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과 사상6
녹취자:문미경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즈 책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탁월 하는지 물어보는데 제가 볼 때는 모두 탁월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골라보라고 한다면 미셀러니(miscellany)를 꼽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에 미셀러니라고 있습니다. 강의 한 5페이지에 나오는데 미셀러니라는 게 잠록이라는 뜻입니다. 미셀러니가 4권으로 되어있습니다. 미셀러니는 통일적인 책이 아니라 신학적인 묵상록 입니다. 예를 들자면 도대체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무언가 뜬금없이 시작하고 죽음은 어디서 왔나, 죽음의 종류, 죽음이 인간에게 가져다온 비극 등등 철학과 미학과 넘나들면서 죽음에 대한 의미를 얘기한 겁니다. 어떤 것들은 두 세줄 밖에 안 된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십 여 페이지 될 정도 기다란 논의들이 나오게 됩니다.
원래 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메모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에드워즈가 말을 타고 외출을 하면 핀하고 메모지를 많이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생각나면 말위에서라도 기록을 해서 여기다 이렇게 핀으로 꼽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가 하나씩 하나씩 뜯어서 메모지를 모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메모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역사에서 메모를 참 잘했던 사람은 테르텔리안누스라는 교구입니다. 그 사람은 지팡이를 갖고 다녔는데 지팡이가 산신령이 갖고 다니는 것처럼 위에가 둥그런 지팡이였는데 뒤로 돌리면 그 속에서 펜과 잉크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것을 어디서든지 꺼내어 메모를 하게끔 활용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휴대폰을 가지고 메모를 합니다.
그런 메모의 사람이었고 천재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 어마어마하게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을 겁니다. 떠오른 생각들은 또 다른 생각들을 부르고, 또 다른 생각을 부르고 하니까 어떤 때는 자신의 머리속에서 떠오른 생각들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을 겁니다. 그걸 쫙 정리를 합니다. 기회가 닿으면 그걸 가지고 상세하게 글을 쓰게 됩니다. 그런 작업들을 해서 남겨놓은 것이 작품이 미셀러니입니다.
이 미셀러니에는 신학만이 아니라 미학, 철학, 성경, 윤리, 과학, 역사, 그런 모든 내용들을 넘나들면서 기록되었습니다. 얘기해봐야 재미없고 실제로 옆에다가 한 권 갖다놓고 몇 개를 좀 읽어야지만 제대로 된 맛을 보는데 미셀러니는 아직 번역이 안 되었습니다. 수많은 책들에 대한 인용, 심지어 그 책을 인용할 때 상당한 부분들을 인용하면서 라틴어도 있고 영어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해서 써 내려 간 겁니다. 그것을 보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어떤 책들에 심취해있고 어떤 것들을 써내려갔든지 그 사람이 움직인 사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중국철학에 대해 에드워즈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논어, 맹자, 사서오경 이런 것들이 거의 16세기 말부터 번역되기 시작해서 17세기 후반까지는 중국의 대부분의 철학서적들을 유럽 사람들이 영어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단한 겁니다. 그러면서 중국철학이 유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칩니다. 예를 들자면 로크, 홉스, 라이프니츠..이런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심지어 영국에 들어가서는 영국의 의회의 제도까지 바꾸어놓는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중국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꽤 길게 중국 철학을 논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의 학문의 깊이에 대해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에드워즈가 이러한 것들을 활용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참된 기독교신학이 아닌 다른 철학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남아있는 계시의 희미한 흔적들, 예를 들자면 중국철학의 책들을 섭렵하면서 그 안에서 중보자의 개념들을 찾아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참된 계시의 흔적들이 이방의 세계 속에 흘러들어서 남아있는 모습이라 보고 그렇지만 그들은 그 계시의 토대로 참된 중보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 거기서 자연신학의 한계를 동시에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 속에 보편적으로 뻗어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성의 증거 그리고 신성의 증거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도덕적으로 우리들을 판단하신다는 것들은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그것만을 가지고는 위대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 그러한 것들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한계를 함께 변증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학은 성경을 기초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개진하는 겁니다. 정말 재미있고 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초 신자들이 읽으면 낙심도 합니다. 왜냐하면 워낙 다방면의 지식들이 동원이 되니까..자기가 모르는 일을 계속하면 짜증나니까 힘이 듭니다. 하지만 그 까짓것 읽어가지고 뭔 도움이 되랴..그럴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충고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예화) 어느 학생이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첫 시간에 선생님 한분이 오셔서 ‘너희들은 신학교 들어왔으니까 이것저것 이 책 저 책 찝쩍거리며 읽지 말고 얕은 물에서 자박거리지 말고 깊이 있는 사람 하나를 선택해서 그의 모든 책을 읽어라. 한 사람을 파라.’ 라고 했답니다. 그때에 깊이 감동을 받고 조나단 에드워즈 한사람을 파야겠다고 결심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존 파이퍼입니다. 일평생 조나단 에드워즈를 탐구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똑같이 반복한 것이 아닌데 그걸 가지고 자기의 사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파야할 대상) 우선 두 가지 조건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그 분의 사상이 성경적이고 탁월해야 합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일생동안 탐구해봐야 뭐하겠습니까? 두 번째는 탁월하고 훌륭해도 남겨놓은 저작이 너무 적으면 그게 유익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일단 저작이 탐구할 정도로 방대한 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공부하는 방식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깊이 파고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보다 많이 읽은 건 존 오웬이었습니다. 에드워즈보다 유명하진 않지만 그러나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일 이 년에 끝낼 생각을 하면 안 되고 일평생을 읽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삼십 권쯤 되는데 700페이지쯤 되니까 이만 천 페이지, 일 년에 일천 백 페이지 씩 읽어도 십년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읽으려면 주일 빼놓고 이백일 잡고 하루에 열 페이지를 읽어야 합니다. 상당한 영어실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어도 18세기 영어라서 문법도 다시 공부하고 어려운데 내용이 소설 열 페이지 읽는 거하고 철학책 열 페이지 읽는 거 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이거는 아주 어려운 내용들이 담겨있기 때문에 수시로 자신이 다른 공부를 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 강의안도 예쁘게 책으로 만들어 드리려고 했는데 가져올 자신이 없어서 그냥 가져왔습니다. 읽다가 단어가 나오면 그것을 모른 채로 읽으면 아무런 남는 게 없습니다. 책을 놓고 볼 때에 알미니우스주의, 보르튀우스 나오면 보르튀우스 치고 들어가서 보르튀우스가 가 누군가? 알미니우스가 누군가? 알미니우스 주의는 왜 생겼는가? 미학은 무언가? 언제부터 생겨났으며 어떻게 발전시켰는가? 그런 식으로 하면 요만한 얇은 책 한 권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그렇게 한번 개념을 뜨고 나면 다음에는 이해가 잘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나서 집에 가면 기찻길에서 떨어지는 이야기, 햄버거 먹은 얘기 그런 것만 생각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항상 공부하고 항상 메모하는 겁니다. 그래서 꾸준히 비가 오나 눈이오나 매달리면서 원전에 천착을 하는 것입니다. 고전과 근대 현대 신학과 인문학 과학, 조화롭게 읽어나가되 항상 중심은 성경과 신학에 두어야 합니다. 비유를 들자면 항상 시작 할 때에는 바이블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인접학문을 공부하게 됩니다. 이것은 능력과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서 이 범위는 넓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을 공부하든지간에 항상 중심이 성경과 맞닿아 있어야 합니다. 항상 중심이 성경에 맞닿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매일 꾸준히 읽는 것이 모든 신학 공부의 가장 으뜸입니다. 하루에 성경을 최소한 이십 장 이상.. 성경을 확확 읽어가는 것입니다. 삼십 장이나 사십 장이면 더 좋습니다. 성경을 한 장 한 장 읽을 때와 한 책 한 책 읽을 때는 완전히 다릅니다. 숲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을 깊이 읽을 때는 아침에는 깊이 읽고 저녁때는 확확 읽어나가는 합니다. 아예 창세기 한 장 잡으면 오십 장 까지 한꺼번에 잡아서 확 읽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일도 해야 하니까 최소한 이십 장정도(30장-40장)씩 확확 성경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성경이 통일적인 계시를 전체적으로 보는 것들을 통독을 통해서 보충하고 아침에는 천천히 읽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깨달으면서 정독하면서 묵상하는 겁니다.
제가 강의하는 내용 중에서 목회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강의가 하나 있는데 ‘평생 설교준비 안하는 법’ 이란 강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성경을 쭉쭉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는 것들이 신학의 기초적인 작업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만큼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뻗어나간다는 것은 성경하고 조직신학, 성경 신학, 역사, 성경, 언어, 이런 것들을 공부하면서 뻗어나가야 하는데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 뭔 데를 목표를 잡으면 미아가 돼 버린다. 그러니까 자기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봐서 성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도움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것부터 공부하면서 힘닿는 대로 하되 항상 원심력과 구심력의 의미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면서 에드워즈는 커다란 원을 그렸던 사람입니다. 굉장한 독서를 했던 사람이었고 목회를 하면서 하루에 13시간씩 공부했으니까.
그렇게 하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에 세계와 역사와 모든 것들이 열리면서 한 번에 볼 수 있는 안목들을 가지게 되니까 무엇을 얘기하든지간에 아주 깊이가 있었습니다. 미셀러니에서 그런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말만 들어도 소용없고 한권이라도 읽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우리보다 영어 잘할 거 아닙니까? 너무 부럽습니다. 우리는 영어 일평생 스트레스입니다. 여러분들은 영어 사회 속에서 사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미셀러니가 그런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고.. 미셀러니는 주제별로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연도별로 해가지고 계속 나아갑니다. 너무 다양합니다. 성경에서부터 시작해서 역사, 이방신학, 미학, 과학에 대한 이야기 수많은 이야기가 오고가기 때문에 하나의 예가 무슨 특징으로 이루어졌는지 말하기 어렵습니다. 미셀러니를 한번 봐야합니다. 시간이 많으면 자료를 하나씩 샘플을 다 여기다 첨부해서 진짜로 읽어가면서 설명하면 정말 좋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한 일주일쯤 해야 합니다.
두 번째가 구속사입니다. 'history of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구속사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여기 계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있습니다. 그럼 여기 세계에 수많은 인간이 삽니다. 그럼 우리 여기에서 소위 얘기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분이 쓴 논문가운데 ‘하나님을 의존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이라는 제목이 긴 논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갓 글로리 파이드 인 더 하트 오브 맨 어브 디펜더스.’라는 작품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우주가 끝없이 넓습니다. 백육십억 광년 정도 되는 우주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우주입니다. 이런 우주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정말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 인간의 마음인데 어떤 마음에서 영광을 받으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유명한 논문입니다. 온라인에서 어디로 들어가시냐 하면 예일대학교의 조나단 에드워즈 센타 라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e-book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갓 글로리 파이드를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그 인간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면 하나님을 디펜던스 dependence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인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아름다움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독립하는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모든 피조물의 의지하지 않고 홀로계시는 아름다움이고 인간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인간은 가장 아름다워 질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번 있는데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그때 인간의 영혼은 가장 아름다운상태가 됩니다. 그럼 영혼이 아름다운 것이 뭐냐..라고 하는 커다란 담론으로 우리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당신의 뷰티 beauty를 보여주시고 이 뷰티를 인식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 뷰티를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가장 커다란 통로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리댐션 redemption 입니다. ‘구속’...
하나님의 구속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 하는 것들이 이 세계 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런 영광을 보고 인간이 그 의미를 알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두 영광은 각각 다릅니다.
영광이라 할 때 나는 크게 셋으로 나눕니다.
1. 본질적 영광-하나님 자신
2. 발산적 영광-셰키나, 샤칸이라고 하는 동사에서 오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고 벌벌 떨게 만드는 영광의 장소적 임재입니다.
3. 효과적 영광- 우리들이 흔히 얘기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할 때의 영광, 하나님의 아름다움 을 인식하는 인간이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영어표현이 ‘아이 어돌 유.’ ‘나는 당신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널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그걸 깨닫고 인간이 그걸 인정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그럼 redemption이 하나님의 뷰티를 인간에게 알려줘서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하신 분이신지 알게 만들어 준다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발현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많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도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배반하고 떠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간섭하시는가.. 그 역사들이 장구하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부터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그 역사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덩어리들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잘 찾아내서 의미를 파악하고 알게 될 때 인간은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감격하게 되고 그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지하게 되는 가운데에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토리 오브 리댐션이 중요한 게 된 겁니다.
구속사라고 할 때 오늘날도 구속사를 이야기하자면 대부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두 가지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신약성경이 끝난 것이 1세기라고 보면 여기에서 계속해서 이어져서 (에드워즈는 18세기에 살았습니다) 자기세대까지의 이 이야기를 플러스 알파로 갔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있어서 로마의 박해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리스 마케도니아 역사까지 나옵니다. 로마의 기독교 승인과 국교와 중세의 타락, 타락에서 일어나는 종교개혁,이런 모든 것들을 다 다루면서 그것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는 흘러가도 하나님의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이 위대하고 원대한 계획은 계속된다는 것..이것을 설파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역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들에게 전달해주는 하나의 거대한 통로이고 그 일반역사의 물줄기를 타고 그 안에서 구속의 역사가 뒤웅 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해 주는 거니까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구속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 구속의 역사를 진짜 아름답게 보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일반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장구하게 펼쳐가게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조나단 에드워즈로 하여금 단순한 신학자와 철학자가 아니라 소위 얘기하는 역사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에드워즈 이런 역사 해석에 대해서 당시 자의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러나 어쨌든 구속의 역사를 보면서 이것을 서술했다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만 들어서 모르고 직접 읽어봐야 합니다. ‘구속사’는 ‘부흥과개혁사’에서 번역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책에 영향을 미친 저자가 둘이 있다면 하나는 유세비우스이고, (유세비우스가 역사를 씁니다) 엔티키티라고 하는 고기, 사기를 씁니다. 유세비우스는 원래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시각에서 이것을 썼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썼는데. 신국론에서 역시 역사에 대한 해석을 합니다. 반달족들이 침입해서 로마가 멸망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 바로 신국론입니다. ‘결국 로마가 망한 것이 기독교인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의 신들을 진노하게 했기 때문에 결국은 신들의 미움을 받아서 나라가 망한 것이다’라고 하는 견해가 당시 팽배했고 이것 때문에 결국은 기독교가 많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변증으로써 신국론을 쓴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로마의 멸망 원인, 인간의 역사가 망해도 거기에 계속되는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의 완성이라고 하는 최초의 역사철학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을 꼭 읽어야 합니다.
(예화) 제가 대학에서 일주일에 한번 나가서 강의를 하는데 학생들에게 그랬습니다. ‘신국론을 읽어라 그럼 내가 너희들에게 밥사주고 만나주마.’ 7명에게 시켰는데 4명이 읽고..그 중의 두 명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자기는 정말 아는 것이 없고 무식한 인간이란 걸 깨닫고 그다음부터 열심히 공부했다는. 겁니다. 그때 편지가 왔는데 일주일에 다섯 권을 책을 읽는다고 했더랬습니다. 젊은 사람이야 펄펄 날지 않겠습니까..가슴이 뜨겁게 불타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지성인입니다. 사랑에 빠져보셨습니까? 정신 못 차리지 않습니까?
(예화) 어떤 자매가 말도 안 되는 형제와 사귀겠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몽둥이를 두드려 패고도 안 되니까 머리를 가위로 잘라버렸답니다. 그러자 그 자매가 수건을 쓰고 담을 넘어가더랍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그런 사랑에 빠져야 합니다. 멍청해서 빠지면 안 됩니다. 백치미 아십니까? 마릴린 먼로가 대표 주자였는데 남성들에게 왜 좋아하냐고 물어보니 생각 없어 보여서 좋아한다고 하더래요. 하나님을 백치미로 사랑하면 결코 안 됩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열렬함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탁월한 지성으로 헌신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구속사가 이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최고의 재료이기 때문에 이 구속사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역사 해석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 다음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책이 있습니다. 그걸 한번 읽어보겠습니다.(6페이지 밑에서 첫 번째단락)
“나는 에드워즈의 역사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유세비우스의 히스토리아 에클레스예스테니아카나 아우구스투느스의 데끼베띠따데이에서 많은 통찰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에드워즈의 역사서술은 아우구스의 신국론과 유사점들이 발견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도 펠라기우스주의 도나토우스 주의에 대항하여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신앙을 수호하고자 역사서를 수호했다면 에드워즈는 소키누스주의(소키누스 주의는 뭐냐면 종교개혁시대 이단인데 이성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믿는 것입니다. 이성주의의 산물입니다) 아루스 주의, 아르미누스주의와 같은 이신론의 시대정신에 맞서서 그 일을 하였습니다. 나는 에드워즈의 저작을 많이 읽을수록 종교개혁자 칼빈의 경우처럼 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참으로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중세학자들과 종교개혁자들,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연구가 깊어질수록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서 독창적이라고 믿었던 상당부분이 아우구스투티누스를 비롯한 다른 저자들의 발상과 통찰의 도움의 빛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존재와 가치의 질서, 덕에 관한 이론과 실천,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아름다움과 통일성, 진리와 선 등에 관한 담론들에게서 예외 없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커다란 영향아래에 있음을 알게 있었다.”
여기에 특별히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구속사에서도 나오고 미셀러니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이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가 줍니까?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누가 주는 사랑이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로 내가 받는 사랑은 하나님이 직접 주는 사랑인겁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윗글과 같은 생각을 말끔히 지워줍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하나님은 사랑입니까? 아가페,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한 인간에게 인디비주얼 individual하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하면 다 저 잘나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생각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본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제일먼저 당신의 아들에게 부어주십니다. 성자입니다. 교회는 성자의 와이프, 아내, 신부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이 교회의 모두 접붙여진 대상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지고 교회에게 부어진 사랑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모든 지체로서 영적으로 결속되어있는 우리들에게 이 사랑이 이렇게 전해지는 겁니다. 이것이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사랑을 받는 겁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런 설명을 주는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지금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랑 전에 교회가 사랑을 받았고 교회가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전에 아들이 사랑을 받았고 아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의 삼위일체 안에서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겁니다. 아까와 똑같은 이야기지만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런 설명을 추가할 때에는 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성, 이것이 아주 중요하게 대두됩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그리고 있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관계입니다.
오늘날 특히 개신교는 교회의 공동체성이라는 것이 산산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결탁해서 individual하게끔 개인주의적으로 이미 다 붕괴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을 주실 때에는 사랑 그 자체가 공동체적 목적에 동참하라고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마치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쟁취한 것처럼 생각하고, 그 사랑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일주일정도로 이야기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신자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이 부분은 어마어마한 하나의 커다란 강의의, 학과목의 한 주제가 되는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하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제가 책을 한 권 썼는데 다음에 올 때 책을 가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고 별도로 공부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잘 이해하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이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특별히 교회의 공동체성을 짓밟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겁니다. 기록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보편 교회의 사랑과 일치하며 이 사랑은 보이는 교회의 지평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처음 태어날 때부터 교회와 함께 태어나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내가 믿음을 갖기 전에 이미 중생하는 순간 그리스도 교회의 몸에 접붙여지는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은혜 받고 변화 받고 말씀을 깨달은 모든 것도 이런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내게 주신 은혜, 내게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은 교회가 모두 함께 누리도록 하나님이 나에게 분여 하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재능이나, 특별한 지식, 은사 모든 것들이 교회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런 구도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서 아주 거대한 하나의 커다란 주제를 이루는 겁니다.
.이 책과 비교할 수 있는 책이 하나있는데 존 오웬의 ‘쎄올로구메나판토다파’ 라는 책입니다. 원래 라틴어로 쓰여 졌는데 이 책이 영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비브리칼시얼러지’라는 책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비싸지 않습니다. 그리고 존오웬의 전집은 에드워드 전집보다 쌉니다. 16권인데 60십 만 원 정도면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주소까지 겹치고 25권을 전부 구입하면 90만 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 책 10권 값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명심해야할 것은 설교에 관해서 에드워즈의 설교가 존 오웬의 설교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존 오웬의 설교가 훨씬 더 수준 높고 장엄하다는 겁니다. 존 오웬의 영어 설교 읽다 에즈워드 영어 설교 읽으면 쉬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존 오웬은 훨씬 불친절하고 단어를 찾아도 안 나옵니다. 이런 작품을 할 때 필요한 것은 옥스퍼드에서 나온 영어대사전이 있습니다. 지금 살려면 400 만 원 정도 할 겁니다. 그 영어책이 좋은 점은 예를 들어 어떤 단어가 나오면 8세기에는 무슨 뜻, 9세기에는 무슨 뜻, 10세기에는 무슨 뜻 ..이렇게 다 나옵니다. 그래서 무지하게 단어장이 깁니다. 그런데 문헌의 세기에 때라 어떤 의미로 쓰여 졌는지 나오고 옛날에 쓰여 지는 것들이 다 나옵니다. 그런 것들은 사전을 필수적으로 옆에 놓고 해야 됩니다. 이제 그 사전은 아예 발간을 안 하고 온라인으로 팝니다. 일 년에 얼마를 내면 그걸 들어가서 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 사전의 도움 없이는 공부 못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공부하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 옛날부터 가난한사람은 공부하기 참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공부해서 뭐합니까? 먹고 쓰고 그래봐야 건강에나 안 좋지..돈 벌면 책을 사고 공부하는 그런 재미로 사는 것입니다.
(예화) 신학교 다닐 때는 정말 책을 사고 싶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점심을 이주일 굶으면 원서 한권정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서를 사서 모았습니다. 지금은 책을 살 수 있습니다. 갖고 싶은 책을 못 산 적은 없습니다. 내가 꼭 사야겠다고 맘먹으면 반드시 삽니다. 한권에 800만원 1000만원 달라는 책도 있습니다. 엊그제도 화랑 갔더니 800만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못 샀습니다. 그런 극단적인 거 아니면 삽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것도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읽고 싶어도 책의 글씨가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더 나이 들면 못합니다. 책이 없어서 공부하지 못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 공부하지 못합니다. 내 서재에 있을 때 제일 짜증날 때가 주변에서 목사님 그 책 다 읽었냐고 물어볼 때입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존 오웬의 쓴 책 가운데 ‘뗴오로구메나판토다파’가 있는데 이게 ‘성경적 신학’입니다. 언약신약을 따라서 창조,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렇게 시대구분해가면서 쓴 책입니다. 정말 대단한 책입니다. 여기에는 존 오웬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문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총동원되는 책입니다. 그래서 희랍의 신화들 철학사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나오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책을 비교한다면 에드워즈의 구속사는 존 오웬의 판토나파가 경비행기를 타고 쫘악 굽어보면서 나는 것 같다면 에드워즈는 물 위에다가 배를 띠우고 강을 타고 숲 사이를 싸악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구속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방식이 다릅니다. 아주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맨 마지막 단락 바로 그 위에 보면, ‘칼 투르먼이 지적한바와 같이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언약과 보편교회의 기독론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역사와 언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오웬은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보편교회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자 직에 관한 중세의 논의들을 창조와 구속의 본질에 관한 신교적 통찰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틀 안에서 성경의 역사를 해석해간다. 한편 에드워즈는 구속사에서 오웬과는 대조되게 성경자체에 진술을 따라 언약들을 근거로 경륜을 해석해 가는데 그의 관심사는 경륜의 시대적 다양성 보다는 그 모든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우주적 완성으로서의 하나님의 구속이다. 에드워즈의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행위들은 인간에게 자신의 성품을 아름다움을 개시하는 수단이다. 이러한 역사의 해석은 성경시대를 넘어 당대까지 해당되었다. 그의 역사해석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비판적이라는 묵시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거기에 이제 비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성경을 넘어서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해석하는 그의 철학적 안목을 지지하게 된 것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을 바라보는 그의 신학이 우주적 성격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구속사를 읽어보십시오.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읽기 전에 혹은 읽은 후에 함께 읽어도 좋으니까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신국론을 읽고 친구들과 모여서 토론을 해보십시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속사를 읽으면 성경을 보는 눈이 확 열리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역사에 대한 이해가 가져다주는 변화입니다. 혹시 여러분 클래식 좋아합니까? 클래식 음악도 아는 것만큼 들리는 것입니다. 역사를 알고 시대의 사조를 알고 그것들이 뭘 표현하려고 했다는 걸 우리들이 이해하게 될 때의 그때에 음악에 대한 스치고 들어봤던 그 음악들이 아주 의미를 가지고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처럼 그렇게 각각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클래식 음악 틀어주십니다) 이게 뭐냐면 구노의 아베마리아입니다. 구노의 아베마리아를 바하의 평균률을 깔고 그 위에 구노의 아베마리아를 집어넣은 게 구노의 아베마리아입니다. 두개가 만난 겁니다. 400곡 정도 바하가 평균률을 썼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평균률이 바로 이겁니다. 이것은 아주 엄격한 수학적 공식으로 수학적 규칙을 따라 작곡을 한 겁니다. 이 수학과 음악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세바스찬 바하는 음악과 질서에 대한 수학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악의 기능 자체가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거라고 보았고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닌 건 음악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규칙과 비율 질서가 아주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게 된 겁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뮤지카 musica에 대한 책을 씁니다. 이건 영어로 ‘온 뮤직’이라 번역되었습니다. 이건 쉽게 책을 구할 수 있습니다. 교부들 전집이나, ‘더 웍스 오브 세틴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WX 라고 하는 시리즈가 전집이 나와 있는데 아직 완간은 안 되었는데 그게 가장 정확한 영어번역입니다. 찾아보면 온 뮤직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이미 벌써 그때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음악에 수학적 기초를 알게 됩니다. 플라톤은 음악, 미술, 이런 것들을 굉장히 경원시했습니다. 이유가 원래 플라톤에게는 전부가 복사판입니다. 원래 이데아가 있으면 그 이데아가 투영된 것이 모형인데 이 모형을 다시 흉내 낸 것이 음악이고 미술이고 예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어제 설명한 것 같은 존재도의 원리에 의해서 이것이 원형이라면 이건 모형이고 이것도 사실 그런 점에서 우습고 물질세계 속에 내려와 있는 건데 이 모형을 다시 모형을 떴으니까 얼마나 조악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것들을 접하면 접할수록 이데아를 찾아가는 인간의 사유는 자꾸 방해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달랐습니다. 절대로 음악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음악에 심취하는 것은 그것도 죄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말과 목소리에 아름다움에 홀려서 그 찬양이 노래하고자 하는 궁극적 대상에 대한 경배를 불러 오는 데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음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하나의 수용성과 배제 성을 함께 가지고 음악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이제 비율, 규칙, 이런 것들은 음악을 음악답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이런 것들이 수열로 전부 계산되는 겁니다. 그래서 음악에서 나오는 화음, 기타 칠 때 카프를 옮겨 끼면 C코드에서 A코드로 바꾼 게 카프하나로 옮기면 C코드가 도로 A코드가 되는 것 같은 그런 원리에 의해서 아주 정확한 수열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겁니다. 그런 규칙성들을 찾아 낼 때에 거기에서 음악적인 미감이 들리고 시각적으로 그런 규칙성들을 찾아 낼 때에 규칙성들이 그 안에 숨어 있을 때에 우리는 그 규칙성을 발견하지 못해도 그 규칙성들이 예쁘게 느껴지고 그런 모든 것들이 그 규칙과 질서와 관계가 되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만드시고 이 세계의 인간들이 타락했을 때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이 모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들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 신 원래의 의도, 그 질서, 질서로의 회귀, 이런 모든 것과 함께 연관이 되고 정교한 연관 속에서 구속의 역사가 전개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아주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런 게 없으면 마치 짐승들이 배만 부르면 뒹굴뒹굴 구르다 놀고 그렇듯이 그런 육체에 매몰되어서 정신의 기쁨이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옛날에 처음에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고 그럴 때에는 다 설명하지 못해도 자기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하나님이 자기를 이때에 여기로 인도하시고 이렇게 인도하시고 돌아보면 아주 정교하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아주 훌륭한 계획에 따라 자신은 그렇게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찬송하게 됩니다. 감격이 살아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질서의 발견입니다.
그러면 그걸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말고 우주적으로 그걸 확장해서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마지막 때에 선교의 역사를 어떻게 펼치고 어떻게 이어가시고 하는 것들을 보면서 거대한 영적인 지도들을 놓고 보면서 하나님이 움직이는 역사들을 이해하게 될 때에 그때에 이 세계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묻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좌절하는 많은 인류와 사람들에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모든 이 세계 질서들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현대의 프랑스철학자 가운데에 레비나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타자성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이걸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일깨워서 공동체성 내지는 도덕성으로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이 볼트만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어떤 경험이 있었던 사람이냐면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갇혀서 부모들을 잃고 비참하게 죽습니다. 볼프만도 똑같은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일평생 이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고통 받으면서 죽고 비참하게 사육을 당하고 육백 만 명이라는 수많은 인종들이 말하자면 제노사이드라고 합니다..인종 말살 속에서 희생제물이 되어갈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셨는가? 였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마지막 고백한 것이 우리가 고통 받을 때 하나님도 거기에 계셨다, 하나님도 거기서 함께 고난을 받으셨다..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배제된 것 같은 무질서한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인간의 인류의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이 그 하나만을 보아서는 설명이 안 되지만 역사의 전개 속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 이해를 못한다고 할지라도 천상 속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조화를 이룰 것이라는 것을 보면서 그 섭리론적 사관을 가지고 인류의 역사를 보면서 구속사를 서술해나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