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청년전도집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3-7)
녹취자 : 한지인
여러분들이 저희 열린교회를 찾아오신 것을 교회를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여러분들에게 잠깐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에 있어서 아주 즐겨 사용하시던 짐승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양이라는 짐승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이런 비유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양치는 사람에게 일백 마리의 양이 있었는데 저녁때가 되어서 그 양들을 모두 거두어 우리에 들여놓고 하나씩 둘씩 모두 헤아려보니까 한 마리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동은 즉시, 그 한 마리가 바로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그 양을 찾기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 안에 잘 넣어두고 그 한 마리를 위해서 산 넘고 물 건너 멀리 떠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 목동은 다친 채 스스로 양떼로부터 유리되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서 어디엔가 슬피 울고 있는 그 양 한 마리를 구출해내어서 너무나 기쁜 나머지 어깨에 매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너무 기쁜 나머지 동네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제 내가 이 한 마리의 양을 찾았기 때문에 너무 기뻐서 여러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터이니 모두 함께 와서 먹고 마시자고 제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양 한 마리의 가격은 우리 돈으로 약 16만원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만,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다가 저녁에 잔치를 하기 위해서는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돈이 들어갔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동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그 동네사람들을 그렇게 성대한 잔치에 초청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도 되지 않는 비유는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비유가 순수하게 예수님께서 지어내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이 인간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일들 가운데 하나를 비유로 들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보이도록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할 때 추운 겨울에 저녁을 먹으러 학교 아래로 내려가는데 예쁘게 생긴 자매 둘이서 풀과 스카치테이프를 들고 다니면서 뭔가 포스트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도 붙이고 있었는데 하얀 A4용지에 총천연색 사진하나씩을 붙여놓고 뭔가를 써놨습니다. 하도 궁금해서 붙이고 간 하나를 보니까 현상금 70만원이라고 써 붙여놨습니다. 얼핏 어느 할머니가 집을 나갔나 생각을 하고 보니까 천연색 사진 한복판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강아지는 흔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치와와와 같은 작고 하얀 강아지였습니다. 종류는 잘 모르겠는데 그런 작은 강아지가 머리에 리본을 달고 있고, 그 옆에는 강아지를 언제 어떻게 잃어버렸는데 강아지를 보호하고 계시거나 혹은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는 분에게는 70만원을 사례하겠습니다. 꼭 찾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삐삐번호와 전화번호를 써놨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아지가 70만원씩이나 할까 한주먹밖에 안 되는 강아지가, 보신탕을 해봐야 한 그릇밖에 안 나올 텐데 70만원씩 할까. 그리고 돌아오면서 어렸을 적에 제가 강아지를 길러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어렸을 적에 개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우리 집에 강아지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근데 언젠가부터 그 강아지를 전혀 기르지 않고 아이들이 강아지를 기르고 싶어 해도 제가 아주 결사반대를 해서 강아지를 못 기르게 합니다. 여러분 생각에 제가 동물을 꽤 싫어하는구나 하는데, 동물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그 동물에 대해서 받은 상처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쉽게 그것을 결정하지 못하게 합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개를 너무 좋아해서 길렀는데, 제가 지금 얼핏 기억하기로 서너 마리 되었었는데, 얼마나 영리한지 그렇게 잘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정을 흠뻑 주고 함께 좋아하는데 꼭 죽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먹을 것이 없으니까 돌아다니면서 짐승들이 뭔가를 많이 주워 먹었는데, 꼭 쥐약을 먹고 죽은 쥐를 먹고 죽던지, 잘못 논 쥐약을 탄 음식을 먹고 죽던지 꼭 죽을 때 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얀 강아지가 코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는 광경을 생각하고 며칠씩 밥을 못 먹고 울고불고 했던 어린 시절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그 자매들 마음이 깊이 이해가 갔습니다. 그러니까 저 강아지를 놓고 70만원을 주고 찾을 가치가 있을까하고 묻는 것은 나처럼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본인들의 입장에서는 70만원이 아니라 아마 그보다 더한 것을 주고라도, 아버지의 자동차를 팔아서라도 그 사랑하는 강아지를 찾을 수 있다면 아마 기꺼이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기도한 것은 아니지만 속으로 찾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골목을 지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 목동도 똑같은 마음으로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목동이 양을 치는 이유는 양을 길러서 털을 깎거나 혹은 잡아서 고기를 먹거나, 팔기위해서 양을 기르는 것입니다. 혹은 젖을 내기 위해서 양을 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일이고 지금 이 목동이 일백 마리의 양을 치면서 살아올 때는 한 마리 한 마리를 돈을 생각하면서 기르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를 자기 가족처럼 느끼면서 그 관계자체를 즐거워하면서 한 마리 한 마리를 길러왔는데 어느 날 집에 와보니 때는 어스름이 되었는데 한 마리가 없었습니다. 만약에 이 한 마리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 산 넘고 물 건너다가 실족해서 다리가 삘지도 모르고 혹은 밤이 되어서 강도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신변에게 닥치는 위험과 손해가 양 한 마리의 가격하고는 비교될 수 없이 끼칠 텐데도 이 목동으로 하여금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게 만든 것은 눈 앞에 보이는 돈과 이익이 아니라 그 한 마리의 양과 자기가 맺고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그로 하여금 산 넘고 물 건너 찾아 나서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맨 처음 부모와 만난 이래로 친구들을 만나고 또 좋은 이성을 사귀고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고 그 후에는 자녀들을 만납니다. 그 이외에도 이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도 우리를 수단으로 생각하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랑 그 자체가 우리를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목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우리들이 살아오면서 우리를 가장 감동시켰던 관계는 우리자신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관계입니다. 불행히도 부모가 우리로부터 베푸는 사랑이 크고 무한하다고는 말하지만 부모들조차도 우리들을 목적 그 자체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어떤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었을 때에는 부모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상처가 부모로부터 우리에게 물려받은바 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배신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 자신을 목적으로 생각하다가 어느 한 순간에 우리자신을 수단으로 생각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배신이라고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들이 일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도 이처럼 우리 자신의 존재자체가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 그런 우리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관계. 그런 관계는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특히 우리 젊은이들은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어느 곳에 우리들이 가 봐도 항상 우리들은 수단으로 취급되기가 일쑤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은 인생을 살아오는지 모르지만 젊은 날에 저를 철저하게 괴롭혔던 생각은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바 된 존재로 태어나서 누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나를 사랑하는가.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문학가 가운데 카프카가 쓴 ‘변신’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 집안에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어느 날 커다란 벌레로 둔갑하고 맙니다. 그 아들이 벌레로 둔갑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은 자신이 가족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가족들에게 무언가를 호소하려고 하지만 의사는 소통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족들도 맨 처음에는 벌레로 변한 자기의 가족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지만, 마지막엔 결국 그 젊은이는 벌레로써 죽고 죽던 바로 그날 가족들은 해방감을 느끼면서 피크닉을 떠난다는 것이 그 단편소설의 끝입니다. 사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제껏 살아오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자체 때문에 한없이 행복해하는 사람.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을 때 그들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할 때에 자기를 모두 그 행복의 대가로 지불해도 좋을 듯 싶어 하는 그렇게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여러분들이 받으면서 살아왔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참다운 성숙은 이처럼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실존으로써 진정으로 자기 속에 있는 진정한 이 사랑의 욕구를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채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라고 하는 어떤 경건한 외로움으로부터 그 한사람은 이제 참으로 성숙된 인생을 살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다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들은 알지 못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리고, 이 천지를 지으셨다고 하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진화를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진화가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진화의 근원이 되는 그 물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원래 존재했다고 말하지만, 그것처럼 과학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은 없습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세상의 물질이 원래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일까요. 생물의 기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설을 내세우지만, 누구도 아주 단순한 생물 하나도 창조해 본적이 없습니다. 이미 지각이 있는 많은 구라파 사람들은 그래서 이미 이 진화론적인 가설을 포기하고 창조론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그리고 그 창조를 기반으로 우리는 나머지 가설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도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드신 것은 바로 마지막에 창조하신 한 피조물을 위함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빗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명이 있는 한 인간으로 만드셨고 그리고 그 인간을 다시 또 한 인간으로 창조되게 하셔서 이 세상에 남녀를 창조하시고 그 둘을 한 부부로 맺어주셔서 이제 오늘날 이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문화를 건설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이 이 세상에 자신의 성품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영적으로 그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교통하시면서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시고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높이면서 원래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돌보아 이끌도록 하시려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이 세상에 자기의 사람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처음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범죄함으로써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이제 그 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스며들어서 창조 원래의 찬란한 빛깔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바로 그 속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가운데 파고들어서 태어나면서부터 그 사람을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하나님이 원래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목적을 따라 살기를 거절하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이기적인 그러한 죄인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죄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부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를 멀리 떠나 방탕한 길로 떠나간 탕자와 같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죄와 욕심에 이끌려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방황하게 되었으니 그 사람의 모습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에 비유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젊은 시설에 경험해야 할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경험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 모든 경험보다도 뛰어난 경험은 나는 여러분들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일인가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자기혼자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생각도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는 마약의 소비와 20여 만명이 넘는 중독자들이 마약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바로 그러한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며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만은 그러나 신앙을 떠나서도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전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젊음은 30년 후에 갚기로 되어있는 지불만기 어음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생각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내면 어려분들의 노년은 너무나 비참할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술에 취하고 그리고 방탕에 취해서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는 노년 시절을 지나게 될 것이며 여러분 이후에 태어나는 젊은 사람들에 의해서 모두 제거되고 청소되어버렸으면 좋을 폐기물과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한시대의 역사를 더럽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말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한번 이 세상에 사람으로써 존재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젊은 날에 더 많이 정신적으로 고민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정말 가치있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피눈물나게 여러분들이 고민하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 자신의 사상을 찾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생각이 있는 한사람이 되어가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당신의 정신적인 특정과 영적 특성을 나눠주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성장하면서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 귀의해서 그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친교의 기쁨을 누리며 가족관계로써 살아가지 않으면 그는 사람답게 살려고 애를 쓰면 애를 쓸수록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떻게 보면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인 것입니다. 양떼도 떠나고 자기를 인도했던 목동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어두움이 깔리는 들판에서 길을 잃고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양은 태어날 때부터 지독한 근시안이기 때문에 길을 잃는 일이 많습니다. 자기 딴에는 한시바삐 자기의 사랑하는 동료들과 그리고 목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리저리 헤매고 돌아다녔지만 마지막 도달한 곳은 저 벼랑 아래 가시덤불이 가득한 그 곳에서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가시에 찔리며 피를 흘리고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보며 슬피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런 불쌍한 사지에 놓여있는 그런 신세가 바로 주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처지에 있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인류 4대 성인 가운데 한분이라고 일컬어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엄격하게 말하자면 성인으로써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의 임무는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가시나무 떨기에 찔리며 목자의 음성을 애타게 기다리는 길 잃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으니 우리들이 예수라고 불리우는 그 한 인간은 사실 몸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참 인간이셨지만,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고통과 죄로 가득한 세상에 오셔서 철저한 이타심과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일생을 사셨으니 그것은 인류에게 감동을 끼치시기 위한 모본을 보이려고 그 일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그 분 안에 있는 잃어버린 양떼와 같은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살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누구처럼 왕의 아들로 태어나신 적도 없고 그분은 누구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부하로 만들어 제국을 건설하신 적도 없으며 그분의 활동 무대는 전 세계를 누볐다기 보다는 오히려 팔레스타인의 작은 몇 동리사이를 오간 그러한 보폭 작은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영향력은 온 인류를 뒤엎었으니 그분의 이 세상에 오심을 기준으로 Anno Domini와 그리고 Befor Christ, B.C.와 A.D. 이 인류 역사의 신기원을 가르는 정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역사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희생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도덕적인 모범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한 가지 독특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못박혀 죽으신 그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진노아래에 놓여있게 되었고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각기 죄인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형벌아래에 놓여있던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주님이 궁극적으로 하신 그 일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시덤불과 같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죄인의 상태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그분이 하신 최종적인 일은 바로 온 세상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를 향한 형벌을 한 몸에 당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이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베풀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주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로 작성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원인들이 굉장히 많은 것처럼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가 불행의 원인이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가지 못하는 부모의 불화가 그 사람의 인생을 비극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가난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진정으로 부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인정받을 수 없었던 그렇게 무능한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깊이 인정해주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번씩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 좋은 짝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과 불행의 원인일 수 없습니다. 불행의 원인은 다양한 것처럼 보여도 그 밑에는 하나의 뿌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있이 살게끔 되어 있는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의 길을 택하는데서 오는 불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33년 동안 종처럼 우리 인간들의 발을 씻기고 우리인간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노예처럼 섬기는 삶을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우리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용서를 받아 아버지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오랫동안 신앙에 귀의한 적이 없어도 우리가 유명하게 알고 있는 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이렇게 결국은 하나님을 등진 이세상의 많은 죄인들을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점점 철이 들고 독서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이 거짓말 같은 기독교의 교리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방황했고 그리고 보다 더 내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줄 수 있는 정교한 논리를 찾아서 그렇게 사상적으로 방황하며 인생을 지냈습니다. 어떤 때는 어렸을 때 다니던 기독교를 박차고 나온 것이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 한 인간의 결단이었는가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면서,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의 사상과 책 사이를 오가며 인생관을 정립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을 붙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수많은 이세상의 사상과 생각, 그리고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나를 유혹하고 손짓했던 수많은 철학자들과 그리고 사상가들이 마지막에 5년이 넘는 세월동안 방황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 남은 것은 망가진 내 자신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것 같은 고독의 느낌,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 자신이 인간으로써 이 세상을 존재하는 것이 너무 힘겹기 짝이 없다는 패배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울 변두리의 아주 작은 교회에서 어눌하게 전파되는 한 할아버지의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그리고 거기에서 들리는 결코 이전에는 내가 접했던 철학이나 사상보다는 정교하지 않은 주장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는 그 주님의 초청이 내 젊은 날의 모든 방황을 끝내게 만들었고 그리고 저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며 그리고 내 인생의 참된 기쁨은 그 나를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고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이제껏 하나님의 그 초청과 약속을 받아들이며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금 보면, 그분의 사상을 내가 그렇게 흠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여튼 사람은 각자 자기 수준에서 감동을 받으니까 항상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제 인생에 아주 밝은 빛을 던져주는 한 책을 만났습니다. 한 저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톨스토이였습니다. 저는 지금은 그분을 그렇게 흠모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당시에 인생의 참된 길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방황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굉장히 마음에 다가왔는데 하나는 톨스토이, 또 하나는 도스토옙스키였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글을 읽으면 사실 톨스토이보다는 훨씬 공감이 되는데 답이 없습니다. 가슴에 아주 뜨겁게 와닿고 깊이 공감이 가는데 마지막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톨스토이의 글들은 마지막에 답이 있습니다. 사실 라스코리니코프는 내 인생의 정답이 될 수 없지만 네플류도프 백작은 제 인생의 답이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그 당시의 저의 판단이었습니다. 그 때 그분의 글을 읽으면서 지금은 제가 그분을 그렇게 흠모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 당시로서는 완전한 인생에 대해서 내가 붙들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 놓친 가운데 읽는 그 분의 책을 통해서 제 인생의 참 빛을 보았습니다. 그 분의 참회록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당시에 제가 이십대 초반이었습니다. 아주 전적으로 공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말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하면, 자기가 어느 날 방황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자기가 굉장히 안전한 곳에 누워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내려다보니까 한없는 하늘 위고 구름 위에 자기가 떠있는데 뭔가 바닥이 있어서 거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구름을 보는 순간에 아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기에서 구르고 뛰고 흔들어보아도 흔들리지 않는 바닥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모든 논리적인 증명을 이 세상의 누구도 끝낼 수 없지만 그러나 신앙으로 받아들였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기를 완전하고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 라고 하는 그런 깊은 감동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실 때에 여러분들에게 가지셨던 그 기대를 따라서 주님과 사귀면서 그 분의 아들, 딸로써 살아가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인생의 방황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불행해진다면 그 방황조차도 없이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일에 몰두하다가 언젠가 여러분들은 슬피 울면서 죽음 저편으로 인생의 날개를 접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을 보고 당신께 나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찾아 가십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성품을 따라서 이 세상에 창조된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방황하던 한 마리의 양과 같던 나의 이 고통과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그 분을 여러분들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여러분들의 죽었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래서 여러분과 그 분 사이에 생명적인 관계를 갖고 마치 가출한 자녀들이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한없이 행복한 가족관계를 누리면서 사는 것처럼 여러분들을 그렇게 당신 앞에 부르고 계신 분이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목자가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설 때에 그 양은 가시덤불이 가득한 숲속의 벼랑 끝에서 몸부림치며 빠져 나올수록 피흘려 찢기며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어둠이 내리는 그 벼랑에 자기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사랑스러운 목자의 지팡이 소리와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와 그 음성은 피를 흘리며 떨고 있는 이 어린양 한 마리에게는 얼마나 기쁜 구원의 음성이었을까요. 그는 이제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을 떨며 두려워하며 그 속에서 방황했지만, 이제 목자의 음성이 들리니 이제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고 더 이상 떨 필요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렇게 벼랑 끝 가시나무 떨기 아래 찔리며 흐느끼고 있는 한 마리의 양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런 양을 찾아 나서시는 한 분이 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그분이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을 찾아 나서시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여러분의 것도 아니고 바로 여러분들을 찾아 나서신 목자되신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바로 그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찾아 나서서 대책이 없이 가시에 찔리며 벼랑 끝에 서있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팔을 내미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내민 손을 잡기만 하면 여러분들은 혼자 사는 것 같은 인생의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분을 향한 사랑이 여러분들 마음에 자라기 시작할 것이며 여러분들이 그분을 건져서 여러분들의 어깨에 매고 당신의 집으로 갈 때에 그분만큼이나 여러분들은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제는 결코 혼자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계셔서 그래서 그 분의 도우심을 함께 받으며 그리고 그 분의 사랑을 받으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여러분들을 버려도 그런 여러분들을 버린 사람들이 주는 상처와도 비교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사랑 속에서 자존감을 회복하며 어두운 세상을 하나님이 도우시는 힘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비로소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며 제가 왜 이 저녁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마음 가득히 눈물을 머금고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잠시 후 여러분들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떤 죄를 지었든지 여러분들이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떤 고통과 어떤 방황 속에서 젊은 날을 보냈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주님은 부르시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날 동안 여러분의 인생에 가득 찼던 고통과 방황들을 끝장내고 그리고 여러분들 속에 그리스도 예수와 참된 생명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솟아나게 하셔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이 원래 이 세상에 여러분들을 만드실 때에 기대하셨던대로 인생을 살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어디든지 하나님과 동행할 것이며 이제 여러분들을 괴롭혔던 어두움의 날들은 끝나고 참다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복된 교제의 행복이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아우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속에서 함께 형제 된 지체들을 만나게 될 것이며 그 속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는 인생의 참된 비결을 배울 것입니다. 잠시 후 여러분들에게 이제 사랑하는 형제들이, 사랑하는 자매들이 짧은 시간에 걸쳐서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참된 도리를 보다 분명하게 개인적으로 제시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는 복된 시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빌어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