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있는 목양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31)
녹취자: 장미연
사도바울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던 때가 언제였느냐고 물으면 아마 아세아에 들어와서 3년 동안 목회했던 때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가장 힘든 때가 언제였느냐고 물으면 똑같이 대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아마도 거기서 자기는 순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재판의 과정을 통해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밀레도까지 오게 되었을 때에 사도바울은 사람을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그들이 왔을 때 사도바울은 유언과 같은 설교를 남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말에 거의 결론 부분에 와서 자기가 그렇게 애써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에베소에 대부흥이 일어나서 교회가 세워졌지만 자기가 사라지고 나면 결국은 사나운 이리가 와서 양 떼들을 아끼지 않고 또 제자들을 끌어다가 그릇된 교훈에 빠지게 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의 목회 환경을 이야기하자면 앞으로 다가올 그 시절의 목회가 오늘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을 지나고 있는 우리보다도 절대로 가볍지가 않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사도는 그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 그런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어떻게 목회해야 되겠는지를 자신의 온 삶으로 보여준 바와 같이 그들에게 증거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건 구약성경에 자주 나오는 화법입니다. 특히 신명기같은 곳에 많이 나오는 화법이지요. ‘기억하라. 잊지말라. 기억하라. 잊지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중요하기에 그가 기억하라고 했을까요? 이제 사랑하던 목회지를 떠나고 거기에 암울한 미래가 닥칠 텐데 많은 사람이 믿음에 물러가 하나님 앞에 그릇된 가르침에 빠지는 대혼란이 일어날 텐데 그때에도 기억하고 계속 해야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게 바로 목회였습니다.
첫째는 훈계의 목회였습니다. 여기 쓰여진 그리스어 단어는 ‘타이르다’ ‘무엇인가 간곡한 말로 타일러서 설득하고 진리로 돌아가게 하는 동작’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이 아무리 암울한 시기가 오더라도 자기의 동역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끝까지 계속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보여준 모본이었습니다. 갈 곳이 많고 해야 할 일이 엄청 많았지만 삼 년이라는 기간 동안을 머물며 제자들을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께 대한 회개와 구원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든든하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는데 그 모든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하는 것을 통해 일어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이제 현대 사회는 나노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견을 하고 각자 도생의 길을 걸을 것이며 이전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회의 변화가 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목회의 방법도 필요하겠지요. 목회도 하나님의 일이니까 좋은 방법이 동원되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변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결코 인간이 변화될 수 없으며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이 생길 수 없고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 그 믿음을 유지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정반대로 이러한 변화무쌍한 때에 이 고전적인 신념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어찌하든지 진리의 말씀을 잘 가르쳐 훈계하여 그들이 신앙을 갖게 만들고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흔들리지 않도록 이렇게 목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각 사람을 위한 목회입니다. 히랍어 성경에도 똑같이 그냥 각 사람,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러한 교회가 위기적인 상황을 맞이할 때에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들이 좀 방심하고 교회 전체를 숫자로 생각하고 목회했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고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그의 신음 소리를 들어주는 개인 목회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교에서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던 사람이지만 그는 남기고 가는 동역자들에게 각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던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너희도 이렇게 목회하라고 가르쳐주었던 것입니다.
선교적으로 지금은 어려운 시대를 당했다고 말하고 이제 팬데믹 상황이 끝나고 나면 많은 수의 교인이 교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고 코로나 때에 교회를 끊은 교인들 중 상당히 많은 수는 안 돌아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목회자에게는 영적으로 보는 안목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시대를 어떤 시대냐고 부르겠냐고 말한다면 휘어져 추수하게 된 시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끊임없이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사는 것이 너무 곤고해서 교회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쪽에서는 많은 욕을 하면서도 또 한쪽에서는 기독교의 문을 두드리며 영혼의 안식처를 찾으려는 곤고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주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 그들을 따뜻하게 대한다면 선교의 기회는 무한정으로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팬데믹 상황에서 인터넷을 이용해서 더 많은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갈망들이 가득 찬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희 교회만해도 매주 새가족 문을 두드리면서 예배에 참석도 못 하는 상황인데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만큼 곤고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숫자 목회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따뜻하게 다가가서 눈물을 씻겨주는 목회가 필요하고 이런 목회를 하는 교회는 반드시 선교의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쉬지 않는 목회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쉬지 않는다는 ‘우크 에파우사멘’이라는 단어인데 ‘우크’는 그리스어에서 강한 부정입니다. 그리고 ‘에파우사멘’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옮기면 ‘샤바트’입니다. 하나님이 6일을 창조하시고 쉬셨다고 할 때 쓰였던 그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밤낮 쉬지 않고 밤이든지 낮이든지 문자 그대로 쉬지 않지는 않았겠지만 잠도 잤겠지만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사역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 되는 교회는 코로나라고 하는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는 더이상 할 것이 없다하고 두 손을 모으고 코로나 지나길 기다립니다. 그러나 돌아올 교인이 있을지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충성스런 교회는 지금도 밤낮 쉬지 않고 일합니다. 매우 어려운 때에 수많은 교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지나는 일종의 눈물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때 아닙니까? 그러면 사람은 모든 창조의 으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창의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못하게 하는 상황이 있는데 상황보다 사랑이 크면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종 창의적인 사역으로 밤낮 쉬지 않고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겨납니다. 교인들 만날 수도 없고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회사에 가서 기다리면서 당신이 퇴근하면 집에까지 태워주겠다고 하고 나는 백신 맞은지 2주 지났다. 그러고 앉혀놓고 집에 천천히 가면서 목회를 하는 겁니다. 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쉬지 않고 목회를 했습니다. 바로 다음 자기가 떠난 후에 아무리 사나운 이리가 와서 교회를 헤치는 상황이 된다 할지라도 당신들이 명심할 일은 밤낮 쉬지 않고 영혼을 섬기는 거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 교회를 지켜주시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충성심을 가지고 이 위기를 선교의 기회로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눈물의 목회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말로 하는 훈계가 아니었습니다. 눈물로 하는 훈계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역사상으로 19세기에 미국의 위대한 전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찰스 피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신학 사상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엄청난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전도자였다는 사실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맨하튼 거리에 주저앉아서 통곡을 하며 저 사람들은 지옥을 가고 있는데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울었던 사람입니다.
어느 공장을 전도를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동자 한 사람이 일을 하고 있더랍니다. 찾아갔습니다.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그 노동자의 눈동자를 쳐다보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랬더니 예수 안 믿는 이 노동자가 피니가 자기의 눈을 한참 쳐다보다가 눈물을 확 쏟는 것을 보고 자기도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예수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 공장 모든 사람이 그날 회심을 했습니다. 눈물은 그렇게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목회가 눈물의 목회였습니다.
리차드 백스터의 표현을 빌자면 “잃어버린 영혼을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울어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사람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눈에 남을 위한 눈물이 언제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을 받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먼저 받으셨고 눈물 받으시기 전에 일평생 수고하며 흘린 땀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땀을 받으시고 눈물을 받으시고 이후에 핏방울을 받아서 우리를 위한 구속의 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들 힘들다고 난리치는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는 눈물이 있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평안할 때 영혼을 위해 흘릴 줄 몰랐던 눈물을 한없이 쏟으면서 그 눈물로 언어로 대신하면서 자신의 목양지를 눈물로 적시는 사역자들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목회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함께 흘려야 할 눈물입니다. 이 눈물이 비가 되어 척박했던 교회의 땅을 기경하고 그 눈물로 기경된 땅 위에 복음의 씨가 다시 뿌려질 때에 메말랐던 광야 같은 교회는 추수하게 된 밭과 같이 그렇게 풍성한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기억합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눈물의 목회를 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