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한 글자 때문에 해고된 사람:
게으름의 선택/ 부주의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바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잠 24:30-31)
녹취자: 김정규
책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원래 큰 공사 입찰을 붙일 때는 입찰 전날까지 견적금액의 10%를 유가증권이나 현금으로 예치해야 하고, 당첨이 되면 바로 그것이 계약이 됩니다. 그런데 계약부서에 있는 직원이 ‘전날’의 ‘전’자를 빼버렸습니다. 전날 마감하는 것이 관례여서 마감을 했는데 그 다음 입찰하는 날 거칠기로 유명한 공사하는 사람들이 돈을 가져와서 큰 난리가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타이피스트가 ‘전’자를 빼먹어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주의 깊음’입니다. 여러분 제사장 제도를 보면 되게 복잡합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했겠습니까? 주석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물론 그 복잡한 것에는 하나님이 뭔가 계시하고 싶은 내용들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과 함께 그렇게 함으로써 제사를 드릴 때 그 복잡한 규례를 따라 부주의하지 않게 제사를 드림으로 그런 정신으로 삶 전체에 그렇게 살아가도록 지도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해석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부주의라고 하는 것은 영어 ‘carelessness’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며, 산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주의를 너무나 자주 경험합니다. 특히, 나이가 들고 인지기능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아주 사소한 일 하나에도 비상한 집중을 요구합니다. 예전에는 10의 에너지만 쏟으면 주의 깊게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30의 에너지를 써도 그게 주의 깊게 잘 되지 않고 자꾸 망가지는 것입니다. 격하게 공감하실 때 아닙니까?
잠 24:30-31을 읽겠습니다.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밭을 매지 않으면 게으른 사람의 밭이 오죽하겠습니까?
1.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서를 소유하게 된 이후에 가져야 할 고민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정서를 갖게 된 때에 어떤 일에 유의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말이 복잡합니다.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변화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일체의 꼼꼼함과 성실함으로 인생의 모든 부분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모든 것을 완벽히 꼼꼼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한도 내에서 게으름으로 시간을 소비하기 때문에 부주의하고 아무렇게나 하는 일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고 어느 한 군데 전부를 거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중심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심이어야 하고 그것이 유일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뿌리가 잘 자라기 위해 거름을 주듯, 밑에 뿌리로부터 영양분이 나와서 가지나 줄기 모든 것을 좋게 합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인생 전체의 좌표가 예수를 향해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이것들이 골고루 쫙 퍼져서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동기가 나와 나의 육체, 가족, 내가 만나는 이웃, 동역자, 그리고 먼 나라에 있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다른 부르심 들이 있으므로 모든 것을 전부 걸어서 도와 줄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한 그 모든 것들에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하나님에게 주시는 고유한 사명에 헌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헌신하고-여러분과 사귐 때문에 설교준비에 소홀이 하지 않는 것처럼-자기중심에 있지만 그러면서도 삶의 모든 방면에 균형을 이루면서 자기중심성을 추구하는 그런 삶이어야 합니다. 소명에 집중하는 것과 함께 균형을 이뤄야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 한 글자로 인한 문제에 상대방에게 설득이 안됐다면 소송을 했을 것입니다. 소송을 하면 100프로 이깁니다. 소송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관청과 계속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에 완전히 관계를 끊지는 않겠지만, 회사의 기물은 박살을 냈다고 합니다. 얼마나 주의 깊음이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부주의함에 정체가 뭐냐면 모든 것을 정확하게 처리하는데 소모되는 마음과 육체의 노고를 아끼려는 게으름의 변형된 형태입니다. 나이가 들면 부주의함이 깊어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삶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내안에 있는 것을 입증해 낼 수 있을까라는 것은 인생의 한 영역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주님을 사랑하는 표현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제가 고등부 학생들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으로 북 콘서트를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읽었던 것을 다시 읽어야 얘기를 할 수 있으니까 읽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5명의 위대한 선한 황제-오현제, 어질고 현명한 황제-중 한사람입니다. 어찌 이렇게 황제까지 된 사람이, 천하를 손가락하나로 움직이는 사람인데 이렇게 성찰을 하면서 살았을까라는 생각에 보면서 부끄러웠습니다. 완벽히 동의할 순 없지만 그 중에 내 눈길을 끌었던 구절이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마음으로 생각한다. 오늘은 제일 못된 놈을 만날 것이며 제일 욕심 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며 엉망진창인 사람을 만날 것이며 나를 해치려는 인간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 모든 소란 속에서도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평정을 지키기로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아주 깊은 명상들로 이어집니다. 물론 그의 사상을 움직이는 배경은 스토아주의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참된 종교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탐욕에 날뛰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초대교회에 많은 교회에서 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마치 기독교 교양의 부교재인 것처럼 읽혔다고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선명하게 모르는 다신주의자도 자기가 섬기는 신들 앞에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했다면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더군다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얼마나 더 삶의 모든 방면에서 주님이 기뻐하도록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삶은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어차피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마치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을 조정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과 망상에서 벗어나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보다 깊고 높아서 항상 우리의 뜻대로 되게끔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전개시키지 않습니다. 그런 간증을 자랑삼아 늘어놓는 사람들을 보면서 입을 벌리고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닌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의 인생이 꼬이면서 우리는 인생의 새로운 장으로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저는 인생에서 제일 빌빌거리는 직업이 2층 교회에서 목회하며 교인들의 코 묻은 돈을 받는 목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하실에 있을 때, 2층 교회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릅니다. 우리 집사람하고 전도 다니면서 ‘저 교회는 얼마나 돈이 많으면 2층에 교회를 잡았을까? 진짜 부럽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인생이 꼬이면서 내 인생은 상상하지 못한 때로 들어섰고, 가기 싫은 길인데 들여놓고 보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인생이 꼬일 때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나님이 예상치 못한 일을 하시려고 나를 이렇게 다루시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기대대로 일이 안되고 꼬였을 때 토라지면서 ‘하나님은 나만 싫어해’라고 생각하고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누구도 완벽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지만,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삶의 모든 방면에서 인정하고 고민하고 그러나 그것이 주님 앞에 기쁨으로 사는 삶을 무력화시키는데 까지 가지 않도록 자기를 다루어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차피 인생은 우리 뜻대로 안 된다.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구역장이 된 것은 모두 인생이 꼬였기 때문에 여기 앉아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작년에 꼭 그만두고 싶었는데 꼬입니다. 사표를 안 받아 줍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2. 사람들은 연약함을 핑계로 자신의 의무에 대해 해이해집니다. 연약함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연약함이라고 하는 것은 남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도저히 너무 고단해서 잠들었는데 주님이 ‘마음은 원이로되 너의 육신이 참 연약하구나’라고 하십니다. 하루 종일 그 고생스러운 주님의 일정에 동행을 한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본인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모든 것이 나의 잘못입니다. 이렇게 말을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너무 훌륭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대머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네가 정말 훌륭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격려하고 칭찬을 해야 합니다. ‘연약함’이란 것을 자기 자신에게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은 패배주의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연약함을 핑계로 이리 저리 흐느적거리면 안 됩니다. 많은 경우에 자신이 스스로 연약함이라고 말할 때, 이 실체는 의무를 태만히 하는 것의 핑계입니다. 진정한 연약함은 여기에 믿음이 역사해서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나 자신을 의지하는 모든 기대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붙드는 것이 진정한 연약함의 표현입니다. 이 뒤에 숨어서 ‘전 연약해서 못합니다.’라고 하지만 그 마음속의 진정한 언어는 ‘난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내 인생의 연약함, 나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연약함이 하나님을 향해 사는데 핑계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연약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전보다 더 주님의 십자가를 더 강하게 붙듭니다.’는 것은 괜찮습니다.
포장되지 않은 연약함이란, 진정한 연약함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근데 무슨 생각으로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인용했는지는 모르지만 가을날이라는 국어교과서에서 한번쯤은 봄직한 시입니다. 제가 한번 읊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령해주시고 이틀만 더 남극의 햇빛을 베풀어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주시고 묵직한 포도송이의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게 하소서. 마지막 포도는 마지막의 일기가 어떠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이것은 벼도 마찬가집니다. 벼 속에 벼물이 꽉 찼는데 냉해를 입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진짜 맛있는 포도가 되려면 모든 일기가 좋아야 합니다. 마지막 날, 결실하기 직전에 전혀 비가 없고 구름이 낀 날이 없고 뜨거운 햇살이 내려쬐서 당이 농축되어 무르익으며 생산된 포도가 최고의 포도입니다. 그건 농부는 열심히 가꿀 뿐, 농부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극의 햇살을 퍼붓고 그래서 마지막 포도를 무르익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고사 성어에서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 ‘나의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의 일을 다 하고 그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다음에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주님을 의지한다는 미명하에 아무것도 안하고 주님을 마치 졸병처럼 생각하고 막 해버리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아닙니다.
3. ‘잠언 24장 30절의 게으른 자와 지혜 없는 자의 원어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꼼짝달싹하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 마음 모자라는 자입니다. 우리가 ‘뱅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거짓말뱅이라고는 안합니다. 계속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자를 앉은뱅이라고 합니다. 주정뱅이와 이 게으름에 뱅이가 들어갑니다. ‘뱅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운명입니다. 거의 못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옛날 사람들의 통찰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장애가 있어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당시 의술도 발달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운명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합니다. 한번 앉은뱅이가 됐으면 죽을 때까지 앉은뱅이로 살아야 하듯이, 한번 술에 고주망태가 되어 중독이 된 사람은 못 일어나고 그것을 운명처럼 여기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맥락에서 게으름이 그런 정도의 중독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시무시합니다. 요즘 젊은 자매들도 보면 허우대로 멀쩡하고 교회도 다닌다고 하니까 결혼을 하고 보니 완전히 집에서 엄마아빠한테 기대서 게으름뱅이로 살던 사람입니다. 안 움직입니다. 그리고 가정이 경제적으로 안돌아가고 아이교육에 쓸 돈이 있어도 자유롭습니다. 그것에 속박을 안 느끼고 걱정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게으름이 운명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거스르기가 얼마나 어려운 게으름의 본성을 보여줍니다. 이 게으른 자는 ‘ אִישׁ־עָצֵ֣ל’입니다. עָצֵ֣ל은 게으름이고 אִישׁ는 사람입니다. 옴짝 달싹하기 싫어하는 게으른뱅이를 말합니다. 여기서 ‘게으른 자’와 ‘지혜 없는 자’를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대부분 지혜가 없습니다. 목사님도 언젠가는 ‘시의원도 게을러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물건을 만들고 청소하고 이런 것은 게을러도 됩니다. 시의원은 그 회사를 잘 경영하기 위해서 머리 쪽으로는 엄청나게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맥 놓고 있으면 몇 십 년 동안 일군 사업이 경쟁회사에 의해 몇 년 만에 거덜이 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노키아라고 알 것입니다. 무선통신회사입니다. 전 세계 1위였습니다. 이 회사가 삼성에게 먹히고 파산할 때까지 딱 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점에서 그 이야기를 여기에 적용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두 개를 같은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אָדָ֥ם חֲסַר־לֵֽב’라고 했습니다. 이 둘은 남자입니다. אִישׁ보다 אָדָ֥ם이 더 보편적인 사람입니다. חֲסַר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לֵֽב는 영어로 ‘Heart’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히브리어에서 쓰입니다. 정신. 판단력, 사랑 생각, 기억, 마음으로 사용됩니다. 결국 인간정신의 심장부라고 보면 됩니다. ‘마음을 지키라’할 때 사용되는 이 단어로 마음이 모자라는 자, 지혜 없는 자를 표현합니다. 대부분 지혜가 없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 둘은 동의어로 삶의 형태가 게으른 사람의 정신 내면에 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전도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온 힘을 다해 전도를 했는데 충성하는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4. 사람들로 하여금 부주의함을 선택하게 하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부주의함을 선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주의하지 않으려면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포도원이 망가진 이유는 누가 일부러 망가뜨린 게 아니라 그냥 부주의하고 게을러서 망가진 것입니다. 아무리 부지런해도 지식과 주의 깊음 없으면 일은 계속 망가집니다. 부주의함과 나태함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마십시오. 이것의 정체는 우리의 영혼에 해를 입히는 게으름이라는 죄입니다. 이 문제에 대항하여 분투하며 싸우십시오. 아무렇게 살지 말고 주어진 일에 몰두하십시오.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로 의뢰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혜롭게 하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