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고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하나님을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실 이 말이 다른 서신서에서 나온 것보다 빌립보서에 나온 것이 우리의 마음을 끕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은 옥 속에서 죄수의 몸으로 어쩌면 사형을 기다려야하는 그런 처지에서 이 편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사람들에게 권면할 때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힘이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그리고 실천하고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는 불붙는 마음이 있습니다. 겸비함이 있지만 그러나 그 겸비함이 비굴하게 느껴지지 아니하고 그 겸비함 때문에 오히려 그가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를 거역할 수 없게끔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지금으로부터 한 16-7년 전에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 은혜가 된 것은 이 편지를 쓴 바울 자신이 복음의 증거를 인하여 매인바 되어 옥 속에서 이제 출입도 제한받으면서 옥 속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다는 이유,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자신에게 주신 거룩한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신명을 바쳤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가 이렇게 고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 떨어지게 되었고 그 상황 속에서 바로 이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커다란 감화를 주고 그리고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영혼들을 가르치십니까? 영혼들에게 권면하십니까? 지체들에게 말씀으로 지체들을 권면하고 올바른 삶을 살도록 교훈하는 위치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족들이나 혹은 여러분의 주위에 있는 누구에게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참 진리를 가르치고 교훈하고 일러 주어야 할 처지에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이미 자기가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대로 살고 있다면 이미 여러분들의 말이 능수능란하지 않고 다소 어눌하여도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거룩한 실천에서 비롯되는 영광스러운 감화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본문에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묵상해보십시오. 착고에 채워서 언제 형장으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죄수, 재판을 했지만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아는 것은 뭔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참 구주라고 하는 사실을 전파하고 죽기까지 동족들의 영혼을 사랑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지금 이 감옥 속에서 이 편지를 쓰면서 그는 자기를 포함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그토록 사랑했던 죽고 싶어도 그들 때문에 죽을 수가 없었던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바로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주님을 많이 믿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다만 믿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라 나를 봐라. 내가 바로 그렇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이렇게 자기를 바쳐서 자기가 가르치는 교훈을 실천하고 거기에 삶이 담겨있으니까 단순한 말 하나도 이천년의 시공을 넘어서 오늘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르치는 바를 따라서 우리가 먼저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의 선생이 아니라 먼저 삶의 선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이 한번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이 하는 것처럼 책상에 앉아서 주석 펼쳐놓고 다른 사람의 설교집 펼쳐놓고 설교원고를 써본 적이 없다고 하니까 그럼 어떻게 하는가 한수 배우려고 물었더니 나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설교 자체를 준비해본 적이 없다. 나는 설교하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설교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위대한 감화는 자기가 가르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교훈이 자기의 삶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진액과 피가 흘러서 묻어나오는 교훈입니다. 그것은 어눌하고 논리가 모자라도 사람들의 가슴에 뜨겁게 와서 박히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웃으면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가슴이 섬뜩하고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맞아. 기도해야지. 쥐뿔도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기도해야지 됩니다. 그러면 자기는 그렇게 합니다. 이게 바로 거룩한 실천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감화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본문의 내용 속에서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두 가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잘 믿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어지지 않고 머리만 굴리며 살던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면 믿을 수 없었던 마음에 믿음이 생깁니다. 상황을 바라보면서 성경을 덮어버리던 사람들이 이제 성경을 통해서 자기 상황을 보게 됩니다. 자기의 처지를 보면서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대들던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 하나님의 긍휼이 자기를 향해 불붙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합니다. 모두 은혜를 받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참 이상한 것이 이렇게 은혜를 주시면 강한 믿음이 생기는데 왜 그 믿음이 견고하지 않고 팥죽 끓듯이 막 끓다가 다시 주저앉고 이런 일들이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또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그런데 아니 그럼 왜 고난도 안 받았는데 믿음이 식습니까? 그러면 믿음은 고난을 통해 유지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그 의도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랬는데 사실은 고난 자체가 목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고행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 죄와 불순종으로 가득 찬 세상이기 때문에 또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자신의 육체 가운데 사는 인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믿음이 생겨서 그 믿음을 따라 살며 순종하려고 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그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르거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떠나서 불순종하는 길로 가야지만 그 고난을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옥에 갇히는 것을 좋아했겠습니까?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을 때 신이 났겠습니까? 내팽개쳐서 죽은 자처럼 여겨졌을 때 바울은 그 순간이 짜릿짜릿하고 아주 환희가 넘쳤겠습니까? 아닙니다. 은혜를 받아도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왜 그가 왜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까? 왜 그가 그 폭풍을 뚫고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지나서 왜 로마에까지 끝까지 가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그를 불러주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택한 것은 이방과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 내가 너를 택했다. 그리고 내가 너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룰 것이다. 나는 이룰 것이니 너는 순종해야지 된다고 하는 것이 바울이 가지고 있는 사명이었고 그 하나님이 그런 사명을 주신 것은 그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게 될 때 마음속에 일어나게 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순종하다보니까 지금 고난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좇아간 것이 아니라 순종을 좇아갔습니다. 그랬더니 고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갈 길을 택하고 불순종할 길을 택하는 대신 고난을 받으면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룰 주신 사람들에게 이런 삶이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일수록 고난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더 많은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어서 이번 주일날 교회에 갈까말까 하는 사람에게 너, 이 민족의 교회를 새롭게 하여라. 그런 사명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사명은 교회에 잘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이제는 교회에서 열심히 더 충성하라.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나중에는 이 영광스러운 조국교회에 영광의 회복을 위해서 너희 몸을 역사 속에 산제물로 드려라.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은혜를 못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은혜를 못 받고 왔다갔다 죽은 사람은 그냥 총살당한 것이지 순교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 커다란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순종해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더 많은 계획이 있고 더 큰 의도가 있고 더 많이 순종해야지 되니까 더 많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더 온전해져야지 되니까 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주님의 능력이 임했는데 왜 고난을 받습니까? 능력이 없을 때 고난을 받지 능력 받으면 주여! 하면 고난도 물러가고 어려움도 물러가고 핍박하던 사람들도 쓰러질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서 하나님의 능력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네가 그 능력을 받아서 그 능력에 어울리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이 고난이 싫고 고난을 마다하려고 하면 반드시 우리는 불순종의 길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지연시키거나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를 유지하는 최고의 비결은 은혜를 주신 계획대로 사는 것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사람은 큰 계획대로 살고, 작은 은혜를 주신 사람은 작은 계획대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큰 계획이 드러납니다. 더 큰 하나님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더 큰 의무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더 크게 순종하도록 요구받게 됩니다. 그리고 더 크게 순종하려고 할 때 고난도 넘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 무서워서 하나님 앞에 은혜 달라고 기도하겠는가.’ 여러분들은 오늘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기억해야지 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바울이 이 빌립보서를 옥 속에서 옥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썼습니다. 여기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쁨”이라는 단어가 18번이나 나옵니다. 얼마나 신기합니까?
옥 속에서 이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의 고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고난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주님이 자기에게 은혜룰 주신 계획대로 순종하면서 살려다가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옥 속에서 생명과 자기의 장래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옥 속에서 불후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옥밖에 있는 자유한 사람들에게 “너희는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너희는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키시리라.” 기쁨을 계속 말합니다. 뭘 보여줍니까? 이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의 계획대로 순종하면서 살려고 했을 때 고난이 넘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고난 받는 자들을 하나님이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위로와 그리고 하늘의 거룩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기쁨, 세속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기쁨은 낭비하고 쾌락을 즐기고 이 세상의 즐거움을 좇는 사람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기쁨은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사람만 맛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자기를 버려도 주님을 높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삶의 방향이 그렇게 된 사람들, 그래서 그렇게 살고 싶어 하고 그래서 그 길로 걸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기쁨을 말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이기고 시련도 너끈히 이기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생하는 것과 고난을 받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고생은 고생이고 고난은 고난입니다. 주님의 목적과 그리고 주님께 순종하고자하는 의도 없이 고생을 하는 것은 그냥 고생하는 것입니다. 고생하는 사람에게는 거룩한 기쁨이 없고 마음속에 참으면 참을수록 한이 되고 상처가 되어서 주저리주저리 원망이 주렁주렁 매달립니다. 결국은 그 더러운 열매가 자기의 삶, 이웃의 삶, 가정의 삶 속에 깃들이면서 한 맺힌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기쁨이라고 하는 해독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믿음을 따라 살고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획을 따라 살기 위해서 순종하려고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는 사람, 아픔을 당하면서도 상처를 받으면서도 불순종하며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래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고난보다 더 큰 거룩한 기쁨을 그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남들이 바라볼 때 눈물겨운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이제는 발은 땅에 닫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쳐가도 우리의 눈은 하늘을 들어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봅니다. 그리고 하늘의 거룩한 신령한 기쁨이 우리를 지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가시밭길을 걸어가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바지는 다 찢어지고 다리는 가시밭길에 가시철망에 찢어져서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얼굴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으로 가득 찬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말하면서 소망 가운데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가시밭길은 잠시 후에 끝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고난의 길이 끝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르심이 임할 때 그들을 들어 올려 그 기쁨의 영원한 나라로 옮기실 것이라고 하는 소망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족하지만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이 바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요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달게 받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며 주님이 주신 이 은혜의 계획을 따라서 찬송하며 걸어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인생을 사셔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