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케 하며 귀신을 쫒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5-8).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셔서 파송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들이 좀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명령이 등장합니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가지 말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이 명령은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 대 명령 ‘너희는 만천하에 다니며 이 복음을 전파하고’ 라고 한 그 명령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이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고을에도 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사도들이 이 사람들과 절대로 접촉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 지역을 우선적으로 방문하지 말도록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저작 의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원래 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유대인의 혈통으로 하나님의 구약의 약속을 따라서 오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전도하고 싶었던 책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특별히 이 부분을 부각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 모두를 위해 오셨지만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먼저 이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셨던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고을에도 가지 말라고 하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의 초기에 한해서 우리들이 지지되어야할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성경은 복음이 제일 먼저 유대인에게서 그리고 이방인에게로 전파되어야할 순서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을 부어주실 때에도 이방인들에게 먼저 부어주시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유대인 제자들에게 먼저 부어주셨던 것이죠. 오늘날에도 이 복음은 교회와 가정 그리고 동족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로 전파되는 하나의 복음사역의 경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었던 이 사람들을 이제 사도로 삼으셔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아직까지도 부족한 것이 많은 이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이 바로 이들을 전도자로 보내시는 마음이었습니다. 전도자로 이들을 삼아 보내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은 또한 우리 열린 교회를 세우신 우리 주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을 사도삼아 보내시기 전에 먼저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시고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 일을 하게 되신 동기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함이라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이 무리들을 보실 때에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보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을 사도 삼아 세상에 파송하셨던 것이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은 각각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능들과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 자기를 해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날카로운 뿔, 물어뜯을 수 있는 큰 이빨 등등 이러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들을 각각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양은 그런 것들을 부여받지 못한 채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우리를 양에 비유하셨고 구약에서도 언약백성들을 양떼로 비유하였습니다. 그 많은 짐승들 가운데 양에다가 우리를 비유하신 이유는 양이 착하고 온순해서라기보다는 목자의 도움 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싶으셨던 것이죠. 인간은 모든 만물들 위에 뛰어난 영장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뛰어난 것은 육체의 특징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특징이지요. 힘으로는 짐승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과 정신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과 정신이 그렇게 탁월하기 때문에 인간은 또한 하나님의 더 큰 보호가 필요한 역설적인 존재가 되었지요. 개는 개만 못한 개가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개만도 못한 사람이 될 수 있지요.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입니다. 모든 사물들은 각각 자기보다 못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사물들이 지니지 못한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영혼을 잘못 사용하게 되면 그러면 자기만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개 같지 않는 개는 없어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그 위대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가야할 존재로 창조되었고 여기에 가장 적합한 비유가 양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인간의 모든 비극은 어디에서 옵니까? 사람들은 인간 불행과 비극의 원인이 물질의 부족 때문이고, 질병 때문이고, 무지 때문이고, 인간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의 도구 일뿐이고 인간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도록 빚어진 존재인데 그 존재의 의도에 맞게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인데 그렇게 살지를 않으려고 하는 것이 또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지요. 그래서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목자들을 주셨습니다. 당시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아 더 큰 목자이신 하나님께로 인도하여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게 되었습니다. 사자와 호랑이야 홀로 다니는 것이 잘못될 것이 없겠지만 양이 홀로 유리방황한다면 그것은 맹수의 밥일 뿐입니다. 이러한 처지를 예수님께서는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민망히 여기시니’ 라는 이 표현은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 는 뜻이 원어의 뜻입니다. ‘에스프랑크니스텔’이라고 쓰여 있는 이 수동태는 바로 그렇게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의 자리가 창자라고 믿었고 콩고사람들은 간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마음을 번역을 올바르게 한다면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으니’ 라고 번역을 하면 제대로 된 번역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으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함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사도들을 보내시면서 너희들은 나의 제자이고 내가 너희에게 큰 능력을 줄 터이니 너희만 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의 아버지께 청하여 더 많은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예수를 믿고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어쩌면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셨던 그 마음을 제자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교회에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제 주님의 큰 은혜를 받고 이 세상에 나가서 하여야할 사역은 바로 이렇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위해 복음을 들고 나서던 사도들의 바로 그 일을 뒤이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셨던 바로 그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날 조국교회의 현실을 보십시오. 정말 교회에 이 예수의 마음이 있습니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했던 때에 자기를 찾아오셨던 목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큰 사랑에 사무치는 마음이 교회에 있습니까? 그래서 이 땅에 있는 많은 길 잃은 영혼들을 바라보고 가슴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마땅히 교회되게 했던 그 참된 예수의 마음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위하여 울어야할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마치 교회는 거대한 기업의 집단처럼 성도들의 헌금을 굴리고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하는 대신 세상에서 찾는 은과 금이 교회에도 많이 있다고 선전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이 세상과 구별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세상과 똑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려고 하는데 그것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는 인간 속에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들이 깊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본떠서 자신들도 커지고 싶어 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본받아서 자신들도 강하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죠.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하나님 없는 나라이고 그 나라의 자랑은 큰 크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의 정신이고 세상의 흐름인 것입니다. 더 많이, 더 크게, 그리고 더 광범위하게, 더 큰 능력,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재물, 이런 것들이 바로 이 세상의 정신이고 바로 이런 것들이 바벨론적인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교회가 이렇게 세를 과시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이 세상에 편만하게 되어서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세상을 뒤덮는 그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왕국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렇게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것으로 세를 과시하고 불교에서 얼마가 모였으니 기독교에서는 얼마가 모여야 된다는 이런 주장들은 하나님의 나라인 예루살렘을 바벨론 나라와 동일시하는 어리석은 생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바벨론 나라의 특징은 더 크게, 더 많이, 큰 권력 이것이지만 그러나 교회는 예루살렘의 특징은 그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몸집을 불리고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그 일을 위해서 세상과 똑같은 정신을 가지고 교회를 홍보하고 이렇게 하는 이 방식은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닌 것입니다. 다행히도 2000년대 후반 이후로 이제 미국에서도 마케팅교회들이 점점 날이 저물고 있다는 다행스런 소식이 전해집니다. 교회를 커다란 기업의 원리를 가지고 운영을 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를 만든다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거기에 경제 원리를 도입하고 목회자를 한 회사의 CEO처럼 부각시키는 이런 종류의 교회관은 이미 미국에서도 인기를 잃기 시작하고 이런 교회들이 이미 가라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의 본질은 교회의 건물이나 교회의 규모나 이런 것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도도 삼아 파송하셨을 때의 그 마음의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는 영혼들을 볼 때 가슴이 찢어지는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었고 제자들이 바로 이 마음을 나누어가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왕국을 전파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도가 되었지만 이 마음을 우리들처럼 소유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말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이 마음을 정말 전수받게 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능에 있어서는 이들이 더 큰 권능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비록 죽은 자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고 문둥병자를 고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마음은 그 당시의 사도들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교회가 충만하게 가지고 있지 않으면 형식은 교회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일수가 없는 것이죠. 이렇게 양떼를 민망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이 마음은 결국 잃어버린 양을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제일 먼저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먼저 받은 유대인들 그들에게 먼저 가도록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잃은 양이 되었다는 그런 해설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집중에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바 되어서 형식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삶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축복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는 비참한 영혼들에게 먼저 다가가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잃은 양으로서의 우선성과 관련이 되는 것이죠. 잃은 양의 우선성은 이스라엘의 우선성을 기초하고 있습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은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세계사에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두 줄밖에 나오지 않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이렇게 중요한 이유가 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찮은 크기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전개를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신 것이죠. 그 점에 있어서는 애굽과 바벨론 모두를 합쳐도 이스라엘 백성 속에 일어난 작은 사건의 의미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 주신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스라엘에게 먼저 알리시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고 그들에게 계시된 바를 터득하는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며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구속사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해주는 중요한 구원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죠. 이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었죠. 그런 점에서 이 구속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완성된 것이죠.
그러나 이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 죽음과 부활은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보내신 성령을 통해 이전에 이루어진 구속의 사실들을 이후에 적용함으로써 구원은 종결되었지만 구원이 적용되는 역사는 계속 진전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계시해주는 계시의 역사는 끝났지만 이루어진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가 적용되는 구원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역사의 물줄기에 서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제 구속의 계시를 완성함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였고 이제 완성된 구속의 계시가 적용되어서 구원을 얻은 우리는 이 구속사가 전개되는 선교적인 시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구들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언약적으로 볼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을 먼저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새 언약이 도입됨으로 완전히 성취되었고 우리 모두 이방에 속했던 사람들도 이 언약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근본적으로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모든 언약과 동일한 것입니다. 형태에 있어서는 각각 달랐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하나의 은혜언약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심으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실 이 영원한 은혜의 언약과 동질의 것인 것입니다. 이 언약을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족장들의 역사 속에서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통해 얻어지는 이 구속의 유익을 누리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의 계시의 말씀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또한 신약의 말씀도 이들에게 먼저 주어져야했습니다. 구약의 은혜를 먼저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또한 성령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임하여 그들을 통하여 구속이 완성된 것을 알게 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서 구원이 나서 그 지식이 이제는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고 영적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모든 역사 속에 전개되고 펼쳐질 것들을 주님은 경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 부어진 이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과거적으로 보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미래적으로 보면 이제 미래에 이루어질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닌 영적인 이스라엘로 나아가는 관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핵심에 바로 그 축에 이스라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을 처음으로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방인의 길로도 먼저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먼저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먼저 가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고 은혜를 받은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믿든지 아니하든지 그들에게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전파되어야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일 먼저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 믿다가 낙심한 지체들, 은혜를 받았으나 미끄러진 영혼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의 혈육들, 나의 가족, 내 형제, 내 골육지친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약의 교회에 땅 끝까지 이르러 전파하도록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같이 한 교회에서 주님을 믿고 함께 복음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다가 미끄러진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문화가 다른 피부색깔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만천하에 나가 복음을 전파하라는 이 화급한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명령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또한 예수님의 이 초기의 가르침,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복음을 들려주라는 이 말씀에 가슴깊이 동의하여야하는 것입니다. 먼 곳에 나가기 전에 먼저 내 구역의 식구들, 예전에는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은혜 안에 있었던 지체들, 지금은 파리해진 채 겨우 교회에 출석하는 지체들, 미끄러져 영혼들이 보이지 않는 그 구역을 돌아보면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서 울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이 누가 울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불쌍한 상태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미끄러진 영혼들, 비록 우리 교회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리저리 방황하며 교회에서 미끄러져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상실한 많은 영혼들, 그 영혼들을 끌어안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그 마음이 예수님께서 교회에 부탁하신 바로 그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섬김이 있든지, 무슨 찬송을 하든지, 항상 교회 안에는 이 예수의 마음이 가득해서 그래서 그 마음으로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서 미끄러져 지금은 방황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그들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어 그들로 어둠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돌아오게 하여야합니다. 그들이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방탕한 길을 걸어가고 냉담한 가슴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이 은혜에 목말라하며 헐떡이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 세상에 있는 친구들은 영혼의 그런 갈증 그리스도와 그리고 은혜가 아니고는 채워질 수 없는 내 지체들의 고통 받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논쟁의 정신은 고통의 책임을 묻지만 그러나 긍휼의 마음은 고통의 상태를 직시하고 그 영혼의 아픔에 동참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이 바로 이런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기 전에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 전에 이미 주님을 믿고 있었던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이스라엘집의 잃은 양이었고 우리도 한때는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우리 자신의 무지와 어둠 그리고 주님께 대한 패역한 삶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빛에서 멀어져 어둠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시덤불속에 있는 어린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거기에서 헤어 나오려고 몸부림칠수록 온몸이 가시에 찔려 상처투성이가 되고 피가 흐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고통스러운 인생의 상태를 개선해보기 위해서 많이 애썼지만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우리는 온몸의 상처와 피가 가득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단정하게 진리를 사랑하고 살아가는 이 모습이 우리의 원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만들어준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의 본래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찬양)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가시밭길 속에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을 때 우리 중 누구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손을 내밀어서 그 손을 잡고 가시밭길 어두운 길에서 돌아선 사람은 없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그 일을 사람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빚진 사람들, 주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께 사랑을 받는 잃어버린바 된 우리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내미는 손길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섬김의 손길을 통해서 더 크신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우리는 홀로 버려진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지만 우리 스스로의 어두움과 죄악 때문에 주님을 멀리 떠나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 속에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우리도 똑같이 그 사랑에 압도되어서 그 사랑을 품고 그리고 영혼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이바지하고자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교회에 맨 처음에 나올 때 그리스도를 붙들었을 때는 우리의 인생 밖에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는데 막상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주셨을 때 우리보다 불행하고 아픈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눈물이 우리의 눈가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그리고 오랫동안 가시와 같던 나의 가족들이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를 위해 살았지만 예수 안 믿는 우리 엄마 그리고 우리 아버지 그리고 너무 불쌍해서 눈물을 흘렸고, 갈등을 일으켰던 많은 형제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가운데 갈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라도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나를 그렇게 해달라고 비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랑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너무 많이 식어버리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한번 육체를 미워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생각을 버리고 사는 일은, 성령의 생각을 따라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번 이 마음에 사무치는 이것은 쉬운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늘 이 십자가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우리가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면 우리의 영혼 안에는 이미 고장 난 것이죠. 교회가 이 마음을 가질 때 그 교회는 비록 적은 무리들이 모여도 그리스도를 충분히 보여주는 교회가 될 수 있지만 교회가 이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다수가 교회에 모인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 마음은 알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본질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본질로 돌아가고 교회에는 이 마음이 충만해야하는 것입니다. 많은 지체들이 교회에 모인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들의 보이지 않는 그늘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여러분들 중에 냉담한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150명 교인이었던 시절에는 그들 모두가 뜨거운 사람들이었는데 이제 교회가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제는 교회를 그저 여러분 신앙생활에 구색을 갖추는 것으로 알고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가운데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것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이루었다면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나누어 가져야지 그 마음이 없이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나를 그 가시밭길 어둠속에서 구원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큰 사랑을 현저히 배반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의 중직자들이 된 여러분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눈물이 많아야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교회의 양떼들을 맡기시고 여러분들 특별히 영혼들을 위해 수고하는 구역장과 교사와 그리고 교역자들에게 이 양떼를 맡겨주셨습니다. 한사람이라도 말씀으로 돌보는 일대일 양육교사들에게도 이 영혼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세월이 흐르며 교리적인 지식이 늘고 그리고 반듯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이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의 살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이 마음으로 충만해질 때 여러분들은 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어서 눈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울고, 다리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찾아가고, 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발을 씻기고,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충분히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교회에 이 그리스도 예수의 잃어버린 영혼 때문에 찢어지는 그 마음이 교회 안에 가득하여야지만 교회가 참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예수님은 전도자들에게 세 가지를 분부하셨습니다. 첫째는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문맥 속에서 보면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선교적인 구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약의 선교적인 구조는 ‘오라’의 구조였습니다. 예루살렘이 여기에 있고 율법이 여기에 있고 이스라엘이 여기에 있으니 너희 이방인들은 여기로 오라는 것이죠.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오라의 구조 소위 선교 학에서 이야기하는 Come structure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표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이 땅에 세워지는 이때에 사단의 왕국이 부서져 나가고 하나님의 통치가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이때에 구조는 ‘가라’의 선교적인 구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세상에 사셨던 선교적인 생애는 이러한 신약의 Go structure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라의 선교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구약의 구조 그대로였다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큰집을 짓고 ‘나 구세주가 왔으니 구원받고 싶은 사람은 이리 오너라.’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정한 거처도 없이 당신의 생애를 특별히 공생애를 그렇게 나그네처럼 사셨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일생을 여행하시며 사셨습니다. 갈릴리로 유대 땅으로 그리고 비천한 자들이 사는 사마리아 땅으로 두루 다니시면서 도시에서도 그리고 촌에서도 당신 자신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이 가셨고 다니신 그 길에 당신의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제는 너희가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성인신의 원리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지만 이제 신약에서는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친히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가신 것입니다. 바로 그 가라의 structure를 그대로 우리 예수를 믿는 신약의 교회에 주셔서 그래서 그들을 가게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교회에서 큰 소리로 외칠 때에 와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조금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진짜 불쌍한 사람은 그렇게 자기 발로 진리를 찾고 자기 발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자기 발로 걸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에 영국에 가서도 보았습니다만 영국은 세계에서도 복지제도가 잘된 나라입니다. 먹고 자고 병고치고 교육받는 것은 나라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게끔 되어있는 사회제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국에는 거리와 거리마다 그 길거리에 노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숙자들이 신고만하면 먹여주고 재워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생활을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부서진 사람들이에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이 눈물을 흘리고 기도해도 가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께로 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여러분들이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지만 찾아가서 손을 내밀지 않으면 계속 어둠속에 있고야말 자기의 힘으로는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분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믿다 낙심하고 상처받은 사람들, 미끄러지고 어둠속에서 신음하며 자기발로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찾아가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마음 안에 있는 넘치는 그리스도의 긍휼 그 영혼을 위하여 목 놓아 울고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가족들에게도 가십시오. 여러분들의 가족들 여러분들이 끌어안고 구원하도록 여러분들을 먼저 복음에 빚지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의 사랑을 여러분들이 먼저 받았으니 그 먼저 받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찾아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이 회심하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 언제 그 부모들이 구원을 받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그분들에게 인생을 마감할 날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이 결국 회심하지 않고 죽는다면 가슴 아픈 말이지만 여러분들이 그렇게 사랑하던 부모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니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여러분들이 모두 알면서도 가족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중대한 직무유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를 다 버리고 다른 어떤 사연이 부모와 여러분 사이에 있었고 또 형제들 간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이 구원받아야한다는 이 명제보다는 사소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값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가야합니다.
두 번째로는 전파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들려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비극이 물질부족 때문이요, 질병 때문이요, 인간관계의 파괴 때문이요 등등으로 설명합니다만 그것은 모두 2차, 3차적인 원인에 불과합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그들이 진리에 소외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은 회심한 사람들이니까 아마 이런 것들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회심하기 전에는, 은혜를 받기 전에는 내가 불행한 원인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했는데 회심하는 그 순간에는 내 인생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었다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버린 것이었다는 것 하나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어찌 여러분들에게만 정답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핏줄,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부모,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그리고 여러분들이 속으로 낳은 여러분들의 자식들에게도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영혼은 유치부 학생이라도 곤고합니다. 곤고합니다. 이 복음을 들려주십시오. 어려운 것이 아니잖아요.
(찬양)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셨네.
마지막으로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좋은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전도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물질을 쓰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한번 회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불쌍해서 기도 속에서 날마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그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이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은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주신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해서 쓰라고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모든 물질과 건강과 시간은 한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이제 여러분 더 늙어서 다리에 힘이 없어져 그래서 지팡이를 짚고 휠체어에 앉아서 자손들의 부축을 받아야할 처지가 되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이 동리 저 동리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가끔 우리 교회에는 연로하신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분들의 공통된 고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목사님 제가 주님을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많이 섬겼을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전도를 하자니 걸어갈 기력이 없고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자니 그것을 선명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지력이 이미 사라졌습니다. 물질도 항상 있는 것 같아도 오는 때가 있는가 하면 가는 때가 있고 풍부한 때가 있는가 하면 마르는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들 얼마나 많이 테이프를 사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수많은 섬김을 통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어제도 영국에서 편지를 한통 받았습니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감사하다는 편지였습니다. 누군가가 우리 교회를 소개해주어서 5년 전부터 인터넷을 들으면서 자기가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다고……. 그래서 자기도 열린 교인 중의 한사람 같은 사람이라는 편지였지요. 그런 종류의 편지를 영국에서도 여러 통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전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의 손에 이끌려서 복음을 만나고 그리고 이끌어주지 않았더라면 계속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을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고 회복되고 십자가의 사랑으로 돌아오고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하여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정직하게 목자인 나의 마음을 헤아려보십시오. 여러분들의 목자가 교인의 수를 탐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목회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양떼의 수가 아닙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버려진 영혼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도 불구하고 주님 없이는 살수 없는 영혼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캄캄한 길에 홀로 있는 영혼들, 가시밭길에 버려진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우리처럼 이렇게 뭉그적거리며 불순종하셨겠습니까? 아마 그분은 식사할 겨를도 없이 영혼들을 찾아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상처받은 자를 싸매시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셨을 것이고 진리의 복음으로 그들의 마음의 상처에 양약을 삼아 발라 주셨을 것입니다.
(찬양)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맡겨줄 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나의 양떼를 부탁한다.
물론 우리가 눈물로 기도하고 사랑으로 전하고 그리고 간곡한 말로 복음을 들려주어도 그들 중 어떤 영혼들은 더 강퍅해지는 마음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해보기는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면 교회는 이미 영혼이 없는 몸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이죠. 영혼을 위해 모일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교회가 분쟁하는 적을 본적이 있습니까?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그 교회의 일치된 마음으로 성도들이 물질의 유익을 구하며 싸우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잃어버린 영혼들을 깊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이 아직도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보이십시오. 자기의 영혼이 추루할 때 남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다 보면 자신의 영혼을 위한 눈물도 솟아납니다. 왜냐하면 남의 영혼이나 내 영혼이나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같은 사랑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이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깊이 뉘우치고 구체적으로 한 영혼이라도 깊이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받은 것들을 거저 주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구원받게 하였사오니 처음 회심할 때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 목메던 그 마음이 저희들에게 가득하도록 다시 한 번 저희를 일깨워주시고 사소한 욕망 때문에 이 큰 사랑을 잃어버린 저희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이런 사랑을 내게 주셔서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