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행 22:7-11)
녹취자: 김명진
지난 시간에는 사도행전 7장을 봤습니다. 그 속에서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해서 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그 설교에 깊은 찔림을 받았습니다. 우선 들었습니다. 그리고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옳은 말씀 앞에서 깊이 승복하기 보다는 오히려 귀를 막고 돌멩이를 들어 스데반을 순교하게 만들었다. 간단하게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자아, 내가 생각 하고 있는 것과 다른 생각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기에 대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모질게 반응하는지,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참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해도 우리 속에 있는 그 어떤 것들이 허물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 것인지를 지난 시간에 봤습니다. 이것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점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쯤에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아파트단지에 있는 유치원과 상가 한 동을 샀고 전체를 유치원과 교회로 했는데, 그 교회에 저녁예배 부탁을 받고 설교를 하러 갔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때 설교하던 본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 “나의 자랑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를 설교하는데 저는 그런 사람 처음 봤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설교가 맘에 들지 않으면 졸든지 딴 생각을 한다든지 하는데, 뭐라고 눈을 흘기면서 중얼중얼 댔습니다. 어떤 아저씨 집사님이 중얼중얼하는데 가운데에서 하는데도 내 귀에도 들릴 정도입니다. 귀에 들린다는 게 물리적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설교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중얼중얼하면서 눈을 흘기면서 투덜대고 있습니다. 끝나고 나서 왜 그랬냐고 그러려다가 제가 일부러 터벅터벅 걸어가서 가운데까지 들어가서 그 사람한테만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이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을 때 다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것도,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었습니까?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났습니다. 악인의 얼굴이 어떻게 천사와 같이 빛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한 사람이 아니라 누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순교하기 직전에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나는 것을 봤습니다. 그 얼굴이 하나님이 그 사람의 편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런 눈에 보이는 수많은 증거가 나타나도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적이 나타나면 잘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생각해 봐야합니다. 이 사람들을 보면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는 표징이 그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싫어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결론이 내리고 있는 그것들을 허물고 무너뜨리려고 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강한 반발이 그 사람들 마음속에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자기가 부족하다 나는 정말 이런 면에서 너무 약해, 그런 것을 가지고 흔들어 들어올 때는 오히려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면에서 강하다고 하는 면을 흔들고 들어올 때 우리는 견디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생활의 강점, 그런 것들이 훌륭합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체험이 있는 사람은 각자 남이 갖지 못한 자기만의 신앙의 강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30년 동안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나왔다고 하던지, 선교에 있어서는 누가 서러울 정도로 헌금을 많이 했다든지, 유치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의 일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수요예배까지 빠진 적이 없다고 하던지, 성가대를 하는데 15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든지, 말하자면 그런 등등의 것입니다. 그런 하나의 강점을 가지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뤘습니다. 그 말 한마디 간단히 하기 쉽지만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남이 모르는 신앙적인 분투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잘못하면 오히려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의 행동을 나무라신 적이 없습니다. 금식한 것을 나무라셨습니까? 아닙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기 위해서 애쓴 것을 비난했습니까? 내면에 율법을 지키고 보다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이 내면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우의 사람들이 어떤 착각을 불러 일으키냐 하면 살아가면서 “내가 이렇게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문제는 그렇게 하나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신앙으로 채찍질하면서 살아와야 했던, 그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런 훌륭한 것들을 가지면서 산 사람들의 삶은 그런 것을 아무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인가를 한 가지를 깊이 하면 남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생각 속에서도 갖게 되고 삶속에서도 갖게 됩니다. 인식 속에서도 갖게 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꺼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볼 때는 하찮은 일 같이 보여도 바둑판 19줄 × 19줄에 돌멩이를 놓고 사는 사람들, 많이 놨어도 한번 흐트러 버리면 그저 오락에 지나지 않는 것을 뼈를 깎는 수도를 하듯이 그럽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에서 보면 우습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전승되어 내려오는 기보 가운데 토혈국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둑을 두다가 지니까 너무나 원통해서 바둑판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그 기보가 아직까지도 남았습니다. 그게 토혈국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습지만 왜 그렇습니까? 그것 하나에 깊이 몰두하니까. 일본에 유명한 사까다라는 9단짜리가 있는데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바둑의 신이 있다고 하면 둘만 하겠습니까?” “몇 점 깔면 이길 것 같습니까?” “4점 깔면 신도 이길 것 같습니다.” 그렇게 깊은 경지에 접어 든 것입니다. 9단이면 입신입니다. 신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뭔가 하나에 몰두하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생활도 몰두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간증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수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정체가 불명확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미쳤다고 해도 그 사람이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인지 다시 검증을 해봐야 합니다. 제대로 신앙생활하고 믿었던 사람들은 다 미친 사람 취급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미친 사람을 취급을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울도 붙잡혀가서 심문을 받을 때 “바울아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도다” 그랬더니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이렇게 결박당한 것 이외에는 여러분도 다 나와 같이 미치기를 원하노라” 그게 예수에 메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을 아무것도 내 신앙생활에서는 이것만을 지키려고 노력을 했다든지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은 그것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환란이 와서 밀면 나가떨어지고 유혹이 와서 잡아당기면 얼씨구나 끌려가고, 세상이 와서 입 맞추면 입 맞추고, 발길로 차면 저리 가서 나가떨어지고,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여러 가지 간증이나 특별한 것들을 만들어 내면서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그 자체로서는 한없이 아름답고, 귀하고, 아주 소중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추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채찍질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스도를 향한 추구는 사라지고 자신의 신앙의 추구 하나만 남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이런 삶을 살아나가야겠다. 그러한 자기 암시적인 신앙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맹점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스데반을 향해서 돌멩이를 던지던 사람들도 무례한 악당들이 아니라 자칭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례한 악당들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소망이 없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를 분별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선행과 우리 신앙 속에 있는 삶의 어떠한 고상한 목표도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도록 도와주지 않는 다면 그 모든 것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마음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자기 속에 하나둘씩 쌓여 가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굉장히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 자기 의가 쌓여지면 이것 하나만 가지고는 안돼요. 왜냐하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체계가 있는 것인데, 이 신앙의 체계는 객관적인 신앙의 체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신앙의 수준이 높던 낮던 각기 나름대로 신앙의 도리에 대해서 블록을 맞추듯이 마음의 구조가 맞추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가 질문하지 않아도 이런 것들을 높이 쌓으면 저런 것들에 대한 의문이 쌓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에 대해 나름대로 해답을 자기가 쌓아갑니다. 뽑히고 파멸되어야 할 것들이 계속 쌓입니다.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이 속에서 쌓이니까 그것이 성경적인 것이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사랑함으로, 어린아이가 신령한 젖을 사모함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 속에서 늘 자신이 깨어지는 것들을 체험하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 사람들만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서 말씀에 가깝게 자기의 신앙의 세계가 구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구축되어도 완전히 객관적인 것들이 구축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류가 없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에 있어서나 사상에 있어서나, 불가능한 것이지 않습니까?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어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성경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에 입각한 완벽한 신앙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있으면 그 사람은 성경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늘 그런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나 성경에 근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완전히 반대편으로 달려갑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잘 못하면 성령을 받아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게 그렇게 무섭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마음속에서 이런 것들이 세워집니다. 그것이 다인 줄 알고 그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잠시는 그것이 편한데 그 것이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한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정하면 그것을 무너뜨리라는 얘기인데 무너뜨리면 어디에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던 것을 자기가 스스로 무너뜨리도록 허락을 하면 자기는 어디에 거처하느냐 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아집의 가장 본질적인 핵심 부위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런 생각들입니다. 부서지지 않는 것입니다.
격렬하게 회개하는 사람도 있고 격렬하지 않고 깊이 회개하는 사람도 있지만 말씀 앞에서 나의 생각이 허무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깊이 느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집들이 허물어져가는 경험이 없는 사람은 신앙의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위험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자신이 감동을 받고 우리 자신이 잘못 세워진 것이 무너지고 깨뜨려지는 늘 깨어지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면 좋은 것들을 지금 못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본적인 진전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동의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일반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진전이 없습니다. 10년을 다니면 뭐합니까? 15년을 다녀도 변화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알을 못 낳는 닭처럼 오래된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가면 자꾸 올라가지 않습니까? 권찰에서 집사, 집사에서 권사, 안수집사에서 장로 그렇게 자꾸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교회가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져 갑니다. 깨어짐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깊이 인식하면서 우선 지금 당장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허물어져 깨어져야할 것들 투성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리 아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어떤 때에 말씀을 읽거나 듣는 가운데 여러분들에게 강한 말씀에 대한 반작용이 가슴에 떠오르거든 오늘 이 설교를 기억하십시오. ‘말씀이 와서 기둥뿌리를 흔드는구나. 이것을 내가 거절하는구나.’ 물론 말씀을 올바르게 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신앙적으로 올바른 영 안에서 참다운 고통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의 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바른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것을 향해서 거절하고 거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생활의 진전이 포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 속에 잘못된 신앙의 구조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무너뜨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언제나 정직해져야 합니다.
스데반을 향해서 돌멩이를 던졌던 사람들의 이상한 점은 스데반이 그 사람들을 향해서 돌멩이를 들었습니까? 말을 했습니까? 그러면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로 반박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반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질서 정연하게 성경을 꿰뚫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왠지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것과 맞지 않으니까 말로 먹고 사는 그 말 잘하는 사람들이 말로 못하고 돌멩이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될 수 있다는 상황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풀어서 다가오는데 내 마음의 구조가 잘 못되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해서 튀는 반감과 말씀을 말씀답게 풀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반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제껏 가지고 있던 신앙의 지식과 올바른 성경을 해석하게 하시는 그 영의 직접적인 충돌을 가져옵니다. 좀 더 진전해서 이야기하자면 성경말씀이 올바로 풀렸는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거부반응은 언제까지나 단편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즉흥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에 대해서 자기를 화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이 잘못 풀려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반감은 그 말씀이 그렇게 풀려진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이 훼방 받고 있다는 거룩한 번민과 함께 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일이 훼방 받고 있다고 하는 그 거룩한 번민과 함께 반감이 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 정 반대의 장면 가운데 하나인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납니다. 사도바울 이야기는 9장 이후로부터 나옵니다. 물론 7장에 사울이라는 이름이 나오기는 하지만 본격적으로 나오는 것은 9장에서부터 나오고, 15장까지 베드로 이야기가 나오고 16장에서 본격적으로 바울의 무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9장에서 시작해서 28장까지이니까 19장밖에 안되는데 그리고 그 속에서 바울의 설교가 몇 번나오는데 공중을 향해서 하는 설교도 있고, 이방인을 향해서하는 설교도 있고, 심문받으면서 한 설교도 있고 여러 가지 변증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몇 개안되는 설교 가운데 이 사도바울은 자기가 다메섹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이야기를 세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많이 있는 것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사문제에 관심이 많이 있는 사람은 늘 시사얘기부터 먼저 하면서 설교를 합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나 핵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사도바울의 신앙, 삶, 삶의 목표, 인격, 모든 것을 다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양파껍질처럼 되어있는 바울의 사상과 신학과 설교, 모든 것을 벗기고 나면 마지막에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극적인 체험, 그것만 남습니다. 그 체험이 얼마나 깊이깊이 사도바울을 움직였는지 설교를 할 때마다 거의 그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성행한다”’ 그러니까 달려갑니다. 어느 정도 심지어는 거짓증인을 불러다가 위증을 하게끔 교사해서 믿는 사람들을 죄 있다고 판결을 받게 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가편 투표를 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끌어가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데 한 낮에 정오쯤 되었는데 하늘로서 태양보다 더 큰 빛이 비취면서 자기를 둘러쌌습니다.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이렇게 물어봤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사울이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다메섹을 향하여 달려갈 때 까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순간, 이제는 인생이 캄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시간표에는 없던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나니까 내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인생에 대한 인식, 인생의 약도를 가지고는 내 인생을 찾아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예수가 여러분의 인생에 혼란을 준 적이 있습니까?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혼란을 가졌습니다.
좀 더 한발짝 나아갑시다. 예수그리스도가 난지 8일 만에 결례를 받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올라갈 때에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를 만납니다. 그 만남이나 다메섹에서 사울이 만난 그 만남이나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제는 종을 편안히 놔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만남이나 그 만남이나 같습니까? 다릅니까? 설교는 이야기 하듯 마음 편하게, 같습니까? 같지 않습니까? 같습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그 예수그리스도가 구속자로 오신 그 어린 아기 예수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하나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리이까” 그랬습니까?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똑같은 예수그리스도가 이상한 결과를 일으키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예수그리스도가 여러분 앞에 나타나서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그러고 나타나면 무릎을 꿇고 “주여 나는 이제 망했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여러분 왜 똑같은 예수인데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불러 일으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답을 들어봅시다. 여러분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 똑같은 예수가 그렇게 엄청난 차이를 일으킵니까? 왜냐하면 사울이 알고 있었던 예수그리스도와 시므온과 안나가 알고 있었던 예수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사울 한 쪽, 시므온과 안나 한쪽, 이 양쪽이 알고 있는 예수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예수입니다. 그러니까 한쪽은 예수를 만났을 때 캄캄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무엇을 이야기 하냐하면 이제껏 살아온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살았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중에 베냐민 지파요. 그러나 결국은 그 모든 경건하고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삶이 그리스도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그 경건한 사울에게 그리스도 예수는 의외의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자기의 신앙의 세계 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나니까 이제껏 가지고 있었던 자기 속의 신앙의 틀들이 모두 거짓인 것으로, 가짜인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려고 하니까 발악을 하면서 돌멩이를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그렇게 무너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만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그리스도가 완전히 빠진 상태에서 신앙의 아성을 쌓아오면서 그 아성이 자신 속에 쌓여진 신앙의 구도 속에 “다메섹에서 예수를 믿는다” 입력을 했더니 출력이 나오기를 “가서 죽여라”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습니까? 사람의 내면속에 있는 신앙의 인식의 구조의 차이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알 수 있겠지요?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나니까 자기는 이제 작동할 수 있는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의 구조,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토록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이런 것을 묻지 않고 무엇을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러 다닐 사람이 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안나에게는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나자 그는 말하기를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주십시오.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나타나자 소망하던 모든 일이 성취되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 전도사님이 올라가서 전구를 다 가설했는데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전구에 불이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가 성전에 왔을 때 시므온이 아이를 안았을 때 전구에 불이 들어온 것 같은 성취를 본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양측의 사람들은 사울과 시므온과 안나, 근본적으로 서로가 알고 있는 그 예수가 조금도 공통점이 없는 예수였습니다. 그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사울이 이렇게 크게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사도바울의 이 체험을 보면서 기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캄캄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가 찾아오시니까 온통 충격이었습니다. 다 부서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당시 사울보다는 예수님을 더 바르게 알고 있습니다. 바르게 알고 있는 그 부분 때문에 여러분들이 바울과 같은 그 체험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바울보다 예수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울은 전체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몰랐는데도 예수그리스도의 만남 앞에 자신이 완벽에 가깝게 무너졌고, 여러분은 대부분에 대해서는 바울보다 그리스도를 더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잘못알고 있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너지지 않으니까 인식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커다란 반항입니다. 이 사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자기 속에 있던 잘못된 자아가 무너지자 “내가 무엇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바로 알고 있는 그 부분 말고 잘못 쌓아 올려진 그 부분이 무너지면 우리자신도 똑같이 잘못 세워진 부분이 옳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부분에까지 얼마나 뿌리 깊은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을 알고 있는 참된 지식과 신앙에 결정적인 오류를 가져다주게 하였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니니 너무 그렇게 서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체험은 오늘 밤에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내 속에 잘못되어진 것, 인식하지 않으면 회개도 할 수 없습니다. 참답게 깨닫는 것이 없으면 돌이킴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속에서 부서져 나가면서 계속해서 쌓여져 가야합니다. 헬라어 성경에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 3~4세 미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따로 있고 5~6세 이상을 가리키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할 때는 전자입니다. 요즘은 텔레비전 때문에 아이들도 잘 그렇지 않습니다만 어른들에 비하면 비교적 아이들이 잘못된 것을 이해하게 하고 타이르고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면 그러면 어린아이들도 수긍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도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이런 점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체험이 없어도 바른 것을 알고 생각을 정리를 하고 있으면 우리생활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힘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시므온과 안나처럼 반응할 것이냐 스데반을 돌로 친 사람들처럼 반응할 것이냐 하는 차이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자기에게 잘못 싸여진 신앙의 인식과 이런 것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우리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나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해 확인을 원할 뿐이노라’하는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도 취사선택해서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꼭 들어야할 하나님의 말씀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깊이 감격한 사람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다면 그들은 말할 수 없이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지지 않으니까 돌멩이를 던지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돌멩이를 던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의인을 죽이는 그 순간까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무섭습니까? 오히려 이 세상의 살인범들은 양심의 가책이라도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며 그 일을 행하니까 얼마나 무섭습니까? 지금도 우리의 잘못된 신앙의 인식과 잘못 쌓여진 신앙의 구조물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그러한 미명하에 열심히 살아가는 그 삶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불순종하는 이상한 잘못된 신앙의 결과가 이어지고 있는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사울이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하고 묻는 이 순간에 비로소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사울이 변하여 ‘파올로스’ 작은 자로 바뀝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도 이 순간이었습니다. 나의 인생이 내가 가지고 있고, 이제까지 붙들고 살아왔고 사람들은 나한테서 그것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깨달은 순간도 바로 이 순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발견한 순간도 바로 이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고 고백을 한 것도 이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다.”그런 고백도 바로 이 순간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물음 속에서 철저히 무너지고 완벽하게 무너짐 속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건축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