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사상 4
녹취자: 김경애
자 왜 그러느냐하면 제가 뜬금없이 저렇게 들어보지도 못한 피터판 마스트리히트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피터판 마스트리히트의 책 TPT라는 이 책을 조나단 에드워즈가 뭐라고 평가하느냐 하면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읽은 모든 책들 중 성경 다음으로 최고로 훌륭한 책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읽어보면 이런 것이 나옵니다. 제일 먼저 독트린이라고 나옵니다. 보셨습니까? 쭉 내려가서 유즈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어떤 성경본문을 읽으면 여기서 먼저 교리를 찾아내고 그 다음에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의 기본적인 것은 누구한테 배운 것이냐 하면 마스트리히트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패트루스판 마스트리히트는 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구조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아마 여러분은 라틴어를 모르기 때문에 내용이 무엇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들여다보면 은혜를 받으실 것입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것을 보면서 눈치가 있으면 무엇을 보게 되느냐 하면 ‘이것이 신학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설명하면 긴데 여기서 소위 이야기하는 로찌 방식의 신학입니다. 여기 라틴어의 ‘로쿠스’라는 단어인데 ‘Place’라는 단어입니다. 장소라는 뜻입니다. 가끔 웃지 못 할 번역이 나옵니다. 이것이 영어로 Common Place가 무엇입니까? Place가 공공장소입니다. 인터넷 Google에 들어가서 Common Place를 쳐보면 거기에 PDF본이 많이 뜹니다. 그러면 Common Place 가 나오는데 이것을 공공장소로 번역하면 웃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뜻은 신학총론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번역한 것이냐 하면 ‘로찌 꼰여네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로찌는 로쿠스의 복수이고 꼰여네스는 Common이니까 말입니다. 이 로찌 꼰여네스를 누가 쓰느냐하면 멜란히톤이 쓴 신학총론입니다. 그것을 공공장소라고 번역하면 웃기게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단어입니까? 영어입니다. 17세기 18세기 영어권에 나오는 작품이 Conversations라고 많이 나옵니다. 이것을 전부 ‘대화’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대화라는 뜻이 아니라 17세기 18세기의 영어에서는 ‘행동거지’입니다. Behavior 입니다. 말하는 것부터 생각하는 것, 예의범절까지 인간의 모든 일상 활동을 총괄하는 행동거지를 Conversations이라고 합니다. 이런 책이 있습니다. Daley Conversation with God. 그랬더니 ‘하나님과 만날 이야기하기’라고 번역을 해서 기도에 관한 책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어떻게 행동거지를 올바르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고 우리말로 번역해서는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며 살아가기’ 이런 정도의 것입니다. 웃지 못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쨌든지 로커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들이 조직신학을 서술할 때 어떻게 하느냐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나옵니까?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이렇게 나오는데 사실 이것을 세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칼빈입니다.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1판, 2판, 3판을 냅니다. 그런데 초판이 나왔을 때 보면 초판을 보면 기독교강요가 허접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뭐냐 하면 ‘사도신경 해설, 주기도문 해설, 십계명 해설’ 이것이 다입니다. 거기에 밑에 약간 덧붙였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례에 관한 잘못된 교리들, 교회의 정치질서’ 딱 그것입니다. 칼빈 시대에는 사람이 예수를 믿겠다고 들어오면 바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카텐큐멘 상태에서 카테키스무스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카테키스무스 교육의 교재가 세 개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 이것을 각각 일 년씩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것을 이번에 총신의 문병호 교수가 라틴어에서 직역을 해서 생명의 말씀사 에서 펴냈습니다. 제가 그 앞에 추천서를 썼는데 그런 책은 다른 책을 팔아서라도 사야하는 책입니다. 그것이 칼빈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 옆에 라틴어 대역으로 달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놓고 읽고 그 대신 초판에 읽는 것을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나머지는 분량이 초판보다 최종판이 3배 이상 늘어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이후에 수많은 이단들과 공격들이 생겨나면서 기독교를 좀 더 정교하게 변호해야 할 필요성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기독교강요의 구조가 점점 복잡해지는데 초창기에는 오늘날의 그런 조직적인 구조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칼빈파에서 생깁니다. 그런데 칼빈파에서 생긴 것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왜 의미를 가지느냐하면 이것이 루터파에서는 조직신학이 체계가 서지 않았기 때문에 전공을 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연구했어도 이것을 전승해주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그런데 칼빈이 오늘날의 7분과의 디비전을 나누면서 마지막 3판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순서를 이렇게 저렇게 위치를 많이 바꾸었는데 이제야 마음에 든다. 이제야 모든 순서가 각기 자기 자리를 찾은 것 같다.’ 그러면서 칼빈파에서는 조직신학을 공부하기가 너무 좋은 것입니다. 서론에서 무엇에서 다루고, 종교, 계시, 성경을 다루고 그 다음에 신론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나?’ 인간론에서는 ‘인간의 타락 전 상태, 타락 후 상태, 구원받은 상태’ 그리고 기독론에서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나?’ 그리고 구원론에 가서는 ‘구원은 무엇인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 것인가?’ 교회론에 가서는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무슨 일을 하는가?’ 마지막으로 종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선명하게 기독교에서 가르쳐야할 지식의 모든 체계들이 하나의 Box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칼빈파에서 교의학인 조직신학이 발달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칼빈의 방식을 따라서 조직신학을 서술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거의 다 칼빈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17세기마저도 아직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네덜란드였으니까 그때 따랐던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로쿠스 방식입니다. 이것을 논제방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 떼올렉티코 프렉티카 떼올로기아 에서는 약 20여개의 논제를 잡는 것입니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로부터 시작해서 구원, 중생 그런 것처럼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제일 먼저 중생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다면 성경 Text를 먼저 찾아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하느냐하면 익서젝티카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주석을 먼저 합니다. 여기서는 수많은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시리아어까지 동원됩니다. 시리아어는 역본, 사본이 다 동원되면서 치열하게 어학적인 논쟁이 벌어집니다. Text의 의미를 확정하고 그 Text 속에서 의미를 다 끌어냅니다. 이것은 공정한 작업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에 가서 여기서 독트리나를 꺼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본문 안에서 항존 하는 교리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엘렌티카 교리를 여기서 A, B 등으로 찾아내면 그러면 여기서는 2,000년의 교회역사를 훑으면서 이 교리에 갖가지 교파가 어떤 오류에 빠졌었고 어떻게 잘못 주장했고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느냐하면 기독교역사의 초창기에 오리겐이나 이런 사람이 쓴 신학의 원리부터 기독교신학이 아직 초창기에 형성되기 전에 이제 막 기독교 교리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들이 생기기 시작할 때 그때는 플라톤의 철학과 이 기독교의 교리들이 함께 뒤엉키면서 철학에 의해서 교리가 침범당하기도 하면서 교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진술부터 시작해서 자기시대에 유행하는 소키노스주의나 그 다음에 아르미니우스주의나 로마 가톨릭의 교리나 이런 것들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에서 삼위일체의 위격과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이단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하는 것입니다. ‘엘렌티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희랍어 ‘엘렌티코’에서 옵니다. 희랍어 ‘엘렌티코’는 ‘꾸짖다’ 입니다. 꾸짖는데 그냥 야단을 치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지적하면서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서 진리의 입장에서 책망해서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엘렌티코입니다. 그래서 엘렌티카라는 이것을 뭐라고 번역하느냐하면 ‘변증적 선교학’이라고 번역합니다. 선교학에서 나오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기에 나옵니다. 여기 자료에 수많은 라틴어와 희랍어 원전에 대한 각주들이 새카맣게 달립니다. 나중에 한번 보십시오. 지금 아마 Google에 들어가면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떠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Google에 가서 두드려보십시오. Google에 가서 안 되면 칼빈 신학교에 들어가면 PRDL 이라고 있습니다. Protestant and Reformed Digital Library 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엘렌티카를 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네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프락티카입니다. 실천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실천은 한편의 아주 훌륭한 설교입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끌어내서 마무리 지으면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야할 것인가를 여기서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이것을 설교에 쓰기는 그러니까 이것은 빼고 이것과 이것 두 개를 따서 아까 말씀드린 독트린 유즈 두 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사실 스콜라주의와도 관계가 있는 것인데 그 이야기는 접고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로쿠스 라는 논제방식은 논제니까 이것을 조직신학의 칼빈식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조직신학 방식이 아니라 논제방식인데 이 논제방식은 항상 질문과 대답의 형태를 가집니다. 이것이 결국 중세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논제 하나에 ‘중생’ 그러면 중생이란 무엇인가? 중생의 주체는 누구인가? 중생의 객체는 누구인가? 중생과 회심과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들이 쭉 질문형식으로 나오면서 상세하게 답변을 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자료들이 동원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은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정말 내가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을 깨달으면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장한 논설들을 보면서 나는 진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깊이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올데다이노이스 다이노 낫싱.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겸손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17세기를 중요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왜 이 17세기를 이야기하느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 사상의 중요한 원천이 17세기 신학자들에게서 신학적으로 나옵니다. 17세기는 어느 시기냐하면 이것도 이야기하면 긴데 루터파를 기준으로 하면 멜란히튼이고 칼빈파를 기준으로 하면 피오도로 배자입니다. 여기서부터 언제까지냐 하면 1725년경까지입니다. 이것이 그러니까 연대가 어떻게 되느냐하면 1560년경부터 시작합니다. 이 시기를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하면 개신교정통주의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종교개혁자들이 굵은 선을 그리면서 개신교 신학의 대의를 만듭니다. 그 만들어진 대의를 붓으로 그리듯이 상세하게 작업을 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입니다. 이것은 17세기 1600년대입니다. 한 부류가 아니라 이 사람들이 화란에도 있었고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는 개혁파정통주의 가운데 한 부류였습니다. 그 다음에 스위스의 취리히에도 있었고, 바젤에도 있었고, 그 다음에 이탈리아에도 있었고, 제네바에도 있었고, 심지어 영국에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영국의 청교도를 생각할 때 청교도가 다 똑같은 청교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청교도들이 문헌을 약 십만 권 정도를 생산했고 오만 권 정도는 사라지고 오만 권 정도가 남았는데 오만 권 중에 삼만 권 정도는 별로 읽을 가치가 없는 것이고 이만 권 정도는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이만 권 중에서 진짜 가치가 있는 책은 그중에서 10%밖에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대륙에서 일어났던 개혁파 정통주의의 거대한 학문적인 흐름에 동참하거나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영국 청교도들 가운데 아주 일부뿐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윌리엄 퍼킨스, 토마스 리즐리, 그 다음에 존 오웬, 종류는 달랐지만 리처드 백스터입니다. 리처드 백스터는 사실은 천재적인 사람이기는 했지만 교육을 그렇게 많이 받지는 못했습니다. 대학을 나오지는 못했습니다. 존 오웬과 논쟁도 벌어지지만 그 존 오웬과 벌어졌던 논쟁에 대한 것들에 대한 해석이 최근에 한권 나왔는데 에스케이트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팀쿠퍼라는 뉴질랜드 학자가 썼고 ‘존 오웬 앤드 리처드 백스터 인 잉글리시 넌 컴퍼먼트’라는 책입니다. 400페이지 정도 되는 두꺼운 책인데 잘 썼지만 재미는 없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지겨운 역사 이야기와 수많은 문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왜 이 두 사람이 같은 청교도였으면서 그렇게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쭉 나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렇게 이런 논제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런 논제방식에 대한 서술들이 그 당시에 광범위하게 유행한 것입니다. 이것들은 사실은 중세 저 멀리로 넘어가면 피터 롬바르디스의 센떼띠아룸 이라는 명제 집으로 유명한 중세시대의 교과서처럼 쓰던 교의학전집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 것이 신학의 입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교리였습니다. 제가 여기에 와서도 학장님과도 대화를 하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의 혼란의 큰 문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윤리적인 문제이고 하나는 지식의 문제입니다. 이 두 개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던 것이 모든 삶을 지식의 기반위에, 모든 지식은 삶으로! 라는 구호를 에드워즈가 외쳤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논제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논제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에드워즈 자신이 이런 마스트리히트 같은 사람들 여기에 왜 17세기에 이렇게 끝나느냐하면 그냥 역사가 전부 다 이성주의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의 가치들이 다 포기되고 이성주의로 그냥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혁파 정통주의의 역사가 끝나게 됩니다. 이때가 아주 황금기였습니다. 이때에 생산해낸 자료들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리고 그 사상적인 깊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요즘에 돌아다니는 현대 신학자들이 쓴 책들은 유치원 학생이 쓴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플라톤을 공부하면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면서는 기독교인인 것에 감사했고, 루터와 칼빈을 공부하면서는 가톨릭교도가 아니고 개신교도인 것을 감사했고, 그리고 17세기 개혁파정통주의를 공부하면서는 내가 개신교도 중에서 다른 교파가 아니라 개혁파에 속해있다는 것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 조상들이 남겨놓은 유산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내일 혹시 시간이 되면 영상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자료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신학이 다 쭈그러들어서 내용이 아무것도 없고 신학교를 가서도 신학교를 일단 졸업하면 그 다음에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체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하는데 그런데 그런 지식이 아주 현저히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설교를 하는데 설교 속에 신학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전도합시다. 우리교회를 사랑합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줍시다.’ 그러니까 문제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합니다. 성장하는 것이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뜻이 아니라 이게 계속 사람이 아이를 기를 때 우유를 먹다가 좀 크면 밥을 주고, 밥을 먹다가 고기를 주고, 그러면서 애들이 커야 제대로 된 사람이 되는 것이지 만날 우유만 퍼 먹이는데 그 애가 영양실조에 걸리지 사람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만날 위로나 받으려고 하는데 위로는 무슨 위로입니까? 그렇게 대단한 위로가 세상에 어디에 있다고 그럽니까! 위로를 받은들 잠시 몇 분이지 그게 무슨 큰 도움이 됩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하면 도덕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착한 사회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혼돈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라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중생과 회심에 대한 확고한 견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야기했듯이 현대 기독교의 모든 분열과 논쟁의 핵심에는 Who is Christian? 누가 그리스도인이냐?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에 대한 생각이 다른데서 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기독교 문화에서 자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 오리지널 잉글리시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와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니까 자기 아버지에게 아버지 Born again 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엄청 화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가는 것이지 Born Again은 무슨 Born Again 이냐고 하면서 화를 내더랍니다. 이제 이미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핵심적인 사실 자체가 사회에서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점에 있어서 확고한 사람이었습니다. 내일 강의를 할 텐데 특히 중생의 문제에 있어서는 중생이 없으면 절대로 기독교인이 될 수 없고 이 중생과 회심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눈을 떠서 하나님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영광 그의 탁월하심을 보고 그 영광을 찬송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쭉 설명을 합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Dispositional Theory라는 소위 성향이론이라는 것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든 그 성향이론이 중생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성화론에서도 나옵니다. 그때까지는 아직까지 구원을 단절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통전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오늘날 이야기하는 이런 중생의 개념을 소위 이야기하는 레게네라치오 라는 중생의 개념이 칼빈이 이야기할 때의 중생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이런 교리적인 발전들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들이 읽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제가 만나게 된 것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청교도에 깊이 심취되어있을 때 그 책을 통해서 그 책을 사서 보면 1페이지부터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돋보기로 보아야할 정도로 깨알 같고 지금같이 나이든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것을 읽을 때에는 복사 집에 가서 두 배로 확대복사를 해달라고해서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 중에서 제일 먼저 부흥에 관한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부흥에 관한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절절히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어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영어를 조금 했으니까 그래도 읽으니까 아주 엄청나게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특히 그때 기억이 나는 것이 4년 2개월 된 아이의 회심의 장면이었습니다. 이름까지 나오는데 휘비바틀렛이라는데 그때는 어떤 관습이 있었느냐하면 어떤 회심이나 부흥에 관한 기록이 있으면 그것을 본 사람이 정확하게 서술을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혼자 접어두면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신빙성이 떨어지는데 그 광경을 목격했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읽고 밑에 사인을 합니다. ‘사실이다. 우리도 보았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 방식을 썼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것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서약 식은 합니다. 그런데 휘비바틀렛이라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4년 2개월 된 남자아이가 하나 있는데 이 아이가 수시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 엄마가 이 아이에게 너 어디 갔다 왔냐? 그래도 이 아이는 한동안 없어졌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디선가 이 아이의 우는 소리가 들려서 가보니까 헛간이었는데 헛간에서 이 아이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다섯 살쯤 된 아이였는데 기도를 하다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막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면서 아이가 막 열렬히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 아이가 완전히 딴 아이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면 월요일부터 엄마께 묻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엄마 교회는 언제가?’ ‘어제 갔다 왔잖아 여섯 밤 더 자야해!’ 그리고 그 다음날 또 물어봅니다. ‘너 왜 그렇게 교회를 가려고 하느냐?’ 그랬더니 이 아이가 하는 말이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 다섯 살짜리 아이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는 설교의 길이마다 다르기는 한데 거의 두 시간 이상 계속되는 설교입니다. 어떤 때는 세 시간 안에는 끝나지 못했을 거라는 설교입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는 설교를 보면 서론, 본론, 결론 이렇게 되는데 이 목사님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어떤 때는 스무 번째까지 나오고 그 유장한 설교를 이 다섯 살짜리가 이해합니다. 그럼 그것을 이해하게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그 아이가 공부로 따지자면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주고받는 수많은 언어나 용어들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회심’ 그러면 그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뭐냐 하면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아이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초월적인 지식을 섭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하나하나 용어는 몰라도 그 목사님이 말씀하신 모든 성경말씀에 대한 이해가 통일적으로 이 아이에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지식들이 들어오면서 이 아이에게 꽂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목회를 하면서 그게 정말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라는 수많은 증거들을 발견했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뭐냐 하면 엄마하고 얘하고 예배를 드리는데 엄마는 자느라고 몸을 못 가눕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초등학교 아이가 석고상을 깎아놓은 것 같습니다. 딱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중의 한 아이는 수요일마다 엄마를 따라서 6개월을 교회에 옵니다. 전도사님들이 ‘너는 이제 다 컸는데 왜 따라오느냐 집에서 놀지! 엄마를 그렇게 떨어지지 못하느냐?’ 그랬더니 ‘아니에요 전도사님 저는 말씀을 들으러 와요. 요즘 충성 시리즈가 얼마나 은혜로운데요.’ 그러면서 그림처럼 딱 앉아서 설교를 하면 하얀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고 듣는 것입니다. 끝나고 나면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이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중생과 회심의 사건은 존재론적으로는 예전에 내 안에 없던 사랑을 창출하는 것이고 예전에는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었는데 바뀌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인식론적으로는 예전에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 2년 전에 조지 마스튼 교수를 만났을 때 저 책을 꼭 읽어보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입니다. 가장 잘된 책입니다. 빨리 한국에 요청해서 구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저번에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오늘날의 목회는 거의 쇼입니다. 목회의 본질이 무엇이냐? 결국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에 의하면 Beauty of God.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삶을 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목회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이 세계 어디에든지 다 퍼져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단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이라는 존재가 도덕적으로 보면 악하지만 존재론적으로 보면 존재론적으로 필요 없고 악한 존재라면 그렇게만 생각하면 그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이 비난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사단은 아주 악한 존재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그런 악한 사단조차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우리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작용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이 세계 모든 곳에 묻어있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모두 있고 모든 학문과 자연과 세계 속에 묻어있는 것입니다. 어제 블루마운틴을 갔습니다. 정말 예쁩니다. 이렇게 산위에 앉아서 블루마운틴 계곡을 내려다보면서 점심을 먹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거기서도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게 만드는 것들이 뭐냐 하면 근원을 케들어가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당나라 시인 가운데 진장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런 시를 씁니다. ‘덴 부제 쿠러’ 앞에서 옛사람을 볼 수 없고 ‘후 부젠 라이러’ 뒤에서 올 사람을 볼 수 없으니 ‘웬텐디디유유’ 천지에 끝없음을 생각하니 홀로 외로워져서 눈물만이 흐른다. 이런 것들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관점에서 보면 이 우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데서 오는 눈물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어려운 말인데 ‘처염’ 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데 처절하리만치 아름다운 것을 말합니다. 그런 분이 여기에 계십니까? 그게 뭐냐 하면 세계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느냐하면 ‘앞에서는 옛사람을 볼 수 없고 뒤에서는 오는 사람을 볼 수 없구나!’ 뭐냐 하면 나라는 인간 존재가 이 유한한 세계 속에서 정말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고 그런데 천지를 보니까 도대체 이것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언제부터 이것이 존재했을까를 생각하니까 홀로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왜? 자기의 기원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모르니까 이 천지에 말없는 무한함. 그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정말 티끌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눈물밖에 흐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놓으면 시편 121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서다.’ 환희를 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 자기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리라. 왜 보는 것입니까? 과학이 이렇게 발달되었어도 산은 만들지 못합니다. 시드니가 얼마나 싱겁습니까? 평평한 평지입니다. 산도 있고 그러면 좋은데 돈을 주고 살 수 있으면 수입 해다가 놓았을 것입니다. 못 만듭니다. 나 같으면 만들겠습니다. 돈이 몇 조원이 들더라도 멋있는 산을 몇 개 만들고 싶습니다. 땅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말입니다. 중국에서는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산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 산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으니 내가 처한 인생의 문제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마음만 먹으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시련과 환란 속에서 두렵지 않다는 마음은 이것을 뒤집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근원을 모릅니다. 앞에서는 옛사람을 볼 수 없고 뒤에서는 오는 사람을 볼 수 없는데 그러면 이 앞에는 누가 있었고 이 뒤에는 누가 있는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은 모릅니다. 그러니까 너무 아름다운 것은 깨달았는데 그 안에서 그 근원을 모르니까 한없는 외로움을 느끼며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을 뒤집으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원래 알미니우스주의자였습니다. 알미니우스주의를 아십니까? 모르시면 오늘 집에 가셔서 알미니우주의를 검색해보십시오. 알미니우스주의자였습니다. 그때까지는 진정하게 회심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천둥소리였습니다. 여러분 미국의 천둥은 한국의 천둥과 다릅니다. 이것이 평지니까 기상이변도 사이즈가 다르니까 어마어마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토네이도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에도 토네이도가 일어납니까? 그럼 여기도 꽤 큰 나라입니다. 미국은 토네이도가 일어나면 어마어마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프차를 세워놓고 다른 차를 타고 갔다 왔는데 와보니까 지프차가 지붕에 올라가있더랍니다. 토네이도를 피하는 드릴을 초등학교 때부터 배웁니다. 그런 정도인데 천둥소리를 너무 무서워했습니다. 그런데 회심을 하고 하나님을 깊이 만납니다. 그것이 언제냐 하면 예일 대학교 대학원시절입니다. 그 사람이 건강을 위해서 말을 타고 숲속을 산책하는데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 ‘권세와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어지이다.’ 라는 말씀을 받으면서 고꾸라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은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기가 아주 티끌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정말 주님의 그 거룩하심을 깊이 경험하며 그가 사실을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겸손한 칼빈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한없이 웁니다. 이 사람은 또 비상한 천재입니다. 그러니까 칼빈주의로 돌아서서 이 사람이 신학이 웅장해지기 시작합니다.
내일 하나님의 Beauty, Glory, Excellence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인데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서 빼놓으면 안 되면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 본질이 무엇인지 내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탁월한 하나님의 영광을 세계 안에서 발견하는데 이것들이 모든 데에 다 흩어져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제한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 아닙니까? 세 사람이 블루마운틴을 갑니다. 다윈이 격찬했다는 다윈절벽 같은 데 말입니다. 그런데 세 사람이 갑니다. 한사람은 미술가입니다. 한사람은 식물학자입니다. 한사람은 지질학자입니다. 그리고 걸어갑니다. 그 사람들은 각자 산을 올라갈 때 어떤 느낌을 받겠습니까? 산이 굽이굽이 된 모형을 보면서 색깔을 보면서 진짜 예쁘다고 그러면 미술가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은 식물학자입니다. ‘세상에 이것이 여기에 있다니? 이 지방에서는 절대 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여기에 있지? 아 옛날에 대륙이 하나였나 보다.’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지질학자는 Layer를 보면서 ‘이것은 어느 시대 것인데 어느 시대 것인데 바로 저 시대 때에 물이 완전히 넘쳤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따라가는데 아무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세 사람이 가면서 ‘오 이 색상!, 이 디자인!’ 또 한사람은 ‘이 식물의 놀라움! 생명!’ 또 한사람은 ‘이 지질, 이 연대! 놀라운 발견!’ 그러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만 가고 삼겹살 구워먹지 자꾸 어디로 가는가? 저기도 평평한데 저기서 앉아서 삼겹살을 구워먹지 어딜 자꾸 가나? 그렇게 신앙생활도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온 땅과 만물위에 가득합니다. 어디에는 이것이 뭉쳐있고 어디에는 파편처럼 흩어져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아름다운 연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입니다. 보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 놀랍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은 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나중에 변화된 다음에는 이 사람의 가장 고상한 취미가 무엇이냐 하면 천둥과 벼락이 때리는 그 무서운 날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원론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많이 합니다. 이원론이 무엇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이런 것입니다. Scale of being. 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존재도 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여기는 하나님이 있고 이것들이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렇게 되면 여기는 그냥 존재하는 사물, 무생물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살아 있는 사물, 식물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존재하고 살아있고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하고 살아있고 감각이 있고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고 이것은 동물이고 이것은 식물이고 이것은 무생물인데 이것을 어떻게 보느냐하면 이렇게 봅니다. 이만큼이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존재의 정도가 이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간 작고, 이것은 작고, 이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만약에 존재라는 것이 라티어로 ‘에세’입니다. 희랍어로는 ‘에이나이’입니다. ‘있음’입니다. 그런데 ‘있음’이 하나님은 100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80쯤이라고 보고 천사가 그 사이에 있어서 90쯤이 된다고 보면 그럼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위로 올라갈수록 Spiritual 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내려갈수록 Material이 물질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선이라는 것은 Spiritual한 덩어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내려갈수록 이것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악이라고 보고 이것은 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쪽으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물질화되는데 물질화될수록 악이 커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물질 개혁설이라고 하고 이것을 플라톤 사상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물질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들로부터 흘러나온 것인데 여기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렇게 영적인 것들이 점점 사라지거나 약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 자체를 어떻게 설명하느냐하면 이런 그릇에 신성이 하나님의 성품인 신적 성질이 가득 담기니까 이것이 감당을 못해서 흘러나옵니다. 흘러나와서 굳어진 것이 이 세계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유출설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내려올수록 악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때 이 희랍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폭탄적인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이 로고스는 누구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이 신성이 차고 흘러넘칠 때 이것이 신성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신의 대리자로서 신의 의도대로 이 세상의 만물을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런 영적인 존재가 사르크스 이게 고깃덩어리인 살, 몸, 육체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감각적인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무생물이고 이것은 Material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악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을 초월해있어야 할 로고스가 이것이 되었다는 것은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플라톤주의적인 물질계약설을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이것과 이것으로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누어지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목회하고 전도하는 것은 엄청나게 영적인 선한 일이고 문방구를 하든지 밥을 벌어먹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밥 먹고 사는 아주 하찮은 것이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세계관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존재에 대한 이원론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런 이원론적인 생각에 대한 타파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통일적으로 보시면서 그러면서 이 안에 어디엔가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어디에도 없었던 적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집안에서 밥을 하던, 빨래를 하던, 낙서를 하던, 무엇을 하든지 여러분의 흔적은 여러분의 집안에 모두 남겨놓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주부가 데데하고 정신이 올바르지 않으면 청소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돈이 많으면 가정부라고 시켜서 하는데 그것도 안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정신이 올바르고 경제적인 개념도 철저하면 쓰는 것도 계획성 있게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이 없으면 돈이 들어오면 확 써버리고 그 다음에는 신용카드 가지고 살고 이렇게 규모 없는 삶을 삽니다.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주인이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인지 드러내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 세계도 결국은 어느 하나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타내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이 어느 곳에는 이렇게 많이 뭉쳐있고 어느 곳에는 이런 것들이 덜 뭉쳐있고 어느 곳에는 띄엄띄엄 있긴 있지만 모두에 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모든 진리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이교나 그런 곳에도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파편적인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진리가 원하는 방법대로 제자리에 갖다놓지 않고 자의적으로 맘대로 배치를 해서 마지막에 결론을 이상하게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인데도 진리를 모든 것을 끊어놓고 보면 예쁘지만 잘못된 진리로 놓았을 때 전체적인 것들은 아주 역겨운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못된 연결들을 다시 타파해서 그것들을 씻어서 제자리에 갖다놓는 것이 이것이 신학의 사명이고 모든 학문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움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만 이 아름다움의 흔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해야 시인 진장처럼 외로움 속에서 그냥 눈물만 흘리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전부 연결된 아름다움들을 학문의 세계에서 발견해서 이 아름다움이 마지막에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고 우리들이 살아가야할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은 이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해서 다른 학문들과 어떻게 이 신학이 연결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되었는가? 라고 하는 것을 내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이 있으면 질문해주십시오.
질문1)
답변1)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답을 하자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을 타고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경험한 것이 구원에 이르는 첫 번째 회심이었느냐? 아니면 구원은 이미 받았는데 또 다른 회심의 체험을 통해서 기존에 있었던 구원에 대한 경험이 Extension 된 것이냐는 누구도 단정적으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구원과 관련시켜서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면에 대해서 어떤 확고한 증거를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첫 번째 해당되든 두 번째 해당되든지 그것이 나에게 무슨 중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고 예를 들자면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알미니우스주의적인 확신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가 얼마든지 이미 거듭난 사람일 수 있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두 번째는 그것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유럽을 전도하면서 사실은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당신 집에 초대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했지만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의 확고한 주장점이 무엇이냐 하면 자유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어라. 심지어는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몰몬교도에게도 가서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리 그래함은 전도자로서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단인들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가서 이단들에게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복음을 전해주면 되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게만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를 들면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일인데 어느 신학교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강의를 해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로써는 시간강사에게 줄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상당한 사례비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이단에 속한 신학교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거기가 이단이 아니냐? 나는 안 간다.’ 그랬습니다. 자기네는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이단이면 교수님이 더 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에게 올바로 가르쳐주십시오.’ 그러는 것입니다. 그게 말로는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제 일단 제가 거기에 가서 강의를 하면 내가 자신들을 후원했다고 생각하지 저분이 이런 말씀으로 우리 교주의 교리를 바꾸어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모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철저하게 반대했던 것입니다. 나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고 정말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분이 신학적으로 신중한 분일까에 대해서는 Decide 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까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질문2)
답변2) 제가 아는 것만 답변하겠습니다. 그것은 이야기하기가 간단히 끝나지 않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칼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적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고 두 번째는 칼 바르트는 기본적으로 실존주의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안 박혔느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누가 입증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또 동정녀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뭐냐 하면 실존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것을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 믿음에 동참한다. 그래서 사실을 이 사람이 역사적인 사실을 이야기할 때 히스토리에와 게시기테를 구분합니다. 히스토리에는 무엇이냐 하면 역사서술로써의 역사입니다. 게시기테는 무엇이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진짜 역사입니다. 진짜 역사는 누구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동정녀 탄생이라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든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미라든지, 이런 것들은 모두 이런 히스토리에로 기록이 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하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역사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렇게 역사적인 Fact를 증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증명할 수도 없거니와 증명할 필요도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여기서 중대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쭉 넘어가보면 이것이 여기에서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타락을 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타락의 기사도 어떻게 보면 신화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가 되느냐하면 신화 속에서 이루어진 타락 때문에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화가 되려면 인간의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 신화가 되고 아니면 역사적인 사건이 되려면 둘 다 역사적인 사건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들이 칼바르트를 신 정통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래서 신(新) 자가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는 것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역사성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역사성을 강조했더라면 칼바르트의 신학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영향을 미쳤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역사라고 우기면 계몽주의 치하의 영향아래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였겠습니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위에 붕 떠있는 신학을 세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정통주의 신학이 결국 우리 정통주의를 대변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미 화란까지 포함해서 바르티즘에 다 흡수가 됩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너무 끝없이 자유주의로 나가니까 이것이 역사성이 있든 없든 그렇게 믿는다는 것을 인정만 해주는 것만 해도 너무 보수주의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유럽의 신학이 안고 있는 문제이고 이미 바르티즘이라는 것도 바르트주의 라는 것도 이미 구석으로 밀려나는 하나의 신학사상이 되고 있는 처지입니다. 이정도로만 하겠습니다. 일단 에드워즈와 관련된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3)
답변3) 그것을 지금 책을 쓰고 있습니다. 9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인데 제가 지금 800페이지 정도 넘게 썼습니다. 그래서 올해까지 마무리를 해서 내년이면 책을 내려고하는데 그것을 여기에서 900페이지를 한 번에 이야기하라면 쉽지 않겠지만 우선 제가 보기에는 그 조나단 에드워즈때까지만해도 기본적으로 이 신학이 삼학사과를 토대로 해서 이루어지는 학문이었습니다. 삼학사과가 무엇이냐 하면 트리비움, 꽈드리비움, 삼학과 사과라고 부릅니다. 삼학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이 삼학입니다. 사과는 기하학, 수학, 천문학, 음악 이게 무슨 학문을 하든지 기본이 되었던 7개의 과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면 그 다음에 이 삼학 사과의 전통이 후에 가면서 훨씬 단순화되어서 자연과학 쪽은 이제 완전히 저쪽 과학쪽으로 넘어가고 문사철로 요약이 됩니다. 문학, 역사학, 철학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대학의 모자가 사각형인 이유도 그게 사학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의학, 법학, 신학, 철학 이것이 하나의 모퉁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 삼학 사과를 다 공부한다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하면 너무 좋고 이것은 신학을 하기 전에 공부를 했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렵다면 기본적으로 문학, 역사학, 철학 이 세 가지는 공부를 한 토대위에서 신학이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러면 신학이 철학과 역사와 문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는 다음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이 없으시면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