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은혜의 지배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신자 안에 있는 은혜와 죄(롬6:14) 2003.1.13 새해말씀사경회 1
2. 은혜와 죄의 지배(롬6:14) 2003.1.14 새해말씀사경회 15
3.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Ⅰ(롬6:14) 2003.1.15 새해말씀사경회 29
4.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Ⅱ(롬6:14) 2003.1.16 새해말씀사경회 34
5.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Ⅲ(롬6:14) 2003.1.17 새해말씀사경회 38
6.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Ⅳ(롬6:14) 2003.1.19 새해말씀사경회 60
7.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함Ⅰ(롬6:14) 2003.1.26 주일오전 80
8. 죄의 지배 아래서 벗어나는 길(롬6:14) 2003.2.2 주일오전 100
9.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함Ⅱ(롬6:14) 2003.2.9 주일오전 119
10.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함Ⅲ(롬6:14) 2003.2.16 주일오전 136
11. 신자 안에 있는 죄 때문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롬6:14) 2003.2.23 주일오전 155
12. 죄와의 싸움에서 경험하는 지성적 혼란 (롬6:14) 2003.3.2 주일오전 174
13. 이러한 혼란을 막는 지침(롬6:14) 2003.3.9 주일오전 194
14. 죄의 지배에 작별을 고하며(빌2:15) 2003.3.16 주일오전 211
1. 신자 안에 있는 은혜와 죄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 6:14)
1. 서론 : 신자 안에 있는 죄와 은혜의 지배
A. 롬 6:14 주해
죄와 은혜의 지배를 논하기에 앞서, 성경 본문을 정돈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라고 표현된 로마서 6장 14절의 문장은 희랍어 성경에서는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즉 희랍어 성경에서는 “왜냐하면 죄가 너희의 주인이 되지 못하리니, 왜냐하면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니라”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로마서 5장에서 시작하여 본문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게 된 것과 그 생명이 신자를 어떻게 지배하고 어떻게 신자들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죄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죄가 은혜와 함께 신자들에게 역사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역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B. 신자의 삶: 은혜의 통치 아래 있는 행복
죄와 은혜가 신자 안에 함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신자의 삶의 정체는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요? 원칙적으로 거듭난 신자는 죄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란 막연히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거룩한 영향력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죄 가운데 살다가도 어느 순간, 깊이 회개하면 은혜가 마음속에 확 밀려옵니다. 그리고 은혜가 들어오자, 마음은 이전에 은혜가 없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변화된 마음은 다른 생활을 시작하게 합니다. 사실, 은혜 받기 전이나 은혜 받은 후에나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집안도 그대로이고, 다니던 회사도 그대로이며, 갑자기 승진을 하거나 돈을 많이 벌게 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를 괴롭게 하던 삶의 상황들이 변함없이 그대로인데도 은혜를 받고 나면 신기하게 마음속에 기쁨과 평강이 넘칩니다. 매일 입에다 원망과 불평을 달고 살았던 사람에게 은혜가 임하면, 그 모든 원망과 불평의 조건들이 감사의 조건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옛날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이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말 사랑해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어느 한 순간, 이렇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란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작용하는 그 무엇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은혜가 심겨집니다. 신자란 바로 이 은혜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신자가 그 은혜의 다스림을 받으며 자신안에 심겨진 새 생명의 원리에 따라 살아갈 때,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소유하면, 은혜가 없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c. 불신자의 삶 : 죄의 지배 아래 사는 고통
이런 은혜가 들어오기 전까지, 다시 말해서 예수 믿고 거듭나기 전에는 사람들은 은혜가 아닌 죄의 지배 아래서 살았습니다. 죄에 대한 그 어떤 통제력도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 채,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10쌍이 결혼하면 그 중 4쌍의 부부가 이혼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이혼률은 점점 더 높아질 것입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아, 신기해. 저 남자는 한 여자와 30년을 살았대. 연구대상이야.”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육이나 모든 삶의 상황들 속에서 자기를 죽이는 훈련들이 전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냥 자기 내키는 대로만 하려 합니다. 자기를 낮추지도 버리지도 않으며,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죄의 통치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단순하게 형법상의 죄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이 세상의 중심이 자기인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없이도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곳에 인간을 두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그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게 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대하신 삶은 하나님을 온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인생의 참된 가치를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데서 찾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하나님께 만족이며, 인간에게 행복이요 보람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 이외에는 인간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아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창조의 목적을 외면한 채,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 믿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고통이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도 멸시이자 반역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온 우주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하며, 자기의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두고 살아가는 모든 삶이 곧 죄라고 말입니다.
D.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세력
그런데, 혹시 이런 질문이 떠오르시지 않습니까? 신자는 은혜아래 있는 존재이고, 불신자는 죄 아래 있는 존재라면, 예수를 믿어도 예수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악질적이고 나쁜 사람들이 있고 예수를 안 믿어도 예수 잘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선한 사람이 있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한 가지 사항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악은 이 세상의 시각일 뿐이지 하나님의 시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자기 생각을 따라서 착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법들을 따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도덕적인 삶을 산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생각에 선한 것을 추구하며 산 결과라면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도덕적인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나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죄 아래 있는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을 간음하고 살인하고 도둑질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미친 듯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좀 단정하게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묵상도 죄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 아래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은혜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삶을 살아가는 위의 질문에서와 같은 신자가 존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1) 원칙적으로 신자의 영혼은 죄의 지배(dominion)가 불가하나, 영향(influence)은 받음.
거듭난 순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신자에게 나무를 심듯 심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그 생명은 죽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생명의 원리가 신자의 안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죄의 지배를 모두 타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거듭난 신자에게 죄의 지배는 완전히 종식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은혜가 나무처럼 점점 자라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무라는 것입니다. 사람 속에 심긴 이 나무는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양분이 공급되고 환경적 조건들이 충족되어야지만 자라납니다. 양분이 충분하고 비가 내리고 햇빛이 비치고 적정 기온이 유지되어야지만 깊이 뿌리를 내려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 전체를 지배하고, 삶 전체를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나무를 연구한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나무가 저 정도 되었으면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물어보는 것은 무식한 질문입니다. 아무리 나무를 많이 연구한 사람이라도 그런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종류의 나무라도 언제 어디에 심겨졌는가, 나무가 심겨져 있는 동안에 그 지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따라 나무의 크기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저는 캐나다에 갔을 때 높은 산 위에서 얼음 밭에 심긴 작은 나무들을 보고, 어른 키보다 작은 그 나무들이 수십 년 된 나무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란 적이 있습니다.
생명의 나무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은혜가 공급되고 은혜를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병행되면 무럭무럭 잘 자라지만, 그렇지 않으면 말라 신자의 마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죄가 영향력을 극대화할 때, 불신자와 다름없는 죄의 지배 상태로 떨어짐
이렇게 되면 생명의 나무가 심겨질 때 타파된 죄의 잔존 세력이 신자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죄의 세력이 타파되었지만, 신자 안에서 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잔존하는 세력들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합법적인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는 필리핀에는 민다나오섬이라는 필리핀 합법 정부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그곳은 필리핀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반군들에게 점령되어 괴뢰정부가 세워지고 그 괴뢰 정부의 지배를 받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 민다나오섬의 예처럼 신자의 마음도 구원과 함께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 원칙이지만 원칙과 달리 죄의 지배 아래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죄의 지배는 완전히 궤멸되었고 죄의 지배는 모두 철폐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자기 안에서 은혜가 강력하게 역사하지 못하면 은혜가 없는 듯 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에게서 은혜가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고, 말씀을 멀리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은혜는 이무 힘도 쓸 수 없을 만큼 미약해 지고 맙니다. 육체를 위해서는 애를 쓰지만,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추호도 시간을 내지 않는 이런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은혜라는 나무가 자라기에는 최악의 환경이고, 죄라는 나무가 자라기에는 기가 막힌 옥토입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죄의 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그래서 급기야 죄의 나무는 마음에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되고, 마음에 있는 자양분들을 빨아 먹으며 뼈 속 깊이 죄악의 뿌리들을 뻗혀갑니다.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신자는 죄가 다스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우군이 소수가 되고, 죄의 반군들은 다수가 되자 결국 실제적으로는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사도가 이야기 하는 ‘죄에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된다’
‘죄에 자기 몸을 드려서 죄의 병기가 된다’ 등의 이야기는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나온 질문처럼 거듭난 사람인데도 불신자보다 더 악하게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죄를 짓지 못하고 생활했기 때문에 일단 그 죄의 맛을 보고나면 무서운 속도로 그 죄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죄는 어느 한계 이상으로 자라면,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영향력을 신자에게 행사합니다.
신자는 이때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영향력을 죄로부터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불신자였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죄의 강한 지배력을 신자가 되어서는 느끼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는 죄 아래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이 중력 속에서 살 때 중력의 힘을 거의 느끼지 못하듯이 거의 죄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도 그것을 죽이고자 몸부림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다릅니다. 은혜아래 사는 삶을 누려보았기에 죄 아래 사는 삶의 비참함을 압니다. 따라서 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죄를 죽이고자 몸부림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을 누르고 있는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스스로를 거듭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죄와의 갈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고갈되고 죄가 장성할 때에 신자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을 통해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영적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영적생활이란 새롭게 심겨진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지키며 사는 삶입니다. 틈틈이 우리 마음의 지배권을 노리는 잔존하는 죄의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영적생활을 해 나가야만 합니다.
영적생활이란 쉽게 말해 하나님의 규칙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어떨 때 그 은혜와 생명의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또 어떨 때 죄의 나무가 자라는지에 대한 법칙도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법칙을 따라서 살면 생명을 누리며 풍성한 삶을 살고, 그 법칙을 따라서 살지 않으면 예외없이 핍절하고 가난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몸부림치며 눈물로 기도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신자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생각들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영적인 생명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삶에 적합한 그것이 아니라면 신자안의 은혜의 나무는 점점 말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죄와 벗하여 지낼 때는 잠시 즐거울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거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갈증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에 따르는 영적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데도 불만족이나 고통 없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든지 상관없이 그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E. 은혜 아래 있는 신자의 의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원리를 따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하나님께 고통을 드리는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이 물 붓듯 부어집니다.
사도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죄만 많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에 의해서 지장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 죄 가운데 있던 사람이 어느 한순간 은혜의 원리로 돌아와 순종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가 은혜의 원리를 따르고자 할 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죄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긍휼을 물 붓듯 쏟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선 중간 결론을 맺겠습니다. 신자는 이제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순종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살고 성화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신자 속에 잔존하던 죄들이 다시 살아 역사해서 불법하게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지배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내버려두면 그 지배력은 점점 더 강해져서 민다나오섬을 점령한 반군들처럼 죄의 정부를 우리 마음속에 만들기도 하는데, 이때에 우리의 마음과 삶의 상황은 불신자 시절의 그것과 상황하고 아주 흡사해집니다.
그래서 신자는 원칙적으로는 은혜의 지배 아래 있고 죄의 지배 아래 있을 수가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죄의 지배를 받는 것 같은 삶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은혜의 생명을 계속해서 성장하게 하는 법칙을 따라서 생활해 나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II. 은혜의 상태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죄와 파멸되는 죄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성경은 이 죄를 성경에서는 두 가지로 나눕니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결코 없어질 수 없는 죄가 있고, 은혜의 지배 아래 살아가면 없어지는 죄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은혜의 지배라고 하는 것은 죄가 완전히 없는 삶이 아닙니다. 깊이 참회하며, 성경이 알려 준 은혜의 수단들을 잘 활용해서 가끔씩 죄의 유혹이 밀려오더라도 적절하게 그 죄를 죽이면서 살아가는 삶이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삶입니다. 쉽게 말해 가끔 거리에 총 든 테러리스트가 출현하더라도 이내 경찰에 의해서 사살되고 마는 치안이 잘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어떨 때는 3-4명 나타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7-8명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사살된 시체로 발견이 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반란이 종종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일단 합법적인 정부가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은혜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죄가 출현합니다. 그러나 그 죄들은 장기적으로 신자의 내면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깊어지면 죄 죽임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A. 신자 안에 있는 두 종류의 죄
1)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죄들 (시 19;12)
그런데 그런 아름다운 은혜의 상태에서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그 죄에 대해서 시편 19편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것은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성경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평범한 지식을 가지고는 찾아낼 수 없는 죄들이고 따라서 회개하기도 굉장히 힘든 죄들입니다.
사실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죄야!”하고 알려주어도 오히려 “에이씨!” 하고 대듭니다. 그래서 완고한 죄인들에게는 항상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대접받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막 나가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어느 날 깊이 은혜를 받으면 비로소 자신의 죄가 끝이 없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살아온 발자취 전부가 죄와 버성겨 살아온 흔적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들어와서 사람에게 역사하기 전까지는 명백한 죄에 대해서도 스스로 죄라고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라고 인정하는 명백한 문제들에 있어서도 그럴진대, 그 인간 갈피갈피에 숨겨져 있는 깊은 죄들을 인간이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신자의 신앙이 깊어질수록 죄의 공격도 교활해 집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을 많이 배운 사람들은 함부로 죄를 못 짓습니다. 복음이 무엇이고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안 사람에게 “야, 오늘 심심한데 교회에서 집에 가다가 사람이나 하나 죽이자.”하고 유혹한다면 누가 넘어가겠습니까? 아무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도 그런 식으로는 유혹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르면 죄의 유혹이 다릅니다. 신앙생활이 정교해질수록 죄도 교묘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정도면 됐다 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빌 3:12上)
그런데 아무리 교활해졌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죄들은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주의 깊게 살피며 살아간다면 상당부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패함과 연약함의 궁극적 원인인 인간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죄와 악들은 인간이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책임을 덜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어 인간으로 존재하는 동안에는 피할 수 없는 그런 죄들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영향은 미치지만 비굑적 적게 영향을 줍니다. 죄라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죄들은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발견되고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즉각적으로 엎드리며 자비와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사죄해 주십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과 은혜의 영향력이 은밀하고도 뿌리 깊은 그러한 죄에 의해 방해받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인간의 통제가 어느 정도 가능한 죄들 (시 19:13)
그러나 성경은 그런 죄 말고 또 다른 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간으로서 통제가 어느 정도 가능한 죄들입니다. 시편 19편 13절은 그러한 죄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통제가 가능한 이러한 죄들은 영혼에 대해서 파괴적인 영향력을 갖습니다.
이렇게 통제할 수 있는 죄의 파괴적인 영향력의 예로 미움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당하게 되면 어느 한 순간 자기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그 사람에 대한 반감의 감정이 확 스쳐갑니다. 그런데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즉시 하나님 앞에서 그 일을 생각해보며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너무 괴롭습니다. 한 순간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미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제가 사랑으로 용서받았으니, 저도 사랑으로 용서하겠습니다. 하나님 잠시나마 미움의 감정을 품었던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확 마음에 밀려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마음에 확 솟구친 미움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이것이 쌓이고 쌓여 그 사람과 같은 세상에서 살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실제로 살인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이것은 은혜로 통제할 수 있는 죄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에 뒤늦게 후회한다고 해도 영혼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러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피묻은 칼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무슨 일을 행했습니까?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데 나는 이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죽였습니다.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기도한다 해도 위의 경우처럼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움과 살인을 같은 죄로 보셨지만, 죄의 진전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이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진전이 된 죄와 진전이 되지 않은 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을 보며 어느 한순간 울컥 솟아오르는 미움을 느끼는 것은 앞에서 다룬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연약한 부분에 속하는 죄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살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살인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담대해질 수가 없고 삶에 대한 애착도 모두 사라진다고 합니다. 통제되지 않은 범죄는 이처럼 인간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듭니다. 은혜 아래에서 통제되는 죄를 범하게 되면 무모한 삶을 막는 마지막 브레이크인 죄책감이 사라지게 됩니다.
B. 은혜의 상태에서 파멸되는 죄의 진전 : 죄의 법
그래서 우리들은 죄를 죽여야 합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력 아래 있다 라고 할 때, 여기서 가리키는 죄는 이 두 번째 경우의 죄들입니다. 이러한 죄들은 일단 짓게 되면 그의 마음에 뿌리를 내립니다. 그래서 마음을 둔감하게 만듭니다. 둔감한 마음은 말씀을 깨닫지도,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죄의 유혹에 전보다 쉽게 넘어갑니다. 마음의 상태가 변하고 영혼의 상태가 바뀌자 조금만 유혹을 해도 아주 쉽게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길어지면 결국 죄가 손짓만 해도 총알같이 달려와 죄를 짓는 상태로 나아가고 맙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죄의 법에 매인 상태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속도로 위로 수십 톤이 넘는 트럭들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마구 지나갑니다. 그런 차들을 만나면 운전자들은 으레 피해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 고속도로를 주름잡으며 제멋대로 달리던 차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으며 살살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면 어김없이 앞에 경찰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경찰관 때문이 아니라, 그의 뒤에 존재하는 법 때문입니다. 법이 있기에 경찰관은 그 거대한 트럭을 손가락 하나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이란 그 자체로 통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범죄는 신자로 하여금 죄의 법 아래에서 살도록 만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죄가 온갖 유혹을 하며 환경을 조성해도 넘어갈까 말까였는데, 죄의 법에 매이게 되자 불끈불끈 솟아나는 죄의 욕망에 재빠르게 순종하며 움직이게 됩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짐승 같은 삶입니다. 짐승에게는 근심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욕망이 일어나면 그것을 곧바로 행동에 적용하면 될 뿐, 고민도 생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정직해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요즘 기도생활 하지 못하는 이유를 회사가 많이 바쁘고, 집과 교회가 멀고, 몸이 많이 피곤한데서 찾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다 핑계일뿐 진짜 이유는 못하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영향력 아래 있는 신자에게는 기도의 장소나 환경은 별 문제가 안 됩니다. 길거리를 걸어가면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고, 전철 손잡이를 붙들고 나지막히 기도하면서도 물같이 녹는 마음을 경험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정직해지지 않는 것도 위선입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정직하게 직시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진정한 필요를 민감하게 느낄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영혼에 희망이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한다고 할지라도 교회 등록의 끈에 묶여서 잘 길들여진 짐승으로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우 그런 삶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Ⅲ. 죄와 은혜의 계획
이제 우리들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도대체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우리에게 죄가 이토록 집요하게 들어와 역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은혜에도 죄에도 저마다 원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A. 은혜의 계획
그냥 은혜를 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은혜는 모두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은혜 받은 것을 이야기할 때, 마치 무용담을 늘어놓듯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복음의 이치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은혜는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은혜받게 하시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원대한 목적을 이루고 우리로 하여금 상상할 수 도 없었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B. 죄의 계획 : 지배
1) 은혜와 마찬가지로 죄도 궁극적인 계획을 가지고 성장한다.
은혜가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듯이 죄도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그냥 우리를 한번 죄 짓게 하기 위해서 유혹한 것이 아니라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접근한 것입니다. 즉 죄의 지배가 모두 파괴되고 은혜의 지배가 살아있는 우리의 영혼의 정부를 타도하고 실질적으로 죄의 반군들이 지배하는 혁명정부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가 궁극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계획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를 주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 주관하다는 표현이 ‘주인이 된다’라는 표현으로 나와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NIV에는 shall not be your master, ‘너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원대한 계획은 늘 신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작은 죄부터 시작합니다. 신자는 잘 하고 있는 부분,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부분들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한 부분 때문에 넘어집니다. 죄는 연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파고 들어온 죄는 죄의 나무들을 신자의 마음에 더욱 많이 심어 울창한 숲을 이루게 만듭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내면에 죄악들로 이루어진 혁명정부를 세우는 것입니다. 불법한 정권을 세워서 신자를 불신자처럼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계획입니다.
2)그것은 신자의 영혼 전체를 지배(dominion) 하는 것이다 (약 1;14-15)
죄에 의해 세워진 불법정부의 지배는 인간의 전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죄악들의 혁명정부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과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 사이에는 말 할 수 없는 격차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전자의 인생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보람을 하나도 느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루 라도 빨리 우리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될 것이며,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 이 세상에 희망이 될 것입니다. 무엇에 의해 지배받는가에 따라 이처럼 현저한 격차가 나는 것은 이 지배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의 영혼 전체에 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Ⅳ. 죄가 신자 안에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두 방법
죄가 일단 마음에 들어오고 나면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게 되는데, 이때 사용하는 두 가지 무기가 속임수와 강압입니다.
A. 속임(deceit)
죄는 신자 안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그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속임이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런 작은 죄는 하나님께서도 금방 용서해 주실 거라고 신자들을 속이고, 죄를 지으면 곤고하고 힘들어 질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는 죄를 지은 후에 맛보는 즐거움은 훨씬 크다고 속입니다.
이 때 지식이 없는 신자들은 속임에 더 잘 넘어갑니다. 그래서 죄는 신자가 하나님 안에서 지혜로워지고 현명해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배 시간에 자신의 영혼에 치명적으로 중요한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데도 귀에 안 들어오는 것은, 진리의 빛이 영혼의 상태를 쪼개고 무지와 죄악들을 드러내 영혼을 수술하는 싫어하는 죄의 영향 때문입니다. 죄의 입장에서 가장 유린하기 좋은 사람은 바로 말씀의 지식이 없고, 죄에 대해서 친화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지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교회를 나오기 싫다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사람들이 흐느끼며 우는데, 그런 분위기가 자기에게는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쾌활하고 명랑한 밝은 분위기였으면 좋겠다고 해서 저는 그 지체에게 노래방으로 가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는데, 한가하게 분위기를 찾고 있다니요?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 흘리는 성도들이 예배 분위기 띄어주기 위해 그러는 것 같습니까? 이것은 수술받기 위해 수술대에 누운 환자가 의사 가운 색깔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수술 받을 수 없다고 일어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것이 다 속임수입니다. 죄는 이런 식으로 치열하게 속이면서 오는 것입니다.
B.강압
두 번째 방법은 강압입니다. 이것은 죄를 짓는 것을 그만 두려고 할 때 찾아 오는 커다란 두려움입니다. 죄의 강압은 홀로 서서 기다리는 고통,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단절감, 죄의 쾌락을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련 등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신자로 하여금 계속 죄의 지배아래 묶여있게 합니다.
이 강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작은 요구를 하나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안에서 크든지 작든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하나만 찾아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그만두리라 결심해 보십시오. 아마 온 마음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을 왜 그만두려고 하는가? 난 그렇게 못하겠다’ 하면서 말입니다. 머리 속으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든데 실제 그렇게 움직이려고 하자, 마음이 용납을 못하고 육신은 길길이 뛰는 것입니다.
평범한 습관 하나 고치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듭니다. 담배를 끊는 사람은 살인도 할 수 있을 만큼 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습성과 안일한 삶의 습성들은 죄에 뿌리박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끊어내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여간 해서는 안 끊어지는 이것이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강압입니다.
Ⅴ. 결론 : 은혜의 원군을 구하라
A. 죄는 신자를 지배하지 못한다. 은혜의 원리를 따르면 우리 영혼은 생명을 누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를 잡고 세력을 확장해 가는 방법과 죄가 자리를 잡고 세력을 확장해 가는 방식은 매우 흡사합니다. 더구나 죄의 자리도 인간의 마음이고 은혜의 자리도 인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런 치열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생존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지원 한 번 제대로 해 준 적이 없는 것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입니다. 스윈녹이라는 청교도는 “예배 시간에 조는 사람들은 몸은 교회에 나왔지만 마음은 벌거벗고 침대에 뒹구는 중인 사람들” 이라고 말했습니다기도도 예배도 그저 형식일 뿐이고, 회개할 줄도 성경을 읽을 줄도 모르며, 순종하려고 애를 쓰는 삶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신앙생활에 지원해 줄만한 자원이 있을 리 없습니다. .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지배하도록 원리를 세워놓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반군이 득세하여 실질적인 지배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불손종하는 삶을 사는 것은 죄의 세력에게 무기 공급을 해주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영혼의 법칙을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는 은혜와 긍휼히 물 붓듯이 쏟아집니다. 한편의 설교를 듣고 기도함으로써 10여 년 동안 싸워서도 이길 수 없었던 죄의 심장부에 단검을 꽂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칙을 따라 산다면 말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주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거듭난 것이 정말 믿어지십니까? 거듭났다고 하기에는 삶의 증거들이 너무나 적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죄에 많이 져서 거의 죄에 이끌려 다니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항거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고백하며, 무릎 꿇고 은혜의 원군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원군을 보내주십니다. 순식간에 수 십 년 동안 우리를 죄인중의 괴수처럼 살게 했던 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바꿔 놓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원래 우리 영혼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죄를 많이 짓습니다. 그래서 자꾸 회개할 일만 생깁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아무리 간절히 회개를 해도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주셨다’ 라고 하는 시원한 기쁨이 밀려오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 죄의 세력들을 약화시키고 타파하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선 중앙청부터 점령하여, 은혜의 깃발을 꽂고 다시 기본적인 질서들을 잡아나가야 합니다.
2. 은혜와 죄의 지배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6:14)
I. 서론 : 죄의 지배
A. 절대적인 죄의 지배
엄밀한 의미에서 죄는 신자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해 내시고, 생명과 성령의 법을 그의 안에 심어 놓으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는 절대적 지배와 상대적 지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죄의 절대적인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심대로 행하며, 자신의 배를 우상처럼 섬기는 사람들로 거침없이 자기의 욕망을 따라 삽니다. 뻔뻔스럽게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가책을 느낄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죄의 지배는 절대적입니다.
B. 상대적인 죄의 지배
그러나 상대적으로 죄가 지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신자란 원칙적으로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풀려나 생명과 성령의 법에 주장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자들도 영적 생명의 법칙을 따라 생활하지 않고 스스로를 방치하고 산다면, 구원받은 자 안에 잔존하던 죄의 영향력이 점점 득세해서 죄의 지배를 받는 상태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신자의 영혼은 성령의 은혜가 지배함에도 불구하고 성령과 은혜의 지배력이 극도로 약화되면 불신자와 방불한 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C. 죄의 지배의 끝 : 절대적인 죄의 지배나 상대적인 죄의 지배나 그 끝은 같다.
절대적인 죄의 지배의 경우는 그 사람 자신이 죄의 노예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영혼은 합법적으로 죄에 장악되어 있다. 그러나 상대적인 죄의 지배의 경우에는 불법하게 신자의 마음과 영혼이 죄에 장악된 상태이다.
하지만 절대적 죄의 지배를 받는 불신자와 상대적 죄의 지배를 받는 신자사이에 있는 그 악함의 끝은 마찬가지이다. 상대적인 되의 지배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매우 크고 사악한 악이기 때문이다.
Ⅱ. 죄의 지배의 성질
A.. 신자에 대한 죄의 지배는 부당한 거역이다.
그럼 죄의 지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 죄의 지배의 성질은 부당한 거역입니다. 원래 신자는 하나님에 의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자신 안에 새롭게 심겨진 은혜와 생명의 원리를 따라서 살기만 하면, 신자 안에 심겨진 은혜의 생명력은 극대화되어서 거룩하고 진실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하고, 생명의 원리를 따라 사는 대신 죄악된 방법을 쫓아 살았기 때문에 마음과 영혼이 죄에 의해 불법하게 강탈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지배입니다.
그런데 불신자의 영혼 속에서 이루어지는 죄의 지배와 신자의 영혼 속에서 이루어 지는 죄의 지배는 똑같이 악해 보여도 똑같지 않습니다. 불신자의 죄의 지배는 신자의 죄의 지배보다는 굉장히 견고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받는 죄의 지배는 불법한 거역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생명과 은혜의 원리가 힘을 얻어 역사하기만 하면 단숨에 허물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비록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 할지라도 항상 마음속으로 되뇌어야 합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삶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를 죽음에서 해방하셨다. 내가 이렇게 죄에 매여, 허약하게 죄와 타협하면서 사는 것은 마치 왕의 가문에 태어난 왕의 자손들이 자신들의 신분에 맞지않게 부당한 노역에 종사하는 것과 같다. 내 삶의 자리는 여기가 아니다. 이것은 결코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아니다. 이것은 부당하게 내 마음과 영혼이 강탈당한 것이다’
인신매매 조직에서 잡혀온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이 인신매매 조직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잡혀온 사람들은 사람 이하의 취급을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자존감을 완전히 망가트립니다. 이렇게 한번 자신의 인생을 철저하게 포기 한 사람들은 그 다음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생활에 익숙하게 젖어서 삶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이것은 신자가 죄의 지배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철저하게 신자를 속이고 강압하여 신자로 하여금 신령한 기쁨이 넘치는 은혜의 삶을 꿈꾸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죄는 인간을 폭력과 강압만으로 다스리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때때로 무엇인가 달콤한 것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써서 우리를 한편으로는 두려워서, 또 한편으로는 달콤함 때문에 떠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배는 부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살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죄가 지배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생명과 은혜의 원리를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은 아무리 극악한 죄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충분히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지를 가지고, 죄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은혜의 지배를 다시금 우리 안에 세우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보내셔서 도무지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던 죄의 지배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시고 은혜의 세계를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죄의 지배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B. 죄의 지배는 악이다
또 하나의 죄의 성질은 악입니다. 여기서 악이란 어둡고 고통스러운 것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항상 고통만 준다면 신자가 왜 죄를 붙들고 살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좋은 것만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듯, 죄도 고통스럽고 나쁜 일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은혜는 고통을 타고 오고, 죄는 달콤한 것들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신자가 죄에 대해 완벽하게 방어하면서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죄가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가 이렇게 달콤한 수단까지 사용하면서 인간에게 접근하는 것은 죄의 지배를 인간에게 이룸으로써 성취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영혼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것입니다.
1)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게 함
신자가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영혼 속에 심겨진 원리와는 완전히 다르게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면, 죄에 의해 조금씩 쾌락과 만족을 얻기는 하지만 영혼의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면 살수록, 죄의 열매를 얻으면 얻을수록 그 영혼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옵니다. 이러한 사람들 속에서는 신령한 기쁨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이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반기를 든 삶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흔들리지 않는 삶, 자기가 정해놓은 방식을 따라 자기 멋대로 신앙생활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자신만만하게 살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한 생활을 하면서도 고민하지 않고, 기도가 안 되고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신자들처럼 교회 밖에서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다 뿐이지, 교회 출석하면서 하나님을 은밀하게 대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영혼을 파괴함
죄의 지배의 또 하나의 목적은 영혼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파괴시킨다는 것은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영적인 질서를 어느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트려 버리는 것입니다. 은혜의 질서들을 파괴함으로써, 적절하게 죄를 인식하고 감독하여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모든 기능들을 마비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에 폭동이 일어날 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현금 자동인출기를 도끼로 부시고 그 속에 있는 돈을 빼가는 일은 다반사라고 합니다. 폭력과 강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국가 질서 자체가 순식간에 붕괴되어 버리고 만다고 합니다. 이럴 때는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불러 ‘왜 그러셨어요? 무슨 죄를 지셨어요?’ 하며 재판을 한다면 재판하는 동안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럴 때 정부는 탱크를 앞세운 군인들로 도시를 평정하게 합니다. 일단 기관총과 탱크를 사용해서라도 나라를 평정해 질서를 세우고, 그 다음에 비로소 하나 하나 문제를 풀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우리의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일단 들어와 지배권을 가지고 나면, 신자의 모든 내적 질서가 붕괴되고 사고의 기능도 흐려집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 대처능력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지 정 의가 가지런하고 일관성 있지만 죄의 지배 아래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망가진 상태가 되었을 때가 바로 죄가 활동하기 제일 좋을 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적진에 몰래 잠입한 특공대라면 헬기와 탱크들을 먼저 폭파하겠습니까? 레이더와 조명시설을 먼저 폭파하겠습니까? 아마 어떻게 해서든지 레이더와 조명, 그리고 교전시설을 먼저 파괴할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 역사할 때도 이와 같습니다. 먼저 영혼을 파괴시켜 죄의 지배를 방해할 만한 것을 미리 망가트리는 것입니다.
Ⅲ. 죄의 지배의 특성 : 죄에 대한 신자의 순종이 죄의 지배에 힘을 실어줌.
1) 죄의 능력은 사람들을 유혹함으로 생각 안에 힘을 가하나,
그것이 곧 죄의 지배를 가져 오지 않음
두 번째로 죄의 지배의 특성은 순종을 통해서 지배력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죄의 유혹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두고 자신이 너무 악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죄의 유혹을 많이 받는 다는 것이 죄의 지배를 강하게 받고 있는 증거라고 판단해서는 안뇝니다. 아무리 많이 유혹을 받고, 아무리 큰 죄의 유혹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신자가 그것과 싸우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죄가 신자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영향은 끼칠 수 있지만 지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와 그 다음에 죄의 지배의 공통점은 모두 순종을 통해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하시고,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셔도 우리가 그저 그런 것들을 느낄 뿐 하나님의 말씀에 실제적으로 순종하며 살지 않는다면 은혜는 우리를 지배하는 힘으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죄도 아무리 강한 유혹을 신자에게 뻗치더라도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우며 자신을 내어 주지 않으면 신자의 영혼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가장 무서운 것은 순종입니다. 죄에 대해서 순종 하지 않으면, 죄는 우리에게 영향만 끼칠 뿐,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죄가 강압, 속임, 유혹, 달콤함 들을 끊임없이 사용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죄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순종으로 힘을 실어주지 않는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일단 굴복했기에 죄가 강하게 그를 끌어갈 수 있는 것이지, 신자에게 죄를 지을 의지가 전혀 없는데 어느 순간 강하게 신자를 사로잡아 강압적으로 죄를 짓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2) 그것은 신자에게 혼란을 가져옴. 죄에 대한 순종을 통해 지배력을 가지게 됨
우리에게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그 죄가 우리의 순종하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 안에 정착했고 지배력을 획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주의깊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집요한 죄의 유혹을 오래 받으면 받을수록 그 죄에 순종하게 될 확률도 커진다는 것입니다. 유혹이 오랜 기간 계속되면 혼란이 옵니다. 계속해서 유혹이 사고 체계에 혼란을 가져와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태에 이르게 되면 결국 언젠가는 넘어지고 맙니다.
Ⅳ. 죄의 지배의 환경 : 신자가 성령과 그의 은혜의 통치를 떠남으로써
그러면 세 번째, 죄의 지배의 환경입니다. 죄가 지배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환경이 있습니다. 그 환경은 바로 신자가 성령과 그의 은혜의 통치를 떠나는 것입니다. 신자 안에서 죄가 지배력을 갖게 되는 사건 이전에는 반드시 신자 안에서 성령의 은혜가 서서히 고갈되는 일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는 죄가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쫓아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는 신자의 내면에 파고들기 위해 먼저 그의 안에 성령의 영향력이 사라지기를 기다립니다.
성령의 영향력이 사그러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과 우리들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보다 더 큰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침투한 죄가 살아남아서 뿌리를 내릴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이 때, 게으름은 죄를 향해 문을 여는 스파이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게으름과 태만에 대해 심각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해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환경이 조성되는 발단은 늘 태만, 게으름, 부주의함에서 출발합니다. 이것들 자체는 큰 죄가 아닐지 몰라도, 이것들이 죄를 향해 문을 열어주고 은혜의 강건함이 유지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죄와 싸울 저항력을 없애는 것이기에 매우 심각한 문제들 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1)신자는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과 주님의 통치를 받으나,
죄의 지배 하에선 이것이 일관되지 않음.
앞서 살펴보았듯이 죄가 들어와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은혜의 지배가 완전히 약화되고 고갈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신자에게 은혜의 지배가 완전히 고갈될 수도 있는가?’하는 의문입니다.
맞습니다. 신자란 성령님의 인도와 또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죄가 지배를 한다고 할지라도, 신자에게서 그러한 것들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상황 하에서도 성령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연속적이지 않고 간헐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일제치하 속에서도 독립투사들이 있었듯,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에게도 은혜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 은혜의 경험이 가뭄에 콩 나듯 일어나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이 간헐적인 은혜의 경험이 신자를 혼란에 빠트리기도 합니다. 가끔 은혜를 경험하면서 문제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아! 나는 리얼 크리스천이구나. 진짜 참 신자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하고 과신하는 것입니다. 몇 달에 한번 혹은 일년에 한번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은 굉장히 확대해서 생각하고, 그런 사랑을 못 느끼며 살아왔던 1년 혹은 6개월의 시간들은 완전히 잊어버리는 이런 일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간헐적인 은혜 경험을 한다고해서 자신을 참된 신자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된 신자가 아니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간헐적인 은혜의 경험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은혜 경험이 간헐적이라는 사실을 보며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는 은혜는 지속적으로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영적인 순발력이 있습니다. 아침에는 약간 곤고한 것 같았어도, 저녁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확 밀려옵니다. 몇 달 몇 년 후에가 아니라 당장 말입니다.
2) 은혜와 죄가 신자 안에 있으나 보좌는 하나이며, 신자는 동시에 주님과 죄를 섬길 수 없다.
신자에게는 은혜와 죄가 공존합니다. 죄가 공존한다고 해서 은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은혜가 지배한다고 해서 죄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이런 의문이 들것입니다. 은혜의 지배, 죄의 지배 말고 그 양쪽에 모두 속한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죄와 은혜가 공존하지만 마음의 보좌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보좌에 계시든지 죄가 그 보좌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위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라고 하시며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논리구조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재물만 섬기는 사람이나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고, 대다수의 사람은 하나님도 재물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마음이 다 우리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둘 중 하나가 더 지배적인 위치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의 배타적인 사랑이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 안에 은혜와 죄가 공존하지만 은혜의 지배와 죄의 지배의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보좌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 보좌에 계시든지 죄가 그 보좌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폭동군의 두목과 정상 정부의 대통령이 동시에 중앙청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대통령 의자를 반으로 나눠 앉을 수는 없습니다.
신자는 죄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고, 은혜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종적인 지배력을 갖는 것은 하나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은혜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은혜의 정도가 다르고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죄의 정도가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중간은 없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산다는 것은 죄의 세력을 더 우세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고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아무리 인정해 주어도 성경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해서는 소용이 없다고 가르쳐 줍니다.
3)마음 안에 은혜의 통치를 현재적으로 경험하기를 힘쓰라
신자들이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다스리는 것을 계속적으로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간헐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결코 진실한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자기 안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를 유지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에 영향을 받고, 간절히 기도하여 자기의 죄를 사함 받는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가 공급됩니다. 따라서 이런 영적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죄의 지배로 들어가고자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죄에 쉼 없이 지고 마음도 수시로 미끄러지는데 그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영적 생활의 실체는 전무합니다. 이것은 연약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계획들을 분명하게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하나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과 다시 살아나신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하며 예수님이 사셨던 것과 같이 자신의 남겨진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니께서 이 세상을 사셨다면 이렇게 사시길 원하셨을 것이다 싶은 삶을 살아 가면서, 어려운 일을 만나면 만날수록 예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이럴 때 그분과 하나되는 것 같은 동화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죄의 지배는 신자가 성령과 은혜의 통치아래 있지 않아야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계속해서 신앙적인 의무를 행하며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경험하기에 힘쓴다면 죄는 신자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배 가운데, 그리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꾸준히 경험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가 계속 우리를 지배할 수 있도록......
D. 죄의 지배의 발전 : 죄에 대한 신자의 저항력을 약화시킴으로 성취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죄가 어떻게 발전해 나가서 신자들에게 지배력을 갖게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 죄에 대한 확신을 무뎌지게 함
우선 첫째로, 죄에 대한 확신을 무뎌지게 만듭니다. 신자가 은혜아래 있을 때에는 죄에 대해 민감하며 죄책감도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그 죄책감 때문에 죄를 뉘우치지 않고는 괴로워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갈 때에는 죄가 쌓여도 죄책감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죄책감이 점점 마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무모하게 범죄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하나님의 마지막 은혜의 수단입니다. 죄책감이 있는 동안에는 담대하게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수시로 짓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 영혼이 화인을 맞아서 어떠한 죄를 지어도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가 들어오면 지배력을 갖기 전에 그 죄에 대해서 계속 생각이 떠오르게 하여 사고를 흩트려 놓아 설득을 하여 마음에 소원이 생기게 합니다. 그래서 정서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여 큰 죄가 아니며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죄보다 클 것이라는 생각과 죄를 짓고 하나님앞에서 당해야 하는 고통보다는 죄를 지음으로써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비교되지 않게 클 것이라는 암시가 계속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죄책감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러한 일이 죄에 전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짓고 싶은 죄에 대해서 먼저 일어납니다.
2) 죄에 대하여 친화적으로 민감하게 함
그렇게 해서 죄에 대한 확신을 무뎌지게 하고 이어서 죄에 대한 소원을 일으켜서 판단을 흐려지게 해서 죄를 짓게 하는데 이때 일어나는 또 하나가 뭔가 하면 죄에 대해서 아주 친근하고 그래서 민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감시하고 대적하는 의미에서 민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너 죄지 이런 민감함이 아니라 오! 너 죄 왔구나. 이런 친화력으로 민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사고와 정서와 의지를 차차 지배하면서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죄와 함께 영적인 무지와 어두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정교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두리 뭉실하고 뭔가 죄가 뭐고, 내 영혼의 상태가 뭐고 이런 것을 가리켜주는 이런 게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소망이 있다. 죄 가운데 살아도 하나님이 친자식을 버리시겠는가. 그런 식으로 해서 얼버무리면서 그냥 살아가는 그런 식을 좋아합니다. 진리의 내용보다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그런 종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간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무지와 어두움이 들어오면서 이 죄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솟아오르면서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죄에 대하여 점차 민감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주 쉬운 표현을 하면 중독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히로뽕 투약하는 사람들보면 이해가 안갑니다. 왜 그렇게 이빨이 다 빠지고 보셨을 것입니다. 미국 마약협회에서 나온 선전, 화장을 다 지우고 나니까 드라큐라 같이 잇몸이 다 파괴되어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모습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다 알면서도 그것을 투약합니다. 5번만 맞으면 누구든지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중독성이 담배 골초에 200배, 그러니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못 끊는 것입니다. 끊으면 막 벌벌 떨면서 정신 이상자 증세가 나타납니다. 그렇게 하면서 죄에 중독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3) 죄책감이 있어도 죄의 지배 아래 있을 수 있다 (롬 2:15).
그러면 이제 아! 죄책감이 있으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게 아니겠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뭔가 하면 죄책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로마서 2장 15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의 빛과 양심의 가책이 죄에 대해서 저항을 해도 저항만 할뿐이지 실질적으로 그 저항이 영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에 이야기한 죄와 다투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이미 죄의 지배가 시작되었을 때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담배 피면 안돼, 마약 하면 안돼. 그런데 한번만 어쩔 수 없이 딱 한번만, 절대 안돼. 그러나 한번만. 이러면서 계속해서 빠져 들어가는 상태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죄 아래 있게 되면 신자의 삶이 너무나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욕망을 잃어버리게 되면 죄책감이 있는데도 이 죄책감을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 죄의 욕망을 따라서 훨씬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책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욥기 24장 13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광명을 배역하는 사람들이며 이사야 57장 20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더러운 바다로서 더러운 것들을 솟쳐내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음속에 어떤 평강도 누리면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평안,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거기서 말미암는 넘치는 기쁨,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에 사랑에 대한 목 매이는 감격 이런 것들은 신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린 채 차가운 형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사람들이 쉽게 자기가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정직하게 인정을 안 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변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내가 그래도 몇 달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는데 내가 이제껏 까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딴 길로 나가본 적이 없는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한 사람인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 나보고 예수에 미친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뭐 그렇게 나쁜 일을 한 게 있나. 조금 잘못한 것이 있다면 기도 생활을 열심히 안하고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어서 남들처럼 그렇게 열렬한 영적 생활을 못했다는 것뿐인데 그래도 그렇게 하면서 죄 짓고 미끄러지는 인간들도 많은데 나는 그래서 그 사람처럼 그렇게 탁월하게 기도하지 못하고 열렬하지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버젓이 교회를 지키면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오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사람이 확신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 설득시키는 것이 용의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죄의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두 번째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죄에 대한 가책을 섬김과 봉사로서 때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그를 설득시키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또 하나는 현실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이 신자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세상의 풍조를 보면서 그런 참된 신자, 거의 없다. 그러면 결국 그러면 목사님처럼 그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지 현실적으로 누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나. 몇 사람이 안돼. 목사님도 그런 사람이 소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힘들게 소수에 들어야 하고 그 소수에 안 든 것 때문에 내가 그렇게 가책을 느껴야 되는가. 그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국민투표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커트라인은 시대가 악하면 뚝 떨어지고 시대가 고상하면 올라가고 시대가 너무나도 나쁘면 성경 찬송 들고 졸면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 오락가락 해도 천국에 보내고 워낙 신앙이 출중한 사람들이 많으면 순교하기 전에는 천국 가는 티켓 안 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차피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세상의 관점을 버린 것이 아닙니까? 세상에 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보이는 이 세상보다 더 사랑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대체 어디 있습니까? 세상이 그렇게 믿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국민투표를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까? 어느 한순간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매일 은혜를 주시고 나를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참된 사랑을 내게 보이셨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믿을 수 없어도 나는 그분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노라.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다 예수를 버려도 나는 예수를 버릴 수 없노라. 어렸을 때 그렇게 감명 깊게 들었던 설교가 생각이 납니다.
(예화: 공산당이 쳐들어와서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면서 했던 행위 중 예수님 사진을 땅바닥에 놓고 지나가면서 발로 밟고 침을 뱉으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살아서라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산다고 그렇게 하고 지나갔지만 어느 주일 학교 선생으로 있는 자매는 예수님의 부서진 사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닦으면서 울었는데 그런 모습이 복음의 체험, 하나님 사랑의 핵심이라는 이야기)
진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찼을 때 주위를 돌아보면서 나처럼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은 없네. 나도 이제 이렇게 사랑하면 안 되겠다. 그래본 적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오직 예수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나를 버리지 않네
그래서 아무 상관없이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그래서 세상이 뭐든지 상관없이 그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주님이 나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사랑해주고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걸어온 길이 우리의 신앙의 길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진실한 신자가 딱 한 명밖에 남을 수가 없다면 내가 꼭 그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죄의 지배를 받을 사람으로 창조된 사람도 아니고 그 죄의 지배를 받도록 주님이 여러분들을 구속하신 사람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해방된 사람들이고 여러분들이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는 것은 정말 부당한 일이고 단숨에 그것을 타파해버리고 은혜의 정부를 여러분들의 마음에 세워서 정말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예수님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발걸음 발걸음이 정말 우리 주님에게 영광이 되는 그런 너무나 사랑스런 존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Ⅳ.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가능한 신자의 경험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굉장히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충격을 받지 말고 들어보십시오. 지금부터 제가 다섯 가지 정도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여러분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게 다섯 가지의 일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있을 수가 있습니다.
1)영적 은사와 내적 깨달음(illumination)
첫째는 영적인 은사와 말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은사가 그 사람을 따라다녀서 뭔가 이렇게 은사를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없는 특별한 은사가 그 사람에게 역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그 은사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죄의 지배아래 있지 않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으면서도 그런 은사의 역사가 그를 따라다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능력을 모두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의 세계에서는 가시적인 어떤 영적인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격 속에 맺히는 진실한 신앙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가 참된 신자인 그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2)종교적 의무를 행하는 중에 경험하는 일시적인 정서의 변화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 말씀을 깨닫는 것은 어떻게 차이가 날까 입니다. 다릅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 죄를 깨닫는 것은 우선 그 깨달을 때에 그 깨달음의 깊이가 매우 깊고 그 깨달음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영혼에 깊이깊이 영향을 미쳐서 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그의 영혼을 움직이고 그의 마음과 영혼을 움직여서 새사람이 되도록 그를 깎아 나가는 거룩한 작용이 뚜렷하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느 한순간 반짝! 하고 깨닫기는 하지만 깊이 면에 있어서 아하!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아! 이거구나. 아! 이렇구나 하고 깨닫는데 불행하게도 그 깨달음이 영혼 깊은 곳에 내려가서 그를 깊이 찔러서 통회시키거나 그를 깊이 꺾어놓거나 그를 새사람이 되도록 그의 영혼 깊은 속에까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점에서 틀립니다.
3)도덕적 의무의 수행
그 다음에 또 세 번째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럴 수 있는가 하면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일시적인 기쁨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그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에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확! 들어서 뭔가 자기가 새로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는 그런 작은 변화들이 있을 수가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도리를 지킨다고 해서 그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삶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대한 열렬한 신앙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 삶을 차마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가서 살인하고 근친상간하고 남녀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 법도 질서도 없이 그렇게 짐승들이 물고 뜯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실제로 안 믿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기본적인 질서와 도덕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믿든지 안 믿든지 이 세상에 창조된 인간에게 죄가 들어온 이후에도 여전히 남겨두신 선악에 대한 감각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일반은총, 혹은 일반계시의 효과라고 부릅니다.
4)범죄에 대한 참회: 총체적이지 않고 단편적임. 자신의 악을 통해 뿌리 깊은 죄를 보지 못함.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여러분들이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참회를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기억해야할 것은 모든 참회가 자기 깨어짐이 아닌 것, 그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뭔가 하면 참회가 진실하면 자기 깨어짐을 동반하게 되는 데 그런 자기 깨어짐을 동반하는 그런 진실한 참회가 있다면 그리고 그런 참회가 계속해서 경험되고 있다면 그가 죄와 싸우고 있는 증거 일수는 있지만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새겨들으십시오. 죄에 대한 참회가 있는데 그 참회가 철저히 자기 깨어짐을 동반한 참회라고 할 것 같으면 그리고 그런 것들이 되풀이되어서 반복적으로 경험되어 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죄와 투쟁하고 있는 중일 수는 있어도 죄의 지배아래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5)죄에 대항하는 약속과 결단의 경험: 그러나 그것은 “아침 구름” 같은 것임(호6:4).
그 다음에 마지막 여섯 번째(실제로는 다섯 번째임) 신자가 죄에 대항하는 결심과 결단을 내린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언제나 이 죄에 대해서 대항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3.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l)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A. 죄의 지배의 특성: 영혼 전체와 그와 관련된 모든 기능에서 지배력을 가짐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신자가 죄의 지배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그런 위험스러운 징후의 첫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 죄의 지배의 영향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좀더 드려야겠습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아래 있게 되면 영혼의 상태가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이 죄의 지배는 영혼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영혼과 관련된 인격적인 모든 작용들의 죄는 그 영향에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죄의 지배를 받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인간의 지성은 어두움과 영적인 어두움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고 그리고 정서는 영적인 무감각과 욕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고 의지는 영적 기만과 악으로 가득 차게 되어서 망가진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B. 죄가 어느 한 부분에서의 상상력을 지배하여 사고 기능에 관여할 때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죄의 지배 아래 있음을 알리는 위험한 징후의 첫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죄가 어느 한 부분에서 상상력을 지배해서 신자의 사고 활동에 관여하게 될 때 그때에 그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징후입니다.
그러나 생각으로 떠올랐을 때 그것을 탁! 쳐서 없애버리면 신자에게 죄에 대한 상상력이 조직적으로 일어나지도 않고 그것이 강한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떠올랐다가 사라지니까, 그러나 이제 그 생각이 딱 고착이 되어서 그것을 붙들게 되면 그러면 이 속에서 체계적으로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범죄에 대한 상상을 체계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에 대한 상상을, 그러면 가만히 상상을 하면 그 상상 속에서 아주 놀라운 기쁨을 계속 맛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생각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체계적으로 그 생각을 붙들고 집요하게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렇게 됩니다. 상상 속에서 얻는 기쁨으로 만족하지 않고 죄의 실현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제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 죄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악한 생각이 예레미야 4장 14절에 나와 있는 말씀처럼 지속적으로 한 신자의 마음속에 머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동안에 이제 여전히 죄책감 같은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고의 기능에 깊이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상상력이, 그러면서 자기가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 이 죄는 가벼운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상상력이 계속 발동을 하고 사고의 기능이 깊이 관여를 하면서 ‘이 죄는 그렇게 큰 게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죄를 지을 때 뭔가 고통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상하게 아주 작은 것으로 여겨지고 죄를 통해서 맛보게 될 이 기쁨은 굉장히 큰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죄를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마음이 허탄한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아까 말씀드린 데로 은혜의 모양은 그냥 남아있지만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시체가 되어서 다 죽어서 마치 관 사이로 흘러나오는 시체 국물처럼 그렇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사실은 그 능력은 없는 그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음이 더러운 악으로 가득 차고 죄의 지배력은 더 강력한 힘을 얻게 되어서 다른 죄들도 쉽게 지을 수 있도록 죄책감을 마음속에서 벗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손을 뻗어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 전체가 악의 화신이 된 것처럼 그렇게 죄를 지어 가는 그런 파괴된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상력이 지배됨으로서 악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대표적인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교만이고, 두 번째는 유혹이고, 세 번째는 불신앙이고, 네 번째는 미움입니다.
C. 죄가 어느 한 부분에서 정서를 지배할 때
신자의 죄의 징후 아래 있는 두 번째는 죄가 어느 한 부분에 있어서 신자의 정서를 지배하게 될 때, 한 부분에 있을 때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죄의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정서가 죄의 지배를 받는 상황
신자의 제일가는 의무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종교적인 의무의 이행과 실천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명령에 걸리지 않으면 그 본분, 그 의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으면 그 모든 종교적인 실천과 의무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정한 섬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그 사람의 정서를 지배하게 되면 죄에 대한 강력한 소원을 품게 됩니다. 전에는 죄가 그 사람을 방문하고 유혹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죄가 정서를 지배 하게 되면 그 사람이 죄를 강력하게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작용들이 있게 되는데 그런데 그런 소원들이 강력하게 작용을 하게 되면 그러면 자기의 인생의 모든 계획이나 이런 것들이 전부다 자기가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그것을 중심으로 다 재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편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신자의 삶의 보좌에는 누가 계셔야 됩니까? 하나님이 계셔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어서 그 하나님 중심으로 가치와 인생의 계획과 모든 섬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뭉개져버리고 자기가 짓고자 하는 그 죄가 자기가 마음대로 행하고 싶은 자기의 그 죄에 대한 욕심, 그것이 중심부에 와서 자신의 인생의 계획을 다 재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뀌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하나님이 하는 사랑보다는 죄에 대한 소원을 계속 키워나가는데 이렇게 될 때 신자의 마음속에는 놀라운 변화가 있게 됩니다. 그 변화가 무엇인가 하면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 2장 15-16절에서는 말하기를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해 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적격의 의미를 갖는 소유격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던지 영적으로 정리된 사람이던지 무슨 초 신자든지 아니면 고 신자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너희들이 누구든지 간에 만일 너희들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너희들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죄에 대한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있고 또 죄를 지었고 그렇게 죄 가운데 있는 데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것은 맞습니다. 맞는데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런데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죄가 1,2,3,4 번 있고 저 밑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조금 있는 그런 것은 성경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부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나님을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서 첫 번째로 사랑하는 정도로 가지고도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사랑이라고 부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전부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인생에 전체의 보좌에 있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계획이 하나님 중심으로 다 재편되는 것,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2)이에 대한 처방
그런 사람들에 대한 처방이 무엇인가?
우선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첫째는 성령의 조명과 성경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해야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자신보다 영적으로 매우 뛰어나서 그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 세력들을 간파하고 그를 영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그 성경 적인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사로 찾아가지 않으면 회복되기가 굉장히 힘들다고 봐야 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최소한 죄의 속임수와 그리고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어떻게 그 죄가 자기에게 오게 되었으며 그 상태가 현재 어떠하고 자신을 어떻게 그 죄에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배우기만 하면 최소한 그것을 외면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시편 139편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죄가 지배를 해서 강하게 그의 정서를 장악하고 어떤 특정한 죄를 짓도록 그를 계속해서 마음의 소원을 두고 불일듯이 그 죄로 몰아갈 때 그때 이제 신자는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계속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데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용서해달라고 많이 기도해도 용서의 확신이 오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죄의 지배를 벗어나서 은혜의 밝은 세계로 들어오게 될 때에 그 죄로부터 자기가 단절되면서 밀려오는 영적인 확신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환경 자체가 계속 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용서받았다고 하는 확신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상황에 놓였을 때 신자가 기도해야 될 것은 사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엄습하고 내가 항거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죄의 세력들을 누그러뜨려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처방이 무엇인가 하면 악에게 대항하고 은혜의 수단을 부지런히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 아래 있고 죄에 어떤 정서에 장악이 되면 사람들이 급속하게 악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단 죄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면 이렇게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간구해도 하나님의 확신이 없고 하니까 점점 은혜의 수단, 예배에 참석하고 그 다음에 믿음에 굳게 서기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이런 일들에 참여할 의욕이 자꾸 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그런 것이 들려도 그래도 뿌리치고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갑니다. 그러면 최소한 그 죄가 진전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이라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공급이 아예 끊어져버리면 완전히 죄의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죄가 마음 놓고 확장하며 영향력을 급속하게 확대해나갑니다. 그러니까 해야 됩니다.
D. 파악 된 죄인데도 사랑을 버리지 못할 때
오늘 마지막 세 번째,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 중 세 번째는 이미 확인된 죄, 파악이 된 죄인데도 그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 없을 때, 그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증상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죄는 우리 신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죄책감을 무디게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것을 죄로 파악했는데도 그것을 도저히 버리지를 못하고 남겨둘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릴 때 그때 그는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신자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죄를 인식하고 그리고 죄를 처리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철저한 정직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의 죄에 대한 깊은 미움과 안타까움이 생겨나게 되면 그것은 결국은 그 뿌리에 대한 고통과 아픔, 자신 속에 왜 이런 마음이 있을까 하는 그 마음 깊은 뿌리에 대한 고뇌를 동반하는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악이A, B, C, D던 간에 전부다 다 거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 뿌리에서 나온 모든 악에 대해서 동일한 반감을 가져야지 만 그것이 진짜 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의 몸부림으로 해석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한 하나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이거 하나에만 몰두한 나머지 나머지는 아무렇게나 살아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아주 분명하게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자가 죄 아래 있을 때는 뚜렷한 징후가 있는데 그 징후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어떤 죄에 대한 상상력이 계속 힘을 얻어서 사고의 기능에 관여할 때 어떤 죄에 대한 욕망이 그 사람의 정서를 깊이 지배하고 지배력을 행사할 때, 그리고 그 죄가 파악이 됐는데도 그것을 버리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버리지 않으려고 할 때, 그는 확연하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4.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2)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오늘은 한 시간 내내 네 번째 징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는데 그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뚜렷한 징후가 또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딱딱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E. 마음의 굳어짐
첫 번째로 마음의 굳어짐인데 그 마음의 굳어짐은 우선 첫 번째로 완전한 굳어짐이 있습니다.
1)완전한 굳어짐(total hardness)
완전한 굳어짐은 첫째는 자연적인 굳어짐과 두 번째는 심판적인 굳어짐으로 다시 나뉘어 집니다. 자연적인 굳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자들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마음이 굳어있는 것입니다.
심판적인 굳어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경에 보면 출애굽기 9장 같은데 보면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라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사람의 마음이 굳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굳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직접 굳게 하시는 경우가 있고 사탄이 굳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적인 굳어짐은 신자에게도 일어날 수가 있고 불신자에게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2)부분적인 굳어짐(partial hardness)
두 번째로는 전체적인 굳어짐 말고 부분적인 굳어짐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원인은 무엇 때문인가. 근본적인 원인과 실제적인 원인으로 나뉘어 집니다.
첫 번째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이 타고난 부패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고난 부패성보다도 신자의 마음의 마음이 굳어지게끔 하는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데 은혜 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고난 부패성이 마음을 굳어지게 하려고 해도 계속 은혜를 받는 생활을 하면 이 부패성을 누릅니다. 부패성을 누르니까 마음이 굳어지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은혜가 들어가서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안 굳어지는데 은혜 아래 안 있습니다. 그러면 억제할 수 없이 부패성들이 계속 누룩이 번지듯이 일어나면서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실제적인 이유입니다. 실제적인 이유는 다시 두 가지인데 첫째는 범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범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있는 원죄가 아니라 실제로 자기가 실행에 옮겨서 어떤 죄를 짓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 실제적으로 마음이 굳어지는 이유는 자기 마음을 잘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을 잘 지키지 않으면 이번에는 생각과 마음으로 계속 죄를 짓게 됩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는 몸으로 직접 짓는 죄보다는 마음을 덜 굳어지게 하고 천천히 굳어지게 하지만 그러나 반복적으로 짓는 마음의 범죄는 필연적으로 그 사람 안에서 은혜를 몰아내고 그 마음이 딱딱해지게 만드는 실제적인 역할을 하고 실제로 죄를 짓는 것도 이렇게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데서 자기의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토대로 해서 범죄로 나갑니다.
그러면 이제 중요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러면 그렇게 마음이 굳어지는 일이 신자에게 일어날 수 있다면 마음이 굳어진 증거들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의 기꺼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말씀을 무엇인가 자기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래서 자기의 죽은 것과 같은 영혼이 살아나도록 깨우고 내가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만들어주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 신앙의 길을 보여주고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없는 힘이 없는 나를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으로 나를 힘주시기를 원하는 그렇게 해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말씀에 의해서 그렇게 영향을 받아야겠다고 하는 의지와 기꺼운 마음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죄책감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때, 그 마음은 굳어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아직 굳어진 마음이 아닐 때에는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굳어진 마음의 상태에서는 안 그렇습니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의 악행과 죄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은혜 아래 있어서 마음이 부드러울 때는 다른 사람이 악을 행하거나 죄를 짓고 그래서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려 드렸다는 소문이 들리면 자기 자신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들어가면 죄를 지은 사람들은 어떨 때 안심하는가 하면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을 때 안심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지명수배를 받고 도망 다닐 때보다는 수갑 채워서 옥 속에 들어가서 죄수들과 함께 있을 때가 훨씬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 다니는 사람들을 빨리 잡아서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여기 많구나 생각하게. 죄인이 가장 불안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의로운 사람들 틈바구니에 자기 혼자 있을 때, 그때에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오는데 그것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외로움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악인은 의인을 도와주는 것 없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런데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악행에 대해서 아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네 번째,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불쾌감이나 아픔 같은 것들을 이렇게 인식하는 마음의 지각들이 다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통곡하실 정도로 탄식하고 아파하시는데도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죄와 불순종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왜? 마음이 굳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굳어진 마음이 바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증거입니다.
3)은혜의 지배를 불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심각한 굳어짐
그 다음에 오늘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런 마음의 일반적인 굳어짐보다도 이런 종류의 굳어짐이 있을 경우에는 도저히 그 굳어짐이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굳어짐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커다란 죄를 짓고도 그릇된 안정감과 무감각 속에서 지낼 때, 그때는 마음의 굳어진 게 그냥 일반적인 굳어진 것이 아니라 특별하게 굳어졌기 때문에 일반적인 은혜의 수단으로는 그것이 회복이 잘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일상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이런 정도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럼 다른 것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매일매일 경험하는 은혜의 정도를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굳어짐입니다. 아주 딱딱하게 굳어진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큰 죄를 짓고도 불안하거나 죄책감이나 괴로움이 없이 편안하거나 그 다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이 지은 큰 죄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이 없는 상태가 계속 될 때, 이것은 굳어진 마음 중에서도 아주 심각한 굳어짐입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아니면 치료가 안 됩니다.
두 번째는 어떤 상황에 있으면 거의 은혜의 지배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을 정도가 되는가 하면 한 가지 죄에 대한 죄책감이 다른 죄에 대해서 거의 방심하게 만들 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된 참회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지은 한 가지 죄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껴서 다른 것은 아직 죄를 안 지었으니까 한 가지 죄를 지었으면 그 죄를 더듬어 가보니까 뿌리가 발견되었는데 자기 속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발견한 것은 죄책감을 느끼는 계기가 됐고 그 계기를 통해서 자기 속에 있는 깊은 뿌리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인데 자기 속에 이렇게 하나님을 거스르고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완고한 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죄책감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경우는 한 가지 죄를 지었는데 죄책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뿌리를 찾아가서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그 뿌리를 보고 아파하고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게 아니라 이루어진 하나의 사건 하나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그것만 없었으면 내가 진짜 깨끗한 사람인데 내가 왜 그랬을까? 이런 자책감 하나에 시달리다가 그 다음에는 다른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경계심을 늦춘 가운데 수많은 죄들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일상적인 은혜의 수단으로서는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하게 하는 그런 세속적인 틀에 있을 때,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선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모든지 뭘 벌어먹고 살아야합니다. 그런 것을 해나가야지 되는데 그렇게 해서 어쩔 수 없이 직업을 가졌는데 환경 자체가 도저히 신앙을 적용하기 힘들 정도로 악한 구조를 가진 것입니다. 직장이 이상하게 악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이중장부를 쓰라고 하고 세금을 포탈하라고 그러면서 거짓말로 보고서를 쓰라고 하고 그리고 고객들에게 있지도 않은 사기를 치고 이런 것들을 강요하는 구조의 경우에는 자력으로 회복될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또 하나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관련된 것인데 도저히 그 교회에서는 정확하게 복음을 가르쳐주지 않아서 정상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그때는 자력으로 그 굳어진 마음으로부터 회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마지막에 두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죄 죽임도 없고 열매도 없는 신앙생활 속에서 스스로 만족해하면서 살 때, 그때는 진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가능성이 정말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때에는 마음이 깊이 굳어져서 의무인데도 그것들을 아주 태만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매일 성경을 읽어야 되는데 그것도 의무인데 안 합니다. 왜 안 하느냐. 그냥 하기 싫으니까 안 합니다. 그래도 해야 되는데 안 합니다.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가책을 안 느낍니다. 그렇게 굳어지는 가운데 의무를 행한다고 하더라도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그렇게 죄 죽임도 없고 열매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깊이 굳어진 상태에서는 특히 설교에 의해서 거의 영향을 안 받습니다.
5. 죄의 지배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3)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서론
그래서 벌써 오늘 삼일 째,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에 대해서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복습을 하자면 첫 번째 어떤 일이 있으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상상력이 사고의 기능에 관여할 때로서 죄악 된 상상력이 꾸준히 사고의 기능에 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특정한 죄악 된 생각이 정서를 지배할 때이고, 그 다음 세 번째는 어떤 특정한 죄를 발견했는데도 그것을 버리는 데 대해서 주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네 번째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마음이 굳어져 있을 때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 한 가지를 더 언급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의 방편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를 죽이며 은혜 아래 살도록 주신 방편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활용하지 않고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죄 죽임을 위한 은혜의 방편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그것은 자기 부인이 없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 세 번째는 내세를 묵상하지 않는 것, 네 번째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 죄 죽임의 주체는 성령
신자는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죽이지 않고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럼 죄는 무엇을 통해 죽을까요? 인간은 여러 가지의 모양으로 경건해지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을 쳐도 자신의 행실을 가지고는 내재하는 죄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죄는 성령님이 주체가 되어 죽이실 때만이 죽습니다. 그러면 얼른 생각하기에 ‘그러면 우리 안에 죄가 죽지 않는 것은 성령님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성결의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죽이고 성결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에 그 집이 더럽고 불결한 집이기를 원하시지 습니다. 깨끗하게 정돈되어서 당신이 편안하게 거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가 정결해지고 죄를 죽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 말씀을 도구로
그리고 그 일에 주체적인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성령님 혼자 그 죄를 죽이실 수는 없습니다. 우선 어떤 수단이 필요하고, 다음으로 인간의 반응을 필요로 합니다. 수단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적용하는 것 없이는 결코 죄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그 적용이 없는 곳에는 성령님이 대체적으로 거의 역사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과 관련지어서 말할 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 하시는 성령님이라고 하는 공식을 가슴에 깊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아무리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스스로 곤고한 사람이라고 몸부림치며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그 적용이 없는 곳에는 냉정한 이야기지만 성령님이 그 죄에서 그 신자를 건지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인간의 순종을 통해서 죄를 죽이심
두 번째는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죄를 죽여나가심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이끌어내어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죄도 은혜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에게 홀로 역사 하여 지배력을 확대한 것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순종하는 신자의 반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성령님이 역사 하시는데도 우리의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을 때, 성령님이 그 사람 마음에 안에 오셔서 지배하시려고 하는데 죄의 지배력들을 쫓아내시고 은혜의 지배력들을 확장하시는 그 일은 안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성령님의 능력의 한계를 느껴서는 안됩니다. 성령님의 능력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거룩한 생활에 있어서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거룩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거룩할 수 있는 성화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우리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1) 자기 부인이 없음
- 신자의 적은 성령으로 거룩해지지 않은 ‘옛 자아’
죄 죽임을 위한 은혜의 방편을 소홀히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첫째로 그는 자기 부인이 없는 생활을 합니다. 신자의 가장 큰 적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흔히 신자의 가장 큰 적이 사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귀를 꺾어야지만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상한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신자의 마음이 그 마귀를 향해서 문을 열고 거기에 반응하지 않으면 제 아무리 강력한 권세를 가진 마귀도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를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최대의 적이 마귀이기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마귀가 최대의 적이 아닙니다.
흔히 사람들은 많은 유혹으로 다가오는 세상이 신자의 가장 큰 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도 신자의 가장 큰 적은 아닙니다. 가장 큰 적은 자기 안에 남아 있는 부패한 옛 자아, 예전에 죄된 본성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는 그 옛사람의 본성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자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대적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아무리 흉흉하고 도둑들이 날뛰어도 문을 단단하게 닫으면 못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을 고쳐서 제대로 잠그는 게 낫지 문을 열어놓기 위해서 온 세상 다 돌아다니며 도둑과 도둑이 될만한 사람을 다 때려잡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일평생을 헌신한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미국 도둑과 한국 도둑이 만나서 사업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한국집은 삼엄해서 접근하기가 힘듭니다. 문을 굳게 잠그고, 담장에는 유리조각까지 꽂아놓아서 도대체 손을 벨까봐 올라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담도 별로 없고 있어도 슬쩍 뛰어 넘어가면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저 예쁘장하게 치장한 나무 담장 정도입니다. 한국은 개를 길러도 송아지만 한 개를 기르지만 미국은 개가 거의 없고 있어도 대게 집밖에 있지 않고 자기들이 데리고 잡니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 집들은 그렇게 무섭고 철창이 되어 있어도 일단 담장만 넘어가면 모든 문이 환영하며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가서 일 보기가 좋은데, 미국 도둑이 하는 이야기는 미국은 대문이 없거나 담장도 낮아서 펄쩍 넘어갈 수는 있지만 문이라고 하는 문은 완벽하게 잠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차이였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도둑이 많아도 문을 굳게 잠가놓으면 괜찮습니다. 저희 교회는 하루에 20시간을 개방해 놓습니다. 아직까지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발생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부분에는, 어디라고는 제가 말씀드릴 수 없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강력한 경보와 함께 119로 연락이 되는 시스템을 갖추어 놨으며 교회 구석구석이 24시간 비디오로 녹화가 되고 있습니다. 화장실만 빼놓고 거의 모두 녹화가 되고 있습니다. 경비실에서 모니터를 틀면 전 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비 시스템이 무엇인지를 아는 도둑들은 와서 한번 망보고는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자기 안에 있는 ‘옛 자아’라고 불려지는 부패한 본성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말했을 때, 사도의 경험에서 못 박혔다고 느꼈던 내가 바로 옛 자아입니다. 그렇게 이 자아가 계속 살아서 계속해서 뭔가를 원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를 남 보듯이 하는 경향을 가져야 합니다.
- 생각과 소욕을 부정함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기 전에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남 보듯이 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소원도 아니라고 부정하고 자기 안에 있는 생각도 안 된다고 부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a. 소극적인 측면
① 이성으로부터의 자기 부인
이러한 자기 부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 부인의 소극적인 측면인데 자기 이성에 대한 부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자기의 생각, 혹은 이성을 시시때때로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각은 결국 무엇을 사랑했는지에 의해서 집중되는 것이고, 무엇을 사랑했는가에 따라서 이 생각들이 계속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돈으로만 보이고, 특정한 취미에 빠진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그것과 연관시켜서만 생각합니다. 바둑에 한번 흠뻑 빠져서 거의 미치다시피 해보십시오. 사람들이 이렇게 앉아 있으면 ‘이렇게, 이렇게 해서 아다리로 죽고 이렇게 하면 대마가 죽는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얀 옷, 까만 옷 입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저거 단수치면 저거 죽는데’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구약 성경인 히브리어에 깊이 빠져서 거의 심취하다시피 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일평생을 그런 것을 연구하다가 죽을까도 생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주님 못 만났으면 그럴 가능성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한번 배우고 나니까 얼마나 재미있는지 한창 성경을 히브리어로 보다가 누우면 천장에 히브리어 글자가 떴습니다. 어디 집회에 가서 여관에 누워서도 벽지 무늬를 보면 히브리어 글자가 막 굴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게 자기가 좋아하면 거기에 온전히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그렇게 떠오를 때에 무엇을 향한 사랑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신자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보장이 있으면 자기를 부인할 필요 없이 격려만 해주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옛 자아가 우리 안에서 죽지 않고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누르지 않게 되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떠오르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익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때로는 생각과 사상에 있어서도 성경을 통해서 자기가 잘못됐다 라고 하는 것을 밝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도 성경 말씀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더 주장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떠오르는 모든 것에 고개를 끄덕이면 마지막에는 패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떠오르고 있는 생각을 부인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이나 사상, 이런 것들을 부인하고 그것을 성령님께 복종시킬 수 있는 부인을 가져야 됩니다.
② 이성에 작별을 고하고 욕망에 재갈을 물림
그 다음에 소극적 측면의 두 번째는 자기 이성에 작별을 고하고 욕망에 재갈을 물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5절에 “너희의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할 때 그 지체는 욕망을 느끼는 지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자가 되었어도 그 속에 죄 된 욕망과 본성은 남아 있습니다. 때문에 성령의 은혜로 그것이 다스려지고 통치될 때는 기를 별로 못 피지만 성령의 은혜가 사라지고 고갈되어서 죄의 지배 아래 있게 되면, 혹은 지배까지는 안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유혹을 받을 때 부분적으로나마 불순종하게 되면 강력한 욕망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그 욕망을 모두 허용하고 들어주면 결국 그 욕망은 자라고 자라서 하나님의 율법도 불살라버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의 보좌를 내어놓으라고 대적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전능하신 하나님도 만족을 시켜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부귀 영화를 누렸던 사람들 중에서 나는 이제 많은 것을 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라고 그렇게 선언하고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은 자기의 욕망을 이 무한한 우주 앞에서 접는 것을 무엇인지 안 사람들만이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는 말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의 철학자들도 그랬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의 경우에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애굽에서 하나님의 큰 능력을 따라서 기적적으로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광야로 나올 때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경험하고 매일 만나를 먹으며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고 불기둥의 보호를 받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전대미문의 위대한 부흥을 경험하면서 광야로 나와서 이제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는데 그들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까?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원망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고기가 먹고 싶다. 수박과 참회가 먹고 싶다. 정욕에 좋은 파, 마늘 먹어본 게 도대체 언제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불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애굽에서 나와서 새로운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믿음이 생겼어도 여전히 그들 속에는 애굽에서 먹던 그 세상의 맛난 음식들에 대한 육적인 욕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부인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 자녀를 망치고 싶으시면 해달라고 하는 대로 해주십시오. 그러면 필연적으로 망가집니다. 어려서부터 자녀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안 되는 일도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게 기를 살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안 되는 일도 많이 있지만 노력하면 그것들 중에 상당한 부분들은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함께 심어주어서 균형을 이룰 때 그가 세상에서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수가 말을 채찍질하면 몇 십 킬로를 총알같이 달립니다. 그러다가 멈추려 할 때, 어떻게 섭니까? 자동차는 브레이크를 밟으면 되지만, 말을 세울 때는 탁! 잡아채면 아가리가 찢어지는 것 같으니까 발을 들면서 길길이 뛰면서 말이 섭니다.
우리의 욕망도 그런 식으로 재갈을 딱 물려서 한 손에 쥐고 있어서 조절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죄 된 욕망이 나를 재갈 물려서 반대로 욕망이 나를 잡고 의에 길로 가려고 하면 욕망의 길로 잡아채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잡아채서 죄에게 순종하도록 만듭니다.
자기 부인은 바로 이렇게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그 욕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 보듯이 해야 합니다. 자기를 야단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하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옳지 않다고 자기 자신을 혼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싶을 때 그런 식으로 하와가 자기를 다루었더라면 그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시편 42편, 43편에서 하나님 앞에 크게 낙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자기 자신을 타이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어찌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느냐. 눈을 들어서 주 너의 하나님을 바라보아라”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영혼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을 바라보아라. 그렇게 자기 자신이 남인 것처럼 그렇게 대화하면서 그것을 재갈을 물리면서 생각과 욕망을 부인하는 것이 자기 부인의 소극적 측면입니다.
b. 적극적인 측면
① 이웃을 사랑함 : 자기 사랑을 비움으로서 가능
그러나 자기 부인은 이런 소극적인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적극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반드시 희생이 뒤따릅니다. 자기를 과도하게 사랑하면서도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행복이 자기의 행복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경우에는 가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아비와 어미를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효도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비와 어미를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이 성경의 정신인데 “아들이나 딸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자도 내게는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의 구현으로서 자녀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관련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 그렇게 퍼져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독버섯처럼 번져 있는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사랑이 대부분 이런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확대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가족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만 잘산다고 해서 잘사는 건 아닙니다. 형제 하나가 바닥으로 구르면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자기 사랑이 연결되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부모 공경, 자식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치 않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을 반드시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기 사랑을 비우지 않으면 기술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옷을 주기 위해서는 추위를 피하고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는 자기 사랑을 비워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자기는 추위에 떨고 추위에 고생하고 있는 이웃을 위해 자기의 외투를 벗어줄 수가 있습니다. 구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②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에서 나옴 : 하나님 사랑을 공유함
그럼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할 가치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선 다른 사람을 사랑할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은 ‘당연하지 뭐!’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죄인도 마찬가지고 죄 용서받은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간에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께서 굉장히 소중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즉 죄인들은 타락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지라도 그들 안에 두신 당신 자신을 닮은 그 형상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 당신의 형상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서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창조될 때에 원래 하나님이 생각하셨던 목적대로 사는 보람을 느끼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어서 그 하나님의 형상이 그 사람에 의해서 존중히 여김을 받으면서 그 하나님의 형상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그런 존귀한 형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그렇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짐승 같은 생활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심판 받을 일을 행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더 파괴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것들을 불신자들은 알 수가 없고 신앙이 어린 신자들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보니까 자신 안에도 그런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이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각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동의할 수가 없는데도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너무나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어떻게 하든지 이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참된 길을 알려주어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과 믿음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원과 사랑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라고 보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향한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고 한 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들을 영적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을 아는 사람들만이 사람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을 행해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그 차원정도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자기 안에 두신 그 형상을 따라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에 그가 많이 짓는 죄는 미워하면서도 그 안에 고통받고 있는 그 하나님의 형상을 인해서 가슴 아파하고 그를 긍휼히 여깁니다. 그리고 그에게 구원의 기회가 이르기를 사모하며 기도하고,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기 위해서 자기에 대한 사랑을 기꺼이 포기하는 삶,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의 적극적인 측면입니다.
자기 부인은 다시 요약을 하자면 떠오르는 자기중심, 자기 이익에 집착하는 생각을 부인하는 것이고, 또 자기의 끌어 오르는 욕망들을 판단해서 아니라고 남을 타이르듯 부정해서 생각이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욕망이 일어날 때는 그것이 의지를 자극해서 욕망대로 살지 않도록 그것을 끊어버리는 것이 자기 부인의 소극적 측면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향한 이기적인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감화로 비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 봉사하면서 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이어진다는 자기 부인의 적극적 측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정말 우리들이 이런 자기 부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자기 부인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항상 개인적인 간증이 참 많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자기 깨어짐이 많은 이유는 그들이 정결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도 쉽게 죄 된 생각에 이끌리거나 혹은 부패한 성향의 유혹을 받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 아래 있을 때는 자기 안에 아직 욕망으로 번지기 전에 악한 생각,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생각이 떠올라올 때, 자기의 이성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부인들이 은혜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는 참 많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생각이 떠올랐다가도 옳은 생각과 옳지 않은 생각이 구별되어서 어떤 것들은 쓰레기통에 들어가 버리고 어떤 것들은 잘 보존이 되어서 마음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들은 은혜 아래 신자들은 가지고 있는데 죄 아래 있는 신자들은 이런 기능들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아주 미약하고 희미하게 밖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그런 생각을 품으면 안되고 그런 생각자체가 성경에 반항하는 생각인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생각이 떠오르도록 놔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 계속 떠올라서 자기 자신의 부주의함과 나태함 속에 방치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그 생각을 계속 북돋아 올려서 옳지 않은 생각들이 그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도 자기 안에서 죄 된 욕망이 솟아오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솟아오르지만 그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은혜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뭘 하고 싶어도 성경에 비추어보아서 그것이 옳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남 보듯이 하며 대화하는 것입니다. 안돼! 나도 하고 싶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싫어하셔. 안돼! 또 유혹이 다가오면 예전에 죄를 짓고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가를 생각하면서 뿌리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욕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자기 부인에 경건한 능력이 은혜 아래 있을 때는 있습니다. 그래서 유혹을 받아도 그것들을 부정합니다. 욕망이 생겨도 그 불을 쉽게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한번 욕망이 불붙으면 그것이 막 활활 타오릅니다. 활활 타올라서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 통제가 안 되는 상태까지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게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깨트려질 수가 없습니다. 계속 불붙어서 정욕과 악한 생각, 거짓 이런 것들에 불이 붙어서 자기가 파괴되어 가는 경험만 있지, 그것들이 부정되어 깨트려지는 경험이 없어서 통회 속에서 자기의 생각이 부정되어지고, 욕망이 억제되어서 그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경험들이 없거나 매우 희박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에게 자기부인이 있습니까? 자신의 육신적인 생각을 성경에 비추어서 그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지지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렇게 하고 싶은데 성경이 금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욕망을 부정하는 하고 있습니까?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런 욕망이 너무 많은데 어느 한순간에 그것이 너무 하나님 앞에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깊이 하나님 앞에 참회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녹아져서 그런 죄에 대한 사랑의 욕망이 깨트려져버리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참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깨트려짐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정결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얼마나 유혹을 많이 받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단지 유혹만 받는 사람이 아니라 얼마나 그것과 더불어서 치열하게 분투하면서 사는가 하는 것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분투 속에서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 안에 있는 옛 자아의 소욕들을 이기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두 사람을 어떻게 똑같이 보시겠습니까? 자기의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대로 살아서 그것을 키워 신앙적으로 옳지 않은 사고 속에서 살고, 욕망이 일어나면 그것들을 누룩처럼 확 번지게 해서 강력한 욕망으로 자라기까지 방치면서 사는 그런 사람과, 그것과 더불어서 철저하게 싸우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동일하게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는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그렇게 싸우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싸웁니까? 주님 때문에 그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부인이 없으면 단숨에 자기가 죄에 삼켜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극상품 포도나무가 되기는커녕 들 포도와 같은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대신 수치를 안겨드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싫어서, 자기 안에 그 하나님을 잃어버리기 싫어서 간절히 매달리는 몸부림입니다.
만약 여러분 마음속에 이런 것이 없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2) 십자가를 지지 않음
두 번째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죽임을 위한 은혜의 수단을 활용하지 않는 것이고 더불어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상징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나의 십자가’라고 하는 그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가 있고, 상대적인 의미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라고 하면 고유한 십자가가 있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우리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말할 때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도 지게 해주십시오’ 하는데 그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질 수도 없고 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 홀로 지신 십자가입니다. 누구도 그것은 대신 질 수가 없는 십자가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 우리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도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가 있고 다시 상대적인 의미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 좁은 의미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과오, 잘못, 이런 것과는 관계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지키려고 하는데 다가오는 순교의 시간이라든지, 자기는 인격적으로 부족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것이 결코 없는데도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당하는 박해, 이런 것들이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가 않고 평화로운 때는 더더욱 이런 십자가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또 다른 십자가가 있는데 이것이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십자가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무엇인가 들어보십시오.
a. 신자의 십자가 : 성화를 통해 성숙하게 하려고 사용하시는 환란이나 고통들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성화를 통해 성숙하게 하려고 사용하시는 환난이나 고통,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성화를 통해서 성숙하게 하시려고 사용하시는 환난이나 고통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심지어는 타고난 자신의 잘못된 성격도 십자가라고 말할 수 있고, 때로는 자기가 놓여 있는 삶의 상황, 어려운 집안 환경, 심지어는 자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그 죄의 결과들까지도 그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를 성화시키는 수단으로 삼고 계시다면 그것이 훌륭한 우리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를 진다면 하나님 앞에 정말 상 받을 일이 많겠지만 상대적인 의미의 십자가를 진다고 하더라도 그 십자가를 지고 인내함으로 믿음으로 걸어가서 우리를 성화를 통해 성숙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해 가기만 하면 그 십자가를 지고 산 그 모든 고난도 하나님께서는 상 주실만한 고난이라고 보시는 것입니다.
b. 인내가 필요함
그런데 이 십자가에는 야고보서 1장 4절에 나온 바 와 같이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대부분 이 십자가는 몇 초 동안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주사를 맞는 것 같은 순간적인 통증이 아니라 오래 계속 짊어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화의 작용이라는 것 자체가 주사를 맞듯이 고난을 주입시키면 한번에 정결케 되고 성화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랜 시간에 걸친 과정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화를 통해 우리를 성숙케 하시려고 우리에게 지워주신 십자가는 한 시간 있다가 나타나고 두 시간 있다 사라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시간 동안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매어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인내한다는 것은 항상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옛 자아의 본성은 고통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파괴해서라도 편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옛 자아의 본성입니다. 결코 옛 자아는 고난을 받더라도 정직하게 십자가를 지고 오래 참으면서 가야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감당할 때 : 성화의 과정이 촉진됨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과 자신의 이익이 충돌을 일으킬 때, 성경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유 때문에 나 자신의 이익을 피눈물 나게 포기하는 경우는 흔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변명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잘못해석 해서 피난처를 찾거나 혹은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면서 현실론자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런 야합을 통해 결국 성경이 이야기하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 고난을 교묘하게 피해갑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그 십자가를 지면 죄 아래 있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들어가게 될 텐데 결코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성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은 성품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살아온 과거가 너무 일그러지거나 칙칙하게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굽어지고 비비꼬인 성품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남들은 다 웃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자신은 거기서 비비꼬여서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야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면 자신 속에 너무나 거친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발견하고 나면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 자기의 뒤틀려진 심사는 그렇게 하기를 원해도 이것은 성격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따르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자기가 성격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참는 게 굉장히 어렵습니다. 저는 자신이 그렇게 겸손하지 않습니다만 교만한 사람과 마주앉아 있는 것을 못 견뎌합니다. 노골적으로 얼굴에 표현이 자꾸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너무 힘듭니다. 그런 약점을 알고 노력을 많이 해야지 되는데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집에 가서 땅을 한 평 파달라고 하면 파주겠는데, 교만 떠는 그 광경을 계속 지켜보는 것은 속이 막 뒤틀려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내하지 않고 참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안지는 것입니다. 그럼 자기 성품은 안 바뀝니다.
또 성화의 측면만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측면을 우리들이 알아야 합니다. 인격적 성화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적 성화의 측면을 이야기해봅시다. 우리는 연초에 사명을 받아서 사명을 감당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쉬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감당하려고 할 때, 때론 주위에 돕는 사람이 많고 모든 환경이 편해서 순풍에 돛단배 같이 잘 나갑니다. 그때는 열심히 봉사하고 순종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닥칩니다. 시련이 오고, 영혼들을 맡았는데 그 영혼들이 시험에 들고, 동료 교사와도 갈리고, 구역이 봉사를 하는데 구역의 식구들도 말을 안 듣고, 자기의 권위도 인정해주지 않고, 누구 하나 와서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도 그것을 다 짊어지고 사랑하며 돌보면서 가야하는데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중간에 도중하차 하고 맙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요즘은 그런 사람이 우리 교회에는 없습니다만 흔히 이렇게 합니다. ‘목사님, 저 구역장 못하겠습니다. 제가 영혼들을 온전히 돌보지도 못하면서 이 자리를 맡고 있다는 것이 양심에 너무 가책이 됩니다.’ 이게 사실은 입바른 말입니다. 그렇게 가책이 되면 가책 안 받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솔직해져야 합니다. 싫으면 싫다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교역을 이렇게 해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도들이 어떻게 낸 헌금인데...’라며 떠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두 번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엄청난 양심을 소유한 사람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렇게 양심에 가책이 되고 가슴이 아프다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발이 부르트도록 심방하고 자기의 귀한 것을 벗어 지체들에게 나누어주고 피붙이처럼 끌어안고 그 영혼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가증하게 거짓말이나 해서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정직하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저는 도저히 안될 것 같습니다. 더 좋은 분에게 자리를 내어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직한 것입니다.
먼저 말씀드렸듯이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양심이 마비가 됩니다. 없는 죄책감을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부풀려서 구역장을 감당 못한 것에 대해서 참회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말도 되지 않는 위선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면 혐오스러워 하실 일입니다. 막판까지 숨이 넘어가도 정직해야 합니다.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그리고는 그만 둡니다. 이제 십자가는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안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싫으면 안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후의 고생을 계속 하게 되면 그 고생은 이제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벗어버리고 가면 하나님이 안 기뻐하십니다. 그럼 되는 일도 없고 고생을 계속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고생일 뿐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 속에서 예수의 정신을 품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참아 성화를 이루고 성화를 통해서 자기 자신이 성숙한 사람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수단이 될 때에 그것을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고 세상길로 나가서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형식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며 겪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생고생일 뿐입니다. 그런 고생을 통해 점점 더 거룩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더 강퍅하게 변해 가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에는 그 사람을 거룩하고 성화 되고 성숙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도 말하기를 ‘우리 안에는 고난을 그렇게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접촉하는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를 그렇게 성화 시킬 뿐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거룩하게 만드실 그런 도구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맡은 사명을 팽개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아십니까? 이건 겨우 잘 감당하면 집도 얻고 복도 받는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와 관련이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 미끄러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미끄러질 때 사명에서도 함께 미끄러집니다. 그리고 완전히 미끄러져서 나동그라진 사람들에게는 붙들고 가야할 십자가가 없습니다. 고생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티끌만한 것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이 주어지고 직분이 맡겨지면 이것을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나올 수도 있고 집어치울 수도 있고 중간에 사표 낼 수도 있습니다. 월급을 받습니까? 무슨 상여금이나 퇴직금이 있습니까? 이것은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자기와의 직접적인 관계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맡겨주시든지 간에 거기에 생명을 걸고 그리고 그것을 십자가로 짊어져야 합니다. 고생이라고 짊어져서는 안됩니다. 십자가로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그것을 인내함으로 자기에게 매어진 그 십자가를 감당해나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어떤 분의 이야기입니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불륜관계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정상적이지 않은 사생아로 태어나자 그 여자는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이를 집에 데려와 기를 수 없어서 먼 친척집에 맡겨 기르게 되었습니다. 버릴 수도 있었지만 은혜를 받고 자신의 지난날의 지은 죄를 깊이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그 아이를 키우는 과정 가운데 현실을 자기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몸부림을 치니까 죄의 씨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면 감당해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세상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상처 받고 어렸을 때 학대받았던, 깨트려진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왜 우리 엄마 아버지가 날 낳았을까? 나는 왜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 그따위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나는 아직까지도 우리 아버지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마지막에 죽는 것은 아버지 영혼이 아니라 자기 영혼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십자가화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프고 괴로워도 끌어안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질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지려고 애를 쓰면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안 지려고 합니다. 다 집어 팽개칩니다. 왜 하나님이 자기에게 소중하지 않은데 본성에 거스르는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괴로워하면서 조가비처럼 이 속에서 고통을 안고 그렇게 아파하겠습니까? 안 합니다. 십자가 있습니까?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는 그만두고 상대적인 의미의 십자가가 있습니까? 회피할 수 없는데 그것을 짊어지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파하면서 괴로워하는 그런 것이 있습니까?
d. 성령의 위로를 통해 성례전적인 효과를 가져 옴
전 저의 지난 신앙의 과거들을 돌아볼 때에 정말 그런 점의 십자가가 너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랬습니다. ‘예수님, 성경은 순 거짓말이군요. 예수 믿으면 무슨 금시발복 하는 것처럼 쓰여 있는데 예수 믿고 나니까 예전엔 사람으로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예수 믿었는데 이번에는 신자로 사는 것은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백 번이나 힘드네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 대신 놀라운 게 있습니다. 옛날에 세상에서 고생할 때는 그냥 고생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다가 죄 가운데 누구 원망하고 눈을 부릅뜨고 죽으면 끝인데 지금은 백배나 더 고난을 받고 그 십자가가 무겁고 어려워도 믿음으로 지면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1장 7절에 보면 성령의 위로를 통해서 우리가 그렇게 십자가를 지면 좀 어려운 말로 성내전적인 효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즉 그 십자가를 짐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떡과 포도주를 이렇게 먹고 마실 때 주님이 느꼈던 그 고난과 아픔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옵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런 십자가를 질 때에 그때 전해오는 것입니다.
전도사 사역을 할 때의 일입니다. 정신질환으로 약이 없이는 살 수 없었던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의 말로는 약을 먹지 않으면 면도칼로 머리를 쪼개는 듯한 아픈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약을 끊기로 결심했다면서 이러한 간증을 했습니다. 전에는 머리가 아프면 벽에 머리를 박으면서 고통하며 몸부림쳤지만 이제는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하며 기도하면 고통이 기도 때문에 감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은혜가 마음속에서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픈 고통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은 지 6개월도 안된 형제가 이 교리를 체험한 것입니다.
e. 그리스도의 고난을 온전히 드러냄
저는 전도사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쁜 교수 생활과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몇몇 교수들은 저에게 심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교수 생활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내가 생명을 바쳐 뭔가를 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핏기도 없이 매주 드나드는 회심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 영혼들, 지옥에서 저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그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그렇게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로 생각하면 당장 그만두고 연구실에 조용히 앉아서 공부해야 되지 않나 싶어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영혼들이 회심을 안하고 나를 괴롭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더 많이 울면서 하나님과 하나 되고 그 십자가를 지면서 아버지와 하나 되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그 시대를 인해서 그렇게 아파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그러면서 정말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노래처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 번째 생각이 영혼들이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도저히 다른 사람이 대신 지어줄 수 없는 십자가라고 느껴졌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설교를 할 수 있게 제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뭐가 모자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충분한 고난을 치르셨는데 그리스도의 고난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참여하게 되니까 그 십자가를 지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고난의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서 그리스도와 고난을 통해 하나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그런 고백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까다로운 시어머니 돌아가셨으면 좋겠고, 속 썩이는 아들놈 빨리 군대 가버리면 좋겠고, 매일 게으름피고 돈이나 달라는 성질머리 더러운 딸년은 빨리 시집이나 가버리면 좋겠고, 교회에서 맡겨진 많은 일들은 빨리 12월이 와서 청산했으면 좋겠고, 교회에 너무 너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이 도대체 왜 그 모양으로 할까? 이렇게 투덜대고 불평하고 있는 동안에 여러분들의 십자가는 모두 집어던진 것입니다. 불평이 많은 사람, 인내할 줄 모르는 조급한 사람 치고 십자가를 지고 꿋꿋하게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은혜의 지배를 떠나서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는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지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설교하면서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여러분들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그렇게 찾는 내가 나타났는데 하나만 말해라. 무슨 소원을 들어주랴?’라고 하시면 말할 수 있는 기도의 제목이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무엇 때문인가 하면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성문이 불타고 동족들이 고통 받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왕의 곁에서 섬기던 어느 날 아닥사스다 왕이 물었습니다. ‘느헤미야야 안색이 왜 그러니? 왜 무슨 일이 있니? 무슨 소원을 들어줄까?’ 그랬더니 ‘아... 어... 저... 모르겠는데, 생각 좀 해보고요.’ 이랬습니까? 자기 동족에게 보내달라고 즉석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가슴속에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 왕국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살아도 성문이 다 불타고 동족들이 고통을 받는다는데 아! 어떻게 하나. 아프도다. 내 마음이여.’ 이게 있었기 때문에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이것입니다 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있습니까? 이것은 지금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치명적인 부분을 더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말할 수 없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까?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것을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십자가 말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완성되고 나면 또 다른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십자가를 지면서 견디기 힘든 고통, 정말 가슴이 저려오는 아픔, 이런 것들이 있습니까?
새벽기도를 작정하면 뭐합니까? 기도 할게 있어야지 새벽에 나와서 기도를 하지 않겠습니까? 가슴 저미는 기도 제목이 없습니다. 왜 십자가가 없을까요? 굉장히 많았는데 다 벗어치운 것입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자기를 힘들게 하니까 마음속으로 관계를 정리했고, 형제들 귀찮게 하니까 멀찌감치 떨어트려 놓고 남의 일보듯 하고, 구역장, 교사, 무슨 사명을 감당해나가다 이 사람 저 사람 부딪히고 힘드니까 12월부로 청산하고 정리했습니다. 없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뭘 기도할게 있습니까? 다 버린 십자가, 아니 십자가가 있어야지 가슴이 저미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피가 땀이 되도록 진액을 쏟으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놓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 벗어버렸는데 가슴 저미는 기도 제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가슴 저미게 기도하려고 해도 그렇게 기도가 안 되는 것은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있으면 말을 하기도 전에 무릎을 꿇으면 마음이 물 같이 녹습니다. 어떻게 기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삶 속에 있는 절대적인 십자가는 그만 두고라도 상대적인 십자가가 이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거룩해 지고 성례전적으로 그리스도와 일치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것이 없으면 결론적으로 그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3) 내세를 묵상치 않음
마지막 세 번째는 내세를 묵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에는 모든 생각이 세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입고, 먹고, 마시고, 생활하고, 즐기고 하는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물론 세상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돌아가는 것도 알아야 할 필요도 있고, 또 적절하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하게 살다가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좀 더 잘 먹으십시오. 돈 벌면 힘들게 그렇게 애들 데리고 단칸방에서 고생하지 말고 좀 더 넓은 집에서 사십시오. 그리고 처음에는 차도 없이 오토바이 타고 겨울에 그렇게 위험하게 헬멧 쓰고 돌아다녔지만 승용차를 구입하여 타고 다니십시오. 그리고 좀 더 벌면 더 나은 차 타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수도사처럼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분복들을 누리면서 그렇게 사십시오. 그러나 절대로 이 세상 밖에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집착하며 살면 안 됩니다. 가난할 때는 그냥 아무거나 입고 사십시오. 좀 넉넉해지면 좀 깔끔하게 입고 사십시오. 그리고 더 여유로워지면 자기 얼굴 모양에 맞는 옷을 사서 입고 사십시오. 그렇게 단정하게 해서 사람들 앞에서 자존감을 잃지 않게끔 그렇게 사십시오. 그런데 단 어떻게 하라고요? 절대로 지나치면 안 됩니다.
a. 현세의 비참함에 눈떠야 함
그런데 죄 아래 있을 때에는 모든 관심이 이 세상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입의 99%가 전부 땅에서 쓰는 것들입니다. 하늘나라에 저축하는 것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 구제하고,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고, 연약한 자를 섬기는 일에 인색합니다. 먹고, 마시고, 오늘을 준비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내일, 내년, 후년을 준비하고 그래도 돈 남으면 별장사고, 자기 묘지 사고, 가족 묘지까지 미리 사놓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늘어나는 부동산, 재테크, 관심 많으실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여러분 집은 어떻게 지어지고 있습니까? 개딱지 같은 연립주택 지하라도 마련을 해놓으셨습니까? 세마포는 준비되었습니까? 정말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달콤함이 아니라 현세의 비참함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을 비관적으로만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는 이 죄 많은 세상이 나를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 그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그는 정말 신자가 아닙니다. 세상밖에 모르는 신자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해도 그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까?
세상의 모든 비참의 원인은 죄인데 로마서 5장 12절에 의하면 현세에서는 이것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4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현세의 것에 만족하면서 살면 땅에 있는 것들을 절대로 무시 할 수 없고 하나님께 배은망덕하게 살아가는 배교적인 삶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피가 맺히도록 부지런하게 일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부다 이 땅에서 자기의 욕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들의 마음에 온통 가득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신자의 삶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시고 싶으십니까? 왜 가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요. 거기에 가면 매일 생명수 물가에서 뱃놀이나 하고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까? 그러니까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많은 경건한 신자들이 그렇게 간절하게 천국을 사모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직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거기는 생명수 낙원이 있어서 과일이 있어서, 직장 안 다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그것을 한마디로 줄이면 죄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경건한 성도들이 가고 싶어 했습니다. ‘괴로움과 죄만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있으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명과 함께 어두운 세상에 나를 파송 하셨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이것을 집어치우고 도중에 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무겁고 고난이 힘들어도 그렇게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된 상황에서 그 십자가를 지고 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잘 만나 주십니까? 우리들이 눈물을 흘리면 기도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눈물을 씻겨 주시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오해를 받을 때면 환난 중에서 주를 사랑하는 자, 곧 환난 중에 그에게 피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주십니다. 저를 구설의 다툼에서 면케 하시며 비밀히 친 장막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시는 그런 것을 깊이를 경험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순간, 순간 환희와 감격을 맛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살려 주신 것을 인해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국만은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면서도 그건 언제나 끊어질 듯 말듯 이어지는 멜로디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 끊어짐이 하나도 없고, 죄와 슬픔이 없고, 다시 어두움이나 눈물을 흘리는 것이나 고통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작별이 없는 그 영원한 세계에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강한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면 그렇게 괴로운데 왜 십자가를 집니까? 영생을 위한 투자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통해서 영생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즉 영생을 위한 자신의 삶의 투자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우리가 주님 앞에 무엇을 하다 왔다고 고백할까요? 살아온 날이 많은데 아무 것도 섬긴 것이 없습니다. 사랑은 많이 받았고, 자기 아들도 나를 위해서 주셨는데 아무 것도 섬긴 것이 없고, 그냥 욕심만 따라서 저 좋은 대로 살아 왔습니다. 섬기느라고 했지만 그것도 자기의 욕망과 정욕들이 너무나 많이 개입되어 있어서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섬겼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c. 이 세상에서 주시는 축복은 천국의 ‘맛보기’
이 세상에서 살아가노라면 하나님께서 가끔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15-16절 상반 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축복들은 미래에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더 큰 축복에 맛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의 사업에 복을 주시고, 나의 가정에 복을 주시고, 건강에 복을 주시고, 또 주님의 사역을 감당해나갈 때 축복해주시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큰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누릴 그 축복된 기쁨에 비하면 아주 작은 감질나는 맛보기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그 축복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음성입니다.
그래서 섬길수록 주님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주님이 많이 주시면 더 많이 퍼서 주님께 바치고 싶어집니다. 내 머리칼로 주님을 위한 신발을 삼고, 살가죽을 벗겨 홍포를 지어 벌거벗으신 예수님의 몸에 입혀드리고 싶고, 점점이 살을 에어서 예수님의 뚫어진 옆구리나 그리고 손바닥에 메꾸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사랑함 속에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아직까지도 죄 많은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천국의 소망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하늘 잔치의 맛을 이 세상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전부인 줄 알고 살겠습니까?
d. 죽음을 겁내지 않고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줌
오늘이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어떤 죽음도 두려움도 없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 좋으니” 하고 자기를 향해 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오는 죽음의 파도 앞에서 담대하게 죽음의 휘장을 찢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담대하게 그 죽음의 문을 열고 나아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열린 교회는 아직 10살도 안되었는데 개척할 때 꽃같이 예쁘던 처녀들이 이제 아이 둘씩 셋씩 거느린 중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금새 지나갑니다. 어쩌면 그렇게 세월이 물같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가는지 어느 날 몇 밤 자고 나면 우리는 죽음의 문턱 앞에 설 것입니다. 그때에 정말 우리들이 이렇게 은혜 아래 살면서 이렇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예수 한 분 사랑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고 죄를 따라 욕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욕보이면서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의 그 날에 영광스러운 나팔소리를 들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품에 달려갈 수 있겠습니까?
결론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 예수님이 아파하셔도 그 아픔을 외면하고 나의 즐거움만 추구하면서 살았던 삶, 내세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현세에 만족하는 육욕에 빠진 이 삶, 이것이 정말 우리가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하루를 사는 것은 하루를 죽어 가는 것이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곧 죽음의 문턱 앞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42킬로미터 이상을 심장이 터질 듯이 달리는 그 마라톤 선수들을 생각해보십시오. 40킬로를 달리고 쓰러져도 그에게 영광은 없습니다. 마지막에 42. 195미터를 달리고 팽팽하게 맞잡고 있는 결승선을 가슴에 그으며 쓰러지기만 하면 그는 수많은 팡파르와 함께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자기 나라 국기를 높이 올리며 머리에 월계수 면류관을 쓰고 국가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의 지배 아래서 짐승처럼 자기를 위해 먹고 마시며 죄를 죽이는 삶도 없고, 자기를 부인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으며, 천국을 묵상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주신 수많은 십자가를 집어던지고 탈영병처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하지만 주님만 사랑하고 자기의 몫이 되어진 십자가를 비록 그것이 순결하고 절대적 의미의 십자가는 못된다고 할지라도 짊어지고 다윗이 범죄 한 뒤에 범죄의 결과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쳤던 것처럼 자기 안에 있는 불결과 싸우고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내면의 죄악과 더불어 싸우면서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감당해나가려고 무던히 애쓰며 걸어갈 때, 어느 날 주님이 내 인생의 수고를 끝내고 이제는 내 품에 돌아오라고 할 때, 그 사람들은 얼마나 큰 기쁨으로 그 죽음의 날을 맞이할까요?
힘들고 어려운 피 묻은 전투복을 벗어버리고 아름다운 행실로 예비한 정결한 세마포 옷을 입고 우리는 공로가 없고 아무 자격이 없으나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시고 자기의 몸을 쪼개시기까지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화목의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해서 그 십자가의 피 길을 걸어가서 수많은 천군 천사와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인생을 믿음으로 살다온 한 성도의 전투의 고백을 주님 앞에 아뢸 것이고 그때 수많은 천군 천사들의 격려의 박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을 씌어주시고 우리의 가슴에 영광스러운 상급을 훈장으로 달아줄 때 자기의 욕심을 따라 죄의 지배 아래서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던 십자가도 집어던지고 죄 죽임도 없었던 나태한 신자들은 그 날에 정말 부끄러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서 최후를 맞이하시렵니까?
6.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들(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서론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반드시 징후가 있는데 그 징후 중에 하나가 은혜의 죄 죽임을 위한 은혜의 방편들을 열렬히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면서 죄 죽임을 위한 은혜의 방편 세 가지를 다루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고, 두 번째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내세를 묵상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이런 은혜의 수단들을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하거나 그 은혜의 수단들로부터 영적인 유익을 받는 것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것이었습니다.
4) 지속적으로 마음을 다해 기도하지 않음
네 가지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이제 네 번째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는 죄 죽임을 위한 은혜의 수단인 기도를 잘 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가 죄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가 죄를 죽이기 위한 적합한 기도가 될 때에 죄를 죽여서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않도록 보호하고, 만약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그 기도를 통해서 죄의 사슬을 끊고 은혜의 통치로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첫째, 죄 죽임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을 먼저 말씀드리고 두 번째는 죄가 어떻게 신자 안에 들어와서 죄를 죽이는 훌륭한 방편인 이 기도를 못하도록 방해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a. 죄 죽임에 있어서 기도의 중요성
우선 모든 기도가 다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외관적으로 상당히 열심 있는 기도 생활을 하면서도 인격적으로 전혀 주님을 닮아가지 않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열렬히 기도하는데도 기도하는 것만큼 거룩해져간다고 느껴지지 않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바와 같은 방식의 죄 죽임의 효과가 있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선 죄를 죽이기 위한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한데 그 기도가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두 번째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여야 한다는 두 가지 조건입니다. 지속적인 기도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만이 죄의 영향을 미쳐서 그 죄를 죽이는 효과를 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① 지속적인 기도를 통해 영적 도움과 능력을 공급 받음
죄 죽임에 있어서 이 기도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기도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죄를 죽이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달으면 우리를 사로잡아오는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지만 기도는 그 죄와 맞붙어 싸우게 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가 정말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우선 지속적인 기도여야 합니다. 지속적인 기도가 아닌 가끔 드리는 기도는 그 기도가 아무리 간절하다 할지라도 죄를 효과적으로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 죄책에 대한 용서 보다는 죄의 세력을 꺾어 주시도록 기도하라
그런데 실제로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면 이렇게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생활이 불가능해집니다. 신자가 지속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그가 계속해서 기도의 영으로 충만한 상태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는 이미 은혜의 질서들이 거의 파괴되거나 많이 상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가슴속에서 이런 열렬한 기도의 영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집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게 되면 죄가 많이 생각이 나고 기도할 때마다 그 죄에 대한 생각 때문에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지 못합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죄책감이 작용을 하기 때문에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거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자기를 거절한다고 느낄 때에 이 신자의 중요한 관심사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닌 일단은 자기를 거절하시는 것 같은 이 냉담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켜 주시도록 자기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일단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 냉정하게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어도 자기의 죄를 심각하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조차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에 들어가게 된 초기에는 자기의 죄에 대한 죄책감이 분명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거절하실 때 그는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차갑게 자기를 거절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하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그렇게 응답해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다 쓸모없는 헛수고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일단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기 위해서인데 신자의 마음에 밀려오는 참된 평안은 용서를 통해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죽음으로서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용서하신다는 응답이 안 옵니다. 분명합니다. 제가 이 단순한 교리를 몰랐기 때문에 사실은 예전에 목사가 되기 전에도 여러 날 동안을 괴로움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 제목이 많이 있어도 그것은 다 뒤로 물러가고 우선 내가 살아야 기도할 수 있으니까 사죄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한번도 응답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또 설령 어느 한순간에 사죄의 확신이 온다고 칩시다. 그러나 죄가 살아있는데 그 확신이 몇 시간이나 가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실제로 적군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데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을 한들 그 평화가 몇 시간이나 계속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혹은 죄가 지배까지는 아니지만 우세하게 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때에는 사죄의 확신을 구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자기를 엄습하고 있는 이 죄의 세력들을 약화시켜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 죄가 모두 한번에 물러가도록 기도해봐야 즉시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초기에나 가능한 것이고 이미 죄가 우세하도록 힘을 얻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배력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기도해봐야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죄의 세력을 일단 누그러뜨리고 꺾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과정에서 죄의 사죄의 확신을 너무나 갈망한 나머지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확신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응답이 아니라 자기 암시적인 확신일 뿐입니다.
자기 암시적으로 확신하는 경우는 이와 같습니다. 내가 죄책감으로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에 용서한다고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역추적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해준다고 하셨고 나는 이미 예전에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셨을거야. 이 역추적을 가지고 자기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확신이 필요 없다고는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필요하지만 그 확신으로 평안을 얻기에는 자기 속에 우세하게 지배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 죄가 너무나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죄의 확신을 구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우세하게 자기를 엄습하고 있는 죄의 세력을 꺾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어느 한순간에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기도 가지고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이 기도는 지속적으로 되어져야 합니다.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어서 힘겨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죄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의 은혜를 말려버렸습니다. 그래도 어느 순간에는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끔 기도가 되도록 만들어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완전히 포기하지 않도록 암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전혀 기도가 안됐었고 또 하지 않았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서 자책감속에서 기도합니다. 기도가 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고 하늘 문이 열리는 것 같고 내가 부르짖는 이 기도가 하늘로 빨려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마음은 물같이 녹고 통곡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죄에서 나를 구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깊이 몸부림칠 때 하나님이 나의 이 간구를 외면하지 않고 다 듣고 계신다는 느낌이 옵니다. 그래도 그 기도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안됩니다. 간헐적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처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에도 기도를 이따금씩 되게 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지속적인 기도생활로 유인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가 완전히 포기하지 않도록 그런 은혜를 특별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들을 부분적으로는 무지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자기의 기도를 지금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는 자만심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죄의 대한 사랑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발판으로 지속적인 기도에 불을 붙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타다만 막대기처럼 열렬하게 타오르다가 다시 불이 꺼진 채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 속에서 아무리 마음이 녹고 통곡이 쏟아져 나오고 가슴을 찢는 것 같아도 그런 과정에서 정서적인 카타르시스는 경험할 수 있어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자기 안에 내재하여서 우세하게 역사하고 있는 죄의 영향력을 죽이는 일은 못합니다. 물론 막 몸부림칠 때는 그 순간 죄가 움츠려 들어갑니다. 그러나 죄가 움츠려든다는 것과 죽인다는 것은 별개입니다. 죄가 움츠려지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셔도 움츠려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시간이 지나 다시 기도가 멎으면 고개를 들고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진정한 심령의 평안은 죄의 용서를 반복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꺾음으로서 평안이 오게 됩니다.
- 기도의 제일 목적 : 거룩한 생각과 정서를 일으킴
여러분들은 기도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야고보서는 기도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그러니까 기도의 제일가는 목적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얻어내는 것이 기도의 제일가는 목적이지 않습니까? 왜 대답이 없습니까? 그것은 우리 쪽에서 생각하는 기도의 제일가는 목적입니다. 이것이 전부라고 하면 하나님이 왜 우리보고 두 번 기도하게 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 보면 기도의 제일가는 목적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의 이것이 기도를 들으시는 첫 번째 목적이 아니십니다.
그럼 무엇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영혼 안에 잠재되어 있는 믿음, 은혜, 사랑, 주님을 향한 열정 이런 것들을 불러일으키는 내적 갱신의 과정을 삼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하나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한번이 아니라 수많은 날 동안 그 기도를 십자가처럼 지고 기도하게 하신 후에야 응답을 하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이 끝나면 또 다른 기도 제목을 주셔서 가슴이 아프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적으로 기도를 은혜의 방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불러일으키시는 한 수단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 은혜로써 죄의 세력이 궤멸됨
그렇게 지속적으로 깊은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은혜와 믿음과 사랑, 순결의 욕구를 불러일으켜서 세력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 세력이 죄의 권세를 파하고 그 생명을 꺾고, 고사시켜서 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 아래 살기로 결단을 한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기도에 힘쓰지 않는 것은 죄의 지배 아래 살기로 이미 마음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말할 수 없이 불쾌한 불신앙입니다.
기도를 안 하면 평균으로 살고 기도를 하면 매우 특별히 살수 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불신앙의 시대에서 얻은 세속적인 결론입니다. 그렇게 기도함으로서 불러일으켜지는 은혜의 영으로 자기의 옛 자아를 죽이면 영혼이 사는 것이고 그 의무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는 반드시 죽습니다. 교회를 수 백 번 옮겨다녀도 좋은 날 볼 수 없습니다.
은혜의 세계의 원리는 냉엄합니다. 제가 정말 깊이 깨달은 바가 그것입니다. 냉엄합니다. 그 원리로 돌아오면 그렇게 쓸모없는 죄인인데 하늘을 열고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물 붓듯이 쏟아 부어주십니다. 감당할 수 없이 쏟아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원리로 돌아가서 순종하지 않으면 가슴을 찢으면서 가끔씩 미친 듯이 짐승처럼 울부짖어도 하나님은 돌아보지 않으십니다. 거기서 그냥 가끔 울부짖다가 죄의 지배 아래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② 마음으로부터의 기도는 죄가 영혼을 지속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틀을 형성함
- 이 틀 안에서 죄는 지배력을 상실하며 영혼 안에 깃들 곳을 얻지 못함
죄 죽임에 있어서 기도가 유용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기도 말고 또 다른 방면의 요소가 필요한데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만이 죄가 영혼을 지속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어떤 틀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은혜의 지배의 틀을 형성하게 되면 죄가 들어와도 정착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적으로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가 쏟아져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일반적으로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은 고통이 담긴 기도가 쏟아져 나올 수는 있는데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그런 일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한번씩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특별할 때에만 말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마치온천 같은 것을 처음 시추공 할 때처럼 물이 하늘로 10미터씩 솟아올라가듯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가 항상 그렇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해도, 해도 기도시간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다 안 나온 것입니다. 어떤 때는 4시간을 쉼 없이 기도했는데도 자기가 진짜 해야 할 기도에 3분의 1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말하자면 뚜껑을 열어서 물을 푸려고 바가지를 집어넣어도 허공을 맴돌기만 합니다. 두레박을 던져서 줄을 내리고 더 이상 내릴 줄이 없는데 두레박에 닿는 것이 없습니다. 허공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두레박에 줄을 더 묶어서 내려보냈는데 첨벙하는 소리 대신 달그락 하는 소리리가 들립니다. 그러면서 찰싹찰싹 하는 물소리가 들립니다. 두레박을 이리저리 흔들어 겨우 물을 담아냈는데 철철 넘쳐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3분의 1쯤 담겨져서 올라옵니다. 그것도 길어야지 어떻게 합니까? 붓고 다시 또 작업을 합니다.
말하자면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그렇게 뚜껑만 열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던 기도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기도를 할 때 이렇게 힘겹게 기도가 흘러나오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 앞에 아뢰기 때문에 조심성 있고 사려 깊게 언어를 선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기도가 말랐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길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 의무적으로 행하는 간헐적 기도는 영적 유익이 없음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만이 틀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지배의 틀을 형성하면서 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죄의 지배력을 파괴하는 힘을 갖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의무적으로 행하는 간헐적인 기도를 가지고는 영적인 유익이 없다 그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정말 유효한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기도이며, 이런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전 영혼에 힘을 베풀어주십니다.
어느 순간에 그런 생각해보셨습니까? 기도에 깊이 들어가시면 어느 정도까지는 내가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발동을 거시고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당신 하시고 싶은 기도를 막 쏟아내신다는 느낌을 받을 때 말입니다. 그 시작은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이 됩니다.
옛날에 수도가 들어오기 전에 펌프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펌프는 물이 잘 빠집니다. 안 빠지는 펌프는 거의 없습니다. 빠지면 물을 서너 바가지 갖다가 붓고 막 펌프질을 한참 합니다. 힘차게 펌프질을 합니다. 그러면 물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힘겹게 할 필요 없이 그냥 천천히 해도 올라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 속에서 강한 힘을 주시는 것은 우리 자신이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외면적인 의무에 매어서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내야 합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그렇게 기도해 I 야합니다. 10분을 기도를 해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마음에도 없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방언으로 막 주절주절 하는 사람들, 그렇지 않으면 괜히 주여, 주여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아주 나쁜 습관들입니다.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 그 기도를 길어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힘든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게 하노라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강하게 하시는 은혜의 작용들이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의무에 매어서 형식적으로 기도생활 하는 사람들 속에서는 죄를 이길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능력이 그 기도 속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 외적 열심이 있어도 신자 안에 있는 죄를 죽이지 못함
주일을 지키고 수요 예배에 나오고 평생 새벽기도를 작정하고 그 긴 새벽길을 걸어서 새벽 기도에 성실하게 출석하는 사람들 중에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 생활이 지속적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죄를 이겨서 지속적으로 죄의 영향력을 파하고 지배력을 괴멸시킬 수 있는 힘을 공급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새벽 기도의 생활이라면 마귀는 온 교인이 새벽마다 교회당을 가득 채워도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적은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점에 있어서 실천적인 간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목회하기 전에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하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기도에 성실하게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완벽하게 죄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면적인 기도의 의무를 이행하는 그것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문제는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지, 껍데기가 마련이 됐는가 안 됐는가는 초보적인 문제입니다. 문제는 내면의 원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외적인 열심히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의 지배를 파괴하는데 도움을 못 준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데 부도의 위기에 몰려서 일주일 내에 돈이 10억이 필요합니다. 땅의 일입니까, 하늘의 일입니까? 그 다음에 목회를 하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야 될 필요성이 너무 간절합니다. 하늘의 일입니까, 땅의 일입니까? 그러면 들어보십시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기도 제목이 하늘의 일이라도 내면의 원리를 따라서 기도하지 못할 수 있고 기도 제목이 땅의 일이라도 내면의 원리를 따라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좀더 쉽게 말씀을 드리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죄의 지배 아래서 살고 그리고 정신없이 세상에서 돈 버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뻥! 하고 위기가 왔습니다. 일주일 내 10억이 필요한데 이 10억이 마련이 안되면 부도를 당하게 되고 가족들은 삼지 사방으로 흩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쇠고랑을 차고 콩밥을 먹어야 됩니다. 이제껏 쌓아올렸던 평판, 자기가 모았던 재산 모두 물거품이 되고 이제는 거지가 되어서 완전히 길거리로 내몰릴 판입니다. 너무너무 심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건 하나님이 내가 정신 안 차리고 사니까 정신차리게 하시려고 한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습니다. 영적 사고력이 발동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대출기관의 문제, 동업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보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경고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돈이 생각이 난 게 아니라 그 동안에 하나님 멀리 떠나서 산 자기의 죄악 된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회개를 해도 회개는 회개고 역시 현실적으로 그 문제는 일주일 내에 해결하지 않으면 나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마음이 녹으면서 자기의 죄에 대한 회개와 함께 어린아이처럼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돈벌이에 눈이 빨개져서 몇 년을 살다가 정말 오랜만에 주님을 멀리 떠났던 자신의 영혼을 보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속에서 주님의 품에 기대어서 아버지의 도움을 절실히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은 내면의 원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땅의 것을 가지고 기도하는데도 그 과정을 통해서 죄가 죽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있다고 칩시다. 교회가 빨리 부흥을 해야겠습니다. 교인들이 자꾸 떠납니다. 무척 괴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아! 내 친구 아무개 그는 벌써 목회 하면서 몇 백 명을 모았다고 하는데 밥이라도 먹으려고 만나면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있나. 이런 생각으로 꽉 차서 주여! 왜 나의 교회는 부흥을 안 줍니까? 나도 한번 부흥해서 좀 보란 듯이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 좀 도와주시면 안됩니까? 이런 기도는 제목은 하늘에 속한 것인데 내면의 깊은 원리에서 우러나온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 제목은 너무 고상한데 죄는 죽지 않습니다.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도 이런 내면의 원리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기도가 아니면 기도 제목이 아무리 훌륭하고 심지어는 그 기도 제목 때문에 열렬하게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죄를 죽이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 다른 요인의 열렬함 : 응답 애착, 양심의 가책, 마음 없는 열렬함
그러면 열렬한데 왜 죄를 못 죽이는가. 그런데 열렬한 것도 두 가지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서 그것이 영혼을 때려서 영혼에서 다시 사고와 인격을 움직여서 흘러나오는 복받치는 그런 거룩한 열렬함이 있고, 안 그런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열렬해지게 됩니다. 체면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한 게 그것입니다. 딱 몰렸는데 당장 일주일 내에 10억이 없으면 패가망신 합니다. 그러다보니 너무 다급하여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기를 돌아보고 그런 것도 없이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어떡해요 그러면서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게 차압 붙이러 오는 사람, 자기가 체포되어서 끌려가는 광경, 가족들이 울부짖으면서 흩어지는 광경, 종업원들이 자기 집에 와서 술병 집어던지면서 욕하는 그 소리부터 시작해서 다 들리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는 너무 복받치고 다급해지다 보면 사람이 열렬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밖에서 사람이 볼 때는 그 열렬함이 그 열렬함인지 저 열렬함인지 분간이 그렇게 쉽지가 않고 자기 자신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 분별이 쉽지가 않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죄책감에 너무 괴로울 때, 그때는 죄를 지어서 너무 괴로운데 그것을 말씀의 빛에 의해서 뿌리를 더듬어 가서 자기 내면의 세계 속에 있는 죄에서 그것이 비롯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깊이 기도하면 죄가 죽는데 그게 아니라 기도하고 몸부림치는 이유는 내가 너무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이 고통 속에서 건져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몸부림 쳐서 기도할 때 그 기도는 굉장히 열렬합니다. 그런데 죄는 죽지 않습니다.
언젠가 기도원에 갔었는데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한 40세가 넘어 보이는 지체가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열렬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움직이긴 했지만 믿음과 함께 역사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영혼에 울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열렬한 기도 속에서 순간적으로 마음이 강퍅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안 도와 주실 것입니까? 이렇게 여러 번 기도하다가 순간적으로 강퍅해지는 경우를 다 하셨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내면의 원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열렬해도 죄를 죽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의무감으로 하는 이런 기도, 내면의 원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이런 기도는 겉으론 열렬히 기도하는 것 같아도 죄는 전혀 죽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못된 방식으로 올바르지 않은 원리로 따라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오래 하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그 기도에 육적인 열렬함도 지속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지고, 또 하나는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면의 원리 속에 내재하는 믿음이 그의 기도 속에 역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원망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죄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③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속적인 기도만이 죄의 세력에 대한 영혼의 직접적인 투쟁임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어 내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그것이 실제적으로 죄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결론은 어떻게 나는가 하면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되고, 두 번째는 지속적이라야 하는데 그런 기도만이 죄의 세력에 대한 영혼에 직접적인 투쟁이라는 것입니다.
- 세 작용 : 마음이 죄를 적으로 간주, 영혼의 투쟁, 성령의 죄 죽임
그래서 일단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가 우러나오기만 하면 그래서 그 기도가 열렬해지고 간절해지기 시작하면 세 가지 놀라운 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첫째는 자신의 마음이 이제 것까지 사랑하던 죄를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자기의 마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가 우러나오면 그 과정을 통해서 마음에 변화가 와서 이제껏 자기가 사랑하던 죄에 대한 미움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가 우러나와서 열렬해지기 시작할 때 영혼이 비로소 그 죄와 맞붙어서 싸우기 시작합니다. 죄와 맞붙어서 싸우기 시작할 때 성령은 그 죄를 죽이기 시작하십니다. 이 세 가지 작용이 한번에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죄가 왜 들어왔습니까? 그 마음이 악수했기 때문에 들어온 것입니다. 자기가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아무리 열렬히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속에서는 죄와 붙잡은 그 우호적인 악수를 끊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도가 죄를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삼손과 데릴라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삼손이 그 죄를 이기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칩시다. 데릴라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기도를 드리는데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실제적으로 성령님이 죄를 죽여주시기 전 단계에 꼭 필요한 것은 자기 마음이 그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가 성도의 마음을 지배하는 동안에는 그 죄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자기 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낸 기도는 마음이 그 죄를 적으로 간주하게 만들고 적대감을 가져 영혼이 비로소 그 죄와 맞붙어 이제는 지지 않겠다고 피를 흘리며 싸우게 합니다. 그리고 영혼이 그렇게 맞붙어 싸울 때 등 뒤에서 성령님이 칼을 꽂으셔서 하나씩, 하나씩 쓰러트려 죽이시는데 이게 굉장히 빠르게 일어납니다. 마음이 죄를 적이다 생각하고 그 다음에 붙어서 싸우기만 하면 자기가 싸우는 게 아니라 붙어서 싸워서 씨름을 하고 있기만 하면 그 씨름하는 그곳에 성령이 오셔서 등 뒤에서 죄의 등에 칼을 꽂아서 한방에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붙어서 싸우려고 하면 죄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죽어갈 때 신자는 이렇게 쉽게 죽는 죄를 내가 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십 년 동안 죄가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일단 이 싸움이 시작되면 기가 막히게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 이 예배의 현장 주위에서 폭로되는 자신의 약점을 인해서 두려워하고 있는 악한 영들의 세력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희랍어 성경에 보면 죄가 너희의 master가 될 수 없으니, 주인이 될 수 없으니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마음이 죄를 죄라고 인식하고 영혼이 믿음으로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기만 하면 성령님께서 그 믿음을 보고 즉시 오셔서, 피 흘려서 쓰러지고 뒹굴다가 어떤 놈에게는 이기고 어떤 놈에게는 지고 이런 것이 아니라 붙들고 싸우면 즉시 오셔서 등에 칼을 꽂으시면서 하나씩 죽여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수십 년을 그 죄의 지배에서 숙명인 것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해방되는 환희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지속적인 기도는 마음으로 하여금 정신을 차려서 죄를 미워하게 만들고 영혼은 죄와 맞붙어 싸우기 시작하고 성령은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입장에서는 이 기도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두 가지를 막아야 되는데 가끔은 기도해도 되는데 지속적으로 기도하면 안되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도 막을 수가 없다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자신들에게 결정적인 해를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이므로 허용해 주는 것입니다.
- 죄가 마음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기도의 영을 마르게 함
그러니까 죄가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기도의 은혜를 말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마음에 들어오면 기도의 은혜를 말려버리고 마음과 기도가 따로 놀게 만들어서 기도가 마음에 영향을 주고 마음이 기도의 영향을 줄 수 없도록 합니다.
- 기도의 은사를 받았어도 죄에 대한 사랑을 그것을 삼켜버림
우리 주위에는 가끔 보면 기도에 강력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랬어도 죄에 대한 사랑이 그 은사를 삼켜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은사를 특별히 받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순수함을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삶을 사셨습니까? 기도생활이 소나기처럼 오는 그런 기도생활, 환난이 오면 보따리 싸들고 교회도 결석하고 기도원에 올라가는 그런 식의 생활을 가지고는 여러분들이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의 권면을 따라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셨습니다만 우리 신학교에서 가르치셨던 교수님 가운데 박윤선 박사님이 계셨습니다. 주석을 쓰신 분이십니다. 무척이나 경건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60년대에 신학교의 학장이 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래도 한국에서 제일 큰 신학교의 학장님이시니까 좋은 것은 아니지만 자가용을 사드렸습니다. 그 차를 운전하고 계신 분의 간증이 재미있습니다. 목사님을 태우고 가면 꼭 정신병자를 태우고 다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니 혼자 뒤에 앉으셔서 다른 사람들은 다리를 꼬고 가거나, 졸거나 하는데 그분은 올라타자마자 두 손을 꼭 쥐고 계속해서 이 나라와 신학교, 교수들을 위해 기도하며 다니셨다고 합니다. 꼭 그런 모습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기도의 소원이 가슴에 콱 찬 가운데 살아가는 그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이 정말 그렇게 지속적이었는지 제가 묻고 싶습니다. 지속적이었습니까? 외로우면 그 외로움 때문에 주님을 찾고, 환난이 오면 환난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품에 피해서 그 품에 볼을 비비고 기쁜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주님께 달려가서 그 기쁨의 꽃다발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그런 생활이 신자의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기도생활을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이 지속적인 생활이었습니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천국에 가는 길을 무릎으로 걷는 길이라고 그랬습니다. 지속적인 기도가 없는데 어떻게 나를 이길 수 있습니까?
또 하나 묻습니다. 진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까? 저는 새벽기도에 와서 엎드려서 자다가 가는 분들 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 새벽에 달려오는 것까지는 신앙이었는데 왜 매일 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혹시 자신이 새벽기도 하는 성도라고 하는 자부심이라도 그 마음속에서 생겨나면 큰일인데 하는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새벽기도 시간마다 본전 생각을 해라. 잠도 안자고 나왔는데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하겠습니까? 기도를 해도 해도 막혀서 안 나오면 노트를 펴놓고 쓰십시오. 천천히 마음속에서 길어내면서 그리고 읽고 가십시오. 마음으로 길어져 나온 기도만 죄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온다고 해서 그 사람을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결심을 했다 뿐입니다. 그 결심이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실천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 눈에 보이게 이렇게 작정서 하나 써서 통에 집어넣는 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청교도는 말하기를 ‘우리는 살기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하러 오기 위해서 또 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b. 기도를 죽이는 죄의 점진적인 역사
그러면 마지막 두 번째, 죄가 어떻게 실제적으로 신자에게서 기도를 말려버리는지 이 시간에 네 가지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기도할 수 있도록 즉각적으로 기도가 필요할 때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순발력을 빼앗아 가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기도하기를 꺼려하게 만들고, 세 번째는 기도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기도의 의무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① 죄의 지배력의 수단
우선 그 문제를 드리기 전에 서론적으로 죄가 신자 안에 들어와서 지배력을 확보 하는 두 수단이 있다고 했는데 하나는 속임수였고, 또 하나는 강압이었습니다. 속임수와 강압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속임수가 먹혀들어 가게끔 준비하고 강압이 먹혀들어 가게끔 채비를 차려주는 것이 죄가 들어와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비결입니다. 죄의 편에서 보면, 우선 신자 안에 작은 죄들이 들어와서 우선 영적으로 어둡게 만들어서 속임수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고 영적인 힘을 소진시켜서 강압을 할 때 항거할 수 없도록 힘을 빼는 작업들을 먼저 한 후에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커다란 죄들이 줄지어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은 지속적인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는 예배 시간에 와서 조는 분들이 있는데 오늘 이야기를 잘 들으십시오. 너무 무리한 일과를 살면 한두 번 정도는 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마다 자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이 죄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고 지옥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라는 사실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배교적인 행위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 집무실에서 대통령을 대좌했고 대통령이 계속 말씀하시는데 침을 흘리면서 잤다고 칩시다. 여러분들은 사람대접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직위에 있다면 그 직위는 박탈될 것이고, 살아생전 그 대통령을 한 번 더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신다고 그렇게 막 대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는 사이에 철저히 죽어 가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입니다. 눈뜨고 설교를 들어도 헛된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은밀한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가 없는데도 참회하는 마음이 안 드는 것은 이미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본격적으로 죄의 지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왜 주무십니까? 일어나서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이해를 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놓치기 싫으니까 일어나십시오. 정신 차리고 예배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예배가 몇 시에 끝나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렇게 바쁘시면 짧게 예배드리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리고 뭐 그렇게 바쁜데 교회에 갑니까? TV를 틀면 예배가 나오는데, 그렇게 사는 동안에 커다란 죄가 없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에는 영적인 빛이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고, 마음은 어두움이 깃들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단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가지고 죄로 유혹을 해도 거기에 설득을 당합니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도대체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설득을 당합니다. 그리고 죄가 그렇게 문 앞에서 엎드리고 있는데도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빛에서 차단된 삶에서 몸부림 쳐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습니까? 그리고 경건 서적을 읽어서 말씀의 빛을 받습니까?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석해서 은혜를 받습니까? 아니라면 설교 시간이 결국 마지막 남은 말씀의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졸고, 그러면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캄캄한 어두움이 드리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가지고 놀기 좋은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약화시킵니다. 천천히, 특별한 죄가 생각나지 않는데 천천히 은혜의 영향력을 소진시켜서 어느 날 죄가 들어왔기에 싸우려고 이렇게 일어나는데 힘이 없는 것입니다. 팔다리가 떨리고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눈을 뻔히 뜨고 주먹으로 움켜쥐고 와서 손아귀로 목을 누르면서 목을 발로 밟는데 이게 적이라고는 확실히 알 수 있는데도 저항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됩니까? 평화를 찾으려면 죄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해야 합니다. 그 죄를 주님처럼 섬기면 죄가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② 즉각적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되지 못함
- 은혜의 지배 하에선 기도가 필요한 시기를 즐거워함
그래서 죄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기도가 필요할 때 순발력 있게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상황이 오면 두렵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대가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고 그리고 뚜껑을 열면 기도가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러면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실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상황을 만나면 있는 자들은 오히려 정신이 차려지고 담대한 마음으로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만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이 기억에 남는 너무 아름다운 승리를 주십니다. 그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즉각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 죄로 인해 즉각적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되지 못함
그런데 죄가 들어오게 되면 제일 먼저 마음을 더럽힙니다. 그런데 기도는 영혼을 울리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먼저 울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은 언제 제일 잘 기도와 화합할 수 있는가 하면 기도에 합당한 정서를 가질 때에 가장 기도가 잘됩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마음의 정서를 기도의 적합한 경건한 정서로 내버려두지 않고 혼탁케 해서 불결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죄로 인해서 마음이 더럽혀지고 나면 영혼에는 빨간 불이 들어옵니다. 이렇게 영혼에는 빨간 불이 계속 들어와도 자기도, 머리 속으로는 지금 내 영혼이 위험하기 때문에 기도를 해주어야지 된다고 아는데도, 마음이 그 기도를 향해서 움직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하면 기도를 못하는 것이고 성공을 하더라도 마음의 변화가 와서 기도 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흐르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다고 할 때, 여러분은 완벽한 인간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은혜 아래 있어도 어느 때는 사치스러운 마음이 들고 음란한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는 이 정서적인 순발력이 있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사업이 잘나가고 잘 사는 친구들을 보면 아! 나는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 아니야.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오! 하나님 내가 세상 것을 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는데 하며 눈물을 흘리면 순간적으로 그 세속적인 정서가 사라지고 신령한 정서로 복원이 됩니다. 정서적인 순발력이 있는 것입니다.
- 죄의 지배가 시작되면 내면의 무질서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불가능
그런데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이 정서적인 순발력이 없습니다. 죄의 지배가 시작되면 이제 내면은 어두운 무질서 상태가 됩니다. 그런 무질서한 상태가 되면 아까 말씀드린 이유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기도 자체가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만히 옆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면 심령이 기도하고 싶어서 몸을 끌고 가야지 되는데 육체는 안가겠다는 심령을 억지로 끌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결국 못 끌고 오고 몸만 가서 앉아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의무만 하고 그 다음에 그 기도의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오래 앉아 기도하지 못하고 공중전화 거는 식으로 기도하고 발딱 발딱 일어나서 기도의 자리를 비워버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 기도의 순발력을 잃으면 계속 뒤로 물러남 : 결국 죄의 완전한 지배를 허용하게 됨
그래서 결국은 기도의 순발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느 정도 죄의 지배를 받는가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일단 그 순발력을 잃은 그 순간서부터 전선은 뒤로 밀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빨리 밀릴 수도 있고 천천히 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든 이 순발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결국은 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밀릴수록 밀려오는 힘은 강해지고 저항하는 힘은 약해지게 되어서 결국은 죄의 영향력이 우세하게 되고 죄의 지배 아래로 충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③ 기도하기를 꺼려함
그 다음에 두 번째는 기도하기를 꺼려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런 현상이 오는 것입니다. 기도의 순발력을 잃어버리고 나면 기도하는 것이 옛날처럼 기쁘고 신이 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은혜 아래 있을 때는 마음과 영혼의 성향이 자기가 기도해야 할 영혼의 필요와 일치했는데 죄가 들어오고 나면 영혼은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그 영혼을 위해서 영적인 문제들을 기도 해달라고 기도 요청을 하는데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소망이 더 우세하게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다른데 가 있고 기도해야할 요청은 이지로 인식이 될 때, 이지를 따라갑니까? 마음을 따라갑니까? 그것은 마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배추장사를 하시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배추 값이 자꾸 덜어지는 상황을 고민하던 중 예배 신간에 성경 봉독을 하면서 요한복음 3원 16전이라고 읽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지와 정서가 있을 때는 이지가 집니다. 정서가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기도하기를 꺼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내면의 은밀한 죄의 영향력이 극대화되어서 도저히 기도에 몰두할 수 없게 만들고 의무에 굴종하듯이 어쩔 수 없이 나와서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성품이 나타납니다. 천성적으로 불성실한 사람은 습관도 유지하는 게 힘듭니다. 그런데 천성적으로 성실하고 모범생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느끼는 것이 없어도 한번 작정한 일을 꾸준히 하는 일상적인 성실함으로 그 기도의 시간을 지킵니다. 유대인들이 기도 시간이 되어서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갔던 것처럼 그렇게 기도생활이 반복적이어 집니다. 그러나 이미 벌써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대면하기를 꺼려하는 이미 그런 마음들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죄가 우세해져가고 있는 지배력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④ 기도의 능력을 상실함
세 번째로 그 단계가 지나고 나면 기도의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실천하는 가운데서도 수시로 성령님이 오셔서 지금 이 기도 시간에 나와 함께 역사하고 계신다 라고 하는 경험들이 완전히 씨가 말려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따라서 그렇게 성령의 도우심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으니까 기도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도 처음보다 훨씬 힘들고, 두 번째는 합당한 기도제목이 있어서 기도를 토해내도 그 기도하는 내용이 자기의 마음으로 흘러서 내려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능력이 완전히 고갈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기도하러 와서 1-2시간을 엎드렸는데 수많은 공상이 머리 속에 가득 차서 실제적으로 거의 엎드려 있지만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는 것입니다. 졸거나 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 시간에 습관적으로 졸음이 오면 여러분들의 기도가 거의 죄를 이기지 못하고 죄의 지배의 틀 안에서 형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리고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기도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정확한 진단입니다.
겉에서 볼 때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새벽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그리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엎드려 있는데 실제로는 그 속에서 전혀 죄를 죽이지 못하고 다른 생각을 하거나 공상 속에서 깊이 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 보기에는 여러 시간 엎드려 있으니까 공중전화 걸 듯이 기도하다가 발딱 일어나 가는 사람보다 훨씬 깊이가 있는 사람 같지만 둘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사단은 그 정도에서도 만족을 안 합니다. 사단은 집요 하리 만치 뿌리까지 캐서 완전히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끊어놓으려고 합니다. 영적으로는 끊어놓을 수 없으니 실제적으로 완전히 잘려버린 존재처럼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사단의 성질과 죄의 특징을 알면 대충해서는 도저히 그놈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것보다 훨씬 더 질기고 집요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게 너무 복잡하게 느껴지십니까?
자, 대답할 가치도 없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딱 하나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존재하기 위해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많습니다. 인격적이고 고상한 사람, 그 정도는 그만두고 기본적으로 인간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시설물들을 이용하고 질서를 지키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도 12년 정도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사람들이 보는 것입니다. 유치원까지 합해서 14년, 대학은 그만두고 고등학교까지만 쳐도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태어나서 이제 무릎으로 기어 다니는 애들이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 애들이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아빠도 필요 없이, 엄마가 누군지 분별하고 그리고 맘마! 그러면서 숟가락으로 밥을 떠주면 아! 벌리면서 받아먹으면 됩니다. 화장실도 생각할 필요 없고 소변기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싸면 엄마가 치워줍니다. 생존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또 이것은 위험한 물건이다. 칼이다. 발암물질이 있다. 이런 것 알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 있는 곳에 칼을 늘어놓는 부모도 없고, 발암물질이 있는 화공약품을 장난감과 함께 부주의하게 뚜껑 열어서 놔두는 부모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에 있어서 어린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는 많은 것이 필요 없었습니다. 주님 영접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 알고 기도하고 말씀 읽고 목사님 말씀 잘 듣고 그렇게 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가만히 있습니까? 자랍니다. 그러면 그 애가 8살쯤 되었는데 엄마 밖에 모릅니다. 그리고 밥숟가락 이렇게 들고 맘마! 그렇게 해야지 겨우 입을 벌리고 똥도 아무 곳에나 싸고 오줌도 아무 곳에나 쌉니다. 그 애는 초등학교도 못 갑니다. 겨우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배웁니다. 그런데 이제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사회생활이 시작됩니다. 직장도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훈련을 받고 들어갔는데도 세상에 가서 적응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제껏 생활한 것과 너무나 세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직장에 가니까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자기가 처세술에 문제가 너무 많고 인간관계에 어리숙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교정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살아남고 교정을 못한 사람들은 도태되는 것입니다. 이게 냉혹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생각난 비유인데 이 비유가 정말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예수 믿는 게 그렇게 복잡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예수 믿고 지금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복잡한 거 아직 필요 없습니다. 아마 지금 주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죄로 말미암아 기도가 안 되거나 죄의 지배를 받을 때를 말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할 것입니다. 은혜의 지배 아래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들인데 거듭나지도 못한 사람인데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으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교한 말씀이 필요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여러분들이 뭘 입증해야지 되는가 하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도 엄마 아빠만 알아보고 밥숟가락 들어오면 입을 벌리고, 아무 곳에나 변을 봐도 사회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면 됩니다.
⑤ 기도의 의무를 완전히 무시함
마지막 네 번째는 기도의 의무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화시키고, 순발력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의무를 꺼리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눈에 보이는 그 의무까지 모두 팽개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기도를 안 한다든지, 식사기도를 안 한다든지, 취침 기도를 안 한다든지, 대표 기도를 안 한다든지 이런 것은 아닙니다. 다 하지만 그런 식사기도가 죄를 죽이면 얼마나 죽이겠습니까? 취침시간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졸음에 사무쳐서 한 3분 제대로 기도하지도 못하고 푹 쓰러지는 그 기도가 죄를 얼마나 죽이겠습니까? 그래 1년에 한번 돌아오는 공 예배 시간에 써 가지고 올라와서 하는 그 기도가 자기의 죄를 죽이면 얼마나 죽이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기도의 의무를 하찮게 여기고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의 의무조차 무시해버리는 순간에 껍질조차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 아주 안 나오고 모두 안 합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껍질 이야기를 하면 아주 가련하게 생각하는데 여러분, 껍질이라도 있습니까? 하루에 1시간씩 기도하는 껍질을 가지고 있는 분들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마음으로 기도하던 말든 껍질이라도 있는 사람은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30분짜리 껍질이라도 있는 사람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전국의 교인의 55%가 하루에 10분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수준보다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결국은 그 껍질마저도 내버린 그 순간에 우리는 적군에 의해서 손을 들고 완전히 무장해제를 당하고 전투복까지, 전투화까지 벗기고 군번줄까지 뜯기고 팬티바람으로 발가벗겨 서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항거할 수 없습니다. 저쪽은 이미 칼을 들고 포위하고 있고 나는 마지막 남은 단검 한 자루까지 모두 뺏겼습니다. 찔러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자, 그래도 자기 자신을 찌를 칼도 없습니다. 완전히 무장해제 당한 상태입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죄가 더 이상은 하나님을 위해 살면 안 된다. 이 정도로 돌아가면 그래도 견딜 텐데, 칼을 목에 대고 반역하며 살래? 아니면 여기서 죽을래? 둘 중에 하나를 강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모든 것을 무장해제 당한 상태에서 죄와 화해협정을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살아가는데 그렇게 죄를 위해서 살 때 죄가 불쌍하니까 가끔 쾌락을 줍니다. 그게 죄의 삯입니다. 그렇게 산 신자의 마지막이 사망입니다.
결론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신자들도 이 세상에서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어느 상황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공급하시고 죄를 이기도록 기도를 복구시켜주시려고 애를 쓰시지만 어느 상황이 넘어선다고 생각될 때에는 하나님이 그 순간에 더 이상의 도움을 끊어버리십니다. 그것이 신자의 이 세상에서 받는 심판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은 마지막 날에 고린도전서 5장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주의 날에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십니다. 그에게는 다시 회복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죄의 지배 아래서 어두움 속에서 살다가 인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죄의 지배 아래서 그 즐거움과 쾌락을 삯으로 받으면서 죄의 종노릇하며 살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사는 동안에 계속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고 그래서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마귀의 스파이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허무는 일에 앞장서면서 삽니다. 주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마음속으로 그 하나님이 자기의 원수처럼 느껴지는 이중적인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죽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평안이 없는 고통을 맛볼 것이고 마지막 날에는 부들부들 떠는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자들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그런 날입니다. 만약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왜 신자를 향해서 로마서는 너희의 죽을 몸으로 죄에 져서 죄의 순종함으로 불의의 병기로 자기를 드리지 말라고 명령을 했겠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면 명령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고 부분적으로 우리가 그런 일을 경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들이 깊이 각성하고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데 당장 쉽게 기도하겠다는 그 결정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토대에서부터 허물어버리고 다시 나와서 진짜 자기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로 지속적인 기도 속에서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 세력을 향해서 깊이 도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것도 바로 자신의 자녀들이 이렇게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이 싸움이 힘겹지 않은 이유는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이겨놓은 싸움이고 우리 안에 이루어진 정부는 불법적으로 강탈된 괴뢰 정부이이며, 우리 마음이 그 죄를 죄로 인식하고 우리의 영혼이 그 죄와 맞붙어 싸우기 시작하면 성령이 삽시간에 우리의 죄들을 죽이시고 우리의 무너진 세계를 다시 재건하여 은혜의 세계를 건설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죄에 졌던 수많은 날들을 청산하고 이제껏 죄의 지배 아래 살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던 그 죄악보다도 훨씬 더 많이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만 순종하고 그분이 기뻐하는 열매를 많이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게끔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함(1)-
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함(1)
서론
여러 시간에 걸쳐서 저는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위험한 징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많은 징후들을 말씀드린 가운데 지난 시간에는 특별히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방편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때에 어떻게 우리들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증거가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기도가 어떻게 죄를 파괴하고 또 사단이 어떻게 신자들 안에서 그런 기도의 영을 완전히 고사시켜서 영적으로 무장해제 시키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설교를 다하고 났더니 들리는 이야기가 설교를 듣고 두 반응이 나타났는데 어떤 사람은 막 찬란한 빛이 자신의 영혼에 밀려들어오면서 자기가 이제 10여 년 동안 왜 이 어두움 속에서 대상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며 싸웠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용기가 난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용기가 나고 아!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이 지리멸렬한 싸움을 계속하지 않게끔 자기가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설교를 다 들었는데 팔다리에 힘이 다 빠지고 예수님을 믿을 모든 기력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반응이 또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꼭 저렇게까지 말씀을 깊이 쪼개서 그것을 저렇게 해부하는 것처럼 해야지만 신앙생활을 하나? 하는 반감도 생기고 또 어떤 사람은 뭐가 뭔지 모르지만 하여튼 저 강단에서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이야기가 울려 퍼지고 있다. 그래서 뭐가 잘못되었는가 물어보면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나는 싫다. 그런 다양한 반응들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은 모든 사람을 신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시금석 역할을 해서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의 빛이 들어오기 전에는 함께 어깨동무하고 어울려서 살던 사람들이 쫙! 갈라지는 그런 효과도 가집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씀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든지 그것은 저의 몫이 아니고 여러분의 몫이고 저는 여러분들을 즐겁게 할 의사가 추호도 없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저는 요리사가 되기보다는 의사가 되고자 결심한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진실을 감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각자 여러분들의 분량에 따라서 생각하시면 되는데 낙망하셨다, 절망하셨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끝까지 들어봐야 됩니다.
그래서 대충 설교했습니다만 지난주까지 설교는 상반 절에 대한 설교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그리고 오늘부터 이어지는 설교는 몇 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길면 7-8편쯤 될 것이고 짧으면 4-5편쯤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가봐야 압니다. 그래서 빨리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주에 매우 중요한 설교가 행해진다는 것만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서부터 하반 절입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서부터는 이제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러면 은혜 아래 있는 것이 왜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가를 차례차례 몇 주에 걸쳐서 알아보겠습니다. 오늘은 한 가지만 하겠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A. 율법은 무엇인가?
여기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율법이 도대체 무엇이고, 도대체 율법이 신약성경에서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이야기가 되는데 그 율법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갖는 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해 잘 모르실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율법에 대해서 무조건 적대감을 갖는 것들이 어느 정도까지 합당하고 어느 정도까지 합당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생각이 거의 정돈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통해서는 이 문제를 여러분들에게 깔끔하게 정리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여기서 왜 그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이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넓은 의미
우리들이 율법을 하나로 생각하면 안 되고 율법을 두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종류보다는 분류인데 하나는 넓은 의미의 율법이고, 또 하나는 좁은 의미의 율법입니다. 넓은 의미의 율법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당신이 가지고 계신 의지를 흠 없이 계시해주신 총체를 가리켜서 넓은 의미의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은 절대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 19편 같은 곳에 보면 신약에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는 그 율법을 통해서 시인은 “율법은 나의 영혼을 소생 시키나이다”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119편에 가면 “주의 율례가 진토에 붙은 내 영혼을 소생시켰사오며 주의 율법이 하나님의 법이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하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하루에 7번씩 감사하고 자다가 일어나서도 그 율법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에서 이야기하는 그 율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과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의지적인 뜻들을 아주 깨끗하고 투명하게 계시해주신 그 총체를 가리키는 것이 넓은 의미의 율법인데 그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도 포함되어 있고 그 율법이 은혜의 도구로 작용을 해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아주 놀라운 은혜를 제공하기도 하고 그 율법 때문에 낙망해서 거의 더 이상 살수 없을 정도로 진토에 떨어진 시인들의 영혼이 은혜로 소생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2) 좁은 의미
그런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넓은 의미의 율법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율법입니다. 그 좁은 의미의 율법은 구약에서 완전한 복종을 위해서 인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규칙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 율법은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고 하는 살벌한 강제조항과 함께 들어오는데 그 율법 속에는 아까 넓은 의미의 율법에서 인간들이 경험하던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맛보게 만들었던 그런 놀라운 회복의 은혜, 화목의 사랑 같은 것들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a. 에덴에서 주어진 율법
좁은 의미의 율법은 다시 구약에서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에덴동산에서 주어진 율법이었고, 또 하나는 시내 산에서 주어진 율법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그 율법을 받은 사람들이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처음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이었고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간들을 머리로 한 아담과 하와로 한 율법이었기 때문에 모든 후손들에게 또한 함께 동시에 주어진 율법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에 동상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다가 명령을 하셨는데 모든 것은 네 마음대로 주관하고 다스리는데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저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반대로 안 먹으면 계속 산다는 거였습니다. 거기에는 왜? 라는 이유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에 의해서 안 먹는 것이 좋다고 나온 것이 아니라 어려운 말로 선헌적으로 인간의 체험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이게 내 뜻이다 하고 일방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따먹으면 그것은 나에게 도전과 반역으로 알고 그리고 너를 죽이겠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이유는 이것을 통해서 창조된 인간에게 그들의 전적인 의무가 무엇이고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 져야 할 그 복종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인간들에게 가르쳐주심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선을 분명하게 하심이었습니다.
인간은 동산을 다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하나님과 구별됨을 별로 느낄 수가 없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그 나무 앞에 와서는 저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그 계명이 생각나면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통해서 유추해 들어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우리는 이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주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된 그런 피조물일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뜻에 복종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율법을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율법에 잘 순종하고 가만히 머물러있는 동안에는 그가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의로운 사람으로 머물러있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 보여도 그 나무를 보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하면서 그 법을 생각하면서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처음 창조된 인간을 다스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는 그게 인간을 넘어트리려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는 훌륭한 표지판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에는 죄를 막는 능력도 없고 또 들어오면 그 죄를 쫓아낼 수 있는 어떤 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처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주신 율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불순종했고 그래서 죄는 들어오게 되었고 사망이 우리 위에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b. 시내산 에서 주어진 율법
그러다가 두 번째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지게 되는데 이 율법은 처음 믿는 그 율법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그리고 그 율법이 이제는 나라에 주어졌다는 점에서 볼 때 처음 에덴동산에서 주어진 율법과는 양산이 달랐습니다. 애굽에서 이미 300만 가까이 된 사람들이 탈출을 했고 그리고 시내 산에 머무르면서 거기서부터 율법을 받는데 아주 상세하게 제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 속에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계명이 들어오는데 좀 더 발전해서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시고 어기면 하나님이 죽이실 것이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심판이 함께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탈출한 많은 이방의 족속들에게 함께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육적 이스라엘을 모두 묶고 또 신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어온 다른 족속까지 모두 묶어서 이제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율법을 받고 신앙을 고백하고 할례를 받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 율법이 주어졌지만 죄를 파괴하는 하나님의 은혜나 죄를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그 율법 속에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주셨던 율법에는 없었던 새로운 목적을 시내 산에서 주신 율법에서 하나님이 추가를 하시는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지키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로 그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목적이 추가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유익은 우선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빛이 비추면 죄인 줄도 모르고 행했던 사람들이 그 율법의 빛을 보면서 죄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율법 속에는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어떤 힘이 없습니다. 단지 율법이 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느끼게 만들고 그것을 판단하게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심판하고 책망하고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당한다면서 정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지 되는데 이제 죄라는 것도 알았고 그리고 그 죄가 잘못됐다는 것도 알았는데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도 알았고 얼마나 엄중한 심판이 약속되어 있는가 하는 것도 알았는데 죄 가운데로 들어오게 되니까 자신의 힘으로 그 죄를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하나님이 자기를 이 죄에서 건져주시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그 절대적인 갈망을 가질 수밖에 없게끔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율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갈망을 하나님이 성취하실 수 있는 길을 열었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모든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두 가지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없이 살수 없다는 고백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죄 있는 자로서는 그 율법의 요구와 그 율법이 제시한 심판 때문에 그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특권이 박탈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사’라고 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죄는 있는데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막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자기의 죄를 담당한 짐승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제사장 앞에서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그 순간에 자기의 죄가 양에게로 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즉 물리적인 이치로 따지면 말도 안 되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율법에 의해서 죄인이라고 정죄 받은 사람들에게 일시 방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법입니다.
그래서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면 자기가 많은 죄가 양에게로 전가되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그러면 논리적으로 볼 때 이 양은 죄를 짊어진 죄진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죄 지은 자에게 약속하신 죽음과 심판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인이 보는 눈앞에서 그 양이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진홍빛의 그 붉은 피가 그 하얀 양털 위에 확~ 번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충분하지 않아서 짓이겨지면서 거기서 피투성이가 됩니다. 그 양이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막 쏟는 배설물과 튀는 피, 이런 것들이 낭자하게 번지는 가운데 그 껍질이 찢겨 발겨지고 그 다음에 배가 갈라지고 내장이 파헤쳐지고 그러면서 이제 제단 위에서 불태워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 사람이 정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면 거기에서 두 가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는 죄에 대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또 하나는 죄는 내가 지었는데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어린양이 그 죄를 짊어지고 무참하게 죽임을 당함으로서 나에게는 그 죄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주신다고 하는 이 은총에 대한 감격, 죄에 대한 두려움과 그 다음에 은총에 대한 감격이 거기서 함께 용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가 올라가고 피가 낭자하게 튀고 죄인들이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있고 이러면서 제사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그 인간을 잠시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들 때문에 잠시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그 제사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이 잠시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주셨을 뿐이지 그들 속에는 죄를 이길 힘이 율법 안에 없었기 때문에, 잠시 하나님과 교통했지만 여전히 다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면 하늘 문은 닫히고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영원한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
이런 일들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반복되면서 그들은 무엇을 배웠는가 하면 이렇게 잠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양이 대신 죽고 순간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데 언젠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임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원히 감당할 누군가를 보내실 것이며 그래서 그 희생을 통해서 영원히 열린 가운데 그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 그런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구약 시대에도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율법을 마음을 다해서 잘 지키고 그 속에서 제사를 통해서 잠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린 율법에 신실했던 많은 사람들은 절대로 그 율법에 만족할 수 없었고 그 율법을 통해서 정죄 되고 심판 받고 저주받음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 몽학선생
그래서 신약성경은 이 율법을 몽학 선생이라고 비유를 하는 것입니다. 몽학 선생은 서양영화에 옛날 영화에 보면 신분은 종인데 종들 중에도 허드렛일을 하는 종이 있지만 글도 좀 읽을 줄 알고 제법 사람구실을 하는 종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가정을 너무 사랑하고 주인께 충성하는 종이기 때문에 그 중에 신뢰할 수 있을만한 늙은 종 하나를 택해서 ‘애야, 너는 우리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는 그 일을 네가 좀 해라.’ 그러면 그 종은 마부와 같은 종인데도 마부가 이 종으로서 말을 끌고 가면 이 몽학 선생인 종은 도련님 옆에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인데도 마치 자기 자식을 다루듯 합니다. ‘도련님,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지난주에는 도련님 공부 시간에 말썽을 피웠다고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장난치실 겁니까?’ ‘안 그럴께’ ‘오늘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잘 듣고 숙제도 제대로 받아 적어서 그렇게 꼭 모범적으로 공부하다가 오셔야 됩니다. 아셨죠?’ ‘알았어.’ 그리고 보내주고 데리고 오고 하는 선생입니다.
그런데 그 몽학 선생은 비록 선생의 위치에 있어서 그에게 뭔가 이렇게 우세하게 뭘 해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임시적입니다. 이 아이가 다 커서 이제 학교에 가서 말썽부릴 일도 없고 성장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몽학 선생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우리의 손을 이끌고 계속 데리고 간 게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인 것, 그것이 이 율법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입니다. 이것이 시내 산에서 주어졌을 때 추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무엇인가를 우선 첫 번째 알아봤습니다.
B.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시는 두 방식 : 율법과 은혜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시는 방식입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믿는 자들만을 다스리십니까, 믿지 않는 자들도 다스리십니까? 하나님은 믿는 자들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도 다스리십니다. 그러면 다스리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반드시 법이 필요합니다. 법이 없으면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를 기르면서도 자녀가 로보트가 아니기 때문에 규칙을 정해놓고 규칙대로 살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녀보고 일어나. 그러면 자녀가 일어나서 ‘화장실로 가. 칫솔 들어. 그러면 칫솔을 듭니다. 약발라. 입에다 넣어. 움직여.’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어나라 그러면 애가 일어나서 세수하고 그 다음에 다 말하지 않아도 밥 먹고 가방 챙겨서 제 시간에 학교에 갑니다. 그리고 2시면 오게 되어 있는데 5시에 온 날은 저 밖에서 눈치를 봅니다. 뭘 어긴 것입니까?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법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있어야지만 건널목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법만 정해놓으면 그 법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게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는, 그것입니다.
1) 불신자 : 율법으로 다스리심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다스리는데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다스리는 방식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율법으로 다스리시든지 은혜로 다스리시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율법으로 다스리십니다. 그것을 오늘 표현하기를 “법아래 있다. 율법의 다스림 안에 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이 세상에 있는 신자들만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면 됩니까, 아니면 모든 신자들도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야 됩니까? 불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기 위해서는 제시되는 하나님의 요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불신자는 둘로 나뉘는데 율법을 받은 사람과 율법을 안 받은 사람입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의 율법을 받은 유대인, 시내 산에서 받은 사람들 분만 아니라 그 후에 성경을 통해서 그 율법이 계속 가르쳐졌던 사람들은 여기에 속합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뭘 통해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가 하면 그 율법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율법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고 이것을 하지 말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살지 말아라. 그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에 의해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잘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그것을 어기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그렇게 갖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방인들이 있을 것이고 오늘날의 시대에는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그 사람들도 율법으로 다스리십니다.
그런데 율법을 몰랐는데 어떻게 율법으로 다스리실까요? 율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그 율법, 성경의 율법이고 또 하나는 그런 율법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놓으신 율법입니다. 그러면 뭘 새겨났다는 것일까요? 그러면 증명을 하겠습니다.
보십시오. 밥을 먹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밥을 먹을 때 밥그릇을 이렇게 들고 떠먹으면 체신머리가 없다고 해서 욕먹습니다. 그리고 밥상에 얼굴을 파묻고 밥주발에 입을 대고 밥을 먹는 것도 우리나라에서는 좋아하는 식사습관이 아닙니다. 밥을 퍼서 몸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고 퍼서 이렇게 먹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문화가 다릅니다. 그래서 이것을 내려놓고 먹으면 시건방지다고 합니다. 아주 실례입니다. 반드시 오른손으로 이것을 들고 그리고 입 가까운 곳에 대고 우동이나 밥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예의바른 식탁 예절입니다. 이런 것들은 나라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에서는 이리로 오라고합니다. 서양에서는 이렇게 오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은 개를 부를 때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선악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 나라의 문화 속에서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사람들 속에서 정착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문화의 다양성과는 상관없이 도덕 속에는 놀라운 일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게 문화처럼 도덕이 다양하다면 동양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형벌 받을 무서운 죄인데 서양에서는 그게 오락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서양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그랬는데 동양에서는 부모를 학대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서양에서는 친구들을 신뢰로 대하라고 하고 동양에서는 속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아프리카 토인, 에스키모 할 것 없이 틀리는 것도 약간은 있지만 그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고 대부분은 아주 놀라운 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과 경전 사이에 일치가 아주 많은 것입니다. 전 불경은 잘 모르지만 거기서도 보면 사람이 막 교만하게 살고 그러면 계속 잘된다.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논어나 공자 같은 사람도 부모 공경을 가르치고 성경도 가르칩니다. 그게 무슨 커닝해서 베껴 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들에게 주신 율법이 시내 산에서 준 것만이 아니라 그것은 특별한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그 율법을 인간을 창조할 때 그 본성 속에 말하자면 프로그램을 해놓으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창조세계가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정한 코드를 인간의 심성 속에다가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살아오는 상황과 여건에 의해서 다소 흐려지고 혹은 바뀌는 것 같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질서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예수 믿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공직자가 되면 우리나라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역사 속에서 증명이 됐습니까? 그런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나라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한사람, 한사람 속에 신앙이 들어가서 움직여야지 만 겨우 나라다운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법과 원칙과 질서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본성이 율법을 따라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 때 나라는 합리적이고 제대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좋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면 어떻게 됩니까? 나라다운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다운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다 새겨놓으신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게 내세도 안 믿습니다. 그것은 선하게 살아가든 악하게 살아가든지 간에 내세는 없고 형벌도 없고 보답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전체적으로 움직여서 이렇게 공급해주고 저렇게 공급해주는 그런 절대자가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절대로 안 믿는 사람인데도 선을 행하고 잠자리에 든 날은 피곤해도 달콤하게 잠이 옵니다. 악을 행하고 못된 짓을 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굳게 믿는데도 잘 때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고 잠들면 가위에 눌리고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 속에 본성적인 율법이 새겨 있는데 이 코드대로 안 사나니까 죄인들 속에서 이것이 작동을 하면서 인간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주고 양심이 스스로를 고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리학에서는 이 윤리를, 인간이 있는 이 도덕심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그러니까 그런 율법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 속에 다 그런 율법이 있고 분명히 그 하나님의 심성이 만물 속에 나타나있고 마음속에 코드로 새겨져있기 때문에 자기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못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율법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불신자들을 통치하시고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렇게 받은 그 율법은 자기의 죄가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죄를 판단해주고 그래서 그 죄들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을 책망하고 심판하고 정죄해서 괴롭게는 할 수 있는데 그 죄를 끊거나 이기거나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법을 주신 후에는 그 법을 따라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법을 따라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즉 이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절망적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그들을 다스리시는데 그 율법이 죄를 지적해주고 죄를 느끼게만 만들어주는데 그 죄를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 성경에도 그리고 여기에도 나와 있는 신약 성경에도 구약에는 ‘토라’ 그리고 신약 성경에는 ‘노모스’입니다. 모두 단수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율법이 다 쪼가리로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지키면 다 지키는 것이고 안 지키면 다 어기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율법을 어기게 되니까 그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에서도 적절하게 심판을 하시고 마지막에 세상 끝 날에는 완전히 그 모든 것들을 청산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이 다스리는 속에 어떤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막연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선한 끝은 없어도 악한 끝은 반드시 있다. 그리고 악인은 반드시 멸망하고 그리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하늘도 돌아본다’라고 하는 완전히 맞지는 않지만 그런 질서들을 그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다스림 속에서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한다. 왜냐하면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만약에 너희가 법아래 있다면 틀림없이 죄가 너희를 주관할 것이고 shall be master 죄가 너희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런 식으로 법아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2) 신자 : 은혜로 다스리심
그 다음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사람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신자입니다. 그런데 그 신자는 율법으로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다스리십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여러분 이해가 잘 안갈 것입니다. 아주 쉽게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예화를 하나 하고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쉬울 것입니다.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신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뜻입니다. 5월 달만 되면 가정의 달 설교를 합니다. 그때에 사실은 많은 지체들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계속 설교를 하는데 내용이야 거의 비슷하지만 그 중에 어느 지체의 고백입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그렇게 집에서 엄마를 때리고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 부모를 공경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고 하는 놀라운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뒤집으면 율법은 가끔 뒤집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반대로 미워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땅에서 되는 일이 없고 곧 죽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요즘말로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네가 부모를 미워하면 이 땅에서 모두 되는 일이 없을 것이고 너는 객사하거나 젊은 날에 암으로 죽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사망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통해서 그렇게 제시를 받을 때 겁이 납니다. 자기는 이 땅에서 잘되고 싶지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어서 깡통을 차고 싶지 않고 두 번째로 자기는 좀 오래 살고 싶지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겁이 납니다. 그래서 부모를 다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가책은 계속 받는데 그 부모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도 굉장히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미워하는 사람을 욕하지만 말아야 합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체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그 문제가 사실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의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마음속으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부흥회 같은 것을 하면 항상 회개하는데도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너무 받은 상처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그러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콱! 자극을 시켜주셔도 그때마다 가슴 아파서 눈물을 흘리지만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4-5년 전에 어버이 주일 때 똑같은 설교가 행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들으면서 깊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깨달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우리 아버지를 용서하는데 힘이 드는데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을까? 지금은 우리 아버지가 그래도 예전에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시려고 그래도 내가 용서 못하는데 내가 아버지를 나를 아프게 한 것보다 훨씬 더 지능적으로 오랜 세월을 주님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해드리면서 죄와 불순종 속에 살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용서하셨을까? 그때 뭐가 느껴졌는가 하면 그 하나님의 아픔이 느껴진 것입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그러면서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기 위해서 아들이 십자가에서 그 가시면류관과 못 박힌 손과 발, 채찍에 맞은 그 피로 얼룩진 상태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뼈저린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생각이 들면서 통곡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매달리는 그 쓰라린 고통도 모두 맛보셔서 나를 용서해주셨는데 나는 아버지를 이렇게 용서하지 않고 있구나. 그러면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그 아버지를 용서할 힘이 생겨났습니다.
이때 용서하는 것은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고 싶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렇게 하나님 거스르면서 살아온 이 불순종한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나를 위해 죽으셨구나 라는 생각하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들어 온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그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오르면서 그 가냘픈 어깨가 그렇게 쓸쓸해 보여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아버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어둡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라 그 죄와 영혼의 어두움 속에 시달리면서 그렇게 살수밖에 없었던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한 마리의 상처받은 양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그리고서 마음이 녹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누가 상처를 주었는가, 받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 아버지가 그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는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속에 주신 은혜를 가지고 우리를 다스려나가십니다. 그러니 이 두 차이를 비교해보십시오. 그러니 우리는 노예와 같이 율법의 심판이 무서워서 복종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그 은혜가 거의 유일한 방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의 백성들에게 이 은혜를 물 붓듯이 쏟아 부어주시기를 원하겠습니까? 아니, 왜 그 은혜로운 복음의 빛을 설교를 듣고 힘이 빠집니까? 그렇게 살 희망이 떨어집니까? 도대체 여러분들은 어디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넘치소서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부으소서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그 배에서 솟아나도록 생수의 강이 넘쳐나는 것처럼 여러분 모두에게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긍휼을 쏟아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왜입니까? 그렇게 함으로서 당신이 우리를 통치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참으로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들어놓으셨을 때 그렇게 살기 원했던 목적을 따라서 다시 살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그 은혜를 물 붓듯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중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이 화내는 것은 아니지만 개관적으로 볼 때 왜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차별대우하시나. 어떤 사람은 율법 아래 있어서 그렇게 괴롭고 율법 때문에 정죄 받고 양심에 번민을 하고 고발당하며 사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 가시고 그래서 영생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나?’ 구원받은 신자이지만 왜 하나님이 이렇게 불공평한 것처럼 인간을 두 가지로 통치하실까? 그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 대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해방하심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제는 너희가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을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백성들의 모든 죄를, 불순종을 자신이 모두 감당하시고 그리고 그 저주 아래서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율법 아래 태어나서 그 율법의 요구에 맞게끔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진 어린양으로서 우리들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당해야 할 그 처참한 형벌을 한 몸으로 감당하시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대속의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성령님을 통해서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라는 사실을 향해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와 그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그 죄와 사망에 법에서 율법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또 하나는 성령님을 통해서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향해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와 그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그 죄와 사망의 법에서, 율법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생명과 성령의 법을 우리 안에 새롭게 심으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주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때 중대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던 죄와 사망의 법을 모두 박살내고 그리고 거기에 생명과 성령의 법을 심으셔서 예전에는 율법이 그들을 통치했지만 이제는 은혜가 그들을 다스리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잔존하는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이제 도망을 다닙니다. 그런데 이제 이미 이런 것들은 모두 지배의 원리 자체가 궤멸되었고 다스릴 수 있는 그런 법들이 다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다른 나라를 공격할 때에 제일 먼저 공격하는 것은 변방을 공격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변방을 뚫고 들어가서 수도를 향해 진격을 합니다. 다른데 아직 군인들이 남아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수도를 점령해서 왕을 사로잡고 왕의 보좌를 빼앗아버리면 그 다음에 빼앗은 적군들이 즉시 발동하는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너희들이 섬겼던 아무개가 너희 왕이 아니다.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법들은 무시되고 이 나라에 세워진 모든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고 옛날의 관리들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것을 전국에 공포해버립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이 이제 질서가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죄와 사망의 법이 더 이상 우리를 통치하지 못하도록 궤멸시켜버렸는데 거기에서 완전히 죽지 않은 빨치산들이 우리의 영혼 속에서, 신자의 마음속에 남아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외부로부터 무기와 지원을 공급받지 않으면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을 공급해주는 것이 누군가 하면 우리 자신입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살지 않으면 그 반군들에게 계속 도시락 날라주고 무기를 사다주고 텐트 갖다 주고 삽을 갖다 주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점점 그것들을 지원 받으면서 흩어져 있던 세력들을 규합해서 점점 세력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강해지는 것 같아도 일단 그 공급을 끊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영적인 그 원리로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진실 되게 매달리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들을 기대하고 그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서 은혜를 받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거기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그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잔존하는 죄를 이길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은혜 아래서 살다가 마지막에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해서 영원한 심판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누리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두 차이를 비교해보십시오. 율법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고 거기서 그 율법 때문에 고발을 당하고 그 율법 때문에 정죄 받고 그 율법 때문에 가책을 느끼고 그 율법 때문에 저주를 받지만 그 율법을 통해서 어떤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몸부림치며 신음하면서도 또 죄의 종이 되어서 살아갑니다. 아직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어떤 희망도 없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다스려 가십니다. 이 두 사이의 삶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이 땅에 존재하는 두 부류의 인간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러분들 모두는 아니겠지만 만약에 여러분들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에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거듭나서 율법의 지배가 아니라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삶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하면 이 싸움은 우리들이 거의 이긴 싸움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c. 은혜 아래 있는 신자들과 죄
그럼 마지막 세 번째로 그러면 우리에게 이렇게 은혜의 통치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도 남아 있는 이 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선 첫째로 이렇게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도 죄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신자에게도 죄가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다시 둘로 설명될 수 있는데 절대적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죄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벌써 생명의 성령의 법이 거듭남과 모두 파해버렸고 단 두 번째로 실제적으로 우리들을 괴롭히는 죄들이 신자들 안에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법이나 우리를 더 이상 종 삼는 통치하는 절대 권력을 가진 죄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그런 죄는 우리들이 여전히 마음속에 가지고 있고 이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이것으로부터 완전히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끊임없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원리를 활용해서 대적하고 그것들을 적절하게 처리하면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이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영적 생활이 이루어집니다.
2) 그 죄가 신자를 지배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제 우리들이 여기서 생각할 것은 그렇게 잔존하는 죄가 실제로 우리들의 경험에 의하면 굉장히 강한 힘을 얻어서 왕성해지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지체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자기는 도저히 그 죄를 이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울고불고 회개하고 나서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범죄 하는 자기 자신을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도 끊어지지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지체가 하는 이야기가 조금 그 죄에서 벗어나서 비교적 하나님을 찾는 때가 있는데 그때 하나님이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 엄청나게 절망하고 있는데 그 죄를 도저히 자기 자신이 죽이지를 못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죄의 지배에서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죄는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돌아오면 쉽게 죽지만 그 방법에서 이탈되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도 죄는 절대로 안 죽습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 때 마틴 루터 같은 사람은 자기 속에서 죄가 살아서 역사 하는 것을 느끼고 무척이나 괴로워했습니다. 자기가 이런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겠는가 라고 고민할 때 수도원에서 가르쳐 준 것이 금식하고 고행해서 널 죽여라 였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자서전에 보면 깊은 굴속으로 들어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물 한 방울, 낱알 한 톨 안 먹고 삼일씩 사흘씩 자기 죄와 씨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얼굴이 핍절하게 다 마르고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서 오름으로 피투성이가 됩니다. 그렇게 고행을 합니다. 그러면 어느 한순간에 죄가 싹 죽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욕망과 비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질병 중에 두 가지가 있는데 폐결핵은 사람의 몸이 약해질수록 왕성하게 힘을 발휘합니다. 암 같은 것은 신체가 건강할수록 같이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다른 병에 앓고 있는 사람이 암에 걸리면 오래 삽니다. 그런데 제일 무서운 것은 건장하고 튼튼한 젊은이들이 암에 걸리는 것입니다. 멀쩡하게 펄펄 뛰는 사람인데 두 달 안에 죽어버립니다. 이렇게 병의 차이가 있듯이 육체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도 말하자면 그 암적인 그런 부류에 속합니다. 그래서 밥 잘먹고 건강하면 죄의 욕망도 같이 솟습니다. 그런데 이게 밥을 굶고 해서 육체를 학대해서 기운이 짝 없어지면 그러면 죄에 대한 욕망도 함께 감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퇴한 그 순간에 자기가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력을 차리고 다시 밥을 먹고 정상적인 삶을 살면 다시 살아납니다. 그 속에서 미치도록 절망하는 것입니다.
- 복음의 원리로 돌아오라
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원리는 아주 냉엄합니다. 자동차가 눈길이나 수렁에 빠져버리면 아무리 좋은 차도 소용없고 외제차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퀴가 빠졌으니까. 붕! 하고 시동을 거는데 타이어가 외제면 뭐하고 엔진이 좋으면 뭐합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은 퀴가 불이 나도록 시동을 거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차를 빠진 수렁에서 끌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끌어내면 그 힘의 십분의 일만 들여도 잘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지체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답이 이것입니다. 당신은 거기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속에서 나올 수 없고 당신이 신자라면 더더구나 헤어날 수 없습니다. 거기서 애달프게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도 그 순간은 하나님께 기도가 상달되는 것 같지만 이미 원리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미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십시오. 복음이 어떻게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에서 은혜의 지배 속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지에 대해 가르치는 그 원리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 원리로 돌아오면 너무나 쉽게 어느 한순간에 죄를 이길 수 있는 은혜와 긍휼히 물 붓듯이 쏟아 부어지면서 당신이 왜 그렇게 수 없는 날들을 헛된 투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다시 죄에 붙어서 젖을 빨고 하는 그런 짐승과 방불한 삶을 계속해서 살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답을 얻게 됩니다.
제가 요즘 제 안에 죄가 죽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여태껏 설교되었던 것은 굉장히 방대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30%밖에 못 건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야 됩니다. 몇 번 공부를 해야지 되겠지만 그 중에 우선 진리를 한 두 개만 찾아서 적용을 해도 여러분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제가 요즘 적용을 하고 있는 진리 가운데 하나가 지난주에 설교했던 마음으로부터의 기도, 지속적인 기도와 마음으로부터의 기도가 죄를 멸한다는 그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살 때는 물이 가득 고인 우물과 같아서 볼 필요도 없고 두레박 집어넣으면 두레박이 떨어지기도 전에 풍덩! 하며 물 속으로 쭉 들어갑니다.
그런데 은혜가 많이 떨어져 죄의 지배 아래 들어있는 것 같을 때는 두레박을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습니다. 내려서 첨벙! 하는 소리가 안 나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저 속에서 그래도 물이 찰랑찰랑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보이지 않지만 매달려서 흔들고 흔들어서 반 두레박이라도 해서 길어 올려야 합니다.
아까 그 지체와 같은 경우도 전혀 은혜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에게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깊이 들어가서 그래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그런 기도가 아닌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심을 길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이런 죄의 우세한 지배력이 나를 누르려고 하는데 이것을 좀 꺾어달라고 하는 그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응답이 오기도 전에 그렇게 마음에서 기도를 길어내는 이 과정을 통해서 그 죄로 얽매어 살아가던 그 사람의 영혼에 벌써 새로운 작용과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하면서 응답이 오기도 전에 길어내는 과정 그 자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갱신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각하는 것은 응답이 와야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응답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응답은 하나님이 응답을 통해서 몸부림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 속에 죄가 싫어하는 틀들이 생겨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실험해보니까 입증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어내야 합니다. 힘듭니다. 끊깁니다. 그때 다시 마음을 다잡고 마음속에서 길어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화려한 문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면 한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힘겹게 길어내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내가 형식적인 기도를 안 한다. 세 가지 작용이 일어나는데 마음이 죄를 죄라고 인식을 하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섞여서 뭐가 뭔지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좀더 지나면서 그 죄에 대한 미움이 생겨납니다. 왜 나를 이렇게 고갈되게 만들고 이렇게 힘들게 내 진심을 길어낼 수밖에 없게 만든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그 영혼이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몇 십 년 동안 나를 지배해왔고 하나님께서 나를 절망시켰던, 나를 완전히 그렇게 놀랍게 통치했던 이 죄니까 이제 내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지 만 겨우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붙어서 싸우는데 붙들면 시시하게 흐물흐물하더니 주저앉아버리는 것입니다.
옛날 곶감이라는 이름만 듣고 겁에 질린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는 죽으면서까지 곶감을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래서 그 숲에 사는 호랑이들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곶감을 두려워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었습니다. ‘곶감, 곶감’하며 이상한 형상의 동물이 그 숲에 등장하게 됩니다. 호랑이들은 죽은 호랑이의 유언을 기억하며 그 곶감에게 먹이감을 사냥해 바치며 섬기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자 호랑이 무리들의 먹이감이 줄게 되고 심지어 사냥감이 없는 날은 자신들이 곶감의 희생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똑똑한 호랑이 한 마리가 동굴 속에서 자기들이 사냥한 먹이감으로 배를 채우며 지내는 곶감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깁니다. 곶감이 있는 동굴을 습격한 그들은 그 곶감이 탈을 쓴 여우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그 우스운 전래동화가 생각이 났습니다. 죄가 신자들을 지배하는 데 사용하는 두 가지 무기를 강압과 속임이라고 했습니다. 그 지체는 강압과 속임에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설교를 들었는데 살 힘이 빠지고 주님을 믿을 힘들이 빠진다고 하는데 아주 훌륭하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죄가 그런 것을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네가 설교 몇 편 들었다고 기고만장해서 신자 된 이후에도 내가 사실상의 지배권을 네 인생 속에서 행사해왔는데 이제 와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나에게 반항을 하겠다고, 그 몇 편의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가 그렇게 기고만장해서 나에게 대항하겠다고 그게 가당할 것 같은가?’ 그러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렇게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앗아가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보다는 훨씬 더 정교한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는 지배력을 얻기 위해서 계속 투쟁하지만 복음은 그 죄를 소멸하는 능력을 주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통해서 깊이 은혜를 받고 그 죄를 폐기할 수 있는 지속적인 생명과 능력을 말씀의 감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싸울 때 그 죄가 강하게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서 그 은혜가 그 사람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싱거울 정도로 죄가 허무하게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래서 아까 내가 예를 들었던 자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죽도록 미워하는데 예수 믿은 다음에도 수십 년 동안 자기 운명처럼 생각하고 산 것입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속에 들어오니까 용서할 수 없었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능력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미움이 그를 지배하면서 다스릴 수 있는 모든 지배력의 기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를 이렇게 은혜 가운데서 통치해서 우리를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정말 주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려고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이 원리로 돌아와서 이런 승리를 누리면서 여러분들이 감격적인 은혜의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8. 죄의 지배 아래서 벗어나는 길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오늘 드리는 말씀은 죄가 우리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복음이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기에 연장선상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그렇다면 내가 지금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판명이 되었습니다. 혹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죄의 심각한 공격을 받고 있어서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죄의 지배를 받는 상황으로 내려갈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실제적으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이것이 여러분들이 지금 당장 듣고 싶어 하는 가장 시급한 해결책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지난주의 연장선상에서 실제적인 문제들을 잠시 다루고 지나가고 다음주부터 다시 우리가 죄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를 차례대로 짚어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산불이 가끔 나지 않습니까? 산불이 나는데 그 산불은 참 너무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 산림을 가꾸기 위해서 짧아도 5-60년 길면 몇 백 년 동안을 그렇게 공을 들여서 가꾸어온 것인데 그게 한순간에 아무런 경제적인 이익을 주는 것도 없이 그냥 다 불타서 사라져버리니까 너무 아깝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나는 산불은 그래도 그렇게 큰 규모의 산불이 아닙니다. 몇 해 전만해도 일어났던 세계의 중요한 산불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아마존 지역에서 일어났던 산불, 호주에서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산불,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던 그 엄청난 산불, 7개월까지 탔다는 그런 산불, 몽고의 초원 지대에서 계속 번져가고 있었던 옛날의 그 화제들 이런 것들은 정말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끌 수 없는 그런 무지막지한 그런 산불입니다.
여러분들은 산불이 나는 현장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뒷산에서 쥐불놀이를 하다가 논둑에 난 그런 불 말고, 산 전체가 타들어가는 이런 산불은 엄청난 회오리바람 소리가 납니다. 그 이유는 산이 엄청난 목제를 태우면서 불길이 치솟을 때 뜨거운 공기가 하늘로 치솟으면서 공기의 흐름을 만들어버립니다. 커다란 바람소리를 내면서, 실제로 바람이 불지 않아도 엄청난 바람소리를 내면서 산이 타들어 가는데 더군다나 거기에 바람이라도 적절하게 분다고 할 것 같으면 엄청나게 타들어갑니다.
요즘 장비가 많이 발달되어서 한번 저수지 같은 곳에서 헬리콥터가 물을 뜬다고 하면 3톤을 뜬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몇 십대가 동원이 되어도 불이 초기가 아니라 이미 벌써 불이 생명력을 지니고 산을 태우면서 지나갈 때는 불이 타오르고 있는 경계선이 워낙 넓고 길기 때문에 몇 십대의 헬기가 떠서 물을 퍼붓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약도 살포하고 다하지만 안 됩니다. 대부분 그런 어마어마한 산불은 사람이 끈 게 아니라 비가 껐습니다. 폭풍소리를 내면서 타들어가던 그 무서운 불길이 캄캄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꺼집니다. 왜냐하면 3톤짜리 물은 한 장소에 갖다가 붓지만 이 비는 삼지 사방에 다 동시에 내리는 것이기에 불길이 확 잡힙니다.
D. 죄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죄의 지배를 너무 받고 져서 또 자기 안에는 도저히 이 죄에 항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나게 좌절을 합니다. 그래서 가끔 저에게 개인적으로 편지 오는 지체들도 보면, 전 세계에서 편지가 오지만 보면 가끔 자신의 그런 영혼의 상황을 토로하는 편지가 옵니다. 그런데 어마어마하게 죄가 불길처럼 번져가서 자기가 어떻게 그 죄에 저항해보려고 애를 쓰는데 마치 엄청나게 타오르는 산불 앞에 바가지로 물을 끼얹는 것처럼 이 영향력이 너무 미미한 것입니다. 그런 좌절감을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지성은 혼란하고 감정은 기복이 심해서 헝클어지고 의지는 자기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고 해서 엄청난 혼란들이 생겨납니다. 이때에는 한순간에 우리가 여태 것 신앙생활 해온 그런 복음의 교리, 신앙의 진리, 그 다음에 우리들이 헌신해온 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도저히 우리를 어떻게 이 죄에서 건져주지 못하는 것 같은 커다란 절망감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실질적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다루어가서 그래서 우리 안에 은혜의 질서를 회복하고 다시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의 건강한 삶으로 회복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그 지침을 아주 명쾌하게 6가지로 여러분들에게 성경에 기초해서 제시하려고 합니다. 6가지 제목을 먼저 불러드리고 그 다음에 말씀을 진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요즘과 같은 설교를 들으면서 이 메모를 안 한다고 하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의 천재성을 입증하거나 아니면 바보 성을 입증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기본적으로 작은 노트 하나 가지고 다 쓸 필요는 없고 제목만이라도 쓰면서 들어야지 이해가 가지 용량이 안 됩니다. 6개를 우선 먼저 진술하고 차례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죄의 지배의 교리를 이해하라. 두 번째는 삶의 환경을 정비하라. 세 번째는 은혜의 교리를 이해하라, 그리고 네 번째는 이 교리들을 믿으라. 이 진리들을 믿으라. 그리고 다섯 번째는 죄를 이기게 하는 은혜가 어떻게 주어지는지 그 방법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어떻게 공급해주시는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그러면 여러분들이 지금 타오르는 산불과 같은 죄의 세력을 여러분 안에서 느낀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반드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이길 수 있습니다.
1)죄의 지배의 교리를 기억하라.
우선 첫 번째 죄의 지배의 교리를 생각하라. 이해하라. 입니다. 우선 내 안에 죄가 강력하게 역사해서 나를 이렇게 스스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뒤흔든다고 하더라도 이 머리는 비교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고를 정돈하는 일들이 이 죄를 이기고 극복하는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들이 이해할 것은 죄의 지배의 교리를 이해해야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죄의 지배를 받게 되면 생각의 혼란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감정의 기복도 질서가 무너지고 그리고 의지로 통제가 안 되는 망가진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기존의 은혜의 질서들이 깨트려지면서 헝클어지니까 자신도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혼돈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에 잠시 정돈된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는데 그 첫 번째 이해해야 되는 교리가 무엇인가 하면 죄의 지배의 교리를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럴 것입니다. 그럼 죄의 지배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해를 해도 꼭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해조차 못하는데 이길 수 있겠습니까? 거의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죽음 다음으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지입니다. 그게 죽음 다음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생명 다음으로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식의 빛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지식의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가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경우는 자기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 라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면서 실제로는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가 있고, 두 번째는 자기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끔 죄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실은 첫 번째가 더 어려운 질병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따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하고 오늘은 자기가 죄의 지배를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하겠습니다.
①죄의 패배한 상태 I ; 죄의 지배를 모르는 경우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줄 모르는데 죄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회개할 죄가 별로 생각이 안 납니다. 특별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있는데도 거의 생각이 안 날 수도 있겠지만 양심이 무디어져서, 그것보다는 실제로 특별한 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 예를 들면 바리새인처럼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계속 익숙해져서 소문난 죄를 지은 적이 별로 없는 사람, 그리고 자기 양심에도 그렇게 소문나게 죄를 지은 적이 별로 없이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항상 자기 의가 있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착실하게 교회에 다녔고 그리고 이렇게 살아왔다. 이렇게 섬겼고 이렇게 헌금을 드렸고 이렇게, 이렇게 해왔다. 개척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그 교회에서 나없으면 벌써 쓰러졌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소문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죄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소문난 커다란 죄만 우리들을 죄의 지배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정리를 하십시오. 소문나게 덜컥 하게 짓는 살인, 간음, 도둑질 이런 커다란 죄만 우리를 죄의 지배로 데리고 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이렇게 죄라고 하는 그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삶에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삶의 중심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살고, 나 좋은 대로 살고, 내가 사랑하는 것 하고, 내가 내키는 대로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고 사랑하는 그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런 삶이 쌓이면 그가 그런 속에서 살면서 교회 착실하게 다니고 간음도 안하고 살인도 탈세도 안하고 이렇게 하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죄가 충분히 들어와서 그를 모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가운데 그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경우에 처해있는 사람들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자기가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성경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생명 없는 삶이라고 이야기하면 저것은 특별한 신앙의 견해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의 의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음에 비밀에 대해서, 경건의 비밀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이 단지 착실하게 교회 생활을 했을 뿐입니다. 형식적으로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가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중요한 충고가 있습니다. 이것을 가슴에 새기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죄의 증거를 찾지 말고 생명의 증거를 찾아보십시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렇게 생각나지 않는다면 좋습니다. 죄가 없다고 치고 그러면 성경으로 돌아가서 죄가 없고 정결하게 산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 성경이 의로운 사람, 청결하게 하나님 앞에 그 심령을 간직하고 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과 관계를 맺으셨는가를 정직하게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의로운 사람들과는 하나님이 동행해주셨고 산상수훈에 의하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죄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러면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하지 못하는 죄가 많이 들어와서 자기를 죄의 지배 아래로 데리고 갔든지, 아니면 그런 청결한 사람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을 뵈옵는 신령한 교통이나 고난 속에서 죄가 없이 순결하게 의롭게 살아갔던 사람들과 동행하시던 하나님의 생생한 동행의 간증들이 자기의 영적 삶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입증하면 됩니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들 중에서 이것을 입증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들이 정말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다가 교회에서 장례식을 하고 저 세상으로 가는데 정말 그들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토마스 왓슨이라고 하는 청교도의 표현에 의하면 잘 길들여진 짐승과 같은 삶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생명도 없고 특별한 죄를 지은 것 같지 않지만 그러나 죄가 가득 차서 하나님의 영적 광명과 그리고 신령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기 깨어짐의 은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②죄에 패배한 상태 II ; 죄의 지배를 아는 경우
두 번째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경우입니다. 혹은 죄의 심각한 공격을 받고 있고 내가 결코 내가 내 편에 선다고 할지라도 은혜의 지배아래 있다 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범죄가 크면 자책감도 커집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범죄 함으로 말미암은 자책감과 그리고 죄의 특별한 지배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죄의 지배력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그 속에서 은혜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안식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이 그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데 그런데 적절한 은혜의 원리로 돌아오지 않으니까 이제 유혹은 점점 강해지고 그 죄에 대한 저항력은 점점 약해져서 몸부림치는 혼란의 상황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상황이 아주 심각해져서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유혹이 강해지고 그러면 그 죄에 굴복하니까 그 유혹을 저항할 수 있는 저항력이 약화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똑같은 유혹이 다가와도 저항력이 점점 떨어지니까 그 유혹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항력이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감기가 무서운 질병입니다.
(예화; 청년 목회하실 때 어느 형제가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감기에만 걸리면 무균실로 들어가 치료를 받는데 그때 하루에 치료비가 30만원이었지만 저항력이 없어 감기만 걸려도 생명의 위협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
그렇게 저항력이 떨어지면 유혹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에 수시로 굴복하게 됩니다. 수시로 굴복하면서 자신의 은혜의 질서가 계속 파괴되니까 이제 혼돈이 생기면서 너무 괴롭습니다. 자책감까지 일어납니다. 자책감이 일어나고 그렇게 괴로운 상황에서 그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그를 위로하든지, 사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지금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죄가 우세하게 역사하고 있는 상황이 되면 그 다음으로 진통제처럼 그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의 낙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죄 때문에 자기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괴로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그 다음에 다시 죄를 범하면서 잠시 그 죄를 짓는데서 오는 달콤한 즐거움으로 그 영혼의 번민들을 잊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증을 치료하다가 너무 괴로우니까 술을 마시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 되는데 거기에 어떤 진전이 있는가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편으로는 죄의 세력이 그를 죄 아래로 사로잡아가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죄에 수시로 지면서 죄에 길들여져서 자기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죄를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상한 모순이 생깁니다. 한편으로는 죄로 인해서 괴로워하면서도 또 한쪽으로는 그 죄를 계속 마시면서 또 먹고 나서 힘을 내고 또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하다 너무 지치면 가서 죄를 마시고 이런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 되풀이됩니다. 누가 이런 상황에서 그를 구출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불가능합니다.
이럴 때 죄의 지배의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죄의 지배의 요지는 신자는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하나님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준 사람들입니다. 인신매매 범이나 이런 사람들이 사람을 데려다가 거의 노예로 만드는 방법이 아주 비참하도록 그를 망가트려서 희망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희망을 못 갖게 만드는 것, 그렇게 할 때 아주 길들여진 노예처럼 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그렇게 다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릇된 방법으로 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실제로 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죄의 지배가 어마어마한 세력으로 느껴지고 자신은 그 죄 앞에서 너무나 하찮은 존재라고 하는 그런 사실들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싸움이 원천적으로 점점 힘들어집니다.
그럴 때 상기할 게 무엇인가 하면 사실상 내가 죄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죄의 지배를 받는 집요한 공격을 받는 이 상황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우선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필요합니다.
만약에 어디가 많이 아프다. 괴롭다 그러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무조건 병원에 가서 아저씨, 배 갈라주세요. 하지 않고,. 아파도 그것을 꾹 참고 진찰을 받을 갑니다. 진찰을 받는 게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진찰받고 진단하는 동안에도 배는 계속 아픕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함부로 가를 수는 없고 이게 왜 그런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한 진단을 받고 그 다음에 조치를 하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그런 마음을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 가져야 합니다.
그 죄의 지배를 받고 아프고 괴롭다고 이렇게 날뛰고 저렇게 날뛰고 갑자기 철야기도로 돌격하고 그러다가 뜻대로 안되면 술집으로 돌격하고 그러다 괴로우면 친구 찾아서 돌진하고 그러다 안 되면 또 와서 펑펑 울고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프면 차근차근 해야 하는데 갑자기 와서 병원에 간다고 그러다가 갑자기 또 다 때려 치고 신앙으로 해결하겠다고 기도원에 보따리 싸갖고 가는가 하면 안 믿는 사람들은 또 갑자기 궂을 한다고 난리를 치고 이렇게 하면 결국은 사람은 죽습니다. 제일 먼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이 아픈데 의사와 약을 의존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생각이 되서 자기는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의사가 참 현명합니다. 기도하셔도 어디가 아픈지나 알고 정확하게 기도하면 하나님도 편하시지 않겠습니까? 진찰을 받고 그래서 엑스레이를 가지고 가서 여기가 문제인데 여기를 고쳐달라고 그러면 기도도 얼마나 간편하겠는가. 그러니까 다 찍어주고 수술하시겠습니까? 기도원에 가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의사가 우리들이 같이 삼일동안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수술하라고 그러시는지, 기도원에 가라고 그러시는지 그리고 우리들이 만나서 응답을 비교를 해보고 그리고 일치하면 그러면 합시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진실하게 기도하면 기도원에 가는 사람도 있지만 기도하면서 수술 받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모든지 필요한 것은 정확한 진단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죄가 좋아서 죽을 때까지 죄의 지배 아래서 그 삯을 받아먹으면서 그렇게 살다가 죽겠다고 결심을 해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왜 이럴까? 궁금하지는 않습니까? 그래도 한번은 좀 알아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엑스레이를 가지고 정확하게 찍어서 내가 왜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내 인생이 변화되는 게 없고 그리고 왜 이렇게 계속해서 내 영혼은 참된 평화가 없을까? 도대체 이것이 답이라면 내가 정말 이 하나님을 믿을만한가. 내가 정말 구정도 못 쉬고 달려와서 이렇게 예배를 드릴만한가. 이게 효험이 있는가. 한번쯤은 물어보는 것이 인생을 절약하는 방법 아닙니까? 계속해서 교회에 다니고 헌금도 하고 헌신도 하고 계속 그렇게 해야 될 텐데 몇 년이나 더 살지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정확하게 진단을 하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정확한 진단에 의하면 이런 것입니다. 지금 신자가 아무리 죄의 심각한 공격을 받고 지배의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폭동적 사건이지 정상적 질서는 아닙니다. 가끔 여러분들이 이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럴 수는 없어.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그런 사건이 있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무엇인가 하면 정상적으로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그 원칙을 벗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바로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군대가 몇 십만 명이고 경찰이 수만 명이고 이 나라가 보통 나라가 아닌데 그래도 화염병 들고 광화문에 나가서 띠를 두르고 막 데모해서 한 40분만 난리치면 거기 주인이 데모하는 사람이 주인이 된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 빠지고 경찰들도 도망가는 그런 상황이 됩니다. 그게 정상적입니까? 폭동이 일어나서 폭도들이 잠시 나라를 어느 한 골목을 지배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그게 영원히 거기서 데모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나라를 만들고 광화민국이 생겼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닙니다. 곧 정돈됩니다.
신자가 아무리 죄의 세력을 불길처럼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잠시 일어난 폭동일 뿐이고 은혜의 원리로 돌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다시 그 질서를 회복시켜주신다고 하는 정돈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가 막 불일 듯 일어나고 자기가 죄에 휘둘려 산다고 할지라도 항상 마음속으로 그 성경을 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고 불길처럼 일어나는 죄, 네가 그렇게 불길처럼 일어나지만 그러나 나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죄 네가 아니다. 너는 결코 나를 주관할 수 없으리니 왜냐하면 나는 거듭나고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하나님의 자녀다. 내가 지금은 비록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막 살아왔지만 그래서 죄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만 내가 다시 은혜의 원리로 돌아가면 내 영혼에 불길처럼 일어난 이 죄의 세력의 불길을 끌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의 비를 내려주실 것이고 그러면 그 죄가 나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정돈된 생각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2)삶의 환경을 정비하라.
두 번째는, 그리고 나면 마음속에서 어느 정도 이 죄와 담대하게 싸우겠다고 그런 것 까지는 안 된다고 할지라도 일단 이 죄를 피하고 싶다. 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다, 라고 하는 소원이 생겨납니다. 머리가 정돈되고 나면, 그때 해야 될 일은 삶의 환경을 좀 정돈해야 합니다. 그 삶을 정돈한다. 라고 하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죄는 아니지만 죄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환경으로부터 자기를 멀리 떼어놓고 적극적으로는 그 자체가 죄를 이기지 않지만 그러나 죄를 이길 힘을 얻게 하는 그 방법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자기를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일단 자기 사고 속에서 정돈된 죄의 지배의 교리를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이 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가끔 살다가 보면 심각한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간이 확 나빠졌다든지 그러면 제일먼저 생각나는 게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왜 이렇게 나빠졌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막 책을 보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하니까 간에는 술, 담배, 맵고 짠 것, 기타 등등 뭐도 나쁘고 뭐도 나쁘다고 나오는데 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식생활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질병과 가까워질 수 있는 거기로부터 자기를 떼어놓아야 됩니다.
그 좋아하던 담배도 할 수 없이 끊어야 됩니다. 그래도 안 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으려고 기를 쓰는 것입니다. 그것을 끊고 그 다음에 술도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죽는다는데, 나는 그래서 술에다가 해골 표시를 하나씩 이렇게 붙여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아마 사람들이 잘 안마실텐데. 술을 딱 보는 순간에 옛날에는 이 술을 먹는 즐거움을 생각했는데 이게 간에 들어가서 간을 죽이는 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골표시가 딱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에 나쁘다는 것 기름진 음식 등등 하여튼 뭔지 찾아서 자기가 좋아하던 것인데도 할 수 없이 끊고 합니다. 왜 살아야 되니까. 그런데도 먹고 싶다 그러면 먹고 죽는 것입니다. 뭘 그것을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가끔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얼마나 살겠다고 내가 아는 사람도 직장에 다니는데 그렇게 담배를 끊으라고 그렇게 안 좋다고 이야기하는데 얼마나 살겠다고 그러다가 폐암으로 죽었습니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은지, 그게 위험하다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데 왜 그런지. 그렇게 뜻을 세운 사람들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몸에 해로운 것들을 끊습니다. 그 환경으로부터 떠나야 됩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 술, 한잔 안 먹는다고 갑자기 살아납니까? 그거 아닙니다. 담배 한대 안 피운다고 죽고 간이 서금서금해져서 이제는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담배 한대 딱 끊으니까 막 뿅! 하고 간이 막 다시 새살이 돋습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그것을 멀리 해야지만 간이 이렇게 회생의 원리를 따라서 간이 회복하도록 도와줍니다. 하도 답답해서 이렇게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기껏 가르쳐주니까 뭐라고 하는가 하면 얼마나 살겠다고, 먹고 싶은 것 먹고 태우고 싶은 것 태우고 그러다가 죽는 것이지 인생이 뭐.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서 죽습니다. 그때 죽을 때 원 없이 간이 나빠지고 담배피고 술 먹고 죽으니까 참 좋다. 그런 유언을 남기고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을 때는 항상 억울하다고 그러고 너희들은 나처럼 되지 말라고 그러지,
그래서 전 병원에 가면 의사선생님 시키는 대로 합니다. 오죽했으면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뭐하시는 분입니까? 그렇게 의사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처음 봤다고 합니다. 나도 의사입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영혼을 고칩니다. 그런데 그렇게 멀리 하고, 그 다음에 또 생각나는 게 무엇입니까? 그럼 간이 나쁜데 좋은 것을 그것을 다 찾고 또 그것을 죽어도 먹기 싫은데 먹습니다. 무슨 신선한 야채가 간에 좋다고 하면 야채 이파리 하나 먹으면 간이 무슨 그 다음날 아침에 펄펄 뛰는 건 아니지만 그게 생명의 원리를 도움을 주니까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그게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환경을 정비해야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서 자기로 하여금 죄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드는 환경들로부터 자기를 치워버려야 됩니다.
요즘 인터넷 보면 걱정이 많이 됩니다. 특히 젊은이들 말입니다. 그것을 안 쓸 수는 없고 보면 이상한 메일들이 다 들어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도 걸러내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는데 그게 교묘하게 들어오기 때문에 걸러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 것 음란메일 같은 것이 들어와서 젊은이들이 호기심에 한번 열어봤다. 그게 죄겠습니까? 또 죄라면 얼마나 큰 죄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그 자체는 죄가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들이 계속 반복될 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원리가 되고 죄가 잘 성장할 수 있는 여건들을 우리 마음속에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 중에서도 도저히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겠다면 인터넷 자체를 없애버리십시오. 한 1년이고 얼마고 없애버리십시오. 이 메일 없어도 옛날에 살았는데. 나는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 인터넷 껐습니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편지로 하십시요. 그렇게 하며 살면 됩니다. 아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교통보다도 더 소중한 게 뭐가 있습니까? 물론 인터넷 업자들이 들으면 실망하겠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끊어야 됩니다.
불경건한 친구들과의 교제, 이런 것들을 끊어야 됩니다. 자기가 직장에서 있는데 늘 술 상무같이 사람들 대접하고 술대접하고 이렇게 부딪치면서 살지 않을 수 없다. 잠시야 그럴 수 없으면 그렇게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그런 구조 속에서 계속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렇게 일평생 살아서 하나님 앞에 무슨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가서 개혁을 하든지 아니면 죄인들에게 물려주고 나와서 경건하게 살든지, 정직하게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하는 일 없이 밤늦게까지 잠 안온다고 TV나 보든가 아니면 비디오나 보든가 인터넷에 매달려서 쓸데없는 자료들이나 뒤지든가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시간을 방해를 받는다면 그런 것들은 구조적으로 조정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보여줍니다. 차라리 그렇게 잠이 안 오고 그러면 10시쯤 되서 수면제 먹고 주무십시오. 요즘 수면제 너무 잘 나와서 부작용도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까짓 것 몇 번 먹는 것, 미국에 사는 사람들 3년씩 5년씩 그렇게 복용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좋은 약 사서 먹고 5시 30분쯤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감고 새벽기도에 나오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죄와 가까워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인에서 자기를 떼어놓아야 됩니다.
결단을 하고 은혜 받을 수 있는 환경으로 자기를 가까이 데리고 가야합니다. 그래서 교회 잘 나오고 성경 공부를 하든지 뭘 하든지 그렇게 은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대로 자기가 의지적으로 가까이 다가가도록 환경 자체를 정비해야 됩니다. 김유신 장군으로 기억하는데, 어느 날 젊은 날의 방탕한 삶을 깊이 후회하고 개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바르게 살아야지 하는데 어느 날 말을 올라타니까 말이 출발하기에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보니까 이 말이 술집으로 갔습니다. 자신이 변화를 받았다고 말도 변화를 받았겠습니까? 그때 김유신 장군이 말에서 내려서 그 사랑하던 말을 길가에서 칼로 단숨에 목을 쳐버렸습니다. 네 놈이 나를 여기로 데리고 가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런 것이 안 됩니다.
김기현 집사님 한의원에 가보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깝습니다. 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제가 교회 앞에 하나 붙여놓자고 했습니다. 신자는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죄악에 가깝습니다. 정확한 진리입니다. 한편으로는 멀어지고 한편으로는 가까워져야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3)은혜의 교리를 기억하라.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은혜의 교리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기억해야 될 것은 죄가 불길처럼 일어나서 그 세력에 지배를 받고 있을 때에는 자기 안에 은혜가 하나도 없고 그리고 전부 죄 덩어리라고 하는 자각을 갖게 됩니다.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신자 속에는 죄가 어떻게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든지 간에 그 가운데서도 신자들에게는 반드시 남아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심각하게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있으면 그 괴로워하는 것이 은혜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게 전적으로 좋지는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미 커진 죄의 세력에 굴복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평화롭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뭔가 아직까지도 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은혜가 남아 있는 것을 기억하라 입니다. 그 은혜는 죄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그 죄가 그 은혜를 없이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이런 것입니다. 불이 다 꺼졌습니다. 성냥도 없고 부싯돌도 없습니다. 불 피던 자리를 뒤져보니 속에서 조그만한 불씨가 나옵니다. 불씨는 가물가물한데 불씨가 그러면 이쑤시개처럼 칼이나 도끼로 잘잘하게 나무를 썰어서 그것을 나뭇잎 같은 데 놓고 속에서 찬찬히 부는 것입니다. 그러면면 그게 조그맣게 일어나서 나뭇잎을 사르고 이쑤시개 같은 나뭇가지들을 사르고 그 다음에 좀더 큰 나무들을 사르고 불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불이 모닥불처럼 올라가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큰 불로 만들 수 있습니다. 장작을 올려놓고 적절하게 관리를 해주면 불이 막 타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은혜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원리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렇게 불길처럼 일어났는데 그것이 원래 거듭난 신자 속에서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합법적인 일이고 죄가 그렇게 불길처럼 일어나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것은 비정상적이고 임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은혜의 교리를 기억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는 강장해지지만 그러나 그 죄가 결코 은혜를 이길 수가 없으니 이것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산불이 아무리 거세도 쏟아지는 소나기를 감당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 원리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어주시는 죄를 이기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구원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골로새서 2장 14-15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의문의 증서를 도말하시고 정사와 권세를 밝히 벗어버려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느니라.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을 때 단지 죄만 용서해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속에 일어나는 모든 죄의 지배의 원리를 혁파해버리셨고 그래서 실질적으로 이제는 죄가 우리 가운데 들어오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그것들을 능히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이 사죄의 은혜와 동시에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의인의 증서를 도말하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고 십자가로 밝히 승리하셨느니라. 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는 귀신들의 이름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오고 또 율법이 우리를 죄로 정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을 실제로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영적인 놀라운 능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은혜의 원리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우세하게 잠시 폭동을 일으켜서 신자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그 은혜의 교리를 기억하면 무한한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직은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이제 이 교리에 따르면 내가 적절하게 은혜의 원리로 돌아가면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위로부터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자신 속에 올 때 그때 갑자기 이 죄와 맞서서 싸우고자 하는 그런 소망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4)이러한 진리를 믿으라.
그래서 이제 네 번째로 이런 죄의 지배, 그리고 은혜의 지배에 관한 교리를 이해하고 그 내용을 굳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입니다. 우리 안에 죄가 일어날 때 이 죄는 성령님만이 그 죄를 죽이실 수 있는데 성령님이 그 죄를 죽이실 때는 우리의 순종을 사용하셔서 죽이시는데 그렇게 순종하게 하는 기본적인 동인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령님이 우리에게 죄를 죽일 수 있도록 성령님이 은혜를 공급해주실 때에 그 공급해주시는 것을 받는 손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이라는 손입니다. 그래서 그런 진리들을 굳게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를 받게 되면 송두리째 죄가 앗아가는 게 있는데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에 심각한 문제는 죄가 커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그 자체도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 가운데 살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말 그 죄를 정직하게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경험해서 새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은 죄의 양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실제로 바리새인은 세리에 비해서 세상적으로 보면 더 경건한 사람이었고 소문난 죄를 저지른 사람도 아니었지만 세리가 더 죄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함을 받게 만들었던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들이 죄는 이미 지었고 그래서 그것을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비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다급한 것은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는 이 죄의 지배의 세력들을 꺾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믿을 때에 성령님이 내게 오셔서 그래서 죄를 죽여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죄는 이미 지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후회해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와 같은 이런 죄가 큰 사람들에게 정말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은혜의 도움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대하고 믿는 것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때 주의할 것은 믿음이 없어서 자포자기해버리게 되면 이제 죄에 저항하지 않는 길들여진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잘못 믿은 나머지 그 주님께서 자기를 맡아서 다 주관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죄에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그 신앙적인 의무를 도외시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오류에 빠지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지키면서 자기 자신이 믿으려고 애를 써야지 됩니다. 그런데 믿으려고 하는데도 안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 이중적인 모순을 믿어야 되는데 믿어지지 않는 모순들을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경험을 한 것입니다. 믿어야 되는데 그런데 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기로 하여금 그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이 사용했던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영혼에게 습관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네가 어찌하여 불안해하는고. 너는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게로서이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지키실 것이다. 이러면서 계속 자기 자신을 타이르고 책망하고 하면서 그러면서 누그러뜨리면 믿음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말도 한번 하면 말도 안돼. 두 번째는 또 그 쓸데없는 소리. 세 번째 그래. 네 번째 정말? 다섯 번째 그럴지도 모르겠네. 여섯 번 일곱 번 계속 하면 그 다음에는 그것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뇌라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물며 우리 믿음도 믿는 것은 사실은 보는 것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기 꽃이 있다. 믿는다. 그렇게 말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냥 꽃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상이오,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속에서 보통 충만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믿으려고 할 때 그렇게 될까 하는 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누구에게나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떨치는 것입니다. 그런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이런 것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네가 그렇게 잘못을 하고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를 이길 그럴 은혜를 공급해주시리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간절히 기도하고도 옛날에 또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이런 송사들이 마구 들어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죄와 분투하는데도 진전이 별로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는 믿음이 자꾸 식어지려고 합니다. 그때 비록 당장은 내가 이 죄를 이기는 증거가 안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사는 것이 최선이다.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타이를 때 그때 우리의 믿음이 북돋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의심하려는 자신을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자꾸 부인할 때 그때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들은 계속 죽고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점점 강화되게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주실 것이다는 그런 믿음,
5)죄를 이기게 하는 은혜를 주시는 방법을 생각하라.
그 다음에 다섯 번째는 죄를 이기게 하시는 은혜를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시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라 입니다. 그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은 회심의 경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회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심의 경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의 경험을 생각할 때 흔히들 첫사랑의 때, 첫사랑을 회복하고 싶습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첫사랑보다는 훨씬 나아야지 그것만 회복해서 뭐하겠습니까? 지금 하도 못사니까 그것이라도 생각이 나는 것이지, 첫사랑을 회복하고 싶다. 그런 심리를 계속 파고 들어가면 뭐가 그렇게 그리운 것인가 하면 이런 게 그리운 것입니다. 그때는 이렇게 불순종하며 살지 않았는데. 그때는 이렇게 죄에게 쉽게 지지 않았는데. 그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보다 훨씬 더 뜨거웠는데. 그때는 하나님이 더 많이 나를 기뻐하셨는데, 이런 모든 총체적인 것이 첫사랑이라고 하는 아련한 추억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첫사랑의 때, 그때는 좋았는데 라고 그렇게 마치 이제 다 늙어가는 사람이 소녀적 사랑 생각하듯이 그런 태도로 보지 말고 좀더 분석적인 태도로 그 첫사랑의 경험을 생각해야 됩니다. 회심의 경험을,
또 첫사랑이라도 좋고 그 이후에 더 큰 회심이 있으면 그것을 생각해도 좋고 뭘 생각하라는 것이냐면 이런 것입니다. 그런 첫사랑이 있기 전에도 그 전에는 반드시 죄 아래 있었는데 어떻게 죄 아래서 벗어나게 됐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무지무각 하던 나에게 어떻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셔서 나를 이런 사랑으로 회복시키셨는가. 이것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면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지금처럼 똑같이, 혹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악하게 나쁜 상황에서 살아가게 하고 있던 나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그 방법과 방식들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생각이 나면 이제 이치들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어떤 때에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셨는가. 그리고 이제 첫사랑의 기억만 아련히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 마음이 한없이 가난해지던 그 추억, 그 다음에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렇게 논리는 지금처럼 없지만 애절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던 그런 영적인 긴장감, 그리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 라고 마음을 갖던 그런 영적인 각오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다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그런 것들이 그림들이 짝이 맞추어지면서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어떤 경로로 어떤 방식으로 은혜를 공급해주고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은혜를 우리 안에 감화시키는지에 대한 정리된 생각들이 단편적으로나마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지금 자신이 첫사랑을 그리워하고 갈망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받을 준비가 얼마나 안 되어 있는가 하는 것들을 그때 비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첫사랑을 좀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가 주어진 원리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어떤 마음,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려고 할 때 주님이 말씀에 입각해서 그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는지를 생각하고 그 원리로 자기를 다시 되돌려놓으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 노력이 없이 그냥 눈물만 짜는 그런 것으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죄의 지배아래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에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마음이 순간적으로 가난해지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런 이치 같은 것들에 대해서 전혀 무지합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하나님 앞에 막 괴로워요, 너무 아파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가 나를 계속 병들게 해요. 그러면서 눈물 흘리면서 또 먹으면서 기도하고 그것을 또 한번 기도하고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서 가끔 진심으로 기도 할 때 그때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시다. 내 기도가 쭉 빨려 올라가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상달되고 있다. 라고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응답은 아닙니다. 그냥 느낌일 뿐이지 응답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은혜가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고 그 원리로 자기가 돌아와야 됩니다.
그런데 돌아오지는 않고 가끔 가끔가다가 진심으로 마음이 녹는 것처럼 기도가 된다. 그것으로 그칠 경우에는 어떤 마음이 생기나 하면 기도하고 난 다음에 그릇된 안정감 들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아서 해결해 주실 거라고 하는 내 마음에 응답을 주셨다. 그런 하나님이 역사 하실 것이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의 그 위대한 주권에 대해서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은 성화의 문제는 그런 식으로 설명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들어 왔듯이 그 죄를 멸하는 은혜 역시 우리의 자발적인 순종을 도구로 해서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인해서 그 죄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막연하게 어쩌다가 간절하게 쏟아져 나오는 기도 때문에 그렇게 자기가 교만해 지고 그릇된 안정감을 갖고 하나님이 모두 맡아서 해결 해주기로 하셨어. 이런 식으로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몸이 아프면 의사도 고쳐주지만 사실 의사만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히포크라테스가 무슨 예기를 했는가 하면 질병을 묻는 왕에게 폐하, 음식이 못 고치는 병은 의사도 못 고칩니다. 그러니까 의사가 물론 질병을 고쳐주지만 자기 자신이 질병을 치유하는 원리를 따라서 살아야지 의사가 고쳐주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반드시 은혜가 어떻지 주어지는지 그 원리로 돌아가면 죄를 이기는 놀라운 은혜가 주어지지만 그 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냉엄합니다. 매일 울고 질질 짜고 그렇게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황금과 같은 세월만 흘러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죄의 용서보다는 죄의 세력을 약화시켜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 죄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은혜를 강화시켜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살다보면 이럴 수도 있습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는데 조금씩이라도 승리할 때가 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질 때는 왕창 져도 이길 때는 조금 이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긴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떻게 하니까 내가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하니까 내가 이길 수가 있었는가. 그런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저 같은 경우는 많이는 모르지만 음악을 좋아하니까 어떤 때는 이렇게 음악을 듣는데 어떤 음악을 들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이렇게 차분해지면서 그러면서 글도 잘 써지고 뭐가 이렇게 그 자체가 내 안에 회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을 통해서 뭔가 이렇게 하나님을 갈망하게 도움을 주는 그런 음악이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차분하게 합니다. 차분하게 하는데 그런데 허무감 같은 것만 주는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일정한 상황에서는 멀리하고 안 듣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쪽으로 가니까. 다른 때 들으면 또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 자신을 특별히 관리해야 될 필요가 있으면 그런 것을 멀리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관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이라도 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긴 적이 있었다면 그것을 이기게 한 비결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떨 때 그런 승리가 주어졌는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집요하게 그 속에서 일관된 법칙이 무엇이 있었는가를 찾는 것입니다.
한때는 이렇게 죄에 대해서 지고 있다, 라는 느낌이 들 때 그때 아주 훌륭하게 그 죄를 약화시키는 비결을 하나 터득했었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어느 날 말씀을 읽다가 그런 지혜를 받았습니다. 특히 잠언 같은 곳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도 많이 나오고, 죄는 달콤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나중에는 굉장히 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항상 죄를 지을 때는 죄를 통해서 맛보는 즐거움은 요만큼이고 그것을 맛본 다음에는 이만큼의 고통을 맛봐야 되는데 이 사람들이 일단 죄를 지을 때는 이 고통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맛있는 것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범죄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러는데 애굽이 뭐했다는 것입니까? 고기 가마, 그 다음에 마늘, 파, 정욕에 좋은 부추 뭐 이런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노예들의 강장 식품입니다. 그것을 열심히 먹였다고 합니다. 역사 기록에 나옵니다. 왜 주는 것입니까? 그것을 먹고 정욕이 좋아져서 힘내서 노예를 더 많이 생산하고 그리고 벽돌 열심히 날라서 피라미드 쌓아라. 그러니까 노예들에게 그런 것들을 먹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욕에 좋은 마늘, 부추, 파 이만큼 먹고 기분이 좋은 것은 잠깐이고 그 다음에는 신체가 골이 빠지도록 노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광야에 와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럴 때 애굽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마늘, 파, 부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지만 뼈 빠지는 고생도 함께 이야기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하나도 거론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죄가 가지고 있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면 담배 끊는 금연 학교가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제일먼저 일주일 동안 담배를 끊는 연습을 하는데 그런데 거기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담배를 못 피게 하는 것보다도 더 먼저 하는 것은 담배를 펴면 어떻게 되는가를 밥맛이 뚝 떨어지게 만듭니다. 폐가 막 떡이 되어서 그것도 실명을 거론합니다. 무슨 그룹의 회장의 폐, 그래서 떡이 되어서 그게 완전히 볼 수 없을 정도로 구역질이 나오게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혐오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것들을 정내미가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은혜가 공급되는 통로가 뭔가. 그것을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제가 터득했던 방법은 어느 순간에 제가 지고 있다고 생각될 때 그때 아침에 깨자마자 항상 동일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간절히, 드러누운 상태로 그대로, 의식이 처음 생기자마자 죄의 달콤한 보다는 죄의 비참한 결과를 더 많이 느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기도하고나면 그 다음에는 뭐가 생기는가 하면 죄에 대한 인식이 공정해집니다. 요만한 달콤함과 그 뒤에 따라오는 엄청난 쓰디씀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유혹을 받거나 이런 어떤 생각이 날 때마다 항상 그런 기도를 습관적으로 드리는데 현저하게 죄가 죽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말씀에 입각해서 저는 그런 것을 적용했지만 여러분들은 또 다른 것들을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미움과 용서를 듣고 나서, 누가 너무 미웠는데 자기가 계속 그 미움의 죄를 짓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기의 영적 생활에 너무 파괴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워할 때마다 자기가 피 묻은 칼을 들고 있는 그 장면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왜 미움은 곧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통성기도를 하고 있다고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가지고.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에 고난에 대해서 생각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그 고통 가운데서 아파하시던 장면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은혜의 원리들을 터득해나가는 것입니다.
6)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마지막 여섯 번째,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a. 성령에 의해 죄를 이기는 영적인 힘의 공급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짐.
죄를 죽이는 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인데 그 성령은 우리들의 순종과 믿음을 통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셔야 되는가. 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죄를 이길 수 있도록 그 성령의 은혜를 하나님이 부어주셔야 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구약의 사람들은 그렇게 안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신약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죄를 이기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믿을 때 순종할 때 그렇게 죄를 이길 수 있고 죄를 죽일 수 있는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셔야 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사신 그 구속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 앞에 간구하고 그리고 순종할 때 믿을 때 죄를 죽일 수 있는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은혜는 약속을 따라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나도 죄 좀 죽이면 좋겠는데 성령의 은혜 좀 보내달라지만 죄를 죽일 수 있는 성령의 은혜는 불신자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가 하는 놀라운 표는 아파트 사고 차를 바꾸고 무슨 애들 일류대학교에 들어가고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 것도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 내가 죄의 지배아래 살고, 내가 죄에 지고 있는 것 같아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놀라운 증거는 무엇인가 하면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도 하나님 앞에 구하면 주님이 죄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은혜를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구속의 사건이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그런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을 깊이 생각하라.
그러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그 생애와 고난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너무 죄가 커서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다고 생각될 때 그때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까 그 분이 오셔서 일생동안 어떻게 사셨는가? 깃들 곳이 없고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그분이 당신의 생애동안에 이 지상에서 죄인들을 어떻게 다루셨는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11절에 보면 간음한 여인의 기록이 예를 들면 나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너는 인간으로서 가치도 없다. 그리고 너는 이제 인간의 자격이 없다. 모세의 율법에 정한 데로 돌을 던져라!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오히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오.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원함이니라. 누구를 위한 대속물.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온 생애는 죄인을 찾아다니신 생애였습니다. 머리에 둘 곳조차 없는 외로운 생애를 사시면서도 온 관심은 죄인들 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나서,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서 죄 가운데 살고 있고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괴로워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알아도 돌아갈 힘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당신의 교훈과 당신이 보내주신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그 일이 예수님의 전 생애의 과업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분이 그렇게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고 굶주리시고 고달픈 노역과 고통과 핍박과 시련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분이 수많은 박해를 받으시면서 반대자들에게 에워 쌓이신 외로운 생애를 사셔야 됐습니까? 모두 죄인들을 위해서였고 그 죄인들을 건저 내시는 그 일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고 싶으셨던 가장 중요한 일이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마지막은 그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십자가의 고난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죄 없으신 그분이 죄를 알지도 못하고 지으실 수도 없는 그분이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습니까? 그 죄인들을 죄 가운데서 건저내고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죄를 말미암아 상실한 인간의 참된 존재의 목적과 참된 창조의 의미를 그들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을 내려다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죄인들에게도 쏠려 있습니다. 우리에 있는 99마리의 양보다는 길 잃고 헤매며 슬피 우는 1마리의 양을 찾아서 목자가 산 넘고 물 넘어 그를 찾으러 나갔던 것처럼 우리 예수님의 마음도 지금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려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을 돕는 그 일이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보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간이라도 자식을 낳아 놓고 그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어떻게 사람으로 만들고 필요한 때에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공급하고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선한 계획과 공급의 의무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완전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해 놓으신 다음에 그 다음에 죄의 지배를 숙명처럼 여기면서 그 죄의 삼킨바 되어서 일생을 이렇게 보람도 없이 불순종하며 사는 것, 그것을 그렇게 방치해 두실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불신자들의 많은 세계를 바라보시면서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영혼들을 건지기 위해서 가슴 아파하시며 고통하시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나 사실은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바 되어 버린 사람들,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한편으로는 몸부림치며 항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죄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과 같은 많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돕고 싶어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죽어 가신 그 순간에도 기도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저희는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변명하시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죄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특별히 많이 생각하면 거기서 무한한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과 그리고 그 죽은 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체험이 현재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할 때 우리는 현저하게 그 죄의 집요한 세력들을 부수고 쏟아지는 그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c.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충족함을 생각하라.(그가 죄를 이기셨으니 죄의 지배는 부당함).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보혈은 충족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보혈의 샘에서 자기를 씻었고 거기서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샘에서 그 물을 마시고 어두운 세상을 이길 힘을 얻었고 자기 속에 불일 듯 일어나는 죄의 불길들을 껐습니다. 수많은 죄인들이 그 샘에 와서 먹었고, 그 샘에 와서 씻었고, 그 샘에 와서 공급을 받았지만, 그 샘은 아직도 마르지 않고 계속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참된 목적이 죄의 지배아래서 예전에 불신자일 때처럼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삶이 아니라 정말 빛 가운데서 우리 주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도움을 간절히 사모한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버려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가운데서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죄를 선택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공급받아야 할 생명과 은혜의 원리로부터 멀어진 그런 방종한 삶, 불순종한 삶, 마음을 드리는 것이 없는 형식적인 삶, 거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깊이 회개하고 거기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d.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라(고후5:10).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우리들이 곧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 분께로 가기 전에 그분이 우리에게 오실수도 있고 어쩌면 그분이 오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분께로 갈 수 있으니 이렇게 되던지 저렇게 되던지 어쨌든 우리는 조만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 그리스도를 뵈옵게 되는 그 순간에 우리가 살았던 모든 인생들은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 사도바울은 우리들이 선 악간에 행한 모든 것들을 그 심판대 앞에서 우리들이 모두 하나님 심판 받게 될 것이다. 그 날에 우리 주님과 함께 벌거벗듯이 모두 드러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지금 시점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인생 전체를 마치 비디오처럼 보게 될 때, 그때에 일생을 죄에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께로 영광 돌린 적도 없고 원망과 죄악 속에서 불순종을 밥 먹듯이 하며 하나님의 참다운 지배 아래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부끄러운 그 날이 될까요?
일생동안을 믿음으로 살고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 죄와 더불어 싸우고 은혜아래 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마음을 다스리며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을 잠시 머물 이 세상에서 수시로 솟구쳐 오르는 죄에 대한 욕망과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욕심을 뿌리치기 위해서 아파하면서도 주님의 은혜아래 있기를 사모했던 성도들은 그 날에 얼마나 놀라운 위로를 받을까요? 그 분을 뵈옵게 되올 때에는 이제는 죄가 더 이상 여러분들을 추격하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죄와 은혜 사이에서 갈등하며 바람 부는 벌판에 버려진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은혜와 도움을 호소하는 애처로운 울부짖음이 없어도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각각 우리에 행한 모든 것대로 주님 앞에 받을 것입니다. 죄 가운데서 달콤한 낙을 즐기며 은혜아래 있기를 거절하고 방종하게 살아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버려 피 흘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드린 인생의 날들이 없고 티끌만한 영광도 하나님 앞에 드리지 못한 채 살았던 사람들은 그날에 무슨 면목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천국으로 주님을 뵈러 가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피 운다면 마귀도 놀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면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오는 죽음에 위험 앞에서 오라 사망이여 너의 검은 휘장이 찢겨지고 나면 나는 거기에서 일생동안 끊임없이 나로 하여금 죄를 죽이며 살게 하셨던 내 인생의 진정한 목표가 계시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 가운데 뵈올 것이다. 그렇게 외칠 수 있도록 정말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은혜아래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이 방침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매달린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9.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함(2)-
복음이 자유를 주기 때문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죄가 신자를 주관하지 못하는 이유로서 첫번째가 복음이 죄를 이길 능력을 주기 때문이라고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여러분들에게 전했습니다. 죄가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할지라도 그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복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자유를 준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은혜 아래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것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주지 못하는 율법을 설명 드리고, 두번째는 자유를 주지 못하는 복음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복음이 주는 이중의 자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A. 자유를 못 주는 율법
우선 우리들이 첫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자유를 주지 못하는 율법의 문제입니다. 율법에 기능이 무엇인지는 지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이 말씀을 통해서 명쾌하게 들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1)율법의 기능
율법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하나는 로마서 3장 20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기능은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우리들에게 죄를 깨닫게 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사실상 그것이 죄인 것을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이 들어와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나면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죄라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2)어느 경우든 자유를 주지못함; 억압과 속박을 줌
율법이 들어오기 전에는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이 비교적 그 죄를 조금 관대하게 다루셨습니다. 율법이 들어오고 나면 죄가 관대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율법 자체가 그것을 죄라고 인간에게 가르쳐줌으로서 인간이 그 율법의 지적을 받으면서 죄를 깨닫는데 그 율법이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속박과 억압을 느끼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어린 시절 동생이 집에 불을 낸 내용- 너무나 어린 동생이 저지른 잘못이라 관대하게 용서해 줬다는 이야기)
율법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율법을 몰랐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좀 관대하게 다루십니다. 그러나 율법이 들어오고 나면 율법은 우리를 결코 관대하게 다루지를 않습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만들어줍니다. 죄를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은 좋은 것입니까, 아니면 나쁜 것입니까? 나쁠 것이 없습니다. 좋은 것입니다.
3)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지 못함.
그런데 문제는 율법이 그렇게 죄를 깨닫게만 만들어 줄 뿐 우리에게 그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율법에 매어서 종노릇을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죄를 짓는데, 율법이 ‘넌 죄인이다. 이런 죄를 지었다. 저런 죄를 지었다’. 계속해서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죄를 실제로 이길 수 있는 힘은 주지 않습니다. 율법의 그런 책망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에게 그런 능력이 없으면서도 어떻게 하든지 그 율법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한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도 바울이 살았던 삶의 모습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애를 쓸수록,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그 속에서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은 더 강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일 수 없고 잘못된 것일 수는 없지만 이것이 그 율법의 한계입니다.
거울을 쳐다보면 얼굴에 뭐가 묻은 것은 가르쳐 주지만 거울이 우리의 화장을 고쳐주고 얼굴의 오물을 닦아주는 역할은 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거울을 얼마나 요긴하게 씁니까? 거울을 보면서 ‘이놈의 거울은 매일 비쳐만 주지 한번도 닦아주지도 않아’ 그리고 그것을 깨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가 닦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렇게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닫지만 자기를 고칠 수 있는 힘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를 지었고 또 죄를 짓고 삽니다. 죄를 짓고 율법만 쳐다보면 ‘너는 죄인이고 너는 하나님을 버렸다’ 이렇게 율법이 자기를 책망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율법에 다른 한 기능이 추가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을 절망하게 만들어서 예수님의 도움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다른 방법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 죄에서 건져주시기를 바라는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기능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입니다. 어떻게, 어떤 식으로 말하던지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율법은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지도 않고 또 죄에 매어서 살아가고 있는 죄의 종된 인간의 상태를 해방시켜 주지도 못합니다. 율법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B. 자유를 주는 복음
그렇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이 복음이 주는 자유를 크게 이중의 자유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분과 상태의 자유이고, 두번째는 내적 역사의 자유입니다.
1)신분과 상태의 자유: 율법과 저주로부터의 해방
신분과 상태로부터의 자유란, 복음이 죄를 짓고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인간의 죄인 된 신분으로부터 해방하여 준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상태가 되었고 그 신분은 바로 죄인입니다. 죄를 짓고 율법 아래서 죄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외부의 어떤 도움도 없이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거의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복음이 거기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서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
이것이 바로 상태와 신분의 자유인데 이는 복음이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2)내적인 역사의 자유: 죄의 사슬로부터 마음의 해방
두번째 자유는 내적 역사의 자유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기 전, 불신자였을 때에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기능까지도 모두 죄의 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그렇게 죄인으로서 죄의 지배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싶어도 그런 마음이 잘 생겨나지 않고 설령 그런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또 죄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고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죄의 사슬이 그의 영혼과 마음을 매어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신자가 되면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풀어 버릴 수 없었던 영혼과 마음의 죄의 사슬들을 하나님께서 끊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원리와 같습니다. 개들을 줄로 매어놓습니다. 개가 줄에 매여 기둥에 묶여 있습니다. 그 줄 범위 안에서 움직일 때는 묶여 있어도 불편한 것을 모릅니다. 밥 먹고 또 엎드려서 자고 뼈다귀라도 좀 빨고 이러면서 살아갈 때는 어떤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좋은 일이 있다든지 이상한 일이 있어서 달려가고 싶을 때가 생기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 개가 깜박 자기가 사슬에 매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는 팍 뛰쳐나갑니다. 그러면 뒤에서 줄이 잡아채는 것입니다. 실제로 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개의 사슬에 매어 있다는 사실을 잠깐 잊어버렸을 때는 확 달려가지만 실제로는 물리적으로 달려갈 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죄인의 마음도 죄의 의해 묶여 있습니다. 죄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혀 속박을 받고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습니다. 오늘은 손으로 죄를 지었는데 이게 지루해 져서 내일은 입으로 죄를 짓고 싶습니다. 그 줄 범위 안에서 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집에서 나쁜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교회에 가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모든 행동들이 다 줄의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니다. 나는 이제 불신자의 상태에서 심지어는 교회에 다녀도 거듭나지도 못하고 그 죄의 사슬에 매어서 살아가는 게 싫다. 나에게 진짜 죽음이 아니면 자유를 달라’고 하면서 이렇게 참된 영혼의 자유를 향해서 팍 튀어나가려고 하면 그 줄이 잡아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자신이 어마어마하게 큰 사슬에 매여 있어서 강력하게 뛰어나가도 도저히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개가 뛰어나가다가 한번 잡아채면 목이 부러질 정도로 아플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그 줄을 기억합니다. ‘내가 이렇게 뛰어나가면 안 되겠구나. 내가 아무리 개 대가리지만 뛰어나가면 안 되겠구나. 생각을 좀 해야지 되겠구나’ 그리고 최대한 그 줄에 대해서 자기 본분을 지키면서 그 안에 거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 가운데도 불신자들이 혹은 신자들이라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말씀을 들으면서 영혼이 괴롭습니다. 괴로움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 이것은 아니다’ ‘내가 참 신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강한 압박을 느끼게 됩니다. 힘겨움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과 영혼을 묶고 있는 죄의 사슬의 범위를 벗어나려고 할 때 나타나는 죄가 잡아채는 현상입니다. 그때는 견디기 힘든 통증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의를 갖추고 그 죄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운명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이렇게 신분과 상태에 있어서 자유를 주고 또 내적인 역사에 있어서 죄에 매어 있는 상태를 끊고 마음껏 날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가 하는 일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죄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C. 이중(二重)의 자유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세번째로 그 이중의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신분과 상태의 자유: 율법과 저주로부터의 자유
첫째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분과 상태의 자유입니다.
a.죄인들에게 율법은 사단, 사망, 지옥을 요구함. 거기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인간들임.
이것은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죄인들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죄인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자각, 죄를 지었다는 억압, 그리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결국은 그 죄의 주인인 사단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끔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자연적인 힘으로는 그런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그 죄의 지배로부터 뛰쳐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신자들의 운명입니다. 또 교회 안에 있어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입니다.
b.신자들에게 은혜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수여함;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함.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은 죄인들에게 은혜로운 방법을 가지고 영광스러운 자유를 줍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그 역사로 우리의 내면의 사슬들을 풀어 주셔서 자유를 얻게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제껏 지고 있었던 많은 죄들로부터 건져내어서 죄의 노예의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신분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우리에게 해주는 일입니다. 상태와 신분의 자유를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c.그리스도의 대속의 효과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죄의 노예와 죄에 매여 살아가는 그 비참한 형벌 받을 운명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면, 우리의 그 큰 죄의 문제를 우리의 도움도 없이 당신 혼자서 일방적으로 놀라게 처리하셔서 우리를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시켜주시고 이처럼 구속의 자유를 주셨다면, 그에 비하면 훨씬 적어 보이는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은 왜 그런 방법으로 해결해 주시지 않으실까하는 의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평생에 가슴에 새겨야 할 중요한 공식이 하나가 나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 밖에 있는 죄는 아무리 커도 일방적으로 단번에 해결해 버리시지만 신자 안에 있는 죄는 결코 그런 방법으로 해결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것은 성화를 통해서 하십니다. 인간의 순종과 죄와 분투하고 싸우는 인간의 그 노력을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 주신 그 은혜의 원리를 가지고 우리 안에 있는 죄들을 죽여나가시는 것이 우리 안의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지금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을 드렸지만 저는 사실 이런 아주 기초적이고 성화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10, 20년이 넘는 세월을 죄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가끔 예수님이 자기를 그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셔서 자기가 지은 그 많은 죄에서 자기를 건져주셨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자기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이 많은 죄, 그리고 지금 그것 때문에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삶에 대해서는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으니까 주님이 오셔서 그냥 해결해주시기를 바라는데, 그 기도는 죽을 때까지 응답되지 않습니다. 결코 응답되지 않게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원칙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짚어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죄에 매여 율법 아래서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심지어 죄의 노예가 되어서 아무 희망도 없는 죄인으로서 죽음을 향해서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예수를 믿을 때 사망과 죄의 법에서 그를 건져내셔서 그들을 정죄함이 없는 그 자유의 상태로 그를 데리고 가시는 것이므로 우리는 흔히 믿음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고 그의 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셨고 이제 율법이 아무리 나를 고발해도 소용이 없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 그렇게 우리에게 신분과 상태의 자유를 주시기 위한 한 가지 조건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신분과 상태에 있어서 자유를 얻게 된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우리의 구원이 거저 얻은 구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 것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 없는데 믿은 것이 어떻게 공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선물을 주었는데 저 사람이 손을 내밀어서 받아갔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받았는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럴 때 손을 내민 공로로 내가 상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믿음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죄인으로서의 신분과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한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어떻게 치르셨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채 사시다가 율법의 요구를 부응하신 것입니다. 그 율법의 요구는 우리 모든 죄인들은 죄를 지었고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형벌 받아야 할 우리의 죄를 대신 다 짊어지시고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없이 여러분이 내려오셔서 우리 한사람 당 한 사람씩의 죄를 담당하셨다면 모르거니와 한분이 오셔서 어떻게 우리의 많은 죄를 대가를 지불하실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구약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속죄제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수효는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 백성들 전체를 위해 드리는 속죄제의 제물은 하나였습니다. 그 한 제물을 드리면서 모든 사람이 믿음에 참여할 때 하나님께서 그 속죄제를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잠시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죄 많은 사람이 아니라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소유하신 죄 없고 흠 없는 제물로 드렸다는 점에서 보면 예수님 한분으로도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씻어서 속죄하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려 보내서 우리 인간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율법의 요구대로 우리가 그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죽어야 할 형벌을 죄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제물로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아들이었습니다. 영원 전에도 지금까지도 아들이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귀여운 아들이 있다고 칩시다. 그 아들을 여러분 보는 앞에서 짓이겨서 죽인 대가로 여러분들에게 천하를 준다고 하면 그 아들과 바꾸시겠습니까? 품에서 곰살곰살 엄마 품을 파고들고 젖을 물고 재롱을 부리는 그 예쁜 여러분의 아들을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무참하게 살해하고 그 피를 받고 여러분들에게 온 세상을 다 상으로 준다고 한들 그 아들을 온 세상과 바꾸시겠습니까?
하나님에게도 예수님은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죄라고는 하나도 없으신 그분이 그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무참하게 짓이겨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그때에 하나님은 그 광경을 하늘에서 모두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정말 이 세상, 우리를 포함한 이 모든 세계를 아들을 그렇게 죽이시면서까지 예수님이 사셔야 될 정도로 그렇게 값진 것이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오늘 그 피로 구속함을 얻고도 죄가 좋아서 죄의 영향을 받고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그런 것입니까?
옛날에 노예가 사고 팔리던 그런 시대의 역사를 보면 가끔 착한 사람이 나옵니다. 시장에 가서 노예들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 노예, 아빠 노예, 언니, 형 노예, 그 다음에 동생 노예, 아기 노예 이렇게 다섯 명이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 명, 두 명이라고 치지도 않습니다. 노예의 주인이 자기의 집안이 망해서 노예를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노예들이 시장에 팔려 나왔을 때 간절한 소원은 무엇일까요?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꿈도 못 꾸는 것일 테고, 만약 여러분들이 그 상태에 있다면 간절한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가족들이 흩어지지 않고 다시 한 사람에게 팔려가서 일단 가족 모두가 함께 있는 것을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노예를 쿡쿡 찔러봅니다. 흥정을 하는 것입니다.
‘다 얼마요?’ ‘얼마입니다’ ‘나는 그렇게 돈이 없는데..’
그러면 이제 노예들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제는 너무 어리니까 쓸모가 없고 이 아줌마는 나이가 많고 힘도 못쓰겠고 아빠 노예는 쓸만하네. 애하고 형 노예, 둘만 사가지고 가지요’
그렇게 말한다 치면 아이들이 자지러집니다. 그럴 것이 아닙니까?
그 광경을 보던 어느 돈 많은 부자가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지나가다 마차를 세우고 노예 상에게 묻는 것입니다. ‘다 얼마요?’ 그런 사람들은 별로 깎지도 않습니다. ‘얼마요? 로마 돈 300입니다’ ‘그래? 내가 사겠소’ 합니다. 그리고 내려와서 돈 300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증서를 줍니다.
‘다섯입니다’ 그러면 이제 안도의 숨을 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았다! 이제 저 마음씨 좋으신 분이 뿔뿔이 흩어질 우리 가족을 같이 할 수 있게 해주셨구나. 이제 저 집에 가서 충성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인이 그 자리에서 해방증서를 써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노예들이 많아서 너희들까지 안 와도 된다. 가서 이제는 다섯 식구가 헤어지지 말고 그렇게 꼭 끌어안고 사이좋게 살아라’ 그리고 그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 때 지불되었던 돈을 가리켜서속전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바로 그 속전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부자는 무엇 때문에 그 다섯 사람을 산 것입니까? 자기의 밭을 갈게 할 것도 아니고 차를 끓이게 할 것도 아니고 집안 청소를 시킬 것도 아닌데 그 많은 300을 주고 그들을 사서 보내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입니다. 차마 그렇게 가족이 헤어지고 형벌당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형편없는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위해서 여러분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짓이기도록 못박으시면서까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상을 구원해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다른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당신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 당신의 창조의 원래 목적과는 관계없이 사망과 고통 그리고 형벌밖에는 가져다 주는 것이 없는 죄에 매어서 종살이하며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아가는 그 불행한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주님이 여러분들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주시는 형벌의 속전을 주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주 믿는 사람들을 구속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그 피로 속하시고 우리에게 이런 참된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가’ 그래서 정상적인 신자. 건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의 눈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구속의 은혜로 인한 눈물이 흐르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가져오는 효과는 대표적으로 세가지가 있습니다.
①죄의 용서; 형벌 받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심으로써
우선 첫째는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예화: 어린 시절에 동리에 살던 질이 안 좋은 한 형이 매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자신의 가방을 동생에게 들고 가게 하였다. 그 이유는 동생이 엄마가 안 계실 때 몰래 엄마 지갑에서 돈을 꺼낸 것을 형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빌미로 협박을 하니까 하는 수 없이 동생이 형의 가방까지 들고 가게 된 것이었다. 결국 괴롭힘에 견딜 수 없었던 동생은 엄마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게 되었다. 엄마의 용서로 자유함을 얻게 된 동생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계속되는 형의 협박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전에는 율법이 계속 말합니다. ‘너 죄인이지? 너 나쁜 짓 했지?’ 지금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 자신의 양심도 말합니다. ‘그래. 너 죄졌지?’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서 용서를 빕니다. 하지만 사죄의 은혜를 얻고 나면 더 이상 그런 송사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가끔 하얀 봉투에 유리창 달린 편지가 날라 오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교통범칙금 통지서입니다. 저는 그래도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편인지만 위반하는 일이 있으면 대체로 속도위반에 걸립니다. 더우기 요즘은 제가 직접 운전하는 일이 드무니까 그런 일도 별로 없습니다만 전에는 지방에 집회가 있거나 할 때에 속도를 내서 걸리곤 했습니다. 카메라에 찍혀서 날라 오는 범칙금 통지서를 보고 그 돈을 낼라 치면 얼마나 아까운지... 옛날에 산타모 타고 다닐 때에 7만원씩 날라 왔는데 속이 쓰릴 정도입니다. 칠천 원이라면 좀 나은데,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우리 교회에서는 교역자 회의에서 일정하게 룰을 정했습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다가 법을 어기게 되어서 내는 세금은 모두 본인 부담이라고 정했습니다. 범칙금 통지서를 천장을 받아도 모두 본인 부담입니다. 교회에서 내주는 일은 절대 없는 것으로 했으니 당연히 제가 솔선수범해야 됩니다. 용돈에서 그것도 칠만원이나 빼서 내라고 줍니다. 그럴 때는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범칙금 통지서가 두 장이나 날라 왔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해서 들여다보니 한 3년 전에 이미 납부한 과태료가 나왔습니다. 납부한 영수증을 가지고 있는데도 또 부과된 것입니다. 그래서 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야단을 쳤습니다. 이게 무슨 좋은 초대장도 아니고 다 냈는데 왜 또 나왔는지, 영수증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당신이 와서 보라고 내가 왜 가지고 가느냐고. 당신들이 일을 잘못해 놓고 왜 내가 영수증을 가지고 거기까지 가느냐고, 여기 있으니까 와서 보라고. 경찰서에 전화해서 막 야단을 쳤습니다. 사실 제가 범법자였다면 오히려 경찰서에서 다그치는 말에 조용히 있었을 텐데 이미 다 지불한 고지서를 앞에 두고 있으니 그것을 보고 겁낼 필요도 없고 지갑을 만지작거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고소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지었던 수많은 죄들에 대해 예수님이 그 값을 대신 치뤄주신 것입니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이를 통해 죄의 용서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고 그 율법에 종노릇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 율법은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에게 살아가길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표준을 알려줄 수 있을 뿐 그것이 우리를 정죄하지는 못합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나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형벌을 받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구속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구체적인 효과 중 첫 번째 입니다.
②성령을 주심; 성령으로 새생명의 원리를 심으심.“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두번째는 이렇게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시는 것입니다. 화목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주셔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의 원리를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이해하기 쉽게 비유로 이야기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가끔 보면 국가적으로 범법자들을 사면해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옛날,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을 했던 손동희 권사님의 아버지인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썼습니다. 말하자면 특사를 받게 한 것입니다. 그런 특사를 받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대통령이 결재를 해서 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그 죄를 면제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의 죄가 면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다거나 교도소에서 문을 안 열어주면 마찬가지입니다. 면제 통지서가 날라 와서 교도소 직원이 문을 열고 수갑을 풀어주고 교도소에서 입던 옷을 벗고 새옷을 입고 교도소 문을 걸어 나감으로 완전히 자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분과 상태의 자유가 우리에게 그런 형 집행에 대한 중지 내지는 사면을 통과한 것이라면 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를 죄인으로서 살아가도록 얽어 매었던 우리의 사슬을 다 풀어주고 유치장을 열어준 것과 똑같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을지라도 계속해서 자기가 죄에 매여 있다면 그 죄에 매여서 살아가는 삶이 반복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죄 아래 살아가지 않도록 성령을 주셔서 죄와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내부의 구조를 다 파괴해버리고 새로운 구조를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생명의 원리를 심으시는 것입니다.
아직은 죄가 조금은 남아 있지만 그 안에 성령님의 은혜가 깃들여서 은혜를 받고 말씀으로 충전을 받고 기도하고 새로워지면서 은혜의 생명이 계속 살아나고, 남아 있는 그 죄를 계속 죽이면서 성화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주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이렇게 사람을 바꾸어 놓으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그로 인해 우리에게 내면적 자유를 가져다 주시는 것입니다.
③죄의 지배가 종식됨(롬8:1)
세번째는 로마서 8장 1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러므로 말미암아 죄의 지배가 완전히 종식되어 버린 것입니다. 죄의 지배가 완전히 종식되어서 죄는 이제 신자들에게 어떤 지배권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안팎으로 다 파괴된 것입니다. 밖으로는 상태와 신분에 있어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죄의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셨고 안으로는 우리 안에 죄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 지배의 원리들을 모두 파괴하여 새 생명의 질서들을 심어 놓으심으로 이제는 성령의 은혜로 살아가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가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우리의 신분을 향해서나 우리의 내면의 영혼과 마음을 향해서나 지배권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지난 번 설교 때 말씀드린 것처럼 죄가 신자를 지배하는 일이 있을 수 없지만 만약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부당하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마치 혁명적인 반정부 폭동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진압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유를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로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 기이한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받는 그 순간에 우리를 사망과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기셨으며 죄가 우리를 다시 어두움의 나라로 돌아가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이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고 있는 처지는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분명히 신자가 틀림없고 아무리 양보를 해도 내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데 내가 지금 죄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고 죄가 나를 주관하면서 살아가게 된 이 상황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까요? 이것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고 일어날 수 없는 일임에도 비정상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것이며 이렇게 이야기한 수많은 자유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일까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을 그림 같은 비유 한편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이 비유를 가슴에 새겨 놓으시면 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했습니다. 그때는 서슬이 시퍼런 무서운 시대였습니다. 칼을 찬 순사들이 온 동리를 한번 지나가면 울던 아이들도 울음을 그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포의 정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2차 대전에서 일본이 지고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하고 일본은 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일본 순사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빨리 떠나기를 촉구하고 돌을 던지고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시위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 쫓겨서 도망을 갑니다. 얻어터지고 총에 맞은 일본군인, 동리 사람들에게 맞아 피를 흘리고 다리를 절뚝거리는 일본군인, 그래서 그들은 오직 빨리 도망가는 것밖에는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절뚝거리면서 다 도망갑니다. 그렇게 도망가는 그들의 뒤쪽에서는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민국 만세, 대한독립 만세’ 를 외치며 기뻐서 얼싸안고 노래를 부르면서 감격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절뚝거리면서 배를 타고 도망가는 일본 순사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 군화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립니다. 가지 말라고, 가지 말고 여기서 옛날처럼 나를 그렇게 대해 달라고, 칼을 내 목에 대고 위협을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고 그리고 우리 가족들도 데려다가 고문을 하고 가끔 화가 나면 조센징 나쁜 새끼이렇게 나를 욕하고 나를 그렇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이면서도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은 이렇게 필사적으로 달려가서 도망가는 일본군을 붙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됩니까? 망하고 이제 떠나가는데 뭐가 그렇게 그리워서 군화발을 붙들고 울면서 사정하면서 옛날처럼 나를 조센징이라고 욕하고 군화발로 차고 짓밟고 말 안 들면 내 목에 칼을 대라고 합니까? 일제 시대 때 받은 몇 푼의 돈이나 뇌물, 회유하면서 주는 공작금같은 것이 좋아서 그런 삶을 삽니까? 그것이 바로 신자이면서도 죄의 지배를 받아서 살아가는 삶의 실체입니다.
로마서 6장 6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시 죄의 종노릇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그럴 수 없다, 또 그럴 이유도 없다고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돕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달려가서 그 죄의 품에 뜨겁게 안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품을 꼭 붙들고 거기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생명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모든 복음의 생명들을 잃어버리고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뒤틀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됩니까? 영혼이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구속을 받고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셨을 때 그는 이제 그 은혜의 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계명 안에 행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찬송하면서 살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죄의 종된 신분과 상태에서 자유를 주시고 우리의 내적인 얽매임까지도 모두 풀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다시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영광을 돌리면서 살 수 있는 은혜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 다시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견딜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습니다. 괴롭고 곤고하고 힘듭니다. 세상에 나가면 주님 때문에 힘들고 교회에 나오면 세상 때문에 힘듭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피곤함이 엄습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피곤하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렇게 피곤하고 힘들 때에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의 낙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통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유능한 법관 한 사람과 아주 똑똑한 판사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같은 동리에 살았습니다. 우연히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리다가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러더랍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사냐...’ 얼마나 자조적인 이야기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죄의 낙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그러한 삶에 대한 처방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마치 중병에 걸려서 누운 사람이 고통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계속해서 그 죄가 자신 속에 들어와서 그를 계속 괴롭히게 되고 결국 마지막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충격적인 영상이 방송이 되었습니다. 예쁜 여자가 화장도 하고 머리도 단발을 하고 나왔는데 그것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합니다. 화장을 지우고 나니까 이가 다 빠지고 눈은 시커멓게 들어가고 이가 다 빠진 입에서는 피가 흘러 내려 드라큐라 같은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자막은마약, 생각보다 그 후유증은 무섭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 살아가다가 마지막에는 많은 사람들은 주님이 주신 자유 때문에 지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그렇게 기뻐하면서 빛 가운데 살아가는데 자기는 어두움의 나라의 빛의 나라에서 온 스파이처럼 가끔 죄의 낙을 즐기고 그렇게 살다가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게 결국은 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신자의 일생의 마지막 운명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을까요?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2)마음과 영혼의 자유: 죄의 사슬로부터의 내적 자유
복음이 우리에게 주신 두 번째의 자유가 바로 우리에게 주신 내적 역사의 자유입니다. 상태와 신분의 자유에 이어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마음과 영혼의 자유입니다. 죄와 그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율법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 것이 상태와 신분의 자유라면 죄에 매어있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자유롭게 해 주신 것이 내적 역사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서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우리를 주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 보면 그때 우리는 육신의 행실을 쫒아서 마음에 원하는 것에 행하여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다고 나옵니다. 자기가 원해서이기도 하지만 자기 안에 이미 법이 있어서 그것대로 따라가면서 살아가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인간으로 살아가던 모습이 주님 밖에 있을 때에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 18절에 보면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나옵니다. 성령을 주셔서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그런 죄들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의 원리를 주시고 그 능력으로 우리들이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수 있는 놀라운 은혜와 힘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로서 신자 안에 있는 모든 죄는 파괴되고 어느 정도 죄의 성품들이 우리에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이 은혜 안에 살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의 원리로 돌아가기만 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 역사를 보거나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 탁월할 정도로 순결하게 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은 우리보다 결심이 강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이런 원리에 충실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영적인 원리로 돌아가서 지난주에 설명한 것처럼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느낄 때에 영혼들이 돌아오는 복음적인 방법을 찾아간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회복된 영혼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영적인 원리를 따라서 그 은혜를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도 꿈꾸지 못했던 순전하고 아름다운 삶,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원리로 돌아가야 됩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부당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설교를 듣고 이해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 죄는 엄청나다고 말입니다. 목사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죄가 나를 거의 움치고 뛸 수 없도록 지배하고 있고 은혜는 내 안에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내 영혼의 어두움은 가득하고 나도 이 죄를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속임수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죄가 힘을 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이 너무나 힘이 약해져 있기 때문에 그 죄가 작은 힘으로 누르고 있는데도 여러분들이 어마어마한 힘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죄인으로서의 신분과 상태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줬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고 계십니다. 사슬에 매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그런 삶을 살게 만든 우리 마음과 영혼의 사슬을 다 걷어주셨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아주 분명한 말씀의 이치에 따라서 돌아오면 됩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다가 두려움 속에서 슬피 울면서 죽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는가의 여부는 마지막 그때에 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죄가 그렇게 좋습니까? 나를 잃어버리고 내 영혼을 파괴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다 부셔 버리고 그 하나님까지 잃어버리면서까지 소유해야 될 정도로 그렇게 훌륭한 죄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헛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전에는 어떻게 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방황하고 허덕였지만 이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고 명쾌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놓여 있는 그 죄의 지배의 자리를 빛으로 비쳐 주셨고 거기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길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절대로 하나님 혼자서 여러분들을 의롭다 칭하신 그 칭의 사건처럼 일방적으로 죄에서 구원해 내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 원리로 돌아오고 여러분들은 근본적으로 여러분들이 신분이 이제는 죄인이 아니오, 그 죄의 노예가 되어서 살 사람이 아니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율법에 모든 사슬을 벗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지금 말하는 나도 이 죄에 대해서 어쩔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속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이렇게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이런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번호 547번 석방’ 간수가 와서 묶었던 죄의 사슬을 풀어주고 묶은 밧줄도 다 풀어 주었습니다. 문을 열어놓고 빨리 가라고 하고 간수는 사라졌는데 달려가서 유치장 문을 도로 닫고 그리고 밧줄을 갖다가 자신을 다시 묶고 자기 스스로 수갑을 다시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께서 우리가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자기의 외아들을 주셔서 이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이루신 주님의 사랑
주님 말씀 따라 생활하며 주님 사랑 안에 하나 되어
내 마음에 주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험난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저는 실제로 죄인이었던 적도 있고, 어두움 속에 있었던 적도 있고,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에 지배 아래 있었던 적도 있었던 사람으로서 여러분들에게 자신 있게 말합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살 수 있고 우리를 누르고 있는 죄와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이 죄악의 사슬들이 아무리 견고하게 느껴져도 그것은 모두 헛된 속임수일 뿐, 우리들이 정직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서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우리를 그 은혜 안에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복음적인 방법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순종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요구되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인데 신실함과 부지런함입니다. ‘아!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보고 싶어! 그러다가 저녁때는 그냥 그대도 살까봐’ 이렇게 오락 가락하는 신실함이 없는 태도로는 죄의 지배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총체적으로 순종하고자 할 때 신실함과 부지런함은 반드시 요구됩니다.
죄의 지배에 대해서 듣고 자신의 비참함을 느끼고 이제는 정말 그 은혜 가운데 살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성실하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내가 져버린 의무가 무엇이며 기도의 삶을 잃어버렸다면 어느 지점에서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고 게으르게 살려고 하는 자신를 채근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기도하려는 자기 자신을 채근해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통해 죄가 깃들기 싫어하는 후레임을 우리 안에서 형성하도록 하나님 앞에 내적인 갱신을 구해야 합니다. 불순종함으로서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면 이제는 순종하면서 살려고 부지런히 애를 쓰고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내가 이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는 길인가 하는 것들을 어린아이에게서라도 영혼의 이런 이치를 배워야 합니다. 전심으로 여러분들을 그 죄의 지배를 받는 희망이 없는 어두움 속에서 건져 주셔서 다시 주님을 순전하게 사랑하고 온전히 신자가 되어갈 수 있도록 간절하게 탄원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이 이미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자유를 통해서 죄가 여러분들을 주관하게 못하게 하고 그 죄를 다스리며 그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서 빛 가운데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여러분들은 그 어두움 속에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주의 기사를 내게 행하소서 내가 늙도록 주의 그 기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겠노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여러분들이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으로 돌아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함(3)-
복음이 죄 죽임의 격려와 동기를 주기 때문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이미 여러 주에 걸쳐서 말씀의 숲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때로는 이미 걸어온 길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낙심을 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만 그러나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이 시리즈 설교가 끝나가는 데 끝나고 나면 여태까지 설교한 것의 목차를 쭉 적어서 여러분들에게 나누어드리기로 그렇게 마음의 결심을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온 길을 조금은 알아야지만 오늘도 걸어갈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네 번째 시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 커다란 이유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은혜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일들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첫 번째가 복음이, 다시 말하면 은혜아래서 복음이 우리에게 죄를 이길 능력을 주기 때문에, 힘을 주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드렸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시간에는 구정 다음날이었는데 같은 맥락에서 그렇다면 만약에 우리가 죄의 지배아래 있다면 어떻게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간에, 지난 시간이었는데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은혜아래 있기 때문인데 그 은혜아래서 복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매어서 지배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그림 같은 생생한 비유를 하나 일러드렸는데 신자가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는 것은 나라가 망해서 도망가는 일본 군인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옛날처럼 나를 짓밟고 다스려달라고 애원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인데 그 은혜아래서 복음이 우리에게 죄와 싸워서 이길 동기와 격려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기와 격려라고 하는 것은 힘하고는 좀 다른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힘이 2000cc혹은 3000cc 엔진이라고 말한다면 동기와 격려는 동기는 시동을 걸어주는 것이고, 격려는 가끔 기름칠을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차가 아무리 좋아도 시동이 안 걸리면 그 차가 힘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시동만 잘 걸린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동은 걸렸는데 출발하려고 부르릉 하고 엑셀을 밟으면 피식피식 그리고 엔진이 꺼져버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동도 걸려야 하고 그 다음에 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힘을 주시는데도 죄를 이길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데도 신자에게 왜 이런 격려와 동기가 필요한가. 첫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누가복음 1장 75절에 보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언을 우리에게 주시는 가운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결과 의로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세례 요한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그런데 신이 실제로 있으면서도 우리들이 두려움이 휩싸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 안에서 자유하게 해주셨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설교를 들으셨습니다. 신분과 상태에 있어서는 죄의 노예로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고 내적 역사에 있어서는 죄의 사슬처럼 매어서 움직일 수 없었던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끌러 이제 자유 할 수 있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죄가 우리에게 기습을 한다고 할지라도 예전처럼 우리를 얽어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 이 진리를 묵상할수록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힘이 섰는지를 모릅니다.
A. 죄를 이길 효과적인 동기와 격려를 주지 못하는 율법
실제로 우리들이 죄의 싸움에서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죄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신념에 불타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죄를 이길 것이라고 하는 신념에 불타지만 믿음이 식어지면 죄는 어마어마하게 큰 골리앗처럼 보이고 자신은 그 앞에 서 있는 아주 나약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서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난 후에 우리는 그 아낙 자손들 앞에서 메뚜기와 같다고 말한 것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신자들에게도 있습니다.
1)죄와의 싸움에 필요한 동기와 격려
a. 두려움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하나님이 그게 아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그리고 사실 너와 함께 하는 나는 네가 두려워하는 이 죄의 세력들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네가 나와 함께 해서 이 대적들을 이길 수 있다. 이런 하나님의 격려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b. 연약함 때문에(히4:15)
두 번째 또 우리에게 이런 격려와 동기부여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우리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함에 둘러 싸여있는 아주 힘없는 갈대와 같은 그런 존재들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강하게 된 것이지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완고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영적인 세계에서의 죄와의 싸움에 있어서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에 불꽃과 같은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처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담대해지는 것을 느끼지만 우리가 항상 담대합니까? 항상 강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원래는 말에 졸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놀라운 은사를 부어주시자 입을 열면 철학자들도 입을 다물게 할 정도로 유창한 웅변이 쏟아져 나왔고 복음의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던 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학문과 그리고 이적의 능력이 뛰어났던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데네에서 기대했던 것만큼 복음 사역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작은 성공을 거둔 것이었겠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혁혁한 복음의 승리를 일구어내었던 복음전도의 역사를 보면 사도바울의 아데네에서의 체험은 상대적으로 실패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아주 졸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고린도 지역으로 복음을 들고 들어가면서 그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지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연약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사사기 15장에 보면 삼손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나귀턱뼈로 블레셋 군사 일천 명을 때려죽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여 이제 내가 목이 말라 죽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블레셋에 도망간 어떤 군사들 중에 몇 명이 다시 삼손에게 돌격하면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연약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강함과 약함은 이처럼 종이 한 장의 차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동기부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동기부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평생 새벽기도 해야지 결심하였을 때는 확 가슴에 밀려오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약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하나님의 동기부여가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을 율법은 줄 수 없는데 복음은 그런 것들을 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율법아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 아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이 지정하신 올바른 원리로 돌아가면 그런 격려, 그런 위로, 그런 동기부여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이렇게 계속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면 우리에게 담대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런 동기부여를 받으면 우리에게 새 힘이 솟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늘 죄에 지고 실패한 것 같은데 주일날 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잘 깨닫고 나면 다시 한번 포기하다시피 한 이 죄와의 싸움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그러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하는 담대한 확신들이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런 은혜와 하나님의 이런 동기와 그 다음에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그것들을 주지 못하는 무능한 율법
a. “지키면 살리라”고 말하지만, 실제는 패배를 경험함; 두려움과 낙심.
그런데 율법은 이런 것들을 주지 못합니다. 지키면 살리라고 율법이 말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지킬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율법이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다스릴 때에 그 명령을 따라서 살 수 있는 실질적인 힘들이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자주 오해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바로 이런 이유들이 바르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꼭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죄가 무엇인지 보여줄 뿐이지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는 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b. 신자가 율법으로 죄와 싸우다 실패할 때의 반응
그래서 특별히 그 율법을 가지고 자기의 죄를 이겨보려고 싸웠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을 가르쳤던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그리고 서기관들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죄와 싸워서 이기고자 하는 소원은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복음이 우리의 영혼 안에 역사해서 어떻게 우리 안에 죄를 이기고 신령한 능력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이기게 하는지를 그들은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듭나지 못한 채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 그러나 정작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만날 수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죄가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축복들은 누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일은 유대인들에게만 과거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일들이 카톨릭의 어두움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비밀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죄가 자신들의 마음을 통해 영혼 안으로 들어오고, 어떻게 그 죄가 자신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몰아내며 어떤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지배를 종식시키시고 은혜의 지배를 확정 시켜 나아가시는가 하는 방법들을 바르게 터득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온갖 이상한 신앙의 행태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성인들에게 자기를 건져주시도록 기도한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의 공로로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누릴 수 있고 해택을 받을 수 있고 생각하는 통념 사상을 갖는다든지 죽은 후에 다시 한번 자기를 정결케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는 연옥 사상에 빠진다든지 다양한 이상한 신앙의 행태들을 낳았습니다.
①이전의 죄로 돌아감(벧후2:20-22); 자포자기와 죄에 대한 사랑, 두려움
그러면 그런 유대인이나 역설적으로 카톨릭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 것인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참된 이치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신자들도 죄와의 싸움에서 잘못된 방식을 택함으로서 이기기는커녕 철저하게 패배하고 마지막에는 죄와의 싸움에서는 자기가 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한번 거기에 종노릇하며 살아가는데 그 사람이 만약에 거듭난 사람이라면 이제 나라가 모두 망해서 도망가는 일본 순사 몇 사람을 붙들고 애원해서 자기의 고향에 데리고 와서 모든 사람들은 다 광명천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새 정부를 수립하고 사는데 동리에 순사 몇 명을 데려다놓고 거기에 짓밟히면서 일제 시대의 삶을 희극적으로 재현하는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유가 적용될만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는 통탄할 정도로 많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연적으로 이미 소멸되어버린 죄의 지배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서 거기에 복종하며 살아서 삶의 평안을 잃어버리고 영혼은 망가지고 성품은 깨트려지며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고 그의 거룩한 뜻을 따라 살도록 새롭게 창조된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사단에게 헌납하고 살아가서 죄의 노예가 되고 주님은 그 사람의 인생을 바라볼 때 너무나 가슴이 아픈 그런 비참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자식을 나았습니다.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입을 것을 아껴가면서 그 아이를 길렀고 그리고 그 아이를 건강하게 양육했습니다. 좋은 교육을 받게 했고 그리고 훌륭한 학교에 집어넣어서 좋은 선생님들에게 교육을 받았고 여러분들은 자라나는 자녀를 보면서 여러분은 자녀를 향한 계획과 꿈도 함께 자랐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좋은 대학의 졸업을 앞두고 좋은 회사와 그리고 좋은 일거리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이 변심해서 양아치 소굴에 들어가서 그 양아치들의 딱거리나 하면서 그렇게 방탕한 삶을 살고 지명수배를 받은 사람이 되어서 여기저기 도망 다니고 집에 전화해서 돈이나 이상한 계좌로 부쳐달라고 하는 그런 소식에 접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딸을 낳아서 애지중지 고이 길러서 예쁜 옷을 입히고 그리고 좋은 학교에 보내서 아름답게 길러서 그래서 이제 재능과 그리고 학식을 갖춘 그런 좋은 규수감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길러온 여러분들의 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변심을 해서 사창가에서 몸을 팔고 외간 남자와 히히덕거리면서 방탕한 삶을 살며 자기를 망가트리고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급기야 마약에 중독 되고 그래서 어느 요양소에나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여러분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며 이 세상이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한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이해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로 우리를 섬기게 하셨고 금쪽같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여러분들에게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돌보시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자라오도록, 무지할 때는 진리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의 눈의 비늘을 벗기시고 외로울 때는 주님이 친구가 되어주셔서 여러분들의 외로움을 달래주셨습니다. 곤궁할 때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셨고 그래서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힘, 그리고 공급해주시는 은혜로 살아오도록 주님께서 베풀어주셨고 은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분명히 은혜아래서 살수 있도록, 모든 죄의 지배와 그리고 영혼을 얽어맨 죄의 속박으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주어서 이제는 누구든지 그 복음의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바른 삶을 살면 정말 이 세상에서 죄를 밟고 이기며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여러분들이 살아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삶을 허락해주셨는데 스스로 자유케 하신 여러분들의 죄의 노예에서 해방된 그 자유 해방문서를 가지고 다시 죄에게 가서 그것을 바친 대가로 그들에게 몸을 팔고 더럽게 살아가던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위해서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평균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실 그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반드시 죄의 지배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은혜의 통치 아래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아까 유대인과 카톨릭의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만 그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인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지만 개신교 교도들, 심지어는 정말 구원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 중에도 잘못된 방식을 죄와 싸우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고 또 율법을 가지고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은혜로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 무엇인지 그 비밀들을 잘 모르거나 생소하기 때문에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죄와 더불어 부지런히 싸우는데 사실은 율법으로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과 비슷한 방식을 가지고 싸우다가 실패한 경우를 자주 보고 그런 잦은 실패는 죄와의 싸움에서 신자가 이길 것이라고 하는 성경의 증언은 사실이 아니라고 접고 그리고 죄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들 태반이 그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더 쉽게 예를 들게 해주겠습니다. 이런 저런 죄를 짓고 죄의 지배아래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특정한 죄에 계속해서 말려들 때 그때 여러분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게 알려지면 어떻게 하지. 교회에서 나를 집사님이라고 그러고 목사님도 나를 인정해주시고 사실 인정해준 적이 별로 없지만 인정해주시고 그러니까 전심으로 주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 이외에는 전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러실 것이고, 그리고 또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교회에서 내가 집사고 또 장로고 내가 목사인데 이런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까 끔찍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나쁜 자식. 저 순 위선자. 이런 소리가 막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죄를 지을 맛이 싹 달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 이게 죄를 이기는 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게 이기는 게 아닙니다. 입맛이 잠시 없어지는 것입니다. 입맛이 싹 달아납니다.
여러분, 내가 그 이야기하면 입맛이 달아나게 하는 것도 도움이 좀 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담배들을 많이 핍니다. 담배에다가 해골을 하나 붙여놓으면 확실히 덜 팔릴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쯤 덜 팔리겠습니까? 마치 불을 보고 날라드는 나방처럼 잠시는 그런 것 때문에 죄가 주춤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해골을 계속 보면 해골 쳐다보면서 담배를 핍니다.
그러니까 잠시는 그런 생각들이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그런데도 죄를 짓고 싶습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발각이 안 될 거야.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만약 알려지면 창피하고 진짜 가문의 수치지만 발각날 일이 없지 그렇게 해서 그 율법적인 인식이 가져다 준 수치심과 그 다음에 죄책감 그 다음에 그래도 그것을 행하고 싶다고 하는 내적인 욕망 사이를 화해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죄를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일도 있습니다. 진짜 죄가 싫습니다. 죄를 털어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죄가 너무 싫어서 그 죄를 행했던 장소도 가기 싫고 그 죄를 지은 사람과 다시 만나서 싫고 이럴 정도로 죄에 대해서 극도로 죄를 멀리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심히 불명예를 끼쳐드렸다고 하는 그런 신앙적인 마음이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이렇게 살라고 구속해주신 것이 아닌데 주님이 주신 자유를 방종함으로 누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기 때문에 마음 아프고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죄가 내 영혼을 곤고케 하는구나 하는 이런 복음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죄를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이 죄를 버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평화를 얻고 싶은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죄를 지으면 죄가 즐거움도 주지만 괴로움도 줍니다. 그러니까 범죄한 자들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죄를 짓는 그 순간에는 평강이 바라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순간적인 즐거움이 있어서 기쁘지만 그 즐거움이 지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즐거움보다도 더 커다란 두려움과 번민 같은 것들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이 실타래가 얽힌 것처럼 막 헝클어진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는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풀어도 풀어도 안 풀어질 때는 실이 좀 아깝더라도 끊어내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욕망 때문에 죄를 떨쳐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복음적인 죄와의 싸움의 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이 죄 때문에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계획이 방해를 받는다든지, 그 다음에 죄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든지, 이 죄 때문에 내 안에 주님이 충만히 살지 못하셔서 그래서 내가 이 세상을 사는 참다운 보람이 없다든지 하는 이런 신앙적이고 복음적인 동기에 의해서 점검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죄가 가져다주는 고통과 불편함 때문에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그냥 마치 이렇게 때 묻은 옷을 확 벗어버리고 옷을 갈아입고 싶듯이 그런 심리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게 어떤 생각을 합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죄가 생각나는 장소에 가고 싶지도 않고, 죄와 연루된 사람들과의 관계는 다 정리하고 싶고, 그리고 또 어떤 마음에 생각들이 생겨납니까? 이게 너무 평안이 없으니까 그냥 생명 걸고 금식기도를 해서 여러 해 동안 계속 되어온 죄지만 단칼에 끊어버리고 싶은 그런 욕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을 위한 영광에 대한 열망이 그런 결심을 만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평강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도들이 성공을 합니까? 그런 시도를 여러분이 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성공을 합니까? 성공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성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죽이는 복음적인 이치로 돌아가서 영적인 그 원리를 따라서 죄를 죽여가야지만 죄가 죽지, 그런 식으로 안 됩니다.
그것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작 원하는 것은 죄를 죽여서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빨리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평화를 죄와 싸워서 이겨야지만 평화를 얻게 되는데 평화는 죄와의 싸움에서 이긴 승리의 경험을 통해서만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죄에게 졌을 때도 평화가 오고 다른 다양한 방법으로도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평화가 옵니다. 그런 평화가 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다시 죄와 싸울 그런 동기들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왜 그 죄를 떨쳐버리고 싶었던 동기 그 자체가 너무 괴롭고 힘들었기 때문에 그랬는데 지금 힘들지 않고 괴롭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미움이 없이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의 결국이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의미에서 신자인 여러분들이 죄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동안에는 그 동안에도 하나님이 순간순간 평화를 주시기는 하지만 평화보다는 갈등을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갈등을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 그 갈등은 궁극적으로는 죄를 모두 죽이고 이기기 전에 다시 말하면 죄의 지배를 벗어나서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그런 궁극적인 평화입니다.
그러나 금방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죄에게 져주는 것입니다. 그럼 평화가 찾아옵니다. 어떤 죄를 짓고자 할 때, 유혹을 받을 때 우리 마음은 안달복달합니다. 그것을 계속 그 죄를 지으라고 막 우리를 들볶습니다. 그때 은혜가 워낙 많아서 그 죄의 유혹을 단칼에 물리쳐버리면 그러면 은혜로 말미암은 평화가 있지만 이 은혜가 많이 쇠약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유혹이 점점 강해집니다. 점점 싸우다가 싸울수록 다시 아까 말씀드린 은혜의 원리로 돌아가서 그 은혜의 방편에 참여하고 기도생활 하고 해서 위로부터 이렇게 몸부림치고 싸우는 은혜의 힘이 주어지면 죄가 쇠약해지는데 이런 것들이 차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의 시간이 계속되고 계속될수록 은혜의 공급이 안 되고 죄는 점점 강해지기 때문에 자기가 받는 유혹의 힘이 점점 압도적으로 세서 자기는 점점 힘이 빠져서 쇠약해집니다. 그때에 안심하고 있다가 몸부림치고 있는 동안에는 막 견디기 힘든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죄가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데 그 죄를 안 짓겠다고 하니까 수많은 갈등이 이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죄와 싸움을 탁 포기하고 내가졌다. 그리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럼 그 순간에 놀라운 평화가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순간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그리고 잠시의 평화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에 무자비한 은혜의 학살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옛날에 캄보디아가 공산화될 때 그랬습니다. 매일 싸움입니다. 공산당과 국민들이 매일 싸웁니다. 싸운다는 것이 이렇게 전선을 쳐놓고 이렇게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 길거리 지나가다가 폭탄을 던지고 게릴라들이 도망가고 그러고 건물이 불타고 이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완전히 공산화가 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총소리 하나 안 납니다. 왜 이게 말하면 완전히 나라가 전부다 공산군에 의해서 장악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깃발을 흔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편해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다음에 공산군에 대항했던 사람들, 지주들 이런 사람들 다 쏴 죽이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총 쏘다가 총알이 아까우니까 비닐봉지를 씌워서 목에 묶어서 질식시켜서 죽여 버리고 그리고 머리에다가 총을 쏘는데 심지어는 9살 10살짜리 데려다가 총을 막 쏘는 것입니다. 그 애들보고 총 쏘게 합니다.
그러니까 평화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죄와의 승리를 통해서만 그렇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평화가 오고 나면 죄와의 싸움은 상실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방법으로 이렇게 죄와 싸우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 한번도 죄를 죽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못된 방법으로 죄와 싸우다가 죄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할 때 그때 나타나는 신자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집약이 됩니다. 첫째는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고 그리고 신속히 그동안 죄와 싸우느라고 허기졌던 죄의 욕망들을 채우기 위해서 예전에 그 방탕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베드로 후서 2장 22절에 보면 개가 토했던 곳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던 그 구멍으로 더러워지도록 돌아간다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부도덕하게 죄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담대하게 죄의식이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교회는 다니지만 실상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한번도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 그야말로 무지막지해서 그렇게 동물과 같이 사는 사람도 있지만 개중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꽤 경험한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상당히 경험했는데 지금은 거의 막 사는 것입니다. 막 죄를 지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무슨 뭐 꼭 신문에 나는 죄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거의 경건의 세계가 없이 막 자기를 내동댕이치듯이 신앙을 팔아먹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전에 상당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경험했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죄와의 싸움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거나 싸웠는데 죄를 이기는 복음의 비밀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서 계속된 좌절과 패배를 맛본 종교심리적인 반작용이 가져온 삶이 바로 그런 막가는 부도덕한 삶입니다.
②미신적인 맹종과 실천
두 번째는 어떤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주 미신적인 순종에 빠진 그런 경우입니다. 전에 교회에 다닐 때 그런 분들을 한 두 서너 분을 봤는데 우리 교회는 아직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좀 아쉬운데,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서 하는 사람이 교회마다 가면 한사람씩 있었습니다. 시킨 게 아니라 자기가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실 화장실이 더럽지 않습니다. 깨끗하지도 않지만 그러나 특히 열린 교회 화장실 같은 경우는 그냥 이렇게 진짜 화장실에서 예배드리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깨끗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한 2-3-년 전만해도 화장실이 교회에 가도 사실 화장실이 아니라 똥토간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참 지저분하고 냄새가 많이 나니까 그곳을 사람들이 청소하지 않으려고 하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뭐 가끔 이제 교회에 단상에 올라와서 마이크나 잡고 뭔가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고 음식 예쁘게 차려놓고 목사님에게 이것 좀 드셔보세요. 장로님에게 저것 좀 드셔보세요 하며 생색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러나 사실 똥토칸을 치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몇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자매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아무도 이곳을 건드리지 마라. 이곳은 내가 치워야 된다. 이유가 무엇인가? 어느 부흥회를 갔더니 그 부흥강사 이야기가 교회에 가서 화장실을 열심히 청소하면 하나님이 건강을 주신다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몇 사람의 증거를 내세운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딱 듣고 났을 때 건강보다 중요한 축복이 어디에 있는가. 몸도 약한데. 그렇다면 내가 화장실을 청소해야지 되겠다. 그래서 열심히 화장실 청소하는 것입니다. 항상 화장실이 깨끗하게 되어 있으니까 교회로서는 나쁠 게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그런 사람도 아쉽다고 했는데 나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심리로 보면 화장실 청소하는 것과 건강해지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무슨 화장실에서 산림욕이라도 하고 나오는가 말입니다. 물리적인 무슨 비결이 거기에 있는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미신적인 이런 것들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는가 하면 생각을 안 해도 좋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끔 보면 막 재산을 착취하고 막 심지어 몸을 빼앗고 하는 그런 이단들 굉장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휘말려 들어서 패가망신하는 사람 중에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꽤 나온다는 것을 보면 여러분들은 놀라지 않습니까? 아니! 대학 교수가 그 장관까지 지냈다는 사람이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왜 저럴까? 인간에게는 모두 그렇게 생각 없이 자기를 막 공격하고 생각 없이 자기를 그렇게 노예처럼 부려서 미신적인 명상에 빠지게 할 때에 안정감을 느끼는 타락한 종교심리가 인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저는 그런 존재도 못되지만 아주 카리스마적인 목사님 밑에서 입도 못 떼고 그냥 이유를 알든지 모르든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그런 교회 생활에서 한없는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그리고 내가 어떻게 결정을 주겠는가. 네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인격적으로 결정해라. 이럴 때에 굉장히 실망하는 교인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구둣가게를 할까요? 설렁탕 가게를 할까요? 그런데 내가 설렁탕을 끓여봤습니까? 구두를 만들어봤습니까?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서 자기에게 결과만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사실은 대답을 해준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설렁탕도 알아보고 구둣가게도 알아보고 그리고 어느 쪽이든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사업이 잘되게 하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드리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당신과 당신 아내 가족들이 기도하고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결정을 해라. 나도 기도해주겠다. 아주 굉장히 실망합니다. 어느 날 탁! 구두, 이런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사이비가 판을 치는 이유가 바로 인간 속에 내제하는 그런 종교적인 본성들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의 교주가 되는 게 이게 보통 머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그 사람들은 뭘 해도 성공할 사람들입니다. 멍청한 사람들이 이단의 교주가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왜 그렇게 바보같이 합니까?
어느 기도원에 갔더니 사람들이 기도할 때 기도는 안 하고 계속 이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뭔가 했더니 하늘에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은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은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 가만히 하늘나라 묵상하면서 죄 많은 세상에서 이 밧줄을 타고 올라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은혜가 된다면 그것은 이렇게 해서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대한 소망이라는 복음적인 기대가 자기에게 주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 자기가 이렇게 말하자면 모든 욕심이 사라지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쭉 모여 앉아서 밤새도록 이러고 있습니다. 참, 그러니 그런 종교적이 미신들이 어디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그게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할 때에 보이는 반응입니다.
그런 것들이 인간의 3세기부터 14세기에 있었던 수도원 시대에 보면 이게 엄청난 미신으로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했더니 어느 순간 탁! 보니까 여기에 못이 박혔더라. 그래서 그것을 ‘오상’이라고 합니다. 여기 다리 두개 여기 오상을 받았다고 하면 그 수도사들 가운데 끝나는 것입니다. 만약 화투로 말하자면 삼팔 광 땡입니다. 그 이상을 이길 재간이 없는 것입니다. 오상을 받았다. 아니 기도하는데 왜 여기 가시면류관 자국이 나오고 여기 못이 박히는가. 환상의 못이 아니라 진짜 못이 박혀서 피가 철철 흐르는 오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오상을 받기 위해서 그 수도사들이 미친 듯이 고행을 하면서 나도 오상을 달라고, 그것을 받아서 뭐하려고. 그런 미신과 그 다음에 맹종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철칙을 세워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뭔가 원칙을 세우는 것은 필요합니다. 원칙을 세우는 게 필요하면 왜 해. 그럼 하나 하나를 성경적인 이치를 따져서 원칙을 세우면 아! 그렇게 되어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라고 하는 것이구나.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늘 조심하는 게 무엇입니까? 설탕을 많이 먹으면 안 좋습니다. 백설탕 같은 것, 의사들과 건강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다 검증된 바입니다. 그것을 많이 퍼먹어야지만 건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적절하게 섭취하는 게 필요할지 모르지만 필요이상으로 먹으면 반드시 건강에 해가 온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것들을 어떤 이치를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불쑥 튀어나와서 성경과 상관없이 잣대를 확 만들어버리고 그것을 순종하게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옳은 것입니까? 그런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게 율법으로 죄를 싸우려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③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빠짐
마지막 세 번째는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는가 하면 죄와 싸우지 않고 도적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자기 의에 빠지게 됩니다. 나 세금을 한번도 떼먹은 적 없다. 너는 아무리 회개하고 은혜 받으면 뭐하니. 매일 세금 떼먹고 그렇게 사는데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 그런데 자신 속에는 이렇게 깨어 있으나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지배하는 변화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 대신 도덕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누군가 하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영적인 원리가 없이 복음적인 신앙의 원리 없이 도덕적인 삶을 구축해가니까 그 도덕적인 삶을 구축하기 위해서 치렀던 자신의 희생이 생각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기와 세리들을 멸시하고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았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당한 자부심을 갖는데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 속에 보일 리가 없습니다. 이래서 결국은 율법은 죄를 이길 수 있는 어떤 동기와 그 다음에 격려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B. 죄를 이길 동기와 격려를 주는 은혜
그러나 은혜는 이것을 줍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래서 복음이 어떻게 우리 안에 역사해서 우리에게 참된 죄를 이길 수 있는 동기와 격려 그리고 신 자유 이런 것들을 가져다주는지를 신앙 속에서 깊이 체험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설교를 듣고 나서 받아 적는 것 이런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지. 실천을 해야지. 돼지같이 많이 먹어서 살만 찐 사람이 운동하면서 땀을 흘리면서 운동하는 그 TV를 본다고 해서 살이 빠집니까? 한 끼 식사도 조절하지 못하고 말이지 화장도 하기 싫어서 늘 폭탄 맞은 얼굴로 나타나면서 미스코리아 하는 TV 중계방송을 본다고 해서 예뻐지겠습니까? 도대체 왜 그렇게 하고 삽니까?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많이 들으면 뭐합니까? 여태까지 9번에 걸쳐서 설교한 게 책으로 묶으면 거의 700페이지 책입니다. 어떻게 죄를 극복하고 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었는데 실천을 안 합니다. 기도 안 합니다. 근본적으로 그 죄의 지배 속에 있을 때 결정적으로 그 죄의 지배에서우리를 끌어내어서 은혜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분,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시고 다시 성결한 은혜로 우리를 지으시는 주체는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그렇게 역사하실 때 우리가 꼭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그랬는데 하나는 이 죄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영혼에 깊은 어두움이 드리워져서 영적인 암흑 속에서 우리들이 분별력을 잃게 되었으니까 우리가 말씀의 밝은 빛이 필요합니다. 그런 말씀의 밝은 빛이 필요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터득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시계나 보고 예배드리고 졸다가 가고, 그렇게 해서는 그것이 죄나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자신의 영혼이 죽습니다. 탐구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아! 내가 죄의 지배아래 있었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이 죄의 지배아래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러면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면서 그러면 도대체 내 영혼이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망가졌을까?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으려고 애를 쓰고 그 말씀을 터득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왜 성경을 안 읽습니까? 그렇게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으면 밖에 나가면서 그 충격을 지워버리면 그 충격이 여러분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가서 지속적으로 그 은혜의 수단이 되어서 죄를 죽이고 여러분들의 정욕을 불태우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이미 주신 그 자유와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샘솟게 할 때, 그때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데 가다가 테잎이라도 하나 사서 도대체 지난주에 뭘 들었는지 쭈그리고 앉아서 공부하면 안 됩니까? 뭘 노력한 게 있습니까?
또 하나 죄를 이길 수 있는 실질적인 이유는 주님이 이미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죄 때문에 지고 있을 때에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기도라고 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어내고 다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하고 지속적으로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면 놀라울 정도로 우리 안에 죄가 죽기 시작하고 우리의 마음은 죄가 깃들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frame을 형성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게으름과 나태 속에서 실천을 안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약에 눈을 들어서 지혜로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의 핍절한 삶과 패배하고 있는 이 삶이 마치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신앙의 표증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는 죄에 패배한 삶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침체에 빠진 시대가 아니라 배교적인 신앙이 팽배한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물려주시려고 했던 참된 복음의 신앙,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셨고 사도들이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피 흘리면서 죽었고 수많은 믿음의 선각자들이 그 안에서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온갖 특권들을 enjoy했던 그 영광스러운 복음의 신앙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무지와 어두움은 이 시대에 가득하고 세상을 향한 사랑과 육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들이 영적인 아름다운 세계의 축복들을 도외시하며 살도록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먼저 믿었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름값도 하지 못하는 껍데기밖에 없는 신앙생활들이 처음 믿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오해하게 만드는 훌륭하고 사악한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의 배교에 가까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박해와 핍박을 이기지 못해서 배교했지만 구약의 시대에는 우상숭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배교했지만 오늘날의 시대에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끊을 수가 없고 육체 속에서 우러나오는 피 끓는 정욕을 어찌하지 못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배교의 삶을 살거나 혹은 배교에 가까운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거룩은 간곳이 없고 신앙생활의 신령한 측면들은 철저히 무시되고 마치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정신교육을 받는 장소가 교회인 것처럼 전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런 세상을 바라보시며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요? 창조하신 세상을 망가트리는 장본인들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들을 그 모든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영혼과 마음을 얽어맸던 모든 사단의 사슬들을 끊어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지극한 자유함 속에서 성결과 의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수 있는 자유인의 길을 열어주셨지만 죄가 던져주는 한조각의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망해서 쫓겨 가는 일본 순사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자기를 짓밟고 지배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기를 택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적인 배교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캄캄한 시대에 빛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복음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세상이 모두 주를 버리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탐욕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복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이 배교적인 삶이 가득 찬 이 고통스럽고 어두운 이 시대에 마지막 남은 자들이 되어서.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삶이 빛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자녀가 빛으로 산다. 빛들로 나타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것을 윤리적인 면으로만 해석을 합니다. 도덕적인 면으로만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닙니다. 거기서 이야기하는 그 빛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포함될 수는 있지만 그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빛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진리 그 자체의 빛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참된 복음 신앙,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당신을 알리고 싶어 하시는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자신이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될 때 수많은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빛을 나누어주어서 그들도 빛으로 나오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죽이는 신자의 삶에 있어서 총체적인 순종이 필요한데 그 총체적으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죄 죽임의 자세가 있는데 그것은 신실함, sincerity입니다. 그 다음에 부지런함, diligent 이 두 가지가 우리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발적으로 어느 한순간에 가슴이 확 뜨거워져서 아! 그냥 내가 금식하다가 굶어죽더라도 한번 이 죄와 결판을 내. 이런 영웅주의적인 충동적 결단을 가지고는 죄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어때야 합니까? 신실해야 합니다. 성실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실하게 그리고 어쩌다가 한번 겨루어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성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은혜와 죄 죽임의 동기와 격려들이 무엇인가. 이렇게 신자가 바른 원리로 돌아가서 죄와 싸우는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서 은혜를 주시는데 그 은혜는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또 우리에게 인내를 줍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죄와 더불어 막 싸우다가 실패해서 죄의 지배를 받고 거의 졌습니다. 그런데 거의 엎드려져서 거의 죽은 것 같고 이제는 자기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 다시 말씀을 듣고 힘을 얻어서 죄와 싸우기 시작하면 고린도 후서 4장 10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 역사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고린도 후서 7장 4절 하반 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워 지고 있을 때 그래서 죄의 지배아래서 순종하고 있을 때에는 타락한 기쁨밖에는 기쁜 것이 없었는데 죄와 더불어 실제로 싸우기 시작할 때 그때 사람들에게 놀라운 기쁨이 주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기쁨이 죄를 이기게 하는 것은 아닌데 그 기쁨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가 비록 오랫동안 죄에 졌었는데도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것들을 경험하면서 다시 죄와 싸울 수 있는 담대한 힘들이 생겨납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 보면 핍박받을 때에 주의 성도들이 담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함이 그들을 그렇게 담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죄에 지고 있을 때는 어떠한 담대함도 없고 그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이글거리면서 타오르고 있는 죄 악 된 욕망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결과 의지로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깨끗해질 때에 그러기 위해서 애를 쓸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담대한 용기를 우리에게 주셔서 예전에는 죄에게 꼭 질것만 같았고 싸워봐야 괴로움은 더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한순간에 그 죄와 싸울 수 있는 담대함 그리고 내가 이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해방된 사람이고 이제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께서 나를 부르시는 날까지 후회 없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고 하는 담대한 확신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죄에 지고 있을 때에 죄에 완전히 복종하며 살 때에는 전혀 누릴 수 없는 용기입니다. 그런 것들이 죄와 싸우기 시작하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서 5장 3-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지고 있을 때는 완전히 패배하고 지배를 받고 있을 때는 어떤 승리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약속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와 더불어 싸우면 그 죄를 이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확신을 하게 됩니다.
제가 아주 좋은 비유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라고하는 그런 많은 반복된 약속이 있기는 했지만, 언제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습니까? 그렇지만 요단강을 건너서 이제 가나안을 정복하려고 나아갈 때에 그때 그들의 마음이 어땠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하신 말씀이 강하고 담대하라. 지도자였는데도 그렇게 떨렸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며. 그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모세도 이제는 죽고 이제 그 백성들을 데리고 가는데 처음 40년이 채 안되지만 하여튼 그 37-8년 전에 가나안을 그렇게 처음 정탐했을 때 그렇게 강한 사람이라고 판단되던 그 사람들은 지금 그 세월이 흐르면서 더 강해졌을 것입니다. 자손도 많아지고. 그런데 그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새 병기를 수입해왔습니까, 아니면 외국에서 용병을 불러왔습니까? 그런 처지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나아갔는데 싸우려고 하는데 이제 문제는 두려운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약속하셨지만 이 악한 사람들이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철기문명 속에서 이 요새를 지니고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이 가나안 땅이 정말 우리의 수중에 떨어질까? 사실 두려움이 없었다면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래서 처음 만난 여리고성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어마어마한 성이었습니다. 그것들을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가장 먼저 찾아왔던 확신이 무엇이겠습니까? 아!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그러면 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은 시간문제겠다고 하는 확신을 하나님이 주시기 위해서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승리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죄와 싸워서 부분적으로 승리하면 승리의 크기보다도 더 큰 최종적 승리에 대한 확신이 신자의 마음에 불타는 것입니다. 그러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을 하게 되면 결코 거기에 종노릇하겠습니까? 안 합니다.
실제로 일제 시대 때 있었던 일입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부르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무식한 시골 아낙네 하나를 잡아 왔습니다. 일본 순사가 취조합니다. 너 왜 길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가. 그러면 시골 아낙네가 기가 죽어서 무식한 제가 뭘 알겠습니까? 이럴 줄 알았는데 아주 당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할 바를 했을 뿐이다. 너희들은 우리들은 강제로 점령했고 우리는 반드시 독립할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랬더니 일본 순사가 하는 이야기는 욕을 하면서 이게 모르고 그랬다고 하면 살려주려고 했는데 죽으려고 기를 쓰는구나.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나를 죽여라. 총을 들이대니까 나를 죽여라.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어도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펄펄 살아서 뛰고 있는 민족 해방의 정기는 죽이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런 작은 승리 속에서 그런 도저히 죄에 지고 있을 때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담대한 승리의 확신이 거기서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주는가 하면 율법은 못 주어도 복음은 그것을 주는 것입니다.
2)신자가 은혜 아래서 죄와 싸울 때 받는 위로
그래서 신자가 이렇게 해서 은혜아래서 죄와 싸울 때 말할 수 없는 많은 위로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연약한 것을 주님이 아시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서 죄와 더불어 몸부림치고 싸우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작은 것으로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①영적인 소생(사57:15하); 죄로부터의 용서를 통해서<소극적>, 믿음을 통해서<적극적>
그래서 첫째는 영적인 소생을 주십니다. 이사야서 57장 15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 영적인 소생은 크게 두 가지로 주어지는데 하나는 소극적으로는 죄의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적인 소생을 주십니다. 죄가 많이 있었는데 사죄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다시 영적으로 소생하는 그런 은혜를 주시고 또 하나는 이런 심각하게 용서받아야 할 죄가 없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죄와 싸우면서 이것을 싸워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강한 힘을 그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소생을 누리게 하십니다.
②사랑을 받음(요14:2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과 친밀함을 누림.
그것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보면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랑을 받게 하십니다. 죄에 지고 있을 때는 죄에 대한 사랑만 가슴에 역사하고 그리고 그 죄로부터 받는 타락의 기쁨은 있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하나님과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너무 멀리 소원해져 있다고 하는 것. 심지어는 하나님이 자기를 돌아보시지 않는다고 하는 거절감, 이런 것들에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는데 죄와 막상 싸워서 일부분이라도 승리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죄의 지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를 사랑해주세요 사랑하는 증거를 보여주세요 그것은 쓸데없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보여주실 수가 없습니다. 죄와 싸워서 승리해서 죄를 이기는 것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③성령의 도움(빌1:19); 즉각적인 성령의 도우심
세 번째는 성령의 도우심이 나옵니다. 빌립보서 1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죄와 더불어서 싸우기 전에 죄와 더불어 싸워야겠다고 하는 상상을 하는 동안에만은 성령이 자기 속에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럼 막상 죄와 더불어 붙어서 싸우기 시작하면 성령님이 그 죄를 놀랍게 죽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④승리의 확신(고전15:57); 유혹과 시련 앞에서 승리를 확신하게 됨.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이런 유혹과 시련 앞에서 우리들이 승리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작은 승리인데 그 작은 승리를 통해서 정말 하나님이 도우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해주셔서 이 죄와의 싸움에서 내가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하는 증거들을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계속해서 격려하고 자극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도록 만들어주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것은 여러분들의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 없이 여러분들에게 참다운 승리가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부지런히 헌신해야 합니다. 좀 덜 먹고 운동을 해야지 살이 빠지고 건강해지지. 그렇게 해서 소원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죄를 이기면 우리 하나님께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소원은 가지고 있지만 소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 죄를 물 먹듯 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 들어오고 있는 이 죄와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씀의 빛 앞에 여러분들을 세우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자기를 쳐서 복종 시키는 열심히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여러분들이 그 죄와 더불어 싸워서 이길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주께서 내게 주신 이 놀라운 은혜들을 헛된 것으로 보내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매달리며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주께서 그렇게 아버지 앞에서 죄의 지배를 벗어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반듯이 승리를 주시고 그들에게 격려와 그리고 위로들을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11.신자 안에 있는 죄 때문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서론
몇 주에 걸쳐서 왜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은혜의 지배아래서 복음이 우리에게 죄를 이길 힘을 주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관할 수 없고, 또 복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때문에 그 죄의 속박을 받아 지배될 수 없고, 또 복음이 우리에게 죄와 싸울 수 있는 실제적인 격려와 동기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결코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앞으로 저는 이번 주를 포함해서 네 번의 설교를 더 하고 이 영광스러운 교리 시리즈를 아쉽지만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 결론 부분의 설교를 하도록 하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세 번의 설교는 전체적인 교리가운데서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부가적인 진리들을 가르쳐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주와 그 다음주 두 주 동안에는 신자들이 죄와 싸우면서 경험하는 이 지적인 혼란, 그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밝히고, 그 다음주에는 그런 지적인 혼란 때문에 이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하는 자들을 위한 대책을 말씀드리도록 하고, 마지막에는 이 시리즈 전체를 끝내면서 죄와 싸워 이기도록 여러분들을 다시 한번 격려하는 설교로서 약 15-16회 정도 되는 이 죄와 은혜의 지배 설교 시리즈를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매우 특별한 내용을 다룰 것입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신자 안에 있는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죄를 죽이지 아니하고는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없고 또 죄를 죽이는 삶 없이는 정말 승리하는 삶을 살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계속 논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이 죄가 아주 끔찍한 물건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또 끔찍한 물건으로까지 여기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해도 뭔가 계속 죄를 짓고 죄 안에 살면서도 ‘이러면 안 되겠다’고 하는 각성 정도는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역설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죄가 그렇게 끔찍하고 그리고 이 죄가 우리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멸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지만 또 이 죄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가 아니 여태까지 죄 죽임이 없는 생활에 그 비참함에 대해서 그렇게 피를 토하듯이 설교하고 그 죄와 더불어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은 주님이 주신 어떠한 생명의 놀라운 은혜도 현세에서 맛보기 어렵다고 강조해놓고 이번에는 죄가 마치 무슨 커다란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그것을 꼭 끌어안는 것처럼 그 죄가 너무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그렇게 소중하면 아까는 왜 죽이라고 그랬습니까? 그러면 죄가 그렇게 소중하면 빨리 그 죄를 주서 모아야겠네요.’라고 물으시겠죠? 궁금한 것이 참 많으실 것입니다. 천천히 합시다.
전제되어져야 할 사실들
-복음에 내포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우선 우리들이 이 놀라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복음은 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측량할 수 없는 지혜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먼저 기억하면서 이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그 지혜는 얼마나 놀라운지 머리 좋은 사람도 이해할 수 없고, 철학자들도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는 그 철학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마귀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것입니다.
-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에서 말하는 죄
또 하나 우리들이 여기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여기에서 “죄가 이렇게 놀랍고 소중한 것이 된다”는 것까지만 듣고 뛰어나가서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죄가 너무나 귀하다고 그러더라. 아! 내가 그 귀한 것을 여태까지 그렇게 버리고 죽이고 구박을 했으니 도로 찾으러가자.’ 그러면 안 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귀하고 소중하다고 하는 이 죄는 우리들이 범하고 찾아다니고 추구하는 그런 죄가 아닙니다. 죄와 더불어 몸부림치며 싸우는 신자 안에 남아 있는 그 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자살을 많이 합니다만 옛날에도 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자살 방법이 있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공포영화에 잘 나오는 목매어서 죽는 것, 재료도 많이 안 들고 간단하게 끈 하나와 기둥, 대들보 하나만 있으면 죽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잘 사용되던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빠질 물도 별로 없습니다. 옛날에는 강에 빠져 죽는다든지 뭐 투신자살해서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힘을 안 들이고 쉽게 죽기 위해서 사용하던 것들이 있었는데간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간수는 그저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바닷물에서 소금의 요소들을 갖다가 농축해서 짜낸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한 사발 마시면 확실하게 죽습니다. 분명하게, 실패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농약은 먹고 실패하는 사람이 있어도 간수 먹고 자살에 실패한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죽습니다.
그런데 그 간수가 뭐 할 때 꼭 필요한 것인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두부를 만들 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하! 사람이 먹어서 죽는 간수로 두부를 만든다. 그러면 많지는 않지만 두부 속에는 늘 우리를 죽음으로 데리고 가는 독성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렇다면 두부를 많이 먹으면 결국은 죽겠구나.’ 그런데 두 살 때부터 두부를 먹었는데 여태까지 안 죽고 살아있습니다. 오히려 영양학자들은 두부처럼 좋은 식품이 없다고 계속 권합니다. 아마 우리 나라에서 역사가 끝날 까지 계속 간수로 두부를 만들 것입니다. 그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또 하나 소금인데 중국에서는 이 소금이 자살하는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가끔 보면 병을 고친다고 소금을 몇 숟가락씩 먹는데 그것은 큰일 납니다. 잘못하면 죽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금이 속으로 들어가면 그 소금기가 삼투압 현상에 의해서 농도가 묽은 체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장기에 이상이 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짠 소금에다 간, 위장, 창자 이런 것을 한번 절여보십시오. 어떻게 되겠는지. 그런데도 우리는 소금을 안 먹고는 못삽니다. 국, 찌개, 반찬에 모두 소금이 들어갑니다. 미량의 독을 먹고 사는 게 아니라. 그 소금이 없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래서 양질의 소금을 먹는 것이 맑은 물, 맑은 공기, 영양 있는 식품과 함께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금을 적정량을 섭취해주지 않으면 전해질의 문제가 생겨서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탈수현상 같은 것들이 옵니다.
A. 죄의 지속을 은혜의 기회로 삼으심
‘도대체 그럼 뭐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뭐 죄가 소금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국에다 뭘 넣어먹을 수도 없고, 뭘 어떻다는 이야기인가.’ 이런 이야기입니다. 죄는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서 지배력을 얻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폭동을 일으켜서 사실상 우리의 마음을 점거하고 우리의 영혼을 장악해서 신자이지만 불신자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의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도 하고 우리를 유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죄에는 그런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계획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 죄를 사용하셔서 놀랍게 죄가 있는 것을 오히려 사용하셔서 넘치는 은혜를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십니까. 첫째는 죄의 지속을 은혜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죄가 우리 가운데 계속 지속됩니다. 누구도 이 세상에서는 죄를 완전히 죽였다. 죄를 완전히 죽였고 그리고 나는 이제 죄가 없다. 순결하게 되었다. 그렇게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퍼펙트하게 죄를 죽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게 신자 안에 죄가 계속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죄의 지속을 은혜의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1) 회개, 죄죽임 같은 탁월한 은혜는 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때는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크고, 자신의 영혼이 곤고해저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회개와 함께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 시리즈가 한 십 몇 주 동안 계속되는 동안에 몇몇 지체들 속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죄의 지배아래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또 하나는 그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어떻게 그 죄에서 어떻게 벗어날까나 하는 것들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는데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레박을 던져서 끌어올리는 것처럼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깊숙이 들어와서 혈관 구석구석에까지 퍼진 것처럼 자기와 일체를 이루었던 죄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죄가 죄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니까 점점 자신의 영혼에 변화가 오기 시작해서 죄가 깃들기 싫어하는 영혼의 틀들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니까 성령께서 오셔서 그 죄를 죽이시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죄를 죽이고 나서 깨달은 것이 ‘야! 정말 이렇게 내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내가 죄에 매어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이 이게 절대 숙명이 아니구나’입니다. 그리고 강한 확신과 은혜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제는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하구나. 그리고 이렇게 죄가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손에 죽는구나. 그래서 결국은 내가 이제까지 죄의 지배를 받았던 이 삶에서, 이 어두움에서 벗어나는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아! 진짜 이 복음은 살아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구나. 그래서 내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영과 혼을 찔러 쪼개기까지 해서 내 안에 내가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드러내고 모든 것들을 벌거벗은 것처럼 보여주는구나’. 만약 죄가 없었다면 이런 놀라운 확신이 생기는 것이 가능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죄가 소중한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2)우리 안에 남은 죄로 인한 악 때문에 아름답다.
때로는 온전한 삶을 살고 죄를 죽이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했는데도 남아 있는 우리 속에 죄가 있습니다. 부패성도 있고,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덤벙덤벙 하면서 부주의하게 태만하게 게으르게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 그러면서도 마음에 교만이 가득 차서 제대로 배우려하지 않고 그렇게 짐승처럼 사는 동안에 죄를 쫓아가기 때문에 그 죄들이 쌓여서 그 죄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게 그냥 내버려둔 상태에서는 은혜의 기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자기의 죄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그 죄가 계속해서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달으면서 ‘내가 이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겨우 이렇게 살게 하시려고 그 좋으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날 위해 피 흘렸단 말인가.’ 이것은 아니다. 그것을 깨닫고 죄에 대한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물론 마음속에는 아직까지도 그 죄를 버리지 못하는 집착도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속에서 은혜와 죄가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은혜가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이렇게 죄에 대해서 철저히 진 것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형식적이었고 그리고 태만한 기도였고 그리고 마음을 드리지 않는 기도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안 되지만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 두레박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덜커덕 뚝딱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절망이 되지만 흔들어보니까 찰랑찰랑 물이 조금 있습니다. 그것을 길어냅니다. 신기하게 길어내니까 점점 물이 그 마음의 우물에 차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 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가 죄로 인식되고 그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그 죄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의 지속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계속 공급해주시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① 순종을 빛나게 함(그 어려움을 인해 은혜를 구하게 된다.)
그런 증거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사실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순종하기가 참 어려워집니다. 왜냐하면 죄는 그 영혼 안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힘을 공급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담대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있으면 그렇게 순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면서 막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아래 있으면 죄책감이 없습니다. 죄책감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거의 없는 것입니다. 죄책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무모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마지막 브레이크입니다. 그런데 그것까지 없으면 이제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죄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자기가 너무 불순종했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아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이제 죄와 더불어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죄 때문에 불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와 생각,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꺾고 부서트리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깨어짐입니다. 자기 부인이고, 그런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종을 통해서 한 가지를 그런 방식으로 순종했는데 그 순종의 효과가 나머지 모든 삶과 영혼에 미치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잘 안 가실 것입니다. 그럴 때 저는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것으로 예를 드는 것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하는 것은 자식을 낳아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참 무정하게도 하나님께서 재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것을 달라고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다 바치고 너는 욥처럼 되라.’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바쳐라.’ 아들만 바치면 되는 것입니다. 이삭만 바치면 되는데 하나님은 그 한 가지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기록이 자세히 안 나오지만 하나님 앞에 바쳐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아! 그거요. 바칠께요.’ 그리고 덜렁덜렁 데리고 가서 칼로 푹 찔러서 바쳤다고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결혼 안한 사람일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사람이라고 해서 특수 인간이 아닙니다. 모두 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믿음으로 순종하기 위해서 그를 묶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그 단계까지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됐다고 하신 것이죠. 그때에 그 한 가지를 순종하고 나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괜찮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생애적인 경험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내려올 때에 이 아브라함은 한 가지에 순종했지만 한 가지 순종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전체가 새로워졌다는 것을 우리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죄가 있었기 때문에 죄와의 싸움이 있고 싸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꺾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신자의 나머지 많은 부분들을 한꺼번에 갱신시키시는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이 지혜롭게 역사하셔서 그 죄의 지속을 그 은혜를 공급하실 기회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자기를 포기하게 함.
③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탁월함을 의지하게 함.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죄와 더불어 막 싸우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너무나 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모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의 세계에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 참회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기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경험들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야! 놀라워 세상에 내가 이렇게 잘난 줄은 몰랐어.’라고 깨달은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성경에는 진짜 의인이 없고 다 죄인이라고 하지만 ‘야! 사실 이게 말이 안 되는구나. 내가 이렇게 의롭고 순결한 사람인지 예수님 말고 또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나였구나. 이것을 내가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은 뭐 때문에 놀라는가 하면 그 반대적인 의미 때문에 놀랍니다. 그 반대라는 게 ‘아! 내가 이런 죄인이었구나. 정말 흉측하고 그리고 형편없는 죄인이었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있는 그 잔인함, 그 무자비함, 하나님 앞에서의 야비함, 교활함, 그리고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하나님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 싶어하는 교만, 이런 것들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자기 딴에는 해보려고 했는데 자신의 연약함들에 대해 수시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 죄로 가득 찬 자신이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그 죄와 더불어 싸우기는 싸우는데도 여전히 한편으로 죄를 좋아하는 부패한 죄성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그렇게 아무런 능력이 없는 그 비참한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그들을 하나님 앞에 용납되게 만드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로를 많이 의지하게 되고 그리고 그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빈손 들고 앞에 가서 십자가를 붙들고 만세 반석 열리니 그 공로를 의지하여 내가 들어갑니다.그런 고백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중보자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뜨겁게 사랑하게 되고 그분이 나를 위해서 가치 없는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 고난과 그 죽음을 통해 이루신 중보의 위대한 사역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 안에 남아 있을 때 그 죄가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해주려고 죄가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죄가 할 일없이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죄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에 공로를 하찮게 여기고 자기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불순종하면서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을 살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왔는데 신자가 믿음으로 죄와 싸우다가 보니까 그래도 죽이지 못한 그 죄가 우리를 그렇게 예수님 사랑하게 만들고 십자가 자랑하게 만들고 그 복음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그런 놀라운 재료로 사용이 된 것입니다.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이 밀려오지 않습니까? 이 복음의 놀라운 지혜 때문에 말입니다.
④ 세상을 부당하게 사랑하지 않게 함
B. 죄의 능력에 은혜의 공급을 약속함.
1) 죄가 있으나 그의 능력보다 큰 은혜를 주신다.
뿐만 아닙니다. 죄의 능력에 대해서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심으로서 죄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기 시작할 때에 죄가 굉장히 강력하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깊이 침체에 빠져 있는 동안에 자기 안에 있는 은혜의 능력은 고갈되었고 죄의 영향력은 점점 증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자기의 영혼 속에 폭동을 일으켜서 합법적인 정부가 있는데도 일시적으로 점거를 해버린 것입니다. 그때에 엄청난 혼돈을 느끼고 그 죄가 너무나 강력한 세력으로 자기에게 역사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에 그 죄를 여전히 좋아하고 그 죄에 항거하지 않고 그 죄를 계속 따라가려고 하는 동안에는 그 죄에 대해서 어떠한 저항도 거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동안에는 이 죄가 얼마나 능력이 강한지 자기를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그 불안한 확신이 자신에게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그게 바로 죄가 원하는 것입니다. 죄가 원하는 것은 한 번만 자기와 손잡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코가 딱 꿰어서 고분고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죄가 계획하든지 그 죄의 계획대로 살게끔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를 계속 어두움 속에 두어야지만 속임수로 우리를 속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어두움 속에 계속 가두어두어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도 깨닫지 못하도록 죄가 자꾸 방해를 하고 그 다음에 죄가 우리에게 강력하게 강압을 통해서 우리를 지배하는데 그 지배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소극적으로는 우리를 협박하고 위협하며, 적극적으로는 ‘그렇게 안 하면 즐거움도 안 줄 거야.’ 그러면서 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즐거움을 미끼로 계속해서 그를 강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에 신자는 당황하게 되고 그 죄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자기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죄와의 싸움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다음 시간에도 이 문제를 좀더 상세하게 다루려고 합니다만 여러분들 가운데 이제 이런 상황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죄와 굉장히 싸우는 것이 힘들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느낍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런 원리입니다. 혼돈을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은 죄와 싸우는 것이 끊임없는 헌신을 요구하고 총체적인 복종과 그 다음에 성실성, 그리고 부지런함, 그 다음에 삶의 모든 방면에서 전방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결단, 이런 것들을 촉구한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계속해나가야 될 것입니다.
2) 신자가 죄와 싸우는 한 죄가 지배하지 못한다.
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그 죄와의 싸움이 어렵다고 말씀하실 때 여러분들이 그렇게 말할 때 그것이 정말 죄와 싸우기 위해서 애쓰는 가운데 경험한 어려움인지 혹은 싸우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갈등을 하는 가운데서 경험한 어려움인지에 대해서는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지금 어떤 죄를 짓고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죄를 짓는 것은 항상 죄를 지어야만 하는 적절한 필요가 자기 영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패역한 습관 때문이든지 혹은 내가 처음 선택한 죄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분을 버리면서 조차 신자가 죄를 택하는 것은 그 죄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자기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최소한 자기를 편안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워야지만 이길 수 있는데 싸우려면 이것을 놓고 그 다음에 총체적으로 죄와 싸워야 하는데,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은 계속 쥐고 있기 때문에 두 마음이 속에서 함께 공전하게 됩니다. 즉 은혜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죄와 싸우고 싶은데 막상 죄와 싸우려고 하면 죄가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면서 삼손의 품에 있었던 들릴라처럼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 사랑한 사이인데 이제 와서 나를 버리려고 하는 거야.’ 그때는 강압하는 눈빛이 아니라 아주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렇게 호소하듯이 말합니다. 그러니까 못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피곤해지고 힘이 들게 되는데 이것을 많은 신자들이 죄와 싸우느라고 힘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한번도 죄와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지치다가 나중에는 죄에 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래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집니다. 그리고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갑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사실은 죄는 그렇게 힘들게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죽습니다. 문제는 진짜로 죄를 죽여본 적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아까처럼 갈등만 하다가 끝나기 때문에 그 갈등으로 인한 괴로움이 10년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한 번도 죄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죄를 버리고 나서 ‘한번 붙어보자.’ 이렇게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와의 싸움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흔히들 죄는 계속 죄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있고 또 죄를 향한 사랑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계속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자기는 뭐 굉장히 많이 죄와 더불어 싸운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성경이 볼 때는 죄와 더불어 싸운 것이 아니라 갈등을 한 것입니다.
좋은 예가 삼손과 들릴라의 예입니다.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들리라는 우리 말 성경에 들리라라고 되어 있는 영어의 Delilah라는 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영어의 Delilah가 무엇입니까? '요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째든 얼마나 예뻤겠습니까? 그러니 삼손이 푹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생기면 요부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요부가 블레셋의 사주를 받아서 삼손에게 있는 능력의 근원을 알아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가르쳐주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되니까 가르쳐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의 정체를 알고 발로 차버렸어야 되는데 이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이 무릎도 좋고 그 다음에 능력도 안 잃어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애처롭게 매달립니다. ‘당신, 진짜 나를 사랑해?’ 성경에는 그렇게 안 나오지만 현대어로 꾸미면, ‘당신 나 사랑해, 그런데 왜 두 번이나 나를 물 먹여? 왜 당신의 능력의 근원을 가르쳐준다고 나를 속여서 망신당하게 만들어.’ 그러면서 예쁜 얼굴에 눈물까지 흘렸을 것입니다. 청아한 미모에 수정과 같은 눈물이 흐릅니다. 삼손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 여자를 정말 사랑하는데 이 무릎이 이렇게 편한데, 진짜 고통스러운 전사의 삶처럼 그렇게 살다가 이 여자에게 와서 정말 자기가 남성이라는 것을 느꼈는데 이렇게 사랑하고 좋은데 그런데 이 여자가 하나님이 넘지 말라는 선을 자꾸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의 근원을 가르쳐달라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삼손이 괴로웠겠습니까, 안 괴로웠겠습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괴로웠을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그게 죄와 싸운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런 괴로움을 느끼는 자체가 마치 자기가 굉장히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런 바보 멍텅구리와 같은 행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보 멍텅구리 같은 행동 위에 자기를 의롭게 보이려는 사악한 외식까지도 첨가되는 것입니다. 저는 많이 만났습니다. 아주 많이 만났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수시로 만납니다. 그래서 대화하는 순간에만 자신이 죄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하는 사람인지를 말하는 사람이 됩니다.
싸워봤습니까? 갈등을 느끼는 것이 안 느끼는 사람에 비해서는 좋을 것입니다. 능력의 근원인 머리털을 깎아줄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자기가 깎고 그 품으로 달려가는 그런 타락에 비하면 낫습니다. 그러나 신자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다 갈등하는 형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은혜를 떠나서 죄의 지배아래 있고 어떤 욕망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껄떡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막상 손만 뻗으면 그 욕망을 성취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면 두려워하게 됩니다. 갈등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 갈등이 전혀 없으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갈등 때문에 피가 마르고 살이 말라도 죄는 절대 안 죽습니다. 오히려 잠시 멈칫 할 뿐이지 결국은 반드시 여러분들을 이기고야 맙니다.
그러면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가 하면 내가 죄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고 싸우는데 하나님은 나를 안 도우시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입니다. 안 도우십니다. 싸우는 게 아닌데, 그것은 지금 죄와 싸우기 위해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 갈등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이 문제는 더 이상 확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잠깐 말씀드린 이 문제는 치명적으로 중요한 문제이고 어느 정도 복음에 대해서 눈을 뜨고 죄와 싸워보려고 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열 명이면 아홉 명 정도는 빠지는 함정입니다. 거기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결국은 어떤 결론을 내리는가 하면 두 가지 결론을 내리는데 죄와의 승리는 없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고, 두 번째는 복음은 헛풍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기회가 닿으면 복음의 교리들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준비가 이 속에 심정적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않다면 진짜로 자기가 이 죄와 더불어서 진짜로 죄를 안 버리려고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죄를 털고 그리고 싸워야지 되겠다는 마음을 먹그런데 나는 이미 벌써 죄가 너무나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한번에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물리칠 수 없지만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그 방법의 그 원리대로 내가 돌아가겠다. 그래서 말씀의 밝은 빛을 통해서 영적 어두움을 물리치고 그 다음에 성령의 은혜 안에서 부지런히 배워서 그래서 복음의 교리들을 터득하고 어떻게 이 죄를 이기고 싸워야 되는지를 내가 파악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다음에 죄로 가득 찼어도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신자 되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 죄에 매어서 사는 이 삶에 종식을 고하고 싶습니다. 나는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어떤 선한 힘도 내 안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 깊은 곳에 두레박을 던져서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과 기도와 탐구의 삶을 어떻게? 한번 가끔 갔다가 왁! 하는 솟아나는 열정이 아니라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총체적인 삶의 방향에서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매어 달리면 죄가 너무나 놀랍게 죽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복음적인 사실을 제 뼈 사이에서 우러난 체험으로 여러분들에게 증언합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여러분들이 10-20년씩 그 죄에 매어서 아무 희망이 없이 포기하며 살았어도 단숨에 그 죄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갈등하다가, 몸부림치다가 끝나고 실제로 싸워본 적은 없기 때문에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몸부림은 있는데 그 죄와 정말 싸워보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의 능력이 강하게 느껴져도 하나님 앞에 그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아까 말씀드린 방법으로 갈등이 아니라 정면 대결로 그 죄와 싸우려고 하고 반드시 그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진실한 영적인 은혜의 원리로 돌아와야 됩니다. 복음의 원리로, 거기서 싸워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거기로 돌아와서 싸워야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죄가 오래 지배해서 능력이 많을수록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그만큼 더 많이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① 그리스도가 이루신 대속을 근거로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써
그래서 죄가 자기 속에서 강력한 기승을 부리는 것을 뚜렷하게 지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능력보다 훨씬 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 죄에서 놓임을 받고 그 죄를 죽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죄가 은혜에 의해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지를 보여주려고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죄가 뭐 할일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죄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죄는 들어와서 자기의 큰 능력을 보여주고 그 은혜가 도저히 자기를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서 우리를 그 죄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묘막측한 지혜 가운데서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할 때 그 안에 남아 있는 죄를 사용하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깊도다 지혜의 부요함이여 이 교리를 말하다가 그렇게 막 감탄한 것입니다.
- 영적인 어두움과 지적 무지
그래서 조금 곁가지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만 이해하고 들으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정말로 죄를 이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지라고 하는 것은, 지식 없음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 그 자체를 모르는 데서 오는 영적 어두움입니다. spiritual darkness 영적인 어두움이고, 두 번째는 그 복음의 교리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지적인 무지입니다. 그러니까 intellectual ignorance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나오는 영적인 어두움은 복음 자체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가 걷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논리로서 설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인간에게 설득시킬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삼위일체를 설득시킬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이천년 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승리를 준다고 하는 것,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한다는 것을 지식으로 설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에 반드시 종말이 있다는 것, 그리고 죽은 후에 우리들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믿을 수가 있습니까? 이런 것들은 복음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지적인 탐구에 있어서 깨달아질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어두운 영혼을 확! 비쳐주실 때 그 빛에 의해서 어느 한순간에 그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들어오게 되면 영적인 어두움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영적으로 밝은 빛이 비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를 죽이는 생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다시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는 생활, 이런 것들은 복음 그 자체의 커다란 대목만을 이해해서 영적인 어두움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믿자는 것이 유행하는데 그것은 기독교를 망치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에 그리스도에 관해서 예언된 것들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절망과 슬픔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인지 몰랐는데 예수님이 그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기본적인 사실들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서 영적인 눈이 열려서 예수님이 과연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됐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절망과 어두움으로 가득 찬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과 희망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깊이 경험한 다음에 그들이 한 일은 구약 성경을 인용한 다음에 그것을 해설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은혜를 받기 시작했고 실제적으로 어떻게 자기들이 죄의 지배를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의 길들을 제공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필요한가 하면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 자체를 깨닫는 것은 성령의 역사 홀로 하시는 일이고 그것을 통해서 영적인 spiritual darkness가 물러갑니다. 그 대신 실제적으로 죄와 더불어 싸우고 참된 신자가 되는 길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너희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다시 오신다. 그리고 심판하신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 이런 간단한 복음 진리의 기본만을 아는 것 가지고는 해나갈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복음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이해를 통해서 실제적인 지혜를 공급받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다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생선을 자를 때는 네모난 칼, 커다란 것, 이렇게 네모난 칼로 탁탁 치고 닭 모가지를 칠 때도 그렇게 칩니다. 그런데 똑같은 칼이라도 사람의 뇌를 수술할 때는 그런 칼로 안 됩니다. 심장을 수술할 때는, 수십 개의 칼을 사용합니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제가 알기에는 한번 쓰고 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핏줄과 핏줄을 잇고 신경과 신경을 이으면서 그렇게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주는 도구가 무엇인가 하면 복음뿐만 아니라 복음의 교리들을 잘 이해함으로서 죄와 싸우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실질적인 지혜들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들을 가지고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기도하고 매달리고 주님의 은혜를 의지할 때, 그때 실제적으로 죄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장을 수술하겠다고 수술대에 눕혀놓고 의사가 칼을 들고 들어오는데 닭 모가지를 치는 칼입니다. 그런데 이 의사가 이 환자를 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나는 할 수 있다. 왜 이 세상에서 나만큼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그리고 그 닭 모가지를 치던 그 닭털 달린 칼을 들고 심장을 가르겠다는 것입니다. 항상 실패입니다. 한번도 성공하는 적이 없고 만약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이지, 진짜 황소 뒷다리에 개구리가 맞은 격일 뿐입니다. 그런데 바보같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수술해야 하는데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닭 모가지 치던 칼, 이것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힘껏 치면 심장이고 창자고 다 날라 가고 맓니다.
- 부지런히 진리를 탐구하라
그래서 이치들을 부지런히 터득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안 합니다. 그런 게으름들이 무지를 만들어내고 그 무지와 어리석음들이 영적인 게으름과 아우러지면서 죄에 항거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 모습이 죄 아래서 살아가는 불행한 신자들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중대하게 결단을 하고 이렇게 은혜의 원리로 돌아오고 이렇게 죄를 이기는 실제적인 지혜들을 얻기 위해서 부지런히 진리의 말씀과 함께 싸우고 그것들을 자신의 삶 속에서 체험하려고 하는 진실한 몸부림이 없으면 앞으로도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기대할 게 별로 없습니다.
그들은 기회가 오면 반드시 변절합니다. 핍박이 오면 핍박이 무서워서 복음을 부인하고 세상의 유익이 있으면 그 유익보다 예수님을 사랑해야 할 그 이유를 영혼 속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쉽게 예수님을 버리고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게 부분적으로는 여러분들이 이미 경험했던 바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 같아도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죄의 능력보다도 더 큰 은혜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시는 데 이게 하나님이 복음의 지혜입니다.
C. 죄의 가책에 은혜의 용서를 베푸심
마지막 세 번째, 죄의 가책의 용서에 은혜를 베푸심으로서 하나님이 죄가 있는 곳에 은혜를 더하십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죄가 있는 곳에는 항상 가책이 있습니다. 이것을 죄책감이라고 부르는데 이 죄책감은 신자가 행하기 쉬운, 빠지기 쉬운 영적 무모함, spiritual boldness 여기로부터 그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모한 짓을 못하도록 그 죄책감이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의 지배가 계속되면 그 죄책감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죄를 더 많이 짓게 됩니다. 죄를 더 많이 짓게 되면 그 다음에 이 죄가 계속해서 자기를 끊임없이 송사합니다. 그것은 죄책감이 아무리 사라져도 문득문득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고 있을 때는 아주 선명하게 느끼게 됩니다. 뭘 느끼는가 하면 죄가 자꾸 자기를 고소하는 것을 느낍니다. 송사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죄가 자기를 계속해서 정죄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사죄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이 죄가 더 이상 자기를 송사하거나 자기를 정죄해서 무기력하게 만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되면, 그렇게 회개하고 나서 느끼는 지울 수 없는 느낌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놀라운 자유함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죄가 있기에 용서를 베푸신다 : 죄의 정죄하는 능력이 종식된다.
우선 느끼는 것은 자유함입니다. 그래서 죄를 짐에다 비유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것을 무거운 짐처럼 지고 가던 것들을 죄의 용서의 은혜를 통해서 그 짐을 내려놓는 듯한 아주 홀가분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유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죄가 그런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죄는 우리에게 더 많은 짐을 지어주어서 그래서 도저히 하나님을 향해서 버티고 일어나서 그 죄의 짐을 지고 하나님께로 걸어갈 수 없도록 그래서 그 죄의 짐을 지고 고분고분 걸어가게 하려고 우리에게 다리가 휘청거릴 때까지 죄의 죄를 더하게 해서 무거운 짐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이 죄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짓고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진짜 이 죄를 버리면서 살아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예화: 최근에 읽으신 Body for Life 책의 내용-140키로나 나가던 사람이 12주 만에 날씬한 모습 으로 변신한 분의 간증이 나오는데 운동을 하고 식이요법을 하면서 건강을 관리해보니까 힘들기는 하지만 확실히 140킬로의 체구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덜 불편하다는 내용)
물론 죄를 버리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정들었는데 그리고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데 버리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런데 그것을 짊어지고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죽임 당하는 자기의 영혼, 깨트려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잃어버린 마음의 평안,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비참한 인간의 몰골,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 모두를 짊어지고도 그 죄를 놓지 않을 만큼 그 죄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물어보면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죄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이 되도록 그것을 계속해서 짊어지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짐이 너무나 무겁게 되면 나중에는 그 무게를 느끼면 느낄수록 이 죄가 주는 즐거움에 대해 일시적으로 입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러면서 가만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죄가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미친 듯이 따라다녔는데 그래서 마지막에 그 죄로부터 얻은 것이라고는 그 치사한 약간의 즐거움밖에는 없고 잠시의 즐거움과 쾌락 뿐인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박살이 났고, 자신의 영혼은 버려진 자처럼 던져졌고,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마음의 평안도 없는 비참하고 괴로운 처지가 되었고,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파괴되었고, 자기와의 관계도 병들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마음이 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말 오래간만에 무릎을 꿇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진실 되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이 죄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전에는야, 무슨 놈의 설교가 그렇게 길고 예수 믿는 게 그렇게 복잡하니 누가 믿겠나. 짜증난다. 요즘 같이 간단한 시대에그렇게 생각하던 사람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 속에서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이 그리고 실제적인 지침들이 제시되는 것을 보면서 마치 적과 싸우는 병사가 최신 무기를 손에 넣은 것처럼 기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 내가 스스로 택해서 죄의 지배로 걸어 들어갔지만 이 죄의 무게를 지고 사는 것이 너무 괴롭고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 짐을 벗겨주십시오.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그게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의 허락하시네
2)사죄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나의 이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확신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죄가 자기를 향해 고소할 수 없고 그 죄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용서받았다고 하는 놀라운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의 확신은 ‘내가 용서 해 줄께’라는 음성으로 반드시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하나님이 뭘 통해 보여주시는가 하면 회개의 순간에, 용서받은 그 순간에 갑자기 죄가 둑을 터트리면서 밀려들어온 것처럼 막혔던 마음의 담을 허물면서 확! 밀려들어오는데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확! 밀려들어오면서 오랫동안 상실했던 영혼 깊은 곳에서의 찬양과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그 평화 속에서 그렇게 죄를 짓고 모질게 주님을 대적했는데도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실 죄가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 알려주려고 우리에게 힘들게 파고들어 온 것은 아닙니다. 죄에게는 그럴 계획이 전혀 없었습니다. 죄가 그렇게 해주려고 들어온 게 아니라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켜버리려고 죄가 들어왔는데 그 죄 때문에 오히려 신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기만 하면? 진실로 참회하며 그 죄와 싸우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 죄를 사용하셔서 오히려 이런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그때 하나님 앞에 참회할 때에 오히려 그 죄를 사용해서 죄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밀려들어오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체가 있습니다. 그 정체가 바로 세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하나는 자비, 긍휼, 오래 참으심입니다.
① 하나님의 자비를 알게 됨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될 때는 반드시 그 속에 어떤 요소가 있는가 하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러니까 죄가 도저히 끊어놓을 수 없는 그 자신에게 부어지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에게 막을 수 없도록 하늘로부터 쏟아지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참회 속에서 오히려 그 죄를 통해서 죄가 계기가 되어서 그 죄와 싸우고 나니까 그 죄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얼마나 인간들을 자비롭게 대해주시는지 그것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확! 밀려드는 것입니다. 죄가 이런 것을 가르쳐주려던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복음의 지혜로 그 죄를 사용하셔서 그 죄에서 돌이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죄가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못한 그 죄가 오히려 계기가 되어서 그 죄와의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의 인자, 곧 하나님이 인간들을 향해 베푸시는 그 놀라운 자비하심이 경험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거기서 ‘정말 인간의 풍조는 갈리우고 세상은 날마다 바뀌어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구나. 그 하나님의 자비가 없이는 내가 살수가 없겠구나.’ 그러면서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온 땅에 가득하고 나뿐 아니라 내가 미워하는 인간, 죄에 대해서 승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지금 죄에 대해서 지고 어두움 속에 슬피 울고 있는 형제들까지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그를 자비하게 대해주신다고 하는 것들이 막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삶의 상황은 마치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때와 같은데 오히려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우리들은 예레미야처럼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리고 이런 놀라운 자비가 그렇게 사랑하시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긍휼을 알게 됨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또 다른 정체는 긍휼입니다. 이 긍휼은 죄인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 갖는 하나님의 사랑어린 슬픔입니다. 이게 긍휼입니다. 인간이 비참해진 것은 죄로 말미암은 결과고 그것은 스스로가 택한 것입니다. 그 과정을 다 생각하면 슬픔어린 사랑을 하나님이 가지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그 죄는 미워하시고 죄를 지어온 그의 모든 삶은 하나님이 도저히 인정하실 수 없는데도 우리가 당신의 자녀임을 기억하시고, 자기 아들의 피로 산 구속된 백성이라는 사실이 죄를 지어온 과정을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죄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고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너무 마음 아파하시는 사랑 어린 슬픔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의 정체입니다.
③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알게 됨
마지막으로 오래 참으심입니다. 그게 사랑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사죄하시는 사랑을 그 죄로 말미암아 깊이 깨닫게 되면서 회개하는 죄인들은 가슴 아파합니다. ‘내가 정말 잘못된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오래도록 잘못했을까? 주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분을 원수처럼 행했을까?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자비, 슬픔 어린 사랑을 외면하고 그렇게 살았구나.’
문밖에 세워두니 한없는 내 죄라
오랫동안 피 묻은 손으로 방탕한 길로 걸어가고 하나님 없이 살아보고, 죄와 짝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한 조각의 죄의 즐거움과 바꾸어버린 탕자와 같은 나를 다시 용서하고 사랑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제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리셨던 그 예수님의 일체 오래 참으신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 죄와 싸우기 위해서 피 흘린 적이 없는데 그분은 내 죄를 위해서 피 흘리셨고 그리고 나는 죄와 싸우면서 그 고통을 참은 적이 없는데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배역의 길로 걸어가고 죄의 지배아래서 주님을 대적하며 사는 동안에도 한없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셨다는 사실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집을 떠난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집을 기억하지 않는 동안에도 동구 밖에서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먼저 발견한 것도 아들이 아닌 아버지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시고 죄와 더불어 싸워서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가르쳐주어도 단지 그것이 싫다는 이유 때문에 거절하며 심판이 약속되어 있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기를 고집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주님이 오래 참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 가운데 자동적으로 멸망했을 것입니다. 죄는 이런 놀라운 오래 참으시는 은혜를 알려주고 싶어서 우리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이 죄가 약이 되어서 그렇게 자기를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결론 : 잠시 후 죄가 완전히 파기되리라
얼마나 우리가 이 세상에 살까요? 그리고 얼마나 더 살면 우리가 이 죄의 무거운 짐을 벗고 그리고 하나님께 갈수 있을까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은혜로부터 멀리 떠나고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죄가 이런 은혜를 전달해주는 수단이 되기 어렵지만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지배를 벗어나서 은혜아래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수 있도록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난 모든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런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은 죄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죄 많은 이 세상이 우리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 괴롬과 슬픔이 많은 이 세상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고 싶어 하는 영혼을 가진 우리들이 살수 있는 완전하고 영원한 거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영원한 본향을 그리워하는 그런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죄는 결코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리라
얼마나 우리들이 이 세상에 더 살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래 살든지 얼마 안 살다가 가든지 간에 숨질 때까지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포기하지 말아야 할 꿈이 있습니다. 우리의 명예와 지위는 이 세상이 빼앗아가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좋은 것들을 악마가 훔쳐간다고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꿈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속을 얻어서 이 세상에 살게 하셨으니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들이 참된 신자가 되어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계획에 맞도록 이 땅에서 한번 존재하며 살아드리고 우리를 그런 참 사람으로 돌이키기 위해서 신자 되게 하시려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서 자기의 온 몸을 드려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지시고 죽임 당하신 예수님께도 우리를 위해 죽으신 보람을 안겨드리고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죄를 죽이시는 능력의 근원이 되셨던 성령님께도 기쁨을 드릴 수 있는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들이 포기할 수 없는 꿈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이 지혜를 가지고 죄와의 싸움에서 이겨서 그래서 이 캄캄한 세상에 빛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아버지의 영광,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 시대에 산 위에 있는 동리처럼 말 위에 얹혀진 등경처럼 거기에 빛나는 호롱불처럼 찬란한 빛을 발해서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빛들을 나누어주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죄 많은 세상을 보고, 망가진 창조의 세계를 보고 아파하시던 하나님이 위로를 받으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12. 죄와의 싸움에서 경험하는 지성적 혼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죄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 (롬6:14)
예고 드린 바와 같이 오늘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은혜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기 위해서 죄와 싸울 때 흔히 빠지기 쉬운 지성적인 혼란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자가 죄와 싸울 때 빠지는 지성적인 혼란이 있는데, 다시 쉽게 말하면 분간이 되지 않아서 혼란에 빠지는 경우, 정확하게 구별을 하고 분별을 해내지 못해서 혼란에 빠지는 그런 경우인데 이때에 이런 혼란에 빠지게 되면 신자들이 효과적으로 죄와 더불어 싸울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지성적으로 정리를 해서 파악을 하고 있으면 쉽게 극복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죄 죽임을 위해서 싸울 때 죄 죽임을 위해서, 모티브케이션을 위해서 싸울 때 빠지는 혼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원리적인 혼란이고, 두 번째는 개별적인 혼란입니다. 저는 편의를 위해서 원리적인 혼란을 말씀드린 다음에 구체적으로 개별적인 혼란에 대해서 가장 흔한 경우 다섯 개를 간추려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림으로 죄 죽임을 위한 여러분들의 싸움에 이런 혼란을 막는 일에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A.원리적 혼란-진정한 죄 죽임의 분별
우선 원리적인 혼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죄를 죽이는 죄 죽임의 실천이 거듭난 사람들에게만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일 경우에는 죄 죽임을 위해서 많이 애쓰는 것이 그 사람의 신앙을 갖게 하는데 아무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들을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혼란을 가리켜서 원리적인 혼란이라고 제가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거듭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만이 죄를 죽일 수 있고 그래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내적인 생명을 풍성하게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죄 죽임을 통해서 그 사람의 내적인 영혼이 새 힘을 얻고 그리고 생명을 누리며 그리고 그 죄 죽임을 통해서 영혼의 활기와 그 다음에 생명력을 소유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1. 비중생자에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죄를 죽이는 것이 어떻게 해서 신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불신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는가. 불신자들도 종종 죄를 죽이지 않는가. 불신자들도 종종 그 죄를 이기지 않은가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양심과 그 다음에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빛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흔히 ‘인간 본성의 빛’이라고 부릅니다.
불신자의 상태에서 그러니까 아직 교회를 다녀도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의지와 정서는 죄의 강력한 지배를 받아서 죄가 기뻐하는 것을 행하고 그것을 향하여 마음이 끌리지만 그러나 지성은 아직까지도 그 빛을 가지고 있어서 선악을 분별하고 그리고 그 선악을 분별하면서 죄를 향해서 자기 자신을 죄가 다 자기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기능을 이 지성이 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거듭나지도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 속에는 여전히 영원한 세계에 대한 감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죄를 행하면 마음이 무겁고 갈등이 생기고 선을 행하면 마음이 편하고 그리고 안정을 얻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선을 행할 수가 있고 선악을 판단해서 죄에 어느 정도 항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자들만 모여 사는 사회에도 어느 정도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법적인 환경들이 조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죄 죽임의 측면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이런 양심과 본성의 빛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고 죄에 대한 어떤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enmity 라고 하는데 적의를 가지고 있어서 그 하나님을 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 저변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에 그가 양심이나 본성의 빛에 의해서 어느 정도 죄를 절제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이 받아주실 만한 아주 향기로운 제사가 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적의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면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반감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는 두 가지 하나님을 향한 감정적인 반감과 정서적인 반감과, 그 다음에 하나님을 향해 고분고분하게 굴복하지 않고 맞서려고 하는 적대감이 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반발하는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갖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대결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양심과 본성의 빛에 의해서 죄를 절제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죄를 죽인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중생자에게
진정한 죄 죽임이라고 하는 것은 거듭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적 생명과 그리고 성령의 법을 주셔서 거듭나지 않았을 때 우리 안에 있었던 죄와 사망의 법들을 파괴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새로운 틀, 즉 거듭난 사람의 frame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섬기고 순종하고 그리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그 은혜들을 계속해서 살리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신자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 속에 죄가 남아 있습니다. 파괴되어서 잘게 부수어졌기 때문에 힘을 잃어버렸지만 아무리 잘게 부수어졌어도 역시 그 속에는 죄가 있습니다. 그 죄의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그것들이 신자 속에도 잘게 부수어진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지면서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은혜로 그것들을 계속 죽이려고 할 때는 하나씩 하나씩 파괴되어서 죽는 것인데 죽지 않고 남아 있으면 작은 것들은 커지려고 하고 큰 것들은 서로 서로 연결을 해서 연합체를 구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연합전선을 펴서 폭동을 일으켜서 우리 안에 이미 주신 은혜를 그렇게 죽이고 그래서 예전에 자기가 가졌던 이런 영향력들을 우리 안에 다시 복구하려고 하는 아주 절실한 계획을 가지고 쉬지 않고 역사하는 것이 죄입니다.
진정한 죄 죽임이란 바로 이렇게 거듭난 신자가 자기 안에 있는 은혜를 북돋음으로서 자기 속에 비정상적으로 자라나고 있는 그런 죄들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자기가 거듭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하지 않은 채 막 바로 죄와 더불어 싸워서 커다란 승리를 얻으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가 죄와 싸움으로서 영적인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데 자기가 죄에 져서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을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거듭나게 해달라고 매달리게 된다면 원리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그래서 죄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못 죽이고 죽일 수 없는 사람이 죽이려고 덤벼드는 혼란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마치 허공을 치는 것 같아서 그가 이 죄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는 노력, 잘 믿으려고 하는 모든 노력들이 뒤엉켜서 이제 성화에 있어서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물론 죄를 죽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아주 분명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진짜 내가 거듭난 사람인가. 만약에 거듭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거듭난 신자처럼 대접해주어도 여러분 스스로는 내가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아직까지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식하면서 복음의 도리를 구체적으로 가르쳐달라고 누군가에게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복음을 잘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구원을 경험하고 거기에서 영혼이 거듭나는 과정을 겪음으로 신자가 먼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이 능력 있게 선포되는 그곳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이외에 어떤 진리도 자기를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이 죄에 대한 확신을 주시고 그리고 그 죄를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까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영생을 구하며 매달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인 것이 분명해졌다고 할 것 같으면 바보같이 기도도 안하고 말씀의 은혜도 안 받고 예배생활도 엉망으로 하고 이러면서 자기 안에 주신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죄에 가득하고 정욕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면서 내가 거듭난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악할 수 있을까? 아마 나는 구원을 못 받았나봐. 아니면 받았던 것을 다시 잊어버렸든지. 그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라도 지금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악해질 수 있습니다. 죄에게 완전히 져서 죄의 지배를 받으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리스도인이 사악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났다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죄와 정욕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는 그 모든 실패가 구원을 못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죄 죽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은혜생활을 게을리 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주신 생명들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죄에 매어서 살아가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구나. 그것을 깊이 회개하고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기를 사모하는 그런 마음을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B.개별적인 혼란
개별적인 혼란이 이제 무엇인가? 개별적인 혼란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말씀을 드리자면 첫째는 자기의 영혼의 상태를 모르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혼란을 느끼는 것이고, 세 번째는 죄에 지고 있는 자기의 상황으로 복음을 부인해버리는 것,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죄와의 싸움에 있어서 총체적인 싸움이 아니라 자기가 미워하는 한두 가지 죄와 열심히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섯 번째는 죄와의 갈등과 싸움의 차이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씩 이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 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모름
첫째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어두움과 그 다음에 지성적인 무지가 가득해서 그래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정확히 파악하지도 않고 또 그러려고 하는 노력도 별로 없고 그리고 간단한 복음은 듣고 거듭났을지 모르지만 신자답게 살게 하는 복음의 교리들에 대한 이해가 현저히 부족해서 도저히 그 지식을 가지고는 성화의 삶을 살수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런 경우는 지성적인 혼란에 빠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죄가 무엇인지 죄를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지는 것이 무엇인지, 죄의 지배를 받는 게 무엇인지 모른 상태에서 그냥 끊임없이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생명을 강탈당하고 그리고 마음이 죄로 가득 차서 살아가는 그런 처지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잘 출석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열심 있는 일꾼이 되어서 교회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죄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가만히 내버려두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을 격려하고 북돋습니다. 죄는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 때문에 죄가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1)죄를 외면함은 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됨
그렇기 때문에 죄가 여러분들이 한 가지만 자기를 만족시켜주면 나머지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것이 죄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죄 자체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만 하면 여러분들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출석을 하든지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는 일꾼이 되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죄는 내버려둡니다. 왜냐하면 죄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죄가 여러분 속에 풍성하게 역사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잘 다녀도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향한 적의, 즉 enmity를 품고 실제로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대적을 마음으로 하고 있다면 죄는 그것이 너무나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착실히 출석하는 정도는 충분히 용서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외적인 종교생활의 모습을 가지고 자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바보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죄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계획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영적인 것인지를 파악하기만 한다면 그런 바보 같은 오해에는 빠지지 않습니다.
2)죄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를 가짐(반감+대적).
죄는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적의이기 때문에, 죄는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고 적대감이기 때문에 그런 반감과 적대감은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에 대적하는 것이 사람이라면 그를 변화시켜서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지만 이 죄 속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은 그것을 어떻게 성질을 변화시켜서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것으로 고칠 수가 없습니다. 해결의 길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으로 그것을 철저히 부서트려서 그것을 박살내서 없애버리는 것 이외에는 그 적대감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3)자비를 구하나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를 멸시함.
그런데 자신 속에 이런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 가득 차 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한편으로는 자기가 그렇게 멸시하고 적대감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떤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들의 영혼에는 깊은 어두움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에는 죄에 대한 사랑함이 가득해 있어서 그래서 근본적으로 그가 원하는 바는 하나님 없이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나오지 않으면 가책 받을지도 모르는 자기의 양심의 갈등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그런 용도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일평생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그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거의 누리지 못합니다. 예배시간에 와서 다른 생각을 하거나 조는 것 자체는 그렇게 큰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배생활로 말미암아 영혼에 미치게 될 결과는 거의 재앙적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 속에서 주님을 뵈옵는 수많은 기회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향해 당신은 떠드십시오. 나는 나대로 삽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이렇게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해주십시오. 이렇게 자신의 온 삶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영광도 받으실 수 없고 오히려 그가 존재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저렇게 믿어도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가르쳐주어서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두움 속에 함께 거할 수 있도록 담대한 마음을 제공합니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말할 수 없는 누가 되고 그리고 그가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늘 근심하시고 교회는 상처를 받으실 것이고 여러분들의 목회자는 늘 가슴 아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살려두시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살려두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혹시 그들을 계속 살려두심으로 언젠가는 그들도 회개하고 참된 신자의 길을 걸어감으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 것을 기대하시면서 그들에게 뉘우칠 수 있는 길을 주시기 위해서 여전히 이 세상에 살려두시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 중에 상당히 여러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오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정말 왜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여러분들이 이 시간에도 예배당에 나오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버리지도 못하고 그러나 열심히 사랑하지도 않고 교회를 떠나지도 않지만 그러나 교회 안에서 영혼의 참된 유익을 누리지 못하면서도 그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고 생각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게 될 때 여러분들의 영혼의 결국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셨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그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하나님을 원수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여러분들 안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하고도 여러분들 안에 있는 죄를 죽이지 않고 여전히 버려둘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마음은 세속적인 염려와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성공하는 데 있어서 도움을 주는 어떤 교역자로 삼으려고 하지, 진정한 사랑과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은 정말 나의 분깃이시오 하나님은 내 사랑이십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따르고 믿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여러분들에게 그런 신앙생활들을 강요했습니까? 누가 여러분들에게 그렇게라도 믿으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가르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한번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온다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교회에 나와도 심판할 위기를 여러분들의 영혼이 교회에 출석했다고 하는 공로가 여러분들을 절대로 보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살아온 지난날의 죄와 하나님을 향해 품었던 적대감에 대해서 공격을 받을 때에 누가 여러분들 옆에서 변호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정말 신자입니까?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신자 되기 원합니다 참 마음으로
부족하지만 끊임없이, 아직까지도 죄가 남아 있지만 끊임없이 그 죄를 이기고 때로는 유혹에 지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그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그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깨트려지며 진실한 신자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여러분들의 정체입니까? 아니면 돌 같은 가슴을 부여안고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반감을 품고 그리고 도무지 변화되지 않으려고 하는 아집 속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들의 정체입니까? 왜 부서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찬란하게 비쳐주시는 복음의 빛 아래서 여러분들의 드러나는 죄와 여러분들 안에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죄에 대해서 항거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죄와 싸우고 그 죄를 극복해야 할 이유는 이렇게 많지만 여러분들이 그 죄와 싸우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 대신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인생의 왕좌에 오른 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모습을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입술로 신앙을 고백하고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지만 도처에서 모욕 받는 하나님의 이름을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 버려지고 있는 가공할 악들과 그리고 쓸모없고 명분도 없는 분쟁과 다툼들, 그리고 서로를 향한 말할 수 없는 미움들, 그리고 겉으로는 종교인인체 하지만 실상은 세상을 끔찍이 사랑하고 거기에서 주는 몇 푼의 즐거움에 신앙을 팔아버린 노예와 같은 신자들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세상이 빛을 사랑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적습니까? 정말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한줄기 빛을 사랑하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썩어가는 이 세상에서 정말 한줌의 소금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누룩처럼 번져 있는 온 땅에 냉담함과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그렇게 차가울 수 있고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신자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가 있습니까?
제가 이토록 온 마음을 다해서 말씀을 탐구해서 어찌하든지 여러분들을 진리의 빛 아래로, 복음의 찬란한 햇빛 아래로 데리고 가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을 주눅 들게 만들고 할말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는 벙어리로 만들기 위해서 제가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우리 주 하나님이 너무나 보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살아가던 삶의 자리에서 떠나서 깊이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버리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이 죄 많은 사람을 참 신자 되게 만들고 싶다고 하는 계획이 있다고 하는 것과 그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죄와 싸우고 진실한 크리스천이 되어가야 할지를 깊이 깨닫고 여러분들 안에 있는 오랜 묶은 죄와 그리고 위선된 신앙의 껍질 속에 감추어진 구역질나는 수많은 죄들을 토설하고 깊이 참회함으로서 오랫동안 살았던 그 치욕스러운 어두움의 생활을 끝내고 빛 가운데서 사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복음을 들어도 변하지 않는 여러분들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지 생각하지 말고 더럽게 여기시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죄를 죽이지 않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상태에서 가공할 무지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품고 교인이랍시고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들을 조나단 에드워드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손끝에 매달린 거미처럼 하나님이 여기신다고 그랬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어두움 속에서 사십시오.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행복하십니까? 그렇게 죄를 죽이지 않고 어두움 가운데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눈을 감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십니까? 그러면 그렇게 사십시오. 불행합니다. 괴롭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무관심하십니까?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혼란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한 혼란입니다. 신자의 마음에 진정한 평안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만 올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해서 오지 않는 평화는 잠시 평화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아편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지 못할 때 끊임없이 그 아편과 같은 평화를 사람들은 바랍니다. 신자가 마음속에 평화를 누리는 것은 죄를 죽임으로서 누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평화이고 항구적인 평화입니다. 그러나 죄에 졌을 때도 평화를 느낄 수가 있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죄와 싸우는 동안에는 평화가 없고 말할 수 없는 갈등을 동반한 괴로움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악 된 삶을 살면서 돌이킬 줄 모를 때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닫게 하고 역사합니다. 그때 그 말씀이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서 누렸던 평화는 깨트려지고 마음은 혼돈되기 시작합니다. 죄와 맞붙어서 싸우기 시작할 때도 여전히 평화가 없을 수 있습니다.
1)죄와의 타협으로 인한 일시적 평화와 승리한 평화를 오해함
2)죄가 신출귀몰하는 느낌을 받음: 전의를 상실함
그러나 죄에 져보십시오. 죄에 굴복하지 않는 동안에는 갈등이 있지만 그래 내가졌다 하고 죄에 굴복하면 범죄 하게 되고 범죄 하게 되면 즉시 잠깐 동안에 평화가 마음에 밀려옵니다. 그 평화를 하나님과 화목하기 때문에 자기가 누리고 있는 평화라고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물어보면, 은혜 가운데 평안히 지내고 있습니까? 기도생활 잘 하십니까? 거의 못합니다. 그렇지만 평화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으십니까? 뭐 말씀의 은혜를 받는다기보다도 그저 마음이 예전에는 많이 번잡하고 괴로웠는데 지금은 편안합니다. 이것은 정말 죄 죽임의 결과로서의 평화가 아닙니다. 이런 평화에 만족하게 되면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할 전의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다 파괴하고 그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우리의 온 마음으로 느끼게 되는 그 사랑의 연합을 통해서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3. 죄에 지는 상황으로 복음을 덮음
세 번째는 죄의 지는 상황을 복음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계속해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복음의 빛을 받았습니다. 자기 안에 죄가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자기의 영적인 생명들이 쇠약해져가고 있고 신령한 기쁨과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실했다는 것도 파악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죄를 죽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분명하게 알기는 죄가 있다는 것, 그것이 자기에게 어떤 효과를 미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죽이지 않고는 자기의 영혼이 제대로 살수 없다는 것까지 다 파악을 했는데 하여튼 어떤 여러 가지 이유로든지 간에 죄를 죽이지 못했고 그리고 지금도 죽이기가 굉장히 힘들고 무엇보다도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속에서 죄가 그렇게 밉지 않은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의지와 정서 속에서 일어나는 성향과 지성 속에서 증거하고 있는 내용들이 이렇게 모순을 일으킬 경우에, 여기서는 그것은 죄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것을 좋아하게 되고 죽여야 된다고 하는데 안 싸우고 그리고 떠나라고 하는데 여전히 죄와 손잡고 이런 부조화한 상태가 될 때는 결국은 지성이 굴복을 합니다.
1)죄죽이는 복음적인 거룩의 요구를 교파적 이해로 생각함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그때 방법이 성경을 들여다보면서 성경이 참된 신앙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나 이렇게 생각을 해야지 영혼이 사는데 그게 아니라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를 믿나 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죄를 죽이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애를 쓰면서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두 가지 생각을 하는데 첫째는 ‘그래도 내가 이 사람들에 비하면 좀 낫다’ 그 생각이고, 두 번째는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틀렸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은 굉장히 소속감과 위로를 받지 않습니까? 그럴 것입니다.
2)쉬운 길을 찾고 진리를 상대화함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몽둥이를 이만한 것을 들고 자, 숙제 안 해온 사람 이리 나와. 그런데 벌떡 일어나보니까 자기 한 사람입니다. 그럴 때 공포가 엄습합니다. 이 창피, 이 수치, 우선 그럴 것입니다. 점심 먹고 나가서 야, 오늘 우리 반에 숙제 안 해온 애들 혼났다. 누구? 딱 한 애가 안 해왔어. 그 아무개. 그럼 그 수치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얼굴이 흑 빛이 됩니다. 그런데 숙제 안 해온 사람 다 나와. 그런데 거의 다 나오는데 반장까지 나옵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회심의 미소가 생깁니다. 그런데 숙제해온 애가 저기 딱 하나가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벌 받으면서 잘났다. 다 안 해오는데 저만 잘났다고, 그리고 숙제해온 애를 왕따 시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많이 맞아도 안 아픕니다. 왜 같이 맞으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원래 지옥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동지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망으로 가는 길은 길이 넓어서 찾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난, 괴로움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도 들어야지요, 회개해야지요, 끊임없이 죄를 죽여야지요. 성결한 삶을 살아야지요. 지옥에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냥 살면 됩니다. 지옥에 가기 위해서 특별히 강습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지옥 가는 길 전문 강습’ 그렇게 써 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살면 됩니다. 그냥 육신이 원하는 대로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가려진 양심을 따라서 그냥 살면 됩니다. 그럼 결국은 다 지옥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제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성은 알았는데 의지와 정서가 여전히 죄를 좋아하고 죄 가운데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버릴 의지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의 변화도 없고 그런데 이것은 너무 명백합니다. 논리적으로 착착 설명하니까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당신 하나밖에 없는데 이 많은 사람이 틀릴 일이 있나. 다수결을 해봐라. 누가 이기겠나.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해도 그것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유명한 말을 했는데 one man with god he is majority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 사람이 다수이지 제멋대로 떠드는 사람이 아무리 깃발을 높이 들어서 그것을 하면 뭐합니까? 그럴 때 이제 어떻게 됩니까? 분명히 인식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도저히 안 됩니다. 그러면 선택의 길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의지와 정서를 그 지성에 굴복시켜서 회개를 하고 그리고 지정의가 하나가 되든지, 아니면 그 지성을 슬쩍 바꾸어버리든지 잘못됐다고 그런 과정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그런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잘못될 일이 있는가. 그러면서 그렇게 정확하게 복음의 진리를 가리키는 것은 하나의 개인적인 신앙의 성향을 반영한 것일 뿐이지 보편적인 복음의 진리는 될 수 없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러면 그나마도 학식이 있고 논리가 있는 사람이면 왜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거짓말로라도 성경에서 찾아내서 반박을 할 것인데 그럴 능력은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그것은 틀렸어. 왜 내가 싫으니까.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황으로 복음을 딱 덮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뭐가 오는가 하면 속히 두 가지 일이 일어나는데 영혼은 즉각적으로 더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죄를 향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속하게 물러가 침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원인 중에 중요한 것 하나는 실증입니다. 그러니까 막 죄와 싸우고 뭔가 갈등하다가 나중에는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싫고 짜증이 나고 싫증이 나는 것입니다. 옳은 줄 알면서도 싫증이 나면 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때 뭐 또 현미밥을 먹는다고 얼마나 생난리를 했습니까? 현미밥 아니면 안 먹는다고. 요즘 누가 먹습니까? 왜 그런가 하면 싫증이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뭐 하루에 한 끼씩 분식을 하면 몸에 좋다고 얼마나 또 난리를 했습니까? 그런데 실증이 난 것입니다. 그만 두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그것은 거의 배교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정말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해서 그래서 그것과 싸워야지 분명하게 가르쳐주는데. 뭐와 똑같은가 하면 좋은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쭉 부산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다가 부산에 가기가 싫어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럼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서 다시 돈 내고 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와서 유턴해서 다시 고속도로로 들어와서 올라가든지, 부산에 가기 싫으면 강릉에 가든지, 아니면 부산에 가기 싫으면 서해안 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요즘 좋다고 하는 서해안 온천에 가든지 하면 되는데 그런데 쭉 가는데 계속 표지판이 나타납니다. 부산, 부산, 부산 화살표가 이러고 있습니다. 나는 부산에 가기 싫어. 그런데 계속 부산, 부산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려서 그 표지판을 뽑아서 확 돌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계속 내려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부산이 저리로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주 기가 막힌 비유입니다. 계속 표지판 돌려놓고 계속 부산으로 내려갑니다. 부산에 가기 싫다며, 부산 이제 저리로 갔어. 그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시겠습니까? 어두움 가운데 무지 속에 살아가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죄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죄 죽임이 무엇이고 어떻게 은혜 가운데 영혼을 보존하는지를 가르쳐주었는데 거기 승복하지 않는 것, 그래서 복음을 죄를 사랑하는 자기의 상황으로 복음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다른 방식의 신앙생활을 택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런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주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3)급격한 어두움과 죄의 융성. 하나님과의 평화의 가능성까지 상실
4.총제적인 싸움이 아닌 특정한 죄와만 싸움
네 번째는 총체적인 싸움이 아닌 특정한 죄와의 싸움에서 이긴 것을 전부다 이긴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행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악입니다. 죄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하는 경향성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하고 똑같아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우리의 마음, 심지어는 우리가 행하는 일에까지 다 스며들어서 그 속에 다 파고들어갑니다. 똑같이 죄도 자신의 모든 삶 속에 다 이렇게 파고들어가 있습니다. 거기에 다 배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하나의 죄만 미워하면서 그것과 열심히 싸우고 다른 죄는 내버려두는 것은 진정으로 죄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싸워서 아무리 이긴다고 할지라도 그게 여러분들에게 영혼을 다시 살게 하는 죄 죽임의 효과를 가져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이것을 생각하다가 기가 막힌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우군은 국방색 옷을 입고 총을 들고 나갔는데 적군이 오는데 적군이 틀림없는 게 왜냐하면 여기에다가 별을 하나씩 다 달았습니다. 그런데 다 달고 내려오는데, 대게 군인들이 국방색 옷 입고 적군이든지 우군이든지 나옵니다. 누가 무지개 빛 옷을 입고 싸우는 군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저들은 도대체 무슨 쇼 무대에 나온 것처럼 어떤 애는 하얀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나왔고 어떤 애는 빨간 옷을 입고 칼을 들고 나오고 또 어떤 애는 초콜릿의 옷을 입고 대포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싸움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 거기에 적군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습니다. 누구를 죽여야 됩니까? 다 죽여야지 옷 색깔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 막 옷 색깔은 달라도 자기들끼리는 전부다 편을 짜서 조직적으로 이제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서 밀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싸우는데 빨간 옷 입은 사람은 절대 안 쏘는 것입니다. 왜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니까. 그다음에 초콜릿 색깔을 입은 사람도 안 죽입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초콜릿 저 색깔만 보면 발렌타이데이 생각이 나서 기분이 좋다고 안 죽입니다. 그러면서 국방색 옷 입은 사람만 죽이는데 결국은 하얀 옷 입은 사람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주 기가 막힌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까?
그래서 죄를 죽이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한부분에서만 순종하면 안 되고 총체적으로 자신의 모든 삶의 전 방위에 있어서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을 미워하고 싸울 때는 행동 자체 때문이 아니라 행동 저 뒤편에 깃들여 있는 그 죄에 대한 동기,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싸우는 그런 싸움이 될 때에 그 싸움을 통해서 진정한 죄 죽임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서 이제 혼란에 많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특정한 죄와 몸부림치면서 싸우다가 승리한 사람은 항상 자기 이긴 것에 대한 굉장한 자기 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렇게 그런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의 이념이 되어서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은 아주 인간으로 생각도 안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이런 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은 약속 안 지키는 사람을 인간으로 생각도 안합니다. 남의 돈 절대로 안 떼어먹는 사람이 10원이라도 남의 돈 안 갚는 사람을 보면 막 분개합니다. 막 벌벌 떨면서 인간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방면에서는 자기가 죄에 대해서 더 너그럽게 범죄 하면서 그런 특정한 것에 대해서 더 반응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자기의 의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인 하나님과의 사랑을 가져다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순종하려고 하는 총체적 순종의 의지를 가지고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5. 죄와의 갈등을 죄와의 싸움으로 오해함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지난 시간에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죄와의 갈등을 죄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와의 싸움이 너무 너무 힘들다고 비관하고 또 그렇게 비관적으로 실제로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여러분들이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은 죄와의 싸움에서 여러분들이 받았다고 하는 굉장히 힘들고 어렵다는 그 느낌이 정말 죄와 싸우는 과정에서 느낀 것인지 아니면 죄와의 갈등 속에서 경험한 피곤함인지에 대해서 오늘 이 시간에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1)갈등과 싸움의 차이: 죄는 싸움을 통해 죽여야 할 대상임.
이 갈등은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되는데 포기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내적인 고통과 외적인 어려움을 총칭하는 말이 바로 갈등입니다. 그런데 그 갈등의 싸움은 이렇게 타협을 통해서 싸움을 그치게 하기 힘들지만 갈등은 타협을 통해서 종식시키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갈등은 여전히 만약에 적이 있는데 적과 갈등을 느끼는 관계라고 할 것 같으면 완전한 미움으로 사무친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무엇인가 미련 같은 것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계속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2)갈등에서 그치는 이유: 죄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으로 죄를 버리지 못함.
그래서 이런 이야기입니다. 죄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를 합니다. 죄는 가만히 있지 않고 활동을 하고 역사를 합니다. 그때 자기가 세워놓은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그 디자인을 따라서 그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계속 일합니다. 그때 죄가 우리에게 뭔가 자꾸 요구합니다. 그때 그 요구를 안 들어주려고 애를 쓰다가 보면 굉장히 힘들고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죄의 요구를 들어주자니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느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니 죄가 자꾸 나를 붙들고 가지 말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서 이렇게 하지도 못하고 저렇게 하지도 못하고 굉장히 피곤하고 힘겨운 시간들을 겪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의 갈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는 죄가 절대로 안 죽습니다. 죽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힘을 받고 오히려 은혜가 점점 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죄 죽임이 아니라 말을 만들자면 죄의 괴롭힘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죄를 괴롭히는 정도이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통해서는 죄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 죄와 갈등이 엄청나게 커서 때로는 죄와의 싸움에서 실질적으로 지불되는 고통보다 훨씬 큰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겠으니 대답을 해보십시오.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일천 명의 블레셋 군사와 더불어서 삼손이 싸웠습니다. 나귀의 턱뼈를 들고 일천 명을 때려죽이기까지 싸웠는데 힘이 얼마나 많이 들었겠습니까? 힘이 들었기 때문에 마지막 적군을 물리친 다음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제는 내가 죽게 되었나이다.” 다시 말하면 도망갔던 애들이 다시 와서 너 삼손 다시 한번 붙어보자 그러면 나는 싸울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할례 받지 못한 놈들에게 내가 죽게 됩니다. 나는 이제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엎어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엔학고레의 샘을 터트려서 삼손을 먹이셨습니다.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굉장히 힘듭니다. 생사를 건 것입니다.
또 하나 들릴라의 사랑에 깊이 빠집니다. 영어로 Delilah 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딜라일라와 사랑에 깊이 빠집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자기가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의 능력의 비결이 무엇인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가르쳐주어라. 그러면 뭔 소리야. 이것이 뭘 가르쳐달라는 것이야. 안돼! 그러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뭐가 어려워집니까? 이제 그 여자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됩니다. 가버립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이 여자를 너무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것입니다.
그럼 확 뭐 그렇게 갈등을 하는지. 좀 가르쳐줘. 그래. 이것이야. 그리고 확 가르쳐주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그 말을 가르쳐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머리를 깎지 말라. 능력이 거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깎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기는 도저히 힘을 쓸 수가 없고 대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다 가르쳐준다고 생각할 때 원망하는 자기의 동족들과 하나님, 그 다음에 부모님의 당부, 모든 그림들이 한꺼번에 다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쳐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으니까 자꾸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거짓말이 애매모호한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도 완전히 안 버리고 이 여자도 안 버리고 하면서 중립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했습니까? 거기에는 성공이 없습니다. 죄는 싸워서 부셔버리든지 점령을 당하든지 둘 중의 하나지 적당히 타협하는 것은 꼭 뭐와 똑같은가 하면 화재가 나서 자기의 집이 불타는데 불하고 계약을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덜 타기로 우리 계약을 하자.
그래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사이에서 삼손이 말할 수 없는 정신적인 고통을 당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여자가 와서 때로는 막 화를 내면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것도 자기 무릎에 눕혀놓고 다정하게 보듬으면서 그러니까 그 사이에서 말할 수 없이 번민합니다. 그 괴로움이 힘들었겠습니까? 블레셋과의 싸움이 더 힘들었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전자입니다.
아니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여러분들이 다 가정을 가지고 사는데 살다가 인생 막판에 몰려서 남편과 구루마 끌고 나가서 장사하면서 화합하면서 먹고사는 그게 힘이 듭니까, 아니면 그래도 아파트라도 한 채 가지고 있는데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나쁜 짓하고 서로 못 믿고 갈등하면서 사는 그것이 힘듭니까? 어떤 것이 힘이 듭니까? 후자가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죄와 싸우면서 굉장히 고생을 했다는데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둘 사이에 끼어서 어떻게 할지 모르면서 당하게 된 그 정신적인 고통이 그렇게 큰 것입니다. 그렇게 큰 고통을 많이 했는데 얼마나 허무한 고통입니까?
그래서 삼손이 마음 놓고 한번 그 딜라일라 하고 아름다운 죄악 된 사랑에 푹 빠져봤습니까?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것도 아니고 그러니 이게 적자입니다. 고생은 실컷 했는데 죄도 제대로 맛을 못 보고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도 맛을 못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핍절해서 죽어가다가 죄로 떨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도 영원히 그렇게 사람을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씹어 먹다가 단물 빠지면 죄도 뱉어버립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게 결국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중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도 있고 그래서 죄와 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fight 한 게 아니라 conflict 한 것입니다. 갈등만 계속 하다가 어느 순간에 끝난 것이지 그것과 정말 대들어서 싸운 것이 아닙니다.
3)갈등이 주는 피곤함
그럼 결국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힘들기 때문에 소득이 없습니다. 죄와의 싸움은 죄가 죽는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와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을 갈등하고 버티는 자신의 힘은 약해지고 죄는 점점 강해집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당장 진전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갈등을 하는데 뒤로 밀려가고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싫증을 내게 됩니다. 포기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벽에다가 못을 박는다고 할 때 한 2-30번을 두들겨 박아 망치에서 불이 번쩍이는데 못이 안 박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른 방법을 찾겠지 그것이 박힐 때까지 그것을 밤새도록 두드리고 있겠습니까?
영적인 일은 더 빨리 싫증을 내는 것입니다. 그만 두는 것입니다. 그것을 죄와 싸운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 잘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이 죄와 이렇게 갈등을 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이 많은가. 별로 없는데 고로 내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체가 내가 상당히 고매한 영적 생활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혹시 그렇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어!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갈등을 하실까? 마치 군대를 면제받은 사람이 월남전에 갔다 온 사람 무용담 듣듯이 이렇게 앉아서 아이고 세상에 나도 저렇게 갈등해봤으면 좋겠다. 뭐 하러 합니까?
4)이 때문에 죄 죽임이 어렵다고 판단함(굴복)
5)싸우는 증거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럼 궁금한 것은 딱 하나가 이제 남습니다. 그럼 지금 나는 갈등하고 있는 것일까? fight하고 있는 것일까? 싸우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남의 이야기 많이 해서 뭐합니까? 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지. 지금 이야기 많이 해서 뭐해. 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지. 지금 나는 하여튼 죄에 완전히 항복하고 죄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는 것은 아닌데 그런데 뭔가 석연치 않다. 내가 단지 갈등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싸우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분별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
그것은 첫째로 죄와 단지 갈등하는 사람이 아니고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있습니다. 아주 또렷하고 확실한 인식, 그러니까 죄일까? 내 안에 죄가 있는 것 같아. 나도 죄를 많이 짓는 것 같아. 내 안에 죄가 역사하고 있을지도 몰라. 이게 아니라 죄와 싸우는 사람은 아주 분명하게 자신 안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식합니다.
전쟁하러 전투에 나가는 군인이 어디에 나가는가. 적과 싸우려고 나가는데. 적이 누군데? 잘 모른다고나 할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군대에 가면 군대마다 전부다 붙여났습니다. 그것은 적군의 복장과, 항공기, 탱크, 그 다음에 폭격기 그런 것을 다 그려났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그것을 보면서 이게 적군의 모습과 아군의 모습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숙지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첫 번째고,
. 죄를 이길 방법을 배우고 싶어함
두 번째는 진짜 여러분들이 죄와 싸우고 있다면 죄를 죽이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일 죄와 싸우고 있다면 그 죄와의 싸움은 여러분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원할 것이고 지혜를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 죽임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간단한 복음이면 되지만 죄를 죽이는 삶은 청교도 존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A great spiritual wisdom 아주 커다란 영적인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 싸움이 여러분 속에 있다면 그리고 매일 여러분들이 그 죄와 싸우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 죄를 죽이는 방법을 간절히 알기를 원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 그것은 갈등이지 진짜 죄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비유가 하나 생각이 났습니다. 부부가 서로 말다툼하는 것은 전쟁입니까, 갈등입니까? 갈등입니다. 그런데 갈등을 해, 오늘도 아침부터 직장에 가려는데 막 잔소리하고 대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당신은 뭐 잘한 게 있어. 그러면서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누가 그러는데 부인이 미우십니까? 아, 말도 마. 살기도 싫어. 제가 죽이는 방법을 가리켜드릴까요? 그러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미친놈, 누구 지금 남 부부싸움 하는데 와서 아주 간단하게 죽이는 방법이 있는데. 제가 가리켜드릴까요?
그런데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총알이 막 날라 옵니다. 엉겁결에 전선에 갔는데, 우리 6.25 때 총 쏘는 것 일주일도 안 배우고 막 전선으로 투입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무기는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쏠 줄 모릅니다. 막 총알이 날라 오고 옆에서 전우들이 막 죽습니다. 그때 노련한 상사가 와서 죽이는 법 가르쳐줄까? 그러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Yes, 그럴 것 아닙니까? 왜? 부부싸움이 갈등이고 이것은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게 너무나 죄와의 싸움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막 갈등하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는데 그게 죄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하니까 뭘 죽이기까지 하려고 이렇게 갈등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태까지 같이 살았는데 뭘 그렇게 살벌하게 죽이기까지.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니 왜 공부를 안 하십니까? 왜 공부를 안했습니까? 아니 살을 빼려고 해도 공부를 하는데 아니 왜 공부를 안 합니까? 갖다 놓고, 펼쳐 놓고 테이프 듣고 가르쳐 달라고 해서 공부를 하면 되는데, 적어서 가서 공부 하면 되는데 그러니까 방법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갈등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믿음
세 번째로 죄와 갈등하는 사람들이 낙심을 많이 합니다. 잘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이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차이가 뭔가 하면 죄와 갈등하는 사람들은 죄를 크게 보지만 죄와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죄보다는 그 죄와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기대가 더 큽니다. 믿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린 나이에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막 기고만장하게 블레셋이 욕했습니다. 골리앗이 나와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했을 때 다윗이 군복도 안 입고 물매 돌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때 저쪽은 백전노장이고 싸움터에서 잔뼈가 자란 사람이고 키가 구척이라고 그랬으니까 2미터70정도 되는 사람이고 다윗은 어린아이입니다. 군인의 복장도 맞지 않은 아주 홍안의 어린아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둘이 서 있는 것을 볼 때 다윗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냥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다윗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다윗 자신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 Faith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이 대적을 꺾을 수 있게끔 하나님이 만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이길 것을 기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니 죄와 싸우라고 하나님이 하셨으면 무기도 주시고 힘도 주시겠지. 싸워서 실컷 고생하고 마지막에는 죄와 싸워서 이기는 법은 없다. 그 결론을 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죄와 싸우라고 명령하시겠습니까? 선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기만하실 수가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어긋난 추측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약속,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의 신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죄와 더불어 싸우고 영혼의 생명을 누리고자 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은혜의 놀라운 도움과 위로부터 내려오는 그 놀라운 능력들은 외면한 채 상황을 보고 좌절하고 넘어지는 그 모습은 결국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왔을 때 비관적인 보고를 한 열명의 정탐꾼들에게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엄청나게 크다고 다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대성통곡하면서 낙망합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떠나셨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이길 수 있다. 그렇습니다. 죄와의 싸움이 힘들다고 칩시다. 죄는 죄 혼자 싸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죄도 못 이기는 하나님을 믿어서 뭐합니까? 어떻게 그 싸움이 그냥 힘들다가 끝날 싸움인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 성령님을 의지함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죄를 죽이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죄와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성령님이 자기 속에 오셔야지만 죄를 죽이실 수가 있다는 성령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 열렬한 기도로 분투함
마지막 다섯 번째는 죄와 갈등하는 사람들은 고민을 많이 합니다. 단지 죄와 갈등하는 사람은 고민을 많이 하는데 죄와 싸우는 사람은 고민은 적게 하고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죄와 많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 갈등하는 사람의 천편일률적인 공통점은 죄를 인식하고 괴로워하고 갈등을 많이 하는데 열렬한 기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각 속에서만 죄와 싸우는 것이지 실제로 영혼은 한번도 죄와 맞붙어서 찔러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등을 느끼는 정도 가지고는 안 되고 두레박을 우물에 던지듯이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어내고 그 기도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죄는 또렷하게 인식되기 시작하고 열렬하게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이 죄와 실제로 맞붙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재가 났을 때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그냥 다시 잠드는 것처럼 경고는 받았지만 다시 잠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죄와 많이 싸웠으나 승리를 얻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죄와 정말 맞붙어서 싸워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열렬한 기도가 여러분들 속에 살아 있어서 죄에 미움을 간직하고 그 죄와 더불어서 열렬하게 그렇게 기도로 그 죄를 실제로 맞붙어서 싸워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죄와 싸우는 사람들은 기도가 열렬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죄가 또렷이 인식되기 시작하고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죄와 맞붙어 싸우기 시작하면 정말 어쩌면 그렇게 죄가 쉽게 성령의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생을 살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이런 고백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3. 이러한 혼란을 막는 지침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약속대로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죄와의 싸움에 있어서 혼란에 빠지는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들을 그 어려움에서 오는 혼란을 막는 지침을 오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서론적으로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저는 지난 시간에 죄의 지배아래 있는 신자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가운데 죄와 싸우게 되는데 그 죄와의 싸움에서 몇 가지 지성적인 혼란을 경험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장 큰 것으로는 죄와의 갈등을 죄와의 싸움으로 오해를 해서 힘이 많이 들었는데도 죄는 절대 안 죽는다고 판단을 한다든가, 또 그 하나님과의 평화와 죄와 싸우기를 포기한데서 오는 그런 평화를 혼돈 한다든지, 혹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직하게 깨닫지 못하는 그런 무지라든지 거기에서 오는 혼란이라든지, 혹은 자신의 상황을 말씀으로 덮어버리는 것이라든지 등등의 이런 많은 혼란들이 있을 때, 그때에는 이 혼란이 우리의 영적인 어려움을 특별히 더 가중을 시키는 것입니다.
혼란 가운에 영혼의 고통-참된 평안함이 없음
그래서 이런 혼란과 어려움들이 오게 될 때에는 어떤 영혼의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우선 일어나는 일은 도무지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된 평화가 아니라 참된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를 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가운데서 자기는 뭔가 이렇게 신뢰할만한 분명한 근거가 있는 그런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영혼의 참된 위로를 주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의 싸움에서 이런 지성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면 생각이 모두 헝클어져버리고 그렇게 되게 되면 복음에서 오는 정직한 위로와 평화를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죄는 원래 마치 버섯과 같아서 습기 많고 어두운 그늘에서 잘 자라지, 찬란한 햇빛이 비치고 건조한 곳에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어둡고 컴컴하고 습기가 많은 곳에서 독버섯이 번져가듯이 죄 역시 좋아하는 환경자체가 무지의 어두움이지 환한 지식에 밝은 빛이 있는 그런 마음은 죄가 깃들어도 생존하기 굉장히 힘든 그런 환경입니다.
죄가 그런 어두움을 좋아하기 때문에 죄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하려고 하는 일은 우리의 생각을 헝클어지게 만들어서 우리의 마음에 어두움이 깃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헝클어진 생각 속에서 모든 생각이 혼돈스러워지고 혼돈스러운 가운데 어두움이 깃들게 만들어서 죄는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자생력을 길러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신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기쁨이나 참된 사랑이 없이 매일매일 주어진 형식적인 종교적 의무에 열중하게 됩니다.
한사람의 신자가 죄에 졌다고 해서 당장 신앙생활을 팽개치는 것은 아닙니다. 한사람의 신자가 죄에게 져서 결국은 죄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이 신앙의 껍데기를 던져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흔히 우스운 말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기쁨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사랑 없이 종교적인 일들을 의무로 감당하면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을 할 때에 그의 영혼에는 죄가 깃들게 되는데 그의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종교생활이 그 사람 속에서 자라나는 죄의 성장을 전혀 억제하지 못합니다. 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대적하는 반감이기 때문에 자기를 건드리지 않는 한 죄는 우리가 외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한 삶을 흉내내면서 살아가든지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 한 죄는 우리를 말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 없는, 나아가서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가득 가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천사처럼 예배드리고 성실하게 교회생활 하는 일들이 가능한 이유도 죄에 이런 특성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그런 교회생활을 해나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참된 기쁨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단순한 의무감으로 감당해나가는 그런 교회생활이 그에게 행복이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모든 일들이 영혼의 변화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이 그의 마음과 삶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어서 교회생활과 실제 삶이 완전히 분리되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고 형식으로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영혼의 평강이 없는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결국은 신자는 그런 삶을 살아가다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기쁨과 사랑이 없이 의무에 충실한 생활에 대해서 실증을 내게 되고 따라서 그 의무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될 절대적인 필요성과 마음의 욕구를 잃어버린 채 형식으로 가득 찬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영혼의 가장 치명적인 일이 일어나는데 이런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마음에 남아 있던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믿음들이 차츰차츰 잠식되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향한 어떠한 믿음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이런 상황이 바로 죄와 싸울 때 경험하게 되는 지성적 혼란 가운데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사고가 아주 투명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들이 정확하게 살아있어야 됩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들이 믿음의 집안에서 자라는데도 자꾸 바르게 안 자라고 너무 세상 것을 좋아하고, 그리고 경건하고는 거리가 먼 이상한 흉내를 내고, 그리고 합 바지 같은 것을 입고 다니고, 머리를 노랗게 파랗게 초록으로 이렇게 물들이고 그러고 다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너무 과민반응하지 말고 나둬도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니까 머리에 물도 들이고 싶고, 그 다음에 발톱에 칠도 하고 싶고, 또 남이 명품을 같고 다닌다고 해서 자기도 갖고 싶고 그렇게 합니다. 안 그러면 좋은데 애들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머리 속에서 그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만 살아있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라면서 그런 것 다 버립니다. 여러분들 아들딸은 지금 물들이고 다녀도 여러분은 안 들이고 다닙니다. 여러분도 옛날에 어렸을 때는 나팔바지 입고 다니고 여고 시절에 치마를 짧게 입으려고 안달하고 그랬던 것 내가 안 봐도 다 압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어른이 되어서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다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는 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하면서도 그게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중에 그 욕구가 사라지고 나면 단정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동안에 이 녀석들이 이게 옳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그대로 굳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철이 안 들고 바보같이 그렇게 삽니다. 그러니까 이 생각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성적인 혼란이 신앙생활 속에서 오게 되면 그러면 죄와의 싸움이고 뭐고 불가능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이렇게 깨끗한 지식을 섭취하면서 아주 분명하게 살아있는 이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이성의 스위치를 꺼야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최대한 켜놔야 됩니다. 그 대신 그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굴복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서도 가지런한 생각을 가지고 하나하나 배워나가면서 그렇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됩니다.
혼란을 막는 지침
1.자기 안에 있는 죄를 감시하라
그러면 이제 실질적으로 그렇게 이런 혼란을 막는 지침이 무엇인가? 많이 있겠지만 다섯 가지 중요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혼란을 막는 첫 번째 지침은 자기 안에 있는 죄를 감시하라는 것입니다. 이 감시는 두개의 방향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밖에서 자신의 죄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을 감시하는 것입니다.
죄는 어떠한 성향이 있는가 하면 일단은 죄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죄가 들어올 때에 그 죄는 정욕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들어오게 됩니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을, 그런 것들이 하나 들어오게 되면 제일 먼저 이 죄가 들어올 때는 우리의 생각을 타고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경건하게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귀신이 들린 것처럼 말도 되지 않는 죄를 확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런 경우는 흔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많은 신자들의 경험 속에서 이 죄는 생각을 타고 먼저 들어오는 것입니다. 생각을 타고 들어온 죄가 분명히 처음에는 이것이 죄 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확인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한사람의 신자가 은혜아래서 가지런한 질서를 유지한 상태에서 있습니다. 그때에 정욕을 품은 생각이 딱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이 은혜의 질서가 가지런하기 때문에 딱 보고 이게 죄다 하고 압니다. 딱 아는데 그러면 그때 그것이 주여! 그러고 한번에 떨쳐버리면 가장 쉽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그렇게 들어온 악한 정욕을 뿌리치지 않고 그것을 거기에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찾아온 정욕이 죽여지지 않고 악한 생각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남게 되면 이 죄는 우리와 끊임없이 인격적으로 대화하려고 듭니다. 마치 뱀이 하와에게 찾아와서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이러면서 대화를 시도하게 되듯이 죄도 우리에게 들어와서 그 죄 된 생각이 사고 속에서 우리와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대화를 하게 되면 죄에 대한 경계심과 미움이 서서히 사라지게 되고 대화는 친화로 바뀌게 됩니다. 죄와 친화적이 되고 나면 죄를 가만히 내버려둔 채 살아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이렇게 하는 동안에 그 신자 안에 있는 죄는 대화와 친화를 지나서 강화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죄가 생각 속에서 강화되게 되면 그렇게 강화되어가는 과정에서 그의 사고를 혼란케 하고 정서에 죄에 대한 욕구를 불붙여서 의지적으로 실제로 죄를 행하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죄는 그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죄를 한편으로는 자기 안에 그렇게 발전할 만한 죄가 자기 속에 있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런데 사실은 그것을 살피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래도록 늘 보아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친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그것을 미워하는 것이 힘들고 또 감정적으로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것을 지성적으로 잘못됐다고 정확하게 판단해내는 것이 힘이 들고 그런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의지적으로 떨쳐버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빛을 받아서 그래서 자신의 수면 밑에 있는 마음의 세계를 샅샅이 탐사하는 일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옳지 않은 죄라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꼭 필요하고 그렇게 되면 이제 해결의 길이 열려집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런 죄가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보고 듣는 것들의 경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죄가 타고 들어오는 경로는 우리의 생활 습관, 성향, 성품, 우리의 기질 이런 것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점에서 있어서 자신이 이런 죄가 유입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주는 습관적인 기질이나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자기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리고 거기에 대한 독특한 대비책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슴에 선뜻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아주 사람들에게 잘 삐치고 사람들하고 틀어지기를 잘하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자라오기를 그렇게 자라서 뭐 이렇게 나쁜 것은 아닌데 사람들에게 잘해줄 때는 한없이 잘해주는데 성격적으로 좀 변덕이 심해서 잘 삐치고 그리고 아주 쉽게 마음에 원수를 맺고 또 꽁해서 그것을 잘 풀지를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죄가 타고 들어오기 훌륭한 기질입니다. 어떤 것을 타고 들어올까요? 분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데 죄가 그 사람을 이용하면 그것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것입니까? 미움, 아주 한번 그런 사람이 미움을 딱 품으면 풀지 않으니까 그런 성향을 죄가 사용할 때 그 사람이 아주 훌륭한 미움과 분열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여러분들 중에 낭비벽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돈이라도 끌어다가 일단 먹고 싶은 것 먹고, 사고 싶은 것 사야지 속이 풀리는 사람, 카드 회사에서 수없이 독촉장이 날아와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담대한 것처럼 전혀 겁이 나지 않는 사람들,. 그런 낭비벽 같은 것들은 그 사람에게 죄가 타고 들어오기 좋은 훌륭한 통로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가 개인적으로 기질적으로 습관이 되어 있는 이런 특성들은 죄가 타고 들어와도 그 죄가 마치 이렇게 땅을 깊이 파서 왜 이렇게 군대에서 무슨 용어라고 하는지 모르는데 통행로가 있습니다. 보초와 보초가 바뀔 때 숨어서 이동하는 통행로가 있습니다. 그런 통로 같아서 자기 기질을 타고 죄가 이렇게 들어가면 그 죄가 발각이 잘 안 난다는 것입니다. 원래 성질이 그러니까. 그게 특징입니다.
나는 아직 정결하고 낭비벽이 없으나 어느 날 갑자기 돈을 쓰고 싶고 이럴 경우에는 내가 미쳤나 이런 생각이 들지만 원래 어려서부터 그렇습니다. 낭비벽이 심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점이 무엇입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특별히 사치, 세상사랑 이런 것들에 깊이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그 문제로 걸려 넘어지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린 시절에 너무 가난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지도 못하고 그래서 구두 통을 메고 일간 신문을 돌리고 천신만고 끝에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쳐서 그래서 이제 자수성가를 했습니다. 이제는 구두 통 안 메어도 되고 자기 자식들도 신문을 안 돌려도 않을 정도로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굉장히 수전노 같은 기질을 발휘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어느 날 그 사람이 그렇게 돌변했거나 아니면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가 떨어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원래 기질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런 기질을 타고 뭐가 들어올까요? 돈에 대한 인색함. 하나님 앞에 헌신할 줄 모르는 마음, 그 다음에 사람들에 대한 사랑 없음, 이런 죄들이 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 전도사 때입니다. 어느 전도사 집에 갔는데 파티를 열었습니다. 결혼한 형제 집에 가서 콜라 좀 마시자고 했더니 그래 사줄게 그러더니 돈을 꺼내더니 여보 가서 콜라 좀 사와 그러니까 부인이 가서 콜라를 사왔습니다. 잔돈을 갔다가 주니 그 자리에서 서랍에서 장부책을 꺼내 콜라 두병 하고 적었습니다. 그때나 이때나 내 기질이 어디에 가겠습니까? 아무개 전도사 그게 뭐냐고 하니까 가계부를 적는데 자기가 적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다 나간 다음에 그랬습니다. 야, 집어치워라. 세계평화도 염려할 시간이 없는데 언제 그것을 적고 있는가. 그래서 그때 한 30분을 제가 형으로서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앞으로 지도자 될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고 부인에게 넘겨주어라. 그런데 그때 진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지 그 형제가 감화를 많이 받고 그리고 청산했습니다. 부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홀어머니 모시고 긴 세월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돈에 대한 관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학교 다니는 애가 그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해온 것입니다. 그렇게 꼼꼼하게 안 하면 집안이 거덜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했는데 부인은 언니하고만 살아서 돈을 벌어서 다 언니에게 갖다 주어버릇해서 이건 어머니보다 더 경제관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0만원만 들어오면 셀 줄 몰라서 쩔쩔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것을 자연스럽게, 자기는 거기서 장부책과 함께 잔뼈가 굵었으니까 이제 자기가 너무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하고 부인을 주었습니다. 일년도 안 지나서 잘하더랍니다. 잘하겠지요, 합쳐봐야 전도사가 몇 푼이나 벌어왔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대게 웃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성품이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게 그러니까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여튼 부정적인 측면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왔으니까 그렇게 돈을 아껴 쓰고 그러는 것은 단점이 아닙니다. 그런 틀 속에서 자기가 성장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하나의 기질이 되어서 아주 강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돈의 노예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문제를 가지고 그 사람을 계속해서 넘어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볼 때에 우리들이 생각할 때 ‘저 사람은 말이지 돈밖에 모르는 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있기는 있지만 다른 사람보다 살아온 성향이 워낙 강하게 발달한 것입니다. 그 통로에 숨어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이라든지 돈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그 통로에 숨어서 이렇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죄가 계속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러니까 끊임없이 그렇게 공급을 하는데도 그것을 본인들이 죄라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세 개밖에 못 들었는데 오늘 종일 들어도 내가 다 들 수 있습니다. 이게 패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특별히 떠받들어 기르는 애들이 있습니다. 그 애들은 망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해서는 안 되고 자기가 아무리 원해도 안되는 게 있구나 하는 것을 아이들이 알아야 합니다. 아주 선명하게 새겨져야 합니다. 그게 좌절을 안겨줄 것이라고 하는데, 아니 좌절을 안겨주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생각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몇 십 년 만에 아들이 하나 태어났습니다. 딸들이 쭉 많은데 외아들이니까 그 딸은 아들의 종입니다. 그리고 이 아들 하나만 모든 것을 다해주며 황태자처럼 키우는 것입니다. 애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라면서 항상 자기가 여기 서 있고 모든 것을 다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야 됩니다. 그런데 어느 미친 세상이 그렇게 움직여줍니까? 안 됩니다. 그때 막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 아이를 망쳐놓는 것입니다. 그 길은 큰일납니다. 이런 것들을 타고 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그렇게 교묘하게 기질이라는 통로를 타고 거기 숨어서 그렇게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일반적인 지식 가지고는 안 되고 말씀에 의해서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기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이게 내 자연적인 기질인데, 자연적인 기질 그 자체는 사실 그렇게 커다란 죄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겼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그런 기질도 성령이 역사하면 좋은 기질로 변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절약하고 사는 것 얼마나 좋은 기질입니까? 나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을 수 없고, 나는 이렇게 지도자적인 그런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자부심 같은 것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라를 위해서는 쓸 때는 써야 합니다. 무조건 돈 가지고 치사하게 굴며 사는 게 아니라 쓸 때는 또 써야 됩니다. 그런 기질을 못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커다란 일을 맡겨주면 덜덜 떨다가 그냥 끝납니다. 그러니까 또 그러면 안 되니까 다 좋은 기질로 쓰여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기만 하면? 그 성령으로 변화되고 그리고 그 성품 속에 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기만 하면,
그래서 기질이 성령으로 변화되면 훌륭하게 변합니다. 성질이 급하고 막 이러던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서 화끈하게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얼마나 화끈합니까? 그런데 따지기 좋아하고 논리적이고 이런 사람들은 바울처럼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가 얼마나 치밀합니까? 얼렁뚱땅 넘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성적으로 태어나게 된 그런 것들을 그렇게 비관하지 말고 그 성령에 의해서 기질이 변화되고 다만 그런 성품을 타고 죄가 계속 들어오게 되면 이것을 면밀하게 살피는 게 필요합니다. 꼼꼼하게, 그래서 그 죄를 친밀하게 살피는 그것이 꼭 필요합니다.
전쟁이 나게 되면, 지금 뭐 터키에는 전쟁이 날까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데 전쟁이 나게 되면 전쟁과 함께 막 바로 지상군이 투입되지 않습니다. 그럼 막 어마어마한 인명의 손실이 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공군기가 날아가서 폭격을 합니다. 중요 시설들을 폭격을 합니다. 공군기들은 뭘 겁내는가 하면 레이더를 제일 겁을 냅니다. 그러니까 공군기가 뜨기 전에 먼저 미사일로 레이더 기지를 집중적으로 쏴서 그래서 감시체계를 허물어버리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제일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죄를 죄로 탐지하게 하는 레이더망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교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생각이 딱 들어오게 되면 사람의 사고에 혼란이 오기 시작하고 죄를 정확하게 분별해내는 판단력들이 매우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든 이렇게 마음에서 많은 작용이 죄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잘 감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그런 기질들도 감시하고 그런 기질들은 더 꼼꼼히 살펴서 그런 기질을 타고 어떤 죄가 자기에게 파고 들어올 수 있는 충분한 통행로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더 엄격하고 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비추어서 조사를 해야 됩니다.
평평한 평지에 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 없지만 복잡한 지형지물이 있는 곳은 꼼꼼히 탐색을 해야 됩니다. 자연적인 빛 가지고 안 되고 아주 밝은 서치라이트를 여러 명의 사람이 비치면서 뚜껑도 열어보고 골목골목을 뒤져야만 적을 남겨두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그런 성향들, 그런 습관들 이런 것들을 타고 죄가 충분히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을 면밀히 살피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속에 있는 이런 죄들이 있고 또 발견되었지만 그러나 너무 크기가 작아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근본적인 파괴를 가져오지를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죄에 의해서 단번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어째든 우리의 영성을 흐리고 하나님과의 평화에 방해를 가져온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고, 더욱이 무서운 것은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죄가 지금은 매우 작지만 그것들은 역사하고 성장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꼼꼼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자신 속에 있는 죄들을 감시하는 것이 이런 혼란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지침입니다.
2. 죄의 힘을 더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피라
두 번째는 죄의 힘을 더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시편 19편 12-13절에 보면 시인의 고백 속에서 인간이 자기 속에 숨은 허물, 곧 죄를 정확히 다 알 수 없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영적인 삶의 깊이를 더해가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면 생겨날수록 이처럼 자기 안에 어떤 죄가 남아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지혜가 점점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자기 안에 있는 이 죄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일이 매우 어렵게 느껴지고 파악이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견되지 않고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들, 특별히 확인되었다고 하더라도 또 자기가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행동으로 드러내기 전까지는 인간들이 자신 속에 있는 죄에 대해서 매우 뻔뻔스러운 태도를 갖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뻔뻔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 속에 있는 죄가 계속 성장하고 역사하는 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혼의 침체나 영혼의 영적인 고갈들이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비롯됐다고 하는 명확한 인식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이제 심방을 가든지 만나서 묻습니다. 물을 때 교역자들이 집사님, 요즘 굉장히 영적으로 많이 침체되고 은혜생활 잘 못하시는데 죄가 많으신가보지요? 이제 그렇게 묻지는 못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뭐 어려우신 일이 있나보지요? 그렇게 물으면 그 다음에 청산유수같이 나오는 이야기가 뭐 애 아빠가 장사가 잘 안되고, 애들이 또 뭐 건강도 안 좋고, 또 뭐 빚도 있고 쭉 이야기하는데 마지막에 쏙 빼놓은 이야기는 자기 속에 죄가 있다고 하는 문제는 빼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모든 환경적인 것은 환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장사도 잘 안되고, 또 애들도 속 썩이고, 건강도 좋지 않고, 빚도 있고, 그리고 사업도 잘 안됩니다. 그런 일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신앙의 힘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힘이 신앙 없어도 이 세상이 너무나 행복한 사람에게 마스코트처럼 달아주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없었더라면 그 고통 속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힘을 주고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적으로 어려운 일이 많아서 세상 적으로 생각하면 쪼개질 수밖에 없는 가정인데 신기하게 그 신앙이 힘을 주어서 그 어려움 속에서도 가족들을 더 뜨겁게 사랑하게 만들고 물질적인 시련과 고난을 신앙 하나로 극복하면서 살아가게 만들어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도 살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믿음을 따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믿음을 따라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신앙을 따라 살기에 너무나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신앙을 빛나게 만들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환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유리하고, 고향을 떠나고, 톱을 켬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굴에 던져지기도 하고 그렇게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런 모든 것들은 신앙생활의 역작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많은 역작용들을 경험하면서 도무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수 없는 그런 환경이었는데 그 환경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그래서 세상의 환난과 시련을 비웃듯이 아버지 앞에서 살아가게 하는 그런 놀라운 영광을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힘입니다.
그러니까 사업이 안 되어서 신앙생활이 안 되고, 걱정이 많아서 믿음을 유지할 수 없고, 애들이 속 썩여서 은혜가 떨어지고 그렇게 살수밖에 없다면 신앙생활의 유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들은 모두 다 이유요,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 있는데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도 알 수 없는 많은 죄들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래서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죄에 대해서 인간들이 뻔뻔스러워지게 되는데 그러면서 이런 것들은 자기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죄에 대해서 힘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속에 있는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경향입니다. 이런 경향이 계속 먹고 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정욕입니다. 정욕이 마음에 많을수록 이 죄는 풍부한 먹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욕을 하나씩, 하나씩 실현하고 그 정욕을 통해서 실제적인 악에 빠지게 됨으로서 거기에서 오는 자양분들을 먹고 그 신자의 영혼 속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력한 경향성들이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어떤 것들이 이런 죄의 경향성에 힘을 더해주는지를 잘 살펴야 됩니다. 내가 어떻게 했을 때 마음이 강퍅해지던가. 우선 수요 예배 때 계속 설교되던 하나님을 원망할 때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여러 날 동안 듣고 있습니다. 그런 것, 마음의 강퍅함,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자기에게 이런 마음에 강퍅함을 가져오더라. 그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잘 깨닫지 못할 때는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의 빛을 받으며 자기를 성령을 의지해서 꼼꼼히 살피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어떤 것들이 내 안에 죄의 경향성에 힘을 더해주는지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이런 혼란을 막을 수 있는 훌륭한 지침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3.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마음의 평화를 미워하라
세 번째는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마음의 평화를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자기 속에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지었습니다. 정욕이 느껴집니다. 활발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이 감지가 됩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평화로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내가 구원 얻었는데, 내가 교회에 다니는데 이런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 안정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강의 산물이 아닙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적대감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파멸되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마음이 적대감입니다. 적대감은 얼마나 무서운지 적은 감동을 주어서 굴복시켜서 내편으로 만들 수 있는데 적대감은 존재하든지 사라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때로는 적이 죽었는데도 적대감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영국 역사에도 나오고 우리 역사에도 나오는데 용어가 있는데 잊어버렸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 보니까 옛날에 역적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게 아주 못된 놈입니다. 나중에 역사를 살펴보니까 죽여 버려야지 했는데 벌써 죽었습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할 수 없게 내버려두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그 자손들이 있는데도 무덤을 다 파헤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죽어서 썩은 시체를 도끼로 난도질을 하는 것입니다. 뼈다귀 몇 개 밖에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주 바스러트리는 것입니다. 그게 어디도 나옵니다. 아! 부관참시 아! 맞습니다. 장학퀴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뭘 보여주는가 하면 적은 죽었는데 적대감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은 굴복시킬 수 있는데 적대감은 없애버리든지 남아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죄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을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기꺼이 헌신할 수 있다고 하는 미운 마음, 이것이 죄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안에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 절대로 가능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에 계속 침을 뱉으면서 은총을 요구하는 것과 똑같이 모순 된 행동입니다. 그 죄는 크든지 작든지 똑같습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좀 썰렁합니다만 가끔 분뇨수거 차가 큰 트럭에 몇 톤씩 똥을 싣고 지나갑니다. 그것도 똥이고 그것을 분무기에 집어넣어서 가느다랗게 뿌려서 수증기처럼 번졌다고 하더라도 수증기로 떨어진 한 방울을 딱 받아서 현미경에 검사를 해보면 거리를 질주하던 몇 톤 짜리 똥통에 들어있던 성분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크든지 작든지 그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이것은 굴복시킬 수가 없습니다. 없애버리든지 유지하든지 둘 중의 하나지 그것과 더불어 화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만약에 어느 날 무심코 종합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검진을 딱 받고 나니까 어이고 큰일났네요. 왜요? 내장에 주먹만한 암 덩어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3기 4기입니다. 그러면 놀라겠지만 밤톨만하네요 그러면 어 참 기쁘네. 옆에 있는 사람은 주먹만 하다는데 나는 밤톨만하대. 그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생명에 지장을 주고 안 주고 간에 일단 그 암 덩어리가 자신 속에 자라고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기분이 나쁜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밤톨만한데 야구공만 하게 만든 다음에 수술합시다.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도려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런 죄가 자기 속에 있는데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기를 마시면서 공기 속에 각양 오염된 성분들이 우리 몸 속에 흡입되듯이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죄에 오염되어 있어서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많은 죄들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머리 속에 10만 가지의 생각이 하루에 스쳐간다고 합니다.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그런데 그렇게 스쳐가는 것 가운데 백 분의 99는 선한 생각이고, 십분의 일만 악한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100가지의 악한 생각이 스쳐가는 것입니다. 그 중의 90%는 절제를 하고 10%가 발동이 된다고 하더라도 10가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사람이 아마 지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지상에 존재하기 힘들 정도로 도덕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끊임없이 우리 속에 들어와 역사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치 무의식 속에, 공기 속에 오염물질들이 들어오듯이 이런 죄는 하나님과의 평화에 생명의 영향을 미치지만 적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드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트리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죄들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선택하는 죄들입니다. 그래서 죄라는 것이 확인됐는데도 마음에 품고 있을 때 옳지 않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는데도 그것을 여러 가지 이유로 합리화시키면서 그것들을 자기 속에서 내려놓지 않으려고 하는 이런 죄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어떤 평화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죄에 졌기 때문에 죄가 가져다주는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죄와의 싸움이 있는 한 이런 종류의 평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적할 때 죄는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잘 들어보십시오.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부주의 때문에 죄가 자신 속에 들어오는 것, 그것을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연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오는 죄와 꼭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똑같이 반복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해서 항거할 수 없이 인간 속에 들어오게 되는 허물이나 약점, 죄 이런 것과 자기가 부주의하기 때문에 들어오게 되는 죄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주의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들어온 그 죄를 불가항력적으로 자기가 어쩔 수 없이 자기 속에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청교도 존 오웬은 아주 명쾌한 성경적 해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부주의라고 하는 것은 비록 의도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좋아해서 택한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부주의라고 하는 그 자체가 진지해지기 싫어서 자기가 선택한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부주의라고 하는 자체가 진지하게 되는 데 있어서 지불해야 할 수고가 싫어서 선택한 것이 부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기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몰라서 그랬는데요 그것은 안 됩니다. 자기가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그리고 이것이 무엇이고 죄가 어떻게 들어오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깨달으려고 하면 거기에는 수고가 뒤따릅니다. 그런데 그런 수고를 지불하기가 싫어서 부주의함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타고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이 죄를 선택한 것입니다.
좋은 비유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전쟁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참 바보입니다. 전쟁이 나면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비행기가 뜨면 어린아이부터 그것부터 연습하기 시작합니다. 저것은 아군기다. 저것은 적군기다. 이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배우라고 지하대피소에도 써 붙여놓고, 사무실에도 써 붙이고, 길거리에도 써 붙이고, 다 붙여 났습니다. 이런, 이런 비행기 모양은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다 적기다. 이것, 이것은 아군기다. 써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식별하고 외워야 됩니다. 머리에 집어놓고 그러니까 복잡한 것입니다. 그런데 적기가 날아갈 때 그냥 거기에다가 ‘적’ 이렇게 빨간 글씨로 크게 쓰고 지나가면 되는데 이게 뭐 비행기가 수시로 바뀝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폭격을 하려고 폭탄을 잔뜩 싣고 떴습니다. 다른 사람은 적군기로 알고 다 숨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대한민국’ 그리고 막 손을 흔듭니다. 적기가 날아와서 쏴서 죽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선택해도 죄는 은혜를 공격하고 실수해서 선택해도 죄는 공격을 하고 이렇게 비행기가 떠서 군복을 입고 막 손을 흔드는 사람보고 제는 멍청하니까 그냥 내버려두자. 부주의해서 그래. 그리고 지나가지 않습니다.
왜 안 배웁니까? 가르쳐주는데. 배우면 배울 수 있는데. 왜 안 배웁니까? 그렇게 안 배우면 운전면허도 못 붙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운전해서 하늘나라까지 가는데, 아니 운전면허 시험 보는 것만큼도 공들이지 않아서 뭘 하려고 합니까? 그러니까 뭔가 하면 죄의 정체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이기 때문에 그것과 함께 공존하는 평화는 가짜 평화입니다. 그리고 주관자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자기가 죄가 남아 있는데도 하나님과 이렇게 평화하다고 느끼는 이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짓일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정말 내게 주시기 원하는 참된 평화는 이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과 화해로 말미암은 평화, 죄 죽임의 상태에서 도래하게 되는 진정한 평화를 사모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마음을 지켜라
-말씀아래서
네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두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아래서고, 두 번째는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 아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지속적인 감화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는데 우리의 생각과 정서와 의지 속에 나타납니다.
자,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여태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있고 생각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거듭났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생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고의 커다란 변화가 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전에는 자기가 온 세상의 주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인생 살고 먹고 마시다 끝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날이 있다고 하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이 바로 그런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생각은 여전히 부패한 우리의 옛 사람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떠오르는 생각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것도 많이 떠오르지만 악한 것들도 많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떠오르는 자기의 생각, 자기의 지성적인 작용에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한 감화를 받고 하나님의 생각을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으로 자신의 생각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은혜의 세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야지만 그것이 말씀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누군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어떠한 영혼의 변화도 그들에게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이 자기의 생각을 내어쫒는 그런 변화를 계속 경험하면서 살 때에 그때 자기 속에 있는 육적인 생각은 서서히 물러나고 영적인 생각들이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여러분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판단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깊이 변화되고 바뀌는 이런 일들이 일생에 한두 번이나 사경회 때나 일어나서는 안 되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악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죄를 지은 사람이 악한 게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 아래서 살아가야만 자기가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한 인간들, 그런 사람들은 무신론자입니다. 그런 무신론자들이 이렇게 거룩한 예배에 그 무신론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계속 참여하는 것은 그 하나님 앞에 받을 진노가 굉장히 커다란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이 수없이 예배를 드려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예배시간에 졸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그렇게 졸 때에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 때문입니다.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전체를 죄 가운데 사로잡아 와도 그것을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진리를 통해서 자기의 마음의 기뻐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기뻐하는 바를 받아 자신 속에 심겨진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의 노예로 살아갈 때에 가슴속에서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 한 어떤 죄도 그를 노예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 노예의 줄에 자기를 묶는 마음의 죄를 향한 사랑이 없으면 어떤 죄도 그 사람을 노예로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지지난 주간에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그런데 뭐 그런 종류의 책들을 시간을 들여서 읽는 것이 아깝기 때문에 그냥 빨리 읽습니다. 그래도 가끔 봐야지 이렇게 이야기할 기회도 생깁니다. 제목이 뭔가 하면 『중국 황제 어떻게 살았나』 그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 이번에 오스만 터키 제국이 있었던 때 딱 한나절의 시간이 있어서 구경시켜주어서 갔는데 거기에 왕이 살던 왕궁에 갔습니다. 토카피 궁전이라고 하는 곳인데 그곳을 쭉 보니까 역사는 다 지나가고 왕들이 쓰던 금으로 만든 의자. 그 다음에 여러 가지 보석들이 달린 반짇고리, 또 칼집, 왕관 그런 것들을 봤는데 누가 훔쳐갈까 봐 단단한 유리에다 보안장치를 걸고 경찰들까지 있는데 나는 솔직히 거저 주어도 가져갈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게 유치찬란한 물건들입니다. 파란 보석, 빨간 보석, 해서 막 양철쪼가리 같은 것을 붙여서 만들었는데 세상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금으로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마당에 앉아서 추운 겨울에 금으로 만든 의자에 앉으면 엉덩이가 얼마나 시리겠습니까? 그것을 누가 알아줍니까? 촌스럽기 그지없는 의자를 나같이 허리 아픈 사람은 거기에 앉아봤자 허리만 도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를 보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후궁들의 방이 옆에 쭉 있는데 오천 개의 방에 한방에 두 명씩 천명의 후궁들이 거하면서 왕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보면 이것은 애들 장난입니다. 중국은 어느 정도인가. 보통 왕들이 영화를 누렸던 왕들은 일만 명의 후궁을 왕실에서 거느렸습니다. 무슨 한방의 두 명씩 기숙사처럼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창피하게. 다 하나씩 줘야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일만 개의 방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만 개, 거기 두 명씩만 딸려있는 시종이 붙어 있다면 삼만 명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부인 빼고 산 것입니다. 한 끼 식사가 한 트럭 분입니다. 백성들은 두 끼밖에 못 먹게 하고 자기는 그 왕궁에서 네 끼씩 백가지 반찬을 놓고 먹는 것입니다. 왕의 요리만 하기 위해서 동원된 주방의 인원이 보통 450명에서 1000명까지 됐다고 하니까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역사에 보면 가장 오래 있던 왕이 61년 가장 빨리 황제에서 물러난 임금이 24시간입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게 무엇인가 하면 모두 놀라운 게 한 15년 이상을 넘긴 왕이 몇 안 됩니다. 그리고 왕위가 한번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황제의 왕관을 아들에게 물려준 역사가 한차례도 없습니다. 항상 거기에는 피비린내 나는 참극이 벌어지고 그 중에 어떤 왕은 자기 손으로 아버지를 때려죽입니다. 피투성이가 되게 만들고 황제에 등극하고, 등극하고 나면 어마어마한 땅덩이를 다스리기 위해서 자기 형제들을 모두 죽이는데 아버지의 후궁이 일만 명이니까 보통 그 자식이 수십 명입니다. 그러니까 수십 명의 동생들을 혹은 수십 명의 형들을 무참하게 때려죽입니다. 그리고 피바다에 이어서 황제에 등극을 하고 그리고 자기도 그 피비린내 나는 혈투 속에서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왕들이 얼마 못살고 황제들이 그 영화를 누리면서도 죽었는가. 그것을 책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그 구중궁궐 속에 갇혀서 그래서 그렇게 어마어마한 영화를 누리면서 살았지만 왕들의 마음에는 한번도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긴장의 연속이고, 그 다음에는 하루에 네 번씩 먹는 감당할 수 없는 기름진 음식들, 그리고 일만 명의 여인들을 가두어서 정말 자기를 소진하는 그런 성적인 타락 속에서 산 것입니다.
제가 다 읽고 느낀 게 무엇인가 하면 그 구중궁궐 속에서 사람들이 보기에 하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그 천자들이 정말 짐승처럼 살다가 비명 속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게 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그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짐승과 같은 욕구들이 무엇에 의해서도 억제되지 않고 모두 발산했을 때 인생이 어떻게 되는가. 중국 황제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아주 정직하게 이야기해서 그 책을 다 읽고 나에게 황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거절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나는 거기서 그렇게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것보다는 여기서 괴로움과 죄 많은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가끔 속 썩여도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사는 게 훨씬 낫지, 진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 아래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렇지 그렇게 살고자 하는 짐승과 같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날마다 버리고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마음을 전수 받아서 자기의 마음을 버리고 살아가는 그런 삶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의 뜻을 꺾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동행하며 살도록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줍니다. 나를 항상 버리고 주님의 뜻을 좇으면서 나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의지를 따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그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영향력 없이 여러분들에게 그런 삶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은혜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것, 지난달이 아니라 작년이 아니라 옛날이 아니라 젊은 시절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진리의 영향 아래서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전폭적인 영향을 주고 그 말씀의 빛 앞에서 우리의 생각을 꺾고 정서를 누르고 하나님의 거룩한 정서를 받고 그 의지에 굴복하면서 그 신령한 말씀의 영향력 아래서 끊임없이 깨트려지며 살아가는 그런 말씀의 영향력 없이는 우리는 이런 혼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을 지킴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어찌할 수 없이 들어오는 수많은 악과 우리도 어찌할 수 없이 밀려드는 수많은 자기중심적인 편견과 사랑들, 또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은 타고난 천성과 오래된 생활의 습관으로 인해서 죄의 통행로가 되었던 그 많은 비극적인 상황들, 그래서 어떤 때는 정말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조사해 봐도 정말 내 속에 어찌도 그리 더러운 내가 많은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같은 그런 때, 그때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 아래서 마음이 깊이 깨트려지고 그리고 진실한 참회를 통해서 강퍅한 마음은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은 은혜 가운데 살면서 유지하는 가운데 그렇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살피고 이렇게 지키고 간수해서 그래서 살아갈 때 우리가 죄로 말미암은 이런 지성적인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마지막 다섯 번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죄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 자연적인 잘못된 성품과 습관을 통해서 그것을 통행로로 삼아서 죄들이 들어옵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솟아나는 정욕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자기를 만족시켜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것들과 싸우려고 해도 정말 너무나 어렵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잃어버렸고 형식적인 삶, 혹은 자신이 선택한 부주의, 혹은 무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 속에 많은 죄의 세력들을 키운 것입니다. 그때 그 속에서 굉장히 힘들게 느껴질 때 그때 생각되는 것, 예수를 생각하는 것이 그런 혼란에서 벗어나는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 정욕, 지금 내 마음속에서 짓고자 하는 바로 이 죄,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뭘 하셨나? 바로 이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내가 짓고자 하는 이 죄, 이 죄를 모두 짊어지셨을 때 하나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그 아들을 불붙는 진노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죄에 대한 소원을 가슴에 계속 품고 적절하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장하면서 살아가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이 그 십자가 앞에서 가능할 수 없는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특별히 자기가 지금 마음에 품고 짓고자 하는 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이런 죄로 말미암은 지성적 혼란에서 벗어나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의 소욕이 강하게 역사할 때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저렇게 죽으셨는데 그 피로 나를 구하시고 구원받은 이후로 이제까지 나를 먹이고 입히시며 광야와 같은 곤고한 인생의 길을 인도해 오신 그 예수님에게 내가 이렇게 대접해드리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되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좋으신 그분이 죄는 없으시고 알지도 못하시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분이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형벌을 홀로 감당하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며 죽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우리의 죄와 강퍅함 때문이었습니까?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기를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보다 더 좋아했던 우리의 불순종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으셨나요? 못 박혀 피 흘려 죽으면서도 그분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이 저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용서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시고 죄를 알지도 아니하시고 죄가 있지도 않으신 그분이 우리 죄인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 그 죄를 감당하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놓지 않은 죄의 정체가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라면 그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과 화해하면서 살기를 그토록 하나님이 원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하나님을 향한 그 적대감의 원흉을 가슴에 품고 다시 살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아시고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 때문에 얼마나 쉽게 은혜에서 미끄러지는 지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 마음에 어찌할 수 없는 죄의 소욕이 있어도 그것이 옳지 않음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자기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를 바라보면서 자기의 죄를 정직하게 뉘우치고 그 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의 소욕을 성령으로 죽이시고 그의 마음속에서 다시 예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하셔서 잠시 죄로 말미암아 혼란스러워졌던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정돈하시고 다시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슴에 수 없는 더러운 죄를 품었던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생각하며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그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었습니다. 그 수많은 죄와 더러운 악들을 씻어버리고 그들은 옛 삶과 결별했고 예전에 죄 가운데 있으면서 주님을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죄 가운데서라도 예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용서의 기회를 주시고 그 영혼을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해서 여기에서 벗어나는 진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4. 죄의 지배에 작별을 고하며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빌2:15)
오늘로서 저는 죄와 은혜의 지배에 관한 설교시리즈 한 15회 가량 계속된 설교를 오늘로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허락하시면 이제껏 까지 이루어졌던 설교를 좀더 자세하게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소원함이 제게는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죄와 은혜의 지배의 시리즈 마지막 설교 제목을 ‘죄의 지배에 종식을 고하며’ 라고 잡아 봤습니다. 우리는 지난 15번 이상의 긴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가 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은혜의 지배아래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저절로 은혜의 지배아래 거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엄연한 사실도 우리들은 눈은 뜨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지배아래 거하는 것이 신자로서 자연스러운 삶이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셨고 그리고 우리를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는 사람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전에는 죄에 매어 종이었으나 그 신분에서 자유를 얻게 해주셨고 전에는 우리의 마음이 선을 원해도 도저히 선한 것을 할 수 없는 본질상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는 영혼과 마음에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였지만 내면과 영혼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 그 죄를 선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서 죄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그분 혼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셨지만,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단독적인 은혜의 역사로 그 일을 이루셨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는 절대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내셨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던 것 같은 방법으로 죄를 처리하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우리의 순종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를 참여시키시는 가운데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심으로서 우리를 비로소 우리 안에 있는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복음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죄가 어떻게 자기를 영리하게 지배하고 마지막에는 그 죄의 법 아래로 다시 자신들을 사로잡은 것처럼 그렇게 죄의 종이 되어서 살게 하려는 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적절히 죽이는 방법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하나님과 생명을 누리는 기쁨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고 많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죄에 대해서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의 삶은 맛 잃은 소금과 같고 불 꺼진 등불과 같아서 세상과 쉽게 타협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짓고자 하는 모든 욕망을 갖는 것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 우리는 이 시리즈를 모두 들으면서 마지막 내릴 수 있는 결론이 그러므로 신자가 죄 가운데 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더욱이 신자가 잠시의 즐거움을 위해서 죄를 선택하고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미친 짓입니다. 만약에 신자인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한다면 아마 죄를 이기는 것이 너무나 쉽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외부에서 밀려오는 죄의 유혹이 강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있는 죄가 강해서 힘든 것이 아니라 그 죄와 결별하지 못하는 자기 속에 있는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힘이 드는 것입니다.
A. 은혜의 지배 아래 살기 위한 투쟁
1. 죄의 강압: 은혜 안에서 강건해져야 함
그래서 이 죄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크게 두 가지 수단을 가지고 우리들을 지배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는 강압하는 힘, force를 가지고 우리를 지배하려고 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 안에 죄를 들여보내서 우리를 연약하게 만들고 그래서 죄가 들어와서 우리들을 강하게 압제할 때 거기에 항거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도록 애를 씁니다. 이런 죄의 계획을 우리들이 알고 있다면 그 죄에 의해서 우리들이 연약하여져서 패배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자신을 관리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이니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오직 저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한 것처럼 먼저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조금 사랑하던 사람들이 더 뜨겁게 사랑하고, 예전에는 조금 거룩한 삶에 대한 흥미를 가졌던 사람들이 거룩한 삶에 대해서 더 불같은 소원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마음속에서 주님이 주신 은혜의 정서들이 계속 북돋아져서 그래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죄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고 죄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연약해지지 않도록 은혜 안에서 우리가 강해져서 죄를 능히 물리칠 수 있도록 이렇게 자기 자신을 계속 살려야 합니다.
이것을 요한 칼빈 선생은 vivifica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죽인다'라고 하는 의미를 가진 mortification과 대조를 해서 살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vivifica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한편으로는 죄를 죽이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을 계속 살아있게 하고 받은바 말씀이 떨어져서 결실하기 까지 계속 돌보는 우리의 마음을 관리하고 그리고 마음을 지키고 견고해지는 이런 은혜 살림을 위한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2. 죄의 속임: 지식 안에서 총명해져야 함
또 죄는 한 방법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를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속여서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부지런히 성령의 은혜 안에서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공부해서 지성적으로 죄가 우리에 대해서 아는 것 못지않게 우리도 죄에 대해서 탐구하고 죄를 이기게 하시는 은혜의 원리에 대해서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잘 훈련된 한명의 병사는 거의 훈련 되지 않은 수십 명의 병사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능히 자신은 살고 적은 모두 죽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은혜에 대해서 부지런히 배워서 알고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죄에 대해서 거의 배우지 않고 특별히 이 죄를 이기게 하는 복음의 도리에 대해서 거의 무지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많이 아픕니다. 그들은 순종하고자 해도 순종할 힘이 없고 바르게 살아가려고 해도 어떤 것이 바르게 사는지를 아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혼란과 어두움 속에서 매일같이 지냅니다. 껍데기밖에 없는 교회생활에 자신의 천국행 티켓을 걸고 그릇된 안정감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그들은 맛 잃은 소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불 꺼진 등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3. 얼마나 어려운가? 왜 싸워야 하나?
우리들은 만약에 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만 다짐하고 이 세상 대신에 오는 세상을 사랑하며 살기만 한다면 죄를 죽이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에 대한 사랑, 예수님도 따라가야겠지만 나의 욕망도 포기할 수 없는 이중간첩과 같은 태도들이 우리의 이런 죄와의 싸움을 힘겹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힘듦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죄와의 싸움을 통해서 죄를 죽이고 그 죄 죽임을 통해서 거룩한 은혜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왜 우리 모든 신자들이 그렇게 죄를 죽이고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은혜의 지배아래 일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B. '빛들로 나타나게‘ 하시려고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빛들로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1. 원어적 의미: “우주의 발광체들처럼 빛나게 하시려고”
희랍어 본문을 보면 이 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발광체들처럼 빛나게 하시려고” 했습니다. 너희가 우주에 있는 발광체들처럼 빛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 피할 수 없는 부르심:① 참으로 신자 되는 것-최고의 부르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피할 수 없는 부르심이 있으니 그 피할 수 없는 부르심은 곧 우리가 참으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만드신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 솜씨를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 솜씨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 세상의 창조주 되심을 알려주었습니다.
② 이 세상의 고통: 하나님에 대한 無知
그러나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는 인간에게 영혼의 파괴를 가져왔고 그래서 인간은 똑바른 것을 보고도 그것을 올바르다고 인식할 수 없는 망가진 존재들이 되었고 그나마 하나님을 정확하게 보여주던 이 세상의 모든 피조 세계도 창조 당시에 순결했던 광채를 잃어버렸습니다. 인식할 수 있는 인간도 망가졌고 하나님을 알리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도 인간의 죄 때문에 원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의 존재하는 피조물들을 가지고는 하나님 당신 자신을 알리실 수가 없었습니다.
③ 존재을 통한 선포로 세상으로 당신을 알게 하심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차선으로 택하신 방법이 한 사람을 택해서 그 사람에게 당신과 특별히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고 그 망가진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로 상당부분 고치셔서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과 특별히 교제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셨고 망가진 그의 본성을 고치고 치료하셔서 창조 당시에 지어진 인간만큼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런 인간으로 끊임없이 회복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님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그 계시의 빛 아래서 그렇게 은혜로 새사람이 되어가는 것만큼 거룩해져갔고 거룩해져가는 것만큼 그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섞여 사는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통해서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으로 남겨두지 않고 그를 종자 씨로 삼으셔서 가족을 만드시고 그 가족들의 씨를 퍼트리셔서 그들 중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렇게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고 하나님을 닮아감으로서 주님을 알려주는 거룩한 백성들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만족치 않으시고 그들을 민족으로 삼으시고 나라를 삼으셨으니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었고 그들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면서 거룩해지는 것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한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외치던 것을 온 민족의 웅장한 함성으로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웅장한 함성으로 삼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백성의 고유한 표라고 말할 수 있는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 목소리는 변질되어버렸습니다. 거의 들리지 않거나 혹은 때로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를 내어서 우리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니니 너희들도 막 살아도 괜찮으니라. 이런 소리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외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교회에서 흔히 오르내리는 짧은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presence is the best proclamation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현존이야말로 최상의 선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복음도 꼭 필요하지만 그 복음을 지닌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세상은 알고 싶어 하고 그것을 통해서 더 많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서 들려주고 또 써내려온 이 세상에 많은 역사를 통해서 감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짧은 생애동안에 이 세상에 사셨던 예수님의 발자취를 보면서 더 많은 감화를 받습니다. 바로 참으로 신자 되는 것이 이 세상에 인간이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의무이고 사명이며 이것 없이는 그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고 높은 지위에 도달하고 자기의 욕망을 따라서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어놓고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 nothing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고통 하는 원인을 여러 곳에서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고통의 원인을 질병에서 찾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원인을 물질의 부족에서 찾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고통의 원인을 인간관계의 파괴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고통 하는 이 세상의 궁극적인 뿌리가 아니라 고통이라는 나무에 맺은 열매에 불과합니다. 고통 하는 이 세상의 고통에 이유는 수없이 많은 것처럼 느껴져도 그 궁극적인 뿌리는 오직 하나이니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그 무지 때문에 이 세상은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도 똑같이 지금 거론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로서 살던 이들이었습니다. 막 살았습니다.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살았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행복했더라면 지금 여러분들이 여기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힘쓰고 애쓰고 부지런했지만 무저갱과 같은 여러분들의 마음은 무엇을 쓸어 넣어도 만족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십시오. 망가진 인간관계, 물질의 부족, 자기 꿈의 좌절, 욕망대로 살지 못하는 억압 많은 것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여러분들을 위하여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나니까 고통의 이유는 너무나 여러 가지였는데 그 모든 것들이 벗겨지고 그리고 여러분들은 처음으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데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세상이 다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우리가 진실로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만드시고 싶었던, 계속해서 머물게 하시고 싶었던 그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런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참된 신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세상에 있는 그 엄청난 창조된 피조물들을 통해서 당신을 알리실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셨습니다. 오늘날 도처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거짓된 종교들, 하나님이 창조하신 해와 달들을 섬기고 별들을 섬기고 분토로 돌아갈 뿐인 죽은 인간들을 섬기는 이 헛되고 망령된 짓들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끔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형상 대신 섬기는 그 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런 헛된 것들을 섬기며 이교도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기 보다는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물이나 더러운 물건처럼 대하지 아니하고 정말 저들에게도 우리들에게 비쳤던 복음의 광체가 저들에게 비추었더라면, 하나님이 그 은혜의 빛을 저희들에게도 비치게 하셨더라면 저희들도 아마 저렇게 살아가지 않았을 텐데. 누가 그 빛을 저희들에게 보여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피조물들을 통해 당신을 알리는 일을 실패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의 변화된 존재, 다시 말하면 우리의 부패한 이 본성의 죄들을 끊임없이 죽이시고 우리의 영혼을 순결케 하시는 성령의 성화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그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의 온 인격과 삶 속에 나타내어서 우리가 정말로 사람이 누구이고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는지를 알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은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크게 속성적 영광과 그리고 객관적인 영광으로 나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라고 하는 본질 속에 깃들여 있는 영광은 우리들이 돌려드릴 수도 없고 보탤 수도 없고 또 빼앗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이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남겨두셔서 개관적으로 그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기도 하고 모욕을 당하기도 하게끔 남겨두셨습니다.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교회 역사상 정확하게 묘사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심정적으로 서로서로 통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누가 이 영광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설명을 했을까 하고 찾아보았지만 영광을 많이 말한 사람도 영광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현상들은 사도 바울에게서도 나타났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뵌 그 영광의 경험은 사도행전에서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지만 그 빛의 정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개미가 찬란하게 비친 태양빛에 대해서 묘사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결국 저는 존 웨슬리라고 하는 신학자에게서 그래도 제일 괜찮아 보이는 영광에 대한 묘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학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정의를 했는데 감탄하고 웃고 웃다가는 또 감탄하고 했습니다. 영광이란 무엇인가? 찬란하게 비쳐서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그 어떤 것, 그것이 영광이라. 그것도 사실은 영광의 효과를 이야기한 것이지 영광 자체를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가 발견한 최상의 묘사였습니다. 찬란하게 비쳐서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그 무엇,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래서 이 ‘영광을 돌린다.’라고 하는 의미는 그렇게 내가 어떤 존재가 되고 무엇을 함으로서 나를 본 사람이 영광을 느껴서 나도 안보이고 아무 것도 안 보이고 하나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3. ‘빛들’(luminaries):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바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방법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휘 메이스토 포스 희랍어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문자적으로 “너희는 세상의 그 빛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 빛이 아닌 한 빛이 많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들을 극복한 감동적인 인간 승리의 이야기는 낙심한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그것도 한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예화: 어린시절 금요일이면 라디오로 즐겨 듣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절망 가운데서 고생하다가
회복되어 잘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동을 주었는데 이것도 빛일 수 있다는 내용)
모두 저만 위해 살아가는 각박한 세상에서 무엇인가 그래도 이웃을 위해서 선행을 베풀었다는 아름다운 미담은 또한 하나의 빛일 수 있습니다. 그런 작은 빛들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빛들은 이 세상에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고통의 근원인 하나님을 향한 무지와 반역을 고쳐서, 다시 말하면 그들 속에 깃들여 있는 죄의 본성을 멸하여 고통의 궁극적인 뿌리를 변화시켜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끔 만들 수는 없습니다.
① ‘한 빛’ 아닌 ‘그 빛’: 그리스도로 변화된
그래서 한빛, A Light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필요한 것은 A Light가 아니라 그 빛, 즉 The Light가 필요합니다. 그 빛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인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떻게 당신의 빛을 나타내고 계십니까?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되 사도 바울에게 다메섹 가는 길에서 하신 것 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기적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감당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의 영광으로 각 사람을 구원하시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나와 교통함으로 나의 빛을 소유하고 나처럼 빛을 나타내거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들 안에 성령으로 계시면서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들이 주님 안에 있는 연합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비쳐주셨던 그 빛을 우리도 비추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참된 사람으로서 사는 도리가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될지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고통 하는 세상, 죄로 말미암아서 완전히 어두워진 캄캄한 세상, 이 세상 영적인 암흑으로 말미암아 어둡고 지적인 무지로 말미암아 눈멀어버린 그래서 어두운, 진짜 어둡기도 하고 보지 못해서 어둡기도 한 마치 흑암의 캄캄한 그믐밤을 눈먼 사람이 걸어가는 것 같은 그런 캄캄함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참으로 빛이 되는 것입니다. 지위고하가 문제가 아니고 자기를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진실로 빛이 되는 것입니다.
② 빛 잃은 많은 등보다 비취는 하나의 등이 필요.
불 꺼진 많은 등불보다도 불 켜진 하나의 등불이 필요합니다. 빛을 잃어버린 수많은 등대보다도 깜박거리며 빛나고 있는 단 하나의 등대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설교를 하면 어이구! 어렵다. 저렇게 철저한 삶을 우리가 어떻게 살꼬? 저것은 교회에서 생활비 받는 목사들이나 할일이지,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의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누가 있는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안타깝게 여러분들이라도 불러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이 땅에 계실 때 가장 가슴 아파 하시며 하신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말세에 내가 믿는 자들을 몇이나 보겠느냐. 그런데 말세가 될수록 그렇게 하나님을 정말 믿는 사람들, 말세에는 더욱더 간절히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 대목에서 생각이 달라져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소수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 없이 죄의 지배아래 살아도 별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하며 안전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다수이기 때문에 당신의 정의를 굽게 하신 적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는 심판을 받아온 역사였습니다. 첫 번째 심판이었던 바벨탑 사건을 기억해보십시오. 모든 인간들이 모여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 중에 어느 인간 하나도 그것을 쌓아서 무엇 하느냐.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자 하고 하나님을 대변해주는 인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완벽하게 만장일치로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져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비웃듯이 바벨탑 아래로 모여들고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하늘에까지 이르게 하는 탑을 쌓자고 서로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다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려워하셨습니까? 당신의 뜻을 펴실 것을 다수라는 이유라는 이유로 꺾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바벨탑 앞에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사실상 그 바벨탑이 와해되도록 만드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온 땅에 패괴함이 가득하고 노아와 그 가족 이외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한 노아와 가족들은 그 시대의 병신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정신이 돈 사람들로 매도되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소수였고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는 사악한 백성들은 다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수라는 이유 때문에 넘어가지 않고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외적을 인해서 멸망을 당한 역사도 모두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느 시대에 진실한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이 다수인 때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때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많은 수를 자랑하는 것만큼 기독교 신앙의 세계에서 허무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어떻게 알리실 수가 있습니까? 신실하고 진실한 사람들이 알린 하나님의 아름답고 선명한 인상을 형식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 지우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각성된 마음에 다시 죄로 말미암은 편안함을 주고, 하나님 앞에 깨어나야 할 사람을 다시 두들겨서 잠재우는 역할들을 바로 신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인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무나 가정에 어려운 일이 생겨서 머리가 깨질 정도가 되어서 쓰고 들어 누었더니 그래서 옆집에 있는 부인에게 내가 너무 아프니까 약 좀 사다달라고 하니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하니까 그 불신자가 하루는 와서 하는 말이 아무개 엄마, 아니 기도라도 좀 해보지 왜 그래. 나는 안 믿어지지만 당신들은 하나님이 살아있다면서 기도라도 해보지. 그럼 또 혹시 알아. 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③ 풍랑이는 캄캄한 바다의 등대
제가 한 32년 전에 이야기입니다. 인천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인천에 오려고 배를 탔습니다. 배가 한가운데 왔는데 파도가 엄청나게 치는데 배가 떴습니다. 배가 한가운데 오니 아니나 달라 무전이 왔는데 빨리 항구로 돌아가라고 폭풍이 온다고, 아니 그것을 알려주려면 미리 알려주지 그런데 진짜 저는 태어나서 그런 폭풍은 처음 봤습니다. 여객선 이쪽을 때린 파도가 이렇게 포물선을 그으면서 저쪽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배 밑창에서 전부 구명조끼를 입고 오들오들 떨면서 거기에 앉아 있는데 아! 진짜 장가도 못하고 여기서 죽는구나.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언제 더 무서웠는가 하면 캄캄해질 때 그러니까 파도가 그렇게 치니까 배가 가는 시간이 올 때보다도 한배 반은 더 걸립니다. 그런데 이게 캄캄해지니까 진짜 바다에서 아무 불빛도 없으니까 캄캄했습니다. 그게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때 신앙이라도 있었으면 찬송이라도 했을 텐데 신앙도 없고 그렇게 하는데 그런데 얼마쯤 가고 나니까 배가 뚜뚜 하면서 고둥을 울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캄캄한 바다에 저기 선창에 무인 등대가 하나 있는데 거기서 불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그 캄캄한 바다에 그 불빛 하나를 보고 많은 배들이 안전한 포구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옛날에 지금은 GPS 시스템이라고 그래서 글로벌 포지션인 시스템이 되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인공위성으로 배고 비행기고 다 찾아갑니다. 신경도 안 씁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전부 나침판하고 별자리 보고 항해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뱃사람들에게 무서운 것은 파도가 무서운 게 아니라 하늘이 캄캄한 구름에 가려져서 별빛을 볼 수 없을 때, 그때 아무 것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나침판 하나밖에 없는데 이게 올바로 가고 있는지, 그것도 없을 때는 진짜 올바로 가고 있는지 안 가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제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늘에 별이 가득해서 조명탄을 쏜 것처럼 바다를 밝히지 않아도 몇 개의 별만 찬란하게 빛나면 항해합니다. 그러니까 너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소수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고민할 시간이 있으면 자기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 고민하지 말고 자기나. 한 사람이라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강력한 효과를 갖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런 경험을 많이 봤습니다. 가장 훌륭한 것은 한 사람이 예수님 만나고 확실하게 변화되면 그 사람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진짜 누룩과 같이 예수님이 전파됩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소수여도 문제는 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소수의 사람이 얼마나 정확하게 빛을 발하는가.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되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C. 어떻게 빛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1. 본문의 의미: ① 우리 말 번역-“흠없고 순전하여...흠없는 자녀로”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빛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우리말 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흠 없고 순전하여 흠 없는 자녀로서 빛들로 나타나고.”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흠이 없고 순전하고 그리고 흠 없는 자녀가 되면 빛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② 원어적 의미: ἄμεμπτοι καὶ ἀκέραιοι....ἄμωμα
- ἄμεμπτοι; ἀ + μεμπτός(비난, 책망)
- ἀκέραιοι; ἀ + κεραννυμι(혼합하다)
- ἄμωμα; ἀ + μωμος(비난)
희랍어 성경에는 세 단어 모두 ‘없다.’ 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비난 혹은 책망이라는 말에 없다가 붙어 있고, 두 번째는 믹스 혼합하는 것, 반죽하는 것, 이렇게 막 섞어서 비비는 것 그런 것 없다. 이런 뜻이고, 세 번째는 결함 거기에 없다는 말이 붙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번역을 하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하면 “책망할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섞이지를 않아서 결함이 없는 자녀로서 빛들로 이 세상에 나타나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③“책망할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섞이지 않아서 결함이 없는 자녀로”
즉 책망할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섞이지 않아서 결함이 없는 자녀들이 되게 하심으로서 그들을 이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과 나뉘어 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난 일주일 동안도 천국에서 살다가 온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았고 우리는 많은 불신자들과 함께 어깨를 부딪치며 살아왔습니다. 구분되지 않습니다. 나누어지지 않고 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분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지위에 올라가는 것, 그것이 예수 믿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뛰어난 지위에 오르게 되어서 그가 참된 신자로 살지 않으면 신앙에 대한 그릇된 본을 일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퍼트리는 독소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서양속담에 Noblesse oblige에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사회의 유명인사에게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Noblesse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셔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족속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그런 의미에서 신령한 귀족들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거기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를 주셔서 사회적으로 남보다 높은 지위에 있거나, 다른 사람보다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거나, 다른 사람보다 탁월한 전문가적인 지식이나 재능을 주셔서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 밑에서 배워야 하는 처지, 그런 입장을 여러분들에게 주셨다면 여러분들에게는 남다른 의무가 따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여러분 자신뿐만 아니라 그렇게 만나는 많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여러분들은 더 진실한 순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누어준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고 반대로 살게 되면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짓과 위선을 가르쳐준 사람으로서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고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속해놓으셨지만 절대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셨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는 저절로 책망할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섞이지 않고 결함이 없는 자녀가 되어서 어두운 이 세상에 빛들로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동안 살면서도 우리들은 양심의 가책을 얼마나 많이 느꼈습니까? 책망할 것이 없기는커녕 책망하셔도 그 책망하시는 음성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책망 받을 죄 가운데 사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 중의 상당수는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섞이지 않고 순전한 믿음을 우리들이 정말 소유할 수 있습니까? 노력하지 않고 저절로 내버려두어도 우리들이 순전한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끊임없는 이 세상의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와 그리고 탐욕들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이기심이 들어오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해야 할 그곳에 명예를 위한 욕심이 들어오고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섬겨야 할 사랑의 계명 그 속에 자기를 위해서 인색한 마음이 파고 들어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할 마음에 자기를 위해서 그 십자가를 포기하고자 하는 이기심이 파고 들어오고 자기를 부인해야 할 자리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부인하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욕망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뒤섞인 가운데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2. 거룩해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요구
결국 우리는 저절로 이렇게 책망할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섞인 것이 없어서 결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어두운 이 세상에 찬란한 빛으로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① 내적 부패성 때문에-사단의 이용.
그 이유는 첫째는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인 부패성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바르게 살려고 하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를 해도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의 뿌리 깊은 죄 성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낯설어도 죄에 대해서는 친화적인 우리의 이 쓴 뿌리들이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어서 어려서부터 이 뿌리들을 간직하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내적인 부패성 때문에 우리들은 저절로 내버려두기만 해도 책망할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결함이 없는 자녀들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이 부패한 본성 때문에 거기에 깃들인 수많은 죄와 거기에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우리의 정욕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셔서는 절대로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흠 없고 순전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빛이 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이런 부패성을 사용해서 우리들을 죄 가운데로 끌고 가는 사단의 역사 때문에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시면 도저히 우리들이 그렇게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순전한 자녀들이 되어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② 세상 때문에: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 살고 있음.
-원어적 의미;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한 가운데”; 죄의 영향
뿐만 아니라 오늘 성경에서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 세상이 또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세상은 어그러졌고 그리고 거스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적 의미로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부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악하고 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세상의 풍조에 순응하면서 살면 우리도 굽은 삶을 살고 세상이 바라는 대로 세상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고분고분 살아가면 우리들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출석 생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뒤틀린 그런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3. 은혜의 지배 아래서 성화의 삶을 살라;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죄를 죽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은혜의 지배아래서 거룩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그런 사람들로 성화되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서 저절로 빛으로 나타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셔서 거듭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화의 과정, 죄를 죽이는 철저한 거룩의 과정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결단코 빛으로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우세한 본성은 이제 새 본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은혜의 지배아래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새 본성이고 이 본성이 월등히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죄가 주는 작은 즐거움들을 탐닉하다가 죄 가운데 빠지고 그래서 바보 같이 그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도 이렇게 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끊임없이 주님이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시는 날 동안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후패해져가는 겉 사람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죄와 더불어 싸우고 그 죄를 죽이는 그 일에 열심을 다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실을 이렇게 매일매일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그래서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은혜의 지배 속에 머물기를 원하는 이런 철저하고 일관된 헌신된 투쟁 아니고서는 무엇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으며 그 하나님께 우리의 중심을 바치고 싶다고 하는 아름다운 이 헌신을 하나님 앞에 생각나게 해주실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고 우리에게 피할 수 없이 주어진 모든 짐들을 십자가로 생각하며 그 십자가를 진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하나가 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진 삶의 한복판에서 주님과 교통하고 그리고 철저하게 이 세상이 잠시 지나가는 것일 뿐 이 세상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더불어 끊임없이 기도와 묵상으로 싸우는 이 철저한 삶이 없이는 우리는 앞서 이 세상에 살다가 거품처럼 사라졌던 수많은 사람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들로 이 세상을 마쳤던 그 허무한 무수한 사람들의 후배가 되어서 그들의 길로 따라갈 것입니다.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의 그 엄위하심을 인하여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말로는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사한다고 말하지만 한번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격하는 적이 없는 껍데기밖에 없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우리는 두고 가는 이 세상을 안타까워하면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광야 가운데서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갔던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고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불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로를 우리가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하나님이 우리같이 쓸데없는 인간을 위해서 온 천하를 수십 번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당신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나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렇게 하나님을 모질게 반역하고 주님을 대적하고 그 영광을 훼방하면서 사는 짐승 같은 우리들을 위해서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 하소서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셨는데도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도 몰라보고 주님이 그들을 왜 이 죄 가운데서도 진멸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인내하시며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는지도 모르는 채 짐승같이 살며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대적하고 주께 불순종하며 그분의 창조주의 이름을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과 바꾸며 욕을 돌리는 것을 그렇게 참으시는 이유를 이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가벼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그분으로 하여금 오래 참게 하시고 가장 야수와 같이 살아가는 인간들도 당신을 대적하는 원수로 보시는 대신에 그 안에 남겨져 있는 당신 자신의 형상을 보시며 그들이 자신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시는 그들의 회개를 향하여 갖고 계신 그 실낙 같은 기대가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 일으켜 차마 이 세상을 두고 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를 위해 하신 아름다운 일들이 많지만 그 중에 항상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훌륭한 섬김 하나가 있다면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눈먼 자 뜨게 하고 병든 자를 고치시던 예수님의 그 자상한 손길은 고통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인간들, 자신들에게는 즐거운 날이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영혼의 문제뿐만 아니라 육신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얼마나 자비의 풍성한 마음을 갖고 계신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물 한 모금 떡 한 덩어리 만드신 적이 없지만 지치고 배고픈 수많은 백성들을 위해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손수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시던 예수님의 그 마음은 굶주리고 고통 받는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그림이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과 설교자의 외침을 통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들리는 음성이 아니라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과 하나 될 것을 포기하시고 자기를 비었고 왕이 아닌 종의 형체를 자처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꼭 같이 결핍과 고통 속에 시달리면서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면서 눈먼 자를 고치고 병든 자를 싸매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그림처럼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아파하시는 자리에서 예수님도 신음하셨고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해드리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는 그 자리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우시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불순종 사이에서 중보자로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렇게 고통 받으시던 그분에게 유일한 위로는 당신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이 강퍅한 인간들, 야수와 같은 이 세상을 위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원수까지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지만 어디든지 그분은 가시는 곳이 자신의 집인 것처럼 여기시며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친아들을 한분 밖에는 안 계신 당신의 외아들을 그런 모진 고난 가운데 버려두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예수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자기를 찢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속죄함을 입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 십자가를 보면서 그대들은 무엇을 생각합니까? 그 십자가에서 못 박힌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를 보고 무엇을 생각합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죄도 모르시던 그분이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여러분들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지금 마음속에서 차마 버리지 못하는 그 죄 때문에 지금도 죄지을 날을 꿈꾸며 마음속에 잉태하고 있는 그 죄를 위한 수많은 욕심들, 바로 그것들 때문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멸시와 욕을 다 보시고 그야말로 흠이 없고 순결하신 그분의 옥체가 산산이 찢겨졌습니다. 세상이 그를 끌어다가 십자가에 못 박았고 죄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러서 물과 피를 모두 내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죄와 어떻게 악수할 수 있겠으며 그분을 끌고 가서 매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세상과 어떻게 끌어안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지지난 주에 터키에 가서 정말 생애 잊혀지지 않는 고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존경하던 하나님의 사람 크리소스트미의 설교하던 그 예배당이 있던 자리에 섰습니다. 시골에서 설교하고 있던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을 코스탄티노플에 귀족들이 불러왔고 오자마자 그는 정직과 공의의 삶을 외치고 회개와 참된 복음을 삶을 부르짖었습니다. 결국은 거만한 귀족들의 손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가 남긴 말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느냐 그러면 나도 너를 버리노라’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래서 우리는 변천하는 이 세상에서 불변하는 진리를 보고 마음에 스쳐가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정욕도 지나가고 이 세상도 지나갑니다. 모두 지나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우리를 위해서 멸시와 욕을 당하고 고통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과 그 수치를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주와 더불어 싸우고 자기 안에 있는 죄들을 죽여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힘들 때마다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보다는 가볍고 세상 사랑을 버리는 일이 아무리 힘겨워도 예수님이 당신의 목숨을 버리신 일보다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 스스로를 위로해야 합니다.
잠시 구름 같은 이 세상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는 찬란한 빛 가운데서 일평생 우리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끊임없이 죄와 더불어 싸우며 하나 되고 싶어 했던 그 예수님을 찬란한 빛 가운데서 뵈옵게 될 것입니다. 그때 만약에 여러분들이 죄와 더불어 싸운 피 묻은 전투복을 입고 있다면 틀림없이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의 그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세마포 옷을 입히시고 면류관을 씌워주시며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저는 이 시리즈를 마치면서 여러분들을 향한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참으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시면서 이 세상을 좀더 두고 보시며 기회를 주시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 믿음의 경주를 다 달리고 선한 싸움을 마칠 때까지 끊임없이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유지하고 사는 신실한 성도들이 됩시다.
죄와 은혜의 지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