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2015년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2015년 10월 19일-23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10월 27일
목 차
1.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라(눅 14:27)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
2. 예수의 죽음을 짊어질 때(고후 4:10) 2015.10.20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8
3. 내 안에 예수 사심은(갈 2:20) 2015.10.21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2
4. 죽음에 넘겨질 때(고후 4:11) 2015.10.22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7
5.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심(빌 1:20) 2015.10.23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21
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1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라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녹취자 : 김세나
신앙을 갖고 나면 마땅히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관점에서 자신과 세계와 이웃을 나아가서는 자연세계를 생각하다가 그 관점을 하나님에게 옮기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인줄 알았고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이 세계와 나의 삶의 의미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니까 자신은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온 우주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모든 만물들을 각기 지정하신 질서로 돌아가게 하시는데 그 질서에 부합하면서 사는 것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인생을 보는 관점이 바뀌게 됩니다. 이 바뀐 관점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위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지 바뀐 관점을 계속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에너지들이 올바르게 사용될 수 없고 또한 설령 우리가 갖은 생각이 올바르다 할지라도 올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올바르게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가 되는 길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어떻게 보면 냉혹하다 할 정도로 아주 분명하게 제자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우리들이 보기에는 다소 극단적이어 보일 정도로 그렇게 분명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고 따라 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돌이켜서 그들을 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만일 부모, 자기의 처자, 형제 자매 나아가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향하여 기를 꺾고자 하신 것도 아니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그래도 당신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고 말씀이라도 더 들으려고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냉혹하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제자’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약성경에서 ‘마데테스’라고 하는 이 제자는 크게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고유한 열두 제자를 의미합니다. 특히 유다가 죽은 다음에 투표를 통해 뽑혔던 맛디아 까지도 모두 포함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충실히 따라다니던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건이 있으면 우루루 모이는 인파가 아니라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던, 생계를 제쳐두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70인의 전도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사실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은 대부분의 용례가 사도행전 이후 성령강림사건 이후에 발견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에 나오는 ‘제자’는 누구이겠습니까. 확정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열 두 제자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고,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던 그 사람들을 의미하던지,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할 텐데 저의 생각에는 아마 두 번째 부류의 제자들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어떤 등급을 나누는 것인가 라기 보다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의 뜻은 단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당신을 따라다니든 따라다니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당신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믿고 이해하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그러한 헌신된 사람들이 제자라고 예수님이 상정하시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보기에 그냥 처음부터 제자인 사람, 제자가 아닌 사람, 이런 사람들이 섞여 있는 공동체 일 수밖에 없는 것이 교회이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이 제자를 상정하셨을 때 예수님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려는 자들, 그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셨을 때 그 복음에 부합하는 그 어떤 기준에 합치하려고 하는 그러한 어떤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그런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종말에 가서야 우리가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된다고 보면 이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 결국 세상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이 마음에 그리고 계신 그러한 사람들이 제자라고 불려지는 것입니다.
로마시대의 문맥에서 생각해 보면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학문이든지 혹은 기술의 세계에서 보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 스승과 제자는 함께 멍에를 매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그 멍에가 원래 소가 밭을 갈 때 등 위에 짊어지는 나무를 가리킵니다. 그것을 가지고 열심히 밭을 갑니다. 그 소 한 마리가 품으로 계산하면 장정 9명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마리의 소가 해냅니다. 인류 역사상 우경법이라고 해서 소가 밭을 갈게 되면서부터 폭발적인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멍에를 매는데 소를 두 겨레씩 함께 매달면 소가 덜 힘들고 빠를 것입니다. 그것이 멍에를 함께 맨다는 의미입니다. 이 제자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마음에 들게 헌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공유하며 그와 함께 운명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서 그와 함께 그가 당하는 것, 그가 가지고 있는 꿈, 그가 당하는 시련, 그가 맞이하는 기쁨, 보람, 모든 것들을 함께 참여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예수님이 제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그 말을 다른 말로 환치하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로 바꿔서 말하자면 ‘진실한 신자’, ‘참된 신자’입니다. 누가 참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참된 것은 종말에 가서 하나님이 우리의 성화를 완성시키고 영화롭게 하실 때에 참된 사람, 신자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상대적으로 참된 신자, 진실한 신자라고 할 때 끊임없이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의 모본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려고 분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우리들이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이미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이미 붙잡았다 함도 아니라.” 그러한 정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그것을 찾아가는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제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의 자격에 대해서 말하기를 첫째는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심지어 목숨까지도 미워해야지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26절 말씀은 제자의 조건의 소극적인 측면을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궁금해 합니다. ‘미워한다’는 뜻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여기에서 ‘미워한다.’는 말은 ‘hate’한다고 생각합니다. 악의를 품고 미워하는 것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 사람들의 독특한 표현법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나라 어법과 아주 비슷합니다. 아이가 둘이 있습니다. 애가 너무 예뻐 보입니다. 그래서 과자를 하나씩 주었습니다. 그런데 옆의 애가 더 착해 보입니다. 그래서 과자를 더 줬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아이가 자기 준 과자를 던지면서 “에이씨, 우리 엄마는 나만 미워해.” 똑같은 뜻이 여기에 나와 있는 의미입니다. ‘미워한다’는 뜻은 어떤 적개심을 가지고 공격적으로 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순서에서 밀려나서 그것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전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예전의 삶은 효성스러운 삶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당시 평범하고 덕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모를 너무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자신의 삶의 중심이 됩니다. 효자입니다. 여성들이 효자에게 시집가기를 원하겠습니까, 원하지 않겠습니까. 네. 사양합니다. 차라리 독신을 택합니까. 부모를 중심으로 모든 삶이 재편될 때 자기는 밀립니다. 앙탈을 부리고 까불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아버님이 싫어하신다고 말하면 끝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첫 번째 자리에 가고 싶어 합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처자를 사랑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시집가고 싶어 합니다. 이런 사람은 처자를 끔찍하게 사랑합니다. 처자가 부모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갈등을 일으킬 때 남자는 기꺼이 부모를 버리기라도 할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형제나 자매라고 하였습니다. 형제, 자매의 우애가 아주 탁월한 집안들이 있습니다.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가끔 있습니다. 형제의 우애가 아주 탁월하여 끈끈한 우애로 엮어진 집안들이 있습니다. 이런 집안에서는 며느리들이 뭔가 자리를 차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계속 노력을 해서 형제들을 상당히 이간질 시키지 않는한 자신의 입지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집에 시집가는 것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마지막에 자기 목숨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끝까지 자기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어떻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느냐고 말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날마다 그렇게 행하면서 살아갑니다. 결국 처음에 사랑의 문제를 들고 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너희들이 정말 나를 만나서 죄에 대해 회개하고 나를 믿었다면 예전과 똑같은 사랑의 질서를 가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변화 받은 사람들의 결정적인 특징은 사랑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깨달은 주님 중심으로 바뀝니다.
두 번째 말씀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적극적인 측면인데 그것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무엇이겠습니까. 신약성경 전체에서 ‘십자가’를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십자가를 몇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지신 고유한 십자가입니다. 누가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적용된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에서의 십자가가 바로 지금 두 번째 적용된 십자가입니다. 적용된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 같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어떤 수단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십자가는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절대적인 십자가, 또 하나는 상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절대적인 십자가는 인간이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지만 적어도 그 일과 관련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이 아닌데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그래서 짊어지게 된 희생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희생과 핍박, 그러한 것 아니겠습니까. 상대적인 십자가는 자신의 잘못도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경우처럼 다윗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 징계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우리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대부분 상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자신의 허물과 잘못이 섞여 있습니다. 이것도 자신이 믿음으로 잘 짊어지고 감당하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는 도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십자가를 해석하기를 상대적인 십자가, 절대적인 십자가로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로 묶으면서 저의 표현에 의하면 고유한 십자가가 아니라 적용된 십자가,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한 사람 만드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우리 인생에서의 모든 고난과 시련을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삼는 것은 신앙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의미에 대한 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주일에도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 형통하거나 혹은 시련을 당하고 순경이나 역경이나 모든 삶의 상황에 대해서 적합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찾으면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훈련하는 가운데 자신이 조금씩 조금씩 온전한 신자가 되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모두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사람을 바라보면 그에게는 십자가가 없는 것 같아도 견디기 어려운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도 분위기에 따라서 대화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아가는지 이야기 하면 옆의 사람도 옆의 사람도 자기의 삶에 대해서 자랑을 합니다. 한 사람이 낙심하고 처져서 자신이 얼마나 괴로운지 이야기 하면 모두 한숨이 나와서 전염되듯이 자신의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생각과 말을 하면서 인생을 사느냐 하는 것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그러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맺음말로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삶을 살면서 십자가화 되지 않은 삶을 품고 사는 것은 마음에 언제나 독을 만듭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받고 계속 괴로워하는데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의미만 찾으면 그것을 참고 이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과정이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하셨던 것처럼 매일 매일 십자가를 지는 과정은 매일 매일 죽는 과정이기 때문에 매일 매일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합니다. 저처럼 이렇게 간명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모두 경험하실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분노가 치솟으면서 욕이 쏟아져 나오면서 다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가족이고 뭐고 간에 말입니다. 그게 단지 고생과 고통으로만 남습니다. 인간성을 계속 파괴합니다. 그런데 신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래서 눈물로 기도하고 사랑으로 극복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렇게 자기가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살 때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그 십자가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 앞에 다시 예수의 생명이 자신 안에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을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어떻게 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노래방에서 놀다가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그냥 태만한 삶을 살아가면서 은혜를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인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삶의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앞에서 그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큰 뜻에 자신을 복종시킬 때 그 순간은 고통스럽지만 그 순간 자신이 죽을 때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안에 부어져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정신과 영혼의 힘이 생겨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에는,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라.”는 이 명령은 가혹한 명령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는 방법이란다고 하는 것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매일 매일 달게 지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묻고 그 속에서 자신이 이 십자가를 잘 짊으로써 한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품으며 살아가는 그 삶은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주위에 누군가 충만한 생명력으로, 내가 봐도 부러워할 정도로 충만한 생명의 힘으로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만 보면서 부러워하지 말고 그가 어떻게 자기 몫의 십자가를 매일 매일 짊어지고 살아가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고 그렇게 매일 매일 죽는 그 괴로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충만한 생명을 주셔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우라가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오늘 만약에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 다시 한 번 기도하십시오. 십자가가 내게 있는 것과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 사형언도 받으셨을 때 그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이 십자가를 져야 되겠다고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고생하는 것은 십자가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그 적용된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기쁨으로 그 속에서 좋으신 하나님이 이 십자가를 통해서 가장 좋은 것을 매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 십자가 없는 사람에게 절대로 주시지 않는 그들만이 아는 비밀스럽고 놀라운 생명, 부활의 능력을 주셔서 매일 매일 세상을 이기면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2 (2015.10.20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예수의 죽음을 짊어질 때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녹취자 : 김세나
사도바울은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후서가 신약성경의 예레미야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복음사역에서 겪은 많은 어려움들을 필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주신 성도의 행복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을 ‘보배’라고 표현하면서 그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질그릇은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우리 인간에게 주신 그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이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몸소 겪어온 인생의 시련을 여러 가지로 필역하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싸고 답답한 일을 만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이러한 많은 사태들을 겪으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놀랍게 우겨쌈을 당해도 쌓이지 않고, 사방으로 자기를 우겨 싸지만 자신의 마음까지도 우겨 쌈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답답한 일을 만나지만 낙심하지 않고 박해를 받았지만 아무도 돕는 자 없이 버려진 자처럼 되지 않고 물리적으로 핍박을 받아서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아주 죽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우리 속에 역사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그 능력을 역사하는 능력이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삶의 모든 사태들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을 사도가 오늘 필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어떤 방식으로 오는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보면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 우리 몸에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난해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질문을 답하면 이 구절들은 아주 신비한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우선 여기에서 말하는 예수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의 고난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좁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하지만, 조금 더 넓게 보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당하신 모든 수치와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실 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미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셨을 때 이미 그 죽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몸속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들이 마지막 정점에서 온전한 피를 흘려서 성취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졌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면서 당하신 그 모든 고난,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고난,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신 절명의 고난, 그 모든 것들 속에 스며든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능합니다. 두 가지로 가능합니다. 하나는 믿음과 다른 하나는 성령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당하신 그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게 되는데 성령께서 바로 이 믿음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예수의 고난을 우리가 짊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두 가지입니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게 당신 홀로 지신 고난이 있고,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거기에 접붙여진 모든 신자들이 함께 누리게 하신 고난이 있습니다. 두 번째 고난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하고 이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성도는 점차 점차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진실한 신자가 되어 갑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래전에 일본 학계에서 통계가 나왔습니다. 무통분만을 한 엄마들보다 산통을 모두 겪고 아이를 낳은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잘 돌본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쉬운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살면서 우겨 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리려 하는 시도들을 당하면서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을 뿐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근심과 걱정, 염려와 괴로움이 쌓이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고난을 당할 때 내가 이렇게 많은 고난을 당할 때 이 고난은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당하는 고난이구나,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도 이렇게 끊임없이 고난을 당하신 생애였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우셨다는 기록은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웃으실만한 일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의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것을 믿음을 통해서 자신에게 대입시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하고 있는 많은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당하였던 고난, 마지막에 그 고난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겪으셨던 그 끔찍한 고난의 근원을 묵상하면서 믿음으로 그 고난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사람을 미워하는 대신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셨듯이 또한 우리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면서 우리 주신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우리 속에 스며듭니다. 그러면 죽음이 우리 속에 스며든다고 하는 것은 수많은 생명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죽음의 기운이 몸속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생명의 기운이 방해를 받거나 소멸되어 갑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생명의 기운이 박탈되고 죽음이 이기게 됩니다. 한 인간의 생명이 끝나게 됩니다.
이렇게 파고들어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파고들어와서 우리에게 무슨 역할을 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육체 안에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어떤 생명이겠습니까. 죄의 생명입니다. 죄의 생명, 육욕의 생명. 그리고 자기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자아 중심적 생명입니다. 이러한 생명들이 우리 안에 강하게 역사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그 생명이 얼마나 질기게 뿌리잡고 있는가 보여줍니다. 그것은 죄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속에서 죄와 결합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그 생명을 공급하며 자기중심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무엇으로도 그것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죽어갑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마다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그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면서 죽어갑니다. 요새 암 치료법이 매우 발달하여 표적치료라고 있다고 합니다. 약을 주입하면 예전에는 특정 부위 세포를 모두 죽였는데 요즘은 표적을 찾아가 그 약물이 암세포와만 결합하면서 암세포를 죽입니다. 그러한 말하자면 이렇게 우겨 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만나고 핍박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많은 고통 속에서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할 때 그 2천 년 전의 예수를 죽였던 그 죽음의 기운이 영적으로 우리 속에 역사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옛 자아의 생명들을 표적으로 치료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 진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몸은 죄된 육체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경험되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그런 경험이 거의 없기도 하고 아주 풍부하게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경향을 현저히 죽여 아주 자유로운 마음과 심성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사도바울이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이러한 고백들은 예수의 죽음이 스며들어와 자아를 표적치료하듯이 그렇게 육에 속한 죄의 욕망을 온전히 죽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절대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없지만 그러나 거의 모든 것이 죽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끊임없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만나는 핍박과 환란을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삼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경건의 위대한 복음적 비밀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면 우리 예수님을 많이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 시련을 통해서 심지어 악한 자를 통해서도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고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이천년 전의 고난이 자기에게 현재화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국면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몸’은 키 몇 센치, 몸무게 얼마인 우리의 육신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육에 속한 우리의 본성을 광범위하게 포함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시고 운명하십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부활이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그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를 다시 살아나게 하신 그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죽고 완전히 복종하셨을 때 하나님이 다시 성결의 영으로 살리셨습니다. 로마서가 예수를 살리신 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성결의 영을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이 성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렇게 예수를 다시 살리신 영은 모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는, 깨끗하게 하는 영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똑같이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고난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육체 가운데 스며들어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고 사악한 욕망에 대해서 죽는 일들이 우리에게 충분히 일어났을 때 그때 거기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는 것만큼 하나님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죽는 것만큼 살아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것만큼 예수 부활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만약에 표적치료를 통해서 어느 특정 부위의 암세포가 죽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은 세포는 우리의 몸에서 소멸되고 탈각되어 버립니다. 그 자리에 정상적인 세포가 다시 자라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예수의 죽음이 스며 들어서 표적치료 하듯이 우리 안에 있는 사악한 욕망과 죄의 경향성을 죽인 후에 예수의 생명은 역사해서 우리를 모두 살아나게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육체가 죽음의 기운에 거의 삼켜서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하고 의욕을 품어도 우리의 몸이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도저히 우리의 몸으로 머리 속에 생각하는 것들을 실행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그는 그렇게 움직이고 일할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우리의 영혼도 우리의 영혼이 활발히 움직여 우리의 삶의 주인 노릇 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힘이 넘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육체를 주관하는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생명의 부족함 때문에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할 교회들을 깨뜨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어리석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때로는 안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야비하고 더러운 행동들을 그리스도인들이 하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생명대신 죽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명이 끊어지고 아무 동작을 못하는 것이 육체의 죽음입니다. 영혼의 죽음은 그런 식의 죽음이 아닙니다. 영혼의 죽음은 영혼이 고유한 선한 기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악에 내동댕이 쳐진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합니다. 악하게 그렇게 합니다. 그러한 생명을 죽이게 하기 위해 예수 죽음을 우리에게 짊어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예수의 생명이 이천년 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 우리 속에 확 밀려옵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게 하고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갖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부활을 나누는 위대한 경험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많은 일들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이것들을 나의 영적인 생명을 살리는데 사용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큰 선물이 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립니다만 우리의 인생의 과거를 돌아보면 뼈저리게 슬프고 고통 받고 어렵던 때가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고 행복하던 때보다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너무나 많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사람다운 인간이 되었다면 그것은 먹고 싶은 것 먹고 가고 싶은데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서가 아니라 역경과 어려움을 만나면서 그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몸부림 쳤던 그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형언할 수 없는 그러한 지혜로운 비밀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 각자의 삶에서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 속에서 매순간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당합니다. 이런 시련과 고난 속에서 주를 온전히 바라고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인가, 물러가 침륜에 빠진 사람이 될 것인가, 시험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서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사랑이 없는 사람을 사랑의 사람으로 믿음이 없는 사람을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무지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주님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을 주님의 품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붙드십니다. 기도합시다.
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3 (2015.10.21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내 안에 예수 사심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녹취자 : 김세나
이 갈라디아서는 사도바울이 매우 격정적으로 쓴 서신입니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 완전주의자들이 침투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도바울이 가르쳐준 교리를 버리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할례도 받고 율법을 지켜야지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로 이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사도바울이 격정적으로 1장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며 그 심지어 만약에 누군가가 그가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해 준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인사말도 없이 이 서신을 써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2장에 와서 사도바울이 자신의 개인적인 고백을 그들에게 하면서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맥락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그것이 중요한가 설명하면서 율법을 지키며 살려는 유대인 완전주의자들과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온 고백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으니 이는 하나님에게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읽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유명한 고백이 나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라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앞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표준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지 그것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동안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서 율법을 지키고 공로를 쌓아오며 자신이 하나님을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된다는 사상에 젖어온 사람에게는 어느 한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복음적 사실이 선뜻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은혜를 받았을 때에는 이 교리가 감격스레 느껴졌고 또 유대주의자들로서 자신이 가졌던 편견들을 깨뜨릴 수 있었겠지만 은혜가 사라지고난 다음에 그들은 아마도 또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끔 자신의 삶을 고치고 개혁하고 선을 행해야지만 구원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도바울을 대적하였던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인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에 견고하게 서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자신을 의롭게 함으로써 자신의 행위와 자신의 선행을 통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생활은 촉진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썼던 인간의 도덕적인 생활은 하나님 앞에 종교적인 보상을 받게 된다는 사상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사상을 따라서 철저하게 표준적인 유대인의 삶을 살던 이 사도바울을 회심시켜서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게 하셨고 결국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유대인들의 사도가 된 모든 사람들의 복음으로써 구원을 받는 교리의 표준적인 사도가 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단순한 교리의 논쟁을 말씀드리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그러면 인간의 본성에 깃들여 있는 모든 도덕적인 노력을 통해 공로를 쌓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성취해 보려고 하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여져 있는 공통적인 도덕적인 욕망,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의를 얻어 보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 이것들을 어떻게 이기고 정말 복음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오늘 2장 20절의 고백을 통해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는 유대완전주의자들이 어떻게 잘못된 것, 자신이 바로 오류에 빠져서 그러한 길을 걷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명시한 후에 자신 안에 예전과는 전혀 다른 어떤 삶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삶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것은 희랍어 성경에서 보면 못 박혔나니 이 표현은 현재완료입니다. ‘에스타우러마이.’ 희랍어에서 현재 완료는 예전에 그 사건이 일어난 어떤 때로부터 시작해서 지금 계속되고 있는 상태를 동시에 말해주는 화법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옛날에 못 박혔다. 이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지금은 어떠한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못 박힌 그 효과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화법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유대교 사상에 젖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납니다. 그 분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거기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까지 합니다. 거기에서 사도바울의 마음에 큰 충격을 준 사실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정말 부활하였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면 그러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고 또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오늘 다시 부활하여 자기 앞에 서 있다면 그 분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실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이 큰 혼란 속에 사도바울은 한 찬란한 빛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저주를 받은 것도 사실이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다시 살아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이겠습니까. 그렇게 사도바울이 다시 살아나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죽음의 의미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대속적인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더 큰 인정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설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사건이 사도바울의 인생 전체를 흔들어 놓고 그리고 그의 영혼을 일깨웠습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그것이 사도바울의 삶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또 다시 살아나셨다는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깨달은 것도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어마어마한 지성의 벼락을 맞는 것 같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자신의 마음 안에서 매일 매일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사도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구원에 대하여 갖은 생각을 매일 매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전의 생각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자기 자신이 율법의 요구대로 살 수 있다고 믿을 뿐 아니라 요구를 만족시키고 성취함으로써 점점 더 자신을 하나님이 받아들여 주실 만한 존재로 만들어 갈 수 있고 그것이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사상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사상을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이웃에 대해 비교의식을 갖게 만들고 여기에서 한없는 우월감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세워갔던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자기 자신이 열심히 노력을 해서 율법을 지키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을 때 문제는 그리스도가 설 영역이 없습니다. 왜 죄 없으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끔찍한 고난을 당하고 피 흘려 죽으셔야 했는지 왜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셔야 했고 그 죽음의 의미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울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는 거치는 돌이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예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과 그 분의 죽음이 자기의 죄를 인함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그는 그리스도 없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로 세울 수 있다고 하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 자신에 대한 신뢰를 매일 매일 십자가에서 못 박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끊임없이 매일 매일 죽어가는 것이 사도바울의 복음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자신을 십자가에서 영적으로 못 박을 때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이입시키셔서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실행되면서 그리스도 없이 넉넉히 살 수 있는 자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의를 의지하지 않고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려고 하는 자만한 자기, 이러한 것들을 매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이러므로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정욕,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지 않고 자기를 중심으로 삼아 살아가려 하는 삶,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기를 찾으며 주체성 있는 삶을 사는 대신에 끊임없이 육욕을 따라 살면서 주체를 잃어버린 채 세상에 의해서 그 정신에 따라 살려고 하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마다 매일 매일 죽는 것만큼 매일 매일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죽은 자신을 살리신다는 사실을 체험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교회의 머리가 되셨고 자신은 또한 영적인 교회로서 그 분께 접붙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러한 깊은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마치 시인처럼 고백합니다. 그것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그런 놀라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탁월한 영적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천상으로부터 그 충만한 생명의 은혜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을 뜨고 나면 그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은혜를 받고 예수에 대해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그 죽음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우리는 언제나 육체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예화) 제가 설교 시간에도 한두 번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조그마한 교회, 교인 30명 정도 출석하는 예배당에 출석하였습니다. 새벽기도가 그 당시에 4시 반이었습니다. 추운 교회에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변변치 않던 시절에 4시 반이면 추운 밤길을 걸어 교인들이 기도하려고 한 20명씩 나왔습니다. 새벽기도 나와서 방석을 하나씩 놓고 기도하는데 목사님께서 위에서 보니까 여 집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풀빵을 구워가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아주 믿음이 좋았습니다. 뚝 방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 살면서도 그렇게 새벽이면 교회 와서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삶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 시절 코트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돈 있는 사람들이나 오바 입고 다녔습니다. 그냥 몸배 바지에 털 스웨터 하나 입고 목도리 하나 두르고 그 추운 가운데 손이 다 터서 교회 나왔습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그 집사님이 계속 옆으로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예배드리지, 방석을 끌고 옆으로 이동하나 싶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찬송을 부르는데 대성통곡하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방석 밑에서 오천 원짜리 돈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오천 원은 굉장히 큰 돈이었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러 나왔는데 저쪽에 오천 원짜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저 하나면 며칠을 생활할 수 있겠다 생각하니까 방석을 끌고 계속 이동해서 오천 원짜리를 덮었습니다. 기도 끝나고 가져가려고 했는데 마침 부르는 찬송이 “우리 마음이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그러면서 대성통곡하면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다시 눈 뜨고 나면 육체 가운데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합니다. 이렇게 육체 가운데 삽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을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완전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삽니다. 그 육체 가운데 살면서 육체의 욕심과 여전히 그리스도 없이 자신을 주인 삼으며 살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고백합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아직 사는데 이것은 이제 다시 내가 이 육체 가운데서 그리스도 없이 나를 주인 삼은 삶을 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신 이 십자가의 위대한 사랑과 비밀이 어느 한순간 우리의 마음을 때리고 지나가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정말 이 십자가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심령 속에서 매일 매일 반복됨으로써 우리가 비로소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신앙생활의 위대한 비밀들이 우리 삶속에 실제가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생활 속에서 매일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매일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영적인 쇄신과 회복의 경험들이 우리에게 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지신 십자가를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주님 홀로 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우리가 적용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만나는 세상의 모든 어려움, 더 가깝게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면서 만나는 모든 고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신 고난입니다. 그러한 어려움과 시련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도 이 세상에 사실 때 고난을 당하시고 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는 죽음을 경험 하셨구나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그 많은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충분히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올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 분의 분신으로서 그 분의 교회를 위해 그 분의 몸의 일부로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여전히 남아있는 자기를 주인 삼아 살려고 하는 모든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 죄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신을 심판하고 처벌하고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태어난 새 본성을 따라 살려고 하는 치열한 갈망을 갖게 됩니다.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리에서 예수와 함께 다시 살도록 부활의 생명을 우리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경험이 다시 살아나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경험이 여러분 속에 새로워져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에 감춰진 은혜 4 (2015.10.22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죽음에 넘겨질 때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녹취자 : 김세나
10절을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 11절의 내용입니다.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여기에서 ‘살아있는 자’가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이 말은 이중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해석해 봅니다.
우선 여기에서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죽지 않고 육체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오는 죽음과 부활에 대한 경험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 육체 안에 있을 때에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간 다음, 마지막 날 우리의 육체가 영혼과 만나 영화롭게 되는 그 날에는 이렇게 죄에 대해서 깨어지고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다시 살아나는 일들이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죽음과 부활의 경험 자체가 구원을 완성해 가는 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미 구원이 완성된 사람, 혹은 성화가 완성된 죽음 이후의 경우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없기에 살았다는 의미는 육체로 살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두 번째는 또한 이것은 아마도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의미일 것으로 해석해 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살아있지 않고는 그가 비록 그리스도인 중에 아주 믿음이 뛰어났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를 예수 죽음에 넘겨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죽음에 넘겨준다고 하는 의미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작당해서 예수를 로마 군병들과 함께 체포하였습니다. 체포해서 종교제판을 먼저 받고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렇게 법정에까지 서서 재판을 받게 되셨을 때 그 때 예수님이 넘겨진 바 되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들이 비록 악을 행하여 예수님을 넘겨주고자 하였지만 그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셔서 그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죽음에 넘겨지셨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죽음에 넘겨진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그야말로 죽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육체로서는 그렇게 사형당한 것이 죽음에 넘겨지는 것이라면 영적으로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끊임없이 예수의 죽음에 넘겨진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아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해 죽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죽는 것이 육체가 아니라 영혼과 정신이기 때문에 멸절되어서 사라지는 육체의 죽음과 영의 죽음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석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우리의 정신과 영혼 안에는 그릇된 생명들이 살아있습니다. 그 그릇된 생명들이 아주 충만하게 살아있을 때 영혼은 영혼다운 올바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영혼이 죽는다고 하는 것, 정신이 죽는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잘못된 기능을 하고 있는 영혼의 상태가 그러한 것을 할 수 없도록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만큼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몸에 암 같은 것들이 발생한다고 해 보십시오. 그것들이 모여 암 덩어리가 됩니다. 그것도 우리의 몸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충만한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 몸 안으로 뻗어 나옵니다. 그것이 강하게 살면 살수록 우리의 몸이 잠식당합니다. 결국 잘못된 생명이 번성함으로써 올바른 생명이 잠식당해서 결국 어느 날 그 암 때문에 죽을 때 그 잘못된 생명이 옳은 생명을 완전히 파괴하고 죽습니다. 그리고는 그 잘못된 생명 자신도 함께 죽어갑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암 세포가 살 수 있겠습니까. 항상 올바른 생명에 그릇된 생명이 기생하면서 우리의 몸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암은 건강한 사람이 암에 걸리면 전이율이 굉장히 빠릅니다. 나이가 연로하고 힘이 없어 먹지 못하고 마르고 누워 자리를 보존하는 사람이 암에 걸리면 암이 별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질병이 몸이 왕성할 때 잘 번식하는 병이 있고 몸이 강하면 힘을 못 쓰는 병이 있습니다. 폐결핵 같은 경우는 후자에 속하는데 암은 전자에 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의 죽음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결국 여기에서 우리 살아있는 자라고 할 때 육체의 생명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가 주님의 생명이 충만해서 살아있는 그 사람, 우리가 그런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는 것입니다. 전도사역을 하고 말씀사역을 하면서 사도바울과 그 일행이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1장과 2장에 계속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육체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고 이제는 죽음에 이른 것 같은 다급한 환경에 내 몰리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그렇게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고 하였습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자기를 중심으로 살려고 했던 생각,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뜻을 좇아 행하려 하였던 그러한 성품들이 매일 매일 죽음에 넘겨져서 실제로 처형되고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것이 예수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그렇게 될 때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우선 육체에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우리들이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우리의 육체적인 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를 위해 잘 죽고 자기가 깨어질 때 예수님의 놀라운 생명이 우리의 육체에 나타납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의 생명은 영적이고 우리의 육체는 물질적인 것인데 어떻게 물질적인 것 안에 예수의 영적인 생명이 넘쳐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넘쳐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육체가 그저 겉보기에는 비슷한 육체입니다. 한 사람은 희망과 기쁨에 가득한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오늘 내일 자살하고 싶은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들이 의식을 통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보면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얼굴이 벌써 다릅니다. 더욱이 그런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과 그런 좌절과 실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육체로 살아가는 그 삶은 얼마나 그 열매가 다르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이것은 문자 그대로 육체를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항상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영과 육체, 영혼과 육체를 대비시킵니다. 그래서 영은 성령이고 육체는 인간의 죄성에 물든 내적인 세계입니다. 그래서 육체는 옛사람으로 대변되고 성령은 새 사람으로 대변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서 부여받은 새 성품을 다스리시는 주인은 성령님이시고 예수 믿기 전에 이미 가지고 있었던 옛 사람의 성품을 다스리는 것은 자기중심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마귀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라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여기에서 특별히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쓴 모든 서신에서 이 구도를 가지고 우리의 성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죽을 육체라고 말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살코기로 된 육신의 몸은 시간이 흐르면서 공간속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존재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옛 성품도 결국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성화에 이르지 못하지만 죽음과 함께 우리의 성화를 완성하실 때에 하나님이 그렇게 자아를 여전히 자기중심성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완전히 도말하시고 없애셔서 우리를 정말 새로운 거듭난 성품으로 우리를 완성하시는 때가옵니다. 이것이 신자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거룩함의 완성을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하십니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끊임없이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또한 예수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 넘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생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성경은 이 생명이 곧 사랑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충만한 생명은 본질적으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의 힘으로 자신이 예수의 생명을 누릴 뿐 아니라 또한 죽는 많은 사람들이 이 생명을 향유하도록 올바르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이 생명을 힘입어 올바르게 되도록 사랑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이 생명을 힘입어 사랑하게 되도록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인류가 서로를 진심으로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랑하는 사회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소원을 먼저 작은 공동체 속에 담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하여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공동체의 특징은 나눔과 사랑입니다. 나눔은 육체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물질과 혹은 자신의 노동으로 누군가를 돕고 그의 육체의 삶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렇게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한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용서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교회의 이상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마지막 날 완성될 교회의 모습은 죄와 어떠한 불완전한 것도 없으니까 그것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우리들이 예수를 믿었어도 여전히 불완전하고 우리 안에 죄와 은혜가 동시에 있고 이 세상도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도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게끔 방해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직까지는 마귀가 우리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된 평화롭고,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삶은 항상 제한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보냄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주셨지만 매일 매일 싸워서 이겨야지만 실제로 자신들의 영토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하시지만, 매일 매일 자신의 죄와 싸우고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죽음에 넘겨주고 또 교회 전체가 공동체로써 세상의 밀알로 살고 그 일을 위해서 자신들을 기꺼이 희생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주고 서로 베풀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끊임없는 자기 헌신과 희생,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진정한 공헌을 통해서 이 약속들을 얼마나 누리느냐가 결정됩니다.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교회 가는 길에 논둑에 엎드려져서 펑펑 울고 난 다음에 예수를 믿고 그 후에 많은 방황을 거쳐 21살에 회심을 하고 예수를 믿고 기이하게 느껴졌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불과 몇 달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다섯 달 정도, 여섯 달 정도까지는 천국을 오가는 것처럼 행복해 하다가 그 뒤에 느낀 것이 ‘아,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구나.’ 시간이 좀 더 지나가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야지만 안 믿은 것보다 행복하지 잘 못 믿으면 몰라서 안 믿는 때보다 더 불행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성화라는 이야기도 자라면서 설교 시간에 단 한마디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공부하면서 터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이미 베풀어 주신 것이지만 구원받은 우리로서 이 세상에서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는 정말 우리가 얼마나 매일 매일 죄에 대해서 죽어 예수께 넘겨지고 그 진실한 깨어짐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어떻게 충만히 역사 하시는가 그것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 거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있던 어느 교회입니다. 저의 책을 읽고 설교를 들었던 어느 목회자가 자신의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복음을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죽지 않은 옛 사람을 못 박으십시오.”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교회에 큰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그러더랍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나가는데 가방을 팽개치면서 그러더랍니다. 일주일 내내 세상에서 돈 벌려고 이민생활의 서러움에 시달리다가 주일이라도 쉬려고 왔는데 더 못살게 군다고 하면서 신경질을 내고 나가더니 며칠 있다가 장로님이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어디 가시려고 결심을 하셨어요?” “아니요, 저는 여기에서 목회할 거예요.” “목사님, 애들 생각도 하셔야죠.” 하고 나가더랍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계속 그렇게 하면 “아마 잘릴 걸.” 그런 뜻입니다. 서러운 마음을 나에게 토로하는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 참으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하되 잘 참으라. 그게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그래도 그 분들보다는 착하기 때문에 잘 듣기는 합니다. 들어서 뭐 하겠습니까. 어차피 그대로 하지 않을 수많은 내용들을 들은들 뭐 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적은 지식이라도 그 진리의 지식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진리가 요구하는 대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 충만한 생명은 언제나 죽음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잉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을 우리 육체에 충만하게 나타내실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예수를 위해 잘 죽는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심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녹취자 : 김세나
사도바울이 옥 속에 갇혀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옥 속에 갇혀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듣고 보니까 자기가 투옥된 것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자기가 예수 때문에 옥에 갇히고 난 다음에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감옥 속에서 들어도 기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사람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직 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앞뒤 문맥을 잘 살펴보면 기쁜 뜻으로 전하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순수한 뜻으로 전하는 사람들이고, 앞에 나오는 투기와 분쟁으로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자꾸 문제를 일으키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그 사람들의 순수성은 차이가 있겠지만 어떻게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하고 있으니 나는 그것 때문에 기뻐한다는 고백을 여기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그 모습을 사도바울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투옥으로 말미암아 사역자들이 은혜를 받고 어떤 사람들은 기쁜 뜻으로 어떤 사람은 시기와 분쟁 속에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뻐하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겠습니까. 저의 생각에는 복음의 전파가 사도바울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 보다는 이러한 의미인 것 같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시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사역하는 방식에 대해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쨌든 그리스도 예수가 전파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는 인정할 수 없지만 내가 그들이 복음을 끊임없이 전파하는 것들을 보면서 그것을 좋게 해석하고 기쁘게 생각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적합할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그 바로 앞부분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희는 나의 괴로움을 거하게 할 줄을 알고.” 그런 식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세움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하지만 그들은 나의 매임의 괴로움을 더하게 할줄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투므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이것을 보면 시기와 다툼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사도바울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그들의 그러한 복음 전하는 잘못된 태도는 감옥 속에 있는 사도바울의 마음에 큰 고통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해서 결국 전파되는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너희의 모든 허물을 묻어버리고 기뻐하고 기뻐하는 자세를 가지려고 하는데 이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안다는 고백입니다.
당연히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구원’은 우리들이 즉각적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그러한 구원을 가리키는 것 보다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너희들의 태도를 내가 좋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참고 예수의 사랑으로 용납하는 이 모든 자기 죽음, 자기 꺾음, 자기 부인의 과정을 통해서 내가 좀 더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성화의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읽은 20절의 고백이 바로 그 문맥에서 나옵니다.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해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한다.”는 고백입니다. 앞에 약간의 수식어구가 있지만 그것은 그렇게 20절 전체의 뜻을 좌우할 정도의 커다란 것은 아닙니다. 붙어있는 것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이것은 사도바울이 자신의 미래의 삶이 가지고 있는 소망과 기대를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현재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투명한 양심을 보여줍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는 뜻이라기보다 ‘내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그렇게 살고 싶다’, 혹은 ‘전파하는 복음 때문에 내가 괴롭힘을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내가 그것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이런 내용이 이 동사 속에 들어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정체를 20절 하반절에서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에서 ‘내 몸에서’라고 할 때 이중적인 화법입니다. 몸이 우리의 ‘소마’, 우리의 육체를 가진 몸을 의미합니다. 그 몸이 동시에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육체의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그 모든 삶의 방향을 결정해 주는 그의 마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지만 아직은 여전히 자신 안에 남아있는 육적인 성품,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라고 할 때 육체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몸은 단순한 살코기 만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끊임없는 방해로 작용하는 자신의 옛 성품을 함께 포함합니다. 거기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하려하나니, 그 소원이 얼마나 간절한지 “지금 살든지 죽든지 다시 말해서 내가 이 목표를 위해서 달려가는데 그 달려가는 길에 내가 살든지 혹은 죽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결국 그 마지막에 그리스도가 정말 존귀하게 되기 바라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직시하고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십니다. 그 첫 회심 때 하늘의 영광과 기쁨, 은혜의 이 모든 것들이 빛줄기처럼 쏟아져 들어오게 되고 그 안에서 우리들은 안식과 위루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만약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성화를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회심과 함께 밀려오는 감격와 큰 은혜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였더니 지금은 떠나고 없는 어느 교인이 자기는 그런 은혜의 감격이 6년 쯤 갔다고 하였습니다.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저 같은 경우도 그렇게 감격적으로 깊이 회심하고 그 기쁨과 말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한 감격이 한 6개월 정도 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삶이 막 엉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어떤 성화의 교리들을 몰라도 그냥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서 순종하면서 살면 그것 자체가 성화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제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훨씬 빨리 영적인 고갈이 오고 그러면서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구원받을 때 밀려오는 은혜와 감격, 이후에 밀려오는 공허함, 영적인 자원이 부족한 핍절함, 이 사이에서 적절한 설명을 찾는 것이 힘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러했습니다. 더 좋은 환경에서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저는 그러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그가 살아야 할 인생의 목표를 명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옛날처럼 이 세상 모든 삶을 접고 세상을 등진 채 산꼭대기에 있는 수도원으로 가거나 아니면 성을 쌓아놓고, 옛날 수도원들은 아예 문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내려오려면 저 성 꼭대기에서 죽을 타고 내려와야 했습니다. 한번 밖에 나갔다가 들어가는 것은 아주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고 산꼭대기 있는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 결국은 거기에서 수도생활하면서 죽어서 거기에서 유골을 남겨 놓았습니다. 수도원에 가면 수많은 해골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다행히 복음의 더 많은 빛이 들어오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목표로 살아야 할 것인가 가치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가치관은 결국 집약이 되기를 어떻게 집약되는가 하면 구원받은 후에도 계속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의 도움을 받으면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면서 두 가지, 하나는 많은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이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사람 앞에서 사람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될 때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늘 순종하며 충만한 기쁨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주 투철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유, 그것에 대한 자신의 헌신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제대로 된 종교는 아무 희생 없이도 유익을 얻고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우리들이 흔히 기독교에서 알고 있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엄청난 희생과 자기 고통을 요구합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금욕의 종교나 혹은 고행의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당신의 뜻을 알고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살아가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한 삶을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기도생활을 통해서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것을 현실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더욱 깊은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배워갑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그 모든 생애를 건 자신의 삶의 목표, 이것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선교의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것이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외적인 사업들이 번영하는 것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간절히 자신이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서 자기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 소망을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러한 삶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말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무슨 뜻이냐 하면, 왜냐하면 내게 사는 것이니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렇기 때문에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 여기에서 죽음은 어느 사람이 일생을 마치고 흙으로 돌아간 그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일 매일 아주 밝은 진리의 빛 앞에서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상반되었을 때 그 때 자기를 죽이고 혹은 자신을 꺾고 혹은 자기를 부인하는 끊임없는 죄죽임의 실천이 오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죽는다’라는 표현입니다. 죽는다는 표현은 무슨 뜻입니까. 생명을 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할 때 ‘나’라고 하는 자아는 긍정적인 자아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본성상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자 하는 사람, 본성상 끊임없이 주님을 대적하려고 하는 삶,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대항하고 하나님의 뜻을 꺾을지언정 자기는 살고자 하는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하는 이 모든 죄된 본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죽으면 죽을수록 내 안에 새로운 성품, 곧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은 살아나게 되고 결국 자신이 충분히 죽을 때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서 충만하게 사셔서 사람들이 자기를 볼 때마다 그리스도가 자신과 함께하는 그것을 보게 되고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사실은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이 옛 자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거듭난 새 자아의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순종하고 죄 짓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면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성품의 원리를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건강을 심각하게 잃게 된 것을 보면 물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황사가 온다든지 안 좋은 환경이 오기 때문에 그런 경우도 많이 있지만 오랫동안 자신이 견지했던 삶의 방식이 그 사람의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고 서고 걸어가는 자세, 음식을 먹는 식습관, 이런 많은 것들이 그 사람을 바꿔 놓습니다.
(예화) 언젠가 한번 신문을 보니까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습니다. 저도 참 좋아하는데 이 사람이 늘 명란젓을 좋아했습니다. 저도 따뜻한 밥에 비벼 먹으면 맛있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좋은 식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고기의 체내에 흡수된 여러 가지 안 좋은 것들이 사실은 알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좋아하는데 이 사람이 좋아한 음식이 고등어를 노릇노릇하게 구운 것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두 반찬을 늘 함께 먹었습니다. 암에 걸려 결국 역학을 추적해서 무슨 요인이 이런 암을 일으켰는가 보니까 결국 명란젓을 담그는데 사용하는 첨가되는 약품과 고기를 구울 때 노릇노릇해 질 때 나오는 성분이 따로 먹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두 개를 같이 먹으면서 이것이 결합하면서 강력한 발암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부들은 그런 것을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어떤 음식을 함께 먹으면 문제가 되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명란젓도 보면 불그스름한 것들은 전부다 아질산나트륨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냥 맛없이 희끄무레해 보이는 것, 조금만 가져다 놓으면 변질되어서 못 먹는다고 조심하라고 적혀 있는 것들이 믿을만한 것입니다. 아니면 직접 사다가 담궈 먹으면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추적해 가면 결국 그렇게 사람을 병들게 하는 요인이 있습니다. 결국 그것들을 내버려둔 채 건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심사숙고해서 찾으면 나오는 것처럼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역시 그렇게 우리의 옛 성품을 강화시키고 우리의 죄된 자아를 격려하는 그 무엇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길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하는 것을 매일 매일 고백하며 주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화) 언제도 설교 속에서 이야기 하였지만 한 7-8년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을 한분 불러서 생물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고 신앙적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포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우리 몸이 약 60조 개의 세포로 되어 있는데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살아납니다. 저녁때 삼겹살 먹고 자면 불과 몇 시간 사이인데 세포가 부지런히 마치 거품이 뽀글거리듯이 살아나서 아침에 만져보면 몸매가 달라져 있습니다. 어떻게, 잠깐 동안에 그렇게 잘, 충분히 됩니다. 온 몸의 세포가 3개월이면 다 바뀝니다. 결국 뇌 세포만 죽기만 하면 새로 생성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물학자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세포가 죽는데 두 종류의 죽음으로 죽습니다. 한 종류는 ‘네크로시스’라고 해서 세포가 괴멸되거나 충격을 받거나 그러면서 결국 생명이 스스로 끝나거나 수명을 다해서 죽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죽음이 있는 ‘아포토시스’라는 죽음이라고 해서 모릅니다. 과학자들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생물학적으로 아직 충분한 생명이 있는데 세포가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세포의 자살’이라고 합니다. 왜 자살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죽습니다. 아직 생명을 영위할 수 있는데 죽습니다. 죽으면서 ATP라고 하는 화학에너지를 냅니다. 그것이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세포를 분열시키고 돌리는 에너지가 됩니다. 우리로 말하면 공장을 돌리는 전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어느 세포가 죽음으로 전달되는 그 화학 에너지에 의해서 세포의 생명활동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자신도 또 다시 죽으면서 에너지는 다른 세포에게 전달되고 죽은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세포가 생겨납니다. 그것이 60조 개의 세포가 3개월이면 거의 다 갱신이 된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양의 세포가, 적어도 1/100 정도 되는, 60조 개라고 하면 6천억 개 정도의 세포가 죽고 다시 살고 하는 일들이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계속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꼬마전구로 비유를 한다면 60조 개의 꼬마전구가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데 그 불들이 깜빡깜빡 하는 것입니다. 켜지는 것은 생명이 살아나는 것이고 꺼지는 것은 종말을 고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계속 깜빡깜빡하면서 죽음이라는 작용이 그 생명 속에서 계속 일어날 때 그 몸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위에 가서는 서로 안 죽겠다고 하고 세포들이 죽지 않고 생명을 강력하게 영위합니다. 영양분이 필요하니까 다른 곳에 있는 양분을 막 빨아드립니다. 몸이 결국엔 여위게 됩니다. 필요 이상의 양분을 빨아들이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식을 합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죽지 않습니다. 그것이 의학적으로 암입니다. 결국 너무 안 죽으려는 충만한 생명의 덩어리에 의해서 몸 전체가 어느 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을 남겨놓고 나머지 것들의 불이 다 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꺼지고 난 뒤에는 자신도 결국 더 이상 생명을 공급할 곳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저는 그 설명을 들으면서 그때 받았던 충격은 굉장하였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생각났던 성경구절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것이 우리의 몸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나라도 5천만 명의 백성이 있으면 5천만 명의 백성이 모두 죽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나라도 그렇게 좋은 나라는 없습니다. 강압적으로 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따라 살고 장사하고 또한 속이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지위에 있거나 국가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가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 4명 낳아서 여섯 식구가 산다고 생각해 봅시다. 큰 애는 막 대학을 졸업해서 취직하여 돈을 버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 밑의 대학 다니고 군대 가고 등등 있습니다. 얘네들은 가정에 크게 관심이 있겠습니까. 우리 어렸을 때야 안 그랬지만 요즘 애들이 무슨 그런 관심이 있겠습니까. 자기 혼자 김진호의 노래에 나온 것처럼 현실에 던져져 이곳저곳에서 부딪히고 넘어지고 깨지면서 자기 인생을 버티어 내는 것만으로도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엄마의 행복, 아빠의 행복, 가정의 미래, 어느 녀석이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있다면 천연기념물감입니다. 그런 생각하면서 자기 인생의 무게감을 가지고 허덕거리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때로는 집에서 돈이라도 훔쳐다가 도망갈 생각을 하고 속을 썩입니다. 그런데도 엄마, 아빠 두 사람이 모두 끌어안고 스스로 자기 죽음의 기회를 삼고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하면 그 가정은 절대로 깨지지 않고 애들이 그렇게 현실에 부숴 지고 넘어지고 깨지더라도 어느 날 인생의 어떤 무게가 힘겹게 느껴지고 외로운 어느 날 가족사진 한 장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엄마, 아빠의 살아온 인생의 무게가 무엇인지 대부분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그런 것도 못 깨닫는 바보 같은 녀석이 있지만, 있은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 몸으로 낳았는데 말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래도 철이 들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가정을 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가족 속에서 희생하는 이가 없습니다. 자기가 살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그때 결국 와해되어 버립니다. 교회나 나라 모든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좋은 나라는 부자가 많이 사는 나라가 아니라 기꺼이 나라를 위해서 말하자면 아주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많은 나라, 그런 나라가 훌륭한 나라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고백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오늘 한번 사경회 마지막 날 새벽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 죽음이 없이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고 자기 깨어짐이 없이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사람들에게 부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도 자기를 낮추고 깨뜨려지는 사람, 그래서 주님의 은혜로 그 분의 마음에 합당하게 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충만하게 부어 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