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은 우리 안에 생명은 너희 안에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고후 4:11-12)
녹취자: 박윤정
고린도후서는 신약의 예레미아서라고 불립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의 받은 고난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고난과 관련된 가르침을 많이 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제 사도는 오늘 말씀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하느니라’라는 말씀은 사도바울이 직접 경험하면서 체득한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결국 자기가 죽는 것만큼 양떼들이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약 6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뇌세포는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않지만 모든 세포는 죽으면 또 다시 새로운 세포가 살아납니다. 6개월만 지나면 6개월 전의 세포는 거의 없을 정도로 우리 몸은 끊임없이 세포가 죽고 세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세포의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네크로시스의 죽음이 있고, (생물학적인 용어입니다) 아포토시스의 죽음이 있습니다. 네크로시스의 죽음은 세포 괴사입니다. 세포가 노화되거나 충격을 받거나 여러 가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타살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포토시스의 죽음은 생물학자들에게는 아직 비밀입니다. 세포가 아직 더 살 수 있는데 그냥 자살해버리는 것입니다. 신비한 비밀은 그렇게 죽으면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에너지는 옆에 있는 세포에 전달되어서 말하자면 전기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세포를 성장시키고 분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을 비유로 하자면 60조개의 꼬마전구가 꽉 차있고, 수없이 깜빡거리면서 죽어가기 때문에 또 다른 전구가 죽어가는 그 기운으로 깜빡 거리면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포가 아무도 안 죽으려고 하는 세포들이 모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왕성하게 아무도 안 죽으면서 번식하면서 그 부분이 혹처럼 커지고 많은 영양분을 빨아들이면서 점점 더 커지려고 합니다. 그것이 의학적으로 암이라고 합니다. 결국 사람이 죽는 것은 죽는 세포 때문에 살아있고, 살려는 세포들의 덩어리 때문에 죽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 누군가는 죽어야지 산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보더라도 엄마, 애들 다 정신 못 차려도 아버지 하나 정신 바짝 차리고 집안을 살리려고 하면 주저앉지 않습니다. 교회가 다 각기 제 갈 길로 가려고 해도 누군가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를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려고 하면 흩어질 사람은 다 흩어져도 그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반드시 다시 삽니다. 이런 원리를 잘 보여주는 것이 선교, 선교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요? 선교사는 경제적으로 힘듭니다. 문화도 다릅니다. 외롭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 대신 눈치는 별로 안 보지 않습니까? 선교지 가면 선교사가 본국에서 돈 갖다가 다 혜택주고 가르쳐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사람입니다. 목회지에서는 목사들이 끊임없이 죽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를 당합니다. 여러 가지 많은 선교사들과는 다른 종류의 권한 때문에 자기를 죽이고 포기해야 되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선교사는 또 다른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든지 목회자든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죽으면 양떼들은 살고 그가 살면 양떼들이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내가 예수 안에서 죽는 것만큼 너희는 예수 안에서 살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렇게 선교사가 죽기만 하면 무슨 보람이 있나 이렇게 말하고 싶겠지요. 그 정답이 11절에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포가 몸을 위해서 자살함으로써 얻는 이익은 자기 몸을 살리는 겁니다. 유사하게 선교사가 양떼들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 안에서 자기가 죽으면, 즉 욕망을 죽이고, 죄를 죽이고, 야망을 죽이고, 교만을 죽이고, 모든 것을 죽이고 나면 하나님이 선물을 주십니다. 그 선교사 안에서 예수가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온전히 죽고, 예수가 온전히 살아있는 최고의 상태를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런데 그렇게 내 안에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온전히 살았는데 그게 내가 산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때문에 죽어야 할 나는 가짜 나입니다.
미러 제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아서 구별이 안 간다는 것입니다. 명품에만 미러 제품이 있습니다. 짝퉁입니다. 우리 안에 참된 자기와 짝퉁인 자기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면 짝퉁인 자신은 죽습니다. 그 다음에 참된 자신이 남는데 그것이 예수와 일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이게 통곡하고 슬퍼할 일이 아니라 이제는 가짜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가 살아계시니 참된 내가 예수와 함께 살아있으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기가 온전히 죽을 때 가장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로 가는 여러분들이 해야될 일은 이제 감독자가 없습니다. 그동안 제 눈치 보느라고 애쓰셨죠? 담임 목사 아래서. 이제는 야단칠 사람이 없습니다. 감독할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키워온 신앙이, 인격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 사랑함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이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때가 온 겁니다. 게으르고 꾀를 피우고 놀고 싶습니까? 노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순교의 마음을 가지고 그 정신으로 매일 매일 죽어서 선교지를 살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