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없는 은혜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창 32:10)
녹취자: 손미자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해야 한다. 그런 어떤 강박관념만으로 사실은 감사가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죠. 우리는 이 야곱을 보면서 그런 신앙의 평범한 진리들을 굉장히 깊게 깨닫게 됩니다. 이 32장이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 장면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야곱은 32장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기 직전까지 말하자면 인생을 살면서 그 고통과 고난, 그 쓰라린 눈물 골짜기를 많이 걸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그 이전까지는 엄마 품에 있으면서 그 치마폭에 있으면서 인생을 지냈는데 비로소 세상에 나가면서 얼마나세상이 맵고 짠지 톡톡히 그 모든 고난을 다 당하면서 세상이 얼마나 맵고 짠지를 철저히 경험하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들이 결국은 신앙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면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하게 된다. 라고 하는 그 평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을 뭐 인생을 다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야곱처럼 재미있는 인물도 없습니다. 그는 그 어머니 품 안에 자라면서 거의 신앙보다는 자기 머리를 의지하고, 자기 지혜를 의지하면서 살아간, 그런 오뚜기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에서는 약간덜빠진 것 같고, 사람이 좀 단세포적이고 그렇죠. 그런데 하여튼 이 야곱이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낮아지면서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 똑똑하고 잘났고, 그리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기의 꾀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을 철저하게 부수어서 마지막에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들이 지금 32장 이후에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32장에 나오는 고백도 사실은 이 야곱의 원숙한 신앙의 고백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이 32장을 본문으로 택한 이유는 뭐냐면 이전에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그래서 축복을 가로채고, 그러면서 나반의 집으로 도망가고, 밧단 아람에서 생활하고, 거기에서 짐승을 치면서 죽을 고생을 하고, 하면서 약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데 돌아오게 될 때 최초로 그 하나님 앞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고 비로소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와 그 직위를 감당할 수 없나이다. 라고 하는 자기 인식을 동반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32장을 오늘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결국은 외삼촌이 아주 악질이었죠. 그래서 자기가 이쪽 동네에 있을 때에는 이쪽 동네에서는 아버지도 자기보다 한 수 아래고, 형도 자기보다 한 수 아래고, 엄마도 그렇고 전부 다 다 자기 꾀에 놀아났어요. 온 식구들이. 그러니까 자기가 가장 잘났죠. 그러나 밧단아람에 가니까 거기 가니까 자기 가지고는 상대도 안 되는 고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자기 외삼촌이었습니다. 외삼촌이 그래도 조카가 왔으면 따뜻하게 대해줘야 되는데 따뜻하게 대해줄 때부터 그 속에 흑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이 야곱이라고 하는 이 조카의 혈육의 정보다는 노동력을 탐하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점점 세월이 흐르면서 동생을 좋아하니까. 그다음에 동생을 좋아한 것을 알고, “그래 그러면 내가 라헬을 너에게 주마” 그리고 결혼을 했는데 자고 일어나보니까 보기 싫은 레아였어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7년 동안을 일을 하고 받음 품삯이 라헬인데 자고 일어나보니까 라헬이 아니고 레아였잖아요. 7년을 이 야곱은 수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 왜 그래요?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일을 해도 보람이 있잖아요. 이것은 돈 보다도 더 중요하잖아요. 장가가는 일인데 그렇게 7년을 하고 나면 저 아리따운 여자가 내 아내가 된다. 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7년을 수일처럼 일하면서 아마 7년 동안 일하다가 “야, 너 그만둬 다른데 가”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진짜 라반의 눈에 들게 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7년이 차니까 결혼을 시켜줬습니다. 그런데 뭐 야곱은 그런 것도 확인을 안 했는지 뭐 결혼할 때 누구하고 하는지도 몰랐던가 봐요, 정신이 없었는지 뭐 고깔을 뒤집어 씌웠는지 하여튼 자고 일어나보니까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에요. 라헬이 아니고 눈도 나쁘고 매일 쳐다볼 때 이렇게 인상을 쓰고 쳐다보는 그 밥 맛 없는 레아였어요. 그래서 일어나서 씩씩 거리면서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나는 라헬이 좋았는데 왜 내 방에 레아를 집어넣었느냐?” 그러니까 외삼촌이 하는 말이 “우리 지방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예가 없다.” 왜 진즉 말하지 이제 말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결국 할 수 없이 뭐라고 하느냐면 일주일 후에 라헬도 너에게 주리니 그러니까 외상으로 줄 테니까 7년 동안 할부로 갚아라. 할 수 없이 이 라헬을 얻기 위해서 그 사은품을 끼어서 받았는데 그 사은품이 바로 레아였습니다. 7년은 그 원하지도 않는 사은품을 얻기 위해서 졸지에 7년을 더 봉사해서 14년 동안 털리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에는 돌아가려고 하는데 붙잡으면서 “야, 그러지 말고, 너 재산은 가지고 가야 될 것 아니냐?” 그래서 또 약조를 하고 그다음에 이제 양의 새끼를 낳으면 이제 주기로 하고, 그러면서 이제 얼룩, 얼룩 한 이야기도 나오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러다가 결국은 우생학적으로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도 하여튼 하나님께서 그 신풍나무 껍데기를 가지고 역사하셔서 그래서 엄청난 떼를 이루고 이제 건너오는 것입니다. 뒤에서 라반이 쫓아오다가 결국은 붙잡혔죠. 그래서 하나님이 잘 해결해주셔서 다시 라반하고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졸지에 다 탈취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니까 죽이려고 덤벼오다가 하나님께서 “너, 건드리면 가만히 안 놔둔다.” 주장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호하시는 것을 보잖아요. 뒤의 염려는 끝났어요. 그런데 뭐냐면 이제는 처음에는 뒤에도 염려고, 앞에도 염려였는데 뒤에는 라반이 쫓아오고, 앞에는 지금 누가 기다리고 있느냐면 이제 가나안으로 갈 수 밖에 없는데 칼을 갈고 에서가 기다린단 말입니다. 축복을 가로채고, 그래서 평생 동안 한을 품으면서 살아간 그 사람이 가슴에 칼을 품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놈의 녀석, 오기만 해봐라. 죽여 버리리라.” 그러니까 형제지간에도 무섭더라고요. 진짜 정말 무서워요. 끔찍합니다. 그 이익에 대해서, 재리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칼 같아요. 우리는 좀 그런 계산을 좀 넘어선 삶을 살아야 되는데 참 걱정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에서가 기다리는데 가만히 안 놔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건너갔는데 거기에서 머리를 쓰는 것이죠. 아, 어떻게 할 것이냐. 두 떼를 만들어서 한 떼를 먼저 가게하고, 한 떼는 뒤에 두고 자기는 맨 뒤에 가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빤하죠. 별 볼일 없는 사람들 앞에 세우고, 자기가 사랑하는 라헬과 그다음에 그 애들은 맨 뒤에 세우고, 치면 다음 떼를 가지고 도망가고, 그것도 치면 나만 도망가리라. 계산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에서에게 먼저 보냈어요. 에서에게 가서 부탁을 하라. 뭐라고? “당신 동생이 와 있는데 정말 지나간 일은 백배 사죄하겠으니 나를 받아주십시오. 정말 유감인데 지금 이제 정말 주의 종이 되다시피 해서 이렇게 비오니 용서하고 받아달라는 그런 메시지였겠죠. 그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다음에 소식은 좋은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400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벌써 뭐가 잘못 되어가는 것입니다. 오려면 혼자서 오면 된지 왜 400명이나 데리고 옵니까. 400명은 틀림없이 집에서 창칼을 쓰기 위해서 기른 사병들입니다. 그 400명을 데리고 올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동생이 좋으면 혼자 와서 얼싸 안으면 되는데 400명을 데리고 온다니까 아, 이제는 끝났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낙담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이 오늘 이 장면입니다. 그가 불렀던 하나님이 누구냐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는 것이죠. 이것이 벌써 신앙이 어느 단계로 들어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서 그렇게 축복을 가로챌 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기로 약속하셨으면 하나님이 주신다. 그런 신앙이 있었습니까. 그런 신앙이 없었습니다. 이삭도 알고, 그다음에 리브가도 알고, 야곱 자신도 알았을 것입니다. 무엇을? “네 태중에 두 아이가 있는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내가 큰 자는 미워하였고, 작은 자는 내가 사랑하였다. 그로 내가 네 씨가 되게 하리라. 그리고 내 약속을 그에게 물려주리라.” 이런 약속을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기다려야 되잖아요. 그러나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일을 친히 약속을 따라서 행해주시리라고 하는 믿음 보다는 내가 내 방법으로 그 약속을 쟁취하여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런 인간적인 계산이 깊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히브리서에 보면 야곱이 말하자면 장자의 축복을 받기를 원했던 것을 믿음으로 묘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장자 권을 갖고 싶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믿음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런 믿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좋은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렇게 바라는 믿음을 실천하는 그 삶에 있어서는 이 사람이 너무나 많은 잘못을 한 것입니다. 그 잘못은 사실 야곱만의 잘못이 아니라. 엄마도 잘못이고, 아빠도 다 잘못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태중에 두 아이가 있는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에서를 더 편애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신앙에 입각해서 장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관점에서 먼저 나온 장자가 더 우선한다. 라고 하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그 장자를 편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불신앙, 그다음에 리브가는 어때요?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으면 아마도 그 아버지가 아무리 장자를 편애할지라도, 심지어는 그 장자에게 축복을 해주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야곱으로 그 형의 섬김을 받게 하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주신 참된 유업을 큰 아들이 아니라. 작은 아들에게 물려주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혈통의 한 주춧돌이 되게 하실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되죠. 그런데 신앙의 수준이 다 낮고, 믿음으로 살지를 않으니까 누구도 그런 것들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삭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젊었을 때 뜨겁게 예수를 믿고 살다가 나이 들어서 마지막에는 분별력도 잃어버리고 다 잃어버려서 그렇게 분별력이 없고, 그래서 마지막에 인생을 불순종으로 마친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고, 신앙의 연조가 깊어 갈수록 신앙의 깊이가 더 해지고 더 분별력이 뛰어나지고, 판단력이 더욱 예리해지는 이러한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가야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래서 이제 결국은 야곱, 그 아버지도 그렇게 어머니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그런 불순종과 분별력이 없는 신앙생활에 대한 대가를 톡톡하게 지불하고, 그러면서 이제 이 시점에 오게 되었는데 이 야곱이 여기에 와서 하나님 앞에 지금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이름을 불렀던 것은 그와 맺은 언약이 곧 자기와 맺은 언약임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왜? 그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또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시기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전에는 하나님의 약속 같은 것은 관심이 없고, 어떻게 내 방법대로 살아가서 성공하느냐. 거기에 불타고 있었는데 이제는 혹독한 고생과 시련의 터널을 지나면서 인제 겸비해진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이제는 주님이 은혜를 베풀리라고 약속하셨는데 그 야속이 내 인생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겸비해진 단계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아무리 “감사합시다.” 그래도 겉으로는 끄덕끄덕 하고 뭐 그렇게 생각해도 그것은 머리에서만 움직이는 것이지. 정말 감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요? 내가 정말 내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고, 은혜라고 하는 것은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다. 라고 하는 이러한 자기 고백, 자기 자신이 그러한 자기 자신의 위치를 깊이 깨닫는 자각, 이런 것들이 없이는 도저히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리라. 하였나이다.” 그 얘기는 뭐냐면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지금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맞는 것 아닙니까? 그 얘기는 무슨 얘기입니까.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세요. 자신 만만합니다. 여러분, 여름철에 풀장에 가보면 깊은 풀부터 시작해서 뭐 요즘은 깊이 안 만들더군요. 사람들이 자꾸 빠져서 그러는지. 깊어봐야 이정도 밖에 안 되더라고요. 그다음에 가슴까지 내려오고, 그다음에 수영장 가면 우리 이슬이 한 애들이 놀 수 있도록 얄팍하게 물을 해 놓았습니다. 한 30센티 미터정도도 될까 말까 하는 정도 그러면 어때요. 그 물에서는 애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막 첨벙거리고 이리 쌩쌩 저리 쌩쌩 막 다녀요. 그러다가 물이 좀 깊어지면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게 빨리 달릴 수가 없습니다. 한번 궁금하면 수영장 가서 달리기 한번 해보세요. 안 달려집니다. 은혜가 깊어지면 이런 인간적인 자신, 인간적인 방역, 이런 것들이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 육이 사니까 그런 방역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방역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다 쓸데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멋있을지 모르지만 신앙생활에서는 별로 멋이 없습니다. 은혜가 깊어지고 나면 사람이 맥아리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십니까? 지금 당장 결정합시다.” 그러면 “기도해봅시다.” “이거, 이거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주님의 뜻이라면”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는 너무 힘이 없고 맥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어때요? 그 속에는 철저하게 내가 내 힘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박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로소 이 야곱이 이제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해요? 하나님이 내가 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면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라고 하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라반의 집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하지 않고 살아간 그 삶이 어땠습니까? 그가 투덜대면서 불평한 것이 뭐냐면 20년 동안을 내가 먹였는데 내 그 때 생활이 어느 정도냐? 잠이 와서 눈꺼풀이 내려오려고 하면 잠을 쫓고, 그렇게 지켰는데도 짐승이 와서 뜯어먹고, 뜯어먹으면 나는 또 내 품속에서 물어내고, 하면서 이런 고달픈 인생길을 나는 20년 가까이 걸어오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고, 자기의 재간과 자기의 방법과 자기의 수단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는 이 모든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 앞에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야곱을 많은 환란과 시련 속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셔야 오늘 비로소 내가 가서 형 대신 축복을 받으리라.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약속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약속이 그리워지는 것이죠. 그러면서 야곱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오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10절을 보세요.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자각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의 출발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만한 사람 치고 감사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감사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교만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믿죠. 그러나 오늘 야곱을 보세요.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와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야곱이라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이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겨먹기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겨우 이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느냐면 “나는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진리를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하나님이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은총을 베푸셨습니까. 물론 소떼나 양떼를 보면서 은총을 베푸신 것 같죠. 그러나 야곱보고 지난 20년 다시 한 번 살아볼래? 밧단 아람 다시 한 번 갈래? 그러면 아멘 했겠습니까? 노 멘 했겠습니까? 어떻겠습니까? 갔을 리가 없죠. 가서 그 죽어라고 재물은 지금 어느 정도 모으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속에서 인간 대접도 못 받고, 사기당하고, 뭐라고 했습니까? 품삯을 변개하기를 10번도 더하였노라. “얼마 줄게” 그러다가 또 일 열심히 하면 “아, 그것 취소” 이러는 것이죠. 취소하면 “나 못하겠다.” 그러면 또 “줄게” 이러면서 사기를 치기를 10번도 넘게 그렇게 말하자면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 그렇게 20여 년 동안의 세월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말하자면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무인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은혜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28장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기껏 하는 말이 “내 갈 길에 복을 주시고, 그리고 먹을 것을 주시고, 그리고 입을 옷을 주셔서 나를 평안하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그렇게 세 가지 해주시면 나도 세 가지를 하겠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삼고, 이곳을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겠습니다.” 완전히 바타재 입니다. 그러더니 어때요. 인생의 시련의 모진 고비를 넘기고 난 후에 겸비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하기를 “주의 종에게 베푸신” 그러니까 자기의 위치와 신분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 노예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자기의 인생은 하나님에게 관한 한은 자기의 인생은 자존심을 내세울 수 없는 생애다.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 앞에 말하기를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니.” 그 하나님이 이미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그 모든 사건들이 은총이었고, 은혜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그것은 내게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지금 소떼와 양떼가 엄청나게 많아졌는데 야곱의 눈에 지금 그것이 들어옵니까. 그것이 지금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죽느냐? 사느냐? 라는 문제, 경각에 달린 것입니다. 자기가 거기에서 쫓겨나서 어디 가서 살겠습니까. 그런 상황인데도 그는 말하기를 “종에게 베푸신 은총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여유롭고 아주 풍족한 환경이 감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주어진 환경을 어떠한 믿음으로 살아가느냐가 우리에게 감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믿음으로 살아가느냐. 그것이 우리에게 감사하게 하느냐? 아니면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하기를 그는 “베푸신 은총을 감당할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니까 돌이켜서 생각하니까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총, 그렇게 끊임없이 속이는 그 외삼촌으로부터 그 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대적의 위협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시고, 원수들의 추격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이 수많은 물질을 주신 것,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함께 진리를 받았습니다. 믿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라반의 집에서 그 고생을 하면서 20여 년을 살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제가 늘 추수 감사절 맞으면서 말했죠. 진짜 야곱은 스스로 28장에서 하나님과 만났을 때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그것에 비해서 비록 인생은 환난과 시련을 많이 겪으면서 고난 가운데를 지났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알게 되는 일들이 이 라반의 집에서의 그 고난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는 새롭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되고 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여러분이 야곱보다는 나아야 되지 않습니까. 오늘 뭐라고 합니까. “주님이 지나는 동안 내 인생에게 베푸신 그 하나님에 관해서 알게 해주신 그 모든 진리, 그것은 나에게 감당할 수 없이 귀한 것이었습니다.”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수준이 이제는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상당히 영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잖아요.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는 바로를 축복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무엇인지를 깨다는 것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내 나그네 길이 130년이오나, 인생이 결국은 그렇게 수많은 재물을 모았지만 그 인생의 길이 결국은 나그네 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 앞에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감당할 수 없사오니”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가치를 깊이 깨달아요. 수많은 떼를 이루게 되었나이다. 하나님께서 지난 1년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우리는 이번 주간에도 깊이 묵상해야 될 줄 아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할 기회가 있습니다. 12월 11일 날 우리 교회 창립 1주년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1년 동안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한없이 감사했고, 충만했습니다. 믿습니까? 여러분들 말했잖아요. 1월 둘째 주일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설교 다 듣고 나서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랬잖아요. 1월 달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래놓고, 지금 와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많은 것처럼 섭섭한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매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사옵니다. 주님 놔두십시오. 충분합니다. 다 감사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1년 동안도 주신 모든 은혜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믿습니까? 이런 고백을 하고나니까 드디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못 사는구나. 결단을 하면서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 앞에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한없이 감사하고, 주님을 기뻐하고 이런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