하나님과 파멸될 수 없는 생명적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신자는 중생과 함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과 함께 영원히 계속될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랑과 은혜, 그리고 위로를 공급받으며 자신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을, 교회를 통하여 지체들과 함께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 다음에 성도의 사랑이 나오는데, 이제 그 영생의 시작이 삼위와의 교제의 시작이고 영생의 삶의 지속이 삼위와의 교제의 계속이라고 본다면 그러면 이제 교회는 성도의 사랑, 이제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교회 내부로, 여기서부터 어떻게 되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이태까지 이야기 한 것은 이것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렇죠. 지금은 이제 이 안으로 들어가서 이것을 이야기하는 거야. 관점 이동을 하는 거야. 그렇게 볼 때에 뭐냐 하면 성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성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삼위간의 교제의 모상이다 이거죠. 그래서 성도의 사랑 자체가 사랑 자체가 성도가 예를 들어서 은혜를 많이 받아서 이 사람이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치자 이거야. 잘들어봐요.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쳐요. 그러면 이 사랑의 특징 자체가 뭐냐 하면, 그 포괄성을 갖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랑이 있으면 이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요. 그 다음에 또 교회를 사랑하게 하고, 그 다음에 이러한 사랑의 연합과 교통을 이 세상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삼중의 방향으로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이 자체를 두 가지로 이야기했는데, amore라고 하잖아. 사랑인데, amore societatis , 그 다음에 amore privatus 결핍된 그러한 뜻인데 이것을 나는 이제 뭐라 했는가 하면, 사회적 사랑, 사적 사랑이라고 카톨릭에서 번역을 하거든. 나는 그렇게 안보고 자체가 사회라기 보다는 교통이라고 보는 거야. 나는 그래서 교통애라고 부르고 그 다음에 이것을 단절애라고 부르는 거야. 단절애. 그래서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랑이 있는데, 잘들어봐요. 사랑이 있는데, 이 사람이 결국은 그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게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고 있어요.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는 사랑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게 될 때에는 이것이 계속 흐르고 이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게 교통애가 아니라 단절애가 되게 되면 내가 아무리 먼데 있는 사람을 사랑해도 이것이 사랑이 이렇게 멎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멎는 거야. 그래서 사실은 확장이 안되는 거야. 그러한 의미에서 이것을 단절애라고 부르는 거지. 단절애의 대표적인게 에로스의 사랑이잖아. 예를 들어서 사랑에 빠졌다고 하면, 누리고 싶지 뭐 수많은 사람하고 같이 있고 싶지 않잖아. 예를 들자면. 그러한 식으로 사적인 사랑은 단절애에요. 이게 확장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사랑하는 자, 진정한 사랑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참된 만족은 이 신적 사랑을 이렇게 유통하도록, 흐르도록 만들어 주는 통로가 되는 것 자체로 충분히 자신이 만족을 하게 되는 거야. 그게 결국은 성도의 하나님에 대한 만족의 사랑이론을 그러한 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만으로 만족합니다가 무슨 뜻인가 하면 나는 없고 당신의 사랑을 이렇게 흘려보내고 당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이러한 도구가 되는 것 자체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것이 신론적인 표현이 하나님만으로 만족합니다. 이러한 표현이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재밌잖아요. 이러한 식으로 설명이 되는 거야.
그래서 여기에서 이제 아가페 까리따스의 개념이 나오거든요. B번을 보겠습니다.
<본문>
이렇게 영생이 시작된 성도의 사랑은 삼위 하나님의 교제의 모상입니다.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인 사랑인 삼위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지순의 사랑 즉,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이 삼위 간에 교통하는 사랑의 모상인 교회에 참여한 신자들의 개인적인 구원의 경험을 통하여 까리따스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신자들이 이러한 개인적인 구원 경험을 통해서 공동체를 향한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알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의 공동생활이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누구도 이러한 공동체적인 사랑의 앎의 성숙이 없다면 온전한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을 이해함에 있어서 다음 사항들이 숙고 되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제 그렇게 결국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이 그 자체가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 다음에 사랑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이야기 하면 긴데, 여기에 보면 아까 그러한 이야기 했잖아요. 결국은 하나님의 속성이 있고,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이 있는데, 방식이 있는데 이 두가지에 대한 앎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다. 말씀드렸잖아요. 잘 봐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있고 그 속성이 시행되는데 사실 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구획이 나눠져서 사랑, 공의, 의, 거룩함 이러한 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떻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실 때 공의의 측면도 나타나고 그 다음에 또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측면도 나타나고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모든 다양한 하나님의 속성들, 속성들이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각각 다른 효과들이 나타나겠죠. 공의로움의 하나님의 속성이 시행이 될 때 극단적인 심판을 받고 고난을 받으며 하나님을 잘 섬겼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상을 해줄 것 아니야. 이러한 식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것 아니야. 그런데 사랑은 이 모든 것들 속에 무슨 성품이든지 간에 인간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을 때 모든 속성이 나타남 속에 배여있는 것이란 거야. 사랑 자체가.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극단적으로 심판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남이라는 거야. 나타남이야. 그래서 개인의 삶속에 나타나잖아.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하면 막 때리시잖아. 때리시고 어루만져. 이러잖아. 때리실 때 아프고 몸이 터지고 피가나고 그러는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 되어요. 그러면 반대로 용서하실 때에는 없겠네. 때리실 때 사랑이 피와 함께 나타나니까 용서할 때에는 날라가겠는가. 용서할 때에는 용서하시는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베어나와서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 안에서 가장 강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 같은 그러한 인상을 신자들이 갖는다는 거야.
문제는 그것을 인식하느냐 못하느냐. 세계와 맺으신 하나님의 관계 자체가 사랑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질문> 아까 설명하실 때 성령님의 사랑 그 자체로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면 그 성부와 성자에서 나오는 것은 알 것 같은데요, 삼위간의 교제라 할 때 사랑의 교제할 때 성부와 성자, 성령하고 두 분이 성령하고 사랑하고 교제할 때.
<김남준 목사님>
두분이라고 자꾸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지금 우리는 이렇게 있잖아. 페르소나라고 할 때 인격이라고 할 때,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이거야.
<질문>
본질적으로 뭐가 근거가 되는가요. 그것도 사랑 자체인가요? 삼위간의 그 사랑이 존재할 때 그때는 본질적으로 성령을 대상으로 하는가, 뭐가 근거가 되는가요. 사랑 그자체가 성령님이라고 말하면, 그 교제할 때 성부와 성자와 교제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면 그 대상이 본질적으로 성령이 될 때에는 그것도 그자체가 사랑이 되는 것입니까.
<김남준 목사님>
그렇죠. 성령님은 삼위중 한분으로서 아버지와 성령께 사랑을 받으시면서도 동시에 사랑자체 이시죠. 대게 종교개혁자들은 그러한 설명까지 안가요. 창조세계 안에서 보는 거지 그러한 위로 올라가지 않아요. 설명을 해보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보면 안된다 이거죠. 아까 이야기 했듯이 예를 들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 때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반응할 수 없게 되잖아. 그러면 예를 들면 강윤석 목사가 95년도에 회심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 그 전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셨겠어? 계속 사랑했는데 회심하니까 나에게 계속되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었던 것이지. 그래서 이제 결국은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야.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선택한 자들을 사랑하는 거야. 그래서 그 야곱과 에서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이 이는 미워하시고 저는 사랑하셨다 하잖아. 그러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던 사랑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결국 선택의 문제와 관련이 되잖아.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 그렇게 해서 이제 이게 전개가 되는 거예요. 다 못하겠다. 절반만 해야 되겠다. 그 다음에 51페이지로 가게 되면 사랑의 근거 그랬거든요. 여기에 보면 서로의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에 결국은 사랑한다는 거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서 다 못하겠다. 1번정도까지만 하면 중간 안될까? 1번 정도까지만 하면 중간 될 것 같은데, 뒤에는 좀 쉬워요. 1번 자 그 다음사람 읽어봐요. 사랑의 근거.
<본문>
첫째로, 지체로서 성도들의 서로를 향한 사랑의 근거입니다. 사랑은 한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즐거워하려는 영혼과 마음의 작용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사랑의 동기는 언제나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목표로 정하게 되고 그것을 계속해서 즐거워하려는 애착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과 정신의 작용이 사랑인 것입니다.
성도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서 그의 몸의 지체가 된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진리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곧 신미를 봄으로써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또한 진리를 통하여 교회 안에 있는 삼위의 교제의 모상을 발견함으로써 복음 안에서 드러난 영속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성도는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를 이루는 신자 각 사람의 영혼의 아름다움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의 아름다움과 그들의 연합의 질서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아가페를 경험하는 데서 비롯된 까리따스, 곧 지순의 사랑이며 이 사랑의 교통적 성격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들을 이해할 때 다음 사항을 숙고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이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번 사경회때에도 거론이 될 텐데요. 음 이렇게 놓고 뭐가 나오는가 하면, 이정도만 할께요. 이게 뭐냐 하면, (아슬레 티브하 우 티카레브 ..... 아 베투브 베티카) 이렇게 다오거든요. 당신이 선택하시고 당신이 가까이오게 하신 사람의 행복이여. 나오고 우리는 배부를 것입니다. 뭐냐 하면 베투브 베테카라고 하잖아요. 여기에서 나오는 투브가 당신의 집이고, 투브가 토브에요. 선이잖아. 히브리에서 미라는 뜻으로 같이 쓰여요. 그래서 선과 미는 하나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야, 그 여자 참 예쁘다 할 때 그 뭐 8등신이고, 조각처럼 깎아내고 외모를 보고 예쁘다 하는 것은 헬라적 개념이고 여자로서 딱 적합한 것, 아이 잘 낳고 그 다음에 남편에게 가사 일을 잘 돕고 그러한 것이 아름다움이에요. 선과 미가 일치를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할 때 이것을 이렇게 표시해요. 하나님을 이제 이렇게 이렇게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선이 되지만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최고 가치가 미가 되는 거예요.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이 되는 거야. 그 다음에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진이 되는 거야. 진, 선, 미, 성 이 모든 것이 정상의 하나의 개념이에요. 이게 아름다운 자체가 선함이라는 거죠. 이문제도 부분적으로는 다 설명을 했는데 여러분들이 다 기억을 할 리가 있겠어요? 그죠. 그래서 사실은 많이 이야기 한 것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이야기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제 그것도 별로 이렇게 힘도 안나고 말한 거라서, 처음 말할 때 힘이 나죠. 그런데 이제 이런게 뭐냐 하면 이렇게 되는 거죠. 그 사랑이 있는데 첫째,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사랑의 대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유익을 주기 때문에, 여기에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good이에요. 에드워즈가 잘 쓰는 표현인데 외관적 아름다움이에요. 진짜 아름다운 것일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는 거예요. 이러한 유익, 이러한 유익들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이러한 것들을 목적애라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게 아니라 이것은 개체의 문제잖아. 개체가 아니라 사랑하는 주체 자체가 성향이 사랑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흘러나오는 것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박애라고 하는 거예요. 이러한 사랑이 두 개로 나뉘어 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하나로 통합되는 거죠. 어떻게 통합되는지 굉장히 중요해요. 잘들어보세요. 성도들에게 잘 설명을 해야 해요. 어떻게 이것이 통합이 되는가 하면 이러한 식으로 되는 거예요. 목적애는 대상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때문이잖아요. 그림을 그리면 이렇게 되잖아요. 여기에 사람이 있는데, 이러한 인간이 있다고 치자 이거야. 그런데 대머리는 벗겨지고 배는 툭 튀어나오고, 다리는 연아와는 정반대로 정말 짧고, 이렇게 되었다 말이야.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못생겼어요. 그런데 이 사람속에 잘 보면 이 사람속에 사랑이 있는데, 이 사랑이 조금 있을 때 그리고 많이 있다 그러면 조금 있을 때에는 외관에 의해서 파악을 해. 되게 못생겼네. 추 이렇게 판단하는 거야. 결국은 뭐냐 하면 사랑을 덜 느끼게 되는 거죠. 조금 사랑해. 그런데 이제 사랑이 아주 많아졌어요. 은혜를 받아서 되게 사랑이 많아졌어요. 이 사람을 쭉 보는 거예요. 이렇게 보는데 전에는 외관을 이렇게 보는 거예요. 외관이 아니더라도 단점이 이렇게 보이는 거야. 그래서 적게 사랑하게 되는 거야. 그런데 이 양반이 은혜를 받아서 아주 사랑이 많아졌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사람속의 영혼이 보이는 거야. 이 사람속의 영혼을 보니까, 뭐냐 하면 아주 외관이 이럴만한 단점이 있는데도 이 사람의 정신과 영혼이 아주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결국 뭐냐 하면 박애하게 되는 거야.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되는 거야. 이제 그것은 뭐냐 하면 객관적으로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럴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럴 때는 더 많이 보게 해주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죠? 그러한 점에서 이 목적애와 박애애는 통일을 이루는 거야. 이것을 칼빈이 형상이론으로 설명을 하는 거야. imago Dei를 보게 해준다 이거야. imago Dei 때문에 가장 비참해 보이는 인간도 외관이나 단점에 메이지 않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imago Dei를 보게 해주는데, 이것을 보게 하는 것이 성령과 진리가 하시는데, 이 사람의 사랑의 속성을 통해서 하신다는 거야. 사랑의 성품을 통해서 하시게 되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요? 박애가 많은 사람일수록 어떻게 보면 이러한 이 사람 안에 있는 이 아름다움을 많이 보게 만들어 주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성도들을 사랑하게 하는데, 그 사랑이 뭐냐 하면, 얘전에 안보였던 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게 만들어 주는 거야. 지난번 1교구 할 때 보면 남편이 영혼으로 보이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러한 단점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다애하게 만드는 거야. 도덕적 통치에 들어가서 이 부분을 상사하게 설명한 부분이 있거든, 꼼꼼하게 정리해가지고 책속에다가 기록을 해놔. 여기까지만 해야 하겠다.
<질문> 이해가 가는데요. 이해가 있었는데, 어느 정도 이해가 풀렸는데요 성경이 타락한 인간을 향하여 이야기 할 때에는 전적인 부패를 이야기하고 전적인 투항을 이야기 하는데, 남아있을 수 없다라고 한다면, 없는 것을 있는 척 하며 사랑하라는 것인가 라고 하는.
<김남준 목사님>
남아있죠. 하나님의 형상은 잔존하고 있죠. 그 희미한 것 만이나마 사랑하는 것. 그 발가락이 닮았다 못 읽어봤어?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아무것도 닮은 것이 없는데, 발가락이 닮았구나 이놈 내 자식이구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잖아.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니까 지극히 작은 것도 무한하게 보이는 거죠. 임목사를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단점이 많이 있어도 그대가 가지고 있는 객관적인 장점은 분량이 있을 거잖아. 그게 사랑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많아 보이는 거고. 사랑의 분량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니까 당신 자신의 형상을 그 안에서 우리가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면서 우리를 그 눈물겹게 사랑하시는 것이지. 구속의 드라마를 전개해나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이지.
<질문>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가 되는데, 사람들이 그...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뭐냐 하면, 우리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부음바 되었으니, 이렇게 보어지는 것은 아가페 사랑인데, 그것이 이렇게 부음바 되었으니 나타나는 것이 caritas의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 이것이 caritas 이론인데, 그러니 결국에는 뭐냐 하면 이 agape는 삼위 자신 안에서의 교통을 포함하는 우리 자신을 향하여 발현되는 사랑이지만, 인간의 사랑은 삼위 자신안의 교통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고 인간과 교통하기 위한 사랑이잖아.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거의 없는 희미하게 남은 흔적을 이 무한한 사랑 때문에 이것을 굉장히 크게 보시는 것, 이러한 작용이 caritas의 사랑안에 있다는 거야. 그래서 이 사랑이 신비라는 거야. 이 사랑이 신비인 거야.
<질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관점, 내재하는 죄로 인해서 모든 것들이 파괴되어서 그 안에 있는 것들로 사랑하기 보다는 그 관점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문제점이...
<김남준 목사님>
중생의, 중생의 의가 뭐라 그랬나? 중생의 존재론적인 의와 무슨 의가 있다고 했지? 이신론적인 의. 이신론적인 의가 뭐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신미를 보게 해주는 거야. 그것을 얹어 주는 거지. 찬송가에도 보면,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니까, 보이잖아. 똑같이 인간안에 있는 잔존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사랑이 확 부어지면 굉장히 크게 보여주시는데, 그러한데 주의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자체가 그 인간에서 자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없는 휴머니즘에는 빠지지 않는 거야. 그것은 불가능한 거야. 성격적으로 불가능한 거야. 원래 사랑은 하나밖에 없는 거야.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왜곡된 세계관에 의하여 하나님이 잘못 해석되어서 수많은 종교가 생겨나듯이 이것이 개소리하는 사랑이 많아도 그것은 다 개소리이고, 사랑은 하나밖에 없다는 거야. 이렇게 보자.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되지. 여기에 딸기가 있잖아. 이렇게 보는 것과 빨간 안경쓰고 보는 것과, 파란 안경 쓰고 보는 것과 그 다음에 또 난시환자들이 쓰는 보고 보는 것과 볼록렌즈, 오목렌즈로 들여다보면 온갖 것이 다 틀리게 보이는 거지. 그리고 각기 자기 사랑을 이야기 하고, 그것으로서 건너편에 있는 세계를 재투사하려고 하는 거야. 봐. 여기에 여기에 이러한 물체가 있잖아. 객관적으로 이러한 물체가 그런데 이렇게 이 인간이 이렇게 이렇게 오목렌즈로 들여다 봤어. 인간이 이렇게 보일 것 아냐. 어? 맞잖아. 아닌가? 반대인가? 반대이구나. 볼록렌즈로 봤다 이거야. 볼록렌즈. 이것이 이렇게 보일거 아냐. 여기에는 이것도 있고 이것도 있고 이것도 있고 이렇게 다양한 것들이 있잖아. 다양한 것들이 있다고 치고, 이것을 여기까지는 현실세계야. 이것은 자기의 본색이야.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이게 이것보다 크다고 주장하는 거야. 그게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무슨 뭐, 사랑을 이야기 할 때 다 영원의 개념이 들어가는 거야. 나라를 사랑하면 애국자에게는 나라가 무한한 가치요, 그 다음에 최고의 존재인 것처럼 보이는 거야.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나라잖아. 그러한 식으로 보세요. 영원하게 나는 죽어도 나는 영원하다. 이념을 통해서 죽든 뭘 위해서 죽든, 모두다 인간의 참된 휴머니티를 짚밟고 억합하는 거란 말야. 이러한 잘못된 사랑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기 때문에 기독교야 말로 참된 휴머니즘이다라고 하는 설명이 이와 관련되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죠?
그럼 보겠어요. 뒤에 쭉 넘어가서 1번까지만 해요. 1번까지. 그래서 결국은, 그냥 넘어가겠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의 근거, 하나님 때문에 성도를 사랑하게 되는 거야.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면 돼, 이중적이지 하나님 때문에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니까 사랑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성도들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만들었기 때문에 사랑하죠.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일방적인 보답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안돼.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신단 말이야. 그래서 그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성도간의 아름다움을 알게 만들어 주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죠? 마지막으로, 성도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거기까지만 하겠습니다. 54페이지 위에 첫 단락까지만 인도를 해요. 너무 양이 많아서 작은 과는 한번에 나가지 이것은 너무 양이 많아서 두 번에 가요. 한번에 다 못할 것 같아요. 이러한 식으로 문제를 여러분들이 천천히 풀어보고 그리고 사유를 넓혀가기를 바랍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여러분들, 정말로 이번에 사경회를 잘 들으세요. 그러면 7번을 설교할 것이거든, 어젯밤 1시되서야 겨우 다 끝났는데, 7번을 설교 할 텐데 그 설교되는 것들을 잘 메모를 하면서 들으면서 이것하고 잘 결합을 시켜요. 여러분들이 훨씬 더 이해가 잘 될 꺼예요. 질문 있으면 한번 해요.
2-2강
시작되는 신자의삶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다라고 그래서 영생의 시작을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안에서는 삼위하나님과의 교제로 보고 그래서 결국은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영생의 인간적 공동체적 지평으로 펼쳐지게 되는데 이것이 결국 성도의사랑이에요. 교통이고, 결국은 삼위간 교제의 모상이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심이 삼위 안에서 각 위가 서로의 완전하심과 그리고 완전하심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또한 성도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교통함으로써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사랑의 성도들간의 사랑하는 그 근거가 삼위 안에서의 각 위의 서로 사랑하심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심 때문에 완전하심 때문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인데, 그 아름다움의 정체가 바로 각 위의 완전하심이고 그리고 삼위의 질서 안에서 각 위의 완전하심 때문에 삼위 하나님은 서로를 사랑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한 분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 거예요. 그러면 똑같이 교회가 사랑의공동체라고 하는 이 접근을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그릇된 방식으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오늘날 교회가 사랑이기 위해서는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무엇을 계속 해주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것은 마치 레오 10세에게 쓴 마틴 루터의 편지가 생각나게 하죠. 그 편지속에서 서신속에서 마틴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우리 자신의 변화는 사랑을 가져다 주지만,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자신에게 믿음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우리가 카톨릭에서는 바깥으로 끊임없이 어떠한 선행을 하고 공로를 쌓아 감으로써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으로,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그 오늘날 우리들이 하는 접근이 다분히 카톨릭 적인 것이 아닌가 반성을 해보자 이거에요. 즉 교회가 사랑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들을 하고 이러이러한 일들을 함으로써 그것이 그것을 통해서 교회 자신이 그 사랑이 되어 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로이드 목사님은 자신의 책속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남겼어요. 교회는 이 세상의 미담을 남기기 위한 공동체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는 어떠한 좋은 일화를 남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다라고 교회는 이러한 세상의 평가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진리안에서 자기의 그 변화된 본성대로 흘러갈 뿐이에요. 그래서 교회가 사랑이라 할 때 그 사랑은 삼위 하나님의사랑이 성도들의 마음안에 있어서 그것이 실질적으로 성도들과의 관계속에서 행사됨으로써 교회가 사랑이 되는 거죠. 사랑 자체는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한번 맺은 관계를 지속하려고 하는 정신의 성향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사랑이 있으면, 교회가 사랑이 있으면 교회는 움직이는 생물체처럼 절대로 가만히 있을수가 없어요. 그 안에서 각양 놀라운 변화의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뻗쳐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찼을 때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래서 그 사랑이 뭐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공동체 안에서 펼쳐졌기 때문에 성도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사랑의 근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그 성도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여받은 아름다움 때문에 아름다운 거거든. 그것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의 육체가 죽게 되면 980원 정도의 가치가 되는 비료래요. 비료로서 치면 980정도의 가치가 있는 말하자면 물질이라 얘기에요. 그거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매우 존귀한 사람들이 되는 것처럼 성도들 안에 무슨 아름다운 것들이 있겠어요. 그러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관계를 맺은 그 관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그것을 통해서 결국은 그 성도들이 그 말하자면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고 그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그 성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과 똑같이 비례하는 것이다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안에 형제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누가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지평을 이루어 만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 의미가 바로 예수님께서 둘째도 이와 같으니라고 하시는 의미에요. 굉장히 깊은 뜻이 있는 것이에요. 둘째도 이와 같으니라고 하시는 이것이 그 두 지평이 그렇게 하나의 사랑안에서 만나는 거예요. 어쨌든 여러분 공부 많이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54페이지에서 뭘 이야기 하는가 하면, 사람의 존재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 했거든요. 사랑의 목적을 이야기 했는데 존재의 목적은 그래서 이제 아가페의 사랑과 까리따스 Caritas의 사랑을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지순애 사랑이 목표를 일치하게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사랑과 사람의사랑이 어떻게 일치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섬김의 목표가 되는지 지난 시간에 설명을 한 거예요. 매우 중요한 내용이었어요. 이것을 기초로 하여 57페이지 내용을 넘어가면 개관을 먼저 하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러한 그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이해하고 그리고 교회를 그러한 일치 속에서 바라보게 되면 사랑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두 가지 어려움이 동시에 있는 거예요. 뭐냐 하면 항상 까리따스의 사랑을 간직하지 못하는 나, 이게 제일 큰 문제이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지체들에게 여전히 그러한 부패함이 남아있기 때문에, 미완성된 성도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관계가 끊어지고 막히고 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말하자면 사랑을 완성해 가는 아픔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57페이지 시작을 사랑의 아픔이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대한 처방은 오직 이렇게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많은 분쟁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원인은 둘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영원에 대한 무관심과 그리고 헛된 이기심이에요.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뭐냐 하면 다음 시간에 올 때에는 이것 가지고 올 때 <도덕적 통치>를 같이 가지고 와요. 그래서 뭐냐 하면 내가 <도덕적 통치>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했죠. 영원은 시간속에 있는 사랑은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시간속에 있는 인간의 영원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을 알 수 있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바로, 그렇죠. 영원을 이해하는 방식이 사랑을 통해서 영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에요. 완전히 파악한다고 말할수 없지만, 사랑하기 전까지는 영원을 이해할 수 없고 영원은 곧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그래서 참된 빛이요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그리고 진리여 아름다운 진리여, 참된 빛이여,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여. 원본 외웠었는데 잃어버렸는데 아주 아름다워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렇게 그 노래를 하죠. 참 신비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들어요. 기록을 하면 더욱 좋을 텐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반드시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며, 개별교회에 대한 사랑은 필히 이 보편 교회에 대한 사랑의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개별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개별교회들이 다투고 경쟁하고 그러한 그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영국에서는 스펄전목사님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저 멀리 교회가 보이면 항상 함께 타고가던 동역자들에게 우리 저기 있는 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랬다고 해요. 교단은 다르고 그래도 우리 저교회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신앙도 문장속에서 좀 부족한게 그러한 보편교회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에요. 사실 이것이 종교개혁이 잃어나면서 끊어졌어요. 그런데 사실은 어떻게 보면 종교개혁 자체가 그 개혁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잃어버린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과 그 교육을 통해서 상실한 보편교회를 되찾고자 하는 운동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현저하게 흐려져요. 제가 개혁파 정동주의를 연구하면서 아쉬운 아주 강하게 아쉬운 점이 그거예요. 보편교회에 대한 철저한 사랑, 이러한 것들이 현저하게 아쉬운 거예요. 치혈한 신앙의 논쟁속에서 그 서로에 대한 보편교회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쉬운 거예요. 그래서 나보고 왜 서울신학대학교 갔더니 장로교 목사님이, 성결교 목사님도 안와서 장학금 안주는데 장로교 목사님이 와서 주느냐고.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입니다. 고신에 갔을 때도 그래요. 우리 교단 목사님들이 열린교회 보면서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의도로 여기 온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장로교의 교리를 내세우면서 그것이 성경적이고 옳은 각성을 학문적으로 강력하게 논쟁할 수록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깊이 끌어안고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이렇게 사랑하며 베풀고 그가 이단에 속하지 않는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섬기면서 사는 것이 그것이 건강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57페이지 읽어보세요.
<본문>
이처럼 교회를 향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도 완전하고, 그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도 완전하시며, 그들로 자신 안에서 교통하게 하시는 성령님도 완전하십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칭의의 구원은 완전하나 그들은 아직 온전한 의인의 영에 이르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중생과 함께 새 사람을 입었으나, 여전히 옛사람이 남아있는 존재들이기에 그들이 모여서 이루는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하고, 그래서 까리따스로서 교회와 그 지체들을 사랑하려는 성도들에게는 미완성에서 오는 사랑의 아픔이 있습니다. 이것도 이중적인 미완성의 아픔인데, 사랑받는 대상인 지체들이 완전하지 않은 존재라는 점에서 오는 아픔과 그들을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지체들도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오는 사랑의 아픔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참 재미있는게, 조나단 에드워즈는 상당히 서민적인 목회자가 아니었거든요. 철학적이고 귀족적이죠. 집안도 그렇고 그래서 이제 그 집안의 사치함 때문에 교회에서 문제가 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Spirituality라고 하는데, 영성이라기보다는 정신, 육체와 대비되는 인간내면의 세계 그러한 것을 가르키는 것이겠죠. 영성이라기 보다는. Christian Spirituality는 그 마르틴 루터도 참된 설교자 하면 그는 고난당하는 설교자 이어야 한다라고 했거든요.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그 고난이라는 shade은 매우 달라요. 그래서 마틴 루터가 그러한 shade를 자기 교회 바깥에서 많이 보았다면 그럼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우는 자기 안에서 많이 본거예요.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성령문제로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때 교인이 726명인가 그랬대요. 그런데 투표를 했는데, 에드워즈 목사님이 계속 계셔야 됩니다라고 투표한 사람이 19명밖에 안되었대요.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 개인적으로는 교인들에게 호감을 주지는 못하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교회의 중심을 이루는 것 자체가 이미 벌써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위원들이 6명인가 9명인가 있었는데 그 위원들 자신이 평소에 에드워즈에 대해서 굉장히 그 신학이 독선적이라 생각을 하고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 증거, 그러한 와중에서 미국에서 가장 난해한 책이라 여겨지는 나도 읽었는데 이해는 어느정도 했는데 참 어렵더라고요. 그 책이 나왔을 때, 200권밖에 안 팔렸어요. 그러니까 이미 벌써 에드워즈가 그 교회를 떠날때는 알미니우스 주의가 확 번성했어요. 그래서 고통당하는 영성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되잖아요. 우리의 몸에서 어느 세포가 죽어가면 사실은 그 세포가 아픈 것이 아니라 다른 세포들이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신경세포가 죽어 있으면 감각자체를 느낄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 왜 뭐죠? 어디 상처나고 하면 다른 곳이 딱딱하게 붓잖아요. 그 장소하고 부은 장소하고 상관이 없는데 예를 들면 상처가 나서 감염이 된다거나 온몸이 욱신거리고 쑤시면서 잠을 못자고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한 식으로 되는 거야. 그런데 이번에 여러해 만에 치과를 갔는데 사실은 저번에 스케일링 받고 이번에 간게 내 생애에 있어서 3번째 치과에 간거였어요. 치료를 받고 하는데, 신문을 봤는데 이빨을 관리를 잘 못하면 심근경색, 그 다음에 콩팥, 신장염. 그런데 이것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어? 그런데 이빨 관리를 잘 못하면 잇몸이 상하는데 잇몸이 핏줄이 있는데 여기로 치조가 곯아서 고름이 들어가잖아. 그러면 그 바이러스가 전체로 퍼지면서 콩팥으로 들어가서 신장염으로 일으키는 거야. 그래서 신장염이 심근경색을 일으키는 거야. 그래서 기겁을 해서 달려갔더니 그 의사가 웃으면서 그 원리가 맞는 거라고. 그러면서 잇몸관리도 무지하게 중요하다고 그래서 잇몸 붓고 피나는 사람들 있잖아. 그거 빨리 치료를 해야 해. 계속 들어가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연관관계까지 생각안하잖아. 잇몸이 안좋아서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어요. 그거 무슨 상관있나. 그런거야. 치료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의 몸이 이렇게 잇몸이 상해서 고름이 나고 아픈데 그 고통을 신장이 당하고 신장을 통해 심지어는 결정적으로 우리 몸의 심장에서 문제가 생겨가지고, 이게 결국은 몸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은 참 공평하셔요.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은혜에서 멀리 떠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만족을 못해서 고통을 받지 다른 사람의 죄나 하나님 사랑으로부터의 그 소외된 것을 인해 마음아파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멀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 때문에 아파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멀어진 것 만큼 자기가 그 사랑에 가까이 다가간 다음에 그것이 극단화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이 아주 정확하게 귀추를 따라서 잃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내가 그 최근 한 몇 달동안 교회에 대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며 느낀 것이 뭐냐 하면, 우리 교회에 이러한 것들 이야기 하잖아. 내가 옛날에 좋아했던 단어중에 하나가 Heavenly Doctor잖아. 누군가가 무엇이 되고 싶냐고 하면 나는 Heavenly Doctor가 되고 싶습니다. 그때 그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목사는 영혼의 치료자입니다. 의사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사람 하나하나를 놓고 의사가 몸을 만지는 것처럼 목사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해부하고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영혼의 기능들이 연결되고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망가지기도 하고 그 다음에 새로 고쳐지기도 하는가를 풍부하게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의사잖아. 요즘 생각한 것은 뭐냐 하면, 그 정도 가지고 안되. 그게 아니고 교회의 교회 그 자체를 하나의 몸으로 보고 교회 그 전체를 고칠 수 있는 그러한 영적인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단말야. 우리의 약점은 너무 소화적이기 때문에 구원도 그렇게 교회론적 구원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론적 구원론을 펼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신론적 구원론도 아니야. 인간론적 구원론을 펼치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방식은 출발부터가 소화적이에요. 신이라는 것도 결국은 개인의 진위로 떨어지고 구원이라고 하는 것도 개인의 영역으로 떨어지게 되니까 그러니까 이제 파괴적인 신앙을갖게 되고 매우 불건강한 신앙을 갖게 되는 거지. 교회 목적 전체 안에서 영원의 그 영원을 위한 Heavenly Doctor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사람 하나 하나를 다룰 수 있을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에 붙여있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그 능력과 그리고 이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본문)
더욱이 교회는 단지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만 사랑하도록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은 교통적 사랑이니, 그 사랑의 감화를 통하여 신자 안에 소유하게 된 지순의 사랑도 교통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교회가 이 세상으로부터 치열한 핍박에 직면하기도 하는데, 그때에도 교회는 비진리와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까지 사랑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그릇된 사람들과 부패한 죄인들도 그들이 바른 길로 돌아오기까지 인내하며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과연 그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의 사랑이 결국 교회를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분리 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 거예요.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봅시다. 어떻게 생각해 임목사는? 교회를 향한 사랑과 신자의 교회를 위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은 어떤 점에서 구별될 수 있고, 어떤 점에서 구분될 수가 없을까.
(대답)
하나님께서 교회도 사랑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교회를 위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은 동일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래서 본인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의 연장선상에서 동일하게 그 세상도 사랑해야 하고 세상도 교회로 돌아올 수 있는 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누가 이야기 또 해볼까. 이 목사가 얘기 해볼까?
(대답)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세상가운데 택하신 당신의 교인들을 더욱더 사랑하시고 당신의 계획안에서 사랑하십니다.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 같은데,
(김남준 목사님)
강목사, 보태고 싶은 말있어?
(대답)
두분의 얘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질문)
53쪽에보면, 교통적 사랑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이해가 안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실제에 있어서 보면 사실은 그렇지가 않고 그리스도, 사랑이 자꾸 이렇게 블록에 갖혀있는 거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실제로 적용을 해보면 교회에 있는 부서이기주의 그 다음에 우리 교회만, 우리 교회에만 하는 그러한 개교회 이기주의 이러한 것들은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개교회에 대한 사랑이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뿌리를 내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가 교회와 세상은 구분이 되겠죠.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이러한 정도로 놓고 보죠. 이렇게 해서 이것이 하나의 교회입니다. 이렇게 교회. 교회에요. 여기에 이제 많은 성도들이 있겠죠. 성도들이 있어서 그래서 성도들이 이제 사랑으로 이러한 식으로 교통하게 되죠. 그중에 그리스도와 교통하고 이렇게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심으로써 이것이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유념해봐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자 이것이 예를 들어서 State 2라고 합시다. 3라고 해봅시다. 그러면 Stage 이전을 더듬어 가보자. 이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면 이러한 식으로 일치하게 되겠지 않겠어요? 자,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현실교회야. 현실교회에 있었는데 똑같이 이러한 사람들이 둘, 셋, 넷, 다섯, 여섯, 이러한 식으로 있지 않았겠어요? 이렇게 되지 않겠어? 그러면 여기는 어떠한 형태가 될까요? 똑같이 이렇게, 이렇게 되지 않았겠어요? 이러한 식으로 그림을 그리면 이쪽으로 계속 뻗어나가고, 이쪽으로 계속 뻗어나가겠죠. 그러면 결국은 이 사람이 이 교회 바깥이었어요. 이 교회가 결국은 이렇게 자란거죠. 그러면 결국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사람이 이렇게 들어오게 된 것은 이러한 사랑의 속성 자체가 어떤 거라 그랬죠? 관계를 맺고 그 다음에 한번 맺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성향이 이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사랑하면 헤어지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서로 사랑하면 굉장히 힘들어져요. 그래서 어느 시인이 인연이란 질긴거야. 인연이란 질긴거야. 마치 가위로 그림자를 자를 수 없는 것처럼 인연은 질긴거야. 이렇게 시인이 노래를 했어요. 작아지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관계를 맺고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죠. 용서라고 하는 것은 이 성향이 자기에게 죄를 지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에 발산하여 나타나는 하나의 빛깔이 바로 용서에요. 용서. 사랑이,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 용서이기 때문에 내가 너를 용서는 해주는데 다시 꼴도 보기 싫다. 이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는 거야. 이것은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 여기에서 십몇년전에 이미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도 이러한 사랑의 성향 때문에 이러한 사랑의 성향이 계속해서 밖으로 펼쳐 나가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든지. 이렇게 이렇게 세상을 향하여 전진해가, 세상을 향하여 펼쳐져 나간 결과로서 이 사람이 이게 A라고 합시다. 그 사람이 A'로 들어오는 거란 말이야. 그럼 뭐냐 하면 이것이 교회이고, 그 다음에 이것이 세상이라 할 때 이것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확장되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해가는 과정이야.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됐어?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해가는 과정이에요. 이렇게. 완성해가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돼요? 여기에 어떠한 사람이 이렇게 들어오게 되고, 여기에서도 어떠한 사람이 들어오게 되고 이렇게 이렇게 될 때에 그러면 요 지점에서 이 사람이 세상이었지만, 이 지점에서는 이 사람은 세상이 되고, 이 사람은 교회가 되는 거야. 이 지점에서는 이 사람이 세상이었지만, 이 지점에서는 이 사람이 교회야. 이 사람을 향한 사랑이 교회 안에서의 사랑이고 그 교회 바깥을 향한 사랑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세상을 향해 확장해 나가는 방식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라는 거야. 선교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세상을 향한 사랑과 교회를 향한 사랑은 이게 사실은 동질의 것일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야. 동질의 것일 수 밖에 없다. Caritas의 사랑. 이게 바로 그리스도께서 둘째도 이와 같으니 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그 다음에 이웃사랑을 통합시킨 하나의 그 설명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 문제가 신대원 졸업해서 한참 후에까지도 정리가 안되었어요. 굉장히 힘들었어요. 나 자신에게는 어떻게 이것이 일치가 되는지에 대해서 혼란스러워요. 이제 사상적으로 이러한 식으로 형성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에게 교인들에게 자, 교인들에게 사랑을 가르칠 때 교회용 사랑이 따로 있고, 세상용 사랑이 따로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데, 이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사랑이 동질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서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세상을 향하여 사랑하고 확장해가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개별적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한 점에서 사실은 이 두 사람은 분리될 수 없는 거죠. 만약에 성도끼리 많이 사랑하고 밖으로 흘러가지 않는 사랑이라면 이것은 사실은 진정한 의미의 Caritas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죠. 이것은 경험적으로 우리가 항상 생각을 해보면 잘 입증이 되죠. 성도들이 여러분들이 성장반이나 이러한 것들을 해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성도가 가득차게 될 때 성도가 그러한 복음의 진리를 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무슨 그때 심정이 어떠한 심정이 될까요? 전도사님, 경험에 의해서, 어떠한 마음이 될까?
예를 들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의 밝음에 대해 눈뜨고 깊이 감격할 때 그는 유난히 누구를 사랑하게 되는가 하면,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죠.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어요. 그래서 진리를 가르쳐주면 그 진리를 깨닫고 깊은 감동을 느끼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누가 생각나는가 하면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이 나. 그리고 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과 진리에 대한 경험이 나뉘지 않지만 위격들과의 교통에 있어서는 각각 차별이 있을 수 있으니까 주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놀라운 위로를 경험했다고 치자.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Caritas의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에 꽉 차게 되었을 때 누가 제일 먼저 생각나게 되겠어요? 위로받지 못한채 예전에 자신처럼 소외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제일 가엾은 거야. 이게 가슴속에 밀려오게 되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잘들어요. 자, 한 사람안에 있는 그 어떠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정동은, 정동을 느끼게 되면 이쪽으로 이쪽으로 똑같이 사랑이 뻗어나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사람이 굉장히 무지한 사람이었는데 진리를 밝은 진리를 깨닫게 되니까 밝은 진리를 깨닫게 되니까, negative한 의미에서, positive한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사랑의 밝음을 깊이 깨닫고 감격을 하게 된거야.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야. 그렇게 될 때, 그래서 이것이 아주 충만하게 가득하게 될 때 그때에 negative한 의미에서는 이 진리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야. 이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진리가 없어서 시커멓게 어둠속에서 살아가는 거의 동물과 같은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러면서 사랑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사랑하게 되는거야. 또한 한편으로는 자기와 똑같이 진리를 공유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야. 은혜 받은 성도들이 함께 만나면 시간 가는줄 몰라. 그래서 이 사람에 대해서도 사랑을 느끼게 되는 거야. 긍정적인 방식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혹은 소극적인 방식으로, 적극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잘들어요. 이 경우네는 항상 사랑이 통을 동반해요. 통. 고통이에요. 아픔을 동반하고. 이 경우에는 무엇을 동반할까? 희. 기쁨을 동반해요. 이 두 가지가 다 쏟아져요. 참으로 진리를 알고 거기에서 정동을 느끼고 충만해지는 사람이 아니면 진리를 아는 사람을 만나서 그것을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이러한 강하고 신령한 기쁨, 이 사랑이 잘 생각을 해봐요. 그렇게 본다면 획일적으로 나누기는 어렵지만 교회가 아주 온전한 모습을 가지고, 온전한 교회이면 교회일수록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쪽 방면은 Intra Ecclesia, 교회 속으로의 사랑이 되고, odd extra Ecclesia가 되겠죠. 교회 밖으로의 사랑이 되지 않겠어? 그러면 이쪽으로 가든지 이쪽으로 가든지 이 사랑은 동질의 사랑이에요. 이해돼? 아니 그게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을 갔다가 요령있게 설명을 했을 뿐이야.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니야. 다만 이러한 것은 있을수가 있지. 뭐냐 하면 이러한 것은 있을 수 있잖아. 여기에 아주 참 비유가 탁탁 생각이 나면 기분이 참 좋아. 여기에 이렇게 손으로 전등을 붙들고 있어요. 잘들어봐요. 재미있어. 이렇게 빛이 쫙 비춰요. 그런데 여기는 밀가루야. 여기는 빛줄기야. 여기는 전부다 어두움이야. 어두움이야. 그러면 한번 생각해봐요. 밀가루가 확 뿌려져가지고 그게 막 코를 막을 정도로 먼지처럼 가득한 거야. 그러면 이 하나의 빛이 비칠 때 여기는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뿌연 이러한게 나타나지 않겠어요? 캄캄한데는 안나타나고. 빛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이러한 식으로 나타나지 않겠어요? 똑같은 라이트가 비추는데, 내게 물질이 뭐냐에 따라 그 빛이 비춤으로 보여주는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똑같이 교회의 똑같은 사랑이지만 교회라고 하는 이 환경과 그 다음에 교회 밖의 세상이라고 하는 환경은 마치 빛을 전달하는 빛과 만나는 매개의 물질들이 다른 것과 같아서 그래서 사랑이 다른 빛깔로 나타날 수 있어요. 그러나 여기에서 움직이는 것은 똑같은 빛이라고 그렇게 나타나는 거야. 다른 동질의 사랑. 그래서 교회내부적으로, 교회 속을 향한 사랑과 교회 밖을 향한 사랑, 본질적으로는 세상 속으로의 사랑인데 이것은 똑같이 비례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내가 그 뭐죠.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의 확장, 그것이 바로 선교이고 그 사랑의 완성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이러한 식으로. 그러니까 그 교회가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이제 그가 진정으로 얼마나 선교 공동체가 되는가하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이에요. 그 다음. 계속해서.
(본문)
그러므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지적과 같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영성은 고통당하는 영성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많은 날들을 고통의 상태에서 보내어져 세상 속에서 그 존재의 정체성을 확인받았으며 자신과는 다른 이유로 고통하는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의 원천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자의 삶은 바로 이런 교회의 작은 모형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삶의 원형이 바로 그리스도로서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보여주신 삶입니다.
완성된 교회와 미완의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완전히 섰습니다. 비록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 하늘에 오르셨을 때에는 핍박의 두려움에 떨었던 소수의 무리밖에 없었지만, 이미 보이지 않는 교회는 이룩되었던 것입니다. 이후에 사도들의 복음 전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지상교회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교회의 가시화였습니다. 선교적으로는 이 땅의 교회가 아직 충만한 수에 이르는 성도들을 포함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완성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리스도의 교회의 완성을 어떻게 두 가지로 본다고 그랬지? 무슨 완성과 무슨 완성으로 본다고 했지? 그 레카프레타치오의 교리를 하면서 제가 두 용어를 제시했죠. 계량적 완전성과 성질적 완전성. 그렇죠? 계량적 완전성은 뭘까?하나님이 작정하신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는 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된 이 세계는 완성할 양이 끊임없이 가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그것과 함께 성질적 완성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부패한 요소들이 제거되고 그리고 완전한 교회가 되는 거죠. 그것이 한사람 한사람의 glorification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죠. 그 다음
(본문) 53:50
그리고 교회론적으로도 지상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사역을 통하여 완전한 기초를 가졌으나 실제적인 완전함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미완성입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을 좀 더 상사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원리적인 측면에서 교회와 성도는 완전합니다. 원리적으로 교회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희생에 의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완전히 구속을 받은 성도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교회이니 완성된 교회입니다. 인간의 그 어떠한 공로나 노력이 더하여짐으로써 비로소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미 완성된 교회로서 구원의 연합입니다.
둘째는 실제적인 측면에서 교회와 성도는 불완전합니다. 실제적으로 교회는 여전히 미완성의 상태입니다. 교회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속죄는 여전하고 교회의 회원이 된 성도들의 구원도 취소될 수 없는 완전한 구원이지만, 실제적으로 그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취소될 수 없도록 구원을 받은 존재들이지만, 여전히 그들은 미성숙합니다. 그들은 지식에 있어서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 더욱 온전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원리적으로는 이미 완전한 교회이나 실재적으로는 아직 완전하지 않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완전하게 될수록 더 많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사실은 뭐,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 이야기도 사실은 아니지. 주님은 항상 교회를 사랑하시지.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은 개별교회의 사랑이 기초가 아니라 당신의 몸인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개별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편교회의 그리스도의 몸도 건강하고 그리고 아름다울 수 있고 그 다음에 현저하게 온전함에 미치지 못할 수가 있잖아요, 그렇죠? 교회의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타락하고 진리의 빛이 사라지면서 그릇 인도할 경우에는 보편 교회가 심하게 병들고 왜곡되는 거죠. 이러할 경우에 실질적으로 그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매우 깊이 느끼는 것은 매우 어려운 거죠. 똑같은 거예요. 우리 개인의 성화나 보편교회의 전체나 마찬가지에요. 참 놀라운게 뭐냐 하면 우리의 몸안에는 우리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어요. 복원하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어요. 지난번에 고성에서 산불이 나가지고 고성군 거의다가 타버렸었어요. 그때에 굉장했었죠. 화재가 난 다음에 가보니까 그냥 고성군 전체가 그냥 목장이 되어 버렸어요. 목장의 풀같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복구될 때 30년이 걸린다고 했어요. 그런데 3년만에 복구가 된 거예요. 다시 생명체들이 다 돌아온 거예요. 정말 놀라워요. 그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도 그렇게 놀라운 복원력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목회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목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시는 것을 그것을 토대로 우리들이 그 생명이 시키는 대로 일정한 일을 할 뿐이지 결국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의사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잖아요. 의사는 절대로 아무리 의술이 발달되어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해요. 할 수 없어요. 결국은 의사가 아무리 탁월한 의술을 가지고 사람을 고친다고 하더라도 몸 자체가 자기의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러한 복원력, 복원력 곧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의사의 주치가 가능해지는 거죠. 비유를 하자면 이러한 것 아니겠어요? 물길을 터주면 물이 흐른다고 할 때는 흐르는 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거지, 물흐르지 않는 땅에 아무리 물길을 잘 터준다고 해도 물이 잘 흘러요? 의사는 물을 다시 흐르게 할 수는 없는 거예요. 흐르는 물이 막혔을 때, 그것을 트게 해주는 거죠. 그런점에서 우리 목회가 어떤때에는 온 힘을 다해서 목회를 하다가 내가 거의 돌보지 못하는데, 오히려 내가 돌볼 때에는 미끄러졌던 영혼이 내가 돌보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셔서 그들의 마음을 바꾸시고 변화시키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지.
(질문) 이 문장을 보면서 궁금한 것이 있는데, 밀가루는 신앙생활을 잘아는 사람이고, 많이 미끌어지는 사람, 빗줄기는 조금 마음이..
(김남준 목사님) 난 그러한 이야기는 안했는데,
(질문)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투명하고 맑은 어떠한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불신자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까만 칸막이를 켜가지고 빛을 차단시켜서 아예 빛이 못 들어오도록 바깥의 어두움과 같은 것을 바란다. 이렇게 가정한다면 이 빛은 하나님의 사랑이다라고 할 때에, 사랑의 빛을 비춘다고 할 때에 제가 궁금한 것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잘사는 사람이든 못사는 사람이든, 심지어는 지옥에간 사람이든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한 빛이 비출 것인데 그 사람의 내면의 상태와 반응에 따라서 사랑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빛의 양이 틀린 것인가?
(김남준 목사님)
빛의 양이 틀린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르게 경험되고. 동일한 사랑을.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 그렇게 따진다면 하나님이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가 되는 거거든. 그래서 마틴 루터파 같은 데서 레카파틀라치오 교리 같은 것을 설명하면서 굉장히 어려워했던 부분들이 과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창조에 대해서 후회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을까, 없을까. 그럴 수 없어야 되잖아. 없으면 결국은 마귀하고도 화해를 하셔야 된단말야. 그래서 결국 마지막으로 사탄이고 마귀고 뭐고 전부다 다 정리해서 결국은 본래의 선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시고 타락해서 천사가 마귀가, 귀신이 됐으면 그랬으면 타락한 천사가 됐으면 그 상태도 다시 돌려서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 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그러한 배경들이 이러한 거대한 철학적 사유를 배경으로 하면서 지옥이 없다고 하는 거야. 무조건 그렇게 우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 없죠. 그런데 성경에서의 관심은 꼭 무엇하고 똑같은가 하면 하나님의 그 속성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문제와 똑같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 여기에 이렇게 인간이 있잖아.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단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사실은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봐봐야 계속 모르는 거야.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이제 이 하나님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교회나 혹은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보면서 여기에서 어떠한 속성에 대한 그 관계를 통해서 어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그 이해가 생겨나게 되는 거야. 이해가 생겨나게 되는 거야. 이렇게 이렇게 이러한 식으로. 그러면 이 사람은 이것을 이렇게 보면서 보면서 아하 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되고 이것은 이렇게 되고. 그러면 여기에 지식들이 이렇게 있을 거잖아. 그러면 이 지식들을 연결시켜서 여기에서 뭐냐 하면 하나님의 두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속성과 그 다음에 속성의 그렇지. 시행방식에 대한 앎을 갖게 돼. 이것이 바로 다트 엘로힘 혹은 그 다음에 γνωσις Χριστός(그노니스 크리스투)가 되는 거야.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되는 거야. 이렇게 이러한 것을 가리켜서 simplicitas라고 하는 거야. 하나님의 simplicitas. simplicitas는 우리가 알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에도, 사랑 그 자체가 이러한 식으로 관철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다시 how로 내려서 생각해 보면 이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사랑자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모르는 거야. 그 사랑이 사물과 관계를 맺을 때,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내는가에 따라서 사랑의 속성과 사랑이 시행되는 방식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사랑에 대한 지식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이것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신다고 할 때 그게 뭔지 우리가 알겠어? 우리가 이 지상세계에서 사랑하면 만지고 싶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고 돈도 주고.
우리 딸이 기숙사에 들어갔거든. 3주동안. 엊그제 와서 투덜됐는데 내가 없으면 가족들이 자기를 그리워하고 일상적인 일이 안되고 그래야 하는데 다들 바빠서 자기를 생각할 시간이 없는데 그것 때문에 섭섭하다고. 어떻게 다들 내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거야? 각기 다른 사랑으로 나타나는 거야. 참 놀라운 거지. 그래서 있지 그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을 아는 거야. 그래서 어거스틴의 논쟁속에서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말할 수 있느냐 언쟁을 많이 벌였고, 루이스벌콥의 조직신학에서도 사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명제에서 회의적으로 생각을 하거든요. 사실은 그게 그렇게 알고보니까 간단한게 아니야.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을 안다는 거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거야. 누가 그러더라고. 목사님, 왜. 목사님은 설교는 그래도 참 이렇게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고 하는 사람에게는 훨씬 쉽게 들려요. 청년부 중에서도요, 그래도 연애라도 했던 애들은 훨씬 설교를 잘 이해해요. 그것도 못했던 사람들은 영적으로 어둡고 정동적으로 무지해서 이게 뭘 이야기 하는지 모른다는 거지.
(질문) 마음속엣 걸리는 부분들이 있는데요.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완전하게 될수록 더 많이 사랑하시는데 한 신자가 성화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교회가 더 완전하게 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다고 봤을 때,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이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안달하고 성취하려고 하는 그러한 율법주의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것, 어려움들이 있을 것 같고요. 십자가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그 사랑이 가장 크게 들어났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경험할 때에 하나님의 그 사랑을 더 받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살아가는 그러한 것들이 신자의 삶속에서 더 사랑을 받아야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라고 하는...
(김남준 목사님)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고. 예를 들자면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그것이 우리를 율법주의로 데려가나? 그리고 또 이어서 말씀하시지. 하나님 아버지도 너희를 사랑하셔서 너희에게 그를 나타내시리라. 그것을 우리가 듣는다고 해서 율법주의로 달려가나? 그렇지 않거든.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자기 사랑에 빠져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더욱 깊은 사랑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라고 하는 욕망을 가질 때에 그 계명은 궁극적으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과 통일을 이루는 거야. 예수님이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며, 그 계명이 뭐였어요? 그 계명이 결국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 계명을 너희가 지키면 나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요. 아버지도 너희들을 사랑하여 너희에게 그를 나타내 보이시리라.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완전하게 될수록 더 많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 너무 길다해서 끝났지만, 괄호로 경험적으로 하면 좋겠지. 실제적으로 항상 사랑하시니까.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어? 돌아가니까 아버지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느꼈을 것 아니야. 얼마든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거지.
그리스도께서 교회가 완전하게 될수록 더 많이 사랑하십니다. 이 목사, 문학이 그렇게 어려워? 하정복 목사가 자기 초창기 때에 커뮤니케이션이 안되었던 이야기 알아? 부인이 이제 직장을 다녔는데 자기는 이제 부인을 마음껏 사랑한다고 했는데, 집에 들어갔는데 책이나 보고 설거지도 안하고 이불도 안개주고 방도 안치우고 하니까 이게 뭐냐고 내가 이렇게 힘들게 들어왔는데 당신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이럴 수 있느냐고. 나 당신 정말 사랑해. 칼로 한번 째볼까? 중요한 것은 째 보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청소하고 이불개고, 설거지도 깨끗이 해놔서 아내가 들어왔을 때 맘 상하지 않고 편하게 쉬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더 많이 사랑하시죠. 그래서 우리가 항상 시간을 염두해두지 않으면, 시간을 염두해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 그러면 내가 자네가 내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자네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할 꺼야. 우리가 충성스럽게 목회하고 영혼을 위해서 온 마음으로 헌신할 때 그렇지 않을 때보다 하나님이 더 많이 사랑하신다. 동의가 안되나?
(질문) 사랑의 경험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하신데, 각 개개인에게 기본적으로 각기 다르게 차이가 나타나면 영원히 영화된 상태에서도 경험되는 그 사랑이, 영화라고 하는 그 속에서 모든 사랑이 평균화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각자의 영화의 상태속에서 사랑의 경험차이가 있는 것인지.
(김남준 목사님)
다르겠죠. 지성의 크기가 다를테니까. 그렇게 느끼는 사랑도 다르겠죠. 그러나 거기에서 느끼는 그러한 사랑의 가장 최소한은 여기에서 느끼는 최대한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경지이겠죠. 그러므로 누구도 좀더 하나님을 많이 알아도 덜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좌절을 느끼거나 덜 사랑하는 사람이더라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 수치를 느끼지 않는 그러한 세상이 되지 않겠어요? 하나님의 별의 밝기도 각기 다른 것처럼 그렇게 해서 또 하늘나라는 나름대로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질문)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이것을 상급론으로까지 사랑이라는 면에 있을 때.
(김남준 목사님)
나는 근본적으로 상급을 믿지를 않는 사람이거든요. 모르겠어요. 더 깊이 연구를 해보지 않았는데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상급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를 할까. 아무리 그 상급을 받으면서 나름대로 뭐 불만을 안느낀다고 해도 그러한 식의 상급이 과연 존재할까.
(질문)
그 상급이 사랑의 차이,
(김남준 목사님)
난 또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각기 다른 그 무엇이 있겠지만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그 상급이다 그렇게 생각 안해요. 여기서 계속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가서 사랑이 없겠네. 그렇지 않겠죠. 그것을 상급과 연관시키는 것에 대한 것보다는 우리 모두 우리 모두 그 분과의 영원한 관계속에 들어가는 우리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상태의 완전한 완성 그 자체가 더 이상의 상급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복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개념 자체가 뭔가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한 것이고 그러한 것이지 그러한 것을 그 영원한 세계에 투사시킨다는 것 자체는 회의적이에요. 루이스벌콥같은 경우는 나의 의견과는 조금 다르죠. 나는 기본적으로는 그래요. 이러한 것 아니겠어요? 아빠가 죽은 줄만 알았는데 돌아오게 되었을 때, 아빠 손에 있는 선물이 그 아이에게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참 좋은 비유네. 한 무슨 준위. 같은 남자이지만 잘 생겼더라고. 그러한 사람이 다 죽었다고 하는데 바다에서 살아서 딸에게 막 돌아왔을 때, 아빠 손에 들려진 그 선물이 과연 딸에게 관심일 수 있을까.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 무슨 상급이 또 필요해? 이 세상에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래서 내가 창세기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 너무나 은혜를 많이 받는데 그러한 기도가 나오더라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대로 살아도 충분합니다. 주님, 당신 자신의 그 영광을 위하여 더 많이 마음을 쓰십시오. 이 세상에서도 그러한 고백이 나오는데 완전한 의인의 영을 가진 상태에서 뭐가 또 필요해? 그렇잖아. 집에 가서 아내들에게 내가 있으면 됐지. 그랬을 때 아멘해야지 그게 아내이지. 너는 없어도 보험이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지. 오늘 저녁에 실행한번 해봐. 내가 있으면 됐지, 해봐요.
그 다음 계속 읽어봐요. 그 다음 사람.
(본문) 1:17:00정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공로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은 모두 완전하신 속죄에 대하여 구원받은 사랑받는 성도들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라지가 많이 섞이고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도, 또 아주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이러한 사실에는 차이가 없기에 하나님은 모든 교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든 교회가 동일한 사랑을 동일한 정도로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경우를 숙고해 본다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언급된 일곱 교회를 가리켜 누가 교회가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이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결코 같지 아니하였습니다.
B. 완성을 지향하시는 하나님
이러첨 지상의 교회는 모두 이미 구원받았으나 아직 온전한 성화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 지체들로 이루어지고, 또한 이미 완성되었으나 지어져 가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구속을 통한 우주적 재창조라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불완전한 교회를 완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교회는 진리와 성령으로써 때로는 핍박과 고난을 통하여서 점점 더 완전하게 되어 가는데, 이는 지체인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거룩하게 되어 그들이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그 모든 성도들을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로 만드시고, 그들의 연합인 교회를 영원하고 완전하며 흠없도록 만드심으로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실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 온전케 되는 의인의 영이라는 표현은 뭐냐 하면 영화의 상태에 대한 또 다른 그 표현이에요. 성경적 표현이에요. 그 다음.
(본문)
이러한 교리적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사실들을 숙고해야 합니다. 다음 사실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하나는 교회를 안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며 또 하나는 성도들의 영혼안에 있는 지향성입니다.
1. 완전하게 하시는 하나님
첫째로 교회를 완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죄로 망가진 이 세상을 고치는 도구로 사용하시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교회를 완전하게 하시는 일에 헌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는 동시에 자신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게 굉장히 신비해요. 그리고 아주 논리 정연해. 무엇인가 하면 잘 봐. 자, 이렇게 해서 내가 아직 사유를 아직 끝내지 못했지만 새로운 용어들을 부여하려고 하거든. 어쨌든지 간에 이러한 식의 교회론들이 거의 사라졌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삼위일체도 내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지만 대게 변증가들 이후부터 시작되거나 기껏해야 종교개혁자들부터 시작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되요. 대게 어거스틴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렇게 하면 안되고 초대교회 성경서부터 시작해가지고 속사도, 교부들로부터 시작을 해와야 한다는 거야. 얘기 안했어요? 했죠. 그러한 식으로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론도 그래서 교회론도 말하자면 통시적인 연구가 필요한 거야. 통시적인 연구. 저기 성경부터 시작해서 쭉 사도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러한 교회론.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가장 감사한 것은 이러한 교회론의 루트를 만들어 준 것이야. 읽어보니까 아우구스티누스뿐만 아니라, 히뽈리투스라든지, 텔투니아누스, 이레나이우스 모든 사람들이 막 보편교회에 대한 철저한 사랑을.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는 그리스도인도 아니라 할꺼야. 교회끼리 물고 찢고 험한 일들이 일어나느데 이게 교회가 그럴 수 있겠어. 그래서 그것을 보면 처절한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 통일된 사랑이야. 그런데 이제 용어를 부여를 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있게 되잖아. 그러면 뭐냐 하면, 교회 내적으로는 이게 더 온전해 지기를 바라는 그러한 사모함이 생겨나는 거야. 온전함에 대한 사모함이 생겨나는 거지. 그래서 결국 뭐냐 하면 이러한 사랑이 교회 자신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야. 교회 그 자체를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야. 그러면서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 모르는 이 세상이 복되게 되도록, 뭐라고 표현해놨나 모르겠는데 음, 어디 읽다가 말았지?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것들을 느끼는데, 항상 잘 하는 묘사가운데 있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은 무엇과 비례한다고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은 무엇과 비례한다고? 이미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질에 비례한다. 기록을 해두세요.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은 이미 자신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질에 비례한다.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질이 그렇게 별로 좋지 않으면 그렇게 형식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데 그렇게 사무치도록 그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예수님처럼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거야. 그러면 결국 이 보면 Intra Ecclesia에서의 사랑의 국면과 extra Ecclesia 사랑의 국면이 사실 일치하는 거죠. 이렇게 된 것 만큼 이 세상이 망가졌다고 생각을 하고 이 세상을 고치고자 하는 그러한 간절한 사모함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결국엔 두 개가 같이 가는 거죠. 그래서 그 왜 교회에 등록하고 그 다음에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이 그 저 나름대로 기독교 사업하고 있는 사람들 있잖아요. 건강한 신앙일수가 없어요. 이렇게 일치를 이루어가는 거죠. 그 다음 사람.
(본문)
교회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의 터 위에서 거듭나고 구원받은 성도들이지만, 그들이 더욱 온전한 성도로 성숙됨으로써 보이지 않는 교회는 더욱 온전한 교회가 되어갑니다. 그렇게 될수록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을 공고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의 온전함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로는, 성도 개개인의 성화입니다. 성도 각 사람이 진리와 성령으로써 자신 안에 있는 불결로부터 순결하게 되어감으로 신자 개개인의 성화는 성례전적으로 교회의 온전함을 위하여 봉헌됩니다. 신자의 성화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각 신자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화의 진전은 곧 그가 지체로서 속해있는 몸인 교회의 성화가 됩니다. 각 신자의 성화의 진전과 함께 그 일을 위한 헌신은 개인의 헌신인 동시에 성례전적으로 다른 지체들의 헌신과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각 성도들이 지식과 사랑안에서 자라가고 실제적으로 사랑과 일치를 이루어 선한 일을 위하여 섬김으로써 성취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교회를 하나님이 당신의 몸을 완전하게 하신다라고 할 때, 두 개의 페이지, 두 개의 국면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이 마치 인간의 구원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거야. 이미 이루어진, 그 칭의는 그것을 변치 아니하시겠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인간의 끊임없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완성을 신적 완성을 대치하지 못하지만 그 완성을 향해 감으로써 신자는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주님께 순종하면서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처럼 역시 이렇게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는 계획이 있고 하나님이 교회가 서로 그 안에서 자신들이 노력함으로써 온전함의 정도를 나타내어 각각 그 개별교회의 빛깔의 크기가 빛의 크기가 다양해지는 거야. 그 어느 교회는 찬란하게 빛나서 밤바다를 여행하는 수많은 교회와 사람들에게 갈길을 알려주기도 하고, 어느 교회는 거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빛이 흐려지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넓게는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가깝게는 교회가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순종하고 진리로 아름다워지는 거야.
어쨌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거든. 우리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너희가 이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라.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라.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 교회론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야. 우리의 사명은 보편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우리가 보편교회를 위해서 모두 봉사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보편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개별교회를 위해서 섬김으로써 이 교회가 온전해지는 것이 보편교회가 온전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러한 마음으로 섬기는 거죠. 자 그다음.
(본문)
그때 소극적으로는 죄악 된 삶을 버리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섬기도록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뿐 아니라, 지체들과의 관계의 온전함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지향성
둘째로, 성도들의 영혼 안에 있는 성향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혼 자체 안에 두신완성과 목적을 지향하는 성질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교회가 온전하게 될 가능성은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 개개인의 영혼의 지향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이루는 신자 개개인의 영혼안에 있는 원인적인 작용을 통하여 교회는 온전함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신자들의 영혼 안에 있는 원인적 성향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이치는 신자 개인의 성화의 경험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 안에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존재가 되어 가고 선한 일을 도모하며 살, 새 본성을 주셨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 본성을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지향성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지향성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propensity라고 이야기하는데, 지향성, 그 다음에 성향 이러한 것들은 굉장히 어려운 단어에요. 이러한 정도 단어가 쓰이는 것인데, 사실은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사실은 그. 지향성은 뭐냐 하면 자신도 거역할 수 없게끔 이미 자신안에 입력되어 있는 어느 한쪽을 향하고자 하는 성질을 나타내는 거예요. propensity가 하나님께서 이제 뭡니까. 중생으로 거듭나게 하실 때 이러한 영혼의 성향을 바꾸어 놓으시는 거거든요. 성향을 바꾸어 놓으시는 거지. 성향이란 말 자체가 본성에 속한 것이 어느 방향으로 흐른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변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A라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변해서 B라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것을 어떠한 어찌할 수 없는 그러한 어떤 입력된 것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propensity라는 이 말을 쓰는데,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잘 보여주는 단어에요. 그렇게 영적으로 흘러가는데 변화되는 이것이 하나의 그 지향성의 변화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맨 처음에 우리 인간에게 맨 처음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부여하시잖아요. 영혼을. 이 영혼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을 찾아가고자 하는 이미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찾아가고자 하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영혼에게 있어서 이것은 Soul이에요. 영혼에게 있어서 자기가 궁극적으로 그것으로 가고자 하는 지향점이 되는 거죠. 그런데 기독교의 설명이 틀려진 이유는 뭐냐 하면 틀린 점은 이런 거예요. 스피노자의 철학이나 범신론에서는 그 이 성질과,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과 영원의 존재의 본질이 동일해. 이 두 개가. 동일해서 이 영혼이 돌아가는 것 자체가 합일이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고 보는 거예요. 인간의 영혼이 이렇게, 범신론적인 관점이죠. 그래서 뭐 스토아 철학이나 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죠. 우리는 그렇게 안 보고 이미 피조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근접할 수 없는 차별성이 있다고 보는 거거든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영원히 하나님을 지향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그 공락, 지복이라고 그러죠. 지복을 충분히 누리는 지복의 상태에 있는 것. 이것이 영혼히 가고자 하는 끝이에요. 이 지점이. 그거예요. 그러한 점에서 영혼이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인간이 타락을 하게 되지. 타락을 하면서 인간이 결국은 이렇게 처음에는 이러한 지향성도 주셨고, 실제로 이렇게 갈 수 있는 성향도 주신 거예요. 그런데 타락을 통해서 깨뜨려 지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이 가고자 하는 이러한 성향들이 심히 뒤틀린 거죠. 그런데 근본적으로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그 원초적인 지향성은 남아 있는 거예요. 지향성은 잔존하는 거예요. 이 성향은 뒤틀려져서 그래서 그런데 하나님 아닌 것들을 향하고 자기 자신을 주인 삼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결국은 자기 애잖아요.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고 돌이키셔서 그래서 이것을 다시 중생을 통해서 그래서 자기 밖에 사랑하는 이 인간을 주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지향성과 성향 자체를 이렇게 일치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항상 위협으로 갖는 거죠. 이렇게 이렇게 완전하지 않고 계속해서 위협을 받는 거죠. 그래서 흔들리는 거죠. 그래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위로부터 끊임없이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grace, 은혜가 필요한 거죠. 교회는 바로 이 일을 돕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해도 안되고 중생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생각해도 안되듯이 똑같이 삼위하나님과 교회가 관련을 맺고 계시다는 사실을 하나가 더 이상의 교회가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해도 안되고 반대로 생각해서도 안된다는 거이지. 그 다음에.
(본문)
a. 목적인으로서
첫째로는 영혼안에 있는 목적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혼은 그 인간 존재에 대하여 목적인으로서의 성격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혼은 그것을 가진 인간 존재로 하여금 어떤 목적을 지향하여 살게 하는 원천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인으로서의 영혼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창조의 목적은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있잖아요.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그 질서안에서 지극한 만족을 이루면서 발전해가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거죠. 그 다음에.
(본문)
영혼의 이러한 목적론적인 성격은 중생하지 않은 영혼에게도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중생한 영혼에게는 더욱 명확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중생한 신자의 영혼은 그것을 가진 인간존재로 하여금 존재의 방식과 삶이 창조의 목적을 향하도록 원인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신자의 영혼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며 창조목적을 따라 살아갈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상태를 누리게 됩니다. 영혼 안에 이러한 성향을 가진 신자들의 연합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교회입니다.
물론 교회를 천지창조의 목적을 이루는데 기여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계획은 교회를 성도들의 영혼의 상태에만 맡기셨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가 창조목적을 따라 존재하게 하는 목적인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그러한 구원계획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들이 원하지 않을 때에도, 혹은 그렇게 행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때에도 그들을 인도하셔서 교회가 궁극적으로 그 목적에 기여하게 하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거듭난 성도들의 영혼안에는 목적인이 있는 거야. 그래서 뭐냐 하면 자기 영혼을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살 때에 가장 행복한 거야. 그게 사실 불신자의 상태도 희미하게 남아있는데, 중생했을 때 그것은 분명해지는 거죠. 그래서 이상하게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술마시고 노래하고 진탕한 쾌락에 빠져도 영혼의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거죠. 그런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돼죠? 이러한 것들을 각자 가지고 있는 모든 영혼의 연합은, 연합이 가지고 있는 목적인으로서의 총합은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그것과 동일한 거다. 그러니까 교회는 그 자체안에 온전하게 되어가서 하나님과의 지복의 상태속에 있기를 원하는 그러한 자체적인 목적인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참 놀라워요. 우리는 부족한데 하나님이 교회의 부여하신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받게 하시고 우리의 부족을 용납해주시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그래서 힘들어도 열심히 목회하면서 교회에 붙어 있어야 해. 그래서 더 많은 사랑을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그 다음
(본문)
b. 완성인으로서
둘째로는 영원안에 있는 완성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혼은 그 자신 안에 전일성, 곧 온전함을 이루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 본래 창조될 당시의 온전한 상태에 이르도록 완전하게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영혼안에 이러한 성향이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목적인이 자기 바깥으로 향하여 자기 목적을 향해 가는 거잖아요. 그러면 완성인은 자기 자신이 완전케 되려고 하는 거죠. 그러면 이게 이러한 식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또 이 그림이 모두 적용이 되는 거예요. 이게이게. 이 안에 있는 교회가 진리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같은 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교회 그 자체를 온전하게 하고자 하는 그 자신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완성인으로서의 성품을 보여주는 거다. 이해되죠? 충분히 소화하고 가르칠 때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폼을 잡으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도들이 권위있게 느껴지도록 하늘에서 내려와서 자신들이 못본 세계를 거의 보고 산 사람들처럼 가르치는 목회자와 가르침을 받는 성도 사이에 굉장히 커다란 하나님의 앎의, 하나님을 아는 앎의 격차가 느껴지는 방식으로 가르칠 때 거기에 진정으로 권위가 있는 거야. 뭐 소리만 지르고 책상만 두드린다고 해서 권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야. 내용이 있어야지 권위가 있는 거지. 그래서 공부를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성질을 부리면 카리스마라 그러고 공부를 못가르치는 선생님이 카리스마를 부리면 그것은 성질이라 그래. 적어놔. 외웠어? 강목사 외워봐. 교역자도 마찬가지야.
그 다음 교역자도 마찬가지야. 신령하고 탁월해서 성도들이 진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야단을 치면 성질이 아니라 아주 거룩한 카리스마가 되는 거야. 가끔해야지 매일 그러면 안돼. 못가르키면 니나 내나 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카리스마 보이면 성질이라 그래. 성질. 성질. 그 다음
<본문>
그래서 불신자들의 영혼도 그분안에서 자신이 온전하게 되기 전까지는 결코 쉼을 얻지 못합니다.
더욱이 이러한 완성인으로서의 성향은 거듭난 신자들의 영혼 안에서 더욱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그들의 영혼은 육신의 욕구를 따라 살아갈 때에는 고통을 받습니다. 온전함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될 때 영혼은 고통 받고, 온전함에 이르러 영혼이 참으로 영혼 됨으로 가득하게 될 때에는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행복을 느낍니다.
<김남준 목사님>
영혼안에는 영혼 안됨도 있습니까. 그러한 질문도 나오죠. 그러면 내가 물어볼 께요. 영혼이 뭐야라고 한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목사님, 63페이지 그 하단부에 있는데요 영혼이 참으로 영혼됨으로 가득하게 될 때에는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행복을 느낍니다라고 그랬는데 그 영혼이 영혼이 참으로 영혼되지 않은 것으로 가득 찰 때도 있습니까. 그렇게 물었어요, 자 답변해봐.
<대답>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주셨을 때, 그 본래의 존재 목적대로 그것이 기능하고 있을 때에 그 자체로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김남준 목사님>
영혼됨으로 가득한 때에 그렇다고 설명한 것 아니야. 영혼되지 않은 것으로 가득찰 수도 있어요.
<대답>
영혼의 기능이 발휘가 되지 않을 때에
<김남준 목사님>
왜 발휘가 안되냐 이거야. 자, 그대가 이야기 해보자. 이러한 질문을 똑같이 받았을 때, 여기 질문은 성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거든. 좀더 시원하게 설명을 해봐.
<대답>
사람이 사람됨, 사람답다 할 때 사람답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냐. 그 사람도 사람은 사람이지만 사람으로써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본래의 모습 순전성을 온전하게 갖춘 사람을 참된 사람이라고 하고 거기서부터 멀어진 사람들도 사람은 사람이지만 장래성을 상실한 사람이듯이 영혼도 영혼이 아닌 적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참된 영혼다움이..
<김남준 목사님>
묻는게 그 이야기야. 그것을 피해놓고 하는데 참으로 영혼 됨이 있다고 그랬잖아. 영혼 안됨은 뭐냐 이거야. 영혼이 참으로 영혼 됨으로 가득 찰 때에 그렇게 아름답다며. 영혼 안됨이 뭐냐 이거야.
<대답>
문자적으로 영혼 안됨으로 해석하면 안되고,
<김남준 목사님>
설명을 할테니까 들어봐. 그러니까 형이상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그거야. 이번에 이제 총신에서 성경과 리더십이라는 이상한 과목을 줘서 가르치는데 지난주에 들었던 예가 뭐였는가 하면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에서 의지 부분이었거든. 선한 의지의 부분. 학생들이 굉장히 그 쇼킹해 하더라고. 우리 인간이 이러한 식으로 되어 있구나. 기본적인 지식이거든.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이러한 이야기이지. 우리들이 전일성의 개념부터 우리가 정리를 하자. 그래서 그것을 뭐라 그러지? 이게 인테그리타스 integritas 전인통이라고 해요. 이것을 영어에서 integrity 정직이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순전함이거든요. 전일성이라고 했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 일자적 성격으로 가득 찼다 그러한 뜻이에요. 이게 말하자면 존재라 그러자. 존재. 존재이면 이것은 존재가 뭐냐 하면, 있음이 꽉 차 있는 것이 바로 존재에요. 이러한 참된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으신 거야. 하나님이 잘봐요. 잘들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creation, 창조하셔요, 이렇게. 창조를 하시면 여기에서 개별 사물들이 생겨나게 되잖아. 그러면 개별사물들이 생겨나게 되면 예를 들어서 이렇게 돌이다 그러잖아요. 물이다, 물. 제일 좋다. 물이라 해요. 물. 이게 수야. 수. 물 중에 가장 좋은 물. 선한 물이라 칩시다. 어떤 물이 가장 좋은 물이야? 곽전도사. 어떤 물이 제일 좋은 물이야?
<대답>
하나님께서 만드셨던 그 상태로의 물
<김남준 목사님>
바닷물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물의 목적과 용도를 생각하면 돼. 물은 빨간물이 좋다. 왜, 내가 빨간색만 보면 힘이 나거든 그렇게 이야기 하면 안돼. 물의 목적은 색깔을 맞추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죠. 물이 가장 최상의 좋은 상태가 뭐냐 하면 물임으로 충만할 때, 그래서 물아님의 요소가 거의 없는 상태가 최상의 상태라 이거야. 그런데 물임이 뭐냐. 또다른 정의의 상태가 필요한거죠.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증류수와 같은 물, 그러한 상태를 최상의 상태의 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거기에는 그래서 생수기에 있는 물이 썩 좋은 물이 아니야. 그래서 오히려 거기에 여러 미네랄이나 여러 가지 것들이 섞여 있을 때 그러한 물이 더 좋은 물이라 그러지. 어쨌든 그런 거야. 그렇게 놓고 본다면 이것을 하나님이 개별적인 영혼을 창조하시잖아, 영혼. 이 영혼을 창조 하실 때에 육체와 만나잖아요. 이것이 인간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 인간 존재가 선하다 할 때에 이 두 개가 좋은 상태인 것이 좋은 결합을 이루고 있을 때에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면 육체는 빼놓고 영혼을 생각해 보자 그거야. 영혼은 그러면 뭐냐 하면 영혼은 영혼은 이게 영혼은 영혼이 참 좋은 영혼이기 위해서는 영혼임, 이것이 이안에 충만하게 차 있을 때 그때에 가장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 거예요. 영혼아님이라는 것은 도대체 뭐냐. 그러면 생각할 때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하는 거죠. 영혼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 목적과 그 다음에 이 영혼이 자기를 지지하고 있는 성질을 동시에 고려하면 무엇이 영혼아닌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는 거야.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고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영혼의 지향인데 이 안에 영혼은 그 본질 그 자체가 경향성이라고 말했잖아. 힘과 경향성이에요. 이러한 것들이 역행하도록 작용하고 있는 어떠한 힘들이 있는 거야. 이러한 것들이 영혼이 아닌 것들이야.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지 않고 영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바람직한 용도에 맞도록 하나님이 주신 성질이 있는데, 그러한 성질과 거스르는 것, 이러한 것들이 하나의 힘으로 영혼속에서 남고 경향으로 남았을 때, 그것은 영혼이 영혼 아닌 것들로 개입되어 있는 상태라는 거예요.
영혼의 본질은 힘과 경향성이에요. 그래서 이 힘이 이방향으로 가든 저 방향으로 가든 영혼이 아까 이야기 했듯이 영혼이 아닐 수는 없는 거예요. 영혼속에 참된 영혼이 아닌 것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영혼이죠.
<질문>
참된 영혼됨에 대해서 설명할 때, 본질과 지향하는 기능이 일치를 할때에,
<김남준 목사님>
그렇지 일치하는 힘과 경향들이 있을 때에 그것이 참 영혼임이지. 그것이 가득찬 상태.
<질문>
하나님은 그 기능을 제거하고 본질만으로 바꿀 수 있는 건가요?
<김남준 목사님>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거. 하나님의 영은 그러한 모든 담론을 초월해요. 그런 담론은 할 필요가 없는 거죠. 다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물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입장을 갖게 되는 거지. 그다음
<본문>
교회는 이러한 영혼을 가진 신자들의 연합입니다. 교회는 지체들의 영혼 안에 있는 완성인적인 성향으로 점점 더 완전해져 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 단지 신자들의 영혼을 성향에만 달린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의지를 가지고 교회를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 가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공동체적인 성숙 또한 신자들의 성숙과 같이 그분 혼자 이루지 않으시고 교회의 구성원들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가십니다.
Ⅳ. 불완전한 자들로 완전한 교회를 이루어 가심
교회를 향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은 불완전한 자들을 모아서 오나전한 교회를 세워 가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교회를 불완전하게 남겨 두셨습니다. 말할 수 없이 탁월한 경륜 속에서 하나님은 불완전한 교회를 완전한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신자로 하여금 놀라운 사랑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혼란스러워만 보이는 무질서 속에서, 하나님은 지극히 아름다움 질서를 따라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교회를 통치하시며 완전하게 하십니다. 결국 성도의 영적 성숙은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지혜를 아는 시직에서 자라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A. 불완전하게 남겨두신 하나님
이처럼 교회는 완전하게 세워졌으나, 불완전한 신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가 당하는 고통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불완전한 자기 자신 때문에 비롯되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지상에 있는 교회를 불완전한 채 남겨두셨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1.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게 하심
첫째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소중한 당신의 교회를 불완전하게 남겨두신 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교회의 불완전함 속에서 그것을 완전히 타자인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완전한 caritas가 없는 거예요. 그게 자리를 보여주는 거야. 그게. 교회는 공동체적인 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도 그 세상의 악을 완전하게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도 caritas의 사랑이 없는 거야. 자기도 한때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던 세상에 속한 인간들이었는데 들어온거 아니야.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되지 않기 위해서 기도했을 때, 롯 한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이야기 하면 안되지. 그러한 구약시대에도 caritas의 사랑을 보게 되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그 보면 안되는 거죠. 교회에서 보면 그러한게 있어. 열받으면 발로 차버리고 가고, 그냥 조용히 나가는 것은 조금 나은데, 개판으로 휘젓고 지나가는 거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아주 씻을 수 없는 죄를 교회에 짓게 되는 거야. 그리고는 그 다음에 또 다른 교회에 가서 안착하려 하는데 그게 사실 하나의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자기가 그럴 수가 없는 거죠. 정말 제가 한 몇 년동안 교회론 공부하면서 정말 나도 무지하게 살았구나 나도 절실하게 느꼈어요. 교회가 다 정상이 아니야. 너무너무 무지막지해. 어떻게 그런지 모르겠고 지난주에 이야기 했지만 돌아가신 다음에도 책이 계속 나와서 우리에게 정의를 끼치고 계신 그분이 목회하시던 교회의 신자들, 그분이 자신이 그러셨는지 후일에 따르던 추종자들이 그랬는지 모르지만 너는 목회자를 깊이 존경하고 그분이 깊이 진리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은 나무랄 것이 없는데, 그렇게 놓고 자기들이 그분이 떠나고 나니까 그분 설교 테이프 놓고 자기네들끼리 모이고 교회 다니지 않고 이러는 것은 잘못된 일이야. 이러한 교회론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몸을 또 다시 상처내는 일이라 그거야. 물론 올바른 설교를 듣고 좋은 목양을 받아야 하지만 그 좋은 목양을 받는다는 것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가치이지.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교회는 그 이상이에요. 왜, 모두 그러한 좋은 설교 그 다음에 신실한 목양 그 다음에 교회가 성도들에게 베풀어주는 그러한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서 비롯된 하나의 심부름이라는 거야. 그것이 어떻게 본질을 대체할 수 있나. 그런거야.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여러분도 우리 교회 신학생들 이렇게 보면서 좀 이렇게 사역에 내보내야 되는데 교회가 아프고 힘든 교회에 가서 그 속에서 고난과 함께 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자기가 어떻게 죽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해 지는가 하는 것으로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고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귀한지도 알고 동역자들의 섬김과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도 알고 그렇게 가면서 그게 진정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지 조금 조금 말씀이 있고 여러분들의 교회에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교만하고 그리고 또 그렇지 않은 교회들은 턱없이 무지하고 이러면서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리스도의 교회에요. 내가 그 여러분들은 오십개교회 시골 교회 목회자 세미나 할 때인데 내년에 100교회, 최소한 80교회. 그리고 이게 그 다음에 내가 내가 목회하는 동안 얼마동안 갈지 모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은 내가 목회하는 동안에 여름마다 천교회 세미나 하는 것이 꿈이야. 어마어마하겠지. 이천명이 왔다고 생각을 해봐. 그런 것들이 사실은 처음 출발 자체가 그 무너져 가는 교회들을 보면서 내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아. 요즘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마음들을 구체적으로 주셔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감당해야 겠는가가 고민이에요. 영국 교회도 가서 보면은 마음이 너무 아파요. 무엇인가 그들을 위해서 도와야 되겠다 하는 사모하는 마음들이 생겨요. 그런 것을 보면 여러분들은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제 여러분들중 어떤 분들은 이제 교회를 개척해서 떠나게 되거나 아니면 필요하면 여러분들을 교회를 떠나 보낼꺼야. 그래서 너는 한번 말도 되지 않는 교회에 가서 섬겨 보거라. 그때에 진짜 그곳에서 한알의 밀알로 섬길 수 있을 때, 그때에 여러분들이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 목회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 되는 거야. 말씀의 내 영혼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지격이 없는 목사님 밑에서도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분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고 그리고 눈물로 기도하며 자기는 한알의 밀알처럼 썩어서 교회를 세우게 되는 그런데 이바지 할 수 있을 그때에 그런데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바지 하면 안돼.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잃어버리고 나갈 때에 그때에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이 교회에서 참다운 신학을 배우게 된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하루 아침에 그러한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니까 교구와 자기 맡은 부서에서 끊임없는 자기 죽음을 경험하면서 그 길로 가요. 자, 그 다음
<본문>
여기에는 하나 지혜가 있습니다. 교회 안의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가 섞여 있는 것을 보십시오. 한 종류의 사람들은 교회의 참된 회원이 아니면서도 보이는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참된 교회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희생하신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이 자신 안에 얼마나 부족한 지를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기 몸 주신 그 세상이 바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니 신자가 얼마나 그들은 토투스 크리스투스 totus Christus로 여기고 사랑하여야 하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totus Christus가 뭐야, 김동기. totus Christus가 뭐냐니까.
<대답>
모르겠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게 말이 돼? 집에서 읽고 생각하고 와야지. 바람잡이 전도사 되면 안돼. 뭐야, 조성용 전도사, totus Christus가 뭐야? 어떻게 해?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 가견 교회에 들어온 모든 회원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몸으로 여김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참여해야 해. 알고자 하는 성향이 인자 속에서 베여 있어서 그래서 유전자처럼 베여 있어서 항상 진지해야 하는 거야. 그 다음 읽어요.
<본문>
사랑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사랑 없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신자는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이 얼마나 자기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참된 신자들이 교회에 가득하다 할지라도, 그들 모두 건강한 신자일리 없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참된 신자라고 하는 것은 진짜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중생이 분명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거야. 성질적인 면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 다음.
<본문> 2:06:55
그들 중에는 은혜에서 미끌어진 자도 있고 시험에 들어 마음이 악함으로 가득하게 된 신자도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교회를 봅니다. 이때에 신자는 교회의 그런 모습이 바로 자신안에 있는 옛 본성과 새 본성의 싸움의 확대판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도 교회의 한 지체이기 때문에 그 모든 악한 상황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이 있음을 통감하면서 자신 안에 있는 불완전함 때문에 아파하는 교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신자는 교회의 참된 희망이 신자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붙들고 계신 그리스도께 있음을 깨닫습니다.
2. 완성을 갈망하게 하심.
둘째로, 불완전하게 남겨두신 교회를 통하여 참 성도들은 교회의 완성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들의 영혼 안에 있는 완성인으로서의 성격이 교회에 투영되어 교회 자체의 완전함을 갈망하는 것이며 이는 신자가 자신의 영혼의 완성을 갈망하는 것처럼 또한 교회에 속한 참된 신자들은 불완전한 교회가 완전하게 되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영혼의 건강은 스스로 온전해지기를 사모하는 데서 유지되듯이 교회의 영적인 건강함 역시 교회 자신의 완전한 교회가 되기를 갈망할 때에 유지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참 신자들은 이미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교회의 터 위에 아직 불완전하게 세워져 가는 교회를 바라보며,
<김남준 목사님>
어느날 교회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성질적인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어떻게 하면 교회가 온전하게 될 수 있는가를 바라보지 않고, 너무 현시적이고 과시적이라 이거야. 그리고 성과 지향적이고 과업 중심적이어서 본인은 이러한 이러한 일들을 해서 이렇게 성공했다. 이러한 업적을 이루었다. 이렇게 이렇게 외향을 키울 수 있었다. 이러한 등등의 이야기가 전혀 내적인 이야기들이 생략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교회들로 하여금 계속 그러한 것들에 대한 꿈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거죠. 그러한 것들은 잘못된 거죠. 그 다음.
<본문>
마치 불완전한 자신의 영혼을 보는 것처럼 아파하며 그 완전을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이때 교회의 온전함을 사모하는 그 사랑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영혼과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까리따스의 사랑이 가진 교통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사랑은 하나로 통합됩니다.
신자가 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까지는 그 사랑이 까리따스의 사랑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 자신으 루이하여 그렇게 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존재마저도 자기의 행복과 완성을 위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찾는 그의 사랑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에로스의 사랑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것은 다시 설명안해도 되겠지. 사람이 맨 처음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갈 때 사실 그것은 사실은 자기 사랑이죠. 예수 안믿고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고 믿는 그 순간까지는 절대로 주님을 만나지 않아.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행복에 대한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한 갈망인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믿음으로 보시는 거야. 그래서 caritas의 사랑과 eros의 사랑이 통합을 이루는 거야. 그 다음.
<본문>
그러나 그가 이렇게 찾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그는 거기서 자기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였던 사랑과는 다른 사랑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성적이고 이성적인 사랑 그게 아니고 그 자기 사랑을 포함하는 자기 중심적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사랑.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사랑도 eros속에 들어가는 거야. 그 다음 사람.
<본문>
이때 그는 자기를 긍휼히 여기는 은총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데 이때 신자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이때 신자 안에서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겨나는 사랑이 바로 까리따스, 곧 지순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유래하지만, 하나님 자신 뿐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여야 하는 모든 인간들과 사물들을 향한 사랑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교통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신자는 이미 성화의 길을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존전해지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온전함에 이르기를 사모하는 영혼이 아름다운 것은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더욱 온전해져서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게 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심
셋째로, 하나님은 신부인 교회로 하여금 그 불완전함 때문에 다신 자신을 찾고 의지하게 하십니다. 사랑은 의지하는 것이며, 의존의 감정이 없는 사랑은 지순의 사랑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은 아무도 의지하지 아니하나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은 하나님 이외의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정혼한 신부가 신랑 이외의 다른 남자를 의지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고난 가운데 당신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신자들의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게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이 세상의 악함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의 영성은 고난의 영성입니다. 교회가 박해를 당하고 성도는 고난을 받아도 생명처럼 소중한 것을 지키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참으로 신자로 살아감에 있어서도, 교회가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더욱 공고히 누리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절대적인 신뢰로써 당신 자신을 의지하는 의존의 정서 안에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완전하게 세우신 교회를 여전히 불완전한 채로 남겨두심으로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게 하십니다. 교회 안에 조직이 있으나 그들은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많은 일들로 하나님과 성도들, 그리고 이웃을 섬기나 자신들의 섬김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보의 공로를 의존합니다.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가 있으나 설교자를 의존하지 않고 설교자를 붙드시는 성령을 의존합니다.
이처럼 성도는 때로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지혜 안에서 이 땅에 하늘의 많은 복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물들을 의지하지 않고 그 모든 사물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의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교회의 불완전함을, 오히려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데에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뒤에는 뭐 특별히 설명 안해도 되겠죠? 여기에서 끝내야 겠다. 자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오늘 배운 것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고 우리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데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강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랑과 교제인가요. 성령과 교제인가요? 사랑과 교제죠. 사랑과 교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랑과 교제는요. 무엇을 가르키는 거냐 하면, 이것은 caritas이고, 이것은 societas인데 둘다 그 교회안에서의 지평에서의 사랑과 교제를 가리켜요. 이렇게 생각하면 되잖아요. 앞에서 이야기한 게 이러한 이야기 하니야.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삼위간의 위간간의 사랑이 있고 그 다음에 위간 사랑이 있고 그 다음에 이 사랑 자체가 관계를 맺는 교통으로 이루어진다고 봤거든요. 이렇게. 그 다음에 이들간의 모상이 교회안에 이루어지게 되는데 교회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루어지겠어요? 여기에서 사랑은 그 자체가 아가페의 사랑이 될거잖아. 그렇죠? 그러면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 다음에 여기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지체적 사랑이 있을 것 아니야. 그렇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여기에서의 사랑 caritas는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지순애의 반영이잖아. 아가페의 사랑으로서의 반응으로서의 caritas의 사랑이잖아. 이렇게.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의 반응으로서의 이러한 caritas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caritas의 사랑. 그 사랑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그 다음에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 두 지평으로 펼쳐지잖아.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지체들간의 사랑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caritas의 사랑이 이게 지평 융합이라는 말을 사용했잖아. 지평 융합. 그게 뭐냐 하면 신에의 지평이야, 첫째 지평은. 인간을 향한 사랑이야.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인데 이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라면 이 사랑에 대한 이렇게,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펼쳐져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같이 펼쳐 지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caritas의 사랑안에서 caritas의 사랑안에서 지평이 융합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죠. 그러면 이렇게 신에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가장 결정적으로 만나는 이 지점이 교회란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사랑하게 될 때 이 사랑은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사실은 인간안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하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랑의 이 경륜지이기도 하고, 이웃으로 향하여 뻗어나가는 사랑의 중심지이기도 한 거야. 그러한 점에서. 그런데 사실은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의 집은 참답게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보여주기도 하고 이 공동체가 어떻게 올바르게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랑할 수 있을지 잠재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거야. 여기 이것을 A라고 한다면 이 A는 B와 C를 반대로 이야기 해야 겠죠. 이것을 B라고 한다면 이 B는 결코 그 A,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거야. 그러한 점에서. 그러한 점에서 이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이 caritas의 사랑이 이 교제의 말하자면 본질이란 말이야. 그러면 잘 생각을 해봐요. caritas의 사랑이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하여 부어주는 사랑이 아니라 이 사랑에대한 반응이란 말이야. 반응으로서의 사랑. 반응애적인 반응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단 말야. 그러면 한사람 한사람이 이렇게 어떻게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에 대해서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grace란 말야. 은혜의 문제인거야. 그래서 한사람 한사람이 회심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에 영향을 받아서 새로운 사랑에 감화를 받는 끊임없는 caritas의 작용속에서만 이 교회가 올바른 사랑안에서 societas, 교제를 이루는 거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간에와 교통을 모상하는 거야. 본뜨는 거란 말이야. 이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러한 성경적으로 보면, 이러한 사랑과 교제를 하나님의 하나님이 예를 들면 여기에 이제 사랑, caritas가 있고 어쨌든 그 다음에 societas가 있어서 교제를 나눈다고 할 때 이러한 것들을 이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속에 심으시고 강화하고 유지하고 하는 이러한 것들을 만약에 삼위일체의 간섭으로 본다면 관여하시는 이 위격을 어디로 돌려야 되겠느냐 하는 것이죠. 어디로 돌려야 할까? 여기에 지금 나와 있는 대답이 성령이야. 이러한 작용을 하는 주되게 작용하시는 위격을 성령으로 봐야 한단 말이지. 여기는 성부가 되고. 자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이제 내가 책에서 창조와 함께 아우르면서 이 모든 것을 한번 전체적으로 정리를 신학적으로 본 거예요.
우선 첫째 어떻게 봤냐 하면 이렇게 보는 거죠. 맨 처음에 잘 들어요. 잘들어야 돼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잖아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의 창조가 이루어진게 성령안에서 이루어진거야. 성령 안에서. 그래서 세 가지 전체사를 바빙크의 방법에 따라서 세 가지가 나오죠, 어떻게? by Father, 성부에 의해서, 그 다음에 성자를 통해서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성령 안에서, 자 이렇게 되죠. 이것은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더라 그랬잖아. 메가 해패트에요. 이게 라하프에서 옵니다. 라하프는 뭐냐 하면 창세기 32장에 나오는데 이렇게 새 둥지가 있잖아. 이 새들이 주둥이를 내놓고 엄마새에게 모이 달라고 그럴 때 엄마 독수리 날개가 이렇게 하면서 펄러기는 거예요. 이것을 라하프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펄럭거리는 이 주체가 펄럭거림을 당하는 개체보다 훨씬 더 큰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이 창조된 세계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모든 피조물의 창조가 성령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말하자면 창조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결국은 영혼을 가진 인간부터 시작을 해서 그 다음에 동물들과 그 다음에 식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성령안에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너무 확대해석을 해서 잘못하면 애니미즘이 되겠죠. 우리는 그렇게 까지는 보지 않고 이렇게 모든 것이 성령안에서 창조되어서 각각 연관은 다르지만 이것들이 어떤 전체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이것과 관여하시는 정도와 방식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자기의 본체를 나누어주시는 방법이 아닌 그러한 통치와 사무들간의 질서의 방법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현존에 영향을 미치고 계신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잘들어봐요. 전에 설명을 했듯이 레카프레타치오 교리에서 설명했듯이 하나님이 인간 하나를 창조하실 때 그게 이 인간이 하나님이 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개별적인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 전체를 하나의 하나의 그 말하자면 몸으로 창조하시려고 한 것이었다 이미 설명했었죠. 레카프레타치오 교리에서. 그렇게 놓고 그 다음에 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는 그러한 고백을 하기 원하셨다는 거라 이거야.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한사람 한사람 창조하실 때에도 성령안에서 창조하신 것이 되지만 처음 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사실은 성령안에서 하나된 것을 구체적으로 시간 속에서 실현해나가는 것이란 말이야. 그래서 결국은 사람의 창조는 성령안에서 이루어 졌는데 두 번째는 교회 창조야. 그럼 알다시피 교회 창조는 이러한 인간이 죄가 들어와 그 몸 자체가 상해 버린 거거든. 상해 버린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필히 몸 중의 하나로 오셔야 했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필연이었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안에서 교회를 이루시는데 이 교회가 망가진 몸을 재창조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거야. 당연히 이것이 in the Sprit, 성령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죠. 교회의 창조도. 그렇잖아요. 그러면서 이 교회의 창조가 여기 이루어짐으로써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인간이 신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올바르게 caritas의 사랑으로 반응하고 그 자신들은 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이웃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공통분모처럼 만나면서 이 안에서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시려고 했던 인류이고, 교회는 이것을 먼저 선취적으로 모본을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교회 창조가 이루어지는 거란 말이야. 그 이 두 커다란 가닥을 가지고 3과를 만들어 가는 거야. 그러면 보세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성령으로 창조하시잖아요. 그래서 사람을 성령으로 창조하시는데, 잘 봐요. 이렇게. 맨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시잖아요. 데페시 하이아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산 사람이 되는 거죠. 생기를 불어 넣으시는 것, 그래서 이것이 결국은 성령안에서 사람을 창조하셔서 두 가지로 효과가 나타나는데 첫 번째는 사람이 영적인 존재가 되는 거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이 사람의 교통 가능성이에요. 교통 가능성. 그게 첫째로 뭘까요? 우선 인간의 영혼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 가능성이 열리는 거예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인간이 각자 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 사이에 각자 영혼을 가지신 영혼이 있는 영이 있는 인간들끼리의 교통. 이게 가능해 지는 거예요. 이게. 그러니까 놀랍잖아요. 성령안에서 이것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해지고 그 다음에 같은 영혼을 가진 인간들끼리의 교통도 가능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작용이에요. 동물들이 자기의 자식을 위해서 개체의 보호를 위해서 희생을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몰라요. 그러한 점에서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이 종들을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자연적인 섭리로 그렇게 해석을 해야 하는 거죠. 자, 그러면 해결이 됐죠. 그 다음에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이것이 어떻게 되죠? 중생을 통해서 중생을 통해서, 중생. 그러면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societas의 측면에서 본다면 중생 그 자체는 어떤 의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죄로 말미암아 끊겨진 하나님과의 관계, 교제를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회복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안에 행하시는 작용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중생 이 자체가 societas를 위한 것이 된다 이거죠. 그래서 중생과 회심함으로써 인간은 끊어졌던 삼위 일체 하나님과의 societas를 다시 똑같이 아버지에 의해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다시 societas를 이루는데, 이 societas는 사실은 영생의 본질이란 말이에요. 본질.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끊임없이 우리 인간에게 영혼속에 부여되면서 그러면서 인간의 존재의 고유한 목적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이게 생명이라고 하는 게 결국은 하나님의 뭐라 그럴까. 하나님의 자존성. 스스로 존재하심. 이것의 가장 훌륭한 모상이에요, 생명 그 자체가.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신비한게 생명이에요. 그래서 일반적 차원에서도 이 생명은 경이로운 거예요. 하나님의 자존성을 가장 훌륭하게 모상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살아있는 것이 아름답다. 생의 외경이나 이러한 이야기를 썼던 슈바이처나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이죠. 생명이 그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보여주는 것이 되는 거죠. 살아있는 작은 벌레 그죠. 어마어마하게 큰 보석보다도 더 아름답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생명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존성 때문에 아름다운 거죠. 볼 수 있는 사람들만 보는 거죠. 그래서 중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거죠. 아주 정교하죠. 그 다음에 이제 이쪽으로 넘어가면 새사람이 되는데 그 자체가 공동체적 사건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보편교회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거예요. 사랑해야 되고. 그래서 이렇게 중생 그 자체가 공동체적인 사건이에요. 그리스도의 처음에 인간 전체로 보더라도 공동체적인 몸이 없고, 죄로 말미암아 깨뜨려졌는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다고 하는 점에서 접붙여질 수 있게 하는 모든 그러한 접붙이기 하는 능력 자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오기 때문에 복음적인 가르침이나 성령의 모든 역사까지도 그렇기 때문에 시작도 공동체 적이고 그 다음에 결론도 공동체 적이다. 그 이야기에요. 이것을 깊이 우리들이 이해해야 되는 것이죠.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이 문제가. 이렇게 놓고 보면 이제 레카플레타치오 교리가 아주 그 아주 그 순조롭게 풀리죠. 너무 잘 이해가 되죠. 너무 잘 이해가 됩니다.
그 다음에 이제 교회를 창조하셨는데, 잘 보세요. 교회가 어떻게 창조되어요? 넓은 의미에서는 교회는 광야에서부터 존재해왔고, 예수 그리스도 때에도 존재해 왔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면 이 교회의 출현은 성령을 부으심을 통해서 신약 교회가 형성 되는 거예요.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서 고유한 의미의 신약 교회의 시대가 열리는 거예요. 참 놀랍잖아요. 성령 보다 뛰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었는데도 성령이 부어주신 후에야 교회가 이루어지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말하자면 장작임으로 성령이 오셔서 불을 붙이심으로 이게 드디어 말하자면 모닥불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신약의 교회의 시대가 열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 될 수 있죠? 그렇죠. 이전에 잘 봐요.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어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생애를 목격했고 또 십자가의 죽음도 알았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 그러한 부활도 보았어요.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그런데 이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하나도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이 착한 삶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도 있었어요. 이것이 다 쪼가리 쪼가리 떨어져 있었던 거야.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서 그래서 이제 이 분이 누구인가를 증거한 거예요. 이것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속에 증거한 것.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이렇게 증거받은 각 사람들을 각 사람들을 모두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의 몸체로 만드시고 그 다음에 이 사람들 속에서 아가페의 사랑에 대해서 반응으로서의 caritas를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셔서 그래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신 거죠. 그러면 결국 잘봐요. 이것은 이것은 맨 처음에 사랑을 창조하셨을 때 가지셨던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늘 하는 이야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뭐라고 했죠? 대충기도하면 안되고 왜 그렇게 참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어요? 그렇지. 참 사랑이 되기 위해서. 참 사랑이 되기 위해서. 그러면 여기에 이야기하는 참 신자, 참 신자가 되는 것이 핵이라면 그 다음에 참 사랑이 되는 것은 밖으로 뻗어가는 외연이잖아. 이것이 외연이 되잖아.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이 이 내포라면 이것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은 인류라고 하는 공통된 집단을 이루어가시기 위한 참 인류가 되기 위한 방법이라는 거란 말이에요. 참 교회 그 다음에 참 인류 공동체. 그렇게 해서 이것이 기가막히게 연결을 이루는 거야.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75페이지에. 그래서 어떻게 하냐 하면 성령을 부으심으로써 크게 세 가지 일들을 이루시는데 그게 뭐냐 하면 첫째가 공동체에 성령을 부으셔요. 공동체에 성령을 부으셔서 그래서 은혜를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실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시는 거죠. 두 번째는 복음을 믿게 하시고, 성령을 부으심 그 다음에 믿게 하심, 복음을 믿게 하시는 거죠.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말하자면 신자 안에 내주하심. 이것이 전부다다 하나의 societas를 이루게 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는 분명히 첫째는 진리의 내용이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 뭐죠, 영의 교통이 있는 거예요. 이것이 두 개의 기둥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사랑, 그 다음에 진리와 성령 그 다음에 지식과 은혜, 등등으로 대비가 되면서 교회 전체를 하나님이 이끌어 가고 구속 역사를 전개해 나가시는 두 개의 기둥이 되는 거예요. 하나는 객관적이고 하나는 주관적이고 두 개의 기둥이 되어서 쭉 가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예배에서도 목양에서도 구원에서도 계속 강조되었던 두 개의 기둥이라는 거죠.
그 다음에 이제 77페이지로 넘어가면 그러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societas를 이루어가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자, 그러면 여기에서 두 가지가 나오는데, 이제 첫째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용서에요. 용서. 그 다음에 두 번째 사랑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sharing, 나눔이에요. 이것은 사실 소극적인 것이 되잖아요. 이것은 적극적인 것이 되어요. 그러면 소극적인 용서가 나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 여기 보세요. 자 이렇게 해서 아까 그림이 없어져버렸지만 이렇게 있고, 이것이 모상이 되어서 교회라고 하는 커다란 몸 안에서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의 개교회라고도 보여주는 전체적으로, 원리적으로 본다면 전체적인 보편교회의 연합이 되는 거잖아요. 이렇게 이루어지잖아요. 이것을 가리켜서 caritas라고 이해했어요. 그러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caritas 자체가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에 신자들끼리 스스로 불러 일으켜지는 종류의 사랑도 아니에요. 뿌리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이러한 신적인 사랑, 신에 기초하지 않으면, 결국은 이게 아가페이죠. 아가페에 기초하지 않으면 그러면 이렇게 caritas가 존재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우선 그것을 염두해 두고 그러니까 결국은 이 caritas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 원천이 되어서 그것이 사람들 속에 적용이 되어 보이는 모든 인간과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관계들에 대해서 나타나는 빛깔이 caritas의 사랑이거든. 그러면 결국은 정체 그 자체는 원천 그 자체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이란 말이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관계를 맺어서 그래서 우리 안에 접수되고 흐르게 될 때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아무것도 끊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경험적으로 끊어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뭐죠? 죄에요. 죄. 죄에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안에 있는 caritas의 사랑은 원천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는 것처럼 이 죄역시 죄역시 이중적인 국면을 함께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사람들 속에 있는 이 죄는 반드시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죄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거죠. 그것을 내포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그것이 죄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그러면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이 사람들 사이사이에 있는 이 죄가 실질적으로 이러한 societas를 가로막게 되는 거죠. societas를 가로 막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똑같이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지평이 하나님과 그 다음에 이웃을 향하여 펼쳐지듯이 이 죄는 다시 이중적인 지평과 관련이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과 관련이 되고, 이웃과 또 관련이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다음에 지체들끼리 서로 그 회개한 결과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이러한 죄의 문제들을 자기 속에서 해결해야 된다는 거지. 그래서 결국은 대신적인 차원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차원에서는 회개가 필요하고 그리고 대인적인 차원에서는 이 열매가 필요한 거예요. 이것이 관계로서 나타나는 거예요. 이 두 개가 일치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속에서 societas가 계속 흐르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계속 부어줘서 증대되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지은 죄들을 하나님 앞에서 참회하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회개의 열매를 맺어서 그 관계가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해 지도록 각자가 노력을 해야 하는 그러한 지평을 갖게 되는 거죠. 아주 놀라운 일치를 보여주는 거죠. 수학의 공식처럼 탁 들어맞는 일치를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 공동체의 지평속에서 입증된다라고 하는 것이 이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 미래에 이루어질 이웃과의 관계를 모두 공통분모처럼 집약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명제가 성립하게 된단 말이죠. 그래서 성립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이렇게 이러한 societas속에서 자기의 신앙과 태도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reality를 여기에서 정말 알 수 있어야 해요.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 중심적인 신앙이 되어야 한단 말이에요. 그 다음에 이제 용서가 그래서 중요한 거고요, 그 다음에 넘어가면 그래서 용서하시는 사랑을 배운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이렇게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악을 행했을 때, 그 사람을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용서가 고통스럽고 아플수록 결국 뭐가 그 아픔과 고통의 크기만큼 자신 속에 뭐가 있는 거예요. 자기 사랑이 있는 거예요. 자기 사랑을 자기 사랑의 크기 만큼 아픈 거예요. 자기 사랑의 크기 만큼 고통 스러운 거예요. 그것을 비워 버리면 아프지 않아요. 비워 버리면 아프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아직까지도 교회 지체속에 있지만 자기 사랑의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은혜의 계기가 되는 거죠. 그 다음에 이제 용서하시는, 그래서 자기가 받은 용서가 얼마나 가치있고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아울러서 또 배우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용서하시는 사랑을 실천하게 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항상 이중의 화목의 경험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이고, 이것은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주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 것은 caritas의 사랑으로 하는 거라 이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입으면 입을수록 지체들을 더 잘 용서하게 되는 것이고, 교회에서도 보면 한번 미워하고 가슴에 품고 떼려 죽여도 안 꺽여지는 사람 있잖아요. 복음적인 생활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게 사실은 사랑의 부족이에요. 결론적으로. 그래서 가장 악한 관계였다고 할지라도 그게 감정이 지나가고 나서는 그것을 마음속에서 깊이 용서하고 그리고 그도 사랑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기억하고 가슴에 품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니에요. 잘하는 것이 아닌게 아니라, 자기의 안에있는 은혜를 반영하는 많은 것들이 참된 은혜가 아니라는 것들을 보여주는 거예요. 끝없이 용서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을 이제 80페이지에서 다루고 있는 거예요.
80페이지 맨 밑의 단락을 보면, 오늘날 교회에 가득 찬 다툼과 분쟁들을 보십시오. 누군가가 용서를 위해 십자가를지지 않기 때문에 한번 일어난 분쟁들은 끝없이 불길처럼 번져 가고 지체들의 아픔은 온 몸에 전염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참된 신자들은 자신이 고난을 받더라도 교회와 다른 지체들은 더 이상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자기 깨어짐의 용서를 통하여 교회는 미완성의 추루함을 점점 더 벗어버리고 순전한 공동체가 되어 갑니다.
용서의 복됨이 뭐냐 하면 소극적으로는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선물이에요. 그렇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기 전에는 우리가 속박되잖아. 그때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을 때 우리는 자유케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못느낀다 할지라도 지체들속에서라도 이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속박이 되는 거잖아. 속박이 된 만큼 이 속에 흘러야 할 그 성령안에서의 교통, societas는 방해를 받는 거예요.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면 성령이 슬퍼 하신다 등등의 표현, 근심케 하신다는 표현 등등이 이 societas가 방해받는다는 표현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그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일뿐 아니라 공동체적 문제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넘어가면 교제를 세롭고 올바르게 하시는 기초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되죠. 뭐냐 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는 이게 목표가 아니에요. 그래서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여기에 우리들이 있는데, 죄지은 우리들이 있는데 우리들을 이렇게 지나가면서 용서해주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을 다시 사랑하시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늘 이야기 하듯이 더 이상 나한테 말하지 마라. 이 문제에 대해서 너한테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그대신 너와 나는 관계를 더 이상 갖고 싶지 않다. 이것은 용서하겠다는 표현이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표현이에요. 왜냐 하면 용서, 그 자체가 사랑으로 가능한 과정이기 때문에, 용서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 이 용서의 참됨을 확증하는 열매가 사랑이에요. 사랑은 관계의 계속이에요,. 관계의 지속이에요. 관계의 지속이죠. 그게 사랑이에요. 그래서 끊임없는 용서는 하나님과 잘못되었던 관계를 새롭게 시작이 되게 하시는 출발이 되듯이 또한 사람들속에서의 서로를 용서하게 하는 이 용서는 또한 관계를 새롭게 시작하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의 중요한 말하자면 계기가 되는 거죠. 그러한 계기가 계속해서 주어지게 될 때에 관계는 새롭게 주어지게 되고 발전하게 되는 거란 이야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하게 하시는데 여기에서 사랑하시는 교제를 배움, 교회의 참된 기초는 사랑, 그 다음에 교회와 사랑의 완성. 이렇게 이제 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는 조금만 꼼꼼히 읽으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요. 그래서 뒤에 이제 교회 일치 문제는 약간은 어려워요. 그래도 이 교제를 공부하기에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이 부분들을 깊이 목상하면서 여러분들이 가르침을 풍부하게 하기 바랍니다.
또 하나 교훈을 해야겠죠? 가르침의 풍부함은 어디에서 나온다고요? 가르침의 풍부함은 어디에서 나와요? 삶의 무엇? 삶의 방식이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 여러분들이 먼저 이것을 실천하게 될 때에 그때에 이 진짜로 용서해보고 경험이 있어야지 강물처럼 가르침이 확 밀려오게 되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신앙이란 말이에요. 어떻게 경건과 학문이, 지식과 하나님의 사랑이 분리될 수 있겠어요? 이정도로 마치겠습니다. 질문할 것있으면 다음주에 질문해 주십시오. 기도하겠어요.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배운 이 말씀을 잘 소화해서 양떼들에게 아름다운 꼴로 먹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1강
몇 번째 과죠? 4과. 4장. 자, 그러면 이제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목사가 기도하고 하죠.
자, 그러면 4장에서는 쭉 넘겨 보시면 사랑과 일치의 문제를 그래서 이제는 제일 먼저 사랑의 자리 문제가 나오고요, 사랑의 자리가 어디인가 그 문제를 다루고요. 그 다음에 이제 교회의 일치 문제를 다뤄요. 진정한 일치가 어떠한 종류의 일치인가를 다루고요. 그래서 그 안에서는, 두 번째 다루고요. 세 번째는 이제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해서 다룹니다, 3번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다루고, 그 다음에 109페이지로 넘어가면 caritas적 일치 그것의 성격이 어떠한 성격이냐 다루어요. 다시 넘어가보면 사랑의 자리의 문제가 나오고 이것을 셋으로 나누어서 설명해요. 실제적으로는 인간의 영혼안에 그 다음에 기능안에 그 다음에 작용안에, 작용적으로 이렇게 나름적으로 나누어 본 거예요. 합리적이라 생각이 되고 교회의 일치의 성격이 뭐냐. 일치가 뭐냐라고 할 때,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바른 관계의 온전함이다. 이것이 일치에요. 그래서 바른 관계의 온전함, 그리고 일치. 바른 관계의 일치 그 다음에 온전함의 일치, 그렇게 설명이 되고, 그리고 이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A번에 사랑의 질서가 재편된 것이고 그 다음에 이제 B편으로 넘어가면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다시 개인적으로는 참회와 믿음을 통해서 회심을 통해서 그래서 사랑의 질서가 재편되고 그래서 회개를 통해 자기 사랑의 질서를 버리고 믿음을 통해 신적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을 한거죠. 그렇게 하고 공동체적으로는 교회의 목적을 받아 들이는 거죠. 그래서 생명의 질서와 사역의 질서를 사모하고 질서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그 교회적인 질서를 받아들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툼이 생겨나잖아요. 그 다툼이 소극적으로는 영원한 것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이고, 적극적으로는 교만과 이기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보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일체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교제의 증진, 그리고 지체들과의 교제의 증진, 이것들을 통해서 이제 그 온전한 일체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보여주어요. 그 다음에 caritas적 성격의 일치의 성격 그리고 나오죠. 양이 상당히 많아요. 획일화가 아니라 하모니화다. 획일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다다 한 음으로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을 해봐요. 이것은 획일화에요. 하모니화는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이러한 식으로 해가지고 각기 나눠서 불러요. 그런데 각기 다르잖아요. 그런데 그 속에서 하모니가 이루어져요. 그래서 이제 하모니와 까르따디스, 뒤로 넘어가보면 교회의 최고의 섬김이 무엇이냐 문제가 나와요. 구성이 그렇긴 한데 어쨌든 이렇게 돼요. 다시 처음서부터 보겠어요.
일단 읽는게 좋겠죠. 이 목사님부터 시작하겠어요.
<본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모상이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의 교통의 모상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한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서 교제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완전한 머리이시지만, 그의 몸인 교회는 불완전한 신자들로 이루어진 불완전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접붙여졌다는 점에서 이미 완전하나, 아직 잔존하는 부패성으로 충분히 그리스도를 닮지 못했다는 점에서 교회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일치를 이루어갑니다. 그리하여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치와 헌신은 오직 까리따스, 곧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써만 가능합니다.
Ⅰ. 사랑의 자리
이처럼 교회는 삼위 안에 있는 사랑의 모상이며, 이 사랑은 교통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교회의 회원이 되고 그가 중생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삼위 하나님과 연합될 때 그들 안에서 반드시 삼위 하나님의 교제의 모상이 존재합니다. 그런 사랑의 교제 안에서 교회는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완전한 존재가 되어 가며, 그렇게 교회의 오나전함을 위해 기여하는 가운데 성도의 영혼도 완전해져 갑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기초로 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신자의 마음에서 작용하면서 교제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신자의 죄도, 그리고 사랑도 모두 신자의 마음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 하는데, 이는 신자가 이 마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하고, 사랑으로 섬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은 실재적으로는 영혼 안에 있으며, 기능적으로는 애성 안에 있지만, 작용적으로는 마음 안에 있어서 신자의 삶을 주관합니다.
A. 실재적 : 영혼 안에
신자의 까리따스, 곧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은 실재적으로는 그의 영혼 안에 존재합니다. 영혼의 본질은 경향성들과 힘들이며, 기능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지성과 애성, 그리고 의성이 그것입니다. 사랑은 영혼 안에 있는 힘과 경향성으로서, 곧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거기에 끊임없이 붙어 있고 그것을 즐거워하려는 성향이기에, 실재적으로 영혼안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혼 안에 있는 사랑이라는 힘과 경향성들은 그 고유한 질서를 따라서 인간존재의 다른 기관인 육체, 그리고 그 둘과 관련된 기능 모두에 영향을 미쳐서 마음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사랑의 질서를 따르려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제 여기에서 내 설교를 듣는 동안에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하면서 설교를 들으면 편해요. 우선 인간을 이렇게 본다면 이렇게 원인구가 있다고 치고, 그리고 이렇게 있다고 치고 여기가 이제 이렇게 영혼이 있다면 영혼이 있다면 육체가 있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실재에요. 실재. 이것도 실재. 실재야. 실재. 자, 이것은 이제 실재이고 이것은 기능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영혼대로 육체는 육체대로 분리되지만, 마음은 어디로 갔냐고 물으면 안되는 거죠. 그렇죠. 마음은 하나의 기능이에요. 기능. 그래서 이제 기능이라고 보니까 실재가 아니다. 이게 바로 이분설의 구도에요. 이분설의 구도야. 자, 이렇게 보면 그러면 언제나 이렇게 놓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잘들어요. 이 마음은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능이기 때문에 기능이기 때문에 양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요. 그래서 이 영혼은 본질적으로 ........... , power 이렇게 보아요. 이것은 물질이 아니니까 뭐 이제 영혼, 물질설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어요.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수없이 무게를 다는 거야. 운명하기 직전의 무게와 공통적으로 21-22g의 차이가 있는 거야. 그래서 영혼의 무게가 21g이다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영화도 나왔어. 21g이라는 영화도 나왔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의학적으로 분명히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것은 생명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몸에 들어가 있는 어떠한 힘들이 풀어지면서 그 무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의학적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그래요. 뭐 또 안에 있던 폐에 있던 공기가 빠져 나간다든지 여러 가지 것들 때문에 그런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물질이 아니에요. 이러한 성향이나 그 다음에 경향성이나 힘들 이러한 것들로 작용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힘과 성향들이 이게 어떠한 방향이 있거든요. 방향. 방향이 있단 말이에요. 예를 들면 여기에서 주로 생각하는 것은 도덕적인 방향이거든요. 자연적인 방향도 있고, 도덕적인 방향도 있을 것 아니야. 자연적으로 뭐 자연적인 그러한 방향이 있을 것 아니야. 어떠한 사람은 예술을 잘하고, 머리가 좋지만 예술을 잘 하고 그 다음에 어떠한 사람은 논리에 강하고, 그러한 등등의 성향이 있을 것 아니야. 이러한 성향들이 끊임없이 자연적인 것인지 도덕적인 것인지 간에 이렇게 그 마음의 영향을 주는 거예요. 이렇게. 그리고 또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외부의 사물과 접촉할 때 그 때에 마음을 통해서 그래서 정보들이 들어오는 거죠. 여기에는 이제 감각기관들이 있죠. 감관들이 있고, 들어오게 되면 그러한 것들이 마음에 있어서 어떠한 작용을 일으키게 되죠. 그죠? 작용을 일으키면 이 작용이 영혼에 영향을 주는 거야. 여기에는 이러한 영향을 주는 거야. 영향을 주어서 어떻게 하냐 하면 이러한 영혼의 본질인 힘과 그 다음에 힘과 성향의 어떠한 모종의 변화를 주는 거야. 그래서 우리들이 사람의 영혼이 변화된다고 할 때, 하나님이 중생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영혼에 오셔서 직접적으로 이 힘과 방향들을 바꾸어 놓으셔서 그래서 이렇게 마음의 변화들을 맺히게 하기 때문에 중생이 먼저이고 회심이 나중이지만 이후에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많은 것들이 이렇게 마음을 움직여서 이 마음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이러한 차선을 따르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육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거죠. 육체에 영향을 주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침팬지같은 것, 막 놀리고 그 다음에 입에다가 물린 다음에 내시경 집어 넣으면 위가 빨갛게 출혈 되어 있거든. 그러한 것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분명히 육체에 영향을 주는 거야. 예를 들면 뭐 그 다음에 뭐 예를 들자면 아주 예쁜 여성을 본다든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호흡이 가빠지고 뭐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인데 육체에까지 영향을 주잖아요. 이러한 방식으로 영혼과 육체는 놀랍게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거예요. 이러한 식으로 보는 거예요. 여기에 대한 논리들이 어디에 나와있냐 하면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를 보면 나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인간관에 대한 것들이 상세하게, 그렇게 볼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지성, 지성 이것은 원래 있는 말이죠. 그 다음에 애성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런 말은 별로 없어요. 내가 만든 것이고. 그 다음에 의성이라는 말도 내가 만든 건데,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 지성은 이렇게 보는 거예요. 지식 자체, 그 다음에 플러스 지적 능력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이것은 그러면 똑같은 논리로 보면 이것은 어떻게 될까? 그렇죠. 사람 자체와 그 다음에 애적 능력이 되는 거야. 이것은? 의지 자체와 그 다음에 의적 능력이 되는 거죠. 그러면 왜 이러한 복잡한 구분이 이러한 복잡한 구분이 이러한 복잡한 구분이 이렇게 들어가는 이유는 뭐냐.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처음 창조된 사람과 관련이 되어요. 맨 처음에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그럼 맨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 우리가 만약에 그 누구지? 경험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것들은 따릴라 라사야. 백색서판의 상태야. 백색서판의 상태. 백석서판의 상태에서 이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었다가 경험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인데 그것을 잘 믿어지지 않는다 이거지. 분명히 처음 만들어진 사람에게도 지식 자체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사랑도 있고 의지 자체도 있는거다 보는 거죠. 그래서 이제 지적 능력은 다시 나누어지는데 이제 추론 능력, 판단 능력, 그 다음에 추론 능력, 판단 이라기 보다는 변증 능력이죠. 변증 능력 그 다음에 추론 능력이에요. 변증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인데 특별히 그 어떠한 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번쩍 하고 비추어져 오는 그것을 가지고 판단을 하는 거예요. 우리들이 이것을 가리켜서 오성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가리켜서 이성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 다음에 가리켜서 오성이라고 가르켜요. 성경에서는 총명이라고 자주 나와요. 자, 그 다음에 이것은 이제 믿음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고, 이것은 이제 논리적인 지식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같은 능력으로 이제 애적 능력인데,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이잖아. 그런데 사실은 미워하는 것도 사랑 속에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이제 애적 능력을 둘로 나누어서 그래서 애호 능력, 애호 능력과 그 다음에 오혐 능력, 혐오라고 하면 좀 그러니까 바꾸어서 오혐. 이렇게 쓰는 거거든. 난 나름대로 논리가 있는 거야. 왜냐 하면 이 애의 반대말이 오야. 이렇게 애호거든. 오혐이야. 혐.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애의 반대가 오야. 호의 반대가 혐이라고. 좋아하다, 혐오하다. 사랑하다. 이것은 악이라 하지 않고 미울 오자야, 미울 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증오 그러잖아요. 증오. 이렇게. 이렇게 쓴단 말이에요. 증악이 아니라 증오라 하거든. 미울 오. 이렇게 오혐 능력이라는게 맞지. 이것은 뭐냐 하면 좋아하는 것을 잡아드릴 수 있는 끌어 당길 수 있는 능력과 싫어하는 것을 배척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켜요. 합해서 애적 능력이라 부르는 거예요. 그 다음에 의적 능력은 어떻게 부르냐 하면, 이것은 뭐냐 하면 의적 능력은 이행 능력이야. 이행 능력과 그 다음에 저항 능력이에요. 이행은 뭐냐 하면 실행을 하는 거죠. 안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실행을 시키는 능력이야. 저항 능력은 뭘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안 이루어 지도록 막는 능력이에요. 저항할 수 있는 능력. 이게 의지죠. 그러면 어떤 것이죠? 선을 행하려고 할 수 있는 능력, 실행할 수 있는 능력. 악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거기에 저항하는 능력 그런 거죠. 그죠? 죄죽임과 같은 경우에는 이 저항능력 그 다음에 이행 능력 모두가 요구가 되죠. 이행 능력은 적극적으로 은혜를 받아야 하고 저항 능력은 죄의 욕망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부수어 내는 거죠. 이정도 구도로 딱 보고 나니까, 모든 것들이 설명하기가 쉬워 지는 거예요. 그런데 커다란 문제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것을 상세하게 설명한게,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여기에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위하여를 보십시오.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좀더 발전이 있으면서 구체화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틀은 그렇게 보는 거죠. 이렇게 놓고 보면 굉장히 그 이해하기 쉬워 지는 거야. 이렇게 놓고. 그래서 애성안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거, 이거를 가리키는 거야. 굉장히 좋은 표현 같아요. 애성. 몇 사람한테 이야기를 들었어요. 참 가슴에 와 닿는 단어다. 지성은 지성이라고 하는데, 애성은, 지성, 사랑, 의지라고 표현하니까 사실은 이게 안 맞는 거지. 지식, 사랑, 의지라고 표현해야 하는데 지성, 사랑, 의지라고 표현하니까 잘 안맞는 거야. 그래서 사랑과 의지의 관계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 의지, 사랑 그 자체를 이렇게 보는 거죠. 이렇게 있는데 여기가 지 이고 여기가 의 야. 애라고 하는 것은 애라고 하는 것은 이미 벌써 애가 없으면 의가 있을 수가 없어. 그래서 애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기능이라기 보다는 의지쪽에 들어있는 기능이라고 보는 거지.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지성과 의지로 창조하십니다. 지성, 의지, 이 두 개가 짝을 이루면서 계속 등장해요. 이게 바로 이러한 그 다음에 지, 정, 의에 대한 기존에 있었던 전통적인 참 구분을 깨고 그리고 이렇게 그 사랑 그 자체가 의지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경험주의적인 설명들을 받아들인 흔적들이에요.
자, 그러면 이제 됐죠. 그러면 이제 사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면, 이것은 이거고.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사랑은 영혼의 경향성이고 힘인데, 힘이 어떠한 도덕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것이 자기 사랑이나 하나님 사랑이나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요. 영혼의 기능의 모습은 똑같은 거예요. 예를 들자면 이 손을 뻗어서 이렇게 뭔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할 수도 있고, 칼을 들수도 있듯이 사람이라고 하는 그것은 자기 사랑이든 하나님 사랑이든 본질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경향성들과 힘이다.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역사하는 거죠. 자, 그 정도로 해놓고 그 다음에 좀더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B. 기능적 : 이성 안에
신자의 까리따스, 곧 하나님께 대한 지순의 사랑은 기능적으로 신자의 애성 안에 존재합니다. 인간 영혼의 세 가지 기능 중 지성은 사물을 생각하고 추론하며 판단하는 기능과 지식 자체로 이루어지며, 애성은 사물을 선호하고 혐오하는 기능과 사랑 자체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의성은 원하는 것을 행하는 지행능력과..
<김남준 목사님>
여기에서 지행능력이 아니라, 이행 능력이에요. 미스 프린트에요. 이행. 이행이라는 단어 알죠? 그 다음에.
<본문>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저항 능력, 그리고 의지 자체로 이루어집니다.
기능론적으로 사랑은 인간 영혼의 기능 중 애성 안에 자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물을 판단할 수 있도록 두 가지를 주셨는데 하나는 지식이고, 또 하나는 정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물을 보고 지성으로 판단하고 또 마음이 그것에 이끌리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함으로써 그것들을 판단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것은 이제 존 오웬의 그 설명이에요. 그래서 존 오웬 뿐만 아니라 이것은 전체적으로 합의하는 내용이에요. 누구든지 그렇게 보았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판단을 지성으로 하고 마음이 이끌리거나 배척하거나 그렇게 하면서 판단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두 가지는 서로 영향을 미쳐요. 그래서 저 사람이 안 좋은 사람이다 생각하면, 그가 하는 행동들이 다 이상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 다음에 저 물건에 대해서 잘못 알게 되면 이후에 일어나는 그 물건의 작용들을 전부다 오해하게 되는 거죠. 그 다음.
<본문>
그런데 정서를 움직이는 이 사랑은 또한 의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어떤 것들을 선호하게 하거나 혹은 혐오하게 함으로써 사물을 판단하는 지성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의지를 이끌어 냅니다.
애성은 애적 능력과 사랑 자체로 이루어지는데 애적인 능력은 사랑과 관련된 영혼의 기능입니다. 이러한 애적 능력은 선호능력과 혐오 능력으로 나뉘는데...
<김남준 목사님>
선호 능력이라고도 하고, 애호 능력이라고도 하고. 선호라고 하는 것은 선택과 관련짖는 거예요. 그래서 선호. 오혐. 이것은 뭐냐 하면 선택하는 거죠. 그래서 선호 능력, 또는 애호 능력 그렇게 부릅니다.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 다음에.
<본문>
선호 능력은 영혼이 좋아하는 것에 마음이 끌리고 그것에 합치하며 또한 그것을 목표로 누리려고 하는 경향과 능력을 가리키고, 또한 혐오 능력은 그것을 싫어하고 배척함으로써 거부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간의 애성은 하나님께서 생래적으로 주신 사랑 자체를 포함합니다. 인간은 애성적으로 사랑할 능력을 갖추었지만, 사랑에 있어서 백색석판..
<김남준 목사님>
t가 빠졌어요. 타뷸라 a앞에 t가 빠졌어요. 타뷸라 라사. tabula rasa.
<본문>
상태로 태어나지 않고 이미 하나님을 향한 지순애 사랑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여야 하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하여 친절을 베풀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아름다운 영혼 안에서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가장 영혼다움으로 가득차 영혼의 전일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혼은 그 모든 힘들과 경향성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적용하며 살 수 있도록 정의되어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정의가 아니라 정위. 정위. 위치를 잡는다.
<본문>
성도의 온전함은 바로 이처럼 영혼 안에 있는 모든 부패한 본성들을 순결한 사랑으로 변화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가득차서 그 사랑 안에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자신의 존재목적을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구현해가는 삶에서...
<김남준 목사님>
그러면 사랑이라는 것이 결국은 존재의 목적을 합치시키는 거죠. 그래서 너무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의 존재의 목적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 되는 거죠. 부모 사랑이 대표적이잖아요. 부모는 목표가 없어, 자식이 잘 되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 잘 되면 되는 거예요. 이번에 홍민기 목사 그 교회에 갔는데, 사모님이 참 피아노를 잘 치시더라고요. 줄리어드 출신인데, 재원이야. 그런데 남편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목회하면서 만족하는 거죠. 그러면서 이제 삼년 됐는데 삼백명 모이니까 잘하고 있는 거죠. 어쨌든 사랑은 그렇게 합치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사실 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꿈을 버리게 되는 거죠.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리는 거야. 결혼하기 전에는 선교를 가겠습니다. 목회를 하겠습니다. 예술을 하겠습니다. 뭘 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형제 딱 만나면 그 다음에 없어지는 거죠. 자기 뭐 할건데? 자기의 꿈과 존재의 목적이 생겨나는 거죠. 합치 시켜 가는 과정이에요.
그지, 강성경? 강성경이가 그러한 형제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줘요. 모두 다 그러한 것을 너무 하니까 결혼이 지체가 되는 거야. 언제든지 나를 합치시킬 수가 있다. 그렇게 생각 해야 해. 강성경 전도사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줘야해. 강성경 전도사, 그 김진아가 거기 있드만. 강성경보다 자기가 한 살 어리다고 자랑하대. 그 다음에.
<본문>
행복과 쉼을 느끼는 것입니다. 교회의 온전함은 바로 지체들이 영혼의 온전함을 회복하고 거기에서 비롯된 삶을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이제 기능적으로는 이제 사랑이 대상 안에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되는데 사랑 안에 이제 어떻게 되냐 하면 실질적으로 영혼 안에서 사랑의 성향이 강해지게 되면 그것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실제로 이 그 영혼의 사랑의 경향성들이 생겨나게 되면 실제로 마음 안에서 아주 강력한 힘으로 역사하게 돼요. 그래서 악한 습관 같은 것도 마찬가지에요. 일단 성향이 형성되게 되면, 그러면 중독같은 것들도 그래서 생겨나는 거예요. 게임 중독에 빠지고 이러한 것들 있잖아요. 그래서 청교도들은 마음 안에 성향이 형성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경계했어요. 그 성향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주님의 그 이름을 높이고 말씀을 사랑하고 하는 이러한 것들의 성향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 신앙생활에 저해가 되는 것이 형성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주의 했던 것이죠. 그래서 죄죽임 그럴 때 그 자체가 마음 안에 있는 성향을 영혼 안에 있는 성향을 죽여 가는 거야. 어떻게?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작용들을 제어함으로써 성향들을 죽여가는 거야. 성령의 역사로서. 그 다음.
<본문>
C. 작용적 : 마음 안에
비록 사랑이 실재론적으로는 영혼 안에, 기능론적으로는 애성 안에 존재하지만, 그것이 직접 사용되는 곳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작용적으로 볼 때, 사랑의 자리가 사람의 마음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행동을 산출해 내는 공장과 같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행동과 대적하는 행동들이 직접 산출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너무나 자주 그 마음의 주인이 인간 자신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에게 영혼을 돌이키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돌이키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움직임이 신자 자신의 의지 안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심지어 신자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동안에도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여’ 작용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의 의지적 활동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게 이제 그 신학적으로 지금 이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 제가 중국인가 어딘가 가서 자기 깨어짐을 가지고 특강을 했는데, 그 듣던 한 사람이 질문을 하는데, 뭐냐 하면 은혜로만 되어야지 거기에 인간의 의지가 개입이 되면 어떻게 되겠냐고. 그러한 것들은 이제 개혁신학에 대하여는 알고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그 마음의 구조라든지 그러한 이해가 거의 없기 때문에그렇게 인간을 그렇게 보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리가 안되어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기본적인 개념들이 정리가 안되어 있으면, 논리적인 설교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두리 뭉실하게 뭉뚱그려서, 그렇게 되면 이제 날선 검이 되기 위해서는 논리가 분명해야 해요.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에요. 정말 정리가 안되겠어요?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수 없다 그러면 은혜 자체가 의지를 불러 일으키는 작용인데, 그 이야기가 잘 안되죠. 참 그러니까 신학 공부를 잘 못한 거죠. 은혜와 의지가 대립이 되는 식으로 설명을 하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해결이 안되는 거야. 그래서 이제 존 오웬이 자기의 성화론에서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Holy Sprit>에서 하나님의 성령인데, 성령이 He works in God, and with God, not without in us and with us, not without us and against us, not without us. 라는 유명한 말을 만들어 낸 거예요.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지. 우리를 거슬러서 우리 없이 역사하시지는 않는다. 이렇게 되는 거죠. 어쨌든 이 문제는 철학에 있어서 굉장히 난해한 것중에 하나인데, 이런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으면 성경을 이해하는 정도도 다르고, 그 다음에 마음지킴의 교리를 더 꼼꼼히 살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본문>
따라서 신자의 마음은 전쟁터와 같습니다. 인간에게 어떤 행동을 촉발시키는 무수한 감정들이 이곳을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하루에 십만가지 정도의 생각이 오간대요. 그러한 것들은 대부분 열매 맺지 못하고 사라지지만, 어떠한 것들은 열매를 맺으면서 행동을 산출하게 되는 거죠. 그 다음에.
<본문>
사랑 뿐 아니라 미움이 실제로 작용하는 곳도 마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작용하는 곳도 신자의 마음이며 의심과 거짓이 자리하는 곳도 거기입니다. 사랑도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마음이 사랑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결코 사랑으로 말미암아 일치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마음에 반영되고, 마음의 작용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미칩니다.
<김남준 목사님>
특별히 이제 설명할 내용은 없죠.
<질문>
여기에서요, 지금 기능적, 작용적 딱 잘 안잡히는데요, 왜냐 하면 마음이는 것도 function이라는 것도 기능, 작용 예, 번역될 수 있는 사항인데
<김남준 목사님>
나는 이렇게 나눈 것들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이렇게 본 것이에요. 실재적으로는 영혼 안에 있고 그 다음에 기능적으로는 혹은 작용적으로는 마음 안에 있다하면 되는데, 굳이 기능적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더 넣었던 이유는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 했던, 여기에서 기능을 이야기 한 것은 능력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거예요. 무슨 이야기 이냐 하면 여기에 영혼의 영혼의 성향이 있잖아. 이렇게. 이것이 그 다음에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이게 이제 작용을 하면 이게 바로 행동으로 산출이 되는 거야. 산출이 되잖아. 그런데 이제 이렇게 설명을 해도 되지만, 그러나 내가 뭘 이야기 하고 싶은가 하면, 애성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게 영혼과 마음이야. 마음사이에 존재하는 어떠한 루트라고 생각하면 안돼. 다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이 마음을 나눌 때, 행동이 산출되는데 여기에 어떤 이렇게 이렇게 이제 여기 성향에 예를 들어보자. 여기에 A를 싫어하는 성향이 있다고 치자. 여기에 A가 등장했을 때, 배척하거나 저항하려는 이러한 행동을 산출하게 될 것 아니야. 그러면 이렇게 될 때에 그것이 마음 안에 일어나는 작용이지만, 이게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작용이지만, 이것은 이 마음 안에 있는 기본적으로 이미 있는 어떤 두 가지의 능력, 아까 이야기 한 대로 애호와 오혐이라고 하는 이러한 능력, 이 능력의 틀 속에서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지, 마치 마음은 평판적으로 있는데 이것이 수시로 이것이 떨어져가지고 그것이 개별적으로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보는 거죠. 이러한 능력이 그 마음 안에 이미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마음의 능력, 마음의 능력 기능이라고 하는데, 기능의 틀 안에서 이러한 것들이 싫어하는 것들은 오혐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기능을 사용해서 이러한 것들이 일관성있는 것들로 전개되는 것을 볼 때에 이것을 마음 안에 이미 이러한, 마음 안에. 이것은 마음 안에 경향성이라고 해야 하나. 성향이 아니라 경향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마음안에는 성향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거지. disposition이라고 하는데, disposition. 이러한 성향들은 인간의 마음안에 있어서 애호 하거나 오혐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게 기능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마음에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작용하는 것이지, 이게 산발적으로 어느 사건이 생겨나게 되면은 그것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보는 거예요. 그래서 어쨌든 B번과 C번 두 개는 각각 다른 영혼이 있고, 애성이 있고, 마음이 있다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지 말고, 영혼과 마음 이렇게 이해를 하되 이 마음 안에서 이러한 틀들이 있다는 것을 한번 애성이라는 것으로 짚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해를 하면 되요. 자, 그 다음. 그렇게 되고요. 철학책을 찾아봐도 답이 잘 안나와요. 사람마다 말하는 것이 복잡하고 어지러워요. 칼빈도 인간의 영혼이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유익하다 그랬어요. 그래서 공부를 하라고 권면하는 장면이 나오죠.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정리가 다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문맥 자체가 그 당시에는 너무 호기심이 많으니까, 나처럼 설명하고 하면 사람들이 철학의 재판이라 느껴질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너무 안하니까 너무 안하니까 자기 구조가 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전혀 모르니까. 그런데 그러잖아. 영혼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가끔 물어보는 것, 주님이 나를 만지셨다고 하니까 어디를 만져 주셨냐고 물으는 것과 똑같이 영혼의 변화가 필요하다니까 영혼이 뭔데? 답을 못찾아요. 영혼이 어떻게 변화되는 건데? 빨강색이 노랑색으로 변화되는 거야? 아니면 크기가 커지는 거야, 뭐가 변화되는 거야, 심지어 나의 설교 속에 영혼의 파괴도 나오잖아. 그러한 것은 영혼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 안돼. 어떻게 파괴 돼? 그런데 왜 영혼의 파괴라고 쓰냐. 자기 깨어진다라고 하는데, 뭐가 깨어지냐. 자기가 유리 그릇이야? 그렇지 자기는 유리지. 도자기. 그러한 것들은 그 정의를 분명하게 해놓지 않으면 안되는 거지. 그래서 항상 자기 깨어짐이든지, 도덕적 통치에서든지 나오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definition이야. definition부터 먼저 해야 하는 거야. 제 이야기를 앞으로 여러분들이 설교자가 깊이 있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하면 저의 충고를 받아 들여요. 몇 년동안 대게 많이 고민하였고 그렇게 개혁파 정통주의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는데 결론은 뭐냐 하면 철학없이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악보볼 능력이 없이 음악을 공부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판단이 서요. 그래서 이제 칼빈신학교 가서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정말이에요. 저의 충고를 받아 들이고 그리고 자기의 설교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으로 자기가 설교를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돼요. 감동은 잘들으세요. 감동은 세월이 지나면 감동을 줄 수 있어요. 자기 삶이 진솔하고 진지하기만 하면, 감동을 줘요. 그래서 철가방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잖아. 철가방에 목숨을 걸었다. 유퉁같은 사람은 국밥에 내 인생을 걸었다. 그 사람이 나와서 TV에서 떠드는 것 보면,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감동이 돼요. 야, 누구는 국밥 하나 가지고 청춘을 걸었네. 야, 우리는 뭔가. 그래서 철가방도 감동을 주고 진지하게 살고 자기를 거기에 합치시키려고 쏟아 부으면 똥 푸는 사람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거야. 모든지 뭐는 감동을 안 주겠어. 결국은 감동을 못 주는 무엇이냐 하면 진지함과 몰입, 자기를 쏟아 붓는 일체의 삶이 없기 때문에 오래 예수를 믿고 목회를 해도 감동을 못주는 거야. 감동을 주죠. 뭐든지 주죠. 뭐든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면 감동을 줄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아요. 절대로 깊이를 보장하지 않아요. 그러면 결국엔 감동을 줄 수 있는 것도 자기가 몰입하는 그 분야지, 자기가 몰입하지 않는 분야에 감동을 줄 수 있나. 그 모든 삶의 방면에서 그렇게 주님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그러나 사람의 정신과 마음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거예요. 모든 방면에 있어서 그렇게 다 못하는 거죠. 야, 기도도 이 사람은 나와 비교도 안되는 구나. 야, 말씀의 연구도 나와 비교도 안되는 구나. 그 정도야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탁월하구나, 죄인들의 심리도 꽤뚫고 있구나. 무슨 경영, 뭐 뭐 현대 과학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인간이 되어서. 그래서 뭐냐 하면 이제 설교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감동이 아니라, 감동은 깊이가 얕아도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거야. 그 감동과는 상관없이 설교가 깊어 지려면 그렇게 여러분들이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 정리된 사고들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이거지. 최근에 여러분들이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최근에 그 여태까지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을 쓰잖아. 삼위일체론을 이제 왜 쓴 거예요? 삼위일체론을, 조직 신학 전공자가 대답해야지, 삼위일체론을 왜 쓴거야? 모른다고 하면 안돼지. 삼위일체론을 왜 썼던 것 같아? 무슨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쓴 것 같아? 김희찬. 응? 다 가르쳐 줬구만 왜 그래, 삼위일체론을 왜 썼냐니까. 허허. 왜 몰라, 삼위일체니까 삼위일체를 입증하기 위해서 썼을 것 아니야. 그래 안그래, 제목이 삼위일체잖아. 그게 전통적인 학설이었어. 그러니까 삼위일체의 교리를 교인들과 신학자들이 알아듣게 증명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론을 썼다는 것이 전통적인 학설이에요. 그런데 그게 보다시피 만만한 책이 아니에요. 언제 같이 공부하면 굉장히 좋을텐데, 시간이 없으니까. 한 6개월 배워야 하는데, 만만한 책이 아니에요. 누구든지 신학을 함에 있어서 그 책을 통과하지 않고는 신학이 안되는 거예요. 더군다나 신론에 있어서는 우리가 뭐 극자유주의자도 그 삼위일체론은 원천이래는 거야. 요즘에 1960년대 이후로 60년대, 아 그렇죠. 60년대, 50년대 이후로 그러한 삼위일체론 자체가 삼위일체를 증명하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하는 전통적인 그 말하자면 관점에 대한 아주 진지한 비판이 일어나는 거예요. 굉장히 매혹적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맞다는 확신이 들어요, 내 마음속에. 그러면 증거가 뭐냐 하면 삼위일체론의 뒷부분에 보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쓸데 없는 일이다. 삼위일체는 그렇게 해서 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그래. 다 하고 나서, 그러면 하지 말았어야지. 증명도 못하는 거, 자기가 왜 하냐 이거예요. 그래서 이제 새로운 학설이 나오는데 나는 그게 심정적으로 아주 깊이 동의가 돼요. 어거스틴은 그 학설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처음부터 삼위일체론을 쓸 때, 그 신비한, 신비에 속하는 삼위일체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그것을 쓴 것이 아니라는 거야. 그러면 뭐냐 하면 영혼의 영혼의 수련을 위해서 썼어요. 군인들이 전쟁을 할 때 유능하게 하기 위해서 평소에 군사 훈련을 하잖아. 영혼의 군사 훈련을 위해서 쓴 거야. 무슨 뜻이냐 하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사유의 능력을 근육을 배양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삼위일체속으로 들어가서 모든 논리력을 동원하면서 사람들의 상상력과 이성의 능력을 자극하는 거야. 그러면서 이 영적인 근육을, 지적인 근육을 길러 주기 위해서 삼위일체를 썼다 이거야. 그래서 이것은 그 자체가 철학서나 교리서가 아니라 교육서란 말이야. 이게 최근에 나오는 학설이에요. 상당한 일리가 있다 보는 거야. 실제로 보면 한참 그러한 설교를 많이 할 때, 젊은 친구들은 능력이 막 뛰어 나잖아. 막 놀랍게 발전해 나가. 사유의 능력들이. 그럴 때에 성경의 진리들을 흡입하고 빨아 들일 수 있는 놀라운 힘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이 책을 총신에 가서 애들 강의하면서 이것을 보여주면서 그랬어요. 이것을 한권씩 줄까, 그랬더니 달래. 주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읽어야 되니까 가져가는 즉시 읽을 의무가 생기고 읽기 싫으면 안가져도 된다. 그런데 가져가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 다 읽을꺼래. 다 달래, 책도 이쁘니까. 가져가더니 그 다음시간에 가서 이야기 해보라 하니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 훈련이 안된 거예요. 놀라워요. 그 다음에.
<본문>
Ⅱ 교회의 일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데에 분명한 도덕적인 목적이 있으셨던 것처럼,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을 재창조하심에 있어서도 분명한 도덕적인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러한 목적이 기여하기 위하여 구속으로 회복될 세상의 종자 씨로 선택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아주 분명한 존재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재창조의 모상으로서 자기 안에서 회복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성도들도 자기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써 자기의 존재목표를 교회의 존재목표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혼자 살아갔더라면 다 할 수 없었을 인간 존재의 목적과 창조의 목적을 공동체적인 섬김을 통하여 이 땅에 실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상의 교회 안에서 신자들은 끊임없이 추루한 자기사랑과 교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써 성도들 간의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임 목사, 요즘 교역자들이 무슨 스터디 하냐.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하고 있잖아. 같이 모여서 하는 스터디에서.
<대답>
이게 목사님, 시작 하시기 전에 저희가 먼저 이것을 하자 해서 이것을 하던 과정이었어요.
<김남준 목사님>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레카프텔라치오 교리를 그것을 좀 공부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엮어서 누가 좀 애착이 있는 사람이 하면 좋은데, 연관된 것을 딱딱딱딱 묶어서 교회에 관해서 한꺼번에 묶어놓는 거야. 레카프텔라치오 교리가 지금 여기에 나오는 지금 93페이지 앞의 설명이 레카프텔라치오에 대한 설명이거든.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공동체를 창조하셨고 그렇게 보면 이제 그 뭐야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를 약으로 묘사하잖아. 우리 몸이 병에 걸리면 약을 어떻게 하냐. 우리 몸속에 투입하거나 바르잖아.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성육신 하셔야 되는 거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어요. 필연적으로 인성을 입으셔야 했고,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셔야 했다 이거야. 그래서 그리스도를 그가 medicine, 약이라고 보았던 거야.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어. 약이라 그러는 거야. 그래서 우리 인류 전체의 몸이 약이신 그분을 복용한거야. 그 부패로부터 우리들이 살아가고 마지막에는 허물을 벗어 버리는 거야. 그 허물이 결국엔 영원히 멸망될 자들에 해상하는 거야. 여기도 반론이 굉장해요. 멸망받을 자들이 있다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강력하게 부인하는 거죠. 루터나 존스토트나 이러한 사람들은. 그러나 개혁파에서는 그렇게 안보죠.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그러한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을 굉장히 아릅답게 묘사를 한다고. 그래서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야. 그래서 약을 복용을 하는 거야. 그리스도야. 이제 마지막에 이제 다 회복이 되고 마지막에 그 껍질처럼 남은 허물같은 옷을 벗어 버려서 그것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원히 멸망받을 자들, 완전한 불결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제 지옥의 불길 속에 타오르는 가운데 그때 그 성도들은 기뻐하고 그리고 하나님 그 심판을 통해서 지극히 영광을 받으시는 거야. 굉장히 아름다운 논리죠. 그래서 레카프텔라치오 교리를 공부를 하면 좋겠어. 여러분들이 설교자는요, 내가 어저께도 교회에 가서 달라스에서 설교학 공부하고 온 목사님들에게 설교는 설교를 배움으로써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였던 사람들이 설교자가 되는 거예요. 예배자였던 사람들이, 그래서 훌륭한 예배자에게서 설교자가 나오는 것이지, 절대로 설교를 연구하고 그런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야. 그래서 최고의 설교학 시간이 신학교에서 언제냐 하면 채플시간이야. 채플 때 무엇이 설교고 무엇이 설교가 아닌가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을 때 거기에서 설교자의 가치나 이러한 것들을 인식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란 말야.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안하고 그 건성으로 자꾸 지적으로 접근해서 하려고 하니까 설교가 잘 안되는 거죠. 보면 설교도 자기가 듣고 꺾어졌던 그 설교를 자기가 재탕할 때 그 설교가 가장 힘이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한창때, 설교집을 많이 읽었어요. 스펄전 설교집 많이 읽었어요. 그러한 설교집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이 도전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한 것도 잘 안 읽으려고 하잖아. 읽어봐야 이것이 지적으로 남는 것이 있을까. 그렇지 않아요. 설교집을 많이 읽어야 해요. 설교집과 전기들을 많이 읽어야 해요. 어려운 신학책만 가지고 씨름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것이 되지 않은,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목사와 설교에서 그런 말을 하잖아요. 신학을 전달하는 최상의 도고가 설교라고 본다. 그리고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은 하나님을 향한 정중한 예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경배의 정신속에서 말씀이 수납되어야지, 강의하는 것처럼 전달되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 다음에, 그 다음 사람.
<본문>
A.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님
교회의 일치를 말함에 있어서 먼저 기억하여 할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가 단지 다툼과 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치는 영적인 일치로서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바르고 온전한 관계를 통하여 수립되는 일치이지, 서로의 이해관계의 일칠글 따라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육적이고 조직적인 일치가 아니라, 영적인 일치이며 유기체적인 일치입니다. 이는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신자 개개인의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써 이루게 되는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일치는 단지 이해관계를 고려한 편의적 사랑의 일치가 아니라 지순의 사랑의 일치이며 그 사랑을 통해 성도의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일치입니다.
B. 바른 관계의 온전함과 일치
이처럼 교회의 일치는 관계의 온전함과 일치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관계의 온전함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두 개는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니죠. 그렇죠? 그렇게 이루어지는 일치에요. 무슨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니까 모든 사람이 그 뜻에 합치하도록 자신이 온전해 질 때, 그러한 일치가 이루어지는데, 그렇게 자기를 포기하고 온전해지도록 가는 그것이 사랑이 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되는 것이죠. 그 다음에
<본문>
그것은 외형적이고 조직적인 일치가 아니라, 영적이고 유기적인 일치이며 사랑의 일치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참된 교회의 일치는 삼위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신자 자신과 다른 지체들의 존재론적인 질서 안에서 수립되는 바른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바른 관계의 일치
첫째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입니다. 교회의 일치는 진실한 참회를 통해 하나님께 용서받은 신자가 다시 사랑으로써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는 신자들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 욕망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내버려둔 채 일치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정말 교회에 필요한 일치가 아닙니다.
<김남준 목사님>
오늘날 보면, <분열된 복음주의>에서도 보는 것과 같이 이게 그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방법들이 그 소위 이야기 하는 에큐메니컬을 중심으로 일어나잖아. 일어나게 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교회가 정말 사랑으로 넘치게 될 때, 그 이루어지는 일치는 정말 놀라워요. 그러한 경건의, 그러한 교회적인 일치라고 하는 것이 다원화, 다원화, 다원적인 사상이 들어오기, 들어오는 것과 맞물려 있지만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뭐냐 하면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참된 회심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영적인 변화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게 될 때, 일치에 대한 기대는 사라지지 않는 거야. 은혜 받으면 될 것이다라는 것과 그러한 경건의 능력이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 시점에 바로 이러한 그 소위 이야기 하는 연합 운동들이, 외적 일치의 연합 운동들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라고 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거죠. 그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 했던 그 일치가 설득력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때만 해도 자기의 회중들이 변화를 받고 새로워가는 그러한 실제적인 삶, 그리고 그때만 해도 굉장히 논리적인 사유를 많이 할 때잖아요. 수도원에서 뭐했겠어요. 수도원에서 그 공부하고, 수도하고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러한 일치들을 상당히 현실적으로 볼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교회도 보면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성도들이 변화하고 회심하면 목회자가 의도했던 대로 교회가 움직여지지만, 그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거죠. 그러면 깨지지 않고 싸우지 않으려면 결국은 진리라는 표준보다는 각자 놓여진 상황이 어떠한 상황인가 하는 것을 서로서로 이해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상대방을 서로 건드리지 않는 것 밖에는 대안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모습으로부터 현저하게 멀어지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누가 그러더라고. 막 투표를 하면서, 내 의견은 이래요, 이래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얘들아 그거 그렇게 하면 안된다. 사회자가 예수님도 의견이 있으면 손을 드세요. 당신도 어짜피 한표에요. 자 그다음 사람, 교회는. 각주 14부터.
<본문>
교회는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일치에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도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둘째로, 사람과의 온전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지체들 간의 끊임없는 용서와 사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신자 각 사람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끊임없이 깨뜨려지고, 자기죽음을 경험하고, 또 그분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이렇게 온전한 관계 속에서 만나고 즐거워하는 그 행복은 끊임없는 용서의 실천과 사랑의 극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교회의 회원인 신자는 이러한 사랑과 헌신으로서 지체들을 세워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제 이게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안 변하잖아. 그리고 인간의 자아는 말이죠. 자기에게 있어서 거의 신적인 존재야.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티끌만한 세상의 욕망이 물질에 대한 욕망이 없어도 그것은 최대의 우상 숭배자가 되는 거야. 그래서 인간이 목숨은 내놔도 자기는 하나님 앞에 깨지기를 원하지 않는 거예요. 의외로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요. 그러한 것들을 내버려 둔채 목회자들에게 맞춰주고, 교회 분위기에 맞춰 주고 하는 식으로 인생을 영위해 나가는 거죠. 그게 결국은 그 본인에게 그러한 삶이라고 하는 것이 경건에 기반을 둔 삶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제 내가 항상 목회의 영광이 회심이라고. 그분이 그러죠. 내가 어제 만난 분이 기숙사 교목을 하시는 분이에요. 그날 회심 목회에 대해서 강의를 하러 가고 나서 자기가 학생들과 대화를 많이 하고서 충격이었다고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충격이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충격이죠.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들이 본질로부터 멀어져 있는가를 보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에 의하면 목회할 때, 여러분들 가까이 와서 잘 맞춰 주고, 여러분들의 수족이 되어 주고 그 다음에 돈도 잘 내고, 여러분들에게 접대를 잘 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잖아. 그렇게 되면 안되는 거죠. 진정한 성경이 이야기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의 일치가 아니잖아. 사람이 깨뜨려지고 변화되어야 하죠. 그래서 목회의 영광은 회심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사역을 하고 있는 현장안에서 작지만 그 회심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해요. 그래서 간증 거리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야 해요. 지금 안생기면 앞으로도 생길 가능성이 없어요. 깊이 그러한 문제들을 놓고 고민을 해야 해요.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여러분들에게 아픈 자극이 될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사역을 이루어 가면서 많은 열매들이 교회 전체의 후원을 받고 있는 거예요. 성도들이 예배에 은혜를 받고, 다른 교역자들이 이렇게 저렇게 나누어서 섬겨 주고, 예를 들면 출판부에서 책 만들어 주고, 이렇게 다 섬기고 그 다음에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래서 여러분들의 목양이 수월해 지고 영혼들이 고분고분 하는 것인데, 여러분들이 이제 목회를 직접 할 때에는 그것을 다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 하면, 부 목사님들은 잘 들어요. 훌륭하게 부 목사 했던 사람들이 훌륭하게 담임 목회하는 것 아니에요.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비오듯이 총알이 쏟아지는 그 곳에서 참모장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던 군인이 사단장을 시켜 주면 그렇게 잘 수행하느냐. 그것은 완전한 별개의 문제에요. 그래서 수시로 자기 자신이 정말 하나님 앞에 빈들에 서서 자기를 봐야 해요. 그래서 전도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생짜배기 사람들을 모아 놓고 심지어 불신자들을 회당에 공회당에 가득 집어 놓고 한번 담대하게 설교해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이 속에서 영혼들이 회심을 하는 역사들이 일어나는가. 그것이에요. 그래서 지금 같은 좋은 것들이 갖추어지지 못하였던 때에도 아우구스티누스 경우 같은 때에는 주교들이 인정하면 곧바로 성직자가 되었거든요. 오히려 그때에 존경 받고 신학적 깊이가 더 깊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요. 목회자들이 더 많이 나오는 거예요. 신학훈련을 조직적으로 안 받았는데. 왜냐 하면 확실히 검증이 되니까. 이 사람이 수도생활을 하면서 정말 애제자인가. 진리에 관하여 목마른 사람인가 그것은 숨길수가 있겠어요? 어떻게 숨길수가 있겠어요? 그러면 그 다음에 공중들에게 예수를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들을 전할 때 표징들이 나타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가. 이 세가지를 보고 성직자를 시키는거야. 훨씬더 열매가 뛰어나요. 그래서 신학을 배우고 코스를 밟는 것 자체가 자기를 은닉하는 과정이에요. 남이 속는 것은 괜찮은데, 자신도 속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야. 그래서 안되는 것인데, 그것을 하니까. 점점 교회를 할 수 없는 사람인데, 교회를 하겠다고 하니까.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지만.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거든.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공동체 가운데 섞여 사는 동안에는 인식을 잘 못해. 그런데 교회를 세운 다음에 그것을 인식 할 때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이거예요. 아, 내가 준비가 안되었구나. 그래서 어떻게해. 이제 와서 일수부퇴지. 안된다 이거야. 그래서 항상 이야기 하는 것이 대담하게 불신자들이 모인 곳에서 한번 피를 토하듯이 그리스도를 전하고 완전 두드려도 안되는 강심장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그 사람들이 변화되는가를 보아야 하는 거예요. 그것이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라 이거예요. 하나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다음 사람.
<본문>
2. 온유함의 일치
교회의 신자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따라서 자신을 온전하게 하고자 하는 유일한 동기는 사랑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이게 진리라는 이유 때문에 주관적으로 이 진리를 거스려 살고자 하는 자기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동기가 있어야 하잖아. 동기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라 이거야. 사랑이야. 그 사랑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 합치시킬 수 있는 놀라운 힘들이 생겨나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회심을 강조하고 하는 것도 그러한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빼어 나올 수 없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런 거야.
엊그제 이어령 씨가 얼마전에 간증집을 썼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썼어요. 읽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어요. 2주 만에 십만부가 팔렸대요. 고맙게도 이어령 교수가 고맙게도 자기 친필싸인을 해서 가지고 왔어요. 거기에 보니까 그러한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낙터가 눈물을 흘리게 안흘리게요. 몽골에 낙타가 있는데, 이 낙타가 아주 못된 낙타들이 있대요. 대부분의 낙타들은 안 그러는데, 새끼를 나가지고는 그냥 버려 버린대요. 젖도 안주고 자기를 귀찮게 하면 용서 안하는 거예요. 이럴 때 이것을 치료하는 사람이 있대요. 어떻게 치료를 하는가 하면, 음악으로 치료를 한 대요. 그래서 그러한 못된 낙타들만 모아 놓고 피리를 불고 음악을 연주해서 그 낙타의 눈에서 눈물이 쭉 흐르면서 지 새끼에게 젖을 먹인대요. 음악치료 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굉장히 신나하는 이야기 일텐데. 짐승도 음악으로 치료가 되는데, 하물며 인간이라면... 결국 뭐냐 하면 인간에게 사랑의 감화가 있을 때 그때에 태도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죄에 대해서 실날하게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들이 심각하게 제고해야 되는 거예요.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죄에 대한 증오, 죄지은 사람들에 대한 그러한 공격이나 이러한 것들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되고, 설교가의 의역심이라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되고, 참된 사랑으로 그들이 나아가는데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그것을 버리지 않고는 참된 사랑으로 갈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목표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다루어야 하는 거예요. 그럴 때에 죄인들이 죄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서도 설교자의 마음 속에서 그 죄에 대한 엄격한 꾸짖음 넘어에서 넘쳐 흐르는 사랑의 초대를 읽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설교자들은 모든 몸으로 설교를 배우고 그리고 설교를 하는 사람이에요. 그 다음.
<본문>
신자는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 때문에 온전함에 이르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접붙여진 신자의 연합은 영적인 것이며, 그리스도께 붙어있으나 자신들의 개별적인 본성을 가진 채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니 신자들의 일치는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조화적으로 이루는 일치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일치는 신자 개개인이 끊임없이 자신의 구주이시며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교만과 욕심을 버리는 자기 깨어짐을 통하여 실현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이제 우리 학교 다닐 때인데, 목사님이 이제 학문은 없으셔. 그런데 학생들에게 뭔가 나는 전혀 아니었는데, 몇 학생들은 굉장히 감동을 받았었는데. 목사님이 자기 교회 초청을 했는데, 학생들이 가서 충격을 받고 온거야. 수요예배 갔는데, 교회가 아직도 마루에서 예배를 드리는 거야. 그때만 해도 마루에서 예배 드리는 교회가 많지 않았거든. 돈이 없는게 아니라 300명이 모였으니까, 꽤 많이 모이는 거였어요. 그런데 마루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거야. 방석 없이. 더 충격적인 것은 남자들은 그래도 봐주는데, 여자들은 까만 치마에다가 하얀 저고리를 입고 오는 거야. 그때가 1985, 1986년도 였는데, 그런 것은 성경적인 일치가 아니야. 그래서 이 기독교의 정신은 어떤 유익을 위해서 통일을 기하는 것은 성경적인 정신이 아니야. 오히려 자유롭게 하는 거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사랑의 증거야. 각각 다른 것이 최대한 발현이 되면서, 그것이 더욱 아름다워 지는 거야. 그래서 누군가에게 강력하게 규제하려고 할 때에 이게 성경의 어디 근거를 두고 있는가 반드시 묻고 그렇지 않는 것은 것은 아니라고 보고, 사람들에게 자유함을 주어야 하는 거야. 그것이 성경의 정신이야. 그것 까만 치마, 하얀 저고리, 쪽진 머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각자 투피스, 원피스 다 입고 나와도 반바지 입고 나와도 서로 깊이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관계와 온전함에 일치를 이루는 것에 마음을 기울여야지 똑같은 옷 입고 그리고 마음은 찢어지고 나뉘는 것이 뭐 교회의 진정한 일치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거야. 여러분들이 그러한 것을 버려야 해요. 그래서 그게 이제 마음 깊이 어떠한 지식적으로 정리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가야 해요. 아름다운 일치. 용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이 되어야 해요. 그 다음 사람.
<본문>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참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도익가 되어 온전함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루어 집니다. 매순간 진리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지체들에게 용서가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의 욕심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사랑을 통해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신자 개개인의 끊임없는 자기 죽음과 자기를 깨뜨려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철저한 희생과 섬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각 성도의 성화의 온전한 정도는 이러한 희생적 사랑으로 통하여 공동체적 차원에서 입증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는 용서와 사랑의 최종적인 열매라고 할 수 있으니 이 일치를 통하여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기관과는 다른 단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렇죠.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겉모양은 다양하고 내면에 있어서는 사랑은 일치를 이루고 해야지. 그런데 거꾸로 겉모양은 제복을 입은 것처럼 통일되고, 그 다음에 속에서는 끊임없이 사랑이 없어서 그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각기 하나님의 질서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미운 거죠. 그래서 질서, 아름다움. 질서의 아름다움은 모든 게 왜 지금 이 방안이 아름답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뭐 다른 공간에 비해서는 아름답잖아요. 천장의 하얀색과 옆에 있는 벽 색깔이 어울리면서 블라인드의 베이지 색 빛깔이 옆에 있는 철문의 틀과 잘 어울리는 거죠. 여기에 만약에 배 선실처럼 동그랗게 창문을 뚫었다면 대게 웃길 거예요. 그죠? 이렇게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직사각형으로 배열을 한 거예요. 에어컨을 동그란 에어컨을 놓을 것이 아니라 각진 에어컨을 놓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원리가 이것이죠. 그것의 아름다움이에요. 똑같이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각각의 아름다움 속에서 사랑의 일치가 있는 것이죠. 오늘 여기까지만 합시다. 질문..? 없어요?
질문) 영혼의 실제에서는 이제 영혼의 본질을 설명한 것이라든지, 영혼의 작용을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왜냐하면 habbit이나 power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움직이게끔 하는 경향이나 힘이니까 그 자체에 대한 설명보다는 작용에 대한 설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것과 지식 자체와 지식 능력, 이러한 기능의 설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김남준 목사님) 그렇게 따지면 아무것도 설명이 안돼요. 왜냐하면 영혼은 영혼은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내가 설명을 해줄께요. 하나님이 계신데, 자,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할 때에는 첫째는 Whoness, 그 다음에는 Whatness. 누구신가 그 다음에 무엇인가. 이것은 존재론적인 질문이고, 이것은 속성적인 질문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잘 들어봐요. 대게 재미있어요. 나만 재미있는지 모르지만.. 이게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해보자 이거예요. 여기에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을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뭐가 설명이 안되는가 하면 우리들이 무엇이라고 할 때 이러한 사각으로 깎아 놓은 돌이 있다고 치자. 이렇게. 그러면 이것을 볼 때에 무엇이냐 할 때에 이 사람 속에 머릿속에 범주가 이렇게 떠오를 것 아니에요. 그게 뭐냐 하면 탁 보는 거야. 여기에서 컴퓨터 파일이 돌아가는 거야. 생물, 띵. 아니요. 그러면 식물, 땡. 아니요 되는 거죠. 식품, 땡 아니요.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루어 지면서 그 다음에 쭉쭉 나가면서 마지막에 뭐냐 하면 무생물이고 딱딱한 돌이다. 그래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것을 보면 침이 안 나오는 거야. 이해가 되죠? 문제는 인간이 무엇을 볼 때에, Whatness 무엇이냐 생각할 때에 그 무엇이냐를 결정하는 틀들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모든 기준이나 틀들이 뭐냐 하면 크기, 모양, 색깔, 부피, 그 다음에 무르고 단단함, 차갑고 따뜻함, 그 다음에 습하고 건조함, 이러한 모든 물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이게 놈이 되는 거라 이거야. 기준이 되는 거라 이거야. 그것에 의하여 whatness를 보는 거야.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볼 때에 하나님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은 판단이 안되는 거야. 그래서 보니까 결국은 바람잡는 이야기처럼 무엇인가라고 이야기 할 때에 추상적인 명사들이 나오면서 무엇임을 규정하게 되잖아. 이해되죠? 이것을 나누는 것을 가리켜서 메타피지컬이라고 부르는 거야. 형이상학이란 말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이분이 무엇인가 설명이 안된다고 보는 거야. 그러면 결국은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이분이 누구이심은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여기에 있는 많은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들이 있다 이거야. 나무도 있고, 해와 달과 별들도 있고, 그 다음에 머리난 아줌마도 있고, 그렇단 말야. 그러면 그러면 하나님이 이들과 각각 관계를 갖으셔요. 관계를 갖을 때에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변화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때 이것들에게 일어나는 모종의 변화가 있을 것 아니야. 그러면 원래 있었던 것과 변화되는 것들 사이를 보면서 이 하나님이 어떠한 성품을 갖으신 것들인가에 대해서 추측이 되는 거야. 무슨 이야기 인지 알지? 예를 들자면 얼음이 있다 이거야. 그런데 깜깜했는데 얼음이 가만히 있더라고. 그런데 해가 떴어.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이것이 슬슬 녹아 내리는 거야. 햇빛은 안보여. 햇빛 자체는 볼 수가 없는 거잖아. 그냥 환하게 되었을 뿐인데, 누가 내려.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태양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지만, 아 저 태양은 뜨겁구나. 열이 펄펄 나는구나. 그래서 태양이 없었을 때는 이것이 얼다가 태양이 나타나니까 다시 물이 되어서 녹아 버리는 구나. 없어져서 도로 얼어버리네 그러면서 태양이 이곳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이 물체와 관계를, 얼음과 관계를 갖는 태양을 보면서 태양의 무엇임을 유추하게 되는 거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특성, 이 자체로서는 파악이 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속성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심플리티따스라고 부르는 거야. 하나님의 단순성이란 말이야. 이러한 하나님의 단순성을 가장 닮은 것이 인간의 영혼이야. 영혼을 이러한 구도를 가지고 볼 때에는 없는 거지. 없는 거지. 그런데 이 영혼이 육체와 관계를 맺는다든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든지 이 땅에 있는 사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들을 보면서 이 영혼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뿐이지, 본질을 이야기 할 때에도 그것은 사물들과 접촉하는 것을 기준으로 본질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이 자체가 무엇이냐고. 설명이 안되죠. 영혼은 물질이 아닌데 어떻게 설명이 되는가 이거예요. 그러면 설명 안되는 것은 다 마찬가지예요. 모든게 다 마찬가지에요. 사랑은 설명이 되겠어요? 사랑은 오래 참는 것. 못된 인간하고 만나는 것 보면서 사랑이 없을 때는 저 자식 못 참았는데, 오래 참게 되네. 사랑에는 이러한 특성이 있는 구나. 발견하게 되는 거야. 그렇게 볼 때에 그래도 이것으로 압축을 한 거야. 조나단 에드워즈는 도덕적인 이러한 것들을 배제한 거야. 이것들이 이제. 이렇게 볼 때에는 사실은 영혼만이 아니라 모든 물질이 돌맹이 자체도 본질적으로는 해빗과 파워로 보는 거죠.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내가 지금 화학 기호는 잘 모르겠는데 돌맹이도 여러 가지 탄소도 있을 것이고, 철도 있을 것이고, 금도 섞였을 것이고 등등 여러 가지가 막 섞여서 되었을 것 아니야. 이러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우연 적인 것이란 말이야. 그러면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창조론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바위를 만드셨을 때, 실제로 이러한 것이 없을 때에 하나님이 형상을 부여하실 때, 이 형상 자체가 이러한 해빗과 파워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물질과 만나면서 그러한 고요한 성질을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는 이것을 본질이라고 이야기 해도 되는 거지. 본질이라고 이야기 해도 되는 거지. 이러한 것들까지 부인한다고 하면 없는 거지. 아무 것도 없다고 봐야지. 자, 또 다른 질문? 질문 없어?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마우신 주님, 오늘도 함께 해주시고, 저희들을 지켜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또 성도들을 세우도록 도와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4-2강
<본문>
Ⅲ.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
여기서 우리가 숙고할 것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먼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도들 간의 일치는 원리적인 일치와 실제적인 일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원리적인 일치나 실제적인 일치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원리적인 일치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그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접붙여진 신자들로서, 함께 몸을 이루고 있는 다른 지체들과 공동체로 존재합니다. 이는 지상에 있을 때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천상에 이른 후에도 계속될 영적인 연합입니다. 이러한 원리적인 일치는 어떠한 때에도 손상되지 않는 일치이니 이는 이 일치의 본질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불변하는 영적 연합에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실제적인 일치는 성도들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이는 신자 개개인이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성화의 진전은 곧 교회의 일치를 촉진합니다. 지상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실제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일치입니다. 이러한 일치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김남준 목사님>
이제 일치를 말할 때, 원리적인 일치, 실재적인 일치라고 나눌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잖아요. 구원얻는다는 것 자체가 공동체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죠? 그래서 이제 큰 그림을 가지고 보면 이러한 것 아니겠어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속에서 신적 작정이 이루어져요. 이 작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미 이 안에서 인간을 창조하죠. 그러면 창조하신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하나의 몸으로 묶고자 이렇게 의도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레카플라치오 교리에서 가르쳐 드렸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에 이 사람들중에 어떠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이미 이렇게 예정되어 있는 것 아니에요.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이후에, 타락한 이후에 결국은 인간이 타락하게 되면 결국은 인간이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다 타락의, 타락한 후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이후에 사람들이 이렇게 계속 타락한 모든 인류들이 이후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속에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죄를 간과하셔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하는 구원 계획도 이렇게 펼쳐 지는 것 아니겠어요, 이렇게? 이렇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구원받을 자들이잖아요. 그러면 무슨 이야기 인가 하면, 이게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면서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러면 결국은 인간이 태어나는 것도 이 신적 작정의 실현이요, 그죠?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구원을 받아 가는 것.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도 결국은 신적 작정을 성취하는 것 아니야. 그렇잖아. 그러면 결국 이미 주어진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몸이 잠재태적으로 주어진 이 몸이, 가능태적으로 주어진 이 몸이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 사람들을 이렇게 이렇게 연합시키시는 이 것이 바로 교회라 이거야. 그렇게 보면, 잘들어봐요. 자 사람이 시간속에서 보기에는 여기에 있는 어떠한 사람이 회개해서 이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회개를 하고 이 사람이 들어간다라고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 들어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이렇게 형성하시려고 영원전부터 계획하셨던 교회의 몸속으로 부름을 받는 거야. 그래서 뭐냐 하면 이러한 중생이 자체가 공동체적인 말하자면 성취하에 있는 거야. 중생 자체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 되죠? 이해 되잖아요. 관점을 그렇게 보면 이해가 되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해서 가게 된다 이거야. 그러면 그렇게 해서 공동체의 몸으로써 부름을 받게 된다. 이렇게. 가게 된다 이거야. 그러면 한번 이렇게 공동체 속으로 이렇게 해서 들어가게 된 사람들은,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을 이루는 거야. 내가 이것을 5월5일에 발표하는 논문을 아주 힘들게 완성을 했어요. 영어로 번역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내가 이야기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오시잖아요. 이 분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던 것은 레카프탈레치오 교리에서 보면 이 필연이에요. 필연. 그래서 이제 아우구스티누스가 너무나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약이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오셔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몸 전체를 치료하시는 거예요. 이 치료의 범위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치료하시는 거잖아요. 이것은 이미 가능태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이 시간속에서 실현되어 가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실현되어 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다면, 이 몸 전체가 결국은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시간을 고려해서도 볼 수 있고 시간을 뛰어 넘어서도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칭의를 이야기 할 때 교리에서 영원에서의 칭의를 개념을 알고 있잖아요. 똑같이 영원 신적 작정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기로 한 자가 있으니까 시간속에서 실현이 되는 거잖아. 그것을 영원에서 칭의라고 이야기 하거든요. 그러면 이것도 마찬가지로 일치를 이러한 점에서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 실재로 교회를 형성하면서 이렇게 교회를 형성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이 지상에 존재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원리적인 일치 말고 원리적 일치 말고 실재적 일치가 필요해요. 이 실재적 일치에 의해서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는 거예요. 그러한 일치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랑이다. 사랑의 일치다. 그러면 이것은 꼭 무엇과 유사하냐 하면,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 할 때, 원리적인 연합과 실재적인 연합으로 나뉘어서 이야기 하잖아요. 실재적인 연합은 무엇을 통해서 와요? 원리적인 연합은 칭의를 통해서 오지만은, 실재적인 일치는 무엇을 통해서 와요? 그렇지.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실재적인 일치를 이루는 거죠. 그래서 지금은 이름을 잊어 버렸는데, 그 청교도, 청교도가 아니지. 이름을 잃어버렸어요.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하면, 누가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냐. 가장 넓게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이다. 그런데 더 좁히면 실재로 영적인 부패에 빠져서 그리스도의 몸 답게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은 제외해야 한다. 실재적으로 그 생명을 누리면서 침체에 빠지지 않고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자신의 삶을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들이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은 이것이 A고, 이것이 B라면, B의 파일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 것인가. 이게 진정으로 교회의 모습을 교회되게 하는 그러한 의미들이다 하는 거예요. 이러한 케파에 대한 담론들을 결국은 어떤 생각을 우리에게 하는가 하면 양적인 교회 성장의 생각들에서 이러한 것들이 좋은 것인가 반성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것이, 이 범위가 확장되어지도록 해야 한다. 거기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아까 이야기 한 이야기들을 염두해 놓은 것이에요.
<본문>
A. 사랑의 질서가 재편됨
교회의 일치는 성도의 사랑의 일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삼위 하나님과 교회와 자신, 그리고 지체들인 다른 성도들 간에 존재하는 존재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데서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존재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데서 이루는 일치이니, 곧 성도의 개개인이 사랑과 순종으로써 그리스도께 합치된 생각과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개인적인 사랑의 일치는 반드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구현되어야 하며, 이를 통하여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장되어 가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은 다음과 같이 논의될 수 있습니다.
1. 개인적으로 : 참회와 믿음을 통하여
첫째로, 개인적으로는 참회와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교회가 참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그 구성원인 신자 개개인이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원리적으로는 이미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한 몸이 되었으나 실제적으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각과 뜻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표에 자신의 존재목표를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참회를 통해 이기적인 자기의 죽음을 경험하여야 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선호하는 질서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악, Evil이라고 하는 그릇된 사랑의 질서를 받아 들이는 거예요. 악문제도 이제 이것이 결국은 뭐냐 하면 악을 똑같이 죄와 똑같이 악을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그 선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악이지만,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한 주관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릇된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악이에요. 그러니까 절대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을 기준으로 볼 때, 절대적으로 악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자, 어떠한 사람이 밤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죽여서 시체를 암매장하고 그의 현금을 강탈했다고 치자 이거야. 그러면 이것은 악한 거야, 아니면 선한거야? 악한거죠. 그런데 그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은 그것을 선하다고 생각을 한 거야.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악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된 선에서 보다 좁은 의미의 선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그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이해되죠? 그러니까 아주 극단적인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동의할 수 있는 악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어떠한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하죠. ‘이 놈의 세상 다 폭발해서 없어져야 해’ 그 사람은 진짜 폭발해서 지구가 반쪽이 나서 그냥 부서져서 없어져 버리는 것이 선이라고 느껴지는 거예요. 어떠한 식으로든 자기사랑의 질서를 받아 들이는 것은 다 악이라 이거예요. 결국 하버드 대학에서도 인간의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 오랫동안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결론은 뭐냐 하면 기독교적인 접근은 아니지만,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장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는한 인간은 어느 가르침을 따르더라도 결국은 행복할 수 없는 거예요.
어느날 포스터모더니즘의 말로는 그러한 것을 보여져요. 나는 이번 논문을 쓰면서 가슴이 많이 찢어졌어요. 사실 이게 우리에게는 기회다. 여러분들이 오늘날의 시대 정신을 따라서 목회를 하려고 하면 피튀기는 전쟁심이 필요해요. 찬양 기자재는 더 좋은 것을 들여야 해요. 훈련도 더 빡세게 해야 되고, 뭐, 그래요. 그런데 미국에서 말이지. 이 놀랍게 젊은이들 속에서 개혁주의의 부흥이 있는 거야. 개혁주의의 부흥이 일어나는 거야.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바지 하는 거야.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산산히 찢어 놨기 때문에 어떠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산히 찢어지고 절대적인 가치를 다 부인해 버리면, 신나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같은 젊은이들도 있거든. 옛날에 나 젊었을 때처럼 나는 무슨 사상, 누구에게든지 종이될 용이가 있는데 Master가 없어. 그리고 뿌리가 뭐냐는게 나의 궁금증이었어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중학교 1학년 말에 사춘기가 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기질속에 뿌리를 찾고자 하는 집요한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 고등학교 애들 한참 시험 공부하는데 나는 왜 살아야 되나, 아침에 눈을 뜨면 학교의 시험공부, 이러한 것들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야, 오늘 하루를 인간으로 살아야 되는가. 그러니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겠어. 맨, 그 당시에는 쓸데없는 책이 보면서 고민을 하는데 말할 상대도 없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그러한 사람들이 나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꽤 있어. 그러니까 그 열정 컨퍼런스나 존파이퍼,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조나단에드워즈 연구. 조나단에드워즈의 부흥은 정말 대단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이러한 곳 까지도 에드워즈 학회가 대 부흥을 이루고 있어요. 그게 아주 기이한 현상이에요. 19세기에 페리밀러 나온 이후로 조나단에드워즈 연구에 부흥이 일어났어요. 그것 말고도 몇 사람이서 개혁주의의 부흥을 미국에서 맞았어요. 그것은 예를 들어 존 맥아더 목사님 교회 같은 경우 뭐, 만명이 넘게 모이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게 자유로운 미국 사람들이 그 유장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거잖아. 그렇게 목회를 하면 불러 와지는 거야. 내가 목회할 때에 옆에 새로운 교회 들어온다고 내가 신경쓰는 것 본적 있습니까? 그러한 것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러한게 부흥이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제대로 가르치면 뿌리를 알려주기 때문이에요. 내가 이야기 하는게 뭐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의,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러한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대로 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텐데 왜 부흥이 안되나. 뭐지? 그쪽 교단하나 있지? 독립교단인가 하나 있잖아. 개혁주의해서 철저히 하는 교단들 있잖아. 5개 교회인가 몇 개 교회 모여서 하는 교회 있잖아.
나는 이제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나눠 주려고 가져왔는데 여러분들은 아직 내 생각을 잘 몰라. 그게 뭐냐 하면 역사상 개혁주의를 재현해서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사람들의 오류가 있어. 오류가. 아주 공통적인 오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시대와 소통하는 다변성과 본질을 고집하는 것 사이에 판단의 혼란이 오는 거야. 그래서 이 글에도 이야기 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하면 이 세상의 문화 그 자체를 인본주의라고 다 보고 그 다음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현상들 그 자체에 대해서 앙심과 반감이라고 품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러면 안된다. 그렇게 하면 그게 그러한 잘못을 크게 저질렀던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올드 프린스턴이야. 역사속에서 내가 개혁주의 흐름속에서 이야기 했잖아. 그때부터 무슨 정신이 생겨났는가 하면, 올바른 개혁주의 신앙이라는 것이 negative한 진술이야. ‘우리는 찬양집회 안한다’ ‘제자훈련 안한다’ 뭐 안한다, 뭐 안한다 그런데 그러한 negative한 것으로서 개혁주의의 하나의 특징으로 자기 자신들이 주장을 하는 거야. 물론 그러한 것도 있겠죠. 그렇지만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하는 거죠. CS루이스가 그렇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뭐냐 하면 이 사람은 그러한 파도를 굉장히 잘 탄거야. 그 사람이 유일한 사람이야. 시도한 사람으로 내가 보기에는. 예를 들면 지금 우리는 굉장히 과학의 시간이야. 조금 다른 곳으로 나갔는데, 언제 나에게 시간을 줘. 내가 한번 교역자들에게 가르쳐 줄게. 우리들이 굉장히 정치한 과학의 시대잖아. SF같은 것 보면, 확하고 파도가 치는데 옛날에는 물을 붓고 그래가지고 막 찍은 거거든, 1950년대 1960대에는. 그런데 지금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잖아. 그런데 영화같은 것 보면 2012 영화의 물이라든지 빙산들이 무너지는 것 같은 거라든지 굉장히 어마어마한 실감이 나잖아. 그게 뭐냐 하면 유체역학이 이용이 되는 거야. 그래서 물이 이렇게 쏟아지지 않냐. 막 이렇게 치잖아. 물방울 하나하나가 하나하나에 유체역학을 이용해서 이것이 어디로 얼마만한 힘으로 튀는지에 대한 방정식이 있어요. 그 방정식의 값을 물방울 하나하나에 대입을 하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요? 그렇게 해서 컴퓨터 그래픽을 때리는 거야. 그러면 그게 실제하고 똑같이 움직이는 거야. 어마어마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거야. 이러한 치열한 과학 시대인데 이상하게 판타지가 유행하는 거야. 반지를 가지고 막 이랬더니 무슨 뭐가 생겼다더라. 그러잖아. 판타지라고 하잖아. 그 판타지가 유행을 하는 거야. 그 판타지에 가공할만한 힘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 아주 선명하게 자라나는 세대에게, 어린아이들에게 선과 악의 대조를 아주 훌륭하게 보여주는 거야. 그런데 사실은 그것을 깨끗하게 보여주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파트가 기독교거든. 그러한 것을 이러한 문화를 왜 저러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이야기 같은 것들이 저렇게 엄청난 인기를 끄는지를 모르고 그까짓 마법 이야기하면서 애들 읽는 것 빼앗아서 던지고 안사주고 그리고 욕을 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거지. 드라마 같은 것도 마찬가지에요. 드라마도 쭉 보면 뜨고 있는 드라마에는 공통적인 문화적인 특징이 있는 거야. 그러한 것들을 목회자가 안목을 가지고 현대문화와 소통할 수 있는 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거야. 이 충고는 여러분들이 20년쯤 흐르고 나면 지금 느끼고 있는 것보다 훨씬더 심각하게 느끼게 될 꺼야. 여러분들이 이러한 코드까지 정확하게 읽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주 구석에 갇혀서 개혁신학을 설교하는 자기만족에 빠져서 추종하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담장을 쌓고 마치 자신들의 교회가 성장하고 소통하지 않는 것은 워낙 옳음을 추구하는 것 때문이라는 그러한 착각,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다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그러한 문제들을 조심해야 하는 거예요.
시대와 소통하는 다변성과 본질을 양보하는 것을 혼돈하는 거죠.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비본질적인 것에는 목숨을 걸고, 그 다음에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주 너그럽게 양보를 하면서 결국에는 교회를 망치는 거야.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해요. 그리고 문화를 깊이 이해해야 하는 거야. 문화자체가 소통하는 수단인 것이기 때문에 깊이 이해를 해야 하는 거야.
음. 97쪽. 그런데 이제 그릇된 질서를 받아 들이는 것인데, 그게 악인데 그러한 그릇된 질서는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 수시로 받아들이라고 유혹이 다가오는 것이거든. 누가 그것에서부터 자유롭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어?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이 세상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거야. 그것이 사실은 보면 교회의 순수성을 헤치고 신앙의 순수성을 헤치는 것이 되지만, 더 넓은 견지에서 그가 구원의 목적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자체가 아주 놀라운 은혜의 수단이 되는 거야.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자기가 홀로 주앞에 살 수 없는 사실을 알고 그분을 끊임없이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죄를 자기 안에 있는 악을 정확하게 보게 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이 되고 주님을 의지할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되는 거지. 그래서 끊임없이 개개인이 참회하고 믿고 이게 결국은 반복되는 회심이겠죠. 회심의 반복이죠. 그 다음사람.
<본문>
a. 참회: 자기 사랑의 질서를 버림
첫째로는, 참회를 통하여 자기 사랑의 질서를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사랑은 구체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물의 질서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사랑의 질서의 동심원 한가운데는 자신에 대한 부당한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진실한 참회는 항상 자기 깨어짐을 동반하여야 합니다.
신자는 그 자기 깨어짐의 경험 안에서 부당한 방식으로 자기를 사랑하려는 옛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죽음의 경험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영혼과 본성 안으로 들어오는 실재화의 경험히며, 이 자기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기죽음은 곧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성취되는 과정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신자의 그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와 자신 사이에 있는 실제적인 연합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자기 자신에 대한 부당한 사랑에 관하여 깨어질 때, 비로소 자신이 설정한 사물들의 질서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참회 안에서 경험되는 자기 깨어짐은 곧 죄에 대한 사랑이 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자 개개인이 이처럼 진실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교회의 일치는 촉진됩니다.
따라서 신자 개개인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의 증진이야말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이처럼 진실한 참회가 늘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는 누구도 자기중심적인 교만과 이기심을 버릴 수 없고, 교회는 분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b. 믿음: 신적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임
둘째로는, 믿음을 통해서 신적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를 회개하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자기 사랑의 질서를 버리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랑은 곧 사랑하는 대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질서를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믿음으로써 자기사랑의 질서를 버리고 하나님이 지정하신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임으로써 교회가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항상 신자들에게 이성적으로 납득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때 신자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비록 자신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다 깨달아 알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토대로, 자신의 부패한 이성의 추론보다 명백한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주어진 계명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수많은 사랑의 질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따라 각각 사람과 사물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지정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개개인의 자기 깨어짐은 공동체적으로 봉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의 깨어짐이 되는 거야. 예수 그리스도는 깨어질 수 없는 분이시지만, 왜, 완전한 머리이시니까. 그 몸들은 완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깨어지는 거죠. 그러한 것들이 집단적으로 깨어지는 것들이 교회에 나오는 각성과 부흥의 역사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적으로 깨뜨려지잖아. 참회하잖아. 이러한 것들이 우리 목회에 있어서 굉장히 약해진 거죠. 옛날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것들을 통합할 수 있는 영적인 권위와 통찰이 있었어요. 그래서 1852년에 미국의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뉴욕에서 일어났던 기도운동들, 열렬한 기도운동들 이러한 것. 그러한 것들이 이제 아주 기회를 적절하게 활용했고, 청교도 역사에서 보면 전염병 같은 것 발생해서 사람들이 죽어가잖아. 이러한 것들을 목회자들이 굉장히 훌륭한 교회전체가 깨뜨려지는 영적인 기회로 활용하였던 거야. 그러한 것들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나님 앞에 공동체적을 회개를 하면서 깨뜨려지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지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야. 한 개개인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깨뜨려지면서 그렇게 하게 되는 것들. 부흥을 보면 부흥이 참 항상 동전의 양면과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영적 각성이에요. 영적 각성이 없는 부흥은 참된 부흥일 가능성이 적어요. 반드시 참된 부흥은 영적인 각성과 함께 다가오는 거죠. 나중에 그 뭐지. 거룩한 부흥을 읽으면서 정리를 해봐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경우는 순종을 지성의 명료성과 깊이 연관을 시켜요. 그 사람에게 물어보면 일단 은혜에서 미끌어져서 이제 잘못살고 있는 사람이 돌아오는 방법이 뭐냐 하면 제일 먼저 순종이라고 봐요. 의지의 순종은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고 이어서 지성을 명료하게 한다는 거야. 그 다음에 말씀을 깨닫고 그 다음에 정서가 정돈되고 의지가 다시 강화되는 이러한 순서가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미끌어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순서예요. 그 다음
<분문>
2. 공동체적으로: 교회의 목적을 받아들임으로
둘째로, 공동체적으로 교회의 존재목적을 받아들임으로써입니다. 공동체적으로 교회가 일치를 이루는 것은 이처럼 개개인의 참회와 믿음을 통하여 가능해집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길입니다. 개인적으로 철저한 자기 깨어짐과 신앙을 통하여 신자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그 목적을 구현하는 데로 정위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 그 목표를 따라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며 믿음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신자들 안에는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있으니, 그 일치 안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평화를 누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은 공동체적으로도 적용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니까 공동체 적으로는 교회의 존재의 목적과 같아지는 거야. 의견이 각각 다를 수가 있잖아. 그런데 교회가 존재하는 존재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성경적인 규정을 놓고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교회의 지체들의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더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 하면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현재에 재현하기 위하여 그래서 힘쓰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정하신 아주 중요한 신앙의 모토다 보는 거죠. 그 목적을 받아들여야 해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면 참으로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내가 참으로 어떠한 신자가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항상 같이 가는 거야. 기차 레일처럼. 그래서 참된 교회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고민할 수 없어요. 그리고 만약에 전자가 없이 후자에 대해서만 고민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결론을 내릴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한사람 한사람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을 그것을 결국 공동체적으로 보자면 온전한 교회가 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질문이 항상 같이 가고 두 개가 항상 묶어져 있는 것이지, 그러한 교회론적인 질문을 제외한 채 내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한 식으로 되는게 아니에요. 오늘 그런 면에서 사고가 너무 교회론이 고려되지 않은 신학적인 사고들이 난무를 해서 오늘날 문제가 되는 거죠.
그 다음에. 넘어가겠어요. 그렇게 해서 공동체적으로 교회 존재의 목적을 받아 들이는데, 100페이지로 넘어가면, 생명의 질서와 사역의 질서를 사모함 그랬잖아요. 이것은 결국 크게 세 가지를 내가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에서 이야기 하면서 세 가지 질서를 이야기 했지. 세 가지 질서가 뭐였어? 유기체적 생명, 그 다음에 섬김 그리고 통치잖아. 여기에서 통치를 제외한 이유는 결국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은혜에 의한 생명의 역사 그 다음에 사역의 질서 이 모든 것들이 이제 통치의 질서는 이 두 지평과는 성질이 다르다고 여겨지는 거죠. 이것은 이제 그릇되게 행동했을 때 제제하고 하는 것이니까, positive한 것들만 예로 든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러한 질서들을 따라서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질서와 교회의 이러한 하나님이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시는 통치의 질서들을 따라서 사역들이 이루어지잖아.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나 이후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속에서 좀 소외된 개념이 바로 사역의 질서야. 질서없이 사역을 했다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서 강력하게 사역해야 할 개념보다는 기독교 세계의 천지에서 비진리와 싸우고 교회를 옹오하고 변증하는 것에 치중하면 되었던 그러한 환경이잖아요. 그래서 놀라운게 종교개혁자들에게서 선교의 흔적이 안나타는 거야. 예외적인 것이 칼빈이 선교를 하죠. 멕시코인가요? 멕시코죠? 아주 획기적인 거야. 칼빈이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을 당시의 세계관을 뛰어넘어주는 것인가 보여주는 거야. 그래서 그러한 생각들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어떠한 생각을 우리들이 해야 되냐 하면, 어쨌든 칼빈이 그러한 선교 공동체를 만들어요. 최근에도 논문이 하나 나왔어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던 거예요. 그러한 것들을 생각을 하면서 개혁신학 교회론 들을 받아 들여야지, 그렇지 않고 단지 교조주의로 가면 그러면 적실성을 잃어버리기 쉬운 거야. 내가 몇몇 그 개혁신학적으로, 개혁신학까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개혁교회 특징을 고집하면서 목회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 걱정스러운게 뭐냐 하면 뭔가 깊이 사상속에서 해석하면서 이것을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추종이에요. 추종. 그래서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그것을 왜 만들어졌는지 아는데,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몰라. 그래서 카피는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다른 상황속에서 해석을 못하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가요? 그런데 목회자는 그렇게 하면 안돼요. 나는 그러한 점에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보고, 지금 내가 체계적으로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가끔 한국에서 고지 곶대로 청교도 목회를 하려고 하는 교회가 잘 안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는 거죠.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하죠. 청교도 목회를 한다고 하면서 교회가 잘되는 교회들은 타협을 많이 해서 그렇게 된 것이고, 자신들은 워낙 알 보수이기 때문에 안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지. 참 어지럽죠.
그 다음에 이제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함 그랬죠. 그 다음 사람 두 번째 단락부터 읽어봐. 교회의 일치는 101페이지부터.
<본문>
b. 질서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함
이러한 두 질서를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사모함으로써 지상 교회의 존재목적을 구현해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마음으로 그 질서를 사모하는 것은 참으로 교회가 존재목적에 이바지하는 데에 자신들의 모든 섬김과 헌신이 쓸모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성도들은 자기를 구원하신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실천하고, 이로써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뿐 아니라 공동체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게 됩니다. 홀로 믿었더라면 도저히 행할 수 없었던 섬김들을 공동체적으로 구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교회는 존재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교회의 일치는 성도들이 바로 이에 필요한 질서를 한 마음으로 사모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이 너무나 자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실 때에 남아있는 연약한 제자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그에 필요한 질서를 사모하였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예고하신바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에 힘쓰며 그 질서를 갈구하였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4)
뿐만 아닙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공동체적으로 세상을 섬기기에 어려운 질서 속으로 들어갈 위협이었습니다. 이 때 그들은 이러한 핍박과 고난 속에서 교회가 교회의 존재목적을 따라 섬기기에 적합한 질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리고 또 그런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과 자원을 공급해 주시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러면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툼이 일어나는데, 왜 일어나느냐. 왜 그러한 다툼이 일어나게 하느냐. 두 가지 원인을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영원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 영원한 것들에 대한 무관심.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나라의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애쓴다고 하기 위해서는 영원한 것들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지 가능한 거예요. 그러한 영원한 것들에 대한 사랑이 없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자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면 도덕주의에 떨어지게 되거나 아니면 이 세상 인간의 행복에 이바지 하는 환경을 조정하는 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번 논문에도 이야기 했는데, 맨 처음 18세기에 경건주의가 일어날 때에는 그래도 굉장히 영적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전부다 복음 운동이 복지사업으로 다 대치되었어요. 그래서 독일에 가면 프랑케 제단이라고 있는데 어마어마하게 커요. 커다란 블록 전체가 프랑케 제단이에요. 어마어마해요. 그러한 복지국가로 가는 모델을 제시했다라고 하는 것에는 굉장히 가치가 있지만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복음의 능력, 복음의 사역들은 사회주의화 되어지는 거죠.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이제 우리의 눈에는 안타깝죠. 그러면 결국 뭐냐 하면 교만과 이기심 때문이다. 자, 그 다음 사람 읽어봐.
<본문>
b. 적극적: 교만과 이기심
둘째로, 적극적인 측면에서입니다. 교회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다투는 적극적인 원인으 교만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원인은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교만이 마음에서 나잖아. 교만이 다른게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더 높이고 그러한 것은 유아들에게 하는 설명이고. 사물의 질서에 대한 자기 판단의 고집 이것이 결국은 교만이에요. 교만. 모든 죄의 뿌리를 지적으로는 모든 죄의 뿌리를 지적으로는 교만, 의지적으로는 자기사랑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사랑과 교만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하나는 지성적 측면을 다른 하나는 의지적 측면을 보여주는 거야. 그래서 죄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자기 사랑이라 말하잖아요. 교만 없이는 자기 사랑에 빠질 수가 없어요. 이해되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잘 모르는 것이고, 내가 가장 사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 자기사랑은 반드시 지적인 교만을 내포한다 이거야. 그 다음
이것이 바로 교만에 대한 형이상학적 정의입니다. 그러나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판단은 그리스도께서 내리는 판단이 최종적인 판단이며, 그것 이외에 어떤 판단도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할 수 없으니 그렇게 되면 그것이 교회 안에서 이데올로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판단에 더 이상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104페이지로 넘어가며, 두 번째 단락 그 다음 사람
<본문>
이러한 교만에 의하여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분쟁과 다툼에 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상대화하고, 그러한 자신의 판단이 그리스도와 성경의 정신에 부합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진리의 판단을 따라 자신을 개혁하여야 합니다. 이로써 교회는 공동체적으로 사랑의 질서를 재편하는데 있어 일치된 방향을 갖게 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인간은 누구든지 부패성이 있으니까 자기사랑에 끌리게 되는 것이거든. 이렇게 강하게.
<본문>
둘째로는 이기심입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게 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의 이익을 사랑하게 될 때 그 교회 안에는 끊임없이 다툼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자의 이기심은 잠시 있을 세상에 있는 것들을 향한 애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한 자기 자신이 부패성에 흘러서 언제든지 자기사랑에 빠지게 되고 교만하고 같이 가는 거거든. 그러한 것들에 철퇴를 가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어 주는 것이 뭐냐 하면 선명한 진리를 확 보여주어서 아, 내 판단이 틀렸구나. 이것이 바로 지성의 각성이고 성령의 놀라운 은혜속에서 아, 나는 추루한 인간이고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다라고 하는 감동을 가져다 주는 것이 은혜야. 그래서 이제 내가 항상 이야기 하지만,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 무슨 시간이라고 그랬어? 성경 읽기라는 거야.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토론할 필요가 없는 명제들을 제공을 받는 거야. 나는 이렇게 믿어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명제들이 주어지는 거야. 그것을 지식이라고 하잖아. 믿음의 규칙과 뭐야? 생활의 교훈. 그것을 제공을 받아요. 그것이 명제야. 그것을 딱 받을 때에 아, 그냥 바케스로 물을 받아 머리에 뿌리는 것처럼 확하면 잡다한 생각 공부하다가 고3때, 연예하는 생각도 나고 놀라갔던 생각도 나다가 바케스에 물을 담아 확 끼얹으면 정신이 퍼뜩 나듯이 그렇게 정신이 퍼뜩 나는 일이 이제 계속 될 때에 그때에 잘 믿고자 하는 성향이 생겨나고 올바르게 살고자 하는 성향이 생겨나는 가운데 그러한 가운데 논리의 틀들이 생겨나는 거야. 그게 바로 신학이 정말 신앙의 신학이 되는 거지. 그런데 이상하게 신학을 할수록 성경으로부터 멀어지니까 그게 문제가 되는 거지. 그러한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이나 개혁파 정통주의 사람들에게 많이 배워야 하는 거야. 기본적으로 그들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Greek과 히브리어 텍스트들을 거의 암기하고 있었어요. 성경전권을 거의. 그러니까 자유 자제로 술술술술 나오는 거야. 그런데다가 70인 번역과 시리아역본까지 막 쏟아져 나오는 거야. 조나단에드워즈를 보면서 기이했던 것이 뭐냐 하면 야, 어떻게 이렇게 신학을 전개할 때, 그 많은 성경 구절 속에서 기가막히게 찾아서 연결을 시킬까. 그것은 성경 전체를 아주 다독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거든. 그러한 거죠. 성경을. 칼빈도 자기의 설교속에서 성경과의 친숙성을 굉장히 강조하죠. 그러한 기준들을 가리켜서 베리따스, 진리라고 하는 거죠.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허위에 흐르기 싫은 삶을 제시받은 진리의 기준에 부합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생겨나는 특징이 되는 거죠. 베룸과 베리따스의 관계에요. 자, 거기 계속 읽어봐봐.
<본문>
삶의 질은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키는 데 있습니다. 생각으로 진리를 찾는 데는 희생이 따르지 않지만, 거기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진실은 자기죽음을 필요로 합니다. 진리를 구하며, 진실에 이르지 아니함이
<김남준 목사님>
그게 굉장히 중요하잖아. 진리를 구하며, 겉으로 라고 해야 하지. 겉으로 구하는 거지. 진실을 겉으로 구하며...계속 읽어봐
<본문>
신자의 허위이자 탐욕이 신자들이 영원한 것을 사모하고 그 영원한 것들이 주는 의미에 관심을 가져야 할 본분은 버리고, 한시적이고 잠세적인 것들에 대한 추루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될 때, 그의 삶이 어떻게 진실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김남준 목사님>
그 다음에 이제 다음 페이지 넘어가서 다음 사람 맨 마지막 단락, 105페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본문>
지금 이 순간도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은 박해하는 세상에 의해 고통 받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지체들에 의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들을 세상에 가르치고 성도들에게 보여주며
<김남준 목사님>
이번에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느 유족이 그랬죠. 차라리 싸우다 죽었으면 원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잖아요. 목회하면서 당하는 대부분의 많은 고난이 복음을 열렬하게 전파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불신 세력과 싸우다가 당하는 고난이라고 하면 참 좋겠어. 대부분의 많은 고난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개념없는 일들 때문에, 혹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이야. 그러면서 이제 피가 마르고 살이 썩고 그러면서 고통 받는 거지. 주님 보실 때 얼마나 어리석겠어요? 그러한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지식의 빛이에요. 그래서 지식의 빛이에요. 그렇게 될 때에 목회자의 길, 목회자 아내의 길, 뭐 교회의 본분 이러한 것들에 대한 명료한 지식을 갖을 때, 다투는 많은 부분들을 해소할 수 있다 이거죠. 자, 그 다음.
<본문>
스스로 그 영원한 것들로 인하여 즐거워해야 할 교회가 신자들의 추루한 욕망 때문에, 잠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충돌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아름다움은 훼손되고 영혼들은 추루해지며 공동체는 일치를 이룰 수 없게 됩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래서 이제 그렇게 되면 이제 삼위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그래서 결국은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전체적으로 요약을 하면, 대부분 신자의 개개인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 다음에 지체들이 서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교회가 진정한 일치를 이룬다 이야기야. 109페이지로 넘어와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까리따스적 사랑의 일치의 본질이 어떠한 거냐 하는 것을. 그 다음 사람. 109페이지 a번 읽어봐. 아르모니아.
<본문>
첫째의 까리따스적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지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가 이루어야 할 까리따스적 일치를 가리켜서 사랑의 하모니라고 불렀습니다. 음악에서 하모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악기가 같은 소리를 냄으로써 음악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악기가 각기 다른 소리를 내지만, 작곡가의 의도를 따라 모든 음들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냅니다. 단지 악기가 다르고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이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조화의 원리 없이 다른 악기를 흉내내려고 하거나 혹은 자기 만의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하모니가 아니라 소음이 될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잘 생각해봐. 우리들이 합창을 한다고 할 때, 유니슨이라고 하잖아. 같이 파트에 상관없이 일치해서 부르잖아. 그것은 하모니 속에 잠깐 나올 때 아름다운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부른다면 그것은 군가지 음악이 아니란 말이야. 굉장히 어떻게 보면 오래 들으면 굉장히 불쾌하고 무섭죠. 그런데 도, 미, 솔.. 각자 각자 자기 부호를 따라 가는 거야. 그런데 그것들이 쫙 어울리는 거야. 그 어울림이 정교하고 많을수록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거야. 그래서 복잡함의 질서가 정도를 더할수록 피조세계에서는 더 아름다운 거야.
예를 들어보면, 책상 하나를 예쁜 것을 사다놔. 예뻐 안예뻐? 예쁘지. 그러면 어떠한 생각이 들어? 아, 바닥을 바꿔야지. 그래서 바닥을 바꾸면 벽이 안되겠다해서 벽지를 갈았어. 그러면 천장을 보면서 안되겠다 천장도 손대야지. 천장 손대면, 여기에 문이 안어울려. 그래서 문을 바꾸면 그러면 의자는 후지잖아 그러면서 바꾸는 거야. 그렇게 되면서 전체에 대한 욕망을 느끼는 그러한 것이 뭐냐 하면 전체의 하모니다.
우리 교회에서 만드는 각양 도안물이나 책을 보면 네모 디자인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 것을 여러분들이 느낄 거예요. 왜냐하면 건물이 네모낳고. 뭐 인쇄물이라도 만들 때에 네모낳게 만듦으로써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거예요. 어떠한 사람이 나보고 네모를 좋아하시냐 그러는데 그럴수도 있겠지만, 만약 교회가 아기자기하게 원형으로 지어졌으면 나는 인쇄물이나 다른 것들 모두 형태를 바꿨을 거야. 그게 달라야 하는 거지. 그 전체적인 질서를 다같이 이룰 때 그 안에서 사람들이 굉장히 즐겁고 편안해 지는 거야.
그래서 내가 항상 옷 잘 입는 법에 대해서도 강의 한 번 해줬잖아. 김찬제 전도사님 같은 경우는 조폭차림이나 다름 없어. 까만 것에 하얀 것 팍 메고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이제 저기 김지태 전도사 같은 경우가 저게 이제 성격 불안을.... 패션 심리학에서 빨간 넥타이는 남자의 성기를 나타내는 거야. 그래서 눈에 별로 안 좋은 거야. 그래서 교회에 올때에는 교회의 색깔과 맞추어서 잘 어울리게 입고 나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거야. 원판이야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그것을 바로 하모니라고 하는 거야. 하모니가 굉장히 멋있죠. 아주 굉장히 멋있잖아요. 어거스트 러쉬 봤잖아요. 어거스트 러쉬. 한참 상호교통 할 때 그 영화가 나왔는데, 그게 재밌는게 뭐냐 하면 남자가 치는 것은 완전히 팝이잖아. 하류 문화의 팝이야. 여자가 첼로를 연주하는 것은 상위 클래스의 클래식이잖아. 두 개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게 기가막히게 조화를 이루잖아. 난 뭐 한번 밖에 안 봤지만, 그게 굉장히 기이하더라고. 어떻게 그렇게 화음을 맞출 수 있었을까. 그래서 결국은 두 개가 하류문화와, 그게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큰거야. 말하자면 우리가 아는 것처럼 고급문화가 따로 있고, 하급문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통을 이루면서 어쩌면 그렇게 두드리면서 길거리에서 기타를 치는데, 그게 공연장에서 치는데, 그게 하이클래식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아주 아름답게 들리잖아. 그러한 것들이 바로 하모니라는 거야. 그래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다를까. 나와는 다를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사람 자체가 다름을 인정하는 거야.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그것이 나에게는 기회가 되고 나에게는 나를 도울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서로로 인하여 서로가 더욱 온전하게 되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의 질서라는 거야. 교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거야. 그래서 나는 같은 사람들끼리 교회에서 모이는 것에 대해서 자꾸 복음적이라는 생각이 안들고, 선교적으로도 그렇게 정죄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지만, 연예인 교회, 법조인 교회, 자기들끼리 모이는 거잖아. 무섭겠어. 변호사 교회. 다시 모여서 변호사 교회, 판사 교회, 검사 교회 모이면 부장판사.. 어지럽죠. 자 그러면 이해되죠. 그러한 하모니를 아름답게 이루게 만드는 그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합창단 연습을 해보면 이러한 것을 많이 깨달아요. 누가 기가막히게 잘해도 소용이 없어요. 자기는 오히려 소리를 죽여주고, 저 사람 소리를 높여주고 막 이러면서 결국은 한 부분으로 이바지해서 전체가 잘 되게 할 때, 그때에 그들 중에 개별적으로 영광받는 사람이 없으면 모두 함께 영광을 받는다 이거야. 그게 사랑의 하모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잘 생각해봐요. 축구나 단체 경기 같은 곳에서 감독들이 제일 신경쓰는 것이 개인선수의 기량보다도 팀 전체의 화합이에요. 이제 그러한 사랑이 있을 때, 그때에 막 굉장히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반주해보고 찬양인도해본 사람들이 느낄 텐데, 막 여러 악기들을 동원하여 찬양인도를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막 밀려오면 신들린 것처럼 반주가 잘 되고, 찬양 인도가 잘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모니에요. 그 다음에 이제. 또 뭐지. 그 다음에 111페이지로 넘어가서 110페이지 쪽으로 가죠. 110페이지 맨 아래 단락부터 읽어봐.
<본문>
그러므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들이 각기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 때문에 그들과 함께 이루는 보편적인 질서 안에서 비로소 자신이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다른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로부터 떨어진 거리도 다르고 별의 크기와 밝기, 그리고 빛깔도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의 광명을 가지고 밤하늘에 빛나니, 달은 달의 광명으로 수많은 별들은 각기 별로서 자신의 광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로서 밤하늘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만약 성도들이 자신들의 차이점들을 토대로 지체들의 우열을 겨루거나 다툼을 일으킨다면,
<김남준 목사님>
한번 생각해봐요. 밤하늘에 별은 없고 달이 그냥 후라이팬에 호떡 얹어 놓은 것처럼 수천개가 달이 떠있다고 생각해봐. 무섭지 않겠어요? 그 다음에.
<본문>
그것은 교통하는 사랑에 전면적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프게 하고 교회에 고통을 줍니다. 그리고 신자가 이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에 고통을 줄 때, 그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없으며 주신 마음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까리따스적인 일치를 통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될 때, 교회는 더 큰 영광을 드러내게 되고 교회의 존재 목적은 보다 더 성숙하게 부연되게 됩니다.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빛 안에 있는 잠재적인 아름다움을 가시적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빛을 더욱 신비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의 까리따스적 일치는 획일화가 아니라 조화이니 이 조화의 성숙이 곧 교회의 성숙이며 교회의 완전함의 성립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것이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있어야 할 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이라는 거야. 그때에 그 다름은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런 것이야.
<본문>
교회의 최고의 섬김
둘째로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참으로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부각되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세 가지 목적인데, 첫째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예배로 나타나죠. 그리고 세상을 위해 존재하고. 선교로 나타나요. 교회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데, 이게 교회 자신의 돌봄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뒷 페이지로 넘어가요. 둘째줄.
<본문>
그러므로 하나님과 세상과 자신을 향한 교회의 최고의 섬김은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신자의 최고의 섬김이 곧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랑과 교제와 일치하면서 세상 사람들이나 집단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삼위일체와의 사랑의 교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참된 행복을 알게 되고, 그러한 교제 안에서 터득하는 지식을 통해 이 세상을 위한 지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혜의 빛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통치를 받으며 행복해하는 신자들의 그리스도교 교회의 일치가 이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선교는 바로 이러한 삼위와의 사랑과 일치를 이 세상에 부여하기 위한 교회의 첫 번째 시도입니다. 선교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통하여 진리를 가르치며 참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그들이 들어가게 하여 지식과 사랑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 곧 교회의 일치를 이루게 하는 길이니 이 일치가 세상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 사랑의 질서로 이루어진 나라이니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일치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비롯된 일치여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것입니다.
5-1강
본문 읽음...
B의 첫째 단락에 보면 인간의 본성은 사람의 영혼의 본성이고, 성령론은 하나님의 영이신데 그 영이 우리 영혼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죽 나오는데 존 오웬이 퓨리마터로기아 성령론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인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이 인간 안에 들어왔다는 개념도 존재론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관계론적 측면으로 봐야 합니다. 특별이 우리가 사경회 때 ‘라카프팔라치오’ 교리를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우리 개개인을 향한 사랑이 결국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분여다’ 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데 우리들이 그것만 생각하면 안 되고 웨스트민스터에서 나온 말인데 존오웬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 개념, 제 1권에서 기독론 안에서 창조론을 다룹니다. 존오웬의 신학은 철저하게 기독론적인 신학입니다. 이번에 발견한 하나님의 형상 문제를 똑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의 분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존오웬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관계론적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관계론적이냐 존재론적이냐 많은 분쟁이 있어왔는데 루터파에서는 관계론적으로 보고 다른 한편에서는 존재론적으로 봅니다.
표준적으로 개혁파에서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것을 완전히 관계론적으로 본다면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본질이 없다라고 말하면 이신론적으로 가거나 또 다른 초월성으로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오웬은 당시의 무슨 문제와 관련이 되냐면 내가 여러분에게 말했던 ‘경건의 비밀’ 그 문제와 관련이 됩니다. 무슨 뜻이냐면 ‘알미니우스’ 주의가 일어나면서 ‘소피니우스’ 주의가 발생하면서 일반도덕과 경건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삶이 혼돈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것을 너무 존재론적으로 생각해버리면 인간 안에 그런 도덕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는 커다란 능력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개발하고 채워 가면 도덕적인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 그것과 그 다음에 영혼이 거듭나고 변화되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거룩한 삶으로 이루어지는 도덕,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혼돈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이 문제와 관련이 되냐면 성도가 구원과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분여 받는 모든 복락, 그 다음에 영혼의 변화를 비롯한 모든 특징들은 결국은 기독론적으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자가 하나님의 형상도 누리고 하나님의 사랑도 받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임 바 되고 성령의 내주도 누리게 되고, 그 외에 많은 언약백성으로서의 분깃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면 안 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중보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예수께서 중보하신다라고 할 때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받아서 개별자들에게 나누어준다라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분여 속에 우리들을 참여하게 하시는 근거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내가 음식을 먹어서 영양분이 생기면 눈이나 코에 영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먹고 몸 자체가 유익을 누리면서 생명의 기관을 타고 우리 몸속에 전파되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분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을 비롯한 개혁파 전통주의자들과 초기의 종교 개혁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구원의 중심이라고 보았던 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이 구원론적인 기독론이라고 말한다면,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이 이 기독론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구원론을 위한 기독론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론을 위한 구원론, 기독론을 위한 교회론, 기독론을 위한 창조론, 기독론을 위한 종말론 이렇게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이 새로 고안해 낸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자신들이 상쇄화 시켜서 발전시켜 냈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게 기독론을 그 모든 신학과 우주론의 중심에 세우려고 했던 교부들의 흔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개혁파전통주의자들이 존 오웬과 같은 사람의 이런 표춘적인 노력들은 자기시대의 발전도 있었겠지만 충분히 고대 교부들의 근거를 가지고 유실된 것들을 다시 정교하게 복원해 나가는 한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 중요한 예가 우리가 지난번에 공부했던 ‘레카피탈로치오’의 교리가 그것입니다. 전체를 장엄하게 기독론중심으로 그러는데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설명을 이런식으로 총체적으로 하는 것들을 유실되어버리니까 굳이 기독론을 그렇게 우주론적으로 모두 펼쳐서 그리스도의 글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존오웬과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Person of Christ'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모든 것들에 대한 문제의 답을 찾는 것입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칼빈은 물론이고 후대의 사람들이 ’솔루스 크리스토스‘를 왜 찾게 되는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구원론 중심적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솔리데오 그로리아‘가 결국은 ’솔루투스 크리스토스‘의 구현입니다. 그래서 롬 11장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느니라‘ 그것이 결국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모든 세계의 학문적인 것들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운명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기의 교회의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분여를 받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방황하던 인간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다가 그리스도예수를 만나서 기쁨의 삶을 살고 그것이 감사해 무릎을 꿇고 봉사를 해서 이것을 하나님께 올린다고 생각하지만 존 오웬 같은 경우는 그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께 올려지기에 적합할 정도로 순결한 섬김이나 심지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까리따스의 사랑조차도 하나님께 올려지기에 적합한 정도로 훌륭한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그리스도예수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께 올려 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로 올려지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그렇게 올려지고 내려지고 하면서 피조물은 그 모든 선악 간에 그리스도를 의존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절대의존의 운명 아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맨 처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든 인간들이 미처 인간들조차도 깨닫지 못했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했던 인간이 타락하자 그리스도의 중보를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가득한다고 하는 의미 자체가 주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투스 크리스투스’는 영어로 말하자면 ‘Hole Chris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체적인 그리스도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설명이 안 되지만 교회에 몸이 있는데 현실교회에는 불신자도 섞여있는데 그것을 엄밀히 구별해 내는 일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완벽하게 구별해내는 것이 불가능하고 설령 그것을 구별해 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 안에 안 믿는 사람이 있다고 칠 때,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한 형제로서 사랑하고 돌보고 해야지 그것을 구별해내서 차별대우한다는 것을 옳은 일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결국은 교회의 참된 모든 구성요소들이 아닌 사람들조차도 사랑의 원리로서 이들을 대하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칼빈 같은 사람들이 이런 이유를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형상이 잔존해 있는 것이다라는 것에서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본문 읽음...
여기에서는 연합의 교리를 이야기 하는데 신자의 중생과 회심은 시간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당신의 영원한 계획들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 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맨 처음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하나님 안에는 이후 종말까지 영원히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에 대한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창조뿐만 아니라 타락, 타락 후에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저항하고 멸망 받을 사람들에 대한 지식도 있었을 것이고, 구원받을 사람들에 대한 지식도 있었을 것이고, 그 지식이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배제된 지식이라면 사실은 피조물에 의해 끌려 다니시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의지도 있고,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있는 것들이 구체화되어가는 과정이 역사의 전개 과정이고, 구속사의 전개과정이고, 그래서 구속사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그리스도의 몸을 작정하신 그대로 완성하여 가시는데 하나님이 당신의 작정하신 교회를 완성 해 가시는 완성의 방법이 개량적 완전성과 성질적 완전성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개량적 완전성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의 수를 채우시는 것이고, 성질적 완전성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계속 거룩하게 성화시키셔서 당신이 의도하셨던 그 표준으로 가게 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신자의 성화가 이 세상에서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교회의 완전하게 거룩한 상태도 그것으로 종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 모든 것들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실제적인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이 그를 중생시키시고 회심시키시는 일로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는 것은 개개인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이 ‘하나님에게는 자녀만 있지 손자는 없다’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라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아들만 낳으시지 딸도 없다. 아들만이 상속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긴 것입니다. 희랍어에 ‘테크논’이란 말이 있고 ‘피오스’란 말이 있습니다. ‘테크논’은그냥 ‘얼라’입니다. ‘피오스’란 말은 법적 상속권이 있는 아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피오스’로 불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손주가 아니라 자식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중생하고 회심하는 과정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예수께 접붙여집니다. 사람이 누구를 통해서 접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구원론 속에서 교회가 개입이 되거나, 또 다른 성인들의 공독이 매개가 되거나 하는 것들은 다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그리스도의 생명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원리적으로는 거듭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예수의 몸에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그 연합은 중생과 함께 붙어지는 연합이지만 회심은 그것을 느끼는 것이고 실제적인 연합은 사랑을 통해서 증진되기도 하고 후퇴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의 역할을 못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누구냐 라고 할 때에 원리적으로는 구원받은 사람들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들도 사실은 실천적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몸답게 못 살기 때문에 제외된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눈이 부어서 고름이 줄줄 흐르면 눈의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처럼 그렇습니다.
P120부터 본문 읽음...
이런 종류의 유비가 나올 때에는 전체적으로 취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라는 설교를 하는데 거기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뜻은 빛은 어두움을 비추는 것이고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인데 그것 하나만 가지고 집중해야 되는데 소금의 모든 것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 안 됩니다. 본문을 읽고 점핑을 하면 성경은 사라지고 소금만 가지고 설교를 하면 설교가 끝이 안 납니다. ‘소금은 물에 잘 녹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가서 티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국에다 소금을 넣어보십시오 소금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풀어져서 스며듭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항상 유비가 나오면 유비가 의도했던 대로 생각을 해야지 설명이 되는 것이지 다른 방면으로 의도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머리로 계신데 모든 분여들을 유통하게 하시는데 이 역할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처음부터 기독론적일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론적이어야 합니다. 존오웬은 이것을 삼위일체까지 끌고 갑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성부, 성자, 성령이 있는데 이 교통이 성령이다 라고 하는 것은 새 이야기가 아니고 이미 존오웬에 의해서 설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이 바로 이 교통의 본질이고 그것이 또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구속의 과정 속에서 똑 같이 성부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라고 하는 창조의 모든 이 구도들이 삼위의 구도가 구속사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섭리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들이 성령 충만 해야 할 당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 질 때에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분여가 풍부해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충만하게 누릴 뿐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통해서 용서하고, 나누어주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서 이 모든 사람들이 구속을 통해서 똑 같이 우리의 모든 육적인 일들과 영적인 모든 것들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본문 읽음.... 신자와 신자의 연합...
그런 진리의 통일성이 사랑에 의해서 완성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콘코르디아’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치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일치라고 하는 것이 획일화된 일치가 아니라 마치 음악이 화음을 이루듯이 다른 것들이 그대로 인정되는 가운데 그 다른 것들이 아름다운 하모니, 연극에서 말하면 앙상블을 이루어서 개개의 모든 것들이 통일을 이루면서 일치를 드러내는 그런 군대 적이고 군국주의적인 통일이 아니라, 그런 하모니를 이루면서 사랑으로 그에게 있는 것 때문에 내가 없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있는 것에 이바지하고, 나의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의 없는 것 때문에 유익하게 빛나는 그런 종류의 하모니를 이루어서 그것들이 높낮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신 은혜와 자원들이 교통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힘이 세면 무거운 것을 들 때 누구를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들면 되니까...
만약에 내가 영어를 잘한다면 그것을 도움을 받기 위해서 누구를 찾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요리를 잘한다면 내가 하면 되지 누구를 찾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고 사람마다 각각 자연적으로든지 혹은 신령적으로든지 다른 은사들을 각기 주셔서 서로를 보완하고 의지하게 하심으로서, 교회 속에서 서로가 서로 다른 것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일치와 조화를 이루어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면서 각자에게 은혜를 주실 때 자기가 가진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합창단 했던 경험을 보시면 혼자 아무리 잘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뭐냐면 소프라노 베이스 테너 베이스가 있으면 목표는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아주 큰 소리로 잘한다면 잘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한 사람이 잘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소리만 난다면 합창에서는 선생님이 그 사람에게 소리를 낮추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모니를 전체적으로 잘 이루어서 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묻히고 우리 전체의 하모니가 드러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하모니를 이루게 되는데 그런 하모니적인 일치가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통일성입니다. 그 기준이 진리와 성령을 통해서 이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화두가 진리와 성령, 지식과 사랑, 은혜와 지식, 이런 것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도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구속의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지식과 은혜의 형태로, 성령과 진리의 형태로 수없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드러남 자체가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나타남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읽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치하시는데 결국은 은혜로서 통치하십니다. 무슨 뜻이냐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지체들을 징계하실 때조차도 사실 그들을 파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치시고 일깨우셔서 당신의 은혜로 돌아가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실질적으로 어느 교회는 망하는 교회도 있잖습니까?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전도하던 교회도 망한 교회가 많잖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보편적인 교회들을 보십시오. 결국은 때로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가 있고 때로는 생명을 거두실 때가 있어도 결국은 그것을 교회론 적으로,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도 당신의 은혜로서 당신의 교회를 부양하신다라고 봐야 됩니다. 사실은 은혜로서, 징계로서 나뉘어지지만 징계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구분이 될 뿐이지 완벽하게 나뉘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본문읽음...
이런 것들을 목회 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설명 하냐면 공동체 적으로 우리들이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 때 나타나는 어떤 기도의 능력이나 열기 이런 것들은 개개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왔을 때 그런 기도의 은혜, 성결한 정신, 이런 것들의 총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공동체적으로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할 때 하나님이 그 교회에 참된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적인 갈망이 로이드 존슨의 정의에 의하면 부흥은 사실 집단적인 것입니다. 그 분은 그것을 성령세례로 풀고 그 다음에 성령세례를 집단적으로 받는 것을 부흥이라고 본 것입니다. 성령세례의 개념에 대해서는 각자 차이가 있겠지만 부흥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교회가 한 몸인 것처럼 공동체가 간절히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할 때 하나님이 그 몸 위에 충만한 성령을 부으셔서 그들에게 부흥을 주신 것입니다. 그 원리가 제일 처음에 나온 것이 오순절에 사도들과 제자들이 주님 앞에 모여서 기도할 때 ‘Single heart' 여러 사람인데 하나의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린 것입니다. 그 때에 그 몸 전체가 하나의 마음을 이루면서 주 앞에 간구할 때 주님이 그리스도의 한 몸인 그 교회에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는데 그것이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부어지는 거룩한 부흥입니다. 그런 부흥의 핵심은 사실 은사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의 영광, 아름다운 구속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적인 아름다움, 이런 것들이 지상에 부어지고 그것들이 정돈되고 그것들이 주님을 위한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신 뜻을 따라 살게 하는 놀라운 능력의 충만함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개인이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진리를 통해서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쏟아 부을 때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충만하게 채우시는데 교회가 영적으로 그렇게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본문 읽음...
여기에서는 성화론에서 배운 것처럼 원리적인 연합은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항상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밑으로 내려가면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적인 관계 때문에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은 확고하고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관계를 맺으시고 그 관계 안에서 특별한 영적 은총을 누리게 하신 것이 그리스도를 교회 안에 항상 거하시게 하신 하나님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실제적인 연합인데 실제적인 연합은 교회의 사랑 안에서 연합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공동체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그 때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것을 교회론 적으로 볼 때 실제적인 연합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개인의 신자 안에 실제적인 연합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통해서 연합을 느끼게 되고 본질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이런 실제적인 연합이 강화될수록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을 자신들이 정동 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담대함과 여유, 그 다음에 희생,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이런 것들을 예수 죽임을 짊어질 수 있는 그런 고백 같은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연합을 누릴 때 두 가지로 나타나게 되는데 첫째는 그리스도를 사랑함,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순종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읽음...
질문.
모두라고 하는 그 부분에 있어서 온전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교회 등장 그 중에서도 불신자가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회에 들어왔는데 온전한 신앙 고백 없이 회심의 증거도 없이 교회 공동체에 있는 그 영혼들까지 포함하는지?
- 토투스 크리스토스교리가 생겼을 때 교회의 문맥을 고려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 때에는 입으로 하는 완전한 고백이 없이는 교회의 회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세례를 받으려면 상당기간동안 신입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문맥을 고려해본다면 외형적으로라도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신앙을 고백하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의 문맥에서는 적용을 달리합니다. 그런 고백을 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달리 봐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세례를 받든지 말든지 놔두는 것은 교회가 매우 잘못하는 것입니다.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분명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 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6개월이고 1년을 보면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게 하고, 만약에 교회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들에게 신앙의 엄중성을 진지하게 일깨워서 구원과 하나님의 백성 됨에 대한 의식이 없이 교회에 계속 출석하지 못하도록 복음을 도전을 할 때에 그 사람들이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재보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때까지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이 내게 있어서...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넓게는 선교 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토투스크리스투스의 교리 자체의 목적이 엄격하게 말하면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리 때문에 이미 교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구획을 짓고 나누어서 너희들의 사랑을 제한하거나 차별하지 말아라 그것을 위해서 토투스크리스투스의 교리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교회의 구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래의 지체들이라는 마음으로 봐야 합니다.
5-2강
김남준 목사님 : 135 페이지. 양목사부터 읽어 보세요.
양연식 목사 : 가견적 교회의 경험.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신자들에 의하여 가시적으로 나타났지만 그리스도는 보이시는 분이 아니시니 그렇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으로 계실 때에는 사도들에게는 정반대였습니다. 사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관하여 눈에 보이는 경험은 다음과 같이.
김남준 목사님 : 사도들 시대에는 예수님 살아계셨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가시적으로 보이고 교회는 아직 안 보이는 거에요. 그래서 헤드 신 바디 빌리브드(Head seen body believed) 그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보이고 반면에 그의 몸인 교회는 믿어져야 했던 반면에 우리들의 시대에 와서는 정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안보이시잖아요. 그래서 정반대가 되어서 헤드 빌리브드. 머리는 믿어지고 바디 신(Head believed body seen) 몸은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의 아름다움의 극치는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어제도 에베소서를 묵상하면서 굉장히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데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제가 읽어볼게요. 3절 그다음에 5절. 5절을 한번 보죠.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게 뭐냐 하면 4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비밀’ 이거든요.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그리고 이제 나오잖아요. 9절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였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지난번에 레까피텔라치오의 교리를 하면서 지상 세계에서의 구속사의 펼침이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들의 지식을 더한다는 이야기했죠. 그러니까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들도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 그런데 그 펼쳐짐이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을 아는 영광스런 지식이 증진되는 것도 위에서 아래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역사의 전개를 따라서 그게 이루어진다 이거에요.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지식의 발전이 이루어져요. 그게. 그러니까 구속사가 종결된 다음에도 이거는 우리가 유추해보는 건데 구속사가 종결된 다음에도 천상세계에서 그 지식의 증진이 지상세계에서의 그 가시적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의 펼쳐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라고 보는 거예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관계가 되는 거죠. 그래서 지상에 있는 놀라운 구속 사역의 전개야 말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사랑과 지혜가 시간 세계 안에서 펼쳐지는 거예요. 그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천상에 있는 천사들 그리고 성도들도 이 땅에 있을 때에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지식들이 증진되고 그래서 거기에서 그래서 거기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하나님의 존재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엑기스가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첫째 자연세계 속에 담겨있쟎아요. 그 다음에 이게 뭐냐 하면 성경계시 속에 담겨 있어요. 그래서 자연세계 속에 남아있는 것들은 포괄적이고 보편적이지만 성경계시는 말하자면 이것의 에센스에요. 엑기스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게. 그러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이 핵심을 이루는 거거든. 이게 심미라면 이 심미를 보여주는 말하자면 중요한 통로 이 렌즈 같은 것들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탁월성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사경회때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에 대해 공부했잖아요. 그러한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이르게 된 거에요.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에서 읽은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 특별히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혜 이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셔요. 이 세계는 천상 그 다음에 지상세계를 창조하셔요. 그러면 창조하신 두 세계가 이렇게 천상과 지상 두 세계가 있다 이거에요. 그러면 여기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도 결국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세계를 통해서 투영되어서 하나님 사랑이 드러나는 거 아니에요? 이건 영원 속에 계신 하나님이시니까 사실 인간에 의해 파악이 안 된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투영하셔서 그래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세계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세계는 피조물인 인간이 이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자신이 또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당신 자신을 감상하시는 거예요. 이게 세계의 존재의 이유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천상세계와 지상세계에서 여기에 이렇게 자연의 세계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결국은 이 지상세계 안에서는 자연을 통해서 그리고 그다음에 인간과 이 모든 창조를 통해서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이제 창조와 계시는 아주 밀접하게 관련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창조의 세계 자연세계와 성경계시가 있는데 타락한 다음에는 이 자연계시도 부패하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도 부패하는 거예요. 계시를 전달해주는 자연이 부패하고 그다음에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도 부패하는 거예요. 그러한 인간들에게 치유책으로 주신 것이 성경계시라는 말이에요. 요걸 성경계시라고 그러죠. 성경계시의 핵심 코아가 뭐냐 하면 구속이란 말이에요. 구속. 그래서 여기에서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 구속의 역사가 전개가 되잖아요. 구속전개. 그러면 구속을 전개하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결국 하나님이 한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인류를 이렇게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그 고백 이런 고백 속에서 모든 인류를 하나로 묶으시려고 했던 거죠. 하나의 몸으로 창조하신 거예요. 이렇게 창조하시려고 했는데 타락하잖아요. 타락해서 결국은 이렇게. 이것은 말하자면 구원받은 백성들의 무리가 되는 거죠. 이거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무리가 되는 거죠. 그죠. 그러면 구속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멸망할 인간들 중에서 구원하기로 작정된 영원한 하나님의 지혜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속해 나가시는 전개과정이 구원사쟎아. 이것을 확정지어서 구별해서 영원한 멸망에 처할 사람들과 그 다음에 영원한 말하자면 구속에 이를 사람들을 구별해내는 과정들이 시간과 공간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말이에요. 그게 구속사란 말이에요. 구속의 역사. 그러면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지혜가 탁월하게 나타나는 거예요. 이 전개과정이 보여지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여기 이렇게 오시는 거예요. 이러한 전개가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구속 전개가. 여기에서 전개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아주 찬란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이게 펼쳐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속성과 그 다음에 속성의 시행방식이 전개가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는 거예요. 이렇게. 그것이 결국은 자기들이 뵈옵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돼요? 미(美)에 대한 깊은 인식이 결과가 뭐죠. 사랑이라고 그랬잖아. 사랑. 사랑은 계속 증진되는 거죠. 그 전개과정을 보는 거죠. 주욱. 그 전개과정을.
그러니까 인간의 죄라고 하는 그것이 에드워즈가 이 문제를 아주 잘 설명을 했어요. 죄가 들어온 것이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커다란 작정 속에서 보면 인간이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이 속성, 이 창조하신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를 가지시면서 당신 자신의 속성 사랑뿐만이 아니야. 사랑이 우선 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사랑뿐만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와 자비와 신실하심과 이런 모든 것들 있잖아. 신실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결국은 약속에 대해 충실하신 건데 약속이란 것이 결국은 우리들이 그 약속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은 결국은 우리들이 타락된 후에 약속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거잖아. 그런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들이 찬란하게 들어올 준비를 인간이 죄가 마련해 준거야. 그래서 인간은 죄를 범하였고 사단은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기 위하여 인간을 유혹했지만 그것들이 성공하였을 때 오히려 역으로 하나님은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인간에게 보여줄 수 없었을 탁월한 계시를 누리게 하신 거죠. 그래서 이제 이런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받는 유익이 뭐냐 하면 첫째는 뭐냐 하면 우선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이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 이 속성의 전개 방식이 아주 탁월하게 전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렇게 탁월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을 탁월하게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에요. 그래서 이제 대부분의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어도 예수 그리스도는 오셨어야 된다 이렇게 보거든요. 아마 내가 레까피텔라치오 교리에서 설명을 했을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셨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인간이 타락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시어서 이 세상에 오셨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이 창조하셔서 구원하시는 이 모든 인간들을 위한 하나의 가장 아름다운, 인간들이 이렇게 있다면 말하자면 여기 원뿔과 같은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인간의 모본을 보여 주는 거죠. 타락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탁월성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비교할 수가 없잖아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이것이 더 탁월한 목적을 가지고 보여지는 거에요. 더 탁월한 목적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구속이에요. 구속.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이러한 구속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죄인의 심령 가운데 있는 초자연적 특성 이게 에드워즈가 강조하는 건데 초자연적 특성. 자 어떤 걸까요? 예를 들자면 리차드 십스도 얘기했지만 하나님 앞에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는 것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일어날 수 없었을 거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마음이 확 녹아내리는 이러한 경험들은 항상 죄와 타락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신자가 경험하는 초자연적인 특성, 마음 안에서,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경험 그런 건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상상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인간에게도 죄에 시달리고 많은 구원의 전개 과정에서 인간이 고난을 받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 때문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게 한다는 면에서 결국은 전체적으로 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목적을 더욱 찬란하게 성취하시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에드워즈가 자신의 전집에서 보면 베너 오브 트루쓰 1번이야.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라는 그런 종류의 설교가 있어요. 거기에서 이 문제를 아주 상세하게 다뤄요. 그런데 아주 굉장히 탁월해요. 특히 초자연적 특성에 대해서는 리차드 십스가 상세하게 다뤘는데. 그런 경험은 아주 굉장히 복된 것이죠. 그런데 사실 우리들이 자기 깨어짐 속에서 누리는 깊은 녹아내리는 마음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 속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랑 이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죄의 덕분이에요. 죄의 덕분에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느끼고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들이 이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맨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셨을 때에는 사도들이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는데 이후에 이루어질 교회의 모습은 아직까지 불확실한거에요.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교회는 아담의 타락 직후부터 존재하거든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아담은 선택자와 불택자의 공통 분모이긴 하지만 그러나 칼빈도 아담은 구원받았다고 확신하쟎아요.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 구속과 관련해 주어진 때부터 결국은 교회는 있었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이것들이 전개가 되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시는 거에요. 그렇지만 이게 불분명한 형태로 있어서 결국은 고유한 의미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로 나타나는 거거든요. 그것이 성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에요. 성령이 오셔서 다스리시는 시대가 되면서 교회는 실질적으로 나타나서 이 두 개가 교체가 되는 거에요. 교회가 이렇게 되고 그 다음에 여기는 이렇게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는 신(seen) 되고 이것은 빌리브드(believed) 됐는데 이제는 반대로 이것은 신(seen)되고 이것은 빌리브드(believed) 되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바라보게 되는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거꾸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교회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통로가 되었고 이제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통로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가 교회다워져야 할 이유, 더 순전하고 올바르게 되어져야 할 이유 그 다음에 교회로서의 목적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그 기준 이것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정확하게 보여주느냐 그거에 달린 거죠. 그래서 선포 그 다음에 선포와 어울리는 삶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그래서 그리스도를 올바로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그게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이거죠. 그리고 이걸 통해서 결국은 더 멀리 나가면 신지(神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 내려보내시는 거죠. 여기에 구원이 있는 거에요.
낭독자 :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관하여 눈에 보이는 교회의 경험은 다음과 같이 시기에 따라 구분됩니다. 즉 사도들의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눈으로 뵈올 수 있었으나 그의 몸인 교회는 아직 세워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믿음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통하여 미래에 세워질 교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지상생애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나누신 교제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선택하시되 당신을 위해 일할 도구들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세우셨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는 명백히 열두 사도들을 세우신 것이 당신과의 특별한 교제에로의 선택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는 교회 설립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지상생애를 통하여 교회의 머리되실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일루 교회와 삼위가 함께 누릴 사랑의 교통, 그리고 지체들 안에서 누리게 될 사랑의 교통의 실재를 몸소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이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직 형성되지 않았으나 곧 세워질 교회를 믿음으로 바라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 그 다음
낭독자2 “ 2. 우리들 :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봄.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비로소 그리스도를 봅니다. 즉, 교회는 우리의 눈에 보이며, 또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으나 이 교회를 통하여 믿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경험은 사도들의 경험과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교회를 통하여서만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이는 몸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머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에 속한 지체이나 동시에 그 자신도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교회의 한 몸의 지체인 동시에 또한 그 몸을 봄으로써 그리스도를 더욱 잘 믿게 됩니다. 신자가 교회의 일부이면서도 스스로 그 몸을 바라보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아닌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습니까.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요, 머리는 보이지 아니하고 믿어지는 것이니 사람들이 그리스도는 볼 줄 몰라도 교회는 볼 줄 압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 지체들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름답고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님 : 그러나 이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교회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쁘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야. 왜냐하면, 자, 생각해보세요. 아름답다, 그 다음에 선하다 그 다음에 참되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교회를 통해서 이렇게 볼 때에 그러면 이렇게 본다 이거야. 그러면 이건 뭐와 관련이 있냐하면 이 사람 속에 있는 판단의 기준과 관련이 되잖아.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의 진에 대한 선에 대한 미에 대한 각각의 판단의 기준이 있잖아요. 그죠. 그러면 무슨 얘기냐 하면 이게 성경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신적인 기원을 가진 것으로서 분명하게 기준에 의해서 이것이 A, B, C라고 하면 이 사람 속에도 A. B. C와 어울릴 만한 것이 있어야지만 이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일 때 ‘아 이것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렇게 판단을 하쟎아.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것이 다른 거예요. 이것이. 무슨 얘긴지 알죠? 다른 거라 이거야. 판단의 기준이 다르다 이거야. 이렇게. 그럴 경우에는 참된 것을 보여주어도 그것을 참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잖아. 만약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었을 때 사람들이 깊이 동의하면서 만약에 그것이 아름답다고 여겨질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복음을 전할 때 싫어하는 사람이 없어야 되잖아.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는 성경계시이고 성경계시의 엑기스는 복음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잖아. 그런 차이가 존재하는 거야.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말했듯이 교회가 이렇게 판단할 때에 이 사람들이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애쓰는 교회가 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이거야. 아주 쉽게 얘기하면 예수님께서 ‘너희의 착한 행실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할 때에 그것은 하나의 결과이지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이거야. 그러니까 교회의 아름다움은 충실히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여기에 진과 미와 선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살려고 하면 그것이 이 사람들에게 효과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거지. 그게 결국은 거룩함이야. 거룩함. 거룩함의 효과란 말이야. 효과. 그런 거룩함의 효과가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거야.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감격하고 기뻐하고 그럼 되는 거야. 그런데 사상과 생각이 틀려서 그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것은 할 수 없는 거지. 그것은 그 사람들의 처지고. 그래서 목적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사람들에게 그 영광이 인정되는 것 이게(전자) 원인이라면 이것은(후자) 결과라 이거죠. 그러니까 이 자체가(후자)가 목적이 될 수 없다 이거죠. 그래서 이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교회에는 미담을 만들어내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아름다운 일화들을 만들어 내고 감동을 주고 그런 목적으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얘기가 이거죠. 그래서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자 그 다음.
낭독자3 : 3.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자신. 이러한 교리적 사실로부터 우리는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합당한 존재로 나타나기를 힘써야 할 의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자기 자신의 지체들과 또한 이 세상에 대하여 보여주어야 할 자신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담을 조성하고,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회개혁을 위한 도덕적 매개체가 아닙니다. 혹시 교회를 통하여 그런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회가 참으로 교회된 결과이지, 그것이 목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 개개인이 그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거룩해지고자 할 때, 그의 삶이 도덕적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도덕적인 삶은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의 열매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는 그 열매를 위하여 애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하여 힘쓴 것이니, 그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분께 일치되는 존재의양식과 삶을 추구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복음적인 거룩함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거룩해져 가는 본성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므로 그 거룩함을 이루었다 하는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 그러니까 만약에 복음적 거룩함으로서의 열매가 도덕적인 삶인데 그걸 통하지 않고 바로 도덕적인 삶을 겨냥하게 될 때 수많은 자기의가 생겨나게 되는 거야. 그래서 거꾸로 오히려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거예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이유라 이거에요. 자, 그 다음. 그 다음 사람.
낭독자4. : 까리따스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줌 . 첫째로, 교회는 까리따스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까리따스는 교통하는 사랑으로서.
김남준 목사님 : 그래서 이제 내가 소위.. 아모르 소끼아쓰라고 하쟎아요. 카톨릭에서 사회적 사랑이라고 번역하는데 나는 그걸 교통애라고 보는 거죠. 왜냐면 까리따스의 특성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서 오는 사랑이거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다음에 이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가게 되는 거야.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나요.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사랑하게 될 때 이런 사랑의 아가페 적인 사랑의 특성을 본받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들을 교통애라고 부르는 거죠. 이에 비해서 아모르 쁘라비뚜스. 사적 사랑이라고 그러죠. 그런 사랑은 뭐냐면 나는 단절애라고 부르는 거죠. 단절애. 쁘라비뚜스. 사적인 사랑. 사애라고 많이 번역을 해. 이건 뭐냐 하면 궁극적으로 이렇게 자기 자신이 이렇게 속해서 그래서 자기 자신이 이렇게 잊혀지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의 순환 속에 자기 자신을 두는 거야. 그래서 자기 자신도 이 사랑을 흘러가게 하는 한 통로가 되게 하는 거야. 이게 사실은 교통애의 특성이야. 하나님의 자기회귀적인 위대한 사랑 속에 자기 자신을 한 통로가 되게끔 그냥. 그러니까 자기 자신은 없는 거지. 그래서 이런 사랑이 흘러가는 그것으로 만족하는 거야. 내가 만약에 죽은 다음에라도 누군가가 나를 연구한다면 고린도전서 13장을 반드시 연구하게 될 거라고 난 생각해. 난 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리는 가장 기본적인 그림이 만물이 그에게서 나와서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느니라 그러지. 이것을 사랑으로 풀이를 하는 거지.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그 사랑이 결국은 만물을 모두 휘돌아서 당신 자신에게도 돌아가는 거야. 이것이 바로 복이란 말이야. 이것이. 모든 복의 효과인 평안과 이 모든 행복이 하나님 안에 있는 거거든. 그러면 이런 피조물인 인간 존재가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실재적인 방식이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그분 안에 있는 거야. 피조물인 물질에 속한 이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교통에 의해서 하나가 되는 거지. 전적인 타자가 어떻게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겠어요? 그건 관계의 합일이에요. 관계가 사랑의 합일이라 이거야.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를 버리고 이 사랑으로 회귀해서 거대하게 흐르는 이 사랑의 자기 순환 속에 당신 자신이 여기 서서 그 사랑이 나를 통해 흘러가는 통로가 되게끔 자기 자신을 이바지해서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화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해지는 인간의 비결이라구. 그래서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같은 거 공부하면서 인간의 제일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쟎아. 그래서 이제 조직신학에 보면 인간의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인간이 창조된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되었다(?34:58초) 그러는데 사실 이것은 나누어지는 게 아니야. 어느 관점에서 우리들이 이것들을 먼저 풀어내느냐 하는 거지만 그래서 이 두 개는 거대한 하나의 사랑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시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 그래서 자기를 하나님 사랑에로 돌아가게 하시는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런 얘기에요. 자 그 다음에.
낭독자4 :(계속 이어서) 이 사랑 안에서 신자들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교통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게까지 미치고자 하는 속성이 있으니, 이는 삼위 하나님 자신뿐 아니라 교회와 지체들, 그리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미칩니다. 이 사랑은 신자 개개인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을 발견함으로써 소유하게 된 지순의 사랑이며, 이 사랑은 신자의 존재 그리고 모든 삶에 있어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신자의 이러한 까리따스로 충만한 사랑 때문에 공동체적으로 삼위 하나님과 교회의 지체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보이지 아니하나 그 사랑에 감화를 받은 신자들 안에 있는 까리따스를 통해 지체들과 모든 이웃은 그리스도 자신의 사랑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훌륭한 유기중 하나는 그를 뵈옵는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 안에 있는 까리따스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 그 자체가 바로 성부를 향한 성자의 지순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그분이 지상 생애 동안에 죄인들을 향해 보여주신 그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자비에 넘치는 섬김은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안에 잇는 아가페의 사랑을 보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하나님 자신으로서 아가페의 사랑이 있었고 동시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 아들로서 아버지를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까리따스의 사랑을 소유하게 만드는 아가페 사랑의 근원이기도 하였고, 당신 자신이 우리들과 한 형제로서 어떻게 지순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이웃들을 사랑해야 하는지 보여주기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주시는 일은 승천하신 이후 성령 강림과 함께 세워진 교회에게 마땅히 승계되어야 할 주님 자신의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주시는 일은 승천하신 이후 성령 강림과 함께 세워진 교회에게 마땅히 승계되어야 할 주님 자신의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계속 존재하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교회에 계승하셨고, 그것이 바로 신자들을 통해 당신의 몸을 이루게 하신 중요한 의도입니다. 실로 교회가 하여야 할 일 중 이보다도 더 본직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까리따스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 각자가 신적인 지순의 사랑으로 가득차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완성하는 전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사랑의 체험이 공동체적 지평으로 나타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 자신이 이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몸의 일부인 지체들이 그 사랑의 몸을 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또한 이 세상을 향하여도 그리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진리이시니 교회가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사랑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갖게 하시고 싶은 그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는 사적인 사랑이 참된 까리따스의 사랑을 대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면서도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투고 분쟁하는 것입니다. 이 사적인 사랑은 언제나 자기사랑을 중심축으로 하여 외연이 확대된 사랑이니, 이것은 본질적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지순의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적인 사랑을 통해서는 교회가 결코 자신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 이제 보라구. 여기서 이렇게 설명을 했잖아. 그러면 결국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거대한 사랑으로 회귀하게 될 때에 이러한 하나님의 회귀하시는 사랑이 사실은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이렇게.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 이거죠. 그래서 요한 사도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참 사랑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했을 때 그 형제가 사실은 이 교회를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자기가 여기 이런 식으로 있으면서 자기 외연을 이런 식으로 확대하는 거야. 이것을 이렇게 많이 확대할 때 이렇게 중첩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죠.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그렇게 감격할 필요가 없다 이거죠. 그래서 이걸 뿌리를 추적해가서 그 사람의 사랑의 근원에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 하는 것을 봐야죠. 그래서 교회에서도 보면 맡겨준 일을 굉장히 열심히 해. 굉장히 헌신적이야. 그런데 반석이 그리스도가 아니야. 그런 사람들은 여기에서 있을 때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여기에서는 벌릴 수 없는 격차가 나기 때문에 결국은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이 없는 사람들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교회에. 가장 커다란. 적이 되는 거예요. 복음에 대한 반감이 항상 이 속에 있는 거죠. 이 속에. 그럼 여기서 일치 꽁꼬르디아 라고 하는 것은 뭐겠어요.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각각 이 사람들이 다른 거야. A, B, C, D 이렇게 각각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이렇게 사랑에 있어 일치를 이루는 거야. 그래서 이것들이 음표로 그린다면 말하자면 도 미 솔 이렇게 되는 거잖아. 도 미 솔 화음이 이루어지잖아. 도 미 솔 도 화음이 이루어지잖아. 이렇게 해서 각각의 다름. 사랑은 말이지. 사랑은 다름을 인정하는 힘이야.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힘이야. 그래서 부부도 서로 사랑하면 이 사람이 나와 다른 것이 참 감사하고 사랑이 식으면 다른 것이 짜증이 나고 힘들게 느껴지는 거야. 이런 속에서 교회의 아름다움 말하자면 꽁꼬르디아 일치를 이루어가는 거에요. 그게 이제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138 페이지 꼼꼼히 읽어보세요. 140페이지. 그 다음 사람. 마지막 단락만 읽어봐요.
낭독자5 : 이러한 일치는 단지 제도나 규율에 의한 타율적인 일치 혹은 외형적인 일치여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참된 일치는 진리와 사랑을 통한 일치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치의 유일한 초점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교회가 이러한 일치의 지속을 자신의 지체들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합치를 이루어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진리 안에서 성숙해 가야 합니다. 이로써 세상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보게 되고, 그 몸을 통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를 통한 하나님 영광의 나타남입니다.
김남준 목사님 : 그러면 자 여기 보라구.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의 순환이, 잘 들어봐요.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의 순환이 있잖아. 순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멀어져서 각각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이유는 무엇 때문이에요? 각각 자기 생각과 자기 사랑과 자기 의지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꺾고 돌아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바로 무엇이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그걸 하게 하쟎아. 그런데 그걸 위해 필요한 것이 이렇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가 뭐냐 하면 지식과 사랑이야. 이것이 성령이고 은혜라면 이것이 진리이고 복음인거에요. 그래서 커다란 두 개의 화두 진리와 은혜 지식과 은혜 그 다음에 성령과 진리 이런 두 개의 화두에서 이렇게 된 사람들을 다시 돌아가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목회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다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다시 비끌어 매고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선교죠. 이렇게 하면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더 많은 성도들이 소외되지 않고 이런 자기 사랑의 순환 속에서 있게 되는 것이 목회의 영광이란 말이죠. 그런데 자꾸 그러질 않고. 여기 있다가도 자꾸 이탈을 하쟎아. 다시 이제 목양적인 돌봄을 통해서 돌아오게 하는 거쟎아. 다시 이탈을 하쟎아. 그럼 다시 돌아오게 하고. 관계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을 여기 참여하게 하고. 이렇게 해 나가는 이것이 목회라는 말이지. 목회는 궁극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는 거야. 그래서 세 가지. 어떻게?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거. 이게 결국은 목회의 목적이란 말이지. 이 두 개 이외에는 다른 것들은 본질적인 무기가 아니에요. 지식과 사랑.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하든지 목양을 하든지 무얼 하든지 간에 이 지식과 사랑 이 두 가지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통하는 거야.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6강
사실 지난 시간에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이라는 제목 이였는데 끝까지 설교를 못하고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가서 아무데서나 끝나지 않았고 끊어도 좋은데서 끝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제 그 남은 부분을 하면서 계속이어서 교회와 사랑의 확장이라는 이런 교리를 가지고 우리들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인제 그런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 교회가 함께 연함을 이루면서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참된 예수의 몸으로써 이게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야 되겠는데,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교회는 불완전한 혼합이다. 교회 자체가 불안전한 혼합이기 때문에 사실 이일이 굉장히 어렵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고 우리가 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성령 안에서 한 아버지께 경배한다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우리들이 진리를 중심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러나 인제 교회 안에는 모두 참 신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크게 세 종류의 신자가 포함되어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이사람 모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에요. 신앙고백자들이 이제 모여서 교회를 이루는데 그 고백자들이 크게 세 종류의 사람이라는 거죠. 우선 첫째는 뭐냐면, 크게 분류하면 참 신자와 그다음에 부패한 신자와 그 다음에 거짓 신자. 이렇게 세 종류의 신자가 모여서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이죠. 둘로 나눈다며는 참 신자와 거짓 신자로 나누게 되는데 참 신자는 다시 둘로 나뉘어지겠는데 상태가 좋은 신자, 맛이 간 신자, 이렇게 나누겠어?? 이렇게 되는 사람이 누구나 그러면 이런거죠, 참 신자는 아주 분명하게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이에요. 접붙여진 사람은 어떻게든 간에 참 신자에요. 참 신잔데, 참신자라고 해서 모두 진실한 신자가 아니에요. 열심히 죄를 죽이고 은혜생활을 잘하면 이게 건강한 신자가 되어서 진실성이 많은 신자가 되요. 근데 요즘 무슨 망령이 드렀는지 기도 도 않하고 뜻을 세웠어요. 안하기로, 그리고 말씀의 은혜도 안 받고 예배시간에 맨날 늦게 오고 그리고 끝나고 가다가 주차장에서 대판 싸우고, 이런식으로 교회다녀요. 그사람은 분명히 거듭났는데도 상태가 않좋아, 여러분 몸이 항상 똑같은 상태 안니잖아요. 뾰두루지라도 하나 생기며는 그 주위가 다 곪으면서 인제 그 부분이 몸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잖아요. 엉덩이에 뾰두루지가 나면, 앉을때도 엉거주춤하게 앉고, 하여튼 많은 고통을 주잖아요. 그게 상태가 않좋은 신자야 그래도 그 사람은 넓은 의미에서 참 신자야. 왜, 그래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졌으니깐 근데 인제 거짓신자는 아에 교회 나오기는 하는데 접붙혀지지는 않았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신자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워낙 교양이 있고 품위가 있어서 교회 점잖케 다닐수 있고 참신자이긴 하지만, 워낙 교양이 덜되있어요. 교양 떨어진 사람은 은혜가 덮고 있을 때에 진짜 겨우 버티지 은혜가 뚜껑을 딱 벚어 버리면, 그담에 본래의 모습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 쭉 보며는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는 옛날 모습이 어땠는지 잘 연상이 안돼요. 지금 늘 그냥 천진 난만한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듣고 뭐 그냥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하니깐, 근데 인제 은혜가 떨어지면 연상이 다 되요. 아 그랬겠구나, 옛날에, 그리고 인제 목회하는데 참고가 되죠. 어 정말, 두고두고 참고가 됩니다. 아 그렇겠구나, 그래서 한번씩 은혜가 떨어져 보는 것도 목회에 참 도움이 되요. 아 저사람이 옛날에 그런사람 이였구나, 아 인제 그 속에 저런 기질들이 있었구나, 근데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속에 덮혀서 살아왔구나. 은혜의 뚜껑이 열리니깐, 아 인제 저렇게 되는 구나, 그걸 인제 깨닫는거죠. 그럼 인제 아, 저사람, 인제 저런 면에 있어서 많이 돌봐줘야지만, 사람이 고쳐 지겠구나 이런생각을 인제 하게되는 거죠. 물론인제 그런생각을 하게될때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지마는 그렇게 되면서 사람이 성장을 하게되는 거에요. 근데, 이렇게 세종류의 사람들이 섞여서 신앙생활을 하거든요. 근데 이게 그러며는 이제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들은 거짓 신자고 그담에 또 참신자이긴 하지만, 상태가 안좋은 신자는 교회에 고통을 주는데 요 상태 않좋은 신자들이 고정되었으면, 고정되었으면, 방이라도 따로 만들어서 분리를 하겠는데, 근데 돌아가면서 상태가 안좋아 지거든요. 돌아가면서,^^ 그러면서 인제 그러거든요. 근데 모든사람이 이렇게 규칙적으로 돌아가면서 그러는 거는 아니죠. 그래서 인제 신앙이 좀 부족해도 워낙 사람이 침착하고 주님께 붙혀 있으려고 하는 꾸밈이 없는 성격이고 이렇게 열심을 내고 하며는 덜한데, 그렇지 않으면, 인제 이사람이 좀 낳아졌나, 그러면, 또 저사람이 뚜껑열리고, 저사람이 좀 뚜껑 닫혔냐 하며는 또 저사람이 열리고, 하면서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그렇게 가는거에요. 세상끝날까지 이제 바로 종말까지 교회의 특성이에요. 근데 특별이 인제, 이중에서 참신자와 거짓신자가 함께 섞여있는 것은 교회에 더 많은 고통을 주는거죠. 더많은 고통을 주는거죠. 그니깐, 회심하지 않고 예수께 접붙혀지지 않는 사람은 실상 정말 그 교회에 회원이 아니거든요. 근데 인제 그렇게 회심하지않는 그런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있게 될 때에 문제가 없을 때는 그냥 가만이 있지마는 그러나 인제 문제가 생기게되며는 인제 괭장이 많은 문제를 일으 키면서 고통을 받게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깐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예수의 몸에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그 분량이 없어요. 분량이라는 건 뭐냐며는 왜 이렇게 사람도 살다보며는 기본적인 인간성을 갖추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륜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억울하거나 잘못된 상황을 맞이 해도 넘을 수 없는 어떤 선을 가지고 있잖아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영적으로 예수의 몸에 접붙혀 지고 하나님의 사랑속에 깊이 들어간 사람들은 순간 적으로 많이 약해지는 적도 있지마는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기가 넘어야 될 선과 넘지 말아야 될 선을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어요. 근데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들은 한번도 그사랑에 녹아 보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깐 이 선이 없다구요. 뚜껑이 잘못 열리면, 이선이 없이 넘나 드는 거에요. 그런데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자연적인 본성에 있어서 이사람이 교양이 있고 인품자체가 아주 뛰어나고 절제나 이런것들이 쭉 있어서 사회생활을 할때도 막가는 사람이 아닌경우에는 그런거를 어느정도 지켜요. 그런거 조차도 없어요. 사람을 향해서도 그런게 현저히 교양이 떨어져서 부족하고 그리고
또, 하나님을 향해서는 거듭나서 예수께 접붙여 진적이 없으니깐. 하나님 앞에 경계선이 없는 거죠. 이런사람들이 인제 하게될 때, 교회는 말할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오늘 우리가 어저깨부터 우리가 배우는 교리가 소위 예기하는 토투스 크리투스 라고 그래서 이건 라틴언대 모두를 그리스도예수의 몸으로 여김 그런 뜻이거든요. 좀 길어요. 그러며는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이 예수의 몸일 수 있어요? 거듭나지도 않았죠, 때로는 교회를 막 아프게 하죠, 아까 애기 했듯이 사람을 향해서도 경계가 없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경계가 없어서 지멋되로 넘나드는 이런 사람을 예수의 몸이라고 생각할 수 있냐 이거죠. 그죠! 왜 예수의 몸으로 생각해야 되는 지는 좀 있다가 하고 이렇게 참신자와 거짓 신자가 넓게 분류를 해서 참신자와 거짓신자가 섞여져 있는 것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교회의 모습이에요. 어쩔수가 없어요. 그래서 완전 구별이 불가하다 이거에요. 우리는 그런것들을 구별하려고 노력은 하죠 노력을 해서 어떻하죠. 그런 사람들에게는 세례 주면 안돼죠. 그리고 그런사람들에게 교회에 큰 직분을 주고 이렇게 되며는 교회가 언젠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돈많은 사람을 장로시키고 뭐 이렇게 하고 그담에 회심의 여부 잘 확인도 안하고 억지로 권하다시피해서 세례를 주고 이렇게 되며는 결국은 나중에 교회가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거에요. 그런면에서 구별은 하지마는 완전히 나뉘어 지는 것이 불가능 한데 종말까지의 교회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어디에 또 나타나냐하며는 말이죠 예수님의 비유에 보며는 한 밭에서 가라지와 곡식이 함께 자라는 거죠. 주인이 그거를 만약에 가라지를 뽑아야되겠다고 밭으로 뛰어들어 가며는 그러며는 심어놓은 작물이 망가지는 거죠. 또 그물을 하나의 또 비유로(?) 어부가 나가서 그물을 쳤는데, 그물을 쳐서 일단은 그물을 친 것을 다 고기를 가지고 와서 인제 먹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고기들을 갈라내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이게 그물 그 자체가 교회라면 보이는 교회라면 마지막에 그걸 분류하는 작업은 다 낚은 다음에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다 라는 것이죠. 이러한건 특별이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는데, 노아가 방주를 짖고 거기에 이제 사람들이 들어 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육축들을 보존고 싶으셔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짐승들을 집어 넣으라고 그러셨어요. 근데 참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은 정결한 짐승 근데,이미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있잖아요.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쌍씩 집어넣고 부정한 짐승은 두쌍씩 집어 넣라 이게요. 부정한 짐승은 두고 두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피해야 하는 물건이거든요! 근데 그걸 이상하게 부정한 짐승을 거기다 집어 넣어라고 그러신다고, 구원의 방주 속에 집어 넣으셔요. 나중에 인제 이게 두고두고 문제가 되죠. 그래서 너희는 나한테 제사 지낼 때 이런 부정한 짐승은 제사드리지 말거라, 또 이런 부정한 짐승들을 먹으면 안된다. 이런 부정한 짐승들을 만져도 안된다. 그러면 결국은 상종을 안할 부정한 짐승인데 홍수로 다 쓸어버리시며는 야! 뛰어다니는 건 뭐든 잡아서 먹어도 되고 나한데,제사드리면 된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건만 남겨 뒀거든, 왜 그렇게 안하시고 왜 손도 되면 안되고 먹으면 안되고, 제사진도 지낼 수 없고, 늘 피해다니면서 조심해야 하는 그런 부정한 짐승을 살려 두시니냐 이거에요. 왜그랬을 거 같해요? 하나님의 섬리에요. 그래서 어떻게 됬냐하면, 이 부정한 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는 진짜 그들이 정결해 지고하 하는 노력을 하게 하시는거죠. 부정한 짐승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진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때에도 내게 순종하면서 제사를 드리나 하나님이 확인하실수 있는 거죠. 그냥 뛰어다니는 거 아무거나 잡아와! 그러지 않고 가서 하나하나 살펴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주님께서 보실 수 있고 시험하실수 있는 거죠. 부정한 것이 있으니깐, 상대적으로 번성을 막 해나갈 거 아니에요. 상대적으로 부정한 짐승들을 보면서 저건 하나님께서 금하신 부정한 짐승이다 보면서 정결함에 대한 말하자며는 개념들이 분명하게 생겨나잖아요. 이게 하나님께서 교회에 거짓신자들을 두게하시는 이유에요.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좋은 감정을 안가지고 있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 않으면 교회 안나오면 되잖아요! 근데, 정말 잘나와요. 꾸준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며, 꾸준히, 그렇게 교회 나와 요. 그렇게 교회나오다가 지옥으로 가는거에요. 그게 얼마나 가슴아픈 일이에요. 그죠! 근데 하나님께서 세상끝날까지 그런 사람들을 교회안에 남겨 두셔요. 왜냐하면, 그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정결해지게 되는 거죠. 교회도 마찬가지로 참된 신자들를 그러한 거짓신자를 교회에 남겨두심으로서 참된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에 고통도 당하게하시지만, 참으로 하나님편에 서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참과 거짓 두 개가 교회안에 보이는 교회안에 함께 있는 것을 보면서 참된 것에 대한 더욱더 사모하는 동경을 갖게하시는 거죠. 그러니깐 우리가 은혜가 떨어지며는 죄짖고 이러는 사람들을 보며는 아고 나도 한번좀 한다리 껴볼까? 나도 옛날에 한가닥씩 했는데, 이런 맘이 들지만, 상태가 좋으면 그런걸 이렇게 볼때에 아 정말 내가 진짜 정신 차리고 살아야 되겠구나. 진짜 신앙생활 제데로 신앙생활 안하면 저꼴이 되겠구나. 하고 각성하면서 마음생기잖아요. 하나님이 그런 죄를 통해서 우리를 오히려 성결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이래서 하나님께서서 교회에는 이 거짓신자들을 하나님께서 항상 있게 하셔요. 그런데 인제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럼 그런사람들이 보이는 교회안에 있으면 그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거룩함이 손상되는 거 아님니까? 그런생각 하게 되죠 그죠. 교회를 순결하게 해야되는 데. 거기에 신앙은 고백하지만 사실상 예수께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서 온갖 부도덕한 일을 하고 교회를 아프게 하고 또 죄를 짖고 이렇게 하게 되며는 그러면 교회의 거룩함이 더럽혀지지 않습니까? 그러는데, 더렵혀 지지않아요. 왜 더렵혀지지 않습니까? 그사람 어짜피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더렵혀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예수의 몸에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이 교회안에 와서 많은 악을 행하고 그럴 때 교회는 고통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참된 교회의 거룩함은 손상되지 않아요. 물론 사람들은 보면서 저인간도 교회에 소속해 있으니깐, 아이고 저 교회 형편없구나. 이렇게 말하자며는 사람들의 평가는 떨어트릴 위험은 있지만, 성결한 의미에서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공동체적인 실제적 연합을 파괴하거나, 실제적 연합 어저깨 말씀드렸잖아요. 공동체적인 실제적연합 말씀드렸죠. 원리적으론 예수께 접붙혀 있지만, 교회의 몸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사랑과 순종으로 예수께 잘 붙어있으면, 그러며는 이 실제적인데서 연합이 이루어져서 그 통로를 통하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전해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런데 아무런 문제를 주지 않는 다 이거죠. 아무런 문제를 주지 않는 겁니다. 절대로 교회의 거룩함이 손상되지 않는다 이거죠.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궁금한게 남겠죠. 뭐가 남느냐며는 그러면 아까 애기한 제삼의 사람 맛이간 교인들 참신자이긴 하지만, 맛이간 상태가 안좋은 교인들이 부패할 경우에는 그래서 악을 행할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이럴경우에는 인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거룩성이 손상을 입게되느 거에요. 그리고 실제적인 연합이 이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사람에 의에서 악이 행해지니깐, 그리스도교회에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 흠집이 가기 시작하고 교회의 거룩함에 말하자며는 파괴가 오기시작한 거에요. 그러니깐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어떤 결론에 도달할수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혀지지 않은 사람의 매우 커다란 악도 참된 교회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 손해를 끼칠 수 없지만, 그리스도예수께 접붙혀진 신자의 부패한 신앙은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에도달하게 되는 죠. 그러니깐 교회의 참된일치나 건강을 위해서 거듭나지 않은 거짓신자들은 책임이 적지만, 그러나 참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예수께 접붙혀진 사람들은 책임이 아주 많은 거에요.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러면, 성령의 이름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러면, 그사람이 세례를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속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교제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게 거듭남이요 구원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죠. 우린 생각할 때, 야, 신난다 예전엔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그리고 아, 정말 그 죄에 져서 멍에를 지고 무겁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데, 예수님이 날 위해 돌아가시고, 나를 이제 이렇게 믿기만 하니깐 하나님이 세례주셔서, 예수께 접붙히게 하시고 그예수를 통해서 삼위하나님과 교통을 이루게 하셨으니 야 이제 진짜 고생끝 행복시작이구나, 그게 아니라이거예요. 그렇게 접붙혀진 것은 물론 이제 옛날에 그 고통스러운 죄의 멍애 에서는 벗어나게 되지마는 이렇게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서 한몸이 되고 그 한몸이 된상태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면 그다음에 이제 그분만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이 명하신 모든 지혜와 사랑을 따라서 살겠노라고 다짐 하는 거에요. 이게 약속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속으로 딱!세례를 받고나면, 죄의 짐은 하나님이 다 벚겨주셨는데 성경을 한권 주시는 거에요. 이제 죄의 짐은 벚었으니 이제,이건 죄의 짐보다 훨씬 가벼운 멍애인데, 니가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걸 딱 짊어 지는 거에요. 그리서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다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놀게하리라, 쉬게 하리라 놀게하리라 먹게하리라, 퍼지게 하리라 그러지 아니하시고 내가 주는 멍애는 그 이제까지 니가 지고온 멍애보다 훨씬 가볍다. 나와 함께 그 멍애를 지고 멍애를 진다는 말이 예수님 시대때 맹락에 의하며는 선생과 스승이 된다는 뜻이에요. 기술자가 같은데, 그래서 같이 기술을 배워가는 거죠. 그렇게 멍애를 지자 그렇게 예수그리스도께 묶이는 거죠. 근데 그걸 안해 구원에 대한 이해가 아주 매우 잘못되어 있는 거죠. 예수님 믿고 나며는 그다음에는 뭐, 아주 모든 것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제는 고생끝 행복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의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안해, 그럼 뭐냐 내가 기쁨이 있을 동안에 예수께 봉사하고, 사라지면, 할 수 없는 거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공경이 적선적인 공경이 되는 거야. 내가 아라서 조금 보태드리면, 주님이 영광받으시는 거고 이런 식으로 사니깐, 교회 접붙혀 졌는데, 계속 곪은 신자로 남는 거야. 십년째 계속 곪아, 이십년째 계속 곪고, 좀 아무는 가 하더니 물집 진물 질질 나고 그러는가 하더니 곪는 기운이 뿌리를 내려가지고, 저 밑에까지 파고들어가서 가끔 위에다 고약을 발라도, 위만 아무는 듯하지 또 저 밑에서는 계속해서 그러는 거죠. 은혜를 좀 받으면, 겉은 아물어서 좀 정신차리고 다니나 그러는데, 저속이 이미 썩었어. 저속이 너무나 오래됬어. 그러니깐, 인제 그속에서 계속해서 고름이 올라오는 거야. 겉엔 그냥 멀정해도, 속에서 계속 욱신욱신 쑤시고, 이러는 상태로 계속 사는거야, 그런시각을 가지고 한번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한번보세요. 교회가 이렇게 있는데, 교회마다 다 작게 보면, 하나 하나의 몸이잖아. 그리스도의 몸을 이렇게 보세요. 그렇게 교회가 모습이 다양할거라 말이죠. 어떤교회는 건강하게 잘 돼서, 군살 하나없이 잘 되가지고, 정말 아름다운 청년의 몸과 같이 무엇이든지 시키시며는 달려가서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탄탄하게 근육질로 말이지 근육질로 잘 되어있는 그런몸인데, 어떤 몸은 말이지, 배가 잔뜬 나와가지고, 그냥 배가 땅에 끌릴정도로 되가지고 그러고 관절염이 걸려서 설설 기면서 다니는 그런 교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교회는 몸은 그래도 배도 안나오고 제법 볼만한데, 세상에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종기가 잔뜩 나가지고, 도대체 어디가 눈인지 콘지, 구별이 안갈정도로 그러고 골름 냄새를 풍기면서 살아. 여러분들이 속한 교회는 어떤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번 생각해 보신적 있어요? 그래서 인제 참신자가 부패하게 될 때에 교회의 거룩함에 손상을 주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인제 교회에 많은 아픔을 주는 거에요.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로 통치하시고, 또 은혜로 안되면, 징계로 통치하고 이렇게 하시면서 고치시기는 하지만, 그러니깐, 인제 자신에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에요. 마음에 평안이 있겠어요. 그렇게 힘들고 그담에 교회에도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는 거죠. 그게 한번 여러분들의 모습은 어떤지 한번 진지 하게 생각을 해 보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교회가 거짓신자들이 악을 행함으로 고통을 당하고 참신자들이 악을 행하므로 교회가 말할 수 없이 아픔을 겪고 이러면서 교회 온몸이 상쳐 투성이가 되고 그러 잖아요. 그런데 참 놀라운게 말이죠 교회가 죽는 법은 없어요. 우리의 인간의 목숨도 말이죠 어떻게 보면 파리 목숨같지 마는 참 질기거든요. 다리 같은거 톱으로 수술하는 톱으로 뚝 잘라도 꺼내도 살고, 머리도 이렇게 해가지고 뚜껑을 다 열었는데도, 뇌를 막 파내고 이랬는데도 또 살고, 괭장해요. 괭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거에요. 그런 생명력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셨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교회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거에요.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거에요. 사람들은 다 버리고 떠나가도 주님은 홀로 그 교회에 계셔요. 그래서 그 사람들로 연합을 이루게 하시고 그래서 다시 그들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셔요. 많이 사랑하셔요. 그러니깐, 인간들이 내가 아니면, 이교회를 어떻게 하랴, 그런생각도 하지 말아야되. 누가하겠지 이건 더 나쁘지마는, 누가하겠지! 제가 옛날에 교회건축할 때, 깊이 깨달은 교훈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나는 맨처음엔 감동 받았거든요. 아 목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다해 주시죠. 다해주시죠. 그러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두종류인데, 믿음이 너무 좋아서 자기를 다 헌신하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게 진짜 참말이에요. 목사님 우리가 많이 해도 결국은 주님이 이루시죠. 이런 뜻이고, 자기가 안바치고 그런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 게 무슨 뜻이냐고 하며는 하나님이 모두 하십니다. 딴사람이 모두 합니다. 그애기야 그게 똑같드라고, 감동이 달라요. 누가 애기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지켜주셔요. 그걸 여러분들이 이제, 볼 수 있으면, 제법 성숙한 사람이에요. 눈이 뜬사람이에요. 마치 여러분들이 그 고등학교에 다닐때까지 대학다녀도 용돈 조끔주면, 집에서 나올 때 발길로 문차고 오고 그리고 막 엄마한테 심술부리고, 나 학교 안다녀 버릴꺼야! 챙피해, 안다니면, 뭐!누가 손핸데. 이런식으로 협박하고 저도 참 많이 그랬거든요. 근데, 나중에 그러든애가 언째쯤되며는 우리엄마가 우리 길으느라고 얼마나 많이 고생하셨을까. 그리고 그 엄마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아릴때가 있어 지가 시집가가지고 저보다 못된 자식 낳아가지고 고생을 좀 해봐야되. 그러면 인제 엄마 마음을 깨닫게 되. 그때에 인제 비로서 인간으로서 철이 드는 것처럼, 성도도 교회의 몸에 접붙혀 지기는 했는데, 이게 뭐가 뭔지 모르고 까불고 다녀. 그러다가 인제 어느때쯤 말씀을 많이 먹고 성숙해 져서, 그래서 인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에요. 그리스도인 몸인 이교회가 얼마나 아플까? 그러니 몸이 이렇게 아프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실까? 내가 그 아픔의 원이 되고 있으니, 내가 얼마나 비류한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되요. 그때에 그사람이 깊이 이제 성숙하게 되는 거죠. 철이 들게 되는 거에요.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진짜 그리스도의 예수의 몸의 일부로써 지각이 있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근데 제경험에 의하면, 그때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하구요 그리고 참다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잘 가르쳐 주어야지만, 성도들이 겨우 깨달을 수 있는 성숙한 경견이 바로 이 교회를 어머니의 품처럼 여기게 되는 그것이 바로 성숙한 신자의 표증 중에 하나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 그런 것들을 많이 생각을 해야지, 생각을 안하고 살면 머리 허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도 결국은 자기 몸하나 둘 교회하나없이 그리고 이리저리 유리방황하면서 인생을 살아요. 그러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얼마나 고통을 주고 부끄러운 것 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그리고 떠돌이처럼 그렇게 살아간다 이거죠. 그것은 정말 실패한 인생을 사는 지름길이에요. 정말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그럼 왜 이렇게 그 교회안에 거짓 신자들은 속히 회심시켜서 돌아오게 하시고, 정신못차리는 신자들은 빨리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잘 못받으며는 한차례 때려서 그리고 가로열고 나는 빼고 그리고 가로 닫고 그렇게 해주시지. 왜 하나님이 그렇게 두고만 보시고 그래서 거짓신자들이 계속 교회 찔르고 다니고 부패한 신자들이 계속 곪은데로 그 붙어있게 만드시고 떨어지지도 않고 몸에 붙어있어서 그래서 그냥 옆에 사람도 아프게 하고 고름냄새 풍겨서 결국은 전체적으로 교회의 품격이 떨어지게하고 예수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서도 멀어지게만들고 왜 이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실까? 왜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실까? 이런생각 들때가 있거든요. 자기가 잘 못살 때에는 그런 생각이 잘 안들죠. 하나님 이렇게 좀 신앙생활 잘 안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차례씩 한번 정신차리게 맞아야 정신차리는데, 좀 때려주시지. 그런생각은 잘 안하죠. 자기가 또 신앙생활을 잘 할때도 그런 생각 잘 안해. 그건 왜냐하면, 은혜가 너무 충만하니깐, 그러니깐 어떤때 그런 생각을 하냐면, 상태가 안좋은데, 자신은 좋다고 착각 할 때 그때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시거든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그러면서, 교회의 몸에 보이는 교회에 가짜 신자와 곪은 산자가 섞여 있게 하셔요. 섞여있게, 그 왜그러실까 하나님이 왜 그러실까 여기에 하나님의 아주 깊은 그 경륜이 담겨 있어요. 지혜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며는, 하나님이 교회의 이러한 모습 가짜 신자가 섞여서 보이는 교회가 찔림을 당하고 참된 신자중에 부패한 자가 있어서 곪은 상처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 아파하고 이런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참된신자들에게 자기 안에 있는 거짓과 불의를 보게 하시는 거에요. 거짓과 불의를 보게 하시는 거에요. 잘보세요. 교회안에 교회가 순전하게 하나님을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구원받았잖아요. 교회가 순전하게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람을 향해 그 사랑을 향해 나타내고 그런 까리따스 곧 지순의 사랑속에서 살아야 될 존재잖아요. 근데 그렇게 안살아. 그러면서 교회가 그속에 온갖 더러운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냄새나는 거죠. 교회는 성결에 지기를 바라지만, 실체에 있어서는 병원하고 비슷한곳이에요. 사람을 고치기는 하지만, 그런 죄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병균이 많은 병원과 같이 그런 곳이 바로 교회에요. 그런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그거를 자기가 신앙심이 없이 그걸 들여다 보게되며는 짜증이 나는 집단이에요.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냐며는 아이씨 골치아픈데, 한번 옴겨? 두 번 옴겼는 데, 세 번 못 옴기겠어? 그리고 옴길 생각을 한다 이거야, 물론 이제 하나님이 때가 되면 이사를 간다든지 직장을 옴긴다든지, 뭐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하나님이 목사도 교회를 옴기는 데, 신자들이 왜 교회를 못옴기겠어요.그죠. 근데 이제 문제는 교회에 상처를 내지 않고 첫째는 그리고 일체의 온유함과 진지함으로 주님앞에 인도를 구하며 그러면서 교회를 옴기는 경우에는 문제가 덜되는데, 아이씨 골치아퍼 갈아보자, 그리고 이교회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뭔가 생각하는 거에요. 곪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구나, 안 곪은 교회 어디 있나? 그리고 한번 뒤지는데 그눈에 그런게 보이겠어요? 이미벌써 이렇게 상태가 안좋아서 상한 눈이기 때문에 분별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것들을 구별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보암직 하고 먹음직 한 교회 가는 거에요. 그 교회에 접붙혀 지는 순간에 그 교회는 고통이죠. 기도제목이죠. 왜냐면 이사람은 다른 사람보고 썩었다그러고 떠났지마는 다른 사람보고 썩었다그러고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그사람 자신이 이미 거기에 간염되서 같이 썩은 사람이에요. 썩은 거의 종류는 틀릴 수 있어요. 그래도 같이 썩은 사람이에요. 그사람이 가서 저교회가서 털썩 붙었어요. 그교회는 그 순간부터 아파하기 시작하는 거에요. 본인 그렇게 생각 안하죠.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한테 어느 교인이 찾아와서 그랬대요. 목사님 요즘 교회 정말 썩었습니다. 저 정말 순결한 신앙생활 하고 싶은데 그런 좋은 교회있으면 소개시켜 주십시오. 스펄전 목사님이 그런교회는 없는데, 혹시 발견하거든 그 교회는 절대 가지 마십시오. 왜요 그러니깐 당신이 가는 즉시 안그렇게 될겁니다. 그러니깐, 결국은 그런식의 사고방식을 캐들어가보면, 어떻게 되냐면, 자기 사랑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아픔을 당하고 있는 거보다 자기가 아픔을 당하는 것을 훨씬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죠. 보세요.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거든요. 왜냐며는 교회에 속한 성도들만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도 잘못할 수 있고 또,목회자만이 아니라 교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한덩어리가 되어 잘못할 수도있어요. 그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체적으로 자기 빼놓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어요. 몰론 그렇죠. 그때에 신자는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죠. 처음부터 그 사람이 그런 상황에 대해서 열받고 뭐 이렇게 복수심에 불타고 다 때려치고 떠나고 싶다 이런생각을 갖지는 않았겠죠. 그렇지만, 그런점에서는 그사람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가죠 왜냐하면, 정말 교회답지 않은 교회도 많고 신자들 답지 않은 신자도 많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받는 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인정이 되는 거죠 문제가 뭐냐하며는 그런 현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이사람의 마음속에 뭐가 있어야 되야하며는 잘못하는 그 교회에 일꾼들 신자들 목회자들 이렇게 개별적인 존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이사람의 그 고민이 까리따스 안에서 일어나는 고민이 아니라고 하는 거에요. 교회는 그런식으로 다루어 질 수 가 없는 거라는 거죠. 뭐냐면, 그렇게 다가오면 안되고 그속에 잘못된사람들이 섞여 있어도. 결국은 그 사람들과 자신 때문에 예수의 몸 전체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몸의 고통이 전해와야 되거든요. 몸의 고통이 전해질 때 그것이 몸전체의 고통으로 전해지면서 몸을 위하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게 아니라 그 몸을 아프게한 어느 지체에 대한 이글거리는 복수심과 분노에 불타는 것은 이것은 카리따스의 사랑이 아니에요. 혈기에요. 여러분 한번 보세요. 아주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가 기가막힌 비유가 떠올랐어요. 여러분이 교회에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잖아요. 처음에는 교회를 염려해요. 근데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면서 사람들의 잘못과 부패들이 보이는 거에요. 그때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보통 올바르게 사유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사과하고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교회를 향한 염려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교회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에 불타게 되는 거죠. 그때에는 몸을 향한 사랑이 사라진 뒤에요. 다시한번 반복할께요. 맨처음에는 교회를 염려하는데, 교회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여요.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이미 그들을 미워하게 된때에는 몸전체를 향한 사랑은 사라진 때에요. 왜그러냐하면, 예수의 몸인 교회의 사랑은 카리따스의 사랑이에요. 이사랑은 교통적인 성격이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게 하는 사랑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을 이미 미워하고 분노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했던지 간에 그 순간에는 이미 카리따스 사랑은 없는 거에요. 이부분이 아주 미묘한 부분이에요. 이지점에서 굉장히 교회를 사랑하던 많은 성도들이 넘어져요. 그리고 결국에는 사단의 도구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거에요. 근데 이제 옳지 않다라고 하는 것을 비유로 통해 들려 줄께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요. 여러분도 몸이고 교회도 몸이잖아요. 근데 여러분들의 몸의 여러분들의 몸이잖아요. 그런데 하다가 상처를 입는다든지 해가지고 막 곪고 상하고 문제가 막 생겨고 심지어는 몸이 이상해가지고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암이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때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만약에 간암이 걸려서 지금 생명에 위독하다고 그러면 간에대한 막 미움이 생겨요? 이놈의 간 다 후벼파버려? 짤러버려? 나쁜자식! 이런생각이 드느냐 이거에요. 가다가 탈까닥하고 다리가 삐였어 골절이 되가지고 부러져가지고 몸을 못움직이겠는 거에요. 그때에 여러분 어떤생각이 들어요. 이 병신같은 다리 저거 왜 똑바로 걸어! 너 때문에 나까지 고생하잖아 이러면서 몽둥이를 들고 부러진 다리를 두둘겨 패느냐구요. 자기몸은 그렇게 안하잖아. 그 부러지면 어떻게되 어! 큰일났지! 그러고 분명히 머리는 직장에 가있고, 지금 손으로는 글을 써야 되는되, 다 쉬면서 온 몸의 기관이 다리에 집중하는 거에요. 그리고 이 다리를 끌고 데려다 주는 사람이 없으면, 자기가 목발을 짊고라도 병원에 가는 거에요. 돈없으면 꿔서라도 갖고가 가지고 치료를 하는 거에요. 언제까지! 다 날대까지. 그래서 처음에 동기는 교회를 사랑한 것일 수 있는데, 이게 사단의 계교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을 미워하고 물고 뜯게 만드는 거에요, 그래서 시작은 참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며서 성령으로 시작한 일이 육체로 번지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인간을 향한 독한 미움, 그런것들이 이속에 생겨나게 되는 거요. 결국은 까리따스의 사랑이 사라지는 거에요. 그리고 복수심이 남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말할 수 없이 상처을 받게 되는 거에요. 쉽게 이야기 하며는 처음에 곪은 상처가 문제가 되는게 아니라 그걸 짜본다고 까불다가 오염이 되가지고 거의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깐 그거는 몸을 다루듯이 교회를 다뤄야 되는데 푸줏간에 고기를 다루는 것처럼 교회의 몸을 다루는 거죠. 그렇게 다루면 안되는 거죠.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다루면 안되는 거에요. 이부분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냥 이정도로 하고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어쨌든 그런식으로 다루면 안된다 라고 하는 거죠. 절대로 까리따스사랑이 아이에요. 그리고 뭐냐며는 마지막까지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될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며는 모든 사람이 잘못해도 주님은 교회를 지키신다는 거에요. 반듯이 필요하면 하나님이 그사람을 데려가셔, 정말 정말 안되겠으면, 하나님이 생명을 거둬가셔요. 그래서라도하나님이 이일을 해나가게 하시는 거죠. 그전에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있는데, 참 신실하신 분이데, 청빙을 받아서 교회를 가시는데, 너무너무 힘들어 하셨어요. 장로님들이 여러분 계시는데, 그중에 한 장로님이 늘 선두에 서서 교회를 힘들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목사님이 안식년이 돼서 육개월인가 얼마를 쉬고 오셨는데, 늘 목회하면서 그 장로님 때문에 힘들어하고 몇 번을 교회를 그만 두려고 맘을 먹으셨고 목사님만 그러는게 아니라 많은 힘없는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는데 육개월만에 돌아왔는데, 이 장로님이 완전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났나 하며는 육개월 목사님이 안식년 가시는 동안에 하나님이 이 장로님을 지옥문앞에 데려갔다 나오신거에요. 죽음 끝에까지 데려갔다 나오신거에요. 그래서 이분이 완전히 생각이 달라진거에요. 아! 내가 악하게 살았구나. 내가 꼭 교회에서 잘못했다기 보다도 내가 악하게 살았구나, 나의 목숨은 주님 손 끝에 있구나. 이제 내가 남은 생애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하나님이 일일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교회를 지켜주셔요. 그점에 있어서 우리가 모든 힘을 다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그 선을 넘지 않고, 나머지를 주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되요. 그리고 깊이 기도하고 그 그리스도의 몸의 아픔이 진짜 처음처럼 몸의 아픔으로 느껴지고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아픔에 교회를 그렇게 아프게 했던 내가 바로 그 상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 교회에 있는 아픔들을 자기의 몸에 난 아픔처럼 객관화 수 없어야 되요.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이건 객간화야! 자기 간암 걸린 거 보고 에이씨! 딴기관은 다 멀쩡한데, 넌 바보같이 뭘 처먹어서 암에걸려서 확짤려버릴꺼야! 그렇게 안그러잖아. 그 드러운 놈의 간! 괜히 붙어가지고! 말이지! 안 그러잖아, 객관화 못하잖아 결국은 간과 함께 아파하다가 그 간과 함께 죽는거에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에요. 이게 그리스도 몸에 붙어있는 지체들의 말하자며는 성화의 모습이에요. 우리가 늘 부족하잖아요. 그죠. 그니깐 주님께서 우리모두를 바르게 해주시도록 늘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그래서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이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교회와 아파하고 이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거에요. 그렇게 해서 말이죠. 뭘 배우게 되냐면, 그렇게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모든일이 자기안에서 일어나는 일하고 너무 비슷한거에요. 교회안에는 아무리 썩었어도 그 교회가 하나님이 자기를 세워주신 자리라고 생각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하나도 없는 교회는 없어요. 정말놀라워요 어쩜 그런지 몰라요. 심지어는 어느정도냐면 예배라고 할 수 없는 예배를 드려요. 나 진짜 목격했어요. 온 교인이 다 자. 정말로요. 그런데 교회가 필요하다고 그러면 말씀을 듣고 눈이 초롱초롱 살아있는 교회 교인들보다 더 많이 헌신해.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그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아닐꺼야. 그러는데 그렇지 않아요. 진리의 말씀 쪼금 밖에 못깨닫고 예배시간에 조는 사람 많아도 그 속에는 진짜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생각하고 진리는 많이 몰르지많은 조끔 알고 진리에 자기를 철저히 자기를 합치시키기 위해서 아파하며 기도하는 교인들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예배시간에 많은 교인들이 조는 것이 정당화 되지는 않지마는 그러나 그렇게 함부로 생각하면 안된다 이거죠. 그래서 결국은 뭐냐면, 그속에서 그 교회에 병든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게되요. 그래서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해 지며는 교회의 그런 병든 모습을 볼때에 그 마음이 마치 에스라 같이 되는 거에요.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타락했다 그랬을 때 칼빼들고 나온게 아니라 성전으로 달려가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기 문턱에 엎드려서 하나님앞에 한 없이 울었어요. 그래 왜그랬냐면 하나님 너무 죄송합니다. 자기의 죄악인 것처럼 토설하고 아파하는 거야. 카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차되면 교회가 부패하고 지체가 막 잘못하고 그리고 올치않은 일이 일어나서 막 사람들이 힘들어 할 때 그것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을하는 거에요. 이거는 저인간 때문이다 저 자식 때문이다. 이런생각 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에서 상처가 났을 때 그렇게 생각을 안하는 것처럼. 이걸 어떻게 하난 나도 너무 아프다 이몸이 아프지 말아야 할텐데, 아픔은 내가 당하고 지체들은 지켜주고 자기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지체들의 명애는 보존하고 자기가 쓰라린 고난의 아픔을 당해도 지체들은 아프지 않도록 보호하고 자기가 상처를 많이 받고 짖이겨지는 한이 있더라고 교회는 상하지 않도록 자기를 다 던져서 보호하는 거에요. 왜 왜그래야 되요? 왜그래야돼? 예수의 몸이잖아 우리는 우리 몸이고 예수의 몸이잖아요 우리가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이 평안하고 안녕을 누리는 그것이 이 교회의 모습이잖아요. 그렇게 할때에 신자의 삶은 견디기 힘들게 고통스럽죠. 그 뭐 이루 말 할 수도 없죠. 그런 속에서 아파하는 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혹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중보자가 된 것 같이 중보해보신적 있어요. 그건마치 깊이 들어가면 어느정도냐며는 나는 그냥 껍데기 일 뿐이고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오셔서 기도하시고 그냥 가신다고 기도가 끝나고 나면, 탈진하는 거에요. 저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내가 용서를 비는 거에요.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저사람이 빌어야할 기도를 나를 통해서 다 토설하게 하는 거에요. 그때에는 그 기도를 받는 사람받는 사람을 향한 어떠한 미움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렇게하면서 그게 중보기도의 정수에요. 그렇게 뼈져리게 깊이 기도하게 하세요. 사실을 그런걸 가끔 경험하지마는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그마음으로 교회 모든 지체들 지금 상태가 않좋아서 헛튼짓 하며 교회 계속 고통을 주는 막나니와 같은부패한 신자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세요. 그것을 바로 지혜를 가지고 그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에 의해서 행사가 된다그랬어요? 그렇지 사랑에 의해서 그게 바로 예수의모습을 본받은 사람의 신앙생활의 모습이고 그런속에서 자기는 많은 고통을 당하죠. 그래서 사도바울도 고백을 했어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나의 육체에 채우노라. 나의 육체에 채우는 많은 고난이 교회때문이고 그리고 그 고난은 바로 예수님이 이땅에 계셨더라면, 당하셨을 그 남은 고난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공동체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을 애기하는 거에요. 어려운 말로 하면 성례전 적으로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께 자기자신을 봉헌하는 거에요. 그래서 사회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서 하던 방식과 같은 똑같은 방식을 가지고 교회에서 하게되는 거에요. 여기는 전혀 다른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란 말이죠. 이 사람들을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기고 사랑하여야 할 이유가 둘있는데, 하나는 뭐냐하면, 상태가 안좋은 신자는 비록 상태가 안좋지만, 예수의 몸이기 때문에 또 예수의 몸에 접붙히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택하신 양 일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그러며는 내게는 우리안에 들지 아니한 또다른 양들이 내가 있어서 그들도 인도하여야 터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시죠. 우리안에 아직 안들어 왔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양이라고 이미 부르시는 거죠. 근데 그 사람이 세상에 있어도 우리가 가서 선교할텐데. 그사람이 오게 되었으니깐. 사실을 그 자체가 말 할 수 없는 선물이죠. 우리들이 선교를 나갈때에 그사람들에게 좋은 대접 기독교에 대한 예의 바른 태도 교회의 질서에 대한 업격한 존중 목회자의 대한 겸허함 성도에대한 예의 우리가 그거 기대하면서 전도나가요? 그럼 아파트 전도하다가 아파트 전도갔는데, 잡상인 출입금지인데 여기 왜 들어가요? 그럼 가만히 있어. 머기 끄덩이를 잡아 당겨가지고 땅에다가 한번 매치고 오지! 우린 그건거 기대하지 않는다 이거죠. 그려며는 당연한 일이 일어났구나. 근데 어떤사람이 오~ 전 예수는 안 믿지만, 들어오세요. 이추운날에 그러면서 손을 문을 열고 두손을 잡으면서 아이구 이 손봐 이렇게 추워서 어떻게 난 예수는 안믿지만, 어째든 들어요세요. 내가 하여튼 믿을 마음 있으니깐. 들어와 보세요. 뭐 제대로 된 인간이 있었구만, 우린 그렇게 생가하냐 이거에요? 우째 이런일이!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깐 안믿는 사람이 교회와서 불신자고 거짓 신자라고 하더라도 가끔 곤조부리고 그러며는 아이고 당연한 일이 일어났구만, 이러고 얌전하게 교회다니면, 아이고 왠일이셔? 이렇게 하면서 사랑해 줘야지 선교지가 교회속으로 들어온거거든요. 사랑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가 진정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질 날을 기대하는 거죠. 그때는 인제 다 와서 미안하다고 그런다고 그때는 정말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깨닫는 거죠. 그런게에요. 그러다가 보니깐 신자의 영혼과 마음이 이제 강조가 되는 거에요. 왜그러냐며는 아 죄송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깐, 이렇게 해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토투스크리스투스 교회의 보이는 교회 전체를 예수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그런거란 말이죠. 그러다보면 인제 그담에 우리가 뭐를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냐 하면, 교회가 확장된다는 게 뭐냐. 쉽게 애기하면, 교회가 성장 한데는게 뭐냐 우리가 교회가 성장한다 그러면 대게 몇가지 이런걸 뽑잖아요. 애를 들자며는 우선 교인이 많이 모이는 것. 교인이 계속 줄어드는데, 성장한다고 그렇게 애기 하는 사람은 없단 말이죠. 교인이 계속 늘어나는 것 성장이죠. 학고방 같이 쬐끔한데 복닥거리고 오부 육부 예배드리다가 큼지막한 예배당을 지어서 가는 것도 우리가 성장이라고 이야기 하죠. 또 뿐만아니라 성도들은 조끔밖에 안되는데, 헌금이 계속 늘어나서 그것도 성장이라고 애기하죠. 또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정신차리지 않고 했는데. 정신차리고 신앙생활을 해서 또 뭐 어쩠튼 가정도 평안하고 이렇게 다 된다. 근데 우리가 이런것들을 성장이라고 그러는 거죠. 전자의 세가지는 양적성장이라고 그러고 후자는 우리들이 질적성장이라고 그러잖아요. 근데 사실 이런 구분 자체가 뭐 별 특별한 의미가 없죠. 왜냐하며는 교회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수가 영향을 행사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이 좋은 신자라는 전제 조건이에요. 거짓신자나 상태가 안좋은 신자가 많이 섞여있게 되면, 이게 늘어날수록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선교의 걸림 돌이 되는 거죠. 무슨애긴지 알죠. 여러분들 이렇게 보다가 저사람은 진짜 예수 믿는다고 말을 안하고 다녔으면 굉장이 좋겠다. 말로는 우리가 못하지마는 사실 그런생각 우리도 하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아 여러분 자신을 포함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게요. 그러면, 진정한 의미의 성장, 교회의 확장이라는게 뭐냐. 교회의 진정한 확장은 참된 의미의 선교에요. 그 선교를 통해서 그 복음화 되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확장인데 교회의 확장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랑의 확장이에요. 하나님이 이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을 제창조 하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택하셔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태어나게 하시잖아요. 종자씨로 택하신거죠. 이씨를 사방에 퍼트려서 그래서 이제 이세상을 회복된 세상으로 만들고 싶어하시는 거에요.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시는데, 문제는 종자씨가 이게 신통칠 않아 갔다 뿌려놓며는 이게 싹이 나고 열매를 맺어야 할텐데 그게 안되는 거죠. 그러니깐 씨가 문제가 되는거죠. 근데 이제 만약에 씨가 좋아진다며는 교회가 모판이 되어서 모를 다 찢어서 그래서 인제 모네기를 다 하게되며는 몇 달 지나고 나면 막 그 벼로 가득한 논 밭이 되고 가을이 되면, 막 누렇게 벼가 익어서 황금 물결이 출렁거리는 그런 밭이 되어져요. 모판은 요만한거 하나였는데, 그걸가지고 다찢어서 모를 내니깐 그냥 들판 전체가 누렁 곡식이 출렁거리는 그런 황금물결에 논이 된거에요. 그런것처럼 세상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시는 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된 세상이 도대체 뭐냐. 결국은 뭐냐하며는 하나님 안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사랑의 질서를 따라서 일이 이루어 져있거든요.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건 거의 천편일류적인 유사해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냐면, 사람이 각각 조금씩 틀리지만 자기의 사랑에 말둑을 박고 원을 치면서 살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사는 거에요. 예수믿는 사람들은 틀리거든요. 하나님의 사랑의 중심에 말뚝을 박고 사는거죠. 그러니깐 신자가 부패하거나 거짓 신자여서 그렇지 참되고 진실한 신자는 데게 생각하는 것이 비슷한거죠. 여분 뭐 얼마나 비슷해요! 여러분들중에 어떤사람은 돈 많이 벌어서 떵떵 거리면서 살아봐야되겠다. 아니면, 지금은 성화되는 시간이니깐, 좀 참았다가 성화가 어느정도 완성되면, 내가 가서 한번 타락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다 이거죠.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를하면서 원을 그리면서 어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문제는 뭐냐며는 보이는 교회는 독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보이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지상에 있는 교회에요. 나눌수 있는 데, 사도들의 경우와 우리들의 경우로 나눌수 있어요. 사도들의 경우에는 교회가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이는 거죠. 예수님은 알아계시니깐. 예수님은 눈으로 보고 교회는 믿음으로 봤어요. 그렇니까 사도들도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다음에 이제 성령이 임하셔서 세워질 그 교회의 맛을 예수님을 통해서 본거죠.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이 교회를 어떻게 교회되게 이끌어 가야될것인가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원천이 된거죠. 왜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때에 택하신 의도가 일하게 하실려고 먼저 부르신 것이 아니라 먼저 부르신 것은 함께 있게 하기위해서 부르신 거에요. 그래서 그들을 불러서 함께 있게하고 복음도 전하게 하고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제자들을 부르신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항상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니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앞에는 종종 나타나셨지마는 항상 열두제자와 함께 따로 다니셨어요. 그런이유는 뭐냐하면, 그 열두제자 안에 예수님이 계시므로 그 속에서 이미 교회의 모형을 이루면서 어떻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고 그 가르침을 따라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나누고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을 몸소 체험하도록 예수님께서 시범을 보여주신 거죠. 그런 정신을 성령오신 다음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대로 구연해 간거에요. 사도들이 그러니깐 예수그리스도는 보이고 그담에 교회는 어떻하죠. 안보여요. 그러니깐 어떻하죠. 예수그리스도는 보고 그담에 교회는 믿어야 됬어요. 믿음으로 볼수 있었다 이거죠. 근데 우리의 경우는 틀려 이제 예수님이 안계셔요. 부활승천하시고 그리고 영적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어요. 어디 예수님이 여기 계셔요? 사람들 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믿음있는 사람 모두 이렇게 진리를 깨닫고 새해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보면서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우리모두 봐요. 그러니깐 이건 어떻게 되는 거죠? 눈으로 교회를 보고 예수그리스도는 믿음으로 보게 되는 거죠
그러니깐 이게 중요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도들에게 자기를 보여주실때는 흠이 없고완전한 모습이였어요. 그러니깐 사도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지성의 한 개는 있지만, 어쩧든 성령 오신다음에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실때에 그 교회의 모습을 성령오신다음에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실때에 그 교회의 모습을 성령오신다음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함께 동행하면서 그런 교회를 만들고 싶어 했던 거죠. 그런데 우린 그렇게 안되고 이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의식을 못해. 근데 요걸 보고 아는거에요. 근데 문제는 요 무리를 보고 예수님을 알게 됬는데, 이런 무리들인 교회를 보여분 예수님은 완벽하신 분이셨는데, 완벽한 예수님을 보여줄 이 교회는 현실적으로 불완전한 교회에요. 그러니깐 인제 거기서 뭐가 나타나냐면, 이사람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서 똑바로 살면, 사람들이 이 교회를 보면서 빨리 예수님을 생각하는거에요. 빨리! 빨리생각하고 제대로 똑바로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근데 이게 상태가 않좋은 신자들이 많고 거짓신자들이 많이 섞여 있어서 눈에 보이는 교회가 이게 자꾸 부패하고 곪고 냄새나고 상하고 절뚝거리고 뭐 이러는 그 담에 뭐 이렇게 장애가 일어나가 지고 뭐 괜히 손이 머리를 쥐어 박고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발이 괜히 등을 차서 말이지 차서 등뼈를 부러트리고 이렇게 하면서 인제 마치 망가진 로버트처럼 이러는 거를 보며는 사람들이 인제 예수님이 생각이 안되는 거죠. 몸이 정상적으로 일치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 뭐를 생각하겠어요? 뇌의 기능이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든지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니에요! 그 생각없이 막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사람보고 우리 가끔 그러잔아요. 너 뇌가 없냐! 이렇게 애기 하잖아요. 그러니깐, 심지어는 그렇게 엉터리 같은 교회를 이렇게 보면서 없네~ 예수님 없네~ 예수님 믿고 예수님께 접붙혀서 되는 사람들이 사는데 일관성도 없고 지들끼리 대방 거리 물고 뜯고 싸우고 법정에 고소하고 말이지 치받아 가지고 막 그냥하고 어 그렇게 하면서 욕 짖거리하고 심지어는 주먹이 오가고 말이지 그러고 말이야 돌아다니면서 막 비방 하고 이러는데 없네~ 뭐 이사람들 모인데가 우리모인데하고 뭐가 틀 리가 없네~ 없어~ 애이 없어! 있는데 막 떠드는 거에요. 없어! 아주 확신을 갔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전도하다 보며는 어려운 사람들이 불교신자 다른 종교 믿는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게 예수믿다가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 그사람들 전도하기 너무 힘들어요. 그사람들은 없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에요. 심지어는 어떤사람은 그래 계셔도 안믿겠다고, 그?? 그럼 굉장히 선교가 어려워지는 거죠. 예수님은 안보이고 교회는 보이는 거죠.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서 예수님을 보여주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삼위하나님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삼위하나님을 보고 와서 그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그 삼위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게 인간의 본분이거든. 이게 첫 번 단추서부터 이게 안뀌어지는 거죠. 그러면 인제 그 교회가 하나님이 자기들을 부르신 그 교회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거기에 접붙혀져 있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자기를 구원해 낸 하나님의 뜻대로 못살게 되는 거죠. 그러니 그 하나님의 자기를 구원하신 뜻대로 살아야지만, 영혼에 안식이있고 인간의 행복이 있고 거기에 인간이 태어난 보람이 있는데 그렇게 살지를 않으니깐 내적으로는 수많은 갈등과 죄에서 벚어날 수 없고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고백을 하면서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불의 저지르고 악하게 살아가게 되는거요. 그래서 결국은 예수를 믿은 보람이 거의 없는 핍절의 삶을 살게 되는 거죠. 그러니 이 모든 것이 교회의 상태와 맞물려있다고 생각하니깐.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숙제 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면 교회가 보여주어야할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 때 그 교회를 통해서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그리스도가 살아게심을 믿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자들 뿐만 아니라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을 까?그거 였거든요 첫째는 뭐냐하며는 까리따스로 충만한 자기 자신을 보여주어야 하는 거죠 까리따스는 지순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이 뭐든지 하실수 있는 분이니깐, 자기 아들을 구지 사람의 몸을 입어 이세상에 내려보내시지 않으시고도 우리를 구원하실려고 맘을 먹으셨다면 구원하셨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런데 하나님이 친히 자기의 외 아들을 이세상에 내려 보내셨어요. 또 한번 양보해서 그게 아니라 예수님이 반드시 사람의 몸을 입고 죽으셔야 했다고 결론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내려오시자마자 말구유로 가지 마시고 바로 십자가로 가시면 되잖아요. 근데 그렇게 안하시고 33년이라는 긴생에동안에 멸시와 욕을 당하면서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으시면서, 33년을 살게 하셨어요. 솔직히 33년 예수님이 사시는 동안에 예수님이 한번이나 당신 자신의 존재에 어울리는 대접을 받아 본적 있어요? 그런 보람있는 생애를 사신적 있어요?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하면 반역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픽박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생명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죽일 궁리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잖아요. 그런데도 사람의 몸을 입으셔서 이세상에 내려보내신 이유가 뭐 때문이지 알아요? 그게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몸을 입은 예수님으로 실제 우리와 똑같은 세상에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사시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이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 지를 주님이 본보기가 되도록 우리에게 보여주신거에요. 그거를 이책속에 길이 담으시고 그걸를 몸소본 사람들이 교회의 터를 놓게 하신거에요. 사도들이에요. 그 터를 놓게 하신 거에요. 그래서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생애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어야 됬어요. 그렇게 하게 하신거에요. 그리고 우리에게 ?? 떠오르는 거죠. 만약에 예수님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그런식으로 보내지 않으셨다면, 우리린 그런생각 못하는 거죠. 우리가 상태가 좀 않좋을 때에도 우리가 정신이 들게되며는 그런생각하죠. 아 지금 내자리에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이렇게 않하셨을 텐데.. 또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하나님뜻대로 살려고 하는데 너무 힘들어요. 고통이 자기를 너무나 찔러 그럴 때,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 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런 고백 못할 거 아니에요. 그속에서 우리들이 얻는 통찰과 위로가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님도 고난을 당하셨는데, 멸시와 욕을 당하셨는데, 시련과 아픔을 당하셨는데, 그 은혜로 구원받은 내가 아무리 나를 소진하며 사라도 예수님 발 끝이라고 따라 갈 수 있을까? 주님도 그러셨는데, 이 할 수 없었을 거 아니에요. 보여주신거에요. 그렇게 해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찬 자신을 이세상에 보여줄 때,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 안보이는 예수님이 믿어지는 거에요. 그 까리따스가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예수사랑 예수사랑 가지고 나타내 보여줄 때 되는 거죠. 그 어떤 불신자가 있었데요. 전도 대상잔데,아마 그 사람이 믿는 사람집에 초대가 됐든모양이죠 아이들을 둘인가 셋을 데리고 갔는데, 안믿는 사람도 마음이 너무 답답하면 누구에게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애기 저애기 털어놓는데 둘이서 이야기에 폭빠져서 애내들이 돌아다니면서 온집안을 개판으로 만들어 논거에요. 심지어는 변기에다 뭘 집어넣어 가지고 도기를 들어내지 않으면 알될 정도로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막 이렇게 굉장히 난리를 처 놓거요. 그러니깐 그래도 다 교육받은 사람들이니깐 이치를 알잖아 애기에 정신이 빠져서 이야기를 했지만, 그집에 너무 많은 손해를 입힌거야 그래서 미안해가지고 몰라하는 데, 구김이 하나없는 얼굴고 그집 부인만 그런게 아니라 그짐에 있는 딸까지, 나중에 온 딸까지 다 위로 하면서 아무 상관없다고, 그 불신자가 그것을 보면서 나라며는 이 상황에서 저럴 수 있을까? 자기하고 비교를 하는 겨죠, 나라며는 이상황에서 저럴 수 있을까? 오늘의 결론 예수 계시네, 그사람들은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는거죠. 나는 그렇게 못한다. 어 예수있네, 어디? 저사람 안에 있네. 그러니깐 보이는 사람을 통해서 믿어지는 거죠. 제가 언제도 한번 어떤 형제가 부동산을 감정하고 하는 그런사람인데, 하러 갔더니, 업자가 천오백만원을 다 낡은 돈으로 가방에서 꺼내 놓으면서, 탁 주더래요. 우리 한번만 봐주십시오. 이사람 싸인하나만, 잘해주며는 돈을 몇십억씩 더 대출을 받을 수 있으니깐, 어 그럼요. 잘해 드려야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뭐가 어려워서요. 제가 있는 힘을 다해서 잘해드릴께요. 그대신 이건 예수 믿는 사람이거든요. 그순간 그사람들은 예수있네, 이렇게 생각하는거요. 어 있네! 왜? 지금 있잖아! 저렇게 젋은 사람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돈을 그걸 밀어놓으면서, 잘해드릴께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해드릴께요. 돈받은 것 보다 더 잘해드릴께요. 근데 받을 수 없어요. 왜? 나도 받고 싶은데 내안에 예수가 계시거든요. 있네!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있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찬송들고 교회와서 눈물흘리는 모습을 보면서는 있네, 이렇게 애길 않하는 거죠. 왜냐면, 그거는 자기도 시어머니 하고 싸우고 속상하면, 부엌에 가서 우니깐, 왜 그런 생각은 안하는 거죠. 있네! 그렇게 이야기 하려면, 뭔가 자기안에 있는 그 놀라운 평안, 그게 바로 그런 충만한 카리따스로 충만한 자신을 교화가 보여주는 것이 이 사랑의 질서를 확장시키는 선교의 대의에요. 그니깐 잘해야돼, 그러니깐 뭐냐면, 여기서 뭐 그렇게 하나님의 막 선포하는 데, 아이구 제일 촌스러운게 그거에요. 우리교회 가서 우리목사님 설교 한번 들어보라고, 이 얼마나 시시한 전도에요! 그게 뭐에요. 그게 그렇게 하는게 아니고, 자기 안에 살아계신 예수를 보여 줄수 있어야지. 그걸 보여줄수 있어야지. 그렇게 하면서 사람들에게 그걸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때 예수의 사랑이 확장되어 가는 거거든요. 또하나 보여 줄것이 뭐냐며는 일치로 충만한 자신을 보여줘야돼요. 그게뭐냐며는 존재의 목적이 통일 되게 나타나게 되는 거죠. 예를 들자면, 이러잖아요. 설교하다가 목이 말라요. 잘보세요. 목이 말라요 그래서 물을 마셔야 되겠잖아요. 근데 온 기관이 움직이는 거죠. 먼저 눈이 어여기 물있구나 봐요. 그담에 손이 이렇게 나가죠 그죠. 손이 이렇게 탁 들어요. 그러니깐 여기서 컵의 차가운 기운이 온몸에 짝 느껴지면서 전달하는거에요. 이게 뜨거운 물이 아니고 찬물이다. 이애기를 해주는 거에요. 그러니깐, 후루룩 후루룩 마실 준비를 입 하는게 아니라 쫙 마실 준비를 하는 거죠. 불어서 마셔도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리는 거에요. 그리고 이제 목이 물을 기다리는 거죠. 들어요. 이렇게 올라가는 거죠. 그리고 고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쭉~ 그리고 들어오면, 벌려요. 쫙~ 벌려요. 이러는데, 물 갔잖아 이사람아 입벌려 그렇게 안하고 이렇게 이거는 슬로우 비디오로 일어나는 거죠.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 이렇게 ^^ 슬로우 비디오고, 이거는 일치에요. 온몸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쫙 해서 움직여서 하나도 손가! 입벌려! 고개내밀고! 자라처럼 빼! 그렇게 안하고 그냥 이렇게 움직이는 거죠. 그걸통해서 뭐냐면, 이사람이 정상적인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이는 거죠. 그러니깐, 교회도 보는 데, 사람들이 볼 때 그렇게 움직일때에 비로서 아 이게 뭐가 일치하게 움직이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거죠. 그런생각을 하게 되지, 이게 중구난방으로 막 움직여서 일치된 목적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될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 없네! 그렇게 딱 결론을 내리게 되는 거죠. 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그냥 그져 축구좋아하는 사람이 조기 축구 하듯이 예수좋아하는 사람들이 예수 동호회라고 이렇게 모여서 이렇게 그냥 이렇게 취미생활 하듯이 그렇게 하는 구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실제로 제가 목회를 하면서, 재미있는게 뭐냐며는 한집안에 회심의 역사가 동시에 일어날 때, 여러 가지 경우가 있는데, 인제 어떤경우에는 이래요. 한 집에 예를 들자며는 네 식구가 사는 거야 근데 제일 먼저 남편이 가서 말씀을 듣고 그 몇 달 교회를 다니면서, 완전 변해서 새사람이 되는 거야. 그러면 온가족들이 야! 니네아빠, 요세 좀 변하지 않았냐? 매일저녁 일찍 들어오시지않냐! 허긴 그렇네요. 맨날 술먹더니 요세 술도 안먹고, 둘째가 있다는거야, 그건만이 아니야! 아빠요세, 매주 교회가잖아~ 요세는 빠지는 때가 거의 없어. 옛날에는 갈때가 거의 없었는데, 어! 진짜! 그렇네~. 이런거죠. 사람이 아주 신중해지고, 기도하고 성경읽고, 이게 그모습이 쪽~ 보이는거죠. 그때는 인제, 식구들이 아빠를 이렇게 원숭이 보듯이 보는거죠. 아이고 그리고 인제, 다들 그러죠. 부인도 몇일니나? 그러다가 이 남편이 은혜를 받아서 점점 깊어져, 그러더니 둘째애가 가가지고 변화받고 와가지고 눈물을 펑펑흘리면서 엄마 나 예수님 만났거든. 그런거죠. 엄마 인제 불안해 지기 시작한거야. 그래서 첫째까지 가가지고 뒤집어지고 수련회와가지고, 엄마, 엄마, 정신차려, 엄마 이렇게 살면 클라~ 엄마, 정말 정신차려, 그리고 여보 우리 예배드립시다~ 이러니깐, 예배는 뭐, 지금 텔레비전하는 시간인데, 텔레비전에 벌렁누워가지고, 침대에 벌렁 누워서 팅! 하고 리모컨 키고 한참 연속극 커져가는데, 읽어가는데, 거실에서 말이지 셋이서, 울면서 기도를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때부터 인제, 이게 두렵기 시작하는 거죠. 두려움이에요. 어디에서 오는 두려움일까요. 살아계시네! 거기서 오는 두려움이에요. 하나님 진짜 있구나! 하나님이 없다면, 식구들이 어떻게 순식간에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그게 생기는 거죠. 당신 예수믿어! 예수 안믿으면 큰일나! 예수믿어서 성공한사람 다섯사람 안믿어서 망한사람 내가 애기해줄까? 그런애기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부인이 물어보는 거야. 여보 진짜 예수님 계셔? 당신 진짜변화되니깐, 어떻게 돼? 마음이 어때? 이렇게 물어보는 거에요. 이게 가장 훌륭한 선교에요. 정말 훌륭한 선교에요. 여러분들이 집에가서 저는요. 잘 모르지만요. 우리 남편보니깐, 확실히 하나님 살아계셔요. 그러면, 그게 진짜 예수믿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되는 거죠. 그런 일치를 보여주도록 되는데, 이 일치라른게 뭐냐면, 기계적이니 일치가 아니에요. 기계적인 일치가 뭐죠? 획일화 하는거요. 이북사람들이 데게 획일화 잖아요. 방송할 때, 자꾸 바뀌는데 목소리는 똑같애. 왜 그렇게 하는지 나는 이해가 안가요. 똑같애. 그런것들이 획일화에요. 그래서 교회에는 그런 교회의 일치는 그런 일치가 아니에요. 근데 우리는 교회에서도 이렇게 볼 때, 일치를 생각할 때, 기계적이고 비인격적인 일치를 생각하는 거죠. 뭐 예수믿는 사람들은 어때야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되고 이렇게 딱, 규격을 갖춰서 생각을 하잖아요. 근데 그런 일치가 아니라 이 일치는 그런 일치가 아니라 하모니의 일치에요. 하모니의 일치라는게 뭐냐며는 악기가 여기에 수십개가 있는데 악기를 연주할 때에는 그 악기가 다른 악기하나를 정해놓고 그 소리를 내려고 애를 쓰지 않아요. 피리는 피리소리내고, 컨트라베이스는 컨트라베이스 소리를 내고, 바이올린은 바이올린 소리를 내고 그것도 펄스트 바이올린 쎄컨발이올린 소리를 가각 다른 소리를 내, 심지어는 작곡자가 작곡 할때에도 똑같이 안가고 다 틀리게해. 그러면 각자 자기 가는 거야. 근데 그거를 다 엮어가지고 하모니를 연출하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만약에 그렇게 연주가지고 똑같이 연주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럼 뭐 군대에서 들리는 군가처럼 들리겠죠. 그렇게 아름다운 하모니가 나는 게 아니라.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음악중에 하나가 뭐냐면, 남자들이 한 여덟명내지 한 이십명이 명에서 부르는 복사 중창이요. 나는 그걸 굉장히 좋아합니다. 아주 신비할 정도로 빨려들어갈 정도로 인간의 목소리가 최상의 악기에요. 그니깐 바로 하모니에요. 같은소리를 내가지고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행진하면서 부르는 군가 밖에 안나와요. 근데 하모니가 울려퍼지면서 그렇게 오랬동안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거죠. 교회에는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니깐, 왜 너는 왜 나처럼 기도할 때, 경건한 사람이면,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위로 들고 얼굴을 땅에 대고 그렇게 기도를 해야지, 그러고 너는 기도할 때, 나처럼 말이지 성경에 보면 부르짖으라, 이렇게 되었는데, 소리도 그렇게 못내고, 혼자서 그렇게 기도하냐, 너는 기도할 때, 분명히 마음을 토해놓으라 했는데,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기도를해야지 너는 왜 그렇게 글짖기 하듯이 예쁜 글 읽듯이 그렇게 기도를 하느냐 사람들이 자꾸 그러거든요. 근데, 그 다양성을 다 인정을 하는거에요. 그러면서 하모니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깐, 내게 부족한 것을 그사람들이 체워주면서, 교회전체적으로 하모니가 되어서, 온사람들을 꺽지않고, 온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은사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와주고, 단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까리따스를 가지고 그것들을 구연하게 하고 저사람이 나와 다른 뭐가 있으며는 항상 저사람 때문에 내가 도움을 받겠구나, 우리교회가 부족한 것을 저사람 때문에 보탤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해야지, 우리교회 너같이 튀는 사람 필요없어. 그러면 안되죠. 좀 튀면 어때, 천장이 좀 낮아서 좀 걱정이지만, 튀어도 괜찮아. 그렇게 해서 얼마나 좋아, 그러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교회가 만들어 가는 거죠. 이런 일치를 교회가 보여줄 때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믿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인제. 결국은 신자의 영혼과 마음이 강조가 되는 거에요. 교회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아름다움이 문제가 되는 거죠.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이 에베레스트 산이라는건 동의를 하지만, 그게 제일 예쁜 산이라고 하면,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죠.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아도 그산보다 참 많구요. 오히려 작은 산들중에 아름다운 산들이 참 많이 있잖아요. 그러니깐 마찬가지죠, 생각해보세요. 그런 웅장한 강이 제일 아름다운 강이다. 그렇게 말할 수 없구요. 큰 것이 아릅답다구 말할 수 없어요. 오히려 독일 속담에는 작은 것이 아릅답니다.라는 속담이 있어요. 작은건 뭐든지 아릅답잖아요. 예를 들면, 팔뚝만한 쥐! 느낌이 어때요? 오 뷰티플 그래요? 느낌이 어때요? 팔뚝만한 쥐, 두러 누워 낮잠자는데, 내 배 밟고 지나가다. 어때요. 우리 옛날에 어렸을때는 쥐가 천장에 늘 많았거든요. 이렇게 어느날 친구네 집에 가서 자는 데, 자는데 뭐가 툭 떨어졌어요. 봤는데, 금방 태어난 빨갛고 예쁜쥐 한 다섯 마리가 떨어졌어요. 다달렸어요. 발도달리고, 눈도달리고, 귀도달리고 다달렸어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막 꼼지락 꼼지락 거려요. 그러더니 우리가 자고 일어나니깐, 그 집에 동생이 그걸 실 묶어서 논다고 또 목에다 다 실 묶어가지고 자기가 키운다고 말이죠. 얼마나 귀여워요. 배 발고 지나가는 팔뚝만한 쥐 보다 훨씬 났잖아요. 얼마나 귀여워요. 그러니깐, 작은게 오히려 아릅답잖아요. 뭐 크고 작은건 우리 맘대로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교회의 가치는 큰거 아니에요. 그래서 뭐 크다적다 라는 거 획일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며는 그사람들을 잘 돌봐야 하니깐, 교회도 넓히고 의자 석수도 크게 만들고 이렇게 해야 되겠죠. 교회가 그렇게 커져서 건강하기만 하면, 큰 몸이 되니깐, 그죠.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교회가 이렇게 해낼 수 있잖아요. 그런면에서 나름대로의 유익이 있죠. 그건뭐 우리가 결정할 건 아니지마는 그러너 인제 기본적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자체가 아름다움에 두어야 되요. 아름다운 교회인가? 추로하고 큰교회를 원하느냐,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를 원하느냐, 일초라도 망설일 필요가 없는 거죠. 작더라고 아름다운 교회가 참 좋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에게 영적인 스승이 되시는 죤오웬 목사님이 자기의 책속에서 교회의 규모를 애기하면서, 그져 마음대로 할 수는 없지만, 할 수 만 있다면, 교회는 이백명에서 오백명정도의 싸이즈며는 가장 좋겠다 그렇게 썼어요. 근데 저는 그것도 많은 것 같아요. 오백명도, 그러고 싶어요. 저는 정말, 그래서 정말 그러고 싶어요. 그래서 어떤때는 교회가 너무 힘들고 어려울때는 그런 생각도 했어요. 아이 ?? 근데 문제는 뭐냐하며는 중요한 것은 뭐냐하며는 이 아름다운 것이 중요한거에요. 교회의 아름다운 이라는 게 뭐냐? 건물의 아름다움이나, 이런게 아니라, 거기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의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그 이룬 연합의 아름다움이에요. 영혼의 아름다움이에요. 그러니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어떻게 되야 되겠어요? 영혼이 끊임없이 세가지 삼위일체적 삶을 이야기 했죠!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고, 그담에 쇠신되고 세로운 진리를 발견하고 영혼이 영혼됨으로 꽉 찬 변화가 한사람 한사람에게 일어나서 이것이 공동체 적으로 모두 새로워 지는 거에요.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고 함께 모여서 드리는 기도회가 이런것들이 중요한게 뭐냐하며는 이 한 몸으로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함께 영혼의 찌꺼기들이 빠져나가면서 순전해 지는 거에요. 그때에 이제 교회전체적인 예배를 잘드리고 나며는 영혼이 아주 맑고 깨끗한 영혼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잖아요. 그렇게 쇠신되어 가야되요. 그래서 끊음없이 밖에서 안에서 밖에서 유혹하고 안에서 부패성이 역사해서 우리가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하는거죠. 사단의 유혹도 있어. 끊임없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면, 교회전체적인 영혼이 아름답지 않는데, 까리따스의 사랑이 깃들 수가 없어요. 까리따스의 사랑이 깃들기 않는데, 성도들을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고 섬긴다고요! 어느 정신나간 사람이 그렇게 하냐 이거죠. 안한다 이거죠. 자기사랑이 꽉 차 있는데, 누가 그러겠어요.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죠! 교회 전체적으로 이게 병들고 추루해 지게 되는 거죠. 그러면 교회전체적으로 실제적인 연합이 끊어지는 거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 공동체가 모여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어요, 그리고 신자의 삶이 각기 병들기 시작하는 거에요. 교회가 시험에 들어봐요 거기에 매달린 성도들이 다 시험에 들기 시작해요. 시험에 들기 시작한다고. 그리서 중요한 것은 교회의 영혼의 아름다움 이에요. 그거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면서 자신의 추루함이 교회의 아름다움을 해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그게 진짜 예수의 몸에 접붙혀진 사람이 가져야 될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움이 나타나면, 그 교회가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은 신자의 마음을 통해서 그걸 보여주는 거에요. 신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이노력은 아주 중요한 거죠. 마음 지킴이라는 교리 책 속에서 이미 제가 다 밝혔어요. 그런 마음을 자기가 끊임없이 지키면서, 그러면서 분투하고 싸워서 그 마음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언제든지 사용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것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거죠. 그런 사랑안에서 성도들이 계속 자라가야 하는 거죠. 그런 사랑안에서 성도들이 계속해서 잘라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성장이에요. 하나는 정화 됨이에요. 무슨 뜻이냐하면, 영혼안에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과 경향성들이 이런것들이 자꾸 흐트러지고 이질적인 경향성들이 생겨나는 데, 이런것들이 다 빠져나가고 온영혼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꽉 차는 것이 정화 되는 거죠. 풍성해 진다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이런사랑이 아주 충만하게되어서 그래서 하나님 자신만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찬 상태가 되는 거야.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이외의 다른 것들에대한 사랑은 점점점점 시아에서 멀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또렷하게 하나님만 사랑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교회를 섬기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에게만 관심이 있어서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데로 자기자신을 봉헌 하려고 하는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점점점점 더 집중될 때 그것을 사랑의 풍성함이라고 하는 거에요. 분산이 많이 됬을 경우에는 즐거울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데, 고난이 오면 때려쳐요. 때려친다고요. 근데 주님을 많이 사랑하면, 고난이 와도 그것을 참고 견뎌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자신의 안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이 없는 삶을 자기가 생각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니깐 어떻게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 하는 거죠. 그렇게 하며서 하나님 한분을 향한 사랑으로 점점더 집중 되는 거에요. 그때 그 사랑을 풍성해 진다고 이야기 하는 거죠. 그렇게 될 때에 이제 이 교회는 점점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인제 마지막으로 생각해 봐야 될 것은 뭐냐하며는, 이러한 신자의 영혼과 마음이 강조가 되지만는 인제 신자의 영혼과 마음이 그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차있어야 되지만, 또한 동시에 공동체로 한 몸을 이루는 교회가 어느 시점에서 같은 생각과 마음을 품어야 된다는 것을 어제 장시간에 걸쳐서 여러분들에게 논증해 보여줬어요. 그죠. 그래서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뭐 이것저것 모두 해야 되지만, 어느 시점에서 우리 개인에게 너 요즘 왜 기도 않하냐? 또 시간이 지나가면, 너 요즘 왜이렇게 정직하지 못하냐, 또시간이 지나가면, 너 요즘 왜이렇게 게으르냐? 이렇게 때에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메시지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이 교회를 향해서도 그런게 있다 이거죠. 그러니깐, 너희들은 같이 모이기만 했지만, 사는 건 그냥 니네 아라서 각자 살아라. 그러시지 않고 교회가 한 몸으로서 느끼는 거죠. 이런것들을 전달 해주는 것이 바로 강단의 사명이에요. 거러니깐, 자꾸 요구하면, 안된다라고 하는 애기가 바로 그거에요. 기도하면서 항상 그런 분별력을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주시도록 하면서 그러면서 기도하는 거에요. 듣고 싶은 설교 주제가 있으며는 기도를 많이 하세요. 그럼 제 마음을 움직여서 글로 갈꺼에요. 왜? 그 메시지가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그러니깐,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느시점에서는 교회를 향해서 그냥 순졀해 지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시는 거죠. 그때에 모두 자기가 분결하다라고 하는 것을 회개해요.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는데, 깨달음도 별로 없이 어떻게 회개가 되기는 됐는데, 이사람은 뭐 직장 떨어져서 서러워 울고, 저사람은 뭐 성경 안 읽는 다고 울고, 저사람은 자식이 속쎄긴다고 울고, 뭐 이런식으로 되면, 아무리 울고나도 이데 일치가 안돼 근데 어느 순간에 순결하라! 그러고 막 이것 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메시지가 준엄하게 주어지고, 순결하게 살기 위해서 고난받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막 위로 하시는 거에요. 그때 사람들이 다른거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자신의 문제로 떠오르는 거야. 맞아! 내가 지금 이런문제 저런문제 다있지만, 이건 결국 내가 순결하지 않아서 생긴문제야! 그러고 떠오르는 거야. 이제 수면위로 다! 사람은 각각 처한 상황은 틀린데, 그것을 중심으로 다 떠오르는 거야. 그래서 회개를 하는 거죠. 하나님 내가 순결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뭐 어떤 사람은 성적 순결을 회개하고 어떤사람은 직장에서 부정한 것에대해서 순결하지 못했다고 회개하고, 어떤사람은 가정에서 말이지 잘못한것에 대해서 순결을 회개하고, 학생들은 학교가서 컨닝한거를 회개하면서 순결을 기도하고, 이렇게하면서, 결국 각자에게는 다르게 적용이 되는 거죠. 근데 점차적으로는 같은 메시지가 주어지는 거에요. 그때 어떻게 되냐며는 교회전체적으로 불결을 털어버리고 예수의 몸인 전체의 교회가 순결하게 다시 거듭나게 되는 거죠. 이제 이해가 가죠! 그러니깐, 절대로 강단에서 선포하는 이 메세시는 너무나 보편적이기 때문에 나같이 아주 특수한 상황에 있는 사람의 삶은 다룰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상담이나 통해서 다루어질 문제지, 이렇게 수천명을 놓고 선포하는 이런 메시지 속에 내가 보편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내가 너무 유별란 상황에 있기 때문에 그건 안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비 성경적인 생각이라 이거죠. 절대로 그렇게 되는게 아니라 이거죠. 절대로 그렇게 되는게 아니라 이거죠. 심지어는 어떤 일이 있었냐며는, 제가 헌금 설교를 딱 두을 번했어요. 헌금 설교할 때 회심한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깐, 그러죠 하나님이 하나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또 어떤때에는 지금같이 너! 예수의 몸이 이게 몸이다. 그렇게 설교하는 거에요. 그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어! 지금 나에게는 교회가 문제가 아니고 사업이 문젠데, 어떤사람은 사업도 문제가 아니고 교회도 문제가 아니고, 지금 우리애가 문젠데, 아, 우리애도 문제가 아니고, 남편이 문젠데, 뭐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난 몸이 아파 죽겠는데, 이런 식으로 다양한 상황을 가지고 왔는데, 하나로 보는 거야, 관계를 보는 거야, 아! 그렇구나, 내가 사업이 계속 어려움이 오고 이랬는데, 아~ 이게 교회와의 관계가 잘못됬구나. 회개하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면, 어느쪽으로 들어가느냐만 차이가 있는 거지 그 쪽으로 말씀이 들어가서 그를 전체적으로 고치는 거에요. 어느 한부분을 고치는게 아니에요. 그러니깐, 어떤사람은 고칠 때 약바르기도 하고 어떤사람은 근육주사도 놓고 어떤사람은 혈관주사 놓고, 어떤사람은 입벌리라 그래가지고 속에다가 물약 쑥 집어 넣기도 하고, 별 다있잖아요. 그러니깐 다른 방식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렇게해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몸인 하나의 사람 하나의 교회가 하나의 사람이잖아요. 예수님 머리로 하는, 그 하나의 사람으로 다루시기도 하고 그걸 또 각자로 다루시기도 하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바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개인이 그렇게 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에서의 진실한 참회가 있어야 된다는 이거죠. 각자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예수님의 뜻에 자기를 부합시킬 때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듯이 공동체 적인 깊은 자기깨어짐을 통해서 일치가 촉진이 되는 거죠. 여기에서 참된 까리따스가 이제,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가지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그렇게 진실하게 참회하게 될 때, 그때에 교회의 몸을 더럽히고 힘들게 했던, 모든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게 되는 거죠. 동시에 함께 버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개개인의 삶이 정결해 지고 동시에 같은 메세기를 듣고 같이 버리게 되니깐, 교회몸 전체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거죠. 그걸 버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깐 몸전체가 사랑을 받게 되는 거죠. 그러니깐, 신자 개개인이 받는 사랑은 몸전체가 받는 사랑안에 있는 거라 이거에요. 왜냐하며, 내가 회개 하기 전에 이미 예수의 몸에 접붙혀 지니깐. 접붙혀지니깐. 그 몸안에서 이루어 지는 거죠. 오늘 날 사람들이 많이 잘못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이지점이에요. 그게 뭐냐하면,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그렇게 함께 뭐가 되는 것 그거는 나에게 있어서 관심사가 아니에요. 문제는 뭐냐면, 나! 내문제 어려운데, 나! 나! 나! 계속해서 그러고 가는 거에요. 해결이 안되는 거죠. 필요한 만큼 교회를 이용하다가 힘들며는 사요나라! 떠나는 거죠. 떠날때는 이미 까리따스를 다 털어먹은 상태에서 떠나기가 십상이에요.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상처주고 이러면서, 그래서 교회의 몸을 아프게하고 떠나. 떠났어도, 그는 장소를 떠난거지 몸은 붙어있는거 아니에요! 전체적으로 우주적인 교회에 붙어 있는거 아니에요! 그러니깐 그 속에서 예수의 몸을 계속 찌르면서 자기는 복을 달라 그러는 거죠. 자기몸을 찌르면서 복을 달라 그러는 거죠. 그러니깐, 안되는 거죠. 근데 그가 공동체 적으로 깊이 함께 회개 하고 나면, 그러니깐, 개개인이 하나님앞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것보다 백배는 더 중요한게, 공동체가 모두 모였을 때 한마음으로 회개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거에요. 이거는 백배나 더 중요한 거에요. 이거는 백배나 더 중요한 거에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 공동체적으로 함께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모두 함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한 형제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거에요. 이런까리따리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그때에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서 두가지를 배푸는데 있어서 충만한 자원을 소유하게 되는 거죠. 하나가 뭐냐하며는 용서! 두 번째가 뭐냐하며는 나눔! 이에요. 나눔. 용서와 나눔이 생겨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 까리따스의 핵심이 뭐냐하며는 용서를 통한 까리따스의 경험이에요. 용서를 통한 아가페의 경험이에요. 그래서 까리따스가생겨난거죠. 그러니깐 항상 예수님께서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은혜에대한 깊은 감격이 있는 거죠. 그러니간, 나에게 죄짖고 나를 아프게 한 사람들을 용서해 줄수 있는 거에요. 용서하는 과정이 아프긴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를 깨달음과 진리에 부합시키는 진실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사람이 계속해서 변화되고 그 변화가 공동체의 변화로 이어지게 되는 거죠. 또 마지막 하나가 뭐냐하면, 나눔이에요. 이거는 뭐냐하면, 이기심이 사라진데서 오는 나눔의 정신이에요. 이기심이 사라진 데서 오는 나눔의 정신이에요. 그래서 신자가 탐욕을 버리고 이기심을 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지체들의 죄가 나의 죄처럼 느껴 졌듯이 지체들의 자원의 부족으로 말미암는 고통이 내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들을 균등하게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는 거에요. 그렇게 살아서 몸전체가 골고루 누리면서 몸으로써 건강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을 하고 그 몸과 함께 즐거워 하는 거에요. 큰돈없고 많은 재산 없고, 부자 아니어도 그것 때문에 행복해 하고 그 때문에 예수의 한 몸이 되어서 기쁘게 살아가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사랑이에요. 이런 사랑의 질서를 확장해 나아가는 것이 선교에요. 그래서 결국은 결론을 내지자면 결국은 하사람의 신자의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처다보고 감격을 하거나 혼자 조용히 좋은 책을 읽으면서 어쩜 이사람 내 생각하고 이렇게 똑같을까. 위인들의 간증집을 읽으면서 어~ 정말 멋있게 살았어. 나도 이런 순교의 순간이 오며는 이렇게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것을 통하여 영혼의 아름다움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에요. 영혼의 아름다움은 그런 개인적인 차원에서 나타날 수 는 있어요. 여러분 자신을 너무 신뢰하지 마요. 미안해요. 너무 실망을 줘서. 별을 처다보면서 아~ 끝없는 우주.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에 대한 찬양이 가슴에 복받혀 오른다고 해서 그대들 안에 까리따스가 꽉 차있다고 나는 하나님 밖에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그렇게 남들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이야기 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지 말라 이거죠.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인 까리따스는 개인의 차원에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차원에서 입증되는 거에요. 그래서 그 공동체의 차원에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고 한번 사랑하기 위해서 한번 죽는 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죽여서사랑하고 자기의 소유를 털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지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자기스스로 가난해 지고 스스로 고통받는 자리에 내려가고 좋은 것은 지체들에게 더 좋은 것은 우리 주님께 안좋은 것은 자신이 짊어지고 교회의 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깊이 끌어안고 그렇게 살아가요.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해 해야되냐면, 진리가 그를 계속 비춰주고 있어야 되요. 그래서 인간이 이렇게 진리를 생각하는 것은 비용이 안들어가요. 근데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것은 피흘리는 고난을 통해서 합치 되는 거죠. 합치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 일생동안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 드려본적이 있어요? 하나님 이제는 저이거 사랑 안합니다. 드려보신 적 있어요? 일생동안 못고치던 태도였고, 아직도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태도인데, 예수님이 아파하시니깐, 전 이제 그것을 그만 두겠습니다. 해보셨나고요. 그것이 바로 진리를 합치 시키는 거야. 별을 보고 명상하고 간증집을 읽으면서 눈물 흘리는 것은 까리따스 사랑이 충만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근데 고난을 받고 피를 흘리면서, 예수의 형상 닮지 않은 자기를 진리 때문에 깍아 버리는 것은 진짜 예수 죽음에 고통에 동참하려는 예수의 환란과 오래참음에 동참하려는 지순의 사랑없이는 할 수 없는 거에요. 할 수 없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중요한 숙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에요. 많은 진리를 아는 것이 삶을 질을 보장해 주지 않아요. 제가 일평생 설교자로 부름을 받아서 죽는 순간까지 진리를 연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외치기를 여러분도 고대하고 있죠! 그러나 내가 그렇게 소명을 따라 살아도 그대들의 삶의 질을 보장해 주지 않아요. 추어도 보장해 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설교자가 보장하거나, 하나님이 보장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진리를 깨닫고 자기를 그 진리에 합치시키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는 여러분만의 눈물의 길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자기 죽음의 길을 가야하는 거에요. 거긴 아무도 없어요. 외로운 구도의 길이에요. 그게 바로 구도의 길이에요. 예수님만 합께 하셔요. 그렇게 걸어가는 거에요. 그래서 끊임 없이 깨뜨려지고 끊임 없이 새로워 지고 끊임없이 진리를 발견하고 그러면서 자기를 그 진리에 계속 합치시켜 가는 거에요. 가끔 선배 목사님들이 이세상의 목회처럼 행복한게 없고 자기는 목회하는 순간이 신이나고 행복하다는 애기만 들으면, 저는 항상 준욱이 들어요. 나는 아직도 이 목회하는게 남의 옷 입은 것 같고 그래서 목회는 항상 내가 원하지 않은 가슴아리이고, 그리고 설교는 이국의 언어에요. 그러나 자기가 죽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에요. 너무 너무 어려워요.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똑같은거에요. 그길을 우리 각자각자 걸어가는 거에요. 어디까지는 우리가 함께 가지만, 어느시점에서는 각자가 예수님 앞에서 걸어갈 수 밖에 없는 단독자의 삶을 살게 되는 거에요. 그 구도의 길 있는 사람들에게는 날이 갈수록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거에요. 물론 약할 때 있죠. 그리고 그러면 안되지만, 미끄러질 때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낙심이 되어서, 이젠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고난의 때도 있어요. 근데, 그런 구도의 길을 가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걸어가요. 때로는 넘어져도,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엎드려져 외로운 벌판에서 홀로 가슴아프게 가슴아리를 해도 그렇게 걸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은 반듯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사람들은 욕하고 손가락질 해도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 예수의 몸의 사랑스런 지체가 되어가요. 처음에는 불완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리안에서 지혜를 배우고 그 사랑안에서 까리따스를 배우면서 그래서 살아요. 그래서 온전히 예수오셔서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몸을 다 찢어 성찬으로 나누워 주신 것처럼, 그 유사한 삶을 살아갈 수 가 있게 되는 거죠. 왜냐하면,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그리고 그 피로 나를 건지셔서 자기 생명을 통해 삼위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신 그 예수 때문에, 그 예수님이 교회와 계시기 때문에 그 예수안에서 내가 한몸 되어서, 이 추하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 이 교회 안에서 삼위의 교통의 모상을 이루는 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에 걸어 갈 수 있는 것이죠. 잠시 지나는 인생길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나를 위해 너희들이 당하는 고난는 장차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을 믿으면서,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으며 그렇게 걸어가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하사람이 그렇게 걸어가요. 매순가 쓰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고, 미끄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 내가 예수의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지체들에게 사랑을 받는 다는 사실 때문에 격려와 위로를 받으면서 일어나요. 오늘은 내가 아파서 사랑하는 지체의 위로를 받지만, 내일은 저 지체가 아파서 내가 위로하고, 그래서 정말 사슴처럼 함께 기대어 살게 하시기 위해서, 어린 양들처럼 함께 목을 부비고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한 교회 불러 그렇게 놀라운 예수의 사랑에 접붙혀 주시는 거에요. 내가 지극한 예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목자된 마음으로 내가 말 할 수 없는 내안에 있는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권합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