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전도
(199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1:16) 1995.4.26 수요예배 1
2. 복음을 위하여(행21:13) 1995.4.30 주일오후 14
3.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롬9:1-3) 1995.5.3 수요예배 26
4. 쉴 수 없는 복음전도(행5:40-42) 1995.5.17 수요예배 33
5.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빌1:29) 1995.5.24 수요예배 43
6. 복음에 빚진 자로다(롬1:13-15) 1995.5.31 수요예배 53
7. 주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고전2:2-5) 1995.6.14 수요예배 60
8.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2:4-5) 1995.6.21 수요예배 67
1.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사도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곧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들의 개념을 제외 할 대는 그 복음 속에는 부끄러워 할 만한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고 세상 적인 눈으로 보게 될 때 그 복음은 부끄러워 할 만한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복음을 부끄러워한 것 이상으로 복음을 증오하였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정도가 아닌 복음을 하나님을 섬기는 도가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처럼 이 어리석은 도가 누룩처럼 온 땅에 번져 가는 것을 보면서 속히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늘 쓰는 “복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한국어 의미로 복스러운 소리, 영어의 의미로 좋은 소리, 헬라어의 의미는 기쁜 소식으로 해석되는 데 무엇이 복스럽고 좋은 소식이며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까? 바울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본문은 마르틴 루터가 읽고 크게 절망한 구절이고 그 속에서 또한 하나님을 만난 구절이기도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먼저 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의를 알지 못하고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의를 알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하고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복음을 알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 구절을 읽다가 하나님 앞에 항거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복음속에 칼을 두셨나이까?” 그는 정확한 인식을 하게 되었씁니다. 하나님의 의는 칼입니다. 죄인을 정죄하는 기준이고 의가 무엇인지 드러나자 인간이 그 의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낫습니다. 구약의 의는 율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듯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 율법이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였습니다. 그러나 깨닫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의이지만 지키고 살려고 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의 율법을 지키고 의를 이루었다고 하면 다른 계명으로 실패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으며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마지막 내 속에 탐심이 있으면 그것으로 계명을 범하게 되고 그 탐심으로 인하여 곧 우상숭배라는 말씀에 의해서 우상을 숭배하는 결과가 되어 끊임없이 율법에서 멀어지게 되고 의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죽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의, 우리에게 지키도록 하신 율법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망입니다. 루터가 몸부림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면 의로 여기시지만 지키지 못하면 죄로 여기시고 대가는 형벌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 의인이 없다고 하십니다. 한사람의 의인이 없으며 누구도 율법을 지키고 부합한 삶은 살수 없게되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죄와 죽음의 아래에 있게 됩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거기에 종노릇하고 살아갈 수 록 죄로부터 죄의 열매를 맺고 마지막엔 심판에 이르게 되는 죽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복음에 이르게 되어 이런 것으로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해도 도저히 불가능해 정죄 받고 사망아래 놓이게 된 사람을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었습니다.
예) 많은 젊은 청년들이 병역을 기피하려합니다. 병역을 기피하고 도망하는 죄는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기피하지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제가 아는 친구의 형이 머리가 아주 좋았고 집에서 편히 지내다가 군대에 입대하여 고생을 심하게 치르다가 그것을 참지 못하고 부대에서 부대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머리를 써서 탈영을 하였습니다. 어느 시골집에 들어가 중학생 교복으로 바꾸어 입고 산으로 산으로 돌아서 집에 와서 지냈는데 늘 그에게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30이 넘어서 결국 잡히게 되었고 지방에 끌려가서 3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범죄하고 도망하던 사람이 어느 날 뉴스에 병역법이 개정된 방송으로 일체의 지난 모든 과오를 묻지 않고 자수하여 광명을 찾을 기회를 준다는 소식을 들으면 엄청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소식이 역사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죄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지배한 것처럼 기쁜 소식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육신의 정욕대로 먹고 마시는 것 속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온 젊은 관원의 고민처럼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죄와 사망과 형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뿐 아닌 열심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싶었지만 율법을 펼치면 펼쳐 보일수록 끊임없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어느 부분을 보아도 너는 죄인이다, 너는 정죄되었다. 어떻게 살든지 사망이며 죽음뿐이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때 율법 속에서 우리를 정죄하는 효력을 무력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얻은 샛길 곧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이젠 아무 공로 없이 거저 와서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그런 구원과 하나님과의 샬롬은 얻기 위해서 그토록 몸부림치며 갈구하고 사모하며 누리고 소유하고 싶어했던 그 구원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죄의식 속에서 살고 몸부림 쳤던 사람들이야말로 복음이 얼마나 복된 소식인지 알게 되었고 기쁜소식 좋은 소식,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젠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기를 기다리고 잇는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
기쁜 소식인줄 모르는 것입니다.
바울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원하지만 그의 복음 전파 방식 가운데 동일하게 죄인임을 상기 시켜주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은 선조 들이 복음을 전하는 동일한 방법으로 어찌하든지 죄의 심각성을 일깨워주고 죄인의 운명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우며 형벌의 끔찍함을 보여주고 충분히 절망한 사람들은 복음이 복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의 뿌리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물론 환경에 의해서 죄성이 더욱 촉진될 수 도 있습니다.
예) 싱가포르는 “철권(?)아래 파라다이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껌을 씹으면 벌금형이고, 껌을 만들다 적발되면 곧장 징역을 살게 됩니다. 거리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면 곤장 4대를 맞게 되는데 맞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차위반일 경우에는 280만원 상당의 벌금을 물게 되는 철권입니다. 거리가 더러워지기 때문에 껌을 못 씹게 하는데 우리 같으면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껌 떼는 사람을 고용한다든지의 생각을 할 수도 잇겠지만 그들은 그것이 아닙니다. 법이 강력하게 지배를 하면 죄성이 있지만 밖으로 들어 날 수가 없습니다. 뺑소니 사고를 치고 도망한 차를 쫒아 가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창문을 열고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을 몇 명만 광화문에서 총살형을 시킨다면 아무도 뺑소니를 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귀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북한이 현재 상황이 법의 강력한 권한이 있다고 합니다. 남한에 내려와 얼마 지내고 보니 무서워서 생활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강간이나 살인이나 강도 도망등 수 없이 많은 사건들이 발생하는데 내게 만약 그런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긴장감에 몇 달을 벌벌 떨며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북한에는 그런 범죄가 있을 수 없는 이유가 평양 시내에서 공개처형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회나 환경은 죄가 드러나는데 억제하는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법이 완화되면 범죄가 증거하는 것을 보게 되고 사회가 모순이 가득 차고 뇌물 없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 되면 사람들이 그 죄성과 사회 구조가 결탁되어 죄가 상승작용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를 가지고도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궁극적인 것은 인간의 죄의 뿌리입니다. 태어날 대부터 인간은 환경의 자극이 없는 곳에서 평화롭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는 결국 죄성이 솟아나서 열매를 맺게 되고 단지 환경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만약 환경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한다면 부유하고 경제적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더 도덕적이어야 하는데 범죄가 더 지능적이고 야비해져 갑니다. 이 든 이유는 인간의 죄성입니다.
한 예로 고양이와 쥐를 태어나자 마자 함께 길른 다고 해봅시다. 아직 어릴 적에는 서로 잘 지낼 수 있지만 성장 한 후에 고양이가 쥐와 잡아먹게 되는 것이 선천적으로 고양이의 본질 속에 그 쥐를 싫어하는 품이 깃들 어져 있고 그들 사이에는 천적이기에 그러합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며 거스려 살려는 속성이 깊이 뿌리 박고 잇습니다. 누가 그것을 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무도 뺄 수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도덕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므로 형법은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표면적인 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잇는 죄의 뿌리입니다. 무엇으로도 뽑히거나 빠지지 않고 자연 소멸되는 법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 있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며 그 죄는 역사 하는 것입니다. 죄는 개인 모임이나 국가 가운데서 법처럼 역사 하여 법은 눈에 보이는 법이 없으나 그 법이 다스리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전에 인천에서 살 때 안양대학까지 강의를 나가는데 3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밤에 다닐 때는 생명을 걸고 수인선 산업도로를 달리기도 하는데 4차선 도로에서 10톤,20톤 30톤하는 트럭이 차선 없이 100km이상을 달리므로 매일 대형사고가 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됩니다. 승요차는 1차선으로 다니게 되어 있고 짐차들은 2차선으로 달리게 된 것을 지켜서 운전하면 될 것을 차선을 오가며 춤추듯이 달립니다. 어느 날 운전하는데 갑자기 앞에 가던 큰 차들이 일제히 길을 비켜주어 이상하다 생각하고 달리다 보니 앞차로 갈수록 길을 계속 비켜주고 짐차들은 빼곡히 서서 꽁무니에 꽁무니를 물고 걸음마 하듯이 달렸습니다. 그래서 제 차를 선도로 하여 여러 차들이 쭉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가지 않아 언덕을 지나서 파란 옷 입은 경찰 한 명이 한 손에 스티커와 속도계를 들고 지켜서 있었습니다. 마주 오는 차가 그것을 알고 먼저 반대편 짐차에게 신호을 보내주었기에 일제히 단속에 걸리지 않으려고 속도를 맞추어 줄을 섰던 것이었습니다. 그 도로를 지배하는 것은 법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무서운 것입니다 아직 경찰이 보이지 안는 곳에서부터 수 십톤 씩 되는 차들이 속도를 내고 빵빵거리거나 손을 흔들어도 반응하지 않고 질주하는 차들이 경찰 한 명이 서서 속도계를 들이대고 있으면 양순해지고 그 대열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한 편으로 달리면 20분이면 갈 수 잇는 시간을 f2시간이 걸려도 기다리는 것은 법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지배하고 있는 r성이 아니라 죄의 법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자동차 대열 같은 인생의 항로에서 수많은 인생의 항로에서 사망으로 몰고 내려갑니다. 수없이 진노의 심판 가운데 불붙는 지옥으로 떨어지면서도 여전히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이 죄가 지배하고 잇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있고 살아가는 것에 희망이 있습니까? 그 속에서 몇 푼 벌어들인 돈 때문에 즐거워하고 새로 산 집과 차 때문에 기뻐하면서 그렇게 줄줄이 죄의 족쇠에 채여서 사망의 길로 내려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영화 킬링필드 같은 데서 수많은 사람들이 족쇠를 채우고 옷을 벗긴 채로 진흙탕을 걷게 하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족쇠를 벗고 도망가고 싶지만 어찌할 수 없이 당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생각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사망으로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 족쇠를 찬 채로 웃으며 살고 또 어떤 이는 그 모습그대로 텔레비젼 앞에서 재밌어 하며 웃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족쇠를 찬 채로 보너스를 받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해외여행을 가게 된 것을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게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극 결국은 이미 정죄되었던 모습이 그 죄 아래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을 기다리고 잇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입니다. 이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성경이 그들을 위해서 치열하게 타오르는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과학이란 지식으로 그것을 인정하든지 아니하든지 관계없이 그것은 인가의 마음을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니다. 인간에겐 죽음이 잇고 그 죽음 너머에는 심판이 있으며 심판 뒤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지옥의 영혼들이 그 죄의 아래 살고 법을 따라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결코 밖으로 튀어나올 수 없습니다. 도망하고 싶지만 즉시 걸리게 되므로 아무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에는 첫 번째 심판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지혜로운 자는 장례 집에 간다고 했듯이 그 사망이 깃들여져 느끼며 애통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별로 유쾌하지 않은 그 뒤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죄의 법 아래 살다가 죽은 인간에게 마지막은 죽음이 있고 그 너머에는 사망의 법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치열하게 타오르는 풀무 불 속에 떨어지는 것을 인간은 늘 농담처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지옥 불에서 오늘 지금 농담처럼 들었던 것을 후회하지만 누구도 그 후회하는 마음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곧 성경을 믿지 않은 결과이며 성경은 인간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관계없이 엄연히 말하기를 인간이 죽음이 있는 것과 같이 부인할 수 없다. 두 번째 사망이 지옥의 불 가운데 떨어지는 것이며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그 속에서의 인간이 죽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학이 자유주의 화 되어가면서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나타나고 있 지만 만약 지옥도 없고 천국도 없다면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교훈도 거짓말이 되고 그것이 거짓말이 되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을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를 보내신 하나님은 어떻게 믿으며 의지하고 그를 증거하시는 성령을 오늘 어떻게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가까웠다는 소식을 들려주는 롯의 경고를 농담처럼 여겼던 사람처럼 오늘날도 그러함에 대해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언제나 신앙이 없던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농담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의 마음에 각성을 주시고 진정한 변화를 주실 때는 인간은 지옥의 실체를 체험했습니다. 죽음이 어떻게 무서운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중3 때 신앙이 없었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끔찍하였고 화장실까지 10미터 거리였는데 어두운 밤길에 혼자서 화장실을 걸으면서 내가 오늘밤에 죽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도 나이가 들면 죽음에 대한 무감각이 생기고 어린이 같은 마음이 사라지는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마음이 되는 것은 믿음이나 지혜가 아닌 죄로 말미암는 극단적으로 무감각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죽음 뒤에 사후 세계에 대해서 명백하게 밝히셨는데 그것이 바로 죄인을 기다리고 잇는 운명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고 안 믿은 결과가 꼭 사후에만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사도가 고백합니다. “ 나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사도 자신이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복음 안에 있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열심히 살았고 자기의 가지고 잇는 모든 경력과 혈통과 지위와 삶의 목표들은 자랑했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자신의 목표에 취해서 살고 있을 때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스도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자 사울이 바울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을 보고 체험했습니다. 미래에 사후에 있는 생명의 약속이 아닌 오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순간에 이제껏 열심히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사실은 생명 없는 죽음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히틀러는 죽음을 앞둔 하루 전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 그 아내와 함께 권총으로 자살하였고 죽음을 앞에 두고 결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혼여행 갈 처지도 안되었고 지하 벙커 밑에서 그렇게 초조하게 패전의 순간을 기다리며 죽음을 맞이 했습니다.
확대해서 생각하면 우린 어차피 신한 부 인생입니다. 6개월이나 1년 후에 죽는 것도 시한 부 인생이지만 10년 후에 죽는 것을 시한 부 인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개 2년이나 6개월 2년 정도의 시간을 시한 부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6개월이나 2년이나 15년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 앞에는 타오르는 지옥 심판의 불이 기다리고 있고 끔찍한 칼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은 닥쳐올 지옥심판을 잊기 위해서 세상이나 다른 것들로 자랑하고 취하고 잊어 버립니다. 그것이 오늘 살아가는 인생들의 모습이며 바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그가 믿었고 구원을 주셨고 이전에 그가 본 세상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 들게 보였고 이전 목표와 가치들은 완전히 가치 없는 쓰레기와 같이 보였고 배설물처럼 보였고 대변이나 소변처럼 더러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인생이 새롭게 보이고 우주가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하며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몸부림치며 도달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칭찬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 나타나서 나는 아무 공로도 의로운 것도 없는 그 때에 내가 너를 구원하기를 원하노라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을 때 하나님의 칭찬이 그에게 미쳤습니다.
롬3장에서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헬라어로 “아두레이션 글로리”입니다. 이것은 칭찬입니다. 모든 죄인들은 아무리 잘 살고 몸부림쳐도 한나님의 칭찬에 이를 수 없게 되었고, 구원은 주께서 칭찬하는 자에게만 베풀어 주십니다. 수도를 하고 도덕적으로 살고 애를 쓰며 수많은 법 아래에서 자기를 복종시키려고 노력하고 금식하며 철야하고 구제하며 자신을 불사르어 내어줄 지라도 그리스도께 칭찬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아무 공로 없다고 할 때에 “ 내가 너를 구원하노라” “아멘 주 여 내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바울이 무엇을 했습니까? 무엇한 일이 있었습니까? 공로가 있습니까? 그가 믿은 공로를 공로라 할 수 있습니까?
제게 현금이 50만원이 있습니다. 이 돈을 김승기 전도사님께 드린다면 그 돈을 받은 전도사님이 그 돈을 받게 된 경위를 묻는다면 전도사님이 손을 내민 은총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돈을 준 사람을 보아야 하는 것이지 전도사님의 손을 내민 것이 공로가 되었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믿었고 그것은 조금도 의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죄 가운데 소망이 없고 지배받으며 살다가 그 타오르는 지옥 불에서 영원히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그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널 사랑한다 “내가 널 구원하였다”하셨을 때 아멘하였고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졌습니다. 이전엔 종교지도자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오셔서 그것을 바라보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날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도록 만드는 그 걸림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전에 사랑하던 그것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전에 자기 생명을 버려 추구하려 했던 그것 때문에 눈이 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마련하신 구원을 볼 수 없다는 것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너는 죄인이라는 송사를 받았습니다. 그 때에 어떻게 위로를 받았습니까? 나보다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 칭찬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자기를 칭찬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었습니다.
열심히 그리스도인으로 그 모든 것들을 가려 볼려고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지배하시고 그 찬란한 복음의 광채 앞에 내가 금식하고 율법의 의로 난지 8일 만에 할례 받고 지키려 했던 것들이 얼마나 지푸라기와 같은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전기가 나가면 교회에서는 누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인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잠시 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면 될 텐데 호주머니에 감추었던 불을 꺼내서 켜곤 합니다. 전기 불이 들어 온 다음에 계면 쩍은 얼굴로 호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곤 합니다.
하나의 촛불을 켜도 환하게 빛나고 주목을 끄는데 어느 순간에 밝은 형광등이 들어온 후에는 누구도 그 촛불을 의지하여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몸부림쳤던 모든 신앙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심으로 그 전 것이 되었고 빛이 들어왔으므로 죄의 법에 따라 묶여 2차선으로 가고 있는 인생을 걸어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길을 걷게 만든 것이 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격하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운전자가 경찰을 왜 무서워할까요? 주먹이 운전자보다 세거나 권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5만원이나 그 보다 더 많은 범칙금 때문인 것도 아닙니다. 그 현상 배후의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포로 아래 살던 사람들이 이탈하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망의 스티커를 발부함으로 겁이 났는데 어느 순간에 그 법이 무효화되는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일어 나는 것입니다. 다른 편으로 달려가는 이를 향해서 사망 스티커를 뗀다고 말할 때 그것에 겁내지 안는 것은 부활 즉 죽어도 산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을 통해서 인간을 역사 했는데 그 스티커를 무효로 만드는 덧셈 카드가 바로 구원과 생명과 부활입니다. 지금 사망이 지배하지만 부활이 역사하는 것으로 후에는 사망으로 몰아가지만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길 죽어도 다시 살겠고 사망을 능가하는 표를 보여주며 그 표를 증거하라고 하시며 그것을 미래에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에게 있어서 다이너 마이트와 같은 능력이었고 복음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지를 깨달아 사람에게 전할 수 잇습니다. 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라”와 같은 이야기를 갈라디아에서는 내가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적극적으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왜? 자기를 벗어날 수 없는 죄와 그 속의 소망 없이 심판을 눈 앞에 두고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자기를 던져주고 생명을 주는 구원의 힘을 보여주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체험하면서 다른 사람은 부끄러워하지만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면서 그 이유는 그 복음이 그에게 있어서 능력이 되었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며 구원받는 자들이 어떻게 보여줍니까?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 안 믿고 살 때는 죽기 위해서 살았고 심판을 위해서 살았고 모든 분기시은 하나님의 진노 밖에는 없었으며 어떻게 살아도 세상의 칭찬에는 이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칭찬에는 이를 수 없는 것은그들은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구원을 얻게 되었고 구원이 현재적으로 나를 구원하고 목표가 되어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그 한가지 일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기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참다운 구원을 못 받은 사람일 수 있고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누리며 그 구원 안에서 환경을 능가하고 여건을 초월하고 상황을 jadj서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하는 복음 안의 참된 자유와 그 놀라운 복된 분깃들을 누리지 못하며 사는 이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한 일인지 아십니까?
고등학교 시절에 영어소설에서 읽었던 어느 책입니다. 미국까지 배를 타고 30일 정도 걸리는 일정인데 돈이 없어서 겨우 배 가격만 준비하고 승선하여 출항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도움을 달라고 청할 수도 없고 배 안에는 아는 사람도 없어서 배고픔을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식다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멋지게 옷을 차려 입고 뷔페 식당에 모여서 즐기며 먹고 포도주까지 마셔가며 휴식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참기를 하루 이틀 이 지나고 7일이 지나 도저히 견디기가 힘겨웠고 그가 신앙인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다에 넘실거리는 파도는 포도주처럼 보이고 걸어다는 사람들의 하얀 얼굴은 보리빵 처럼 보였습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한 그는 결심했습니다. 어차피 굶어죽으나 맞아죽으나 미국까지 못 갈 바에야 실컷 먹을 심산으로 많이 먹고 이제는 바다에 던지워 죽든지 감옥에 갖히든지 배부르고 보자는 심산에 식사를 하고 나서 후론트에 갔습니다. 그가 도착하지 지배인이 그에게 묻기를 어디가 불편한지 식사가 입에 안 맞는지 등등을 물었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사실은 내게 식사 값을 지불할 돈이 없다고 말하자 그 지배인은 말하기를 이미 배 가격에 식사가격이 포함 된 것이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또 한 예로 어 떤 사람이 20억 빚에 몰려 자살하였고 그 후에 그 아들이 수소문하여 증조부의 땅이 수백 억원이나 되는 것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비참하며 우리 가운데 구원을 인해 한없는 감격과 감사와 기쁨과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주님께 드리며, 내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 온 우주의 밤하늘과 별들 가운데 외치고 싶은 이런 감격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변을 둘러보면 그리스도 인들이 모두 불행해 보이는 얼굴로 불만족에 가득 차 있는 얼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베푸시니 위대한 구원을 저리가라 하고 오늘 기도해서 얻지 못하는 직장과 몇 모금의 포도주와 진로의 문제와 그 어떤 작은 것들을 인해서 기쁨은 사라지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 통 불만족에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는데 신약 성경이 가르쳐 주는 기독교신앙은 이것이 아닙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주일 성수와 삼일 예배와 십일조를 하고 건축헌금을 통해서 신앙의 선물을 받고 탑이 쌓아져 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우리는 늘 울어도 눈물로는 갚을루 수가 없습니다. 남은 나의 인생이 어떻게 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태도로 살았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그 놀라운 부요함과 하나님의 참된 생명을 오늘 내가 느끼고 보며 살아갔습니다. 이것은 예전과 다른 비교해서 보면 폭탄과 같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변하고 세상의 은과 금 같이 썩어져 버릴 것들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그리스도가 없이 고통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았기에 궁극적인 치료 책이 그리스도의 복음뿐이었습니다.
이 이유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뼈 속 깊이 사무쳤고 성령이 그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습니다. 주의 거룩한 능력이 그들에게 임했고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불같이 뜨겁게 만들고 복음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음을 향해 장례 행렬을 이룬 것도 보게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제왕도 있고 고관도 있고 부자도 있고 관원도 있었고 학자도 있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죽음의 대열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몸부림치고 사나 그 옆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뜨겁게 타오르는 불 못이었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을 제외하고 사랑을 논하는 것이 농담처럼 들렸습니다. 진정으로 죽어 가는 영혼을 위해서 그 길을 돌이키도록 생명과 복음의 광채를 그들에게 비추도록하 였습니다. 참된 복음을 알게 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 외에 족쇠의 발에 채여 사망 길로 가는 사람에게 소독약을 발라주며 얼마나 아플까하는 이상한 사랑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고통하는 세상을 향하여 유일한 해답은 그리스도, 생명, 십자가 사건을 아는 것이며 그리스도 인들은 이 일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설교자나 장로나 교사나 집사나 평신도로 세우신 것도 어떤이는 배추나 무를 팔고 직장 생활을 하거나 운전기사를 하든지 죽어 가는 사람이나 젊은이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이 한가지 외에 다른 일로 부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성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성령의 자녀 삼으로 심과 영원까지 인치시고 인간의 마음에 영원한 목표가 되며 그리스도인은 그에게 매인자로 그 자리에서 복음 전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자로 그것 외에 소망이 없습니다. 오늘 교회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복음을 전하며 구원의 참된 기쁨을 누리고 전도지를 들고 거리에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을 때 멸시의 눈으로 바라봄을 당해보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그 간악한 유대 병정들에게 수욕을 당하셨는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자랑하지 않으면 모두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대학원시절에 한 동안 교계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말하지 않던 몇 명의 학우들이 있었는데 후에 알고 보니 그들의 아버지는 당시 불미스럽게 시끄러웠던 사건에 연류된 분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복음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복음이 날 살게 하네
갈보리의 사랑이 날 구했네 이 복음은 사도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딴 사람들은 부끄럽게 여겼고 온전하게 복음을 이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호의호식하고 예수 이름 때문에 자기 이름을 내려놓은 사람도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사도가 오늘 한 번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로마인들을 향하여 고백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이며 십자가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로마교회에 속한 로마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흉악한 형벌자를 처형하는 것으로 그 로마인들에게는 나는너희가 흉악한 죄인을 저주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린 분이 예수이기에 부끄러워하지 않노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능력이 사도와 함께 했습니다.
복음의 깊이를 깨닫고 깊이 매달리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신적 강제가 그 마음에 임하여 지배하고 움직이며 몰고 다녔고 그 마음에 신적 강제력에 의해서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내가 빚진 자라고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무엇을 꾸이거나 빚진 적이 있었고 잘못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오직 그리스도를 만난 이유로 그리스도가 그에게 어떠한 사랑으로 구했는지를 이 사도는 이 좋은 그리스도를 누리지 않은 사람들을 향하여 거룩한 보혈로 건지고 사망에서 생명의 놀라운 빛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의 지배를 받으며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을 향해 아낌없이 자신의 영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동족과 지친과 골육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그 은혜로 날 구한 것은 그 은혜로 날 구한 것 뿐 아니라 이 구원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도구로 부르신 것 뿐이었습니다. “내가 내 골육 친지중 몇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내가 기뻐하겠다”라고 고백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영혼이 길에서 죽어가고 있으며 사망의 대열이 그 지옥의 치열한 불길을 더 치열하게 돋구기 위해서 땔감이 되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가 그치고 있습니까? 왜 이 세상은 구원하는 구원 능력과 거룩한 구원의 복음이 온 땅까지 이르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구속의 역사를 잃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복음의 충성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내가 이 복음을 전하고 자랑할 이유가 없이 부득불 전했다” 내가 복음을 로마에 전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며 내가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 안에서의 삶과 복음 밖에서의 삶이 얼마나 심각하고 무서운지를 깨닫게 되었으며 가난하거나 부요 함 속에서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유식하거나 무식의 차이와 명예 속에서와 아닌 것의 차이는 없습니다. 인간의 중요하게 여기던 문제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들어와 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헬라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가장 큰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보니 십자가 아래서 끌어안고 형제자매라 하고 나니 이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학위를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 사이에는 높은 담장을 갖고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고, 미모의 여인과 흉칙한 얼굴을 한 추녀사이에는 큰 운명의 차이가 있는줄 알았는데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는 차별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 차별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움직이는 역사를 따라서 복음 전파되는 것을 보면 원칙이 없이 가난한자와 제사장들 가운데 무릎꿇게 하였고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자에게 차별이 없는 은혜를 주심으로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하나의 구분이 있음을 목격하였습니다. 구스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해지고 구원의 강물이 넘치고 복음이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제 자매라는 칭호를 부르며 앉은뱅이와 같은 자들이나 고관대작이 서로 끌어 나고 노예가 회장과 눈물을 흘리며 가장 교만한 헬라인과 유대인을 끌어안고 신앙의 가르침을 달라고 하는, 헬라인을 지옥의 뗄감처럼 여기던 유대인들이 헬라인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구별이 있습니까? 도덕적으로 고상한자와 부패한 자 가운데 죄 가운데 살아가던 죄인중의 괴수가 서로 입을 맞추고 사랑하며 복음이 없는 곳에서 참된 사랑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눈을 뜨게 되어 이 세상에서 분류되는 기준이 복음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복음이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그 복음에 감격에 사로 잡히지 않는 한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여도 모이는 자기 들 끼리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여전히 교회앞에는 변호사 모임과 의사들의 모임이 존재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나 골프모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하나님의 복음이 흐려질 때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단 하나의 구분만 남겨두고 모든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사람과 용서받지 못한 진노아래서 살아가는 두 종류의 사람입니다
바울은 구속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깨닫고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선교사나 목사나 설교자일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사랑이 우주보다 도 더 큰 사랑이 하나님이 당신을 그 직장에서나 세우신 곳에서 얼마의 월급을 받고 보너스를 받다가 정년퇴직 하는 것을 위해서 보내시니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대의 구원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가치 없는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구걸하여 빌어먹는 사람이든지 부하게 사는 사람이든지 그 모든 것은 복음을 만 천하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문을 열고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고요히 앉아서 말하지 않고서 삶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십자가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핍박받고 욕을 들을 때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을 확인할 수 잇습니다. 바울이 그가 그리스도께 미쳤다고 고백하며 내가 줄에 매인 것 외에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핍박을 받을 대 고난받을 때 즐거워하고 삶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전철이나 골목에서 복음을 전하며 아파트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경비원들에게 쫒겨난 경험을 가지고 검표원 들에게 몰매를 맞는 경험 속에서 복음을 전하며 고통하는 자에게 복음은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그것을 안고 죽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을 금고에 넣고 나무그늘아래 누워서 죽음을 기다렸다면 그는 그렇게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의 가슴에 놀라운 사랑이 신적 강제력에 의해서 어찌할 수 없었고 그 마음에 뜨거움으로 부어주셨기에 이 세상 살동안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도 그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진리를 자랑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바울을 자랑하셨으며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를 어디 가든지 바울의 하나님, 바울의 여호와 바울의 그리스도 예수라고 불리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이 어디서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오셨고 성령을 찾을 땐 성령이 그에게 오셨고 그가 능력을 구할 때는 능력을 주셔서 지옥의 사자들에게도 그의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거룩한 하나님의 영권을 그에게 주셔서 고통하는 세상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무지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을 떠난 이 비참한 세상 가운데 참 빛을 던져 주시는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한 사람으로 살다가 갔습니다. 세상은 그의 이름을 기념할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의 역사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겠습니까? 그는 작은 키에 대머리에 광대뼈가 나오고 배가 나온 추남이었다고 전해지는데 무엇을 기념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그는 경범죄와 수많은 범죄와 사형 죄를 지고 쫒겨 다니고 돌로 맞고 40에 감한 매를 5번이나 맞고 성밖의 광주리에 매여 달리는 일들을 하며 살아온 사회의 범법자요 문제아였습니다.
황제만을 숭배하고 경배하는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도가 없다는 누룩과 같은 이단 사상을 전했던 그를 로마의 역사가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께 붙잡히고 그 복음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서바나와 갑바도기아와 안디옥과 갈라디아를 누비다가 죽었으나 위대한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접하는 이 복음도 그 사람의 섬김 때문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에게는 위대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교회를 세웠고 만약 이 교회가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춘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문닫으시길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2. 복음을 위하여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21:13)
지난 한 주간 동안 주일 오후에 무슨 시리즈를 할까 생각을 많이 했는데 결심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 깨닫게 된 것은 오늘 오후에는 이 사도행전 21장의 말씀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못 나오신 분들은 수요 설교를 못 들으셨겠습니다 만은 저는 지난 수요일 로마서 1장의 가장 영광스러운 본문 가운데 하나인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라’ 하는 말씀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정말 다수에 의해서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소수에 의해서 하나님의 복음은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왔습니다.
(예화) 가난하던 시절 싸게 파는 폐계를 모르고 사서 너무 질겨 먹을 수 없었던 이야기.
오늘날 그리스도인 중에는 이 폐계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사료만 축낸다고 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이 폐계와 같이 알도 못 낳는 그런 닭들이 가득한 것이 교회의 형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커지지 않고 영혼들이 구원되는 은혜로운 복음전파의 역사가 멎고있는 겁니다. 언제나 복음의 위대한 역사는 정말 소수의 헌신된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그 복음으로 영혼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남겨주셨던 그 가장 커다란 교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 믿는 우리에게만 최대의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게도 최대의 계명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최대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명령 가운데 가장 커다란 명령이 너희는 만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상명령이라고 말합니다. 땅에 있는 명령이라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큰 명령이 없다는 의미에서 지상명령(至上命令)입니다. 최고로 높은 위치에 있는 명령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복음전파에 대한 다급한 부담감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복음 전파의 부담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헌신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도 이 복음전파에 대한 부채의식들이 없는 것을 우리들은 오늘날 보게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바로 사도 바울, 지난 수요일 날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한 그 사도의 마지막 선교 장면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던 것은 성지 순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파하러 가고 싶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언이 있었는데 그 예언은 말로 하는 예언이 아니라 행동 예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바울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풀러 가지고 그것으로 자기 손을 묶으면서 말하기를 “내게 성령이 이르시기를 이 띠의 임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렇게 되리라.”했습니다. 그 얘기는 무슨 뜻입니까? 체포되어서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모든 교우들이 힘을 합해서 바울을 말렸습니다. 절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랬더니 사도가 하는 말이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모든 양떼들이 울면서 바울에게 가지 마시옵소서 하고 간절히 간청한 모양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기다리는 것이 그러한 죽음의 위협, 핍박, 그것밖에 없으니 가지 말라고 모든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동기는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성령이 그곳에서 나를 유대인들로 인하여 체포되게 하시고 심문을 받게 하시고 고난을 받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고 해서 성령이 거기에 오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령이 환난과 결박이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거기서 환난과 결박과 핍박이 기다린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성에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사도는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20장에서 언급한 동일한 마음으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환난과 결박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는 동일한 고백을 여기에서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는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는다고 네가 예언을 했는데 결박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나는 각오하였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생각해봅시다. 먼저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환난과 핍박이 기다린다고 증거 하는 명백한 성령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야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습니까? 그는 순교를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예수를 위해서 사는 겁니다. 잠깐 동안에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오랫동안 사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사도가 오늘 이 예루살렘에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가야 할 부담을 이 사도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부은 바 되어서 거기로부터 오늘날의 교회가 시작이 되었는데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복음이 시작되고 교회가 시작된 그곳에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방언과 예언을 하는 능력과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셨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편견에 가려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예루살렘의 본토박이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구원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서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도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가게 만들었던 것은 예루살렘에 환난과 핍박이 기다려서 거기서 예수를 위해서 죽어야겠다는 것이 목표가 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들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가야할 부담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 영혼들, 하나님을 사실은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다고 생각하고, 구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원과 상관없이 신앙생활 하고있는 종교적인 도시인 이 예루살렘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가 누구이시고 구원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증거하고 전함으로 그 영혼들, 자기 혈육 중 몇을 곧 예수 믿게 만들기 위해서 그는 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우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먼저 들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먼저 복음을 듣고 자기가 믿고 있는 이 신앙, 이렇게 믿는 것이 과연 참다운 복음에 입각해 있는 신앙인지를 점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선교의 대상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교적부에 등록이 되고 인사를 하고 집사로 승진을 하고 이러는 것들이 곧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 안에서 참되게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 그리고 예수의 넓은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신 그 놀라운 은혜에 붙잡힌 사람,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은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일주일 동안 그 의식 속에 이 어두운 세상에서 사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로,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어떤 사람은 물건을 팔면서 손님들을 만나며, 어떤 사람들은 물건을 배달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친척과 만나면서 방법은 다양하고 행할 수 있는 실천의 길은 무한하게 많지만 그러나 어떻든 그가 어디에 살아가든지 의식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바울의 마음을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이었습니다. 가장 하나님과 가까운 도시,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 구속의 역사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혀 죽으시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들을 다른 도시보다 먼저 보았던 그 예루살렘, 그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종교적이었고 신앙의 껍질 속에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영혼들을 향한 뼈저린 부담이 오늘 사도로 하여금 목숨을 돌보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만든 요인이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교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붙잡힌 사람들로 변하기 전에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저는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의 마음에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죄에 대해서 생각나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슴아프도록 만드는 것도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게 만드는 것도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령은 홀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특히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고 바울을 예수 그리스도가 다메섹에서 부르실 때에 바울의 대치할 수 없는 소명은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그 영혼들 이방에 있는 영혼들 그가 예루살렘에 있든지 이방에 있든지 바울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종교적인 모습을 하고 있든지 아니면 타락한 죄인으로 창기와 같이 세리와 같이 살아가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든지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그에게 구원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 하늘로부터 좇아 내려와서 사람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그들 위에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매일 경문을 차고 율법을 읽고 율법을 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그리고 그것이 자기 인생의 모두이고 소망인 것처럼 다른 세상의 모든 일을 버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을, 바울은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삶을 살았지만 나중에 깨닫고 본 것은, 그 위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이 없는 의가 아니라 심판이었습니다. 경건치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는 불신앙의 사람들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바울은 보았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성령이 말리셔도 예루살렘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교회가 성령의 권능으로 놀랍게 무장되어야 할 필요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무장되기 위해서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여러 주에 걸쳐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묻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하게 하고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권능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여러분들 가운데 사랑을 주셔서 모든 성도들이 교회에 나올 때마다 놀라운 기쁨과 은혜로 충만해지게 되면 그 다음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교회가 영적으로 강하여져야한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되어야한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는 성령의 권능이 필요 없습니다. 육신을 위해서 사는 일에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게 하는데는 성령의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인간 자신 속에 부패한 죄 성을 의지하고 살면 그는 얼마든지 타락하고 육신을 위한 삶을 살고 정욕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일생을 위해서 재물을 모으고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일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일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 없습니다. 왜 필요합니까? 무엇을 위해서 필요합니까? 왜 신학생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직업도 포기하고 집안으로부터 박해를 받거나 이웃으로부터 멸시를 받으면서 성경책을 끼고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밤늦도록 공부하고 기도하고 리포트를 쓰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또 그렇게 공부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공부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체험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만드셨습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들어주지 않는 놀라운 응답들을 여러분들에게 들어주셔서 하나님이야말로 살아 계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살아 계셔서 이 시간에도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일년이면 백 오십 번 이상의 설교를 열린 교회에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동안에 남이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알았고 들었고 배웠습니다.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가끔은 거저 나눠주는 테이프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읽는 열린하늘도 네 번이나 받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신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베푸시지 않는 그러한 은혜로 우리에게 은혜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는 것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우리의 마음에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받게 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삶이 그 복음 전파에 기여하지 않으면 여러분 참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학교에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학생들보고 대답해 보라 했습니다. 우리 교회를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가장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냐고 하니까 전부 하는 말이 “우리요” 했습니다. 신학생들 신학을 한 사람 가장 복음 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되고 예수의 넓은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가슴에 안고 전합니다. ‘헬무트 틸리케’라고 하는 독일의 신학자가 있습니다. 아주 경건하고, 자유주의 사상이 난무하는 가운데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통쾌하게 메시지를 전했던 분입니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저는 신선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신학교를 이삼년을 다니고 나서 그가 방학 때 휴가를 얻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가정하고 있는 겁니다.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고향에서는 모두 그를 축복하고 반겼습니다. 왜냐하면 옛날 그 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해서 이제는 복음 전도자가 되겠다면서 신학교에 간 그 형제가 삼 년만에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돌아와서 모든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겁니다. 그 형제가 그 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형제가 인도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여러 형제들과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본문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니까 사람들이 전부 그 최근에 자기가 예수를 만난 체험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신학생이 점잖게 팔짱을 끼고 이야기했습니다. “형제가 이야기 한 것은 다분히 경건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고, 자매가 이야기 한 것은 정통주의 견해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고, 자매가 오늘 그 성경을 보면서 깨달았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은 옛날에 ‘오시안다’라는 신학자도 이미 말한 바 있는데, 형제가 깨달은 바 성경을 보며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알미니안주의라고 말하지.” 졸지에 성경공부 모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골 교회에서는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듣고 나서 사람들은 압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형제에게 성경공부 가르치는 것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으니 형제가 이제 이 자리에 앉아서 성경공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앉고 나니까 그는 거만하게 마치 선서하듯이 성경을 읽으면서,“이것은 신학적으로 어떻고 이것은 무슨 식으로 어떻고 이것은 요즘 어떻고”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야 이게 오늘 우리의 모습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옛날에도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옛날에 신학교 들어가기 전 이 청년이 그 시골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경공부 해나갈 때 그는 남보다 놀라운 은혜를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적 무슨 적’은 몰라도 확실한 사실은 성경을 통해서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는, 진리가 있고 감격이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하고 나서 그는 사람들이 성경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붙잡게되고 성경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수많은 개념을 포착하는 대신에 성경이 자기에게 전해주는 생생하고도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들을 체험적으로 아는 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전도에 관해서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속에 깨달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며, 인생에 있어서 이보다 절박한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를 믿게 하는 이일을 위해서 자신을 허비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잘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무디어졌네
그러니까 주님께서 천국이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합니다. 의심이 없습니다. 편견이 적습니다. 잘 받아들입니다. 잘 감격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또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랑입니다. 누가 작은 것 하나라도 주면 돌아다니면서 “이거 누가 사줬다”고 자랑하지 않습니까? 장난감이 다 망가져서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직전이 되었는데도 그것 쳐들면서 “이것 할아버지가 사줬다.”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이런 순수함들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 나와서 교회를 맡고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쉽게 말하면 이 세상의 죽어 가는 영혼들에 대한 구원의 다급함, 복음전파의 다급함에 불타지 않은 가운데 오랫동안 신학을 하고 공부한 사람들이 나가서 무엇으로 성도들의 마음속에 불을 붙여서 그들로 하여금 그 불이 뜨거워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이 세상을 향하여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교회는 기도할 것이 없는 겁니다. 복음전파를 제외해 놓으면 교회는 별로 기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속에 복음을 전하고 죄인을 깨닫게 하고 그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깨닫게 하는 요소가 점점 사라지고 이제는 모인 사람들이 즐기는 요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도를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를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혹은 “아버지, 가지 마십시오. 당신은 우리의 목회자입니다. 거기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사도는 말했습니다. “놔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만 너희들을 향한 그 사랑도 가로막을 수 없는 사명이 나에게는 있다. 예루살렘에로도 가서 하나님의 복음, 은혜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 일을 위해서 나는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가장 타락한 형태의 교회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돈을 주고 고용하는 것입니다. 옛날만 해도 우리 나라의 교회에는 사찰이 없었습니다. 사찰이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성도들이 오면 누구나 청소했습니다. 그리고 끝나고 돌아가면 누구나 청소했습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찰이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사찰이라는 제도가 생기고 나서 이제 사람들은 떨어진 휴지 하나 거의 줍지 않습니다.
(예화) 전에 있던 교회에서 아이들이 청소를 하니까 어떤 어른이 사찰이 치울 것이니 놔 두 라고 했다는 이야기.
이런 편의주의가 이제는 교회에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돈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전파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이 뜨거운 여름에 자기 몸으로 뛰어다니면서 축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고 레슬링을 하고 씨름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보고만 싶어합니다. 이런 관람자적인 심리가 교회에도 들어오게 되어서 이에 헌신적인 사람들, 복음 전파하는데 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돈을 주고 사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돈을 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자기들은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지극히 타락한 교회의 형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이런 놀라운 역사는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도시에 사도들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폭탄이 터지고 나서 수많은 특공대들이 그 도시를 휩쓸고 다니면서 각개전투를 하면서 하나씩 처치해서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메어 왔습니다. 누구들이었습니까? 사도행전이 그 이름을 기록하기도 잊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 속에 있었던 열망은 이름을 내고 교회가 커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 그 영혼을 구원하고자하는 뜨거운 열망, 이것들이 바로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동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신학교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정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 영혼에 대한 복음전파의 뜨거운 사명이 그 마음을 한 번 휘집고 지나 가야지만 영혼을 움직이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뜨거운 복음의 메시지들이 가슴에 메아리 치는 겁니다. 여러분, 소쩍새가 우는 고통의 밤이 없이 국화꽃은 피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큰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이러한 경영가적인 야망만 가득 차 있지 영혼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그 영혼에 얽매인 사슬들을 풀어주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려고 하는 복음전파에 대한 사무치는 열정들이 멎어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저를 포함해서 신학교는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이러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사도에게 주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또한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 놀라운 구원을 깊이 느끼고 이 구원의 복음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교회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으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우선은 그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또 하나는 이 사도의 마음속에 있었던 사명입니다.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그것은 사도에게 있어서 인생의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자기의 편견과 잘못 알고 있었던 구약의 모든 지식들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심으로 바울로 하여금 은혜를 받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은혜를 그에게 주셔서 그로 하여금 죄인 중의 괴수요 그리고 포악자요, 핍박자였던 사람을 사도로 만드시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은혜로만 다가오지 않고 그 은혜는 사명과 함께 다가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내가 네게 나타난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들에 사환과 증인을 삼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다름 아니라 내가 만난 그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내가 너를 유대인들 중에 구원하여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인들에게 보낼텐데, 거기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 일들을 하기 위해서 너를 세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바울로 보면 다메섹에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던 그 시기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울과 만나주신 이 놀라운 것이 단순한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울을 바울로 만들어 주실 때 구원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리고 그는 한사람 바울을 거기서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마음속에 불이 있었습니다. 무슨 불입니까?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야 한다라고 하는 간절한 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구령의 불길은 놀랍습니다.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구령의 불길을 주셨는데 이 불은 아주 정결한 환경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공기가 연기로 가득 차고 습기로 가득 찬 곳에서는 불이 자꾸 꺼집니다. 그러나 공기가 맑고 깨끗한 곳에서는 불이 잘 붙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슴속에 있는 구령의 불길은 사도로 하여금 순수한 삶을 살게 했고 사심이 없으니까 이 불길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한두 번쯤 우산 쓰고 사영리 안 전해 본 사람 있으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언젠가 한 번쯤은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수시로 그 불길은 꺼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그 영혼을...(?)
중간에 우리가 무슨 결론을 얻게되냐 하면 가슴속에 영혼을 향한 그 구령의 뜨거운 갈망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혼탁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을 만났고, 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남들이 하지 않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복음전파를 위해서 그들은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영혼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서바나도 마다하지 않고 로마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고 그 넘치는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즐거워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보람과 기쁨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살려고 할 때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난을 받아서 살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같이 절망하고 낙담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절망과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넘치는 위로를 발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위한 사명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면 다이내믹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밋밋한 인생을 살다가 죽는 겁니다.
위기를 만났다. 무엇이 위기입니까? 사업에서 위기를 만나고 자기가 잘못해서 죄를 지어 시련을 당하고 하는 것들은 상 받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욕망과 이런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 마음속에 타오르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 대한 갈망과 불쌍히 여기는 그런 마음의 불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역동적인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가장 확실히 느껴보고 싶으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을 때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서 복음전파의 삶을 살 때 그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 누구에게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아닙니다.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것들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쉽게 얘기해서 만천하에 다니며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삶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때 얼마나 연약하고 비참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는 것, 이 모든 일들이 복음 전파 현장에 우리를 둘 때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가 왜 이 놀라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까? 거기 이외에는 구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도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이 유대교의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영광을 우상과 버러지와 금수의 형상과 썩어질 것들에게 바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모르고 죽어 간다는 사실을 사도는 깊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더 커다란 일이 없다는 사실을 사도는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예수의 넓은 사랑을 안고 믿음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더 크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은혜 체험에서 자라갔습니다. 말씀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예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인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거치는 방해 돌이 되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핍박과 고난이 아니라 예수를 알면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형식적인 신자들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모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사도는 발견하고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동일한 심령으로 예수의 마음으로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유일한 구원을 전파할 사람들을 오늘도 부르고 찾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지 않고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증거하고 전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감격이 더 오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고 주저앉는 것 같을 때도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자랑 할 때 새 힘이 생깁니다. 저는 그런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어떤 때는 주일 아침에 일어나서 혹은 집회 갈 때, 약속은 해놨지만 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해야 할 불같은 마음이 없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근심에 싸이기도 하지요. 내 마음속에 설교의 영이 메마른 것 같은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자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펴고,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가슴속에서 나 혼자 있을 때 없었던 그 감격과 기쁨을 새롭게 솟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그 예수의 넓은 사랑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리고 내 속에 주셨던 그 동일한 기쁨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울러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자기를 오해와 편견 가운데 살아가며 하나님을 위한 다고 살지만 그러나 사실은 멸망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는 자기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런 놀라운 사랑은 사도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비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받았습니다. 남이 못 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지식들을 주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이 감격 할 수 없는 그 말씀을 인해서 우리는 감격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저는 문득문득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이 교회를 세우셨지만, 교회는 서있어도 이 교회가 하나님께서 맨 처음 이 교회를 세우실 때에 원하셨던 모습으로 되어가지 않는 것 같은 한계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이 교회를 여기 세우고 토요일마다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인이 얼마 안되기는 했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나와서 예수의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일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요즘 토요일에 나와서 복음 전하는 사람이 네 명 다섯 명 미만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커다란 반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헌신하지 않으면 교회는 여기 왜 서있는 것이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사도가, 바울이 그렇게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에게는 닫혔던 구약이 열렸습니다. 성령을 받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가 수많은 서신서들을 쓰면서 결국은 거의 그 사도 바울 한 사람에 의해서 오늘날의 기독교의 형태가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먹을수록 복음의 깊이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갔습니다. 연로해질수록 영적이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 영적이 세계와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더 예리해졌습니다. 그의 판단은 더욱 정확해졌습니다. 그는 점점 더 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욱 더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를 풍성하게 가지고 있는 대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나이가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그는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감격에 넘쳤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와 같이 더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메섹에서 부른 줄 알았습니다. 은혜가 깊어지자 하나님께서 자기를 모태로부터 택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은혜가 깊어지자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도로 세우신 것은 만세 전에 택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깊어지자 하나님은 더 크게 보였고 자기는 더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복음의 깊이와 예수의 넓은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점점 죄인 중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해도 자기에게는 조금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앙의 겸손과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아는 인식의 지평, 그리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분간해낼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깊이들이 산 속에서 얻어진 것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거의 도시를 떠난 적이 없을 정도로 혹은 아테네에서 혹은 예루살렘에서 혹은 안다옥에서 혹은 에베소에서 혹은 고린도에서 혹은 골로새에서 수많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만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욕을 받았습니다. 부끄러움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매맞고 옥에 갇히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순교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수고하지 않는다면 마지막날에 우리에게 무슨 상급이 있겠습니까? 예수 믿고 은혜 받아서 그 은혜가 떨어지면 다시 그 은혜를 받아서 기분 좋아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래서 은혜를 받고 교회의 제도 속에 묶여서 그렇게 사람들이 삽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상급들이 있겠는가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이 고통 하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사람들과 특별히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뿐만 아니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도 각오하였다.” 오늘 우리야말로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전에 사도는 칼과 죽음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지났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 없습니다. 이전에는 문화의 벽을 넘어야했고 언어의 벽을 넘어야 했습니다. 혹은 인종의 벽을 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든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고난을 받을 때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고난이 얼마나 놀랍고 그 고난에 깔려있는 그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를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화) 모슬렘 중에 지하드 조직에 관한 이야기- 헌신된 마호멧교의 평신도인 한 청년의 이 야기.
한 선교사가 이 글을 읽고 말하기를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엄청나게 절망했다. 이 사람은 ‘알라’를 위해서 그렇게 믿음이 자라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다 불사르게 내어주었는데 우리는 과연 복음을 위해서 이런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오 엠 에프 선교사들의 전통이 있습니다. 지금도 선교지에 도착하면 짐 풀기 전 그날 밤에 편지지 펴놓고 유서를 쓰는 겁니다. 여러분, 이 삶은 지금 하나님 앞에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고 있는 삶입니다. 가난한 교회에서 열심히 노력을 해서 아프리카로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간지 몇 달되지 않아서 아프리카 토인들에게 피살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광고시간에 울먹이면서 말했습니다. “얼마 전에 아프리카로 파송한 아무개 선교사가 어제 저녁에 아프리카 토인들에게 피살되어 순교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누가 그렇게 피살당하고 순교한 그 선교사의 뒤를 이을 사람 없습니까?” 그 교회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내소서.”하며 일어섰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살다가 죽으니까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어도 그 사람의 죽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령한 감화를 끼치고 감화를 받았던 사람들이 다시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헌신하면서, 피에 피를 잇대이고 시체가 시체를 넘으면서 그렇게 복음이 전파되어 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책의 이 모서리가 왜 빨간 색으로 되어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금박 칠을 하고 다니는데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빨간 칠이 성경에 되어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어 가는 순교자들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금박이 아닙니다. 성경에 금박을 발라놓은 정신이 교회를 지배하니까 복음전파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순교자들을, 사람들이 성경을 펼 때마다 기념하게 하기 위해서 선조들이 이 성경을 빨간 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지는 어느 곳에서든지 순교가 있었고, 그 순교의 시체의 피를 타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먼 곳에 나가서 생명 걸고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길 원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이 내 마음에 있어서 어디든지 그 복음을 들고 외치러 나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이런 선교사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조국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미래에 할 수 있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오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말했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떠한 의식을 거쳐서 어디로 가든지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곳에서 구원을 받고 이곳에 있는 것, 이곳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힘을 다해서 우리가 이 복음 전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시련을 당할 때 비로소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런 고백을 가슴에 안고 주께서 우리의 혀가 굳어지게 하시기까지 이 땅에서 예수의 넓은 사랑을 전파하고, 우리의 심장에 피가 멎을 때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삶에 헌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3.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어느 목사님께서 늘 사모님께 이런 유언을 남겼답니다. “여보 내가 죽거들랑 다른 모든 일을 하기에 앞서 이 봉투를 뜯고 난 후에야 장례를 치르시오”라고, 때가 되매 어느 날 목사님께서 작고 하셨고 살아생전에는 보여주시지 않던 봉투가 생각이 나서 개봉해 보니 그 유언장에는 장례식 식순과 기도해줄 분과 말씀을 전해주실 분들의 이름이 씌여있고 성경본문이 씌어있었는데 그 본문이 바로 롬8장입니다. 롬8장은 인간의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사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다 말한뒤에 이세상에서 받을 고난을 말한뒤에 그후에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시고 자기의 힘으로 이룰려고 해도 불가능했던 구원을 하나님의 의로 이루시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영화롭게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향하여 죄인이라고 송사하는 율법과 양심과 그리고 모든 송사를 향해서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자를 누가 감히 송사하겠는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끓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이 모든 것에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천사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우리를 우리주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끓을수가 없다는고백을 한 후에 사도는 갑자기 감격에 찬 외침을 환희가운데 승리를 외치다가 갑자기 깊은 시름에 잡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9장의 장면인데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양심을 더불어 증거하노니 사도의 마음속에 성령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해낸 이야기가이 아니라 성령께서 사도의 마음에 오셔서 사도로 하여금 지울 수 없겠금 생각나게 만들어 주셨다. 어떠한 신적인 강제력으로 그무엇인가를 자꾸 생각나게 하시므로 그것이 잊혀지지 않고 계속해서 성령이 내 안에서 증거하므로 내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이 내게 증거할 때에 사도의 마음은 끊임없이 고통하고 큰 근심가운데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성령이 무엇을 말씀하셨기에 사도가 큰 근심과 고통이 가슴을 에이는 아픔이 있었을까요? 생각해 보면 사도는 기쁨과 환희의 감격에 차서 승리를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같은 한 인격 안에서 어떻게 그 놀라운 온 두팔을 벌려서 하늘을 안을 것 같은 승리의 기쁨과 가슴을 에이는 듯한 고통이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로 논리나 언어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는 결코 기쁨이 없으며 기쁨이 있는 곳에서는 결코 고통이 공존할 수 없습니다. 잔에 물을 부으면 가득차고 잔을 쏟아내면 물이 비는 것과 마찬가지로 잔에 기쁨이 다 쏟아지고 나면 것과 같은 속도로 고통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마음이며, 기쁨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면 말도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되는데 큰 감격을 누리는 인격속에 큰 고통하는 인격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큰 고통을 느끼는 인격안에 큰 기쁨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회상할 과거를 돌이켜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가장 충만하게 기뻐하던 때를 생각해 보면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을 때입니다. 주의 할 것은 눈물이 많았다고 해서 은혜가 충만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가 먼저 충만했기 때문에 그 충만한 은혜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예수의 넓은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을 그 때에 가장 눈물이 많았습니다.
그때 왜 울엇나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고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때에 흘리는 눈물과 이런 은혜가 없을 때 흘리는 눈물과는 같은 눈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충만하게 느낄 때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그 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지만 그 기도하는 순간이 끝나고 그 눈물을 닦고 나면 그 고통은 사라지고 성령의 기쁨이 우리 안에 밀려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팔복 가운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애통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나면 깊은 슬픔이 찾아오는 데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런 순서를 따라서 찾아오는데 이 슬픔이 전에는 사도에게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배가 나오고 머리도 벗어지고 키가 작고 광대뼈가 나온 아주 추남이었고, 매우 차가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고 나서는 정서가 풍부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어린아이처럼 정서가 변하는 것입니다. 이 정서가 메마른 것도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정서만 변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심령이 변했기 때문에 그 변화된 심령이 인격에 영향을 미치고 그 하나님과의 사귐 때문에 정서의 세계에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사도는 오늘 큰 고통을 느끼게 될 때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그 무엇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놀라운 특권을 이 사도가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과 헤아릴수 없는 그 크신 사랑을 내가 바꾸어 입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천사들이나 깊음이나 높음이나 악한세력들이나 그 어떤 것들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이 , 그 사랑의 은혜를 오늘 나에게 미치고 있다는 감격을 사도가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엔 동족을 향한 깊은 슬픔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나와 같이 이 참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사랑을 받지 못하고
구원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동족을 향한 슬픔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감격한 ,진실로 그 사랑을 깊이 체험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동일하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사랑을 인해서 구원받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사도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위해 십자가에서 주신 그 구원이 얼마나 큰지 자기의 인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크고 놀라운 사랑을 내가 받고 사는 사람인 것을 사도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만삭이 되어 태어나지 못한 것 같은 자신에게 다메섹에서 나타나 주셔서 예수의 놀라운 그 구언을 보이시고 무지로 말미암아서 참된 생명의 길로 걸어가고 참된 구원의 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을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강권적으로 사도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강권적으로 사도를 만나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리스도안에 마련된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구원 사랑을 깊이 누리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그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동안 점점 깊어져 갔습니다. 한번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지만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자기를 그렇게 만나주고 구원해 주신 놀라운 은혜를 인하여 복음에 매인 생애를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살아가는 사도의 삶과정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그에게 다가오시고 하나 안에 있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기의 마음속에 깨닫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의미는 구원의 가치를 알고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때에 광대하게 다가오는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약속된 그 놀라운 특권과 은혜를 누리고 활용하고 그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그것을 인하여 누리는 즐거움과 특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구원받은 자의 합당하게 끊임없이 살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그것이 단지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오늘 잃어버린 그 구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놀랍게 임하고 그 놀라운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게 될 때비로소 느끼게 되는 것이 잃어버린 영혼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은 결코 교육으로 할 수 없습니다. 전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만들어 주는 것은 훈련이나 교육을 통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구원받은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리고 있는 가 하는 것은 오늘 알고 그것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끼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더 깊이 느끼고 그렇게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우리는 구원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놀라운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 은혜로부터 멀어졌던 동족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도가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몫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지만 오늘 그는 유대인들을 인해서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 가운데 일어나는 그 충만한 역사와 유대인들 가운데 일어나지 않는 그 구원의 역사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위해서 부름을 받고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방을 누비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실상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구원을 알지 못하고 사망가운데 허무한 것에 종노릇하고 ,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예수를 알고 구원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구원의 놀라운 은총을 누리며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며 그 사랑으로 온갖 얽매인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풀려서 살아가는 놀라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미치고 그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발 앞에 회개하고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어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잇는지를 보았던 것입니다. 한 덩어리 흙처럼 잠시 썩어져 사라질 재물을 하나 붙들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손을 내려놓고 영원을 보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부모는 우리를 버려도 우리를 영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신 살아가는 놀라운 변화들을 사도가 목격하면서 놀라운 이 복음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며 어둠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동족들을 보았습니다.
말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말로 그들을 설득하고, 무력으로 할 수 있다면 무력으로 하고, 돈으로 그들을 살수 있다면 돈으로 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구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아멘하고 그 구원 속에서 놀라운 구원을 받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결코 돈이나 재물이나 말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지고 죄로 어두워진 그 심령 속에 복음의 밝은 빛이 비추어지고 그 복음 앞에서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보게하고 복음 앞에서 참회하고 실천적인 회개가 없이는 결코 영원의 거듭남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임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 사도였고 성령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이적적인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는데 내 사랑하는 친족과 바리새인이었던 내 아버지, 여전히 바리새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내 친족들과 친구들을 자기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가 없었기에 사도는 그 사이에서 아파하며 고통하고 그 영혼들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가장 놀라운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난 그는 세상이 동의해 줄 수 없는 것 때문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하찮게 여기는 것 때문에 한없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기뻐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살아 계실 때에 무엇으로 인하여 기뻐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부터 명령을 받고 복음을 들고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에게로 찾아갔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어떤 때에 즐거워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아멘하며 예수의 구원 앞에 응답하였을 때에 그들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당신의 구원의 능력이 제자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모든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 마음 가운데 혼탁케 하는 어둠들로 역사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추지 못하도록 그들의 영혼이 혼미케 하는 어둠가운데 악한 세력들이 거꾸러지고 쫒겨 나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영혼을 녹이고 회개시키고 참으로 거듭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났을 때 그들은 기뻐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세워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찬송했습니다.
모두들 슬퍼하는 그 자리에서 그는 노래하였고 기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꿈이 이 세상에서, 그 예수그리스도, 자신들이 이미 받았고 느끼는 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예수의 그 넓은 사랑을 사람들도 알기를 원했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은 옛날하나님과 요즘 하나님처럼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우리가 참 믿음을 지키고 죄악이 가득하고 오류가 온 땅에 가득하고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자녀들이라도 헤치기 위해서 울부짖는 이때에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며 걸어가는 신앙의 길은 넓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는 오늘 누구에게도 없는 그 가슴 저미는 고통을 지금 로마에 잇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가 호소하는 사실은 내가 이런 정도의 고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려서 내가 고민하고 있으므로 상당히 영적인 인물로 대우해 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은 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증거하고 계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비할 데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나를 그 끔찍한 죄와 편견과 그리고 충성되이 살아도 생명이 없고 헌신되이 살아도 오히려 하나님께 거친돌이 되었을 그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구원으로 돌이키게 만들어주신 이 놀라운 사랑을 아는지에 대해서, 마치 이 세상에서 자신 혼자만 그 놀라운 사랑을 받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광대하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연약한 자신이 울어야 할 그 자리에서 우시고 고통받는 그 자리에서 함께 고통을 치루시고 시련을 받을 자리에서 시련을 당하시고 고통하실 때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그를 통하여 나타난 바 되신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셨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고, 그 놀라운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내게 미치게 되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에 그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에는 예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와 같이 죄인 된 자를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지푸라기 같은 인생을 찾아오시고 그 인생의 고통을 헤아리시며 죄 가운데서 구속하여 주시기 위하여 예수의 인격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를 붙들었습니다. 이 사랑이 바울만을 구원했습니까? 사도만을 구원하고 사도에게만 소망을 주고 사도에게만 그 모든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일들을 버리고 생명과 빛으로 걸어가도록 이 특권이 주어졌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부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놀라운 사랑이 임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8장에서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우리에게”......, 자신과 우리를 하나로 묶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이 가슴에 미치는 사람마다 그들은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부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이 이 영혼들을 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여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가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다 백지 장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사랑은 언어의 고백만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달아 아는 이 바울은 오로지 하나의 꿈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혼들이 구원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것이고, 그것이 없으면 인생의 모든 비극에 대한 치료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R.A토레이 목사님은 성령과 동행하며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하나님과 생생하게 동행하며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소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되고 그 인격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면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복음전파에 대한 강제력을 느끼게 됩니다. 사도가 오늘 그치지 않은 고통이 영혼과 심령 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골육친척을 위해서 내 자신이 끊어질지라도 내 자신이 원하는 바로라“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날 어느 한 지체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깊은 은혜의 세계에 젖어들기도 했었는데 어느 날 아침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향해서는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비추어보니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은 그리할 수 없다고 되어있기에 무엇이 부족한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면서 심령의 부흥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두신 것은 교회를 통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방주 속에 들어간 사람들만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구원의 기쁜 소식은 믿는 자들을 통하지 않고는 전해지지 않은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자신의 모든 종교적인 삶을 그 일을 위해서 소진하는데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기 속에서 구원의 감격이 역사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서 예수의 놀라운 사랑과 가치를 깨닫고 그 구원을 붇잡고 그 구원을 다시 이루어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삶을 통해서만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독특한 맛을 드러낼 수 잇는데 그러한 삶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잇는 것이 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어느 못된 자식들이 부모에게 대들면서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사도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게도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치르셨던 희생, 영광을 버리고 죽기까지 낮아졌던 그리스도의 복종과 그 구속의 은혜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이 복음을 모르고 이 복음서 외인이 되었더라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을 살고 죽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가 복음에 빚진 자 되었다는 깊이 느껴야 합니다. 제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그 놀라운 구원을 받고 이제는 자기가 아니라 영혼들을 인해서 슬퍼하고 고통할 수 잇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팔복에서 애통하는 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복을 받았고, 받고 있는 복된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놀라운 깊은 사랑을 깨닫고나니 사도가 원하는 바는 내 동족이 구원을 얻어야 할텐데, 왜 이 복음이 제일 먼저 자신의 동족에게 전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하고 있는가? 그런데 자기 안에는 그들을 돌이켜서 예수를 믿게 하는 아무런 힘과 도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희망이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는 것뿐인데 수없이 많이 전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했던 것처럼 바울을 거절했습니다.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단지 복음을 전할 뿐이라는 의식을 갖으면서 그 복음이 놀랍게 역사해서 우리 가족과 골육지친 중에서 몇 명만이라도 완전하게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와 그 놀라운 은혜를 보여줄 수만 있다면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지옥으로 들어갈 지라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가 지옥을 몰라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속에서 영혼들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과 구원을 위해서 타는 이 마음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그 불을 끌 수 없습니다. 마치 육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육체의 정욕을 어떤 불로도 끌 수 없는 것처럼 마음속에 일어나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끌 수 없는 것이 사도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진정으로 구원받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지는 않았지만 사도로 하여금 그 고백을 따라 일생을 살도록 허락해 주시고 만들어 주셨으며, 그는 최선을 다해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던졌습니다. 날마다 구원의 역사를 베풀면서 도덕이나 철학이나 지식이나 선한 행위로도 어떻게 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죄 가운데 눌려서 사는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빛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신 그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는 길은 우리가 복음을 전해보면 알 게 됩니다. 그들이 얼마나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보면 내가 이 복음을 믿게 된 것이 얼마나 복된 자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치지 않은 고통이 사도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처럼 구원을 이루는 고통이었고 상 받을 만한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도에게 주셨던 이 복음에 대한 부담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4. 쉴 수 없는 복음전도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使徒)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禁)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凌辱)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0-42)
몇 주 전 서부터 수요일 날은 복음전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5장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도행전에서 성령강림 사건이 2장에서 주어진 다음에 계속 복음이 열심히 전파되다가 한 번 교회의 커다란 위기가 다가오게 됩니다. 그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던 헌금을 안 드리고 슬쩍 속여서 떼어 두었다가 감춘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하면 아나니아도 죽고, 삽비라도 죽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오늘날 교회는 시체가 즐비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서 5장에 보여준 사건은 한 사람이 헌금을 떼어먹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5장을 기점으로 해서 2장에서부터 폭포수와 같이 하나님의 쏟아져 나오던 하나님의 복음전도의 역사가 5장1절에서부터 stop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아나니아가 삽비라가 죽고 나서 다시 온 교회와 이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고 나니까, 사도들의 손으로 인간의 표적과 기사가 많아지고, 또 믿는 사람들이 다함께 솔로몬 전각에 모이고 그런 새로운 복음 전파의 역사가 오게 되는 겁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고려하면서 이 사도행전 5장을 읽어야 합니다.
이 5장의 사건은 개인이 하나님 앞에 헌금을 떼어먹으면 이런 징벌을 받는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라, 교회의 순결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 사건을 성경은 개인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말하자면 순결에 대한 위협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이 강하게 일어났을 때에는 이처럼 심판의 역사도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성령이 인정해주시고, 기뻐해 주시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난 곳에 그 성령이 동일하게 죄를 책망하시는 역사도 뚜렷하게 나타나요. 그걸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회심이 죄를 책망하고, 중생케 하는 그런 강력한 성령의 책망이 있는 곳에는 강력한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기쁨 주심이 없는 곳에는 죄에 대한 분명한 책망도 없다 이것입니다.
한 성령이 오셔서 어떤 사람에게는 죄에 대한 책망을, 어떤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쁨을, 어떤 사람에게는 책망과 즉시로 놀라운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아주 하나님은 심각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도 이 사건을 심각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고 나니까, 교회가 다시 거룩함을 회복하고, 순결을 회복하니까, 그 다음에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게 오늘 우리가 읽은 그 앞까지의 얘기입니다. 결국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냐하면 복음전파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교회의 영성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교회가 순결하고, 그 교회가 거룩한 성령의 은혜로 충만할 때 그 교회는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하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니까 이 사람들이 대제사장들이 사람들을 그 옥에다가 가뒀습니다. 사도들을 잡아다가, 그런데 이젠 결국은 나중에 전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니까, 우린 안 전할 수 없다고 하니까, 결국은 때려서 놓은 겁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이 나오는 문맥입니다.
40절부터 제가 다시 한번 봅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옳게 여겼다는 것은 기독교라고 하는 사상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은 무너뜨릴 수가 없고, 하나님이 아니면 내버려두어도 망한다 그 얘기입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려들어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41절을 먼저 해석을 해야겠습니다.
복음전파의 역사는 항상 희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시대이든지 간에 모든 교회의 성도가 일치 단결해서 복음을 전했던 시대는 거의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유능한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졸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전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은 초대교회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고 나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복음 전하는 사람들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령 전도하지 않는 성령주심 이것은 성경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성령이 사람들에게 오시고, 그 성령이 사람들에게 감동시키게 되면 그러면 그 성령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그 복음을 전하지 않고 베길 사람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오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지마는 그러나 관계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오시자 하나님이 내게 느껴지고 관계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고 하는 확신이 생기고, 그 하나님이 내가 하는 일을 지금 기뻐하시고, 나와 동행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 내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리니까 보다 더 확실하게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신앙의 놀라운 감격이 일어나서 그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마는 그런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를 누리며 사는 것에 놀라운 신앙의 행복을 느끼게 되니까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복음 안에서 약속된 바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이런 그 하나님을 아는 참된 행복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이런 행복 안으로 들어오기를 사모하는 그런 열망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설교를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간증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은 개인적인 전도를 통해서 어떤 사람은 고래고래 길거리에서 소리를 치면서 불특정 다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어떻게 되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무엇을 하든지 말로 하든지 글로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찌하든지 하여튼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야 되겠다는 절박함에 사로 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성령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복음전도의 역사에서 복음전도자로서 한 시대를 연 사람들로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한나라의 복음의 문을 열고 복음의 불을 붙인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체험하고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근본적으로 인생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을 포함해서 신앙이 피상적이던 시대에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구원받지 못했다 하는 것의 차이가 아파트 당첨된 것과 안 당첨된 것보다도 차이가 없는 것 같은 그렇게 사람들에 의해서 신앙의 가치가 평가절하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냥 우리들끼리 있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생각해 봅시다. 오늘 주위에 있는 아주 특별한 신앙 말고, 그냥 평균적인 신앙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서 오늘 교회에 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사건보다도 더 중요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부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생이, 삶이 액세서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농담처럼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렇습니다. 복음의 기초가 잘못된 겁니다. 복음의 기초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셔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실체를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철저하게 보이실 때 그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첫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비로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은 그 소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입니다. 얼마나 죄 가운데 있고, 소망이 없고, 그리고 그렇게 죄 가운데 살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그리고 얼마나 끔찍한 것이고, 이렇게 인생의 목표가 없이 살아가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인생이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 모든 인생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깊이 느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상적인 복음밖에 아는 것이 없으니까, 전도도 피상적인 전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사도들이 오늘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채찍질해서 놓아주었더니, 사도들은 뭐라고 그랬냐하면 그 이름을 위해서 이렇게 비참하게 매 맞고, 욕을 먹고, 능욕을 당하게끔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습니까? 무엇이 사도들로 하여금 능욕을 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는데, 자기를 멸시와 천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자리에서 세워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는 확신에 불탔기 때문입니까? 쉽게 얘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그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듣게 끔 말하는 것이 자기가 평탄한 가운데, 능욕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체험도 틀렸습니다. 성격도 틀렸습니다. 부르심을 받을 때도 같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체험과 다양한 사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다양한 면을 체험하면서 그러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체험이 어떠했든지 교회에서의 위치가 어떠했든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든지 또 어떠한 교훈을 들으면서 이제껏 살아왔든지, 그들은 인생 자체가 전폭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고 말하는 일에 매었습니다. 붙잡혔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심하게 얘기하면 심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날 때 그때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어디에도 전도학교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전도학교가 필요 없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은 그런 말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공부를 해야지만 겨우 전도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고가 오늘 성경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느냐 이 얘깁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그는 물동이를 메고 올 때만 해도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깨달았습니다.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을 알고 자기 안의 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신 것과, 자기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을 깨닫게 되자, 그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그리고 온 동네로 다니며 성경에 약속된 그 메시야를 내가 만났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일 하나에 매였고 이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해서 능욕 받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 사건을 통해서 성령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방언과 예언과 그리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하시던 똑같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인 이 사도들을 통해서 신의 아들이 하시던 위대한 일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운 은혜를 받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책망하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시체로 실려 나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두려워 할 정도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삶의 이유가 그런 권세들을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그 목표가 결국은 그리스도의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한가지에 그들의 모든 삶의 목표가 꽂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복음을,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자로 세우셔서 설교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직장을 다니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학교를 다니게 하시며,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두신 것은 방법이 어떤 방법으로 살아가든지 궁극적으로 그 살아가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온 세상에 알리셔서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자기의 영적인 지위를 높이거나 혹은 자신의 종교적인 만족을 위한 성령의 체험들이 추구되고 있는 것은 다분히 신약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신약은 전도하지 않는 성령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구석구석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뭐라고 소개합니까? 우리는 이일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본 사람도 있겠지만, 나중에는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본 사람만 전도한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 사람도 전도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만져 보지도 못하고, 그 아래 서 보지도 못한 그 십자가의 증인들이 되게 만들었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이 부활의 증인될 수 있게 만들었던 그 요소는 무엇이었습니까? 성령이었습니다. 성령이 오시자 성령을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줄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증거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철저하게 그 사랑, 인격과 삶이 그리스도에게 매이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천박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것은 뭔가 많이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실 때 피상적으로 알던 신앙이 확실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알았던 신앙이 깊이를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체가 불분명하던 신앙이 분명한 형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놀라운 역사가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와 성령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전도할 수는 있어도 그러나 전도에 있어서 성과는 성령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 엄청나게 많은 차이를 가져옵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받든 못 받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명령입니다. 그래서 5장에 보면 무슨 얘기가 나오느냐 하면 우리는 그 일에 증인이라고 말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매일 나태와 안일 속에서 긴장이 없이 매일 가서 자기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가서 돈 벌고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고 긴박감이 없는 그러한 나태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뭐 성령이 도우실 여지가 있는 삶을 살아야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가야지만, 지팡이와 막대기와 필요한 것 아닙니까? 불꽃같은 성령의 불기둥이 필요한 광야에 자신을 던져야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태와 안일과 만족과 무사안일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뭐만 있으면 됩니까? 마음 먹은 대로 살아가는 쉽게 얘기하면 정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방탕한 육체와 해이한 사고 방식만 있으면 그런 삶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신 복음 전도의 명령에 순종할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공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마는 성령은 그러한 것에 대해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쉽게 얘기하면 그것을 거기서 제자를 삼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1차적인 것은 분사로 나와 복음을 전하면서, 가르치면서 세례를 주면서 다 한꺼번에 나오는 것 그런 것입니다. 전도는 전도대로 교육은 교육대로 다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마태복음 28:19-20이 주는 그 지상명령은 핵심적으로 요약하자면 믿지 않는 수많은 족속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Go, 가라입니다. 가라, 가라는 것입니다. 와서 그들을 오라는 것이 아니라 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삶의 실체를 보게 하고 그들이 그 복음 앞에 결단하게 만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상황에서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번 그 상황에서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종족이 로마라고 하는 한 울타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는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동지방의 어느 민족들이 종교가 없는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철저하게 자신들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주도 만해도 어림도 없습니다.
제가 그때가 언제입니까? 81년도인가? 강원도로 집회를 한번 갔는데, 가서 같이 인제 청년들과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데 놀랍습니다. 아줌마한테 복음을 전했더니, ‘예수를 믿으시라’ 안 믿으면 어떻게 되냐고 하니까, 그 천국과 지옥에 대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더니, 그럼 우리 시어머니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그럼, 뭐라고 얘기해줘야 되겠습니까? 사실대로 얘기했습니다. 그럼 난 믿을 수 없다는 것이고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천국이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시어머니를 불물에 내 버려 두고, 나 혼자 천국을 가겠다고 예수를 믿느냐 이것입니다. 죽어도 같이 지옥에 가서 죽어야지 그 우리가 보면 웃지만, 그 진지한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아주 그렇게 진지합니다. 그게 결국 무엇을 말해주는 겁니까? 그 만큼 사람들이 강한 아집과 자기 나름대로의 편견과 불신앙이라 하는 것도 하나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그러는 것도 훌륭한 신관입니다. 내세가 없다 그것보다 더 확고한 내세관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근거도 없이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그 당시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그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구세주라고 하는 이 말도 되지 않은 미개한 이야기를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겠습니까? 자신을 거의 불가능한 일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이세상 사람들 눈에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미련한 일 하나에 인생을 걸고 수고하는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미쳤다고, 미쳤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에다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때 뭐라고 합니까?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지어다” 거기서 ‘너희’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오시니까 떠나지 않습니다. 범죄하든 개판으로 살든 주님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 여러분 만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렇게, 교리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예수를 믿고, 잘못 살아도 우리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우린, 지금 죽은 다음의 일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일이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분명하게 하나님을 위한 삶의 증거들이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가 무엇을 통해서 미래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을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할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오늘 그렇게 하나님을 믿을 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마지막에 우리는 천국 간다. 그것 하나만 가지고 우리가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수가 있겠느냐. 매일 실족하고 매일 패배하고, 그리고 회개하고 뉘우친다고 말하지만, 회개와 같은 삶, 같은 삶 계속해서 연속입니다. 그러면서 한 번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바람처럼 흘러가는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납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불러 가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시험을 해 보고 다시 할 수 있는 인생도 아닌데, 계속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겠다는 것은 아는데,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은 뭐입니다. 무엇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될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는 놀라운 표징들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무엇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과는 뭔가 틀린 사람이라고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 만들어주는 것이 뭐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 이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런 약속을 하겠습니까. “내가 너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불가능에 가까운 불모의 지대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던지고 살아가는 자, 오늘 내가 직장에 다니지만 그러나 한 달에 100만원 150만원 기껏해야 250만원 300만원 그 월급 받고 밥 먹고 사는 것을 위해서 내가 직장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구원의 신앙. 복음의 신앙에 불타고 있는 그 사람들, 그 사람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자기가 있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며, 모험적인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간증할 만한 것을 남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서 저는 한 7,8년 전에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정말 귀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들의 삶 전체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라고 하는 말하자면, 복음전파에 자기 인생의 모든 가치가 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죽음의 위험을 무릎 쓰고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고 자기 개인의 유익을 포기하며 오직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들 그 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놀라운 체험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는 뭐 한국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이제 가셨다. 그 이유는 말씀이 충분하기 때문에 성령이 옛날처럼 역사 안 하셔도 된다. 성경에 어디 그런 원리가 나옵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러한 복음전파를 위한 모험적인 삶에 자신을 던지고, 그래서 매맞고, 옥에 갇히는 일까지도 기쁘게 하는 이런 모험적인 인생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표징들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옥문을 흔들고 싶으시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서 투옥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도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자신을 던지며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미친 듯이 그일 하나에 생명을 건 사람들을 찾기 힘드니까. 하나님의 이런 역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가만히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 중에서 여러분 생각할 때, 정말 성령이 전폭적으로 도우시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한 말하자면 삶의 모습이 우리입니다.
이어서 성경은 말합니다. 날마다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예수를 도와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가르치는 것과 전도하는 것 그 중심자에 무엇이 있는지 보십시오.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누구입니까? 예수는 한 아이의 태어난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지어진 것이야 깊은 의미가 있지만,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고유명사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도 고유명사였지만,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말하면 메시야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이 세상에서의 지상 생애에서의 이름이라면 그리스도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기다려온 그 전 인류를 구속의 소망이신 그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예수는 비하하신,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높아지신 예수의 이름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떠하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은 예수란 이름을 작은 것이지만,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계속해서 예비된 것입니다..
그것은 뭐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나와서 그가 모든 인류의 죄를 구속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대망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자기들에 재판에 의해서 정죄 당하고, 자기들이 박은 그 못에 못 박혀서 자기들이 던진 그 채찍에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채, 결국은 자기들이 창으로 찔러서 죽인 그 예수가 그리스도라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죄패를 썼는데, 그 의미는 조롱하는 의미였습니다. 조롱하는 의미로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표를 써 붙였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 정도로 묶여 있을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온 세상의 왕이요, 모든 인류의 구속을 위한 구속주가 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믿었을까요?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그때의 시대에도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부흥의 시대도 가만히 살펴보면, 부흥이 일어났을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거기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나뉘어집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이 분명하고 능력에 넘치면 넘칠수록 이 나뉘어지는 것은 더 분명하고, 복음이 불분명하고 능력이 불분명하고 불분명할수록 반응이 애매 모호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가리 치는 것과 전도하는 것이 교회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불신자들이나 신자에게 가르치든지 그들은 예수가 곧 우리를 구원하신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 택한바 되어서 우리의 구속을 완전하게 이루신 그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가르침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이 나가서 전도할 때도 그 그리스도가 중심이었습니다. 이게 이야기하는 복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입니다. 당연히 그 예수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일 수가 있는가? 이야기할 때 거기는 필요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구약의 약속 그리고 못 박혀 죽으신 것,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다시 오실 것, 심판,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얘기하게 되는 것인데, 그 모든 것들을 얘기하면 성경을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전하던 바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흥행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도 복음의 도에 손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이런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였습니까? 교회가 교인을 불리거나 재산을 늘리거나, 일에 혈안 되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순수한 복음을 그리스도가 예수가 바로 사람들이 그렇게 실패한-
(뒷면) 선한 일을 행하다가 혹은 오해를 받고 죽어 가는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좋을 때나, 혹은 전혀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없는 상황에든지, 어느 상황에서든지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 전파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놀랍게 많은 숫자로 급속하게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희락이 있고, 치유가 있고 그리고 사도의 가르침이 있고, 교제가 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모든 것의 출발은 복음이 전해지고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거져 일어났습니까? 성령이 예루살렘 교회에 유사 이래가 없이 강력한 성령이 부어 주신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혼자 역사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은 이렇게 그 거룩한 성령을 받고 그 성령에게 미루지 아니하고 그 성령과 더불어 그 성령의 도구가 되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당시로서는 말도 되지 않는 이 허황된 교리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진리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이 사람들은 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오늘은 전해도 소용없을 때 내일 다시 전하고 오늘 가르쳐도 이해되지 않을 때 그 다음날 다시 가르치고 금주에 이해되지 않고, 가르쳐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도해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시 찾아가고 쉴 새 없이 쉼 없이 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받쳤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쉬지 않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쉬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쉬지 않고 열심을 내면서 어느 일에 자신의 존재와 삶과 능력과 제정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은혜와 그리고 그 모든 노력들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들은 쉬지 않았습니다. 유사이래 없는 위대한 성령의 능력의 부음을 받았던 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부여잡고 누리고 그리하여 도저히 복음이 들어갈 수 없는 땅에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의 복음을 실어 나르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그들은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바로 예루살렘교회로 하여금 예루살렘교회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이 태만하고 해이하게 느껴집니까? 그때 우리들이 영적 전쟁의 현장에 서 보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를 들어가고 나서 이제까지 이르기를 신학교의 교수로 있으면서도 한 번도 교회봉사를 쉬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넉 달 쉬었습니다. 넉 달, 넉 달을 교회 옮기는 중에 자리가 떠서 넉 달 쉬었습니다. 쉬었어도 예배는 드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심령이 죽습니다. 설교를 안하니까. 뭐 다급할 것이 없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돌보고 있는 영혼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예배를 11시에 하니 맞추어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나면은 쪼로롱 집으로 와서 씻고 드러누워서 쉬고 TV나 보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인지 설교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복음전하는 것을 통해서 그런 영적인 전쟁에 자신을 드려야 됩니다. 그리고 그 긴박함을 스스로 느껴야 됩니다. 그러니까 괴롭습니다. 긴박감을 느끼는데 그것을 이길 수 있고 승리로 장식할 수 있는 능력은 없으니까? 그 괴로움이 약입니다. 그렇게 괴로워해야지만 주님 앞에 신령한 은혜와 능력을 구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영적인 삶에도 변화가 오는 것이지 욕심이 이끄는 대로 평탄하고 아무런 도전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얘기했습니다. 언젠가 청년이 한 명이 와서 간절히 기도하려면 어떻게 기도하면 됩니까? 간절하게 사느냐? 간절하게 살아야지 간절한 기도가 나오지 않느냐? 이들은 쉬지 않았습니다. 그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받은 교회가 온 교우들과 더불어 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이 일에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는 이것 하나에 자신의 삶을 걸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처럼 당신을 섬기고 진정 당신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복음 전도의 현장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예수를 믿는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예수 믿고 여기서 기다리다가 천당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남겨 두신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이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우리를 쓰시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이 복음을 듣고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그러한 곳으로 지날 때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아요.’ 이런 사람들에게 최고의 약은 복음전도를 위해서 자신을 드려 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이 세상이 절박한 영적인 싸움의 전쟁이고,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이 계신가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마시고, 누리고, 지나가든지 그것은 하나님에게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천당에 올라갔을 때 주님은 ‘그래 네가 고기를 몇 kg이나 먹고 왔느냐? 그 중에 한우가 몇 kg였고, 수입 육이 몇 kg였냐? 그런 것 관심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건강을 유지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잠시 살아가기 위한 수단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는 일에 쓰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 ? ) 바로 그런 동일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기를 그치기를 작정할 때, 그런데, 그 교회는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는 것이 낫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을 주께서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이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또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 어두움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면 구원의 길을 보여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오늘 이 빌립보서는 모든 성경이 그렇지만 제가 처음 은혜를 받을 때 아주 사랑했던 성경입니다. 거의 이 빌립보서를 외웠었는데 이 빌립보서의 무대는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아주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막으셔서 마게도냐로 방향을 돌린 다음에 처음 세워진 교회가 바로 이 빌립보교회인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신앙의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에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내면서 1장에서 자기가 옥 속에 갇혀있다는 것 때문에 너무나 슬퍼하고 걱정하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얘기하면서 나는 옥 속에 갇혔지만 내가 옥 속에 갇혔어도 그리스도 복음은 갇힌 것이 아니다 내가 옥에 갇혔지만 예수의 복음은 계속 전파되지 않느냐 내가 옥 속에 갇혔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복음은 더 멀리 더 놀랍게 전파되지 않느냐 하면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 것과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내 몸에서 온전케 되기를 원한다는 그 유명한 고백을 하고 난 후에 빌립보교회 역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교회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들로 인해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런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니까 뭐라고 얘기가 나오냐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너희가 살아야 된다. 그래서 복음 전파라고 하는 것은 말로만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입으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때 세상이 변화하는 역사가 나타난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얘기하냐면 사도바울이 듣고 싶었던 것은 신앙을 위해서 온 교회와 교우들이 하나가 되어서 서로 협력한다는 소문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듣고 싶어했던 것은 대적을 만나도 이 빌립보교회가 전혀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고 담대하게 그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산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바로 빙거다. ‘빙거’라고 하는 것은 확실한 증거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이 빙거냐. 그렇게 너희가 복음 안에서 견고히 서서 신앙생활을 하고 또 일심으로 한 뜻을 품고 복음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고 어떠한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해서 기가 죽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그러한 삶의 자세를 보이면 이것은 너희에게는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이고 그 사람들에게는 멸망 받을 것이라는 심판의 증거이다 이 사실을 이 사도가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설교하고자하는 29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오늘 우리들에게 이 성경구절은 대단히 생소한 성경구절일 것입니다. 우선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하는 것은, 출발이 구원부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 이전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사람이 없는 것이죠. 들에 핀 백합이나 공중에 나는 새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자기는 가치 없지만 내가 가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모든 선물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고백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런 섬세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것을 힘입어서 살아가고 만물이 기동하고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호흡하고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은 주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감사하지도 않고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사도는 너희에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아시아로 흘러 들어가서 중국을 지나서 동방으로 전파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사도들의 그 계획을 하나님이 막으시고 복음의 물줄기를 돌렸을 때 제일 먼저 그 구원의 혜택을 입었던 사람들이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지방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와 놀라운 사랑을 이 비립보교회의 교인들이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서 그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사실은 들에 핀 백합처럼 이렇게 살아온 자신들의 인생이 섬세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돌보심의 손길아래 살아왔다는 이 은혜가 무엇인지도 그들은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구속의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이 빌립보교회 교인은 모든 사도들 가운데 뛰어난 바울과 같은 사람을 목회자로 삼아서 그곳에서 바울과 같은 훌륭한 사도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어둡던 눈들이 열리고 캄캄한 마음들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길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되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될 것인가 어둡던 인생의 좌표가 정해졌습니다. 생명이 없는 곳에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져갈 들풀과 같은 인생들이 생명의 복음을 듣고 영원을 향하여 사는 놀라운 인생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모든 하나님의 베풀어주신 은총, 그것은 하나님의 대가없는 은혜였습니다. 주님께서 거저 주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빌립보교회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까? 피도 섞이지 않고 살도 섞이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에 그리스도의 일군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도는 오늘 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향해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내 증인이시라..
사도 바울 속에 있었던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향한 그 놀라운 사랑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옥 속에 갇혀서 사형언도를 기다리면서도 옥 바깥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이 근심할 것을 염려하며 기뻐하라고 열 여덟 번이나 적었던 이 사도와 같은 목회자를 빌립보교회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생명의 놀라운 은혜와 복음을 확증함에 참여하고자하는 헌신된 마음을 이 교회에 주셨던 것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부자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이와같은 은혜가 사실은 빌립보교회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이러한 은혜를 주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가 무엇이관대 생명의 놀라운 복음을 주시고 끊임없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 불순종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진리의 빛을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비춰 무엇이 참 길이고 무엇이 거짓된 길인지를 알게 하시고 때때로 낙망하여 우리가 참 길과 거짓된 길을 분별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빛으로, 말씀의 광채로, 그리고 참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갈 길을 지도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을 은혜라고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와같이 가치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여호와께 경배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여러분에게 가슴벅찰 정도의 놀라운 특권으로 가득찬 은혜로 느껴진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수없이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은혜인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은혜를 따라서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이 빌립보교회에만 미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주님이 주셨습니다. 무슨 가치가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칼 아래 놓여있는 우리를 그의 피로 구속하셔서 생명과 자유를 주셔야할 어떤 가치가 우리들에게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밖에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는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이유도 없이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거도 없이 우리들을 사랑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아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매일 매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는 어떠합니까? 매일 매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지은 죄를 들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사죄와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참회를 거절하신 적이 있습니까? 매일 매일 우리는 연약하고 늘 깨어지기 쉽지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득불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의 나 된 것이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숨쉬고 그 은혜를 마시고 그 은혜 속에서 잡니다.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리고 제가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겠습니까? 그렇게 비교해보는 것으로 놀랍지 않다면 잠시 후 죽은 뒤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각각 다른 상태에 있게 되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힘입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은혜가 무언가를 위한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 은혜가 무언가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대가는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목적 없는 사랑은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는 그것이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는 목적이 있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생명의 은혜를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를 주신 계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노예로 삼으시기위한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받은 사람으로 만드셔서 그 은혜받은 사람으로서 우리가 보다 더 훌륭한 인생의 목적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는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계획을 따라 살 때 우리의 인생은 은혜를 받은 것에서 더 나아가서 그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인생은 더욱 더 빛나고 훌륭한 인생으로 변모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너희에게 은혜를 주셨다.’
빌립보교회가 받았던 이 모든 놀라운 은혜는 그리스도를 위한 은혜였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과연 이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 은혜가 목적 있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깊이 붙들고 살아갈까요? 사람들이 잠시는 은혜를 받았지만 금방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놓쳐버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목적과 계획도 붙들지 못하고 놓쳐버릴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을 때 의도하셨던 은혜주심의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면 우리의 은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까? 잠시 하나님의 계획을 버리고 주님이 은혜를 주셨을 때 우리에게 계획하셨던 그 계획을 버리고 여러분의 계획과 목적을 버리고 살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은혜는 금방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처럼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비한 것입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실 때 사람들은 인생 전체가 뒤바뀐 것 처럼 슬펐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가득하고 고통가운데 신음하던 사람들이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고 눈물이 변하여 기도가 됩니다. 고통의 불평이 변하여 찬양이 되고 불안과 장래에 대한 염려로 가득했던 미래가 갑자가 확신과 비젼에 넘치는 장래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그 은혜를 주셨지만 그 은혜를 견고하게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한 때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지만 지금은 다 잃어버렸습니다.
한 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눈물로 감격하고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으로 아멘하였지만 지금은 냉랭합니다. 하나님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무엇때문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만족을 위해 계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인생들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의 만족을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신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족을 얻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고 은혜를 주실 때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은혜의 계획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은혜가 촉진됩니다. 은혜가 더욱 풍성해집니다. 은사에 은사가 더해집니다. 충만에 충만이 더해집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지식이 더해집니다. 풍성한 은혜에 풍성함이 더하여집니다. 어둡던 영안이 열리는 그 위에 더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실 때에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그 놀라운 계획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한번 받은 은혜에 족하고 그 이상 은혜를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계획을 가지셨는지를 잊어버리고 그 계획을 따라서 여러분들이 살지 않을 때 여러분의 은혜는 소진됩니다. 벌써 소진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너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은혜받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주신 그 은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은혜를 유지하기는커녕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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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동안 어느 목사님한테서 설교 테잎을 듣고 꼭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전화를 받으면서 마음이 한없이 슬퍼졌습니다. 그 슬퍼진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하면 제 눈에 열린 교회가 생기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쭉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 교회가 여기 서기 전에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설교를 하니까 은혜를 받고 받은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있으니까 다 알죠. 그런데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일년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목사님처럼 내게 와서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을 했는가?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하면 한번 은혜를 받은 사람들, 몇 달씩 은혜 받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는데, 근본적으로 은혜는 좋은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계획하고 있는 삶을 사는 것은 너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린 그 은혜가 얼마나 영혼 깊은 곳을 건드린 은혜였는가? 나는 새삼 물어보게 됩니다.
일년이 넘어 이렇게 지나오면서 이제는 어느 곳에 가서 설교하더라도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열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바라는 바가 그들의 받은 은혜에 기뻐하기보다는 염려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그래, 그렇게 깨달은 만큼 견고하게 살아야 할텐데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계획들을 언제나 자기의 생각대로 그 은혜의 계획을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은 철저하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은혜 받을 때 부담 느낄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은혜를 받을 때 기뻐하는 것만큼 부담을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의무를 느끼고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하여 갖고 계신 계획대로 살아야할 무거운 영적인 짐을 지어야 할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그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살게 하십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주시리
주님의 은혜를 먹고, 그 은혜 속에서 숨쉬며, 그 은혜 안에서 살았습니다. 인간의 풍조는 변하고 세상의 사조는 흘러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없었습니다. 이런 모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도대체 삶이 예수를 위해서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은혜를 받겠으며 또 받았다고 잠시 눈물을 펑펑 흘리고 기뻐 뛴들 그의 은혜가 그의 영혼 속에 유지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가 잠을 자든지 깨어 있든지 은혜 받은 우리가 그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기를 꿈꾸고 있는지 그 은혜를 빙자하여 나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살려고 하는지 사람은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다 아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파악할 수 없으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들이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도 그 계획대로 살려고 하지 않을 때 주님은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가 그리스도를 위한 계획 아래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은혜 그 자체보다도 은혜의 계획입니다. 왜 가치 없는 나에게 찾아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 않는 특별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셔서 다른 사람에게 없는 기도의 영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진리의 말씀을 나에게 주셔서 참과 거짓된 것을 분별하고 어두움 가운데 빛줄기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건강과 그리고 믿음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 소망 없고 절망 가운데 신음하는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위로와 희망을 주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굳게 붙들어주셨던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무엇입니까? 죄 가운데 살아서 자기 힘으로 돌이킬 수 없을 그 때에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마음을 녹이시고 자신의 죄를 토하고 예수의 넓은 사랑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나에게 받게 하셨던 그 모든 놀라운 은혜의 이유가 무엇때문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제가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인생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이 원하시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모세가 끊임없이 외쳤던 것입니다. “잊지마라” 과거의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죽은자와 방불한 너희를 살리시고 애굽에서 종되어 포로되어 소망이 없던 인생들을 어떠한 능력으로 구원해내사 어두움 가운데 눈뜨게 하셨는지 잊지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적마다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첫시간 강의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어요.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 나는 이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살아가지고는 내 주 예수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어떻게 내가 갚을 수 있겠는가?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한없건만
나 주 위해 갚은 것은 참 적으니
주 예수여 너그럽게 보옵소서
생명주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시고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 고통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때문이었습니까?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의고난을 통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시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가 그리스도를 위한 은혜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도 위하여 살아서는 은혜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기억해야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은혜는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을 위해서 살 때 은혜가 은혜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이 은혜의 비밀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주어진 그 놀라운 은혜를 사람들은 너무나 값없이 받고 있습니다. 비할 수 없이 귀한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가 사람들에게 하찮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을 버려 주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와 오늘도 자기를 믿는 자들을 실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선대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가 사람들이 그 은혜를 소홀하게 취급하고 하찮게 취급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영혼 속에서 은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가 그리스도를 위한 은혜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때 여러분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만약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삶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위한 계획 아래 자기에게 주어졌는지를 깨달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바울에게 은혜를 주셨을 때 바울의 인생이 어떻게 그리스도만을 위한 인생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 두 사이에 끼어서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있을 욕망을 가졌으나 그러나 너희를 위하여서 이 육신에 거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너희를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라고 말할만치 그는 인생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남김없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드려졌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를 위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꿈과 예수께서 은혜주실 때에 바울에게 가지고 계셨던 계획사이에 조화를 꿈꾸기 위해서 타협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았을 때에 그는 그리스도에게 붙잡혔고 그의 인생은 오로지 한 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혜의 계획과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리움 바 되었으니 이번에는 은혜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인 바 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만 참 자유와 완전한 신앙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그 놀라운 은혜를 받았을 때 사도는 즉시 자신의 모든 인생이 오로지 이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지 않으면 안되는 신적인 강제력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늘 왜 이 사도가 이 흉악한 형벌을 받으며 옥 속에 갇혀서 옥 밖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매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가 그를 붙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은혜가 그의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이 복음 안에 나타났고 그 복음의 예수가 자기의 일생을 붙들었습니다. 한없는 놀라운 은혜를 복음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이 복음을 전하고 이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고 생명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으로 생명을 주는 것 이외에 인생에 참다운 가치가 아무 곳에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의 증거로 인하여 갇힌바 된 나 사도 바울은 한결같이 예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오직 한 분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아야될 인생이란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삶이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는 삶으로 그분께만 드려지는 삶, 그것이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대답입니다. 응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높은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잠시 주어진 이 지나간 밤의 경점과 같은 인생 속에서 허무한 것을 붙드는 대신 영원한 것을 붙들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오해를 바로 잡아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믿을 뿐 아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단지 우리에게 아멘이라는 대답을 듣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받고 싶으셨던 것은 삶으로 아멘을 말하는 인생, 그것을 받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은혜를 조롱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와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강대상에서 증거 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몇 마디 하고 가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옳소하는 제청소리를 듣고싶으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아멘을 말하는 그 대답을 얻고 싶으신 것입니다. 입으로 말하는 아멘이 아니라 삶으로 아멘을 고백하기 위해서 아멘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모든 요소와 더불어 싸우고 고난을 받고 이기고 끝없이 다가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이기고 그리스도 예수만을 위해서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방해하고 거치는 것들을 꺾어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한 심지를 가지고 삶으로 아멘을 고백하는 사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세상의 즐거운 것과 유익한 것이 기다리고 있지만 내게 주신 놀라운 은혜가 그리스도를 위한 은혜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아멘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 비록 시련의 골짜기처럼 보이고 소돔과 고모라성처럼 보이고 아골골짜기 같아도 길이 협착하여 많은 사람이 지나는 것 같지 않아도 내 주 예수 주신 그 놀라운 은혜가 그리스도를 위한 은혜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난의 길 앞에서도 아멘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사람. 나를 항상 버리고 그리스도를 붙드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는 값지고 고귀한 것이 많지만 없는 것도 많습니다. 오늘 성령이 말합니다.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아멘하면서 받아들이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으로 진하게 그 말씀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고백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감동을 받으며 아멘하는 그 아멘도 잠시 후에 그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감동하며 아멘하는데 그 아멘을 받고 삶으로 자기가 자기의 뜻과 의지와 인간의 생각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분만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 삶 전체로 평탄한 길이 있는데도 아멘하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택하고 수많은 유익과 명성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으로 아멘하기 위해서 고난과 무명의 길을 택하는 삶으로서의 아멘이 없으면 잠시 후에는 입술로서의 아멘도 그친다는 것입니다. 지금 때 뿐만아니라 그때에도 다만 믿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남이 알 수 없는 그 놀라운 것들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은 없지만 지식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재물은 없지만 주님의 오묘한 말씀의 세계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셨을 때에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우리가 당신 참 잘 하십니다 그 소리 듣고 싶으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그 은혜가 은혜인 것을 고백하고 오로지 이제는 내 인생이 그리스도에게 은혜로 붙잡힌바 되어서 이제는 내 인생가운데 나를 위하여 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삶으로 고백하며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같이 ??? 수 있는 아멘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삶을 위해서 주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진리의 말씀을 힘입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담대히 말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고 그 은혜를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하심이라.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랍게 주신 은혜가 고난받기 위함이라는데 동의할 수 없죠. 그러나 우리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성령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오늘 이 성경을 쓰고 있는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자기가 받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지를 고백합니다. 디모데서에서도 고백했습니다. 신령한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자기가 구원받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때에 이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은 바울은 고난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자신의 즐거움과 인생의 향기로운 계획들을 포기할 수 있는 자기 희생이 은혜 받은 사람들의 삶에는 언제나 뒤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 너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사도는 단지 한번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 은혜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습니까? 주님이 은혜를 주시고 그는 주신 바 은혜를 가지고 전심을 다해서 오직 그리스도 한분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가 가졌던 모든 인생의 계획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계획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졌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유명해지는지 훌륭해지는지 그런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인생의 말년에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깊이 체험하고 깨달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 자신이 이같은 사실의 증인이었습니다. 주님의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는 고통도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고난과 세상의 고통이 넘을 수 없는 놀라운 평강과 기쁨을 그가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사형날짜를 앞에 둔 죄수가 옥 바깥에서 잘 먹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내가 종말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렇게 격려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고난은 죄가운데 살아가면서 받는 고난과는 질이 다른 고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따라서 받는 이 놀라운 고난 속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더 불같이 일어나기를 원하고 은혜위에 은혜를 더해주시를 원하고 그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받기를 원하신다면 단지 그 은혜에 말로만 아멘하지 말고 삶으로 자기의 뜻을 버려보십시오. 삶으로 자신의 계획을 포기해 보십시오. 삶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삶 전체로 주님의 은혜에 아멘으로 고백하는 오직 주님께만 묶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고난이 넘치는 가운데서 우리는 모든 이 세상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리스도와 하나된 믿음의 생활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지금 교회는 그러한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 바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서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삶 전체 구석 구석으로 오로지 아멘을 말하며 살기를 원하는 한 사람은 회색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수만 명의 사람보다 위대한 일들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오늘도 찾고 주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주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6.복음에 빚진 자로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3-15)
육칠월이 지날 무렵 벼에 꽃이 피었다 지고 나면 알곡이 맺혀갑니다. 처음엔 그 알곡에서 하얀 물이 나오고 햇볕을 더 받고 나면 쌀이 됩니다. 벼가 열매를 맺어야 하지만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면 논에 물이 차서 벼가 다 쓰러지고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30,40년 전만 해도 나무가 많지 않던 시절에는 홍수가 나면 엄청난 물이 넘쳐서 논을 다 쓸고 지나가고 여름 장마에 잠기고 난 뒤에 비에 쓰러진 아직 채 여물지 못한 벼를 붙잡고 하늘을 보며 통곡하는 머리에 수건을 쓴 아낙네의 사진이 오랜 세월 제 가슴에 새겨져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이 가을날 홍수가 지난 논에 나와 하늘을 보며 눈물 흘리며 통곡하는 것일까요? 그 농부는 봄부터 땅을 기경하고 물을 대고 못자리를 하여 모내기를 하며 노력한 여러 종류의 수고가 있었지만 목표는 오직 하나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열매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수리시설이 잘되어 있어 물 염려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해서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달구지에 실어 나르며 활동한 모든 각양각색의 씨름하며 논에 물을 대는 이유가 바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정반대의 이유를 생각해 보면 오랜만에 풍년이 나서 온 동네의 잔치가 벌어지곤 합니다. 농부가 아닌 경유에는 풍년에 대한 실감이 나기가 쉽지 않지만 한 예로 직장을 다니는 한 사람이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출근을 하여 듣는 소식이 한해 동안 수고했으니 퇴근길에 500%보너스를 받아가라고 통지해주는 것과 유사할 것입니다. 열매는 봄부터 여름을 지나 수고했던 농부에 대한 완전하고 유일한 보상으로 다른 것으로는 농부의 노고와 수고에 대해 보상이 될 수 가 없습니다. 일년 내내 수고했는데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땅을 칭찬하고 입지 조건과 풍수지리를 들어 농부를 칭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농부의 수고와 노고에 대한 아무런 보상이 될 수 없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풍악으로 100가마를 예상했던 농부에게 130가마를 거두게 되었을 때 농부의 기쁨과 즐거움은 한 해 동안의 수고와 노고를 보상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수확은 거두고서도 그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농사를 지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보지 못했지만 그곳에 복음이 전해져서 교인들이 있었고 그는 교인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본격적인 선교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메이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생적이니 그리스도인이 생겨남으로 바울이 그들에게 기독교인이 무엇인지를 장엄하게 설명하면서 선교적 편지를 쓰게된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 내가 너희에게 얼마나 가고 싶어 했는지 아느냐?” 라고 고백합니다. 로마에서도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실텐데 왠일인지 길이 막혀있어서 그토록 꿈에 그리던 로마를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되었고 그래서 바울이 편지를 하며 다른 이방인들에게서 나타났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믿음과 구원의 소망이 생겨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한 꿈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고 바울이 이런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꿈과 희망 기쁨을 읽으면서 바로 그가 살았던 것을 목회자들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평신도의 삶과 목회자의 삶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 전도의 열매가 맺어지길 간절히 사모하고 원했습니다.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에 의해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것입니다. 꿈이나 목표에는 2가지로 나뉘어졌습니다. 자기 암시적인 꿈과 계시적인 꿈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 암시적인 꿈은 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 보겠다는 것이나 지위와 명예 조직의 성장이나 대형교회를 꿈꾸는 인간의 결시에 의한 것으로 결심을 지우면 사라질 수 있는 꿈을 말합니다. 둘째는 계시적인 꿈으로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그 꿈을 심어 주시는 것으로서 자기 암시적인 꿈과는 달리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야곱이 잠에서 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경우나 요셉이 아직 어릴 때 본인이 원하지도 않은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부모나 형제들보다 뛰어난 믿음을 주고 앞길을 인도하여 온 세상 민족들을 구원하라는 미래의 약속을 삼으시며 그에게 비젼을 보여주신 것 등은 계시적 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로 가려는 바울의 소원을 열매를 맺고자 함이었고 또한 그의 사모함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로 섬기든지 무슨 열매를 맺는가를 점검해 보아야하며 열매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이 부족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주인의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께서 포도원을 맡겨주셨는데 벌레가 먹든지 말든지 때가 되면 물을 주고 비료 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는 삯꾼이다. 그 삯군에게 당신의 밭을 맡기겠는가? 종의 신분이나 자기의 것으로 여기고 오직 열매를 맺기 위해 수고하고 맺혀지지 않을 때에는 좌절하고 고민하면서 그 문제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선교자로서 카퍼레이드를 하기 위해 로마에 가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목적은 오직 믿지 않는 자들을 예수 믿게 만들고 확실히 구원의 열매 맺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세워주기 위해 가고자 했습니다. 그때 그가 사모했던 그 마음으로 다른 지역에서 선교하면서 각성하고 자기의 사신 우상들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영적인 부흥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의 생각이었고 로마에 갈 때에는 죄수의 몸이 되어서 판결을 받기 위해 끌려가게 되었지만 게의치 않은 이유가 바로 열매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로마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가 대접을 받고 자기의 권세를 보여주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도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죄수로 끌려가는 모습은 정말 그가 원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과시하는데 있지 안았고 목회적 업적을 쌓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혼을 구원하여 열매맺게 함에 있었기에 자신의 방문을 통하여 어떻게든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만 있게 된다면 그는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과연 그가 끌려갈 때엔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생각했겠지만 하나님께선 완벽하게 복음전할 준비를 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늘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랄 수 있는 사모함 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주실 은혜만큼 중요한 것은 내가 왜 더 큰 능력과 은사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자신의 삶의 뒤를 돌아보며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10,20년 신앙 생활하면서 어떤 열매들을 맺고 있는가? 어떤 열매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열매들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영혼 구원하는 일과 관련하여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을 열매맺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품꾼이요 노예였고 그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열매 맺을 때 충성된 자는 그 주인의 마음처럼 한없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세상이 다른 이유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뉴스 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신앙생활에 대해 냉담하더니 말씀을 듣고 굳게 살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이 우리에게 들려질 때 기쁨으로 들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충분하게 기뻐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곧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예화) 사랑의 교회 부 목사님과 대화를 하는 중에 그 교회 성도들이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멀리 이사를 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멀리 이사한 사람들 가운데 신앙이 뜨거워지고 교회 가까이 사는 사람들의 신앙이 식어진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에 잘 안나오고 속썩이는 사람들 가운데 교회 근처에 있는 사람들인데 먼데 잇는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마음일 경우 포기하고 나오지 않겠지만 그 안에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 2~3시간 거리를 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가까운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모함으로 나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새 신자가 매주 밀물처럼 등록하는 한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역자 회의 시간에 한교역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에이, 왜 우리 교회로만 다 오는 거야, 딴 교회로도 가지?!”라고... 말입니다. 아버지 께서 포도원의 품꾼으로 삼으신 놀라운 은혜를 깨달은 자는 영혼을 그렇게 볼 수가 없습니다.
목회의 소명이 있는지 없는지 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목회 소명에 앞서 평범한 성도로서의 소명이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꿀같이 달게 듣고 전도할 대에 그의 마음이 기쁘고 교회를 섬기며 봉사할 대에 즐겁고 물질을 바칠 때에도 아깝지 않고 교회에서 선을 행할 대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것 같을 대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기초적인 삶이며 우리가 아버지 집에 부름 받을 때 모두 품꾼입니다. 어떤 이는 젊은 나이에 부름을 받았고 어떤 이는 노년에 부름을 받은 이도 있지만 모두 아버지의 일을 위해 충성된 것인가 하나는 것은 열매를 향한 기쁨을 가지고 공유함이 있어야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슬퍼하는 마음을 가진고 아버지의 고통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자가 충성된 자입니다.
바울은 열매맺는 목적을 위해 부름을 받은 자로서 빨리 맺히든 늦게 맺히든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최선의 열매가 영혼을 믿게 하여 추수함으로 아버지 집에 들이는 것이 열매이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이런 소원들이 윌 속에 언제나 있어서 그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돈을 빌린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복음을 들은 것도 아니고 할부의 물건을 구매한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어떤 신세를 진 것이 없는 그였지만 그리스도께만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바울이 이방인이나 로마인에게 빚진 것 없이 부채와 관계없는 것이나 바울은 부채의식을 가집니다. 부채를 많이 질수록 가중되는 것은 위기 의식이며 채주가 악덕일수록 위기 의식은 더해집니다. 그러기에 빚에 대한 의식은 썩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남의 돈을 빌려쓰고 갚지 않는 부채의식 없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깊이 빚진 느낌을 받았을 때 그의 복음을 받고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부채의식을 갖는 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바울이 처음에 유대교에 있을 때 오히려 그리스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의 잘못된 전통아래서 오히려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배척하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편투표를 하고 살다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자신이 가졌던 편견들이 단숨에 와르르 무너졌고 그와 함께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고 인종에 대한 편견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현대 한국에 영남 호남 편을 묻고 가르는 사람들이 진정 그리스도인인지 점검해야 하며 복음을 안다면 그러한 현상들은 발생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며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이 그어놓은 수많은 금들이- 돈 많은 사람과 돈이 없는 사람, 지도자 계층과 지도 받는 자 계층, 헬라인, 유대인- 이것이 아무의미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자와 아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 사이의 하나의 줄밖에 없다는 구별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인과 이방인의 손에서 건져내어 저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놓은 일을 하기 위해 내가 너를 전도자로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얻게 된 것은 눈먼 것 뿐 이었고 직가라는 거리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눈에 상처 뿐 이었지만 그의 영혼 속에는 보화와 같은 것들이 들어와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구별하는 영적 자상이 생겼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죽을 때가 다 되어 십자가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십자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도무지 그 안에는 의로운 것이 없었고 오직 내가 의롭게 살았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의로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 쳤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향하여 극악하게 대접한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도무지 자신을 구할 없고 그렇게 몸부림치며 산 것이 하나님께 반항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복음이 하나님의 의가 되어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한 의로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을 깨달았습니다.
눈뜨고 난 후 자신의 삶이 온통 그리스도께 빚진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리스도 없는 자신에게 다가올 분깃은 눈물, 땀을 흘리며 살아도 마지막 자기에게는 다가올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진노밖에 자신의 아무런 몫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을 찾지도 부르지도 아무 의를 행한 것이 없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막으셔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서 아무 공로 없는 그에게 부활의 소망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몸이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 죽는 때까지 하나님께서 단지 보증 만하고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강하게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핍박과 고난에 직면했을 때 그리스도는 그의 손을 붙잡고 “ 두려워 말라 담대하게 전하라 내가 너의 곁에 너와 함께 하겠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 하셨던 말씀이 바울의 삶 속에서 다이나믹하게 구현되었던 것처럼 삶을 산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그는 자기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왜? 그가 복음의 전파 열매를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전도에 대한 도전, 선교에 대한 촉구 앞에 자신의 삶을 드렸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큰 꿈이 그의 꿈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뜨거운 열망이 그의 열망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타는 마음이 그의 마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를 바라는 불타는 사랑이 그의 사랑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 위에 역사 하는 이유가 바울이 역사 하는 이유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대한 계획 앞에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보이신 적이 없었던 놀라운 임마누엘의 은총을 자신의 계획에 순종하는 바울의 인생을 끌고 가셨습니다. 자격은 없지만 정말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들고 오직 나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된 사랑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증거 되고 전파되어 영혼들이 살아나고 죽은 영혼들이 가득 찬 공포의 땅에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동산이 이루어지는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쓰여질 수 없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여할 수 잇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거치는 사람들은 오히려 믿지 않은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구원의 열매를 위해서 자신을 아끼는 마음 때문에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 다른 방면에서 열매를 풍성하게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신앙의 비밀, 신비는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예수께서 주신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께 감격하고 감사하여 흐르는 눈물이 그치고 나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들의 삶의 결국을 보게 하여 주심을, 전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10,20년이었으나 그 안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살고 지위가 높고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사는 것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면서 그 사람의 인생을 영원과 관련해서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려집니다. 영혼의 빛을 통해 이 세상의 복된 것들이 사실은 복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세상에서 부러워해야 할 것들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가치관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부채의식은 처절했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구원했을 때 그를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하심에 있어서 전도 잘하고 목표를 달성하면 그대로 구원하신다는 조건을 제시 하시지도 않으셨고 그렇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하겠노라고 하셨기에 그가 부담을 느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며 주님은 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
부득불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잇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직 복음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로마에 이토록 많이 남아 있는데 내가 거기에 발을 내딛어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고통이 되고 아픔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가는 그들의 삶의 비천하고 하나님을 모르며 살아가는 것으로 하나님 자신이 받으시는 불명예를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는 기도도 전부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서 영혼이 복음을 듣고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구속자라고 하나는 십자가를 향한 진정한 고백과 죄 사함이 없이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그저 공허한 기도일 뿐입니다.
바울이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울 속에 있었던 불신자를 향한 처절한 부채의식은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물질이 많고 세계를 정복했고 모든 타락의 근원지가 되고 온 땅에 흘러가는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로마인들이 얼마나 더럽게 살아가는 지를 알았기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자나 어리석은 자나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하고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아버지께 돌아오는 일 없이는 그들 가운데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손톱 만한 조금의 여지나, 티끌 만한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알았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지를 보았고 그들에게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이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알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한 것만큼이나 깊은 부채의식이 증가했습니다. 골육 친척을 위해서라도 전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끊어져서 저주를 받고 지옥에 떨어져도 상관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이 즐거워하고 내 동족이 영생을 누리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다면 나는 지옥의 불 고통을 받아도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구원받고 기뻐하는 동족을 인하여 불 속에서 감사 하겠노라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그의 빚진 자로서의 부채의식입니다.
빚진 자에게 인간이하의 대접을 하는 경우를 보게됩니다. 빚진 자에게 채주가 찾아오는 것은 아무 때 방문하더라도 무례하다고 하지 못하고 갖은 모욕을 받을 때 오직 갚아야겠다는 열망밖에 아무생각도 없을 것입니다.
예화) 제가 어릴 적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님께서 빚을 얻어 쓰신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어느 날 아주머니 한 분이 약을 들고 집으로 빚을 받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 밖에 없던 방 앞에 주저 앉으셔서 밤새도록 돈 안 갚으면 약먹고 죽겠다며 울고 계셨습니다. 몇 일 후 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서 그 돈을 갚아주셨지만 어린 제 마음에는 그 아주머니가 불쌍하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는 마음이 들어서 내 수중에 돈이 있으면 갚아 줘서 보낼텐데 했던 기억이 납니다. 빚을 진 사람은 오직 그 빚진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고 잠을 잘 때나 눈을 떠서도 오직 채주의 얼굴이 떠오르듯 바울이 그런 부채의식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움에서 느낀 것이 아닌 죽어 가는 영혼들이 내 책임이라는 것에서 느꼈고 하나님이 내게 구원하라고 하신 그 명령에 전폭적인 순종에서 산다면 저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 가지는 않을텐데 라는 강한 부채의식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왜 우리 가족들 가운데 먼저 나를 부르심으로 믿게 하셨을까요? 또한 가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왜 나를 열심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만드셨을까요? 사람들이 다들 형식적으로 살아가는데 왜 나른 하나님 말씀에 따라 바르게 살아가야 되겠다 라고 하는 결심을 늘 실패할 적도 많지만 여전히 언제나 하게끔 만들어 주실까요?
남이 못 본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시고, 남이 받지 못한 것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하여 주신 것과 남이 알지 못하는 복음을 믿음의 세계를 알려 주시고 세상을 이기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선한 결심을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몇 시간 마다 다시 새롭게 결단하게 하여 주신 은혜는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으며 그것은 먼저 믿은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밀 맡본자로서 그것을 알지 못한이들에게 증거자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열매맺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무 대가 없이 십자가에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고 바울 자신이 고백처럼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위해서 죽으신 그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은혜로 받은 구원이 바울이 대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격해서 깨달은 자는 가슴속에 묻어두기가 불가능하고 이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앗찌만 현재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기 안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놓은 것을 깨달은 것으로 인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신 사건이 얼마나 놀랍고 전도해도 믿지 않은 자들을 바라 보면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 사건임을 알게 됩니다.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식인이나 어리석은 자들 모두에게 신세진 것이 없습니다. 꾸인 것이 없는 모두에게 빚진자로 그리스도 예수께 빚졌고, 그리스도 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오늘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눈물로 씨를 뿌릴자를 원하고 계시기에 그리스도 께서 진 부채의식을 내 마음에 떠오를 때마다 안타까이 구언을 열망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영혼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일학교나 중고등부나 구역장이든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영혼 한사람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가벼이 여깁니다. 그러나 한 영혼 전도하는 일에 부채의식을 가진 사람은 떨어져 나가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 전도는 자신의 영적 관리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부채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헬라인이나 로마인이나 빚진사람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린 헬라인이나 로마인이 섞여있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자입니다. 방배동에 사는이나 사당동에 사는 이들에게, 가난하고 부유한 사람에게나 외국인이나 이방인에게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한결같이 빚진자라는 고백을 가능케합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바울이 이들가운데 전도의 열매를 맺히길 사모하는 마음과 그 꿈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안에도 이렇나 열매를 향한 간절한 사모함을 주셔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함으로 이전에 작게 여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복음을 증거하며 더 크게 아는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7.주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하려 였노라”(고전2:2-5)
고전2장에서 사도는 복음을 전파하는 삶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만난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으나 거의 거기에 버금 갈 만한 깊은 결단을 여기서 하게됩니다. 이 고린도 교회는 수많은 문제에 봉착했었고 그 교회는 돈이 많고 신앙이 떨어짐으로 신앙의 풍조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훈을 필요로 했으며 교회가 분파가 갈라지고 음행의 문제가 나타나고 파당이 생기며 혼란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진리를 아는 지식의 결핍에 있었고 또 하나는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께서 주신 것이지만 그 복음을 순수하게 간직하지 못하고 세상 정신에 배합하여 복음의 정신이 타협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에서 중립지역이란 없는 것이며 주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면 그는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고 십자가를 증거하며 살지 않므면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며 주님을 추구하며 살지 아니하면 주니믈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내가 너희 중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며” 행 18장에 보면 아데네거쳐 고린도에 바로 갑니다. 아데네에서 그 탁월한 지식들, 철학을 말합니다. 에피큐리오스, 에비구레오 학파 학자들과 함께 중요한 철학적 논쟁을 벌였고 그들을 압도했으나 그것이 복음의 열매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깨달은 놀라운 진리가 복음이 철학이나 논쟁으로 굴복되어지는 것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외에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겠다든지 그것이 설교사역에 중심이 되겠다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신앙에 잇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든지의 의미가 아닌 그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을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십자가 사건 외에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왜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무엇이 이루어졌으며 이것을 외치고 아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내 메세지의 중심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아니라 그리스도 외에 내 의식의 세계에서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외의 지식이 하나님께로 받은 바 복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인생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제가 이 말을 했다면 사람들의 생각에 워낙 아는 것이 적으니까 그렇게 말한다고 할 수있겠고, 만약 평범한 소시민들이 했다면 많은 지식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요 그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고 유대교의 놀라운 교리들을 모두 통달하였고 율법의로는 흠이 없었고 교회를 핍박하는 열심을 가진 철두철미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으며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었으며 그의 지식은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입을 열어서 무엇이 신앙이며 누가 하나님이며,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지식 때문이었지만 그는 오늘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모든 지식은 가치가 있읍니다. 영적 가치와 관련하여 지식을 논할 때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큰 변화를 받거나 그런 변화를 갈망함이 심히 클 때에 그는 지식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게 됩니다. 은혜에 대한 모든 사모함은 지식에 대한 모든 사모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나를 구원하신 분이 누구시고 나를 구속하신 이유가 무엇이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과 길이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지식에 대한 사모함이며 그것이 생길 때 다른 지식에 대한 소홀 해 집니다.
어느 여학생의 질문이 기억에 납니다. 저를 만나기 전에 는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었는데 한 학기 저와 공부하면서 자신을 도저히 지탱해 나갈 수가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기독교 신앙이라는것을 오해하고 있었고 그리고 나의 이 영적 상태와 삶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으나 기도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내가 그런 변화를 갈망하고 소망하지만 그 변화가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였는데 책을 읽어보니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해답이 나왔지만 그 것으로는 자신에게 충분한 답이 못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알기 전에는 편하게지내왔는데 이것을 알고 나서자신으로 하여금 깊은 무력감 속에서 고통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은혜중에 복된 것입니다.
마리아와 함께 성전에 올라갔던 예수님을 축복했던 선지자 시므온이 아이를 축복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하고 흥함을 인하여 비방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패배가 우선이고 세우는 것이 나중입니다. 무너지지 않으니까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 자라나고 있습니까? 왜 변화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왜 변화가 그렇게 더딜 까요? 진정한 변환, 무너짐이 없으므로 흥함이 없는 것이고, 절망이 없으니까 진정하 신적소망이 심겨지지 않는 것이며, 그릇된 신앙이 무너지지 않으니까 바른 신앙이 우리 앞에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된 태도들이 포기되어지고 분리되어지고 거절되어질 때 올바른 신앙들이 촉진 되어지고 격려되어지고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이 있노라” 무엇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입니까?
예전에는 하나님께서 형통한 길을 주시면 만사가 오케이 될 줄 알았읍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형통한 길이 열려도 그것이 그의 신앙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제때에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사고 땅사고 차사고 철철이 좋은 옷을 사 입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편안한 대에 잠자리를 들어도 그 하나님의 축복으로는 그 패배하고 있는 영혼의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패배를 안겨줄 수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신앙과 인생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고치고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있는 모든 것들을 알지 아니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문제로 깊고 핵심을 향해 치닫게 될 때 이세상의 아름다운 뉴스와 쏟아지는 홍수와 같은 정보들이 그의 직면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씁니다. 하루에 구약4장 신약6장씩 읽어가나는 것으로는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몇 장 읽어가는 자기 성취가 아니라 지금 자신이 패하고 있는 완전히 패배케 하고 그래서 자신을 복음 안에서 새롭게 완전히 새워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진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아름다운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는 인간의 말로 치유할 수 없음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셔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면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또하나의 의문을 갖게 됩니다. 바울이 초신자나 고린도교회에서 복음을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했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말 천하에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 외에는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우리 보다 훨씬 잘 믿는 사람들이었고 성령의 은사가 충만하여 은사가 서로 충돌할 만큼 생명으로 가득차 있는 교회였습니다. 상당히 영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새삼스럽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겠다고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고린도 교회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초신자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도의 초보를 말하고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 사건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고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신앙들을 붙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삶은 사도 자신이 살았습니다 교리를 뒤척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지만 가장 복음 적이다고 생각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그는 아마도 아데네 에서의 성공하지 못한 복음 사역을 통해서 깊이 반성하여 2장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도적인 선포와 그 선포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선포해서 믿어지게 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아데네 사역을 반영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는 같은 오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십자가의 복음을 말합니다.
“ 내가 너희 가운데 복음을 말할 때에[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그는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잇는 영적인 힘을 한 손에 쥐고 있엇고 고린도 교회에 이르러 복음을 전할 때 그는 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참 모습입니다. 강한 것 같이 진리의 복음을 전하고 확신의 충만한 것같이 예수의 구원을 증거하지만 그러나 돌아서면 우리는 이러한 약함을 경험합니다.
선지서를 읽어보면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진리를 증거하면서 얼마나 연약해 지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는 더듬거리거나 떨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는 유창한 언어와 충만한 진리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깊은 한계를 느끼며 좌절하고 커다란 태산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연약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위해서 사역하는 사람들의 자기 인식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수고하고 자신을 드리고 고난을 받아본 사람들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외소함에 대한 깊은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사도는 더 했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교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 내놓고 말하기에는 부끄럽고 조잡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그 형벌의 상징 인 십자가에서., 당시에 나무에 매달린 자는 모두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사상으로 가득찬 유대인들과 논리와 지혜에 있어서 뛰어난 헬라인들이 당신 복음 전파의 대상이 있는데 유대인에게도 호소할 수 없고 헬라인에게도 호소할 수 없는 능력으로 보면 힘이 없는 결의고 지혜로 보자면 미ㅣ련한 도리였습니다. 사도는 그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이 지혜를 가지고 설득하려는 강한 부담이 있었을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는 심히 떨었다고, 약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바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성령의 권하는 말로 하였습니다. 그는 지혜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에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논리와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가졌고 놀라운 식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의지하는 것을 버리고 순수한 복음과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것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변화를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느 유일한 도구라고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성령의 강력한 나타남과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자신의 입술위에 함께 할 때에만 이 일이 나타난 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같은 말인데 누가 말하면 정말을 말해도 아닌 듯하고 누가 말하면 들은 것을 말해도 진짜 같습니다. 교회 안에도 복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난 후 4년이 지나서 예수님이 하나님 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도 공과 공부를 아이들에게 준비하는과정에서 공과 속에 제목이 “하나님 이신 예수님”이었고 저에겐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게 무지 했씁니다. 언젠가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 어느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부터 종말까지 말하는데 자신은 교회에 와서 수십번도 더 많이 복음을 제시 받았고 영접기도만도 5~6회는 했다고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주겠다는 것에 기뻐하지 않앗습니다. 기본적인 교리가 같은 복음으로 깊이 회개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데 그것이 어느 순간에 자신의 영혼의 깊이 찌르고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웃으면서 들을 수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오늘은 가슴을 찢으며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이 오시면서 그 마음속에 증거해 주실 때 그는 심적 증거를 통해서 마음의 참된 평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의뢰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칼이나 방망이나 불이나 침이되게 하셔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찌르고 태우고 어둠을 밝히게 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이 말씀속에 깃들 그때에 사도는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완고하고 이미 다 버린 세상의 지식들을 자랑하면서 그것으로 자기의 아성을 쌓고 자기 잘 났다고 살아가는 우매한 백성들의 마음을 강동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아테네에서 놀라운 지혜와 수많은 철학으로 변증했고 사람들이 그 변증 앞에서 입을 다물었고 유구문언이었으나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그 복음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었습니까? 바울은 그곳에서 생애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단순한 복음이 그 복음 전파자 위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말씀을 전파할 때 나타나는 성령의 강력함과 능력으로 그것을 전파하며 증거하기 원했으며 다만 오직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오직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지게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던 사람이 알게 하는 진정한 복음의 도구로서 자신의 복음 전도가 쓰여지기를 진정으로 바랬습니다. 하늘의 능력으로 연단된 단 한마디의 말은 단지 인간들의 논리를 세워서 떠드는 수많은 말보다 더 큰 힘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한 말이 아름다운 활통에 들어 있는 보기 좋은 화살이라면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 바 된 복음의 증거는 장사의 시위를 떠난 강력한 화살과 같아서 죄인의 마음에 단지 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심장을 꽤 뚫고 회개의 눈물과 뉘우침의 유혈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복음 전도를 필요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말씀을 증거하고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과 간절함을 별로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무기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후방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전방에서 싸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어떻게 이 단순하고도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의 비문에 비문대신 이 설교 본문을 적게 하였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그는 사도행전 20장에서 말했습니다. “ 내가 복음에 매인바 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이르시기를 환난과 핍박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니 나의 달려 갈 길과 곧 복음 전파 사명을 감당하려 함에는 내가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는 신적인 강제력에 매였고 에워싸였습니다. 성령이 그의 삶과 인격과 삶의 목표와 존재하는 이유와 동기를 사로 잡았고 자신이 이미 풀수 없는 단단한 밧줄이 되어서 자신을 얽어 매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에 굳게 사로 잡힌 바 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이유는 복음을 증거하고 선교의 역사에 남을 만한 커다란 공적을 쌓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복음에 매였기 때문이었고 그를 이끌어 가고 잇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목표나 선교의 비젼이나 꿈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단순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를 사로잡았고 그는 매인바 되었고 자신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종이었고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만이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되었고 그 확신이 들었고 그것은 확신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처절할 정도로 가슴에 불타는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 확신과 처절한 매임이 그를 성령을 오히려 거스리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만들었고 성령은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올라가면 거기에는 각 성에서 수많은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성령의 예고를 뒤로하고 그 이유 때문에도 매일 수 없을 정도로 더 강력한 매임이 있었기에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잇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위협과 협박에 매이는 것보다 더 큰 것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그렇게 올라가는 자에게 있을 모든 예언과 성령의 뿌림침을 뒤로 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복음이 그것을 시켰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자기를 어떠한 죄에서 구하였는지를 깨달았고 그 십자가의 복음에 자신이 매여있었습니다. 우리는 구속의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구속의 십자가 앞에서 진실로 무가치한 존재요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귀하게 여기신 것은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 때문인 것을 오늘도 묵상하였습니까? 그 때에 우리는 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말년에 쓴 것일수록 더 십자가에 매인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우리는 어떠한가? 처음에 믿을 때는 조금 매이는 듯 하나 예수를 오래 믿었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한 면역이 들고 후에는 자신이 진리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면역이 들어버립니다. 그것은 곧 무지극악한 삶입니다.
필리핀에 갔을 때 어느 한 자매가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있었고 대화가 깊이 있어져서 영어가 잘 안되니까 따갈로어로 통역하면서 복음을 전하기에 저는 그 자매가 예수 믿은 지 아주 오래 된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복음 전하는 도를 들어보니 정말 깊이 가 있었고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과 2년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굳은 살을 베어내지 않으면, 지방질을 제거하지 않으면 거만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예리한 말씀으로 우리 자신의 굳은 살들을 도려내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와 우리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그는 처음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 믿을 때 이후 세월이 흘러 갈 수록 더 깊어져 갓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알지 않기를 작정하였노라 심지어 말년에는 내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노라‘“ 고 합니다. 지극히 혐오스럽고 더럽게 여기겠다고 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인생이 깊어갈 수록 더 고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 제대로 은혜를 받고 신앙 생활하면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못박혀 죽으신 구속의 사건을 직면할 때 우리는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직면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그리스도인일까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예전에 십자가 앞에 다가가면서 버렸던 것들이 다시 가깝게 다가와서 이제 세월이 지날 수록 십자가는 다 떼었다고 생각하며 형식아래 같힌 그리스도 인이 되고 교회 안에서 행정을 잘 처리하고 눈치가 빠르게 일을 하는데서 신앙의 연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우리 안에 진정한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잇도록 허락해 주시지 않습니다. 무엇을 통해서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건이 실증적으로 늘 나타나서 그래서 바울처럼 계속 깊어질 수 있겟씁니까? 빌립보서 갈라디아서 디모데서나 말년에 쓰여진 편지를 볼 수록 십자가에 더 깊이 합일 된 모습을 보게 되고 사도의 가르침에 점점 더 정체부분을 십자가에 의해서 압도되는 것을 진정한 영적 생활의 진보인 것입다. 사도는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사람들이 실존적으로 십자가의 사건을 느낄 수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울로 목숨을 버려도 복음 선포하는 일을 그치게 할 수 없었던 원동력이 되고 신적 강제력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는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고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고 굳은 살을 뚫고 들어가며, 영혼 깊은 곳의 파문을 일으키는 능력의 도구가 되는 것이므로 교회의 기도제목은 순수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과 충만한 생명의 능력으로 단순합니다. 이 두가지 기도제목이면 하나님께서 하실 모든 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복음과 그리스도 자신을 버리고 이 세상의 지혜를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오직 세상 끝날까지 교회는 변하지 않는 십자가의 구속의 사실을 붙들고 복음에 승부를 걸고 복음에 자유와 해방과 위로와 권능을 주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더욱 기도해야 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강력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순수한 복음 위에 성령의 능력을 불붙듯 부으시고 설교자가 진리의 말씀을 외치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고 전할 때마다 지혜가 아니라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강력한 능력이 그들의 증거가운데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의 심령에 변화를 가져오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완악한 죄인들의 마음에 감화를 가져오는 일들이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진실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강력한 성령의 나타남과 그 능력이 나타나는 복음의 증거와 능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을 사모하고 그 능력을 구할 때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매인바 된 사람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기억하며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여기에 부르신 것입니다.
8.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도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왜 그래야 했는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복음전도에 가르쳐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오늘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너희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복음전파에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고 그리고 그가 고린도후서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많은 핍박과 환란과 그리고 어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이 많은 세상사람들이 과연 이 허무맹랑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 사실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하는 미련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 같은 그러한 예감이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복음은 이 세상사람들의 지혜에 호소해서 그 사람들의 지적인 동의를 받아내기에는 너무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도는 자신이 말하듯이 말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식에는 졸하지 않을지 모르나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도 이 미련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 구속의 기초를 놓으셨다라고 하는 이 평범한 복음의 사실을 비록 자기가 지식에는 졸하지 않지만 졸하지 않고 부한 그 지식을 가지고도 그 세상사람들에게 믿어질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실을 설득시킨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지식에는 졸하지 않을지 모르나 말에는 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말에 자신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자신을 고백하였습니다. 과연 그렇게 자기의 어눌한 말과 그리고 이 당시의 사람들의 지혜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이 미련한 복음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그는 두려워했고 떨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복음전파에 있어서 결실을 확신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을 만한 놀라운 논리와 지식이 세상 사람들의 그 마음을 움직이고 그 생각을 바꾸어 놓을 만큼 그렇게 논리와 추론을 통해서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로운 논리가 십자가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나타난 지혜였으나 인간에게는 가리워진 지혜였기 때문에 복음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신령한 사람들이 아니라 육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가리워진 사람들이었고 세상의 지혜에 있어서는 드러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은 도였습니다. 어느 눈의(??) 말입니까? 이 세상의 지혜의 안목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설득할 수 없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십자가의 도가 그렇게 미련하다면 놀라운 능력이라도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십자가는 물론 능력입니다 마는 십자가 자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하나님이면서도 복종하신, 죽음에 복종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구원할 수 없었던 메시아를 보여준다는 이러한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은 지혜로운 헬라인들에게는 미려한 것이었고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메시아로서 나무 위에 달리셔야 했다는 그 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이적을 불러올 수 없는 무능한 메시아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그것으로 설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사도가 안떨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거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면서도 이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사도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사실이 사도의 가슴속에 체험적으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고 내 마음을 찢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진실이란 것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그러나 논리로 입증하고 깨달은 것 보다 더 확실하게 그는 그리스도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속의 주인이란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니까 체험이 없는 복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선조들의 복음이고 교회의 복음이지 여러분의 복음은 아닌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도가 로마서에서 내 복음에 이른바와 같이(my gospel)...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깊이 체험할 때 그때에 우리는 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체험하게 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건이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를 육화시켜야 됩니다. 복음이 육화되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시지만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땅의 낮아지시기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죄 있는 자의 모습으로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와 동일하게 되셨습니다. 그가 비록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이시지만 아무도 그가 우리와 다른 분이시란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낮아지시고 우리와 하나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도 비록 우리는 들었고 예수의 복음이지만 그 복음이 우리 안에 와서 그 복음이 육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내려와서 그 복음이 우리 안에 우리와 복음이 나누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약하며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을 때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변증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지혜 있는 헬라인들을 설득할 수 없고 표적을 구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걸려 넘어지는 유대인들을 이해시킬 수 없었지만 바울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그렇게 지혜를 구하고 지혜를 구하고 이적을 구하던 헬라인과 유대인들이 그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변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이 복음을 사람의 지혜로 설득할 수 없는데 그 전하는 바울이 설득할 수 없었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설득을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 그리고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어떠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종이나 자유자나 혹은 로마인이나 그 어떤 사람들이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 앞에 속죄함을 받지 않고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말할 때 그 십자가를 오히려 말로, 지혜로 설복하려고 할 때는 설복되지 않았는데 그 복음을 단지 말했을 때 이상하게 설복될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워하고 떨었는데 그 지혜롭고 교만하고 헬라인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기의 모든 지적인 교만들을 내려놓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메시아가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메시아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던 그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그는 표적을 보이려고 애를 쓴 것이 아니라 단지 십자가의 도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도를 들을 때 바울은 어떤 표적을 보이기 위해 애쓴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과 복음의 의미를 진술하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표적을 구하고 이적을 추구하던 유대인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이제까지 자신들이 허무한 종교에 매여 살아왔음을 깨닫고 구약을 새롭게 보고 복음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이런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굳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논리로 설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논리로 설복시키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언제든지 지적인 설복 하나를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사람들 마음 가운데 영접되어지고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말에 아주 능한 그리스도인들은 말에 어눌하고 논리가 있지 않은(??) 무신론자들과 논증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주장하는 자기의 주장을 승리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가 예수를 믿게되는 것은 아니죠.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있는 마음의 불신앙,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에요. 논리는 그 다음에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방벽과 같이 굳건히 서 있어서 도무지 나의 말씀전파를 듣고 믿어줄 것 같지 않은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증거해야 합니다. 쉼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말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는 초청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언제나 복음의 위대한 승리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반대를 받고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능력이 없어서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그렇게 복음을 전파할 때 복음을 싫어하는 무리들의 대적을 받고 어떤 지방에서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길을 떠나셔야됐습니다. 이런 일은 그분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의 모든 경험을 말하면서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헬라어 성경에는 아카이로스, 유카이로스 좋은 시간에 혹은 나쁜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아주 적합하고 좋은 시간에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하고 환경이 조성되어있는 것 같지 않은 불편한 시기에도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자기의 지식으로서 복음을 설복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복음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지혜가 없고 세상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미련한 복음이 지혜로운 사람들을 굴복시켜서 그 지혜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미련한 복음 앞에 자기들이 미련함을 고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적이 없는 십자가의 복음 앞에 이적을 구하고 이적을 행하던 사람들을 무릎을 꿇고 엎드리게 만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을 준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이야말로 최대의 이적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며 복음은 역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람의 ???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복음은 사람들을 사용하여 땅끝까지 줄달음치며 때로는 불을 일으키고 바람을 일으키고 생수를 퍼트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들을 해갈시키는 역사를 주었던 것입니다.
한쪽에서 그리스도예수의 복음의 미련함을 사람들이 규탄할 때에 바로 그 옆에서 어떤 사람들은 터져나오는 지혜로운 생수의 복음을 마시며 기뻐하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았던 것입니다. 한쪽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의 지혜 없고 미련함으로 인하여 모두 그 복음에 걸려 넘어지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들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이여 하며 복음의 광대한 세계 속에서 입을 벌리고 다물 줄 모르는 신앙의 감격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전파는 우리 손에 있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는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 고칠 자를 고치시고 거꾸러뜨릴 자를 거꾸러뜨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거꾸러트리거나 새롭게 살리시는지 안 살리시는지는 복음이 전파되고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늘 우리도 이러한 신념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세워지기 전부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땐 아주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 한 6개월쯤 했을 때였을까요?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설교자인 저로서는 사람들 마음속에 일어나는 전도에 대한 잔잔한 회의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열매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지를 수십만 장을 뿌렸는데 열매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그렇게 복음을 전해서 우리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정말 얼마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이쪽 동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은 저쪽 동네에서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놀라워요.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들을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험할 필요는 없지만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석달만 전도하기를 쉰다면 교회에 새로 나오는 사람도 거의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추수할 곡식들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회의에 빠져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무엇이냐면 열매를 거두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인하여 고민하는 일이 오늘 우리의 복음전파를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고민이 되어야지 열매에 대한 고민이 오늘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는 고민은 신령한 고민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고민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우매한 고민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고민 거룩한 고뇌가 아니라 천박하고 인간의 태만함을 유발시키는 고민입니다. 사람이 고민하기 시작하면 무기력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몇 명을 전도하다 죽을 것입니까? 우리 교회가 몇 명까지 커지기를 바랍니까? 전 그런 목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언젠가 제가 타락해서 그런 목표를 말하거든 여러분들이 저한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해달라고 제가 개척한지 한달 되었을 때 말했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정성껏 섬기고 예배하고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증거하고 그리고 애써서 그 복음을 전파하다가 죽어 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 위대한 능력의 복음을 들고 누볐던 그 놀라운 기독교전파의 전설적인 도시들이 지금은 대부분 어떤지 아세요? 복음의 꽃이 피었을 것 같죠? 아닙니다. 대부분 회교도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복음의 영광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각자 시대를 위해서 각자의 몫에 태워진 십자가가 있고 각자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서 충실하게 살다가 죽으면 끝입니다. 다음에 이 교회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쓸데없는 염려 때문에 혈압높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세대의 조국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천국에 가서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서는 미래 교회에 대한 염려 때문에 너무 근심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근심하고 좌절하되 신령한 근심을 해서 그 근심을 한 이후에는 내 마음에 불같이 뜨거운 사명감이 일어나고 내 마음속에 주를 향하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뜨거운 소망이 북받치는 이러한 거룩한 고민에 붙잡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희망이 있나 하면서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런 모든 고민 그리고 그 고민을 생각도 없이 입에서 쏟아내면서 그런 무기력을 사람들에게 옮기는 이런 행위들은 모두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이세상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아셨고 또 그와 같은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때가 온 것을 알고도 우리를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지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보고 미련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의 지혜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발 앞에 엎드려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에 나타난 위대한 하나님의 지혜와 오묘한 하나님의 계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식의 부요함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찬송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성과에는 상관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최선을 다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지혜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신령한 지혜에 눈뜨게 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때마다 더욱더 이 복음이 더 급히 더 다급하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빨리 증거 되어야 한다는 다급한 심령을 가져야 될 것이며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우리는 이 복음이 더욱더 수많은 사람들에게 빨리 전파되어져서 더 많은 사람들이 무지한 지혜에서 깨어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우리는 기도하면서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인간의 말로는 도저히 설득될 수 없는 무지하던 그 지혜와 그 십자가의 무지함이 지혜 없음이 오히려 지혜 있는 사람들에게 신령한 지혜를 가진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고 능력을 구하던 사람들이 십자가야말로 구원의 능력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그것은 어떻게 해서 일어난 것입니까?
바울 자신도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를 보십시오. 그는 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치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사도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서 말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그 자체는 지식에 의해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잇는 지식에 의해서 잘 설명이 되어지기만 하면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사이에 있는 벽을 무너뜨려서 그 신령한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놀라운 지식의 말로 완전히 설명되어서 신령한 은혜를 통하지 않고도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두려웠습니다. 떨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 손에 들려진 십자가의 복음과 표적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과 유대인의 그 교만함 앞에 이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말로써 설명해서 저들을 납득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그랬는데도 깨트려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특권의식이 강하던 유대인들이 마음의 벽을 허물고 이방인 헬라인들을 붙들고 나의 형제라고 부르고 입맞추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만하던 헬라인들이 자신의 지혜를 지식을 미련하다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라고 찬미하는 이 깨트려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요? 오늘 질문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왜?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하게되어졌습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 대답은 바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논리로 도저히 이해될 수 없었는데 성령이 오셔서 그 성령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복음을 증거할 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 마음가운데 역사하니까 인간의 미련함의 뿌리가 뽑히고 인간의 지혜의 뿌리가 뽑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심겨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파되어도 그 복음이 인간 그 자체를 변화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단지 잘 정리된 지식의 말씀만을 가지고는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 정결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될 때 성령이 나타나셔서 그 마음 가운데 역사하실 때 그때에 말하자면 편견이 뽑히고 주의 놀라운 말씀이 가슴속에 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떻게 예수를 믿게되었는지를 말하라 그러면 믿게되기까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있지만 이 속에서 일어난 작용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심겨진 것이 인간의 논리로 심겨져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그 심겨진 것이 신령한 세계에서 신령한 방법으로 심겨진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데... 말은 서로 못하지만 예수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오시게 되었는지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안에 주님이 계셔서라고 제가 말하면 다 이해합니다. 무엇 때문인가요?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강한 성령의 나타남과 하나님의 능력이 그 말씀사역에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자기가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성령 주시기를 즐겨하셨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성령 주시기를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때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무 성과를 받지 못하고 그 동리의 귀족들에게 항의를 받고 떠나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에 있어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는 놀라운 성령의 충만함을 다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는 비결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성령의 필요함을 절박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것이 성령이 절박하게 필요하다고 하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환경에 자기를 두어야지만 그 결핍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먹고 마시고 놀고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의 필요함을 절박하게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이 지혜를 안 주셔도 오늘은 무엇을 먹고 내일은 무엇을 입어야 할지를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하여 수고할 때 우리는 절박하게 성령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저는 주일학교를 하면서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성령 충만하지도 못하고 내가 지금 나 자신을 추수리기에도 힘들어 죽겠는데 밖에서 살아갈 때는 힘들기는 해도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하고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해주셔야 되겠다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아요. 그런데 주일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면 그것을 절박하게 느낍니다. 절박하게 느낍니다.
내가 성령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할 때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면 많이 나와서 감사하고 적게 나오면 적게 나온 것이 도전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라버리면 아이들이 많이 나오면 안심이 되니까 게을러지고, 적게 나오면 실망이 되니까 낙담이 되어서 그만두고 싶고... 이렇게 인간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좋지 못한 의미에서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늘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단상에 오를 때마다 심각한 능력의 부족을 깊이 경험합니다.
오늘 말씀 참 기가 막혔던 것 같은데 ...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건드리고 상처만 내고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장사의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어서 퓩하고 날아가서 쾅하고 꽂혀서 도저히 뽑히지 아니할 정도로 그렇게 깊숙이 꽂히는 그런 말하자면 신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바울이 끊임없이 자기의 수많은 지혜 그리고 계시에 있어서는 정말 다른 사람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그런 놀라운 계시의 세계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끊임없이 자신이나 자기의 지식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위로부터 내리는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죽는 날까지 의지했던 그 이유를 하나만 말하라고 한다면 간단합니다.
믿음이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매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붙잡지 않으면 안되는 그 상황에 자기를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매 순간 순간 자기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사명과 그리고 소명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위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칭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이런 신령한 하나님의 성령의 나타남과 그리고 능력을 향하여 목마른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제법 그리스도의 복음을 많이 전파해서 꽤 여러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들었던 사람이라면 우리는 만약에 우리가 애쓰고 수고한 모든 순간들 위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고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났더라면 우리의 정성을 다한 헌신을 통해 지금 우리들이 거두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열매를 거두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이라는 거룩한 후회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나의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나를 붙드시고 내 말을 사용하셔서 저 듣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고 그의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심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알게 하는 성령의 증거 하시는 역사가 우리의 복음전파에 항상 동행해주시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심겨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이 기가 막히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찬송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도 저럴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성령과 그 능력으로 내 마음에 이 놀라운 은혜의 복음을 심으셨으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이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 우리는 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무능한 죄인을 사용하시고 바울 같이 지식에 부하지도 못하고 아론과 같이 말에 능하지도 못한 나의 어눌한 증언을 통해서 저 사람의 마음속에 구원의 복음을 심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찬송하고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우리 안에 있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각한 결핍과 모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사도의 고백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이 고백이 옳은지 그른지를 시험해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기로 다짐하는 순수한 복음이 교회에 충만해야 할 것과 그리고 이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복음 자체로 자긍하지 아니하고 이 복음을 유효하게 하시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우리의 전파하는 복음전도 속에 늘 동행해 주시기를 기도해야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교회에 있을 때에 그 교회는 은과 금은 없어도 그리스도를 소유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