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할 사명과 기도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잠잠할 수 없는 소식(왕하 7:9) 2005.6.12 주일 오전 1
2. 마지막 부탁 (마28:19~20)2005.6.19 주일 오전 12
3. 흔들리지 말라(고전 15:58) 2005.6.26 주일 오전 23
4. 선교와 중보기도의 능력(골4:3) 2005.7.3 주일 오전 37
5. 복음의 능력과 기도(행3:1~6) 2005.7.10 주일 오전 48
1. 잠잠할 수 없는 소식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왕하 7:9)
가족시리즈를 지난주로 아쉽지만 마치고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이 본문이 담겨진 전체적인 배경을 좀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는 북 왕국 이스라엘 아합의 시대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게 됩니다. 북 왕국은 이스라엘이 되고 남 왕국은 유다가 되는데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은 남 왕국에 의해서 계승되지만 정치적으로는 북 왕국이 훨씬 더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거기에 아합이라고 하는 인물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 사람은 신앙이 별로 없는 인물로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의 아내가 된 이세벨은 멀리 페니키아 지방에서 바알 신을 섬기던 헌신된 여인이었는데 여호와의 종교가 받들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에 선교사적인 헌신된 마음을 가지고 시집온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커다란 고통을 주게 되는데 어째든 이 두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북 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 점점 잊혀져가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패역하고 불순종하던 이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던 종 두 사람을 보내어서 어두움의 시대와 맞서게 하십니다. 능력의 선지자로 알려진 엘리야와 갑절의 영광을 더해달라고 매달리던 엘리사 이 두 선지자에 의해서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그 두 선지자 중 이제 엘리사 시대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엘리사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선지자가 도단에 있을 때 종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보니 성주위에 수많은 군대들이 에워싼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선지자가 탄식하며 낙심하는 종을 위해 하나님 앞에 빌자 종의 눈이 열려지게 되었고 성을 에워싸고 있는 군대보다 더 많은 하늘 군대가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때 그 도단 성을 에워쌌던 군대가 바로 아람군대입니다. 이 아람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위쪽에 위치한 신흥국가였는데 다메섹으로도 불리는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위로 북진하려는 이스라엘과 남하해서 비옥한 팔레스타인의 네반트 지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다메섹의 충돌은 매우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아람군대가 또 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된 것입니다.
도단성에서 엘리사를 포위했던 아람군대들은 엘리사의 한번의 기도로 모두 장님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른 성으로 이끌어지고 성으로 이끌려져서 갇히고 이제 그들을 모두 죽일 수 있게 되었는데도 엘리사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다가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군대가 오늘 이 북 왕국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수도인 사마리아를 포위하게 되었으니 왕인 아합의 복장은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말하기를 엘리사 이 사람의 목이 붙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리라 그렇게 하면서 그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엘리사에게 떠넘기며 엘리사를 향한 미움과 복수의 감정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마리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대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변경에서 일어난 공격이 아니라 이미 전선에 밀려서 사마리아까지 포위할 정도가 되었고 왕까지 그 성에 갇히게 되었으니 국운이 백석간 뒤에(?)놓여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보급로가 끊어지게 되자 그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게 됩니다. 결국은 그 모든 곡식이 바닥난 다음에 오늘은 네 아이를 내일은 내 아이를 서로 잡아먹는 사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때 선지자가 이제 날이 밝으면 곡식 값이 다시 떨어지고 사람들이 풍족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와 같은 고통스러운 전쟁의 상황에서 일어난 이야기 한 토막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데 이 성경의 보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할 시급성과 태만한 의무의 심각성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성밖에 오늘 문둥이 네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문둥병은 그 당시에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질병으로 분류가 되었고 전염성이 매우 강한 질병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곳에 거할 수 없었습니다. 성전에 갈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엄격한 격리가 요구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네 명의 문둥병자가 오늘 사마리아 성 밖에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전선이 서로 대치된 가운데 그 중간 지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도 굶주렸으니 보급로가 끊어진 성밖에서의 문둥병자의 삶은 그들의 문둥병의 현재만큼이나 심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몹시 굶주리게 되었고 그래서 성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성에 있는 사람들도 양식이 없어서 모두 굶어죽는다는 소리가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자니 굶어죽을 것이고 성안에 들어가 봐야 결과가 마찬가지니 갈 수 없었고 문둥병자들은 함께 의논을 하다가 우리 차라리 그럴 바에야 손들고 아람군대에게 가서 항복을 하자. 죽이면 어차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것이고 혹시 산다면 먹을 것을 주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아람군대로 걸어 내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람군대에 가보니까 손을 들고 항복을 하기 위해서 걸어갔을 것입니다. 항복할 준비는 되어 있는데 손들라고 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진에 가보니까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있는데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음식도 식료품도 마실 것도 그대로 남아있고 심지어는 장비와 말까지 남아 있고 보물도 그대로 남겨두었는데 아람군대는 한명도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유는 황혼이 질 무렵에 하나님께서 아람군대에 이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성을 함락할 날을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는 그들의 귀에 동시에 어마어마한 말발굽 소리와 대군의 함성소리를 듣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아람군대는 즉시 이 어마어마한 군대는 이스라엘이 가졌을 리가 없는 군대이고 틀림없이 다른 나라와 그리고 특별히 애굽의 대군들을 돈을 주고 사서 용병들을 불러온 것이니 저들과 맞서면 우리는 멸망하리라 큰 두려움이 그들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급히 식료품과 군 장비는 물론이고 말까지 내버려두고 그리고 황급하게 도망을 가고 그래서 적군들이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있던 큰 적군의 진영은 아무도 없는 무주공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네 명의 문둥이가 이제 그들이 남겨두고 간 진에서 먹을 것을 먹고 필요한 보물들을 챙겼다고 하는 이야기를 오늘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들이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은 이 기쁜 소식은 잠잠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의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침묵할 수 없는 엄청난 소식이라고 그들은 외쳤던 것입니다. 도대체 그들이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침묵할 수 없었던 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쟁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적군은 모두 사라졌다고 하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소식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극심한 굶주림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다쳐서 공포에 떨며 두려움 가운데 밤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제일 처음 그들이 아람군대의 진영으로 달려와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제일먼저 찾았던 것은 먹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제 여기저기서 먹을 것들을 찾아내어서 허겁지겁 자신의 배를 채우는 동안에는 아마 두고 온 사마리아 성도 거기에 있는 동포도 생각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음식을 어느 정도 먹고 배가 부르게 되자 그들은 두고 온 동포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모든 아람군대가 철수하고 먹을 것이 지천으로 남겨지고 보물들까지 여기저기 흩어져있는데 이렇게 기쁜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적군이 모두 사라진 벌판을 응시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의 두려움과 굶주림에 떨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은 습관적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태도, 우리의 신앙생활의 방식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부합하고 이치에 맞는지를 성찰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중요한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행동하기 쉽고 마음에 마땅히 품어야할 정당한 생각은 버리고 품지 말아야 할 부당한 생각이나 정서들을 갖고 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은 더욱 뼈저리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 네 명의 문둥병자가 잠잠할 수 없었던 소식은 그 대의야 전쟁이 끝난 것이지만 그들이 예전에 받던 고통과 대비해서 생각할 때 그들이 속히 전해주지 않으면 안 될 기쁜 소식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주린 자였던 자신들이 배부르게 되었다는 관심이었습니다. 거기에 남아 있는 많은 식료품과 음식들은 자기 네 사람을 배부르기에 충분할 뿐 아니라 이 사마리아 성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에 갇혀 있는 모든 백성들을 기아상태에서 구하기에 충분한 양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이 굶주림 속에서 배부르게 되었다는 이 소식을 그들에게 희망과 함께 전해야했습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굶주렸던 네 명의 문둥병자 속에서 우리는 우리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와 십자가의 은혜로 그분의 생명의 양식을 먹고 배부르기 전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는 문둥병자와 같은 상태였고 그 위에 또한 견딜 수 없는 허기짐을 가진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육신으로만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육신은 그릇이고 그 그릇 안에 우리의 속사람 영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의 육신이야 이 세상에 있는 양식으로 배부르고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육신의 삶을 영위하게 되지만 우리의 속사람인 영혼은 하늘의 양식을 필요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스스로 이런 이치를 망각하고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 인해서 스스로 부요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을 때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을 뵙고 합당한 구원의 은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부요한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불의하고 악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던 것과 놀라운 대조를 이룹니다, 이것이 어제나 오늘이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시는 우리 하나님의 방법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맨 처음 이렇게 핍절한 상태가 되어서 영혼의 허기짐을 끌어안고 주님을 찾았을 때도 바로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양식, 그것으로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깊은 곤궁함과 굶주림은 마치 아람군대를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항복하며 걸어가던 문둥병자와 같은 절대 절명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그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고 그 복음을 사용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역사로 말미암아 누구도 쉽게 돌려놓을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그 죄를 우리의 마음에 확신시켜주셨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을 하나님을 떠나고 내 마음대로 살았던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복음의 밝은 빛으로 우리 자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로 말미암아 상하고 문둥병자와 같이 망가진 우리 자신을 보여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 밖에서 오는 주님의 치료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전심으로 갈망하게 되었으니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여 우리를 성령의 은혜로 용서해주셨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 충만한 양식을 먹으면서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에 만족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그 말씀 속에서 우리들이 영혼의 만족과 배부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이 나시기나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이 오랫동안 인생의 허기짐을 면하고 그 말씀의 은혜로 우리의 영혼에 가득 채워져서 우리들이 배부르게 되었을 때 우리의 눈에는 끊임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에 흐르는 감격의 눈물과 함께 아직까지도 핍절한 채 굶주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가족과 형제들, 골육지친들 그리고 내 동포, 얼굴과 눈빛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미전도 족속들에 대한 생각이 우리에게 그런 뜨거운 눈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외신과 국내에 있는 언론을 통해 들려오는 보도에 의하면 조속한 시일 내에 북한의 식량을 공급하지 않으면 360만 명 이상이 굶주릴 것이고 그중에 상당수가 아사할 것이라는 슬픈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994년도의 최악의 식량난이 북한에 밀어닥쳤을 때 어느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200만 명의 사람이 굶어죽었고 동리마다 그 시체를 치우는 것이 큰일이었다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어떻게 하든 우리들이 도와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동포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많이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런 육체의 굶주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영혼의 굶주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갈이고 진리의 샘물이 말라서 목마른 그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더 불행한 일이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비참한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우리들이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한 공급을 받게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언젠가 저희교회 새 가족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체계적으로 목자와 양을 쭉 공부하던 어느 지체가 교역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전도사님, 옛날에 제가 있던 교회에는 이런 지식의 빛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풍성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일까요? 하면서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던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정말 갖기를 원하시는 그 마음입니다.
이 메마르고 핍절한 시대에 우리 주님이 아직도 여기에 계셨더라면 그런 사람들 때문에 늘 그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멸시와 욕을 당하신 그분의 생애에 모든 발자취는 골고다 언덕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부요하신 그분이 가난해지셨고 굶주린 우리를 먹이시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하늘의 생명 떡이 되어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쪼개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까지 이어진 그분의 지상 생에 모든 발자취는 그냥 걸어가신 길이 아니라 당신이 뿌리신 눈물을 밝고 걸어가신 발자취였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바로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던 자신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그분에게 있어서 자신에 대한 슬픔은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골고다의 언덕에 이르는 그 발자취까지 그분이 당신의 눈물을 밝고 걸어가셨을 때 그 눈물의 의미는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눈물이었고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을 위한 흐느낌이었습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러니 그 주님이 지금 여기 계셨더라면 그분의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있으셨겠습니까? 지금 여기 계셨더라면 아마 지금도 당신이 흐르는 그 눈물을 밟으며 과천으로, 평촌으로, 안양으로, 서울로, 대구로, 부산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니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배부름을 깊이 경험했을 때 이 네 명의 하찮은 문둥이는 그 소식을 사마리아 성에 오늘 밤 안에 전파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천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화급함을 느꼈습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습니까? 처음 회심할 때 가졌던 그 착한 마음, 우리 어머니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면 제 생명을 거두어 가셔도 좋습니다. 내 아버지가 주님께 돌아올 수 있다면 내 동생, 내 가족들이 주께 돌아올 수 있다면, 내 이웃과 내 동포가 예수의 사랑을 알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도 좋습니다. 그 처음 고백이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물론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 우리는 놀지 않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어떤 분들은 탁월하도록 예수의 손에 사로잡혀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더 많이 울었더라면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더 많이 품고 우리에게 임한 우리를 배부르게 한 소식, 핍절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고 주려죽는 우리의 영혼의 원기를 공급해주신 이 복음의 기쁜 소식, 예수 안에서 이미 획득된 이 놀라운 하늘의 은혜로운 유업들을 누리며 우리들이 배부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더 많이 눈물을 흘렸더라면 맨 땅을 밟으며 섬겼던 우리의 섬김이 그런 섬김이 아니라 우리의 눈물을 밟으며 걸어간 예수님의 섬김이었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쯤 가족예배를 드리고 있을 것이며 우리의 친구들은 더 많이 주님께 돌아왔을 것이고 온 땅에 주님을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것이고 생명의 유업을 함께 누리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사람들이 더 많이 손에 손을 잡고 우리 주님의 이름을 찬송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의 불충함을 용서해주시기를 빌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 처음 정신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복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마음으로 살고 싶어 했던 그 착한 정신과 마음, 그것이 우리들이 돌아와야 할 초심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잠잠할 수 없이 전파해야 하는 중요한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들이 잠잠할 수 없는 소식은 그들이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으로 배불렀을 뿐만 아니라 지천으로 흩어져있는 수많은 보물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보물 중 일부를 감추었지만 그 보물은 사마리아성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나누어가져 핍절함을 면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많은 보물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악 된 세상의 성에 갇혀서 두려움과 영혼의 주림 속에서 떨다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 은혜의 벌판으로 나왔을 때 거기에는 무엇이든지 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법적으로 하늘나라의 유업을 소유할 수 있는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유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고통을 받으면 괴로웠고 그리고 시련이 오면 이를 악물고 외로움 속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를 열고 성령의 신령한 위로와 하늘에 속한 유업들을 우리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고난도 이기며 찬송할 수 있었고 전날에 두려움이 변해서 우리의 노래가 되었고 지난날의 한숨이 변해서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고난 속에 외로웠지만 지금은 주님이 동행하고 계십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잖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동행하는 축복들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그 열려진 하늘의 문을 통해서 우리 속사람 영혼이 필요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눈부시게 부어져 쏟아졌습니다.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그 놀라운 유업들을 누리면서 우리는 오히려 주님을 멀리 떠나 살 때에 전혀 맛볼 수 없었던 하늘의 희락을 맛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영생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주님 앞에 자기를 이처럼 이 땅에 살려두신 사명을 깨닫고 강물처럼 흘러가고 싶어 하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이 빈손 들려 이 세상에 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생명과 건강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많은 물질을 주셔서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하늘은혜로 여러분들을 가득 채워서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고 밥이라도 먹게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물질을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은혜의 들판에만 나오기만 하면 아람군대는 도망갔고 모든 보물을 함께 누릴 수 있음에도 불과하고 단지 그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성안에서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서 떨며 밤을 지내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주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이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그의 피로 이루신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많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보혈의 물에 씻고 그것을 마시며 즐거워하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직도 가난하게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때는 그들의 가난함을 인해서 우리가 많이 울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제는 점점 그런 기도 소리가 사라지고 교회는 각기 저마다의 즐거움에 빠져 있어서 제임스 파커가 언급했듯이 즐거움을 찾다가 천박해버린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진지한 슬픔대신 값싼 기쁨들이 교회에서 환영을 받고 심각한 복음과 진리대신 경쾌하고 가볍고 즐거운 놀이들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즐거워하지만 주님은 슬퍼하시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기쁨을 얻지만 진정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에 속한 독특한 기쁨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교제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에 그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이런 주님의 음성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이 시대의 선각자들로 아버지 앞에 다시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17년 전에 제가 어느 집회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했던 각기 다른 두 자매가 각기 다른 시간에 와서 똑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감당할 수 없는 괴로운 일이 있는데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 수십만 명의 울부짖는 신음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기 기도를 하려고 시작했다가 결국은 그 울부짖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성령님이 얼마나 기도를 시키시는지 성령님이 자기 육체를 사용하셔서 오셔서 당신 기도를 실컷 하시고 빠져 나가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라고 확신합니다.
지금도 눈을 조용히 감고 이 도시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사람들의 영혼은 울부짖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은 이 세상에 있는 것 말고 우리의 기갈을 면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작 영혼의 그 부르짖는 외침을 거절하고 영혼이 도저히 만족을 누릴 수 없는 그 영혼에게 잠시 즐거움을 누려보라고 말하니 영혼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우리 주님의 아픔은 계속 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만 생명수는 말랐도다
인애하신 우리 구주 의의 심판 하시는 날
곳 가까이 임하는데 믿는 자여 어이할꼬
그들은 주림을 면했을 뿐 아니라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동포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람군대가 남기고 간 보물이야 한정이 있었지만 예수 안에서 그의 피 공로를 의지해서 우리에게 부여된 하늘의 기업에는 한정이 없지 않습니까? 내 동포와 이 땅에 예수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먹고 마시고 누린다고 할지라도 다함이 없는 그 풍부한 공급을 남겨두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처음 회심했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 놀라운 하늘의 은혜와 이 땅의 복들을 공급받으면서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모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죽음의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많이 울었습니까? 우리 가족, 때로는 얼굴도 모르는 내 동포, 피부 색깔도 모르지만 이 땅 어느 한구석에서 예전에 나처럼 두려움과 결핍 속에서 떨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일평생 동안 간직하며 살게 하시려는 착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실에 기초해서 이 문둥병자들은 자신들의 침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침묵, 그것은 옳지 못한 소위라고 하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만약에 우리가 이 기쁜 소식을 제일먼저 맛보고도 여전히 전쟁의 두려움과 굶주림 속에서 자기 아이를 잡아먹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 동포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일이고 천벌을 받을 죄라고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복음에 관해서 똑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내가 복음에 빚진 자로다. 내가 이 복음을 화급히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사도 바울에게 빨리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사도는 복음 안에 있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자 쓰레기 같았던 옛 삶을 포기하게 되었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자랑하고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 흠이 없던 그 생명 없는 어두운 날들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 무지 속에서 주님을 몰라 주님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이루셨으니 이제 믿음으로 이것을 누리면 된다고 하는 이 기쁜 소식을 몰라서 여전히 자기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동포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사랑이 그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 네 명의 문둥병자가 반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반성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값진 은혜의 보배들을 많이 발견하고 핍절하고 굶주렸던 영혼들이 예수 안에 복음의 떡으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었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생명을 원하십니까, 우리의 재능을 원하십니까, 우리 무엇을 원하셨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셨던 것은 그런 회심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까? 주님의 마음은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이 땅에 이 기쁜 소식을 자기의 아들을 피 값을 주고 이루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을 몰라 어두운데 떨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 슬퍼하시는 마음이 엄마 하나님의 마음이고 아빠 하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진실한 신자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 하나님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실한 신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침묵하는 죄 속에서 살았습니다. 거기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예전에 그렇게 큰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이 구원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격이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부패했기 때문이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부패하게 된 이유는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소명을 받은 우리가 모든 개별적인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이 소명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혜는 세상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우리 안에 스스로 갇혀 결국은 우리 안에 부패한 성품으로 말미암아서 결국은 은혜도 함께 부패하게 되었고 우리의 마음에서 그런 사랑도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맨 처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여러분들이 얼마나 그 생명의 떡에 배불러하고 기뻐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모든 양식이 똑 떨어지고 이제는 수백만 명의 사람이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주님이 내려주신 양식은 선조들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었고 후손들도 맛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었으니 만나였습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면 이슬과 같이 하얀 것들이 가득 내려 이동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지면에 가득했고 바가지를 가지고 와서 일용할 양식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꿀 섞은 과자와 같은 맛있는 그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먹으면서 그들이 좋으신 하나님을 얼마나 마음깊이 찬송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소명에 부르심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지 않았을 때 그 감격하던 만나는 언젠가 후에 맛대가리가 없는 만나 따위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소식을 들으니까 제가 아는 어느 후배 목사님이 목회를 잘 하고 있는데 교인들이 하도 속을 썩이니까 어느 날 갑자기 설교단에 올라가서 나 한 달 동안 설교를 하지 않을 것이니 굶으라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개인적으로 10년 동안 여러분들을 섬겨오면서 가장 아팠던 때는 가난할 때나, 주위에서 박해를 받을 때나, 교회가 난관에 처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괴로울 때는 여러분들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그 생명의 떡인 말씀을 기뻐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 한 가지 소원이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언젠가 한번 실행에 옮길까도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떡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기 내버려두고 전하면 허겁지겁 달려와서 떡을 먹고 그 기쁜 떡을 아직까지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 그곳이 도시든지, 시골이든지, 농촌이든지, 해외든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반성해보십시오. 이 보잘 것 없는 문둥병자들이 실컷 배부르고 먹은 후에 진지하게 자신들의 태도를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도다. 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맨 처음 주님을 만나고 그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우리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했는지 기억나십니까? ‘나 같은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쓰레기 같은 죄인’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에 살든지 또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입술에 혀가 굳어질 때까지 우리의 혈관의 피가 식을 때까지 우리의 걸어 다닐 발의 힘이 아직 남아 있을 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은혜를 굶주린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소박한 소망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먹고 마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그런 순례자의 삶이 있습니까? 이 세상은 다만 나그네길 나는 다만 나그네, 주님 한분으로만 만족해서 살며 불속이라도 들어가서, 물속이라도 들어가서 이 복음을 나누어주며 살겠다고 하는 그런 진지한 몸부림과 외침이 정말 우리에게 남아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 부요해진 우리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요?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길거리에서 말로 사셨습니까?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 피를 흘려 우리를 사셨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최고로 값진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해내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셨고 우리의 의무는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신 십자가의 보혈을 기억하며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끊임없이 숙고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며 만물의 찌끼와 같은 존재며 오늘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대들이 모든 자원과 이 땅에 있는 물질, 그대들에게 있는 시간, 그대들에게 있는 재능, 심지어는 그대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목숨까지도 사실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한시적으로 위탁한 것들이 아닐까요?
오늘 문둥병자들이 자신들을 반성하며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이 거기서 먹고 마시는 것이 죄악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들의 고통, 아이를 잡아먹으며 굶주림을 연명하는 그 아비규환과 같은 사마리아 성의 비극을 생각했을 때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지 되겠습니까? 우리의 가장 시급한 것은 이런 반성을 기초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리고 주님이 은혜의 벌판에 굶주린 그대들을 먹일 양식과 가난해진 그대들을 부요하게 할 모든 값진 것들을 예비하셨으니 이 안에 와서 이것을 누리라고 누군가가 외치기만 하면 성문을 밀치고 수많은 인파가 그 성에서 쏟아져 나와 이 풍족한 은혜를 누릴 텐데 그 일을 누가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배를 타고 대동강에 와서 순교했을 때 복음 한번 외치지 못하고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실패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받으며 그가 떨고 놓고 간 한자 성경 하나가 이 땅의 복음이 심겨지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인간이 보기에 가장 미련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데 이것이 선교 사역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게 나타납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작정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 쏟는 헌신위에 순교의 희생위에 조국의 교회가 섰습니다.
선교의 역사를 보면 저 위에 북극에 몇 명 살지 않는 에스키모인들을 위해서 사명을 받고 복음을 전파했던 많은 이름모를 선교사들의 일화가 적혀 있습니다. 문화의 차이로 인해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아 죽기도 하고 얼음벌판을 누비며 영혼을 찾아 헤매다가 얼어 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치열하게 헌신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을 인해서 안타까워하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이 복음의 떡을 나누어주고자 눈물을 흘리는 헌신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이 복음은 전파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는 앞당겨졌습니다.
지지난 해에 우리지체들이 시골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무 교회 전도 때에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농촌은 모두 죽어가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만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황폐해져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 왔다고 그러면 지렛대를 들고 불호령을 치던 시골 노인들이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는 많은 지체들의 이야기에 귀를 열었습니다. 뜸을 떠주며 안마를 해주며 발을 씻겨주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70이 넘어 이제는 자녀들도 모두 도회지로 가고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노인네가 복음을 들으며 굶은 주름 사이로 뜨겁게 눈물을 흘리던 그 모습은 우리들이 잊어버릴 수 없는 모습입니다. 지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들은 어느 할아버지가 그렇게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신 분이 있다면 왜 이제야 내게 말하는가 하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메아리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이 주님을 믿으면 얼마나 주님을 섬기다가 가겠습니까? 그러나 그 노인들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복음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찾아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외치지 않으면 듣게 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일을 내일, 내달에 다음에 하는 그것이 하는 게 아니라 속히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시급히 이 일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때로는 먼 나라로 가서 이 복음을 전할 때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우리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 놀라운 소식을 유창한 언어로 전달할 수 없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줄 수 없는 그곳에 가서 그들의 오른손이라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함으로 말이 통하지 않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어도 그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요?
예수의 넓은 사랑을 그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들에게 가서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깊고 깊은 시골로 내려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명민한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모두 시골에서 떠났으니 할머니 할아버지밖에 없어서 우리가 전한 복음교리의 내용을 다 못 알아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그래도 전할 수 없으면 그분들을 끌어안고 그들이 울 수 없는 그들의 죄를 위해서 대신 울어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감격할 수 없는 많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대신 감격해주기만 해도 그 동리에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부르셔서 하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시며 예수를 믿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임한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기쁨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고 이 복음이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 복음에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문둥병자 네 사람이 사마리아성에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할 때 그들이 전쟁의 두려움으로부터 굶주림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은혜의 벌판에 달려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가장 하찮은 문둥병자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둥병자보다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 은혜를 깨달은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더 귀하게 사용하시겠습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서 아직 데려가지 않고 남겨두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마지막 부탁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실 때 마지막 남기신 기도는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로부터 시작해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라는 일곱 마디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함께 계셨고 마지막 승천하실 때 남기신 말씀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부탁을 마지막 부탁이라고 하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겨두신 마지막 부탁이 바로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당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런 예수님의 명령을 가르쳐서 더 이상 중요한 명령이 없다고 해서 ‘지상명령’이라고도 말하고 ‘대위임’이라고도 우리들이 표현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다가 “그러므로” 라고 말씀하셨는지 바로 그 앞부분을 보면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일생을 사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일체의 순종의 삶을 사시면서 율법아래 태어나셔서 율법으로 치면 죽어야 마땅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33년을 사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야 되셨지만 하늘에서 내려오시면서 바로 십자가로 올라가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께는 우리의 죄를 위해 구속하시기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이외에 또 다른 목적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시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 말고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으니 그것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당신의 온 몸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고 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참으로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되는지 모본을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33년 특히 공생애 3년간을 우리와 함께 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전에 우리와 함께 사셨던 이유입니다.
이미 창조 시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시고 우리 인간을 뛰어나게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역사 가운데서, 아브라함의 가족의 역사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모두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기록한 사랑의 역사책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많이 경험했지만 하나님이 보이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도 그들에게는 항상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래서 우리를 그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당신의 살아있는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3년 동안 보여주신 죄인을 향한 그 한없는 동경과 연민, 그리고 연약한 자를 위한 그분의 놀라운 도우심, 이 모든 것들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내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직접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이 병든 자를 고치고 무지한 자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며 힘이 없어서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생애를 통해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계명을 받았지만 실제로 그 계명을 어떻게 준행하면서 사는 것인지 깨닫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 실제로 당신 자신이 온 몸으로 그 계명을 실천해보이며 사심으로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주님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사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셨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떠난 많은 사람들을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당신 스스로 생명을 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런 의문이 제기됩니다. 그 일을 하던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그리고 만약에 승천하신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던 그 일은 누가 뒤이어서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그런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직접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다시 올라가시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남기신 지상명령은 당신이 하신 일의 뒤를 이어달라는 예수님의 당부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남긴 유언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때로는 부모에게 불효하고 막 사는 자식이 있다고 할지라도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 남긴 유언은 받드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명령을 주셨지만 이 지상명령은 주님이 유언과 같이 우리에게 남겨두신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때 주님은 당신의 이 유언을 받든 것에 대해서 제일먼저 우리에게 물어보실 것입니다. 그때 신자의 일생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산 일생이었든지 간에 주님의 이 유지를 따라 산 삶이라면 주님을 기쁘게 뵈올 수 있을 것이나 그가 이 세상에서 무슨 지위를 누리며 많은 것을 가지고 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유를 따라 살지 못했다면 주님을 다시 뵈올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실 때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실 때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이제 더 이상 병든 자가 없고 복음이 무지한 자가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 참된 신자로 만들어야 할 무지한 사람들이 다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아주 작은 일이었습니다. 세계는 넓고 보내야 할 복음은 놀라운 소식이었지만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한구석에 계시면서 그러면서 몇 개의 동리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곧 승천해버리셨습니다. 주님이 이 마지막 유언을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을 그때 이 세상은 아직까지도 당신 자신이 섬겨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이제 그 모든 것을 두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고 그래서 구원의 길을 여신 그 공로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맡기셨으니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주셔서 예수님으로 하늘나라의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 이 땅에 모든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우주를 다스릴 수 있는 통치주의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로 그분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 그분을 주인이라고 부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권세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런 하늘과 땅의 놀라운 권세를 가지신 것과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까 이제 하나님은 팔레스타인 땅에 계셔서 병든 자를 고치고 무지한 자를 깨우치는 일을 직접 하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가지셨던 그 비범하고 놀라운 능력과 권세를 하늘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당신의 이 마지막 유언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의 이 마지막 부탁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마지막 부탁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세 가지로 집약이 되는데 첫째는 제자를 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세례를 주는 것이었고, 그리고 세 번째는 주께서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지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여기에 보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을 희랍어성경에서 보면 좀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제자를 삼으라. 이것만 명령으로 나오고 너희는 가서 그 다음에 두 번째 세례를 주고 세 번째 가르쳐지키게 하라. 이 모든 것이 분사로 나옵니다. 분사는 동시에 일어나는 어떤 동작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번역이 되는가 하면 너희는 가면서 세례를 주면서 내가 네게 분부한 것들을 가르쳐지키게 하면서 제자를 삼으라.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선 첫째로 제자를 삼으라고 이 명령형의 문제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제자를 세 가지 용례로 사용되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열두 제자, 예수님이 사도로 삼으신 열두 제자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바로 이 제자라는 단어입니다. ‘마데케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제자라는 말의 의미가 가장 좁은 뜻으로 사용되었을 때 열두 명의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서 모든 것을 제쳐놓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들, 예를 들자면 72명의 전도대 같은 이런 사람들을 두 번째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사용될 때 그릇된 의미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꼭 열두 제자가 아니더라도 자기 생활을 더 전적으로 포기하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가르쳐서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더 넓은 뜻으로 이 제자라는 말이 사용되었을 때는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믿은 지 하루밖에 안되었어도 그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모두 제자라고 보았고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오는 자체를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너희는 모든 족속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 이것은 이제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넓은 의미인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는 이것은 모든 족속에게 이 복음을 전해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였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모든 족속”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유대지방 중심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셨지, 선교 여행을 떠나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섬김을 통해서 이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갇혀질 그런 성질의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분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이방 여인, 혹은 사마리아 여인같이 유대인이 상종을 안 하는 그런 버려진 족속들과 상대하시면서 그들에게도 구원을 베풀어주심으로서 이제 때가 되면 이 복음이 만방의 모든 민족들에게 전해질 것임으로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이방인들, 피부색깔과 문화, 언어와 지역에 불과하고 그 많은 족속들에게 전파될 것은 이제 성령이 오신 후에 당신을 믿는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위임한 일들을 충실히 수행하시고 우리에게 유언으로 그 사명을 물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이 땅에 계속 계셨더라면 예수님이 하셨을 그 일이 바로 이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피부색깔과 얼굴, 그리고 문화와 종교 모든 생활이 틀린 이방백성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실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바로 이 일을 하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남기신 마지막 명령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피부색깔이 같고 그리고 모두 문화가 같고 그리고 비용을 얼마 들이지 아니하고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같은 민족, 같은 사회 안에도 아직까지도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많은 희생을 치르고 많은 비용을 부담하면서 멀리 있는 사람들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이면서 복음을 전파할 때 이 민족 가운데서 항상 성공적인 복음적인 역사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생을 버마 선교사로 헌신하였던 아도니라는 저드슨은 미국에 보스톤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그 사람이 미국에서 좋은 사역지가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서 불교의 땅 버마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이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영혼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전도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를 많이 하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나중에 토요일 전체를 하나님 앞에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로 바쳤다고 하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을 전도해서 세례를 주는데 6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피를 말리는 헌신과 하나님 앞에서 진액을 짜서 바치는 기도 속에서도 선교의 문이 열리지 않을 때는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미얀마라고 이름을 바꾼 이 버마는 전 세계에서 인터넷이 통용되지 않는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몇 안 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엄청난 박해와 단속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선교사들이 가있지만 선교를 한다기보다는 선교할 수 있게 될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그렇게 진척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우리들이 더더욱 그렇게까지 하면서 본국을 내버려두고 이 민족에게 가서 그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주님의 마지막 부탁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당신에게 있기 때문에 너희는 가서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 속에서 복음의 성공이 지연되고 있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한명을 예수 믿게 하고 세례를 주는데 6년이 걸렸던 아도니라는 저드슨은 마지막 그곳에서 자기의 선교 사역을 마치기에는 6만 여명의 가슴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등불들을 밝히고 죽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 도처에는 이 그리스도를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아는 사람이 없어서 어두움과 무지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비록 우상을 섬기면서 무지와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들이고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참된 신자가 되어가려고 애쓰기만 하면 우리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수 있는 훌륭한 주님의 피조물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너희는 가서” 이 부분이 희랍어 성경에 분사로 되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너희는 가면서 여기에 머물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면서 그러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러면서 가르쳐 분부한 것을 지키게 하면서 이 모든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야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똑같은 사상이 사도행전 1장에 나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 이것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다 더 넓은 지역, 그 다음에 있는 사마리아 지역, 그 다음에 땅 끝에 있는 지역, 이렇게 복음이 차례대로 전파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희랍어 성경에 보면 엔드 엔드 보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에서도 또 유다에서도 또 사마리아에서도 그리고 또 땅 끝까지도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커다란 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인 예수의 복음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입니다. 가까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한번도 만난 적이 없고 본적이 없는 사람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대면할 리가 없는 사람들, 그들도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도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이 숨겨져 있고 주님께서는 그들이 정말 회개하고 당신의 품으로 돌아와서 당신의 양떼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면서 그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버리셨고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그 일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셨습니다.
도대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 좋은 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예수의 마음을 품은 생활입니다. 그분의 품에 안겨서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이라면 그분의 심장에 귀를 대고 그분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이 좋은 땅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복음의 해택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복음을 만날 수 있고 또 훌륭한 목회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자기가 의지만 가지고 있으면 진리의 말씀들을 접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데 있어서 무지한의 자유를 누리면서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심장의 박동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구원하기로 주님께서 선택하셨지만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서 외치는 자가 없어서 손들고 주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오지 못하는 수많은 민족들을 향한 주님의 찢어지는 아픔이 여러분들에게 느껴집니까? 이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착한 신자입니다.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 신자들이 예쁜 신자입니다. 얼굴도 모르고 피부색깔도 모르는 너무 비참한 가운데 살고 있는 민족들에게 예수의 이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당부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를 누리며 살고 있는 발전한 민족들도 있고 또 이 세상에는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런 인간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액수의 돈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이 세상에 너무 너무 많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고 예수의 사랑으로 그 비참한 처지에 처한 그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 살아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 마음을 품고 이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어두운 눈을 뜨게 하셔서 우리로 복음의 빛을 받게 하시고 짐승과 같은 삶에서 벗어나서 성화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어두움과 그 모든 죄를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게 하신 것이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족속이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될 그날을 꿈꾸며 숨질 때까지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끊임없이 파송되어야 하고 파송된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피 흘리며 죽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보낸 그 선교사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지 되고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많은 자원들 중에 상당부분을 영혼을 구원하는 그 일에 헌신적으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때 그렇게 충성스럽게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이 일 위에 헌신했을 때 그때 주님을 다시 뵈올 때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이 큰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들이 가지 않으면 도저히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그 먼 곳에 가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마어마한 일들은 아닐 것입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어제도 보니까 몽골로 떠나는 지체들이 이상하게 생긴 말들을 외우면서 그러면서 몽골말 몇 마디를 열심히 익히는 것을 배웠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며칠 배운다고 몽골말을 배울 것은 아니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들을 수 없는 기쁜 소식을 이들이 가서 더듬더듬한 목소리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당신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들을 수 없는 이 한마디의 음성이라도 들려주고 온다면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성령님께서 그들 안에 충만한 역사를 불러일으켜서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실 것이라고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당부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참상들을 소개한 그 글을 읽고 마음속으로 눈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너무 너무 무서운 일들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다이아몬드를 보는 눈이 틀려졌습니다. 원래부터 저는 그런 보석을 좋아하지 않고 있고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그 다이아몬드가 인간들의 피에 젖은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하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정보군과 반군들이 싸우고 그것들을 차지하는 것을 가지고 재원을 삼아서 그것으로 마약을 사다가 마약을 어린아이들에게 주고 마약에 중독 되게 해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편에 서서 자기네 군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13-4세밖에 안되는 애들이 총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죽입니다. 무지막지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무엇으로도 그들에게 계속되는 그 비참한 불행을 종식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화목케 하는 예수의 복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가서 그 족속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주겠습니까? 우리의 근심과 많은 걱정들은 너무 사치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두 번째는, 세례를 주면서 그랬습니다. 이 당시의 세례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제는 내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제부터 믿기로 노력하겠다는 표가 아니라 믿으려고 애쓰던 과정이 끝나고 이제는 완전히 믿게 되었다는 표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 앞에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을 얻을 길이 없으며 그분 안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구원을 받아들이고 나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믿어가는, 믿기 위해서 애를 쓰던 과정이 끝나고 이제는 완전히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세례의 표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보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과정이 끝나고 이제는 나는 완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모든 의심과 회의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예수님이 내 구주이신 것과 그분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이제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과 그분의 모든 명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는 것이 나의 본분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라는 그 고백이 세례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주님의 마지막 부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믿으려고 하지만 아직까지 믿어가려는 과정이 끝나지 않은 사람들, 의심과 회의 속에 있는 많은 사람이 내게 믿어가는 과정이 끝나도록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가 성장하고 커지면서 많은 것들이 처음과 달라졌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하나님이 이 교회를 세우실 때 제게 주셨던 계시의 마음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을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저로 하여금 이 교회를 세우게 하였고 저는 다만 도구였고 주님이 그 마음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읽게 하셔서 이 교회가 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짧지 않은 세월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오셨습니다. 그 기본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날 드리는 이 예배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처음 교회를 설립할 때 부어지는 예배의 축복보다 덜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날마다 더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선교적인 상황은 많이 변했습니다. 처음 지하실에서 교회를 세울 때는 뜻을 세우지 않고는 찾아올 수도 없는 동네 저 한복판 구석에 있는 지하실 교회였습니다. 물어물어 찾아왔던 사람들이 사당 네거리에서 찾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사당 네거리에 가니까 빨간 벽돌로 지은 큰 교회가 없어서 그냥 갔다는 그런 일화도 있습니다. 빨간 벽돌은 맞는데 빌라 지하실에 있는 그런 빌딩이었습니다. 그때에 많은 영혼들이 그곳에 와서 복음을 듣고 변화되었습니다. 두 번 교회를 세우다 문 닫고 나간 자리에 저희 교회가 깃발을 꽂고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막 시작했는데 동네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이 우리가 교회를 수리하는 것을 보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무슨 격려나 해주려나, 하고 인사를 했더니 만나자마자 계속 혀를 차는 것입니다. 쯧쯧! 잘못 왔어. 여기는 교회가 안 되는 자리인데 세 번 그 이야기를 하고 뒷짐을 짓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그랬습니다. 되나 안 되나 두고 봐라. 남의 교회에 왔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제가 한번 기도해드리겠다고 그러고 가지, 그래도 많은 영혼들이 그곳에 왔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변화되었습니다. 그때는 여러분 같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모두 이 세상에서 찢길 대로 찢겨서 교회에 왔을 때는 거의 믿어가는 단계가 끝난 사람들,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올 준비가 거의 끝난 사람들이 방송을 듣고 책을 읽고 설교를 듣고 이러고 준비된 후에 교회에 와서 예배 시간에는 쓰러질 듯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새가족반에서 새가족 공부를 참석하십시오. 오후 예배를 드리고 가십시오.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할 교인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모두 아침에 오면 저녁 늦게까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오전과 오후 예배 사이에는 열심히 나가서 동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주님을 섬기다가 주일에 흩어져서 수요일에 다시 모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 이사하고 이제 여기에 와보니까 이제는 그런 사람들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가는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는 믿을 마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까지 교회에 나옵니다. 어떻게 할까요? 교회 마당에다가 바리게이트를 치고 한 사람 한 사람 쓰러질 듯이 주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 골라서 교회에 집어넣을까요? 그렇게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집 떠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곳이 교회입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도 끌어안고 있었고 재산을 나누어가지고 먼 나라에 떠났는데도 아들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마음입니다.
그래서 믿을 마음이 없는 사람을 교회에 보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만 참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잘 돌보고 섬겨서 믿어가는 과정이 끝나고 세례를 받게 하고 세례를 이미 받았는데도 여전히 불신앙과 회의에 빠진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이제는 내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습니다. 하고 무릎을 꿇게 하는 그것이 바로 교회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을 어떻게 어머니의 마음으로 교회가 가슴에 품고 믿어가는 과정이 끝날 때까지 그들을 위해서 참아주는가 하는 이것이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은 많이 헌신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마지막 남기신 부탁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세례를 주면서 삼게 하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 아직까지도 주님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믿어지는 과정이 종식되고 이제는 모든 사람 앞에 자기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고백하게 하는 그 일을 너희들이 하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혹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지만 아직까지 믿음이 믿어가는 과정이 끝나지 않은 사람, 이미 믿었지만 신실한 신자로 살기로 모든 세상의 욕심을 끊고 하나님 앞에 갈 길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돌보는 이 일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명입니다.
세 번째는 마지막 부탁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들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이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준행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단지 아멘하면서 믿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주님이 자기에게 분부하신 것이 무엇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실행하면서 사는 사람, 그런 사람들로 그들을 만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금방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과 무지가 얼마나 큽니까? 또 그 어두움과 무지를 깨우치고 지식의 밝은 빛이 들어왔어도 그 지식의 밝은 빛대로 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한번 은혜 받은 것으로 참된 성도가 됩니까? 주님의 말씀 앞에 은혜를 받고 눈물을 펑펑 흘리지만 그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죄를 짓게 됩니다. 한 가지를 깨달아서 이제는 빛 안에 살수 있는가 하면 또 다른 무지가 발견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죄 가운데로 사로잡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이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쉽게 쉽게만 가르치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잠깐 동안은 기분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모두 부패해버리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수 있는 힘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회 안에는 방금 태어나서 묽은 우유밖에 먹을 수 없는 아이부터 시작해서 아주 강한 장사처럼 되어서 매일매일 뼈에 붙은 단단한 고기를 잔뜩 먹지 않으면 자신이 수행해야 할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성장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모두 다 멀건 우유를 한 대접씩 먹인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린아이는 그것을 먹고 잘 살며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정기간, 그러나 장성한 사람들은 영양실조가 걸리고 말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성숙한 신자들에게 단단한 음식을 만들어서 줄 능력이 없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줄 수만 있다면 계속해서 단단한 음식을 만들어서 그래서 장성한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렇게 주님의 말씀, 말씀 위에 그 말씀을 가르쳐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일생동안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더 깊이 더 크게 드러나는 말씀의 세계 앞에서 죽기직전까지 말씀을 배우면서 자신은 깨닫지 못하기가 어린아이와 같다고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도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디도, 빌레몬, 디모데 전후서 등등의 이 모든 이후에 신약성경이 쓰인 것도 바로 주님의 이 명령을 따라 쓰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이 있지, 그것을 잘 가르쳐서 그것을 그대로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라. 그래서 주님이 남겨놓으신 말씀에 기록은 별로 안 되는데 신약성경이 이렇게 두껍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그 일도 감당해야 합니다. 가면서 제자를 삼으면서 또 복음을 전파하면서 또 세례를 주면서 또 주님이 우리에게 분부한 것들을 잘 가르쳐 지키는지 그들을 돌보면서 그러면서 교회는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자원들이 바로 이 주님의 유언을 이루는데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유언 안에서 우리는 놀라운 균형을 보는 것입니다. 갈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믿지 못해서 아직까지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믿어가는 과정을 종식시킬 뿐 아니라 그래서 세례를 줄 뿐 아니라 또 복음이 전파되는 그곳에 전파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보다 더 깊은 진리의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뿌리를 내리며 살수 있게끔 만들어줍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남기신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꿈꾸셨던 미래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할렐루야! 아멘! 하고 구원받는 그것이 예수님이 꿈꾸셨던 유일한 꿈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믿어가는 과정이 끝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믿어가는 과정을 끝나게 해서 세례를 주고 또 그들이 보다 깊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의 분부를 지키며 예수님처럼 작은 예수처럼 이 세상에 살아가는 그런 총체적인 복음화를 예수님께서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가슴을 품고 얼굴과 그리고 피부색이 다른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외치고 그들을 어찌하든지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는 그 일을 위해 헌신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함께 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실제의 경험을 보더라도 주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는지 함께 하시지 않는지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렇게 감격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어둠의 세력들에 의하여 갇힌 이 땅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에게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나아가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생명이신 예수께 돌아오는 그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 자기에게 헌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순간순간 그들을 도우시고 순간순간 함께 하셔서 그들과 동행하셔서 복음의 빛을 비추시고 어두움의 빗장을 깨트리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뿐만 아니라 자신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복음을 들고 나아가 예수의 사랑을 외칠 때 거기에서 놀라운 은혜의 역사,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거기서 놀라운 경험, 그리고 체험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에 서보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엄청난 도전입니다.
전도자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믿지 못해서 의심하는 영혼들을 붙잡고 눈물을 흘려본 사람들, 한 사람을 주님의 온전한 신자로 세우기 위해서 그를 위해 가슴저미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삶을 살고 계십니까? 주님이 주신 많은 은혜를 어디다 사용하셨습니까? 주님이 주신 많은 물질과 시간, 그리고 주님이 주신 건강을 어디에다 사용하셨습니까? 우리를 산 날들은 모두 잊혀져도 주님을 위해 산 날들, 주님이 부어주신 은혜와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죄와 어두운 가운데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해보십시오. 누군가가 어두움을 뚫고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피부색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의 복음을 전해준 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이제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더 많은 물질과 시간, 주님이 주신 은혜의 자원들을 바로 이 주님의 유언을 이루어드리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온 교회가 우리 한번 얼굴도 모르고 피부색도 다른 영혼들을 위해서 많이 울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순교의 각오를 무릅쓰고 선교의 길을 가는 지체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처럼 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완성해 가실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과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마음으로 이 일 위에 헌신하면서 주님이 여러분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흔들리지 말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신약성경에서 부활의 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 절에 위치해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였지만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도 많았지만 또 여러 가지 나쁜 문제들도 많이 뒤섞여있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를 바로잡기 위해서 사도가 많이 수고하고 애썼는데 고린도 교회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은 신자의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의 몸의 부활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라고 하는 것을 변증하면서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자의 삶이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의 교리와 연결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모든 부활을 변증하는 마지막 글 끝에 와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처럼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그렇게 마지막 날에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덧입어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이니 그러므로 흔들리지 말며 더욱 견고하여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부활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문자 그대로 부활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부활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이 부활신앙을 둘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주적인 부활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개인적인 부활의 경험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는 최종적인 몸의 부활이고 또 하나는 현재적인 영적 부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설명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우주적인 부활, 혹은 몸의 궁극적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문자 그대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 앞에 범죄 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약속 가운데 “네가 이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할 때 정녕 죽으리라”고 하는 그 대목은 바로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죽음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고 육체는 죽음을 통해서 멸절하게 된다는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원래 인간은 불멸하도록 창조된 존재였습니다. 육신도 영원히 살고 영혼도 더더욱 영원히 살수 있는 불멸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와서 인간은 죽음에 종속되게 되었습니다.
심판대로라면 선악과를 따먹은 그 순간에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연결도 끊고 그의 육신도 죽음으로 돌아가게 하셔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세상에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접지 않으시고 인간이 타락하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이 원래 세상을 창조하셨던 계획은 계속 수행하시기로 하고 또 인간이 지은 죄를 통해서 사람들이 측량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더 잘 드러나고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경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태어나서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기한을 연장하셔서 일정한 기간동안 이 세상에서 살게 하셨고 또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자녀들을 끼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계속 이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죽게 됩니다. 이제 이렇게 되면 이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제 인간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지게 되니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불신상태에서 죽는 자연인들로 구분이 됩니다. 죽으면 불신상태에 있었던 영혼들은 음부로 돌아가고 그리고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음부는 지옥의 출입구쯤 되는 곳이고 낙원은 출입구쯤 되는 곳이니 낙원에서도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음부에서도 지옥의 고통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렇게 각각 음부와 낙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떠날 때 육신은 이 세상에 두고 떠납니다. 영혼만 신자는 낙원에서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고 그리고 불신자는 음부에서 지옥의 고통을 먼저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간상태일 뿐이고 최종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호령소리로 이 세상에 오실 때는 이제 이 중간상태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부활을 하게 됩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몸의 부활이니 영혼만 있던 음부에 있던 사람들이 이 땅에 두고 간 육신을 다시 덧입게 되고 영혼만 낙원에 있던 신자들이 이 땅에 있던 육신으로 덧입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이 화장을 해버리고 나면 그 모든 것이 흩어져버려서 부활 시에 입을 몸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불변의 법칙에 의해서 결국은 이 세상에 생겨난 모든 물질은 사라질 수 없고 없는 물질이 새로 생겨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하신 권능으로 그날에 흩어진 신자들의 신체를 모두 모아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입히실 것이니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불신자도 부활하게 되고 신자도 부활하게 됩니다. 각각 부활의 목적이 있으니 신자는 그렇게 부활하여 천국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에 적합하도록 그렇게 부활하게 되고 이 부활의 몸은 불멸하는 몸을 덧입는 부활이니 죄가 들어오기 전에 처음 인간에게 입혀주셨던 그 몸의 목적을 그대로 달성한 것입니다.
불신상태에서는 음부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와 입게 되어 부활에 이르게 되는데 이 몸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도 결코 죽을 수 없는 몸이며 무한히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영원한 괴로움을 당하기에 적합한 그런 몸으로 부활하게 되어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영원의 세계를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게 되든지 간에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명백한 사실이고 이렇게 천국과 지옥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으며 신실하게 살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적인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몸의 부활입니다.
부활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신자이기 때문에 잠시 지나는 이 세상으로 충분하지 아니하고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설 그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것, 부활의 그 날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더구나 이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이 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본체는 하나님이셨지만 그가 입으신 몸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이었습니다. 죄는 없으셨지만 살과 피와 뼈와 힘줄과 핏줄로 이어진 연약한 몸을 가진 예수님의 그 몸은 분명히 우리의 몸과 동일한 몸이었고 그래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며 이 세상에서 잠시 사셨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은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그 육신을 가지고 눈에 볼 수 있도록 섬기셨다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30이 갓 넘으신 그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사람들 눈에는 50이나 가까운 나이로 보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무슨 말씀인가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핍박과 고난을 많이 당하시고 고생을 하셨기 때문에 육신의 몸에 속한 자원들이 계속 감소되는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원을 많이 갖고 있었으면 얼굴도 탱탱하고 젊습니다. 그래서 17-8살이 되는 그 어린청년들은 세수하고 크림을 안 발라도 예쁩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이 들면 점점 안 됩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 몸에서 자원이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벌써 그 자원이 3년 동안에 얼마나 많이 빠져 나갔는지 30이 갓 넘으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보면서 50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50도 채 안된 나이에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는가? 거의 50이 되어 보이는 그런 모습으로 자원이 빠져 나간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 박음으로서 죽인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원을 한꺼번에 다 뺏어버린 것입니다. 힘이 떨어지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분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래서 몸을 두고 가셨다가 예수님이 몸과 영혼이 나누어졌는데 하나님이 다시 부활시키시니까 그 영혼이 다시 내려오셔서 당신의 몸과 결합하여 새로운 몸이 되셨는데 그 몸은 옛날처럼 썩고 병들고 자원을 빼앗기고 쇠하는 그런 몸이 아니라 그 몸을 그대로 입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실 수 있는 그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올라가셔서 바로 그분이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머리이신 그분께 쭉 붙어있는 접붙여 있는 지체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는 이미 부활하셨고 그 약속을 가지고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후일에 마지막 심판 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이 그것을 보증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무엇을 하며 살든지 간에 결국은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섰을 때 오늘 왜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분께 고해야 합니다. 오늘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분 앞에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분은 모두 물어보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우리가 마지막 날에는 선악 간에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분의 심판대 앞에 모두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몸의 부활을 믿는 우주적 부활을 믿는 그 부활신앙입니다. 그 신앙을 가지고 우리들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에게 죽음은 심판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이 죽음은 심판이 아니라 이제 괴로운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다 못 이룬 성화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방법으로 완성시키시는 은총입니다.
신자에게서 이 죽음은 은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완전히 거룩하게 할 수 없는 것을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거룩하게 하셔서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신앙을 믿으면서 사는 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우리들이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지나는 것들이고 잠시 사라져가고 스쳐가는 것들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세상을 위해서 살면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의 육신을 위해 살고 주를 위해서 살지 않았는지 그날에 모두 주님 앞에 변명을 해야지 될 것입니다. 오늘 주 안에서 사랑하고 자신이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살지 아니하고 죄와 야합하고 더러운 정욕에 빠져서 살아 죄를 짓던 여러분들은 그날에 주님이 주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죄 가운데 살았는지 주님 앞에 토설해야지 될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바로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 내가 느끼면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사는 신자의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망이 되도록 살아가는 삶입니다. 바로 이런 부활신앙 때문에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고난을 받을 때 주님을 생각하며 고난을 받았습니다. 내가 오늘 주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주와 함께 살리라고 하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핍박과 고난을 견디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서 자기를 쏟아 붓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부활신앙의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부활신앙은 매일매일 삶 속에서 경험되는 영적 부활의 삶입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부활이 있기 전에 먼저 죽으시는 일이 있었듯이 신자도 현재적으로 주와 함께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와 함께 죽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의 죽음은 십자가를 통해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이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성숙시키시기 위해서 사용하는 이 땅에서의 모든 환란과 시련, 고통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런 십자가 고통과 시련과 괴로움들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지혜로운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런 십자가는 때로는 우리는 아무 죄가 없는데도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당해야 하는 고난의 십자가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에 그 열매로서 우리들이 거두어야 하는 괴로움과 고난도 있는 법입니다.
어떻게 해서 생겨난 십자가이든지 간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주님을 닮고 거룩한 신자가 되어가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놀랍게 지혜로운 방법으로 이것들을 사용하여서 섭리 속에서 우리의 인생에 작용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는 신자들일수록 이 십자가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 알기 때문에 날마다 이런 십자가를 우리에게 짊어지게 하지 않으시면 우리들이 너무나 쉽게 뒤로 물러가 부패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시시때때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이 십자가를 주심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주님이 베풀어주신 많은 축복 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따라 살수 있도록 우리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아무리 많은 축복을 받고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자원을 누리며 산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이 정말 행복하고 그리고 너무나 기쁜 일만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인생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는 끊임없는 고통의 물결이 넘실거립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이런 세상의 본질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많이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때로는 이 세상에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매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를 에워싼 많은 고통과 고난, 시련과 괴로움, 근심과 걱정 같은 이 고통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에게 저절로 십자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거기에서 죽으셨으니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한 십자가가 된 것이지 십자가가 그냥 골고다 언덕에 예수님 없이 서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십자가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나무 덩어리에 불과하듯이 신자인 우리에게 있는 많은 고통과 괴로움도 그것이 비록 우리에게 경험이 되어서 우리가 괴로움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 모든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괴로움들이 우리를 성숙시키는 십자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캐 들어가 보면 출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말을 안 드는 아들놈 때문에 온 괴로움이고, 이것은 우리 아내를 통해 온 괴로움이고, 이것은 내 남편을 통해 온 괴로움이고, 이것은 우리 아버지가 내게 준 고통이고, 이것은 정신없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자격이 없는 정치가들이 내게 준 고통이고, 이렇게 모두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을 겪으면서도 믿음이 없으면 모두 그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사실 무자식이 상팔자지, 내가 홀 애비로 살았으면, 내가 차라리 과부로 살 것을 뭐 등등 하면서 다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고통을 겪는데 그것이 그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성숙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고통이 고통일 뿐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내 아들이기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이야.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자식 상팔자인데 하는 마음이 생각이 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아들을 통해 이런 고통을 주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이것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모든 일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동안에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근원을 캐 들어가 보면 반드시 사람을 향해서 미움의 칼을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에게 철저히 속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뭔가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의 목에 칼을 겨누는 것입니다. 칼을 품고 다니면 언젠가 찌르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미움을 품게 되면 언젠가는 범죄 합니다. 그 자체가 이미 범죄이지만, 그러나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 괴로운 일들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그때 믿음이 있으면 그런 괴로움을 준 사람은 그 사람이지만 더 넓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측량할 수 없는 지혜 가운데 나에게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서 나를 여기 세우셨는데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올까 생각합니다. 그때에 그 고통들이 믿음을 통해서 그것은 나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십자가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당신의 십자가를 우리보고 지고 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로마 시대 때 형벌에 의하면 형벌의 관례도 역시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자기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모두 각각 다른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효과는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게 고통이 일어납니다. 내가 그 고통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주님의 자녀답게 살고 순종하고 싶고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들을 잘 감당하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뜻을 세우고 그 길로 가려고 하니까 많은 괴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때에 믿음으로 그 모든 괴로움을 감당합니다. 사람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태어난 시대를 원망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걸어갈 때 당하게 되는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믿음으로 감당하는데 그 믿음으로 감당하는 방식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그 고난을 참으면 후에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많은 괴로움과 시련들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복수의 칼을 갈기도 했지만 믿음이 생기고 나니까 이 모든 괴로운 것을 통해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괴로움을 다 짊어지고 고통을 느끼면서 주님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의 영혼 안에 놀라운 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이상하게 그런 고난을 내가 믿음으로 감당하니까 깊은 고통을 느끼면서 2000년 전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의 경험 속으로 내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분명히 처음에는 내게 오는 고난 때문에 그냥 내가 아프다고 그랬는데 믿음으로 내가 그것을 감당하면서 괴로울 때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니까 지금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을 통해서 2000년 전에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의 죽으심의 고통이 나의 영혼 속에서 실제화 되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죽음의 경험 속에는 반드시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따라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신자가 섭리 속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을 믿음으로 감당할 때 2000년 전에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 속으로 자신이 자기 이입되게 되는데 이때 들어오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 경험이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는 그 모든 죄성과 부패성, 하나님 밖에서 살려고 하는 이 완고한 인간의 완악한 경향성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셨던 죄에 대한 죽음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은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그 죄의 현재적 죽음에 대한 경험을 몰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자기 죽음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깊이 죽음을 경험하게 될 때 그 죽음의 꼭지점에서 거기서 신기한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 속에 닥치는 모든 고난과 괴로움의 십자가를 지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서 하나님 앞에 그 십자가를 생각하며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될 때 자기의 완악한 육신의 성품이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들이 죽는 경험이 있는 그곳에 반드시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영혼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뼈아프도록 깊이 회개하고 나면 회개하고 난 다음에 그 회개하고 난 순간에는 죽는 것 같지만 그런 참회를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이 내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이 소생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영혼의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생명력이 이 안에서 끊임없이 살아나는 소생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죽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고난은 많이 당하고 괴로움은 당하는데 그것을 섭리 속에서 주어진 십자가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은 많이 당하는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생만 하면 사람이 완악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강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만나는 영적 부활의 경험, 영혼의 소생의 경험을 통해서 그 사람이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가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것이 여러분을 성숙시키는 십자가로 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사람을 향한 미움이 가득 차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신세나 한탄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부활신앙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늘 곤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쾌락과 육신의 정욕에 즐거운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혼의 참다운 기쁨과 생명을 가져다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명백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영광스러운 마지막 날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또한 날마다 주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날마다, 날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죽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는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 영혼이 곤고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온갖 이유와 핑계, 그리고 새로운 변명과 그리고 육신의 정욕, 미움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가득해서 십자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 날에 주님을 어떻게 뵈려고 합니까?
그러면 이런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이런 부활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생활, 그것을 오늘 성경에서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견고함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오늘 말합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견고하다고 하는 것은 그냥 흔들리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견고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나무 같은 것들이 뿌리를 많이 내려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그런 상태를 가리켜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콘크리트 위에 죽은 전보대가 서있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견고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고 또 그렇게 견고하게 서있는 전보 대를 칭찬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견고하다고 말할 때는 큰 거목이 세월의 연륜이 지나면서 줄기 가지고 뻗고 뿌리가 내리면서 든든하게 땅에 뿌리를 박은 상태, 그래서 모진 비바람이 불어도 작은 가지 한 두개가 꺾이기는 할지언정 몸통은 흔들리지 않는 그런 종류의 생명력이 있는 견고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자녀로서 크게 두 가지 사명을 가지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주님을 위해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잘 감당해나가는 것,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혼자 유리하며 고생하는 가운데 이런 구원의 목적을 잘 성취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연약하지만 사람인 목자를 세우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잊어버릴만하면 이 두 가지 구원의 목적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 목양관계의 유익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이 23년 동안이나 목회하던 노셈튼 교회를 신약적인분쟁으로 말미암아 사임하면서 남긴 마지막 고별 설교 속에서 자기의 사랑하는 양떼들에게 이렇게 고했습니다. 성도가 한 교회의 목자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이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전심으로 예수를 닮아가게 하고, 그로 하여금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전심으로 그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르쳐 성도다운 성도를 세우게 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게 하고 다른 어떤 일들로도 이 세 가지 일을 하는데 신경 쓰게 하거나 방해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나는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좋은 집, 많은 사례금을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일에 전념하며 살 수 있게끔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대들이 세상맛에 취해서 살다가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할 본분을 잊어버릴만한 순간에 나를 보고 그 사명이 생각나는 사람이 되도록 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죄 많은 사람에 불과하고 순간순간 이 세상에 편한 삶을 꿈꾸고 순간순간 육신의 정욕과 싸웁니다. 그대들 안에 있는 모든 싸움이 내게도 있으니 여러분들이 본바와 들은바와 같습니다. 저는 만들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살수 있게끔 해주십시오.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해서 진리의 깊은 탄광에 막장에 내려가 땀을 흘려 진리를 캐어내고 하루 벌어서 하루 품을 먹는 사람처럼 겸비한 마음으로 그 진리의 석탄을 캐고 그것을 여러분들의 마음에 불 때게 하고 그래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회심하게 하고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저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다른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도록 도와주셔야 됩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죽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마음 편하게 해 주어도 그렇게 해서 남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상 사랑에 타락하지 않을 터이니 여러분들은 그 일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부르심입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다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그 말씀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부름을 받아서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니 마지막 주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그날까지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참된 신자가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큰 그릇도 있고 작은 그릇도 있는데 큰 그릇이 아름다운 그릇이고 작은 그릇이 하찮은 그릇일 수가 없습니다. 멀리 시골에 나아가 공해가 없는 밤하늘을 우러러보십시오. 쏟아질 듯이 매달려있는 별 떨기 속에는 지구의 크기의 수백 배가 넘는 큰 별도 있고 십분의 일밖에 안되는 작은 별들도 있습니다. 큰 별이 아름답고 작은 별이 더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정해주신 위치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밤하늘의 모든 별들은 모두 아름답습니다. 그대들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매순간 주님의 모습을 닮아감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숨질 때 되도록 마지막 하는 그 말이 신자 되기 원합니다. 생명을 주고 마지막 바꾸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하루만이라도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이 기쁨을 감추시지 못하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의 모습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쓰레기 같은 이 세상에서 없어질 것들을 위해서 온 마음을 바친 나머지 주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기 위해서 바쳐지는 마음은 없는 그런 불결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선창가에서 내버려지는 생선의 대가리들과 내장을 먹기 위해서 피가 터지도록 머리를 쪼며 싸우는 더러운 갈매기 떼들처럼 그렇게 세상과 짝하고 살지 않습니까? 그동안에 주님을 모습을 본받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분여해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짐승의 형상으로 변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짐승과 버러지와 우상의 썩어질 것과 바꾸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으로 과하기나 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언젠가 은혜를 받았을 때는 떨리는 마음으로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신자 되기를 원한다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닮은 사람처럼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어두운 세상에 빛을 잃지 않는 하나의 등불처럼 살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계속했습니까? 그런 소원, 그렇게 되고 싶은 갈망이 계속 유지되었는가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근심이나 걱정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런 주님의 거룩한 소명에 비하면 얼마나 가치 없는 것들입니까? 우리의 괴로움과 번민이라는 것도 너무나 사치스럽지 않습니까? 이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이 세상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지 주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오늘 묻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변화되지 않는 자기의 거짓된 신자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그 눈물이 여러분 안에 있는 더러운 탐욕들을 씻어냈습니까? 교만과 불신앙, 미움과 하나님을 향한 육욕의 탐욕 같은 것들을 씻어냈는가 하고 지금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한때는 신자 되기 원한다고 노래를 부르고 어린아이처럼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천사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지만 이제 그런 구도의 눈빛을 잃어버린 많은 신자들이지 어떻게 그렇게 냉담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차가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큰 사랑을 입고도 주님을 전혀 닮지 않은 자신의 짐승과 같은 모습을 보면서도 회개할 줄 모르고 주님이 기대하시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신자가 어떻게 신자일 수 있겠습니까? 견고하다고 하는 것은 그런 첫 번째 부르심을 굳게 붙들면서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10년 후에 지금은 여러분들이 보기에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이 있고 그렇다고 할지라도 10년 후에는 여러분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우리 주님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나도 그대들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을 주님이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언제든지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주님을 그냥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기억하고 나의 이 더러운 모습을 인해서 예수 십자가 못 박은 것을 생각하고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죽음을 경험하게 될 때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은 살아나서 아주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사는 것, 이것이 견고한 것입니다.
두 번째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견고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명을 맡겨주시지만 그 사명은 특수한 사람에게 맡겨주신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미 그 사명이 부여되었고 아직 사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은혜를 받지 못했든지 혹은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감히 사명을 망각하였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삼손은 들리라와 방탕하고 그 무릎에서 잠드는 동안에 하나님이 자기를 이스라엘의 사사로 불러주신 사명을 잠시 잊었습니다. 사명을 주셨어도 방탕하게 살고 은혜 안에 거하지 않으면 사명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그 위에 복음의 은혜를 새롭게 깨닫는 영적인 변화의 은혜들도 더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찌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사명을 안 주셨겠습니까?
처음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뉘우쳤을 때 주님의 사랑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이 가득 채워지고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처음 서서 하나님이 내게 이 사명을 맡기셨으니 내가 잘 감당하고 싶습니다. 나는 아이와 같이 어리니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목 놓아 기도하던 그 자리가 바로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서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명이 적은 것이든 큰 것이든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모두 다 귀한 것이고 큰 사명을 버린 것이나 작은 사명을 버린 것이나 하나님을 버린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뜻을 세우고 사명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고속도로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셨습니까? 죄악의 낙을 누리며 이 세상에서 떠밀리듯이 사는 사람들에게야 잠시 고난이 없을지 모르지만 뜻을 세우고 사명의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끊임없는 파도와 폭풍우와 어두움의 위협이 있고 암초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 중에 대다수는 혹시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주일날 이렇게 나와서 일주일 예배를 드림으로 일주일 동안 지은 죄악이 탕감되는 것처럼 방종한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방종하게 살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혹시 여러분이 아닙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대들에게 눈물이 있습니까?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고유한 사명의 자리에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어려움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까? 나의 모든 더러운 성품과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한 나의 행동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사명 때문에 아파하는 고통이 있습니까? 내가 살았기 때문에 주님이 죽으시고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 사명의 현주소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까? 어쩌면 이렇게 교회가 냉랭할 수 있을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신 구원이고 주님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지푸라기만도 못하고 벌레만도 가치 없는 인간들을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자원을 주셔서 이 땅에 살게 하시는데 왜 그러셨습니까? 죄인들을 참으시되 오래 참으시고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면서 우리에게만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리라
어린 아이와 같이 가진 지식이 많지 않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세가 없어도 밤하늘 한구석에 빛나는 별처럼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맛보기가 되라고 우리를 살려두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데 사용해버리고 이 땅에 자원은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사용하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주의 사명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의 이 간교함을 변명하는 일에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죄와 악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 우리에게 눈물이 있습니까? 어쩌면 이 땅에 성도들이 이렇게 차가울 수 있습니까? 예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얼굴은 굳어져서 이 세상 탐욕에 이글거리지 않습니까? 정말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우리가 눈물을 흘립니까? 그 뜻대로 이루어졌을 때는 감사해서 울고 우리의 죄와 악함으로 우리의 연약함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는 우리의 죄인 것처럼 뒤집어쓰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흘리는 그런 참회의 눈물이 있습니까? 우리가 거기에서 땀을 흘립니까? 정말 비지땀을 흘리면서 주님이 맡겨주신 그 자리가 생명을 주고 바꾼 자리인 것처럼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그 사명의 자리에서 서있습니까? 비바람이 불어오고 원수들의 박해와 핍박과 사람들의 조롱이 있어도 우리가 거기서 피를 흘리고 있습니까? 거기서 우리들이 피를 쏟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흔들리는 것은 은혜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이유가 있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차갑게 살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통곡하고 주님을 위해서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고 예수를 위해 피를 철철 흘리며 살아도 짧은 생애인데 우리가 어떻게 구경꾼처럼 예수의 십자가를 따라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대들이 미끄러진 사명의 자리가 어디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사명에서 미끄러지고 주님이 맡기신 자리에서 도망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복합니까? 정말 즐겁습니까? 정말 편안합니까? 아닙니다.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이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쓰레기 같은 신자로 바뀌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주님이 많이 주신 은혜의 자원들을 자신의 사명의 자리에 쏟아 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명의 자리에 쏟아 붓지 않으니까 자기가 죽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자기 죽음이 없으니까 다시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흔들립니다. 저도 지극히 연약한 여러분의 한 형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연약해서 거목처럼 든든히 서있을 수 없는 아직은 어린 묘목이지만 예수를 붙들 수는 있지 않습니까?
거친 비바람 불어올 때 나를 보호하시고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험한 세상에 나 혼자 있게 마시고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거친 비바람 불어올 때 나를 보호하시고 오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흔들리지 맙시다. 굳건히 서서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가십시오.
믿음으로 산다는 이유 두 번째는 주의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우리가 견고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주의 일에 힘쓰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주의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온 마음과 뜻을 모두 모으고 집중할 때 그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거의 죽고 싶은 사람 일만 명이 목회하는 교회보다는 완전히 죽고 싶은 한 사람이 목회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햇빛이 많이 나는 겨울날 먹지를 갖다놓고 돋보기를 비추면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처음에는 아무 일이 없지만 잠시 후에 연기가 나서 타기 시작합니다. 돋보기 다섯 개가 거기를 비추면 어떻게 될까요? 불이 붙어버립니다. 왜 그렇게 교회 안에서 순수한 부흥을 보기가 힘든지 아십니까? 죽으려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한 사람도 그렇게 하려는 경우가 없을 때는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가 거의 실제적인 상태에 있어서 마귀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나는 오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왜 여기에 있습니까? 감격이 있는 예배 때문입니까? 왜 여기에 계시나요? 비교적 덜 열을 받는 교회이기 때문에 여기에 계시나요? 왜 여기에 계십니까? 교회가 예쁘고 담임목사가 유명해서 이 교회에 계십니까? 교회가 인격적이어서 나에게 헌금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 계십니까? 모두 훌훌 털고 떠나십시오. 할 수만 있으면 저는 교회가 이 세상에 참으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소수의 신자로 가득차는 것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회심할 생각도 없는 죄인들로 가득 찬 것보다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진지하게 생각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많은 은혜를 어디에다 사용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에게 일이 있습니까? 수고하는 일이 있는가 하고 묻고 싶습니다. 내가 주님의 자녀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했을 이유가 없는 그 일, 내가 은혜를 받지 않았더라면 결코 힘쓰지 않았을 그 일, 내가 복음의 참된 은혜를 알고 이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이렇게 나 자신을 쏟아 붓지 않았을 그 일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그래서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그 일을 위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그 일을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습니까? 그 일 때문에 죽고 싶고, 그 일 때문에 살고 싶고,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일 때문에 여러분 자신을 원망하는 그 일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감도는 그런 연연들 속에는 반드시 이런 사명의 자리, 섬김의 자리가 없습니다.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이 그렇게 섬기지 못하는 다양한 변명과 이유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주의 날에도 그 변명이 통할 수 있을까요? 내가 너에게 맡겨준 사명을 왜 감당하지 못했는가? 담임목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20년 동안 그 교회에서 개겼습니다. 주님이 잘했다. 그러실까요? 이 쓰레기 같은 녀석아 내가 너에게 준 구원이 그렇게 하찮은가. 내가 너에게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었던 이 땅에 많은 자원들을 네가 어떻게 사용했는가. 시시때때로 네 영혼에 부어졌던 그 많은 진리의 빛들을 어디에 사용했는가 하고 주님이 물으실 때 여러분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미리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그 날에 여러분들은 유한한 우리의 미래에 짧은 날 동안에 지는 해에 비낀 볕과 같은 한 뼘도 안 되는 짧은 기간동안 주님을 섬기라고 주신 날 동안에 그렇게 허탄하게 보내버린 것에 대해서 가슴을 치며 애통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왜 그렇게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방관자로 살았는지에 대해서 주님의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대답해야지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십시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이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이 직접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지 않으시고 33해 동안 이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이 세상에 와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양떼들을 돌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씻겨주고 그들의 아픔들을 고쳐주고 외롭고 헐벗을 이들을 먹이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렇게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자기의 몸을 화목제물로 바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누가 요구하는 이 없어도 스스로 생명 버리시기를 원했는데 그 길이 고속도로처럼 나있습니까? 마지막에는 사단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를 통해서 십자가를 지시지 말도록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겟세마네동산에서 다가올 십자가를 등에 지고 초유의 외로움 속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모두 잠들어있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느 상황 하나도 주님이 지고 가시는 십자가를 도와주시는 상황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슴 아프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구유에 오셨고 가실 때는 벗은 몸으로 아무 소유도 없이 가셨습니다. 모두 그분이 걸어가는 사명의 길에 방해거리들로 가득 찬 33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것이 사명의 길입니다. 만약에 그런 괴로움과 장애물과 시련이 없는 것이 사명의 길이라면 그 아름다운 사명이 우리 같은 사람에게 차례나 왔겠습니까?
그 날에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는가 하고 말입니다. 내가 그때 그 나라를 위해서 울 때, 내가 그때 그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때 내가 교회를 위해서 날마다 아파할 때 내게 은혜 받은 네가 무엇을 했는가 하고 물으실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삶에 대해서 주님 앞에 직고하여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대답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내 종을 통하여 교회와 이 민족을 향해 마음을 그리고 너의 개인을 향한 마음을 수없이 알려주었거늘 네가 무엇을 했는가 하고 물으실 때 여러분들은 변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날에 나도 내게 맡겨진 그대들이 왜 이렇게 변화되지 않았는지를 주님 앞에 눈물로 용서를 빌며 변명해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보고 뭘 요구하십니까? 당신이 주신 모든 것을 누리며 그 평화 속에 살며 처음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예수 사랑 가지고 예수를 위해 살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마지막 부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그 십자가를 뼈 속 깊이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우셔야 할 자리에서 주님이 다시 와서 우시고 우리들이 고난 받아야 할 자리에서 주님이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들이 피 흘려 죽어야할 자리에서 주님이 죽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은 마음의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마음이 있고 세상 사람의 마음에는 세상 마음이 있고 악마의 사람의 마음속에는 악마의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마음입니까? 예수의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가 주님의 사랑 때문에 피도 섞이지 않고 살도 나누어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그 살과 피보다 진한 그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만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게 하셨고 이 어두운 시대 한 복판에서주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맨 처음 세워주신 자리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렸던 예수님처럼 엎드리고 그분처럼 땀을 흘리고 그분처럼 피를 쏟고 그분처럼 완전히 우리를 내어드렸더라면 우리는 죽었어도 우리의 사명은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었어도 씨인 우리의 사명은 살아서 꽃피웠을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여러분들이 몸담고 있는 이 교회를 보면서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슬픕니다. 너무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건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절대로 이런 교회를 목회하려고 주님께 생명 바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목회할 교회가 이런 교회인줄 알았더라면 감히 거룩한 성업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매일 아침 일어나서 이 날이 마지막이 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산다고 하더라도 살아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교회에 집사님 한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갔습니다. 저는 그분이야말로 수년 내에 내가 본 가장 성도답게 살다가 죽은 보본이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보면서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이 모두 주님께로 갔으면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처럼 똑같이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열린 교회를 통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와서 오랫동안 참회하는 시간을 가졌고 복음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했습니다. 주일에는 그 바쁜 와중에도 병원을 다니며 병상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주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함께 있는 연약한 많은 구역의 식구들을 사랑과 기도로 든든히 세워주었습니다. 마지막 간암 말기여서 복수가 차오를 때도 구역장의 본분을 다했고 임종을 앞둔 얼마 안 되는 시점에서도 구역식구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죽기 몇 시간 전에 다행히 제가 임종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눈동자가 거의 풀어진 상태에서 제가 그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습니다. 이제 주님께로 가니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안식에 들어가라고 말입니다.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 것이 이 세상에서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그는 성도였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다시는 질병과 슬픔이 없는 안식으로 들어갔습니다.
죽기 며칠 전에 아내에게 대필을 하며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 편지 속에서 작은 메모지 석장에 남긴 편지 속에서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오히려 저를 위로했습니다. 저는 이제 비로소 은혜를 받아서 주님을 섬기고 싶은데 왜 그런지 주님이 저를 부르시니 이제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점점점 사랑하는 목사님, 목사님이 계셔서 저는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목회사역을 하시려면 괴로운 일이 많으실 텐데 목사님, 힘을 내십시오. 힘내십시오. 제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오늘은 정집사가 그렇게 주님을 섬기며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그는 갔고 우리는 살아있습니다. 왜 살려두셨을까요? 목숨이 있는 날 동안에 주님을 섬기라고 흔들리지 말고 주님을 섬기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선교와 중보기도의 능력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골4:3)
4주째 걸쳐서 복음을 전파할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런 모든 일을 감당해나감에 있어서 중보 기도의 필요성과 그 능력에 대해서 오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먼저 본문을 해석해보자면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특별히 옥중에 있을 때 이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인해서 갇힌 이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있는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골로새서는 4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 4장은 기독교 교리의 위대한 진술들을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와 그분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영광과 능력을 진술한 후에 3장서부터 4장까지는 실제적인 신자의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3장 첫 시작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얻었으면 이제 너희들은 위에 것을 바라라.” 땅 아래 있는 지체들을 죽이고 위에 것을 바라보라는 권고로 시작하면서 3장에서는 이렇게 위에 것을 바라고 사는데 위에 것을 바라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상세하게 설명한 후에 4장에서는 오늘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복음전파의 중요성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골로새서의 구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신 주님이시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만유의 주이시고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시는데 신자는 그런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리스도가 하늘높이 주님 보좌에 앉으셔서 이 땅을 통치하고 계시니 영광 가운데 계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그 구원의 기쁜 사실을 즐거워하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항상 비록 이 땅에 살고 육체와 결별할 수 없는 삶을 살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는 영광스러운 기업을 받을 사람답게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늘나라의 정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야지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가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사실들을 아직까지도 알지 못하고 있는 많은 이 땅에 백성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를 쓰다가 갇혀서 옥 속에 있게 되었고 옥 속에서 이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이 사명은 교회가 해야 할 일중에 가장 뛰어나고 중요한 사명이고 주님이 이 땅에서 남겨두신 마지막 유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부르심에 순종해야지 되고 이 부르심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모든 영향을 동원하여 이 일을 위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이 일이 교회가 해야 할 모든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교회가 이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이 일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신 후에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의 머리인 동시에 하늘에 있는 모든 성도와 천사들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 돌이 되어 하늘나라에 있는 교회와 이 땅에 있는 교회를 연결시키십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신 구주로서 이제 하늘과 이 땅에 있는 교회의 공통된 머리가 되셨을 때 주님의 간절한 마음은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교회의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아니하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왜 창조하셨는지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떻게 그들이 믿을 수 있겠으며 믿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어떻게 그들이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들을 당신의 사랑을 먼저 맛보고 당신의 은혜를 먼저 경험한 교회를 통해서 이 일을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는 교회입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주님의 심정을 모르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심정을 아는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이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가슴깊이 인식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누구에게 쏟아집니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도성인신에 대해서 감격하는 그 은혜의 현장이 어디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의 변화가 있는 곳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놀라운 역사와 함께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목이 터져라 전파했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의 사랑에 불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바로 그 사람들이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왜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것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전파되는 선교, 전도의 헌신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중보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중보기도의 필요성을 보게 됩니다. 사도가 오늘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골로새 교회는 오늘 사도 바울로부터 편지를 받고 있습니다. 사도에 비하면 골로새 교회는 어린아이와 같은 교인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사도가 이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에 대해서 상세하게 써내려갔던 것은 이것에 관해서 흔들릴 기미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받은 대부분의 모든 교회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이 골로새 교회에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지 않으면 안 될 때쯤 되었을 때는 소위 이야기하는 영지주의에 위험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라고 하는 것은 희랍의 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를 합쳐놓은 사상인데 기독교의 탈을 쓰고 교회에 들어와서 많이 교회를 힘들게 한 이단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신 머리이시고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구속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기본적인 기독론 사상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비한 지식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허망한 교리를 전파했습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도가 연약하기 짝이 없는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니 대 사도인 바울과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어리기 짝이 없는 골로새 교인들을 비교하자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서 직접 사도로 지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에는 졸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구변의 재능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능숙하게 전하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랍철학자들 조차도 그의 변론 앞에서 할말을 잃어버릴 정도로 뛰어난 학문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가 가지고 있는 설교의 능력은 위대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십자가를 심어 주었고 뿐만 아니라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그의 현장 속에 나타나서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놀라운 역사, 병자를 고치기도 하는 기이한 역사를 가졌던 위대한 능력의 사도였습니다. 오늘 그 뛰어난 사도가 어리기 짝이 없는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해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렇게 뛰어난 사도가 이렇게 어리기 짝이 없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어느 모로 보나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중보 기도를 받아야지 자신도 잘 가누지 못하는 연약한 교인들에게 이 위대한 사도 바울이 중보기도를 받아야한다고 하는 왠지 어울리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릎을 꿇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은 그 사람이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은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어떤 의미에서 도움을 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연약하지만 무릎을 꿇었을 때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였고 그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도움이 되실 수밖에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단은 가장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무릎을 꿇을 때 가장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는 연약할지라도 그가 무릎을 꿇었을 때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믿음은 골로새 교인들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골로새 교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기를 도우시는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었고 그것은 곧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믿음 속에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구차할 정도로 중보기도를 부탁합니다. 심지어는 자기보다 한참 신앙이 어리기 짝이 없는 사람들에게조차도 나는 너무나 연약한 사람이고 부족하니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가 정말 연약해서가 아니라 그가 정말 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쳐볼 때 주님의 도움이 없이 살수 없는 처지이니 너라도 나를 위해 하나님께 빌어달라는 부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선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1851년 미국에 로체스터라는 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시 훌륭하게 쓰시던 찰스 피니라고 하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신학은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정통적인 신학으로부터 좀 벗어난 신학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착한 전도자였습니다. 로체스터라고 하는 시에서 이제 설교를 하고 복음전도대회를 하게 되어 있는데 거기에 세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한 교회는 교인과 목자가 싸워서 법정에 고소된 상태이고 또 두 교회는 이제 목자를 내쫒기 위해서 교인들이 궁리를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중에 한 교회에서 이제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이 찰스 피니가 거기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6개월 동안 집회하면서 10만 명이 예수를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비결이 어디에 있었던 것 같습니까? 거기에는 바로 이 사람의 복음전도 사역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기도하던 아벨 클러리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찰스 피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확성기도 없고 대중매체도 없던 시대에 이 사람이 직접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게 된 사람이 50만 명쯤 될 것이라고 선교학자들은 추산을 하니 정말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모두 알지만 아벨 클러리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벨 클러리는 이제 이 찰스 피니의 설교를 듣고 회심을 한 후에 주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일생 사는 동안에 이 찰스 피니의 설교 사역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하루에 13시간씩 이 찰스 피니의 설교 사역을 위해서 헌신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그 13시간씩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오그라진 다리를 펴기 위해서 누워있어야 했다고 하니까 그는 정말 자신의 육체의 고열을 짜서 피니의 사역을 위해 기도로 헌신하던 그야말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헌신적인 기도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게 만드셨고 부흥을 하나님께서 보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보사역의 기도 사역의 필요성은 점점 더 증대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러 다닙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를 쓰고 힘을 쓰면서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을 합니까? 그러나 그 성과가 매우 미미하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일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고 있습니까? 애쓰고 많이 힘쓰지만 그러나 열매가 별로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게 바로 기도에서 우리들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습니까? 간절히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있고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과 그 사람들을 보는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 그들이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복음을 전파하는 그 현장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런 중보기도의 위대한 능력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 오늘 성경이 두 가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중보기도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를 말하면서 맨 처음 거론하고 있는 것이 전도할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도할 문이라고 하는 이 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주석가들이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많이 거론되는 해석이 두 가지인데 이 문을 복음의 상황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은 사람의 입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것은 전도할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하기에 적합한 상황의 문을 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전도의 문을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힘쓰고 애써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고 심지어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려고 각오한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전파할 상황이 열렸을 때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열리지 않은 상황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상황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터키 같은 곳에 복음전파 할 상황이 잘 안되고 문이 닫혀있는 상황입니다. 몇 해 전에 터키에 선교사들을 위한 집회에 갔습니다. 60명이 모여서 저의 세미나를 들었습니다. 모두 토로하는 어려움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터키는 선교사 수가 그리스도인수보다 많은 나라였습니다. 선교사는 700명이었고 거기에서 예수 믿는 평신도는 600명밖에 안 되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많이 나아졌어도 선교사와 그 다음에 평신도의 비율이 1대 2가 될 정도로 많이 성장을 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 한명의 목회자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이 광경을 거기에서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그래서 가보면 선교사들이 모여 있습니다. 반주자도 선교사고 안내위원도 선교사. 엄밀하게 말하면 얼마나 심하게 하는지 수시로 투옥되고 추방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은 터키 같은 곳에서는 선교를 한다기보다는 선교할 날을 위해서 대기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시간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어야 바쁜데 꽁꽁 묶여있으니까 시간이 많습니다. 그래서 집회가 잘되는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모여라! 그러면 쭉 모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베트남 같은 곳도 그렇습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미안마 같은 곳은 더 심합니다. 전 세계에서 인터넷이 안 되는 나라가 둘이 있는데 바로 북한하고 미안마라는 나라입니다. 절대로 그것을 못 열게 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군부들이 독재를 하니까 밖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백성들에게 들어오는 자체를 싫어하고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서구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불교나라가 아닙니까? 철저히 박해를 하고 무엇이라고 조금이라도 선교할 기미가보이기만 하면 철저하게 구속합니다. 그래서 터키에 있는 선교사는 미안마에 있는 선교사들은 각기 전부다 선교사로서 그 신분을 위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로 분명히 갔는데 무슨 빵 공장 사장, 또 무슨 여행사 전무, 아니면 제일 많이 하는 게 오퍼상, 한국에서 의자라도 몇 개 실어 나르면서 영업허가증을 가지고 영업을 하면서 그러면서 신분을 위장합니다. 그럴 정도로 힘들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북한 선교를 어떻게 해볼까 하고 북한을 여러 번 넘나든 분에게 한번 선교의 길이 있는가? 그랬더니 여기서 다 하는 이야기지 거기서 선교는 무슨 선교를 합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불가능하다는 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거기에서 사역을 해서 가까이 있는 공산당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은밀하게 두 셋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휘기한 것이고 오히려 그 자체 안에서 옛날부터 믿어오던 사람들이 지하교회가 있는 것은 상당한 수가 있다고 그러지만 여기에서 북한에 들어간 사람이 복음을 전파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어떤 교회에서 이북에다가 탁아소 좀 해달라고 그래서 탁아소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자제까지 다 싣고 가서 거기에서 탁아소를 잘 차려났더니 갈 때는 다들 농장에 나가고 그래서 불쌍한 애들 데려다가 하려고 그랬더니 전부다 당 간부 애들이 들어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그 유치원이 그 도에서 제일 좋은 유치원입니다. 그러니 노동자들의 아이들을 거기에 보낼 리가 없습니다. 간부 애들이 다 거기에서 진 칩니다. 이런 식으로 뭐가 잘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전부다 뭡니까? 복음의 문이 아직 열리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오늘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옥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전도할 문이 활짝 열려져서 자유가 주어졌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사람이 왜 지금 옥 속에 갇혀서 편지를 애절하게 써내려가고 있었겠습니까? 전도할 문이 닫혀 있고 닫힌 속에서 애를 쓰다가 보니까 갈등을 일으키고 그래서 구속이 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신자들이 알아야 할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복음의 문을 열어주셨을 때 그때 복음전파의 놀라운 능력과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가 바로 이런 것들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로마라고 하는 큰 나라를 만들어놓으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차매” 라고 그랬는데 그 “차매”가 어떤 단어인가하면 아녀자들이 아이를 가져서 임신을 꽉 하게 되면 자기 낳고 싶은 날짜 정해서 낳는 것이 아니라 때가 딱 차면 아이가 나오듯이 바로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만약 삼지 사방으로 나누어지고 수백 개의 나라로 찢어져있었다면 아마 복음이 그렇게 전파되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나라가 로마 제국으로 어마어마한 땅덩어리로 통일이 됩니다. 나라를 다스리기 힘이 드니까 언어를 다 통일시켜버립니다. 쉬운 희랍어로 다 통일시켜버립니다. 태어나자마자 두개를 배워야 합니다. 자기 나라말을 배우고 만국공용어 희랍어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치 오늘날 영어하고 자기네 나라의 말을 배우는 것 같은 세상이 되니까 어디에 가든지 말이 다 통합니다. 나라가 많으니까 그 다음에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길을 뚫은 것입니다. 길을 뚫어서 거기서 세금을 막 거두어들이고 반란이 일어났다고 그러면 질풍처럼 그 길로 달려가서 한번에 묵사발을 만들어버립니다. 이런 일들을 하는데 그 길을 만들어놓으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범죄가 사라집니다. 누가 도둑질을 한다고 그러면 그 길을 타고 쏜살같이 포졸들이 달려가서 다 때려잡습니다. 그러니까 여행이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니까 길을 닦아놓으면 복음전도자들이 그 길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방에 같은 나라말로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할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가 엄청난 핍박의 기간이 지난 다음에 그 다음에 로마가 화해정책을 씁니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믿든지 간에 상관하지 않고 세금만 잘 내고 황제에 대해서 욕하지만 않으면 봐줍니다. 그렇게 해서 전도할 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바로 전도할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도할 문을 열도록 그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문을 안 여시는가? 안 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 전도에 있어서 당신 혼자 역사하시지 않으시고 당신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성령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 32절에 보면 당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뭐가 그러하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자라는 사실을 전파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의 성령을 부어주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기차도 어디든지 다 갑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기차도 있습니다. 땅속도 지나가고 바다 속도 지나가고 강 밑바닥도 지나갑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은 철로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전도의 문을 여시는데 하나님 혼자 열지 않으시고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서 그 기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문을 여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파하러가는 모든 사람들이 전도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성령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1930년대에 무디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5명의 신학생들이 세계 선교의 꿈을 품고 기도실에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5명의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해서 기도하니까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 둘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성령의 은혜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교수님들까지 모이기 시작해서 모이는 그 모임의 수가 300명이나 될 정도로 숫자가 늘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 기도모임 중간에다가 커다란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사회자가한 손가락으로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주셔야 할 지방을 가리키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부흥의 놀라운 역사는 바로 그 기도모임에서 지도를 타고 지나간 손가락을 따라서 그대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를 바치는 헌신적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나타내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올 기회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전도의 능력은 바로 이 중보기도의 능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전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복음전하는 전도자들과 선교사들과 함께 또한 이들과 함께 기도로 동참하고자 하는 성도들의 헌신이 있을 때 생각지 못했던 때에 어느 날 와르르 무너지면서 빚쟁이 열리고 복음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런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힘쓰고 애써야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지방의 시골교회에 전도를 나갔습니다. 이것은 사실은 교회가 세워지고 나서 바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제일먼저 주장한 사람이 바로 저였는데 왜 이것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하면 동기가 있었습니다. 저도 도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학대학원 3학년 졸업을 앞두어서 미국인 선교사 한 사람이 선교학을 가르치기 위해 대학원에 왔습니다. 항상 시험을 봐서 학점을 따는데 굉장히 고통스러운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지도를 펼쳐 보이면서 사방 4킬로 안에 100가구 이상 살기 때문에 교회를 세우면 자립할 수 있는 곳이 530 몇 군데가 되는데 거기 교회가 없다. 그곳을 무 교회 지역이라고 조사를 했는데 그것도 한국교회에서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미국 피시에이 장로교회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한국 사람이니까 거기에 가서 선교를 못한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 무 교회 교회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는 가서 보고 올 수 있지 않은가. 그러고 각자 가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나보다 눈치가 빠른 학생들이 경기도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은 땅! 하자마자 가서 다 찍은 것입니다. 보니까 저는 저 강원도 동해에 있는 어디가 하나 걸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바쁜데 돈도 없는데 가난하던 시절에 백금산 목사와 둘이서 짝이 되어서 고속버스를 타고 동해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말이 동해시지 거기서 버스를 타고 한없이 들어가는데 나라도 교회에 안 나오겠습니다. 너무 멀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가서 동네 가까이 있는 교회에 먼저 가서 우리가 이런 일로 해서 무 교회 지역전도 조사를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목회자가 굉장히 우리를 업수이여기는 표정입니다. 그런데 저는 눈치가 있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이 백금산 목사는 거기 왜 전도 안합니까? 전도하러 가십니까? 물어보니까 그 목회자가 영 불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나 같으면 서울에서 신학생들이 와서 거기 전도 상황을 보고 싶다면 나 같으면 전도사를 시켜서라도 봉고를 좀 태워주겠습니다. 4킬로를 버스를 타고 걷고 해서 갔습니다.
진짜 거기 100여 가구의 마을이 예쁘게 보이는데 교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회자 이야기도 들을 만 합니다. 열심히 전도하러 갔는데 그 사람들이 얼마나 강퍅한지 절대로 안 믿는다고 당신들 몰라서 그렇지 하기에 가서 보면서 이렇게 아름답게 모여 있는 동리에 예수님이 안 계시구나. 누군가가 와서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이 영혼들, 물론 맞을지도 모릅니다. 강원도 산골에서 워낙 강퍅해서 예수를 안 믿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어디에 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를 믿는 동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거기에서 하다못해 창고라도 하나 빌려서 십자가를 세우고 눈물로 한 사람 한 사람 헌신하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보람이 있을까? 우리 모두 이렇게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가 그 전도지를 떠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마음속에 그때 생각했습니다. 아! 우리나라에도 아직 이런 곳이 500몇 군데가 있구나. 한 교회가 하나만 파송하면 금방 530교회가 끝날 텐데 이것을 우리가 못하고 있구나. 생각을 하면서 이제 목회를 하면 내가 무 교회 지역 전도를 해야지 되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그 이즘부터 우리들이 15명이 전도하기 시작한 것이 이게 무 교회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숫자를 좀 늘려서 40여명이 두 군데로 나누어서 가게 되었는데 이제 이 정도 같고 안 되겠다. 우리가 받은 사명이 너무 크지 않은가. 그래서 청년 교역자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30명씩 한 교회씩 해서 120명을 전도대를 만들어라. 그리고 가서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자. 그랬더니 마침 전도 지역에서 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우리 교회에 있는 강도사 한 사람이 우리 본 교회에 있는 청년들에게 기도를 많이 하라고 일깨우기 위해서 글을 하나 썼는데 그게 또 자기네 동네 교회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나. 발칵 뒤집혀서 포스터를 붙이고 열린 교회 물러가라고,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물러가라고 하는지. 그래서 생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가 하면 그냥 우리 청년들은 기도하고 가서 열심히 전하면 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발칵 뒤집히면서 가지도 않은 열린 교회 물러가라고 교회 홈 페이지에 오고 편지가 오고 군청으로 투서가 들어가고 난리를 치니까 그때 갑자기 겁이 난 것입니다. 청년들이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우리 실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게 보통일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열렬하게 기도했습니다. 어느 때 보다 기도를 제일 많이 하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그 동리는 못 가게 되었는데 그 동리보다 더 좋은 마음이 열려있는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120명이 가서 제가 직접 보러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집회도 한번 하고 왔는데 정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거기 가니까 그 동리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도 기적이지만 거기에 갔더니 청년들이 모두 한번씩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넋이 나갔습니다. 은혜 받으면 넋 나가는 것 아십니까? 이렇게 아무 생각이 없이 주님의 사랑이 감동이 되어서 이렇게 번개 맞은 병아리모양 이렇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왜 기도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도는 전도할 문을 엽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전도 선교라고 하는 것은 시작할 때도 기도로 간절히 시작하면 하나님이 어디로 가라고 지정해주십니다. 그리고 또 거기를 간절히 기도하면 전도할 문을 열어주십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 간절히 기도하면 돌아와서 열매가 맺혀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도를 시작해서 기도로 끝까지 가는 것이 이것이 전도요, 선교입니다. 전도할 문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중보기도를 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고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자의 입술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화를 주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깊게 그러면서도 복음의 위대한 비밀, 그리스도에 관한 신비한 비밀들을 쏟아놓게 하게끔 만들어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 비밀이십니다. 솔직히 이야기를 해서 그분이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것, 그것을 어떻게 말로 사람들에게 이해를 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또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33해 동안 사셨는데 그것이 200년을 살고 있는 우리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것이 오늘 우리를 구속해서 주님 앞에 우리를 세운다는 사실, 우리가 어떻게 말로 다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수시로 안 믿겠다고 결심한 많은 사람들의 불신앙적인 질문 같은 것을 우리가 어떻게 타파할 수 있겠습니까? 모범답안을 다 가지고 지나가도 항상 사람들이 질문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우리의 언변을 주장해주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일인데 저는 원래 성격이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믿을지 모르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세 사람만 모이면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을 못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두 사람 앞에서도 떨었고 여학생일 경우면 한사람일 경우에도 떨었습니다. 그런 성품이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연결이 되어서 이렇게 수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더분더분 하게 이야기하고 껄껄거리고 떠들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런 것을 잘 못했습니다.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오랫동안 우정관계를 가지면서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런 것이었는데 신학교를 다니는데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한 10시 반이나 11시 되어서 전철을 타고 오는데 마음속에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지 된다고 하는 마음에 쿵쾅쿵쾅 칩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렇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성령님도 때를 보시고 말씀하셔야지 그리고 그날 갔습니다. 그런데 집에 갔는데 그렇게 마음이 괴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또 되어서 전철을 탔는데 11시쯤 되었는데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고 다 앉아있고 한 4-5사람 정도 서 있는 정도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저녁이니까 사람들이 피곤하니까 인상을 쓰면서 자고 그러는데 맨 끝에 이렇게 서있는데 또 전해야지 된다. 너 전해라. 마음이 막 뜨거워졌습니다. 난 안돼. 그런데 결국 주님이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돌아서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다 쳐다보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데 물건 팔러 사람들이 오고 그러면 여러분, 그렇게 하고 불러도 쳐다 도 안 보고 이러고 있는데 큰 소리로 못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그랬는데 사람들이 자다가 일어났습니다. 시선이 짝 모이는데 이게 완전히 주일학교입니다. 그 다음부터 뭘 얘기했는지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난 옆에서 내가 이러고 듣고 있는 것입니다. 어쩜 그렇게 청산유수같이 쭉 말이 나오는데 마지막 결론이 당신들이 지금 이렇게 피곤하게 절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가는데 다 죄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한 2분 했는데 딱 전파하고 나니까 성령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다음 칸으로 가야지. 그리고 갔습니다. 다음 칸으로 가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랬더니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 저쪽 끝에서 한 5-6사람이 안 쳐다보기에 여기를 보십시오. 그랬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쭉 하면서 전파했습니다.
그 다음날은 학교에 가서 이제는 안 되겠다. 그래서 학교에 가서 전도지 찍어놓은 것 있으면 달라고 그랬더니 창고에 전도지가 엄청 쌓여있는데 요만큼만 달라고 하니까 한 박스를 주면서 너무 고마워했습니다. 처치를 못해서 지금 굴러다는데 많이 가져가라고 해서 가방에 하나 가득 넣어서 전도사들과 같이 플레트홈에 가서 우리가 명색이 전도사인데 전도하자. 내가 떠들 테니까 너희들이 이것을 나누어주라. 그래서 4명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학생도 둘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내가 외치고 지나가면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다음 칸으로 따라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전도사가 좋은 일을 하자고 그러는데 반대를 하겠습니까. 열심히 따라왔는데 그 다음부터 나하고 같이 하교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한 학기동안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 느낀 게 무엇인가 하면 전에는 수업이 끝나면 그냥 빨리 집에 가서 밥 먹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막 가는데 그게 아니라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있는데 그것은 가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랬을 때 이상한 상황이라도 벌어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채플실에 먼저 들어가서 집에 가기 전에 기도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저를 살려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고 그러고 가게 됩니다. 그러면 갈 때마다 하나님이 구제를 주셔서 입에 마치 기름을 바른 것 같습니다. 문장 하나 끊어지지 않고 1분 30초 내지 2분 동안 짝 나옵니다. 그게 바로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을 열어서 그렇게 놀랍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가끔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축구 선수가 공을 몰고 5-7명을 제치고 하프 라인을 넘고 페널티얼에 들어가서 슛을 쌌는데 한번도 안 들어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준비하고 갔더라도 마지막 준비하는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그 사람의 가슴 속에 콱 하고 복음의 비수가 꽂혀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유창함을 누가 주시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기도하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일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 복음, 이 복음의 문이 열리고 열린 그 문 속에 전도자들이 들어가서 청산유수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을 말하고 그 복음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바로 이 일, 이 목적, 이 일을 위해서 내가 매임을 당하였노라고 말합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고 최고의 학식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촉망받는 종교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왜 사랑하는 친구들을 잃어버렸습니까? 왜 동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까? 왜 골육지친으로부터 내침을 당하여 외로운 존재가 되었습니까? 그러고 왜 사람들로부터 가장 멸시당하는 자가 되어서 이제 왜 옥에 갇혀서 죽음의 종소리를 기다리는 때가 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까? 복음 때문에 바로 이 일을 당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복음 때문에 바로 사도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이 일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일으킬 위대하고 놀라운 그 일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면서 자기의 결단을 말합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환난과 핍박에 나를 기다린다고 성령이 증거 하시지만 복음증거를 하기 위하여 마치려함에는 나의 목숨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까워하는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담대히 선언했습니다. 왜 더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한 알의 밀알이고 구원받아야 할 이 세상에 수많은 영혼들은 씨눈이었습니다. 그 씨눈을 위하여 밀알인 자신은 썩고 죽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왜요? 왜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안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이런 사랑이 사도에게만 나타났습니까? 이런 사랑이 사도에게만 경험되어졌습니까? 이런 사랑이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만 나타났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이 사랑의 증인이고 이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고 그 사랑 앞에서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밀알이라는 것입니다. 영혼들은 씨눈이고 우리들은 밀알입니다.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이 일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고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헌신할 때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복음의 능력과 기도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3:1~6)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복음을 전할 사명과 기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먼저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자면 이 본문에는 이제 1장에서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것을 보고 기다리던 제자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고 2장에서는 성령의 놀라운 강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혼 사랑에 불붙은 공동체가 되어서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게 되었고 3장에서는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을 보도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3시, 6시, 9시가 기도시간이었습니다. 이 제 9시는 오늘날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입니다. 그러니까 오전 9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 이 세 번이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이었습니다. 다니엘서 6장에서 다니엘이 그 기도를 그 많은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동쪽 창문을 열고 기도한 것도 바로 이런 유대인의 기도시간을 따른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들이 기도시간을 하루에 세 번씩 잡았던 것을 보면 그들이 비록 우리와 신앙이 다르지만 역시 기도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한 것으로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을 이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이 수정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루에 세 번씩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성령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는 세 가지 요소를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그리고 기도,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가 동인이 되어서 교회가 참으로 교회다운 능력을 가진 공동체로 이제 이 세상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되었는데도 이들은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하루에 세 번씩 개인적으로 또 온 교회가 함께 이 기도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드리는 기도와 이제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이 드리는 기도는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헌신적으로 기도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보존하는 비결들을 터득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보면 성전에 들어가는 미문이라는 곳에 앉은 한 앉은뱅이가 나옵니다. 이 미문은 기록에 의하면 여성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되어 있고 그리고 거기에는 네가노르라고 하는 별명이 붙어 있는 그런 문이었습니다. 거기에 앉은뱅이가 한 사람 앉아있었는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질병이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만 앉은뱅이인 이 질병은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다닐 수 없으니 누군가가 떠메어 아침마다 성전 문 앞에 갖다 두어야 했습니다. 이 사람이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을 한 것은 성전을 올라가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자들에게 불쌍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아마 성전미문에 이 사람을 두었을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이제 구걸을 하고 있는 처지에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기도하러 가다가 자신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구하며 손을 내미는 이 거지인 앉은뱅이를 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요한과 더불어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일어나 걸으라” 했더니 이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우리 주님을 찬송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가난하고 병든 거지를 치유할 수 있도록 능력이 있는 복음을 가진 교회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가진 교회의 모습을 이 6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이 사람들이 복음 안에 있는 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이 비참한 앉은뱅이를 고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앉은뱅이를 향한 선언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말합니다. 우선 그들은 먼저 없는 것을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것은 그들이 은과 금이 아닌 다른 것이 바로 앉은뱅이 된 상태에 있는 이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먼저 복음을 믿는 그들의 신앙을 보게 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이미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그 이후에 이제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많은 성도들이 회심하고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집과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이 발 앞에 갖다 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 많은 물질이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셨으나 이 교회는 예수님과 같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사도들의 발 앞에 전 재산을 판 물질들을 가져다두었으며 교회는 이것을 가지고 과부를 구제하기도 하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은과 금이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한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한 푼의 돈을 구하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했던 것은 은과 금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에 이 앉은뱅이가 주목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이 앉은뱅이는 거기에 쭈그리고 앉아서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호소하며 한참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불쌍하게 손을 내밀며 자비를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도와줄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했던 이유는 우리는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치도록 부름을 받은 교회의 지체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은과 금으로 그를 도와줄 수도 있지만 지금 그 사람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은과 금을 줄 것인가 복음을 줄 것인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하며 담대하게 그 앉은뱅이로 하여금 마땅히 교회를 향해 기대해야 할 것을 기대하도록 만들어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 세상에는 고통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익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고 그리고 이 고통은 우리이웃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을 뛰어넘어서 우리 북한에 있는 동포들, 그리고 아프리카에 있는 난민들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고통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에게 무엇인가 우리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처럼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것만 움켜쥐고 만약에 산다면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한다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힘닿는 데로 그런 고통 하는 세상을 돕고 그리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가난한 우리를 위해서 가난해지시고 또 낮아지신 것처럼 교회는 그런 섬김의 정신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그렇게 이 세상을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의무인데 이것을 행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영혼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마딱드리게 하고 예수 이외에는 참다운 구원이 없다고 하는 것을 그들에게 전하는 이 복음 전파야말로 그 모든 물질적인 섬김보다도 더 우선순위에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성전미문에 앉아서 손을 내밀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에게 한 푼의 동전이라도 구했지만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뜻밖에도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너에게 정말 필요한 그것을 오늘 이 시간에 내가 너에게 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위대한 능력이 복음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얼마나 굳게 확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앉은뱅이를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사실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한 이 고백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복음은 객관적인 복음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고 그들은 마음 안에서 불타고 있는 그런 종류의 복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복음에 대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그 복음은 단순히 우리들이 그냥 알고 있고 듣고 있고 그런 복음이 아닙니다. 이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체험적인, 그리고 현제적인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을 그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고 돈 한 푼 앉은뱅이에게 던져주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그런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런 복음을 교회가 소유하고 있을 때 비로소 교회는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처럼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을 고치도록 부름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고 성도 각자의 마음속에서 펄펄 불붙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이 흩어지면 흩어진 그 곳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서 많은 이웃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교회 속에 들어오게 하고 교회는 또한 더 커다란 강물이 되어서 이 세상을 향해 흘러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들이 교회의 도움을 받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면서 교회를 돕습니다. 마치 산에 처음 나무가 심겨지면 나무가 산의 도움을 받지만 나무가 큰 숲을 이루면서 그 숲이 결국은 산을 도와주듯이 그렇게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으로 거룩한 신자가 되어가는 동시에 주님께로부터 받은바 그 은혜와 사랑, 그 복음의 그 놀라운 은혜, 순수한 그 능력을 가지고 교회가 섬겨야 할 그 일을 위해서 섬기고 돕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교회가 부름을 받았고 그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복음은 전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복음은 아주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고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셨다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죽고 다시 사신 분은 예수님이신데 그것이 우리에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전치사 하나 때문입니다. 위하여, 죽고 다시 사신 분은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죽고 다시 사신 그것이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이 죽고 다시 사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위하여’ 라고 하는 말은 세 가지 의미를 갖는데 우선 첫째는 우리를 대신해서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죄를 지었고 그래서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고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 된 위치에서 이 세상에 살아가고 하나님과 화목이 없고 그리고 주님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 비참한 죄인들인데 바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형벌을 당해야 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해서 받으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용서함을 받은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가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위대한 능력, 죄를 사하여주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다시 화목하게 만들어주는 위대한 능력에 우리가 적용이 됩니다. 그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사신 것, 그러니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어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고 다시 사셨다는 것은 우리를 대표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아야 할 죄를 집단적으로 지은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각자 각자가 지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형벌 받을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사람의 죄를 위해 혼자 십자가에 못 박혔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혼자 혼자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예수님이 수십 억 번 죽으실 수 없고 한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구세주가 되셨으니 이는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끌어안고 우리 모두의 대표자가 되어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고 다시 사신 것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고 다시 사신 것을 통해 그 이익을 우리들이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았는데 우리가 형벌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그 형벌은 예수님이 받으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을 때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이 우리가 한일이 되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존재가 바로 우리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고난을 당한 그것이 곧 우리의 죄를 위해 죽은 것이 되었고 그분이 다시 사셨을 때 그분이 다신 산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살려서 우리가 산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들이 죄를 지었어도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이 끔찍한 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이렇게 죄의 속함을 받고 용서받고 거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부활의 약속까지 누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을 위해 죽고 다시 사셨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그리스도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죽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대들을 위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히셨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고 인정하신 것을 통해서도 그분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외쳤습니다. 그 복음이 그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대신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기쁜 소식에 대한 감격이 그들의 속에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로 가득 찰 때 세상이 누릴 수 있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그 가득 찬 성도들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자신의 삶의 장소로 흩어집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간에 흩어진 그곳에서 그들은 담대하게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그분이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인간들의 죄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마다 다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고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수많은 곳으로 흩어져서 흩어진 그곳에서 주님의 복음을 외칩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그 세상을 향하여 오늘 이 사도들이 말했던 것처럼 죄 때문에 고통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이 세상에 있는 자원과 하늘에 있는 자원이 부족해서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모든 사라들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담대하게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붐비고 그들이 나아가서 복음을 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그 복음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과 원수 된 이 세상과의 관계를 고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바로 이런 복음으로 불붙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잠시 한주 동안 이 세상에 나아가 사는 동안에 있는 처소에서 담대하게 예수의 복음을 외치고 하나님이 없고 그리스도가 없어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이 정신적인 앉은뱅이들, 육체적인 앉은뱅이들에게 담대하게 너의 인생의 그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결해주실 것이라고 외칩니다.
담대하게 그 복음, 그 진리의 말씀을 외치던 사람들은 세상에서 환영을 받습니까? 우리들이 진짜배기 복음의 신자들이 되면 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어두운 세상의 빛이 밝게는 비치지만 어두움으로부터 얼마나 공격을 받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어느 시대건 이 진리의 복음을 따라서 그 충만한 복음을 소유하고 살았던 사람들은 고난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그 복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외치지만 기뻐하지 않는 세상을 보고 때로는 박해를 받습니다. 교회에 와서 그 복음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감격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용기를 얻어서 이 세상에 나갑니다. 또 한 주간 동안 이 세상에서 그런 복음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고 세상과 야합하면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마음에 어둠이 찾아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이 속에서 선포되는 복음을 발견하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 놀라운 은혜의 복음,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복음을 발견하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이 한없이 기뻐합니다. 그것을 경험하면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점점 더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교회가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복음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와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 잔뜩 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거대한 집단이 됩니다. 그래서 항상 참된 부흥이 이 세상에 일어날 때 그것을 극렬하게 대적했던 무리들은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커다란 교회 안에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까지는 살기 싫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맨 처음 이곳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심하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죄인처럼 갈 길을 잃던 여러분들이 이곳에 와서 주님의 복음을 듣고 깊이 예수님을 만나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던 그런 시절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체험적인 복음을 소유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이 없는 핍절한 사람들을 보면서 슬퍼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어떻게 하든지 이 피 묻은 복음을 들려주고 싶어 했고 예수의 사랑을 알게 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선명한 복음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런 착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늘 그 마음으로 기도하던 때였습니다. 바로 그런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고 저와 여러분들을 아직 이 땅에서 살아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6절에서는 또한 능력으로 나타난 복음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어떻게 했기에 복음이 이처럼 놀라운 능력으로 나타나서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모든 성도들의 가슴 속에 역사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근본을 고쳐야 할 기독교의 사명을 보여줍니다. 성전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가 거기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손을 내밀며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가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한번 구걸을 받아서 오늘 저녁에는 집을 사야지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까? 아니면 오늘 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이제 큰 농토를 하나 사서 지긋지긋한 이 거지 생활을 청산해야지 되겠다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그런 꿈을 갖기에는 이미 이 실패가 숙명처럼 오래도록 계속되어왔습니다. 기껏해야 이제 대목으로 치면 9시 직전이 대목이었고 오후 3시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제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지막 여기에서라도 단돈 몇 푼이라도 받아야지만 오늘 저녁에 가서 불이라도 때고 한 끼 저녁식사라도 먹을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이 여기 앉아서 구걸할 때 그 마음은 아마 오늘은 마음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평소보다 좀 넉넉한 돈을 구제받아서 가서 평소보다 좀더 나은 음식을 먹고 불도 좀 따뜻하게 지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내일 다시 구걸을 하러 올 수 있을 때까지 자기의 육신을 보양하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됩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은 이 세상의 근심과 걱정, 많은 고민들을 가지고 일주일을 살다가 오늘 여기에 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소원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주 안에서 그 소원들이 모두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이 땅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는 예전에 계명과 순종이라는 시리즈를 통해서 이런 것들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우리에게 주시는 복의 일부라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모든 것을 100%로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눈앞에 다급한 많은 소원들이 여러분들에게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줍니까? 영원의 빛 아래서 보더라도 오늘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마음의 소원과 욕심들이 정말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들인지 한번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혹시 그것은 오늘 앉은뱅이가 성전 미문에 앉아서 손을 내밀 때 순수하고 간절하기는 했지만 하루밖에는 인생을 해결할 수 없는 동전 몇 닢과 같은 소원이 아닌지 한번 묻고 싶습니다.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 복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는 한 닢의 은화나 동전을 구했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게 비참한 앉은뱅이의 삶으로 평생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구걸이나 하면서 살아갈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고침 받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닢의 동전이 아니라 그에게 복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고 성도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예수 믿게 된 사연들이 참 많습니다.
어떤 부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 물었더니 동기간이 많은 집에 맏며느리로 시집을 왔는데 얼마나 제사가 많은지 일년에 13번을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한번 제사를 지내려면 며칠동안 애를 써야 합니다. 제가 맏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저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믿지 않는 어른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일주일 전부터 없는 살림에 고민을 하기 시작해서 이틀 동안 삼일 전부터 장만하기 시작해서 그렇게 이제 제사를 차려놓으면 동기간들이야 와서 한번 참석해서 그것도 바쁘다고 안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와서 절을 두 번하고 차려놓은 것 실컷 먹고 설거지도 안 하고 도망가면 끝이지만 큰 며느리는 그것을 가지고 내내 설거지하고 치웁니다. 누가 한 푼이라도 보태주는 사람이 있어 뭐가 있어 그것을 13번씩 하려고 하니까 이 부인이 허리가 부러집니다. 그래서 방법을 세워야지 되겠는데 동생한테 미룰 수 없을까. 별 궁리를 다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니까 이 사람이 어느 날 저 이제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대소가가 발칵 뒤집혔는데 왜냐하면 이제 나는 예수 믿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로 가버렸습니다. 교회에 가보니까 진짜 제사를 안 지내는 것은 너무 좋은데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더 힘든 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설명을 안 해도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제사는 음식만 차리면 되는데 신자가 되기 위해서 모두 바쳐야 합니다. 참된 신자가 되라고 요구하니까 다양한 동기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에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바꾸어놓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 부인은 제사 좀 피해보려고 교회로 도망 왔지만 결국은 예수의 사랑에 붙잡혀서 인생 전체가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기독교는 사람을 부분적으로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람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큰 축복은 교회에 와서 사람들의 인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축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그냥 교제나 하고 먹고 마시고 놀다가 가고 기분이나 좋아져서 가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로부터 곧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될 노인에 이르기까지 교회에 와서는 자신의 영혼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을 지도자로 세운 예루살렘 교회가 이렇게 세상을 고쳐놓을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있는 복음을 소유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있었기에 그렇게 능력 있는 복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사도행전 본문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두 가지 요소를 지적하고 있는데 우선 첫째는 공동체의 마음입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나옵니다. 마음을 같이 해서 하나님 앞에 한 마음이 되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또 동시에 사도행전 2장으로 넘어오게 되면 2장 46절에 이들이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순전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즉 이렇게 예루살렘 공동체가 사람의 인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던 현재적인 복음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물붓들이 그런 복음의 능력을 부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세상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강력한 복음의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것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이 예루살렘 공동체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이 마음은 한 마음이 되어 있었고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순전한 상태였습니다. 순전한 개개인의 마음이 모여서 모든 공동체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고 하나 된 그 마음으로 주님 앞에 기도할 때 이런 복음의 능력이 교회의 공동체 속에 활활 타오르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자 개개인의 순전한 마음이 교회의 하나 된 마음의 상태로 가져왔습니다. 우리들이 하나 되자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우리 한마음이 됩시다.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라고 말합니다. 잘 안 됩니다. 생각과 구호처럼 그렇게 쉽게 되지를 않습니다. 왜 한마음과 한뜻이 되자고 그렇게 구호를 외치고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어도 그렇게 한마음, 한뜻이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오죽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 오죽 그렇게 되고 싶으면 우리나라에도 보면 한마음 교회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굉장히 많습니다. 두 마음 교회는 없습니다. 모두 한마음 교회, 또 한뜻 교회, 어떤 교회는 두개를 합쳐서 한마음 한뜻 교회, 그렇게 하나 되고 싶어 해도 잘 안 됩니다. 그 이유는 개개인의 순전한 마음이 아닐 때는 아무리 하나 되고자 해도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한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구호를 외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순전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순전한 마음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고 은혜를 받은 후에 하나님 앞에 마땅히 자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을 내어버림으로서 순전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전함이 없으면 겉과 속이 다른 교인이 됩니다. 순전함이 있게 되면 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질과 밖으로 드러난 삶의 질이 동일한 성질이 됩니다. 같은 품질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이야기하는 인테그레티입니다. 인테그레따스 일체성입니다. 혹은 일자성입니다. 그것이 순전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개개인이 순전한 성도가 되면 예수의 성품과 닮아서 예수님과 실제적으로 잘 연합이 됩니다. 각자가 그렇게 예수님과 잘 연합되면 그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 그 사람은 각각 서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되니까 그 마음이 하나로 흐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가 한마음이 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는 복음의 강력한 능력은 각기 종교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나 이기심으로 가득차있고 부패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각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깃발을 걸고 수없이 모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복음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은 큰 교회만 깃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은 오래 믿은 교인의 마음에 깃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은 성경을 많이 배운 성도의 마음속에 깃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고 많은 숫자가 교회로 모이고 또 성경을 많이 통달해서 알았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이런 복음의 놀라운 능력은 그들의 마음에 순전함의 상태를 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런 복음의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죄인들처럼 이 세상에서 흩어진 양떼들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께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참된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크고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땠습니까? 전에는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것들을 부러워하고 이런 저런 것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고 없는 것으로 인해서 고통하고 때로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너무나 낙심해서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참 사랑을 깨닫게 되니까 마음의 더러운 것을 내어버리게 되었고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은 순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는 마음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옛날에 사랑스러웠던 것이 이제는 사랑스럽지 않게 되었고 옛날에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들이 지금은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그러면서 주님을 찬송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한 게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마음이 녹아질 때는 이상하게 기도의 제목이 없어져버립니다. 예수님이 그때 나타나서 애야, 네가 그렇게 많이 회개하고 순전한 마음이 되었으니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그때는 지금부터 제가 부를 테니 빨리 적으십시오. 집 한 채, 자동차 두 대, 좋은 신랑감 하나, 뭐 등등 막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 안에서 행복합니다.
나는 없어도 주님이 곁에 계시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당신이 계심으로 나는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무름으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피어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죄악 된 세상에서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방황하던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셨으니 이제 내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무엇이 필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일생동안 내가 어디에 있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 예수님 이 땅에 내 자리에 살아계셨더라면 하고 싶으셨던 일들을 섬기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고 싶습니다. 그런 고백만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맨 처음에 예수 앞에 나와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예수가 전부이던 나, 그래서 단 하루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수 없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그 마음이 지금도 있나요? 그때 우리가 얼마나 약했습니까? 그래서 매일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우리는 울었습니다. 분초라도 주님이 붙잡아주시지 않으면 살수가 없고 매순간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시지 않으시면 이 어두운 세상을 우리들이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너무나 약했습니다. 고난이 오고 시련의 파도가 오고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우리는 만물의 찌끼처럼 그렇게 연약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연약했을 때 능력이 심히 큰 것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복음의 능력 말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의 능력이 나를 변화시키고 그 복음의 능력이 나의 옛 사람에서 나의 새 사람으로 구출시켰습니다. 그 복음의 능력이 이 어두운 세상에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같이 누추한 사람들의 입술을 열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영혼을 위해서 가슴을 뜯으며 울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아, 우리가 정말 그런 마음입니까? 그 마음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서 새벽에 일어나서도 많이 슬펐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의 넓은 사랑의 마음이 우리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나 또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예수님 앞에 그렇게 변함이 없는 순전한 마음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순전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합쳐서 교회가 모두가 한 마음이 될 수 있을까?
요즘에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그런 비유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애들아 열린 교회의 교인들아 이리로 빨리 오너라. 부르면 10%는 많이 눈물을 흘리며 뛰어갑니다. 나머지 10%는 부지런히 걸어갑니다. 나머지 한 40%는 그냥 걸어갑니다. 나머지는 안 움직입니다. 드러누워서 노는 사람, 신발을 거꾸로 신고 세상으로 갈 궁리를 하는 사람,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씻어냅시다. 그리고 한번 조용히 이 교회에 와서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어두움의 밝은 빛에 아무 희망도 없이 이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며 하루에 행복을 구하던 이 앉은뱅이 같은 우리들에게 주님이 복음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셨던 것처럼 한번 시작해봅시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주님은 꼭 갖고 싶은 그 마음이었습니다. 바로 그 마음에 복음의 능력이 깃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세상사는 것이 힘들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섬기는 것이 너무 고단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것이 성도로서 우리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쓸데없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왜 소중한 당신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 자고 나면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눈뜨면 그 사랑이 신기하게 우리의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여전히 죄 많고 사악한 인간들이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이 아파서 우리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기를 부인할 수 있었고 그렇게 부인하는 참회의 눈물이 흐르고 나면 예전에 잊혀졌던 예수님의 생애를 사신 선명한 그림이 우리의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그런 마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착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하십시오. 성전 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복음의 능력이 바로 이렇게 순전한 마음으로 공동체가 하나 되었을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의 능력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연약한 것 같으나 그 속에 복음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강하였고 힘이 없는 자 같으나 그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바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순전한 마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이런 공동체가 됩시다. 예수의 사랑을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됩시다.
마지막으로 공동체가 이런 복음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게 된 데는 이들의 기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1장에 보면 마음이 하나가 되면서 그들은 기도의 전혀 힘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 이외에는 다른 일은 안 하는 것처럼 전폭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었고 또 2장에서도 보면 성령님이 강림한 그 후에 역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함께 떡을 떼며 찬미하며 기도에 힘썼습니다. 이런 공동체의 강력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그럴 때 그가 벌떡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기도하지 않고 설교자를 위해서 혹은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에 의해서 이런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재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그런 영혼의 상태를 근심하시게 되고 그래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설교자에게 실망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붙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 터이니 그때까지 교회가 지불하게 될 희생에 대가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자신의 영혼보다 먼저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된 것은 모든 예루살렘 교회였고 전혀 기도에 힘쓴 것도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능력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갖는 한마음이 되는 기도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큰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의 인생의 상황을 조금도 개선할 수 없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는 희망을 잃어버린 이 죄인을 다시 살리시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시간이 바로 기도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그 간절한 중보기도를 사용하셔서 복음의 이 기이한 능력이 나타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 기도해야 합니다.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할 사명과 기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