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레 24:1-3)
녹취자 : 오희열
여기 모이신 분들은 대부분 선교사님들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한다는 점에서는 목회자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은 이 강의안에 모두 수록되어 있는데 지금 나눠드리면 산만하실까봐 가실 때 나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돌아가셔서 저녁이나 아침에 한 시간, 혹은 약 40분이면 다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강의를 경쾌하게 들으시고 나중에 묵직하게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성막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야기를 주제로 이런 내용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이 이야기 하고 있는 성막의 모형입니다. 이 안에 있는 지성소가 약 18평 크기였습니다. 이쪽을 들어와서 성소가 있고, 여기에 제사장들이 들어오고, 여기에는 휘장이 있고 휘장을 사이에 두고 지성소가 있고, 이것이 여섯 평, 이것이 열두 평 정도가 됩니다. 이 지성소는 법궤가 있는 곳이었고 대제사장이 1년에 한 차례 들어가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성막 밖으로부터 오는 모든 빛은 다 차단이 되고 성막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기위해서는 불빛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등잔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고 등잔을 사용해서 빛을 비추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는지를 우리가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성전은 어떤 점에서는 신약의 교회와 신학적인 연속성이 있고 또 어떤 점에서는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사장은 오늘날의 목회자와 연속적인 면이 있고 불연속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을 성취하심으로 성막과 성전, 제사장들을 통해서 예표 하던 바를 모두 성취하셨고 그런 점에서 오늘날 목회자는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제사장이 되었다는 교리를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목회자나 선교사의 소명이 아무리 특별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수준의 문제이지 그 소명은 평신도들의 소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는 일치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에 불타고, 또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서 목회할 열정에 불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정도와 수준의 문제이지 모든 그리스도인 하나님 앞에 받은바 소명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틴 로이드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히 설교자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사람이며 그 다른 무엇입니다. 설교자의 소명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가 여기에서 부각됩니다. 설교자는 설교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메르디트 크라임 이라는 사람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며 성소적 소명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고 있지만 특별히 목회자에게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된 자들이 언약공동체가 이루어졌는데 목회자는 이 언약 백성들을 재창조하는데 이바지하도록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새기면서 성막의 등불에 대한 규례를 보겠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더 이상 단순한 예배 공동체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시대와는 다른 아주 다변화된 시대 속에 살면서 많은 요구들을 받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그리고 현대인의 문제와 도시와 산업화에 따르는 많은 현대인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도록 교회가 요구받고 있고 그래서 교회의 기능은 예전보다 훨씬 복잡한 기능을 가진 그런 교회 공동체로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 넘치는 교회 프로그램과 많은 행사, 그리고 많은 작용들이 이런 요구를 보여줍니다. 교회는 점점 바빠지고 목회자와 선교사는 열심히 일하지만 왠지 신앙의 깊이는 점점 얕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의 현상은 마치 극지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유빙이 바다를 떠도는 것처럼 무엇인가 복음의 본질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목회자와 선교사를 세우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경륜의 목적이 무엇을 지어내고 있는지를 우리는 한 번 더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등대가 있었는데, 이 등대를 통해서 두 말할 필요 없이 진리의 빛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회나 선교사역을 함에 있어서 건전한 세상의 상식이나 지식들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그들을 그 모든 죄와 어두움에서 건져내는 것은 이 세상의 상식이 아니라 오직 진리의 빛 하나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체의 창이 없는, 완전히 어두운 장막을 만드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일들을 바깥에서 비치는 자연의 빛이 아니라 이 등잔에서 비치는 빛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먼저 진리의 빛으로 섬기는 것을 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그 빛으로서만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진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캄캄한 어두운 장막에서 등불이 켜집니다. 밖에서 볼 때는 거무칙칙하고 우리의 눈길을 끌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그런 가죽으로 된 성막이었지만 막상 성막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온갖 색실로 곱게 꼰 휘장들이 있고 아름다운 기구들이 있습니다. 등잔불의 빛이 비치기 시작할 때 그 모든 것들은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오직 그 빛으로만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빛으로 이것들을 비추지 않고 오직 등잔불로 비추신 것은 오직 당신이 지시한 규례를 따라 만들어진 등잔불을 통해서만 비추어 당신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진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만방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선교는 무엇입니까? 단지 인간의 비참하고 가난한 형편을 개선하기 위한 복지가 선교의 일부는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것들을 가르치고 지키고 행하게 하기 위하여, 이 일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교사로, 목회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든지 하나님의 복음사역자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그 캄캄한 어두움에 진리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아니 진리를 무엇이라고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진리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의 고백을 따르면 이 진리의 가장 뛰어난 효능은 바로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던 때에는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고, 혹은 진리가 있어도 잘못된 질서에 정체되어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받으며 잘못된 모든 기초들을 허물고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진실로 진리보다 탁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일 것이며 그러나 그것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진리 자체이심에 틀림없다.” 그 진리가 바로 우리를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참다운 질서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제 후기 근대주의에 들어오면서 진리에 대해서 잠정적으로나마 합의하였던 보편적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두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무규범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대사상의 길을 연 사람은 언제나 있었지만 그러나 프레드리히 니체에 의해서 포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진리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그 모든 것들이 조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일평생 헌신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니체가 오직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기독교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포함에서 모든, 진리가 인간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기준들을 허물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시도는 오늘날 굉장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이제는 진리를 말하면 누구의 진리냐고 물음으로써 그의 시도가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나 장 폴 사르트르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들을 비롯해서 기라성같은 그 도덕적 규범들을 파괴했던 실존주의자들은 바로 정신적으로 프레드리히 니체의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이 진리의 빛은 바로 이렇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즉 목회자는 혹은 선교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로 이 성경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모든 세계에 묻어있지만 이 성경이 바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담겨있는 집적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The essence of God’s beauty”,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성경책 속에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위대한 계획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 인간 구속의 계획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의 찬란한 빛깔들이 이 온 세계에 전달되었고 그래서 사실은 그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전개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고 불행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변형시키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고자하는 계획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 계획이 전개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은 더 찬란하게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거기의 어디에나 하나님의 아름다움 묻어있습니다. 그러나 눈부시도록 찬란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성경책 속에 집적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안 목회자와 선교사들을 그것을 양떼들에게 가르쳐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이 전도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전도란, 혹은 선교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던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전도이다, 선교이다.” 그렇게 해서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한 복음사역자가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그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진리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이런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씀을 혼잡케 하지 않고 순전하게 함으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선교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진리를 탐구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세 번째는 자신이 진리에 합치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베움”이라고 부릅니다. “진실”입니다. 진실은 진리라는 기준이 없이는 진실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에 합치한 상태가 진실한 상태입니다. 그렇게 합치한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합치되어가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성경진리의 빛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목회자와 선교사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것을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진리를 밝히고 깨닫게 하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의 존재 의미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제 나이 열네 살 2개월 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예수를 믿지는 않으셨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열네 살 2개월 되던 중학교 2학년 겨울이었습니다. 주일날 교회를 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면서 그 어린아이가 울었습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울었던 것은 가난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가난했지만 가난 때문에 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울었던 이유는, “내가 누구인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세계는 무엇이고 이것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누구도 이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를 가다가 한없이 울고 두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일어났습니다. 그때 저는 결심했습니다. 일평생을 무신론자로 살기로 말입니다. 지금 정확하게 생각하면 무신론자가 아니라 “안티데이즘”, 반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다. 나는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겠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저는 무신론자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몇년 후 하나님의 극적이 은혜로 저는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 갑자기 삶을 살아갈 용기가 난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인생은 어차피 신 따위를 의지하지 않고 나 혼자 개척해 가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나의 구원은 책읽기였습니다. 문학작품들을 읽었습니다. 위로가 된 것은 주위의 사람들을 만나면 나 같은 고민을 한 사람들이 없는데 책을 읽으면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열네 살 2개월 된 어린아이의 눈에 그 당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나는 그 많은 어른들이 열네 살 밖에 안 된 나보다 인생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고민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각기 자기 좋은 대로 걸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한참 책을 읽고 나니까 내 고민을 공감하는 것은 알겠는데,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고민을 한다는 것이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어린나이에 사상과 철학의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 나이 수준으로밖에는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그러다가 한 벽에 부딪혔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행복한 것 같지 않아보였습니다. 특히 니체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읽으면서 이것이 과연 자기 사상을 찾아가는 마지막인가 하는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에게 전도하는 사람이 없이 스스로 교회당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복된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요지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방식으로 인생의 고민을 처절하게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들을 다른 방식으로 표출합니다. 쾌락주의, 그리고 정신없이 자기 일에 몰두하는 것, 그리고 매일매일 뜻 없이 인생을 사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비롯한 그런 기계에 몰두하면서 사는 것. 그래서 체스터턴이라는 영국의 사상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사실 그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선명한 진리의 빛을 비춰주어서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하고 내 앞에 펼쳐진 이 세계는 무엇이고 예수는 누구이고 그리고 하나님은 왜 존재하시는가를 가르쳐주도록, 최종적인 답을 들려주고 알려주고 나타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목회자, 선교사입니다. 더구나 선교사는 다른 문화와 세계관이라고 하는 굴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관심이 선교에 대한 관심을 능가해야 그 선교는 진실한 선교가 될 수 있습니다. 반복하겠습니다. 진리에 대한 관심이 선교에 대한 관심을 능가할 때, 그 선교는 진실한 선교가 됩니다.
그런 진리의 찬란한 빛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객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이것은 몰라서 어두운 것입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무지한 것입니다. 주관적인 어두움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스스로 죄를 택하고 스스로 진리에 등을 돌렸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어두움입니다. 이것을 주관적인 어두움이라고 부릅니다. “내 눈을 열어 주의 율법의 놀라운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보게만 해 주시면 열립니다. 그런데 모릅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스스로 압니다. 마음이 죄를 붙듭니다. 어두움을 사랑합니다. 진리의 빛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와 선교사는 바로 이렇게 객관적인 어두움을 물러나게 해 주고 사람들의 지성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바꾸어서 진리를 사랑하고 신령한 것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빛은 원 생명, 그리고 우둔한 사람을 깨닫게 하는 진리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진리의 빛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셨는지 그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의 목적입니다. 이런 창조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지으셨기 때문에 자연적인 사물 속에서는 자연적인 질서가 존재하고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모든 선악간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사회를 이루고 살게 하기 위해서 도덕적인 질서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자연적인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 학문입니다. 그리고 도덕의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 윤리입니다. 이 학문과 윤리가 전혀 존재하지는 않는 인간사회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그것들을 모두 성취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사역사자의 본질적인 사명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는 지식을 갖게 하고 그 하나님을 하는 지식을 구현함으로써 자신과 교회와 세계가 하나님이 인간과 교회와 세계를 지으신 목적을 온전히 구현해 나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구약 성경에서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여러분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다트 엘로힘”이라는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얼마나 중요한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버리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제사장의 나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이 지식입니다. 이 “다트 엘로힘”은 그리스적 사회에서 단순한 이성의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그러한 원동력으로서의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슬람과 밀접한 삶을 살고 계시니까 페툴라 귤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젊은이들을 교육시켰고 이슬람세계관으로 무장하여 존재 그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울림이 있는 선교를 꿈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향해 보여주었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감이었습니다. 인간이 현존하는 것은 최상의 선포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이 세 치의 혀로 말하는 것으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사람이 구현하는 인간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서 그 배후에 있는 확고한 사상과 신념의 지식체계를 통해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된다고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상을 갖는 것입니다. 예전에 없던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이유는 진실로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이 전인적으로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소위 그리스도의 워드십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다음에 온 땅과 만물위에 높으신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삶의 주재권을 그분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약시대에 넘어오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기독론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양성경에는 하나님을 하는 지식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라지고 “그노시스 그리스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말로 환치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기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번역을 잘못한 것입니다. “둘로스”라는 이 단어는 “종”이 아닙니다. 킹제임스 버전이 번역할 때, “servant”라고 번역한 이유는 당시 영국에 노예제도가 시행되고 있어서, “둘로스”라는 희랍어가 “slave”를 의미하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격지심에서 그 단어를 선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slave”와 “servant”무엇이 다르겠습니까? “servant”상당한 대접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출퇴근하는 servant도 있고 그들에게는 분명한 월급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servant가 자식을 낳는다고 해서 servant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slave는 아닙니다. 생사여탈권까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노예가 아이를 낳아도 그것은 주인이 기르는 개가 새끼를 낳은 것과 똑같아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그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근에 신학계의 중요한 이슈중의 하나였습니다. 노예입니다. 그래서 노예라고 하는 “둘로스”라는 단어를 들을 때, 그 당시 로마세계에 살던 독자들은 끔찍한 그림이 그려진 것이고 사도바울이 그렇게 고백했을 때 최초의 수신자들에게는 매우 기이한 표현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노예는 권력과 죽음의 위협에 의해서 무릎을 꿇고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종이 되기 위해서는 종의 정신이 깃들어야 했는데 종의 정신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의 정신을 박탈해버리면 노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런 자유인들이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자기 자신을 파는 경우도 있고 전쟁에서 잡혀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그 사람들이 일평생 자유인으로 살았는데 노예가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을 노예로 길들여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노예로 길들여지는 것이 “둘라고고”,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노라”할 때의 그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사로잡혀서 그 사랑 때문에 깊이 좌절하고 엎드려져서 그 사랑에 붙들린바 된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와 선교사도 똑같이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에 계속해서 붙들려 사는 진실한 신앙생활이 토대가 되지 않으면 우리가 행하는 많은 것들은 우리 자신을 위한 성취욕일 뿐입니다.
종교개혁시대가 있었고 그것이 끝나면서 1725년경까지를 마지막으로 해서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성주의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성주의나 합리주의가 마찬가지의 이야기이지만 종교개혁의 시대에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피어스라는 신학자를 끝으로, 이미 넘어가게 됩니다. 알폰스 튜레틴 이후로 제네바 신학교가 소위 말하는 판프로테스탄티즘 프로젝트에 의해서 어떤 이성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실 개혁신학은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때는 이미 데카르트를 비롯해서 근대의 정신의 거대한 물결들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복음적인 생명력을 잃어갑니다. 그러면서 경건주의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합리주의로 넘어가게 되고 그 합리주의로 넘어가게 될 때 나타났던, 그것도 아주 웃깁니다. 그 사람은 에드윈 찰스 다간이라는 인물인데, 벱티스트 세미너리의 유명한 설교학 교수이고 이 사람이 죽고 거의 100년 가까이 되는데도 이것이 여전히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쓰일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던 세 권의 책입니다. “History of preaching”입니다. 이 책 속에서 독일교회를 예로 들면서 어떤 논쟁이 일어났는지를 말합니다. 다음 말씀드리는 것이 주일 설교의 제목이었습니다. “하나의 음료로서의 커피의 가치”, “감자를 주식으로 문화의 말할 수 없는 축복”, “가축을 축사에서 먹이는 것보다 방목하는 것이 더 좋다”, 이것이 주일 설교 제목이었습니다. 부활절을 앞두고는 “사람이 생매장 당하는 것은 끔찍하다” 이런 제목, 이런 것들이 설교제목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합리주의가 들어오면서 교회의 강단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외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 말씀에 대한 영적인 체험이 교회 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신학교수를 만났는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분은 그리스도인이지만 학계에 나가면 비그리스도인 친구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 친구들이 얘기하기를, “너희 교회가 옛날에는 아편이라도 줬었는데 요즘은 뽕도 주지 않는다.” 옛날에는 교회 나가면 사람들을 홀리게 하는 그 초월적인 something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까?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옛날에는 교회에 가면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어떤 신기한 경험이라도 해서 뭐가 있는가보다 하고 교회를 계속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아편같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지금 예배를 드리면서 진리에 대한 결정적인 증언이 이루어지고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는 어떤 결정적인 증언들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생적인 긴박감, 영적인 긴박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침마당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나 하면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최근에 합동 측 교단에서 목사, 장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두 번의 저녁 집회가 있었는데 제가 둘 째날 저녁 집회에 갔습니다. 제가 강연한 제목이 “회심이 없는 목회는 없다”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낯설게 들리는 현실이 가슴이 아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지금으로부터 약 53년, 55년 전 쯤 일이었습니다.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그때 일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그때는 신앙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가든지 열렬한 설교가 있었고, 농담처럼 설교하는 설교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말입니다. ‘저렇게 소리 지르다가 쓰러지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핏줄을 세우면서 젊은 목회자나 나이 드신 목회자나 얼굴이 시뻘겋게 외치고 설교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회개가 있었습니다. 그게 50년 전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부턴가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회개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죄를 범한 자가 되었다, 회개가 필요하다.” 이것 대신에, “너는 상처받은 사람이다. 상처는 네 탓이 아니다. 그 상처는 많은 사람들이 너를 사랑해줘야 치료가 될까 말까 하다.” 이런 식을 복음이 변질되었습니다. 결국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아닙니까?
교회가 이 진리의 빛을 밝히기 위해서는 성경을 잘 믿어야 합니다. 그럼 목회자나 선교사가 성경을 믿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포괄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괄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불러 일으켜져서 우리의 정신과 삶을 지배할 수 있는 어떤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동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현상입니다. 누구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믿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밝히기 위해서는 학문을 탐구해야합니다. 그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학문을 탐구하고 자기 시대의 언어로 그것을 다시 밝혀주고 그 진리에 반하는 모든 사상들의 약점을 공격하고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할 수 있는, 그것이 단순히 인간의 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동반된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의 목회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곧 학문을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는 신학자이어야 한다는데, 사실 학자라는 말, “scholar”는 자기 자신을 지칭하면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제 3자가 그를 respect하면서 써 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제가 좋아하는 것은 “academic”, “학문인” 목회자와 선교사는 기본적인 자질이 학문인 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하나님의 성경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학문을 통해서 탐구해서 왜 자기가 믿는 것이 참다운 진리인지를 설명하고, 이 시대에 일어나는 다양한 이교와 현대 사상에 대해서 그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사나 목회자는 공부를 참 안 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꾸준히 그 학문에 대한 탐구가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두 번째로 나오는 희랍어 “디아노이아”라는 단어는 “지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라고 할 때, 맨 먼저 바쳐져야하는 것은 지성입니다. 그 지성과 결합된 의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할 첫 번째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권하는 것은, 부지런히 책을 읽고 공부를 하십시오. 얘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경을 잘 읽는 것입니다. 학문과 믿음이 병행이 될 때, 성경을 믿는 믿음에 기초해서 탐구가 이루어질 때, 그때 진정으로 성경을 잘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여러분이 어디서 한번쯤 들어본 듯한 이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의 높으심을 꿰뚫어 알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저의 지성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이 믿고 사랑하는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습니다.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지성은 참된 신앙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목사, 혹은 선교사의 정체성이 누구인가 입니다. 여러분은 대부분이 목사입니다. 그러면 선교사이기 전에 목사입니다. 당연합니다. 목사가 먼저 입니다. 목사는 누구입니까? 이것은 저의 생각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할 때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목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어간 선지자들의 후예이며 신약성경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이다.” 이것이 우리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를 보면 목회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아주 탁월한 지성을 소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목회와 학문을 아울러 헌신했던 사람과, 목회지는 없지만 학문, 신학에 헌신함으로써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결 같이 설교자였습니다. 오리겐, 이레나이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이런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어거스틴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의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 인간의 자유의지, 결정과 자유의지, 그리고 선과 악, 시간과 영혼, 이런 것들에 대한 그의 철학적인 사유는 논쟁을 위한 명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실천적으로 고민을 하다가 접하게 된 철학적인 주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1600년의 세월이 흘러도 이 정신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우구스티누스를 비판하는 사람도 그 비판하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배웠다.”하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태어나서 많은 책을 읽었지만 어느 책을 읽으면서도 이 책의 저자가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칼빈이나 존 오웬같은 사람들마저도 말입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의 책을 두 번 읽으면서 저는 무릎을 꿇고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최고의 천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칼빈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특히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을 나는 좋아합니다. 왜 그런지는 여러분이 직접 읽어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신학이 학문일 수 있는가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때문에 신학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자연을 어떻게 잘 이용할지를 가르쳐주는 학문은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우리의 인생을 어디로 가야할지를, 정돈할지를 가르쳐주는 학문이 없다면 그 이하의 학문은 의미가 별로 없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진정한 학문이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에서 “이러한 신학이 믿음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진리라고 보고 시작을 하기 때문에 신학을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논리로 비판을 합니다. “학문에는 두 가지 학문이 있는데 자연 인성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로 출발하는 학문이 있고 더 상위의 학문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학문이 음악이라면 이런 음악은 산수, 수학을 통해서 음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나하면 음이라는 것의 아름다움은 그것의 규칙과 배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에 나타나는 파격적인 현대음악의 등장 이전까지는 음악가에 있어서는 수학이 기본이었습니다. 그것을 모르면 음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하의 평균율들을 보시면 아주 아름답습니다. 그런 것들이 아주 엄밀한 수학적인 수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쓴 책 가운데 “데 뮤지카”라는 글이 있는데 음악론입니다. 거기에 보면 라틴어의 음률을 이야기하면서 얼마나 엄정한 박자에 의해서 음율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어떤 수열에 있는지를 수학적으로 밝혀낸 것입니다. 아주 탁월한 작품입니다. 현대 사람들에게는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작품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광학에 대해서 아퀴나스가 설명할 때, 기하학의 전제를 받아들임으로써 광학이 성립합니다. 그러면 똑같이 신학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지복자들의 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음악이 수학을 받아들임으로 음악이라는 학문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러한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임으로써 하위의 학문인 신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이 “신학대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의 빛을 탐구하는 이야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뿐만 아니라 거룩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학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이 진리를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 교회, 세계, 종말, 자연,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혜를 발견하고 전달하기 위해서는 성경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들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성경을 정 가운데에 놓고 그 주위에 있는 학문들을 탐구함으로써 성경을 진정 성경답게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살아야 할 소명이 복음사역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성경과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에는 열렬함이 요구됩니다. 진리를 파수하고 전수하는 일은 신앙과 신학의 체계,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을 통해서 잘 수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성적인 신학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까지 이 넓은 스펙트럼에서 주님을 추구하고 주님을 아는 지식을 배워가고 그 지식 속에 자신을 용해시키면서 살아감으로써 진정한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한 설교자가 한 마디의 말을 범상치 않게 사람들에게 느껴지도록, 위엄있게 들리게 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것이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자기가 그 진리와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고난을 통해서 치화한 진리일 때 그러한 아우라가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한 설교자가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이미 가혹할 만큼 긴 세월동안 그 진리와 함께 죽고 사는 경험이 있을 때, 그것은 혈흔이 묻어있는 진리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My gospel”, “나의 복음”이라고 한 고백도 그런 고백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교부이고, 제가 30대에 이 사람의 설교를 모두 읽으며 한때 많은 마음을 쏟았습니다. 이 사람은 “황금의 입”이라고 불리웁니다. 이 위대한 교부는 단지 천재성과 열정 하나로 사역한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수사학을 비롯해서 성경, 학문에 탁월한 지혜를 갖춤으로써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메섹의 요한이라는 인물인데 7세기, 8세기를 살았던 교부이고 사실상 이 사람이 그리스계, 즉 동방교부의 마지막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황금의 입”이었지만 이 사람의 별명은 “골든 스트림”, “황금의 청산유수”였습니다. 이 사람은 철학과 역사, 모든 학문을 아우르면 신학이라는 높은 관심에서 그 모든 학문들을 가지고 기독교를 변증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작품을 몇 권만 읽어봐도 얼마나 엄청난 지성의 소유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도 젊은 시절에 엄청나게 학문에 헌신한 사람이었고 뒤에 보면 제가 가장 존경하는, 그리고 2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이 사람의 책을 읽고 연구했습니다. 이 사람은 10대 때, 20대 때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공부에 헌신을 해서 대륙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정치함과 영국 침례교의 (??)을 결합시켜서 영국과 내륙에까지 칼빈주의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입니다. 물론 이 사람이 자기 자신을 칼빈주의자라고 자처하지는 않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탁월한 천재적인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젊은 시절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결심문”이 있는데 거기에는 무엇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결단을 하고 그 결단한 대로 자기가 지키는지를 점검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버지 피너스 에드워즈가 있었습니다. 아들을 공부하러 보내놓고 걱정을 했습니다. 혹시 아들이 게으르면 어떡하나 말입니다. 그때 에드워즈는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 저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나의 소홀함 때문에 쓸모없이 뒤로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결심문”에서 실제로 “한 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가능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자.” 심지어 이런 말도 남깁니다.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내가 해야 할 그 일에 항상 힘쓰면서 살자.”라고까지 이야기 합니다.
요한계시록 4장을 보면 사도 요한이 말년에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마지막에 될 일의 계시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천사의 음성이 들입니다. 그때 두루마리에 계시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늘이나 땅이나 아래에나 그것을 펴거나 볼 자가 없다”는 선언이 들리자 100세 가까운 이 노사도가 보인 반응입니다.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희랍어로 “에클레이온 토 린구”라고 나옵니다. 흐느낀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목 놓아서 운 것입니다. 왜 입니까? 교회에 지을 돈이 없어서? 선교비가 모자라서? 아닙니다. 암 선고를 받아서? 아닙니다. 100세 가까이 살았는데 그 노사도가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며 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리의 말씀이 여기에 담겨있는데 이것을 볼 수가 없다는 선언이 들렸을 때,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갈망이 있습니까? 저는 신학교 다닐 때는 책을 읽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성격이 유별나서 내 책을 내가 가지고 줄도 긋고 읽은 다음에 내가 소유해야 직성이 풀렸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책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책 살 돈은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줍니다. 그런데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가혹할 정도로 바쁩니다. 할 수 있으면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으면 좋은 데 목회사역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서가에 들어가서, 전에는 책 살 돈이 없어서 울었는데 요새는 책장을 붙들고 눈물이 납니다.
(찬양)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가끔 서재에 들어온 교인이, “목사님 이 책 다 읽으셨어요?”물으면 가슴이 씁쓸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다 읽겠습니까? 그냥 열심히 노력할 뿐입니다. 노력하고 몸부림 쳐야 합니다. 책을 손에서 놓지 마시고 항상 책이 마음에 울림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가, 선교사가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선교사는 더 심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교인들이 돕니다. 선교사는 그 한 곳에서 선교를 합니다. 선교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1년 정도 회심하고 한 1년 정도는 선교사를 따라다니면서 배울 것이 있는데 3년쯤 지나고 나면 배울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지적으로 갈피를 못 잡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을 도전했더니 매주, 혹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입니다. 그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워낙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니까 읽으면서 놀랍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시간은 쉬는 시간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김현희 목사님의 명언이 있습니다. “공부와 휴식의 차이를 아니?”, “네?”, “공부는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것이고 휴식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이란다.” 이것이 목사의 삶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단다.” 부지런히 읽으셔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여기에는 찧어낸 기름을 사용합니다.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기름이 성령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등잔의 불빛이 진리와 지성을 가리킨다면 등잔의 기름은 성령과 은혜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조엘 오스틴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얼굴이 배우처럼 생겼습니다. 요즘은 조금 늙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스타 같습니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끔 가는데 숙소에서 TV를 켜면 이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성이 작동을 합니다. ‘저거 말도 안돼. 또 구라치고 있구나! 저 사기꾼!’ 그런데 리모컨으로 꺼버릴 수가 없습니다. 영어를 못하는 우리의 귀에도 그렇게 할 수 없게 들립니다. 너무너무 재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재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누가 보겠습니까? 약을 팔아도 그렇게 하면 안삽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질서정연합니다. 마치 여름날에 숲속에서 물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 설교를 듣는 동안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웃으며 지나가게 됩니다. 꿈같지 않습니까? 한 30분을 그렇게 저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새들백교회, 그리고 빌 하이벨스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비교가 안 됩니다. 제가 알기로도 5만 명이 넘었습니다.
몇 해 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방문을 했습니다. 거기서 총장님과 몇몇 교수와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조엘 오스틴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조엘 오스틴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나누게 되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사람의 신학이 영국 후기의 영지주의 사상과 번영주의들을 융합해서 가르침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의를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영지주의를 공부해서 그것을 하려고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박식한 학자들이 이 사람을 분석해서 옷을 입혀준 것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조엘 오스틴이 누구냐, 나는 목회자와 학자와 양심을 걸고 “He is not christian.”,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인터뷰 한 내용을 보면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신앙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타나는 많은 표적들이,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도 하지만 증명하지 않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독교의 힘은 사상의 힘이고 윤리의 힘입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기독교의 힘은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것에서 기독교의 힘을 추구하려고 할 때, 항상 교회는 부패했습니다. 여러분이 목사이고 저도 목사이지만 정치권력과 너무 가까이 가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역적 되는 날이 옵니다. 항상 너무 멀면 춥고 가까우면 불에 데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상과 윤리의 힘 이외에 기독교는 세상에 보여줄 다른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데서 그 힘을 찾으려고 할 때 교회는 부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상과 윤리가 떨어지면 안 되는데, 항상 사상은 윤리로부터 이탈하려고 하고 윤리는 사상의 근거를 무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마지막에 실종됩니다. 그래서 이 사상과 윤리를 묶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여기에는 가시적인 영역인데 여기는 불가시적인 영역입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아무리 잘하고 깡다구 있는 삶을 살면서 죄를 짓지 않아도 그것을 가지고 기독교의 진정한 힘이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에 의해서 이것이 combination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을 추구하되 자랑할 수 없고 윤리적인 삶을 살되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없고 자기를 신뢰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히브리어로 읽으면서 제 마음을 뒤흔든 구절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14장 2절에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라고 나옵니다. 희랍어 본문에는 “쎄밀 자이트 자크 까티뜨”, “쎄밀”은 “기름”이고, “자이트”는 “감람”입니다. “자크”는 “순전한, 깨끗한”이고, “까티뜨”는 “까따뜨”, “깨뜨리다”의 수동분사 남성 단수입니다. 그러면 “깨뜨려진 순결한 올리브 기름”이라고 번역이 됩니다. 새로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이 단어 하나 속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이 감람유를 착유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깨뜨리는 것입니다. 연자 맷돌 같은 것에 갈아서 바위에 파 놓은 골에 모이면서 기름이 자연스럽게 흘러오게 합니다. 이런 방법은 기름이 깨끗한 기름이 됩니다. 그러나 많은 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렇게 깨뜨린 것을 어떤 통에 넣고 위에서 압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름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기름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불순물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불을 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을음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쓸 만한 등불의 기름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이 됩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에게 목회사역에 있어서, 목회는 선교는 진리를 탐구하고 배운 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배달부가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 체화시켜서 자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도 힘드니까 선배를 찾아가서 “선배, 도대체 인생이 뭐야?”, “네이버에서 찾아봐.”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믿음과 탐구를 통해서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다른 사람을 우겨 넣으려고 하지 말고 자기를 먼저 그 진리에 합치시켜야 하는데,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에 완전히 합치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진리의 말씀이 비출 때 그 진리와 어긋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서 바로 이렇게 진리에 어긋난 자신의 죄를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기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2천 년 전의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오늘 이 현재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actualize 되는 것입니다. 재현되는 것입니다.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이 2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도 지금 주님이 나를 위해 못 박힌 것과 같은 고통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기운이 내 마음에 있는 나 주체적으로 살려고 하는 교만과 이기심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성화부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나 자신 속으로 들어와서 함께 죽으시는가? 그것입니다.
지난 2월의 일이었습니다. 리차드 벡스터가 목회하던 영국 청교도 고향이었던 키더민스터에서 저를 초청했습니다. 가서 “부활의 제 3지평”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했습니다. 12명 정도 모여서 강의를 들었는데, 제가 외국에서 살지를 않았는데 제 영어가 오죽했겠습니까? 어쨌든 강의를 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동양 목사의 듣기 껄끄러운 영어 강의를 듣고 문 앞에서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는 아니고 그 중의 몇 사람입니다. 그분들이 손을 꼭 잡고 “목사님, 정말 은혜 받았습니다.”하는데 눈에 이슬이 고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웰 해리스 같은 사람들이 2차 대전 때에 그렇게 뜨겁게 기도운동을 펼쳤을 때에 그러한 복음의 마지막 끝물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역사를 흘러오면서 어떻게 이렇게 교회가 바뀌었는지를 그 사람들은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영국에서는 남자 둘이 와서 목사에게 주례를 서 달라고 하는데 싫다고 대답하면 인종차별법에 의해서 현행범으로 체포됩니다. 그 옛날의 이야기들이 들렸던 것입니다. 복음입니다. 복음은 시대를 초월하고 관통하는 힘입니다. 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들이 그런 진리에 합치하는 끊임없는 자기 죽음과 반성, 누가 그리스도 예수를 다 본받았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렇지 못했다고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얘기했습니다. 자기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결국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진리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전체가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고 모든 사람이 그 진리에 대해서 살기를 꿈꾸는 그런 생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체험된 진리입니다. 어느 청교도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입에서 나온 진리는 성공하면 그 사람의 머리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마음까지 전달될 수 있다.” 진리의 힘은 그 말씀에 의해 깨뜨려진 자가 전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깨어짐은 죄에 대한 사랑, 자기 의에 대해서 깨뜨려짐으로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깨닫고 책 읽고 사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살고 죽고 정죄 받음으로써 신학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테타치오”, “고난”을 참된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표지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가장 탁월한 표지가 기도입니다. 그래서 경건은 기도하는 마음에서 옥토를 삼아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의 탐구와 마음의 기도, 이 속에서 지식과 경건의 합치가 일어납니다.
존 오웬은 하나님이 진리를 세 가지 보고에 담아 두셨다고 얘기합니다. 원천적인 보고는 이 성경 하나지만 이 성경을 세 개의 보물 창고에 가두시는데,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 성도들간의 가르침, 교회의 말씀 사역, 이 세 가지 창고를 이용해서 성경의 진리를 인간의 영혼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지나 선교지가 이렇게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성도들이 진리를 서로 가르치는, 이런 일을 잘 구현했던 사람이 마르틴 부쳐 같은 사람이 스트라우스 부르크에 목회할 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말씀 사역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영광은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말씀 탐구에 바치고 자신의 삶을 태워 진리의 빛을 교회와 세상에 비추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현상적으로는 무지, 질병, 가난, 차별, 억압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선교사는 어두운 세상의 빛, 양떼들을 위해 부름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목회자, 선교사의 본질적인 사명은 성도들이 성경 진리로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고 성령의 은혜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따라 살고 은혜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여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고 전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창조하신 목적에 합치시켜 그분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심령을 바쳐야 하고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로 은혜를 구해야 하고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키는 진실에 도달하게 될 때 우리의 목회 사역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