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수에 사무친 소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롬9:1-3)
I. 본문해설
오늘 이 시간에는 ‘골수에 사무친 소원’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무엇인가 견딜 수 없는 깊은 근심 속에서 복받치는 설움을 토하듯이 자기 안에 있는 숨길 수 없는 근심을 토로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골육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는 것이었습니다. 사도가 왜 갑자기 8장을 끝낸 다음에 9장을 시작하자마자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런 마음으로 9장을 기록을 했을까요? 8장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바와 같이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구원하였음이라” 그리고는 감격에 벅찬 어조로 구원의 위대한 축복,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구원된 자녀들을 향해 베푸시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에 모든 부분들이 좋지만, 특별히 이 8장은 정말 가슴에 와 닿는 장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직 아무한테도 유언을 한 적은 없지만 혹시 만약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죽고 나의 장례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꼭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해달라고, 누가 할지는 모르지만 미리 부탁을 하는 바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늘 가족들에게 이야기하고, 교회의 중직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내가 죽으면 즉시 어디어디 서랍에 무슨, 무슨 상자를 열어보시오.” 그랬습니다.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교회의 중직들과 가족들이 목사님 서재에 있는 서랍에서 상자 하나를 발견하고 그 상자를 열었습니다. 정성껏 싼 낡은 상자를 열 때에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했죠. ‘상자 안에 뭐가 들었을까? 목사님이 재산은 많지 않지만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유언의 내용이 기록되었을까? 아니면 평소에 누가 교회에 많이 헌신하고 애를 쓰는데 그들을 향한 격려의 말씀이나 … 뭐 이런 게 들어있을까? 뭐가 들었을까?’ 그게 궁금합니다. 열어놓고 보니 봉투 하나가 나오더랍니다. 봉투 하나를 다시 뜯어보니까 거기에 하얀 종이에 목사님의 친필이 나오더랍니다. 그게 뭐냐면, 당신의 장례 예배의 식순이 거기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례예배의 사회는 자기 친구 중에 어느 목사님이 보고, 설교는 아무개 목사님이 하고, 기도는 아무개 장로가 하고, 설교 본문은 로마서 8장 32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그리고 제목, 마지막에 축도까지 기록을 해놓았다고 하니 그 목사님이 이 본문을 읽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그랬겠습니까?
아마 예수 믿고 로마서 8장을 읽으면서 흘린 눈물을 모아도 작은 병에 하나쯤은 될 거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 32절 이하에서는 특별히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느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고 구원을 주시도록 하나님의 아들을 선물로 주셨으니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아끼실 것이 무엇이겠느냐? 가슴이 터지는 사랑의 환희! 이런 놀라운 사랑,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그 모든 것으로, 어떤 것으로 끊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어마어마한 성화의 삶을 사는 사람? 아니. 주의 일을 크게 한 목회자? 아니. 그러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지를 넘나들던 선교사? 아니. 그럼 누구?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그 사람을 향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불순종하고 죄를 죽이는 삶이 없이 불경건하게 살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험하지 못할 때도 하나님이 그를 여전히 사랑하세요. 그래서 조셉 벨라미라고 하는 청교도는 죄인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하나님이 강하게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책망하시는 그 자체가 살 깊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봤습니다. 당신과의 화목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성심스러운 초청이라고 봤습니다. 사랑이 깊으니까 하나님께서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설교의 중심 범위가 아닌데 그래도 조금만 나가겠습니다.
부산에 가면 자살 절벽이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했는지 거기에 표지판이 있어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뛰어내리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글귀가 있을 정도니까 올라가 보면, 인생 시름이 많은 사람은 한 번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바다가 아름답습니다. 제일 아름다운 지점입니다. 근데 거기 가까이 가면 위험한데 사람들이 거기 가까이 간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가까이 가면 멀리서 그럴 겁니다. “저 사람들 왜 저리 가지? 위험한데! 그러지 말지. 어떡하지?” 그런데 여러분의 자녀가 그리 간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쟤가 어차피 자유의지를 가졌지만 저리 가면 안되는데… 그러겠습니까? ‘내가 만약에 큰 고함을 치면 쟤가 얼마나 상처를 입을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얘야, 거기 가는 것이 정말 네 인생에 도움이 되겠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애는 벌써 미끄러져 떨어져 버립니다. 아마 소리, 소리를 지르면서 “너 미쳤니? 빨리 이리와. 너 정말 혼날래?” 이러지 않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II. 골수에 사무친 소원
A. 골육의 구원
어쨌든 그런 사랑을 순종하면 많이 느껴지고, 불순종하면 안 느껴지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구원 받은 자들은 다시는 정죄함이 없도록 부르시고 사랑해주신다는 겁니다. 사도가 가슴이 벅차면서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터질 것 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9장에서 어조가 바뀌더니 그렇게 감격하며 두 팔을 벌리며 외치는 것 같은 사랑의 고백이 변하여서 울먹이는 어조로 바뀌는 것입니다. 내 속에 큰 근심이 있는 것을 성령과 더불어 내 양심이 증거 하는데, 그 근심이 골수에 사무치는 것과 같은 근심입니다. 어떤 근심인가 하면, 골수에 사무치는 근심이 있었으니 그 근심은 골육지친의 구원을 위한 근심이었습니다. 골육지친, 즉 혈육의 구원을 위한 골수에 사무친 근심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혈육, 그리고 골육 그리고 친척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아마도 골육은 민족의 개념이고, 친척은 대가족의 개념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주님이 무슨 일을 위하여 부르셨습니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더니 물론 안 받아들이고 바울을 핍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그 복음을 받으면서 크게 감격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 겁니다. 예전에는 죄 아래 있어서 짐승처럼 살며 하나님을 거스르던 인간이었는데 예수는 믿고 구원을 얻고 빛 가운데 살아가는 단정한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썩어질 것들을 위해 수고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영원하도록 있는 생명의 양식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사모하고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삶을 진리에 합치시키려고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고, 그 구원을 통해 얻게 된 영생을 누리며 사는 그러한 이방인들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지옥에 불을 지피는 땔감 정도로만 쓰이는 피조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많은 민족에 대한 편견이 심한 사람, 예수는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신학적 편견이 심한 사람을 들어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수많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광경을 볼 때마다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이 그 감격 속에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동포, 그리고 자기의 가족, 친척을 향한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견디기 힘든 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이야기하다가 사도가 9장에서 이렇게 울먹이는 듯한 어조로 내 안에 견디기 힘든 골수까지 사무친 근심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동포와 가족, 친척들의 구원 문제였습니다.
B. 하나님의 사랑을 앎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은 참 놀랍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그냥 즐겁고 신나기만 할 것처럼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정말 거듭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가운데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에 있는 때였어요.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는 때, 십자가의 사랑이 내 가슴에 날마다 다가오듯 그 때에 여러분들이 가장 행복했었습니까!
근데 그때가 어떤 때였냐면, 가장 눈물이 많던 때였어요. 그건 무슨 뜻이에요? 고통이 많았던 때라는 말입니다. 어떤 고통? 은혜 받지 못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들을 볼 때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픔을 아팠습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역사하니까 구원받지 못한 우리 아빠가 너무 불쌍해서 울고, 예수님 모르는 우리 어머니, 너무 연로하셔서 말귀도 못 알아들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우리 할머니 때문에 눈물이 나서, 그리고 몇 푼의 돈 때문에 형제 우애가 갈라지기도 했던 내 동기간이 생각이 나서 울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에 밀려오니까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예전에는 세속적인 것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떨어진 이 세상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마음이 성도의 마음속에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 때문에 눈물이 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프면 그러면 그는 은혜로 말미암아 비관주의자가 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격적 정서의 비밀입니다. 이 세상의 정서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일은 거의 없어요. 즉 슬프다가도 큰 기쁨이 밀려오면 슬픔이 자리를 내어주게 되고, 기쁘다가도 슬픔이 밀려오면 그 기쁨이 슬픔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서 한 인격 안에 대체로 하나의 정서가 지배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중생한 신자의 경우에는 한 인격 안에 기쁨과 슬픔이 공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신비입니다.
여러분들이 회개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너무나 마음이 아파, 이것이 나를 찌릅니다.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하나님 앞에 고통 가운데 참회하고 나니까 아직까지도 내가 하나님 앞에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아픈데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래서 한편으로는 부패한 자아에 대한 슬픔과 참회하는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크신 사랑이 같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너무나 기초적인 기독교 신앙의 경험에 대해서 잘 이해를 못합니다. 오늘 사도가 그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8장에서 가슴 벅차도록 감격했던 사람이 9장 들어서자마자 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 어조로 견디기 힘든 자신의 마음 안에 한 맺힌 사연을 토해놓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동포와 친척들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지만 정죄함이 없는데, 예수 안에 있어야지만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여 생명과 성령의 법의 다스림을 받는데 그래야지만 그들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고, 주님과 함께 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데,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향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데… 저들은 모르는구나! 아, 저들은 모르는구나!” 그러면서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에 부모님께 효도해야 되겠습니다! 또 가정의 달 5월은 지났지만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되겠습니다! 남편을 사랑할 뿐 아니라 존경하고, 아내를 사랑할 뿐 아니라 깊이 하나가 되어야겠습니다! 존중하고 하나가 되어야겠죠! 동기간끼리 몇 푼 안 되는 돈 가지고 다투는 유치한 일을 버리고 깊이 품고 서로 사랑해야 되겠습니다! 근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물론 필요하지만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녀들을 사랑하고, 부부간에 금슬이 좋고, 동기간에 화목하게 살아도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것이 정말 행복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행복이 정말 행복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 됨이 없는 기쁨이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그 기쁨일 수 있겠습니까?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이고, 행복의 근원도 하나님 한 분이고, 아름다움의 근원도 하나님 한 분이시며, 사랑도 그 근원이 하나님 한 분이세요. 하나님이 없는 기쁨, 하나님이 없는 아름다움, 하나님이 없는 진리, 하나님이 없는 행복, 하나님이 없는 소망… 이런 것들은 모두 세상과 함께 썩어질 것입니다. 물론 가족들에게 잘해합니다. 예수 믿었으면 사랑으로 소문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더 본질적인 것은, 우리 엄마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 우리 아버지 더 연로해지기 전에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우리 자녀들, 더 마음이 굳어져 나이 들기 전에 어린 나이에 회심하고 예수의 이름이 가슴팍에 기록되는 것, 내 동기간이 그렇게 되는 거, 그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가 지금 울먹이면서 이 9장을 고백해 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예수로부터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원한다. 견딜 수 없는 근심이 내 동포, 내 가족, 내 친척, 구원받지 못한 내 가족 때문에 내 마음이 골수에 사무치는 근심이 있다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족들의 구원은 오늘 복음을 전하고 내일 구원받게 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짓다가 중단을 하고 아직은 성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면서 희생과 수고를 계속 밀었던 것처럼 부담을 계속 느끼고 있지만 헌신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월은 계속 흘러갑니다. 결국은 예수 믿지 않으시고 우리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게 되요. 그때에 우리는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오늘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가족과 친척들을 향한,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향한 이러한 골수에 사무친 근심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뜻을 세우고 헌신하지 않으면서 언젠가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하면서 헛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할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의 헌신을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그 가족들의 구원을 속히 임하게 해달라고 뜻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이 멀리 시골에 계시기에 자주 찾아뵐 수가 없어서, 근처에는 교회가 없어서” 등등으로 핑계를 대지만, 게으름은 할 수 있는 일도 회피하지만 갈망은 불가능한 일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에는 가끔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닌 사람이 찾아와서 이 동네에 부모가 있는데, 동기간이 있는데, 정말 자신이 아무리 해도 안 되는데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근데 제가 알기로는 우리 교회가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병상에서 누워 기동도 못하는데 병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날 자녀들 내외가 와서 한없이 감격하고 눈물을 흘렸어요. 우리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왜 거절을 못하냐면, 예수 믿게끔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기도 하지만, 그 착한 마음, 그 부모를 위해 근심하는 그 마음이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만일 멀리 계시면 그렇게라도 한번 해보셨습니까?
기도 많이 하고 가까운 교회 찾아가서 주소 알려 드리고, 부모 인적 사항 알려 드리고, 가능하면 집으로 모셔다가 한 번 만나게 해드리고 많이 힘드시지만 목사님이 복음을 전해주시면 예수를 믿을 겁니다. 제가 멀리 있지만 늘 기도하겠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기 전에는 죽어있는지 살아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가족의 구원을 위해 구체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때가 되겠지.’ 생각만하면서 가족들에게 특별한 희생의 모본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가족과 똑같이 섞여서 골을 부리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세월은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감히 가족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할 용기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 택하신 그 뜻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고 구원받지 못했을 때 가족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보고 그들을 깊이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로 가족들을 사랑하면 복음을 전파하여야 할 아주 화급한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가족들을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되겠다는 열망만 있으면 방법은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알게 해주십니다.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들의 가족들이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귀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배 중에 실명을 거론해서 죄송한데…우리 교회 나채원 집사님 계십니까? 아마 오늘도 예배 나오셨을 것입니다. 손들어 보십시오. 이 집사님이 예수 믿게 된 감격을, 저는 세월이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는데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들이 먼저 우리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핍박을 많이 하고 아궁이 에 집어넣어서 불태운 성경만 다섯 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봄 심방 때 “너희 집에 한 번 가자고 했어요.” 펄쩍 뛰면서 이 형제가 “목사님,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데요. 목사님, 심방 가면 우리 맞아 죽습니다.” “부딪쳐 봐야지 전하든지 말건지 할 것 아니냐. 한번 목사님이 심방 가겠다고 말씀드려봐라” 하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더니 이 형제가 용기를 내서 아버지한테 목사님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목사가 온다고” 가만히 생각해보시더니, 불호령을 치실 줄 알았습니다. “오시라 그래라. 그 대신 다른 사람들, 객식구들 데리고 오지 말고 혼자만 오라고 해라.” 그리고 할 수 없이 심방 대원들은 아파트 골목에 세워놓고 저 혼자 들어갔어요. ‘설마 목사를 패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채연 집사님 부부가 내가 들어가니까...그런 인사는 목사 되고 나서 처음 받아봤습니다. 근데 들어가서 앉았는데 우리 둘이 어쩜 그리 얘기가 잘 통하는지 거기서 한참동안 얘기를 했습니다. 정말 그 때 심방을 하면서 정말 훌륭한 아버지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자녀들을 그렇게 훌륭하게, 당신이 그 힘써서 길러 놓았어요. 내가 많은 것을 보고 깨달았어요. 그리고 아무도 얻어맞지 않고 심방이 끝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이제 갑니다. 예수님 믿으십시오.” 그랬더니 한 마디로 거 절하셨습니다. “저는 안 믿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님이 여기 오셨으니까 한 가지만 약속하겠습니다. 이후로는 자 녀들을 핍박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만 해도 굉장히 큰 거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아마 최소한 석 달은 흘렀을 것입니다. 근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분이 열린 교회지하실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아들이 하는 얘기가, 가슴을 쓸어내리고 심방을 받았는데, 그리고 한 얼마쯤 지났는데 갑자기 그러더랍니다. “얘야, 열린 교회가 어디냐?” “왜요?” “내가 한 번 가봐야겠다. 목사님이 누추한 집에 오셨다 가셨는데 내가 한 번 답례로 찾아뵈어야지 도리가 아니냐!“ 귀를 의심한 것입니다. 참 훌륭하신 분입니다. 오시는 날, 그렇게 해도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지만 건축헌금 설교나 하고, 교회를 잘못한다고 야단을 치는 날 오셨다면 접촉점이 없었을 가능성도 많은데, 그날 “네 부모를 공경하라”였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정말 물 붓듯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생전 처음이셨습니다. 26년 동안 멸치도 안 드셨다고 하니까 불교에 빠지셔서. 20여년 만에 머리털 나고 처음 교회에 오셨는데, 나가시면서 너무 반가워서 악수를 하는데 이분의 눈에 이슬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그러더니 손을 붙들면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이시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 것도 교회를 다녀봤어야지 하지, 그런 인사는 모르고, “목사님, 정말 부끄럽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정말 잘난 부모인줄 알았는데,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이후의 스토리 저녁 내내 해도 다 못하니까 다음으로 미루고, 어쨌든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영혼들 속에 외적으로 나타난 모습과는 상관이 없이 이 속에서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간절한 사모함이 있는 것입니다.
무 교회 지역 전도 갔을 때도 그런 일 많이 일어났습니다. “할머니 예수 믿으세요.” 하면 부지깽이 들고 나와서 “믿으려면 너나 믿을 것이지 왜 시골까지 와서 귀찮게 구냐”하던 할머니가 “아, 뭘 그러세요.” 그러면서 가까이 가서 어깨도 주물러주고 발도 씻겨주고 그러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하고 복음을 전하니까 그중의 어떤 할머니는 그러더랍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면서, “근데 그 좋은 예수는 왜 이제 전해 주는겨?”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생각하면 그것이 골수에 사무치는 근심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근심이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연약한 죄인이 구원을 얻을 때에는 그 죄인의 가슴이 아프기 전에 옆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프게 되는 일이 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그를 위해 대신 기도해주는 그 기도의 위력 아니겠습니까?
III. 지순의 사랑으로 영혼을 사랑함: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A. 저들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모르기에
두 번째, 사도가 사도의 가슴에 골수에 사무친 깊은 근심의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이 사랑을 먼저 한 민족이, 바로 우리 유대인들이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택하셔서 이렇게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예수를 통해서 발견하고 이 사랑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는데, 그런 사랑을 받은 민족이 가장 완고하게 하나님을 대항하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미워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구원하시는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멸시와 핍박으로 오히려 그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 박해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동포를 향해, 가족을 향한 찢어지는 아픔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20장에서 예루살렘에서 그가 고난을 받으러 올라가면서 장로들에게 남긴 고별 설교 속에서 그런 얘기를 했지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의 간교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김 것과”… 복수로 나옵니다. 얼마나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이 사도를 괴롭혔는지 “그들의 간교로 인한 시험을 참고…” 그랬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런 마음이 들 것 아닙니다. 그렇게 사심이 없이 복음을 전하는데, 잘 들으십시오. 그렇게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데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 자기의 안위와 행복을 다 버리고 그들이 예수의 사랑으로 구원받게 하기 위해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데 그들이 그걸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강퍅해져서 바울을 죽이려고 하고, 소송을 하고, 자객을 보내고, 이렇게 악랄한 짓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래, 그렇게 복음을 전해주는데 싫단 말이지, 나쁜 자식들, 지옥에나 떨어져라. 쓰레기 같은 놈들! 한번 들어가서 불구덩이 안에서 악악거리고 소리 질러 봐라” 그럴 수 있잖습니다. 우리가 잘 그러지 않습니까?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우리 교인은 아닌데, 부인이, 남편이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휴, 그래서 예수 믿으십니까?” “아휴, 말도 마세요. 그 인간이 얼마나 강퍅한지 더 깨져야 되요.” 그래서 속으로 내가 이랬습니다. ‘아, 저게 아닌데..’ 자신은 남편을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사도가 그렇게 자기를 집요하게 박해하고, 그렇게 예수님을 싫어했던 유대인들을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핍박을 받았으면 그런 마음이 들 만하잖아요. “그래, 싫단 말이지. 나도 할 만큼 했다. 그렇게 지옥에 가고 싶으면 가봐. 거기서 악악 거려도 난 몰라.” 그러고 손 털 수 있잖아요. 왜 그렇죠? 이게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의 정체에요. 까리따스의 사랑에는 아주 놀라운 특징 하나가 있는데 그게 뭐냐면, 인간적으로 사랑을 하면 저 사람에게 죄가 있습니다. 그러면 죄가 있는데도 그 사람이 좋기 때문에 죄를 두둔하든지, 또 반대로 저 사람을 인간적으로 좋아하니까 죄와 악과 나쁜 것이 발견될 때는 그 인간을 죄와 함께 매장해 버립니다. 우리 잘 그럽니다. 어떤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나쁜 짓을 해요. 그리고 특별히 자기한테 못되게 굽니다. 그럼 간단합니다. “아, 저 사람 상대 하지마! 인간도 아니야.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어. 교회 와서 아무리 울고불고 난리 쳐도 다 위선이야.” 이게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닌 육적 사랑의 특징입니다.
B. 까리따스의 사랑의 위력
까리따스의 사랑은 어떤 놀라운 힘이 있는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죄가 그 사람과 분리되어서 느껴지게 하는 그런 특성이 있습니다. 저는 이걸 까리따스 안에 있는 죄의 객관화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놀라운 힘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닐 때는, 우리가 가끔 사람에게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 실망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싫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이 진정한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시던 사랑이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가 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죄와 우리를 분리해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이 죄와 우리가 분리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택했는데! 주님께서는 까리따스의 사랑의 충만한 상태에서 우리를 보시니까 죄는 미워하고 죄인은 너무 사랑하십니다.
교회에 아픔이 있고 흠집이 있어도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부숴버려. 날려버려. 잘라버려.” 이렇게 하지만, 주님은 그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랑하시고 교회 안에 있는 죄인들도 사랑하시고 그 죄인들 안에 있는 죄만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어떡하든지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하십시오. 그게 사랑입니다. 두 주 있다가 본격적으로 설교 하겠습니다.
어느 자매님이 있었는데 남편을 그렇게 미워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무능하다, 가정에 책임이 없다, 폭언을 일삼는다 …이 자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매일 이혼할 궁리만 하다가 은혜를 흠뻑 받았습니다. 심방을 갔더니 자기 남편 어깨를 끌어안고 그럽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나니까, 남편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남편이 변했는가 하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너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기도만 하면 제 남편이 불쌍합니다.
이게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 있는 효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집요하게 일평생 자기의 사역을 방해하고 자기를 죽이려고 야비하게 자기를 공격했는데 죄는 미워하되 그들은 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 그랬어요? 너무 사랑하니까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끊어질지라도 저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를 난 원한다.”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들을 향해 그런 마음을 가진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냐면, 사도 안에 있는 까리따스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짧은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 없고, 언젠가 본격적으로 시리즈를 시작하겠지만, 예전에는 치밀하지 않고 듬성듬성 알고 있었던 것인데, 최근에 이런 까리따스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묵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열리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아, 그렇구나.” 그렇게 감격하고 기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너무 슬펐어요. “내가 너무 사랑이 없구나.” 정말 나는 그래도 사랑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감동도 잘 받고 눈물도 많고, 그런데 이 교리를 깨달아 가면서 ‘아, 나는 정말 포학한 사람이구나!’ 주님의 마음 안에 있는 이 사랑을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었습니까?
오늘 오후에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돌아보니까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으며 살아왔던 많은 날 동안에 내가 끝까지 사랑하지 않고 포기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주님의 마음 안에 있는 이 사랑을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가!’ 나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이 오류에 빠지거나 죄에 빠지거나 했을 때에, 특별히 나를 아프게 했을 때에 그들의 과오와 그들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힘들면 싫어하기 일쑤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해서 이긴 경우도 있지만, 이기지 못하고 이 진리를 깨달을 때까지 여전히 마음에 섭섭하고 아픈 생각들을 품고 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혹은 무관심 속에 지나쳐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C. 까리따스의 사랑 안에 있는 객관화 현상
“어쩌면 인간이 이렇게 완악할 수 있을까? 정말 내가 예수의 사랑을 알기는 아는 사람일까?”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것은 제게 있어서 큰 충격이었습니다. 까리따스 사랑 안에 있는 죄의 객관화. 그러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고 쉽게 포기했던 지난날의 모든 것들이 그들이 너무 나쁘고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 강퍅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이 모자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살아온 많은 날들이 예수의 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내었을까?” 지금도 생각하며 가책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핍박하는 동족들인데도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자기를 죽이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강퍅하고 무도한 백성들인데도 죽어가는 그들의 영혼을 보면서 사도는 가슴 아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교리가 막 깨달아지던 어느 밤에 호숫가를 거닐면서 한없이 감동에 사로잡혔어요. 그리고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정말 사랑을 하는 사람인가? 내가 정말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인가?”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마음속에 드리는 기도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의 사랑을 너무나 모릅니다. 너무나 모릅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너무나 모릅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간다는 것과 거의 동의어예요. 요새 위로가 되는 것은, 은혜 받은 성도들, 특히 성화반에서 공부하는 지체들 가운데, 모두는 아니지만 몇몇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런 눈을 뜨여 주시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사랑이 뭔가? 까리따스 안에 있는 죄의 객관화!!!
주님은 이 세상에 사시면서 한 번도 죄를 미워하셨지 죄인은 미워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는 영혼들이라고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도의 마음속에 있는 절박함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모른 채 죽어가는 내 동포, 골육지친, 우리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몰라. 가족의 구원을 위해 애쓴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 간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족의 구원은 내가 직접 구원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남을 통해 그 일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데 먼저 구원받은 가족들의 눈물이 잔에 가득 차야지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게 많은 사람들의 간증입니다. 여러분은 우십니까? 가족들을 위해서 매일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면 아마 벌써 주님께로 돌아와 여러분보다 신실한 신자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가족들이 이 사랑을 모르고 사는 것을 마음 아파하고 그들의 진실한 회심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더디 말고, 빨리, 이번 주에, 바로 오늘!
결국 이러한 사도 바울의 골수에 사무치는 근심은 지순의 사랑으로 영혼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은 지순의 영혼으로 사랑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뭐라고 얘기 하냐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원하는 바로다.”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교리의 대부분이 이 사람을 통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얘기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게 뭐냐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가정법상으로 구원이 취소되고 자기가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원하는 것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긴 하지만 얼마나 그 구원받지 못한 자기의 동포와 골육들을 향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사랑 안에 있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사랑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나와야 되는데 아직 그럴 수 있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가르쳐주는 것과, 그리고 그 마음이 움직이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가족들이 오랫동안 가슴 아파하며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기도를 했는데 그 자기의 가족들이 정말 참된 회심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 기뻐하는 가족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격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이 없으면 면류관도 없고, 가족들의 눈물이 있어야지만 불신 가족들이 주님을 믿게 됩니다. 정직한 고백입니다! 이제는 불신자인 우리의 가족들이 강퍅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먼저 믿은 우리들의 마음이 녹지 않게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가시겠습니까? 우리 깊이 사모하도록 우리 가족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합시다. 어쨌든 여러분들은 데려다만 나요. 말씀은 내가 전할 테니까… 한 번에 안 되면 또 기도하면서 그 다음에, 또 기도하면서 그 다음에…
너무 감사한 것은 5월 첫 주부터 가정 시리즈를 했잖아요. 출석하는 교인이 150명이 늘었습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이 가족입니다. 그처럼 많은 곤고한 영혼들을 우리의 가족들 속에 있어요. 아직도 더 많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들이 육신의 가족과 영혼의 가족이 하나가 될 때 우리의 가족이 육신의 가족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접붙여진 참된 하나의 가족이 될 때, 그때에 우리의 가정이 얼마나 복된 가정이 되겠습니까?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어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