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4. 외부강의
교사 연합 세미나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녹취자: 박은희
아 저는 교회학교 교사를 76년도서부터, 회심하던 해부터 시작을 했으니까 거의 쉬지 않고 교사 혹은 전도사로 40년 가까이 35년 이상 지내왔고 그리고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한 팔 구년, 그 중에 대학생들하고 어울리면서 생활한 것이 한 오 육년 정도, 지금도 또 대학생들하고 같이 생활을 하고 물론 기독교대학이니까 좀 틀리기는 하지만 그런 걸 쭉 이렇게 보면서 사실 ‘이 직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자리가 교사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요새 젊은이들 집회에 가면 “무조건 교사가 돼라. 다른 것 하지 말고 교사를 해라. 교사를”
그런데 이 교사되기가 요새 쉽지가 않습니다. 공부를 꽤 많이 해야 된다고 그럽니다. “그럼,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해서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교사가 돼라.” ‘도저히 교사가 내 실력 가지고는 안 되겠다.’ 그러면 제 2의 길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과외선생을 합니다. 과외선생. 그런데 그것도 공부를 잘해야 된다고 그럽니다. 아니면 학원선생을 합니다. 뭐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예전에 학교선생님을 우리 때만 해도 무조건 신임하고 과외선생을 이렇게 하수로 보았습니다. 요새는 그게 아니라 학교선생님한테 스승의 날 선생님 선물을 안 하는 애들이 학원선생한테는 꽃다발을 갖다 줍니다. 이게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냐하면, 지금 유치원 다니는 애들부터 대학 다니는 애들까지 너무나 방황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전과 같이 올바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시스템들이 다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잘 들었던 얘기가 “훌륭한 사람이 돼라, 진실한 사람이 돼라.” 요즘 스승의 날 노래 나는 절대 못 부르게 합니다. 세상 닭살 돋는 노래가 그 노래입니다. 그런데 거기 보면 선생님이 뭐라 그러셨다고 나옵니까? “참되거라 바르거라” 누가 그렇게 가르쳐줍니까? 난 도대체 그 노래들을 적마다 묻고 싶습니다. 어느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칩니까? “참되거라 바르거라” 누가 가르쳐 주냐 이것입니다.
막 완전히 특히 몇 년 동안에 대학교수들의 권위는 완전히 짓밟혔습니다. 1990년대부터 뭐라고 그랬냐하면 음악이나 특기생들 돈 받고 이러면서 비리들이 드러나고 하면서부터 형편없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되거라 바르거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교육인데 그것을 시켜 주는 데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그것을 담당을 안 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환경이 그것을 가르칠 수 있도록 허용을 안 합니다. 예전에는 유교적 관성이라도 있어서 그래서 그저 따지지 않고 “참되거라” 그러면 “네” 그랬는데 지금은 그게 안 된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속에서 학생들은 굉장히 반항적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신문에 보면 선생님이 뭐라고 그러니까 선생님을 애들 주먹으로 날려가지고 그냥 이렇게 얼굴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히고 선생님을 쓰러뜨리고 짓밟아버리고 하는 이런 교육실에서의 선생을 폭행하는 이런 일들 까지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일본에서는 벌써 오래전에 일어난 것입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강간당하고 하는 이런 일들이. 이런 일들이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은 기본적인 보편가치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자, 이렇게 되다가 보니까 그러면 그렇게 살아가는 아이들은 행복하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까 선생님이 뜰 있는데 요기 내가 어느 아파트라고 하면 그 아파트값 내려갈 테니까 요기 개울가에 있는 아파트 중에 하나에서 뛰어내렸습니다. 17층인가 어디서 뛰어내렸다 그러는데 직접보지 못했습니다. 끔찍한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아이들이 그런 식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자살을 하고 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그냥 애들을 놓고 ‘개념이 없다, 못돼 먹었다, 그러고 나쁜 놈 들이다.’ 사실은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우리 어렸을 때에도 학생들을 이렇게 좀 뭐라고 그럴까 좀 따돌리고 그런 일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부분 이렇게 두 사람이 편먹고 한사람을 한다든지 이런 식이지, 집단적으로 해서 폭행을 하고 괴롭혀서 자살을 하기까지 한다든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요즘 애들하고 그런 얘기를 합니다. 누가 이렇게 왕따 당하는 애를 편을 들고 보호를 해주면 걔가 도매금으로 매장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사실은 우리 한 30년 전만해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들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들은 점점 심화되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인터넷을 하고 이러면서 소통 능력자체 없어지는 것입니다. 소통 능력자체가. 그러니까 책도 안 읽습니다. 한심할 정도로 안 읽습니다.
(예화) 실제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인데 선생님이 문제를 낸 것입니다. 그래서 뭐 이렇게 나쁜 일에 또 나쁜 일이 계속 생기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그러고 설○ 동그라미 치고 가치고 ○친 것입니다. 그러면 답은 뭡니까? ‘설상가상’ 그것은 초등학교 애들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릅니다. 한 녀석이 답을 썼는데 ‘설사가또’ 이렇게 썼습니다. 초등학교 사회시간에 시험문제가 났습니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사회시간에. 선생님이 시험을 내는 것입니다. 탈 북한 처녀와 남한 총각이 결혼을 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런데 선생님이 기대했던 답안은 공산주의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본주의하고 소통이 안 되는 이런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탈 북한 처녀와 남한 총각이 결혼을 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초등학교 4학년 녀석이 ‘그날 뜨거운 밤이 시작됐습니다.’
예를 들어 이걸 웃자고 한 게 아니라 선생님을 뭐 조롱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수준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소통능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소통능력이. 현저하게 소통능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결국은 이제 사회적인 단절현상이 아주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런 처지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하는 것을 학생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뭔가를 이렇게 줌으로써 이 문제를 타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 아닙니다. 아까 이번 주에도 내가 뭐 무슨 교육 그거 있잖습니까? ‘학생 인권 조례’ 그것을 빼가지고 쭉 보았는데 사실 그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 내용을 내가 문제로 삼자는 것이 아닌데 그런데 한쪽에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야, 이것 인권 조례 보니까 학생들은 처벌받지 않는다. 그런데 그 밑에 무슨 뭐 뭐 뭐 뭐 해놓고 마지막에 성적 지향성.’ 이것 봐라 이게 결국은 동성애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저쪽에서는 비판을 하고 그러면서 이제 이쪽에서는 ‘학교폭력이다.’ 이런 것들을 전부다 인권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좋습니다. 민주주의 사회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너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에게 지금 맘껏 하라고 자유를 준다고 해도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닙니다. 주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 핵심은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이것입니다. 그러면 뭐냐? 아이들은 사랑을 원합니다. 사랑을.
그런데 사실은 오랫동안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하면 그 선생님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복종하고 존경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랬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초등학교 애들도 선생님 욕합니다. ‘우리 선생님은 돈만 좋아해.’ 뭐 어쩌고저쩌고 욕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일단 선생님 앞에서는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이제는 사라지고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선생님한테 대드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 각층에서 이미 권위가 무너진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권위가 무너진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이렇게 권위가 무너지면서 사실은 종교나 모든 것들의 권위도 모두 다 우습게 여겨지는 이런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그들이 사상이 달라도, 진리에 인정하지 않아도 그 사람들에게, 아이들에게 한순간에 기독교의 진리체계를 받아들이게 만들고 그 다음에 포스트 모더니즘사상을 극복하여 어떤 그 완전한 세계를 보여준다라는, 가치관을 보여준다라는, 설득 시켰다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잖습니까?
그러면 뭐가 문제냐 하면 제일 큰 것은 아이들은 사랑을 원합니다. 사랑을. 사랑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우리들이 20년 30년 전보다도 지금은 훨씬 어려운 인생을 얘네 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잖습니까? 그렇죠? 그렇지만 그런 거에 비해서 마음을 터놓고 사랑을 받고 교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하고도 특별한 아이들 얼마 일부를 빼놓고는 소통이 안 됩니다. 부모랑. 그 다음에 선생님하고 소통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까 얘기했듯이 친구들하고 이제 소통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친구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아까 얘기했듯이 사람을 이렇게,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아이들이 점점 잃어버립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속에서 아이들은 자기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젊은 아이들이 연예인이나 이런 어떤 사회적인 영웅에 대해서 갖는 막 존중심이나 막 타오르는 패션 같은 것, 이런 것들은 사실은 그런 심리를, 그런 것을 찾지 못하는 불안정한 심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한사람만 있어도 불행한 일은 안 일어납니다.
우리 딸이 지금 대학교 3학년인데 딸이 고 3이면 집안은 얼음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 딸은 아주 예민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뭐라고 그러냐하면 “아빠,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고3 때였다.” 고 그럽니다. 그 이유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그 아이의 인생에 그렇게 도움을 준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잘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다가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그 얘기를 듣고 ‘우리교회도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다.’ 라고 그러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무모한 시도를 한 것입니다. 어느 교회 나이 많은 여전도회에서 할 일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궁리를 하다가 ‘우리가 자매결연을 맺자.’ 그런 것입니다. 무슨 자매결연을 맺냐 하니까 그 근처에 중학교가 있었는데 중학교에 그 교인이 교감선생님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방황을 한다고 그러니까 이 40대 후반 50대 60대쯤 되는 권사님들, 집사님들이 걔네들하고 미팅을 한 것입니다. 난 걔네들이 그런 미팅을 원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아줌마들이 돈은 있으시니까 먹을 것도 싸가지고 오고 위로 왔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가라고 그러니까 모여서 같이 도시락 까먹고 말하자면 이렇게 이메일도 주소도 주고받고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들이 완전히 똥 씹은 얼굴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책없이 할머니한테 편지가 오는 것입니다. 애들은 답장을 안 하는 것입니다. 걔네들이 얼마나 짜증내겠습니까? 중학생들은 외계인인데 외계인하고 지구인하고 만나서 이 대화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할머니들이 꾸준히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입니다. 도시락 같은 것을 싸들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막 짜증을 냅니다. 그런데 한 두 사람이 오는 게 아니라 우르륵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또 뭐 하나 생기니까 먹고 생일이면 카드가 오는 것입니다. 예쁜 여학생한테 카드를 받고 싶지 할머니한테 카드 받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게 열 번 편지하기 전에 마음을 열고 답장이 오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하고 자기를 좀 만나달라고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대화가 안 될 것 같은데 그런데 대화가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무도 이 세상 누구도 자기 엄마, 교회선생님을 포함해서 자기한테 열 번을 연속해서 편지를 보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간증을 보면서 참 놀랍다 그랬습니다. 젊은 아이들은 자유를 확 주잖습니까? 그러면 우상을 찾는 게 심리적인 현상입니다. 왜? 그래야 안정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남에 의해서 강요당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 스스로 누군가를 추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오빠부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현상입니다. 아니, 그 할머니들도 문화적인 차이와 나이의 차이를 극복하고 나중에 아이들이 만나서 자기가정의 문제를 털어놓고 고민을 상담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답장을 받고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여러분들에게는 얼마나 더 가능하겠는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한사람의 인생은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무한한 가치가 있는 그 인생을 그 가는 방향이 바뀌게 만들어주는 사람은 일생에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스승을 간절히 원하고 정말 자기가 존경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선생님이 있으면 지금도 때려도 개의치 않습니다. 걔네들은.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무서운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더 깊은 관계를 가져서 그를 변화시켜야 되겠다고 감히 마음을 못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신앙을 떠났다고 칩시다. 그러면 솔직히 선생님인 나도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지 감이 안 잡히는데 선생님이라고 다 감잡히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감이 안 잡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 있게 ‘내안에 에너지가 넘쳐서 쟤 인생을 이런 방향으로 내가 이끌어 줘야 되겠다.’ 그런 사람이 선생님 열 명 중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선 자기 자신의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남은 에너지가 너무 없는 것입니다. 자기 남편한테도 그렇게 못하는데, 자기애들한테도 그럴 에너지가 없는데, 그래서 이렇게 하면서 점점 심각해져 가는 것입니다. 최근에 얘기를 들으니까 명예퇴직하면 전에는 선생님들이 절대로 안했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원자들이 나온답니다. 이 직업에 대해서 서서히 말하자면 배신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은 OECD중에서 우리나라가 교사들 처우를 잘해주는 상위계층에 속합니다. 제가 교육개발원장님을 만났는데 ‘난 지금 더 대우를 잘해야 줘야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600여명 교사들이 모이는 모임에 가서 “고등학교 선생 연봉 최소한 8000은 줘야 된다.” 그랬더니 기립박수를 치더라고요. 그랬더니 그 원장님은 OECD 국가 중에서 상위그룹에 속한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외국에 가면 기라성 같은 교수들을 만나도 그들 연봉을 보면 졸도 합니다. 대우 안 해줍니다. 정말 실망스럽게 대우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런데 예전에는 선생님 대우도 별로 안 해주었습니다. 선생님이 무슨 보람에 살았냐하면 아이들에게 존경받고 사회적으로도 선생님이라 그러면 가게주인도 고개를 숙입니다. “어유, 선생님이시군요.” 그러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아이, 선생님이 그럼 거짓말하실 리가 없죠? 제가 잘못했겠죠.” 이런 이야기를 골목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선생님이시다. 인사드려라!” 그럽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보람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속에서 누가 이속에 에너지를 가지고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겠습니까? 여러분. 소명 받은 목사도 교인이 싫을 때가 있는데, 힘들고 싫을 때가 있는데 그 뭐 무슨 뼈 빠진 소명을 받고 모든 교사가 된 것이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결국은 이것은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이외에는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이외에는.
그래서 내가 실질적인 지침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이 가르치는 직업을 향한 태도를 분명히 하자. 이게 모든 교육선교에 있어서 일번입니다. 그럼 소명은 어떻게 하냐? 하나님이 이 마지막 때에 사상적으로 이렇게 방황하고 문화적으로 혼란스러워서 아이들이 어디에 마음하나 기댈 수 없는 이때에, 하나님이 특별히 나를 부르셔서 이 영혼들을 돌보라고 나를 학교로 보내셨다. 그 신앙고백이 일번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아니 뭐 초중등학교 선생님 하다가 어떻게 해서 고등학교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고등학교 선생님 하다가 야간에 가서 공부라도 해 가지고 대학교 교수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것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나든지 간에 그런 소명을 가진 사람, 아주 분명하게 ‘나는 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파송된 선교사다.’ 이 소명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분명히 하자. 왜? 여러분 그게 얼마나 놀라운 기회인지를 실험을 해 보면 압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만약에 전도지 들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한번 아파트를 두루 돌면서 일주일에 두 시간씩 6개월만 해보십시오. 여태까지 경험한 통계에 의하면 여러분이 열 명이 나가도 한명을 교회에 데리고 와서 회심하게 할 확률은 거의 5%미만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교역자들이 매주 나가는데 기도제목이 뭐냐 하면 그 집에 거실에 한번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들어오라고 문도 안 열어준다 이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줄 아십니까? 그 정도입니다. 그런데 30, 40명, 혹은 아까 선생님이 얘기했듯이 전교생을 대상으로 펼치면 수천만 명이 적어도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선생의 권력으로라도 “너 여기 가만히 앉아있어. 5분만 내 얘기를 들어!”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뭐냐 하면 윤리적인 결단을 해야 됩니다. 윤리적으로. 무슨 얘기냐 하면 너절하게 살아서는 선교 안 됩니다. 내 이 얘기가 ‘선생님이 청빈하게 살아라, 아니면 수도사 적으로 살아라.’ 그 얘기가 아닙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최소한 사회의 도덕의 기준으로 비추어볼 때 문제가 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도덕의 기준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해야 된다 이것입니다. 촌지 받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어유, 그거 없이, 그게 얼만데.’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게 가사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 공짜입니다. 공짜. 한번 그것을 줄을 확 긋고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마음이 자유롭고 그런 것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왜? 나는 자유롭고 그리고 양심에 추호도 매인 것이 없이 자유롭지 않습니까? 지금 거의 생활이 흔들릴 정도로 월급을 준다면 지키는 게 엄청난 핍박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고 궁핍하면 아주 가난하게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들을 생각을 해 보십시오. 선교사들. 세상에 우리가 빛으로 사는 것은 희생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안 받습니다. 마음은 전부 받고 내가 당신의 자녀를 특별히 잘 돌보겠습니다.’ 선을 쭉 긋는 것입니다. 몇 번만 선을 그으면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게 잠깐은 불편해 하는 것 같지만 그다음에는 아주 놀라운 평가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핍박을 받고 선생님들이 욕을 먹는다고 그러는데 난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물론 욕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아까 얘기 한 것처럼 본인의 윤리적인 결함과 예수 믿는 게 결합이 될 때, 그때에 윤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공격을 못하니까 예수 믿는 것 가지고 공격을 하는데 사실은 밑에는 도덕성에 대한 비난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밑에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줄을 분명히 그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받은 거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어떡하겠습니까? 물어내는 것은 너무 힘드니까. 여기 줄을 딱 긋고 몇 날 몇 월 며칠 몇 시부로 결심문을 하나 쓰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이전에 하얀 봉투는 회개하고 이제는 내가 퇴직할 때 까지 그렇게 안 하겠습니다.’ 그럼, 그것은 옳지 않쟎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옳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 키우면서 한 번도 안 갖다 주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족 중에도 나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목사님, 그럴 필요 없고 먹으려고 덤벼드는 선생님들에게는 피할 방법이 없으니까 아이 병신 만들지 말고, 아이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갖다 주라. 그것은 이제 뇌물이 아니다 예물이다.” 내가 그 선생님하고 결혼할 일 있습니까? 예물을 주게. 그래도 안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교육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랬더니 막 저 뒤에다가 앉히고 그 다음에 코 흘리는 가장 못생긴 여자아이 짝으로 만들고. 진짜입니다. 마음이 굉장히 많이 상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선생님을 만나게 하시는데 그 선생님은 열렬한 내 독자입니다. 그러면 한 2 년 고생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2년은 그래서 생활기록부를 보면 어떤 해에는 수수수수수수이고 그 다음해에는 우미우미우미우미입니다. 그걸 듣고 웃지만 부모가 들었을 때 그걸 다 느낄 때 그 고통은 어떤 것인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래도 안줬습니다. ‘우리까지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물론 줄 돈이 있습니다. 나도 책도 쓰고 교회에서 사례금도 주고 그러니까 내가 선생님 한 이 삼십 만원 주는 것 내가 못할 것 같습니까? 못할게 뭐 있습니까? 학생들 전부다 밥을 한번 사라면 샀지. 그 선생님한테 왜 돈을 주냐 이것입니다. 그 선생님을 망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부형이 하면 안 되는 것은 선생님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쌍( )윤리적 입니다. 윤리적으로 선을 분명하게 서로 긋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가난하게 살아도 그것이 너무 불편하면 하나님이 상급을 주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랍게 변합니다. 그게 학교 선생님이냐? 학원 선생님이냐? 그것 문제 안 됩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가지고 따지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선생님이 어느 대 출신인지 뒷조사 해가지고 참고했는데 지금은 그런 거 소용없습니다. 선생님이 자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해해주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복종합니다. 얘네 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특히 초등학교 중 고등 학교 때에는 마치 얘네 들은 똘마니들이 조폭 따라 가듯이 실지로 그렇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선생님이 하는 짓까지 그대로 흉내 내는 것입니다. 밥 먹고 찍찍 거리는 것까지, 걸음걸이까지 그대로 모방하면서 흉내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무엇인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고 즐겁다.’ 그것을 아이들에게 아주 잘 보여줄 수 있을 때, 이때에 그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뜻하게 끌어앉고 그 아이들에게 사랑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할 때에 만나자마자 사영리 전하지 말고 그 아이들 어디 안가지 않습니까? 아파트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한 안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쭉 해서 자기 삶으로, 표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가를 보여주어서 아이들로 하여금 궁금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저런 놀라운 사랑이 어디에서 나올까? 어디에서 나올까?’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아이들의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선생님이외에. 그 무슨 정규교사냐? 기간제 교사냐?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아이들은 만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아이들을 품고 사랑하고 헌신적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이들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할머니들이 주책 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열 번이나 편지를 보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엽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들어주기만 해도 좋은 선생님이라고 그럽니다.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끌어내어서 “들어봐라” 그리고 또 많이 들어보면 아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여기서 두 시간을 더하라고 그래도 내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간절히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소명을 분명히 하라, 윤리적인 태도를 분명히 하라 그리고 삶으로서 행동을 보여줘라.”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천천히 해도 되는 일입니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선생님에게 묻도록 만들어라.” “선생님, 어떻게 선생님 늘 행복하세요? 우리 같은 사람을 이렇게 사랑해주시는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나요?” 묻게끔. 아이들은 기회입니다. 왜? 가정에서 못된 부모들이 있어서 아이들이 마음을 집안에서 털어놓지 못합니다. 이것은 정말 전도될 가능성이 많은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입니다. 왜? 마음을 털어 놓을 때가 없으니까. 왕따 당하는 아이.
정의의 힘은 무서운 것입니다. 선생님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결코 공부 잘하는 학생이나 얼굴 예쁜 학생, 돈 들고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는 학부형에게 휘둘리지 않는 선생님이라고 하는 도덕적평가가 아이들에게 내려지면 아이들은 선생님을 신뢰합니다. 때리면 맞습니다. ‘그 아이들의 모든 것을 무조건 선생님들은 제자리에 있는데, 아이들이 다 못돼먹어서 위아래도 몰라본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선생님자신도 많이 흔들리는 게 아이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존경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하고 그리고 도대체 누가 그 아이를 위해서 일평생 울어주겠습니까? 엄마도 사고 나기 전에는 안 웁니다. 자기 자신이 인생의 무게가 무거운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애들도 많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선생님이 품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이 인생이 바뀔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말 소명감을 가지고 일을 잘 감당해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