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신학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 22:4~6)
녹취자 : 오희열
우리는 목회사역을 하고 혹은 선교사역을 하면서 어떤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 의문은 단순한 사역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즉 무엇이 한 선교사나 목회자로 하여금 지치지 않고 끊임없는 열정으로 하나님 앞에 한결 같은 사역을 할 수 있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장 간단한 말로 그냥 “성령충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그런 모든 어려움과 역경을 딛고 항상 초지일관하게 하나님의 일에 순전한 동기로 사역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너무나 간단히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평신도용 해설”과는 다른 그 무엇을 우리는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의 경험에 의하면 실제 우리의 영적인 충만한 생명력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매우 특별한 주제로 초청합니다. “아름다움과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껏 제 스스로 박사 과정을 공부했고 논문을 쓰지는 않았지만,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제가 학교를 떠나고 홀로 목회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오히려 공부하기 좋은 위치에 있게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 오면서 제가 느낀 것은 신학에 나와야할 가장 중요한 주제는 “Beauty”,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이 강의 전체의 결과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목회자와 선교사는 부르심을 특별히 입었다는 것뿐이지 평신도의 소명과 전혀 다른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로서 역경과 시련을 만나서 꺾이기도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해 주는 비결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신학과 신앙을 통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속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이런 순서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목회 혹은 선교의 소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명을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여러분에게 사도바울이 왜 복음 전파에 대한 아낭케, 일종의 숙명을 느꼈는가? 그것은 소명체험이었습니다. 그 소명체험을 통해서 분명한 회심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에 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훌륭한 체험을 가진 사람들도 종종 그 소명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명의 문제는 중생과는 달리 순간적인 영적인 경험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지속적인 성화의 생활 속에서 그 속에서 우리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학함”은 지식과 사랑의 완전한 결합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심지어 중세 신학에 이르기까지 유장하게 기독교 속에서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 같은 사람은 “사랑은 곧 지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결합되는 것입니다. 지식을 한참 추구하고 그 다음에 사랑을 보충하거나 지식이 없는 사랑을 찾고 그 다음에 지식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과 사랑하는 과정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신학을 한다고 하는 것은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을 알기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이유는 단지 하나님을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자신은 자기를 빼앗긴다고 생각하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면 자신의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에 대한 지식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지식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의 시행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지식이 우리에게 전해질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간섭하셔서 사물들을 질서로 움직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시는구나!’ 하고 경험하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은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신학에 대한 지성의 자격이 있는데 그것은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능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훨씬 더 구체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위한 지성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심미적인 능력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고 한편으로는 그러면서도 거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지 않은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마음 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이고 이 경외의 원인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아름다운 분인지를 경험하면서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신학을 위한 지성의 자격인 것입니다.
칼빈이 경건과 학문의 조화를 추구한 것은 새로운 발견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있었던 전통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당신의 계시의 말씀을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약속과 함께 주실 때부터 이 두 가지는 함께 따라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과 학문,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지식입니다. 그때 쓰인 글이 바로 이것입니다. “Cor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 “주여, 나의 마음을 당신께 드리나이다.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
그 후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흐르고 한 세대 뒤에 히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네덜란드를 비롯해서 그 당시 대륙과 영국을 포함해서 기라성같이 포진했던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17세기는 기독교 역사상 매우 중요합니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 1세대와 2세대 들이 굵은 붓을 그린 것처럼 종교개혁의 그림을 그려놓고 17세기에 들어와서 정교한 그림으로 고백적 신앙을 그려냄으로써 개신교의 위대한 유산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저는 플라톤을 읽으면서 인간으로 태어나난 것이 자랑스러웠지만 어거스틴을 읽으면서 기독교인인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루터와 칼빈을 읽으면서 개신교인인 것이 자랑스러웠지만 히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를 비롯해서 기라성 같은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들을 만나면서 내가 개혁파의 교인인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여러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웬만한 교파의 신학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유산입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 17세기를 가리켜서 “개신교 교부들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 정도로 종교개혁의 정신을 가지고 중세를 건너뛰어서, 건너뛰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중세의 기독교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보편교회의 교부들과 사도들의 신앙에 뿌리를 두고 끊어진 기독교의 전통들을 새롭게 잇는 시대가 17세기였습니다. 이 사람은 위트레흐트대학의 교수였고, 영국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아서 당시 침체되고 있었던 네덜란드의 소위 Nedere Reformatie 라는 제2의 종교개혁의 기치를 드높입니다.
그래서 제가 최근에 우리 교단 신문에 신학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교단에 있는 모든 교회의 예산의 0.5% 정도를 신학교육 분담금으로 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돈이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안 낸 교회의 신학생들만 원서 접수비를 받고, 그리고 교수님들은 학교 안의 부지를 이용해서 최소 50평 정도의 주택을 지어서 들어와서 살도록 해서 충분히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거기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교수님들이 오고 경건과 학문을 겸비한, 소위 경기고등학교, 서울대로 대표되는 그런 사람들이 우선권을 갖던 시대를 끝내고 이제는 정말 경건과 학문을 겸비한 그런 사람들을 초청해서 그런 환경을 지어주고 그렇게 더 많은 교수들이 학생들의 적은 수의 담임이 되어서 그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저녁도 같이 먹고 같이 기도회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그렇게 신학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사람이 그 일의 모본이었습니다. 17세기에 이 사람이 위트레흐트 대학에 있을 때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소그룹 성경공부를 이 사람이 지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18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이 이 사람의 제자에 의해서 주되어 퍼진 것이라고 합니다. 교리를 가르치고 자신의 삶을 엄정하게 돌아보고 그렇게 학생들을 길러냈습니다. 실력 있고 신앙 있는 학생들은 유학을 보냅니다. 신학교육은 무료로, 기본적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기본 교재까지도 학교가 모두 공급해야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절반이 되어도 학교는 재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도록 만들어놓고 오겠다는 학생들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필요한 학생들을 뽑아야 합니다. 미국의 칼텍 군대? 같은 곳은 저 멀리 미국 어느 구석에 아주 유능한 학생이 있다고 하면 교수 둘이 비행기를 타고 가서 면접을 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실력 있는 학생들이 들어오고 실력 없는 학생들은 들어온다고 얘기해도 필요 없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 학교는 돈이 없지 않다. 돈은 얼마든지 있다. 너희가 아무리 가난해도 문제없다. 그리고 1학년, 2학년 까지는 될 수 있으면 교회의 사역을 하지 말고 공부를 하고, 필요한 생활비를 주고, 필요한 사람은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줘서 공부에 올인 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신학교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경건과 학문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 지를 이 선생님을 통해서 제자들이 직접 배우는 것입니다. 최근에 다행히 이분의 책 한 권이 최초로 한글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모두 라틴어로 되어 있고 영어로 된 책도 거의 없습니다. “영적 침체”라는 책입니다. 이 사람 시대에는 이 사람만큼 가톨릭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입니다. 해박한,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책을 썼습니다. 한 번 주문해서라도 읽어보십시오.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이런 대 학자가 어떻게 그런 실천적인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영적인 침체에 빠진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아주 훌륭하게,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습니다. 이 사람이 강조한 것이, “프리시즌” 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엄정주의”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가르침을 머리 떼고 꼬리 떼고 해서 신학을 이야기하는 기독교의 정신은 나눌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주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책 중에서 “신학논쟁선집”, 이 책에서 “신학의 실천에 있어서 우리는 엄정한 것을 말한다. 이는 행동의 정확함이다.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교훈에 일치하고 신실한 자들에 의해 수용되고 열망되는 엄정함이다.” 그래서 신실한 자들은 대충 살면서, “나만큼 사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하지 않고, 삶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보내신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끊임없이 온전해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엄정성을 요구하는 근거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정성의 근거이고 유효인이시다. 거룩한 완전함이시며 정확함과 순결함을 좋아하시고 당신의 자녀들도 그와 같기를 바라신다. 둘째로 말씀은 단일하고 유일한 엄정함의 기준이다. 거기로부터 그분의 양식, 그분의 형상이 이루어진다. 율법과 합치하면서 조화를 이루게 한다. 이러한 일치의 매듭을 건너뛴다면 종교에 있어서 지지되어야 할 것들 검증하지 못한 채 의심이 남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엄격주의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하는 정신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18세기 영국에 와서 다시 한 번 구현이 됩니다. 그것이 English methodist들의 운동입니다. 우리는 methodist를 감리교라고 번역을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 사람들이 English methodist 의 본거지였는데, 영국 옥스포드의 홀리클럽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methodis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칼빈주의, 알미니우스주의, 다양한 주의들이 모입니다. 그래서 이 methodist는 감리교가 아니라 “행동방식”입니다. “Method” 누가 이 methodis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느냐 하면, “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우리와 다르다. 저 사람들은 삶의 방식이 매우 특별하다.” 해서 methodist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상을 추구하면 그 사상의 체계로부터 어떤 식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삶의 지침이 나올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사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공산주의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는 자유주의의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을 따라서 살아야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지 휫필드입니다. 이 사람은 존 웨슬레와 함께 18세기 영국을 도덕적으로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건져내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레키와 같은 역사가들도 동의하는 바이고 불신자들도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조지 휫필드, 존 웨슬레, 뿐만 아니라 찰스 웨슬레 이런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18세기의 기라성 같은 설교가들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18세기는 영국이 처음으로, 인류최초로 산업혁명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산업혁명과 함께 일찍이 인간이 경험이 보지 못했던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바로 도시화입니다. 도시화, 산업화, 그리고 테크놀러지, 빈부의 차이, 그러면서 인간소외를 경험합니다. 전통적으로 소수의 마을들이 모여서 살던 것들이 무너지고 이제는 생산을 위해서 도시로 모여듭니다. 서울에서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살면서 위에 누가 있는지 아래에 누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옆집에 누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소외와 외로움, 갈등, 노동착취들을 겪게 됩니다.
이런 것이 사실은 우리의 성수주일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작년에 “성수주일”이라는 책을 한 권 썼는데 그런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함께 우리는 그 고백을 컨텍스트에 대한 고려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것 사이에 약간의 브리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엄격한 성수주일의 개념들이 나오게 되었는지 이러한 사회, 문화적인 백그라운드 속에서 이해해야만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래서 이 사람은 종교적인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역설하고 요한 웨슬레는 비록 감리교의 창시자이고 알미니우스주의자였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이 사람도 지식과 은혜의 경험 사이의 일치를 추구한 목회의 전통을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목회는 지식과 사랑이 결합된 가운데 학문적인 지성과 목회적인 실천으로 계승이 됩니다. 지식과 학문적인 지성, 사랑과 목회적인 실천, 이것들이 아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계승되는 것이 개혁주의 목회의 전통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이고 선교에 있어서는 여러분이 전문가이시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전 세계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나라들이 동남아에 모여 있습니다. 그 나라들이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처럼 잘 사게 되거나 서구라파와 어깨를 동등하게 겨룰 수 있는 나라가 되리라고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많은 요인들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전 세계의 경제가 7~8% 지속적으로 성장한다고 보면 상당히 많은 혜택을 이 지역의 사람들이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수준이 좋아지게 됩니다. 그럴 때 밀려들어오는 그 엄청난 경제주의의 물결, 그리고 한국사회가 최근 30년 동안 경험했던 그 충격적인 경험, 도덕적인 타락은 물론입니다. 그런 속에서 물밀듯 밀려오는 물질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절대규범을 거부하는 상대주의적인 사상, 이런 무규범주의, 이런 것들이 도덕과 철학에 연관되어서 뿐만 아니라 도덕, 역사, 철학, 경제, 문학, 사회, 심지어는 패션, 음악,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의 식생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의해서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올 때, 그것들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이 있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한국 교회 안에서 생각해보십시오. 85년도를 기점으로 기독교인구가 줄기 시작했습니다. 신학교의 학생들도 줄기 시작해서 경쟁을 뚫고 들어갔던 학생들이 이제는 거의 미달을 면한 정도가 되고 오히려 학과의 정원을 문교부에 반환할 정도까지 되어가고 있습니다. 목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학교에까지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에 종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 그렇게 될 때, 이렇게 밀려들어오는 모든 상황 속에서 기도교인으로서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충만 하도록 목표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하나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사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체계를 가지고 이 세계를 바라보도록 해야 합니다. 패튤라 귤렌이 이슬람을 선교했던 것 같은, 그런 전 포괄적인 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판 소피아 사상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틀을 가지고 모든 학문과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체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기초를 놓아야 할 너무 중요한 기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현대교회의 비극은 신학과 설교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깊이 있게 해설을 하고 그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도 전문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맞장구치듯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신학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이 설교자가 장로교 설교자인지 감리교 설교자인지 침례교 설교자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 뒤범벅이 되어 버렸습니다.
“올바른 신학함”이란 지식과 경건, 목회를 통해 이런 것들이 수행되는 전통들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개혁주의만이 복음주의의 뿌리인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역사적으로 보편주의는 개혁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개혁주의는 개혁주의 만이 아니라 뒤로 넘어가면 13세기말 지각변동으로 일어난 새로운 사상들, 소위 말하는 “피아 로도르마”라는 새로운 학문의 방식에 대한 사조로부터 시작해서 그 뒤로 중세시대, 그 뒤로 교부들의 시대, 그리고 속사도, 사도들의 시대, 그런 신앙의 전통성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부흥주의라는 것이 들어옵니다. 부흥주의는 감정이라고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기독교로 생각하는 사조들은 이미 사도들의 시대 때부터 있었습니다. 몬타누스파 같은 사람들, 그러면서 감정과 지식의 강조점 이 두 사이를 진자운동처럼 왔다갔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흥주의가 결정적으로 복음주의 속으로 들오는 때가 18세기에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에 일어났던, 1740년대에 제 1차 대각성 운동을 통해서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36년도에 부흥이 처음 일어났지만 40년, 41년, 42년 이후에 부흥이 파죽지세로 퍼져가면서 거대한 부흥이 일어나고 그 중심에 섰던 사람이 조나단 에드워즈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 때에는 사실 그런 부흥을 통해서 일어나는 강력한 영적인 상황들을 신학적으로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그런 인물이 좀처럼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날 때는 19세기 중반이니까 약 100년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찰스 피니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찰스 피니는 선교에 영향을 끼치고 전도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개혁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신학적인 관점, 복음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사람은 매우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도 부인하고 성령의 역사도 부인했습니다. 세미펠라기안주의를 넘어서서 3/4 펠라기우스주의쯤 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그냥 자기가 원하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본 사람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서 이 신학이 기존에 가졌던 정통적인 신학으로부터 훨씬 멀리 빗나가게 됩니다. 그런 사상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부흥주의는 긍정적으로는 신앙에 대한 새로운 갈망을 주고 근대선교운동에 이바지하고 사회개혁에 이바지 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는 목회자직에 대한 이제까지의 지성적 전통을 허물어뜨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지성의 중시라는 전통들을 부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 우리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헛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교수님들은 뭘 하라고 말씀하시고 개혁주의의 전통을 이야기하지만 실제적인 목회 현장에 가서 분위기를 보면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부흥주의적인 전통이 들어오면서 이 지성적인 전통을 아주 얕잡아보는 새로운 경향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 그림을 보십시오. 이상하지 않습니까? 18세기 말 미국 켄터키 지방에 있었던 부흥운동입니다. 불이 타오릅니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고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는 것이 하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웅성웅성 합니다. 성령의 지나친 주관주의에 치우치면서 극단적인 성령의 체험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에 도달했다. 이제 인간이 만든 제도를 따라서 학교를 가고 공부를 하고 신학 훈련을 받아서 제도적인 정책을 따라서 목사가 되던 시대는 옛날시대이고, 성령이 이렇게 놀랍게 역사하는 시대에는 wonderful freedom, “놀라운 자유”를 하나님이 주신 시대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든지 성령받은 사람은 설교할 수 있다. 목회자가 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불건전한 복음주의 속에 들어온 요소들이 활짝 꽃피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안 머레이라는 분입니다. 지금 연세가 많으신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목회할 때 여기서 부목사를 하던 분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더 나아가 새로운 기적의 시대가 이르렀다고 믿었던 그들은 설교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설교자를 따로 구별해두는 일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지금이라도 뛰쳐 올라와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면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는가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는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에,” 미국이 독립을 하고 민주주의가 꽃피는 시기였습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찾아갔던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이야기하는 독실한 개혁주의적인 신학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활동하던 이신론주의자들이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떠오르면서 전통적인 지위와 직무들은 너무 독재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단순하게 설교해야한다는 목회서약을 공격하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어도 말이 유창한 사람들은 발언할 기회를 훨씬 더 많이 얻게 됩니다. 이것이 그 당시 상황이고 이런 요소들이 개화하기 시작해서 19세기와 20세기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무디의 부흥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무디의 전기를 조심스럽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 얼마나 진실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학적으로 매우 아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학의 상당부분을 그 후의 은사주의가 계승하게 됩니다. 그리고 20세기 오순절 운동이 미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1960년대까지는 “당신이 신봉하는 교파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에, “저는 칼빈주의입니다.”하면 사람들이 상당히 그 사람에 대해서 respect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후로 뭔가 중요한 변화가 미국에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60년대는 어떤 때입니까? 미국의 프렌시스 쉐퍼에 의하면 미국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질서가 결정적으로 꺾어지기 시작한 게 1960년대였습니다. 특히 월남전에 개입하는 그 사건, 반전데모를 통해서, 61년에 프랑스에서 학생혁명들이 일어나고 유럽에 불길처럼 번집니다. 그것이 철학사적으로 현대철학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많은 철학자들이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무규범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것들이 사회적으로 대중적으로 활짝 꽃피기 시작합니다. 그 사상은 훨씬 전부터 있었지만 말입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그런 흐름을 타면서 한 시대의 정신과 기독교의 오류들이 만나는 것입니다.
조지 휫필드가 그 당시에 설교하던 모습입니다. 가운을 입었는데 어디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까? 길거리에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하는데 어떻습니까? 이 사람이 흐느끼면서 울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고꾸라지듯이 엎드러져서 회개하는 장면이 보입니다. 설교라는 것이 거룩한 예배당에서만 행해질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street preaching 이 유행되고, 꼭 안수 받은 목사만 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 분은 자기 담임목사가 회심하지 않은 것 같으면 쫓아내야한다고 까지 얘기했습니다. 개혁주의의 교회론에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살면서 1736년에 이미 첫 번째 부흥이 있었지만 1740년과 1741년에 엠필즈의 부흥으로 시작을 해서 미국대륙에 부흥이 번져갈 때, 그때의 중심적인 인물이 조나단 에드워즈였고 그때의 대중적인 명성에 있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휫필드에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휫필드는 이미 대서양을 넘나들면서 거의 전설적인 설교자의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런데 주관적 충동, subject implusion 이라는 것을 놓고, 쿵 하고 내 마음에 감동이 왔다거나 약간 직통주의적인 것들 말입니다. 이 사람의 신학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분은 굉장히 칼빈주의적인 설교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주관적인 충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결과인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판단할 때 주관적인 충동을 의지했습니다.
조지 마스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휫필드가 영적인 충동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 에드워즈가 꾸짖었을 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 채 냉정하게 주제를 무시했다. 두 사람은 굳건한 협력자로 남았지만 가까이 사역하기에는 방식이 너무나 달랐다.” 만약 에드워즈에게 휫필드가 신학을 배웠더라면 좀더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 “올바른 신학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성경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제 나온 도표입니다. 성경이 구속사역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찬란한 속성들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 펼쳐진 형형색색의 드라마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책이고 복음은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자면 이렇습니다. 제가 생각해서 그려본 것입니다. 찬란한 무지개빛이 빨주노초파남보로 비치는데 그런데 이 무지개빛이 구속사역입니다.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냅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고 초대교회가 태어나고 성령이 강림하고,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 구속사역입니다. 이 찬란하게 나타나는 구속사역은 그 밑에 하나님의 어떤 성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속성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의, 정의. 어디서 나타납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보는 것입니다. 자비, 용서, 사랑,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구속사건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보고 그 뿌리가 어떤 하나님의 성품과 맞닿았는지를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본질, 선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어, 인격, 삶으로써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몇 년 전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5년쯤 된 것 같습니다. 마스던 교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강변에 앉아서 약 두 시간동안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래도 이분이 나를 만나주셨습니다. 세계적인 석학이시고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의 최고 권위자이십니다. 아직 살아계시고 지금은 노틀담 대학교를 은퇴하시고 칼빈신학교에 와 계십니다. 함께 앉아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시간 동안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유결정론?에 대해서 까칠한 질문을 많이 했는데 굉장히 자비롭게 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때 나왔던 얘기 가운데 이분이 지적한 것이, 오늘날 목회의 비극은 말할 수 없는 피상상이라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처럼 깊은 사상에 뿌리를 내리고 그런 설교관을 가지고 설교를 해서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그들이 이 ??이 둘러싸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따라 사는 그런 사람들로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목회의 본질은, 선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서 그들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했을 때 아주 흔쾌히 동의를 해 주셨습니다.
로이든 존스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설교가 무엇이냐? Logic on fire, 불이 붙은 논리이다. 그리고 eloquent reason, 감동시키는 추론이다.” 그래서 설교란 논리를 설교하는데 감동시키는 추론입니다. 불붙은 논리, logic 이 지성과 지식에 관한 것이라면 fire는 은혜와 능력,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reason이 지식에 관한 것이라면 eloquent 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서 그를 공감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설교란 신학을 감동적으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 설교를 들으면서 기뻤다가 슬펐다가 눈물이 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무슨 사상이 들어오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상을 자신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의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거룩한 의무에 묶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즐거움을 얻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와 사랑을 하나님의 은혜로 묶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 소명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할 일인 것입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이웃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올바른 신학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를 인식하고 그것을 마음의 정동이 일어남으로써, 이것이 반복될 때 그것이 성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감동을 주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미학적 표현이고 이것은 종교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적 위대하심과 무한한 도덕적 완전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신학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신이 선포한 바를 살아냈고 충분히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설교와 삶의 불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목양을 위한 설교를 위해 필요한 지식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입니다. 거기서 삶의 지혜, 세계, 인생에 대한 통일성 있는 판단이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만보다는 겸손을 배워야 하고 자기가 어떤 지식이나 누구의 사상을 좋아해도 성경진리만큼 신뢰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성경에 굴복하는 배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역을 해보면 공부할 시간이 없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이지만 목회는 종합하고 활동하는 성향을 필요로 합니다. 다른 것들을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같은 것으로 보이는 것을 끊임없이 분석해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구별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회의 열정이 뜨거우면 공부하기가 힘들고, 공부를 많이 하면 가슴이 식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런 일을 하는 초보적인 경험일 뿐입니다. 도가 트면 공부하면서 뜨거워지고 뜨거워지면서 공부하게 되어서 모든 살고 배우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과정 자체가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어거스틴을 읽고 6개월을 울며 기도했습니다. “왜 이렇게 불공평하십니까? 누구에게는 천재성을 주시고 나는 부지런히 공부해야만 겨우 이해할 사람으로 만드셨습니까?” 그러고 나서 가슴에 새겼던 것이 무엇입니까? “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則亦及之矣 부기일일이천리 노마십가칙역급지의”, 천리마가 하루에 천리, 즉 400 km를 간다는 것입니다. 그 천리마가 한 번을 크게 뛴다고 해도, 천리마가 빠르기 문에 빨리 가는 것이지 한 번 뛰어서 산을 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둔한 말, 보통 말, 못난 말이 열흘을 달리면 거기에 미치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백리를 열흘 가면 천리가 되는 것입니다. 천리마가 한 번 크게 뛴다고 해도 열 걸음을 나아갈 수 없고, 우둔한 말이라도 열흘을 달리면 거기에 미칠 수가 있다. 일의 성과는 계속 하는 데에 있다. 순자의 “수신편”에서 이야기 합니다. 능력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공부를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사역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하고 있는 이 일은 하더라도 허투루 쓰는 시간들을 아끼면서 여기에 몰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로 하나님 앞에 사역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그냥 똑같이 사역하는데 한 사람은 틈틈이 계속 책을 읽고 의미를 생각합니다. 묻기도 하고 글도 읽고 보고 그것들을 계속 축적합니다. 한 사람은 그냥 몸으로 떼우는 노가다 선교를 합니다. 한 달이나 6개월 지나서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10년 지나고 나면 둘이 함께 앉아서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차이가 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지식이 모자란 상태에서 진실해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원하는 대로 다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닌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특출 나서 한 번에 천리를 달리지만 우리는 백리 밖에 못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놀 때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다 늙어 가는데 공부하라고 왜 난리냐고 생각하십니까? 조선시대의 우리 선비들은, 여러분도 아버지나 할아버지 제사지낼 때 보셨을 것입니다. “OO 學生府君神位(학생부군신위)” 라고 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학생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관직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은 학생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인생에 대해서 배우는 학생입니다. 우리 선조들도 그런 생각을 가졌는데 우리는 선교사(宣敎師) 아닙니까? “교敎”를 “선宣”하려면 그 “교敎”를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식이 없는 “교敎”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이 미신 아닙니까? 기독교는 미신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속에 “교敎”가 살아있으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한데 하나는 마음에 불붙는 사랑과 아주 분명한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매일 들통을 지고 탄광 막장으로 내려가서 그날 쓸 뗄감을 캐다가 하루 가족을 위해 불을 피워 밥도 해먹고 난방도 하며 살게 하는 광부와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주일에 네 번이나 다섯 번을 설교해야 하는데 너무 몸이 아파서 한 번을 설교하고 뻗었습니다. 들어와서 링거를 맞고 혼수상태에서 주일을 지냈는데 그 다음 날 월요일은 공부하는 날입니다. 나에게 월요일은 휴일이 아닙니다. 거의 쉰 적이 없습니다. 가방을 들고 공부하러 아침에 나가는데 아내가 저를 붙들고 가지 말고 쉬라고 했습니다. 나는 공부하러 가야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평생 가방 들고 공부하러 다니지 않았어요? 며칠 쯤 쉬어도 티가 나지 않아요.”, “티가 난다.”, 그때 제가 했던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신학이 예쁩니다. 이 세상에서 신학처럼 예쁜 학문은 없습니다. 신학을 다루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를 다루는 것입니다.
(찬양)
온 세상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잘 알 수 있어요
우리가 주일학교 때 부르던 이 찬송가의 작시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어거스틴입니다. 이런 주장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어거스틴이 그것을 작시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 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이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공부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 신학의 아름다움을 공부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게 아닌데 아름답다고 착각하는 인간들의 눈의 비늘을 벗겨버리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여러분은 자녀가 있으실 것입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는 것이 선한 것입니까, 컴퓨터 게임하면서 노는 것이 선한 것입니까? 대답을 못 하십니까? 중고등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게임임이나 하고 미치는 게 좋은 것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런데 아이들은 좋은 것에 마음이 끌립니까, 안 좋은 것에 마음이 끌립니까? 안 좋은 것에 마음이 끌립니다. 거기에 중독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름답지 않은데 인간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왜 아름답지 않은지 눈꺼풀을 확 벗겨 주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와 관련된 학문입니다.
이 사람은 흐로샤이데 라는 화란의 신학자였고 18세기와 20세기를 거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학교 다닐 때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사서 책을 못 읽었습니다. 일주일치 점심을 굶고 돈을 모아 가지고 걸어가서 생명의말씀사에서 원서 하나를 삽니다. 그러고는 가슴이 벅차서 돌아옵니다. 지금은 책을 살 돈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가난해서 못 읽었는데 요즘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가만히 좀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닌데 하나님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면 가야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읽다가 맥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교인이 묻습니다. “목사님, 서가의 책을 다 읽으셨어요?”, 항상 주눅이 듭니다. ‘이런 심술궂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내 서가의 책을 모두 읽으려면 350년을 읽어야 합니다. 계산을 해 보니까 부지런히 읽어도 350년을 읽어야 모두 읽을 수 있는 양입니다. 거기에 유니우스의 책이 있습니다. 이런 옛날 책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따끈따끈한 책들까지 수없이 많습니다. 읽는다고 읽지만 들어오는 양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낙담합니다. 그런데도 서재에 들어서면 책들이 재잘거립니다. “목사님! 저 좀 읽어주세요!”, “저 지금 방금 들어왔어요!”, “저는 유럽에서 건너왔습니다!”, “저는 되게 비싸요.”, “저 좀 읽어주세요!” 마음은 아프지만 싫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 많은 책들 앞에 조용히 서 있으면 내가, 굽이쳐 흐르는 이 기독교의 지성사 속에 얼마나 티끌 같은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면 영혼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지만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의 원인은 아름다움입니다. 예쁘니까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예전에 불신자였을 때는 모든 아름다움이 이 세상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지위를 갖고 재산을 많이 모으고 예쁜 아내를 맞이하며 예쁜 집에서 그렇게 삽니다. 예쁜 것과 다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된 다음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는 심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탐미의 정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구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자기가 얼마나 추루한 존재인지를 발견하게 되어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킴으로써 하나님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 지성적으로 사상을 따르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선교사는 최고의 목회, 최고의 선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름다움의 진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에서 아름다움을 확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입니다. 성경을 믿고 은혜를 받고 학문을 공부하면서 자기가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고 그런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교하고 말씀으로 섬기니까 그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감으로써 아름다움이 확장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자매가 불신자였는데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습니다. 친구가 그녀를 보고 하도 곤고해 보이니까 오라고 한 것입니다. 남편과 오랜 갈등 속에서 이혼을 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남편과 도장을 찍으려고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교회를 왔는데 하필 그날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불신자인데 와서 회심을 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편을 불렀습니다. 남편이 나와서 생각할 때 오랜 세월이 냉랭하게 흘렀고 이 아내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자기를 불렀다고 생각했답니다. 아내가 노려봤습니다. 한 여자가 남자와 살다가 이제 그만 살 때는 웬만한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고개를 크게 끄덕이시면 남편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 아내가 남편 얼굴을 딱 쳐다보더니 무릎을 꿇었답니다. 그리고 울면서, “여보, 내가 잘못했어. 당신이 이렇게 망가진 것은 나 때문이야.” 하며 울기 시작했답니다. 남편이 뭐라고 했겠습니까? “당연하지! 너 때문이지!”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아름다움이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추루한 인간의 죄와 타락이 이 세계가 더럽고 누추하게 된 원인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테크놀러지의 강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이 비참한 운명을 개선할 수 없습니다. 자, 샌프란시스코에서 호주 시드니까지 30분이면 날아가는 비행기를 연구 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누가 그러는데 그런 비행기가 동양과 서양을 날아다니면 영화의 문법이 바뀌어야 한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호주에 가서 집회하고 뉴욕에 가서 잠을 잔다고 합시다. 아니, 달나라의 집에 가서 오늘 저녁 12시 뉴스를 본다고 칩시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KTX를 타고 두 시간 만에 부산을 넘어가니까 뭐가 달라졌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행복해진다거나 우리 인생이 더 의미 있게 되어진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테크놀러지가 가지고 있는 현혹한? 힘입니다. 그런 것들을 본래의 아름다움으로 돌아가게 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동성애에 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동성애의 문제가 쓰나미처럼 밀려오는데 물론 변증도 하고 압력도 넣어서 법도 개정을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마지막에 최종적인 장치가 있습니다. 내가 그때 발언을 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애자로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로써 모든 사람을 굴복 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존재감,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모든 불신자들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신학함에 있어서 신앙의 역할입니다. 철학은 진리를 찾지만 신학은 진리를 보여줍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고 우리의 사랑을 거기에 합치하여 행복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그분을 사랑할 수 있으면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도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을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이것에 의존하여 하나님 알기를 갈망하는 구도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학함의 요체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과 신학 뿐 아니라 인문학, 자연과학, 음악, 예술, 이러한 습득할 수 있는 모든 지식들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수집하는 재료들로,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창조세계 안에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질서들을 인식하고 파편처럼 흩어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다시 엮어서 그것을 연관 지어서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풍요한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우리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경과 교회에 뿌리를 둔 경건으로서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뻗쳐나가게 우리 자신이 준비되고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준비시키는 것이 선교사역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내용이 없으면 선교나 목회는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의 원인인 존재는 하나님께로부터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된 만물 중에 그분 없이 창조된 것은 없기 때문에 결국 지식의 근원이 하나님 한 분이듯이 만물 존재 속에 묻어있는 아름다움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흩어져서 분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면 그 모든 아름다움을 하나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찬란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고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관을 짓는데 이것이 지식의 전달입니다.
성속의 여부는 지식 자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온 세계가 아름답게 되는 일에 소명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결국 궁극적으로 그 나라가 아름다움의 나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소명을 받은, 선교의 소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같이 읽읍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이 없나니 비와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신학은 정말 사랑스러운 학문입니다. 왜냐하면 학문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참으로 아름다우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신학공부의 목적은 최고의 아름다운 하나님을 공부해서 자기가 아름답게 되고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세상도 그것을 회복하기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눈 뜬 사람이어야 하고 그 아름다움을 더 많이 알기를 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