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집에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 23:6)
녹취자:이병두
그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놀라운 행복을 간직한 채 감당할 수 없는 목자 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이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지켜주신 은혜 때문에,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바르신 은혜 때문에, 그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놀라운 축복이 시인의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감동을 받은 시인이 확신한 것은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를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고 인자하심이 일평생 자기를 추격해 올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미사일이 피하며 도망가는 비행기를 따라가서 결국 격추시키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기를 추격할 것이라고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염려와 근심은 거룩한 근심과 속된 근심으로 나눠집니다. 거룩하고 신령한 근심은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게 하지만, 속되고 세속에 속한 근심은 우리의 살과 뼈를 썩히고, 우리로 하여금 점점 불안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인격적으로 승복한 가운데 그 분을 전심으로 의뢰하며 사는 가운데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자신을 이 온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모든 잘못된 태도들이 결국, 그 사람을 점점 더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터 멀어지게 하고, 주님의 크신 은혜로부터 멀어지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요체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그 분께 맡겨 드리고, 그 분이 공급해 주신 은혜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야 말로 신앙의 진수이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녹아내리는 마음의 기도는 주님을 향한 경외심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의존, 그리고 주님을 향한 신실한 우리의 반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가 사라진 것은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않은 결백한 시인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따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라는 것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나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 속에서 시인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삶의 방식을 택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유기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의 관계입니다. 즉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집은 보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사랑은 보이는 하나님의 집과의 관계에서 투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랑은 하나님의 집에서 만나는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형체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이 태양이라면, 태양은 하늘 멀리 떠 있으면서 결코 지구와 맞닿은 적은 없지만 이 땅에 있는 모든 생물체들에게 태양의 효과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교회의 질서 속에서 그 사랑이 참으로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집이라고 다윗이 불렀던 이 집은 아직 성전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의 견고하게 세워진 하나님의 집은 다윗시대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솔로몬의 시대에 완공되었습니다. 다윗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사용하던 바로 그 성막이 여호와의 집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오벳에돔의 집에 있던 그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왔습니다. 성막이 있고 이 성막은 조립식 텐트로 만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아는바와 같이 성막은 주위에 둘러쳐진 하얀 천으로 된 울타리와 18평의 텐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18평의 텐트는 성막의 중심에 위치하고, 거기에는 다시 12평의 방과 6평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어 성소와 지성소라고 불리웠습니다. 주위에는 하얀 천이 쳐져 있을 뿐이며, 가운데 있는 이 성막의 덮개는 물돼지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햇빛과 비를 맞으며 칙칙해진 그러한 물돼지 가죽의 지붕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그저 천막에 불과하였고 초라한 장막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이스라엘의 영광이 있었으니 하나님이 바로 거기에 임재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동할 때마다 제일 먼저 이 하나님의 집을 옮겼고, 장소가 정해질 때마다 중심에 하나님의 집인 이 성막이 쳐졌습니다. 그리고 나면 열두지파가 그 성막을 중심으로 둘러싸며 진을 치고 그렇게 광야에서 주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성막 위에는 불기둥 혹은 구름기둥이 있었고, 그 구름기둥이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거기서 주님을 예배하며 살았습니다. 불기둥이나 구름기둥이 이동을 하면 그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성막이 제일 먼저 이동하였고, 장소가 정해지면 또다시 진을 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랑과 경외심은 보이는 성막을 향한 존중으로 나타났고, 거기서 그들은 하나님이 율법에 정하신 규례를 따라 속죄의 제사를 드리거나 헌신의 제사를 올리면서 그렇게 믿음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이었습니다. 성막이 있고 그 주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거지가 결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약시대의 성막사상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가진 채 신약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연결되지 않는 중요한 성전의 개념은 제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일시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이 열리는 그러한 사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한 제물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영원히 단번에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짐승을 죽여서 드리는 제사가 필요 없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매번 용서를 받고, 복음 안에서 우리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써 예배 올리게 됩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늘의 자원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혼이 소생된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의를 따라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연속성과 함께 연속성도 있으니, 이는 바로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보이는 성전 안에서 함께 만나는 언약 백성들 속에 그 지평 속에서 입증 되었듯이 신약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성도 안의 넘치는 사랑은 보이는 교회 안에서 눈에 띠는 형제들 속에서 가시적인 교회의 질서 안에서 입증되어야지만 그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참 진실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느끼는 모든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느끼지 못한 모든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주님을 향한 사랑은 아주 조금 밖에 없는데, 느낌상으로는 매우 크게 다가올 수도 있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데, 그 느낌은 비교적 적게 다가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사랑을 모두 감정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이것은 사실 옳은 사랑의 정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은 다분히 이성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거기에는 그렇게 사랑하는 그 사랑의 열매가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이런 모든 아름다운 인격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싸움이나 하고 송사나 하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헐뜯고 하는 이런 모든 불결한 모습은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부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의 공동체 속에서 그 존재가 입증될 때 비로소 그것이 정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만약에 진실로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여러분 마음 안에 끊임없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불붙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이 여러분이 보이는 공동체 속에서 충분히 입증될 수 있도록 그렇게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또한 여러분도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장 즐겨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고 또 하나는 머리와 몸의 관계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바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신비적인 연합의 관계인데 이것이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라고 말입니다. 성경에서 더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 비유는 다름이 아닌 몸과 머리의 비유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나머지 모든 성도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 신자들은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 자기 혼자 예수님 만나서 일대일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사실은 더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신자 개개인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예정된 그리스도의 몸을 시간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작정의 실현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자마자 그리스도의 몸에 실제적으로 접붙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한 몸을 만들어 가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실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태어날 때 공동체 속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후로 그는 결코 떨어질 수 없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몸의 한 부분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그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구원은 얻은 줄은 알고, 자기 옆에 함께 구원받은 지체들이 있는 것을 모른다면 그의 구원은 진실한 구원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리이시고 교회가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어는 길거리에 있는 건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러한 보이는 지역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부활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구원을 얻은 모든 성도들은 바로 그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하나의 거대한 교회를 이룹니다. 여기에는 인종과 교파의 구별이 없고, 심지어는 시대의 구별도 없습니다. 모두가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의 교회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몸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보편교회, 혹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교회라고 부릅니다. 그 모든 교회들이 하나로 되어 있고, 그 모든 교회가 한 몸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몸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머리이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곧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향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머리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고, 팔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고, 가슴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화) 우리 집에 딸이 있는데, 이번에 대학을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저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도 항상 이렇게 외국에 집회 오면, 통화를 합니다. 빨리 오라고 합니다. 네 살, 다섯 살 이때 쯤 될 때입니다. 집에 가면 이렇게 뜨겁게 포옹을 합니다. 그러고 이제 물어봅니다. “아빠 보고 싶었어?” “응” 곤란한 질문을 제가 합니다. “아빠 어디가 제일 보고 싶었어?” 그러면 아이가 말을 못하니까 손으로 눈, 코, 귀, 입, 가슴, 다 찌릅니다. 그러니까 다 보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보고 싶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고, 그 몸인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참답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입니다. 여러분이 잡지 같은 것을 읽으면서 멋있는 탤런트 나왔을 때 ‘이야! 이사람 멋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충분히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교회를 어머니라고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을 안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사랑할 교회가 없다고 하는 것은 정말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자기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교회가 있고, 그 교회 속에서 날마다 이 모든 보이는 교회가 아닌 하나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충심으로 사랑하고, 그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사는 그런 신실한 신앙생활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존경하는 목자가 있습니까? 섬겨야 할 지체들이 있습니까? 피붙이와 같이 여겨지는 교회의 성도들이 여러분 곁에 늘 있어서,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감으로서 여러분이 날마다 예수를 더 닮아가고 있습니까?
(예화) 지금부터 한 30년 좀 넘는 이야기입니다. 전주에 있는 어느 한 기독교 병원의 원장실에서 머리가 벗겨지고 연세가 많이 드신 의사 선생님 한 분과 한 50대쯤 되어 보이는 시골 남자 한 분이 무엇인가 서류를 손에 들고 서로 언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시골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집사님 이였습니다. 원래는 그 교회의 목회자가 있었는데, 교인이 열 서너 명 밖에 안 모이니까 도저히 생활 하실 수가 없어서 다른 목회지로 떠나셨습니다. 가난한 시골사람들이 모여 사는 교회이니 열댓 명이 헌금을 해서 목회자 한 사람의 생활을 책임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를 부를 능력도 안 되고, 오겠다는 목회자도 없어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집사님이 제일 연장자고 오래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기도회도 인도하고, 찬송 인도도 하다 보니까 목사님 오실 때까지라고는 했지만, 결국 주일 예배까지 인도해서 목사도 아닌 사람이 목회도 아닌 목회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텐트로 쳐진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음이 너무 상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이 집사님은 어느 날 자기는 이렇게 편안한 집에서 먹고 자는데, 하나님의 집은 저렇게 텐트로 쳐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면서 성도들에게 성전을 건축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였으니 저 집사가 미쳤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목사님도 못 모시는 처지에 어떻게 무슨 돈으로 교회를 건축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집사님은 우리가 꿈에 그리는 예배당은 크고 화려한 예배당이 아니라, 벽돌이라도 몇 개 쌓아놓고, 천막이 아닌 곳에서 주님을 예배해야지만 되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하고 기도를 한 끝에 모든 성도들이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가서 일을 하고, 논일 밭일을 하고 밤에는 모여서 개울가에 있는 모래를 퍼다가 시멘트를 섞어서 손수 벽돌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블럭을 만들어서 예배당을 짓게 되었는데, 교인들이 십시일반 헌금도 하고 여성들이 폐품을 갖다 팔고, 근처에 있는 교회에 사정을 해서 보조를 좀 얻고 블록을 찍어 이렇게 벽을 사방을 돌려 쌓고, 위에서 나무로 갓쇼를 올려서 코르타르를 종이에 먹여서 만든 루삥이라는 재질을 가지고 지붕을 얻었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정말 초라해 보였지만 텐트 속에서 예배를 드리던 이 사람들에게는 대궐 같은 예배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무를 사다가 대패질을 해서 음식점에 앉는 것 같은 의자를 만들어 놓고, 강대상도 하나 나무로 짜서 궤짝처럼 얻어 놓으니, 옛날 컴컴하던 천막에서 드리던 예배당에 비하면 너무너무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이 좀 더 돈이 모이면 미장도 하고 벽도 발라서 색칠도 해서 예배당다운 예배당을 만들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일입니까? 큰 태풍이 불어오더니 하룻밤 사이에 지붕이 찢어져서 저 멀리 밭에 쳐박혔고, 한쪽 구석에는 물이 들어와서 결국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 예배당을 허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또 텐트를 치고 예배를 드리면서 사람들이 많은 실망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이 집사님이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를 하다가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왜?” “만약에 내가 장애인이 되도, 당신이 나랑 같이 계속 살아줄거야?” “당연하지, 당신은 내 사랑하는 남편인데.” 그렇게 말을 하자, 남편은 품속에서 꾸겨진 신문지 한 장을 꺼냈습니다. 신문지에 보니까 ‘눈을 삽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이 하는 말이 “여보, 저 무너진 예배당을 다시 짓고 싶은데, 돈이 없어. 그런데 여기 물어보니까 눈을 사겠대. 그래서 내 한쪽 눈을 팔아서 그 돈으로 우리 예배당을 다시 짓고, 그리고 거기서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소!” 그 때 부인이 얼른 가서 팔고오라 그랬겠습니까? “아니 집을 팔아서 건축헌금을 했다는 사람은 들어봤지만, 산 사람의 눈을 뽑아서 건축헌금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안 된다.” 몇 주간 동안을 부인을 설득했지만, 부인은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베게 잇을 적시며 잠이 들었습니다. 하다못해 부인이 그러면 일단 그 병원에 가서 알아보고 오라고 남편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 남편이 병원에 가서 원장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하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을 보여주면서 “이 눈을 내가 팔 테니, 내 눈을 가져가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이것은 산 사람의 눈을 사겠다는 게 아니라, 곧 죽을 사람이 자기의 눈을 기증을 하면 사례를 하겠다는 뜻이지 가족들에게 산 사람 것은 안 된다.” “제발, 제 눈을 사 가십시오.” 하도 실랑이를 하다가 “당신이 도대체 당신 눈을 팔아서 뭘 하려고 그러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러이러한 사정에 의해서 쓰러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고 싶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안경을 벗고 눈시울 붉히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한 교회의 장로입니다. 내가 한 교회의 장로여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당신은 일개 집사로 어떻게 그렇게 교회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 원장님이 직원들에게 방송으로 지시를 해서 점심시간에 필수적인 의사들을 남겨 놓고 모두 강당으로 모이라고 하고, 이 집사님의 아름다운 교회 사랑을 간증하였습니다. 그러고 그 자리에서 모금을 했는데, 이백만원이 걷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은 눈도 안 뽑고, 이백 만원을 들고 뛸 듯이 교회에 와서 교회를 모두 완공했습니다. 실화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누렸던 지위나 환경은 하나님이 관심도 없으십니다. “얘야! 너 지상에 있을 때에 뭘 하다 왔느냐?” “하나님, 제가 LA에 있는 제일 큰 세탁소 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대답을 듣고 싶겠습니까? “어떻게 살다가 왔냐?” “하나님, 제가 LA에 이민 와서 돈좀 벌었습니다. BMW7 시리즈만 계속 타고 다녔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답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천국에선 이렇게 초라해 보이지만, LA에 살 때에는 천만불짜리 저택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그런 것 물어보셨습니까?
(찬양)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땅위에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주님, 제가 지상에 있는 날 동안에 이런 사업도 하고, 저런 지위에도 오르고 이렇게 벌어먹고, 저렇게 사업을 하면서 살았지만 그것은 모두 껍질이요 수단일 뿐이었고,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주님이 내게 주신 큰 은혜를 따라서 제가 일평생 어느 교회를 섬기고, 그 교회에서 아이를 낳고, 그 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힘이 있는 대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고 목회자의 목회를 도우면 살았습니다. 제가 눈물로 섬겼던 교회가 지금도 저기에 있사오니 제가 이 천국에서 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저 교회에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런 대답을 할 수 있게끔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제 일생에 기억의 맨 끝자락은 한 네 살 때쯤 됩니다. 제가 그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희귀한 특권이었습니다. 시골 강원도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사업을 하였고, 저는 선교사가 세운 그 교회의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벌써 50년이 훨씬 넘은 세월이 흘렸는데도, 그 때 그 마루가 깔린 유치원, 빨갛고 파랗고 노란 나무벽돌들, 운동장에서 친구와 뛰어놀던 기억들, 유치원 끝나고 오는 길에는 노란 유치원 가방에 이름 모를 풀들과 꽃을 따서 담으며 뒷집의 계집아이와 함께 유치원에서 돌아오던 일, 그리고 겨울이면 얼음판에서 동네 형들과 함께 얼음을 지치던 일, 날리던 연을 바라보면서 박수치던 일, 모두 기억에 생생합니다. 손을 뻗으면 지지난주에 일어난 일 같이 잡힐 듯한데, 50년 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잠깐 지나가는 바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무엇을 남기고 죽으려고 합니까? 주님이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그 말 할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을 어떻게 감사하며 일생을 살아 오셨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그 크신 은혜 때문에 어는 교회가 여러분의 섬김을 받았고, 그리고 어는 교회가 여러분이 진심으로 섬기며 사랑했던 교회였습니까? 오늘 시인은 하나님께로 부터 받았던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목자 되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합니다. 그리고 그런 놀라운 은혜를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에, 그의 마지막 남은 소원은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들과 함께 우리 좋으신 주님을 높이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돈 벌어서 뭐 합니까? 돈 벌어서 교회에 바치고, 교회는 그것을 남들을 위해서 나누어주고, 공부해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섬기고, 좋은 재능을 개발해서 재능이 없는 사람들에 종노릇하고,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아직도 계셨더라면 섬기셨을 나의 사랑하는 지체들과 이웃을 나도 섬기며 예수님이 살아계셨더라면 끌어안고 사랑했을 사람들을 나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에겐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주님의 교회에서 받으면서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꺾고, 주님을 사랑하고 나를 버리고 이웃을 섬기고, 나를 죽이고 오히려 지체들을 살리는 일에 이바지 하며 살아서 나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유익을 얻고, 많은 지체들이 섬김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서 나는 사라지고, 지체들은 하나님 앞에 드러나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은혜를 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시면, 그것으로 무엇을 하시려고 합니까? 그런 놀라운 사랑과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여러분이 한 몸에 받았으면, 여러분은 주님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그 교회에서 여러분만 못한 사람들을 온 마음을 다해서 섬겨서 여러분이 그 교회에 있는 것이 그 교회에 있는 그 모든 지체들에게 행복이 되도록 그렇게 남의 행복을 위해 이바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으며,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사랑하며, 그렇게 매일매일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극복하면서 주님의 한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는 것이지, 인생이 뭐 그렇게 새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50년 후면 우리 중에 여기서 만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죽어서 마지막 장례를 지낼 때, 사랑하는 많은 성도들과 믿음의 후손들이 와서 여러분 마지막 가는 길을 환송할 것입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어린교회의 다음 세대들이 마음속으로 ‘하나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돌아가신 저 권사님처럼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지금 돌아가신 저 장로님만큼만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오늘 여러분이 파출부를 해서 밥을 먹고 살면서 신앙을 해도, 여러분은 실패한 인생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다시 만날 기회야 거의 없겠지만 어디 있든지 제 귀에 들려오는 소식이 여러분이 그렇게 2010년도 봄에 위대한 23편을 통해 복음의 원시림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에 어는 하늘 아래서든지 주님을 신실하게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아름다운 성도들로 살아간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우리 천국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