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4. 외부강의
성령의 역사와 복음선포
녹취자: 박은희
우리가 다방면으로 개혁주의적인 목회를 해야 된다라고 강조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상황은 우리에게 그렇게 쉬운 상황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 개혁신학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체계나 그리고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목회의 방식, 그리고 우리들이 견지해야하는 삶의 양식, 이런 것들이 현대정신하고는 현저히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사실은 오늘날은 이런 개혁신앙을 견지 하므로서 현대인들에게 매력을 줄 수 있는 그런 상황이 굉장히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학만을 공부한 게 아니라 이렇게 교회를 몸소 직접 개척을 해서 그래서 17년 동안 이렇게 이끌어오면서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로이드 존슨목사님을 통해서 청교도의 눈을 뜨고 나서 청교도를 부지런히 섭렵을 했고, 지금도 제 서고에는 영국 청교도 책들만 한 3000권 정도 더 이상 모았습니다. 그런데 청교도를 공부하면서 깊은 감격을 느끼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제가 존 오웬 목사님을 만나고, 그의 전작을 제가 공부하면서 존 오웬 목사님의 멘토링을 받은 것이 한20년 이상 동안 존 오웬 목사님의 멘토링을 받았는데, 그리고 나서 솔직히 영국 청교도의 대한 매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청교도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렸다기보다는 워낙 거장을 만났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옛날에 읽은 작품들이 아류처럼 생각이 되어서 그렇게 눈에 썩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저 나름대로 그 후에 이전에 배웠던 칼빈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리고 이제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서도 공부할 필요성을 느껴서 따로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이레네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같은 교부들을 공부하고, 자연스럽게 중세의 교부들의 역사,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 부분인데 종교개혁자들과 그들 사이에 있는 아주 놀라운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서 눈을 뜨면서, 그 보편 교부들의 대한 공부 없이 종교개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해서 안셀무스 라든지, 피터 롬바르드, 그리고 다메섹에 요한이라든지,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 이러한 사람들을 풍부하게는 못했지만 그래도 읽느라고 읽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만 볼 때에는 사실은 종교개혁자들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자리매김 할 수 없었는데, 이들의 뿌리인 보편교회 교부들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보니까 종교개혁자들이 왜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저의 연구에 사실은 최근 한 5년 동안에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존 칼빈 그리고 개혁신학에서의 여러 가지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제가 아주 깊은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우리교회 세 개의 공원이 있는데 존오웬 공원, 그 다음에 칼빈 파크, 조나단 에드워즈 파크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도 아주 깊이 감화를 받았고 그러면서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해야 될 필요를 더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리처드 멀러교수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제가 개혁파 정통주의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한 오년 동안 그쪽에 작품들을 읽고 공부하는 일에 나 자신을 헌신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오늘날 우리들이 한국교회를 이렇게 보면서 아까 우리 이 교수님도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 하셨지마는 절대적인 공부의 양이 너무 현저하게 적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왜 오늘날 한국에서 개혁주의 목회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소수입니까?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을 해도 성장하는 교회가 드문 이유가 뭡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제가 아주 간단하게 두 가지로 대답을 합니다.
첫째는, 개혁신학을 공부를 하고 좋아하는 것은 쉬울 줄을 모르지만, 그것을 자신의 사상적 체계로 삼고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공부의 양이 지금과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을 행여나 칼빈주의를 폄하한다든지 아니면 깔본다든지 그렇게 듣질 마시고, 기본적으로 저는 개혁신학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한국에서 개혁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개신교는 중세교회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툭 쳐서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주관주의에 흘렀다고 툭 쳐서 잘라버렸습니다. 쯔빙글리는 아까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작품도 많지 않고 우리하고는 입장이 다르다고 그래서 어쨌든 잘라냈습니다. 그리고는 블링거나 하이데커루스같은 쮜리히에 신학자들의 글들은 소개도 안 되었고 거의 읽지 않습니다. 쳐냈고, 그리고 그 다음에 칼빈파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150년 전에 나온 슐라이어마허 테제에 의하면, 결국은 칼빈이 만들어 놓은 그 아주 아름다운 신학을 배절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성주의를 도입하므로 망가뜨렸고, 똑 같은 일이 루터파에서는 멜랑히톤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나타났다고 가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자이후로 이어지는 칼빈주의의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유산은 이성주의로 흘렀기 때문에 쳐냅니다. 그러면 딱 칼빈 남습니다. 칼빈 남는데 알다시피 칼빈의 작품은 크게 세부류로 나누어지는데 기독교강요와 같은 신학적인 작품들과 그의 서신들과 주석, 그리고 설교, 이렇게 네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주석도 잘 안 읽습니다. 이제는. 편지 같은 것 공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학논문도 거의 안 읽고 외로운 섬 하나 기독교강요가 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칼빈주의의 전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역사를 보면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칼빈의 신학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신부터 시작을 해서 신학논문, 그리고 기독교강요의 초판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최종판, 그리고 그의 방대한 양의 주석까지를 전체를 메타리알로 놓고 어떤 견해에 대해서 칼빈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를 비로소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쉽게 이야기하면 문맥에서 이탈된 채 칼빈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칼빈이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했던 그 폭넓은 사상들을, 충분히 포괄적으로 계승하는 대신 교두주의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위험이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칼빈이 그 후대의 신학자들과 기독교역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칼빈은 성격이 아주 내성적이고 샌님이었고, 그리고 여행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생 중에 해외출장은 두 번 밖에 안 갔습니다. 그런데 해외를 두루 다니는 어떤 사람보다 더 큰 영향력을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런 개혁주의적인 목회가 정말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전하는 한사람이 이런 사상으로 무장되어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또 하나의 어려운 점은 뭐냐 하면 회중들에게 참다운 중생과 회심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 이것이 칼빈주의가 자랄 수 있는 토양입니다.
언젠가 세미나를 했는데, 그 세미나에서 이야기들이 쭉 오고 갔는데, 사실 교회에서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가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모든 교회의 정치, 그리고 생활의 윤리, 그리고 또한 신학에 있어서의 예수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중심성, 이런 것들이 전체의 신학의 체계들을 묶어내는 하나의 그 한자말로 말하자면 거루가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제가 회중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었습니다. 만약에 당신은 설교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이어야 한다고 믿는데, 회중들 전체가 나는 그런 설교가 싫다고 그러면 어떡 할꺼냐 이거야? 또 그리스도 중심적인 정치, 그리스도중심적인 신앙, 그리스도중심적인 삶, 이런 것들이 중심이 될 때에 개혁주의적인 전제들이 살 수 있는데 만약에 우리는 시대의 정신이 더 좋지, 예수중심으로 사는 게 싫다라고 고집을 부리는 교인들이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예화) 제가 아는 목사님이 목회자들을 50여 명 씩 같이 모아서 개혁주의 공부를 하는데, 스터디를 하는데, 전화가 왔더래요. 나는 아무 아무 교단에 어떤 목사인데 나도 가서 좀 배우게 해주쇼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당신 알미니우스주의 교단에 있는데 여기 와서 공부를 할 수 있겠냐고 그랬더니 아, 자기는 그래도 배우고 싶다고 그래서 와서 칼빈주의와 개혁신학 청교도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깊이 아주 이 사람이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책도 읽고 설교도 이제 칼빈주의적으로 설교를 하기 시작 했습니다. 교인이 50명 모일 때에 그 모임에서 공부를 했는데 2년 동안 공부하고 거기서 자기가 생각이 바뀐 대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교인이 20명으로 줄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칼빈주의나 개혁주의가 우리목회의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 유용성에 문제를 가지고 따질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까 이야기한 것의 대한 답을 이 사례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여러분 아시다시피 조나단 에드워즈는 알미니우스주의자 였습니다. 그래 똑똑하고 지성있는 젊은이가 칼빈주의자가 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철저한 칼빈주의자로 전향하게 됩니다. 1723년의 일입니다. 그러면 왜 1723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조나단 에드워즈가 알미니우스주의 자에서 철저한 어떤 의미에서는 말이지, 그 아주 극단적인 그런 칼빈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게 바로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글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신앙 고백 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이 sweetness 달콤함, lovely 사랑스러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이 복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깊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체험된 칼빈주의적 전제를 지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말하자면 설교자로서 신학을 갖는 것이라 이야기입니다.
보름스의회에 불려 나갔을 때에, 마틴 루터가 칼 5세의 신문을 받았고, 그때에 카제탄이 루터를 신문하지 않았습니까? 그때에 루터가 모든 변론을 다 끝낸 다음에 마지막 한 이야기가 무엇이었습니까? “Herr,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s anderes. 주여, 나는 여기 서있습니다. 그런데 달리는 나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수여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달리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게 만들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모두에서 그는 말합니다.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이 성경과 양심에 따라 증언한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명백하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우리 인간의 이성에 법칙에 현저히 어긋난다는 것을 내가 나에게 증명해준다면 내 견해를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나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자기가 고백하기를 양심에 매여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높은 칼빈주의적인 설교, 그 하나님 주권사상,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실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성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의 말씀사역이 다른 사람의 청교도나 개혁신앙을 흉내 내고 그것을 조리있게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을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구 프리스턴의 신학교 교수가운데 ‘제이에이 알렉산더’라고 하는 유명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미 벌써 당대에 그 설교자들의 가벼움을 이 분이 벌써 의식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도무지 강력한 힘이 없다. 깊은 대양과 같은 인간의 마음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는 결단 속에서 설교하지 않는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칼빈주의적인 목회를 하기위해서는, 첫째로 우리자신이 체험된 개혁주의자가 되어야 됩니다. 체험된 개혁주의자가 되고, 두 번째는 그 체험한바 복음을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설교하기 위해서는 다시 두 가지의 요소가 필요한데, 학구적인 요소와 경험적인 요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학구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은 인문학에 기반을 두고, 이성에 입각해서 학문의 체계들을 세워갈 수 있는 논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언젠가 조엘 비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영국 청교도에, 말하자면, 천착해서 공부하신 분이고 그리고 또 피알티에스라는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요번에 제가 가서 개강예배설교를 했는데 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연구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스콜라주의를 아는 청교도와 스콜라주의를 모르는 청교도들로 나누어지는데, 스콜라주의를 알았던 청교도들의 신학 작품이 훨씬 깊이가 있고 장중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윌리암 퍼킨스, 사무엘 루더포드, 그 다음에 존 오웬, 이런 사람들이 말하자면 그 개혁파 정통주의를 깊이 이해하고 대륙의 개혁파 정통주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중에 존 오웬의 스승격인 윌리암 아메시우스같은 사람은 그 화란에 소위 나다레 네프로마띠에라고 하는 제 2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 이런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보에티우스나 고마루스, 그리고 후에 마스트리히트같은 사람들이 칼빈주의를 화란교회에 정착시키는데 대단한 공로를 했던 것으로 우리들은 이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 외에 우리들이 아까 말씀 드린 것 같은 그런 풍성한, 무슨 이야기냐 하면,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설교하는데 너무 재미가 없는 입니다. 설교를 재미로 듣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설교를 들을 때에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우리를 깊이 끌어안는 논리이어야 됩니다. 저도 요번에 ‘죽기내기로 기도하라’고 하는 우리 박윤선 목사님의 설교 집에 추천사를 써달라고 그래서 제가 봤습니다. 저는 박 목사님의 설교를 직접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벌써 합신으로 가 버리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만 설교를 읽으면서도 경험되는 것, 특별히 나는 여러분들에게 시험 삼아서 1940년대 이전의 설교, 박형룡 목사님의 설교를 비롯해서 그 당시에 총신의 혹은 신학교 교수들의 설교들을 읽어보십시오. 저는 30년 40년대의 행해졌던 박형룡 교수님의 설교집을 읽고 박형룡 교수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뭐냐 하면, 그 설교 속에 엄청난 파워가 있습니다. 그 설교문을 지금도 읽는데도 그것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를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칼빈주의가 체험된 칼빈주의였기 때문에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칼빈주의를 설교 하면서도 사람들을 깊이 끌어안는 실제적인 감화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칼빈주의 목회를 하기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입니다. 절실하게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조건이 바로 그런 설교를 듣고 회중들이 변화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과 회심의 문제입니다. 이 중생과 회심의 문제는 너무너무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지난번 영국 방문 때에 피터마스터스 라고 하는 영국의 목회자를 만났습니다. 이분은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스펄전이 세운 타바날크 처치를 40년 전에 부임해서 지금 은퇴를 앞두고 계시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이 맨 처음 부임할 때에 교인이 40명이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지금은 영국에서 900명 장년이, 그리고 어린이들이 600명 정도 모이는 그야말로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투 하이퍼 칼빈니스틱하다고 그분을 비난할 정도니까 그런 정도로 그분이 칼빈주의적인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분이 저와 대화하는 가운데 우리들이 개혁신학자라고 믿고 있는 사람, 두 사람을 아주 통렬하게 비난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버나드램이고, 또 한사람이 존 머레이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분의 비난에 충분히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요지는 우리가 깊이 곱씹어볼만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먼저 버나드 램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버나드 램이 소위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성경해석학의 원리, 뭡니까? 역사적, 문법적, 그리스도 중심적해석, 그 세 개가 우리들이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실수였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딱 개혁주의 설교의 말하자면 기준을 제시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빼놓은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spiritualization’ 이라고 하는 설교 방식입니다.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영해’가 되잖습니까? 그러나 물론 그분은 철저한 칼빈주의자니까 오늘날 우리 부흥사들이 이야기하는 옛날에 이야기 한 것처럼 성경본문 끄집어내고는 아무 상관없이 spiritualize 하는 그거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분하고 대화를 한 결과 이 분이 말하는 spiritualize 라고 하는 정의는 매튜 헨리 식의 익스파운데이션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문법적으로 분석해서 1차 회중에게 주었던 의미를 찾아내고, 그다음에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하는 것, 그것만 가지고는 절대로 설교가 아니라 이것입니다. 그 안에서 spiritualize 되어가지고 풍부한 해석을 끌어내어서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어펙션을 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전통들이 끊어지는 것을 버나드램이 합리화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동의는 안하지만, 그렇지만 상당부분 부정 할 수 없는 동의가 되는 것이고, 또 한사람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 존 머레이였는데, 존 머레이가 이제 우리들이 소위 구원론에서 알고 있는 오늘날까지 유통되고있는 구원서정 오르더 살로티스라고하는 것을 완전히 픽스합니다. 이제 그러면서 어떤 딜레마에 개혁교회가 빠지게 되었냐하면, 중생의 문제를 아주 좁게 해석을 하므로서, 중생과 회심의 관계가 중생의 자연스러운 표출이 회심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문맥을 보면 알미니우스주의적인 수네르기즘, 소위 이야기하는 구원에 있어서 신인협력설에 대한 강한 반발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면서 이런 논리들을 구체화하게 되었는데, 사실을 이것들이 시작된게 도르트회의에서부터 문제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알다시피 이제 학론파들이 네그런 알미니우스주의자들과 이어지는 학론파들에게 대적하면서 구원론을 수네르기즘이 아니라 모네르기즘, 하나님 동력주의적으로 해석을 하기위해서 반론을 제기하는 가운데 이것들이 소위 일래지스트러블 그레이스라고 하는 것까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주의 5대강령 가운데 하나 그것까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런 맥락에서 이제 그렇게 되니까 묻습니다. 인간의 회심을 왜하느냐? 왜안하느냐? 물어보면 하나님이 중생을 안 시키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요청, 회개하라, 돌이키라, 이런 것들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강력하게 탄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실은 그것을 존머레이 한사람에게만 뒤집어 씌우는 것은 머레이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고, 이미 벌서 17세기 칼빈까지는 그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칼빈은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의 중생을 이야기 한 사람이 아닙니다. 칼빈이 즐겨쓰는 단어는 중생, 레개네라티온이라는 단어보다는 뉴붤스, 신생의 개념이었습니다. 그 구원의 개념은 포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신학적으로 넓은 의미의 중생론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저기 유효적 부르심으로부터 시작을 해서가지고, 마지막에 영화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전부다 다 신생의 과정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을 뒤로 넘어가면 이미 중세시대부터 죽 내려오던 그런 구원관이었는데 중간에 중세에서 이런 개념들을 천주교적인 오해로 심하게 교리적으로 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라티아 인푸자의 교리가 나오고 이것들이 성사에 의해서 인간에게 주입되는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구원을 교회의 권위로 귀속시키는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은 했지만 그러나 새로운 입장에서 이것들을 구원 그 자체를 중생 그 자체를 내로우한 의미가 아니라 폭넓은 의미로 보아서 우리의 구원과정에 있어서 모네르기즘이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 리제리네이션 하나만이 아니라,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가 안 됩니까? 다른 모든 것들도 다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야 되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의존적인 사유 안에서 이 구원론 전체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런 것을 볼 때에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미 벌써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은 마스트리트같은 사람, 이런 사람은 벌써 존 머레이하고 거의 300년 가까이 차이가나는 200년이상 차이가 나는 사람인데도, 이미 그 사람에 의해서 구원의 단계들이 이렇게 구체화 되었고, 마스트리트도 이미 8단계로나 나누었고, 고마르스나 이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이미 다 세분했기 때문에, 사실은 존 머레이 한사람에게 그걸 뒤집어 씌우는 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다그러나 그런 것들이 오늘날에 현저한 문제들을 만들어 냈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마루스 같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나누면서도 훨씬 더 아주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것이 소위 이야기 하는 넓은 의미의 중생론의 흔적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중생시키는 것은 주님의 동력적인 사역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중생이 되었는지 중생된 그 사람이 회개에 이르는 것은, 회심에 이르는 것은 그것이 발현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강력하게 요청 하시는바이고 인간은 거기에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둘을 조화시킨 하나의 사례로서 찰스 스펄전이나 존길 같은 사람들을 들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것들도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설교자들은 굉장히 혼란스러워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설교사역 속에서 진정한 개혁주의가 꽃피기 위해서는 그들이 회심해야 됩니다. 중생하고, 이미 중생이 이루어진 중생을 기초로 회심이 일어나서,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중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회개하도록 기도하라고 얘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올바르게 복음을 선포해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거듭나고 정말로 변화되는 이런 일들이 우리의 목회 속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가 그런 영향력이 없이 칼빈주의를 한다라고 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제가 17년 동안 목회사역을 하면서 내리는 결론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칼빈주의에 대해서 많이 천착을 해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성도들 속에 심기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이 표준적인 개혁신학은, 좁은 의미의 개혁주의는,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그 아름다운 풍미를 가진 신학이지만,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거칠기 짝이 없는 신학이고, 강압적이기 짝이 없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문제는 사실을 신학적인 논리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바는 아닙니다. 한사람이 설교할 때 거기에서 번뜩이는 불과 논리를 초월하는 성령의 강한 역사로 사람이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는 이것을 우리들이 어떻게 논리로만 모두 설명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칼빈주의를 많이 공부하고 와서 설교한 교수나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정말 학문적으로는 별것 아닌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서 주님을 만나고 칼빈주의로 변화되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부분을 위해서 이것은 여러분들이 결코 누구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은 여러분들이 혼자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면서 씨름해야 될 성질의 것이고, 그리고 나는 오늘날에 칼빈주의와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던지고 싶은 화두가 뭐냐 하면, 어찌할 수 없는 청교도가 되어야 돼. 달리는 어찌 할수 없는 칼빈주의자가 되어야 돼. 다른 길은 택하려고 내가 노력을 해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숙명에 매인, 마치 사도바울이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한 번도 복음전하지 않으면 너 죽여 버리겠다 말씀하신 적 없습니다. 그런 소위 이야기하는 디바인 앤 폴스먼트, 신적인 강제력, 아난케 이런 것들에 사로잡힌 청교도, 달리는 어찌할 수 없는 청교도, 달리는 어찌할 수 없는 칼빈주의자, 달리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개혁주의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우리가 또 다른 지적인 만족으로서의 칼빈주의를 향한 도피, 지적인 만족으로서의 개혁주의적인 도피, 요 최근에 제임스 스미스라고 하는 칼빈신학교 교수가 쓴 책속에서, 소위 개혁신학을 통해서 회심하고, 개혁신학을 좋아하게 된 초심자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 중에 하나를 교만으로 들었습니다. 교만. 사고방식이 아주 비판적이고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깔보는 것이 칼빈주의의 반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깔보는 것을 . 그것은 사실을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 칼빈주의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칼빈주의 정신은 겸손입니다. 겸손. 그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에 거슬러 올라갔는데 진리에 대한 확신은 담대하지만, 그 지성은 유순한 지성이기 때문에 이후에 자신이 성경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또 다른 진리에 대해서 즐거이 복종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유순한 지성입니다. 그것과 함께 강조되어야 할 것이 열정입니다. 열정.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칼빈주의자면 비 칼빈주의자보다 윤리적이어야 되잖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윤리적이어야 되잖습니까? 자기가 칼빈주의자면 비 칼빈주의자보다 더 열렬히 기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자기가 칼빈주의자면 비 칼빈주의자보다 신행이 일치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화) 아까 우리 서문광 목사님이 말씀 하셨으니까 생각이 나서 하나만 얘기를 하겠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개척하신 교회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에 문선명 그쪽에 소속된 이화여대 교수 한사람이 예배에 참석을 했답니다. 저녁예배마다 참석을 했는데 한 몇 달쯤 지난다음에 부목사님이 물어보았답니다. 여러 달 동안 우리 박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나는 아직까지도 자기가 교육받은 것이 맞는지 박 목사님 말씀이 맞는지 잘 모르겠대요.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저 노인이 저렇게 피를 토할 듯이 외치는데 진리가 아니라면 저렇게 목숨을 걸고 설교 하지 못 할꺼라그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칼빈주의자들이 결핍하고 있는 것이 이런 종류의 열정입니다. 저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바둑이 있습니다. 바둑에는 기보라는 것이 있는데, 바둑을 둔 기록들을 남겨놓는 것을 기보라고 합니다.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100 여 년 전에 기보가운데 토혈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두 흑백을 쥐고 두 기사가 바둑을 두었는데 한사람이 불계로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집을 계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진 게 불계 아닙니까? 이 바둑을 두다 진 사람이 너무 억울해서 그 바둑이 끝난 다음에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반상에 엎드려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 기보가 아직도 전해 내려오는데 토혈국 입니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바둑을 두다가도 지니까 그게 너무 원통해서 피를 토하고 죽어버리는데, 우리는 목회사역을 한다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지금 세월을 농하고 시간이나 가지고 놀자는 것입니까?
나에게 설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사발의 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 신적인 확신에 붙들린 사람이, 그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외치지 않을 수 없어서 토해놓는 한사발의 피 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되느냐? 안 되느냐? 크게 되느냐? 작게 되느냐? 그 문제에 난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17 년 동안 교회를 했지만, 내년에 목표를 한 번도 세워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맹세코, 수많은 부교역자들에게 인원을 늘리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압박을 가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목회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것입니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지 놓고, 일만 명이 모이는 곳과는 다르지 않게 설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마음의 불, 그래서 로이드존슨 목사님이 설교를 정의할 때에, 로직 온 파이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불 붙은 논리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할당되어서 다뤄보려고 하는 주제로 근접해보겠습니다. 자, 우리들이 이 장에 논의를 통해서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것이 파괴력이 있어서, 사람들을 거듭나고 그리고 회개하게 만드는 역사,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칼빈주의가 사람들에게 즐겨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이제까지 논증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책속에서 중생과 회심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이렇게 설명 했습니다.
첫째는 존재론적인 변화입니다. 사물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그 본질과 관련이 있고, 본질은 그 사물만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성향입니다. 경향성입니다. 그런 점에서 존재론적 변화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연인인 사람이 복음을 듣고 강력한 성령에 거듭남에 의해서 새 성향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새 성향이 뭐냐 하면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하였던 인간, 소위 아모르수이, 자기사랑에 빠졌던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뀌게 되는 것, 그것은 너무나 현저해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식론적인 변화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중생과 함께 인간은 new sense, 새로운 감각을 부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세계, 영적인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들을 감각할 수 있는 spiritual new sense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이러한 spiritual new sense에 대상은 beauty입니다. beauty. 아름다움이란 말입니다. 그것도 특별히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하나님에 아름다움은 이 모든 세계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묻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회심 하고난 다음에 천둥과 번개를 가장 무서워했는데, 회심한 다음에는 창밖에서 들판을 가르고 떨어지는 낙뢰를 보고, 천둥소리를 듣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두려워 벌벌 떨던 장면이 왜? 그 안에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내 영혼이 찬양하네.
제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을 슬라이마하크테제에 있던 개혁신학자들이 얕잡아 본 것을 반성하면서 제가 이 개혁파 정통주의, 특히 그 전기와 중기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그 이유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 분들의 저작 속에서, 아주 기독론과 관련해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엑스겔란띠아 크리스티, 그리스도의 탁월성입니다. 그리스의 탁월성. 시간이 없어서 다 설명 못 드리겠습니다만, 그리스도의 탁월성의교리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관한 지식을 이 세상에 현시하심에 있어서, 사용하신 가장 중심적인 루트가 구원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이바지 한 것입니다. 근데 그러한 구원사역에 있어서 가장 정점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성육신을 렌즈로 이제 신약신학은 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다트 엘로힘이 크리스토 로지칼 컨버젠을 거쳐서 신약에서는 그노시스 크리스투 그리스도라는 지식으로 전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대해서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강력한 체험적인 요소를 개혁파 정통주의 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인문학에 대해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요? 중세철학 다 꿰었죠. 왜? 상당수가 이 사람들이 누구였냐 하면 상당수가 수도원에서 공부하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 다음에 종교개혁의 정신을 철저하게 물려받았습니다. 그것을 자기의 언어로 쏟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철학에서 보편교회 교부들을 뺀 그런 교부들의 유산과 개혁파 정통주의 동안에 쌓아올린 그 위대한 유산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비교가 될 정도로 엄청난 유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모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도 내가 말씀드렸듯이 플라톤을 공부하면선 인간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러웠고,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면서는 기독교인 것이 무지하게 자랑스럽고, 루터 칼빈공부하면서는 개신교도인 게 자랑스러웠는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공부하면서 개혁파 교인인 것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도 알지 못하는 엄청난 조상들을 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안 가르치니까 이제 문제입니다. 우리 김병원 교수님도 열심히 가르치겠죠? 공부하고 오셨으니까. 이런 문제들입니다. 그럼 그런 인식론 속에서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시야들이 생기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모두 모여서 엑기스처럼 엉켜 있는 곳이 있는데, 그게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들이 희미한 파문을 그리면서 이 자연세계에도 다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들은 그 사람들만이 비로소 모든 이 세계에 관한 학문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아까 이한봉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진리의 교리의 유기적 체계, 더 확장해서는 그 많은 모든 학문들의 유기적인 체계들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흔히 칼빈주의가 우리 목회에서 꽃피기 위해서는 설교해야 됩니다. 제가 17년 동안 새벽기도 말고 약 4000번의 설교를 했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 안하실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 양심에 관한한은,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설교의 주제나 방식을 양보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씀드리지만, 나는 내가 설립한 교회지만, 어떤 때는 이 설교시리즈가 끝나기 전에 교인들이 나보고 나가라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설교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 없습니다. 어디가도 이것처럼, 여기서 목회하는 것처럼 힘들지는 않을테니까. 아! 나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커지는 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작아지는 것도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손에 있는 것이고, 힘닿는 대로 영혼들을 끌어안고 목회해야 된다는 것은, 우리들이 움직일 수 없는 전제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 이렇게 봅시다. 자, 그러면 이제 다짐을 해야겠습니다. 다음 주 부터라도. 알았다. 내가 맘 놓고 칼빈주의설교 하기 위해서는 칼빈주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변화시켜야 되겠구나.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일차적인 목표가 온 맘을 다해서 설교하고 기도해서 인간들을 변화시켜야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에다 토 달지 마십시오. 변화시키는 것은 주님의 주권이지 우리가 합니까? 그것은 변화시킨 다음에 말하십시오. 많은 교인이 변화되었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 혼자 하신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교회 건축할 때에 담임목사가 “돈 없어서 참 큰일 났다.” 이렇게 염려할 때 옆에서 “목사님,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들 속에 들어있는 의미는 목사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못하지만 딴 사람이 돈 낼 것입니다. 그 뜻입니다. 그게 하나님 주권입니다. 그 행간을 분명하게 읽어야 됩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이 칼빈주의자입니다. 돈 없어 쩔쩔 맬 때에 “목사님, 우리교회에 다 가난한 성도들인데 누가 헌금할 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제가 집을 팔죠.” 이런 사람이 칼빈주의자입니다. 자, 그렇다면 어떡하든지 몸부림치면서 영혼이 변화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승부해야 됩니다. 또 이렇게 가르쳤더니 어떤 사람은, 자기네 교회 돌아가서 교인을 원수 보듯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나마 자기를 따르던 몇 명의 편들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외톨박이가 된 것입니다. 그건 또 바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때리시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먼저 교인을 깊이 끌어안고 사랑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가 우리에게 이런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속에 잘못된 오류들이 발견되거나, 때로는 끔찍한 악이 발견될 때에, 우리는 가슴을 치며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 죄악이 나의 죄악이옵나이다. 저 오류가 바로 나의 오류이옵나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도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을 회심하지 못한 교인들의 상태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식 말야, 내가 그렇게 설교했는데 끝까지 말 안 듣더니 뺀질거리고 회심도 안하고 꼴 보기 싫은 녀석 같으니라고.’ 이러면 회심이 안 일어납니다. 정말 목회자가 기도 많이 하면, 회심하지 못한 게 내가 회심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고, 교인들에게 내가 더 따뜻하게 설교했다면, 선명하게 가르쳤다면, 마음깊이 우러나는 마음으로 교리를 가르쳤다면, 변화 되었을 턴데. 라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주일학교에서 회심에 관한 역사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한 토막이 재미있습니다. 어느 날 아이가 회심을 안 하던 아이가 주일학교 선생님이 말씀을 가르쳐 줄때에 이 아이가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이런 이야기를 집에 가서 했습니다. “엄마! 전도사님이, 목사님이, 강대에서 예수님이 우리 죄 위해서 돌아가셨다고 수 없이 설교했는데, 그 때는 나는 믿어지지 않았어. 그런데 우리 선생님이 나에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흘리실 때에,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믿어 졌어. 엄마.” 그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기도해야 됩니다. 열렬히 기도하십시오.
오늘날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에게서 설교만 배우고 기도는 안 배웁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로이드존슨 목사님 돌아가시고 나서 박사논문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 논문을 항상 박사논문 제출자들이 베다니존스에게 헌정했습니다. 부인이잖습니까? 항상 그분이 논문을 읽고는 말씀하셨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남편에 관해 논문을 썼지만 한 가지 사실을 잘 모르더군요. My husband was a man of prayer. 내 남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칼빈주의자들 상당수가 뺀질댑니다. 그러니까 목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깊은 자기 깨어짐 속에서, 피 떨어지듯이 가슴을 녹이며 눈물을 쏟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교인들을 깊이 끌어안으면서 설교해야 됩니다. 소리만 지른다고 해서 그것이 거룩한 책망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이들 책망할 때 “너, 이놈의 새끼 그따위로 하면 내가 너 죽여 버릴 거야.” 아니면 “너 우리 집에서 내쫒을 꺼야.” 그런다고 애들이 변합니까? 나 교육해 보면 어떤 때는 아이들 놓고 우리 집사람이 “아들아 혹은 딸아, 엄마는 너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프다.” 그 한마디가 오히려 더 깊은 찔림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게 칼빈이 가르치려고 했던 칼빈주의입니다.
작년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9박10일 동안 6500km를 타면서 그 종교개혁 여행을 하는데 루터의 유적지에서 나는 눈물 안 흘렸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죽어도 그 사람이 될 수 없고 그 사람과 나는 하늘과 땅입니다. 그런데 피에르 예배당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는 그 순간에 눈물이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왜? 더군다나 피에르 예배당에 들어가고 놀란 게 그 석상들, 우상들 그냥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칼빈이 예배당 하나도 안 바꾸고 설교 한 것입니다. 얼마나 바꾸고 싶었겠습니까? 그것을. 근데 안 바꾸고 설교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하고는 나하고 너무 그 사람은 기분 나쁘겠지만, 비슷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에서 이러고 가슴 아프게 목회하는 나나, 그 옛날에 피에르 예배당에서 그것 하나 못 부수고 설교를 해야 했던 당신이나, 눈물이 그렇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깊이 끌어안고 회심하지 못한 인간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들이 그래서 그 누구입니까? 리처드 벡스터가 그런 얘기를 했잖습니까? 자신의 회심을 위해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 대신 기도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게 목회자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하고 그다음에 설교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말씀을 전해야 되잖습니까? 목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부흥회 간 게 아닙니다. 부흥회는 삼일하고 오면 다시 초청 안하면 안가면 됩니다. 아무 부담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가지로 설교를 하고 나서 회심한 사람도 다음 주에 또 만나야 되고 회심 못한 사람도 다음 주에 만나야 됩니다. 오늘 회심 안하면, 인생 완전히 끝났다고 설교하면 다음 주일날 못 만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균형을 유지하면서 물러서지 않는 꿋꿋함으로 목회의 본질적인데 자기 자신을 다 쏟아 부어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래서 토혈의 목회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피를 흘리면 교인들은 겨우 눈물을 흘립니다. 목회자가 뜨거운 눈물을 쏟으면 교인들은 땀을 조금 흘립니다. 목회자가 땀을 비 오듯 쏟으면 교인들은 조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자기도 가지도 않은 곳에 저 쪽으로 가보십시오. 예수가 계실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안살지만 그렇게 살아 보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럼 안 됩니다. follow me 나를 따르라.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치열한 구도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살아온 삶을, 살고 싶은 삶을, 받은바 은혜를, 성경에 진리를, 설교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 오늘날에는 그런 용어도 거의 사라졌지만, 옛날에 우리 선배들은 설교할 때 이 인간들을 다 깨뜨려 버려야 되겠다라는 마음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조수미가 인터뷰에서 그런 얘기를 했잖습니까? 자기는 매번 노래 부를 때 마다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나는 노래 부를 때마다 온 청중을 뒤로 쓰러뜨릴 각오로 노래를 부른다.”며.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런 마음을 가지면, 여러분들도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 그러면 우리들이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다, 깊이 깨진다, 우리들이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인간들이 깊이 깨지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매우 모호한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성령의 역사는 신비한 사역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분석할 수 없고, 그리고 우리들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펴서 그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규명하는 자체를 매우 건방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혁자들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인간의 지성을 향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의지를 향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먼저 우리들이 지성을 향한 것은 무엇 이냐 라고 하면, 이게 일루미나쵸, 조명입니다. 조명. 자, 조명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자연적인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은 우리들은 조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예화) 예를 들자면 자판기에서 돈을 넣고 단추를 누르면 커피가 나온다. 이것은 성령의 조명 없이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 상식으로 알고 누르면 되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남녀가 건강하면 아이를 낳는다. 이런 것도 성령의 조명 없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조명은 그런 분야에서는 성령의 조명이 필요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은 인간의 자연적인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는 진리들, 쉽게 이야기하면,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들을 우리에게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 이것이 결국은 조명입니다. 조명이 없으면 믿음이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리학적으로야 가능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고유한 믿음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설교하는 도중에 사람들에게 자연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그 복음의 신비한 것들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혁주의적인 설교를 하면서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을 합니다. 또 개혁주의자들은 믿으라는 이야기도 강력하게 못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잖습니까?
(예화) 물론 잘못된 예입니다만 왜? 믿게 하시는 분도 누구? 하나님이시니까.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믿으십시오.라고 하는 이야기자체가 너무 알미니우스주의 적입니다. 이래저래 하여튼 속박 받는 게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가 칼빈주의를 잘못배우면 매우 어정쩡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주기도문으로 마치겠습니다. 거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주님이 이루신일을 많이 생각만 하십시오. 그게 당신의 의무입니다. 과연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을 충분히 이야기해 주고 있는 테제라고 우리들이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한때 스킨도로 이어지는 화란의 구속사적 설교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최종적인 내린 결론은, 깊이 배울 수 있는 요소들은 많지만 이것들이 아니면 설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판단이었습니다. 스킨더나 홀베르다같은 이런 사람들의 그것들을 읽어보면, 너무 웅장하고 멋있습니다. 정말 멋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럼 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의 웅장한 교향악을 감상하고 나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난 어떡하라는 것이냐? 이게 없습니다. 그런데 개혁주의의 설교가 그런 설교가 아닌 것이 분명하잖습니까? 칼빈이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강조했지만, 신명기를 200번이나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는 뭐냐 하면, 이것을 행하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것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막보는 거다 강력하게 신명기를 설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기독교 강요만 있지, 설교를 안 읽으니까 신학적인 균형을 상실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할 때에 ,제일 먼저 사람들에게 강력한 성령의 조명이 있기를 기도하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설교를 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조명자체가 신학적으로 인간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의 이해에 무엇인가를 더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조명을 통해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깨닫게 되리라고 기도하는 것은 칼빈주의적도 아니고 개혁주의적도 아닙니다.
그래서 노래방에서 회심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을 어디서든지 역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설교 속에서 성령의 조명이 있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인간의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얘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설교하는 모든 진리의 내용들을 회중이 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그 뜻이 아니라, 나는 설교 할 때 인간이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초자연적인 진리와, 인간이 자연적인 이성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인 진리를 함께 설교하지만, 이것을 인간이 이해하려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령이 조명하실 때에, 그때에 올바른 성령의 조명이 주어지고 복음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거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나 이런 글들을 논리적으로 썼었던 이유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성령에 있어서 우리들이, 인간들이, 확 변화됐으면 좋겠다라고 할 때에 구체적으로 그 첫 번째 카테고리가 인간의 지성을 비추는 성령의 강력한 조명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순간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34살에 신학교 교수가 되었는데, 35살에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생애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설교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든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된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제일 처음 깨달은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언어가 이렇게 허술하구나 하는 것입니다. 왜? 내가 만난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한 아름다움을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서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성령의 강력한 조명이 회중들에게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설교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빛이 들어오게 되면 인간은 정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2005년도 12월 25일 날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희교회에서는 성탄절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한 40 정도 된, 마흔 살 정도 좀 넘은 형제 한사람이 친척집에 놀러왔다가 우리교회 예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날 하도 술을 많이 먹어서 ‘예배당에 와서 좀 자야 되겠다’라고 마음을 먹었는데, 우리교회 들어오니까 잠자기 너무 좋은 조건입니다. 예배시간에 조용하고 푹신한 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앉자마자 잠을 청했는데 설교자가 올라가더니 설교 본문을 읽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보내셨음이라.” 평소와 꼭 같은 성경봉독이었습니다. 우린 성가대가 없으니까 성경봉독하고 바로 설교 시작합니다. 그런데 잠을 청하던 젊은이가 ,젊은이도 아니지, 이 형제가 성경본문을 듣는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설교 속에서 멈출 수 없도록 눈물이 쏟아내는데 다행히 아내는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 나이 먹도록 플라톤을 공부하고 있는 철학자였습니다. 대학에 강의도하고 그러는 사람인데, 집에 가서 혼란에 빠졌습니다. ‘내게 뭔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시험 삼아서 그 다음 주에 다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 이건 뭔가 이렇게 술에 너무 취해서 몸이 나약해져서 일어난 심리적인 어떤 변화일 것이다.’ 다시 왔는데, 설교는 달랐지만 똑 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세 주를 이것을 경험하고 나서, 이 사람이 비로소 그렇게 가정 평화를 위해 오래 교회를 다녔지마는, 이게 바로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험이구나. 그리고 플라톤이 그토록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로 설명했던 체관, 체관에 이르는 그 신비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6개월 동안에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 신학 책을 다 읽었습니다. 6개월 동안에. 그게 뭡니까? 그게 신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뭐가 신비합니까? 그는 신비한 것 아무것도 못 느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빛이 확 들어왔고, 일생동안 철학을 공부해도 알 수 없었던 애매모호한 것들이 가지런한 정렬로 탁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조명입니다. 신비입니다. 신비. 그런데 지성적인 신비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 성령의 강력한 조명이 있을 때에, 인간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가장 뛰어나신 주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주권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존재론적인 위치와 가치론적인 위치를 올바로 정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설교가 설득할 수 없는 것은 성령에 조명에 맡기고, 설득할 수 있는 것에 한도 내에서는 깊이 설득해야 됩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 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끔 설교를 듣잖습니까? 그러면 제법 칼빈주의적인 설교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근데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아니, 칼빈주의를 설교하면서 왜 저렇게 허술할까? 저렇게 논리가 허술하게 하면 참외도 안 팔리겠다. 참외를 갖다놓고 팔 때도 제가 장사를 해 보았었습니다. 무장사도 해보고 배추장사도 해보았습니다. 무를 사다놓았는데 좀 모양이 없는 것을 사다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와서 다 타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옆에 무장사가 있는데 “아니, 그래서 무가 잘생겨야지 말이지, 이게 뭐 이렇게 울퉁불퉁하고 말이지. 에이 이게 못생겨서 맛없겠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이 툭 치는 것입니다. “아줌마, 돼지 인물보고 잡아먹어?” 그 한마디로 모두 굴복한 것입니다. “맞다. 진짜 돼지 인물보고 잡아먹나? 크면 됐지.” 다 사가는 것입니다. 논리적이어야지. 그리고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팍 뛰어넘으면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가 설교와 지성에 관계에 있어서 시종일관 유지했던 원리가 있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교하라, 이성적으로 설교하라, 그러나 그대의 논리가 사람들을 믿게 한다고는 절대로 믿지 마라. 무슨 뜻인지 알죠? 그 논리는 도구일 뿐이고, 성령이 그 마음을 조명 하셔야지만 믿을 수 있다. 그것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우리의 설교가 논리적인 설교가 제물이 되어서 성령의 강력한 불이 떨어지도록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는 의지에 작용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은혜라고 하는데 이 은혜를 그라티아, 이것을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구원에 이르는 길 자체를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는 곧 은혜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두 번째의 용례는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할 때 그것은 가치 없는 죄인들을 향해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호의. favor. 세 번째 용례가 중요한데,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기록을 해두셔도 좋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은혜의 정의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러니까 이 은혜의 결과가 결국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까리따스라고 말했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러브라고 이야기하고, 혹은 라이프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자, 그러한 하나님 사랑이 우리에게 깊은 감화를 줄때에, 우리의 의지는 방향이 바뀔 뿐 아니라, 전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인간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힘을 줍니다. 첫째는 인퓨싸의 방식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없던 그 힘을 성령이 단독적으로 확 불어넣어서 힘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중생. 그런데 성화에 있어서 우리에게 이 힘을 주시는 그 방법은 뭐냐 하면, 도덕적 설복을 통해서입니다. 도덕적 설복을 통해서. 그러니까 도덕에 관한 이성의 설복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힘이 주어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자, 예를 들어볼까요?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자, 예수 믿은 사람입니다. 이미. 그런데 은혜에서 멀리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일도 잘 안하고 경건생활도 안하고 어쨌든 삶이 엉망입니다. 불러놓고 하나하나 가르치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그리스도의 본분에서 어긋났다. 하나하나. 너 그렇게 가정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되겠니? 하나님이 너를 위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피 흘려 돌아가게 하셨는데, 너 그렇게 돈 벌어서 너 자신 사치한데 쓰고, 가난한 사람도 안 돕고, 그럼 되겠니?
이렇게 설득을 하는 겁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자기가 정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너무 멀리 떠났다는 사실에 설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설복하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러면서 의지와 은혜사이에 아주 미묘한 하모니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파신학자들은 은혜가 의지의 역사하고 힘을 주는 방식을 뭐라고 보았냐하면 스위트하게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한사람이 아니고 여러 신학자들이 이야기 합니다. 유니우스도 그렇고 그 다음에 트레틴 같은 사람도 그렇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물론이고 스위트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달콤한 방식으로. 그래서 그 속에 하모니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하면, 그렇게 은혜를 받고나면 저인간 죽어도 용서할 수 없었는데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저 인간 사랑할 수 없는데, 사랑할 힘이 생겨납니다. 거룩한 삶을 살수 없었는데, 살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지성을 향한 강력한 조명 속에서 인간이 올바른 사실에 눈을 뜨게 되면서 자기가 여태까지 하나님 바깥에서 내렸던 판단과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버릴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의지에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의 두 요소입니다. 그래 사실은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없으면 우리의 설교가 무엇이든지간에 사람들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조지 윗필드가 그런 이야기 했잖습니까? “오!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칼빈주의를 설교하든지 아니면 알미니우스주의를 설교하든지 사단은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을 때에 그 때에 우리의 지성에는 빛이 들어오고 우리의 의지에는 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돌아갈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에드워즈의 견해에 따르면, 설교자의 중대임무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beauty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 인줄을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구원에 교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 아름다움에 감격을 해서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걸 알고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의존하면서, 우리들이 열렬히 기도하고 토혈의 설교, 토혈의 목회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강의안을 상세하게 적었으니까 읽어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성령의 역사와 복음선포(요약)
11/09/07,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 세미나
김남준 목사님
[1] 서론
- 우리가 지향하는 개혁주의목회의 방식 및 우리가 견지하는 삶의 양식은 현대정신과는 현저히 거리가 멀다.
[2] 왜 개혁주의 목회를 지향하는 사람이 소수인가? 왜 성장하는 교회가 적은가?
A. 첫 번째 이유: 엄청난 분량의 공부
1)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좋아하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그것을 자신의 사상적 체계로 삼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분량의 공부가 기다리고 있음. 일단, 한국교회의 현실은 절대적인 공부의 양이 너무 현저하게 적음.
2) 슐라이허마허 테제에 의하면 칼빈이 만든 아름다운 신학을 베자가 등장해서 이성주의로 변질시켰고, 루터의 신학은 멜랑히톤이 등장해서 변질시켰다는 가설을 가지고 있음. 칼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신들 → 신학논문들 → 기독교강요 초판부터 최종판 → 성경주석들 및 설교집을 전부 질료들로 놓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음. 결국에 우리는 문맥(Context)으로부터 이탈해서 칼빈을 이해하려고 들기 때문에 그를 교조주의적으로 계승할 위험이 큼.
B. 두 번째 이유: 중생과 회심의 변화
1) 조나단 에드워즈의 체험
- 그는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 복음을 깊이 만났기에 체험된 칼빈주의적 전제를 지니게 됨.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자로서 신학을 갖는 것.
2) 불합리하고 초이성적인 칼빈주의적 설교
- 성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말씀사역이 청교도들이나 개혁자들의 신학을 조리 있게 전달하는 식으로 될 수 없음. 개혁주의 목회가 꽃피우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중생과 회심의 변화를 체험해야만 함.
[3] 칼빈주의적 목회를 위한 필요 요소
A. 학구적인 요소
1) 인문학에 기반을 두고 이성적인 체계를 세워나갈 수 있는 논리가 중요함.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설교할 때는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깊이 끌어나는 논리여야 함.
2) 스콜라주의
: 조엘 비키 ‘영국의 청교도들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연구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스콜라주의를 알았던 청교도와 몰랐던 청교도로 나뉘는데, 그걸 알았던 청교도들의 신학 작품이 훨씬 깊이 있고 장중하다.’
B. 체험적인 요소
1) 피터 마스터스 목사의 비판
a. 버나드 램: 그는 소위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성경해석학의 원리(역사적 / 문법적 / 그리스도적 해석)를 합리화하면서 Spiritualization이라는 설교방식, 즉 매튜 헨리 식의 풍부한 해석을 끌어내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지침들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오늘날 사라짐.
b. 존 머레이: 머레이는 Ordo Salutis를 고정했는데, 중생의 문제를 아주 좁게 해석하면서 Synergism에 대항해 Monergism으로 그것을 설파함. 그는 인간이 회심 안하는 이유를 하나님이 중생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함. 오늘날 하나님이 강력하게 말씀하신 “돌이켜라. 회개하라!”는 내용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함
2) 중생
a. 넓은 의미의 중생론
(1) 칼빈은 중생을 신생(New Birth)으로 구원의 서정 전체를 훨씬 폭넓게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해함. 우리의 구원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중생에만 Monergism이 아니라 다른 모든 구원 서정을 포괄하는 더욱 커다란 Monergism이다.
(2) 고마루스의 경우 넓은 중생의 의미를 표명함. 중생한 사람이 회심에 이르는 것은, 그것이 발현되는 것은, 하나님이 강력하게 요청하시는 바이고, 인간은 거기에 참여해야 함.
b. 에드워즈의 중생론
(1) 존재론적 변화: 존재는 그 사물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향. 자연인이 복음을 듣고 거듭나 새로운 성향을 부여받아 자기를 사랑하던 성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뀜.
(2) 인식론적 변화: 인간은 중생과 함께 새 감각(new sense)을 부여받음. 영적인 것을 감각할 수 있는 Spiritual New Sense, 즉 Beauty에 대한 감각이 생겨남.
3) 체험의 결과들
a. 신적인 강제력(Divine Enforcement): 누구에게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 하나님 앞에 스스로 깊이 몸부림쳐야 하는 성질의 것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숙명에 사로잡힌 개혁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b. 지성: 진리에 유순하게 복종할 수 있는 지성
c. 열정: 칼빈주의자면 비칼빈주의자보다 더 윤리적이고, 더 기도하고, 더 신행(信行)이 일치해야 함.
‘저 노인이 저렇게 피를 토할 듯이 외치는데 진리가 아니라면 저렇게 목숨을 걸고 외치지는 못할 것이다’(박윤선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통일교 소속 교수의 말).
[4] 성령의 역사와 복음 선포
A. 우리의 의무: 기도
1) 변화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핑계는 영혼이 다 변화한 뒤에 해야 할 말이며, 우리는 영혼들이 변화되도록 어떻게든지 기도해야 함. 칼빈의 설교는 배우려고 하지만, 칼빈의 기도는 배우려고 하지 않음. 칼빈주의자들 중에 상당수가 기도하지 않고 뺀질거리기에 목회가 잘 안 됨.
2) ‘내 남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베다니 로이드존스). ‘자신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 대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Richard Baxter).’
B. 성령의 역사
: 성령의 역사에 대해 너무 모호한 그림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이 너무 신비해서 분석할 수 없고, 정체를 규명하는 것은 너무 건방진 생각이라고 대다수가 여김.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의 생각은 결코 아님.
1) 조명(Illuminatio)
a) 정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는 진리들이 믿어지는 것이 바로 조명
b) 조명의 작용
- 철저히 인간의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를 해야 함. 설교하는 모든 내용을 회중이 다 이해한다는 뜻이 아님.
- 자연적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초자연적 진리와 인간이 자연적 이성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진리를 함께 설교하지만, 인간이 이것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성령이 조명하실 때, 올바른 조명이 주어지고 복음에 눈을 뜨게 됨
- 설득할 수 없는 바는 맡기고, 설득할 수 있는 바는 깊이 설득해야 함.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교하라(에드워즈). 논리와 이성은 도구이기에 그것으로 인간이 변화되지는 않는다. 지성적 조명을 위해서 기도하라.
2) 은혜(Gratia)
a) 의지에 작용하는 성령의 역사
(1) 구원 자체: 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
(2) 호의: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
(3) 은혜: 인간으로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
b) 새 힘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
(1) 주입: 없던 힘을 성령이 확 부어주시는 것. 중생.
(2) 설복: 성화에 있어서는 도덕에 관한 이성의 설복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힘이 주어진다. 그래서 많은 개혁자들이 달콤한(sweet) 방식으로 하모니가 일어난다고 설명함.
[5] 결론
-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없으면 누구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가 없음.
-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칼빈주의를 설교하든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설교하든지 상관없을 것이다(휫필드).
-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에드워즈).
- 이것을 알고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의존하면서 피를 토하는 설교를 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