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이들에게 은혜를 주심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적군과 아군이 팽팽히 맞서고 있을 때 공격을 알리는 신호로 어둔 밤하늘에 불붙인 화살 하나를 멀리 높이 쏘아 올립니다. 그 화살과 함께 모든 군인이 총 진격을 하게 되고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때 쏘아올린 화살을 가리켜서 효시라고 부릅니다.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나오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알리는 이방선교 역사의 효시였습니다. 바로 이방선교의 효시가 베드로를 사용하여서 이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알려지기는 사도 바울이 이방선교를 위해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문을 연 사람은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맏이였습니다.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하고 그들에게도 유대인과 똑같이 성령을 부으셔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를 삼으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오랜 동안 민족적인 편견을 깨고 이제 이방 선교를 위해서 뜻을 모으게 되었고 하나님이 바울 사도를 사용하셔서 본격적으로 이방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실 때 예루살렘 교회가 온 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서로 협력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II. 기도의 사람, 고넬료와 베드로
오늘 여기에 보면 이방 선교의 문을 열었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한복판에는 기도의 사람 고넬료와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A. 기도의 사람들을 사용하심
첫째로, 하나님이 기도의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 큰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베드로가 제 육시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가 유대인들에게는 기도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있는데 이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네 귀를 묶은 가운데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그 보자기가 열리자 거기에는 아주 불결하고 더러운 곤충 등이 가득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귀에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이것을 먹어라’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율법에 이런 것들은 먹지 못할 더러운 부정한 것들인데 내가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환상이 보이고 나서 환상은 사라졌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한사람이 왔습니다. 고낼료는 이탈리아 군대의 중대장쯤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집에 불러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고 고넬료 집안에 사경회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사경회가 이방선교의 역사를 이루는 종자 씨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전파 역사는 언제나 이렇게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그 이방인들,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이방인을 가슴에 품고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선택되어지므로 그 기도의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기도의 파문이 형성되고 그것을 통해서 선교의역사가 일어납니다. 위대한 선교는 항상 영혼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났지만 그들이 영혼을 품기 전에 먼저 가슴에 기도를 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자신에게 주신 은혜 안에서 그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둘러싸여있습니다. 직장에 가도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가족들이 불신 상태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에 늘 부담이 됩니다. 명절이면 만나는 우리의 친척이나 형제들도 불신자들이 있어서 항상 우리의 부족함을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복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심령에 깊이 박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복음의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심령에 이 파도가 밀려가는 것입니다. 이일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의 파동을 가져올 기도의 진원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잘 준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너무나 다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고 여섯 살 때부터 논문을 쓰기 시작했던 열아홉 살에는 대학의 교수가 된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천재를 사용하시는가 하면 혹은 무디와 같이 40분 설교를 하면 스물 네 번이나 어법이 틀리는 사람을 사용하셔서도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오웬 선생 같은 탁월한 신학자를 사용하셔서 인간들을 해부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세우시는가 하면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이 준비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을 사용하셔서 지금도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스펄전은 위대한 설교자였지만 그를 회심시킨 사람은 이름 없는 시골 교회의 목사님이셨습니다.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아주 건강한 요한 웨슬레 같은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하면 한번 설교하고 주저앉아서 한사발의 피를 토했던 브네이너드 같은 설교자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연령과 성별, 학식은 각각 다르지만 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파장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진원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었으니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복음화 되지 않았다면 과연 여러분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그 복음의 파동을 우리의 가족들에게 전달해주는 도구가 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사람들을 꼭지점처럼 이으셔서 복음의 역사,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B. 기도로 선교함
하나님께서 기도를 사용하셔서 선교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930년대에 미국의 무디 신학교에서 5명의 학생이 모여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아직까지도 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영혼들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들이 모두 그 지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부흥을 구했습니다. 5명이 모이던 기도모임은 점점 소문이 나고 모이는 사람마다 기도의 은혜에 불이 붙어서 300여 명의 학생들과 교수님들이 모여서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였습니다. 둥그렇게 모여서 기도하고 있는 그들 한가운데는 커다란 세계지도가 펴 있었고 학생들은 손가락으로 그 지도를 가리키며 바로 이곳에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 달라고 온 마음을 다하여 그 예배실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잠자던 유럽의 땅에 놀랍게도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부흥의 역사가 진행되는 그 모든 경로는 그들의 손가락이 지나가고 있는 방향과 일치하였습니다. 바다를 건너 낯선 땅을 위해 그들이 가보지도 않은 곳,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지만 그들이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고 그 기도 속에서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그 기도의 파장은 바다를 건너 대륙에까지 전달되었고 그 기도의 파장이 동토와 같이 얼어붙었던 땅에 잠자던 수많은 형식적인 교회를 일깨어서 복음의 사를 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1930년대에 있었던 유럽의 곳곳에서의 부흥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바로 복음의 역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전도지를 들고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해도 요지부동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전하지만 그 복음이 효력 있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온 마음이 한군데로 모아져서 기도의 파동이 그들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높은 기도의 파도가 교회에서 출렁거릴 때에 산처럼 높은 파도가 되어서 아파트를 대리고 다세대를 때리고 공장지대를 때리고 높은 사무실의 건물들을 두드려서 그들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일깨워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역사를 우리들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기도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모아 기도의 집이 되게 하시고 그들의 기도의 함성을 함께 묶어서 기도의 큰 파도를 형성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 기도의 파도가 높이 강력하게 일어나는 교회마다 그들에 의해서 이방의 땅에까지도 이 복음이 울려 퍼집니다. 동토와 같이 얼어붙었던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고 심령이 회개하고 죄를 책망하고 중생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어리석었던 모든 예전의 사악한 삶을 돌이켜 빛 되신 그리스도 예수, 진리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그 심령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들이 다시 기도에 동참하여 기도의 파문을 일으키는 그 하나님의 용사들이 되고 기도의 파문은 끝없이, 끝없이 밀려나갑니다. 한 시대를 향한 교회의 영향력은 결단코 그 교회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크기가 영향력에 비례하기 위해서는 한 조건이 필요한데 그 교회가 진리의 공동체가 되어서 온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의 파문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대들의 가정이 왜 복음화 되지 않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심령이 먼저 깨뜨려져서 거기에서 파도가 쳐야 합니다. 높은 파도, 웬만한 물결에 흔들리지 않는 가족들의 마음이라면 산 같은 기도의 파도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일어나 여러분들의 가족들을 때릴 때 심령들이 변화됩니다. 저희 교회에는 죽어도 예수 믿을 것 같지 않던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단시간에 기도해서 기적과 같은 회심의 역사가 가정에 일어난 집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간증들을 가진 지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영혼의 변화, 구원받지 못한 완악한 아버지의 회심을 위해 일주일 이주일 한 달씩 금식하며 철야하다가 기적과 같이 구원의 역사를 보게 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한 지체는 수년 동안 구원받지 못한 어머니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굳어져 돌과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입원하게 되었고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들을 기회도 없이 뇌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더니 잠간 깨어나게 되었고 그때 우리 교회 목사님이 가서 복음을 전하고 기쁨으로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온 가족들의 손을 잡으며 너희들은 예수를 잘 믿으라고 유언하고는 다시 뇌사상태로 들어갔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위한 기도의 파문은 반드시 죽어가는 사람을 깨어서 복음을 듣게 만든다는 우리들이 간증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한사람, 한사람이 기도의 진원지가 되어서 우리 심령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은 변화가 있고 그 변화로 우리들이 이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여 기도의 파문이 일어나서 그 파도에 부딪혀 우리의 가족들이 회심하고 우리의 이웃들이 뉘우치고 우리의 부모와 형제들 직장의 동료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서 구원의 복음으로 우리를 건져주셨고 우리를 아직까지도 세상에 살게 하십니다. 믿지 않는 많은 가족들에게 에워싸여 살게 하시고 예수 모르는 많은 이웃들에게 둘러싸여 매일 매일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이방인의 선교의 위대한 역사의 종자 씨가 되었던 이 고넬료 집안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일을 하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하나님께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 선교의 위대한 장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 고넬료의 한 집안의 사경회로서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사경회를 시작합니다. 사람 보기엔 이것은 아주 작은 사경회에 불과할 것입니다.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고 있고 우리의 이웃들도 수십만 수백만입니다. 그런데 이 추운 겨울 이렇게 작은 사람들이 모여서 드릴 이 사경회는 그야말로 아주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모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 지진과 같은 성령과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때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일어난 이 기도의 파장이 전 세계를 품습니다. 북녘 땅까지 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족을 품습니다. 가보지 못한 이방 땅의 영혼들까지 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기도의 파장이 산을 넘고 파도를 지나 바다를 건너서 그들에게까지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은혜를 받아야지만 우리의 이웃들 온 열방들에게까지 주님의 이 행복을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해에 우리들이 이런 놀라운 은혜 받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III. 은혜 받을 준비
그럼 이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여야 할까? 그 준비의 방식이 오늘 고넬료의 고백 속에 나와 있습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바 모든 것을 우리가 듣기 위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A. “주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경회는 사람들이 준비하고 인간이 계획을 세웁니다. 한 설교자에 의해서 사경회는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말씀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을 보내어 줄 것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경회가 열리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설교자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말씀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재주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 사경회는 하나님이 반드시 실망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설교자이지만 하나님은 이 사경회를 통해 여러분들이 마음을 하나님께 모으고 주님을 향하여 눈을 들고 주님께 전심으로 여러분들의 심령을 바치기를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염려와 근심으로 어두워진 마음은 우리의 시선을 이 땅을 향하게 합니다. 우리의 흐트러진 마음은 이 세상을 향한 시선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방법입니다.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깃들일 수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탐욕과 거짓된 욕망이 아니면 근심과 염려로 가득 채워서 도무지 영혼의 시선을 들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없도록 만듭니다.
베드로를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걸어갔습니다. 놀랍게도 자신이 물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자 그는 물결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눈을 들어 사람에게 오는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심지어는 설교자를 바라보지도 않고 오히려 단지 그를 도구로 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말씀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앙망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반드시 준비된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한 주간 동안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이 짧은 한 주간 동안 여러분들의 마음을 낮추십시오. 그리고 요동치는 환경을 바라보고 울고 웃는 어리석은 생활을 잠시 그치고 영혼의 시선을 들어 모든 것 위에 뛰어나고 만물을 통치하시는 주권을 가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모든 것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기대를 가지십시오. 그분은 선하시고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들을 깨닫게 하셔서 당신의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B. “당신에게 명하신 바”
여기서 당신은 베드로입니다. 고넬료도 진실하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열납되었도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깊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물질을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들이었는지 주님의 마음에 진심의 섬김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깨달음이 없었을까요? 말씀에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었을까요? 성경이 말합니다. 깨닫는 마음이 없이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이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많은 깨달음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대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물질로 헌신하고 마음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대신 심령을 하나님 앞에 드려 기도의 헌신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랬는데도 오늘 이 고넬료는 베드로를 불러 당신에게 명하신 바를 듣고 싶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주지 않으면 결코 자신은 깨달을 수없는 사람인 것처럼 베드로에게 부탁을 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의지가 아닙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달해주시는 방식이 무엇인지 그 원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은혜 안에 살고 기도의 세계가 열려 있을 때 성경을 읽으면 매일매일 깨달음을 주십니다. 또 하나님의 묵상할 때 책을 읽을 때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깨달음을 주셔서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여러분들의 삶을 고치게 하시고 위로받게 하시고 격려해 주시고 교훈하시고 때로는 책망해 주시고 바르게 해 주십니다. 그런 작용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일주일 동안 매일매일 하나님과 만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한 교회의 지체로 불러 세워진 한 목자를 통해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므로 공동체가 같은 마음을 품고 공동체적 일치 속에서 주님의 생각을 반영하는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읽으며 은혜를 받고 말씀을 연구하며 깨닫지만 그것은 여러분 개인의 것 일수 있지만 하나님은 목회자에게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통로를 통해 지금 이 교회를 향한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을 저수지처럼 가득 담은 목회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음성을 교회에 들려주십니다.
계시록에서 마지막에 되어 질 위대한 일들의 계시를 예수님께서 요한 사도에게 보여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여주는 이것을 기록하여 교회의 사자에게 보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일곱 교회의 사자는 일곱 교회의 목회자입니다. 왜 하나님이 네가 직접 가서 온 교인을 모아놓고 설교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아직 이 계시를 깨닫지 못한 목회자에게 전해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교회 목양의 원리의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 교회 전체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교회 사찰이나, 전도사나, 운전기사에게 구역장에게 알게 하지 않으시고 목자에게 알게 하셔서 더디면 더딘 대로 그것을 깨닫게 하셔서 당신의 마음을 품어 백성들에게 지체들에게 외치고 싶은 마음을 주십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그 말씀을 외칠 때에 많은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향하여 어떤 생각과 마음을 품었는지를 보이는 목회자를 통해 보게 하십니다. 그의 분노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 아파하시는 것을 보여 주시고 그의 기쁨을 통하여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즐거움을 나타내십니다. 그의 눈물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성도들이 느낄 수 있게 해 주셔서 함께 주님께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같은 시기에 같은 메시지를 들려주시므로 말미암아 공동체적 마음을 품게 하시고 이 공동체가 하나의 사람인 것처럼 주님이 기뻐하시는 반응을 보이며 공도체가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여러해 전에 어떤 사람이 잡지에 쓴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먹자골목 같은 음식 골목이 길게 뻗어져 있는 골목 어귀를 배가 불뚝 나오고 머리가 벗어지고 안경 낀 어떤 신자가 이빨을 쑤시며 꺽 하고 트림을 하고 걸어 나오는 그림이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음식점이 아니라 그 먹자골목 같은 굽어진 골목 양편에는 교회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교회는 각각 다른 간판이 걸려있었습니다. 찬양 전문교회, 원조 선교교회, 훈련 제일교회, 성경공부 전문교회, 설교 중심교회 수없는 간판이 있고 이 사람은 이 교회에서는 선교, 저 교회에서는 기도회, 저 교회에 가서는 구제, 십일조는 이쪽 교회, 감사헌금은 저쪽 교회, 본 교회는 주일헌금, 자신들의 교회에 기도회가 열리는데도 이 사람들은 자기 교회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남의 교회에 모여서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가 철야기도 전문교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선조들은 참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본 교회 정신이었습니다. 교회가 개 교회 이기주의에 빠지는 것과 본 교회 정신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개 교회 이기주의가 무엇이냐면 물질이든지 무엇이든지 저희들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 성장을 시기하고 교인들을 뺏으려고 하고 헐뜯고 이러는 것은 개 교회 이기주의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본 교회 정신을 가졌습니다. 자신들의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습니다. 모든 행사가 겹치면 항상 자신이 속한 교회에 우선권을 두고 거기에 마음을 실었습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신앙생활이라고 믿었습니다. 여기보다도 설교 잘하는 교회가 있어도 그 교회에 가서 주일예배 드리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정하면 그 교회가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목사님이 이 세상에서 유명하지 않아도 존경하고 자신의 교회가 돈 없고 약해도 그 교회 사랑하고 다른 교회가 가진 좋은 물건 못 가지고 있어도 그것 때문에 자신들의 교회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본 교회 정신에 충실했습니다. 이런 정신이 희석되어 가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인데 예배 전문교회로 가고 이 교회에서 마음을 모아 온 성도들의 기도하는 시간인데 기도 전문교회에 가고 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을 흩으러버립니다. 신앙생활이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찢겨짐과 나눔, 교회 공동체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는 모든 허공에 뜬 섬김들, 그의 신앙생활을 섬김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허하게 만들고 자신을 열심을 내고 자신을 애를 쓰지만 전체적인 틀에서 교회를 해롭게 하는 이런 일들을 거침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방 선교의 종자씨가 되었던 고넬료 집안의 사경회에서는 이 가정 자체가 하나의 교회였습니다. 말하기를 “당신에게 명한 바를 우리들이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에게 명한 바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죽을 때까지 의무는 여러분들의 부모를 위해서는 매일 기도하지 못해도 목자를 위해서는 매일 기도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의무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예배에 기대를 가지고 나온다면 하나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의 재주를 의지하는 것이므로 언젠가는 실망하고 넘어지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목회자를 모두 편애하여야 할 의무는 없지만 기도하여야 할 의무는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고 탐구하여서 저수지와 같이 목회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담기는 것이 여러분들이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18세기 미국의 설교자였던 에드워즈는 23년 동안 정든 교회를 떠나면서 고별설교 속에서 교인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대들이 목사를 위하여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며 그 말씀을 따라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도록, 그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모든 것을 돕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일주일 밖에 안 남았지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여러분들에게 전해줄 말씀을 새롭게 불러일으키시도록 그렇게 여러분들이 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내일 교회를 떠나서 한적한 곳으로 갑니다. 금요일 오후에 돌아와서 교회 일을 처리하고 밤에 여러분과 함께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난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지 안 하는지 다 압니다. 여러분들의 기도를 강력하게 느꼈던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그 중에 한번이 재작년 겨울 사경회 때였습니다. 사경회는 다가왔는데 그때도 교회 일이 폭주했습니다. 며칠 동안을 밤잠을 못 잘 정도로 일에 시달렸습니다. 마음을 괴롭히는 일들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는데 설교 준비를 하기 위해 성경을 펼치는 것이 양심에 걸렸습니다. 평소에 읽던 성경 본문을 펴고 먼저 교인들의 양식은 나중 문제이고 내 양식이나 먼저 찾자하고 말씀을 폈는데 펴자마자 부어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떠오르는 말씀을 메모했는데 아침 안 먹고 오후 2시까지 메모했는데 메모를 다 못했습니다. 결국은 대강만 적어놓고 배가 까불어져서 연필을 놓고 요기하고 산에 올랐습니다.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다시 밤늦게까지 하였는데 그것이 요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때 주신 말씀이 바로 “성화와 헌신”이라는 사경회 설교였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금요일에 돌아오면 내가 어땠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될 수 있으면 몇 교구가 기도 안 했는지 알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C. “듣고자 하여”
희랍어 단어의 άκούω 이고 히브리어의 동치어는 שְׁמַע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문맥에서 ‘듣는다’라는 이 말은 우리 한국말의 듣는다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저 녀석이 말을 안 들어’ 하는 이야기는 가는 귀를 먹었다든지 보청기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들리기는 들리는데 마음을 기울여서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듣고자 하여 모였습니다.’라는 것은 귀청소가 끝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이 당신이 말씀하시면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나이다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 제가 꼭 들어준다는 보장이야 못하지만 한번 당신 뜻을 말씀은 해 보십시오.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해 보시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순복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의 귀에 들립니다. 그 순복의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성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두 개의 예화를 들겠습니다. 한 번은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개척하기 전에 청년부에서 설교를 계속하는데 그중에 한 아이가 예배 시간마다 뚫어지게 쳐다보아서 이 친구가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펑펑 울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자매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 무슨 모임에서 모여서 주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거기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내가 싫더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싫었냐고 했더니 그것은 모르겠는데 말하는 것, 태도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자기가 역겹고 반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니까 반감을 표시할 수 없어서 항의 표시로 가운데 앉아서 노려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사모했으면 저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노려보기 시작했는데 눈동자도 피하지 않고 노려보리라 생각했는데 불과 몇 주 지나지 않아서 그 노려보는 눈빛을 타고 하나님의 말씀이 스며들었습니다.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자신 있게 말씀하는데 지성을 하나님께 모으지 않으면 어떤 영혼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지성을 하나님께 모으지 않고 일어난 변화는 그 현상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것은 커다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 꺼 놓고 10분만 시간을 주면 여러분들을 다 울릴 자신이 있습니다. 울면 뭐합니까? 여러분들에게 던지겠습니다. 교회 오래 나왔는데 왠지 나에게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회심이 왜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뭔지 알아보고 싶다고 하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내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일주일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시간에 일찍 나와 앞자리에 앉아서 눈도 깜빡 거리지 말고 나를 쳐다보세요. 지성을 집중하세요. 그러면 4주가 지나기 전에 반드시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도 변화를 못 받았다고 하면 내가 만나줄게요. 내가 일대일로 말씀을 전해주겠습니다.(포항에서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고 회심한 어떤 불신 가정주부 이야기) 먼 거리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은 모든 것을 극복합니다. 온 마음으로, 내적인 순종의 마음으로 말씀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D. “모든 것을”
제가 이사를 가면 항상 한 사람을 잘 사귀어 놓습니다. 동네 약사입니다. 지금은 약사들이 권한이 없고 병원에서 의사들이 지어주면 그것을 가지고 가서 사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약국에 가서 직접 약을 지었습니다. 저는 아프면 제일 먼저 약국을 가서 묻습니다. 아픈 곳을 이야기하고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속히 병이 나을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라고 합니다.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며칠 분을 지어드릴까요?” 이것을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 비상식적인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제가 며칠 먹으면 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알아서 해 주십시오. 소신껏 약을 지어주세요. 약 값에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선생님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지어주세요.”라고 합니다. 항상 이런 태도로 약국에 가니까 언제나 대우를 받습니다. (2년 전 교역자 수련회 가서 편도선으로 병원 치료받을 때 의사 말을 잘 들은 이야기) 우리 교회 의사분들을 만났는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의사를 불신하는 태도를 보이면 진료 카드에 표시를 하여 말썽이 안 나게 한다고 합니다. 바보 같은 행동인데 이런 행동을 동일하게 목회현장에서도 합니다. 목사님 요새는 제가 위로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런 책망의 말씀은 요즘 저에게는 맞지 않거든요. 이것은 마치 환자가 누워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적이나 인간적으로도 그러면 안 됩니다. 어느 약사의 고백입니다. 요즘 방송과 인터넷을 많이 하므로 환자가 와서 처방을 내려 약사에게 주문을 한다고 합니다. 전문가인 약사를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는 우리보다도 우리의 영혼의 의사이신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자세로 우리 자신을 낮추며 해야 합니다. 이 땅에 주님이 계셨을 때 아픈 사람들을 어떻게 섬기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픈 사람들이 주님 앞에 가서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을 앉혀 놓고 손가락질을 하며 자기가 왜 이 병에 걸리게 되었고 이 병명이 무엇이고 어떤 치료가 필요한지를 주님께 장황하게 설명한 병자가 있습니까? 그냥 주님께 가서 맡겼습니다. 주님 앞에 드러누웠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 헌데를 만지시고 병든 곳을 고쳐주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E. “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다 모였습니다. 아내는 친척의 일이 있다고 가고 큰 아들은 놀러 나가고 작은 아들은 회사일 바쁘다고 가서 이빨 빠진 것처럼 식구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다 모였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렇게 안 모이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 아십니까? 교회 못 가도 직장에서 인터넷 틀면 생방송으로 울려 퍼집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그 미끄러운 길을 수십km씩 신호등을 수십 개를 지나서 기름을 없애며 빵빵거리며 가족들을 싣고 그 추위에 교회에 오면 넓은 주차장도 없으니 실강이를 해야 하고 교회 들어오면 좋습니까? 천장이 낮은 교회의 공기는 탁하고 끝나고 가는 길은 장난이 아닙니다. 집에서 츄리닝 차림에 뒤를 바치고 앉아서 인터넷으로 드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럴 수도 있지만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사람이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똑같은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로 영향력을 크게 미치는 분입니다. 그 목사님은 새벽설교를 2시간 반에서 3시간을 했다고 합니다. 새벽 설교를 그렇게 하면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합니까? 했더니 설교 중에 한사람씩 일어나서 밥을 주고 돌아오면 설교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도 엄청나게 많은 tape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우리도 100명 모였을 때 tape이 1년에 1억 원어치가 팔린 교회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다음 주에 전부 tape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았는데 목사님이 거기다가 석유를 뿌리고 불에 태웠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이것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귀한 줄을 모른다.” 그 말씀이 한번 울려 퍼지고 다시는 올 수 없을 것처럼 매순간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18세기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가 자기의 설교를 인쇄하겠다는 출판업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설교를 인쇄하시겠다구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그 시간에 하늘을 찢고 번득이던 그 번개불과 우레와 같이 울려 퍼지던 천둥소리도 인쇄할 수 있나요?” 그것은 딱 한번만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물론 tape으로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현장에 나왔더라면 더 뒤집어지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뻔히 집에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주님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어리석은 길을 택합니다. 밀리는 차, 전철을 두 번 세 번 갈아타고 한 아이는 업고 한 아이는 안고 두 아이는 양쪽에 들리고 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벌써 올 때 하나님은 뜻을 세우시는 겁니다. ‘저 자매는 내가 은혜를 주어야 된다.’ 그렇게 온 사람이 자모실에서 두 다리 뻗고 벌렁 누워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본전 생각이 나는데...“다” 모여 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펼쳐 보여 주시므로 우리 모두가 한 마음을 가지게 하십니다. 이렇게 모두 다 모이는 사경회가 됩시다.
F. “하나님 앞에”
이 사경회를 사람들은 설교 듣는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사경회는 날짜를 정해서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모임입니다. 높여 드리는 우리의 예배의 경배에 대해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반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나오거나 사경회를 하러 나올 때에 뭘 듣고 가야 되겠다는 마음이 우선되어야겠어요? 주님을 높여야겠다는 마음이 우선 되어야겠어요? 그런데 생각이 그게 아니라 듣고 가는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 어디겠습니까? 그 장소에 모였어도 마음이 하나님을 높이고 있지 않다면 차라리 화장실에서 하나님 마음을 높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더 영광을 받을 실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이라면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 모두 모여서 여기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런 경배에 대한 생각이 흐려지면서 이 예배와 모든 것들이 편의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들으려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경배하려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첫 번째 목적입니다. 사경회는 들으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듣기 위함이라면 다 집에 있고 모이지 말라 하고 난 스튜디오에서 설교하면 됩니다. 자동 예약해 놓고 불 끄고 자면 녹화도 되니까, 그럴 필요도 없이 다음 주일에 와서 문서선교부에서 cd 한 장 사가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 이 사경회가 듣고 가는 모임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일차적으로 주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목표 자체가 내가 비록 침체에 빠지고 어둠 속에 있지만 그래도 나의 소원은 우리 주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 밀리는 차도와 복잡한 길을 헤치고 마음을 모아서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도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큰 은혜가 우리 심령에 가득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이고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실패와 좌절의 2006년은 더 이상 우리와 인연을 끊고 2007년도에는 정말 하나님 앞에 올바른 마음, 충만한 은혜, 거룩한 비전을 가지고 승리하면서 사는 한 해가 되어야겠습니다. 한 주간 동안 열심히 주님께 매달리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