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은혜받을 준비Ⅲ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찾아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때⑴(잠1:28下-29) 2002.8.4 주일오전 1
2. 찾아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때⑵(잠1:30) 2002.8.11 주일오전 14
3. 하나님 앞에 정직히(잠3:32) 2002.8.4 주일오후 23
1. 찾아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때①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잠1:28下-29)
우리는 흔히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오 그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또 우리의 간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정 반대로 말하기를 아무리 주님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며 부지런히 주님을 찾으려고 애를 써도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단정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배워온 그 이치와 오늘 지혜자가 이 잠언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이 신앙의 도리 사이에 어떤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를 행하여 부르짖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자기를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시지 않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고 만나려고 해도 거절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의 신앙의 경험은 확실히 그럴 때도 있었다 라고 하는 대답을 우리에게 또 한편 줍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주님께 응답을 받고 주님을 간절히 찾아서 삶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난 적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때로는 여러분들이 많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도 왠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고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자 했는데도 왠지 그 하나님께 긍휼함을 잊지 못하는 것 같은 그런 경험을 여러분이 하셨을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든지 그런 경험을 하실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때로는 영혼에 깊은 곤고함 때문에, 때로는 인생의 커다란 시련 때문에, 때로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죽음 앞에서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이 아니면 어떻게 살수 없는 상황인데도 부르짖어도 자기의 기도 소리는 허공을 맴돌다 공중에 흩어지고 그리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절히 구해도 어떤 도움도 나타나지 않고 점점 인생의 깊은 수렁과 미궁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은 그런 좌절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고 있는 지혜 자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방탕하던 때도 있었지만 주님을 깊이 아는 때도 있어서 영혼의 큰 축복과 그리고 영혼의 커다란 고통을 맛보았던 순례자적인 여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사람이 오늘 확신을 가지고 그런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때가 없습니까? 정말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데 어떤 도움의 희망도 하나님으로부터 비치지 않고 정말 주님을 부르지만 왠지 하나님께로부터 인격적인 응답이 들려오지 않는 때, 그래서 그때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시는가. 주님의 은총은 이제 다했는가. 이제 나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는가 말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두 가지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그리고 또 하나는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첫째는 지식을 미워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여호와 경외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 뜻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로 도대체 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트’라고 되어 있는 이 지식은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그런 지식이나 인생을 살면서 터득하는 그런 생존을 위한 지식들이 아닙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이 지식을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지식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신 그 뜻을 헤아리면서 창조주 하나님, 구속 주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데서 터득한 지식들입니다. 이 지식은 사람의 머리에 머물러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지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손과 발에만 있는 지식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지식은 지성과 우리의 감성과 우리의 전 의지의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인격 깊은 핵심부에 자리 잡아서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게 하고 또 다른 정체성을 갖게 만들고 또 다른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고 싶어하고 사모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고 배워 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땅히 힘써야 할 의무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6장에서 말하기를 “그럼으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도 주님을 찾아도 대답을 들을 수가 없고 만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상적으로 여기에서 지혜자가 등장시키고 있는 가상적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부르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기는 하는데 그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의 본분을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터득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가상적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오직 하나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을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나는 이 세상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는 고통을 받을 때에 인간은 그 고통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통해서 의미를 생각하고 그래서 그 고통을 자신의 인생을 비옥하게 하는데 활용합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일 경우에는 고통을 당할 때 항상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의 행복과 불행, 그리고 죽음과 삶 모든 것을 자기의 주권 아래 가진 그 하나님이 생각이 나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참 모습을 그 고통을 통해서 정직하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지금 그 현주소가 어떠한지를 터득하게 되고 그래서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자기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어느 자리에 자기를 서게 하시는지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에 대한 해석의 능력을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고통에 대한 해석의 능력을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이해가 잘 안가시겠지만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정신없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앙도 정신없이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업도 잘되고 그리고 모든 게 다 잘나갑니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막 사기충천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아주 열렬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 동안에 신앙은 게을러지고 왠지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부르십니다. 그래도 안 돌아옵니다. 왜 마음이 많이 강퍅해졌고 세상에 있는 것들로부터 받는 만족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 경험하는 그 불만족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즐거워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참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자기의 백성들이 자기를 떠날 때 그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하든지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장시간동안 인격적으로 설득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싶어하고 신실한 사람들을 만나서 권하게 하시고 여러모로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하나님과의 그 끊어진 관계를 보여주십니다.
안 돌아옵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어루만지시기 시작하십니다.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제껏 까지 경험한 적이 없는데 아! 진짜 의지할 데가 없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그때에 보통 상당히 많은 수의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은 그런 위기와 어려움을 경험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버리기 시작할 때 그때 어느 한순간에 그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 이제껏 까지 자기가 사랑했던 것들이 자기를 배신한다는 것과 그리고 자기가 이제껏 까지 소유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었던 세상에 있는 것들이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상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드디어 그런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 처음에는 누구 때문에, 세상의 어떤 환경 때문에 그렇게 변명하면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에 그런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 자기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단절된 관계를 직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여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러나 벌써 그런 동안에 그의 영혼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지금 자신이 시련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자기를 다시 행복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대답해주시지 않고 찾아도 만나주시지 않는 마음은 이런 마음이 아닙니다. 그냥 어려우니까 그런 하나님 자신을 시련 속에서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고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고치고자 하는 몸부림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상에게 빌 듯이 자기를 도와달라고, 그러니까 오늘 여기에 나와 있는 가상적인 이스라엘의 이 부르짖음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과의 깨트려진 관계를 보고 아파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단순히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벗어나기를 원하는 동물적인 부르짖음입니다.
이 삶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삶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힘써야 할 가장 커다란 의무는 하나님을 부지런히 알아 가는 것,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아감으로서 그 지식이 그의 인격 속에 쌓이고 그 지식을 가지고 그는 그 지식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호세아서 4장에서 예고하시면서 왜냐하면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기 때문이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이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예전에 터득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 빛 아래서 지속적으로 살지 아니하는 것과 또 하나는 새롭게 하나님을 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지식적인 완고함입니다.
자 이 문제를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끔 한번 예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그릇되게 살 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가르쳐줍니다. 심지어는 성경을 읽을 때에도 성경이 우리를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너의 진정한 행복은 너의 창조자 되시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이 또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줍니다. 그렇지만 왠지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이야기가 틀리지는 않는데 왠지 그 지식 때문에 내가 아직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깨달음을 얻고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져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부서지면서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믿노라고 인생을 살았지만 사실은 자기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생활이었다는 것 그래서 결국은 교회도 다니고 성경도 읽고 헌금도 하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로 봉사도 했지만 그 마음 중심 속에 진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가운데 살아온 바리새인과 같은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전에 자기가 그렇게 오래 교회에 다닌 것을 그렇게 자랑하고 교회에 헌금 많이 한 것 그렇게 자랑하고 그리고 교회 열심히 섬긴 것도 그렇게 뻐기는 마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깨트려지게 되면서 사실은 자기가 행한 그 모든 것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세울만한 것이 있다고 믿었던 자기의 의로운 행실이나 삶에 대한 모든 기대감 자부심 같은 것들이 산산이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깊이 거꾸러져서 자기가 얼마나 그런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인지를 깨닫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뭘 배우는가 하면 정말 하나님은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 지식이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아니면 손과 발에 있습니까?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충동을 따라 역사 하는 그런 감정이 아닙니다. 정확한 지식에 기초해서 마음도 지배하며 그리고 그의 모든 삶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또 하나님을 떠나서 잘못 살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그 지식이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사랑하신다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여전히 이 세상을 사랑하고 싶어합니다. 헛된 것들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위해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생각하니까 헛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을 능가하는 삶도 없고 그 지식을 밑도는 삶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만 열심히 배우면 뭐해 삶이 개떡같은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 정리되어 있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한다. 그래도 그것이 정말 아는 것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화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면 여러분 속에도 ‘내 안에 사는 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있어서 그 지식이 자기를 그 지식대로 살게 하는 그런 지식일 때 그게 참된 지식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듣고 말씀에 대해 잘 정리하고 책을 읽고 잘 필기해서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너 어쩜 이렇게 정리를 잘하니 이야기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여러분들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 화 되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바로 중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유명가수들의 이름과 키와 취미와 주민등록 번호를 적어 다니면서 나는 그 가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자기 지식입니까? 잡지에서 다 배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아 알아가면서 여러분들이 증명하는 커다란 위험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는 것, 그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 부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치 않은 자기를 그 안에서 쳐서 복종시키고 깨트리는 강력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서 그래서 무엇인가 흔들리지 않고 흔들릴 수도 없고 쓰러져도 곧 그것을 붙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아주 명료하고 분명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여러분들에게 제공해주는 그런 변화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가지라고 말씀드렸는데 첫째는 이미 가르쳐주신 그렇게 해서 예전에 소유하게 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것을 계속해서 붙들고 살아가지 않은 것 그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것입니다.
분명히 예전에는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깊이 감화를 받고 그것이 정말 내 중심에 있어서 그것이 나의 생각을 움직였고 그리고 나의 마음도 주장했고 그리고 나의 삶도 움직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구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 안에 일어나는 영혼의 변화는 거듭남 이외에는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거듭나면 영원하고 완전합니다. 다시 거듭나지 않은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많이 주셔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있지만 그 지식에 의해서 주장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일들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넘어설 수도 없고 밑돌 수도 없다라고 하는 말은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데 그 지식 이상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또 그 지식 이하의 삶을 살수는 있는데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데 전에는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을 때는 아무리 그런 정도의 높은 삶을 살려고 애를 써도 안됩니다. 그러나 일단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지식을 따라서 살려고 애를 쓰면 그 지식에 부응하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지 않고 지속적으로 은혜 안에 성장하지 않으면 주님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이 주셨는데도 그 지식이 현재적인 지식이 되지 못해서 미끄러지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까 말씀드린 그 이야기와 이 이야기가 연결이 됩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이 이미 알게 하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는데 그 지식을 따라서 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께서 대답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돌이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그 지식의 빛 아래 살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이 해결사처럼 자기 인생에 오셔서 도움을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배웠고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예전에는 몰랐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깊이 받고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정말 바라시는 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아버지 앞에서 터득해갈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한동안 그 지식에 붙들려 살았습니다. 날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누구도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우리는 그 십자가의 고난이 온 인류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한 고난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했고 육신의 생명보다 주님이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수 있었습니다. 큰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군인이 자신의 온 마음의 시선을 승리에 고정시키고 그래서 가장 가치 있는 승리를 얻기 위해서 덜 가치 있는 것들을 버리면서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그 지식에 붙들려서 살고 있습니까?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정말 그 지식에 붙들려서 그 지식에 빛 아래서 오류가 없을 수 없고 완벽하게 마음을 지킬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재갈을 먹이며 끊임없이 실패하는 우리를 추슬러 세우고 우리의 마땅한 본분이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시게 하시고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하신 예수를 영화롭게 하며 사는 그런 삶이 되기를 끊임없이 힘쓰고 있습니까? 끊임없이 그 지식의 영향 아래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가장 고통스러운 마음 중에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서 당신이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목자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보시는 것과, 한때 당신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충만히 주셨는데도 그 지식을 버리고 미끄러지는 신자들을 바라보시는 것이 주님의 가장 커다란 아픔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습니다. 열심히 주님을 부르고 있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지만 그 용건은 자신의 행복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서 변화되고 싶다든지 주님께 부르짖어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서고 싶다든지 그 분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묵은 땅이 기경 된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 앞에 기뻐하는 의에 열매가 되고 싶다든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부지런히 그렇게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인가 우상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먼저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도움을 주는가 이었습니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불평합니다. 아!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을 때는 말씀을 몰라서 목말랐는데 신앙의 도리를 터득하고 나니까 아! 정말 신앙의 길이 너무 멀구나. 요즘 마음 지킴의 교리를 조장들이 공부하면서 한숨을 많이 쉰다고 합니다. 왜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마음을 지키는 신자의 삶과 걸레처럼 헤 벌래 하게 마음을 벌리고 사는 자신의 삶 사이에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격차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정말 참된 신자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길이 너무나 가혹하다 꼭 그런 길밖에 없는가. 어디 좀 이렇게 그냥 쉬운 길, 그래서 그냥 주님이 오셔서 저절로 무엇인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런 삶, 그런 게 없을까? 없습니다. 만약에 있었다면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 살았던 바울이 왜 예수 죽인 것을 짊어졌을까요? 왜 자기를 쳐서 그렇게 복종시키려고 했을까요? 왜 날마다 죽어야 했을까요?
쉬운 길은 넓은 길입니다. 친구도 많고 외롭지 않습니다. 거기에 정말 생명이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은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그 만남을 통해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자기를 아는 부인할 수 없는 지식을 심어준 사람들이라면 여러분들은 지금 그 지식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불행하지만 오늘 여기서 말하는 그 지식을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 주님을 아는 그 지식의 빛 아래 살면 잃어버릴지 모르는 이 세상의 행복과 육신의 안일함, 새롭게 부가될지도 모르는 천상에 무거운 의무들에 대한 부담감으로 그 지식을 거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습니다.
주님은 불의한 사람도 용납하시고 죄인들을 영접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납되기에 너무나 커다란 죄는 없습니다.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사람들, 언제나 하나님은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셔서 그래서 온전한 사람이 살수 없었던 삶을 살게 하셔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소망 없이 더러운 죄인이라고 스스로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아는 지식을 버리며 살아가는 삶을 가장 슬퍼하십니다.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예전에 주님을 만났다면 그때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지식의 빛 아래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힘쓰고 애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두 번째는 또 무엇인가 하면 그 지식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을 더 이상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신자의 마음속에 부어졌을 때에는 그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강력한 욕구들이 있습니다. 그 욕구들이 성경을 열심히 탐구하게 만들고 살아가면서도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살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힘을 주시는가.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살 때에는 어떤 오류에 빠지고 이렇게 오류에 빠졌을 때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 하는 통찰들을 그 속에서 끊임없이 제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니까, 하나님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하시고 성경을 통해 경험하게 하시고 그리고 하여튼 좋은 옷 입고 그렇게 하는 것보다도 더 좋은 하나님의 말씀 깨닫고 싶어하고 그리고 정말 그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은혜 많이 받았을 때에는 성경도 참 많이 읽었고 책도 물론 다 안 읽은 것도 많지만 하여튼 부지런히 샀고 그리고 테이프도 열심히 들었습니다. 늘 귀에다 꽂고 다니고 또 자기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많이 사주고 싶어하고 안 믿는 사람 읽지도 안 읽는데 성경책 사다주고 테이프도 사다주고 책도 사다주고 열심히 그렇게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다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듣는 일도 옛날처럼 열심히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성경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그 일을 게을리 합니다. 그리고 더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편안한 신앙생활을 즐기려고 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삶입니다.
초창기에 행해진 설교 가운데 ‘하나님을 찾으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고 옛날 시리즈입니다만 여러분들이 그 시리즈를 꼭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몇 개 되지 않습니다. 합해서 한 열 개밖에 되지 않습니다. 특히 ‘마음을 다하여’ 그 시리즈 속에서 제가 설교한 것이 하나 생각이 나는데 그것은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명목상의 신자의 삶을 이어가면서 주일이면 시계추가 움직이는 것처럼 교회에 자동으로 오고 끝나면 가고 교회 일이 있다면 와서 봉사하고 오랜 동안 신앙생활 해온 것 때문에 목회자에 대해서 기본적인 예의를 표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 이제 처음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볼 때에는 감동을 받을만한 훌륭한 종교적인 삶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 누구든지 그 환경 속에서 그렇게 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만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이상 알고 싶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좀 행복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예전에 은혜 많이 받았을 때 그 때 그 마음이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자기는 짐승처럼 느껴졌고 더 많은 지식의 빛을 하나님 앞에 얻고 싶어했습니다. 단 하루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그 말씀에 은혜 받지 않으면 갈급 해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단 이틀이라도 마음을 쏟아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다면 견디기 힘든 영혼의 갈증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목말라하십니까?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갈급 해 하십니까?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서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가난하기가 엄마의 앞가슴을 파고들 듯이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하는 영혼의 욕구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을 파악했고 그리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진리에 대해서는 배울 것이 별로 없는 자부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하나님을 버린 삶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정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반듯하게 교회 출석하고 교회에서 교사가 되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고 교회의 일군이 되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봉사합니다. 누구나 세워주면 그 자리에서 그런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성경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게을렀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까? 율법사들이 성경 읽히기를 게을리 해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까? 제사장들이 무의 도식한다고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버리고도 그런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끔 하나님 앞에 자기 현실에 대해서 이런 것도 좀 해결해주고 저런 것도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그것이 응답된다면 그것은 정말 응답이 아니라 우연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고 자신의 깊은 내면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고자 하는 신령하고 진실한 인격적인 욕구가 없는데 그가 기도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어떻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일 수가 있겠고 설령 그 기도가 열렬했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슴에 품는 기도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 뿐이라
그런 고백이 있습니까? 한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주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은 그 은혜로 자고 하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주님을 아는 지식의 현재적인 영향력 아래 살아가게 하시려고 주님이 그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한때 하나님 앞에 많이 깨트려지고 아버지 앞에 깊이 변화를 받았지만 그러나 정말 이제 그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아가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태만함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미워하는 사람이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중요한 사람도 있고 덜 중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요함의 경중은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는 것을 느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친밀함을 보여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런 지식의 빛 아래서 끊임없이 깨트려지고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옛날에 받은 그 은혜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아는 지식이 아무리 크더라도 주님은 그 지식보다 훨씬 큰 분이시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서 어린아이처럼 예수를 더 알기 원하고 어린아이처럼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고 그런 목마름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신실한 주님의 지체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여러분 자신입니다. 변화되어서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미워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추구하면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크게 두 번째 여기 나온 것을 보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히브리 성경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선택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이라’라고 되어 있는 이 경외는 사실은 ‘야레’ 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인데 ‘두려워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은 단지 하나님께 대해서 갖는 두려움이 공포만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떨리는 두려움과 함께 그 두려움을 회피하고 싶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감격적인 사랑의 정서가 함께 있는 것이 경외함의 진수입니다. 그래서 이 경외는 아주 정말 탁월한 번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 영어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fear 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충분한 번역이 아닙니다. 경외, 정말 훌륭한 번역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두려움은 반드시 떨리는 두려움인 동시에 그 두려움의 자리에서 회피하고 싶지 않은 아주 감격적인 사랑의 정서를 동반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였을 때 살아가야 할 삶의 정황이 바로 그런 정황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를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되면 두 가지 정서가 함께 공존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는 것과 그리고 그 하나님만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그 지식의 현재적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는 그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 받고 싶고 동시에 그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더 온전해지기를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런 지식의 영향 아래 살아가지 않을 때는 야, 하나님 좀 사랑해라. 주일날 와서 예배만 드리면 다냐. 그렇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아니! 이만큼 사랑하면 됐지. 수요예배도 나오는데. 아니! 뭐 내가 얼마나 많이 변화되었는데. 옛날에는 내가 주일 예배도 후딱 하면 빼먹었는데. 술 먹고 안 나오고 고스톱 치다가 재끼고 그런 내가 얼마나 변화되었는데 그렇게 하다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서 주님의 지식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면 그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그러니까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 받고 싶다는 욕구는 아주 동일하게 그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사랑을 받으면 좋겠다. 그것은 하나의 희망 상황이지 갈망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을 텐데, 굳이 복권에 당첨된다면 내가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 하는 정도의 어떤 요행수적인 희망 상황이지 자기의 존재를 걸고 하나님 앞에 사랑 받고 싶어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사랑 받고 싶은 욕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많이 사랑을 받고 싶고 더 많이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을 더 온전히 사랑하고 싶은 이것이 결국은 신자의 성화에 있어서 순결과 맞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깨끗한 것이 순결히 아니라 비록 예전에 인생을 걸레처럼 살아왔어도 지금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 그 사랑으로 한 신자의 마음이 가득 채워져서 삶 구석구석에 그 사랑의 영향력이 지배하는 삶, 그것이 순결한 삶입니다. 주일 안 빼먹고 십일조 안 떼어먹고 성가대에 하루도 안 빠지고 그런 게 순결이 아니라, 물론 다 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순결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의 정서로 신자의 내면의 세계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게 순결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신다고 예수님이 팔복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분명히 이야기하는 게 그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너희들이 선택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우리는 흔히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변화시킬 사람은 반드시 변화시키신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신다. 그게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맞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부족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교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자의 성화에 있어서 그런 정도의 공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꽝! 입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요즘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 이래로 계속해서 그런 소위 이야기하는 내어 맡김을 통한 전적인 은혜로서 자동 성화의 이런 교리에 미혹을 받던 때가 참 많았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진리가 아닙니다.
나는 오늘 새벽에도 일어나서 잠이 깨어서 잠깐 그런 묵상을 했습니다. 누군가가 체험으로 그런 소위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 대한 분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얻고 싶어하는 그런 분투하는 노력 없이도 자동적으로 우리를 깊은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만들고 우리를 주님을 닮아가게 한다는 그 교리를 누가 삶으로 입증한 사람이 있으면 한번 좀 만나고 싶습니다. 절대 그런 어리석은 사상입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자 가운데 인간의 철저한 죄성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집착했던 사람은 루터고, 인간의 무능함을 뛰어넘는 하나님에 영광스러운 주권에 대해서 가장 크게 눈떴던 사람은 칼빈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주권, 그래서 어떤 사람으로부터는 그 사람이 관점자체가 지나치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치우쳤다 라고 하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그런 칼빈의 신학사상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저술 속에서 시종일관 말합니다. 그것은 성화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어떻게 고난에 참여하는지, 어떻게 분투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정말 생명을 누리면서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택하지 아니하였다.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저절로 하나님을 경외하게끔 만들어주실 것이다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지금 20여 년이 넘도록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세월이 약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너희들이나를 찾아도 만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나 여호와 두려워하기를 선택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이것은 선택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싶다고 선택을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경외하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특히 성화의 영역에서는 그런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성화 될 수 없고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부패성을 누르면서 나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보다 주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그렇게 살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그 결단대로 살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기를 택하는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순종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어떻습니까? 언젠가 어두움 속에서 떨고 진리가 무엇이지 알 수 없어서 어둠 속에서 사는 동안에 그 때는 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했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 어두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을 때 우리의 눈이 뜨여졌고 어두움에서 광명을 찾았습니다. 그런 광명을 우리들이 얻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마음속으로 깊이 결심했습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큰 은혜를 주신 주님만을 사랑하고 이 세상이 모두 주님을 버려도 나는 주님을 붙들고 사람들이 다 부끄러워해도 나는 이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에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매 순간 우리는 피 어린 결단 속에서 주님이 주신 마음을 붙들고 주님이 주신 그 지식 아래서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끊임없이 거짓이 우리를 유혹하고 육신의 안일함이 우리를 꼬이고 세상의 명예와 행복이 우리를 손짓해도 이 세상에 정체를 분명하게 알고 그리고 내가 산 것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살리셨기 때문에 내 인생 전체가 주님의 부채 덩어리고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살아도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나는 이 세상에 행복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나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서 구원의 영광을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하든지 경외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 그것을 끊임없이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원하고 기도합니다.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저도 또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를 이번 사경회를 통해서 참된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이끄셔서 우리의 마음에 우리도 알지 못하게 들어온 거짓된 것들을 주님이 정결케 하시고 주님을 아는 지식의 현재적인 영향력 아래 살아가지 않았던 우리의 그 태만한 삶을 십자가에 못박고 다시 한번 뜨겁게 주님을 추구하고 그리고 주님을 바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생에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영광이 진흙과 같이 이 허망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우리 주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우리를 소명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새 삶을 살게 되기를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기대하며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2. 찾아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때②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잠1:30
이어서 세 번째로 지혜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는 이유를 꼽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커다란 행복이 있다면 어려움 속에 주님을 부를 때에 주님께로부터 대답이 있고 주님께 도움을 청할 때 주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도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가장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불러도 대답을 들을 수 없고 찾아도 주님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를 오늘 지혜자는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에서 “받지 아니한다”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반’데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기뻐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좋아면서 기꺼이 수용하는 그런 것이 안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교훈’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 말로 ‘에차’인데 영어로 말하면 counseling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 보면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할 때 그 꾀가 여기에서 쓰여진 히브리 단어하고 꼭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뮈라고 표현할까 의논,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카운슬링, 상담, 의논, 하나님의 생각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안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다양하게 인도해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자기의 백성들이 당신뜻 안에 살게 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자극하십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을 알리시고 자기의 뜻을 보이시고 자기의 계획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사람들 마음 안에 있는 선한 양심을 일깨워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도 만드시고 때로는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에 대해서 눈을 뜨게끔 만드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기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충고를 통해서 자기 가던 길을 돌아보고 그리고 자신의 걸어가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걸어가시게 하고 싶으신 길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교훈을 받게 하십니다.
그것보다도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숨기없이 적나라하게 당신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고 그 다음에 우리들이 걸어가고 있는 삶의 실제적인 모습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이 우리를 향해 어떤 생각을 품고 계시는지를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교훈을 받으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단지 예배 시간에 나와서 설교 시간에 졸지 않고 똑바로 앉아있는 것만을 의미하고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예절바른 예배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은 그야말로 그분의 카운슬링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수시로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과 그리고 우리의 환경과 다른 경건한 사람들의 권면과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기의 계획을 보여주시고 또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삶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아뢰면서 하나님과 의논하고 그래서 그 과정을 통해서 삶 속에서 순간순간 자기가 갖게 되는 삶에 대한 자기의 주권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며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끔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아주 완고한 고집을 가지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을 봅니다. 심지어 어떤 지체는 목사인 저를 정면에 대놓고 용감하게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그 뜻에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형벌을 받는 것 그 뜻을 훨씬 쉽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껏 까지의 이야기는 짐승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속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이런 것입니다. 순종의 길이 굉장히 힘들어보이는데 그 순종의 길로 들어가면 의외로 쉽고, 불순종의 길은 굉장히 쉬워보이는데 들어가면 상상할 수 없는 어려운 길들이 펼쳐집니다. 그것을 지금 장시간 동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결론은 그렇습니다.
순종의 길은 굉장히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것 같고 그리고 순종하는 동안에 견디기힘들 정도로 고통을 많이 받을 것 같지만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 맡기고 그 길로 들어서면 그 길은 그렇게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아주 하나님이 놀랍게 그 길을 걸어가는 그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그리고 순종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시고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게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해주시는 위로가 있습니다. 물론 잠시 그 위로가 더뎌지는 적은 있습니다. 그래도 그 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위해서 애를 쓰는 그 희생은 하나님께서 모두 갚아주십니다.
그런데 불순종의 길은 쉬워보이는 것 같은데 쉽지 않습니다. 굉장히 쉬워보이는데 거기를 들어가게 되면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이 일어납니다. 여기에서처럼 불러도 하나님의 대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어두움 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아까 그 사람이 나를 막 대들 듯이 이야기한 게 아니라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강퍅한 마음에서 흘러나온 고백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징계를 당하는 것이 순종을 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말 너무너무 무지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 사람들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그런 유혹을 받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속임수입니다.
오늘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삶이 무엇일까? 뭔가 우리들이 하나님이 안기뻐하시는 길로 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길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사실 하나님보다도 내 뜻을 더 소중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가고 싶은대로 가고 싶어하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고 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것이 설사 범죄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정말 하고 싶은게 있으면 하나님께 대놓고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십시오. 뒤에서 호박씨 까지 말고, 대놓고 그러면 나는 우리의 삶이 놀랍게 변화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 저거 훔치고 싶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 기도에 놀라운 능력을 부어주시겠지요. 안 그렇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의논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게 무엇인가 하면 첫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악인의 목소리에 자꾸 귀를 기울이면서 뭐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꾸 악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야,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겠냐. 거기서 무슨 좋은 꾀가 나오겠는지. 그것을 계속 쫓아가면서 그 다음에 죄인의 길에 서게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정반대입니다. 시편 1편에서 악인의 에차를 좇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에차를 좇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그렇습니다. 죄악된 이 세상에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살면서 정말 마음으로는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은혜받았을 때는 순간순간 마음에 밀려오는 불결하고 더러운 생각과도 싸웁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지금 이 삶의 순간은 하나님이 안지켜보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불순종은 잠깐이고 이익은 영원하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에차,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과의 의논보다는 자기 육신의 생각과 그 다음에 악한 자의 꾀를 좇아서 살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됩니다. 그때에 그 하나님 앞에 그대로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의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이런짓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생각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거기서 자신의 생각을 깨트리고 주님의 생각에 자기의 생각을 굴복시키며 그렇게 사는 것이 차선책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비록 가끔 악을 저지르고 불순종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삶의 상황에서도 주님을 부르면 주님이 대답해주십니다. 자기도 어떻게 자기 속에 있는 불순종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안타까워하고 도와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정말 주님을 전심으로 믿고 의뢰하며 살고 싶은데 어느날 자신이 믿음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사람처럼 주여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매달리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못만날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슬기를 어디에서 공급받고 있습니까?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 고난과 시련에 직면할 때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인생의 문제를 누구와 의논합니까? 누구와 에차합니까? 누구로부터 그 지혜를 공급받고 의견을 조정해서 살아갑니까? 여러분들에게 정말 그런 세계가 있습니까? 오늘 지혜자가 거론하고 있는 가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열렬하게 하나님을 부르고 그리고 주님을 만나고 싶어서 간절히 찾지만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의논속에서 그 교훈을 기뻐하면서 사는 관계로서의 삶이 아니라 가출한 자식이 부모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간직한 채 먹을 것이 떨어지니까 돈받으러 오는 것 같은 그런 자세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조금 하나님을 찾고는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자리에 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은 잃어버린 채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서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더 깊은 죄의 수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오늘 이 지혜자는 고백합니다.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주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이 삶의 가장 큰 행복은 언제나 주님께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고백합니다. 우리의 결심은 약하고 우리의 지혜는 부족합니다. 믿음을 지키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여리고 우리를 삼킬 듯이 밀려오는 이 세상의 시험과 유혹의 물결들은 너무나 큽니다.
우리는 주님이 구원해주신 이후로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쓰며 살아가도록 주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을 모르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자기가 최고였지만 어느 한순간에 깊이 깨트려지고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죄악되고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고 하나님 앞에 변화받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는 마른 눈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마음속에 언제나 눈물이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참사랑과 은혜를 알고나니까 그 사랑을 붙들고 변함없이 그 주님께 순종하며 사는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알고 그리고 매순간 주님이 자기를 붙들어주시는 그 은혜가 없이는 지속적인 순종의 삶이 거룩의 삶이 불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이치를 터득하게 된다면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인생을 살다가 한두번 짐승처럼 살다가 하나님 앞에 두들겨맞고 깨트려져본 그 깨어짐의 경험, 그것도 1-20년전에 일어난 그 한두번의 깨어짐의 경험을 붙들고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다메섹 가는 길에서 그렇게 위대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경험한 사도 바울이 왜 날마다 죽어야 했으며 왜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져야 했을까요? 왜 날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갔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단번에 완전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 안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거룩한 본성과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막대먹은 예전의 본성이 공존합니다.
오늘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이유를 보십시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홀로 서기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가만히 지켜보시고 계시는 하늘의 하나님께 감동을 안겨주는 드라마와 같은 인간승리의 삶을 주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기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나와 의논하며 살아라. 에차의 삶입니다. 카운슬링의 삶입니다. 그런 삶입니다.
옛날에 우리 교회의 자매가 아닌 자매가 시집을 안가서 왜 안가는가 했더니 선을 하도 많이 봐서 그동안에 눈이 점점 높아져서 이제 왠만한 사람에게 결심이 잘 안선다고 했습니다. 그런 동안에 자기가 늙어가고 있는 것은 깜빡 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원하는데 그런가 했더니 키가 컸으면 좋겠고 그리고 학벌은 자기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의사나 변호사면 좋겠고 그리고 얼굴이 준수했으면 좋겠고 그리고 마지막 보태는 말이 그래도 너무 가난하면 안되겠지요. 그리고 진짜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신앙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내가 그런 형제가 왜 너에게 오겠니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위로를 했습니다. 다 좋다. 그냥 기도할 때 그냥 막연히 좋은 사람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키도 정해라. 네가 사진 갖다놓고 몇센티쯤 되면 좋겠는지 한번 재봐라. 키 1미터87센티, 거기다 변호사 학벌은 아무래도 괜찮고 그리고 다 해라. 그리고 코도 예쁘고 눈도 예쁘고 그림같은 사람이 안되겠으면 네가 그림을 그려서 그런 사람 달라고 기도해라. 그리고 마지막에 항상 덧붙여야 될 것이 있다. 이상은 제 생각이옵나이다. 주님이 제가 말씀드렸을 때 다 들어주셨으니까 저도 이상은 제 생각입니다. 주님 생각을 말씀해주십시오. 주님이 제가 말씀드렸을 때 조용히 들어주신 것처럼 저도 주님이 말씀하실 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에차의 삶입니다.
그런데 신자의 심리가 이미 내가 여러분들에게 나쁜짓을 하고 싶어도 그것을 기도하라고 그랬는데 사실은 그것은 억지라고 하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시지 않는 길을 택하고 그렇게 하고 싶을 때에는 기도에 있어서 자유가 없습니다. 벌써 그것이 잘못된 일인 것을 자신의 양심이 시간이 흐를수록 또렷히 증거하는데 이거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계획을 가지고 이런 이런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안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을 자기가 마음속에서 이미 증거받고 있는데 그런데 그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주님의 뜻은 중요한게 아니라고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에차의 삶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청소년들이 깨어진 가정, 불후하고 어두운 집안에서 자라난 애들이라고 해서 전부다 빗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한 부모밑에 태어났다고 해서 애들이 다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고 막대먹은 부모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모두가 막대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한국교회 목사님이 계십니다. 유명하신 분이십니다. 목회를 아주 잘하시고 몇만명 교회를 하시는 분인신데 그런데 그분이 한번 개인적으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는 너무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저녁 때면 술먹고 들어와서 혁대로 자기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후려치고 술병을 집어던져서 아이들이 전부 부엌으로 도망가고 하는 그런 것들이 어린시절의 기억에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훌륭하게 목회자가 되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자유해졌으니까 강단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집안의 내력들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무엇인가 하면 자녀들이 부모를 향해서 무엇도 의논하지 않고 대화의 문을 닫으려고 하면 그때가 위험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에차의 삶이 안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자라나는 아이들과 부모인 우리들의 생각이 어떻게 같겠습니까? 목회자의 제 생각과 목양을 받는 여러분들의 생각이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여러분끼리도 같은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도 생각이 다른데, 한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도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같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그렇게 부모와 생각이 달라도 다른 것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의논하는 삶을 살면 그러면 결국은 그 의논을 통해서 부모의 올바른 생각이 자식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자식의 올바른 생각이 부모의 잘못된 생각을 내쫒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간에게는 아무리 부모라고 할지라도 오류가 있지만 오늘 여기에서 에차 즉 카운슬링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과의 의논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입니다. 당신의 꾀를 좇아서 당신과의 상담을 통해서 당신과 의논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그 겸허함을 자기의 백성들이 갖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무서운 사람들은 하나님과 의논없이 자기의 결단으로 커다란 일들을 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굉장히 두려운 사람들입니다. 그게 결국은 하나님없이 살아가는 삶의 표지입니다. 참 이상한게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주시면 많이 주실수록 심정적으로 우리는 너무 약해집니다. 그래서 지난 1월 사경회 때 상한 마음과 깨트려진 마음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이번에 공부하실 것입니다. 상한 마음과 깨트려진 마음은 다릅니다. 상한 마음은 그렇게 마음속에 눈물이 가득차고 내 힘으로는 살수 없습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정말 살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상한 마음입니다. 그 상한 마음이 들었다가 나가버리면 남는게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상한 마음이 되어서 아! 주 없이 살수 없네, 주님의 구주요 눈물흘리며 살다가 눈물씻고 저녁 때 그 상한 마음 다 잃어버려서 세상 사랑하고 먹고마시며 껄껄대고 그리고 자기의 인생길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버리고 나면 상한 마음 자체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상한 마음은 깨트려지는 심령으로 지나가는 없어서는 안될 조건입니다. 그래서 그 상한 마음이 상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깊이 깨트려질 때 그때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바로 그런 삶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은 자기의 백성들이 자기 잘난맛에 사는 삶이 아닙니다. 언제나 주님께 의논드릴 수밖에 없는 의존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매순간마다 자기를 붙들어주시는 하나님, 지키시는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수 없다는 고백으로 자기의 생각은 있지만 그 생각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서 그래서 자기의 소견을 주님 앞에 아뢰는 그 일에 대한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이 의논의 과정, 이 카운슬링의 과정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절했습니다. 왜 거절했을까요? 왜 그렇게 하나님과 의논하고 살면 정말 아름다운 일이 생기고 그리고 좋은 길들이 생겨나는데 그렇게 왜 주님께 의논드리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자기의 생각과 다르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논을 드리면 하나님이 자기의 계획은 찢어버리고 자기가 걸어가고 싶은 그 길을 걸어가도록 하나님이 자기의 계획을 보여주실까봐. 이게 하나님과 의논하며 살지 않는 인생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런 삶이 습관화되었을 때 그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배에 나옵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기 안에 생명이 없고 이미 자신의 온 삶은 주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그들이 외쳐도 대답하지 않으셨고 그들이 주님을 만나려고 해도 만나주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의논없이 자기 좋을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좋은 점은 자기 해보고 싶은 것을 원없이 해보면서 산다는 것이고 나쁜점은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자기 해보고 싶은대로 다 해보고 그렇지만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정말 어느 한순간에 정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때를 만나도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같고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불러도 주님의 대답이 없을 때 그때 비로소 그동안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살지 않고 제 좋은대로 인생을 걸어오면서 뿌렸던 그 씨앗을 거기서 열매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맛보는 그 비참함과 영혼의 고통이 불순종하면서 하나님과 의논없이 사는 동안에 누렸던 기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영속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정말 주님과 의논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책망에 관한 문제인데 “나의 모든 책망을 없신여겼음이라”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과의 의논이 없이 자기의 좋은 고집대로 사는 사람들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의논하지 않고 그리고 자기좋은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결코 하나님이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옳지 않은 것을 행하는 그 사람을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 혹은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마음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또한 자기의 자녀들을 더 잘못된 길로 가지못하도록 막는 하나님의 은혜에 한 나타남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점진적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삶이 바로 무엇인가 하면 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어떤 삶인가 하면 악인의 꾀를 좇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주님과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과 의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지혜를 배워갑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 죄인의 길에 섭니다. 늘 다니는 길, 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길에 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과의 의논 속에서 그것을 받으면서 그 지혜를 가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마지막에 가는 종착역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내버려두실 리가 있습니까 막으십니다. 막으시는데 그 막으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책망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니까 “모든 책망을 없신여겼음이라” 그러니까 이게 한두번이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끊임없이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하는 양심의 책망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살면 옳지 않다고 지적하는 하나님이 보내신 경건한 사람들로부터 책망을 비롯해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직접적인 책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끊임없이 책망하십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야단을 맞으면 하나님 앞에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든지 간에 칭찬받는 것은 그에게 즐거운 것이고 책망을 듣는 것은 그에게 견딜수 없이 고통스럽고 외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주님이 책망을 해서라도 돌리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체로 하나님 앞에 옳게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항상 옳습니까?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열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열심히 항상 순수하라는 법이 있습니까? 언제든지 오류에 빠질수 있고 잘못될 수 있고 혹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속고 살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보여주시고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을 받을 때에도 너무 괴롭고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고생을 할 때도 힘듭니다. 때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가 당하는 육신적인 환난과 어려움도 우리에게는 정말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때에 경험하는 마음의 아픔이 사실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길을 걸어가다가 깊이 회개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에 대해서 뉘우치면서 자기가 깨트려질 때에 영혼 속에서 경험하는 그 깨어짐의 진통보다 크지는 않습니다. 칼로 자기의 살을 에이는 것처럼 그렇게 아픕니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순간까지는 아주 뜨거운 하나님의 그 채찍질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매질이 있습니다. 피가 터지기까지, 그렇지만 그렇게 뼈저린 아픔 뒤에는 반드시 뭐가 있는가 하면 평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서 밀려오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히브리 기자가 심지어는 뭐라고 이야기를 했는가 하면 징계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친자식이 아니라 사생자다. 우리를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은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들이 차마 잘못 살아가는 것을 보실 수가 없어서 그 망가진 채로 우리를 영원히 버리실 수 없어서 주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책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항상 바르게 살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 책망을 받는데 주님의 그런 깊은 책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켜 서게 하는 아주 놀라운 은혜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항상 달콤하고 좋은 이야기만 들으면서 살려고 하는 이런 사람이 되면 여러분들의 삶에 희망이 없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서나 목회자의 목양을 통해서나 자기를 무조건 칭찬만 해주는 목양을 원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 만난 사람들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 세워주기를 원합니다. 그런 삶이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그런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에 서 계십니까? 혹시 지혜자가 언급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도움이 정말 필요한데 불러도 주님께로부터 응답이 없고 상황을 생각하면 꼭 주님을 만나야 하는데 어디에 가서도 주님을 뵈올 수 없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월이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를 저절로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이 수없이 속아온 사단의 속삭임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한번 꼼꼼히 살펴보십시오. 그렇게 불러도 주님의 대답이 없고 찾아도 주님을 만날 수 없게 된 하나님과의 그런 단절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의 걸어온 삶의 발자취들을 돌아보십시오. 주님과 의논속에서 살았습니까? 하나님과 상담 속에서 사셨습니까? 그리고 그 끝에는 항상 여러분들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자기 승복이 있었습니까? 물론 은혜받았습니다. 옛날에 비하면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도 참 대견할 정도로 좋은 신자가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오늘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은 그런 식으로 짐승같이 살던 날과 오늘 성도다운 삶을 티끌만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비교하면서 안일해지지 않습니다. 정말 살아있는 성도는 그런 것은 갖지 않습니다. 더욱더 주님을 알고 싶어하고 보다 더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고 그러지 그렇게 지난 날들을 인해서 자고해지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예전에 만난 하나님은 예전에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뜻대로 살게 했고 지금은 지금 만나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그 은혜의 능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응답이 필요하고 주님을 만나야지만 해결될 수 있는데 여전히 주님의 대답이 들리지 않고 주님을 만날 수 없는 그런 삶가운데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책망받은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야단치실 때 주님의 마음을 불순종으로 아프게 해드린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뉘우치고 아파하면서 그 주님 앞에서 자신의 뜻을 꺽어본 적이 있습니까? 마치 종아리에서 피가 나도 때리는 부모의 마음의 찢어지는 고통을 먼저 헤아리는 그런 자식의 마음으로 돌아가본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그 은혜의 빛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부르면 그분을 만날 수 있고 언제나 외치면 주님이 찾아와 만나주시고 언제든지 주님을 뵙고 싶다고 말하면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하늘나라의 아름다운 비밀들을 알려주시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고 보호자가 되어주시는 그런 하나님과의 은혜 속에서 살기를 하나님이 너무나 간절히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말 청산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잠시 속세를 떠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수련회 시간들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기회는 있습니다. 찾오셔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분들의 이런 삶의 모습으로 돌이켜서 언제든지 부르면 주님의 응답이 있고 도움을 청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그런 주님과의 교통 속에 사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3.하나님 앞에 정직히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수련회를 앞두고 정말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훌륭한 성경구절을 오늘 우리들이 대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은 편의상 상세하게 해설이 필요한 본문이기 때문에 하고 그리고 본격적인 설교를 시작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에 나오는 “대저” 라는 게 나오는데 사실 요즘은 쓰지 않는 말입니다. “대저”라는 말이 대부분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히브리어에 ‘키’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말하자면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뜻입니다. 또 아침에 보았던 것 같은 것은 키 앞에 ‘타트’라는 단어가 하나 더 와서 ‘타트 키’ 인데 그것도 역시 뭐, 뭐 때문에 키만 쓴 것 보다 더 좀더 단호하고 강조적인 뜻이기는 하지만 번역할 때 대저 이런 식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대저’라는 말이 나오면 거의 한글 성경에 번역을 잘못하지 않는 한 대체로 ‘왜냐하면’ ‘이는’ 그런 정도의 뜻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으나 정직한 자는 그의 교통하심을 있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부분을 보면서 여러분들이 패역에 관한 설교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즉시 보면서 호세아서 같은 분위기를 느끼면서 아! 패역한 사람,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그렇게 망령된 삶을 사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그리고 정직한 사람, 즉 착한 사람은 하나님의 교통하심을 입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히브리 성경으로 보면 이게 아주 전형적인 대꾸법입니다. 대꾸법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으며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하니 뭐 이런 것, 표어 같은 데서 그런 것을 많이 씁니다. 길이 좁다고 위반 말고 길이 넓다고 과속 말자. 정확하게 좁다 넓다가 대칭을 이루고 과속 위반 이것이 대칭을 이루어서 그 특징이 뭔가 하면 문학적으로 사람들에게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반복해서, 혹은 점층적으로 아주 간결하게 사람의 마음에 심어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이 잠언 전체가 어떻게 보면 노래입니다. 가락을 붙여서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시편도 마찬가지고, 그런 문학적인 양식을 염두에 두면서 이것을 번역하면 이 번역은 조금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원래의 의미에서 약간 벗어났다는 그런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이 부분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면 제가 정확하게 번역을 해드리겠으니 보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번역을 하면 “왜냐하면 굽은 자에게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이 있고 또 똑바른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친교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미워하심과 그 다음에 뒤에 나오는 우리말에서 교통이심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짝을 이루고 그 다음에 ‘패역’이라는 것과 ‘정직’이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이 ‘패역’이라는 단어는 호세아서에서 나오는 ‘패역’이라는 단어와는 히브리 원어가 다릅니다. 거기서 쓰여진 것은 ‘마슈브’라고 그래서 슈브는 ‘돌아오다’ 이며 ‘마’는 명사어인데 이게 이렇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나로즈’ 라고 하는 단어인데 원래 ‘루즈’라고 하는 동사에서 온 것인데 루즈는 빗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뭔가 맞추려고 하는데 빗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빗나간 것 그런 의미입니다. 휜 것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게 번역을 할 때 이것을 대꾸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것을 번역해서 짝을 이루게끔 반의어로 번역을 해야지 만 이게 맞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여기 여호와의, 여기서 패역한 자에게는 일 때 이 패역은 호세아서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패역이 아니라 그냥 굽은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마음에는 생각이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오랜 동안 도덕적인 패역 가운데서 찌들어서 죄에 의해서 마비가 된 그런 사람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에 관해서 지금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번역할 때 마음이 굽은 사람은 그 다음에 마음이 올바른 사람은, 혹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그렇게 번역을 하는 것이 옳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마음을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나로즈’라고 하는 이 단어는 마음이 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거울 같은 게 이렇게 휘면 물체가 똑바로 안보입니다. 그렇듯이 무엇인가 도덕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뭔가 사물을 볼 때 똑바로 안보고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것 같이 그렇게 마음에 휨이 있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이 있으며, ‘토헤바’라는 단어인데 이 토헤바 라는 단어가 구약 성경의 앞부분에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상을 미워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미워하는 바요. 하나님은 우상을 가증히 여기시니라 등등, 하면서 밉다, 가증하다, 혐오하다 할 때 그것이 토헤바 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에 원래 피동사가 없으니까 이렇게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왜냐하면 휜 사람에게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이, 이렇게 그러니까 괄호 속에 집어넣으면 있다는 것입니다. 휜 사람에게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이 있고 그리고 뒤로 넘어가면 그 다음에 똑바로 다 하는 것은 ‘예샬림’이라고 되어 있는데 ‘야샤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똑바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휘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똑바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놓고 본다면 뭔가 비추면 그대로 똑바로 딱 비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울로 말하자면 휜 거울이 아니라 똑바로 된 거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그렇게 똑바른 사람들에게는 뭐가 있는가 하면 여기 교통하심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게 ‘쏘드’입니다. 이 단어가 어디에 쓰여져 있는가 하면 여러 군데에 나와 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아모스 3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비밀을 감추시겠느냐” 그렇게 나올 때 비밀로 나옵니다. 그래서 비밀이라고도 나오고 그 다음에 또 신뢰로도 나오고 또 그 다음에 여기서 교통으로도 나오고 확신으로도 나옵니다. 그래서 뉴 인터네셔널 버전에서는 이것을 캉피던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여기서 이야기하는 쏘드는 성경에서 다른 곳에서 그렇게 다양한 용도로 쓰였지만 이 원래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쏘드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토헤바의 반대입니다.
그러니까 굽은 사람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이 있고 그러니까 혐오하심이 있고 그런데 사실 혐오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안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굽은 사람은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하나님이 안 좋아하시고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올바른 사람들에게, 정직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교통이 있다고 번역을 했는데 정확하게 보면 친교입니다. 비밀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 비밀스러운 관계, 친교 그런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한참 들여다보며 고민을 하고 생각하다가 이렇게 번역을 하면 좀 정확하겠다 생각했는데 어떻게 했는가 하면 왜냐하면 마음이 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소원함이 있고 거리감이 있다는 것은 거리감입니다. 마음이 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소원함이 있고 그리고 마음이 똑바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번역을 하면 가깝겠다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좀 말이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소원함이 있고, 좀 어렵습니다. 그것을 좀 부드럽게 말하자면 마음이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이 있고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의 친근함이 있느니라 이렇게 번역을 하면 제가 보기에는 최상의 번역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해설이 끝났으니까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에 보면 그럼 마음이 휘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여기서는 ‘토헤바’라고 그래서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수사법입니다. 그러니까 미워한다라고 할 때, 혐오한다라고 할 때 뒤에 보면 쏘드 즉 하나님과의 친교 내지는 교통의 소중함을 워낙 강조하다가 보니까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것과 맞먹는 반대되는 단어를 선택해야 되는데 웬만한 강도의 단어를 택해서는 이게 살지 않습니다. 이게 전달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좋은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여자 아이 하나 남자 아이 하나 둘이 있는데 애를 때려주고 과자를 준 것이 아니고 둘이 있는데 애한테만 과자를 줬습니다. 그랬더니 애가 튀어나와서 한다는 말이 엄마는 왜 나만 미워해. 정확히 말하면 사실 미워한 게 아니라 애를 더 사랑한 것인데 그 사랑이 워낙 가슴에 찌르다가 보니까 자기는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생각이 났을까? 하여튼 아주 정확합니다. 이것은 원고에도 없는 것인데, 아주 정확합니다. 바로 그것을 여기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혐오한다고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이 굽은 사람은 막 동물 같이도 안보고 인간 같이도 안 본다. 죽여버린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우상을 하나님이 막 극렬하게 미워하시듯이 마음이 굽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죽이신다. 하나님이 막 멸망시키신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항상 해석을 할 때 교리적인 균형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정직한 자에게는 존재하는 하나님과의 이 아름다운 교통의 축복성을 너무 강조하다가 보니까 그런 놀라운 아름다운 축복이 마음이 굽은 사람들에게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까 하나님은 마음이 굽은 사람은 미워하신다 라고 말을 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통의 축복이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우선 마음이 굽었다 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하나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런 어떤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바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저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나친 무지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진리에 대해서 굽은 마음을 갖게 한다 그렇게 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말씀에 대해서 잘 정리가 된 사람이 들을 때에 섭취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양분과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이 들을 때 섭취하는 영양분이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워낙 결핍되었을 때에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에 대해서 정직해지기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직한 반응보다는 자기가 그 말씀에 대해서 받은 인상에 의해서 그 말씀에 뜻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올라가서 설교를 했다고 칩시다. 이 사람이 정말 좋은 주옥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여러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면서 말씀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지금 저 사람이 설교하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신앙의 참 도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든지 덜 들어내고 있다든지 이렇게 판단력이 생길텐데,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많이 다녔고 안 다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이 얼마나 참된 성경의 지식 가운데 세워졌는가 하는 문제와 이제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그 사람이 우연히 들어오다가 주보를 받는데 요즘은 주보에 보면 목회자에 대해서 학력까지, 학위까지 상세히 기록하는 그런 교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쭉 넘기면서 보면서 아! 이렇게 공부도 제 코스대로 못한 사람이 무슨 좋은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지금 말씀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말씀 자체에 의해서 그 말씀이 성경의 참된 신앙의 도리를 드러내고 있는가 않는가 라고 판단을 하고 감동을 받기보다는 워낙 무지하니까 이외의 요소, 그런 것, 저 사람이 이렇게 제대로 코스도 받지 못한 사람이 말하는 것을 신뢰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저렇게 체구도 볼품없는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제대로 잘 설교하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무슨 용모가 코미디언 누구를 닮았는데, 그런 다른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 뭔가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도 그것을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그런 무지의 상태,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받아들여지고 인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많이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마찬가지고 설교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는데 시선을 확 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뜻인가 하면 어딘가를 예쁘게 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교회 예배당의 실내장식의 요건이 아니라 특별히 눈에 거스르게 없게 만드는 것이 교회의 예배당의 인테리어의 원칙이 되어야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에서 말하면 그런 것들을 ‘노이즈’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을 방해가 되게 하는 것, 제가 지금 이러고 설교를 나왔는데 오늘 만약에 내가 여기 노란 양복에다가 빨간 넥타이를 매고 마치 옛날에 마스크에 나오는 사람처럼 모자를 쓰고 내가 하얀 분을 바르고 나왔다면 여러분 얼마나 말씀을 듣는데 장애를 받겠습니까? 눈물 뚝뚝 흘리면서 복음을 설교해도 그래서 화장이 지워져도 굉장히 힘들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교회에서는 자꾸 제거해야 합니다. 교회에 무슨 예수님 사진, 또 무슨 풍경화 이런 것 걸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깔끔하게 해서 특별히 눈에 거스르게 하는 것이 없이 사람들이 편안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어째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가 그의 마음을 그렇게 굽게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두 번째 굽은 마음에 원인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잘못된 하나님에 관한 선지식들, 그러니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영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주 굉장히 힘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버리기 위해서는 이미 자신이 그 이단에 빠졌을 때 가졌던 확신을 능가하는 그런 분명한 복음에 대한 체험이 없이는 옛날에 잘못된 하나님에 관한 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그릇된 확신, 이것은 말하자면 죄를 범하는 사람 가운데 먹고살기 힘들어서 이렇게 우발적으로 범행해서 돈을 뺏고 그 다음에 사람을 죽이고 한 사람들은 그냥 범죄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든지 돈을 뺏든지 폭력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사상적인 확신 때문에 그런 일을 행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확신범’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옛날에 이북에서 빨치산 하다가 잡히거나 이렇게 이북에 찬동하고 그래서 잡혀온 사람들 가운데 수십 년이 되도록 전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이 한 장만 쓰면 되는데, 나는 옛날에 확신하는바가 틀렸고 그리고 대한민국이 좋은 나라다. 그 한 줄만 쓰면 되는데 끝까지 안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십 년씩 있으면서 옛날에 이인모씨(?) 같은 그런 사람들 안 씁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확신범입니다.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누가 그 사람을 쉽게 고치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요즘은 성경공부를 많이 하는 시대입니다. 직장에서도 하고 회사에서도 하고 등등 많이 하는데 --정확하게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에게서 배워야 됩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성경의 진리에 기초해서 확신을 가져야지 만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지 아무렇게나 성경을 배우고 그렇게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우리 교회는 부분적으로 구역장 하고 있습니다만 평신도들이 동역자로 쓴다고 하는 캐치프레이즈를 가지고 광범위하게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 성경공부 교사로 등장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약에 어떤 잘못된 확신이 그 사람 가운데 심겨지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신앙의 확신, 그리고 잘못된 신앙의 지식에 대한 신념, 이런 것들에 의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휘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교회에 나올까말까 하고 생각을 하던 젊은 시절인데 여호와의 증인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집집마다 열심히 돌아다닙니다. 하도 와서 한번만 들어달라고 애원을 하기에 들어오라고 해서 쭉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는 제가 교회를 안 다닐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쭉 이야기를 하는데 굉장히 솔깃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젊은이였으니까 다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받아들여졌으면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다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 물어보는데 그때에 저에게 전도하러 온 전도자가 대게 무식했습니다. 내게 묻는 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은 내가 물어보는 것은 하나도 대답을 못하고 당신 이야기할 것만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이야기하니까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당신이 아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아는 것을 내가 어떻게 신뢰하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가 있겠는가. 공부 좀 해라.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경험을 제가 아는 어느 크리스천이 가졌는데 굉장히 많은 성경구절을 동원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요한복음 3장 16절에 뭐가 쓰였는지 아는가 하니까 모른다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많은 내용들이 있어도 중심적인 내용들이 기둥이 되고 나머지의 것들이 가지를 쳐서 형성된 그런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봐야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를 가지고 성경을 보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성경의 진리가 명백하게 이야기해도 그것을 정확하게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교리에 대한 확신, 그런 것들이 이렇게 사람들의 삶을 아주 황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향해 우리의 마음을 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요인은 체험과 관계되어 있는 것인데 체험은 확신을 갖게 만들어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이 체험은 그 사람이 그 체험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그 체험의 의미와 가치들을 정확하게 해석해내서 성경적으로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할 능력이 있을 때에는 그 사람의 신앙적인 체험은 성경 다음으로 그 사람의 신앙에 있어서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날에 청교도들이 성경을 통해서 보편적으로 성경 어디에서든지 통용될 수 있는 교리를 발견하면서 그 교리가 진리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데 사용했던 또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리를 세우면 그 교리를 성경에 의해서 모두 입증하고 두 번째는 그 교리가 자신의 신앙생활 속에서 삶 속에서 진리임이 경험되는가 라는 것까지 검증을 거쳐서 교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교리의 어떤 실천적인 강한 특성들이 있기 때문에 신자들을 움직이는 굉장한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체험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어떤 체험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이 성경에 명백한 진리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보다는 그 체험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제가 언제 한 3-4년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예화: 예전에 신학교 교수로 계실 때 다른 학교 신학생이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간청해 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그분이 부탁하시기를 자기네 학교에 와서 강의를 해달라 고 하면서 그 당시 돈으로 거액의 돈을 주겠다고 했지만 이단이라서 강의를 해줄 수가 없다고 하자 이단이니까 와서 똑바로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거절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이미 굽은 사람들이고 펴는 것이 자신의 분깃이 아니기에 거절하 셨다는 이야기)
이상하게 성경이 형제를 그렇게 사랑하라고 그러고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서 그렇게 연민과 사랑을 가지라고 성경이 많이 강조하고 있는데 이단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섭섭할 정도로 가볍게 취급합니다. 한 두 번 경고한 다음에 듣지 않으면 사귀지도 말라. 그게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까? 형제가 그릇된 길로 빠지는데, 그러면 가서 이 몸이 가루가 되기까지 섬겨서 그를 돌이켜야지, 그게 사랑이 아닙니까? 대답이 없는 것 보니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처음에 신앙생활 할 때에는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아니 지금 술 먹고 강간하고 도둑질하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를 위해 계속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그 영혼이 돌아오도록 아버지 앞에 매달리라는 것이 성경에 일반 된 가르침인데 그런데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라 뭐 대신 그를 위해 통곡하라 네가 울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울 수 있겠는가. 이런 아주 애정 어린 호소가 없고 한 두 번, 그러니까 한번만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만, 너 믿는 것은 옳지 않다. 참 신앙으로 다시 돌아 오라. 그래서 안 들으면 그 다음에는 만나지도 말고 사귀지도 말고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체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결합까지 다 끊고 그리고 살아라. 그게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차가울 정도로 딱 권면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굽은 것을 돌이킬 수가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오히려 그를 펴려고 하는 사람들이 펴는 것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그 굽은 것에 영향을 받을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교회의 진리성과 거룩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을 딱 끊어내는 것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밥을 먹었으니 밥값을 해야 된다고 해서 쭉 밥 먹을 때까지 듣고 밥 먹은 다음에 제가 반격을 했습니다. 이런 것은 잘못됐고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를 쭉 했는데 그 자매가 기분 나쁜 것은 강의할 때에는 앞자리에 앉아서 펑펑 울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를 하니까 내 말이 가슴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하나씩, 하나씩 거의 상당히 많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면서 깊이 공감을 표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이제 강의 시간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마지막 나온 이야기가 나를 실망시켰습니다. 그것은 교수님 말씀이 다 맞는데 그래도 저는 그 교회에서 체험한 것이 너무 큽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돌아왔는지는 모릅니다. 내가 보기에는 돌아올 정도의 분별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사람들을 끌어내기 위해서 적극적인 사역을 해야 할 필요성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의 모든 접촉을 확 열어놓는 것을 성경이 금하고 있는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은 그런 잘못된 체험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 얻게 된 어떤 모정의 확신이 항상 성경 위에 있는 것입니다. 말로는 내 체험이 성경 위에 있다 그렇게 말 안 합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안 하지만 사실적으로는 그것이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체험에 부합하는 성경 구절만 열심히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성경에서 나오는 원리들이 밖으로 올라와서 그것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야지 만 성경을 해석하는 도구와 성경을 해석한 결과 사이에 일치성이 주어지는데 그게 아니라 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자기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성경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그 체험을 가지고 이제 분석하면서 성경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통일교에서 쓰는 (?) 보십시오. 처음서부터 끝까지 성경구절로 범벅이 된 책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 수많은 성경구절 중에 정확한 해석은 거의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게 하는 강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체험입니다. 그릇된 체험입니다.
그래서 항상 어떤 것들을 유지해야 하는가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체험, 그것보다도 성경이 객관적으로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진리에 훨씬 비중을 두면서 신앙의 세계를 세워 가는 것이 중요하고 자기 체험을 지지하는 성경구절을 찾아내기보다는 성경의 진리를 터득하면서 그 진리들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훨씬 정확한 신앙을 세워 가는 방법입니다. 어째든 그런 식으로 어떤 일이든지 간에 마음이 굽은 사람들은 대게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좁힐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세 가지를 예를 들었습니다만 또 하나는 흔히 있는 일 중에서 굳이 추가한다면 이런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잘 지키면서 신앙생활 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제 미끄러지게 됩니다. 신앙적으로 미끄러지게 되면 항상 둘 중에 하나입니다. 미끄러져서 자기 자신이 잘못됐다는 것을 깊이 뉘우치고 돌이키는 마음을 갖게 되든지 아니면 자신의 미끄러짐을 정당화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이런 일 하지 않습니다. 미끄러지면 미끄러졌다고 생각을 하고 또 일어나야 될 필요도 못 느끼는 사람도 많습니다. 미끄러진 김에 엎드려서 자면 편하니까, 그러나 말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리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미끄러지게 되면 깊이 통회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되겠다 라고 마음에 생각하든지 아니면 자기가 미끄러진 것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작업들 속에서 이제 사람의 마음이 굽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굽어지게 될 경우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미워함을 받는다 라고 할 때 미워함보다는 하나님과 소원해진 그 거리감을 좁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성경은 이제 그 반대를 이야기하는데 그렇지만 정직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다.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가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럼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런 부정직한 것, 굽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까 들었으니까 그럼 이제 이 정직한 것, 똑바른 것이 무엇인가는 이제 여러분들이 의미를 역으로 생각하면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해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절대적으로 굽지 않고 그렇게 똑바른 사람이 있을까? 누구든지 마음이 굽어 있는데 어느 정도 다 굽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음악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도 하여튼 좋은 음악 몇 곡만 있으면 책을 한 곡 쓸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능률이 오르는데 어떤 것은 듣기만 하면 너무 심경이 짜증이 나고 괴로운 그런 음악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절대 안 듣습니다. 그래서 CD하나를 사서 꼭 듣는 음악은 그 중에서 한번은 다 들어보지만 그 중에서 좋은 곡만 몇 곡 듣는데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악기 소리를 들으면서 짜증이 나고 힘들어지면 한동안은 그 악기가 등장하는 음악은 다 싫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가슴이 와 닿지 않겠지만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돼지고기 먹고 체한 사람이 그게 계기가 되어서 돼지하고 같이 있고 싶지도 않고 돼지를 애완용으로 기르고 싶지도 않고 나아가서 돼지고기가 스쳐간 모든 음식은 못 먹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사람이 지금 돼지고기를 맛있게 요리를 해서 먹으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하면 선입견이 강력히 지배를 해서 그것에 대해서 ‘돼지’라는 생각이 딱 떠오를 때 그 최악의 상황이 연상되면서 이것을 먹으면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것을 강요받고 먹으면 반드시 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적인 효과입니다.
그런 것들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있는데 누가 여러분들이 나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무지라든지 아니면 그릇된 확신이라든지 잘못된 체험이라든지 아니면 또 뭐 자신의 미끄러짐에 대한 정당함이라든지 이런 요인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굽게 보지 않는 정말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을 나는 가졌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한다면 그 확신 자체가 이미 굽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마음이 굽은 사람, 즉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친교가 있다라고 할 때 이 정직은 선적이고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동적인 개념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수시로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에서도 그런 얘기를 썼는데 목회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뭐 꼭 목회의 길만은 아닙니다. 교회의 일군이 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일군이 되어서 일을 해나갈 때 과거에 살아온 것이 굉장히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목회자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전에 아주 정말 가난하고 헐벗게 산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잘 섬기면서 살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넉넉하게 살아서 부족한 것이 없이 산 사람들이 하나님께 물질 축복을 받으며 사람들을 잘 섬길 것 같습니까? 누구일 것 같습니까? 대답을 좀 하십시오. 그래야 설교에 도움이 됩니다. 누구일 것 같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직선적으로 대답이 나온다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가난하게 어린 시절을 살아오고 일평생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집착이 더 많아서 상당한 재산을 모으고도 불안한 것입니다. 또 옛날 같은 어려움을 만날까봐. 또 자기 자식들이 자기와 같은 그런 어려움을 경험할까봐. 그렇게 하면서 물질에 대해서 강하게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넉넉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좀 낫겠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안 그렇습니다. 넉넉한 사람들은 넉넉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만큼 써야지 사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쓰고 그래서 생활비가 부족해도 자기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합니다. 왜 자기가 좋아하니까. 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무엇인가? 그런 자라온 배경들이 생짜로 남아서는 절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예화: 아시는 목사님이 자신의 교회 재정을 맡으신 분에 대해 머리를 흔드실 정도인데 그 이유는 재정을 맡으신 분이 예전에 방직공장을 운영하던 사람이어서 그 사고 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하루 결근을 해도 인색하게 월급에서 제하고 주었다 는 이야기)
결국은 사람은 살아온 배경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반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일평생 가난하게 시달리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가난히 얼마나 아픈 것인지 압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의 눈물을 훔쳐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그 마음을 만지셔서 고치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옛날에 부자였습니다. 막 풍덩풍덩 다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들어섰습니다.
오늘도 여기에 선교사 한 분 오셨습니다만 선교지 같은 곳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공부를 많이 해서 한국에 있으면 좋은 소리 듣고 대접받고 잘 살수 있는데 선교지에 가서 얼마나 고생스럽습니까! 커피 한 통 사먹는 것도 생각을 많이 하고 사먹고, 그렇게 사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든지 옛날처럼 내가 뉘 집 아들인데,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그렇게 하면서 살아갈 것인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깊이 만져주시면 예전에는 그렇게 부요하게 살았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더 가난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사람이 살아온 바 삶의 경험은 그를 굽게 만들었지만 하나님이 만져주시는 그 은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는가 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가 그의 영혼을 만져주고 그의 심령을 변화시키니까 그가 살아온 배경이 굽어진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펴진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예전에 자기를 굽게 만들었던 것 때문에 오히려 똑바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신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슨 이야기를 제가하고 싶어서 이야기를 하는지 여러분들은 지혜로우니까 다 이해하실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직하다’라고 하는 것은 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이 굽은 사람과 정직한 사람의 차이점은 정직한 사람에게는 수시로 자기 깨어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굽은 사람들에게는 깨어짐이 없습니다. 회개하는 이단을 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의 부정함과 불결함을 인해서 깊이 아파하는 그런 경험들이 이단에서 자주 일어납니까? 이단 속에서 거룩의 갈망들을 발견하신 적이 있습니까? 성경적인 거룩을 추구하는 그런 진정한 거룩의 대한 갈망들을 본적이 있습니까? 몽상가적인 그런 신령함의 추구 말고 본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직한 자에게는 하나님과의 교통함이 있다 할 때 그 정직을 보고 하나님이 교통하심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이야기하는 ‘야샤르’ 정직이라는 그 자체는 무엇인가 하면 지금 앞에 나오는 사람이나 이 사람이나 모두 굽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전자의 사람은 굽어진 그 상태에서 굽어짐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이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함으로 여러 가지를 요인들이 자기를 굽게 하더라도 하나님의 그 말씀에 의해서 수시로 펴짐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깊이 깨트려지고 나면 확실히 드는 게 무엇인가 하면 옛날에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그것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는데 은혜를 깊이 받고 말씀을 깨닫고 나니까 그게 아니었다. 그런 어떤 지식적인 선회함이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명시적으로 예전에는 내가 잘못했었는데 예전에는 내가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회개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돌이키고 보니까 하나님이 이런 분이셨구나. 아! 정말 내가 예전에는 잘못 생각했다. 그리고 내 열정도 잘못된 지식 위에 기초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내 의지나 행동도 잘못된 지식에 기초해 있었다. 내 딴에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영적으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은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는 아주 굉장히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고 일생동안 오직 누구 말대로 일평생을 자기가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왔고 그리고 하나님밖에 모르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결코 자신의 그럴듯한 삶 이면에 깔려 있는 그 난잡하고 더러운 불결한 죄의 본질들을 볼 수 있는 눈이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들추어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항상 이것은 자기를 향한 말이기보다는 아직까지도 자기와 같은 신앙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비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깊고 달콤한 친교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깊고 달콤한 친교는 항상 뼈아픈 자기의 깨어짐을 통해서 시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빗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굽지 않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굽어진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그렇게 굽게 한 것보다는 자기가 굽었다는 사실을 말씀의 거울로 정확하게 비추어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올바르게 반응하는 사람, 정직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직한 자입니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정직한 자에게는 하나님과의 교통함이 있는데, 그래서 사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죄지만 그 죄가 태산처럼 높고 크다고 할지라도 그 죄를 몰아내는 첫 번째 발걸음은 정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기를 진실 되게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현재의 그 모습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그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과 자기의 살아온 삶이 선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살아온 삶이 여러 가지 순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 죄를 몰아냅니다. 죄를 이기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생각할 때 있을 것입니다. 이상하게 나는 분명히 믿는 사람들은 이런 죄도 이기고 이런 유혹도 이기고 이렇게 산다고 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죄는 굉장히 커 보이고 그 이길 수 있는 힘은 거의 없어서 그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게 정말 믿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오셔서 사신다는 말씀이 맞는 것인가. 그리고 정말 신자 안에 주님이 살아 계셔서 그렇게 거룩한 삶을 영위해나가고 죄와 육신을 이기고 누를 수 있는 어떤 영향력들을 우리에게 끼치신다는 것이 맞는 것인가 라고 하는 회의 같은 것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상당히 공감들을 하시는데, 여름 수련회에 많이 가야지 되겠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결국은 가만 나두어도 전혀 해결이 안됩니다. 관건은 진실해지고 정직해지면 해결이 됩니다. 누구 앞에 가서 안수기도 받으면 단번에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멍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보십시오. 유창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못 움직였지만 가슴을 치면서 나 좀 불쌍히 여겨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그 세리의 기도는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는 기도였지만 차마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못한 기도였지만 열납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없는 영적인 파워가 세리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까? 바리새인에게는 없는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세리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입니까? 세리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죄를 참회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바리새인도 성령이 역사 하시면 그를 참회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은 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이래에 두 번씩 금식한 사람입니다. 진실입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은 그런 신념이 아닙니다. 그런 자기 칭찬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 어떤 신령한 영향력도 못 받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에게는 진실함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죄 가운데 빠져도 거기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그 죄악이 관영한 그 더러운 똥통과 같은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여기는 똥통입니다. 나는 죄악덩어리입니다. 나는 다 썩었습니다. 주님은 나를 싫어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지만 지금 내 모습입니다. 돌아가고 싶습니다. 다시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불결하지만 순결해지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그것을 내일 다시 죄에 빠지더라도 오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시인하는 것, 빠져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매달리는 것 그것 이외에 무슨 다른 처방이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이 역사 하시면 특전대원처럼 무장한 천사가 밧줄을 들고 내려와서 자기를 그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번쩍 들어서 한순간에 자기를 수정과 같이 맑은 사우나에 자기를 집어넣어서 씻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들을 기대하는 것은 자유지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화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입증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굽은 것이 있습니다. 저라고 없겠습니까? 여러분이라고 없겠습니까? 누구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굽은 것이 있고 또 수시로 굽은 영향을 우리들이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 앞에 깨트려야 합니다.
지나가는데 어느 형제를 만났습니다. 인상이 정말 그지 같습니다. 꼭 나쁜 사람 같습니다. 등록을 했는데 혹시 뭐 훔치러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조사해보니까 방금 교도소에서 나왔데, 아 그럼 틀림이 없구나. 그렇게 하면서 확신에 확신을 더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탁! 봤는데 인상이 저 사람이 인상이 고약하다. 왼쪽 뺨에 칼자국은 또 어디서 맞은 거야 그러면서 이 사람 혹시 폭력배 아닌가. 이런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그것은 한순간의 인상이었고 주님이 나에게 붙여주신 지체이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갈 곳 없이 방황하다가 주님의 품에 찾아온 사람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시 아가페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보니까 이 형제가 인상이 험한 것도 그 순간 모습으로 볼 때는 죄인 중에 괴수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니까 진짜 하나님의 은혜의 첫 번째 증거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과거의 모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결함이나 걸어온 발자국들이 오히려 그의 연약할 때에 하나님의 강함을 보여주신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까? 여러 가지 인상이나 생각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깊이 깨트려지고 어떤 인상을 받고 어떤 생각을 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데 방해가 되는 그런 어떤 굽음이 자기 속에 있다면 그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완전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만 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한순간에 자기에게 다가와서 더러운 자기의 의의 옷을 벗기려고 할 때 마음이 굽은 사람은 그것을 뿌리칩니다. 벗길 수 없습니다. 내가 이제껏 살아온 삶이고 그리고 이것이 내 자신의 명예다. 난지 팔일 만에 세례를 받았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이게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고 나자 모두 배설물 다. 모두 더러운 배설물에 불과하다. 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못 만났으니까.
그런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는 게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것입니까?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안 받은 사도가 누가 있습니까? 그게 뭐가 그렇게 수치스럽습니까?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아온 삶이 왜 그렇게 수치스럽습니까? 창피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가 창피한 정도가 아니라 더럽다고 말하는 이유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것 때문에 예수를 만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원통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는 동안에 정말 나의 죽은 영혼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나의 구원자이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예수 만나고 나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 안하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니까 나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다고 믿었고 난지 팔일 만에 받은 할례가 나를 이방인들과는 특별취급을 하나님께 받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그것이 나로 하여금 직통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에 달려가서 그분을 뵈올 수 있을 것이라고 나에게 확신을 주었는데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내 생애 가장 귀한 것이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라고 하는 고백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흘러나오게 만든 것입니다. 그게 정직입니다.
예수님의 분명한 나타나심과 그 말씀 앞에서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확신으로 굽어진 마음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율법의 흠이 없던 자신의 완전한 삶에 대해서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것을 버린 것입니다. 그게 정직한 삶입니다. 그 굽은 마음이 사라지고 나서 정직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대면하고 나니까 흘러 들어온 것이 예수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 그 예수의 보혈의 피로 맺어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찬란한 영적인 연합, 이것들이 단숨에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이게 바로 히브리서 성경에서 오늘 이야기하는 교통함입니다. 즉 ‘쏘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주 설교되는 이 설교를 통해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편히 푹 쉬시려고 합니까? 무엇을 기대합니까? 6개월 동안 혹은 1년 동안 곤고하게 살았던 여러분의 마음을 설교자가 좀 달래주기를 원합니까? 유행가 한 곡 틀어놓고 설음을 달래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무엇을 원합니까?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남들이 그렇게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는 그 뜻밖의 은혜, 그런 것이 나에게 좀 없을까,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것은 별로 없다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지키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요행은 없습니다.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나는 오늘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설교 준비 잘하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시는데 계속 기도하십시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해마다 말씀을 주셨는데 이번 수련회라고 하나님께서 빈손으로 가서 죽 쓰고 와라 하나님이 그러시겠습니까? 뭔가 주실 것입니다. 저의 설교 준비를 위해서도 여러분들이 열심히 기도해야겠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기도해야 할 것은 주님이 내게 무엇이든지 말씀하시면 제가 정직하게 그 말씀에 대해서 반응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과의 소원함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그 아름다운 친교, 예수 안에 있는 그 생명에 아름다운 연합과 친교와 교통들이 물밀 듯이 내 영혼에 밀려들어오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뒤통수 때리는 것같이 급습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지 말고 이제껏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유화하고 그리고 여호와에 대한 경외함을 선택하지 않으면서 살았던 그런 나의 많은 삶, 이것에 대해서 깊이 돌이키고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 정말 주님이 말씀의 거울로 나를 비추어주시면 거기에서 내 휜 마음을 붙들지 않고 그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주님이 내가 틀렸다고 말씀하시면 아멘 나는 틀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망가졌다고 지적하시면 그렇습니다. 나는 망가졌습니다. 나를 고쳐주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죄인이라고 하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렇게 반응하겠다 라고 하는 이런 확실한 다짐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준비하면 주님이 내게 무엇을 보여주시든지 내가 그 말씀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하고 그 말씀에 의해서 굽어진 것을 무너트리고 주 앞에 다시 세움을 받으리라고 하는 그런 확신, 그런 다짐이 여러분 속에 있을 때 이번 수련회에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만지고 지나가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에 은혜받을 준비Ⅲ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