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2-5)
녹취자: 백지영
지난 시간은 제가 빠졌고 오늘도 이어서 복음전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생애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만난 것보다 더 큰 사건은 이 사람에게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거의 거기에 버금갈만한 깊은 결단을 한번 여기서 하게 됩니다. 그것을 바로 2장에서 싣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 고린도교회는 수많은 문제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우선 이 도시는 돈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돈이 많고 신앙이 떨어지니까 여러 가지 타락의 풍조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가 교훈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분파가 갈라지고 음행의 문제가 나타나고 그리고 파당이 생기고 은사의 문제로 교회가 일치를 보지 못하고 하는 혼란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진리를 아는 참된 지식의 결핍에 있었고, 또 하나는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것이지만 그러나 그 복음을 순수하게 간직하지 못하고 세상의 정신에 야합해서 복음의 정신이 타협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고린도교회의 실패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중립지대란 없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면 그는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추구하지 않으면 주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는 아주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재미있는 것은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로 가게 되는 것이 언제였느냐 하면 아데네를 거쳐서 고린도 교회로 바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데네에서 바울은 탁월했던 지식들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에피큐리우스, 에비그레오 학파 학자들과 함께 중대한 철학적인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논리적으로 압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복음의 열매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그 아데네에서의 사건을 통해서 바울이 일생에서 잊힐 수 없는 커다란 하나 교훈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곧, “복음이라는 것이 결코 논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철학을 굴복시킨다고 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 평범한 사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사도적인 각성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노라.”
여러분, 사도가 “작정하였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앞으로 내가 너희들에게 나아가서 설교를 할 때에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말하기로 했다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내 설교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신앙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든지 하는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은 알지 않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그가 왜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무엇이 이루어졌는지, 이것을 외치고 이것을 아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다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는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내 메시지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못 박히고 그가 왜 죽으셨고 그가 누구였는지, 그가 죽으심으로 어떤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는지, 그것이 아니고는 내가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의식의 세계도 다른 것으로는 채우지 아니하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결심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외의 지식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귀한 복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인생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저 같은 사람의 말이면 워낙 아는 것이 미천하니까 그렇게 말할 수 도 있겠지 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같이 많은 학문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소시민들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래 많은 지식이 없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놀라운 교리들을 모두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교회를 핍박하는 열심을 가진 철두철미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의 자랑은 지식이었습니다.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입을 열어서 무엇이 신앙이고, 누가 하나님이시며,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직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이해를 하고 들으십시오. 곡해하시면 안 됩니다. 모든 지식은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영적인 변화와 관련시켜서 이 지식의 문제를 논할 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큰 변화를 받거나 아니면 그런 변화에 대한 갈망이 심히 클 때, 그때 그는 지식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게 됩니다. 지식에 대한 사모함이 없으면서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은혜에 대한 모든 사모함은 결국은 지식을 향한 사모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그 지식이 무엇입니까? 참 하나님이 누구시고, 나를 구원하신 분이 누구며, 나를 구속하신 십자가가 무엇이고, 그리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사모함, 이것이 지식에 대한 사모함입니다. 그렇게 될 때 다른 모든 지식들이 하찮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학교에서 기도하기란 과목을 종강을 했습니다. 그중에 어느 여학생 하나가 일어나더니 눈물을 거의 글썽이면서 질문하였습니다. 종강시간에 마지막으로 질문하라고 하니까 여러 사람이 질문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그 여학생이 질문한 것입니다. 교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갔는데 한 학기 공부하고 나니까 온통 뒤죽박죽이 되 가지고 이제는 자기가 도저히 자신을 지탱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나는 뭔가 깊이 기독교신앙이라고 하는 것들을 오해하고 있었고, 나의 영적인 상태, 영적인 삶에 대한 나의 이해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그리고 내가 그런 변화를 갈망하고 소망하지만 그러나 그 변화가 무엇인지 나는 알지도 못하겠고, 그런데 결국 당신이 쓴 모든 책들을 읽어보면 그 변화는 하나님에게 달렸다고 이야기하는데 자기로서는 그 대답으로서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오히려 이런 것들을 모를 때는 편하게 지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을 알고 나서는 말할 수 없는 깊은 무력감 속에서 고통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누군가 여러분들에게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무어라고 말하겠습니까? 저는 우선 말했습니다. “자매여, 그대는 복되니라.” 그것은 무너짐의 시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 그를 기다렸다 축복했던 선지자 시몬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아이를 축복하며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든 백성들의 폐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느니라.” 패배가 먼저입니다. 세워지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무너지지 않으니까 서지를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자랍니까? 왜 변화가 없습니까? 그리고 변화가 왜 그렇게 느립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무너지지 않으니까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패함이 없으니까 흥함이 없는 것이고, 절망이 없으니까 진정한 신적 소망이 여러분들 속에 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릇된 신앙이 무너지지 않으니까 똑바른 신앙이 여러분들 앞에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된 태도들이 포기되어지고 부인되어지고 거절되어지고 미워함을 당할 때, 올바른 신앙의 태도들이 촉진되어지고 격려되어지고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대는 복이 있노라.” 무엇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인가? 저도 옛날에는 하나님이 형통한 길만 주시면 만사오케이될 줄 알았습니다. 이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형통한 길이 열려도 그것이 그의 신앙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제때에 시집장가가고, 집 사고, 차 사고, 땅 사고, 논 사고, 밭 사고, 철철이 좋은 옷을 사 입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편안한 침대에 잠자리를 들어도, 하나님의 축복으로는 패배하고 있는 그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이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패배를 안겨 주실 수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신앙과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고치고 치료할 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자신의영적인 문제가 그렇게 깊고 핵심을 향해 치닫게 될 때, 도대체 그 사람에게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뉴스와 쏟아지는 홍수와 같은 수많은 정보들이 그가 직면하고 있는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하루에 6장씩, 구약4장 신약2장 읽는 것 가지고 만족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6장 읽었다는 자기성취가 아니라, 지금 패하고 있는 자신을 완전히 패배케 하고 그리하여 자신을 복음 안에서 새롭게 세워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진리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말과 아름다운 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개 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무너지고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지혜 속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셔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셔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면 그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 새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만약에 바울이 처음 믿는 초신자들 혹은 막 고린도 교회에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우리는 이해가 갑니다. 정말 천하에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이미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잘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의 은사가 너무나 충만해서 은사끼리 충돌을 해서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생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런 면에서 고린도 교회는 상당히 영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새삼스럽게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다짐했다라고 하는 고백을 이 고린도 교회에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초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에 이렇게 복음의 도의 초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 사건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고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신앙을 붙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사도 자신이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자기화(化)된 신앙이 그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리를 들쳐 거리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해야지만 복음적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마도 아데네에서의 성공하지 못한 복음사역을 보면서 깊이 반성했을 것입니다. 그 반성이 저는 이 2장에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사도적인 선포와 그리고 그 선포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믿어지게 만들어서 항복을 받아내게 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입니다. 이것을 아데네에서의 사역을 반성하면서 오늘 이 고린도 교회에게 향해서는 같은 오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지금 이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는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영적인 권능을 한손에 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이르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는 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참 모습입니다. 강한 것같이 진리의 복음을 전하고 확신에 충만한 것 같이 예수의 구원을 증거하지만, 그러나 돌아서면 우리는 이러한 약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서를 읽어보면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정말 공감하게 됩니다. 한번 다시 한 번 선지서를 읽어보십시오. 그 선지서를 읽어보면 선지자들이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얼마나 자주 연약해 지는지를 선지서 속에서는 매장 넘길 때마다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이런 심정입니다.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노라.” 그가 진리의 말씀을 증거할 때는 더듬거리거나 떨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는 유창한 언어와 그리고 충만한 은혜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하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깊은 한계를 느끼면서 좌절하고 커다란 태산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연약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위해서 사역하는 사람들의 자기 인식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수고하고, 그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자신을 드리고 고난을 받아 본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이렇게 왜소한 존재가 되는 것 같은 깊은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더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교리는 너무나 모든 사람들에게 내놓고 말하기에는 부끄럽고 조잡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 형벌의 상징인 그 십자가에서,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나무에 매달린 자는 모두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하는 그런 사상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과 그리고 논리와 지혜에 있어서 뛰어난 헬라인들이 그 당시 복음전파의 대상이었는데, 십자가의 이 교리는 유대인들에도 호소할 수 없고 또 헬라인들에게도 호소될 수 없는, 능력으로 보자면 힘이 없는 교리요 지혜로 보자면 미련한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그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이 부끄러운 교리를 가지고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강한 부담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사도는 내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바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는 자기의 말과 자기의 전도하는 것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지혜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에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논리와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놀라운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들을 의지하는 것들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과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것만이 그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변화를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유일한 도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는 성령의 강력한 나타남과 그리고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자신의 입술 위에 함께 할 때에만 이 일들이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똑같은 말인데 누가 말하면 정말을 말해도 아닌 것 같고, 누가 말하면 들은 얘기를 말하는데도 그것도 진짜 같습니다. 교회 안에도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4년 후에야 예수님이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공과공부를 하는데 공과 제목이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게 무지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복음을 다시 들어야 될 사람입니다.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언젠가 어느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종말까지 얘기를 하는데, 자기는 교회 와서 수십 번도 복음 제시를 더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접 기도만도 자기가 생각나는 것만 해도 대여섯 번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영접을 그렇게 많이 하는지 모르겠는데 대여섯 번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복음을 전해주겠다고 하는 데 대해서 아주 기뻐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그 복음은 누가 전하나 다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기본적인 도리가 다 똑같습니다. 더구나 짧은 시간에 전해야 되니까. 그런데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왜 똑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깊이 찌르고 들어오면서 이전엔 웃으며 들을 수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오늘은 가슴을 뜯으면서 들어야 하는 그러한 사건으로 변화되는 것은 성령이 오셔서 그의 마음속에 증거를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증거해 주실 때 그는 신적인 증거를 통해서 마음에 참된 감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들이 의뢰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기술과 그리고 심지어는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수의 복음을 의지해서도 안 됩니다. 오셔서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증거하고 전파하는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때로는 그 말씀을 칼이 되게 하시고 방망이가 되게 하시고 때로는 불이 되게 하시고 때로는 침이 되게 하셔서, 그래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찌르고 태우고 어두움을 밝히게 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이 말씀 속에 깃들 그때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비밀을 알았던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 완고하고, 내가 이미 다 버린 세상의 지식들을 자랑하며 내가 다 버린 세상의 지혜들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자기 아성을 쌓고 그리고 자기 잘났다고 살아가는 이 우매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아데네에서 내가 놀라운 지혜와 철학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했고 사람들은 그 복음의 변증 앞에 입을 다물었고 유구무언이 되었지만,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그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생애적인 교훈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단순한 복음, 그리고 그 복음을 전파하는 자 위에 역사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말씀을 증거할 때 나타나는 강력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이것으로서 증거하고 전파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말하면서 다만, Only!, 다른 것 말고 오직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나타남으로, 그리하여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믿어지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몰랐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진정한 도구로서 자신의 복음 전도가 쓰여지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하늘의 능력으로 연단된 단 한마디의 말은 단지 인간의 지혜로 논리로 세워서 떠드는 수만 마디의 말보다 더 큰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한 말이 아름다운 활통에 들어있는 보기 좋은 화살이라면, 성령에 의해 기름 부음 바 된 한마디의 복음 증거는 장사의 시위를 떠난 강력한 화살과 같습니다. 그래서 죄인의 마음에 단지 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심장을 꿰뚫고 회개의 눈물과 뉘우침의 유혈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복음 전도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말씀을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간절한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기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후방에서 노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방에서 싸우는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가 어떻게 이 단순하고도 놀라운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비석대신에 이 구절을 자기 비문에다가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그는 사도행전 20장에서 말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매였습니다. 신적인 강제력이 그를 에워 쌓습니다.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바울의 생각과 사고와 인격과 삶과 삶의 목표와 존재하는 모든 이유와 동기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도 이미 풀 수 없는 단단한 밧줄이 되어서 자신을 결박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복음의 진리였습니다. 이 진리에 그는 붙잡혔습니다. 사로잡혔습니다. 풀릴 수 없을 정도로 굳게 사로잡힌바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루살렘에 가서 한번 큰 판을 벌려보고 선교역사에 남을 만한 커다란 복음전동에 공적을 쌓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말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예루살렘에 내가 올라가는 이유는 하나님께 내가, 복음에 내가 매였기 때문입니다. 그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목회의 목표나 선교의 목표나 꿈이거나 비전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단순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매인 바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은 자신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부름 받은 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삶으로써만이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되었고, 그 확신은 확신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처절할 정도로 가슴에 불타는 처절한 확신이었습니다. 그 확신과 그 복음의 매임이 그를 성령을 오히려 거스르며 올라가게 만들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성령이 그렇게 증거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성령의 그러한 환란과 핍박에 대한 예고를 오히려 뒤로하고, 그 이유 때문에도 매일 수 없을 정도로 더 강력한 매임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환난과 핍박이 기다린다고 하는 성령의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위협과 협박에 매이는 것보다 더 큰 것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바로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자에게 환란과 결박이 있을 것을 예고한 모든 예언과 성령의 증거를 뿌리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복음이 그것을 시켰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자기를 어떠한 죄에서 구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복음에 자신은 매여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구속의 십자가를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묵상하셨습니까?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 앞에서 여러분들이 진실로 무가치한 존재요, 그리스도가 아니면 나는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오로지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 때문이라는 고백을 하셨느냐고 오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읽어보면 말년에 쓴 것일수록 더 깊이 십자가에 매이는 것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좀 매인 것 같습니다. 십자가 설교할 때 제일 잘 우는 사람은 믿은 지 한 2년 미만의 초신자들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서 형식적인 신자가 된 사람들은 이제 아무리 십자가 얘기해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하자면 복음에 면역이 되었다고 할까요? 진리에 대해서 면역이 된 것입니다. 나중에는 진리에 대해서 감격하지 못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일에 면역이 되 버립니다. 그게 결국 무지무각한 삶입니다.
(예화) 필리핀에 갔을 때의 일인데, 자매 하나가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나중에는 나를 쫓아다니면서 이 친구가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얘기가 깊이 들어가니까 영어가 잘 안 통하니까 내가 영어로 말하면 따갈로그어로 통역을 해 주면서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래서 굉장히 예수 믿은 지 오래 된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옆에 서서 그 형제에게 복음의 도리를 설명하는 것을 보니까 아주 깊고 그리고 자기가 느끼고 있는 복음을 정말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래서 오래 믿었는줄 알았습니다. 예수 믿은 지 2년 됐다고 합니다.
이런 무지무각함들이 깊이 깃들이는 것입니다. 이 굳은살을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배에 기름기가 끼어서 거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지방질을 제거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예리한 말씀으로 우리 자신의 굳은살들을 도려내는 일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조적인 일입니까? 사도는 계속 처음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그 다음서부터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계속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리스도 외에는 내가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노라.” 심지어 말년에 가서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노라”(빌3:8)고 하였습니다.
배설물이 뭔지 아십니까? 성경이니까 좋게 번역한 것입니다. 똥입니다. 지극히 혐오스럽고 더럽게 여기게끔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인생이 깊어갈 수록 더 고상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자체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과 나는 간 곳없고 구속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처음에 그렇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해야지 그렇게 되지 잘못 들어오면 그런 것도 없습니다. 제대로 출입구로 들어오면 한번쯤은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보다 오늘도 예배 시간 전에 반주로 나오는 그 찬송,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반석이신 나의 주,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구속의 사건에 직면할 때, 우리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존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앞에 심각하게 직면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그리스도인일까요? 저는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십자가는 점점 멀어집니다. 옛날에 십자가 앞에 나오기 위해서 버렸던 것들이 다시 가깝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한참 흘러가면 그 다음에는 십자가는 이미 다 띠었다고 생각을 하면서 복음에 대해서 냉담해져 가는 것입니다. 형식 안에 갇힌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에서 무슨 행정을 잘 처리하고 눈치가 빠르게 교회 일을 하는 것 그런 것을 가지고 신앙의 연조라고 생각하는 ...... (46.07 녹음 끊어짐)
하나님과 우리 속에 진정한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이 실질적으로 늘 나타나서 그래서 바울처럼 계속 깊어집니까? 빌립보서나 갈라디아서나 이런 쪽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디모데서나 인생의 말년에 쓰인 편지를 볼수록 십자가와 더 깊이 합일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의 가르침의 점점 더 전체부분을 십자가에 의해서 전체의 부분이 십자가에 의해서 압도되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생활의 진전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사도는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실존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목숨을 버려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 일을 그치게 할 수 없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적인 강제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는 바로 이런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 그때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고 굳은살을 뚫고 들어가고 그리고 영혼 깊은 곳에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기도제목은 사실은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순수한 복음과 충만한 성령의 능력, 이 두 가지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교회는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복음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버리고 이 세상의 지혜를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오직 교회가 세상 끝날 까지 그리스도와 변함없는 그리스도의 흔들리지 않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구속의 사실을 붙들고, 이 복음에 승부를 걸고, 이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과 위로와 권능을 주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강력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순수한 복음 위에 성령의 능력을 물 붓듯 부으시고 설교자가 진리의 말씀을 외치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전할 때마다, 지혜가 아니라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강력한 능력이 그들의 증거 가운데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의 심령에 변화를 가져오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완악한 죄인들의 마음에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고 온 세상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교만한 이 백성들이 진실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놀라운 구속의 역사도, 이러한 강력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이루어지는 복음의 증거와 전파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며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사모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구할 때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매인 바 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기억하며 우리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