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외적세계와 내적세계 (3)
녹취자: 이경순
13.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정동의 원인은 감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물에 대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애호하는 감정에 정동을 반복하여 경험하게 되면 사랑의 경향성이 마음과 영혼 안에 발생하게 되고, 반대로 추함을 발견하여 그것을 싫어함의 정동의 경험이 반복되면 그것이 배척의 경향성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미움의 정체이다. 미움과 사랑의 감정은 인간 마음의 서로 다른 작용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을 구심으로 하는 하나의 동심원을 이루는 그 외연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하여 사랑은 미움 반대편에 있는 감정이 된다. 그리고 그 중간 대역이 싫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제가 여기다가 한 그림을 그릴 텐데 보세요. 여기에 사람이 있고, 이 사람이 어떤 것들을 바라봅니다. 어떤 것은 아주 아름답게 보이고, 어떤 것은 아주 추하게 보입니다. 추하게 보면 여기에는 혐오(嫌惡)의 감정이 생겨납니다. 오(惡)라고 씁니다. 또 하나는 아름답기 때문에 애호(愛好)하는 감정이 생겨납니다. 자, 그러면 이것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고 이것은 추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마음이 중간지역이라면 감정의 대역이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처음에는 중립이었는데 어떤 것을 보면서 계속해서 마음이 끌리지 않고 싫어하고 멀리하게 되면서 정동들이 생겨납니다. 곧 추한 것들 때문에 정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광경을 봐도 마음이 움직이지만 추하고 더러운 것을 봐도 마음이 움직입니다. 이것이 반복될 때 미움 혹은 싫어하고 혐오하는 감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것들을 보면서 계속해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나고 사랑하는 감정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정동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쌓이면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선이라고 느끼고, 추한 것은 악이라고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진짜 아름다운 것인지, 혹은 진짜 선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결국 인간의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과 진짜 아름다운 것, 선하다고 느끼는 것과 진짜 선한 것이 일치하지 않는데서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이 그 행위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고 살인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저지른 사람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지른 것입니다. 즉 살인을 하지 않는 것보다 살인을 하는 것이 자기에게 가져다 줄 이익을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덕 법칙을 어기고 살인을 합니다. 모든 정신의 구조가 이런 식으로 따라옵니다.
결국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추한 것, 악한 것은 그것이 진짜 올바른 것이냐는 것을 판단할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를 알기위해서는 공중에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서 이것을 비추어보고 동의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각자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모두 다른데 진정 좋아해야 될 것을 싫어하거나 아름다운 것을 추하다고, 혹은 추한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마음이 끌린대로 행했을 때에 오히려 더 큰 문제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확신들이 여기서 생겨납니다. 결국 인간은 이 모든 것의 상대적인 기준이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그 무엇에 의해서 이 모든 것이 판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사상은 이런 절대적인 기준을 부인합니다. 절대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하나의 규약일 뿐이며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헌법재판소와 같은 최고 기관에 궁극적인 법에 대한 판단을 맡기는 것이 그 예인데, 그것 자신도 계속 변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낙태법에 대해서 판결이 나오는데, 다들 생각하기는 위헌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고 내다봅니다. 위헌 아니면 한정위헌 아니면 부분 위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분적으로 헌법과 합치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언제 언제까지 정부는 낙태죄를 폐기하라는 식의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많고, 좀 과격하다면 낙태죄는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기에 폐기하라는 판결을 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낙태죄가 헌법과 합치판결이 난 것이 2010년입니다. 그런데 약 9년 만에 또 다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 법을 어기며 파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다가올 시대의 윤리의 선각자일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그러한 판단에 대해서 동의를 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진리는 계속 변천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과 신앙의 규칙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저 말씀은 참고자료가 될 뿐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변천하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참된 진리를 고수하며 살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중대한 숙제입니다. 커다란 대세를 가지고 이 사회가 흘러간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진리 안에 살면서 세상과 구별된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렇듯 모든 판단에는 검증이 필요합니다. 선한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둘이 일치를 이루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지금 학생에게 좋은 본분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인데 공부보다 게임이 더 좋아 보이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 사이에 분리가 일어납니다. 게임하는 것은 아름답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것이 객관적인 것이나 주관적으로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선하다고 느끼니까 괴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것을 합치시키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숙제가 되는 것입니다.
혐오의 대역도 좋음의 대역도 아닌 중간대역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권태입니다. 싫증입니다. 어제까지 불같이 뜨겁게 사랑하였고 그래서 밤 12시까지 같이 있다가 헤어졌는데 오늘 새벽 4시에 지긋지긋해져서 절교를 선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혐오의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중간대역인 싫증의 대역을 지나야 합니다. 반대로 애호의 관계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었는데 점차 이끌렸다가 애호의 대역으로 이동하는 절차를 거칩니다. 신앙도 똑같은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 이끌립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더 이끌리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하나님에 관한 것들이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바로 신앙의 권태기가 옵니다. 그리고 더욱더 세상을 향하게 되고,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진리에다가 묶고, 선한 것에다가 묶고 눈에 떠오르는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 진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 라는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에게 진리의 빛이 없으면 그것을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비춤으로써 그 현혹하는 그 수많은 것들 중에서 참된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서 다이아몬드와 모조다이몬드 같은 것은 쉽게 구별 못합니다. 우리는 잘 못합니다. 본 적도 없고 혹 결혼할 때 받아보기도 하지만 팔아버려서 잘 모릅니다. 그런데 보석 전문가들은 멀리서 봐도 금방 압니다. 이게 고급 원석이냐 아니면 아주 형편없는 것이냐를 말입니다.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이것이 정말 예쁜 것인지 진짜 좋은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사랑해야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면 안 될 것을 사랑하는 데서 모든 비극이 생겨나게 됩니다.
사도요한이 요한1서2장 15절16일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목적격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모든 이세상의 아름다움의 근원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분이신가 하는 것을 만물과 사람을 통해서 느끼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하나님 사랑 때문에 만물과 사람들을 사랑하고 만물들을 선의로 대하면서 사는 것 여기에 이것이 인생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심을
그래서 이어령 교수가 한번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어떤 남자가 아파트 앞집에 사는 여성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결심을 하고 편지를 써서 거의 매주 꽃다발을 보냈답니다. 어느 날 한 1년쯤 지났을 때 그 아가씨한테서 편지가 왔습니다. ‘아, 드디어 이제 결실을 맺는구나.’ 했더니 결혼하게 되었다는 편지와 함께 청첩장을 보냈는데 결혼상대자가 꽃 배달해 주는 택배남자였답니다. 그러니까 꽃이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 접촉해서 그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느냐에 사랑이 달려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백만 송이 꽃이면 뭐하겠습니까?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세상에 대해서만 많이 알고 싶어 하면 결국은 세상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면서 계속 사랑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좋은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 내가 늦게야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라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또 그러면서 ‘너무나 오래된 그러나 너무나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내가 이제야 주를 사랑하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일상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듣게 되면 세계가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든지 살아계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알고 있으나 학문이 없는 사람은 성경을 펼쳐야지 하나님이 느껴지는데, 밤낮 학문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드러내는지를 설명을 들으면 온 천하 만물이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증거 하는 그림책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학문을 하는 기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보면서 한없이 아름다워 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개는 할 수 없고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런 것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14. 이러한 사랑과 미움의 정동은 감각적인 사물들을 접할 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스스로 상상하고 사유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이는 가시적 물체가 없어도 마음은 스스로 상상력을 통하여 형이상학적인 가치나 영원한 것들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들은 동일하게 마음에 미움과 사랑이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지금은 아무도 그분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상상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의 봄은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 상상은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상상이 아니라 그에 관한 진리의 증언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상상이며, 그러한 진리가 주는 지식의 객관성과 그를 정서적으로 느끼는 동정이 마음 안에서 결합함으로써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습득된다. 그리하여 보이는 육신의 감각적 사물보다도 보이지 않는 세계와 가치에 대해 더 많은 사랑을 갖게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영원적인 특성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건생활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것 손으로 만져지고 우리가 본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게임에 빠졌다면 게임을 더 열심히 해야지 하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빠져있기 때문에 저절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타락한 본성 속에 고유하게 스며들어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음식을 썩지 않게 보존하려면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옛날에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생선을 잡아서 배를 갈라 깨끗이 씻은 다음에 햇빛에 말립니다. 그래서 딱딱하게 북어처럼 말립니다. 그러면 심지어 몇 달을 두어도 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금에다 푹 절여서 아주 진짜 어마어마하게 짜게 만듭니다. 생선장사가 그것을 가지고 반년을 가지고 다녀도 절대 썩지 않습니다. 아니면 기름 속에 풍덩 집어넣는다든지 아니면 독일의 소시지처럼 훈제를 한다든지 하는데, 훈제의 경우 어떤 나무에 어떤 방식으로 굽느냐에 따라서 상하기도 하고 6개월 이상 가기도 합니다. 그런 다양한 음식을 보존하는 방법들을 인간들이 개발해 냈습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많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음식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뚜껑 열어서 지금 같은 때에 바깥에 놓아두면 이틀정도 있으면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고 먹을 수 없는 음식으로 변합니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지만 인간의 마음이 부패되는 일에는 별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마음을 지키려고 하지 않고 흘러 가는대로 내버려두면 인간의 마음은 아주 죄에 가깝게 됩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봉했던 사람이 장 자크 루소였습니다. 그러한 자연주의 철학에서 나온 그 유명한 고전적인 교육서가 루소의 <에밀>입니다. 에밀에서 장 자크 루소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에게 한 시간 동안 선악을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선악을 습득시키는 법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한 시간 동안 놓아두는 것이다.’ 아이들은 설명할 수 없는 조화와 자연의 이치 속에서 선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보면 그랬지만 자연에 대해서 별로 감흥이 없습니다. 놀이동산이나 좋아합니다.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지,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주는지, 그 안에 그 얼마나 평온한 안식이 있는지를 아이들에게 자꾸 가르쳐주어서 그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그 자연을 사랑하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자연을 사랑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키는 일은 마음을 안 지키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 갈 때에는 다릅니다. 마음을 지키면서 살지 않은 자의 삶은 너무나 힘겹고 나중에는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여 결국은 자살하거나 죽습니다. 할리우드의 많은 유명한 스타들이 그런 불행한 길을 걸었습니다.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과 같은 사람들도 다 그런 길을 걸었습니다. 떠오르는 명예와 어마어마한 부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지키는 일에는 에너지가 들어가지만 (그 결과는 참으로 귀합니다). 예를 들어서, 당장 오늘 먹고 싶은 것을 안 먹고, 졸고 싶은 것을 참고 깨어있으며, 하지 말아야할 일들을 절제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힘들지만 이런 일들은 일생동안 비교적 건강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자고 싶은 대로 다 자면서 방탕하게 살면 그것이 조금 지나면 육체의 건강 악화로 돌아오게 됩니다. 30대중반에 뇌졸중에 걸려 죽을 지도 모릅니다. 요즘은 20대에도 뇌졸중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유한한 삶을 살지만 오늘 살고 죽을 일회용품이 아님을 생각하며 우리의 몸과 마음 전체에 느끼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부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특별한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결코 즐거움이 될 수 없습니다. 정신 줄을 놓고 사는 게 편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훗날 뭐가 되겠습니까?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머리털이 없는 것은 용서가 되어도 머리에 든 것이 없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여자가 못생긴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아는 것이 없는 여자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허망한 것입니다. 지성미를 원해요? 백치미를 원해요? 대답을 안 하네요 백치미도 아무나 갖는 게 아닙니다. 머리만 나쁘다고 모두 백치미를 갖는 게 아닙니다.
15. 이러한 모든 정동의 작용들이 지식과 함께 감정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마음 안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 안에서 발생한 정동의 작용들은 영원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렇게 경험된 지식은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 보관된다. 뿐만 아니라 그 지식과 함께 경험했던 감정들 까지도 함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는데, 일단 마음의 표면을 통과하여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고통의 감정 없이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옛날에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소환되지 않은) 기억 속에서는 아프거나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일어난 일인데도 현재 아플 때가 있습니다. 기억을 소환할 때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이 이 기억과 회상을 위에 비교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코가 있고 입이 있고, 그 아래 위(胃)가 있습니다. 입에서는 입맛을 느낍니다. 쓰고 시고 달고 짜고 혹은 기름기가 있음을 여기에서 다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이 목구멍만 넘어가면 아무것도 못 느낍니다. 그러니 결국 아주 비싸고도 맛있는 음식은 입에서 느끼는 딱 15초의 쾌락입니다. 물론 접시에 차려진 예쁜 것을 보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입속에서는 약 15초의 쾌락입니다. 입을 떠난 그 음식들은 맛있는 것도 없고 맛없는 것도 없습니다. 물론 배속에 들어갔을 때 좋은 음식은 배 속을 편안하게 하지만 불량음식은 그 안에서 요동을 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째든 내려갑니다. 미각은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것을 기억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먹었던 그 음식을 울컥하고 토해냅니다. 그러면 그것이 다시 올라옵니다. 되게 매운 것을 먹었다면 욱하고 토하니까 다시 올라오면서 신물과 함께 엄청 매운 고춧가루 성분들이 다시 한 번 매운맛을 주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이 기억 속에 잠긴 기억은 아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소환할 때에 이 기억들은 의식의 표면을 두드립니다. 그때는 20년 전에 느꼈던 아픔인데도 똑같이 재연이 되어서 그때보다 더 아플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엉겁결에 그 고통을 어떻게 이겨냈는데 은혜도 떨어지고 인간성도 악화된 지금에는 그 고통이 더 치받혀 올라오면서 인간에게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보면 인간이 아름다운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회상할 때에 아름다운 그 기억들이 떠오른다는 것은 너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이런 요소도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인생에 일어난 일들을 자기 스스로 소화할 능력이 현저히 모자란 사람들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것이 그대로 경험될 뿐이지만 신자들은 이 일을 신앙적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고통을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서 너무너무 가슴 아픈 일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못 만났더라면 그것이 계속 한으로만 남아 있을 텐데 감사하게도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일어난 그 일은 매우 나쁜 일이었지만 그 나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선을 이루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를 들자면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노예로 끌러갔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서 자기를 국무총리로 만드셔서 온 세상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하시려는 원대한 계획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전히 형들에게 버림받은 것은 아픔으로 남았기 때문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렇게 통곡하며 울었지만 그는 결코 형들에게 복수를 꿈꾸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해석해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복수와 원한의 관계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한 스펙타클 속에서 보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어려운 일들은 내 인생을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오히려 자신이 만난 어려운 일들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나쁜 기억들은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찬송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좋은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는 방황하지 말고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십시오.
16. 마음은 스스로 그러한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불러낸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의 회상이다. 이 회상의 작용은 마치 바다 밑에 가라앉은 물건들을 바다 밖으로 건져내기 위해서는 수면 위로 올라오게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때 정동 없이 존재하던 기억들은 마음의 표면 위로 올라오게 되고, 표면 위로 올라온 기억들은 또 다시 그것들에 대한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때에 과거에 대한 회상이 마음 안에서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방식을 따른다. 첫째로, 지식에 대한 회상을 통해서이다. 어떤 계기에 의해서 자극을 받든지 혹은 연관된 사물들을 감각하거나 상상함으로써 그 기억들이 이끌어내어질 때 그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 함께 따라오게 됨으로써 마음에 다가온다. 둘째로, 이렇게 어떤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 회상되어 마음의 표면에 떠오르게 될 때에 그 사물들을 접하면서 경험했던 감정들도 함께 회상되는데 이것들이 마음에 떠오른 지식과 함께 결합하며 또 다시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정동의 정도는 그때마다 각각 다를 것이다.
예를 들자면 옛날에 헤어진 사람인데 갑자기 보고 싶습니다. 이상하게도 비오고 슬픈 일을 만났을 때는 더 보고 싶어집니다. 늘 먹고 싶은 음식이지만 비가 쏟아지면 더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 것처럼 때마다 감정의 크기는 다를 수 있습니다. 여하튼 그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궁금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옛날처럼 그렇게 보고 싶지 않겠지요. 똑같이 그 사람이 보고 싶으면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때마다 다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 안에서는 이런 놀라운 작용들이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면서 그 속에서 여러분들은 순간순간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들이 연결되면서 여러분들의 인생이 지금까지 이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10년 후면 그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15년 후에는? 20년 후에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까? 아니면 비혼자가 되어서 남아 있을까? 아니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까? 아니면 선택한 누군가에게 끝없는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될까?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여태까지는 흘러가는 대로 살았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매 순간 순간 최선의 것을 선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원망이나 하고 투덜거려봤자 아무도 좋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힘들다는 이야기도 자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 무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약점으로 이용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이것은 내 인생이니 나 혼자 살아가야할 인생의 무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힘이 없으니까 주님 의지하는 것입니다.
17. 인간의 영원한 사물들, 혹은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에 대한 이러한 정동의 작용은 항상 회상에 의존한다. 만약 인간이 행복한 상태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자신이 행복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것이 행복한 상태인 줄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같은 방식으로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는 인간이 진리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난생 처음 접하게 된 진리에 대해 그것이 진리라고 분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것이 선재하는 영혼 속에 주님이 이미 공통적으로 소유하게끔 갖게 하신 기억이든지 혹은 개별적인 영혼들을 창조하실 때에 그 개개의 영혼에 심어주신 공통적인 씨앗과 같은 인식이든지 혹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영혼 안에 있는 지식이든지 간에 그것을 지금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 안에 선험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행복이나 진리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을 인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영원한 것들에 대한 정동은 언제나 회상을 이용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것들은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을 보았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인간이 행복한 상태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자신이 행복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것이 행복한 상태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야! 이것이 바로 진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진리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 너무 행복해’라고 고백하는 것은 행복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것이 행복인지 알았습니까? 그런 것들은 인간의 경험을 넘어서는 어떤 선재적인 기준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에 도달 했을 때 ‘아,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진리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난생처음 접하는 진리에 대해 그것이 진리라고 분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영원한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은 마음을 통과해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이 감각적인 사물들이 지식의 경험을 통하여 그렇게 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만 말고 좋은 뜻으로 생각하자라고 권고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행동은 똑같으나 그런 생각으로 사람을 대할 때는 전제를 달리 갖는 것입니다. 그런 전제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순수한 해석에 달린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이처럼 모두 해석의 작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감각적인 사물들은 인식 하는 주체인 한 인간을 중심으로 배열된 시간과 공간의 순서를 따라 감각되고 지각되며 인식되고 정동되어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가치들과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시간과 공간에 묶이지 않음으로써 자유롭게 넘나들며 인간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사실 이러한 사유적인 이데아나 형상들이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시간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영혼도 시간을 초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어제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10년 전의 일은 너무나 또렷합니다. 9년 전의 일은 생각이 안 나는데 11년 전의 일은 너무나 생생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억의 깊이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얼마만한 정동을 가져다주었느냐에 의해서 그것은 아주 오래도록 깊이 남기도 하고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뉴턴에게는 한 개의 사과가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어마어마한 산맥들이 지진으로 무너지는 경험보다 물리적인 양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의미적으로는 죽어도 잊혀질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건의 크기가 의미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날마다 해석할 수 있는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18. 인간의 마음 안에서 경험되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정동은 영원한 특성을 갖는다. 감각적인 사물들에 대한 인간의 기억도 시간을 초월하는 특성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다. 즉 외부의 감각적 사물들이 마음 안에 정동을 불러일으키고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매이나 일단 기억 속으로 들어간 모든 지식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기억 속에 존재한다. 방금 기억된 것이라고 해서 오래 전에 기억된 것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앞서지 못하며, 과거에 기억된 것이라고 해서 방금 기억된 것보다 뒤에 있지 않다. 오히려 분명한 지식과 커다란 정동을 느낀 정도에 따라 어떤 것은 두드러지게, 어떤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희미하게 우리 기억 속에 남으며, 그것이 아주 기억 속에 없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그것을 다시 불러 낼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망각이라고 부른다.
19. 마음은 바로 이렇게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광활한 기억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어떠한 사물이나 어떠한 가치들에 대한 경험도 인간 마음을 통하지 않고는 이 지상에서 기억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알고자 한다면, 이 마음의 문을 통해 우리의 영혼 속을 봄으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면 우리를 향해 선을 베푸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불순종하고 거스르면 진노하시고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자아를 피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인간 영혼 안에서의 무소부재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 영혼은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본뜬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물들을 기억을 통하여 현재의 마음의 표면 위에 떠올리고 시간적으로 이미 사라진 사건이나 도래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도 정동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영혼은 마치 우리의 몸 안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처럼 원하는 어디에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당신 닮게 창조하신 가장 훌륭한 증거 중 하나이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하나님이여 내가 나를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나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를 파악할 수가 너무너무 어렵기 때문에 우리들이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주는 가장 큰 유익은 내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장소에 국한되어 있으나 그의 상상과 기억은 때로는 장소를 초월하기에 우주공간을 날아다니는 우리의 상상과 기억을 보는 것입니다. 아무데나 거리에 관계없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세계를 여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폭 넓게 사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많은 세계를 볼 수 있겠습니까?
20.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는 무엇이 있을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도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대해 알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지식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지식만큼 이나 제한적이고 희미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자신의 영혼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 세계는 무한할 것이며, 하나님처럼 무한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천국에서조차 인간 영혼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 완전히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날마다 증진하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빛 아래서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과 비례하여 자신의 영혼을 아는 지식도 성장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내적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과 스스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 사이에 어떤 일치를 말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역사 가운데 이런 것에 대해서 제일 크게 눈을 뜨고 여태까지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을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이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과 같은 사람입니다. 프로이드나 융과 같은 사람이 인간의 심리학에 대상이 의식하는 것들이었는데 그 의식하는 것들은 무의식의 세계에 조종을 받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비유하자면 캄캄한 어둠속에 서치라이트가 환하게 비칩니다. 그러면 그것을 딱 보면 거기에 나무도 있을 것이고 쓰레기통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더 넓은 세계의 일부일 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냥 알려진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 의식하는 것은 서치라이트에 비친 일부분과 같고 무의식의 세계는 훨씬 광범위해서 의식의 세계의 원인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심리학이나 융의 심리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또 다른 해석들을 내놓고 있지만 그때는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서 그렇게 눈을 뜨게 해준 것입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지식은 우주에 대한 지식만큼이나 제한적이고 희미하다 인간은 영원히 자신의 영혼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영혼의 세계는 무한하며 하나님처럼 무한하지 않다 할지라도 천국에서조차도 인간영혼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 완전히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날마다 전진하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빛 아래서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과 비례하여 자신의 영혼을 아는 지식도 성장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내적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제일먼저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마음 없이 존재하는 나와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나와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그 양자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시인이 그런 기교를 사용합니다. 내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여 불안하여 하는 고, 하고 말을 겁니다. 그렇게 자신과의 대화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과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참된 가치를 향해서 상승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마지막 기회입니다. 문학작품을 많이 읽으십시오.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읽지 말고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그것을 그 속에 담겨있는 코드가 무엇인지 기독교신앙으로 비판하면서 읽어내는 가운데 지적인 성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조건 거기되면 에 빠지는 사람이 안 됩니다.
질문)
우리 인간이 무엇인가 명상을 한다는 것을 폭넓게 본다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사물에 대한 감각들을 잠시 차단하고 혼자서 생각하는 것이 명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적인 명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소위 이야기하는 명상으로 안 부르고 묵상이라고 부릅니다. 혹은 사색이라고 우리가 부른다면 그것은 이런 논리가 됩니다. 우리가 사색을 하는데 사색을 하거나 혹은 명상을 하는데 우리는 기본적으로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냐면 우리가 하나님을 계시의 말씀 없이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만큼 나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이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신에 대한 지식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대신적인 존재가 될 때에 그만큼 대자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뜻이냐면 인간이 여기 있습니다. 의문투성입니다. 당연히 자기가 누군지 모릅니다. 세계 속에 살고 있고 자기도 살고 있지만 자기가 누군지 모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진리의 빛을 얻게 되고 이 하나님의 존재 때문에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규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심지어는 자신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몸을 두고 살고 있는 이 자연의 세계에 대해서 도대체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규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이런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아무 빛도 없이 묵상을 한다고 하는 것은 끝도 없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의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면 뜻도 없이 심연을 바라볼 때 인간에게 마지막에 느껴지는 것은 허무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느낌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명상이 가치를 부분적으로는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도움이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예를 들면 만약에 하루에 세 번씩 반성한다면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은 물이 될 것이다. 그럼 옛날 사람들도 그냥 막 감각에 맡기고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하루에 세 번씩만 반성하면 움직이지 않는 맑은 물의 풍경이 비치는 것 같이 명정함을 얻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진리가 없었지만 진리를 절대로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이 생이면 그 생에는 도가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 도를 자신이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도에서 벗어 날 때는 자기가 그 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게 유교에서 인의예지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고 뭘 했어도 인이라고 하는 무한한 사랑의 법칙에서 보면 반성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것들이 인간에게 전혀 없다면 짐승하고 똑같이 다름이 없는 세상이 됩니다. 사람들이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어도 사회가 이정도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 반성하는 빛도 결국은 하나님이 부분적으로 비춰주신 진리의 빛의 힘입니다. 그 진리가 완전한 진리가 아닌 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묵상은 우리가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를 거기서 보고 우리가 보는 것은 명상을 하되 묵상을 하되 명확하게 진리의 말씀의 빛에 자기를 비추어서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답지 않은 것을 나에게서 끊임없이 덜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진리로 빚어지는 나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자신의 행하는 것이 일치를 이루는 삶이 바람직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질문)
연애가 그런 것 아닙니다. 존재하지 않은 것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명확한 규범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피해도 만나는 일이 있고 만났는데도 피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연애를 하지 말라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사랑하지 말아야 되겠지만 연애를 합니다. 연애가 항상 달콤하고 재미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은 그냥 나타난 모습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견딜 수 없이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들도 일어납니다. 그것을 겪으면서 인간은 또 성숙해져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도 있습니다. 연애를 하는데 자기할일을 대충하면서 라도 연애하는 사람이 있고 한번 빠지고 나면 아무것도 못하는 무기력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성향을 알아서 다른 사람은 안 피해도 될 것을 자신은 피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유리할 수가 있습니다. 조용히 있다가 선보고 몇 번 만나고 장가가는 게 더 좋은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자기가 무엇에 의해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 할 정도로 매몰시키는 요인과 만나는 것은 그것은 자기다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뒤흔들어 놓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항상 마음에 이 말을 새깁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이외에 무엇에 의해서도 내 인생은 뿌리 채 흔들릴 수가 없다. 더욱이 어떤 인간이 나타나서 나를 그렇게 흔들어 놓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게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야지 상대방도 행복한 것입니다. 영원히 나만 사랑해? 어떻게 영원이야? 죽을 때까지만 잘 사랑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담에는 항상 책에도 나왔지만 성경이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것을 잘 기억을 하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그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본적이 없는데 그 죄를 지은사람보다 더 생생하게 그 죄의 결과가 어떤지를 느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하는 일입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옳은 일을 아직 하지 않았는데 했을 때 어떤 기쁨이 느껴지는 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설명을 조금 더 부연하자면 인간이 있는데 꽃길만 걷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길을 원합니다. 안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인생은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출렁거리면서 걷습니다. 그런데 에이, 비, 시, 디 ,이 ,에프 이렇게 건너올 때마다 여기서 항상 죽음을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교만해집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끊임없이 요동치는데 결국은 인생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에이라는 상황을 만나서 바닥까지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다 라고하면 살아야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행복하려고 사는 것이지 불행하기 위해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요 위에 있는 의미를 발견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높아집니다. 교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미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비는 에이 때문에 비는 시 때문에 사는 이는 디 때문에 각각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삶은 요동치지만 마음은 이 속에서 무엇인가 일관된 가치를 따라 산다면 그 무엇을 자기가 붙들고 있을 때 요동하는 현실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것입니다. 가난할 때도 있고 부자일 때도 높아질 때도 있고 낮아질 때도 있고 사랑할 때도 있고 헤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지옥과 천국을 오간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자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게 말하자면 인류역사에서 철학이 나타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항구적인 어떤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미를 생각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질문)
모두에게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셨는데 문제는 소극적인 지식입니다. 예를 들자면 ‘나 책을 잃어버렸어 ,무슨 책을 잃어버렸어? 뭘 잃어버렸는지 확실하게 잃어버렸어 이렇게 이 책이야 그러면서 주니까 아니? 그럼 뭐야 몰라 나 생각은 안나 그런데 여태까지 보여준 이 책은 아니야 그런 지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똑같이 진리를 아는 지식을 인간에게 주셨는데 그 진리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더욱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은 모르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있다는 것과 자기가 죄가 있다는 것과 고통스럽다는 것 이것만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수많은 종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그 사이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식도 매우 중요한 것은 행복한 상태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 행복에 도달했을 때 아, 이거다 라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를 들자면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칩시다. 스테이크를 먹었다고 칩시다.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태어나서 스테이크를 수없이 먹었을 겁니다. 그래서 세계에서 유명하다는 집에 갔습니다. 진짜 스테이크를 만들어 와서 딱 베어서 한입 먹는 순간에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스테이크들이 이것을 만들려다 실패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이 안에 불완전한 것을 먹었지만 만족이 없었고 가장 완전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떤 행복한 상태에 딱 도달했을 때 행복을 설명하라면 못하는데 아, 난 지금 행복해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된 것 일 때는 행복인데 거짓된 것에서 그것을 느낄 때는 혼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플라톤 같은 사람은 레테의 강으로 설명을 합니다. 영혼이 옛날에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인간의 영혼이 존재했는데 인간의 영혼이 저 하늘의 세계 천상의 세계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이데아의 세계에서 내려오면서 레테라고 하는 가상의 강을 건너게 됩니다. 그 가운데 영혼들이 헤엄을 쳐서 건너옵니다. 그런데 그 강폭이 너무 넓습니다. 그러면 물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영혼은 그 물을 많이 마십니다. 그런데 그 레테의 강물의 이름이 망각의 강물입니다. 건너왔는데 옛날에 있었던 일들이 전혀 생각도 안 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게 조폭에 종사합니다. 영혼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선에 대한 기억,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주 조금만 마셨습니다. 그래서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아무리 유명하게 만들어주고 인기를 온몸에 누려도 이 속에서 그것으로 달래지지 않는 허무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과 대화를 하게 금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마다 그런 것들을 주셨지만 그런 것들을 어떻게 이끌어 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교육입니다. 교육과 신앙이 그런 것들을 이끌어 냅니다.
질문)
우리가 신앙적으로 이야기하면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항상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고전적인 답변입니다. 그럼 한번 보세요. 이런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 년에 50조 가까운 국방비를 씁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러면 50조를 만약에 성인을 2000만 명 정도로 보고 만약에 50조를 나누어갖는다면 제가 보기에는 아마도 2천만원정도 됩니다.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런데 그런 돈을 일 년도 아니고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모르는 돈을 계속 씁니다. 대부분의 무기는 사용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폐기합니다. 이번에 들어온 에프35전투기가 1600억에 들어 왔는데 비행시간이 8천 시간밖에 안됩니다. 끝나면 고철수준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유지하는 동안에는 1600억짜리를 사면 유지비가 약 4천억 정도 듭니다. 그러면 한번 떠서 1초를 체류하는데 그냥 수표를 던져야지만 될 정도 비용입니다. 그런데도 그 희생을 감수합니다. 그리고 젊은이 들이 가서 20개월씩 복무합니다. 옛날 우리 때는 36개월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친구들이 내가 장가가서 아들을 낳으면 엎어놓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압니까? 남자로 태어나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들 그런 것을 감수하면서 삽니다. 왜냐하면 한 번의 전쟁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끝내버립니다. 유구한 전통 다 필요 없고 어마어마한 정치제도도 다 필요 없습니다. 한 번의 야만성이 힘으로 휩쓸고 지나갑니다. 결국 우리가 매일 매일 마음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매일 매일 우리에게 주는 행복도 있지만 그것보다 우리의 인생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될 때 입게 될 치명적인 손해를 생각하면 우리가 오늘 내 마음을 절제하고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의 의무를 수행하고 세상 믿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하면 살고 학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발견해가고 하는 그 수고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보험도 들고 매일 매일 보험료 내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도 못 사먹습니다. 그 대신 커다란 사고가 일어날 때 보험이 자기를 어느 정도 책임져줍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저축도 하고 보험을 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 그렇게 하지 말고 안 될 때에 내 인생을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 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어떤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때는 여태까지 살아 온 모든 삶의 과정들이 작용을 하면서 그를 헤어 나오게 하기도 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엊그제에도 어느 한 자매가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싱글이었을 때 너무너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는데 불신자였답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불신자를 전도하면 되지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그러면서 결혼을 했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일 줄은 몰랐다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적인 어려움까지 호소하면서 그러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매일매일 우리들은 언제 우리에게 결정적인 선택이 주어질지는 모릅니다. 그 선택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선택했을 때 우리들이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어떤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당연히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편하게 해주마. 그러지 않고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있다는 것입니다. 있는데 그래도 매일 매일 말씀 읽고 은혜 받고 살아가는 삶이 인생의 위기를 만나서 그 속에서 신음하고 고통 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래서 난 그런 것들을 아주 유명한 재벌들, 최근에 어느 항공사의 가족들이나 할리우드의 대스타들 그리고 슈퍼보이에서 일확천금을 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기록 같은 것을 보면서 그래서 인간은 확실히 이 세상의 물질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진짜 마음과 영혼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3장. 영혼과 영원 그리고 마음
1.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할 때, 이것은 신자의 영혼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교제하시는 것은 인간의 의식 세계 안에서 비로소 경험되는데 거기가 바로 신자의 마음이다. 신자의 마음은 하나님이 작용하시는 자리이기도 하고 또한 인간의 죄가 작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음 안에 자리하고 인간의 악한 욕망도 마음 안에 있으니 이로써 인간의 마음은 어떤 상태를 지니게 된다. 특히 인간을 창조 목적을 향해 살게 하는 본거지로서의 인간의 마음은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하는 인간의 죄의 경향성과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목적에 합치한 삶을 살려고 하는 은혜의 경향성 간의 치열한 다툼을 불러일으키는 고지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은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곳이니, 영혼은 영원을 잇대어 있으며 육체는 이 세계를 잇대어 있어 인간의 마음은 두 세계가 넘나드는 문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 할 때 그것은 신자의 영혼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교제하시는 것은 인간의 의식세계 안에서 비로소 경험되는데 거기가 신자의 마음이다. 신자의 마음은 하나님이 작용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인간의 죄가 작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음 안에 자리하고 악한 욕망도 거기에 있으니 이로서 인간의 마음은 어떤 상태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을 창조목적을 향해 살게 하는 본거지로서의 인간의 마음은 자기중심적으로 살게 하는 인간의 죄의 경향성과 하나님 사랑하며 그 목적에 합치된 삶을 살려고 하는 은혜의 경향성 간의 치열한 다툼이 일어나는 고지이기도하다. 인간의 마음은 매순간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르며 살 것이냐 죄를 따르며 살 것이냐 여기서 죄는 마음이 은혜로 강하게 무장될 때는 감히 공격을 안 합니다. 그러나 약화된 틈을 타면 즉시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려고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점령되고 나면 짐승과 같은 삶이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영혼과 육체가 만나는 것이니 영혼은 당연히 영원을 잇대어 있으며 육체는 이 세계를 잇대어 있어서 인간의 마음은 이 두 세계가 넘나드는 문이 된다. 그 문을 통해서 영혼과 시간, 천상과 지상, 자신과 하나님, 이렇게 죄와 신앙 이런 것들이 만나는 하나의 문입니다. 그러니까 솔직히 여러분 인정할 수 있잖아요? 어쨌든 몇 번 공부는 안했지만 마음이 확실히 중요하다는 것은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어쨌든 지겹도록 공부는 안했습니다. 사용설명서가 없이 온몸을 부딪치며 살아보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한 30억을 주고 부가티 스포츠카를 뽑았는데 매뉴얼을 안 읽었어요. 그래서 그냥 딥다 밟았더니 앞에 가서 박치기를 해서 앞차 범퍼 수리비가 5억이 나왔습니다. 뒤로 후진하다 뒤가 부딪히면서 2억이 나왔습니다. 옆 문짝이 부딪히면서 또 났고 기어가 작살나는 바람에 3억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까? 한번만 그렇게 하면 아, 이거 큰일 나겠구나 하고 똑바로 앉아서 아마 설명서가 외국어로 되어 있으면 번역기를 동원해서라도 아마 완벽하게 번역을 하고 아니면 돈을 100만원 주고라도 누가 그거 할 수 있는 사람 불러다가 설명서를 들으면서 메모까지 하면서 입력을 할 것입니다. 왜냐면 차가 너무 비싸니까 그럼 여러분의 인생은 얼마나 비싸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까짓 거 부가티 자동차에 비교하겠습니까. 여러분들 인생이 30억 밖에 안 됩니까? 그런데 왜 매뉴얼을 안 읽습니까? 여기저기 들이박고 60이 다 되었는데 별로 못 깨닫고 그러고 삽니까?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러면서 나중에 후회 하는 것입니다. 아 그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너무 늦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은 마음을 배우려고 태어난 것입니다. 스트디오 에로고스 나는 공부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A. 영원과 영혼
1. 사물은 단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사물들이 있으니 이 역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보이는 사물들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인식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물들은 인간의 영혼을 통해 직접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작용이 인간 영혼의 기능인 지성의 작용이다.
2. 인간 존재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지며 육체는 가시적 존재이고, 영혼은 가지적 존재이다. 가지적 존재는 육체의 감각으로 지각되지 않는 영원 세계에 속한 존재이며 그 자체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하나님 자신의 덕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절되지 않도록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의 존재를 직접 볼 수는 없으나 그 영혼의 작용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기에 마음의 작용을 인식함으로써 그 영혼의 존재와 상태, 그리고 작용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자신의 영혼에 대한 지식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마치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지극한 제한성을 갖는 것만큼이나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알수록 자신을 탐구하고자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며 자신을 탐구할수록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러한 탐구를 위하여 영원과 영혼에 대하여 갖는 마음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영혼과 영원
1) 사물은 단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의 의에 창조된 것이다. 당연합니다. 보이는 사물들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 인식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물들은 인간의 영혼을 통해 직접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이 인간의 영혼의 지성의 작용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지며 육체는 가시적 존재고 영혼은 가지적 존재이다. 가지적 존재는 육체의 감각으로 지각되지 않는 영원 세계에 속한 것이며 그 자체는 하나님의 의에 창조되었지만 하나님 자신의 덕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절되지 않도록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의 존재를 직접 볼 수 없으나 영혼의 작용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을 인식하므로 서 그 영혼의 존재와 상태 그리고 작용을 알게 된다.
비유를 하자면 어떤 스포츠가 선수가 내가 지금 시속 350킬로 최소한 3시간 이상 경주를 해야 하는데 이 사람이 아주 베테랑이라면 엔진 뚜껑을 열어보면서 그 정도의 시간을 이 차가 달릴 수 있을지 알 수 있습니다. 딱 보면서 아, 이것은 이 케이블을 바꿔야 되겠다. 더군다나 정비사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난 다음에 내가 왜 그랬지 그러지 말고 마음의 엔진의 뚜껑을 열어보고 이 마음을 가지고 계속 살면 내가 무슨 일을 할까? 어디로 갈까 그것을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리 어두워도 전등을 가지고 강한 빛을 비춰보면서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마음과 영혼의 얼개를 알아야 합니다. 자동차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지 뚜껑을 연 다음에 아 이런 장거리 운행은 못해 이렇게 결론을 냅니다. 아무것도 아는 지식도 없이 열어 보고나서 아유 뜨뜻하네. 그 정도밖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사람들도 아무것도 몰랐었는데 하나하나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선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엔진뚜껑만 열어도 냄새를 맡으면서 소리를 들으면서 아 이정도로는 장거리주행은 불가능해 하는 결론을 냅니다. 그 사람의 판단을 어기고 하면 무사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똑같이 예고에 들어맞게 금 엔진이 과열되어서 불이난다든지 사고가 납니다. 그게 자신의 마음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인간의 자신에 대한 지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식이 그런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알수록 자신을 탐구하고자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며 자기를 탐구할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러한 탐구를 위해 영혼과 영원에 대해 갖는 마음에 관계에 대한 지식이 절실하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