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안에 거하라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거룩한 삶의 근원(아4:12-15) 2006.10.16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
2. 거룩한 삶의 나눔(아5:1) 2006.10.17 가을말씀사경회(새벽) 8
3. 사랑을 잃었을 때(아5:6-8) 2006.10.18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6
4. 주님이 계신 동산(아6:1-3) 2006.10.19 가을말씀사경회(새벽) 25
5. 주님이 계신 마음(아8:6-7) 2006.10.20 가을말씀사경회(새벽) 32
1. 거룩한 삶의 근원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아4:12-15)
1. 아가서의 특징
아가서 본문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이런 그림이 떠오릅니다.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막아 놓은 동산이 있는데 그 동산을 열고 주인이 들어가 보니까 그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꽃들과 아주 귀한 약재가 되고 향품이 되는 많은 식물들이 아주 탐스럽게 자라서 그 산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많이 피고 향기가 진동하는 귀한 향품들을 만드는 식물들이 자라고 각종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귀한 식물들이 온 동산에 가득할까?
특별히 어느 쪽에 그것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거기를 한걸음 더 나아가보니 거기에서 물을 계속 흘러나옵니다.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그 흘러나오는 물을 더듬어가니 샘이 계속 솟으면서 그 물이 계속 흘러내려서 땅을 적시면서 그 아름다운 향품을 만들어내는 식물과 약초와 아름다운 화초와 아름다운 많은 풀들이 그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모든 아름다운 삶과 섬김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회심해서 주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금은 비록 내가 죄를 짓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 앞에 잘 살고 싶은 사모함과 소망들이 이 속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여기에서도 사람마다 각각 상황이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경건한 집안에서 자라서 부모의 돌봄을 받고 빗나가는 법이 없고 늘 교회와 학교 가정 이것밖에 모릅니다.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화:김조이 선교사의 학창시절) 경건하게 산 사람들은 주님을 믿고 은혜가 떨어져도 많이 빗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단맛, 쓴맛 다 보고 갈 데까지 다 갔던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지면 속히 그때까지 가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런 것들이 유리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리점이 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한 옹달샘에서 물이 쉬지 않고 계속 솟아나니까 그 양이 비록 펑펑 쏟아져서 들이붓는 것처럼 홍수가 나듯이 옹달샘에서 물이 나오지 않더라도 작은 양의 물이지만 끊임없이 그 옹달샘에서 계속 쉬지 않고 샘물이 솟아나니까 그 물이 계속 흐르면서 아주 아름다운 숲을 이루게 되듯이 신자의 마음을 옹달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계속 솟아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오고 자신의 인격에도 놀라운 변화가 찾아옵니다.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갑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영적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계속 솟아나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 그것을 통해서 인격과 삶을 두루 적시는 가운데 우리는 물댄 동산과 같이 값지고 소중한 열매를 맺는 식물들이 자라는 동산처럼 우리의 삶과 인격에 변화가 옵니다.
물이 흐르는 동산에서 자라는 식물과 물이 사라진 메마른 산에서 자라는 식물은 완전히 종자가 틀립니다. 물이 메짝 마르고 건천이 되어 버린 곳에서 자라는 식물은 물이 쭉 대어서 흐르는 물댄 동산에서 자라는 식물과는 완전히 틀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계속 공급을 받으면서 그 사랑에 잠겨서 나타나는 우리의 인격적인 특징과 삶의 행동이 틀리고 은혜가 바짝 말랐을 때 우리에게서 나오는 언어나 행동, 인격 이 모든 것들이 완전히 틀립니다.
한 때에 아무리 많은 열매를 맺고 귀한 약초 아름다운 식물들을 자라게 만들었던 동산이라도 옹달샘의 물만 막히면 그 물댄 동산에서 자라던 식물들은 다 죽고 물이 없어도 견딜 수 있는 아주 거친 식물들이 그 땅을 대신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어느 순간에 깊이 경험하고 주님을 만나고 박살이 나도록 깨뜨려 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계속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분을 상담한 이야기-열린교회에서 생애적으로 주님 만난 사람이 많은 것과 그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 돌아선 것에 대하여 놀란 내용)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잘못된 것을 보면 생애적으로 주님 만났다는 것이 거짓되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애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서 깨뜨려져서 진리와 은혜의 세계를 보았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은혜의 공급이 끊기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가 자신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쇠가 불에 시뻘겋게 달구어졌다가 식은 쇠는 더 강합니다.” 무쇠를 그렇게 만듭니다. 여러 번 불에 달구면 쇠가 딱딱해집니다. 연철에서 강철이 됩니다. 망치로 때리면 변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부러져버립니다.
3. 그 사랑이 식으면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 은혜가 식으면 그 마음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팍해집니다. 이미 그런 은혜의 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에 식어지고 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팍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적 굳어짐이라고 마음지킴의 교리에서 펼쳤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늘 붙들어주시던 마음을 손을 놓으시는 것입니다. 강팍하게 굳어집니다. 왜 그렇게 하시냐면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지고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게 되면 모든 은혜로 말미암는 만남 안에는 소명이 있습니다. 내가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깊이 깨뜨려져서 은혜를 받게 되었다 하면 그에게는 남다른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잘 믿고 잘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할 책임이 뒤따르게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안 하면 그렇게 주님을 못 만난 사람이 안 하는 것보다 주님은 더 심각하게 그 사람을 다룹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시면 주실수록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과격한 방법으로 다룹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모르고 무지하고 어리석었을 때에는 하나님이 오래 기다리시고 인격적으로 나를 감동시키시고 오래 동안 참으시고 이렇게 다룹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고 알 것 다 알고 꾀가 말짱한 신자가 되었다고 하나님이 판단하시면 우리를 과격하게 다룹니다.
성경에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많이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는 끊임없이 우리의 은혜의 샘을 막으려고 애를 쓰고 사단의 일차적인 공격의 대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단이 여러분들을 공격해서 여러분들로 하여 주일에 노래방에 가게하고 교회 봉사하다 대판걸이 싸움을 하게하고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서 누구를 살인하게 하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의 샘을 막으면 당장은 그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가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하나씩, 둘씩 잘 자라던 아름다운 나무들은 그 동산에서 천천히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오늘 옹달샘의 물을 막았다고 해서 오늘 오후에 모든 동산이 폐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천천히 고사되어 갑니다.
이런 원리는 처음 믿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오래 섬긴 사람들에게도 심지어는 목회자에게도 모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교리를 많이 이해한 사람이 어떻게 단숨에 미끄러질 수 있을까 하지만 단숨에 미끄러진 것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 동안 천천히 은혜의 샘이 막히면서 서서히 그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이 고갈되어 가면서 산 전체가 황폐해집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만하지 말고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믿는 가정에서 곱게 자란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억수로 타락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맛도 많이 보고 평범한 죄인들이 돌아다니는 인생의 길은 거의 빼놓지 않고 돌아다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이상합니다. 누구에게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지만 그때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 사람들을 다 용서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나를 객관적으로 볼 때 내 인격에서 어떻게 그런 아량이 나올 수 있을까? 내가 아는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인데 하면서 내가 객관적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누가 옆에서 막 분노하고 그래도 인생을 살면서 그럴 수 있지 다 불쌍한 사람들이고 주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인데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지 말합니다.
그러고 다 끝나고 세월이 몇 년이 흘러갔는데 은혜가 떨어지면 옛날 사람들이 다 미워지고 그때 그 고통이 살아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서 이 세상에서 완전한 치유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불행입니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은혜 아래서 살아가야 합니다.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옛날에 받은 생애적인 은혜는 옛날의 나를 변화시켰고 어제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던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 내 영혼을 살렸고 오늘은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일어나 묵상을 하는데 어떤 때는 일어나서 묵상을 하는데, 그저께 아침에도 읽던 성경을 펴서 읽는데 첫 절을 읽는데 눈물을 쏟아집니다. “불평하지마라” 내가 몇 달 동안 불평을 많이 했나 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여호와의 성실하심으로 너의 식물을 삼을지어다.’
말씀 준비를 하러 가는 그 아침에 혼자 책상에 앉아 있는데 눈물이 쏟아지는데 견딜 수가 없어 얼마를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에 눈물을 씻고 한 절을 읽어 나가는데 더 찌릅니다. 한 열절을 읽고 다섯 절 쯤 읽었는데 눈을 떠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를 다루십니다. 그러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의인은 어느 상황에서도 고통을 받는 사람이니 하나님을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여호와의 성실하심으로 너의 식물을 삼으라. 사람들은 나를 실망시키고 내 인생의 가는 길에 고난과 어려움이 있고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그것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시비하는 방해걸이가 언제나 있게 마련인데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크게 보는 대신에 내 앞에 있는 난관과 어려움들을 더 크게 보았구나 하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아침이었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사실 제가 이 찬송을 참 좋아했습니다. 사람이 나를 실망시킬 때, 외로울 때, 무엇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내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것 같을 때,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은 때 이 찬송을 얼마나 많이 부르면서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동안 내 입술에서 사라졌던 찬양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여호와의 성실하심으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눈물을 흘리고 회개를 하고 나서, 회개만 하고 나면 안 되지 않아요?
눈물을 씻고는 나같이 은혜 떨어진 성도들이 있을 텐데 그들에게 어떻게 이것을 가르쳐야 될까 하면서 그날 아침에 서너 번 설교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떡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마음에 자유가 주어집니다.
4. 사랑을 지속하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묶인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 묶임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묶임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을 감사하지 못하는 것, 마음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려고 하는 것,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하는 것, 말씀의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 이런 것이 무위로 돌아갑니다. 그 하나님과의 묶인 것을 풀어야지만 은혜의 샘에서 흐르는 그 물이 막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묶임이 없이 언제나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 앞에 구김이 없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불순종할 때도 있습니다. 즉각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야 합니다.
사람사이에 묶임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서 성령님으로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원수 맺은 마음, 지속적으로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 이런 것들은 잘못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심각한 파괴입니다. 그래서 잘 보면 하나님과의 묶임 안에는 반드시 사람과의 묶임이 있습니다. 없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항상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과의 묶임을 풀어져야 합니다.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것이 없고 저 인간이 잘못했는데 나에게 와서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하면 내가 용서해 주겠는데 아무리 눈치를 주어도 오지 않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누구의 잘하고 잘못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의 문제인데 문제는 묶인 것 그 자체가 하나님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푸는 사람이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풀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집회하기 전에는 항상 그 묶인 것을 먼저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묶인 것을 풀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묶인 것을 풀어야 합니다. 가서 용서를 빌고 화해를 청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이렇게 사람과의 묶인 것을 풀어야 합니다.
자신과의 묶인 것을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안 하시는데 자기 자신이 자기를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 정죄의식, 열등감,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쓸데없는 후회, 집착입니다. 그 은혜의 샘에 우리의 마음에서 그 샘이 솟아나야 합니다. 어제는 그렇게 펑펑 울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는데 오늘은 건조하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제 그렇게 나를 움직인 말씀을 오늘 다시 묵상해서 내 마음에 불러일으키면 은혜가 살아있지만 스쳐 지나가면 또 마음이 메말라집니다. 어제 은혜로는 어제 하루 종일 묵상하며 살았습니다. 오늘은 오늘 새롭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아침마다 광야에 나가서 만나를 거두어 먹었던 것처럼 매일매일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게으르고 부주의하고 세상의 일로 마음이 번잡합니다. 솔직히 기도 한 마디도 못하고 양복입고 출근하고 저녁때 잠자리에 들어서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많지요? 그렇게 해 가지고는 은혜의 샘이 물이 흘려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 은혜의 샘에서 물이 흐르는 은혜의 생활을 우리들이 매일매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전투입니다. 그 옹달샘을 지키기 위한 전투입니다.
매 순간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한 끼를 굶고는 살 수 있어도 베풀어 주시는 오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임을 고백하며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그날에 주실 은혜를 구하며 매달려야 합니다.
5. 옹달샘 마음
오늘 한번 눈을 감고 여러분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여러분들의 신앙의 동산은 어떤 상태입니까?
오늘 이 아가서의 기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값진 식물들이 가득 자라고 있는 샘물이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동산입니까? 옛날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모두 그 아름다운 식물들이 죽어가고 가시와 엉겅퀴들로 가득 차서 처음에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섬김의 부름을 받았을 때는 두렵고 떨리고 주님 사랑하고 영광스럽고 기뻤는데 이제는 혈기 분노 강퍅함 미움 가시 같은 마음 이런 것들만 가득 차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가 있을 수 없는 모든 사람입니다.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는 저에게도 가장 어렵고 전투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평생을 설교하며 살았는데 하나님이 그래도 기본이야 못하게 하겠습니까? 내 안에서 은혜의 샘이 고갈된다면 그것이 훌륭한 설교이면 위선이고 신통치 못한 설교이면 자연스런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이야기하기를 목회자의 마음은 교회의 옹달샘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계속 부어주시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 나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오늘 나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그런 간절한 사모함, 우리 마음에서 계속 솟아나는 새로워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2. 거룩한 삶의 나눔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아5:1)
1. 친구들아 먹으라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쯤 되면 우리나라 어디를 가 봐도 나무가 별로 없는 민둥산 천지였습니다. 어느 곳에 가도 산들이 전부다 벌거벗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가 곡식을 좀더 심기 위해서 끊임없이 산을 개간하였습니다. 밭을 일구어서 식물을 심이니까 곡식은 거둘지 모르지만 비가 오면 산이 물을 빨아들여서 저장했다가 가물면 그것을 토해 놓아야지만 그 산 아래 펼쳐진 들녘들이 그 물을 머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전혀 안 되었습니다.
2. 은혜의 샘이 마르지 않도록
우리 신자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민둥산과 같은 마음과 영혼의 상태가 되면 은혜를 머금을 수가 없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기도 할 시간 없고 성경 한절 읽을 시간 없고 자신의 영혼의 필요에 대해 어떠한 주의도 기울일 시간이 없고 죽어라고 이 세상에 가서 일을 하는 사람은 민둥산입니다. 홍수가 나면 그것을 저장하고 지탱할 힘이 없습니다. 마구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그런 삶을 삽니다. 세상에서 먹고 살자면 어쩔 수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세상살이에 다 바치고 나면 주님께 바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중요한가하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나면 그렇지 않은 삶이 가능합니다. 주님 의지하면서 가능한 것입니다.
혹시 인생을 살다가 정신없이 바쁘고 모든 것을 쏟아 부어서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의 특정한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런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때조차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온전히 매달리고 기도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환경이라기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구김이 없으면 우리에게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은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실재로 제가 20년 전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될 때도 정말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바쁜 시기를 살았습니다. 건강도 안 좋았습니다. 그랬는데도 수시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가능했습니다. 제 영혼은 최고의 호황을 누렸습니다. 중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3. 동산에 무엇이 있었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솔로몬 왕이 동산에 들어간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나의 신부여, 나의 누이여’라고 부르면서 그 동산에 있는 수많은 몰약과 향 재료 많은 먹을 것들을 보면서 그것을 거두고 먹고 마시면서 한없이 행복해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을 자기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많은 친구들에게 와서 이것을 먹어라 이것을 먹고 힘을 내라고 초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속에서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댄 동산과 같이 기름져서 거기에서 많은 아름다운 인격의 열매와 삶의 행위의 많은 열매들을 맺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랑이 그 동산에 들어왔는데 동산의 샘의 물은 마르고 가시와 엉겅퀴만 가득할 뿐 그 어떤 값진 향품도 아름다운 꽃도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신랑이 그 동산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신랑은 동산에 들어오고 나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해서 거기에서 그것을 거두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이 즐거워하는 사람들일 경우에는 많은 열매를 맺고 많은 양식들을 생산해 내는 그 아름다운 동산과 같은 신앙의 인격, 그 마음, 삶을 이루어 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면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번성하는 아름다운 향품과 향 재료와 그 모든 먹을 것과 마실 것, 이 모든 것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샘에서 나옵니다. 샘이 직접 먹을 것과 즐거워하는 것들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동산 한가운데서 샘이 그치지 않고 계속 흘러들어오니까 그것이 이렇게 많은 아름다운 동산이 되게 한 것이고 그 아름다운 동산에서 많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향 재료 같은 것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관건은 은혜의 샘이 우리에게서 막히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세상은 원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은혜의 샘물이 계속 솟아난다는 이야기는 삼위 하나님의 연합 속에서 그 하늘의 신령한 자원들을 공급받으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샘에 물이 계속 솟아납니다. 그러면 이길 수 없는 고난이 너무 힘들어서 이미 인생 끝장냈을 것 같은 고난이지만 은혜의 샘물이 계속 솟아나면 은혜의 힘 때문에 고난을 이깁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이기면서 살아갑니다. 그 은혜의 샘물이 없었더라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은혜의 샘물이 계속 자기 속에 흘러들어오니까 가끔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도 그 은혜의 물에 내 마음이 깊이 잠겨서 주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십자가이지 주님도 이 사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보다 나로 인해서 더 많은 아픔을 겪으셨지’ 주님의 사랑이 그 은혜를 타고 내 마음 속에 흘러들어옵니다. 용서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아픈 용서와 사랑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 안에 있는 많은 죄와 거친 것들을 발견합니다.
은혜가 메말랐을 때는 유혹이 오면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더 좋은데 어떻게 그 유혹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 유혹을 이길 힘이 은혜에서 흘러나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좋은 신자라도 늘 유혹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의 샘이 있습니다. 마음이 유혹으로 인하여 산란하고 어지러울 때 다시 하나님 앞에 곤고한 마음을 토하며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미 결별한 세상인데 이 세상이 다시 나를 향해 유혹합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시옵소서.’
신기하게 은혜의 샘에서 다시 샘물이 솟아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생각납니다.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할 때에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네♬
그러면 다시 하나님과 내가 밀려들어옵니다. 나는 매 순간 주님이 붙들어 주어야지만 겨우 살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면서 오히려 잠시 유혹을 받았기 때문에 교만하고 하나님을 의지 않는 마음이 사라지면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살아가고 싶은 의존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모든 힘이 은혜 샘물에서 나옵니다.
은혜의 샘물이 끊어지고 나면 용서했던 사람 다시 미워지고 결별했던 이 세상 다시 그리워지고 정욕과 더러운 욕심들이 다시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자기를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모든 비결은 은혜의 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샘을 통해서 주시는 많은 결실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 신랑이 그 잠근 동산에 들어와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도 없는 사이에 흘러나오는 그 샘물을 통해서 그 동산에서 말할 수 없는 값진 것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식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동물도 있고 곤충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동산에 있었던 것을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몰약과 향 재료들 이었습니다. 이것은 치료하는데 쓰여 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꿀이 많이 있었습니다. 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송이 꿀과 꿀은 사람에게 열량을 많이 품고 있어서 힘을 내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 식품입니다.
셋째는 포도주와 젖입니다. 거기에는 야생의 포도들도 많이 자랐던 모양입니다. 그것으로 짜서 즙을 내어 포도주가 되고 거기에는 짐승도 있어서 젖을 짰습니다. 포도주와 젖은 양식입니다. 음료와 양식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샘물을 계속 머금고 우리 인격과 삶이 주님의 은혜로 인해서 아주 풍성해지게 되면 그 풍성해진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치료하고 이 세상의 힘을 잃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굶주리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하므로 동산 밖의 굶주리고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치료받고 힘을 얻고 배부르므로 다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면
1. 몰약과 향 재료
이것은 약품입니다. 몰약 같으면 무엇인가 이것을 썩지 않게 하고 상처에 바르면 상처를 부드럽게 하는 치료제이고 향품들 입니다. 이런 것들이 암시하는 바는 바로 은혜 받는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치료하는 힘입니다.
물론 신자는 자기가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신앙의 인격이 은혜 안에서 아름답게 변화된 사람들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치료하게 합니다.
마음이 분노하고 정욕에 사로잡히고 혈기에 사로잡힐 때 이 은혜의 샘에 끊임없이 양식을 공급받고 충만해진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아서 치료해 줄 수 있는 아주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치료하라고 붙여주면 가시와 엉겅퀴 밖에 없어서 서로 찌르고 싸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은혜 떨어진 사람들은 바로 그렇습니다.
지난주에 투표를 해서 직분들을 맡았습니다. 그분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은혜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섬김입니다. 서약까지 했으니까 사명을 맡은 사람들에게 최대의 재앙은 일은 많이 맡았는데 은혜의 샘물이 마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데 은혜가 떨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가슴을 뒤져도 몰약과 향 재료가 나오지 않습니다. 풍부하게 많이 나오는 것은 가시나무입니다. 가시나무는 불을 때도 열량도 많이 안 나옵니다. 아무 쓸모없이 땅만 망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은혜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을 때에 그들의 가슴 속에는 수많은 몰약과 향 재료들이 있어서 사람들을 치료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놀라운 도구들이 되는 것입니다.
2. 송이 꿀과 꿀
꿀은 열량이 높은 식품이어서 사람들에게 힘을 줍니다. 성경에 보면 송이 꿀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힘이 납니다. 이길 수 없었던 세상을 이길 수가 있고 극복할 수 없는 환경들을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 그 말씀 속에서 생겨납니다. 자신의 인생의 환경은 벼랑 끝에 섰는데 그 벼랑 끝에서 계속 힘이 납니다. 이기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 송이 꿀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 송이 꿀을 계속 먹으면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는 강한 힘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합니다. 말씀의 은혜가 완전히 그치게 됩니다. 그러면 힘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심령이 물댄 동산과 같을 때 우리의 가슴 속에는 송이 꿀과 꿀이 가득합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은혜로 나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니까 끊임없이 그 말씀의 은혜가 내 마음에 역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때 곤고해 보이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것을 나누어 줄 때 그것을 먹고 새 힘을 얻으면서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으면서 삶의 활력을 얻습니다.
은혜 받지 않는 사람들은 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험에 들었는데 그 사람을 심방하라고 보낸 사람이 은혜 떨어진 사람이면 최악의 심방이 됩니다.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궁시렁대고 위로하라고 보냈더니 한숨을 더 크게 쉬고 결국은 아무 유익도 못 주고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가득해서 신앙의 인격이 말씀의 인격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곤고하고 괴로운 심령에게 찾아갔다면 그 가슴에서 송이 꿀과 꿀을 주어서 먹게 합니다. 거기에서 힘이 나와서 나도 우리 주님을 붙들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구역을 아무리 나누고 구역장을 수없이 세워도 그것을 가지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설교 들으면서 구역장들은 깊이 새기십시오. 자신의 가슴을 들여다보세요. 내가 정말 은혜의 샘물이 계속 흘러나와서 지치고 힘을 잃은 나의 양떼들에게 나누어줄 송이 꿀과 꿀이 내 안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그런 것들이 있으면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살아보았으니까 알지만 인생의 가는 길이 바뀌는 것이 가능합니까?
달려가는 고속 전철의 길은 바꿀 수 있어도 달려가는 인생의 길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놀랍게 그 인생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래서 자신 속에 있는 말씀을 영혼들에게 먹여서 이 말씀을 통해서 그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돌이켜서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섬김입니까?
이 모든 섬김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은혜의 샘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벌들이 날아와서 송이 꿀과 꿀이 가득하게 되는 그런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3. 포도주와 젖
이것은 음료와 양식입니다. 이 젖을 가지고 그 사람들이 많은 식품들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요구르트, 버터, 치즈, 심지어는 술도 만들어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은 우리 신자들을 통해서 굶주리고 목마른 영혼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처럼 포도주가 되고 그들을 배부르게 하는 젖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마르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흘러나와서 그 속에서 포도주와 젖이 가득하게 될 때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먹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지만 은혜를 간직하지 못할 때도 있고 이런 은혜에서 소외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미끄러지려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함에도 어느 한 순간 분노에 사로잡혀서 혈기를 부리는 사람 등등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허기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설교자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샘에 흘러나오는 물로 말씀의 은혜를 가득 적신 성도를 보내어서 그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게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라 잘 살아라’ 하고 목회자가 설교하면, 목회자는 어차피 그렇게 설교해야 되니까 그런 마음이 들지만 (물론 은혜 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 자기와 똑같이 헤매고 방황하던 지체가 변화를 받은 다음에 말씀의 은혜가 가득 차서 ‘우리 잘 살아야 해, 교회를 사랑해야 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해’ 하고 손을 꽉 붙들면 밀려오는 감동의 깊이가 틀립니다. 저 인가도 나와 똑같이 헤매고 모여서 한숨쉬고 그랬는데 놀랍게 변화되어서 가슴 속에 포도주와 젖을 가득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누어 줍니다. 그 속에서 큰 위로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주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에 곤고하고 괴로운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많이 있는데 마음에 젖과 포도주가 가득해서 그들을 배부르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이 망가진 세상을 고치고 온전하지 못한 교회를 치료하는 도구로서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결실에서 오고 결실은 성장에서 오고 그 모든 생명과 성장은 은혜의 샘의 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은혜의 샘에서 물이 끊이지 않고 계속 솟아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오래 예수를 믿었다고 하더라도 은혜의 샘물이 그치게 되면 믿은 지 얼마 안 되서 은혜의 샘이 그친 사람하고 틀린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회에 뿌리를 박았다는 것 하나 정도 틀릴까 나머지는 틀릴 것이 없습니다.
4. 기꺼이 초대하고 싶은 동산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회자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의 물을 계속해서 흘려보내시는 그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그 물들로 흐르게 하고 성도들은 그 흐른 은혜의 물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작은 샘물이 되어 솟아나오게 됩니다.
강단이 큰 샘물이라면 여러분의 마음은 작은 샘물입니다. 거기서 계속 그 물이 솟아나오게 합니다. 두루두루 흘러서 여러분들의 온 심령을 적셔서 몰약과 향 재료와 송이 꿀과 꿀과 포도주와 젖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그 가슴에 손을 넣어 연약한 사람, 병든 지체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때 생명과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는 도구로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가 이 세상에서 지위 높고 재산 많지 않아도 일생 그 전체가 하나님을 아름답게 섬기는 생애가 되는 것이고 그의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받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보좌 우편에서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신자의 일생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마감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가슴속에서 우리의 심령 안에서 은혜의 샘이 마르지 않아 많은 결실을 맺는 은혜 안에 끊임없이 거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3. 사랑을 잃었을 때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아5:6~8)
1. 영적 침체의 요인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혼의 침체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침체가 찾아오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주님을 우리의 인격으로 충분히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신다는 사실은 이성적으로는 잘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는 인격적인 경험이 많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 내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도 이성적으로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생각하지만 정말 마음 깊이 밀려오는 인격적인 감화 속에서 그 주님을 사랑하는 경험이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영혼의 침체가 계속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였던 사람이 아니라 원래는 하나님도 모르고 이 세상에 굴러다니며 육욕과 세상 사랑에 빠져서 오래 동안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부모의 인도를 받으며 교회 생활을 하였다 하더라도 본성상 하나님을 떠나 살던 존재가 인간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주님의 인격적인 감화가 느껴지고 진리 안에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주님의 탁월함을 끊임없이 관상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정이 끊임없이 변하게 될 때, 끊임없이 하나님의 신적인 아름다움의 자극으로 우리 안에서 변정이 일어날 때 우리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온 옛 본성을 뛰어넘어서 자기 속에 경험되고 있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사라져 버립니다.
원래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던 옛 본성이고 자기 사랑에 빠져서 살던 본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아주 쉽게 옛날의 마음과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영혼의 침체는 결국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가져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극단적인 자기 사랑에 빠져서 극단적인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상황에까지 이를 수가 있게 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영혼의 침체가 찾아올 때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많이 그 영적인 침체를 좌우하게 합니다.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이 워낙 세속에 빠진 적이 없고 경건한 가정에서 살아왔으면 영혼의 침체가 찾아와도 깊은 죄악에 빠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죄악 된 경험, 죄악 속에서 기쁨을 누린 경험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새로운 죄악에 빠져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보호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허랑방탕하게 갈 길, 못 갈 길을 다 가며 많은 죄를 짓고 불순종의 기쁨, 죄악의 기쁨을 맛본 사람은 침체에 깊이 빠져들고 그 침체가 다루어지지 않으면 예전에 빠졌던 죄로 쉽게 미끄러져 들어갈 수가 있게 됩니다.
영혼의 침체는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이 사라지면서 찾아옵니다.
영혼의 침체가 인격적 결핍을 통해서 찾아오는데 그리스도의 인격을 경험하면서 그분의 사랑에 의해서 끊임없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 이것이 인격적인 경험이라면 그런 인격적인 경험의 결핍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입니다.
이렇게 나누었지만 두개는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구분됩니다. 그만큼 이 두 가지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내적인 원인은 우리 안에 번성하는 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에 결핍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그 사랑과 은혜가 마음속에 체험되어질 때는 우리의 마음에 동일하게 생각과 모든 감정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수납의 감정이 항상 같이 갑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짝사랑에 빠지는 적이 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만큼 자신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있다라는 경험을 하게 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고 있다라고 하는 경험만큼 하나님을 받아들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온전히 영접하여 주신다 라는 감동을 받을 때 자신도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명하시든지 나는 다 받아들이며 살겠다라고 하는 그런 감정의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종종 나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같다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갈망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계속 번성하게 되면 이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탁월함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계속 움직여서 그 하나님과 관계에서 인격적인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일들이 사라집니다.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 안에 죄가 없을 때는 결코 없지만 이것은 정도의 문제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온전히 지배해서 이런 죄의 영향력들이 거의 힘을 쓰지 못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우리 속에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외적인 요인은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있는 예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는 것, 좀더 넓게 펼치면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 되는 성도들과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섬기는 것, 가정 예배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주는 외적인 통로가 됩니다. 비록 내 안에 죄가 있고 그것들이 기승을 부려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잘 못 느끼게 만들어주는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이런 은혜의 수단에 마음을 바쳐서 열심히 참여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되어서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그 죄를 미워하고 죽이게 되는 작용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들은 서로 구분이 안 됩니다. 이 두개가 같이 계속 갑니다. 마음에 죄가 번성하게 되면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것이 싫고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것이 기쁘고 좋으면 자기 안에 있는 죄는 현저하게 죽어갑니다. 자기 안에 죄가 있을 때 감정적으로는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지만 그런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곤고한 영혼의 상태를 헤아리면서 주님께 은혜를 구하게 되면 은혜의 수단에 방편에 믿음으로 참여할 때 하나님께서 수단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물론 이렇게 외부의 수단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도 기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 사람이 마음을 바치며 영혼의 회복을 갈망하며 그 은혜의 수단에 믿음으로 참여하는가 하는 것을 사람들은 다 계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
2. 신랑이 사라지다
우리가 읽은 이 대목은 이 아가서가 한 토막씩 신부의 노래, 신랑의 노래가 반복됩니다.
여기서는 신부의 노래입니다.
어제 신랑이 노래했습니다. 동산에 들어가서 많은 것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 노래에 대한 화답으로 신부가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문맥은 신부가 혼자 잠이 들었는데 마음은 깨어 있습니다. 신랑이 문을 두드리며 나의 신부야, 나의 누이야 하며 부르는 소리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창밖에서 들립니다. 그럴 때 빨리 뛰어나간 것이 아니라 주춤거렸습니다. 그러면서 나가 문을 열어보니 신랑이 가고 없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워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불러도 없구나.
불러도 없는 것 같은 상태는 영적인 침체 속에 들어가서 주님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여자가 신랑을 찾아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정작 신랑이 왔을 때는 꾸무럭거리다가 문을 열어 보았는데 신랑이 사라지고 나니 마음이 타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만한 때에,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만한 기회가 있을 때에도 주님을 만날 사모하는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절히 부르고 찾을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그 은혜를 받을 만한 그 때에 동일하게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지나가고 나면 어느 순간에 주님을 만나기 어려운 때가옵니다. 우리들이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신약시대 이후로 언제든지 은혜 받을 만한 때이고 긍휼의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재적인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조금만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면 주님을 만나고 변화 받을 수 있는 때인데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그런 좋은 때를 흘려보내고 나면 주님을 만나려고 막 찾아도 주님을 만나기 어려운 때가 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은혜의 때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지금, 내가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주님이 나를 부르실 때, 내 마음이 주를 갈망할 때, 이 때가 주님을 찾을 때이고 만날 때라는 사모함을 가져야 합니다.
예화: 어떤 지체가 교회를 떠나고 난 후에 인터넷으로 말씀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있을 때에는 안 듣던 사람이 멀리 떠난 후에는 말씀을 사모하고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3. 신랑이 없으면
침체가 찾아오게 되면 영혼의 손해가 찾아옵니다. 본문에 보면 신부가 신랑을 찾아서 거리로 나갔습니다.
때가 밤이었습니다. 순행하는 사람, 성루에서 파수하는 사람들이 봉변을 주었습니다. 웃옷을 다 벗겼습니다. 이 여자가 신랑의 생각이 더 간절했습니다. 신랑이 있었으면 내가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은혜 떨어지면 봉변을 당합니다. 단정하고 아름답던 성도도 은혜가 떨어지면 옷고름이 다 풀어헤쳐지고 젖가슴이 들어나고 수치를 보이게 됩니다. 인간의 썩은 냄새가 나오게 됩니다. 영혼의 해를 입히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침체가 깊어지면 침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계획은 우리를 침체에서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 데려 가려고 하여 영혼은 많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전투에서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면 죄가 될까 안 될까 그런 생각 하지 말고, 간신히 벼랑 끝에서 이게 죄일까 아닐까 금 밟으면서 그러지 말고 목표 자체를 죄 안 짓는데 두지 말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더 많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다 목표를 두면 정말 그 모든 미끄러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같은 사람을 이 소중한 일을 위해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명의 자리에서 마음을 졸이면서 때로는 마음의 큰 기쁨으로 자기를 깨뜨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대개 미끄러지는 사람들은 사명이 온데간데없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해야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침체 속에서 영혼의 어두움이 찾아오는 가운데 미끄러지고 영혼이 봉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침체는 위험한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는 한때는 은혜를 많이 경험했는데 지금은 미끄러진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는데 본인의 의지적인 결단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침체에 빠진 사람들, 한때는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경험했지만 지금은 침체에 빠진 사람들, 한때 하나님과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침체는 더 많이 고통스러워집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다루실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쉬워야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 말은 반만 맞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아주 평이한 언어로 설교를 해야 된다는 면에서 쉬워야 된다는 말은 맞는데 쉬워야 된다는 의미가 신앙에서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초보적인 것을 가르쳐야 된다 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쉬운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너무 재밌고 쉽고 잘 이해되고 조금도 저항감과 어려움이 없이 적응하면서 살 수 있는 교회에는 새로 예수를 믿고 어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행복한 교회이지만 그런 교회의 공통점은 거기서 오래 신앙생활한 사람은 밑도 끝도 없는 곤고함 속에서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고 뒤로 미끄러져서 봉변을 당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치유할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한데 훨씬 더 죄의 깊이와 죄인들의 마음의 깊이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보다 깊은 비밀들을 가르쳐 주어서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은혜의 세계, 마음의 비밀들, 영혼의 은밀한 부분들을 깨닫게 됨으로써 영혼의 침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은 아주 간단하게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예수님이 너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믿으라고 설교하면 회심할 수 있습니다. 회심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속에서 주님께 순종하며 사랑하며 오랜 세월 살다가 미끄러져서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에게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되고 예수님이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너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반복할 때 그 사람들 속에 몇 사람들이나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다 압니다.
궁금한 것은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었는데 왜 자기가 미끄러져서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 들어와 있게 되었고 그 깊은 침체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바라보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고 자신의 마음과 영혼의 구조는 어떻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은혜가 빠져나가고 지금 이렇게 죄 가운데 떨어지게 되었나를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을 가르쳐주고 이해를 시켜서 그것이 빛이 되어서 그를 어둠 속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다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 예수 믿으려고 하는 사람을 다루려고 하는 말씀보다는 훨씬 깊이가 있는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거기서 극복을 했는데 또 다시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는데도 마음에 기쁨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많은 하나님의 치료하는 말씀이 필요하게 됩니다.
교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오늘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런 모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길거리에서 봉변을 당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있고, 봉변을 당할 위기에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 위기에서 막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섞여있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설교는 그런 사람들이 보다 깊은 자신의 영혼의 비밀과 죄의 작용,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은혜의 역사 등등에 대한 보다 깊은 지식들을 요구하는데 그것들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더 이상 다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남아있으면 여러 가지 다른 동기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나이에 내가 어디로 옮기랴? 이때까지 낸 헌금이 얼마인데...조상 대대로 이 교회 다녔는데 그래도 이만한 교회를 어디서 찾을 수 있으랴? 하는 등등의 이유로 늘어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교회를 통해서 무슨 유익이나 회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가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 그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교회가 된다고 하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정상적으로 교회가 운영되는 것이 아닙니다.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4. 내 신랑 못 보셨나요?
하나님의 놀라운 그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데서 미끄러지게 되니까 영혼이 봉변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수치가 찾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침체에 깊이 빠진 결과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이 신부의 마음에 신랑이 얼마나 소중한가하는 것이 이 마음속에 떠오르면서 예전에 있었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신랑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앞부분에 보면 신랑이 그렇게 신부를 그리워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룹니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신부가 교만해졌던 모양입니다. 신랑이 워낙 자기를 위하고 자기 없으면 못 살겠다고 찾아다니니까 언제라도 만나면 만날 수 있고 왕비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신랑이 와서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데도 꿈지럭거리면서 신랑이 당연히 거기에 있겠지 하고 문을 열었더니 신랑이 사라졌습니다.
사실 이것을 보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께 더 신속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빨리 응답하고 주님을 꼭 붙들고 놓지 않는 사모함이 필요한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 같으면 역으로 ‘오늘도 가면 은혜를 받을 텐데’하는 해이한 마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언제든지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해이한 마음들이 생겨납니다.
심리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결국은 신랑을 못 만나고 깊은 그리움 속에서 신랑이 없는 상태에서 봉변을 당하게 되니까 신랑에 대한 그리움이 더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랑을 막 부르게 됩니다. 봉변에서 벗어나서 갈망의 단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마다 붙들고 우리 신랑을 보았습니까? 나의 남자를 보았습니까? 예루살렘의 여자들을 다 붙들고 이야기합니다. 혹시 다니다가 우리 신랑을 만나거든 내가 너무나 그를 사모하므로 병이 났다고 전해달라고 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런 상사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때문에 끊임없이 눈물이 솟고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대한 모든 관심이 사라집니다. 나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은 때가 없지는 않다 라고 이야기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느낌입니다. 갈망입니다. 간절한 갈망을 이 신부가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 침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은 간절한 갈망입니다. 하나님은 갈망하는 사람의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간절한 갈망,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안타까움, 간절한 사모함과 갈망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갈망도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갈망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갈망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갈망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분산입니다. 내 영혼의 문제가 가장 시급하고 내 영혼의 모든 이 문제야말로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절박한 문제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갈망이 안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데 마음이 다른 것에 계속 빼앗기고 분산되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쾌락에 빠지는 것, 이 세상에 있는 정욕,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닌데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쏟는 것, 이런 분산들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갖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분산되니까 계속 곤고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없는 공허한 마음에 외로움과 괴로움 들을 다른 것들로 달랩니다. 자기가 처한 여러 가지 상황에 핑계 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고치려고 들지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더 많은 패역과 봉변 불순종 죄악들을 낳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돌아가기가 더 어려운 사람으로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샘의 물이 마르는 것입니다. 한때는 거기에 많은 몰약과 향재료와 포도주와 젖과 모든 아름다운 약초가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은혜의 물이 마름으로 말미암아 함께 모두 다 고사되어 죽어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은혜 가운데 있을 때 그렇게 온유하던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 마음이 변하고 식어지면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메마른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정말 그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서 물을 먹고 물댄 동산과 같은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회복을 갈망하라”
본질적이지 않는 것은 관심을 끊고 그까짓 것이 아무렇게 된 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밀치고 ‘나는 우리 신랑을 만나야 하리라 우리 주님을 만나야 하리라 예루살렘에 있는 여자들아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전해다오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 하려무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저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더 이상 은혜의 샘이 마르고 아름다운 동산이 황폐하게 된 가운데 첫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런 삶은 더 이상 저에게 행복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죽음과 같은 삶입니다. 하나님 나를 이 은혜에서 회복시켜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며 깊이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어느 한 순간에 쏟아 부어 주시듯이 우리의 마음을 깨뜨리시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가도록 만들어 주시는데 이것을 가리켜 영혼의 회복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시니까 얼마나 더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회복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그런 갈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사경회에 여러분의 마음을 잘 추스르고 이전에 영적인 침체와 결별해야 합니다.
다시 빛 가운데 살고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4. 주님이 계신 동산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아6:1~3)
1. 신랑이 좋아하는 동산
사랑하는 사람이 가 버리고 나니까 이제 이 여인은 예루살렘 거리를 헤매며 예루살렘에 있는 여자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전해주려무나 하고 부탁했습니다. 아마 그 모습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자들에게는 매우 애처롭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빼어난 미모에 아름다움이 있는 그 여자가 자신의 연인을 찾지 못해서 그렇게 슬픈 사람처럼 헤매는 광경을 보면서 예루살렘 여자들이 말했습니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느냐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느냐 우리가 함께 너의 사랑하는 자를 찾아주고 싶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이 여자를 동정하며 돕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이 여자가 자기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2절에서부터 여인의 노래가 다시 시작합니다. 그 여자가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는 동산으로 돌아갔도다. 그 아름다운 동산 봉한 샘이 있고 덮은 우물이 있는 그 동산, 거기에서 물이 흘러 흐르는 물 때문에 꽃피고 새우는 각양 몰약과 향재료과 꿀과 송이꿀과 포도주와 젖이 흐르는 그 동산으로 돌아갔도다 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주님은 이처럼 은혜의 샘에서 물이 흘러나와 마음과 인격과 삶이 아름답게 변화되고 있는 성도들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자가 신랑을 잃어버린 과정을 통해서 다시 한번 그 신랑이 물댄 동산과 같은 아름다운 곳을 얼마나 사모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마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그 동산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누이여, 나의 신부여 라고 부르면서 그 동산을 그렇게 즐거워하던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2. 그 동산에 오르라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일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필요하냐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이지로써 알 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으로써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충만하게 느낄 때 거기에서 우리의 실재적인 마음과 인격, 삶 이 모든 것에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뜻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지 못하는 것은 자기 사랑이 하나님 사랑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악한 욕망에 쉽게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도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여러 잡다한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들이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좇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해결 방안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깊이 감격하게 될 때에 그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대로 우리들이 순종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우리 안에 있을 때 그때 우리 마음 깊은 곳이 샘물과 같이 은혜의 물을 흘려내고 그 흐르는 은혜의 끊임없는 물의 흐름 때문에 우리의 마음, 강퍅하고 거친 마음이 변해서 온유하고 사랑스런 마음이 되고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고 부드럽게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옥토와 같은 밭이 됩니다. 그렇게 떨어진 말씀이 씨앗들이 결실을 맺고 아름다운 수확을 거두어서 동산 전체가 물댄 동산과 같이 향기로운 꽃들과 아름다운 화초들과 약재료들과 송이 꿀과 젖과 포도주가 가득한 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신랑은 그 동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거기가 주님이 계신 동산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가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우리의 마음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어느 한 순간 정말 우리의 영혼이 곤고해져서 주님을 필요로 하는 그 때에는 우리에 대한 주님의 차가운 거절감을 경험합니다. 주님이 나를 돌아보시지 않는구나. 주님이 나를 떠나셨구나 하는 차가운 거절감을 우리들이 경험하게 됩니다.
이 차가운 거절감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서 사라진 데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사라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마음도 변하고 우리의 인격도 예전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 그 인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서 식어지면 인격도 우리 인격이 아니고 우리의 심령도 우리의 심령이 아닙니다. 삶의 아름다운 모든 열매들도 다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에게서 은혜의 물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많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게으름, 게으르기 때문에 은혜의 수단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깨달음이 힘들어집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지 않으면 마치 뚜껑이 없이 향유를 받은 것과 같아서 모든 것들이 날아가 버립니다. 기도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는 뚜껑의 역할을 합니다. 기도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아뢰면서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불씨를 우리 안에서 잘 보존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것들, 불순종을 통해서 우리 안에 은혜의 샘이 마르게 됩니다. 모든 게으름, 불순종, 태만함, 부주의 이런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뿌리는 죄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죄만이 우리의 은혜의 샘을 막습니다. 우리는 물댄 동산과 같은 아름다운 동산, 주님이 계실 수 있는 곳, 그런 동산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어려운 마음 밭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신기합니다.
예화: 마당의 나무이야기
3. 아름다운 동산에서 이루시는 약속
이 세상에는 정말 피할 숲이 없어서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죽어가는 어린 새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들로 잘 성장하고 숲은 맨 땅 위에 나무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교회라고 하는 동산에서 은혜를 받고 그 속에서 아름답게 자랍니다. 그 사람 마음속에 은혜의 물이 흘러 아름답게 자랍니다. 동산 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의 샘이 있고 거기에서 펑펑 솟는 물이 두루 휘돌면서 온 동산을 적십니다. 수많은 나무들이 어깨를 대며 그 동산 위에 있고 그 나무 하나마다 줄기 가지 잎이 튼튼하게 뻗어 나와서 이 나무가 저 나무와 손잡고 저 나무가 그 나무와 손잡아 이어지면서 빽빽한 숲을 이룹니다. 거기에 지치고 갈 곳 없는 어린 새들이 날아들어서 보금자리를 틀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봐요.
숲이 있는데 나무가 있기는 있는데 다 잎 떨어진 나무들, 잎 달린 나무도 누렇게 바래며 죽어갑니다. 나무 사이를 걸어도 이파리 하나 없어서 뙤약볕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온 동산에 그렇게 숲이 사라졌는지를 발견하게 된 것은 바싹 마른 그 동산의 샘물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샘물이 하나 없고 바싹 마른 동산에서 메마른 것을 보게 됩니다. 동산에 비료 주는 곳은 없습니다. 시냇물만 샘에서 계속 흘러나와도 동산은 누가 돌보는 사람 없어도 거기서 쭉쭉 뻗으면서 아름다운 나무로 자랍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필요한지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은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말씀 사역을 위해 늘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서 교회의 말씀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고 거기에서 계속 샘물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어리석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계속 해서 목회자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쓸모없는 일에 목회자의 마음을 빼앗기게 만듭니다. 목회자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공급받는 일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샘은 물을 솟아나게 하지만 샘의 물을 전달해주는 그 수로는 샘의 물이 그치기만 하면 며칠 안에 바싹 말라버립니다. 목회자는 샘 자체가 아니라 그 샘의 물을 전달해주는 수로에 불과합니다. 샘의 물을 솟아나게 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 안 하시는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잘 안 들립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뚫어진 두 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주님의 음성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서 우리의 마음이 분요하고 흩어져있고 산란하게 되면 우리가 그 마음을 받아서 그 마음속에서 깊이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못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슬기로운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그런 물댄 동산과 같은 성도들이 있는 교회를 좋아하고 그런 물댄 동산과 같은 성도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기쁘게 거하십니다. 침체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 자신을 너무나 야박하게 대해 주시는 주님의 엄격하심 때문이라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을 깊이 돌아보십시오. 그래서 매일매일 주시는 그 은혜를 간직하고 그 은혜의 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거친 인격의 나무에 새순이 돋도록, 거친 여러분의 마음의 밭에 아름다운 꽃이 자라도록, 향기나는 백합화, 신랑이 그토록 좋아하는 백합화가 자라도록 여러분 자신을 가꾸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미친 사람이 자기의 영혼을 거의 돌아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속에서 그는 결코 행복해 질수 없습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 없이 살 수 없다고 깨닫는 것은 영적으로 충만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침체에 빠졌을 때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여자도 자기의 사랑하는 자는 자기에게 속하고 자기는 그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고 하는 것을 신랑을 만날 수가 없어서 병이 났을 때 깨달았습니다. 내가 내 신랑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구나. 내가 왜 사랑하는 나의 신랑이 문을 두드릴 때 꿈지럭거리고 태만함으로써 달려 나가 그를 속히 맞이하여 붙들지 못했을까? 내가 그렇게 지체할 동안에 내 사랑하는 자는 나의 창문을 떠났는데 내가 왜 그러했을까? 후회하면서 그를 너무나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에 병이 났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정말 자신은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신자가 부주의함과 게으름 자기 사랑의 죄 때문에 그 은혜를 간직하지 못하고 미끄러질 때 이런 의문이 듭니다. 미끄러질 만할 때 주님이 우리의 손을 강권적으로 붙들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은 미끄러지게 내버려 두십니다. 주님 없이 한 동안 살게 놔두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말씀이 거의 들리지 않는 영혼의 어두운 때가 다가와도 하나님이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그를 내 버려두십니다. 때로는 이것이 주님의 엄격하심, 거기에서 비롯되는 우리의 작은 죄에 대한 주님의 큰 거절감으로 우리들이 생각하지만 주님의 의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 주님이 당신 없이 죄 가운데 사는 성도들을 미끄러지게 내 버려두실까요?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치지 않는 가운데 어두움 속에 우리를 버려두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사는 고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기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그 은혜를 잃어버릴 때쯤 되면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 가운데 살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가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뼈 절이게 느끼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후에 신자가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정신을 차리고 신앙생활을 하기만 하면 예전에 미끄러진 경험이 주님을 꼭 붙들고 사는 아주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많이 받고 그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고통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 우리들이 태만하고 부주의해지기 쉽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사는 기쁨도 알고 그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지독한 고통도 알게 됩니다. 그 고통 속에서 자기가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 자신은 주님께 속하고 주님은 자신에게 속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이 세상에서 정말 귀한 것이 주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럴 때 자신을 복종시킬 수 있는 힘들이 나오게 됩니다. 의지적인 결단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 영적인 침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당신께 붙어있도록 훈련시키는 아주 훌륭한 재료가 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침체에 빠뜨리신 것은 아니고 여러분 스스로 걸어서 그 동산에서 떠나 거리를 방황하고 웃옷을 벗기고 순행하는 사람들, 성을 파수하는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한 것은 여러분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침체와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말씀을 들으면서 끝없이 곤고한 사람들이 있지요? 마음속으로 손 들어보세요.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너무나 긴 세월동안 한없이 미끄러졌고 나의 모든 삶을 둘러싼 사물들의 질서는 엉킬 대로 엉켜서 나의 마음이 그 모든 사물의 그릇된 질서에 매여 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그때에 이 여자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그 아름다운 동산으로 돌아갔구나. 나와 함께 아름답게 사귀시던 그 주님이 요즘은 아름다운 동산과 같은 마음을 가진 다른 성도들 심령 가운데 계십니다. 그 속에서 깊이 두 번째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침체 가운데 이런 고백을 드리는 것이 주님께 죄송하지만 저는 이 미끄러진 침체를 통해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런 깊은 고백을 우리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내 마음이 아름다운 동산과 같았을 때 내 마음에 주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가 나눈 그 기쁨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데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시고 우리를 깊이 변화시켜 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르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고백하고 돌아오면 주님의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두 가지가 약속되어 있다고 늘 가르쳐 드렸습니다.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무한한 능력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여서 다시 그 여러분들의 샘에 은혜의 물이 흘러야 합니다. 이 은혜의 샘이 다시 터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말씀에 집중하며 말씀에 은혜를 받고 깊은 회개를 통해 다시 은혜의 샘에 물이 흐릅니다. 은혜의 샘에 물이 흐르기 시작할 때 그 물이 어느 날 아침 한번에 막히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이 서서히 돌아보지 않는 샘이 되므로 막힙니다. 은혜의 샘이 터져 다시 흐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혜의 샘에 물이 계속 흐르도록 매일매일 끝없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분투하며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온 마음을 모아 중심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 모든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은혜의 샘물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것 말고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대안이 있으면 찾아가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대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은혜의 샘을 회복하고 또 지키는 여러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5. 주님이 계신 마음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8:6~7)
1. 인같이, 도장같이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아가서의 거의 끝부분입니다. 여기에서는 신부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노래하기를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나를 네 팔에 두라’ 이것은 아마도 앞에 보면 신랑이 신부를 만나서 끌어안는 장면이 나옵니다. 왼팔로 신부에게 베개를 해 주고 오른 팔로 끌어안아 누워있는 묘사가 나옵니다. 아마도 그것을 형상화해서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나를 너의 팔에 두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옛날부터 도장은 권리를 행사하는 아주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아무렇게나 몸밖에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옷 속 깊이 넣고 가슴에 품어서 누구도 쉽게 빼앗아가거나 스스로 잃어버리지 않도록 보호하고 다녔습니다. 도장을 지팡이와 함께 늘 팔에 두어서 언제든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고 누구도 자기 모르게 탈취해 가지 않도록 그렇게 간직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에서 이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관계에 있어야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감정을 늘 동반하게 되는데 첫째는 기뻐하는 것과 둘째는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며칠 동안 아가서를 보면서 생각했지만 사랑은 서로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기뻐하기 때문에 그를 볼 수 없을 때 낙담하는 여인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 하나님을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인해서 아주 크게 즐거워합니다. 사랑하지 않고 무관심한 사람은 만난다고 하더라도 덤덤하거나 혹은 만나는 것 자체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만나게 되면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가슴이 뛰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기쁨입니다. 예전부터 사랑은 항상 기쁨을 가져오는 감정으로 묘사되었습니다.
2. 기쁘게, 소중하게
사랑의 슬픔이라고 하는 것은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단절되었을 때 찾아오는 감정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이 기쁨과 슬픔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늘 사람의 마음속에 흐르게 됩니다. 만나면 말할 수 없이 기쁘지만 그 어떤 이유에 의해서 만날 수 없도록 차단되면 슬프고 어둠이 찾아옵니다. 만나면 한없이 기뻐서 마음과 생각 온 몸의 뼈까지 즐거워 떨지만 그 만남이 차단되거나 더 이상 볼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뼈 속까지 타들어가면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은 신부의 고백과 같이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전해주려무나’라고 고백할 수 없을 정도까지 가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결국은 한 사람이 누군가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가 하는 것은 어떤 때는 본인 자신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만날 수 없게 될 때 얼마나 많은 슬픔이 그에게 밀려오느냐에 의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깊이가 확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많이 기뻐하는 것은 많이 사랑하는 것이고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을 볼 수 없도록 차단되었을 때는 슬프게 마련인데 그 기쁨이 작은 것이면 만날 수 없도록 차단되었을 때 슬픔도 작을 것이요 기쁨이 매우 크면 만날 수 없도록 차단되었을 때 그 기쁨은 큰 슬픔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의 감정은 기쁨의 감정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슬픔의 감정은 기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 때 생겨나는 또 다른 결핍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영적 침체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사람이 영혼의 침체 속에 들었을 때 힘들어하는 깊이는 하나님을 사랑한 그 깊이에 비례합니다.
우리 모두 회심하고 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았고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신 분이라고 하는 감각들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이 은혜는 사람 속에 주어졌을 때 성장합니다. 은혜가 성장한다는 이야기는 곧 주님을 향한 사랑이 성장한다는 이야기와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효과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성장한 정도는 사람마다 틀립니다. 상태의 문제입니다. 은혜의 성장이 수준의 문제라면 이번에는 상태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나의 영적인 수준이 일정한 수준에 있는데, 일정한 수준에 있다하더라도 상태가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나 말씀의 깊이 같은 것이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수준이 오늘 저녁에 갑자기 하늘로 치솟는 다든지 오늘 저녁에 수준이 꽤 높았는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니 뚝 떨어져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일정한 수준인데도 우리의 마음이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정도가 각각 틀립니다. 아침에 틀리고 저녁때 틀릴 수도 있습니다. 은혜가 성장을 하게 되는데 정도가 사람마다 틀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가 각각 다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의 세계 속에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정말 깊이 사랑하게 된 어떤 사람이 범죄 한다든지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영혼의 침체에 빠져서 하나님을 뵈올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할 때 그 고통은 그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이 그렇게 되었을 때와는 비교될 수 없도록 커다란 고통이 그 사람 마음속에 일어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의 기쁨이 크면 만남이 차단될 때 사랑의 슬픔이 너무 크게 동일한 비례로 일어납니다.
다윗을 보면 과장이다 싶을 정도로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결코 과장이 아니라 진짜 이전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기뻐했었기 때문에 자기의 죄로 인해 하나님을 뵈올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만큼의 깊이만큼 슬픔과 고통을 깊이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감정의 또 하나의 요소는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감정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매우 기뻐하는 것이고 여러분들에게 매우 큰 기쁨을 주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소중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까짓 것을 가지고 뭘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가치가 아니라 절대가치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에 깊이 빠졌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 얼굴도 못생기고 사회적 지위도 없고 머리도 다 빠지고 배는 나오고 그래도 자기가 사랑하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절대가치입니다.
사랑하는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상대가치가 아니라 절대가치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그것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것입니다. 기쁨을 주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소중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기쁨을 줍니다.
여러분들이 돈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통장을 만져본다고 해서 거기서 꿀이 떨어져요 우유가 떨어져요 그런데도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소중히 여기니까 기쁜 것입니다.
때로는 큰 물건이 아니라 사소한 물건인데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값이 얼마가 나가든지 그것과 상관이 없이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전 성격이 이상해서 옷을 입든지 넥타이를 매든지 뭘 하든지 한 가지만 계속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예화: 넥타이, 런닝셔츠 이야기)
남이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 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술라미 여자는 종족적으로 말하자면 흑인 계열의 사람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에디오피아 사람들하고 교류하는 이야기들이 신약성경에도 나옵니다. 그런 여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솔로몬이 어떤 한 여인, 객관적으로는 그렇게 뛰어나 보이지 않는 여인에게 그 여인 안에 있는 매혹적인 매력 때문에 그를 사랑스런 자로 여기고 깊이 사랑에 빠졌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복음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데 자신의 외모 때문에 이 남자가 자기를 끝까지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계속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면 이것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외모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런 감정이 계속되는 이유는 사랑의 확신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나 하나님이 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랑 그 자체가 절대가치입니다. 절대가치가 아닌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 “너 참 괜찮구나. 정말 사랑스럽다.” 옆에 더 좋은 신자가 나타났어요. 그럼 주님이 “어제까지는 네가 괜찮았는데 미안하다. 오늘은 얘가 더 좋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놓고 비교하면서 그 사람을 그 기준에 모자라는 것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긴 하는데 얼굴이 왜 그래?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다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소중히 여깁니다. 사랑하면 소중하게 여깁니다.
여기에서도 나옵니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소중하니까 마음에 품습니다. “도장같이 팔에 두라” 깊이 끌어안고 그렇게 자신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사이에 어떤 분리도 없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 사랑의 감정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자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까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은 우리 주님이 계시는 곳이어야 하고 신자의 마음에 주님이 계시지만 그 주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자신이 주님께 사랑받는 사랑의 관계, 기뻐함과 소중함의 관계는 자기 자신의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끊임없는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서양의 전통에서는 이 사랑을 획일적으로 그렇게 말 할 수는 없지만 감정이라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동양의 전통에서는 이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이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성리학의 논쟁 가운데 4단 7전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4단은 仁義禮知 라고 하는 덕목이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에게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7전인데 僖怒愛樂哀惡慾입니다. 이 밑에 있는 7개의 감정은 情이고 감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위에 있는 仁義禮知라고 하는 것은 지성입니다. 그중에서 첫 번째 것을 仁, 곧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동양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감정에 굴복하고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보다는 이성의 측면이 많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끊임없이 이성을 가지고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성의 판단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 사랑이지 감정의 충동대로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3. 감정의 충동, 전인격적 헌신
이러한 동양의 사상이 기독교의 사랑 사상과 아주 흡사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면서도 추동된 감정의 충동을 따라 사랑하는 것을 아주 가치 없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지식 사상입니다. “여호와인 내가 너희에게 정말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너희가 나를 아는 것이다. 나를 아는 것 없이 나에게 제사하고 많이 헌신하면 그것은 마치 이방 사람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제사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원하는 것은 너희가 나를 아는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상입니다. ‘안다’ 라고 하는 그 자체에도 물론 지성적으로만 아는 것을 포함하지 않지만 제일 앞서가는 것이 지성입니다.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감정도 실체가 다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의 감정이라고 이야기 할 때 우리들도 사실은 감정뿐인 그 사랑 자체는 아주 천박한 것으로 여깁니다. 오히려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느 한 순간에 확 끓어올라서 좋아하는 감정을 우리도 매우 천박하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그 지식의 기반에서 그를 사랑하게 될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받는 소중한 교훈은 우리 주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많은 사랑을 받으시고 절대가치의 사랑을 받으셔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주님을 깊이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그 사랑이 계속해서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감정적으로만 가슴을 벌리고 내 마음속에 주님에 대해서 뭘 느끼고 싶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돌진을 하게 되면 그 감정은 충동적으로 무의미합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런 것을 알려고 하는 마음 없이 한 순간 마음속에서 추동되고 있는 감정을 통해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인격적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그 사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과 함께 기뻐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랑이 식었을 때에 사랑하는 자로서 나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에게 좋은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순전히 감정적인 측면을 가진 그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외식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도 많이 드리고 나 자신도 많이 드려서 섬기고 많은 의무를 스스로 찾아갑니다. 사랑하면 스스로 끊임없이 의무를 만들어냅니다. 은혜를 받게 되면 새벽예배를 나오면서 의무를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합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옵니다. 그 사람에게 더 소중한 사람이 되고 더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그에게 합치시킵니다.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둘 사이에 있었던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갈등을 해소가 되면서 합치적인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귀한 물질을 드리며 살아갑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사랑의 감정이 식습니다.
처음에 뜨거운 사랑이 있을 때와 그때에 하나님을 섬겼던 그것을 똑같이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고 있는 그것과 실재로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자신의 감정 사이에 층차가 벌어집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선이 아닙니다.
위선과 단차가 생기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하는 어려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위선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남에게 보여서 자신이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했었는데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사랑이 식었지만 내가 주님을 사랑할 때 그 의무를 감정이 차마 미치지 못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주님께 대한 나의 의무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행하련다 하고 행하는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물론 이런 점은 항상 명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사랑이 식었는데도 사랑이 충만했을 때 섬기는 그 행위의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위선은 아니지만 자기가 이렇게 섬기는 의무를 행위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감정이 그 섬김에 미치지 못하는 이것이 무슨 문제가 있으랴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렇게 이성적으로 주님 앞에 행하고 그것 자체가 사랑이지만 어떻게 하든지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는 감정이 다시 그 의무에까지 미치도록 그 자신 속에 하나님이 은혜를 불러일으키시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자기를 가득 채우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알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이것이 나중에 외식에 흐르게 될 위험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서도 끊임없이 자기의 할 의무를 하면서도 은혜를 구해서 속히 내 마음속에 있는 이 식어진 사랑의 정서가 내가 주님을 섬기고 있는 그 사랑의 의무를 가득 채워서 이렇게 섬기는 이것 자체가 나에게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하는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기쁨의 헌신이 되도록 자기 자신이 은혜를 받아서 꽉 채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사랑입니다.
(예화 : 청소년 사역이야기)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여야 할 사람이 주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드리는 것은 정상적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을 때에도 예배에 나와야 합니다. 예배에 아예 안 나오고 놀러가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거룩한 삶,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삶의 기반이 무엇일까요?
주님이 그 마음에 계신 사람들은 항상 그 마음에서 은혜의 샘이 솟아납니다. 그 은혜의 샘은 시내를 이루어 두루 흘러 거기에 각양 많은 몰약과 향재료를 만들어 내고 꿀과 송이 꿀, 포도주와 젖을 만들어 내어서 그 동산을 비옥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어서 그들을 풍요롭게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결핍된 마음으로 힘겹게 의무를 감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해지길 빕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 안에 거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