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2 구역공과강좌
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 2
녹취자: 김경애
D. 한국교회 성장에 대한 평가
Ⅲ. 21세기 한국교회의 역할
A. 개혁주의 신학과 청교도 전통의 부흥
B. 중생과 회심을 통한 참된 성화의 추구
존 파이퍼 목사님의 교회에서도 회심의 문제, 특히 Baptist들은 철저한 전통이 있거든요. 그런데 굉장히 강조한다고 그래요. 사실은 이것이 강조되지 않으면 사실 목회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래서 이 문제가 순수하게 강조의 문제만이 아니라 철저하게 강조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인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설교와 모든 사역 속에서 이것들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설교말씀을 전하는 자기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어야 되는 것이에요.
(교과 읽음)
결국 이 중생과 회심이 없으면 목회 자체가 불가능해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개혁주의적인 목회가 잘 안 되는 그것이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개혁주의 목회가 안 되는 그런 측면도 있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실 개혁주의 목회를 모르기 때문에 개혁주의가 안된다기보다는 개혁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자신 안에, 회중들안에 안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에요. 그 개혁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뭐냐 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중생과 회심이에요. 여러분! 우리들이 자기가 진정으로 회심을 경험해본 사람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도 자기의 회심이 자신의 의지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아요. 그런데 항상 덧붙이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그렇게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먼저 내 마음을 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인간 스스로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이 회심이 한번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회심을 통해서 그 회심의 본래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그 복음을 통한 회개의 영향력이 지속되어야지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이에요.
(교과 읽음)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면 많은 회중들이 무기력을 느끼는 것이에요. 그러면 ‘건널목으로 건너라.’ 그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에요. ‘건널목으로 건너라.’ 그러고 ‘속이지 마라.’ 그것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죠.
(교과 읽음)
그러니까 성화를 강조하고 성화를 강조한다는 것이 두 가지로 대변될 수 있겠는데 우선 첫째는 성화의 생활에 대한 교리들을 잘 가르쳐야 되겠지요? 오늘날 성화의 생활을 위해서 가르쳐져야할 교리는 범위가 어마어마하게 넓지 않겠어요? 모든 신자의 모든 삶을 포괄하는 것이니까 개인적인 경건생활부터 시작해서 교회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가족이나 아니면 심지어 마음을 지키는 모든 것까지 전부 다 성화에 대한 강조겠지요.
(교과 읽음)
교리적인 지식들이 강화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성도들이 교회에 왔을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부러워해야할 덕 있는 생활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그래서 부자가 되고 아니면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그렇게 되는 것이 그것이 교회에 와서 높이 평가받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그런 가치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가치이고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오히려 그런 가치와는 다른 것들이 높이 여김을 받는다고 여겨질 때 실제 자신이 세상에 나가서 살 때 방향의 수정이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세상에서 높이 여김을 받는 사람이 교회에서도 그 이유 때문에 똑같이 높임을 받고 부러움을 산다면 세상과 교회 사이의 균일화가 이루어질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지난번에 누구죠? 누가 조엘 오스틴을 누가 비평을 했는데 간증을 하면서 거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자동차 딜러였는데 목사님께 기도를 받고 그리고 지침을 따라서 열심히 긍정적인 생활을 했더니 거기에서 뉴욕인가 워싱턴에서 자동차 세일즈맨을 했는데 평소보다 비교도 안 되게 엄청나게 많은 자동차를 팔았다는 것이죠. 그것을 논평한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게 그 사람에게는 간증이 될 수 있었겠지만 자동차를 없는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이 사는 것이고 있는 사람은 각기 여태까지 자기가 거래하던 딜러들이 있었을 텐데 그러면 그것을 빼앗긴 사람은 생각해보지 않았느냐? 그러면 결국은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그렇게 빼앗긴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냐?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일반은총 차원에서 수완이 좋고 기술이 좋아서 그렇게 딜러를 잘해서 그래서 자동차의 판매고를 많이 올리는 사람들은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해서 무엇이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그런 식으로 비평하는 것도 보았는데…….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은 은혜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은 신앙에서 참 바른 태도잖아요? 물 한 모금을 먹더라도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너무 극단화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항상 그 자체 안에는 모순적인 결과가 오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 다른 가치라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 이외에 무엇이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 인간이라는 것이 중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서 눈을 뜨게 되면 거기에서 자기의 정신과 영혼의 양식을 얻게 되는 것이에요. 그 아름다움에 아주 농축된 집적들이 성경이고 교리는 그 아름다운 집적들을 수놓은 것들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아니고는 이 개혁주의적인 교리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쨌든 그런 참된 성화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된다는 것이죠.
C. 철저한 개혁주의 교리와 신학 교육
(교과 읽음)
복음주의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신복음주의가 등장하면서 복음주의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어요. 그래서 개혁주의라는 말 대신 복음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 사실 개혁주의라는 말 자체도 사실은 그렇게 아주 좁은 의미가 아니었거든요. 넓은 의미에서는 사실 가톨릭이 아닌 것은 다 개혁주의라고 보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용어가 사라지면서 복음주의가 들어오게 될 때에 사실은 그것은 신복음주의가 일어나면서 널리 사용되게 되요. 그런데 그 말속에는 이미 아주 상당한 관용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여러분도 아마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들어보았을 것이에요. 우리가 너무 싸우지 말고 사도신경을 고백을 한다면 우리들이 서로를 받아들여주어야 된다는 소리를 들어보았지요? 사실은 사도신경을 부인했던 이단이 역사적으로 거의 없어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낳으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성령을 믿사오며…….’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것은 유니테리언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고백이고, 그 다음에 아폴리나리우스주의자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이고, 아리우스주의자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에요.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에요. 그 고백 자체가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신조의 일치를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올바로 해석해주느냐 하는 것이 이제 수많은 사도신경 강론을 낳았던 배경이 되는 것이죠. 각자 동상이몽으로 해석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에게 나으시고’ 해도 그분이 하나님과 아주 유사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제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사도신경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에요.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정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신 분이라고 설명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복음주의라는 말 자체로 이제 충분하지 않아요. 개혁주의라는 말도 사실은 충분하지 않아요.
(교과 읽음)
그러면 성경공부가 대두된 것이 제가 보기에는 1970년대 파라처치부터 시작되어서 80년대부터 교회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강해설교가 되는데 성경에 대한 관심을 많이 높였다는 점에서 칭찬할만한 일이죠.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이 성경공부라는 그 자체가 정말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그리고 교리를 학습하고 하는 그런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그런 성경학습방법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교회마다 층차는 있지만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교회들에서 다분히 성경공부라는 그룹의 모임 그 자체를 교회의 그룹 활동을 위한 하나의 매개체 비슷하게 그렇게 사용하려고 했던 측면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신학을 탐구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을 학습하고 기독교 사상의 체계를 세우고 하는 그런 의미의 개혁주의적인 신학공부를 통한 신학사상의 이해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요즘에 보니까 몇몇 교회에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교회는 경건주의를 지양한다고 아주 명백하게 매뉴페테이션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역사를 알면 사실 그렇게 못하는 것이죠. 역사를 알면 그렇게 해서 경건주의 운동이 성경을 공부하는 그것은 좋았지만 교리를 버리고 그렇게 생생한 성경의 교훈을 붙잡겠다고 하는 그 결과 결국은 관용주의가 들어오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게 되고 하는 그런 과정들을 다 겪게 되잖아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는 거울이 되는 것이죠.
(교과 읽음)
그러니까 이게 말이죠. 책임도 교회에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성경의 진리들이 아름다우면 그 진리들을 집적해놓은 교리는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성경이 말하자면 성경 자체가 체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체계가 있는데 그 성경의 아름다운 진리들을 구슬처럼 엮어서 교리를 만들 때 그것이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지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방식으로 전달되어야지만 감동을 받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이제 차가운 이론으로만 전달되어질 때 사람들은 성경공부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오히려 교리가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청교도들의 대부분의 책들은 전부 다 교리를 풀어서 설교한 내용들이었거든요. 그런 내용들의 설교였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실존주의적인 영향에 이르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 해석하기도 전에 적용을 이끌어내는데 성급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의 거의 수단이 되고 그 다음에 그것과 맞닥트려서 자기가 깨달은바 적용한 것 그런 것들이 강조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것 자체가 힘이 없는 것이에요. 진리 자체가 자기를 움직이는 힘이 없는 것이에요.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움직이고 변화시킨다는 그런 인식 자체가 현저하게 흐려지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교과 읽음)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그 다음에 교리를 가르치는 것도 결국은 사상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에요. 그 사상이 인본주의적인 사상이 아니라 성경적인 사상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에요. 내가 방배동에서 목회할 때인데 어느 연세 드신 아저씨 한분이 와서 은혜를 받고 있었어요. 이분이 자기를 만나달라는 것이에요. 나중에 만나보니까 목사님이에요. 목사님이 목회를 하다가 목회가 안 되니까 우리교회에 와서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생활을 일 년 가까이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점심을 사주면서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데 한 때 잘 나가던 언론사 간부였어요. 그러다가 퇴직을 하고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목회를 했는데 오늘날의 목회가 너무 세속적이니까 자기는 성경적인 목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100독하기’ 그런 운동 있잖아요? 성경을 그 나이에 100독을 했고 3000개의 성경구절을 암송했대요. 여러분 가운데 3000개의 성경을 암송하는 사람이 많겠지요? 아마 300개도 못할걸요. 그런데 결론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그런 운동이 별로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안 되더라는 것이에요. 그렇게 성경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 그리고 자기가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겠다는 것이에요. 성경을 가지고 하는데 안 된다. 그리고 나중에 자기의 간증을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학이에요. 신학……. 신학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성경을 잘 가르쳐도 그것을 사상으로 뼈대를 세우지 않는 것은 모래로 계속 쌓는 것과 똑같은 것이에요.
(교과 읽음)
똑같은 이야기를 조나단 에드워즈도 이야기를 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 위에……. 모든 지식을 삶으로…….’ 그런 기치를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해요. ‘네가 왜 그렇게 살아야하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한다.’ 사상이에요. 사상……. ‘네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너의 그 사상이 어떻게 삶으로 나타날지 말할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마스트리히트가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면서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위선이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보면 많이 가르쳐보잖아요? 그런데 가장 훌륭한 신학적인 전수는 설교에요. 요즘에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평생에 일관된 태도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설교의 방식을 통해서만 기독교의 진리를 전달했어요. 그래서 TV에 나와서도 대담, 토론 이런 것은 거의 응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분의 ‘목사와 설교’에서 그런 사상을 잘 피력했는데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말하자면 위엄에 굴복하는 정신 속에서 진리는 가장 잘 학습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 속에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서 깨달은 교리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면서 평면적으로 펼쳐놓고 이렇게 공부하면서 배우는 교리 그것은 전혀 다른 지평으로 다가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런 공부의 한계가 그런 것이에요. 그래서 교리학습, 교리학습……. 그러는데 제일 좋은 것은 설교 속에서 교리를 끊임없이 가르쳐서 교리 앞에 그 사람을 굴복시키는 경건의 효과가 예배 속에서 나타날 때 그때 그 교리는 그의 삶과 마음속에 파고들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들입다 책을 놓고 공부하고 하는 그것으로써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교과 읽음)
그래서 거기에 보면 나오잖아요? 각주 10번이에요. ‘doctrina est vivendi Deo per Christum’ 그랬잖아요. 내가 보태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in spirit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그것이에요. 그게 내가 보기에는 가장 잘된 신학의 본질 같아요. doctrina est vivendi Deo per Christum in spirit. 그래서 ‘성령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어요.
기뻐하십시오. 피터 팬 마스트리히트의 TPT가 3600P로 되어 있거든요. 번역을 하면 3600페이지 정도 되요. 그래서 번역자를 내가 만났어요. 타드 형제라고 내가 만났는데 1200페이지를 번역해서 출판사에 넘겼답니다. 지금 교열을 보고 있는데 내년 7월경이나 늦어도 12월 안에 1200페이지짜리 마스트리히트가 나옵니다. 물론 영어로 되었겠지요. 아마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정도의 책을 쓸 사람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대가 됩니다. 굉장한 책입니다. 그 친구가 영어로 그것을 다 번역했는데 이번에 한국학생 하나가 그냥 라틴어에서 직접 한국어로 번역을 하겠다고 도전장을 냈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타드 형제는 아예 고전학을 전공했어요. 그래서 그 친구가 이번에 번역한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하면 PRTS 쏠리데오 글로리아 인가? 비키 목사님이 하시는 출판사에서 ‘스케치 어쩌고저쩌고’ 하고 나오는데 윌리엄 에임스의 교리문답을 라틴어에서 번역했어요. 내가 선물로 하나를 받아왔는데 아주 고전어를 잘하고 멀로 교수님도 라틴어가 나오면 그 형제한테 confirm을 받을 정도로 그렇게 라틴어를 잘하는데 나하고 이야기가 잘되어서 마스트리히트 전체를 PDP파일로 CD6장에 얻어왔습니다. 지금 제본하고 있는데 기대가 되요. 마스트리히트만 있으면 다른 것은 거의 안 봐도 됩니다. 그것 하나만 평생 외우면서 목회를 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신학 책이에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보면서 아주 독창적이라고 느껴졌던 아주 많은 부분들이 마스트리히트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의 속죄’ 그러면 속죄에 대해서 저 고대의 교부부터 시작해서 당대의 이단들까지 다 섭렵하는 것이에요. 어마어마하게 우리들이 찾기도 힘든 그런 방대한 자료들이 다 머릿속에 있었다고 그래요. 거의 성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그래요. 이 사람에 대해서 거의 연구가 안 되어 있어요. 안드레아 네일러라는 사람이 예일대학에 있는 교수인데 Neeler 이에요. 그 사람이 마스트리히트라는 책을 작년 10월쯤에 냈어요. 브릴에서 냈는데 브릴출판사에서 냈는데 되게 비싸요. 책 한권에 180,000원이에요. 그 속에서 마스트리히트를 소개했어요. 그런데 다는 아니고 신론 부분을 가지고 신학의 방법론과 그 다음에 교의신학의 진술방식, 그래서 맨 처음에 주석 이그제티카, 도그메티가, 엘렘티카 프렉티카 이렇게 4개로 나눠지는데 그것들이 유래하게 된 것과 그것들의 구성에 대해서 썼는데 탁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마스트리히트에 대해서 쓴 최근에 나온 가장 좋은 자료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교과 읽음)
그러니까 두 가지에요. 뭐냐 하면 첫째는 회심한 것이 분명한 것이어야 하고 두 번째는 회심한 것이 확실한데도 아는 내용이 없으면 세례를 주면 안 돼요. 아는 내용이 있어도 회심의 증거가 없으면 세례를 주면 안 돼요. 둘 다 있어야 됩니다. 회심의 확실한 증거와 그 다음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이 두 가지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과 읽음)
잘 들어봐요. 사실은 신학 전반에 대한 지식과 진술된 교리, 예를 들면 인생의 제일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제시되잖아요. 카테키스무스에서 제시되잖아요? 그 개별적인 교리에 대한 지식과 신학 전체를 아는 지식 사이에서 상관성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해볼 수 있는 사람 있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이야기에요. 어떤 개별적인 낱개의 교리에 대한 이해의 폭은 그 교리를 일부분으로 하고 있는 전체의 교리 체계에 대한 지식에 영향을 받는 것이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되시죠? 성경을 읽으면서도 발견하게 되잖아요. 성경을 읽을 때 신학교 가기 전에 읽을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읽는데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 많은 지식들이 생겨나게 되면 그런 지식이 없었을 때는 이것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성경 구절이 ‘이 구절은 이래서 중요하구나!’ ‘이 구절은 이래서 중요하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잖아요? 그 다음에 또 체험적인 요소가 들어오게 되잖아요?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이 녹나이다.’ 할 때 자기가 녹아보지 않았을 때는 아니 설탕도 아니고 뭐가 녹아? 그렇게 생각하지만 자기의 마음이 진짜 그렇게 녹아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시인이 이 고백을 할 때 절절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그러한 면에서 보면 개별적인 낱개의 교리에 대한 이해의 폭을 그것을 많이 가르친다고 하더라고 그것과 관련된 모든 교리 전체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을 때 그 하나하나의 교리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란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요?
또 이런 것도 있지요. 어떤 교리들을 강조하거나 확장해서 해석할 때 그 교리를 계속 확장하면 다른 교리들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지를 아는 사람이 알면서 그것을 확장하는 것과 그것을 모르면서 확장하는 것 사이에는 굉장히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뭐냐 하면 낱개로 된 교리 교육은 굉장히 좋은 방법이지만 그러나 신학 전체를 가르치는 방법과 병행되어야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에요. 그래서 성경 자체를 가르치는 것, 낱개의 교리들을 가르치는 것, 그 다음에 신학 전체의 체계를 가르치는 것, 이 세 가지가 병행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교과 읽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단순한 반복을 하지 말고 두 번째 배울 때는 더 풍부하게 설명을 해주고 더 깊이 있게 설명을 해주어야 해요. 그래서 똑같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가지고도 공부하면서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이렇게 강의할 수 있다는 것이죠.
(교과 읽음)
똑같아요. 설교를 전달하는 것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나 진리의 내용이 있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선한 의지를 솟구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