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복음에 빚진 자로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3-15)
녹취자 : 오희열
어느 해 초여름 6월이 조금 지났을 때, 아주 큰 비바람을 동반한 태풍이 온 적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생각이 잘 나질 않지만 대개 5월이 지나고 6월, 7월이 들어서게 되면 벼에 꽃이 피게 됩니다. 그리고 꽃이 지고 나면 알곡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덜 익은 벼 이삭을 까서 보면 하얀 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햇볕을 받으며 시간이 흐르면 여러분이 오늘 저녁에 드시고 온 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매가 여물어야하는데 바람이 불고 비가 오니까 꽃이 다 덜어지고 게다가 한참 곡식이 햇볕을 받으면서 자라야할, 알이 배겨가는 8월말에 큰 홍수가 났습니다. 논에 물이 차서 벼들이 다 쓰러졌던 것입니다. 한 30년 전만해도 홍수가 나면 엄청나게 크게 났습니다. 그때는 나무가 없으니까 비가 오면 바로 토사가 흘러내리고 강을 한없이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많은 물들이 논으로 들어와서 논을 다 쓸고 지나가버렸습니다. 여름에 그렇게 바람 불고 비와서 꽃이 떨어져서 실패했는데 가을에 태풍이 와서 홍수로 논이 물에 잠겨버리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 다 여물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곡식들을 바라보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수건을 머리에 쓰고 하늘을 향해서 통곡하는 농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앞에 십자가만 있으면 정말 회개하는 장면일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통곡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실린 사진이,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제 가슴에 배겨서 지금까지도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그것이 생각납니다.
왜 그 사람들이 다른 때도 아니고 가을날, 홍수가 할퀴고 지나간 논밭에 나와 주저앉아서 하늘을 우러러보면 눈물 흘리고 통곡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국 겨울부터 농사를 준비하고 봄이 와서 못자리를 내고 땅을 기경하고 물을 대고 모내기를 하고 비료를 준 모든 과정들이, 종류는 여러 가지였지만 목표는 오직 하나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열매를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수리시설이 잘 되어있지만 예전에는 천수답 같은 것들은 제때에 맞추어 하늘을 열어서 하나님이 비를 주시지 않으면 소망이 없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한밤중에도 거적때기를 쓰고 논으로 나가서 물고를 열어주고, 물이 없으면 지하수를 퍼다 주거나 심지어는 달구지에 물을 실어다가 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몸부림을 쳤는데 그가 활동한 모든 활동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흙과 더불어 씨름하고 어떤 때는 물과 더불어 씨름하고, 추위와 더위와 씨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과 씨름하든지간에 마지막 목표는 열매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정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해에는 얼마나 풍년이 들었는지 유사 이래 이런 풍년이 없다면서 농부들이 추수를 하며 흥겹게 농악을 부르는 광경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의 저와 여러분들은 도시에 사니까 풍년의 즐거움을 저부터도 잘 모릅니다.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기쁜 것과 내가 기쁜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풍년의 기쁨을 말해봐야 이해를 못하니까 이런 예를 든다고 합니다. 어느 날 회사에 갔는데 사장이 직원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예정에 없던 것인데, 금년 한 해 동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저녁에 퇴근할 때 총무과에 들러서 500% 보너스를 받아서 가십시오.”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실감이 날 것입니다. 100만원 월급을 받는데 갑자기 그날 사장의 얘길 듣고 총무과에 갔더니 500만원을 준 것입니다. 사람들이 월급 탄 게 아니라 계 탔다며 좋아할 것입니다. 이렇듯 농부의 즐거움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열매입니다. 열매는 여름 동안에 이루어졌던, 그리고 봄 동안에 이루어졌던 농부의 모든 고통에 대한 완전하고도 유일한 보상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으로는 농부의 고통과 수고가 보상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십시오. 열심히 일을 하고 고생을 했는데 열매는 못 거두었지만 사람들이 와서 “당신처럼 일을 능숙하게 잘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거나 혹은 “당신네 밭은 참 좋은 길목에 자리를 잡았네요.”, “당신네 논은 풍수지리학으로 볼 때 아주 훌륭합니다.” 하며 아무리 칭찬을 해도 농부가 봄, 여름, 가을에 이르기까지 뼈 빠지도록 고생하고 수고한 것에 대해서 아무런 보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그런 것에는 상관이 없습니다. 가을이 되어서 다른 많은 논에는 풍년이 들지 못하고 어려움을 당했는데 내 논에는 기가 막히게도 헤아릴 수 없는 수확을 거둬들여, 유사이래의 풍작을 거둔 것입니다. 100가마를 예상했는데 130가마가 나오는 큰 수확을 거두었을 때, 그때의 기쁨과 즐거움은 과거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모두 보상해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놀라운 수확을 거두었는데도 그것이 별로 기쁘지 않고 그것을 위해서 고생한 생각만 자꾼 난다면 그 사람은 몸으로는 농사를 지어도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을 한 번도 못 만났습니다. 바울은 가지 못했지만 복음은 이미 들어가서 거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히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선교의 바람은 휩쓸고 지나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매이지 않는 복음이기에 로마까지 들어갔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누가 전한 사람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바울은 기뻐하면서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장엄하게 설명하면서 제일 처음 쓴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자체가 OOO(녹음이 끊어져 있습니다)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 선교적인 편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써내려가다가 바울은 “내가 얼마나 너희에게 나아가고 싶어 했는지 아느냐”라고 합니다. 왜 바울이 그토록 로마를 방문하고 싶어 했습니까? 거기 가서 무슨 대접을 받으려고 가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시면 나를 통해서 너희 가운데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실 텐데..’ 하고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길이 막힌 것입니다. 결국은 갑니다. 그런데 그토록 꿈에 그리던 로마를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길이 막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편지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 싶어 했는데, 그것을 너희가 좀 알아다오. 내가 너희에게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것은 다른 이방인들에게 나아가서 방문하고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열매가 많이 나타났던 것처럼 로마에 있는 너희들에게도 놀라운 믿음과 구원의 열매가 맺히기를 내가 사모한다.” 사도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게 만들었던 참된 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사도바울이 마음속에 이런 복음에 대한 사모함을 간직하고 그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기의 모든 희망과 꿈과 기쁨을 걸었던 것을 읽으면서, 우리는 바울이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후에 목회자들이 그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몇 주 전에도 제가 이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만,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직자의 삶과 평신도의 삶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방인들 가운데 전도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성취하고자하는 목표에 대해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꿈이나 목표는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자기 암시적인 꿈이 있고 또 하나는 계시적인 꿈이 있습니다. 자기 암시적인 꿈은 내가 이 세상에서 뭔가를 해서 성공을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 성공은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지위가 높아지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목회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큰 교회를 만들어보겠다거나 구역을 인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구역을 한번 키워보겠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계시적인 비전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그 꿈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 특징은, 앞에 있는 꿈은 인간의 결심에 의해서 유지되기 때문에 결심을 놓으면 언제든지 무너집니다. 그러나 후자의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요셉의 경우에는 오래전에, 자기가 원하지도 않던 때에 “내가 너를 들어서 네 형들과 네 부모보다 뛰어난 믿음을 주고 네 앞길을 인도해서 온 세상의 민족들을 멸망가운데서 보존하리라”하고 약속했던 것은 계시적인 비전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로 가고자하는 사도바울의 소원, 열매를 맺고자 하는 소원을 볼때 사도바울은 그 열매를 대단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든지 우리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점검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열매에 대해서 나는 얽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이 부족한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주인이 기뻐하든지 말든지 난 별로 상관없다, 난 내 일만 하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포도원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 포도원이 벌레를 먹든지 열매를 맺든지 말든지 그런 것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나는 때가 되면 물주고 비료 주는 것으로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삯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여러분의 밭을 맡기시겠습니까? 맡길 리 없습니다. 비록 종의 신분이지만 그 포도원이나 농토를 가꿀 때에는 자기 것처럼 애정을 가지고 오직 열매 하나를 위해서 수고하면서,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에는 좌절하고 슬퍼하면서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우리에게 그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사도 중에 이방 선교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으로서 카퍼레이드를 로마에 가서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손에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로마에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었던 목적은 오직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중에 얼마를 구원해서 예수 믿게 만들고 확실히 구원의 열매를 맺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세워주기 위해서 그토록 로마를 가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의 소망이 그렇게 열매 하나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그 로마에 가기를 그토록 그리워하고 사모했지만, 그때 그렇게 사모했을 때 그는 다른 이방인의 도시를 방문하며 선교했었던 것처럼 로마에 가서 담대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각성하고, 에베소에서 있었던 일과 같이 자기의 사신 우상들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그런 놀라운 부흥과 영적인 변화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바울의 생각이었고 다른 모든 도시들에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셨는데 로마로 갈 때는 죄수의 몸이 되어서 판결을 받기위해 로마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도바울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매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약에 로마를 방문하고 심방하는 이유가 대접을 받고 자기의 권세를 보여주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방의 사도의 위엄을 보여주는 데에 있었다면 그가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는 것은 정말 자기에게 원하지 않는 바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자기를 과시하는 데에 있지 않았고, 목회적인 업적을 쌓는 데에 있지도 않았고 오직 영혼을 구원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떻게 가든지 자기의 방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만 있게 된다면 그는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 갈 수 있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끌려갈 때에는 그가 어떻게 죄수의 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가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준비를 완벽하게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많이 받아야할 사모함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주실 은혜들을 기대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내가 왜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큰 능력과 은사를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결론들을 자신의 삶의 뒤를 돌아다 보면서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10년 혹은 20년 신앙생활 해 왔습니다. 어떤 열매들을 우리들이 맺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열매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되고 있습니까? 삶 속에, 인격 속에 무엇보다도 바울은 이 열매를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을 열매를 맺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품꾼이고 노예였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열매를 맺을 때, 진실로 그 주인에게 충성된 일군은 그 열매가 맺어질 때 주인과 같은 마음으로 한없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한없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이유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한 영혼이 구원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그 소식이 우리에게 한없는 기쁨과 빅뉴스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누가 논을 사고 땅을 사고 집을 사는 것이 큰 뉴스가 아니라, 누가 신앙에 대해서 냉담하더니 이번 주에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잘 하기로 굳게 결심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기쁨으로 들려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한 사람이 예수를 고백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때 충만한 기쁨을 우리들이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사랑의 교회 다니는 부목사님들을 만났는데 이런 얘기를 합니다. 심방을 하는데 참 이상한 것이, 교회에서 멀리 갈수록 사람들이 뜨거워지고 가까이 올수록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 나오고 계속 속 썩이는 사람은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코앞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교회 가까이 사는 신자들 중에 불분명한 신자들이 많다고 하니까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건 당연한 얘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먼데 있는 사람은 나오기가 너무 힘드니까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마음이 되어버리면 아예 안 나와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시간, 세 시간씩 차를 타고 나오는 것을 보면 뭔가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게 모두 신앙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교회에서는 한 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어찌되었든지 사람이 많아지면 교회로서는 좋은 아니겠습니까? 계속 사람들이 떠나서 나중에 목회자와 사모 둘만 남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늘어나서 많이 모여야 말씀도 듣고 변화를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그 교회에서 교역자 회의를 하는데 한 부교역자가 이랬답니다. “에이씨, 왜 우리 교회로만 다 오는 거야? 딴 교회로도 좀 가지!”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 포도원의 품꾼으로 삼으신 그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영혼을 그렇게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목회의 소명이 있는지 없는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회의 소명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받기 전에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먼저 봐야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런 것입니다. 말씀이 꿀같이 달고 맛있고, 누구를 전도할 때에 기쁘고, 교회에서 봉사할 때 참 즐겁고, 물질을 교회에 바칠 때 신이 나고 아깝지 않고, 교회를 위해서 선행을 하는데도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내게 위로가 되는 것, 이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아니면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이 없을 것 같을 때, 그것이 바로 목회의 소명입니다.”, “어렵네요.” 어려운 게 아니라 기초입니다. 기본적인 삶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우리는 모두 그렇게 열매 맺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아버지의 포도원의 품꾼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9시에 왔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10대나 20대 때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6시 퇴근 시간인데 5시 50분쯤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 사람은 죽기 전에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래도 모두 아버지의 집의 품꾼들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을 가지고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충성 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열매를 향한 기쁨을 공유하고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향한 기쁨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떨어지는 그 실과들을 보면서 슬퍼하고 마음 아파할 수 있는 아버지의 고통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렇게 열매를 맺는 그 목적을 위해서 로마를 방문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런 열매를 맺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늦게 맺히는 열매가 있고 때로는 빨리 맺히는 열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든지 우리는 열매를 맺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고의 열매가 영혼을 추수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이는 그러한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소원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있어서 그런 열매 맺음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이것을 말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내가 빚진 자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 사도바울이 이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을 빚졌습니까? 돈을 빌려 썼습니까? 복음의 빚입니까? 그럼 사도바울에게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었습니까? 미안하지만 사도바울은 헬라인에게 빚진 게 없고 로마인에게 꾸어 쓴 것 없고 야만인에게 무엇을 사다가 쓴 일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사도바울 그들에게 신세진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빚졌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사도바울이 빚진 것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에게 빚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빚진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는데, 그리스도에게만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전에 누가 저에게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늘 전도사님의 은혜가 생각이 납니다.” 했습니다. 저는 “그러지 말아라, 이제 나에 대해서 더 이상 부채의식을 갖지 말아라. 내가 선한 일을 해 준 것도 없지만 혹시 있다면 그것은 내가 너 때문에 해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해 준 것이니까 너도 나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에게 빚졌다고 생각하고 자꾸 선물 같은 것을 사오지 말아라.” 했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이런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과 로마인에게 전혀 빚진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었습니까?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인과 무슨 관계가 있고, 고린도인과 무슨 관계가 있고, 에베소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었습니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으면 평생 한 번도 안 만났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 대해서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빚져 보셨습니까? 친구에게 조금 꾸어 쓴 것 말고 빚을 정말 많이 졌을 때 다가오는 것은 위기의식입니다. 그 채주가 악덕이면 악덕일수록 더 위기의식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빚에 대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어찌됐든 간에 좋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태평하고 편안하게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남의 돈 쓰고 태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과는 절대 거래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절대 돈을 빌려주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돈을 얻어 쓰고도 부채의식을 전혀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부채의식을 느꼈다고 하는데 사실 빚진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빚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께 깊이 빚을 졌을 때, 빚진 느낌을 받았을 때, 이런 부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은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부채의식을 느낌에 있어서 그리스도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고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사도바울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처음에는 복음도 모르고 예수도 몰랐습니다. 신앙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유대교의 잘못된 전통 아래에서 오히려 예수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배척하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편투표를 하며 증인으로 섰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던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신학적 편견들이 무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무너져 나간 것이 아니라 단숨에 와르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너지면서 함께,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종에 대한 심리적인 편견도 함께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영남, 호남을 가르며 싸우는 것을 보면 그 사람들이 정말 거듭난 사람들인지 묻고 싶은 것입니다. 복음을 정말 알면 그 일은 불가능합니다.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니까 깨닫게 되었는데, 인간이 그어놓은 수많은 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 많은 사람 가난한 사람, 바울 자신과 같은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지도를 받는 사람, 헬라인과 유대인, 이렇게 수없이 갈라놓습니다. 이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줄밖에는 없다는 것을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과 아직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사람, 오직 이 두 사람밖에는 구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을 깨닫고 보니까 즉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소명이 다가왔습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내가 네게 나타난 것과 장차 네게 나타날 일들의 사환과 증인은 삼으려 함이라. 내가 너를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손에서 건져내어서 저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놓는 도구로 너를 사용하기 위해서 전도자로 불렀다.” 그렇게 열리고 나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라고는 눈 먼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보지를 못하고 직가라고 하는 거리로 끌려갔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받은 것이 눈의 상처밖에는 없지만 그의 영혼 속에는 그 만남을 통해서 보화와 같은 것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영적인 자산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그 십자가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우는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에 놀랍게 매였을 때 깨닫게 된 것은, 나는 완전히 빚진 자다. 도무지 내 안에는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내가 의롭게 살았다고는 했지만 알고 보니까 로마서에 나온 그대로, 하나님의 의로 나타나신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내가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 쳤지만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극악하게 불순종하며 대적한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는 자신을 도무지 구할 수 없고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아봐야 하나님을 향한 반항밖에는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결국 하나님의 의가 되셔서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십자가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한 의로서 그리스도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눈을 뜨고 보니 자신의 모든 삶이 온통 그리스도 예수께 빚진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자기에게 다가올 분깃이, 눈물을 흘리며 땀을 흘리며 살아도 마지막 자기에게 다가올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밖에는 없었는데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고 아무 의를 행한 것이 없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향해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막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나서 아무 공로 없는 그에게 부활의 소망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몸이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 죽는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때부터 죽는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단지 보증만하고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 순간마다 강하게 그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핍박과 도전과 고난에 직면했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손을 붙잡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담대하게 전하라. 내가 네 옆에 너와 함께 있다.” 과연 모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함께 있을지니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바울의 삶 속에서처럼 다이나믹 하고 완전하게 이루어졌던 삶을 구현했던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왜 입니까? 그가 복음의 전파, 열매를 요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에 대한 도전, 선교에 대한 촉구 앞에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큰 꿈이 그의 꿈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뜨거운 열망이 그의 열망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타는 마음이 그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를 바라는 그 뜨거운 사랑이 그의 사랑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역사하시는 그 이유가 바울이 역사하고 있는 동일한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 그리스도 예수의 거대한 계획 앞에 자신의 삶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누구에게도 보이신 적이 없었던 놀라운 임마누엘의 은총으로 자신의 계획에 순종하는 바울의 인생을 끌고 가셨던 것입니다.
자격은 없지만 저는 정말 이런 인생을 한 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오래 살면 무엇 하겠습니까? 살만큼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살다죽으면 또 무엇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들고 오직 나를 구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사랑, 구원의 기쁜 소식이 증거 되고 전파되어 영혼들이 살아나고 죽은 영혼들로 가득한 동토의 땅에 꽃피고 새가 우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의 동산이 이루어지는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쓰여 질 수 없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나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우리가 기여할 수 있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거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믿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욕을 받는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구원의 열매를 위해서 자신을 아끼는 마음 때문에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른 방면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신앙의 신비는,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고백하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은혜에 대한 그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감사하고 감격하기 때문에 흐르던 눈물이 그치고 나면 즉시 눈뜨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구속의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결국을 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전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불과 20년 10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고 지위가 높아지고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지에 이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면서 그 사람의 인생을 영혼과 관련해서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영혼의 빛을 받고나니 이 세상의 복된 것들이 복된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세상에서 부러워해야 할 것들이 부러워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거듭난 가치관을 인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부채의식이 얼마나 심했는지 처절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구원하셨을 때, “내가 이 놀라운 사랑으로 너를 구원해낸다마는 조건이 있다. 네가 전도를 잘 하고 목표량을 달성하면 그대로 너를 구원하려니와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도로 무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처절한 마음을 느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주님은 사도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내가 복음에 빚진 자로라, 부득불 할 것을 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으리로다.” 라고 느끼게 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중요한, 아직까지도 예수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로마에 이토록 많이 남아있는데, 내가 거기에 발을 들여놓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 바울에게는 고통이 되고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를 모르고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삶의 비참함과 또 하나는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며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이 받으시는 불명예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라는 말도 모두 거짓말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서 그 복음을 듣고 영원히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구속자라고 하는, 십자가를 향한 진정한 고백과 죄 사함이 없이는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공허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속에 있었던 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처절한 부채의식은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대한 부채의식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한다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부채의식인 것입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로마 사람들이 얼마나 더럽게 살아가는지를 알았습니다. 물질이 많고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모든 타락은 로마로부터 시작되어서 온 땅에 흘러갔습니다. 그런 것을 알았기 때문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하고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 없이는, 그들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손톱만큼의 여지도, 티끌만한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을 깊이 알았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부패한지를 보았고, 그 부패한 사람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왜 입니까? 자기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그가 받았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것만큼 부채의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뭐라고 합니까? “내 골육지친 중 몇 명이라도 예수를 믿고 전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서 저주를 받고 지옥에 떨어져도 나는 상관이 없다.” 왜 입니까?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즐거워하시고 내 동족이 영생을 누리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다면 나는 지옥의 불 가운데 고통을 받아도 즐거워하시는 하나님과 구원받고 기뻐하는 내 동족을 인하여 불속에서 감사하리라.” 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빚진 자로서의 부채의식이 얼마나 처절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모독을 받을 정도로 큰 빚을 져본 적이 없습니다만 주위에서 보면 빚진 사람은 사람도 아닌 취급을 받습니다. 빚쟁이가 몰아붙이는 것을 보면 무섭습니다. 그때 그렇게 비참하게 온 집안이 빚에 시달리고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을 보십시오. 빚진 자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민주사회라고 해도 빚진 자는 종이 되어서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빚진 자는 꾸어준 사람이 아무 때나 찾아와도 무례하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모욕을 받으면서 살 때, 오직 그 빚을 갚아야하겠다는 열망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옛날 얘기가 나와서 죄송합니다만,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가계가 어려우셔서 빚을 얻어 쓰신 모양입니다. 그때 빌려준 아줌마가 자기네가 꾸어준 빚을 안 갚는다고 약을 들고 저희 집으로 와서 돈아 안 주면 그 약을 먹고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안 돌아가고 방이 딱 하나뿐이데 방 한 가운데 누워서 밤새도록 꺼이꺼이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오죽했으면 어른들은 다 피하고, 저는 어린 마음에 그 아줌마가 불쌍하기도 하고 제가 괴롭기도 해서 저한테 돈이라도 있으면 갚아주고 돌려보낼 텐데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다행히 며칠 후에 아버지께서 오셔서 그 빚을 갚아주셨습니다. 정말 빚진 사람, 그 빚을 갚아야하겠다는 부채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그 빚진 것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나 깨나 빚 걱정입니다. 빚져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눈을 감으나 뜨나 채권자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부채의식을 느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느낀 부채의식이 아니라 ‘저 영혼들이 저렇게 죽어가는 것이 내 책임이다.’라고 하는 부채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구원하라는 명령에 내가 전폭적으로 순종하여 산다면 저들이 저렇게 비참하게 죽어가지 않을 텐데 하는 강한 부채의식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가족들 가운데 여러분들을 먼저 예수 믿게 만드셨겠습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별로 없으실 것입니다. 왜 가족들 가운데 여러분들을 먼저 예수 믿게 만드셨겠습니까? 그리고 가족이 교회는 다 나오지만 왜 하필이면 여러분만 그렇게 열심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겠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들은 모두 형식적으로 살아가는데 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아가야하겠다는 결심을 늘 실패한 적도 많지만 언제나 하게끔 만들어주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남이 못 본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시고 남이 받지 못한 것들을 받아서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시고 남이 알지 못하는 복음의 세계와 믿음의 세계들을 알려주시고 여러분들에게 세상을 이기며 믿음으로 살아야하겠다는 선한 결심을,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매 시간마다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그 은혜를 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먼저 믿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미리 맛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미리 맛본 다음에 그 사랑과 은혜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증거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아무 대가없이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고 바울 자신의 고백대로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들의 괴수였던 자기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이 은혜로 받은 구원이 나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는 일이 있어야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그 사랑을 정말 깨달은 사람들이 그 사랑을 자기 가슴속에 묻어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이전에는 받았으나 지금은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가 자기 안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놓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신 이 사건이 얼마나 놀랍고 내가 예수를 믿게 된 사건이 전도해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기적과 같은 사건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나 다 내가 빚진 자다. 그들은 나에게 꾸어준 것이 없고 나는 그들에게 신세 진 적이 없었지만 그리스도 예수께 내가 빚졌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오늘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자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빚진 그 부채의식이 내 마음에 떠오를 때마다 나는 그렇게 안타깝게 구원을 열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영혼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제가 중고등부는 5년밖에 못했지만 주일학교는 오래 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평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주일학교나 중고등부나 구역장도 마찬가집니다. 그 평범한 사실 하나는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아이가 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에 대해서도 열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전도하기 위해서 힘을 기울이면서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한 영혼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전도는 자신의 영적인 관리를 위해서도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사도바울이 깨닫고 부채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헬라인이나 로마인이나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헬라인이나 로마인과 섞여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로다, 방배동에 사는 사람이나 사당동에 사는 사람이나, 부요한 사람이나 아주 비천한 사람이나, 외국에 있는 이방인들이나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나는 그들에게 빚진 자라.”는 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사도바울은 이들 가운데 전도의 열매가 맺어지를 사모하였습니다. 그 꿈을 하나님은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 안에도 이런 열매를 맺어야 하겠다는 간절한 사모함을 주셔서 우리가 이 복음을 전파함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이전에는 작게 알았지만 복음을 증거하며 더 크게 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