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4-60)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녹취자: 김동길
요즈음 수요일은 신앙과 참된 은혜의 체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지난 시간에 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지난 시간까지 연결해야지만 오늘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지난 시간에 찾았던 본문은 마태복음 10장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서 예수께서 큰 병을 내어 쫓고 모든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고치고 약한 것을 고치는 그런 큰 권능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 능력이 얼마나 컸는지 병든 자가 낫고 문둥이가 나음을 받고 깨끗해지고 죽은 자가 심지어 살아나는 놀라운 복음전파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 이야기를 드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큰 은혜를 입고 왜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말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을 했지만 그러나 그가 왜 죽어야 되는지도 모르고 왜 다시 사셔야 했는지도 모르고 쉽게 이야기하면 성령은 체험했지만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교리에 대해서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한 이런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성령을 그렇게 한량없이 받으면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다고 했고 그 다음에 택한 본문이 사도행전이었습니다. 성령을 한없이 받았는데도 끝까지 남아있는 관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시대가 가르쳐 주고 성경을 봤지만 성경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상한 가르침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남아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없이 하신 말씀을 못 알아듣고 성령을 체험해도 못 알아듣게 되었는데 오순절에 이르게 되어서 오순절의 성령을 체험하게 되고 그리고 그 많은 성도들은 그 체험한 성도들의 설교를 듣게 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그리고 왜 죽으셔야 되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고 구약과 신약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었고 순식간에 신앙의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다는 그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변화되지 아니하면 우리가 성령을 체험해도 우리는 그 성령을 통해서 온전히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 어렵다. 왜 이렇게 어려울 것인가 하는 것을 다음에 이야기 드리기로 했는데 그 날이 오늘입니다. 오늘 그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먼저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린 성경본문인 7장 전체가 어떤 맥락에게 있게 되었는지를 여러분들이 보셔야 합니다. 일곱 집사를 6장에서 세우고 사도들이 말씀전파와 기도에 전무하고 그리고 집사들이 그 모든 일들을 공궤하는 데에 열심을 내니까 교회는 다시 복음의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결단이나 성령의 인도도 필요하지만 성도들이 성숙하게 반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여야 하리라 그러면서 그 중요한 일인 과부들을 돌아보고 고아들을 돌보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을 자기들의 손에서 떼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할 때 모든 성도들은 거기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성숙한 반응을 보이니까 교회가 영적으로 자리가 잡히고 그 다음에 새로운 부흥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돈독하고 또 은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권능까지도 가지고 있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씀을 전할 뿐만 아니라 아주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민간에 보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의 살아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집사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집사와는 차원이 틀린 집사이겠습니다. 그런데 공회라고 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여러 마을 구레네와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 이런 곳에서 온 사람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공회를 만들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종교적으로 어떤 일들을 심문하고 재판하는 그런 장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기관과 백성과 장로들을 충동시켰다고 했으니까, 그런 정도 정치적인 공작을 꾸밀 수 있으니까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공회였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스데반을 끌고 오고 거짓증인을 세워 가지고 뭐라고 훼방하게 하게 했냐면, 이 사람들은 거룩한 곳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증거가 나사렛 예수가 이 성전을 헐고 또 모세가 전해 준 규례를 고치겠다 그랬다 했습니다. 사실은 주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오해의 소산이었습니다.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삼 일만에 다시 지으리라 하신 것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율법의 규례를 고치겠다 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겠다고 하시면서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 새롭다기보다도 완전한 해석을 예수님께서 설교 가운데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똑바로 듣지 않으면 이런 이상한 오해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경건하게 들여다 보아야지 선입견을 보고 들여다보니까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증인을 서고 스데반을 비롯하여 이 사람들이 가리키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때 스데반이 7장에서부터 장엄하게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어떻게 깨달은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2장에서 오순절 성령체험 속에 들어갔던 사람이거나 들어가지 않았더라도 1장에서 회심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겠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사람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성령을 체험하면서 유대인들이 꿈꾸고 있는 정치적인 회복, 다윗왕국의 영광스러운 날들의 회복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제자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 사람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 비슷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2장에서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이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완전히 깨어지고 복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아니면 2장에서 베드로와 열한 사도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이 완전히 새로운 체계를 갖게 된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체계입니다. 구약의 신앙이 흘러 내려오다가 그 다음에 이것이 끊어졌습니다. 내려오던 신앙이 옆가지로 꺾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잘못된 이해로 꺾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교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복음서에 나타날 때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사상과 생각들이 구약에서 바로 온 사상이 아니라 구약을 똑바로 이해하면 신약과 맞닿는데 똑바로가 아니라 중간에서 꺾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수많은 종교분파가 생겨나게 되고, 수많은 종교적인 이론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유대교는 구약 종교에서 이탈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해석을 해서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연결을 시킨 것이 바로 세례요한부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을 제대로 해석을 했으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의견과 일치를 볼 터인데 그것이 아니라 꺾어지면서 곁가지로 흘러나간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나간 것이 결국은 성경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그 시대의 사고와 생각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고와 생각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직접 끌어 들어서 신약의 성취로서 설명을 하셨는데 이런 커다란 차이가 나게 되는 것에서 이런 기가 막힌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그렇게 (7장을 나중에 집에 가서 읽어보면) 숨을 쉬지도 않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또 이삭과 내려가서 애굽으로 양식을 얻으러가는 이야기 또 모세의 태어남으로부터 시작해서 출애굽으로 시작을 해서 쭉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광야의 교회와 다윗 왕과 이런 것들을 쭉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하신 것과 앞으로 다시 오실 것까지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역사를 통관하는 이런 것들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서 강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체험을 하면서 그 시대 속에서 생겨나게 된 잘못된 사고와 생각들, 자기중심적인 그런 생각들이 무너지고 성경전체의 맥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이런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설교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설교가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와 거의 완벽하게 같다는 것입니다. 길이는 이것이 길고 그것은 짧은데 거의 같은 설교입니다. 똑같은 정신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설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깨어졌던 사람들이 만약에 다시 스데반의 설교를 듣는다면 태도가 어떠했겠습니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어찌할꼬” 하면서 깨어졌던 사람들, 그것을 통해서 복음이 무엇이고 그리스도가 무엇이고 결국은 우리가 그렇게 맹목적으로 섬기던 그렇게 배껴쓰던 그 구약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성경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회개하고 돌아섰을 때에, 그 설교와 오늘 이 7장에서 증거 되고 있는 이 설교가 같은 정신입니다. 같은 영에서 나오는 설교입니다. 그런데 이 7장의 설교가 훨씬 장엄합니다. 사도의 설교가 무색할 정도로 평신도가 이 장엄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 설교를 들을 때 어떠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한없이 감격했을 것입니다. 제가 한 이 말이 동의가 되십니까? 그렇다면 아멘 하십시오. 됩니까? 그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이 들으면 그렇게 감격했을 그 설교를, 54절을 보십시오. 결국은 베드로의 설교와 내용이 같다는 것은 52절에 보니까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중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신다고 예고한 자를 저희가 죽였고 이제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런데 아까 거기에서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똑같은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54절에 저희가 들었다. 똑같이 반복되는데 어떻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어떠했습니까? 우선 조용히 그 설교할 동안 거기까지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사람들이 들으면 감격했을 그 설교를 들으면서 어떻게 했습니까? 먼저 마음에 찔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도 똑같이 마음에 찔렸습니다. 말씀이 살아있으니까 그 마음을 찌르는 것입니다. 다가가서 가슴을 찌르는 것입니다. 확 찌르는 것입니다. 찌르는데 앞에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찔리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회개는 베드로가 하라고 그랬지요. 언제 회개를 했습니까? 어떻게 할꼬 하니까 회개를 하라고 그랬지요. 이래서 거짓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어요? 찔리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강하게)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이렇게 했겠습니까? 다 죽어갔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그 말이 누구와 똑같았냐면 바울이 다메섹에서 빛으로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서 "으악" 하고 넘어졌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 너무도 당당하게 걸어가 서서 주님 앞에 서서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했습니까?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이까? 신나는 대답입니까? 힘없는 대답입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해야 할꼬? 그 말이나, 주여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이까? 그 말을 한 사람들의 그 고백은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예수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편견, 말씀이 아니라 세상이 가르쳐 준 자기의 인생을 바라보는 사상의 틀, 이런 모든 것들이 우르르 쿵쾅 와장창 무너지는 그 소리입니다. 자, 봅시다. 사도바울이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까? 그 사람이 무엇을 행하여야 할지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모르는 사람이었습니까? 감히 자기는 가르칠 선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모두 내 앞에 나와서 무엇을 행하여야 할지를 배워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누구이었습니까? 많은 곳에서 왔지만 그 사람들은 경건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도다" 그들은 신앙에 대해서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제로 살았습니다. 다윗왕국의 재건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그 때를 기다리면서. 그러면서 그 시대에 서기관과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쳐 주는 그 가르침을 따라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열심이 있었습니다. 경건이 있었습니다. 소망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헌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대해서 자기의 삶을 걸었습니다. 종교의 기본적인 요소는 다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이 사고관, 그러한 모든 것들이 잘못 형성되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무너지니까 마지막에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의 모든 생각과 사고와 사상의 체계들이 무너지지를 않으니까 은혜를 받아도 늘 도루묵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무너진다고 해서 졸도를 하듯 은사체험을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졸도를 하듯 은사체험을 해도 지지난주에 이야기 했듯이 그것이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고의 벽이 무너지지를 않고 자기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이 견고합니까? 은사체험 많이 받은 사람들이 견고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하나의 감정놀음이라고 생각을 해서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 스데반의 설교를 들을 때에 그 스데반을 통해서 하나님이 스데반의 설교도 성령이 충만한 설교였고 베드로의 설교도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때 찔렸고 또 이 스데반의 설교를 들을 때도 사람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런데 한쪽은 우리가 어찌해야 할꼬 하면서 이제는 그 고기나 잡던 그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감히 내 인생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고 할 때 무릎을 꿇고 들을 사람들입니까? 무엇이라 했습니다. 베드로에 대해서 교육받지 못한 사람, 학문이 없는 범인인줄 알았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 자기 인생의 전체가 무너지면서 무엇을 어찌해야 할꼬 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틀림없이 다리의 힘이 후들후들하면서 떨리면서 털썩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이제껏 자기가 의지하며 살아왔던 사고, 사상과 나름대로의 생각과 선입견과 생활의 신조와 삶의 목표와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구약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우리의 인생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그 순간에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우리가 죽인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에 자기를 의지해오고 자기가 의탁해서 살아오던 그 모든 사고의 틀들이 모두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다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각성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놀라운 영적인 역사가 일어났는데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마음이 찔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스데반이 말은 잘하는데 성령이 충만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문제는 설교는 좋았지만 성령이 없어서 망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간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 성경을 보면 베드로 못지않게 이 사람도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듣고 이 사람은 행실이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설교를 잘 듣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삶을 살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것을 잘 들으십시오.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그 설교를 듣지 않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직면하는데서 회피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말은 잘하는데 성령의 능력이 없어서 내가 당신의 말에 귀를 못 기울여 주겠어. 아니면 삶이 너무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아무리 말은 잘해도 나는 설교를 들을 수 없어. 심지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때문에 나는 그 설교를 들을 수 없어. 상서로운 말을 너무나 많이 쓰기 때문에 그 설교는 들을 가치가 없어. 등등의 많은 이유를 댑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러한 면에서도 해당 사항이 없었습니다. 집사를 세울 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설교를 했으니까 설교자의 자격의 문제에 있어서는 베드로를 이야기하면서 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모든 것들이 무너지면서 우리가 어찌해야 할꼬 해야 했는데 마지막에는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이 찔렸습니다. 여기까지는 확실히 영적인 역사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소망이 없는 사람은 안 듣는 사람입니다. 듣고 나서 배척을 하든지 아멘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하는데, 듣지를 않으니까 긍정적으로든지 부정적으로든지 마음의 찔림이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마음을 다해서 과연 그러한가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 때 마음이 찔립니다. 집중하지 않고는 마음이 찔리는 법이 없습니다. 졸면서 설교를 듣다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듣지 않으면 내용을 모르니까 무엇을 결단해야 할지 무엇을 위해서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그 말씀에 마음이 찔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들의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인데 그 마음이 찔리는 것입니다. 찔리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하는 가책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찔림입니다. 다시 한 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말씀을 듣다 찔린다 하는 것은 내가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확인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이 찔림은 아픔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찔린다고 하는 것은 나는 원하지 않지만 저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가책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통해서 온 것입니다. 찔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이 말을 듣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이를 갈았습니다. 밤에 자다가 수련회 가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뽀드득 뽀드득 이를 가는 것입니다. 이를 가는 이유는 적개심에 불타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한 적개심입니까? 스데반을 향한 적개심인데 결국은 스데반이 칭찬받는 사람이었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그 사람들이 얼굴을 쳐다보니까 얼굴이 천사와 같다고 했는데 한 맺혀서 이를 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람들이 이를 가는 것은 무엇에 대해서 이를 가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이를 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해서 이를 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들을 때 그것도 정확한 말씀을 그것도 성령의 기름부은 바 된 말씀을 그것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은혜가 가득하고 권능이 많은 자기들이 눈을 뜨고 이렇게 봐도 천사와 같이 빛나는 그 사람이 하는 그 이야기를 듣다가 무엇이 이를 갈게 하였습니까?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찔렸습니다. 아, 저 말이 맞고 내가 틀리지도 모른다 그러면 가책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한 그 사람이 말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단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갈고 그 말을 못하게, 설교도 못 끝내고 돌에 맞아 죽는데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생각하고 틀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고백 한번 해봅시다. 겉으로 드러나게 대답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눈으로 말합시다. 말씀을 듣다가 반발 같은 것 생긴 적 없으십니까? 또 그 말씀을 듣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속에서 반감이 쏟구쳐 나온 적 없으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 같았던 그런 때 없습니까?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권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천사와 같은 사람으로부터 듣는데도 이렇게 반발이 생겨서, 율법에는 분명히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돌맹이로 쳐죽이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지금 입력되어서 가지고 있는 율법과 신앙과 인생과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와 다르다는 사실이 이토록 이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마음에 와서 부딪치지 않고 그저 내용을 그런 내용인데 초점도 없고 헤매다가 끝나는 말씀이었으면 이들이 이렇게 과민반응을 했을까요?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사람들을 명확하게 가르는 것입니다. 믿을 사람들과 도저히 믿지 않을 사람들을 갈라놓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설교자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늘 관심은 내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나가 아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올바른 것을 전하고 있는가 그것만 생각하면 끝입니다. 전에 보면 가끔 사람들이 열린교회 소문을 듣고 왔는데 부부가 왔는데 한 사람은 한없이 감격하는데 한 사람은 벌레 씹은 얼굴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를 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참다운 은혜체험과 관련해서 어떠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까? 사람 내부에 우리 속에 이런 것들이 존재합니다.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빨아들이고 받아들여서 내가 변화되려고 하는 그런 욕망보다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고 보호하려는 그런 본능과 방어기재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말씀을 봐야지, 말씀을 들어야지, 하나님 말씀을 주시옵소서, 아 말씀이 참 좋더라, 말씀을 들으러 가야지 이렇게 합니다. 마음이 찔릴 때 이를 갈고 돌멩이를 던져서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누구보다도 율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따라서 살려는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그리고 이렇게 예수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성경의 선포가 들리자 이 사람들은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와서 이렇게 신앙의 어떤 세계를 관통하는 설교를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 빼고, 너희가 못 박아 죽였다 이런 이야기 빼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고 그 다음 그 아들은 이삭이었고 또 이삭이 아들을 낳고 그 아들 밑에 또 아들이 있었는데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갔고 그 이야기 할 때 돌을 들었습니까? 자기들 생각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돌멩이를 들어서 친 지점은 하나님이 오리라고 성경에서 예언하신 그 의인이 왔다, 그 분이 바로 너희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예수를 죽인 것이다 입니다. 그 대목에서 설교가 끝났다는 사실에 우리들이 유의해야 합니다. 이들은 성경의 역사를 보고 신앙의 체계를 보는 데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집어넣으니까 그 그리스도가 모든 신앙의 체계와 모든 신앙의 사고에 구석구석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자기들이 생각했던 성경의 모든 해석들이 다 틀려져 버리고 그리고 자기들이 이제껏 해왔던 것들이 다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진짜 의미 있는 것을 위해서는 자신들이 오히려 그 의미 있는 일들을 행하는 것 대신에 죄를 저질렀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고 그 죄는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다 받아들이고 나니까 결국은 무엇이 되냐 하면 너의 인생은 헛살았다, 너가 믿는 것은 신앙도 아니다, 그렇게 믿어봐야 가는 것은 지옥밖에 없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 절망. 이 사람들이 그 절망을 경험하도록 가슴에 그 말씀이 찔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뿌리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그 설교자를 아예 죽여 버릴 정도로.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인간적으로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경건한 신앙 속에 감추어져 있는 예례미야 1장에 나오는 꺾고 파멸하며 무너뜨리며 부숴트림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자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성경은 완악함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가르쳐서 하나님은 강퍅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강퍅함과 완악함은 결국 우리를 오해와 심판으로 데리고 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느 설교자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뒷동네에서 풀빵 굽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굴뚝 청소하러 다니는 사람들까지 또 높게는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사상가라고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사색을 많이 한 사람은 좀더 꼼꼼한 사상가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무식한 사상가라고 합니다. 신문을 보면 증인을 살해하고 신출기몰한 그 친구도 사람은 각기 자기 할 일에 충실하면 된다, 돈 버는 사람은 돈 버는 일에 살인하는 사람은 사람 죽이는 일에 다 충실하면 그것이 인생이다. 일기장에다가 적어놓았다고 합니다. 말이 됩니까? 누가 가서 고쳐줄 수 있겠습니까? 논리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똥고집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이야기 입니다. 아니, 그건 옳지 않지 않냐? 논리적으로 생각해봐. 까불지마, 내버려두시오 이렇게 살게요. 이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 속에 있는 본성입니다. 결국 중요한 답이 있습니다. 교회가 어떠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못 만나, 주위에 내가 사람들이 속 썩여서 하나님을 못 만나, 남편이 속 썩이고 자녀가 속 썩이고 아니면 친구가 속 썩이고 부모가 속 썩여서 내가 주님을 못 만나, 내가 이런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에 주님을 못 만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내가 그토록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나 만나주시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은근한 반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어리석은 생각을 청산하십시오. 결국은 하나님을 못 만났다는 요소가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쓸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자기의 보배인양 아는 것입니다. 김경록이라는 사람이 말합니다. 나는 이런 사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돈 버는 사람은 돈 버는 일에 여자는 여자의 일에 살인하는 사람은 열심히 살인하는 것, 이것이 인생을 충실하게 사는 길이다. 말이 됩니까? 말도 안 되는데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뼈아픈 이야기를 한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내 첫 번째 기도제목이라고 했는데 마음속으로는 내가 얼마나 대견한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고 하는 영적인 문제를 1호 기도제목을 가지는 것이 쉬운 일인가? 나는 그런 것을 기도제목으로 가질 수 있는 사람이다, 아 대견해 이뤄지고 안 이뤄지는 것이 나중 문제이고 그런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없이 자기가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가소로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는 그것이 가소로운 것입니다. 부숴지려고 안합니다. 무너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상과 틀을 딱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안 듣습니다. 그런데 말로는 자기가 무지무지하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말로는 그러는 사람들을 보면 진짜가 없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났구나, 서울시내 이 복잡한 세속적인 도시에서 이렇게 은혜를 사모하는 구나, 눈물이 맺힐 정도로 내가 너무너무 은혜를 사모하는구나, 무슨 책도 읽고 무슨 책도 읽고 한없이 감격했다고 합니다. 약도를 그려달라고 해서 열심히 약도를 그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왔는데 안 듣습니다. 10분도 집중을 안합니다. 허공을 한참 쳐다보다가 땅을 쳐다봅니다. 좋은 표현으로 존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열심히 덜덜 떨면서 기도를 합니다. 다 바람을 잡는 것입니다. 오래 지난 후에 이야기 할 기회가 있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왜 말씀을 안 듣는지 들어보았습니다. 자기는 주의 종이라면 귀신도 내어쫒고 병든 자도 확확 살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당신이 과연 병든 자를 살리고 귀신들린 자를 확확 내쫒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자기를 허물지 못하게 하는 빌미를 설교자들은 할 수 있으면 제공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말씀을 그대로 듣고 그 말씀 앞에 나는 항복이라고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그 이유가 너무도 많습니다. 마치 군대에서 상관이 내무반 검열을 할 때 진짜로 검열을 하기 위해서 왔으면 야, 깨끗하게 참 잘 해놓았구나 하고 갈 텐데 그러나 아예 들어올 때 마음속으로 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들어올 때서부터 평가를 하려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디 뒤집어보면 잘못한 것이 있을 텐데 하면서 그것만 찾는 것입니다. 찾다가 무언가 보이면 아흔아홉 가지 올바르게 한 것이 생각이 안 나고 모포 아홉 번째 모포 왜 각도가 비뚤어졌어. 그것이 딱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잘한 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감화력이 있어요.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 같아요. 수많은 사람이 울면서 기도를 해요. 말씀에 하자가 없습니다. 자기도 마음에 찔립니다. 그런데 말을 할 때 반말 비슷하게 하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냐 어쩌면 부랑자 출신일지도 몰라. 그러다가 어떻게 용케 회심해서 개천에서 용나서 목사가 됐는지 모르겠는데 교육을 그 정도 밖에 못 받았다면 내가 그래도 대학을 나왔는데 그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좀 있지 않아? 반대말도 안쓰고 설교도 깨끗하고 흠 잡을 데 없는 내용과 불꽃튀는 열정이 있고 사람들이 그 설교를 듣고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다 괜찮어. 사람 생긴 것도 괜찮고 학벌도 있고 설득력도 있고 성령의 능력도 나타난 것 같고 열정도 있고 저것봐 저거저거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를 하는 것을 봐, 이야 뭔가가 있구나 그렇지만 너무 지나쳐. 왠지 한쪽으로 약간 쏠린 것 같아. 그렇게 쏠린 것을 내가 계속 듣다가 나도 쏠리면 안 되잖아.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밤을 새어도 못합니다. 그것을 찾는 것입니다. 먼지털어서 찾는 것입니다. 그래, 설교 내용도 좋고 도저히 내가 승복을 안 할 수가 없어. 정말 좋아. 정말 괜찮아. 다른 사람도 들려주고 싶어. 그런데 문제는 아니, 저게 정말 주위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이런 감화가 정말 감화이고 저 사람이 비판하는 것이 잘못되고 저렇게 말하는 것이 정말 올바른 것이라면 근데 교인이 30명 밖에 안 모여? 그러면 교회가 작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큰 교회에서 설교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어떻게 진리가 많은 사람에게 환영을 받을 수 있을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들 들어온 것 보니까 이 교회 넓은 문인것 같아. 핑계는 한없이 많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허물어 지는 것들을 피하는 것입니다. 예의는 차려주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라면 무릎도 꿇어주고 통성으로 기도하자고 하면 주여 하며 통성으로 기도해 주고 한마음으로 기도하자고 하면 눈물도 좀 흘려주고 그러나 마지막에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이미 여기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주님, 보태기는 하지만 빼기는 하지 마십시오. 세우고 내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려주시지 마는 무너뜨리지는 마십시오. 방해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안됩니다. 저는 여태까지 설교사역을 해 오면서 제 설교를 들을 때 화가 난다는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왜 화가 납니까? 자기도 모른다고 합니다. 모르는 것을 오늘 성경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나치면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말씀을 전하다 순교를 당한 사람들은 정치적 동기라기 보다는 말씀을 대해서 아멘으로 응답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 그런 종교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말하자면 화를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지막에 사가랴의 피까지 제단사이에서 흘렸다. 그리고 죽었다.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다 죽었다. 가장 종교적인 도시, 가장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도시에서 죽어갔습니다. 오히려 처음 예수를 믿고 신앙 이야기가 나오면 창피해서 할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말씀을 더 잘 받아들입니다. 그것도 들을 때에 한 해서 입니다.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예 자기는 백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여기에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살아온 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참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때 감화를 받으면 선입견이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안하지만 우리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잘 받아들이는 일이 일어난다면 미안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기가 무너지기를 원하는 일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일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새로운 진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데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 벼랑으로 밀린다는 것입니다. 계속 밀면 떨어지게 되지 않냐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그런 종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마지막에는 그 말씀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허물어지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집회에 참석하거나 책을 읽거나 여러분과 이야기가 잘 통한다고 믿지 마십시오. 잠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계속 허물어 뜨려야지만 새롭게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 안에는 개똥철학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자기는 교회를 옮기는 철칙이 있는데 지하실 교회는 안되고 2층 교회도 안되고 단독건물이어야 하고 별의별 생각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모시는데 자격 조건이 있는데 일반대학원 나오고 외국에 가서 목회학 박사라도 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인간이 세운 구조물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막 통성기도할 때에 통성기도를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반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 같이 묵상기도 합시다 그러는데 고새를 못참고 혼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통성기도는 싫다, 묵상기도 가지고는 안 된다 이런 틀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틀과는 안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가슴 속에서 복받치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감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지금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려고 하는 것처럼 자신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으면 큰 일이 납니다. 그것으로 신앙은 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이고 내 안에 기가 막힐 정도로 신비로운 요소가 많아서 내가 내 자신에게 얼마나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죽입니까?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방법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누구의 모습입니까? 제자들 사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제자들이 사도행전 1장에서 안 깨어지고 7장으로 넘어왔다면 그 사람들이 돌맹이를 들고 스데반을 쳐죽일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 많은 추억을 나누고 왔음에도 말입니다. 그런 성령을 받았는데도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틀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방인 문제였습니다. 다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사마리아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다 보여주시고 수리아, 나아만 이야기,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 이런 모든 이야기들을 다 하면서 복음이 이방에까지 전해지게 되고 먼저 하나님의 은총을 미리 맛본 라합의 이야기 이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복음을 통해서 들었는데도 오순절의 성령을 받았는데도 여전히 무엇이 남습니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함께 밥 먹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거기에 미혹되는 것입니다. 함께 먹고 앉았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안 먹은 척 도망갈려고 했는데 그것을 바울이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대놓고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을 혼돈케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복음과 율법에 대해서 관계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대가들도 그런 기재가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까, 성령이 가르쳐 주셨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 잘나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 나라도 없고 종살이 비슷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자존심인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상과 사고인 것입니다. 늘 말하지만 영호남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을 크게 회개해야 합니다. 저는 어느 교회 목사님이 죽을 때 어느 지방 사람들을 장로로 세우지 말자고 하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호적 없애자는 이야기는 저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고 저어쪽입니다. 교회에서 이 벽을 못 넘는다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복음의 깊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너지지를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권하는 것은 절대 그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서 열린교회 교인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복음 하나를 가지고 산다 라고 하는 시대적 복음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금요일마다 땅바닥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게 무슨 복음으로 사는 것입니까? 그 쪽 동네 사람은 저 쪽 교회로 모이고 저쪽 동네 사람은 그쪽 교회로 모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그런 교회는 복음이 선포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면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들이 믿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이 올바로 선포되면 호남사람들만 모이는 교회, 만들려고 해도 되지를 않습니다. 경기도 사람이 와서 은혜를 받는데 어떻게 호남사람 교회가 되겠습니까? 영남사람이 와서 회계하고 뉘우치고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데 어떻게 호남사람 교회만 되겠습니까? 어떻게 영남사람만의 교회가 되겠습니까? 충청사람만의 교회가 되겠습니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만들려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가지고 있는 틀입니다. 그 틀들이 부숴지지를 않고 있으니까 복음도 거기에 걸러서 여과되는 것입니다.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와서 동남아시아를 다 부수고 수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나쁜 짓하고 했을 때도 거기에 기독교가 그 시대의 기독교가 용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일본에 있는 기독교는 순수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아주 소수를 빼놓고 말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는데 군국주의라는 사상에 걸러서 통과되는 것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순수한 기독교 신앙이 안 들어오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고와 타협한 신앙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독교에 의해서 세상이 바뀌어질 것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무언가 세상이 가지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질의 기독교가 들어오고 신앙이 들어와야지만 꺽고 파멸하고 부숴뜨리고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 유대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가 오늘날 마음 속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고 성경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해라. 그 대신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은 건들지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나지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만 듣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 자체가 우리 자신의 생각과 이념을 하나님과 대치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이제까지 해온 그 잘난 신앙의 경험을 의지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니면 안됩니다 하는 것이 결국은 무엇이냐면 내가 옛날에 경험한 신앙이 있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데 그것도 못 살아가니까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도록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하는 것이 주님이 필요합니다 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일대의 혼돈이 생기는 것입니다. 생각이 잘못되면은 계속해서 영적인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이 이단 속에 있을 때에는 무엇을 만나고 본 것 같은 것입니다. 미혹하는 영들의 세계 속에 우리를 미혹하는 많은 그릇된 체험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체험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에도 있습니다. 굿할때 무당이 소나무 가지를 붙들고 굿을 하지 않습니까? 놓고 징을 치면서 북을 치면서 춤을 추는데 물건이 혼자서 뛰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와서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것은 트릭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신들린 사람입니다. 이렇게 올리니까 궁중에 붕 떠있잖아요? 아무리 만져봐도 실오라기 하나 없습니다. 그런 체험은 어디에나 다 있습니다. 그런 체험을 하던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와서 배겨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신앙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을 느끼기 전에 결국은 어떠한 고통의 생활을 보냅니다. 그 이단으로부터 받은 것을 털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털어집니다. 아무데나 가서 성경 배우고 아무데나 가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듣고 이 책 저 책 보면서 마구잡이로 들어서 이 속에서 틀이 잡히기 시작하면 큰 일 나는 것입니다. 그 결국은 한번 들어가게 되면 딱딱하게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변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똑바로 섰는데 이 쪽 엉치뼈가 옆으로 튀어 나왔습니다. 딱 들어가기만 하면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맵시가 좋겠는데 처음에 이런 것들이 생겨날 때는 그런 식으로 할려고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세월이 자꾸 지나다 보니까 이런 것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치기를 원해도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버릇 같은 것이 절대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버릇을 하나를 고치는데 고통스러운 투쟁을 해야지만 버릇 하나 고쳐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버릇이 있지 않습니까? 저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버릇이 있습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좋고 편한 것입니다.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어떤 학생이 다리를 덜덜덜덜 떨면서 볼펜을 돌리면서 외웁니다. 도대체 앞에 앉아서 책을 보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복잡한 수학문제를 풀고 있었습니다. 애야, 다리를 떨고 이거를 돌리면서 양쪽 귀에 FM 음악을 꽂았는데, 무어라 하니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야, 가만히 앉아야지만 집중이 되지, 이렇게 떨고 이렇게 하는데 문제가 풀리냐? 80문제만 풀다보면 다리에 알통이 배기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저는요 아저씨, 이렇게 해야지만 정신의 통일이 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거 다 내던지고 고요히 앉아서 백지를 딱 놓고 문제를 풀려고 하면 오만가지 잡동사니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거 고쳐라. 그 순간부터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심각하게 되면 입술을 이렇게 깨무는 습관이 있습니다. 지금 34년 정도가 지났는데 아직까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들이 또 그럽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다가 갈지 모릅니다. 입술이 약각 비뚤어졌습니다. 껌도 씹어보고 심지어 반창고도 붙여보고 했는데 결국은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게 가장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만나고 싶으십니까? 그런데 문제는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그러나 이대로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주님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하냐면 내가 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은데, 내가 생각하는 신앙,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깨어지는 아픔없이 앞으로 돌진하면서 밀고 나가게끔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긴대로 확확 밀어주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과 주님 만나고 싶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에 청년부 할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가는 곳마다 기도제목은 좋은 기도제목이 나옵니다. 사람은 못 바꾸고 기도제목만 바꾸는 가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게 웃을 때도 있습니다. 어디서 배웠는지 저의 소망은 죽든지 살든지 주님과 만나서 담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담판하겠다는 사람이 맨날 담판하러 나와서 졸면서 어떻게 담판이 되겠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걸고 하나님 앞에 해결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조건이 많은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허물지 마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난 지가 그저 한 10년 미만일 것입니다. 20년, 30년, 40년, 50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오늘까지 살아오고 갖게 된 신앙의 체계와 인생에 대해서 갖게 된 경험과 말씀을 보는 견해 등 이런 모든 생각들이 항상 성경적이고 올바른 길로만 걸어왔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잘못된 것들을 많이 세워 올리고 했습니다. 자기가 가장 자랑하는 것, 인생의 역사와 신앙의 역사를 돌아볼 때 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이것만큼은 보배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것조차도 어떤 때는 신앙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여기에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실 때 창녀요 기생이었던 여인, 그런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며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왔습니다. 돌맹이를 던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가장 종교적인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술팔고 몸팔고 사기치면서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 돌맹이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께 던지겠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오셨을 때에 그 사람들이 가장 복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 거절하는데 창녀, 기생, 세리, 못된 놈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상한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도 타락해야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타락한 사람들이라는 이유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준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붙드는 대신 그리스도를 만나자마자 일시에 허물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무시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허무는 것이 내가 허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들어와서 허무는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자기에 대해서 용서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를 증오하는 사람들,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에 대해서 용서를 못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아무것도 아닌데도 5년, 10년 교회에서 봤는데도 어느 동네에 사는지, 전화번호가 어딘지, 부모님은 있는지, 형제가 누군지, 무엇을 해서 밥을 먹고 사는지 도무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웃기는 하는데 일체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어보면은 빙빙 돌리고 자꾸 물어보면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전부 그런 방어기제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영적인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자존심 가진 사람들, 곧 죽어도 곁불은 안 쬐겠다. 이렇게 자기가 세운 것입니다. 왜 얼어죽습니까? 곁불도 쬐고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곁불 쬐고 살다보면 장작 피는 날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들을 보는 눈이 날카롭습니다. 날카로운 것 자체는 훌륭합니다. 남들이 못보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것도 성령에 의해서 무너지고 파괴되어지고 하나님이 완전히 지배하고 다스릴 때는 그것이 요긴한 칼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것들은 파괴도 안되고 무너지지 않고 잔뜩 살아있으면서 그 칼을 휘두르면서 교회를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여러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말은 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교회가 살고 사람들이 감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열심은 있습니다. 열심은 있는데 교회가 설교자가 우리 모두의 신앙생활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그 신앙의 틀 속에서만 발동하고 그것에서 어긋나면 열심이 발동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 열심은 결국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열심이라고 할 지라도 이 속에서 무너지지 않은 것들이 많으니까 그 기제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따라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도 많이 하지만 결국 많은 사람들을 다치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좋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 자체를 저는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뿌듯하였습니다. 자기는 어떻게 살아갈까를 걱정을 하는데 열린교회에서는 어떻게 죽을까를 고민하면서 기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 자신이 그런 깊은 신앙의 세계 속으로 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그 요소들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노골적인 방법으로 말씀을 향해서 돌맹이를 든 적이 없지만 말씀을 들으면서 치우쳐서 과연 그럴까 하고 돌아가는 것도 돌맹이를 든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누가 그러한 사람을 변화시키겠습니까? 변화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5년 혹은 10년 전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보십시오. 신학교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15년전에 신학교 1학년 학생이었는데 15년이 지나니까 머리도 빠지고 주변머리도 빠지고 안경도 금테로 바뀌고 배도 나오고 얼굴에 살도 붙고 옷도 입고 승용차도 타고 다니고 아니면 고생을 해서 허리가 구부러져서 얼굴이 누렇고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사람들이 15년 전에 학교 처음 들어갈 때 받았던 은사를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에 신앙의 인격이 신실해서 오직 기도, 오직 기도 밖에 없다고 하면서 점수는 F가 나와도 채플실에 올라가서 엎드려서 주여 주여하고 방학 때면 당연히 십일조는 금식기도로 드려야 하는 것으로 알고 그냥 기도로 갑갑할 정도로 융통성도 없고 기도로 살던 사람은 교인이 몇명 모이든 상관없이 그렇게 목회를 합니다. 그 때에 성경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갖고 싶어하고 말씀 말씀 그러던 사람들은 지금도 설교하면서 어떻게 하면 성경대로 설교를 할까 고민을 합니다. 학교 다닐 때에 교수를 찾아 점심을 먹자고 하며 이쑤시개 드리면서 학점 좀 올려주십시오 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어디 가서 어느 노회문을 두드리면서 개척교회했는데 그래도 도와줘야 할 것 아닙니까? 당신이 이 교단에서 제일 감화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기치고 돌아다니면서 시멘트값 모으러 다닙니다. 그 때 기도도 싫고 친구들도 싫고 앉아서 영어책이나 보고 있던 사람들은 지금 10년이 지났는데 여기 출판사 2층에서 교정보고 앉아있습니다. 맨날 신학교 다닐때 수업시간도 빠지면서 채플실 들어가서 피아노 두드리고 기타치고 노래 부르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러고 다닙니다. 그저 이 강대상은 허름해도 천 이백만원, 이천만원씩 주고 음악세트 갖다놓고 교인은 50명 밖에 안되고 그것 두드리고 있습니다. 안 바뀝니다. 그것이 우리 이야기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위를 보십시오. 10년 전에 같이 신앙생활했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10년이 지나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아니, 저렇게 변했다니? 저게 김집사 맞어 박집사 맞어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거의 못 만납니다. 그런 사람들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자신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안 변합니다. 그렇게 말씀 많이 듣고 왜 안 변하냐고 하는데 말씀 많이 들은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유를 잔뜩 먹는데 정수기 통에 집어넣고 다 걸러내고 맹물만 빨아먹는데 살이 찌겠습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력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늙었다는 것 밖에 더 있습니까?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 했느냐 할 때는 경력이 문제가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이 깨어지고 무너지고 항복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열정에 불타는 것에 대해서 나무라지 마십시오.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제일 비참할 때가 항복을 못 받을 때입니다. 요리 빠지고 조리 빠지고 기가 막히게 빠져서 이렇게 하는 척하다가 도망가는 것입니다. 항복을 해야지만 무너질 것 아닙니까? 그래야지만 새로운 자기가 형성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형성되지 않는 것이 발전만 안하는 것이면 괜찮지만 이렇게 반감이 자라는 것입니다. 체험을 구해도 이렇게 자기 속에 있는 깊이 감추어진 잘못된 자아를 드러내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이 부서지는 그런 체험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토대는 흔들지 않고 그냥 등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그런 행복한 체험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어찌해야 할꼬? 하는 이 체험이 아니라 어 왠 불, 왠 성령, 왠 행복 이런 것만 체험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체험은 아무런 신앙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잠시 후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 성령의 불 받고 손을 얻고 기도만 하면 뒤에서 시꺼먼 도장이 생겨나던 그 청년, 부동산 사기치고 감옥에 들어가 앉아있습니다. 아무런 도움을 안줍니다. 제가 늘 말하지만 불 때러 다니는 그런 오순절적인 신앙생활은 고통하는 시대의 이 신앙의 한계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체험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이나 이런 것들이 파괴되고 무너지는 체험들이 와야지만 하나님이 그 위에 세우실 것 아닙니까? 우리의 심사가 이와 같습니다. 달동네에서 판자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 한 집에 5평 6평밖에 안되는 집, 그것도 8평짜리를 입주권 얻을려고 베니아판으로 일곱개 여덟개 막아서 사기치면서 입주권을 따내는 것, 그것도 하나에 몇 백만원씩 주고 사고 들어가는 사람들. 그렇게 새까맣게 붙어있는 달동네, 각하 우리에게 좋은 아파트 하나 주시옵소서, 어떻게? 우리가 지어주랴? 네, 빨리 지어주십시오. 그래? 그러지.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이 판자촌을 헐지말고 지어주십시오. 어디다 지어주겠습니까? 판자촌이 뜯겨 나가고 민둥산이 드러나야지만 그곳에 지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틀을 죽어도 양보할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 태도가 가히 필사적입니다. 말씀이 귀에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 듣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안 듣는 것입니다. 안 듣는 이유는 속에 있는 것들을 무너뜨리기 싫은 것입니다. 예를들면 용서하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번 주만 넘기만 저런 도서는 없겠지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슨 일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가지만 수십개월 동안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5년 전에도 그 기도제목, 4년 전에도 그 기도제목, 3년 ,2년, 올해도 그 기도제목, 내년에도 바뀔 때도 또 그 기도제목입니다. 그런데 한번도 마음 속으로 내 기도제목이 어찌하여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나님이 왜 이렇게 행하실까? 그런 고민은 안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못 만나고 살아가는 것이 내가 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무너져야 하는 것들을 무너뜨릴 때 당하는 그 고통과 아픔과 무너지게 될 때 의지할 곳 없게 되어버리는 외로움 이런 것보다 훨씬 견딜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자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흥을 이야기하고 각성을 이야기하고 요한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설교를 평가하고 그러면서도 그런 것들을 스스로 내가 이러한 이 시대의 잊혀져가고 있는 신앙의 주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치있게 생각 안하는 이것들을 내가 가치있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내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가? 나는 이만해도 보통사람들과는 틀리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봐라. 내가 요새 유행하고 있는 설교하고 각도가 다른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얼마나 내가 다른 사람하고 얼마나 다른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됐어. 됐어. 그 정도만 해도 괜찮어. 쓸모가 있어. 누가 누구에게. 자기 자신에게.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보고 가소롭다하며 웃으시는 것입니다. 그냥 거미줄 같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구조물들이 이 안에 가득 도사리고 있어서 그것들이 복음의 빛이 비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그러한 집들을 우리 속에 지어서 스데반과 같이 사도들과 같이 이렇게 변화되어져 가는 이런 사상들을 가져다주는 이 일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나 이 사람들이 오순절날 한번 하나님을 만나니까 모든 것이 다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아닙니다. 중요한 것만 무너졌습니다. 이야기 했듯이 이방인과 같은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나중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선은 원하는 것은 그런 큰 가닥만이라도 무너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고 그것이 계속 살아서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열매가 맺혀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을 깊이 봐야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오늘 이 속에서 스데반과 같이 우리가 되었다라고 하는 착각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의 이 그림자를 말씀을 들었지만 마음에 찔려서 이를 갈고 급기야는 돌맹이를 집어들 수 밖에 없었던, 스데반이 아니라 스데반을 순교케 했던 사람들의 심경이 여러분들이 오늘 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조금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칼빈도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에 늘 강조했던 것이 설교를 준비하지 않고 올라오는 설교자가 없듯이 모든 교인은 설교를 들을 준비를 하고 와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준비는 무엇입니까? 본문을 미리 읽어오고 외우고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라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주님 그 말씀으로 내가 기꺼이 무너지게 하옵소서. 기꺼이 내 자신의 잘못 심겨진 것들이 뽑힐 때에 아프더라도 내가 그것을 참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그렇게 자신을 영적으로 깊이 준비하고 와야합니다. 저는 여태까지 여러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집회도 하였습니다. 집회 때는 준비를 좀 합니다. 그래서 집회 때는 은혜를 받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하던대로 똑같은 시간에 하는데 집회 때 은혜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받게 해주시옵소서.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고 비워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매주일 반복되고 수요일마다 반복되니까 그런 기도를 거의 안하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세월만 자꾸 보내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는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기도제목은 결국 아득히 먼 기도제목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참한 일들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 속에 이런 유대인들과 같은, 이런 백성의 장로들이나 이런 사람들과 같은 요소들이 내 안에 굉장히 강하게, 그것을 가리켜 사도바울은 죄의 법이라 했습니다. 법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도로면에 차를 세우면 3만원에서 7만원으로 오른다. 법이 딱 한번 세워지고 나니까 불법주차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하나 딱 붙이고 가면 몇 일 일당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법은 실제적으로 사람들의 삶 속에 침투해서 영향을 미치며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방어기제들이 우리 속에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그런 기도제목을 가지면서 살아가도 그것들이 성취되고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 그러한 방어적인 요소들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고 새끼를 치면서 막 자라나는 것입니다. 땅 속을 들여다 보니 그것들이 길 같이 자라나고 복음의 씨앗은 결국 묘목처럼 자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삶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늘 도전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영혼은 거듭났는데 가치관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만 대입됐을 뿐이지 예전에 그 꿈이 지금도 그 꿈입니다. 안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면 속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그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끊임없는 제동장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낼려고 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요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삶 속의 은혜체험의 한 요소를 우리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참답게 하나님을 체험하고 참답게 진리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과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자신과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은 제가 요즘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인해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죄송한데 한창 제가 신앙의 체험을 깊이 갖게 되었을 때 한편의 설교를 위해서 30시간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급격하게 삶이 바뀔 수 있는 비결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뭔가를 자꾸 할려고 하지 말고 내가 뭔가를 하면 하나님이 나를 갸륵하게 여겨주시겠지 그런 생각하지 말고 주어진 일은 충성을 다하되 말씀을 들을려는 마음의 준비를 간절히 하고 오십시오. 심지어는 금식까지라도 말입니다. 듣고 그 말씀이 참다운 말씀이고 그 말씀이 성령으로 역사를 하시면 중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스펄전이 신앙에 있어서 회색지대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고 바르게 선포되고 그것이 충분히 들려지면 그러면 마음이 찔리고 그 말씀을 아멘하고 붙들고 우리가 바뀌든지 아니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바는 지금 우리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면 첫째는 설교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맞든지 안 맞든지 나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그런 개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깊이 들으니까 찔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찔리는 찔림이 말씀에 대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찔림이 되지 않고 그 말씀에 순복하고 엎드려지는 찔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하냐면 말씀이 나를 흔들고 허물때 이를 악물고 참으리라 그리고 무너지게끔 나를 개방하리라. 그런데 설교가 들릴 때 저 사람이 내 깊은 속을 뭘 알겠어 하면 일이 다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무너지는 만큼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은 다 무너지지는 못했지만 일부 무너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일부 무너진 만큼 행복한 것입니다. 자유로운 것입니다. 더 무너지면 더 자유로운 것입니다. 마지막에 다 무너지고 나니까 이전에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길뿐 아니라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 그것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정말 중요한 주제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설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근본적인 성찰이 없다면 안됩니다. 기도제목 내놓을 때에 하나님 만나기를 원한다는 기도제목을 내놓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기도제목 내놓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기도제목에 합당한 삶을 먼저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고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 자신을 대견스럽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자꾸 부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제목 자체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더 가난하고 절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경건서적 같은 것을 읽으면서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더욱 부요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이런 것을 사모하다니? 누구 좀 봐 이 책을 읽다가 화가 났대. 누구 좀 봐. 이 책을 읽으면서 졸았대. 그런데 나는 은혜가 되는 거야. 그러면 내가 다른 사람과 틀리지 않겠어. 너 같은 사람은 없어. 아무 유익을 우리에게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갈 수 있는 많은 교회를 버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좋아하는 많은 메시지를 버리고 열린교회를 갔다는데 과연 가니까 소득이 있다고 하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볼때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나올 가능성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여기 뜻을 세우고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항상 사모하듯이 주님 오직 말씀하옵소서. 그 말씀의 참된 이치를 깨닫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고백이 참되고 진실한 고백이라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말씀이 다가와서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찌르지 않는 것은 우리가 모든 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어도 들리는데 소리로 들리지 내용으로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오픈되어 있으면 무심코 지나가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비수와 같이 날라와서 꽂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찔려서 뭔가 말씀이 다가오면서 내 삶에 있어서 고질적인 부분을 흔들기 시작하면 할렐루야가 나와야 하는데 노 할레루야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씀이 다가와서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우리의 속사람을 흔들 때에 아 올것이 오는구나. 이것을 기다려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참았던가. 그렇게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린 것이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흔들면서 아픈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왠 불, 왠 성령, 왠 체험. 이것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 불, 그 성령, 그 체험 그런 것들이 참된 것일 때에 더 수준 높은 것들일 때에 패하고서 흥함을 받는 것입니다. 먼저 무너지고 절망을 했습니다. 회개를 해야되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이 사람들을 흔든 것입니다. 흔들다가 결구 우두둑 하면서 뿌리채 뽑혀서 무너진 것입니다. 이제는 붙들고 살아갈 아무것도 잊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해서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밤에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은 끝나고 나면 20분 이내에 다 사라져서 어딘가로 갑니다. 그런데 다 불바다가 되고 무너지고 부숴져서 없어져 버렸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마음이 생각이 납니까? 2장의 유대인들이 그런 상태가 된 것입니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으면서 묻는 말이 형제들이여, 어떻게 그 사람들이 형제들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술에 취한 사람들하고 어떻게 형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술에 취했다고 하더니 이제는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주저앉는 것입니다. 다 무너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렇습니다. 그리고 세워지는 것, 우리들이 흔히 사모하는 그 기이하고 놀라운 신앙의 체험과 수준높은 영적인 그 체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진수들이, 말할 수 없는 그런 기쁨과 그런 신앙의 영적인 체험들, 우리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움직여놓고 우리들이 꿈꾸는 삶을 살게하는 근본적인 변화의 동인이 되는 그 놀라운 체험들이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그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깊은 신앙의 체험을 원한다고 말하면서 그 소망이 자꾸 채워지지 않자 자기가 이런 식으로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닌가 그런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좀 악한 경우입니다. 결국은 생각은 옳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따라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개가 토했던 곳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다시 누웠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가서 편안히 사는데 그러나 결코 다시 돌아가도 그런 속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애굽을 떠나고 홍해를 뒤에 놓은 사람의 마음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흔드시옵소서. 그리고 우리 잘못 심겨진 것들을 깨뜨리고 무너뜨려 주옵소서 라고 하면서 매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맡기고 주님의 말씀이 나를 깎고 부수기를 원하는 그런 깊은 결단과 각오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참다운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무슨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 그것을 보고 우리를 평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책들을 좋아하고 어떤 사상들에 심취해 있는 지를 가지고 우리를 평가절상하시거나 평가절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나 사상이나 그런 견해나 신앙에 대한 사고나 이런 것들이 소중한 것은 그것을 따라서 몸부림치고 살 때에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이 유대인들과 같은 그토록 역사가 흐느끼면서 구약의 시대부터 그런 메시지가 들리기를 사모하면서 아브라함도 죽어간 것입니다. 이삭도 죽어갔습니다. 야곱도 그 소망을 가지고 죽어갔습니다. 다윗도 그 소망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그렇게 흐느끼면서 기다리던 그 놀라운 사건이 성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찔리고 이를 갈고 결국엔 돌맹이를 들어서 그 스데반을 죽였을 때 그것은 스데반을 향해 던진 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던진 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던진 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던진 돌이었습니다. 똑같은 성품과 그러한 요소들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결국 가장 자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하나님이 허물고 무너뜨리고 그래서 처참하게 무너뜨리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흔들리면 주님 더 세게 더 강하게 더 빨리 흔들어서 주님 저의 고통같은 것들은 보지 마옵시고 하나님 오늘 저녁에 끝장을 내 주시옵소서. 흔드시옵소서. 주님, 내가 이렇게 흔들리다가 죽는 것이 낫지 이것을 내가 그대로 문제로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이, 보십시오. 실패투성이의 인생길 이것입니다. 내 속에 무너지기 싫어하는 것들을 부여잡고 그것을 섬기면서 살아온 인생이 바로 실패로 얼룩진 과거의 인생의 역사. 다시 돌아가서 살고 싶지 않은 그 40년, 50년, 20년, 10년, 30년의 세월, 그것이 바로 이것인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마치 어린 아이에게 좋은 약을 먹이는 것처럼 사정보지 말고 무너뜨리시옵소서. 주님 왜 이렇게 시간을 끄십니까? 제가 아프고 고통받는 것 개의하지 마시고 꺾어버리세요. 단순히 오셔서 무너뜨려 버리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라는 말 안해도 하나님이 그 기도를 알아들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무엇으로 다가오십니까?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다가와서 말씀 그 자체로 우리들을 흔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에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면서 기복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면서 여기에 복음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돈으로 바꾸었고 우리들은 고통없는 안일함으로 바꾼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관념에 유의만 하다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최근에 들어서 이런 문제에 대해 명확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교회에 정말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고통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자기를 기만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의 최선의 정책은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 앞에 탁 털어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주님, 이것 이것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런데 안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나도 무너지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무너질 수 없다면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는 아픔이 무엇인지 내가 느끼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매달려서 기도를 해야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소망이 있지 그것은 덮어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주님은 어찌하든지 말씀을 통해서 본질적인 곳으로 다가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겉으로 웃고 다니고 흰옷 노란옷 입고 다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알긴 무엇을 압니까? 백분의 일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만나주시기를 원하시고 여러분 속에 참된 부흥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오른쪽 어깨를 치시든지 머리를 쓰다듬으시던지 왼쪽 어깨를 치든지 엉덩이를 치시든지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거기가 아니라 거기 그 은밀한 것 그 근본적으로 여러분들이 본질적으로 붙들고 놓지 못하는 그것을 놓고 이야기 하자시는 것입니다. 핵문제 이야기 하자니까 핵문제 이야기 안하고 엉뚱한 이야기만 툭툭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가리는 것입니다.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자꾸 피해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하나님께서 건들여 주실 때만 감격과 회개가 왔습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문제를 짚고 두드리면서 들어가지 않을 때에는 화나는 일도 없었지만 감격도 없었습니다. 참다운 회개가 없습니다. 벌써 열달 밖에 안되는데 설교를 들어봐야 몇 편이나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자꾸 비껴갈 궁리를 하는 그러한 흐름들이 언뜻언뜻 느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저를 포함한 우리 모든 사람들이 언뜻언뜻 느껴지는 것입니다. 제 마음 속에 찾아오는 것은 내가 이렇게 지금 당장 원할 때마다 일어나지도 않는 그런 것들을 성경의 기본적인 관점이라고 확인하면서 이렇게 성도들을 어렵게 끌고 가는 것이 결국은 수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가 그런 유혹이 스쳐갈 때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유혹받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혹이 스쳐가지만 저는 즉시 그 유혹을 미워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느낄 때 저도 그런 것들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것이 새벽기도에 여러분들이 열심히 안 나오고 금요철야 기도회에 열심히 안 나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문제의 해결들을 그렇게 자신의 시각에서 보면서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그 교묘하게 감추어진 방어의 기제들을 이끌어 올리면서 그 말씀을 빛을 받으면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부숴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이러한 추구들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러한 추구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은 숙명론적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만난다 라고 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한 두사람에게만 허락되었다. 아주 특별한 사건인 것처럼. 내가 어차피 목사가 될 것도 아닌데 크게 만나서 뭐하겠어. 조금 먹고 조금 살지. 이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은 그것은 가리켜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는 참된 기쁨이 없고 참된 승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저 같은 사람을 믿고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불이라도 떨어지게 하셔서 열린교회 폭탄이 터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그런 꿈 가지고 있으면 저도 원하지 않고 하나님도 원하시지 않으니 꿈을 깨십시오.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은 3년도 못 있어서 교회를 떠나버릴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떨어져서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싫고 사람들 많이 데려올테니까 그 사람들이나 박살을 내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이 시간을 빌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정말 힘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셔서 여러분의 의지와 여러분들의 정직함과는 상관없이 하늘에서 폭탄 같은 것이 떨어져서 유례없는 부흥이 일어나기를 꿈꾼다면 꿈을 깨십시오. 부흥은 한번도 그렇게 온 적이 없습니다. 말씀이 들려지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교회 속에서 일어나기를 원하는 장엄한 깨어짐들이 여러분 자신 속에서는 왜 안 일어나는가 하는 그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뇌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말하자면 여러분들이 사모하는 그런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그 길을 지나치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