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4-6)
녹취자: 김경애
우선 여러분이 이처럼 뜻 깊은 주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실 지난 20년 동안 조국의 교회에서 그 이전의 50년을 합한 것보다도 훨씬 더 격동하듯 치달아온 역사를 우리들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격한 변화의 물결들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전에 없었던 성경공부의 열기, 제자훈련, 찬양집회 그러면서도 또 부흥회들이 점차 사라진 것, 그리고 사회참여에 대한 논란, 여러 가지 기발한 목회 프로그램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화 투쟁의 시기를 지난 것도 바로 이 20년 어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처럼 자기의 생명을 지키고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향하여 영향력을 발휘할 것인지에 대해서 굉장히 고민해왔고 언제나 이런 질문은 교회로 하여금 진지하게 만들어왔습니다.
역사를 보면 언제나 이렇게 격동기를 지날 때마다 교회에는 양분된 기류가 더욱 강한 색채를 띠고 흐르게 마련입니다. 한쪽에서는 교회를 지난번 민주화투쟁에서 본 것과 같이 사회변혁을 위한 매체로 삼으려는 전진기지로 삼으려는 그런 현실변혁적인 시도가 있고 또 한편에서는 아예 기독교 신앙의 역사성을 외면하고 복음의 타계성만을 강조하는 초월주의적인 신앙이 흐르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양쪽에 속한 사람보다 훨씬 더 압도적으로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 있어서 신앙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 때는 성령운동도 전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마지널리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돌멩이를 들고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십자가를 끌고 거리로 뛰어나가서 화염병을 던지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지널리티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왜? 신앙과 삶은 이미 분리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신앙과 실제적인 삶을 분리시켜서 형식적인 교회생활에 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 급격히 영적 각성과 신앙부흥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바로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도 풀 수 없는 난제와 같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임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주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와 또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8년 정도 된 일입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러한 신앙부흥이라든지 영적 각성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이 소개되면서부터 사람들은 뭔가 부흥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극단의 혐오감을 갖고 있는 옛날 50년대, 60년대, 70년대 유행하던 그런 부흥하고 다른 무슨 부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방면에 대한 우리나라에서 단 한권의 책도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역시 이런 이해도 피상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러면 조국의 교회가 이처럼 부흥이라는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명백한 맥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저는 이 한 시간 동안에 부흥에 대한 그 위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다하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에 가서 우리는 부흥을 추구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부흥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교회에 참된 모델을 신약성경 속에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신약성경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교회로 하여금 신약의 교회로 돌아가게 만드는 그 참된 원동력이 바로 부흥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흥, 영적각성, 이런 기치를 높이 들고 현수막을 붙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20여 년 동안 조국교회에는 수많은 현수막이 나붙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데올로기들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겠다는 미명하에 한국교회를 스쳐갔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야말로 그 모든 것들은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여러분! 이데올로기와 성경의 진리가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데올로기는 그 이데올로기 주장 하나로써 도무지 성경의 비평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류로 인정되고 시정될 수 있는 모든 여지를 봉쇄하고 그리고 절대적인 자리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교회의 의식이나 그리고 목회적인 추구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적인 캐치프레이즈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은 그렇게 부흥을 추구한다고 떠드는 사람에 의해서 부흥이 이룩된 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역사를 보십시오. 진정한 부흥을 맛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추구하고 있는 것들을 가리켜서 신앙부흥이라고 그러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참된 각성을 경험했습니다. 말만 무성하고 그리고 좋은 말은 골라서 다 주워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말이 풍성했을 때 언제든지 교회는 능력이 없었던 것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부흥, 위대한 영적인 각성, 이런 것들은 이데올로기의 자리에 앉아서 여태까지 조국의 교회에 떠올랐다 사라졌던 마치 뒤웅 치는 파도에 떠올랐다가는 물결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물거품과 같은 그런 수많은 인간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와 어깨를 겨루고 서있을 수 없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그 입에 부흥, 리바이벌이라는 그 한마디 담기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교회로 하여금 신약의 교회로 돌아가게 하는 힘을 저는 부흥이라고 저는 말합니다. 부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 부흥은 교회로 하여금 신약성경에 참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 곳에 집회를 다니면서 이상하게 초대교회라고 쓴 교회의 간판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세울 때 그들의 꿈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가면서 결국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목회자 가운데 초대교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연구대상입니다. 누구든지 다 돌아가고 싶습니다. 마음을 먹는다고 다 될 것 같으면 우리가 힘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돌아가겠다고 다 몸부림치는데 점점 초대교회하고는 먼 교회의 모습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초대교회가 완전한 교회입니까? 무슨 완전한 교회입니까? 그 당시에도 그 속에 죄가 가득한 사람들이 있어서 헌금을 착복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무지가 난무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에 전무하도록 부른 사도들을 과부들이나 공궤하는 재정집사로 세우는 이러한 이상한 일들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 있었던 교회 가운데 그 교회만큼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살아계심을 보여준 교회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교회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 교회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그 교회되게 하였던 그 참된 원동력을 오늘 우리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그러니 북치고 꽹과리치고 현수막을 걸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주여 삼창을 한다고 해서 부흥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부흥이 오는 것이면 부흥을 못 볼 교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이 모든 용어의 천박한 사용으로부터 부흥이라는 한마디의 말을 보호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데 왜 안 됩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 합니다. 다 합니다. 예수를 믿고 어떻게 헌신하면 초대교회가 되고, 또 예수를 믿고 어떻게 사심을 버리면 초대교회가 되고, 또 예수를 믿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의 모습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노인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알긴 다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 해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되게끔 하는 것이 바로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거의 완전에 가까울 정도로 신약성경으로 돌아갔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하셔야하는 것입니다. 1620년에 청교도들은 오직 신앙의 자유 하나를 위해서 대서양의 자그마한 범선을 타고 바다를 넘어서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1620년에 도착했는데 1670년에 어느 목사님이 보스턴 법원에 법원장을 선거하는 선거에서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그는 개탄하며 모든 회중들에게 소리쳐 외쳤습니다. 프린스목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할아버지로부터 신앙을 배웠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저 어렸을 때 말씀하시기를 “얘야, 내가 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청교도들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에 함께 건너왔는데 7년을 살았단다. 7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그 청교도들 가운데서 누구를 욕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로 거역하거나 누구를 미워하거나 이기심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내거나 불경건한 말로 교회를 더럽히는 사람을 한사람도 보지 못했단다.” 그야말로 하늘의 나라가 지상에 임한 것입니다. 이런 때의 역사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던 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여러분! 잠자는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실컷 자는 비결을 배우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습니다. 헤겔의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는 그 말입니다. 여러분! 잠자는 수많은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없습니다. 잠자는 다수의 역사는 책을 써서 먹고사는 역사가들의 몫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있는 역사를 원하는 것입니다.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거룩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보여주었던 그 위대한 선조들의 신앙의 시대, 역사가들이 기록하기를 넘어갔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장엄한 역사의 기록의 장을 메우고 있는 위대한 살아있는 교회의 역사를 오늘 우리들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조국의 교회들이 이렇게 교회가 교회되게 만드는 그것이 없이는 교회가 될 수 없는 그 참된 신앙부흥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극단적으로 혐오하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이 시간에 한번쯤 그들의 입장에서 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집회를 많이 다닙니다. 그러나 요즘은 만날 세미나가 뭔지 여기는 그래도 세미나라고 안 그래서 좋습니다. 세미나인지 네미나인지 나는 모르지만 ‘아니 부흥회라고 그러지 왜 세미나라고 합니까?’ 그랬더니 목회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부흥회라고 그러면 안 옵니다.’ ‘그러면 뭐라고 그래야옵니까?’ 차라리 그러면 ‘신앙부흥세미나’ 그러면 온답니다. 그래서 ‘네미나 라고 하면 더 잘 오겠네요?’ 여러분! 조국의 교회가 부흥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바르고 순수하지 못한 잘못된 부흥을 추구하는데서 빚어낸 수많은 고통과 더러운 배설물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50년대, 60년대, 70년대 초반까지로 기억하는 있었던 그런 부흥회가 전부 다 전혀 성령이 역사하지 않은 그런 모임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지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바르지 못한 집회 속에 있는 조각난 진리를 사용하셔서라도 하나님은 그 시대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정확하게 인식하셔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거기에는 어느 정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음도 인정해야 되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러나 오늘날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놓은 것, 그것이 지금에 와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책임이라면 그 운동의 책임이고 아니면 공로라면 또 그 운동의 공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적으로,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 지난날의 세속적인 부흥의 추구를 재현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부흥과 영적인 각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전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반응인 것입니다. 한쪽 끝에서 펑하고 튀기며 반대쪽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나가서 우리나라 교회의 교육수준도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은 전부 다 고등학교 이상을 나왔습니다. 발에 차이는 것이 학사학위 소지자이고 놀고먹는 것이 박사선생님들입니다. 그런 시대에 고학력시대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이제 뭔가 교회가 불 때는 것 같은 것은 그만두고 뭔가 자신들을 차분히 가르쳐주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교회가 저지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체험을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모든 교회에 말하자면 깊이 배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제일 먼저 바로잡고 풀지 않으면 안 될 숙제로써 남겨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70년대 이후부터 성경공부나 이런 것들이 굉장히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기독교인구가 늘어나면서 시장이 확장돼서인지 기독교출판사들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고 그리고 분별없이 미국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책들이 말하자면 무더기로 번역되어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의 90% 이상은 읽어볼만한 가치도 없는 잡동사니 같은 것들을 이 땅에 토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것들을 젊은이들이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두고 보십시오. 그 많은 책을 읽은 것이 앞으로 조국의 교회가 부흥을 맞이하는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즉시 저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통해서 성도들이 얼마나 영적인 유익을 얻었는데 기독교 출판사에서 누가 나왔으면 맞아 죽으려고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좋은 일도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태도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놓았느냐 하면 우선 예배에 있어서 커다란 변질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10년 전에 서울시내에 있는 300명 이상 700명 이하로 모이는 중간급 교회의 이삼십 대 청년을 대상으로 앙케트 조사를 했는데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이 자기의 신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신앙의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설교를 통해서 바로잡거나 공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000명 가운데 22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78%는 신앙과 설교와 예배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예배를 참아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왜 그러면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 아십니까? 이 이유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3가지 요소가 크게 자리하고 있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됩니다. 하나는 깨닫게 하는 요소이고 또 하나는 느끼게 하는 요소이고 또 하나는 즐기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가장 타락한 모습은 즐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즐기는 요소가 우위를 차지하고 교회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으면 교회는 정말 볼썽사나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요소가 느끼게 하는 요소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세해야할 요소는 깨닫게 해야 하는 요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화하시는 가운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원문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때가 온다고 되어있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의 모든 기관과 구별되는 뚜렷한 표지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회단체는 교회 말고도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애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노인의 몸을 이끌고 지팡이 하나를 들고 애굽의 박사들과 술사들 앞에서 서서 물이 피가 되게 만들고, 개구리가 나오게 만들고, 파리가 나오게 만들었을 때 애굽의 술사들도 그것과 똑같이 따라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고 사람의 삶을 고쳐놓는 일을 교회가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즉시 세상은 여러분에게 증거를 대라고 말 할 것입니다. 세상에도 이런 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깨닫게 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힘을 교회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말씀이 터져서 무지한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일들을 아무리 기다려도 교회가 그 일을 잘 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는 신령한 목사님 밑에 축복받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강남에서 전해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대부분의 교회들을 보십시오. 고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에서 터져서 일주일 동안을 살아가게 만들 수 있고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해주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의 감화를 받는 대신에 그 말씀을 자기의 생각으로 풀어 해설한 잡다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속에 아무리 엉터리없는 그리스도인의 말이라도 그 속에는 진리의 요소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들이 하나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아홉 가지의 잘못된 구조물들을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심령 속에 건축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적나라하게 그 말씀 앞에 서서 판단을 받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잘못 세워진 구조물들이 무너지는 파괴되는 역사가 점점 힘들어지고 말하자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가정된 그런 강한 아집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앞으로 오래도록 조국의 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는데 방해물이 될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오늘 다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다루고자하는 신앙의 주제는 그 부흥에 있어서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하고 저는 가려고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무엇을 가지고 교회다워지는가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흥과 어떤 관계에 있고 부흥과 그렇고 그런 관계에 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이런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교회의 참모습에 대해서 진지한 교훈과 도전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바와 마찬가지로 잠자고 있는 다수들을 통해서는 배울 것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는 대부분이 잠자는데 자신을 할애해 왔습니다. 18세기에 ‘위대한 영적부흥’이라는 책을 쓴 잔 길리스의 책을 번역한 허시우스 버너라는 사람의 언급에 의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잠자는 다수의 역사만을 기록하기를 즐거워한다. 교회는 잠 자체가 인생의 행복인 것처럼 언제나 푹 잠들어왔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눈을 부스스 뜨고 일어나는가 하면 다시 또 이전보다도 더 깊은 절망적인 잠에 빠지곤 하였다. 그러나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이 잠들었던 시대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항상 깨어있는 소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보존되어 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이 교회사를 기록하고 있는 이 사도행전 3장에서 그러니까 2장에서 성령이 강림했으니까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실질적인 처음 장면이 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데 그 상황은 바로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은 풍성한 시기입니다. 시기적으로 길지 않은 시기였지만 그러나 그 교회로부터 우리는 한없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 경건서적을 가려서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눈치 챘을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이후로는 왠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고 심령을 움직이는 경건서적의 작가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18세기 대륙의 신앙부흥의 끝물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로이드 존스 같은 사람은 기인이었습니다. 돌연변이입니다. 많이 읽으십시오.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예루살렘의 교회의 시대는 어쩌면 지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완전에 가까운 부흥을 누리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2장에서 성령강림이 있고난 직후에 예루살렘 교회는 괄목할만한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교회를 변혁하는데 관심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의 관심은 교회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무엇을 변혁하는 것이었습니까? 그들의 관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신반포 교회에 꿀이 많이 있습니까? 왜 이렇게 말이 없습니까? Response가 있어야지 무엇을 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무엇이었습니까? 교회를 변혁시켜야겠다는 그런 운동들을 고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냥 살았습니다. 목표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살았습니다. 그냥 막 살았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이 그냥 막 살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부흥하였고 그리고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순종하였고 순종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주셨습니다. 먼저 이 교회는 오순절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죄인의 마음에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복음 진리의 케리그마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기독교적인 선포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구약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가리어진 비늘을 벗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설교하기 시작했고 그 해석은 수많은 사람의 영혼들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학적인 편견과 심리적인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깨닫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했고 사도들은 서슴없이 이 악한세대에서 회개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수많은 회심 자를 교회에 보내었습니다. 부흥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영혼들을 찾아서 세상 밖으로 나갔지만 진짜 부흥이 있었던 시대에는 세상의 사람들이 물결과 같이 교회 속으로 떠밀려 들어왔던 것입니다. 참된 회심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천국과 방불한 성도의 교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회자가 읽어드린 이 성경본문은 바로 그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거지를 만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 부분을 읽을 적마다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조국의 교회가 오늘 이 두절밖에 안 되는 성경구절을 자세히 좀 들여다보면서 하나님께 깨닫게 해달라고 며칠만 통성기도를 해도 교회는 바뀔 것이란 소망을 갖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느 시대에든지 부흥은 구호를 외치면서 머리에 띠를 두른 사람에 의해서 부흥은 불러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겸비하게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부흥의 횃불이 밝혀졌던 사실들을 기억하셔야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어서 순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 사건이 왜 중간쯤에 나오지 않고 왜 이 앞머리에 나와 있을까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겨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반드시 일어난 사건의 연대기적인 순서가 앞에 왔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이야기가 앞에 나오겠습니까? 2장에서는 성령이 강림했고 그리고 설교를 했고 종말론적인 선포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흥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부흥이 일어난 교회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2장의 뒤를 이어서 이제 교회가 그렇게 부흥을 소유한 교회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출발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그 앞부분에 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가면 내 사역을 성령이 와서 계속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일어났던 수많은 병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친 그 치유의 사건과 연속선상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 사건을 앞에 기록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으신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이 치유의 사건은 이 개인적인 치유의 사건은 정말 그야말로 개인적인 사건이었으나 그러나 성경은 이 사건을 기록하여 앞에 둠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무엇을 통하여 참으로 교회되는지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는 자신의 힘으로 위치를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가능한 병자였습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를 들어다가 걸식할 수 있도록 성전 문 앞에 두었습니다. 미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아름다운 성전 문에 흉측한 앉은뱅이가 앉아있었습니다. 얼마나 웃깁니까? 그리고 그는 거기서 아무리 강퍅한 사람이라도 성전에 들어갈 때는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서라도 동전 한 닢을 던져줄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많을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돼서인지 아무튼 그 자리를 택했습니다. 금과 은으로 꾸민 아름다운 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문 앞에 불행한 처지가 되어서 거지로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이처럼 일평생을 남의 동정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베드로와 요한을 향해서 무엇을 좀 달라고 손을 내밀었던 것은 조금도 비난받을만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당연한 일을 했습니다. 그는 살기위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 도움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믿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으로 들어간 그 시간에 그는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속에서 세상의 모습을 읽습니다. 저는 이 앉은뱅이의 모습을 통해서 여러분이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향하여 손을 내밀고 오늘을 살아갈 하루의 생명을 부지해줄 그 무엇을 구걸하고 있는 그 처참한 앉은뱅이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정상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종교의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의 모습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 요구를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얼핏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집회를 하고 있는 동안에 오늘밤에 이 강남 바닥에서 여러분!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시는 술이 얼마큼인지 아십니까? 30억입니다. 술 먹고 여관에 지불하는 돈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헤아려보지 않았지만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한 달이면 900억이고 1년이면 1조 8000억의 돈이 큰 교회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이 강남에서 술값으로 지불되고 있습니다. 혼자 얼마나 잘 살아갑니까? 조금도 누구를 의지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얼마나 자립심이 강한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오늘밤에 전도지를 들고 이 환락가를 누벼보면 알 것입니다. ‘아저씨 예수 믿으세요. 아저씨의 영혼이 지옥의 불길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즉시 말 할 것입니다. ‘애들은 빨리 가서 자라.’ 여러분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음을 우리는 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잘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씩씩한 것이 씩씩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볼 때 씩씩한 사람이 집에 가서 고요한 밤이면 벽을 마주하고 베갯잇을 적시는 연약함의 사연을 아십니까? 이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이 좋은 저녁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는데 술을 퍼마시고 개가 토하듯이 바닥에다가 먹은 것을 토하고 돈을 뿌리면서 누비다가는 그 이튿날 아침에 아픈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면서 다시 술을 먹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웃으시는 분들은 수상한 사람입니다. 아무 때나 웃으시면 오해를 받습니다. 여러분! 그 모든 것은 혼자 힘으로 인생을 지탱할 수 없다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강한 것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강할 때가 정말 세상이 강하여 보일 때 자신은 한번 복음이 그들의 급소를 찌를 때 거꾸러지면서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부흥의 시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핏 보면 이 세상은 자기 혼자 힘으로 신나게 잘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많이 교육을 받고 재물을 누리고 미래를 보장받을수록 더 스스로 자립하며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교만한 세상의 태도는 어디에서든지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세상 속에 살아가는 개인의 총 집합입니다. 세상이 어떠한지를 보기 위해서는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깊이 관찰하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깃들여있는 모든 공허함은 곧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에 깃들여있는 공허함의 총회인 것입니다. 개인의 삶을 주목해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자립심이 강하고 자신감에 차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혼자의 힘으로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세상을 피상적으로 볼 때 세상이 우리는 무서워 보이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너무나 확신에 차서 복음을 받아들일 여유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알 때 그렇게 교만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을 피상적으로 알 때 그 세상 앞에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 신령한 영안을 열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눈을 열게 했던 신령 영안을 주셔서 도단 성을 둘러싼 아람군대 뒤에 진을 친 수많은 하나님의 천군과 천사를 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그런 영안들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그렇게 혼자서 삶을 영위해 갈수 있다는 사실이 곧 그들이 본질적이고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씩씩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님을 여러분이 기억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지점을 여러분이 주목해주십시오. 여러분! 세상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우리는 쓸데없는 것만 가지고 고민을 하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들이 그렇게 자립심 강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인생과 세상의 근원적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 앞에 손을 내밀어 구걸하고 있는 거지의 모습 속에서 세상 자신이 읽을 수 없는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그들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자신들은 인정하지 않아도 그들의 내면이 이처럼 절망적인 몸부림 속에서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다시 찾을 생각도 하지 마라.’ 그 이야기는 보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의 종소리여, 내 인생을 향하여서는 그칠지어다.’ 그 이야기는 하루 속히 자기를 구원해달라는 몸부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죽었다고 단발마적인 몸부림으로 외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신앙고백과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세상의 강함을 읽는 대신에 허무 속에서 몸부림치는 세상의 모습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낀 손으로 무릎을 꿇은 채 사도들을 향하여 손을 내밀며 무엇을 얻을까? 처참한 눈빛으로 사도들의 도움을 구하던 세상의 이 모습을 우리는 읽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잃어버린 세상을 향해 흘릴 눈물이 너무나 적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웃음은 늘어나도 울음은 마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신령해지는 것과 우정이 충만해지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혼동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자기네끼리 사교적인 모임으로 변해가는 것이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상은 점점 비참한 영적인 사망의 자리로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소득이 늘어나는 것이 이런 영적인 상태에 아무런 개선을 줄 수 없다는 것은 기독교가 찬란하게 꽃피었던 나라들의 번영을 보면서 우리는 뼈저리게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귀하게 살고 국민소득이 30,000불이 되는 것은 대통령의 기도제목일지 모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도제목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검은 고무신을 신고 겨울에 다시 무명양말을 신고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이 조국이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물같이 흐르고 공법이 하수와 같이 정의가 물같이 흐르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꿈꾸고 그리워하고 목말라해야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은 늘어나는 재산과 번영하는 국가를 보며 즐거워할지라도 우리는 쇠하지 아니하고 강건하게 서가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 조국의 역사 속에 투사해서 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쇠하여 가도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쳤던 선지자 이사야는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비관 속에서 찬란하게 피어오르던 낙관의 역사관을 우리들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혼자 힘으로 잘살아가는 이 모든 세상의 사람들은 그 내면의 세계에서 이처럼 간곡한 탄원으로 교회를 향해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고요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이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습니까? ‘너희여 나를 구원하라. 교회여 어찌하여 우리의 역사를 버리려느냐? 그리스도인들이여 너희들은 정녕 조국을 잊었는가?’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습니까? 몇 년 전에 제가 어느 집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집회가 끝난 다음에 자매 3명이 똑같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전도사님!’ 그때는 전도사였습니다. 지금도 목사가 아니고 강도사입니다. 미스프린트입니다. 지금은 강도사입니다. ‘전도사님, 저는 기도를 못하겠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눈을 감고 무릎을 꿇으면 막 몸부림치는 피어린 절규가 한 두 사람의 절규가 아니라 수백만의 절규가 귀에 들린다는 것입니다. 조금 있더니 자매 하나가 ‘이것은 비밀인데요. 전도사님! 이상하게 가만히 무릎을 꿇고 눈을 감으면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요.’ ‘몇 명이나 되는데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수십만의 사람의 울부짖음이 들립니다.’ 조금 있다가 또 와서 또 그래요. 여러분! 이게 이 광경을 하나님은 이 역사의 한마당에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못 듣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의 눈이 가리어져 있고 우리의 귀가 멀고 우리의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각성된 심령으로 조국을 바라보십시오. 들려오는 수백 명, 아니 수천만의 울부짖음과 몸부림이 우리의 귀에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은 이처럼 절박하게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 동네사람들이 (테이프 끊김)
여러분! 교회는 세상 속에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주목하여 우리를 보라.’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이유와 앉은뱅이가 그들을 주목한 이유는 같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도 요한 사도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을 때 쳐다보았습니다. 멀쩡히 쳐다보는 사람을 왜 또 쳐다보라고 그랬는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너는 우리를 주목하여 보라.’ 그랬습니다. 그 사실은 지금 네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지만 그러나 그 생각을 버리고 다시 한 번 쳐다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가 사도들을 쳐다보는 눈길과 사도들이 그를 쳐다보는 눈길이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향해서 ‘너는 우리를 주목하여 보라,’ 사도가 말했을 때 사도는 근원적으로 그의 인생의 문제를 치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가 그를 주목한 것은 오늘 하루의 양식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를 쳐다보았던 것입니다. 그가 원한 것은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도들에게 원한 것은 적선이었던 것입니다. 한 모금의 포도주와 한 조각의 빵을 살 수 있는 은화 한 닢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교회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언제나 교회를 필요로 한다고 세상은 말합니다. 그들이 요구하고 원하는 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세상은 교회로 하여금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서 교회가 마땅한 몫을 기여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요구하는 것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애처롭게도 세상의 그 요구에 부응해보려고 애를 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 서있고 역사는 교회의 둘레에 서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구분은 될지언정 나눠질 수는 없습니다. 오늘 와서 신령한 말씀을 들은 여러분이 오늘 잠시 두세 시간 후면 문을 나서서 그 세상의 물결을 이루어가고 있는 한사람의 영향력 있는 요소로서 이 세상의 한 부류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남의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세상의 요구를 그리스도인들이 거절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가 놓여있는 그 시대의 요구들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듭 강조하신 것이 결국은 죄악 된 이 세상에서 세상을 등지고 포기하고 숲속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팔복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 변화 산에서 당신의 변화하는 신령한 모습을 보았던 모든 제자들을 다시 세상으로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로 가게 했습니다. 왜? 거기가 바로 그들이 있어야할 자리였습니다.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은 잠시입니다. 여러분은 즉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착하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은 Humanitarianism이 지향하는 바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교회에게 이렇게 묻기를 좋아했습니다. ‘너희가 세상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고 있느냐?’ ‘네가 역사 속에서 마땅히 지불해야할 임대료를 이 세상에 지불하고 있느냐?’ 이것을 질문했습니다. 교회가 신령한 영향력을 잃어버릴 적마다 세상이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콤플렉스를 느끼고 그리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들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양심이라고 착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이런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고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궁금하게 여기는 이 주제를 향한 해결의 길로 접어드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고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섬길 수 있는 모든 섬김의 시작은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반복할 테니까 아멘을 한번 해보십시오. 고통 하는 세상에 대한 유일한 정답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고통하고 자기모순 속에서 몸부림치는 이 허무한 세상의 유일한 해답은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추수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세상의 비극이 끝나는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일 없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치료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양분하려고 시도한다는 그러한 반문을 갖고 계신 분들이 여러분 중에 있으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세상의 질문 앞에서 전전긍긍해온 교회시대마다 영혼의 구원과 세상을 섬기는 일이 통합되기는커녕 점점 양분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조국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지난 세대에 초월적이고 타계적인 신앙 일변도의 예수천당의 신앙의 흐름은 반성해야할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점도 곰곰이 생각하면 그들이 전도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whole Gospel를 전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까?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국교회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명의 수많은 순교자의 뼈들이 오늘 여러분에게 사도행전 3장을 증언하고 있는 이 시간에도 간도에 묻혀있고 만주에 묻혀있고 시베리아의 벌판에 썩지 못한 채 아직까지도 동토의 땅에서 뒹굴면서 그들의 영혼은 천국에서 오늘 저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들의 순교자적인 죽음과 그리고 복음 하나를 전하고 영혼 하나를 건져서 천당에 보내야겠다는 이 불타는 집념 하나를 가지고 때로는 방물장수로 변장하고 때로는 매수인으로 변장해서 산골과 화전민들을 누비고 동토의 땅을 누비며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서 생사를 걸었던 순교자적인 삶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슨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살아온 것이 반성해야 될 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모든 어리석은 사람들의 눈에 가린 것들을 벗겨주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교회사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할 뿐인 것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수면상태에 가까이 들어가고 현실을 타계할 수 있는 영적인 영향력을 잃어버릴 때마다 아무 유익이 없는 이런 쓸데없는 논쟁들이 교회에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 점에 지성인들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부편 투표에 표를 던져야지만 지성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19세기 말의 대륙의 교회가 경험한 바였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자신들을 위한 역할을 교회에 요구해왔습니다. 인도주의가 원하는 바를 세상은 언제나 교회에 요구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이 되기 위해서 더 나은 윤리적인 공동체인 교회인 너희가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이런 현실적인 요구를 부응하도록 그렇게 강요받아왔던 것입니다.
오늘 성전 미문에서 거룩한 성령으로 충만하게 가득 차게 있었을 베드로와 요한을 보면서도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는 대신 그들의 자비를 통해서 오늘 하루의 양식을 구해서 오늘 잘 먹고 따뜻한 방에 누워서 내일도 깡통을 들고 여기에 나와서 구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 일 하나에 이 거지는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을 주목하도록 그에게 촉구한 것은 단지 그의 하루 양식을 해결해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을 근원적으로 치료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앉은뱅이를 불러서 자기를 주목하게 만든 것은 그의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때 굉장히 많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왜 성경은 이런 식으로 극단적일까?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분이 성경의 숲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연한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탁월한 안목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평범한 성경 본문 속에서 남이 제기할 수 없는 의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답해가면서 우리는 보다 깊은 성경의 메시지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왜 이렇게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한 푼 주십시오.’ 그러는데 불쌍하지도 않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거지가 설령 구원을 받고 성령 충만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먹고살아야할 것 아닙니까? 성령 충만 하다고 해서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목사님!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요. 나를 너무 째려보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노려보십니까? 여러분! 왜 성령 충만하고 구원을 받아도 오늘 하루는 먹고살아야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러느냐는 말입니다. 아니 왜 이렇게 극단적이냐는 것입니다. 조금 치우치지 않았습니까? 만날 하는 이야기가 그 치우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균형 잡힌 복음에 의하면 이런 것이 아닙니까? 그 복음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아니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복음입니다. 우선 저처럼 시계라도 풀러주면서 ‘자, 은과 금은 없거니와 시계라도 너에게 주노니 팔아서 오늘 저녁 자장면이라도 사먹어라.’ 하고 주고 그 다음에 복음을 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그렇다고 그러십시오.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오늘날 사도들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하면 대부분 여러분 같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저사람 치우쳤다고 이야기 합니다. 제가 어둠속을 헤매다가 지금으로부터 7, 8년 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즉시 몇 개월 있다가 설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이렇게 설교하러 다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처음에 정말 놀라운 진리를 성경을 통해서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이전에는 사람들이 내 설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별로 돌아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한 번도 설교단에 올라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되겠다는 생각을 별로 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대도 없으니까 점검해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은혜를 받고나서 복음을 전하는데 나는 정말 복음의 그 진수만을 골라서 전한다고 전했는데 사람들은 만날 듣고 나서 하는 이야기가 ‘저 사람은 치우쳤어.’ ‘균형을 잃었어.’ ‘복음의 편견에 붙잡혀있어.’ 그래서 한동안 기도제목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주님, 중심 잡게 하옵소서. 균형 잡게 하옵소서.’ 균형 잡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을 안 해주십니다. 강대 밑에서 기도할 때 ‘주님, 오늘 말씀을 전하다가 열 받지 말게 하옵소서. 주님을 전하다가 정말 치우치지 말게 하옵소서.’ 하면서 올라갔는데 하나님이 이상하게 응답을 안 해주십니다. 그리고 전하고 나오면 나는 균형 있게 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치우쳤어.’ ‘아 역시 그렇지! 쯫쯫. 치우치지만 않았으면 참 쓸 만한 사람인데’ 아 몰골은 흉악하오 마는 문자 속은 기특하오. 계속 고민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한테 와서 입에 거품을 물고 당신은 치우쳐서 장래가 염려된다는 둥 그때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주님! 나는 왜 이렇게 생겼습니까? 나는 왜 이렇게 자꾸 치우칩니까? 주님 저에게도 균형을 주시옵소서.’ 정말 오래도록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말씀만 펴면 더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치우친다고 남들이 그럽니다. 내가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우리 집사람까지도 아침에 큐티를 하고 펼쳐놓고 본문을 주고 해설을 해주는데 ‘여보 치우쳤어!’ 요즘은 균형을 너무 잘 잡는 것 같다고 걱정된다고 그럴 정도로 진보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만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역시 멋있으십니다. 어느 날 균형 잡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저도 모르게 이 속에서 복받치는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주님, 저는 영원히 균형 잡지 않겠나이다. 주님 치우치게 하옵소서. 주님 나는 치우쳐야만 하겠나이다. 주님 더 치우치게 하옵소서.’ 그리고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균형 잡힌 사람이 없어서 다 치우쳐서 나는 그 사람들에다가 비하면 너무 냉정할 정도로 균형이 잡혀있어요. 막 치우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막 성경이 물줄기가 되어서 열려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이야기하면 밤새워도 이야기 못하는데 몇 개만 맛을 보십시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완전히 치우쳤습니다. ‘우리가 정신이 온전하여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요. 미쳤어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 사나 죽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로다.’ 끌려가서 심문을 받는데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바울아 네가 공부를 많이 하더니 미쳤구나.’ 그러니까 바울이 멈칫거리지도 않고 즉시 말했습니다. ‘각하여 내가 이렇게 결박당한 것 외에는 당신도 나처럼 미치기를 바랍니다. 나는 세상이 미치지 않아서 미치는 사람입니다.’ 하다가 나중에는 어느 정도로 치우쳤는지 아십니까? ‘내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짐을 당할지라도 나는 원하는 바라.’ 치우쳤습니까? 균형 잡혔습니까? 나는 그래서 균형 잡힌 사람 그 잘난 사람들을 만날 적마다 말합니다. ‘잘났다. 정말 잘났다. 네 똥 굵다.’ 저는 각오했습니다. 영원히 균형 잡지 아니하리라. 균형 잡기를 원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잘나게 균형 잡힌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삶의 진수가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분은 치우친 사람이었습니다.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며 어두운 세상을 성경 기록 속에서는 한 번도 웃지 않고 지나셨습니다. 그리고 처참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순간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복음의 기도로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치우쳤습니다. 나는 그 놀랍게 균형 잡힌 사람들의 허한 영적인 생활을 꿰뚫어지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서있는 반석이 그리스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고 우리의 구원의 영원한 반석이 그리스도 예수이심을 깊이 체험하고 안 사람마다 모두 균형을 잡을 수 없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치우쳤습니다.’ 또 그럽니다. ‘치우쳤다. 어쩔래? 치우쳤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가만있기나 하지 묻습니다. ‘좌입니까? 우입니까?’ 그럽니다. ‘농담하지 마십시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닙니다. 나는 핵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치우친 사람입니다.’
부흥이 일어난 시기마다 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을 정말 위험할 정도로 치우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흥의 물결을 따라서 사람들은 원색적인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고 한편의 설교는 한 발의 피를 토하는 것과 같이 농도 짙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세상은 교만한 무릎을 복음 앞에 꿇고 그리고 이 세상의 헛된 영광 뒤에 찬란하게 떠오르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사람들은 흐느끼고 회개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부흥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면 됩니다. 은과 금은 없다고 그러는데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왜 은과 금이 없습니까? 그러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내가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없습니까?’ 그러면 성도들이 낸 그 연보는 다 어디 있습니까? 집을 팔고 땅을 팔아서 보따리를 사도들의 발 앞에 밀어 넣었는데 그것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이 정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정말이 아닙니다. 은과 금이 없다는 것은 정말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재정이 풍부했습니다. 그런데 왜 ‘은과 금은 없거니와’ 라고 말합니까?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것이 아니라고요? 아니 거기에 있는 것은 그러면 성도들의 것입니까? 사도들이 도장을 찍으면 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없다고 그러느냐는 것입니다. 위증을 하고 있습니다. 위증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럽니까? 정말 없어서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은과 금이 없다고 말해야지만 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갑니까? 이게 우리를 엄청난 혼동으로부터 구해주는 원리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교훈입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거지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에 더 이상 그들을 쳐다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하여 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은과 금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던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를 위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에게는 은과 금이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가 바로 이 앉은뱅이에게 기대했던 바는 바로 이런 실망이었습니다. 철저한 실망, 내가 요구하는 것이 저들에게 없다는 실망, 내가 바라는 것이 저들에게는 없다는 그 철저한 실망, 그것을 이 앉은뱅이가 체험하게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도들은 은과 금 같은 것을 가지고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거지의 기대를 완전히 꺾어버렸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교훈입니까? 그리고 그들은 은과 금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하여 은과 금이 내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앉은뱅이 한사람을 보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교회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담대히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은과 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단호히 말한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은과 금을 주목하는 대신에 자신들 안에 있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참 생명의 근원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신 근원적인 소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고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유하고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기관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사회의 미담을 만들어서 사회면이나 메우기 위해서 이 땅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귀하지 않거나 가치가 없거나 교회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이상의 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우리 주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슴 저미며 슬퍼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이 땅에서 존재에 합당한 일컬음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뻐하는 것은 그 하나님이 온 땅에 높이 들리어지고 그 이름을 온 백성들이 경배하는 것을 보면서 교회는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신적인 기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백성답게 양육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께로 구원하는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이상은 이 땅의 모든 육체들이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한다는 그 이사야 40장의 예언이 교회의 이상인 것입니다. 온 세상이 여호와의 다스림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는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 고백을 통하여 사도들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는 동시에 그의 불행의 근원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주목하도록 또 거지가 주목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도들이 은과 금이 없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서슴없이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한없이 부끄러워했을 이 이야기를 서슴없이 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충만한 하나님은 은과 금이 할 수 없는 더 크고 위대한 일들을 능히 행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은이나 금은 단지 고통 하는 육신을 위해 일용할 양식이 될 뿐이거니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을 때 교회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샬롬을 잃어버린 채 불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참된 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불구의 삶을 바꾸어놓아 하나님과 다시 샬롬을 회복하게 만들고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각양 은총과 기업을 누리게 함으로써 어두운 세상에서 장애물과 같은 불행의 문제를 훌륭하게 극복하며 천상의 것들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원동력을 교회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은이나 금 같은 것들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인생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던 시기마다 즉 하나님이 다시 깨우시는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필요하여 에스골 골짜기에서 마른 뼈와 같이 교회가 생기를 잃어가고 있던 그 때에 교회는 불행히도 자신의 곤궁한 영적인 상태,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없는 것과 같은 이러한 가난한 영적인 상태를 붙들고 고뇌하기 보다는 세상의 은과 금을 모으기 위해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대등한 관계에서 대화하고 싶어 했습니다. ‘너희가 은과 금을 찾느냐? 우리에게도 은과 금은 있다. 너희에게 환영받는 그런 사상을 우리도 싫어하지 않는다. 너희가 추구하는 가치를 교회도 동참해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 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그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었던 주인공인 베드로 사도가 후일 다른 편지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한 것이라.’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을 등져 불행한 길을 걸어가는 인생들을 근원적으로 회심시켜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소유하게 된 때는 세상의 은이나 금 같은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 안에는 금보다 귀한 믿음이 있고 이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귀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교회가 이러한 영적인 권세와 힘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세상에 있는 은과 같이 부서질 사상이나 금과 같이 써버리면 없어지고 말 잠시 빛날 세속적인 성취에 대하여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교회는 다시 이 세상에 가치관을 받아들이게 되고 복음은 빛을 잃어가고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은 사라져가고 하나님이 교회를 기뻐하시는 증거들은 사라져가고 성령은 교회 안에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환영을 받을지라도 마땅히 우리를 환영하여야할 그리스도께서 슬퍼하고 계시는 기이한 장면이 역사 속에서 연출되어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생한 인도하심과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 교회가 이끌리기 보다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제도나 그리고 기능에 의해서 교회가 움직여지는 죽은 자와 같은 모습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이전에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고백하며 세상에 그 모든 은과 금 같은 것들을 다 내려놓고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달려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다가가 그의 발을 껴안았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교회에 들어왔는데 들어와 보니까 나보다 훨씬 지체가 높으신 분들이 자기가 교회에 들어올 때 다 버리고 들어온 그것들을 주워 모으면서 키 재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더 영적으로 공허해지기 시작했고 이 세상을 은과 금으로 자신들의 공허한 영적인 삶을 메워보려고 하는 그릇된 보상심리는 언제든지 작동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의 구원을 위한 전도를 사회를 위해서 돈을 몇 푼 내면서 봉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그리워하며 애통해야할 중보기도의 의무를 사교적인 모임을 가지고 피켓이나 몇 개들고 명동거리를 누비는 것으로 균형 잡힌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끝내버리고 그리고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는 대신 우정을 나누는 우정 충만한 교회 분위기로 만족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복음으로부터 멀어졌고 행사는 많아도 영적인 삶은 황폐해져 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교회는 신적인 권위를 잃어버리고 세속의 정신 속에서 사람들이 세운 기관과 멤버십을 나누어갖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각성이 필요했던 시기마다 교회는 언제나 이러한 모습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이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매우 뜻 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이 지점에 서야할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멈추고 어떻게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정말 신약의 교회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 원동력에 대한 내면의 문제로 눈을 돌려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교회 자신의 수준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낼 수 없고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는 본국의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능가하는 교회가 심겨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조국의 교회사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금 새롭게 위대한 각성과 부흥을 맞이해서 교회다운 교회로 변하는 것이 선교와 이 세상의 변화를 위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커다란 각성이 필요했던 시기마다 교회는 사라져버린 그리스도의 함께하심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적인 능력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재를 인하여 애통하고 마음 아파하는 대신에 가난한 심령이 되는 대신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내게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면서 은과 금을 인하여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리스도 예수를 교회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판단은 정확하고 예리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나 그러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게 하고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이같이 세상의 변혁을 위하여 부여받은 근본적인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과연 세상의 은과 금으로 자기에게 부여된 거룩한 소명을 다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겠습니까? 왜 많은 사도들이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외치기를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이 천하에 구원을 받을 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없다고 말했겠습니까. 왜 모든 것을 다 알고 헬라의 철학을 달통하고 에피큐리우스 학파의 학자들과 철학의 논쟁을 불러일으켜서 그들을 무색하게 했던 대 사도, 당대의 최고의 지성인 사도 바울이 순교를 일 년 앞에 두고 반백의 노사도가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반백의 머리를 흔들며 흐느끼면서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하려 세상에 임하셨다 함이더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 왜 사도가 내가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워지는 것들이 무엇을 회복할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은이나 금 같은 것들을 많이 모으고 부동산 등기들을 교회가 손아귀에 쥐고 있으면 그것으로써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입니까? 여러분 건물을 허물고 5층, 6층, 8층, 10층으로 짓고 몇 억짜리 오르간을 들여놓으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아줄 것 같습니까? 다 욕합니다. 감탄하는 사람은 헌금한 자기네 교인들밖에 없습니다. 다른 교회 교인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남의 교회에 가서 남의 교회 크게 지어놓은 것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신반포교회에서 옮겨야겠다고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연구대상입니다. 돈을 낸 그 사람들만 좋아가지고 괜히 들뜨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늘어나서 예배드릴 장소가 없는데 어떻게 교회를 안 부술 수가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지어야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런 부동산 등기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강도사님, 우리교회 재산이 대강 얼마쯤 될 것 같습니까?’ 속으로 ‘장로님 노시는군요.’ 어쨌다는 것입니까? 백억이면 어쩌고 이백 억이면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이게 도대체 조국교회의 수준이라니 통탄할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18세기에 위대한 영적 부흥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름을 여러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중에서 여러분이 다 아는 이름 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와 그리고 웨슬리 형제들입니다.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는 가운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옥스퍼드에 다니던 이 사람들이 모여서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카비넌트 즉 언약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모두 사인을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약속은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 가운데 눈에 확 뜨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고아와 과부들을 구하거나 선교를 함에 있어서 바자회를 하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 서원합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치우쳤을까요? 바자회 하면 어떻습니까? 그 돈을 가지고 불고기집에 가서 고기를 먹거나 해외여행을 가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돈을 가지고 가난한자를 도와주자는데 뭐 어떻습니까? ‘헌금해서 하자.’ 아니 헌금도 하고 바자회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입니다. 그렇게 조상의 유전된 망령된 행실이라고 생각하고 그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손에 붙들려서 위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가슴에 묻어서 지울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역사 속에 남겨놓았던 사람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이야기하면 얼굴은 둥글둥글하게 생겼는데 무엇이 그렇게 따지기를 좋아하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는 사람들에게는 언제까지나 이 치욕스러운 교회사 속에서 둥글둥글 살아가는 이방원과 같은 인생을 사는 것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하나님 앞에 약속했습니다. 모두 유행하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절했습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정말 이 세상에 비참한 불행 고아와 과부의 문제, 교육의 문제 사회의 변화의 문제에 대해서 이 세 사람만큼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투신을 해서 이 세상을 고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자회 같은 것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세상으로 하여금 금이나 은이 아니라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주목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자회를 하면서 참기름이나 짜가지고 왔다갔다 뛰어다니고 옷가지를 들고 이러 저리 뛰면서 몇 푼 주어모아서 코 묻은 돈을 헤아리면서 주님을 위해서 대단한 일을 했고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부요함 대신에 ‘어찌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떠났나이까? 오늘도 말씀을 듣고 아무도 회심한 사람이 없나이다. 어찌하여 하나님 전도의 문을 닫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위대한 역사를 그치셨사옵니까?’ 이런 문제를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셨고 이 18세기의 위대한 영적인 거성들이 그 사실들을 직시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들에게는 은과 금이 없다고 말해도 괜찮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줄 뿐인 은과 금이 아니라 고통 하는 인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그리스도 자신이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찬송 하나를 부르고 좀 더 하겠습니다.
(찬송 189장)
마음의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게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거룩한 천국에 올라간 후에도 죄 속한 은혜의 찬송들 기쁘게 부름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그러면 도대체 만날 각성, 각성 그러는데 그러면 각성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무엇을 각성이라고 말합니까? 저는 각성이라는 것을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정의합니다. 교회가 자기들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라지셨다는 사실을 어느 날 불현듯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즉시 ‘저 사람은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아니 그리스도가 어떻게 사라졌다 다시 왔다 하는가?’ 그러나 여러분! 이 문제를 여러분이 제에게 대답을 요구하기 전에 여러분은 계시록 3장을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여러분! 전도지에다가 잘 찍는 성경구절이 요한 계시록 3장 20절에 나옵니다. 다 같이 외워봅시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전도용 성경구절이 아닙니다. 이것은 각성용 성경구절입니다. 이것은 Non Christian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Christian을 위한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였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뭐라고 말씀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일곱 금 촛대를 붙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일곱별을 붙잡고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회자도 그 손에 붙들고 계셨습니다. 촛대 사이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입니다. 구원받은 교회였음을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은 곤란한 교리적인 문제를 야기 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밖에서 두드리십니까? 교회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은 닫혔습니다. 사람들은 모였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안했겠습니까? 성가대도 이렇게 섰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모여서 가끔 각성집회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도 파송하고 제직회도 하고 헌금도 하고 주일 대예배도 드렸습니다. 구역예배도 모였을 것입니다. 주일학교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이것은 구원의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입니다. 이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았으면서도 거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보다 더 추월할 정도로 악한 삶을 살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이 각성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에게 알려줄만한 많은 성경구절이 있지만 오늘은 역대하 한 장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15장입니다. 그리고 딱 한절입니다. 12절입니다. 역대하 15장 12절입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였다.’ 여러분 이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르호보암 이후로 유대의 역사는 어두움으로 치달았습니다. 사실 그 어두움은 이미 솔로몬 말기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역사 속에 찬란한 샛별과 같은 군주를 하나 보냅니다. 신앙의 사람 아사였습니다. 일평생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하였다고 성경이 평가한 사람입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위대한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구스에서 일백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유다나라를 쳐들어왔습니다. 그때 이 히스기야는 그들과 가서 비굴하게 뇌물을 주고 군대를 돌려보낼 궁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주여 어찌하시렵니까?’ 일백만 대군을 박살내버렸습니다. 쫒아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일들이 유다 역사에 도대체 언제 일어났습니까? 솔로몬 이후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 위대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의 어머니를 우상을 섬긴다는 이유 때문에 폐위했습니다. 대개 개혁은 서민부터 시작되는데 이 사람의 개혁은 철저하게 궁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산당을 허물고 바알신상들을 깨뜨렸습니다. 아세라 목상을 두드려 엎고 시작했고 그리고 이들에게서 일어난 이 놀라운 신앙의 위대한 개혁을 보면서 북 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의 본거지인 남 왕국 유다를 그리워하는 향수가 생겨서 귀화자가 속출하리만큼 위대한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런 일이 도대체 다윗 왕 이래 언제 있었습니까? 이 놀라운 일들을 이 교회는 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 시대는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바로 선지자의 권면을 받은 이 아사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아사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백만 대군을 하루아침에 쫒아낸 왕이 어디 있느냐?’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를 들이대면서 사람들을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이 놀라운 신앙의 개혁들을 인해서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 깊이 자신을 돌아보면서 결단하고 백성들 앞에 나왔습니다.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결심한 것은 열조의 하나님을 찾기로 다짐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대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들은 그때의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열조의 하나님을 찾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해주실 때에 어떤 위대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은 역사 속에서 모두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그 차가운 역사의 기록들을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애굽의 온 땅에 열 가지 재앙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중다한 잡족들로 하여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밖에는 참신이 없다는 사실이 각성시키셨던 위대한 하나님의 시대를 그리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마른땅에서 물을 내심으로 말미암아 온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가대로 변하게 되는 위대한 역사가 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열조들의 감격들을 오늘 그리워하게 되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언제든지 부흥이 오기 전에는 이처럼 요즘의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고 옛날의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해주실 때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그 위대한 일들이 역사 속에 묻힌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믿음을 통해 재현될 수 있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각성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교회 안에 함께 계셔야할 그리스도가 자신들과 동행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그밖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갑자기 무미해지고 그런 은과 금과 같은 것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가나안땅을 너희에게 유업으로 주겠다. 그러나 내 사자하고 가라. 나는 안 간다.’ 할 때에 백성들이 그 말씀을 인해서 슬퍼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영적인 각성은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은과 금을 의지하면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오다가 어느 날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 위대한 시대와 성경의 약속을 돌아보며 사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각성인 것입니다.
몇 달 전에 성남과 강남구의 경계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갔었습니다. 마지막 돌아오는 날 그 교회의 전도사님이 제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자매 하나가 밤에 전화가 와서 길게 통화를 했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이틀 제 집회에 참석하고 나서 전화를 했는데 상당히 깊은 밤이었는데 자매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전도사님 내가 창녀 같습니다.’ 그는 어제 그런 생각을 안했습니다. 자기는 균형이 잡혔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일학교를 열심히 섬기고 있었고 성가대에서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마 그 자매가 직장을 다니고 있다면 십일조를 떼어먹은 적이 없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늘 그 자매를 생각하면 대견하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청년들이 그만큼만 예수를 잘 믿으면 참 좋을 텐데. 전도사님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각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지혜 있는 자라고 믿었지만 어느 날 미련한자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분별력이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눈먼 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평범하게 운영되어오고 그 안에는 언제나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움직임이 그치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동기와 힘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과 그리고 그의 경외하심과 그리고 그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진실한 열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잘못된 자신들의 삶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한 데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관계가 자신의 모든 영적인 가난한 삶의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