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은 열정이 싫다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잠 19:24)
녹취자: 이미란
이런 책의 코드가 사실 오늘날의 사조와는 잘 맞지 않는 편입니다. 요즘은 ‘하기 싫으면 하지 마, 한번밖에 없는 인생이야, 너 좋은 데로 살아, 하기 싫으면 그만둬’ 라는 게 세상에서 흔히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생각들도 사실은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산업사회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60세 기준으로 보면 힘에 넘치도록 일했습니다. 직장을 위해서든지 뭘 위해서든지 기본적으로 그렇게 헌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삶 속에서 지금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되고 살 수 있게 되니까 그런 산업 사회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거기에는 우리가 생각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욜로(You Only Live Once, 인생은 한번뿐이다)’가 뭔지 아십니까? 한번 밖에 없는 인생에 대해서는 이걸 외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살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경쟁사회에서 어느 정도 승자가 된 사람들이 이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진짜 약자인 사람들이 만약에 그런 사람들의 구호를 생각 없이 따라간다고 하면 점점 이 사회에서 약자가 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반성들을 우리들은 양쪽으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힘든 시대를 살아가던 한 사람으로써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일에 내몰리고 기계처럼 인간이 일하고 인간의 노동이 값싸게 취급받고 하던 현실에 대해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우리는 한 시대를 전쟁이 끝나자마자 태어나서 이제까지 해방은 못 겪었지만 그 격동하는 시기를 겪으면서 살았으니까 그런 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우리의 삶의 방식과 태도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를 한번 생각을 하면서 우리의 갈 길을 세상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성경 안에서 우리의 갈 길을 정해보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에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이 말씀을 살펴봅시다. 게으른 사람이 뭐가 먹고 싶어서 손을 음식 그릇에 넣어봤더니 과자나 뭐든 잡혔습니다. 그런데 이걸 올리기가 너무 싫은 겁니다. 그걸 시인은 살면서 생생하게 본 것입니다. 자 이 전체가 의미하는 것은 게으른 사람은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1. 잠언 19:24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으름의 모습은 어떠한 것입니까?
배고픔을 경험했는데 음식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릇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없습니다. 입에 넣어야지만 허기진 것을 면할 것인데, 결국 시작은 했으나 일의 끝을 못내는 것입니다. 뭔가 열정이 부족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게으른 삶의 태도는 습관입니다. 그래서 이 태도가 습관으로 굳어지게 되면 우리의 온 몸은 부지런히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해 저항합니다. 게으름은 결국은 뭔가 일을 시작을 하지만 끝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게으른 생활은 우리의 정신을 더욱 실증에 빠지게 만들고, 이 실증은 더욱더 게으름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계속 순환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2. 영적인 게으름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들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가장 슬픈 것은 인생을 사는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불행한 것은 그릇된 목표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불행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표가 설정되고 그것이 올바르게 설정이 되었고 그것을 향해서 가슴을 뛰는 것만큼 우리가 진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게 생생하게 가슴 뛰며 살아 있게 하는 어떤 진리, 하나님의 말씀,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은 예전에 몰랐던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자기가 설정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면, ‘천지 창조의 목적’ 혹은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시리즈를 다시 한 번 복습하면서 가르칠 것들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의 은혜로 우리를 깨우시고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심으로써 이 영적인 게으름을 떨치고 하나님 앞에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화) 자 이렇게 보면, 목표가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서 저기로 가는 목표가 있습니다. 100의 힘이 듭니다, 그리고 바로 저기가 목표 지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실제로 이 길을 걸어가면 뜻하지 않은 사태를 만날 적이 있습니다. 분명히 시간 계산을 하고 갔는데 안개가 껴서 비행기가 뜨지 못하던지, 혹은 홍수가 나서 길이 떠내려가서 그래서 한없이 돌아가야 했던 경험들이 있습니다. 결국, 여기에서 저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100의 힘이 든다면, 사실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120쯤 가야 되겠다는 목표를 정해 놓고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러면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도착할 것이고,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미 이런 희생을 생각하고 빨리 달렸으니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실제로 필요한 것을 자로 재듯이 정확하게 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상황들이 벌어질 수 있으니 좀 더 많은 것을 예비해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써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게으름이 이런 식으로 반복이 됩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은혜에서 미끄러집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지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6가지 이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는, 죄를 경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 사랑입니다. 이것 때문에 총명이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정욕에 이끌림입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정욕이 아니라 개별적인 정욕입니다. 잘못된 특정한 것에 대한 욕심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통로가 되어 몸과 마음 전체를 정욕으로 물들여서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실천은 하지 않고 실천 없이 개념만 증가하는 것입니다. 실천은 하지 않고 지식적으로 생각만 자꾸 늘어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자기 부인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니다’라는 자기 부인이 없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태만한 기도 생활입니다. 이런 것들이 은혜에서 미끄러지는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질 때가 되면 죄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위험을 모릅니다. 세상사랑 때문에 아주 밝은 총명이 어두워지고 정욕에 이끌립니다. 그리고 실천은 없고 지식만 늘어납니다.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으니 당연히 하나님 앞에 진정한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기도 생활은 태만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에서 물러나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완전히 미끄러져버리는 것입니다. 언젠가 다시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문제3. 거룩한 삶은 결심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가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무엇으로 입증됩니까?
은혜에 감격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은혜를 받음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에 대해 멈추지 않는 끈임 없는 갈망이 있기 위해서는 성화 생활이 동반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현실성이 없이 탱크가 비행기를 맞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KT 전차는 탱크로써는 유일하게 지대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겨냥할 수 있습니다. 몇가지 기술적인 문제가 좀 있어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완성이 된다면 상당히 수준 높은 탱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많은 포탄을 쏜다고 하더라도 맞추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대공포라는 것이 있는데, 하늘에 물샐틈없이 포탄을 쏘아서 비행기를 떨어뜨렸습니다. 지금은 그런 시절이 지나가고 미사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기술이 좋아졌냐면 여기에서 쏘아서 평양에 있는 유리창을 몇 번째까지 맞출 수 있다고 하니 굉장한 것입니다. 1994년도 걸프전이 일어날 때만 해도 미사일의 오차가 200미터 정도 되었는데 그것이 4, 5미터로 줄고 이제는 1, 2미터로 줄어들었다고 하니 엄청난 겁니다. 아무리 많은 포탄을 쏘아도 맞추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달려갈 때 우리의 마음은 그 목표가 선하고 올바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기도하게 되고 그 목표가 이루어졌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안타까워하는 목표가 없는 사람은 성취되었을 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이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하면서 흘리는 눈물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삶이겠습니까? 아무리 편안하고 자신이 만족을 누리는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그렇게 행복한 삶이겠습니까? 더욱이 이 세상에는 하나님도 없고 인생은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이며 결국은 내 생에 가장 좋은 가치는 내가 행복을 누리고 만족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히 그런 목표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가여운 것이겠습니까? 신령한 것에 대해 멈추지 않는 갈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르는 줄 아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의 마음에 선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돌아가실 때가 되셨는데,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새로운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생애 전체가 바로 이 목표를 실천해가는 생애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죽을 때가 이르는 줄 아셨을 때에도 이젠 너무 힘겹게 살았으니 이젠 좀 쉬자 라고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던 그 목표를 따라 끝까지 질려 가사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렇게 하셨는데 이것이 얼마나 어려우셨을까요? 그러나 핍박과 시련이 있고 배신이 있었는데도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문제4.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안타까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한 것을 위해 분투하지 않는 사람은 악한 것과도 피나게 싸우지 않습니다. 선한 것을 위해 분투하지 않는 사람은 악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도 분투하지 않는다. 악과 싸워 분투하지 않는 사람은 선한 것을 위해서도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죄와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않기 위해 죄인들이 이 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일을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라고 이야기 합니다. 은혜에서 물러났습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라보는 것은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리스도께서 견디고 참으시는 만큼 힘들지는 않다. 그분을 생각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한번 자신의 인생이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한없는 자기연민에 빠지고 자기 인생을 살만하다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면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둘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은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는 삶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사람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면 가슴 뛸 이유가 없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때로는 자기를 비난하고 때로는 자신의 선의를 잘못 이해하고 악으로 자신에게 갚는다 할지라도 그런 것에 인간이니까 마음이 안 쓰일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생사 간에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며 가는 길입니다. 금방 끝납니다. 그리고 어두움의 휘장이 내려집니다.
(예화) 설악산에서 어느 교단 총회에서 목회자들하고 많이 모였습니다. 거기를 3일 동안 모여서 집회를 해 달라 해서 갔습니다. 제가 원래 눈이 조금 나쁩니다. 좀 좋아지기는 했지만, 저기서 머리가 하얀 원로 목사님 3분이 걸어오십니다. 내가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드려야겠다 싶어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아 교수님 왜 이러세요? 저희들이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제가 가르친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머리가 하얀 모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교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아직도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라고 합니다. 제가 착각인지 몰라도 오히려 제가 젊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세월이 흘렀는지 그대들 만난 지 엊그제 같은데, 교수 초년생이 되어 불같이 야단치고 그럴 때가 엊그제 같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늙어가는 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같이 늙어 가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인생이 덧없는 것입니다.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까불고 나쁜 짓하고 다니는 걸 이렇게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거 아무것도 아닌데 금방 늙는데, 늙지 않아도 어느 날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불치의 병입니다. ’ 라는 말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칼날 위에 자기 인생을 들고 아무 생각 없이 까불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그 용기가 전 너무 슬픕니다.
자 이 말씀을 다시 읽어봅시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전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우리가 마음 깊이 주님이 정말 수고 했다, 이 땅에 수고를 끝내고 너는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셔도 오늘 오후에는 내가 여전히 하고 있을 그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미워하지 말고 오늘도 오후에 잠시 생각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내가 정거장이 되고, 미움은 내가 종점이 되게 하자’ 라고 말입니다. 나로써 내가 마지막 피해자로써 그 미움을 끝내고 더 이상 그것이 또 다른 사람에게 원한이 되지 않게끔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