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에 대한 목마름
(2004-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가난하고 상한마음(시109:22) 2004.7.18 주일오전 1
2.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살자(딛2:11~12) 2004.7.25 주일오전 13
3. 믿음으로 살려면 은혜가 필요합니다(창45:14~15) 2004.7.28 수요예배 29
4. 하나님 자신을 찾으라(시42:1) 2004.8.1 주일오전 38
5. 준비된 이들에게 은혜를 주심(행10:33) 2004.8.4 수요예배 51
6. 하나님을 찾으라(호5:15) 2004.8.18 수요예배 65
7. 은혜에 대한 목마름엔 참회가 있습니다(눅18:13) 2004.9.1 수요예배 75
8. 가난하고 슬픈 자의 목마름(시편69:29) 2004.9.8 수요예배 81
9. 주린 영혼의 축복(시107:9) 2004.9.15 수요예배 86
10. 꺾이지 않는 간구(눅22:44上) 2004.9.29 수요예배 95
11. 거기서 다시 찾는 하나님(신4:30) 2004.10.6 수요예배 104
12. 하나님 앞에서 탄식함(시55:16~17) 2004.11.3 수요예배 114
13. 고난을 통해 은혜를 갈망함(시142:2) 2004.11.17 수요예배 122
14. 겸손함과 갈망(시22:26上) 2004.12.1 수요예배 133
15.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찬송을 주심(시22:26下) 2004.12.15 수요예배 142
16. 곤고한 땅에서 하나님을 갈망함(시63:1 2004.12.29 수요예배 151
17. 하나님 갈망은 곧 말씀갈망(시119:174) 2005.1.5 수요예배 160
1. 가난하고 상한마음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시109:22)
연단 시리즈를 지난 주로 마치고 오늘부터는 주일오전 시간마다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몇 주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 이 시편 109편은 표제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는 도처에서 일어난 대적들로 인해서 압박을 받고 있는 시인의 곤고한 상태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는 왕이 되기 전 사울에게 박해를 받으며 도망 다닐 때 쓰여진 시거나 혹은 반란을 경험하고 원수들에게 추격을 당하던 때에 쓰여진 시일 것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어째든 시인은 이 시속에서 그렇게 고통당하는 자신의 곤고한 형편을 하나님 앞에 토설하면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이 하루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시편이 없었더라면 자기의 인생의 얼마나 황량하고 외로운 인생이었을까 생각하면서 시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저도 나이가 들면서 정말 이 시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아마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건조하고 황량하였을까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살아서도 하나님을 잘 섬긴 사람이었으나 죽은 이후에 그가 남겨놓은 이 작품들을 통해서 더 많은 성도들과 그리고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그래서 이미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의 사람이지만 지금도 그의 시를 읽으면 그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가 하나님 앞에 늘 충만하게 승리하면서 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지은 많은 시편들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사랑, 원수들로부터 받는 핍박과 고통, 그곳에서 하나님을 구하는 몸부림과 기도, 사죄의 탄원과 자신의 죄에 대한 뉘우침, 소망과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애정이 모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시에서도 이 시인이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간절한 목마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목마름이 없는 신앙생활이 오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일이 되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대부분은 일주일 동안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이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정말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그 주님이 자기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죄의 문제와 인생에 있어서 많은 고통에 대해서 주님이 자기를 만나주시고 자기를 건져주시기를 바라는 갈망이나 믿음이 없이 그냥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라도 예배에 나와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마음에서 액땜하듯이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로 이제는 점점 교회가 붐비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극장구경을 가도 15분전에 도착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는데 매일 예배시간에 상습적으로 지각합니다. 예배가 시작되어도 사람들은 예배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예배시간에 여기저기서 졸고 주보에다가 낙서나 하고 핸드폰이 울리면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또 밖으로 뛰어나가는 사람들, 이게 정말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는 예배시간인가? 무료하게 예배가 끝나는 시간을 겨우 견디다가 힘없이 빠져나간 사람들은 그중에 대다수가 일주일동안 단 한번도 간절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안 부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누룩처럼 번져가고 있는 이 형식적인 신앙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는 이 모든 부패한 신앙 속에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요?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회심하지도 못하고 거듭난 적도 없는 사람들은 원래 그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예배에 참석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할지라도 내가 진실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의 훌륭한 예배의 참석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옥에 가서도 여러분들은 교회 다니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거짓되고 안일한 신앙에 자신을 맡기고 방종하게 신앙생활 했던 수많은 사람들, 마음에는 하나님을 한번도 둔 적이 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목마름도 없이 매일 매일의 종교생활을 이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을 거기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진실로 회개하고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손꼽아 주일을 기다리고 그리고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발걸음은 마치 구름을 타고 나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 쓸모없고 쓰레기만도 못한 더러운 인간을 구원하셔서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무엇이 관대 성도를 섬기게 하시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에게 거룩한 사명을 주셔서 생명을 걸고 섬길 수 있는 자리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예배는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하나님과 만나는 달콤함이 있었고 예배 순서 갈피갈피마다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진실한 간절함이 배어있었습니다 목이 터지도록 찬양을 불러도 가슴에 가락이 넘쳐나고 그리고 어두움을 가르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진리의 빛은 언제나 우리를 주님 앞에 세우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한 성품은 때로는 우뢰와 같이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어두운 우리 영혼의 빛줄기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고통 하던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양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끝난 후에는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울고 그리고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배반하고 살아온 나의 악함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 손에는 늘 눈물 젖은 손수건이 있고 찬송을 부르다 흐느껴 울고 그래서 물에 젖어 구겨진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얼마나 그 뜻대로 살고 싶어 했습니까? 그러나 오늘날도 그런 간절함이 지속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번에 40여명의 중국 선교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제가 아주 의지를 가지고 일부러 등을 떠밀다시피 보냈습니다. 갔다 온 많은 지체들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봤습니다. 가서 뭘 느꼈는가? 모든 지체들의 공통된 대답이 목사님,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없습니다. 감사와 목마른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집중하고 마음을 나누지 말고 주님의 진리를 깨닫고 참된 신자가 되라고 모든 환경을 만들어주고 여건을 만들고 말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고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새사람이 되려고 하고 주님의 은혜에 목마르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떻게 예배하고 어떻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어떻게 아이들을 잘 교육을 하는지 비디오를 중국에 가서 보여주었더니 중국에 있는 지체들이 다 보고나서 한숨을 쉬더랍니다. 그래서 그때 보여주지 말걸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나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거기에는 여러분들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마름이 있습니다. 간절함, 그 내용도 없는 그 신학교에서 그래도 성경 한 구절을 위해서 다세씩 여세씩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혹은 걸어서 그렇게 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방학 때 내려가면 그 18-9세밖에 안되는 애들에게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의 목을 놓고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목마름이 영원히 사라진 것입니까?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는다는 듯이 부요한 모습으로 예배 시간에 늦거나 말거나 교회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가면서도 어떤 가책이나 후회, 안타까움도 없이 힘차게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여러분들을 보면서 너무 슬픕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주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을 먹고 그것으로 인해서 새사람이 되고 변화되지 않으면 그 인생에 어떤 희망도 없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여러분들에게 공급하고 이 많은 지체들이 불철주야 여러분들이 마음을 쓰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가난함이 없습니다. 이전에 예배당을 가득 매웠던 그 통곡하는 울음소리와 그리고 죽은 자를 방불한 인생들을 살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의지하면서 간절하고 목마른 이런 목마름들이 사라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중국에 갔다가 올 때마다 느끼는 일입니다 이런 속에서 목회를 하는 제자신의 영혼은 얼마나 위험할까? 어쩌면 여러분들보다 더 위험할지 모릅니다. 우리의 탐욕과 그리고 우리의 거짓된 욕망이 가져다준 필요 말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것을 너무 많이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완벽한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미국보다 우리나라가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아무 것도 필요 없이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만 있다면 그 바램을 가지고 순교도 불사했습니다. 좋은 집도 잃어버리고 사랑스러운 집과 그리고 삶의 보금자리를 모두 뒤로 한 채 핍박을 받으며 보따리를 쌌습니다. 우리에게 없는 게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예전에 우리 마음속에 있었던 가난함을 잊어버렸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 지난 한주동안 살면서 정말 나는 주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아무 것도 말고 나에게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분들이 얼마나 됩니까? 현저하게 이런 목마름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더 좋은 환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더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섬기고 도울 수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옆에 있습니다. 그런 것들 중에 단 하나라도 그 핍절하고 가난한 중국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면 그들은 여러분들보다 배나 더 참 신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너무 많아, 사람도 많고 누리고 있는 것도 많고 편안한 환경도 너무나 많아,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는데 일부러 온 사람들을 모두 뜯어내고 가마니를 깔고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릴 수는 없잖아요. 만약에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가난해진다면 나는 오늘 저녁에라도 이것을 다 뜯어내겠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외치는 자 많은 한국교회는 그 사람들에게 주고 바람처럼 대륙을 가로지르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역하다가 광야에서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입니다.
정말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전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진리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선명한 복음의 빛이 어두움을 가리고 벼락처럼 우리의 영혼에 내리쳤을 때 그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인생의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건져질 수 없는 그 인생의 벼랑 끝에서,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그렇게 주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 그래서 주님이 그 손을 잡아 이끌고 그 벼랑에서 우리를 건져주셨을 때 우리의 마음이 이러했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 불타올랐고 우리의 눈은 한 가지라도 더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샛별처럼 빛났습니다. 우리 손에는 늘 섬김이 있었고 그리고 우리의 무릎은 늘 꿇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나같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살려주신 주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조국교회 한 모퉁이를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었습니까? 예전에 나처럼 빛을 잃어버렸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깨달은 진리의 빛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고 연약한 자들을 이끌며 갈 길을 모르는 형제들을 친절하게 인도하며 주님이 주신 것들로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섬기고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 아니었습니까? 너무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아파하실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심지 않은 포도원에서 열매를 따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았던 광야와는 비교될 수 없이 풍족한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총으로 그들에게 주신 것이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은총을 주신 것은 바로 그곳에서 여호와가 누구신지를 알리는,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어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땅에서 그들은 부패했고 주님이 주신 곡식으로 우상을 섬겼고 그리고 가난이 사라지고 궁핍이 물러가자 그들은 정욕에 빠져서 부패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것을 이미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모세를 통해서 그 모든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는 말아라 죄인 된 너희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축복을 주시면서 한 가지를 반드시 잊어버리지 말고 간절히 권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모든 것을 누리고 모든 것이 형통하고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이 여유로워질 때 그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는 한때 유리하는 아람백성으로 애굽에 내려가 종이 되었으며 바로 아래서 비참하게 노예로 살아가던 하나님을 등진 더러운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긍휼에 뛰어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 바로의 압제에서 건져주시기를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 나름같이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때문입니다. 정말 이제는 눈물도 없고 갈망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처절한 목마름, 가슴이 찢어지는 기도제목도 없고 자신의 목숨을 주어서라도 이루어야 할 사명에 대한 사명감도 없는 그런 시대를 오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도대체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없는데 그럼 도대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란 무엇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에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란 곧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입니다. 왜 은혜가 있는 상태에서만 하나님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던 때가 어떨 때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던 때, 그때에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입술에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티끌만큼도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얼마나 마음 아픈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은 먼저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을 오늘 시인이 고백하기를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하는 이 고백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형편을 모두 하나님 앞에 비추어보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대해서 눈뜨게 될 때 자기가 가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주님 안에 모든 것이 있다고 믿을 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궁핍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의기양양하게 살아있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유산을 가지고 타국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냈던 그 탕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흉년이 들어서 모든 돈을 다 허비하고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도 구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히브리사람들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목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쥐엄 열매조차 먹을 수 없는 가난한 상황이 되었을 때 그가 자신이 정말 가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일군이 얼마나 많은데 아버지의 집에 풍족함을 생각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얼마나 궁핍하고 그리고 가난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데 원수들에게 쫒기고 있고 그리고 대적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처지는 바로 그 원수와 대적들에게 아주 하찮은 물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된 상황 속에서 이 대적자들에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원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왕이 된 후에도 다윗의 신앙에 있어서 이 고백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범죄 했던 특별한 기간들을 제외하고는 그는 한나라의 제왕이었지만 군림하는 대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한 마리의 상처받은 어린양처럼 떨며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돈이 많으면 다윗보다 많습니까? 지위가 높으면 여러분들이 왕이었던 시인보다도 높은 자리에 있습니까? 예전에 은혜를 받았다면 시인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까? 이것은 소유하고 있는 것의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원래 하나님의 은혜 앞에 떨던 그 초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육신의 부요 속에서 영혼의 상태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입니까? 육신의 부요 속에서 잊기 쉬운 영혼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시지 않습니까? 가난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복주십니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태가 됩니다. 질병에 걸려서 고통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구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건강을 되찾게 해주시기도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기타 마음을 둘 곳이 없는 괴로움으로 인해서 고통 받던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면 그 난관을 벧엘 삼아서 주님이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평안이 찾아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가 이전에 지고 있던 무거운 우리의 인생의 짐을 벗기실까요? 왜 예전에 우리들이 숙명처럼 짊어졌던 그 모든 죄악의 굴레를 벗겨주셨을까요? 왜 궁핍하던 사람들을 여유 있는 사람으로, 낮은 자를 높은 자로, 연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건강한 사람으로, 재능이 없고 아무 쓸모없는 사람들을 유능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만들어주실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그 축복의 과정을 통해서 더 많이 경험하고 이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하였으니 주님이 주신 자원으로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가난하던 사람들이 부요하게 되었고 병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되었고 어두움 속에서 무지하던 사람들이 이제 지식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주신 그 물질적인 부요와 육신적인 건강, 그리고 모든 축복들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황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받다가 그 고난을 이기지 못해서 타락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평안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환경 속에서 살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바로 물질적인 부요 속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정직한 인식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육신의 부요함 속에서 영혼의 진정한 상태를 바로보지 못하고 마음이 부요해져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전에 어두운 죄악의 길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날들을 원통하게 후회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울부짖었던 그런 간절함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더 잘 주님을 섬기게 하시려고 주님이 주신 좋은 여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그 목마른 초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눈에 눈물이 마른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처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뜨거운 감격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동일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우리들이 먼저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충분히 하나님을 대신해서 가슴 아파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명한 빛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원래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데 주님이 우리를 건져내셔서 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를 생각하고 그래서 주님이 많이 축복해주셔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착한 마음을 간직하고 한때 주님을 멀리 떠나고 더러운 죄인으로 주님을 대적하며 살았던 그 모든 죄악들을 결코 잊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곳곳에 모든 것이 형식화되어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 속에 깊이 배어 있습니다. 갈망이 없는 예배, 마음을 실지 않는 기도, 내키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교회 봉사, 그리고 오늘 설교에 은혜를 못 받으면 테입을 듣고 테입이 살 돈이 없으면 나중에 책이 나오면 읽고 책사기 싫으면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그것도 빌리기 싫으면 구역장에게 배우고 이러면서 우리의 마음은 점점 부요해져가고 있습니다. 정말 이런 모습을 보시면서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하게 목마른 마음입니다. 정말 그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머리 좋고 돈 많고 똑똑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구석구석 배어 있는 이 피곤함,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지루함,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향한 권태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다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살았을 때 방탕하게 누리던 즐거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 없이 살았던 그 날들이 얼마나 아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소외된 채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소유하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가던 많은 날들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때에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깡통처럼 살아가던 그 핍절한 삶으로 우리가 돌아가고 싶습니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처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요함의 빛 아래서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자인지 보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한 하늘나라의 그 아름다운 상급과 놀라운 은혜의 비밀들을 보면서 지금 내가 그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주님이 그토록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신 것인지 그 가장 좋은 것으로부터 우리를 가로막았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바쳐짐이 없는 신앙생활은 모두 가식입니다. 그것은 모두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로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중심이 상하나이다.” 여기에서 이 중심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상합니다, 실컷 두들겨 맞고서 다 짓이겨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쓰리고 아픈 그런 마음이 된 것입니다. 왜? 자기가 너무 가난하고 너무나 궁핍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사랑을 생각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작아서 마음이 상하고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축복에 비하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바치는 것이 너무나 없어서 마음이 상하고 그리고 주님이 내게 주신 진리의 빛의 크기를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서 순종한 사람이 너무나 부족해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상하고 어째든 그렇게 마음이 상합니다.
이 마음이 상하는 것은 죄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거룩의 효과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생애는 상한 마음을 안고 사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마음은 늘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고 그리고 그분은 죄인은 아니셨지만 죄인들이 죄의 결과로 인해서 당하는 고통 때문에 늘 마음에 고통을 품고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늘 눈물을 뿌리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은혜가 무엇이며 그분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눈물을 뿌리며 걸어가는 이런 안타까운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시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난관에 에워싸여서 자신의 처지를 보았습니다. 자신은 자원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밑천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기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가난했으나 하나님의 부요함을 보았고 자신은 약했으나 아버지의 강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고 집중한 나머지 그의 심령이 상하기까지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 이런 상함이 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12년 전입니다. 제가 설교자로 세움을 받고 얼마 안 되어서 성남에 있는 어느 한 교회에 집회를 갔습니다. 작은 예배당에서 한 40명 정도 교인들이 마루바닥에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에 온 교인들이 무릎을 꿇고 가슴을 찢으면서 하나님 앞에 목 놓아 울면서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 중에 앞에 있던 어느 지체는 이제 중학교 1학년짜리였는데 머리를 박박 깎고 남루한 티셔츠를 입고 얼마나 간절하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지 눈물이 한없이 흐르고 목에는 핏발이 가득 선 채로 저렇게 내버려두다가는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 교회는 우리교회처럼 이렇게 크지도 않았고 여러분처럼 좋은 옷을 입고 여유 있는 삶을 사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주택을 개조한 이층에서 마루바닥에서 의자도 없이 앉아서 그렇게 사모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동리에서 얼마나 핍박을 했는지 무당들이 많이 사는 동리였는데 하여튼 수시로 교회를 핍박하고 얼마나 핍박을 하는지 어떤 때는 집회를 해놓고 목사님이 도망을 하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 한 4-50명의 성도들이 거기에 와서 그렇게 고난을 받으니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대해서 얼마나 사모하겠습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고난이 있습니까? 교회를 향한 고난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탐욕으로 우리가 더 갖고 싶은 것을 빼고 나면 우리에게 없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런 속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유희부족하고 만족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이런 삶이 너무나 싫습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자기를 희생할 줄 모르며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게 갖추어진 곳에서 부패한 영혼과 함께 살다가 마지막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진도 지역에 제가 내려갈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120명이나 보냈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내려갔습니다. 모두 초라한 예배당들입니다. 인구 128.000명이었을 때 교회가 90교회인데 이제 인구가 38.000명으로 줄었는데도 90개 교회니 인구 300명당 교회가 하나씩인 동네는 거기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게 이 세상의 가게 같았으면 다 문 닫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문 닫지 않게 살려놓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러니까 각 교회마다 15-20명이 모입니다. 예배당은 지어 있는데 15-20명씩 모입니다. 젊은 아이들은 다 서울로 올라가고 노인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대원들이 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더니 예배당마다 마지막 전도 집회를 하는 날 꽉꽉 찼습니다. 제가 가서 설교하던 곳도 두 줄이 서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모였습니다.
그중에 한 교회는 그곳 전도사님을 우리 교회에서 후원해주는 교회인데 우리 교회가 그곳에 전도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몇 달 전서부터 그렇게 간절히 개인적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도를 시작하기 10일 남겨놓고는 매일 성도들이 모여서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인 열 댓 명밖에 안 나오는 교회에 그날 밤에 22명이 등록을 했습니다. 여러분보고 그 교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라면 드릴 수 있을까? 나는 궁금했습니다. 불편한 것을 조금도 못 참는 여러분들이 결코 그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인테리어도 촌스럽습니다. 그리고 불도 이렇게 밝지 않습니다. 냉방기도 없고 선풍기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가 납니다. 앰프도 이렇게 명료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교회 성도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거기는 성령님이 계셨습니다. 왜 거기 가셨을까요? 교회가 작아서, 사람들이 착해서, 아닙니다. 왜 가셨을까요? 간절한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이 선교 환경에서 열린 교회가 와서 복음을 전해준다는 데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해주셨습니다. 연약한 성도들이 여러분들보다 뛰어난 지식은 없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철야, 눈물로 금식하며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여러분이 모일 때는 안 나타나시는 성령님이 그 시골 교회에 나타나십니다. 거기서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때는 모두 어두움을 가르고 들어오는 참된 진리의 빛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들이 경험한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죄인이 자기의 죄를 깨닫겠습니까? 성령님이 아니면 어떻게 그 어두움 속에 진리의 빛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진리의 빛 앞에 엎드려지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희망을 버리고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세상 사랑에 눈이 멀었던 그 어두운 눈이 뜨여져서,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깊이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 가슴아파하고 왜 나같이 쓸모없고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까? 그런 마음 상함, 그게 옛날에 있었습니다. 초막이든지 궁궐에든지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 마음이 상하도록 주님을 바라보고 그리고 하나님이 아무리 나를 부요하게 하고 그리고 우리를 편안한 환경에 두시고 없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해주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은혜를 향한 응시하고 있는 그 눈을 거두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모여서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옛날에는 우리가 안 그랬는데, 옛날에는 성도들이 그렇게 가슴아파하고 은혜 받고 그랬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마음속으로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부터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어두움 가운데서 나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살 수 없을 것처럼 매달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들, 돈을 주셔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는데도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지위를 높여주셨는데도 주님의 은혜에 사모함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들, 건강을 주셨는데도 주님의 은혜, 한순간이라도 주님이 자기를 붙들지 아니하시면 자기가 혼자 도저히 살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상한 마음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언제나 나타나십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정말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듣기를 거절하는 그 많은 복음, 진리의 기쁜 소식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교리를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들려진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참된 신자가 되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누룩처럼 번지고 있는 이 태만함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었고 그리고 하늘의 모든 자원을 모두 소유하신 분이었습니다. 능력이 한량없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가지신 예수님이 모든 것을 가지신 것처럼 살게 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셔서 아무 것도 없는 자처럼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간절하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께 목말라하며 그 아버지께 사랑에 목을 매고 사랑해야하는지를 그분의 생애 전체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없는 자처럼 아버지에게 기대셨고 은혜 없는 자처럼 하나님 아버지에게 은혜를 구하신 생애였습니다. 인자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늘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기대며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많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의지하며 사랑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우리의 죄, 우리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염려 말고 정말 우리가 예수가 아니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염려, 은혜 받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기도의 제목,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더라면 우리의 가슴에 메아리쳐질 수 없는 그런 처절한 간절한 목마름과 사모함들이 정말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게 큰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기억해보십시오. 우리가 어두움 속에 방황할 때 우리를 구원해주시려고 부르셨던 그 은혜는 물론이고 예배당에서 쫓겨나게 되어서 갈 곳이 없고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할지 기약도 없을 때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이 풍부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기적적으로 넓은 예배당을 주시고 지혜로운 사람들을 세우셔서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되게 하셔서 여러분들이 참된 신자가 되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정말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있는 일군들이 많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외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편안한 예배의 환경과 좋은 교육시설 속에서 어려움이 없이 묻혀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며 주님이 우리를 여기에 인도하신 그 뜻과 어떻게 다를까요?
처음 이 교회당을 주셨을 때 뒤뜰에서 손에 손을 잡고 우리들이 이 동리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울면서 기도했습니까? 주님이 쓰시겠다면 우리의 재산도 드리고, 우리의 재능도 드리고, 이 생명도 달라고 하시면 십자가에서 놓을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서부터 우리들 속에 그런 예전의 간절함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등록한 사람들이 너무 열심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다고 하는데 나는 하나도 믿지 않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용광로가 불에 뜨거워서 쇠가 녹아내리고 있다면 무슨 쇠가 들어왔든지 함께 녹지 않겠습니까?
나는 도처에서 너무나 슬픕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피로 값 주고 세우신 교회이고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고 우리가 의지할 무엇이 있습니까? 불면 날아갈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닌 이 건물이나 이 재산, 그리고 이 좋은 환경, 이것은 모두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부자라, 부요하여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는 벌거벗었고 가난하고 그리고 수치스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눈멀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전보다 나아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전에는 이 세상에서 방황했고 이제는 교회 안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 세상에서 죄의 종노릇하고 이제는 교회 안에서 육신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세상에서 세상을 꿈꾸었고 이제는 교회 안에서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시고 죄악의 구덩이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몸부림쳐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그 죄의 자리에서 건져내주신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옛 삶을 살지 말고 좋으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라고 하나님이 건져주신 것이 아닙니까?
이번에도 무 교회 전도지역에 가서 지체들을 이렇게 보면서 나는 여러분들 전부다가 거기에 없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 바로 그것이야. 주님이 우리를 어두움가운데서 건져주신 것은 그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내어주신 빛이신 주님을 알리기 위해서였고 우리에게 그 더러운 죄를 용서해주신 것은 죄에 매어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 용서의 은혜를 경험해서 가치 없고 더러운 불결한 죄인들에게 한없는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덮어주신 것은 우리들이 가서 주의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아직까지 어두움에 매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 빛을 전하고 그 일을 위해서 우리의 소유, 우리의 건강,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의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훈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명을 가진 교회 안에 지체들이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없습니다. 사경회를 하나보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까 나와서 앉아 있다가 가고, 수련회를 하나보다, 백번을 그렇게 여러분 예수를 믿어도 절대로 주님의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이 신앙생활을 차라리 그만두시는 게 낫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전은 마른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그 아름다운 얼굴은 눈물로 가득 찬 성도들입니다. 그 눈물이 가슴에 더러운 죄악을 씻기고 정결한 마음이 되어서 그래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그렇게 믿어서 되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신 구원의 은혜이고 어떻게 발견한 진리이고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생을 방향도 없이 종처럼 매어서 살았는데 우리들이 다시 그런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영혼의 목마름을 못 느끼는 것일까? 옛날에는 잘 느꼈는데 옛날에는 목마름을 많이 느꼈는데 그래서 하나님, 제 영혼이 목마릅니다. 주 예수여 더 충만한 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 않았습니까? 마음의 부패 때문입니다. 이 영혼에는 세 가지 작용이 있는데 총명과 생각과 마음입니다. 마음이 부패하지 않고 정결하면 영혼이 곤고하면 즉시 마음이 그것을 느낍니다. 영혼의 기쁨이 넘치면 즉시 그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마음이 부패하게 되면 영혼이 곤고한데도 곤고한 것을 못 느낍니다. 그래서 마음이 잘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참으로 신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많은 일들에 에워싸여서 한 주간을 보냅니다. 그중에서 정말 나의 더러운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닦아내는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분주하게 일주일동안 세상일, 교회일 여기저기서 섞여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의 죄악을 발견하고 주님의 그 크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 한발을 담구고 교회에 한발을 담구고 살아가는 이중인격자와 같은 생활을 회개하면서 주님의 용서를 구하며 가슴아파하는 그런 시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결한 마음, 그 곳에서 신령한 빛이 비칩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모든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가 정말 새로워져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목마름이 없이 계속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제일 싫어하시는 죄 중에 한 가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때는 언제나 마음속에서 넘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주님이 내게 은혜를 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해야 합니다. 깊이 뉘우치고 초심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렇게 은혜에 목말라하고 진리를 알고 싶어 하고 그리고 참 신자가 되고 싶어 하던 그 목마른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살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딛2:11-12)
오늘 우리가 읽은 디도서 본문은 목회자인 사도 바울이 사역자인 디도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 중에서 2장 앞부분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위대한 계획들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바로 그런 계획들이 아주 훌륭하게 명료하게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범위적으로 숫자적으로 모든 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의 종류, 계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나 자유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권세 있는 자나 비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인종의 차별이 없이 각기 각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하기로 선택한 모든 사람들은 문벌이나 그리고 이 세상의 지위에 매이지 않고 어디에든지 존재하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보이셨는데 그런 구원의 은혜가 바로 우리에게도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이 사실이 향후에 그가 살아갈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불경건과 이 세상의 모든 정욕을 버리고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본문을 해설해나가기 전에 우리는 제일 먼저 오늘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이치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구원을 일상적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사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도 불가능하고 하나님 앞에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구원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찮게 생각하거나 혹은 받은 바 이 은혜를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가, 우리들이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분당에 있는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을 때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교회 부목사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 책을 열심히 읽는 독자 중에 한사람이었는데 목사님, 우리가 강단에서는 구원이 어떻고 영광이 어떻고 설교하지만 실제로 성도들의 삶으로 내려가 보니까 구원은 십 원 보다 조금 못합니다. 얼마나 우리들에게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구원의 은혜 자체에 대한 감격이 없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구원을 늘 있을 수 있는 일상적인 그리고 기본적인 것, 마치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숨쉬고 물먹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뼈저리게 감사하는 적이 없듯이 그냥 그저 구원받은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입증이 됩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어두움 가운데 살다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게 됩니다. 거듭남의 순간을 우리들이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심해서 우리들이 새사람이 되고나면 그때 우리의 인식의 영역에 가득 밀려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새로운 우주관입니다. 왜? 예전에는 하나님도 몰랐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비인격적이고 막연한 존재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습니다. 그때 가슴깊이 모든 인식의 영역에 꽉 차게 밀려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고 그 다음에 이제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그 찬란한 구원의 빛, 그 은혜를 아는 지식의 빛 아래서 나머지는 별로 중요한 게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이후에 내 인생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많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나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으니 그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러니까 그 나머지 일은 이제 하나님이 다 책임져주실 것이고 그리고 이제 나는 그분과 함께 동행 할 것이니 염려 없다. 그게 바로 구원의 감격을 느꼈을 때 우리의 인생관입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면 제일먼저 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구원의 감격하는 정서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성화의 삶을 살게 하는 원초적인 동기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감격이 사라진 사람에게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한 구원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릴 수가 없고 구원의 감격이 있는 한 구원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그렇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순교의 종소리가 울려오는 인생의 석양에 서서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하려고 이 세상에 임하셨다 함이로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자기가 사도로 소명 받은 것 그것도 큰일이었습니다. 복음 사역에 혁혁한 성공을 거두므로 승리를 거둔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다시 살아날 수 없을 정도로 고난으로 가득 찬 길을 걸어온 것, 이것도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죄인들을 구하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과 바로 그분이 내려오신 것이 이 죄악덩어리인 그래서 죄인 중에 괴수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자기와 같은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라고 생각을 할 때 그때에 나머지는 다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한 게 무엇인가 하면 이런 구원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이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에게는 거의 성화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무슨 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비전을 따라 살든지 간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그 구원의 은혜가 내게 나타나기 위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다. 이 인식이 그 사람 속에 살아있지 않으면 나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가 무슨 비전을 품고 무슨 일을 섬기며 어떻게 살아가든지 간에 베드 크리스천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사람 안에 자기를 구원해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은 결국은 죄가 그렇게 만든 것이고 그 사라진 그곳에는 결국은 죄가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어떤 비전을 품고 어떻게 섬기고 어떤 생각을 하며 신앙의 길을 걸어가든지 간에 그 속에 구원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릴 정도로 아직까지도 세력을 가지고 남아 있는 이 죄는 어떤 식으로든지 그 사람의 삶 속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포장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을 향한 대적과 그리고 반감. 이런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여튼 드러내서 그 삶의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참다운 감격이 없이도 수십 년 동안 인내와 끈기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청교도들이 그렇게 사모했던 복음적인 거룩함을 잃어버린 삶입니다. 복음적인 거룩함에서 떠난 삶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이 사이를 찢으면서 들어오는 게 무엇인가 하면 은혜로 받은 구원과 그 은혜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는 실제 생활을 분리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렇게 멈추었다. 그래서 내가 한없이 죄를 짓고 방종하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의 그 크고 넓은 사랑에 비하면 내 죄는 태평양 바다에서 오줌한번 싸는 것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가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 사람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평안도 존재할 수 없고 만약에 평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심령이 죽었기 때문에 느끼는 마취상태의 상황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생각해보십시오. 없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오래전에 구원을 경험했고 너무나 많이 성숙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구원받은 사실 자체가 초보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감격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번성하고 있는 죄와 영혼의 무감각이 그 구원의 기쁨을 상실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원에 대한 감격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원초적인 성화의 기초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자녀다운 최소한의 삶을 살게 하는 마지막 선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다음에 처절하게 하나님께 매달릴 때 부르짖었던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시고 구원의 기쁨을 내게서 회복시켜주십시오.” 이게 양보할 수 없는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완전히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신앙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예배하면서 훌쩍훌쩍 우는 것은 미성숙 내지는 분량에 넘치는 감정주의의 소산이고 성숙한 신앙은 눈물 없음과 냉정함으로 대변된다는 것인데 사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신앙생활은 철 가슴 돌 마음 경연대회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슨 놈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항상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다른 것 말고 하나님의 그 큰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이 왜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구원해주셨을까?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되고 자기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안절부절못한 거룩한 텐션이 있어야 합니다. 한번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말로는 그렇게 합니다. 감사하지, 누가 안 감사하다나. 주님 구원해주셨는데 감사하지. 그러나 뭐입니까? 그리고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은 일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뒤집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가 만들어낸 이야기인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탕자의 비유 속편입니다. 탕자가 허랑방탕하게 다 허비하고 이제는 굶어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풍족한 품꾼이 얼만 많은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아버지가 벌써 나와서 기다리십니다. 아버지가 끌어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해후를 했습니다. 아들이 울먹이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아버지와 하나님께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저는 아들이라고 하는 불러주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저를 아버지의 집의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가까이서라도 아버님을 뵈면서라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버지가 펄쩍 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너는 내 아들이다. 내 재산을 가지고 가서 다 털어 없애고 방탕하고 그랬지만 이렇게 돌아왔으니까 어찌 네가 내 아들이 아닌가, 이 아들이 구원의 감격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구나. 아버지 은혜가 감사하다. 아버지가 큰 소리로 애들아, 우리 아들이 돌아왔다. 가서 목욕을 시키고 좋은 옷을 입혀라. 목욕을 다 시키고 아버지가 좋은 새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옷을 입더니 갑자기 돌변합니다. 싸구려를 색깔도 안 맞는 것을 이것도 옷이라고 말이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감정이 모두 사라졌을 때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게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다른 이유 때문에 말고 왜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사랑하셨을까? 구원해주셨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큰 사랑의 빚을 지고 내가 어떻게 해야 되나. 안절부절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은 한번도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거기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고난을 받을 때 다시 그리로 돌아갔습니다. 아, 맞아,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능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지. 우리가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았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섬김을 다할 수 있다면 무엇이 아깝겠는가. 그런 고백을 합니다.
성화의 길을 걸어가려는데 너무 어렵습니다. 그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는데 그래서 우리를 이렇게 구원해주셨는데 그 구원의 은혜를 받은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것이 없고 모두 빚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주님을 우리의 마음에 구주로 영접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님으로 영접했다고 하는 의미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제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모두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신 것은 너무 분에 넘치는 은혜였습니다. 그런 고백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그런 것들이 사라집니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에 솟아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의 불경건과 육체의 정욕들입니다. 그것들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사라집니다.
토마스 페이슨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자기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죄는 우리에게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제일먼저 하는 일이 죄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을 망가트린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그 죄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은혜를 다 파멸합니다. 그게 죄가 와서 제일먼저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기쁨은 그러면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리 떠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깊이 회개하고 나면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눈물로 인해서 거짓된 가치관들이 씻겨나갑니다. 이게 결국은 얘기하면 길지만 죄의 속이는 작용이 가져다오는 인식의 흐름입니다. 더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런 작용들로 인해서 어떤 죄의 속임으로 인해서 혼란스러웠던 것들이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 모두 씻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진정으로 헛된 것이 무엇이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 아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사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과 가치를 따라서 사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런 구원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격이 사라지고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 사람이 만연하는 죄의 세력이 그의 내면의 세력 속에 번성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아주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은혜의 상태에 있을 때는 자기를 구원하신 사실 그 펙트에 대해서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신자가 은혜의 상태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고 하는 이 사실 팩트에 대해서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사라지고 나면 그 펙트에 대해서 싫증이 나는 것입니다. 지적으로는 동의가 됩니다. 그런데 전인적으로 싫증을 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신자의 참다운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한번 그런 시금석을 가지고 그대들 자신의 신앙을 재보십시오. 어떤 상태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평생에 힘쓸 의무는 우리 주의 덕을 기리는 것입니다. 즉 프레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끼치신 그 은덕, 그 구원의 덕을 기리는 것입니다. 잊지 않고 그것을 계속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존재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신 이것을 한순간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 하나님 앞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그 자세, 이게 모든 성화의 삶에 기초입니다. 누구도 이런 구원의 은혜를 일상적으로 여긴 후에는 내면에 어떤 성화의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들이 더 감격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살아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인식 속에서만 비로소 죄에 대한 심오한 인식이 생생하게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구원의 은혜는 은혜고 삶은 삶이고 심지어는 믿음이 너무 좋은 것이 신실한 삶을 가로막는다는 식의 이런 엉터리 논리는 이 복음적인 거룩함의 교리에 비쳐서 보면 사실 성립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은 자신의 탁월한 논문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록 신자라고 할지라도 죄에 대한 심오한 인식, 그리고 죄에 대한 생생한 인식, 그것을 분명하게 간직하지 않은 채 성화의 삶을 살수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뭘 보면서 깨닫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날 분노하고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들 중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사치스러운 것들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 가운데 아마 상위 1%안에 들 정도로 모든 것을 누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배고픔과 헐벗음이 거의 없는 환경 속에서 무제한의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모든 편의가 제공된 환경 안에서 돌봄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모든 하나님의 은덕을 누리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에게 미친 이 구원을 심상히 여기고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우리들이 아무런 감동도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부패하기가 아주 좋은 조건이고 그리고 똥 같은 바리새인들을 만들어내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은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고 완벽에 가까운 세계 최고의 신앙의 자유를 구가하게 하시고 복음의 빛 아래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데는 그렇지 못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런 뚜렷한 사명이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읽어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에서 살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로 우리를 건져주신 것은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깊이 거듭나고 회심을 경험했을 때 우리의 지난날의 수많은 죄들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깊이 우리의 죄를 처절하게 회개할 때 그때 우리가 제일먼저 경험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로부터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외부로부터 들어온 어떤 은혜의 작용에 의해서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순결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저도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이제까지 사는 동안에 아, 지금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가장 깨끗한 상태에서 데려가실 것인데 라고 느낀 순간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깨끗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양심에 책망할 것이 없이 그렇게 순전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가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순전한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영혼이 이 죄와 더러움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대제사장의 그 마지막 유언적 기도를 들으시면서 그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가 구하는 것은 이 사람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구함이 아니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이들을 남겨두셔서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고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사람의 신자가 죽음에 대한 간절한 사명을 가지고 있으면 대체적으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도 충동적인 사모함이 아니라 지속적인 죽음에 대한 사모함을 가졌다면 세상에 대한 사랑을 거의 버렸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을 위해서 정말 피 흘리면서 분투하면서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 죽음을 사모하는 것이 허영입니다. 사치입니다.
지난 한주간도 제가 혼자 있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혼자 한 주간을 지났습니다. 한 장소에서 거의 집에도 나가지 않고 한 주간을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너무 마음 아프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누구보다도 죽음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는데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부르시면, 그런데 사실 그런 소망을 품는 것 자체가 너무 사치스럽습니다. 살아온 세월을 이렇게 돌아보니까 주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지 속에서 살았던 날들이 인생의 반 토막 이상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으면 그렇게 살 그렇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는데 지식의 빛이 없어서 그렇게 못 살았던 날들을 또 빼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그 지식을 후에 받았는데 이제는 마음이 그렇게 내키지 않아서 안 산 날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빼버리고 또 둘 다 있었지만 깊은 침체 중에 있어서 거의 죽은 자처럼 살았던 날들을 빼버리고 나니까 진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함을 인해서 주님이 기뻐하셨던 적은 몇 주간 정도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주간. 많이도 아니고 몇 주간, 그래서 응답을 안 해주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주님의 부름을 받고 가면 우리야 좋겠지만 그러나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순전하게 만드셔서 데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순전하게 만드셔서 어두운 이 세상의 빛들로 어그러지고 고통 하는 이 세상의 참된 주님의 자녀로 그렇게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선물입니다. 아무나 데려가 달라고 그래도 안 데리고 가십니다. 데려가셔서 뭐하시겠습니까? 땅에서도 아직 안 고쳐졌는데 살게 하시고, 그러니까 사는 게 모두 사는 게 아니고 죽은 게 모두 죽은 게 아닙니다.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벨과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처럼 산 사람들도 많습니다. 중요한 화두는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살게 하려 하심이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래 이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하려 하심인데 그러면 이 세상과 우리의 본성은 일체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정작 기대하시는 것은 일치하지 않은 본성을 간직한 채 이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일치한 본성을 가지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Conformity to christ가 있고 그것과 짝을 이루는 것이 Conformity to the world 입니다. Conformity to christ는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Conformity to the world는 무엇입니까? 세상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Conformity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로마서 12장에 보면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나옵니다. 본받는다는 말이 희랍어로 수수께마티즈오입니다.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신자를 찍어내는 힘이 있고 세상도 그리스도 못지않게 사람들을 그렇게 찍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어떻게 하든지 세상이 자기의 틀에 맞추어서 사람을 찍어내고 싶어 합니다. 더군다나 신자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틀로 찍히도록 내버려두시고 싶지 않고 당신의 틀로 찍어서 당신의 형상을 뚜렷하게 간직한 존재들로 이 세상 한복판을 살게 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께 컴폰 되는 것만큼 세상을 향해서는 컴펀이 안 되고 그리스도께 컨폰이 안 되는 것만큼 세상에 의해서 컴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만큼 세상으로부터 도움받기를 거부하게 되고 그 반대도 성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두 번째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 때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불경건과 세상의 모든 정욕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경건은 원래 어원이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희랍어로 유세베이아라고 하는데 유는 굳 그런 뜻이고 세베이아는 두려움입니다. 희랍어로 포거스입니다. 같은 비슷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람직한 두려움, 이게 바로 경건입니다.
한 인간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는 은혜의 분량만큼 하나님과의 친교의 감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교의 감정은 결코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감정을 훼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이 친교의 감정이라고 생성하는 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공경한 인식을 흐려지게 만듭니다. 이것 역시 죄의 속이는 작용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공정한 존재적 인식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그랬더니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을 때 기도내용 말고 제일 먼저 가르쳐주신 하나님에 관한 존재론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제일 먼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납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그렇게 말하지만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거기에 나도 함께 있다. 하나님이 너희 안에 계시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분이 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줄 때는 너희 마음에 계신 아버지 이렇게 가르쳐주시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그렇게 부르고 시작하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하기 전에 기도해서 어떤 친밀감이 느껴져서 그 은혜가 획득된다고 할지라도 그런 모든 경험 이전에 투철하게 모든 기도의 실천의 과정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할 인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기도하는 너희는 땅에 있는 인간이다. 왜? 이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압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 롯과 같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그렇게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외치면서 살아갑니다. 예전에는 은밀하게 떠들던 이야기들을 이제는 확성기를 붙들고 떠듭니다. 정말 이때야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직도 이 세상에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다는 사실 보여줄 누군가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그 본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무법한 자들의 악한 행실로부터 경건한 롯을 하나님이 건지셨다고 말합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릴 수 있겠지만 그러나 어떻든지 간에 그 롯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한계 안에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과 섞이지 않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소수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떤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그것은 사실 우리 인간이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그 한 사람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그 존재로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날 동안에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한복판에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최고의 섬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불경건하게 삽니다. 정말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을 읽어낼 수 없는 무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이방인들 중에서가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서 업수히여김을 받았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존재론적인 소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아직 생명을 거두어가지 않고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은 모든 삶은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불경건하게 살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즐거우셨을 것입니다. 뭐가 남은 것이 있습니까?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자기의 글속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도 정욕도 모두 지나가되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언젠가 성화에 대한 교리를 깊이 깨달으면서 지금도 계속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만 그렇게 뼈저리게 하나님 앞에 회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렇게 살았을까? 너무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았던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주님께 불순종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서 육체의 쾌락을 누리고 죄를 지어서 잠시 행복을 느낀 적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무 것도 남겨준 것이 없습니다. 남겨주고 간 것은 영혼의 황폐함과 이렇게 살면 마지막 끝이 이렇게 쓰고 고통스럽구나 하는 것밖에는 가르쳐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를 사도가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세상 모든 정욕입니다. 세상의 본질 그 자체가 정욕입니다. 욕망도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살던 동리에 폐병에 걸린 여자 아이가 살았는데 지금은 확실히 죽었을 것입니다. 정말 아프리카 난민은 저리가라였습니다. 16세가 된 아인데 몸무게가 한 30킬로도 안 나갔습니다. 제는 왜 저러는가 하니까 폐병에 걸려서 그렇게도 한데 전혀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먹고자 하는 욕망이 안 든다고 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자기의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음식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또 의복에 대한 욕망도 있습니다. 또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지식에 대한 욕망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존감 있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의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욕망도 필요합니다.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성적인 욕망도 필요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욕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그 계율을 파괴하면서 까지도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강한 그 무엇인가 고등한 목적을 가진 아주 하나님에 의해서 통제되려고 하지 않은 사악한 욕망이 지닌 정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욕정입니다. 정욕입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수많은 욕망, 그 욕망 속에서 일어나는 경쟁관계, 거기에서의 시기와 다툼, 그리고 거기서 오는 분노와 좌절과 절망,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우월감과 거기에서 오는 짓밟힌 듯한 느낌 이런 것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이렇게 살기에는 우리 안에 주신 예수님의 생명이 너무 고귀합니다.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을 여러분과 같은 젊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고통 하는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들이 이처럼 종교의 완벽한 자유를 누리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저의 선배 가운데 한사람이 특수 선교사역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구소련인데 몰래 넘어가서 비밀리에 탈출을 시켜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련 부부인데 나이가 드신 부부를 탈출시켰습니다. 자유세계에 안착을 했는데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선교사님, 정말 오랜 기도 끝에 자유국가로 넘어왔는데 저 다시 한번 소련에 데려다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여기 오지 않겠습니다, 두 번째는 자유세계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소련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그대들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라.
어떤 때는 우리들이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좌절하고 절망을 느끼는 다양한 제목들이 얼마나 본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지 주님이 우리를 오늘밤에 부르시면 모두 지푸라기와 같이 의미 없는 것들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가슴을 넓게 펴고 그리고 세계 방방곡곡에서 들리는 이 조국 땅 구석구석에서 들리는 주님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얼마나 오늘 넘치도록 많은 것을 누리며 우리 자신들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들인지 여러분들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정욕들입니다. 특히 여기에서 나오는 이 정욕은 대부분의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음란으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젊은 날의 육체의 정욕은 끊임없는 족쇄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본능적으로 대적하는 삶으로 살도록 만들어주는 구실을 합니다. 우리들이 이런 사실을 사슬에 묶인 채 어떻게 구원의 합당한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도 알고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신 구원의 은혜에 대한 현재적인 감각이 살아있을 때는 문제가 안 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갑니다.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신 구원인데,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마름하게 될 때 한 번 더 이 세상에 살 기회를 달라고 해도 주님도 들어주실 수 없는 기도입니다. 두 번째 찬스는 없습니다. 꼭 한번,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하루하루가 엮어져서 우리의 인생 전체가 영원 속으로 사라져갑니다. 그러니까 오늘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아주 생경스럽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해야 합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살면서 동시에 우리의 정욕도 어느 만족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 존재할 수도 있다고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은 마귀에서 난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3500년 전에 가나안 땅을 쩌렁쩌렁 울렸던 여호수아의 외침을 반복하고 싶습니다. 너희는 오늘날 섬길 자를 택하라,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겼던 그 신들을 섬기기를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이런 불확실한 시대이고 다원 하는 시대일수록 철저하게 유일신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게 대안입니다. 거기 참된 복음적인 거룩이 있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어느 정도 불경건하게 살고 어느 정도 육체의 정욕도 만족시키면서 복음적인 거룩을 이룬 채 구원의 은혜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은 악마에게서 온 것입니다.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살았던 경건했던 그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흐느끼고 사모하듯이 하늘나라를 그리워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오히려 추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입니다. 여기서 근신한다는 것은 셀프컨트롤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지식과 은혜가 살아있어서 그것이 자기를 어느 정도 부인하면서 살게끔 자기를 컨트롤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간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성화의 구원은 그런 근심함 속에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릇된 안정감이야말로 우리들이 경멸하고 두려워할 적입니다. 오히려 거룩한 떨림, 거룩한 떨림과 두려움, 이것을 가지고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삶 그것 말고 또 다른 선택의 길이 없습니다.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때 공부하고 담을 쌓았습니다. 뜻을 세우고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와서 이제 사회에 나오니까 자유인이 되었지만 술 먹고 담배피우는 것 이외에 자유인이 되어봤자 좋은 게 뭐가 있겠습니까. 고달픈 인생사가 기다립니다. 철가방도 해보고, 가스 배달부도 해보고, 길거리에서 장사도 해보고 해도 너무 먹고 사는 것이 힘이 들었습니다. 애가 그때 생각이 난 것입니다. 23살인가 몇 살 쯤 되었는데 공부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이것보다 힘들까? 그리고 담쌓았던 책을 다시 들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애가 서울 대 인문대를 수석으로 들어갔습니다. 몇 년 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지금은 연수원 졸업하고 뭔가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친구가 쓴 책이 30만부가 넘게, 13-40쇄까지 찍힌 것을 내가 봤으니까 엄청납니다. 그 책이 공부가 제일 쉬웠습니다. 그 책입니다.
이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진실한 신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어렸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렵다는 것도 어느 관점에서 이야기하는가에 따라 틀립니다. 그러면 참되고 진실한 신자가 되는 길을 버린다고 칩시다. 어려워서. 그 다음에 택한 길을 무엇입니까? 불경건하게 세상 모든 정욕을 추구하면서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을 벗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그렇게 쉬운가? 쉬울 것 같습니까? 잠깐은 쉽습니다. 억제되었던 욕망을 털어놓으면서 자기 멋대로 방종한 삶을 살고 그렇게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밤새도록 신나서 노래방에서, 단란주점에서 술 퍼먹고 춤추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들이 혼자 어두운 방에서 아침을 맞이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예수 믿기 전에도 술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술이 깰 때 너무 싫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숙취와 두통, 그리고 그다음에 간밤에 친구들이 많았는데 아침에 눈뜨고 나면 아무도 없습니다, 또 같은 방에서 술 먹고 쓰러져서 잤다고 하더라도 저녁때는 그렇게 다정스러워보였던 친구들이 아침에는 다 자기 일에 바쁩니다. 직장에 가는 놈, 학교에 가는 놈, 다 바쁩니다. 저녁때 있던 그 관계와는 다 끊어진 것입니다. 밤 시간은 정서적인 시간이고 아침은 이성적인 시간이니까 자기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싫었습니다. 잠시 정욕을 따라서 사는 것은 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정욕이 모두 물러가고 난 다음에 다가오는 그 외로움과 공허함,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죄의식과 고통, 그것을 당하는 게 그렇게 쉽습니까?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그런 죄 속에 살고 정욕을 따라 살고 그러다가도 마지막에 생각나는 게 무엇입니까? 똑같은 지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구나. 내 죄를 용서받을 수 없을 거야. 그런 자책과 두려움. 이런 것들이 엄습합니다. 그것은 쉬운 길입니까? 그래서 차라리 그것보다는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 길이 훨씬 쉬운 길입니다. 가장 쉬운 길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잠시나마 참된 신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올바르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말씀과 은혜를 탐구하던 날은 짧은 기간이어도 항상 우리 속에 좋은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우리가 점점 하나님 앞에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산 날은 거의 한평생을 그렇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남는 것이라고는 끊임없는 죄에 대한 갈증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다는 정죄감, 철벽같이 막혀진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거기서 오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모든 의심과 혼란, 이것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대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인생은 자꾸 흘러갑니다. 한번 가면 오지 않는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젊음, 어두움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불러서 주님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의 죄를 모두 토설하고 누구에게나 이루기 어려운 그 구원의 길에 이르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저는 복음의 진리의 빛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도 살 수없었는데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주셔서 진리의 빛을 보게 하시고 진리를 비쳐주셔서 우리가 어디서 넘어졌는지 알았고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깨달았고 그리고 원수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하는지도 깨달았고 그리고 왜 우리들이 참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도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 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전히 정욕을 만족시킬 기회를 찾고 적당하게 불경건한 환경과 타협하면서 살면서 우리들이 고통을 줄이고 즐거움을 더 맛본들 이것이 우리에게 이다음에 무엇을 남겨주겠습니까? 아마 이 세상에서는 맛 잃은 소금이요, 빛 잃은 등불이 될 것이며 주님 앞에서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우리들이 사랑했던 세상도 얻지 못하고 세상 때문에 버렸던 우리 주님도 얻지 못하는 그런 불쌍한 처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장마가지지 않고 찬란한 햇볕이 비치면 바닷물을 모아놓고 염전에 문을 닫으면 일주일이면 소금이 됩니다. 염전을 하는 장로님이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겨울철에 김장을 하기 위해서 펌프 물을 틀어서 소금물을 풀려고 하면 소금이 풀리지 않는데 소금을 담아서 배에 싣다가 자칫 잘못해서 후크에서 빠져서 바닷물에 풍덩 들어가면 아까우니까 얼른 건져보면 불과 1-2분 안에 꺼냈는데 소금은 다 없어지고 가마니만 남는다고 했습니다. 해석이 참 은혜롭습니다. 성도는 원래 하늘에서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살던 사람인데 하나님이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햇빛이 비치는 염전과 같은 환경에서 있으면 보송보송한 소금이지만 다시 자기가 원래 돌아온 고향인 바다. 곧 세상으로 돌아가면 자기도 예상치 못했던 너무 짧은 순간 안에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확 풀어져서 세상과 동화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그런 구원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것은 이제는 사는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구원받고 나서 정욕도 만족시키고 구원의 감격도 유지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받으면서 세상 사랑도 받는 그런 중립의 제 삼의 삶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악마적인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를 중히 여기거나 혹은 저를 경히 여기니라.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한분께 고정되고 자기를 구원하신 그 계획을 따라서 복음적인 거룩을 이루며 성화의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현자로서의 삶의 해안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을 통찰하는 해안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유지가 됩니다.
그래서 구원해놓으신 하나님의 구원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이 치열한 삶을 거론하면서 그 중간에 사도가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우리를 양육하시되 그렇게 나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구원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이 그렇게 이 세상 모든 정욕과 불 경건을 내어버리고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을 좇아서 살게 하시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와 같이 거듭나게 하셔서 벌판에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계속해서 기르시는 것입니다. 양육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똑같이 애국심을 품었다고 합시다. 6살짜리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글짓기를 하거나 포스터를 그리거나 까먹을 돈을 아껴서 그저 의연금을 내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장서한 청년이 애국심에 불타면 어떻습니까?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훌륭한 장군이 되었는데 애국심에 불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군의 부패를 방지하고 그리고 적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전투력을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정치가가 가슴속에 이런 애국심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회 전체를 움직여서 바른 나라를 갖게 되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순수함은 언제나 유지되어야 하지만 순수함이 최고의 가치는 아닙니다. 동시에 뭘 얘기해야지 되는가 하면 성숙한 사람의 순수함이 더 유용합니다. 그래서 장성한 분량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길러 가시는 것입니다. 길러 가시면서 장성한 가운데 우리들이 하나님을 훌륭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시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영적으로 성장시키시는데 사용하시는데 두 도구가 있는데 하나는 지식과 또 하나는 은혜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저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랄찌어다.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우리에게 미칠지어다.” 여기서 저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 그러니까 자라는 것입니다.
벌써 한 10년이 되었습니다만 저 남해바다에 애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데리고 휴가를 갔는데 뱃사공이 바위로 잔뜩 된 산을 가리키면서 나무가 한그루 서있는데 한 일 미터나 일점 오 미터 정도 되어보였습니다. 저 나무가 천년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뻥일 것입니다.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다고 했습니다. 뻥이라는 사실로 믿는데 그런데 하나 공감이 가는 것이 있는데 천년은 안 되었어도 하여튼 수백 년 동안 붙어 있었습니다. 안 죽고 살았습니다. 빛도 있었습니다. 빛이 없었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습기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없었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영양분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전혀 없었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만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천년을 넘게 거기 서있는데 그 나무를 잘라서 회초리나 하면 될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만약에 좋은 땅에서 천년을 나무가 자랐더라면 나무의 종류에 따라 틀리지만 레드우드 나무 같은 게 그렇게 자랐다면 아마 거의 키가 120미터는 자랐을 것입니다. 둘레는 2.5 미터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큰 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난 사람으로서 목숨은 붙어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지식과 은혜가 거의 공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그렇게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여러분들의 미래는 없습니다. 묘목으로 심어졌는데 마지막에 분재로서 인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꿈을 가지고 하나님의 동산에 묘목으로 심겨졌는데 그가 마치는 인생은 거목이 아니라 분재로서 인생을 마칩니다. 아무 쓸모없는 분재로서 인생을 마칩니다. 뭐하겠습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받은 구원인데 얼마나 많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이 이 구원을 사모하다가 죽어갔는데 이 밝은 복음의 시대에 살면서 이 구원의 비밀을 간직하고 질그릇과 같은 우리 속에 보배와 같은 진리를 담으셔서 우리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동산에 심겨서 분재와 같이 우리의 인생을 끝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 마지막에 남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깨달음과 이해가 살아있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은혜가 부어지는 이 역사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 속에 일어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분재와 같은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반드시 하늘을 열고 쏟아지듯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곳 어두운 세상에 우리를 빛으로 살라고 부르셨는데 그래서 우리같이 쓸모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고결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우리 안에는 그런 삶을 살수 있는 자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며 그러면서 온갖 이 세상의 잡다한 정욕과 그리고 더러운 불 경건에 물들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런 더러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끌려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지 않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모든 것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 진실한 신자가 되지 않고도 그렇게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분투하고 노력하면서 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날들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치 있는 날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헛되고 헛된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래서 사도는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되” 그랬습니다. 모두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정말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면서 정말 어떤 의미에서는 하늘나라에서 목 놓아 울기에는 너무나 좋은 환경에서 모자라는 것이 없이 살아가는 그런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십자가의 정신은 날마다 쇠퇴합니다. 이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고 하는 것은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간다고 하는 것은 영웅전에서나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로 퇴색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후로 이 세상은 더 많은 예수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예수님과 닮은 삶을 사는 존재들을 너무나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리고 무지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줄 현자의 출현을 목마르게 기대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세계는 넓고 주님은 도처에서 흐느끼고 계십니다. 나는 은혜를 받고 너무나 쉽게 부패해가는 여러분들, 그리고 저 자신 안에 있는 허물들을 보면서 마지막 날에 우리가 누렸던 이 좋은 환경과 모자라는 것이 없는 이 풍족한 삶들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인데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서 활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어떻게 변명할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받았으면 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실제적으로 온 마음을 실어서 정말 내게 그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든지 은혜가 없이 살아가는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내 생명을 거두어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자유스러운 신앙의 환경, 넉넉한 물질적인 생활, 굶주림과 배고픔이 없는 이 풍요로운 생활로 인해서 우리가 전심으로 주님을 구하고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불러주신 그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한다면 언젠가 하나님이 거두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빼앗아 가셔서 핍박의 칼날이 가득한 세상에 되게 하셔서 더 가난해져서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녀도 좋으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루어지리다
예루살렘이 모두 훼파되고 이방인들의 말발굽아래 짓밟혀졌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거하며 평화를 말했던 유대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십니까? 성은 모두 무너져서 겁탈당한 부녀자같이 되었는데 그들의 백성들은 장롱 밑에 숨겨두었던 패물들을 가지고 곡식을 구하러 뛰어다녔습니다. 아, 정말 노아와 어두운 시대에서 빛으로 부르신 주님이 장엄한 구원의 계획을 인식하고 자기를 위해서 울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지체들을 위해서 울고 주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어두운 이 세상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그 일을 해야지 되겠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 일을 해야지 되겠습니까?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 일을 해야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 어떻게 그분이 우리를 피 값 주고 사셔서 당신의 백성을 삼으시고 어두운 이 세상에 파송하셨는지를 깨달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무는 시대를 바라보는 말세를 바라보는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시겠습니까? 주님이 이 동산에 그대들을 모아서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시고 양육하시되 복음으로 진리로 은혜로 양육하시는 세상 모든 정욕과 타협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불경건과 세상에 속한 모든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 진정으로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답게 어두운 세상에서 빛들로 거치는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참된 진리를 아는 자녀로서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길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믿으시면 그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러나 거기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늘을 열고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은혜, 황폐한 이 세상을 보며 폐허된 자신의 영혼을 보며 그리고 차가운 침묵으로 가득 찬 이 시대의 교회를 보며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물질적인 부요 속에서 영적인 빈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참으로 거치는 이 시대에 살아가면서 우리들을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세대 가운데서 우리를 왜 구원해주셨는지를 깨닫고 자기에게 임한 구원의 이 은혜에 대해서 끊임없이 감격하고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주께서 이 세상에 살도록 허락하신 모든 날들이 주님의 그 영광에 기여하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 또 다른 쉬운 그리스도인의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모두 악마로부터 오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 안에 주의 은혜가 넘치는 동안에는 우리가 이 구원의 갈 길을 다 달려가고 주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도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그분이 받으시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우리가 질 수 있었으면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우리의 영혼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모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정말 닫힌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목 놓아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핍절한 자신의 영혼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걱정하는 것 말고 망가진 자신의 영혼을 끌고 올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고쳐달라고 목 놓아 애원해본 적이 있습니까? 깊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본 적이 있습니까? 벼랑 끝에 서서 주님에 내게 은혜를 주셔서 벼랑에서 돌이켜 신자의 삶을 살게 하시든지, 벼랑 끝에서 하나님이 밀어버리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라고 하나님에게 부담을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칠흑과 같이 어두운 밤 견딜 수 없는 인생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실패했던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을 만났고 그리고 거기서 상한 심령으로 부르짖는 자를 찾아오셔서 물 붓듯 은혜를 부어주시는 영적인 갱신과 삶의 쇄신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주님의 은혜 없이 절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고백하고 생명을 걸고 그 은혜를 구해서 하늘의 문을 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믿음으로 살려면 은혜가 필요합니다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 하니라.”(창세기45:14-15)
수련회 때까지 두 주밖에 안 남았지만 그러나 오전에 이어서 계속 은혜를 갈망하는 것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합니다. 정말 이 장면은 우리들이 창세기를 읽을 때 가장 깊이 가슴에 감동적으로 남는 성경구절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까. 그림처럼 그려져서 우리의 가슴에 아로새기게 하는 영향력이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흔히 그리스도인의 참 복 받은 삶은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가는 삶이다. 우리가 쭉 성경을 통해서 또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메마르고 그리고 모래바람밖에 불지 않는 황량한 벌판이라고 할지라도 강물이 생겨서 흘러가면 그러면 그 주위에 수많은 생태계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죠. 처음에는 시뻘건 황토밭 한 가운데로 물 한줄기 흘러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강둑이 생기고 그리고 인근에 논밭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강둑에는 풀이 나고 그리고 강 하구에는 풀 섶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플랑크톤을 먹고 많음 물고기들이 자라게 되죠. 그래서 하여튼 그 강 하나가 흘러가면 그렇게 아름다운 생태계가 형성되고 살만한 사람들이 강을 끼고 촌락을 형성해서 부락을 만들고 성을 이룩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할 수 없어서 그렇지 만약 우리가 그런 삶을 살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복 받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참다운 가치는 그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얼마나 높은 지위에 도달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수와 갈채를 받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참된 가치는 어떻게 죄와 그리고 허물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참으로 고치시는 그 일에 바람직하게 쓰임 받아서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없었더라면 고쳐질 수 없었던 많은 세상들을 고쳐서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세상으로 바꾸어 놓는가? 거기에 인생의 참다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높은 지위에 두기도 하시고 많은 물질을 두게도 하시고, 혹은 유명하게도 하시고, 혹은 무명하게도 하시고, 혹은 재능 있게도 하시고, 혹은 남보다 많은 지식을 소유하게도 하시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그것을 이루기 위한 한 방법이지 그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큰 고통을 안기는 그런 삶을 살수도 있고, 흐르는 강물과 같은 삶을 살아서 수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평화를 안겨다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이렇게 보면 옛날보다 물이 참 많이 적어졌습니다. 그렇죠. 실제로 옛날보다 강수량이 많이 줄어든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엔에서 나온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물이 부족한 국가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참 큰일입니다. 그러니까 물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또 이제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제는 곳곳에서 산림이 아주 울창하게 자라고 있으니까 화제를 막기 위해서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저수지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산이 비를 내려 보내도 개울까지 내려오지 않고, 산에서 다 막아서 그래서 자연 호수를 만들어서 혹시 산불이 나면 이제 헬기가 물을 퍼서 끌 수 있도록 이렇게 시설들을 해서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해서 어쨌든지 물이 잘 안 내려오게 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메마른 들판에 강물이 흐르면 생태계가 형성되고 논과 밭, 들판이 이어지고, 그리고 강둑이 형성되고 고기들이 헤엄지고, 그리고 많은 아름다운 생태계가 형성되는데 그러다가 물이 없어서 비가 오지 않아서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강이 말라버리죠. 그러면 무수천이 됩니다. 와디라고 하죠. 그래서 무수천이 되버리고 나면 그다음에는 우선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까 논밭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떠납니다. 그리고 강에 놀던 고기들도 모두 사라지고, 그리고 강바닥에는 아주 억세고 거친 그런 풀들이 돋아나게 되죠. 가시 식물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물 하나가 흐르지 않았는데 그 주위의 모든 생태계가 그 풍요롭고 열매를 맺고 곡식을 가꾸던 생태계들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아주 조잡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황량한 생태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요셉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요셉의 오늘 이 장면은 이미 애굽에서 국무총리가 되었고, 그리고 형들을 모두 만나는 장면입니다. 꿈에도 보고 싶어 했던 자기와 배 같은 동생, 역시 베냐민도 여기에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이제 거기에서 베냐민을 끌어안고 목을 어긋맞게 끌어안고 한없이 통곡하는 장면이 여기에 나옵니다. 사실 이 요셉의 일생은 정말 드라마 같은 일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아들로 태어나서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 했죠. 그리고 그 어머니는 넷 있는 부인 중에서 야곱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의 여성이었습니다. 나머지 셋은 다 사은품으로 끼어 팔기로 억지로 온 것이고, 그의 진정한 사랑은 라헬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몸에서 이 요셉과 베냐민이 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아기를 기다렸겠습니까. 이 아이가 태어나서 그렇게 사랑을 받다가 형들에 의해서 팔려서 애굽으로 끌려오게 되잖아요. 거기로부터 이어지는 그 긴 세월동안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설움, 그리고 그 말로 이루 다 할 수 없는 처참한 그 고난의 일생을 어떻게 필설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속에서 이 사람이 결국은 하나님의 큰 섭리에 의해서 이 사람이 애굽의 국무총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 땅에 7년이라는 흉년을 두고 있는데 2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잖아요. 그런데 그 형들과 그 형들이 자기를 그렇게 팔아서 그 형들로 인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그 어리고 젊은 시절을 그렇게 고생하면서 인간으로 당해야할 수모,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그 고난의 시기들을 다 거쳤습니다. 결국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부모와 아버지와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가족들을 다 거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큰 나무를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런 것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막 들판에서 뛰어놀다가 구름이 가득 쌓이고 소나기가 막 오고 그럴라치면 아이들이 막 뛰어가서 비를 잠시 피할 수 있도록 들판에 서 있는 큰 나무, 거기에 그 품에 어린 동생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자기 위 아닙니까. 자기 형들이 다 거기 그 나무 그늘아래서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도 피하고, 심지어는 아버지도 그 품으로 피합니다. 그런 큰 나무로 서 있는 요셉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흐르는 강물과 같은 인생 아닙니까. 그리고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 “내가 너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복 주고 복 주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런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큰 나무 같은 사람이 되어서 그리로 모두 피하는 것입니다. 그것 사실 창세기의 이 요셉 스토리를 잘 읽어보면 사실 말이죠. 요셉을 포함해서 모두 상처투성이의 사람이었습니다. 다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뒤편으로 넘어가면 마지막에 야곱에 죽으면서 자기 아들 열둘을 하나씩, 하나씩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부분을 읽어보면 요셉이 얼마나 마지막 죽으면서 이들을 위해서 유언을 남기면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도 마음에 얼마나 맺힌 것이 많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선 야곱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이 무엇이죠. 사랑하는 요셉을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사랑하는데 나중에야 만났지만 어쩌면 자기 배속으로 낳은 자식들이 그를 애굽에 팔아버리고 돈 몇 푼 받고 팔아버리고 그리고 염소의 피를 옷에 묻혀 와서 “당신의 아들을 짐승이 잡아먹었나보다. 그리고 그 옷을 갖다 던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야곱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겠습니까. 뭐 굉장히 많지만 제가 세 개만 거론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입니다. 그렇게 강간을 당하고 그뿐만이 아니죠. 그렇게 해서 시므온과 레위가 주동이 되어서 그 성 사람들을 속이고 세겜 사람들을 모두 죽이죠. 그 때에 찾아왔던 그 큰 두려움, 이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보복을 당하겠구나. 하는 그 무서운 두려움과 공포, 또 하나 있죠. 그것이 뭐냐면 자기의 맞아들 르우벤이 서모와 간통한 사건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그 아버지가 마음이 아팠으면 그 아들을 축복해야할 자리에서 아들을 차마 축복하지 못하고 그리고 아들에게 축복대신 저주에 가까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어가면서도 그 마음에 담긴 한이 얼마나 뼈저렸겠습니까. 지금 이런 일들 중에서 우리 인생에 한 가지만 일어나도 아마 우리 인생 안 살겠다고 펄펄 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날이 얼마나 그렇게 아팠으면 바로 앞에 섰을 때 “네 나이가 몇 살이냐?” 그럴 때 “내 나그네길이 130년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년 수에 못 미치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그러니까 야곱에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성공의 순간들, 쾌재를 부르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빼앗았을 때에도 성공의 순간이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신풍나무를 넣었다 꺼냈다. 넣었다 꺼냈다. 잔재주를 부려서 그 삼촌의 양떼를 다 자기 것으로 만드는 순간에도 사실 의기양양한 성공의 순간 아니었습니까. 도망을 갔는데 외삼촌이 와서 죽여 버리려고 아들과 달려와서 하나님이 극적으로 건져주시죠. 그때도 정말 성공의 순간이었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모두 그냥 잠깐 동안 나타난 현상들이었을 뿐이고, 인생의 길을 물을 때 “내 나그네 길이 130년이요 나의 조상들의 년 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그 인생 살아보라면 살아본다는 것입니까. 만다는 것입니까. 다시 한번 그 인생을 살아보라. 그러면 야곱으로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상처의 사람이었죠. 그렇죠. 라헬은 진즉 죽었지만 그의 첩 둘과 본 부인 하나. 끼어 팔기로 시집온 레아가 있었잖아요. 그들도 가만히 들어가 보면 행복 했을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죠. 결혼 한지 일주일 만에 자기 동생에게 남편을 빼앗긴 사람이 레아입니다. 아들을 낳아주고, 낳아주고 그랬는데도 이 남편의 마음이 도무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일평생 그 남편을 목매이면서 살다가 인생 마지막을 보게 된 사람이 레아입니다. 빌하와 실바는 또 어땠습니까.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몸종으로 딸려왔다가 어떻게? 엉겁결에 야곱의 첩이 되어서 아이를 낳고, 그 집안에 함께 더부살이를 하게 된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이 받았던 마음고생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또 그 몸에서 태어난 서출들이 얼마나 많은 설움을 받았는지 보십시오. 요셉을 그렇게 팔아버린 이유도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수시로 그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 하니까 거기에서 오는 편애와 차별대우, 설움, 이런 모든 것들, 응어리진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요셉의 형들이었습니다. 물론 요셉을 그렇다고 자기 핏줄인 어린 동생을 죽이려고 마음 먹었다가 심지어는 돈을 받고 팔고, 아비에게 가서 속인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들도 많은 상처뿐인 인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또 아들이 잔뜩 있으면 뭐해요. 아버지는 매일 실음에 잠겨서 옛날에 잊어버린 요셉만 부르는데 그러니 자식들은 요셉을 팔아먹었어도 그들이 요셉에게로 향하던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가로챌 수가 있었습니까. 없었죠. 다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흉년이 들어서 이제는 먹을 것도 없는 상황이 되었고, 자식들까지 굶겨죽을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누가 거기에 행복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또 말하고 싶습니다. 요셉은 행복했습니까? 오죽했으면 첫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뭐라고 지었습니까? “므낫세” 라고 지었는데 그 의미는 뭐냐면 “잊어버리고 싶다” 입니다. 잊고 싶다. 이름을 지었는데 망각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무엇을? 어디부터 생각하고 싶지 않을까요? 아버지 품에서 사랑받던 때는 제외하고 형들에게 팔렸을 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여기 애굽 총리에 오르기 그 직전까지. 오르지 직전에 무엇으로 있었습니까. 누명을 쓰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죄수의 몸에 있었습니다. 다시 생각하고 싶은 것이 하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아주 100% 동의합니다. 왜냐면 요셉에 비하면 덜 험악한 세월을, 더 험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물론 다행히 저에게는 형이 없어서 팔지는 않았지만 동생들은 착해서 날 안 팔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렸을 때였지만 다리 밑에 갖다 버린다는 이야기는 수시로 들었습니다. 원래 거기에서 주워왔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렇게 드라마틱한 인생은 못 살았다고 하더라도 젊어서 치열하게 연단을 받으면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고난을 받던 그 때에는 솔직히 무슨 지나고 나면 아름답다고 하는데 아직 인생을 덜 살아서 그런지 하나도 안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살던 집 근처도 가기 싫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런데 오죽했으면 첫 아들을 낳았는데 얼마나 뜻 깊겠어요. 그러면 긍정적으로 하지 “잊고 싶다.” 첫 아이를 낳아서 이름을 망각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상처입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상처로 말하자면 요셉보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죠. 다른 사람들이야, 자기 하는 짓이 있어서 그렇다지만 요셉이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가족들로부터 단절된 채 그렇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그런 고난을 받아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서 지성으로 섬겼더니 그 이상한 여자가 자기를 그렇게 유혹해서 싫다는데도 사랑이 변해서 미움이 된다고 모함해서 감옥 속에 쳐 놓고, 거기에서 또 배신을 당하고, 이러면서 그렇게 고통으로 가득 찬 세월을 보냈을 때 그래서 여기에 보면 요셉이 울었다는 이야기가 엄청 많이 나옵니다.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아까도 나왔잖아요. 그것이 어느 한 순간에 되니까 모두 복 받치면서 설움이 되어서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는데도 말이죠. 믿음으로 살았어도 사람입니다. 연약한 인생일 뿐입니다.
자, 모두 불쌍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야곱이 무역을 하고 그리고 목축을 치는 집안이었습니다. 어느 해는 장사가 잘 되고 가축도 잘 자라서 떼돈을 번 날이 있었겠죠. 그러니까 곡식 사러갈 돈도 이렇게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잖아요. 그렇죠. 머리 좋은 야곱이 사업 수완도 뛰어났습니다. 그러니 돈 못 벌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집안의 상처와 아픔을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셉 한 사람이 흐르는 강물과 같은 인생을 산 것입니다. 큰 거목이 되어서 그들을 모두 피하게 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눈에 흐르는 닦아주고, 형들의 가슴에 꽂힌 상처를 씻어주고, 그리고 두려워 떠는 그 형들의 자식까지도 모두 거두면서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자기들이 멸시하고 팔아먹었던 요셉 앞에서 당신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저희는 그대의 노예일 뿐입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요셉 한 사람이 흐르는 강물과 같은 인생을 사니까 그 수 십 명의 가족들, 애굽으로 내려온 사람이 66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까지 하면 딱 70명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요셉 한 사람의 그늘아래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처절하게 불행할 수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다 말씀드렸잖아요. 야곱도 요셉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거기에서 피 끓는 분노를 가슴속에 간직한 채 요셉을 그리워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머지 세 여자들은 한번도 자기에게 정을 주지 않았던 그 남편의 죽음 앞에서 눈물은 흘렸을지 모릅니다.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뿔뿔이 흩어졌겠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요셉 한 사람이 흐르는 강물과 같은 인생을 사니까 거기에 모든 사람들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요셉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니까. 그렇게 형들을 끌어안고 이 동생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그 눈물의 의미가 뭐냐면 한편으로는 자신이 살아온 모든 날들에 대한 복받치는 설움이기도 했지만 또 하나는 감사의 눈물이고, 또 하나는 뭐냐면 그 뒤편으로 보면 또 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면 그 자신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으면서도 자기를 그렇게 망가뜨리고 고통스럽게 하도고 자신들은 전혀 그것 때문에 더 행복해지지 못한 채 지금도 자기의 그늘아래 피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존재가 되어있는 형들에 대한 말할 수 없이 깊은 연민입니다. 그것을 가슴깊이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또 누구에게 주시냐면 결정적인 순간에 누구에게 주시냐면 에서에게 주신 것입니다. 사실 나는 그 장면을 읽을 때마다 항상 남과 북이 언젠가는 저렇게 강가에서 이 에서와 야곱에 끌어안고 그렇게 서럽도록 눈물을 흘리면서 화해하던 그런 날이 나는 남과 북 사이에 꼭 오기를 바라는 마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그러잖아요. 에서는 오직 마음에 칼날을 가지고 이 야곱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갑작스럽게 그 마음을 마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하나님이 마치 연극의 연출자 같습니다. 야곱에 저기에서 자기의 모든 축복을 빼앗아가지고 큰 거부가 되어서 오잖아요. 산삼녹용 먹은 얼굴을 해가지고 멀리서 보기에도 당당하게 나타나면 그 사실 에서의 입장에서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하게 하시려고 그 전날 환도 뼈를 한대 갈기시는 것입니다. 환도가 어디인줄 아시죠. 허리약간 아래입니다. 복숭아 뼈가 아니고 꽝 하고 한 대 얻어맞으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지팡이를 짚고, 이 허리를 가누지 못해서 거의 장애인처럼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을 딱 보는 그 순간에 에서의 마음은 확 녹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저 놈이 내 축복을 빼앗아 가서 서럽게 살아온 날도 가슴 아프지만 그 순간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 동생을 보면서 “그래서 얻어간 것이 네가 뭐냐? 그리고 장애인처럼 그렇게 쩔룩거리면서 지팡이를 의지해서 저렇게 나타나고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면서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은총을 구하는 처지가 되었구나. 그러니까 끌어안고 눈물을 한없이 펑펑 흘리는 것입니다.
에서는 사람이 좀 모자라지만 단순하거든요. “야, 같이 가서 살자.” 야곱은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머리는 머리대로 계속 돌립니다. 같이 가 봤자. 언제 저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데 변하면 사고치지 그리고 “형님 먼저 올라가십시오. 저와 우리 모든 양떼들은 지금 지쳤기 때문에 하루만 더 몰면 모두 길가에 쓰러집니다.” 그러니까 “내 사람들을 너에게 남겨주랴.” 그것도 극구 사양합니다. 왜? 가다가 마음이 변해서 핸드폰이라도 쳐서 “야, 정리해.”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씨도 남겨두지 말고 대 데려가십시오. 곧 올라가서 주의 얼굴을 뵈오리다. 그리고 영원히 안 가잖아요. 대단한 사람입니다. 통곡은 통곡이고, 머리면 머리고, 그런데 하여튼 그렇게 하나님이 마음을 녹이셔서 이루어질 수 없는 화해를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녹이는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이 요셉에게 하나님이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알겠다. 이거죠. 역시 그러니까 요셉이 흐르는 강물과 같은 인생을 살고, 거목과 같은 인생을 살아서 그늘을 제공해주니까 진짜 혀를 깨물고 눈을 뒤집으며 분노에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처로 가득 찬 사람들이 이 요셉 한 사람의 인격의 그늘 아래서 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육체의 생명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진정한 가족으로 다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요셉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동생인데 그러면서 그 모든 상처받던 사람들이 그 모든 상처를 씻기며 그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다행이다. 한 사람이 흐르는 강물처럼 사니까 그러겠구나.
그러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좋다는 것은 알겠는데 무엇이 이 요셉을 그렇게 흐르는 강물 같은 인생을 살게, 결국은 거목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해서 상처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모든 그 가족들을 자기의 품에 들어오게 해서 자기를 팔아먹었던 형들도, 서모와 통간했던 형도, 그 자식도,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그 서모들도 큰 누나도 모두 품에 안고, 그 안에서 안식을 분명히 줄 수 있었잖아요. 그러면 뭐가 그렇게 했냐?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요셉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지 않아서 스스로 아무 희망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혜의 피난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철저히 소망이 없는 사람, 불행해지는 것 이외에는 또 다른 선택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인생의 막장에서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런 수많은 사람들을 그곳에서 그 어두움 속에서 건져내고, 생명을 보존하고 편히 누리면서 살게끔 만들어 주었는데 여러 사람이 아니라. 요셉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큰 그늘이 되게 해주셨고, 흐르는 강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보세요. 그 요셉의 품에서 아버지가 눈을 감잖아요. 요셉을 만났을 때 뭐라고 말합니까? “이제 내가 지금 죽는 것도 가하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내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너를 보았고, 내가 너만 보고 싶다고 했는데 네 자신도 내가 보았으니 나는 이제 여한이 없다.’ 요셉의 품에 안겨서 요셉이 눈을 감겨줄 때 그 일백 삼심 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이 야곱이 130세에 여기에 와서 훨씬 더 오래 살게 되죠. 140 몇 세 인가까지 살죠. 그렇게 긴 세월을 살면서 그러면서 지워지지 않았던 상처가 이제 이 130년이 넘는 나그네 길처럼 살면서 가슴에 수없이 칼을 꼽고 살았던 그 모든 원한과 아픔, 저리 저리 가슴 저민 인생의 그 쓰라진 상처들이 요셉의 인격의 품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평강을 통해서 스쳐지나갑니다. 야곱은 살아온 모든 인생보다 아름다운 죽음을 그 요셉의 품에서 맞은 것입니다. 다른 모든 형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어디에서 그런 행복을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요셉이 진심으로 용서하고 당신과 당신의 자녀들을 내가 기르겠습니다. 나를 팔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두려워마소서. 나를 이곳에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여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악을 선으로 바꾸나 오늘날에 내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았기 때문에? 신앙으로 살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몰론 우리의 환경이 여러분들이 처한 환경이 정말 신앙으로 살기에 어려운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사면을 둘러보면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상황을 보면서 눈물 흘려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것은 답이 아닙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고 남는 진리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모든 사람이 불행하고 믿음으로 산 모든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다른 대안이 뭐가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아침에도 요셉을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요셉이 만약에 에굽이 팔려갔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했는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그래도 그 집안에서 그래도 좀 밥술이라고 먹는 종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힘들게 쓰레질을 하고 노예사리를 하면서 생각을 해보니까. 그 나쁜 자식들, 형들이 나를 팔아먹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를 악물고, ‘나쁜 놈들, 인간 이하의 자식들, 내가 당장 달려가서 너희들을 쳐 죽이리라.’ 그렇게 분노를 품고 만약에 보디발의 집에서 탈영이나 했더라면 잡혀서 개죽음 당하는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또 잘했는데 보디발의 부인이 자리를 유혹해요. 그래서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가서,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 감옥에서 나는 이런 죄를 지을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서 행패를 부렸다면 좀더 빨리 죽었을 것입니다. 쥐어 터지고, 그리고 불량 죄수로 분류되었겠죠. 그리고 독방차지를 했을 것입니다. 사실 사고치고 깽판 친 놈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왜 안 그럴 수 있었습니까?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그가 그렇게 해서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있다고 사람이 버림을 받았다든지, 아니면 밖으로 내친바 되어서 그저 불량 청소년으로나 살다가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범법자가 되었다든지.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튼 그 믿음의 길에서 도태되었다면 그 수많은 가족들 중에 누구도 그 상처를 위로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가슴에 한을 품고 다행히 보디발의 집을 탈출해서 형들에게 가서 칼부림을 해서 형들 몇을 찔러 죽였다고 칩시다. 자기도 죽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버지는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을 상상해볼 때 요셉 한 사람이 믿음으로 사니까 그 한 사람만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가족들이 그 흐르는 강물처럼 살던 이 요셉의 그늘 아래서 다시 행복을 얻고, 그들의 많은 죄와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아름다운 위치로 돌아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살게 하시고 싶었던 삶입니다. 오늘도 바로 이런 삶을 살게 하시고 싶어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어렵죠.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들려오는 소식만 들어도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이 많은데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길 말고 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 좋은 길이 있으면 한번 대답해보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보이는 환경에 이끌려서 넘어지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물론 아프지요. 물론 힘들지요. 물론 쓰라리죠. 물론 용서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까 요셉이 믿음으로 산 이 길이 최선의 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반드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고난을 받는 것 같고, 더 많이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더 아픈 것 같고, 더 괴로운 것 같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그 믿음을 통해서 당신의 그 위대한 계획을 보여주십니다. 반드시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정말 마지막으로 그러면 도대체 요셉이 믿음으로 살았다. 그랬는데 그로 하여금 그렇게 믿음으로 살수 없는 환경이잖아요. 사실은 요셉이 형들을 고자질하고, 그래서 그것, 아버지의 편애를 받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팔려가서 그렇게 치열하게 고생할 정도로 그렇게 중죄를 지은 것은 아니잖아요. 또 어린 소년이었는데 그렇잖아요. 우리 자라면서 한번쯤 형이나, 언니, 누나에게 동생에게 시샘 안 해본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얼마나 어려웠어요. 그런 삶을 살면서 요셉이 에굽에 끌려온 이후로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에굽에 끌려오게 된 이 사건을 통해서 요셉이 인생을 살아가는 처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다른 사람을 고자질 하거나 다른 사람을 자기로 인해서 이렇게 손해되는 일에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뭐냐면 그 에굽에 와서 요셉이 크게 두 번을 배신을 당합니다. 첫 번째는 보디발의 아내죠. 그런데 우리 같았으면 끌려가서 자기의 누명을 벗어야 되는데 가당치도 않잖아요. 요셉은 그렇게 준수하고 예쁜 청년이었는데 왜 그 나이 먹은 여자를 탐을 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저 여자가 나를 오히려 겁탈하려고 했고, 오히려 나를 유혹하려고 했다.” 한번쯤은 불수 있잖아요. 그렇죠.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딱 한마디만 합니다. “이 곳에 와서도 나는 옥에 갇힐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또 한번의 배신 사건이 있죠. 감옥 속에서 꿈을 잘 해석해줬는데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의 약속을 저버리잖아요. 그런 복수심에 불탈 수 있는데 거기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기다려요. 그러다가 후에야 깨닫고 이제 그를 꿈꾼 바로 앞에 세우는데 그 때 나이가 삼십 세였습니다. 후에 이제 에굽에서 문헌이 나오는데 에굽에서 공직을 담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연령이 삼십 세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섭리 속에 그를 감추었던 것입니다. 28세에 나와서 꿈을 해석했더라면 돈 몇 푼 줘서 돌려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상처받을 상황이 많은데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은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느냐? 그것이 뭐냐면 그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 안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특별히 그가 정말 은혜 안에 살았기 때문에 그가 정말 믿음을 따라서 에굽에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훌륭한 증거가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을 때입니다. 보는 사람이 우리 둘 밖에 없지 않느냐? 그때에 뭐라고 하느냐면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득죄하리요.” 청교도 존 오웬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이것이 바로 신자가 죄에 대해서 명민하게 깨어있어서 죄가 도무지 이 사람을 속일 수 없고, 이 사람을 유혹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은혜의 상태라고 해설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크리스천이 언제나 그런 삶을 살아야 된다. 당신 보기에는 우리 둘이 있지만 사실은 여기 셋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그리고 어찌 내가 이 큰 악을 행하여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이 하나님께 죄를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뿌리치고 뛰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와 함께 있으려고도 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그 사람을 살아가게 만든 것이 뭐냐면 은혜입니다. 그러면 그가 얼마나. 그 사람도 사람이었는데 그 에굽에서 그래도 종중에 으뜸이 되어서 총무가 되어서 신임을 받고 하면서 교만해지고 유혹에 빠질 수 있는 환경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렇게 믿음으로 살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이 은혜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언제 어디에서 받은 은혜였을까요?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언제 요셉이 뼈 빠지게 기도해서 불 받았다는 기록 안 나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매일 그 이국땅에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꿈 있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고, 형들의 곡식 단들이 자기의 곡식 단에 절하던 그 꿈 있잖아요. 그것을 간직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리고 끊임없이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매일 매일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도 신자로서 우리 모두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방종하게 사는데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던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도 그런 삶을 살고 난 다음에는 즉시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롯도 마찬가지였고, 노아도 마찬가지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고, 모든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혈열 단신으로 에굽에 내팽개쳐진 이 요셉에게 있어서 그가 거기에서 일을 하고 보디발의 집에서 인정받았지만 그러나 보디발과 그 모든 집안의 사람들이 요셉과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동행하면서 살았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리고 도저히 믿음으로 살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원한과 미움, 절망과, 한숨, 미래를 알 수 없는 모든 불안함 들을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극복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 사람을 끊임없이 은혜를 구하는 삶이 이 사람을 은혜 안에 살게 만들었고, 이 사람을 은혜 안에 살게 만든 그 삶이 결국 오직 믿음으로 살도록 인도했고, 그래서 결국 자신도 상처투성 이었지만 그러나 스스로 그 상처를 모두 극복하고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살수 있었고, 거목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 자기가 없었더라면 정말 눈을 부릅뜨고 광야에서 모든 식구들이 원한을 가슴에 품은 채, 미움을 간직한 채 죽었을 그 사람들을 평화로 불러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이유입니다. 한번 눈을 들어서 여러분의 가족과 그리고 여러분들의 이웃을 쭉 한번 보세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나 상처투성이 인지,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인지 서로 찌르고 또 찌르면서 아파하고, 그러면서도 이 끝이 없는 끊임없는 다툼과 갈등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누가 그 사이에 흐르는 강물이 될까요? 누가 그들을 모두 그늘 아래로 불러 모을 수 있는 큰 나무가 될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하라고 우리를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불러주셨습니다. 요셉이 만약에 형들에게로부터 받은바 대우에 대한 원한을 가슴에 품고 애굽에서 살았더라면 쓸모없는 삼류 인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매일 매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멀리 바라보지도 않고 매일 매일 은혜 안에 살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보디발의 집에 팔렸을 때 요셉보고 “너 이다음에 어떻게 되겠니?” 요셉이 자기 계획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감옥 속에 들어왔을 때 “이제 너는 어떻게 되지?”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모두 거기에서 풀려나와서 수염을 깎고 그리고 새 옷을 입고 바로 앞에 섰을 때 “이제 너 뭐가 되지?”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냥 한 순간 한 순간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는 대신 매 순간을 염려했습니다. 오늘 내가 믿음으로 살 수 있을까. 오늘 내가 신앙으로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내게 필요하다. 그랬더니 요셉이 염려할 필요도 없이 장엄한 구원의 대 드라마를 타고 그리고 요셉으로 하여금 만민을 그 기갈에서 건져주는 구원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가족들에게 큰 숲이 되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 백성들에게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자기의 품에 안고 생명을 천하에 보전하게끔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살아야 될 터인데 그것이 잘 안돼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뭐가 필요합니까.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면 믿음으로 살지 않을 사람이 없고,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았는데도 신앙으로 살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어제의 은혜로 살았고 오늘은 오늘 우리에게 부어주실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제 한번 여러분들이 결단을 내려보세요. 여러분들에게는 딱 두 종류의 인생이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원망하고, 미원하고 상처받고 그렇게 살다가 삼류 인생처럼 쓰레기처럼 애굽땅에서 거렁뱅이가 되어서 기억해주는 사람도 없이 살든지, 아니면 큰 나무, 그리고 상처받은 내 주위에 있는 수많은 가족들과 영혼들 한복판을 가르고 흐르는 강물이 되어서 그들로 하여금 거기에서 마시게 하고, 그 그늘아래 깃들면서 살게 하는 삶을 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원하십니까. 이래도 여러분 은혜를 간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4. 하나님 자신을 찾으라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시편 42편은 43편과 함께 쌍둥이 시로 불려집니다. 이 두개의 시편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어떻게 생겨나고 또 역사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표제에 보면 이 시가 고라의 자손의 시,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마스길은 지혜롭게 하는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시를 많이 읽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많은 지혜로운 교훈을 얻는다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와 있는 고라의 자손은 단지 이 시를 보관한 사람일뿐이고 이 시의 저자는 다윗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우리들이 히브리 성경에 기록된 이 표제를(?)없다고 봅니다. 더욱이 시대를 고려해볼 때 뒤편에 넘어가보면 성일에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인도하는 일을 시인이 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볼 때 이미 왕이 된 다윗이 그 일을 했을 리는 없다고 봅니다. 어째든 그래서 이 시는 고라 자손 중 한사람이 지은시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거의 일치된 견해는 이 시의 시대적인 배경이 다윗 시대일 것이라고 보고 그리고 때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황망히 왕궁을 떠나 요단 건너편 남의 나라 땅으로 망명길을 올랐을 때 거기에 함께 동행 했던 고라의 자손 중 한사람이 기록한 시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고라 자손은 원래 고라족속이었고 그들은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올 때 함께 떠나왔던 민족입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그들을 인도할 때 지도력에 반항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 대항하는 고라의 자손들을 좋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응징하심으로서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고라 족속들이 있던 땅이 갈라지고 진지가 땅에 모두 매몰되는 전대미문의 끔찍한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모든 고라의 족속들이 멸망한 것이 아니라 일부 자손들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배신자의 반역자의 자손이라고 하는 불명예를 안고 슬픈 역사 속에서 혈통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임금이 될 때 나라를 세울 때 이들이 많이 기여를 하게 되고 그래서 다윗이 이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특별히 선택해서 왕이 된 후에 성소에서 예배를 돕는 일을 종사하도록 만들어서 이제 고라의 자손이 반역의 무리라고 하는 옛 오명은 모두 씻고 하나님의 기관에서 수종을 드는 그런 기관으로 영광스럽게 다시 세움을 받게 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망명길에 동행해서 이제 이렇게 이 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첫 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가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제목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왕은 쫓겨나고 그리고 나라는 원수들이 불법으로 점거했습니다. 그러니 가장 절박한 기도제목은 원수들을 쫓아내시고 우리의 왕을 다시 복위시켜주시는 것 그것이 가장 절박한 기도의 제목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오히려 이런 기도제목들은 뒤로 미룬 채 자기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이한 움직임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것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나라,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의 일터보다도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자신도 하나님을 찾기에 목마르다고 간절하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거룩한 갈망이 없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하고 진실한 갈망이 없는 세대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모르는 이 시대의 불신자들은 이런 갈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원래 죄 가운데 태어나서 한번도 그 죄를 떠나본 적이 없고 그래서 인간이 이런 갈망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이런 갈망을 갖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접해주시는지에 대한 어떤 인상도 받지 못한 채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미 하나님을 알고 그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의 선하심을 맛본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이런 목마름이 현저히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현실은 이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시대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시대를 비유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하시며 그렇게 가슴아파하셨습니다. 사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죄 가운데 매어서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신 그분이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 때문에 땅에는 평화이며 하늘에는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기를 위해 이루신 그 놀라운 구원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좋아하지 않았고 그리고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이신 그분이 인간들과 함께 계셔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하든지 그들의 영적인 형편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게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는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심판과 함께 다가오는 나라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결코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산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회개하고 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옴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임박한 심판과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가슴아파하는 마음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들어가시면서 멀리서 성을 보시고 가까이 오시자 통곡하면서 우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잠시 후면 다가오게 될 예루살렘의 그 끔찍한 멸망을 미리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수님의 그 통곡하는 예수님의 울음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뼈저리게 회개해야 할 죄악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거의 벌거벗겨진 채로 살던 우리들을 이만큼 축복하셔서 먹고 살만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경제가 어렵고 힘들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세계에 나가보면 우리보다 잘 살아서 부강한 나라보다는 우리나라를 부러워하는 나라들이 훨씬 많게 되기까지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축복하셨습니다. 피 흘리는 동족상간이 있었어도 하나님이 그래도 그곳에서 적당히 우리를 전쟁을 끝나게 하시고 뼈아픈 사연이 많이 있지만 반 토막이라도 남아서 우리가 이렇게 번영을 누리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위에 더 크고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많은 교회가 서게 하시고 6-70년 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기독교 국가는 아니지만 기독교 국가도 누릴 수 없을 정도의 완벽에 가까운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중국에 갔을 때도 제가 강의를 하는데 소식이 왔습니다. 자기 동료 중에 몇 사람이 성경을 배포하다가 공안에 끌려갔습니다. 중국에 있는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그랬습니다. 조선에서 그렇게 완벽하게 신앙의 자유가 있으면 십자가는 어디서 찾습니까? 우리는 이게 십자가인데, 어디에서 십자가를 찾습니까?
이렇게 완벽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떤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도처에 매우 피곤하게 신앙생활 하는 기력이 역력합니다. 의무감에 못 이겨서 무거운 발길을 옮기는 주일 예배나 드리고 예배는 드리지만 돌아가고 난 다음에 다시 예배의 정신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사는 가식과 위선, 그리고 거짓과 허위들, 그리고 신앙을 자기의 번영의 기회로 삼으려고 하는 그 얍삽한 세속주의 정신들 이런 것들이 우리들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그 모든 죄를 우리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아버지를 모시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사정을 하나님이 모르신다고 불평하지만 사실은 거꾸로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들을 길러보면 알지만 효자가 누구입니까? 효자가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른 애들이 효자가 아닙니다. 공부를 잘한 애들이 효자가 아닙니다. 효자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 자식입니다. 그 새끼가 효자입니다. 아빠가 마음아파하면 아빠가 왜 그렇게 마음아파하고 있는지를 알고 아빠를 그렇게 마음 아프게 해드렸다는 것 때문에 더 아파하는 자식, 그게 진짜 자식입니다. 엄마가 수심에 가득 차고 그리고 슬퍼하면 엄마가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그 마음을 알고 그것을 깊이 헤아려서 그래서 아파하는 엄마 때문에 자기도 마음 아파하는 그게 바로 효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아서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는 신앙생활, 그런 생활입니다.
정말 이 시대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통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그런 냉담한 시대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정말 우리들이 회개해야 할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는 이것이 우리들이 회개해야 할 가장 커다란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는 모든 신앙생활은 위선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깃들지 않는 모든 신앙생활은 하나님보시기에 거짓입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는 신앙생활, 모두 거짓입니다. 외식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드리는 신앙생활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그 사랑에 붙잡혔을 때는 우리들이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알아드렸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들으며 나를 향해 마음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전해져왔고 기도하면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들 때문에 슬퍼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교만한 이 땅의 백성들을 보면서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우리가족들을 위해 기도했고 주님의 마음을 알아드리지 못한 채 저 좋은 대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해서 깊이 회개하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뉘우쳤습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어려움이 있어서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오늘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렇게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정말 일주일동안 예배의 정신에 부합하는 정신으로 사셨습니까? 정말 예배 시간에 주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신앙의 감격을 누릴만한 삶을 살았습니까? 예배는 바로 일주일동안 살았던 모든 삶의 반영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일주일동안 그 진리대로 살고 그 진리대로 되기 위해서 고민하고 몸부림칠 때만이 그 6일이 있을 때만이 하루의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기 위한 준비는 예배당을 떠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예배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지 않은지 아십니까? 은혜가 필요한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지 않은 것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워보십시오. 우리의 힘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게 됩니다. 어두운 세상에 복음을 전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불의와 맞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쳐보십시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를 이길 수가 없고 우리의 불의와 우리의 악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은혜 가운데 살면서 거룩해지고자 했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했습니다.
오늘날의 예배를 한번 보십시오. 시체들이 모여서 침묵 속에서 드리다 지나가는 이 예배,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예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 시간에 아무런 갈망도 없이 찾아와서 끝날 시간만 기다리면서 예배를 드리는 수많은 군상들, 예배 시간에 와서 졸고 이 세상의 헛된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그렇게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드리는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러 내려오신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습니까?
퍼질러 자던 야곱이 꿈에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했습니까? 후다닥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붓고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여기서 만났구나.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정말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신앙의 자유도 주시고 경제적으로 좀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 가운데 아무도 굶어죽은 사람이 없이 좀 불편하고 어려울 뿐입니다. 우리가 번영하고 부자가 되려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오늘 우리들이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더 큰 것은 영혼의 어려움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진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몰랐던 사람들은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한때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무엇인지 알았던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제일먼저 팔복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입을 열어서 첫 번째 주신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이었습니다. 가난한 마음의 축복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르게 만들어주실 것이었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통째로 주셨습니다. 정말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부요하게 살다가 조금 물질이 줄어들어서 불편하게 사는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희랍어로 푸토코스입니다.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파산선고를 받고 길거리에 내어 쫓기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살면서 별 경험도 다 했습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학교 옆으로 이사를 왔는데 전 재산을 통 털어서 허름한 전세방을 하나 얻어서 왔습니다. 3천만 원의 은행 빚을 쓰고 있는 집이었는데 집이 9천만 원쯤 나가니까 차마 무슨 일이 있으랴 하고 덜컥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3천만 원에 집이 넘어가버렸습니다. 주인은 도망가고, 몇 달 있으니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와서 방을 빼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가냐고 하니까 우리가 알바가 아니라며 이사비용을 20만원씩 줄 테니까 나가라고 하면서 이것도 안 줘도 되는 것인데 불쌍해서 주는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습니다. 그 추운 엄동설한에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게 진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 있구나.
그때 깊이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이런 집에 왔지만 그러나 이것도 뭔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체 항의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견뎠습니다. 정말 그때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진짜 가난해져도 그렇게 마음이 가난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교 끝나고 나서는 학교에 있는 신학교 예배당에 올라가서 그렇게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진짜 어디로 가야지 될지, 아무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진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 한마디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를 도와줄게. 그 한마디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사방을 돌아보아도 아무도 도움을 구할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한 두 시간씩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할 때 힘이 들었는지 땀에 런닝과 팬티가 다 달라붙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추운 겨울에 갓난아기를 데리고 아무 것도 없이 길거리에 내쫓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난한 것입니다. 심령이 그렇게 된 사람이 복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그러지만 사실 얼마나 많이 우리들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가운데 너무나 잊혀진 찬송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 아닙니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깊이 하나님 앞에 진짜 주님이 아니면 우리가 어디에 가리까? 우리에게 억만금이 있고 이 세상 왕후당상의 자리에 우리를 두신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붙들지 아니하시면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찾아가십니다. 돈 많고 교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교회에서 교인들의 대접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리고 거들먹거리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섬기는 것 없고 바치는 것 없고 죄밖에 지은 것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나는 주님 없이 살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심령이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정말 우리들이 회개해야 할 죄가 바로 이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가난함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가 이 세상의 어두운 속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방황할 때 그때에 주님을 찾을 때, 그때 그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의 보좌에 고정되었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오로지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그 하나님의 그 사랑, 그것만을 갈망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저는 요즘 여러분들의 목자로서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도처에서 마음이 부요해져있는 여러분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 주신 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누리고 있지만 그러나 또 반대로 우리가 가진 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정말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가 잘난 사람들입니까? 매순간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가 충분히 죄를 이긴 사람들입니까? 매순간 하나님께서 말씀의 빛을 통해서 우리에게 총기를 더해주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가 충분히 지혜로워진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도처에서 실패하고 있고 하나님이 주신 수많은 은혜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가 부패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 앞에 받았던 생생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 돌이킨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모든 명분에 대한 감사함과 은혜를 잊어버린 채 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예전처럼 여러분들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서 방탕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방탕한 길에서 돌아왔을 때 주님 앞에서 맞보던 그 말할 수 없었던 은혜의 감격, 이제는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 고난이 오나 시련이 오나 내가 이 복음과 함께 예수를 신랑삼아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어디서든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애틋한 마음이 사라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해주셔야 할까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당신의 가슴 아픈 마음을 보여주셔도 애통하지 않는 여러분들을 보시면서 주님이 여러분들 대신 아파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가난한 마음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정말 고단한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집회에 가면 설교하러 가면 어디든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핏기를 잃어버린 얼굴로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차라리 죽음이 오히려 쉽겠다고 생각하며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 그들 중에는 여러분들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만큼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면서 살아온 불한당 같은 사람들도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못 만나는 하나님을 그들은 만납니다. 왜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진 것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건강이 있다면 그것이 믿을만할까요? 한순간 하나님이 치시면 죽음 앞에 다가가는 우리의 연약한 인생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지위가 있다면 그것이 믿을만할까요? 우리에게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의뢰할만할까요? 모두 허무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찾지 않으십니까? 어려움이 생겼을 때 와서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것은 물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지만 기도할 때마다 자기의 요구 사항으로 가득 채우고 더 이상 영혼의 어떤 진전도 없는 것은 하나님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도처에서 우리를 부요해진 자신을 봅니다.
오늘 아침에도 교역자들이 모여서 이번 수련회를 앞두고 한주간인데 교구별로 모여서 기도를 하는가, 했더니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아침 내내 마음속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떻게 사나.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 있을까? 빚 얻어 지은 이 편안한 예배당 때문에 우리들이 부요해졌다면 다 부셔버리고 잿더미 위에서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을까? 정말 나는 여러분들이 무엇을 믿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주 수련회 가는데 보따리를 싸서 수련회를 가면 하늘을 열고 은혜가 쏟아질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요행을 바라는 사행심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새벽기도는 날이 너무 덥고 그리고 육체적으로 너무 힘든 때니까 조금 주춤했다고 이해를 해도 한주 후가 수련회인데 정말 교회당 구석구석에서 흐느끼면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공동체가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하고 기도하고 그런 지체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나보다도 더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도처에 여러분 얼굴을 마주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도처에 가난함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성령이 너무 슬퍼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편안한 가나안 땅에서 광야에서의 우위와 그 첫사랑의 때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상숭배에 빠지고 간음하고 방탕한 삶을 살다가 멸망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축복들은 주님을 섬기라고 주신 축복들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기회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당신을 섬기면서 살라고 주신 은혜들입니다. 아침 내내 마음에서 눈물이 물같이 흘렀습니다. 설교자 한 사람 붙들어주시면 은혜가 쏟아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절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의 재주를 믿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염려와 근심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마음이 없다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지금보다 더 어려운 때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그때에도 주님이 거기에서 나타나셨습니다.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 나름과 같이 우리를 인생의 벼랑 끝에서 우리를 업어 나르셨습니다. 우리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이끌어오셨습니다. 아침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만 내 생애 단 한번만 정말 주님의 은혜를 목말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면 그 통곡하는 기도 소리에 묻혀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을 텐데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뭘 가진 게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은혜의 세계를 맛보았다고 하지만 여러분들이 맛본 은혜의 세계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는 훨씬 더 넓고 깊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알았다고 하지만 그 복음의 비밀 중 여러분들이 안 것은 넓은 바다의 한 해변가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목말라하지 않습니까? 더 많은 은혜와 더 많은 능력을 주셔서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어두움 가운데 방황하는 수많은 인생들에게 예수의 이 사랑을 나누어주고 그리고 이 지식의 빛을 나누어주는 현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데 왜 그것을 위해서 목말라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은혜로부터 미끄러져 부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슬퍼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처음에 그 초심으로 돌아가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징벌하실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그런 간절한 목마름을 간직한 채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목마르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팔레스타인 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사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슴은 가을철이 교미기입니다. 발정한 사슴들이 짝을 찾기 위해서 들판을 나섭니다.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갖고 이제 암컷을 찾아 나서는데 이 발정기가 되면 사슴의 신체적 특징이 찾아오는데 타는 것 같은 목마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짝을 찾다가 짝을 찾아서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망보다는 목이 타들어오는 이 갈증이 더 많이 파고듭니다. 그때 물을 찾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광야에 물이 많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우물을 가지고 서로 다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다 너무 목이 마르면 그 다음에 헛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기 샘이 보입니다. 사슴이 미친 듯이 달려가지만 샘은 없습니다. 결국은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사슴은 쓰러지고 두 눈은 부릅뜨고 죽어갑니다. 죽어가면서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이 시인은 팔레스타인의 들판에서 그렇게 두 눈을 부릅뜨고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은 많은 사슴의 시체를 보면서 자라왔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시인의 가슴속에 있었던 목마름이었습니다. 간절한 목마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좋을 텐데, 은혜가 떨어지니까 사는 게 참 힘들구나. 그것은 목마름이 아닙니다. 그냥 일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목마름은 오늘 이 시인이 고백한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찾기에 간절히 목말라합니다. 타는 것 같은 목마름이 엄습할 때 그 사람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가 칩시다. 물을 줄 수 없지만 빵은 줄 수 있는데 대신 한번 먹어볼래. 먹을 수 있겠습니까? 물은 줄 수 없지만 좋은 구경을 시켜줄 수 있는데 그것을 보면서 목마름을 좀 달래보지 그래. 될 수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강력한 목마름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셔서 내가 여기에 있다.
어두움의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정말 목마름입니다. 그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한 채 후루룩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수많은 사람을 봅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며 회개할 기회도 없이 그렇게 빠져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없고 자신의 죄에 대한 미움도 없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유혹에 대해서 판단하는 능력도 없이 그렇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떠밀면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 마지막에 그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무엇이 남을까요?
정말 우리에게 참다운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수백 명 수천 명이 모여서 플레카드를 들고 으샤 으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깊이 무릎을 꿇고 깊이 자기를 돌아보면서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신에게 얼마나 필요하고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 그것을 통해서 그것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다른 모든 거짓된 위로를 멀리하고 그리고 주님을 대면하면서 정말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인생의 벼랑 끝에서 나를 업어 날라주시든지 아니면 벼랑으로 밀어 버려주십시오. 둘 중에 하나를 해주십시오. 여기 세워주지 마시고 나를 손잡고 벼랑에서 이끌어 건져주시든지 내 등을 밀어 이 벼랑 아래 떨어트리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주십시오. 그래야지 되는데 그 벼랑 끝에서 앉아서 소주를 마시며 화투를 칩니다. 웃음이 나옵니까? 그 벼랑 끝에서 뭔가 육체의 즐거움과 향락을 누리는 비결들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거룩한 갈망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갈망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뭔가 조금 결핍된 신앙생활이 아니라 아주 나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왜 제게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없을까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정하기는 힘들겠지만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없는 신앙생활은 아주 나쁜 신앙생활이고 그 신자는 아주 나쁜 신자입니다. 베드 크리스천입니다. 악한 신자입니다. 그가 겉보기에 어떠한 반듯한 삶을 살아가고 있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베드 크리스천입니다. 성화를 통해서 도달하려고 하는 정반대의 신자입니다. 왜 그런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사랑의 결정적인 특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님 없이도 다른 기쁨이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기쁨이 없어도 넉넉히 살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남녀가 둘이 같이 보고 싶을 때 보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는 환경 속에서 있으면 둘이 진짜 사랑하는 것인지 안 사랑하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가끔 결혼을 하려고 하는 형제, 자매들이 저에게 와서 그런 말을 하는데 결혼을 하기는 해야지 되겠는데 이 사람을 사랑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면 만나지 말라. 그럼 간단합니다. 만나지 않아보면 금방 압니다.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두 달 안 만나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보고 싶으면 안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얘기를 할 게 없습니다. 사랑하지요 사랑하는데 요즘 너무 바빠서, 바빠서 못 만납니다. 만날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까? 안 됩니까? 바빠서 못 만난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말이 됩니다. 그러나 너무 바빠서 보고 싶지 않습니다. 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어디서 사기를 치고 있는지, 순 사기지 무슨 놈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 있습니까.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많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왜? 우리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왜 이렇게 아파하면서 피어린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전에는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을 늘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국땅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사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있을 때 기뻐하던 마음이 변해서 슬픔으로 변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같이 있을 때 기뻐하던 마음이 변해서 슬픔으로 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도록 물리적으로 차단이 되었는데도 슬퍼하지 않는 것은 만나봐야 두 사람이 서로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교회에 어느 자매가 있었는데, 우리 교회에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남편이 사우디로 돈벌러 갔습니다. 그 사이에 교인인데도 바람이 났습니다. 자기 교회의 청년하고 간음을 했습니다. 남편이 3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온 그날 저녁서부터 싸웁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람난 여자에게는 남편이 들어오는 게 그렇게 싫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아십니까? 바람난 것입니다. 세상 사랑이든지 무엇이든지 다른 사랑이 여러분들을 차지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 그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 다음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정말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워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변해서 슬픔이 됩니다. 정말 우리에게, 그렇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고 싶은데 우리는 약해서 범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고 싶은데 그래요. 우리가 약해서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많이 기도하고 그렇게 살고 싶은데 정말 육신이 약해서 그 기도의 짐을 다 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을 할 수 없을 때 그때에 우리가 그런 것들이 차단되었을 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목말라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다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감찰하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된 환경 속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껍데기만 와서 예배를 드리는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누가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찾는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우리 그럽시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많은 축복 때문에 그것이 너무나 많아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우리가 사라져간다면 우리 과감하게 기도합시다. 다 가져가시라고. 그래서 우리 다시 한번 깡통 차게 만들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낫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약에 먹고 살만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 다시 굶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우리가 이만한 예배당에서 좋은 시설에서 수많은 행정직원들의 섬김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면 우리 다 팔아서 어디 자선단체에 시사하고 우리 길거리로 나갑시다. 그리고 거기서 정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드리는 예배가 태만함과 그리고 마음의 부요함 속에서 드리는 이 형식적인 예배보다 백번 낫지 않겠습니까? 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주님이 주시는 것 누리면서 사는 것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 미친 짓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사실 어리석은 짓을 참 많이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면 그렇습니다. 요즘도 가끔 보면 드물기는 하지만 실로 뜨개질을 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미친 짓이 아닙니까? 시장에 가면 싸고도 따뜻한 옷이 많은데 실을 어디서 사는지도 나는 모르겠는데 그것을 사다가 손이 부르트도록 뜹니다. 그렇게 해서 시장에 내다팔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를 받겠습니까? 3-40만원을 받겠습니까? 사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니까 어리석어집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용서함을 받고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자리에 와서 지금 시가로 2천 만 원이 넘는 향유를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곳에 부어버립니다. 얼마나 미친 짓입니까? 그런데 사랑하면 그런 일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허비라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이 정말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 전파되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가 정말 주님을 귀하게 여긴다면 주님을 뵈옵는 신앙생활을 할 때는 정말 귀하고 귀한 주님을 잘 섬기게 하시고 또 뵈올 수 없는 상황이 될 경우에는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나만 그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귀하게 여기기까지 통곡과 눈물이 그치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우리에게 그런 갈망이 있는 신앙생활을 너무나 바라십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그럼 시인이 그렇게 갈망했던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셨는가?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히브리 성경에는 살아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이 말이 얼마나 말이 안 됩니까? 하나님이 죽으실 때가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시지만 여러분들이 은혜생활을 안 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느껴지지도 않고 경험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삶의 상황에 고통스러워서 씨름해봐야 여러분들이 은혜 없이 씨름하면 그냥 몸부림칠 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의 든든한 배짱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 하나님은 나를 향해 선하신 분이시다. 그 배짱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잔재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신앙의 굵직한 선들을 잊어버리고 잔재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경우에 따라서는 죄를 지으면서라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해보십시오. 우리가 은혜 아래 살 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내 마음에 느껴집니다.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느껴집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나의 모든 삶의 상황 속에 찾아오셔서 간섭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런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왜 그런 하나님이 안 느껴지는 것일까? 20여 년 전에 죽었지만 아직까지도 그의 노래가 인기곡 순위에 오르내리고 있는 미국의 가수가 있습니다. 엘비스 플레스입니다. 택시 운전수였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운전을 하는데 뒤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가 탔습니다. 이 택시 기사의 재주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스카웃을 해서 가수로 키웠더니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기자들이 그 집에 찾아가서 인터뷰를 하는데 어디서 달걀껍질 타는 냄새가 났습니다. 무슨 냄새입니까?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가수가 이 사이에 담배를 끼고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 담배가 타들어가서 나는 냄새였습니다. 마약에 중독이 되어서 손의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안에 내제하는 죄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앗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죄가 자꾸 속이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꼭 그렇게 애절하게 하나님을 찾아야지만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는 죄는 죄대로 지으면서도 하나님이 너를 너무나 사랑하셔. 그리고 죄가 꼬이는 것입니다.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들어오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끄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성결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 칼빈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러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의 뜻을 모두 버리고 주님 앞에 깊이 엎드려지는 것 이것이 모든 기도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승승장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가 성공하려고 하는 그런 사행수는 진정한 기도의 영성의 기초가 아닙니다. 자기를 다 버리고 전적으로 그분 앞에 엎드려지는 것, 나는 주의 것이오니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게 기도의 출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죄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전에 그 간절한 갈망의 불을 다 껐습니다. 지금도 끄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에게 정말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안 됩니다. 정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신앙생활은 향기를 잃은 꽃입니다. 효력을 잃어버린 약초입니다. 너무 나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살 수 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수련회를 다 가면 누가 행복하겠습니까? 수양관이 좋아하겠습니까, 내가 좋아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살아야 되니까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입니다. 선심 쓰듯이 수련회에 참석하지 마십시오. 10명이 가도 나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정말 목마른 사람,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단 한번만이라도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사람들, 그리고 그 은혜를 그리워하고 그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다면 그들의 회개하는 통곡소리에 묻혀서 눈을 감아도 얼마나 행복할까? 일주일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금식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이번 수련회에서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모하는 사람만 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벧엘로 올라가는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러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준비된 이들에게 은혜를 주심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
사도행전 10장은 선교사적으로 아주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장입니다. 왜냐하면 이 10장에서 유대인들에게만, 예루살렘에만 임하였던 성령의 은혜가 똑같이 이방사람에게도 임하여 드디어 이 성령의 역사가 유대인들에게만 전속된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제일먼저 적진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이 있습니다. 그 화살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공격을 합니다. 그 화살을 가리켜서 ‘효시’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 10장에는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시는 보편적인 은혜의 역사의 효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이 위대한 성령 부으심의 효시에도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두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일을 이루십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베드로 사도와 그리고 고넬료라고 하는 이달리야의 군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방인 선교는 원래 누구 담당입니까? 사도 바울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선교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베드로를 택하셔서 이방 선교의 효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 우리는 여기에서 전혀 무리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주 지혜로운 역사를 봅니다. 그것은 이제 이방 선교를 특별한 소명을 주어서 주도하고 역사할 사람은 사울이었지만 사울을 사용하셔서 그 문을 열지 않고 베드로를 사용하셔서 문을 여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 중의 머리였고 그리고 가장 유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후에서야 회심하게 되는데 그 나중에 회심하고 아직 이 10장 정도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그 이름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그 사울이 만약에 자기가 회심했다고 하고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셨으니까 우리 모두 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이방 선교를 위해서 힘을 합치자. 그랬으면 아마 웬만해서 움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유대교적인 사람, 가장 구약적인 사람, 구약을 가장 잘 이해하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 그 베드로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밖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성령을 부어주심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더군다나 베드로는 오순절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건 사이에 똑같이 일치하게 부어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 베드로에게 있어서 중대한 편견이 깨트려지게 됩니다. 무슨 편견이 깨트려지게 되는가 하면 첫째는 인종적인 편견이 깨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유대인들만 중요하고 나머지 모든 이방인들은 역사라는 무대에 있어서 엑스트라에 불과하다고 하는 구약적인 사상에서 온 인종적인 편견이 깨트려진 것입니다. 사실 구약이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 구약을 오해한 인종적 편견이 깨트려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학적 편견이 깨트려진 것입니다. 무슨 편견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이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서 예수 메시아가 유대인들만을 위한 구원자라는 신학적인 편견이 깨트려진 것입니다. 그렇게 깨트려진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아닌 베드로가 직접 사도들에게 가서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의 경험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셨다. 그러니까 모두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 선교의 새장을 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왜 하필이면 베드로였을까? 하는 것은 우리들이 대충 풀렸는데 그럼 베드로와 이방인인 고넬료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고 또 그 어떤 공통점 때문에 하나님이 이 사람들을 사용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선 이 고넬료에 대해서 성경이 평가하기는 경건한 사람으로 평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 받아질만한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구제한 것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넬료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인 동시에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어떻게 하다가 이방인 선교의 새장이 열리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환상이 주어집니다.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펼쳐지는데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것들이 거기에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벌레나 뭐 이런 것들, 그것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 환상을 보고 나서 그 환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는데 고넬료가 사람을 보내서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연결이 된 것입니다. 두 사람 다 구속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기도의 사람이었고 또 바로 그때에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장시간의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베드로와 간절히 기도하는 고넬료 이 두 사람을 사용하셔서 기도 중에 서로 통하게 하시고 그래서 그들을 사용하셔서 이방인 선교의 장을 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첫 장을 연 도구가 되었던 사도 베드로도 영광의 막중함은 이루 말할 수 없거니와 그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의 영광을 펼치는 디딤돌이 되었던 고넬료 역시 구속사적으로 커다란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당신의 큰 역사를 이루실 때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무디 같이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도 사용하시고 조나단 에드워즈나 오웬같이 몇 백 년 혹은 몇 십 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가히 천재와 같은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같이 설교 한편 하고 피를 한 사발씩 토하는 그런 약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요한 웨슬레와 같이 건강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바울과 같이 논리적인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베드로와 같이 열정 있는 사람을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은 다양합니다. 남자만 거론해서 미안한데 여자도 하나님이 많이 사용하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남자든 여자든, 지성인이든 지성이 좀 모자라든, 건강하든 질그릇같이 연약하든 그들의 모든 인격을 관통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그가 기도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엠 바운즈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사람이 기도하려고 엎드렸을 때 그 사람의 됨됨이를 넘어서지도 못하고 거기에 못 미치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 딱 바로 그 사람입니다. 기도하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때 바로 그 사람, 하나님이 매우 중요하고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기도 속에 나타나면 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그리고 높은 지위가 없고 명성이 없어도,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수많은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내도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때 그때 하나님이 그 사람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찮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VIP입니다. 베리 인포턴트 펄슨 매우 중요한 사람,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은 VLP 매우 가벼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 VIP와 VLP는 밑에다 작대기만 좀 길게 그으면 됩니다. 그렇게 기도를 깊이 하고 하나님 앞에 중요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사람과 가볍게 드려 받아지는 사람 사이에 얼핏 보면 아주 작은 차이밖에 없이 보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위대한 역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밟고 하나님이 지나가신 역사입니다. 더 실감나게 한 번 더 표현하겠습니다. 적을 수 있으면 적으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기도하려고 엎드린 사람들의 등을 밟고 지나가신 하나님의 발자취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입니다. 히스토리입니다.
그러면 우리 개인의 삶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이 될까? 똑같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계속 무릎을 꿇은 정말 깊고 진실한 사람으로 일평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 열심이 사로잡혀서 기도하던 때가 있는가 하면 꾀부리고 그러던 때가 있었습니다. 은혜 많이 받고 펄펄 날다가 며칠 안 되어서 깡통을 찼던 때도 있고 많이 그렇게 은혜를 받지 못했지만 그 은혜를 간직하고 늘 기도하면서 사는 동안에 그 은혜가 우리 안에서 점점 자라서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랐던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그랬고 또 경우에 따라서 어떤가 하면 정신을 못 차리면서 살아왔지만 큰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서 거기에서 딱 부딪히면서 큰 어려움을 만나면서 하나님 앞에 열렬히 간구해서 그래서 영적인 돌이킴의 기회를 기도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다 자기를 쏟아 부어서 기도를 하던 그때마다 우리 인생의 전환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전환이라고 하는 것은 꼭 출세를 했다든지, 승진을 했다든지, 돈을 벌었다든지, 아파트를 샀는데 프리미엄이 많이 붙었다든지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지 간에 어떻든지 간에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전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밟고 지나오신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개인의 인생의 역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 조용히 생각해서 지금은 비록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언젠가 인생의 기로에 서서 바짝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자기를 다 쏟아 부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기도를 회복하고 싶어 하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 만약에 기도를 안 하고 올바르게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무릎을 꿇은 간절한 기도를 전환점으로 삼으셔서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배를 몰고 바다를 항해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저는 아무튼 모터보트를 한번 몰아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탈 기회가 별로 없고 그리고 대게 비쌉니다. 그런데 한번 캐나다에 갔을 때 거기에 있는 후배 목사님이 집회 때문이 아니고 그때는 무슨 제가 특별히 신학적으로 살펴볼 일이 있어서 갔던 때입니다. 한 10년 전인데, 그런데 자기 집 가에 호수가 있는데 태워주겠다고 해서 탔는데 그 사람이 보험까지 다 들어주고 그리고 한참 하더니 나보고 핸들을 잡고 몰아보라고 해서 20달러를 내고 4시간 반을 몰았습니다. 나중에 추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몰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 10분 몰고 나니까 별 것이 아니구나.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게 그렇게 빨리 달려가는 보트가 이렇게 돌리면 이렇게 움직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수많은 섬이 몬타리오 호수에 떠있습니다. 작은 것은 우리 교회의 터 반만 한 것부터 시작해서 큰 것은 인덕원 사거리만한 섬들이 수만 개가 거기 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가 이렇게 피해서 지나갑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보트를 몰고 가다가 암초가 큰 것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핸들을 감아서 키를 이렇게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계속 배가 가는데 핸들은 안 돌리고 정지, 정지, 스톱! 그러거나 아니면 이랴! 그러면 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뭔가 큰 난관을 만나거나 전환점이 오려고 할 그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해야지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내가 잘못하다가 큰일 나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부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로 돌이키려고 기도하는 일이 없이 그렇게 생각만 하는 것은 바위섬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보트 핸들을 붙들고 스톱! 정지! 멈춰! 그러면 안 되지,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실제로 핸들을 감아서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제일먼저 하나님 앞에 해야 될 일이 기도해야 할 일인데 그때 우리의 인생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실 기도하는 일은 굉장히 힘듭니다. 왜 힘들까요? 땅 파는 일보다도 더 힘듭니다. 왜 기도한다고 해서 손에 물집이 잡히고 뭐 그러지 않습니다. 곡괭이를 들고 겨울에 땅을 한번 한 두 시간 파보십시오. 그러면 형편없이 됩니다. 그런데도 기도가 더 힘듭니다. 왜? 땅은 그냥 힘을 들여서 파면되지만 기도는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려야 합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기도의 기초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이라고 생각을 하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기도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펄펄하게 살아왔는데 그게 되겠습니까? 죄가 펄펄 살아있는데 그게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그냥 바위섬을 향해 돌진하는데 핸들을 돌리지 못하고 그냥 달려가서 부딪혀버리면 그런 사람들도 많습니다. 돌이키는 사람들도 가서 그냥 부딪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보면 제트스키라고 해서 오토바이 같은 것을 타고 바다에서 막 달립니다. 그것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여러 사람이 벌써 죽었습니다. 저 청평이나 양평 저 위쪽으로 가면 법으로 못하게 합니다. 엄청 빠르게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몰고 가서 바위에 부딪힙니다. 그렇게 빨리 갈 줄 모르고 달리는데 그냥 날라 가서 바위에 부딪히면 그 속에 휘발유가 가득 들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못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막 달려가다가 물속에 잠수했다가 나오는 사람의 머리를 밟고 지나가서 사람들이 다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생각에는 천천히 걸어가는 것 같지만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뭘 보면 아는가 하면 터덜터덜 걸어갈 때는 누가 그 사람이 그렇게 힘차게 걸어간다고 생각합니까. 가다가 전봇대에 한번 부딪히면 안경이 깨지고 터져서 피가 납니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 누가 힘들여서 내려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발을 한번 헛딛어 보십시오. 그냥 지하철 전체가 울릴 정도로 구르면서 나가떨어집니다. 그렇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완고하게 걸어갑니다. 돌이키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그래서 누가 그렇습니다. 한사람이 살아가고자 하는 인생의 갈 길을 돌이키는 것은 공존하는 지구의 궤도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힘들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 그것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냥 부딪힐 줄 알면서도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기도가 해결해줍니다. 그래서 아주 복 있는 사람들은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복 있는 사람들은 놀다가도 기도해야 할 순간에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 재수 없는 사람들은 누군가 하면 기도하는 것처럼 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안 해버리는 사람입니다. 아주 재수 없는 사람은 처음서부터 기도를 안 하는 사람입니다. 네 종류로 나뉩니다. 그러니까 가다가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거기서 생애 어떤 전환점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이방인에게 성령 부어주시는 역사가 아직 없었을 때 그때 유대인들의 편견을 깨고 성령 부어주시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회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결심하고 그들이 언약의 백성들이 되는 이런 존귀한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이 엄청난 전환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기도의 사람 두 사람을 택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로 깊이 기도하게 하시고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전환점들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이 고넬료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이런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목하고자 하는 간절히 이런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사실은 기도하는 시간들 중에 많은 시간들이 비효율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몇 시간이나 기도했는가 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실증을 간직한 채 드리는 그 기도는 능력을 거의 잃어버린 기도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실질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돌이키라고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의 신자가 마음을 다 바쳐서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의 상태를 간직하면서 사는 그것, 그것이 성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숙제중의 하나입니다. 일단 영혼의 실증이 들어오게 되면 열렬함이 사라져갑니다. 그래서 작년 수련회 요지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영혼의 실증은 기도의 열렬함으로 이겨야 하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려고 하는 육체의 게으름은 우리들이 부지런함으로 이겨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영혼의 실증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모하는 마음이 이제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기도에 있어서,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물을 가득 집어넣고 팽팽하게 집어넣고 탁! 하고 찌르면 펑! 하고 터지면서 물이 확 쏟아지지만 반쯤은 들고 반쯤은 비어 있는 주머니에다가 아무리 찔러봐야 물이 들은데 찔러야 질질 나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절함이 꽉 차있으면 단번에 기도가 확 쏟아져 나옵니다. 이 고넬료와 고넬료 집안의 사람들은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은 베드로를 청해왔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베드로가 여기에 왔고 그리고 이제 그 집에 그 마가의 요한의 다락방에 부어졌던 그 비범한 성령 강림의 역사가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바로 그 자리에서 재현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그런 비범한 성령의 역사가 부어지는 준비치고는 너무 초라했습니다. 그것은 현수막을 내걸고 신문잡지에 광고를 내보낸 수만 명이 모인 대형 집회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집안 식구들이 모여서 그래서 예고도 없이 이루어지는 가정 사경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아주 매우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위대한 역사, 이방인들에게 물 붓듯 성령을 부어주시는 위대한 역사의 뚜껑을 뗄 때,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모든 이방의 사람들이 성령 부어주심을 경험할 때마다 항상 그 성령의 그 놀라운 은혜가 말씀을 파고 들어온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이 가슴속에 아로새겨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를 찾아보면 기독교 말고 이방 종교에도 영의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생기기 이미 오래 전에 신학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동양에 전파되기 오래 전에도 중국의 고서를 찾아보면 성령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기독교 이후의 종교에서도 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 기독교가 영적인 종교이면서도 독특한 영적 종교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선을 그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영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일어나는 영의 역사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여주었던 자세가 무엇인가 하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제일먼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주께서 그러니까 이 고넬료 집안에 성령을 물 붓듯 부으시는 이 놀라운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설교할 때 나타나는데 그들이 모인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게 하사 성령을 부어주시는 모든 주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하면 주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께 이 주권이 있으니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하면 은혜를 많이 받을 수 있지만 어떻게 못하면 은혜를 못 받는다고 하는 것도 일반적인 원칙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원칙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기계적으로 통용된 것은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이 청년들이 모인 집회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설교가 조금 길어지니까 애들이 막 안절부절 해서 나중에 왜 그러느냐 했더니 연극 표를 사놓고 끝나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예정보다 시간이 훨씬 넘어버린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일어납니다. 분명히 극장구경을 가려고 했는데 회심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극장이 재미있습니까, 하나님을 뵙는 게 더 재미있습니까? 찢어버리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률적으로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주권이 누구에게?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을 잘 예비하지만 그러나 물 붓듯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주권은 하나님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어떤 자세가 요구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치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란 것 같이 주님만을 바라본 것입니다. 아, 이제 이 정도 했으니까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여기 지금 나왔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지, 그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격이 없고 모든 주권은 주님이 가지고 계신다. 그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고넬료 집안에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시는 성령 부으심에 있어서 이방인의 효시가 되게 하신 이 사건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일어났는데 그 전에 먼저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바”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 베드로에게 당신의 계시를 보이시고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이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직접 보여주시지 왜 베드로에게 먼저 보여주셔서 그래서 이 고넬료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청한, 그 중에 일부 예배에 와서 먼저 설교를 듣고 두 번째 참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다 방금 개봉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동시에 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래야지 교역자라고 하는 계층이 존재하고 유지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한 공동체로 묶으시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이 땅에서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모임이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자, 이런 생각을 해봅시다. 어떤 잡지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하도 교인들이 여기 저기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니까 그것을 풍자해서 그림을 그렸는데 먹자골목처럼 교회가 쭉 있는데 그 교회 앞에서 배가 잔뜩 튀어나온 교인들이 꺼억 하면서 이빨을 쑤시면서 걸어 나오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먹자골목처럼 교회가 쭉 있는데 간판을 크게 다 붙였는데 찬양전문교회, 훈련 전문교회, 선교전문교회, 설교 전문교회, 봉사전문교회, 구제 전문교회, 그 남의 교회를 다 이리저리 돌면서 뷔페처럼 차려먹고 꺼억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사실 문제가 있을 게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립을 잘 안 합니다.
자, 백 명의 교인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저마다 교인이 돌아다니면서 각기 개별적으로 어디서든지 간에 은혜를 받고 주일이면 모입니다. 그리고 주일 저녁이면 각자 흩어집니다.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지 되나? 함께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 항상 개별적으로 가가호호 방문하셔서 당신을 만나게 하시지 않고 그들 모두 모으고 그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임재의 증거를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서 하나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교회의 교회됨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같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서 이 집에 가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일먼저 하나님이 먼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전달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을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그 음성을 전달해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시는 사경회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뭐가 나오는가 하면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라고 나옵니다. 우선 여기서 세 번째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어디에 많이 일어나는가 하면 믿음이 있는 곳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의심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곳, 그런데 그런 믿음을 사람들 속에 심어주는 도구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래서 여기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아코오’라는 단어인데 그냥 이렇게 듣는다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말의 용법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애 요즘 말을 잘 안 들어, 귓구멍에 귀지가 꼈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귀청이 커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애 요즘 말을 잘 안 들어, 그렇게 이야기할 때 이비인후과 좀 가보라고 그러지, 그렇게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듣는다고 할 때 무엇인가 하면 물리적으로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다 알아들으면서 순종을 안 한다는 그 뜻입니다. 말을 안 들어. 그렇게 합니다. 똑같이 성경에도 이 듣는다. 에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동양이라서 통하는 게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듣는다고 하는 것은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 이렇게 보면서 가장 누가 뭘 이야기할 때 귀를 잘 기울이는 경우가 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운전면허시험 보러가서 그 직전에 강사가 가르쳐줄 때 진짜 그렇게만 말씀을 들으면 면허 따기 전에 다 구원받을 것 같습니다. 어쩜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청심환도 먹었겠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까딱까딱 그러면서 열심히 듣습니다. 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군대에 가서 처음에 훈련소에 갔을 때 사방이 캄캄하니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듣습니다. 모든지 가르쳐주면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이 내면의 복종을 가지고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말씀의 역사는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언젠가 한번 전도사 때 집회를 갔는데 그때 저는 고등부를 담당하고 중 등부는 다른 교역자가 담당했는데 그 교회는 삼년에 한번씩 중고등부를 연합해서 수련회를 하는 게 규칙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바람직한 것 같았습니다. 연합을 하는데 사이좋게 한다고 중학생 고등학생을 다 섞어났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진짜로 제 생애 몇 번 기록에 안 남을 정도로 그렇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그런데 어쩜 중 등부 고등부 애들이 바둑판처럼 섞어 앉았는데 어쩜 아다리 치듯이 중 등부 애들만 비껴가면서 고등부 에들 위에만 성령이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딱 내리니까 그 애들은 다 엎어져서 펑펑 울고 애들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 형들을 쳐다봤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는 일어났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면서 분위기를 보니까 나갈 수 없는 상황이고 그날 밤인데 그 전도사님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우리 후배인데 강사 방에 찾아와서 형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아주 고통스러워하는 눈빛입니다. 내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정말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앞에 앉았고 뒤에 앉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집중도가, 일부러 이렇게 사이사이에 형 동생, 형 동생 이렇게 그런데 어쩜 그렇게 바둑판 쓰러지듯이 확 하고 성령의 역사가 임하니까, 그러니까 8시쯤 설교를 시작해서 9시쯤 설교를 마치고 1시 반까지 기도회가 이어졌습니다. 아무 인도자도 없이,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이 엎어졌는데 그 애들만 1시 반까지 괴로운 것입니다. 뭘 합니까? 거기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사람이 참석해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장 강력한 후보자가 누구인가 하면 내적인 복종의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번에 우리 열린 신문이 나왔는데 나는 그것을 읽고 진짜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남편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한다면 진짜 모든 남편들이 구원받고 변화될 것입니다. 그 자매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으면 사경회에 와서 당신이 하나님을 못 만나면 그러면 내가 모든지 하겠다. 어쩜 그렇게 담대한 모험을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니까, 그런 것이 가능합니다. 정말 생각 없이 교회에 나오는 것, 이게 백날을 다 와야 소용이 없습니다. 단 몇 주를 와도 간절히 사모하며,
제가 요즘은 그럴 기회가 별로 없는데 교회가 작을 때는 빤히 다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80-100명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누가 조는지 자는지 다 압니다. 그런데 몇 번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불러서 그렇게 예배를 드리지 마라. 그런데 거듭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신자면 서로 대화가 됩니다. 그런데 사실 불신자입니다. 거듭남이 없습니다. 진짜 못 알아듣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렵다고 하는데 그런 말만 나오면 저는 또 기가 죽습니다. 어렵다. 두 번째 기가 죽는 것은 너무 길다. 그런데 몇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네 번만 나오고 나오지 마라. 네 번만 나오고 억지로 나오지 말고 네 번만 나오고 그래도 못 알아듣겠으면 나오지 마라. 그리고 둘 중의 하나를 해라. 다른 교회를 가든지 그것도 싫으면 그만두든지, 왜 그렇게 나와 봐야 변화될 리가 없습니다. 나오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그리고 깊은 명상에 잠기는데 뭔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다 집어치워도 좋으니까 네 번만 나오고 그 대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오죽했으면 내가 그랬습니다. 오후 예배를 드리지 말고 집에 가라. 피곤한데 가서 자라, 회사에 다녀서 피곤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오전예배 드리고 가라. 사실 목사가 그러면 안 되는데 오전 예배를 드리고 가라. 집에 가서 엄마가 뭐라 그러면 내가 가라고 그랬다고 그러고 가라.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푹 자고 월요일 날 가라. 그 대신 두 번 드릴 것을 한번으로 깎아주었으니까 앞자리에 앉아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라. 그리고 그때 그 말씀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나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계속하면서 들어라. 그런데 그렇게 제가 실험한사람 한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변화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그러지 않았지만 모두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들으려고, 그러니까 내적으로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나와서 듣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그럼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니 그러면 그렇게 꼭 반듯이 준비된 사람들만 은혜를 주십니까? 아닙니다. 전혀 안 그런 적도 있습니다. 제가 언제 한번 얘기했는데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께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는 이층교회를 하는 것도 보통 실력이 있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습기 나오는 지하실 한곳을 빌려서 모여서 매일 기도회를 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온 동리 사람들이 진정서를 집어넣으니까 경찰서에서 형사 둘을 보냈습니다. 갔는데 막 설교중입니다. 그것도 목사도 아니고 어떤 아줌마가. 그러니까 그래도 체면이 있지 사람들이 있는데 함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뒤에 쭈그리고 앉아서 듣다가 이 사람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고 회심하고 갔는데 가서 무슨 축전봉명을 쓰겠습니까? 그래서 별 문제가 없다고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작년인가 제 작년인가 우리 교회에서 복사기를 고치러왔던 아저씨 한분이 예배 시간에 복사기를 고치고 나니까 예배 시간이 되어서 간사가 예배를 드리고 가시지요. 그리고 팔짱을 잡아끌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에게 성령이 역사했는지 제가 기억이 틀릴지 모르지만 십 몇 년 동안 교회를 안 다녔다고 합니다. 그날 와서 설교를 듣는데 그날 설교가 거듭나셨습니까? 입니다. 그러니까 복사기는 고쳤는데 자기는 못 고치고 이제 산 것입니다. 그날 펑펑 눈물을 흘리고 회심하고 그리고 그 후에 교회에 등록해서 잘 다닌다고 거기까지 제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스스로 자기를 잘 들어야지 되겠다고 미리 준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이런 예외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그를 너무 긍휼히 여기셔서 말씀이 전해지기 직전에 심령의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짧은 동안에 이루어진 것인가 오랜 동안에 이루어진 것인가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 앞에, 그래서 사경회를 위해서 10시에 나오라니까 나오고 7시에 나오라고 그러니까 나오고, 이렇게 나와도 내적으로 정말 여기에서 주님을 만나고 뭐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든지 나는 순종하리라. 그것이 마음속에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사람이 보기에는 오래도록 그 사경회를 준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준비가 안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보다는 오히려 진짜 거의 떠밀리다시피 왔어도 말씀이 전해지는 그 순간에 마음을 한없이 낮추고 그리고 이 말씀대로 살고 싶고 그리고 순종하고 싶다고 하는 사모함이 막 들게 될 때 그 사람이 훨씬 주님을 만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들리는지 한번 가보자, 그러면 곤란합니다. 한번 생각을 하십시오. 내가 정말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다. 그리고 그 말씀에 정말 순종하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들을 때 그때에 하나님이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모든 것을 목사님, 요즘 제게는 위로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약국에 가서 아저씨, 약 좀 주세요. 어디가 아프신데요? 증세를 얘기해야지 되는데 골이 아픕니다. 허리가 아픕니다. 무좀이 났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지 약을 찾아줄 텐데 그냥 제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됩니다. 저기 빨간약 하나하고 여기 파란 알약하고요. 저기 위에 하얀 물약, 그것은 쥐약이었습니다. 돌파리 의사만 있는 게 아니라 돌팔이 환자들도 많습니다. 환자의 의무는 무엇인가 하면 의사가 고쳐줄 때 잘 의사를 의지하고 그를 신뢰해야 합니다. 물론 신뢰를 안 주는 의사들도 많습니다. 우리 교인 중에 심방을 어디 갔더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왼쪽 다리가 아프다고 그랬는데 오른쪽 다리는 수술했습니다.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노인네니까 말을 잘 못하니까 분명 왼쪽 다리를 고치러왔는데 오른쪽 다리를 만지면서 여기 아프세요? 그러니까 응, 그래서 수술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해놓고 보니까 거기도 잠시 있으면 했어야 했다고 합니다. 정말 황당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의료분쟁도 많이 일어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것, 자기가 자신을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자신도 자신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자기를 진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선명하게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 내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이구나.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이것이구나.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것이 내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서 주님이 보내신 칼이요, 내 상처에 부으시고자 하는 포도주와 기름이라고 받아들이겠노라 하는 그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모여 있는 모든 가족들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유대인들도 아니었지만 정말 유대인들 중에서도 보기 어려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대체로 주님을 의지하면서 산 50년의 인생보다는 5일 동안을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산 사람을 통해서 더 영광을 받으십니다. 길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대체로 주님을 의지하면서 산 일만 명의 사람이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는 두세 명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 다섯 번째 요소가 무엇인가 하면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다섯 번째는 다 희랍어로 모두입니다. 모두 모인 것입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입니다. 자 생각해보십시오. 집안에 자식들이 한 12명이 됩니다. 많이 낳는 집은 그렇게 낳습니다. 큰아이보고 애들에게 다 전해라. 내가 할말이 있으니까 주일날 저녁에 모이라고 그래라. 되는 집안은 거의 다 모입니다. 왜 아버지가 하실 말씀이 있다는데, 아버지가 자식을 보자고 그러는데 모입니다. 그런데 안 되는 집안은 그 시간에 극장구경을 가서 못 옵니다. 애가 과외공부를 가서 못 옵니다. 시장에 가야지 됩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을 안 듣습니다. 그리고 두세 명이 모입니다. 모인 사람들도 애이, 우리만 와서 형들은 왜 안 오는 거야, 우리만 오라고 그러고 말이지, 나가면서 다음에는 오나봐라. 그러니 그 집안에 구심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시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면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같은 때에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동일한 것을 가지고 고민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을 함께 나누어가지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한 가족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하도 사경회를 오라고 그래서 요즘 거의 안 나갑니다만 그래서 그럼 가겠다고 그랬습니다. 목사님이 직접 오셔서 부탁을 해서, 그런데 뜻밖에 제외를 했습니다. 그것은 사경회를 주일오전 11시부터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하고 그러니까 자기가 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좀 곤란하다고, 아니 왜 그러냐고 나는 그런 얘기를 생전 처음 들어봤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냐고 그랬더니 교인이 6-700명이 모여도 사경회를 하면 250명을 안 넘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단 다 들어야지만 뭐가 될 텐데 무슨 방법을 써도 안 모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죽 답답하셨으면 그 6-700명 모이는 주일 강단을 비어줄 테니까 그때는 우리 교회는 100명도 채 안 모이던 때였는데 날보고 주일강단에 서서 사경회 첫날 저녁에 하고 싶은 그 말씀을 그들에게 들려주라고 그러면 그들이 그 다음날 나올 줄 아나. 안 나온다고 하더라도 한번이라도 들어야지 되지 않겠는가. 사실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모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의도도 없고 모두 다 같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나중에 테이프를 들으면 되지. 그래서 어떤 때는 테입을 다 모아서 교회 마당에서 불질러버리고 싶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너무 의지합니다. 테입을 나오지, 또 주일날 돌아오면 출판부에서 만들어서 요약본이 나옵니다. 그러면 힘들게 돈 내고 더위에 거기까지 가서 줄서서 밥타먹고 줄서서 물 떠먹고 그리고 거기 쭈그리고 앉아서 고달프게 하나, 이것입니다. 그래서 수련회를 하는 동안에는 아주 쌈박하게 휴가를 갖다오고 그리고 정리 본으로 누워서 귀에다가 꽂고 그리고 듣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물론 그렇게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지, 그런데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함께 같은 시간에 하나님 앞에 있는 그 자체가 한 교회의 성도의 의무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것을 손에 발이 닿도록 그렇게 사정해야 합니까? 누구를 위한 일인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정말 누구를 위한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
제가 이번에 정말 하나님 앞에 감사한 일을 만났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암 수술을 하셨는데 그런데 정말 건강하나는 타고 나셨습니다. 정말로, 저는 여태까지 태어나서 저희 아버님이 몸져누워서 끙끙 앓는 장면을 딱 한번밖에 못 봤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렇게 건강하시고 요즘도 아침이면 계양산 그 꼭대기를 단숨에 올라가십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가서 건강진단 좀 받으라고 등을 미셨습니다. 상이용사시니까 다 무료입니다. 약 타러 한달에 한번씩 가시는데 신청만 해놓으면 받을 텐데 왜 안 하냐고, 나중에 하도 아버님이 말을 안 들으시니까 부부싸움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볶이다 못해서 할 수 없이 가서 신청을 하고 진단을 했는데 암이 정말 조기에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하시고 건강하십니다.
그때 병원에서 진찰결과를 보러 가니까 아버님은 안 알려주고 가서 가족들을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40%는 아 이게 큰일이구나. 했는데 그 의사가 자랑하고 싶어서 부른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은 발견을 못한다고, 그리고 그 의사는 그렇게 아버님을 진단하고 한두 주 있다가 다른 곳으로 출장인가 휴가로 갔습니다. 잠깐 진단한 사이에 탁 걸린 것입니다. 권위자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암이 권위자가 있습니다. 진짜 다른 곳에 갔으면 발견을 못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정확하게 찾아낸 것입니다. 만약에 2년 정도만 늦게 발견했으면 지금 가족들이 그렇게 가슴 아프게 눈물을 흘리고 어쩌면 아버님을 여위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적기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머님 손을 붙들고 몇 번을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진짜 잘하셨다고, 그렇게 등 떠밀어서 보냈더니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진단받다가 딱 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치료도 안 받으십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가 안 망가지는 사람입니까? 아니 무슨 탱크주의라고 그러고 가전제품을 만들어도 쓰다가 보면 망가지는데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고장 날 요인을 가진 채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또 그런 환경 속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번 찍어봅시다. 찍어보자니까. 찍어봐서 그래서 수술할 것이 있으면 수술하고 약 먹고 고칠 것이 있으면 고치고 아침에 구약, 저녁 때 신약 이렇게 해서 먹고 고치고 그렇게 해서 뭐 어떻게 하래요. 그리고 다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하지 않으니,
저는 어떤 때는 서글픕니다. 교역자들이 노심초사하면서 전전긍긍하며 매일 체크를 합니다. 누가 가고 누가 안 가는가. 무슨 돈 때문에 그렇습니까? 어차피 돈 그런 것 관심 없습니다. 가면 항상 모자랍니다. 여러분이 회비를 내도, 그리고 수양관에서는 우리가 너무 많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사모하면서 기다립니까? 죄인들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거기 모두 모이는 것, 그래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인생을 고치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라고 그러는데 물론 다른 교회에서 보면 깜짝 놀랍니다. 교인들이 거의 다 가니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일날 모이는 인원보다 더 가야 합니다. 왜 외부에서도 오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는 그렇게 묻고 싶습니다. 뭐가 그렇게 바쁩니까? 바쁘지요. 바쁜데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사람은 급한 것부터 먼저 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중요한 것부터 먼저 합니다. 물론 급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합니다. 그런데 물론 다른 일이 급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덜 중요합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부터 먼저 해야 합니다. 그것을 막 애원하듯이, 진짜 여러분 교구에 교역자들이 여러분 수련회 다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흘린 눈물만 모아도 아마 코카콜라병으로 하나는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돈이 없다고 그러면 돈을 마련해보고 또 무슨 애를 봐줄 사람이 없다면 심지어 애를 봐줄 사람까지 구해주고 데리고 오면 봐주게끔 다 해주고,
어제도 결제가 올라왔는데 바이블 캠프를 하는데 750만원이 올라왔습니다. 여러분보고 이만큼 잘라내서 가서 애를 보시라고 그러면 여러분들 수련회를 가시겠습니까? 절대 안 가지, 그냥 오라고 그래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잘 훈련된 사람들, 선교단체의 강사들을 모아서 하는 것입니다. 28명이 옵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냅니까?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지, 그것을 왜 그렇게 합니까? 첫째는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고 두 번째는 그 아이들을 변화받기 위해서 사실 아이들은 또 안 해도 되지, 여름성경학교를 했으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변화 받으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럼 와서 거기 다 참석하는 게 의무입니다. 모두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이것을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개인의 삶이 확장된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고난을 당하면 교회도 같이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 연단 시리즈를 들으면서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성숙한다고 그랬습니다. 이게 교회가 그렇게 고난을 받으면서 연단을 받으면서 교회 자체가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이 고통과 고난과 연단은 또한 교회를 위한 고난이고 동시에 교회의 고난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 함께 그 자리에 서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테입을 너무 믿지 말고,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그분도 유명한 설교자였는데 교인들이 하도 테입을 들으니까 다 갖고 오라고 해서 2만 5천개를 모아놓고 교회마당에서 불질러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것 때문에 당신들이 바로 그 시간에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게을리 한다면 이것을 다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그러면서 내 설교 녹음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한번 허공중에 울려 퍼지고 오는 사람들만 듣게 하라. 물론 나중에 다시 녹음이 되었지만 그분도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모두 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거기에 서있는 것 그 자체가 성도의 의무입니다. 좋으면 하고 싫으면 말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서있는 곳이 어디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 앞에”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빽빽한 구름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어땠습니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장엄한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 시간을 엔조이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싫은 것은 아닌데 좋으면서도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에게 간절히 간증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마시고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하나님께 구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저 빽빽한 구름 사이로 올라가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가지고 오십시오. 모세에게 애원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 면전에 있는 것이 싫지는 않았는데 그런데 두려웠습니다. 그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떨림이 그들의 마음 안에 공전했던 것입니다.
이미 벌써 베드로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도 않았는데 이제 막 전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 같은 지금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셔도 더 고칠 태도나 자세가 없이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의식한 사경회준비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어떻게 이 사람들을 안 만나주시겠습니까?
정말 거의 없습니다.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왜 수련회를 왔는지 이해가 안 가는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GBS시간에 가서 잡니다. 아마 직접 하나님께 한수 배우는 중인가 봅니다. 그리고 집회에 천천히 슬리퍼를 끌고 내려옵니다. 새벽기도는 설교가 끝나는 것과 함께 사라집니다. 모두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 의식이 현저히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뛰어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선 것을 의식할 수 있는 삶입니다. 이들이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서있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이 사람들 앞에 지금 하나님이 계십니까? 이들 앞에는 베드로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유대인인 당신 앞에 섰습니다. 대 사도 앞에 서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앙망했고 이미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간절한 사모함, 내게 은혜를 주십시오. 내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면 계속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여기서 내 인생의 전화점이 되게 하시고 여기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정말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있는 그 사람, 그 사람들을 주님이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시는 그런 새로운 은혜를 여러분들이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하나님을 찾으라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호세아5:15)
몇 주 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에 대해서 하나님을 갈망함에 대해서 몇 주 더 수요일 마다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이 호세아 5장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세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호세아 때에는 이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아주 번영한 국가가 되어서 잘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잘 살게 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그렇게 번영했지만 물질적으로는 번영했지만 신앙적으로는 아주 타락한 그런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선지자 이 호세아를 보내서 이 호세아는 정말 사랑으로 예언했습니다. “호세아” 라는 말 자체가 “구원”이라는 뜻인데 예수라고 하는 말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의 그림자처럼 그렇게 훌륭하게 사랑으로 그 백성들을 향해서 예언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문맥은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렇게 교만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다 자기 멋대로 살지만 그러나 이제 때가 오면 저들이 깊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있는 자신들을 괴로워하는 때가 온다. 왜냐면 하나님이 징계를 하시기 때문에 큰 환난이 오고, 그 고난 속에서 결국은 잊었던 하나님이 생각나게 되어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때가 되는데 그 때에는 결국에 그들이 무릎을 꿇고 고백하기를 “오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주시고 치료해주실 터인데 그래서 그 백성에게 의를 비처럼 내리시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주실 터인데 오늘 여기에 보면 그 때까지 하나님이 돌아가서 당신 계실 곳에 계시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뭐냐면 출애굽기 33장 34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그 백성들 가운데서 떠나가시는 것을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워낙 부패하고 타락하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멀리 떠나가시는 그리고 멀리 떠나 가셔셔 그래서 거기에서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깨닫고 정말 마음으로 그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계시겠다.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교리적으로 보면 오늘 날 우리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주님이 이미 오셨죠. 그래서 우리 안에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시는 것이 또한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간 삶을 살면 그러면 계속해서 우리들이 그런 삶을 살게 되면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그러나 사실 주님이 거의 떠나신 것 같은 그런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기도를 할 수도 없고, 기도를 해도 차가운 거절감이 느껴지고,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귓전을 울릴 뿐 가슴에 와서 박히지를 않고, 하나님을 섬겨도 마음에서 깊은 우러나오는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에 속한 모든 것들이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그렇게 행복하게 하고, 내게 즐겁고 기뻤는데 이제 이 모든 것들이 고통이 되고 괴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일 때 그 때에 우리들이 거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오늘날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 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만나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이 은혜 언약 안에는 무한한 용서가 약속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큰 죄라도 얼마나 많이 지은 큰 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겠다. 라고 하는 사죄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여러 번 용서를 받아도 다함이 없는 그런 무한한 용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빌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을 용서해주시고 사유해 주시는 은혜가 나타나는 것이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은혜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무한한 사죄의 은혜는 약속되어 있지만 사죄의 은혜뿐 아니라. 또 무엇도 약속 하셨는지 아십니까? 무한한 은혜의 능력을 공급하실 것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늘 자원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영생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늘 자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영생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요. 그런데 용서가 필요해요. 내가 죄를 지어서.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면 양심의 괴롭힘을 당하거나 아니면 자포자기 하거나, 아니면 죄를 끊임없이 지으면서 뻔뻔스럽게 살아가는 그런 파멸에 이르는 인생밖에는 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나면 그다음에 용서가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 용서가 필요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나의 지난 죄를 모두 고백하고 용서해주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용서해주시죠. 은혜를 입어요. 살아가다가 고난이 밀려와요. 마음에 평안이 필요해요. 그러면 하나님께 구하면 평안을 주셔요. 물질이 필요해요. 구하면 하나님이 물질도 주셔요. 그런데 병이 들었어요. 건강이 필요해요. 하나님 앞에 기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건강도 주셔요. 이렇게 하나님께 있는 무한한 유무형의 자원을 하나님을 의지해서 무한히 끌어다 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의 공급을 보증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죄를 선택하고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떠한 은혜의 공급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슴 깊이 새겨야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방탕하고 타락했습니다. 죄 가운데 처음에는 죄가 좋아서 선택해서 죄 가운데 막 살았는데 돌아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이었습니다. 그것이 죄의 마지막 열매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리셔서 그래서 의를 비처를 내리시며 용서해주시며 그 백성들을 다시 영화로운 백성들이 되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는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는 뭐냐면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오늘 날 신앙생활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용어중의 하나가 “간절히” 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간절한 마음이 동반된 그 무엇이 아니고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간절함이 동반된 그 무엇이 아니면 어떤 것으로도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고,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간절함이 없는 기도생활, 하나님 만났을 수 있을까요? 간절함이 없는 말씀생활, “하나님 한번 말씀해보시죠. 제가 그렇게 하고 안 하고는 내 권한이고 일단 한번 말씀을 해 보십시오.” 이런 태도로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통해 영혼이 변화되고 마음이 새롭게 되는 일이 일어날까요? 마음이 거의 담기지 않는, 여러 가지 많은 섬김들, 그것이 일이니까 해 나가기는 하지만 내 영혼에 무슨 유익을 가져다주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렇게 섬기는 것 때문에 내 영혼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것, 심지어는 그 일들이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자꾸 방해가 되는 것, 이런 것들은 결국 어디에서 비롯되느냐면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드리는 그 마음의 밭이 없이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큰일을 많이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그 일에 마음을 항상 담아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그런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간절함의 첩경입니다. 모든 것의 간절함을 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요.”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실어서 우리의 섬기고, 그리고 우리가 활동하고,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 한 과정이 되어야합니다. 심지어 더 넓게 생각하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그런 과정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진실한 성도가 된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뭐냐면 간절히 우리 주님을 찾는 것. 그래서 인격적으로는 주님을 닮기를 원하고 삶으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섬긴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때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는 삶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는 것은 어느 한 부분에서만 일어나야 될 일이 아니라. 모든 삶의 방편에서 포괄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기도생활을 하는데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다 그러면 삶 전체에서 똑 같이 하나님을 안 찾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안 찾는다. 그러면 삶 전체에서 하나님을 안 찾는 것입니다. 어디가도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안 찾는 그러한 태도나 생각을 버리는 영역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셔서 주님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불러주셨습니다. 거기에서 계속 불평하고 원망만 할뿐 거기에서 자기가 섬기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고,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그것을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준 십자가로 알고 그리고 그것을 지는 과정을 통해서 부패한 자기를 죽이고 그래서 주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배우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은혜를 받고 사는 것을 배워요. 이런 것들이 없이 마음에 없이 섬기는 사람은 그 사람은 기도도 또 그렇게 마음에 없이 합니다. 말씀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고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그렇게 뒤로 물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람은 자신이 주님을 간절히 찾아요. 어떻게 하든지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신 그 은혜를 갚으면서 살고 싶은 그런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러면 기도 속에 간절함이 베어 나오겠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간절하겠죠.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겨주셔서 섬길 때에도 간절하겠죠. 그래서 중심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 만큼 모든 삶의 방면에서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말씀을 듣든지, 봉사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속에 모두 하나님을 향해서 그 일을 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베어 있으니까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관심을 끌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그가 하는 일이 아무리 거룩하고 훌륭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심을 끌 수 없습니다. 왜냐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들이 영광을 돌린다.” 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아니면 사업을 열심히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아니면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고 싶어 하는 곳이 어디냐면 우리 마음속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흔히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 그럴 때에는 대게 어떤 때입니까? 범죄를 저질러서 그것이 모두 폭로되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그 죄가 그 사람의 마음에 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워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먼저 받고 싶어 하는 것이 뭐냐면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화와 관련지어서 생각하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리는 뭐냐면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변화시키셔서 새 삶을 창조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누가 계셨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계셨잖아요. 하나님이 천지를 이렇게 심묘막측 하고 아름답고 조화 있게, 너무 너무 아름답게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마음속에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하나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있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밖으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새 삶을 창조하실 때도 우리를 먼저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진리를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아침마다 새롭게 저녁마다 새롭게 참회와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날마다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되어서 우리의 마음이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삶을 살았는데 그것이 마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같이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았더니 살아가는 삶의 발자취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왜 그러면 그들을 기왕에 용서해주실 터인데 그냥 용서해주시지 쓰시는 김에 그냥 팍 쓰시지 뭘 찾을 때까지 기다리시나. 그리고 또 그것도 간절히 그것도 우리의 경험으로 보면 한번 가지고 안돼요. 그냥 간절히 오래도록 주님을 찾게 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를 만나주시죠.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은혜를 주셔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면 처음에는 죄 가운데 살았고, 불순종 하면서 살면서 은혜에서 많이 미끄러졌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도 차가운 거절감 밖에 느껴지지 않아요. 두 번 기도해도, 세 번 기도해도. 네 번 기도해도. 그러니까 그렇게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니까 실제로 자신이 살아가는 그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힘들 것 아닙니까. 그런데다가 또 그 결심이 약해요. 그래서 정말 내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결심이 약해요. 그러니까 그 결심은 아직 약하고 은혜는 아직 주어지지 않고 마음의 정욕은 불붙어요. 그러니까 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죄의 무게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니까 양심에 가책을 더 받으면서 괴로워해요. 그러니까 전에도 막혔었지만 이번에는 더 막히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들이 계속 되풀이 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을 굳게 세우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 심지어는 내가 지금 죄를 이기고, 그리고 불순종하던 대로 살고 싶어 하는 나를 죽이기 위해서 고통을 받는 이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그 간절한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간절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녹아내리는 마음을 바칠 수 없게끔 살았던 그 많은 두터운 암초들이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과정에서 그것들이 깨뜨려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오랜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긴 과정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할 것은 뭐냐면 그렇게 자기의 죄를 깨뜨리면서 간절히 대답도 해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 칠 때에 당장에는 무슨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무슨 변화를 하나님께서 당장 주실 수가 없죠. 왜냐면 이미 벌써 오랫동안 이 마음이 두껍고 굳어져서 하나님의 은혜도 느낄 수 없고 심지어는 죄가 앉아서 눌러 붙어서 딱딱해졌습니다. 그것들이 깨뜨려져야합니다. 그러니까 더 많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는 것을 한번 비유해봅시다. 여성들이 아이를 가져서 날 때가 되지 않습니까. 날 때가 되면 힘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이가 반사 신경이 자극되면서 아이를 밖으로 밀어내도록 막 자기 이 내부를 수축시키는 힘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서 인체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는 것처럼 간절히 밉니다. 그런데 그것이 한번 통증이 오면 그냥 자동차가 터널에서 빠져나오듯이 쑥 하고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을 산고라고 하지 않습니까. 간절히 기도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간절한 과정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통증 없이 아이가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산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잘못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고통을 통해서 나와야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가운데 삶의 모든 방면에서 마음을 실을 수 없었던 마음이 변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이 뭐냐면 죄의 영향입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들어온 순간부터 하나님을 열렬히 구하는 인자를 우리 안에서 다 파괴합니다. 그러니까 죄를 간직한 채로는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부르짖을 수가 없습니다. 시편에 보면 “나님께서 저희를 징벌하실 때에 저희가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막 징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식간에 공포가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오는 고통이 너무 크고 무섭기 때문에 이것을 빨리 피해보겠다. 라고 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 때 제시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신이면 얼마든지 말하자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듯이 아무거나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이것을 정리하시고 계십니다. “거기에서 내 얼굴을 구하며” 이것은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냥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고통이 계기가 되었지만 그 고통이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는지 이면에 있는 영적인 이치를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된 기쁨은 하나님의 그 얼굴 앞에서 사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쁨을 구했고 거기에서 행복과 그리고 거기에서 번영을 구했다. 결국은 마지막에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밖에 없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것을 구한 마지막 결과다. 그래서 우리는 다 필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이 필요하다. 세상의 번영도, 그리고 세상의 훌륭한 포도주와 훌륭한 기름도 필요 없고, 우리는 주님의 얼굴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찾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에게 세상의 틀에 메여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매일, 매일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그리고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평안한 상태가 하나님을 떠나서 누리고 있는 이 평안한 상태가 “후” 하고 불면 날아가 버릴 검불과 같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사용하십니다. 풍랑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시련도 일어나게 하십니다. 고난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픔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들들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에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고통이 주어지니까 그 고통을 피하고 싶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큰일 났다. 이런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는데 어떻게 하나? 이런 어려움이 더 커지면 어떻게 하나? 안돼 내가 하나님을 찾아야지.” 처음에는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과정에서 혹은 영적으로 깨닫는 것이 빠른 사람은 즉시 그 속에서 지금 내가 격고 있는 환난이나 어려움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 앞에서 떠나 숨어버리는 우리들을 간절히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으로 이해력이 있는 모든 신자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환난과, 고난, 시련,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영적으로 워낙 탁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늘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늘 발견하고 그래서 순종하지 않던 자신을 순종하게 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인생을 막 뒤흔들어 놓고 그러는 필요성은 그만큼 적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말씀하시지 않아도 될 만큼 그렇게 완벽한 신자는 없습니다. 또 이 세상이라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의 죄는 용서하셨지만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들은 이 세상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내 안에 죄가 없더라도 그런 죄의 결과 속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또 우리 죄의 결과도 남아있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부터도 구원을 받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렇게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치고자 하시는 섭리가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마지막에는 우리를 그런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살아야 될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난과 시련, 어려움이 일어날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깨닫고 그 때 하나님 앞에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위기에 닥친 자신의 사업이나 고나,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이 깨뜨려졌다. 라고 하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간절히 찾는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히랍 어로 말하자면 “쭉 뻗어나간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간절함에는 반드시 인내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간절하기는 한데 참을성은 없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간절한 것이 아닙니다. 간절하면 거기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수로보니게 여인을 예수님이 만나시는 과정입니다. “내 딸 좀 고쳐주십시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자기가 도저히 예수님에게서 그런 말씀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이 여인이 간절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거기에서 실망했을 것입니다. “야, 예수님이 내가 소문에 듣던 분이 아니구나. 어떻게 우리를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고 하지만 우리를 어떻게 개라고 부를 수가 있을까? 아, 나는 너무 실망했다. 상처 받았어. 내가 온 세상에 선포할거야. 예수님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의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그것이 결국은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얼마나 그가 은혜를 구하는 그 마음이 간절하고 절실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갈망은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받았을 때에 그냥 고난만 물러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징벌을 받을 때에 하나님 앞에 벌벌 떨면서 매달리는 이런 것들은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재앙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세례요한 아닙니까.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하나님ㄴ의 나라가 가까웠다.” 그러면서 선포하니까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 깃들였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바리세인과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그랬더니 요한이 아주 기쁘게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너희보고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회개하면 세례를 준다고 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 너희들이 재앙을 만날 것이라고 해서 그래서 세례를 나도 받고 싶다고 하면서 덜덜 떨면서 나왔는데 “독사의 자식들아.” 그러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무엇을 원하느냐면 재앙을 피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양한 섭리를 사용하셔서 우리 가는 길을 막으시고 고난당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바는 고난을 피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라.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그 동안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태도를 고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회초리로 때린다. 그럴 때 부모도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죠. 부모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뭐냐면 이 아이가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빌고 다시는 그 부모의 마음에 아픔을 주었던 행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얘가 아프지 않게 계속 매 맞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아, 오늘 저녁에는 아무래도 맞을 것 같으니까 바지 속에다 솜을 좀 넣고 가야지. 오늘은 옆에 있는 효자손으로 엄마가 내 등을 내리 칠 것 같으니까 오리털 파카를 입고 공부해야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부모가 원하는 것이 아니듯이 똑같이 고난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 그것 자체가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뭐냐면 당신의 얼굴을 구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나 오랫동안 당신의 얼굴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번영 때문에 이 세상에 있을 실패 때문에 하나님을 잊고 살았고, 내 마음대로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내게 더 큰 고난이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얼굴빛으로 내게 비춰주시면 나는 이보다 더 큰 고난도 감당하며 살겠습니다. 살 수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근심해보셨죠. 그 근심은 우리의 뼈를 썩게 하고 살을 마르게 합니다. 견디기 힘들고 이 혀에서 쓴물이 넘어옵니다. 쓴물이 넘어올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럽게 견딜 수 없이 괴롭습니다. 말할 수 없이 힘듭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근심과 염려의 마지막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 영혼에 커다란 상처입니다. 그 근심 때문에 남아있는 우리의 마음이 갈라지고, 그 근심 때문에 하나님을 앙망하지 못하고 그 근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제대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근심 하나 때문에 우리 삶 전체가 다 휘둘립니다. 무얼 가져다줍니까. 아무것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것들을 가져다줍니까. 그러나 주님을 찾는 것도 말할 수 없는 근심이죠. “아, 이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나를 향해서 부어주시던 그 은혜가 이제는 다 했는가?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 사역에 하나님의 축복이 다했는가?” 나는 말이죠. 큰일을 하고 죽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야망은 없습니다. 그냥 한 걸음, 한걸음, 갈뿐입니다. 언제까지 가다 죽을는지 모르지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은 나를 축복 하셔야 됩니다. 언제까지냐면 내가 죽는 그 순간, 그리고 내가 죽은 후에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 위에도 축복이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그 일이 큰 일일 수도 있고, 작은 일일 수도 있고, 그리고 내가 크게 쓰임 받을 수도 있고, 작게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그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도 예전에 내가 교회를 섬길 때 담임 목사님은 교인이 조금 나오는 날에는 거의 점심을 못 드셔요. 찬물에 말아서 조금 드시고, “목사님 왜 그렇게 못 드셔요?” 그러면 “밥알이 모래알 입니다.” “왜 그러세요.” “교인이 조금밖에 안 나와서” 어느 날에는 맛있게 드셔요. 웬일로 교인들이 많이 나왔죠. 사실은 교인이 조금 나오는 것이 근심이 안 될 수는 없지만 그 자체 때문에 그렇게 가슴 조려하고 한 적은 오히려 좀 적고,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뭐냐면 불길한 예감이 밀려올 때 “아, 이제 하나님이 나의 목회에 축복을 여기까지만 베푸시려나보다. 아, 이 한계를 못 넘는구나. 여기까지만. 여기가 끝인가 보다.” 그런 느낌을 받을 때 그 때 그 불길한 느낌이 학 밀려오면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그러면 다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무한한 자원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이 모두 우리를 사도바울처럼 만드시겠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렇게 활동하려면 헌금하는 사람도 있어야지 다 사도바울만 하면 여러분 여기 올라와서 다 설교하면 누가 듣겠습니까. 어느 교회에 갔더니 무슨 예배를 드리는데 교인은 3명 앉았는데 강대에는 8명이 올라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똑같이 쓰실 수는 없잖아요. 또 그럴 필요도 없으시겠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다 다양하게 쓰죠. 기가 막힌 비유가 생각났네. 엄지발가락이 커요. 새끼손가락이 커요? 엄지발가락이 크죠. 엄지발가락이 새끼손가락보다 훨씬 굵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또 하나 입은 이렇게 마음대로 움직이지만 귀는 마음대로 못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마음대로 못 움직이는 귀든, 크고 뭉뚝한 엄지발가락이든, 그다음에 요만한 새끼손가락이든, 또 우리 몸속에서 조금 잘라져도 안 죽는 데가 있고, 조금만 잘라져도 죽어버리는 데가 있잖아요. 창자 같은 것은 한 3-40센티쯤 뚝뚝 끊어내도 그 곱창 좀 잘라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또 이으면 살아요. 위도 한 3분의 2쯤 뚝 잘라서 창자하고 이어놓으면 창자가 변하여 늘어나면서 위가 된데요. 그것도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심장도 반쯤 잘라도 죽죠. 그렇죠. 심장이 더 곱창 같은 것에 비해서 치명적인 장기지 않습니까. 곱창도 다 자르면 문제가 되지만 심장 100그램하고 창자 100그램하고 비교하면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창자는 한 1킬로쯤 잘라내면 살지만 심장은 조금만 떼어내도 죽습니다. 심장 성형수술 했다는 사람 보았습니까? 심장이 좀 못생겨서 긁어냈다는 사람 보았습니까? 그런 치명적인 장기와 덜 치명적인 장기가 있고, 엄지발가락처럼 두툼한 놈도 있고 새끼손가락도 있습니다. 그리고 목이 이렇게 움직이는 입도 있고 절대 못 움직이는 귀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양합니다. 치명적이고, 덜 치명적이고, 크고, 작고하는 것도 다 있지만 결국은 그 모두 한 힘을 받아서 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밥을 못 먹어서 쭉 기운이 떨어지면 손가락 움직일 기운만 없는 것이 아니라. 발가락 움직일 기운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 몸에서 나오는 힘을 자원으로 삼아서 중요한 놈도, 덜 중요한 창자도 그다음에 별로 더 덜 중요한 손톱도 자라고, 심지어 엄지발가락도 움직이고 새끼발가락도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주 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일을 할 수도 있고, 덜 중요한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큰 일을 할 수도 있고, 작은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들이 맡은 일이 크든지 작든지 간에 무한히 하나님의 그 자원을 퍼서 쓸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교회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아야 되고 그리고 교회에서 사무나 보는 사람들은 거의 은혜가 필요 없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크고 작아도 그 은혜의 샘에서 물을 길어서 그것을 가지고 원동력을 삼아서 그 은혜에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설교도 하고, 심방도 하고, 운전도 하고, 청소도 하고, 사무도 보고, 또 영화도 만들고, 그다음에 새 가족 안내도하고 대리석 청소도 하고, 잔디도 뽑고, 칠도 하고, 이렇게 모두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 사람들입니까. 그 모든 자원을 하나님께서 당신과 화목한 가운데서 누리면서 살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지 않으면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것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 은혜를 간절히 구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에 돌아온 것은 쓰디쓴 고통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정지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앞으로 가든지, 뒤로 물러가든지 둘 중에 하나지 정지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미끄러진 것,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고, 그분께로부터 더 이상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도 그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큰일은 아니어도 하나님이 각기 그릇을 주어서 그 일을 맡기셨겠죠. 그렇지만 내게 하나님께서 작은 일이라도 좋으니까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더 이상 자원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이 될 때. 그 때 두려움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이제는 다하였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이제는 다 하였는가?” 그런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받은 바 그 은혜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해져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혜에서 멀어지고 죄 가운데 살면 사탄도 신경을 안 씁니다.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죄한테 맡겨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은혜를 받고 나면 죄와 사단의 집요한 공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때에 하나님과의 큰 교제가 있은 후에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특이한 번영이 있은 후에 사람들이 시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주신바 이 은혜를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은혜와 얼굴을 구해야합니다.
이런 것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해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광부가 금을 캐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전심으로 하나님 자신을 찾는 사람을 하나님이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시기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면서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과의 막혀서 더 이상 누리고 살지 못했던 그 은혜들을 다시 한번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래서 주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데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그렇게 찾고 싶어 하는 데도 하나님의 은총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 오늘 답을 주고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저희의 죄를 뉘우쳐 가로되”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에 앞서서 자신들의 죄의 길을 떠나야합니다. 만약에 어떤 불순종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었다. 라고 한다면 다른 모든 불순종보다도 먼저 그 불순종을 제일 먼저 버려야합니다. 그래서 양심에 거스르는 악을 행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너무 가증한 것입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냐면 먼저 거기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그 사람을 어떻게 하실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떠나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죄 가운데서 괴로워하고 그래서 이따금씩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도 그것으로서는 평강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고 하나님이 만약에 만나주시면 그들이 더 방자해져서 그 은혜를 계기로 해서 더 충분히 하나님을 멀리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야하는데 만약에 여러분 속에 그렇게 주님이 간절히 구해지지 않거나, 혹은 자신은 간절히 주님을 찾는다고 찾는데도 주님이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면과 그리고 삶을 돌아보면서 지속적인 불순종과 우리의 죄를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버리고 불순종에서 떠나기에는 우리가 너무 약하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변명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삶에 악을 버려야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아주 강하고 놀라운 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늘 높이 새가 날아오르려고 큰 날개를 퍼득 이는데 조금 날아가더니 고무줄 하나가 깊이 땅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막 몸부림치면서 날아가 보면 고무줄이 조금씩 늘어나요. 그런데 발목도 빠져나가는 것처럼 아픈 것입니다. 하다, 하다 나중에는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이것을 못 끌러버리겠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때 만약에 그 줄을 끊어주면 그 새가 하늘을 향해서 얼마나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겠습니까. 높이, 높이 날아서 그래서 거기에서 온 땅을 내려다보면서 날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고, 우리의 모든 기도와, 모든 말씀생활과, 모든 섬김과, 그리고 모든 우리의 삶 전체 속에 주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 베이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죄를 버려야합니다. 불순종하는 길에서 떠나야합니다. 최소한 자신의 양심은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없어야합니다. 최소한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양심에게 지적받을 정도의 죄를 범하면 안 됩니다. 최소한, 양심이 발견하지 못한 죄도 성령이 빛을 비춰주시면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삶에 간절함이 베이게 함, 정말 간절함이 베이게 하는 그리고 그 간절함을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우리의 죄를 버려야합니다. 회개해야합니다. 절대로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그 능력보다는 그 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더 탁월하고 뛰어납니다. 그래서 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죄를 버리고 주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큰 은혜와 만족을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은혜에 대한 목마름엔 참회가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누가복음 18:13)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없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우리들이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이렇게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이 모두 흘려보내고 그리고 지극히 작고 짧은 날 동안만 은혜의 갈망을 가진 채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이 우리들이 그렇게 긴 세월동안 이렇게 헛된 신앙생활을 할까? 하는 그런 반성을 해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성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답을 찾지 못하고 허공중에 맴도는 질문으로 남다 결국은 멀리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이런 모든 현상들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깊은 갈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갈망, 이런 갈망들을 우리가 깊이 간직하고 우리들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으면 참 좋겠는데 무엇 때문에 갈망이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우리들이 계속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바리세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이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는 이 모습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세리는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죄가 만은 사람이었고,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며 깊이 하나님 앞에 회개한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은혜에 대한 갈망을 우리들이 가지려고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죄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없이는 은혜에 대한 갈망을 우리들이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다가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의 품속으로 돌아와서 그 은혜와 자비를 맛보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화를 받으며 살게 되는데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멀리 떠나서 생명도 없이 교만 가운데 저 좋은 대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한 순간에 자신의 죄와 악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있는데 자기를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자리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자기 안에 있는 죄와 불순종의 흔적들입니다. 그 때에 신자는 하나님 앞에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갈망이 진실한 것인가? 아니면 거짓된 것인가? 거짓되다고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바라는 마음이 정말 진실한 갈망인가? 아니면 순간 스쳐가는 마음의 바램인가? 하는 것들이 이제 이 마음속에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진실한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틀림없이 하나님 앞에 그런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자기의 아픔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좋아서 그 악을 행하고 내가 원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했지만 지금 다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자 하는지 간절한 갈망을 가질 때 그 때 비로소 이 갈망이 진실이라면 이 사람이 예전에는 그것을 내가 선택해서 내가 죄를 지었고, 불순종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는 갈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갈망 속에는 항상 자기의 비천함,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면 도저히 혼자 설 수 없는 그런 전적인 무능함, 그리고 자신의 아무 능력이 없는 미력함, 그리고 주님 이외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어떠한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전적인 무기력한 상태 그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과거에 어떤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그 곳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음 함께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리는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로 객관적으로도 나쁜 사람이었고, 주관적으로도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도 그래 내가 죄인이니까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겠어. 그리고 낙심과 실망 속에서 터덜터덜 걸어서 성전을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이고, 나는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데 나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전에 얼마나 나쁜 짓을 했고, 얼마나 주님의 마음에 못을 박았고,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며 살았는지 그것을 기억하지 마시고, 지금 이 죄 가운데서 경험하게 되는 비참한 결과로 말미암아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된 이 처지를 살피시고,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주위를 한번 돌아보세요. 너무 냉랭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용서를 받아서 그의 은혜로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차갑고 냉담할 수 있습니까.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워요. 그리고 심장은 이 세상의 목소리에 대해서만 반응을 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것도 한 주나 두 주가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6개월씩 1년씩 긴 기간동안 시체와 같이 싸늘하고 차가운 그 돌 같은 가슴을 안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자부하면서 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정직한 자각을 가지고 그리고 깊이 회개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그 가슴에 주님을 향한 갈망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아무리 은혜의 갈망을 가지라고 외치고 눈물로 설교해도 그 불이 붙여지지 않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오늘 어떻게 하면 그 굳은 마음이 모두 제하여지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서 그래서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오늘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무엇이고, 은혜와 함께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얼마나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그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안 사람들은 모두 간절히 싶어질 것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여러분 모두 아마 그것을 너무나 원할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가슴을 찢으며 그 하나님 앞에 머리를 조아려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통증을 안고, 자기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그리고 용서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강물과 같은 기쁨을 냉랭한 내 가슴 속에 흘려보내 주시고, 그래서 지나간 모든 죄는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간절함으로 돌아오지를 못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마음을 다 쏟고 그리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은혜가 없는 생명보다는 생명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택하겠다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그 일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 언제 일어났습니까. 우리들이 아무리 많이 인생에 대해서 궁리를 하고 신앙에 대해서 궁리를 해도 해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신자는 살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필요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으로부터 원하지만 그러나 힘을 다해서 그 은혜의 상태로 들어가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주님을 마치 당신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매우 인색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아마 그렇게 놀라운 은혜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매우 소수일 것이고 하나님은 웬만해서는 그런 은혜를 주시지 않는 분이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누구의 마음이 가장 아프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리 떠나 살 때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한 주님이 그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깊이 가슴아파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멀리 떠나서 내 멋대로 불순종하며 살아가서 하나님 앞에 악하게 살아갈 때에도 우리는 아파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아파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에게 곧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생수와 같은 자신의 은혜를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값없이 거저 와서 마셔라.”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도 이제는 은혜 받을만한 때다. 은혜의 때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하나님은 웬만해서 은혜 베풀어주시지 않으려고 하는 인색한 분, 과거의 어떤 죄나 불순종 하나를 꼬투리 잡아서 두고두고 우리를 면박을 주고 그래서 결국은 한번 떠나간 은혜의 자리로 웬만하면 못 돌아오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친 하나님이라기보다는 자기가 만들어낸 또 다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든지 당신의 은혜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하십니다. 값없이 그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서 당신의 마음에 근심을 끼치던 사람들이 기쁨을 당신의 마음에 고통을 주던 사람들이 즐거움을 주도록 끊임없이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셔서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웬만하면 우리에게 은혜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어렵고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은혜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성전에 올라오기 전까지 세리의 삶은 뒤죽박죽의 삶이었습니다. 마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면서 세리 노릇하면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비참함을 인식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지만 자신의 삶은 그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이 삶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 거룩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면서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고, 그래서 이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그 은혜의 응답으로 진리의 빛이 비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가 그 나라를 이루어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심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섬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섬김은 뭐냐면 그 은혜를 열렬히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만 그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자기의 힘으로는 그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매우 미천하여 은혜가 필요하면서도 그 은혜의 원천이 하나님인줄 모르는 사람들, 심지어는 그 은혜의 주인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나 오랫동안 죄 가운데 있어서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마음의 자유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대신 그들이 갈망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들이 대신 갈망해서 그 은혜가 그들의 삶 한 가운데 부어져서 그래서 새 삶을 살게 되도록 그렇게 만들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그런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너무나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력으로 알 수가 없고, 자신들의 피곤하고 지치고 죄 가운데 고통 받는 삶의 근원적인 원인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들을 위해서는 커녕 우리 자신을 위한 은혜의 갈망도 없이 살아간다면 이것은 정말 너무나, 너무나 더럽고 비참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도 절반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고 나와 그리고 내 가족과 내 이웃위에 부어져야할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갈망을 간절히 하나님께 토해놓는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하는 정말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회심하지 못했던 수많은 영혼들이 강물처럼 그 은혜를 구하는 갈망의 눈물에 쓸려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울어야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 교회에 나오지만 거의 껍데기처럼 신앙생활 하는 그런 나쁜 신자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누가 그 사람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고칠 수 없습니다. 오직 고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간절히 자신에게 임할 은혜와 그리고 내 이웃에게 임할 은혜, 그리고 교회에 임할 은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갈망하며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큰 행복이며 또한 얼마나 놀랍고 큰 특권이겠습니까. 그래서 교회 안에서 정말로 보배로운 사람들은 돈이 많고 높은 지위를 가진 정치인들이 아니라. 정말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교인은 누구냐면 하나님의 은혜를 눈물로 구하는 기도의 세계를 가진 교인들입니다. 자기를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그리고 심령이 병들어서 스스로 자기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그 은혜를 위해서 목마르게 구할 수 없는 그런 영혼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보배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모인 사랑하는 모든 지체들이 한 마음을 품고 자신과 그리고 교회위에 물 붓듯이 부어질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데 그것이 진정한 은혜로 말미암은 부흥입니다. 다른 것이 부흥이 아닙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는 진정한 부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제일 먼저 이러한 갈망이 없는 것을 하나님 앞에 깊이 안타까워하면서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이 은혜를 갈망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안고 있는 대부분의 기도의 제목들은 거의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면 모두 해결되는 기도의 제목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살펴보고 싶은 것은 그러면 그런 은혜조차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나, 오늘 이 세리의 기도가 모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은혜를 구할 힘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내가 먼저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을 내가 느낄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은혜를 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해야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주시는 성령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뭐냐면 우리의 눈을 떠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없이도 이 지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날은 단 하루도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 이 죄 많은 세상에, 그래서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철저히 느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자신이 보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 세리가 세리로 임명받은 그 날부터 이렇게 자기가 죄인인 것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고 일평생을 살아왔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죠. 언젠가는 아무 문제없이 살아오던 날도 있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배신자라고 욕은 먹었지만 그러나 개처럼 벌어서 나는 정승처럼 쓴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을 비춰주신 것입니다. 재물이 있고,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물질로 인해서 어떠한 결핍과 고통이 없어도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자신 안에 있는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죄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너무나 불쌍한 신세가 되었다고 하는 죄가 가져다준 비참에 대한 인식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마음속에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깊이 찍히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성령께서 그 사람의 죄와 그 죄의 비참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어주셨을 때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해야 되겠습니까? 금을 구하겠습니까? 은을 구하겠습니까? 높은 지위와 친구를 구하겠습니까.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긴 생명을 구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뭐냐면 오직 그 죄와 그 죄의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죄를 용서하시고 그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 말고는 기대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절실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마지막 결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국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아직까지도 희망이 있는 존재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보다는 자신의 힘으로도 넉넉히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깊이 회개해야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께서 성령님으로 역사해주셔서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죄와 그 죄가 남겨놓은 그 비참한 결과를 또렷하게 보게 만들어주셔서 그래서 돌처럼 굳은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그 은혜의 필요를 느끼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세리를 보세요. 다른 아무것도 그의 마음속에 소원으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구하는 것은 오직 딱 한가지였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발견했고,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위치에 있는 자신의 처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재물이나 그리고 행복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자기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셔서 관계를 맺어주실 수만 있다면 내가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다 드릴 수 있겠다고 하는 전적인 의존의 마음이 오늘 이 기도 속에 베어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없이 냉랭한 가슴만 가지고 기도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도 가슴에 담기지 않은 채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무엇이 남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의 인생의 날이 100년 200년 계속 된다고 할지라도 그 인생의 긴 길이에 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요?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이 마지막에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을 그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날마다 은혜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영혼의 비참함을 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기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노라. 고 하는 고백을 지녀야합니다.
오늘 이 세리는 분명히 죄인이었고, 형언할 수 없는 많은 죄악들을 지어서 한 때는 주님의 마음을 뼈아프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의 마음에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 혼자서 주님의 은혜도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주님의 은혜의 맛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인생의 진실을 발견했습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도저히 어떻게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물질보다도 은혜를 원했고, 이 세상의 긴 생명보다 오히려 지존하신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사랑의 은혜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무슨 향기가 있을까요? 예수의 향기가 있습니다. 왜? 그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이 죽고, 또 그 은혜를 받으면 끊임없이 자신은 살아납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모두 죽어버린 것 같은 나무에 잔디밭에 새싹이 돋고 물이 오르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나고, 다시 아름답게 살아나듯이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올 때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요. 그런 끊임없이 은혜를 구하면서 사는 그 사람들의 삶 속에는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예수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오래도록 예수를 믿어왔든지 간에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들의 신앙생활 속에서는 항상 더러운 인간의 부패한 악취가 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하루 내내 집회를 하면서 교회를 돌아오면서 설교하기 위해서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꼭 하나만을 구하면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올릴 수 있는 소원이 뭘까?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지혜로운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 다른 것을 구하지 않고 아마 이것을 구할 것 같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이 순탄하든지 시련과 고난으로 얼굴지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간에 내 마음이 항상 내게 주신 주님의 은혜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은혜, 나를 더 온전하게 하는 은혜, 나를 하나님 앞에 더 순전하게 만들어주는 그 은혜를, 목마름을 간직하고 일평생을 사는 것,” 그것이 아마 주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말에만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눈물 흘리지 않고, 나이가 들어서 우리의 머리가 백발이 되고 그리고 죽음의 날이 가까워 와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 되어서 우리는 주님 없이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주님의 은혜를 생명줄 삼아서 살아왔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를 우리들이 일평생 드리다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에 그 갈망이 가장 클 때. 가장 크고 간절할 때 그 때 주님이 내가 이 세상에서의 은혜가 아니라. 이제 영원한 나라에서 이제 다시는 빼앗길 수 없는 그 은혜를 네게 주리라는 그 응답과 함께 주님의 나라에 갈 때 그 신자의 행복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짐승처럼 되는대로 생각하고 되는대로 먹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 신령한 기쁨과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성도들이 꼭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8. 가난하고 슬픈 자의 목마름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시편69:29)
69편 시편은 다윗의 시로 되어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쓰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는 시인 중, 많은 시편들 중 탄원 시에 속하는 시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시인은 곤란한 위기 가운데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원수들은 이 시인을 조롱하고 있는 가운데서 한없는 고난을 받고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시인은 “나는 슬프고 그리고 가난하오니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여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항상 높은 데를 두루 다니는 사슴과 같은 형편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 우리의 악함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깊은 인생의 계곡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다 더 연단하셔서 좋은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깊은 영혼의 수렁으로 데려가시기도 합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신자의 영혼은 깊은 고통을 받고 그리고 그 환란 속에서 신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종종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절망스러운 상황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에 만약에 우리에게 책망 받을 것이 없고 하나님을 향해 담대하다면 우리는 훨씬 더 이 고난의 때를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책망할 것이 있고 마음 깊은 곳에 우리가 당한 환난과 그리고 고난이 우리의 죄에 대한 결과라고 하는 확신이 우리 속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죄에 대한 결과라고 하는 확신이 우리 속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굉장히 마음 깊은 곳에서 자유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의 아픔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의 송사까지 겹쳐서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할 것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오늘 하나님 앞에 이처럼 간곡한 탄원을 주님 앞에 토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어떤 죄악 가운데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지 시인은 매우 곤란하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신자가 만약에 마음속에 자신의 명백한 죄가 생각이 난다면 깊이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전에 무수한 양심의 송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결코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양심의 송사, 그리고 결코 율법에 의해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단호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이 고난에서 함께 다가와서 외적으로, 내적으로 그는 매우 곤고한 상황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신자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 안에 죄에 대한 깊은 가책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신자는 훨씬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고 사모하기에 적합한 마음의 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완전하게 살 수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힘써서 적어도 우리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받을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않도록 그렇게 우리들이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고난과 환란을 만났을 때에 순발력 있게 주님을 붙들고 그 고난의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훌륭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매일, 매일 살아가는 이 삶이 주님을 위한 삶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지만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매일, 매일, 살아가는 이 삶, 그래서 우리들이 정결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서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진실한 신자가 되는 삶은 고난의 날을 위한 훌륭한 더없이 훌륭한 보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모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꼭 필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를 거기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건져주시고 거기에서 우리를 이끌어내어서 자유하게 해주시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인데,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그 깊은 수렁에서 건져내어주시고 새롭게 해 주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건져주시는 그 구원하시는 은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심령으로 변화된다. 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깊은 고난과 시령의 수렁에 들어갈 때는 몰론 이거니와 때로는 욥과 같이 그렇게 큰 고난을 당할만한 잘못이 없었는데도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계셔서 우리를 깊은 시련 속에 들어가게 하실 때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오늘 밤까지는 환란과 시련이었는데 내리 아침에는 그 시련과 환난이 끝나는 그렇게 쉽게 우리들이 기대하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날 때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실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게 만드십니다. 말하자면 열을 가해서 제멋대로 형체를 가지고 있는 쇠를 녹여서 그래서 좋은 쇠가 되어서 나오게 되면 그 쇠의 가치가 엄청나게 높은 가치를 가진 그런 쇠가 되는 것입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엊그제 제가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거의 정확한 정보겠지만 그 용광로에 들어가기 전에 제가공해야 되는 쇠, 우리들이 엿장수 주고 그러는 쇠들이겠죠. 1킬로에 한 45원정도 밖에 안 간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불 속에 들어가서 잘 단련되어져서 이제 새로 만들어진 쇠로 나오면 그것이 750원으로 변한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 시련 가운데 연단하셔서 그래서 쓸모가 거의 없는 파쇠와 같은 우리들을 시련의 용광로 속에 집어넣고 잘 연단하셔서 그래서 새로운 쇠로 다시 빼 내시면 우리는 아주 가치가 뛰어난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큰 용광로에다가 그 녹슨 못도 있고, 그다음에 쓰다가 버린 부지깽이도 있고, 자루 떨어진 찍게도 있고 이런 것들을 다 집어넣고 그것들이 쇳물이 되어서 녹아내릴 때까지 열을 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불을 떼어서 한참 동안 달구면 이제 쇠가 그 불의 열을 받아서 터지기 시작하면서 이 껍질에 붙었던 오물들이 떨어져 가나고 그리고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하얀 불꽃을 내면서 눈부신 붉은 빛을 내는 그런 쇠 녹은 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틀에 부어서 철판도 만들고, 이렇게 하면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동안 이 많은 쇠에 고강도의 불을 가해서 그래서 한참 동안의 시간에 걸쳐서 이 열을 가해서 비로소 이 쇠들을 녹이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 연단시키셔서 그래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작정하면 하나님이 강한 불길을 우리에게 오래도록 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한달 일수도 있고, 두 달일 수도 있고, 일년 일수도 있지만 그 시간을 우리들이 획일적으로 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여튼 상당한 기간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을 주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그 고난들이 도구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모습을 닮아서 성숙하도록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뜨거운 불을 가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불로 가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또한 시련과 환난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 그 속에서 우리를 뜨거운 불로 오래도록 달구셔서 그래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쇠는 밖에서부터 열이 가해져서 녹으면서 서서히 안 쪽으로 녹아 들어와서 그 목적을 이루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할 때 우리를 녹이시려고 하는 그 부분은 우리의 외부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환난과 고난을 만나도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녹지 않으면 그러면 그 고난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주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아주 훌륭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은 우리들이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비밀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다 동시에 고난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난의 비밀을 많이 가지고 그래서 그 고난의 비밀 때문에 믿음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들 중에는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런 고난과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가난하고 직업도 없고, 그런 사람들만은 아니겠죠. 그 중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또 미스코리아 뺨칠 정도로 예쁜 사람도 있고, 그리고 의사가 필요 없는 건강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신앙의 세계를 보면 어떤 때는 우리가 믿음이 별로 없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는 이렇게 살다보니까 돈도 없고, 갈 길이 막혀서 그래도 주님의 은혜를 좀 구하려고 왔는데 저렇게 부자이고 돈 많은 사람은 왜 교회에 올까? 그렇죠. 나야 얼굴이 못 생겼으니까 이 나이 되도록 뭐 한번 누가 와서 한번 사겨보자고 얘기하는 사람도 없고, 하니까 외롭잖아요. 그래서 주님을 찾지만 저렇게 그림 같이 예쁜 자매는 왜 예수를 믿을까? 누가 그래요.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를 다녔는데 얼마나 부요하게 사는지 청년부에 여름에 가보면 3분의 1이나 되는 청년들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어디 갔나. 그랬더니 해외연수, 유학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은 그것은 광고 대상도 안 될 정도로 그리고 얼굴들도 예쁘잖아요. 왜냐면 그 강남에 가서 얼굴 예쁜 것은 그것을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예쁜 부인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어떤 형제가 그런데 딸을 낳는데 이것은 완전히 메주를 한 3층에서 던진 것처럼 생겼습니다. 자기도 안 닮고 엄마도 절대로 안 닮은 것이었어요. 세상에 너는 어디에서 태어났는데 이렇게 태어났냐. 그리고 결혼하고 몇 년 있다가 우연히 처갓집에를 갔는데 명절 때인데 다들 떡국도 끓이고 하는데 어느 방에 들어갔는데 어느 앨범이 있어서 폈는데 하필이면 자기 딸하고 똑같은 여자 아이가 거기에 있더래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그렇게 얼굴도 예쁘고 집안에 돈도 많고, 그러는 사람들은 왜 예수 믿을까?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의 이 고통과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만 고통과 시련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이죠.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자원이 모자라서 겪는 그 고통과 괴로움은 해결하기가 점점 더 어려운 것입니다. 돈 가지고 해결 안 되니까 그렇죠. 그래서 돈 많고 지위 높아진 사람들이 때로는 가난하고 고생스럽던 옛날을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왜냐면 이 땅에 있는 자원만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그런 고난은 이기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커다란 시련과 그 고난이 겹치면 너무 힘든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죠. 제가 예수 믿기 전에 청년이었을 때 인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진짜로 들에 핀 풀포기 하나 가을철에 우는 벌레 한 마리 그것이 부러운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도 보면 말이죠. 주전 한 5세기에서 3세기 경이 히랍 철학의 전성기 입니다. 그리스 철학이죠. 그래 사실 그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기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뭔가 학문을 설명하려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고의 틀을 빌어서 설명해야 될 정도니까 그런데 인류 역사상 가장 자살률이 놓은 시대였습니다. 그 때가. 그래서 나는 답을 그렇게 찾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죽었을까? 나의 대답은 그것입니다. 2300-2400년 후인 내가 격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을 겪었던 것입니다. 왜 그러면 그들이 자살을 했을까?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죽은 것입니다. 다른 대답이 없습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 라고 하는 그 자체가 이 땅에 있는 자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인간이 오늘 이 시인이 경험한 이런 깊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시련과 고난과 그 외로움 속에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있게 될 때에 그의 영혼은 아주 곤고하고 사면으로 우겨 쌈을 당하게 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일단 이런 난관에 처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은 항상 자원의문제입니다. 병든 사람에게는 병을 고치는 자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물질이라는 자원이 필요하죠. 지위가 너무 낮아서 비굴해지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좀 존중히 사람들에게 여김을 받을 수 있도록 지위가 높아지는 일이 필요하죠. 그런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다 이 세상에 있는 자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무 외롭다. 수많은 친구들이 나를 에워싸고 술을 먹고 흥겨운 시간을 갖고 그래도 나는 외롭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라고 하는 자원은 미안하지만 이 세상에서 돈을 주거나 이렇게 사랑을 가장한 것들은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사랑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이 사람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오는 사랑으로부터도 메워지지 않는 그런 갈증이 있어서 누군가 영원한 사랑을 갈망한다. 라고 할 때 그것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허무를 직시하게 될 때 그 때도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은 결국은 보람, 가치라고 하는 자원입니다. 그것이 없으니까 허무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뿐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깊은 시련 속에서 육체는 물론이거니와 영혼도 같이 깊이 절망하며 그리고 자신의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 설 수없을 것 같은 그 깊은 고난의 때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원하는 것은 뭐냐면 주님이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하는 탄원입니다. 이 구원해 달라는 탄원입니다. 결국 이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이러한 자원으로 결핍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하나님께서 이 시인에게 공급해주셔서 이 시인으로 하여금 그러한 환난과 시련 속에서 벗어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과 하늘에 속한 자원들이 함께 결합이 되는 때가 많습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육신적인 질병이 걸려서 굉장히 괴롭고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불치의 병이 아니라. 현대 의학으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필요합니까? 돈이 필요해요. 그런데 그런 낙심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이 배신감을 받으면서 인생에 대한 외로움까지 함께 느껴서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그 깊은 질병 속에서 건져주실 때에 물론 하나님이 어느 날 기도의 응답으로 그 사람을 단번에 낫게 하셔서 고쳐주실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받을 수 없었던 도움을 뜻하지 않게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긍휼과 사랑을 입어서 치료를 받고 그리고 거기에서 낫게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과정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공급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공급되는 물질을 뛰어넘어서 하늘 자원들을 공급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놀랍구나.” 우리가 큰 것은 아니지만 작은 것들을 이렇게 받을 때조차도 “야, 진짜 한님의 사랑이 이렇게 놀랍구나.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고 계시는구나. 나를 정말 긍휼히 여기시는구나.”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계속해서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이런 종류의 구원을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전에 시인이 다다르게 된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선 첫 째로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가난하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이 슬프다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에서 “가난하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뭐냐면 자신이 처한 이러한 깊은 상황 속에서 자기를 스스로 건져낼만한 자원이 자기에게 없다는 고백입니다.
9.주린 영혼의 축복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편 107:9)
신자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기뻤던 때는 무엇이니, 무엇이니 해도 주님을 만나고 그의 사랑을 경험할 때입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이 오직 이 세상의 자원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의 밝은 빛을 주셔서 성령의 은혜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까 우리의 진정한 고통이 사실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의 눈앞에 발견된 것은 뭐냐면 우리의 주린 영혼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영혼에 굶주린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기 시작할 때 그 때에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닙니까? 우리는 매일, 매일 이 세상에서 끊임없는 고통과 그리고 삶의 허무를 봅니다. 저는 단 하루도 그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가. 그리고 정말 이 세상이 얼마나 소망이 없는 땅인가? 그래서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가오는 불행과 고통을 대비해서 보험에 들지만 그것도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주고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의 수고와 모든 근심의 멍에를 벋기고 우리를 받으실 그 날에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누리는 날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는 도저히 만족을 얻을 수없었던 그런 주린 영혼들을 만족하게, 만족하게 하시는 그 날을 바로 우리가 기다리고 사모하는 날이죠. 그런 그 하늘나라에서 맛보게 될 그 완전한 영혼의 만족과 그리고 심령의 참된 기쁨을 하나님이 만약 미래의 것으로만 내버려두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맛보게 하시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그 갈망을 유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목이 마를 때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그 물을 입에 축일 때마다 이 사람의 몸에서는 생수를 향한 더 견디기 힘든 이 육체의 갈망이 생겨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대한 보다 더 큰 사모함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미래에 우리들이 못 볼 하늘나라의 신령한 맛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경험입니다.
신자를 “성도” 라고 부르는데 사실 이 세상은 거룩한 성도들이 살만한 세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성도가 죄 많은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도로서 이 죄와 슬픔이 많은 땅에서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바라보지 않는 또 하나의 본향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적인 삶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끊임없이 그 본향을 사모하면서 삽니까? 우리가 끊임없이 그 본향에 대한 목마름을 가직하고, 이 세상을 적당히 멸시하며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그 행복을 더 갈망하고, 그 나라를 위해서 이 나라를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우리의 마음의 부패는 얼마나 심한지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 깊이 눌러 붙어 있고 웬만해서는 기도의 눈물로도, 말씀의 은혜로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치 상처가 난 곳에 딱지가 앉으면 그것을 미리 떼어보려고 손을 써서 잡아당기면 살점이 함께 묻어나오면서 찢어져 피가 나서 그래서 차마 그 딱지를 떼지 못하듯이 우리의 마음에 눌어붙어있는 세상에 대한 사랑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많은 눈물의 기도가 효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많은 삶 속에는 이러한 세상 사랑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들이 하나님을 향한 섬김을 더럽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서 우리의 내면의 깊은 목소리를 들을 수있어야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내면에 있는 깊은 목소리를 들어보면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떡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내 영혼의 견딜 수 없는 이 요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리고 그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영혼의 절박한 외침은 덮어버리고, 부지런히 자신의 육체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 앞에 죄 죽임이 없고, 진실한 성화의 삶이 없는 신자들의 모습니다. 그러니 영혼은 계속해서 굶주리고 목말라 있고, 그것들은 덮어놓고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극도의 자기 아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첨하면서 살아갑니다. 최근에 설교 속에서 새로 나온 용어가 “자기 아첨”입니다. 자기 아첨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 부인의 정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올곧음이 신앙적인 사고와 판단력이 살아있어서 그래서 자신과 영혼을 공격하는 죄의 모든 속임수와 부패한 욕망의 생각들을 감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해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이지만 스스로 그것을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자기 부인이 없이는 누구도 진실한 성화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대신 오히려 자기가 아첨을 하는 것입니다. 그 아첨의 대상은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영적인 속사람에 대한 아첨이 아니라. 육적 속사람에 대한 아첨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고, 죄의 소욕을 따라 살고 어둠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그런 더러운 육체의 욕망에 대해서 아첨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마셔도, 마셔도 목이 갈한 것처럼 육신을 위해서 아무리 봉사해도 이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통과 번뇌, 그리고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자신의 그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과 번뇌는 영혼의 주림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육체가 여러 날 먹지를 못해서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프고, 그러니까 배만 고픈 것이 아니라. 음식물이 들어가지 않으니까 눈은 어두워지고 손과 발에 힘이 다 빠지고 이 머리에 생각도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기력이 상실했는데 계속해서 먹을 것을 찾아다녀서 음식물을 입에 집어넣고 소화시켜야지 원기를 회복할 텐데 그 대신 화장만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예쁘게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예쁘게 칠을 했는데 왜 이렇게 내가 기운이 없을까? 최근에 나온 화장품으로 이렇게 예쁘게 발랐는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을까? 광대뼈가 튀어나와서 돈을 들여서 깎아내고 여기 살이 패여서 엉덩이에서 뜯어서 붙이고, 이렇게까지 하고 머리가 벗겨져서 가발까지 심었는데 왜 이렇게 온몸이 기운이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주 적적한 비유입니다. 그리고 더 미친 듯이 그렇게 자기 화장을 하고 하는데 해결이 안 됩니다. 영혼의 주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이 많고 부요하면 염려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물질이 많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또 다른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또 경제적인 문제도 없고, 또 건강의 문제도 없는 사람에게는 그들만이 아는 또 다른 인생의 고통과 고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삶의 허무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이런 삶의 허무 같은 것들은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풍풍하고 번영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허무를 많이 느낍니다. 특정한 나라를 거론해서 안 되었지만 저는 프랑스 영화를 잘 안 좋아하는 편입니다. 요즘은 프랑스 영화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지만 왜 그러느냐면 ( ? ) 같은 것 있잖아요. 스토리도 별로 없으면서 사람들 이렇게 눈에 초점 잃은 사람들 많이 나오는 영화 있잖아요. 보고나면 가슴이 정말 허전해요. 언젠가 한번은 진짜 영화를 보면서 진짜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저 사람에게 예수님을 좀 알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고민하면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는데 해결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빙빙거리고 돌려봐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은 주린 영혼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영혼의 주림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 이렇게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채워질 수 없는 그 공간을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두신 것입니다. 그것이 가득 찰 때 인간은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다운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고갈된 것입니다. 타락이전의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타락한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은 사라지고 사망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거듭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그 생명으로 다시 채워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성도는 다시는 그 사망에 의해서 생명이 빼앗길 수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이 전혀 없는 영혼의 굶주린 상태가 되었다가 우리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그 은혜가 한없이 밀려옵니다. 그러면 그 주린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 때에 그 행복은 이 세상에서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요?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만족이기 때문에 오늘 날도 그리스도인들이 그 처음 사랑을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가득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 자신입니다. 그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득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가득 채우시는 경험 속에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경험이 동반됩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들은 어쨌든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열심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열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신령한 은혜를 받은 사람의 숨길 수 없는 표증은 뭐냐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 혹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고민이 뭐냐면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그 사랑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커다란 고민입니다. 그 사랑 안에 사는 것이 그런데 이제 이런 사랑이 두 종류가 있는데 그게 뭐냐면 하나는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붓듯 특별한 성령의 역사로 확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입니다. 대게 처음 회심과 함께 경험하는 회심이 이런 초월적 사랑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사랑의 경우는 뭐냐면 내재적 사랑의 경험입니다. 이 내재적 사랑의 경험이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죄와 싸워 이긴 사랑입니다. 그래 이제 여러분들은 이해를 할 수 있겠죠. 초월적 사랑은 하나님이 어느 한 순간에 사람에게 확 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대게 첫 회심에서 사람들이 이런 초월적 사랑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 다음 신자가 경험하는 사랑은 대부분 죄와 싸워 이긴 사랑의 경험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죄와 싸워서 이기면서 자신이 성결해지면 성결해질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성결한 사랑이 우리 속에 뜨겁게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초월적 사랑만 기대하고 내재적 사랑은 발견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심을 하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또다시 초월적 사랑을 경험하는 예보다는 죄와 싸우고 진실한 회개의 삶을 살면서 내재적인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죄 죽임이 없이 우리들이 방종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그 사모하는 영혼은 뭐냐면 주린 것입니다. 주린 것을 모르는 영혼이 아니라. 자신이 주린 것을 느끼고 이제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자신의 갈한 영혼을 만족시키려는 외곡 된 방식을 버리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만족하시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은 그 은혜로 나를 만족케 하신다. 라고 하는 것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비유 가운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 부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곡식을 쌓아 두었으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랬습니다. 사실은 영혼은 그것을 가지고 먹고 마신다고 해서 즐거워하고 편안해 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부자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였던 것입니다. 영혼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질 때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 영혼은 비로소 만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사실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렇게 주린 영혼이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 ? )청교도가 그랬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영혼에게 아무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당연한 이야기 이지만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영혼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자가 아무도 없다. 고 한 사도바울의 고백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의 은혜에 가득 차서 영혼이 만족을 얻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그 은혜에서 기쁨을 얻고 있는 성도에게 고난이 닥쳤다고 칩시다. 그러면 아마 그 성도는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시련이 닥치면 그 시련이 설령 악마가 준 시련이라고 할지라도 그 시련의 칼끝으로 성도를 공격했지만 성도가 하나님의 섭리를 신실하게 믿을 때에 시련 속에 담겨진 악마의 칼끝은 그 성도를 파괴하는 대신 성도의 불완전한 부분을 깎고 다듬어서 결국은 그 시련 끝에 예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물질을 주시고 번영을 주시면 이 땅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그 성도는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길까요. 기도만 하고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섬길 수 없었던 일들을 위해서 전심으로 봉사하고 헌신할 것입니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겠죠. 그가 만약에 질병에 걸린다면 질병을 통해서 이 세상의 덧없음과 육체의 유한함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래서 썩을 몸을 벗어버리고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덧입게 될 영화의 그 날을 더욱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그 성도가 죽임을 당한다고 할 때 그는 아마 하늘나라를 사모하던 그 성도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결핍과 고통,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성도들에게는 나쁜 일이라고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정사나 권세나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이나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그를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겠죠?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게 하는 그 은혜가 우리 안에 없다고 한다면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나겠죠. 환난과 시련이 오면 주님을 원망할 것이요. 고난이 닥치면 배신할 것이요. 번영을 주시면 유혹에 넘어져서 범죄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 안에 살지 않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사랑 받으려고 하지 않은 성도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은 일이 일어 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우리에게 마음에 깊이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리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죽을 수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새벽마다 이른 아침마다 만나를 거두며 살았던 것처럼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도저히 살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은혜 안에서 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주님이 이런 주림을 면하는 놀라운 은혜를 누구에게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렇죠. 사모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모한다. 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에 스쳐가는 감정이 아니라. 집요하게 계속 되는 감정입니다. 이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하는 감정은 죄에 대한 욕망과 아주 유사합니다. 우리들이 어떤 죄를 짓기 전에 먼저 마음이 그 특정한 정욕에 꽂힙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강하게 끌리게 되고, 거기 딱 꽂혀서 그것을 빨아 먹고 싶은 간절한 욕구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영혼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쳐지나가는 것이면 우리의 영혼에 해가 덜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집요하게 꽂혀서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죄를 잉태하고, 장성해서 그 죄를 산출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지속됩니다. 똑같이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그 은혜를 사모하게 될 때에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정말 사모할 때는 그것이 마음에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게 고정 되어서 그래서 그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은혜가 떨어졌을 때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생각 안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될 터인데 진짜 은혜를 못 받으니까 힘들구나. 이런 생각을 안 할 리가 없죠. 그런데 그런 경우의 많은 생각들이 진짜 생각으로 떠다닐 뿐입니다. 그러나 진짜 영혼의 참된 회복이 올 때쯤 되어서는 그 생각이 떠도는 생각이 아니라. 집요하게 우리의 마음에 딱 꽂혀서 오랫동안 계속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조금 은혜를 주셔도 만족이 안 됩니다. 보다 더 큰 은혜를 갈망하게 되고 조금 변화를 받아도 그보다도 더 큰 변화를, 조금 변하를 받아도 그것보다도 더 간절한 변화, 조금 변화를 받아도 보다 더 완전하게 이르는 변화를 받고 싶어 하는 갈망들이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린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로 만족함을 얻게 될 때에 나타나는 영혼의 변화들입니다. 성경에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갈망에 있어서 수동적인 능동적인 면을 동시에 강조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갈망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넣어주신다고 하는 것과, 또한 사람이 신자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도록 성경에 의해서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갈망하라.” “하나님을 사모하라.”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라.” 수없이 성경에서 신자에게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망하는 마음을 넣어주시지만 갈망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갈망하는 마음을 넣어주시고, 사모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목마름을 넣어주십니다. 이 목마름 속에서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목마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목마르면 하나님이 오늘 저녁에 가득 채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이제 이런 궁금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녁에 목말라 하면 여기에 보내면 사모하는 자에게 영혼을 만족시켜주신다고 했는데 왜 오늘 저녁에 사모하면 오늘 저녁에 만족시켜주시지 않을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 침체에 빠진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는 때로는 낙심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얼마만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회복했는데 스스로 부패해져서 그 갈망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마음을 추슬러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조금 생겨났는데 갈망보다도 더 큰 죄의 욕망이 생겨나서 또 갈망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미끄러지기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 같은 죄인이 다시 하나님의 처음 사랑으로 충만해 진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는 약속 되어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자기 주위에도 그런 첫 사랑을 정말 회복하고 첫 사랑을 부러워하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설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죄와 싸워서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이제 낙심하고 실패할 때 그 때에 그 사람의 마음은 급격하게 굳어지고 그리고 미신적인 신앙에 빠지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시 이 더러운 죄의 즐거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하는 거죠. 왜 그러실까? 왜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기는 바라는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금방 우리를 만나주시지 않고 가혹하리만치 긴 시간동안을 목말라만 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보다 더 완전한 목마름으로 당신을 찾으실 때까지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그런 궁금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지만 오늘은 이 본문에 입각해서 한 가지만을 말씀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그 한 가지는 뭐냐면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자의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우리가 사모하는,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상당한 시간동안 유지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망가진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더라면 아마 선악과를 따먹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았다고 한다면 거기에서 영혼은 만족을 얻었을 것이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영혼의 만족을 얻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통해서 더 큰 만족을 얻으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타락은 예수만 바라보아야할 신자의 의무에서 이탈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이미 벌써 눈빛이 구도자의 눈빛을 잃어버리게 되고, 삶의 부패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 창조의 아름다운 목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탈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면의 세계가 모두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받은 은혜를 지키면서 살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는 신앙생활의 정체가 아니라. 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정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생각이지 정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지 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는 급속히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 순간, 그 아름다운 신앙의 자리에서 이탈할 때부터 마음이 다 흐트러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만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서 다시 제자리로 찾아가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가지고 우리를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성도들에게는 어느 한 순간 진실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매달려도 하나님의 은혜의 회복이 즉시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낙심하면 안 됩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시키시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당신을 사모하는 사람, 그 사람들이 비록 이전에 걸레와 같은 죄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주님은 그들을 무한히 용납하십니다.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문제는 죄가 많아서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가라져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이렇게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 주님 앞에 내 삶이 연납되기를 원하는 사모하는 마음, 하나도 없이 우리들이 형식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영역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이 행하는 신앙의 의무들,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하고, 교우들을 섬기고, 여러 가지 맡은 일에 봉사하면서 사실은 우리의 마음이 실리지 않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갈망이 없이 단지 일하며 개별적인 의무를 감당해 나가는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사모하는 영혼을 가진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든지 예배드릴 때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에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갈망, 내가 더 주님 앞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갈망, 그래서 주님께 사랑을 받고 내가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베어 있기를 원하는 갈망, 그래서 나는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내 인생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보람으로 사는 것. 그것이 성도의 생활 아닙니까. 정말 우리들이 갈망이 없는 신앙생활만큼 이 땅에서 정말 저주받은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그는 썩은 꽃과 같습니다. 형체는 한때 아름다웠지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잃어버리고 나면 다 썩어서 그래서 악취가 나는 꽃입니다. 그 나중은 추하고 더러운 것이 처음의 아름다움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그런 갈망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오늘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랑을 기억하고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시면서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우리를 진정으로 되게 하시고 싶으신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를 되게 하고 싶으신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렇게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고, 자기에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고 그 은혜의 부어주심을 방해하는 내 안에 있는 죄와 불결들을 미워하고, 그래서 분투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이 십자가는 지는 고통, 이런 분투함이 있을 때에 그 성도는 예수의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향기는 완성된 성도에게서 풍겨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고통하며 주께로 한걸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성오들의 삶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입니다. 그래서 아무 향기도 풍기기 않던 신자가 자고 일어나서 갑자기 향기를 풍기게 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날마다, 날마다 주께로 다가가는 생활을 통해서 그 향기가 풍겨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지 다만 그 은혜를 만들어만 놓고 누구에게도 나누어주지 않으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그분이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그 임마누엘의 은혜의 샘에서 우리들이 씻고, 먹고, 마시고, 배부르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고 그것 때문에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그것이 예수님의 눈물어린 갈망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너무나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너무나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로 없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값도 없이 거저 나누어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이러한 은혜를 잊어버리고 핍절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의 방식에 역행하는 삶입니다. 오늘날은 은혜 받을 만한 때이고, 생명수처럼 넘쳐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만약에 그 은혜에 주린다면 노아의 홍수 때에 물을 못 마시는 것과 같고, 마치 야곱이 애굽시대의 칠년의 풍년 기간 중에 창고에 쥐가 굶주리는 것과 같습니다. 빈부나 귀천이나 구별이 없이, 죄인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구별이 없이, 누구든지. 주님의 그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그 하늘의 생명을 절실하게 사모하는 사람, 내게는 지금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필요하고 내 영혼에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부어주시고 우리 안에 소생시키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내가 이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떠나서 그리스도께 속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그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사모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면을 두루 살피시며 간절히 사모하십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신앙 생활한 어른이 받지 못한 은혜를 어린아이가 받고, 성경을 많이 깨달아 안 연륜 있는 성도가 받지 못하는 은혜를 이제 처음 믿는 연약한 신자들이 받습니다. 교회에 유력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받지 못한 은혜를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 은혜를 주십니다. 왜? 하나님을 향한 사모하는 갈망은 그 모든 것 보다도 뛰어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우리의 영혼을 타일러야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세상을 사랑하느뇨. 너는 오직 너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라.” 낙심할 때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세상의 일로 근심하느냐? 담대히 눈을 들어 예수를 바라보라.” 타일러야합니다. 그리고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합니다. 우리는 공로 없고 우리는 하나님 앞ㅍ에 의롭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아들의 공로를 보시고 오늘도 우리를 거두어주시고 주님이 은혜를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구원해 놓으실 때에 우리에게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삶을 우리가 살 수 없사오니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도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요즘도 보면 낮에, 혹은 깊은 밤에 혹은 새벽에 나와서 성도들이 기도합니다. 교구별로 모여서 기도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교회 한 구석에 한가한 시간에 나와서, 혹은 새벽에 그 피곤한데 나와서 간절히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흐느끼며 간구하는 성도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정말 우리에게 얼마나 기도제목이 많은지 모릅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많이 해도 일어나면 기도하지 못한 것들이 마음속에 많이 떠오릅니다. 모두 은혜에 대한 갈망이 우리들에게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모하는 마음들이 사라지는 것이고 이런 은혜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의 마음이 녹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시선이 그분께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많은 것들은 대부분 잠시 지나는 것들입니다. 이것의 가치는 결코 우리의 영혼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우리의 인생에 형통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모두 휴지조각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사모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인색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는 분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정결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주님으로 가득 채우셔서 예전에 받지 못했던 더 큰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의 간절하고 사모하는 신앙생활을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번 진심으로 어린아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말고 정말 주님 한분만을 바라면서 그분 자신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주린 영혼을 충분하게 만족케 해 주셔서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살도록 그래서 이 땅에 살아있는 날 동안 주님을 섬기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계획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사모하고, 의지하고, 매달리는 그런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결심하고 제일먼저 회개해야합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하느냐면 사모함이 없는 신앙생활을 회개해야합니다. 그것은 나쁜 것입니다. 첫 째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미끄러지는 것이 나쁜 것이고 그다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렇게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 중에는 평생 새벽기도 작성하신 분들 있죠. 하나님과의 약속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약속해도 너무 육신이 연약해서 못 지킬 때도 있겠죠. 그렇지만 하나님은 다 내려다보시지 않습니까. 마음에 갈망이 없어서 내팽개친 것이, 아니면 정말 주님 앞에 분투하고 살아가는데 어쩔 수 없는 것이든지, 주님은 모두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회개해야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삶을 깊이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모한다. 라고 하는 것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을 갈망하지 않기 때문에 맛보는 세상과의 평화, 주님을 갈망하면서 주님 앞에 다가가기 위해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데서 오는 고통, 이것을 감수해야합니다. 자기 아첨으로 인해서 만족을 얻는 대신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고 고발하는 그런 자기 자신의 신앙의 양심의 외침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야지만 올바른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갈망이 없는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통탄해 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합니다. 그것을 고쳐야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합니다. 기도만큼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없습니다. 기도만큼 하나님을 향해 목마른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최상의 방식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경건한 시인들이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으며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찼을 때 그들이 무엇했습니까? 많은 사람을 만나서 하나님에 관해서 자기 지식을 자랑하기 보다는 혼자 조용한 곳을 찾아서 주님을 갈망하며 자신 속에 있는 이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주님 앞에 토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갈망하고, 혹은 실성한 사람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였고, 부자도 자신을 가난하다고 고백했고, 권세 있는 자도 하나님 앞에 자기는 궁핍하기 때문에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아뢰지 않았습니까. 기도 안한 것, 예배에 안 나온 것, 헌금 안한 것, 그것 말고, 갈망하는 마음이 없는 것, 그것을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건강하지 않은 상태를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그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10. 꺾이지 않는 간구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上)
우리들이 흔히 간절히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간절하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어디에든지 간에 이 간절함이 적용되어야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온전히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일에 있어서도 물론이거니와 오늘 분문에 기록된 바와 같이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그뿐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도 역시 이런 간절함이 그 의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깃들여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향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런 간절함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경향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간절함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유지한다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왜냐면 마음의 경향이 하나님을 향하여 흘러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 흐름을 따라 간절함이 보태어지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의 이런 경향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흘러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간절함이라고 하는 것, 자체를 자신에게 불러일으키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찾는 모든 삶에는 이 간절함이 관건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열렬해지지 아니하고 매사에 있어서 간절해지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의 그릇된 경향성과 다투지 아니하면 우리들이 온전한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특별히 이 장면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날 밤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던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이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고 또 하나님이 그렇게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죠. 그리고 이제 내일 이거나 아니면 같은 날 아침이면 십자가에 매달려서 자기의 피를 흘리실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피 흘리시기 전에 우리를 위해서 또 당신 자신이 지실 십자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기 전에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이 지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모두 쏟아 붓는 헌신적인 기도를 주님 앞에 드리셨습니다. 사실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쏟으며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처절하신 기도의 모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작한 기도가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그 때부터 지금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동산에 엎드린 이 순간까지 살아오신 예수님의 생애 모두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순간을 보면서 주님의 생애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서 간절한 생애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이셨죠. 그리고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는 약한 것이라고는 가지실 수 없는 분이었고, 그는 본체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인간하고는 다른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그 하나님 되심은 사람 되신 인성에 감추어져 있는 그런 신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연약함을 함께 그 육체 속에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찾고,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주님을 찾아가려고 할 때에 그 방해하는 모든 요인들을 경험하셨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죄 이외의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 들을 모두 짊어지셨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간절히 기도하신 것도 알고 보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시고 이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무시지도 못하시고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얼마나 마음을 녹이는 것 같은 기도였든지 예수님의 진액이 모두 빠져나가고 급기야 예수님의 흐르는 그 땀 안에 시뻘건 피가 함께 섞여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되셨고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하는 것도 경험하셨고, 간절히 주님을 찾는 것이 인간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그 영혼 안에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도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제사장이다.” 라고 묘사했습니다. 당신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모든 연약한 것들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입장에 서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언제나 큰 위로가 됩니다. 주님이 우리처럼 사람의 연약한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우리와 같이 연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하게 자신을 드리셨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고, 우리에게 격려와 그리고 헌신의 동기를 제공해 주지만 또 하나는 반대로 주님이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연약할 때에 주님께서 모두 경험하신 연약함이기 때문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신다. 라고 하는 사실도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 마지막 기도의 경험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할 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아오셨고,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단 한 순간도 아버지 없이 홀로 계신 적이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는 더욱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잔을 지나갈 수만 있다면 지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지만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고는 십자가를 지시고 잘 감당하기 위해서 오히려 능력을 구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 어느 한 순간도 고난을 받지 않으시는 시간이 없었지만 특별히 이 시점에는 특별한 고난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지만 이 때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게 되었다.” 고 말씀하실 정도로 이 하나님 앞에 커다란 은혜가 필요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가 필요할 때 주님이 하신 일은 첫 째로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 은혜를 향해서 갈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 갈망은 여러 삶의 여러 방면에서 숨길 수 없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우선 말씀을 듣는 태도가 다를 것이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은 또한 섬기는 것도 남다를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의 은혜가 간절히 필요하면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간증할 때에도 그의 간절함이 묻어날 것이고, 은혜가 필요한 상태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되면 그러한 갈망의 증거나 삶의 모든 방면에 나타나지만 특별히 기도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잠시 당신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이 고난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마지막 순간을 기도에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 라고 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행하셨던 사역을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무지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사역도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역이 없었고,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제 이 세상과 작별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영혼들, 병든 자와 그리고 무지한 자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과도 이제 작별하실 예정이었습니다. 마지막 꺼져가듯이 얼만 남지 않은 자신 자신의 생애를 병든 자, 아파하는 자들을 하나씩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고치시다가 죽음을 맞이하셨다면 예수님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사마리아와 그리고 먼 지방에서 예수님이 아니면 복음을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앞두고 피를 토하듯이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고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셨다면 우리가 그분의 그 죽음을 위한 그 마지막 준비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다시 예수님께로부터 생생한 목소리로 천국 복음에 대해서 배울 수 없는 제자들, 아직은 무지하고 어두운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평소처럼 가르치시다가 생애를 마감하셨다고 할지라도 아마 예수님을 비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셋 중 어느 것으로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최후를 마치셨어도 그분의 생애는 너무나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묵상해봅니다. 죽음 진전까지 피를 토하듯이 설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죽임을 당하시기 직전까지 병든 자를 어루만지시며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시는 모습, 죽기직전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그 비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 교사이신 예수님, 어느 장면도 일생을 당신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하여 살아온 예수님께 적합한 그림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던 이 세 가지 사역을 계속 하는 것으로 당신 생애를 마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은밀하게 계속하시던 그 사역으로 다시 복귀하심으로 당신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을 빛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하나님 앞에 오래도록 간절히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서 혹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곤궁한 사람이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핍절하고,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말합니다. 만은 그러나 그 모든 간증과 고백이 있어도 그가 실제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로 은혜를 간절히 찾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배가 부른 사람입니다. 아직도 무엇인가 하나님 이외에 믿는 것이 있고, 무엇인가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러한 부분들이 그의 마음 안에 남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주목하실까요? 유능하고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런 심정이 없는 사람들, 주님 앞에는 중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오늘도 사면을 두루 살펴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을 또한 하나님도 찾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은 반드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들, 자신이 놓여있는 삶의 환경에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원만으로는 도저히 이것을 극복할 수 없고 그리고 무엇인가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절대적인 자원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정말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자원만으로 오늘의 이 상황을 이겨나가고 여러분들을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 부르셔서 오늘 이 삶의 자리에 두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을 충분히 이루어 가실 수 있게끔 준비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해야 하고, 그 갈망이 진실한 것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 기도의 방식이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이 간절하다. 고 하는 이 표현이 오늘 세 가지고 나오고 있는데 힘쓰고, 그리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고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첫 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갈망이 있는 사람은 영혼으로 자기의 육체를 복종시킨다. 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힘을 쓰셨다. 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육체의 힘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기 자신을 쏟아 놓을 때 육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힘을 소진하는 일 없이는 하나님 앞에 절실하고 간절한 기도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영혼은 그렇게 자기에게 복종하는 육체를 통해서 힘을 얻게 되고 육체는 그렇게 쏟아 붓는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 서를 보면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나 간절히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볼 수 없을 때에 병이 나게 됩니다. 시편에 보면 이러한 표현들은 더욱 섬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했기 때문에 육체의 많은 부분들이 그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계시죠.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할 때 시인들의 눈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여졌고,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기 때문에 밤이 늦도록 깨어있었고,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기 때문에 그들의 손은 높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간절히 갈망하기 때문에 밤에 자다가 자신의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보면 육체가 쇠잔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어떠한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육체의 게으름을 복종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온전한 신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가 어떠했습니까.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잡히시기 전날 밤 까지도 예수님은 고단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이제 더 바칠 힘이 어디에 남아있었겠습니까. 병든 자를 섬기고 연약한 자를 돕고 무지한 자에게 복음을 가르치시고 그리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육체의 짐을 모두 소진하면서 살아오신 예수님의 그 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한 순간에 이르게 되자. 육체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예수님의 영혼에 복종되었고, 그래서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간절한 영혼의 열렬함에 따라오면서 육체는 힘을 쏟으면 하나님을 찾는 그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참 너무 안타깝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거나 혹은 편지를 받아보거나 여러 경로를 통해서 보면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고 싶어 합니다. 진실합니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도 올바릅니다. 그리고 자기의 부족도 압니다. 그래서 절대로 교만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향해서 거만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진실합니다. 그리고 또 정말 참 신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참된 신자가 되어 싶어 합니다. 그리고 간간히 기도 속에 눈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약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맥스루케이더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분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당신이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받으신 후에는 하나님이 결코 있는 모습 그래도 있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어떻게?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닮는 것
당신을 닮기까지 당신을 다루십니다.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시죠. 이것 밖에 모습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되지만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너무 가슴 아프지만 지난날들을 불 충성하게 살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잘못된 일들을 다시 뒤집을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내가 이런 사람일뿐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주님이 받으시지 않으면 내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받으시죠. 그러나 맨 날 그 찬송만 부르고 있어서만은 안 됩니다. 왜냐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살든지 계속 하나님이 나를 받아달라고만 얘기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지만 받으신 후에는 당신의 형상을 이룰 때까지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의 육체를 그 영혼의 뜨거운 갈망으로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진실해요. 그리고 마음이 정해져있습니다. 그리고 방향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때요. 육체를 다루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육체를 장악하고 영혼이 원하는 데로 육체를 자신과 하나 되게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계속 반복해서 미끄러지고 실패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육체가 영혼이 육체를 다루는 법을 알아야 하는데 반대로 죄 된 육체가 신령한 것에 욕망을 가지고 있는 영혼을 향해 거시리고 저항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성화에 있어서 진전은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갈망에 완전히 복종된 예수님의 육체를 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그야 예수님의 육체에는 죄가 없었으니까 그러셨겠지. 그렇게 말할 수 있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혼을 거시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성령님을 우리 안에 주셨잖아요. 그래서 힘쓰고 애써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영혼으로 그 육체를 굴복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간절한 갈망이 여러분 속에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육체가 계속 저항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영혼의 뜨거운 갈망이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육체를 굴복시키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 말이 쉽지 정말 어렵죠. 이번에도 케나다 두 군데 집회를 하고 왔는데 얼마나 힘이든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도 그 낮과 밤이 바뀌면서 비행기 안에서 절대로 잠 못 자는 사람인데 그러면서 가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죠. 여기에서 잘 시간이 거기에서 일하는 시간이고 거기에서 일하는 시간이 여기에서 잘 시간이고, 뭐 몸이 어떻게 그 시간하고 맞춰야 될지 모르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약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연약하니까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두 교회 집회에서 정말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커다란 은혜를 하나님이 부어주셨습니다. 그렇게 큰 은혜를 주셨으면 큰 목소리로 씩씩하게 보고를 하지 왜 그렇게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너무 연약합니다. 그런 연약함을 그대로 가지고 영혼으로 육체를 굴복시키며 산다. 라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에게 고난을 산출합니다. 왜? 육체니까. 은혜 받아도 육체니까. 나는 말씀 전하러 가면 그 교회에서 빼놓지 않고 예배시간마다 하는 기도가 있잖아요. “강사 목사님 절대로 피곤하지 않도록 주님이 지켜달라고” 그러는데 그 기도를 들을 때마다 속이 참 보입니다. 아마 이제 부흥회 끝난 다음에는 절대 그런 기도 안 할 것입니다. 부려먹으려니까 이제 그런 기도를 간절히 하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정말 우리 육체가 얼마나 연약한지 모릅니다. 그 육체를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굴복시킬 때 그 무거운 이 노도의 짐을 육체가 그대로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그 하나님께 “절대로 피곤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사실 그 기도가 응답될 가능성이 별로 있는 기도입니까.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절대로 피곤하지 않고 안 먹어도 배 안고프고, 아무리 피를 쏟으면서 설교를 해도 절대로 생생하고, 그런 것이 어디 창조섭리에 맞는 것입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기도는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의 육체가 그렇게 영혼에 굴복하며 헌신할 때 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어렵죠. 그런데 그 대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며 살아가는 이 길이 고난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말해 주어야합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주님의 생애를 생각하세요. 저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렇게 육체를 영혼에 굴복시킬 때에 육체를 가장 확실하게 굴복시킬 수 있는 그 무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나처럼 이렇게 섬길 때에 이렇게 육체가 고단하셨겠지. 이렇게 쉼이 필요한 순간이 그것을 거절하고 하나님 앞에 내게 지워진 의무를 감당하려고 할 때 주님도 나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셨으니 나보다 조금도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아니하시고 지금 내가 겪는 모든 고통을 겪으셨겠지. 그리고 그렇게 훌륭하게 감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가셔서 칭찬과 상급을 받으셨지. 그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난 속에서 자신의 고난을 잃고 그 속에서 이 세상이 얼마나 철저히 소망이 없는 곳이고 그리고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유한한 육체인가 하는 것을 동시에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을 영혼의 열망에 굴복시켰더니 육체가 굴복하는 것과 함께 우리의 영혼이 정결케 되어지는 변화까지 함께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이 세상과 육체를 향한 적절한 미움을 갖고 살지 아니하면 결코 그 하나님을 향해 갈망하여야 할 순간에 자신의 게으른 육체를 복종시키지 못한다. 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 안 남은 우리의 생애, 그리고 얼마 안 남은 이 금년에 나는 여러분들이 진실합니다. 그리고 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약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좀 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영혼의 열망으로 육체를 복종시키기까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예수님의 이 기도는 간절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영혼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님이 그렇게 연약한 처지에 계셨고,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의 은혜가 필요할 그 순간에 육체가 기도하시려는 주님의 열망에 부흥하면 부흥할수록 예수님이 영혼은 육체의 헌신을 한발 더 앞서서 나가셨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더욱 간절히” 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말에는 둘이지만 히랍어 성경에는 한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 ? )이것은 비교급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엑크테이노 히랍어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히랍어에서 “엑크” 어디, 어디로부터. 어디, 어디에서부터. 라고 하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고, “테이노” 라고 하는 단어는 이렇게 손 같은 것을 쭉 뻗다. 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엑크테네스 라고 하는 형용사. 간절한 혹은 간절히 라고 하는 이 말의 의미는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쭉 뻗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가 사도행전 12장 5절에서 사용되었는데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해 간절히 빌더라.” 할 때 그 “간절히” 가 바로 엑크테이노 라고 하는 단어에서 변형된 부사를 사용했습니다. 거기에서는 원급이 사용되고 여기에서 비교급이 사용된 것입니다. 쭉 뻗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인가 힘 있는 것이 쭉 뻗으려고 할 때에 장애물들이 있어도 게으치 않고 쭉 뻗어나가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히랍어 단어에서 “간절히” 라고 하는 낮말이 오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최초의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자극하면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간절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 간절함이 유지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쭉 뻗지를 못하고 무엇인가 은혜에 대한 갈망은 생겼는데 장애물을 만나게 되면 거기에서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멈추는 것은 엑크테이노가 아닙니다. 멈추지 않고 그런 장애물이 있는데도 쭉 뻗어나갈 때 그것이 바로 엑크테이노 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간절히” 라고 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불러일으켜지고 그리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면 우리가 알기 전에 먼저 우리의 죄가 그것을 감지하고, 사단이 그것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의 육체가 이어서 그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죄가 그것을 감지하고, 죄가 그것을 감지하게 되면 그 은혜의 번성함을 통해 자기가 죽임을 당할 테니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인가 방책을 마련해야 될 것이고, 사단이 그것을 알게 되었으면 우리를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죄를 보호해줘야 합니다. 그렇잖아요. 우군은 없습니다. 신자가 은혜를 받을 때 그렇게 죄에게 우군은 없습니다. 온통 적군에게 둘려 싸여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유일한 우군이 있습니다. 게으르기 좋아하는 육체, 우군입니다. 그것을 손잡으려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은혜를 받았어요. 진짜로 받았어요. 수련회 때 받았고, 사경회 때 받았고, 주일 예배 시간에 받았고, 구역 공부하다 받았고, 하여튼 분명히 받았어요. 은혜는 분명히 받았어요. 그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것을 잘 간직해서 큰 은혜로 발전시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큰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것을 간수하지 못해서 소멸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은 부싯돌로 탁 하고 불을 켜서 수 없이 하다가 간신히 불씨가 떨어졌는데 그것을 잘 간직하고 호, 호 불면서 큰 불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고, 불이 펄펄 붙는 장작을 몇 개나 가지고 불을 일구기 시작했는데도 그 아궁이를 관리를 잘 못해서 다 그 불이 사위어서 불씨조차도 남지 않게 되는 경우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실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에 오신 것은 사실이지만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제자들이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죠. 사실 우리들이 은혜의 원리를 떠나서 순수하게 창조섭리의 정신에서 인간의 육체만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거기 엎드려서 잔 제자들이 비정상이 아니라. 거기에서 피를 쏟으면서 예수님이 비정상 아닙니까. 얼마나 고단했으면 잤겠습니까. 그 동안에 놀았겠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러면 같은 육체로 보면 예수님도 거기에서 잠드실 수밖에 없는 그렇게 피곤한 육체로 자신을 소진하면서 살아온 날들이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보인 그 차이는 뭐냐면 제자들은 하나님 앞에 예수님이 그렇게 부탁하시니까. 그렇게 부탁하신 적이 그렇게 많이 않잖아요.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너희들 마음에는 원이 있구나. 너희들 마음은 내가 이해한다. 진실해. 그리고 예수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고 싶어.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고 싶어. “마음에는 원이로되” 그다음에 나오신 말씀이 “육신이 약하도다.” 마음에는 원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차이가 뭐냐면 제자들도 마음에 원이 있었고 예수님도 마음에 원이 있었는데 제자들은 게으른 육체에 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육체를 이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쏟아 부으며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제약의 요인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그 간절함은 그 모든 장애들을 뚫고 계속 뻗어 나갔고, 예수님의 영혼의 상태가 그러했기 때문에 자기를 바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리고 그다음 날 짊어지신 십자가에서 능히 승리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에 모두 패배하고 도망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간절함이 없이 우리들이 신앙생활 해 온 때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간절함은 장애를 극복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간절함은 도저히 그 일을 이룰 수 없도록 방해하는 여건들을 물리치고 최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원들을 성취하게 하는 커다란 능력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육체가 약해서 우리의 진실한 결심을 수행하지 못할 때 마다 이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멸시와 욕을 당하고 모든 고난을 받으신 피곤한 그 육체를 가지고 당신 자신의 모든 진액을 쏟아 부으며 고난의 십자가를 준비하고 계신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정말 이런 종류의 십자가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아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공급해주시는 능력보다 자신 안에 있는 연약함을 신뢰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찾지 않으십니다. 약하죠. 그리고 정말 질그릇 같이 깨지기 쉬운 그런 존재입니다. 갈 때는 비행기를 갔는데 한 좌석도 없을 정도로 사람이 꽉 찼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옆에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 앉아 있었습니다. 별로 운이 안 좋을 때는 엄청나게 뚱뚱한 노랑 냄새가 나는 외국인이 타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좌석이 가운데 있으면 양쪽 배가 허리를 눌러요. 그러면 진짜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어린 학생이 있어서 편히 갈 수 있었는데 집회 끝나고 너무 힘든데 정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나 봐요. 내 옆에 세 자리가 비었어요. 그래서 누워서 왔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갈 때는 내려서는 너무 힘들었는데 그렇게 누워서 오니까 공항에 내렸는데 정신이 아직도 쇠락하고 한 3일 정도는 한 번 더 집횔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육체가 간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합니다. 그리고 연약합니다. 그런데 환경이 언제든지 그렇게 편안함을 제공해 줄 수 있으면 좋죠. 뭐 나쁠 것이 뭐가 있겠어요. 돈이 많아서 의자 한 세 개쯤 사서 쭉 뻗고 매일 누워서 다니면 뭐 나쁜 것 뭐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일생을 살다가 보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의 한계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의 욕망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모든 환경에 의해서 우리가 철저하게 섬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흔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보이신 그 모본을 생각하면서 힘닿는 대로 우리 자신을 이기며 주님께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리며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해서 헌신된 삶을 살았는지는 사람은 모두 알아주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하나, 하나를 기억하시면서 그러면서 우리를 기억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참된 신자답게 살아가고 좋은 신자로서 우리 주님을 섬기는 방법 가운데 지름길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2000년 전에도 십자가를 진 성도들이 있었고 그들이 십자가를 졌을 때는 모두 아팠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또 다른 십자가가 있고 그리고 그 십자가는 언제나 아픕니다. 통증이 없는 십자가. 자기 복종이 필요 없이 저절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되는 지속적인 헌신,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가치 있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 어려운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을이 깊습니다. 이런 때가 되면 마음 한 구석이 언제나 시리죠. 왜냐면 만물이 다 열매를 맺는데 연초에 결심한 것도 많고 새운 뜻도 많은데 돌아보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어떤 의무를 감당함에 있어서도 온전함이 결핍된 채 마치 수확이 적은데 그것도 수확해 놓고 보니까 열매가 충실하지 않아요. 이맘때쯤 되면 그런 심정이 되지 않습니까.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날들이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흘러갔는데. 그래서 용서를 구하고 오늘부터가 우리의 날입니다. 어제는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육체의 게으름을 영혼의 열심히 굴복시키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이 썩을 장막을 벗은 후에 우리가 육체의 밖에서 주님을 보게 될 것이고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덧입을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조금만 더 참고 믿음 생활 하셔야합니다. 곧 주님이 부르시지 않겠습니까. 그 때까지 잘 참고 인내하면서 처음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 안에 시작하신 그 아름다운 소명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11. 거기서 다시 찾는 하나님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 날에 네가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신명기4:30)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인생이 나누어지지 않는 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그 두 가지가 나누어지는 사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의 신앙은 가짜라고 우리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시대의 신앙생활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삶 속에서 신앙 때문에 고뇌하는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발에 맞는 신을 신는 것처럼 신앙을 가진 것이 편안하다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더 이상 변화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주 온전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거짓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향기는 신앙을 가지고 자신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고뇌하고 눈물 흘릴 때 그 때에 진정한 신앙의 아름다움이 있고, 거기에 신앙의 향기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신앙의 향기가 발하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주 향기롭고 아름다운 그런 인생이 되게끔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래에 환난을 당할 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떠나와 마지막 가나안을 정복하고 긴 역사를 이어가는 동안에 가장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 때였습니다. 이 때는 광야의 여정을 모두 마치고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120세나 되는 노고를 이끌고 이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온 노 종 모세의 설교를 유언적 설교를 듣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패역하고 교만해서 광야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던 백성들이었지만 이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하나님께 꼭 붙어있는 좋은 사랑의 때였습니다. 그랬는데 바로 그 아름다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다음에 가나안 때에 들어가서 후일에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그 환난을 당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바로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고 그들이 우상을 섬기게 된 것은 하나님만을 오로지 사랑해야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보다는 자기 자신의 행복을 사랑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는 말을 듣습니다. 사실 왜 세상을 사랑하게 됩니까? 왜 하나님 때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대신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그들이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 한다. 기 보다는 세상을 사랑하는 이유가 바로 자기 사랑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은 그 무엇인가를 주어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신자가 되었음에도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모든 타락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동물들의 자기 사랑은 엄격하게 자기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는데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호랑이나 맹수들의 위협을 사람들이 이야기 하지만 배가 부르면 절대로 호랑이나 사자 같은 짐승들이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단 예외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낄 때 그 때는 공격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사랑은 다릅니다. 인간의 자기 사랑은 그 이상의 아주 높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부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기 사랑이야 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말한 자기 사랑, 즉 “아모르스위” 라고 하는 자기 사랑은 바로 이처럼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 이상의 큰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뭐냐면 자기 자신이 인생에 있어서 최종적인 가치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종적인 가치의 자리는 인간이 앉아야할 자리가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만이 거기에 앉으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지를 못하고 이방신들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이방신이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실 수 없는 어떤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 자기 사랑 때문에 그렇게 이방의 신들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 때문에 그들을 환난을 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 당신의 자녀로 부를 때에 우리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지 개의치 아니하고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그것만 회상하면 참 눈물이 납니다. 그렇죠.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전하듯이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캐물으신 때가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가 구원 받기를 간구하였을 때 마치 취조하는 형사가 우리를 심문하듯이 우리의 지나온 죄에 대해서 캐물으신 때가 있습니까? 상처 받은 사람은 상처받은 그대로 실망하고 엎드려진 사람은 엎드려진 그대로, 하나님께서 받으셨죠.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시고는 그 사랑과 은혜의 힘으로 우리가 순종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사람 되어 주님 앞에 날마다 가까이 주님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열심히 포기하지 않는 열심히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위해서 애쓰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환난을 만나게 되고 그 환난 속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의롭다. 그리고 내 양심의 스스로를 책망할 것이 없다. 라고 하는 확신이 없을 때에는 항상 환난을 당하면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눈을 떠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못 살고,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계셔야할 최고의 가치에 우리 인간이 그 궁극적인 가치가 되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참으시지만 그러나 반드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환난을 주십니다. 불순종하는 자들도 형통할 때가 있다고 여러분들은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의 눈과 같은 것입니다. 큰 폭풍이 불면 작게는 50킬로에서 크게는 한500킬로미터 될 때까지 태풍 한 가운데에 들어온 바다는 그림 같이 고요합니다. 그런데 그 원 밖에서는 큰 폭풍이 불 것입니다. 폭풍의 눈이 점점 좁아지거나 이동을 하면서 폭풍의 가상자기에 배가 들어가게 될 때에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풍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반드시 환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내적인 한난일 수도 있고, 외적인 환난일 수도 있고, 두 가지를 함께 동반한 환난일 수도 있습니다. 큰 환난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 때 신자는 종종 자신의 죄 때문에 그 속에서 양심의 강력한 송사를 받습니다. 이 양심의 기능은 두 가지인데 우리를 죄 있다고 우리 자신에게 고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죄는 이러한 환난을 당하기에 적합하다고 정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 이 양심은 우리를 송사하고 정죄할 때 율법을 사용해서 우리를 정죄합니다. 율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동시에 인간의 마음에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안할 때에 하나님을 버리고 제멋대로 살았던 것에 대해서 깊이 가책을 느낄 때에 그래서 환난을 만날 때에 양심은 우리를 송사하고 정죄합니다. 그 때에 신자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불쾌하신 나머지 자신에게 복수하고 계시다고 생각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물론 말로는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불순종과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복수하고 계시다. 라고 하는 느낌을 정확하게 받게 됩니다. 기도할 때 느껴지는 차가운 거절감과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읽어도 아무것도 깨달음이 없는 그 어두운 영혼의 밤을 지나게 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가 사는 동안에 가장 커다란 축복은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 지는 것, 그리고 설교를 들을 때에 그 말씀이 가슴에 깊이 찔려서 나를 고치게 하고, 변화시켜주고 새롭게 하는 것 이런 것입니다. 이것이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21살에 회심해서 이제껏 예수님을 믿으며 목사가 되어서 이 길을 걸어왔지만 심지어는 목사가 된 후에도 6개월씩, 7개월씩,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음성이 거의 들리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그 고통과 목마름은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하나님의 말씀을 펴면 하나님께서 늘 말씀해 주시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모두 구조가 똑같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모두 구조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깨닫는 바가 있고, 내 마음에 눈물이 흐르고, 설교를 들을 때 그 말씀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인 것처럼 들릴 때 그는 사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주신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그런 모든 것들이 다 그치고 그리고 큰 쓰라린 환난이 폭풍처럼 밀어닥칠 때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깊이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 하소서.
어디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도와주소서.
순종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 순종하면서 그것이 기쁜 성도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믿음이 연약해져도
미리 예비한 힘을 주시고
위태할 때도 안보하시니
주의 능력 있는
그 팔을 의지해
그래서 깊이 순종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미래의 일이기는 하지만 순종하지 못하죠. 그래서 광야의 고난의 길에서 사랑했던 하나님을 모든 것을 갖추게 되고 번영이 찾아오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죠. 하나님이 환난을 보내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이 옵니까? 환난 가운데 있습니까? 의로운데도 내가 욥과 같이 환난을 당한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깊이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나 정죄에 빠지지는 마십시오. 내게 있는 어떠한 결함, 내게 있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하지 못한 그 어떤 것이 이 환난의 원인이 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 깊이 여쭈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죄가 생각나거든 하나님 앞에 즉시 고백하십시오. 주님은 의로우시며 나는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함께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타락과 함께 회복을 하나님이 동시에 예고하십니다. 그 환난을 많이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이 “돌아온다.” 라고 하는 것은 참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전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 하나가 있습니다. 전도사 때인데 할아버지 목사님이 어느 날 주일 예배를 인도하시는데 평소 그분이 그런 분이 아닌데 예배 시간에 한없이 찬송을 부르시면서 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찬송이 뭐냐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그 찬송을 쭉 부르시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너무 감동을 받으시니까 두 번째 또 그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그 50이 넘어서 교회를 개척해서 그 이층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자매님이 연세는 많으시지만 그래서 이제 권찰이 되고, 집사가 되고, 그렇게 해서 그 교회에 처음 권사로 세우는 때에 저도 기억이 납니다. 굉장히 열심이셨습니다. 하여튼 봉사하는 일을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틈만 나면 떡을 해서 성가대원들을 먹이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분이 교회에서 이제 권사가 되어서 잘 봉사하다가 무슨 시험에 들었는지 권사까지 된 사람이 신앙에서 실족해서 다른 교회에 간 것이 아니라. 아예 교회를 안 나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알기로는 한 3년 이상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권하니까 그 마음이 돌아서서 다시 그 예배당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릴 때 그 무뚝뚝하기 짝이 없던 그 할아버지 목사님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을 부르고 흐느끼면서 축도를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래 하나님의 집에 있는 사람들보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성경 여러 곳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중에 가장 신구약을 통 털어서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그 아들의 귀향, 그리고 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실 거기에서 주인공은 돌아오는 아들이 아니라. 집에 변함없이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 탕자는 바로 좁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그리고 또 넓게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우리 모든 인간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마치 생명처럼 사랑하던 자식이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기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올 때에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그 마음이 얼마나 기쁘신지 그 죄인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에 그 하나님의 마음의 기쁨은 그 죄인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에 하나님을 아프게 하였던 것을 잊어버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 탕자의 비유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아들이 돌아왔어요. 아들은 과거에 대한 생각을 꽉 차서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집에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그저 품꾼중 하나로 생각하고 밥이나 먹여주시면 아버지의 집에서 그저 종처럼 일하겠습니다.” 아버지가 그 말에 대해서 아무 대답도 안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귀담아 들을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고 그리고 큰 잔치를 열어서 하는 말이 “이는 죽었다가 살아온 내 아들이라.” 그렇게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예전에 재산을 갈라 아버지를 등지고 홀연히 다른 나라 땅으로 떠난 그 아들 때문에 아파하고 분노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까? 읽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죄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자기의 불순종하는 고집 때문에 깎여지지 않는 신앙의 인격 때문에 고난과 시련을 많이 만났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과거의 모든 죄를 불문에 붙이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로만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로만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마음을 먹는다고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자행자지 하면서 사는 인생의 끝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주님의 품을 떠나서 자기의 마음대로 사는 인생의 마지막 끝이 어떻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까? 죄와 어두움과 하나님과의 단절과, 고통과, 견디기 힘든 시련, 미움과 원망, 이런 것 이외에 거기에 무엇이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비록 밤길을 걸어서 수요예배에 왔지만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그 품에 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잃어버린 자는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습니다.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곤고합니까? 환난을 만났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앞에 고집부리고 불순종하던 생활, 자기 마음대로 인생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던 거기에서 돌아서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돌아오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그렇게 돌아오는 자들에게 기대하는 삶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난 사람을 정의할 때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 열심히 봉사하다가 쉬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 하면 다시 교회 출석 잘 하는 사람, 그리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는 사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시는 사람의 삶의 모습은 단순히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전부, 우리의 전 인격을 통해서 섬김을 받기를 원하시고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돌아온 다음에는 그다음에 그가 정말 하나님 앞에 돌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야합니다. 그 입증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삶입니다. 이 청종한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꼭 그렇게 할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기울여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무슨 발표를 기다리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자기 이름이 그 방송에 나오기를 고대하던 그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병원에서 순서를 기다린다든지 그런 때 어떻습니까. 이름을 부르면 즉시 일어나서 달려가서 자기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받으려고 하겠죠. 그런 태세로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을 말씀을 듣는 것이 바로 청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이라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 어두운 세상을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있을까요? 어제는 은혜가 충만했지만 오늘은 말할 수 없이 영혼이 고갈 되는 것 같고 건조해서 견딜 수 없이 갈급해지기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입니다.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그런 일들이 언제나 있기 때문에 누구도 이 성화의 길을 걸어가면서 이것이 다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이겼다. 그리고 충분히 승리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두 가지를 통로를 끓어놓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우리의 소원을 올리는 기도의 줄을 끊어놓는 것입니다. 기도의 줄을 끊어 놓으면 우리들의 기도가 간절해 질 수 없고, 열렬해 질 수 없고,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없으니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공격해서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통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는 통로를 사단이 끊어놓는 것입니다. 한 3-4개월만, 아니 3.4개월도 필요 없습니다. 한 몇 주만 하나님의 말씀에 어떠한 감동도 없이 여러분들이 살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기도도 사라집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적 작용입니다. 그래서 기도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신령한 세계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지만 이 기도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열어주는 것이 뭐냐면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춰서 우리에게 신령한 하늘의 양식에 대한 목마름과 간절함이 생겨나게 되면 기도도 간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목사님 전혀 기도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기도 하려고 애쓰지 말라. 제가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잘 다스리면서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들어라. 그러면 말씀을 쭉 듣는 가운데 깨달음이 오면 깨달음이 와서 내 마음에 감화를 줄 때에 이 얼음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녹으면서 그러면서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유를 한번 해 봅시다. 큰 펌프를 지하에 박았는데 아직 거기 땅이 얼어서 얼음이 가득 있습니다. 아무리 펌프질을 해도 물이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펌프질을 하면 물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씀의 통로를 사단은 계속 끊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부터 어떤 빛도 받지 못하고 그 말씀에 깊은 은혜와 감화를 받지 못할 때 잠시는 기도가 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수원이 메마른 곳에 파이프를 대고 물을 길어 올리는 것과 같이 잠시는 기도가 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결국 기도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늘 감화를 받아야 하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가 있고, 요즘 하나님의 말씀을 펴면 내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많이 주신다. 이러한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든다면 여러분들 자신의 마음을 잘 관리해야합니다. 요즘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아침에 나와서 마당에서 성경을 펼치고 조용히 읽거나 아니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같은 책을 펼치면서 우리의 구언의 드라마를 쭉 묵상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십니다. 비도 안 오고 끈적거리면서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자근자근 하게 다가오는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성경을 묵상해보세요. 다 말씀을 읽고나면 다시 기도하러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정도로 심령이 깊이 젖어옵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금방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들이 밤길에 촛불을 켜고 이동할 때 촛불을 켜서 이렇게 들고 이렇게 이동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가려서 왜? 촛불이니까 바람이 불면 꺼지기 쉬우니까 우리 안에 있는 은혜도 그렇습니다. 많은 세상으로부터의 유혹, 내 안에 있는 죄의 욕심, 이런 것들이 계속 바람이 되어서 끌려옵니다. 그것을 잘 간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제일 가슴이 아픈 것은 뭐냐면 말씀이 너무 어렵다. 그럴 때 그리고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럴 때 그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나는 10년 넘게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해 오면서 끊임없이 기도하며 여러분의 영혼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살피려고 노력한 적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라는 마음을 가진 때는 없습니다. 설교자는 요리사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아픈 것을 여러분 자신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러죠. “목사님 제게는 위로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여기가 무슨 부패 식당인줄 아십니까? 여기는 병원입니다. 나는 같이 약국이나 병원에 가도 잘 난척 하는 사람들 제일 싫어합니다. 자기가 약국에 가서 조제 다합니다. 뭐 몇 알 하고요. 또 물약은 뭐 주시고요. 거기에 가루약은 뭐 주시고요. 그것을 하루에 한 개씩 먹을게요. 그러면 약사는 무엇 하려고 거기에 서 있는 것입니까. 약사들은 나를 좋아하죠. “선생님 제가 이렇게 아픕니다.” 그러면 “무슨 약을 드릴까요?” “선생님이 저한테 그렇게 물어보시면 안 되죠. 나는 아픈 것을 알 뿐이지 약은 당신이 알지 않습니까. 소신껏 돈을 더 받으셔도 좋으니 소신껏 지어주세요.” 그러면 항상 더 받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약사도 사 자 돌림이고, 목사도 사 자 돌림이잖아요. 내가 싫습니다. 구약이든지, 신약이든지 내가 처방해서 주는 것이지 와서 “저는 위로의 약이 필요합니다. 구약은 저에게 적성이 안 맞거든요. 신약을 주세요.” 내가 항상 그러죠. “주는 대로 먹어요.” 그런데 그 때가 제일 마음이 아픕니다. 왜 마음이 아프냐면 과연 저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노력을 해보고 저렇게 말하는 것일까? 사람이 관심사가 다르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관심사가 같으면 정말 놀랍게 쉬습니다. 그리고 이해합니다. 오늘도 제가 라디오 방송하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나운서가 그래요. “목사님, 목사님 책은 어렵기로 소문이 났는데요.” 그런데 그 아나운서가 나의 책을 열심히 읽는 독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자신이 한번 읽어서 모두 이해되는 책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스스로 확인해 줄 뿐이지 그 이상의 것을 보태주지는 못합니다. 책이나 설교나 모두 들으면서 ‘맞아,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야. 참 나는 아는 것이 많거든.’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나는 정말 죽으면서도 유언을 하고 싶습니다. “내 설교 테이프를 남은 것 들으면서 어렵다. 그러지 마라.” 왜 내가 이렇게 안타까우냐면 사람들이 너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일 날 와서 “여기에 와 있습니다.” 뚜껑이나 열면 내가 말도 안 합니다. “마음의 뚜껑”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이해가 안 되도 “말씀해 주시옵소서. 주님” 이러면 좋은데 마음에다 써 붙였습니다. “셀프 서비스” “네가 뚜껑 열고 넣어라.” 그러면서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죽어도 청종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이 신앙의 길은 구도의 길입니다. 옛날에 도를 찾기 위해서 구도를 떠난 사람이 하는 일이 네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째는 뭐냐면 속에의 이념의 끊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적용은 다릅니다. 그러나 엄마, 아빠. 내 남편 다 있습니다. 그런데 구도의 길을 떠나는 그 순간 그 사람들 자체 때문에 자체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끊어야합니다. 그래야지 도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삶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랑하고, 두 번째는 뭐냐면 스승을 찾는 것입니다. 똑 같습니다. 제가 저의 신앙과 학문에 최고의 영적 스승으로 생각하는 존 오웬의 목사님이 자신의 책 속에서 수 없이 반복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이러, 이러한 혼란에 빠졌거나 이런, 이런, 깊은 죄에 빠져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당신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빨리 뛰어난 목회자를 찾아가십시오. 그래서 당신의 영혼의 상태를 점검받고 그의 돌돔을 받으십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도 기독교 하고 똑같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하는 것이 뭐냐면 자기의 욕망을 끊임없이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도 똑 같습니다. 왜냐면 욕망 그 차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흐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흐려지면 도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 경험했죠. 예수님을 잘 믿고 은혜 생활을 맑고 깨끗하게 할 때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똑바르고 선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혼동 가운데 있으면서 그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면 아주 명쾌합니다. 몇 달을 고민해도 해결이 안 되는데 1. 2. 3. 4. 결론 딱 내리면 더 이상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을 잘 인도하던 이 사람 자신이 은혜에서 멀어져서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뻔히 보이는 길인데 자기 걸어가는 그 길이 어떻게 되는지 잘 모릅니다. 이것이 신비한 것입니다. 죄는 이렇게 우리의 총명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죽이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이것을 내가 여러분들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구도의 길을 떠났던 사람들이 하는 그 세 가지 말고 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지런히 지식을 터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없이는 도를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렇게 해서 출가를 하고 그리고 좋은 스승을 찾아서 그리고 욕망을 끊임없이 죽이면서 도를 찾는 다는 사람이 책을 읽고 스승으로부터 가르쳤을 때 “아, 역시 내가 아는 것을 선생님도 알고 계시구나. 아, 역시 이 책을 읽고 보니까 내 마음에 드는구나. 역시 나는 참 잘났어.” 이런 결론을 내리는데서 도가 찾아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픕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깨달으려고 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자신의 삶 속에 그것을 적용해보려고 하고 하는 진지한 탐구가 있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청종하며 하나님을 따라가는 이것이 바로 타락해서 환난을 당했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왔을 때에 회복하기를 바라는 모습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불순종과 지로 말미암아서 깊이 타락했던 사람, 그래서 환난을 많이 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그것을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네가 거기서 하나님을 찾으리니 마음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구하면 너희가 만나리라.” 그것입니다. 죄와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징계를 당하고 하늘의 모든 도움이 끊어진 것처럼 시련과 고난 속에서 쓴물을 머금으며 환난의 비바람을 만날 때에 그에게 필요한 일은 오직 단 한 가지입니다. 그럭저럭 변명이나 하고, 그럭저럭 자기 합리화나 시키면서 살면서 좋은 날 오기를 기다려봐야 그런 좋은날은 오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거기에서 나 여화와를 구하게 되리니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나를 구하면 만나게 되리라.” 그래서 신앙생활에서는 의지가 매우 필요합니다. 이 의지적인 결단이 우리 성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의지적인 결단이 없으면 우리들이 순종할 수도 없고,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또 의지가 무릎을 꿇지만 않으면 순종하던 길에서 돌이켜 서서 불순종 하는 길로 꺾어질 수가 없습니다. 의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환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렸던 사람들은 모두 뜻을 세운 사람들 이었습니다. 뜻을 굳게 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지고 하늘 자원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은혜의 통로가 막히고 그리고 환난과 시련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자신은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고 고립되었다고 느낄 그 때에 그 때가 바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끊고 전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여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없이도 넉넉히 살수 있다고 믿으면서 살아왔던 날들을 전심으로 회개하고 그리고 이제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세상의 번영도, 이 세상에서의 긴 생명도, 이 땅에서의 행복도 이 땅에서의 높은 지위와 성공도, 내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내게 무엇인가 주실 수 있다면 한 가지를 돌려주십시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하나님과의 평화를 돌려주십시오. 가진 재물 없어도 환난과 시련 때문에 괴로워도 주님과 평화가 없다면 환난과 시련은 주님을 꼭 붙드는 인생의 계기가 될 것이고 궁핍하고 외로우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하는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매달려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제멋대로 떠나갔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 환난을 만나게 되죠. 그래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마음이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깊이 깨뜨려진 채로 사는 사람들은 인생의 위기를 만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우리 교회에 한 태준 집사의 딸 15살인가 영국으로 유학 갔습니다. 그래서 13살인가 가고 15살인가 부다페스트 콩쿨에 가서 브람스인가를 연주했는데 1등 없는 2등 상을 받았는지 1등 상을 받았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평론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15살 먹은 어린 소녀에게서 이 곡의 해석을 듣는다는 것이 너무 놀랍다. 그랬습니다. 요번에 그 아이가 뜻밖에 한국에 와서 정 명훈 하고 코리아 심포니하고 협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뭐 내가 갈수가 있어요. 케나다 가 있는데 그래서 이제 꽃다발을 하나 만들어서 보내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자기 아빠 말로 뭐라고 하느냐면 십대 애들이 톱스타들 보면서 꺅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에 꽃다발이 왔다고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 나 지금 케나다 에 있다. 그런데 거기에서 간증 하나를 하는 것이 많은 은혜를 주었습니다. 뭐냐면 얘가 너무 오랜만에 한국에 오니까 너무 볼 것도 많고 재미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면 연주가 안 돼요. 그런데 불안하고 걱정이 되더래요. 그래서 마지막 리허설을 세종문화 회관에서 하는데 아니더라는 것이죠. 끝나고 나서 자기는 금방 알죠. 그리고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막 울더니 엎드려서 그 어린 녀석이 간절히 기도하더랍니다. 그러고 나서 가서 연주를 했는데 얼마나 잘했는지 호평을 받고 즉각적으로 내년에 일본에 가서 정 명훈 씨 하고 한 번 더 협연하기로 스케줄이 잡혔대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면서 이제 그 고백이 그것입니다. 뭐냐면 어쩌면 하나님은 한시도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않고 사는 것을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면 사랑하실수록 우리가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전심으로 의지하며 나 혼자 힘으로 도저히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시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면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을 구하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부르시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면,
보십시오. 하나님을 멀리 떠나 환난과 시련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 아름다운 은혜의 말씀을 청종하며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 반드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며 마음을 다해서,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이 전부인 것처럼 간절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주님을 찾는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제는 나를 용서해주신다.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하실 때까지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그치지 않겠습니다. 내가 사람에게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음식을 먹기를 거절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성품을 다하고, 내 모든 뜻을 다해서 이 과업이 내 일생의 마지막 과업인 것처럼 간절히 주님을 찾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하신 분이시기는 하지만 약할 때가 딱 한번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당신을 찾기 위해서 마음이 녹아내릴 때. 그 때 하나님께서 차마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도 그런 자비와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12. 하나님 앞에서 탄식함
“나는 여호와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 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55:16-17)
55편은 다윗의 시인데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썼는지 시 자체의 설명이 없으니까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뒤편에 가보면 그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단서들이 나오는데 그것이 뭐냐면 지금 자기를 매우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대적들이 사실은 처음부터 원수였던 사람들이 아니라. 한 때는 자기 친구였으며 함께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시인이 배신을 당하고 그들에게 애매하게 복수를 당하며 고난 가운에 있는 모습을 여기에서 그러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장 가능성이 많은 때는 아마 왕이 되기 직전에 사울에게 쫓기던 때나 혹은 보다 더 가능성이 있는 것은 왕이 된 후에 부하들이 자기 아들 압살롬을 옹위하여 반란을 일으킨 때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때이든지 간에 확정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이 시인은 지금 예전에 가장 사랑하던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고, 그들이 등을 돌려 자기와 원수가 된 것을 보여줍니다. 오죽했으면 그 사람들이 원수였더라면 내가 참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은 정말 친구였고, 내 입장에서는 그들이 그렇게 졸지에 나를 배신하여 나의 원수로 등장하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었노라. 고 고백을 해서 이 시를 읽는 우리의 마음까지 이 시인의 아픔이 느껴져 오게끔 만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다윗이 하여튼 깊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그리고 그 고통은 자기가 너무나 사랑하고 신뢰하던 사람들로부터 받는 배신에서 오는 고통이기 때문에 밖으로는 대적으로 고통과 안으로 밀려오는 배신의 고통이 이 시인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구약성경에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고, 존 오웬의 말과 같이 이 사람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성도가 없을 정도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생애는 절대로 평탄한 생애가 아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좁게 보면 시인이 당하는 많은 고난들 중에 어느 부분은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받는 징계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하나님의 채찍일 수 있지만 그러나 더 넓은 안목에서 보면 이 시인은 항상 올곧은 길을 걸어왔던 사람입니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다가 유혹과 시련 앞에서 넘어진 때는 있지만 신발을 거꾸로 신고 하나님을 등졌던 때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생 주님을 믿고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쉼 없이 올곧은 길로 한걸음에 달려가 우리의 인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고자 애를 쓰고 싶은 어떤 때에는 지나온 우리의 인생을 모두 다 백지로 돌려버리고 다시 한번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게 하나님 앞에 올곧은 인생을 살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재생의 기회를 주신 분이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서 그 사람이 원래는 올곧은 사람이었는데 잠시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진 사람인지 아니면 마음이 하나님을 완전히 배신해서 주님을 등지려고 하는 사람인지를 하나님이 가려내십니다. 이 시인은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긴 안목에서 보면 이 사람이 이렇게 치열한 고난을 당하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면서 뼈아픈 슬픔의 길을 걸어간 것이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눈을 가지고 보면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평범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 두 가지 모순이, 모순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 까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결코 평탄한 길을 걸어가게 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평탄한 길을 걸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렇게 고난과 시련으로 얼룩진 길을 걸어가게 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인데도 이 세상에서 때로는 슬픔의 사람처럼 인생의 길을 지나게 하실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기대의 관계에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많이 사랑해주시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계획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또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여가고, 그 지식 안에서 올곧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해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를 향해서 매우 특별한 계획을 보여주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계획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더 받으면 더 받을수록 그 계획이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가지고 계신 원대한 계획들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남다른 삶을 살아야합니다.
청교도 가운데 뉴 잉글렌드의 목사였던 토마스 쉐퍼였던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그 일생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어떤 사람이 그분의 이 거룩한 인격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손이 자신의 영혼을 스치고 지나갔다는 사실에 대해서 두려운 부담을 가지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특별히 만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일생을 살았다. 그런 이야기 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고난을 겪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도 있었지만 그 징계도 보복을 위한 징계가 아니라. 더 큰 계획을 위한 징계였으니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 받는 것과 함께 고난도 많이 받은 이유는 그들을 향해 거시는 하나님의 기대가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시인이 더 온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고, 하나님을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이 고난을 통해서 더욱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순결한 사람이었지만 이 고난의 풀무를 통과하면서 하나님 앞에 더 순전한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셨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을 이 큰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이고 외적인 깊은 고통을 시인이 경험하면서 당시에야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서 자신을 순결하게 만드시려고 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나 받는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당시에야 동의하기 힘들었겠지만 후에 이 시인이 이러한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시인이 이 큰 시련과 고난을 당한 것을 통해서 결국은 보석처럼 순결한 신앙의 인격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고난을 당한 모든 사람들이 거룩한 인격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고 시련의 풀무를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순결해 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인은 어떻게 하였기에 그런 깊은 고통과 말할 수 없는 내적인 번민의 풀무 불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결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숙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오늘 시인은 여기에서 이것을 세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 째는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기로 결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인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많이 사랑하던 자들이 자기를 배신하고 그리고 발뒤꿈치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악 날 한 방법으로 자신은 미워한 적이 없는 이 시인을 향해서 복수의 칼을 들이대고 생명을 노렸습니다. 그리고 이 시인을 모해하고 이 시인을 깎아내리고 이 시인의 생명을 끊기 위해서 가장 자신에게 원한이 많이 맺힌 원수들과 같이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미워한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이 시인이 부딪히고 있는 이 문제는 사실은 그렇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배신의 문제였으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자신을 배신한 무리들에게 복수를 하고 그들의 생명을 끊어 그들의 준동을 종식시켜 버리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평안을 찾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에게는 항상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야가 있었습니다. 이 시인 다윗은 아주 현명한 지도자였고, 순간의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는 그런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인은 깊은 슬픔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도 이성의 판단을 잃지 않은 아주 지혜로운 임금이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 사실을 모두 입증할 수는 없지만 이같이 다윗의 탁월한 이성적인 태도는 후일 자신이 모두 이제 이스라엘을 평정하고 사울의 집과 모두 화해하고, 므비보셋까지 자기가 모두 불쌍히 여기면서 돌보고, 이런 경우에도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베풀어야할 모든 위로와 그리고 편의를 제공했지만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만은 냉철하게 판단해서 연민의 감정에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다윗은 하나님 앞에 냉철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자신을 괴롭힌 원수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자신에게 반역을 꾀했고, 주동자가 누구였으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군사를 결집하고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규합해서 자신에게 조직적으로 반항을 했는지 아마 이때쯤 시인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모두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단숨에 달려가서 요절을 내어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보는 도 하나의 시야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섭리적인 인생관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신을 해하려고 하고 원수들이 자기를 향해 칼을 갈지라도 절대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런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섭리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질 수 없으니 또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계획한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섭리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제 2의 원인이 되는 사람들을 붙들고 씨름하는 대신 첫 번째 자신의 인생의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부르짖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인이 잘한 기도인지, 못한 기도인지에 대한 시비의 판단은 접어두고라도 이 시인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그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저들이 산채로 음부에 내려가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아뢸 정도로 시인은 그렇게 가슴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너는 잠잠 하라. 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부르짖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에게 그 억울함을 토로하고 백성들을 규합하고 특공대를 조직해서 자신을 그렇게 모해하고 반역했던 우두머리를 시해 하려는 시도를 하기 전에 그런 군사적인 시도를 하기 전에 그는 하나님께로 나아갔고, 섭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그래도 아뢰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온 방법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성경을 묵상하다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악한 말을 하고, 하여튼 그렇게 죽일 듯이 덤벼들었습니다. 그 때마다 모세와 아론은 참 이상했습니다. 손을 들어서 홍해를 가르고 지팡이들 들어서 지팡이를 깨치던 그 큰 능력은 어디가고, 가장 힘없는 사람이 되어서 그 백성들에게 지겹도록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 때 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백성들을 엎드러지게 하고 하나님이 모세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이렇게 큰 어려운 일들을 사람으로 인하여 만났을 때 항상 사람들과 대결하는 대신 너무나 자주 인생의 섭리의 최종적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에게 얼굴을 구했습니다. 아이를 낮지 못해서 첩이 낳은 아이 때문에 멸시를 당하던 서러운 여인, 한나가 바로 그런 여인 아니었습니다. 머리를 잡아당기며 추악한 여인들끼리의 싸움을 접고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 성소로 올라가서 자신의 인생의 섭리의 최종적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술 취한 여인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믿음의 임금 히스기야를 기억해 보십시오.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받고, 말로 할 수 없는 모독의 편지를 받은 후에 그가 결단한 것은 작전 회의도 아니고 군사동맹도 아니고 여호와의집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펴 놓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으며 살아간 인생의 발자취였습니다. 이 시인은 바로 그런 사람들과 어깨를 겨룬 신앙인이었습니다. 한 때 범 죄 해서 넘어진 때는 있지만 그러나 그는 신발을 거꾸로 신고 주님을 등진적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자기가 가야하는 그 길로 걸어간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도 이 시인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억울한 때에 견디기 힘든 깊은 고통과 견디기 힘든 깊은 시련의 통증이 기다릴 그 때에 문제의 상황을 붙들고 싸우는 대신에 자신의 섭리적 인생의 최종적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부르짖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큰 풍랑이 왜 일어납니까? 인생의 커다란 시련이 왜 일어납니까? 대부분이 우리의 죄악과 욕망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게으르거나 혹은 나태해서 혹은 불순종해서 하나님 보다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서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따라가다가 결국은 넘어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받는 고난을 쉽게 의롭기 때문에 받는 욥과 같은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는 제일 먼저 이 풍랑이 어디에서 왔으며 그리고 나의 어떤 죄가 이러한 고난을 불러왔는지를 가슴에 깊이 새기면 99% 이상은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을 보여주십니다. 그런 깊은 시련을 당할 때에 여러분들이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섭리의 마지막 주관자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우리의 힘과 정력을 쓸데없는 것과 씨름하면서 허비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도 없이 그 시련과 고난 속에서 우리의 마음도 상하고 몸도 상하고 심령도 엉켜서 결국은 시련을 극복하지도 못하고 신앙만 팔아먹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고 가르치신 후에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교훈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시험에 들게 되면 얼마나 악에 빠지기 쉬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인생의 크고 작은 많은 파도들은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들지 않습니까. 적은 파도라고 해서 적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에 이는 배를 깨뜨리며 삼키는 엄청난 폭풍도 한번에 즉시 그런 폭풍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바람과 풍랑으로 시작합니다.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은 인생의 작은 풍랑이 올 때에 그 속에서 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그 음성을 작은 풍랑 속에서 크게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작은 일이 계기가 되어서 깊이 회개하며 그리고 많은 고난을 겪은 것이 아니라. 작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새롭게 만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자신의 인생의 섭리를 주관하시는 최종적인 주관자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두 번째 보니까 “근심하여 탄식했다.”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근심하라.” 라고 번역된 말의 히브리어 단어는 “시하”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시하” 라고 하는 단어는 직역하면 “어떤 생각이 마음을 꽉 채우다.” 혹은 “어떤 것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옳게 번역했죠. 어떤 영어성경을 이 부분을 “기도하다.” 번역한 성경도 있는데 사실은 본래의 뜻으로부터 좀 멀어진 번역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시하” 이 단어의 뜻이 지시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로 기도하기로 결심했는데 시인이 경험 하게 된 장애를 가리킵니다. 그 장애는 무엇이냐면 상황에 대한 많은 염려들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워서 그로 하여금 기도에 매진하지 못하게 한 경험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 인생의 섭리의 주관자가 주님이시며 따라서 이 주님 앞에 나는 깊이 기도함으로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리라. 이렇게 뜻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것으로서 우리의 모든 근심이 물러가고 아무런 방해도 없이 쏟아지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면 그런 사람은 아주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걸어오라.” 말씀하셨을 때에 물 위를 걸어갔지만 잠시 후에 예수님보다는 풍랑 이는 바라를 보며 두려워하여 물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기적을 많이 보고, 그분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도 그렇게 믿음과 의심이 공존했거든 하물며 그만 못하는 우리들에게야 그런 일들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시하” 즉 눈에 보이는 상황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일시적인 시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제 이 모든 인생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내 인생 섭리의 최종적 주관자를 믿으며 기도하기로 결심한다고 할지라도 끊임없는 상황에 대한 염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근심, 그 근심과 염려로 인해서 처음 결심했던 하나님께 의지하리. 라고 하던 결심들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향해 올곧게 세워져 기도로 나아가려고 했던 마음의 틀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자주 우리들이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눈물을 흘립니까. “나 세상 자랑 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주님만 사랑합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입니다. 내 인생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라고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지고 부서지려고 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무너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음성이 몇일만 들리지 않고 내 기도가 주님의 마음에 몇일만 상당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도움의 기대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는 시련, 눈에 보이는 고난, 눈에 보이는 사랑하는 사람들로 말미암는 배신,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황 아닙니까. 시인이 누구보다도 올곧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을 많이 경외한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우리들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깊이 근심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겠다고 뜻을 세웠지만 간간히 밀려오는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그림이 마음을 가득 채워서 경건한 심령을 더럽혔고, 하나님께 바쳐진 올곧은 심령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더욱이 오늘 시인이 깊이 “탄식하리니.”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에 처한 성도의 강함과 약함, 그 사이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부르짖으리라고 결심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순간적으로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한 염려와 그리고 깊은 탄식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상황을 모두 뒤엎게 만드는 훌륭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근심과 탄식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위선된 아름다운 기도보다는 솔직하고 정직한 약간을 예의를 벗어난 기도가 훨씬 하나님의 마음을 쉽게 움직이고, 자신의 마음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대적하는 심정을 가득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처럼 마음을 감추고 기도하는 그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지 못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는 도저히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못 믿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배를 들이미는 불신앙이고, 오히려 이렇게 고백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믿어야 마땅한데 이 지점에서 도저히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주님 나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라고 말이죠. 어떤 때는 위기에 처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믿습니다. 라고 연발하면서 기도하는데도 마음속에서 절대 안 믿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차라리 믿기를 포기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인생이 깊은 위기 속에서 나는 주님의 도움이 너무나 필요한데 주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주님 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의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움직이는 위대한 기도의 힘은 열심보다도 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기도의 힘은 정직입니다. 정직이 결핍된 피를 토하는 열렬한 기도는 갈맬 산에서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며 자신의 신께 부르짖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열정입니다. 피를 통하는 열정이 없어도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직입니다. 이 시인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뜻을 세웠지만 상황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자신에게 밀려올 것을 알았고, 탄식할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일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인생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간에 자신을 붙드시는 분은 주님뿐이시다. 라고 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마음을 깊이 채우는 상황에 대한 근심, 거기에서 토해 나오는 그 깊은 탄식까지도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털어 놓기로 작정하게 되자 그에게 놀라운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소리를 들으시리라.”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의 이 표현은 시편 여러 곳에서 많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내 소리” 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콜” 이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인데 “소리”입니다. 특별히 소리 중에서도 부르는 소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고 부르는 그 소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편 5편에서도 시인은 말했습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이 세상에 가장 두려움이 없이 용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큰 군대를 거느린 왕도 아니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정치가도 아니며 큰 돈을 가진 부자도 아닙니다. 탁월한 건강을 가진 건강인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수많은 군대를 거느린 왕도 많은 돈을 가진 부자도 건강한 젊은이도 인생을 두려워하되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기도 뜻을 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한국 교회의 박해의 역사를 조금 읽고 있습니다. 그 역사의 기록들을 읽어 가면서 보면 도저히 그 고난을 받던 성도들이 이 세상에 있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담대하게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걸어갔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수진성도” 라고 하는 낮말을 알고 계십니까? 진리를 수호하던 성도들이라고 하는 뜻이고, “수진수난의 성도” 라고 하는 말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받았던 성도라고 하는 뜻입니다. 수진 성도. 수진 수난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살아도 하나님 앞에 살고, 죽어도 하나님 앞에 죽는다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신앙은 우리와 달랐지만 천주고 전래 초기에 순교의 길을 갔던 김 대근 신부의 순교의 장면을 지켜보았던 어느 목격자의 생생한 기록은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만듭니다. 물을 뿜으며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 앞에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칼로 뺨을 툭툭 치면서 고개를 칼로 자르기 좋게 돌려대라는 요구를 받으면서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이렇게 하라는 말이냐? 이렇게 하면 네가 내 목을 치기에 적합하겠느냐? 자, 이제는 충분하냐?” 9번을 내려치니까 목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 놀라운 담대함, 개신교 선교의 역사에서 수진 성도들이 지녔던 그 말할 수 없는 담대함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이 믿는 것이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살 것이다. 라고 하는 그 정직한 신앙 하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용기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베푸신 은혜와 거룩함이 교회의 담을 넘어 역사에 기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되기 이해서는 용기가 없이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용기는 바로 혈과 육에서 오는 용기가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살기로 결심한 거기에서 오는 용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인은 순간, 순간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로 뜻을 세웠지만 순간, 순간, 밀려올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근심과 염려, 그리고 탄식까지도 하나님 앞에 그것을 하나님 앞에 맡겨드리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세 번째로 하나님께로부터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굳센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내 소리를 들으실 것이라.” 고 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앞에서만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를 거절하시면 그 백성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들이 비록 한 때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상처를 입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다시 일어나서 주님을 위해 가던 길을 걷는다면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공정한 성품에 어긋하시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지금 인생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당신 앞에 드리는 수천의 재물과 헌신보다는 당신 앞에서만 살고 싶어 하는 그 눈빛 앞에서만 살고 싶어 하는 “고랑데오”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그러한 결단을 보고 싶어 하시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지금은 약하나 그들을 강하게 하셔서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큰 시련을 당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배신하고, 견딜 수 없이 눈물이 흐르는 시련의 계곡을 지날 때 순간, 순간, 상황에 대한 염려, 순간, 순간 자기가 처한 사태에 대한 생각이 마음을 매워 힘들게 하는 이러한 경험은 이상한 경험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도 종종 일어날 수 있는 경험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때도 우리는 주님을 붙들어야합니다. 주님 이외의 다른 어떤 곳에도 우리가 매달리고 의지하고, 그리고 우리가 호소할 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믿어질 때에는 믿어지기 때문에 믿고, 믿어지지 않을 때는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해야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우리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부모에게는 골목에서 수많은 자식들이 떠들며 뛰어놀아도 자기 자식의 음성을 감지할 수 있는 탁월한 본능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흐느낌 속에서도 당신 앞에서만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부르짖는 흐느낌을 강파 하시는 탁월한 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고난의 길을 모두 지나고 나면 우리는 때때로 가장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버림을 받을 채 있었다고 생각되는 그 시기가 사실은 하나님이 가장 또렷하게 음성을 들려주시는 그런 시기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고, 더욱이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서 단판을 지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련의 폭풍인 경우에는 우리 자아가 그 시련의 바다에 던져지기 전에는 풍랑이 멎지를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하나님과 만나서 단판을 짓고 해결을 지어야할 인생이지 결코 우리의 재주와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잊어버린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작은 풍랑 속에서 큰 음성을 들으세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때 여러분들의 소리는 주님의 귀에 들릴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3. 고난을 통해 은혜를 갈망함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 하는도다.”(시 142:2)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이 시를 썼다고 하니까.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서 도망 다니던 시절에 쓴 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노력은 정말 집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같은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이 떠나시고, 여호와의 부리는 악신이 그에게 임할 때에는 더더욱 더 집요하게 이제 이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으니 그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집요한 살인의 욕구는 결국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이 집요한 살인의 욕구는 자신은 버림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보다는 다윗을 죽임으로서 자신의 정권을 연장해 보려는 기도와 통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에 대한 미움이 아마 치열하게 이를 죽이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을 향해서 그렇게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울의 집요한 추격을 받으면서도 사울에 대한 연민의 정을 떨치지를 못했습니다. 피난을 가다가 동굴에 가보니까 사울이 자기를 쫓느라고 고단하게 여행하는 도중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도 그의 몸에 손을 대어 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자라는 사실도 알았지만 그의 모든 처리를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고 그분의 주권을 바라보았던 믿음이었으니 사울의 그것과 너무나 대조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집요한 사울의 추격을 피해서 정말 걸인처럼 떠돌아다니고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자객의 위협을 피해서 도망을 다니던 어느 때에 굴속에서 아마 간신히 그들의 추격을 피했을 어느 때였을 것입니다. 굴속에서 이 시를 썼으니까 굴 밖으로 자유롭게 나돌아 다니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는 그 때에 이 시를 썼으니 틀림없지 않습니까. 그 때에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자신의 형편을 하나님 앞에 구합니다. 사울을 미워한다면 아마 이 큰 고난을 당하고 미움, 추격, 살인의 위협을 받을 때 함께 복수심에 불타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에는 사울에 대한, 사울이 다윗을 향해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적개심이나 미움이 불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중심을 토해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마음으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신앙생활 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그분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분을 구하고 그분께 붙어 있으려고 애를 쓰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고, 그분과 하나 되려고 애를 쓰는 그 마음이 바로 그 경향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연합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찾는 마음인데 우리가 언제나 이런 마음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혼자 씩씩하게 잘 사는 것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이 자기를 의지하는 마음, 그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꼭 필요한 하나님이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겠으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겠으며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높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자들 마음 가운데서 죄인에게서도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이 어떤 죄인 이느냐면 뉘우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죄인의 마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우리가 강해집니까? 약해집니까? 세상을 향해서는 강하고 담대해 지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면 반대가 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너무 비겁하고, 그리고 비굴하고 그리고 치사할 정도로 이 세상에 빌붙어서 살려고 아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서는 담대합니다. 그리고 딱딱하고 굳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차드 십스라고 하는 청교도는 자기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향해 부드러운 마음은 세상을 향하여 딱딱하고, 세상을 향하여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딱딱합니다.” 부드러운 땅이 되어야지만 씨를 뿌리면 내려가면서 농부가 일부러 흙으로 덮어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갈려진 거기에 쭉 씨를 뿌리고 가면 그러면 비가 오면서 슬쩍 덮이고 그러면서 쑥쑥 뿌리가 돋고 싹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신앙생활이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 그 마음은 뭐냐면 하나님에 의해서 깨뜨려진 마음,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의존적인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 무엇입니까? 기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는 마음이 들고, 호자서는 도저히 자기 스스로 설수 없다. 라고 하는 생각이 들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을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현저히 적거나 거의 없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영, 기도하게 하는 은혜의 영은 의존하는 마음 안에 깃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늘 의지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 그 자체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죄의 본질적인 성격죽의 하나입니다. 사악한 독립심, 그것이 바로 죄가 시키는 것입니다. 탕자가 살아있는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하고 집을 떠나서 먼 나라로 가버린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먼 나라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에서 굶었습니까? 아니거든요. 그러면 뭐냐 아버지와의 관계가 영향이 안 미치는 곳에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가 먼 나라에 가서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허랑 방탕 했다. 그랬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그 의존의 관계를 끊고 싶었기 때문에. 아니 먼 나라 말고 가까운 동네에서 허랑방탕하면 안돼요? 불편하잖아. 아버지가 보고 있는데 그러니까 악한 독립심, 그것이 죄 안에 깃들여 있는 성질입니다. 그렇게 은혜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다가도 은혜가 떨어지고 믿음이 식게 되면 이 사악한 독립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독립심이 생기게 되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도도 안하죠. 한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인 기도죠. 그러면 또 뭐도 안 하게 되죠. 당연히 순종을 안 하게 되죠. 하나님 앞에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깊이 매달릴 때 그 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하고 순종하는 이 두 가지는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가 되면 무엇을 보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돌아가는 도구로 그것들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을 떠날 때가 되면 어떤 일을 만나게 되든지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는 재료로 삼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형통해서 그러면 은혜 안에 있어서 하나님께 붙어있을 때에는 형통하니까 어떻게 되요? 그냥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 제가 지난 주일날 광고 시간에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다. 형통할 때에는 그렇게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올 때에는 어려움이 올 때 어떤 마음이 생기느냐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인생을 혼자 살아갈 수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잘 되면 형통하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어려움이 생기면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의지하고 매달리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미끄러져서 멀어져 가고 마음이 강퍅해져 가면 형통하면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아, 이제는 하나님이 없어도 되겠구나. 물론 말은 그렇게 안 하지만 그런 심보를 가지고 살아가요. 그래서 어려움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토라지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아이, 씨 도와주지도 않고 말이지.” 물론 그렇게 도와주지도 않는데 하나님 두고 보십시오. 나도 안 믿어 드릴 테니까. 이렇게 대놓고는 말을 못하지 그렇지만 마음이 그런 경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아니,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뭐해 도와주지도 않는데. 그래 실제로 같이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은 날 별로 안 도와주시는 것 같아. 그렇게 담대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잘 되면 잘 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안 되고 어려움이 생기면 그것 때문에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을 멀리 하려고 하고, 그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런 사람은 간단합니다. 매 맞아야합니다. 혼나야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 마음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는데 우리가 너무나 자주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한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평탄한 길을 걸어가게 하시다가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의 부여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지 않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서도 특별히 자신의 힘으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무엇을 깨닫느냐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인생의 숙제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자, 사울은 누구였습니까? 한 나라의 임금이었습니다. 다윗은 누구였습니까? 양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죽이려고 군사를 풀었습니다. 다윗이 군사를 모아서 이들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그 왕을 누구에게 고자질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백성들 앞에 나아가서 저 왕은 틀렸고, 나쁘고, 나는 옳다고 강변을 하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자기의 도망 다니는 것 말고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하루 목숨을 연장하면 오늘도 하루 산 것이고, 내일도 하루 그 칼날을 피해서 이굴, 저 광야, 저 들판으로 도망을 다녀서 하루 목숨을 부지하면 산 것입니다 사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이 언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겠다고 했습니까? 사울을 몰아내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했습니까? 다윗은 그런 것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하고 아버지의 집에서 짐승을 치는 소년이었고, 다만 하나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아주 착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야망이 없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 말고 야망이 없습니다. 있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자, 누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요. 그 사람이 물어요. “왜 날 그렇게 사랑하지?” 그 때 그 사람이 “다 나에게도 꿍꿍이 속이 있지” 그러면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연대는 생각이 안 나는데 갑자기 준비한 예화가 아니라서 애드몬드 힐러리라고 하는 사람이 에베레스트 산을 처음 정복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야 과학이 엄청나게 발달했으니까 신발부터 해서 온갖 과학적인 도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때는 그런 것도 없었던 별로 신통치 안았던 때에 그 원시적인 방법으로 등반을 해서 인간으로 도저히 오를 수 없다던 거기를 등반했습니다. 그러니까 뭐 거기에 오른 사람들 중에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이 그랬습니다. 물었습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당신은 왜 그 산에 오르십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이 아주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왜냐면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사랑도 똑 같은 것입니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왜 그렇게 사랑해?” 그렇게 물을 때 그 사람이 그 이유를 몰라야합니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그렇게 네가 좋아.” 그것이 사랑이지. “다 너에게 말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지.”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나면 그 다음은 다른 것은 생각이 안 납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많이 받았으니까 이제 내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지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이렇게 많이 받았으니까 그리고 내게 물질이 있으니까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많이 나누어 주어야지. 아, 정말 내가 이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니까 내가 이렇게 받은 큰 사랑을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사람들에게 갚아줘야지. 이럴 수는 있죠.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종속되는 것이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흔히 비전, 비전 그러는데 사실은 진정한 비전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죠.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자기의 꿈을 극대화해서 비전을 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만을 깊이 사랑했고, 왕이 되겠다는 그런 꿈을 꾼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당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내버려두시지를 않으십니다. 반드시 쓰십니다. 모든 준비가 인간적으로 볼 때에 다 갖추어졌어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용하시지 않으실 수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것도 갖추어진 것이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그 사람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비밀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한 나라의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만 사랑한 것이 다윗의 실수였죠. 왜?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하나님 밖에 모르는 그 사람을 짐승의 똥이나 치우면서 평생 살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기름 부음을 받아서 한 나라를 다스리게끔 하나님이 내버려 두실 것 같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 젊은이들이 “아, 일평생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면서 살까?” 그러는데 나는 항상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민하지 마라. 네가 고민해 봐야 소용이 없다. 왜? 그렇게 머리 굴려서 하나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라고 하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 그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에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먼저 배워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가르쳐 주지 말라고 귀를 막아도 하나님이 너에게 들려주셔. 그리고 너의 손을 이끌어서 거기에 하나님이 세워두셔.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죠. 그것이 뭐냐면 오늘 저녁에도 집 사람과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뭐 금방 일어난 일을 이야기 하니까. 따끈따끈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 사람이 저에게 뭐라고 하느냐면 “여보, 당신 옛날에는 참 착한 사람이었는데”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맞아 내가 결혼하고 나서 당신 말 잘 들었지 이것 하라. 그러면 이것 하고,” 또 유치원 선생이었으니까 좀 잘 시켜요. 그러니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내가 착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 강한 사람도 아니었고,” 맞대요. 강하지 않았데요. 그런데 그 때가 좋았다. 이거지.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지금 약해볼까?” 약해보면 어떻게 될까요? 정말 저는 유리 그릇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기질이 아직도 남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절대 믿으실 리가 없겠지만 누가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그러면 그 사람은 코를 골고 자도 나는 밤을 꼬박 새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에 그 사람을 찾아가야합니다. “당신이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는데 진심이냐? 나는 어제 밤에 한잠도 못 잤다.” 그런데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아니 저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받았다. 그러면 어떻게 저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받았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혹은 그 사람이 무슨 오해가 있었을까? 그리고 막 괴로워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나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았겠어요. 그런데 나는 솔직히 사람에게는 그랬지만 하나님께는 하나님은 나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그러면서 밤새도록 잠 못 이룬 적은 없지는 않지만 극히 드문 것입니다. 어느 날 그것이 아, 이것이 내가 진짜 사람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깨끗한 것도 아니고 사랑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이런 것은 아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쁘게 생긴 유리그릇은 말이죠. 명절 때 가끔 꺼내서 식혜나 한번씩 담아먹고 깨끗이 씻어서 저 선반 끝에 얹어놨다가 내년에 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를 그렇게 1년에 한번정도 쓰시고 저 선판위에 올려놓으시려고 했으면 그대로 내버려 두셔도 아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막 양은 설거지 통 쓰시듯이 그렇게 이리저리 던져서 쓰시려고 했는데 유리 그릇 같으면 뭐합니까. 그러니까 그냥 굴리시는데 그런 연단의 과정을 여러분도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게 겪었겠지만 정말 하나님께서 인정사정없이 굴리시는데 무서워요. 여러분 자동차에 유리가 있잖아요. 그것을 돌 맹이 같은 것이 날아오면 쨍 하고 깨집니다. 옛날에는 안전유리라고 해서 돌 맹이가 딱 날아오면 와르르 무너지면서 눈에도 들어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중간에 고무가 들어가서 금만 가죠. 그래도 무섭거든요. 그런데 요즘 한국 사람이 개발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필름이 나왔답니다. 그 필름을 자동차 유리에 붙이잖아요. 저도 그것이 안 믿어졌는데 진짜래요. 그런데 붙여놓으면 한 석 달 정도 있으면 이 필름이 녹는답니다. 공기 중에 녹아서 유리 속으로 들어간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거기에다 권총을 갈겨도 총알이 튄답니다. 방탄유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리그릇이 있어서 순수하고 깨끗하고 맑은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뜨거운 물에 넣어도 금이 가고 차가운 물에 넣어도 금이 가고, 떨어뜨리면 박살이 나고, 또 잘못 부딪히면 이빨이 바지고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필름 같은 것을 넣어서 단단하게 만들면 그것이 유리 그릇 같으면서도 단단하게 막 쓰는 그릇처럼 되면 편리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시중에 많이 나왔잖아요. 유리그릇처럼 생겼는데 불을 붙여놓고 불을 질러도 물이 끊고, 계란도 삶아먹고 그러잖아요. 그것이 뭐냐면 유리가 아닙니다. 유리면 그렇게 견딜 수가 없습니다. 특수 처리를 했든지 아니면 유리같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재질입니다. 그런 것들로 우리의 생활이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순수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해요. 사심이 없고, 순수해요.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맡기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이 죄가 없는데도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다 사용하셔도 깨지지 않는 그릇이 되게 하기 위해서 진짜 인간의 한계선상까지 왔다. 갔다. 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뭐냐면 사울에게 미움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집요하게 살인의 위협을 느끼면서 도망을 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다윗이 불같은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강하여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도자로서 그것이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다윗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치열한 불길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에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면 모두 강해지나. 그것은 아닙니다. 물론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면 물론 강해집니다. 강해지는데 문제는 뭐냐면 아무렇게나 강해지면 안 됩니다. 은혜 안에서 강해져야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애가 매일 맞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엄마는 너무 속상하잖아요. 매일 울고 들어오니까 그래서 쫓아가서 너 왜 얘 때렸냐? 그러면서 그 쪽 부모랑 싸우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제 창피한 것입니다. 그래서 댓 대 터지고 들어 온 놈이 “엄마 제가 때렸어” 그리고 들어오니까 한 열대를 때린 것입니다. 곱빼기로 그러면서 “이 바보 같은 녀석,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그리고 하여튼 맞은 것 보다 곱빼기로 더 맞은 것입니다. 그다음부터 이 아이가 돌변하는데 말이죠. 정말 싸우는데 사생결단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왜냐면 어차피 맞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말이죠. 한 4학년 그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5학년 6학년 애들하고 한번 붙었습니다. 그런데 뭘 집어 던지느냐면 장독대 옆에 보면 고추장 담그는 항아리 조그마한 것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머리통에 던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장독이 깨지지 머리가 깨지지는 않죠. 조그마하니까. 그런데 얘는 뭐냐면 그다음에는 이 엄마가 원은 풀었습니다. 그런데 맞고 들어오지 않으니까. 그다음에 더 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매일 가서 용서를 빌고 돈을 물어줘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강하게 자극을 받으면서 공격을 당하니까 그 아이가 강해지기는 강해졌는데 비뚤어져서 강해진 것입니다. 그래도 보면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성격이 강하기는 강한데 올곧은 쪽으로 강하게 “난, 믿음으로 산다. 난,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주님만 따라 갈래.” 이런 의미에서 강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오다가 한번 틀어지면 “안가.” 그러면 누가 심방을 가건, 공갈을 치건, 소용없이 제 갈 길로 가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내버려둬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야.” 그리고 돌격하다가 사고치는 그런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식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세요. 얼마나 신기하냐면 그 다윗을 강하게 만들어야 되겠는데 그렇게 강하게 만드셔서 되겠습니까. 그러면 완전히 네로 같은 놈이 하나 나오는 것입니다. “죽여 버려. 불 질러.” 이러는 거죠. 그렇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통치하기에 적합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강해져야 할뿐만 아니라. 주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강해진다는 의미 자체가 보다 높은 위치에서가치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그리고 일의 선후를 알아서 지도자로서 결단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가치가 없었을 때는 다 잘해줄 수 있었지만 그런 가치를 딱 세우고 나면 그다음에는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 작은 것들을 잘해줄 수 없는 그런 길을 선택해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지도자로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크게 쓰임을 받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에게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몰아붙여서 이 사람을 고난만 실컷 당하게 하면 이상하게 굽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시는 것입니다. 안 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시냐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시되 하나님이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울에게서 다윗이 쫓겨 다닐 때 쫓겨 다니는 그 다윗을 구하기 위해서 이미 버린 사울인데 죽이실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을 따돌리게 하실 수도 있고, 아니면 마음을 변화시켜서 아예 다윗이 죽은 줄 알아서 다윗을 추격할 수 없도록 만들고 하나님이 무엇인들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계속 다윗을 달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시련과 어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느 날 그 굴속에 피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너무 원통한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다윗이 너무나 원통해요. 왜? 나는 사울에게 이렇게 죽임을 당할 정도로 이렇게 사울을 괴롭힌 적도 없고 악한 감정을 갖지도 않았다. 그런데 들려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자기에게는 근심거리 밖에 없어요. 그것을 어떻게 자기 힘으로 풀 수도 없고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 시인으로 하여금 외부적으로 당하는 큰 고난과 괴로움의 자극이 이 시인의 마음을 하나님께 더 매달릴 수 없도록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품에 있어서는 강인해지고, 내적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주 여리고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들고 싶으셨던 제품입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여 직원하고 대화를 했습니다. “시집가야지.” 그러니까 “예 가야죠.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좀 밀어주십시오.” 그래요. “그래 어떤 사람을 원하지?” 온화한 사람이 좋대요. 그래. 대게 온화한 사람 좋지. 그런데 그런 사람은 우유부단해. 그러면 온화한 사람 말고 맺고 끊는 사람 좋지. 그것도 괜찮죠. 그런 사람들은 또 너무 강해 상처를 줘요. 성실한 사람이 여러분 좋죠. 성실한 사람 여러분 좋아요. 싫어요. 융통성이 없어요. 깝깝이 입니다. 좀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 낫죠? 융통성이 있고, 창의적인 사람이 낫죠. 그런 사람은 요령을 피워요. 이렇게 지렁이 같이 뼈도 없는 사람이 좋아요. 이렇게 약간 터프한 맛이 있는 사람이 좋아요? 약간 터프한 사람이 좋잖아요. 결혼한 사람은 이야기 하지 마요. 이제 끝났는데 뭘 자꾸 이야기합니까. 결혼 안 한 사람이 얘기해야지. 그래요. 약간 터프한 사람이 낫죠. 그런 사람은 쥐어 팹니다.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자매가 있다가 그래요. “얘야 독신으로 살아라.”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러지 마라.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기질은 다 문제가 있단다. 직원들이나 직장에서도 모든 부하직원들을 거느려 보면서 보는데 이렇게 일이 딱 부러지게 깔끔하게 해내는 직원들이 너무 착하죠. 대게 까다로워요. 눈치를 많이 보게 만듭니다. 사람을 신경을 많이 쓰게 합니다. 그런데 인간성이 좋아서 언제나 웃고 아주 마음이 좋고 그런 사람은 부정확합니다. 뭐든 딱 떨어지는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직원 예배에 거의 할 때마다 항상 그렇습니다. “마음은 둥글고, 일은 네모지게” 그러나 사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제가 알거든요. 노력할 뿐이지. 그런데 그래서 답이 뭐냐 답이 필요 없고, 하나님이 은혜로 다시 빚으신 사람, 재건축 된 사람, 개발하고 싹 쓸어버리고 리모델링 한 사람, 그런 사람을 찾아야합니다. 그러면 정확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용납하고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창의적이면서도 성실하고,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로 빚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다윗을 훌륭하게 쓰시려고 마음을 먹으니까 하나님이 그냥 이렇게 순결하고 하나님만 사랑해요. 그러면 뭐해요. 그가 만약에 왕이 되었다고 칩시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만 사랑하고 이렇게 합시다.” 그러는데 장군 하나가 “그러면 안 돼요.” 하면 깜짝 놀라가지고 말이지. 덜덜, 덜덜 떨려가지고 그리고 밤에 가서 나처럼 밤새도록 울고, 저 장군 나 때문에 상처 받았나봐? 어떻게 하지. 그럴 것 아닙니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데려다가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가 있겠습니까. 수많은 나라가 이스라엘을 넘보고 그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왕국이라는 그 자체가 말이죠. 크게 얘기하면 이 교회와 비슷하고 작게 이야기 하면 우리 마음과 비슷합니다. 거기에는 다윗에게 충성하고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려고 하는 무리들도 있었지만 반역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외부적인 공격도 각 나라에서 얼마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겠습니까.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언약 백성을 다스리는 그 다윗이 그래가지고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한 사람이 필요한데 그냥 무조건 강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내면은 아주 순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연약함 속에 강인한 성품이 함께 깃들여서 주님의 음성에는 마음이 녹아지지만 인간은 장군이 수 백 명 와서 소리를 꽥꽥 지르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해도 “시끄러” 한 마디로 잠재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것이 그냥 됩니까. 하나님의 연단을 통해서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가시죠.
그런데 이제 문제는 뭐냐면 그런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과정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나는 정말 억울합니다. 나는 마음속에 너무 많은 근심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저 나쁜 자식들 다 죽여 버리시지 왜 나두십니까?” 복수심에 불타서 하나님 앞에 원한 맺힌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 하소서.
어찌해야 좋을지 나를 도와 주서서
어찌 해야 좋을지
나를 도와주소서.
다윗이 그런 마음 가지고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도 속에는 저 사울이 나를 이렇게 죽이려고 하는데 나는 어떻게 합니까. 나는 그렇게 원한을 살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난 정말 억울합니다. 하나님 나의 이 원한을 어떻게 좀 풀어주십시오. 나의 이 억울함을 하나님이 한번 나타내 보여주시고, 내가 의롭고 저들의 불의하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 기도가 물론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울이 죽느냐? 내가 죽느냐? 하는 이 문제만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 뒤에 나오지 않습니까. “나의 우환을 주님께 진술하리로다.” 내가 당하고 있는 많은 환난 거기에서 오는 수많은 근심, 거기에서 오는 이 마음의 어지러움과 이 산란함, 그리고 너무 힘든 이 모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기도할 때 다윗이 정말로 하나님을 필요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그래 내가 사울을 오늘 아침에 죽여 버리마.” 그러면 “아, 하나님 이제 됐습니다. 이제 기도할 필요도 없고 정말 잘 하셨습니다. 제가 바로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것 아니잖아요. 그러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이 환난과 어려움에서 나를 보호해주십시오.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면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연단을 통해서 한 나라를 다스리기에 적합할 정도로 연단해 가시는데 그 과정에서 이렇게 강한 사람으로 주님 앞에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순결하면서 강인하고 하나님의 쓰심에 합한 그릇으로 다듬어져 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혼자서 그 일을 해 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더 크신 구원과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쇄신시키시고 강하게 하시고, 강건하게 하시고 변화시키고 정화시키고, 새롭게 하셔서 내면적으로는 순전해서 점점 더 내면이 여려지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점점 여려져서 그래서 주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되게끔 내면의 세계는 고치시고, 성품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을 지닌. 하나님 이외에 누구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그 백성들을 인도해 가실만한 그런 지도력을 지닌 사람,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사람이 변화 되었는데 결국은 그렇게 변화되는 과정에 이 사람에게 꼭 필요했던 것이 뭐냐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신의 구원과 그리고 자신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갈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하나님이 계속 다윗을 두심으로 말미암아 그로 하여금 하나님만 찾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계속 이리로 데려 가시는 것입니다. 그가 받은 그 환난과 그가 받은 그 말할 수 없는 고난, 이루 비할 데 없습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쓰신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고난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꼭 필요한 사람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보니까 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원통함을 하나님 앞에 토해 놓습니다. 이 비유가 재미있잖아요. 이 속에서 울컥거리고 피가 토열 하듯이 피가 토해 나오듯이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이 견디기 힘든 원한, 원통함을 자신의 이 억울하고 견딜 수 없는 이 원통함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 앞에 토해놓으면 아주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이나 일어납니다. 원한이죠. 그것을 하나님 앞에 토해놓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이처럼 추격을 받고 있으면 나에게는 나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이 우환에서 내가 이런 우환을 당하고 있고, 내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이렇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이것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내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간절히 매달립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간절히 매달릴 때 원하는 것이 뭐냐면 구원, 그리고 마음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사람을 강인하게 하나님께서 뒤흔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높이고 주님께 붙어있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왕이 된 다음에도 그 때 받았던 훈련이 남아있습니다. 왕인데 절대 왕 같지 않습니다. 왜냐면 거만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나 주님 앞에 어린 아이처럼 대답하는 것입니다. 원래 생겼습니까. 그렇죠. 고난 가운데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데 하나님의 그 은혜를 갈망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세월을 보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악해지는 것입니다. 심령이 아주 강퍅해집니다. 은혜 없이 고난만 당한 사람 옆에 가지 마세요. 무섭습니다. 말에도 칼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파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섭습니다. 왜냐면 그렇게 살아온 자체가 사실은 자기를 보호한 한 방식이었단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잘못이 없거나 매우 적어도 하나님이 치열한 고난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왜냐면 그 불길이 아니면 우리를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다듬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강력하게 환난과 연단으로 우리를 다듬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환난과 연단 받고 있는 사람들은 기뻐하세요. 왜냐면 하나님의 특별한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학교에서 대학에서 9년이나 있지 않았습니까. 보면 그 교수들이 불러다가 물론 나는 워낙 야단치는데 은사가 있으니까 그랬지만 하여튼 한 녀석은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나갈 때 문을 못 찾더라고요. 문을 못 찾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야단을 치는데 선생을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세요. 아무나 붙잡고 야단치나. 물론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야단친다는 것도 그것도 좀 거짓말이 섞인 것입니다. 뭐냐면 그렇게 야단을 치면 고쳐질 것 같고, 될 녀석 같으니까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비뚤어 져서 저것 야단쳐봐야 소용없다. 그러면 야단 안 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늘 그랬습니다. 짐승 같은 교인들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자. 그것이 삶의 신조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런 애들은 예의 바르게 대해주고, “아, 예 그러셨습니까.” 그러다가 이제 얘는 고쳐질 수가 있겠다. 그러면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뭔가 우리를 연단하시고 강력한 고난의 불로 우리를 달구신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시련이 닥치고, 고난이 오고, 연단의 불길을 통과하게 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권력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육체의 즐거움입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과 시련의 불길을 통과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의 구원 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데 타는 마음으로 이것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연단을 계속 받는데 사람만 계속 망가질 뿐 그 사람이 고쳐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왜? 은혜에 목말라 하지를 않으니까
나는 아주 정말 무서웠습니다. 지금은 나와 같이 생활하면서 많이 고쳐졌는데 교역자 몇 사람이 외부에서 들어왔어요. “아무개 목사, 아무개 전도사, 담임 목사님이 이렇게 부를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전도사 생활을 13년이나 했어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네 목사님 부르셨습니까.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그리고 얘기하면 되잖아요. “아무개” 그리고 부르잖아요. “네. 네. 네. 네.”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볼 때도 너무 측은할 정도로 그렇게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뭘 잘못했냐?” 그랬더니 없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눈치를 보냐. 내가 대놓고 그랬습니다. 너 하나님의 눈치를 그렇게 본적이 있냐?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랴. 너는 사람의 사람이냐? 하나님의 사람이냐? 담임 목사의 사람이냐? 하나님의 사람이냐? 물론 그 얘기를 듣고 담대해지면 안 되겠지만 그런 것이 다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아세요. 은혜 없이 전에 있던 교회에서 비인간적으로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지도자들 밑에서 귀도 못 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귀 좀 펴라고 갖다 나도 이게 “아무개” 그리고 부르면 네. 네. 네. 대답을 한 다섯 번쯤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야, 이방도 아니고 왜 그러냐. 그냥 점잖게 “네 목사님 부르셨습니까.” 그러면 되지. 네. 네. 네. 네. 뭐냐 이 교회에서는 절대 기 못 펴게 하지 않을 테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라.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자기 길을 걸어가는데 왜 그러느냐?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은혜 없이 고난과 억압을 많이 당하면 그렇게 굽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를 잘 단련시키고 연단시켜서 쓰시려고 하는데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을 향해서 간절히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과 환경에 의해서 그렇게 비참하게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히 일그러진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때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같은 시련, 고난의 파도, 해치면서 우리들이 연단을 받고 시련을 당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의 은혜. 내 영혼을 살리시고 위기 속에서 나를 건져내심으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이는 이 위대한 간증, 이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은혜에 목말라 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합니다. 받는 고난을 생각하지 말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이 위대한 은혜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할 때 그 때에 하나님이 그 은혜에 목마름을 보시면서 고난을 능가하는 사랑을, 은혜를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견딜 수 없는 사선을 넘나드는 연단을 받으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고난과 시련이 너무 어려워서 너무 어려움을 많이 당해서 기도를 할 수가 없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생사를 걸고 하나님 은혜, 오늘의 우리들이 당하는 이 고난과 시련, 연단의 불길이 우리를 망가뜨리는 기회가 될 것이냐? 아니면 우리를 더 순전하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쓰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냐?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목말라 하고, 그분의 은혜에 얼마나 갈급한 사람들이 되느냐. 그래서 고난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면서 매달리며 사느냐.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4. 겸손함과 갈망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시 22:26上 )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우리 심령에 충만한 은혜를 누리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자신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그렇게 곤고하게 살게 되면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앞에 자신도 행복하고, 그래서 자신 속에 넘치는 기쁨과 소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사는 것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신 다음에 금방 하늘나라에 데려가지 아니하시고, 주님이 이 세상에 살아서 이 세상에 빛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 세상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땅에서 하나님의 많은 축복을 받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 때에 땅의 기름진 것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경건한 시인은 오히려 “먹고 배부를 것이며” 라고 말할 때에 이것은 오히려 영혼에 관한 것을 염두 해 두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잘 영적으로 배불리 먹고, 그리고 만족을 누리면서 사는가? 그 사람은 바로 겸손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스스로 낮춘 사람,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낮추고 그리고 한없이 낮아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이고 그렇게 겸손한 사람들은 먹고 배부르게 된다. 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곤고하게 살아가는 그 모든 궁극적인 이유는 그 안에 영혼의 진정한 만족, 영혼의 진정한 배부름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게 되면 허기지게 되면 눈도 침침해서 잘 보이지 않고 생각도 치밀하게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뭘 발견했는데도 몸도 신속하게 움직이지를 않죠. 그리고 글도 잘 써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의 영혼이 배고프게 되면. 굶주리게 되면 그는 영적으로 사물들을 바로 볼 수가 없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들을 판단하는 것도 힘들고, 또 판단했다고 하더라도 즉각적으로 거기에 대응하는 신앙적인 행동들이 모두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신자가 우선 잘 먹고, 배부른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영혼을 진정으로 배부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떡이 없어 기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근을 만나게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생활 하는 동안에 매일, 매일 만나도 먹이셨는데 그렇게 매일, 매일 만나로 먹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은 결국 보여주시고 싶었던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만나를 먹이셨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을 알려주시고 싶으셨으면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서 곡식을 거두어서 먹이는 방법으로 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손으로 짓지 아니한 방식으로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그 양식을 먹음으로 그들을 살게 하고, 단 하루도 그것 없이는 살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서 이제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양식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그 영혼이 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신자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은 은혜를 받고 그것으로서 영혼이 진정한 만족을 얻게 되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은 만족과 은혜를 얻게 되면 그다음에 이 세상에서 넉넉한 하늘 자원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 있는 자원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승부하죠. 땅의 자원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있으면 교만하고, 없으면 좌절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자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을 통해서 공급되는 하늘의 은혜요. 하늘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이 세상자원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하늘 자원으로 살아갑니다. 눈으로 볼 때는 분명히 세상 자원이 그 일을 하기에는 모자랍니다. 그런데 그는 하늘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넉넉히 이깁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 땅의 자원을 더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영영 이 땅의 자원이 안 주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이 땅의 자원은 주어지지 않아도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와 기쁨, 소망, 사랑. 이런 것들로 이 땅의 자원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긴 고통의 기간들을 기쁨 가운데 견디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항상 헌금을 이야기 할 때면 떠오르는 마게도니아 교회가 그런 교회 아니었습니다. 잘 사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면서 사도바울이 지극히 가난하던 마게도니아 교회의 넘치는 헌신에 대해서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이 마게도니아 교회에 행하신 일들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하면서 마게도니아는 극한 가난과,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도록 연보했다고 자랑했습니다. 어떻게 극한 가난, 많은 시련 가운데서 넘치도록 연보할 수 있었습니까? 가난해도 극도로 가난하고, 시련이 있어도 많은 시련이 있었는데도 그들이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기쁨이라고 하는 하늘 자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극한 가난과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그들이 넘치도록 하나님 앞에 연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 양식을 먹고 배부른 신자들이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면서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러한 하늘 자원을 공급받는 영혼의 배부름 없이 교회를 오고 가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이미 그는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팥죽 한 그릇만 주어도 언제든지 팔수 있는 명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요.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며, 그는 또 하나님 때문에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급선무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은혜를 받고 우리의 영혼이 배부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혼이 진정으로 그것을 먹고,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진정으로 배부른 자가 되면 그러면 그는 이 세상을 기쁨 가운데서 넉넉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즉각적으로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경험한 그 과거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먹는 것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사실이죠.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내 입에 들어올 때는 어떻습니까? 씁니다. 아픕니다. 어떤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픈데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할 때 세상에서 시련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 겪는 아픔보다 더 진하고 강렬하게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때는 그래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깊이 찌르면서 그 말씀이 내 영혼이 부어질 때 나는 거의 죽을 것 같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까무러치는 사람들도 여럿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으면 배가 불러지고 만족해지고 기쁨이 생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빛 된 삶을 살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런 질문이 여러분들에게 떠오를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자꾸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질문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깨달음의 깊이가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우선 오늘은 시간 관계상 간략하게 답변을 하고 그 다음 말씀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이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언제나 그렇게 배부르고 만족하며 기쁨이 오는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강력하게 나를 찌르는 것 같은 고통과 아픔이 올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여러분들이 하게 된 것이죠. 저는 이것을 영적 명현 현상이라고 합니다. 제가 최근에 들어서 최근 한 2년에 들어서 다른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만은 저 자신의 신체에 관해서 아주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쉬는 것입니다. 자, 이제 몇 달 동안 거의 쉼 없이 열심히 일을 합니다. 어느 한 순간에 체력이 고갈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죠. 일에 미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역하다 보면 환경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대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체력이 고갈되죠. 체력이 고갈되게 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힘들기는 하지만 체력이 아직 고갈되지 않았을 때는 푹 자고 나면 힘이 조금 축적됩니다. 그러나 고갈 되고 나면 한참 드러누워서 자고 나면 몸이 더 깊이 꺼져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드디어 쉽니다. 그래서 혹은 쉬러 가기도 하죠. 좀더 전화 연락도 안하고 팩스 연락도 안 하고 그러는 곳으로 가서 며 일 쉽니다. 저도 몇 번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가서 한 이틀 쉬는데 코피가 납니다. 사람들은 쉬러 가서 얼마나 빨빨거리고 돌아다녔으면 코피가 날까? 그런데 사실 쉬러 갔는데 그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닌 것도 아니고 일상적으로 움직이던 노동의 3분의1밖에 안 하면서 그냥 조금씩 천천히 산책하러 다니고 쉰다고 해서 가만히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뭐 왔다. 갔다. 하고 뭐도 사먹기도 하고, 산에도 올라가고, 그러는 것이 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한 이틀쯤 지났는데 코피가 나요. 그것이 몇 번 경험되었습니다. 그래서 쉬는데 왜 그럴까? 얼핏 떠오르는 말이 “쉬는 것도 힘들다.”는 옛말이 있잖아요. 맨 처음에 그런가? 했더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뭘까? 그리고 이틀 삼일 째쯤 되면 피로감이 확 엄습합니다. 잠을 그렇게 많이 자는 성격이 아닌데도 2-3일 정도 되면 깊은 잠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코피가 나요. 이것이 도대체 뭘까. 2년 동안 고민하면서 의학 하는 사람들이 동의를 할지 모르지만 저는 이것이 육체적 명현 현상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휴가를 가든지 해서 첫째 날은 아직까지도 일하던 긴장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아직 환경으로부터 쉼이 시작되었지만 몸은 아직 쉼에 적응을 못해요.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서 드디어 심리적으로 쉼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 때 이제 모든 긴장을 풀고, 쉼의 상태에 들어가니까 긴장 속에서 기능을 버티고 있던 육체들이 이제 밖으로 그 독소들을 내 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진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럴 때에 다시 올라와요. 휴가 끝입니다. 3일 만에 그리고 올라오면 그러면 그 때 막 피곤하기 시작했으니까 올라오고 바로 일로 들어가면 코피가 펑펑 쏟아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면 육체가 다 쉬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긴장하기 때문에 온 육체 속에서 고함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휴식 끝.” 그리고 온 몸이 다시 긴장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유익한 시간들이 아니다.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최소한 7일 정도까지 쉬어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면 2-3일 되면서부터 몸이 꺼지면서 코피도 나고 잠도 더 많이 옵니다. 그런데 3일 4일 5일쯤 지나면서 이제 다시 회복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회복 되는 것을 염두 해두고 이야기 한다면 코피가 나고 몸이 쉬는데 몸이 까 부러지고 코피가 나고 하는 것들은 일종의 명현 현상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이치에 의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무엇인가 죄가 있어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데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려고 하는 완고한 고집, 깨지지 않는 자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요. 그래서 말씀이 탁 깨달아지면서 쫙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지고 있는 은혜의 경향성과 자기 안에 붙들고 있는 죄의 경향성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벌써 은혜가 강해요. 그러면 막 이 자아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옛 자아는 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만 하면 자기가 붙들고 있던 죄를 보따리 싸놓고 기다립니까? 아니거든요. 어떻게 하든지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버텨보려고 하는 이런 것이 이 속에 남아있거든요. 그런데 그 말씀의 은혜가 워낙 강해요. 막 쑤시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때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뭐냐면 육체의 자아가 느끼는 고통입니다. 육적 자아가 느끼는, 부패한 자아가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성들을 은혜에 의해서 파괴당하면서 느끼는 고통입니다. 막 고통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막 아프면서 자기가 무너지고 그러면서 그러다가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강하게 들리면 듣고 집에 가서 몸살을 합니다. 사실입니다. 집에서 끙끙 앓습니다.
옛날에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에 지체 하나가 엄청난 구도의 결심을 한 것처럼 교회에 오더니 “목사님 제가 이 교회에 등록하고 다니겠습니다. 주님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더니 설교 몇 번 듣고 은혜를 받더니 그래 다녀라. 그다음에 오락가락 합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습니다. 그래서 이제 “왜 그렇게 교회를 한 달쯤 나오다. 두 번쯤 빠지고 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냐?” 그러면서 제가 그랬어요. “교회가 잘 안 맞는 것 갔냐? 그러면 그러지 말고 결석 안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가라.” 교인 한 30명쯤 모일 때였습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래라. 그것이 너에게 잘 하는 것 같다.” 그랬더니 하는 이야기가 참 재미있어요. “제 생각을 하면 벌써 교회를 떠났어야 되는데 연약한 열린 교회를 두고 교회가 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저까지 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죠. “그래 찬송 한 장 부르고 말씀 한 장 보자.” 그리고 말씀을 쭉 전하다가 그랬습니다. “그것은 네 생각이고, 교회는 추호도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네가 교회를 필요로 한다. 가는 것은 너의 자유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의 자유가 아니다. 교회가 너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달에 한번씩 교회에 안 나오는 너를 교회가 너를 뭘 필요로 하겠니? 오히려 네가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묵사발을 만들어 놓고 보따리 싸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3일 동안을 앓았데요. 그 즉시부터 열이 나기 시작해서 그 열이 신령한 열인지 육신의 열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어쨌든 그 열이 그 열로 변해서 3일 동안을 막 심하게 앓고 태어나서 그렇게 목회자에게 밟혀보기는 처음이라고. 목회자가 밟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죽이겠죠. 누가 여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아, 이교회는 나 아니면 쓰러지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겠느냐? 교회와 이 세상의 단체의 차이는 뭐냐면 세상에 있는 단체는 나 없으면 쓰러지는데 그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세상의 단체고, 교회는 뭐냐면 나 자신이 아무 쓸데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나 하나가 교회에 얹혀있는 것이 이것이 아마 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부담이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얹혀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의 신자들입니다. 그러더니 그 후에 개가천선해서 한 동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갔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뭐냐면 명현현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자기 안에 붙들고 있던 옛 자아와 투쟁을 하면서 거기에서 피가 나고 아프고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몇 번 청소하면 일정기간 동안 청소하면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 꿀 보다도 더 단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 마치 트레펑으로 막힌 하수도 뚫듯이 몇 번만 뚫으면 그러면 말씀이 쓰거나 아프지 않고 그냥 꿀같이 달기만 하고 일생동안 그렇게 되는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수도관 트레펑으로 이런 세제로 한번 뚫어서 뻥 하고 한번 뚫어놓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물질이 끼면 또 물이 잘 안 흐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청소해야합니다.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깨뜨려지고 그래서 그 아픔 속에서 피 흘리고 명현현상이 일어나서 다 깎여져 나가고 상당히 많은 부분이 깎여져 나간 다음에 그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이게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다가와서 그때부터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대로 이제 잘못 세워진 것들이 막 부서지는 기간이 어느 정도 있고나서 그다음에 그가 은혜 안에서 잘 살고 불순종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면 그다음부터 말씀이 들어가면서 막 신앙이 은혜를 받으면서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번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고 불쑥불쑥 나듯이 말이죠. 신앙의 성장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먹으면서 쭉쭉 자라는 것입니다. 한참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은 밤에 자다가 울잖아요. 밤에 호르몬이 나와서 키가 크는 것이거든요. 너무 크니까 세포 사이에 관절이나 이 판이 있는데 그것이 평창 되면서 육신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자라는데 그래가지고 저도 한참 자랄 때는 한 달에 1센티쯤 자랐습니다. 그래서 1년 지나면 10센티 내지 12센티씩 착착 그리고 한 2-3년 자라고 그다음에 딱 멈추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계속 자라겠어요. 그러면 천장을 뚫어야지 그래서 한2년 정도 딱 자라고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잘 먹고 그다음에 자기가 먼저 깨뜨려지고 나서 그다음에 말씀이 이제 아멘 하고 순종으로 받아들여지면 쭉쭉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훌륭한 신앙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 때에도 이 핍박의 역사를 보면 대게 웃깁니다.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 가운데도 훌륭한 순교자들이 나왔지만 믿고 난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입증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들은 깡다구가 많아서 순교했겠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은혜의 성장의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좋은 땅에 잘 심겨진 나무와 바위 같은 척박한 곳에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며 붙어있는 나무 그 연조가 문제입니까. 이 신앙이 쭉쭉 자라는데 또 똑같은 밭에 있을 때에야 물론 연조가 문제가 되죠. 그렇게 하면서 신앙이 쭉쭉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쁨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주님 때문에 만족을 누리면서 사랑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훌륭한 전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외칠 때에는 듣는 사람들에게 깊은 두려움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지도 않고 짐승처럼 막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외치면 그것이 공갈 협박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전하는 기독교 신앙이 이렇게 진지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무엇 때문입니까? 하늘의 신령한 그 은혜의 실체를 우리 자신이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 기독교의 복음이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고, 그 말씀에 배부름으로 말미암아서 신앙이 죄에 대해서는 깨뜨려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자라게 되고, 강력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처음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요, 마지막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입니다. 거기에서 깊이 은혜를 받을 때 그때 비로소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하늘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시대에 우리를 불러주신 뜻이 무엇이고, 우리가 이 고통 받는 조국의 역사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이 뒤틀린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셨는데 이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서 이 역사 속에서 교회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은 또 다른 지식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야지만 받은바 은혜를 낭비하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한 사람이 그냥 온갖 무술을 다 익혔어요. 그래서 한 20명쯤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다 때려눕힐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쳐요. 이 옳고 그름의 판단이 없어요. 그러면 뒷골목의 깡패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힘을 가지고 뭐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올바른 의식을 심어주어서 판단력과 정의감을 가진 사람이 되면 의협심이 있는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많은 은혜의 자원이 있고, 그 위에 이런 시대를 알고 주님의 뜻과 자기를 구원하신 계획을 분별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깊이 깨닫고 배우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게 되면 주님이 주신 이 은혜의 자원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이 시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통해서 여러분의 영혼이 먹고 배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에 있는 어느 경영학을 하는 사람이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책 속에서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면 회사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회의를 조사한 결과 가장 나쁜 회의가 뭐냐면 배고플 때 하는 회의였답니다. 논쟁도 많고 싸움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하는 회의가 제일 좋냐? 대접을 잘 받고 칭찬을 많이 듣고 배가 부를 때 그 때에 하는 회의는 말이죠. 화기애애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왜 사랑해야 할 지체들이 교회 안에서 물고 뜯고 그리고 매일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누나, 우리 동생, 우리 고모부, 우리 이모부 전도하게 해 달라고 눈물 흘리고 콧물 흘리다가 전도도 못하고 무슨 일만 있으면 대판거리 싸우고 해서 결국은 미천 다 들어내고 그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자기가 배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배고프니까 그러니까 결국 어떤 시점까지는 견디지만 어떤 지점이 딱 지나가면 그다음에는 자기 인간의 본성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강퍅해서 안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강퍅해서 안 믿기는 자기가 똑바로 안 사니까 안 믿지. 진정으로 사랑하고 넘치는 하늘 자원을 가지고 아낌없이 그들에게 베풀면서 내 생명을 그들에게 주고 그들을 사고 싶다. 는 마음을 가져보세요. 왜 전도가 안 돼요. 살고자 하니까 사람들이 죽는 것이지 죽고자 해보세요. 반드시 삽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인내하고 말이죠. 깊이 끌어않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인내하면 자신을 하나님과 그 죄인 사인에 화목 재물로 주려고 해 보세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인격 속에서 나옵니까?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뭐가 필요해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말씀의 은혜에 의해서 자기가 먹고 배 부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먹고 배부르고 자신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고 하나님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사명을 따라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 좋아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지 실제에 있어서는 사실 그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늘의 말씀의 깊은 은혜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그 하나님의 말씀의 사모함을 가지고 그렇게 살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표에 대부분의 많은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면 여러분들의 목회의 관심사는 둘입니다. 첫 째는 뭐냐면 여러분들을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먹고 배부르고, 그래서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는 뭐냐면 그렇게 받은바 은혜가 자기의 심령에서 넘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흘러나리라.” 그것이 넘쳐흘러서 사도들의 배에서 그것이 넘쳐흐르니까 예루살렘과 온 사마리아와 온 땅 끝까지 이르러 주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잖아요. 그것이 흘러넘치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것이 흘러넘치니까 선교가 되잖아요. 그것이 흘러넘치니까 고통 받고 아파하는 사람들 속에 다가가서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흘러넘치니까 이 부패하고 더러운 세상과 마주하면서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올곧은 명령을 따라서 올곧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아서 세상이 부패해도 진짜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은혜의 자원이 넘치도록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과 또 하나는 뭐냐면 그렇게 받은바 은혜를 어디로 흘러넘치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이것이 이제 교회가 해야 될 일입니다. 특별히 이 10년을 지나면서 교회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줘야할 일이 바로 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진실한 그 은혜를 참된 믿음 생활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 배에서 말씀과 은혜의 생수가 쏟아져 나오고 그리고 올바로 잘 깨닫고 분별해서 그래서 어그러지고 거시리는 세상에서 그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자원들을 어떻게 이 교회의 담을 넘어서 이 세상과 그리고 이 고통 받는 이 땅에 펼치면서 살 것인가? 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지. 그냥 그렇게 꾸역꾸역 교회 다니고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솔직하게 얘기해서 말이죠. 이번에도 끊임없이 모든 관심사는 여러분들에게 내년에도 금년에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 속에 넣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말씀을 부여잡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거잖아요. 여러분은 놀라겠지만 지난 한달 동안에 출판부에서 책을 여섯 권을 만들어 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왜 만들겠어요. 문제는 뭐냐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기가 막히게 만들어져도 머리에 구멍 뚫고 깔때기 집어넣어서 위에서 기름 붓듯이 부을 수는 없습니다. 만들어 놓을 뿐이지 그것을 먹는 것은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없어서 곤고하고 그리고 피곤한 삶을 살고, 하나님께 대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 주셨다고 말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영혼 속에 하나님을 향한 싫증과 미음을 간직한 채 그 힘겨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 결국은 무엇 때문입니까? 다 하나님의 말씀에 배고프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쳐야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주위에 많이 즐비하게 널려져 있어서 손만 뻗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늘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그렇게 넉넉하게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 답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배 부른다는 것입니까? 겸비한 사람, 겸손한 사람, 하나님 앞에 깊이 낮아진 사람, 자신이 아무 가치 없는 죄인이며 그래서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 그것을 믿는 사람,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구원 받기 전을 생각해도 정말 희망이 없는 인간이었죠. 구원해주신 다음에도 우리들이 양식으로 삼고 살아온 것은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수시로 깨뜨리지만 우리를 구원하기로 맺으신 그 언약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우리를 붙들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자원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인간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한없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받았어도 여전히 비참한 인간이며 여전히 자기 안에 이 부패함과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이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때 그 때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은 비참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비참한 사람이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겠느냐? 나는 정말 비참한 사람이라. 나는 사람이 아니요. 벌레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거시리면서 살고,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아들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티끌만한 감사도 없이 하나님께 대한 싫증과 미움을 간직한 채 살기 싫은 남편하고 억지로 사는 것처럼 그렇게 권태감으로 가득 찬 신앙생활을 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깊이 비참함을 느껴야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는 정말 비참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정말 희망이 없는 더러운 인간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자기 자신이 겸비하게 낮아지게 될 때 마음에 어떤 현상이 생기냐면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하나님의 모든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 그분을 의지하니까. 죄인의 그런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의 이 경박한 기독교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면 이런 하나님을 향한 깊은 의존, 거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선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강력한 의무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강한 의무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비참한 인간, 하나님이 아들을 주셔서 구원해 주신 그 큰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이 사악한 나의 자아, 나는 정말 비참하고 나는 정말 더러운 인간이다. 내 안에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 이제껏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나의 소견을 버립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자기를 맡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핵심입니다. 이 기독교 신앙에서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뭐냐면 오직 이 사랑만이 자기의 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주는 유일한 동기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적인 사랑, 하나님을 향한 이 사랑 속에는 무엇이 담겨있느냐면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겸비함이 그 사랑 자체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을 이렇게 시어 적으로 사랑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 내가 너 사랑해주지. 그래 자 내가 쓰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항상 하나님을 아래에 놓고 사랑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진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 없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이 합치했기 때문에 그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두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깨뜨려지지 않는 신앙생활을 해 나갑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열렬한 열망이 있습니까. 주님을 구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생사를 걸고 주님의 얼굴을 찾는 그런 사모함과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없습니까. 영혼이 이미 하나님을 향해서 권태감을 느끼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고 있는데 어떻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생명을 걸고 주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런 속에서 의존의 감정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런 속에서 겸비함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런 속에서 주님을 향한 진실한 인격적인 사랑을 발견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몇 푼 안 되는 마음도 들이지 않는 의무를 행하는 것으로 바꾸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볼 때는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마음속에는 항상 황량한 빈들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지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먹지를 못합니다. 그 말씀에 배부르지를 않습니다. 그 말씀에 깊이 은혜 받지 못합니다. 늘 굶주립니다. 그래서 비참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렇게 비참한 사람들이 가장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얘기합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요.” 하나님 앞에 깊이 낮아진 사람, 하나님 앞에 깊이 겸비해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요. 고단한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때로는 잘 달려갈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죄와 악함이 가득하게 찬 것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열렬한 소원과 그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피곤과 싫증으로 하나님 앞에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여러분은 정말 주님을 찾는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스스로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배부르고 싶어 하는 깊은 겸비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는 주님이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나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나의 죄와 악함이 가득 있으나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으로 나를 먹여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한 번 그 말씀에 변화받기 위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거는 그런 마음, 그것이 진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신자의 겸비한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면 주님을 만나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과거에 지은 많은 죄 때문에 오늘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이러한 겸비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배 부르려고 하는 이런 간절한 그리움이 여러분들에게 없기 때문에 지리멸렬하고 그리고 피곤한 신앙생활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겠습니까. 또 이 어두운 그림자를 이끌고 그 아름답고 깨끗한 땅 2005년도까지 끌고 갈 작정입니까.
오늘날 나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던 것을 나는 똑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택하십시오. 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과거에 이 세상에서 살아오던 대로 섬기던 이 세상의 신과 세상 사랑과, 자기 육체에 대한 자랑과 이런 것들을 섬기면서 살든지 택하십시오. 주님 편에 선 사람들은 오직 여호와 한분만 섬기려고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끌고 다시 깨끗한 2005년의 땅으로 끌고 들어가지 말고, 여기 2004년에서 모두 장사지내고 그리고 이제는 새해를 시작해야지. 정말 하나님은 오늘도 죄가 아무리 만아도 겸비하게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멀리 떠났던 나 자신을 돌이키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오늘 그 말씀을 먹고 배 부르려고 하오니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영혼을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5.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찬송을 주심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시편22:26下)
시편22편 26절 지난 시간에 상반 절을 설교했고, 오늘 이 시간에 하반 절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진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혼의 만족을 얻고 싶어 하지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만족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난 시간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어서 시인이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을 찾는 자는 찬송하게 될 것이라. 고 말합니다. 찬송을 언제 하게 됩니까. 우리들이 찬송을 하게 될 때에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몸과 그리고 우리의 모든 환경이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을 찬송할 때가 있죠. 그리고 그 찬송은 그 고난 가운데 찬송이 많이 흘러나옵니다. 그래 찬송가 작사의 역사를 보더라도 커다란 전쟁과 그리고 큰 시련이 있을 때마다 그 주옥같은 찬송가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마치 그 화초가 가시에 찔릴 때 진한 향기를 발하게 되듯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도 역시 고난 속에서 많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또 모두 좋은 환경 속에 있다고 해서 성도들이 찬양하는 것은 아니죠. 결국 이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고난스러운 환경에 있건, 평화로운 환경에 있거나 환경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과 마음의 상태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여정을 돌아보아도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찬송하며 살았던 날들은 평탄했던 날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시련과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하나님을 인하여 기쁘고 만족을 누리게 될 때에 그 때에 고난 속에 있어도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평안할 때에도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영혼의 상태 마음의 처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환경에 의해서 저절로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시인이 하나님을 찾는 자는 찬송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이 마음과 영혼의 상태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그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재미있잖아요.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뭐든지 다 주신다. 그래야지만 요즘 우리들은 속에 시원한데 예수 안에 영생이 있고, 예수 안에 기쁨이 있고, 예수 안에 진정한 구원이 있고, 예수 안에 충만함이 있고, 그런 것 말고, 예수 안에 아파트 있고, 예수 안에 자동차 있고, 예수 안에 신랑 있고, 예수 안에 신부 있고, 그래야 좋잖아요. 예수 안에 가장 좋아하는 돈도 있고, 그래야 속 시원할 텐데 그렇지 않죠. 시인이 오랫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시시 때때로 주님 도우시는 은혜로 살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힘입으면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더군다나 표제에 보니까 뭐라고 했느냐면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얠렛샤할에 맞춘 노래” 그 당시에 뭔지는 모르지만 “사슴가”라고 불리 울 수 있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맞추어서 부르게끔 그렇게 지은 시입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체험에 근거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고난을 많이 받고 으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더니 하나님이 응답해주시고 즉시 그 위험에서 건져내시고, 원수들을 파멸시키시고 한 기적적인 경험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다윗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이겼을 때 그 이김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우리가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세상을 이기게 하시고 적군들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였잖아요. 다윗이 그런 식으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찬송이 물론 전쟁을 해서 수많은 적들을 파멸시키고, 그리고 그 승리의 현장에서 부르는 찬송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떻습니까.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즉시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슬픈 새와 같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고, 냉과리와 같이 자기의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통 가운데 두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본 결과 시인이 놀라운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환경을 뛰어넘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모든 것이 형통하게 열리고 내 마음 먹은 대로 잘 될 때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에 대한 아첨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신앙의 참된 대의는 나를 버리고 나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해서 그분의 뜻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대의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사람에게 육신적인 박력은 점점 사라집니다. 그래서 연약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고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대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이라고 하는 틀 속에 언제든지 담겨져서 다시 빚어질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빚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안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우리의 마음을 당신 뜻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움직이시려고 하지만 우리의 마음의 선입견과 무지, 편견, 이런 것들로 인해서 딱딱하게 굳어져 있고,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욕구에 의해서 굳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많은 감화를 주셔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이처럼 녹아내리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존하면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잘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관건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바꾸는데 기도의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나의 태도를 바꾸는데 기도의 능력의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 있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이라도 박살을 내 버리려고 하는 오만에 가득 찬 기도는 응답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욕으로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하여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아주 아름답고 강력한 기도를 보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해서 완전히 녹아내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신자, 기도 자를 하나님이 보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도하면 물론 하나님이 그 위기의 상황을 순식간에 바꾸어서 고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찬양하는 이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실 때도 있었고, 또 해주시지 않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언제나 똑같은 결과가 왔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여러분들의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그런 경험 있죠. 어떤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어서 그것이 꼭 응답받아야 될 것 같아서 간절히 기도하다 보니까 그다음에는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변화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그렇게 기도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입증해보이고 싶어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쇄신된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런 하나님을 향한 찬송, 누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냐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신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이것은 “다라쉬”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다라쉬”는 추구하다. 찾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막 쫓아가는 것 그것을 다라쉬 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간절히 쫓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찾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찾는 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찾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 하나 이외에는 다른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찾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도저히 그것을 포기할 수 없고, 다른 것을 향해서 마음에 관심이 나누어지지 않고,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허비하거나 소비시켜서라고 지금 없는 그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찾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여건 내는 것은 너무 쉽고 비자 내기도 미국 비자 내기가 어렵다고 투덜대기도 하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내주지 않겠어요. 교수를 하다가 그만 두었잖아요. 그리고 이제 목회에 전념했잖아요. 교수 때는 가지고 않고 그냥 제직 증면서 주면 내주잖아요. 그만두고 나서 미국 비자를 내려고 했더니 내가 무직자로 등록이 되어있데요. 왜? 교회가 교단 가입도 안 되어있지. 원래 목사를 거의 무직자 하고 비슷한 수준으로 쳐줍니다. 여기 롯데 백화점에서 카드도 안 만들어 준데요. 우리 집 사람이 그런데 꼭 내야 되겠어요. 그래서 이 서류 저 서류 다 떼고 뭐 출판사에서 인쇄 받은 영수증까지 다 떼고 그리고 옛날에 있던 대학 재직증명서까지 다 떼었더니 내 주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한번 잊어버렸거든요. 분명히 파란책 속에 넣어놨는데 집회 날짜는 다가오는데 없었습니다. 한 3일 동안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요. 책을 온통 다 뒤졌습니다. 하여튼 파란 것만 보이면 다 여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약과입니다. 한20년 전의 일인데 제가 아는 분이 여권을 잊어버렸는데 그 여권이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확신은 없는데 식구들이 쓰레기통에 넣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하여튼 그랬데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러면서 그 때 9일인가 출국날짜가 남았는데 그것을 못 찾으면 큰일 나는데 그래서 고민했더니 누가 그러더래요. 난지도에 가서 찾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난지도에 쓰레기 버릴 때. 사실 그것이 말이 됩니까. 서울 인구가 1200만인데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갔는데 거기에서 말하자면 대방이 있더래요. 쓰레기 분리하는 최고 넝마주이 같은 사람, 신기하게 찾아준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쓰레기통에다만 버렸으면 거의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간단합니다. 찾으면 50만원을 내 놓으십시오. 그러더래요. 20년 전에 50만원이니까 굉장한 돈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50만원이 문제가 아니지. 그래서 좋다. 그랬어요. 야, 대단해요. 9명을 풀어서 3일을 뒤졌답니다. 그것 시간이 없어서 내가 다 말은 못하겠는데 뒤지는 요령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쓰레기가 분리되는데 차가 들어오면 아무렇게나 막 갖다 버리는 것이 아니고, 어느 동네인가가 나오면 어느 정도에 있는지 나옵니다. 그래서 언제쯤 왔느냐. 그러면 이것이 묻혔느냐 위에 있느냐 까지. 우리는 그냥 갖다 아무렇게나 막 버리나 그랬더니 그것이 아니고 쓰레기를 버릴 때 어느 정도 분류를 해서 버리니까 이 범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9명을 풀어서 3일 동안 밤 낮 없이 뒤지는데 그 요령이 여권 비슷한 색깔이 있는 것만 먼저 모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것만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쓰레기에서 넝마를 하니까 찾으면서 하는 것입니다. 찾으면 50만원 준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야 원급도 더 되는 것인데 그것을 너도 나도 와서 이제 덤벼들어서 결국은 찾았다는 것입니다.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감동적인 것은 뭐냐면 3일 동안 그 여권주인이 그 옆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찾았을 때 그 사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그 쓰레기더미에 앉아서 펑펑 울고 싶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사업인가 뭔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못가면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답니다. 9일 남았는데 그 여권을 만들고 비자를 다시 만들 그 시간도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찾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찾았는데 물에 젖지도 않고 그대로 나왔데요. 그러니 얼마나 뛸 듯이 기뻤겠습니까. 그 자리에 앉아서 아마 펑펑 울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찾는다는 것입니다.
“에프비 마이어” 라고 하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자는 누구도 그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없다.” 그랬습니다. “왜냐면 깊은 우정은 어쩌다 한번씩 흘낏흘낏 쳐다보는 눈길 주는 것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 감명 깊은 말입니다. 아까 쓰레기는 깜짝 놀라시더니 이런 좋은 말에는 전혀 감동을 안 받으시네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가끔 주님이 생각나는 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사이의 우정이라고 하는 것도 그 사람을 알고 친해지려고 깊이 노력할 때 되는 것인데 이렇게 뭔가 이렇게 반쯤은 의심이 섞인 눈빛으로 흘낏흘낏 쳐다보는데 그것이 10년을 옆에 집에서 살아도 먼 이웃이지 그것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남녀가 여기에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주례를 설 때에 나는 신기해요. 어떻게 이 인간이 이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일평생 태어나서 한번도 그것을 못해보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또 너무 많이 해서 문제가 되는 사람도 있죠. 그렇지만 한 사람이 태어나서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해요. 그런데 혼자서만 사랑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 사람도 사랑하고 저 사람도 사랑해야 되요. 그리고 모든 것이 맞아야지만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주례 설 때 호적 초본까지 다 떼거든요. 부모 동의서까지 다 받아서 서류가 이만큼입니다. 그런데 다 합격을 했어요. 교리문답도 합격하고, 그래서 교회를 빌려주고 주례를 서는데 그것 기적이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둘이서 자매는 저기 앉았고, 형제는 여기 앉아서 한두 시간에 한번씩 이렇게 쳐다보면서 “아이고, 뭐 저런 게 있네.” 이런 식으로 이렇게 쳐다본다고 해서 사랑이 싹트겠느냐는 것입니다. “에프비 마이어”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그 은혜 속에서 살고 그분과의 평화를 누리고 달콤한 교제 속에서 살았던 사람, 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작에서 가장 나타나는 그 사람의 특유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스위트니스” 번역하면 “하나님의 달콤함” 이것을 번역하면 좀 이상하죠. “하나님의 달콤함” 사실 그것을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달콤함” “하나님의 스위트니스” “오늘도 그 하나님의 달콤함을 맛보았다.” 또 아메리칸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의 일기에도 그런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청교도들의 문헌에 그 스위트니스가 아주 보편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달콤함 그런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그런 달콤함을 느꼈던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면 하나님을 철저하게 추구하고 그분께 부합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존재가 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갈망에 넘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가끔 나타나는 백 금산 목사님이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그 책을 썼습니다. 그것 한번 읽어보세요. 거기에 보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기 결심, 그 속에서 어떻게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매 순간 결단하고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애를 썼는지 상세하게 기록에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이 생각나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결심하면 그대로 혹은 몇 일 금식을 하면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삶의 방향을 정합니다. 그리고 매일 점검하고, 일주일에 점검하고, 한달에 점검하고, 일년에 점검해요. 그런 책을 보면서 많은 독자들이 그래요.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를 읽은 소감이 어떻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결론은 없다.” 몇 사람 책을 사줬더니 이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면 신경과민증적 율법주의자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모질게 학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그만큼 살고, 그만큼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고 에드워즈는 그만큼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랑하는 청교도들은 신앙의 아주 뚜렷한 특징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하는 주제와 관련해서 지적하자면 그리스도와 깊고 달콤한 사랑에 빠진 지성인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탐구하면서 들어나가면서 깨달아가는 그런 사람들이었고, 그다음에 동시에 그런 지성만 살아있는 사람이면 아주 차갑고. 냉랭했을 터인데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풍부한 영적인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서 설교되는 설교 중에 되게 어렵다. 라고 느끼는 것이 아마 청교도들은 주일학교 학생들도 아마 이해했을 정도의 그런 정도의 설교수준밖에 안 됩니다. 진짜 그 진수를 깊이 들어가면 진짜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한번 설교해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들의 특징이 뭐냐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충족 성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에 충분하시고, 그리스도의 속죄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하시며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구속의 공로는 하늘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을 덧입게 하시에 충분한 공로적인 기초를 만들어 놓으셨다. 이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마음에 속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그 충만함이 가득 찬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환경을 하나님이 어떻게 변화시킬지 그것은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지 중요한 것은 환경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왕에 못지않는 호위호식을 하며 모든 것을 누리면서 평탄한 길을 걸어가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죄 가운데 빠져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으면 거기는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토마스 굿윈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천국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안 계시면 나는 당장 도망갈 것이다. 왜냐면 거기는 지옥이기 때문이다.” 생명 수 강이 흐르고 뭐 별 난리를 다 쳐서 모든 것이 있어도 예수님이 거기 안 계시면 거기는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신부가 시집을 갔는데 신랑은 없고 60평짜리 아파트만 있어요. 그러면 거기는 감옥이죠. 그렇죠. 그것이 감옥이지 문화주택 일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성도가 천국을 갔는데 예수님이 안 계셔요. 그러면 간단하게 얘기합니다. 거기는 지옥이다.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거기는 지옥이다. 지옥은 불붙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 안 계신 곳이 지옥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토마스 굿윈의 이러한 통찰은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인생을 이렇게 돌아볼 때 진짜 하늘에 있는 것 같은 기쁜 날들은 언제였습니까? 돈 많이 벌 때도 아니고, 승진할 때도 아니고 좋은 차 살 때도 아니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주님이 나와함께 하실 때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 속에서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을 살면서 언제가 지옥 같았습니까? 가난할 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부유할 때, 그것은 더더욱 아니었죠. 그러면 언제요? 주님이 안 계실 때. 그 때가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찾는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찾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찾는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께 끊임없이 연합되려고 하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 되는 것 같은 연합을 누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진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행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그런 친밀한 관계 속에서 있고자 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을 찾는 사람을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니까. 하나님을 갈망하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모든 방면에서 무재한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지 안 사랑하는지를 알아보려면 사랑이 고백될 수 없는 환경,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환경에 두어보면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지 안 사랑하는지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들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것이 다른 그 어떤 덕목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 세리와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잖아요. 그들이 죄인 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들이 그 죄를 회개하고 나서는 예수님을 전심으로 찾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더 많이 사랑받고, 예수님께 더 가까이 있고, 예수님께 더 많이 섬김을 드리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죄인이었으나 이제는 죄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추구가 곧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받게 만들어주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그 유명한 누가복음 18장에서 죄인인 세리가 가슴을 치면서 그렇게 슬퍼하면서 울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 이었습니까? 어떻게 해주면 그 눈물이 딱 그치게 해 줄 수 있습니까. 돈을 많이 줄께. 그래도 그 눈물을 그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슴을 두드리는 이 비참한 세리의 눈물을 그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세상의 다른 것으로는 안 됩니다. “어머 너 승진했데.” 그런 얘기가 들려와도 그것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야, 세금 더 많이 뜯을 때가 발견되었데.” 그래도 그것 가지고 해결이 안 됩니다. 오직 해결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 죄를 용서해줄께. 그리고 내가 너의 기도를 들어줄게. 한걸음 더 나아가서 네가 그렇게 회개하고 용서를 비니 내가 너를 사랑해주고 내가 너 옆에 있을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이 이 세리의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보세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예배에 안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또 해야 할 의무를 안 행하는 것도 아니고 다 합니다. 그런데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요. 또 옛날에 누렸던 신앙의 깊은 감격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요. 그 때에 바보같이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야, 그것 교회에 다녀봐야 소용이 없구나. 예배에 출석해봐야 소용없구나. 열심히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물질로 섬겨도 소용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영혼의 만족을 누리고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 헌금하는 것, 섬기는 것, 그것이 여러분들을 하나님을 못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에 부합한 사람이 되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더 많은 사랑을 받고, 그분과 연합된 존재가 된다. 실제적으로 그 영적인 연합을 누리면서 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한 간절한 추구를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을 찾는 그의 간절한 분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무엇보다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알겠다. 그런데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풀어야 될 숙제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그렇게 찾게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왜 그렇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사람을 만나주시고 당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영혼에 만족을 주십니다. 변화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고, 순종할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이제 알았는데 그러면 왜 나는 그렇게 안 될까? 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을 그렇게 찾고 싶은데. 여러분도 여러분 생애에 그렇게 이 세상에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리고 오직 주님만을 간절히 찾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한 두 번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영혼에 아주 깊은 만족을 주셨습니다. 사랑을 주시고, 그런데 그렇게 되고 싶은데 지금 그렇게 못해요. 그런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이것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마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부패라는 시리즈가 여기에 대한 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보다 더 현실적인 것, 하나만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림으로서 이 본문에 대한 해설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실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이게 뭐냐면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그랬으면 좋겠다. 라는 희망을 갖는 것과,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된다. 라고 하는 이 갈망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전자의 그 희망은 상황에 의해서 막히거나 여건에 의해서 방해를 받으면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 그런 종류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해야된다. 라고 하는 예를 들면 어떤 사고가 났는데 자기 자녀가 반드시 살아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갈망하는 것, 이것은 타협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갈망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희망은 양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 이외에 바라보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흩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빛을 모으는 원리와 같습니다. 돋보기로 빛을 쫙 모으면 가죽이나 헝겊, 종이 같은 것을 태워버리듯이. 심지어는 나무도 연한 것 태워버리듯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추구는 양보할 수 없는 그 한 가지 목표에 매달려서 주님을 간절히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이 마음의 쇄신의 작용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을 안 찾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희망도 있고. 심지어는 거창하게 생애적인 변화를 받고 싶다는 고백도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랑하는 것도 많고, 영혼에 대한 싫증도 간직하고, 세상에 대한 사랑도 간직하고 또 변화받기 싫어하는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이런 모든 불신앙도 간직하고 그리고 신앙의 길을 걸어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성경도 읽고 하지만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간에 거기에는 모두 하나님을 향한 적당한 싫증,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적당한 권태감, 이런 것들이 다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받으셔도 순전하고 깨끗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향기로운 제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피곤한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가는 동안에 시간은 계속 흐르고 우리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육신적인 일에 대해서는 덜하지만 신령한 일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죄 된 본성에 어울리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그 은혜를 받고 싶어 하고 그럴 수 있지만 그것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에 빠지면 오래도록 그것을 즐거워해도 신령한 은혜를 갈망하고 받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안달하고, 그리워하는 그런 마음이 무한정 오래 지속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나님을 향한 싫증과, 세상에 대한 사랑, 그리고 끊지 못한 자신의 정욕에 대한 미련, 그런 것들을 모두 다 싸안고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추구하기 위해서 길을 떠나기는 떠났는데 그런데 그 입은 옷차림새나 들고 있는 물건들이나, 신은 신발의 모양이나 이런 것들이 진짜 달려가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슬리퍼 끌고, 그리고 쭉쭉 늘어지는 비단 옷이나 입고, 그리고 귀걸이, 목걸이, 팔걸이 다 하고, 띠도 없이 조금만 뛰면 그저 속옷이 흘러내릴 것 같은 그런 옷을 입고, 경주 장에 나왔는데 그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간절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렇게 하니까 그의 모든 삶이 다 온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기도를 해도 적절하게 하나님께 대한 권태감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싣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맡겨주셔도 그 일을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온전하게 해서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야 되겠다. 라고 하는 의도된 목표가 없습니다. 그저 일에 떠 밀려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드려도 이 물질의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한 것을, 내 마음이 담긴 것을 전적으로 드려서 그래서 이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시고 싶은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내가 그 하나님을 도와드려야 되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일을 거들어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해도 거기에 모두 하나님께 대한 싫증과,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 적절한 권태감, 죄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것입니다. 불투명하게.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멀리 떠난 적은 없었는데 한번도 하나님을 찾은 날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너무나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인생에 가장 큰 문제이고 그것을 극복하기 전에는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니까 신앙생활이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저것 주워들으면서 지식적으로는 쌓여 가는데 그 지식이 살아있는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이 지성의 창고에 쌓인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살아있는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실천으로 말미암는 피가 솟구쳐서 그 지성을 적셔야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지식들이 피에 젖은 지식이 될 때에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살아있는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인생을 살면서 대부분의 삶을 종교적으로 보냈는데도 진짜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적도 없어요. 하나님 때문에 불행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져 본적도 없고, 하나님 때문에 안 된 것도 없지만 하나님 때문에 된 것도 없다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랑에 빠진 성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마치 여권을 잃어버린 사람이 난지도를 뒤져서 여권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나에게 위로가 될 수 없고, 아무것도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을 찾는 사람,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그 죽었던 영혼 속에서 터져 나오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10년을 대체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1년을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 많이 만나는 풍성한 은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것들이 어떤 것인가요? 정말 여러분들에게 소중한 것이 있습니까? 주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두고 가야 할 것들, 그것들 중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있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주저하게 만들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고, 그분 안에서 창조의 목적을 구현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사랑과 연합되며 그분과 하나 되어서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갈망하던 바였습니다.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며 사는 삶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모든 행복이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전심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그분을 찾고, 그분께 매달리기 위해서 결단하고, 그러기 위해서 잃어버려야 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말합니다.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하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런데 문제는 너무나 결심이 약하고, 그리고 너무나 올곧음이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으면서 자극을 받아요.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그 결심이 오래 가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마치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그 사랑과 그 돌보심으로부터 떨어지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심으로 매달리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 내가 그분을 찾고 있는 것을 입증하며 그분께 매달릴 때 주님께서 왜 우리를 안 만나주시겠으며 그렇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어찌 찬송이 깃들지 않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당신을 찾는 아무도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을 찾는 자가 누구든지, 하나님이 그들을 용납해주셨고, 그들이 어려움이 변해서 그들의 마음에 당신을 향한 찬양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창녀와 세리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을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도둑과 살인자들의 주님이시라고 일컬음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당신을 찾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6. 곤고한 땅에서 하나님을 갈망함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 하나이다.”(시 63:1)
구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습니다. 또 다윗만큼 하나님을 갈망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과 갈망은 매우 깊은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만날 수 있고, 함께 있을 수 있는 동안에는 사실 우리가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상대방도 잘 모르고 우리 자신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헤어져보고 환경에 의해서 만날 수 없는 상황이 될 때에 비로소 우리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게 되죠. 무엇을 통해서 알게 될까요? 보이지 않을 때에 그 사람에 대한 갈망의 크기는 보일 때 그 사람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사랑의 깊이와 정확하게 일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제 1월 달이 지나고 나면 2월 달부터 새해 들어서면 이제 대학 다니던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군대로 불려가죠. 집에서 맨 날 늦게까지 잠이나 퍼질러 자고 그리고 후딱 하면 용돈이나 달라고 하고 심통이나 부리고 그러면 부모가 볼 때에 원수덩어리 같아요. 요즘 병무청은 뭐하나 저것도 안 잡아가고. 그러다가 그래도 공익 근무라도 안 떨어지나 그러고 있다가 현역 2병 그러면서 판정을 내려요. 제일 만세 삼창 부르는 사람이 엄마입니다. 잘 되었다. 진짜 잘 되었다. 옛날에 우리 박 헌준 목사님이 청년이었을 때에 매일 교회에 와서 군대 안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 진심을 참 갸륵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 좀 더 많이 하게 해 달라고, 그런데 사실은 진짜 교회에 봉사를 하고 싶었는지 군대가 무서웠는지 그것은 하나님만 아시죠. 그래서 우리도 열심히 기도해줬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집에 어머니가 계시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우리 박 헌준 청년이 군대 안 가게 해 달라고 기도 많이 하는데 우리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으니까 어머님도 기도 하십시오.” 그런 식으로 권면을 하면 당연히 어머니가 “아이고 목사님 그렇게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럴 줄 알았거든요. 그랬더니 “우리 모두 박 헌준 청년 군대 안 가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딱 잘라서 그래요. “안 돼요. 목사님 쟤는 가야 되요.” 그게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군대를 가지 않습니까. 현역 되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좋아서 만세 삼창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 이제 군대를 갈 날이 다가와요. 왜 이렇게 날짜가 안 가는 거야. 빨리 빨리 좀 갔으면 며 일만 더 참자. 참자. 그러다가 가요. 가지 일주일 전가지 초연해요. 3일, 좀 가슴이 흔들려요. 하루. 기분이 좀 이상해요. 그리고 보내요. 그리고 매일 퍼질러 자고 방소지도 안 한다고 문만 열면 소프라노로 소리소리 지르던 그 방을 쳐다보니까 이 퍼질러 자는 놈이 없어요. 가슴이 싸늘한 거죠. 그리고 아이 군대 보낼 때쯤 되면 대게 40대 중반이나 50대쯤 되잖아요. 그 연령적으로도 가슴이 시릴 때 입니다. 그때 비로소 이제 그러는 것입니다. 보내놓고 그다음에 집에 와서 울죠. 그러다가 한 일주일 있으면 옷이 와요. 그러면 또 한번 울죠. 결국은 뭐냐면 쳐다볼 때 그렇게 원사 같았는데 자식을 사랑한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그 옷이 온 것만 봐도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아들도 마찬가지요. “아이고 지겨워. 진짜 빨리 군대 들어가서 나라 밥 얻어먹어야지.” 그리고 가보니까 달을 봐도 엄마 생각나고 별을 봐도 엄마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헤어지고 나면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똑 같은 것입니다. 가끔 저에게 어떤 사람이 그러거든요. “목사님 저는 이상해요.” 왜요? “저는 목사님이 설교할 때 말씀하시는 것 같은 그런 갈망이 잘 안돼요.” 이 자리를 빌어서 제가 답을 얘기해 줄게요. 당신은 하나님을 별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뭘 그것을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하나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왜 만나고 싶겠으며,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하고 왜 함께 있고 싶겠어요. 똑같은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유대 광야에 있을 때에 이 시를 쓴 것입니다. 적어 두었는지 그 때에 마음에 떠오른 생각을 나중에 정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지 광야에 있을 때에 이 시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광야에 있을 때는 결국 언제라는 것입니까. 사울에게 추격을 받으면서 도망 다니던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리고 왜 쫓겨야 되는지 죄목도 모르는 그런 끊임없는 도망자의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광야에 유리하면서 숨어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지난 시간에 설교하면서 제가 얘기했습니다. 만은 천외의 지형입니다. 그래서 굴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숨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비나 라덴이 광야로 도망간 것처럼 그렇게 못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망을 다니면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쫓아다니는 사람도 고달프지만 도망 다니는 그 다윗의 처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사울에게 무슨 나쁜 짓을 했어요. 이스라엘에게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준 죄 밖에 없는데 그것이 어떻게 죄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집요하게 미치광이처럼 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몸부림치면서 추격하는 것입니다. 이 다윗이 도망을 다니는 것입니다. 도망자는 외롭습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이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 외로울 때 광야의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서 광야를 유리하면서 지냈습니다. 그가 뭐라고 얘기 하냐면 “내 영혼이 주를 찾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뭐라고 고백하는지 한번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그랬습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히브리 성경에 보면 “나의 목숨으로서, 혹은 나의 혼으로서” 자기를 다 바쳐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간절히 찾는다고 번역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내가 주님을 찾습니다. 나의 생명을 걸고 주님을 찾습니다. 나의 온 혼을 다해서 내가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시인이 왜 이렇게 주님을 간절히 찾을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첫 째는 뭐냐면 환경적인 어려움으로부터의 구출을 위해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왜? 사울의 군대는 수가 많습니다. 이 잡듯이 광야를 뒤집니다. 자신은 도망을 다니는 신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도망을 다니지만 언제 붙잡힐지 모르는 그런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환경적인 깊은 어려움 속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자기 자신은 자기를 건져낼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즉시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어려움이 생기면 우리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하나님 간절히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 내가 지금 너무 목이마릅니다.” 기도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냉장고에 가서 꺼내서 물 한 병 마시면 되지. 자기 자신 안에 자원이 있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습니다. 시인이 환경적인 어려움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는 그 환경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아직 합법적인 왕입니다. 자신은 반역자의 누명을 쓰고 도망을 다니고 있습니다. 집요하게 찾아 나서는데 결국은 발각당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들의 손에 잡혀서 죽는다고 할지라도 누구하나 자기의 죄 없음을 입증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사울은 강하고, 그리고 다윗은 약했습니다. 사울은 칼자루를 쥐고 있고, 다윗은 칼끝을 손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누가 위험하겠습니까. 사울은 자원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혈혈단신으로 도망을 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런 환경적인 어려움에서 구해주시도록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못 살았고, 하나님이 한번 버릇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자녀를 환경적인 깊은 어려움 속에 두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복수를 하신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시시해요. 여러분들이 부모인데 자식을 향해서 만약에 잘못한 아이를 때려준다. 그러면 그것이 복수입니까? 네가 이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 너도 한번 배로 당해봐라. 그리고 두들겨 패면 그것이 진짜 엄마입니까. 그럴 수 없잖아요. 하나님도 똑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목표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 바른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는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를 환경의 큰 어려움 속에 두실 때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냐면 어떤 잘못한 것에 대해서 형벌을 내리기 위해서 어려움 속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짖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틀이 쇄신되고, 하나님 한분 밖에는 자신에게 소망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도움이 필요한 환경의 어려움 속에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를 두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이런 깊은 환경적인 어려움에 처한 것입니다. 사울에 의해서 도망을 다니며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의 추격을 받는 상황 속에서 이전에 다윗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만큼 잘못한 죄가 다윗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처럼 순결하고 그처럼 하나님을 어린 아이처럼 사랑하고, 주님을 따르고 그분께 부종하려고 했던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런데 지금 아무도 없는 외로운 광야에서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시련의 밤을 지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이제 이 다윗을 크게 쓰시려고 합니다. 크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마음이 큰 사람, 하나님이 높이 쓰시려는 사람은 마음이 강한 사람,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려고 하는 사람은 마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적어도 한 나라를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게 하시려고 한 계획이 하나님께 있었고, 그 다윗의 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보좌를 보여주시고 싶은 계시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이 다윗에게 그런 기대를 거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그런 계획에 부합한 사람으로 만드셔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으려는 사람은 더 철저하게 순전하도록 하나님이 연단하시고, 하나님이 크게 쓰시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마음을 매우 강하게 하시는 연단의 불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 풀무에 담아서 달굼 질을 한 그 쇠는 점점 강해져서 철과 철이 맞부딪힐 때에 상대방의 철을 부러뜨리기까지 하는 힘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자원으로는 도저히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 환경 속의 어려움에서 건져주시도록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환경적인 이런 어려움에 처한 것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어야합니다. 이런 환경적인 어려움에 깊이 처하게 되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면서 그 도움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붙어있고, 하나님을 향해 변화 받은 그런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으라고 어려움을 주셨더니 그 어려움 속에서 근심과 걱정으로 영혼을 부패시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환경적인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 그 어려움을 통해서 주께로 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도록 그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주님을 바라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환경적인 어려움 속에서 기대하고 계시는데 그 어려움 때문에 근심과 걱정에 휘말려서 그나마 있던 은혜까지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문제는 어려움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라면 큰 어려움, 그다음에 적은 어려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가 산 것이 우리의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에게는 어려운 일도 쉬운 일이고 쉬운 일도 쉬운 일입니다. 아이들의 힘으로는 벽돌 한 장을 혼자 들어야 할 상황이나 두 장을 혼자 들어야 할 상황이냐가 아이들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할 차이일지 모르지만 어른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듯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의지하지 않음을, 어려움 속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그리고 이 어려움 속에서 내가 내 안에 있는 자원으로는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을 간절히 불러야 되겠다. 이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하는데 그것이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올 때 그 어려움을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치료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의 이름을 부러요.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과 그 은혜를 구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환경적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이 나를 도와달라고 주님을 간절히 찾다가 보면 그다음에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기 전에 모두 잃어버렸던 자기 자신을 먼저 찾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생기기전에는 지금 자기 신앙이 어느 지점쯤 와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내가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간절히 주님께 자기의 마음을 집중시키는 가운데 비로소 자신의 이 신앙생활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 이러한 부분들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났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졌는가 하는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 자신을 먼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자기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만나면서 그 모습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인지, 안 기뻐하시는 모습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것의 가장 구체적이고 최종적인 적용이 뭐냐면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말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기대하시는 모습과 자기가 그 어려움 속에서 만난 자신의 모습 사이에 있는 커다란 차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이 자기를 보며 아파하시는 그 주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인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이유는 자신의 그 환경적인 어려움으로부터 자기를 구해달라는 거기에서 주님을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찾은 것입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첫 번째 이유가 발전함으로서 두 번째 이유로 나아간다고 말할 있습니다. 그 두 번째 이유가 뭐냐면 영혼의 깊은 어려움으로부터 자기를 건져달라는 그런 이유에서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자, 시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거룩하고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광야에서 도망을 다니면서 사울이 풀어놓은 자객의 추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양심에 사울을 해친 적이 없고, 사울에게 그렇게 죽임을 당하여야 할 만큼 잘못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양심이 깨끗했습니다. 자유로웠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사울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왜? 양심의 자유로움이었습니다. 양심이 떳떳하고 또 하나님을 의지해요.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부종하려고 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요.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없죠. 그러면 그 메마른 땅, 그 광야 한 복판을 지나면서 양심의 거리낌이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면 두려울 것이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그러면 기쁨 충만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그렇습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연약한 존재입니다. 죄가 없고 하나님 앞에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고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고 그렇기만 하면 그 성도에게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그 성도는 항상 룰루. 랄라 찬송만 부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가책을 받는 것이 없고 그래도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고 고통은 고통입니다. 다만 그것을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아니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승화시키기에 좋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은혜 안에 살고 있으면, 그러나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오늘이 어떻게 보면 더 많이 아프죠. 은혜 밖에서 완전히 떨어져서 가슴이 돌덩이처럼 굳어진 사람들은 눈물도 안 흘려요. 그리고 막 너무 어려움이 닥치면 어느 한계까지는 막 고민하고 하지만 그 한도가 꼴깍하고 넘어버리면 아이고,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될 대로 되라지. 그리고 자기 자신을 확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그 고통스러워요. 하나님과의 거리낌이 없고, 그리고 주님 사랑해요. 그리고 자신이 잘못한 죄 때문에 오는 고난이 아니에요. 그래도 그 아픈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도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다윗이 눈물로 그 광야의 시간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영혼의 어려움 입니다. 그래서 환경적인 어려움과 영혼의 어려움, 환경의 깊음과 이 영혼의 깊음, 이 두 가지는 떨어지기 힘들 정도로 항상 같이 붙어 다닙니다. 물론 우리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안에 우리가 있을 때에 때로는 환경적으로 너무 고통스럽고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상황 속에 놓여있는데도 그 속에서 신앙으로 그 어려움을 승화해서 가슴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환희로 꽉 차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빌립보서를 쓸 때에 그 감옥에 있었습니다. 오히려 옥 밖에 있는 사람들은 감옥에 갇힌 이 사형에 처해질지도 모르는 이 바울을 보면서 근심하며 가슴아파하고 있을 때에 오히려 옥 속에서 갇힌 이 죄수는 옥 밖에 있는 자유로운 사람들을 향해서 “기뻐하라. 내가 너희에게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러면서 기쁨의 편지를 그들에게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 그럴 때도 많습니다. 누구처럼 오늘 이 믿음이 좋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처럼 이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찾는 이유는 뭐냐면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면서 겪게 되는 영혼의 이 깊은 침체와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건져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이 곤고하고 그리고 심령이 깊은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이 영혼이 깊음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자원은 세상에게 있는 사람에게 빌릴 수 있지만 세상에 있는 자원이 우리를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에서 건져줄 수 있습니까. 우리를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주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영혼의 짐을 벗기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의 자원을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을 전심으로 찾고, 당신을 전심으로 구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간절함이 없는 일만 마디의 기도보다는 마음을 다 바친 몇 번의 기도가 이런 하나님의 영혼을 만져주시는 은혜를 받게 더 합당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오늘 이야기 하죠. “곤핍하고 메마른 땅에서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간절히 찾습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은 문학적으로 볼 때 이중의 기법이 중첩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 이것은 뭐냐면 자기가 지금 도망 다니고 있는 광야입니다. 광야에는 물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짝 마른 곳입니다. 여러분들이 영화에서 보면 그쪽 지방이 나오지 않습니다. 돌, 모래, 가시덤불, 이런 것들입니다. 그 물이 없이 바짝 마르고 그리고 곤핍합니다. 곤핍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숲 속이 있고, 여기는 물도 흐르고 나무가 있어서 거기에는 열매들도 매달려 있고, 그래서 특별히 좋은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물도 마실 수 있고, 열매도 따 먹고, 연명할 수 있고, 쉴 수도 있고, 이러면 곤핍한 땅이 아니라. 아주 풍요한 땅이죠. 그러나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마치 자기가 이렇게 걸어가고 있는 이 광야 자체가 자기를 저주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이는 곤핍한 땅입니다. 거기를 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위에 하나가 더 중첩 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의 영혼의 상황이 거기에 중첩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이 물은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은 이 물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거나 혹은 하나님 자신과의 만남, 혹은 하나님 자신과의 만남에서 오는 영혼의 만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시편 42편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시냇물이 곧 하나님으로 묘사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비유가 된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나는 사슴처럼 시냇물 같은 주님을 찾는 것처럼 갈망합니다.” 이렇게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이야기 하는 “시냇물” 혹은 “물” 이것은 뭐냐면 하나님 자신이거나, 혹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절 끝 날에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리라.” 거기에서 이야기 하는 생수도 역시 물이죠. 이것은 뭐냐면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서 신자들이 누리는 만족입니다. 그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깊은 만족을 누리게 될 때 여기에서 샘물처럼 솟아나오고 그 만족함이 솟아나올 때 그 물이 흘러가는 곳 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실제로 걸어가야 하는 이 피난처인 광야도 물이 없어 메마르고 곤핍하기 짝이 없는 땅이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도 이 마른 광야처럼 뜻밖에 당하는 이 고난과 시련,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곤고한 도망자의 생활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깊은 침체 속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주님을 간절히 찾게 된 것이죠. 오늘 우리들은 오히려 정 반대 아닙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고 그래야할 상황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적으로 메마르고 곤핍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 고 말합니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이 메마르고 곤핍한 땅 속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간절히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는 메마르고 곤핍하기 때문에 물이 없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핑계입니다.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는 이유를 정당화시키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어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일을, 혹은 너무나 많은 환경의 어려움, 시련과 고난, 뜻밖의 환난 이런 것들 때문에 저는 너무나 어려움을 당했고, 그리고 저는 주님을 찾지 못합니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오늘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믿음이 뭐냐면 그렇게 물이 없이 메마르고 곤핍한 땅과 같은 인생을 지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을 오히려 갈망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교회에 나가봐야 누가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기도회를 해도 은혜도 안 되고 예배를 드려도 은혜가 안 되고, 결국 우리는 이렇게 삽니다. 그래서 마치 은혜를 못 받은 것이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설명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 메마른 광야를 지날 때에 누가 시인에게 물 한 모금 주었습니까? 어디에 가면 물이 있다고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까? 물이 없어 곤핍한 땅을 지나면서 그의 육체는 더욱더 목마르고 물을 갈망하게 되었을 것이고, 똑같은 방식으로 주님을 만나기 어려운 이 환난과 많은 어려움 속에서 그의 영혼은 육체가 물을 찾는 것처럼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이 너무나 어렵고 주님을 통상적으로 믿기 어려운 환경이니까 물이 없어 메마르고 곤핍한 것 같은 환경이니까 물 되신 주님이 필요합니다. 영혼이 너무 곤고하고 어려우니까 주님을 찾지 못한 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오늘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는다고 고백합니다.
오늘도 한번 눈을 들어서 세상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밤에도 전 세계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은 거의 같지만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은 다 다릅니다. 눈을 들어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간절히 사모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이 치열한 갈망으로 주님을 만나고 그분으로부터 만족을 얻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 전체의 문제가 달린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주님이 찾아오시겠습니까. 농담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찾아가시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오랜 기도가 하늘에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땅에 떨어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주님께 드리는 숫한 섬김이 주님의 보좌에 이르러보지도 못하고 이 세상에 떨어져버리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런 일이 일어나죠. 그 모든 일은 그가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그가 하나님을 생각하며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주님을 찾는 마음, 이것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섬김은 폐기처분 되고 그들의 많은 기도는 허공을 맴돌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마음에 한번 감동을 받아서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드려야지 결심은 했지만 일단 재산을 팔고 나니까 혹시 아니면 하다가 반쯤 이 세상에 감추어 놓고, 반쯤은 하나님 앞에 들고 와서 그래서 주님을 찾는 그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우리가 그런 식으로 주님을 대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안에 갈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마치 상한 제물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두 마음을 품은 자를 미워하시나니.” 그랬습니다. 두 마음은 품은 사람들,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순결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남편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 두 마음을 품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자체가 불결이고 죄악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신부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께만 우리 자신의 마음과 모든 것이 바쳐지고, 그래서 주님과 동행할 때는 그분을 즐거워하고 주님께로부터 멀어질 때에는 그분을 갈망하는 그것이 신부로서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갈망이 없는 신앙생활이 있고, 또 다른 갈망이 있는 신앙생활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갈망이 없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자기가 좋아서 하는 세상일일 뿐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일년 동안도 가만히 이렇게 돌아보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주신 은혜로부터 부패할 때마다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으면 안 될 환경들을 하나님이 많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1년 내내 형통한 길을 걸어간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은 1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걷기도 하고 시련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기도 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의 부패를 털어내고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없고, 주님의 도움과 그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라고 하는 간절한 갈망, 그 은혜의 간절한 몸부림, 그 은혜의 말할 수 없는 사모함, 그것 때문에 그것을 갖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파할 줄 아시면서도 하나님이 어려움 가운데도 있게 하시고, 고난 가운데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좀 더 귀하게 그리고 우리를 좀더 훌륭하게 쓰시고 싶어 하시는 그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고난도 주시고 시련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엉뚱하게 그렇게 고난이 많고 어려웠기 때문에 주님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오늘 시인은 뭐라고 말합니까? “물이 없어 메마르고 곤핍한 땅이었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서 주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진짜로 주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이 아니면 어쩔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나는 목숨을 걸고 주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물 가운데로도 불 가운데로도 통과하고, 시련과 고난의 어두움과 통과합니다. 우리의 앞으로 펼쳐진 날들은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난의 때가 없겠습니까? 뜻을 세우고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 시련의 시기가 없겠습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도전하는 수많은 악의 세력들과 싸우고자 할 때에 괴로운 날이 우리에게 없겠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을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역사를 보십시오. 이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게 변하고, 이 세상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셔도 성결하게 살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에게 이 세상은 항상 고향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일이 왜 없겠습니까. 그 때에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이 없고 메말라. 그리고 곤핍한 인생이로구나. 그럼으로 나는 주님을 찾을 수 없었노라. 그렇게 힘들고 괴롭고 시련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만날 수가 없었노라. 이것이 주님의 뜻이겠습니까? 아니면 시련이 많고 메마르고 광야와 같은 길을 지나고 물 한 모금 주는 이 없는 것과 같은 인생의 어려움에 종종 쳐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서 주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노라. 이것을 주님이 원하시겠습니까? 무엇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겠습니까. 주님이 바라시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바라다보시고 지극히 작은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천국으로 부름을 받을 나이든 성도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외모나 그들의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어린아이든지, 어른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주님을 처음 믿은 사람이든지 간에 오래 믿은 사람이든 누구이든지 간에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 주님을 찾되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사명을 걸고 주님과 연합되기를 원하고 곤고하고 메마른 인새의 길을 걸을수록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야 말로 주님이 필요하다고 믿으면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 자신이 한 모금의 시냇물을 찾기 위해서 타는 듯한 갈증을 가지고 품고, 그 갈증 속에서 광야를 가로질러 내달리듯이 그렇게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디에서든지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외모를 취하지도 않고 형식으로 취하지도 않으십니다. 중심을 하나님께 토해놓으며 오늘 이 시인처럼 메마르고 곤핍한 땅이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주님을 부르는 사람,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가끔 깊은 밤이나 낮에 교회당에 와 보면 금요 기도회도 아니고 새벽 기도회도 아니고 기도 모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교회 구석구석에 엎드려서 그렇게 말할 수 없이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흐느끼는 성도들이 있죠.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한 사람들, 풍랑 이는 바다와 같은 상황, 눈보라치는 그 모질 디 모진 시련의 상황 속에서 그 속에서 자신을 의지하고 않고 주님을 붙들고 싶어 하는 사람, 그 속에서 자신의 영혼까지도 주님의 손에 붙잡히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매달리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경험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이 그 간절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임재 하셔서 살아계셔서 주님이 보여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7. 하나님 갈망은 곧 말씀갈망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시119:174)
사람은 누구나 편안한 환경에서 고통 받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실제로 고통을 받아보면 평안한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평탄한 삶만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시지를 않죠. 여러 가지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때로는 고난 가운데 시련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잘못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하게 단련시키실 목적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의 결과가 아닌 훈련 목적으로 우리를 불같은 시련이나 혹은 견디기 힘든 결핍가운데로 데려가실 수가 있습니다. 혹은 두 번째로 우리의 죄와 우리의 악의 결과로서 결국 그런 깊은 징계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선택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버리고 죄를 선택한 마지막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열매로 맺히는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훈련시키실 목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죄 때문도 아닌 제 3의 원인으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태도 같은 것입니다. 죄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우리의 잘못된 태도로 인해서 끊임없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듣고는 들은 이야기를 가슴에 묻어두어야 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야할지 그런 판단을 잘 못하고 늘 말을 옮기기를 좋아하는 태도 때문에 커다란 분란을 일으키고 곤경에 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 역시 죄의 문제가 아니죠.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증 서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죠. 보증 서 주는 것이 죄는 아니죠.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보증을 잘 못 서주면 침상이 날아갈 것이라고 잠언서가 경고하고 있죠. 그런데 말하자면 경솔한 삶의 태도가 계속 그 사람을 여러 가지의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넓은 관점에서 보면 3번으로 인해서 오는 고난이 2번이 죄 지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올 수도 있고 혹은 이제 3번의 고난 그것이 1번 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누어지기는 하지만 이 세 개가 함께 통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에게 다양한 고난과 어려움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어떤 이유로 말미암아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되었든지 간에 그런 곤경에 처한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건, 아니면 특별한 훈련의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던, 자기의 잘못된 삶의 태도로 인해서 삶의 어려움에 쳐했던 어쨌든지 간에 그 속에서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시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기에서 구출되기를 하나님께서는 바라시는 것입니다. 훈련을 목적으로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오려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깊이 몸부림치는 가운데 그 훈련의 목적이 성취됩니다. 또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로서 구출되어 나오는 과정을 통해서 거기에서 자신 속에 있는 죄가 정결케 되고, 그리고 다시 은혜의 능력을 회복하는 성화의 작용을 경험하게 되죠. 태도가 잘 못 되어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태도가 고쳐지겠죠. 모두 고쳐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번 깊이 고쳐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어느 경우에 해당되든지 간에 고난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모한다.” 라고 하는 이 말은 히브리말로 “기다린다.” 간절한 그리움을 가지고 기대하는 것 우리말로 하면 학수고대하는 것입니다. 학은 목이 길지 않습니까. 그래서 목을 쭉 빼고 꼭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다리는 그런 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주의 구원을 학수고대하였사오니 그런 뜻입니다. 간절히 구원을 바랬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바라는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 어려움, 어떤 곤경인지는174절을 보고는 알 수 없죠. 어쨌든 119편 전체가 고난 가운데를 통과하는 시인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으니까 어쨌든 환경적으로 외적으로 깊은 고통과 어려움,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든지 간에 깊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데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사모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거기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라는 간절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모함을 여기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흔히 단순히 희망하는 것과 그다음에 갈망하는 것은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희망하는 것은 그냥 바라는 소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망하고 사모하는 것은 단순한 소원을 넘어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입니다. 이 단순한 희망과 갈망 사이에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 째는 뭐냐면 희망은 안 이루어져도 괜찮지만 성취되면 더 만족스러운 것이 희망입니다. 안 이루어져도 살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바라는 바가 성취되면 더 행복할 것 같은 바램. 그것이 희망입니다. 그러나 갈망은 뭐냐면 미래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그것이 만약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현제가 견디기 힘들게 고통스러운 것, 그것이 갈망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시죠. 두 번째 차이는 뭐냐면 따라서 단순히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그 희망을 위해서 희생할 각오가 없거나 아니면 그 희생할 각오가 적습니다. 그러나 갈망은 희망을 능가하는 바램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기꺼이 많은 희생을 지불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서라고 그것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희생의 각오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신자가 좋은 신자가 되고 싶지를 않겠습니까. 만약에 나는 중심으로 좋은 신자가 되기 싫다. 나는 중심으로 이 어려움 속에서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셔서 건져주시는 것 그런 것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은혜를 받고 싶지 않다. 나는 그런 것 필요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신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신자는 모두 성경에서 우리에게 좋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모두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좋은 신자도 되고 싶고, 충만한 은혜도 받고 싶고, 하나님께 칭찬도 받고 싶고, 마지막 날 주님 앞에 갔을 때에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것 보다는 착하고 충성스럽구나. 그렇게 칭찬을 받고 싶은 거죠. 그런 희망은 모든 교인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희망인 경우에는 아직 좋은 신자가 안 되어도 살만해요. 그런데 좋은 신자가 되면 더 좋겠죠. 더 행복하겠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면서 살고 싶지만 안 돌리면서 살아도 그냥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돌리면 좋겠지, 왜 남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니까 그러죠. 그러나 갈망은 가진 사람들은 다릅니다.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워낙 좋은 신자가 되고 싶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마다 그런 좋은 신자가 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자신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 현실의 자신이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 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졌을 때” 마치 시편 42편에서처럼 “요단강 건너편으로 왕을 따라서 피난을 가고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어도 법궤도 없고, 성소도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될 때. 주야로 눈물이 된 사람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애가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짓밟혔어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전쟁이 일어나고 예루살렘이 다 파괴되고 성소가 황폐하게 된 상황 속에서 장롱 밑에 감춰놓았던 보물들을 꺼내서 양식을 사러 다니기에 급급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고, 주님을 경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시편 42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뵙지 못해서 주야로 눈물이 음식이 되었고,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식을 구하러 다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에 보이는 반응은 어마어마하게 다릅니다. 시편 42편의 저자는 평소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희망했을지는 모르지만 갈망하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신앙의 쭉정이와 알곡들이 가려내지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면 항상 하나님의 자녀가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그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벗어나려고 하는 간절한 사모함, 이것은 믿음의 척도가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시인이 그러잖아요. 어떤 어려움에 처해져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어려움 속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나기 너무 어려운 상황 속에 처해있습니다. 거기에서 그가 한 일은 여호와의 구원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한 것입니다. 첫째는 구원해 주시는 그 능력을 사모했고, 또 하나는 자신을 그렇게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이 하나님뿐이시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 있는 사람의 갈망입니다. 환경적인 깊음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갈망이든, 혹은 내면의 깊은 영혼의 깊음 속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갈망이든, 어떤 갈망이든지 간에 이 시인 속에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간에 지금 갈망이 가득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시지 않아도 살만하고 견딜만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이 나타나서 자기를 건져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흐느끼는 목마름이 이 시편 속에 묻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태도이고,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사는 성도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런 강한 사모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셔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 인색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전심으로 찾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 라는 희망들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은혜를 받는 그 일에 생사를 거는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자기가 변화되기를 원하고 새로워지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새로워지고 변화되는 그 일에 생사를 거는 그리스도인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사모함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그 인자하심이 나타나면 신자가 당하는 고통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인자하신 그 은혜의 역사를 못 보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핍절하고 괴로워지는 사람들이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큰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긍휼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없으면 주님의 위대하심을 우리들이 경험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작은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그 은혜에 대한 사모하는 목마름을 가지고 있으면 아주 놀랍게 커다란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은혜를 향해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그 은혜를 나누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바라는 바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주님을 간절히 찾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정말 진정으로 사모함, 진정한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본받고 싶어 하시는 행동이나 모본을 당신 자신이 먼저 보여주시죠. 그러면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에 잃어버린바 되었을 때 하나님이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하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다가 하나님을 품을 떠나요. 그리고 불순종하고 옛길로 돌아가요. 그래서 다시 육체에 속한 옛사람의 성품대로 살아요. 은혜로부터 멀어져요. 그리고 죄 가운데로 들어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혼과 환경의 어두운 밤이 찾아와요. 처음에는 그런 길을 자기가 좋아서 택했고, 은혜 안에 있는 것이 힘들어서 불순종을 택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택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힘에 이끌려서 죄와 불순종의 삶으로 잡아당깁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괴롭힘을 당하면서 살아요. 그리고 곤고하고 괴로운 시절들을 보냅니다. 그래서 아파해요. 그리고 깊이 괴로워해요. 그러면서 시련과 고난을 당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찾으시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녀석이 교회에 나왔나” 하면서 쭉 쳐다보면서 “아이고 없네. 어제는 또 시험이 들었나?” 그리고 그냥 접어버리십니까? 대게 그것은 나쁜 교역자들이 그렇게 목회를 하죠.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찾아가서 그래서 그들을 결국은 하나님 없이 살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인격적으로 승복하실 때까지 끊임없이 그를 찾아 나서십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집 떠난 인간,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한 인간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그 찾으시는 행동을 보여주는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처음에는 주님 없이 살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폭풍 속에서 시련 속에서 곤고함과 괴로움 속에서 결국은 자기 마음문턱 앞에 까지 찾아와서 피 묻은 손으로 자기의 가슴을 두드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모두 자기가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이 붙들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을 자신이 버리는 것입니다. 죄와 불순종 속으로 들어가요.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자기를 팽개치셨고, 버렸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은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집요하게 찾아가십니다. 우리가 비록 죄를 짓고,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그 순간까지도 주님은 깊이 찾아가십니다. 무엇도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그 간절한 열망을 끌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죄도 그것을 끌 수가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끊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 이것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끊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추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면 성찬 할 때 보면 성당에서 사람들이 쭉 줄 서서 와서 하나씩 받아먹고 가잖아요.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이 성찬을 가지고 성찬위원들이 찾아가잖아요. 이것이 아주 굉장히 의미 깊은 것입니다. 주님이 당신 자신의 피와 살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찾아 나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당신을 찾을 때에 당신이 우리를 찾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하나님이신 당신을 그렇게 찾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울 때나 곤고할 때나 시험이 올 때나 심지어는 죄 가운데 있을 때나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주님을 간절히 찾는 이 신앙의 자세는 모든 신앙의 미덕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많은 선한 일을 하고 반듯한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그가 행하는 모든 도덕적이고 아름다운 삶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맛을 잃어버린 열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향기로운 기름, 향기로운 번제 이런 것들이 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제 이런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 많잖아요. 헌금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고, 혹은 우리가 이렇게 교역을 하거나 교회에서 봉사를 하거나 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그 중에는 모든 생활을 하나님께 의탁하면서 섬기는 교회의 교역자나 직원 같은 사람들이 있고, 아니면 그렇지 않고 하나님 앞에 그냥 나와서 교인으로서 보수와는 상관없이 봉사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종류든지 간에 그 바치는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함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사람들이 교회 일을 하면서 이제 교회의 재정을 갖다 쓰잖아요. 결국 이 땅에 있는 자원, 하늘의 은혜 이런 것들이 다 합쳐져서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어 나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물질이 없으면 안 되죠. 물질과 그런 땅의 자원과 하늘의 자원들이 합쳐서 대부분 하나님의 일들이 이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여러분들이 헌금을 했지만 지금 쓰여 진 돈은 여러분들이 헌금한 돈이 쓰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여러분들이 헌금했지만 지금 교회의 경영이나 혹은 선교나 혹은 전도나 혹은 교역자들의 생활비나 직원들의 생활비나 이런 것들을 위해서 쓰는 돈은 여러분들이 헌금한 돈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난 돈이냐? 여러분들이 낸 헌금은 하나님께 바쳐져서 하나님께로 가 버렸고, 그리고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은 하나님이 당신의 창고에서 열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헌금할 때에도 항상 내가 헌금을 안 하면 교회에 운영은 무엇으로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답답하니까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관계를 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성도들이 바친 그 헌금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바친 돈이 교회로 흘러들어가서 교회가 그것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해서 하나님께로 들어가 버렸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올 때에 교회의 운영을 위해서 필요한 그 돈은 하나님의 창고에서 새롭게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면 성도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물질을 바치고 교회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물질을 받아서 쓰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사역하거나 이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직원들도 많이 있고 그렇잖아요. 그래서 항상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이 일을 하고 대가를 받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상이 한품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근로자입니다. 종교 근로자입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하는 일과 보수를 비교하는 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나는 보수 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바쳐진 사람으로 내게 받은 소명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을 했기 때문에 월급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다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따로 직업 활동을 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하나님이 먹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헌신한 것은 그것은 하나님께 다 드린 것이고, 그러면 어떻게 되요. 생활비가 몇 달 안 나와도 교회의 교역자가 직원들은 파업 같은 것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감사하게도 한 번도 그런 적 없지만 다른 교회에서도 몇 달치씩 생활비를 못 줬데요. 내가 아는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것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가 봉사한 이것은 하나님 앞에 다 드린 것입니다. 거저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갔어요. 그러니까 자세가 어때야 되느냐면 보수를 받으면서 일한다는 그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보수와는 상관이 없이 이것이 나의 소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한다. 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똑바로 잘해야 합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하는 이상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어느 신문사에서 기자가 와서 교회를 취재하고 싶다고 해요. 그래서 한참 이야기를 하면서 소개를 해주니까 나중에는 이야기 하는 것도 힘이 들었습니다. 자꾸 물어보니까. 그래서 이제 행정 실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교회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보여주면서 그랬더니 우리 교역자들과 직원들이 쭉 있으면 이렇게 출근하면서 카드를 대면 찰칵하고 컴퓨터에 들어가서 출근시간이 찍혀요. 한 달에 한번씩 결제가 나옵니다. 누구는 지각 몇 번, 하고 쭉 나옵니다. 웃는 것 보니까 그것도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딱 나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지각으로 분류되죠. 그래서 한번도 지각을 안 하면 수입니다. 한번 지각하면 우 입니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이야기도 안 해요. 두 번부터 지각하면 유감의 편지를 보냅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수, 우, 미, 미는 “그렇게 지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양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가는 그것보다도 더 충고합니다. 그런데 기자가 보고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기업이며, 회사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뭐 그렇게 말씀하시느냐. 교회니까 이런 것을 어떤 면에서 회사보다 더 잘해야 된다.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 그래서 우리의 모든 섬김 속에 당신이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보다도 더 몸에 배인 섬김, 아무런 보수와는 상관없이 하나님 한분이 동기가 되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자꾸 지각을 자주하고 자기 의무를 잘 안하면 그것은 신앙이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세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섬기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달 올라간다. 그럴 때 그런 자세를 가지고 하고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바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한번 묻고 싶어요. 내가 여기 교회에서 20년이고 30년이고 목회를 하다가 죽었는데 하늘나라 갔더니 아무것도 안 주셔요. “아니 주님 나는 상급도 안 주십니까?” 너 월급 다 받았잖아. 그렇게 말씀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너 일한 것은 이만큼이고 이중에서 월급 얼마 받았으니까 너 남은 월급밖에 없다. 그러면 이것이 가불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이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산 모든 삶은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소명을 느끼면서 산 모든 삶은 하나님께 바쳐진 삶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주시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여러분들은 보면 재능을 가지고 있잖아요. 은사도 가지고 있고, 혹은 재능도 가지고 있고, 혹은 다른 삶에 비해서 여러분들이 물질도 있을 수 있잖아요. 물질도 없고 재능도 없지만 여러분들이 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을 수 있지 않습니까. 시간도 없고, 물질도 없고 재능도 없지만 힘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 무거운 것도 들 수 있잖아요. 그렇게 뭐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는데 필요하다 그러면 그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 드리면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셔요. 그러니까 저도 생활비를 주잖아요. 뭐 한번도 교인들이 주는 생활비로 생활한다고 한번도 생각한적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여러분들에게 섭섭한 적 없었고, 많이 준다고 생각해도 여러분들에게 감사한적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바치고 하나님이 먹고살 것만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노동의 대가가 아닙니다. 노동의 대가라면 너무 비참합니다. 노동의 대가가 이것밖에 안 되나?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그렇잖아요.
제가 왜 이 얘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살아가는 모든 삶, 월급을 받고 섬기든지, 월급 없이 섬기든지 가끔 와서 섬기든지 매일 섬기든지, 아무나 재능으로 섬기든지, 시간으로 섬기든지, 물질로 섬기든지, 아무것도 섬길 것이 없어서 힘으로 섬기든지. 무엇으로 섬기든지 간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바친다. 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입니다. 어려움에 처하고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역시 똑같이 그런 정신이 베어 있어서 이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으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온전히 예배하는데 지장을 받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어려움 속에 있으면 어차피 육적으로 자유롭지가 않잖아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커다란 금전적인 물질을 인해서 빚에 몰리고 고통을 받아서 어려운 상황 속에 있으면 여러분들이 나는 아무 지장 없다. 빚쟁이가 나라 비를 서고 유리창을 다 깨도 내 마음 평안해 그럴 사람 있느냐고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가 없어서 평안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들 보기는 불쌍하잖아요. 그 사람들이 나에게 받을 돈을 못 받았기 때문에 손해를 보고 저렇게 괴로워하는데 도덕적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느냐고요. 고통 속에 있고 구원이 필요한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 우리의 영혼이 자유로울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으로 말미암아 억압을 받잖아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벗어나서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한번 자유로운 가운데 환경의 자유로 영과 마음의 자유로움 가운데 주님을 섬기고 싶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구원을 사모하는 동기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섬기고, 어떻게 살아가거나 거기에 모두 베어있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 모두 베어있습니다. 그것이 어려움을 당한 성도의 올바른 반응입니다. 어려움에 처해서 하나님이 간절히 당신을 찾는 마음을 불어넣어주시기 위해서 어려움 가운데 두게 하셨는데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늘러 붙어 앉아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 오랜 일생 살면서 늘어난 것은 그냥 견디는 것, 그게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열매와 불신앙의 열매의 차이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의 열매는 견디면서 열렬하게 주님께 무엇인가를 구합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열매는 거기에 만성이 되어서 환경에 눌러 붙어 버리고 거기에 적응해버리거나 혹은 견디면서 이를 악물고 마음에 악심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마음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슨 어려움에 쳐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해야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가 진짜 주님을 찾는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원수들이 이렇게 많으면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니.” 그러면서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여 법도는 나의 기쁨들입니다.” 복수로 나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를 통해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첫 째는 뭐냐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그 성도를 구출하시는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그 어려움 속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환경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혼이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서 어떤 그림자도 없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을 위해서는 그것이 시험이 아닙니다. 항상 환경적인 깊은 어려움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영혼에 깊음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반합니다. 그래서 환경적인 깊음 속에서 구원이 필요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 영혼도 그 환경적인 깊음 속에서 함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깊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에서 건지시는 방법이 뭐냐면 하나님이 먼저 말씀을 보내서 어려움 속에 묶여있는 그의 영혼을 자유 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다 보면 환경으로 인해서 너무 곤고하고 괴롭죠. 마음이 가난해지고 이제 주님 밖에 의지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면서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내가 이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 좀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나와서 혹은 사경회에 나와서 은혜를 받아요. 그러면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나 혼자 발가벗겨서 그 제단에 세우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혼자 말씀하시는 것처럼 쭉 퍼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요. 은혜를 많이 받아요. 그래서 집에 들어오니까 문제가 다 해결 되었습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거의 없죠. 그래서 믿지 않는 남편, 속 썩이는 자식들 때문에 그렇게 곤고하고 괴로워하고 그러다가 와서 은혜를 많이 받고 이제는 내 남편을 품고 사랑하고, 자녀들도 내가 오래 인내하면서 주의 교훈과 교양으로 양육을 해야지. 내가 진짜 이제까지 삯군 부모였구나. 그리고 깊이 깨닫고 집에 돌아가면 남편은 옷 목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여보 내가 여태까지 당신 핍박한 것 용서해줘.” 자식은 팔자로 엎드려져서 꺼이꺼이 울면서 “엄마 마음 너무 아프게 해 드린 것 용소해주세요. 내가 이제 새사람 될게요.” 그렇게 부흥회 하면서 기다리느냐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그런 일은 희귀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구원이냐? 왜냐면 전에는 그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니까 하나님이 그런 한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이 내면의 세계의 묶인 것부터 하나님께서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요. 영혼이 막 움직이고 활동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이 마음을 녹이는 기도와 은혜의 갈망을 통해서 하나님이 환경을 바꾸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마지막에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공식을 뭐라고 합니까?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치료되고 고쳐질 때 사람과의 관계도 치료되어 지고 어려움 환경 속에서 망가진 환경과의 관계도 고쳐지고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학대하던 자기 자신에 대한 파괴적인 관계도 고쳐져서 모든 것들이 자연적인 질서로 돌아간다. 우리들이 그런 공식을 배우잖아요. 그것이 말하자면 그것을 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한다는 이야기는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에드워드 영이라고 하는 유명한 구약 연구가가 그 사람은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36개 국어를 했다고 하니까. 그런데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다른 것으로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말씀으로 창조하셨을까?” 요즘은 그런 것 하는 사람 없지만 탁 하면 웨이터가 오잖아요. 하나님이 탁 이렇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빛이 있으라.” 이렇게 창조하셨을까? 거기에 대해서 에드워드 영 박사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은 이후로 창조된 모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 성으로 통하는 것임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합니까? 어려움에 처하고 너무 괴롭고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떻게 했다고요?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 말씀 한 마디로 “거기 있을 찌어다.” 생명이 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말씀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 주실 것이라고 믿어, 그렇게 굳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하신 그 말씀에 대해서 깊이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지하실에 있는 교회에 있을 때인데 왜 그렇게 만나자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많은지 꼭 나를 만나야 되겠대요. 그래서 예배시간 30분전인데 만났는데 교회당을 내려오면서 흐느끼는 것입니다. 한 50대쯤 된 아주머닌데 말이죠. 그래서 야, 진짜 어떻게. 그때는 교회당이 이렇게 딱 내려오면 바로 화장실을 통과해야지만 화장실 앞을 지나서 내려오는데 화장실로 내려오는데 흑흑흑 하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야, 문밖에서부터 성령 받았으니 이 사람은 진짜 굉장하겠다. 그런데 앉았는데 그러면서 이제 같이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얼마나 곤고한 인생을 살아왔고, 그리고 지금도 그 어려움 속에 있는지를 쭉 얘기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어떻게 여기는 알고 찾아왔냐? 그러니까 뭐 설교를 들어보고 그런 것은 아니고 누가 꼭 가보라. 그러더래요. 인생 막장에 갔을 때 꼭 한번 찾아볼만한 교회라고, 그래 자기가 막장까지 왔으니까 그래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을 처음 봤습니다. 진짜 교회를 들어서더니 덜덜 떨다시피 하면서 흑흑흑 얘기하는데도 계속 흑흑 흐느끼고 그래서 그 줄거리를 쭉 얘기하는데 진짜 가시밭길 같은 인생을 살아왔고, 가시밭길 같은 인생을 지금 가고 있어요. 그러면서 뭐냐면 자기는 진짜 정말 한번만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주시면 일평생 주님만 섬기면서 살겠다는 거죠. 어쨌든지 간에 그런 고통 속에 있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어쨌든 하나님께서 건져주시지 않겠냐고. 아멘. 그러면서 하나님이 건져주시기 정말 바란데요. 그리고 이제 예배가 시작 되었습니다. 아, 정말 흐느끼듯이 자더군요. 그런데 어쩜 쭉 설교에 집중하다가 어느 한 순간 깜빡하고 자고 졸수는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기도 딱 끝나고 본문을 읽으면서부터 눈이 내려가기 시작하더니 야, 대단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회개가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가 있다고 가르쳤잖아요. 율법적인 회개는 복음적인 회개와 모양은 거의 비슷합니다. 흐느껴 울죠. 괴로워하죠. 그래요. 그런데 뭐냐면 이 죄로 말미암는 고통,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운 심판, 양심의 정죄의식, 이런 것 때문에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때로는 막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두들기면서 그렇게 괴로워하고 쥐어뜯듯이 그렇게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남이 이렇게 보기에는 얼마나 철저한 회개처럼 보입니까. 복음적인 회개는 다릅니다. 마음이 아려서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이렇게 잘못했으니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겁나서 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심판을 더 많이 받더라도 주님의 마음이 아프시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흐느끼는 것입니다. 회개가 그렇게 차이가 있듯이 말하자면 그 자매는 그렇게 어깨를 들먹이면서 흐느끼면서 예배당을 걸어내려올 때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원을 사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구원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도 거기에서 회복될 때가 되면 먼저 변화가 환경부터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환경과 사람, 이 모든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하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하나 돌아보면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하나가 변했어요. 마음이 변했습니다. 마음에 변화가 계속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사모하는 마음을 들고 그 말씀에 그리운 마음이 들고, 그 말씀에 깊이 자신이 녹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은혜를 받으면서 깊이 사모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말씀과 그 은혜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곧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다. 마음과 온 영혼을 모으고 주님이 나에게 하실 말씀을 기대한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의 참다운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환경, 이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 각자가 처하고 있는 인생의 어려움들은 각각 다릅니다. 똑같은 이유 때문에 고통을 받아도 색깔이 너무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처하고 있는 어려움이 아무리 종류가 다르고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고치시는 강력한 은혜의 힘, 놀라운 능력의 역사, 은혜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게 된 인생의 상황은 너무나 다양하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결국 해답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임금은 나라가 적군에게 포위되어서 멸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구원해달라고 매달리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응답을 받았죠. 한나는 복잡한 것이 아니라. 첩이 아들을 낳고 자기는 무자하여 아들이 없어서 구박을 받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것이 너무 서글프고 서러웠습니다. 무슨 위대한 인물을 낳아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물줄기를 바꾸어 놓겠다고 하는 그런 원대한 야망이 있는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소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술에 취한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온 몸과 마음을 기울이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주님이 말씀으로 그에게 응답하셨죠. 어떠한 상황이든지 간에 상황은 여러 가지 지만 대답은 하나님을 만나는데 대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구출받기를 원하는 그 사모함이 진짜로 진실한 사모함이라면 그는 환경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달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이 이 인생의 문제에 개입하셔서 나에게 역사해주시고, 그리고 인생의 벼랑 끝에 내몰린 것 같은 이런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실 수 있으며 주님이 말씀하시면 나의 환경과 모든 것들은 그 말씀에 굴복할 것이라고 하는 믿음, 그래서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며 그 은혜를 구하는 사모함, 이것이 바로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죠. “너희가 염려한다고 너희 키를 한자나 자라게 할 수 있느냐” 많은 염려와 근심이 있어요. 어떤 때는 잠이 오지 않죠. 걱정과 근심이 많아요. 꼭 개인적으로 꼭 야망과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근심걱정이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근심과 걱정, 이런 것들이 쭉 떠오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근심과 걱정이 쭉 떠오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애정, 주님의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생긴 염려였는데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면 그 염려가 뼈를 섞이고 살을 말리는 그런 염려와 근심으로 쭉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가야 되겠다.” 그랬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싸늘했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우리는 누구를 따라 다니나.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는 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가족들도 다 버리고 이제 예수님을 따랐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서 멀리 가신다고 하는데 어떡하나? 주님을 향한 사랑이 가져다준 근심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러니까 그 근심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다는 것입니까? 안 좋다는 것입니까? 안 좋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 어떤 한 선교사가 인디언들이 사는 아주 황량한 벌판으로 선교를 갔습니다. 진짜 아무 이웃도 없고, 그리고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 하나 있는데 진짜 인디언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고, 그것도 인디안 마음에 가서 함께 섞여서 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는 백인이니까 오두막집 하나에서 사는데 이웃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여보 여기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니까 오지 마, 거기 편한 곳에 있어”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하고 너무 같이 있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갈래요. 여보.” 그랬더니 할 수 없이 와라 그래서 왔습니다. 그래 와서 두 부부가 광야에서 만났는데 그야말로 완전히 광야에요. 바람은 얼마나 부는지. 그냥 항상 먼지가 가득 쌓이는 것입니다.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에 거기에 왔는데 이 여자는 점점 외로움에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인디언들을 전도하고 하는 사역에 헌신해요. 그러니까 그 외로운 광야에 있는데 남편도 자기에게 신경 안 써주는 것 같아요. 아무도, 그러면서 너무 괴롭고 이제는 너무나 황량한 벌판에서 친구도 없고, 아무도 없는 외로움 속에 처해요. 그래서 가끔 선교사들의 아내들이 우울증에 걸려서 본국에 돌아오는 예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선교사 부인 한 사람은 우울증이 있어서 우물에 뛰어들어서 자살하려고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런 상황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얘야 나는 진짜 못 살겠다. 이제 나는 돌아가야 되겠다. 여기는 캄캄한 감옥이야.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얘기할 사람도 없고, 오두막집 하나 황량한 벌판에 버려져있고, 정말 살수가 없는 곳이야” 그랬더니 친구가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얘야, 두 사람이 감옥에 있었단다. 그런데 한 사람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하늘만 보면서 살았고, 또 한 사람은 땅만 보면서 살았지.” 그것이 편지의 다였습니다. 그것을 받고 나서 이 아내가 깊이 감동을 받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만약에 아무도 이야기 할 사람이 없고, 만날 사람이 없고,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 내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도 없다면 이런 환경이 만약에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이 환경에 하나님만 묵상하기에 얼마나 좋은 환경인가? 그런데 내가 결국은 하나님만 바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땅만 바라보고 사니까 그러니까 외로움과 괴로움이 많이 밀려들어오는 것이구나. 그래서 견디기 힘든 파괴적인 감정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진짜 한 사람의 신자가 주님을 진심으로 찾고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히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어려움 상황,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단절된 상황, 자신에게 있는 자원으로는 자신을 도저히 거기에서 끌어내서 스스로 건질 수 없는 그 위기의 어려운 상황, 그 상황이 사실은 하나님만 바라보기에 얼마나 적합한 환경입니까. 능력도 없죠. 그 어려움에서 견뎌낼 자원도 없죠.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도와줄 다른 사람도 없죠.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자기는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상황 아닙니까. 그 속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바라보고 그리고 나를 여기에서 건져내 주십시오. 그런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건져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갈망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설교를 끝내고 싶지만 혹시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내가 좀 보태고 싶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목사님. 나는 그렇게 절박하게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환경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있고, 그리고 신앙생활도 그저 잘하고 있고, 부족한 것이 별로 없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영혼과 육체가 그저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다음에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없는 것은 자신의 환경과 모든 처지가 꼭 그래야할 필요가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보면 어떤 사람은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은혜의 놀라운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주님 만나기 위해서 타락하고 싶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죠. 자기도 한번 그렇게 멀리 떠났다가 주님을 극적으로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대게 충분히 하나님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그것을 모르느냐? 눈이 떠지지 않으니까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그 큰 아들 아닙니까. 뭐라고 합니까. “아니 나는 한번도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이 내가 아버지 집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사실은 그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던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까. 눈을 떠요. 영적인 눈을 뜨면 자기가 얼마나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고, 그리고 자신은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행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위치에 놓여있는 가련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주님 앞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 안에 있는 더 많은 불결을 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온전해지지 않은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악함을 생각하면서 깊이 절망하는 사람은 거룩해지려는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자기의 악함을 인해서 깊이 좌절하지 죄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해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충분히 회개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간절함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세요. 가장 눈물이 많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많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하고, 더 가까이 가고 싶어 하고 한 때가 언제였습니까?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을 때 그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던 때는 주님을 멀리 떠나서 주님을 욕 보였을 때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할 때, “나는 왜 이것밖에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나? 주님이 내게 보여주신 사랑에 비해서 내가 주님께 보이는 사랑은 얼마나 초라한가? 내가 이런 식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주님 앞에 가서 주님을 뵈올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언제 들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주님을 정말 사랑할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의 환경에 어디에 놓여있고, 남이 알지 못하는 어떤 시련이 있고, 우리의 죄, 어두운 그림자가 우리의 영혼에 어떻게 깊이 드리워졌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것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우리들이 주님 앞에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사경회가 다가옵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에 의해서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내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 영혼의 곤고하고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 라고 하는 말씀을 향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영혼의 작용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나게 하십니다.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사모하게 하십니다. 그리워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처절하게 그 은혜를 갈망하게 만드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 안에 그런 자원이 있습니까? 얼마동안 그렇게 살아도 우리들이 계속 그렇게 살 수 있는 자원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위로부터 부어주시지 않으면 우리 속에 스스로 축척될 수 있는 은혜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정말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 은혜를 받았는데도 오늘 새로운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제 만나는 어제 족했고, 오늘 아침에는 또 하루를 살 만나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또 우리에게 오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약한 자를 하나님이 강하게 만드시고,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그리고 병든 자를 하나님이 치료하셔서 다시 주님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지난날의 실패를 많이 생각해본들 무슨 유익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겠습니까. 지난날의 후회와 우리의 잘못을 많이 곱씹어 본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겠습니까. 필요한 것은 뭐냐면 하나님은 엎드러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그리고 쓰러진 자를 다시 일으켜 세워 자기의 길을 걷게 하시는 그런 회복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경회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제 새벽에도 160명 가까운 청년들이 새벽에 나와서 그렇게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정말 그런 사모함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고정되고, 그 은혜와 사랑을 향해서 간절히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고치시는 것입니다. 준비된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주님 만나려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고침 받으려는 사람들을 고치시고, 일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빠짐없이 이런 은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에 대한 목마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