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길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령으로 거듭남(롬11:23下) 2005. 8. 28 주일 오전 1
2. 거듭나기를 사모하라 (요3:6) 2005. 9.4 주일 오전 17
3. 기다리시는 하나님 (눅15:20) 2005. 9.18 주일 오전 35
4. 본 남편에게 돌아가리니 (호2:6~7) 2005. 9. 25 주일 오전 51
5. 다시 마음을 베라 (렘4:4上) 2005. 10. 2 주일 오전 66
6. 하나님을 아는 것을 기뻐하심 (호6:6) 2005. 10. 9 주일 오전 78
1. 성령으로 거듭남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롬11:23 하)
1. 교회 안에 있는 비회심자들
먼저 지난 주 설교에 이어서 교회 안에 비 회심자들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회 안에는 비 회심자들이 있고 이 교회 안에 있는 비 회심자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교인이 되는 것으로 작정하는 것으로 가능하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의 한 일원이 되어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는 일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항상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교회 안에 있는 비 회심자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과 다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멸시되거나 혹은 교회에서 경계되어야 할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사람들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1장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설파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처음 구원은 유대인에게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그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을 알려 주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도 유대인의 혈통을 통해 보내셨고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선포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이었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완강하게 하나님을 거부하였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그들에게 거절당한 복음은 마른 가지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고 그 이방인들은 이제 돌 감람나무에서 꺾여 참 감람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서 본질적으로 변화가 되어 참 감람나무들이 되었습니다.
2. 접붙여지지 않은 본성
한편 참 감람나무에 붙어 있던 원 가지들인 이스라엘은 꺾여서 밖에 버려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있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회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참된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무거운 부담들이지만 세상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들으려야 들을 수 없고 또 어떻게 해야지만 그리스도의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는지를 알고 싶어도 알려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또 알려주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 유지되지 않지만 교회에 나와 있는 비 회심자들은 이런 은혜의 수단들을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참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한 교회 안에 있는 비 회심자들은 일단 교회가 영적으로는 그들이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참 예수의 살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일단 한 교회 안에 있으면서 형제로 받아들여지고 사랑한다는 점에서도 그들은 유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있는 지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비 회심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그를 위해 더 특별히 기도할지언정 회심하지 않았으니까 저 사람은 참 교인이 아니고 그러니 나는 저를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목회자가 눈물을 흘리고 가슴아파하는 것도 비 회심자들을 위해서지 회심하고 은혜 생활을 잘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비 회심 못한 상태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커다란 축복의 일부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설교를 듣는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이 교회에 이렇게 소속되어서 회심한 사람들과 설교를 듣고 있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이 큰 사랑을 입은 사람이고 특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교회 안에 있지만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많이 주신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은 회심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도 없고 또 이따금 길거리에서 만나서 한 장의 전도지를 들려준다고 할지라도 전도지 한 장으로 주님을 믿도록 충분한 빛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비 회심자들에게는 놀라운 은혜의 수단들이 항상 옆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참 신자가 되고 싶은데 나에게 진리를 가르쳐달라고 하면 교회 안에는 발 벗고 가르쳐줄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회심하지 못해서 예수의 살이 되지 못한 것 같은데 내가 정말 예수의 살이 되기를 원하니 나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할 때 그것을 아는 많은 지체들이 자신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기도해줄 것이고 목회자들도 그렇게 도울 것이기에 여러분들은 이 많은 수단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연락을 하고 챙기면서 교회 출석하도록 권면하는 것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큰 유익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모든 기도회와 예배의 참석, 경건한 의무의 이행, 교회의 출석, 그리고 섬기는 생활로의 부르심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제공해주신 훌륭한 은혜의 도구들입니다. 이들 중에 어떤 것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회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회 안에 비 회심자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있는 불신자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 안에 있는 비 회심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런 특별한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모든 축복의 수단들, 은혜의 도구들이 여러분들 곁에 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이 여러분들을 회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많은 중보기도가 그대들을 거듭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설교자나 좋은 목회자가 옆에 많이 있고 늘 여러분들을 위해서 염려하고 사랑해주는 지체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회심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는 것이지 그들이 여러분들을 위해 대신 회심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은혜의 기회들을 잘 활용하여 속히 회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복된 사람들이 되지만 이런 많은 은혜의 수단들은 주님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직까지도 회심하지 않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후일 이렇게 풍부하게 제공받은 많은 은혜의 기회 때문에 하나님 앞에 준엄하게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책임감도 아울러 느껴야 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많이 접하지 못하고 교회에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한 사람들은 그래도 다소나마 변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잘 전해주었더라면 저도 어쩌면 예수를 믿었을지 모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몸에 일부가 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누군가가 진지하게 설명해주었더라면 저도 하나님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지 아니하고 예수의 몸이 되게 해달라고 많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고 변명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이미 들어와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여러분들은 핑계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대들은 목회자를 통해 선포되는 많은 진지한 말씀들을 버렸고 그리고 성도들의 많은 여러분의 회심을 위한 눈물을 헛수고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자신의 회심을 위해 우는 남편의 깊은 통곡을 헛되게 했고 그리고 남편의 회심을 위해 진실하게 흐느끼는 아내의 가슴 찢는 수많은 기도의 날들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누구를 핑계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핑계될 수 없을 것이고 여러분들은 어쩌면 한번도 예수님에 관해서 진지하게 들어보지 못했던 불신자들의 처지를 부러워하게 될지 모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 회심하지 못한 신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와 그리고 그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저는 오늘이 시간에 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일부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입증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정말로 더 이상 교회 안에 있는 비 회심자가 아니라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살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이 왜 예수의 몸에 일부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의 본성이 접붙여질 수 없는 변화될 수 없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접붙여지지 않은 본성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예수의 몸에 살이 되어 접붙여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 생명과학에 대한 연구이고 특별히 체세포 복제를 통해서 인간이 많은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희망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발전을 하게 될지 두고 보아야 알 일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원리의 섭리, 그리고 오늘까지 우리의 의학의 경험으로 본다면 사람의 몸에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의 살이지 개고기나 소고기일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에 일부가 잘려져 나가거나 혹은 세포를 이식하여 피부를 접합하게 될 때 우리는 자기의 살의 일부를 떼어내어서 자기에게 붙이든지 혹은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 모든 생래학적인 구조가 맞는 사람의 장기 같은 것을 선택하여 몸속에 끼어 넣어서 자신의 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이치입니다. 그럼 이 육신의 몸도 이처럼 정교한 이치의 원리가 통용된다고 할 것 같으면 영적인 몸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교회의 몸도 그것보다 더 정교한 원칙이 적용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거기에 붙어 있는 모든 지체들 하나하나를 주님이 붙이실 때는 아무 살이나 붙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살을 만들어서 붙이십니다. 전혀 우리는 예수의 살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짐승과 같은 삶을 살던 더러운 죄인의 살코기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그들에게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하시면 고깃덩이에 불과하던 사람들의 몸의 본성이 변화되어서 예수의 살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은 살이 됩니다. 그렇게 만들고 나서 예수님이 그 살을 예수의 몸에 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계속 붙여나가도록 아직은 미약한 몸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섬겨주면 다시 피가 통하고 진액이 통해서 그래서 성숙하면서 참된 신자로 자라서 예수의 자연스러운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열린 교회도 그렇게 성장해온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무시해서가 아니라 정직하게 이런 원리를 놓고 볼 때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은 형식상으로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 붙어있는 지체이지만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본다면 여러분들은 예수의 살이 아닙니다. 다른 지체들이 예수의 살이 되어서 예수의 몸에 붙어 그래서 예수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들어가고 진액이 들어가서 그래서 예수님의 몸에 일부가 되어서 생활하고 있는데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은 교회에 있지만 아직까지 접붙여지지 않은 예수님의 살이 아닌 사람의 살, 또 사람의 살로 비유하자면 여러분들은 지금은 고깃덩이에 불과합니다. 전혀 기분 나빠하실 이유가 없고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교회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본성적인 살을 본성에 있어서 거룩한 성령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예수의 살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의 몸에 붙여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모처럼 이런 회심과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주시는 이유도 여러분들이 더 이상 교회 안에 예수께 접붙여지지 못한 고깃덩이로 있는 것을 주님이 마음아파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오늘 복음의 진실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은 그런 사람들의 본성,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은 본성에 특성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너희”라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오늘 설교하는 저를 포함해서 예수의 몸에 살로 붙어 있는 좋은 신자들 모두가 다, 오늘 교회 안에 남아 있는 비 회심자인 여러분들처럼 오랫동안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았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여러분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비 회심자이기 때문에 여러분들 안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원수 된 경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차례대로 입증해보이겠습니다.
우선 교회 안에 있어도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겉모습으로는 교회 안에서 일정한 의무를 준수하고 그리고 성도된 도리를 다하는 것처럼 생활하고 있지만 가치 판단하는 기준에 있어서 여러분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아닌 여러분들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중심이 된 모든 가치 판단은 하나님을 현저히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한다고 할지라도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서 가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너무 소중하고 생명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찮게 여기고 그것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받는 가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자기 교육을 받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것, 성경은 그것이 생명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 회심자들은 너무나 쉽게 이 세상과 타협합니다. 아니 타협한다기보다는 이 세상에 나아가서 자기가 숨겨진 본성대로 살아가는 노골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오늘 비 회심자인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참으로 이 세상에서는 가치 있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 가치 있다 그러시기 때문에 생명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나를 죽이려고 할지라도 나는 이 가치는 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것을 지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 회심자들은 가치 있는 것들을 위해서는 헌신하며 살지 않고 무가치한 것을 의해서는 생명을 버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차이가 나는 것은 비 회심자들은 영혼의 취향이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들과의 취향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거듭났고 그리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신자들도 때로는 세상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사는 일에 미혹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고 예수의 참 살이 된 사람들은 그런 일은 항상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고 잠시 그런 즐거움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거듭난 사람들의 영혼의 취향은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입니다. 그분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향기, 그분께로 비쳐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 그분께로부터 비쳐오는 참된 진리, 그분의 선,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 이런 것들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의 살로 진정으로 접붙여진 사람들은 잠시 동안 눈이 멀어서 은혜가 떨어져서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다가도 금방 돌이켜 서서 마음에 말할 수 없는 허기짐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같이 자기가 잠시 사랑하던 것들을 다 버려두고라도 예수의 냄새를 맡으려고 하고 예수의 사랑의 그 샘물에 목을 축이려고 하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따뜻한 손길에 자기가 쓰다듬어지려고 애를 쓰고 그것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이런 향취를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회심하지 못했는지 회심했는지 아직도 긴가민가 하는 분들에게 나는 오늘 완전한 시금석을 보이고 싶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이 과연 예수의 향취를 그리워해본 적이 있습니까? 물론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곤고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고 시련을 경험하게 되면 마음이 괴롭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좀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기라기보다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쪽으로 상황이 발전되고 있는 고통스러운 환경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니 자기 사랑에서 시작되는 눈물입니다. 비 회심자들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 회심자들이 이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풍겨나오는 향취가 너무나 감미로워서 아무데도 가지 않고 예수님과만 함께 있고 싶은 경험, 비 회심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참된 사랑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놀라워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오직 예수님께만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열렬함, 그런 시간들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그 안에서 예수의 사랑에 녹아지는 그런 깊은 자기 녹아짐, 이런 것이 없습니다. 비 회심자인 여러분들에게 내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기도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기에 너무나 갈급합니다. 돈도 필요 없고, 명예도 필요 없고, 구차한 생명도 필요 없습니다, 나는 예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예수여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영혼의 시선이 예수께만 고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목마른 적이 있습니까? 근본적으로 회심하지 못한 비 회심자들은 영혼의 본성이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처럼 영혼의 취향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의 은혜의 세계에서 풍겨 나오는 감미로운 천국의 향취를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의 향취에 민감합니다.
어떤 사람이 밀림에서 사자새끼 한 마리를 구해가지고 오랫동안 애완동물처럼 길렀습니다. 이놈이 꽤 컸는데도 그 주인의 말을 잘 듣고 주인과 밥도 먹고 뒹굴며 놀고 그랬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지만 결코 주인을 무는 적이 없고 그리고 주인 옆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미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어미 사자는 자기 새끼가 사람들이 사는 집속에 있는 것을 보고 너무나 안타까워서 큰 소리로 서너 번 울부짖었습니다. 그 순간에 이 사자 안에 있던 야성이 깨어나서 오랫동안 자기를 길러주었던 정든 주인을 뿌리치고 숲 속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영혼은 사자와 같습니다. 비록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하나님의 교회에 길들여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야수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라도 밖에서 으르렁거리는 야수의 성질을 자극하는 표호소리가 들리고 나면 그 야성이 자극되어서 본래의 고향인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오래도록 회심하지 않고 수십 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보다는 회심하지 못한 채 잠시 다니다가 교회를 그만 두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도 이런 논리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취향에 있어서 이런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서 또한 이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성적으로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정서를 영혼 깊숙이 빨아들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정서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밝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이 한번 자신의 마음속에서 예배 중에 일어나고 있는 이 정서의 변화에 대해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날 하나님이 예배에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함께 졸면서 예배를 드리던 옆 사람들이 깨어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 여러분들이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는지 한번 경험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절대로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고 회심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그 정서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난 여러분들에게 성령에 입각해서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에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주님을 깊이 만나서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영혼을 녹이는 것을 본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오히려 차갑게 오그라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영혼 안에 있는 정서와 회심하고 예수의 살에 접붙여진 사람들의 정서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지하게 선포되면 선포될수록 여러분들의 영혼은 긴장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주위에 있는 지체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의 뜨거운 사랑에 열렬해지는 정서로 바뀌면 바뀔수록 여러분들의 마음은 완강해질 것입니다. 소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심지어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받고 주님의 정서를 느끼면서 변화되고 있는 지체들이 비정상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배가 끝나도 많은 성도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자기를 회심시켜주시고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자신 속에 불어넣어주시는 피 같은 은혜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지만 여러분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의지의 면에 있어서도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현저하게 차이가 납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의지는 자기중심적인 의지이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거기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나 강인하고 용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본성적으로 변화된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은 의지에 있어서도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육이 펄펄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육적인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나아가서는 비굴해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의지를 꺾고 하나님, 내가 어찌해야지 되겠습니까? 나는 주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여 날 도우소서. 하는 그런 종류에 자기 의지의 꺾어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 회심자들은 실천적인 삶에 있어서 무신론의 삶을 살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거듭나고 예수의 살이 된 사람들에게는 항상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실천적인 삶에 있어서 예수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이 항상 천사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잘못된 삶을 살고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하나님 앞에 꺾어집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의 살점이 있는 사람들은 오늘 회개하고 있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육욕을 따라서 산 것에 대해서 뉘우치고 있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고 싶은 마음을 갖고 일주일 동안 죄악들을 마음속에서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 회심자들은 실천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면서도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뭘 잘못한 것이 있어.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내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내가 얼마나 많이 교회를 섬겼는데, 그리고 나는 그래도 내가 할 몫은 하는 사람인데 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예수님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그런 의무를 행하든 안 행하든 예수님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붙은 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더 노골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 여러분들은 노골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신령하게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는 참된 회심자들과 비 회심자들이 비교되지 않지만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은 이렇게 신령하게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서 부부싸움을 하고 아내를 때리고 자식들에게 폭언을 퍼붓지 않습니까?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는 비 회심자들이 다 집어 치우라고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지 못합니다. 주님이 두려워서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직장에 가서 여러분들이 부정을 행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신앙의 정조가 없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명령하신 명령이 일주일 동안 사는 동안에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관심거리가 됩니까? 정말 무엇을 해야지 내가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돈을 벌고 지위가 높아지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내 가족이 행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뭘 원하실까? 내가 하루를 살았는데 잘 산 것일까? 하나님이 싫어하신 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사람들에게 대하는 것을 주님이 좋아하실까, 싫어하실까? 싫어하신다면 어떻게 할까? 두려워하는 그런 실천적인 정신이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실천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신론적인 삶은 회심하지 못한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비록 남편이 되어서 교회에 나왔지만 회심하지 못했다고 칩시다. 그리고 이렇게 와서 신령하게 예배를 드릴 때 여러분들의 아내는 감탄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들도 회심하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대신 학대하고 주먹질을 한다고 칩시다. 그 아내가 여러분들 앞에 회심할 이유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비록 회심하지 못했지만 예수의 표를 머리에 붙인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여러분의 가족들이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집사나 권사나 교회에 어떤 직분을 맡다보면 이렇게 표는 하나 더 붙게 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실천적인 삶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 모든 변하지 않는 삶들이 바로 본성이 바뀌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것은 결국 여러분들이 보이는 교회의 지체가 되기는 했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예수의 살로 본성이 바뀌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이 이런 비 회심자들이 이렇게 모든 삶의 방면에서 거스르면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 거스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이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못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본성을 가진 인간입니다. 교회 마당에서도 가끔 이제 3-4살도 안된 애가 소리소리 지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안 해준다고 부모를 이기는 것을 봅니다. 그때마다 인간이 얼마나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인간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자기하고 싶은 대로 살려고 하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비 회심자인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하고 싶은 것을 하나님 때문에 안 해본 것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예배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집어치우라 말씀하실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것을 참으로 버리지 않고도 교회에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비록 회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이미 이익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비 회심자라고 할지라도 교회에 결석하고 일주일동안 살 때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셨습니까? 불편이 제거되지 않습니까? 이미 여러분들은 받을 것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것들을 가지고 거래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회심한 사람들은 여전히 욕심이 남아 있어서 해서 되지 않을 것들을 하기도 하고 자기의 것이 아닌데도 그것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회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행한 대로 하는 것이 마지막에는 고통스러운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 때문에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 생각하며 주님 앞에 꺾어집니다.
비 회심자들인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마음이 녹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녹아내리고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려서 그래서 양심의 가책과 괴로움으로 뼈가 상하는 것 같고 그 이후에는 하나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배신하고 내가 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였을까 하고 누구도 위로할 수 없을 만치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그래서 눈물을 쏟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아파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하고 예전에 그런 짓을 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주님을 위로해드리고 싶은 이런 착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비 회심자들에게 이런 경험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여러분들은 이미 예수의 살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노골적인 설교를 듣고 있는 동안에 여러분들은 어쩌면 마음속에서 그래 난 그것밖에 안된다. 어쩌겠는가 하고 반발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악마가 행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는 피조물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반감을 품는다고 가정해봅시다. 하나님이 여러분들로부터 왜 그런 거센 반발을 받아야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는지 한번 곰곰이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입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여러분들을 택해서 이 세상에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실수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드신 것이 잘못이 아니라면 또 한번 이유를 대보십시오.
여러분들을 위해 하나님이 교회를 만들어놓으신 것이 잘못하신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비록 회심하지 않았지만 교회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주신 것이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입니까?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일평생 듣지 못하는 진리의 복음을 매주 듣게 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실수입니까? 많은 지체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대들의 회심을 위해서 아내가 가슴을 찢고 남편이 마음을 찢으며 아버지 앞에 죄인처럼 긴 세월을 살아가게 하시는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입니까? 목회자가 무엇인가 교회를 나설 때마다 회심하지 못한 그대들의 영혼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신 것 그것도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입니까? 말해보십시오. 무엇을 잘못하셨기에 하나님께 여러분들이 원망하고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내가 너희를 잘라버리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처럼 교회 안에 있으나 예수께 접붙여진 참된 예수의 살이 아니니 내가 마음 아파하노라. 그러니 너희가 진짜 예수의 살의 일부가 되지 않은 것을 깨닫고 돌아와서 이제는 그만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이 되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님이 못하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완강하게 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들의 정체는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겉모습은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고 일정한 의무를 행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이 깊은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고 주님과 원수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회개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바뀔 수 없는 본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어떻게 거듭나고 예수의 살에 일부가 될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추론해볼 때 여러분들이 만약에 회심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도 심지어는 교회가 완전하지 않으니 여러분들을 회심한 사람으로 잘못알고 직분을 맡겨주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함께 교회를 섬기게 하고 여러분들이 일정한 의무를 다하게 하고 여러분들을 성도라 혹은 직분자라고 불러준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본성이 변화되어서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았다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 된 감정을 품은 가운데 행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원수 맺어보신 일이 있습니다. 그 인간은 정말 보기도 싫고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다시 만나기도 싫은 그런 인간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없기를 바랍니다만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여러분들과 화해한 일도 없이 만면의 웃음을 띠고 여러분들 앞에 나타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두 손을 무릎을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기쁘시겠습니까? 그 인사를 통해 공경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들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아무개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제가 당신이 잘 지냈는지 무척 염려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할 것입니다. 더욱이 그가 여러분의 옷에 먼지가 묻었다고 하며 옷에 먼지를 털어줄 때 여러분들은 온 몸에 송충이가 기어가는 것 같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가 주는 선물이 있다고 무엇인가를 내밀 때 그것은 오물처럼 여러분들에게 더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교회의 출석과 그리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섬김, 심지어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의 모든 봉사행위까지도 하나님에게는 이렇게 악하고 더럽게 느껴진다고 하는 사실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모든 죄인들을 용납하시지만 그러나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의로운 사람보다 죄를 범한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해주셨고 그들을 당신 품에 불러 모으셨지만 그들은 예전에 죄인이었던 사람들이지 예수님의 품에서까지도 예수님보다 죄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비 회심자들은 그것은 너무나 엄격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분명히 사랑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있지만 그 사랑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사랑입니다.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에게 오늘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가면서 길을 걸어가면서 나 같은 인간을 왜 이렇게 사랑하실까 하는 주님의 사랑에 눈물을 흘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회심치 못한 채 나를 이제껏 까지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대해서 펑펑 울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회심한 이후에 일어나는 일이지 회심하기 전에 일어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중에 사랑하는 어떤 성도가 있는데 그가 일평생 끊임없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예수님의 이름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예수를 위해 쓰고 건강도 예수를 위해 쓰고 자나 깨나 예수님만 생각하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고 온 몸을 다해서 교회를 사랑하고 섬겨서 마지막에 주님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해 산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해주시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동일한 원리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주님이 많이 사랑해주셨는데도 거부하고 회심할 기회를 끝없이 주셨는데도 뿌리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복음의 정신을 눈물로 가르쳐주셨는데도 싫다고 뿌리치고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가치판단에 있어서, 취향에 있어서, 정서에 있어서, 의지에 있어서, 실천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완강히 거스르며 제 좋을 대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내버려두신다면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셔야 합니다. 더욱이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 선택하셔서 일찍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깨닫도록 만들어주신 사람들은 더 많이 심판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핑계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같이 이렇게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지옥을 이야기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면 천국도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누군가가 지옥이 없음을 입증하고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면 저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오히려 저에게 설득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시고 영원히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믿고 신실하게 의지한 사람들은 축복하셔서 그들에게 복을 누리게 하시고 주님을 거스르고 회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채 교회에 오래도록 남아 있으면서 이런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벌거벗은 몸에 지푸라기를 잔뜩 두르고 불을 견디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매주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교회생활, 그리고 일정한 의무를 감당하는 신앙생활에 형식을 띤 모든 의무의 이행들, 그리고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단정한척 하고 일주일의 삶과는 상관이 없는 다른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모든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이것들 때문에 여러분들을 심판하시지 않아야 할 이유는 아무 것에도 없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영혼이 위험한 상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의 죄는 매우 큰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는 적극적으로 악을 행한 적이 없고 나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매우 커다란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그 사랑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옳다고 부르짖는 사람도 없고 그들은 모두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녹아져서 자기가 죄인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잘못했노라고 고백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든 가운데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은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내가 이 세리와 같이 죄인이 아닌 것을 감사하다고 이래에 두 번씩 금식하고 이러이러한 선한 일을 행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예수의 몸으로 여겨주시지 않았습니다. 일생동안 죄밖에 지은 적이 없는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내가 죄인입니다.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사실 그는 이제껏 죄밖에 지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 여기시고 예수의 몸에 일부로 접붙여주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전에 죄를 지었지만 그 죄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 안에 남아 있는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이런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예수의 살로 만들어 그분의 몸에 접붙여질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기회들은 마치 시장에서 물건이 나열되듯이 그냥 전시된 그런 기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기회들이 제공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많은 지체들이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릴 수 없을 때 여러분들의 회심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고 아내가 여러분들의 회심을 위해서 수년 동안 죄인처럼 애통해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남편이 아내인 여러분의 회심을 위해서, 여러분들의 부모가 자식인 여러분들을 회심을 위해서 울부짖었고 그들은 만약에 여러분들이 회심하고 주님의 품에 안길 수가 있다면 자신들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리만치 처절하게 수많은 날들 동안 울부짖으며 아파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그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였고 그들의 심령에 피눈물이 쏟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과 자식과 부모 속에 들어와서 흘리신 피눈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이제껏 까지 교회 안에 회심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모든 지체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와서 받은 수많은 이익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잘못하셨고 그리고 목회자와 사랑하는 성도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불러서 핏덩이와 같은 여러분들을 당신의 품에 안으셨습니다. 본성적으로 변화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태어날 때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시체와 같은 여러분들을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거듭나는 길은 오직 이 세상에 있는 썩어질 것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 거룩한 보혈로 말미암아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수시로 당신 자신의 앞가슴을 풀어헤쳐 불은 자신의 젖을 여러분들의 입술에 물리고자 하였습니다. 굳게 다문 여러분들의 입술에 젖은 젖꼭지를 물리신적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어미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젖을 여러분들의 입술에 대었습니다. 빨기만 하면 그 신령한 젖이 여러분들의 몸속에 들어가 살코기에 불과했던 여러분들의 그 살이 예수의 살이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교회에 접붙여져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수 있었을 텐데 여러분들은 완강하게 그 입술을 열어 그 젖을 빨기를 거부했습니다. 교회는 출석했고 헌금도 했고 이런저런 일로 섬기기는 했지만 여러분들이 정말 해야 할 중요한 일 입술을 벌려 어린아이처럼 그 신령한 젖을 빨아먹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입을 열도록 수많은 성도들이 핍절한 여러분들의 영혼을 보고 예수께 가까이 와서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 속에는 지금 이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들을 위해서 우는 여러분들의 가족과 지체들이 있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위해 울어주지만 그들이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회심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가슴을 풀어 예수의 젖을 물려주지만 내가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빨아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 모든 것을 완강하게 여러분 스스로 거부했고 심지어 어떤 때는 젖꼭지를 빨기는커녕 그 젖꼭지를 물어 피가 뚝뚝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한두 번이 아니라 긴 세월들을 이렇게 살면서 교회의 몸을 아프게 한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나 내버려두셔야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죽음 이후에 교회에 출석했다는 이유 때문에 일생에 그 껍질을 썼을 뿐 하나님을 대적하고 말씀의 젖꼭지를 물어 피 흘리게 한 여러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여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올바른 성품에 따른 공정한 처사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이제도 믿을 것이 남아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는 오랫동안 골수불교를 믿던 집안에 속해 있던 자매 한 사람이 나와서 예수님을 믿고 회심했습니다. 마당에서 제가 만났습니다. 그때에 6주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생전 처음 교회에 나왔는데 첫날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이 너무나 무섭고 혼자 있는 집에 가면 시커먼 사람이 늘 있는 것 같아서 두려웠는데 회심하고 나니까 주님이 항상 자기와 함께하는 것이 느껴진다고 제게 고백을 했습니다. 회심하지 못하고 있는 여러분들은 만약에 그 자리에 여러분들이 비어주고 그 자리에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아까 그 여성과 같은 자매들이 돌아와서 여러분의 자리에 앉았더라면 얼마나 더 많이 회심하고 지금쯤은 훌륭한 예수의 몸이 되어서 살이 되어서 주님을 섬기고 여러분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무엇입니까? 왜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 있지만 예수의 살인 적이 없습니다. 예수의 피가 여러분의 살 속에 따라서 흘러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회심하지 않은 완고한 유대인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언제까지 하나님 앞에 그런 태도를 견지할지에 대해서 오늘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 마지막에 죽고 난 후에야 내가 회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아직은 회심하지 못한 채 한번 살아볼만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즐거운 일도 많고 그리고 기쁜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그 심판이 여러분 속에 시작되었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가 묻고 싶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계십니다. 행복하십니까? 예배에 참석하고 계십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 여러분이 주님 앞에 열납 되는 것이 경험하고 계십니까? 예배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도록 쏟아지는 것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물론 저는 설교를 길게 하겠다고 뜻을 세운 사람은 아닙니다. 짧게 할 때는 짧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슬퍼하는 것은 설교의 길이를 조절하지 못한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길이에는 관심이 있지만 내용에는 관심이 없는 비 회심자들 때문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좋은 교회를 보지 못해서 그렇지 이 땅에 좋은 교회들 속에는 참다운 생명의 말씀이 주일날 3-4시간 울려 퍼진 교회도 있었고 한국교회사를 보면 주일 예배를 7시간 동안 설교한 기록도 나옵니다. 몸을 비비꼬고 핸드폰을 받고 슬리퍼를 끌고 교회당을 나가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렇게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저에게 강요하지 마시고 노력을 할 것입니다. 짧게 하도록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촉구하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돌이킬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여러분들이 거절하는 그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갔을 때 너 회심했는가. 안 했습니다. 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나. 아닙니다. 김목사가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회심하지 않았는가. 너무 길었습니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하나도 우습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살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무나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는 분은 이미 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아직 회심하지 않고 교회에 들어와 있기는 합니다만 이것도 여러분들이 걸어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심하지는 않았지만 회심 이전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이처럼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21살 때 회심하고 예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회심하기 전에 하나님이 저에게 먼저 은혜를 주셔서 제 발로 교회에 걸어가게 하셨고 교회에 간 다음에 회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렇게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 것도 여러분들이 한없이 감사해야 할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 없이 회심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이렇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여러분들이 제대로 활용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마음을 다해서 예배에 참석하신 적이 있습니까? 일주일 동안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내 마음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수많은 지체들이 내 옆에서 회심하고 예수님을 만날 때 제발 나를 소외시켜주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까? 예배 시간도 늦게 마치 공연장에 들어오는 사람처럼 기대감도 없이 그리고 예배당에 참석해서 시계를 들여다보고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수많은 은혜가 주어졌어도 여러분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본성을 변화시키면서 예수의 살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들의 살로 삼아서 예수의 몸에 붙여 예수의 심장의 피가 흐르게 하시고 예수의 진액이 흐르게 하셔서 여러분들이 예수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소외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때가 되면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지체들이 왜 그렇게 기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여러분들은 왜 설교자가 그 많은 날 동안 그렇게 많이 울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왜 그렇게 죽고 싶어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주를 믿노라고 주 이름 부르나 문 굳게 닫아두니 한없는 내 죄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대들 자신을 위해서 회심하기 싫다면 나를 위해서 회심해주기를 바랍니다. 제가 주님을 만나고 일평생 한일이라고는 이 교회를 섬기는 것밖에 없는 여러분들이 회심하지 않으면 주님 앞에 가서 제가 뭐라고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없는 그 하늘나라가 어떻게 내게 천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주님을 거스르며 죄 가운데 살아오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형식은 있었지만 근본은 바뀌지 않아서 중심을 주님 앞에 드리지 않은 죄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회심할 수 있도록 주신 수많은 기회들을 외면했던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많은 가치관과 생각, 그리고 판단에 있어서 여러분 자신이 중심이 되었던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하고 그리고 끝까지 남아 있는 자기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했던 것, 무엇보다도 형제들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교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을 상처 냈던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도 예수 믿는 표를 붙이고 이 세상에 나아가서 그릇된 일을 행하여 비윤리적인 삶으로 사람들에게 지탄받았던 것에 대해서 회개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하나님이 뭐 잘못하신 것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에 속하지 못했는데 여러분들을 교회에 불러주셨는데 예수님이 잘못하셨습니까? 매순간 복음의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시고 교회 안나오면 여러분들에게 애타게 심방을 하고 전화를 하고 참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 되라고 수없이 타일렀는데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비난받으셔야 됩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이 머리이신 예수님에게는 기쁨이 아니라 많은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살이 아닌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몸을 찌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심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자부했던 사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혹시나 하는 기대 때문에 여러분들을 여전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오랫동안 살코기로 있었으니 조금만 내가 참으면 저희가 진실로 본성이 변화되어서 지금은 모르지만 자기의 죽을 영혼을 위해서 내가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알고 그래서 회심하고 이후에는 예전에 내 마음을 아프게 해주었던 것보다 더 기쁘게 하면서 살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오늘도 여러분들을 위해 참고 계시고 그래서 많은 지체들이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한번도 여러분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여러분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대들이 오래도록 회심하지 못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여러분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끌어안고 살라고 교회를 세워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완고한 삶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예배 시간마다 지상에 내려온 하나님의 나라를 느끼고 예수 사랑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쁨, 죄와 근심으로 인해서 어그러진 마음들을 주께서 풀어주시고 은혜와 위로의 빛을 물 붓듯 부어주셔서 이 땅에 살지만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하시는 기쁨을 느끼고 싶지 않습니까?
저와 그리고 사랑하는 지체들이 맛보고 있는 이 예수의 달콤한 은혜, 뼈 속까지 스며드는 이 감미로운 사랑, 어두운 이 세상에 어디에 있든지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는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은혜, 가슴을 녹이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여러분들도 느끼고 싶지 않습니까? 그 빛 가운데 살고 싶지 않습니까? 모두 아주 가까이 여러분들 가까이 있습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3. 접붙여지는 길: 회개함
오랫동안 주님이 여러분들을 기다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가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여러분들을 정말 사랑합니다.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을 오늘 깊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탁합니다. 주님을 오랫동안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 밖에 세워두지 마십시오. 이 긴 세월동안 주님이 피 묻은 손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시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제 여러분 회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너무나 많은 날 동안 교회 안에서 신자의 너울을 쓰고 예배 생활을 하였지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십시오. 주일만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요일도 나오겠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려달라고 고백하십시오. 사랑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이 능히 너희를 접붙이실 수 있음이라” 주님이 여러분들을 접붙여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두 빛 가운데서 기뻐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거듭나기를 사모하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1.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을 해설하자면 이 안에는 거듭나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가장 핵심적인 진리들을 신약에서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처음 태어날 때는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그 안에서 9달 반 동안 사람의 신체가 형성이 되고 그리고 정신까지 기능을 갖추게 되어서 몸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게 첫 번째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태어나 사람들이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영혼도 육체가 태어난 것처럼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육체는 사람의 몸을 빌어서 태어났지만 영혼은 성령의 힘을 빌어서 다시 태어남으로 영혼도 살아있고 육체도 살아있어서 참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답게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접붙임과 거듭남
오늘 성경에 보니까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이 유다의 관원이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으니까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관원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권력을 가진 관원이었습니다. 국권은 잃어버렸지만 로마는 개개의 민족의 종교에 대해서 별로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래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그래도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공의회를 만들어서 거기에서 공의의 의원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도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을 사시하고 신문하고 처결할 수 있는 종교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바리새인으로서의 종교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영망이 있고 또 인텔리에 속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밤에 찾아온 것은 낮에 찾아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리새인으로서 대낮에 찾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 무엇인가 도를 얻기 위해 찾아간다고 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눈에 보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명예나 모든 일에 있어서 좋지 못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아마 밤에 찾아왔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이 비록 바리새인이었고 바리새인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모든 것을 통해서 상당히 감화를 받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이 밤에 예수그리스도를 찾아온 것도 어떤 물질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신앙의 도에 대해서 좀더 깊은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올 때 예수님에 대한 두 개의 아주 선명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예수님께 대한 매우 호의적인 인상이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임에 틀림이 없다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은 받은 선지자와 같은 선생님이라고 하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분의 하신 모든 일들로 미루어볼 때 그것은 놀라운 일이며 이런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 아니라면 행할 수 없다고 하는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믿음에 가까운 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찾아와서 이 니고데모는 제일 먼저 자기가 받은 인상을 예수님께로 진술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3. 거듭나지 못한 자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으신 선생님이시며 또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하는 진술을 예수님께 올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위하는 예수님께 상당히 호의적인 진술이었고 예수님은 당연히 그 사람의 그런 진술에 대해서 칭찬하시든지 아니면 호의적인 어떤 반응을 보이셔야지 만 마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이야기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당신이 하실 말씀만 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인텔리고 종교지도자인 나이든 이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매우 당황스러웠고 그래서 엉겁결에 예수님께 매우 수준이 낮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이미 나이가 들어서 늙어 이렇게 사람 몸집이 커졌는데 어떻게 어머니의 배속에 다시 들어가서 그 태에서 두 번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고 명백히 말씀하시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거듭나야지 되겠다고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즉 사람의 몸이 어머니의 태를 빌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은 육에서 육이 태어나는 것이고 예수님이 지금 다시 태어나야지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미 태어난 그 육이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영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태어나는 것은 어머니의 육체를 빌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좋은 인상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 거듭남과 접붙임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서부터 계속해서 회심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에 여러분들이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선택되어 교회로 이끌려지게 되었고 이 교회에 들어와서 여러분들은 거듭났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질 수 있는 아주 놀라운 은혜의 기회들을 풍부하게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이 누구이고 죄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지 구원받을 수 있고 어떻게 해야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질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지만 참 신자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풍부한 진리들이 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때를 따라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충분히 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여러분들의 진정한 회심을 위해서 진정한 거듭남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많은 성도들의 눈물이 있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거듭나고 회심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기를 바라며 헌신적으로 수고하는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여러분들은 특별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제공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제공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의 모든 수고가 여러분들을 저절로 여러분들의 의지에 반해서 거듭나고 회심하여 예수의 몸에 접붙이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기회일 뿐이고 이 기회를 활용해서 진정으로 회심하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은 여러분들이 선택해야 할 일이고 여러분들이 그렇게 선택하고 그렇게 되기를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로서 여러분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일부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미 한차례 여러분들에게 비유를 들었지만 너무나 생생한 비유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다시 듣고 싶어 하는 충동을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피부에 어느 부분에 결함이 있으면 이식을 합니다. 그때 이식은 바로 자기의 살 중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떼어서 보이는 결함이 있는 부분에 접붙이고 꿰매어서 그래서 우리의 피부를 이식합니다. 그 이유는 엉덩이에 붙어 있는 살을 얼굴로 옮긴다고 하면 살에 부위는 틀리지만 그 살이 동일본질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에 한쪽에서 떼어내고 다른 쪽에 붙여도 그것이 우리의 몸이 잠시 후에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식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얼굴에 결함이 있어서 피부를 떼어내고 그리고 손바닥만한 피부를 다른 곳에서 다시 이식하여야 할 상황이 벌어졌을 때 여러분들 중에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소고기를 떼어서 여러분들의 뺨에 붙일 사람이 있겠으며 닭고기를 떼어다가 여러분들의 볼에 붙일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바보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닭고기나 쇠고기는 여러분들의 얼굴 살과는 동일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갖다가 기가 막히게 꿰매어 거기에 붙여놓는다고 할지라도 둘은 접합되지 않습니다. 핏줄도 통할 수 없고 신경도 통할 수 없습니다. 결국 언젠가는 이것은 이것대로 떨어져 나가고 썩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이실 때 우리가 거듭나고 회심하여 변화된 사람이 된 후에 변화된 영적인 영혼이 된 후에 그리스도께 예수께 접붙이시는 것이지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은 채 예수의 몸에 접붙이실 방법이 없고 접붙이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접붙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무모한 일을 전혀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회심하고 거듭나서 본성이 새로워진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예수의 몸에 접붙여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몸에 그렇게 접붙여지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줄과 신경이 통하게 되어서 예수의 몸에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기계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라져서 그 손가락을 싸들고 병원으로 가는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다.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딱 잘라졌는데 그 잘라진 손마디가 한마디 이상 잘라졌습니다. 그것을 얼음에다 싸서 그래서 병원으로 가야지 됩니다. 빨리 가야 합니다. 불과 한 3-40분 안에 병원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손가락 색깔이 검게 변해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피가 줄어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진액이 빠져나오고 피가 빠져나오면서 수축되어서 오그라든 것입니다. 그래도 병원에서 기가 막히게 접합수술을 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붙였는데 처음에 붙인 손가락을 보면 꼭 손에다가 골무를 낀 것 같이 남의 살이 붙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몇 달 지나고 나니까 다시 핏줄이 통하고 힘줄이 통하면서 신경이 살아나고 손톱까지 빠진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잘라진 손마디가 몸에서 떨어져나갔고 몸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동의본질이기 때문에 접합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접합하게 되면 처음에는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핏줄과 핏줄이 이어지고 신경과 신경이 연결이 되고 힘줄이 서로 연락하고 피부가 접합이 되면서 자연스러운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에 부르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몸에 접붙여지게 하시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에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정으로 거듭나 회심하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혼이 접붙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 안에서 참된 예수의 몸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교회의 한 일원이 되었고 형제자매로 불려지고 그리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기도 하고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외형적인 모습이고 영적으로는 그가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몸과 동일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질 수가 없습니다. 그냥 섞여 살 때는 그냥 섞여 살지만 그에게는 예수의 생명이 없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머리를 드시고 당신의 교회들을 들어올리실 때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붙어 있는 모든 몸들은 함께 씻겨져 들려짐을 받을 것이지만 그의 몸처럼 여겨졌던 많은 부속물들은 결국 모두 벗겨지고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그것을 비유하자면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에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인 영적 교회의 일부라기보다는 거기에 심겨져 있는 신발이나 양발, 그리고 장갑이나 외투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생명이 있는 존재로서 예수께 접붙여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당신의 몸만 꺼내실 때에 그것들은 모두 벗어버려야 될 것들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진정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이곳에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회심하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합니다. 나는 이제껏 별로 그렇게 나쁜 짓 하지 않고 잘 살아왔는데 그런데도 제가 거듭나야지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물론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반듯한 삶을 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을만한 소문난 죄를 저지르지 않고 여러분들이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이지는 것은 그 살이 변하여 예수의 몸과 동일본질이 되는 것이지 그렇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렇게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번에 설교 드린 바와 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회심하지 아니하면 여러분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려고 하는 본성의 경향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살로 변화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거듭남과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고 그리고 그런 거듭남과 회심이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진정으로 접붙여진 예수의 살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박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의 회원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여러분들의 회심을 판단하려했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회심하고 그리고 거듭나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으면 세례를 받았어도 여러분들은 성찬에 참여하면 안 됩니다. 죄짓는 것입니다. 거룩한 그리스도 예수의 살과 피를 기리는 이 성찬에는 오로지 진정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만이 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과 접붙여짐의 관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다고 하는 것은 완벽하게 동의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순간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속에 안식을 얻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오늘 이 거듭남의 필요성을 좀더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거듭나지 못한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는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을 오늘 우리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 거듭나지 못한 자는 영혼이 죽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은 움직이지 않고 숨쉬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모든 것들이 기능을 멈춘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육체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죽은 자는 고깃덩이를 쓸어놓은 것처럼 아무 말이 없습니다. 반응하지 못합니다. 모든 작용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들은 육체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라고 하는 단어가 영혼에 적용될 때는 죽음의 의미가 아무런 동작을 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저는 성경이 우리에게 예수 믿고 거듭나기 전에 우리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살펴보고 그리고 그것이 진짜 육체의 죽음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회심하기 전에는 우리의 영혼이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거듭나기 전에 우리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면 제가 묻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우리의 영혼의 활동이 없고 영혼의 어떤 움직임도 없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영혼이 어떤 움직임도 없고 활동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었겠으며 대적하는 것 자체가 작용이니까 말입니다. 또 오늘날 발달한 이 첨단문명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영혼이 지성적인 활동을 함으로서 만들어낸 인류의 문명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가, 나쁜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어째든 이런 놀라운 문명을 일구어내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영혼이 활동한 결과이고 그 영혼의 활동이 이성으로 나타난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문화, 예술, 그리고 철학, 학문, 과학, 수많은 기계들이 바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영혼이 활동하지 않는 것이 영혼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성경이 우리를 분명히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는데도 그 죽은 영혼을 가지고 우리는 이렇게 문명을 일구어내고 그리고 이렇게 사유하고 이렇게 살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영혼이 죽음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논증을 함으로서 여러분들의 이해를 분명하게 하려고 합니다.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고 나면 음부라고 하는 곳, 낙원이라고 하는 곳으로 가게 되고 마지막에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우리 모두 몸이 부활하게 될 때 그 몸이 음부와 낙원에 있는 영혼과 결합되어서 믿었던 자들은 생명의 부활을 경험하고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리고 불신자들은 이제 심판의 부활을 통해서 그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 지옥을 사망의 장소라고 부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거기를 생명이 있는 곳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의 영혼이 멸절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불멸의 존재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잠시 후면 죽지만 그러나 이렇게 죽음을 통해서 육체와 헤어졌던 영혼은 다시 자신의 육체와 만나서 불멸의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분명히 지옥도 천국과 마찬가지로 불멸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멸절되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최대한의 고통을 받으며 그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증대되고 날마다 새로운 고통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가 바로 죽음의 장소입니다. 그 속에서 영혼들은 활동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활동합니다. 거기서도 아마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울부짖으며 영혼들이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거기를 생명의 장소로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죽음의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이 제거된 상태가 바로 이 죽음의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거듭나고 회심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기 전까지는 작용하고 있고 움직이고 있고 활동하고 있지만 그 안에 예수의 참된 생명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발달한 문명과 지혜, 학문과 예술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이 창조시에 두셨던 어떤 원리들을 부지런히 찾아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음악을 쓴 것은 재미가 하나도 없고 지루하고 짜증나고 어떤 사람이 음악을 작곡한 것은 매우 들을 때 우리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고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정하신 음악의 한 이데아를 찾아가는 결과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추종할 수 있는 이성적인 능력이 아직까지도 영적생명이 제거된 상태에 있는 인간들에게도 상당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작곡을 해야지만 감동적인 곡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작곡을 해도 히트곡이 나올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 같은 사람은 이런 것들을 수자적인 배열로 설명하면서 우주는 수가 본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되신 하나님 이외에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실 분이 없지만 하나님의 이런 지식은 인간의 본성 속에 녹아있고 자연과 우주 속에 녹아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그것을 탐구해서 인생의 참된 길이 무엇인지를 사람이 부지런히 공부하면 아무 생각 없이 욕심이 이끌리는 대로 사는 사람보다 단정하고 어느 정도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의 이데아를 발견해가기 때문입니다.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것들은 만들어내는 것이 과학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물사이에 법칙들을 발견해가는 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그것들을 발견해갈 때 사물 개체 개체에 있는 이데아에 접근하게 되고 그것들 하나하나는 모두 아름답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하고 이렇게 찬란한 첨단문명을 누리면서 살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문명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눈물로 기도해서 만들어낸 문명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나 하나는 개별적으로 이데아를 찾아가지만 이 이데아를 모두 묶어서 그래서 이것들을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이 놀라운 일들은 자연적이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얘기했던 소위 선에 이데아의 개념은 철학자들이 생각을 했을 뿐이지 그것을 실제로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영혼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초자연의 세계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어있는 영혼도 그렇게 활동을 합니다. 그렇게 활동을 하지만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없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로부터 전해지는 이 생명의 효과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있으면 그것은 잠시 후에 그리스도 예수의 핏줄과 이어지고 신경과 연락이 되고 그리고 힘줄과 근육들이 이어져서 예수의 자연스러운 몸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손목이 기계에 끊어졌습니다. 떨어져나갔습니다. 손이 벌벌 떨면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능이 있어서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끊어졌고 지금 온 몸에 의지를 가지고 이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절단되어 나갔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반사 신경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대뇌가 명령을 해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접붙여지지 않아도 영혼에 일정한 움직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이 결핍되어버렸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채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 다니고 있고 보이는 교회에 한 회원이 되어 있으나 사실은 아직도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마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제가 그래도 주일을 빠지지 않고 나오고, 연보도 드리고, 그리고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잘 어울려 지내고 있는데요.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는 것은 그런 것으로 접붙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게 되는 것은 그런 교제나 예배의 참석이나 헌금이나 봉사나 이런 것들에 의해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존재 자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변화되어서 새 본성을 가진 거듭난 사람이 될 때 예수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이고 이것은 진실한 회심과 중생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변화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영혼의 죽음의 상태라고 하는 말은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이 결핍된 상태이고 또 하나는 신령한 것들에 대해서 반응할 수 없는 무능한 상태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허물과 죄로 죽음의 상태에 있는 영혼도 부지런히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느끼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이성적 추론도 하고 문명을 만들어내고 학문과 예술을 발달시키고 기회를 진보시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죽어 있는 영혼, 죽음의 상태에 있는 이 영혼은 신령한 것에 대해서 반응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고등학생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와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던 때였고 그랬는데 그 교회에서는 3년에 한번씩 고등부와 중등부가 같이 수련회를 갑니다. 이제 그렇게 함으로서 이들의 연합을 촉진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데리고 저 강원도에 있는 산골로 수련회를 갔는데 고루다 어쩌다 장소를 골랐는데 하여튼 엄청나게 높은 산을 지나고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미사일 부대를 지나서 있는 그런 사람이 진짜 마음을 같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그런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비가 가끔 나온다는 동리인데 다 부서져가는 분교, 교실 4-5개가 있는 딱 한 채 박에 없는 그곳에 어떻게 기도원이 서서 거기를 수소문해서 갔습니다. 들어갔는데 그때 몇 십 년 만에 비가 어마어마하게 왔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계곡을 지나서 갔는데 한 이틀 있으니까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하루 이틀 늦게 온 아이들이 왔는데 개울을 여섯 개를 건너야지만 올 수 있을 정도로 마지막 줄을 타고 넘어올 정도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밤중에 설교를 하는데 애들이 다들 모였는데 고등부 애들이 80명 정도 모이고 중등부가 한 50명 정도 모여서 섞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때도 길게 했을 것 같지요. 그런데 45분밖에 안 했습니다. 중고등부 애들에게 45분이면 한참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박자를 맞추어주셨습니다. 캄캄한 밤인데 전기가 있었는데 발동기가 돌아가면서 희미한 형광등이 몇 개 켜있는데 그것도 껌벅껌벅 하는데 밖은 불빛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물이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흐르니까 누가 올 생각도 못하고 군부대에 구조요청을 신고까지 해놓고 집회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계곡에 물이 쏟아져내려오는데 어마어마했습니다. 학교 덮치는 것은 문제도 아닌데 믿음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회개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데 설교 시간 내내 천둥번개가 치는 것입니다. 기둥이 흔들릴 정도로 그리고 번쩍! 하면서 벼락이 치고 그러니까 거기서 영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은혜를 받는데 진짜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시면서 진짜 제가 태어나서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8시 반쯤인가 되어서 제가 설교를 해서 9시 15분쯤 설교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배 끝나고 나서 우리 다같이 기도합시다. 그랬는데 그 기도가 새벽 1시에 안 끝났습니다.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울부짖으면서 기도하는지 인도하는 사람도 필요 없고 반주자도 필요 없고 그냥 자동으로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데 1시가 되어도 안 끝났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기도를 하는지 한 아이는 벽을 짚고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허리가 너무 아프니까 벽을 짚고 회개를 합니다. 두 시간이 넘도록 그런데 기가 막힌 게 무엇인가 하면 여기서 고등학생들이 그렇게 대굴대굴 구르면서 회개하는데 그 사이에 있는 중학생 애들은 주보가지고 비행기를 접고 있었습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신령한 것에 대해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잠깐이면 모르는데 한 시간, 두 시간 계속 흐르니까 애들이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들이 무서워하면 할수록 거듭나고 회심한 아이들은 기뻐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회심한 다음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느낌이 어떤가 하고 물어보니까 그 중에 한 자매가 명료하게 대답했습니다. 전도사님, 옛날에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셨는데 지금은 제 마음에 계신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이게 영혼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하면 하나님의 신령한 것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가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이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노력을 하면 죽은 이성을 가지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뛰어넘고 신앙이 요구되는 이 자연의 이치를 뛰어넘는 신령한 것을 이야기할 때는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혼의 죽음의 상태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제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 중에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주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추구하시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몇 백 명의 사람들이 회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저는 신뢰하지 않지만 그러나 여러분들 가운데 상당한 사람이 지난 이주와 삼주 사이에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제가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 가운데는 아직까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남아 있다는 사실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매우 불쌍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에 대해서 한없는 연민을 보내는 바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물과 생명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와서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행동도 여러분들이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위선으로 가득 찬 바리새인의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영혼이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이해할 수없고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설교를 매우 어렵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 중에는 교회를 상당히 오랫동안 다닌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5년이 아니라 10년을 교회에 다녀도 여러분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제 설교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설교는 여러분들에게 죽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연적인 이치만을 가르치는 설교가 아니라 신령한 세계를 보여주는 설교이기 때문이고 거듭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회심한 지체들이 더 많이 은혜를 받고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더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은 심히 소외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그 마음이 제가 말씀드린 회심하는 형들 사이에서 주보로 비행기를 접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중학생들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왜 회심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왜 회심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영혼에 죽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 그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두 번째 상태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 대해서 느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그러나 그자신의 영혼이 죽어 있기 때문에 죽은 영혼이 다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리 여러분들을 만지고 지나가셔도 하나님의 그 사랑의 감촉을 느낄 수 없고 그 사랑 앞에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면 여러분들은 아마 이렇게 변명할지 모릅니다.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모든 신자가 항상 감격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진정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의 마음 안에는 이미 주도적인 경향성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 선한 일만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상태가 나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은 사람도 들어 누워서 말이 없지만 심한 질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가만히 누워서 말이 없습니다. 전자는 죽은 것이지만 후자는 병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해당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20평 정도밖에 안되는 정말 손바닥만한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그 교회는 서울 변두리에 길가 밭 한가운데 서있었고 그리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싸구려 장판을 깔고 집에서 각각 양발 같은 것을 기어서 만들어 갖고 온 두툼한 방석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삐거덕거리는 풍금 소리에 맞추어서 톱밥 난로를 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는 새벽기도가 4시 반이었습니다. 살인적인 시간입니다. 4시 5분에 종을 칩니다. 초종이라고 그렇습니다. 그것을 듣고 이제 성도들이 잠을 깨서 일어나 옷을 입습니다. 재종이 4시 25분에 치는데 이것은 예배시간이 임박했으니 새벽에도 나올 사람은 재종이 울릴 때 교회에 도착했거나 교회 매우 가까이 와 있어야지만 새벽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예화: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 신실한 어느 집사님이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들을 데리고 풀빵장수를 하면서 힘겹게 살아가는데 어느 날 새벽기도 찬양시간에 갑자기 통곡 하며 우는 집사님의 사연은 방석 밑에 떨어져있는 돈 오 천원이 탐이나 몰래 감 추었는데 찬양을 하면서 찬양내용을 통해 회개하게 되면서 깨트려졌다는 내용)
오늘 아침에도 그 생각을 하면서 눈물이 낫습니다. 그렇게 지겹도록 가난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그 물질을 보면서 교회에 떨어진 돈이니까 지체의 돈일 텐데 그것을 한번 방석으로 덮고 갖고 싶은 욕망이 추운 새벽기도에 나오는 그 자매의 마음에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겠다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데 결국은 거듭난 사람은 사랑이 이기고야 맙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시간 차이가 15분도 안되는데 대굴대굴 구르면서 우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15분이 아니고 15일이 될 수 있고, 150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태가 나빠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생명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태가 나빠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람, 신령한 복음의 비밀 같은 것들을 깨달아 아는 이런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 대한 이런 인식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에게 내가 묻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린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왜 이렇게 사랑하시고 그리스도 예수까지 나에게 주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을까? 감격하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주님 앞에 엎드려져서 그래서 정말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인격적인 탄원이 있는지 오늘 묻고 싶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교회에 와서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세상만사가 뜻대로 안 될 때 모든 일이 꼬이고 자기가 너무나 힘들고 괴로울 때 자기중심의 생각들이 펼쳐지지 않고 자꾸 방해를 받아서 괴로울 때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인데 여러분들이 절에 가서 울겠습니까? 무당에 굿판에 가서 울겠습니까? 노래방에 가서 울겠습니까? 교회에 와서 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런 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심령이 녹아내려서 그 감사한 때문에 그 흘리는 놀라운 눈물, 예수님은 정말 존귀하고 아름다운 분이시고 자기는 쓰레기 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자기 인식에서 나오는 그 처절한 눈물 같은 것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면 저에게는 그런 눈물이 없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이 녹아내려 본적이 없는데 그러면 제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입니까? 맞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회심한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죽은 행실 밖에는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움직일 수 없으니 어떤 행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죽은 자의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행실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동들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죽음의 행실들은 영혼이 거듭나고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흘러나올 수 있는 행실이기 때문입니다. 미움, 다툼, 분쟁, 그리고 허영, 음란함과 호색함, 교만, 투기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죽은 행실의 열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또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그런 죽은 행실 속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제 주위에는 예수님 잘 믿고 그리고 거듭났고 목사님말대로 예배시간마다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 중에도 그런 죽은 행실을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요. 그렇게 고소할지모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된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성령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안에 죄의 찌꺼기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계속 역사하면서 부분적으로 죽은 행실들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현저하게 죽은 행실을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상태가 나빠서 그런 것입니다. 좀 두고 보면 이제 다 뼈저리게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옵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영영 회개를 안 하고 돌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에 그럴 수는 없고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죄를 지어서 죽음의 행실들을 많이 만들어내면 그 사람의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마음속에 사라집니다. 이미 마음속에서 고통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행실들이 열매 맺게 됩니다. 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 자비, 착함, 온유, 절제, 인내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열매들은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그들이 그 열매의 덕을 보게끔 만들어줍니다. 이것은 변화된 본성,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새로워진 본성이 아니면 흘러나올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삶의 열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의 행실입니다. 그것들이 신자 안에서는 계속 맺혀지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행실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죽은 행실들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그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내 안에서 항상 그런 것들이 밖으로 흘러넘쳐서 그렇게 목사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죄를 짓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좋습니다.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안 하십니까?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났는데도 그를 해코지 하지 않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해코지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제물에 대해서 욕심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강도처럼 빼앗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람이 불쌍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일이 마음속에 욕망으로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일을 실제로 행할 때 겪게 되는 불평과 고통이 참는 것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성의 빛으로 그것을 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행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죽은 행실이 억제 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 종류의 억압하는 힘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참된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될까요? 성령으로 거듭나야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지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물은 정결의 상징이고, 성령은 쇄신의 상징입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우리 인간이 짓고 있는 이 죄가 영혼의 오염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깨끗하게 하는 비결은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들을 씻어냄으로 말미암아 정결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정결하게 하는 방법은 먼저 우리가 심히 지은 죄, 그리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에 대해서 정결하게 하실 때 그것은 용서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보다 붉을지라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많은 죄를 지은 것은 영혼에 오염된 것과 같은 찌꺼기인데 그것들을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는 순간에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실 때 예수의 보혈이 우리를 그 모든 죄에서 깨끗이 씻어서 우리를 순전한 주님의 사람으로 주께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으로 주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회심하지 않은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합니다. 또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그리고 또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헌금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좋은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여러분들이 걸어가다가 똥통에 깊이 빠졌습니다. 온통 똥물을 다 뒤집어쓴 아주 더러운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깨끗이 씻으면 되는데 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 그대로 어떻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합니다. 온 몸에 똥물을 다 뒤집어썼는데 여러분들이 비단옷을 입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께 용납되어보려고 노력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똥냄새가 물씬 나는 그 사람 가까이 다가갈 이유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몸에 붙은 더러운 것을 씻어낼 생각은 안 하고 얼굴을 예쁘게 화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무리 예쁘게 화장하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오물을 뒤집어써서 불쾌한 냄새가 나는 여러분들에게 화장이 예쁘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들을 안아줄 사람이 지구상에는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그 똥물을 뒤집어 쓴 상태는 해결하지 않고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예쁜 핀을 꽂고 장신구를 붙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붙여도 사람들에게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가 우선적으로 해결할 것은 비단옷이 없고 그리고 예쁜 헤어스타일이나 장신구 색깔의 화장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맑은 물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비누로 깨끗이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번씩 물에 행구서 그 냄새가 모두 사라진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에게 용납될 수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 식사도 할 수 있고 악수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좀 초라한 옷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에 의해서 무시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 회심하지 않은 채 교회생활을 하고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여러분들이 죄에서 정결케 되어지지 않은 가운데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바로 똥물을 뒤집어쓰고 예쁜 옷을 입으려고 하는 것이고 똥물을 다 뒤집어쓴 상태에서 핀을 꽂고 화장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것으로는 여러분들이 절대로 하나님께 용납되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먼저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샘물에서 그 모든 더러운 죄의 오염들을 씻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물로서 거듭난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런 정결하게 하는 작용은 한번에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정결하게 하는 성령의 작용을 신자의 영혼 안에 심으심으로 그 작용들이 계속 일어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우리의 육신의 정욕에 흔들릴 때가 없습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물질에 대해서 욕심이 안 생깁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더 낫게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이 들 때가 없다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런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거듭나고 물로서 정결케 되어지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작용이 없을 때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면 그냥 일어나고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이 찌꺼기와 더러운 것들이 계속 쌓입니다. 정화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막 일어난다고 해서 우리 모두 죄를 짓는 것은 아닌데요. 안 지은 것이 아니라 못 지은 것입니다. 억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물이 밖으로 쏟아 넘치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서 샘물처럼 계속해서 오물들이 고여 가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해결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이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놀라운 정화의 기능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예수 믿고 은혜생활 하는데도 물질에 탐심이 생길 때도 있고, 명예욕이 생길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한 마음이 들 때도 있고, 육욕에 사로잡혀서 음란한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아마 오늘 이렇게 점잖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 청년들 가운데는 상당수가 지난 한 주간동안 여러 차례 음란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것입니다. 한번 그 사람들만 일어나서 찬양 한번 해볼까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회개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면 오늘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지난 한 주간동안 여러분들의 그런 잘못한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버려두실 리가 없습니다. 가슴에 깊이 찔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되면 이 속에서 신기하게 샘물이 솟아납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마음들이 다 사라집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누가 야단치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면 깊이 깨닫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일주일동안 더럽게 살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며 살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깊이 회개할 때 다 사라집니다. 어마어마하게 이 욕심과 더러움들이 확 죽습니다. 예배가 마치고 기도를 홀로 드릴 때는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아! 그렇구나.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런 마음이 이 속에서 확 생깁니다. 이게 바로 정결케 하시는 성령의 작용인데 이것은 거듭난 사람에게 이런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심하지 않은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거듭난 것에 틀림이 없는 내가 아는 형제 하나가 있는데 회심하지 못한 나는 설교를 듣는데 예배 시간에 계속 졸고요. 회개도 안 합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지었던 죄를 요즘도 또 짓고 있습니다. 기다려보십시오. 상태가 나빠서 그렇습니다. 고장 나서 그렇습니다. 나중에 허리가 부러지도록 회개하고 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영영 안 돌아오면 그 인간은 거듭난 인간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러 나온 여러분들 중에도 아마 틀림없이 인생에서 많은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실패한 가운데 오늘 예배에 나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잃어버린 물질이나 잃어버린 명예 건강 때문에 가슴아파하지만 그것보다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무너져가는 그곳에서 여러분들을 끌어내셔서 건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십시오. 정신 차리고 살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경고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막보고 살면 한동안 하나님이 참으십니다. 계속 참으시지는 않습니다. 혼납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싫어하시는 사람들,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버려두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가장 큰 심판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혼내시고 야단치시고 환란을 주시고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1장에 보면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돼지발톱을 깎아주는 것을 보았습니까? 죽음의 날을 위해서 예비 된 것입니다. 그냥 나두었다가 나중에 도살할 날에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4.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거듭되는 회심 시리즈를 들으면서 여러분 중에 회심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 저거는 내가 통과한 것인데, 조심하십시오. 여러분들이 계속 상태가 나쁘게 살면 하나님이 한번 혼내십니다. 그때 여러분이 지금 주님을 피해 다니면서 살살 피하면서 무사안일주의 정신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모두 다 토해낼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장부책에 기록했다가 하나님이 반드시 받으십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요령을 피우면서 신앙생활 할 때는 편하지만 그것보다 더 비교가 되지 않은 뼈저림으로 이 자리에 나와서 토설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허리가 끊어질 듯 회개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영원히 안 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갈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이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씻으셔서 또 성령을 우리 안에 심으셔서 계속해서 성령의 정결케 하는 작용이 신자 안에서 일어날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에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쇄신하는 작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예수의 살과 동일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본성 속에 깊이 들어가서 죄의 요소들을 다 빼내시면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우리를 하나로 만드셔서 예수의 몸에 붙여질 수 있는 살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우리의 외형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예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가 되거나, 무식한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 되거나 이렇게 외형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 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본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공통된 본성이 아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기계처럼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드시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본성 이외에 개별적인 본성을 주셔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회가 획일화되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회가 완전히 통일이 되어서 의견이 단합이 된 나라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북한입니다. 그래서 지금 굶습니다. 정말 바보입니다. 저렇게 되면 안 됩니다.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색깔을 이루면서 서로 적당하게 충돌하면서 살아가야지 사회는 발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를 들어서 봄에 씨를 뿌려서 가을에 추수해서 먹고 사는 농사에 종사할 사람은 느긋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농사를 지어야지 오늘 돈을 벌어서 오늘 본전을 뽑으려고 하는 사람은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느긋한 본성을 주셔야지 되는데 그런데 지금 수천억의 돈이 왔다 갔다 하면서 국제 화물시장에서 돈이 던져지고 투자를 하고 회수를 하는 엄청난 금융거래 속에 존재하는 사람이 느긋한 사람이 가면 돈 다 털어먹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순발력이 빠른 본성을 주셔야 합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곡조에 민감한 본성이 필요하고, 조각 같은 것을 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좋아하는 형상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본성을 가질 것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양한 본성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질이 급하면 예수 믿고 거듭나도 성질이 그대로 급합니다. 그런데 그 급한 성격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급한 일이 있을 때 그 사람을 시키면 화끈하게 해내니까. 그러니까 거기서 그 죄의 본성만 빼내고 나면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추진력이 없는데 그 대신에 참모역할을 너무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도저같이 돌격 앞으로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앞에 세워놓고 뒤에 쫓아가면 어려운 문제들을 다 뚫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피 터져도 자기가 쓰러집니다. 뒤에 있는 사람은 그 길로 따라가면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까 다양한 색깔, 아름다운 색깔들이 모여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와 다른 사람을 보면 너무 기뻐해야 합니다. 성질이 그렇게 너무 급하냐. 너무 부럽다. 나는 느긋한데, 우리 둘이 한번 손잡고 잘해보자.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결혼할 때도 그런 사람을 만나야합니다. 똑같은 사람을 만나면 연애할 때 신나는데 3년도 못삽니다. 그러니까 안 통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그게 주님의 뜻입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내가 이 다음에 세미나 할 때 말하겠습니다. 성령으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본성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성 자체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 본성 속에 있는 것들 중에서 자기중심으로 자기 본위로 살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다 빼내십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개별적 본성을 가진 사람은 급한 대로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동요가 없는 진중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게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합니다. 시종일관, 그리고 또 이렇게 아주 정서가 풍부하고 이런 사람은 마음을 녹는 듯이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매 순간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본성들이 다 죄가 빠져나오고 나면 거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들로 바뀌게 되면 이 모든 개별적인 본성들이 찬란한 빛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 쓰여 집니다. 그래서 이 타고난 본성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러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은 그런대로 또 필요합니다. 안면에 철판 깐 사람은 그런 대로 써먹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본성을 다 빼내시면서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람으로 꽉 채워지게 하십니다. 그 본성이 바로 머리되신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것과 같은 동일본질의 본성입니다. 이게 딱 접붙여질 때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본성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냥 교회에 다닐 뿐이지 본성의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깨트려본 적이 없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 이런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까? 멸시와 욕을 당하시면서 종처럼 일생을 사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을 보시며 통곡하면서 우셨을까요? 아마 지금 이 예배당에 주님께서 오시면 설교하는 저, 그리고 착한 마음을 품고 예수를 위해 산 사람들, 오늘도 예배를 드리며 많은 은혜를 받으며 예배를 드리고 나면 이제 주님을 일주일동안 섬겨야지 생각하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 순간에 여기에 오시면 예수님은 회심하지 않은 여러분들을 먼저 찾으실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이런 마음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주님이 찾아오실 때 이제껏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제껏 걸어온 길이 주님 없는 길이었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반역하고 울려 퍼지는 복음 아래서도 마음을 닫고 주님의 교회의 일부가 아닌 살덩어리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를 예수의 몸에 접붙여주시옵소서. 기도할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 눈에 눈물을 씻기시고 죄인을 영접하시는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맞이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심하지 못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날, 얼마나 쓸쓸히 교회당 문을 나섰습니까? 옆에 있는 지체가 예수의 사랑에 가슴이 물같이 녹아내리고 드러난 그 비밀스러운 복음의 빛 아래서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때 여러분 얼마나 많이 소외감을 느끼셨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제 그런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지금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실로 회개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거듭날 수는 없지만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 공로를 의지해서 거듭나기를 힘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거듭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이날은 거듭나기 위한 은혜의 날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아무 때나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특별히 부르시는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더 많이 눈물을 흘리시는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더 애타는 음성으로 여러분들을 찾아나서는 때가 있습니다. 가시에 찔려 방황하고 있는 길 잃은 양 같은 처지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다가오셔서 나의 사랑하는 어린양아! 불러주시는 특별한 부름의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지금 주님의 그 사랑 앞에 응답할 때입니다. 여러분들이 지난날 많은 죄를 짓고 주님의 마음에 많이 못 박은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회개하는 죄인들을 깊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의 집에 재산을 다 낭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자기의 아들 탕자를 그 아버지가 어떻게 맞아주는지 한번 기억해보십시오. 아버지는 그 탕자를 먼저 발견하고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영접해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도 여러분들을 기다리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기다리시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저도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더 많이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마십시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5. 거듭나기를 사모하라
오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의 회심을 기다려야 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피 묻은 손으로 두드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두드리시는 음성 앞에 여러분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열고 그분을 맞아드리십시오. 다만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을 받아달라고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더 많이 사랑해주시고 여러분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참된 몸으로 접붙여주실 것입니다. 생명까지 여러분들을 위해 주신 분이신데 그 정도를 여러분들을 위해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대들을 위해서 흘리신 보혈의 핏 길을 걸어서 그대들의 구원을 위해서 찢으신 그리스도의 몸의 휘장을 지나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한 부분으로 일평생 기쁘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1. 본문의 배경
오늘 이 누가복음 15장에는 기독교 역사 이래로 가장 많이 설교되어왔던 탕자의 비유가 실려 있습니다. 왜 이 탕자의 비유가 여기 실리게 되었는지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을 때 뜻밖에도 그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자칭 의롭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가 죄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세리와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 가까이 모이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도 하고 또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서 불만을 여기며 왜 예수는 이렇게 더러운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그들과 함께 먹고 가치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는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는 15장에 나오는 세 개의 아름다운 잃어버린 자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토막은 잃은 양의 비유이고, 둘째 토막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이고, 세 번째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모두 잃어버린 양, 드라크마, 아들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 세 비유는 각각 잃어버린 원인과 동기가 차이가 납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양이 적극적으로 목자를 떠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 때문에 부득이하게 대열에서 떨어져서 그래서 길 잃은 양이 된 그런 상태를 가르치고 그래서 양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목자가 가서 양을 찾아왔습니다. 드라크마의 비유는 연약한 것도 아니고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닌 물체니까 자기 의지와 연약함,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운명적으로 잃어버린바 되었다가 다시 찾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나오는 이 탕자의 비유는 자기가 의지적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그리고 회개하고 그리고 다시 의지적으로 아버지께로 돌아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이 연약함 때문에 비교적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바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두 번째 경우는 숙명적으로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바 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교도의 가문에서 태어났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전해주는 사람이 전혀 없는 땅에 태어났다든지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마지막에 나오는 세 번째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알았지만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싫어서 멀리 떠났다가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실상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들의 방탕한 삶으로부터의 돌이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들이라도 잃어버린 사람들이고 잃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시 찾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비유가 프리즘과 같이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그 다양하고 놀라운 사랑의 특성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하나님을 떠난 삶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들로서는 요구할 수 없는 것을 요구했습니다. 즉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내게 돌아올 유산 중에 내 몫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산을 받아서 며칠 못 가서 다 처분해서 돈으로 바꾸어서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허랑방탕하고 모든 물질을 허비하고 세월을 보냈습니다. 흉년이 찾아왔고 그는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에 있는 사람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고 그 주인은 그를 들판으로 보내어 유대인들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생활을 하도록 그에게 시켰습니다. 결국 거기에서 그는 돼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연명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을 떠나서
이 탕자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불효막심한 행동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서 부모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생전에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는 자식들이 있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굉장히 못된 사람들입니다.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녀의 도리를 다하고 그리고 부모가 죽음이 가까울 때 임종이 가까워서 자기의 자녀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면 그 유산에 서로 만족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그렇게 부모의 사랑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살아가는 것이 가족들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부모에게 당신이 죽었다고 치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괄호 속에 들어간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죽었다고 치고 그리고 어차피 나에게 돌아올 유산인데 그게 몇 분의 몇이 되든지 간에 나에게 먼저 주십시오.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그대로 자기의 유산을 받게끔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멀리 떠난 채 살아가고 있는 사실상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당당히 요구했을 때 그에게는 그런 것을 요구할 권리도 없었고 또 그렇게 재산을 요구하는 이 아들의 마음속에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즐거움이나 기쁨 같은 것들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옳지 않은 일을 하고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이 아름다운 비유를 읽으면서 누구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흔히 이렇게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난 자식은 교회도 안 나오고 이 세상에 가서 나쁜 일을 하면서 교도소나 드나들면서 하는 가끔 듣는 그 방탕한 자들의 간증에 나오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정신적으로 해석해보면 사실 아버지의 품을 멀리 떠나는 것은 사실 육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매주일 교회에 나와서 단정하게 예배를 드려도 정신적으로 여러분들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난 방탕한 자식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지만 이 아름다운 탕자의 비유 속에 담겨진 보석과 같은 복음의 교훈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난 이 아들이 제일먼저 한 일은 허랑방탕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유산을 방탕한 삶을 위해 다 써버렸습니다. 쓰는 동안에는 기쁘고 즐거워서 아버지도 생각나지 않았고 그리고 아버지와의 관계 같은 것은 더더욱 안중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마음의 외로움과 객지의 설움도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향락에 빠질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다른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허랑방탕한 삶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게 되면 즉시 허랑방탕한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허랑방탕하다니요? 매주일 주일을 잘 지키고 헌금도 하고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명절인데도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저의 단정한 모습을 보십시오. 물론 저에게는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은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이 없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제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저는 허랑방탕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탕자와는 종자가 틀린 인간입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허랑 방탕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의미에서 허랑 방탕은 보편적인 도덕의 기준을 뿌리치고 그리고 바람피우고 술 먹고 마약하고 싸움질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거짓말하고 이런 것이 허랑 방탕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가 된 사람들이 그렇게 허랑방탕할 수 있습니까? 신자들 중에는 그런 정신 나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정신적인 탕자를 생각할 때 그 허랑 방탕은 그런 세속적이고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허랑 방탕이 아닙니다. 허랑방탕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주신 자원들을 원래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 허랑방탕한 삶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가십니다. 그래서 인생을 마감하게 하십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직은 하나님이 이 땅에 여러분들을 살려두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이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하나의 자원입니다. 죽는 것이 왜 죽습니까? 숨을 쉬고 혈액을 돌릴 수 있고 기억을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가 다 떨어지게 되면 그 자원이 생명의 자원이 고갈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죽는 것입니다. 그게 별개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살려두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은 비록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고 불순종할 때도 있지만 어째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살려두시면 언젠가는 깨닫고 돌이켜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시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생명을 지금까지 연장을 시켜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이 땅에 살면서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많은 이 땅에 자원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일부를 여러분이 오늘도 헌금하셨습니다. 이 자원들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들을 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 땅의 자원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고 그 자체를 즐거워하고 그 자체를 즐기는 일에 몰두하게 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자원을 그릇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허랑방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자원을 주셨습니다. 신령한 은혜를 영혼에게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주신 것은 그 은혜를 여러분들이 받아서 사명을 깨닫고 그 하늘은혜를 가지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무릎을 꿇어서 그들의 발을 씻기며 섬기고 그리고 이 세상을 고치는 이 일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늘의 자원을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았는데 어떤 사명도 못 느끼고 그리고 자기 즐거운 것만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래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희생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 적도 별로 없고 그리고 영혼을 위해서 가슴아파하는 일도 없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허랑방탕한 삶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허랑방탕한 삶을 살게 되면 언젠가는 이 자원이 떨어지는 날이 옵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주셔서 지금 여러분들을 붙들고 계시지만 언젠가는 여러분들의 심장이 굳어지고 그 핏줄에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코에서 호흡이 멎고 뇌의 작용이 멈추는 때가옵니다. 언젠가는 오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여러분들의 생명의 자원들을 사용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땅에서 장수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자원으로 방탕해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고 여러분의 인생을 그릇된 일에 사용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을 계속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생명을 빨리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신자인 여러분들에게 주셨을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망가진 세상을 고치도록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주셨습니다. 돈을 얼마나 벌든지 여러분들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탁하신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이 없이 사용합니다. 즉 허랑방탕하게 됩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자원이 끊어집니다. 왜 하나님이 더 이상 공급해주시지 않으시니까.
하늘자원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 그 충만한 은혜를 받아도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섬김이 없을 때 그 은혜는 스스로 안에서 부패해버리고 변질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두 번째 찾아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궁핍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탕자가 바로 이 궁핍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재산을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으로 먹고 마시고 연락하며 허랑방탕하게 하고 있을 그 때에 흉년이 왔더라면 탕자를 그렇게 불행하게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이 아버지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자원이 다 바닥이 났을 때 그때에 흉년도 아주 커다란 흉년이 그 고장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취업을 할 수 없고 빌어먹을 수도 없는 처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돼지우리를 청소하고 돼지를 키우는 목부가 되었으니 이것은 유대인으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어서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바닥에 떨어진 돼지 주는 사료의 쥐엄 열매라도 먹고 싶었으나 그것도 먹을 것이 없었다고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궁핍한 모습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허랑방탕하고 그래서 결국은 아버지와 집도 잃어버리고 마지막에는 궁핍하게 되어서 자신의 입에 풀칠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데 왜 이 아들은 그런 불행한 길을 택했을까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결국은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것 말고 그 아버지 밖에서 다른 행복을 찾았기 때문에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 예배당을 가득 매운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아마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싶어 하고 순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여러분들이 모두 하님께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한번 진지하게 숙고해보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주님이 주신 생명의 자원들이 허비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생명의 자원을 쓸데없는 일을 위해서 고갈시키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여러분들이 불순종하면 이 땅에 주신 자원도 점점 줄어들 것이고 주신 자원들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 주신 하늘자원도 여러분들이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면 사라지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은 순종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고 나는 순종하며 살기 싫다고 단언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여러분들 중에 다수의 사람들이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탕자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는 나오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은 먼 나라에서의 삶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한편 마음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데 실제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잃어버린 탕자와 같은 불쌍한 처지에 있게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모두가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참된 행복은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드셔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낳아서 그 핏덩이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이며 기를 때 그 아이에게 있게 하고 싶은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되었으면 하는 그 자리가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자식으로서는 가장 큰 행복이고 그 때에 부모인 여러분들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애들마다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옛날에 공부를 안 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여러분들의 자녀가 있는데 여러분들의 자녀가 고 3입니다. 내일 모래 대학시험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떻든 대학을 진학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애가 공부는 안 하고 돈 버는 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엄청나게 5천 원씩 벌어옵니다. 그러면 그 아이를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자식에게 정말 원하는 것은 아버지가 원하는 자리에 있는 것, 그리고 자식은 바로 아버지가 원하는 자리에 있을 때 아버지를 가장 많이 사랑으로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특별히 신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자리에 있고 행복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에 있을 때 거기에서 우리도 행복할 수 있고 하나님도 영광 받으실 수 있고 우리의 존재는 아름답게 빛나게 됩니다. 그런데 탕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런 행복을 그 아버지 안에서 찾지를 않고 자기가 설정한 다른 목표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그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목표를 설정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을 등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아프게 해드려야지만 그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궁핍함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탕자가 그랬습니다. 이 아버지는 굉장히 인자하고 생각이 깊고 자녀를 너무 사랑하는 아버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들은 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를 섬기며 그 집안에서 함께 일하면 점점 더 재산이 불어나고 농토도 많아지고 그리고 물려받을 유산도 많아질 것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결국은 자기의 것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 안에서만 찾아야 할 행복을 아버지 밖에서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런 잘못된 생각이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나는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 집에 계십니까? 물론 여러분들의 육체는 아버지의 집에 속해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집에 여러분들이 앉아서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도 아버지의 집에 있습니까? 그래서 그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그 즐거움을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참된 행복이 아버지와 관련된 것들 속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 아무리 나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버지가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면 나를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계시는지 지금 묻고 있는 것입니다.
뜻밖에도 교회 안에는 정신적인 탕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몸은 매주일 교회에 나오지만 정신적으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방탕한 길에 있는 사람도 뜻밖에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려도 이 예배를 드리는 현장에 와 계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도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이 아버지의 집에서 느끼면서 돌아가는 대신 올 때 무덤덤한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무덤덤한 상태로 아버지의 집에서 돌아가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많이 있습니다. 몸으로는 결코 탕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이미 마음에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참된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관련해서 그렇게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밖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주일동안 자신이 행복이라고 설정한 잘못된 목표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는 계속 하나님께 불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불순종하는 삶을 사니까 자원은 계속 낭비됩니다. 허랑방탕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굶주리고 핍절한 상태가 되는데도 여전히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는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굳어지고 심령에는 근심이 가득하게 됩니다. 몸은 아버지의 집에 나와서 있지만 쏟아지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감격하고 어찌할 수 없는 그 사랑 때문에 기뻐하는 이런 정말 착한 아들이 권리는 누리지 못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탕자가 바로 그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땅의 자원이 있는 동안에는 허랑방탕하고 그래서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었으나 때가 되자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다 거두어가시고 흉년이 오게 하셨습니다. 그는 이제 모든 가지고 있던 자원을 잊어버리자 자원이 없는 알몸으로 불행에 노출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렇게 여러분들을 다루십니다. 하나님 밖에서 계속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십니다. 한번 잘못했을 때 하나님이 곧바로 후려치셔서 정신을 차려서 돌아오게 하실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해도 그렇게 한번 찾아보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는 적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묵상합니다. 이 지혜로운 아버지가 재산을 절반을 떼어주고도 잃어버릴 것이 뻔한데도 그 자식에게 주고 그리고 집을 떠나게 했던 이유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내 재산을 절반을 잃어버리더라도 내 자식이 정말 아버지의 집에서 사는 것밖에 참된 행복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내가 이 재산을 낭비하리라. 그리고 그 자식을 새로 얻는 것이 진정으로 자식을 얻는 것이라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묵묵히 그 재산을 떼어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몸이 병들고 생명의 자원이 고갈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어느 바보 같은 사람은 기독교의 미덕이 가난에 있다고 하는데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을 우리들이 수치스러워할 필요도 없지만 자랑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 여러분들에게 많이 주시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래도 예수 믿고 나서 밥술이나 먹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늘에 있는 은혜의 자원도 여러분들에게 주셨을 때 그것을 낭비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소중한 은혜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이 그것을 다 허랑방탕하게 낭비해도 하나님이 내버려두십니다. 왜 다 잃어버리고 나서 참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때서야 주님밖에는 참된 행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그렇게 깨달은 아들이 못 깨달은 채 아버지의 집에 몸만 있는 것보다는 아버지가 보기에는 훨씬 낫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지 않고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오래도록 기다리시면서 돌아오도록 이렇게 말씀으로 섬기십니다. 교회에 가면 목사님 설교를 통해서 타이르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통해서 타이르고, 지체들을 만나면 지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타이르십니다. 그런데 좀처럼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얻어 보려는 그 욕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환경을 흔드십니다. 그래서 자원을 다 낭비하게 하십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을 좀 믿을 때는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예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세상을 넘나들다가 모두 잃어버리고 가난해진 분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오늘 무릎을 꿇고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재수가 없어서, 잘못된 사람을 만나서,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해서,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가를 깨닫게 하나님이 많이 해주셨는데도 여러분들이 안 깨달으니까 하나님이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궁핍함에 노출되게 만드신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오늘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는 한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충만히 받아서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쏟아지고 섬길 때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런 놀라운 하늘자원으로 충만하게 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은혜가 어디로 갔습니까? 하나님이 도로 걷어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은 교회에 나오지만 영혼은 말할 수 없이 곤고해져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무한한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부르짖어도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때 비로소 여러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고 애를 썼던 마지막 결과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자원이 없으면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자원,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물질의 자원, 하늘의 은혜의 자원 이것들이 다 고갈되고 나면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것이 죽은 것입니다. 몸이 더 이상 숨을 쉴 기운이 없을 때 몸이 더 이상 피를 돌게 할 수 있는 심장의 박동을 가져다줄 수 없을 때, 뇌가 더 이상 작용을 해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기억할 수 없게 될 때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한 자원들이 우리 육체 안에 모두 떨어졌을 때 우리는 자연적으로 삶이 끝나고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좋은 자원을 주셨는데 여러분들이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자원들을 다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3. 돌아오는 길
이 사람을 보십시오. 무슨 자원이 남아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의 집의 유산은 다 날려버렸습니다. 은혜의 자원도 다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어버렸고 온 옷은 더러운 돼지 똥과 사료들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급료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돼지가 먹는 사료라도 한번 먹어보려고 했는데 그것마저도 돼지가 다 먹어버리고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자원은 병들고 겨우 살아있는 이 생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되었으니 생명도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두 다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지 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탕자가 돌아오는 길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돌아오는 길, 탕자가 방탕하였다가 결국은 돌아올 때 세 가지의 단계를 거쳐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첫째는 죄를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껏 까지 이 탕자는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감히 유산을 달라고 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소식도 없이 그것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원이 모두 고갈되어버리고 이제 죽음의 문턱에까지 오게 되자 이 아들은 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옵나이다. 결국 이 지점에 와서야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한 것이 아버지에게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게도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자원을 가지고 가족을 버리고 먼 나라로 떠나가서 방탕한 삶을 산 것이 아버지께만 죄송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범죄한 일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으로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에 몸은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는 여러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 이 장면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버지는 여러분들이 당신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데 여러분들은 그 아버지 안에서 행복을 얻는 것 말고 다른 밖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몸으로 교회에 나오는 일은 육체의 부지런함만 있으면 가능하지만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의 집에 진정으로 돌아오는 일은 죄를 정직하게 인식하고 참회하는 진실한 회개가 없으면 이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예배에 수없이 참석하면서도 오래전에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지금 궁핍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긴 세월동안 교회를 다니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지를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자식들을 어느 날 짐꾼들을 보내어서 보쌈을 해서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오는 일은 없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아버지를 보면 상당한 재산가였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시켜서 품꾼을 보내어서 자기의 아들을 보쌈 시켜서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는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자기의 죄를 정직하게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죄를 정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것은 결코 여러분들을 제가 나무라거나 야단을 치거나 회개를 하라고 닦달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 이치를 이해하도록 제가 마음에 애정을 다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뉘우치지 않고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궁핍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탕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궁핍한 극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이제껏 산 모든 일이 아버지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던 모든 일이 하나님과 자신의 육신의 아버지의 가슴에 못 박은 커다란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과 그리고 자기의 육신의 아버지를 향하여 이렇게 가슴 아프게 해드렸던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두 번째로 그는 한없이 겸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뭐라고 말합니까?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를 만날 텐데 나는 그때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할 거야.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즉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부르셔도 제가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저는 자격이 없는 아들입니다. 다만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 중 한 사람으로 여겨주신다고 할지라도 먼발치에서나마 아버지를 바라보며 즐거워하며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면서 노예처럼 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찾아가면 그렇게 말할 것이야. 이렇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가 살아있는데도 죽었으면 나에게 물려줄 유산을 먼저 달라고 요구할 때 이 아들은 자신은 유산을 물려받을 정도의 가치는 있지만 아버지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환난을 만나 자원을 다 잃어버리고 그리고 막바지 돼지우리의 쥐엄열매를 먹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이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자 마음이 한없이 겸비해져서 낮아지고 또 낮아졌습니다. 한없이 낮아졌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자신은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왜 그러면 쓸모없는 아들이었을까요?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에 모든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저 아름답지 않습니까? 썰렁해하시는데, 제가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입니까? 설교할 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우리 목사님이 계실 자리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있을 때, 그때 제일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 거기가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이 꽃이 예쁩니까, 안 예쁩니까? 대답 좀 해보십시오. 예쁩니까, 안 예쁩니까? 이것을 내가 이고 있다면 꽃이 예쁘겠습니까, 안 예쁘겠습니까? 이것은 여기가 자리지 내 머리가 자리가 아닙니다. 자기 자리에 제일 예쁜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아들은 지금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진짜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와 관계를 가지며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며 있었더라면 정말 보석과 같이 아름다웠을 아들이 그 아버지를 멀리 떠나니까 너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아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빛이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두신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떠나는 즉시 여러분들은 아주 추루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더럽고 누추하다는 것이 원래 미학적으로 무슨 뜻인가 하면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그게 더러운 것입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 너무 예쁩니다. 여기에 한 5-6마리가 예배당에 날아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더럽겠습니까?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그게 지금 예배당에 걸려 있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얼마나 불쾌하겠습니까? 설교자도 안 보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나님이 두시려고 하는 자리에 있을 때 그때 가장 예쁘고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고 그리고 탁월하고 그리고 하나님도 여러분들을 기뻐하셔서 많은 자원을 내려주십니다. 그것을 떠났을 때 이 자식이 비참해지게 되었고 그러자 그는 깊이 겸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그는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결단하게 되었습니까? 일어나 내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결단했습니다. 왜 이제는 더 이상 실험해볼 필요가 없다. 아버지 밖에서는 어떤 행복도 있을 수 없고 혹시 우리의 눈이 현혹되어서 어떤 행복에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살아보니까 그것이 결코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유일한 길은 다시 그 떠나왔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관계를 맺으며 아버지께서 있으라고 할 그 위치에서 있는 것, 그것밖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단을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아버지의 집에 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집에 육신적으로는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들이 아버지의 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신적으로는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난 탕자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집에 왔는데도 아버지를 느낄 수 없고 내 옆에 있는 지체들은 그 아버지와 만나서 행복한데 나는 그 지체들이 아버지를 만나면 만날수록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예배당에 나왔다가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사랑의 아버지가 여러분들을 불러주셨고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신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셔서라도 여러분들을 당신 곁에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데 여러분들이 왜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정신적인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무슨 무슨 일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곤고하다. 누구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불행해져있다. 어떠어떠한 상황 때문에 내가 너무 괴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원만 있으면 다 해결이 됩니다. 우리에게 가진 것이 없으면 우리에게 기대려고 하는 사람이 모두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이 많으면 그중에 조금이라도 나누어갖고 싶어서 기대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창고에서 인심이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은혜가 떨어지면 우리를 조금만 섭섭하게 해도 미워하는 독한 마음이 쓴물처럼 올라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은혜의 하늘자원이 많으면 정말 놀랍습니다. 너무너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자원이 넘치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살면서 뭐 그럴 수도 있지. 어리고 미숙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까 그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 그런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정말 가슴을 비지고서 말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너무 기대를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 어디를 가면, 어떤 시간에 이르게 되면 이런 자원 하나도 없이도 그렇게 만족스럽고 행복한 날이 올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완전히 만족을 줄 수 있는 날, 땅에 있으면 왜 성도들이 하늘나라를 그리워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만족을 못 주지만 여러분들도 그 사람들에게 만족을 못 주었습니다. 원래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로부터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는 어떻게? 이 땅에 있는 자원만을 가지고 살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하늘에 양식을 생명의 만나를 마음 입은 자에게 내려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주여주여 우리를 먹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자원이 필요합니다. 믿음생활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고난이 계속 옵니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나를 자꾸 아프게 합니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 땅에 있는 자원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곤고합니다. 그때에 그래서 고달프고 괴로운 것은 예수님밖에 있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믿음생활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괴롭습니다. 아픕니다. 고난이 옵니다. 사람들이 나를 곤고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자꾸 떠나고 아프게 합니다. 그런데 남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자원이 내게 또 있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자원이 쭉 흘러서 내 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순전히 무슨 문제인가 하면 자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자원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나니까 자원도 끊어진 것입니다. 아버지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니까 처음에는 굉장히 많은 자원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나니까 이 자원이 금방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지금 왜 돌아가는 것입니까? 그 자원을 찾아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자원이 어떻게 공급됩니까? 육체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1-2시간 예배를 드리고 가면 그 자원이 채워집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배 시간은 주유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유소는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 채워집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아버지를 멀리 떠났던 영혼들이 죄를 정직하게 인식하고 겸비하게 낮아져서 자신의 죄를 깊이 참회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럼 그때 하늘의 자원들을 하나님께서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면 아버지 찾으면 다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에게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핍박을 많이 받으면 그 아버지가 소망을 주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섭섭한 일을 만나고 괴롭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위로해주십니다. 땅의 자원이 끊어지면 하나님이 보태주십니다. 그러면서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이 무슨 행복이 있겠는가. 이런 결단, 나는 돌아가리라. 내가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서 아버지 밖에서 행복을 찾는 이런 일은 내가 안 하리라. 결국은 이것이 내게 가져다준 것이 무엇이 있는가. 모든 자원을 앗아가고 나를 방탕한 이 돼지우리와 같은 세상에 엎드려지게 한 것 말고 내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단이 내려지게 될 때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고 싶은 것은 나도 사실이고 곤고하고 궁핍한 것은 사실이지만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떠나왔습니다. 또 내가 돌아가기로 결심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한번 저의 몰골을 보십시오. 떠날 때는 양복을 입고 떠났는데 지금은 돼지를 치는 목부의 삶을 살면서 온 작업복에는 돼지 똥이 묻어있고 사료들이 묻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몰골로 몸은 병들어 수척하고 수염은 길고 눈은 휑하고 머리는 덤불처럼 길어서 아버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 되었는데 어떻게 이 몰골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좀 계산하고 돈이라도 벌어서 옷이라도 사 입고 돌아가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을 보십시오.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의 집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이 결심한 다음에 돈을 모아서 양복 사 입고 선물 들고 아버지의 집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염도 못 깎고 머리도 더부룩한 채 그 모습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새 옷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흘리던 눈물자국 그대로 움켜쥐던 쥐엄나무 가지 붙들고 그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집이 너무나 그리웠던 것은 이 아들이었는데 돌아오는 아들을 발견하는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틀림없이 아들이 아버지를 알아보는 것이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는 것보다 쉬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자기가 떠날 때 기품 있는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고 떠나가는 그 아들의 모습은 갈 때는 늠름하고 잘생긴 청년이었겠지만 돌아올 때는 쓰레기 같은 부랑자 걸인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들이 아버지를 발견하지 않고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그 흉악하게 변해버린 몰골을 가진 그 걸인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말쑥한 양복, 늠름한 체구 다 사라지고 걸인과 같고 부랑아와 같은 모습으로 목부의 옷을 입고 돌아오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에 한처럼 맺힌 사랑이 자기 아들을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이 아버지가 측은히 여겼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새카맣게 잊어버렸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잊어버린 때도 아버지의 마음은 항상 그를 염려하고 있었고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긍휼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먼저 이 아들에게 달려갔고 끌어안고 그 더러운 얼굴에 입을 맞추며 즐거워했습니다. 틀림없이 부자는 끌어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은 비록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탕자와 같은 길에 서있다고 할지라도 아마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하게 경험한 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생각해보십시오. 예배 잘 드리고 성령 충만해서 돈 많아서 봉사잘 할 때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낀 것이 아니라 이 탕자의 길에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피보다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회심하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곤고하고 예수 믿으며 살아가는 일이 힘들다고 생각할 때마다 저는 그 작은 교회에서 풍금소리에 맞추어 기도하면서 회심하던 그때를 기억합니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에 길에 고달파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주소서
그 교회당은 없어졌습니다.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윗필드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세기를 흔들어놓은 설교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마음이 곤고해질 때마다 어떤 일을 했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회심한 그 예배당을 찾아가서 자기가 회심한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내가 탕자의 길로부터 돌아와 주님을 만났는데 내가 다시는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지 아니하리라. 다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아버지가 그렇게 노심초사하면서 이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결국은 이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뭐하려고 아들을 기다렸을까요? 돌아온 다음에 아들을 앉혀놓고 네 놈이 갖다가 허비한 돈이 이렇게 많은데 이제 네가 갚으라. 내 집에서 뼈 빠지게 일해라. 그리고 아들을 향해서 채찍을 내리쳤습니까? 아닙니다. 아들은 분명히 자신의 죄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제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기에는 너무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품꾼중의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그랬더니 아버지가 당연하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 씻기고 새 옷을 갈아입히고 가락지를 끼어주었는데 이 가락지는 당시에 도장이 달린 가락지였습니다. 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뭐가 남아 있겠어요. 자기의 재산을 다 가져갔는데, 그런데 다시 이 아들을 위해서 재산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아버지의 마음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끊임없이 탕자의 길에서 내 집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당신 집에 부르셔서 뭐 하시려고 그러신 것입니까? 아무 것도 원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같이 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가출해서 집을 나갈 때 여러분들이 내버려두겠습니까? 방송국에 경찰서에 수소문을 하고 현상금을 걸고 아는 사람들을 풀어서 친구의 집을 모두 뒤질 때 그 집나간 자식을 향한 여러분들의 기대가 무엇입니까? 빨리 돌아와서 돈벌라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네가 없는 것을 견딜 수 없으니 내 곁에 돌아와서 우리 같이 살자. 가족이니까, 너는 내 안에 나는 네 안에 같이 살자. 그것이 아닙니까?
저는 LA에서 집회가 월요일까지 있는 줄 알았더니 주일날 오후에 집회가 모두 끝났습니다. 비행기 표는 화요일이었으니까 월요일 하루가 시간이 남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그 교회의 두 목사님이 저에게 월요일 날 꼭 LA를 관광하라고 권했습니다. 디즈니랜드를 모시고 갈까요? 아니면 영화촬영 장소인 유니버스 스튜디어나 스튜디오 같은 곳을 가실까요? 그래서 다 전화까지 해보고 팸플릿을 들고 오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도 좋지만 저는 이 도시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저에게 옛날에 공부를 가르쳐준 90세가 훨씬 넘으신 원로하신 선생님이 이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로서는 어디에 살고 계신지 어디에 가야 만나뵐 수 있을지 혹시 살아 계신지 돌아 가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그 관광 말고 그 선생님을 수소문해서 저를 좀 데려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중히 부탁을 드렸더니 이 목사님들이 열심히 수소문해서 결국은 그 선생님이 살아계신 곳을 찾아냈습니다.
이 선생님은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조직신학을 가르쳐준 선생님이었고 여러분들은 뵌 적이 없습니다. 20년 전 그 선생님이 70이 훨씬 넘으셨을 때 2년 반 동안 제가 그분의 조교로 섬겼습니다. 그분은 제가 만난 목사님들 중에 몇 분 안 되는 성자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1930년대 미국유학을 했으니 하나님이 내신 분들입니다. 유학하고 돌아오셔서 한국에 초창기에 조직 신학교수 두 사람 가운데 한 분이 되셨습니다. 원래 이 분은 부산에 큰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유학을 하고 와서 신학교의 교수님이 되셨는데 채플실에 들어가려면 앞에서 학장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는 하시더랍니다. 이 학교에는 직원들도 있고 교수님들도 계신데 제가 부족해서 학교에 돈이 없고 그래서 이 선생님과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학장님이 눈물로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나면 이튿날 땅문서 하나 가지고 와서 학장님, 이거 내가 가지고 있는 땅인데 급한 대로 팔아서 직원들 월급이라도 주고 학교 운영에 보태십시오. 이렇게 해서 그 많던 재산을 다 허비하셨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왜 목사님은 1년에 한번씩 2천명도 넘는 신학생들에게 밥을 사주는가 하고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있다고 하는데 그게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그 선생님의 조교로 섬길 때 가장 인생 중에 물질적으로 곤고하던 시기이었습니다. 그때 민주화사태가 있으면서 학교는 장기 휴교를 하고 저는 그 기간에 기도하고 공부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하루에 13시간씩 공부했습니다. 이상하게 공부하고 일어나면 하늘에 별이 막 보이면서 몇 차례 혼자 쓰러졌습니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학교에서 온 어느 학생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150명 내지 200명의 신학생들이 수도가에서 물을 마시고 식당으로 안 가고 산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며칠동안 밤에 잠잘 때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에게 우리 서로 돕자고 그랬더니 그분 하시는 말씀이 다 거짓말이야. 요즘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런데 나 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어.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애들아 신학교 다니면서 밥을 못 먹고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것은 20년 전에 내 때로 족하다. 내가 힘만 있으면 도와줄게. 그게 그 사연의 시작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곤고했으면 어느 날 정말 물질적으로 곤고한데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김 전도사, 생활이 얼마나 어렵겠니. 이거라도 보태어서 쓰라고 돈을 건네주었습니다. 뒤뜰에 나가서 세어보니까 25만원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때 등록금이 50만원이었으니까 25만원은 거금이었습니다. 학교 뒤뜰에서 그 봉투를 붙들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때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내가 이 사랑을 꼭 갚겠습니다. 내가 이 사랑을 갚을 때쯤에는 이 선생님은 돌아가셨겠지만 내가 서있는 그 자리에 남아있게 될 많은 신학생들에게 갚겠습니다. 그게 제가 일평생 신학교를 돕게 된 둘도 없는 단 하나의 동기입니다.
그런데 어째든 그 선생님이 집을 찾았습니다. 노인 아파트에 살고 계셨습니다. 아파트는 그냥 그런대로 깨끗한 아파트였습니다. 가보니까 혼자 계셨습니다. 그래서 과일바구니 하나하고 꽃다발 하나 가지고 가서 목사님 옆에 놓고 제가 큰 절을 올렸습니다. 94세였고 20년 만에 만났습니다. 굉장히 총명하고 건강하신 분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다리가 상하셔서 이제 누가 붙들어주지 않으면 일어나실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무릎을 꿇은 채 소파에 앉아계신 목사님 손을 꼭 붙들고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은 어디에 가셨습니까? 7년 전에 먼저 갔어. 목사님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정말 며칠 같이 자면서 식사도 챙겨드리고 휠체어에 태워 시원한 공원에도 구경시켜드리고 식사도 나누고 그러고 싶었습니다. 꼭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손을 붙들고 목사님, 얼마나 외로우세요? 그랬더니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제 마음에 평생 잊혀지지 않은 감동이 되었습니다. 외롭기는 뭐가,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데. 이어서 보태셨습니까? 예수 안 믿으면 몰라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셔서 외롭지 않아.
그때 제가 인사를 드리고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마음으로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목회를 하면서 고난이 겹치고 시련의 파도가 밀려올 때 나는 외롭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외롭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예수님이 안 계셨구나. 비행기를 타고 오는데 그렇게 눈물이 쏟아질 수가 없었습니다. 외롭기는 뭐가 외로워.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데. 15평도 안되는 그 작은집에서 혼자 계시면서 우리보기에는 외롭지만 그분은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먼 훗날 불행히도 내가 그렇게 오래 살게 되어서 교회도 은퇴하고 사랑하는 부인도 다 내게서 떠나고 내가 사랑하던 내 아내마저 먼저 보내고 그 나이에 내가 그 골방에 혼자 남았을 때 그때도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탕자의 길에 서있는 우리를 왜 그렇게 간절히 부르실까요? 어디 써먹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냥 너희는 내 집에서 가장 행복하니 나와 함께 살자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거절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 말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불러주시는 분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 돌아가십시오. 주님을 더 이상 문밖에 세워두시지 마시고 주님을 여러분들 안에 들어오게 하십시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4. 본 남편에게 돌아가리니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갈찌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2:6~7)
1. 본문의 배경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에 순종하며 또 그렇게 살아가는데서 행복을 느끼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인간은 바로 그렇게 지정된 그 자리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고 그런 관계를 떠나서 다른 곳에서 행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참회하여야 할 커다란 불경스러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믿으면서도 그 주님께 붙어있지 못한 생활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부르셔서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지를 하나씩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북 왕국 시대의 선지자였고 북 왕국 이스라엘 중에서도 나라가 매우 강성하고 번영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선지자였습니다. 나라는 강성하고 번영했지만 백성들은 번영할수록 점점 신앙의 참된 도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 호세아 선지자를 말씀을 전파하는 예언자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제 가장 번영했지만 가장 타락했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비극적인 가정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났고 경외하는 경건한 선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고멜이라는 디블라임의 딸에게 장가를 들도록 명령하였으니 그는 음란하기로 많이 알려진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 음란한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결혼을 한 호세아 선지자는 결혼생활에서 끊임없이 가정을 버리고 외간 남자의 품을 따라 떠나는 이 더러운 여인을 뼈 속 깊이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에 의해 운명지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수없이 남편을 배반하고 외간남자의 품으로 떠돌아다니는 이 여자를 쉼 없이 가서 물질을 주고 구속해오는 이 호세아의 행동은 호세아의 도덕적 결단에 따른 특성이라기보다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골수에 사무치도록 이 여자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시킨 것이었으니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뼈 속 깊이 사무치는 사랑이 무엇인지 선지자에게 느끼게 하시고 또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시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 예언을 통해서 말로는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희망이 이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선지자의 편에서 보면 형벌과 같은 무서운 사명이었지만 또 선지자는 이런 비극적인 가정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예언하면서 예전에 자신도 차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 뼈 속 깊이 파고드는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그러면서 자기 자신 전체를 불태우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는 전령의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고멜의 음란한 행동은 당시 바알 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알이라는 말을 원래 히브리말로 주인, 왕, 혹은 상전, 때로는 남편이라는 말로도 사용되는 말이 바알입니다. 이 바알 종교는 원래 페니키아 저쪽에서 들어온 종교인데 이 종교가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와서 아주 놀랍게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번성한 바알 종교는 근본적으로 농경사회의 종교입니다. 더욱이 이 바알 종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마 직면하지 못했던 그래서 산지로 도망갔던 가나안 원주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아래로 내려오는 가운데 잡다한 농경사회의 신과 혼합을 이루면서 더더욱 혼탁한 종교 양상을 빚어냈습니다. 이 바알 종교의 제의는 대게 산당에서 행해지게 되는데 그 산에서 신전을 지어놓고 거기서 바알 신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을 공경하게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에서 물러나가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지를 창조하신 상천하지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게시고 전 우주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유일신앙이 있었다면 그들이 결코 바알종교에 탐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을 전통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바알신이 있으니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을 섬기고 바알신도 섬긴다면 이중의 보험을 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에 있었던 지역 신, 사상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로칼 갓 사상입니다. 당시에 있었던 지역 신, 사상은 신들마다 테리토리가 있어서 그래서 그 관할구역에서는 그 신이 가장 힘을 쓴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간 배를 탄 것도 아마 이런 지역 신, 사상에서 하나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떠나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해석을 합니다.
여기에서 이 바알신이 그런 농경사회의 신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목하던 시대,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대에는 여호와가 힘을 썼지만 이제 여기에서는 바알신이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밉보이고서는 번영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바알신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구약의 다툼의 패턴이라고 하는 소위 리브 패턴이라고 하는 것이 나옵니다. 리브는 히브리말로 다투다는 뜻입니다. 그 다툼의 패턴이 무엇인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는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언제 주님을 버렸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나만을 섬기지 않은 것은 나를 버린 것이다. 이렇게 다툼의 패턴들이 들어온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택하겠다거나 세상 이외에는 나에게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다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한번도 섬김을 받으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고멜이라는 여인이 이토록 음란한 여인으로 나오는 것은 바알의 제의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특별히 최근 들어와서 많은 고고학적 발굴들이 20세기에 이루어지면서 이런 호세아가 당시에 직면했던 사회상에 대한 다양한 빛들이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산당에 바알 신을 섬기던 신당이 있고 그 바알을 섬기는 제사행위 속에는 성행위가 헌제행위로 뒤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당에 작은 방들이 여러 개 있고 신전에는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종교적인 신전 창녀들이 있어서 헌 제자들이 제사를 드리러 와서는 바로 그 방에 각각 들어가서 제사행위 속에 있는 한 순서로서 신전의 창녀들과 성적인 교접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방에서 성적인 교접들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바알을 매우 기쁘게 하고 심지어는 그 바알을 흥분시켜서 가뭄 때는 비를 내리고 또 햇빛이 필요할 때는 햇빛을 내려서 곡식을 익게 한다는 이런 해괴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구약학자들은 아마도 이 고멜이 그런 신전 창녀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호세아서의 배경이 되는 내용입니다.
2. 신앙, 하나님과의 결혼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봅시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신앙은 하나님과 혼인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결혼이 구약성경에서 매우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편이신 하나님과 혼인한 그런 아내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신랑으로 그리고 교회를 그의 신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집단적으로 교회에만 적용되지 않고 신자 개개인에도 적용되었으니 사도바울은 목회자인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자리매김하기를 자신은 중매쟁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처녀인 너희들을 잘 가꾸어서 그날에 정말 순결한 신부로 예수님께 바쳐지기 위해서 그렇게 처녀인 너희들을 순결한 신부로 만들어가는 일을 돕는 사람이 사도 바울 자신이라고 소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전체의 맥락을 놓고 보면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혼인관계는 어떻게 보면 이미 이루어진 혼인관계이고 또 궁극적으로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혼인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할 처녀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앞으로 신부가 될 미래의 아내로서 묘사합니다. 이것은 이제 예수님 시대 때 결혼제도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약혼입니다. 약혼인데 또 정혼이라고 하는데 정혼하게 되면 우리는 그 정혼의 의미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특히 지금은 더 그렇습니다. 약혼식도 안 하니까, 우리 결혼할래. 그래 하자. 그러고 약속을 합니다. 깨져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누구와 정혼을 했다고 선언을 하면 그것은 부부관계입니다. 그래서 그 정혼한 상태를 다시 깨트렸다고 하는 것은 거의 시집갔다가 소박맞고 돌아온 여자 정도의 불명예를 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정혼을 하게 되면 이미 결혼관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결혼관계는 이제 혼인자치에 들어가서 결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너희를 순결한 처녀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들인다고 할 때 그 처녀는 그냥 처녀가 아니라 정혼한 처녀입니다. 올래디, 이미 결혼관계 속으로 정혼을 통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신방을 차리고 한 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낮엣,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긴장관계가 이제 혼인제도 속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사실 이것이 명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에 그 우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치 얼핏 들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멀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택정하신 것, 가깝게는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 나타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약속을 주시는 것을 정혼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리고 그 정혼한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그리고 광야를 유리하면서 그 하나님께로부터 보호와 도움을 받고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제 말하자면 혼인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 번에 걸쳐서 상기시키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신 사이에 연애하던 때를, 여기서 연애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결혼에 준비 단계로서의 연애는 아니지만 그러나 사랑하고 연애하던 때의 그 연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거기에서 태어난 세대들을 데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짧은 기간동안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순전하게 하나님을 따르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서 그런 일들이 초기에 일어났습니다. 그런 때를 하나님이 상기하신다고 믿어집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우선 신용카드를 같이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내인 자매가 가난해도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결혼관계 속으로 들어오는 그 남자는 몸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가끔 자매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부담이 될 때가 있습니다. 왜 빚을 가지고 들어오니까. 장가들겠다고 빚을 잔뜩 지고 나같이, 그리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빚도 아내의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어째든 남성이 살 자리를 다 마련하고 아내가 될 자매를 부릅니다. 내가 이 자리를 빌어서 얘기하는데 혼수에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형제들에게 부탁하는데 그 못난 일 좀 하지 마십시오. 나는 너 자신의 존재 하나로 충분하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수많은 자매들을 보십시오. 가슴에 뭐 와 닿는 것이 없습니까?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누리게 됩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남자는 예로부터 모든 힘으로서 결혼관계 속에 들어온 아내인 자매를 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힘은 깡패와 만났을 때 대신 맞아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육체적인 힘뿐만 아니라 지식과 모든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 힘이 있어서 한 여인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결혼관계속에서 사랑을 서로 독점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는데 너무 눈물겹게 자기를 사랑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당장 시집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똑같이 사랑하는 자매가 한명 더 있습니다. 많지도 않고, 그러면 다 집어치우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결국은 무엇입니까?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 유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외에도 많은 유익들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게 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버려도 인간적으로 덜 외롭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 앞에서 홀로 선 단독자의 구원을 향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셀베에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터니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영원을 향한 외로움 같은 것에 있어서는 누구도 공유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인간적인 모든 외로움은 물러갑니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본척하지 않아도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고 내 아내가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 유익을 한없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아주 놀라운 책임과 부담도 뒤따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오직 그 사람에게 헌신해야지 됩니다. 그 사람 말고 헌신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쯤 더 있으면 중대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나왔던 고멜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그 한 사람을 위해서만 헌신해야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깊이 복종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편이 아내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것은 사랑이고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서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일은 복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노예시대로 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이 꼭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가 아닙니까? 성경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또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럼 내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복종만 하면 됩니까? 그런 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엉터리 같은 교리가. 그런데 왜 그러면 사랑이 두 번 겹쳐서 쓰여 지지 않고 그 여인들을 향해서만 남편의 의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랑이 쓰여 지는가 하면 그것은 여자의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는 특성을 가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언젠가는 우리가 주례를 아무렇게나 서는 것이 아니라 주례할 때 서약하는 것이 다 책에 나와 있습니다. 표준서를 보고 하는데 언젠가 한참 10년 쯤 하다가 보니까 이게 좀 이상합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신랑 아무 아무개는 신부 아무개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는가. 건강할 때나 괴로울 때나 뭐 이러면서 사랑하겠는가 하고 나옵니다. 그런데 저쪽에 가면 틀립니다. 아내인 아무 아무개는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남편을 사랑하고 그렇게 두개가 더 보태어집니다. 존경하고 순종하겠는가. 그래서 어느 날 생각하다가 이것은 양성평등에 위반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적이지 않은 가부장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 예식서를 쓰면서 두개를 추가해놓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음성인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둘 다 같이 하든지 빼든지 그 다음부터 내가 고쳤습니다. 똑같이 남편인 아무 아무개는 사랑하고 아내 된 자를 사랑하고 또 아내 된 자를 존경하겠는가? 똑같이 합니다. 저쪽에 가서도 똑같이 합니다. 신부 아무 아무개는 남편 될 누구누구를 사랑하고 존경하겠는가. 결국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하면 성경에서 이미 나옵니다. 피차 복종하라. 그럼 누구보고 복종하라는 것인가 하면 옳은 쪽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남편이기 때문에 복종하지 말고 아내이기 때문에 봐주지도 말고 서로 옳은 쪽에 복종하라. 그래서 자신의 주인이 남편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그리스도이신 것을 입증하라. 이게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아멘을 해 아멘을, 아멘을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또 하나의 중요한 의무가 생겨나는데 그것은 정숙함을 유지하여야 할 성적순결의 의무입니다. 이것은 아주 결혼에 있어서 핵심적인 가치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핵심적인 가치에 속한 것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5-10번 정도의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내가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이런 성적인 결합과 부부의 결합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이미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찌니라” 라는 이 대목에 나와 있고 그리고 그것이 정욕과 그 다음에 이 모든 육체의 쾌락, 이런 것과는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아주 복잡한 신학적인 문제가 얽혀있습니다. 이것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여러분들에게 들려주기로 하고 그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어째든 이처럼 성적으로 정절을 지켜야 할 중대한 의무가 수반됩니다.
그래서 유교시대 때 우리 양가집 여인네들은 가슴에 항상 단장을 품고 살았습니다. 칼입니다. 위급한 상황에 자신의 정절을 유린할 사람으로부터 자기를 정당방위하거나 도저히 자신의 정절을 지킬 수 없을 경우에는 차라리 정절을 잃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이나 생각들이 옳은가 아닌가 하는 것은 여기서 논의할 성질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처럼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혼인관계에 들어가서 누리게 되는 말할 수 없는 축복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러나 결혼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기가 떠맡아야할 이 의무도 굉장히 크다고 하는 것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 되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동안에는 이렇게 자신의 아내 된 의무를 다하고 그리고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전혀 힘든 것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편 되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대로 그에게 특권이지 절대로 무거운 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외와 사랑이 사라지게 되면 이제 자신이 아내로서의 모든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부담을 느끼게 되고 결국 생각은 어차피 기회가 있으면 이 의무의 짐을 떨쳐버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바로 고멜이 그런 생각 때문에 경건한 남편인 호세아 선지자의 가슴에 못을 박으며 이방의 신당으로 달려가고 거기서 이름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남자들과 교접하면서 난잡한 삶을 산 타락한 여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그 고멜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호세아가 아니라 고멜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렇게 고멜이 끊임없이 경건한 남편을 뿌리치고 한편으로는 바알 신에게 축복을 받기 위해서 산당으로 달려가고 한편으로는 그 바알을 섬기는 과정에서 맛보는 육체의 향락을 위해서 집을 뛰쳐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시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싫증내고 끊임없이 세상 곁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 밖에서 축복을 받아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떻게 보면 받기가 매우 힘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적인 결단과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박수치고 노래를 불러도 하나님이 흥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아무리 율동을 하고 발광을 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흥분해서 하늘을 열고 여러분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그런 비인격적인 망령 들린 신이 아닙니다. 고도의 도덕성과 그 도덕성의 기원인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이 옛날에 바알신의 이름을 불렀던 선지자들처럼 옷을 벗고 온몸을 상하게 하여 피가 철철 흐르게 하여도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축복을 받기에 너무나 어려운 것입니다. 총체적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온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거룩함을 좇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알 신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어째든 흥분시키면 비를 내리고 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알이 주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바알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더럽게 타락했기 때문에 바알이 흥분해서 비를 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비를 내리신 것인데 우연히 때가 맞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이 속으면서 바알이 그렇게 자기를 축복해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멀리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언제 하나님을 버리겠다고 그랬습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지만 언제 하나님을 섬긴 적이 있습니까? 언제 하나님만을 사랑한 적이 있습니까? 무엇인가 하여튼 그 속에 섞이려고 하고 이중의 보험을 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 하나님 앞에 참 잘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 중에는 일주일 동안도 현저히 자신의 양심에 거스르는 죄를 습관적으로 지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 현저히 양심을 거스르지는 않지만 그러나 양심이 너무나 무디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지속적이고도 간헐적인 범죄행위 속에서도 주일이면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매우 모독하는 사람들이고 주님이 주신 이 예배라고 하는 거룩한 이 제도를 심히 더럽히는 사람들입니다. 무지와 어두움 가운데서 죄를 짓는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더 많은 죄책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담대하게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졌기 때문에 이렇게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심히 죄책이 되고 내가 받을 징벌을 더하는 것이라면 집어치우면 되겠네요. 그래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무거운 죄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물을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예배를 드려도 안 된다. 집어치워도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은혜가 고갈되고 나면 살수가 없고 죽을 수도 없는 하나님을 향한 의무를 행해도 소용이 없고 안 행하면 더 나쁜 그렇게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지 이렇게 와서 드리는 주일예배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동안을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옷깃을 여미고 자신의 온 지성과 마음과 그리고 온 뜻을 다해서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섬깁니다.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합니다. 주일날 와서 신랑 되신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떠나서 일주일 동안 세상에 살아갈 때 당신을 향한 사랑을 지키려고 했더니 수많은 유혹으로 내 마음은 상하였고 멸시와 핍박으로 나는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랑은 남편 되신 하나님 당신뿐입니다. 고백할 때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이 예배의 현장 속에 뼈 속까지 타들어가는 그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신부인 우리들을 향해서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신을 버리고 음란한 길로 가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내버려두셨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가는 길에 담을 쌓아 가는 길을 막고 가는 길에 가시로 그 앞에 쌓아놓아서 그래서 그 가시에 찔려서 도저히 갈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다가 보면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뜻을 세우지 않고 아무렇게나 살 때는 편안하게 살았는데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사명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이렇게 살아야지 되겠다고 뜻을 세웁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섬겨야지 되겠다고 하고 자신의 의지를 굳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핍박을 받고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생기면 생긴 대로 살자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마음의 괴로움은 적은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닫고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절박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는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면서 끊임없이 좌절하고 괴로워하고 고민하게 되지 않습니까? 내적인 견딜 수 없는 고통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이 이렇게 올바른 길을 가고 올바른 사람이 되려고 뜻을 세웠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은 대부분 이렇게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주님을 버리고 그 아름다운 혼약관계를 배신하고 자기 좋은 대로 방탕한 길을 가기 때문에 주님이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길을 고집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주님이 세우신 담벼락을 만나게 되고 담벼락을 만나 두려워하며 무릎을 꿇는 대신 그것을 지나쳐가던 길을 가고 싶어 하기 때문에 무수히 부딪혀 머리가 찢어지고 그리고 그 담벼락이 피로 물드는 것입니다. 수없는 가시로 울타리를 쌓아 가지 못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시를 보고 두려워하며 가던 길을 돌이키는 기회를 얻는 대신 온 몸으로 부딪혀 무릎이 모두 찢어지고 그리고 살점이 모두 떨어져서 허연 무릎 뼈가 드러나기까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가시넝쿨과 싸우다가 거기에 넘어집니다.
왜 그렇게 미친 듯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뼈를 깎고 살을 찢는 고통 속에서도 달려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바알이라는 놈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자기사랑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를 사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기 말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표상일 뿐이고 실제 그 뿌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자기 사랑은 어떻게 나타난다고 성경이 묘사합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럼 왜 그렇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합니까? 결국은 그것을 사랑할 때 즐거움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편에서 시인은 말하기를 “탐닉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역하나니 그는 여호와를 멸시하는 자로다.” 라고 말합니다. 무엇인가 욕망을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자신의 사랑 때문에 사랑하게 되면 그러면 그는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반드시 하나님과 등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으면 가던 그 길을 계속해서 갈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을 사랑하고 갑니다.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오늘 이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이 가다가가다가 담벼락에 머리가 부딪혀 담벼락에 피가 흥건히 고이고 가던 길을 가로막는 가시떨기가 가득한데 그 무릎에 피를 쏟다가, 쏟다가 엎어졌습니다. 바알이 달려와서 구해주었습니까? 아니면 선지자가 가서 구해왔습니까? 여러분들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고 가다가가다가 주님이 길을 막으셔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피 흘려 가던 그 길에 쓰러졌을 때 한번이라도 세상이 달려와서 여러분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네가 나를 이렇게 사랑해서 찾아왔는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네 남편인 여호와까지 버렸으니 이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어찌하겠는가 하고 안아주는 세상을 본 적이 있습니까? 대답해보십시오. 왜 대답을 못합니까? 세상에게서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세상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의 빛으로 보면 그것은 굉장히 찬란한 섬처럼 보이고 보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영광이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이라는 햇살의 빛에서 비추어보면 세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니라.” 그랬습니다.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가시떨기를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생각이 깊은 사람은 지금 이 시점에 저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제게 고통이 있습니다. 진짜 가시에 찔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완전히 배반하고 세상으로 간 사람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해서 제가 세상을 완전히 끊고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고통은 주님을 버린 것 때문에 당하는 고통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부족하나마 주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데서 오는 고통일까요?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웬만한 현명한 지혜를 가지고도 이 질문에 대해서 너는 이 경우다. 저 경우이다. 하고 무 자르듯이 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정체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서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한번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청년이니까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없지만 결혼을 해서 이제 때가 되면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러면 직접은 경험이 없으니까 드라마 같은 곳에 보면 계속해서 이를 악물고 밧줄 하나 주면서 힘을 주라고 합니다. 사실은 힘줄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나올 때쯤에는 머리가 아래로 향하면서 이놈이 내려와서 자꾸 치받습니다. 그러면 양수가 터지면서 이 아이가 물과 함께 나오는 것인데 이 아이가 나오려고 몸을 움직이면서 치받으면 이 자율신경을 움직여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반사적으로 엄청난 힘이 복부 아래쪽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 배에 모든 근육들이 확 뭉쳐서 아래를 향하려고 하는 이 태아를 밖으로 밀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쑥하고 나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어느 자매가 아니 목사님 애도 안 낳아보고 어떻게 그렇게 묘사를 하는지 정확하고 틀림없다고 해서 척 보면 압니다. 그렇게 해서 힘을 주면서 나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사람에게도 고난이 있고 주님을 등지는 사람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둘이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해보면 압니다. 자신이 받는 고난이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찾아가기 때문에 받는 고난일 경우에는 그 고난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도에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나는 이것을 피의 펌프질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기도제목이 마음깊이 다가와서 하나님, 내가 주님을 섬기면서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고 기도를 하면 이 속에서 영적인 자율신경이 움직이면서 이 속에서 내면의 세계가 펌프질을 합니다. 그러면서 피의 기도를 솟구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욕심을 따라가다가 고멜처럼 험난한 가시밭길에 엎드려진 사람들은 기도해도 그런 피의 펌프질이 없습니다. 참회하고 돌아오기 전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한번 점검해보십시오.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왜 그렇게 아파합니까? 여러분들이 자신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참회도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의존의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도도 아닙니다. 그 눈물을 회심하지 않은 사람도 펑펑 흘릴 수 있는 종류의 눈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모두 믿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믿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종교적인 체험 속에서 그 체험이 주는 다양한 현상을 비집으며 그것이 참된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체험인가 하는 것인가를 분별해내는 것은 고도의 영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중에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신앙의 감격도 없고 주일날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감격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깨트려지는 진정한 변화도 없는 많은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어떻게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바알을 좇아가다가 담벼락에 부딪혀 피를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서는 안 될 가시밭길을 걸어가다가 엎드려져서 쏟는 피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흘리는 피만으로는 주님의 긍휼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육신이 찢어지고 피가 많이 흐른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이 돌같이 굳은 채로 남아있는 한 주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긍휼을 힘입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의 몸을 상한 그 고난과 그 고통이 아니라 마음이 깨트려진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니 깨어진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 한 시인의 고백과 같이 그 고난을 계기로 해서 그 속에서 깊이 깨트려져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뭉개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다리시고 받으시는 것입니다. 지나간 모든 죄를 기억도 아니 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럼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미 결말이 뻔한 길을 그렇게 비참하게 망가질 수밖에 없는 그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그 길을 미친 듯이 달려가서 부딪히고 부딪혀서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양보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가는 일관된 불순종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거짓행복의 추구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를 먼저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하나님을 공경할 때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오는 그 기쁨이 참다운 기쁨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라고 하는 자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땅에 있는 물질이라고 하는 자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라고 하는 하늘의 자원, 이 모든 것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유하고 즐거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모두 사용해서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에 지정해준 그 섬김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복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지 않고 즐거움의 원천이 하나님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즐거워하기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신 육체의 생명이나 이 땅에 있는 자원이나 이런 것들 안에 궁극적인 행복의 원천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게 질서가 뒤바뀌게 되어서 하나님을 사용해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사용하게끔 주신 것들은 궁극적인 목적처럼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것들이 혹은 이 세상이 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신이신 하나님은 물질의 자리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용해서 그래서 그것들을 누리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아주 사악한 삶입니다. 이런 식으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거짓된 것을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의 삶이 어떻게 영위되어야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나의 머리가 아닙니다. 그 가르쳐주는 것은 객관적인 진리가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그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또 객관적인 진리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하나님의 뜻을 소유한 보이는 사람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화육하신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통해서 참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때 비로소 그 참된 길을 따라 걸어갈 때 그 사람이 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선한 삶을 살아서 궁극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그 안에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된 삶은 어떤 것인가 하면 이미 벌써 진리가 없습니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저리로 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제시하는 목표 자체가 죄가 속여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짜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오는데 그 삶이 선한 삶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적하지 아니하고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원하는 그 삶의 목표를 찾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거짓 행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짓된 행복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어떤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이 이야기하기를 죄의 낙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죄도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잠시는 육체의 모든 고단함과 피곤을 잊어버리게 만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이 육체를 돕는 것이 아니라 육체로 들어와서 육체를 심하게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을 앗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행복입니다. 끊임없이 경건한 남편을 버리고 바알신당으로 줄달음질치던 이 고멜에게 소정의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렇게 가정을 버리고 도망갔을 리가 있겠습니까?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거짓된 행복을 찾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기도를 많이 하고 젊을 때 하나님을 깊이 만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가 일생동안 계속되지 않으면 젊은 시절에 주님을 만난 은혜의 경험들이 여러분들의 미래를 안전하게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 한 가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밖에 있는 어떤 행복을 꿈꾸지 않는 것,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밖에서 어떤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꿈꾸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범죄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삶의 실천 속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아주 큰 기대, 사람들을 만나서 하나님 없는 대화 속에서 누리게 될 기쁨, 어떤 오락에 탐닉하게 되는 거기서 굉장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 또 미래에 결혼, 취업, 그리고 승진, 등등을 꿈꾸면서 거기에서 무엇인가 굉장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행복의 기대, 이런 모든 것들은 알게 모르게 여러분들을 방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작은 영향을 여러분들의 영적생활에 미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여러분의 영적생활을 뿌리 채 뽑아서 던질 강풍과 같은 위대한 능력을 가진 폭풍우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기울여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사실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있다면 튼튼한 위입니다. 나는 새벽 1시에 삼겹살을 구워먹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입니다. 우리 형제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소화에는 늘 자신이 있었고 허리가 망가지기 전까지는 소화에 정말 자신이 있었고 그리고 그렇게 굉장히 먹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미각이 아주 굉장히 다른 사람에 비해서 발달해서 다른 사람이 그 맛이 그 맛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를 아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그런 감각이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나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참 그렇게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막 늘어날 때 거의 90킬로를 육박했습니다. 그러다가 두 번이나 세 번을 결단하고 집중 조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몇 달 동안에 제가 사색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고 저는 평생 동안 이것이 계속 가기를 바라고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흐트러진 자신의 몸을 보면서 아주 괴물같이 느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너무 절제 없이 살았던 것만 내가 후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리바운드 되거나 그랬는데 요즘 다시 느끼는 것은 경험 속에서 아주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음식을 먹는 삶에 있어서 방탕하게 되면 사색이 안 되는 것을 제가 깊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치면서 내가 아! 그래서 내가 그렇게 묵상을 하려고 했는데 사실은 만족스러운 묵상 생활이 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구나. 아주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먹고 싶은 모든 욕구를 유지하면서 덜 먹는다고 하는 것은 진짜 저 같은 신체적 조건에 있는 사람들만이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압니다. 그 고통이 어떻게 해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니까 기대감을 안 버리고 절제를 하려고 하니까 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녁을 뭘 먹을까? 내일은 뭘 먹으면 굉장히 행복하겠다. 삼일후면 점심 약속이 있는데 그때는 어디를 가야지. 그럼 굉장히 맛있고 음식이 예쁘고 보기도 좋고 음식점이 깨끗하고 이런 것들에 대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지워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절제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색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에너지를 공급받기 위해서 먹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에 평정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먹는 것만 예를 들었습니다만 보고 만지고 느끼고 냄새나고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강력한 기대들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헛된 행복을 꿈꾸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이 마음자체가 더러워지고 욕망에 의해서 흔들린 마음의 물결은 지성에까지 출렁거립니다. 그래서 사물들을 인식할 때 수많은 표상들이 보이는데 그것을 그대로 신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에 미친 듯이 몰두하고 시간을 투자합니다. 굉장히 중요한데 아주 우습게 여기고 자기를 헌신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이 사람이 아무리 진지한 열정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살고 보면 휘청거리면서 살아온 아주 쓸모없는 인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많이 말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에 관해 하나님께 말하는 기도의 시간을 더 많이 갖고 그리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시간보다는 눈에 비추는 모든 시간을 자신에게 받아들이는 시간, 관상으로 바라보는 이 모든 만물을 보면서 실제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는 그 인식들을 자기 속에 잠잠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소화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진짜 진실하고 깊은 사람들이 되어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흔들리지 않는 현자의 삶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혜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 여자가 어떻게 됩니까? 바로 그렇게 될 때 그가 고통 중에서 뉘우치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고통 중에 깊이 뉘우치면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이제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으니라.” 고통을 통해서 깊이 그 고통 속에서 뉘우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매우 커다란 위로를 받습니다. 고멜과 같이 뼈 속 깊은 곳에라도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뼈 속 깊이 바알에 대한 열렬한 애정과 음탕함이 골수에까지 녹아있는 이 여인인데도 어느 고통의 시점에 가서는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리고 인격적으로 결단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주님을 멀리 떠났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고멜보다 낫습니다. 그렇게까지 멀리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까지 멀리 갔다고 하더라도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 앞에 돌아올 능력이 없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외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돌아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주님은 돌이키시고, 참회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참회시키시고, 주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를 따라올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그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주님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사소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얼마 안 되는 신앙생활이지만 과거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언제 정말 행복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돈 많을 때, 아니잖아요. 애인이 생겼을 때는 더더욱 아니잖아요. 언제 행복했습니까?
여러 해 전인데 TV에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던 어느 톱스타가 여자 배우인데 인터뷰를 했습니다. 광고 한번 출연하면 당시에 10억씩 개런티를 받았다고 하니까 진짜 때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언제 행복했는가? 그랬더니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가정에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너무 가난해서 다 쓰러져가는 빌라에 살았는데 그러다 돈을 조금 벌어서 아버지가 개인택시를 했는데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그랬습니다. 온 가족이 아버지 돌아올 때쯤에 골목에서 기다리면 아버지가 개인택시를 몰고 돌아와서 돈주머니를 풀러놓고 차고에 세워놓고 차에서 나와서 자기를 안아줄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 여자가 시집을 갔는데 온 동네에 슈퍼에 소주가 동이 났습니다. 그게 왜 그럴까 그랬더니 우리는 소주를 안 먹으니까. 왜 그런가 하니까 이제 그 여자도 가는구나. 그리고 사람들이 다 술을 마신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자기가 인기가 올라가서 돈을 몇 십억 벌고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자기가 시집가는 것이 슬퍼서 수많은 남자들이 그렇게 슈퍼에 소주를 동낼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때에 행복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게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잠시 도피하여 마음에 평정을 찾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신 신자들이 이렇게 평범한 사실을 모르고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산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발아래의 돌맹이와 들풀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할 정도로 사과할 정도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언제 가장 행복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고난이 오고 시련이 올 때도 우리를 불행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진짜 행복할 때는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께 사랑을 받을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안에 회심과 함께 심어주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감격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지킴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린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행복도, 어떠한 만족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을 등졌기 때문에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 해 전에 중국에 갔을 때 한 3천명 이상 모이는 교회에 거기서 목회하시는 아주 원로 한 목사님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에 관해서 옆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젊었을 때 복음을 듣고 정말 구원을 경험하면서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 이제 이 한목숨 예수 위해 살겠다고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신학교에 다니는데 유명한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발칵 뒤집히고 교회마다 부서지고 그리고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처형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그때 전도사였는데 신학생이었는데 결국은 가족과 헤어져서 22년 언도를 받고 가족들과 일체 연락도 끊어진 상태에서 그래서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서 22년을 징역을 살았습니다. 복역기간이 다 끝나고 결국은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변한 동네를 이리 찾고 저리 찾아서 22년에 떠났던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은 다 무너지고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어서 폐인이 되어있었고 아들 하나는 열렬한 공산당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이 분이 그 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막 흐느껴 우는데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애야, 아직도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게 신앙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3. 기다리시는 하나님
“환난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느니라.” 그래서 그 하나님께로부터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주님께 드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만 신자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그 안에서만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산 넘고 물 건너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 그 사람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허탄한 것에 매어서 사랑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고, 행복할 수 없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불쌍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은 담벼락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가시덤불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의 가는 앞길에는 끊임없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고 주님의 이름을 수없이 불러도 그는 형통한 길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계시는 한 그는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 지혜로운 자가 되어서 생각하십시오. 우리 주님을 이렇게 사랑하는 남편을 버리고 뼈 속까지 타들어가는 음욕으로 남편을 배반하고 어그러진 길을 가는 고멜과 같은 여러분들을 찾아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5. 다시 마음을 베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자가 없으리라“(렘4:4 상)
1. 본문의 배경
오늘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주님께 속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유다 나라가 망하려고 하던 그 직전입니다. 역사적으로 6세기에서 7세기 정도의 일이었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는 여러분들이 역사에서 배운 앗시리아에서 멸망을 당하고 150-18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그때의 일이었습니다. 이 남쪽 유다는 이제 이미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조정에서는 오래된 우방인 애굽과 새로 강력한 나라로 등장하는 바벨론 사이에서 외교적인 줄타기를 시도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기울어져가는 구군은 그런 외교적으로는 막을 수 없게끔 이미 물에 갈아 앉는 배처럼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바로 이 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라고 하는 선지자를 보내어 예언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가장 희망이 없어 보이는 절망적인 때에 가장 뛰어난 선지자를 주님이 보내셔서 그 시대의 백성과 사람들에게 주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여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고치고 돌아오도록 촉구하고 계시는 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서 기울어져가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인간이 가장 희망이 없다고 하는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에 선지자들이 많이 나오고 특별히 성경을 기록한 정경 선지자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지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의 그 탁월함은 예언의 내용에도 있지만 예언하는 그 방식의 뛰어남에 의해서 입증이 됩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선지자 중에 뛰어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분의 마음까지 전해준 선지자였습니다. 전해주었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그 마음에 의해서 불타올랐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사람의 별명을 하나님 마음의 선지자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의 특징은 눈물이 담긴 예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단지 기울어져가는 이스라엘의 역사의 그 비탈길에서 흘리는 한 애국자의 눈물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흘러내리는 그 눈물의 마음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울고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도 울고 계셨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예언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그 끌어 넘치는 정념을 그 백성들에게 보여주면서 예언을 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오늘 이 예언 속에서 등장하는 이 4장의 내용은 멸망과 심판의 비탈길에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간절한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백성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4절에서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 사람들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할례라고 하는 것은 아이가 태어 난지 8일 만에 행하는 의식인데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고추의 앞부분에 껍질을 베어내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할례라고 합니다. 이 할례는 종교적인 의식이었고 이것이 없이는 그 백성 중에 한 사람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인 된 그 표를 하필이면 그 아이의 고추에다가 새기기를 원했을까 하는 그런 의문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대해서 많은 설명이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요악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선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이 아이가 어렸을 때 양피를 베어버림으로서 두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아이의 발육과 성장에 아주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도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좋은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어째든 의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는데 그 8일째가 바이타민 테이가 가장 많이 분비되는 시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양피를 그때 베게 될 때 아이의 그 후의 모든 발육에 놀라운 좋은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할례를 행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런 세세한 이유를 밝히지 않으셨지만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추론해갈 때 일반은총 차원에서 이 할례는 첫째로 육체의 발육에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제 위생과 특별히 관계가 있습니다. 어린아이 적에 이 양피를 베어내지 않으면 아이가 자라면서 그 표피 속에 아주 더러운 이물질들이 끼게 되고 그것들이 이제 성기 부분에 각종 감염이 되는 질병들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 아이가 결혼해서 아내를 맞이하게 될 때 그런 병균들이 수많은 질병들을 부인에게 유발시켜서 다양한 부인병들을 발생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런 병균에 오염된 채로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반은총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게 하셨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런 일반은총적인 차원 말고 특별은총적인 차원에서는 이 할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생각나게 하는 표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그 표를 등이나 보이지 않는 엉덩이에 새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몸에 한 부분인 이 성기 부분에 새기게 하셔서 남자들로 하여금 어린시절에 자랄 때부터 시작해서 성인이 되어 마지막에 죽을 때까지 항상 자신의 몸의 그 표를 보게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는 특별한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시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몸에 있는 표를 보면서 자신이 성결 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속하고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고 그분을 섬기면서 살되 또한 그분으로부터 매우 특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도록 된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 사람 속에 일깨우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어째든 이 할례의 표는 구별된 표이고 그래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살도록 그렇게 지정된 백성의 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할례 받은 백성들입니다. 여러분들의 살에는 구약시대처럼 이 표가 새겨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살에 새겨진 표보다도 더 뛰어난 마음에 새겨진 할례의 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맨 처음에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그 말할 수 없이 따뜻한 첫사랑을 느끼기 전에 회심한 순간을 기억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인 줄 알고 자기의 행복이외에 더 큰 가치가 없는 것처럼 제 멋대로 살던 여러분들이었는데 어느 순간에 주님께서 어두운 영혼에 빛을 비추시고 감았던 눈을 뜨게 해주셔서 복음과 복음의 교리들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다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죄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하셨다는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사랑에 감격해서 기뻐하기 전에 제일먼저 마음에 할례를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난지 8일밖에 안 되는 아이를 그 양피를 찢어서 베어낼 때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이의 사타구니에서는 피가 흐르고 아이는 자지러지듯이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몸에 할례를 행할 때 느끼는 그 아픔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아픔이 우리의 마음에 양피를 베어낼 때 있었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알고 우리가 그 안에서 감격하기 전에 주님의 칼로 우리의 마음에 그릇된 사랑을 도려낼 때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그 복음이 우리에게 알게 하였을 때 우리가 얼마나 아팠는지 기억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할례를 받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그 할례의 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표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이 정말 사랑해주어야 할 매우 특별한 자기에게 붙은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할례의 표는 구별이니 이것은 하나님 앞에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에 동시에 또한 자신도 하나님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고 그분께만 헌신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오늘날 하고 있는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만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는 이방의 나라를 더 많이 의지하고 신앙보다는 자신들의 외교능력을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이방신당을 드나들면서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였습니다. 할례 받은 백성들이었는데도 그 할례의 표에 부합하지 못하게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슴에 손을 얹고 이 모습이 바로 정확하게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육체의 할례의 표도 이렇게 하나님께만 헌신하도록 부름을 받은 놀라운 증거가 되었다면 살보다 더 깊은 곳,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행한 이 할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어떠한 사랑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 곧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그분을 순전하게 사랑하고 그 사랑에 메어서 그분을 높이기 위해서 그분께만 헌신하며 살도록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십자가의 피로 아무 공로가 없는 우리들을 죄 가운데서 이미 죽었던 우리들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만 헌신하여야 할 이 마음의 할례 된 표를 잊고 교회에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조금도 구별이 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많은 은혜들은 우리 안에서 부패하고 주님이 활용하도록 주신 많은 은혜의 방편들은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을 향한 할례의 정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늘에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여러분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주시고 여러분들을 구하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여러분들을 살려두시고 그 십자가의 보혈로 죄인인 우리의 가슴에 할례를 행해주신 것은 이제는 그분만 사랑하고 그분만 섬기고 그분만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주님이 주신 표입니다. 그 표에 합당한 마음과 삶으로 돌아갈 때만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고 바로 그 자리에서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이 사람들은 가시덤불에 파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먼저 땅위에 가시덤불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워버리고 그리고 굵은 돌을 먼저 골라내고 그리고 그 땅을 갈아서 기경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기경되어서 부드럽게 된 흙 위에 씨앗을 뿌려야지만 작물이 되고 곡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은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이 씨는 아무 씨가 아니라 곡식의 씨앗입니다. 파종한다고 하는 말자체가 잔디나 혹은 나무 같은 것을 심는데 쓰는 말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일년생 곡식을 만들어내는 씨앗을 뿌리는 것을 파종이라고 부릅니다. 이른 비가 오면 파종을 하고 늦은 비가 지나고 나면 추수를 하게 되어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너희에게 주시고” 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곡식의 씨앗을 뿌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곡식을 낼 리는 없습니다. 이미 땅의 지격을 가시덤불이 다 빨아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씨앗이 뿌려져도 뿌리는 내리고 싹은 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가시덤불 속에 있는 그 뿌려진 곡식의 씨앗이 가치 있는 열매를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합니다. 원래 악한 나무는 지격을 강하게 빨아먹고 인간들에게 소용되는 좋은 나무는 그 지격을 그렇게 무섭게 빨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가시덤불과 곡식이 함께 뿌려지게 되면 손해를 보는 쪽은 가시덤불이 아닙니다. 씨앗을 가시덤불 속에 뿌리니까 씨앗이 왕성하게 자라서 곡식이 길같이 자라서 결국은 땅의 지격을 다 빨아들여서 가시나무가 말라 죽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의 일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설령 곡식이 먼저 심겼다고 하더라도 가시덤불에 씨가 떨어져 자라기 시작하면 땅은 망가지고 곡식이 죽지 가시덤불이 죽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부패성을 정학하게 간파하고 보여주신 비유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과 세상 사랑에 가시덤불의 씨앗이 떨어지면 동시에 떨어져서 동시에 발육한다고 하면 결국은 말씀에 씨앗이 무성하게 자라서 이길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히 그 마음의 밭을 돌보지 않는다면 결국은 여러분들의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과 세상 사랑의 씨앗은 경쟁하면서 자라는 것 같지만 마음의 지격을 가시나무 덤불과 같은 세상 사랑이 다 빼앗아가서 결국은 말씀의 원래 씨앗은 비틀어 말라버립니다. 이미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씨를 뿌리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뿌려진 씨가 바로 그중에 하나가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입니다. 그 씨는 뿌려져서 길가에 떨어진 씨처럼 그렇게 말라버리거나 새가 와서 먹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분명히 싹을 틔었고 뿌리도 내렸습니다. 그러나 결실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가시덤불 속에 밀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전혀 공경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절대로 예배하지 않는 행동을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은 한번도 하나님을 안 섬긴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늘 제사를 드렸고 그리고 하나님을 공경했고 그들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섬겼어도 오늘 주님의 평가로는 가시덤불 속에 곡식의 씨앗을 뿌리는 것 같이 소용없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공경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만 공경하는가 물어볼 때는 대답하기 힘들어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만 섬기는가 하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힘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예배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가하고 묻는다면 대답이 흐지부지해집니다. 이런 문제들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게 바로 가시덤불 속에 곡식의 씨를 뿌리는 어리석음입니다. 뿌리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열매를 생산해내지는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또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늘 예배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이 세상 사랑과 죄에 대한 집착의 가시덤불로 차있는데 이것들을 불태우지 않고 여러분들이 이런 의무를 다한다고 하면 절대로 은혜를 못 받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일주일 가운데 죄악 가운데 뒹굴다가 왔어도 주일날 예배 시간에 가슴에 와 닿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그릇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도 섬기는 중에 여러분들의 마음이 따뜻해지고 정서의 변화가 오는 일들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뿌리가 땅에 내리고 싹이 나는 것입니다. 절대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자라고 있는 가시덤불과 같은 세상 사랑과 육체의 정욕이 그것들로 하여금 열매 맺도록 허락하지 않고 마음의 지격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는 것 같지만 다시 이 자리를 떠나면 세상사랑과 유혹이 여러분들의 마음의 지격을 다 빨아들여서 뿌려진 말씀의 씨는 일주일도 가기 전에 다 터져서 죽어버리거나 싹만 낸 후에 비실비실 메말라가는 그런 식물의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을 질러 성령의 불로 여러분들의 그 마음에 있는 가시덤불과 같은 세상사랑과 물질에 대한 염려와 걱정들을 태워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재가 된 것들이 오히려 땅에 들어가서 땅을 비옥하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씨앗이 자라는데 도움을 줍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나는 이 세상 사랑을 버립니다. 이제는 내가 절대로 죄를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다. 결국은 정욕을 따라서 산 삶이 비참한 줄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내 안에 있는 정욕을 미워합니다. 라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죄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 죄를 통해서 그 죄가 없이 산 사람보다 하나님과 더 깊이 연합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그렇게 해서 회개의 불로 태워진 세상 사랑의 가시덤불은 비료가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번 여러분들이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주받은 짐승 가운데 하나는 박쥐입니다. 낮에는 쥐처럼 다니고 새처럼 밤에 날아다니지만 새도 그를 새로 인정하지 않고 쥐도 그를 쥐로 인정하지 않아서 결국은 동굴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날아다니는 그런 신세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이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가 이러하였습니다.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고 수없이 예배를 드리고 크고 작은 많은 모임에 참여하여 몸이 지칠 정도가 된다고 할지라도 잠시 가슴에 와 닿는 신령한 자극이 있을 뿐 하나님의 깊은 사랑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 있는 가시덤불과 같은 세상사랑 그것을 불태워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돌이켜 서야지만 주님의 깊은사랑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들에게 정말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성경은 그것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 중 첫째는 마음가죽을 베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아이의 양피가 그를 불결하게 하듯이 마음이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의 그 가죽이 바로 이런 불결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음을 덮은 이 죄의 가죽이 그 속에 온갖 불순물들을 끼게 해서 악취가 나는 마음이 되도록 만들고 급기야는 베어내지 않은 양피가 피부병을 일으키듯이 그 더러운 이물질 속에서 마음에 수많은 오염과 더러움들이 돋아나서 그래서 순결한 마음을 잠식해버립니다. 그래서 도저히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그런 마음이 되게 만들고 그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원천으로 하여 흘러나오는 그의 삶과 행동도 결국은 병든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겉모습은 그대로 경건한 것처럼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그 모든 경건해 보이는 행동 속에 깃들어있는 그 행동의 정신은 죄에 대한 사랑이고 의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이 그 내용을 보고는 받으실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마음에 가죽을 베이지 않는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에 나올 수 없었고 주님을 만날 수도 없었고 죄가 있어도 그 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죽어가야 했고 혹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할례 받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죽임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영적으로는 오늘날도 이런 원리가 계속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은 그런 육체의 행동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는 될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마음가죽이 베어지는 일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육체의 할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듯이 신자 된 여러분들도 또한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아니하고는 여러분들이 이미 더러워진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까짓 것 베어내면 되겠네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한 부분을 도려내는 것과 마음을 덮고 있는 죄의 가죽을 잘라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힘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저는 금년에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2월 달에 목에 있는 살 주먹만한 것 두개를 도려냈습니다. 아직까지도 완치가 완전히 원상태로 돌아온 것 같지 않습니다. 목소리와 성대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아픈지 저는 태어나서 그렇게 아픈 것은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사람이 찾아오는 것도 싫고 말을 시키는 것도 싫었습니다. 차라리 눈을 감고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 2주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얼마나 아팠으면 제가 집에 돌아와서 뒷방에 서서 혼자 엎드려서 엉덩이에다가 진통제를 놓았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안 울었습니다. 절대 울지 않았습니다. 괴로워도 아파도 나는 안 울어, 안 울었습니다. 그런데 마음가죽을 벨 때는 한없이 울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마당에 앉아서 묵상을 하고 있는데 어느 후배가 찾아왔습니다. 얘기하다가 목사님, 생명이 있는 설교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제가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생명 있는 설교의 비밀은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목회를 해서 12년 동안 성도들과 결혼하고 살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들이 성도다. 왜 그런가 하면 가끔 일정 기간동안 늘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만 일정 기간동안 성도들이 말할 수 없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기뻐하고 살아나는 특별한 축복의 때가 있는데 그때는 항상 말씀의 칼로 내 마음에 가죽을 도려낼 바로 그때라고, 그래서 밤새도록 며칠동안 도려내고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흐르다가 혼절하면 그리고 가서 다 죽은 사람처럼 설교를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기뻐하고 살아납니다. 그러니 정말 잔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말씀을 펼 때마다 이렇게 자기의 마음가죽을 도려낼 수 있도록 그렇게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우리의 마음을 덮은 불결한 마음 가죽을 보게 하시려고 고난도 주시고, 핍박도 주시고, 그리고 시련도 주시고, 때로는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그때에 더 많이 아픕니다. 몸에서 살덩이를 떼어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이 주님의 그 칼로 마음의 가죽을 도려낼 때 자지러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그때 맛보는 아픔은 다른 종류의 아픔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죽음 그 자체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의 가죽을 도려내어서 죽음을 맛볼 때 그렇게 죽음을 맛보면서 마음의 가죽을 베일 때, 아무 것도 사랑하는 것이 없게 될 때 그 죽음 속에서 생명력 있는 설교가 나오더라. 그래서 성도들은 저와 한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관계가 바로 이 성도와 설교자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오직 도려내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아픈지 어떤 사람들이 일생을 살면서 단 한번도 그 마음 가죽을 베어내지 못하고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결국은 살다가 죽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죽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전할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베어내야 할까? 그러면서 어제 밤부터 마음에 위로를 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고 말입니다. 그게 마음에 할례입니다.
그런데 오늘 재미있는 것은 그 속에 “너희 스스로” 하고 덧붙였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의 가죽을 베어내는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받았던 육체의 할례와 문학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처음 할례는 난지 8일 만에 받는 할례이기 때문에 그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양피를 벨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예외 없이 모두 할례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받아야 할 이 마음의 할례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할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할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는 어머님과 경건한 아버지를 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신앙이 그렇게 훌륭하다고 해서 그분들이 여러분들의 마음의 가죽을 베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다닐 교회를 선택하기 위해서 수없이 교회를 고루고 고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은 추루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몸담게 될 지체들은 아름다운 존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좋은 신앙을 가진 신실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가입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신실한 지체들이 자기의 마음에 할례를 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선포되는 좋은 목회자가 있는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그의 입에서 선포되는 그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도 그를 할례 시켜주지 못합니다. 그랬더라면 아마 능력 있는 설교자에게 가서 할례를 받으라고 성경이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런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모든 수단들은 칼일 뿐이고 마지막 그 칼을 가지고 자신 안에 더러운 마음의 가죽을 베어내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이 일은 이제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할 일입니다. 육체의 할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의 할례는 자기 자신이 그 칼로 베어내야 하는 그런 종류의 할례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깊은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한점의 살을 베어내는 그것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픈데 하물며 그보다 천배나 만 배나 아픈 마음 가죽을 베어내는 그 일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마음의 칼을 도려내기 전에 주님의 진리의 빛을 통해서 자신을 덮고 있는 더러운 마음 가죽을 발견하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껍질을 들쳐보니 그 속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결한 이물질들이 가득 끼어있고 그리고 거기에서 자라는 모든 해로운 미생물들로 인해서 마음의 살갗에 두드러기들이 생기고 수많은 물집들이 잡히고 그리고 썩고 곪아가는 자기 자신의 마음의 피부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칼을 들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도려내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자신의 마음 가죽을 베어내는 아픔을 지불하고서라도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돌아가야지 되겠다고 하는 선한 의지의 발동과 의지입니다. 그것이 자기 깨어짐의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유지되어야 하고 그 의지가 힘을 잃어버리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되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십시오. 많이 말씀을 깨달을 때도 있었고 그 깨달은 말씀 때문에 기뻐할 때도 있었고 눈물을 흘리던 때도 있었는데 그때가 항상 자기의 마음가죽을 베어내는 그때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결단을 하고 그리고 이런 형식적인 삶 속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이 모든 것들이 냄새나는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고 그 말씀의 칼로 자신의 마음에 양피를 베려고 할 때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알 수가 없는 죽음의 고통입니다. 차라리 그 순간에 조용히 눈을 감고 주님께 부름을 받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럽습니다. 쓰레기 같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그분의 사랑을 버린 그 부패한 죄 사이에서 한없는 고통을 느끼며 그 칼로 자신의 그 마음의 가죽을 베기 시작할 때 그 속에 경험되는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럼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죽음이면 베어내기는커녕 아마 칼을 대는 것조차도 힘들지 않겠습니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거기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믿음입니다. 나는 오늘 아프나 그러나 이 아픔은 치료받기 위한 아픔이라고 생각하고 그 칼을 자신 속에 댈 때 그것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을 에이기 시작할 때 피가 흐르고 죽음의 고통이 깊이 스며들어오게 되면 그런 죽음을 경험할 때 거기에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마음의 더러운 가죽을 베어내는 죽음의 아픔은 바로 예수님이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고난을 받으면서 당하셨던 그 아픔이라고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그 고통을 깊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그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의 교리에 진수 부분에 해당됩니다. 이제 그 속에서 깊이 예수와 함께 느끼는 그 죽음의 기운이 자신을 그렇게 아프게 하지만 그러나 아파하면서 죽어가는 것은 바로 내 안에 있는 살아있어서는 안될 옛 자아가 그렇게 치열한 죽음을 경험하며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의 마음의 가죽을 벨 때 그렇게 아프게 느껴지는 그 고통, 몸에서 살을 떼어내도 눈물을 흘리지 않던 사람이 그 칼을 자신의 마음에 대자 견딜 수 없이 눈물을 흘리고 아파하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위대한 생명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소위 이야기하는 유니오꼼 끄리스토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진수에 해당되는 부분을 지금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도려내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도려내는 그 순간에 아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과 함께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당한 것만큼 하나님과 합일되어 가는 놀라운 하나 됨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 됨의 비밀이 바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그 비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나온 바와 같이 “너희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할 때 그 세상을 닮아갔던 그것이 죽고 깨트려지면서 예수의 형상을 본받는 모습으로 다시 빚어져가는 과정이 바로 자신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그 과정과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치열한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대해서 알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일부분을 깨달은 것일 뿐입니다. 마치 입에다가 호두를 넣고 계속 빨아먹으면서 그것으로 만족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영적인 수준입니다. 이게 바로 마음 가죽을 베어내지 못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범적으로 보이는 신앙생활의 한계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가죽을 도려내고 그 속에서 예수 죽음의 기운을 느껴보지 못했던 모든 사람들이 경험했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경험은 신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렇게 깊이 마음의 가죽을 도려내게 될 때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들어오지만 그 도려내는 과정을 통해서 가슴속에는 다시 한번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자기와 같은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다는 사실이 가슴에 깊이 살에 새긴 할레의 표보다 더 깊이 지워질 수 없도록 새겨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 알고 있는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amazing grace를 작시한 사람은 노예상인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가 문명국가에다 팔아먹는 노예장수였습니다. 그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개한 후에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며 영혼들을 위해 힘썼습니다. 나이가 점점 많이 들어 기억력이 흐려지고 정신이 왔다갔다가 할 나이가 되었으니 모두 그의 기억력을 염려할 때 그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비록 나이가 많아 늙어 내 기억력이 쇠퇴해가고 자연적인 생각의 능력이 퇴화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일평생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내가 가장 더러운 노예상인이나 하던 더러운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십자가에서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표가 그대들의 가슴에 있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절실하게 가르쳐주어도 자기 안에 이 더러운 마음의 가죽이 있다는 것과 그리고 이 가죽을 베어내지 아니하고는 그분과의 실제적인 연합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해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마음을 덮고 있는 그 가죽을 베어내는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들이 망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이기심에 빠져있는 징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 주일에 그대들을 향한 내 마음에 있는 넘치는 사랑을 전합니다.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게 하나님이 아무리 능한 말씀을 주시고 하늘을 가르는 성령의 능력을 주셔도 내가 그대들의 마음을 할례 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아마 여러분 모두를 벌써 고쳤을 것입니다. 그대들의 마음은 그대들 자신의 것이니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지만 여러분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의 가죽을 베라고, 할례 하라고 지금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파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당신의 선함과 자비하심을 보이시며 너희는 그 마음에 가죽을 베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의 가죽을 베어내는 일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고 그 마음의 가죽을 베고 나면 상처 입은 세상 사랑의 비가 가슴 가득히 흘러내리지만 그러나 바로 그때에 주님이 우리를 안고 계십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이 있어도 그들은 우리의 영혼에 의사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유일한 의사는 우리 주님뿐이시고 그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서부터 우리를 그렇게 고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망가진 우리들이 고쳐지기를 원하시고 똑바로 걸을 수 없는 우리들을 고쳐서 똑바로 걸을 수 있도록, 바로 볼 수 없는 우리들의 눈을 떠서 그래서 똑바로 볼 수 있도록 그렇게 굽은 다리와 굽은 팔을 펴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 수 있도록 고쳐주시려고 그렇게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간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고 그 사랑의 감동이 우리의 마음에 찔림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앗과 같았기 때문에 결국은 변화될 수 없었고 결국은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께 바쳐진 것이 되기가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에 가죽을 여러 가지 이유로 베어내지 않은 사람들, 결국은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주님 안에서 행복해지는 것보다는 마음에 가죽을 도려내지 않는 통증 없는 삶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결국 마지막에 받을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그 가시덤불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었습니까?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온 날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습니까?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시면과 같은 계곡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었고 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깃털처럼 날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외로운 자가 되어서 주님의 사랑도 느껴지지 않고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은 가련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됩니까? 주님께 나아오지만 주님께 실제로 접붙여진 자들이 아니라 주님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그리고 진실한 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잘 살았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못합니다. 거기는 모든 인간이 똑같은 지점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돌이켜서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한 의지의 책임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회개합시다. 진실한 신앙생활을 합시다. 그것이 정말 여러분들이 주님께 사랑을 받는 비결이고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비결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속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속한다고 하는 것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적인 연합을 가지고 그것이 서로 연관성 속에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나무가 있고 이파리가 있습니다. 이파리는 나무에 속해있고 꽃잎은 꽃에 속해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이파리를 떼어내면 이파리를 더 이상 나무에 속했다고 부르지 않습니다. 가까이 가 있어도 속했다고 부르지 않고 스카치 테프로 붙여놓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우리는 이 잎사귀가 저 나무에 속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속했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속한 적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은 거리에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가 아니라 여기로 가도 한번 떨어진 것은 거기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내게 속하라고 부르시는 그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우리의 인생 전체를 달라고 그러십니까? 평생 주님의 집에서 노예살이를 하라고 부르십니까? 아니면 묻는 그 순간 죽어버리라고 우리에게 순결을 명령하십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그분께 속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께 속하고 그분은 내 안에 속하고 내가 꼭 이루어졌으면 좋았을 일들을 하나님이 이루시고 하나님이 성취하고자 하는 그 일들은 내가 이루면서 합일된 목표 속에서 살아가는 그 서로에게 속한 연합의 삶을 주님이 그렇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연합의 관계를 통해서 해택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과 연합된 그 속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에서 “하늘에서는 주 외에 내게 사랑할 자가 누구리요. 하나님께 가까이 하니 내게는 복이로다.” 하고 말입니다. 그도 한때 주님의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세상에서 번영하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형통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닫고 나자 그는 하늘에 주 밖에 누가 있으리요. 선언 하면서 이 땅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주께 가까이 함이라 라고 말했습니다.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 원치 않으며 즐겨 고난 길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까이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그렇게 우리가 당신께 속한 존재이기를 원하시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를 고치시고 그리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불러주시는 그분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깊이 우리의 마음을 드립시다. 그리고 진실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버립시다. 그래서 그분과 합일된 삶을 살고 그러기 위해서 그대들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십시오. 교회 마당만 밟는 그런 신앙생활이 아니라 마음에 진심으로 할례를 행하고 그 아픔 속에서 주님께 속하는 자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 하나님을 아는 것을 기뻐하심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1. 본문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분의 배경을 잠시 말씀드리고 그리고 이어서 본문 속에 담겨진 메시지들을 우리들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 왕국의 선지자였습니다. 솔로몬 이후로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북쪽은 이스라엘 왕국이었고 남쪽은 남 왕국이었습니다. 북 왕국의 선지자로서 그는 이제 북 왕국뿐만 아니라 남 왕국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양쪽을 넘나들며 예언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는 구약의 요한이라고 부를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풍부한 예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애끓는 예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초청이며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을 만나고 또 이런 저런 인생의 고비를 지나지만 마지막에 우리들이 돌아오는 지점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입니다. 우리들이 그 안에서만 진정으로 안식을 얻을 수 있고 그 안에서만 참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의 증언이기도 하고 또 우리들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했던 중심적인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음란하기 짝이 없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에게 장가를 들었고 그는 아내를 많이 사랑했으나 아내는 끊임없이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자기 속에 억누를 수 없는 아내를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늘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선지자는 뼈 속까지 타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고 그렇게 집나간 방탕한 아내를 눈물로 찾아나서는 이 호세아 선지자의 변함없는 사랑의 행동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시는지 주님이 알게 하시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오늘 이 예언서 속에도 녹아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곤고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번영속의 곤고함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이때에 북 왕국은 오늘 이 성경에서 에브라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왜냐하면 북 왕국으로 갈라진 지파 가운데 가장 큰 지파가 에브라임이었기 때문에 에브라임은 별명, 혹은 애칭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복종하지 아니하고 제 멋대로 가고 있는 이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눈물겨운 음성이오,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번영을 구가하면서 그들은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다음에 마지막 돌아가는 지점은 자기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사랑 때문에 일도 사랑하고, 자기 사랑 때문에 돈도 사랑하고, 심지어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도 사랑합니다. 우리 부부가 며칠에 나누는 대화가 그것입니다. 여보, 나 죽기 전에 죽지 마. 서로 자기가 먼저 죽겠답니다. 나는 항상 그러는데 나 죽고 한 일년만 더 살다가 죽어라. 살아서 시집가는 것은 너무 억울하니까. 나는 서원을 했는데 언제 죽든지 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홀로 살다가 죽는다. 그런데 뭐 그때 가야 데려갈 사람도 없겠지만 어떻든지 간에 그러자. 그런데 그것도 가만히 보면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자기를 사랑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자기를 사랑하고 또 가족을 사랑하고 좀더 넓게 누구를 사랑하고 이러는데 결국은 중심을 그리는 이 컴퍼스는 자기 사랑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2. 번영 속의 곤고함
그래서 이상한 명제가 생깁니다. 이렇게 가족을 사랑하고 이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해야 합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면 가족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보고 오래 살라고 그러고 남편은 아내를 오래 살라고 서로 먼저 죽겠다고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이 결국은 어떤 명제로 삼는가 하면 자기를 이기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기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금방 깨달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제가 이것을 얼마나 깊이 묵상을 하면서 깨달은 것인데 그렇게 1초 만에 깨달으려고 합니까? 친절하게 한번 다시 하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랑하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내 행복하고 밀접하게 얽혀있습니다. 그 사람이 죽거나 다치거나 문제가 일어나면 내가 너무 불편합니다. 불편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나를 너무 사랑하면 안 됩니다. 다 양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기적으로 극단적으로 나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아내도 남편도 식구도 심지어 아이들도 모르고 저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은 자기가 고달파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양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자기를 이기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기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러니까 이 컴퍼스 자체가 옮겨지지 않고 이것을 아무리 원을 다양하게 그린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 때문에 세상도 사랑하고, 우상도 사랑하고, 가족도 사랑하고, 가족 이기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별 일 다 하지만 그러나 이 중심측은 옮겨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산 것입니다. 번영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선지자가 아모스였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글에 보면 그들이 어느 정도로 번영했는가 하면 무역도 잘하고 국방도 튼튼하고 외교도 아주 잘하고 그래서 아주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여름이면 여름 별장으로 놀러가고 겨울에는 겨울 별장으로 놀러가고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면 상아로 깎아 만든 침상입니다. 물론 그것도 돈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어째든 그렇게 수입품으로 아주 호화스럽게 사치스러운 삶을 살면서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렇게 번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신앙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다른 곳에서 비유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뒤집지 않은 빵과 같다. 화덕에 놓고 빵을 굽는데 아래가 충분히 익으면 뒤집어야지만 위가 충분히 익어서 양쪽이 다 골고루 익은 빵이 되는데 그런데 한쪽만 내버려둔 것입니다. 뜨거운 불을 가하니까 한쪽은 새카맣게 타버리고 위는 날 것입니다. 아래는 타서 못 먹고 윗부분은 날것을 가지고 먹을 수 없어서 결국은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처럼 된 상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번영을 주시니까 쓰레기들이 번영을 구가하면서 막 세상 적으로 막 활기차고 열심히 움직이면서 막 아주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활기찬 그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다 세속적인 관심사입니다. 신앙적인 것은 위에 날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양쪽이 다 한쪽은 타고 한쪽은 익지 않아서 먹을 수 없는 그런 빵이 되어버린 것처럼 이스라엘 상태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나라에 적용시켜서 볼 때 나라가 그래도 잘 살아야지 되겠다는 생각을 외국에 나갈수록 참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동남아시아나 그리고 동유럽 그리고 러시아 지방 쪽 이쪽에 가면 우리가 그래도 여행하거나 선교를 위해서 방문을 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대부분 우호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난 그 이유가 뭘까 생각했는데 우리 조상들이 자기들 나라에 빈대떡 하나 붙여준 것이 없는데 그래도 한국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한국처럼 자신들도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그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우리가 소말리아처럼 비참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덧 그런 모든 가난하던 시절을 딛고 그래도 세계의 11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을 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어두운 전망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나라는 그런 것이 없겠습니까? 그래도 나라는 계속 발전하고 부강하면서 살아갑니다.
미국을 갈 때마다 교포들을 만나면 좀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거기에서 이민간지 2-30년 이상 된 사람들은 당시 한국에서는 내로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돈 많은 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똑똑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없으면 그 당시에 이민을 갈 수가 없었고 미국에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아주 잘한다든지, 돈이 많든지, 권력이 있든지 그런 엘리트들이 갔습니다. 가서도 사업이라도 한국과 연관이 되어서 수시로 드나들면서 한국을 알면 그렇게 말을 하지 않을 텐데 가서 한국에 연고도 끊어지고 해서 2-30년 심지어 40년이 되어서도 한국에 한번도 안 들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갔을 때 아주 똑똑하고 사회경험이 많은 사람인데 한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주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습니다. 아니 한국이 벌써 망해서 부도가 났을 나라인데 아직까지도 굴러가는 것을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뜸 물어봤습니다. 한국을 마지막으로 갔다 온 것이 언제인가 그랬더니 22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30분 동안 설명을 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2-30년의 군사독재 시절에 그렇게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사회가 모순덩어리였던 상태에서 돈만 많이 번 나라가 된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때로 딱 멈추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한참 설명하고 우리나라 아직까지도 문제가 많습니다. 부패지수 국가로도 아직까지도 120국 중에서도 42위밖에 안 올라가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에게 항상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발전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어쩌다가 (?)나가서 빈대떡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가 골고루 다 발전하면서 경제도 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30분 동안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고 그리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진짜 우리나라가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그렇다. 나를 믿어라. 발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때서야 마음에 안식을 하면서 그분들은 한국이 못 산다고 그래도 괴롭습니다. 왜냐하면 어디를 가도 한국인이라는 딱지를 벗을 수가 없으니까. 너무 잘산다고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왜 자기들은 박탈감을 느끼니까. 자기는 여기에 와도 미국에서 주류 계층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아직까지도 슈퍼를 하고 그러면서 뭐 먹고 사는 것이야 근심이 없지만 무슨 신분의 상승이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잘살게 되었다고 그래도 그냥 거기 있을 걸 하는 마음 때문에 박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달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부흥하는 것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얼마나 동남아와 이쪽 선교에 덕을 많이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한류의 열풍이 불어 닥치는 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진짜 오묘한 섭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이 참 좋은 것인데 그런데 국내에 들어와 보면 정말 염려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번에 정부에서 2018년까지 우리가 3만 5천불을 가겠다고 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는 간절합니다. 그래 3만 5천불 정도의 국민소득이 된다고 칩시다. 그럼 아마 내가 보기에 세계에서 6-7위안에 드는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그럼 그렇게 되었을 때 과연 이 백성들이 지금의 이 정신을 가지고 주님이 주신 그런 놀라운 부를 정말 잘 누리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놀라운 섭리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을까? 그것이 매우 염려가 됩니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모두 번영하고 난 다음에 이 기독교 신앙을 철저하게 붙들었던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모두 번영하면서 이 신앙을 팽개친 것입니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에 여러분 얼마나 주님을 굳게 붙들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가난한 모든 시절에 그렇게 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열심히 믿고 붙들었던 시절에 우리들이 가난하고 고통 받던 시절에 정말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머리 속에 생생하게 초등학교 때 조국에서 어떻게 교회를 개척했는지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이렇게 다 얻어놓고 교회에 오라고 하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시유지니까 시 땅입니다. 거기다 미군부대에서 텐트를 얻어다가 그래서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얻어다가 고물상에서 가마니 갖다가 빨아다 텐트를 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도 얘기했지만 다 자기가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땅은 시의 것으로 무단으로 점령하고 텐트는 미군부대에서 얻어오고 그리고 벽돌은 벽돌공장에서 사정해서 빌려오고 가마니는 고물상에서 가져오고 자기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서 사과궤짝 하나 과일가게에서 빌려다가 그리고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그렇게 찬송 부르며 시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얼마나 열심히 믿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물질의 문제 때문에 매우 곤고하게 사시는 분들이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복 받는 비결을 가르쳐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도 가난을 미덕이라고 가르쳐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모든 자녀들이 당신의 자녀인 동시에 주님의 것인 이 세상의 유업을 함께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누릴만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주님이 이것을 막으셔야 합니다. 칼이 얼마나 요긴한 것인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칼이 없이 우리는 살수 없습니다. 칼 한 자루에 백 만원을 한다고 해도 아마 사야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귀한 칼을 아이에게 맡겨두지 않습니다. 미래에 하나님의 축복은 오늘의 신앙이라는 그릇을 담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래에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의 신앙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현재 미래 과거가 없습니다. 한번에 하나님이 보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미래가 다 보이고 과거도 보이십니다. 하나님이 돈을 많이 주시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하나님이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다 아십니다. 그런데 지금만큼도 주님을 붙들고 살 것 같지 않아 그러면 하나님이 안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은 사업을 망하고 동업하면 동업하는 사람과 같이 물속에 들어가고, 남에게 돈 빌려주면 떼먹히고, 집사면 집값 떨어지고 계속해서 하나님이 절대로 예산에 있어서 풍성하게 안주십니다. 몰라 그 사람을 하나님이 포기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안 주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그런 의지를 잊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내 방법대로 해서 한번 쥐어보겠다고 몸부림을 치면 결국 불신앙적인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과 맞서면서 부를 찾는 격이 되니까 이번에는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내 설교가 찌르는 화살처럼 가슴에 깊이 박히는 지체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 그래 저 설교가 맞아. 그런 사람은 한번 아멘 해보십시오. 상당히 많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리 깨달으면 좋은데 다 털어먹고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뼈저리게 깨달으며 그때 가르쳐주시지. 그때 가르쳐주었는데 안 들린 것입니다. 세상에 눈이 멀어서 안 들린 것입니다. 비결이 무엇인가? 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안 됩니다. 내가 보장합니다.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고 그래도 내가 말리겠습니다. 왜? 불행해지니까.
몇 년 전에 어떤 잡지사에서 미국에 있는 슈퍼볼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로또복권 같은 것이 맞은 사람이 행복했는지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부다 불행해졌습니다. 그 중에 한 그룹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매주 오 달러씩인가 모아서 복권을 사고 당첨이 되면 반씩 나누어갖기로 했는데 2천 6백 억 원의 복권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7명인가 나누어 가졌습니다. 7명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가 하고 추적을 해보니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이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집사는 것, 이혼하는 것 그 다음에 차사는 것, 재혼하는 것, 그 다음에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중독이 되는 것, 그리고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시니까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주님이 미래에 돈을 주시면 이 사람이 어떻게 살까를 보는데 여러분들은 안 그럴 것 같은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비딱선을 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절대로 안 그럴 것이면 말로만 안 그런다고 그러면 안 되고 아니 게가 절대로 옆에 안 걸어가겠다고 혈서 쓰고 걸어보라고 게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앞으로 가겠습니까? 혈서가 아니라 그 손가락을 몇 개 잘라도 그 부러진 손가락 가지고 옆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단과 무슨 맹세, 서원들을 많이 하는데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아니 지키지도 않을 것을 뭐라 합니까? 그러니까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들 수없이 부인 앞에 각서 씁니다. 다시는 안 먹겠다고, 그래서 안 먹었습니다. 본성이 바뀌지 않는데 그게 바뀌겠습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이상하게도 어떤 놀라운 공식이 성립하는가 하면 진짜 부자가 되려면 돈에 대한 관심을 버려야 된다는 이상한 공식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왜 세상에 대한 관심을 다 가지고 하나님 앞에 본성이 바뀔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주님 만나서 깊이 깨트려져서 본성이 바뀌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여러분 눈에 뭐가 보였습니까?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뭐만 보였습니까? 구속한 주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본성이 변합니다. 그래서 공식이 성립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 부자가 되려면 돈에 대한 관심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똑바로 되도록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매달려야 합니다. 그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혹시 하나님만 우리를 부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혹시 인간의 방법으로 편법으로 부하게 되도 하나님이 한번 어떻게 하나 지켜보실 수 있습니다. 결국은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시험에 든 것입니다. 번영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 축복을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우상을 섬기고 세상을 사랑하며 부패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곤고하게 되는 때가 온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번영과 부는 잠시는 우리의 영혼의 곤고함을 잊게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많으면 관심을 다른데 돌릴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잠깐일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은 영혼의 곤고함은 무엇으로도 달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영혼의 곤고함은 그런 것으로 달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젠가 때가 오는데 너희들이 나를 멀리 떠나는 때가 온다. 그러면 너희들이 나를 떠나면 나도 너희를 떠난다. 그런데 때가 되면 너희들이 스스로 곤고한 때가 온다. 그래서 너희들이 보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가 우리를 찢으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이나 때리셨으나 우리를 고쳐주실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돌아가려고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날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뭘 깨달아 알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꿈이 없고 순수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돌아오는 것만 진짜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영혼의 곤고함을 치료하는 비결입니다. 꾸밈이 없고 강요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그것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치료를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속적으로는 번영하고 부흥했지만 반드시 곤고한 그 영혼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도 살아오면서 가끔 번영 속에서 곤고함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의 원하는 것을 주셨으나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였도다.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영혼을 파리하게 하신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세상에 모든 것들이 다 잘되고 그리고 부가 쌓이고 물질적으로 복을 누리며 살아도 그게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까? 절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팔고 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고 하는 그런 간절하고 사무치는 열망이 이 마음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번영 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의 마지막 결국입니다.
오늘도 이 설교를 듣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이렇게 번영하는 가운데 영혼이 매우 곤고해져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모든 것은 걱정 없이 잘 돌아가고 있지만 물질도 있지만 영혼이 매우 곤고한 분들도 여러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은 우리의 영혼에 양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에 자원은 우리의 육신에 기여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의 자원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물질이 많아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부요하고 어리석게도 그것을 믿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물질이 많아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십시오. 어차피 그것을 여러분 마음대로 쓸 수도 없는 돈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춤바람이 나겠습니까? 아니면 호화여행을 다니겠습니까? 아니면 명품으로 못생긴 얼굴에 떡칠을 해보겠습니까?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말한 이 세 가지는 뭘 해도 하나님 앞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모든 것을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많이 있어봐야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남의 것을 보는듯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물질적으로 번영할 때 하나님 앞에 영혼의 곤고함을 못 느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번영하면서도 도저히 이것가지고 채워질 수 없는 심령의 곤고함을 느끼고 이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내 영혼을 만져달라고 간구하면 하나님이 이 물질을 정리하지 않으셔도 그 사람이 그렇게 갈구하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의 영혼을 만지십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영혼이 그렇게 곤고하게 하셨는데도 이 물질에 정신이 팔리고 부해서 영혼의 곤고함을 못 느낍니다. 곤고함을 느끼려고 하면 가서 그 물질로 쾌락하고 물질로 자기의 육신을 즐겁게 하면서 어리석은 부자가 말한 것처럼 내 영혼아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자. 멍청이가 아닙니까? 영혼은 그런 떡이나. 술을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그 귀한 사랑과 그리고 그 진리와 그 은총 때문에 영혼이 만족을 하는 것이지 거기다 술을 퍼붓고 떡을 갖다가 붓는다고 해서 이 영혼이 만족을 얻는가 하는 것입니다. 멍청이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혼의 곤고함을 달랠 물질도 없게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오늘 그런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니까 그런 것입니다. 이 질투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남았을 때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질투하신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라 오오 어서
3. 이스라엘의 해결방법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받아주십니다. 결국 주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돈이 많아도, 돈이 없어도, 주님 밖에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번영했지만 곤고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이 곤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해결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오늘 두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첫째는 제사, 두 번째는 번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에는 제사 번제 이렇게 나왔지만 이것은 제사는 제사 중에서도 특별히 속죄의 제사를 가리키는 것이고 뒤에 나오는 것은 희생의 번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먼저 속죄의 제사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부강해지면서 하나님을 버렸지만 여전히 그들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의 선지자가 말하기를 “너희의 인애는 쉬 없이 없어지는 아침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도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있으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힘을 쓸 수 없을 만큼 아주 미미한 것이 있을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미하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돌이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정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신자 안에 세상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함께 공전할 수 있습니까? 있다 없다 말 좀 해보십시오. 두 소리가 한꺼번에 나왔는데 둘 중에 한 사람은 틀린 것입니다. 신자의 사랑이 성경에서 신자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가 없는가, 어떤 때는 없는 것처럼 말하고 어떤 때는 있는 것처럼 말하고 어떤 때는 둘 다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결론을 내자면 신자 안에는 세상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공존합니다. 신자는 불신자가 죄를 짓는 것은 틀립니다. 불신자가 죄를 짓는 것은 온 의지로 하나의 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신자는 아무리 나쁜 상태 속에 들어갔어도 죄를 짓고자 하는 의지와 그 죄를 짓지 않고 싶어 하는 의지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지이고 하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의지입니다. 이 두개가 같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항상 사랑이 그 속에 있습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아래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에게 져서 심각하게 패배해서 방탕한 삶을 사는데도 가끔 어떤 때는 기도하면 주님의 사랑이 생각이 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있다고 평가하지 않고 없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는 신자 안에 사랑을 보는 세 개의 관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존재적 관점입니다. 이 존재적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을 보면 아침구름 같기는 하지만 잇습니다. 그러나 평가론적인 관점에서는 이런 것이 희미하게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인가 아닌가, 그게 문제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뭐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고 아침에는 있지만 저녁에는 사라지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있다. 없다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너희가 세상을 사랑하면 누구든지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 그럴 때는 요한일서를 받는 사람들이 여러분과 똑같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그럴 때 여러분들이 지금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 그들은 각서 쓰고 교회 탈피하면서 나는 세상을 사랑하겠다고 작심했다고 그러고 사도 얼굴에 침 뱉고 나가서 죄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경험적 사랑입니다. 이 경험적 사랑은 그 속에 조금만 있어도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크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늘 경험될 수는 없습니다. 늘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되려면 진짜로 그 속에 많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 중에서 중요한 것은 있다, 없다 로만 판단이 되는 평가론적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완전히 죄에 져서 거의 하나님을 버린 듯한 삶을 삽니다. 그런데 살다가 너무 곤고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절 좀 도와주세요. 그러면 그때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그래서 자기를 하나님이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으며 자기도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있지만 자기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마르면 다시 범죄 합니다. 이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보십니다. 그나마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은 그것마저 못 느끼면 하나님 앞에 돌아올 가능성이 없으니까 느끼게 해주시는 것이니까 이것을 과대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하자면 그랬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침구름과 같은 안개처럼 금방 사라져버린 그런 종류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자기의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고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제도입니다. 속죄의 제사를 통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 그런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그들이 시도했던 것이 헌신의 번제입니다. 이 번제는 모두 태워서 드려서 향기를 하나님 앞에 올려 보내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헌신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번영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매우 곤고한 자신의 영혼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안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안 기뻐하시니까 하나님 앞에 헌신의 번제를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분명히 당신을 공경하기 위해서 주신 제도인데 그런데 이것은 공경이 아니라 아첨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종류의 아첨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아첨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악한 사람들이 아첨을 좋아합니다. 이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첨을 받을 때 온 몸에 닭살이 돋습니다. 그래서 불쾌합니다.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그러니 모든 진실의 원천이신 그 완전히 진실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 앞에 나와서 공경하는 대신 아첨할 때 하나님의 그 불쾌한 마음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일생을 괴롭힌 철전지 원수가 여러분 앞에 뜻밖에 나타나서 아양을 떨고 호의를 베풀려고 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들겠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사람이 먼저 정말 진실하게 내가 잘못했다고 진실하게 참회하는 것,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입니다. 나는 일본에게 그런 것을 촉구하고 싶습니다. 그냥 무슨 신사를 참배하고, 말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좀 단 한번이라도 이웃나라에 대해서 충심으로 참회하며 그렇게 잘못했다고 중심으로 용서를 빌어보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고통을 주었던 이웃나라나 다른 나라에게 그렇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없고 하나님 앞에 많은 짐승들을 잡아서 번제로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을 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는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해결방법이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예배라고 하는 제도는 얼마나 복된 제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일주일 살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았을 때만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일주일 동안 정말 너무 부족한 삶을 살았는데도 예배에 와서 참회하면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그리고 다시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하늘의 힘을 공급해주십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 은혜의 도구가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아무리 진실하게 살려고 하더라도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진실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허위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진실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진리를 버린 삶이 이게 허위의 삶이고 위선이고 거짓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많은 성도들이 소원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고백이 너무 멋있습니다. 참된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배운 것입니까, 아니면 진짜 마음속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그런데 그런 고백을 갖고 있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진실해지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실제의 삶에 있어서 진리를 저버리고 나면 그가 오히려 진실을 찾기 때문에 허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거짓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허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깨트려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성경을 말씀을 잘 읽고 깨달을 때, 설교를 듣고 그 진리를 깊이 이해하게 될 때 자기의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 같은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방편입니까?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만큼 인생을 살아왔지만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험난한 인생을 저도 살아왔습니다. 그 고비마다 거기에서 이제는 여기서 영영 엎드려져죽는구나 생각하던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마지막으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이겼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정말 올바른데도 고난을 당하는 때도 있었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 내가 너무 잘못했기 때문에 징계를 당해서 고난을 당하는 때도 있었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할만한 죄를 짓지 아니했지만 올바르지 아니한 태도로 살았기 때문에 일반섭리 속에서 그것이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와서 고통 가운데 연단을 받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시고 고난 가운데 두셨든지 마지막에 그 어둡고 고난으로 가득 찬 환경의 깊음, 연단의 골짜기에서 헤어 나올 때는 항상 말씀의 지팡이와 기도의 사닥다리로 그 깊은 굴속에서 벗어나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얼마나 좋은 방편인지,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께로 어떤 응답도 들리지 않아서 영혼의 곤고한 길을 걸어가다가 자기를 깨트리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그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세상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은 부당한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매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기도의 문을 여시고 간절한 쏟아져 나오게 하실 때 그 기도의 힘으로 이겨왔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고백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고백입니다. 엎드려 넘어진 곳에서 우리는 항상 다시 일어나지만 일어난 그곳에는 항상 진리의 지팡이와 뜨거운 기도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은혜의 방편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이런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이런 것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에 골짜기에서 어디에선가 신음하다가 아끼는 사람이 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딛고 일어섰습니다.
내가 오늘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런 은혜의 도구들이 여러분들을 건져내고 있습니까?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한 지체들에게 내가 오늘 주님의 마음으로 묻고 싶습니다. 예배 속에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만나주십니까? 그리고 정말 어두움 가운데 가득 차서 빛의 자녀임에도 어두움 속을 걸어 다니는 그 캄캄한 영혼의 침체의 때에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빛을 받고 있습니까? 기도라는 훌륭한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며 용감해지고 있습니까? 안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딪쳐서 넘어졌던 그 지점입니다. 그들도 여러분처럼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습니다. 오늘도 주일예배에 가면 뭔가 좋은 일이 있으려나. 있으면 좋을 텐데, 없어도 할 수 없지만, 꾸역꾸역 성경을 읽지만 뭔가 좋은 일이 있을까? 기도는 하지만 능력은 잃어버린 가운데 기도의 문이 막힌 그리고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변명들이 오갑니다. 사업이 어렵기 때문에 너무 곤고해서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누가 나를 대게 힘들게 하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저런 이유와 이런저런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예배시간에 나와서 마음 편하게 하나님을 경배할 수도 없어.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난 두 가지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고 그리스도만 바라보면 믿음으로 살아가던 때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왕처럼 떠받들며 그렇게 여러분만 위해서 봉사해주었습니까? 세상의 환경은 순응해서 여러분들이 은혜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에게 환경을 제공해주었습니까? 아닙니다. 또 하나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혼의 침체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해서 해매는 동안에 우리의 인생은 흘러갑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남은 날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습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애야, 네가 나를 섬겼는가? 내가 맡겨준 사명의 자리에서 나를 섬겼니? 아니요. 왜 못 섬겨. 사업이 잘 안 되어서 마음이 갈려서 주님을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가면 늘 나를 힘들게 하는 족속들이 있어서 내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내가 늘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었지만 내 성질을 계속 자극하는 일들이 주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내가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랬구나. 정말 난 몰랐다. 그런 아픔이 있었구나. 그래서 날 안 섬겼구나. 정말 몰랐다. 내가 못 도와준 것을 너에게 사과하마. 천국에 제일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섬겨라. 그러시겠습니까? 주님이 아마 쓰레기 같은 녀석이라고 많이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으로서 해결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예배에 가슴에 진정으로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아첨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향한 경배입니까? 여러분들이 듣는 하나님의 말씀, 예의바르게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하나님을 향한 아첨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입니까?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해결방법,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대신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인애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사랑, 곧 하나님을 향한 헷세드였습니다. 이 헷세드는 하나님의 자비, 혹은 인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실 때도 헷세드라고 말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바칠 때도 헷세드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성도라고 하는 말은 핫시드인데 핫시드는 바로 이 헷세드의 피동명사입니다. 이렇게 자비를 입은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우리를 우리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 되도록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정말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 존재론적으로 희미하나마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은 있는 것은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그 사랑 안에 그런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그런 헷세드의 사랑, 지고지순한 그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가 드리는 모든 속죄의 제사, 그가 아첨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는 모든 헌신의 번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번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하나님과의 생명이 끊어진 상태에서의 번영이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베어서 길가에 던져놓은 마른풀과 같아서 아침에는 살아있는 풀과 구별이 되지 않지만 정오의 뜨거운 햇빛 아래 시간이 흘러 오후가 되고 나면 뿌리는 내리고 있는 살아있는 풀은 청청할 것이고 잘려진 그 풀은 풀이 아니라 검불이 되어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의 존재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헷세드였습니다. 지고지순의 사랑, 하나님을 향한 깨끗하고 순전한 사랑, 그것이 있을 때 하나님이 속죄의 제사도 기쁘게 받으시고 번제 제사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드렸던 일천 번의 번제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일천 번의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그가 주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똑같은 번제를 반복해서 드리는가 하고 짜증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기쁨 속에서 그를 찾아오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랴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일천 번의 번제를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그 번제에 어울리는 솔로몬 안에 있는 이 헷세드의 감동하신 것입니다. 깊이 감동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인 헷세드는 없는 것과 다름없는 정도로 아침구름과 같고,
그래서 아침구름이 도대체 뭔가 궁금해서 아침에 일부러 일어나서 그 구름을 보러갔습니다. 산에 그런 아침구름이 많이 낍니다. 그런데 안개는 아닙니다. 안개는 이렇게 넓게 퍼져서 내립니다. 그러나 아침구름은 딱 구름입니다. 그런데 얇습니다. 그리고 매우 낮게 뜹니다. 그러니까 안개는 지면에서 올라와서 뜨지만 이 구름은 그렇게 뜨는 것이 아니라 아주 낮게 사람 키 정도로 아침구름이 뜨는 법은 없습니다. 최소한 아무리 높아도 얇은 동산 정도에 걸린 그런 종류의 구름입니다. 그런데 그 구름은 하늘높이 떠있는 두터운 구름, 비를 내릴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구름이 아닙니다. 너무 얇아서 구름 사이로 밖에 있는 풍경이 다 보일 정도로 얇은 구름인데 구름이 분명한 것은 무리를 지어서 옮긴다는 것입니다. 안개는 퍼지는데 그런데 그 구름은 신기하게 아침 햇빛이 뜨기 전에 나타나지 햇빛이 밝게 비추면 금방 사라져버립니다. 이슬보다 더 빨리 사라집니다. 그게 아침구름입니다. 그런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이렇게 마음 가득히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가득한 이 인애, 곧 지고지순한 사랑이 헷세드로 가득한 사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일평생을 변함없이 하나님을 향한 이 지고지순한 헷세드의 사랑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꽉 찬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지고지순한 사랑 헷세드와 더러운 세상 사랑이 늘 섞여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신자라도 회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다른 사람을 보지 말고 여러분 자신 안에 이런 지고지순한 헷세드의 사랑이 꽉 차있는가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하나님 앞에 자기 깨트려짐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지고지순한 사랑과 함께 섞여 있는 더러운 자기 사랑을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도록 그래서 깨끗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가득 차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고 그렇게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의무이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옛날에 받은 사랑 어쩌다가 아침구름 같은 사랑인데도 자신에게 경험되는 그런 사랑, 그런 것 말고 진짜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꽉 찬 지고지순한 사랑,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가득 차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속죄의 제사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실 것이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헌신의 번제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헌신을 받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받아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두 번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 “알다” 단어가 성경에서 제일먼저 쓰이는 곳이 어딘가 하면 창세기입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낳으니라.” 할 때 “동침하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옛날 영어에 노우. 알다 단어 속에는 성교하다는 단어가 뜻이 이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자, 너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 알아. 나 알아 나 외웠어. 하나님의 사랑은 세 가지인데 오래 참음, 그 다음에 긍휼, 그다음에 자비,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사랑이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알지, 어떻게 알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내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세상 죄를 지시고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리고 눈물이 흐르는 것, 그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책을 많이 읽으면 교리를 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남이 알지 못한 지식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진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수 있게 하는 것은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자신 속에 깊이 경험되어서 뼈 속 깊이 파고드는 그런 경험 속에서 주님을 아는 지식이 될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사랑하면 너무 많이 사랑하게 되면 어디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까? 사랑하게 되면 가슴이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정말 사랑하게 되면 온몸의 뼈 속까지 아픕니다.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이룰 수 없거나 사랑을 하는데 사랑을 받아주지 않거나 사랑하는데 사랑할 수 없도록 환경에 의해서 차단되면 그 채워지지 않은 아픔은 골수에까지 깊이 사무치게 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가짜 사랑입니다. 그런 것이 뼈 속 깊이 파고드는 것이 사랑이라면 지식의 핵심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4장에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이런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저희가 지식을 버렸음으로 나도 저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이 지식을 버린 삶을 하나님이 그렇게 통탄해하시면서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린다고 말했으니 이 지식을 버린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을 갖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주님 안 만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옛날에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보지 못한 사람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첫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서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그렇게 회상할 수 있는 것이 과거밖에 없다는 것은 지금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지 않다고 하는 증거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애꿎은 짐승을 잡아서 목을 따고 드리는 그 흉측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통 힘을 내어서 자기를 다 바치면서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 아첨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매일매일 알아가는 것,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는 것, 섬기는 것을 통해서 주님을 알아가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가고,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아가고 이렇게 해서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합일의 삶을 살면서 주를 알아가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로 하여금 예전에 그 모든 이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다 버리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이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지식 때문에 그는 고난의 길을 가고 고난의 길을 가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그 예수가 누군지 더 알고자 하여서 그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여서 고난에 참여하는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여서 그는 이전 것은 다 잊어버리고 위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달려갔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열심이 있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하고 주님을 향해서 굽어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 세월은 속히 흘러갑니다. 오늘 저녁에 가서 거울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살같이 빠른 광음이 지나갑니다.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주님을 향한 이 지고지순한 헷세드의 사랑이 꽉 차있습니까?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섬기며 그분께 복속되어있는 접붙여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살지 않은 나나머지는 모두 허망한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나는 여러분들에게 마음 가득히 예수의 사랑을 전합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님을 떠나서 채워줄 수 없는 갈등을 가진 채 곤고한 인생의 길에서 걱정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아파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기만 하고 임무를 감당해나가는 이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너희가 깨트려져서 나를 향한 순결한 사랑으로 다시 가득 차고 그리고 너희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것, 내가 그것을 원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오늘 아침에 마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했습니다. 우리 같은 인간이 무엇인데 우리를 은혜언약 안으로 불러주셔서 은혜 언약 안에는 죄를 이기는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의 공급이 약속되어있고 우리가 그런 은혜에도 불구하고 주 앞에 잘못된 길을 걸어갔을 때는 진실하게 참회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겠다는 무한한 사죄의 은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 앞에 온전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여기 서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나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죄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똑같이 주의 진리를 붙들고 살지만 수시로 넘어지고 쓰러지기 때문에 주께서 어깨를 붙들고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이 필요한 상처받은 한 마리의 어린양에 불과합니다. 아침마다 마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깨닫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 영혼들의 목자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 한 마리의 가장 연약하고 상처받기를 잘하는 양에 불과합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 크신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쓸모없는 음흉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용납되게 하시기 위해서 은혜는 우리에게 주시고 죄에 대가는 당신이 받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서 낙인찍히고 버림받은 모든 죄인들의 구주가 되시는 분이 계시니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 앞에 나오는 참회하는 어떤 죄인도 실망시키신 적이 없고 우리 주님밖에는 구원의 소망이 없다고 믿으며 십자가의 보혈 앞으로 나오는 가장 더러운 죄인도 실망시킨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죄인의 마지막 은신처이시며 죄인의 마지막 피난처이며 용서받을 죄인의 마지막 재판자리가 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 앞에서 오늘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다 버리고 그분의 품으로 달려오십시오. 거기에 쉼이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