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S 선교사훈련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0-12)
녹취자: 박지성
단풍이 곱게 물들던 어느 가을날에 후배 목회자가 마당에 성경을 읽고 있는데 찾아 왔습니다. 옆에 앉으면서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배님, 생명력 있는 복음사역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생명력 있는 복음사역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고 물었더니 “말씀을 전할 때에 영혼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서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이런 것이 생명력 있는 역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합니다. “그런 생명력 있는 복음 사역의 비결이 뭡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죽음”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쳐다보면서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죽음, 목회자의 자기죽음 그것이 생명력 있는 복음 사역의 비결입니다.” 그것을 오늘 입증이나 하듯이 사도바울은 이 고린도후서에서 고린도교회의 교인에게 말하기를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린도후서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약의 예레미야서입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의 별명입니다. 그래서 1장부터 참 눈물 없이 읽기 어렵습니다. 1장을 시작하면서부터 사도 바울은 자기의 복음사역이 얼마나 힘든 사역인지를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지성으로 말하자면 당대의 최고의 학식을 가진 사람이었고 신령하기로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능력으로 말하자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살 소망까지 끊어져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가 되고 마지막에는 만물의 찌끼와 같이 되었다고 고백을 했습니까?
우리들이 착각을 하는데 능력을 많이 받으면 능력 없는 사람이 고생하는 일들을 쉽게 할 수 있고 능력 모자란 사람이 오래 걸리는 일을 능력 받으면 수월하게 짧은 시간 내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 능력을 달라고 하는 그 기도가 사실은 무서운 기도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1장 8절에서 사도 바울이 아들과 같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뭐라고 권면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여러분은 선교사이시니까 선교역사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선교의 역사를 회상해보십시오. 하나님께 부터 큰 능력을 받았던 선교역사의 기둥과 같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종들 중에서 한량으로 인생을 보낸 사람이 있으면 한번 꼽아보십시오.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능력의 순서가 고난의 크기의 순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놀라운 비밀을 터득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17년 동안 열린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해오는 가운데 정말 목회자가 죽어서 이룩된 교회의 부흥만이 참된 부흥이지 자기가 안 죽고 이룬 부흥은 예외 없이 바벨탑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때에는 교회든지 선교사역이든지 열매가 많고 성장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장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냐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화) 여러분은 1995년도에 캐나다 토론토를 휩쓸었던 ‘빈야드운동’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아마 선교지에서도 이런 문제들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그때 그 부흥이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제가 직접 토론토까지 갔었습니다. 그때 전 학교에서 부흥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가서 봤는데 그날도 사람들이 거의 한 4000명 가까이 모였습니다. 수없이 모이고 새 신자를 소개하듯이 “브라질에서 오신 분, 아메리카에서 오신 분”하며 일어났는데 수십 개국의 사람들이 새 신자처럼 와서 앉아있었습니다. 이후에 일어나는 집회를 보면서 ‘저건 가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서 쓰러지고 깔깔대고 웃고 나중에는 기어 다니면서 짐승소리까지 냅니다. 그것이 무슨 성령의 역사이겠습니까?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복음사역에 있어서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사역의 가치는 사실 성공이 아닙니다. 후배 목사님들을 만나서 늘 하는 이야기는 “정말 성공하고 싶으면 성공할 꿈을 버려라 그래야지 정말 성공한다.”입니다. 교회와 우리의 복음사역은 등대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해도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환영하던 시대는 없습니다. 등대는 많은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항구에 하나만 빛나도 수많은 배들이 그 등대의 불빛 하나를 보고 안전한 포구로 대피합니다. 크게, 많이, 높이 이것은 바벨론의 가치이지 예루살렘의 가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전파되는 것이면 주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지 아니하고 이집트나 중국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택하지 않고 북경이나 아니면 이집트의 테베 같은 도시를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뜻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그렇게 사람들을 참된 예수의 사람으로 세우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복음사역의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지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의 일행이 예수죽인 것을 자신들의 몸에 짊어졌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 번역은 예수를 죽인 것에 대한 가치를 몸에 짊어졌다는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니라 희랍어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는 것은”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죽음을 짊어진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예화) 여기도 보니까 연세가 드신 선교사님도 계신데 죽음의 기운이 많이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무릎도 아프고 젊어서는 팔팔했는데 기력이 시들기 시작하고 머리가 희기 시작하고 허리며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하고 예전에는 이틀 밤쯤 새는 것은 일도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루만 철야해도 삼일씩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맵니다. 그것이 죽음의 기운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선교 나가던 싱글 선교사의 얼굴이 하얗고 아주 예쁘장해서 ‘저 야리야리한 자매가 험한 선교지에서 뭘 할까?’ 그러고 걱정을 하면서 기도를 하고 보냈는데 한 15년 만에 돌아왔는데 도저히 그때 그 자매라고 알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험한 얼굴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죽음의 기운이 얼굴에 퍼져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명은 죽음의 기운에 삼키면서 서서히 서서히 생명으로부터 멀어져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죽음의 기운이 우리의 몸에 퍼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이 교회역사에서 유명한 “콘뽀르마티오 크리스티”의 교리입니다. 직역하면 “예수 본받음의 교리”라는 유명한 교리입니다. 사실 이것은 개혁주의 성화론의 진수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정수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2000년 전의 예수 죽으신 죽음을 2000년 후를 살고 있는 우리와 연결 짓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 선교사님들도 젊을 날에 회심을 하셨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정신없이 이 세상에서 자기가 주인인 줄 알고 제 멋대로 살다가 어느 날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찬송)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에 견딜 수 없게 마음이 아픕니다. 어떻게 2000년 전에 예수님은 이미 죽었고 내가 마음 아파해 봐야 2000년에 죽은 예수님의 통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것과 상관없이 20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 넘어서 지금 내 앞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처럼 그렇게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후 3000년에도 마찬가지였고 4000년까지도 주님이 안 오신다면 4000년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에게 복음 전파를 받으면서 회심했던 그 사람들이 오늘 우리가 전파한 복음을 듣고 예수 만난 사람보다 더 주님을 깊이 만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순간에 확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죽으신 그 끔직한 고난이 내가 물 먹듯 먹고 마시며 살아왔던 이전의 모든 죄악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었구나.’하는 통증이 확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 죄를 짓고자하는 욕망이 죽기 시작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무슨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개별적인 나타남이고 뿌리는 정욕입니다. 정욕의 좁은 의미는 성적욕망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자기가 자신을 주인 삼는 삶을 사는 것, 자기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을 하며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주인삼은 삶이 죄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것이 죽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죽음의 기운에 의해서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 예수 죽으심의 기운이 쫙 들어옵니다.
칼빈선생은 자기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런 해석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십자가를 날마다 지는 것만이 우리가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길이다.” 그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그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하고 거룩한 신자를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통칭해서 십자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고통이 없으면 십자가가 아니고 또 고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이 다 거룩하고 순결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목회하면서 험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해보십시오. 선교사역을 하면서 일에 시달리면서 한번 해보십시오.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교인들에게 씹히면서 한번 고난을 당해보십시오. 그런 사람 모두 거룩해 진다면 누가 안 그렇게 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고통이 곧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주님이 나를 깨끗하게 하시려고 그래서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나를 당신의 모습 닮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신다 생각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드리고 소화시키는 사람들만 거룩하고 진실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기죽음이 없다면 그 목회지는 병든 것입니다.
선교가 목회가 아니라한들 해아래 복음 사역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람을 전도해서 그 사람을 예수 믿는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선교의 목표요 전도의 목표요 또 복음사역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한단다.” 그 사망이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보다 사도바울일행이 덜 헌신했습니까? 은사가 모자랍니까? 지력이 모자랍니까? 인품이 부족합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까지 복음사역을 위해 헌신하기로 맹세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면에서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보다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합니다.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한다. 그래서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놀랍게 이 복음사역에 있어서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는 잔인하게도 목회자와 선교사들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찬송)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예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생물학을 조금 공부를 했었습니다. 참 신기한 게 인체입니다. 인간의 몸은 60조개 정도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이 세포가 에너지를 가지고 공장처럼 돌리면서, 조그만 세포하나가 공장 같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공장을 돌려서 영양을 받고 공급하고 하면서 세포분열을 해서 세포를 키웁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세포가 3개월만 지나면 뇌를 제외하고 똑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포로 바뀝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세포가 죽습니다. 죽는데 이 세포의 죽는 것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네크로시스”의 죽음이 있고 또 하나는 “아폽프톱시스”의 죽음입니다. 생화학용어입니다. “네크로시스”는 희랍어에서 “네크로스”, “죽은”이라는 뜻입니다. 확 괴멸되거나 아니면 힘이 다해서 수명이 다해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폽프톱시스”의 죽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포가 자살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왜 자살하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세포가 분명히 성성한데 팍하고 죽어버립니다. 자살을 해버리고 그때에 발생하는 APT라는 화학 에너지를 옆에 세포한테 줍니다. 그러면 그것을 전력을 삼아서 자기 세포를 돌리면서 세포분열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온 몸에 반짝이듯이 수많은 세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면서 그 죽어가는 것 때문에 다른 세포들이 막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가다가 우리의 몸에 아무 세포도 안 죽겠다고 버티는 부분이 생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지 않으려고 살려고 몸부림을 치니까 에너지를 막 빨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데서 영양분을 빨아옵니다. 옆에서 죽어주지를 않으니까 빨아들입니다. 받으니까 더 빨리 성장을 합니다. 안 죽겠다고 막 커집니다. 그것이 암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복음 사역은 일정하게 죽는 사람들이 있어야합니다. 그 죽는 사람들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 죽는 일에 있어서 으뜸이 되어서 나와 함께 이 복음 사역을 살리기 위해서 죽자. 그리고 그 죽음의 선두에서 서야 될 사람이 목회자와 선교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들아,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단다.” 사실 예수님의 그 말씀도 말이 안 됩니다. 왜냐면 시골에서 자라신 분들은 낱알을 보신 적이 있지만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다 썩어 버리면 절대 밀이 될 리가 없습니다. 거기에 배아가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땅콩은 까보면 두 개를 벌려 논 거기에 작은 이파리 같은 배아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는 것은 그 배아를 살리기 위해서 나머지 땅콩이 썩으면서 그것이 양분이 되어서 죽는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다 죽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배아를 살리기 위해서 나머지 대부분의 밀알이 썩어서 거름이 되어서 영양분이 되어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배아가 사는 것입니다. 그 배아가 곧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의 목회현장으로 적용을 하면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이고 선교지의 양떼들입니다. 그것이 배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귀하신 몸을 마치 밀알처럼 여기시고 우리같이 쓸모없는 죄인들은 그 밀알의 배아처럼 여기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은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마음에 와 계신 것입니다.
요새 널리 유행하는 노래가
(찬송)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타어난 사람
목회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죽기위해 태어난 사람. 그것입니다. 목회자의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모든 기독교의 진리들이 생명수가 되어서 확 용솟음치는 것입니다. 화려한 언어가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를 경험하고 온 증인으로서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 같은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이 신앙생활 잘하고 있습니까? 정말 잘하고 있습니까? 일천한 목회의 17년 경험이지만 아주 평범하게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눈물을 쏟으면 교인들은 땀을 흘리기 시작하고 목회자가 피를 쏟으면 교인들은 그제야 울기 시작합니다. 목회자가 강대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주님이 맡겨주신 엄중한 사역을 위해서 자신이 얼마나 준비되지 않은 인간인가를 알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간절히 매달리며 피눈물 뿌리면 그 눈물이 교회 바닥에 스며들고 흘러가서 쓴 뿌리는 그 눈물을 먹고 죽습니다. 주님이 심겨놓으신 열매들은 그 눈물을 먹고 성령의 은혜로 살아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선교사역은 아마 더 많이 그럴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말합니다. “얘들아,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하느니라” 선교가 잘 안될 때 목회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고통스러울 때가 왜 없겠습니까? 자, 나는 여러분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복음사역자로서 말합니다. 피를 바르십시오. 자기 사역에 피를 바르십시오. 그것이 비결입니다. ‘나는 죽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렇게 자기 죽음의 삶을 살 때 거기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만 바라보는 이 복음 사역의 길을 잘 갈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눈을 들어서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길이구나’하고 생각해야합니다. 어젯밤에 한 20년 전의 제자들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이제 같이 서면 선생과 제자들이 구분이 없습니다. 같이 늙어갑니다. 머리 다 벗어지고 흰머리에 노회장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야, 참 세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나.” 그러니 여러분, 하늘나라를 바라보십시오.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오늘 저녁 주님이 부르셔도 우리의 사역에 피를 바르다가 가는 그런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