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Ⅰ(창3:19) 2003.4.14 십자가사경회(저녁) 1
2.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Ⅱ(창3:19) 2003.4.15 십자가사경회(저녁) 24
3. 왜 예수님이 오셨나?(막10:45) 2003.4.16 십자가사경회(저녁) 47
4. 왜 예수님이 오셨나?(막10:45) 2003.4.17 십자가사경회(저녁) 72
5. 왜 믿어야 하는가?(1)(롬3:26) 2003.4.18 십자가사경회(저녁) 97
6. 왜 믿어야 하는가?(2)(롬3:26) 2003. 4. 20주일오전 118
7. 왜 믿어야 하는가?(3)(요1:12) 2003. 4. 27주일오전 133
8. 왜 신자답게 살아야 하는가?(갈2:20) 2003. 5. 4주일오전 144
9. 왜 두렵지 않은가(1)(롬8:38-39) 2003. 5. 11주일오전 163
10. 왜 두렵지 않은가(2)(롬6:5) 2003. 5. 18주일오전 176
11. 왜 두렵지 않은가(3)(빌3:21) 2003. 5. 25주일오전 190
12.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계21:3-4) 2003. 6. 1주일오전 201
1.왜 구원받아야 하는가(1)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저는 오늘부터 사경회 기간 동안 그리고 만약에 못 끝나면 계속 주일예배에 이어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설교를 해야지 되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전부 다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이 결국은 우리의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데 불행하게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너무 아는 것이 부분 것이거나 아니면 편협 되어 있거나 아니면 아는 것이 아예 너무 현저하게 없거나, 그래서 설교를 듣고 부분적으로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그 진리를 보관할 수 있는 지식의 틀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보면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인데 그런데 사실은 기독교 진리를 아는 일에 있어서는 현저하게 무지해서 그래서 내가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왜 내가 믿어야 되는지, 그리고 믿으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대해서 애매모호한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불확실하거나 혹은 심지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사실은 구원에 대해서 많이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한 사람에게 너 내가 전도하려고 하는데 좀 들어줄래? 그렇게 말했는데 하도 조르니까 그래 그럼 한번 얘기해봐. 들어줄게. 그런데 16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러면 이 사람이 16시간 동안 그것을 듣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길게 전할 수가 없고 간단하게 인간은 죄인인데 그런데 타락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예수를 믿으면 너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갈수가 있다. 이렇게 간단하게 얘기해줄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제시를 해주어도 충분히 믿을 수가 있습니다. 아멘! 하고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 이후에 예수 믿는 사람이 된 다음에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만 가지고는 절대 안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 됩니다. 구원 안 받은 사람보다도, 구원 안 받은 사람은 간단하게만 알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었는데도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을 때는 아멘 하고 믿지만 믿고 난 다음에 성경을 탐구하고 설교를 듣고 또 자신이 깊이 정리를 해서 내가 임한 구원이 도대체 무엇이고, 내가 구주로 믿는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를 우리 스스로 탐구해가면서 거기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아주 훌륭한 신앙생활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에게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설교들을 했을 때 가끔 여러분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그런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소망을 가지라고 설교를 했는데 낙심하거나, 기도하라고 설교를 했는데 지금 이만큼 기도하는 것도 그만두려고 작심하는 사람, 부지런하게 살라고 설교했는데 게으름에 대해서 설교했는데 아이고! 이제 이거 너무 힘들구나.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신앙 전체적인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전체를 알았더라면 아주 유익을 받을 수 있는 설교들을 말하자면 약이 되는 설교들을 그 약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고 영양분을 제대로 빨아들이지 못하고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설교되는 이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가슴에 담고 일평생 그것을 책꽂이 삼아서 거기에다가 주님의 말씀들을 이제 채워 넣는다면 충분히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서 풍성한 삶을 사실 수 잇을 것입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다 설교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못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왜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부터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오늘이나 혹은 내일까지 계속 되더라도 어째든 ‘우리에게 왜 구원이 필요 한가’ 라는 주제부터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이 세상이 너무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그리고 인간들이 그렇게 간절히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는 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성경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깊이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인생을 고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행복하고자 원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불행해져가는 것을 느끼게 되고 진짜 여러분들이 인생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고민했더라면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과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만 그렇게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정말 지난날과는 비교도 안 되게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행복이 있다고 해서 행복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는데 그 행복은 마치 무지개와 같아서 산을 넘고 무지개를 붙잡으려고 하면 그 무지개는 그 산을 넘었는데도 또 그 산 너머에 있고 다 잡힐 듯 잡힐 것 같아서 부지런히 산을 넘어 달려가 봤더니 그 무지개는 사라졌더라. 뭐 그런 내용의 시입니다.
‘인간이 행복이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하는 것은 우리들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을 잠시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 이래로 세상에 있는 많은 지혜로운 사람들은 도대체 이 인간의 고통이 무엇 때문일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그리고 이 고통을 제거하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많이 궁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얻게 된 많은 결론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환경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나 말고 환경에 있다. 그래서 가난이라든지, 질병이라든지, 그리고 또 무지라든지, 또 파괴된 인간관계라든지 이런 것들 속에 궁극적인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어느 정도 맞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난하게 살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그냥 자가용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다닌다든지 갈비를 못 먹어서 삼겹살을 구어 먹는다든지 그런 게 가난한 게 아닙니다. 진짜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끼니를 염려해야 하고 실제로 물질이 없어서 끼니를 잇지 못하는 그런 경험이 진짜 가난의 경험입니다. 물론 거기에서 더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감사하다. 아니면 죽만 감사하다. 한없이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가난하면 인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배가 고파서 죽어가고 굶주림 속에서 아우성을 치게 되면 인간에게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습니다. 그 가난은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하게 되면 싸움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찢어지게 가난하면서 온 가족이 히히 낙낙 하는 그런 가정을 봤습니까? 안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도 항상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집이 번듯하고 깨끗한 집은 부서질 것도 많고 던질 것도 많고 깨질 것도 많을 텐데 그런 집에서는 별로 싸움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던질 것도 없고 깨트릴 것도 없는 집에서는 매일 집어던집니다. 그래도 안 깨지는 것들입니다. 플라스틱, 소쿠리, 구두 짝 이런 것, 오늘 다 집어던지고 다 들여왔다가 씻어났다가 내일 또 집어던지고,
저는 청소년 때 진짜 가난한 동네에서 살아봤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한 동네에 집 한 채에 15만원이었으니까 진짜 옛날이야기입니다. 가난하니까 하수도가 뭐가 있어요. 비만 오면 물이 콸콸 넘쳐서 진창이 되고 쌀 씻은 물을 다 길거리에다 버리고 그렇게 가난한 동네인데, 낮에는 그래도 불편해도 살겠는데 밤이 되면 전기불도 없지, 거기에다가 가난한 사람들은 밥도 못 먹는데 어떻게 술은 많이 먹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냥 술집만 쭉 생깁니다. 술만 먹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술만 먹으면 싸우고 죽이겠다고 달려가는 놈, 피투성이가 되어서 도망가는 놈, 그리고 가난한 집 부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싸움도 잘하는지, 옷이 다 뜯어지고 피투성이가 되도 악만 남아서 싸웁니다. 돈이 많고 부유하게 사는 동네에서 그렇게 싸우는 것 봤습니까? 그러니까 확실히 가난도 인간의 고통스럽게 하는 한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 그뿐만 아닙니다. 무지하면 인간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육을 많이 받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누를 끼치지 않습니다. 물론 요즘은 공부를 많이 하고 그래도 사람들을 아주 잔인하게 고통스럽게 하고 예의가 전혀 없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은 교육은 있지만 교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교육이 있고 교양이 잘 갖추어진 사람들은 얼마나 주위에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품위를 유지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교양이 없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정말 양보하거나 그럴 줄도 모르고 그렇게 무슨 예의라든가 미안하다든가 이런 게 교육을 많이 못 받았어도 교양이 있는 사람들은 안 그렇습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 것들이 고통의 원인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뿐만 아닙니다. 질병이 얼마나 고통의 원인이 됩니까? 자기 자신이 아픈 것은 물론이거니와 식구 중에 한사람만 아파서 사경을 헤매도 여러 명의 가족들이 얼굴 필 날이 없이 고통스럽고 그리고 견디기 힘든 괴로운 시절들을 지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가만히 보면 인간이 불행해질 수 있는 이유는 무궁무진합니다. 나만 잘산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닙니다. 내 형제 하나가 질병에 걸리면 내가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면 또 인간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뿐만 아닙니다. 또 우리들에게 있어서 인간관계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꾸 깨트려지고 밉고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제가 중국에 가 있을 때 장국영이라고 하는 난 그 사람이 누군지 긴가 민가 했는데 사진을 보니까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한참 어리겠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벌써 50가까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젊은이처럼 보이는 사람이 호텔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돈이 많고 그렇게 팬들이 많고 열광적인 환호성 속에서 사는 사람이 그런데 그냥 뛰어내려서 무참하게 도로 위에 떨어져서 피투성이 되어서 죽어버렸습니다. 내가 그 소식을 듣는 순간에 그렇게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저렇게 살까? 이렇게 인간관계에서 오는 깨트려짐도 이렇게 인간에게 절망으로 이끌어서 죽음으로 몰고 가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부분적으로 우리의 인생에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를 들자면 어떤 질병에 걸리면 징조가 나타납니다. 징후가, 감기에 걸리면 어떻습니까? 자꾸 콧물이 나고 재채기가 나고 그리고 기침이 나고 목이 붓고 열이 나고 으슬으슬 춥고 뼈마디가 쑤시고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가난, 무지, 그 다음에 질병, 인간관계의 파괴, 고통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불행한 것에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재채기, 콧물, 그 다음에 열나고 뼈아프고 뼈마디가 쑤시는 것 같은 그런 증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병에 걸렸기 때문에 감기에 걸렸기 때문에 그런 증상이 나타나듯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려 있는 상태가 그렇게 무지와, 가난과, 고통, 인간관계의 파괴 이런 것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라는 병을 가져다 준 병원체는 말하자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죽음에 걸렸다고 하는데 죽음이라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오는 증상이 바로 가난, 질병, 고통 이런 것들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러면 도대체 죽음에 걸려있다. 인류가 이 모든 인간이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려 있는 상태다. 그럴 때 그러면 그 죽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그저 목숨이 끊어져서 죽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경이 이야기할 때 이 죽음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같은 그렇게 짐승이 숨이 끊어져서 피를 흘리고 죽는 그런 것 하고는 좀 다른 의미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그 의미를 추적해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어떻게 만드셨는지를 더듬어가야지 됩니다. 그래야지만 죽음을 추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은 단지 흙으로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없고 오직 한 가지 의미밖에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하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그러면 생명은 무엇인가?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죽지 않으려고 하는 모든 기능, 그것이 끊어지면 곧 생명이 끊어진 것이고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의 죽음에 의미는 단 일회, 딱 한 가지 의미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뛰어다니면 산 것이고 그리고 숨도 못 쉬고 피 흘렸고 이제 썩어서 냄새가 나면 죽은 것입니다. 딱 그 의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것은 산 것이고 죽은 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 흙으로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다음에 그 코에다가 훅~ 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이 훅~ 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과정이 바로 인간을 제외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의 창조와는 구별이 되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흙을 빚어서 사람의 몸을 만드셨고 그것은 짐승들이 그런 것과 같이 똑같은 목숨을 가지고 있고 그 속에다가 훅~ 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은 하나님이 그 속에다가 영혼을 불어넣으셔서 영혼과 육체가 만나서 그래서 영혼과 육체가 하나는 속사람이 되고 하나는 겉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그 두 가지가 함께 결합되어 있는 동안에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물들의 신체는 흙으로 빚어서 빚으시는 즉시 그 육체 속에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을 그냥 집어넣어버리셨는데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고 육체를 육체대로 빚으신 다음에 영혼을 집어넣어서 영혼 속에 인간의 육체와 함께 만나게 하셔서 그 영혼에 의해서 육체의 생명이 주장되도록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은 아까 뭐라고 그랬습니까?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것이고, 죽으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틀립니다. 살아있어도 죽어 있을 수가 있고 죽었어도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면 다시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그 인간에게는 그러니까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구성이 속사람과 겉 사람으로 되어 있으니까 당연히 죽음도 둘을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겉 사람의 죽음이 있고 속사람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겉 사람의 죽음이 있고 속사람의 죽음이 있는데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겉 사람과 속사람이 모두 살아있는 상태에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서 -이후에 다시 설명합니다만 -인간의 속사람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속사람이 죽어버리고 이제 인간의 겉 사람만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조금 아까 목사님이 겉 사람과 속사람 둘이 만나서 결합이 되기 때문에 이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속사람이 죽으면 겉 사람도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맞습니다. 그게 맞는데 신기하게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죄를 범해서 속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겉 사람도 죽어야 마땅한 인간인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 다음에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들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속사람은 죽었는데 겉 사람을 어느 정도 살아있게 끔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속에 죽어 있는 영혼이 예수님을 믿고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시기 위해서 인간이 살아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육체의 죽음은 동물의 죽음과 똑같이 숨이 끊어지고 혈액이 더 이상 돌지 않고 그래서 몸이 굳고 생명을 위한 모든 기능이 끝나게 되면 그렇게 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다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그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홀로 존재하게 될 때 영혼은 죽음의 상태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인간을 보는 시야가 이런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지만 어떤 삶은 죽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어떤 사람은 산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아니 그게 웃을 일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묘사하지 않고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인간이라고 신자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아닐 경우에는 죽었더니 가 아니라 지금도 죽어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무엇인가 죽어 있는 영혼의 상태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서 인간의 그 원래의 창조될 때 겉 사람과 속사람이 함께 살아있던 그런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동물의 삶과 거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 세상에 있는 짐승들보다 좀더 오래 산다는 것, 그러나 또 절대적으로도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보다도 훨씬 오래 사는 동물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 그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런 죽음이라는 병에 걸려있는 상태가 바로 아까 말씀드린 무지, 고통, 가난, 질병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속사람이 그렇게 죽어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현상들이 바로 그런 무지와 고통, 가난 이런 것들인데 바보 같이 그런 증상을 알아서 만약에 그것을 고치고 싶으면 그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 자체를 고쳐야 합니다.
여러분, 감기가 들어서 콧물이 막 쏟아지고 그 다음에 몸이 으슬으슬 춥고 뼈가 막 쑤시는데 그러면 병원에 가서 감기약을 먹어야 됩니다. 그래서 감기를 고치면 이런 증상들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병원에는 안 가고 콧물이 막 나오니까 콧물이 못 나오게 하려고 코를 다 풀어버린다든지, 아니면 콧구멍 두개를 그냥 센 휴지로 막아버린다든지, 그 다음에 열이 막 나니까 냉장고 속으로 들어간다든지 그런 방법을 취해서 감기를 이겨보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편도선이 막 부으면 몸살기운이 떨어지면 함께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을 벌리고 편도선을 공격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우리들이 가난이라는 것이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면 역설적으로 부자인 사람은 모두 행복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이 부자가 아니라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부자들도 알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또 이제 이렇게 질병이 만약에 고통의 원인이라면 그러면 그게 궁극적인 원인이라면 건강한 사람들은 행복해야 됩니다. 건강한 사람이 행복합니까? 오히려 병든 사람들은 오늘 내일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살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사지팔다리 멀쩡한 사람들이 죽지, 그것도 기운을 써야지 죽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절벽에서라도 뛰어내리려면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기운이라도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무지 때문인가. 그런데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사회는 행복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를 많이 시켜놓으면 인간이 얼마나 절묘하게 머리를 굴리는지 그 많이 배운 지식을 가지고 말하자면 아주 고등하게 범죄를 합니다. 못 배운 사람들의 범죄는 바보 같고 아주 단순합니다.
(예화: 교도소에 어떤 무식하고 촌스러운 시골 청년이 집단 살해혐의로 구속되어 있는데 사연인즉 시골에서 올라와 방황하다가 어느 집에 들어가 보니 가족이 한방에 모두 모여서 자고 있기에 모두 죽이고 그 집에 들어가 훔치고자 생각하고 연탄불을 방문 앞에 놓고 부채질을 하다가 잠이 들어 잡혀 구속되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진짜 공부 많이 하고 똑똑한 사람이 그렇게 바보 같이 연탄불 빼다가 부채질 하다가 엎드려 자겠습니까? 더 교묘한 방법으로 이 세상의 법을 어기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면서 살아갑니다.
(예화: 중국에도 현금서비스가 되지만 현재는 중단된 상태인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처럼 전산화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10분이 걸려야지만 다른 기계에 돈이 인출된 사실이 드러나는 사실을 알고 차를 대놓고 1분 안에 차를 몰고 가서 다른 곳에 가서 또 빼는 불법이 성행한다는 이야기)
그런 것도 초등학교도 못 나오고 시골에서 농사나 짓던 사람은 카드를 주면서 한번 범죄 해 보라고 해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교육수준을 많이 받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범죄가 더 교묘하고 더 야비하고 지능적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문명화된 국가들이 보여주는 그런 범죄의 현실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죄의 죽음이라는 병에 걸린 구체적 증상들이지 그것 자체를 붙들고 씨름을 해서 인간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게 그러면 그런 죽음이라는 병에 왜 걸렸는가. 모든 병에는 병원체가 있게 마련입니다. 병균이 있어서 그 병균이 그 병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이 죽음을 몰고 온 병균이 있습니다. 그 병균이 무엇인가 하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궁금해지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도대체 죄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죄와 악을 혼돈합니다. 그래서 죄가 무엇인가 그러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부도덕하거나 정직하지 못하거나 뭔가 남에게 불편한 해를 끼치는 모든 행동을 죄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에 대한 견해이고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죄가 아니라 악입니다. 그래서 악이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난 그것도 죄의 한 결과이고 구체적인 질병의 근원은 죄라고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죄의 증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과나무 뿌리가 있으면 거기서 올라와서 반드시 사과나무의 잎사귀가 매달리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게 되는 것처럼 죄라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각종 악들이 맺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악이라고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가르쳐주니까 하는 것입니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인간이 잘 못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을 가르쳐주니까 그렇게 잘하지 외국에 나가면 우리나라 사람들 젓가락질 하는 것을 보고 외국 사람들은 굉장히 신기해합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그렇지 3-40년을 닦은 실력하고 그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젓가락 가지고 뭐 별것을 다 집어서 먹습니다. 아주 정교하게 멸치까지 다 집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못합니다. 애들도 훈련을 안 시키면 젓가락 두개를 이렇게 쥐고 이렇게 하다가 결국은 못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악이라고 하는 것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처음서부터 악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죄가 그 속에 있는 병균에 오염된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이제 악이라고 하는 증상으로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죄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기준이 있어야지 됩니다. 기준이 있어야지만 이게 잘됐다, 잘못됐다. 판단을 해서 죄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기준이 애매모호합니다. 왜 애매모호한가 하면 이게 장소에 따라 다르고 시간에 따라 다릅니다. 커다란 틀은 그래도 비슷한데 그것마저도 무너지면 인류 사회가 다 무너집니다.
예를 들면 동양에서는 부모님께 잘 공경해드리는 것이 선한 행동인데 서양에서는 부모를 막 발로 차는 것이 잘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생겨난다면 인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못하게끔 인간 속에서 보편적인 양심을 주어서 그렇게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친구를 사귀면 믿음으로 사귀어야지 된다는 것은 동양에만 있는 사상이 아니라 서양 사람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서 이런 기준들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막 시대에 따라서는 막 무너지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제가 호주에 갔을 때 어느 장로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집회시간에 기도를 하십니다. 사연이 뭔가 그랬더니 거기서 전 세계의 동성애자의 대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50만 명이 모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모였을 때는 100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여서 한번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보라고, 우리도 똑같이 세금을 냈는데 내가 남자랑 살든 여자랑 살든 무슨 상관인가. 누가 남자는 여자와 결혼해서 살아야지 된다고 기준을 세웠는가. 그런 것은 웃기는 것이다. 자기 좋으면 사는 것이지, 그리고 궐기대회를 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 오는 것 관광수입이나 받아먹겠다고 그런 대회를 유치해서 개최하고 이렇게 해서 살아갑니다. 이런 기준들이 애매모호합니다. 요즘에 보면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준들이 막 무너져갑니다.
그런 모든 것들과 절연하고 성경으로 돌아갔을 때에 그 죄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바로 올바른 죄에 대한 견해이고 그 병균 때문에 죽음이라는 병이 들어왔고 그 병에 걸린 증상들이 바로 그런 수많은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라고 하는 병원균을 찾아내어서 박멸해서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 믿은 사람들은 그 균을 거의 다 죽인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약간은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수시로 증식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그 병원체를 잡아내고 그것과 더불어 싸우는 이 노력은 신자가 된 다음에도 여전히 필요한 노력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적당한 질병 상태로 그것이 영영 그 사람의 생명을 뺏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강한 질병 상태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저 다니기는 다니는데 헉헉거리면서 다니고 에고, 에고 그러고 다닙니다. 그러니까 전도도 못하고 봉사도 못하고 기도도 못합니다.
그러면 그 죄라고 하는 게 무엇인가? 그게 무엇인가 하면 두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하지 마라. 그러시는데 그것을 하는 것, 혹은 하라. 그러는데 안 하는 것, 이게 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만 아니라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절대로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없고 죽음이라는 질병을 몰고 올 수도 없고 그 죽음의 질병에 걸린 증상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죄에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법에 온전히 순종하기에 모자라는 것, 그러니까 일반의 경우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그 하나님의 법을 안 지키겠다. 이렇게 하는 강인한 의지가 있는 것이지만 후자는 자기 자신 속에 능력이 모자라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것, 그것도 죄입니다. 그런 죄가 죄라는 병원체를 몰고 와서 그 죄라는 병원체가 죽음이라는 질병에 들게 했고 그 죽음이라는 질병이라는 증상들이 인간 세상에 그 많은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스스로 그 속에서 헤어나보려고 얼마나 애를 많이 쓰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그냥 눈에 핏발을 세우고 돈번다고 합니다. 안면도 몰수하고 가족이고 동기간이고 다 안면철폐하고 그리고 돈이 있어야 산다. 그러면서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 그러면서 그냥 미친 듯이 돈을 버는데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예화: 가난한 부부가 부지런하게 일해서 돈을 많이 벌자 여러 가지 갈등으로 인해 이 혼 하게 됐는데 이전처럼 가난해서 살았다면 이혼할 기력이 없어 이혼하지 않았
을 것이라는 이야기)
이렇게 인간들이 궁극적인 원인인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영적 상태의 원인이 되는 죄라고 하는 병원균을 처리하려고 하지 않고 쓸데없이 이 증상과 더불어 싸우는데 인간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증상과 더불어 미친 듯이 싸우다가 결국은 불행하게 죽는 것이 그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럼 그 죄가 그렇게 문제가 되는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죄를 그렇게 문제로 삼으시는 이유는 죄가 하나님을 향한 거역이거나 순종함에 있어서 모자라는 것인데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하면 당신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관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의지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처음에 창조하실 때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인간이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인간은 죄가 없어도 혼자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진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들어놓으신 그 목적을 온전히 구현하면서 살 수 있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식물들이 있지만 식물들이 사막에 심어놓으면 살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의존해서 삽니다. 태양빛을 받으면서 광합성 작용을 해서 자기의 성장에 필요한 양분들을 공급을 받습니다. 그러다 그 옆에서 자라나는 나무들은 옆에 있는 나무들이 쓰러져서 죽으면 그것이 거름이 되어서 그것을 의지해서 또 자랍니다. 이렇게 삼라만상 모든 것이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피조물 하나하나가 마치 우리의 온 몸이 핏줄로 다 연결되고 신경으로 연결된 것처럼 그 피조물 하나하나가 다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 그래서 그렇게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도록 그 모두다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연결된 것들이 각자가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연결되는 객체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의지해 있을 때 비로소 서로서로에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을 붙들고 계시니까 그 태양의 주위를 지구가 돌고 그리고 그 지구의 주위를 달이 도는 것입니다. 만약에 과학적으로 볼 때 태양이 위치 이동을 해버리면 지구는 지금 도는 것처럼 태양의 주위를 정상적으로 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체 하나하나가 전부다 역학적인 관계에 의해서 거리와 질량 만류인력의 법칙, 이런 것들이 작용을 해서 균등하게 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만 쑥 빼버리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모두 이렇게 의지하면서 살아가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모든 것들은 영혼을 가진 것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그들과 인격 대 인격의 관계를 맺으시면서 그들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과 창조의 질서를 가지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그 법칙에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들을 보존하시고 그렇게 붙들고 계시면서 온 우주 세계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풀잎하나 꽃 하나도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 그 다음에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지는 풀 한포기도 모두 하나님이 혼자 자라게 하시지 않고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을 맺고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조금 약간 옆으로 나갔지만 이런 것들이 죄로 말미암아 다 깨트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처음 창조는 밖으로부터 이루어져서 그 창조의 질서들이 쭉 형성이 됐는데 그렇게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을 다시 재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오셔서 영혼을 살리시는 창조를 통해서 그렇게 구속받은 사람들이 함께 연결이 되어 나가고 그 사람들이 함께 연결이 되고 그렇게 해서 인간의 구속의 그 날에는 모든 창조 세계까지 이렇게 구속이 되어서 온 피조 세계가 다시 하나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가 만물의 충만이시니”라고 하는 그 충만 사상이 바로 거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가 만물 가운데 충만하시도다.” “만물로 충만하게 하시고” 충만, 충만 이게 희랍어로 “프레로마”라고 하는 것인데 꽉 찼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그렇게 커뮤니케이션 하는 그 속에 그것들을 모두 다시 연결을 맺으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뭐 알고 아멘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처음에 있었던 만물이 서로 모두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사람이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 혼자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든지, 누가 옆에 사람이 열심히 기도를 해주었든지, 하여튼 하다못해 예배를 드리는 장소라도 빌려주었으니까 변화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기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또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런 큰 은혜를 받았는데 혼자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혼내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은혜 받았으니까 돈 많이 벌면 열심히 헌금합니다. 나는 그냥 하나님 앞에 헌금했는데 그 헌금 받고 그 헌금 가지고 만들어놓은 교회당에서 얼굴도 모르고 피도 안 섞이고 살도 안 섞인 사람이 몇 년 후에 와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은혜를 받았는데 간절히 기도했는데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가 다시 유기체적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이런 안에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속에 그리스도가 충만히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교회를 향해서도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를 충만히 거하게 하시고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독립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독립성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하면 존재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뜻이고 그리고 의사결정면에서 볼 것 같으면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독립성입니다. 그런데 그 독립성은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에게는 비슷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 옛날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은 누가 만드셨나. 하나님이 만드셨지.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드셨나.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누가 만드셨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이미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러니까 그럴 수가 있으니까 하나님이지, 만약에 누가 만들었다면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질문의 끝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못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그렇게 하나님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실 때 인간만은 훅~ 하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창조하셨는데 당신을 닮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을 인간에게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하면 서로 하나님과 이렇게 교통할 수 있도록,
그때에 하나님의 마음의 생각했던 관계가 무엇인가 하면 가족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하면 잘 들어보십시오. 하늘에는 하늘을 창조하시고 거기에는 당신과 늘 교통하고 당신의 성품을 닮은 천사들을 두어서 하늘을 다스리게 하시고 땅 아래는 하나님이 땅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셔서 땅을 다스리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 위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펴고 또 땅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펼치셔서 형이하학적인 세계와 상학적인 세계,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가 모두 통합되어서 그래서 한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한 무리가 되어서 온 우주를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채우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하셨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만들었는데 그 인간에게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닮은 성품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있는 사랑의 성품도 나누어주시고 의로움도 나누어주시고 여러 가지 성품을 나누어주셔서 하나님과 우리가 가족관계로서 이렇게 교통할 수 있도록 의사소통하고 가족 관계처럼 맺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을 빚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단순히 객관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진 존재인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나님과 한 가족인 그런 관계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떤 공장 사장이 생산을 많이 합니다. 장갑도 만들고 그 다음에 뭐 만든다고 그럴까? 컵도 만들고 하여튼 그 공장은 오만가지를 다 만드는 공장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만들었는데 자기 아들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공장에서 생산했지만, 그런데 아들은 공장에서 생산되지 않았겠지, 그렇지만 비유가 좀 이상하게 되었지만 어째든 생산된 것은 다 똑같지만 그러나 제품과 자기 아들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공장에 와서 애를 낳았으면 공장에서 생산한 것이 아닙니까? 어거진가? 그렇다고 해서 그 애 등에다가 2003년 3월 23일 생산, 딱 찍어주고 유효기간 2008년 5월 3일 이렇게 찍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듯이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서 빚어졌다는 점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하고 다 똑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점에서는 하나님과 가족관계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가족이라는 것이 서로 의지하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가족끼리는 희생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내가 우리 아버지 위해서 희생을 많이 했다. 이게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가 아! 내가 자식들을 위해서 많이 희생했지. 희생이 아닙니다. 싫으면 낳지 말지. 희생이 아니고 가족들 간에는 그런 낱말을 쓰는 게 아닙니다. 엄마, 아빠, 남편, 아내, 아들, 딸 이런 단어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아닙니다. 서로가 모두 한 몸입니다. 남편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하는, 다 짜증나는 사람들입니다. 부부가 뭔지 알면 그런 희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셨을 때 그렇게 뛰어난 존재로 만들어놓으신 것은 뛰어나게 자기를 의지하면서 가족관계로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여기 젊은 사람들 많이 있는데 제가 말씀드리는 게 무엇인가 하면 효도는 어버이 날 꽃 한 박스 갖다 주면서 일년에 하나씩 달으라고 그런 게 효도가 아니고 진짜 효도는 부모에게 자식이 항상 저는 부모님이 필요합니다. 하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그게 효도입니다. 장가가서 6개월도 안됐는데 집에 가서 밥을 먹으면서 아! 엄마 밥은 왜 이렇게 맛이 없지. 우리 색시가 해주는 밥은 진짜 맛있는데. 그것은 불효입니다. 거기에 가서는 둘이 짜고 엄마 아! 우리 집 사람이 해주는 밥은 정말 못 먹겠어. 역시 엄마 밥이 최고야. 그런 의미에서 엄마 갈 때 김치 한 박스만 싸줘. 그럼 겉으로는 엄마가 이놈의 자식 이제 장가가서 월급봉투는 안 가져오면서 우리 집에 와서 김치까지 가져가려고 한다면서 욕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흐뭇한 것입니다. 그렇지, 내가 그래도 이게 50년 김치솜씨인데. 영원히 나를 못 쫓아오지. 그리고 싸주는 것입니다. 그게 소속감을 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예화: 아시는 목사님 부부는 바퀴 벌래가 나오면 사모님이 손으로 잡으신다)
그런데 사실 그런 소속감은 좀 반대가 되어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매들이 여보, 어떻게 저 벌래 어떻게? 뭘 그까짓 것 탁! 해서 그럴 정도가 되어야지 됩니다.
(예화: 도둑이 복면을 하고 칼을 들고 어느 교회에 들어오니까 모두 무서워하고 있는데 사모님이 버선발로 내려오시면서 하얀 고무신을 들고 오히려 야단을 치시며 쫓아 가시니까 도망갔다)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서로 의지하며 살게 된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성품은 지금도 변함이 없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뭘 달라고 그럴 때 제일 좋아하십니다. 그것도 이렇게 주려면 주고 말려면 말고요. 뭐 하나님 자식 죽지, 내 자식이 죽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 말고 막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만 주세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이게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 주님이 안 주시면 제가 어디에 가서 달라고 그러겠습니까? 그러면서 막 그렇게 애처롭게 매달리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마음에 제일 큰 기쁨은 우리가 이런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 없이 살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이런 찬송 부르면서 하나님 의지하는 마음으로 이 심령의 눈물이 가득 고인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최고로 치십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 돈 많은 사람 그런 사람 따라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의존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의지하게 되면 놀라운 효과가 하나 나타나는데 그게 순종입니다. 의지하는데 순종하지 않는다. 그게 말이 됩니까?
어린 아이가 캄캄한 밤길에 길을 잃었습니다. 아저씨가 딱 걸어가다가 아이가 울고 있으니까 너 왜 우냐? 아저씨 나 이 산길에서 집을 잃었습니다. 네 집이 어디니? 저 산 두개 넘어 어디요. 왜 이렇게 밤늦게 다니니, 괜찮다. 아저씨 있으니까. 손잡고 그리고 후래쉬를 키고 신체가 건장해 보이는 아저씨가 걸어갈 때 그 아이가 쫓아갑니다. 뭐 하는 것입니까? 의존하는 것입니다. 한참 걸어가다가 손을 잠깐 났어. 야, 이리와라. 손 붙들어라. 그런데 그 애가 잠깐 붙들었으면 됐지 왜 자꾸 붙들라고 그런 거야. 그러겠습니까? 아저씨 먼저 가세요. 그러겠습니까? 안 그렇습니다. 붙들어라. 예. 빨리 와라. 예, 그게 의지입니다. 의존입니다. 순종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생활을 안 할 때는 하나님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의지하지 않으니까 목회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주 예의바르게 대해야지 나중에 큰 봉변당합니다. 늘 인사를 해도 구십도 각도로 하고 절대로 반말하지 않습니다. 예, 네, 그러셨습니까?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목회자를 의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사실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목양을 받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게 그런 식으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또 너무 의지해서 걱정입니다. 목사님, 이 가게 때려치우고 저 가게 차리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사업에 대해서 뭘 알아야지. 그래서 내가 그런 것 물어보지 말고 성경을 물어봐라. 그래서 항상 내가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그 사업을 때려 치고 떡볶이 가게 집어치고 어묵 가게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지만 목사는 그런 것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네가 연탄을 팔던 아니면 쇠 덩어리를 팔든 떡볶이를 팔든 어묵을 팔든 뭘 팔든지 하여튼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 비결은 내가 가르쳐줄 수 있다. 그런 의존의 마음이 생기게 되면 시키는 대로 잘 합니다. 어쩜 그렇게 순종을 잘하는지, 이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고 가르쳐주면 네 하고 순종을 잘 합니다. 의존의 마음이 사라지고나면 그 다음에 순종을 안 하게 됩니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들이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금하신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를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뭐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하나님하고 의존하는 그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럼 뭐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독립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의존하며 살아서 나쁜 게 뭐가 있습니까? 아니 에덴동산 다 주셔서 거기서 누리면서 창조세계를 누리면서 살고, 피조 모든 만물들 앞에 말하자면 왕처럼 군림하면서 그것들을 다스리고 그 피조물들로부터 모두 하나님을 대리해서 자신들을 다스리는 자라고 하는 인정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이 끊임없는 생명을 공급해주셔서 그렇게 참다운 인간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계획에 맞도록 하늘에서는 천사가 땅에서는 자신들 인간이 온 세계를 다스리는 그런 것이 뭐가 나쁩니까?
쉽게 얘기하면 옛말에 나오듯이 제상을 가리켜 말하듯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야. 하나님 한분만 자기 위에 있고 온 피조세계가 자기 아래 굴복해, 그런데 독립하겠다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하고 맞장뜨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그래서 뱀이 유혹할 때 뭐라고 합니까? 죽지 않는다. 하나님처럼 된다. 그렇게 유혹을 합니다. 그게 본심입니다. 인간이 그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왜 순종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의존하지 않으면서 안 살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사는 그게 가장 나쁜 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죄라고 하는 것이 남의 물건을 훔치고 누구를 때리고 하는 그런 것만이 죄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죄는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중앙에 있고 모든 가치에 대한 판단이 자기로부터 나와야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 가운데 그런 권한을 누릴 수 있도록 창조된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누구만이 누리실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만이 누리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중국의 황제가 얼마나 대단하지 아실 것입니다. 정말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위엄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정말 중국의 황제는 신과 같은 지위를 누렸는데 만약에 그 시대에 임금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용상에 한번 앉아서 이리 오너라 하고 장난삼아서 한번 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만 죽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낳은 엄마 아빠 또 그 사람을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아마 씨족을 모두 멸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 감히 언감생심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교역자실이 쭉 있는데 언젠가 들여다보니까 교역자 자리에 어떤 청년이 앉아서 열심히 책을 읽습니다. 그래서 내가 혼냈습니다. 계급의 질서가 아니라 거기는 목양하는 사람이 앉아서 성경을 가르치고 삶의 도리를 가르치는 곳이다. 네가 진리에 대해서 경외심이 있다면 그 자리를 그렇게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지체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주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이게 절대로 권위주의가 아닙니다. 그까짓 의자 다 쓰고 버리면 고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여기에 올라와서 오락회 하면 그게 무슨 하나님의 거룩을 범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용서하기가 굉장히 힘들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생각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와서 세속적인 노래를 부르고 하필이면 여기에 와서 그럴 수 있습니까?
독립하려고 했던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범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느끼신 그 마음의 고통과 하나님이 받으셨던 상처보다도 하나님이 느끼셨던 이 고통과 분노를 생각해보면 이것은 전혀 경우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자리에 인간이 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죄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창조될 때 인간에게 허락된 그 의존의 관계에서 이탈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 태도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게 옛 질병인데 지금도 그것들이 도지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정말 주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의지하고 순종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독립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저 혼자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절대로 안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수 없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에는 항상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그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마음으로 눈물이 가득 고인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 의존을 떠나서 독립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하는 이 모든 세계의 사상과 사조가 모두 하나님 앞에 정죄 받아야 됩니다. 뭔가 하면 인간이 중심입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왜 독립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인간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기계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계속 에너지가 주어져야지 됩니다. 인간도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인간의 모습대로 살아가려고 할 것 같으면 위로부터 부어지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위로부터 부어지는 생명의 연합을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어떤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끊어버리고 나니까 그다음에 어떤 결과가 오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는 도저히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남의 자원을 뺏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그 자원을 부당하게 뺏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도저히 자원이 될 수 없는 그릇된 것을 자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삶의 자원을 뺏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원이라고 하는 것은 내 안에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들을 빼앗고 그렇게 하면 내 삶이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당한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인간을 철저하게 자기 밑에 예속시키고 싶어 합니다. 누구에게 짓밟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도 철저하게 그 인간을 자기에게 예속시키고 싶어 하고 그리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자 하고 무슨 수당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도구만 있으면 도구를 활용해서 자기 밑에 두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저는 중국을 갈 때마다 참 그런 것들을 뼈저리게 느끼는데 자금성에 가면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옆에 놓는 돌이 있는데 사만명이 들어다 났다는 통 돌이 있습니다. 사만명이 어떻게 그것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거기에다가 용을 새겨놓은 그 큰 돌멩인데 계단 옆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어서 황제가 묘를 썼는데 묘의 높이가 200미터입니다. 묘가 아니라 산입니다. 남산이 350미터밖에 안되는데,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죽으면서 혼자 죽지 않고 그 다음에 수백 명을 같이 묻는 것입니다. 왜 그 속에 같이 들어가서 왕을 지켜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죽는데 뭘 지키는지, 그런데 그런 생각으로 다 집어넣습니다.
중국의 어느 황제는 시를 잘 지는 황제였습니다. 내가 시를 좋아하니까 시인들은 모두 모여라. 그래서 시를 짓게 해서 자기보다 못 짓는 시인은 못 짓는다고 죽이고 잘 짓는 시인은 네가 살아있으면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간다고 또 죽이고, 그렇게 하면서 삽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허무합니다. 그 나라에 있는 모든 신민이 오직 한사람을 위해서 봉사한 흔적입니다. 그게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스스로의 자원을 가지고는 도저히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이 되니까 수많은 사람의 자원을 뺏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황제들이 후궁을 일만 명씩 거느린 것입니다. 미쳤습니다. 일만 명의 여자들을 궁 안에 두고 거기에서 공인된 짐승과 같은 삶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행복했습니까? 누구도 행복한 사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부당한 방법으로 취한 것이고 개인간의 부당한 방법으로 취한 것이 범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기가 왜 나타납니까? 정당한 방법으로 저 사람에게 있는 것을 나한테 이동할 수 없으니까 나쁘게 꾀를 짜내서 저 사람의 재산을 부당하게 자기에게 옮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장소만 이동했다고 그러지만 그러나 사실 장소만의 이동이 아니지. 그렇게 부당하게 살아갑니다.
나라와 나라가 충돌을 일으키면 어떻게 됩니까?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너는 애국자다. 나라와 민족을 지켰고, 다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죽었는데 뭐 나라와 민족의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훈장 하나 받고 말이지. 그러니까 그것도 정당하고 하나님의 공의에 맞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면 어느 정도 정당성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 부당한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인간들이 살아온 역사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진짜 오스만터키 제국이나 중국 같은 곳에 가보면 인간이 사는 게 어떻게 저렇게 허무할까 그렇게 느껴집니다. 하여큰 짜증이 나고 어떤 때는 진짜 눈물이 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 왜 미쳤다고 이런 짓에 굴복하고 평생을 살다가 죽나. 호텔에 갔는데 테이블이 큰 게 있습니다. 그런데 밋밋한데 거기에 구름같이 가끔 무늬가 있습니다. 아! 저거 몇 개 안되니까 붙였겠지 하고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나무 통판을 오다가다가 있는 무늬만 내놓고 밑판은 다 깎은 것입니다. 그것 하나를 만드느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생을 했겠습니까?
제가 아는 자매 하나가 중국에 가서 인테리어를 자기네 집을 인테리어를 하는데 중국 목수를 불러서 책꽂이 하나 짜달라고 하니까 10일이 걸린다고 해서 한국은 이틀이면 짜는데 뭐 그렇게 오래 걸리는 가 했더니 그래도 그 정도는 걸린다고 어쩜 15일 걸릴지도 모른다고, 품값이 오천 원밖에 안 들어서 그럼 짜라고 그랬더니 그 다음날 오는 것 보고 뒤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이런 떡메를 실고 왔습니다. 뭐 하는가 했더니 파낼 것이라고 합니다. 책꽂이를 만드는데,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책꽂이 모양으로 파낸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것을 보면 막 화가 납니다. 아니 그 책상 하나를 깎기 위해서 그 인간들이 거기에 매달려서 그 무늬 하나 내기 위해서 헤아릴 수 없는 수십 만 명,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 칼로 칼끝을 놀리다가 늙어가면서 결국 죽는 것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인간이 허탄한 것에 굴복한다고 하는데 그 허탄하다는 말이 가치가 없고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을 하다가 그 소중한 인생의 기회를 정작 자기가 창조된 목적이 자기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한번도 섬기고 한번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채 그렇게 허망한 일에 굴복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막 껄껄거리면서 웃을 것입니다. 미쳤다. 세상에 왜 책꽂이를 파나. 판때기 갖고 다 못 박지. 얼마나 허무한 짓인가. 그런데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밥 먹고 직장생활하고 돈벌고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그 모든 일은 그렇게 다 허탄한 것입니다. 열심히 돈벌어서 뭐합니까? 자식들 시집장가 보내고 뭐입니까? 그래서 애들 놓고 그래 그게 뭡니까?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헛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생명의 뿌리가 잘려버린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허탄한 것들입니다. 다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 이 나라 문화 굉장하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정말 눈물이 납니다. 내가 그래서 마음속에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이 허무한 일에 굴복시킨 인간들을 하나님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미친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난번 집회에 오스만터키에 갔더니 왕이 앉던 의자라고 갔다 났는데 금으로 만든 의자입니다. 그것을 막 망치로 두들겨서 별의별 모양을 다 냈습니다. 나는 걱정이 됐습니다. 추운 날에 거기에 앉으면 치질이 걸릴 텐데, 항상 밖에 앉을 때 그것을 갖고 나와서 앉았다고 합니다. 추운 날에 그 철판 위에 앉으면 설마 금이라고 거기가 따뜻해지겠습니까! 그 추운데 거기에 털옷을 입고 거기에 앉았습니다. 치질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거기 무슨 왕관이고 뭐고 다 있는데 도난장치를 다 걸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그 중에서 거저 가져가라고 가방에 넣어주어도 가져가고 싶은 것 하나도 없습니다. 진짜 그것을 쓰고 여기에 와서 돌아다니면 애들이 나를 왕따시킬 것입니다. 저 아저씨 돌았다고.
그것을 빼앗기 위해서 그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그렇게 더러운 인생들을 살아간 것입니다. 그게 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는 자기를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이제 자기 자신의 자원으로 살려고 하는 그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죄의 결과가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죄를 짓게 됨으로서 범죄의 결과가 네 가지가 일어나는데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가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네 번째는 자아와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범죄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그리고 또 인간관계도 파괴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다 파괴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파괴를 몰고 오는 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가 하면 궁금증이 듭니다. 그것을 어디서 찾는가 하면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그 약속, 언약과 관계 지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 가지를 아주 중요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첫 번째 명령이 무엇인가 하면 문화명령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래서 이미 하나님이 창조해놓으신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들이 계속 생육하고 번성하며 자라고 인간도 계속 생육하고 번성하며 자라서 하나님이 맨 처음에 지어놓으신 사람의 마음과 신앙을 가진 똑같은 많은 사람들과. 그러니까 아담 하나만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인 많은 사람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하나 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한 가족관계가 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그렇게 만들어놓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문화명령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또 하나의 명령을 주시는데 그것은 종교 명령입니다. 그 종교 명령이 무엇인가 하면 동산 중앙에 있으니까 가장 눈에 잘 띌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선악과를 심어 놓으셨는데 그 나무는 보통의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를 ‘선악과’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선악을 알게 된다는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닙니까? 무슨 얘기인가 하면 악이 없었던 상태이니까 사실 선한 것 밖에 없는 상태였으니까 선과 악을 대비해서 알게 된다는 이야기는 쉽게 예기해서 악이 악을 알게 된다는 말과 동의어란 말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언약의 당사자는 하나님과 인간 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이 언약을 맺읍시다. 해서 맺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과 약속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때 당사자는 하나님과 인간이고, 언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동산 중앙에 심어놓은 선악과를 먹지 마라. 그걸 지키지 않으면 형벌은 죽는 것이다. 지키면 끝도 없이 영생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친교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약의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흔히 이 선악과를 놓고 왜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거기에 선악과를 놓으셨을까? 안 두시면 되지. 그런데 사실은 그 선악과는 따먹고 타락을 했으니까 그것 때문에 범죄 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면서 살았더라면 순종했을 것이고, 의존하면서 순종하면서 살았더라면 오히려 그 선악과가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 세상에 창조 되었으니까 이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착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굉장히 많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온 천하를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하나님은 안 계시고 자기 혼자 그걸 다스리라고 그러니까.
여러분 만약에 회사에 여러분이 직공으로 들어갔는데 사장이 어디 떠나면서 “나 대신 여기 회사일 좀 봐라” 그리고 사장이 그냥 돈 벌고 계속 외국에 붙여주면서 살다가 한 5년 10년 지나면 여러분이 사장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느 날 사장이 와서 “야, 이거 왜 이렇게 했냐?” 그러면 굉장히 한동안 적응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담도 우리같이 죄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완전한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불순종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인간에게 그 선악과는 자기가 타락을 하려고 마음을 가졌으니까 시험거리가 된 것이지 얼마나 좋습니까? 다 아담 말들 듣고, 다 이름지어줄 테니까 다 나와. 다 줄 서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 다 지었으니 나가. 이러면 다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 땅을 하나님처럼 다스리는데 동산 중앙에 딱 와보니까 선악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딱 깨닫는 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참 명령하셨습니다. 너 이거 따먹지 마라. 그때 비로소 뭘 깨닫는가 하면 아! 맞아. 내가 이 온 땅을 다스리고 있지만 하나님은 나의 창조자이시고 나는 단지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일 뿐이구나. 온 세상을 내가 다스리고 있지만 사실은 저기 굴러다니는 저 돌멩이, 기어 다니는 저 도마뱀, 날아다니는 저 새, 그리고 물속에서 즐거이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나는 창조의 동창생일 뿐이다. 다만 하나님이 나를 짐승으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사람으로 만드셨구나. 그래 맞아. 나는 사람일 뿐이야. 그리고 매일 매일 돌아갔더라면 이게 완전히 은혜 받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보고 매일 깨달으면서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그곳에서 이탈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그것을 따먹고 범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먹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한사람이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죄가 물밀 듯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기억해야 될 것은 이 아담은 한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이 온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두 사람을 예로 드는데 하나사람이 아담이었고 한사람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담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해놓으신 사람이 아니라 태어날 모든 인류의 대표자였습니다. 그게 성경의 대표사상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따먹지 마라.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아담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게 아니라 모든 후손의 우두머리로서 맺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모든 신학자들이 영원히 있을 그 시험은 아니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일정 기간동안 아담을 시험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그것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불평을 합니다. 무슨 내가 선악과 맛도 못 봤는데 내가 왜 그 할아버지가 먹은 선악과 때문에 내가 죄 중에 태어나서 이 생고생을 하고 살아야 하나. 그렇게 얘기하지만 이런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아담이 그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아담은 그것을 보면서 유혹도 이겼을 것입니다. 따먹고 싶은데 안돼. 그리고 유혹도 이기고 어째든 뭔가 순종의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담이 그것을 안 따먹었다면 우리는 먹고 싶은 선악과를 안 먹도록 참은 적도 없고 그것을 이기려고 애를 쓴 적도 없는데 여전히 영생을 누리면서 살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그런 대표의 원리가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한 그 순간에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온 세상에 죄가 확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을 로마서에서 ‘에이스엘던’이라고 하는 희랍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게 무엇인가 하면 뭐가 확 밀려들어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연상하면 됩니다. 제방에 탕! 하며 터지면서 물밀 듯이 그 엄청난 흙탕물이 들어와서 한 동리를 모두 물바다로 만들어버린 것,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 죄 아래 모두 잠겨버리게 되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죄가 밀려들어옴으로 말미암아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범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두 가지 결과가 일어났는데 하나는 관계에 있어서의 결과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에 관한 결과입니다. 관계에 있어서 결과는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창조해놓으신 사람의 위치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이 세상에 남아 있고 그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위치에서 온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영광스럽게 다스리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이 세상의 통치자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모든 자원들이 공급되는 통로가 막혀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인간은 견디기 힘든 고통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인간이 고통이 생기면 그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습관이 생겨난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오랫동안 죄 가운데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본성적인 기능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때 사람이라고 해봐야 아담과 하와 둘밖에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와가 따먹고 그 다음에 아담도 먹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느 성경 밖의 문헌에 보면 아담이 왜 선악과를 따 먹었는가 했더니 그렇게 나오는데 가보니까 하와가 먹은 것입니다. 먹으면 죽는데 그것을 왜 먹는가. 너 죽고 내가 어떻게 사나. 그래서 먹었다고 합니다. 성경 이외의 문헌이지만, 전설처럼 써내려간 것이지만, 그러니까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했습니까!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고 사이좋게 선악과 나누어먹었는데 3장에서 갈등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찾아오셨을 때부터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이 여자가 주었기 때문에 내가 먹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뭡니까?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요” 그런 고백은 다 사라지고 아! 이 쓸데없는 인간 때문에 나까지 말려드네,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필이면 이 여자였을까? 다른 갈비뼈를 뽑아서 다른 여자를 만들어주지. 그렇게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관계가 파괴된 것들이 그 이후에 모두 인간들이 유전을 받고 태어나면서 인간들이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관계를 깨트리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훈련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 관계를 잘 맺으면서 사회생활 하기 위해서는 훈련을 많이 시켜도 이게 잘 안됩니다. 도대체 조막만한 애들이 왕따 시키는 것을 어디서 배웠습니까? 10-20년 전만 해도 우리들이 사실 잘 못 듣던 얘기입니다. 그렇게 애들을 왕따 시켜서 그렇게 하고 학원가에서 무시무시할 정도로 폭력이 일어나서 애들이 그 폭력이 무서워서 장기를 팔러가고 말이지, 진짜 이게 세상입니까? 우리 어른들이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 세상이 된 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죄로 말미암아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아담과 하와 시절에는 파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자연에 의해서 손해를 본다든지, 무슨 산사태가 나서 거기 깔려 죽는다든지,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서 죽어버린다든지 그런 것 없습니다. 모든 자연과 인간이 안전한 조화와 합의를 이루면서 살아갔습니다. 자연이 인간을 자꾸 파괴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연 편에서 보면 인간이 자기를 자꾸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와 똑같이 창조되었다는 면에서는 동창생이니까 이게 같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아까 말씀드린 그런 만물이 서로 교통하면서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막 파괴하고 부서트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나중에 복수하는 것처럼 그 악영향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이 끊임없는 갈등, 공생에 관계가 아니라 갈등의 관계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미래의 학자들이 모두 보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미래의 지구에 대해서 굉장히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진짜 우리도 그렇습니다. 비행기 타고 다니면 지구 땅덩이가 좁은데 너무 더럽혀집니다. 사람들이 마구 지구를 낭비하고 자원을 낭비하고 아름다운 자연 세계를 마구 파괴하면서 일시적인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 후손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함께 이 지구상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막 낭비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게 다 어디서 온 것인가 하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날 이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 속에서 과연 이 만물을 임금처럼 다스리시는, 지배한다, 다스린다는 말이 히브리말로 “라다”입니다. 왕이 제국을 통치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진짜 인간들이 자연을 그렇게 대합니까? 모든 산을 보면서 이게 다 내 나라의 백성들이다. 그것을 꺾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막 파괴하고 행복을 위해서 얼마든지 요절낼 수 있는 그런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공격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연도 인간을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관계가 깨트려진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깨트려진 것입니다. 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뛰어내려서 막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과 역행되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 자신이 혼란시키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속에 또 다른 자기가 있는 것 같은 정신적인 혼란 속에 빠져서 자기 안에 통일성을 잃어버려서 자기 속에 말할 수 없는 갈등들을 서로 일으키면서 외부에 원인이 없어도 자기 속에 갈등을 일으켜서 정신병의 원인이 되고 죽어가는 그 자체가 다 어디서 온 것인가 하면 죄에서 누리게 된 결과입니다. 이것은 모두 관계에서 오는 결과들인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범죄의 결과에 있어서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면 두 가지를 가지고 왔는데 첫째는 죄책과 오염을 가지고 왔습니다. 죄책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져야 하는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오염이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도덕적인 오염 내지는 선천적 부패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죄책과 그 다음에 이 오염을 숙명적으로 타고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이 되었고 이것이 이 모든 인간의 고통의 근원이 되었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고통의 근원이 이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왜 구원받아야 하는가?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어제는 너무 늦게 끝났습니다. 오늘은 좀 빨리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짓고 나니까 인간이 죄를 지은 결과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네 가지의 관계의 파괴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첫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됐고, 두 번째는 인간과의 관계가 파괴됐고,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됐고,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자아와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벌서 끝까지 나가지 않아도 이 정도만 되면 인간이 얼마나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가 파악이 되었습니다.
위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살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끊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남은 것이라고는 인간밖에 없는데 인간과의 관계도 파괴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연 속에서 살아야지 되는데 자연도 자기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과의 관계도 또 파괴된 것입니다. 자기밖에 없는데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인간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도록 철저하게 그런 모든 관계가 파괴된 가운데 인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이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것은 정신병내지는 착각입니다. 인생이 무엇이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면 그 인간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철저히 깨트려진 것입니다. 이것은 관계 면에 있어서 이제 이런 죄의 결과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 심각한 것은 사람 자신 안에 이 죄의 심각한 결과가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남게 된 게 무엇인가 하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결과가 인간 속에 남게 되었는데 하나는 죄책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오염이라고 하는 것이 남게 되었습니다. 죄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문자 그대로 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그래서 죄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거나 그것을 순종함에 있어서 모자라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된 것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어제 잠깐 말씀드리다가 끝냈습니다만, 그 죄책이라고 할 때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그 죄의 비참한 결과를 물려받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 다음에 그 죄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금하신 종교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인데 그렇다면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은 게 내가 아닌데 왜 나까지 그 죄책을 물려받아야지 되는가. 그래서 그 모든 인간들이 죄의 결과인 죄책과 오염을 함께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는 성선설이나 성악설이나 이야기할 때 이게 아주 애매합니다. 성선설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성악설이라고도 말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을 기준으로 보면 성선설이 맞는데 아담 이후의 자손들을 보면 성악설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담 이후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이 아담은 죄를 범한 즉시 그 죄책과 오염을 받게 되었고 그 후에 자연적인 출생 법에 의해서 태어나는 모든 자손들이 다 거기에 죄책과 오염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궁금한 생각이 드는데 도대체 그 선악과를 내가 맛도 못 봤는데 왜 그 할아버지가 따먹고 내가 그 죄책과 오염을 물려받아야지 되는가. 억울하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는 어떻게 하든지 이 원죄라고 하는 것을 부인해보려고 하는 시도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특히 로마서 5장 19절 같은 곳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한사람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한사람을 통해서 의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오해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담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성격규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담 한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그냥 개인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후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아담은 흙으로 빚어서 훅~ 하고 생기를 부어서 만드셨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를 만들어서 훅 ~ 그래서 이것은 네 자식이다. 그렇게 줍니까? 그래서 우리도 결혼해서 애를 낳을 때면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서 훅~ 하고 바람을 넣어서 이것은 네 것이다. 그리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아담이 개개인 중에 한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아마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안하고 하나님이 한사람 아담만 그렇게 창조하신 다음에 그 후손부터는 아담과 하와의 결혼, 즉 성생활로 말미암아서 인간적인 생육 법에 의해서 출생하도록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이단 같은 곳에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성문제와 인간의 죄의 타락을 연관시켜서 그래서 이것을 아주 비유적으로 해석을 하는 그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성 그 자체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져야 됐던 것으로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 에덴이라는 말 자체가 히브리말로는 ‘에드나’라고 하는 말과 같은 어근입니다. 에드나가 무엇인가 하면 즐거움입니다. 그 즐거움 중에서도 특별히 성적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성생활이라는 이 자체는 타락했기 때문에 생육하기 위해서 선택된 수단, 죄와 결부된 어떤 수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타락하지 않았어도 부부생활을 통해서 아이들이 출산해서 이렇게 태어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러니까 성생활 그 자체에 어떤 죄악 된 요소 이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가 하는 그 문제만 도덕적으로 남는 것이지 그 부부간에 이루어지는 그 성행위는 하나님이 인간 종족의 번식을 위해서 죄와는 상관없이 택하신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인간을 보면 모든 인간이 전부다 그 아담으로부터 기원이 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의 이해에는 자손들이 허리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이 허리가 남자들의 기운이 내제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사상에서도 보면 엄마가 아이를 낳는다고 안 그러고 아버지가 낳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나라도 똑같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하시고? 나를 낳으시고. 말이 됩니까? 엄마가 낳았는데 엄마가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엄마는 어떻게?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현실적으로 반대입니다. 낳기는 엄마가 낳고 돈은 아빠가 벌어다가 먹이니까. 어머니 나를 낳으시고 아버지 날 기르시고 그렇게 해야지 되는데 그렇게 안 합니다. 이게 한국사상과 성경 사상 가운데 문화점이 일치점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신만 차려서 성경을 공부하면 서양 사람들보다 성경을 더 잘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난 것만 보더라도 이 아담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그 할아버지 개개인이라고 이야기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이 벌써 받아들여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인류 역사 전체에서 인류의 대표가 될 수 있는 딱 두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한사람은 아담이고 한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인가 하면 두 번째 아담입니다. 아담만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대표에 있어서는 시간적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아담과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고 그리고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래서 처음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때는 그 아담 개인하고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그 아담, 그 후에 태어나게 될 모든 자손을 대표하는 머리로서 하나님이 그와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언약’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구약의 사상으로 보면 그것을 ‘계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아담이 둘이서 약속을 서로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는 너에게 이 모든 창조한 세상을 주고 그리고 너를 다스리게 한다. 하늘에는 천사들이 있어서 하늘을 다스린다고 그랬습니다. 땅에는 누가 있습니까? 온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땅을 다스리게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는 천사 밑에는 없습니다. 천사 밑에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땅에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짐승들도 있고 창조된 세계가 있습니다. 물론 하늘에도 세계가 있지만 이 창조된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인간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릴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 본래의 위치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천사들보다 훨씬 나은 위치입니다. 천사들도 흠모하는 위치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머리로서 아담을 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시기를 이것을 다 너에게 다스리게 준다. 그 대신 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마라. 이것은 내 명령이다. 잘 지키면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고 영생을 주고 너의 영광스러운 인간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어기고 따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파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아담이 범죄 했을 때 그것은 아담의 개인적인 범죄가 아니라 그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그 범죄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사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이 대목이 잘 이해가 안 갔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러분들에게 제가 이해를 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안 가면 제가 두 가지를 가지고 논증을 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 선악과의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동안만 그것을 시험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할아버지가 선악과를 안 따먹고 순종했더라면 우리도 영생을 누리면서 이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 자연과의 관계, 자아와의 관계가 모두 파괴된 가운데서 이렇게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그래서 고통의 열매를 따면서 이렇게 괴로움 속에서 살지를 않을 것입니다.
아담은 그 선악과를 보면서 아 저거 먹고 싶기도 한데 주님이 그러지 말라고 그러셨지. 하고 이렇게 억누르는 데는 약간의 자기 의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의지를 하나도 발휘하지 않았어도 아담이 그것을 순종했더라면 우리들이 그 언약의 대가를 그대로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왜 맛도 못 본 선악과 때문에 우리들이 벌을 받아야지 되는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논증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것입니다.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원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의가 들어오고 구원이 들어온 원리가 똑같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의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거저 용서해주셨다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대신 대가를 다 치르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대신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여러분들이 하다못해 가시에라도 찔려봤습니까? 아니 그 십자가에 한번 끌려봤습니까? 나무에 매달린 것은 고사하고 맨발로 거기 한번 따라가 봤습니까? 하나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의가 들어와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똑같이 그런 식으로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이 설득되셨으리라 고 믿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죄책과 오염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려받은 결과가 바로 하나님과 인간과 그 다음에 자연과 자신과의 관계가 파괴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점점 그 깨트려진 관계가 점점 아주 흉악한 방향으로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칼빈 선생과 같은 분은 기독교 강의에서 이 아담이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어째든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조금 있다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하는데 그러니까 처음 아담이 범죄 했을 때는 범죄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지고 인간과의 관계도 깨지고 다 모든 것들이 깨트려졌지만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인상이 남아 있어서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대에 가보십시오. 가인을 보십시오. 아벨을 때려죽입니다. 동생을, 이게 인류 최초의 살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가르쳐주었습니까? 그러면서 아버지에게서 볼 수 있었던 범죄를 한 장본인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남아 있었던 신앙을 가인이나 그 후의 후손인 에녹이나 라멕이나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깨트려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냥 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하게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지구를 떠나셔야지 된다. 심지어는 하나님은 죽었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할 정도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이 극도의 악한 방향으로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법의 역사를 가만히 보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법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법이 생겨나는데 아주 간단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고조선의 8조 법금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8개 조항밖에는 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 법이 점점 발달하고 많아집니다. 그래서 법이 발달한 나라가 독일이니, 로마니 그러고 자랑하는데 법이 발달하는 것은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못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약에 법이 없는 세상에 살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수가 없으니까 법을 만들어서 지금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법, 대통령령이나 국무총리령 부서 령까지 포함한다면 여러분들이 팔을 뻗어도 다 안을 수 없을 정도의 법령들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여러분들이 몇 페이지나 알고 있는지 나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매주, 매달 바뀝니다. 수시로 가제정정을 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법령은 아예 구멍이 뚫어져 있습니다. 빼어놓고 새것을 집어 놓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담당하는 사람도 무슨 법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깨어진 인간관계도 어떻게 됩니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극도로 발전해갑니다. 아담과 하와가 인간과계가 깨졌지만 이혼은 안 했습니다. 아담이 누구에게 새장가 갔습니까? 그때 여자도 없었지만, 보기 싫어도 자기를 비참하게 만든 장본인이어도 데리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발로 차버립니다. 가라고 합니다. 왜 싫으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간과계가 다 깨지는 것입니다.
자연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점점 보십시오. 이게 점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흉악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점점 사람들이 이제 자연을 자기가 창조된 고향입니다. 흙에서 창조되었으니까. 고향 같은 푸근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연에 대해서 극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생활합니다.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의 이 정신병동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게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부유한 나라에서는 그래도 괜찮겠지. 아닙니다. 부유한 나라일수록 이 정신적 질병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정신병동이 많고 거기서 인간들이 정신적으로 고통하고 자신과의 관계가 균열된 채로 정신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도 보면 남이 보기에 저 사람이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와의 관계가 깨트려졌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것들이 말세가 될 수록 점점 심각해가니까 들어온 죄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발전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어째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죄책과 오염이라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죄책은 이제 원죄 안에 죄책과 오염이 두개가 같이 있습니다. 원죄 안에, 그런데 그 죄책은 이제 죄에 대한 책임이고 그 오염은 이제 이 죄책의 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죄의 결과입니다. 둘 다 죄의 결과인데, 죄책은 좀 어려운 용어로 말하자면 사법적인 책임이고, 그 다음에 오염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인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오염이라고 하는 것이 두 가지 성격을 갖는데 선천성과 부패성을 갖고 있습니다. 선천성이라고 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오염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죄책을 갖고 태어나지만 오염을 갖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그 오염이 우리들이 흔히 인간을 이해할 때 잘못된 교육, 그리고 나쁜 환경 이런 것들이 사람의 도덕성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 인간들이 그렇게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선천적으로 그런 부패성을 타고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실험을 했습니다.
(예화: 고양이와 쥐의 실험)
그런 것들을 선천적 관계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고양이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쥐에 대한 살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이고 싶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고양이가 쥐를 죽이고 싶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듯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부패하게 살고자 하는 그 부패한 본성이 죄를 지으면서 살고자 하는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만히 보면 애가 어쩌면 3살밖에 안됐는데 어쩜 능숙하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사실 거짓말을 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애들이 지나가다가 나는 그 애들을 잘 모릅니다. 예배 시간에 한번도 못 만나니까. 그런데 애들은 TV에서 나를 늘 보니까 내가 자기를 잘 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어떤 애는 걸어오면 김남준 목사님 그리고 부릅니다. 그래서 보면 막 달려오는데 나는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안아줍니다. 그래서 아! 정말 예쁘다. 목사님 보고 싶었니? 응, 얼마큼? 하늘만큼 땅만큼, 글쎄 집에서 그렇게 하늘만큼 땅만큼 보고 싶었는지. 나는 아닐 것 같은데, 그러면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서 줍니다. 그 다음 만났을 때는 하늘만큼 땅만큼을 말할 때는 손까지 들면서 하늘만큼 땅만큼, 그런데 사실 그 거짓말이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런 게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3,4,5살 되면 어떻게 그렇게 거짓말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학교에서 공부를 통해 배운 논리와 사회생활을 통해서 배우는 논리, 이런 것들이 점점 정교하게 협력하여 악을 배우면서 거짓말을 배워갑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쳐주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훌륭하게 배워갑니다. 이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 속에서 악이 깃들여있다는 것을 부패한 선천성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죄성을 가지고 인간이 선천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부패성입니다. 그런데 태어나는데 도덕성을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여기서 이제 도덕적인 부패성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될 수 있는데 하나는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입니다. 전적인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성품 전체가 타락해서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도 없고 또 순종하려고 해도 순종할 수도 없는 것, 그래서 전자는 타락이고 후자는 무능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해서 인간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저절로 이렇게 소생을 해서 다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 수 있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없이 철저하게 타락해버렸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좀 목사님 이상합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잘 받으면 훨씬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은 악하게 살게끔 악한 환경에서 내버려두면 더 흉악한 범죄자가 되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열심히 교육을 시키고 아이들을 바르게 가치기 위해서 가정에서도 노력하는데 그렇게 전적으로 타락해서 아무 가능성이 없다면 그럼 그 교육도 필요가 없겠네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절대로 선한 것이 있을 수 없고 다시 인간 자력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도덕적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런 전적인 타락과 부패는 교육과 환경에 의해서 상당한 부분은 개선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선되는 게 이 속에 있는 본질적인 죽음이 몰고 온 타락이라고 하는 현상을 이 본질적인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는 전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한데 교육을 잘 시키면 이 타락성이 발전을 해서 인간을 더 흉악하게 만들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기능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특별히 어렸을 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여러분 하나의 영혼을 책임지는 게 아니라 여러분 자식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굉장히 심각한 것입니다.
아이가 이제 막 자라면서 거짓을 배우고 세상을 배우는 악을 배우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예민하게 선과 하나님과 도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특별히, 그때는 교육이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진리를 가르쳐주고 올바른 것을 가르쳐주면 아이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슴에 새깁니다. 그런데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는 대로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왜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 담배피고 그렇게 합니다. 요즘은 어른들이 가도 담배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다니고 중학교 다니면서 술 먹고 담배피고 별로 안 좋습니다. 뭐 지옥에 갈 죄는 아니지만 어째든 안 좋습니다. 안 좋은데 아이들이 합니다. 아이들이 교육을 받아서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나중에 자라면서 철이 들면서 그것을 버리고 옳은 길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가 정립되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그렇게 행하면서 계속 살아서 아예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든지 못 살든지 간에 우선 중요한 것은 선악의 판단을 분명하게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훈련을 시켜야지 됩니다. 제일 좋은 것은 아주 어렸을 때입니다. 그때 엄마 아빠가 아이를 보면서 호, 불호를 분명히 해야지 됩니다. 아이가 선하게 행동할 때 아주 좋아하고 악하게 행동할 때 아주 근심하고 마음아파 하는 표정을 지음으로서 이 아이가 가슴에 아주 명료하게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또렷하게 배워가는 것입니다. 아이가 꽤 철이 들었는데 엄마를 때리고 발길로 차고 그래도 내 새끼 내 새끼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서 진짜 발길로 찹니다.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가 이렇게 표정하는 것으로 배우지만 좀 나이가 들면 아이들이 말로 논리적으로 해야지만 아이들이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좀더 커서 청소년 때가 되면 이제는 엄마 아빠 뒤에서 보고 배우게 됩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앞에서 가정예배 드리면서 능수능란하게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그것 안 듣고 아빠가, 엄마가 행하는 그 뒷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교인이라고 하면서 늘 사기나 치고 다니고 말이지. 거짓말이나 하고 말이지, 술이나 먹고 노름이나 하고 말이지, 부도덕한 삶을 살고 그렇게 되면 아이가 그 엄마 아빠를 통해서 아주 확연하게 영향을 받으면서 선악의 선 정도는 넘으면서 살아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가슴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주는가 하면 그게 교회에서 주는 영향보다 큰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유아세례 받을 때 지금이라도 시간이 안 늦었으니까 자신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하는 게 그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이 결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자동차를 온 집안 식구들, 자식들을 태우고 같이 가는 것입니다. 부딪치면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 다 죽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렇게 해놓고 그렇게 잘못된 교육의 본을 보여서 아이에게 선악은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살아도 좋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뭘 그렇게 성경말씀대로 살 필요가 없다. 가끔 술도 마시고 담배피고 노름도 하고 바람도 피고 그렇게 사는 것이지. 뭘! 이렇게 해서 가르쳐준 아이는 잘 못삽니다. 그것을 나중에 돌이킬 수가 있습니까? 엄청나게 그 자식에게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가만 안 두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인간이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선천적 부패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래서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 속에 살아갈 수박에 없는 인간인데 그 위에 그렇게 악한 영향을 끼치면서 자식을 막 망쳐버리는 것입니다. 인생 자체를 완전히 망가트려버리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이자 마지막의 축복을 저버리게 하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마치 뭐와 똑같은가 하면 비유가 너무 잔인해도 여러분 용서하고 들으십시오. 자기 자식을 눕혀놓고 도끼와 칼로 그 아이를 막 짓이기는 것과 그게 똑같은 것입니다. 그럼 낳지 말아야지. 그것의 영향은 생각 없이 부모가 아이들에게 주었는데 그 영향을 부모가 지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게 지워지지를 않습니다. 한번 새겨진 것이 지워지는 것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안 지워집니다. 그렇게 해서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분, 이 교육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별히 여기 말도 못하는 애 무슨 교육을 하는가 하는데 영아 부, 유아 부, 유치 부, 이 교육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유년 부, 초등부 교육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때 교육이 바르게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타락성과 전적인 무능을 가지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엄마 아빠가 이미 타락했고 그 죄 가운데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 올바르게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가정을 한번 보십시오. 그래도 마지막에 그래도 걸 수 있는 기회가 그런 가정으로부터 그런 경건한 영향을 받는 것인데 그런 경건한 가정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도 엄마 아빠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어떻게 자기 자식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목숨 걸고 가르칠 수 있습니까? 그러니 더욱더 예수님을 전혀 안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떻겠습니까? 믿지도 않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여러분의 자녀를 신앙으로 가르쳐야지 되겠다고 결심을 한 것은 이것은 여러분 진짜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될 일입니다. 기적적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부모의 누를 여러분들 대에 되풀이 하면 안 됩니다. 계시의 빛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있습니다. 교육에 따라서 상당히 많이 아이들이 선한 행실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선한 것을 행하기는 하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다 더 나은 사회가 어느 정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지만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런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외국 사람들이 자신의 후세에 대해서 교육에 대해서 신경 쓰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지금 벌어서 어떤 의미에서 자기들만 먹고 사는 것입니다. 나는 아주 분노를 느낍니다. 이 나라가 정말 나라답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걱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육에 대해서 자식들에게 교육을 많이 신경 쓰는 나라가 반드시 도덕적인 나라가 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들이 결국은 많은 사회적인 범죄로 인해서 견딜 수 없도록 시달리고 고통스러운 사회악을 경험합니다. 350만 명이 노숙자이고, 3초에 한번씩 강력사건이 일어나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교육제도가 잘못됐습니까? 아닙니다.
오늘날 사실 우리에게 들어온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범죄들이 사실은 외국의 문화를 타고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교육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들 속에서 그런 것들이 오히려 범죄가 교육에 의해서 막아지고 규제되지 않고 그렇게 범죄와 죄악들이 독버섯처럼 번져나가는 현실들은 결국은 교육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안 믿어도 올바르게 교육을 시켜야지 됩니다. 올바르게 시키면 조금 낫고 단정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불행해지는 것은 영혼이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해결이 안 됩니다. 무엇 때문에? 그 죽음이라는 질병을 가져다준 죄라는 병균이 아직까지도 퇴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질병적 결함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병에 걸린 사람들, 암에 걸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암에 걸렸는데 막 걸린 그 순간부터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 없이 몰핀을 맞고 살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는 그 순간까지 통증을 못 느끼고 고요히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부위를 암세포가 파먹고 들어갔는가에 따라서 각기 다릅니다. 그렇듯이 교육에 의해서 약간 뭐가 개선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죽음이라고 하는 그 사람 안에 있는 궁극적인 질병이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궁극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째든 죄책과 오염을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제 벗어날 수 없는 두 가지 죄를 안게 된 것입니다. 첫째는 원죄라고 하는 것을 끌어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죄는 바로 선천적인 부패성이라고 이름 지어지는, 도덕성 부패성이라고 이름 지어지는 오염과 그리고 원죄에 대한 죄책, 그것이 원죄를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책이 원죄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죄에 대한 책임이 원죄입니다. 그 죄의 결과로 인해서 인간 안에 부패성이 잔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제 실제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원죄라고 하는 것과 또 하나는 실행 죄, 혹은 자범 죄, 혹은 고범죄, 혹은 본죄 여러 말로 표현을 합니다. 영어로 actual sin입니다. 실제적인 죄입니다. 그래서 이 실행하는 죄, 실제적인 죄, 혹은 자범죄, 본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세 가지로 크게 나누는데 마음의 죄와 말에 죄와 행동의 죄로 나누어집니다. 마음의 죄는 마음속에서 품고 있는 이기심, 시기심, 미움, 질투, 원망, 이런 것들이 마음으로 짓는 자범죄 들이고 그다음에 말로 짓는 것이 있습니다. 욕설, 저주, 원망하는 말 이런 것입니다.
그 다음에 행동으로 짓는 죄가 있습니다. 폭력, 살인, 간음, 사기, 협박 이런 것입니다. 괴롭힘 이런 모든 것들이 원죄의 그 뿌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원죄 안에 죄책과 오염이 있는데 이 죄책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의롭다 칭함으로서 그 칭의는 너희는 이제 의롭다 예수님이 대신 값을 지불해주었으니까 너는 의롭다하는 것으로 해결이 되고 남아 있는 도덕적 오염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은혜를 받으면서 끊임없이 이제 남아 있는 죄와 싸우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감으로서 이 사람이 이제 그 죄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화’라고 말하고 그 성화는 도덕적 오염을 제거해감으로서 우리 안에 하나님이 맨 처음에 우리를 창조할 때 주셨던 그 하나님 닮은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과정은 곧 하나님이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거룩의 과정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결국은 인간이 그래서 원죄의 뿌리와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이제 자범죄, 본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가 원해서도 범죄 하지만 원하지 않아도 어찌할 수 없이 범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파괴되고 인간과의 관계도 점점 더 파괴되고 자연과자아와의 관계도 점점 더 파괴가 되어서 죄를 자꾸 짓게 되니까 이번에는 물려받은 죄에 보태어져서 외부적으로 자기가 짓는 자범죄에 의해서 죄들이 계속해서 유입되어 들어오면서 이 오염을 점점 더 확대시키고 오염을 점점 더 고질적인 오염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질병이 점점 더 깊어져간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질병이 점점 더 깊어져 가니까 증상도 점점 더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 질병에 걸렸을 때는 아주 사소한 징후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독감에 걸렸을 때 처음에는 왠지 몸이 나른하고 그리고 아예 쑤시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게 기분이 좀 영 안 좋고 찌뿌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다가 그 병이 점점 깊어집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에는 좀 춥기 시작합니다. 몸이 붓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점점 심하면 뼈가 막 쑤시기 시작합니다. 조금 있으면 열이 40도씩 오르기 시작하고 좀더 심해지면 막 벌벌 몸이 춥고 떨리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고 거의 혼수상태에 들어가서 심하면 독감에 걸려서 연세 많이 드신 분들은 죽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질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질병의 징후들은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그러니까 이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의하면 마지막 때가 되면 이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고 점점 더 타락해서 인간들이 서로 사랑해야 할 기본적인 관계들마다 모두 파괴되고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앙을 두려워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하나님을 기억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는 오히려 하나님을 금수와 버러지만 못한 형상과 바꾸면서 살아가는 그런 극도의 죄악 된 삶이 보편화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죽음이라는 질병이 점점 더 깊어질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증상이 따라서 악화될 것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죽음이라는 증상이 어느 정도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뭐가 더 역사한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죽음을 가져다주는 죄라고 하는 병원균이 점점 더 강력하게 역사해서 상황을 악하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대가 이미 왔습니다. 이런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고통 하는 것에서 인간들이 바보같이 환경을 개선하고 교육을 시키고 돈을 많이 벌고 복지제도를 많이 하면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궁극적으로는 이제는 정말 그 고통을 가져다주는 이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죽음이라는 질병을 이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치료되어야 할 필요성이 마지막 때가 되면 점점 더 절박하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제 여태까지는 계속해서 우울한 이야기만 했습니다만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은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총을 어떤 방식으로 베푸시는가 하면 범죄 한 인간에게 이제 베푸신 은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첫째가 무엇인가 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됩니다. 그게 언약이고 그게 계약입니다. 그런데 그 대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가 하면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히브리 성경에 ‘무트타므트’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법 가운데서 필연적 강조용법입니다. 반드시 죽으리라. 말하고 있는 화자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죽게 하겠다.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겼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즉시 죽여야지 됩니다. 일단 사람이 겉 사람과 속사람으로 나뉘어졌다고 했습니다. 범죄 한 그 순간 속사람은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은 속사람만 죽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사람이건 겉 사람이건 모두 죽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칙적으로 본다면 그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즉시 속사람이 죽은 것처럼 겉 사람도 죽어야 마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죽는다고 말씀하실 때 그 시간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먹는 날에는 네가 죽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시간적인 24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먹는다면 그렇다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러면 넌 죽는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속사람은 죽게 하셨는데 겉 사람은 살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려두셔서 요즘은 한 100년 정도 채 안되지만 옛날에는 기후와 생태계가 그때와 달랐기 때문에 훨씬 더 오래 살았습니다. 그래서 몇 백 년을 살게 하십니다. 살게 하시는데 이제 이게 굉장히 묘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우선 무슨 뜻인가 하면 만약에 인간이 범죄 했을 때 인간을 즉시로 죽여 버리고 나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가 너무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없는 창조 세계가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들어놓으신 이 세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싹 쓸어버릴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살아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은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그게 왜 은총인가? 일정 기간을 살아있게 하셨는데 그 사이에 자손들을 나았습니다. 그래서 자손을 남기고 죽고 그 자손이 다시 자손을 남기고 죽고 하면서 부모의 대와 자식의 대가 걸치면서 계속 이어지게끔 하나님이 놔두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받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기회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에 대한 대답이 바로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당신께로 돌아와서 타락하기 이전에 인간을 이 땅에 창조하셨던 원래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기회를 두 가지로 사람들이 활용합니다. 한사람들은 진짜 그렇게 주신 기회를 활용해서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구원을 받고 그래서 비록 죄 가운데 있었지만 그러나 다시 생명 되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그래서 옛날처럼 그렇게 완전하지 않지만 부분적으로 하나님께로 공급되는 힘을 받고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죄책은 제거되고 오염은 남아 있지만 끊임없이 위로부터 다시 하늘의 자원이 공급될 수 있는 길을 자기를 믿는 백성들에게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힘을 통해서 오염되어 있는 것들을 계속 해서 정화시키면서 죄를 이기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을 때 인간의 본래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신앙으로 사는가가 이제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그 원래의 목적대로 우리들이 돌아갈 수 있는 그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혀 하나님을 기회를 줘도 안 믿는 백성들이 나타납니다. 그 백성들은 어떻게 사는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즉결 심판하셔서 죽여 버리고자 했지만 구원받기 위해서 은총의 기회를 베풀어주신 그 기간들을 어제 말씀드린 독립성을 구현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인생을 막 살아가니까 그 속에서 계속 문명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려고 하니까 인간이라는 게 옷도 좀 따듯하게 입고 싶고 그러니까 옷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고, 사람이 밥만 먹고 어떻게 사나. 노래도 불러야지. 그러니까 이제 악기 만드는 기술도 발달되고 노래만 불러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사회가 발달하고 보니까 노래만 부르는 사람들 책만 만들어주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나오고 그 책만 배달해주면서 먹고 사는 사람도 나오고 그러면서 문명이 계속 가지치기를 하면서 발전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이렇게 기가 막힌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참 눈부실 정도입니다. 전화기 하나를 가지고 외국으로 가면 한국에서 따르릉 전화가 오면 받습니다. 호주에 가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자락을 깔고 막 1시간을 통화할 것처럼 늘어놓기에 한 10동안 전화를 받다가 여기 호주인데 전화요금이 많이 나오실 텐데 하니까 얼른 끊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정도 가지고 만족을 안 하고 이제 계속해서 노력하는데 이제 몇 년 안 있으면 그런 것도 필요 없고 핸드폰 하나 가지고 전 세계로 돌아다니는 시대가 오고, 이제 문자 메시지는 물론이고 인터넷까지 세계 어디에서 다 될 수 있는 시대가 옵니다. 실로 눈부십니다. 컴퓨터가 못할 수 있는 게 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럴 정도로 참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그렇지만 이 속에 죽음적 질병에 대해서 그것이 뭘 도움을 주었습니까? 이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말하자면 암 4기 말기에서 죽을병에 걸렸는데 여기 예쁘게 바르고 이봄에 새롭게 나온 립스틱이라고 그러면서 예쁘지? 그런 것과 똑같습니다. 휠체어 새로 샀다. 이거 금칠했다. 그리고 죽을 날을 기다리면서 타고 다니는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야, 봐라. 내가 이번에 새로 나온 관을 사가지고 왔는데 며칠 후에 내가 여기에 들어갈 것이라고, 그런 것입니다. 궁극적인 고통의 문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점점 사람들이 그 문명에 미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함으로서 인간 속에 있는 본질적인 것들을 감추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지 되는가 하면 그런 속에서 문명을 공유하고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안 하려면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구를 떠나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명을 공유하고 살지만 항상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죄 많은 이 세상의 문화와 문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이것들은 죽음이라는 우리의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의 질병을 타파할 수 없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살아가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첫 번째 베푸시는 은총이 무엇인가 하면 죽음을 유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을 기회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향해서 인간의 고통의 궁극적이 죽음이라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형 집행을 유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집행정지 상태입니다. 집행정지라는 것 해봤습니까? 감옥에 안 가봤으니까 잘 모르실 것입니다. 집행정지라는 것은 징역2년! 그럼 징역 2년을 살아야지 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하면 정상을 참작해서 집행정지! 그러는 것입니다. 2년 동안 감옥에 당장 들어가야지 되는데 집행을 정지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살아야지 되는데 정지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회에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죄를 안 짓고 잘 살면 법을 잘 지키면 2년이 지난 다음에 정지된 집행이 그냥 풀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살다가 또 죄를 짓습니다. 2년 자리를 지었습니다. 그럼 그 다음에 2년 더하기 안 한 것 더해4년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메시아를 약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무엇인가 하면 ‘메시아’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맛사’라고 하는 히브리어 동사에 피동태입니다. 맛사는 기름붓다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얘기하면 이 메시아는 그들을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빠지게 된 이 절망적인 죄의 질병의 상태로부터 구원해낼 어떤 분, 그분이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가 타락 즉시 예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는가 하면 타락을 해서 이제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그런데 이제 거기에서 뭐라고 약속되었는가 하면 여자의 후손이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의 후손이라는 게 참 이상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게 성경의 사상도 남자가 아이를 낳는다고 되어 있는데 하필이면 여자의 후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훨씬 더 뒤로 넘어가서 마태복음에 가서 의문이 풀립니다. 마태복음 1장 17절로 넘어가면 “마리아라고 하는 여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남자의 후손으로 계속 나오다가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이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이 여자는 아버지 없이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연적인 생육법이 아닌 성령으로 마리아가 잉태해서 태어나게 될 것을 미리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분이 오늘날 말하는 예수님, 역사적으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그때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시라고 하는 이런 것입니다. 역사가 쭉 지평선으로 태초부터 시작해서 종말까지 있는데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게 전등과 같습니다. 불빛과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환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도 좀 어둡습니다. 머니까. 그러니까 이 끝도 빛이 다 안가니까 어둡습니다.
그런데 어두우면 또 어두운대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녹과 같은 사람이 이렇게 어두운 시대를 살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그때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빛을 주신 것입니다. 그 빛을 붙들고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밝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못사는 사람은 많은데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저쪽 끝에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자기가 요한계시록을 보고 미래에 될 일을 모두 깨달았다고 그러는데 다 뻥입니다. 여기가 빛이기 때문에 여기는 자연적으로 좀 어둡습니다. 그러니까 계시록 속에는 우리들이 아직까지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요소들이 많고 더군다나 세계의 역사의 진행과 관련시켜서 이것이 꼭 그것과 꼭 의미하는지를 딱 떨어지게 말할 수 없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비추시기 때문에 이렇게 비치기 때문에 이렇게 비치고 양쪽에는 자연스럽게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문제가 안 됩니다. 왜 666이 뭔지, 진짜 유럽공동체가 마지막 날에 그 나라들인지, 진짜 붉은 용 그 마귀가 교황인지 아닌지, 유럽공동체의 미래의 태어날 대통령인지 그런 것 몰라도 우리들이 충분히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이처럼 공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 메시아를 그렇게 딱 약속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지금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분명하지 않지만 그러나 처음 범죄 했던 아담에게는 아주 의심할 여지없이 명료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아담과 하와는 무엇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아담과 하와 속에 있었던 가장 첫 번째 증오심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구에 대한 증오심이었습니까? 마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진다고 해서 먹었는데 알고 보니까 이게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떻게 하든지 죄라고 하는 본성은 하나님과의 의존의 관계를 깨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강함은 철저한 의존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나는 주님이 없이는 살수가 없다. 나는 일분도, 일초라도 하나님이 붙드시지 않으면 나는 살수 없다. 그렇게 해서 내가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실 텐데.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야지 되는데,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 싫어하시면 어떻게 하나. 그리고 전전긍긍하는 신령한 의미에서 소심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주일을 안 지키면 어때. 괜찮아. 뭐 새털과 같이 많은 날, 십일조 생활 해야지. 뭐 돈 좀 많이 벌면 할게. 교회봉사 좀 해야지. 뭐 나가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무슨 목사님이 항상 앞에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시는데, 내가 그래서 그 말을 안 합니다. 뭐가 고맙습니까? 나도 맨 처음 선배 목사님 따라서 그냥 했는데 어느 날 뭐가 고마운가. 진짜 내가 뭐가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부터 안 합니다. 반갑습니다. 반가운 것은 사실이니까 ‘반갑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이 아! 잊어버렸습니다. 소심함, 그래, 맞아 장로님 항상 앞에 앉아야지 되겠습니다. 신령한 의미의 소심함이 우리에게 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이, 아담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명료하게 알지 않았는데 아주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처음에 죄를 짓고 나니까 뱀을 알게 되었습니다. 뱀은 사실 사단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아담이 그것도 알았습니다. 바보같이 뱀만 미워한 것이 아니라 뱀 위에 있는 마귀를, 사단을 틀림없이 의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증오심을 갖고 있는데 모든 것은 모르지만 하여튼 세 가지 사실이 분명한 것입니다. 여자에게서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태어나서 뱀을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단의 머리를 깬다는 것은 죽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렇게 타락으로 말미암아 밀려오게 된 이 비참한 상태로부터 구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를 아주 명료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온갖 신경은 어디로 갔습니까? 아기에게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 아이를 낳았을 때 이 아이가 그 아이일 것이다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카인’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가인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여호와로 말미암아 내가 아들을 얻었도다.’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태어난 것에 대해서 이 부부가 얼마나 심각한 신앙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부여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꿈은 깨어졌습니다. 왜 자기들을 구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아이가 동생을 쳐 죽이는 범죄를 했습니다. 그때에 죽음이 들어왔지만 아담과 하와는 아직은 육체적인 죽음은 경험을 못했습니다. 그 무대로 돌아가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렇게 자식으로서 끌어안고 기뻐하고 살았고 둘 다 예뻐했는데 어느 날 큰아들이 작은 아들을 쳐 죽이고 그 아들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는 모습을 그 식구들 중에서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의식 없이 껄떡이면서 죽어가는 그 모습을 식구들이 지켜봤을 그 두려움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럴수록 아담과 하와는 처절하게 자기들의 죄를 후회했을 것이고 그리고 자기들을 에워싸고 있는 이 범상치 않은 죽음의 어머 어마한 세력으로부터 열렬히 구출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간절히 구출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뭐 무지하게 많이 나오는데 그래도 하나만 하면 또 여러분들이 혹시나 할까봐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노아가 태어납니다. 라멕이 노아를 낳습니다. 그때에 ‘노아’라는 이름은 ‘쉼’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 아들로 인하여 안식을 얻으리라. 그 안식이 뭘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단순히 그냥 먹고 자고 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혹시 아이가 그 아이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이어진 게 모세에게로 이어지고 계속 성경에 안 나타난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이가 태어나서 뭔가 좀 범상치 않으면 이 아이가 혹시 그 아이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보내실 그 어떤 메시아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구속하실 것이라고 믿는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캄캄한 시대에도, 하나님이 이들에게 베푸신 은총은 이렇게 두 가지로 나타났는데 이제 이 은총을 베푸셨지만 현재적으로 즉각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을 연장한 것은 즉각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인데 그런데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앞으로 오시겠다고 그런 것이지 가인도 뚜껑을 열어보니까 아니었고 노아도 뚜껑을 열어보니까 아니었고 모세인가 해서 모세도 뚜껑을 열어보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야지 되는데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든지 내면의 세계가 죄에 의해서 가득 억눌림을 받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선택받았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는 도저히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좀 어려움 말로 말하자면 진료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한번에 빛, 바다, 하늘, 땅 이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지으실 수 있는 재료들을 창조하십니다. 그게 재료의 모습이 1장 2절에 창세기에 나타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는 그 상태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이 천지 창조할 재료들을 쌓아놓으신 상태입니다. 그 재료 속에서 이제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씩, 그렇듯이 선택이 바로 그렇게 재료를 창조하시는 것이고 그 선택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심으로서 이제 당신의 선택을 구체화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백성들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만들어 가시는데 그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이 선택하셨다고 하더라도 원죄를 물려받고 그래서 죄책과 오염이 있고 선천적이고 도덕적인 부패성들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제 물론 그들을 하나님께서 믿는 순간에 구원해주실 때 그때 죄책의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여전히 오염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교통하는 것과 같이 이렇게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계속 거하시면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이런 정도의 복락은 누리지 못했지만 순간순간 하나님이 그 백성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제사입니다.
제사는 며칠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제사를 통해서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 죄인과 교통할 수 없기 때문에 죄 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그래서 제사는 하나님을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죄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가 하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면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것이지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면서까지 죄인을 만나게 해주셔야지 됩니까? 그 궁극적인 설명이 하나님 안에 있는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라고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짐승을 가지고 나와서 기도하고 자기의 죄가 그 짐승에게 옮겨지고 그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순간에 하나님이 진노를 푸시고 다시 그 백성의 죄를 깨끗이 씻어서 그들과 함께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집단적으로도 이루어지고 개인적으로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항상 한시적이었습니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죄를 짓게 되고 죄를 짓게 되면 다시 하나님과의 교제는 막히고 이런 일들이 계속 되풀이되는 가운데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 죄인들이 부분적으로나마 당신 앞에 나와서 신령한 은혜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길들을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제사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에게 기도, 혹은 율법, 하나님의 말씀 이런 것들을 깨닫게 하고 실천하게 하심으로서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은혜의 감격들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어떤 하늘의 자원도 공급받을 수 없던 인간들이 그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부분적으로나마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늘 자원을 힘입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해서 배려하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래서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깔고 오늘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여태까지 우리의 결론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미 판단이 났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들은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노력들이 얼마나 헛되고 의미 없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못을 박을 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구원 하나만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이 대치될 수 없다고 하는 분명한 인식을 우리들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다가 예수님을 버리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언제든지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죽음 이후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이시다는 사실을 붙들지 않는 사람은 기회가 닿으면 반드시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또 하나가 필요한 것이 있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유혹이 워낙 강하고 우리 안에 죄가 훨씬 강하면 생각은 그렇게 해도 실제 우리의 삶은 생각대로 안 삽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생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하신 분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 존재할 그리고 지금 나를 포함해서 이 모든 인간들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는 확신을 우리들이 머리 속에 가지고 있어야지 되고 또 하나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라고 하는 것을 내가 실질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안전합니다. 절대 예수님 배반하지 않고 절대 예수님 떠나서 세상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인간의 악과 고난에 대한 이 세상의 접근을 한번 봅시다. 인간의 악과 많은 고난에 대해서 사람들을 말씀드렸듯이 자꾸 바보같이 그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증상들일 뿐인데 그 증상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씨름을 하면 이 세상이 나아지고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가 하면 아닙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불행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이 없이 자신만의 자원을 가지고 살아야지 되는 것에서 비롯되는 비극입니다.
그러니까 네 가지 관계의 파괴를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뒤에 나오는 세 가지 관계의 파괴는 첫 번째 나오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의 결과로서의 파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지 않았다면 그 나머지 세 개의 관계는 파괴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결국은 궁극적으로 모든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하나님께로 공급되는 그 은혜의 힘에 의해서 살도록 되어 있는 그 공급되는 자원의 통로가 막힌 데서 비롯되는 고통이 바로 이런 이 세상의 죄와 끊임없는 고통입니다.
문명은 많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신약성경이 쓰여 지던 시대가 지금부터 2000년 전입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아무리 로마 시대라고 할지라도 자전거가 없었고 오토바이도 없었습니다. 자동차는 더더욱 없고 사람들은 마차타고 다니고 그냥 아무리 발달한 나라라고 하지만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지금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로켓을 타고 달나라에 가고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유영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인간의 그 본질적인 것이 뭐가 바뀌었습니까? 만약에 바뀌었다고 할 것 같으면 사실 이 성경이 특히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읽으면 도대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 2000년 전하고 지금하고 역사가 언젠데 이게 타당성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보면 다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왜 인가의 본질은 하나도 안 바뀐 것입니다. 지게를 지고 다니고 그루마를 끌고 다니고 그것도 그만두고 귀틀집에서 나무를 돌려서 물집이 생기도록 부싯돌에다가 불을 붙여서 그렇게 살아가던 그 언어도 별로 많지 않던 그 시대에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그 비참함이나 오늘날 좋은 승용차 타고 제트기 여객기 타고 호의호식하며 날아다니는 그 인간들의 비참함이나 죄가 가져다주는 비참함은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같은 돼지우리인데 그게 재래식 돼지우리인가, 신식 돼지우리인가. 에어컨이 나오는가. 안 나오는가. 요즘 돼지는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주고 운동시간까지 있다고 합니다. 에어로빅까지 시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고기 맛이 좋아진다고 하니까 그 차이입니다.
궁극적인 문제가 컴퓨터가 나오고 말할 수 없는 과학문명이 발달되고 그래서 그게 우리를 궁극적인 죄라는 질병에서 치유해주었습니까? 건져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런 모든 불행 자체가 한정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으로 살게 되어 있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그것이 끊어진 가운데 자기 안에 자원도 별로 없지만 자기 안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데서 오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어제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두 가지 방법에 있어서 그릇되다 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그릇된 방법으로 그 자원을 조달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방법으로 조달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그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혼자 살아야지 됩니다. 혼자 가지고 살다가 안 되면 안 되는구나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하고 뺏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 야비하게 경쟁하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죽여서까지 상속할 유산을 빼앗고 사기를 쳐서 재물을 뺏고 명예를 가로채고 그렇게 하면서 부당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는 자원을 자기의 자원으로 활용을 해서 그 인생의 고갈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해결이 안 됩니다.
해결이 안 되는 이유는 두 번째로 그것들이 방법에 있어서 부당할 뿐만 아니라 성격에 있어서도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성격에 있어서 부당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런 것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절대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허무했던 것은 난 정말 그 느낀 허무라고 하는 것은 진짜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왕궁들을 돌아보면서 느낀 그 허무 말입니다. 후궁을 일만 명이나 두고 무슨 한 끼 식사에 한 트럭 반씩 요리를 해서 네 번이나 먹고 그래서 중국 황제들이 그렇게 일찍 죽은 것입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백성들은 두 끼만 먹고 자기는 네 끼를 먹는데 한번 식사에 한 트럭 반씩 요리를 한다고 합니다. 한 트럭 반은 먹지도 못하겠지만 기본 반찬이 백가지, 몇 가지해서 그것을 1500명의 사람들이 요리하고 말이지, 그렇게 하면서 살다가 결국은 과체중, 과 지방으로 해서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여자들하고 그렇게 음란하게 살다가 그렇게 해서 짐승처럼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이 계속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고통의 문제가 부족한 자원 때문인데 이 부족한 자원은 뺏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정복의 역사고 이것이 인간의 피비린내 나는 생존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런 것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달라집니다. 궁극적인 해결의 열쇠가 아닙니다. 만약에 인간의 그 악과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인간 자신 속에서 고갈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져서 더 이상 안 오는 빈곤한 자원 때문인데 다른 사람들의 것을 뺏어서 늘려서 말미암아서 자신이 인간으로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 자신 안에게는 그렇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합니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벌려면 좀 큰 꿈을 가져보십시오. 먹고는 살지요. 그렇게 살아서 뭐합니까? 왜 먹고만 삽니까? 좀더 버십시오. 많이 버십시오. 직장도 다니면 정직하게 유능하게 살아서 승진도 좀 하고 매일 어떻게 말단으로 그렇게 삽니까! 그렇게 해서 많이 벌어서 다른 사람을 다 주십시오. 돈 벌어서 남 주고 다른 사람주고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면 됩니다. 왜 그것이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우리 인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 받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도와야지 됩니다. 왜냐하면 살아야지 아까처럼 예수 믿을 기회를 연장 받습니다. 이번에도 터키인가 어디에 몇 년 전에 지진이 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다쳤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구호물자를 많이 보냈습니다. 참 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종교와 상관이 없이 인간들이 살아야지만 하나님 믿을 기회가 있습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그렇게 하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한국에서 돈 많이 벌어서 아프리카 사람들 먹여 살리고, 서울에서 돈 많이 벌어서 대구 사람들 먹여 살리고 얼마나 좋습니까? 아멘을 좀 해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인간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는 환상들이 인간 속에서 계속해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다양한 종교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통해서 자기를 수양하고 뭐 덕을 쌓고 뭘 하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결국은 그 속에 있는 죽음이라는 질병에 궁극적으로 인간이 치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종교를 가지고 인간의 이 고통 하는 문제들이 해결이 됩니까?
오늘날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소위 이야기하는 기독교 국가,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을 보십시오. 세계의 중요한 역사는 거의 다 종교적 명분을 가지고 일어났습니다. 30년 전쟁, 100년 전쟁, 그리고 또 십자군 전쟁, 이런 모든 전쟁의 역사들이 모두 자신의 종교가 옳다고 생각하는 미명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 전쟁들을 통해서 인간들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결코 이 세상에 있는 참된 진리가 결핍된 종교들을 가지고는 결코 이 세상이 구원 얻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반응은 유사종교입니다.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적 성격을 가진 사상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공산주의, 자본주의 이런 것들입니다. 공산주의는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경제 구조를 개선해서 다 벌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는데 공산주의가 그것이 헛것이라는 게 뭔가 하면 청렴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계급이 싫어서 모두 같이 잘 살자고 하니까 잘살도록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된다. 그래놓고 자기들은 많이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부패가 극도에 달하는 것입니다.
지금 공산주의국가 중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부가하고 있는 국가 중에서 아주 극히 일부 국가를 제외해놓고 모두 더러운 부정이 가득 온상처럼 번졌습니다. 그게 모두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이 누구인지를 너무나 몰랐던 것입니다. 마르크스나, 엥겔스나, 레이닌이나, 스탈린이나 이런 사람들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그런 식으로 인간이 불행에서 구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존재인데 그런 것을 너무 모른 것입니다.
지금도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사실 맨 처음에 소련은 아주 강력한 공산주의 체제를 지지했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아니 이게 논리적으로는 같이 농사를 짓고 먹고 살면 다 골고루 잘 살수 있을 것 같은데 같이 농사를 지으면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두 다 구교 화 할 수 없으니까 자기네 집에 심어서 울타리를 타고 위로 올라간 호박정도는 그저 자기네가 따서 먹어도 된다. 그랬더니 공동 농장에서 기르는 호박은 요만하고 자기에 집에 올라간 호박은 이만한 것입니다.
또 중국도 그런 예를 잘 보입니다. 중국이 군인들이 전쟁이 끝나고 나니까 군인들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먹고 살려고 하니까 도저히 나라에서 월급을 줘서 먹여 살릴 수가 없으니까 할 수없이 잘 나가는 기업체는 하여튼 어떤 식으로든지 뺏어서 군인들에게 운영하라고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면 잘 나가는 기업을 뺏어서 군인들에게 주었더니 군인들이 인수하고 몇 년이 지나면 전부다 부실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왜 기업의 주인이 없으니까 우리 모두가 주인이다. 모두가 주인이라는 말은 아무도 주인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회사에서도 주인이 없는 돈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항상 내가 얘기하는 게 교회 돈을 쓸 때는 내가 직원들과 교역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지출할 때는 항상 내 돈이라도 그렇게 쓸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공산주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물질을 똑같이 보는 게 아니라 이게 누구의 물질인가에 대해서 아주 예민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 역사 속에서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자본주의로 해보니까 되는가, 했더니 자본주의는 유물론을 배격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유물론을 배격하고 세워놓은 자본주의는 또 어떻게 되는가 하면 돈 주고 사람을 팔아 인신매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단적인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공산주의와 서로 이런 식으로 유통하는 것입니다. 사상적으로, 그랬더니 결국은 이런 식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의료해택을 못 받는 사람들이 3500만 명, 3000만 명. 그리고 노숙자가 350만 명,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미국이라는 사회에 3만 불이 넘는 사회의 그림자입니다. 자본주의는 그런 것을 양산해내는 것입니다.
그런 유럽국가에서는 자본주의하고 또 이렇게 사회주의하고 결합해서 수정자본주의라는 것을 한번 만들어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또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세금을 많이 거두어서 노숙자가 없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아! 이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먹고 일은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받아도 괜찮으니까. 내가 실제로 캐나다에 가서 그것을 웰 페어라고 하는데 복지 연금을 받고 사는 사람들 보니까 부부가 아이 둘 하고 살아가는데 도저히 생활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니까 나라에서 집과 돈을 주는데 30평 아파트하고 그 다음에 엑셀 자동차 하나 굴릴 정도인데 그리고 아이를 낳으니까 억수로 가난한 집 애를 낳았다고 하면서 귀저기 회사에서는 귀저기 몇 박스, 우유 회사에서는 우유 서너 박스, 젖병 회사에서는 우유병을 몇 개를 가져 주는데 차에 한 가득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평일인데 나이애가라 폭포로 구경을 하러 갔습니다. 집회 끝나고 아니 그때는 집회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거기 무슨 연구할 게 있어서 구경하러 갔습니다. 시간이 나서 갔는데 가보니까 전부다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흑인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니 이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가? 했더니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니까 안 해도 먹고 사니까, 왜 웰 페어 받아서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게 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자꾸 요즘 들어서는 그쪽 수정자본주의 나라에서 아닌 것 같다고 자꾸 생각하면서 복지도 자꾸 줄여야지 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결국은 인간이 이렇게 뭔가 사상을 가지고 인간의 불행을 궁극적으로 해결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할 것 갔지만 그러나 사실은 캐 들어가 보면 그것들이 인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을 못한다는 것이 입증이 됩니다.
또 하나가 있는데 낙관적 문명론입니다. 그래서 역사관은 크게 두 형이 있는데 역사가 이렇게 계속 반복을 하면서 점점 더 비참해진다고 하는 비관적 문명론이 있고 그 다음에 이제 역사가 이렇게 스펭글러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나 역사가 순환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역사가 계속 배우면서 뭔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낙관론적인 문명론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얼마 안 되는 역사만 보더라도 그것은 낙관론이 맞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18세기 합리주의가 들어오고 19세기에 한참 인간의 아주 놀라운 구체제, 그러니까 독재정치와 왕정, 이런 탄압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내서 자유롭게 교육을 시키고 모든 것이 억압이 아니라 이렇게 자유로운 가운데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이런 사회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의 문명 안에 존재하는 놀라운 균형감각 때문에 이 사회가 아주 아름답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소위 이야기하는 경제적으로는 아담스미스의 레제스베르 정책이나 뭐라고 그렇게 합니까? 자유 방임론이나 국부론 같은 곳에서 나온 이야기, 그런 이야기, 사고자 하는 사람이 있고 공급하는 사람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이렇게 만나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그러면 더 늘어나면 더 생산을 하고 더 생산을 하면 덜 값이 떨어지고 값이 떨어지면 더 살려고 하고 값이 떨어지면 생산을 덜하고 그러면서 이게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완벽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19세기 이전에는 나라가 이렇게 근대화 되면서 자유롭게 살아본 시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롭게 살면 인간들이 이게 평화롭고 이 세상이 뭔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를 많이 이야기하고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풀어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고 나니까 결국은 그런 사상이 계속 꽃을 피웠는데 1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안 되겠다 하고 국제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제 전쟁을 방지하자. 그러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졌습니다. 수만 만 명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이제 다시 유엔연합을 만들어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고 그랬는데 지금도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유엔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 네가 뭔데. 그러면서 우리는 전쟁은 안 한다.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처처에 전쟁과 고통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이런 현상들은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문명적으로 낙관론을 가진 것들을 우리들이 선뜻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적으로 보면 이미 예고된 결과이고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시고 죽음의 병에 걸려 있는 인간의 상태가 인간 자신의 힘으로 절대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의 궁극적인 희망은 무엇인가? 결국은 무엇인가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나타나는 이 견디기 힘든 고통의 증상들인데, 이 고통의 증상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도 인간에게는 없지만 어느 정도 이것들을 개선해보기 위해서 인간이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그런 고통스러운 증상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변화도 우리들이 줄 수가 없다는 것이고 더더욱 그 죽음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그 지독한 죄라는 병균에 대해서는 인간이 단 한 터럭도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서 살다가 행복해지려고 하는 꿈은 다 꿈에 불과하고 그리고 결국은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 명약관야(?) 해진 것이고 따라서 인간들은 이런 상태로부터 구출되는 것이 이 세상에 몇 년이나 더 사나. 돈을 얼마나 더 버냐. 얼마나 짜릿한 쾌락을 누리고 얼마나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에서 사는가. 이것보다도 더 근본적인길입니다.
가끔 병원에 심방을 가면 진짜 눈물을 많이 흘릴 때가 많습니다. 어느 성도의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 저 병이 낫고 싶습니다. 병이 나으면 남대문 시장에 가서라도 지게라도 져서 먹고 살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질병 상태에서 죄라는 질병상태에서 극복만 하면 진짜 암 말기에 있는 사람이 건강해지면 건강한데 뭘 못해먹고 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건강해지기만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무한한 자원이 공급되는데 뭘 못하겠습니까? 얼마나 살다가 죽으면 어떻습니까? 죽는 것도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시련입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시련이 아니라 그 형벌이 실현된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세상에서 옮겨서 완전한 복락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기 위해서 하늘 마차를 타는 것이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찍 죽으면 좀 일찍 가는 것이지 아무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진짜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우리가 아무리 권력을 많이 누려도 중국의 황제만큼 누렸겠습니까? 로마의 제왕만큼 누렸겠습니까? 그들도 모두 허무하게 살아져갔는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이 끊어진 사람은 이렇게 뜯어놓은 풀과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 모두 말라서 지푸라기가 되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은 이제는 우리 안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고 증상을 치료하는 그 정도를 가지고는 우리의 이 고통스러운 상태로부터, 죽음의 질병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우리를 건져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이런 죽음이라는 질병과 궁극적인 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낼 수 있는 구원이 내 안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가 아니라, 내 밖에서 이 세상 밖에서 나를 위해서 이 세상 속으로 오는 어떤 제 삼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위해 오셨기에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이 왜 오셨을까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왜 예수님이 오셨나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저는 지난 이틀 동안에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를 연속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다 끝내기를 원하지만 못 끝내면 내일 계속하는 것으로 하고 가는 데까지 오늘은 좀 빨리 가보겠습니다. 어째든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지금부터 이어지는 설교는 왜 예수님이 오셨나?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리고 부활 사건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근거가 되었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땅 위에 글씨를 쓰신 것 이외에는 예수님이 글로서 나는 이런 존재다. 나는 이런 일을 했다고 남겨놓으신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서가 쓰여 진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나서 25년 내지 30년 후에 쓰여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후대에 성경의 기록을 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문이 생기는가 하면 이 기록이 예수님에 관해서 기록을 하고 있는데 이게 진짜 정확하게 예수님에 관해서 기록을 했을까? 누구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에 관한 일을 기록하려고 붓을 든 사람들이 많은지라” 그랬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려고 했는데 그리고 그런 기록들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이 성경의 기록은 정말 믿을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제 참된 신앙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이제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여기에 성경의 기록은 예수님의 원래의 모습을 그렸다기보다는 초대교회 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참 이랬으면 좋겠다고 그려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기록이 우리에게 성경이 되었는데 그 기록을 보아서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전재했던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아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 그것을 규명할 수도 없다는 주장을 핀 것입니다.
그래서 좀 어려운 말로 ‘비 신화작업’이라고 그래서 여기에 예수님이 이런 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려놓았는데 거기에서 그들의 간절한 소망 때문에 덧입혀진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다 걷어버리면 남은 기록들이 있을 텐데 그것들이 어쩌면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그런 남은 부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재구성해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예수님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는 어떤 생각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나 하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고 이 땅에 계실 때 어떤 모습으로 계신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진짜였는지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제자들이 분명히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을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이라는 사건을 경험하고 나니까 이 경험을 통해서 ‘아! 이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아! 메시아셨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서 이제 그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믿기 시작했고 자기들만 믿을 수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파한 기록이 사도행전 이후에 교회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들에게는 예수님과 나누었던 교제의 희미한 흔적을 더듬으면서 그 예수님이 우리들이 경험한 예수님 이상의 어떤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려낸 예수님에 관한 그림이 바로 복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이제 공공연하게 많이 20세기에 전해져 왔는데 그런데 이것이 옳지 않은 주장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정말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른 것은 그만두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경험함으로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 예수님이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성경의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라고 생각을 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많은 학자들의 연구는 이것은 옳지 않은 주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근거가 크게 한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할 때 메시아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새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비로소 메시아의 개념이 생겼다면 이래도 할 수 없고 저래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아에 대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이 기록되고 그 다음에 신약성경이 기록될 때까지 약 4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데 그때에도 메시아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발전을 해오게 되고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사상이었습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 라는 말인데 그 말은 히브리어고 그 말을 희랍어로 옮긴 것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런 이름입니다. 그것도 역시 ‘크리오’ ‘기름붓다’ 라고 하는 곳에서 온 피동명사입니다. ‘크리스투스’ ‘기름부음 받은 자’ 그랬습니다. 이 기름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세 인물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그 메시아라고 하는 그 사상은 단순히 왕이나 선지자나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서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해서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을 메시아라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들이 믿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 메세아라고 하는 사상 속에 부활의 사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메시아의 죽음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뛰어난 존재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의 죽음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은 것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이유 때문에 메시아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해서는 유대인의 사상이 그것을 이야기를 안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그 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으로서의 그 사상에는 메시아가 부활한다는 게 없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부활하셨구나. 그러니까 메시아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논리적으로,
두 번째는 구약에서 그려낸 메시아는 그렇지 않지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은 성경에서 계시되어 있는 메시아사상을 정확하게 해석한 메시아사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는 철저히 자신들의 민족인 이스라엘과만 관계가 있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스라엘과만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필요 없고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심지어 이방 여인에게까지 은혜를 베푸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구원의 은혜가 민족을 초월하고 이스라엘 밖에까지 전파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 메시아사상과는 안 맞는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단순히 부활하셨다는 사실만 보고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그렇게 확신해서 그 신앙이 생겼을 것이라고 하는 그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말씀하신 적그리스도와 투쟁, 그리고 부활, 그리고 마지막 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 하나님의 심판주로 오시는 그 예수님의 심판 주 되심,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의 당시 사상에 의하면 메시아의 일이 아니라 메시아보다도 훨씬 뛰어난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시대에 태어나서 아직까지도 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명료한 이해를 안 가졌을 때에 그는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시대에 평균적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부활의 사건 하나를 보고 아! 이분이 메시아구나. 이렇게 믿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믿게 해주는 뭔가 근거가 있어야지만 되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듣고 그분이 메시아라는 결론을 내리고 거꾸로 들어가니까 아니! 부활하신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야지, 왜 부활했는데 못 믿나.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에 이 메시아는 부활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했으니까 메시아다 이렇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러면서 또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 시대에 메시아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또 예수님의 메시아사상이 예수님하고 안 맞습니다. 그 당시의 메시아사상은 무엇인가 하면 그 당시에 시대적인 배경이 유대 나라가 로마라고 하는 초강대국에 모두 점령 되었습니다. 그래서 짓밟혀서 억압을 받고 있고 그리고 세금도 다 뺏기고 그리고 또 황제를 섬기라고 그러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는 로마가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었지만 그러나 비근한 예로 그들 혼자 하나님을 믿을 때는 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재판해서 가두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권한이 다 사라졌으니까 율법이 그야말로 법적 구속력이 없는 순수하게 신앙에 호소하는 문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입장에서 보면 로마 치하에서 밟혀 산다는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굉장히 불편한 것이었고 불편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선민의식이라고 하는, 선택된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선택된 백성들이 이 민족의 지배를 받는 것은 성경 전체로 볼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엄청난 수치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시대의 상황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 성경적인 사상이 뒤틀리기 시작하면서 아주 극단적인 유대민족주의로 발전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 바로 그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그리고 그들이 꿈에도 그리워하는 역사상의 화려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가 뭔가 하면 다윗 시대의 나라입니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 영토가 최고로 넓었고 그리고 엄청나게 큰 나라들에서는 그러지 않았지만 주위에 있는 작은 나라들은 전부다 다 다윗의 왕국에 복속되어서 그렇게 신하처럼 섬기면서 조공을 매년 바쳐오는 그런 영광스러운 왕권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가 바로 진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영원히 이루고 싶으셨던 나라였다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가 되었는데도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려라.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하심이 그때입니까? 그랬습니다. 그래서 뭔가 하면 이스라엘을 그 나라, 다윗의 왕국 같은 나라로 이렇게 회복되게 만들어주실 때가 이제 이땝니까?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상에 있어서 혼돈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던 백성들과 똑같이 혼돈에 빠져 있었는데 그 영적인 눈멂이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벗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나중에 하고 그렇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결국은 그들은 그 성경에서 그려내는 공정한 메시아 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자기들의 소망으로 성경이 그려내는 메시아사상에 덧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 받고 싶은 사람이 성경을 보면 맨 복 받는 이야기만 나오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성경을 보면 계속 벌 받는 이야기만 나오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은 소원이 나라를 회복하고 국권을 회복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이 꿈이었고 로마의 정치적인 압제에서 벗어나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성경을 보니까 성경 속에 하나님이 갑자기 용사처럼 되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대적들을 무찌르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렇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시려고 하는 메시아는 바로 이런 용서와 같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창과 칼을 들고 로마에 반기를 일으켜서 혁명을 일으켜서 그 나라를 두들겨 엎고 그 이스라엘 나라를 재건해서 이 로마를 비롯한 모든 족속들이 조공을 들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조공을 바치러 오게 되는 그런 행렬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인간은 약하지만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라면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항상 핍박만 받은 것이 아니라 환영을 받으실 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언제? 뱃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을 먹었을 때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메시아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료나무 가지를 꺾어 겉옷을 길에 깔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라는 그 말 자체가 히브리말로 호시안나, save us please! 그런 뜻입니다. 우리를 제발 구원해주십시오. 아무한테나 외칠 수 있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그들이 무엇을 꿈꾸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죽인 것도 그런 기대에 부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꿈꾸던 나라는 예수님이 메시아로서의 그 모습은 전혀 유대민족주의적인 메시아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창칼을 들고 로마에 대항해서 혁명군을 조직해서 해방의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온 전사처럼 사신 생애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서도 그 예수님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메시아하고는 판이한 인생을 사시다가 가신 분이기 때문에 부활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럼 무엇 때문에 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아! 그분이 정말 메시아구나 이렇게 믿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사실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주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강력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이 지상생애에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가르침이 참말이었구나. 하나님의 교훈이었구나 하는 것을 믿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에게 그분이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끔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럼 왜 그런지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평생에 가르치셨던 가르침이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지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사고의 틀에는 맞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나타난 일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굉장히 황당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 굉장히 많이 나오지만 대표적으로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몇 가지 사건만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우물가의 여인이야기입니다. 우물가에 여인이 물을 길러왔는데 예수님께서 물가지고 한참 이야기하시다가 이 물보다 더 좋은 물이 있다. 그것은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그 샘물이다. 우리는 딱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 ‘영생’이라고 하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바보 같이 물 길러 안 오는데 물이 계속 쏟아진다고? 배속에서 물이 계속 나온다고? 완전히 정수기가 배속에 들어가 있네. 그래놓고 나 그것 좀 달라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희극입니까?
그 다음에 또 이 사람보다 더 엽기적인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칭찬을 하는데 예수님은 전혀 안 기뻐하시고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까 그래도 명색이 말이지 부자이면서, 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를 지도하는 공의회의 위원이라고 하는 지도층 인사가 성경도 많이 연구했을 텐데. 그런데 그 사람이 질문을 하는데 오늘날 우리 시대 같으면 초등학교 1학년도 그런 질문을 안 합니다. 다시 태어나라고요? 아니 내가 늙어서 이만하고 우리 엄마는 다 꼬부라져서 요만한데 내가 어떻게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갑니까? 그런데 이게 지금 예수님하고 농담하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해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옳지 않은 다른 지식들이 잔뜩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도대체 이해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오히려 우리로 말하자면 성경공부 많이 하지 않은 그 당시에 잘못된 성경공부 많이 하지 않은 창녀, 기생, 그리고 그런 이스라엘의 공동체 속에서 소외된 세리,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비교적 잘 알아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텅 비었기 때문에 잘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텅 빈 사람들보다 무서운 사람은 이상한 게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통이 텅 비었으면 거기에 물을 집어넣으면 그 물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에 음식찌꺼기가 들어있습니다. 거기다가 맑은 생수를 부으면 뜯물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아무 곳에서나 막 배우고 그러면 안 됩니다. 아무 책이나 다 주어 읽어도 안 되고, 이게 자기가 정확하게 성경의 교리를 아는 기본적인 골격이 있으면 책을 읽으면서 아!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틀리구나. 아! 이것은 옳지 않다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분별하는 자체가 이제 신앙이 자랐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어떻든지 간에 그들이 그렇게 올바른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릇된 지식이 그들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매우 낯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도 사실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항상 설교하신 후에는 사람들 다 돌려보내고 제자들만 모아놓고 다시 성경공부 시키는 것입니다. 사실 그래도 잘 못 알아듣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때는 너무나 명백하게 인자가 이제 많은 사람들 위에 내 몸을 대속 물로 주기 위해 왔다. 처음 되고자 하는 자는 나중 된다. 그러면서 당신이 받을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도, 그렇게 명료하게 말씀하시는데도 전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 이제 전혀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못 알아들었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전적으로 아멘, 그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럴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까, 없었다는 것입니까?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베드로의 고백같이 너희도 가려느냐.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매 어떻게 주님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전혀 못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냐고 그러니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상당히 뭘 또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십자가를 져야지 된다니까 그러시면 안 된다고.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죽으시냐고, 그러니까 아까 잘 고백한 것이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고 어쩌다가 황소 뒷발질에 돌멩이를 맞고 개구리가 죽은 격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완전히 맞으니까 정답을 맞혔다가 또 틀렸다가 맞추었다가 또 틀리고 지워서 다시 썼는데 또 틀리고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든지 간에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체계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부분적으로는 모르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냥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지금 안 믿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듣는 것은 알아듣는 게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는가 하면 예수님 당신이 안 죽으시면 그냥 있지만 당신이 죽으시면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안 게 아닙니다. 진짜 그 의미를 몰랐으니까. 그렇게 알지 몰랐던 이유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은 분명했는데 이 속에 들어있는 것들이 성경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그 시대에 잘못된 신앙지식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이것들이 비칠 때 도저히 그것을 해석해서 정확하게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하고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쇼킹한 것입니다. 그럼 뭐냐 입니다. 가르침도 잘 이해를 못했는데 돌아가셨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다가 자기들은 예수와 함께 한 사람이라고 그러고 아무 것도 주시고 간 것도 없고, 그리고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그 예수님은 죽어서 올라가고 그리고 자신들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뭘 해야지 되겠습니까? 뭘 해야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사건은 사실은 구약에서도 별로 본적이 없고 그리고 자신들 시대에는 기적이라는 게 가끔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같은 것은 본 일이 없습니다. 그 부활의 모습을 보는데 누가 아무리 비비고 예수님을 만져 봐도 확실히 부활이었습니다. 그럼 결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살리셨구나,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옳은 분이었구나.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가르친 게 진짜였구나.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을 계기로 해서 역 추적해간 것입니다. 옛날의 가르침들이 그게 진실이었구나.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거꾸로 추적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들이 성령강림사건을 통해서 성령님이 약속대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가 생각나게 하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너희를 인도하시리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오셔서 그 빛을 환하게 비쳐주시니까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가 생각이 나면서 자신들 속에 있었던 이 잘못된 유대주의사상, 이게 예수님을 못 보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나중에까지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사울 같은 사람입니다. 어째든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좀더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그럼 이제 궁금한 것은 제자들은 그렇게 이해를 했다고 그러는데 그러면 도대체 제자들이 이해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당신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는가.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를 사람들에게 어떤 분이라고 계시를 해주셨는가. 그게 더 중요합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준 가장 명료한 단 하나의 성경구절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오,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게 무엇인가 하면 내가 온 것은 섬기고 그리고 고난을 받아서 너희를 위해서 대신 죽기 위해서 내가 왔다. 그들이 이해했을 리가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킬 때에는 항상 무슨 표현을 쓰셨습니까? 나 예수는 이렇게 표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인자’라고 항상 표현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에게는 다른 호칭도 많이 있었습니다. 주. 혹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이런 호칭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부 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 혹은 심지어 마귀가, 귀신이 한 이야기지 예수님 자신이 나는 주님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명료하게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인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이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어떤 존재로 그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는지에 대한 그 비밀이 숨겨 있습니다. 인자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말하자면 The son of man 사람의 아들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자기를 지칭할 때는 a son of man 한 사람의 인자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정관사를 써서 The son of man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직역을 하자면 그냥 인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아들이니라. 다시 말하면 내가 바로 그 인자니라. 다시 말하면 그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오,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 그래서 당신을 가리켜서 지칭할 때 그 인자,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묘하지 않습니까? 당신 자신을 지칭할 때 내가 사람의 아들이라고 그러지 않고 그 인자라는 말로 삼인칭화해서 당신 자신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그 다음에 이사야서에 대한 이해의 빛을 받지 않고는 이 문제를 풀 수 없고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정말 당신을 자기의 시대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주셨는지가 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니엘서 7장 13절에 보면 이런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자막에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런 것입니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이상 중에 다니엘이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상 중에 보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거기에 이끌려 나아와서 백성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알현하는데 구름을 타고 오는 존재라고 하니까 이것은 그냥 평범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나오는 다니엘서 7장 13절에 “인자 같은 이” 라는 애매한 표현이 나오는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인자와 같은 이라는 것이 여기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서에도 나오고 또 시편 8편에도 나오고 구약에 여러 군데 흩어져서 인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히브리말로 ‘바르나사’라는 표현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 인자라는 표현이 이 성경에 쭉 나오는데 명료하게 그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안 나옵니다. 다만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면 그 인자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다라고 하는 것, 좀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다니엘서 7장 13절에 그런 인자가 나오는데 그 다니엘서 7장 13절이나 에스겔서나 혹은 시편 8편 같은 곳에 나오는 거기에 인자 같은 이.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그 표현을 유대의 문헌에서 찾아보면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표현이 메시아를 가리킨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유대의 문헌에서는 그냥 ‘인자’ 그러면 그냥 평범한 누구의 사람의 아들, 진짜로 인간의 아들만을 의미할 뿐이지 사람의 자식만을 의미할 뿐이지 이렇게 인간을 의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보냄을 받은 그런 존재,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인자라고 소개할 때 그냥 인자라고 소개하지 않고 정관사를 붙여서 그 인자라고 소개를 해주신 것은 바로 너희들이 구약에서 인자에 관한 기록들을 보지. 거기에 나오는 그 인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지, 그렇다고 해서 또 천사는 더더욱 아니지 그러면서도 뭔가 이렇게 하나님 자신은 아닌 것 같으면서 하여튼 그런 신비스러운 존재지, 구약이 애매하게 사람의 아들, 그렇게 명시했던 많은 그 사람의 아들이 바로 나를 가리킨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그 인자, The son of man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면서 또 이사야 53장에 보면 여기에는 목숨을 버리는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마른땅에서 자라나기를 연한순과 같이 자라나서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고...” 쭉 나오면서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고난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렇게 나오면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가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메시아의 고난의 장이 53장에 나옵니다. 이미 벌써 설교도 했고 메시아 고난과 영광이라는 책으로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꼭 한번 사서 읽어보십시오.
그런데 거기에서 나오는 그 고난 받는 메시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내야 되는데 자기가 그렇게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으면서 끌려 다녀서 그렇게 메시아가 되겠는가. 그래서 53장을 읽을 때 사람들은 크게 혼돈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렇게 성경의 토씨하나 바뀌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읽는가 하면 “그는” 이라고 된 것을 분명히 성경이 그는 이라고 했는데 그를 살짝 바꾸어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우리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오, 그러면서 우리라고 바꿔서 읽어서 그것이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고난 받는 자기의 민족의 한탄이라고 그렇게 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 안 맞습니다. 그래서 53편을 연구하다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상황도 가끔 벌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해서 다니엘 7장 13절에 나오는 에스겔서나 시편 8편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어떤 인자가 있고 이사야 53장에서 자기가 고난을 받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는 인자가 나오는데 바로 그 인자가 누구인지를 구약에서는 명확하게 표현을 안 했지만 그 인자가 바로 나다.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서 보면 그 인자라고 하는 그 존재가 나오는데 다니엘 7장 13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거기를 보면 우선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름을 타고 온다고 그럴 때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그런 신적인 존재, 하나님이나 하나님에 가까운 어떤 그런 가까이 있는 신적인 존재가 구름을 타고 오지, 변화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 완전한 인간은 그렇게 구름을 타고 오르내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합니다. 올라가실 때도 구름을 타고 올라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주어집니다. 그게 결국은 예수님이 신적인 존재,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궁금한 것은 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더 좋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을 당신 입으로 안 하셨을까 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무엘하 7장을 우리들이 이해해야 됩니다. 12절 1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위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여기에 보면 이 구절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다윗을 축복하시면서 이 후에 이어질 다윗의 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지역적, 국부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나라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고 더 우주적으로는 이제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만들고 그리고 그 영적인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되심으로서 그 위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영원까지 계속될 예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사무엘하 7장 12절과 13절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전통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이것을 순수하게 육적으로는 이해를 해서 다윗의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기의 나라를 튼튼히 지켜주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정치를 잘 해서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하고 온갖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기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용사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상이 그 당시에 있던 하나님의 아들의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무슨 이야기가 되는가 하면 만약에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처럼 아! 맞아. 인간이 범죄 했으니까 사람으로는 구속할 수 없겠지.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했을 거야.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구나.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셨구나. 이렇게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들은 딱 꿈꾸는 것은 아! 우리가 이때 구약에서 쭉 알고 있었던 그 하나님의 아들, 사무엘하 7장 12절 13절 이하서부터 약속되어서 전통적으로 수립된 그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큰 지도자가 되어서 무력과 그리고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부강한 나라로 만들고 그리고 수많은 나라를 창칼로 복속시켜서 그들을 무릎 꿇게 만들고 조공을 바쳐오게 하는 다윗 시대의 영광을 제현 할 그 하나님의 아들, 그 하나님의 아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하면 즉각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사상, 하나님의 아들 사상에다가 예수님을 꿰어 맞추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마디도 안 했는데도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당신 하시는 일을 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지 않으면 그런 일을 못하실 것입니다. 뭘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병자들을 고치고 막 이런 놀라운 기적을 보니까 예수님은 말을 하시지 않았는데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틀 속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아! 저렇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면 살린 자도 죽일 수 있겠구나. 로마 황제. 가라 그리고 한번에 죽을 텐데. 말씀하시는 길에 힘들지도 않으신데 왕의 그 졸병들도 한번에 다 죽어라. 그 한마디만 하시면 끝나는데. 그게 유혹을 강력하게 느낀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제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놓고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잘못된 것이고 성경이 정말 이야기하려고 했던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이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주고 그들을 바로 잡아주시지 그러십니까? 설명하기 전에 벽돌이 먼저 날아갑니다. 다 집어치우라. 그러면서 막 날아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빌라도의 뜰에 섰을 때 아니 뭘 잘못했습니까? 잘못하게 뭐가 있습니까? 아니 유대인들 해꼬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굶주린 사람 먹이고 아니 병든 사람 고쳐주었는데 보사부장관 표창장을 주지 않을지언정 뭘 잘못하신 게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하는 말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막 소리소리 지릅니다. 그 사람들 대부분이 벳세다 광야에서 보리떡 먹은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종료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소리소리 지르고 일주일 전에 입성한 사람들입니다. 그 주간에, 일주일도 안 됩니다. 그 주간에 그랬으니까. 그런 마당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는데 너희 민족이 전부다 알고 있는 것은 꽝이야. 그것은 너희가 잘못한 것이고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줄게 설명하기 전에 막 날아옵니다.
그것을 그렇게 예수님이 설복해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또 전해서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예수님이 죽으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안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야. 그러면 이 분을 또 믿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은, 아니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데 어떻게 구원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그 인자다. 그러니까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내가 그 인자다. 이정도만 하면 내가 누군지 알겠지. 그게 사람들 마음속에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먹혀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자다. 이렇게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당신이 분명히 신적인 존재다. 하나님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렇게 나라나 부강하게 하고 이스라엘을 잘 먹여 살리는 뛰어난 정치가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사람들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의 그 아들들이라고 불려졌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언약관계는 무엇인가 하면 모세를 대표자로 해서 맺은 그 율법으로 맺은 언약관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서 제일먼저 시내 산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일어났던 일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서 일어난 가장 잊지 않고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중대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율법을 거기에서 받는 사건입니다.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시니까 그 율법을 받으면서 율법을 모세가 낭독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멘 아멘 했는데 아멘 하기 전에 거기 피를 뿌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 피는 죽음을,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린다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 피를 뿌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죽도록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죽음을 당해도 좋습니다. 라고 하는 죽음까지 내건 맹세가 바로 이 언약의 피를 뿌리고 아멘 아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후로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했으면 좋을 텐데 불순종했습니다. 그것도 현저하게 불순종해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당신의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그렇게 살면 안 되고 하나님의 법으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그 선지자들의 피어린 외침을 비웃기나 하듯이 더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고 자신들이 계속 불순종하고 죄를 짓기 위해서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까지도 굽게 만들면서 자기들 좋은 대로 신앙생활하면서 살아가더니 결국 하나님이 이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것이 벌써 언제 일인가 하면 북 왕국 이스라엘은 722년의 일이고 남 왕국 유다는 586년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던 시대하고는 한 500년까지는 아니지만 450년까지 차이가 나는 그 때에 벌서 나라를 잃어버리고 그 시기를 지나면서 바벨론과 메데, 바사, 희랍을 거쳐서 그래서 로마에까지 계속해서 나라와 나라를 이어가면서 계속 속국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불순종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멸하시고 그리고 새로운 영적인 이스라엘을 만드실 것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 때 대표자가 바로 그 인자가 대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자기의 백성들을 다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언약을 받았던 것처럼 이 인자가 그 자기로 말미암아 만들어지게 될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 물론 그 속에는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믿는 사람이 들어오지만 이제는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그 백성들을 모았을 때 앞으로 이루어질 그 백성들의 처음 영적 이스라엘의 조상을 바로 그 인자이신 예수님을 사용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그렇게 인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사상은 이미 출애굽기 32장 10절에도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범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보고 말씀하시기를 나 좀 내버려두라. 이 백성들을 내가 다 정리하겠다. 그리고 너를 조상으로 해서 새 민족을 만들겠다. 그러니까 모세가 간절히 안타깝게 매달리면서 한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넘어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이미 벌써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파기하면 어느 순간에 그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쓸어버리고 거기에서 인자라고 부르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이제는 육적인 껍질에 매인 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그런 육적 이스라엘 혈통에 속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 메시아를 믿는 믿음으로 영적으로 하나 되는 민족과 혈통에 얽매이지 아니하는 신앙으로 새 언약 속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모두 묶어서 영적 이스라엘로 만들고자 하는 소원이 하나님에게 벌써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우리들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데 그 새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던 그 잘못된 메시아사상은 창칼을 가지고 주변의 나라를 정복함으로서 그래서 세워지는 나라였는데 이 새 이스라엘은 그렇게 된 나라가 아니라 그 인자라는 분이 오셔서 그 백성들이 될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고난을 받고 형벌을 받고 죽음으로 그 백성들의 머리가 되셔서 그들을 그 죽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들어오게 만들어서 새 백성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무리들을 보시면서 그들을 다 당신에게로 이끌어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셨는데 바로 그 소원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의 죄를 위해서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그래서 예수님이 처음 이 세상에 등장하셨을 때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그게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당신이 이제 역사 속에 나타나신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인자인 자기를 통해서 구원받은 무리들이 막 생겨나도록 만드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곧 무엇인가 하면 당신이 오셨다. 라고 하는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제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통치를 받으며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완전히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 세상에 그 죄와는 관계없는 한분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분이 말씀을 선포하고 그분이 자기가 메시아라고 하는 신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면 그들이 이제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 이후에 고난을 받고 죽으신 다음에 성령이 임하면 강물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텐데, 그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제 절대로 죽음이 지배할 수 없고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죄와 사망이 지배 화 된 이 세상에서 이 사단의 세력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나타나고 그 왕국이 완전히 궤멸되어버리고 이제는 패잔병들이 여기저기 도망 다니는 그런 아주 창조의 버금가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런 명료한 예언을 따라서 예수님이 이제 딱 오셔서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그리고 심지어는 너희 가운데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까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어서 우리들이 살펴볼 것은 그럼 십자가 사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외치셨는데 결국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백성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라가 있기 위해서는 영토와 주권과 국민이 있어야 됩니다. 주권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고 영토는 이 땅이지만 국민은 이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새 백성들을 만드는 방법들이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북쪽 땅을 이만큼 떼어서 철조망을 치고 여기는 이제 예수의 나라라고 깃발을 세우는 그런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하면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사람들을 모으시는 방법은 그들의 죄가 문제였습니다. 이틀 동안 말씀드린 것처럼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서 이 백성들을 모아야지만 이제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가 이미 실질적으로 사단이 그 사망이라고 하는 무기를 가지고 죄의 병균을 많은 사람들에게 퍼트려서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손아귀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동으로 거기에 매어서 그렇게 꼭두각시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슬을 끊지 않고는 도저히 사람들을 구속해서 자유로운 사람, 그래서 처음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사람들을 창조하셨을 때에 사람이라면 참 이런 존재가 되고 내가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이런 사람으로서 내가 만들어놓은 이 세상을 관리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꿈꾸시던 기대를 따라서 살 능력도 없고 살 수도 없을 정도로 타락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모종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는 그 백성들을 만드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백성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시는 대속입니다.
이것은 내일 계속되겠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대속을 하시는데 그 대속하시는 방법, 죽으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선 그 문제를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강조를 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사상은 창과 칼을 들고 나라를 강력하게 만듦으로 메시아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지만 진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메시아는 그게 아니라 찔림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그 백성들의 죄를 지고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씨들을 모두 모아서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그리고 당신이 그들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짊어 죽음으로서 형벌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이제 죄가 당신이 선택한 사람들, 당신을 믿고 당신의 품으로 들어와 당신 나라의 백성이 된 새 이스라엘 영적 백성들 속에는 그 죄가 주관하지 못하도록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대신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어떻게 구속을 가져오는가 하는 문제는 너무 긴 문제이니까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필이면 왜 십자가였는가. 여기서 이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를 이야기해야 되는데 한쪽국면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즉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아주 고도로 고안을 해서 만들어낸 아주 치밀한 선택이었습니다. 뭐가? 십자가의 죽음이, 그러나 예수님의 편에서 보면 그들의 고도의 계획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만약에 다른 죽음을 택하는 것을 원하셨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다른 방법으로 죽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은 하고 싶어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죽으시던 기간이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계획을 짰습니까? 유월절에는 하지 말자. 백성들이 많이 있는데 그 백성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아니까 만약에 죽였다가 그 백성이 폭동을 일으키면 아주 골치 아픈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하니까 죽이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이 유월절에 돌아가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죽으신 것입니다.
유월절은 바로 구약으로 넘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포로 생활을 할 때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나는데 아홉 가지 재앙이 일어났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재앙이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는데 그때 장자뿐만 아니라 처음 난 것은 짐승의 새끼까지도 다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예외가 아니라 사실은 다 죽어야 했습니다. 죽음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까지 죽으면 안 된다. 너희는 내가 살리는 백성들이니까 내가 비결을 가르쳐주마. 그리고 모세에게 가르쳐주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어린양을 대신 잡아라. 그래서 그 피를 문설주와 지방에 바르면 죽음이 엄습할 때 모두 죽이겠지만 그러나 그 피를 보면 너희는 나와 특별한 약속을 맺은 백성이라는 것을 보고 죽음을 보지 않고 죽음이 넘어간다. passover 죽음이 건너뛰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죽어야지 되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건너뛰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건너뛰는 게 유월절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죽은 어린양이 사실은 예수님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유월절에 안 죽이려고 했어도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이 의미 깊은 유월절에 돌아가시게 하는 것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아귀가 딱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으셨습니다.
결론을 내가 뭘 이야기하고 싶은가 하면 고로 십자가의 유대인들이 아무리 고안을 많이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더라도 예수님이 원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안 원하셨으면 죽었어도 십자가에 안 죽으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이 될 수 있는데 하나는 당신의 죽음이 유월절 사건의 성취라는 것을 보여줌으로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육적 이스라엘을 깨트리시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형성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명료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택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실제적인 이유인데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그 하나님 앞에 인간들이 모두 지은 그 죄, 선택될 백성들이 짓는 그 모든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서 그 죄에 대해서 형벌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예수님이 대속하여야 할 그 죄는 얼마나 크고 악질적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백성들이 선택된 지은 죄와 짓고 있는 죄와 앞으로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그것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이 그 죄 가에 대해서 심판을 하셔야지 되었으니까 죽음치고는 참혹한 죽음이어야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에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있는 그 동안에는 하나님의 눈에 아들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진 재물로 보였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공의의 성품을 따라서 그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서 죄를 짊어진 당신의 아들을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심판하셔야 했으니까 그 죽음이 굉장히 끔찍한 죽음이어야지 되는데 인류가 고안해낸 사람을 죽이는 방법 가운데 가장 잔혹한 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죽음은 생명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통을 느끼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끔찍한 고통입니다. 그래서 못을 박고 그리고 그 다음에 매달렸는데 온 몸이 늘어지면서 못에 이 몸이 걸려 있으니까 50, 60, 키로 혹은 70키로 나가는 몸이 이 못에 박혀 있으니까 몸무게가 늘어지면서 이 살이 계속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록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안 나오지만 죄수들에게 못을 박으니까 계속 찢어지는 것입니다. 오리발처럼, 그러니까 이제 그 다음부터 못이 점점 안쪽으로 들어와서 여기에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박으면 동맥을 건드리지 않으면 박을 수가 없습니다. 동맥이 터집니다. 그러면 못은 레일에 박힌 그런 못과 똑같습니다. 터지면 동맥에서 피가 출혈이 되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두통과, 그리고 견디기 힘든 갈증이 옵니다. 그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6시간이나 매달려계셨습니다. 그 방법을 예수님께서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하는 유대인들이 계속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네가 그리스도인가. 네가 메시아인가. 그것을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네가 메시아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래. 나 메시아다. 어쩔래. 그러셨습니까? 아닙니다. 항상 예수님은 모호했습니다. 모호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비겁해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저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답을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맞는데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당신 메시아야. 그렇게 물어보는데 메시아는 메시아인데 저들의 머리 속에 있는 그 메시아는 완전히 아닙니다. 그래. 나 메시아다. 그런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메시아하고는 틀리다. 그렇게 부분적으로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게 놓고 이야기하면 그 설명을 사람들이 다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의도하고 싶었던 것은 메시아에 대한 새 개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아주 좋은 예가 하나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하고 그렇게 살아가는데 친구랑 만났습니다. 둘이 이야기하는데 너는 뭐하니 그러니까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잘 지내고 있고 뭐 어쩌구저쩌구 그렇게 합니다. 야, 너는 뭐하냐고 하는데 할 이야기 없습니다. 아직 직장을 못 구했으니까. 그런데 어떤 애가 지나가면서 선생님! 그러는 것입니다 주일 학교 선생입니다. 그러니까 애가 아, 이제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애가 선생님 하니까. 그리고 이 애는 헤어져서 이제 갔습니다. 너 교사니? 그리고 물어봤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됩니까? 그럴 경우 간단합니다. 교사는 교사인데 월급 안 받는 교사야. 교회에서 애들을 가르치거든. 그런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았을 때(?) 할까봐 너 교사니? 저쪽이 물어보는 것은 학교에 가서 분필 들고 회초리 들고 가르치면서 월급 받는 그 교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사는 맞습니다. 그런데 매일 교회에 와서 공과 책 들고 애들 가르치고 월급도 못 받는 그리고 잘못하면 전도사님에게 혼만 나는, 똑바로 해, 그런 소리만 듣는 교장 없는 학교의 교사입니다. 그런 느낌을 무한정도로 확대해서 생각하면 됩니다. 워낙 이게 말이 안 되니까
예수님이 뭐 이렇게 소심하시고 겁이 나서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이 명확하게 이야기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계속해서 네가 메시아인가 이렇게 물어본 이유는 아니지. 너 메시아 아니지 그런 대답을 듣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야 나는 메시아다. 그 대답을 듣고 싶은 것입니까? 그러니까 틀린 것입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그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메시아다. 그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래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채근한 것이었습니다. 왜 나는 메시아가 아니야. 내가 무슨 메시아야. 나는 목수의 아들로서 태어나서 집에 있으니까 하도 갑갑해서 성경이라도 좀 가르쳐줄까 하고 나왔는데 사람들이 엄청 따라다니네. 미안해. 너희들 교인 다 뺏어서 미안해 다 돌려보낼게. 그러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해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그렇게 너 메시아지? 그렇게 물었을 때 이 사람들이 계속 메시아라는 답을 듣고 싶었던 이유는 메시아. 그러면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는 왕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통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온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렐루야 하면 되지 않은가. 그런데 그들은 메시아는 나사렛에서 난 저 젊은이가 구약에서 그렇게 꿈에도 그리고 있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는 그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는 정치적인 그 훌륭한 용사로서의 그 구원자일 수가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아닐 수 있나. 그러면 그들은 근거는 없었지만 몰골을 봐라. 무슨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얘기하면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제가 어떻게 구원자가 되겠는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놀라운 신앙적인 개념이 그래 겨우 직업도 없이 다니는 이 사람이란 말인가. 처음서부터 아니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이상하게 막 몰려서 이분을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백성들을 혼돈시키는 이상한 거,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지만 많은 사람들이 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눈을 이렇게 떴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노시하고(?) 치자니 도저히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또 그것을 아니라고 하자니 백성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고 싶었는가 하면 귀찮은 존재니까 우리의 종교적인 체계를 자꾸 허물어트리고 아무리 봐도 가르치기는 가르치는데 우리가 가르치는 것하고 연관선상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귀찮은 존재라서 없애버려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없애버리는가. 메시아라고 그래라. 메시아라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왕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왕이라고 그러면 그것을 빨리 로마에 가서 제가 왕입니다. 그렇게 이르려고 그런 것입니다. 제가 왕이래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왕이래요. 이렇게 일러서 로마의 대한 반역자로 몰아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것입니다. 이 사람을 메시아로 몰아서 왕이라고 그러면 로마는 펄펄 뛰는 것입니다. 로마가 가장 용서하지 않는 죄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금을 안 내는 것과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나머지는 관대했습니다. 이것은 막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입니다. 단칼에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세금을 내야지 되는가 하고 물어봤더니 그러니까 예수님이 교묘하게 피해가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그러니 세금을 안내겠다는 것으로 죄목을 씌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굉장히 지혜로우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다음에 메시아냐고 물어봤던 게 무엇인가 하면 내가 메시아라고 하는 대답을 받아내면 그 다음에 봐라. 자기가 왕이라고 그러는 사람이 있다. 이 무리를 규합해서 로마에 반역을 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우두머리가 여기 있다. 우리는 이를 처치할 권한이 없으니까 어떻게 생각하는가. 단칼에 처리해. 그러면 정치적인 힘을 빌어서 예수님을 죽여 버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죽여도 또 이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 이럴 수 있습니다. 저 못된 사람들에게 메시아에게 고난을 가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무엇인가하면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아 죽인 자는 신명기 21장 23절에 의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골치 아픈 그의 존재를 없애버리고 또 하나는 그를 따르던 백성들로 하여금 병든 자도 낫고 뭐 하나님의 말씀으로 뭐 좀 하나 했더니 어이구 하나님이 저주한 인간이었구나. 그리고 침 뱉고 돌아서게 하는 것이 그 유대인들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 십자가를 택했던 것입니다. 왜 목매달아 죽이십시오. 칼에 찔러 죽이십시오. 바다에 빠트리십시오. 그렇게 이야기 안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렇게 외쳤습니까?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재미있는 게 무엇인가 하면 요한복음 19장 15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그랬습니다. 네가 왕이냐 그랬더니 대답을 안 하십니다. 그랬더니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양쪽으로 협박을 한 것입니다. 그 재판하는 사람에게는 뭐라고 협박을 하는가 하면 네가 만약에 이 예수를 살려주면 스스로 왕이라고 자칭하던 사람을 살려주니까 로마를 등지는 것이다. 그렇게 협박을 하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가이사에게만 지배를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은 가이사가 아니라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섭리 속에서 자신들의 입으로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습니다. 이 고백을 곧 뭘 암시하는가 하면 이제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된 백성들로 하나님과 정치적으로 관계를 맺는 그 모든 관계는 끝나고 그리고 이제는 그 육적 이스라엘의 껍질은 깨트려지고 그리고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들어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새롭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백성들이 형성되어서 새 이스라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끝나고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의 출현이 예고되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속죄함을 얻은 많은 사람이 믿음을 통해 구속을 얻은 많은 무리들이 이제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악 된 세상에 사는데 이 세상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의존하며 하나님이 자기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이 죄로 말미암아 흐려졌지만 어떻게 하든지 은혜를 받고 순종하고 의존하면서 그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사람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려고 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셨을 때 절대적인 의존의 관계로 살아가려고 만드셨습니다. 그때 독립선언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독립선언을 안 하고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 없이 살수 없네. 찬송 부르면서 사는 것입니다. 독립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속하고 싶습니다. 그런 변화가 놀랍게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못 박아 죽인 그 예수가 그대로 돌아가셨으면 조용하게 모든 것이 끝났을 텐데 죽은 지 사흘 만에 예수님이 죽으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부활하셔서 살그머니 승천하셨으면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르고 그냥 끝났을 텐데. 예수님이 그렇게 안하시고 부활하셔서 당신의 모습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 생전에 있었던 것처럼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교제하시고 잡수시고 다니시고 하면서 사십일을 이 지상에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전에 예수님이 죽는 것을 알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 죽는 것을 보았고 또 지금 부활한 것도 본 사람들은 이 뭔가 간격을 메어야 했습니다. 논리적으로, 그래서 이게 견딜 수가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제일 먼저 뭐라고 했는가 하면 헛것일 거야. 그거 환상일 것이야. 그런데 환상이 아니라 만져보면 정말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르치셨는데 눈에 생생하게 보이는데 심지어는 못 자국까지 그대로 나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생생하게 가르치시는데 그 가르침도 옛날에 그 목소리, 그 음성, 그 톤으로 옛날에 가르치셨던 것과 똑같은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시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께로 가르침을 받았을 때에 그때 그 느낌하고 똑같은 느낌입니다. 다만 그때 그분은 죽기 전에 그분이었고 이분은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문으로 들어오실 수도 있고 벽을 통과하실 수도 있습니다. 시간에 얽매이실 수도 있고 안 얽매일 수도 있고, 사라지실 수도 있고 나타날 수도 있고 제자들과 함께 손잡고 걸어 다닐 수도 있고 홀연히 없어질 수도 있고 그러니 이게 아주 분명히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인데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것을 도저히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적인 사상으로서는 이것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활 자체가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그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에게 와 닿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로마서 1장 4절에 보면 무슨 표현이 나오는가 하면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것은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하나님이 부활을 통해서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을 해주셨다는 이야기인지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인지 이게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인정해주시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셨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부활을 통해서 인정하게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이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아주 치사하게 나무에 매달아서 딱 죽인 것입니다. 신명기에 나온 것처럼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나무에 매달아 죽인 게.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래. 맞아. 예수님을 알고 보니까 죄인이었어. 죽어 마땅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의로우신 그분을 어떻게 그렇게 나무에 매달려서 죽게 할 수 있는가. 의로운 사람은 그렇게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커다란 신앙적인 혼란을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나타난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을 경험하고 나니까 무슨 질문이 풀리는가 하면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의문이 풀리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 죽음의 의무가 아직 무엇인지 부활한 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확실하게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가 아닌 게 분명했습니다. 뭐?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린 그 죽음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아서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매달리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하나님이 왜 살리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면 그렇게 살릴 사람이 없는데. 만약에 당신이 싫어서 저주해서 죽여 버린 사람이라면 자기의 죄 때문에 못박혀죽으신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그렇게 죽여 놓고 하나님이 다시 살린 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그 때에 어렴풋이 제자들의 마음에 이 죽음의 의미가 결코 유대인들이 교묘하게 조작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은 것이다. 봐라. 너희들이 따라다니는 그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다. 왜 나무에 매달아죽지 않았느냐. 자고로 하나님의 저주를 안 받은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죽은 거 봤나. 이렇게 한 것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었는데 쾅! 하고 깨트린 충격이 일어났는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의미는 잘 몰랐지만 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무슨 궁금증이 나오는가하면 그러면 왜 죽으셨을까? 이게 궁금한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은 아닌데 왜 죽으셨을까 하고 생각을 하니까 이제 성령이 강림한 다음에 이제 깨닫게 되었지만 예수님이 하시던 말씀이 명료하게 생각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성경 말씀이 잘 깨달아집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일관되게 전해 내려오는 게 무엇인가 하면 “인자의 온 것은 오히려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 인자가 죽으면 너희가 살리라” 한 이런 많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약속들 가르침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의 이 정신세계 속에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쾅! 하고 터지면서 이 거짓 메시아사상이 깨트려지면서 단숨에 폭발적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무엇인가 하면 그렇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이 능력으로 다시 살리셔서 그 죽음이 자기의 죄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셨고 그렇게 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 매달려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구나.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렇게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자신의 자원으로 도저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도록 버림받은 인간을 구원하셔서 다시 당신의 품으로 불러 모으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에 그들이 경험했던 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변화는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였습니다.
그 다음에 뭐 밖에 안 보이겠습니까? 예수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예수밖에 보이지 않아서 생명을 걸고 이 예수 이외에는 천하에 누구도 구원받을 이름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다고 외친 사람이 바로 누구인가 하면 바로 베드로가 그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수님의 전 가르침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철저하게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깨진 가운데 불운하게 살고 일시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제사라는 길을 열어주셨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궁극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데서 자신들을 구원해내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고린도 전서 15장 3잘과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나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바울이 전수받은 것은 저절로 깨닫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직접 전해주셨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도 누구에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초대교회의 복음 선포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뭘? 예수님은 바로 나사렛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아니라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 하나님의 아들을 바로 하나님께서 그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셨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오직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그의 인생의 전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기쁜 소식이 된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래서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들은 왜 다른 종교는 안 그러는데, 야, 불교를 봐라. 얼마나 관대하나. 예수님 태어나신 날에 축전도 보내고 플랜카드도 만들어서 예수님 생일 축하한다고 마스코트 만들어서 보내지 않나. 그런데 왜 너희는 왜 그런가, 그 사람들은 그렇게 평화를 사랑해서 모든 종교가 함께 어울려서 어깨동무하자고 하는데 너희들은 왜 예수 외에는 안 된다고 그러는가. 전부다 너희의 인격적인 편협함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게 아닙니다. 이것은 이제 신앙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들은 그런 방법에 의해서 다양하게 구원받는 길이 있다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한 구원 사건을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께 나갈 자가 없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우리를 누구도 구원해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 모든 것들은 인간에게 속한 유한한 자원을 가지고 자기를 구원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제 말씀드린 대로 모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유한한 인간을 자원을 가지고 무한한 타락과 무한한 무능과 무한한 죄악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구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것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방법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원한 하나님의 형벌에 놓여 있는 인간의 그 비참한 상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자원이 끊어진 가운데서 이 세상에서 그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려서 그래서 고통이라고 하는 증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인간을 전혀 치료할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결코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여러분보다 더 많이 공부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확실한 것 하나는 지금 세 시간 동안에 걸쳐서 말씀드린 것 같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죽으신 이 사건이 보통 사건이 아니었구나. 그리고 그분이 거기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 바로 나의 구원과 직결되는 사건이었구나. 이 과거에 우리들이 잘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건이 아니라 바로 그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숨겨 있어서 예수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신 것이었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깊이 그 백성들이 깨닫고 거기서 와르르 무너졌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유대인이었고 잘못된 신앙을 가졌지만 마음속에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살아가고 싶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껏 까지 잘못된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보면서 아! 정말 하나님을 범죄 해서 철저히 떠났던 그래서 주님이 창조해놓으셨지만 창조의 목적대로 조금도 살아보지 못한 그 비참한 인간들, 거기에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해도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더 어떻게 할 수 없고 점점 더 왕성해가는 이 죽음의 근원이 되는 죄의 병원균을 퇴치할 수 없어서 죽음이라는 질병의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이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구원방법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라는 것을 그 백성들이 청천벽력과 같은 엄청난 충격으로 그들의 지성과 그들의 영혼을 찢으면서 정오의 햇볕과 같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이제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을 수가 없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경험에 붙들려서 그들이 생명을 바꾸면서까지 외쳤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다. 베드로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외쳤던 것은 너희가 나무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리셨으니 그분이 곧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다. 너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라. 그래서 너희들이 신자가 되라. 그게 목숨을 걸고 외쳤던 것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외쳤던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마지막에 설교를 다 끝냈지만 마지막에 그렇게 외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들이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메시아였다. 너희들이 못 박아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죽음을 통해서 너희를 구원해낸 것이 너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고난을 받는 것도 그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도들이 이 공통된 고백 속에서 생명을 걸고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예수가 그들에게 전부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위해서 살고 예수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오늘날 변하지 않은 이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이 세상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있어도 세상이 좀처럼 교회에 의해서 변화되지 않는 모습들을 한번 보기를 바랍니다. 알콩달콩 모여서 기분 좋게 교제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들어놓으신 목적은 그렇게 여러분들이 자기만족에 빠져서 살라고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 만드시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백성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죽음의 증상이 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그 질병에 걸려서 이 세상에 있는 돈이나, 이 세상에 있는 명예나, 이 세상에 있는 사회 구조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이 죽음의 병에 걸린 이 비참한 사망의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날뛰고 그리고 마치 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과 같이 죄 아래로 모이고 죽음 아래로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한 사람들, 땅에 창조해놓으시고 하늘에는 천사들을 두어 다스리게 하셨지만 땅에는 그 사람들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당신이 지어놓으신 이 세계를 다스리게 하시고 싶어서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당신의 형상을 그들 안에 조각해놓으시고 심어놓으시고 그들에게 맡겨주신 그 사람들이 바로 불나방처럼 죄 아래 달려들고 지옥의 불길 아래로 떨어지는 세상이 아닙니까? 세상이 어떤 종류의 고통에 시달리든지 간에 이 고통 하는 세상에 대한 영원히 변치 않는 답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의 복음 이외에는 도무지 또 다른 해결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캄캄한 세상에서 죄로 무지하게 살아가는 그 무지한 백성들, 죄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단칼에 생명을 거두셔야지 만 정당한 것인데 그들을 이 땅에 살려두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그렇게 모욕하고 그분의 이름을 욕보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그렇게 철저하게 망각하고 살아가는데도 하나님이 그들을 이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가 있다면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기쁘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원대로 하시자면 그들은 모두 쓸어버리셔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단 하나 기대를 걸고 계신 것은 누군가가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단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다가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만물의 영장답게 다스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단 하루라도 살다가 죽게 하시려고 그 견디기 힘든 죄악의 광경들을 보시면서도 하나님이 이들을 지옥으로 보내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이 땅에 남겨두시고 지금도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동구 밖에서 그 타락한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사랑을 알고 당신의 품에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구원하심에 있어서 당신이 직접 하시기를 결정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의 이 십자가의 사랑, 복음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알았던 사람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살아나신 이 사건이 자기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바로 말할 수 없이 자기 한 인간을 향한 목매임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우리들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복음을 알았던 성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 사랑 가지고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과 같은 거리에도 찾아가서 그들을 붙들고 인생의 진실이 무엇이고 그리고 네가 누구 아들인데 이렇게 죄에 복종해서 사는가. 이제 이 시대는 끝났고 이제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너를 너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네 마음의 문밖에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문 굳게 닫아두니 한없는 내 죄라
그래서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다양한 환경에 살지만 둘 중의 한사람일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어떤 사람은 이미 용서받은 죄인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제 이 복음의 감격을 유지하고 예수밖에는 이 세상에 모든 소중한 것이 없고 그리고 짐승처럼 이 땅에 태어나서 동물처럼 비참하게 죽어갔어야 했을 그 더러운 인간들을 예수님이 우리의 흉악한 죄를 위해 죽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그 숙명적인 죄에서 건져내서 이제 참사람으로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셨으니 부지런히 예수님을 믿고 옛사람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으며 성화되어서 정말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보람을 안겨드리고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아버지의 마음에 무한한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 이외에는 이미 믿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모든 것은 정말 최고의 소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교회는 나왔지만 가끔 다녔지만 주님을 영접한 적이 없다면 오늘 그 날입니다. 오늘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깊이 영접하고 거듭나십시오.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예수를 못 박았던 죄와 여러분들의 모든 원죄와 본죄들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나는 죄인이오니 예수의 피로 나를 용서하시고 이제 나도 정말 주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단 일년만이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다가 목적대로 살다가 갈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죄를 용서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분과 함께 동행 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왜 죽으셔야 했나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상)
월요일과 화요일은 왜 구원받아야 하나. 그리고 어제 수요일은 왜 그리스도께서 오셨나. 그리고 오늘 이제 이 시간에는 왜 죽으셔야 했나. 이 문제를 오늘 다루어보겠습니다. 다 다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한번 힘껏 나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두 시간에 걸쳐서 말씀드린 것은 인간이 모두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고 그 병원체는 죄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린 증상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악과 그리고 고통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 이제 두 가지 결과가 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질병은 그렇게 해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병은 우리에게 계속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죽음은 이제 모든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에게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그 죽음의 지배아래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에서는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이제 인간의 그 죽음이 형벌 때문이라는 사실을, 죄에 대한 형벌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자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째든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고 나중에 이제 하나님이 그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셨는데 그 용도가 무엇인가 하면 이 땅에서 우리들을 마지막으로 당신이 직접 거룩하게 하셔서 하늘나라로 인도해주시는 한 수단으로 죽음을 사용하셨지만 그러나 일단은 그 죽음이 모든 사람들 위에 보편적으로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고 인간은 이 죽음을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이렇게 하나님의 형벌인 동시에 사단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이라는 것을 히든카드로 삼아서 인간을 향해서 그 죽음이라는 카드를 내밀면서 그들이 더더욱 죽기를 두려워함으로서 바보같이도 생명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대신에 죽음을 주장하고 있는 마귀의 세력에게 복종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그러나 잠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가운데서 집행이 유보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자손들을 남기고 이 땅에 인류가 멸절되지 않고 계속해서 이제 생존해오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생존의 기회는 하나님을 믿을 기회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하고 인생사는 동안에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만 동시에 또한 이 세상의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멀리 주님을 배반한 가운데 살아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이 땅의 문화를 건설하면서 문명을 가꾸면서 그렇게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죽음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확실하기는 했지만 잠시 집행이 유보되었지만 영혼의 죽음은 즉각적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에도 이미 그들의 영혼은 죽었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완전히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자 처음에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당신과 교통하게 하시고 거기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시고 그는 그 자원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그리고 순종하면서 사는 인간이 창조되었는데 그런 관계가 모두 깨지게 되었습니다. 독립을 원했고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범죄 하였지만 그 결과는 인간이 도저히 독립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들은 아주 비참하게 되었고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 그리고 견디기 힘든 이 존재의 괴로움이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자신의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이 땅에 살아있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 고통이 되었고 어떤 평안도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목에서 오는 어떤 평안도 누리지 못한 채 인간들의 삶은 나날이 고통과 저주스러운 삶을 계속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의 결과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두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와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들로 이 땅을 다스리게 하자.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형상’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첼레메’라는 단어고 ‘모양’이라는 말은 ‘데무트’라는 단어인데 이 두 번째 단어는 바로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동침해서 가인을 낳았을 때, 그때 그 데무트를 아담의 데무트를 닮은 가인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형상과 모양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지만 그러나 대체로 성경적인 입장에서 서 있는 많은 신학자들은 이 ‘첼렘’ 즉 형상이라는 말과 ‘데무트’ 이 모양이라는 말은 두 단어가 다른 단어로 반복되고 있지만 성경 전체의 의미로 볼 때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형상은 심장이나 장기와 같이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진 해부학적 기관은 아니지만 마치 인간 속에 하나님께서 이성을 주시고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감각을 주신 것처럼 해부학적으로 만져지지는 않지만 반드시 인간 속에 실제로 있는 영혼 안에 실제 하는 그런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이 형상은 본래 영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는데 그것들 중에 닮은 것을 인간에게 주심으로 하나님이 인간 속에 두신 그 형상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교통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교통하심에 대해서 응답할 수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피조물이 되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상은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가 교제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영원불멸한 존재로 이 세상 지난 저 세상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그런 특징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형상은 형상과 모양이 같은 말이고 그래서 그 형상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자연적인 형상과, 또 하나는 도덕적인 형상으로 나누어집니다. 이 자연적인 형상은 이성과 관계된 형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도덕적인 형상은 신앙에 관계된 부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자연적인 형상의 기능은 이성으로 생각하고 추론하고 그리고 선악을 분별하고 하는 그런 이성과 그 다음에 도덕, 그리고 또 한번 하나 더 나아가서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을 다 주고 그것으로 끝났지만 인간은 죽어도 죽지 않고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영혼은 영원히 살아서 그래서 믿는 자는 하늘나라로 가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간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결과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형상을 가리켜서 자연적 형상이라고 부르는데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이 자연적인 형상은 그 죄로 말미암아서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상당 부분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그런 반쯤 파괴된 존재로 형상이 아직까지도 잔존하게 되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도덕적 형상인데 이 도덕적 형상은 이제 하나님과의 신앙적인 관계와 관련된 부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에 관해서 성경은 참 지식과 의와 거룩의 본질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도덕적 형상이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고, 그를 진정으로 그에게 순종하게 하고, 그를 진정으로 따르게 하는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할 수 있는 가장 유일한 통로였는데 그 도덕적 형상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이 파괴된 도덕적 형상을 두고 이런 비유를 썼는데 여름날에 생선이 이렇게 막 궤짝 같은 데 있으면 짓이겨지는데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니까 그게 썩으면 파리들이 날아다녀서 이 생선이생선이 아니고 거의 죽처럼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부서진 인간의 도덕적 형상의 현 상태라고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것도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없이 그렇게 도덕적 형상이 파괴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물을 인식할 수 있도록 두 개의 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는 이성이었고 즉 자연적 형상이었고, 또 하나는 신앙, 곧 도덕적 형상, 혹은 초자연적 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온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고 하나님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하나님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완전히 몰라도 아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서 도덕적 형상, 즉 초자연적 형상이 철저하게 궤멸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서 자연적 형상도 상당부분이 파괴되어버렸습니다. 마치 눈 한쪽이 머니까 그것이 질병이 번져가서 반대쪽에 있는 눈도 함께 거의 실명상태에 갔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사람들은 이 두 형상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어떤 정확함이나 그리고 인간에게는 어떤 올바름도 찾아볼 수 없고 완전히 이성적으로도 어떤 능력이 없는 그런 사람인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는 그와 다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육체에 속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속한 진리를 말할 때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도, 특별히 불신자들이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어제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자연적 형상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연적 형상을 활용해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해내신 그 창조 속에 깃든 법칙들을 찾아서 일구어낸 그 업적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과학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법칙들을 찾아가면서 과학들을 일구고 이처럼 문명과 문화를 일구어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도덕적 형상,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관계된 부분이 완전히 궤멸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마치 더듬이가 잘려버린 귀뚜라미처럼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고 두 눈을 완전히 실명해버리고 그리고 자신을 인도하던 개도 놓치고 그리고 더듬으며 가던 지팡이까지 떨어트려서 한걸음도 옮겨놓을 수 없게 된 그런 소경과 같은 상황에 서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 하고 더듬거리면서 찾아가다가 벼랑으로 구를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 이게 바로 도덕적 형상, 즉 초자연적 형상이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도덕적 형상은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여전히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짐승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어느 정도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1장 7절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이니” 라고 말함으로서 인간을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불러도 좋은데 그 말은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랑의 원리를 적용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을 때 그 사랑에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도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죄인들도 사랑하는데 그 사랑하는 이유가 그렇게 사랑을 해야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있고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지만 평화로운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사랑하는 그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적인 죄인도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비록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형상을 대하는 우리의 이웃을 향한 태도는 곧 영이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일치한다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이 십자가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안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깊은 감화를 받게 되면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갖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갖게 되는데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게 만들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핵심으로 말하자면 그런 사랑을 경험하고 비참한 인간들 속에 있는 그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그것을 붙들고 울 수 없으니까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울어주고 그렇게 그들이 다시 그 형상을 구원받아서 회복하도록 그렇게 희생하면서 사는 삶이 이게 요약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죄의 이야기를 하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 죄가 왜 그렇게 심각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긴 것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깨졌다는 것입니다. 관계가 깨졌다는 것은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부부가 죽어라 이층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아래층에서 살던 사람이 견디다 못해, 참다못해 올라갔습니다. 그랬더니 이 부인이 막 바가지를 집어던지면서 남편에게 이 죽일 인간아 가서 없어져버리라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나 저 인간하고 살기 싫어서 정말 죽겠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랬습니다. 아, 그렇게 하려면 매일 시끄럽게 하지 말고 이혼을 해! 그러면서 소리를 질렀더니 그 여자가 그 사람에게 바가지를 던지면서 하는 말이 결혼을 했어야 이혼을 하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이미 벌써 의무를 위반해서 관계가 깨졌다는 것은 이미 뭘 전제로 하는가 하면 관계가 세워졌고 거기로부터 의무가 주어졌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가 중요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거기서 이제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무엇인가 하면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은 워낙 말씀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을 가진 분들이기 때문에 잘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거기서 우리들이 고려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언약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관계라고 하는 말의 이 ‘언약’이라는 말은 히브리말의 ‘베리트’라고 하는 것을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희랍어에 ‘디아데케’라는 말을 옮긴 것인데 우리말에는 정확한 번역이 없습니다.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어이, 내일 와. 책 한권 줄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언약이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의 언약은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베리트, 그리고 디아데케라고 하는 두 단어를 번역할 때 계약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계약, 그러면 사글세방 전세방 계약한 것 밖에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관대 하나님하고 계약을 맺겠는가.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계약은 너무 세속적인 것 같아서 하여튼 언약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만 이것은 쌍방적인 약속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계약의 형태를 가진 언약이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타락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타락한 인간이 죄가 심각해졌고 그렇게 심각해진 인간을 버려두지 않고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이 당사자가 되어서 우리와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우신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세 가지 계약의 성격을 띤 언약이 있습니다. 그 계약의 성격을 띤 언약이 있는데 그 계약, 언약의 배경은 설명을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지금 설명을 드리자면 여러분들이 아마 두고두고 구약, 신약 이렇게 이야기할 때 언약. 이렇게 이야기할 때 실감이 나실 것이라고 봅니다. 그림처럼 묘사를 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시를 전달하실 때 절대로 다른 나라, 그리고 다른 사람의 문화를 가지고 계시를 받는 사람들에게 전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이 살고 있는 문화를 이용하셔서 그들에게 계시를 전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잘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문화와 이런 것들을 사용하여 전할 때 그 시대 사람들이 생생하게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귀신을 묘사할 때 제가 잘 드리는 비유인데 귀신을 묘사할 때 우리는 대게 남자가 안 나타나고 여자가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아주 못생긴 사람은 그 귀신에 등장도 잘 안됩니다. 적절하게 그리고 그 사람은 항상 하얀색 옷을 좋아하고 생머리를 좋아합니다. 생머리 타입으로 화장기도 없이 하얀 옷을 입고 그리고 나타나는데 항상 입술과 눈은 파란색이고 이쪽에 토마토 즙이 쭉 흐릅니다. 그것을 보면 동양문화권에 특히 우리 나라사람들은 그리고 파란빛이 비추면 귀신이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그림을 서양에 사는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그 사람들이 자꾸 가까이 가서 이게 뭔가. 이게 누군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결국은 그 귀신이 서양에 가서 쪽도 못쓰고 창피를 당할 것입니다.
서양의 귀신은 그렇게 등장하지 않고 우리와는 반대로 까만 옷을 입고 안감은 빨간색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확 뒤집어서 빨간색이 좀 보이게 하고 그리고 왜 그런지 이빨이 반드시 두개가 길게 나오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늘과 성경책을 아주 무서워하는 그런 드라큐라로 등장을 합니다. 그런 귀신이 우리나라에 나타나서 이조 시대에 이렇게 나타났다면 사람들이 가서 이빨을 흔들어놓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너는 어디서 왔기에 이렇게 독특한 이빨을 가졌니. 우리 집에 와서 새끼나 끊어라. 그럴 것입니다. 이처럼 문화를 타고 이렇게 이해가 되기 때문에 문화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쓰여 지던 당시에 특별히 주전 15세기 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때 중근동 지방에는 어려운 말로 ‘벳셀트리티’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벳셀’이라고 하는 것은 봉신을 의미하고 ‘트리티’는 조약을 의미하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큰 나라의 왕이 있고 그 나라를 자기가 다 다스릴 수 없으니까 조그맣게 쪼개어서 맡겨두는 각 성의 성주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계약 맺어집니다. 그러나 사실 계약이라는 게 웃기는 것입니다. 큰 나라를 정정해놓고 서울에 있어서 자기가 다 다스릴 수 없으니까 평소에 그래도 마음에 들던 사람, 너, 너, 너... 7명만 이리와라. 내가 이 나라를 다 다스릴 수 없으니까 중앙에서 내가 하고 7개로 쪼개어서 너희들을 각 성에 왕으로 삼아줄게. 유감 있어. 유감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거기에 선택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럴 때 계약이 성립되려면 계약서를 씁니다. 그래서 계약서를 쓸 때 그러면 그것을 누가 씁니까? 그 왕 혼자 쓰는 것이지. 이것은 좀 봐주라. 왕이 그러겠습니까? 황제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계약서를 씁니다.
계약은 대게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서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한 동지가 되어서 이제 이 나라를 해방하고 우리가 이렇게 왔다. 그리고 이제 의무조항이 나옵니다. 왕인 나는 너에게 이 나라를 맡긴다. 이 나라는 네가 세금을 거두어서 먹고 살아라. 단 세금에 절반은 나에게 넘기고 그리고 전쟁이 나면 너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나에게 와서 죽기까지 싸워서 나를 지키고 이 나라를 보호해야지 된다. 그렇게 약속을 쭉 하고 마지막에 우리는 이 약속을 지킬 것을 천지신명에게 약속한다. 둘 중에 누가 이 약속을 어길 때에는 천지신명의 저주가 있을 것이니라. 그렇게 해놓고는 커다란 짐승을 쪼개어놓습니다. 그래서 황소 같은 것을 쪼개서 둘로 갈라 반쪽으로 쪼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세로로 그리고 벌려놓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몇 바케스의 피가 낭자하게 흐를 것입니다.
그때 많은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 큰 나랑 왕과 이제 성을 다스리게 된 작은 왕이 함께 그 약속된 계약서를 피를 밟고 그 짐승 사이를 지나갑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누구든지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천지신명이 짐승이 이렇게 쪼개서 죽은 것 같은 죽음을 어긴 사람에게 내릴지니라. 하고 그것을 하나씩 갖고 있고 하나는 신전에다가 보관을 하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 문화에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이 젖어있었습니다.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이 내리는 이 명령이 굉장히 심각한 것이라고 아무리 강조를 해도 이 사람들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법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를 선택해서 이제 열국의 아비로 삼고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고 내가 너를 복주고 복주리라 이렇게 말하지만 아브라함이 그것에 대해서 이를 믿었다고 했지만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의심이 갑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원래 메소포타미아에 아버지와 함께 우상을 만드는 집에서 살던 사람이었는데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많은 신들이 인간들에 의해서 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들의 공통점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이든지 인간에게 재물을 얻어먹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안 가리는 걸근대는 신들이었고, 또 하나는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신들이었습니다. 일관성이 없고 도덕성이 없는 그런 이 신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여호와라는 분이 나타났지만 처음에 아브라함은 그분이 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이제껏 자기가 만났던 그 수많은 신들과는 완전히 틀린 그런 탁월한 인식을 갖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진실인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보고 짐승을 잡으라고 해놓고 하나님이 불로 임하셔서 불로 쪼갠 그 짐승 사이를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번역하자면 하나님이 기이한 불로 나타나셔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갔다는 것은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면 내가 너에게 이렇게 약속했는데 꼭 지킬게. 안 지키면 내가 저렇게 죽임을 당하마.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계시를 해주실 때 당신 수준에 맞추지 않고 사람 수준에 맞추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돌도 안 된 애 보고 야, 음식먹자. 그러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맘마 먹자. 그래야지 알아듣습니다. 너 그렇게 계속 젖꼭지 물면 징계 받는다. 애는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런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인간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 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강력한 인상이 찍히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장난이 아니구나. 이게 진짜로 이루어질 모양이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이런 효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결국은 뭘 의미하는가 하면 언약은 언약인데 죽기까지 준수해야 되는 계약입니다. 맹약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 언약을 어기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 혹은 계약이라고 하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언약에는 하나님,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를 대표로 하는 인간과 함께 맺는 세 가지 종류의 언약, 계약적 성격을 띤 언약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지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같이 아담과 맺으신 언약입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행위를 담보로 했다고 해서 행위 언약입니다. 그 행위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안 먹으면 내가 계속 너희를 이렇게 영생을 누리게 만들어주고 만약에 먹으면 너희를 정녕 죽이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당사자는 하나님과 아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 이제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범했으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 깨트려진 것입니다. 깨트려진 그 관계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결과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그리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죽음이라는 질병에 악한 증상들이 고통과 죄악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의 복원이 없이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회복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다시 두 가지 언약이 나오는데 하나는 구속언약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은 스가랴서 6장 13절에 보면, 자막에 뜨고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오,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평화의 의논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사이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다시 평화롭게 만드는 것에 대한 이 의논이 있었고 그 의논이 언약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을 다 말씀드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지만 이런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그를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혀 성령으로 잉태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게 하시고 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 함께 하시고 죽으시면 그를 다시 살려내셔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만드시는 것이었고, 예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었고 인생이 고통을 다 당하시고 율법아래 복종하시고 그리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성자인 네가 그렇게 하면 성부인 내가 저들과의 깨어진 관계를 고치고 그래서 다시 저들과 화평하게 관계를 맺고 인간의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겠다고 하는 계약의 성격을 띤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구속의 언약을 따라서 그것을 이행하는 일환으로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고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세 세 번째, 또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언약이 무엇인가 하면 은혜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사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선택된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은혜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 아담 언약과 대칭해서 부르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 언약은 행위 언약인데 이름을 바꾸자면 아담 언약이 되겠고, 은혜 언약은 바꾸자면 예수 언약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위 언약을 은혜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 행위를 담보로 하였지만 이 세 번째 대조되는 은혜에서는 행위를 담보로 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은혜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죄를 안 보고 넘어가주시는 특별한 호의를 베푸시는 일환으로서 은혜 언약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은혜 언약의 약속과 요구는 무엇인가. 당사자는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과 예수를 머리로 하는 선택된 백성들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도 그 은혜 언약의 당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 언약은 첫째로 약속은 무엇인가 하면 예레미야 31장 33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나는 너희와 너희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들이 되고 나는 네 하나님이 되리라. 고 하는 이 약속이 성경 66권 전체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것을 옛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옛날 약속, 즉 구약이고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 새 약속, 곧 신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고 불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도 바로 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이 가장 근본적인 약속의 실현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작은 약속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약속의 내용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뜻입니다. 이제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서 죽음이라는 광범위한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그리고 그 상태는 실로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한번에 죄 있는 사람은 다 나와라.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사람은 다 나와라. 죽음의 병을 일으키는 죄라는 병균은 없었던 것으로 해라. 이렇게 하나님이 한 말씀만 하시면 천지를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었는데, 그러면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잠시 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논증할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창조는 하셨지만 일방적으로 그들을 죄 가운데 죄가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다시 그들과의 언약을 복구하시고 그 언약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언약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하고 그 언약의 내용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시고 한 가정을 택하시고 또 한 나라를 택하시고 그 나라는 다시 영적인 한 공동체로 발전시키시고 그런데 그 마지막 발전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들과 하나님이 관계를 회복하시고 다시 부분적으로 하늘 자원을 힘입어서 죄의 상처를 치유 받고 참 사람답게 살게 하심으로 그들의 삶과 말, 현존을 보면서 참으로 사람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었고 선교적인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약속은 나는 너희와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약속이었는데 그럼 요구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행의 언약, 즉 아담 언약에서는 요구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계약 자체가 은혜의 계약적 성격을 띤 언약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행위가 이 은혜를 받는 수단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것은 은혜 계약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요구되는 행위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도적으로 그 계약을 주도하시고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은혜의 언약을 적용하시는 것이 이 언약의 특성이었습니다. 그때 요구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우선 첫째는 믿음이었습니다. 언약과 언약의 내용을 믿고 그리고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 이것이 언약의 요구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아하! 그러면 처음 아담 언약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 조건이었고 은혜 언약은 믿는 것이 조건이겠네요. 결국은 그렇다면 그 은혜 언약이라는 것도 우리가 믿었다고 하는 행위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참 바보 같은 이야기입니다.
자, 제가 여기 이런 선물이 황금으로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아무나 주고 싶었습니다. 당신 이것 가지고 가.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나도 줘요. 나도 줘요. 그랬더니 쉿! 조용히 하시오. 당신 나와서 이것 가지고 가. 자매가 가져가. 왜 가난하게 생겼으니까. 그리고 줬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손을 이렇게 내밀어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져갈 때 너는 참 좋겠다. 그 큰 금덩어리를 거저 얻었으니까 참 좋겠다. 그렇게 모두 말하지, 야, 너는 손 내민 공로로 금덩어리 하나 받았구나.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입 벌린 공로로 밥을 먹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문학을 너무나 모르는 사람입니다. 초등학교에 다시 보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내일 아마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믿음 다음으로는 믿음과 함께 요구되는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무엇인가 하면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것이 순종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순종할 수 있는 근거는 절대적인 의존의 관계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순종하면서 살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 바로 순종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우선 원리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 있어서 죄 가운데 있던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켜서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상태를 놀랍게 바꾸어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심으시고 하나님을 적대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본성이 가장 우세했고 거의 전부였는데 그것을 단숨에 거듭남으로 깨트리시고 그 속에 우세한 성품을 심으셨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타락하기 전에 아담처럼 살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하시고 그럴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 속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하나님이 우세한 성품을 넣어주셔서 순종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주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는 타락하기 전에 아담과 같이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잔존하는 부패한 성품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니 그것은 폐병에 걸려서 죽은 사람을 살려냈는데 약간의 폐병 균이 건강한 폐 속에 남아 있는 것 같은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이치를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은 항상 의롭지만 그러나 동시에 항상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Always just and always sinful 항상 의로우나 항상 죄가 남아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마틴 루터는 자기의 작품 속에서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뭐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씨닐루스 유스트스 엣트 배까또로 번역을 하자면 의로운 동시에 또한 죄인인, 죄가 남아 있는 그것이 인간의 참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는 나중에 다루겠습니다만 우리가 은혜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늘 극복하면서 문제가 안 될 정도로 그것들을 이기면서 살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이제 우리에게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형상을 회복시키시지만 그 형상은 다시 우리가 계속해서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더더욱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 형상은 계속 씻기고 닦이어져서 더 찬란하게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나면 빛날수록 원래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셨던 인간의 그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눈물 흘리며 회개하고 참회하고 그리고 교만하지 않고 주님께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에 나온 것입니다. 착합니다.
그 다음,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결국 인간이 파괴한 것입니다. 이제 행위 언약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래서 결국은 죄가 들어왔고 죽음이 왔고 그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비참한 증상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래의 인간의 상태로 돌이키기 위해서 어떻게 하셔야 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의 고통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문제가 되고 죽음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파고 들어가면 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궁극적인 원인이니까. 그래서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속죄’라는 말이 나옵니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높여서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을 만나봤는데 눈물 흘리며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박수치는 부흥회에서 그 찬송을 부르면서도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속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쾌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소수였습니다. 물론 간단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속죄가 뭡니까?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어사전이지,
그래서 오늘 생애 최초로 깨끗하게 정리를 하십시오. 이 속죄는 본질적으로 네 가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좀 어려운 말입니다. ‘유화’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용서하고 이렇게 부드러워지고 용서하고 하여튼 좋아진다는 그런 뜻입니다. 좀 있다가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가 ‘화목’입니다. 네 번째가 ‘구속’이라는 것입니다. 희생, 유화, 화목, 구속 이 네 가지가 속죄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씩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희생이라는 말은 결국 어디에서 온 것인가 하면 영어로 sacrifice 인데 sacrifice 가 영어에서는 그대로 제사가 됩니다. 왜냐하면 제사 자체가 희생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희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희생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가 죄를 지어서 거기에 정당한 벌을 받는 것은 희생입니까, 아닙니까?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이 아니고 희생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잘못했는데 그것을 뒤집어쓰고 자기가 대신 고통을 당하거나 죄의 대가를 지불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범법한 사람들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고 갈게요.
(예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예비고사가 끝나고 사은회를 하는 밤에 착실한 학생이었던 어느 형제가 술을 먹고 뜻밖에 경찰서 앞에 가서 오줌을 누니까 현행범으로 붙잡 혀 구속되자 그의 아버지가 오셔서 사정을 해 풀려나자 그 아버지가 아들의 뒤 통수를 때리면서 하는 말이 20년을 길렀는데 오줌도 못 가리냐고 했다는 이야기)
그게 바로 희생입니다. 오줌은 아들이 누고 비는 것은 아버지가 가서 빌었습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성경에서 제사가 바로 이런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가서 손을 얹고 제사장 앞에 기도를 하면서 자기의 죄가 이 짐승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짐승은 죽임을 당하고 피가 낭자하게 흩어지는 가운데 거기서 죽는 것입니다.
그게 희생인데 그렇게 죽는 것이 무슨 효과를 가져왔나. 그게 신기하게 이 사람에게 있는 죄를 잠시 동안이라도 그 죄를 이렇게 대신해서 값을 그 짐승이 치렀다는 것으로 쳐주시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감당하며 죽어야 되는데 그런 것은 관계고 뭐고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좀 어려운 말로 ‘속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속상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속상하셨다. 그래서 속은 속한다는 속자고 상이라는 것은 보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짐승이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음으로 그 벌 받을 형벌에서 그 제사, 헌 제자,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입니다 이게 희생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11-1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에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시니라”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 제도의 핵심은 죄의 전가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따로 있고 형벌 받는 제물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제사 제도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것, 그래서 그 진노를 받고 죄를 모르는 짐승이 죽는다는 것, 그런데 그 해택은 죄를 지은 인간이 보게 된다는 것, 이게 이 제사의 제도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희생 제사를 통해서 죄인의 죄를 속상하는데 히브리서 9장 14절에는 이렇게 명료하게 나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고 어찌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 만약에 그런 짐승의 피도 일시적으로 나마 너희의 그 죄를 대신해서 죽어서 속상할 수 있었다면, 속량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너희를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은혜를 입게 만들 수 있었다면 예수님과 짐승을 어떻게 비교하느냐. 재물에 있어서, 그러면 하나님이 그 예수의 대신 죽으신 피를 보고 너희의 죄를 영원히 구속하실 수가 없겠느냐. 없다면 이상한 게 아닌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요지가 그것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희생입니다. 그래서 죄는 우리가 지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독특하게 오셨습니다. 대제사장인 동시에 자신의 몸을 직접 가지고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하시는 대제사장인 동시에 또한 동시에 제물이신 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반드시 어때야 했습니까? 그렇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제물이 되셔야 했으니까 그분은 반드시 죄가 없으셔야 됐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지 됐고, 죄를 위해서 죽어야 했고, 그러시기 위해서는 참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데 오실 때에는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이셨는데도 참 하나님 되심을 참 사람 되심 밑에 깊이 감추시고 일체 천한 종의 형상을 가져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시다가 그리고 때가 되매 우리를 위해서 대속 제물로 죽으신 그 희생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그 짐승 한 마리가 죽어서 그 억만 죄악에서 살아가던 그 죄인을 잠시 그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평하도록 만들어줄 수 있도록 만들었다면 짐승과 예수님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 그리스도의 순결한 피가 우리 수많은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셨을 때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이 안 믿어지면 이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유화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죄를 덮는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마음을 풀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덮는다고 하는 것은 죄를 없앤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죄가 있는데 그 죄가 이렇게 붉은색인데 하얀 것을 이렇게 덮어서 그래서 빨간 게 아닌 것처럼 이렇게 만들어준다는 것, 이것이 바로 죄를 덮는다는 의미이고, 이것이 바로 유화가 의미하는 첫 번째 성격입니다.
사실 죄를 덮는다. 그럴 때 그 죄를 그렇게 덮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죄가 있으면 반드시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따라오니까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진노는 단순한 복수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너 죄졌지. 내가 너를 죽여 버릴 것이다. 이런 표현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죄를 지은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죄를 지은 죄인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죄를 지은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아주 자식을 사랑합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고 합니다. 애가 눈에 들어갈 수도 없겠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고 그러는데 애가 어느 날 그래도 3-4살이 되어서 엄마 응아! 하면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는데 밥을 먹고 있는데 그냥 그 옆에다가 한자백이 그날따라 굵은 것을 쌌습니다. 소리도 그냥 팍! 내면서 한자백이를 싸났습니다. 그럼 여러분 어떻게 하십니까? 큭! 이럽니다. 그 아이가 싫은 것이라기보다는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오물을 더러워하는 그 성품이 그 오물에 대해서 반응한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지금 금방 생각난 것인데 기가 막힌 비유입니다. 그것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저는 비유만 잘합니다. 진짜 생각도 안 났던 것인데 이게 진짜 기가 막힌 비유입니다. 그래서 죄는 우리가 싸놓은 오물하고 비슷합니다. 팍! 싸났는데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서 으악! 하고 반응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거룩의 반응입니다. 그게 진노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은 일관됩니다. 그런데 이게 고통이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자식을 너무 사랑하는데 그런데 그 아이가 계속 나쁜 짓을 할 때 그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차라리 포기해버리면 속편합니다. 그날 밤에 기다리지 않고 잡니다. 어떻게, 내 논 자식이다. 죽었다. 그리고 내일 가서 동사무소에 가서 사망신고 할 것이다. 그리고 끝입니다. 왜 의절하고 살잖아요. 의절한 아버지가 밤늦도록 의절한 아들이 왜 안돌아올까 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시겠습니까? 철 좀 들으십시오. 그런 것입니다. 덮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덮는다고 그럴 때 덮는 대상은 죄입니다. 죄를 덮는다. 그리고 그렇게 덮을 때 효과는 무엇인가 하면 정결해지는 것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용적으로 정결해진 것이 아니라 정결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것이고, 그렇지요, 덮었으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그래서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이 모든 일이 유화의 일, 즉 죄를 덮는 일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죄 그 자체가 하나님을 대항한 절대 악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는 하나남 앞에서 해결해야지 동네 사람하고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유화의 의미인데 우리가 여전히 죄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뭘 변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우리가 뭘 변했습니까? 담배 피는 사람은 여전히 담배피고 말하자면 나쁜 짓 하던 사람은 여전히 나쁜 짓 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던 그 순간에 예수님이 그 피로 우리를 덮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애 깨끗해요. 그냥 좀 봐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정결한 사람으로 보시고 그리고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덮었을 때 실제로 이제 거듭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덮으셨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하면 이렇게 덮었을 때 우리에게 거듭남을 주셔서 이제 우리 안에 우리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창조하셔서 그래서 죄를 하나님이 직접 부셔버리시고 약간은 남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죄들을 죽여 버리시고 말하자면 힘센 사자의 등뼈를 박살나서 움직일 수 없도록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버리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니까 그것을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누구 앞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그래서 마음 아프게 해드린 그분 앞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두 번째는 이 유화에는 마음을 풀어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싸우고 나면 확 마음이 틀어집니다. 부부가 싸웠는데 이러고 계속 살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뭔가 마음에 이게 풀려야지만 관계를 회복하겠는데 서로 눈치를 봅니다. 이제는 며칠동안 말을 안했으니까 이제는 이렇게 살수 없으니까 계속 버틸 만큼 버텼는데 이제 좀 풀어봐야지 되겠는데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내가 잘못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가서 정말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또 싸우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아침에 매일 보리밥에 된장국만 줬는데 그날은 왠지 이른 아침부터 치마를 두르고 똑딱똑딱해서 반찬을 쭉 만들어놓고 화장도 예쁘게 하고 앉아서 이것 좀 드셔보세요. 아니 며칠 전만 그랬어도 확 치어버리면서 냅둬. 그랬을 텐데 이제 마음이 많이 풀어졌으니 더 마음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풀어주는 것을 유화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하나님은 물론 인간을 향해 사랑하고 계셨지만 그러나 분명히 그 인간은 당신과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도전이었고 그 인간이 선악과나 따먹은 것이라고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 위의 세계는 가만히 있는데 땅 아래 세계는 완전히 다 엉망으로 작품을 버려놓은 것입니다. 전체를, 전 우주를 다 망가트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이게 풀어지지 않는데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었지만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대신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그 죄에 형벌을 제가 받겠습니다. 그리고 고난당하신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의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으면서 풀리는 것입니다. 이게 유화입니다. 그 유화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세 번째로 유화 다음에 화목이 가능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화목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뭘 이야기해야지 되는가 하면 화목을 이야기하기 전에 무슨 사이가 있었기에 화목이 대두된 것인가 하면 불화한 사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불화한 이유는 두말할 필요 없이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언약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관계가 깨트려진데서 오는 불화였습니다. 그 불화의 근본 원인이 죄라고 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다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그 창조한 인간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에 지은 하늘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 심지어는 천사들보다도 더 많이 사랑해주시면서 그렇게 완벽하게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미쳤다고 선악과를 따먹는지. 그게 완전히 미친 짓입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깨트려졌을 때 불화한 관계가 되었는데 그 죄로 말미암아 변화된 관계의 성질을 두 단어로 표현하라고 말한다면 적대와 거리감입니다. 한자말로 하자면 적대와 소원함,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적대와 거리감입니다.
이 적대감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enmity 입니다. 적대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독립선언을 하고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뛰쳐나왔는데 그러고 나서 상황을 보니까 인간은 자기가 독립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아가면서 고통 속에서 뒤엉킨 삶을 사는데 그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대적하고 살아가는데 인간이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아무리 타락했어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천사보다 높은 지위를 허락하셔서 하나님처럼 이 땅의 온 만물을 통치자가 되어서 다스리게 하셨는데 하나님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부당하게 대접합니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 보면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어떤 게 성립한 것입니까? 하나님 자신 속에 있는 거룩의 성품 때문에 인간에게 대해서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노는 적대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은 부당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여러분들이 눈 똥을 보고 코를 막고 돌아서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올바른 표현이었습니다. 물론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지만 그 죄와 죄인이 결탁되어 있을 때는 이게 그렇게 이론적으로 구별이 되지만 실제적으로는 구별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애가 있는데 그 애가 계속 나쁜 짓을 합니다. 그런데 내가 미운 것은 그 애가 아닙니다. 그 애는 너무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애가 버릇을 안 버리고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 누구를 때립니까? 죄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애를 때립니다. 죄를 때릴 수가 없습니다. 죄를 어떻게 때리겠습니까. 그래서 애를 때려서 애로 하여금 그 죄를 버리고 사랑스러운 존재만 남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나누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것이 그렇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여기 열린 교회에서 한 시리즈 가운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꼭 한번 사셔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적대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먼저 하나님이 인간의 거룩한 성품 때문에 인간의 죄를 차마 보지 못해서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이 적대감을 거두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적대감을 나한테서 쏟아부어주세요. 그렇게 해서 당한 것이 십자가의 모진 형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효과로서 인간에게 그것을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께서 오셔서 변화시켜주심으로 인간도 그 적대감을 버리고 하나님과 뜨겁게 이 죄의 담장이 허물어진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끌어안고 펑펑 우는 탕자의 돌아온 광경을 연출하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밟은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또 뭐라고 그랬습니까? 거리감입니다. 소원함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것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고 언제나 거기 계신데 제 발에 저려서 하나님이 무서운 것입니다. 애들이 가끔 나쁜 짓 할 때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크게 나쁜 짓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시험 시간에 하도 까불고 장난치다가 그래도 90점은 맞는 애가 10점을 맞았을 때 또 그것보다 죄질이 나쁜 게 엄마 지갑에서 한 5천원 꺼내갔을 때, 아니면 학교에 가야지 되는데 개교기념일이라고 거짓말하고 학교에 안 갔을 때, 이럴 때 애들은 이상하게 엄마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안방에 있다가 엄마가 안방에 들어가면 건넌방으로 들어가고 건넌방으로 가면 다시 밖으로 나가고 똑같이 나가면 다시 부엌으로 들어옵니다. 뭔가 애가 살살 피하는 거리감을 갖는 것입니다. 뭐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는 거리감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이 거리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니까 그 영적인 철저한 단절에서 오는 더 절망적인 거리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봐도 이 거리감이 있습니다. 왜 인간을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저 인간의 죄를 어떻게 해주어야지만 다시 끌어안고 사랑하겠는데 그런데 이게 잘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번 써먹은 예화입니다만 적합한 것 같아서 다시 쓸 테니까 이해를 하십시오. 그냥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친구가 있는데 전화가 왔는데 다 죽어가는 말을 하기에 왜 그런가 하니까 와줘. 왜? 하니까 나 좀 어떻게 해줘. 나를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나 좀 어떻게 해줘. 왜? 그랬더니 나 사스에 걸렸어. 그럼 여러분 총알같이 달려가서 콱! 끌어안고 펑펑 울면서 사스가 왜 너에게 갔을까?- 사스가 뭔지 아십니까? 괴질입니다. -괴질이 왜 너에게 걸렸을까?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어떻게 그러느냐고요. 그러지 않습니다. 어떻게 도와줄까? 와서 나 좀 안아줘. 그것은 안돼. 119 보내줄게. 그랬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거룩의 성품 때문에 죄인들은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이 그 죄인을 향해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런 것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애들을 이렇게 보면서 워낙 화가 났을 때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막 때립니까? 나는 워낙 화가 나면 안 그렇습니다. 가라.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아주 최고로 화가 난 표시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때리려니 몽둥이가 아깝다. 그런 뜻입니다. 가라. 말하고 싶지 않다.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러면 이제 마음대로 못합니다. 이 거리감이 느껴지니까. 이런 거리감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는 그 고난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우리를 향해 거리감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한편으로는 우리를 어루만지셔서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이제 중요한 문제가 여기서 대두가 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이 화목의 효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죽음이 화목이라는 것을 가져왔다면 이 화목이 누구에 대한 화목인가.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불화했는데 우리를 두 가지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화했는데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거리감을 두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장렬하게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확 감동시키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저렇게 사랑하셨는데 내가 하나님을 대적했구나. 그리고 포기하고 하나님, 예수님 때문에 저 당신께 돌아갑니다. 그리고 돌아가고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던 무한한 거리감을 좁히고 아버지께로 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주장은, 그런 주장이 있습니다.
두 번째 주장은 그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지금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적대와 소원을 해소시켰다는 그런 주장이 있는데 또 하나의 주장은 무엇인가 하면 정 반대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대한 하나님 마음에 있었던 적대감과 거리감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해소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먼저 마음을 푸시고 적대감을 해소하시고 거리감을 좁히시고 어찌할 수 없는 인간에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전자가 맞을 것 같습니까, 후자가 맞을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역시 평소에 말씀을 깊이 잠기던 분들이라서 즉각적으로 알아보십니다. 전자는 틀린 것이고 후자가 맞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제가 시간은 없지만 짤막하게 입증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에 보면 화해에 대한 이야기, 즉 화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막에 나오겠습니다만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재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재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성경 구절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읽으십니까? 아마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려고 왔는데 평소에 형제들의 돈을 상당히 많이 강탈했습니다. 때리기도 하고 괴롭혔는데 제사를 드리려고 하다가 보니까 양심에 찔리는 생각이 나는데 야, 그 주제에 무슨 제사냐. 그 주제에 무슨 예배냐. 야, 너 여기 오기 전에도 형제들 등쳐서 돈 뺏고 어제는 네 형제 발로 차서 이빨을 부러트리고 너 그렇게 나쁜 짓만 하고 괴롭혔잖아. 그러니까 아! 그렇구나. 그러면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이 내 예물을 안 받으시겠구나. 그러면 가야지. 그리고 가서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어제 발로 차서 네 이빨 부러트린 것 용서해라. 대신 내 이빨 뽑아줄게. 이렇게 용서를 빈다든지, 야, 너 가서 내가 등쳤는데 날 용서해라. 그렇게 이해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미움과 용서에서도 한번 다루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누가 죄를 죄었고 안 지었고 그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선적인 의미는 자기 자신이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혐의’라고 하는 말은 혐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입니다. 그 추측을 상대방이 강력한 확신으로 가지고 있는 상태가 혐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인혐의로 구속되었다고 하면 아직 살인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살인을 했을 가능성이 많은 느낌을 많은 사람들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잡혀갔는데 범인이 다른 곳에서 발견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가르친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중요한 것은 그가 범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가 범죄를 아니했을지라도 그를 보면서 다른 사람이 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등쳐먹었지. 네가 나를 사람을 시켜서 괴롭혀서 내게 고통당하게 했지. 지난번에 교통사고 당한 것 네가 고용한 살해범의 짓이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어떤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네 형제가 너를 인해서 피눈물 나는 복수심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면 네 예물을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성전을 받지 않으신 그 이유 중에 하나도 그것과 연관시켜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받으시고 다윗에게는 안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야기해서 무슨 다윗이 장난삼아서 죽인 적이 있습니까? 아니 성경에는 오히려 가는 곳마다 다윗이 하나님이 함께 하니까 이기더라. 그랬는데 하나님이 부르신 전쟁터에 가서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싸워서 이기고 이기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렸는데 왜 그것 때문에 다윗에게서 안 받으셨나. 이것도 이 문제와 관련시켜서 이해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떻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을 움직여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거룩함에서 오는 적대감을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해소시키시고 거리감도 풀어주시고 그래서 이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이것이 속죄의 세 번째 요소입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 마지막으로 구속이 있는데 이 구속이라고 하는 것은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림 같은 언어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노예제도하에서 사람들이 이제 노예를 사고팝니다. 짐승처럼, 그래서 사고파는데 그때에 그 노예는 자기가 사고 싶은 사람을 돈을 주고 가서 삽니다.
그런데 이제 영화 같은 데 보면 돈이 많고 마음이 좋은 사람이 나옵니다. 노예 시장에 가니까 엄마 노예, 아빠 노예, 그리고 애들 노예, 3-5명해서 이렇게 대식구가 있는데 이미 벌써 아빠 노예는 수없이 채찍에 맞아서 그렇게 피멍이 들어있고 이 가족들은 모두 쇠줄에 묶여 있는데 한결같이 아이들은 울고 있고 엄마 노예는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우리를 한군데만 같이 살게 해주세요. 그리고 우는데 이 노예상은 안 팔리면 네 사람에게 나누어서 팔 용의도 있습니다. 물건처럼 생각하니까.
그것을 보더니 돈이 많은 사람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감회에 잠기더니 마차를 멈추어라 그렇게 하면서 내리지도 않고 마차 안에서 노예 상을 부릅니다. 야, 저 5명이 얼마냐? 뭐 200만원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옆에 있는 자기 수종드는 사람에게 주라. 200만원을 주고 문서를 받고 그 노예를 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사람들은 아! 우리가 정말 흩어지지 않고 같이 있고 보니까 돈도 있고 권세도 있고 마음씨도 좋은 주인에게 팔려가는구나 그랬습니다. 갔더니 의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같이 살게 되었으니 우리 이 집에서 열심히 일하자 그랬는데 5명을 다 부르더니 깨끗하게 씻기고 옷을 입히더니 이리와라. 5명이 다 왔는데 너희 이름이 다 맞나. 그러더니 문서를 씁니다. 그리고 도장을 탕! 찍더니 이것은 너희들이 내 노예였는데 내 권한으로 너희를 자유인으로 해방시켜주었다는 문서다. 이 문서만 가지고 있으면 어디든지 가도 너희들이 자유인이지 노예 취급을 안 받을 것이다. 그럼 황당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구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지불했던 돈을 ‘속전’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속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죄 때문에 우리들이 마귀에게 팔린 사람들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죄의 대가를 죽음으로 지불하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구원을 거저 얻은 것이라고 그러는데 그것은 우리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거스르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더러운 인간들인데 순결하고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주고 우리를 살 가치가 있습니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럴 가치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라면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딸 하나 주고 거리에 불량배 수십 명하고 바꾸자면 여러분 바꾸겠습니까? 안 바꿀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주 더럽고 쓸모없는 인간들이었고 예수님은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아들을 속전을 주고 우리를 구속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속은 세 가지 성격을 갖는데 우선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려고 했던 사역이 바로 이런 속량이었습니다. 속량이라고 그렇게 합니다. “날 속량했으니 그 보배 피로서 날 속량했으니” 그 찬송가 146장에 나옵니다. 그렇게 속량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를 속량하는 대가로 생명을 예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이런 철저한 계획 속에서 우리의 이 비참한 노예처럼 죄에 매여 사는 우리를 거기에 구해내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속전으로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것은 대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 왜? 우리는 죄는 지었지만 그 죄에 대한 대가를 하나님 앞에 치를 수 있는 능력이,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이 구속이 무엇으로부터의 구속이었는가 할 때 둘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율법으로부터의 구속이고, 또 하나는 죄로부터의 구속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범죄 했으니까 그들에게는 사망, 죽음이 약속되었는데 그 죄에 대해 예수님이 지불했기 때문에 이제 율법이 우리를 저주할 수 없도록 그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해내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이 율법의 저주가 남아 있고 그래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의식적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5절에 보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의식적인 그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그 모든 의식으로부터 우리들이 완전히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행위의 율법으로부터 우리가 구속함을 얻은 것입니다. 즉 구원을 받는 조건으로서 율법의 의무를 준행하면서 살아야 할 그 책임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이제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로마서 5장9절은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마지막으로는 죄로부터 구속하신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속하셨다고 그럴 때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신분의 상태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고, 또 하나는 내적 효과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분의 상태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신분 자체가 죄인이었고 그리고 그 죄를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었고 죄를 좋아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 죄인의 신분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심으로 우리는 이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오,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으니 신분에 있어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적 효과 면에 있는데 전에는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든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능히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을 밧줄로 다리를 묶고 팔을 묶어놓고 그리고 그에게 커다란 추를 매달아서 그를 감옥에 가두어둔 것 같은 똑같은 처지였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가끔 든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 내면의 세계가 죄의 원리에 철저히 얽매어 있기 때문에 도저히 가끔 일어나는 소원대로라도 살수가 없었는데 성령께서 거듭남을 통해서 우리의 그 사슬을 모두 풀어주시고 이제는 그렇게 죄가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죄와 사망의 법이 깨트려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에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고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가면 능히 이 마음에 얽매인 사슬들을 풀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수 있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내셨는데 그 모든 일들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분이 십자에서 피 흘려죽으심으로 이 같은 일들을 이루어놓으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제 하나님 앞에 그 나아가는 길이 무엇인가. 이 속죄의 본질이 이런 것이라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반드시 이런 속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 통로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한시적인 통로이고, 하나는 영원한 통로입니다. 한시적인 통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약에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가 언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 제사의 제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구체화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했지만 나중에는 제사가 점점 복잡하고 구체적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속죄 주에 대한 계시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단순했습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제사도 하나님과 만나기에는 충분한 제사였고 언제부터 이 제사가 주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즉시 제사 제도가 주어졌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담 자신이 제사를 드렸고 그 아버지로부터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배웠기 때문에 아벨과 가인의 제사 드리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치적으로 정확하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그 인간들을 폐기처분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교통하기를 원하셨다고 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반드시 제사라는 제도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제사를 통해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짐승의 희생이 이 제사에 반드시 동반되었고 피 없는 제사는 없었습니다. 피 없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가 있었지만 그것은 반드시 피 있는 제사와 함께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피 없는 제사는 없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제사에서는 반드시 피 흘리고 누군가가 죽어야 했습니다.
이 짐승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했는데 첫째는 순종의 요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규례대로 제사를 드려야했다 라는 뜻이고, 두 번째는 믿음의 요소인데 제사를 드리는 헌 제자가 그 제사에 믿음으로 참여해야지 되는데 그 믿음이 내용은 하나님이 반드시 계신 것과 이 제사를 드리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는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 번째는 희생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제물이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역시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렇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실 때에도 아무렇게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율법의 요구대로 순종하면서 사시다가 희생하셨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앞에 나아가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믿음이라고 하는 요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방편이 있는데 영원한 방편은 제사가 아니라 아까 배운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방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이사 동시에 희생 제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유례가 없는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몸으로 제물로 가지고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서 당신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치면서 당신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과 범죄 한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됐습니다. 즉 아담이 지은 그 죄를 대속해서 우리를 이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는 죄 없는 상태의 아담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제물을 바칠 때에는 흠이 제물은 절대로 안 받으시고 흠이 없는 제물을 받으신 것이 바로 이런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에서 흠 없는 제물, 흠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바로 그분이 사람이시기는 했지만 우리와 똑같이 죄를 가지신 분은 결코 아니고 그러셨더라면 예수님의 그 피가 짐승의 피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기뻐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짐승의 피는 제사로 받으셨지만 사람의 피는 제사로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지 됐고 그런데 완전히 하나님이시기만 했다면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는 분입니다. 죽지 않고는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효과는 이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죽음은 일시적인 효과밖에 가져올 수 없었지만 하나님으로서 죄가 없으셨고 인간으로 흠 없는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그분의 속죄의 효과는 완벽하고 영원하고 최종적인 효과를 가져 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율법의 도움이나 혹은 짐승들을 잡아 죽이는 이 제사의 도움 같은 것은 필요 없고 언제든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속죄 재물이 되신 그 십자가를 믿고 바라봄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신적인 존재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이 사실을 빌립보서 2장6-7절에서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으로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서 죽으시니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비록 죽으셨지만 영원히 죽으실 수 없었던 이유는 그분이 바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었지만 그의 본체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에 이런 불붙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구약에 예수님을 안 믿었던 사람들보다 훨씬 벌을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불쌍하지 않습니까? 정말 마지막으로 그렇게 속죄하셨는데 그 하나님이 인간을 가만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정말 속죄하셨는데 속죄의 동인이 무엇인가? 속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 강한 힘이 무엇인가? 이것에 관해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답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그게 답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제 여기서 중대한 논쟁이 나옵니다. 그것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속죄하시기 위해서는 꼭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게 하실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왠지 모르지만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아멘 할 따름이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런 것을 가리켜서 ‘가설적 필요론’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교부들이 성경을 그렇게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개신교 신앙에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냈다고 하는 사상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성경구절이 아주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또 다른 의견은 무엇인가 하면 이것이 성경적인 견해인데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셨지만 그렇게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 못박혀죽게 하심으로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셨다면 안 됩니다. 능력이 없어서 안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있고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한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나라든지 법에 제일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가장 무서운 법은 왕에게 반역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게 법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 반란군은 토벌되고 아들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아빠 우리가 남이야.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왕은 그래도 아들을 살려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살려줄 수 있습니다. 죽이지 마라. 그러면 끝입니다. 신하들이 반대하면 반대하는 신하들을 죽여 버리면 됩니다. 누가 말릴 수 있습니까! 그런데 왕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죽여라.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더 큰 목적과 법이 있기 때문에 할 수는 있는데 그렇게 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못하시는 일, 안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품과 모순 되는 일은 안 하시기 때문에 못하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또 법칙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두개의 법칙이 충돌을 일으킬 때는 하나님이 못하십니다. 하나님보고 동그란 삼각형 그려보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리실 수가 있겠습니까? 동그라면 삼각형이 아니고 그렇지 않습니까? 삼각형을 그리면 동그랄 수가 없는데 그 인간이 그렇게 법칙을 정해놓고 하나님보고 그리라고 그러면 어떻게 그리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세워놓은 법칙을 허물고 하나님께 가야지 됩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보고 살인해보십시오. 아니 하나님보고 거짓말해보십시오. 하나님이 하시지 못하겠습니까? 천지도 창조하신 분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안 하십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바로 성경적인 사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대표적인 성품이 이 거룩한 공의의 성품과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성품이 있었는데 인간이 범죄 했을 때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성품은 저희를 용서해주고 구원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의 성품은 하나님이 만약에 범죄 한 인간들을 다루면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내려다보고 온 땅에 있는 피조물들이 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신 것이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래서 그 아들을 대신 형벌을 받게 하심으로서 그래서 자신의 거룩한 공의는 만족을 시켜드리고 또 한편으로 그 죄지은 인간들은 공로 없이 용서받게 함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족시켜드린 것입니다.
(예화: 찰스 스펄젼의 설교집에 나오는 일화: 법원에서 오래된 친한 친구를 만났으나 잘 못을 해서 피고로 끌려와 벌금을 내야 할 상황에서 재판관인 친구가 과연 어떻게 친구를 재판을 할지에 대해 많은 사람이 친구라서 봐주겠지 했던 기대와 달리 많 은 벌금을 내렸는데 재판이 끝나 내린 벌금을 그 친구가 내주었다는 이야기)
이게 바로 다름이 아닌 이것이 바로 속죄의 동의입니다. 대리적 속죄입니다. 그런데 대가를 지불해주는 것인데, 그 사람이 재판관이었지만 무죄! 탕탕! 왜 내 친구니까. 이렇게 재판을 하고 내려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좀 어려운 말로 ‘결과적, 절대적 필요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경우의 해석을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지만 당신 안에 있는 공의로운 성품 때문에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기의 아들을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것이 우리를 속죄하시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져온 놀라운 사실은 이제 우리가 옛 언약 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새 언약 아래로 부르셔서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함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공로는 아무 것도 없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거룩한 적대감을 거두시고 우리를 향한 거룩한 거리감을 완전히 버리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와 같이 더러운 인간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보내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게 하심으로 이 모든 적대감과 거리감을 파하고 그리고 무너진 죄악의 담장 그 위에서 우리와 같이 아무 쓸모없이 죄를 지었지만 자신이 그 죄에서 헤어날 수도 없고 주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망가트렸지만 그것을 어떻게 복구할 수 없는 이 더러운 죄인들을 주님이 다가오셔서 뜨겁게 끌어안으시고 이런 용서의 은혜를 하나님이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서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죽음 때문에 고통과 악에서 헤어 나올 수 없고,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자원을 모두 끊어졌던 사람들에게 다시 하나님이 연결하셔서 그래서 하늘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해주셔서 그래서 원래 창조 되었던 인간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살수 있도록 주님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필설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도저히 뒤집을 수 없는 죄의 막힌 담을 하나님이 이렇게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죄에 매어서 사슬에 매어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를 건져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우리의 구원의 개관적인 근거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것으로 이제는 전해지게 되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축복스러운 일이 우리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가 내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5.왜 믿어야 하는가?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6)
지난 시간에는 왜 예수님이 오셔야 했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왜 우리가 믿어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루신 그 속죄의 구원사역이 우리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신앙을 가진 처음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믿고 오래된 후에까지, 심지어는 신학교에 들어간 후에까지도 이 믿는다는 것이 정확하게 뭘 의미하는지를 잘 명확하게 사람들에게 말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저만 그러나 했더니 나중에 대화를 나누다가 보니까 지금도 예수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까지는 굳게 믿는데 궁금한 것은 내가 지금 믿는 게 진짜 믿는 것인가, 안 믿는 것인가. 진짜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짜 구원받을 믿음인가, 아닌가. 혹은 믿음이 다른 믿음은 아닐까? 이런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많이 만났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불안감은 안 가지고 있지만 전혀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이라고 성경이 제시해주는 그 믿음과는 전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사실 이 사람들은 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전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믿음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데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마 여러분들이 이런 궁금점을 완전히 해소하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짜 구원 얻을 수 있는 믿음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달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여러분들이 어떻게 이렇게 믿음에 관한 교리들을 전해야 될지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참 사람이며 참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있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하시려고 그렇게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렇게 속죄를 이루어 놓으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이루어놓은 속죄일뿐이지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저절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속죄하심으로 이루어놓으신 구원을 우리가 ‘아멘’하고 받아들이고 그래서 내가 그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축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게 만드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믿음이 조건이라는 이야기는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원을 주실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이렇게 주었을 때 손을 내미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믿음이 결코 공로적인 의미에서 구원의 조건은 될 수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어째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일 먼저 궁금한 것은 도대체 뭘 믿는다는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무슨 대답을 갖고 있습니까? 사람들마다 제 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까?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믿는 것이 아닙니까? 또 어떤 사람은 사도 베드로가 칭찬받았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닙니까? 그랬는데 전부다 정답을 비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우선 이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을 믿는 것인데 사실 여기서 믿는 믿음은 선포된 믿음을 믿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넓은 의미의 복음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신 모든 행동과 말씀을 다 포함해서 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포된 복음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고 예수님이 보여준 행동의 모본과 예수님이 가르쳐준 말씀도 모두 복음이었지만,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을 사도들이 성령강림사건 이후에 선포할 때는 그 어마어마한 것을 다 선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하는 그 고백이 틀린 고백은 아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론적인 고백입니다. 기독론적인 고백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고백이고 구원에 입장에서 구원론적인 선포는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믿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해주시고 예수님의 그 속죄의 공로가 그에게 그대로 전가되어서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을 주시는 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제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 “믿다”라고 하는 말이 희랍어로 ‘피스튜오’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에는 원래 헬라어에서는 전치사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냥 영어로 말하자면 believe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는다 할 때는 영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안에 believe 인 인 무엇 무엇 안에서 라고 하는 전치사가 들어가는데 아주 특색이 있습니다. 이것을 희랍어에서는 엔 이라고 하는데 피스튜오 엔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무엇 무엇 안에서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희랍어에서는 전치사 중에서 '삼격 전치사'라고 말하는데 삼격 전치사가 지시하는 중요한 의미는 움직이는 상태가 아니라 정지된 상태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28장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할 때는 밥티제테 세례를 주어라 그 다음에 전치사가 들어왔는데 에이스라고 하는 영어로 하자면 인투 라는 전치사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줌으로서 이 사람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연합되어 들어가는 이동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제가 세례를 줄 때 내가 예수를 믿는 자, 아무개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게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줌으로서 이 사람이 성부와 성자의 성령의 이름 속으로 이렇게 들어가서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동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포된 복음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 안에서 믿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이렇게 의롭다 여김을 받는 구원 얻는 이 믿음의 조건은 복음을 믿는 것인데 그 복음은 선포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살아나셨다고 하는 이 사실을 믿는데 이것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정지된 상태에 있는 것이고 언제든지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믿음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음의 내용이 이처럼 정확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는 공로가 없지만 예수님이 이루어놓으신 속죄 사역 때문에 우리를 구속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그래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래서 다시 하늘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타락하기 전에 아담이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힘을 가지고 그 자원을 가지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참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라는 구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데 선포된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고 다시 사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포라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라고 하는 말, 영어에 “포아쓰”라는 이 말은 “포”라고 하는 말은 세 가지 정도의 뜻을 갖는데 희랍어에서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의미입니다. 세 가지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듯이 첫째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했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그런데 사실 “대신”이라고 하면 일대 일에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닙니까? 너 내 대신 예비군 훈련에 갈래? 불법입니다. 너 내 대신 예비군 훈련에 갈래?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야, 너 내 예비군 훈련에 가려면 사람 수천 명 다 빠져. 내가 가서 다 해줄게. 그것은 아닙니다. 너 대신 내가 가서 출석을 불러주마.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신”이라는 말은 일대 일인데 예수님이 한사람 한사람을 대신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이 수십 억 번을 죽으셔야지 되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은 대신 죽었는데 우리 모두를 한꺼번에 당신 품에 안고 우리 모두를 대표하신 분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품어 안고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런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리적인 죽음이기는 했는데 우리 모두를 다 품에 안고 우리 모두를 대속해서 대신해서 한번만 죽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포함한 대리적인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내포적인 대신”이라고 말합니다. 내포적인,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를 속에다가 집어넣으시고 우리와 연관을 가지고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죽음을 “내포적 대신적 죽음”이라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실이 선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우리를 다 끌어안고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한번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니까 우리 예수님이 죽으신 그 죽음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었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때 그 살아나신 부활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되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 근처에 그 고백을 할 때 가 본적이 없지만 자기가 예수님을 믿기도 전에 자기를 선택하시고 자기까지 포함한 모든 구원받을 백성을 끌어안고 함께 죽으시고 함께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 라고 하는 고백의 참뜻입니다. 그것을 믿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놓으신 그 속죄를 우리에게 적용시킴으로서 우리를 구원받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어려우면 어렵다고 그러십시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이제 내가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러면 뭘 받습니까?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는데 물속에 풍덩 들어가야지 되는가. 물을 뿌리기만 하면 되는가. 그러는데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속에 풍덩 들어가는가, 머리에만 물을 뿌리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세례라고 하는 그 의미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믿어가는 과정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확실하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한번에 확~ 하고 믿음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지만 구원받지는 못하지만 믿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작용이 많이 이루어지다가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에 확실히 믿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례는 그렇게 내 안에서 이제 믿어가는 과정은 끝났고 나는 이제 확실히 믿게 되었다. 뭘?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셨다는 것이 이제 믿어지는 것이 이제 완전히 끝났다. 이제 확실히 믿어진다. 그 표현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 세례를 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 세례를 받은 것은 안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괜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궁금한 것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오늘 제일 중요한 핵심부분입니다. 이것 하나만 오늘 물고 늘어지겠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믿음을 설명하는데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자들이 너무 바쁘면 이발을 못합니다. 저도 그럴 때 많은데, 그래서 아무래도 몰골이 흉악해서 안 되겠어서 밤중에 이발소에 뛰어갔더니 문을 닫습니다. 그래서 두드리면서 나 머리 좀 합시다. 그러니까 한참 망설이더니 내가 지금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러더니 오세요. 그러더니 해주더랍니다. 그래서 넓은 이발소인데 직원도 다 퇴근하고 한사람의 주인이 있는데 이제 옷을 벗고 머리를 다 깎고 그리고 이제 뒤로 누워서 면도를 하려는데 불을 다 끄고, 왜 넓으니까 사람 하나밖에 없으니까. 여기만 불을 희미하게 켜놓고 그리고 면도하시지요. 그리고 눕혀놓고 조금 있다가보니 칼을 가는 소리가 났습니다. 샥샥! 그런데 한편 이 면도를 하려고 하는 이발소 아저씨는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목사님이 얼마나 전도해야지 된다고 광고를 많이 하셨는지 이제 전도를 해야지 되겠는데 어디 가서 전도를 할 수도 없고 할 줄도 모르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예수를 안 믿는 사람 내버려두면 지옥에 간다고, 그래서 이 사람이 보니까 이렇게 밤중에 이 사람이 온 것도 하나님의 뜻이구나. 그리고 이제 샥샥 칼을 갈면서 또 불빛에 이렇게 비쳐보면서 또 갑니다. 그러더니 오더니 여기 비누칠을 하더니- 남자들은 목부터 면도를 합니다. -목에 칼을 대더니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머리털이 서더랍니다.
어떤 분이 믿음을 설명하는데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믿음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이발소에 가서 면도를 할 때 눈을 감고 그 시퍼런 칼에 우리의 목을 맡길 수 있는 것은 면도 사를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좀 썰렁합니다. 정답을 말하면 틀린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확률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면도사 에게 면도해달라고 그래서 목이 잘리는 사람이 일년에 서너 명만 나와도 아마 자기가 집에서 면도하지 절대로 면도 안 할 것입니다. 4호선 전철을 타고 서울역을 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게 4호선 타고 인천으로 도망친 전철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확률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구원해주는 믿음은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댕! 틀린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에 관한 예수님 자신의 선언인 요한복음 3장14절과 15절을 보면 믿음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나옵니다.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인자도 드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멸망치 않고, 이 문맥이 무엇인가 하면 요한복음 3장인데 이제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예수님이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다가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 말씀하신 바로 뒤에 유명한 성경구절인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은 또 어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가 하면 민수기 21장 8-9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입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호르 산에서 홍해를 돌아서 에돔 땅으로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셨는데 그 여정이 매우 험난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셔서 불 뱀을 보내셨는데 그 불 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불같이 빨간색의 뱀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물리면 화끈 화근하게 열이 올라서 불붙는 것 같아서 불 뱀이라 그러는데 뭐 둘 다 포함됐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중요한 것은 물리면 죽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는데 이 백성을 위해서 뱀을 만들어라. 그것이 참 이상합니다. 그래서 뱀을 구리로 만들어서 장대 끝에 달아서 높이 들라는 것입니다. 요즘도 병원차에 보면 지팡이에 뱀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성경 여기에서 따온 것입니다. 치료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높이 들면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해석적인 일치가 있습니다. 해석적 대칭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구약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곧 예수님 시대를 비롯해서 이 신약의 시대에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죽어가는 백성들이라는 이야기고, 아니 이것은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해볼 때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두 번째는 장대에 매달려서 높이 들린 뱀은 예수님이라는 것이고 예수님 자신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랬으니까. 그리고 “쳐다본즉 살리라” 그랬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왜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믿는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이든 윌슨 토저’라고 하는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믿음은 곧 보는 것이다.” “페이스 이즈 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본다”라고 하는 그것은 보이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뭔가를 목적을 가지고 응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 물려서 지금 신열이 펄펄 올라서 약도 없이 죽어가야 할 상황인데 장대 끝에 뱀을 매달아서 높이 쳐들고 이것을 봐라. 이것을 보는 자는 살 것이다. 라고 말했을 때 그 장대 끝에 달린 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심정이 어땠는가를 알면 쳐다보는 그것이 왜 믿음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 약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치료책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 자신들은 거기에서 가만히 내버려두면 뱀에 물린 상태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데 방법이 단 하나가 제시되었습니다. 그것은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것을 쳐다보는 그 눈빛이 얼마나 간절했겠으며 그것을 쳐다볼 때에는 자신의 생명을 이렇게 쳐다보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살려줄 것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쳐다본 것인데 그것을 예수님은 믿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단순한 지식적인 동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 그러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습니다. 어이구! 왜 그러셨을까? 그렇게까지 하시지 마시지. 믿으십니까? 예, 예, 그런데 당신이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슨 죄가 있나요? 사람이 태어날 때 원죄, 본죄 이런 것 굉장히 많이 갖고 태어납니다. 우리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사람은 하여튼 죄인이라고 그러십니다. 시인하십시오. 예, 예,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다고 해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전도 보고하는데 뭐라고 하는가 하면 목사님, 영접은 했거든요. 그런데 교회는 안 나옵니다. 물론 구원 얻고도 교회에 안 나오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별로 그렇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그런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믿음인지 우리 보겠습니다. 어째든 이 믿음의 성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 얻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은 절대 의존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게 연결이 됩니다. 맨 처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원하셨던 관계가 어떤 관계라고 했습니까? 절대의존의 관계, 절대의존하게 되면 삶의 자세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절대 순종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관계를 회복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지요.’ ‘그렇다고 하지요.’ 그런 정도의 지적인 동의가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분들은 충분히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충분히’ 라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절대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일도 소용없고 교회에 나오는 일도 의미가 없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엇 때문에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십니까? 아버지가 여러분들을 낳지도 않았는데, 믿어야 됩니다. 그래야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의존적인 믿음을 하나님께서 마음을 갖게 하시는 방법이 믿음을 주시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인간의 독립선언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으려고 했던 자기중심적인 생각들, 삶 이것이 결국은 불순종이고 이것이 죄였습니다. 그것을 완전히 꺾어버리고 다시 창조할 때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그 숨길 수 없는 특징은 ‘주 없이 살수 없네’ 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속에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을 별로 경험해본 적이 없다면 거듭나지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제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오늘 성경이 그랬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이신 칭의 교리’라고 말합니다. 이신, 믿음으로서 칭의, 의롭다 함으로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칭함을 받는다고 그러니까 벌써 기분이 이상합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당신을 신자라고 일단 칭합시다. 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이 신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칭한다.’라는 말은 상태에 대한 실제적 선언이 아니라 법적인 선언입니다.
예를 들자면 분명히 죄가 있는데 소위 이야기하는 ‘사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고 사고를 내고 그리고 범죄자로 호적에 등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가끔 ‘특사’라는 것을 베풉니다. 경축할만한 일이 있을 때 사소한 범죄 때문에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는 사람들을 구원해주기 위해서 특사를 베풀면 그가 분명히 예전에 법을 어겼고 처벌을 받은 근거가 있으니까 전과자인데 그런데 어느 날 법정을 통해서 이러이러한 사람들은 이제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친다. 이렇게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지었던 사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는데 법적으로는 그것이 없는 것처럼 이렇게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이것입니다.
백화점에 가면 왜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150만원’ 이렇게 해놓고 줄을 그어놓고 그 다음에 ‘100만원’ 이렇게 써놓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보고 150만원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어차피 줄을 근 순간에 무효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칭의가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짜 의로운 게 아니라 의롭다고 하나님이 쳐주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속죄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순간 아직까지도 죄가 남아 있고 또 과거에도 죄를 지은 사람이었고 여전히 상태는 죄인이지만 그를 의롭다 이렇게 선언을 해주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믿음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게 해주는 가장 중요하고 아니 가장이 아니라 유일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 그러니까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시고 잘 들으셔야지 됩니다. 이런 의롭다 함을 얻게 해주는 믿음은 지금 말씀드리는 요건을 반드시 충족해야지만 의롭다 여김을 받게 하는 믿음이 될 수 있지,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결코 그가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이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마지막 날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로 나타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거의 그들을 먹이실 때에 열렬하게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겉모양으로 보면 우리보다도 열렬히 예수님을 사랑했고 추종했습니다. 그랬는데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의롭다 칭함을 얻게 하는 이런 종류의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겉모습은 비슷했지만 그들은 의롭다고 여김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호하면서 예수님 따르기를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이고 그것을 위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생업도 버려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보다 어떤 의미에서 훨씬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다수들 중에 구성원들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것을 볼 때 겉으로 믿는 것 같이 보였지만 사실은 그 믿음이 참으로 의롭다 여김을 가져다주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막판에 가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로 나타나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지루하지만 하나만 더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쫒고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이 그들을 내가 너희들을 도무지 모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쓰인 동사는 희랍어에서 제이의 부정과거 동사인데 이것은 처음에는 알았었는데 나중에 잘못하니까 모르는 사람으로 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내어쫒던 그 처음부터 이 사람들을 몰랐다는 의미의 동사 ‘에그노니’ 라는 것이 쓰여 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믿음이 아닌 이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정말 의롭다함을 가져다주는 믿음인가를 시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부산 집회에 가시기 위해 밤 기차를 타시고 일어난 일- 어느 분과 좌석의 번호 가 같아 황당하게 여기던 중 그분의 표는 하루가 지난 표였다. 그래서 강경하게 일어나기를 원하던 그분이 오히려 밤새 이리저리로 빈자리를 찾아다녀야 했다.)
우리의 믿음이 만약에 그렇게 가짜 표 같이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특히 신앙의 체험이 별로 없고 예수님을 향한 개인적인 사랑과 깊은 순종을 못 느껴본 사람, 특히 믿기는 믿는데 예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지 잘 모르겠다. 이런 상태에 있는 분들은 오늘 분명하게 여러분들의 믿음이 가짜 기차표 같은 것인지 분명히 확인을 하고 아니면 그것을 찢어버리고 새것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이제 진행을 하겠습니다. 우선 의롭다 하게 하는 그 본질은 이 믿음 자체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선행조건이 몇 가지가 있어야 됩니다. 우선 첫째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지 됩니다. 아까 그 사람처럼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셨습니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안하셔도 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 됩니다.
두 번째는 모든 하나님의 계시에, 특히 예수그리스도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자비에 대한 진실한 동의,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빨리 믿는다고 그래라. 이 인간아. 너 믿는다고 그래, 믿는다고 여기서 도장 안 찍으면 이 회사 나가야지 돼. 이런 식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동의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구체적인 복음이 제시되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우리 교회에 한번 갑시다. 왜요? 그러면 가면 거기 열린 공간도 있고요. 커피도 아주 맛있고 첫날 가면 식당에 가서 밥도 줍니다. 그리고 내일은 또 명절이기 때문에 교회에 가면 떡도 주고 밥도 줍니다. 아! 우리 교회는 참 좋습니다. 이러면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뭘 거기에 대해서 아멘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제시되어야 되는데 아무리 줄여도 빠질 수 없는 결정적인 내용이 약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와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우리를 중재해주는 중보자가 되셨다고 하는 사실, 죄인인 우리 인간이 타락해서 하나님 앞에 도저히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신 때문에 우리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 우리와 거리감을 느끼시고 계신데 그것을 좁혀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고 그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신다는 사실, 그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죄를 깨닫는 모든 죄인들을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교회에도 나갈 수도 있고 성당에도 갈수 있고 아니면 불교에 가서 한번 해볼까?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자원을 가지고 살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죄를 깨닫는 모든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이 두 번째고,
세 번째는 디모데후서1장 10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이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즉 이렇게 구원을 얻는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불쌍히 여기는 긍휼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제시받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분명하게 전해주는 사람이 없이 스스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그것은 문서를 보면서도 주님을 믿을 수 있고 또 자기가 직접 성경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어째든 누군가가 그에게 외부적인 도움을 통해서 최소한 이 세 가지 사실을 전해주고, 제시를 해주고 그것을 알게 하지 않고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경우는 성인들의 경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가끔 가다가 교회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갖는다거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융숭히 접대하고 기독교를 옹호하는 견해를 가졌다고 해서 그가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복음을 제시를 받았을 때 의롭게 되는 믿음의 진짜 본질은 무엇인가? 이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그렇게 제시된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고 다시 사셨다. 그분이 중보자시다. 그리고 바로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는 이런 복음을 제시받았을 때 그게 진짜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줄을 알고 무릎을 꿇는, 즉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구의 강요로 말미암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승복하는 진실한 믿음, 그것만이 그 사람을 의롭다 여김을 받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상세하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이 오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첫째는 제일먼저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먼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 얻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그 정도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믿고 실제로 그것을 버려야지 됩니다. 이것에 관해서 사도행전 4장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 얻을 수 없나니 천하에 인간이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심이 없음이니라” 라고 말입니다.
자, 여기서 이제 중요합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이 언제 구원받으려고 애를 쓴 사람이라면 구원의 길을 포기하고 말고 할 것인데 지금 처음 복음을 제시받아서 이제 구원받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생각했는데 언제 구원받아야 될 필요성을 느낀 적이 지금 이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지 되는가 하면 이렇게 생각해야지 됩니다.
제가 둘째 날 말씀드린 가운데 인간의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려서 비참한 상태가 된 것을 말씀드리면서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위해서 몸부림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선 첫째 몸부림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종교로 나타납니다. 잘못된 종교들을 믿으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잘 수양하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유사종교들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념적인 것입니다. 대게, 공산주의나 자본주의적인 이런 종류의 어떤 이념들을 믿고 그것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낙관론적인 문명론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이 세상이 점점 나아지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그 구원은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고 하나님의 진노가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질병 상태에 걸려서 계속 악과 고통으로 가득 찬 속에서 살아가야지 되는데 말씀드린 것처럼 종교를 택한다든지 아니면 자본적이나 공산주의를 따른다든지 아니면 낙관론적인 문명론을 의지하면서 살아보면 그 악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제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 사람들이 생각했던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종류의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어떤 길도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예수님을 몰랐을 때에는 돈 많이 벌고 그래서 내가 큰 집을 지니며 살고 많은 재산을 모아 가지고 있으면 아마 나는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할 것이야. 이렇게 생각한 것은 그 사람은 그것을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구원은 없다고 그렇게 믿어야지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는 것을 천당에 가는 데만 쓰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똑같이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로 그 사람을 의롭다 여김을 받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지막 날에 천국에 가보면 알지만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두렵습니다.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닙니다.
또 만약에 내가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권력을 쥐면, 혹은 공부를 많이 해서 내가 존경받는 학자가 되면, 혹은 자식들을 잘 길러서 이놈들을 입신양명 출세를 시키면, 아니면 내가 얼굴이 예쁜 자매와 결혼을 하면, 아니면 내가 아주 능력이 있는 신랑을 만나서 예쁜 집을 짓고 아주 행복한 삶을 살면 그러면 나를 괴롭히는 인간속의 죽음이라는 질병 때문에 내제하는 악과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다고 해서 돈벌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공부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출세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시집장가가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때는 이런 것들을 하기는 하지만 이런 것들을 한다고 하더라도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하면 악과 고통이 내게서 모두 사라져서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지만 그러나 진짜 예수님을 알고 나서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게 될 때에는 이런 것들을 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로는 결코 내 인생에 계속 따라다닐 이 악과 고통으로부터 나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악과 고통의 궁극적인 뿌리는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것이고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질병은 죄라는 병균이 가져다주었는데 좋은 신랑을 만나고 훌륭한 직장에 다니고 돈을 수십억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이것이 결코 죄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기는 해도 그것으로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길이 인생의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을 포함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서 분명히 합시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돈에 미쳐서 사는 사람들,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예수 믿었다고 말하면서 거짓말이나 하고 사기나 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면서 자기의 배를 불리고 수시로 뇌물봉투를 싸서 관리들에게 주고 그래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이웃들을 모함하고 동업자들을 모함해서 그들을 헐뜯고 그래서 자기의 이속을 차리는 이런 사람들은 구원 얻은 사람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 하나 혹시 만약에 그들이 그래도 구원을 얻었다면 지금 아주 더럽게 살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아주 더러운 죄로 되갚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그들을 그 더러운 죄악에서 건져주니까 건져주신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쪽이 좋은지는 여러분들이 선택하십시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도덕하게 살고 비윤리적으로 살고 말이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섞여 살고 그러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절대 그 사람이 구원을 못 받았든가, 그것을 통해 이미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이렇게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그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든가 혹시 예전에 그런 적이 있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취소될 수가 없는 것이니까 백번 양보해서 만약이 혹시라도 그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게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면 아주 더럽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모욕을 안겨드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여러분들이 자식 때문에 너무 집요하게 속을 썩을 때 저 자식을 내가 왜 낳았을까? 이런 고통스런 마음을 하나님께 느껴드리게 하면서 그러면서 살고 있는 중입니다. 확실하게 하십시오. 구원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그러면 둘 중의 치유책이 하나입니다. 구원받은 것 같지 않다면 진짜 확실하게 믿고 오늘, 그래서 진짜 믿는 사람이 되고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나는 예전에도 하나님을 믿고 있고 지금도 믿고 있다고 말한다면 지금 그렇게 야비하게 살고 있는 삶을 청산하십시오. 하나님의 진노가 여러분들 위에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았다면 혹시 그렇게 살수 있을지 모르지만 구원받았다면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입었는데 그리고도 그것을 구원받았다는 것을 계속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기로 생각하면서 왜 한번 구원하시면 하나님도 취소 못하신다고 하는 그 교리 하나를 붙들고 담대하게 계속해서 회개 없이 살아가면 마지막 날에 결국은 그 사람의 구원이 사실이 아니라고 입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첫 번에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구원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자기를 궁극적인 질병 상태에서 건져낼 수 있는 다른 어떤 길도 없다.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길이 된다고 내게 호소해오는 모든 것을 나는 버린다. 그리고 오로지 나를 위해 죽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가 그렇게 구원받을 수 있는 죽음이라는 질병 상태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고 믿는 이것이 의롭다함을 얻게 만드는 그 믿음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다가 아니라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의지의 동의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내 마음속에, 생각 속에 그런 믿음이 오는데 의지가 그것을 깊이 동의해주는 것입니다. 의지가 맞아, 맞아. 그래 나는 그 믿음을 받아들일 것이야. 그렇게 의지가 결단을 하면 그러면 그것과 함께 영혼이 그 진리를 붙잡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영원히 그것을 붙잡는 순간에 마치 7700볼트의 전기가 오르면 탁! 붙들면 확 올라서 사람이 변해버리듯이 그 진리를 영혼이 의지와 함께, 물론 그 의지를 움직이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의지가 그것을 붙잡는 순간에, 의지가 동의하는 순간에, 영혼이 그것을 붙드는 순간에 온 영혼의 전류가 흐르듯이 여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강력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거듭남이라고 하는 변화입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면 그 변화는 영혼과 관계된 모든 기관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말하지만 우리 몸속에서 영혼과 관계되지 않은 기관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 내가 나의 죄 때문에 고개를 둘 수가 없습니다. 고개는 육체입니다. 그런데 죄에 눌리니까 육체를 움직일 힘도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참회하면서 “내 뼈가 수척하였사오니” 그랬습니다. 육체의 기관까지도 영혼에 연결이 되니까 지정의, 마음 이런 것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전작용 같은 것들을 받으면서 영혼의 변화가 그들에게 미치면서 한꺼번에 변화가 확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4장6절에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그렇게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의지의 동의를 통해서 영원히 그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는 단계의 세 번째는 마음깊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approvation 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냥 그렇구나. 이런 게 아니라 인정하는 그것이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그런 종류의 인정입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이 길이 지름길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 길이 막힌 것 같아도 이리로 가면 길이 있다. 그래 인정할 수 있다. 그러면 그리로 갑니다. 이런 종류의 인정함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곧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고 살아나게 하신 다음에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여기시는 그 방법이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주시는 방법이요, 사랑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에 대해서 깊이 인정하고 그 인정 때문에 그 인정을 고려해서 삶의 방향을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trust하는 것입니다. trust한다는 이야기는 형식적으로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데 벽 같은 곳에 기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스티로폼이 있으면 제가 기대겠습니까? 그러면 뒤로 나동그라집니다. 그러나 벽이 안전하니까 기댑니다. 이게 의뢰하는 것입니다. 든든해서 조금도 내 예상에 빗나가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 충분히 기대는 것입니다. 그게 의뢰입니다.
아이들을 낳으면 너무 귀엽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이렇게 흔들어주면 좋다고 그렇습니다. 공중으로 던집니다. 심하면 공중으로 던지면 그래도 애는 좋다고 막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 애도 처음부터 그런 게 아니라 한번 이렇게 했는데 계속 안전하니까 의뢰하는 것입니다. 휙~ 던졌는데 깍! 그렇게 하면서 쾅! 하고 떨어지는 그런 일들이 한번만이라도 일어나면 던질 때 그 애가 아마 자지러지게 울 것입니다. 그렇게 트러스트 하는 것입니다.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믿음에 네 번째 단계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에 대해서 이제 무엇인가 하면 베드로전서 1장 21절에서 말하기를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는 저희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모든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의지할 분이 오로지 그 하나님밖에 없다고 하는 의뢰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을 얻는 믿음이의 네 번째 단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 보혈로 말미암는 속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받을 때 ‘그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생사 간에 의지할 분이 없는 것을 믿느뇨’ 그 고백을 받아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정말 의지할 분은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 쓸모없는 죄인을 한없이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그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 이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 것에도 내가 의지할 수 없다. 그 신앙이 의롭다함을 얻는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돈이 많다고 좀 뻐기면서 기도 안하고, 또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 거의 생각하지 않고, 아래 있는 사람들 자기의 종처럼 생각하고 교만해지는 이런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혹시 그 사람이 만약에 구원을 받았다면 그러면 아주 잘못살고 있는 중입니다.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받은 자녀가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분명히 여러분들이 좋은 집에 살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길러서 그래서 좋은 학교에 보냈는데 이놈이 어느 날 학교에도 안 나타나고 집에도 안 나타나서 찾아가보니까 다 때려 치고 말하자면 불량배들과 어울려서 그래서 골목에서 사람 칼로 찌르고 돈이나 뺏으면서 삽니다. 그런 정도의 돈은 와서 달라고 그래도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도 그 자식이 내 자식입니다. 그렇지만 그 애는 아주 잘못 살고 있는 중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뭐 우리가 조금 못산다고 그렇게 우리 믿음이 구원받은 믿음이 아닙니까? 그래요.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고 우기면 내가 인정해주는 게 소용이 없지만 그렇다고 치십시오. 그렇게 인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아주 더럽게 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속죄의 은혜를 원수와 같이 행하면서 그 사랑을 더러운 죄로 갚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둘 중의 하나를 확실히 하십시오. 구원을 얻었다면 깊이 회개하고 그 구원에 합당한 삶으로 돌아가고, 못 받았다면 믿음이 없는 것을 고백하고 주님을 진실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로 믿고 그리고 새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 이외에는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를 갈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에는 세 가지 요소가 따르게 되는데 우선 첫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의뢰함 속에 포함되는 내용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내가 의뢰하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진노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면서 어떻게 그 하나님을 의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 자신이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지금은 자녀의 부모가 되었지만 한때 여러분들도 어느 부모의 자녀였을 것입니다. 요즘 애들은 말을 안 듣는다고 그렇게 하는데 요즘 애들이 아니라 옛날 애들도 말을 안 들었습니다. 우리 애들은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는가 하는데 자기는 했나. 요즘은 그렇게 말이지 선생이 시키는 대로 안한다고 하는데 자기는 모범생이었나. 바지를 단정하게 입고 다니라고 그러면 양복점에 가서 늘려서 나팔바지 입고 다니고, 무릎 아래까지 학생복 입고 다니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더니 바늘로 찍어매서 무릎위로 올리고 다니고 그랬잖아요? 그 피가 어디로 갑니까? 다 그 밭에서 그 콩이 나는 것이지,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부모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뭘 잘못하거나 그러면 부모님에게 야단맞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잘못하는 그 순간에 부모가 나를 야단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우리 부모는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야’ 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자식이 미운 게 아니라 자식이 버리지 못하는 죄와 경솔함, 이런 것들이 미운데 그것을 지금이라도 자녀가 놔버리면 자녀를 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붙들고 있으니까 때리는 것입니다. 못 먹을 것 먹은 애를 등을 쳐서 그것을 토해 놓으라고 그렇게 하듯이 막 때리는 이유는 애가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라 막 때리면 아파서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잘못된 것을 버릴 줄 알고 부모가 그렇게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과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실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신실한 분이라고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의뢰함 속에 포함된 요소는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곳에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셔도 나는 나대로 또 사는 방법이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안 받은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는 그렇게 다른 방법으로 살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도 살수 있고 또 다른 방법으로 살면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주는 모든 방법에 대한 기대를 꺼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향한 의뢰입니다. 차례대로 이야기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길에 전적인 포기, 그 다음에 의지의 동의, 그 다음에 마음 깊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 다음에 이제 다섯 번째로 성경에서 언급하는 종류의 믿음은 바로 앞에서 네 가지 이야기한 이런 종류의 믿음이지 심리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왠지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이렇게 해서 생각하는 심리학적인 믿음, 또 자기의 소원을 극대화시킨 나머지 될 거야, 될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자기를 암시하는 종류의 그런 종류의 믿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피죽도 못 먹고 어린시절에 고아로 고생을 하다가 지금은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가 그랬더니 군대에서 화장실에서 그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군대에 가기 전에 뭐도 해보고 뭐도 해보고 다 실패해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군대에 갔는데 제대할 때가 되었는데 이렇게 가마니로 쳐놓은 간이화장실에서 변을 보는데 거미 한 마리가 줄을 타고 내려오는데 이놈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고 싶은데 그런데 못 가는데 그러면서 여러 번 시도를 하는데 9번을 시도한 끝에 결국은 건너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막 엄청나게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아! 이 화장실에도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구나. 이 거미가 두 번 세 번, 여덟 번 하다가 끝냈으면 자기 뜻을 못 이루었을 텐데,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꾸준히 했더니 됐구나. 그 다음부터 이 사람은 항상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그 집에 나올 때 거울을 보고 항상 주먹을 쥐고 거울에 써 붙여 났다고 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다. 밑에는 나는 된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될 수 있다. 너 할 수 있어. 이렇게 해온 결과 무수한 고난과 어려움을 이기고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무조건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그 대상과 밀접하게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 그리스도의 속죄 속에 나타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뢰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만이 영혼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고 이 영혼의 변화가 우리의 온 영혼과 관계된 영혼과 마음과 지정의와 이 모든 것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놓으신 그 속죄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그 손입니다. 그런데 댕!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편에서는 이렇게 믿음으로 사람이, 다시 지워버리고 다시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궁금한 게 왜 하나님이 그냥 구원받으라고 주시지 그렇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시고 그 전적인 의뢰 속에서 우리를 회개하고 거듭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이 구원의 은혜를 주실까? 이게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만을 향한 전적인 의뢰,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불행의 원인이 되는 죽음이라는 질병에서 자기를 건져낼 수 있는 다른 모든 방법들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정된 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자기를 구원해주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그 집중의 과정들을 통해서 뭘 청산하게 하시는가 하면 독립선언을 포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 하나님을 떠난 그 죄가 가장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렵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부자들도 구원받은 예가 많이 나옵니다. 아리마대 요셉, 빌레몬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역사가 일어나는데도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가 하면 돈이 많고 그 재물에 대해서 사랑하고 의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다고 하는 독립선언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하게 하시는 그 믿음에 과정을 통해서 독립하며 하나님 앞에 뛰쳐나갔던 그 자식들이 도저히 혼자는 살수 없다고 포기하고 아버지 제발 나와 함께 있어주시고 나를 아버지 곁에서 떠나지 말게 해주시옵소서 하는 절대의존의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게 됩니까? 순종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이렇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뢰함으로 말미암아 내면의 세계가 완전히 쇄신이 되고 그래서 원해서 독립선언을 하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어서 독립해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다 끊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을 창조하셨던 제자리에 돌려놓고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을 순종하면서 살아가게끔 이렇게 바꾸어놓기 위해서 이런 믿음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가장 초기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이 믿음이 과연 순종을 포함하는가. 다시 말하면 구원받는 믿음, 즉 의롭다 여김을 받는 그 믿음 속에 순종이 포함된 것인가, 아니면 믿음은 믿음이고 순종은 그 다음에 오는 별개의 것인가 라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실제로 교회사속에서 이 두 가지를 두고 논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견해는 이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의롭다 여김을 받는 그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포함되지 제외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질문이 여러분들 마음속에 많으시겠지만 좀더 들어보십시오. 우선 이것을 입증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구원 얻는 믿음을 가졌다고 할 때 그 믿음이라는 것이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도 은혜인데 이 믿음이 순종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질문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믿음이 순종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첫째는 믿음이라는 것도 은혜인데 이것이 하나님이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너를 주려고 선물 가져왔는데. 뭔데? 뭐를 가지고 왔는데. 뭔데? 낙서하다가 버리는 휴지 한 장이야. 그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이 되려면 이것은 내가 중국서 사가지고 온 도자기인데 네 생각이 나서 내가 사지고 왔다. 이것이 나도 필요하지만 네가 써라. 그러면 아! 고마워. 기쁩니다. 그러니까 선물이라는 그 자체가 상식적이고 그리고 통념적이고 언제고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선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례적이고 예외적이고 특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그 선물을 받고 아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주 기뻐하는 것인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지극히 크심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통하지 않고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주신 선물인데 그러니까 그것을 아주 놀랍게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이런 것을 받아본 적이 없고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너무 좋은데 그런데 그렇게 선물로 받은 그 믿음이라는 것이 죽어 있고 활동도 안하고 열매도 못 맺고 그리고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믿음은 믿음이고 순종은 순종이라고 두부를 자르듯이 딱 갈라놓으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은혜를 주셨는데 그 믿음이라는 은혜가 역사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우리들이 불순종하며 살아도 내버려두고 마음속에 어떤 감동도 불러일으켜서 하나님께 순종하게도 하지도 않은 그런 종류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야고보 사도는 오히려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닙니다. 질문이 많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무슨 질문이지 압니다.
그 다음 보십시오. 그래서 그 믿음이라는 것은 또한 믿음이라고 하는 은혜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이 믿음은 예수님을 아멘하고 믿을 때 잠깐 쓰다가 버릴 일회용이 아니라 그 믿음을 품고 살면 구원하셨지만 더러움이 남아 있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그 형상이 그 믿음의 은혜의 역사 때문에 계속 씻겨나가서 찬란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하게 할 그런 믿음인데 그 믿음이 우리를 순종하게 할 수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이것은 성경 전체의 믿음에 관한 진리들을 전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믿음이 순종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믿음이라는 은혜가 영적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은혜는 즉 우리를 의롭게 여기게 만드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뢰의 이 믿음은 그 은혜 말고도 또 다른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믿음의 은혜 말고도 성경에는 다른 은혜를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게 하는 은혜라든지, 성결하게 살고 싶어 하는 은혜라든지, 잘 섬기는 은혜라든지, 기도의 은혜라든지, 무슨 설교의 은혜라든지 다른 은혜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두 은혜가 하나가 있고 하나가 없고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이 두개가 함께 이렇게 유기적으로 섞여 있습니다. 섞여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뢰의 마음을 가져다주는 이 믿음의 은혜는 다른 순종하게 하는 은혜와 섞여 있습니다. 섞여 있기 때문에 따라서 순종하는 은혜가 행사되지 않는데 유독 믿는 은혜만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은혜가 그렇게 섞여 있기 때문에 순종하는 은혜가 있는 그곳이라면 거기에 하나님을 향한 전적으로 의뢰하는 믿음이 존재하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기는 하지만 순종하지는 않는 그런 종류의 믿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첫날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이 세상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의 뜻을 따라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다 지어서 네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 너는 땅에 살아라. 나는 하늘에 살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께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을 깊이 의뢰하게 하셔야 됐으니까 의뢰와 순종이라고 하는 이 자체가 동 떨어지는 것이 아닌데 이 의뢰 그 자체가 이제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궁금한 게 있겠지만 좀더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의롭게 하는 믿음의 은혜를 받게 되면, 즉 구원이 이르는 믿음을 우리가 소유하게 되면 어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면 전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고 싶은 주도적인 경향성이 생겨나게 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주도적인 경향성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그런가. 이런 이유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의롭다 여김을 받는 즉 구원 얻는 믿음을 선물로 주실 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뢰가 포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뢰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인간 편에서는 그 의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지 않기를 원하는 강력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때야 되는가 하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불순종이 바로 죄를 가져오고 그 죄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다시 자기는 그럴 수 없는데 독립선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뢰하는 마음이 깊어질 때 순종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나중에 성화에서 다시 다루어지게 되는데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그러는데 마른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뜻대로 못삽니다. 그래서 들어보십시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의 순종하는 삶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강단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결단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식가지고 살수 있는 삶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있을 때 순종하는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뢰의 마음이 필요한데 의뢰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마음속에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수 없네
여러분, 기도할 때 한번 반복해보십시오. 하나님 정말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이고 더럽기로 말하자면 쓰레기와 같은 인간이고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내 마음과 결심은 약해서 수시로 죄에 넘어지고 유혹에 흔들립니다. 말씀을 따라서 분투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도저히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붙들어주시지 않고 이 세상에서 제왕이 되게 하시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붙들고 지옥이라도 가주시옵소서, 나는 주님 없이 살수 없습니다. 예수님,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기도할 때 눈물이 안 흐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뢰의 마음이 들 때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아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지 아멘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되는 믿음의 은혜를 받게 되면 총체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주도적인 경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안에 있는 의문이 이제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우선 첫째는 이런 의문입니다. 그러면 총체적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러면 목사님 제가 구원 못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 못 받았습니다. 그러나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받았으면 그럼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받았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변화시키셔서 구원해주셔서 변화시켜주셨을 때는 여러분 속에 하나님을 총체적인 방향에서 총체적으로 순종하면서 살고 싶은 주도적인 경향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도적인 경향입니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막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도적인 은혜의 경향이 점점 쇠약해지고 그리고 자기 멋대로 정욕을 따라서 살아가는 이 게으르고 육욕적인 삶이 죄와 함께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죄의 경향이 은혜의 경향보다 일시적으로 강하게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안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빨리 돌이키지 않으면 죽습니다. 어떻게? 그럼 하나님이 내 목숨을 거두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실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로마서 8장13절에 “만일 너희가 육신의 행실대로 살면 죽으려니와” 반드시 죽는다. 어떻게 지금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지만 지금 남아 있는 그 영적인 생명, 영적인 생기, 하나님의 은혜 이런 것 모두 뺏겨버리고 지금보다도 더 더럽고 비열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가면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며 살고 그분을 순종하며 의뢰하며 살게 하시려고 구원해주셨는데 정 반대의 목적으로 여러분들의 구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날이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그 일을 못하게끔 간섭하십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은 지금 믿음이라는 것도 은혜고 따라서 믿음 속에서는 반드시 순종이 포함된다고 말했는데 그런데 내가 지금 순종을 못하고 살아가는데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러면 내 안에 있는 은혜는 죽어버리고 활동하지 않고 열매 맺지 못하고 역사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비슷한 대답입니다. 구원을 못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진짜로,
그 믿음이 믿음은 믿음인데 의롭다 여김을 받고 구원에 이를 정도의 믿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아닐 수 있고 그렇다면 대답이 다 된 것이고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또 만약에 사실이라면 그러면 여러분들은 처음에 가졌던 하나님을 향한 단순하고도 어린아이와 같은 의뢰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그 은혜에서 심하게 부패되어서 그래서 뒤로 물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물러가면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니라.
예전에는 여러분들을 보실 때 기쁨과 즐거움에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시면서 즐겁지 않고 기쁘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의 얼굴을 떠나서 불순종하며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인생의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이 정말 지금 그렇게 살면서 행복하다면 여러분들은 절대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아무리 불순종하고 타락해도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고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허무와 고통에 대한 감각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경솔하게 구원을 말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하박국 2장 4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여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할 때 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2장 4절에서 이야기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할 때 바로 그런 의미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다 여김을 받아 예수의 그 속죄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구원받게 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잘 들어보십시오. 이제 끝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달라붙어 있으려고 애를 쓰는 그런 종류의 믿음입니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거기에 매달려서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이외에는 소망이 없다고 매달리는 그 믿음입니다.
(예화: 가정법원에서 부부가 이혼을 하고 나오면서 데리고 온 자녀를 서로 맡지 않으려 고 하는 과정에서 애가 엄마를 붙들면서 울며 매달리는 처절한 모습이 보기에 안 타까웠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붙드는 것입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원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옵니다
그런 믿음입니다. 사랑과 자비를 피가 맺히도록 거기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혼을 위해 제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한 집착으로 달리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와 놀라운 사랑을 여러분들 어떻게 깨닫습니까? 길거리에 지나가다가 깨닫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뜨거운 은혜를 어떻게 깨닫습니까? 뭘 보고 깨닫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이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하나님을 굳게 붙드는 그 믿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집착하는 그 믿음이 바로 우리를 아무리 죄가 많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씻어 양털같이 희게 만들어주는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시고 그 십자가에서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모두 품에 안고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단번에 화목제물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안에서 우리도 죽었기 때문에 주와 함께 살고 구원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 소유하시고 참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6.왜 믿어야 하는가?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6)
믿음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사건과 연합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속죄의 사역에 함께 연합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연합이 되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는데 혼자 당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모두 끌어안고 우리의 대리자로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으니까 우리도 함께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되었고 또 그 주님이 거기에서 살아나셨으니까 우리가 또한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예수님이 대신 사셨을 때 우리도 살아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시고 못 박히셨는데도 성경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아나셨다는 사상을 성경이 강력하게 외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우리를 모두 끌어안은 대신 죽으신 죽음과 부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내포적인 대신적 죽음과 부활 때문에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그 예수님의 구원 사건과 연합시킴으로서 우리가 그분에게 참여하게 되는데 첫째는 그분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으셔야 했던 상태였습니다. 우리도 그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그분께 포함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대리자이신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진노를 받으셔야 했을 때 우리도 진노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율법의 요구를 만족하셨을 때 우리도 이제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됨됨이에 참여하게 되고 또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속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혼자 못 박히신 것이 우리를 모두 끌어안고 있는 대표자로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가 당한 것으로 하나님이 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죄를 지시고 율법의 저주를 받았습니까? 우리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것으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율법에 정죄함을 받고 죽었나요? 우리도 죽은 것으로 인정해주시고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나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곧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데 이 구원의 실제에 대해서 성경은 세 가지로 묘사를 해줍니다. 첫째는 칭의, 쉽게 이야기하면 의롭다 일컬음을 받게 해주시고, 두 번째는 화목하게 해주시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각각 어떤 관계를 염두에 두고 채용해온 그림입니다. 의롭다 인정해주시는 것은 법정 관계에서 빌려온 그림이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빌려온 그림이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가족관계에서 빌려온 그림입니다.
그 그림 같은 묘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성경은 구원의 실제가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여러 각도에서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나 예수 믿고 구원받았지. 그렇게 하면 감격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여러 각도에서 상세하게 설명을 듣고 나면 정말 내가 받은 이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이 가슴에 다가오고 또 이렇게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녀답게 살고 싶다는 소원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식었던 소원이 다시 솟아올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두 가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과, 두 번째는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말이 길어서 한자말로 칭할 칭자에다가 의로울 의자를 써서 ‘칭의’ 라고 부르거나 혹은 의로운데 의자에다가 인정한다. 라고 인자를 사용해서 ‘의인’이라고도 말하기도 하고, 이 ‘칭의’ 혹은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기 때문에 ‘이신칭의’라는 말로 간략하게 줄여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째든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입니다.
이 ‘칭의’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에 근거로 해서 죄인을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25절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준바 되고 우리의 부활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죄인인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그 거룩의 힘과 영향 때문에 심판을 받아서 파멸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그런 죄인이 되었고 그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죽음이라는 질병을 가져왔고 그 죽음이라는 질병의 절망적 증상들이 악과 고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궁극적인 원인은 우리의 죄가 우리를 이렇게 망가트렸는데 그런 더러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 다시 설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화: 오래전에 어느 형제가 군대서 트럭을 타고 가다가 탈영을 해서 민가에 들어가 중학생 옷을 입고 탈출해 그때부터 도피생활을 하게 되어 직장도 못 다니고 항 상 불안한 상태에서 도망 다니다가 나이가 들어 붙잡혀 결국 영창도 가고 다시 대구에 있는 군대에 입대를 하는 등 이중의 고통을 당하다가 제대를 했는데 그 때부터는 경찰이 있어도 담대했는데 그것은 과거의 모든 죄에서 해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화: 8년 동안 재판에 시달린 어느 치과 의사가 아내와 딸을 죽였다는 혐의를 쓰고 괴롭힘을 당하며 일심에서 사형언도까지 받았지만 아무런 혐의가 없어 나중에 무 죄로 풀려났다.)
전에는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돌아다니지도 못했고 감옥에 있었지만 돌아다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 놈이 마누라하고 자식새끼를 죽인 짐승 같은 놈이라고 다 손가락질을 했는데 이제는 그 사람을 볼 적마다 나부터 손가락질 되는 게 아니라 8년 동안 참 고생했구나. 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냐고 기자가 물어봤더니 수사 좀 똑바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한이 맺혀있는 것입니다. 수사 좀 똑바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일순간에 그가 참 불쌍한 사람으로 그렇게 내 마음에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의롭다고 하는 선언이 가져다주는 유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간에 죄가 들어왔고 우리가 죄 없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재판장이 너 죄 없다. 그렇게 선언한 것은 재판장이 내려가서 그 사람이 죄가 없도록 도와준 게 아니라 확인을 하고 선언을 해준 것입니다. 선언을 해주니까 그것이 모두 통용되는 것입니다. 칭의 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법정적인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법적인 행위입니다. 죄가 있습니다. 죄가 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이제는 의롭다. 이제는 이 사람의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지을 죄에 대해서 더 이상 거론하지 마라. 이 사람은 이제 죄가 없는 것으로 내가 친다. 내가 없는 것으로 치겠다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최종적인 권위인데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언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통해서 오는가 하면 믿음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롭다함, ‘칭의’라고 하는 것은 신명기 25장에 보면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할 것이요. 악인은 정죄할 것이로되”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에서 의롭다 한다는 그 단어는 의롭게 만들어주고 역사해서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고쳐주는 그런 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단순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의롭다.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 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언제 주시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을 때 주십니다. 그 믿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금요일 날 상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아닌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구원 얻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안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분들은 하여튼 꼭 금요일 날 설교를 들으셔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를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그 믿음이 대단한 것이구나. 이 믿음이 만능이구나.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구나. 하는데 사실은 직접적인 효력은 믿음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그 믿음이 그렇게 의롭다 여김을 받는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는 기초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에서 ‘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이 성서신학에서는 매우 난해하고 어려운 신학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주 쉽게 정리를 해드리겠으니까 이것만 여러분들의 마음에 넣고 있으면 성경의 ‘의’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 아주 편안하게 성경을 이해하면서 읽어내려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의를 크게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속성적 의’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그 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품에 속한 의, ‘Essential righteousness’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 의,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 중에 의로운 성품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로운 성품은 하나님에게는 거룩함이 있는데 거룩함에 대해서 도전하는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방어하시는 성품이 바로 그것이 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 고 하면 겁납니까, 행복합니까? 겁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는데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 고 그러면 신납니까, 겁납니까? 신이 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오셔서 굽은 것을 펴주시고 당신의 성품대로 당신의 거룩에 도전하는 것들을 정리해버리시고 나면 비로소 그때 내가 억울함이 풀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산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런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온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도전하지 않고 대들지 않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온전히 인정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드리는 그런 세상을 위해서 산다는 의미라고 해석하면 틀림이 거의 없습니다. 쉬우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율법적 의’입니다. 율법적 의는 무슨 뜻인가 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면 겁날 것이 없고 율법에 있는 것을 행하면 의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다 행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습니까, 안 두렵습니까? 두렵지 않습니다.
저도 가끔 이제 스승의 날이 다가와서 그 선생님 생각이 나는데 저는 중학교, 고등학교 때 만난 영어선생님이 있는데 저를 참 예뻐하셨습니다. 그렇게 예뻐하시고 자기처럼 고등학교 선생님 되라고 저를 참 많이 설득하셨는데 결국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얼마나 독특한 분인가 하면 1학년 때 학교 체벌하지 말라는 그런 것 없었습니다. 부모님들도 선생님에게 꼼짝 못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갔는데 숙제를 내주었는데 숙제가 살인적입니다. A, B도 제대로 못 쓰는 애에게 영어숙제를 내주는데 삼자택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lesson 5; 제 5 과를 다 외우든지, 150번을 읽든지, 50번을 쓰든지 셋 중의 하나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외웠다고 하면 자꾸 막히니까 안전한 방법은 쓰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악함이 드러나는 게- 그때는 복사기도 없었습니다. -어떤 녀석은 밑에다가 먹지대고 쓰는 것입니다. 25번 쓰면 50번 쓴 게 됩니다. 먹지 됐으니까, 두장 되면 15번만 쓰면 45번이 아닙니까? 먹지대고 씁니다. 그렇게 썼는데, 그 숙제를 밤을 새워도 도저히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 영어숙제만 있는가 하면 다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해서 천신만고 끝에 해서 갔습니다. 그것도 잉크 찍어서 펜으로,
그랬더니 선생님이 숙제해온 사람 손들어 하니까 숙제해온 사람이 한 14-5명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다 일어나라고 하더니 책상을 치우라고 하더니 다 치우고 숙제 안 해온 애들을 다 마루바닥에 엎드리라고 하더니 숙제한 애들보고 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선착순으로 왔다갔다가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일 등한 애 하나는 들여보내고 그 다음에 일 등한 애, 그러니까 애들이 막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제가 가벼웠습니다. 저 같은 사람 태운 사람은 괜찮은데 한 65킬로 되는 애 태운 애는 늘 꼴찌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이 숙제를 해서 가지고 간 사람들의 희망은 숙제검사를 하는 것입니다. 숙제를 안 해간 사람들의 내 평생소원은 숙제검사 안 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 날도 가슴을 졸이면서 이 숙제검사 안하면 어떻게 하나 그랬는데 들어오자마자 숙제검사 한다. 그런데 막 복음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이게 누구의 마음인가 하면 율법을 지킨 사람의 마음입니다. 문제는 율법을 다 지키는 인간이 없습니다. 만약에 있다고 하면 그 길로 해서 구원받으면 되니까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벌써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그래서 이 악과 고통이라는 증상이 나타나서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자기 혼자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지금 살 능력이 없는 망가진 존재가 되어버렸는데 그 주제에 무슨 거룩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요구를 완벽하게 지킬 수가 있습니까? 못 지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말미암은 그 의는 얻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일시적이지만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제물이 나의 죄를 다 뒤집어쓰고 심판을 받아서 죽으면 잠시 동안 그게 의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적 의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한 의와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나고 나면 다시 범죄 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또 막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물로 오셔서 짐승으로라도 잠시 하나님과 화목할 길을 열어주셨는데 예수님도 우리의 죄를 위해서 제물이 되어서 죽으면 잠시만 하나님께 열린다고 그러면 효과 면에서 예수님을 짐승하고 똑같이 치는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화목제물로 바치셨을 때는 의의 효과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하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합리적입니다. 동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동의를 안 해도 할 수 없습니다만 성경이 가르침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우리의 의가 되게 해주셨는데 그게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성취하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적 의를 완전히 성취하시는 분은 율법이 주어진 시대에 태어나고 지금 이 시대에 그것을 성취하신 분은 오직 한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율법적으로 의로우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자신 때문에는 죽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관심이 예수님의 의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관점이 지금 우리에게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죽으실 필요가 없고 죄 값을 치룰 필요가 없었는데 우리의 죄를 위해서 짊어지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하나님 앞에 이 죄인들에 대한 의를 당신이 가지게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를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의를 세 번째인 복음적 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적 의는 탁월함에 있어서 율법적 의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면서 비교적 의로운 사람이 있다. 상대적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완전히 의로운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 복음적 의는 완전히 의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이런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당시 사람들로서는 참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이러면 오늘날로 말하자면 헌신적인 목회자입니다. 그 시간 다 바쳐서 성경연구하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가르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처럼 여겨졌는데 그 사람들이 의로운 것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하면 그 사람보다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 돈도 많이 내라. 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적 의는 일평생 경건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헌신적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써서 얻은 그 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고 찬란한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이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구원사건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Jesus dead for us’ 예수 그리스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도다 하는 것, 그것을 아멘하고 전심으로 의뢰하는 것, 이 믿음의 성질은 금요일 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때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우리가 한 일이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고 그리고 율법의 정죄를 받고 그래서 율법의 요구대로 제물이 되어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죽으실 때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모두 끌어안고 우리와 관계된 대표자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끔 보면 회사 회장이 경영을 잘못해서 빚을 많이 지고 회사가 넘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이 종업원들도 다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비자금을 말단 종업원들이 보기를 했어. 만져봤어. 먹어봤어, 그 회사가 망하는데 함께 도산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보다 더 강하게 우리와 연관된 하나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끌어안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우리도 죽은 것이 되고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받고 희생제물이 되어서 사형을 당하실 때 우리도 함께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그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을 때 우리도 그 요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거저 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더 이상 지불할 수 없는 최고의 비용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의 날에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얽어매고 있던 모든 파괴적이고 적대적인 세력, 죽음, 율법의 저주, 정죄, 사망 이런 모든 파괴적인 힘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신 것입니다. 그 파괴적인 힘에서 예수님이 그것을 모두 끊어버리고 다시 살아나셨을 때 혼자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믿는 자들을 끌어안고 우리와 한 덩어리가 된 존재로서의 대표자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가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함께 살아난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활을 기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계란 먹는 날이라고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의미를 알아야지 기뻐하지, 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우리를 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계실 때 그토록 도전하고 인간을 철저하게 지배하려고 하던 그 파괴적인 생각들이 이제는 아직도 이 세상에 존재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우리를 얽어맬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입증해주신 사건이 부활의 사건입니다.
옛날에는 어떻습니까?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 믿고 나음을 얻었습니다. 영혼이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는데 이것들이 다 깨트려지고 나음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이 속에 죽은 듯이 심어놓으셨습니다.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모든 악과 고통에서 인간은 스스로 어떻게 해방될 수 없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고통이 생기는가 보다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인간관계가 깨져서 고통을 받고, 인간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운가 보다 하고 인간들이 없는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면 그것에는 다시 질병이 발생해서 고통을 당하고, 그 질병으로부터 벗어나면 또 다른 고통이 생기고 이러면서 인간들이 끊임없이 이 고통과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한번 걸리면 그것이 우리를 사로잡아서 움츠려서 뛸 수도 없게끔 그렇게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은 불행하면 그냥 불행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은 불행하면 그냥 불행한 것입니다. 고통스러우면 그냥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은 불행해도 행복할 수 있고 고통스러워도 기쁨이 넘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보면 사도 시대에 있었던 예수 믿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까? 뭐가 행복합니까?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집도 잃어버리고 친척도 잃어버리고 동족들에게도 외면을 당하고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박해와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죽음의 길로 걸어가야지 됐는데 뭐가 행복했습니까? 불행했습니다. 그렇게 불행했는데도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왜 그 불행의 세력이 여전히 있지만 더 이상 그들을 얽어매어서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뭘 소유해야지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행복하면 그냥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행복해도 불행한 것입니다. 다 돈 갖고 부족한 것이 없이 그렇게 살아도 불행한 것입니다.
중국에 가있을 때 장국영이라고 하는 그 배우가 말이지 내가 기억하는 몇 명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한 30살쯤 된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나이가 한 50이 다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돈도 많습니다. 그 사람만 나타나면 비명을 지르는 예쁜 여자들이 얼마나 많고 이 세상에 그 사람의 팬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행복하고 건강하고 돈이 있고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많고 지위가 있고 그렇게 행복한데 그런데 불행한 것입니다. 왜 죽음의 세력과 절망의 세력들이 돈이나 건강 명예 이런 것들에 의해서 결박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있어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 마음으로 믿고 사랑하고 섬기고 그렇게 살아가야지 됩니다. 더 이상 그런 세력들이 문제가 안 됩니다. 예수 믿었는데 왜 이렇게 가난하고 예수 믿었는데도 이렇게 어려움이 계속 있고, 복음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물론 예수 믿을 때 그 구원은 그 모든 것에서도 하나님이 건져주십니다. 특별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예수 잘 믿어보십시오. 그래도 하나님이 밥은 안 굶게 해주십니다. 저도 예수 똑바로 믿고 나니까 비소로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내가 아무리 잘살아도 내 형제, 동기간, 우리 어머니 아버지, 이웃 친척들이 가까운 친척들이 고통을 받으면 내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다 연관이 되는데,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십니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이 세상에 아직까지도 죄의 세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 밖에서 다스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수시로 공격합니다. 그래도 이제 더 이상 그런 것에 이제 더 이상 소용이 없습니다. 마치 저항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균들이 달려들어도 더 이상 소용이 없듯이 상관이 없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진정한 파워가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하며 눈물 흘려야 할 그 시간에 찬송 부르며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마라와 같이 쓴물을 머금으면서 탄식해야 할 그때에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향해 감격적인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겼다. 더 이상 사망과 파괴적인 세력들이 나를 사로잡을 수 없다. 도전은 해오겠지. 그러나 나를 삼킬 수 없고, 나를 사로잡을 수 없고 더군다나 거기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내가 다시 하나님을 떠날 수는 없다. 그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 왜 그렇게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부르는가. 이 이야기입니다. 이 칭의는 결국 관계의 회복입니다. 관계의 재수립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면 처음 창조될 때 인간은 어차피 하나님께 절대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의도 자체를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쑤시개는 무엇을 찍어먹으라고 만든 것이고 이빨 쑤시라고 만든 것이고, 젓가락은 젓가락질 하라고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쑤시개 가지고 젓가락질이 되겠습니까?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 수밖에 없도록, 죄가 없어도 그렇게 살도록 그래서 당신께 그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에서 비롯된 순종 속에서 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처음부터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의도를 인간이 벗어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로부터 의지하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 인간의 영혼에 연결된 통로를 통해서 하늘 자원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늘 자원을 공급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창조하신 광활한 세상에서 수많은 창조세계를 돌보는 선량한 관리자로서 아주 인자한 왕과 같이 혹은 그 황제 앞에 충성스러운 신하처럼 그 하나님의 대리자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영광스럽게 이 지상세계를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그 통로가 끊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하늘 자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원리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게 되었는데 혼자 사는 존재가 되었고 또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며 살고자 만들어 놓으셨는데 독립선언 하는 존재가 되었고 하늘 자원을 힘입어야 겨우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는 존재인데 하늘 자원의 공급통로가 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는데 다 사는 게 아닙니다. 생존은 하지만 인간이 사는데 사는 게 오죽하겠습니까? 거기서 인간의 모든 부패성이 함께 역사하면서 아주 더럽고 뒤틀린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엄마가 없고 아빠가 없어도 삽니다. 동기간이 없어도 삽니다. 가난해도 삽니다. 교육을 못 받아도 삽니다. 친구가 없어도 삽니다. 옷이 없어도 삽니다. 신발이 없어도 살고요. 인간이 공급받는 것 대부분 다 끊어버려도 마실 물과 먹을 양식만 있으면 생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존할 인간이 마지막에 어떤 존재가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인간이 자기 자원으로는 도저히 이상하게 행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하기를 아! 이게 돈이 없게 때문이다. 뺏자. 아니면 미친 듯이 일해서 개처럼 벌자. 이렇게 해서 재물도 모으고 지위도 올라가려고 하고 욕망이 충돌을 일으키면 전쟁도 일어나고 그리고 뭔가 사람들 사이에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이웃도 사귀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을 궁극적으로 끊어진 하늘 자원을 다시 공급받게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는 이 칭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갖게 만들어주고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이 되니까 다시 그 통로가 생기기 시작해서 하늘자원이 흘러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꿔놓고 용서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늘자원을 끝없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마침 좋은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옹달샘이 있습니다. 샘이 퐁퐁 솟아납니다. 혹은 이렇게 위에서 물이 계속 내려오고 흘러가는 샘이 있습니다. 그런 샘이 집 근처에 있어서 초등학교 때도 늘 거기에 가서 세수도 하고 강아지 데리고 나가서 오줌도 뉘고 그렇게 거기서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방학 때, 이제 그런데 그 샘을 놔두는 게 아니라 꼭 못된 애들이 진흙을 가지고 와서 막 풀어놓고 도망갑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놓고 갈 때는 물이 금방 더러워집니다. 그런데 그게 그릇에 고여 있는 물이면 계속 더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가 하면 물이 계속 흘러들어옵니다. 그리고 계속 밑에서 솟아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막 더러워서 먹을 수 없을 것 같다가도 한 10분 있다가 오면 다시 깨끗한 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바꾸어놓으셨습니다.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이해가게 아주 쉽게 설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죽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칭의를 통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칭의를 통해서 하늘자원을 공급받게 되면 신자가 그 공급 맛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유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들 갈급하다는 말을 쓰십니다. 예수 믿기 전에 그런 이야기를 썼습니까? 그때는 갈급하다고 안 그러고 갈증 난다고 그랬습니다. 그때는 사이다를 찾는 것이고 지금 갈급하다고 그러면 사이다가 먹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이 통로가 다시 열려서 하늘 자원이 공급되는 것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뜻입니다.
주 예수여 은혜를 내려주사 늘 충만케 하옵소서
그것이 하늘자원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것들을 공급해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급받고 나면 내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자원이 내 안에는 없고 오직 그 하늘로부터만 오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니까 이 세상의 금이나 은보다도 소중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면서 삽니다. 그러니까 돈 좀 번다고 어깨에 힘주고 막 뻐기고 이러고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벌었으면 어떻게 하라고 그랬습니까? 남 다주라고 그랬습니다. 남 다주고, 자기 것도 조금 남기십시오. 굶으면 안 됩니다. 내일 살아야지 되니까, 좀 남기고 다 주고 그러면 자기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는데 말이지,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뢰의 마음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는 것, 당신 참 사업 잘하네. 돈 많이 벌었어. 당신 진짜 대단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슬픕니다. 나는 주 없이 살수 없는 존재이고 내가 돈은 많이 벌었지만, 높은 지위에 올라갔지만 성공했지만 내 관심은 성공도 아니고 많은 재물도 아니고 높은 지위도 아니고 뛰어난 학식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하늘자원을 공급받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생기면 어떻게 한다고 그랬습니까?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만이 곧 불순종입니다. 교만은 마음의 불순종이고 불순종은 그것이 마음에 있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런 인간들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러니까 참된 신자는 모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하다는 이야기는 비굴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담대하고 당당하고 단호할 때는 단호하지만 이 겸손함은 사람 앞에서의 비굴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나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재를 무릎 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 앞에 티끌에 불과한 인간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겸손함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칭의 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셔서 우리에게 하늘 자원을 공급해주실 때마다 누가 생각이 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신분을 허락해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 예수님의 사랑도 모를 때 하나님의 은혜도 기억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주셨음을, 이렇게 나를 의롭다 여김을 받게 해주시고 내 공로는 하나도 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하늘 자원을 공급하셔서 왜 나를 이렇게 살게 하실까? 그래서 감사와 은혜의 눈물에 젖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해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빛을 던져주고 열심히 벌어서 다른 사람 다 주고 그래서 가시고기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살았을 삶입니다. 그것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도시락 사준다니까 아멘 소리가 크더니 왜 이렇게 복음, 믿습니까? 아! 그렇습니다.
그 칭의 다음에 또 하나 구원의 실제에 대해서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법정관계에서 빌려온 그림이라고 말씀드렸고 이 화목케 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빌려온 그림입니다. 사람의 범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두 가지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친교적인 측면에서 관찰할 때 그렇습니다. 뭘 가져 왔는가. 하면 적대감을 가져왔고 두 번째는 거리감을 가져온 것입니다. 왜 적대감을 가져오는가 하면 잘 들어보십시오. 이 죄를 성분 분석하면, 물을 성분 분석하면 H2O입니다. 수소분자 2개 산소분자 1입니다. 맞습니까? 그렇게 되어서 물이 되는데 그런데 이 죄를 쪼갤 수 있는데 까지 성분을 분석해보면 그 성분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대적과 하나님을 향한 반감입니다. 그리고 이 총체적인 게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그것을 다시 세분화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반감을 갖는 것입니다.
반감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청소년 시절에, 하여튼 아버지가 한번 싫어지기 시작하면 뭐라고 하더라도 싫습니다. 밥 좀 먹어라 그러면 사람이 밥으로만 사나. 공부 좀 해라. 그러면 에이씨 우리 아버지는 공부밖에 몰라. 그럼 좀 놀아라. 언제는 공부하라고 그러더니. 하여튼 모든지. 반감이라고 하는 것은 가슴 깊은 곳에 있어서 의지와 정서 지성 모두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게 죄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그 약을 인간이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죄라는 약이 들어갔는데 그 첫째 성분이 대적인데 이게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약이 풀어져서 온 몸에 다 퍼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는 것으로도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듣는 것 가지고도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으로도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생각하려고 하는 것으로도 대적하려고 그리고 사람과 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이 세상 속에는 물리의 법칙들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법칙입니다. 그 법칙들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니면 그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타임지를 받아보니까 거기 이라크에서 쓴 무기에 대한 이야기가 특집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폭탄이라는 것을 적의 건물이 있다든지 탱크가 지나가면 탕! 하고 쏴서 이렇게 맞추는 게 폭탄입니다. 그런데 이 폭탄은 이번에 사용이 되었는데 하늘에 떠 있습니다. 그래서 탱크가 지나가면서 보니까 대포도 없고 자기 공격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파치 헬기 같은 것에 걸리면 탱크는 죽습니다. 정확하게 맞습니다. 그래서 탱크를 타고 다니다가 아파치 헬기를 만나면 빨리 다른 곳으로 가야지 됩니다. 그런데 이제 탱크가 아무도 없어 나옵니다. 그런데 하늘에 떠있던 폭탄이 그때 작동을 합니다. 날아갑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인줄 알았더니 3-4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폭탄 뚜껑이 열려 그리고 폭탄이 3-5개가 나옵니다. 그래서 폭탄 셋이서 각자 인사하고 각자 목표물을 찾아서 날아갑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빵!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왜 그런데다가 씁니까? 지금도 눈이 빨개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쟁이 안 나도록 막아주시니까 그렇지 만약에 이 고삐를 풀어주신다면 이 세상은 벌써 멸망했습니다. 그런 것들의 기원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께 대한 적대하는 대적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인류를 모두 구원 얻어야 할 백성으로 불쌍히 여기신다고 생각하면 그런 기술이 있어도 그것을 만들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발전합니다. 그런 적대감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자기가 가서 따먹고, 자기가 범죄하고, 자기가 좋아서 나쁜 짓 하다가 괴로운데 왜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다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면서, 그게 꼭 뭐와 꼭 같은가 하면 자기가 가서 사고치고 문제를 일으켜서 감옥에 들어가고 두들겨 맞고 불량배에게 돈 뺏기고 얻어터져서 와서 엄마에게 와서 엄마는 누구 허락받고 나를 낳았어? 그런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은 이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이 적대감은 정당한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이 적대감은 인간의 (?)자체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대한 적대감입니다. 왜 그 죄의 성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대적인데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것까지 사랑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이 그것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또 하나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차를 몰고 지나가는데 길거리에- 개를 기르려면 잘 길러야지 되는데 -길을 잘못 든 개가 고속화 도로를 들어섰습니다.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쳤습니다. 그랬으면 어떻게든 누가 와서 좀 치워야지 되는데 개도 큰데 그놈을 계속 밟고 지나간 것입니다. 밤에, 그러니까 창자가 다 나와서 머리통이 짓이겨졌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좀 힘들더라도 참으십시오. 가슴에 새겨지니까. -이제 어느 자매가 데이트 하는 날이라 애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고 그리고 무스까지 바르고 겨울연가에 나오는 사람처럼, 물까지 들이고 그리고 목도리까지 두르고 짝 나타났습니다. 웃는 사람들은 회개해야지 됩니다. 얼마나 많이 TV를 봤으면 난 2번밖에 안 봤는데, 그래서 저기 있는데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은 너무 애틋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간밤에도 눈이 2센티는 나왔습니다. 눈물이 맺히도록, 그런데 뭘 손에 들고 있습니다. 가보니까 길거리에서 머리통 깨지고 창자가 다 터진 그 개를 들고 자기야 빨리 와 그렇게 부릅니다. 가서 뜨겁게 안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간절히 바라는 것은 반감을 가지고 있는 배터진 짐승의 시체와 내가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떨어지는 게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떨어지기만 하면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가서 뜨겁게 악수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을 들고 있는데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품에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가겠습니까?
대적하는 사람은 설득해서 그 마음을 바꿀 수도 있는데 이 대적이라는 감정 자체는 박살내서 없애버리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의롭다고 불러주셔도 다시 화해가 되지 않고 거리감이 있다면 이건 진정한 의미의 화해가 아닙니다.
또 하나는 거리감입니다. 인간 편에서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죄를 지은 다음에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랬더니 아담이 하는 말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신 분인데, 이 사람은 지금 하나님을 피해서 아주 순식간에 무서운 분으로 돌변해서 숨은 것입니다.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거리감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는데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안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 그러고 불러도 대답을 안 하십니다. 한 1시간 기도하고 갔는데 혼자 중얼거리고 간 것 같아 마음이 너무 허전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거리감입니다. 그 거리감은 피곤하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환난이 온다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거리감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 거리감은 오직 하나 때문에 말미암아 온 것인데 그것은 죄와 불순종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런 거리감이 있을 때는 정확하게 여러분들이 절대의존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절대순종의 자세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진실한 참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하나님을 낯설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좋은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가정의 날이 다가오는데 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다 사는데 항상 그 아버지 어머니가 두렵습니다. 무섭습니다. 혹은 굉장히 먼 친척만큼도 안 느껴집니다. 그리고 항상 불편하게 느껴지는 관계 속에서 자라온 아이가 정상적인 아이가 될 수 있습니까?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거리감을 인간은 자기 죄 때문에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거룩함 때문에 가지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화목은 바로 이런 관계가 다 청산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의 이 뜨거운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사건이 아닙니다. 뭘 잘못했는데 아버지 한번만 봐주세요. 용서해주세요. 막 야단맞았어. 너무 사정을 하니까 알았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까 네 방으로 가. 보기도 싫다.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줬다니까. 왜 자꾸 이래. 귀찮게 가. 이러면 애가 편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복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아이의 마음은 무엇인가 하면,
어떤 애가 그러더랍니다. 아버지가 어느 날 너 이놈의 자식 이 애비가 너에게 뼈 빠지게 돈벌어서 안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막 그러니까 애가 대드는데 뭐라고 대드는가 하면 언제 아빠가 나를 정말 염려하는 마음으로 따귀한번 때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랬다고 합니다. 애는 맞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 구타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냥 돈 주고 이렇게 자기 의무를 다해주는 그것 말고 못했을 때는 따귀라도 때리고 이놈의 자식 말이지 이러면서도 끝나고 나면 뜨겁게 끌어안는 이런 관계를 원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언제 나를 위해서 뼈 빠지게 일했냐. 아버지 벌어서 먹고 살고 골프 치러 다니고 엄마하고 재미있게 살았지 내가 돈을 몇 푼이나 쓴다고 아버지 뼈 빠지게 돈 버냐고 대들더랍니다. 틀린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진짜 애들이 돈을 몇 푼이나 쓴다고 말이지, 뼈 빠지게 돈번다는 그런 말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5월 달에 또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는 당신의 거룩하심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갖다가 화해를 시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그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의모든 죄를 지고.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다 짊어지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죄 없는 어린양을 하나님이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진노를 퍼붓는 게 그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먼저 마음이 움직이신 분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요한사도가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화해를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해서 감화가 먼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먼저 풀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당하는 그 비참한 죽음을 보시고 인간들이 나에게 몹쓸 짓을 하고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모욕과 더러운 일을 했지만 내가 이제는 저 인간들의 죄 때문에 가지고 있었던 이 적대감과 그리고 저 인생들을 향해 가지고 있던 이 거리감을 내가 접어야지 되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 인간을 향해서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혀죽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구원의 실제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놀라운 화목함, 언제 한번 기사에 보니까 청소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쁜 것 가지고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친구와의 화목한 관계가 깨지면 자살합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도 여자애들 셋인가 한꺼번에 자살했습니다. 고층아파트에서 뛰어내려서, 왜 자살했는가 하면 친구관계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저도 친구를 막 넓게 사귀는 그런 형이 아니라 몇 명 그렇게 죽지 못해 따라다니는 그런 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친절하게 사귀다가 뭐 때문에 틀어집니다. 그러면 공부도 못하고 정말죽고 싶습니다. 시련 당했을 때의 느낌과 또 다를 것입니다. 전혀 다릅니다. 화목이 깨지는 것인데, 그런데 그 사람을 또 학교에 가면 매일 봐야지 됩니다. 또 요즘 집에서도 그런 것을 경험하고 계신 분, 여기 계실 것입니다. 부부싸움해서 말입니다. 그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고통스럽지 않다면 원래 그 사람과 관계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화해의 길이 열렸습니다. 잘 화해하고 그리고 라면이라도 하나씩 먹고 즐겁게 헤어지고 돌아오면 그렇게 행복하고 날아갈 듯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한없는 화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이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는구나.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 사람이 은혜 받지 못했을 때는 매일 찬송 부를 때 너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고 나니까 그 다음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랍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죄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들에게 봐라. 나도 살리셨는데 너를 안 살리시겠냐. 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까. 이게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의 그 놀라운 화목을 경험한 사람들의 축제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놀라운 것입니다. 어느 정도?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게 화목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매일 가도 매일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집안 식구들이 은혜 받고 나니까 왜 그렇게 교회에 자주 가느냐고 그러는데 이것도 지금 너무 조금 가서 걱정인데 일주일에 다섯 번밖에 안 가는데 그것도 많이 간다고 합니다. 이번 주에는 7번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바로 무엇인가 하면 구원이 가져다 준 화목입니다.
이렇게 화목하게 되면 어떤 효과가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건한 의미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취소시켜서 지옥으로 보내시면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이 안 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 편이시니 누가 나를 대적하랴. 방백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나는 좋도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오리라” 그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 화목이 가져다주는 효과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는 세상이 뭐라고 요동해도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흰 이빨을 드러내고 내 앞에 와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아 오너라! 내가 너의 휘장을 찢고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우리 주님을 만나리라’ 그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교훈은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화목을 해주셨으면 이 화목을 한번 화목을 해 주셨다는 것 때문에 자만해서 막 살면 안 됩니다. 이 화목을 계속 지켜야 합니다. 이 칭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의롭다고 칭해주셨지만 계속해서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행세를 해야 됩니다. ‘나는 주님이 의롭다고 불러주신 사람이고 하나님이 관계를 회복해 주셔서 나에게 하늘 자원을 공급해 주시는 사람이다.’ 그런 믿음이 내게 있다는 것을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시로 그 믿음으로 맞서면서 이 세상을 대항하면서 살아야 되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화목을 가져다 주셨지만 이 화목은 우리가 계속해서 지키면서 살아가야할 화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신령한 소심함을 지녀야 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안 믿는 사람이 볼 때 너무하다싶을 정도로 그런 삶을 살아야 됩니다. 나를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내가 이래도 될까? 내가 이렇게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나를 싫어하실 텐데.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면 어떻게 하나. 다시 하늘자원이 끊긴 그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서 사는 그 고통을 내가 맛보기는 싫은데,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지만 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화목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이 바로 사랑의 성화의 동기가 되어야지 됩니다.
지금 여러분 중에도 다 듣고 나니까 감사하지요? 그렇게 구원해주셔서 하나님이 화목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중에서 이 화목을 지금 현재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깊이 회개하면서 그래서 주님과의 적대감과 거리감을 버리고 그리고 탕자가 그 고생 끝에 돌아가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러면 여러분들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깨끗이 씻어주셔서 다시 여러분들에게 그 화목을 돌려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하늘자원을 힘입고 살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왜 믿어야 하는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때 우리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또 다른 중요한 특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가족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구원받은 사람의 존재와 삶에 관한 두 가지 묘사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는 의롭다 일컬음을 받는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화목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불의하고 죄악 된 인간을 하나님께서 법정에서 용서해주시고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불러주시는 것이 ‘칭의’ 라고 한다면 적대감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반감과 대적 속에 하나님과 맞서서 살던 그런 막나가던 인간들을 하나님과 다시 화해시켜주시는 것이 ‘화목’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 됨은 그런 것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집안에 입양이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리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다른 구원에 관한 그림들과는 다른 또 독특한 묘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 됨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우선 첫째는 의롭다 일컬음을 받는 칭의,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것, 혹은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는 것,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 되는 이 사건과 구별되는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결코 나뉠 수 없는 일련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하셨기 때문에 또한 화해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화해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또한 당신의 자녀 삼으실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모든 사건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일에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시는 것, 즉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것은 결코 우리의 상태나 내적인 성질들을 변화시키시는 행위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는 그 법적인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길거리 빈민가에서 부모도 없이 고아로 다니던 애를 누가 데려다가 자녀로 삼으면 그 자녀 삼은 것은 법적으로 자녀를 삼은 것이지 양가의 집에 자녀로 들어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가 뒷골목에서 고아로 돌아다닐 때 행실과 그리고 그 마음, 그 교양 없음, 이런 것들을 한번에 다 버리고 새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양자됨은, 하나님의 자녀 됨은 법적인 행위이고 신분에 관련된 행위입니다.
세 번째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상태에 있어서 그리고 내적 성질에 있어서 변화가 아닌 법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하는 확인 방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인시키시는 방법이 있는데 성령을 주셔서 그 성령이 그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동안에 그 성령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버지가 바로 자신의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믿는 자 가운데 들어오신 성령님을 가리켜서 ‘양자의 영’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특별히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부자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의 마음에 강력하게 확신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 삼으셨다는 법적인 문서 한 장 없어도 그 문서보다도 더 강력한 효력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에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증거 해주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확신은 언제나 우리에게 똑같은 정도로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 속에서 살아갈 때는 강력하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강력하게 확신하게 되지만 믿음이 식고 우리들이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불순종하게 되면 이 확신이 자꾸 옅어지게 됩니다. 확신이 옅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는데 지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다. 최소한도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자녀라고 하는 확신을 우리가 갖게 되면 그러면 그 확신 때문에 담대하고 죄와 타협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확신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증거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계실 때에는 같은 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확신하게 만들어주지만 이 성령의 역사하시는 정도가 깊이 떨어지면 그러면 똑같은 정도로 그 확신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양자의 영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양자 된 사람,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들이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아들이 되는 것인가, 거기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를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또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그 속에 성자와 성령도 포함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대두가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한분 각자 각자 역사하시지 않고 성부가 역사하시는 곳에 성령과 성자가 계시고 성자가 역사하시는 곳에 성부와 성령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할 때는 엄격하게 말하면 성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자이시지만 그러나 성령님도 성자는 아니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존재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모든 만물의 아버지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믿지 않은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아닌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점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생들이고 인격적인 생명이 없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 세계는 바로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여기에서 주님을 믿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 때는 그 아버지는 그런 의미에서 우주적인 창조주로서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인을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로 구속하시고 그 피로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고 용서받은 인간들 사이에 특별한 구원의 관계를 성립시키시는 데서 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겠다.” 고 말씀하실 때에 그때에 이 자녀 됨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구속의 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희생과 속죄의 피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피로 그 구속의 공로로 특별히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백성들 그들이 바로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의 사역을 기초로 한 것이고 그것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적용시킨 사람들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와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혈통이나 가문에 따라서 된 것이 아니고 공로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가 없고 자기를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만을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의 핵심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옵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택하셨을 때 원하셨던 관계는 다름이 아닌 가족관계였습니다. 당신께 순종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백성들을 구속하시고 그래서 그 백성들이 자기의 진정한 아들, 진정한 자녀가 되어서 한 집안 식구처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꿈이었고 그 꿈은 바로 아담이 하와와 함께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함으로 잠시 무너지는 것 같았던, 파괴된 것 같았던 하나님의 소원이었고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백성들이 되어서 그래서 아담을 통해서 이루고 싶으셨던 문화의 명령, 번성하고 생육하고 번성해서 이 땅에 충만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인간의 참된 이치와 본연을 드러내는 그런 문화를 이 땅에 노동을 통해서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과 절대적인 순종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백성으로서 그렇게 이 땅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는 그런 종교적인 백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었고 그리고 바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옛 아들들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을 버렸으며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기보다는 죄를 섬기고 우상을 섬기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던 것처럼 똑같이 그들은 의존하며 살아야 할 하나님에게 독립을 선언하고자 하였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하늘 자원을 힘입어서 살기 보다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자신의 자원을 삼으면서 하나님 없는 사람들처럼 똑같이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옛 아들들은 실패한 자들로 버리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새 아들들을 세우셨으니 이는 새 언약을 세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그런 새 언약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이렇게 새 언약을 세우시는데 그래서 누가복음 22장에 말하기를 “이 자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이는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피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고 옛 언약아래서 실패한 하나님의 아들은 정리하시고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새 아들들을 세우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 아들들은 이제 믿음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그 은총을 받아들인 아들들이며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용서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허락하심으로서 그리고 그들 안에 영원히 성령님으로 와 계심으로서 이제 옛 아들들이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 아버지와의 가족관계를 명실 공히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된 것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칭의를 통해서는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지도 않은데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게 되었고, 화목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맞서던 그런 질적으로 나쁜 관계에 있던 우리들이 화목한 친구의 관계로 다시 회복되게 되었다면 자녀 됨을 통해서는 우리에게 또 하나님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지 우리들이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제 그 집이 남의 집이 아니라 내 집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길거리에서 버려진 고아가 누구 집에 들어가서 빵 하나만 훔쳐도 절도죄에 해당이 됩니다. 그리고 훔치지 않아도 남의 집에 들어가면 주거 침입죄로 구속이 됩니다. 그러나 일단 그 집 주인과 관계를 맺어서 그 집안에 입양이 되고나면 그 집은 이 아이가 다니면서 아버지 집인데도 내 집이라고 말해도 괜찮고 밤이고 낮이고 아무 때나 들어가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서 먹고 싶은 것을 아무리 꺼내먹어도 문제가 안 되고 때로는 실수로 집에 있는 것 좀 부셔도 문제가 안 됩니다. 물론 야단은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숙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집안에 입양되어서 그 집안의 자녀가 된 놀라운 특권입니다. 반드시 그 특권이 따르게 됩니다.
몇 해 전에 신문을 보니까 이름을 되면 잘 알 수 있는 옛날에 유명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는데 어느 젊은이가 그 아버지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친자확인소송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분명히 그 사람의 아들인데 사진이 나왔는데 똑같습니다. 아주 인감도장입니다. 이렇게 봐도 똑같습니다. 안경까지 똑같은 것을 썼는데 진짜 똑같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바람을 펴서 그 아이를 낳아놓고 그리고 그 아이를 아들이라고 인정을 안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죽어라 그 아버지에게 가서 난 당신 아들인데 왜 인정을 안 해주는가. 자꾸 피하니까 법원에다가 그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고 내가 그분 아들이라는 것을 법적으로 인정해주십시오 하고 승인신청을 냈습니다. 아마 이겼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버지는 싫어도 그 아들을 친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싶었을까? 사실 어떻게 보면 자기를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이가 30살이 훨씬 넘도록 아버지 없는 사생아로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불행하게 만든 근원이 그 아버지니까 글쎄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갔다 오지 않았으니까 모르지만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추측하기는 그 마음속에 아버지를 향한 목 매이는 사랑보다는 오히려 증오심과 원망이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학교에 가서 가족 란에 아버지가 없는데 뭐라고 썼을까요?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생아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그 집안에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그리고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속으로 증오해야 마땅한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목매이도록 잊을 수가 없어서 아들이 되겠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왕년에 한 나라를 주름잡던 정치인이니까 망해도 아직까지 상당한 재산과 실권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집안의 자식으로 인정이 되면 법으로 아들로서의 권한을 보호받게 되고 그것은 아버지도 보장해주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문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그 아버지가 다 털어먹고 그리고 한 푼도 없어서 다 뺏기고 지금 감옥 속에서 종신형을 받고 복역을 하고 있다면 이 친구가 이렇게 신문사까지 찾아다니고 법정을 쫓아다니면서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니까 인정을 해달라고 재판을 청구했을까? 아마 안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옛날에 고관으로 있다가 퇴직한 정도로 그런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아니 쥐뿔도 없으면서 말이지,
그래서 가서 우리 신자의 의무는 바로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원래 당신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분이다. 그러니 그 집안에 빨리 양자로 들어가라. 그러면 당신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인생의 모든 악과 고통의 문제, 하늘 자원이 없어서 지금 비실비실하게 죽어가는 이 영혼의 상태와 삶의 곤궁한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기 자랑이 아니라 아버지 자랑입니다. 애들은 거의 전폭적으로 아빠 팬입니다.
(예화: 예전에 아시던 분이 방위 병인데 그 아들이 비행기만 뜨면 저 비행기에 자기 아 빠가 탔다며 좋아하면서 아빠를 늠름하게 생각했다는 이야기)
그게 자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 자랑하십니까? 뭐 별로 그렇게 자랑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버지 자랑하십니까? 많이 해야지 됩니다.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활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시리즈를 시작할 때에 처음 이틀에 걸쳐서 저는 인간의 악과 고통의 근원적인 뿌리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그 질병은 죄라고 하는 병원체에 의해서 옮겨진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모든 악과 고통의 문제는 결국은 죽음, 더 궁극적으로는 죄인데 이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고 더 이상 하늘 자원을 공급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된 데에 인간의 궁극적인 불행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렇게 하늘 자원이 공급되지 않자 이번에는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 하늘 자원의 부족한 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해서 인간은 나름대로 몸부림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도 머리를 싸매고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이고 머리를 싸매고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서 심지어는 다른 나라에 가서 빼앗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테러를 가하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자원을 뺏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원을 통해서 인간이 악과 고통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제가 또 두 번의 설교를 통해서 장시간에 걸쳐서 인간의 고통과 악의 문제가 이것에 의해서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은 이 땅에 있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이 땅에 있는 자원만으로는 살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늘 자원을 힘입어서 그 하늘나라의 자원을 가지고 살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 하늘자원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수 있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생이야말로 하늘자원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생은 문자 그대로 뜻한다면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긴 세월을 오래도록 목숨을 부지하면서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조상들보다는 못했지만 우리들보다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오랜 장수의 삶을 살았던 한 사람 야곱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창세기 47장에서 말하기를 야곱이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 백삼십년입니다. 나의 연수가 조상의 나그네 길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길게 장수하며 살았는데 그렇게 장수하며 산 사람의 고백이 무엇인가 하면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에서 마냥 오래도록 사는 인생의 길이를 연장해준다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니라 참 불행할 것 같습니다. 적당할 때 살고 적당한 수를 누리고 죽어야지, 한 나이가 백 살쯤 들어서 기억도 잘 없고 질병에 걸려서 고생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화장실에 가려면 그냥 몸부림을 치면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야지 되고 넘어지면 즉시 팔다리가 부러질 위험이 있는데 항상 조심해야지 되고, 자식이 왔는데도 이게 둘째인지 셋째인지 잘 생각이 안 나고 이렇게 해서 예배 시간에 와서 한 시간 앉아있을 기운도 없고 이렇게 만약에 산다면 정말 행복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실 때에 사명을 주셔서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사명과 할일이 완수되면 하나님이 데리고 가십니다. 그러니까 영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나오는 그 영생이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영생을 주기 위함이라”고 성경이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영생은 멸망의 반대라고 생각하시면 간단하게 풀립니다. 여기서 멸망은 무엇입니까? 멀리는 그가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음을 보게 되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고, 또 더 멀게는 그가 이제 두 번째로 하나님 앞에 죽은 후에 가서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아주 가깝게는 지금 그가 하나님의 신적 생명에서 끊어진 채로 하늘자원을 공급받을 수 없게끔 하나님과의 생명에서 단절된 채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멸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생은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 살면서도 다시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갖고 그 하나님의 신적 성품에 참여한 자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이고 그 영생은 이 땅에서 비록 육신은 죽지만 그 육신의 껍질을 벗은 후에는 보다 완전한 영혼의 생명을 누리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인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생명적으로 연합된 관계가 되고 하늘 자원이 흘러들어오는 통로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풍성한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오신 목적에 대해서 설명하시기를 “주님이 온 것은 양들로 구원을 얻게 하고 그리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풍성한 삶을 주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주시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더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는데 이 풍성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가난한 사람들이 부해지는 것도 포함됩니다. 억눌려서 아무 인생의 보람을 못 느끼던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더 중요한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과 생명적 관계를 회복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하늘 자원이 그 믿는 자들 속에 흘러들어가서 그것들로 인해서 그가 풍성하고 부요한 삶을 사는 그것이 다름 아닌 풍성한 삶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난하면 그냥 가난의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면 증오할 수밖에 없었고, 고통이 오면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시련이 오면 그 시련 속에서 괴로워할 수밖에 아무 도리가 없었습니다. 마치 아무런 방어 도구도 없이 싸움터에 내동댕이쳐진 저항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그 속에서 그렇게 고통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을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가난도, 불행도, 고통도, 시련도 그 어떤 것들도 우리를 마음대로 휘둘러서 우리를 고통과 결핍 속에 살게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가난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해서 물질을 공급받고, 그리고 미움의 고통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은혜의 감격을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자원을 공급해주셨습니다. 고통이 닥치면 전에는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오히려 그 고통을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아주 놀라운 기회로 삼을 수 있는 하늘자원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만나는 다양한 시련과 그리고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는 그 환난 속에서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생명을 통해서 그 환난을 행복을 위한 기회로 바꾸고 시련을 도전을 위한 기회로 바꾸면서 오히려 그 풍랑 때문에 안전한 포구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놀라운 그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 사람들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리고 이 영생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심으로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로 인해 끊어졌던 관계, 즉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삶,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이 절대 의존의 관계를 복원시키셨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절대적으로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그 영생을 통해서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제 다시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늘자원을 넉넉히 공급받으면서 살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이제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재앙이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인데 그 죽음은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훌륭한 성화의 기회로 작용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곤고함이나 이 세상에 있는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고 이 영생을 통해서 하늘자원을 끊임없이 공급받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똑바로 제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그리고 그 영생은 우리 안에서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서 갈한 우리의 영혼을 적시고 고갈된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켜서 어두운 이 세상을 불꽃처럼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가지고 살도록 만들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그런 영생을 소유한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또한 우리의 죄와 그리고 옛 성품으로 돌아가는 불순종의 삶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샘들을 막아버릴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신 영생의 놀라운 특권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활용해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살고 그것을 활용해서 하나님께 절대적인 순종의 삶을 살아서 그 영원하도록 솟아나오는 하늘자원을 가지고 주님이 우리 안에 없었더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시련들을 이기고 고난들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으려면 잘 믿어야지 됩니다. 대충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참 사람의 본분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이 땅에 두시는 동안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명령을 따라서 이 땅에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고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죄와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자원을 우리들이 얻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들을 이미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죽음과 파멸에 떨어졌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그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자각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서 독립선언하고 살아갈 때 죄악에 즐거움은 조금 누렸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시 쑥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우리들에게 돌아왔고 세상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과 그리고 우리가 그 아들인 것을 깊이 인정하면서 그 품에 안겨서 그 아들 된 자리를 행복해하면서 그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여기에 인생의 참된 행복이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는 어떤 행복도 우리들이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가짜 자원, 가짜 행복, 그리고 가짜 만족들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신 이 모든 것을 포괄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5장 17절에서 말하기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새것이 되었습니까? 예전에는 죄악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대들던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살려내시고 그에게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는 이제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독립선언을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고자 몸부림쳤고 그래서 죄 가운데 떨어진 인간들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세상의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마귀의 자식들이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얻고 죄의 용서함을 받아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이제는 새것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전에는 땅에 있는 자신의 자원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곤궁함을 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나서부터는 이제 자기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이 땅에서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자원은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 땅에 자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누리고 하늘자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그리고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의 어떤 죄가 하늘자원의 공급을 가로막고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늘자원을 끊임없이 공급받는 삶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제가 농담처럼 이야기를 하지만 여러분 돈을 많이 벌어서 어떻게 하라고 그랬습니까? 남을 다 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분위기 자체가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중요한 복음입니다. 왜 그렇게 함으로서 뭘 보여주는가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자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는 참된 자원이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벌어서, 그러니까 돈을 벌고 사업을 하고 이럴 때는 좀 이렇게 전문가처럼 되어야지 됩니다. 그래서 경영을 해도 좀 야무지게 하고 돈을 벌어도 돈이 안 벌리면 왜 돈을 못 버나 하고 골몰하게 생각을 하고 지혜를 구해야지, 겨우 밥이나 먹고 살아서 뭐합니까? 밥이나 먹으려고 태어난 인간이 아닌데 좀 남아야지.
그래서 우리 열린 공간도 마찬가지고 문서 선교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영을 야무지게 해서 그래서 돈을 벌어야지 됩니다. 열린 공간에서 돈벌고 문서 선교부에서 돈벌어서 뭐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가서 테프 팔아주고 커피 팔아주고 해서 그것을 갖고 뭐하겠습니까? 간사들이 그것 가지고 시집가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다 벌어, 그래서 담임목사인 내가 가서 테프 하나 가지고 와도 장부에다가 적어놓고 곧바로 청구서 올라옵니다. 에누리가 없습니다. 그게 잘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야무지게 경영을 해야 됩니다. 목사님이라고 주고 또 전도사님이라고 주고 구역장이라고 해서 주고 그러면 벌써 오래 전에 문 닫았습니다. 그러니까 경영을 하려면 좀 야무지게 해야지 됩니다. 아들에게 물건을 팔아도 돈을 받으십시오. 그것은 그것이고, 그렇게 해서 돈을 정성껏 벌어서 그 다음에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오. 좋은 일에 쓰십시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제일 불쌍한 사람이 그게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자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네 교회 통장에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데 물론 그것도 좋을 것입니다. 나쁠 것은 없습니다. 누가 자기네 교회에는 돈이 몇 십억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쓸 때가 없느냐고 나는 잘 쓰는데 우리 교회에 좀 달라고 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헌금을 많이 해서 교인들 퍼주어야지 됩니다. ‘우리 교회는 헌금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뭐 돈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늘어가는 것은 교인들이 돈에 대한 욕심밖에 없습니다. 정당하게 가르쳐야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넘치게 헌금을 해야지 됩니다. 대신 교회는 그것을 다 퍼주어야지 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원리입니다. 교회가 뭐 할일이 없어서 움켜쥐고 있는 돈 때문에 교회가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러면 은행위에다가 십자가를 꽂으면 진짜 교회일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의 자원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사람이 물질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면 그 사람 안에 영생이 역사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돈의 다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우리가 정말 불행과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을 안 해본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경험해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 죄를 씻기 원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입니다. 가난했습니다. 환난도 만났습니다. 혹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기도 하고 핍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자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하늘자원인 영생이 우리 안에 있을 때는 가난해도 부요했고, 버림받아도 행복했고, 그저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즐겁고 기뻤습니다. 그런 하늘자원을 힘입어서 우리들이 날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해보십시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처럼 행했던 나 같은 더러운 인간을 하나님의 가문에 용납해주셔서 입양해주셔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원수의 집안에 원수를 하나님이 다시 부르셔서 자기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서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일제 시대 때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를 사면시켜서 일평생 자기의 아들로 삼았던 손양원 목사님의 일화를 기억합니다. 사랑의 원자폭탄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그래도 사람의 가문에 들어온 자식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그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을 죽인 것보다도 더 끔찍한 일을 하나님 앞에 범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어마어마한 세계를 죄로 말미암아 초토화시켜버린 장본인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거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은 수많은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가진 종들을 죽였고 급기야는 우리에게 생명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가 용서를 빌지도 않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원자폭탄정도가 아닙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바로 우리 안에서 일어났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생각하면 사실은 더 이상 할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일평생 우리와 같이 더러운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삼아주신 이 감격스럽고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할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자녀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끊임없이 하늘 자원을 공급받으며 살게 하셨습니다. 본성적으로 법적으로 자원을 활용함에 있어서 모두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거의 망가진 옛 사람을 고쳤다기보다는 옛 사람은 쓸어내시고 새사람을 창조하신 것처럼 그렇게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 됨에 놀라운 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송해야지 되는데 이것이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미운 물건이 되어서 저주와 진노를 한 몸에 받으셔야지 됐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혀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벌을 받으셔야지 됐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사망을 맛보셨고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한없이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나은 자녀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때로는 숭고하다고 표현하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랑이 우리를 원수에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고 영생을 누리도록 만들어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놀라운 특권입니다. 이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자기의 본분이 무엇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인지를 생각하며 주님이 그토록 꿈꾸셨던 관계,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런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왜 신자답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지난주까지 구원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럼 오늘은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커다란 전쟁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사건이었습니다. 결국은 이라크는 모두 망했고 그리고 이제는 미군들이 그 나라를 임시적으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있기 전에 오래전부터 미국은 철저하게 준비를 했고 그리고 무기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나라를 설득해서 전쟁에 참여하게 했고 육로를 통해서 지상군들이 이라크로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많은 항공모함과 해군 병력 공군 병력들이 걸프만에 집결했습니다. 그런데 왠지 가장 먼저 전쟁을 시작할 줄 알았는데 전쟁을 안 했습니다. 그리고도 계속 꼼꼼하게 정세를 분석하고 그리고 정확하게 파괴될 목표물들을 찾아낸 다음에 어느 날 갑자기 새벽에 일제히 수십만의 미사일이 바그다드를 향해서 날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폭탄들이 날아가기 시작하고 쉼 없이 폭탄들이 그 바그다드에 있는 군사시설과 정부 주요기관들을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디 데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자면 decision day라고 하는데 결정적인 날이다. 무엇에 승리를 위한 결정적인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폭탄이 퍼부어서 수천발의 미사일을 가지고 폭탄을 퍼부어서 결국은 모든 공공시설을 폭파하고 군사시설을 파괴해서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휘체계가 다 무너지고 그리고 더 이상 나라로서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런 일을 감행하는 그 날을 D-day 라고 우리가 말합니다. decision day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폭탄을 퍼부어서 이라크의 군사시설들이 모두 파괴되고 관공서가 잿더미가 되었다고 해서 바그다드가, 이라크 전체가 미국 사람들의 손에 저절로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불과 며칠 전 대통령은 그 항공모함 위에서 군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V-day라고 말합니다.
victory day 그러니까 decision day와 victory day 사이에는 전쟁이 이겼는데도 아직까지도 뭔가 이겼다 라고는 말할 수 없는 여운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곳곳에서 잔당들이 출몰하고 테러가 감행되고 그리고 폭탄이 날아들고 하기 때문에 V-day가 오기 전까지는 여전히 전쟁에서 D-day를 통해서 승리의 기선을 잡았어도 병사들이 안심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겼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까지 완전히 승리하지 않은 그런 상태가 바로 D-day와 V-day사이에 있는 전쟁의 상태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D-day그 와 V-day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그 엄청난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담당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마음을 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고 그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고난당하신 후에 다시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완전히 사단의 척추를 부러트려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기를 쓸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을 내어서 이제 거의 엎드려서 설설 기어 다니는 그런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승리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D-day가 바로 그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면서 마지막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 다 이루었다. 이제 끝났다. 다 이루었다. 그래서 예전에 죄에 매어서 종노릇할 수밖에 없고 율법아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제 멸망에 이르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어쩔 수 없이 그 죄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도 싸움은 끝난 게 아닙니다. D-day를 통해서 승리의 기선을 잡았고 사단은 허리가 부러져서 설설 기어 다니는 상태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는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영들의 세력들이 여전히 역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전쟁은 끝났지만 도망가지 못한 패잔병들이 남아서 그래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듯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우리 빨치산들입니다. 파티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공격을 해서 내려와서 남한을 거의 다 점령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서 허리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위로 치고 아래로 치면서 다 했더니 이제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이 사람들이 도망을 갔습니다. 빨치산들이 다 도망가서 어디로 갔는가 하면 지리산이라는 경상도 깊은 산골 속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국은 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 땅은 우리나라 땅입니다.
그런데 빨치산들이 손들고 항복하고 내려와야지 되는데 산속에 숨어서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만 되면 먹을 것을 찾아서 민가로 내려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쌀을 빼앗아가고 닭을 훔쳐가고 김치를 뺏고 또 산속에 끌고 가서 또 먹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소탕했으면 좋겠는데 산이 어마어마하게 높고 사람들이 숨어 있으니까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긴 세월을 두고 소탕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금 제가 몇 년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는데 상당히 긴 시간동안, 맨 처음에는 2만5천명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 씩 하나 씩 그렇게 굶주려죽고 추위에 얼어 죽고 그 다음에 민가에 내려왔다가 사살 당하고 이러면서 이제 서서히 다 죽어갔습니다.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decision day를 통해서 승리를 얻었는데도 그런 빨치산들이 남아서 공격을 해오고 피해를 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이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셨다고 하는 이 구원사건을 아멘 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우리는 그 예수께서 이루신 그 구원의 위대한 승리를 우리들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decision day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밖에서 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순간에 그동안 우리를 장악하고 있었던 이 사단의 권세, 죄와 사망의 법,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국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간들인데 주님을 구주로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그 순간에 이런 숙명적인 죄와 사망의 법을 하나님이 산산이 부셔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한 그 원죄, 우리가 지은, 우리가 짓고 있는, 우리가 지을 모든 죄의 징벌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진노의 자식이 아니라 죄의 법의 지배를 받는 그런 비참한 백성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단번에 그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것을 무너트려주시고 대신 그 속에다가 생명과 성령의 법을 심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수 있는 영생의 법을 우리 안에 넣어주셔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신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그 기대대로 살아갈 수가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D-day를 통해서 승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 속에 부패성이 남아 있습니다. 잔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패성이 계속 역사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충만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이것은 없는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지리산에 빨치산들이 한 3-40명이 숨어 있다고 해서 우리가 못하는 일이 있습니까?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다니고 다 먹고 삽니다. 그 대신 빨치산이 있는 깊은 산속에 무슨 산삼을 캐러 간다든지 그것은 위험합니다. 지리산으로 가는 것은, 그러니까 거기만 안 가면 그냥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죄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못 섬길 것도 없고 기쁨을 누리면서 살지 못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조금 남아 있는 죄는 지난번에 죄와 은혜의 교리를 설교할 때처럼 그 죄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간절히 매달리니까 그 죄는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서 들어왔는데 오히려 그 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인가 하면 이것을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도 안하고 은혜도 안받고 그리고 이 죄가 융성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계속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영적인 활기와 그 다음에 힘을 잃어버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점점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서 살 수 없는 이 죄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이미 구원을 받고 D-day의 승리를 누린 사람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승리했기 때문에 기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살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V-day까지는, 그래서 그런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이야기할 때 그 시제를 세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과거의 시제입니다.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절이나, 8장 1절에 보면 우리들이 이미 구원받았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또 현재 그 구원 안에 있다. 현재적 구원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또 하나는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받은 구원과 지금 이루어가고 있는 구원과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구원을 세 가지로 동시에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미 얻은 구원은 우리들이 영혼이 구원받은 것,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제 다시는 정죄함이 없도록 구원된 것을 가리킨다면 현재적 구원은 성화를 통해서 계속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고, 미래의 구원은 우리 썩을 몸을 변케 하셔서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시는 그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 얻은 신자는 결국 어떻게 살아야지 되는가. 그 삶의 자세가 무엇인가 하면 과거에 하나님이 주신 구원에 대해서는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해주셨구나. 아! 정말 그 은혜에 너무 감사하다. 하나님이 나 같은 이 더러운 인간을 왜 이렇게 사랑해주셨을까? 아! 정말 그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 그런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뭘 기다리는가 하면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 죄와 싸울 필요도 없고 은혜받기 위해서 회개할 필요도 없고 자기의 부패성을 발견하고 가슴아파할 필요도 없는 그 완전한 구원, 영화라고 불려지는 그 완전한 구원, 그래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케 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가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신 그 영화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면 날마다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이 부패성들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고 이 부패성들을 끊임없이 순종함으로 거룩한 성품으로 바꾸어 가시려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에 참여하면서 살아가야지 됩니다. 이것을 간단한 말로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볼 때에 이 구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세상나라에서 하늘나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3절에 보면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 내사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느니라”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흑암 darkness는 영적인 어두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죄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본래적인 이해, 영적인 총명 즉 spiritual understanding을 죄 때문에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인간으로서 알지 않으면 도저히 인간답게 살수 없는 그 지식이 없어진 상태가 영적 흑암의 상태입니다.
예를 들자면 온 천지를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내가 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라고 하는 이 지식, 영적 지식입니다. 그리고 나는 철저하게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이게 영적 지식입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나를 위해서 보내주신 예수님의 그 보배로운 피로써 내가 구속함을 받아서 죄인이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좋은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영적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지식이 죄 때문에 모두 사라져서 캄캄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여전히 지식은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그래서 지식을 가지고 부지런히 인간이 뭔가를 개발하고 그리고 이 지식을 활용해서 문명을 건설해가고 인간의 삶을 좀더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 또 지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이런 저런 것들을 탐구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영적으로 불이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어두움 속에 있기 때문에 지식이 계속 발달을 해도 그 지식은 그런 영적인 어두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으로만 사용이 되어지지 그 지식이 영적인 어두움을 깨어나게 하는데 쓰여 지지 않는 것입니다. 표현은 복잡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요?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고 많은 것들을 연구하고 개발을 해도 인간의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은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원인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있고 그 죽음이라는 질병은 죄라는 병원체에 의해서 유포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결은 그 죄라는 병원체를 죽이고 그래서 그 죽음이라는 질병에서 우리들이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과 문명의 발전이 그것을 주지를 못합니다. 다만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죽어가면서 좀더 그 죽음을 덜 생각하고 즐겁게 죽는 방법, 별로 없지만 그리고 또 이렇게 다가오는 인생의 허무를 잊기 위한 다양한 마취제 같은 것으로 지식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문명의 한계입니다.
결국은 그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은 마치 캄캄한 전기가 끊어진 어두움 속에 살다가 불이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구원을 딱 받고 나면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리고 이 세상은 어디로 가고, 내가 이제 왜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가. 이런 것들에 대한 답이 아주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때 모든 사람들이 회개를 하게 됩니다. 더욱이 어른이 되어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회개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회심이라고 하는데 conversion이라고 하는데 conversion 즉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회개할 때는 왜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것이고 그 다음에 믿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것인가.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회심이라고 하는 것 중에서 회개는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그 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렇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깊이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이제는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죄를 지으며 살수밖에 없었던 그런 인생관, 가치관, 이 세상의 길, ‘에토스’ 이런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깊이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회개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사람답게 살라고 명령을 주신 분이 일차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시고 우리의 모든 범죄, 아담의 범죄를 포함해서 우리의 모든 범죄는 일차적으로 성부 하나님께 대한 범죄이기 때문에 그 죄를 깨달았을 때 우리는 엄위하신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자기가 형벌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 repentance on to God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계속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하나 요소가 있는데 이것은 믿음입니다. faith 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왜 믿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되는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났는데 그 하나님이 보여주신 이 엄격하신 앞에서는 자기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아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신다고 할지라도 그 용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직접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나의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이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죽고 다시 사셨다고 하는 이 종말론적인 선포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인생의 희망, 나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수 없는 이 비참한 처지에 있는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의지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인간을 처음 이 땅에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바입니다.
그런데 그 회심, 그 속에서 특히 회심이라고 하는 것, 이게 결국은 뭘 의미하는가 하면 자기가 이제껏 까지 아담을 통해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와 그 죄의 뿌리 때문에 결국은 죽음이라는 질병 상태에서 온 몸 가득히, 영혼 가득히 번진 그 죄라고 하는 병원체 때문에 계속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자기 스스로 지은 죄, 이런 모든 것들을 회개하고 예수님만을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나는 이제 이 세상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의 길, 즉 worldly way에토스를 나는 다 버립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치관도 버립니다. 예전에는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었고 인생의 참된 의미는 내가 행복해지는 것에 있다고 믿었고 그 일을 위해서 저는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고 살았지만 그것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나 중심의 가치관과 나를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이 어리석은 제왕 적 가치관을 모두 버리고 나는 단지 하나님을 기대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인간의 참다운 본분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폭적으로 의뢰하고 주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인생의 참된 본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제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계속 불순종하고 자기의 행동만을 위해서 살고 그리고 관심의 초점이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자기를 섬기는데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그 약속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죄를 지으면서 신자가 살아가는 근본적인 동기입니다.
하나님은 너 그런 것 하지마라. 너는 지금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넌 그런 길을 가지 말고 네가 행복해지는 길이 그 길이 아니니까 그쪽으로 가지마. 그쪽으로 가지 말고 빨리 돌아와서 뉘우치고 이리로 가라. 알았지.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못하겠다는 이유는 그리로 가면 하나님만 좋지 나는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만 좋으면 난 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좀 참으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도 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옛날에 가지고 있던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는 무엇인가 하면 전쟁을 하라고 무기를 다 들려주어서 전쟁터로 사령관이 파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다시 뒤로 돌고 있습니다. 저기 적군이 있는데 돕니다. 그리고 이리로 걸어옵니다. 그것도 총을 이렇게 들고 사령관을 쏘려고 돕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령관님 저를 불러주셨지요? 제가 사령관님의 부하입니다. 저를 사랑하시지요? 그리고 계속 총을 쏘면서 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불순종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불순종하면서 사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는 그렇게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행복한 끝이 있을 것 같으면 말도 안합니다. 그렇게 살면 마지막으로 오게 되는 것은 비참한 파멸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신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깊이 회개를 하고 온 회개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버렸다는 의미는 세상에서 안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을 버린 것입니다. 그게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어떻게 그렇게 순간적으로 그 세상의 가치관을 버릴 수 있으며 세상을 그렇게 버리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지 않으면 그러면 세상에서는 고통을 받게 되고 또 내 안에는 여전히 아직까지도 부패성이 남아 있는데 그냥 무 자르듯이 싹둑 어느 날 그렇게 살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이 회심을 하고 보면 어느 날 한순간에 분명하게 돌아서서 진짜 무 자르듯이 그렇게 나 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방향이 확 바뀌게 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구원받는 그 순간에 성령을 주심으로서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구원받은 자의 최초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반드시 이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그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예수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나의 중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구원받은 사람들이 즉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고 나면 성령님을 우리에게 구원받은 첫 열매로 주시는데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아주 놀라운 기쁨이 우리에게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돈 좀 많으면 해해거리고 행복해하고, 또 어려움이 생기면 그냥 슬퍼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았는데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니까 이제는 기쁨과 슬픔의 이유가 바뀝니다. 세상에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어도 여전히 이 속에서는 성령님이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서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는 원동력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지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죄로 말미암아 끊어진 하늘자원이 인간에게 공급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늘자원은 성령을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자원이 공급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이 세상의 죄가 많고 또 내 안에도 부패성들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통해서 공급해주시는 성령님의 놀라운 그 은혜 때문에 이 죄를 이기고 육신적인 정욕들을 이기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하늘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게 상당히 주관적인데만 그치는 성령의 체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기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마음이 막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성령의 체험이 이렇게 주관적으로 우리에게 와서 역사하시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면서 사는데 있어서 아주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쉽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혜가 내 속에 충만하게 역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힘들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믿는 것도 힘듭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충만해서 내 안에 성령님이 온전히 나를 주장하실 때는 염려를 잘 안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평강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면 하나님 앞에 기도는 안 하고 염려만 막 하는 것입니다. 염려를 하면 그 염려가 맛있나. 막 뼈를 삭이고 살을 곪게 만들면서 막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막 절망 속에 만들고 밥도 못 먹게 만들고 잠도 못 자게 만들어서 인간을 점점 망가진 인간으로 점점 죽음의 질병 상태가 강력하게 역사해서 중병상태로 들어가게 만듭니다. 그래도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이런 주관적인 성령의 경험이 이렇게 소중하고 그래서 그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지만 그러나 이런 성령의 은혜가 주관적인 자신의 내면의 체험에서만 머무르지 말고 그것이 밖으로 이렇게 흘러나오도록 그렇게 열매를 맺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니”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성령의 열매를 인격 속에서 많이 맺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매를 많이 맺으면 그 열매를 보면서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똑같이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왜 저렇게 다른 열매를 가지고 살아갈까? 그리고 그 열매는 저 사람의 인격 속에 맺힌 열매인데 내게는 없는 열매를 어떻게 맺으면서 살아갈까? 그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자기가 인식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서는 그런 성령의 열매를 맺고 그렇게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매를 맺어갑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이런 열매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간절히 권하기를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라. 그런데 이 빌립보라는 지방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터키에 가면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시아 대륙과 유럽대륙이 만납니다. 그리고 거기에 보스포러스 라고 하는 해협이 있고 이것이 러시아의 흑해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가느다란 해협 하나를 두고 아시아와 유럽 대륙이 딱 만나는 곳입니다. 그 위에 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감회가 참 새롭습니다. 그 아시아의 저쪽, 한국서부터 시작된 그 아시아 대륙이 와서 그 다음에 유럽대륙이 딱 거기서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이 유럽 쪽으로 조금 들어가다가 보면 ‘빌립보’라는 지방이 거기에 있는데 이 빌립보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라고 하는 유명한 임금을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사람 아버지가 필립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땅을 점령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거기를 빌립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제국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그 뿌리를 희랍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어입니다. 거기는 이미 인류역사에서 정말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나라입니다. 그리스 문화가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역사적으로 캐 들어가 보면 그 종자 씨는 이집트에서 옵니다. 이집트에서 와서 그게 크레타 섬을 통해서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로 넘어가고 그리스도에서 그 찬란한 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이제 문화의 관심사가 다른 게 이집트를 비롯해서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사상 자체가 인간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고 다 하늘에 관심이 많습니다. 농사를 짓고 살아가니까 이제 하늘에 관심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간보다도 자연, 그렇게 천지의 어떤 현상, 동물 이런 것들에 대한 숭배가 유행을 하게 됩니다. 관심이 그리로 갑니다.
그런데 이쪽은 무역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관심이 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돈을 얼마나 남기나. 이렇게 계산하니까 참 현실적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발달합니다. 막연한 어떤 신들을 향해서 관심을 가지고 건설된 문화는 솔직히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에는 적합한 것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는 아주 합리적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물리학, 수학, 그리고 천체, 하늘에 별 이런 것들을 연구하고, 그 다음에 장사를 하면 돈을 얼마나 남길 수 있는가, 건물을 어떻게 지으면 틀릴 수 있는가. 금 같은 것을 사람들이 가지고 만들었을 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속지 않고 살수 있는가. 그 다음에 어떻게 금이 섞여 있는 돌맹이를 갖다가 잘 해서 금붙이를 만들어서 팔아먹을 수 있을까? 관심사가 이런 것들에 발달한 것입니다. 거기서 문화를 건설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란한 문화가 수학, 정치 뭐 이런 것뿐만 아니라 예술에 있어서도 찬란하게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알렉산더 대왕서부터-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우리나라와 같은 문명을 누리지 못하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아프리카까지 정복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리스에 와서 헬라의 찬란한 문명을 맛보고 무릎을 꿇고 감복을 했으면 좋겠는데 그것을 한번에 모두 퍼트리기는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워낙 많으니까. 건설을 하고 해야지 되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여기 헬라까지 안 오더라도 너희들이 빌립보에 와서 한번 맛보기를 보여줄게. 그래서 빌립보라는 도시를 만들어놓고 그 찬란한 헬라의 문화, 희랍의 그 문화들을 거기에다가 이식시키는 것입니다. 전시장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헬라까지 안 가고 거기에 가서 보면서 아! 이 헬라 나라는 정말 엄청나구나. 이 희랍은 정말 엄청난 나라구나. 이게 어마어마한 나라구나. 아! 여기가 정말 이렇게 멋있으니 그 헬레니즘의 본거지로 가면 거기는 얼마나 멋있을까? 이것을 생각나게 만들기 위해 거기에다가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나중에 헬라 나라가, 마케도니아 제국이 망하고 로마가 이것을 다 차지하게 될 때 그때 로마가 그대로 그것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에 찬란한 문명에 엄청난 긍지를 느끼는데 사람들이 뭘 알아야 자기를 존경할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갖다가 거기에 건설해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것이니까. 그러니까 할 수 없이 한곳을 정해 그때 다시 선택된 것이 빌립보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리적으로도 아시아의 사람들과 유럽 사람들이 막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지방에서 무역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터키의 이스턴블에 가면 실크로드의 종착역이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그때 지어놓은 상가가 그냥 있습니다. 그런데 상점이 팔천 개입니다. 동대문 시장은 거기에 대면 장난입니다. 팔천 개,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이 가게가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벌써 이 중국 실크로드 시대부터 물건은 유럽에서 가져오고 여기서 가져온 물건들은 거기에서 물물교환을 하고 또 바꿔서 터키에서 금 같은 것을 가져가고 그 다음에 비단 같은 것을 가져가는 물물교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터키에 가보면 심지어 일본에서 온 도자기 같은 것도 다 발견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내왕을 많이 하는 곳에 세워나야지 그게 맛보기가 되지 저 산속에 며칠동안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등산가 이외에는 올라갈 수 없는 산꼭대기에 올라가봤자 누가 맛을 보겠습니까?
그래서 그 빌립보라는 그 고장을 로마의 직할시로 정해서 빌립보시민들에게는 로마 시민권과 동일한 자격을 줍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로마 문화를 이식해서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로마하고는 아직 멀리 떨어져있지만 거기에 와서 그 맛을 보면서 로마를 상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 진짜 로마 사람들은 너무 좋겠다. 아! 정말 얼마나 좋을까? 그것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야, 너 이 빌립보 지방이 로마의 찬란한 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맛보기로 거기 존재하지, 너 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아 너희들은 왜 이 땅에 있는지 아니? 너희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그 교회가 하늘나라의 맛보기야. 하늘나라를 여기에 이식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불가능하니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 살아가는 너희를 여기에다가 빌립보처럼 두어서 너희 교회를 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보면서 아!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 아! 그렇다면 이들이 원래 고향이라고 말하는 그 하늘나라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면서 갑자기 이들이 사는 게 시시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 동리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막 바로 안 가고 예수님을 믿어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나도 좀 붙여줘,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돼! 왜 여기는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이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을 믿을 때 진정으로 너희가 이 교회에 일원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래? 나는 어떻게 하든지 나는 그 나라에 가고 싶어. 무엇이든지 가르쳐줘. 나는 믿고 싶어. 내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가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그 참된 천국의 맛보기의 역할을 잘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하면 교회에서 싸움이나 하고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이 더 부도덕하고 더럽고 이렇게 되면 그럼 사람들이 보면서 저들은 왜 그렇게 매일 모이나. 나는 정말 싫다. 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나라와 같은 것이 하늘나라의 맛보기라면 나는 그 나라 가기 진짜 싫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삶이고 아까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에서 뭐가 나오게 되는가 하면 그래서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정말 따라서 신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 하늘나라의 맛보기가 되는 삶을 살아야지 되겠구나 하는 숙제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은 우리를 살려두신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믿고 내일 데리고 가시면 됩니다. 그러면 얼마나 순결하겠습니까? 깊이 모든 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되어졌을 때 하나님이 딱 데리고 가십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버려두시면 죄에 의해서 시달리고 유혹받고 정욕 때문에 괴로워하고 눈물 흘릴 줄 다 알면서도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두시는 것입니다.
왜? 네가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받았고 그리고 내가 너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 너도 날 위해서 뭘 좀 해라. 그런데 나의 간절한 소원은 맛만 보았더라면 나를 믿고 너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들이 많은데 맛을 아직 못 봐서 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있다. 네가 여기에서 맛보기가 되어줄래.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기에 두신 것입니다. 그 대신 내가 너에게 맛보기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내가 아낌없이 하늘을 열고 하늘자원을 너에게 부어줄게.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바로 이 세상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서 좀 윤리적으로 살아야지 된다는 문제가 나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다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고 이 사람들의 모임은 교회다.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번씩 맛을 보려고 합니다. 왜 죽음의 질병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자기네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몰라서 그런 것이지 인간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한번씩 맛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한번씩 갖다가 먹어보니까 퉤! 하고 뱉어버립니다. 정말 더럽다. 차라리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낫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요즘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아저씨들이 리어카에다가 수박을 잔뜩 가지고 팝니다. 아! 먹고 싶다. 수박을 이제 담아서 끌고 갑니다. 그런데 거기 항상 구루마 위에 수박 하나가 딱 올라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담아놓을까요? 제일 맛대가리도 없고 갖다가 버리기 직전의 것, 그것을 거기에 갖다가 놓을까요? 너무 좋은 것을 거기에 올려놓으면 아깝습니다. 그래도 제일 좋은 것을 골라서 그래서 딱! 깨서 칼집을 내서 갖다가 놓습니다. 먹어봐라. 그런데 이상하게 맛 배기는 대게 맛있는데 믿고 사가면 아닙니다. 아니 맛이 틀립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모든 제품이 그렇습니다. 점퍼를 샀는데 쇼윈도에 걸려 있는데 너무 예뻤습니다. 그런데 조금 커, 그래서 맞는 것을 달라고 하니까 창고에서 꺼내오는데 똑같습니다. 그런데 만져보니까 옷감이 틀립니다. 자기들은 똑같다고 그러는데 내 눈은 못 속입니다. 똑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한참 망설이다가 몸에 맞는 창고에서 나온 것 주지 말고 몸에 안 맞는 쇼윈도에 걸린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입고 왔습니다. 지금도 겨울에 그것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세상에서는 맛보기하고 실제 것과 다릅니다.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맛보기는 너무 좋은데 실제 하나님의 나라는 신통치 않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맛보기 역할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맛보다도 더 맛있게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숙제는 무엇인가 하면 얼마나 거기에 근접한 맛보기가 되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떤 신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교회는 하늘나라의 식민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샘플로 만든 도시라고 합니다. 모형도시, 그러다가 보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윤리적 책임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밖에서 볼 때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죄의 고통과 뉘우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죄인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사용하셔서 은혜를 넘치게 하시는 신비스러운 복음의 비밀들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눈에 보일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정말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윤리적 기준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안 삽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업을 하는데 부정직하게 해.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돈을 떼어먹고, 부당한 방법으로 세금을 포탈하고, 그리고 부당한 방법으로 근로자들의 이익을 착취하거나, 또 기업을 해서 나라에 등록이 되었으면 그것은 그 기업 자체가 나라의 재산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식회사로 등록하면 세금도 감면해주고 온갖 해택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세웠지만 자기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몰래 비자금을 만들어서 부정한 방법으로 관청에 있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고 정치인들에게 돈줄을 대서 그것을 타고 부정한 방법으로 경쟁을 해서 떼돈을 벌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은 이미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버린 세상의 길, worldly 에토스 세상에서 버린 길이고 세상의 가치관이나 그리고 육에 속한 모든 인생관입니다. 그것으로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고 계속해서 악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인 죄는 죽음이라는 질병의 증세만 깊게 할뿐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늘나라의 맛보기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로 그들을 구원해놓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그들에게 생명을 주셔서 그래서 이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그랬더니 돌아다니면서 계속 행동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야, 하늘나라 가지마. 맛도 없고 더러워. 가지마. 하나님의 통치 받지 마. 아주 굉장히 나쁜 분이야. 너 그렇게 하나님 믿으면 나처럼 불행해진단다. 그리고 막 돌아다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애지중지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돌아다니면서 우리 아빠 순 나쁜 놈이라고 동네방네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오히려 아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그러고 돌아다니면 법원에 고소하고 가서 멱살이라도 잡을 텐데.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 아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가 준 돈을 가지고 차타고 다니면서 마이크 사갖고 떠들고 말이지, 아버지가 준돈 가지고 밥 사먹고 기운내서 우리 아버지가 나쁜 놈이라고 그러면서 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천국의 맛보기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버린 가치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허무하다고 해서 포기한 이 세상의 인생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그것을 자유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그런 것 때문에 결국은 죄를 짓게 되고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생명을 고갈시키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었으면 자기 인생 전체에다가 상표를 건 것입니다. 그 상표가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표, 이것을 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표를 건 것입니다. 그렇게 표를 걸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기업을 하면 안 믿는 사람보다도 더 정직해야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사람들을 고용했으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다도 더 그 사람과 함께 사업하고 그 사람 밑에서 종사하면서 뭔가 이렇게 해택을 누릴 수 있어야지 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 믿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뭔가 그 속에서 안 믿는 사람하고는 계속 의심하면서 살았는데 이 사람은 탁! 믿을 수 있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한번 오늘날의 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십시오. 이게 진짜 하늘나라의 맛보기로서 살아가는 삶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면 그러면 달라야지 됩니다.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정치인이 되어서 똑같이 말이지 그렇게 기업들의 돈이나 받고, 접대나 받고, 향응이나 받고, 그 비자금 검은돈들을 가지고 다시 자기는 또 줄을 대서 정치인의 생명을 연장하고 이런 식의 삶을 살아서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학생이 되었으면 학교에서 부정행위를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뭔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살아도 절대 이렇게 안 사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구나. 그것을 번쩍 생각나게 해주어야지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정말 인간의 도리가 무엇이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정말 살아가고 있으면 자기에게 속한 한 나라의 윤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구나.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구나. 그것을 깨닫게 만들어주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 세상에서는 이런 도덕들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 사람들을 데려다놓고 계속해서 선한 사람만 복 받고 악한 사람은 벌 받는다. 너는 똑바로 살아라. 그리고 계속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이미 다 무너졌습니다. 왜 부모가 이미 이런 일에 있어서 모본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가정에서도 무너지고 학교에서도 무너졌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을 학생들이 존경을 해야지 되는데 존경을 하지 않습니다. 왜 부모가 선생님 존경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은근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들이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다 궤멸되어버리고 다 파괴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의 어떤 도덕적인 기능들이 다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모들도 솔직히 이야기해서 자기의 자식들을 어떻게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사람으로 기를 수 있는지 여기에 관심이 많지, 어떻게 하면 고난을 받으면서도 도덕적인 삶으로 올바르게 살아가게 하는가 여기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윤리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많이 힘이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굉장히 힘이 듭니다.
제가 아는 어느 그리스도인은 돈이 많이 생기는 회사에 다녔습니다. 그런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승진해서 가니까 저녁때 되어서 서랍을 열어보니까 영문도 모르는 오백만원, 백만 원 수표가 들어있는 게 서랍에 매일 몇 장씩 들어왔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물건을 대량으로 구입하는 자리에 책임을 맡은 사람이니까 업자들이 그 속에다가 넣고 갑니다. 명함하나와 같이 넣고 갑니다. 그리스도인이니까 그렇게 살수가 없었습니다. 다 싫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 공정하게 경쟁을 해서 그렇게 해라. 그랬더니 당장 들어오는 이 자재의 원가가 10%이하로 다운이 되었다고 합니다. 리베이트라고 하는 것은 공공연합니다. 100만원어치의 물건을 사면 10만원어치는 이렇게 팁으로 주는 게 이게 관례가 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필요 없다. 이게 필요 없으니까 10%만큼 물건값을 깎아주든지 물건을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와라. 실질적으로 20%이상 원자제가 싸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때 그럼 그런 사람들이 그 회사로 볼 때 얼마나 이익이 되고 좋은 사람입니까? 그런데 해고당했습니다. 왜 그 좋은 사람을 회사는 잘랐을까? 그 자리를 거쳐 가면서 그렇게 뇌물을 받고 부정하게 처리한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느껴서 모함해서 해고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런 게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런 고난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뭐가 필요한가 하면 단지 우리들이 이를 악물고 이 세상에서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지 되겠다는 도덕적 결심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위로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과 아들에게 베푸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구원의 아름다운 은총, 이런 것들을 경험하고 나면 이 세상이 정말 하찮다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기업하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십시오. 그래서 다 남을 주어야지 됩니다. 그것을 자기가 움켜쥐고 이 세상을 살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 믿을 때 결별한 가치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의 꿈이 돈을 많이 벌어서 엄청나게 호화스러운 주택과 외제 자동차나 굴리면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황제처럼 호의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꿈이라면 여러분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꿈은 예수 믿기 전에 꿨던 꿈이고 예수님 안에서 이미 버린 꿈입니다. 그 꿈이, 그런 소망이 우리 안에 있는 궁극적인 악과 고통의 원인인 이 죽음의 질병에서 우리를 구원해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이미 깨달은 그런 종류의 잘못입니다. 거기로 다시 돌아가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나라에 반역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절대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에 맛보기가 되어야 할 그 중차대한 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그렇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윤리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야 하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은혜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sanctification 입니다. 성화는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에 대한 책임은 주께서 의롭다 여기심으로 모두 치워버리시지만 아직 죄의 법은 다 파괴되었지만 공비 잔당처럼 남아 있는 이 죄의 찌꺼기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항상 의로우나 항상 의롭지만 그러나 언제나 역시 죄도다. all way just, but, all way simple 항상 의롭다 함을 받았으나 여전히 죄가 남아 있는 상태가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남아 있는 부패성과 죄들을 제거하시는 이 일을 성령님이 하시는데 그것을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정의는 인간 속에 남아 있는 죄의 오염과 부패성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순결하게 만들어 가시는 성령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작용인 이 성화는 의롭다함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 칭의 와는 달리 하나님이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되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지 우리 없이 우리 밖에서 우리를 대항하여 역사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거룩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종한 사람들을 성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 성화를 통해서 우리들이 열매를 맺는데 그게 우리의 영혼이 순결해지는 것이고 거기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할 수 있는 인격적인 열매가 맺히고 거기에서 삶이 흘러나와서 우리의 삶과 섬김 속에서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는 열매들을 맺혀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순결과 그 다음에 인격의 열매, 그 다음의 삶의 열매가 모두 연장선상에서 하나님 앞에 맺혀져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화의 삶을 우리들이 끊임없이 살아가는데 그러다가 보니까 뭐가 필요한가 하면 지속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상황은 그렇게 순종하면서 살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순종을 할 수는 있는데 순종을 하면 반드시 많은 경우에 고난이 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고난이 오게 되면 계속 고통이 오게 됩니다. 그게 너무 이 세상에 살기에 힘이 듭니다. 힘드니까 어떻게 하는가 하면 그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불순종합니다. 불순종하니까 우리들이 죄에 빠지게 되고 죄에 빠지면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를 잃어버립니다. 그러고 나니까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길 인격적인 의존의 관계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자기중심적이 되고 죄를 짓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대로 똑같이 하나님의 나라의 맛보기로서의 삶을 못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아주 중요하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이제 그리스도인이 순종하면서 이 세상에 D-day와 V-day 사이에서 믿음을 지키면서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애를 쓸 때 고난이 닥칩니다. 고난이 닥칠 때는 항상 그 고난이 고통을 동반하고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때 그것을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는데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그것이 실제의 삶 속에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이 함께 못 박혀서 경험한 그 죽음이 실제로 죽어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의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맛보기로 살아가기 위해서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해지기 위해서 많이 애쓸 때 우리는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여 있습니다. 하늘에는 악의 영들이 진치고 있고 그리고 우리 앞에는 우리를 순결하게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살도록 우리를 유혹하고 봐라. 바꿔진 예수 믿는 인생관 가지고는 너희에게는 고통밖에 없다. 그러니까 빨리 옛날 인생관으로 돌아가고 옛날에 네가 버렸던 세상의 길, worldly 에토스로 돌아가서 그래서 네가 다시 세상인 나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라.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이 대적이 이렇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여다보니까 우리 안에도 여전히 죄와 부패성이 있어서 우리를 그 죄 아래 사로잡아가는 것입니다. 조금만 은혜가 멈추면 이 죄가 기승을 부리면서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늘나라의 맛보기로서 살아가려니까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렇게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그때 그 고난을 이상하다.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 왜 이렇게 고난이 오나. 하나님은 아마 복을 안 주시는 분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면 믿음에서 미끌어지게 되고 결국은 맛을 잃은 소금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니까 고난이 올 때 어떻게 생각해야지 되는가 하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 내가 경험하는 이 고통은 바로 이전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그 예수 안에서 경험한 죽음이 지금 실제화 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은 나의 옛 성품들이 철저한 죽음을 경험하고 거룩하게 되어가서 하나님의 나라의 맛보기로서 정말 순전한 맛보기로 내가 변해갈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신자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순전한 하나님의 순전한 맛보기가 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을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뭘 또 허락해주시는가 하면 위로를 허락해주십니다. 그래서 그 위로는 누가 경험하는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면서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런 성령님의 위로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았던 그 부활이 자신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오면서 실제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마 이해가 정확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기 전까지는 세상 나라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사명감이 없었습니다. 사명이라고 그래봐야 다 저 좋아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돈벌어서 여우같은 부인하고 그 다음에 토끼 같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고 목표였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마음속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비로소 이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길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신의 본분이 이 세상에서 좋은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맛보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다가보니까 고통이 너무 많습니다. 옛날에는 돈 몇 푼 있고 건강하고 마음이 상할 일이 없으면 그냥 행복하다고 그러면서 지냈는데 이제는 은혜를 받고 보니까 예수 안 믿고 살아가는 저 사람을 보면 너무 불쌍하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섬기라고 나에게 직분을 주셨는데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많이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까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신 하나님 앞에서 이런 존재밖에 못 되는구나. 그리고 이렇게 밖에 못 살아드리는 것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그때 가슴이 저미는 것 같으면서 그렇게 아픈 것입니다.
또 고난이 닥쳐, 그 고난을 보면서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통하고 아파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이 올 때 그것을 자기 십자가화 하고 그래서 그 길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을 십자가를 지는 기회로 삼고 그것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옛 성품을 끊임없이 죽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죽음은 비록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지만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고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이 어쩌면 좋을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아파하고 깨트려질 때 그 느끼는 영혼의 고통은 차라리 손가락의 살점이 좀 떨어져나가는 것이 훨씬 덜 아픕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옛 성품이 죽어 가는데 그런 죽음을 경험하고 나면 반드시 하나님이 놀라운 위로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 저 정말 쓸데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의 맛보기로 이 세상에 두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제가 이렇게 엉망으로 살아가고 있고 형편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더럽히는 것 같아서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맞다. 진짜 그렇다. 죽어버려라. 그렇게 안 하십니다. 그게 아니라 아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가 옵니다. 그러면서 아! 정말 이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이 죄인이 결국은 우리 주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의지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열납 되는구나. 그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험한 다시 살아난 부활이 우리의 실제가 되어서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서 옛 사람은 점점 죽고 성령의 위로를 통해서 새 사람은 계속 살아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처음 믿을 때는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었는데 그렇게 죽고 다시 사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성화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정말 합당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은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랑을 그에게 베풀어주십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으니까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을 맛보고서는 싫어.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안가. 하나님이 싫어. 저 사람을 맛보고서는 거봐. 이게 다 쓸데없는 것이야. 그러던 사람들도 진짜배기 신자를 맛보고는 아! 그게 아니었구나. 이게 다 정말 쓸데없는 것이었구나. 그런 것을 깊이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니까 자꾸 먹는 생각만 납니다. 장항 쪽으로 집회를 갔습니다. 그 교회에서 어느 집사님이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해서 차로 한 20분을 갔습니다. 뭘 먹으러 가는데 이렇게 멀리 가나 했더니 가보시면 압니다. 갔는데 아귀찜만을 전문으로 하는 집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아귀찜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가서 아귀찜을 딱 내왔는데 기도를 하고 나서 한점 맛을 본 다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서울에 있는 모든 아귀찜은 이것을 만들려다가 실패한 것이구나.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방식 자체가 이게 아닙니다. 아귀를 질이 좋은 것을 잘 삼아서 듬뿍 큰 접시에 깔고 그 위에다가 소스를 부었습니다. 그런데 맛이 완전히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그것만 먹어봤기 때문에 아귀찜을 먹고 싶은 욕구조차도 못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가서 그 아귀찜을 맛보고 나서 아귀찜을 잘 먹게 되었습니다. 왜만하면 아귀찜 먹는다고 하면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먹을 때마다 항상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이것도 하려고 하다가 실패했구나. 그런데 비교적 이 집은 조금 실패했구나. 그런 정도지, 진짜 원조는 거기로 가야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맛보기를 주셨는데 그 사람이 진짜 맛보기가 아닌데 그것을 맛보고 에이 하나님 나쁘구나. 하나님 나라는 순 엉터리구나. 그리고 버릴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당신의 나라는 너무 행복한 나라이고 당신의 나라에 들어오지 않고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참다운 도리를 알 수 없는데 그렇게 잘못된 맛보기를 맛보고 퉤! 그리고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로 돌이켜서 예전에 하던 대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정말 피할 수 없는 최고의 사명은 전도도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 출석도 아닙니다. 교회 개척도 아니고 선교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이차적인 것입니다. 제일 큰 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돌리는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참된 하늘나라의 맛보기가 됨으로서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도록 그런 마음을 갖게 만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려서 고통 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해결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의 은혜를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 흘려죽으심으로 열어놓으신 하늘자원의 공급 통로를 통해서 이 죄와 사망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하늘의 그 신령한 은혜들이, 하늘자원들이 한없이 부어져서 그래서 우리는 죄 많은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죄에 의해서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하늘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사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하늘자원이 공급되고 충만한 그 사랑 속에서 살게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환난이나 시련이 아닙니다. 전쟁이나 기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죄악 된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이 죄악 되면 죄악 될수록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하늘자원을 너무나 부어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죄악이 관영한 때에는 항상 하나님께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그때일수록 하늘나라의 맛보기가 그 죄악 된 세상에서 더 필요하고 진짜배기 맛보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들을 부어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죄악 된 세상에서 하늘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밖에 있는 환난이나, 위험이나, 칼, 벌거벗음, 고난, 전쟁, 기근 이런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닐 우리 안에 있는 아직까지도 순결해지지 못하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순종하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뢰하면서 살아가면서 이런 것들을 계속 정결하게 하시려는 성령의 성화의 역사에 자기를 맡기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괴로움도 만나고 고난도 만납니다. 예수를 믿고 모두 고속도로와 같은 형통한 일만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도 있고 시련도 있습니다. 환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예전에는 그것을 죽음이라는 질병 상태에 걸려서 눈물을 흘리며 고통만 당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험한 나의 죽음이 실현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십자가를 질 기회로 활용하고 그래서 내가 점점 더 거룩해져갑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에게는 D-day를 통해서 승리의 기세를 잡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제는 전쟁도 필요 없고 죄와 싸울 그런 우리의 결심도 필요 없는 완전히 승리한 그 V-day의 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 가운데 죄도 없고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순전한 상태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만 영화롭게 하는 그 영광의 날을 기다리면서, 그 날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이 세상의 속한 자녀인 것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나를 즐겁게 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내 뜻을 관찰하기 위해서 사는 것아 아니라 나를 항상 버리고 십자가를 붙들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에 훌륭한 맛보기로 살아갈 수 있을까? 왕이 되고, 훌륭한 군인이 되고, 박사가 되고, 엄청난 기업주인이 되고 그런 것들은 모두 삶의 양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가 누렸던 지위의 높고 낮음에 의해서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그가 순결한 하나님의 맛보기로서 인생을 사는가.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오늘도 이 땅에 살아있게 하신 이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왜 두렵지 않은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절망적인 존재이고 죄가 어떻게 인간을 병들게 했으며 죽음이라는 질병이 어떻게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거기서 건져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그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사건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지 그 사건에 적용되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지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구원과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태초와 종말이라고 하는 전체의 구도 속에 넣고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늘 다루는 내용들은 교리적으로 예정과 하나님의 지키심에 관한 내용들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으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것을 되찾는 길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아마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셨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신자가 인생을 살다가보면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그 정도가 아니라 기도할 힘도 없고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시기는커녕 하나님께서 자기를 징벌하실까봐 두려운 그런 상황에까지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에 일부는 전에 구원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지만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실한 성도의 삶을 안 살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맞이하는 경우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예정이라고 하면 이것은 아주 굉장히 어려운 교리처럼 느껴지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혼란을 불러일으킨 진리로 그렇게 생각이 되고 있는데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정리를 하시면 아마 이 예정의 교리 때문에 여러분들의 믿음이 더 견고하고 돈독해질 것입니다. 원래 예정이라고 하는 것은 더 넓은 범주에 속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작정은 하나님의 선하신 지혜로서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미리 의지를 가지고 계신 것을 가리켜서 ‘작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 넓은 우주 속에 있는 한 지구에 불과합니다.
책을 한권 사서 우주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읽어보니까 우리가 속해 있는 곳이 태양계입니다.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고 그 주위에 아홉 개의 별들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 아홉 개의 별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태양이 빛나고 있는데 그 태양은 겉에가 6,000도고, 내부의 온도는 1,500만도쯤 된다고 하니까 가본 사람도 없고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속에 수소가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이 열을 받으면서 헬리움으로 변해서 지속적인 폭발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태양표면에서 공중으로 이천 킬로미터 가까이 되는 불길이 치솟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야, 이 태양이 온 우주의 중심인가보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태양도 얼마 후면 더 이상 폭발할 수소가 없어서 불이 꺼지게 되고 불이 꺼지게 되면 주님이 오시지 않아도 이 지구를 비롯한 모든 위성에 그 빛이 가지 않고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물론 40억년 후에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 태양계도 우리 은하계라는 큰 은하계의 저 귀퉁이에 있는 작은 가족에 불과합니다. 가족이라고 칠 수도 없고 우리 은하계 안에서도 태양계는 먼지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은하계의 별의 식구의 총 수가 2000억인데 그 중에서 10개니까 정말 그것은 먼지와 같은 것인데 우주는 그런 2000억 개의 별이 모인 은하계가 수십억 개가 모여서 우주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아는 바가 너무 없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신비한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질서정연하게 그 2000억 개의 수많은 별들이 그렇게 움직이고 그런 2000억 개씩 있는 은하계가 수십억 개가 모여서 그것들이 움직이고 역사해서 그것들이 그렇게 우주의 질서적인 조화를 이루어 가는가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참 감탄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것도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님의 보전이라고 부르는 사역이기는 합니다만 하나님은 이렇게 커다란 우주의 생성, 혹은 인간의 삶과 죽음 전자는 질량 면에서 엄청나고 후자는 인간 자신에 관한 의미에 있어서 엄청납니다. 그런 사건만 하나님이 미리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를 향해서도 의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날고 정하신 때에 수명이 다해서 떨어집니다. 누구도 보는 사람 없이 피었다지는 한포기 들풀도 주님의 뜻이 아니면 태어날 수도 없고 주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소멸할 수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작정 가운데 특별히 도덕성을 가진 피조물들에 관한 미리 정하신 작정을 ‘예정’이라고 부릅니다. 그 도덕적 피조물들은 셋으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천사들이고, 두 번째는 인간이고,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셋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구원받은 것은 지금 받은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영원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구원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예정을 말할 때는 태초로 가서 예정을 생각하면 혼란에 빠지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이 시대로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들이 예정을 말해야지만 예정이 우리의 신앙을 돈독히 하는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말하기 전에 우리들은 성경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시는 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구약의 중심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구약의 모든 역사와 메시지들은 한 분을 겨냥하면서 달려온 것들이고 신약의 모든 계시와 역사는 한분으로부터 흘러나온 계시들입니다. 구약은 한분을 바라본 예비적 계시였고, 신약은 한분을 통해 나타난 계시였습니다. 바로 그 한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신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예수님 이전 시대를 B.C 기원전 즉 before christ 라고 구분하고 그 예수님 이후의 시기를 아노도미니 우리 주님의 시대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입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을 보아도 예수님이 역사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이건 안 인정하는 사람들이건 간에 어째든 간에 B.C.와 A.D. 기원전과 즉 기원후로 나누어서 예수님이 역사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는 그분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History라고 부릅니다. His 그의 스토리 이야기 그것이 바로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온 역사, 이것이 구약의 역사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역사 이것이 신약의 역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예수님이 역사에 중심이신 이유는 예수님이 구약과 신약에 중간에 서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역사에 중심이라고 하는가보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역사에 중심이 되신다는 진술은 단지 수학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구약과 신약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역사에 중심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역사에 중심이라는 이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구원사건의 의미가 모든 역사에 앞뒤를 갈라놓는 중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역사의 중심이라고 할 때 이것은 시간적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이것은 역사적 의미가 예수님이 모든 역사의 중심점이 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구약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이라고 하는 구원사건,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신 이 한 사건을 향해 달려온 역사이고, 신약은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심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수많은 백성들을 구원한 역사의 기록이 바로 신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구약을 읽을 때는 구약만 가지고 읽어서는 절대로 구약이 말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계시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읽기 위해서는 신약을 잘 알고 있어야지만 구약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를 들면 아마 여러분들이 이해하기가 쉬우실 것입니다. 밤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세 나무가 있다고 칩시다. 그 나무는 전혀 비슷하지 않습니다. 감나무는 감이 달린 나무고, 밤나무는 밤이 달려 있습니다. 물론 대추나무는 대추가 달렸습니다. 나무 생김새도 달라서 열매까지 달려 있을 때 그 나무를 혼돈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뿌리만 잘라서 흙에 뒤덮인 뿌리만 자른 것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면서 이게 무슨 나무의 뿌리인가? 그리고 이게 계속 자라면 앞으로 무슨 꽃이 피고 어떤 열매가 맺겠는가 하고 물어볼 때 그것을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나무를 집중적으로 그것도 나무의 뿌리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한 풍부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구분해내기가 힘들 것입니다.
신약을 모르고 구약을 보면 마치 그렇게 뿌리만 잘라놓은 나무를 보고 이 나무에서 무슨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지를 생각하기 힘든 것처럼 그런 정도로 구약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만약에 구약만으로 충분히 이 모든 것들을 알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신약의 계시를 허락하셔서 성경을 쓰게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새 교훈을 너희에게 주노니 라고 말씀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런 사실들이 어디에서 입증되는가 하면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구약을 굉장히 신성시하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 가운데 이런 하나님의 여러분들이 듣고 계신 이런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해서 알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있기는 하지만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만큼 구약자체만을 가지고는 우리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완전히 드러내는데 부족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도 우리들이 제일먼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앞에 있는 창세기부터 읽으라고 가르치지를 않고 요한복음부터 시작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이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깊이 있게 이 성경 계시의 전체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풍부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읽고 그리고 사도행전과 로마서를 읽으면서 그러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그 지식의 빛을 가지고 구약으로 들어갈 때 찬란한 보석과 같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계시와 진리들을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뿌리와 열매의 관계로도 묘사할 수 있지만 그림과 해설로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미술전시회에 가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 추상화입니다. 추상화라고 하는 것은 ‘추’ 빼버렸다는 것입니다. ‘상’ 이렇게 우리들이 흔히 이해할 수 있는 상을 제거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추상화를 보면 항상 드는 느낌이 ‘저런 것은 나도 그리겠다.’ 그런 생각밖에 안 들고 그렇습니다. 저건 나도 그리겠다.
그래서 여러분은 기억하실지 모릅니다만 60년대에 소련의 수상을 지냈던 후리스초프가 있습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피카소가 이미 당시에도 유명한 화가였는데 그 피카소의 그림이 참 혼란스럽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나서 가만히 있었으면 되는데 뭐라고 했는가 하면 저 그림은 당나귀 새끼가 꼬리를 흔들어서 그린 그림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무식한 발언이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피카소가 내려간 게 아니라 자기만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정말 그 사람처럼 망신을 당할까봐 그런 말은 안 하지만 어떤 것을 보면 그냥 물감을 막 집어던진 그런 그림도 있고, 안에는 물감을 뿌려놓고 발로 밟고 지나간 것도 있고 그런 그림들을 보면서 참 저게 왜 아름답다고 말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언제 한번 미술을 전공하는 화가를 한번 만났습니다. 전 전문가를 만나면 늘 배우고 싶어 하니까 추상화에 대해서 좀 알고 싶다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분 하는 말이 추상화는 상을 빼버린 것이기 때문에 제가 궁금한 것은 미술에 관한 고도의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이 그림 그리는 화가가 원래 머리 속에 넣고 있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 말씀이 그것은 아무리 탁월한 미술적 식견을 가진 사람도 불가능하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아름답고 이것이 추상화를 놓고 일등, 이등 상을 주는 것은 어떤 기준인가 그랬더니 그것은 문학으로 말하자면 독자비평식이라고 합니다. 어차피 그린 본인 이외에는 그 무엇을 생각했다가 그 상만 빼고 인상만 거기에 남겼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보는 사람이 그것을 각자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사 한사람이 기가 막힌 해석을 거기에 부여하면 그러면 그 작품의 진가가 돋보인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렇지만 한번은 또 어떤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어느 잡지에서 정말 반추상화를 그렸는데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그려났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는 미술사에서 신기원을 열어가고 있다고 자부하시는 노 화가인데 그분이 인터뷰를 하면서 자기 그림에 대해서 한 페이지에 걸쳐서 상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그 그림을 보니까 진짜 이해가 갑니다. 아! 이게 이런 의미구나. 그 그림을 구약이라고 말한다면 그 설명이 신학입니다. 그래서 설명만 들으면 얼마나 건조하겠습니까? 그림만 보면 답답한데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보면 그림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그림을 보면서 이 해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이 원래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되어 있고 아람어는 조금만 되어 있습니다. 같은 샘족 언어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수많은 언어들이 있어도 가장 서정적인 언어중의 하나가 히브리어입니다.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샘족 언어 모두가 이렇게 서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구약을 기록한 히브리어는 산문을 쓰기에 적합한 언어가 아니라 시를 적어가기에 적합한 언어입니다. 단어 하나 하나에 그림과 같은 많은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언어를 택해서 구약을 기록하신 것은 우연히 아닙니다.
또 인류가 발명한 많은 언어들 가운데 가장 정확한 묘사의 적합한 언어가 있는데 그 언어 중에 하나가 바로 희랍어입니다. 그리스어입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셔서 신약을 기록하게 하신 것도 역시 우연히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감성적으로 풍부한 언어로 구약의 그림을 그리시고 가장 정확한 묘사로 신약을 기록하셔서 정확한 묘사를 가지고 풍부한 서정성을 가진 구약의 계시를 해석하고 구약의 풍부한 서정적 계시를 가지고 신약의 정확한 계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경을 연구할 때도 이런 연구방식이 견지되어야 합니다.
이제 예정을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 예수님의 계시의 중심 성을 우리들이 이제 이해해야지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쪽이 태초이고 이쪽이 종말입니다. 그래서 태초와 종말로 쭉 시간이 연결이 되어 있는데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입니다. 의미적으로,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여기가 구원사건이 일어난 여기가 가장 빛이 찬란하고 환하다는 것입니다. 여기로부터 아주 멀어지면 흐려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 가장 확연하고 찬란하게 드러났고 그리고 거기로부터 멀어진 태초일수록 흐리고 거기로부터 멀어진 종말일수록 어둡습니다.
그런데 계시를 가지고 말을 해도 그런 논리가 성립이 되는데 그 위에 우리를 더 어렵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어두움과 지적인 눈멂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죄가 가득 차서 그 죄로 말미암아서 영혼의 어두움이 깃드니까 하나님이 보여주셨는데도 충분히 알 수 있는데도 영적인 어두움 때문에 하나님의 보여주시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탐구하고 공부하면 이해력이 증진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알 수 있는데 사람들이 먹고 사는데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에 관해서 주님이 알려주신 이 계시와 우리의 구원을 향한 계획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지성적인 눈 멈, intellectual blindness그 지적인 눈멂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알려주셨는데도 연구하고 이해하면 될 텐데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알려주신 모든 것들을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 그 안에서는 찬란한 계시의 빛이 드러났습니다. 거기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희미하고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성경을 많이 부지런히 배워야지 됩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어떻게 하면 내가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진실한 신자로 계속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드리는 삶을 살수 있을까? 내 안에 있는 수많은 죄, 내 밖에 있는 온갖 시험과 유혹, 이런 것들을 이기고 어떻게 주님의 마음으로 합당하게 남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권성한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들을 부지런히 공부해감으로 알 수 있고 또 그런 것을 공부해도 영적으로 이 죄를 짓고 어두움 속에 있으면 그런 지식들이 효과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결한 삶을 살고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탐구를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배워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어제 교리반에서도 부지런히 쓸데없는 무슨 지식이든지 막 이런 것들을 섭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별로 쓸데도 없는 책들을 보며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한 일입니다. 그런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방을 자주 가는데 책을 딱 사면 세 종류로 골라서 삽니다. 하나는 탐구할 책, 두 번째는 여가가 나면 읽을 책, 세 번째는 화장실에서 읽을 책 세 종류의 책을 삽니다. 그래서 시시한 책들은 그러나 궁금한 책, 또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을만한 이익이 있는 책. 이런 것들은 화장실에서 읽는 것입니다. 요즘 무슨 투란도트 한다고 해서 무엇인가 뭐 과일 이름인가 그래서 투란도트 책을 한권 사서 왔습니다. 어제 사서 왔는데 읽으니까 너무 재미있습니다. 잠깐 동안에 화장실에서 봤습니다. 정말 상상력이 기발합니다. 그러니 뭐 좀 알아야지 될 것이 아닙니까? 너무 잘 알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좀 비슷하게는 알아야지 되잖아요. 그 다음에 여가가 있을 때 뭔가 이렇게 하나님의 일에 골몰하다가 피곤할 때 쉴 때, 그때 쉬면서 읽는 책들, 그런 것들은 약간 무게가 있는 책들을 읽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진짜 탐구할 책들은 어떤 책들인가 하면 나에게 거룩한 지식을 가져주는 책들, 즉 공부하고 나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들고 내가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드는 그런 지식들이 바로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소설책을 가지고 밤새우고 그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송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지고 밤을 새고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밤을 새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너무 자주 새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지적으로 무지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라도 아주 초롱초롱하게 깨어 있으면 그러면 부족한 지식이라도 붙들고 온전하게 살려고 하니까 중간은 하는데 그런데 지적으로라도 게으르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탁월하다는 생각은 엉뚱한 발상입니다. 누구나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도 누구든지 영적으로 나태해질 위험이 있고 그리고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도 지적으로 매우 게으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어두움이 없도록 순결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들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회개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하면서 그것은 자기 부인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야지 되고 지적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탐구하고 거룩하게 한 지식들을 습득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지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 요한이 그때 거기에 끌려갔을 때 이미 백발의 노사도로 95세쯤 되었을 때인데 그 백발의 노사도가 어린아이처럼 펑펑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천사가 마지막에 될 일의 계시를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이 계시 속에 하나님의 마지막 날들의 일이 담겨져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인봉이 되었고 천사들이나 사람이나 누구도 이 인봉을 떼기에 적합한 사람이 없으니 어린양 이외에는 이 인봉을 뗄 수가 없다고 하니까 이게 계시는 주어졌는데 그 계시를 볼 수가 없으니까 이 사도 요한이 거기에서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면서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지 도서관까지 만들어주었는데 그런데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 이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서 항상 여러분들이 그런 지적인 눈 멈 때문에 눈 멈이 심각해지면 어느 정도까지 되는가 하면 태초와 종말만 어두운 게 아니라 너무 캄캄해져서 심지어는 예수님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계시의 빛이 비치고 있는데도 십자가가 뭔지, 왜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 왜 예수를 믿으면 참 신자가 되어야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캄캄한 소경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다고 하는데 진짜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백번 양보해서 진짜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어두움 속에서 살다가 가면 박수치고 좋아할 존재는 마귀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가슴아파하고 슬퍼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삶을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을 탐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지 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말씀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 읽는 책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어디를 읽고 있고 그 다음에 책은 어디를 읽고 있고 그래서 계속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지식들을 우리를 무릎 꿇게 만드는 지식들로 계속 공급해서 우리 시대를 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종말을 보고, 미래를 보고, 과거를 볼 때에 적어도 하나님이 안 알려주신 것은 우리들이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알려주신 것이 우리의 영적인 어두움과 지적인 눈 멈으로 말미암아 못 보는 일은 없어야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될 일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책을 가까이 해야지 됩니다. 성경 어디를 읽고 있습니까? 그러면 어디를 읽고 있습니다.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습니까? 그러면 무슨 책 어디에 이렇게 연필이 꽂혀 있어야지 됩니다. 어디 꽂혀있습니까? 그러니까 가게부에 꽂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교리반에서도 그랬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별명을 스스로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고 3 이라고 지었습니다. 고 3은 모든 것을 절제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고 2쯤 되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탱탱이 공부를 안 해서 대학에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부지런히 공부해서 한 30년 신앙생활을 하고 나면 여러분 뒤에 여러분들을 수없이 마음을 녹이고 깨트렸던 책들이 책꽂이에 서너 개 정도는 쭉 비치되어 있어야지 됩니다. 그것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죽는 것입니다. 그게 그 지식을 자랑하려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여러분은 몰라서 그렇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우리의 사랑스러우신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전에는 몰랐던 것을 주님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될 때 막 뛸 뜻이 기쁜 그 기쁨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수많은 은금보다도 더 귀하고 영토보다도 더 귀하고 그리고 고관대작 이 세상에서의 높은 지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입니다. 그런 기쁨을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노래한 흔적이 119편입니다. 주의 말씀을 인하여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천천 금은보다도 더 귀하다고 노래했던 그 시인의 노래가 바로 그런 노래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우리의 영적인 어두움과 지적인 눈 멈으로 말미암아서 마지막 것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찬란한 계시의 빛,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 그렇게 해서 신자 된 우리, 그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지 되는 것, 이렇게 분명한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계시록만 전문적으로 연구해서 미래에 될 일을 다 파악했다고 그렇게 떠드는 사람이 있는데 다 가짜입니다. 그렇게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또 그것을 잘 안다고 해서 그렇게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중심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찬란한 계시의 빛부터 우리들이 잘 이해할 때 그 마지막 끝에 될 일들은 우리들이 잘 몰라도 우리가 정말 좋은 신자로 사는데 별 문제가 안 됩니다. 666이 무엇이고, 거기에 나오는 적그리스도가 누군지 역사적으로 수많은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떨 때는 그것을 교황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히틀러라고 생각했고 또 어떤 삶들은 로마의 황제 네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다 그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이 되었으니까 지금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적그리스도가 누구일까? 모릅니다. 666의 표가 무엇일까? 컴퓨터 바코드라고 그러는데 그게 맞을까?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모른다고 해서 불안할 필요가 없습니다. 666의 바코드가 무슨 코든지 간에 또 마지막에 나타날 그 적그리스도가 교황이든지 아니면 새로 만들어진 유럽공동체의 통합 대통령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자녀로서 정말 기다리면서 사는데 있어서는 그 지식이 어두워서 잘 좀 안 보인다고 할지라도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충분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나 그때는 마주 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거울은 지금 우리들이 쓰고 있는 이런 거울이 아닙니다. 이런 거울은 나온 지 얼마 안 됩니다. 옛날에 성경이 쓰여 지던 시대에는 대게 거울이 석경이 아니면 동경입니다.
중국에 이번에 가니까 물을 거울로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활용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런데 미인이 살았는데 다리가 이렇게 연못위에 있는데 다리마다 뻥뻥 뚫었습니다. 저기 빠지면 위험한데 어떻게 뚫어났나. 그랬더니 그게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들여다보고 화장을 고치고 간답니다. 글쎄 워낙 뻥이 센 사람들이니까 믿는 척 했습니다 그런데 동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을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거기에 비추는데 비추기야 비추지만 그러나 대충 형체만 비치지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거울처럼 그렇게 선명하게 색상이나 이런 것들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희미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희미합니다. 어떤 때는 정말 영적으로 깨어있고 정말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데도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계시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식의 빛 아래서 살면 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는 염려 없습니다. 왜 주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정이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말하면서 예정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원래 성경이 예정을 이야기할 때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거꾸로 자기 자신을 회고하면서 예정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한다면 전망적으로 예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예정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좀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설명을 드리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예정교리를 이야기하면 모든 사람이 항상 질문하는 게 그것입니다. 목사님, 내가 그러면 이렇게 열심히 믿어도 예정이 안됐으면 결국 꽝이 아닙니까? 그렇게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우리 가족을 전도하는데 만약에 우리의 가족들이 예정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전도해도 결국은 헛수고인데 그러면 그것을 미리 알고 예정된 사람만 복음을 전하면 낭비가 없이 참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예정을 그런 용도로 사용하라고 가르쳐주시지를 않았습니다. 사람의 모든 구원이 예정되어있기는 하지만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예정으로 알아맞혀서 복음을 전하고 하고 않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끝까지 기다려봄으로서 구원으로 예정이 됐는지 안 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하신 것조차도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자, 제가 이제 한 예증을 들을 테니까 이것을 듣고 나면 여러분들이 모든 의문이 풀리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 구약의 지식마저도 당시의 유행하던 유대교 사상의 의해서 잘못 물든 왜곡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에게 알려진 바와 같이 어쩌면 지상에서 존재했던 최상의 성도의 삶을 살았고 그리고 최고의 사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다메섹 사건은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었고 인생 전체를 갈라놓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속에서 세 번이나 다메섹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고 즉시 사도로 부름을 받은 다음에 얼마 동안은 그는 자기가 구원받은 것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사건을 계속 언급을 했습니다. 아! 정말 내가 거기서 예수님을 못 만났더라면 지금도 여전히 헛된 유대교 종교지도자의 길을, 생명 없는 그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을 대적했을 텐데 그러면서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는 우연히 거기서 주님을 만났겠지만 자기는 주님을 만날 계획이 없이 거기를 가다가 거기서 주님을 만났지만 그렇게 절묘하게 거기에 찾아오신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이렇게 만나서 예수 믿게 만드시려고 하는 그 계획을 예수님이 오래 전에 가지고 계셨구나 하는 사실을 은혜가 깊어지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아! 그렇구나. 이게 우연히 다메섹에서 만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 전에 이것을 계획해놓으셨구나.
그러고 보니까 자기가 태어난 것까지도 신비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수많은 정자가 나와서 난자와 결합해 하나가 만나서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태어났습니다. 자기 어머니 배속에서 자기가 있을 때 그때 벌써 하나님은 자기가 어떻게 살 것을 다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간 후에 어느 시점을 정해서 사울인 나를 꺾어서 그래서 예수님 믿게 만들고 그래서 다른 사도들이 전할 수 없는 곳에 가서 예수 복음 전하고 하나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빛 가운데로 돌아오게 하려고 나를 택하셨구나.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주신 이 감격이 훨씬 깊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더 견고해진 것입니다. 아!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시기는 했지만 이미 그것은 하나님이 내가 우리 엄마 배속에 있을 때부터 정한 것이었구나.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모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어” 그랬습니다. 그가 나중에 은혜를 더 많이 받고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아니야. 내가 겨우 엄마 배속에 들고나니까 하나님이 보시면서 꼭 저기 사울이라고 이름 붙여질 녀석이 저 배속에 들었네. 저 녀석을 내가 회심시켜서 나의 나팔로 삼아야지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만세 전에 나를 택하사” 그래서 은혜의 경험의 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게 거꾸로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하나님이 자기의 갈 길을 정해놓으셨다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면 아! 내가 여기 이렇게 선 것은 내가 어느 날 주의 종이 되어야지 되겠다. 그러고 탁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만세전서부터 계획을 하고 나를 태어나게 하셔서 여기에 세우시려고 나를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그러니까 어떤 느낌이 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온 인생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었구나.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내 인생의 현재는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겠는가.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내 미래의 날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고 하나님이 주관하실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 우리가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가다가 내가 10년 후에 뭐가 되었을까? 그렇게 궁금해서 아주 가슴이 조릴 정도로 그렇게 궁금했습니다. 한 83년도에도 그랬고 93년도에도 그랬습니다.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83년도에 제가 대학원에 있을 때인데 그때 나는 이렇게 가난한 신학생인데 10년 후에는 내가 뭐가 되어 있을까? 계속 학교의 선생을 하고 있을까? 뭐가 되어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지나가니까 신학대학의 교수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뭐 교수생활은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뭐 괴로움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93년도에는 2003년도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대게 궁금했습니다. 그때는 교회 개척하기도 전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궁금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계속 선생으로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이미 들어왔고 어느 교회가 나를 데리고 갈까? 그 교회에 갔을 때 성도들은 나를 좋아할까? 한 10년 후에 죽어라 성도들과 장로들에게 구박만 받고 꼭 주눅 든 오리새끼모양 교회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밥이나 먹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두렵기도 하고 그때는 이미 설교를 하러 많이 다니며 사역할 때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10년 후에 나를 역사적인 설교자로 쓰셔서 오대양 육대주를 흔들어놓으시는 것은 아닌가. 도대체 10년 후면 어떻게 될까? 그랬더니 10년 살고 보니까 이렇게 된 것입니다. 상상도 안 했습니다. 여러분들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안 했습니다. 1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그때까지 있을까? 하나님이 불러가셨을까? 아니면 열린 교회는 여기 계속 있겠는가. 아니면 넓혔겠는가. 다른데 갔겠는가. 아니면 내가 다른 곳으로 가고 여기는 다른 사람이 와서 목회를 할까? 뭐 궁금한 게 너무 많습니다.
잘 안 보입니다. 궁금한 게 많습니다. 그래도 항상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한 가지 분명합니다. 10년 후의 나의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정말 감사하고 행복할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심히 고달프고 괴로울 것이라는 것,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니까 10년 후에 어떤 모습으로 잇을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핵심가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결과이고 그런 비전은 가질 수 있지만 그러나 핵심가치가 아닙니다. 핵심가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 내가 10년 전보다 훨씬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주님께 더 많은 기쁨을 드리고 하나님과 더 많이 함께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그것에 대해서 더 궁금하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렇게 살게 되면 뒤를 회고할 때마다 이게 결코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예정하시는 은혜를 바라보는 신자의 시각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교리의 유용성은 우리를 낙심하게 하거나 혹은 방종하게 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정절 있게 하고 더욱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가고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는 그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오.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인도하셔서 이렇게 하나님 섬기게 하시려고 그 고난을 통과하게 하시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예수 믿게 하시고 그 집안에 태어나게 하시고 만세전에 나를 택하셨구나. 이렇게 생각될 때 아!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놀랍다. 그러니까 오늘은 타락하자. 그러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주님이 나를 오래 전에 예정하셨고 나는 결코 우연한 존재도 아니고 우연 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피조물도 아니고 나의 인생의 계획을 하나님이 짜시고 그 계획대로 살도록 내게 능력을 주시고 그 계획대로 살지 않을 때 나를 꾸짖으시고 인격적으로 설복시키셔서 당신의 계획대로 살게 하시고 계시다는 하나님의 이 손길을 느낄 때, 그때 우리는 더 하나님 앞에 순결하고 정절 있는 삶을 살게 되지 절대로 방종하고 타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만 우리로 하여금 신자답게 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최선을 다해서 사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게으르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여러분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아픕니다. 저게 얼마나 커다란 죄인데, 하나님이 어떻게 주신 생명인데, 오늘 여러분들이 아무렇게나 허비하고 있는 이 오늘이라고 하는 날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그 내일을 못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오늘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가슴 두근거리는 축복이고 특권입니다. 이 날을 우리들이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우리들이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 거기에 우리들이 붙잡혀있을 때만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수 있는 것이지 주님이 우리를 놓아버리시면 우리의 부지런함도 헛것이오, 우리의 결심도 헛것이오, 우리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사망 가운데 데려가며 왕 노릇 하던 악한 마귀의 세력은 등뼈가 부러지고 나동그라졌습니다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 세상은 완전히 우리가 승리한 세상이 아닙니다. 독처에 아직까지도 폭도들의 반란이 있고 여기저기 테러의 위험이 상존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항상 순종하며 살고 그 계시의 찬란한 빛 아래서 은혜를 받은 성도들과 함께 무리를 지으며 다니고 또 살아가면 어려움이 없지만 불순종에서 홀로 교회 가운데서 떨어져 나아가고 예수님 손놓고 세상 가운데 돌아다니면 얻어맞고 생명을 위협을 느낄 정도로 아직까지는 어두움이 있는 위험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죄와 유혹, 시련과 핍박이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죽지 않는 질긴 생명력을 가진 우리 안에 있는 이 죄성과 타락한 성품, 그리고 이것들을 꼬드기며 유혹하는 이 세상의 집요한 유혹과 그리고 도전,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오는 수많은 시련과 박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려야 하는 그런 이별의 슬픔, 고통 이런 수많은 것들이 끊임없이 우리 안팎에서 작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의 동기를 부단히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고 우리 자신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는 항상 우리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이렇게 연약하다고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위해서 살면서도 그러나 또한 동시에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 다 살수가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주님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따라 살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앙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의 손을 놓지 않고 꼭 붙들고 절대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타락하기 전에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가지고 살기를 원했던 바로 그 마음입니다.
그런 절대의존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무엇을 한다고 했습니까? 순종합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을 이 죄와 유혹과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이미 이겼지만 그러나 아직 완전히 이기지 않은 처처의 위험과 도발이 도사리고 있고 마음의 죄와 영혼의 위협들이 남아 있는 이때에 최선을 다해서 주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그러나 항상 우리의 믿음보다 강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뿌리, 우리의 신앙보다 더 강한 이 세상의 유혹, 우리 주님보다 더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의 시험들을 우리들이 끊임없이 만나고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살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울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이 우리의 붙잡은 손을 놓지 아니하시도록 아버지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는 절대의존의 마음으로 주님께 기대고 주님께 순종하고 우리는 그 품안에 안겨서 주님이 안전하게 우리를 지키시는 그런 놀라운 임마누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항상 성령 충만하십시오. 그리고 늘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우리들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들이 실패하고 낙심하고 뒤로 물러났어도 그것이 영원한 패배와 멸망에 이른 것이 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보증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믿었을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오신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이미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서 일생을 살아서 성화의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사람은 못됩니다. 그때에 예수의 공로를 힘입어서 우리를 영광의 형체로 변케 하시는데 이것을 가르쳐서 ‘영화’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 완전하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순결한 존재로 만들어서 흠이 있고 실패 많이 하고 하나님을 자주 배반했던 그런 부족한 인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피로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성령으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셔서 우리를 흠 없고 티 없는 자녀로 아버지 앞에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그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흠도 없이 티도 없이 영광 가운데 드러날 그 날을 꿈꾸면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도 빛들로 나타나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그 은혜를 목말라하며 세상을 이길 거룩한 힘을 진리를 통해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바로 이 지상에 남겨져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까지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완전히 영광스럽게 변화시켜주실 때까지,
최후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끝까지 우리의 몫에 대인 십자가를 그 험한 십자가를 우리 주님도 지셨으니 붙들고 끝까지 성도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왜 두렵지 않은가 2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자가 되리라”(롬8:38-39)
지난 시간에 우리를 구원하고자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렇게 구원해놓은 우리를 끝까지 지키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면 오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교리를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한 단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중생, 칭의, 양자됨, 성화 이런 것과 같이 구원의 순서에 한 단계가 아니라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멀리는 영원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신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또 가까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생을 끝날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데리고 가시는 그 전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것입니다. 앞의 것은 시작이라는 면에서 끝이 없이 영원 전에 시작된 것이고, 뒤에 것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 것은 시작이었고 뒤에 것은 끝이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구원과정의 한 단계로 다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같은 에베소서 1장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는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이 놀라운 계획은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시작해서 영원 후까지 계속되는 구원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구절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와 함께” 라고 쓰여 있는 구절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두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입증하는 구절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신자의 이 연합은 성경에 우리에게 제시된 구원의 비밀 가운데 가장 절정에 도달하는 찬란한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녀로 살아가는 이 모든 신앙생활의 과정이 그리스도와의 그 연합을 이미 이루었고 또 한편으로는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이 가르침은 성부, 성자, 성령 그 모든 각 위의 하나님에게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즉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선택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를 믿는 그 순간이 아니라 영원 전에 우리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지혜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언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태어난 우리들을 구원하기로 이미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선택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구원하실 것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에 그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한 근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직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도 전에,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당신의 외아들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선택하시고 구원하기로 미리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런 의문에 접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면 우리는 왜 그동안 예수님 믿기 전에 불신자의 삶을 살았을까? 어떤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느끼지 못한 채 불신자의 삶을 살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런 의문이 듭니다. 이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리적으로는 우리를 미리 아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해놓으셨지만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신 것은 영원 전에 하신 일이 아니라 불순종하며 이 세상에서 예수 모르고 살아가는 날 동안은 아직 그 원리적인 연합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복음을 듣고 거기서 나 같은 죄인을 부르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복음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내가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뉘우쳤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있었고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아주셨고 그리고 내가 내 안에 예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접붙여 연합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렇게 복음을 전해서 선택된 사람들이 원리적으로만 하나님께 연합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음을 가짐으로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그 일이 필요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만 비로소 그가 죽음이라고 하는 질병적 상태에서 벗어나서 하늘자원을 공급받으며 살수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선택의 기초가 사랑이라면 구속의 기초는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에게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우리의 죄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그리고 모든 악은 우리가 바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그 죽음이라는 질병은 우리의 영혼에 동일하게 찾아와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늘자원은 끊어졌고 이제 인간은 어리석게도 땅의 자원을 가지고 하늘자원을 대신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치열한 경쟁과 혹은 범죄를 통해서 더 많은 재물과 더 많은 이 땅의 자원을 긁어모으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지만 인간은 결국은 이 땅의 자원으로서는 죽음이라는 질병의 문제를 극복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불쌍히 여길 가치가 없는 죄인들을 향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죽음이라는 질병적 상태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그 죄의 대가인 형벌을 하나님 앞에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지성적 신비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믿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있는지는 믿음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는 지성적 신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 모든 구속의 사건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천하에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외에는 죽음이라는 이 절망적 영혼의 질병상태에서 우리를 건져낼 수 있는 그 어떤 다른 방법도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셨고 바로 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그 하나님의 선택을 구속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셨지만 우리 마음속에 그 사실을 믿어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더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하십니까?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내 마음에 믿어지도록 만드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누구를 통해서 꿈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진리가 정말 생생하게 살아서 내 마음속에 믿어지게 하시고 그래서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그 두드리시는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주님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내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시도록 내어드리는 이 놀라운 승복이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집니까? 이게 바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무리 우리에게 역사하신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구속의 공로가 없었더라면 성령 혼자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물겨운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아들이 하늘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그 무한하신 사랑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이루어졌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성령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그 구원을 적용시키셔서 믿어지게 하시고 또 그 성령님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사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주시게 되었는데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놀라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비밀이 이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공통된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제목이 붙어 있지만 이 교리는 단지 성부와 성령을 제외한 그리스도와만의 연합을 이야기하는 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는 성부와 성령이 제외되고 성령의 내주하심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가 제외되는 그런 공식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한 인격을 따로 따로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얼핏 보면 세 분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그분들은 공통된 신적본질을 소유하고 계시며 세 분인 것 같으나 사실은 한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모든 구원사역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의 이 교통 속에는 각각 나머지 위도 함께 교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는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맛보게 될 효과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통해서 우리가 맛보는 가장 탁월한 효과는 은혜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최고의 교통의 축복은 성령의 위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과 교통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각각 삼위일체의 하나님 중에서 어느 위와 직접적으로 우선적으로 교통하고 있는지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물 붓듯 부어지는 사랑을 깊이 느낄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가장 우선적으로 교통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정말 쓸모없는 죄인에게 부어주시는 가치 없는 죄인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호의, 놀라운 은혜가 부어지는 것을 경험할 할 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우선적으로 교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말할 수 없이 침체되어 있고, 죽을 고비에 떨어진 것 같고, 만물의 찌끼가 된 것 같이 절망적일 때에 근거도 없이 찾아오셔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놀라운 위로의 역사를 경험할 때는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우선적으로 교통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지라도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통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절망 가운데 그런 놀라운 위로를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놀라운 위로와 감화, 말할 수 없는 축복, 그 모든 좋은 것 중에 단 하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내려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 중보자로서의 효과는 구원받을 때에만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기도 속에는 정욕이 묻어있고, 더러운 것이 있고, 바르지 않을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지 않은 것들이 일부 섞여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기도는 정화되어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인 이 구속의 중재를 통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주시고 우리가 올리는 헌신이 아무리 순수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실 정도로 정결한 헌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흠향하실만한 완전한 사랑 같은 것들은 죄 가운데 사는 인간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헌신과 사랑도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의 은혜를 통과하면서 정결해져서 그 피를 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헌신과 사랑을 받으시고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 속에서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의 그 구속의 중보를 빼놓고는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위로가 있는 그 곳에 반드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이런 중보의 은혜를 누리며 성령의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만들어주신 신적인 동기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집을 나간 자식같이 불쌍한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이 모든 위로와 은혜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제외해놓은 성령의 위로 역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명하면 많은 시간이 가겠지만 이런 식으로 성령뿐 아니라 성자의 은혜에도 이런 식의 공식이 적용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할 때에도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와 성령의 위로가 적용되어서 삼위의 하나님 각 위와 우리가 우선적으로 교통할 수는 있지만 하나의 위와 교통할 때에 나머지 두 위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은 무엇일까? 어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적 성격은 어떤 것일까? 입니다.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째는 그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 영적이라고 하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 신비적인 것이라고 하는 사실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신자의 연합이 영적이라고 불리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주시는 역할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영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이 실제적인 연합이 거듭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사건은 우리의 영혼에 일어나는 일생일대의 가장 엄청난 사건이고 이것은 이 세상의 천지창조의 비견될 수 있을만한 엄청난 의미를 가진 사건입니다. 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영생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죄라는 병균에 감염이 되어서 먹든지 마시든지 생각하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그 병원체에 모두 감염이 되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불결한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절망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끝없는 고통과 넘치는 이 세상의 악이었습니다. 유한한 인생을 살면서 인간은 죽음이라는 질병 상태에서 경험하는 그 고통을 어찌할 수가 없었고 그 견디기 힘든 고통과 어려움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자원을 공급받으려고 했지만 하나님과의 연합이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어떠한 하늘 자원도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피나는 경쟁을 통해서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다투고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서 애썼으며 필요하면 전쟁을 통해서 남의 자원을 빼앗고 살인을 통해서라도 남의 자원을 강탈해서 자기의 것으로 누려보며 살려고 했지만 지혜로운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긁어모은 이 땅의 자원이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림 병적 상태에서 자기를 건져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자신의 인생의 비밀이 복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죄의 지배는 무너져버렸고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우리와의 연합을 통해서 관계를 복원하시고 하늘자원을 공급해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영적인 연합을 이루어놓으셨습니다.
영원 안에는 이런 놀라운 사실이 일어났지만 겉 사람 속에는 당장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못생긴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갑자기 잘 생긴 사람으로 미모의 남성과 여성으로 변모된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즉시 금시발복을 해서 갑부가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갑자기 박사들과 어깨를 겨눌 수 있는 세상지식을 소유하게 된 것도 아니고, 나이가 많아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소년으로 변모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그대로 있습니다. 왜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들을 성령이 이루신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몸에는 물리적으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영혼에는 신비하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예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하늘나라의 열린 문을 통해서 하늘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었던 그 사람을 생명으로 다시 살리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영적으로 이루어진 일들이고 영혼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들이 영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속에서 맺어지는 관계가 영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약속으로 치면 외인이오, 혈통으로 치면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와 상관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생명의 분깃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거듭남을 통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주시는 그 연합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갖고, 성자와 관계를 갖고, 성령님과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방인이오, 외인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집에 자녀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힘입은 자가 되었고 언제든지 도움을 호소하면 성령님의 은혜로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 때 이것은 그의 유업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집안에 입양이 되어서 그의 자녀가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집안이 대단한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면 그의 자녀 됨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되는 즉시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권한을 법적으로 보장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모든 권한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수립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들이 누리게 되는 관계의 축복이고 그 관계가 바로 영적인 관계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는 여러분들이 회심하기 이전에 그리스도 없이 살면서 경험했던 외로움의 고통을 상상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환난과 시련이 밀려오고 인간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너무나 힘겨울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고난과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사랑해야 될 사람들을 향해서 마음속에서 복받쳐 오를 때 여러분들은 무엇으로도 이것들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이 없이 속수무책으로 원수에게 당하고 그리고 고통을 받으면서 이 세상에 목자 잃은 양같이 내동댕이쳐지고 버림받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분과 연합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연합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놀라운 위로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오면 사랑의 하나님께 우리의 고난의 처지를 아뢰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은혜를 구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고난보다 더 큰 위로를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나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고난도 이기고 시련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그리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이 동행하는 삶 속에서 우리들이 누리는 이 축복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물리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라고 하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연합의 본질은 신비적인 것입니다. 이 신비는 단지 감정적이고 체험적 신비가 아니라 지성적 신비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도저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로는 알 수가 없고 오직 믿을 때에 체험을 통해서 우리들이 그 지식의 비밀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 깊은 하나님의 지식의 부요함을 드러내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를 경험한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의 신비를 우리들이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견디기 힘든 고난이 올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 영혼의 비밀에 대해서 주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연합을 통해서 부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의 신비를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양으로 치자면 바다를 먹물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쓸 수 없고 질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그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따라서 모두 이런 비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정말 알 수 없습니다. 그 큰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을 이룬 사람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근원이며 그 연합은 정말 신비하기 이를 때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정욕이 기승을 부리고 우리밖에 수많은 유혹이 여기에 즐거움이 있노라고 손짓할 때 우리의 영혼은 피곤해집니다.
우리는 이미 그 죄악들을 버리고 바로 우리들이 그토록 우리 안에서 정욕이 역사해서 짓고 싶어 하는 그 죄를 위해서 좋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중심적인 소원은 우리가 그 유혹에 반응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잔존하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죄의 정욕들은 우리들을 그곳으로 달려가도록 미친 듯이 졸라댑니다. 그때 우리들의 영혼은 너무 피곤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렇게 끈질기게 유혹하고 우리 안에서 쉼 없이 정욕이 역사할 때 우리는 아마 그 죄에 굴복하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비하게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 안에 정욕밖에 없는 것처럼 죄가 우리 속에 기승을 부리고 이 세상에 오직 우리를 유혹하는 대적밖에는 없는 것처럼 온갖 시험과 유혹이 우리를 에워쌀 때에도 우리가 엎드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속에는 근심과 걱정, 그 틈을 탄 죄의 정욕들이 내 안에 들끓고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유혹자들은 나 하나 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둘러싸서 내 영혼을 내놓고 그리스도를 버리라고 유혹합니다. 나는 이 모든 죄악을 대항할 힘이 없고 이 넘치는 유혹 앞에서 나는 바람 앞에 심지와 같이 그리고 나부끼는 갈대에 상한 그 줄기와 같이 그렇게 나는 아무 힘이 없는 존재입니다. 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신 것처럼 오늘 이 순간도 내 영혼과 마음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아버지여 나를 도우소서’ 간절히 기도하면 일순간에 우리의 정욕이 물러가고 우리를 에워싼 그 수많은 깃발을 든 유혹자들이 어느 순간에 우리를 떠나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놀라운 일들은 우리 안에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은 고통이고 유혹은 곧 죄고 불행은 불행일 뿐이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룬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하시고 유혹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심과 그리스도의 순결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알게 하신 이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그 놀라운 축복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인데 이것은 정말 신비한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은 풀리지 않는 놀라운 신비에 또 한번 접하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시는데 성령은 영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입니다. 우리 안에 영혼이 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영인 우리 속에 들어오시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두 가지 충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영과 우리 안에 있는 우리의 영혼은 어떤 면에서도 똑같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영혼이 곧 성령이 되셨고 성령이 우리의 영혼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 이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셨어도 성령님은 성령님이고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렇게 말해야지 됩니다. 교리적으로, 그런데 그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의 영혼 속으로 들어오실 때, 그때 이게 질적으로 똑같은 영혼일 수 없는데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영이 영으로만 가만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육체 속에 오십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는 성품도 있고 기질도 있고 성향도 있고 심지어는 굽은 인간성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그 안에 성령님이 오실 때 이것들은 성령님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거의 생각해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풀어야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가 풀리고 완전히 풀리지는 않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이 신비에 대해서 더 크게 감격하게 됩니다.
자, 이 문제를 잠시 접어놓고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 말고 영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귀신이 들리는 것입니다. 귀신도 영이고 우리도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들어올 때 귀신이 우리의 영혼이 되고 우리의 영이 귀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성령님이 오시는 것과 동일합니다. 귀신이 들어와도 귀신은 귀신이고 우리의 영혼은 영혼이고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육체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변하는데 변한다. 라고 하는 그 의미가 성령이 들어오실 때 우리가 변하는 의미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변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귀신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영혼을 파괴적으로 통치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성, 감정, 의지, 우리 안에 있는 성품 이런 것들을 막 파괴적으로 부수면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굉장히 성품 적으로 양순하던 사람인데 귀신이 들리면 막 폭력적으로 돌변합니다. 그리고 귀신이 들어와서 역사할 때 사로잡으면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인격적으로 우리를 막 휘몰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귀신이 들린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됩니까? 불 가운데로 막 데리고 가서 집어넣고 물 가운데로 데리고 가서 막 빠트리고 심지어는 제가 다니던 어느 교회 형제는 귀신이 그 사람을 데리고 한밤중에 일어나 저수지로 달려가게 만들어서 거기 풍덩 빠져 죽게 했습니다. 이렇게 비인격적으로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막 부셔버립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의 지성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했다가 저 말을 했다가 하고 감정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의지도 믿을 수가 없고 그래서 모든 것들이 다 엉망인 상태에서 흐트러져서 다만 귀신에 의해서 비인격적으로 막 휘둘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귀신의 영이 들어왔을 때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성령도 영이시고 우리의 영혼하고는 다른 영이십니다. 그런데 영혼을 가지고 육체를 가진 우리 속에 오실 때에 왜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납니다. 이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들려도 사람이 바뀌는데 성령이 들리면 어찌 사람이 바뀌지 않겠는가 할 때 그 말이 사실이지만 귀신이 사람을 바꾸어놓는 방법과 성령이 사람을 바꾸어놓는 방법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성령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는데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영혼이고 성령님은 성령님이신데 이게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함께 뒤섞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따로 존재하면서도 연합을 갖는데 이 연합을 통해서 성령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영이시고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와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를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공급하고 그리고 우리와 성령과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를 차츰차츰 거룩해져가도록 우리에게 영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기질들을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성령님이 그대로 오셔서 그렇게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그것과 함께 거하시면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성격이 급하던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를 경험해도 여전히 급합니다. 따지기 좋아하던 사람들이 성령의 은혜가 임해도 역시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궁금한 게 많고 호기심이 많던 사람들은 성령님이 오셔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어주셔도 여전히 따지기를 좋아하고 궁금한 게 많습니다. 그런데 기질적으로 나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질 자체가 아니라 기질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좋고 나쁜 게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인가 하면 성격이 활달하고 분명한 사람들은 그런대로 좋고 침착하고 사려가 깊은 사람은 그런대로 좋습니다. 그리고 결단을 빨리빨리 내리는 사람은 그런대로 좋고 신중한 사람은 신중한대로 좋습니다. 창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래도 좋고 누가 참여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뒷바라지하기에 적합한 기질을 가진 사람은 그것대로 좋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손의 지문이 다른 것처럼 각자를 다 다르게 만들어놓으십니다.
여러분들이 모두가 소설 같은 것을 읽으며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야! 어쩌면 책을 이렇게 잘 쓸 수가 있을까? 그리고 감탄하는데 여러분 모두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모두가 아무도 책을 쓸 수가 없습니다. 왜 아무도 안 사니까. 그러니까 어떤 특징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각기 각기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자연적인 특징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개입되어 있는 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단을 내리기 잘하는 사람들이 은혜로 가득 찬 성품이 되면 그 결단을 통해서 순교도 하고 교회가 우왕좌왕 할 때 갈 길을 보이기도 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주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도 합니다.
또 그러나 그가 만약에 죄에 깊이 물들게 되면 그런 결단을 자기의 육체의 만족을 위하는데 사용하게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버릴 거야. 결단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결단내리기 잘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깊이 파고들어왔을 때는 이런 특징들이 아주 나쁜 쪽으로 기여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목표는 우리를 모두 똑같은 사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징들은 그대로 하나님의 은사로서 내버려두시고 그 속에서 죄만 빼내셔서 순결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의적인 사람이 있고, 창의적인 사람을 뒷바라지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있고, 꼼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있고, 결단을 내리는 사람 옆에는 신중하게 조언을 하는 사람이 있고,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도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이렇게 다양하게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누가 하시는가 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오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말씀과 은혜로 감화시켜 가시면서 인격적으로 우리를 승복하게 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성품의 이 패역과 죄의 독소들을 제거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충돌도 느끼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나를 막 파괴하시고 내 본성을 막 짓밟으시고 나도 모르게 그냥 막 미친 듯이 귀신이 역사하는 것처럼 역사하게 만들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말할 때 ‘나도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이런 표현을 많이 하는데 일생에 몇 번만 하십시오. 늘 그렇게 사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것이 자기가 보기에는 굉장히 고차원적인 영적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리적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다른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왔으면서도 우리의 인간적인 특징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역사해서 우리의 인간적인 특징들을 그대로 사용하되 그 특징 안에 깃들여 있는 죄 된 것들만을 정화시키면서 우리를 성령님이 오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우리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이 세상에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이것은 뭐 말로 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렇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연합의 교리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알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하면 우리로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주님 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만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이 찬란한 계시를 담고 있는 성경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길’ 33개짜리 그것을 꼭 들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하면서 항상 예수님이 빼놓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맺나니”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인가 하면 이런 연합의 신비를 우리들이 알게 해주시는 것,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아가게 만들어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순종을 통해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살수록 이 연합의 비밀들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이 깨달아갑니다. 그래서 이렇게 순종하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주님이 우리 안에 기뻐하시는 것도 알고, 마음이 상해하시는 것도 알고, 슬퍼하시는 것도 압니다. 성령을 근심시켜드리는 것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를 경험하여 알게 하시는 것은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지 됩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으면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 영원히 비밀이 됩니다. 그러니까 순종하는 삶 없이 그것은 절대로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연합의 비밀을 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이렇게 연합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연합을 하나님이 계속 강화시켜주십니다. 점점 더 풍성하게 우리들이 순종하면 그리스도와 더 많은 연합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연합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우리의 영혼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영향이 훨씬 크게 힘으로 작용하고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이 거룩해져가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이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러나 우리의 죄를 많이 죽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면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게 되면 죄와의 싸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내가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할 때 이것이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성령님이 이 거룩한 투쟁을 위해서 나에게 무한히 힘을 공급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예를 든 그런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놓고 보면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해서 이것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연합이라면 이 연합은 영원히 불변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원리적인 연합은 영원 전에 이루어졌고 실제적인 연합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날 때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이 연합이 또 어떤 의미에서 보면 원리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는데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루어졌고 누구도 그것을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것들을 얼마나 풍성하게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의 성화의 정도에 많이 달려 있습니다.
밖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근심을 참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번 나무를 심었는데 정말 예쁜 나무가 한 세 그루 정도가 죽었습니다. 지금도 그 나무 생각만 하면 참 마음이 아픈데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못생긴 나무를 대신 갖다가 심었는데 제가 산으로 보냈습니다. 못생긴 나무는 산이나 지키고 그리고 열린 교회는 잘 생긴 나무가 지켜야지 그래서 다시 예쁜 나무를 갖다가 심었는데 심은 시기가 너무 늦었습니다. 10월 중순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지열이 너무 높을 때 심어도 잘 안 되고 지열이 너무 뺏겼을 때 심어도 생존가능성이 적습니다. 그래서 봄이 되었는데 계속 잎이 나오지 않는 나무 두 그루를 보면서 저것은 아무래도 죽은 것 같은데 큰일 났다. 그러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천천히 천천히 잎이 났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은혜를 받은 정도가 다르듯이 나무마다 뿌리는 다 살아있어도 싹이 나고 잎이 피는 기간이나 과정 모습이 다 제각각입니다. 어떤 것은 아주 일치감치 게으름시리즈를 듣고 은혜를 받았는지 혼자 나와서 막 손을 흔들고 반겨주는가 하면 어떤 것은 아직까지도 눈을 비비지도 않습니다. 일어날 생각도 안합니다. 그래서 ‘아마 저게 죽었나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더니 시간이 지나니까 하나하나 이파리가 나옵니다.
그런데 나무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뿌리는 살아있는 데도 가지 중에 일부는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에게 뿌리박은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와 쉽게 연합되었지만 그러나 죽을 수도 있다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에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연합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을 따라서 순전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가에 의해서 아주 곤고하고 풍성해질 수도 있고 그 연합이 거의 없는 것처럼 핍절한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원리적으로는 이미 연합된 이것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연합들이 곤고해질 수도 있고 이 연합들이 쇠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구원받은 모든 자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합을 이룬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 가운데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 사람들이 얼마나 풍성하게 이파리와 줄기가지를 내고 얼마나 많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가는 똑같은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다양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듭남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셨다고 할지라도 이 연합은 또 한편으로는 이미 이루어놓으신 연합이지만 또한 우리가 계속해서 이 연합을 유지해 나아가도록 성령을 힘입어서 이 연합을 계속해서 유지해나가고 발전시켜 나아가는 이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 연합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죄를 잘 죽이고 이성화의 삶을 부지런하게 살면 그래서 마음을 잘 지키면서 하나님의 이 풍성한 은혜 안에서 살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와의 더 많은 연합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시지만 나와 특별히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는 잠깐 유혹을 받고 미끄러지는 것 같아도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하면 단숨에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고 또 우리가 영적으로 약할 때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순간적으로 우리의 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능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말하자면 우리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연합이지만 이 연합을 실제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곤고하게, 그리고 크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유지해 가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정결케 하는 성화의 삶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지마다 깨끗케 하시나니” 그렇게 깨끗케 하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자원을 풍부하게 공급받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 효과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 반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구원을 통해서 연합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연합이 느껴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풍부한 은혜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넘치도록 쏟아 부어지는 하늘자원을 가지고 이 세상의 악과 고통을 넉넉히 이기면서 살아서 모두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이미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서 정결해져라, 거룩해져라, 순전해져라, 온전해져라.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거듭거듭 요구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구원받았으면 그냥 살아라. 그러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을 실제적으로 풍부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비결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고자 할 때 그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을 우리들이 실질적으로 풍성하게 누리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신앙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너무 아름다운 관계다. 그리고 내가 정말 어찌 주를 떠나서 살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 주님은 내 안에 계시고 죽음이 흰 이빨을 드러내고 다가올지라도 나는 무섭지 않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온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경험을 가지고 있을 때는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특별히 사랑하던 때였습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 그때에 그 효과로서 연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그 핵심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최대한으로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비록 신자지만 유혹받지 않습니까? 세상에 많은 유혹들이 우리를 향해 손짓할 때 불행하게도 우리는 언제나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이 세상의 죄악이 정말 만물의 찌끼와 같고 배설물처럼 느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때는 우리도 그 죄의 유혹에 굴복하고 싶을 때가 있고 그리고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육신의 정욕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때도 있습니다. 무엇으로 이런 것들을 이길 수 있습니까? 넘칠 듯이 밀려오는 이 세상의 강렬한 고난과 우리를 뒤흔들어놓을 것 같은 핍박 속에서도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이 놀라운 담대함, 이 놀라운 강건함의 비밀이 어디에서 옵니까?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를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주님의 사랑이 신자들 안에 강력히 역사하고 있을 때 사도처럼 그는 말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장래일이나 깊음이나 높음이나 정사나 권세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연합은 환난이나 시련은 물론이거니와 죽음으로도 끊어놓을 수 없고 우리의 육체가 이 세상에서 진토가 되어 흩어지는 그 순간에도 주님과의 이 연합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멸, 불후의 연합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소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예수와의 이 아름다운 연합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리기까지 이 연합을 지키기 위해서 더 온전히 예수를 사랑하고 그리고 이 죄와 이 불결한 본성에 에워싸인 가운데 우리 예수를 더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성화의 거룩한 삶을 살고 끝없이 순종의 삶을 살아서 예수를 온전히 사랑하고 그 예수님으로 내 안에 충분히 살아계시게끔 한번 주신 이 연합을 곤고히 지키고 그 연합을 통해서 하늘자원을 한없이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도의 축복입니다.
이 자원을 힘입어서 내가 세상을 이기고 이 자원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서 그들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이 놀라운 일들을 위해서 날마다 살아가는 이 삶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리면서 살게 하고 싶은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죄 가운데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단절된 우리들을, 그 가운데 죽어간 우리들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하신 구속의 공로로 우리와 연합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없어도 당신이 곁에 계시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당신이 계심으로 나는 있고 당신의 노래가 있음으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 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우리의 영혼의 시선을 오로지 해서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고 주께서 우리의 인생의 수고를 마치고 우리를 부르신 그 날이 내 생애 전체에서 우리 주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한 날이 되고, 우리 주님의 그 은혜의 세계를 가장 많이 안 날이 되고, 그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그날이 되도록 우리들이 끊임없이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붙들고 죄를 버리고 거룩을 추구하는 성화의 삶을 통해 이 연합을 이루어가는 것, 누리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자 소명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1.왜 두렵지 않은가 3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놓으신 구속이 우리 인간에게 적용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영화’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땅에 살았던 경건한 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면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죽음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질 이것이 내게 더욱 좋으나” 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오, 죄에 대한 심판이지만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죽음은 성화를 완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모든 신자들은 성화의 삶을 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순종하고 게을러서 조금밖에 성화되지 못하고, 어떤 사람들은 일체의 순종함과 부지런함으로 성실함으로 성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많이 애씀으로서 주님을 더 많이 닮아갑니다. 전자의 사람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별로 드러내지 못할 것이지만 후자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드러내고 계속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자기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담아서 그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성화를 위해서 많이 애쓰는 성도와 그렇지 못한 성도의 차이가 이 세상에서는 짐승과 사람에 비길 정도로 현저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경우의 사람이든지 간에 이 땅에서 완전히 성화되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죽은 후에는 우리들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서 영혼이 잠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되는데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정도로 완전히 거룩해지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자가 죽을 때 그 죽음의 순간에 육체와 영혼이 갈라질 때 그 영혼을 순전하도록 인간이 못다 이룬 성화를 완성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죽은 후에 우리의 영혼이 입게 될 상태입니다. 죄가 없고 온전히 거룩해진, 그래서 성화의 완성이 이루어진 상태가 바로 죽은 후에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서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상태입니다.
거기가 완전한 천국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천국의 복락을 이미 이루면서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교제 속에서 살게 되기 때문에 경건한 많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렇게 죽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주셔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자기의 육신 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죄와의 힘겨운 싸움을 끝내고 영혼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완전히 거룩해진 상태에서 일체의 죄와의 연약함에 방해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 함께 있게 되는 이 상태, 이것이 죽은 이후에 성도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이런 영혼의 상태는 육체를 떠난 상태이고 온전히 거룩해져서 어떤 오염도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이 상태가 온전케 된 의인의 영의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을 정말 부러워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이라도 우리를 불러주신다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로 근심하지 않아도 되고, 배신이나 상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이나 가난으로 인한 고통,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죄와의 투쟁과 이 세상에서 맛보는 온갖 곤고함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그런 날들이 바로 죽음 이후에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 상태에서 맛보게 될 행복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가 너무나 이 땅에 있는 신자의 상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거룩해진 상태고 성화가 모두 이루어져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교통이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할지라도 죽음의 문제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죽음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약속을 따라서 이미 심판받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통해서 심판을 집행하시는 것이지만 신자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했으니 죽음이 만약에 우리의 옛날 죄에 대한 심판이라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용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죽음은 성화를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완전히 성화되지 못한, 완전히 거룩해지지 못한 성도들이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만져주심을 경험하고 완전한 거룩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첫째로 육신과 영혼이 그렇게 떨어져서 육신을 이 세상의 무덤에 남겨둔 채 그리스도와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되는데 그래도 육체와 영혼은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죽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성도가 구원을 얻어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계속 죽어갑니다. 실제로 죽음이 아직까지도 나는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이제는 내가 정죄함이 없는 행복한 상태에 들어갔지만 죽음은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약속된 구속이라고 하는 것은 죄로부터의 구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도래하게 된 죄의 비참한 결과로부터의 구속도 포함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불순종하며 멀리 떠나갔고 그래서 허랑방탕한 가운데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그때에 아버지는 동구 밖에서 눈물로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고 있었고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와서 아버지의 품에 안겼을 때 아버지는 모두 용서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죄로부터의 구속을 의미한다면 이제는 아버지와 화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허랑방탕 하는 동안에 난잡한 생활로 성병도 옮고 폭음을 하고 과음을 해서 위장도 다 망가지고 건강이 말할 수 없이 해치게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망가진 그 아들의 건강을 고쳐줄까요, 안 고쳐줄까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그런 병에 걸렸다면 아버지는 즉시 의사를 불러서 그의 모든 질병을 치유해서 건강하고 행복한 상태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로부터의 구속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속 뿐 아니라 죄의 결과인 비참함으로부터의 구속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죽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우리의 영혼이 가있다고 할지라도 죄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죄의 결과로부터는 아직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가 영혼과 떨어져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죽은 후에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성화가 완성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그것을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는 부활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 땅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육체들을 먼저 살아나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신자의 부활입니다. 그렇게 살아난 그 육체가 성화가 완성된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영혼과 다시 결합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인데 이때에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어떤 상태가 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의 상태와 꼭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잠시 육체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치되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삼 일째 부활하실 때에 예수님의 육체가 다시 살아나고 예수님의 영혼이 그 육체 속에 만나서 부활체가 되셨는데 이때에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예전에 주님을 본 인간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모되셨습니다.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빛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그 홀연한 영광을 이 땅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찬란한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이것은 거룩하게 된 상태를 지나쳐서 영광스럽게 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영광은 하나님이 거기 계신 효과입니다. 그래서 그 본체적 영광의 효과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는데 그것이 지극한 거룩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품으로 다시 만들어진 인간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리적으로 영화의 상태입니다. 이 영화는 따라서 육체와 영혼 전체가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스러운 형상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빌립보서 3장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몇 주 전에 후사를 말씀드리면서 우리가 하늘나라의 유업을 받을 것을 보증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보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을 믿고 신자가 거듭날 때 그의 마음속에 성령이 오십니다. 이 성령이 우리를 끊임없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하늘위로와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교제를 맛보며 행복하게 만들어주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일체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이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의 악하고 더러운 본성을 순결하게 하셔서 우리의 존재를 점점 더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 안에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렇게 거룩하게 만들어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의 첫 열매로서 이 일을 하시는데 이것은 맛보기일 뿐이고 그 성령님이 보증이 되셔서 마지막에 우리들이 그 보증을 가지고 누리게 될 완전한 축복은 그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성화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그런 영화의 상태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이 땅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탄식하면서 기다리는 바입니다. 이때에는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그리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을 입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썩을 것은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썩지 않을 것은 영광스러운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만나면서 찬란한 영화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악인은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의인의 부활이 모두 있고 난 후에 악인들도 부활하게 됩니다. 그들이 죽었던 모든 육체가 부활하고 그리고 음부에 있던 그들의 영혼이 그 육체와 모두 결합하게 되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을 받아들이지 않은 죄의 상태에서 죽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부활한 몸이 되었지만 그 몸은 하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거하면서 영광을 누리기에 적합한 부활의 몸이 아니라 지옥의 형벌을 감당하기에 적합한 몸으로 그들은 부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자들은 어째든 영화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전에 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주셔서 교회의 지체들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성화되게 하시고 그러다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불러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가셔서 마지막 날에 부활과 함께 우리를 육체와 영혼을 결합시키셔서 완전한 영광스러운 상태로 들어가게 하시는데 이때에 이 영화는 육체의 부활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육체의 부활과 함께 이 일이 이루어지는데 이 영화는 모든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신자들에게 차별이 없이 동일하게 그리고 동시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태어난 날짜도 다 다르고,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신자들은 성화의 정도도 다르고, 성화가 죽음을 통해서 완성된 날짜도 다 다릅니다. 태어난 날, 죽는 날, 신앙의 열심의 정도, 모든 것들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이나 나중 죽은 자들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차별이 없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가 함께 구름 속으로 들어올려 주를 경험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니”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이미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영혼과 육체가 나누어지는 상태에서 육체를 다시 살리셔서 성화의 완성된 상태에 있는 영혼을 결합시켜 영화의 상태로 데려가시고 아직 죽지 않고 살아서 주의 재림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막 바로 그들의 성화도 완성하시고 막 바로 그들의 영혼을 영광스럽게 하셔서 불멸의 몸을 만드시는 것이 바로 이 영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 영화의 교리를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화는 주의 재림시 승리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이 땅에 오신 초림은 너무나 초라하고 미약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누구도 알아주는 사람 없이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나셨지만 특별한 믿음의 눈을 가지고 계시를 받은 자 이외에는 예수님이 정말 영광스러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은 그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보실 수 있도록 영광스럽게 오십니다. 그 날짜는 도적이 오는 것과 같이 우리 모두 어느 날이라고 확정해서 말할 수 없지만 오시는 그 모습은 도적과 같이 오시지 않습니다.
찬란한 영광 가운데 이 세상에 오실 것이고 그때에 우리들이 경험하게 될 환희가 가득 찬 승리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먼저 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김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지금까지도 사망은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이라는 카드를 가지고 굴복시켰고 그들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아직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못했을 때에 경험했던 죄에 의해서 패배하고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던 삶의 모습입니다.
사망은 마치 총을 겨누고 요인을 노리는 암살자와 같이 정확하게 사람을 겨냥하고 그들에게 죽음을 쏩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 부활하시고 우리도 부활시키셔서 사랑하는 육체와 순결해진 영혼이 다시 만나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덧입게 될 때에 사망이 그렇게 영화롭게 된 우리를 겨냥하고 쏜다고 할지라도 그가 쏜 죽음에 굴복할 사람은 그때는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사도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냐고 강력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첫 시간에 인간의 모든 악과 고통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역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구속의 완성이 바로 이 영화이고, 이 영화의 상태에서 모든 성도들은 어떤 죽음이라는 질병도 없는 상태에서 죽음이 끊임없이 자신들을 겨냥해도 죽일 수 없는 불멸의 찬란한 영광스러움으로 덧입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해야지 됩니다. 이 영화가 각 사람 한사람 한사람에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예수 다시 오실 그때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동시성은 교회의 통일성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만세전에 우리를 택하실 때에 아무렇게나 아무 시간에나 택한 것이 아니라 한번에 우리 모두를 함께 택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한사람 한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선택한 모든 사람들이 구속 얻을 수 있는 구속의 근거를 하나님이 한꺼번에 마련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가 되게 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한번에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로 연합되게 하셨고 이 모든 일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교회의 일체성을 가지고 역사하신 맥락에서 볼 때 각 사람이 아무렇게나 아무 시기에나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시기에 하나님이 죽었던 모든 성도들을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순결한 영혼과 결합하여 영화롭게 하시고 살아있는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지체인 우리들도 그들과 함께 한 지체로서 영화롭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신 계획이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마지막에는 흠이 없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아무리 훌륭한 목사가 목회를 하고, 진실한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 밖에 사랑하는 이가 없는 순결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만들어도 그 교회가 흠이 없고 티가 없는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 흠과 티가 있습니다. 물론 진실한 목양이 이루어지고 성령의 축복이 같고 영혼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애통하며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으로 성화의 삶을 사는 교회와 아무렇게나 믿겠다고 뜻을 세우고 모인 교회, 둘 사이의 차이는 정말 동물원과 성도들의 모임과의 차이일 정도로 그렇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 깨어짐이 있고 순전하게 목양을 받고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모두 받으실만한 그런 아름다운 교회는, 흠이 없는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충족한 영광의 교회가 되는 일은 성도에 대한 단번에 이루시는 영화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이렇게 영화롭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이렇게 영화롭게 되고 나면 그 영화의 상태의 결과는 어떤 것일까?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들이 빛으로 나타남으로 썩어가는 세상에서 소금 같은 존재로 살아감으로서 어두운 밤바다에 반짝이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애쓰고 성화를 위해 많이 노력해서 예수 닮은 모습을 가지면 가질수록 정확하게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발하는 등대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바다를 대낮과 같이 환하게 비추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상태에서는 그 일이 가능해집니다. 어두움을 배경으로 하여 겨우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통한 영광스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신자들이 영화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여 자기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모든 곳을 영광의 빛으로 밝혀 그 빛 안에 들어오는 어떤 사람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거나 부인하거나 그 앞에 부복하여 절하지 않거나 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찬란한 영광의 빛을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광의 빛이 충만하게 실현된 곳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그 하늘나라에서 어떤 성도들이나 어떤 천사들도 하나님 앞에 충분히 경배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영화롭게 되고 나면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나타나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런 결과가 도래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속박을 받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가깝기는 가난 때문에 속박을 받습니다. 무엇인가 꿈을 가지고 그 뜻대로 살고 그것을 이루고 싶은데 경제적인 곤핍함에 속박을 받으며 그 일을 다 이루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 성품의 완고함이나 우리의 굽은 성품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속박하는데 있어서 가장 뛰어난 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는 끊임없는 성화의 삶을 살아도 여전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우리 안에서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어느 한순간에 은혜를 많이 받고 깨트려져서 이제는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일평생을 살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느 한순간에 눈을 떠보니까 자기 속에서 죄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났고 때마침 우리 안에 죄가 왕성한 것을 보고 세상의 유혹이 그 죄의 왕성한 정욕과 손잡고자 할 때에 자유롭던 우리의 영혼은 억압받기 시작하고 생명과 성령의 법은 이 죄의 법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힘겨워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은혜의 강력한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법이 역사해서 우리를 곤고케 합니다. 죄가 있으면 그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있다고 말하지만 죄를 이긴 후에는 행복하지만 죄가 남아 있고 그것과 싸우는 동안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성도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리요” 하고 탄식하였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구원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고아와 같이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시시때때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지혜도 부어주시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죄와 싸우면서 속박을 경험합니다. 영화로운 상태가 되면 이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자기 깨어짐의 눈물도 없고 죄를 참회하는 자의 피어린 통곡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따라가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이 세상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며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탄식도 거기에는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교제가 있고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불화나 담장이나 방해물도 없이 완전한 결합을 이룬 상태에서 이 영화의 상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성도들이 그토록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날을 목말라하며 그리워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생명수 강가에서 경험하게 될 먹을 것과 마실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오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은 그렇게 많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으로 자신들이 변케 될 영화의 날들을 목마르게 기대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로 이 죄와 힘겹고 피곤한 싸움을 모두 끝내고 어떤 죄에 의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방해받지 않는 지극히 순전하고 완전한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목말라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영화롭게 될 날을 그리워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가 아무리 좋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고 이어졌다가는 끊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은 주님을 만났을 때는 기뻐하고 주님을 볼 수 없을 때에는 슬퍼하며 목말라합니다. 이 모든 고통스러운 경험들은 바로 죄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향해 부르는 아름다운 헌신과 사랑의 노래는 토막 난 노래들이어서 언제 불러도 한곡으로 이루어지는 멜로디가 아니라 시시때때로 토막토막 끊어진 노래들이 되고 끊어진 사이사이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잃어버린 죄의 날들이 있고 그 속에서 경건한 성도들의 영혼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신음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들 안에 근심하시며 하나님 아버지는 아파하십니다. 실로 아무리 뛰어난 성화의 의지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성도들이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 사는 것이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 사실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내 주여 내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축복을 누리고 가슴시린 감동으로 우리 예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산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의 가장 행복한 날이 그 영화로운 상태에서 가장 덜 행복할 날보다 훨씬 더 불행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이 땅에 모든 수고가 끝나고 죽음으로 순전히 거룩해진 우리의 영혼을 잠시 헤어졌던 겉옷처럼 벗어두었던 우리의 육체를 영광스럽게 부활시키셔서 우리의 거룩해진 영혼과 만나게 하셔서 죄도 없고 흠이나 티와 점도 없는 완전한 거룩한 상태로 만드셔서 우리의 모습 그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모습처럼 찬란한 빛으로 이 세상에 비출 때에 그때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요?
우리가 그런 모습이 되기를 이 세상에서 꿈꾸었기 때문에 넓은 길보다는 좁은 길을 택했고 죄와의 화해보다는 싸움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는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우리를 에워싼 이 세상의 수많은 악과 더불어 싸웠습니다. 언제나 이긴 것도 아니었고 이기는 때도 있었지만 우리 스스로 죄에 빠져서 불순종한 처지로 미끄러진 때도 있었습니다. 죄에 빠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못 박히신 그 고통에 아픔을 더해드린 적도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 원해서 한 일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죄와 유혹이 끊임없이 가득하고 우리 속에 여전히 죄의 법이 은혜의 법과 함께 공존하고 수시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고자 하는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육적인 자아들과의 고통스러운 싸움이 그 날에는 모두 끝날 것이고 우리의 성화를 통해서 그렇게 드러내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영화로운 몸으로서 찬란하게 드러내어서 천사들도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도 우리의 그 영광의 효과를 가져다 준 본체이신 하나님을 향해 부복하게 만들어줄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때는 죽음도 없고, 죄로 인한 고통도 없고, 뼈 속 깊이 사무친 우리의 패역과 그리고 더러움에 대한 고통스러운 참회의 눈물도 없을 것입니다. 온전한 희락과 의와 그리고 평강이 거룩과 의와 진리 안에서 찬란한 빛을 발할 것이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창조시에 인간에게 주었던 그 아름다운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려고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내신 그 구속의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가 의지하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많이 애를 써도 흠 없고 티 없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죽음으로 우리를 온전히 성화시키시고 부활로 우리들을 완전히 영화롭게 하셔서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이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것이 신자들에게 그토록 사모하는 그리움이 되고 경건한 성도들이 사도 요한과 같이 주께서 속히 오시겠다는 약속에 대해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 영화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영화는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화이고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소망은 오늘 성화의 삶을 살면서 예수를 닮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슴 벅찬 희망이 되고 영광스러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신앙의 중요한 요소들을 잃어버리고 사는 시대입니다. 이천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를 했습니다. 그 이천년의 역사 속에서 믿음을 따라 살았던 성도들, 한순간 구차한 목숨을 얻기 위해서 주를 배반하는 대신 핍박하는 이 세상을 향해 자신의 심장을 내어주었던 수많은 순교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들이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고 고통을 고통이라고 느끼지 않았던 그 영광스러운 힘의 비밀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환난과 시련이 몰려오고 죄와 유혹이 기승을 부리고 우리의 영혼이 공격을 받고 우리의 육체가 피곤할 때에도 성도들이 그때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다시 곧은 무릎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만들었던 그 담대함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바로 재림 신앙에서 나왔습니다. 유혹이 밀려올 때 ‘내가 이때에 죄를 짓고 다시 오실 영광의 주님을 어떻게 뵈올꼬’ 라고 생각하며 유혹을 이겼습니다. 핍박과 고난이 가득하고 원수가 생명을 내어 놓으라고 소리칠 때에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내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생각하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부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가난해지기를 자처했던 사람들, 세상에 살아있으나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죽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죽이며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힘에 넘치는 희생으로 힘에 진하기까지 수고하며 자기를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에 내어주었던 그 비결이 바로 재림 신앙이었습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렇게 노래 부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해서 누리지 못했던 많은 것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이 더러운 세상에서, 유혹이 가득 찬 이 땅에서 나를 구속하신 그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어떻게 하든지 나의 육신의 지체를 죽이고 하나님을 더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 애썼던 그 모든 삶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심판하시는 그 놀라운 일들이 바로 재림과 함께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수많은 성도들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성화의 삶을 살면서 거룩해지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죽음을 통해서 완성되는 성화의 완성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질 소망이 되는데 그 정도가 아니라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영화의 상태로 들어가서 사망을 밟아 이기고 구속을 완성한 그날이 얼마나 그리운 날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미 사도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절대로 주님은 빨리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이 세상의 육체의 욕심대로 살고 경건을 잃어버린 채 방탕함에 자기를 내어준 삶을 살았습니다.
내일이라도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소리가 울려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떠시겠습니까? 우리는 그 날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가운데 사모함으로 기다리며 살고 그 날에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끊임없는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이 영화는 끝으로 우리만의 영화가 아니라 온 피조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한 흔적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을 나타내보여주는 영광스러운 표를 가지고 있었듯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 창조의 아름다운 세계는 그 인간과 함께 연결되어 있었고 그 모든 피조세계의 연결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절대로 허무한데 굴복하지 않고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고 하나님이 자기들 가운데 보이지 않은 분이시지만 계시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어서 위에는 천사들을 통해 하늘을 만드시고 아래는 그 인간들을 통해 하나님이 심히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파괴되고 죄를 짊어진 비참한 인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관련을 맺고 있는 온 창조세계가 탄식하고 슬퍼하게 되었고 태초에 하나님이 주셨던 그 창조의 영광의 빛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모든 피조세계는 신음하고 탄식하면서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의 저주아래 데려간 인간에 대한 몸의 구속이 모두 끝나 자신들도 구속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 하나님은 땅을 저주하시기를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땅이 뭘 잘못했습니까? 이 세상의 피조세계가 뭘 잘못했습니까? 아담 한사람이 범죄 하자 아담과 함께 커뮤니케이션을 이루고 있던 온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형벌의 역사가 미치고 그래서 온 피조세계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드러내는 찬란한 창조의 빛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자연의 상태는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기 전에 여러분들의 상태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많이 변화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 궁극적으로 영화를 통해 완성되고 그때에 이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여러분들을 보면서 천사처럼 느끼게 될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한 빛이 여러분의 존재 그 자체 속에서 아름답게 비치게 될 것이며 그런 정도로 이 자연이 아름다움을 회복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그 날을 이 온 피조세계가 탄식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성경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모든 만유 가운데 계시게 될 그 날이 바로 이 세상의 신자들이 영화되는 날입니다. 그 날에 악인은 모두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서 지옥에 던져질 것이고 죄의 원흉이었던 마귀도 영벌에 처해질 것이며 그래서 이 세상은 다시 죄가 들어오기 전에 그 창조 시대의 그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위에는 영광스러운 하늘, 아래는 찬란한 땅의 세계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함께 높여 드리는 영광스러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지 되겠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아무렇게나 굴리고 있는 여러분들의 영혼이 그렇게 영화롭게 될 영혼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렇게나 굴리고 있는 여러분의 육체가 언젠가 겉 사람은 후패하고 낡았지만 언젠가는 이 더러운 껍질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물질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찬란하고도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주의 영화로운 형상을 덧입게 하실 그 육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끊임없이 죄와 짝하고 갈등하며 유혹에 넘어져서 가슴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더러운 자신의 삶을 인해서 고통 하던 그 모든 눈물과 탄식의 날이 끝나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는 그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우리들이 덧입게 되어서 흠이나 주름이나 티가 없이 우리 온 성도들이 온전히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어서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한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일이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우리들이 얼마나 바라던 일이었습니까? 언제나 우리가 한번 참된 신자가 될 수 있을까요? 언제나 한번 나의 이 강인하고 더러운 육신에 속한 자아가 죽어서 우리의 몸과 영혼에 완전하고 거룩한 자유를 누리며 우리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을까요? 목말라하고 고대하던 그 일이 그 날에 말할 수 없는 찬란한 영광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예수와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잠시 신랑이 오는 날까지 이 땅에 머물러 고단한 성화의 길을 가는 것을 우리는 죽어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그 날에 영광스러움을 생각하면서 잠시 주를 위해 고난의 경한 것을 정말 중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끊임없이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진실 된 삶을 살다가 우리 모두 그 나팔소리가 울려나는 그 날에 한 사람도 소외된 사람이 없이 영광스러운 몸을 덧입고 그분 앞에서 손에 손을 잡고 어린양 예수를 찬양하게 되는 그 날이 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그간 계속되어온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시리즈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주일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라는 제목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영화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화까지는 어떻게 알겠는데 영화는 잘 이해가 안 된다고 하는데 이해 안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화는 이 세상에서 죄인들을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작용으로서 인간의 부지런함과 순종을 사용하셔서 말씀과 여러 은혜의 도구들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가시는 작용입니다. 우리가 많이 눈물을 흘리고 참회하며 순종하면서 살 때에 우리는 날마다 순결해져가고 성화되어갑니다. 그리고 성화가 많이 되면 될 수록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내적으로는 하나님과 완전한 사랑과 교제를 누리고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선교적인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어서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성화되었다. 즉 완전히 거룩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죽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실 때 하나님이 직접 우리들이 다 못 이룬 우리의 영혼 속에 남아 있는 이 부패성들을 완전히 제거하셔서 거룩을 완성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의 완성일 뿐이고 아직 영광스러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거룩을 완성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육체는 이 세상에 남겨두었고 죽음 때문에 우리 영혼만 하늘나라에 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마지막 나팔소리와 주의 호령소리가 나고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죽음 때문에 갈라놓아야 했던 우리의 지상에 있는 육체가 부활하고 하늘나라에 있는 우리의 영혼이 결합해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에 적합하도록 거룩해지는 게 아니라 영광스럽게 되는데 그 영광스럽게 되는 그 일은 우리의 힘과 순종, 이런 것으로 되는 게 아니라 그 날에 주님이 우리를 부활시키신 그 능력으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영화롭게 된 모습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던 그 찬란한 영화의 모습이고 그 찬란한 모습의 맛을 변화 산에서 희디흰 모습으로 찬란하게 변화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하시던 장면 속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 찬란한 영화가 바로 어제 말씀드린 그 영화입니다. 그러면 그런 영화의 상태가 된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그 다음이 이제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사도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밧모’라고 하는 외로운 섬에 갇혔고 거기서 마지막 날에 될 계시들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명은 계시를 적어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까지 그 기록된 계시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계시록에 나오는 언어들은 많은 상징으로 이루어져있고 당시대의 사람들이 은어처럼 주고받았던 묘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계시록의 의미들을 나는 완전히 파악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시록 속에서는 명백하게 미래에 일어날 영광스러운 비전을 담고 있고 그 찬란한 비전은 역사적으로 많은 기독교회들로 하여금 핍박과 고난, 시련을 이기는 소망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비참한 유배자의 몸으로 21장에서 만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고 거기서 이 세상의 창조와 구속이 완성되는 하나님의 그 찬란한 영광을 샅샅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찬란한 영광이 오늘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새 하늘과 새 땅, 믿는 자의 궁극적인 상태를 먼저 말씀드리기 전에 우리들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 먼저 우리들이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되리라고 봅니다.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순간에 홀연히 변화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 가운데 맞이하고 주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필연적으로 영화의 상태에 도달해서 찬란한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전까지 뭔가 중간의 상태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들이 죽으면 죽음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육체는 여기다 남겨두고 영혼만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영화롭게 되는 것은 영혼만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부활한 육체와 만나야지만 영화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죽어도 영화롭게 될 때까지는 일정 기간을 하늘나라에서 임시로 기다려야 되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천국을 가리키는 말이 두 단어가 나오고 지옥을 가리키는 말이 두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낙원과 천국’이라는 단어와 또 하나는 ‘음부와 지옥’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껏 까지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고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배워왔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대충 가르쳐준 것이고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믿고 죽은 영혼은 낙원에 이르게 되고, 믿지 않고 죽은 영혼은 음부에 이르게 되는데 낙원이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묘사가 되어 있고 음부는 성경에서 ‘고통 받는 곳’이라고도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어째든 믿고 죽은 사람은 낙원에서,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은 음부에서 각각 대기하게 되는데 그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을 해서 낙원에 있던 영혼과 땅에 있는 육체가 결합하여 천국에 이르게 되고 믿지 않는 영혼들은 음부에 있던 영혼과 땅에 있는 육체와 결합하여 심판에 부활로 나아와서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여태까지 우리는 그렇게 대충 그냥 지옥, 천국 죽은 즉시 가는 곳으로 그렇게 배워왔을까?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중간 상태에 거하는 것은 잠시 있는 일이고 궁극적으로는 천국과 지옥으로 각각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잠시 머무는 곳보다는 영원히 거할 그 천국과 지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낙원에 들어간 사람이 뭔가 문제가 생겨서 나중에 지옥으로 가버리거나 음부에 들어간 영혼이 뭔가 변동이 생겨서 천국에 이르게 되는 그런 변화는 일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져왔고 또 하나는 음부와 지옥, 그리고 낙원과 천국이 어떻게 다를까에 대해서 연구하는 신학자들도 있지만 성경 자체가 이것에 대해서 풍부한 설명을 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규명한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모든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바는 음부는 비록 중간상태이기는 하지만 영혼만 가 있는, 거기서 심판의 부활을 기다리는 중간처소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미 지옥의 고통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고 낙원은 비록 천국은 아니고 영혼만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복락들을 이미 충분히 맛보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음부도 지옥에 속하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낙원도 천국에 속하기 때문에 죽는 즉시 천국에 간다, 지옥에 간다.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음부는 지옥의 현관이나 앞마당쯤이라고 말할 수 있고 낙원은 천국의 현관이나 혹은 앞마당 정도라고 말할 수 있으니 분명히 음부와 지옥이 다르고 낙원과 천국이 다르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은 우리들이 죽으면 육체는 여기 남겨두고 중간 처소인 낙원으로 가게 됩니다. 물론 거기서 영혼밖에 없지만 거기서 충분히 하늘나라의 각종 위로를 맛보고 하늘나라의 각종 축복들을 누리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천국이 영화 이후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서는 낙원보다 훨씬 더 풍부한 최종적인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논리로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음부에 가고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대로 거기서는 고통을 경험하고 괴로워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예고편일 뿐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의 육체와 영혼이 함께 결합되어서 심판의 부활로 나아온 후에 그들이 지옥에 던져지고 나면 거기에서 맛보게 될 형벌의 고통은 음부의 고통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중간상태에서 있는데 어떠한 이유든지 간에 이렇게 천국과 지옥, 낙원과 음부에 영혼이 이를 수 있는 선택의 기회는 이처럼 이 땅에 살아있을 때에 단 한번 주어지는 것이지 죽은 후에 그들을 위해서 자식들이 헌금을 하거나 기도하고 그러면 그들이 제 이의 기회를 얻어서 그래서 다시 천국으로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이런 모든 교리들은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거짓입니다. 오직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들이 유일하게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를 영접하고 죄의 용서를 받아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하늘나라는 바로 중간상태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중간상태가 지나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모든 믿는 자의 영혼을 그 낙원에서 육체와 결합시켜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영화를 누리게 하고 그들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을 때에 경험하게 될 지극한 복락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은 영혼이 가는 곳이기 때문에 이런 장소가 아니라 공간이 아니라 가공의 곳일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우리가 육체와 결합된 다음에 거하게 될 천국은 분명한 장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가 부활하고 부활한 육체가 결합이 되면 살아있는 우리 인간처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단 하나의 차이는 우리 인간은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날에 우리의 육체는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고, 공간을 따라 이동할 수도 있고 공간을 초월할 수도 있는 마치 이 세상에 계실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시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신 것처럼 그런 종류의 육체를 가질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천국이라는 곳은 처소성이 있는 장소가 될 것이고 그리고 그 곳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그때 이루어질 하늘나라가 이 세상에 불안전한 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완전하고 온전한 나라가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4절에서 말하기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하늘나라에 대한 짧은 묘사에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네 가지 중요한 특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위로이고, 두 번째는 영생이며, 세 번째는 기쁨이고, 네 번째는 해방입니다.
우선 첫째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위로가 있다고 하는 이 하늘나라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이 세상은 눈물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그네의 길의 설움을 간직한 곳이 인생의 길이라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모두 고백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태어날 때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마지막 죽을 때에 눈물을 흘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비통한 울음소리 속에서 이 정든 세상을 등지고 영원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인간의 눈물 흘리는 그 일이 어찌 시작과 끝일뿐이겠습니까? 시작과 끝뿐만 아니라 진행되는 인생의 그 모든 항로자체가 눈물을 뿌리며 걸어온 길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살아간 발자취에는 걸어간 발자국과 함께 떨어진 눈물의 흔적으로 미어진 것이 한사람 인생의 나그네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주님이 씻겨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눈물이 있고 그렇지 못한 눈물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아파하고 흘리는 참회의 눈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눈물일까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 주님을 거스른 이 세상을 보면서 흘리는 그 중보의 눈물은 얼마나 안타까운 눈물일까요? 이 세상을 살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핍박과 고난을 당하며 흘리는 그 눈물, 주님을 만날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흘리는 그리움의 눈물들은 얼마나 고귀한 눈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때는 항상 이 세상에서조차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부족과 죄 때문에 깊이 애통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시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 주님이 이런 눈물을 씻겨주시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가슴아파하는 성도들,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가슴저며하는 모든 성도들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서 눈에서 그 눈물을 주님이 친히 씻기시고 완전한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욕심을 따라 사는 기회로 바꿨지만 주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감사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이 세상에서 주의 영광을 위해 살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흘리는 모든 눈물들을 주님이 그 나라에서 모두 씻겨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그런 눈물만 주님이 씻겨주신다면 주님을 위해서 살지 못했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 나라가 얼마나 위로와는 거리가 먼 나라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괴로움 속에서,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흘렸던 눈물,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부패한 성품 때문에 죄를 짓고 두려움 속에서 흘렸던 눈물, 집착과 아집 속에서 깨어지지 않는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며 흘렸던 그 후회의 눈물,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흘렸던 눈물, 복수와 회한과 후회와 아픔에 이 세상적인 이유 때문에 흘렸던 많은 눈물들도 그 날에는 주님이 친히 그 성도들의 눈에서 씻겨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의 최상의 표현이고 우리가 흘리는 눈물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그 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주님께 용납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훌륭한 증거입니다.
어렸을 때 우리의 기억들이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들은 골목에서 형들에게 얻어맞거나 혹은 골목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다가 부당한 일을 당해서 마음이 상하면 누구에게로 달려갔습니까? 엄마를 찾아서 울면서 달려가면 일하다가 나온 엄마가 우리를 그 치마폭에 싸고 역성을 들어준 후에 그리고 우리의 눈에 흐르는 그 눈물을 행주치마로 혹은 치맛자락으로 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전보다도 더 많이 끌어안고 사랑하고 우리를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눈물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 세상은 나그네의 길이고 눈물골짜기의 길입니다. 인생을 좀더 산다고 하는 것은 눈물골짜기의 길을 좀더 걷는다는 의미이고, 인생을 오래 살았다는 것은 많이 눈물을 흘리며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인생의 그 길을 걸어왔다는 의미입니다.
눈물흘림을 며칠 더 담고 행할 길을 다 가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누리겠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인생의 길은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환난과 시련이 견디기 힘든 고통들이 때로는 우리의 죄와 부패함들이 우리의 눈에 많은 눈물이 흐르게 하지만 이 세상의 위로가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받는 그 위로가 얼마나 하찮은 것입니까? 오늘은 내 마음에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내일은 상처가 되고 오늘은 내 눈에 눈물을 닦아주었던 사람들이 내일은 내 가슴에 칼을 꽂는 일은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의 눈에 모든 눈물을 씻겨주신 예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 오늘은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고 내일은 우리의 마음에 고통을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이 위로는 최종적인 위로이고 궁극적인 위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죄 많은 이 세상에 위로가 없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잠시 지나는 나그네의 눈물길이고 우리는 이 세상을 지나는 과객이며 우리의 시민권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영생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다시는 사망이 없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저편으로 건네 보낸 사람들은 이 사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수 있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아직은 우리가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고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덧입게 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을 소망해야 되는 이유를 믿는 우리들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속에서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함께 거하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바램이고 영원히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있는 날 동안에 그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 우리의 소박한 꿈인데 죽음은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를 영원히 함께 있지 못하고 우리를 각기 데려갑니다. 태어날 때는 순서대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순서와 상관이 없이 주님이 부르시는 순서대로 죽음의 휘장을 걷고 우리도 가본 적이 없는 영원한 세계로 떠나가 버립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의 강 저편으로 떠나보낸 사람들은 이미 지옥이 무엇인지를 맛본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려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를 영원히 볼 수 없는 슬픔, 목매어하나 만날 수 없고, 그리워하나 다시 볼 수 없는 그 사람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바로 지옥과 방불하다는 것을 경험했다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삶은 얼마나 지옥 같겠는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아무리 성화되고 아무리 주님께 순종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고통과 그리고 견디기 힘든 이별의 슬픔들을 우리는 종식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은 죽음이 남아 있고 우리의 육신을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여위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는 다시는 그런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헤어져야 하는 뼈아픈 비극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생에 나루터에 우리를 남겨두고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홀연히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하는 뼈저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고 죽음이 그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는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말씀을 드리는 이 순간에도 저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로 갔으나 보고 싶은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만나고 싶어 하고 그리움에 사무쳐서 베개 잎을 적시며 잠들어도 이 세상에서 한번 떠나간 사람들을 다시 볼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를 괴롭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우리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죽음의 모든 권세들이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미칠 수가 없고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던 우리의 보고 싶었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찬란한 모습으로 만날 것입니다. 다시 죽음 때문에 헤어질 위협과 두려움이 없이 영원히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함께 교제하며 살 성도들과 그리고 사랑하는 하늘나라의 가족들로서 그들을 만날 것입니다. 다시는 이별이나 눈물, 죽음 때문에 불현듯 떠나보낼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 없이 우리는 그들과 영원히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제가 보고 싶은 사람들을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 희망 하나 때문만이라도 죄 많은 이 세상을 떠나서 그 나라에 거할 욕망을 가진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주님이 오늘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면 우리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죄 많은 이 세상에 수많은 눈물 자국들과 핏자국들을 남겨두고 순간순간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치렀던 수많은 죄와의 전투들로 말미암아 피투성이가 된 전투복을 벗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덧입혀진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우리는 비록 더럽고 불결한 인간들이지만 우리를 대속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 때문에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리신 보혈의 길을 걸어 거룩하신 아버지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고 우리는 그 앞에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랑하는 사람들, 보고 싶어서 늘 그리워하고 안타까운 그리움 속에 잠자리에 들어야 했던 그 얼굴들을 거기에서 보고 얼싸안고 행복해할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는 항상 죽음이 역사하고 있어서 그 죽음의 위협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 죽음의 위협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얼마나 가슴을 졸이는 나날을 지내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 죽음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의 강으로 떠나보내는 슬픔 때문에 목 놓아 울고 생애 벼랑 끝에서 그 멀리 떠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가지도 못하고 머물지도 못하며 통곡하고 있습니까? 그런 모든 아픔들이 이 세상에서는 쉼 없이 계속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에게는 영원한 고향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다시는 사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우리의 가족들을 두고 먼저 떠난 간 우리 아버지, 우리 할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내 가족, 그리고 내 동생들, 우리 형들, 주 안에서 죽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잠시 구름 같은 이 세상이 지나고 나면 죄도 다시 이별도 슬픔도 없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할머니, 우리 동생들 모두 만날 것입니다. 그 나라가 바로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나라입니다.
세 번째는 기쁨이니 이에 대해서 묘사하기를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고" 하늘나라는 단지 애통과 통곡이 없는 곳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나라는 기쁨을 앗아가는 이런 뼈저린 통곡, 피어린 애통함이 없는 기쁨의 나라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기쁨, 얼마나 우리와 거리가 먼 단어입니까? 희락, 가슴이 터지는 것과 같은 환희, 이런 단어들은 우리들이 거의 잃어버린 기억상실증의 단어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주님을 의지하고 성화의 삶을 살면서 오늘도 온전한 신자가 되고자 애쓰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하늘 기쁨을 언제나 맛보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처음 때에 주님을 영접하면서 경험했던 그 하늘의 문이 열리고 거룩의 축복들이 소낙비처럼 내리던 그때 그 영광스러운 기쁨을 아직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뿐이 아니었습니다. 성화의 삶을 살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기쁨이 우리들에게 없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기쁨들은 얼마나 이 세상에서 자주 차단되는지 모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차서 이 세상사는 동안에 눈꽃처럼 순결하게 주님을 위해서 살수 있었을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에 죄악이 나를 삼키고 영혼이 갈 길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렇게 자신 있었던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이 깃들기 시작하고 그 기쁜 대신에 우울한 슬픔이 깃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 찰 때는 하늘의 신령한 기쁨이 있지만 그러나 얼마나 자주 이 세상의 유혹과 우리 안에 부패한 본성과 정욕들이 이런 기쁨들을 앗아가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이런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한없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면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두운 주관자들이 가득하고 그리고 내 안을 보면 죄와 정욕과 부패함들이 가득하여서 우리의 영혼을 곤고하게 합니다. 언제나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거룩한 기쁨은 우리의 거룩한 상태에 달려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 자신이 불순종하고 거짓된 삶을 살므로 우리 안에 주신 그 기쁨은 마치 끊어진 멜로디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흩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는 기쁨은 이제 죄에 의해서 방해 받지도 않고 정욕에 의해서 덜하여 지지도 않으며 세상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에 의해서도 방해될 수 없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다시는 통곡하는 것이 없고 그 나라에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서 거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찬란하고 거룩한 기쁨이 가득하게 되는 곳, 근심과 모든 염려와 결별하고 온전한 기쁨이 그 가슴에 가득해서 매일매일 새 날을 맞이하고 그 날이 매일매일 살아가는 인생의 날 중에 최고의 날이 되는 그런 곳,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그 기쁨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가슴 벅찬 희락을 누리며 희열 속에서 살아가는 그 나라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니 우리가 어찌 그 나라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지막 네 번째는 해방이니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말속에서 나왔습니다. 아픈 것, 연약한 모든 것들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속박이고 구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 새 꿈은 하늘을 나르는데 있는데 그 새를 새장에 가두어 두었다면 어찌 속박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번에 몸이 아파서 응급실에 두 번 갔다가오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렇게 마음이 침체에 들 정도로 비감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나는 게으르고 싶지 않은데, 나는 잘 살고 싶은데 그런데 육체의 속박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째깍째깍 초침이 지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에 우리를 데리고 가실 날도 정하셨고 그것은 우리가 희망을 갖고 기도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 각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데리고 가실 날도 정해놓으셨습니다. 오늘날 데리고 가실지 60에 데리고 가실지 70에 데리고 가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오늘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정해진 그 날을 하나씩, 하나씩 빼먹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저금한 통장의 돈을 매일매일 인출하듯이 곳 감에서 하나씩, 하나씩 그 곳 감을 빼듯이 정해진 날들은 정해져 있고 매일 매일의 삶은 그것을 빼내면서 살아가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살아있을 동안에 주님을 더 잘 섬기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이라고 하는 장이 필요합니다.
나는 게으르고 싶지 않고 나는 열심히 살고 싶고 나는 정말 게으르지 않고 분명히 살고 싶고 쓸데없는 목표를 가슴에 품지 않고 주님이 주신 목표를 따라서 그렇게 살고 싶은데 육체가 그렇게 살지 말라고 속박을 합니다. 섬기면 몸이 아프고 섬기기 위해서 매달리면 육체가 더 이상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때 느끼는 그 영혼의 고통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시는지요? 그래서 그렇게 비감할 수가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일주일에 이삼일씩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공부하고 성경을 탐구하고 또 하나님의 일을 해도 끄떡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우리의 노화는 우리의 육체에 속박을 점점 더 강화합니다. 점점 더 연약함의 노예가 되어갑니다. 그래서 힘이 있을 때는 무지해서 하나님을 위해 못살았고 그리고 지혜가 있을 때는 마음이 그것을 원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못살고 이제 지혜도 생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도 이번에는 육체가 연약해져서 그 속박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게 됩니다. 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일입니까? 그래서 그렇게 비감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몇 주일을 지나면서 허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몇 달 동안 밤잠 안자고 열심히 아껴 쓴 시간 이렇게 하면서 다 날려버리는구나. 그러고 나서 오늘 아침에 기도하는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구나.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결국은 꿈도 소용이 없는 것이었고 결심도 헛된 것이고 하루하루 상한 갈대처럼 연기를 내며 꺼져가는 심지처럼 꺾지 않고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긍휼을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내 날의 길이를 어찌 알겠으며 정해진 그 길이의 날 동안에 강건하게 살지, 연약하게 살지 오늘 내가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살아도 언제 다시 질병과 아픈 것의 복병이 내 앞길을 가로막을지 알 수 없구나. 그러면서 그렇게 눈물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살려두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지만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꿈은 사는 이 나라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 그 땅을 그렇게 기다리고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몇 주일을 지나면서 한 지혜를 또 얻었습니다. 목표를 세워놓고 나를 가혹하게 채찍질하는 그런 분투의 삶도 꼭 필요하지만 하루하루를 주님이 생명 주셔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 그래서 새 날이 하루 밝으면 신비하게 여기고 또 하루가 지나면 감사하게 여기면서 하루가 마치 최후의 날인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 말고 또 다른 대안이 뭐가 있을까?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셨는데, 오늘 공중에 날다가 내일을 떨어지는 새들도 먹이시는데 하나님이 내 인생의 계획을 어찌 잊어버리실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루를 주시면 신비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지혜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모든 위로와 그리고 영생, 그리고 기쁨, 그리고 해방이 있어서 그 나라가 좋지만 그것보다도 더 좋은 것은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바로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큰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장막”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할 때 그 “거하심에” 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 ‘에스케노센’ 이라는 단어가 바로 21장에 쓰여 진 에스케노센이 라는 단어이고 이 단어는 희한하게도 히브리말 ‘샤칸’에서 온 ‘챠우머’입니다. 히브리말 샤칸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인 ‘쉐키나’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마치 하나님의 영광인 쉐키나가 깃들었던 그 천막을 친 성막을 암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 바로 우리 가운데 성막이 쳐진 것과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광야 시대 때 쳐졌던 그 장막은 얼마나 초라한 것이었습니까? 그 내부에 들어가 보면 다른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찬란한 것들이 가득했지만 겉보기에는 물 돼지 가죽의 천을 두른 아주 초라한 그런 텐트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그분은 천한 목수의 아들이셨습니다. 멸시와 욕을 당하고 육신의 연약함까지 짊어지셨을 때에 그분은 이 세상에 쳐진 낡고 초라한 장막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장막이 솔로몬의 성전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완성이 되었습니까? 이 땅에서는 예수님의 모습이 광야에 처진 초라한 쉐키나의 장막과 같았으나 그러나 그 하늘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거하시는 장막을 치신 그 모습은 감히 그 모습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찬란한 영광이었으니 솔로몬 성전의 그 영광도 하늘나라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의 영광에 비하면 어두움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그 그리스도 예수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는 그토록 사랑하기를 원했고 늘 사귀며 그 임재 안에 살기를 원했지만 끊임없는 죄와 그리고 이 세상의 유혹과 우리의 부패성과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연약과 불순종 때문에 수시로 떨어져야 했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결합과 찬란한 영광을 그 나라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를 우리가 가장 사랑할 나라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랑하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뵙게 될 때에 그때에 영광과 기쁨은 오늘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동안에 경험하는 슬픔과 고난과는 비교될 수 없이 찬란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소망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서 그 영혼으로 우리에게 보내어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나라에서 우리를 보내어 사람 만드셨고 언젠가는 당신의 품으로 보내실 텐데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그 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서 너무나 행복한 나라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그 나라입니다. 우리들이 있는 곳이 누추하고 초라해도 너무나 마음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곳이 하늘나라 같은데 우리들이 그토록 눈물 속에서 대면하고 싶어 하고 일평생 성화의 순례의 길을 걸어가면서 닮고 싶어 했던 그분과 대면하는 그 자리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자리가 되겠습니까?
더욱이 거기서 성경 최대의 약속,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최대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약속이 영원히 이루어지고 다시는 인간의 죄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은 완전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을 그 땅에서 보게 될 것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일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는 창조와 구속이 완전히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좌절된 것 같았던 천지창조의 모든 오묘한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성취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고,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깨트려졌고,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었고, 자아와의 관계도 무너져버렸는데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 모든 관계들을 치료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고 찬란한 창조의 광채를 잃어버린 빛바랜 우주와 자연의 세계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그 더러운 껍질을 벗고 찬란한 창조의 광영을 다시 회복하게 될 터인데 그때 만나게 될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긴 겨울이 지나고 돋아나는 그 아름다운 새싹들의 합창과 수많은 꽃들의 향연, 우거진 녹음의 우렁찬 함성 소리 속에서 느끼는 자연의 신비와 영광은 그 나라의 영광, 구속이 완성될 때에 탄식하며 기도하던 이 모든 피조물들이 영광스러운 광채를 다시 회복하게 되는 그 광휘에 비교한다면 지금 있는 것들은 모두 부끄러운 어두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 하늘에 있는 달과 별, 그리고 숲과 모든 나무와 열매들, 나무 사이로 오가는 수많은 새들과 자연의 모든 동물들, 우리 발아래 구르는 돌 하나 풀 한포기까지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하고 영광 가운데 그 위엄을 송축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우리는 하나님과 천군천사와 더불어 찬송하고 경배할 것입니다.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그 영원무궁한 나라에서 우리가 마음속으로 일평생 그렇게 사랑했던 소원, 마음에 품었던 간절한 희망을 따라서 좋으신 우리 하나님만 섬기고 구속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 그 은혜를 찬송하며 우리를 구속하신 그 성령님의 놀라운 이 위로하심에 대해서 한없는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살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지위가 그 나라에서 높지 못하고 하늘나라 한 구석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종든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이루어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름 없는 종으로 사는 것이 죄와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황제의 면류관을 쓰며 사는 것보다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 영원한 나라를 꿈꾸며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당해야 하는 수고와 모욕, 멸시와 천대도 참으며 그 나라에 무한한 영광을 갈망하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사는 것입니다. 흰 이빨을 드러내며 사나운 파도처럼 우리를 삼키기 위해서 우르릉대는 죽음의 권세 앞에 두려워 떨기는커녕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반드시 그 날에 네가 삼킨바 되고 우리는 너를 이기리라고 담대하게 외치며 어두운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일까요, 내일일까요? 내년일까요, 10년 후일까요?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실 꿈과 같은 그 날이 언제일까요? 속히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살아서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고, 죽어서는 아벨처럼 죽어도 그 피로 말할 수 있는 삶을 살다가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과 어깨를 겨룰 그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도 힘겨운 이 성화의 길, 기쁨으로 걷고 얼마 남지 않은 순례의 길을 주님과 동행하며 매일매일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