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즐거운 잠, 방탕한 잠:
게으름과 잠(2)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 ”(잠 20:13)
녹취자: 조경훈
이 지혜자는 인생을 달관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과 자녀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공통된 한 성품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잠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잠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달콤한 잠에 취할 때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젊어서는 잠을 너무 많이 잘까봐 자신을 경계하고 채찍질 했는데 지금은 잠이 안 와서 걱정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잠을 자기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성품이고 인간이 싸워야 할 중요한 주제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게으른 사람들은 대개 빈궁하게 살더라는 것을 지혜자는 말합니다. 부모가 많은 유산을 물려주었는데 게으르면 재산을 잃어버립니다. 게으른 사람은 게으른 것으로 마음이 만족하지 않고 정욕을 찾기 때문입니다. 결국 판단력도 흐려지면서 빈궁하게 됩니다. 눈을 뜨라고 말하는 것은 눈만 뜨면 부자가 된다는 게 아니라 일찍 눈을 뜨고 일을 하면 양식이 족하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같은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이 공식이 완벽하게 맞지 않을 수 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1. 잠언 20장 13절이 좋아하지 말라는 잠은 어떤 유형의 잠입니까? (131) (141)
잠이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잠이라면 왜 하지 말라 라고 하겠습니까? 잠을 잘 자지 못하면 건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면 안 먹어도 살이 찝니다. 밤 11시 부터 밤 1시 사이에는 수면 속에서 면역체가 형성이 됩니다. 잠잘 때는 빛이 없는 완전한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잠이 들어야 됩니다. 암막 커튼 같은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처음 사용할 때는 좀 답답한데 커튼을 치면 수면에 도움이 됩니다. 방에 모든 불빛을 없애야 됩니다. 그리고 깊은 수면 속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이것은 일정한 도를 넘어서 방탕한 상태가 되어버린 종류의 잠을 가리킵니다.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말로 테애하브라는 명사입니다. 히브리말로 아하브가 사랑입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항상 도를 넘습니다. 지나칩니다. 지나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도 아닙니다. 이 단어는 일정한 도를 넘은 방탕한 상태를 가리키는 동사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역을 하면 이 부분이 잘라지지 않고 붙어있습니다. 너는 가난하게 되지 않도록 잠자기를 사랑하지 말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잠자기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본성을 내버려 두면 그는 무기력하고 가난해 지기가 쉽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동물은 어떻겠습니까? 강아지 코코가 자명종 맞춰놓고 자는 것 보셨습니까? 개는 잠이 오면 자고 안 오면 깨어있습니다. 본능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방탕한 삶이 이런 본능에 충실한 삶입니다. 어떤 본능은 우리에게 참 인간다운 삶을 사는데 도움을 줍니다. 인간에게 생식의 본능이 없으면 인류가 번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식욕이 없다면 건강을 잃기가 매우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의욕이 없으면 대개 식욕도 떨어집니다. 식욕이 있다면 삶의 의욕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의욕과 상관없이 먹기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식욕이 삶의 의욕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근심이 많고 걱정이 있고 삶이 싫으면 먹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듣고 싶은 것도 없고 보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게 다 싫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정한 욕심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도 말 할 수 있습니다. 식욕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밥을 안 먹을 때 요리사들이 온갖 재료를 가지고 장난을 칠 때 우리 혀가 꿈틀거리며 받아먹으면서 건강을 유지하니까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요리도 많이 생각해 볼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그 본능을 따라 살 때 이것이 바로 방탕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2. 성경이 말하는 두 가지 잠은 각각 무엇입니까? (132-133) (142-143)
성경이 잠을 이야기 하는데 긍정적으로도 얘기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172:2) 이 때 에는 잠이 긍정적일까요? 부정적일까요? 긍정적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 안에서 평안을 얻을 때 깊이 잠들 수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옥에 갇혀서 처형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베드로는 깊이 잠을 잡니다. 이것은 죄악의 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잠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랑의 잠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0장 9절에 보면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설교를 듣다가 깊이 졸았습니다. 그러다가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우리도 가장자리에다가 나무를 하나 세워놓고 졸음이 오는 분은 약 3미터쯤 띠워서 거기서 예배를 드리면 어떨까요? 졸면 떨어지고 밑에는 스펀지를 놓으면 될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요나서에서도 태만의 잠이 나옵니다. 요나가 주님께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했는데 그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이 그 항해를 기뻐하지 않으시니까 바다에 풍랑이 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참 재미있는 게 하나님이 바람을 쏘시니라 라고 돼 있습니다. 얼마나 놀랐습니까? 배가 쫙 가는데 하나님이 그 배를 향해서 바람을 쏘시는 것입니다. 배 안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애매하게 요나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발사한 바람을 맞고 온 배가 재물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자신은 배 밑창에 들어가서 깊이 누워서 잠이 든 것입니다. 이것이 태만의 잠입니다.
삶의 의욕이 없으면 밤에는 잠이 안 오고 낮에는 잡니다.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의 잠과 태만의 잠인 두 가지 관점이 나옵니다. 이것이 시험의 잠이고 죄악의 잠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 봅시다. 우리의 잠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잠입니까? 아니면 태만의 잠입니까?
3. 방탕한 수면이 죄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34) (144-145)
방탕이라는 것은 일정한 도덕규칙이나 혹은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욕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물을 부어보면 낮은 데로 흘러갑니다. 바닥에 물을 확 뿌리면 길도 없고 낮은 방향으로 이리 저리 흘러갑니다. 방탕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도덕률과 규칙 규범과 상관없이 욕망이 가장 우세한 힘이 되어서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원하는 데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방탕입니다. 수면생활의 방탕은 잠을 자는 데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말할 것입니다. 잠자는 데 무슨 규칙이 있냐. 자면 되지. 잠 올 때 잠 오면 되고 먹고 싶을 때 먹으면 그것이 사람이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겠습니까? 몸에 특별한 이상이 있으면 아침을 안 먹고도 잠을 잘 수밖에 없고 너무 배가 고프면 밤잠을 안 자고도 밥을 먹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인간에게 주신 신체의 사이클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기가 찾아가야 됩니다.
방탕은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규율하고 규제하는데 너무 큰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에너지가 가장 적게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그것들은 또 다른 에너지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뇨습관이 있는데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당뇨 판정을 받거나 경고를 받았으면 기본적으로 맛없는 식사를 해야 합니다. 달고 짜고 매콤한 음식을 먹으면 안 됩니다. 진짜 맛없는 통밀 같은 것을 먹어야 합니다. 빵가게에 가도 설탕기운이 반지르르한 빛나는 빵들이 너무나 많은데 아무리 씹어도 아무 맛도 없는 호밀 빵 같은 것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부드럽게 간 것들을 먹으면 안 되고 딱딱한 원재료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기름기부분은 삼가서 육류를 먹고 운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다 자기 하고 싶은 것 하고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 경고조차 안 지키면 마지막에 합병증이 시작이 되서 손가락, 발가락, 다리 등을 잘라내야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았는데 나중에 돌아오는 청구서는 그때 제대로 지켰더라면 괜찮았을 희생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청구서가 되돌아오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에게는 예배드림이 기쁨이고 기도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예배드리는 것도 힘들고 기도하는 것은 고역이고 말씀 읽는 것은 머리에 쥐가 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올바르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복을 받는 것이 마음대로 살아가다가 마지막에 대형사고가 나서 인생이 난관에 처해서 치러야 하는 희생보다는 훨씬 더 적다는 것입니다. 수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도 결국 게으름에서 비롯됩니다. 게으름의 뿌리는 자기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이라는 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자기사랑은 지성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내 판단이 하나님 판단보다 낮다는 지성을 통해서 죄가 들어옵니다. 결국 정신을 차려서 생각을 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생각하여 보라. 생각하라는 것이 지성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수도 없이 나오는 것이 알지 못하느냐? 알지 못하였느냐? 입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알지 못하느냐 그 뜻은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알지 못하니까 바보 같은 삶을 살면서 인생을 낭비하고 온 몸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중요한 의무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생각을 안 하려는 세대입니다. 생각은 귀찮고 힘겨운 작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온 몸으로 부딪히면서 터지고 깨지면서 결국 마지막에는 생각해서 회개도 하게 되고, 생각해서 개똥철학도 나오고, 생각해서 마지막에는 신앙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일시적인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질문이 무슨 뜻일까요? 5시에도 안 일어나고 8시에도 안 일어나고 11시에도 안 일어나고 2시에도 안 일어난다는 뜻일 것입니다. 늦게 잔 것도 아닙니다. 늦게 잦으면 좀 늦게 일어날 수도 있고 아프면 당연히 더 잘 수도 있습니다. 너무 아프면 아주 자게도 됩니다. 제 시간에 잠 들었다고 하더라고 워낙 고단하게 바쁘게 살았다면 몸이 너무 과로해서 더 잘 수도 있습니다. 방탕한 잠을 많이 자는 이유는 일어나기 싫은 것입니다. 결국은 게으름입니다. 성화에서 신자가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진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순종하는 삶과 끊임없이 죄를 죽이는 삶 이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두 가지 자세를 요구하는데 일체의 부지런함과 주의 깊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함은 삶의 태도이고 주의 깊음은 지성의 부지런함입니다. 부지런한 것은 육체의 부지런함이고 주의 깊음은 정신의 부지런함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의 풍성한 삶이 이어져가는 것입니다.
집에서 살림이라도 깨끗하게 반짝 반짝하게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모두 그 사람만의 헌신이 있습니다. 영혼을 깨끗하고 빛나게 하는 사람도 똑같지 않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4. 방탕한 수면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초 작업은 무엇입니까? (135) (146)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면 방탕한 잠으로 인생을 낭비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회개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부모님이 아이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헝겊으로 만든 곰 인형입니다. 이 곰에 유해물질이 묻어 있다는 판정이 났고 이 제품을 회수하는 중입니다. 아이가 죽기 살기로 그 인형을 안 내놓는 것입니다. 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라돈침대처럼 어떤 효과가 일어날지를 모르겠는 것입니다. 저도 전기장판을 쓰다가 라돈얘기를 듣고 확 치워버렸는데 너무 추워서 다시 깔았는데 거기서 뭐가 나오는지 불안한 것입니다. 장난감을 뺏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아이를 개 패듯이 패고 뺏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이 아이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유해하지 않은 더 좋은 로봇 장난감을 사오는 겁니다. 요즘 애들은 공룡 좋아하더라구요. 수많은 공룡들의 이름들을 다 외웁니다. 세 네 살 된 애들이 수 십 가지의 공룡의 이름은 다 외우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은 아마 못 외울 것입니다. 더 좋은 장난감을 주면 정신이 버쩍 나서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기존 인형을 집어던지고 새로운 것을 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사는 행복을 깨달을 때 방탕한 수면보다 얼마나 좋은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5.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수면 생활이 방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36) (148)
신앙의 가치로 인생을 재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변화가 필요하고 하나님 만났으면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은혜는 신자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주님께 받은 이 은혜가 더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그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비로소 이 은혜가 얼마나 자기의 인생을 빛나게 해주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게으른 자의 나라가 아닙니다. 부지런한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는 아니지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방탕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을 때 장례예배에서 낭독되는 성경구절이라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는 자기의 관 위에 놓인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이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