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가시 울타리로 이어진 길:
게으름의 결과/고통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잠 15:19)
녹취자: 조경훈
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다니라고 있는 것입니다. 길이 있기는 있는데 언제 사람이 다녔는지 흔적이 없이 풀들이 자라있고 더욱이 가시 같은 것들이 많이 나 있다면 다리 부분에 특별한 장구를 채우지 않는 한 그 길을 걷기는 아마 굉장히 힘들 것입니다. 게으른 자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고 정직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길은 대로다. 라고 나오는데, 성경도 일종의 문학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게으른 자의 길은 울타리 같다고 하면 여기에는 정직한 자 말고 부지런한 자가 와야 맞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구법이 사용된 본문에서 가시 울타리와 대로는 짝이 맞는데 게으른 자와 그 대구로 오는 정직한 자는 짝이 맞지 않습니다.
본문을 설교한 지가 15 년도 더 지났지만 제가 받았던 커다란 감동은 게으른 자 치고 정직한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도 살아야 합니다. 게으른 자가 정직하면 진짜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땀을 흘리고 자신의 희생에 대가를 치르고 대가를 받고 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게으르기 때문에 도저히 경쟁이 안 됩니다. 물론 게으르다는 것을 어마어마하게 천재고 학교 공부도 싫어하는 것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여기서 게으르다는 것이 몸만 놀리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가지고 기술혁신을 이루고 획기적인 생각으로 세계에 문명의 전환과 기술의 발전을 이루었던 사람들은 학교 공부에는 좀 게을렀을지 모르지만 머리 자체는 굉장히 부지런했던 사람들입니다. 빌 게이츠가 어렸을 때 학교 공부에는 정말 관심이 없고 즐겨하던 것이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사전을 읽었는지 알 수 없지만 백과사전을 읽어 낸다고 하는 것은 훌륭한 선생님 한두 명을 만나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아주 폭넓은 지식들을 익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지런함으로 정신을 쓰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본문에 지혜자가 인생을 살면서 깊이 통찰한 것이 게으른 자의 반대는 부지런한 자가 아니라 정직한 자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게으른 자는 대부분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감명이었습니다.
1. 잠언 15장 19절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96-97) (103-105)
게으른 자는 큰 길을 걷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인생의 끈임 없는 가시밭길이 전개가 됩니다. 물론 부지런한 모든 사람이 대로를 걷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육체의 근면함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정신의 지혜를 같이 얘기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정신이 지혜롭고 육체가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좁은 길을 걷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의 길이 열린 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으른 자에게 주어진 큰 길은 정식으로 난 큰 길입니다. 시작이 보여서 너무 쉽습니다. 사람이 게으르게 사려고 하는 것은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오후에 강의를 오기 위해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할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얘야. 너는 이렇게 게을러서 뭘 해먹고 사려고하니? 맨날 그러셨습니다. 제가 할머니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지금까지도 드는 생각은 ‘나는 본성이 게으른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내가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후천적으로 부지런해졌다. 그런데 나의 본성을 게으른 사람이다.’ 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는 동안에만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부지런히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본성이 A에서 B로 변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본성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고무줄을 탁 놓으면 원위치로 다시 돌아가듯이 옛날의 못된 성품, 게으름, 이기적인 기질, 잔악함 그 모든 것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변화된 성품도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그 사람을 붙들고 있을 때에만 변화된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이 변화됐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도 변화된 성품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 여러분 자신들이 증인이지 않습니까? 조금만 은혜 떨어지면 옛날 성질머리가 그대로 나오고 말 함부로 하던 기질 그대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주셔서 변화되어도 이제는 주님의 은혜에서 약간 멀어져도 내가 변화된 본성으로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을 때 까지 당신을 의지하며 살게 하십니다.
오늘 옷을 입으면서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할머니. 제가 이제는 부지런해졌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이 은혜를 놓으시면 저는 즉시 게으름으로 돌아갑니다. 언제나 주님의 은혜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영화배우 신성일씨가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그분은 강철 같은 분이었고 싸움의 일인자였는데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인생이 덧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영화배우도 아니니까 겸손하게 삽시다.
정직한 자의 길은 히브리어로 좁은 통행로입니다. 그것이 넓은 길, 큰 대로가 되는 것입니다. 오솔길 정도면 낭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가시덤불이 가득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걸어가는 것 같지만 정직한 자의 길은 마지막이 큰 길이라는 것입니다.
2. 게으른 사람들이 눈에 보기 좋고 쉬운 것만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98) (105)
쉬운 것은 힘이 안 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책 좀 읽으라고 해도 안 읽는 게 무엇 때문입니까? 지식을 새롭게 섭취하는 것 보다는 안 섭취하는 게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음식하고 다릅니다. 음식은 갖다 놓고 냄새 맡으면 먹고 싶지 않습니까? 음식에 완전히 초연한 분들도 있지만 그 분들은 감각이 좀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건강하면 음식의 모양을 보고 냄새를 맡으면 먹고 싶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말랑말랑한 순 살을 기름에 넣고 바삭하게 튀겨서 아삭아삭한 통닭이 얼마나 맛있겠습니까? 바사삭하고 말랑말랑한 치킨이 입에서 삭 녹으면서 닭고기의 육즙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고 생각하면 먹고 싶지 않습니까? 이상하게 지식을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은 끊임없이 정신으로 곡괭이질을 하면서 캐야 됩니다. 일평생을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하면 집에서 살림만 하던 사람이 이소라 다이어트 흉내 내는 것처럼 온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 비디오 보기도 싫고 그 프로를 하면 먹방으로 채널을 돌립니다. 마찬가지로 게으른 사람이 눈에 좋고 쉬운 것만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힘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고를 감내하면서 뭔가를 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됩니다. 수고하는데 수고하는 것만큼 재미있던지 두 번째는 확실히 힘들지만 그 너머에 원대한 목표가 있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녁 시간에 소파에서 파자마 바람으로 뒹굴뒹굴 구르면서 팝콘을 먹으면서 드라마를 보는 게 신나겠습니까? 아니면 퇴근 후에 헬스장에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운동을 하는 쉽겠습니까? 당연히 전자가 쉽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운동을 못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은 건강을 잃어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계속해서 살면 내가 결국 얼마나 힘들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은 보다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이 미용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어떻게 건강하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이상하게 걸음을 걸을 때 발을 헛디딥니다. 그것이 늙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발에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레그프레스(Leg Press) 같은 것을 해서 발에 근육을 올리고 튼튼하게 하면 헛걸음질 하지 않습니다. 등산할 때 사고가 올라갈 때는 잘 안 나지만 내려올 때는 다리에 힘이 풀리기 때문에 더 많이 납니다. 게으른 사람은 이런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원대한 목표를 가질 때 지불해야 할 고통이 싫기 때문입니다. 문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처럼 침상을 뒹굴면서 사는 것입니다. 게임이나 영화와 같이 현실과 상관없는 일에 점점 빠지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것은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현실을 극복하며 살아야 됩니다. 결국 게으른 사람은 꿈이 없습니다. 꿈을 위한 목표를 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가 두려운 것입니다. 혹시 목표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게으른 사람은 끈임 없이 핑계를 댑니다. 그 속에서 실천하지 않을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나는 게으를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을 게으르게 놔두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평범하게 사람을 사랑해도 그 사람을 위해서 부지런 해 집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봉사하면 이렇게 좋아하고 내가 챙겨주면 이렇게 기뻐하는데 당연히 부지런해지게 됩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면 나도 좋습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은 진짜 그 사랑이 뭘 하는 사랑일까 물어보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도 부지런해지게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절대로 게으를 수 없습니다.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 유한한 시간이 흘러가는 게 너무나 아깝습니다. 째깍 째깍 째깍. 우리는 언젠가는 죽습니다.
한 시대에 영화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신성일씨가 솔직히 말해서 진정한 미남 아닙니까? 저는 그 후에 그 정도의 사람을 못 봤습니다. 자기 남편만 한 미남이 이 전에도 없었고 이 후에도 없었다는 것은 부인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돌아가십니다. 정말 헬스 많이 하고 나이 팔십이 되도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훅하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정된 시간 속에서 살기 때문에 부지런히 살아야 됩니다. 비전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존(חוזון)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현실도 아니고 비현실도 아닌 것입니다. 꿈이 진짜 비전이 되기 위해서는 그 꿈을 꾸기만 할 뿐만 아니라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비전은 야망을 갖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인생이 어떤 의미 있는 인생을 살 것인가를 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솔직히 그것이 없으면 인생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보다 힘들지 않는 게 좋다. 라는 것은 게으른 자의 심정입니다. 옛날 어른들이 게으른 사람을 게으름뱅이 라고 불렀습니다. 앉은뱅이, 게으름뱅이, 주정뱅이 등 뱅이는 절대로 안고 쳐지는 것입니다. 경험적으로 옛날 어른들은 딴 것은 고쳐도 절대 게으른 본성은 못 이긴다고 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 이것보다는 힘들지 않는 게 더 좋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늘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뭘 하는 데 그렇게 힘이 드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9) 저희의 신은 배요. 이것은 편하게 살고 싶은 자신의 욕망입니다. 현대사회가 편하게 살라고 자꾸 부추깁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실천을 해도 괜찮고 부모로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은 괜찮은데 우리처럼 흑수저로 태어난 사람이 게으르기까지 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교를 하면 설교를 듣습니다. 회개를 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를 했으면 그 다음에 삶을 전환해야 합니다. 회개는 자기가 한 순간에 감동을 받으면 눈물이 나오고 후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삶을 바꾸는 것은 여태까지 자신이 산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돌아 누워서 내 삶을 바꾸지 않고 싶다고 얘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들기 때문입니다. 삶에 있어서 게으른 사람들은 설교를 들어도 그냥 즐깁니다. 기도해야 될 때도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을 불러서 간증을 시킵니다. 와. 대단하다. 그 간증을 들으면서 감동을 받은 나는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가 생각합니다. 전도 하십시오. 라고 하면 전도 많이 한 사람 불러다가 간증을 듣습니다.
3. 게으름이 육체와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각각 무엇입니까? (101-102) (109-110)
게으르면 제일 먼저 정신이 문제가 됩니다. 올바른 마음의 구조가 허물어져 버립니다. 지진이 와서 한 번 쓸고 지나가면 창문이 부서지고 지붕이 뜯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구조 진단사들이 와서 구조 진단을 해서 지진으로 말미암아서 구조에 문제가 생겨서 기둥이 부러졌는지 대들보가 금이 갔는지 무게를 이 구조로 견딜 수 있는지 컴퓨터에 입력해서 구조 역학적으로 계산을 해서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이 되면 아무리 집이 예쁘고 장식이 멋있어도 사람이 거기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구조만 든든하면 지붕이 뜯겨 졌더라도 다시 지붕을 하면 됩니다. 창문이 강풍에 부서졌어도 유리장수 불러서 다시 끼우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이 올바른 구조를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그것이 이미 무너진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결국에는 육체도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 니다. 그러니까 다시 게으르게 살 수 있습니다. 게으르게 살게 되면 결과적으로 게으름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도 영향을 줍니다. 많이 먹고 전혀 운동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건강에 이상이 오게 됩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에너지를 뿜어내고 영양을 보충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집에 들어가자마자 창문을 먼저 열어놓고 공기를 소통합니다. 창문만 많이 열어놔도 라돈 같은 것이 나와도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순환을 해야 되는데 순환을 안 하면 건강에 이상이 오는 것입니다. 게을러서 정신적인 노동을 안 하면 뇌가 작동을 잘 안합니다. 결국엔 마음도 건강한 마음이 깃들 수가 없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망가지고 인격도 망가지게 됩니다.
4. 게으름을 버리고 부지런하게 정도를 따라 사는 일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정직한 길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05) (114)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그 길을 따라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의식 속에 또렷하게 남아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 항상 우리의 마음을 지배해야 됩니다. 정직한 자의 삶은 결국 부지런한 삶이고 결국은 좁은 길로 들어서지만 넓은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게으르고자 하는 부패성과 끊임없이 싸우며 살아야 됩니다. 저 사람은 유전자 자체가 굉장히 부지런해. 나는 어머니 아버지가 유산은 안 물려주셨지만 게으름은 물려주셨어. 나의 게으름은 우리 부모의 유전자 탓이야. 라고 하면 안 됩니다.
전설적인 18세기의 복음 전도자인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나는 썩어서 죽느니 차라리 닳아서 죽겠다고 얘기 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제자들이 모두 부지런해졌습니다. 모두 열심히 복음 전하고 살다가 남김없이 순교합니다. 물론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갇혀서 계시를 받으며 말년을 맞이하지만 말입니다.
5.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는 쉼이 필요합니다. 적절한 쉼은 육체에 새 힘을 주고 영혼에 선한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만, 부적절한 쉼은 육체를 게으르게 하고 영혼을 싫증에 떨어지게 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적절한 쉼의 두 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 (110-111) (121)
첫째는 육체의 원리입니다. 육체는 쉬면서 일하게 돼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쉬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결국 우리의 육체가 자연적인 원리에 의해서 쉼을 가져야지만 되게 돼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6분의 1로 하셨을까? 안식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땅도 6년을 기경하고 한해를 쉬어서 지력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런 비율로 정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그 무엇인가가 있다. 라고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육체의 쉼이 필요합니다. 건강에 이상이 올 때는 더더욱 쉬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의 영혼도 쉼을 얻기 원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의 짐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것처럼 진짜 우리로 하여금 참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진정한 힘은 육체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을 앙망하는데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건강이 나빠서 의사가 쉬라고 할 때는 쉬어야 됩니다. 쉼과 일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로사 하거나 돌연사를 합니다.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주신 육체니까 이것을 잘 관리하는 것도 우리의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