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마음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마음, 신자의 정체(롬5:5) 2007.8.8 온가족수련회 1
2. 하나님, 마음의 치료자(롬5:5) 2007.8.9 온가족수련회 12
3. 성령의 마음(롬5:5) 2007.8.10 온가족수련회 20
4. 사랑의 마음(요21:15) 2007.8.9 온가족수련회(새벽) 30
5. 마음의 골방(마6:5-6) 2007.8.10 온가족수련회(새벽) 34
1.마음, 신자의 정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한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서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마음은 아주 심오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신앙생활 하면서 특히 예배를 드리고 무엇인가 자극을 받을 때에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은데 실제의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는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것이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서 또 하나님은 그것을 어떻게 바꾸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대로 살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아주 신기한 곳입니다. 이 인간의 마음은 바깥으로는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있는데 이것은 물질세계입니다. 인간 안에는 또 하나의 무한한 세계가 펼쳐있는데 이것은 도덕세계, 영원한 세계입니다. 그 둘이 만나는 곳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 시간 속에 태어났다가 공간속에 나타났다가 시간 속에서 사라지는 모든 유한한 피조물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시간과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영원한 것들이 만나는 장소도 바로 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마음을 중심으로 바깥의 사물들은 육신의 눈을 통해서 수없이 보고 육신의 몸에 접촉하는 것들을 통해서 사물들을 이해하는 지식들이 들어오고 인간의 마음자신과 영혼이 알게 된 영원한 세계에 속한 지식들이 들어와서 만나는 곳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눈이 어떤 사물들을 보고 접촉해서 그것이 어떤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전달하면 그것을 가지고 싶다, 먹고 싶다, 누리고 싶다하는 욕망이 일어나는 곳도 우리의 마음이고 동시에 그런 것들은 다 헛된 것이니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계신 하나님을 위해 살거라 하고 책망을 하는 곳도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이 바깥의 세계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고 인간 안에 있는 영혼 안에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 인간의 영혼 안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생각들이 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을 제외한 모든 인간의 사지 중에 인간의 마음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팔다리가 잘려져 나가도 여전히 인간이며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간의 육체가 죽어버려도 영혼은 하나님께 들려져요.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계획대로 살아가기에 적합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은 자기 밖에 있는 사물의 세계와 자기 안에 있는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아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또한 외부의 세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내부의 세계에서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자신이 어떤 생각들을 만들어 내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상상력입니다. 악한 사람은 항상 악한 것에 대해 상상을 할 때 마음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작용을 합니다. 선한사람은 선한 일을 상상할 때에 그 상상이 꼬리를 물면서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많은 선한 일들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시지만 인간이 없는 이 모든 세계에서 외형적인 경배를 온누리에 받으시는 것보다 가장 연약한 성도의 가장 작은 마음 하나 안에서 영광을 받는 것을 온 우주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는 잃었던 자 하나가 돌아오는 것이 천국에 계신 하나님에게는 큰 기쁨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전 포괄적인 세계관을 지지하면서 물질적으로 발달한 이 세상을 혼자 흘러가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이 세상 구석구석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자고 외치며 사람들이 저 마다 파송 받은 자의 삶을 살자고 외칩니다. 실제로 전개되는 오늘날 삶을 상황을 보면 안 믿는 사람들에 의해 부끄러운 지적을 받으면서 사회 전체의 도덕적인 수준이 하락하고 그런 일들에 있어서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그런 현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교회선교전략이 잘못되었다, 교육방침이 잘못되었다. 구조가 잘못되었다고 수없이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들은 일리가 있지만 찾아들어가 보면 마지막에 도착하는 그 문제점이 뭐냐 하면 마음입니다. 교회 오래도록 다녀서 예수 믿는 사람의 버릇과 예의 범절를 많이 갖추었는데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로 봉사했기 때문에 이제 어떻게 교회에서 전략을 짜고 봉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일로써의 선교사업의 노하우는 갖추었는데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최상의 상태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은 수없는 폭풍과 풍랑을 견디는 것입니다. 교회의 행사도 해보고 교회 직분이 올라가서 이런저런 일도 해보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겉을 핥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깊은 곳에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서 새 마음으로 고쳐지고 그렇게 고쳐진 그 마음이 그를 새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일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표와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에 달려간다 할지라도 결국은 그 마음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동화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이 마음이 인간의 모든 삶의 근원이고, 하나님과 만나는 유일한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거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 두 번째는 마음이 그 삶이라는 물을 흘려보내는 저수지와 같은데 그것을 돌볼 의지는 거의 없이 왜 이렇게 삶이 꼬이고 망가지고 나 스스로도 어떤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통스러워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고 동일한 의문을 가진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하라” 해서 경험했고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해서 빠져 본 적이 있고, 교리반에서 공부했고, 섬겨야 한다고 해서 아웃리치도 다녀왔고, 물질도 바쳐야 한다고 해서 헌금도 많이 했는데, 왜 그런지 나의 삶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보다는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돌고 있고 진리의 많은 말씀을 듣고 지식적으로 많이 안다고 할지라고 왜 그런지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행복이 없다. 그 문제의 결국은 마지막에 마음으로 귀착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으로의 여행은 우리의 우주여행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이 광대무변한 우주, 그 안에서 우리가 갔다 온 것은 겨우 달 그것은 우주 전체의 크기로 보면 거의 움직이지 않고 지변에 달라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으로의 여행을 떠나본 적 있습니까? 따라서 인간이 자기를 안다 하는 것은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과 만나고 또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와 만나는 것입니다. 이문은 바깥세계로 나오는 문이며 또 영원한 영혼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우연해 보이는 수많은 행동들, 그리고 상황마다 나오는 수많은 말,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 지니게 되는 수많은 태도들, 이런 것들은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의 삶에서 불쑥 솟아난 것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샘의 원천으로부터 보이지 않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가닥을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가닥으로 흘러나온 것 같지만 그 많은 가닥들은 마치 프리즘을 통과하고 분광되어서 스펙트럼을 형성하면서 퍼지는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 색깔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우연한 것들처럼 보이는 말과 행동 태도 그 모든 것들을 더듬어 가면 많아 보이는 것도 다발로 엮어져서 하나의 지점을 향해 들어가게 됩니다. 그것들이 모두 하나로 모아지는 그 지점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인간은 마음이 생긴 그대로 생각하고, 욕망하고, 결정하고, 의지를 행사하면서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의 어떠함은 그곳에서 수많은 인간의 말과 행동,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태도들을 직조해 내는 방적기계와 같습니다. 수많은 옷감들을 씨줄과 날줄로 짜요. 그런데 그곳에 다양한 행동과 태도, 마음이 모두 섬유의 성분처럼 녹아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바르고 온전하면 물론 그 사람이 온전한 삶을 살고자 늘 애쓰기는 하지만 모든 행동과 삶 속에 하나님을 향한 온전함이 실 속에 베여있는 섬유질의 요소처럼 다 베어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물이 스며들 듯이 그 온전함이 베어있습니다. 그가 직장에서 상사를 섬기든. 교회에서 지체들을 섬기든,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온전한 마음이 섬유에 베인 물처럼 스며들어서 그 씨줄과 날줄로 엮여진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받음직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권력을 쥐고 아주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섬기면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느냐, 심지어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실직 상태에 있느냐를 불문하고 이 삶의 옷감을 계속 짜지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옷감을 어떻게 짜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 영광 받으시라고 찬양만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벙어리가 되어서 그런 찬송 못 불러도 그렇게 온전한 마음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 그 사람이 비록 실직상태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있어도 그의 삶의 옷감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삶의 옷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옷감이 짜여서 매일매일 가위로 잘라버리면서 다음엔 잘해야지 하는 이런 식의 삶을 더 계속 할 것이 아니라 그런 식의 삶의 옷감이 짜여 나오는 그 공장인 우리의 마음으로 가보야 합니다. 인간들은 대부분 어떤 죄를 덜컹하고 저지르고 그것이 고통이 되어서 돌아와서 자기에게 괴로움을 줄때나 돼야지만 비로소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마음 안에 그것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통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해서 돌아왔다고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바리새인적인 회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했을 때 회개하길 원하시는 것은 그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갈망하게 함으로써 우리자신의 마음의 틀을 고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크게 고통을 받는 순간 이외에는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음은 인간내면에 있는 영원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는데 어디서 만납니까. 하나님은 마음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지닌 인간이 예배당에서 있었기 때문에 예배당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음 안에서 만난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만나다고 하면 그날 예배당에 있는 모두 하나님 만나야 하는데 옆에 사람은 잠을 자고 있는데요.. 마음은 영원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무엇인가영혼이 직접 사물들을 보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 영혼이 보는 것은 물체가 관심사가 아니에요. 이런 물체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물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같은 것, 정의, 믿음, 하나님의 자비 등은 육신으로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영원한 것들은 인간의 지성으로 영혼으로 직접 보는 것입니다. 보는 이런 것들은 수많은 끝을 알 수 없는 인간 안에 그 어마한 기억의 세계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인간의 마음으로 감지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크기는 무한정 넓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한없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컴퓨터는 용량이 초과되면 더 이상 입력을 해도 들어가지 않아요. 우리 인간의 기억의 저장고는 아무리 파란만장한 생애를 백년을 살았어도 그 사람이 앞으로 천년을 더 살아도 그 모든 기억들을 집어 넣을 수 있어요. 물론 그 기억들이 모두 다 꺼내어 쓸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지 많은 그 모든 기억들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누스는 말하기를 “인간의 마음은 무한하신 하나님께도 좁지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인간의 영혼과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작용들 심리학자들은 하루에 인간에 머릿속에 십만 가지의 생각들이 스쳐지나 간다고 합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수없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그 가닥들은 다 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며 그것들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만남도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도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살피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되도록 그 마음이 밝은 상태를 유지해서 마음 본래의 기능을 잘 하도록 자기를 지키는 것이 첫째가는 사명입니다. 그런 기능을 잘 유지함으로써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보냄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인간의 마음이 맑으면 순간적으로 유혹이 들어와도 즉시 물리치면서 우리의 눈이 발견하는 많은 것들에 의해서 그리고 끌려가는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자제하고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맑은 마음 안에서 진리와 성령의 도움으로 올바로 해석을 해서 우리로 흔들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지체들과 상담하다 보면 자신이 영적으로 침체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해서 모두 환경적인 이유를 댑니다. 직장에서 일이 많아서, 실직상태에서, 사업이 안 되어서, 어떤 사람은 사업이 너무 잘되어 바빠서.. .그러면 이 세상에는 모든 일어 나는 삶의 모든 상황이 그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은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을 합니다. 사업이 어려워서 은혜생활 못하겠다는 사람이 사업이 잘되면 다시 은혜생활로 돌아와야 하는데 이번엔 너무 사업이 잘되어서 시간이 없다. 이렇게 하면서 계속 비켜 가는데 결국 이것은 모두 2,3차의 간접적인 원인일 뿐입니다. 그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의 생활을 했던 때를 보면 고난이 많고 괴로웠기 때문에 힘들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웠어요. 주일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바쁘고 힘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마음은 더 하나님께 모아질 수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드리는 예배는 우리의 마음속에 감격을 가져다주었어요. 그러면 같은 상황인데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을 더 풍부하게 경험하고 만나는 기회로 삼고 어떤 사람은 미끄러지는 동기가 되는데 그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대답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한사람의 가치는 그 마음의 가치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신자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인간의 영혼에 어떤 작용을 하신다고 하더라도 그 작용은 인간에게 모두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알려지는 것은 모두 마음에서 이루어지니 심지어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과 직접만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간 자아에 전달해주는 곳은 다름이 아닌 마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바로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는 신자의 영혼 안에 있는데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인간의 마음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맞죠. 그것을 증거라고 읽어낼 수 있는 힘은 그것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아름다운 숲속에 들어가도 삼겹살 구워먹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안에서 한없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에 사물 자체에 근원이 있는 것이라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똑같이 느껴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하나님 자신에 대한 찬송과 경배가 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지킬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영혼에 대해서 너무 모릅니다. 영혼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면서 큰 부끄러움에 잠겼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목사는 성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인데 전도자의 임무는 영혼을 건지는 사람인데 영혼에 대해서 무얼 아는 것이 있는지 작은 쪽지에 영혼에 대해서 써보라고 해도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밖에 있는 사물들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고 그릇되게 사용한다면 여러분의 육체는 성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날카로운 칼 두개를 젓가락으로 생각하고 음식을 찍어서 수시로 먹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입술을 걸레가 될 것입니다. 똑같이 인간의 영혼도 그러합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암에 걸려서 순식간에 죽었습니다. 암에 걸렸단 소식을 듣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녹용을 지어 온 것입니다. 암 걸렸을 때 그런 걸 먹으면 순식간에 죽습니다. 아들을 향한 사랑도 있고 없는 살림에 보약을 지었는데 그걸 먹으면 인간의 몸 안에서 암세포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아무리 공을 들여도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다면 아무리 돈을 들이면서 해도 결국은 그것이 여러분들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처럼 똑같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곤고함은 해결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어떤 사람이 밥 대신 하얀 설탕을 한 사발 놓고 숟가락으로 물 말아서 먹으면 미쳤다고 하지 않겠어요. 그 사람에게는 너무 달콤하고 맛있어요. 우리에게는 그 설탕을 먹으면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지식이 있고 그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청심환 가운데 안궁청심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청심환이 다 같은 종류가 아니며 잘못 먹으면 큰일 납니다. 어떤 사람이 아기가 경기를 하니 병원에서 안궁청심환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6개월을 먹였는데 아이가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안궁청심환은 정확한 진단에 의하면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갈 때 아주 소량을 그것도 3-4일만 쓰고 한번 썼으면 몇 개월 동안 쓰지 말아야 하는 약입니다. 그 속에는 주사라고 하는 독약성분이 들어있습니다. 이것을 아이에게 아침저녁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의사도 그것이 몸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몰랐고 엄마인 사람도 몰랐던 것입니다. 후에 식물인간이 된 어린아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를 개선하는데 도움을 줍니까? 일상적으로 해오는 이 예배의 참석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고치고 있습니까? 교회에서 직분 맡아서 꾸준히 봉사하는데 참 훌륭한 것입니다. 옛날처럼 그것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바꾸어 놓는 힘이 있습니까? 설교를 열심히 듣는데 그런 힘이 있습니까? 마음과 영혼에 대해 깊이 탐구하십시오. 반드시 그 노력을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영혼과 마음.. 인간이 처음 창조된 내력을 보면 하나님이 땅에서는 흙으로 육체를 만들고 하나님 자신이 영혼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심으로써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창조된 그 기록으로 가보면 설자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영혼과 육체처럼 인간이 죽고 나면 하늘로 올라가든지 땅으로 묽히는 실제가 아니며 하나의 기능입니다. 인간의 육체가 영혼을 직접 느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혼은 육체의 움직임을 느끼고 육체는 영혼의 움직임을 또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 영혼의 고향은 영원한 세계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그 창조된 곳은 영원입니다. 그리고 영원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셔서 인간의 육체와 만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이 고향이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고향으로 향할수록 인간의 영원은 삶 전체를 이끄는 자기의 고유한 지도적인 능력을 훌륭하게 발휘를 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에 의해서 마음이 끌려가고 마음에 의해서 영혼이 좌지우지 되는 이러한 삶은 참된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참된 성도의 삶은 영혼과 마음, 육체 사이에 가지런한 질서가 형성된 삶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육체를 이끌고 그 마음은 영혼에 의해서 이끌려 지는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 영혼은 영원으로부터 취하여 졌기 때문에 영혼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있는 한시적인 것으로서는 자식의 양식을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향이 영원이기 때문에 영원히 있는 분 진리이신 하나님, 선이신 하나님, 아름다우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받고 그 하나님께 영향을 받음으로써 영혼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고 영혼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향해 올바르게 순결한 상태에 있을 때 마음은 찢어지지 않고 하나의 온전한 마음이 되고 영혼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도 온전한 한 덩어리가 되고 그 깨끗한 영혼과 하나가 된 마음 안에서 그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일반 된 삶이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군인이 되느냐 공무원이 되느냐 장사꾼이 되느냐.. 이런 것은 삶의 양태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자기의 영혼의 만족이 되시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면서 사는 것으로써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가 어렵고 기도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이 살아온 삶 가운데 기도가 잘 되던 때가 있어요. 예배드릴 때 마다 많은 눈물이 흐르던 때가 있습니다. 기도가 잘 될 때는 준비기도가 필요 없으며 예배당에 무릎을 꿇자마자 눈물이 쏟아집니다.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나누어짐은 영혼의 혼탁함의 증거 입니다. 영혼이 순일한 상태가 되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 영혼을 깨끗케 하시는 것은 오로지 진리와 성령의 힘 이외에 아무것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혼이 잇대어 있고 깨끗한 상태가 되면 인간이 끊임없이 눈으로 밖을 보면서도 무엇을 사랑하고 말아야 할지에 대한 또렷한 질서가 생겨나며 이것이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 진리와 영혼이 마주하고 있지 못하면 이런 질서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덜 중요한 게 더 중요한 것이 되고, 더 중요한 게 덜 중요한 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이 욕망이 만드는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뒤바뀌어진 상태에서 사랑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지요. 내 마음 안에 성령임을 근심시켜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그렇게 되어버리면 마음이 진리를 싫어합니다. 영혼을 진리에게 세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허위의 삶입니다. 생활과 습관으로는 옛날의 잘 형성된 삶을 유지해야합니다. 진리가 싫은데 그 생활을 유지하려니까 예배가 지루하게 느껴지고 기도가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영혼을 위한 간구가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러한 영혼과 마음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수많은 일들을 해도 결국 그 많은 일들은 지구 주위를 계속 도는 인공위성처럼 한 번도 우리의 마음과 만나지를 못하며 인간의 마음은 점점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성도의 참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영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진리와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영원과 영혼은 관계가 있으며 영혼이 영원과 끊임없이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때에 영혼은 깨끗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깨끗해지는 일은 마지막 때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에 귀를 기우려보면 저 깊은 웅덩이 속에서 영혼이 소리칩니다. 네가 이 세상에서 주워 들이는 물질, 욕망을 따라 사는 삶, 이 세상에 있는 명예, 좋은 것들, 안락한 삶, 보장된 성공. 나는 그런 것들로 살 수가 없다. 나에게 내 고향을 보여다오 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부자가 했던 것처럼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이제 내가 창고를 짓고 곡식을 넉넉히 쌓아두었으니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것은 육체의 양식이지 영혼의 양식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시는 예수님과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목회자와 함께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렇게 영혼을 진리에서 단절된 채 내팽개쳐 지고 마음은 삶을 이끌어 갈수 있는 정결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육체가 그 마음을 끌고 다니면서 거덜을 냈습니다. 그게 욕망대로 사는 삶입니다. 행복하신지 묻고 싶습니다. 잠시는 기뻤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말씀을 듣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양심은 고통 받고 있습니다. 잠시 기뻤지만 그것은 행복은 아니라고 여러분의 마음이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마음은 이미 어떻게 해서 그런 고통 속에서 있게 되었고 혼란 속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4년 전 그 마음이 지금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지요 4년 뒤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영혼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영혼은 진리를 향하여 있을 때에는 정결한 순일의 상태가 되고 순전하게 하나의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마음은 그 영혼의 상태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빵이 한 덩어리인 것처럼 하나가 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서 영혼이 깨끗하고 마음이 온전히 하나인 성도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수많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보고 죄인들과 접촉합니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욕망들이 생겨납니다. 은혜가 있어도 호기심도 생기고 배고프면 아주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욕구도 생겨나고 누가 새로운 곳을 다녀와서 여행한 곳을 자랑하면 나도 가고 싶다. 누가 어떤 소유를 가져서 아주 애착하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은혜 중에 있는 성도도 나도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진리에 영향을 받으면서 아주 순전한 상태에 있으면 이런 것들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진리의 빛 앞에서 그 빛을 잃어버려요. 이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것이 진리의 아름다움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 보다 더 귀하다” 란 고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이 본 것을 우리안의 죄성이 우리에게 얻게 위해서 욕망을 가지고 범죄하라고 날라다 주어요. 영혼에서 비치는 밝은 빛이 그 매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수시로 공격을 받으면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온전함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 온전함을 유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님이 그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생명과 사랑이 계속 솟아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영혼만 변화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실 수 있는데..영혼의 변화는 놀랍게도 마음을 통과하여 이루어집니다. 특히 성화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후로 인간의 영혼은 그 자체로 진리를 싫어합니다. 자신의 삶이 거짓되니까. 마음은 부패해요. 생각을 허탄한 것을 쫒고 욕망은 타락한 것을 그리워하고 의지는 건전한 생각보다는 더러운 욕망에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삶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창조의 계획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비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을 고치기 위해서 제일 먼저 고치려고 마음먹은 곳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변혁된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을 보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하나님이 바꾸시기 전에 먼저 인간의 영혼을 중재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단번에 거듭나게 하시고, 그 마음의 할례를 받아 새 마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하나님 앞에 회심하고 주님을 만났을 때 그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찼어요. 나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었어요. 주님이 내안에 가득계시고 삶과 죽음 인생의 성공과 위기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회심하고 거듭날 때가 되면 먼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던 길을 돌이키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될 때에도 제일먼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혼의 변화는 또한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들어가는 측면이 특히 성화과정에서는 절대적입니다. 마음이 향락에 빠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데 어느 날 교회 가서 영혼이 변화를 받았기 때문에 며칠 있다가 마음의 변화가 왔다.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영혼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유익이 되는 지식들입니다. 영혼은 그 본질이.. 본질은 그것 없이는 그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 본질이 경향성입니다. 인간의 영혼도 그러한 경향입니다.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이 마음의 경향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계속 흐르는 경향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하고 나서부터 인간은 자기 안에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거스르는 경향을 가지고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거듭나게 해 주시니까 이 안에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경배하는 경향들이 영혼 안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죄의 경향도 남아 있어요. 이것이 어떠한 상태냐에 따라서 인간의 마음에 반영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가지런히 정돈된 경향을 가졌을 때를 우리들이 영혼이 깨끗한 때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깨끗하다라는 것은 물리적인 깨끗함이 아니라 다른 것이 섞여 있지 않은 그런 순전한 성향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투영이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니까 마음이 찢어지고 나뉘어 져서 불결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짧은 시간 안에서는 이 두개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즉 영혼은 아직도 더러운 상태인데,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영혼은 아직 순전하고 비교적 깨끗한 상태인데 마음은 나뉘어 질것 같은 죄된 충동을 인간의 마음이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fot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살았기 때문에 마음이 굳어지고 영혼의 경향성이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도록 패역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패역한 사람인데도 예배드리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 밀려오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자기가 너무 비참하다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가까이 계시다는 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은혜의 정동이라고 부릅니다. 정동이라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정이 출렁거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한번 경험함으로써 이 영혼의 질서가 그날 밤에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 저녁은 하나님이 온 마음으로 느껴지면서 눈물 흘리며 기도했는데 다음날 아침에는 다시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뭘 보여주는 거냐하면 어제의 경험이 진실하지 못한 경험일수도 있지만 그것이 진실한 경험이었다고 하더라도 영혼 안에 있는 잘못된 경향성들은 짧은 시간에 은혜의 정동을 경험하는 것으로써 순전하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 대책은 그런 것은 한번만이 아니라 그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물러가려고 하면 다시 은혜를 구하며 나와서 다시 그런 은혜의 정동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될 때에 영혼은 진리를 향하게 되고 영혼은 깨끗한 영혼으로 다시 변모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힘입니다. 그래서 잠시는 그것이 차이가 날수 있지만 마음 안에서 계속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결국 영혼의 변화가 오는 것이고 영혼의 변화는 다시 마음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이죠. 인간이 계속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살며 악을 행하잖아요. 그럼 저 사람의 돈을 훔치기도 하고 폭행하기도 하고 명예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교회를 아프게도 하잖아요. 그런 모든 것들은 이 사람의 밖에서 일어나는 피해잖아요. 그 사람을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혼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마다 혼내시는 것입니다. 그 혼내시는 방법이 뭐냐 하면 마음과 영혼이 망가지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지어는 교인들까지도 아내에게 폭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래는 집안 내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이 집안에서 아내를 폭행하는 원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그 피를 물려주는 것입니다. 한번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번 때려서 아내를 철저히 복종을 시키면 그 다음에는 용기가 생기며 그 마음이 둔해지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악이 계속 쌓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우그티누스는 그것을 죄벌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면 그 사람이 당한 것보다도 더 심각한 것을 이 사람의 영혼 안에 인간이 스스로 행하게 되며 그것을 짊어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성도의 마음인데도 아주 모질고 악한 마음이 되어서 불신자의 그것보다도 더 악하고 부패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 인간이 마음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마음을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그것이 하나님의 초월적 보심입니다. 인간은 밖으로 자신의 삶이 흘러 나와서 그것이 양심의 가책을 주고 고통이 되어서 자기에게 돌아올 때야 비로소 자기 잘못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 의해서 마음은 감추어진 것이 되었고 또 인간의 마음 안에 어떤 계획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삶으로 흘러나오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보는 것이나, 사물들을 보시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이 흘러나오는 시간을 빼버리고 나면 이미 마음과 함께 마음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현재의 삶, 미래에 흘러나오게 될 모든 삶과 심지어는 마음 자체에 있는 작용까지도 하나님께서는 한 번에 아시는 것입니다. 아직 내가 악을 행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악인이라고 규정하시고 저 사람은 아직까지 선을 행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이라 규정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마음과 시간의 관계 속에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어도 자기를 발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인간에게는 오리무중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발견되는 존재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찾고 만난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말했죠. 내가 주의 낮을 떠나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내가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여호와의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자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자아가 확인이 되는 곳이 마음 아닌 곳에서는 자기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이 자아 곧 자기가 항상 올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 편이 되어서 나를 보면 죽은 영혼이 되어도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객관적으로 볼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은혜를 못 받을 때에는 내가 무슨 죄가 있나? 더 나쁜 사람들이 교회에 얼마나 많은데, 이만하면 되었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수없이 악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지혜로운 충고를 했어요. 너의 속에 무슨 생각이 있으면 다 말로 해보아라. 오늘 죄 지었으면.. 다말로 해보아라, 그러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텐데..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니면 자기를 객관적으로 하나님 앞에 비추어 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객관적으로 보는 유일한 곳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부패하게 되면 멸망 받을 길로 가장 비참하게 달려가면서도 자신에게 소망을 발견하며 불행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모든 헛된 싸움을 접으세요. 우리의 마음은 갈대와 같습니다. 바람이 조금만 불면 나부낍니다. 죄의 바람이 불어도 나부끼며, 은혜의 바람이 불어도 나부낍니다. 아무리 갈대라도 뿌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삶이 바람에 나부끼기만 하고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는 변화였는지 살펴보라는 것이죠. 근본적인 변화가 안 되니까 그냥 한번 정서적으로 순화되어서, 사경회, 수련회 마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참다운 만남, 그래서 마음 깊은 곳이 하나님을 만나고 꺾어지고 깊이 깨뜨려 지는 진실한 변화가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삶이 허한지 살펴보세요.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만나는 지성소가 되어서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끌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우리 인간의 연약한 성품이 함께 만나 신령한 기쁨을 누리고 그 진리를 향유하는 그 즐거움 속에서 살게 되는 그런 참다운 변화가 있을 때에 우리의 삶 전체는 하나님 앞에 짜인 옷감이 될 것이고,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깃든 그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한 본성들이 모든 옷감 속에 물처럼 스며들어서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삶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 수련회에서 시시때때로 얼굴을 묻고 기도하며 이 자신의 마음으로 떠나는 말씀의 여행 안에서 다시금 주님의 거하시는 성소인 여러분들의 마음이 깨끗함을 회복하여 날마다 주님을 만나 신령한 기쁨을 누리고 삶 구석구석에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하나님, 마음의 치료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그렇게 마음이 온전한 상태에 있으면 거기에서 수많은 아름다운 올곧은 삶의 행실이 흘러 나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이 이런 상태를 상실하고 망가지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망가진 마음을 고치는 치료자로 성경에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 여러분이 왜 하나님이 거듭난 신자의 마음도 이렇게 망가질수 있도록 불안전하게 내버려 두셨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게 될것이고 그렇게 듣게되면 결국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 영혼과 마음, 육체의 삶은 질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진리의 영향을 받으며 아주 맑은 순일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때. 그 영혼의 기능인 인간의 마음은 나뉘지 않고 모두 하나의 마음이 되고 그 마음 안에서 흘러 나오는 인간의 많은 행동들은 올곧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의 빛을 받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하나가 된 온전한 마음이고 그곳에서 자기 속에 있는 지식의 질서를 따라서 삶이 계속 흘러 나오게 되면서 놀라운 질서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아주 선명한 지식의 빛속에서 은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렇게나 살아간적이 별로 없어요. 자신의 모든 행동과 삶, 심지어는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작용까지도 자기의 생각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죠. 그렇게 영혼이 맑고 마음이 온전해서 자신과 자신의 모든 삶을 살피는 사람은 충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정생활을 할때에도 생각을 먼저하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가계가 휘청거리지 않아요. 수입을 냉정히 생각하고 지출할수 있는 능력을 계산한 다음에 그 능력을 벗어나는 욕망은 억누르면 빛더미에 올라않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은 자기 집안에 사들이는 물건들이 있어도 그것을 왜 사야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가 있게끔 먼저 구입해야 할 것들과 나중에 구입해야 할 것들에 대한 순서들도 정확히 질서를 따라서 구입을 하는 것이죠.
우리의 마음과 삶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죠. 다시 마음으로 들어가 보면 이 마음 안에서 실제로 외부의 세계와 접촉하고 자기 안에 있는 영적인 세계와 접촉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이 무엇을 아는 지성과 욕망과 그것을 어떻게 하도록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는 의지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생각, 욕망, 의지는 마음속에서 하나로 기다랗게 된 떡 같습니다. 빨간색 떡 덩어리, 하나와 파란색 떡 덩어리, 하얀색 떡 덩어리,를 하나씩 뭉쳤습니다. 세 개를 다 굴려서 하나의 가래떡처럼 만들고 싶어요. 그러면 손으로 굴리면 합쳐지겠죠. 그러나 경계선은 또렷하지는 않겠죠. 우리마음에서 작용하는 지성, 곧 생각과 욕망과 의지. 이 세 가지가 경계선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죠. 다만 이 생각의 끝은 욕망에 매우 가깝고 욕망의 끝은 의지에 매우 가깝다는 것은 우리들이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온전할 때에는 영혼이 진리의 밝은 빛 아래 있어서 우리의 마음이 온전할 때에는 생각이 제일 먼저이고 그 생각의 판단에 따라서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을 따라서 의지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의 구조 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찬란한 진리의 빛 아래 있을때에 그 생각, 지성은 도대체 무엇을 아느냐 하는 것이죠. 우선 그 지성 안에서 두가지 작용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거기에서 믿음을 통해서 진리이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왜 이 말씀이 참 진리인지 이유는 댈수 없지만 내 마음속에 그것이 확실하게 믿어지고 믿어지니까 그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혼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온전한 마음일 경우에는 생각이 아주 총명해 집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일에 이어서 결과가 어떻게 뒤따를 것 이란 것 에 대한 아주 놀라운 이해가 생겨 납니다. 저는 학교에서 공부가 정말 별루인 아이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아주 탁월하게 공부를 잘하는 경우를 여럿 보았습니다.
번쩍 하고 놀라운 초자연적인 빛이 들어오는 것은 아닌데도 마음인 온전해 지면은 이성의 작용이 아주 활발해 져서 평소의 지혜보다도 아주 뛰어나게 사물들을 분간하고 그것이 일어날 어떤 결과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대 부분 돈이 부족하거나 권력이 모자라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지혜가 모자라서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일에 뻔한 이치가 분명한데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보이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온전한 마음안에서는 이러한 지성의 활동이 아주 극대화 되는 것입니다.
지성은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추한 것이다. 선한 것이다. 악한 것이다. 이것은 더러운 것이다 라는 판단을 내리면은 그 다음에 있는 욕망이. 욕망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려는 마음과 싫어 하는 것을 배척하려는 마음. 추하고 더럽다 라고 생각이 판단을 내리면 욕망은 그것을 혐오하는 것입니다. 지성이 예쁘다. 아름답다 라고 판단을 내려요, 그러면 욕망은 그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다. 가까이 가고 싶다, 붙들고 싶다. 라는 욕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욕망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쪽으로 갈라져서 어떤 쪽으로 기울게 되면 그 욕망에 맞는 선택을 의지가 하는 것입니다. 이 판단이 영혼이 진리의 빛 아래 있을 때에는 이 지성이 판단이 아주 정확합니다. 휼륭하게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 자아의 지도적인 역할은 영혼이 하는 것이고, 인간 마음의 지도적인 역할은 지성이 하는 것입니다.
판단을 내리면서 욕망을 하고 의지에 행동을 하게 되어, 생각이 질서로우니까 밑에서 내려오는 삶도 아주 질서 있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자기 마음안에 있는 삶이 밖으로 흘러나오잖아요 그 삶을 보면서 마음이 기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삶이 자기가 의도한 대로 충분히 흘러나오지 못했을 때에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삶을 보면서 지성은 더 진리의 빛을 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욕망은 더 지성의 판단에 따라 뜨겁고 분명해져야 할 필요를 느끼고, 의지는 그 욕망의 움직임에 따라 단호해 져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현미경으로 보듯이 자기 자신의 마음의 부정함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참회하며 그 마음을 하나님앞에 깨끗하게 해달라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올곧은 삶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 나오는 행동을 통해서 삶이 이루어 지고 그 삶은 무엇인가 자기가 있는 세상을 물질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바꾸어 놓을 것 입니다.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못 받았을때에는 혼돈하며 헤메고 다녔는데 은혜를 받으니 정신이 똑바로 차리고 자기 가정이 불신 가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대로 살려고 하다보니 자신의 삶도 질서 있게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용서에 대한 말씀을 들으며 자신이 변화되니 가족들을 용서하게 되고 상처가 많은 가정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 했는데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니 이러한 상처를 우리 가정에 두신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어 이 가정을 고치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기 위해 나를 세우셨기에 이 상처도 나에게 좋은 것이다 라고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은 자기 밖에 있는 사람, 사물들을 변화 시킬 것 입니다. 변화의 과정자체가 우리가 변화시키는 그 속으로 스며드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질서잡힌 내면의 세계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면서 사람들을 바꾸고 사람들 속에 어떤 선한일을 해서 그들을 바꾸어 놓을때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변화된 우리를 통해서 이 세계속에 침투하시는 과정입니다. 결국은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들 속에 스며들게 하심으로써 나아가서는 마지막으로 이 모든 자연세계 속에 이미 계시지만 그렇게 인간들을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시키면서 스며들어서 온 세계안에 당신이 충만하게 계시도록 만드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런 충만한 영광을 향해서 이 세상은 종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런 충만함은 종말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서 겨우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구속이 완성된 후에는 더 찬란한 충만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차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이 세계에 아무리 가득차셔도 하나님이 모자라서 다 스며드시지 못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렇게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는 그 삶 자체가 바로 그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자기를 확장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우리에게 오늘 미리 맟보아 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니면 이러한 기쁨을 자기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 속에 스며드시는 이 기쁨을 경험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 모든 세계속에 우리를 통해서 당신 자신이 스며드시는 이 놀라운 일들의 시작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무리 선교적인 삶을 외치고 세상을 향해 용감하게 달려가도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그 분께 온전히 지배되는 마음이 아닌 사람들은 몸은 선교적인 삶을 살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들 속에 스며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수고들이 폐기처분되고 고단하게 많이 애쓰나 열매가 적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계가 완성되어가는 것과 함께 자신도 같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삶의 질서를 바르게 하시를 원하십니다. 이런 수련회나 사경회를 하면 많은 사람의 관심사는 이번 성회에서 내 문제를 해결받아야 겠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문제가 많겠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문제 자체가 해결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맛나가 먹기 싫다고 고기좀 달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고기를 주셨는데, 아직 고기가 이빨사이에 있을때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죽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어요. 홍해를 앞에두고 두려워 떨때에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찬송하던 사람들이 삼일도 못되어서 마실물이 없자 하나님을 향해 독한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많은 문제들을 이번에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면 그것은 유효기간 얼마짜리 입니까? 그것을 담보로 몇 달동안 하나님 잘 섬길지 말해보세요? 6개월이라고 칩시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되요? 또 미끄러져서 전도사님들을 바쁘게 하시겠죠. 할수 없네요. 하나님께서 5개월쯤 되어서 문제를 시작하셔야 겠네요. 그 다음에는 주기가 짧아 지겠죠. 그 다음에는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문제를 던져 주셔야 겠네요. 적어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대하셨던 삶은 그런 삶이 아니란것죠. 병이 생겼을 때에는 치료하는 것이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더 좋은 것은 같은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안고 있는 그 문제가 왜 시작이 되었습니까? 아주 질서 있는 영혼, 마음, 육체의 단정한 삶속에서 생겨난 문제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여러분 눈에는 문제보다는 하나님이 훨씬 크게 보일것입니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을 찾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손톱만해 보이고 문제는 손바닥만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잘못되어서 여러분에게 고통을 주게된 문제도 사실은 여러분들의 영혼의 어두움, 나뉘어 지고 갈라진 마음에서 흘러나왔습니다. 무엇이 빠르겠어요. 그 문제부터 빨리 땜질해 주시고 마음은 내버려 두시는 것이 낮겠어요. 아니면 마음 그 자체를 완전히 고쳐서 다시는 그런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는 것이 급하시겠어요. 우리들이 문제에 매달려서는 우리의 신앙의 본질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면 사실은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나님 찾다보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돈이 급해죽겠는데 마음 문제를 하고 있어. 그렇게 해서 고쳐지겠습니까? 지금 하는 이모든 이야기들은 여러분들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다루는 것이고 이러한 이치를 깊이 깨닫게 될 때 여러분들은 자신의 삶을 돌이키게 되어서 다시는 그 더러운 덧에 빠지지 않게 될것입니다. 이러한 질서가 파괴되는 원인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원죄 때문입니다. 원죄라고 하는 것은 아담이 지은 죄입니다. 흑인이 자식을 낳게되면 흑인을 낳게 되는 것과 마찮가지로 이 죄는 우리에게 물려진 죄가 되었어요. 모든 사람이 아담과 함께 그 죄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죄가 밀려들어옵니다. 원죄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전적으로 죄가운데서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죄에 대한 책임과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선한일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지만 악하게 살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악을 체계적으로 배워서 악인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기반자체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원수처럼 아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본성을 따라서 움직이고 행동하게 되면은 악한 삶을 저절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인간은 계속해서 타락하고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죄가 인간의 본성에 깊은 부패성을 가져다 주었어요. 이 안에 타락하고 더러운 부패성 때문에 인간은 마음 전체가 그 죄로 물든 상태에서 태어나요. 그리고 마음을 더럽힐 수 있는 능력은 있는데 자신의 힘으로 그 마음을 깨끗케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향하는 선한 일은 행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고 하나님을 완고하게 거스르면서 살고자 하는 철저히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타락한 본성은 특별한 일이 없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아니여도 좋은 교육을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에 어느 정도 억제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 악한 본성은 점점 더 발전 하면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런 식으로 작용을 하니 영혼이 진리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있지요, 마음은 그렇게 망가진 상태이지요. 그 망가진 마음에서 망가진 삶이 흘러져 나가니까 이런 아름다운 모든 질서 들이 파괴되는 것이죠. 그것이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부모 자신이 올바르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식이 휼륭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같이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망가지는 것은 80% 이상이 부모책임 입니다. 그런 마음속에 있는 원죄 때문에 거급난 다음에도 원죄안에 있는 부패성은 죄책은 용서받아서 해결되었지만 부패성은 계속 살아서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안에 질서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것과 함께 실제적인 원인은 진짜로 죄를 짖기 때문입니다. 죄를 실행한다고 해서 실행죄 입니다.
사기를 친것고 아니고 부정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한마음의 되어 본적이 없어요. 늘 기도하면 마음이 혼란스럽고 나뉘어져 있어요. 교리공부를 다시 해야죠..
실행죄는 강도, 도적, 폭행 밖으로 튀어나온 것만 실행죄가 아니라 마음으로 품은 죄도 죄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악을 행하고 하는 생각을 품었는데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지 않았더라고 마음을 안 망가뜨리겠냐 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 실제적인 실행죄 때문에 하나님앞에 죄를 짓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망가져서 그 질서가 흐트러 지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마음에서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그것이 영혼에 영향을 미치고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과 마음의 상태와 실제적인 삶의 행동은 항상 비슷한 것이 되려고 하는 현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운데 설령 계속해서 악을 행하고 부주의 해서 마음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이런 악한 것을 하면서도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수 있잖아요. 어느정도는 영혼에 빛이 비춰요. 마음이 나뉘어 지고 삶이 무질서 하게 흘러 나오게 되면은 말씀의 빛이 비추면 비출수록 자신의 마음과 삶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음 자체가 진리를 좋아할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수단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안읽기 시작하고 앞자리에서 설교를 집중해서 듣다가 저 뒤에서 다리꼬고 졸다가 가고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에 열심있던 사람이 핑개만 있으면 예배에 빠질려고 하고 그렇게 하면서 진리 자체로 우리를 가까이 데려가는 참된 도구들로부터 멀어 지는 것입니다. 그 모든 도구들이 진리를 전달해 주는 도구이기 때문에 마음자체가 나뉘어진 상태에서 그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결국은 스스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결책이 없을까 궁리하며 외적인 고백으로는 하나님을 불러 들려요. 근데 자신의 마음을 고치시는 하나님은 싫어요. 문제만 해결해 주시길 원하는 것이죠. 그렇게 될 때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마음놓고 더 미끄러 질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전해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결국은 나쁜일이 되고야 말아요.
어느 청교도가 말했어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의 마음에는 나쁜일 이라는 것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진리에 영향을 받으면서 마음자체가 그 도로 인해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요. 고난이 오면 고난 때문에 주님을 붙들고 연단되어져요.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강물처럼 흘러가서 많은 사람을 고치고 치료하는 도구가 되요.
물질이 부족하면 하나님 의지하며 훈련받으니까 경건해 지고 그 모든 것이 학력이나 교회오래다닌 출석연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린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 “여호와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고 중심을 보느니라”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인간적인 판단으론 도저히 저런 사람들을 사용해서 크고 위대한 일을 하실 리가 없는데 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누구도 못한 위대한 일들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너무 좋으셔서.
신자가 되었는데도 왜 자꾸 죄를 짓게될까? 어떨땐 진심으로 이젠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하게 되잖아요. 인류가 타락한 이후에 우리모두 죄가운데 태어나게 되요. 우리의 영혼이 진리의 빛으로부터 차단되어 죄의 강력한 원리가 우리의 영혼안에 심겨져 있고 마음의 더러움은 바로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영향으로 말미암에 미워하고 정욕을 품고 사람들을 모함하고 헐뜯고 정복하고 하는 야비한 삶의 근원으로써 힘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이 마음 안에서 인간이 아닌 육체를 가진 동물과 같은 차원의 작용이 마음안에서 만나게되는 것입니다. 들짐승들은 절대 과식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도 육체적인 차원에서는 동물과 유사한 같은 자연적인 질서에 있기 때문에 그런 기능을 주신것입니다. 신기하게 인간에겐 마음이 있는것입니다. 활동을 위해서 배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을 못하는 것입니다. 먹으면서 희열을 느끼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보리밥에 열무김치 먹으면 되는데 비싼 돈을 주고 밥등 먹습니다. 아주 화려한 곳에서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 욕망들이 자꾸 팽창을 하면서 아주 기본적인 육체의 존속을 위한 욕구와 만나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경항성이 들어가면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물질세계속으로 감아가지고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박히니까 하나님이 안보이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미 가지고 이T기 때문에 그렇게 박히지만 가난한 사람은 그렇게 되고 싶어서 박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와는 상관이 없어요. 굉장히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그런것들로부터 초연한 사람들이 있고 아무것도 못가지고 있는데 뒤엉혀서 내동댕이 쳐진 사람이 있단 것입니다. 실지로 그가 얼마나 없이 살아가는가 그것만 보아서는 마음이 깨끗하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느곳에서도 가난을 칭찬하지 않아요. 부유한 것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손에 듣 불이나 칼과 같아요. 어느것을 쥐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믿을때 하나님이 거듭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우리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샘솥아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이 영혼과 마음에 가득채워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영혼안에 혁명적인 놀라운 변화가 일어 난납니다. 칼빈은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인간의 중생은 마치 여름날의 바닷가에서 다 썩어서 형체를 알아 볼수 없는 생선이 그 바닷물 속에서 헤엄치게 된 것과 같은 사건이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혼과 마음와 삶의 질서를 잡을 수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영혼안에 생명의 법을 심어요. 그곳에서 생명과 사랑이 솟아나요. 그것을 통해서 영혼은 아주 구체적으로 진리의 맛을 알게 되요. 이 안에 진리에 대한 기억은 있었어요. 진리를 만나는 순간에 그리움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리움이 활화산처럼 쏱아져 나와서 진리를 받아들어요. 진리에 대한 그리움과 목마름이 영혼안에 구체적으로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진리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향하여 생명의 양식이냐, 사랑의 음성이냐 기쁨의 냄새입니다. 영혼이 그것을 계속 그리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도 영혼은 계속 고통하며 그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 못된 마음이 이 양식을 먹으려고 하면 그릇을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예배 안드리고 도망하고 성경읽지 않고. 이것은 모두 영혼이 하는 짓이 아닌 마음이 하는 짓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모든 결과는 부매랑이 되어서 자신에게 돌아 옵니다. 그렇게 활화산이 터지듯이 죄를 몰아내고 생명과 사랑이 쏟아나는 이것은 자동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은혜 안에서 은혜의 작용속에서 순종하고 자기가 하나님앞에 받쳐지고자 할때에 우리에게 흘러 넘쳐서 우리의 마음을 적시고 영혼을 바꾸고 우리의 삶을 고치면서 이 질서를 유지해 가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께서 심겨놓으신 법이 파멸되는 법은 없지만 정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죄의 영향 이외에 아무 선한것의 영향도 받을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모두 없애신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남아있어요. 이것들이 서로 영혼안에서 우세해 지기 위해서 다투는 것이죠. 죄도, 은혜도 모두 인간의 마음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통해서 들어오니까요. 하나님이 이러한 상태에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가 정말 신자로써 자기안에 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을 이기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자기의 마음의 질서를 깨뜨리는데 자기의 힘으로 할수 없다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호소하지 않을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이 무엇인지 이미 알았기 때문에 그 질서가 깨뜨려 질때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아는 것이죠.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해볼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이 안됩니다. 마음이 육체보고 이거 집에,, 하면 금방집습니다. 생각하자마자 말로 하지 않아도 즉시 들어요. 마음이 고쳐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마음 자신에게 명령을 해야 하잖아요. 그것은 마음이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들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없습니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데 하기 싫을때 여러분의 마음에 명령해보라구요 그렇게 쉽게 명령이 먹히는지 거의 실패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절망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입니다. 그것은 아주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찮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같은 탁월한 사람도 이미 신자가 된 후에도 그런 고백을 했죠. “내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데 자기 마음은 악을 행하고 있더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문에서 건저 낼 것인가“라고 고통하잖아요. 그런 영적인 거인도 그것이 잘 안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을 해도 안듣는데, 하나님이 명령을 하면 듣겠습니까? 자기편인 자기가 말을 해도 듣지 않는데 다른편인 하나님이 말씀을 하면 듣겠어요. 이제까지 마음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이정도 되면 여러분이 절망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것이 되면 왜 그렇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한때 이런 고백을 했어요. 하나님 이제 당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난 후에 나도 내가 싫어서 나를 버렸사오니 이제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나와 당신을 기쁘게 하는 삶 만을 살고 싶사옵니다. 무언가 자신의 휘감기는 것 같은 삶의 상황속에서 벗어나고 온전해 질려고 몸부림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늘 이 이야기가 칼로 저민 살갓에 소금을 바르는 것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정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두개냐 아닙니다. 그렇게 되고자 하는 마음이 내 마음 구석에 있는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매우 약한 것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이 훨씬 크기 때문에 힘이 없는 마음 한 구석에서 이렇게 해라 라고 마음에 명할 때 마음 자신이 “싫어” 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영혼과 마음과 삶 사이에 질서가 깨진 상태가 회복이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하나님 사랑하시죠, 사업의 길도 열어 주시고 자녀의 복도 주시기도 하고 이렇게 펼쳐지죠. 그런데 시편에 뭐라고 그려셨죠. “저희의 구하는 것은 주셨으나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하는 일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 느껴지는데 내 영혼속에 하나님이 그 부드러운 숨결로 함께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을 안해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이 세상에서 버려진 것처럼 하나님께 버려진 것이 느껴진 것입니다. 이때 나타나는 마음의 현상이 하나님께 대한 깊은 낮설음 하나님과의 무한해 보이는 것은 거리감 입니다. 한없이 멀게 느껴 집니다. 내가 하는 일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보여요.. 그것을 보고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지 않으셨구나 라고 느끼는데 내 마음속에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영광은 느껴지지 않는것입니다. 질서가 깨뜨려졌어도 우리의 일반적인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완전히 살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삶이 여러 가지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이 싫어서 물질을 끊으시려고 해도 이 사람과 거래하는 거래처의 사장이 하나님을 잘 믿고 돈이 꼭 필요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입니다. 보디발이 하나님앞에 무엇이 의미있는 사람이였습니까? 그집이 흉년이 들고 집안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는 요셉에게 고난이 와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반적인 삶에 하나님의 복이 있는 것을 가지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공정한 판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고난도 슬픔도 이기면서 살아가지만 그 마음에 주님이 가득한 사람...
지하실 교회에서 지금까지 보배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컴컴한 교회당 구석에서 마음이 하나님 앞에 다 바쳐진 흐느낌의 기도, 눈물,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 이런 성도 들이 보배입니다. 일반섭리에서는 하나님의 복이 없는 것 같아도 주님을 다 가졌잖아요. 이 놀라운 지혜는 신자안에 죄가 남아 있기 때문에 마음의 온전한 질서를 유지 하는 것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꼭 필요하다는 아주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이제 이 마음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곳에서 하나님을 의사에 비유합니다. 의사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치료하실 때 강한 고통이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 마음 만들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치료하시는가? 내일 하겠습니다.
3.성령과 마음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음바 됨이“ (롬5:5)
우리의 육체를 향해서 마음이 이것을 집어라 들어라 명령을 하면 명령과 실행사이에 구분이 없을 정도로 금새 실행을 하는데 마음은 육체와 다른데도 잘 순종을 하는데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을 하면 듣지를 않는다는 것이죠.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이 마음을 향해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 하시니까 순종을 해라 라고 지시를 해도 마음은 듣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마음은 큰 고통과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하고자 하는데 또 그 하고자 하는 마음에 순종하지 않는 또 다른 마음이 있어서 우리 안에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사도가 이야기 했던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을 육체를 거스린다 하는 것과 같고 그 훌륭한 사도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리요” 하고 탄식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였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이죠. 이러한 현상이 내 마음안에서 일어나고 있는것.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무엇인가 마음먹은 것을 마음에게 명령할 때 마다 마음이 거의 순종을 하지 않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이 마음이 온전해진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이미 욕망과 시기심 호기심 질투 죄악 등으로 인해서 마음이 나뉘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자기 같은 물건이 있는데 하나는 손상당하지 않는 온전한 것이고 하나는 서너 조각이 손상되었는데 기가 막히게 맞추어 놓아서 겉으로 볼때는 아무 이상이 없는 두 항아리처럼 보인다고 칩시다. 나뉘어지지 않는 항아리는 힘을 주어서 어느쪽이든지 붙들고 번쩍 들면 들리든지 안들리든지 둘중하나이죠 그러나 겉으로 볼땐 똑같은 항아리인데 이미 금이 가서 간신히 붙어있는 것이면 힘을 주어서 어느 부분을 번쩍 들을때 손에 집힌 한 조각을 따라오지만 나머지 독은 땅에 붙어 있어서 따라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이미 벌써 마음이 나뉘어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영혼은 진리의 빛을 받으면서 순전한 하나됨을 상실하여 어두움 속에 쌓여있고 마음은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이 안에서 지성과 욕망과 의지 사이의 관계가 혼돈 되었있어요. 실제의 삶도 이제는 어떤 질서를 따라서 차례대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삶이 행동으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고 배설할 때에 계획을 세워서 배설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삶도 생각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조화를 이루고 아름다움을 형성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쏟아져 나온 하나님을 향한 악과 잘못된 것들은 즉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주어서 그들을 오염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무능이 이러한 처지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오늘 설교는 아주 중요한 설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이렇게 마음이 망가질 것을 이미 아셨기 때문에 그런 망가진 사람들을 치료하실 대책까지 세워놓으셨습니다. 그것을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성령님을 통하여 이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치료하신단 말이죠.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는 의사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몸에 질병이 있을 때에도 질병의 종류에 따라서 우리 몸에 번져가는 것이 다릅니다. 우리의 마음이 망가지는 심적인 질병은 우리의 외과적 상처와는 다른 방식으로 질병이 생겨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마치 암이 생기듯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자기도 몰랐던 것이 서서히 이 안에 자라서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급기야 자기를 죽음으로 데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망가지는 것도 똑같이 그렇게 시작된다는 것이죠. 무엇인가 잘못된 생각들이 착상이 되어서 그것이 자라면서 점점 우리의 마음안에 잉태되면서 우리의 마음을 망가뜨려요. 그것이 자기 속에서 자기의 선택을 따라 자기의 사랑을 받으면서 더 정확히 말하면 마음의 선택을 받아 마음의 사랑을 받으며 마음의 보호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에 그 마음이 그것을 직접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이 자기를 보기 위해서는 볼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보는 눈이 열리고 눈이 뜨여진다고 할지라도 보고자 하는 대상이 캄캄한 어두움속에 있으면 시력의 차이는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찬란하게 비치는 빛입니다. 그 빛은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비치는 빛입니다. 그 조명을 통해서 그 빛을 통해서 마치 병원에서 사진을 찍듯이 자기는 아직까지도 고통을 느끼지 못했지만은 자기 안에 이런 잘못된 것들 망가진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고장이 나지 않으면 마음 자신의 말을 잘 듣습니다. 왜냐하면 한덩어리이니까요. 고장이 나게 되면은 마음이 어느 마음 하나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 저 마음이 각각 입을 열고 말을 합니다. 말하는 마음은 많은데 듣는 마음은 별로 없어요. 그래서 각자 노는 것입니다. 이런 혼란이 망가진 마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게될때 그때 비로소 깊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치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질병 치료는 개복을 하기 전까지는 통증을 못 느낄지 모르지만 우리의 마음을 고치는 하나님의 작용은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그렇다는 망가진 실정을 보여주는 순간부터 신자의 마음속에는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통이 너무 커서 육체의 손과 발이 잘려나가는 것이 오히려 덜 아플 정도로 그렇게 큰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통과 함께 두려움도 찾아 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바로 지금까지 자기 마음에서 사랑하고 붙들고 있던 것들과의 끊어짐에서 찾아온 고통이고 두려움은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무엇인가을 붙들어야 한다는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과 고통은 하나님의 치료가 시작되면서부터 아주 강하게 시작되기 때문에 때로는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마음이 잘못된 상태를 발견했으면서도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집착으로 말미암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치료하시도록 자기를 하나님 앞에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료가 시작이 되면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양심을 깊이 찌르시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이 잘못된 것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커다란 죄를 지은 인간인가를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고통은 고통이 없이 망가진 마음이 고쳐지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망가진 마음이 고쳐질때에는 그런 큰 고통을 통해서 고쳐지는 것이죠. 왜 하나님이 자비로우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하면 바로 이 망가진 마음을 고치는 과정을 통해서 영혼과 마음과 육체의 삶 사이에 그 단정하고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살아가지 않는 기쁨보다, 그후에 찾아오게 되는 그 질서를 회복하는 고통이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번 불에 많이 데어서 고통을 받아본 아이들이 불을 무서워 하게 되듯이 하나님이 어리석음에 빠지기 쉬운 당신의 자녀들을 그렇게 가르치기 위해서 망가진 마음이 고쳐질때에는 육체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깊은 고통을 격게 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런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 마음을 치료하시는 또 하나의 지혜는 그 고통을 통해서 그들을 복음으로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멀리 하게 만들어 주지만 그러나 죄를 없이 하지 못하고 버리게 하지도 못합니다. 율법은 죄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만들어 주지요. 그래서 깊은 고통속에서 아파하는데 그런 상태에서 자기를 건저 주실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가 있으니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깊은 고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게 되는 것이죠. 그 고통의 경험속에서 바로 자기가 자기의 마음이 망가지고 자기의 영안이 더럽혀지고 삶이 죄 가운데 떨어지게된 이 모든 잘못된 것 때문에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가슴속에서 전혀져 내려와서 시작은 나의 망가진 마음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진리의 칼 때문에 시작되는 고통이였는데 그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고통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의 아픔으로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그 고통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투영될 때 그 경험 속에서 이천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 경험,고통을 통해서 자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의 기운은 죽이는 능력이예요. 그 기운이 마음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거스리고 이러한 영혼의 질서를 깨뜨리면서 자기가 이세상의 임금인 것처럼 살았던 우리의 마음의 쓴 뿌리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어가면서 시차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빠르게 그리스도께서 그 죽음과 함께 부활하시는 영광스러운 기쁨이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신자의 심령 속에서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독특한 기독교만의 경험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잘난 철학 속에서도 이세상의 어떤 잘난 사상 속에서도 이런 경험은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한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 져서 참회할 때 무지하게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죠. 그 고통을 당장 집어 치우고 싶어요. 아니면 그대로 계속 붙들고 있고 싶어요. 그게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을 거스르는 논리잖아요. 인간은 고통을 싫어해요. 그런데 그 고통이 마음에 그것도 죽음의 고통이 밀려 오는데도 이상하게도 그 고통이 싫지가 않고 아주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그 비밀이 뭐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함께 이 마음을 고치시는 신자속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달콤한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우리의 마음을 고칠 때만 있는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살아갈 때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을 하다가 핍박이나 고난을 당해서 너무 괴로워 그런데 이상하게 남에게 주시 싫어.. 그런 경험입니다.
(찬양) 즐겨 고난 길 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그러니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위대한 곳이애요. 그 일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에 속한 것입니다. 그 영혼에 속한 것이 이 작은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치시면서 이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질서를 간절히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던 많은 생각들 그리고 그렇게 찢어진 마음으로 욕망과 충동을 따라서 살아갔던 그때마다 배설하듯이 기쁨을 느꼈던 자신의 수많은 삶들에 대해서 깊은 고통을 느끼며 아무리 많은 기쁨을 준다고 해도 이것 필요 없고 절제와 순종이 있는 밝은 진리의 빛에 영향을 받는 영혼과 하나가 된 마음 질서로운 자신의 삶 그 속에서 하나님 안에서 절재하고 그 하나님을 우러르면서 사는 그 단정한 삶과 질서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럴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고치지 못하도록 수많은 송사와 의심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고쳐지는 과정을 통해서도 또 다른 죄의 욕망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때에 필요한 것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마음에 있고 마음의 생명은 영혼에 있으며 하나님은 그 영혼의 생명이시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나서는 어디에서도 이 질서를 되찾을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나를 참된 안정과 행복으로 데려갈수 없다는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바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를 한번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망가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매순간 구원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구원의 계획대로 살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 바로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치료를 하시기 시작하는데 그 치료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 치료냐 하면은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치료애요. 그 성령의 치료의 방법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속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영혼이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지고 마음이 나뉘어져 있으면 이상하게 우리 안에 의지가 매우 약화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마음 그 자체가 철저히 악해요. 선한 어떤 가능성이 그 안에 없어요. 불신자 중에 선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은 그 사람 자신 안에 있는 성품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를 그렇게 하고 계신 중이애요.
신자는 이런 악한 의지를 중생에 의해서 하나님이 선한의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 수 있는 그런 의지로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 선한 의지가 가득차서 마음을 하나 된 상태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셔요. 첫 사랑의 때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악한 의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하나님을 향하고 살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마음에 꽉 차지 않고 자꾸 모자라게 마치 기름이 떨어져서 공간이 생기듯이 비는 것이애요. 그렇게 되면 이게 마음이 꽉 차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에게 명해도 그 마음이 아닌 것이 그 마음 안에 있어요. 그래서 또 그것이 마음이 되요.
그러니까 이상하게 자기가 자신의 마음에게 명령하는데 말을 안 듣는 것애요. 하나님이 우리 의지를 선하게 만들어 주셨지만 중생은 우리를 선하고 가능성 있는 마음 그 의지로 고쳐놓고 니네들끼리 내가 능력 주었으니까 잘 살아봐라 너는 이제 신품이니까 너 혼자서도 잘 할수 있을 거야 그것이 이 의지와 관련된 중생의 정의가 아니애요. 악한 의지를 중생을 통해 선한 의지로 바꾸어 놓으셨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그치시면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중생한 신자의 존재 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그런 생각이 들겠죠. 불신자의 영혼하고 무엇이 틀립니까? 틀리죠.
왜냐하면 불신자 속에는 이렇게 성령의 역사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역사고 자신의 죄에대해 깨닫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하는 이러한 반복적인 회심의 역사는 없다는 것이죠. 신자는 성령께서 이미 중생과 함께 그 안에 계세요. 그 안에서 성령님이 계속 은혜를 부어 주심으로써 그가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령님의 은혜를 받을 때 비로소 나뉘어지지 않도록 나누어 주신 그 상태를 유지할수 있고 그 속에서 영혼과 마음과 육체의 삶 사이에 질서를 집행해 나갈 수 있는 거죠. 신자의 중생한 마음, 의지라 할지라도 그것이 불신자의 그것과는 훨씬 다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느다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오히려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본래의 순일한 상태의 하나됨을 상실했다면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제일 먼저 원인이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겨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망가진 신자의 마음을 다시 고쳐서 참된 신자로 만드시는 분이 누구시냐 하면 성령님 이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 안에 하나님의 우주를 향한 무한한 계획이 인간의 이 마음 안에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 하나의 물건이 상관없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모든 것이 서로 연관을 가지고 창조하셔어요. 이것들이 서로 자연적으로 영적으로 서로 교통하시도록 창조하신 것이죠. 왜 그렇게 되었냐 하면 창세기 1장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죠 땅은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그 위를 운행하시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개별적인 물질과 사람의 육체를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무형의 이 재료의 덩어리를 창조하세요. 그게 2절이애요. 그것을 하나나님의 신, 성령이 운행하셨다고 했는데 운행한 것이 아니라 원래의 뜻은 꼭 싸고 있는 것이애요. 마치 우리들이 밀가루를 넣어놓고 위에다가 보자기를 덮어서 이불속에 넣는 것처럼 그렇게 푹 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이 성령님이 그 모든 것을 감싸고 계셨더라, 그러니까 이 모든 인간을 비롯한 창조의 만물들이 생겨나게 될 그재료 자체가 성령 안에 있었던 것이죠. 성령 안에서 그것들이 땅과 하늘과 바다와 나무와 꽃과 벌레와 물고기와 사람과 육식으로 지어서 창조되어 나온것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길바닥에 구르는 돌맹이 하나든지 아니면 거룩한 성도이든지 모두 그 고향이 성령안에서,,
우리도 고향이 같은 사람들은 타관에 모여서도 서로 연계를 맺잖아요. 그것이 동향사람들의 동호회잖아요. 그렇게 성령이 품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것은 성령과 관계를 맺게되고 성령안에서 태어난 모든 것들은 또한 그 안에서 성령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모두다 연결되어서 모든 것들이 자연속에 퍼진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켜서 만물의 연결 상호교통의 연결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중의 첫 번째가 자연적인 상호교통입니다. 위치를 가지고 서로 존재하는데 이것이 서로 위치와 작용이 함께 엮어져서 서로서로의 생존과 작용에 영향을 주는 거애요.
이상하게 낮에 안 물던 모기가 어수름해서 숲속에 들어가서 산책을 할려고 하면 정신없이 달려들어 포식을 하잖아요. 그 이유가 무엇때문이냐 하면 낮엔 산이 산소를 뿜어내요. 그런데 밤엔 이산화 탄소를 뿜어내는데, 이 모기들이 이산화 탄소를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모이는 거애요. 이렇게 다 관계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산에서 뿜어낸 산소를 인간이 마시기 때문에 사는 것이고 동물들이 토해낸 이산화 탄소는 숲에 광합성 작용에 도움을 주는 것이죠. 이런식으로 서로 다 연관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하나의 연관은 영적 연관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서로 영적임연결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사이에만 영적연결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적어도 삼중의 연결을 가져요. 가장 중심부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삼위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의 영적연결입니다. 바깥에 또하나의 원이 있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성도를 포함한 모든인간들과 함께 갖는 영적인 연결이애요. 그 바깥에는 이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을 비롯한 식물, 무생물과도 영적인 연결을 갖는 것이애요. 시간이 없어서 어떻게 무생물이 도덕적인 피조물은 인간들과 영적인 연결을 갖고 이 세계 운명에 동참하는지는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그러나 결론은 영적 연결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바깥으로 나아갈수록 영적인 연관은 확대될 뿐이지 진짜 영적연결의 그 핵심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도와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도, 성도와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 하나님과 연합이 가장 정수애요. 그것들이 바깥으로 퍼지면서 이것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발아래 구르는 돌맹이 하나도 인간과 영적인 연결을 갖는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그 돌맹이가 그돌맹이지만 그돌맹이가 그돌맹이가 아닙니다.
인간을 회복 시키시면서 그 성령의 만물을 회복시키시는 역사가 그 모든 무생물에게 까지 스며들어서 찬란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만드신 이유가 바로 이렇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이 모든 세계속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죠. 이것은 아주 굉장히 중요한 아주 커다란 종말론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창조하신 이세상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펼쳐서 우리 신자, 우리 인간 이 땅에 있는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속에 당신 자신을 스며들게 해서 그것들을 돌아오게 해서 하나님자신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그래서 하나님이 만물을 사랑하시지만 결국은 만물 속에 자기를 나타내셔서 하나님자신을 사랑하게 하시는 이 위대한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세계는 없어지지 않아요. 질이 변할 뿐이지 시간도 사라지지 않아요. 왜 하나님 자신이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신을 펼쳐서 우리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 속에 자시를 펼쳐서 당신의 신성을 흘려보내도 흘려 보낼것이 모두 떨어져서 더 이상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이 흘러나오지 않는 그런 시대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우리 인간들과 우리 신자들과 우리 사람들과 종말적으로는 이세상의 모든 피조물 속에 당신 자신의 영광을 가득하게 흘려보내는 위대한 역사를 할때에 인간을 그 전달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지금한 이야기가 조금 철학적이고 어려워서 이해 가지 않으면 다 지워 버리고 이 예화 하나만 기억하면 돼요.
내가 예수 믿었는데 은혜도 못 받고 마음은 다 나뉘어 져서 아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어요. 그때에는 내 주위에 나로 말미암아서 어떠한 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요. 식구들은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회사에서는 나를 보면서 예수 믿을 맛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변화를 받아요.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고쳐지면서 영혼에는 찬란한 진리로 말미암은 순전함이 회복되고 마음은 가지런한 정돈된 질서를 가지게 되고 그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모아지게 되요. 그때에 그 사람은 반드시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진리의 빛을 받는 영혼은 하나의 마음이 되는데 초점이 없이 하나의 마음이 될 수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 초점이 하나님 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초점이 모아져서 하나가 되는데 그 하나는 뭐냐하면 마음의 하나이고 마음을 하나로 묶는 것은 사랑아니면 미움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그 마음이 반일하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내가 대면하고 있는 내 가족들에게 나의 마음과 영혼의 이런한 상태가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내가 그에게 무엇을 해주지 않아도 나의 이 실존 자체가 그에게 미치는 영향이애요. 그 영향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내 가족들에게 펼치시는 영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 가족속에 흘러 들어간 이것의 정체가 무엇이냐면 사랑와 생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사랑이셨죠. 그리고 삼위 하나님만 계셨을 그때에 하나님은 사랑이셨어요. 그하나님이 생명이셨어요. 그 증거가 뭐냐하면 바로 그분에게서 수많은 생명들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죽어라고 생명의 근원을 찾아볼려고 해도 발견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현미경으로 관측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그 생명의 원인이시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생명을 산출하시는 분이세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써 생명을 산출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사랑 속에서 생명을 산출해 내는 것입니다. 일개의 벌래도 암수가 있어서 짝짓기를 하고 그런 사랑의 느낌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창출해 내는 것이죠. 모든 것들이 인간은 그것을 훨씬 더 잘 보여주지요. 인격대 인격으로 깊이 사랑해서 결혼해서 몸이 하나 되어서 뜨겁게 사랑해요. 생명을 잉태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사랑의 교통속에서 생명이 잉태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몸속에 들어가게 하셔서 완벽한 교통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남자의 몸이나 여자의 몸 어디를 파놓아도 그 안에는 생명이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 지면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라만상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삼위 일체의 원리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내가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차게 되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생명을 쏟아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은 생명은 반드시 살아있는 존재이든 죽어있는 존재이든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선교의 역사 어두운 동포의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전도의 역사 구령의 위대한 역사가 어떻게 펼쳐졌는지 보세요. 무역회사가 선교의 역사 이룬 것이 아니애요.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끓어 오르는 그 생명이 선교의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 영향을 미친것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에게만 오셨는데 내가 변화되어서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알게 하니까 이번엔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내 가족들 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또 이웃속으로 이웃속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2년전에 제가 교회와 하나님이 사랑을 설교하면서 선교가 무엇이냐? 하나님 사랑의 확장이다라고 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하나님이 자신을 확장해 가시는 모든 연결들이 무엇을 통해 이루어 지냐하면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계시죠.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요. 성자를 통해서 교회는 성자와 함께 연합되어 있어요. 우리 각신자가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에 대해서 제가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교리를 가르쳐 드렸죠. 신자 한사람 한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그것이 결국은 교회가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와 연합이애요. 그런 그리스도와 교회를 이렇게 연합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와 교회가 맞닿아서 연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애요. 이것을 연합되게 묶어주고 있는 교통이 성령님이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이 모든 세계가 창조 되었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 교회를 창조하신 것은 성령안에서 창조된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생겨나기 직전에 성령님이 오시잖아요. 창세기 1장에서는 세계의 물질이 성령에 의해 휘감겨 있을때에 탄생한 것처럼 교회는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이 감싸고 계시는 가운데 교회가 창조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모든 연합에는 이 성령님이 실제적으로 연결이 되어서 모든 신자와 신자. 신자와 인간, 인간과 이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로 연합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세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 성령님이 결속하셔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누립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리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께 모두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것을 원리적인 연합이라고 합니다. 끊어질수 없어요. 구원이 취소될수 없는 것처럼 확정적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이 연합이 너무가 아름다워서 주님이 내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안에 있는 것 같은 황홀함을 느껴요. 그런데 언제는 주님이 나와 연합하셨다는 교리는 내 속에 있는데 예수님은 하늘보다 더 먼곳에 계신 것 처럼느껴지고 나는 홀로 이 세상에 내동댕이 쳐진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신자들고 자주 자살에 충돌을 느끼는 것입니다. 20% 정도의 그리스도인이 자살의 충돌을 느낀다고 합니다. 답이 뭐냐고 자꾸 신문에서 그러는데 오늘 가르켜 드릴겠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 인데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를 구원하여 연합을 이루게 하셨는데도 그 연합을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그리스도께 떨어진 것 같은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의 유일한 해결책은 성령님의 은혜이지요. 오늘 여기에서 “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음바 됨이니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것이죠.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마음은 그렇게 우리의 영혼과 잇대어 계신 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통하여 외부의 세계를 향하여 우리 마음을 통해 당신 자신을 펼치십니다.
우리가 진리안에서의 맑고 깨끗한 영혼과 하나가 된 마음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되어 있을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 당신을 사랑과 생명을 끊임없이 내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 생명과 사랑이 없는 사람은 선교지에 가서도 선교를 못하지만 이생명과 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은 선교이지에 없어도 선교를 해요. 왜? 여기서 쏫아나는 생명과 사랑이 누군가에게 전달이 되고 누군가에 전달할 사람이 없으면 기도속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간 커다란 인생의 계획을 꿈꾸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좋은 마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인간의 위대함이 얼마나 커요. 이 세상에는 인간보다 더 큰 존재들이 많아요.
큰 산, 무게가 십 톤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고래, 인간의 육체의 존재로는 비길수 없는 어마어마한 존재.. 그것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속에 전달하는 이 위대한 전달자의 기능을 못 가졌어요. 오직 인간만이 이 지상에서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보면서 눈물 흘려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을 비롯한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여러분과 같은 신자들 조차도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소중한 마음을 쓰레기처럼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었지만 주님이 찾아 오실수 없는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갈수는 없는 마음이 되게끔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행복합니까? 인생의 위기라구요 그 위기를 극복해 지면 행복해 질까요? 근심걱정이 많다구요 그것 해결되면 행복해 질까요?
행복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온 우주와 하늘에 꽉찬. 오후에도 이 숲을 보면서 감격을 해요. 풀포기 하나, 나뭇잎하나가 하나님의 영이 그곳에 스며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생각을 해봐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런 영광을 아무도 보지 못하고 우리 인간은 보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확장하여 펼치시는 하나니의 사랑과 생명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어야 해요. 내가 전달해준 그곳에서 죽었던 것이 살아나고 파괴되었던 것이 그 사람 때문에 찬란한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이 우주적인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운명은 마지막 하나님 자신의 운명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운명이 뭐애요?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서 당신이 피조물을을 통해 찬란한 무한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운명에 성도들은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 영혼을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그 영혼한 세계가 이 우주의 세계로 펼쳐 나오고 이 우주의 세계가 마음을 통해서 그 영혼의 세계로 교류하는 곳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 가운데 최고의 작품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그리고 사람속에서는 인간의 마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품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우리가 직접 볼수 없지만 마음은 우리가 느낄 수 있고 너무나 친숙하고 이 마음이 없이 우리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그 찬란한 영광을 위해서 오늘 피었다 사라지는 들풀과 같은 존재들이 고개를 들어서 영혼을 보게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같은 이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사랑하는 나의 성도들이여. 주님이 여러분이 가르쳐준. 이 찬란하고 위대한 기독교 신앙을
이 세상에 욕망에 쌓여 땅에 것에 얼굴을 파 묻고 사는 그러한 미련한 삶을 통해서 이 아름다운 신앙을 쓰레기처럼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마당에 들어설때 마다 가슴아픈 것은 그렇게 말씀을 많은 깨달은 성도인데, 그렇게 은혜를 많은 받은 그런 성도인데 다잊어 버리고 영혼은 어두움이 가득하고 마음은 다 나뉘어 져서 온전함이 없고 그 속에서 욕망과 미움 불신 이런것들이 끊임없이 충돌질 하며 자기도 왜 사는지 모르는 비척거리는 삶의 괴적들을 그리면서 살아요.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문제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고쳐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만약에 내 마음 잘못되었어.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마음 고쳐야되 고쳐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하나님이 날 데려 가시지 이 마음으로는 내가 이 세상을 살수 없어. 이렇게 눈물 흘리는 마음이 생겼다면 그건 더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하신 사람들을 시작하신 사람들을 하나님이 끝까지 그것을 성취해 주시지 않을리가 있겠어요.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할께요. 다른 아무것에 매달려도 여러분의 인생의 꼬인 문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결되도 그것은 궁극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는 우리의 마음의 제사 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하나님 내 마음을 고쳐주시옵소서.
나는 아무리 내 마음에게 명령해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을 고쳐주시고 깨끗게 만드셔서 주님이 차지하시고 내 영혼도 진리의 빛으로 순결하게 하셔서 주님이 홀로 차지해 주시옵소서.
그러한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며 믿음으로 나 자신도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주님의 은혜 많이 우리의 마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성령의 사랑만이
오랜 세월동안 숙명처럼 망가진 채로 끌어 않고 살았기 때문에 망가진 삶을 살게 했던 내 마음을 고칠 수 있으리라는 굳센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모든 마음을 반드시 고쳐주실 것입니다.
4.사랑의 마음으로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이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부록입니다. 20장으로 끝나면 꼭 맞게끔 되어 있는데, 21장이 부록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록의 내용은 오직 한 가지 일을 기록하기 위한 부록입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주시는 그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이 요한복음 21장이 없다면 우리는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0장은 요한복음의 끝일뿐 아니라 동시에 복음서 4개의 끝입니다. 거기까지 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갔는데, 사도행전 1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사람이 어떻게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됐을까 하는 혼란이 생겨나는 거죠. 우리는 지도자가 되거나 하나님이 특별히 쓰시는 사람은 우리와는 매우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되기를 좋아하죠. 열두 제자가 있었는데 모두 도망갔는데 한 제자만 끝까지 도망가지를 않고 예수님을 따라왔어요.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채찍에 맞게 피 흘리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그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더라. 그렇게 한다면 우리와 그러한 사람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으니까 우리에게는 적용을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자들과 똑같이 실패한 이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해 주심으로써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될수 있었으니 베드로를 보고 교회를 지도하는 베드로를 보는 모든 사람들 마다 실패한 베드로를 기억하지 않고 그를 다시 회복시켜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요한복음 21장은 부록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보면 20장까지 달려온 모든 요한복음의 그 복음이 어떻게 실제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죄인들에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결론이고 이후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 복음과 함께 퍼져가는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는 바로 이 21장의 사건을 반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는 거죠. 사실 예수님이 이 베드로를 처음 만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부활하신 후 예수님이 3번째 나타나신 거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고기 잡은 것이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비난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까지 보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것은 봤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특별히 사명을 주신것도 없고 계속 같이 계셔서 이 마을 저 동네 복음을 전하러 다니신 것도 아니었고, 어디로 가시는지 말씀도 안하시고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시는데 뭘 할 일이 있겠어요. 그래서 고기를 잡으러 간거죠. 세 번째 나타나셨지만 베드로를 이렇게 정면으로 대면하신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것도 처음예수님을 만났던 때하고 비슷하지 않습니까? 결국은 베드로가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자기가 잘못한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오니까 예수님께서 벌써 불을 피워놓고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어요. 식사를 한 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어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들이라고 하는 것은 고기를 가르킬수도 있고, 또 사람을 가르킬 수도 있습니다. 어쨋든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실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하는 이름은 예수님이 버리라고 하신 이름이었죠. 이제는 더 이상 네 이름을 시몬이라고 하지 말고 베드로라고 하라 하셨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불러주셨을까요? 베드로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기 위한 공적인 이름이고, 요한의 아들 시몬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연약한 이 세상의 아버지의 아들이 이름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불러주신거죠. 다시 말해서 주님께 처음 부름을 받던 그래서 '주님이여 나를 떠나소서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바로 그때의 시몬으로서의 베드로를 불러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고백을 한다고 칩시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이나 우리의 사람됨, 우리의 부끄러운 일, 우리의 고통받는 처지,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 이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간구한다고 칩시다. 그런 고백이 있기 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아시는 분이시죠. 그래서 사람에게 나아갈 때에는 우리를 우리보다 좀더 낫게 보이기 위해서 단장하지만,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오히려 우리를 사실보다 낫게 보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을 다 내려놓고 그리고 있는모습 그대로 더하지도 않고 빼지도 않은 보태지도 않고, 감하지도 않은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요. 그래서 주님이 나를 향해 내리시는 그 모든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난 좋은 일과 나쁜 일, 이미 알려진 일과 알려지지 않은일, 나도 어찌할수 없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들, 이것을 하나님께 그대로 보여드리는 거죠. 그렇게 나아오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하실 말씀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예수님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경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다른 동려 사도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죽는때까지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호언 했습니다. 그걸 기억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지 않겠어요? '끝까지 나를 따른다더니 어디 갔었냐? 죽기까지 따른다더니 살아있네.' 그런데 그런 모든 질문을 뒤로 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 라고 물으면 요한은 드릴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배반했으니까요. 네가 나를 사랑하겠느냐?라고 물어도 대답을 할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도 그런 비슷한 질문을 하고 주님을 버렸으니까요. 예수님은 아주 단순하게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이렇게 물으셨던 거죠. 그랬더니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고백을 했어요. 이것이 요한의 아들 시몬이 예수님께 들었던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불순종하고 심지어는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아닌것들에 의해 지배되고 그래서 예전에 주님과 만났던 그 마음 안에서의 하나님의 성품과 우리 인간의 만남, 영원한 세계와 이땅의 세계속에 사는 나와의 만남, 영원 속으로의 그 무한과 우리 몸 밖의 이 무한한 우주와의 만남. 이러한 아주 소중한 자리, 거기를 통해서 인간의 구속과 온 창조 세계의 완성이 시작되는곳, 그것이 바로 그렇게 중요한 그 마음.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있는 상태,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중요한 바램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없는 온 우주를 차지하실때보다 죄인의 마음 그 하나를 차지하실 때 더 기뻐하시는거죠. 그리고 그 마음을 차지하심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이땅에 계셨더라면 사시고 싶었던 삶을 살게하시는거죠. 그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이예요. 그래서 온 세상이 사람으로 가득차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아닌 것으로 가득차 있던 마음이 하나님으로 꽉 차서 그래서 그 마음이 주님을 독점적으로 사랑하고 또 주님께 독점적으로 사랑을 받는 그런 마음이 되는것이 우리가 이땅에 살아있을때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서도 가장 절실하게 바라시는 그러한 상태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서를 통해 다시 당신과의 교제로 불러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의 그 어떤 하나님의 자녀도 예수님께 낙인찍힌 사람은 없어요.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기대하시고 기대하신 바대로 이 시간세계 속에서 살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고치시고 한 때는 잃어버렸던 사랑을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올때 그 사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고 그리고 무엇인가 나에게 도움을 주시는 증거를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은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그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는 상태에서도 우리의 일반적인 삶을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많은 증거들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마음이 하나님앞에 고쳐지기 전까지는 그런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셔도 한가지는 안주셔요. 그게 뭐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일, 우리의 사업, 우리의 육체, 우리의 계획, 이런 우리 밖에 있는 일이나 계획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것 말고 우리의 마음안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꽉 채우시는 그런 하나님의 안아주심. 그런 하나님의 깊은 친교,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어서 마치 이 세상에 (찬양)'주님과 같이 내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안주시는 거죠. 그래서 신자가 그 마음 안에서 자기의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이 아주 놀랍고 지밀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될 때 신자는 영혼의 참된 만족을 같이 잃어버리는 거죠. 아내가 집에서 남편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렇게 밖에서 이웃과 만날 때 무절제한 말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물질적인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비교의식을 갖게 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집에서 부모의 충분한 사랑을 못받는 아이들이 밖에 나가면 튀는거예요. 나쁜 의미에서 튀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그 지밀한 기쁨과 참된 만족을 잃어버릴때 그때 신자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많은 증거들을 바깥에서 찾고자해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기를 과시하고 예전에 받은 은혜들에대한 과도한 자랑,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영적인 우월감. 이런 걸로 자기를 과시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사랑으로 하나의 교제속으로 들어가는 이 신자의 참된 기쁨을 대신 할 수가 없어요. 그 기쁨을 무엇에다가 비교할수 있겠어요.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때문에 경험하는 그 놀라운 기쁨. 그분께 홀로 사랑을 받는 가득찬 유혈. 이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조금도 외롭지 않은 하나님과의 사랑, 그런것이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요. 생명까지 다 주셨어요. 아들은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희생하셨어요. 성령님의 소원은 그 아들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증거하시는거예요. 그러니 삼위 하나님이 얼마나 간절히 우리의 마음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관계가 되고싶어 하셨겠어요. 그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겁니다. (찬양)'주 예수 대문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들어 오시네' 굳게 닫아두니까 그런 사랑의 회복이 불가능해지는거예요. 그래서 일평생 우리가 살면서 주님을 크게 섬기고 피흘리기까지 희생하는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앞에 정직해 지는거예요. 이것이 오늘 문을 굳게 닫아걸고, 감추어두었던 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나도 이 마음을 고칠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내 마음을 고칠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간절히 진실하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겁니다. 그것이 필요한 겁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슴속에 당신이 참 사랑이시고 그리고 당신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것과는 비교될 수도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의 마음에 붙잡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그 어떠한 문제를 해결받는것 보다는 가장 시급한 문제예요. 그리고 주님은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또한 인간의 마음을 가장 잘 새롭게 하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새벽에 예수님과의 만남이 필요해요. 아무도 없는 제자들만 있는 이 고요한 새벽의 바닷가에서 거기를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킬 자리로 택하셨어요. 이 자리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 있는 자리예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이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나도 어찌할수 없는 이 마음을 고쳐주시고 그리고 다시한번 주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도록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를 고쳐주실수 있을 것입니다.
5.마음의 골방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5-6)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이 대목의 앞 부분에는 외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외식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그래서 자신이 기림을 받기 위하여 선한 일을 남에게 보이도록 행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아주 심각하게 질타하시면서 참된 신자의 영적 생활이 이 외식과 양립할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선하고 좋은 덕은 다른 사람에게 기림을 받는 것과 짝을 이루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죠. 그래서 창조의 목적을 향하는 인간 마음의 덕스러운 행동은 많은 사람들이 기리게 하고, 칭찬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계속 전파되게 하시고 또 악하고 부덕한 행동은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게 전달하셔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목적에 자기도 부합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기려주기를 원하시는 것은 그 선하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좋은 장점과 아름다운것을 주신 하나님을 높이고 기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하나님의 의도대로 된다면 사람들에게 있는 좋은 장점과 영혼의 아름다운 덕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 때문에 그것을 그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을 높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또 두려움을 어느정도 받는 것이 기림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받으셔야 할 영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그것을 스스로 누리고 좋아하는 것을 미워하셨던 것이죠. 그러니까 이 외식은 하나님을 향해 그 마음이 받쳐지지 않은 곳에 외식은 번성하게 되는 것이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 마음을 차지하는 곳에서는 이런 외식이 물리쳐지나니 이는 하나님에 의해 마음이 차지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의 교제가 가장 크고 달콤하기 때문에 다른것에 의해서 이것이 대신 되기를 원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 읽은 성경에 보니깐 예수님께서 '기도할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하나님께 빌라' 하고 되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중에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남이 나를 많이 칭찬해 줄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런 기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높여줄것이라고 하는 희망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이 우리중에 그렇게 많을까요? 그러므로 이 외식을 좀더 확장시켜서 생각해보면, 기도와 관련지어서 외식이 가지고 있는 위험은 마음의 나뉨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면서 다른 사람이 나의 기도하는 것을 보고 좋은 평판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 자체가 한 마음이 되지 못하도록 마음을 갈라놓는 것이고 이렇게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까지 기도의 마음이 쉽게 나뉘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을 잇대어 있지 못해 더러워진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그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입니다. 그의 마음이 기도와 함께 하나님앞에 온전히 쏟아질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열납된 사람입니다. 이 온 우주가운데 더 아름다운 장면이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밖의 끝없는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우리안에 끝없는 또 하나의 우주 무한한 영혼의 세계의 관여자인 우리 인간이 마음 안에서 만날 때 그래서 그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이 모두 쏟아질때 이 온 우주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채 살아왔던 죄를 깊이 깨닫고 이 세상에 분요하던 염려와 욕망과 호기심 때문에 나뉘어 졌던 자기의 마음을 온전히 모아 지존하신 하나님앞에 잘못 살아온 자신의 삶의 중앙에 나뉘어진 마음이 있음을 깨닫고 자기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뉘어진 마음을 주 앞에 쏟아놓아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큰 자비밖에 의지할 것이 없어서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는 그 성도의 녹아내린 마음보다 더 아름다운 다운것이 이 세상에 어디이 있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가 충만한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상적인 일을 할때 보다도 죄가 가득한 죄인이 하나님앞에 깨뜨려질때 그 삼위 하나님을 더 충만히 느낄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우리의 과거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초월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물같이 부어져서 아무 쓸모가 없는 더러운 인간을 향해 넘치는 하나님의 큰 자비를 경험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예외없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룬 일에 대해서 뽐내거나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좋은 장점을 자랑하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내 안에 헤아릴수 없이 많은 불결과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나를 미워하며 어떻게 하면 이 영혼의 묵은 때를 떨쳐버리고 지독하게 얽매여있는 이 세상의 끈끈이를 떨어버리고 자유롭게 나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를수 있을까? 그리고 마치 웅덩이에 빠진 짐승이 울면서 밖으로부터의 도움을 구하며 몸부림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자비도 도움을 호소할 그때 하나님의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행동이 있었고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은 가장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많이 느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누가 있었습니까? 사람의 평판이 우리의 기도에 영향을 미쳤습니까? 하루의 일과에 대한 조바심이 우리로하여금 기도의 불을 끄지 않을수 없도록 방해했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수 있는 이 예물이 우리의 마음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홀로 우리의 마음을 다 차지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실질적인 골방입니다. 그래서 그 골방은 우리의 마음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독점된 마음, 하나님에 의해서 홀로 차지된 마음.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 주님에 의해서 차지된 마음은 하나님을 홀로 차지하는 마음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수많은 언어들을 그분께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낙심할 만한 환경을 만날 때 우리에게 용기를,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릴것 같은 환경을 만날 때 믿음을, 이 세상에서 상처를 받은 마음에 위로를, 진리를 찾지못해 간구하는 마음에 지식의 빛을 더하여 주시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과 만나는 마음의 골방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얻을수 없는 모든 하늘에 속한 자원들을 그 골방 속에서 공급을 받습니다. 영적인 게으름은 육체의 부지런함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로는 매우 분주하나 마음은 게을러지고 영혼은 싫증에 빠지는 것이죠. 그래서 영혼이 하나님의 싫증으로 가득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만큼 자신과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에 마음이 분요하여 평정될 때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이 나뉘고 부산한 것이 일때문이고, 이 세상에서 어쩔수 없이 행하여야 하는 의무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더러운 때문이고, 그 영혼의 더러움은 진리의 빛 아래서 씻기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기도의 골방도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진리에 빛을 만나 그 진리를 기뻐하고 좋아하고 그 진리로 양식을 삼을때 마음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꽉 차게 되고 그렇게 마음이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될 때 그 골방은 누구도 침범할수 없는 아주 훌륭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장소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정말 마음안에 예전에 있던 골방이 여전히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받쳐진 기도의 향연이 올라가는 골방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잘 들리게 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수 있는 그 마음의 모든 감각은 오직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까닭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어두운 세상에 우리로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가장 중심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예요. 마치 흘러가는 샘물에는 아무 계획과 의식이 없어도 그 흘러가는 물결을 따라 온갖 수초가 생겨나고 물고기가 놀고 그리고 주변에는 생태계가 형성되듯이 우리의 마음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만나는 고요한 평강이 가득해서 그 사람이 흘러 넘치게 될 때 그 마음을 샘물삼아 흘러내리는 은혜의 강물은 우리의 정신을 바꾸어놓고 우리의 육체의 생각들을 고쳐 우리의 육신의 감각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것을 자신도 아름답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역하게 여기는 것을 자기도 역하게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러한 하나님과의 내적인 교제 안에서 우리의 순종의 삶은 흘러가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위하여 울지 못하는데 어떻게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울겠으며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탄식하겠습니까? 모두 위선입니다. 인간은 자기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만큼 자기 바깥에도 그러한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우리의 마음을 깊이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의 골방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내면의 골방은 또한 형식의 골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한번도 이러한 골방을 잃어본 적이 없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이러한 내면의 골방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디서든지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 기도하실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자신을 쏟는 무제한의 기도는 형식의 골방을 통해서 훌륭하게 지탱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여럿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장소 모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그러한 장소들이었습니다. 산, 광야, 한적한곳, 감람산, 강가, 이런 곳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의 기도의 골방이 무너졌다면 그러한 것들을 제건하기 위해서 기도의 시간과 장소를 확정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에 항상 기도를 하려고 하고, 정해진 장소에서 하나님앞에 마음을 드리려고 해서, 그것이 자신 속에 습관처럼 형성이 되어서 그 장소를 생각하면 어디서든지 하나님 앞에 무릎이 꿇어지고 그 장소앞에 나아가는 발걸음 속에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각별한 분리의 감정이 생겨나게 해야합니다.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없이는 흘려보낼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는다면 농부의 부지런한 손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많은 사업이 무슨 결실을 얻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의 분주함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며 그런 깊은 몸부림 그것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기도의 형식의 골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고 지밀한 기도를 하나님앞에 드릴수 없다면 오늘 '문을 닫고'라는 말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기도를 위한 마음의 골방에는 하나님이 우리 홀로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문이 열리고 많은 객스러운 것들이 함께 들어와 있고, 언제 들어와 있는지 그 골방에 거미줄과 벌레가 가득하다면 형식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만날 수 없는 기도의 골방입니다. 그래서 홀로 조용히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생명 그것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생명입니다. 홀로 조용히 있으며 하나님 만을 앙망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마음에 이 세상의 잡념들을 씻어내는 그런 홀로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예수님이 당신을 다 주셔서 우리에게 사시고 싶은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니 그 마음을 내게 달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들이는 우리는 '나의 마음을 당신께 드리나이다.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라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었습니다. 잠시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염려와 근심, 나뉘어지고 굳어진 마음 때문에 잃어버렸던 우리의 기도의 골방을 다시 찾고 그래서 그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 온전히 차지 되도록, 그래서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이 되도록 주님 앞에 매달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마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