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며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녹취자 : 김세나
이 잠언에 실려 있는 이 부분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제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부분으로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여호와께서 갚아 주시리라. 아주 더 이상 해석이 필요 없을 정로도 간단명료하게 되어있는 그러한 경구입니다. 경구의 형태를 가진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본론은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여호와께 꾸이는 것은 곤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행방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를 위해 갚으시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중요한 차이는 아니지만 그러나하나님께 꾸이는 것은 이라는 것이 앞부분에 나왔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이 그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죠. 그래서 야 너희들 나한테 꿔 주는 것이 뭔지 아냐. 나한테 꿔 주는 것이 뭔지 아냐. 그것은 바로 곤핍한 사람들에게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긴다 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가난한 사람이란 말이 히브리말로 달인데, 달. 이는 꼭 가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곤핍한 그 다음에 곤고한 이런 모든 것에 쓰였어요. 그러니까 어쨌든 여기에서 가난한 자라고 해석을 했는데 곤핍한 자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물질적으로 더더욱 그렇게 곤핍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라고 되었는데, 사실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고 하난 이라는 동사인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은혜를 베푸는 거예요. 여러분 여호하난이라는 이름 들어 봤죠. 요한이라는 말도 들어 봤죠. 여호하난은 여호와 플러스 하난. 하나님의 은혜 베푸시다. 그리고 요한은 여호와 플러스 하난. 똑같아요. 약자에요. 여호와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불쌍히 여긴다, 좀 정확하게 번역하면, 불쌍히 여기는 것은 마음의 표현이지만, 마음의 상태이지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외적으로 들어난 모든 행동까지 포괄한다는 것으로 볼 때, 그러니까 오히려 그 곤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혹은 베푸는 사람 이렇게 해도 되거든요. 여호와께 꾸이는 사람은 곧 곤핍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이다. 이렇게 해도 되고 여호와께 꾸이는 것은 곧 곤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사람으로 해도 되고 행동으로 해도 상관없습니다. 번역은. 어쨌든 강조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그 꾸이는 것은 곧 곤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앞의 부분을 우리들이 해설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리고 당신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시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인간조차도 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 분이 생명을 붙드심으로 존재하고 있죠. 더욱이 악인이든 선인이든 구별이 없이 두루 비치는 햇빛과 그것을 통해서 맺혀지는 열매,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어김이 없는 그 때를 주님이 지켜 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을 운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삶이 보존 되고 있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에게 무엇을 꾸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라 이거죠. 그리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그러한 그 하나님의 은혜의 빚진 채 살아가는 그 인간, 그 인간이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그러한 은혜를 보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많이 강조하고 있고, 특별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집중적으로 그러한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자신이 그 하나님 앞에 이러한 그 사랑의 빚을 많이 진 종교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을 권고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 좀 격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일반적인 성경의 논리를 뛰어넘는 격한 표현으로 여호와께 꾸이는 자는, 여호와께 꾸어주는 것은 이라고 묘사한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나게 하냐하면, 말라기에 나오는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하는 지시가 생각나게 하죠. 십일조에 관련해서 말라기 선지서에 그렇기 기록되어 있죠.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이 복을 부어 주실 텐데 그렇게 하는지 안하는지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시험받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니죠. 그리고 인간이 그 어떤 동기에서든지 간에 하나님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바 진리를 확인하기 위한 호기심으로 시험해 보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죠. 예수님께서도 같은 질문을 유대인들이 하였어도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대답 안 하시거나 대답하셨어도 책망을 함께 하셨죠. 그랬는데 성경이 그러한 일반적인 통례를 깨고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하는 것은 그 사항이 그토록 중요했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십일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율법적 중요성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말라기 시대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공의가 무너진 거예요. 십일조를 냄으로써 그것을 가지고 레위지파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으니까 이스라엘의 어떤 종교체계 자체에 붕계가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죠. 그러한 하나님 앞에 율법적인 헌금의 의미를 담지 않는 것을 통해 결국 드러나는 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우습게 여기는 마음,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과 통하는 것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그 명령에 순종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십일조만 내면 모든 것이 끝난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하고 하나님의 율법이 갖는 그들의 삶에 자리를 그 율법이 회복하기를 원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데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의 삶을 주장하지 않아요. 그러한 것들은 모두 타파하고 다시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의 온 삶을 주장하는 그러한 신앙적인 상황으로 돌아가도록 선지자를 통해서 아주 강하게 탄핵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시험해보라고 한 것이에요.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꾸어줄 수, 사람이 하나님께 부채를 가질 수 있을지언정 꾸어줄 수 있는 전제들이 아닌데도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 구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하나님께서 곤핍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 그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은 곤핍한 자를 돌보는 것이다 라는 거죠. 우리들이 여기에서 하나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여기는 곧 교회가 국가였으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도 언제나 이렇게 부가 평균적으로 누려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죠. 부의 평준화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무슨 뜻인지 아시죠. 그렇다고 해서 구제를 받는 사람이 구제를 하는 사람보다는 가난하고 곤핍한 위치에 있고 구제를 하는 사람은 그 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데, 구제를 할 모든 사람들이 탐욕으로 제물을 모아서 다른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잖아요. 거기에는 그러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제물을 모아서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그 믿음을 어여삐 보셔서 물질적으로 축복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그렇지 못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믿음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매우 특별하게 그를 가난 속에서 연단하셔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아직은 결핍가운데 두시는 사람들도 존재할 수 있다 이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가난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더 인정받은 사람이라고 믿을 필요는 없는 것이죠.
저 자신을 보더라도 그 어느 때 보다도 하나님과 친근하게 보내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던 때였는데도 가난하게 살던 기간이 있었어요.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 기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를 필요한 부분들을 가난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연단될 수 없었을 많은 부분들을 연단하여서 후일에 쓰시기 합당하도록 주님이 만지신 그러한 섭리들을 인생을 다 살지 않았는데도 벌써 느낄 수 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단 말이죠. 그러한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을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이거죠. 언제든지 그런 것이 존재한다 이거죠. 그래서 마치 이 기독교 신앙으로 이 사람들이 볼 때 부유한 사람들을 획일화 시켜서 공격하는 그러한 사고방식 같은 것들은 절대 신앙이 아니에요. 신앙이 아니에요. 문제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부유함에 대해서 질타를 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에 대해서 주님께서 질타를 가하신 것이죠. 그러니까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탐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고 또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그의 마음이 저절로 하나님 앞에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었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항상 그 사람의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신 것이죠. 예수님은 물론이거니와 또 사도바울이나 초대교회의 성도들 그 사역자들 주위에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죠.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돈이 많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왜냐하면 복음은, 이데올로기는 이해관계를 갖은 특정 층이 호소하지만 복음은 빈부나 귀천이나 어린아이나 남녀나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에게 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인지 간에 그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하는 힘이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타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런 것을 보더라도 성경은 인간의 가난과 부유함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충분히 인정한다는 것이죠.
우리들이 문제로 삼는 것이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부의 양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에요. 사람의 마음이죠. 그 사람의 마음이에요.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탐욕에 이글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어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속에서도 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들이 깊이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아니면 이러면 좋겠다 라고 하는 이상적인 생각의 소호를 받으면서 그런 문제들을 다루기보다는 성경의 정직한 빛을 받으면서 그런 문제를 다루는 것이 옳다 라고 하는 것이죠. 옳다 라고 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집을 말이죠. 집을 어느 정도 살면 괜찮을까요. 어느 정도 크기의 집에서 살면 하나님께 죄송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고 자기 양심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답하기가 참 쉽지 않죠.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다르고, 또한 식구 수에 따라서 다르고, 그렇죠. 식구 수에 따라서 다르고 또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이다 그랬어요. 저희가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 정확하게 생각이 나요. 중학교 3학년 때인데, 담임 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그러한 말씀을 하셨어요. 저녁 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집에 돌아가서 밥을 또 다시 먹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 그러시면서 당신 생각에는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자는 것이 좋다고 생각 한다 그러시면서 추천하신 것이 계란후라이 하나에 우유 반잔 정도. 그러니까 반에 있는 학생들이 전부다 뱃살을 잡고 웃었어요. 왜 웃었을까요. 비현실 이야기이다 이거죠. 어떻게 매일 집에 가서 계란 하나씩을 먹고 우유는 또 어디에 있고 컵은 어디에 있나. 곡부는 있었지만 컵은 없었어요. 곡부는 양은 다 찌그러진 게 곡부고 컵은 이렇게 예쁜 유리로 된 것이 컵이었어요. 현실성이 없다. 그렇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몇 년 뒤에 고등학교 갔더니 고등학교에서는 한 학생이 들어와서 자기 학원 선생님을 욕을 욕을 해요. 왜 그러냐 했더니 그 사람 말이야 미친 사람이다. 왜 그러느냐. 그 수업을 하다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래는 거예요. 거기 있는 여학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더래요. 그 여기서 이렇게 공부를 하는 여학생들은 그래도 모두 목욕탕이 있는 집으로 시집을 갈 거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분노하면서 세상에 말이지, 학원 선생이 그런 식으로 여학생들의 허영심을 부추긴다는 거죠. 현실적으로 목욕탕이 있는 집이 없었으니까. 겨우 뭐 초등학교 때도 보면 학교에서 이 잡는 약 뿌려주고 그랬잖아요. 바글바글 어디서 목욕을 해요. 그러니까 그래서 도덕 교과서에 나왔잖아요. 바른생활 교과서에 목욕은 한 달에 두 번 한다고 나왔어요. 머리는 한 달에 한번 깎고. 그러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렇게 웃잖아요. 그래서 의미가 그때의 의미와 지금의 의미가 달라요. 왜냐하면 이제는 사람들이 목욕탕을 소유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 때는 당연이었어요.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도 피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목욕을 위한 공간을 따로 만들고 거기에 물을 따로 들어오게 하여 더운 물, 찬 물을 따로 나오게 한다는 것을 기술적으로도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불가능한 일이었죠. 이렇게 모든 것들이 바뀌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르다는 거죠.
(예화) 필리핀에 있는 어느 선교사 한 사람이, 저도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어요. 안 가도, 저는 이해 안 되는 것을 쉽게 노골적으로 내색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데 몇 번 가니까 이해가 가기 시작했어요. 그런 어느 목사님이 분노하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셔요. 선교사 이 친구들이 말이지 자기를 속였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했더니 자기가 가지 않을 때는 좋은 차 타고 돌아다니고, 자기가 갈 때에는 다 썩어가는 엔진소리도 가련한 녹슨 봉고를 끌고 온다는 거예요. 와 가지고 자기를 데리고 가고 그리고 어느 집에서 재워 보내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는 집도 따로 있고 타는 차도 따로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분노하시고 이제 노인 분들은 아주 단순하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 달부터 당장 선교비를 안 보내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그 선교사의 이야기는 아닌데 그런데 나중에 몇 번 자기네들이 보니까 어떻게 되었냐 하면 집을 세를 얻어서 사는데 보통 거기에 마닐라에 나오는 집들은 조그만 우리나라 연립주택 같은 집들이 나오는 게 아니라 한 채씩 세로 나와요. 그래서 세를 주는 것은 싸구려 집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더군다나 대상이 외국인일 경우 아주 크고 심지어는 수영장까지 딸려 있는 집을 세로 주는데 그것이 비싸지가 않아요. 한 달에 보증금까지 해서 35만원에서 어마어마하게 커서 대문 앞에 입이 벌어질 정도는 70만 원정도. 그래서 그것을 빌려서 사택도 쓰고 교육관으로 쓰고 그리고 예배당으로도 모이기도 하고 위층은 선교 본부로 사용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이제 한국에서 그 어느 교회에서 여전도회 회원들이 간 거예요. 그런데 이 양반들이 파출부해서 보내는 사람들도 있고, 그리고 보신탕 집 해가지고 매달 보내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 선교사를 위해서 늘 기도하가 한번 오라고래서 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이 뭐 기가 꼴깍 넘어갈만한 거예요. 한국에서 따지면 20억이나 될 만한 어마어마한 저택에 그 할머니의 말이 재밌지. 정원에 파인애플 나무까지 있더래요. 열대 지방에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 그래서 보니까 이 상상이 안 가는 거예요. 그래서 가서 계속 있다가 시험에 잔뜩 들어가지고 더군다나 그곳에 보니까 가정부들까지 있는 거예요. 거기 쉽게 이야기 하면 일정한 직업이 없이 은혜를 받고 거기에서 거두는 자매들이 있는데 이게 무슨 직장을 회사를 선교회가 운영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 둘 데려다가 부인일도 시키고 설거지도 시키고 이렇게 하면서 생활을 보태 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가서 기겁을 한 거죠. 야, 이거 선교사가 가정부도 셋씩이나 두고 청소, 마당 청소하는 사람 따로 있고 차를 모는 사람 따로 있고 부엌에서 반찬하는 사람 따로 있고 그리고 우리는 진짜 다 쓰러져 가는 연립주택 지하에서 곰팡이 핀 집에서 살면서 파출부도 하고 보신탕 집도 하면서 이것 해서 보내주는데 야 세상에 이런 식으로 사는구나. 그러면서 말하자면 실족을 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은 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가르침, 그리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초점과 우리 자신들이 이 생각하는 초점이 다른가 하는 진지한 이해가 결핍된 것에서 나온 것이거든요. 이러한 상황이라 이거죠.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속에서도 말이죠.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래서 이러한 빈부나 이러한 것들에 대한 차이가 일어나는 거예요. 존재한다 이거죠. 그래서 이제 문제는 그러한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는 물질적으로 복을 많이 주셔서 부하게 하시고 이 사람에게는 가난하게 하셨는 대도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다 하면서 내버려 두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나는 하나님이 특별한 뜻이 있으셔서 부하게 해 주셨으니까 나는 그것을 계속 유지하면서 살아야 하고 쟤는 그렇게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대도 하나님께서 저렇게 가난하게 내버려두시니까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데 그 뜻을 자꾸 내가 도와줘서 방해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은 그러한 가르침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거죠.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못 돼서 너는 아직 멀었어, 너는 고생을 더 해야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아주 심하게 굴리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백성들은 그에게 먹을 것을 가지고 공급해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거죠.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긴급하고 다급한 마음을 가지셨는지 뭐라고 현상을 거시느냐 하면 그것은 나에게 꿔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다. 꾸어주는 것은 무엇과 관계가 있는가 하면 신실성과 관계가 있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무엇을 꾸어가지고 가서 안 갚는 사람은 그래도 사람이 좋을 수는 있어요. 사람이 좋을 수는 있는데, 그런데 좋다 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짆아요. 그런데 신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죠. 신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도서관 같은 곳에서 책을 빌리고 몇 개월씩 안 가져다 주거나 아니면 그 그냥 자기가 가져 버리거나 그런 것 있죠. 우리는 아직 없습니다만, 교회에다가 문고 같은 것을 비치하고 그러면 책장 열고 써 놓고 가지고 갔으면 가져다 놔야 하는데 써 놓고 자기가 가져버리거나 없애 버리는 경우 있죠. 우리교회도 본 받아야 해요. 교구에 항상 테이블 이렇게 중요한 시리즈들을 빌려 주거든요. 교회에서 사서 교구에 비치를 시켜주죠. 그런데 교역자들이 그것을 꼼꼼하게 관리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교회일이 너무 많다 보니까 그러한 것들을 대출하는 것까지 관리한다는 것이 그렇지만 한 1년 지나고 나면, 한 1-2년 지나고 나면 1/3내지 반 정도는 거의 없어져요. 어떻게 되었냐 하면 어디 노트 같은 곳 보면 적다 말다 적다 말다 그래서 흐지부지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갖다 주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가 소유해서 경제적으로 이득을 봐야 되겠다 이것은 아니겠죠. 그런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본적인 신뢰를 구축해 나가는 삶의 방식이죠. 그러한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지. 돈 꿔 가지고 가서 흐지부지 해서 말고 그리고 또 뭐 빌려가고 나서 흐지부지 해서 말고. 그리고 하는 말이 그것 뭐 몇 푼이나 된다고. 몇 푼 되고 안 되고는 임자가 결정할 일이고 자기가 빌려갈 때는 빌려갔으면 정확하게 가져다 줘야 하죠.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전부 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거예요. 더군다나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에요. 신실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그러면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조차도 부인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성품이 있었어요. 그것이 뭐죠? 신실함이에요. 마지막까지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인하기 어려웠던 하나님의 성품 중의 하나가 신실함이었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종종 사람들이 의심을 했어요. 왜냐하면 너무 역경을 역경을 당하고 너무 살기가 괴로우면 진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죄는 이만큼인데 징벌을 이만큼 내리시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인하기 힘들어하였던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실함이었어요. 신실함. 그 신실한 하나님이 나한테 꿔 주는 것이다.
(예화) 나는 뭐 금융 관계 돌아가는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신문 상으로 가끔 읽어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요즘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6개월 전만 해도 은행이 신실한 채무자 몇 사람을 열심히 찾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웃긴 게 뭐냐 하면 아니 전에는 서류를 들고 그렇게 은행에 돈 빌려 달라고 하면 뭘 떼어 와라, 뭘 떼어 와라. 그리고 타박을 주고 안 하더니 그런데 내가 집을 사려고 계약만 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러 은행에 들어갔는지 그 은행에서 전부다 전화가 온다는 거예요. 선생님 이번에 어느 아파트 몇 동 몇 호를 계약 하셨죠? 우리가 대출을 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또 전화가 와서 아니요, 우리가 더 잘 해드리겠습니다. 왜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담보가 있으니까 신실성을 확보하는 거예요. 여차 하면 팔면 되니까요. 그러니까 서로 꿔 주고 싶어 하는 거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꾸어주면 하나님이 그 채무를 잊어버리시거나 기피하시거나 그러실 리가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강력한 어법으로 말씀하신 것은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시급한 것인가 보여주는 것이죠. 시급하다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얼마나 자주 이런 구제의 의무, 구제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책임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을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보면 이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보면 이제 문제 제기부터 하자면 우리들은 흔히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죠. 교회가 구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 그 사람들이 목소리를 많이 높이죠.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사실은 이 개인적인 구제가 훨씬 더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죠. 보십시오.
제가 그것을 말씀 드릴 테니까 보세요. 이제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구약시대 때에 대게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방법들이 어떤 것들이었느냐 하면 이런 거죠. 밭에서 이제 추수를 할 때 그 때 쭉 작물을 걷으면서 저 귀퉁이를 남기는 거예요. 나무의 열매가 열면 그 나무의 열매를 딸 때에 위의 한 부분을 열매를 남겨 두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 조상들도 까치밥이라고 해서 한쪽을 남겨 두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나그네를 위한 배려이고, 또 하나는 생태계를 위한 배려에요. 그래서 짐승들도 와서 먹고 나그네들도 가다가 먹을 수 있게끔. 그리고 쭉 추수하고 지나간 다음에 이삭을 줍지 않아요. 떨어지게 내버려두고 거기에 와서 사람들이 와서 주워 가게끔 만들었거든요.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그것을 알뜰하게 모두 거두어 가면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있는 것을 남겨 두어서 개인적으로 그것을 생태계와 그리고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위해서 공유하는 거죠.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남겨 두는 것이죠. 그러니까 신약으로 넘어가면 말이죠. 신약으로 넘어가면 신약에서 거두어들인 헌금은 헌금이라기보다는 연보였어요. 연보. 연보라고 하는 말이 가장 좋다. 연보라고 하는 것은 이제 헌금 그러면 하나님께 바쳐졌다라고 하는 것이 강조 된 것이지만, 연보라고 하는 것은 용철을 강조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가난한 자를 돕고 구제하는 일에 많이 사용한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거두어들인 헌금을 가지고 물론 그들은 그 안에서 교회 일꾼들을 생활할 수 있게끔 해주기도 했을 것이고, 그리고 그들이 모임을 갖고 공적인 일들을 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썼을 것이에요. 그렇죠. 그렇지만 그러한 비용들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이러한 식의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죠? 첫째는 존재할 필요가 없었고 왜냐하면 언제든지 유대인들 회당을 빌려서 모일 수가 있었고 유대인들 회당이 어느 세를 받거나 그러한 것이 아니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그러한 예배당을 갖을 수가 없었죠. 이유는 뭐냐 하면 또 다른,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처음서부터 독특한 종교라는 것이 노출이 되었다면 벌써부터 박멸되었죠. 왜냐하면 기독교는 유대교 속에 있는 한 분파라고 이 로마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에 내버려 둔 거예요. 왜냐하면 로마사람들은 기존 이 넓은 세계를 통치하려고 보니까 두 가지만 반대를 안 하면 내버려둔다는 입장이었거든요. 하나는 세금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황제를 숭배하는 것. 이 두 가지만 동의하면 내버려둔다는 거였어요. 왜냐하면 종교가 너무나도 다양하니까 피지배인들의 종교가 다양하니까 그것을 쑤셔가지고 민족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러니까 사도행전에서도 예수믿는 사람들이 유대인과 막 싸우고 있을 때 로마인들은 항상 끼어 들기 싫었던 거예요. 유대인속에 여태까지 있었던 다양한 분파들끼리의 논쟁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만약에 교회 예배당을 크게 지어놓고, 필요는 있었을 거예요. 있었겠지만 그것을 만약에 건물을 크게 지어놓고 이것은 유대인과 다르고 여기는 새로 생긴 기독교라는 종교다 하면서 깃발을 높이 들었을 것이라 한다면 박멸 당했겠죠. 그래서 이제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 신약성경에는 교회를 지으라는 말이 없는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를 짓는 일에 열심을 가지고 있느냐 그러겠지만 사실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교회 자체를 유지해가는 경제력이 많이 필요하게 된 거죠. 셋팅 자체가, 배경 자체가 차이가 난다 이거죠. 신약에서도 보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그렇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연보를 다 거두어서 그 연보를 필요를 느끼는 지역, 필요를 느끼는 교회, 필요를 느끼는 개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죠. 많은 것들을 많이 거둬서 나누어 주었던 거죠. 연보를 볼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교회를 이런 것들을 단순히 전달해주었던 역할을 했을 뿐이지 이러한 상황 때문에 전달해주었을 분이지 그것은 어떤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어떤 한명의 교인이 얼마씩 어느 기간 동안 헌금을 해야 한다는 식의 어떤 의무감의 성격은 아니었단 말이죠. 있는 사람들은 많이 내고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내고 그것은 개인적으로 낸 것에 대해서 전달하는 역할들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볼 때에 그것을 가지고 오늘날과 그대로 생각하면 차이점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어쨌든 간에 중요한 논리가 있는데 요지는 이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교회가 한편으로는 이 신약시대의 교회의 정신을 본 받아서 교회가 나름대로 교회가 부지런히 자신이 가지게 된 그 헌금들을 구제를 하는 일에 사용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선적으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자신들이 구제하는 그 일이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일관화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말이죠. 그것이 커다란 어떠한 프로젝트를 세워서 그래서 거기를 위해서 거액의 돈을 모아서 하는 그러한 일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는 그 가난하고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성도는 항상 자기 자신이 그렇게 곤핍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부름을 받은 처지에 있다 라는 인식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실천을 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이 그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가르침이에요. 특히 구약에서는 더더욱 그러한 것들이 강조가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경건한 생활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사실 우리들이 십일조를 드리거나 감사헌금을 드리거나 하면서 가난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오르면서 동정과 연민을 가지고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은 아니죠. 우리들의 대부분의 헌금 생활들은 의미와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헌금의 동기가 되고 있지, 감사헌금 10만원을 내면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것이 우선으로 헌금의 동기가 되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에요.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그런데 이게 헌금을 해도 자기가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일상적인 필요를 덜어서 그를 도와줄 때에 하나님의 이 그 고통 받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람들을 현재적으로 많이 체험하게 되는 거죠.
결론은 뭐냐 하면 교회도 힘써 해야 되겠지만, 교회가 아무리 그를 위해서 힘쓴다고 할지라도 이 성도들이 개인의 삶 속에서 개인적으로 구제해야 할 필요성들이나 중요성들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개인적으로도 늘 이렇게 구제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고 그리고 연보내면서도 교회에서 구제하는 일을 힘써야 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어떤 쪽이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은 여호와께 꾸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여호와께 꾸어주는 것이다라고 하는 의미속에 하나님이 반드시 갚으시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에 담겨져 있는 것이죠. 그러니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그것을 갚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구제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되죠. 그래서 마치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에게 이만큼 이렇게 구제했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저만큼이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계산적인 방식으로 십일조를 하거나 혹은 구제를 하는 것들은 모두 신앙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이다 라고 하는 거죠. 즉 너희는 나를 시험해보라고 하신 말씀이나 혹은 구제하는 것은 나한테 꿔 주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말씀이지 우리가 구제를 하고나서 그것 꿔 준 것 내 놓으십시오. 당장 내 놓으십시오 라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말씀 드릴 수 있는 성질의 일반적인 행동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보면 곤핍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라고 나오는데 이게 그 은혜라고 말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것은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실 수 있는 것이거든요. 인간이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되었을 때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형상이에요.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 하나님이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깊이 경험하게 한 사람이 그 은혜 받은 것이 동기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이 자기를 다루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다루어 주는 것, 주님이 자기를 곤핍한 자로 보시고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또한 자기가 곤핍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물질을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이제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구제에 힘쓰며 산 사람들, 어떻게 갚아 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획일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그죠. 초대교회 때 자기의 제산을 모두 팔아 성도들을 위해서 드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바친 사람들 가운데 다수의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걸었어요. 그것은 비단 초대교회의 일일 뿐 아니라 한국기독교 초기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어요. 어떠한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과 인생에 있어서 부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바쳤지만 지금도 고난을 많이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이것은 사실 우리가 의심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죠.
더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주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사실 그 선행이라고 하는 것은 안 나오고 행동이라고 나와요, 히브리 성경에. 그 행동에 대해서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그런데 갚아주다 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가 그 옛샬렘이란 단어인데 그게 화목이라는 샬롬. 어원이 같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 화평케 된다고 하는 것이죠. 굉장히 재미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잖아요.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빚을 지셨을 때에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표현대로 누군가가 구제를 함으로 하나님께 꾸어주었을 때, 그 부채를 하나님이 유지하면서 사신 것은 마치 화목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내시는 것과 같다. 그것을 다시 갚으셔서 화목하게 한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아주 좋은 해석이 이런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번역하면, 문화적으로 딱 들어맞는 등가번역이라고 생각해요. 역사적인 상황까지 고려해서 이렇게.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은 곤핍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니 하나님은 자기에게 꾸어준 사람의 그 행동에 대해서 그에게 갚으심으로써 마음이 편해지시느니라. 이 이야기에요. 아주 정확한 번역이에요. 하나님이 그 행동에 대해서 그에게 갚아주심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시느니라. 옛샬렘. 샬롬을 그러니까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빚지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쩔줄 몰라 하는 마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잖아요. 빚 얻어서 흥청망청 살고 빚 속에서 살면서도 태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만큼도 빚지면 안달복달 하는 사람 있죠. 그것 뭐 좀 빚졌다고 해서 내일 당장 경찰이 잡아가는 것도 아닌데 안달복달 하는 사람이 있죠. 그것은 뭐냐 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 그 빚 때문에 어떤 불이익을 받거나 해를 받거나 하는 것보다는 내 자신이 빚을 졌다는 사실, 채무자라는 사실 그것에 대해서 내 자존심이나 모든 것들이 용납을 하지 않아서 편하지 않은 거예요. 그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뭐냐 하면 자기가 몇 끼를 덜 먹더라도 갚아 버리고 나면 마음이 비로소 평정을 찾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말하자면 그런 분이시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남의 빚을 얻어 쓰고도 사실 교회가 빚을 졌기 때문에 이 말을 하기가 편하지 않은데 그 빚을 지고도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 빚을 지고도 떵떵 거리고 편하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반영하는 삶이 아니에요. 아니라 이거에요. 정말이에요. 결국 그런 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어느 순간의 삶이 위기를 만나곤 해요. 위기를 만나곤 해요. 그런데 그러니까 이 그 기가 막히잖아요. 그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를 위해 갚아주시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시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곤핍한 자를 구제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결단코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지 보상해 주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약속을 이렇게 아주 절박한 표현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게 히브리어니까 우리의 가슴에 다가오지 않지 이러한 그 잠언 그 자체가 그 당시의 통용되던 경구들로 많이 이루어진 것이거든요. 그 당시의 그 이 저 의사소통에 있어서 경구들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거든요. 짤막짤막 하면서도 인간에 대해서 깨우쳐 주는 것들이 있는데요. 그런 것들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그것을 최초 청중들에게 하나님이 들려주셨을 때 그 감동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였을지는 우리는 사실 모르죠. 그것을 이렇게 더듬어서 성경을 해석해 주니까 여러분들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거죠. 하나님은 그 행동에 대해서 그를 위하여 갚아주시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구제했을 때에 그때부터 하나님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으셔요. 아 내가 빚을 졌구나. 너한테 빚을 졌구나. 내가 어떻게 하든지 내가 이 빚을 갚아야지만 편하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떻게든지 축복해주어야겠다는 약속을 이처럼 아주 묘한 수사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죠.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해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잘 알 수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난 다음에 물질의 많은 축복을 받은 것에 대해서 말하지만 사실은 그 간증을 들으면서 우리가 그 간증을 의심하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간증을 많이 퍼뜨리는 것이 행여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의 동기를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아닌 보상으로 자기가 받을지도 모르는 상에 대한 탐욕으로 그 마음을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실 물질로 어떠한 사람을 구제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부자 되게 해 주신다. 우리 이런 식의 획일적인 논리를 공식화 할 수 없어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어떠한 식으로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채무로 여기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충분히 갚아주시기 전까지는 마음이 편하시지 않아 하시는 그 신실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것이에요. 그래서 이기심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그 영적으로 풍부하게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영적으로 부요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이 그 사람들 속에 자기 속에 넘쳐나는 사람들은 결코 그런 식으로 자기만을 위해서 이기심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이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빈부의 격차가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잘 살아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결핍해요. 어떤 사람들은 하루 저녁에 즐거운 시간을 위해 소비하는 금액이 어떤 사람들이 한달 생활비 정도 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획일화 시켜서 그 모두 탐욕으로 가득찬 더러운 삶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비난할 수 없어요. 그러나 만약에 그 사람의 마음이 자기가 그 부를 누리면서 사는데 골몰한 나머지 고통 받는 사람을 거의 기억을 못 하거나 그리고 또한 본다고 하더라도 그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돕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비난받아도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염려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가 아니라 그 부를 누리고 살아가는 동안에 둔탁해진 그의 신앙의 양심과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부를 누리고 살아가는 동안에 익숙해진 나머지 나신이 이러한 부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 생각해서 하나님의 이해와 그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는 비난 받아도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를 많은 이유로 우리를 물질적인 결핍이나 어려움 아래 두셔서 연단하시는 것처럼 그리고 주님이 많은 이유로 우리들을 물질적으로 축복하셔서 부를 누리게 하시죠.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주님이 베풀어 주신 물질의 축복들을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누리고 사는 것은 죄가 아니에요. 많이 축복해 주시면 좀 더 많이 누리고 살아도 성경적으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지나치면 절대 안 된다라고 하는 거죠. 너무 지나쳐서 그 물질이 자신 속에서 어느 한순간에 더 이상 그 물질을 누릴 수 없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거나 혹은 그 물질을 누리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고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이 마음의 긍휼과 실제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구체적 실천을 잊어버릴 정도로 자신의 부를 소비하고 살아가는 데 골몰해진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다 이것이죠. 그래서 저는 말이죠. 물론 우리들이 정신 위생을 위해서 구제를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안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신앙을 떠나서라도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흔히 이야기해요. 자녀들의 올바른 심성을 위해서라도 어려서부터 구제를 가르쳐라. 구제를 가르쳐라. 다시 말하면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하더라도 일생동안 어른이 되어서 자기 스스로 가계를 꾸려 갈 때까지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조금도 동정해 본 일이 없는 그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 비록 그가 하나님을 아직 안 믿고 있다고 할지라도 어려서부터 부가 얼마나 상대적인 것인가를 보고 그리고 사회가 부를, 인간의 부를 획일적으로 분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서, 그 자신의 물질적인 부요함, 그 그늘에 가려서 경제적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에 대한 눈을 뜨고, 그들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는 그 심성을 수시로 갖게끔 하지 않으면 그 물질주의로 치달을 가능성은 거의 100%라 이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무자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물질의 초월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세요. 오늘날 이 도시의 강포함들이 다 무엇 때문입니까. 다 돈 때문이고 부 때문이라는 거예요. 더 많은 것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확보해서 자기가 누리면서 살려고 하는 그러한 탐욕된 욕망들에 대해서 만들어낸 것이 도시의 타락함이에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보세요. 타락이 극에 달았던 도시치고 소박한 도시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고. 그렇죠. 고대의 문명을 사랑하던 도시죠. 사회 밑바닥에서 발굴되기 시작했잖아요. 그 비스비스 화산에 의해서 묻힌 폼페이라는 도시가 그랬잖아요. 엄청난 도시가 발굴되니까 말이지 엄청난 그 벽화들이 나오고 그러한 도시였잖아요. 최고의 부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도시였어요.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인간이 소박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타락했으면서도 물질적으로 소박한 삶을 살아갔던 도시는 없다 이거예요. 그것 보세요. 우리나라에서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향락 산업 들이 시골의 물 흐르는 곳에 생겨납니까. 돈이 흐르고 있는 그곳에 생겨나요. 그렇게 생겨나요. 겉잡을 수없이 거기에서 인간의 탐욕을 빨아들이듯이 버섯처럼 자라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향락산업이에요. 그래서 그 뒤에는 배금주의 사상, 물질을 최고로 생각하는 그 사상이 도사리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러한 것에 대해서 항거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돼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축복해주시죠. 그러한 것들을 적절하게 누리고 사용하는 것은 죄가 아니에요. 잘못이 아니에요. 그리고 어느만큼 누리는 것이냐, 그리고 어느 만큼이 호와롭게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냐 그것은 상대적인 문제에요. 그죠. 이게 말이에요. 수도사들은 어떻게 살았겠어요.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상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탐욕이다. 그죠. 인간이 그 수명을 유지할 수 있는 수면만큼의 잠을 자는 것 이상은 타락이다. 그리고 인간이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의 옷을 입는 것이 이것이 옳은 것이다. 사실은 이런 식의 금욕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대해서 성경이 그런 금욕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두 데려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이 주신 축복들을 적절하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데 도가 지나치면 안 된다 이거에요. 그리고 많은 물질적인 것들의 허비와 낭비는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탐욕을 자꾸 키우는 거예요. 탐욕을 자꾸 키워줘서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들을 소비하면서 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에요. 그 둘 사이에 이 치우치지 않으며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미 1세기 지나면서 2세기 지차면서 기독교의 그런 사람들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희랍의 사상들이 기독교 가르침과 엉키면서 사람들 속에 파고드는 거예요. 그래서 말하자면 철저한 권위주의적인 기독교의 양식들이 나오는 거거든요. 그것은 복음을 왜곡한 것이죠.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식의 사고방식에 빠져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물질적인 축복들은 우리들이 모두 누리면서 살 수 있다 라는 식의 그런 식의 성공주의적인 배금주의적인 지식들에 대해서 성경은 지지하지 않는다 이거에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된다 라고 한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절제라고 하는 것이 사실 필요가 없죠. 주어진 대로 마구 누리면서 그렇게 살면 되니까요. 그것을 반드시 마지막에 인간을 타락으로 이끌어 간다 이거에요. 탐욕.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절제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 자신 속에 있는 탐욕이 보이지, 우리 자기 자신을 방치해 버리고 욕망의 우리에서 이끌어 살도록 내버려 두면 사실 우리 속에 탐욕이 있는지도 몰라요. 하나님의 법으로 그리고 신앙의 양심으로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탐욕을 제지하려고 할 때 치고 올라오는 이 작용을 보면서 내가 굉장히 탐심이 있구나. 그리고 이런 것들이 경건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이구나. 그러면서 이런 것들을 느끼는 것이지 마음 먹은대로 다 허비하고 살면 그렇게 되냐 이거에요. 여러분들에게 하나 제시할게요. 여러분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물질을 소비하고 쇼핑하고 막 샀어요. 생활에 꼭 필요한 것 말고 그냥 덜 필요한 것들까지 막 샀어요, 저녁까지. 그러니까 후회가 될 정도로 지출을 많이 했어요. 그러면 저녁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경건해 지던가 생각해 보세요. 물론 여러분들은 아침에 쌀 사오고 밤에는 기름 사오고 저녁때는 약국에서 약 사오고 이러한 구매활동을 했다고 해서 경건이 흐트러지는 것은 아니에요. 여러분들의 경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막 가서 돈을 잔뜩 넣고 막 사고, 그리고 돈이 모자라서 카드까지 써가지고 말이죠. 그리고 저녁에는 이번 달에는 카드 값이 얼마나 나올까 그리고 걱정이 되는 상황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좀 더럽혀 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어요? 그렇잖아요.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러한 삶, 그런 식으로 살기 때문에 그러한 식으로 신자가 살기 때문에 사실은 구제를 거의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을 한 것을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마시고요. 아주 작게 헌금하고, 자기로서는 작게 헌금 한 것으로서 모든 구제의 의미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처럼 그 작은 헌금과 함께 구제의 의미를 전적으로 교회에 의탁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너무 물질주의적인 방식이고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험하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다 하는 거예요. 절대로 우리들이 그러한 탐욕에 이끌려 살아가서는 안 된다 이거에요.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자녀들에게 그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자녀들에게 돈 버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나중에 가르쳐줘도 돼요. 먼저 가르쳐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쓰는 방법을 가르쳐 줘야 해요. 왜냐하면 쓰는 방법은 돈 버는 방법을 아무리 잘 알아도 쓰는 방법이 올바르지 않으면 하나님이 깡통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고, 쓰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를 복주실 것이기 때문이에요. 두 종류의 사람은 감당할 수가 없어요, 세상이. 하나님이 복주시기로 한 사람과 그리고 하나님이 망하게 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 그 두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어요. 뭘 해도 망하고 뭘 해도 잃어버려요. 그래서 가르쳐줘야 해요. 만약에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지 않고 부모를 통해서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삶을 부모들에게서 배운다면 그 자녀들이 불쌍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긍휼히 여기거나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그러한 생각을 자녀들이 절대 안 한다 이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대로 나 하나의 잘못된 생각의 방식이 대를 물려 주면서 그 긍휼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인데요. 이러한 것들의 인식이 전혀 없이 마구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자녀들에게 그런 것들을 잘 가르쳐야 해요. 어떻게 말하자면 물질을 쓰고 어떻게 물질을 소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자기의 자녀들에게 잘 가르쳐야 해요. 그래서 이 아이가 어린 아이들이 돈 버는 재미를 먼저 느끼면 안 돼요. 돈 쓰는 재미를 느껴야 해요. 그 어려서 애들을 돈을 주면 꿍쳐 놓고 절대 안 쓰는 애들이 있죠. 그것을 굉장히 칭찬을 많이 하잖아요. 아, 얘는 말이지 한국은행의 돈은 마르는데, 얘 주머니의 돈은 안 마르잖아. 그렇게 해 가지고 걔가 하나님을 깊이 만났는데 그러한 삶의 방식이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보라고요. 돈이 있으신 분이 헌금 안 하는 분은 어려서부터 안 가르쳤기 때문이에요. 그 원인도 많다고요. 그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박살이 나기 전까지는 헌금을 안 하는 거예요. 기껏 하는 이야기가 훈련이 안 되었다고 하는데 훈련이 안 된게 아니라 탐욕으로 다져진 거예요. 훈련이 안되긴 뭘 안돼요. 훈련이 어디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훈련을 통해서 됩니까. 하면 하고 말면 마는 것이지 훈련은 무슨 훈련이에요.
우리 주위에도 보면 처음 취직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첫 월급을 하나님 앞에 열매로 드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훈련을 통해서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주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 깨달았으니까 그러한 것을 할 수 있는 것이지. 훈련으로 되는 것이냐고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돈 버는 방법은 나중에 가르쳐줘도 돼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테니까. 그러니까 쓰는 방법을 먼저 가르쳐 줘요. 자녀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잘 가르쳐 줘요. 그렇게 해 가지고 언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 그리스도인의 소비생활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고 봐요. 어떤 데에는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안 쓰고 어떤 때에는 이해가 갈 정도로 풍부하게 쓰는 그러한 것이에요. 그게 중요한 것이에요.
(예화) 토마스 칼 라일이 서제에서 글을 쓰고 있었는데 한 자선단체에서 문을 두드리면서 들어왔어요. 그때 촛불을 세 개를 켜 놨다가 두 개를 딱 꺼놨더래요. 이 들어오는 이 사람이 딱 생각한 거예요. 망했다. 이렇게 부자로 살면 후원이라도 되어 줄줄 알고 왔더니 야 세 개 촛불 켜놨다가 잠시 자기 글쓰기를 쉰다고 두 개를 꺼 버리는 이 쫀쫀한 사람이 이 내놓을 리가 있나. 그 자리에서 거액의 기부금을 내 놓으면서 뜻있는 일을 위해서 써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눈이 휘둥그래 지니까 토마스 칼 라일이 설명을 덧붙였어요. 다 읽었어요. 당신은 이 기부금을 달라고 나에게 요청이 왔을 때, 내가 세 개의 촛불 중에서 두 개의 촛불을 끄는 것을 보고 당신이 당신의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을 염려하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내가 이렇게 한 것이 시사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돈을 버는 방법이 아니라 쓰는 법을 잘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 아이가 돈을 버는 즐거움이 아니라 쓰는 즐거움과 보람, 그 돈을 쓰면서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 주는 거예요. 훈련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그것이에요. 뭐냐 하면 곤핍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그것을 갚으시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지시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오늘날도 그러한 필요성은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다 존재하는 거예요. 그것이 꼭 교회를 통해서 그것을 해야 될 필요는 없어요. 물론 여기 매주일 지정헌금을 통해서 누구에게 전해달라고 올라오지만, 그것도 좋아요. 그것도 좋고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그렇게 이웃을 도와가면서 살아서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들 가운데 뜻이 계셔서 가난 속에서 연단하는 거예요. 그 때 하나님께로부 부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베푸는 이 정성스러운 자기를 드러 내지 않는 구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물질적인 연단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 그 소명을 불러일으키는 거예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눈뜨게 되는 거예요. 그게 그 사람의 경륜에서 더더욱 물질적인 궁핍 속에서도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훌륭한 촉진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성탄절입니다. 구정 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떡은 좀 해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다. 그러한 식의 구걸에 의존하는 구제 보다는 자신의 삶 속에서 그것이 많이 젖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자기 자신의 돈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반은 공적자금이라고 생각하셔야 해요. 언제나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 그 필요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쓰실 수 있도록 그러한 열려진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에게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확인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해요. 그래서 더 많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더 많이 섬기면서 그렇게 하면서 살 때 그 사람 자신의 삶이 한편으로는 탐욕이 흐르지 않으니까 너무 좋죠. 그렇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이 주신 물질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여 보시면서 더 많은 것을, 더 많은 것을 맡기시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나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이잖아요. 그러한 삶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