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속임을 이기는 길
(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죄의 속임과 계획(약1:14~15) 2004.8.8 주일오전 1
2. 생각에 대한 죄의 공격(약1:14~15) 2004.8.8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18
3. 생각을 공격하는 죄의 구체적인 계교들(약1:14~15) 2004.8.9 온가족 여름수련회(오전) 30
4. 생각을 이탈하게 하는 죄를 피하는 길(1)(약1:14~15) 2004.8.10 온가족 여름수련회(저녁) 50
5. 생각을 이탈하게 하는 죄를 파괴하는 길(2)(약1:14-15) 2004.8.15 주일오전 73
6. 묵상과 기도의 유익(약1:14~15) 2004.8.22 주일오전 88
7. 말씀과 기도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사(1)(약1:14~15) 2004.8.29 주일오전 105
8. 말씀과 기도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사(2) (약1:14~15) 2004.9.5 주일오전 120
9. 죄의 속이는 역사(1):생각을 이탈 시킴(1)(약1:14) 2004.9.12 주일오전 134
10. 죄의 속이는 역사(1):생각을 이탈시킴(2) (약1:14) 2004.9.19 주일오전 151
11. 죄의 속이는 역사(1):생각을 이탈시킴(3) (약1:14) 2004.10.3 주일오전 165
12. 죄의 속이는 역사(1):생각을 이탈시킴(4) (약1:14) 2004.10.10 주일오전 180
1. 죄의 속임과 계획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향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구원받기 전에 세상의 모든 욕심과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예수님을 보내어서 구원해주었는지 구원의 깊은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키도록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이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에만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서 자신도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부패한 본성과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부패한 본성과 그 죄를 끊임없이 순결하게 하신 성령님의 은혜로운 성결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들은 성화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화의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에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가 되는 대적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 죄는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잔존하는 세력이 우리 안에 부패성 속에 남아 있어서 예전에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던 그런 삶을 살도록 우리를 충동하고 그리고 우리를 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많이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우리 안에 있는 이 죄들은 많이 죽게 되고 죄가 죽은 것만큼 우리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온 존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존재가 되고 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싶어 하는 소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고난과 시련이 와도 하나님과 연합된 가운데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열려진 관계를 통해서 하늘자원을 공급받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도 여전히 우리 안에 내제하는 죄가 우리로 하여금 이런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살지 못하게 하도록, 성화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렇게 내제하는 죄의 작용이 있는데 두 가지로 우리에게 작용을 합니다. 첫째는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죄는 어느 한순간 죄가 우리 안에서 자라게 되면 이 죄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고 이 힘을 가지고 연약한 우리들을 밀어붙여서 그래서 정욕을 따라 살게 하고 죄를 짓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도록 우리를 강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런 죄의 놀라운 힘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을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죄의 법’이라고 고백을 했고 그것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자기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로잡히는 자는 사로잡는 자보다 약한 자이고 사로잡히는 자보다 사로잡는 자보다 강하지 않으면 사로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죄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신자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볼 때에 신자는 비로소 진짜로 죄가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죄가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에서 이탈해서 불순종하면서 살도록 강력하게 밀어붙인다고 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죄의 힘은 크기는 각각 다르지만 신자인 우리 모두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힘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죄의 강력한 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살고 적절히 은혜의 수단에 참여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진실한 참회가 있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지 못할 때 말씀의 은혜가 사라지고 기도의 은혜가 사라질 때 이 죄는 점점 더 강력한 힘을 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영혼과 인격 전체를 지배하고 삶 전체를 그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크고 작게 우리 안에서 발휘되고 있는 죄의 힘을 이길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은 우리의 혈과 육에 속한 힘이 아니라 죄에 강압하는 힘을 이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오직 은혜의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죄, 그리고 죄의 힘을 사로잡고 그것들을 억압하고 죽이기 위해서는 은혜의 힘이 필요합니다. 죄의 힘도 대단히 막강하지만 은혜의 힘은 그것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어서 단숨에 우리 안에 일어난 그 은혜의 힘이 죄의 힘을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눌러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신자가 끊임없이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게 되면 은혜는 우리 안에 강한 힘을 형성합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순종하는 삶, 삶의 실천, 말씀의 지속적인 빛, 열렬한 기도생활 이런 것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강해집니다. 점점 더 강해져서 그래서 우리 안에 우리안의 모든 속사람을 그 은혜의 힘으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분명히 죄가 있어도 그 죄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이 인간을 죄와 관련해서 네 분류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 그러니까 라틴 교구였습니다. 라틴어로 된 글 속에서 ‘꼬세 떼까레’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 이게 바로 타락하기 전의 인간입니다. 타락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논 보쎄 논 떼까레’ 죄를 지을 수가 없는 인간입니다. 구원받고 중생한 다음에는 ‘꼬쎄 논 뽀까레’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인간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에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영화된 상태에서는 ‘논 뽀쎄 떼까레’ 죄를 지을 수 없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면 적어도 우리의 양심을 거스르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를 결정적으로 깨트리는 이런 커다란 죄들로부터는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죄는 결국은 강한 힘을 가지고 신자를 밀어붙여서 그래서 그 신자로 하여금 죄에 고분고분히 말을 듣도록 만들고 그리고 그 신자로 하여금 죄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죄가 힘을 가지고 하는 그 일입니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의 힘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은혜의 힘이 없이는 그가 절대로 좋은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10-20년을 교회를 나오고 이렇게 점잖은 모습으로 예배당에 나와서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이런 모습 자체가 아니라 여러분 속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서 정말 죄를 이길 수 있는 은혜의 힘이 존재하고 그것이 매일매일 잡초처럼 일어나는 여러분들이 죄를 죽이고 그 힘을 누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아도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중이고 아름다운 신자가 되어가는 중이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인간 존재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그런 은혜의 힘이 없다면 그래서 여러분 속에 일어나는 죄의 힘을 파멸하고 누를 수 있는 힘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인가 꼭 가져야 할 것을 하나 잃어버린 그런 정도가 아니라 아주 나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 그 자체가 여러분들의 분명한 삶의 개혁과 그리고 내면의 세계의 진정한 변화가 없다면 위선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가 작용하는 또 하나의 작용은 속임입니다. 죄가 신자를 속이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도 속이고 물론 또한 신자도 속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강압으로 역사해서 신자들을 밀어붙여 죄를 짓게 하고, 또 하나는 속임으로 역사해서 신자의 생각을 흩트려 놓고 생각이 마땅히 가야할 길에서 이탈하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도록 만드는 것이 죄가 신자에 대해서 역사하는 대표적인 두 작용이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이 죄의 두 작용, 죄의 강압하는 힘과 그리고 속이는 역사에 대해서 꼼꼼히 배우고 지켜서 그래서 일생을 사는 동안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맛서야 할 대적인 이 죄를 이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로부터 시작해서 한 10주간 걸쳐서 죄의 속이는 역사를 이기는 길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죄가 사람을 속이는데 가장 좋은 환경은 영혼이 어둑할 때 영혼이 어두컴컴하면 죄가 속이기가 참 좋습니다. 요즘은 좀 그런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옛날에는 한국은행에서 돈이 없어서 그랬는지 왜 그렇게 찢어진 돈이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요즘은 난 찢어지고 풀로 붙인 돈은 못 봤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꼭 찢어진 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장사를 했는데 가끔 보면 돈을 받아왔는데 집에 와서 세어보면 천 원짜리는 천 원짜리인데 똑같은 짝 두개가 이렇게 붙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다가 모자라니까 비슷한 것을 갖다가 종이 풀로 붙여서 이렇게 해서 물건을 삽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는 밝은 대낮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뻔히 보이니까. 캄캄한 저녁때 파장 때쯤 와서 그때 사람이 막 붐빌 때 와서 사고 주고 물건을 받아서 빨리 거슬러주라고 하면서 빨리 가버립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의 돈을 하나 받았는데 만 원짜리를 받았는데- 그렇게 할 시간이 있으면 가서 돈을 벌지 -만 원짜리 종이돈을 이렇게 잘랐습니다. 같이 뜯어내서 두개로 만든 것입니다. 어떻게 분해가 되었는지 그것을 말려서 이렇게 접어서 가지고 와서 두 번을 접어서 만 원짜리였는데 집에 가져가서 펴보니 뒤에 백지였습니다. 돈이 아닌가 하고 자꾸 보니까 돈은 돈인데 기가 막히게 그것을 톱으로 잘랐는지 뭐로 잘랐는지 이렇게 분리를 했습니다. 그런 돈들은 다 언제 쓰는가 하면 저녁때 씁니다. 어두컴컴할 때 사람이 한창 바빠서 물건 파는 사람이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 그때에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죄가 우리를 속이려고 할 때 영혼에 밝은 빛이 있으면 그냥 속이는 것이 잘 안 통합니다. 좋은 환경이 무엇인가 하면 영혼이 어두컴컴할 때 잘 되는 것입니다. 요즘 기름값도 오르고 해서 전기세가 장난이 아닙니다. 나는 진짜 할 수만 있으면 이 도시를 환하게 했으면 좋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도시를 환하게 하면 범죄가 줄어듭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밝은 빛이 있고 어두움이 사라지면 죄가 함부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분명하게 볼 수 있으면 그러면 속일 수가 없습니다. 영혼의 어두움이라고 할 때 영혼의 어두움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영혼의 어두움은 첫째는 객관적인 어두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그럼 첫 번째 객관적은 어두움이 무엇인가? 영혼의 어두움이 있는데 그래서 첫 번째로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주관적인 어두움은 결론만 얘기하자면 말씀의 밝은 빛이 비추면 금방 물러가는 어두움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오늘도 1부 예배 시간에 어느 자매님이 기도를 하셨는데 어두움 가운데 살면서 정말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될지도 모르고 살아야 될지도 몰랐는데 복음의 밝은 빛을 받고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야기하는 그 어두움은 객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이번 주에도 어떤 사람이 교회에 상담전화를 했습니다. 30년을 천주교를 믿은 사람인데 방송설교를 듣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30년 동안 성당에 다니면서 도대체 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일까? 그러고 궁금했는데 방송설교를 듣고 나니까 이게 바로 기독교 신앙이구나 하는 마음이 생기고 30년 동안 성당에 다녔고 개신교 설교는 처음 들었는데 아무래도 천주교가 틀린 것 같다고, 그리고 상담을 했고 그리고 부목사님들이 설교 테이프를 주었습니다. 공부를 계속하라고, 그런 어두움이 바로 객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이런 객관적인 어두움을 물러가도록 계속 노력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게 아주 기가 막힌 비유가 방금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자, 소경이 캄캄한 집에 살아서 도대체 물건을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경이 불나간 집에서 사니까 더듬어서나 물건을 찾지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원인이 무엇인가 그랬더니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과에 가서 수술을 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이제 완벽하게 고쳤으니까 다 잘 보일 것이라고 이제 집에 가서 붕대만 풀면 될 것이라고 해서 집에 와서 붕대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무엇을 안 했기 때문입니까? 불을 켜야지, 또 반대로 불을 아무리 켜도 눈 수술을 안 하면 희미하게 보일 뿐이지 이렇게 뿌옇게 빛이 비쳐질 뿐이지 실제로 사물을 볼 수는 없습니다. 정말 정확한 비유입니다. 그 밝은 전기불이 불을 비추면 물러갈 수 있는 어두움은 객관적 어두움이고 그 다음에 수술해야 될 어두움은 주관적 어두움입니다.
그래서 이런 객관적 어두움을 물러 치기 위해서 시인이 119편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119편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어두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의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을 보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객관적인 어두움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참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알려고 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참 궁금합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갔을 때 어떻게 변명을 하려고 하십니까? 너 이렇게 살았니? 이것은 이렇게 해서 살았니? 주님이 물어보실 때 저는 그렇게까지 신자가 살아야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만약에 말한다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애야, 네가 하늘나라에 들어오고 하늘나라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생을 사는 동안에 어떻게 운전면허만큼도 공부를 안 하고 신자의 삶을 살려고 했니. 그러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항상 지식적으로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빛을 듬뿍 받아서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베드 크리스천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도 안 읽고 하나님의 말씀도 배우려고 하지 않고 그 말씀을 가슴에 담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도 않는데 그 사람의 어두움이 얼마나 심각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받으면 뭐합니까? 그 은혜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받는 것입니까? 그래서 은혜를 받고 몇 달 있다가 개가 다시 토해놓은 데로 다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던 웅덩이로 돌아가는 것처럼 다시 돌아가서 삽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이 세상에서 신자의 삶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삶인 것처럼 그리고 옛날에 간헐적으로 은혜를 받은 것이 자신이 굉장히 선택된 사람인 것을 입증하는 놀라운 증거인 것처럼 뻐기고 죄 위에 교만을 더하며 살아가는 그런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그런 사람이 행복할 수 있습니까? 주님도 슬프고 자신도 불행합니다. 이 객관적인 어두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지식을 통해서 물러가게 되는데 잘 들으십시오. 노력을 하고 애를 써도 도저히 이 객관적인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해주는 이가 없다든지, 사면을 아무리 돌아봐도 진리의 참된 빛을 찾을 수 없다든지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 조금 혼납니다. 그런데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밝은 빛을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영혼의 실증과 육체의 게으름으로 안 합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어두움 속에 계속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많이 혼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적게 맡은 자들에게는 적게 구할 것이오,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구할 것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평생을 공부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공부가 지식의 자람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이 객관적인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 그런 삶을 위해서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중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도 진짜 고승들은 이 수련에 전진하고 학문에 끊임없이 익혀서 도를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왜 아들 낳게 백일기도해준다고 사람이나 후리는 중은 땡 중입니다. 내가 오죽했으면 우리 교역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구하지 않으면 땡 목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문제는 성결하고 더 온전한 삶을 사는데 가로막는 객관적인 어두움을 물리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책을 한 200만원어치 구입을 했습니다. 그 중에는 존 오웬에 대해서 쓴 박사 학위논문이 10권이나 들어왔습니다. 한권에 10만원이 넘습니다. 가슴이 쓰렸지만 구입했습니다. 몇 번 망설이다가, 왜 그것들을 보면서 지난주에도 그 중에서 한권 읽었는데 놀라운 빛을 발견했습니다. 아직 책으로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 혼자 연구를 하면 몇 달 연구해도 찾아낼 수 없는 진리들을 그 젊은 사람들이 박사 논문을 쓰면서 연구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교수가 학술잡지에 쓴 논문을 읽으면서 내가 펑펑 울었습니다. 왜 아직까지도 객관적인 어두움은 많습니다. 그래서 누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어두움이 모두 물러가고 내가 많이 살았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어두움이 물러가기 위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가야지 됩니다.
두 번째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이 주관적인 어두움은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어두움은 알려고 하기 때문에 빛을 비쳐주면 물러가는 어두움인데 이 주관적인 어두움은 자기가 붙든 어두움입니다.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 있겠다는 고집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죄입니다.
지하실에 교회를 개척할 때 얻을 때가 없어서 고민하는데 오산당 병원 옆에 지하에 하나 있다고 해서 가보니까 지하실이기는 하지만 대로변이고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려고 하니까 그 바로 앞에 있는 가게에서 사람이 나오는데 아저씨도 나오고 아가씨도 나오고 그런다고 하니까 인사를 하면서 너무 잘하셨다고 하면서 여기 위치도 너무 좋고 사람도 많이 다니는 너무 좋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보고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냐고 해서 교회를 하려고 한다고 그러니까 갑자기 인상이 확 변하더니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주인이 아닌데 왜 그러는가 했더니 주인에게 이야기해서 당신들이 들어오면 자기네는 나갈 것이라고 해서 알고 보니까 퇴폐 이발소였습니다. 내가 만약에 거기에 다방이라도 한다면 아마 그 사람이 손잡고 눈물까지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퇴폐 이발소 입장에서 보면 예배당이 밥맛이지, 아니 그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처럼 교회가 들어오기를 이발소가 싫어하는 것, 이게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명료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이게 더 절망적입니다. 물론 전자도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십시오. 30년을 다녔는데 매일 성당에 가서 하는 이야기가 기독교 신앙이 이게 아닐 텐데, 그리고 30년을 다녔습니다. 이런 객관적 어두움도 심각한 문제지만 주관적인 어두움은 더 심각한 어두움입니다. 이것은 죄의 강력한 영향을 아주 훌륭하게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이런 죄가 속이기 위해서는 이렇게 어두운 환경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신자가 빛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빛을 닮는 것, 빛을 받고 빛 가운데 사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빛이라고 비슷한 비읍자도 다 싫어합니다. 왜 빛이 확 비추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니까. 감추어진 가운데서 살기 적합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불의에 자식들이라. 혹은 어두움의 자식이라고 불렀던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이제 죄가 속이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한 10주 동안 계속해서 죄가 우리를 어떻게 속이고 그리고 그 속이는 죄를 이기는 길이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죄의 속이는 작용인데 성경적으로 이것은 증거가 나타나있습니다. 어떻게 증거가 나타나있는가 하면 디모데 후서 2장에 보면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여자가 꾐을 받아 죄에 빠졌고” 그러니까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올 때 죄가 와서 제일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하면 한 사람을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속였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는데 아니다. 이 일을 제기한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익을 제공했습니다. 죄를 지을 때 정녕 죽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을 승복시킴으로서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철창을 부수듯이 힘으로 외부에 있는 죄가 쾅 하고 부수고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죄가 깃들게 되는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신자를 설복하고 순종하게 함으로서 자기 스스로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을 받으면서 죄를 질 때 바보같이 자기는 너무 싫은데 죄의 힘이 너무나 강해서 자기가 어쩔 수 없이 자기기 죄를 짓는다든지 자기는 절대 안 그러려고 했는데 사단이 너무 강력하게 역사했기 때문에 자기도 그 앞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하는 그런 것은 전부다 바보 같은 변명입니다. 성경이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와가 바로 그랬습니다.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뱀이 나를 꼬였기 때문에 내가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하소연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잘 기억하십시오. 죄를 지을 때 자기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사단이 워낙 강하게 역사해서 죄를 짓는다든지 아니면 자기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은데 죄가 워낙 힘이 세고 자기가 약해서 자기 의지에 반해서 저절로 죄를 짓게 된다든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모두 그 자체가 죄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은 가슴을 찢는 진실한 참회를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하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께 나갈 때 자꾸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그러고 나갑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입니다.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주저리주저리 사업이 힘들고, 환경이 어렵고, 애들이 속 썩이고, 돈은 없고 백날 해보십시오. 거기서 뱅글뱅글 돌다가 수채 구멍으로 들어갑니다.
두 번째 무엇인가 하면 아주 결정적인 구절이 고린도 후서 11장에 나오는데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뱀이 이하, 이하는 하와입니다. 하와를 미혹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봐 염려한다. 그런 고백이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히브리서 3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매일 피차 권면해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나오는데 여기 “유혹”이라고 그러는데 영어 성경에 보면 deceitfulness 그러니까 속임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속임으로 강퍅해 됨을 면하라. 죄의 속임에 넘어갈 때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에는 세 가지 작용이 있는데 첫째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가 총명입니다. 세 번째가 마음입니다. 그런데 죄는 제일먼저 생각을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공격해서 생각을 이탈시켜버리면 마치 긴 기차가 달려가다가 탈선을 했는데 다른 것은 하나도 탈선을 안 하고 기관차만 탈선했습니다. 기관차만 선로에서 조금 이탈했습니다. 나머지 차는 다 붙어 있어도 기관차가 이탈을 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힘도 필요 없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이 살아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나머지 객차를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생각을 먼저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17장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 .여기서 거짓되고 라고 되어 있는 단어가 영어로 deceitful입니다. 속임수가 가득한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만물보다 속임수가 있고 심히 더러운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여기서 유혹, 욕심이라고 그러는데 영어성경에 보면 deceitful lust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속임으로 가득 찬 정욕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죄와 정욕은 사춘간입니다. 동족입니다. 그래서 서로 도웁니다. 죄가 정욕을 불러일으키고 정욕은 죄에 힘을 더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손잡고 신자들을 속입니다. 이게 성경의 증거입니다. 성경은 풍부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악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들은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는 사람들이다. 그게 바로 악한 사람들의 정체입니다. 계시록에 가면 마지막에 절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 중에 예외 없이 항상 등장하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거짓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속이면서 사는 사람의 특성 그 자체가 죄의 전형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사람을 속이는 것이 인격화되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할 때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실해야지 됩니다.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궁금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다면 죄가 왜 그렇게 신자들을 속이려고 할까?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 속임 속에 효능을 이야기해야지 됩니다. 속이면 놀라운 효능이 있습니다. 그 효능이 무엇인가 하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죄가 들어와서 세상을 편만하게 지배하기 전에 제일먼저 한 일은 여자에게 와서 그를 속이는 것입니다. 속일 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죄의 위험에 대해서는 감추고 이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다. 그런데 만약에 죄가 와서 이야기할 때 그래 죽어. 죽는 것은 절대 사실이야. 따먹기만 하면 너는 죽어. 그것은 절대 사실이야. 그런데 죽는 그 순간에 맛있어, 그럼 죽는 그 순간에 이화가 그것을 따먹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도 정상적으로 제시를 안 합니다. 그리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입니다. 그리고 안심을 시키고 그다음에 굉장히 좋다.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굉장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야. 그리고 부당하게 감추고 부당하게 없는 이익을 제공합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리고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야. 굉장한 일이 일어날 것이야. 따먹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세기 5장서부터 시작해서 계속 죽는 이야기가 족보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뱀을 통한 이 죄의 속임이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인가 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가 세 가지 시험을 합니다. 예수님이 상종도 안 하고 모두 끊어버리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새빨간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고 나한테 절해라. 그러면 천하를 너에게 주마. 예수님이 절도 안 하셨지만 준다고 하는 그것도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하나도 거짓말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인간 중에서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숨소리 빼놓고 다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숨소리도 거짓말입니다. 그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숨을 쉬는 것인지 방귀를 뀌는 것인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게 무슨 문제인가 하면 이 하와를 꿰려고 들어왔을 때 하와에게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따먹어라, 이게 맛있잖니. 그랬더니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죽을까 하노라." 사실은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명백하게 죽는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트 타모트, 반드시 화자의 의지가 나타나있습니다. 반드시 죽는다. 내가 죽인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죽는다. 이 뜻이 되어 있는데 죽을까 하노라. 이게 벌써 뭘 보여주는가 하면 정서가 상당히 그것을 먹고 싶은 뜻으로 기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생각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이 생각이 있고 여기에 정서가 있는데 정서가 죄와 친숙해지게 되면 그 죄를 짓고 싶은 것입니다. 그때 생각이 올바릅니다. 그래서 이것은 죄다. 이것은 잘못하는 것이고 이후에는 굉장히 커다랗게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고 감시하면 정서가 죄를 짓고 싶은 마음에 안달을 해도 실질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담배를 펴서 인이 박히게 되면 그러면 그것은 못씁니다. 그러니까 담배를 피면 안 됩니다. 뭐 좋은 것이라고 핍니까? 나도 다 해봤는데 하나도 안 좋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다닐 때 애들이 그렇게 담배를 피는데 그러니까 그때 벌써 옛날이야기인데 그때 벌써 굉장히 보수적인 때였는데도 보수적이면 뭐 합니까. 우리 학교도 아무튼 개 패듯 하는 학교였는데, 그런데 하여튼 소용이 없습니다. 담배를 피다가 걸리면 정학을 시켜도 그것은 그때고 오후 시간에 화장실에 들어가 보면 여기저기서 담배연기가 계속 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벌써 담배를 숨어서 몰래 핍니다. 그리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한대 권하니까 안 피운데요. 그래서 왜 안 피우냐고 그랬더니 끊었다고 합니다. 벌써 끊었어. 왜 끊었는가. 아니 학교에 다닐 때는 그렇게 못 피려고 할 때는 숨어서 피우고 도망 다니면서 피다가 왜 이제 졸업해서 피워도 되는데 안 피는가 했더니 이제는 알았다고 합니다. 몸에 매우 나쁘다고, 실컷 해보니까 몸에 나쁘다고 이제 19살짜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담배에 인이 박힌 사람들이 끊는 방법은 금연학교에 가면 제일먼저 폐병 걸려 죽은 사람들의 폐를 유리 상자에 넣어서 다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진하고 다 보여주면서 첫날 하는 작업이 정나미가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잔인한 사진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쭉 보여줍니다. 그런다고 해서 수십 년 동안 태운 담배를 이 몸에서 안 받습니까? 요구를 합니다. 욕구하는데 정서가 요구할 때 생각이 자꾸 그림을 보내는 것입니다. 피토하고 폐암에 걸려서 죽은 사람. 그 다음에 완전히 진흙더미 속에 집어넣었다가 꺼낸 것 같은 시커멓게 절은 그 폐, 그리고 가족들이 펑펑 울고 있는 그 장례식 장면, 이런 것들을 생각이 자꾸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서가 못하는 것입니다. 혹시 한다고 하더라도 생각이 죄에 오염되지 않으면 조금 하다가 그것을 버립니다. 그런데 생각이 오염되어서 뭐 어때, 괜찮은 것이야, 괜찮지, 이렇게 해놓고 나면 마음 놓고 타락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고린도 후서 12장에 나오는데 "뱀이 이하를 미혹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노라" 그러니 결국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를 향해서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거기서 떠나서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번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직까지도 한번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제일 사랑스럽고 고귀하신 분인 것처럼 느껴지지 못했다든지, 그리고 정말 인간은 하나님 앞에 하잘 것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든지 이런 것들을 느끼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흉내 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이외에는 절대로 나를 이 사망의 형벌에서 구할 자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굳게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거듭나지 않으면 회개하고 거듭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으로 흉내 낸 이 모든 것들이 절대로 여러분의 영혼을 안전하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죄가 속이는 이유는 속임의 효과가 워낙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대부분이 언젠가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이 너무너무 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놀랍습니다. 그래서 그 주님 때문에 너무 행복합니다. 그때 여러분보고 그런 주님의 사랑을 버리고 너에게 이런 즐거움을 줄 테니까 죄를 지라고 하면 여러분들 짓겠습니까? 안 합니다. 그 사랑 다 버리고 빌딩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랑 하고 바꾸자. 그럼 바꾸겠습니까? 그게 바보입니다.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신자는 영원히 죄를 짓지 말아야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젊었을 때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까? 자기의 생명을 더 사랑했습니까? 대답을 왜 못하십니까? 다윗이 젊었을 때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을 더 사랑했습니까, 자기의 생명을 더 사랑했습니까?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음으로 나의 입술이 주를 찬양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자기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왜 죄를 지었습니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다윗이 이 다윗이 아닙니까? 똑같은 사람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죄의 속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죄가 속인 것입니다. 이제 나중에 나오는데 다양한 방법으로 속입니다. 그래서 속임입니다. 이 속임의 효과가 그렇게 뛰어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속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신자에게 이만한 좌판을 가져와서 여기다 온갖 죄를 다 갔다 놓고 탁 주면 그것을 버리고 이것 먹어라 그러면 그때 그 사랑을 버리고 그것을 먹을 신자가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죄가 꾸준히 노력하면 그 사랑을 버리고 이것을 먹게 할 수 있습니다. 유혹하는 것입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유혹 그 자체가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 가운데 들어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죄가 이런 속임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신자에게 다가올 때 모두 속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속이는 과정이 없이 한번의 죄로 그를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서서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우리들은 오늘 본문에서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는데 그래서 여섯 단계를 보게 되는데 우선 여기서 우리들이 죄의 냉혹한 진행을 보게 됩니다. 이 죄가 인간이 어떻게 눈물을 흘리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냉혹하게 죄는 자기 갈 곳으로 인간을 끌고 갑니다. 마치 소장수들이 소를 끌고 도수장으로 끌고 가듯이 그렇게 죄가 인간을 죄가 끌고 갑니다.
우리 어렸을 때 도수장이 옆에 있었습니다. 소 잡는 곳이, 어렸을 때도 거기 지나가기가 되게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소들이 밤나무 골 근처로 줄지어서 소 잡는 날 오는데 그런데 얼마만큼 오면 소가 그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렇게 웁니다. 그리고 안 가려고 하고 그리고 어렸을 때도 소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소를 데리고 곧바로 도수장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입을 벌리고 바커스로 물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몇 년 지나고 나서 물먹인 소, 그렇게 나오기에 아, 그렇게 해서 킬로를 불려서 그랬구나. 알았습니다. 소를 끌고 갑니다. 그런데 이미 이 사람은 소를 팔았습니다. 이소를 붙든 사람은 소 주인이 아니라 소장수입니다. 돈을 받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바로 그날 이 소를 바로 도살장으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끌고 거기에 가면 나무로 소 한 마리가 들어오면 좌우로 소가 움직이지 못하게 골목을 해서 저 건물 속으로 들어가게 하면 앞에 백정이 있다가 곡괭이 같은 것으로 정확하게 정수리를 치면 잠시 후에 가죽이 벗겨져서 나옵니다. 하루에 수십만 마리가 그렇게 죽어갑니다.
그러니까 죄는 일단 다가올 때는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왜 속여야지 되니까, 그러나 일단 딱 우리를 붙든 다음에는 그 팔린 소를 소장수들이 끌고 도수장으로 가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냉혹하게 피도 눈물도 없이 자기가 가기로 예정되어 있는 곳으로 인간을 끌고 갑니다. 그 최종적인 가야할 도수장이 어딘가 하면 사망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망을 낳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교리적인 혼돈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 도대체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신자인가, 불신자인가. 둘 다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용만 다릅니다. 그럼 불신자의 경우에는 어떤가. 불신자의 경우는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고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낳아서 죄가 상처를 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 자랍니다. 그렇게 해서 채찍을 들고 자기를 낳아준 엄마를 후려갈기면서 종노릇 시키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육체도 버림을 받아서 죽고 마지막에 심판 날에 그 육체도 죽임을 받고 영혼은 지옥에 던져지고 음부에 던져지고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서 하나님의 처참한 심판을 받고 지옥불속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게 첫 번째 사망한 육체의 죽음이고, 두 번째 사망은 바로 불 못에 던져지는 마지막 최후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죽음은 성화 상태로 들어가는 한 과정이지만 불신자에게 있어서 이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형벌입니다. 육체에 대한 죽음입니다. 사망입니다. 죽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죽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정도 가지고는 그가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살아왔던 일생의 죄를 다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능력으로 음부에 있는 영혼을 살려내시고 그리고 육체를 다시 입히셔서 영원한 심판을 받기에 적합한 몸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을 처단해서 지옥 불에 던져버리시고 그리고 영원히 증폭되는 고통 속에서 영원히 고난을 받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해도 창조주 하나님을 모욕하면서 살았던 그들의 그 죄를 다 갚을 수가 없습니다.
신자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신자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왜 신자가 죄를 지어도 마지막에 하나님의 구원이 취소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영혼을 죽여 버리셔서 지옥에 던져버리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의 죄는 이 세상에서 죄의 대가를 치루지만 다 정산이 끝나지 않은 죄에 대해서는 최후의 심판 날에 모두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어떤가 하면 신자들은 죄를 지으면 이 세상에서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치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만약에 어떤 신자라는 사람이 있는데 죄를 많이 지었는데 영혼의 깊은 고통도 없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는 일도 없이 아주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 사람은 구원받았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을 그렇게 다루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범죄 하게 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 세상에서 그가 참회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를 벌하십니다. 그래서 징계하십니다. 만약에 이런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그랬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반드시 징계하셔서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자기의 행실을 뉘우치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끔 만드십니다. 야단을 치셔서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만약에 이것이 없다면 그는 불택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계속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이 크게 징계하십니다. 작은 죄에 대해서는 작게 징계하십니다. 그렇게 징계하십니다. 사업이 망한다든지, 육신의 병이 든다든지, 가족이 풍비박산이 된다든지, 경제적인 큰 손해를 입는다든지, 아니면 모든 것들이 다 가만히 있는데 마음이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워서 괴로운 날들을 보내게 하시든지 그렇게 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고 죄 가운데 살았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하늘자원을 공급받으면서 살아야지만 비로소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수 있는데 그게 끊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자, 신자가 아버지의 집에서 같이 사이좋게 살 때도 아들이었고 재산을 빼앗아가서 허랑방탕하게 보내고 나중에는 돼지우리에 들어가서 엎드려져서 쥐엄열매를 찾을 때도 아들이었고 회개하고 돌아가서 새 옷을 입었을 때도 아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답이 다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의 속임에 놀아나서 그래서 모든 좋은 것을 잃어버리고 징계를 받으면서 울면서 살아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누가 아니라고 했습니까? 구원받았으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들인지 아닌지는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어떻게 되는가 하면 쥐엄열매 조차도 주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버지의 집이 부자인 것과 지금 내가 궁핍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내린 결론이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아버지의 집이 그렇게 풍부한데 나는 지금 쥐엄열매조차도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들이면 뭐하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래요. 여러분들이 구원받고 구원은 흔들릴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진실로 구원받았다고 치고 마지막 날에 주님이 여러분들을 버리시지 않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빨리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렇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내가 비록 쥐엄열매조차 먹지 못하고 돼지우리에 엎드려있어도 내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가. 그럼 됐지. 뭐가 더 필요한가, 그러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일어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지 됩니다. 그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신자를 마지막으로 계속 끌고 가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실제적으로 영혼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결국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우리에게 누리면서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은 희랍어로 ‘조에’ 영생입니다. 생명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신자가 죄를 범하고 계속해서 죄에 매어서 사니까 실제로 자기가 가는 곳은 조에 생명이 아니라 ‘까마토스’ 죽음입니다. 죽음으로 자기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영원한 형벌이나 죽음보다도 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고통스럽고 하늘자원이 없어서 궁핍 가운데 살고 죄 가운데 살고 죄를 이길 수 없고 그리고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계획에 반역하는 삶을 살고 이게 영원한 형벌만 못합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죄가 신자를 속이고 마지막에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가는 냉혹한 진행이 속임수의 여섯 단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욕심에 이끌려, 두 번째는 미혹됨이니. 이렇게 나옵니다. 첫째가 “욕심에 이끌려” 그랬습니다. 욕심에 이끌려 그랬는데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아직까지도 죄를 마음에 꼭 품은 그런 상태가 아니라 생각이 선로에서 탈선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욕심에 이끌려 하는 것은 생각이라는 기능에 관여된 것입니다. 영어로는 mind 라고 합니다. 생각이라는 기능에 관여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탈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이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 전체와 우리의 육체를 주도하는 통합적인 사령부입니다. 이게 생각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보면서 신호를 보냅니다. 우리가 그런 것이 아닙니까. 길을 빨리 건너야지 되는데 시간이 없는데도 안 가고 서서 기다립니다. 차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생각이, 그런데 정신병자들은 건넙니다. 왜 생각이 없으니까. 그 다음에 또 어떤 때도 그렇습니까? 저도 그런 적이 한두 번 있는데 뭔가 근심과 신경 쓰는 일이 많으면 정신없이 행동하다가 큰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어렸을 때 뭔가 생각을 하면서 걸어가는데 앞에 차가 획 지나갑니다. 트럭이 지나가는데 트럭 앞으로 뛰어든 것도 아니고 트럭이 이미 지나갔는데 트럭 중간에 내가 뛰어든 것입니다. 그 트럭에 받혀서 획 돌면서 쓰러졌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생각이 이탈하니까 자기 육체에 다가오는 위험을 정확하게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처럼 욕심에 이끌려 라고 하는 것은 생각이 이탈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음에 계속 해서 나오는데 이 생각을 제자리에 놓아두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성화 생활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첫 단추의 실패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잡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아무리 은혜를 받겠다고 그래도 그것은 뜻 물에다가 생수를 붓는 격입니다. 안 고쳐집니다. 그게 죄가 첫 번째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미혹됨이니 하고 나오는데 이것은 정서와 관련된 것입니다. 자,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제 영혼의 상태가 죄에 상당히 가깝게 되어 있으면 그러면 죄와 친화적이 됩니다. 그러면 자기 손으로 감히 이 죄를 덥석 잡지 못해도 거기로 계속 이렇게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하와의 경우에 뱀이 선악과를 먹으라고 그러니까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죽을까 하노라" 그랬습니다. 벌써 정서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먹으면 정녕 죽는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벌써 죄에 미혹된 정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 반대의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요셉입니다.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같이 자자. 동침하자. 그러니까 요셉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안 된다. 내가 이 어찌 큰 악을 행해서 여호와 앞에 범죄 하겠는가. 그리고 설득했습니다. 당신 주인이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겼는데 두 가지만 안 맡겼다. 자기가 먹는 음식과 그리고 당신을 안 맡겼는데 당신은 자기의 아내이기 때문에 안 맡긴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하고 같이 동침해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겠는가. 그리고 딱 뿌리치고 같이 있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자리에서 좋아. 그러면 같지 자자. 이렇게까지 안했더라도 뭔가 이렇게 석연치 않게 이 여자에 대해서 끌리는 것이 있고 그 죄에 대해서 끌리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요셉이 그 자리에서 단언하고 여호와 앞에서 어찌 이런 죄를 지고 득죄하겠냐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뭐라고 말을 했을까요? 저 마님, 지금은 좀 그렇고, 밤에 얘기합시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그랬을 것이 아닙니까?
초대교회사에 실화입니다. 길선주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원래 이분이 도인이었는데 한쪽 눈이 실명이 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생애적인 변화를 경험한 다음에 한국 부흥사의 하나님이 쓰시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때는 은혜를 많이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집회를 엄청나게 다닙니다. 그때 평양에서 말씀을 많이 전해서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믿게 되고 평양이 성시하가 되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이제 영업에 방해를 받는 집이 술집입니다. 술집 중에서도 고급 술집, 요즘으로 말하자면 요정입니다. 기생들이 술 파는데, 요즘으로 말하자면 기생연합회 회장이 애들을 다 모아놓고 왜 장사가 이 모양인가 그랬더니 말도 마세요. 언니, 보통문제가 아니야 그러니까 왜 사람들이 이상하게 야수교에 빠져서 술 먹으러 안 온다고, 야수교가 예수교입니다. 왜 갑자기 그러냐고 하니까 길선주라고 하는 인물이 있는데 가는 곳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펑펑 울고 그러더니 술 먹은 것, 노름한 것을 다 회개하고 첩 질한 것까지 다 회개하고 이러면서 새 삶을 살아서 그 피해를 우리들이 본다고 그러니까 기생연합회의 회장님이라는 사람이 그 중에 가장 미모가 출중한 젊은 애를 하나 뽑아서 사명을 주었습니다. 사명이 있다. 그것은 이렇게 해서 길선주 목사가 더 이상 일을 못하게 하라. 애가 길선주 목사가 하는 부흥회를 날마다 따라다녔습니다. 앉는 것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펑펑 웁니다. 기생들이 천성적으로 연기를 잘하니까, 그러니까 목사님도 봤을 것이 아닙니까. 만나자고 그래서 상담을 했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젊은 나이에 남편이 사별해서 그래서 이제 아이도 없이 자기가 이렇게 과부가 되었는데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예수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고 이제 남은 이 여생을 예수님과 함께 살고 싶다고, 그러니 이 목사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는 무슨 풍습이 있었는가 하면 목사님들이 부흥회를 많이 다니면 여 성도를 하나 데리고 다니는 별로 안 좋은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양반사회의 과도기적인 유물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집회하는 목사님이 이제 옷을 빤다든지 한 주간 동안 수발을 드는 것입니다. 조수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라다니던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하면서 목사님 신발이나 닦아드리면서 자기는 일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보니까 얼굴도 예쁘고 훌륭한 자매가 그렇게 회개하고 섬기면서 살겠다는데 기분이 나쁠 게 없습니다. 그렇게 해라. 그래서 집회를 잘하고 그때 집회는 피를 토하듯 하는 것인데 그러니까 낮 시간에 너무 고단하니까 대청마루를 빌려주어서 거기에 목침을 베고 누워서 눈을 붙이는데 뭔가 감촉이 느껴져서 보니까 신발이나 빨겠다는 자매가 대청마루에 올라와서 목사님 가슴에 기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녀가 어쩌고 저쩌고 그러니까 목사님이 만약에 죄에 대한 친밀함이 있었더라면 소녀가 뭐 어쩠다고 그러면서 오늘 저녁에 이야기를 마저 하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쪽으로 기댔는데 오른쪽 팔로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뿌리쳤는데 사실 얼굴도 얍삽하고 호리호리한 자매가 한복을 입고 수종을 들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그리고 뿌리쳤는데 얼마나 세게 뿌리쳤는지 마루에서 세 번이나 굴러서 댓돌 아래로 굴렀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분 안에 죄에 대한 어떤 친화적인 상태도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미혹된다고 하는 것, 욕심에 이끌린다고 하는 것이 전부다 희랍어로 '엑셀 코네느스' 그 다음에 '델레아조네느스' 라고 하는 두 단어인데 이 두개가 낚시꾼들이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낚시꾼들이 미끼 밥을 걸어서 낚시를 던지면서 고기들을 유인해서 잡는 그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말이 나중에 변천해서 사창가에서 쓰던 말이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창녀들이 예쁘게 화장을 하고 유혹해서 호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14-15절 전체에 문맥이 무엇인가 하면 간음을 해서 잉태를 해서 아이를 낳는 것을 머릿속에 그림을 두고 써내려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문학적으로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생생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미혹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정서에 많이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딱 이탈을 하면, 그러니까 생각이 똑바로 서서, 그러니까 생각은 우리 모든 정신작용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집안이 바로 되려면 아버지가 있어서 딱 이놈 그러면 말을 들어서 명이 서야지만 그 집안이 됩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딱 있어서 정서 너 꼼짝 마. 너 의지. 안돼 이렇게 호령을 해야지만 이게 사람이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생각이 이탈되었습니다. 정서가 충분히 미혹이 됩니다. 이것은 정서에 관련이 됩니다.
그 다음에 “욕심이 잉태한즉” 그랬습니다. 그것은 아기씨가 여자의 태에 딱 착상을 하는 그림입니다. 생각이 이렇게 스쳐가던 것을 잉태하는 것이 그 중에 한 생각이 떨어져서 태에 딱 아기씨처럼 착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기씨가 여자의 태내에 착상을 하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에는 자기가 떼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돌아다닐 때는 이렇게 때낼 수가 있는데 딱 착상이 되면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수정란과 자기가 일체가 되어서 그 아이가 점점 자기양분을 먹으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그러면 떠다니게 내버려두지, 왜 그 중에 한 생각을 딱 붙들어서 품고 그것을 착상을 시키는가. 여기에는 의지가 많이 관련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는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의지가 안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계속 떠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의지가 딱 그것을 선택하면서 딱 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착상되게 합니다.
그러면 궁금한 게 무엇인가 하면 왜 그렇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놀라운 즐거움을 가져다줍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죄가 상상 속에서 빈번하게 사고의 기능에 깊이 개입하게 될 때 그때에 죄의 지배아래 있는 증거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간음죄 같은 경우가 아주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성적인 욕구가 있으니까 수없이 스쳐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이게 빈번해지고 아주 많아지다가 그 다음에 그 중에 하나를 자기가 딱 붙듭니다. 그것이 착상이 됩니다. 그것이 계속 자랍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마지막에 너무 비참한데 이미 벌써 생각이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인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고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인간이 어떻게 이런 것까지 다 피하면서 살 수 있어, 예를 들면 그 다음에는 실제적으로 내가 이런 것들을 품는 것이 옳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이 옳지 않은 나의 불의한 행실보다는 훨씬 클 것이야. 이런 것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속으면서 그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잉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계속해서 사고의 기능 속에서 그 죄에 대한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굉장히 즐거운 것입니다. 즐거움을 맛봅니다. 그러면서 이속에서 그것들이 즐거움을 맛보면 정욕이 커지게 됩니다. 그 커진 정욕이 이 안에 착상된 이 죄라는 아이를 자라게 하는 양분을 공급하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점점 정욕이 커지게 되면 아주 충분한 영양이 공급이 되면서 아이가 계속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배가 이만큼 부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꽉 채웁니다. 그러면 여건만 마련이 되면 분출하듯이 터져나가서 죄를 짓게 됩니다. 잉태하고 난 그 다음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일단 욕망이 잉태되면서 죄가 잉태되어서 강한 욕구를 갖게 되면 거기서 많은 즐거움을 얻게 되면 정욕이 자랍니다. 그런데 그것도 어느 한도까지입니다. 어느 한도까지는 마음속에서 생각을 하는 것으로서 굉장히 기쁘고 그리고 죄의 달콤함을 맛보게 되는데 어느 정도 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정도로 도저히 만족하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 품었던 죄를 실행에 옮기고 싶어 합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이 배속에 있는 아이가 충분히 자랐을 때,
여러분, 아이를 낳아보신 분은 알지만 그 큰 아이가 어떻게 인간의 몸에서 나올 수가 있습니까?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마치 배변작용을 할 때에 자기가 오늘 배변을 해야지, 자 시작 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변이 꽉 차게 되면 자율신경을 건드려서 배가 꽉 축소되면서 변을 밀어내듯이 아이가 꽈 커져서 나올 때가 되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자율신경을 자극해서 이 아이를 밖으로 배출하려고 배가 막 오그라드는 것입니다. 축소가 되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는데 남자는 왜 끄덕이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해보지도 않고 말이지, 이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힘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힘이 콱콱 들어가면서 결국은 아이가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잉태가 된 상황에서 2개월이 된 상태에서는 그런 문제를 안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게 8-9개월이 넘어서 이제 10개월이 꽉 차서 막달이 될 때쯤 되면 그 다음에는 전에는 여건이 안 생기면 죄가 안 지었는데 막달이 되면 자기가 여건을 조성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런 때가 언제인가 하면 특별한 시험의 때입니다. 환경이나 모든 것을 바쳐주면 그때는 강력한 폭발하듯이 범죄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그다음에 죄가 출산을 하게 됩니다. 태어나게 됩니다. 그때 이제 의지를 비롯해서 전 기관에서 도움을 받으면서 출산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그 다음에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출산을 하기 전까지는 내 안에 있으니까 아직 내가 어느 정도 간수가 되는데 태어나고 나서는 그 다음부터는 제멋대로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말을 합니다. 이렇게 부른 자매들이 힘들다고 얼른 낳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어른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래도 배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 여기에 있으니까 내가 가고 싶으면 따라가고 내가 자면 애도 자는데 그런데 애가 태어나면 나는 자야지 되는데 이놈은 웁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쉬고 싶은데 밥 달라고 그러고,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온갖 일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랍니다. 그래서 죄가 낳아서 자랍니다. 그리고 또 죄가 사출됩니다. 계속 자랍니다. 그때까지는 자기 새끼인데 태어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완전히 돌변합니다. 그리고 딱 성장한 뒤에 채찍을 들고 지배자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낳아준 엄마를 채찍으로 후려갈기면서 속임과 죄로 억압을 하면서 마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임과 억압으로 압제하면서 자기 나라의 일을 이루는 노예로 삼았던 것처럼 그렇게 내 몸으로 난 새끼인데 그 새끼들이 커서 그 다음 이 채찍을 들고 나타나서 나를 채찍으로 후려갈기면서 지배하는 위치로 바뀌게 됩니다. 그게 결국은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결국 마지막에 무엇인가 하면 영적인 죽음으로 귀결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죄가 신자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냉혹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치열한 과정을 처음 시작할 때 이렇게 채찍을 들고 나타난다면 절대로 죄에 굴복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처음에는 아주 달콤하게 나타납니다. 그렇게 해서 대화하고 그리고 우리의 객관적인 어두움과 주관적인 어두움을 충분히 사용해서 수준에 맞게끔 그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내가 늘 이야기를 하지만 하나님을 많이 만나고 말씀을 많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는 죄가 고도의 간교함이 필요합니다. 말도 못합니다. 그 속에서 죄가 고도의 간교함을 필요로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일수록 엄청난 죄입니다. 왜냐하면 비유를 하자면 이 죄를 배에다 비유를 한다면 밋밋하고 잔잔한 호수입니다. 그곳으로 배가 지나갑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죄라는 배가 17-8미터가 넘는 폭풍도 살아남았고 벼락, 그리고 함포사격을 다 받으면서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뭐를 안 해봤겠습니까? 말씀 앞에 깨어져보지를 않았겠습니까, 철야기도를 안 했겠습니까, 금식을 안 했겠습니까, 말씀의 빛을 못 받았겠습니까? 다 했는데도 마지막에 그 치열한 은혜의 폭격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간교함이란 어떻겠습니까? 너무 너무 간교하고 놀랍습니다. 그게 바로 이 모든 죄의 냉혹한 역사가 우리를 마지막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 처음 시작을 속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뚜껑을 여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그렇게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간절한 소원은 우리를 구속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주님의 마음에 기쁜 사람이 되는 것, 어두운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지식의 빛을 나누어주고 죄 가운데 매어서 예전에 우리처럼 고생하며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빛 가운데 살수 있는 길을 인도해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데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 밖에 있는 객관적인 어두움들이 우리로 이런 삶을 살지 못하게 그런 어두움과 태만 속에서 죄의 속임은 점점 간교해져가고 우리의 영혼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세월이 좀 지나면 내 영혼에 무슨 변화가 일어날 것 같았지만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여러분들 자신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시고 또 잠시 변화되었어도 다시 너무나 신속히 옛날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의 그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도 고통이고 여러분들에게도 큰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 무엇이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 안에 있는 내제하는 죄의 강력한 파멸하는 영향력들을 파악하고 충분히 의로운 자가 되어서 이 죄가 우리를 이끌어가는 냉혹한 과정을 직시하고 그리고 거기에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살아가야지 됩니다. 거기에 진실한 성도가 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2. 생각에 대한 죄의 공격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그처럼 죄는 속임으로서 자신의 항구적인 계획을 시작하고 그리고 영혼이 어두움 속에 있을 때 그의 속임은 매우 탁월한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여섯 단계에 걸쳐서 냉혹하게 그 죄에 붙잡힌 영혼들을 끌고 사망으로 데려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럼 오늘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왜 죄는 생각을 먼저 공격하는가? 죄가 생각을 먼저 공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생각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 때문에 그러합니다. 생각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 때문에 그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잠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각은 우리 온 영혼과 생각 자신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감시기능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 이탈되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잘 이행할 때 그때에 죄가 들어오는 경로와 죄에 대한 자신의 반응, 그리고 변하는 상황 등을 잘 파악해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위험들을 인지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말하면 이렇게 말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저도 생각을 참 많이 하는 편인데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 생각이나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해를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큰 성을 지어놓고 그리고 거기에 높이 파수 대를 만들었습니다. 곳곳에 파수병들을 세워서 파수병들로 하여금 밤이나 낮이나 성을 향해 혹시 외적이 쳐들어오고 있는지를 살피도록 높은 꼭대기에다가 파수 대를 만들어서 사람을 배치했습니다. 거기에서 파수병들이 사방을 둘러보면서 살필 때 아마 그 눈에 굉장히 많은 것들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나부끼는 나뭇잎으로부터 시작해서 숲 사이로 뛰어다니는 짐승들, 그리고 날아다니는 새들과 흰 구름, 그리고 저 멀리서 흘러가는 시냇물 등등 많은 사물들이 눈에 비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임무는 그 많은 것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것들 중에서 오직 하나를 감시하기 위해서 거기 세워진 것입니다. 누굴까요?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쳐들어오는 적병이나 혹은 정탐하기 위해서 온 스파이들이 성 가까이 접근하는가를 보기 위해서 계속 감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적군들이 저쪽에서 줄을 맞추어서 그 성을 향해 올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혹시 대군을 이끌고 저 멀리서 이렇게 전면적으로 공격을 해올 수 있다고 할지라도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 전에 먼저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파수꾼의 임무입니다. 오히려 이렇지 않을까요? 이 스파이들이 온 몸에 나뭇잎을 붙이고 숲 사이를 왔다갔다 움직이면서 조금씩 이동하면서 성 가까이 접근해서 그 성의 형편을 살피려고 하지 않을까요? 혹은 민간인의 복장을 가장하고 그 성의 사람인 것처럼 하고 성문을 정식으로 통과하지 않으려고 할까요? 이런 것들을 관측하는 것이 파수꾼의 임무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생각이라는 기능을 주신 것은 아무 것이나 생각하면서 말갈 때 소갈 때 가라고 하나님이 생각을 주신 것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기 위해서 생각이라고 하는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각이라는 기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라는 기능이 많이 생각을 해도 파수꾼을 세워놓았는데도 계속해서 나부끼는 나뭇잎을 보면서 동요나 부르고 뛰어다니는 짐승들이나 보면서 ‘저것이나 잡아먹으면 맛있겠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고향생각이나 하고 그러면 그 사람은 보기는 많이 보았는데 아무 것도 보지 않은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경계에 원칙이 있는데 한꺼번에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백 미터씩 끊어서 관측을 합니다. 다시 이렇게, 이렇게, 그 다음에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먼 곳으로 이렇게 관측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생각이 물론 생각이 있으니까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고 저 사람을 보면서 ‘옷 새로 잘 입었네.’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생각이 해야 할 고유한 임무는 아닙니다. 생각은 가장 위에서 생각 자신은 물론이고 그리고 자신의 온 영혼, 그리고 주변의 모든 환경들을 쭉 살피면서 그런 환경들을 사용해서 혹시 죄가 들어와서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고 자신의 인생을 무너트리지 않을까?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놓으신 계획에 어긋나게 살도록 만들지를 않을까를 두려워하면서 쭉 감시하는 것이 생각의기능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거기에 서서 이제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의지를 모두 그 수하에 두고 그리고 그것들을 부리면서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온 영혼과 우리의 모든 마음들이 작동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 생각이 가지고 있는 중차대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서 제일 먼저 죄가 생각을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밤중에 공격을 하려고 한다면 여러분 제일먼저 누구부터 처치하려고 하겠습니까? 그 성을 높이 파수를 서고 있는 사람들을 자객을 보내든지 멀리서 저격병이 총을 쏘게 하든지 소리 안 나는 총을 쏘게 하든지 뭘 하게 하든지 그들을 먼저 처치하고 그 다음에 성문을 열고 그 다음에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죄가 생각을 먼저 공격을 합니다.
두 번째는 생각이 지니고 있는 영적인 특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소울이라는 말과 spirit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spirit 라고 하는 단어는 여러 의미로 쓰이기는 했는데 그런데 영혼의 작용과 관련지어서 spirit를 이야기할 때는 대부분 이게 다 생각입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나의 심령으로 섬기는 내 하나님이 그러면서 고백을 합니다. 모두 다 무엇인가 하면 영혼의 작용의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글에 나옵니다. "주 오실 그날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순전하기를" 그런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때에 거기서 나오는 영과 혼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생각과 정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많은 곳에서 이 spirit하고 하는 영이라고 하는 그것이 실제로 영혼의 작용과 관련되었을 때는 모두 생각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생각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래서 뭐라고까지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영의 생각은 생명이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영의 생각은 생명이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 이게 희랍어 본문의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 마인 디드 니스입니다. 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 수동태입니다. 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은 영적인 생명이요, 육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은 영적으로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생각이 생명과 사망으로 통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문처럼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 생각의 작용이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영혼의 상태가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생각의 상태가 영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줍니다. 이렇게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생각이 가지고 있는 작용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양심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생각이 올바른 생각의 틀 위에 딱 놓여 있을 때는 올바른 양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의 틀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틀에서 벗어나서 영혼에 다가오고 있는 위험이나 잘못 같은 것들을 판단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 되어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작동하지 않는지를 생각이 파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생각이라고 하는 작용이 영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 생각이라는 기능이 올바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생각이 생각자체의 감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의 중요한 기능이 무엇인가 하면 생각은 생각 자체를 감시하고 그 다음에 전 영혼을 감독하는 것이 생각의 의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아니 생각이 생각을 어떻게 감시하나.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속에 이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죄를 짓고 싶은 생각이 확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아직까지도 생각이 올바른 틀을 유지하고 있으면 생각이 떠올랐지만 또 다른 생각이 그 생각을 부인합니다. 안돼! 그래서 그 생각을 지워버리거나 아니면 초기에 털어버립니다. 둘 다 똑같이 생각입니다. 생각이라는 한 작용 안에서 하나는 부패한 옛 본성의 뿌리 속에서 생각이 계속 나오고 거룩하게 된 새 본성 속에서 생각이 계속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부패한 본성 속에서 나오는 생각을 이 영적인 본성 속에서 나오는 생각이 그것들을 얼마든지 감시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 얼마든지 감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생각이라고 하는 속에는 여러 가지가 섞여서 작용을 한다고 할지라도 어째든 그 속에서 생각 자체가 넓은 영역의 생각 자체를 감시하고 생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감시하고 그 생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영혼 전체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죄의 위협들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생각 자체가 올곧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 혹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들에 고착되어 있기 보다는 성결하고 진실한 성도의 삶을 살기 위해서 마땅히 가 있어야 할 자리에 생각이 가서 거기에 계속 뿌리를 내리고 고착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명령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기보다는 생각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안 되고 생각이 생각 자체에 대해서 주도권을 행사하도록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생각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나. 교회에서 듣나. 마찬가지입니다. 자, 예수님이 생각날 때가 있지요? 할 때 있습니까?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생각날 때가 있으십니까? 생각이 나지 않은데 생각을 하려고 하는 때가 많습니까? 거의 없습니까? 매우 적을 것입니다. 물론 있습니다.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매우 적습니다. 우리는 경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성경의 권고를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야지 될 것을 생각으로 하여금 계속 생각하기 위해서 생각을 많이 분발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 그럼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약에 생각에 어떤 제재를 가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그러면 그 생각이 어떻게 될까요? 돗대 없고 삿대 부러진 배처럼 물결이 치는 대로 우리 본성의 물결이 치는 대로 계속 아무 데로나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의 물결이 어디를 향해서 칩니까? 그렇습니다. 죄를 향해서 물결을 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생각이 표류합니다. 표류하는데 그냥 표류하는 게 아니라 일단 시간이 지나면 아주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표류하듯이 다가갑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죄의 영향이 미치면서 그 죄가 속이기 시작하면서 그 여섯 단계를 이끌어서 우리의 생각을 정복한 다음에 그 다음에 하나씩 하나씩 정복해서 끌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온 영혼과 인생이 배라면 그러면 우리의 생각은 거기 조타실입니다. 거기를 들어와서 점령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서라고 할 수 있는 기관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움직이면 죄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내버려두게 되면 그러면 제가 늘 하는 이야기지만 짐승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살면 됩니다. 그냥 자기 배짱대로 살면 그러면 마지막에 다 짐승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답게 살려고 하면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생각도 똑같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반드시 우리의 옛 본성의 물결을 따라서 결국은 죄가 지향하고 있는 그 항로를 여행하면서 그 사망이 심령으로 미끄러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명령하는 것입니다. 생각날 때는 물론 생각하고 생각이 잘 안 날 때는 안 나기 때문에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실제로 이렇게 하지만 조금만 그것을 실천해본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됩니다. 제가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끔 금식기도를 하면서 큰 결단을 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일 새벽기도에 나와서 아침에 한두 시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대치할 수는 없지만 그것 못지않게 강력한 힘을 가진 기도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에게 숫자까지 제시를 했습니다. 하루에 20번만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찾아보십시오. 하나님 나는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입니다. 주님의 피로 용서받은 쓸모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제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주님이 저를 버리시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을 만날 그 날을 사모합니다. 지금 30초가 채 안 걸렸습니다. 20번 정도만 하면 그래서 그 20번의 기도가 모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올 수 있다면 여러분들의 이 영혼의 상태가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천하신 분이 몇 분 안 될 것이라고 하는 것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 됩니다.
기도의 은혜 속에 살면서 마음의 경향성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하나님을 계속 앙망하고 있으면 하루에 20분이 아니라 100분도 찾습니다. 그런데 이게 내적인 경향성과 내가 해야 할 의무가 너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안 됩니다. 그럼 목사님은 어떠십니까? 하고 물어보고 싶으실 것입니다. 아주 굉장히 궁금하신 것 같습니다. 내가 솔직히 고백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실천하려고 무지하게 애를 씁니다. 그런데 그날, 그날의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다릅니다. 어떤 때는 20번이 아니라 150번 주님을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루 종일 기도 속에서 산 느낌입니다. 한 10분 간격 내지 15분 간격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하루에 10번 부르는 것도 굉장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은혜의 상태라도 은혜에 촉촉이 젖어들은 그것이 다르고 또 그 다음에 일이 많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소낙비처럼, 그런데 그 속에서 수시로 일이 밀려오는데 그 속에서 30-40분마다 한번씩 가슴에 손을 얹고 간절히 주님을 찾는다고 하는 것은 보통 내적으로 강렬한 욕구가 있기 전에는 힘듭니다.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바람직한 것은 아까 이야기한 것 같이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게 하는 채비가 되게 하는 놀라운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의 커다란 벌판이 세 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하고 그 다음에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에게 그럼 답이 무엇입니까? 그러면 그렇게 힘든데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영혼에 대해서 그렇게 중요성을 갖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땅히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생각해야 할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모든 삶의 토대가 될 수 있게 하겠습니까? 이것을 대답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 같은 경우 교회의 공사하는 것도 가끔 들여다보고 생각해야지 되고 또 뭐 교회의 재정에 대해서도 생각해야지 되고 누가 돌아가셨다, 어려움이 있다. 그러면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을 안 해야겠어요, 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이차적인 것들입니다. 그럼 무엇인가? 일차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세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위에 것을 바라라. 위에 것을 찾으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얻었으면 너희는 위에 것을 찾으라.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 은혜와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것이 기초가 되어서 구체적으로 형제도 염려하고, 교회도 걱정하고, 교회제정도 걱정하고, 그 다음에 사람과의 관계도 하고, 뭐도 하고 심지어는 교회 마당에 무슨 꽃을 심을 것인가 이런 것도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청소를 잘할 것인가. 청소하는 지체들이 그런 것도 고민하고 이럴 때 비로소 그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그 기초 위에 서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위한 온전한 의무를 감당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금 있다가 하고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계속해서 생각이 이탈되지 않고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대상에 고정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성품, 은혜의 세계, 그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들에 대해서 생각이 고정될 수 있겠는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아이들이 두 달쯤 지나서 석 달쯤 될 때쯤 되면 뭘 선물을 합니까? 모빌을 선물합니다. 그래서 천장위에 스카치 테프를 붙이고 기다랗게 달아놓습니다. 그럼 아이가 이렇게 누워서 그것을 쳐다봅니다. 왜 쳐다볼까요? 눈에 보이니까 쳐다봅니다. 그런데 그 모빌은 말 그대로 움직입니다. 바람이 불어서 움직이고 어째든 가만히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하필이면 어지럽게 모빌을 달아줍니까? 긴 막대기 하나 천장에 꽂아놓고 거기다 구슬 하나 달아놓으면 안될까요? 그러면 그것을 아이가 쳐다볼까요, 안 쳐다볼까요? 잠깐 쳐다보다가 그 다음에 안 쳐다볼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사고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정지상태에 있는 사물을 오래도록 쳐다보지를 못합니다. 이것을 쳐다보는 것은 한 3-4초밖에 못 쳐다봅니다. 저 포스터 아주 시원하게 그렸습니다. 저것을 쳐다보는 것은 한 3-4초는 쳐다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보고 3분 동안 쳐다보고 있으라고 그러면 벌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꼭 신기하게 저 글자가 춤을 춥니다. 파도가 막 움직입니다. 그러면 1분을 쳐다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쳐다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한 번 더 이게 어떻게 된 게 파도가 앞으로 튀어나옵니다. 그러면서 막 물방울이 쏟아집니다. 그러면 10분도 쳐다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 있더니 글자 하나 하나가 튀어나오면서 막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그게 두 시간도 쳐다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변화무쌍하게 계속해서 다른 리포트리로 움직입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쳐다볼 수 있습니다. 이제 좀 문학을 아는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만해도 되겠지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아무리 내가 생각해야 할 바람직한 생각의 대상이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천장에 막대기 끝에 매달린 구슬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면 잠깐 보다가는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아무리 좋고 그리고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가만히 계시면 그러면 예수님을 오래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이 그 앞에서 우리에게 뭐 이렇게 율동이라도 하셔야 되겠습니까?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내가 알았던 예수님이 이런 분이었습니다. 이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쳐다보는데.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런데 이런 문제 아닙니까? 그런 분인 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생각을 이렇게 쳐다보거나 막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예수님의 모습들이 막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럼 막 내가 생각이 고정되어야 할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막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눈을 뜰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바람직한 대상을 생각함으로서 영혼의 유익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생각의 의무인데 생각은 그렇게 오랫동안 한 대상, 움직이지 않는 한 대상, 변화가 없는 한 대상, 더 이상의 느낌을 가져다주지 않는 한 대상을 쳐다보면서 오래도록 그 의무를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그 하나님과 신령한 세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새로운 지식과 깨달음들이 계속 풍부하게 생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눈을 거기서 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단순한 생각의 영역이 아니라 체험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는 생각입니다. 그런 현상이 언제 나타납니까?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은혜를 받았을 때 나타납니다.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러면 하나님의 성품 사이 사이에 있는 차이점들이 놀랍게 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다가옵니다. 은혜를 전혀 못 받은 사람은 무슨 설교를 하든지 어차피 못 알아듣습니다. 조금 은혜를 받으면 다 그게 그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고쳐진 경험이 많으면 그 말씀이 똑같이 느껴지지 않고 아주 다양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맛있는 음식점에 데려갈 때는 입맛이 있는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기껏 힘들게 데려가서 자랑하려고 사주면서 맛있지, 그때 먹었던 그 집하고 틀리지, 한참 눈을 껌벅이면서 뭐 그게 그것이네, 그날은 돈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느낍니다. 은혜를 받았을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날마다 새로운 말씀이 주어집니다. 날마다 새롭게 다가옵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목사님 왜 매일 죄에 대해서만 설교하십니까? 매일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습니다. 그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인간이 그 인간 같다. 그게 아닙니다. 다른데 세미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의 의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우선 첫째는 생각의 의무가 일반적으로는 생각 자체와 전 영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게 생각의 일반적인 의무입니다. 두 번째로는 개별적으로는 생각의 의무가 하나님의 요구대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각각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요구대로 우리의 영혼과 온 기관이 그 요구에 순종할 수 있도록 조취를 취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각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까 잠깐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렇게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그 토대위에 이제 하나씩 하나씩 뭘 이렇게 놓는데 그렇게 쌓아가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그것들이 계속 솟아나면서 새로운 생각을 계속 불러일으킬 때에 그것을 계속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토대 위에서 이제 가정도 생각하고, 사람의 형편도 생각하고, 교회도 생각하고, 돈도 생각하고, 사업도 생각하고 다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야기한 그 생각이 앞에 이야기하는 그 생각 속에 복종되어야 합니다. 굴복되어야 합니다. 그런 것은 없고 기본적으로 이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다. 은혜의 세계를 생각한다. 생각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유지하게 한다. 이런 것은 없어, 그리고는 성경에 보니까 열심히 구제하라고 그랬네. 그리고 구제하고 그 다음날 또 넘겨보니까 기도도 하라. 그러니까 기도도 합니다. 전도도 하라고 하니까 전도도 하고 또 보니까 가난한 사람 쌀도 보태주라고 그러고 또 하고 또 보니까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뭐고 하라고 하니까 하고 그것은 꼭 뭐와 꼭 같은가 하면 자기는 굉장히 많은 것을 드렸는데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괴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선물이라고 가지고 왔는데 여러분들에게 별로 필요가 없어도 사람들이 이렇게 마음 깊은 중심으로 가져온 것이면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몇 십 년씩 보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혀 가지고 오기는 가져 왔는데 막 선물 보따리를 잔뜩 가져왔습니다. 뜯어보니까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연탄 두장, 그 다음에 해괴망측한 것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그 사람에게 기쁜 것이 아니라 짜증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무를 그런 식으로 이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아주 실증을 내십니다. 너희들이 제물을 바치고 월삭을 지키고 이러는데 그런 모든 것들이 총체적인 기초가 없이 개별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다 하나님 앞에 거절당한 섬김입니다.
그것은 마치 뭐와 똑같은가 하면 이것과 같습니다. 집을 질 때 벽돌이나 콘크리트 이런 것들이 모두 있어야지만 그것만 있으면 저절로 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전문가의 설계에 따라서 계획대로 하나 하나 놓일 때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트럭을 몰고 와서 벽돌 두 트럭 쏟아놓고 그 다음에 모래 한 트럭 쏟아놓고 유리 반 트럭 가져와서 쏟아놓고 그 다음에 페인트 통 한 30개 가져와서 쏟아놓고 가고 그렇게 쌓아놓고 가면 그게 어떻게 건축입니까 쓰레기더미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는 하나님을 많이 섬겼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서 별로 섬김을 받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생각은 개개의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과 그 다음에 모든 영혼이 개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거기에 잘 순종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키는 그것이 생각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런데 이제 생각에 대해서 이제 죄가 공격을 합니다. 우선 일반적으로는 이 죄는 생각을 공격하면서 의무를 벗어버리도록 만듭니다. 생각을 속여서 그 의무를 벗어버리도록, 의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각 자기 자신을 감시하고 전 영혼을 감시하고 상황을 모두 살펴서 개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인식하고 거기에 순종하게 하는 것, 이것이 생각의 의무인데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하는 하는 방법이 강력하게 들이밀어서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거기에서 꼬여내는 것입니다. 자, 경비병들이 서서 감시를 한다고 그럴 때 그들을 처치해서 죽여 버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훌륭한 방법 중에 하나는 그 사람들을 근무지를 이탈하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불러내다가 파수 대에서 내려와서 막걸리라도 한잔씩 먹게끔 만들어서 얼떨떨하게 취하게 만들어놓으면 망루에 올라가 왔다 갔다 할 때 취해서 사람도 나무 같고 나무도 사람 같은 그렇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방법이 아닙니까? 죄가 그런 식으로 생각을 꼬여서 속여서 고유한 감시의 의무를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감시하고 영혼과 모든 상황을 감시해서 개개의 의무에 부합하도록 행동하는 것을 못하도록 그 의무를 벗어버리고 거기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죄가 하는 일입니다.
개별적으로는 이 죄가 어떻게 생각에 대해서 공격을 하는가 하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죄의 위험을 생각지 못하게 합니다.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깨달았을 때는 이 죄에 대해서 아주 또렷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죄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에 대해서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죄의 정체에 대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죄는 아주 다양한 모습을 하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다양한 속임수를 쓰고 나타나지만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는 그 속에 있는 껍질을 벗고 보면 그 속의 실체는 모두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실체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은혜를 받은 신자는 그 죄의 기원이 무엇이고 그 다음에 지금은 그렇게 달콤하게 나에게 다가오지만 그러나 마지막으로 이 죄가 어떤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간파를 합니다. 그래서 잠시 죄가 주는 즐거움보다는 그 죄에 빠지게 될 때 나중에 경험하게 될 그 치열한 고통을 먼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생각을 속이게 되면 죄의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합니다. 죄가 얼마나 놀라운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죄가 들어와서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그리고 이제껏 까지 자신을 인도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를 발로 차버리고 그 다음에는 죄와 함께 밑도 끝도 없는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어떻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태가 되게 만듭니다. 그것을 생각이 이탈되지 않고 올바로 있을 때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공정한 인식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설령 감정이 안 따라주어서 감정은 그것을 어떻게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도 생각이 올곧은 상태에 딱 있게 되면 감정을 꾸짖는 것입니다. 안된다. 감정은 너무 하려고 하는데 생각이 안돼. 그리고 이렇게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굳게 붙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게 되면 그 위험을 감추는 것입니다. 위험은 감추는 대신 이점은 부각을 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죄가 개별적인 의무에서 우리를 이탈하게 합니다.
두 번째는 죄에 대한 마땅한 생각에 틀을 벗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 우리들이 은혜로부터 멀어져 있다가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회복하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게 되고 하나님께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경험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렇게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 그런 경험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경험의 깊이만큼 우리는 죄를 혐오하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죄를 어떻게 합니까?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멀어져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거의 없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자기는 말로 하지만 느낄 수가 없습니다. 느낄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 목숨을 건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느낄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생각이 그렇게 뒤틀리고 영혼이 그렇게 죄에 오염이 되니까 양심의 기능도 이미 비뚤어져버렸습니다. 이탈해버렸습니다. 명백하게 죄인데 그게 그렇게 무슨 큰 문제가 되나. 이렇게 양심이 무디어집니다. 총명은 흐려져서 그것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망가진 상태에서 죄에 대해서 인식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마땅히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 죄에 대한 혐오감, 이런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죄에 대한 친숙함, 그 다음에 죄에 대한 친화력 이런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미 벌써 생각이 이탈된 것입니다. 이탈이 되어서 그래서 생각이 이미 벌써 개별적으로 죄에 의해서 속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거룩한 삶을 위한 사고로부터 이탈하게 만듭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고 그래서 여러분 자신도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때에 여러분들의 관심은 어디로 모아지는가 하면 거룩한 삶으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런 거룩한 삶을 가로막는 중요한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결국은 죄입니다. 그러니까 그 죄를 절대로 사소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죄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죄가 몰고 올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두려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두려움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삶이 무엇인가 하면 근신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절대로 노예적인 두려움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과 유지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를 나의 불순종과 죄로 인하여서 파멸시키고 싶지 않다고 하는 하나님께 고착되고자 하는 이 착한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두려움입니다. 그게 바로 근신하는 삶이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근신하는 삶에 대해서 많이 칭찬을 합니다. 이제 이렇게 죄는 개별적으로 죄의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게 하고 죄에 대한 생각의 틀을 벗게 하고 거룩한 삶을 위한 사고로부터 이탈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관심사가 거룩한 삶, 어떻게 진실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자가 될 것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것, 가치 없는 것들을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살아갑니다. 죄에 의해서 이미 충분히 속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죄의 계교는 이런 총론적인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죄가 생각을 공격하는데 이 신자의 생각을 무장하고 있는 죄에게는 매우 나쁜 이 구조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가져다주는 생각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이 깊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공부하고 그것을 인격적으로 체험해서 지식적으로 정리가 잘 된 사람들은 매우 치밀한 사고를 가졌을 것이고 그저 덜렁덜렁 와서 가끔 소낙비처럼 몇 년에 한번씩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아주 현저하게 덜 정리가 되어 있고 그리고 어두움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어째든 복음적인 생각들의 흔적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적인 교리에 얼개를 가지고 삶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것이 그 얼개가 매우 잘못되었다고 그러면 망가진 레이더로 적의 침공을 감시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죄가 들어와서 난리를 치고 돌아다녀도 그게 죄라는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 것들이 잘 정리되어 있으면 그러면 그 죄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체험과 함께, 단순한 개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체험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으면 죄가 역사해도 이 속에서 죄라는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죄가 공격을 할 때는 구체적으로 신자들이 알고 있는 이 복음의 교리를 그것을 없애버릴 수는 없으니까 어느 날 나타나서 내가 아무리 죄의 속임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나타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다 뻥이야. 그럴 때 아, 뻥이었구나. 이것은 죄에게 속인 게 아니라 배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그래서 네 죄를 용서받았다고? 다 거짓말이야. 200년 전에 죽은 예수의 피가 어떻게 네 죄를 용서할 수 있나. 너는 바보같이 그것을 믿니. 그럴 때 아, 내가 이제껏 까지 수많은 설교를 들으면서 속았구나. 이렇게 아무리 죄가 강력해도 신자를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거든 그것은 네 말이 맞아. 이렇게 해야지만 대화가 됩니다. 죽으시기는 죽으셨거든 그래, 네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지. 그런데 다는 아니야. 아니면 이런 식으로 뭔가 대화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이미 알고 있는 복음 교리들을 오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잘못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많은데 시간관계상 6가지만 들겠습니다. 오늘 다 못하고 마치더라도 여러분이 이해를 하십시오. 우선 첫째는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을 아주 흔해빠진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을 아주 흔해빠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러면 그 구원에 대한 감사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그 구원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고백을 하나할 게 있는데 어제 밤에 말씀을 다 준비하고 앉았는데 우연히 교인 수첩을 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다 나오는데 사실은 솔직히 이야기를 해서 나중에 등록한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는데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거기다가 내가 문자 메시지를 하나 썼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번 수련회에 와서 진짜 결심하고 은혜를 받으라고, 그러고 나서 얼굴을 보면서 이 사람도 이런 메시지가 필요해. 쭉 적어서 한 40명한테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막 쇄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안 옵니다. 그러더니 어떤 사람이 답장을 하나 보냈는데 누군지 모르지만 고맙소. 당신도 은혜를 많이 받으시오. 그러고 왔습니다. 그래도 그 다음에 편지가 하나 들어왔는데 그래도 좀 나은 게 뭐라고 했는가 하면 어머, 담임목사님 그러더니 담임목사님이 이런 편지를 보냈을 리는 없지만 그러나 어째든 참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온 마음을 모으고 은혜를 받으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러고 끝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답장을 했습니다. 내가 담임목사님입니다. 사진을 보고 직접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매일이 왔는데 감격에 찬 매일이 가득 왔습니다. 앞에 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다 얼굴 보면서 보냈는데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그것이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째 이런 일이! 그리고 답장을 한 것입니다. 나머지 38명은 답장이 없습니다. 놀랐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누구신지 모르지만 분명히 내가 거기에 김목사 라고 그랬는데. 죄는 제일먼저 들어와서 자기에게 대항하는 기초를 말려야 합니다. 그 기초가 무엇인가 하면 구속에 대한 감사입니다. 신명기가 바로 그런 문맥입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그 신명기를 도입하기 전에 제일먼저 나오는 것이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뭘 잊지 말라는 것입니까? 애굽에서 종 되어 소망 없이 노예 살이 하던 너희들, 유리하던 너희들을 이끌어내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신명기에서 말씀하시기 전에 나 여호와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낸 나 여호와다. 그러면서 또 하나 무엇인가 하면 그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다. 그러니까 이미 이루어진 구속에 대한 깊은 감사, 그 다음에 마지막에 완성될 구속의 영광스러움에 대한 한없는 기대,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모든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에 기초입니다.
그래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설교하면서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쓰레기와 같은 인간입니다. 벌레만도 못한 너무나 더러운 인간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나를 구원해주셨으니 나는 이 은혜를 죽어도 잊을 수 없는 감당할 수 없이 커다란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을 때는 어떻게 하나.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해서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셨지요. 아,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주시지 않으시면 누구를 구원하시겠습니까. 너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겠습니까? 그런 자부심이 들지만 은혜를 깊이 받게 되면 주님께로부터 받은 구속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왜 나를 사랑하실까?
주 예수 나를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깊이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참 이상한 게 이게 마르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마르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니까 질릴 때도 되었는데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누가 도움을 주었는데 큰 집을 하나 사주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때 내가 너에게 집을 사주었지? 처음 만나서 그러면 무릎을 꿇고 형님, 감사합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달에 만나서 내가 너 집 사준 것 알아. 아, 감사합니다. 그 다음주에 만나서 또 내가 너 집사준 것 알아. 그 다음에 만나서 내가 너 집사주었지? 네, 그 다음에 오후에 만나서 또 내가 너 집 사준 것 알아. 누가 아니래요. 대번에 그렇게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속의 은혜에 대해서 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이 신자가 은혜를 받고 나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분이 거기서 당한 그 고난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를 보면서 죄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고 나같이 하찮은 인간이 지은 그 죄가 우리 주님을 얼마나 마음 아프게 해드렸으면 그분께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남겼는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그리고 나는 그 은혜로 살리신 것이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러분들도 그런 십자가의 은혜를 지금이라도 깊이 깨닫고 나면 너무 마음이 아픈 게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스럽게 구원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 뻔뻔스러움을 누가 가져다주었는가 하면 죄가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제일 먼저 와서 우리의 영혼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이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모두 말려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럼 무엇을 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여기서 맺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이 구속의 은혜가 장난입니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도저히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심지어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조차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그 십자가의 구속 아래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인생은 정말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고 철저히 소망이 없는 이 세상의 현세에 삶에 만족하지 말고 그리고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의 그 사랑을 깊이 기억하면서 그 사랑의 경륜을 따라서 살다가 주님을 만날 그런 소망을 가지고 우리들이 매일매일 살아야지 마치 이 세상에 자기를 즐겁게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 앞에 매우 부끄럽고 아주 더러운 삶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고 자신도 그렇게 죄 가운데 살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면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돌이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3. 생각을 공격하는 죄의 구체적인 계교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죄가 제일먼저 생각을 공격하는 것은 생각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 때문이고 또 생각이 가지고 있는 영적 특성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깊이 명심해야지 될 사실은 생각을 되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은혜의 상태에 있을 때는 생각되는 것들이 신령한 것들,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그의 계명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뭐라고 개인적인 고백을 했는가 하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지키면서 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하루에 7번씩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무한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상태에 있지 않고 은혜에서 멀어져 있을 때는 하나님을 지키면서 살도록 주신 그 말씀 때문에 기쁘고 감사한 것이 아니라 생각할수록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상태에 있을 때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금은보다 귀합니다. 금이나 은보다도 내게 더 귀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 속에서 기쁨을 한없이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생각이 나는 것들이 은혜의 샘이 열려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계속해서 은혜로운 생각들이, 신령한 생각들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어제 모빌을 설명한 것처럼 가만히 있으면 한참 쳐다보다가 그만 두는데 이게 계속 솟아나는 것입니다. 신기합니다. 계속 솟아나니까 그러니까 마음이 마땅히 생각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에 딱 고정이 된 것입니다. 솟아난 것입니다. 이때는 생각이 되는 것들이 정말 영적이고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얘기한 것처럼 “영의 생각은 생명이오.” 그런 신령한 생각들이 계속 솟아나오니까 우리의 영혼에 끊임없이 힘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이 우리의 영혼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삶 전체를 쭉 스며들어서 내려갑니다.
오늘 오후에도 제가 그런 묵상을 잠깐 했습니다. 그렇게 좋은데 하루에 20번만이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나는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정말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나를 구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큰 사랑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드리면 오늘도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루에 20번씩만 드려도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실천이 잘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후에 제가 묵상을 잠깐 했습니다. 우리 안에 그렇게 살기 싫은 것입니다. 하기 싫은 경향성이 무엇인가 하면 그게 결국은 죄고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듣고 있는 설교의 주제와 관련시켜서 이야기를 하자면 육신의 생각입니다. 아직 마음에 은혜의 샘이 그렇게 깊고 견고하게 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은혜로운 생각이 안 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조금 나고 육신적인 생각들이 막 솟아나서 우리의 영혼을 풍성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샘이 굉장히 크게 터져서 막 솟아질 때는 생각이 되는 대로 생각을 해도 비교적 안전합니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좀 지으십시오. 좀 이렇게 온 마음으로 표현을 해야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항상 그렇게 영적인 생각에 샘, 은혜의 샘이 크고 육적 생각, 즉 육신적인 생각에서 솟아나오는 부패한 샘이 매우 작으면 대체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생각을 해도 비교적 신령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데 그런데 사실 그럴 때가 드물고 오히려 이쪽이 훨씬 크고 이쪽이 작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생각이 되는 대로 생각을 하면 그러면 되는 게 맨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막 이렇게,
어떤 자매가 자기네 학교를 다니는 classmate 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데 몇 시간째 창문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가웃뚱 거리면서 뭔가 고민에 잠기고 뭔가 궁금하게 하고 그래서 가을에 명상에 잠겼나. 그래서 뭐 너 고민이 있니? 무슨 생각을 하니 그렇게 하니까 하는 말이 이해할 수 없어, 심오한 것인 줄 알고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그러니까 최진실이는 왜 이혼했을까? 여러분은 보고 웃지만 예수 믿는 사람도 대부분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루이스 베일리 라고 하는 17세기의 청교도가 자기의 저명한 책 '더 프렉티스 오버 파이어티'라고 하는 '경건의 실천'이라고 하는 그 책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집회를 하고 오면서도 비행기에서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그야말로 정말 내가 짐승이구나. 여러분들은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가 짐승이라고 그러는데 '짐승이 동물들을 가르쳤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아침에 제일먼저 일어나서 딱 생각을 할 때 급한 용무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먼저 눈을 뜰 때 뭘 생각하는가 하면 '죽은 후에 이렇게 눈을 뜨면 천국에서 아침을 맞이하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을 입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오늘도 이 성도의 거룩한 행실로 옷을 입듯이 부끄러움을 가리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쭉 나오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하지만 그런 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그 영적으로 탁월한 인물도 하루에 일어나서 첫 번째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 생각이 하루를 지배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은혜의 샘이 클 때는 생각이 되는 대로 생각을 해도 비교적 안전하지만 반대일 경우에는 생각이 되는 대로 생각을 하면 그러면 결국은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혼에는 깊은 어두움이 들어오게 되고 그리고 죄에 속임에 의해서 이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제 어제 뚜껑을 열다가 말았습니다만 그런데 이제 생각을 속이는 죄의 간교한 역사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그 사람의 생각을 지배합니다. 그 생각 속에 파고들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이런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이 생각과 그리고 총명은 어떤 관계에 있나? 들어보십시오.
성경은 영혼을 이야기할 때 세 가지 작용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생각, 두 번째가 총명이고,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과 총명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면 이 총명은 생각에 많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뜻인가 하면 생각은 이렇게 많은 것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데 그것들을 통해서 받아들인 많은 생각들을 사물을 판단하는데 적용할 때 그때 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부패하면 총명도 반듯이 흐려지게 됩니다. 생각이 신령하고 순전하면 판단도 아주 명료하게 됩니다. 어름과 같은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성인이 이런 것들은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들이 결합되어서 나타나는 지적인 활동입니다. 그것은 그렇다고 치고 그러니까 죄는 그래서 죄가 들어와서 결국은 생각만 망가트리면 그 다음이 총명은 단숨에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가면서 이것은 죄라고 판단하는 사람이 너무 드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갈 때는 이미 생각이 부패해지면서 생각이 죄 가운데로 들어갔기 때문에 생각이 부패해져감으로 총명도 이미 흐려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판단을 내린 것은 총명인데 총명이 함께 흐려졌기 때문에 자기기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가면서 내가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전혀 그런 일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죄의 역사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든 원리들을 가지고 그리고 아주 구체적인 계교를 가지고 영혼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공격하는 죄의 구체적인 계교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생각을 공격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공격하니까 결국은 성도가 참된 생각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생각의 틀을 복음에서 빌어 와야지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할 때 그때에 대변혁이 우리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서 그래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새 생명의 원리가 심어지고 이러지만 동시에 이것이 우리의 정신적인 세계까지 모두 포함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생각이 180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생관이 바뀌고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고 세상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안 달라지면 이것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달라지 게 됩니다. 그때에 생각이 새로운 생각의 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풍성하고 분명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복음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잘 가르쳐주면 그럼 이 생각의 틀이 아주 구체적으로 놀랍게 세워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기본적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구나. 나는 죄인이구나. 우리 주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구나. 내가 거듭났구나.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구나. 이제는 순종하며 살아야지 되겠구나. 죽은 다음에는 하늘나라에 가는구나. 이런 기본적인 것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 것들을 잘 가르쳐주지 못하면 객관적인 어둠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우적거리면서 왜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려고 그러는데 믿는 게 이렇게 힘이 들고 왜 이렇게 제 자리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이러는지를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떻든지 간에 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생각은 복음에 대한 교리들에 의해서 생각이 정돈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리된 수준과 정돈은 각각 다르지만 생각은 그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생각이 놀랍게 변합니다. 미끄러졌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으신 것 같아. 그러면 그것은 배교지 생각의 이탈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알고 있는 틀을 부셔버리도록 죄가 우리를 그렇게 유혹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네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그러는데 순 거짓말이야. 너의 죄는 예수님이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야. 이렇게 얘기하면 우리가 아멘 그러겠는가. 안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렇게 말하면 솔깃해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네 죄를 위해서 죽으셨으니까 이제는 그렇게 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조금 널널하게 살아도 괜찮아. 그러면 그 틀 안에서 약간 변형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수법이 죄가 맨 처음에 이 세상에 들어오기 위해서 하와의 생각을 공격했던 것과 너무 꼭 같은 것입니다.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뱀이 유혹을 합니다. 변형시켜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그런 식으로 죄가 공격을 합니다. 그중에 가장 무섭고 가장 큰 것이 어제 말하다가 중간에 끝난 구원의 은혜를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제 파고들어옵니다. 이것은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그가 무엇을 하며 살든지 간에 자기와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구원해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받은 이 구원은 매우 특별한 것이다. 그런 감격이 사라지면 베드 크리스천입니다. 나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그리고 그가 도덕적인 삶을 살고 여러 가지 신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죠셉 벨라민이라고 하는 18세기의 청교도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의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의무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 사랑에 기초하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단지 행위일 뿐이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더 실감나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한 사람이 일할 때 열심히 일할 때 그는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이 일할 때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사랑의 기초가 없이 행한 많은 의무와 도덕적 행위들, 이 모든 것들이 자기의 기억 속에는 하나님을 섬긴 것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사실 하나님은 그런 섬김을 받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도 마지막 날에 거짓 선지자들이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진실 되게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주시는 것을 내가 경험할 수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을 내가 경험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요한 1서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사 신자의 성화의 생활 속에서도 이런 사랑의 선도권은 항상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경험이 없이 혼자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그런 경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 하고 이야기할 때 원천적 사랑이 무엇인가 하면 아까 인용한 성경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그게 원천적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크고 작은 하나님의 사랑에 경험은 그 원천적 사랑에서 비롯된 지유적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이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를 어려움 속에서 매일매일 건져주시고 보호하시는 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데 우리를 그 죄의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별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그런 경험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 원천적 사랑이 마르고 나면 지유적 사랑의 경험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굉장히 많은 신자들이 속습니다. 그 속는 원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지금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이유는 두 가지 정도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이 너무 자아 중심적입니다.
아이들은 조금만 잘해주면 그냥 파고듭니다. 제 방에는 이만한 깡통에 사탕이 항상 가득 들어있습니다. 아마 내 사탕을 안 얻어먹은 애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목양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데 비서실에 애들이 기웃거리면 이리로 오라고 해서 하나씩 나누어줍니다. 인사시키고 그리고 보냅니다. 그렇게 몇 번만 하면 이 녀석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저 멀리서 나 뛰어가서 목사님에게 인사해야지 그리고 막 뛰어옵니다. 그리고 끌어안고 뽀뽀를 합니다. 그리고 귀에다 나 사탕 먹고 싶은데, 그럼 또 줍니다. 그러다가 한 몇 달 못 만납니다. 그럼 마당에서 만나서 내가 손을 흔들어도 그렇게 냉정할 수가 없습니다. 기가 막힌 비유입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모든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이 너무 자아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그 애들도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이 너무 자아중심적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그 감격이 한나절도 안 갑니다. 더 하고 싶지만 그 정도에 끝내겠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자체를 전인적으로 보지 않고 감정적 느낌의 차원에서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비교적 가려서 쓰는 편이지만 외국사람들은 굉장히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TV같은 곳에 나와서 팝송가수나 연애인들을 보면서 I love him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랑이지만 결혼식 할 때 당신은 남편이 될 이 사람을 사랑합니까? 할 때 Yes, I love him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결혼식장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그 다음에 지나가다가 기자가 물어보니까 저 팝송 가수 어떻게 생각합니까? I love him 이야기하는 것이 똑같이 이야기하는 Love지만 틀립니다. 후자는 괜찮다. 그 사람이 노래하는 것 괜찮다. 예쁘다. 그럼 그냥 Love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 개념을 길거리에서 인터뷰를 하는 그 개념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들어와야지 되겠습니까?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남편과 아내로 받아들일 때 고백할 때 그 사랑의 개념을 가지고 들어와야지 되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사랑에 대한 개념이 경박하기 때문에 자신이 충분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방식 자체가 이미 자기중심적인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랑에 대한 확인이 그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삶의 발자취를 돌이키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해야지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자기중심적으로 해석을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면 그런 사랑을 느꼈을 때 하나님께 뭔가 그 사랑에 대해서 반응을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굉장히 감정적입니다. 느낌적이고 느낌에 국한된 감정적이고 헌신을 해도 그 헌신이 고린도서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마게도니아가 하나님 앞에 넘치는 물질을 드렸을 때 어떻게 했는가 하면 자신을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자신들의 소유를 주님 앞에 드려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렸다고 그러는데 그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 사람은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도 다분히 동정적인 사랑을 표시합니다. 그러니까 물질이나 어떤 것들을 조금 하나님 앞에 드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왜 이기적인 자아 중심적 사랑이니까. 너무 곁가지로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이 정도에서 끝내겠습니다.
결국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가 하면 우리가 받은 이 구원, 우리를 구속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 구원의 은혜는 일평생을 살면서 신자들이 단 하루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일상적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그 원천적 사랑을 충분히 느끼고 그리고 그 사랑에 기초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 입장에서 보더라도 원천적 사랑입니다. 신자의 가슴속에 그 하나님이 자기를 구속해주신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가 넘쳐서 ‘이 구원을 매우 특별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이 원천적 사랑이 자신의 모든 섬김, 모든 의무, 모든 생활 속에 배어들어갑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힘으로 내가 무릎을 꿇고 성도들의 발을 씻길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서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종노릇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천적 사랑이 마르면 그런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날려버릴 때도 제일먼저 죄가 공격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생각을 먼저 공격합니다. ‘내게 임한 이 구원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다. 봐라. 이렇게 다 많은 사람들이 다 구원받았지 않니. 뭐 그렇게 대단한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을 죄가 계속 넣어주는 것입니다. 생각을 그렇게 혼돈 시키는데 그런데도 이 안에서 계속해서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있고 그 은혜에 대한 뜨거운 감격이 있으면 그런 감격이 일어나면 그러면 생각을 속이려던 죄의 공격이 무참하게 파괴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생각이 보호되는 것입니다. 왜 죄가 아무리 우리를 그렇게 설득하려고 해도 지금 내가 특별한 감격이 느껴지는데 이것을 어떻게 부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죄가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에 깊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들을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속이는 것은 사실상 죄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게 구속의 은혜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저 감사하지만 이렇게 얘기하게 되는 것은 은혜가 떨어졌을 때입니다. 죄가 생각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회복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를 그 깊고 더러운 그 죄의 수렁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정말 새롭게 해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 구속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이 생각을 공격하는 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음이 주는 자유를 자기마음대로 확대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자의적으로 확대해석 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복음은 우리에게 많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을 이야기하면서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이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네가 죄인이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이것을 지워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정사와 권세와 같은 이 마귀의 세력 안에서 힘없이 눌려 살던 모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그 거듭남과 함께 보혈의 능력으로 거기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단지 지나간 때에 지은 많은 죄에 대해서만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덧입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계속 존재하시면서 그래서 우리를 이제껏 까지 지배하던 죄의 원리들을 타파하고 그리고 승리하면서 살수 있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이 모두 이제 새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 언약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 언약을 통해서 이런 것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언약은 첫째로 우리에게 어떤 큰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사죄의 은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커다란 죄도 능히 이길 수 있는 죄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은혜의 공급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아무리 큰 죄도 용서해주시고 또 그 신자를 공급하는 매우 커다란 죄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죄를 사랑하고 그것을 붙들고 사는 사람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거나 잘못되어 있거나 희미합니다.
그러니까 자유를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의 과거의죄, 현재의 죄는 물론이고 미래의 우리가 지을 모든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단번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를 죄를 용서해주셨다.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받은 신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위에 있었던 죄가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입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죄책, 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그 다음에 부패성, 이 두 개를 함께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용서가 됩니다. 칭의를 통하여서, 그러나 이 부패한 본성은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죄의 원리들을 다 해체하시고 그래서 생명의 원리를 심으셨지만 죄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 속에서 번성해서 우리 안에서 지배력을 다시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가 들어오는 가하면 신자에게 있어서 순종의 의무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의 언약은 우리에게 죄도 용서받게 해주시고 어떤 죄도 그것은 물론 예수 믿기 전에 지은 죄건, 믿은 다음에 지은 죄건 그것은 시기와 상관이 없이 어떤 큰 죄든지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 은혜 언약 안에서 예전에도 도우셨고 또 크고 작은 많은 죄들을 신자가 경험하게 될 텐데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충분한 공급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상태까지 하나님께서 모두 보증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 무엇이 들어오는가 하면 신자의 순종의 책임이라는 것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 자유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는 최대한 확대해서 해석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순종을 해야 한다든지 이런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한다든지 이런 것까지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자유를 해석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죄의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게 이 복음이 주는 자유를 확대해석하는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이 죄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분투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개념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면서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상당부분이 도덕적인 양심에 걸리는 부당이나 혹은 죄를 지은 다음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지 신자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뿌리치면서 살아야지 된다는 것은 성화에 대한 갈망으로 이렇게 총체적으로 이어지는 갈망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상당히 너그러운 생각을 갖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는 내가 죄를 지어도 이렇게 자유를 확대해석해서 그래서 ‘내가 이 죄를 짓는 것이 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유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멋대로 살아갑니다. 신자로서의 이 외면적인 의무, 교회를 출석하고 십일조 헌금을 하고 그 다음에 기본적으로 하는 일들은 해나가지만 실제적으로 자기 자신을 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지 못하게 하는 죄에 대해서 분투하고 투쟁하는 그런 삶을 안 삽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죄가 생각을 파고 들어와서 그래서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죄가 구체적으로 신자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신이 굉장히 많은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신자의 의무를 말하고 거룩한 삶을 위한 신자의 분투한 책임을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율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적이라고 하는 것이 복음을 폐하는 율법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담을 주고 자신에게 뭔가 힘든 책임을 안겨주는 모든 것들을 율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신자의 의무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자유롭게 살아도 저절로 놀라운 신자의 삶을 살수 있다고 한다면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이렇게 순종하라. 이것은 하지 말라.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저렇게 살아라. 그렇게 우리에게 지시했을 리가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명령했을 리도 없습니다. 이런 모든 생각들이 다 죄가 그 사람의 생각을 속이는 구체적인 계교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죄에 대해서 찬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사도가 그것을 이야기했을 때 사실을 뭘 얘기하고 싶은가 하면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 더욱 우리들이 철저하게 우리의 모든 구원이 우리의 힘으로 온 것이 아니요, 주님의 은혜로 온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자신이 모두 주님의 것인 줄 알고 그리고 그분께 철저히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청지기처럼 살아야지 된다. 그런 개념으로 은혜에 의한 구원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거꾸로 해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쓸모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직 은혜로 살뿐이다. 요즘도 미국에 이야기하는 은혜주의자들이 은혜운동들을 펼칩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문제도 많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놀라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인간의 행위를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행위를 가지고 은혜를 대신하는 구원의 수단으로 행위를 말하려고 할 때는 그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구원받은 다음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 그렇게 말합니다. 나의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난 것이라. 그런데 예전에는 어떻습니까? 자기는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그 다음에 베냐민의 지파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는 것 이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겼습니다. 왜 그것에 의해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나중에 뭐라고 그렇게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의를 발견하고 그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다음에는 이것을 모두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은혜 말고 자신의 행위를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니까 배설물과 같이 여겨야지 되지만 그렇게 은혜로 구원받은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살 때는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이 삶과 행위가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어떤 말씀이 나오는가 하면 우리의 행위는 히브리어 원어에 의하면 “넝마 같고”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의 행위는 걸레 같고” 라는 그런 고백을 보면서 사람들이 많이 오해를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야, 이 행위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뿐이구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문맥이 다릅니다. 그것은 선지자가 지금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그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런 우상숭배에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절기를 지키고 의무를 행하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는 다 넝마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미 벌써 더러운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 심령의 정결함을 버리고 우상을 사랑하고 거기에 간음하듯이 섬기는 사람들이 한쪽으로는 우상을 섬기던 그 몸을 가지고 한쪽으로 와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보고자 주님을 섬기고 율법을 이야기하고 하는데 하나님이 볼 때는 전부다 그들의 의인은 넝마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를 통해서 도달한 의인은 넝마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최고의 아름다운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온전한 성품과 행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구원받은 거룩한 무리들이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하얀 세마포를 입었는데 이것은 성도의 의로운 거룩한 행실입니다. 그래서 사도도 “거룩한 행실로 옷 입고” 그랬습니다. 무슨 뜻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은 기분 내키는 대로 살고 그리고 아,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사람이야. 다 하나님의 은혜지, 나는 나의 행위나 행동, 이런 것들에 나는 관심이 없어, 나는 하나님의 그 은혜로만 살 뿐이야. 이러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벌거벗고 다니는 인간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신자에게 있어서 은혜인가, 행위인가 문제가 되는가 하면 그게 아닙니다.
잘 들으십시오. 신자가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면서 사는 것은 곧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사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가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급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없으면 그는 진실한 성도일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실한 목마름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의무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순종하려고 하는 삶에 대한 철저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게 됩니다.
우리가 행위가 있기는커녕 하나님 앞에 죄에 미끄러져서 깊은 타락의 사면에 빠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각성이 되어서 자기 삶을 보니까 너무 비참한 죄에 웅덩이에 빠져서 죽을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는 이제껏 하나님을 위해서 훌륭한 삶을 산 게 아닙니다. 방탕하게 살다가 죄에 미끄러졌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것을 나중에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다시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힘으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할 때 그 사람의 속에 있는 소원은 무엇입니까? 은혜주시면 다시 타락하고 싶다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이제 그렇게 나를 이 어두움 속에서 이 깊은 죄악의 수렁 속에서 건져주시기만 하면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싶습니다. 그런 구체적인 삶의 행위에 관한 거룩한 삶과 행위에 관한 그리움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왜 그 상태에서는 자기가 그런 삶을 살고 싶어도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죄 아래서 자기가 정죄되었다는 느낌을,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고자 자신의 실제적인 삶에서 분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간절한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이지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겠습니까? 구하게 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수요예배 시간에 어느 젊은이가 10시 10분이었습니다. 설교를 오래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해택을 받습니다, 그때 왔으면 더 고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10시 반에 끝나고 그랬으니까, 나를 붙들고 상담을 했습니다. 땀이 다 흐르는데 무슨 상담인가. 누구냐고 그러니까 총신대학원 졸업반 학생이라고 뭘 상담하겠는가 하니까 두 가지만 여쭈어보겠다고 해서 하라고 하니까 설교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지 되나. 그것을 왜 나에게 물어보나.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내가 설교를 잘 했으면 지하실 교회에 이러고 있겠는가. 오대양육대주를 돌아다니지, 다음 질문, 기도를 열렬히 하고 싶은데 안 된다고, 어떻게 하면 기도를 열렬히 할 수 있겠는가. 해서 내가 그랬습니다. 열렬히 삽니까?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심히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열렬히 삽니까? 아니 은혜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하지 갑옷입고 칼 차고 나이트클럽에 가는 사람을 봤습니까? 그런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전쟁터에 나간 사람을 못 본 것과 똑같습니다. 아니 구체적인 의무를 행하고 죄와 싸우면서 살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은혜가 뭐가 필요합니까? 은혜를 주면 부담스럽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죄에 깊이 빠지게 되면 은혜 받은 사람하고 만나는 것도 싫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면 좀 성령 충만한 사람하고 만나면 해결이 될 텐데 꼭 삼지 사방 찾아내서 저하고 똑같은 사람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도 유유상종하는 것입니다. 굴비 꿰듯이 쭉 매달립니다. 그게 뭡니까?
그러니까 은혜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순종하려고 하는데 내가 너무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 가운데서 아무렇게나 살고 방탕하게 살 때 내가 너무나 죄를 짓기에는 힘이 들다 하는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말해보십시오. 하나님, 내가 불순종하기에는 내가 너무 약합니다. 그래서 불순종하기에 너무 힘이 약한 적이 있습니까? 부지런하게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채찍질해야지만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내버려두면 됩니다. 거기 무슨 은혜가 필요합니까? 그러니까 은혜를 믿는다고 하는 미명하에 죄에 대해서 찬동하는 것은 사실은 은혜를 믿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오늘도 박용규 교수님이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처럼 진짜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한번 평양대 부흥에 대해서 한 50페이지 논문을 쓰면서 저도 이렇게 많은 자료들을 보고 그랬는데 거기에 보면 그 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은 진짜 헌신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와는 비할 때 없는 그런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정말 탁월한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철저하게 헌신하면서 살고 하나님 앞에서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았다고 칩시다. 세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할 테니까 누가 가장 복음적이고 생각이 죄에 의해서 속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인지 판별을 해보십시오. 첫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일 저런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정말 나는 일생을 살면서 주님을 참 많이 섬겼습니다.
지방에 집회를 내려갔는데 어느 장로님이 저에게 저녁을 사면서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제가 이런 일도 했고 저런 일도 했고 하면서 명함을 내놓는데 이 직함만 한 5-6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결론이 나만큼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드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약간 맛이 갔구나. 그렇게 느끼고 그날 저녁에 하필이면 설교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그 은혜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를 설교했는데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나가면서 나하고 악수를 하고 인사를 하는데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분이 한분이 있었는데 그 일을 많이 하는 그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만나서 완전히 태도가 180도로 바뀌면서 겸손해졌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면서 목사님, 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하잘 것 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계속 깨달으십시오.
그런데 그런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많이 하고 정말 나만큼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 없다. 이 사람은 두 번째 나쁜 사람입니다. 더 나쁜 사람은 계속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듯이 죄를 지으면서 그러면서 저런 행위는 필요 없어. 하나님의 은혜야. 하나님의 은혜하고 인간의 행실하고 잽이 되겠어. 은혜가 훨씬 놀랍지. 이러고 사는 사람은 더 나쁜 놈입니다. 그러면 정말 생각이 죄에 의해서 속임을 당하지 않은 건강한 복음적인 신자는 누구일까?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의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신감이 없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박력이 없어지는 것을 아십니까? 예전에 은혜를 못 받았을 때는 그거 합시다. 그거 해, 안 될게 뭐 있어. 한번 해봐. 하자, 하자. 그러는데 그러다가 은혜를 받으면 기도해봅시다. 자기 앞에 있는 많은 일들 중에 작은 일 하나도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 내 힘으로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그래서 제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죄를 지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죄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런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열심히 섬깁니다. 그래서 진짜 유능하고 탁월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땀을 흘리면서, 요즘 토요일마다 교구에서 나와서 청소를 합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설교를 들은 죄로 말이지 나와서, 이름까지 써냈습니다. 은혜 받을 때 생각은 하나님 생각, 그 다음날 생각은 사람의 생각, 삼일 째 생각은 마귀의 생각이라고 그랬습니다. 땀이 짝 흐르게 합니다.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보고 그렇게 말하는데 당신 정말 유능하다.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어. 뭐 특별한 비법이 있어. 그러면 당신만의 노하우를 가르쳐줘, 그럴 때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사람이 진짜 성화의 도상에 서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때에 아멘하고 그래야지 은혜가 됩니다. 다시 할게요. 바로 이 사람이 진짜 성화의 도상에 서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멘!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럼 이제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빙자해서 죄에 찬동하는 이것은 새빨간 가짓말입니다. 그것은 벌써 자기 자신이 은혜를 확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사람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라고 사도가 정죄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속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네 번째는 신앙의 기준을 세상의 풍조에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신앙의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렇게 이렇게 살고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항상 거기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때 정면적으로 그 말씀이 틀렸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목사님, 그 말씀은 맞지만 현실적으로 이게 첫 번째 자주 등장하는 숙어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래서 한순간에 목사를 굉장히 비현실적인 만들어버립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고 성경이나 파는 꽁생원으로 몰아버립니다. 또 많이 쓰는 게 요즘은, 어떤 목사님이 남의 교회에 가서 실컷 설교하고 축도를 하는데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이렇게 축도를 해야지 되는데 “요즘은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그랬더니 끝나고 나서 성도가 목사님, 예전에는 축도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러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텍스트가 있습니다. 성경의 본문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앞에 콘을 붙이면 칸텍스트입니다. 현대의 정황입니다. 어떤 것이 더 우월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텍스트가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 텍스트를 가지고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거꾸로 합니다. 그 시대를 가지고 성경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시대를 따라서 굽이치는 것입니다. 막 그러면서 이 신앙의 기준을 세상의 풍조에다가 두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정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우리를 구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확신하고 있다면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넓은 길로 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좁은 길이 옳다면 나는 그 길로 간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결심문 속에서 제일 먼저 고백한 것이 그것입니다. 나와 내 이웃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옳지 않은데 그 일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옳지 않으면 나는 안 한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안 한다고 할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한다면 나는 한다. 그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성도의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흩트려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의 기준 자체를 이 성경에다가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풍조에다가 맞추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가. 그것도 면밀하게 조사를 해서 퍼센트를 내서 거기에 뭐 맞추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편한대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광신자 취급을 하고 이상한 복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취급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제 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미 벌써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정립된 신앙이 아니라 세상의 풍조에 섞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어느 시대에 있든지 간에 그 그리스도인이 그 시대를 본받는 것은 너무 쉬운 것입니다. 그러니 그 시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오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 이게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세상 풍조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들이 흔히 교회가 이 세상을 닮아가야지만 선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지만 심리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보고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러니까 사람들이 쳐다본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도 있거니와 그랬으면 사람들이 쳐다봤겠습니까? 다 있는 것인데, 그런데 한 푼 보태달라고 손 내미는 사람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러면 도대체 뭐가 있다는 것인가. 사람들이 쳐다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리스도를 보여준 것입니다.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바보같이 교회가 이 세상을 많이 쫓아가고 이 세상에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교회에 다 있다고 이야기해야지만 사람들이 교회를 주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넌센스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교회와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와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제가 예수 믿기 전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게 예수를 믿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고 실망하는 장면이 어떤 장면인가 하면 우리하고 너무 틀리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에 속한 사람 같지 않아. 너무 달라. 그래서 예수 믿을 마음이 안 생겨. 이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언제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실망하는가 하면 어느 날 봤는데 똑같습니다. 탈세하고 사기치고 거짓말하고 너무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 예수를 믿을 맛이 딱 떨어집니다. 그러면서 너희들과 내가 다른 게 무엇인가. 예수 믿는 사람은 바보같이 우리가 모두 똑같아야지 서로 교통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충분히 예수 믿는 사람답게 다른 사람이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홍해를 말리고 여리고 성을 무너트리면서 막 진군을 했습니다. 그때에 그 가나안에 살던 많은 사람들 속에 여호와가 누군가 하는 그 신앙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라합과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는가 하며 이 백성들은 이제껏 우리들이 본 모든 백성과 다른 종자들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껏 이 땅에 살았지만 이런 민족은 본 적이 없다. 왜 그랬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민족이다. 그래서 애굽을 초토화시키고 홍해를 가르고 그리고 광야를 지나서 신원과 바산의 왕들을 파멸시키고 그리고 마지막에 홍해를 건넌 그들이 또한 요단강을 말리면서 건너고 그리고 여리고성을 무너트렸습니다. 도대체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알고 보니까 그들에게는 자신들에게는 없는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라고 하는 신의 보호아래 들어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게 많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속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들어오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풍조에 맞추면서 사는 것은 이것은 절대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성경을 면밀히 상고하고 성경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성경이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매일 읽고 그 성경 속에서 은혜를 받고 주일날 와서 설교를 들으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요즘 세상에 그러면서 신앙의 기준을 이 세상의 풍조에 맞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인간풍조는 나날이 갈리워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정녕 내 꿈은 참되리라
우리 앞에 있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세상에 환영을 받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세상풍조와 야합했던 사람들 중에 신령한 삶을 누렸던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들은 늘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분투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이 세상에 풍조보다도 위에 놓고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심령을 바쳤습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했는데 만약에 태어난 그 시대마다 모든 신자들이 그 세상의 풍조에 세상의 기준을 맞추었더라면 도대체 믿음의 투쟁이 어디 존재하겠으며 목숨을 다해서 주님을 위해 싸워야 할 일들이 어디에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면서 생각이 죄에 완전히 속은 가운데 어리석게 이 세상 풍조에 기준을 맞추고 살아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만나게 됩니다.
다섯 번째는 포괄적인 신앙의 고백으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순종을 대신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의무가 무엇입니까? 율법 중에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마음대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의미심장합니다. 옛 언약을 받아들이는 중보자였던 모세를 통해서 주신 그 말씀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똑같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질적으로 틀리지만 그 언약에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똑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그렇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랑이 토대가 되어서 그것이 원천적인 순종의 토대가 되어서 거기서 지배적인 순종들이 개개의 구체적인 의무에서 모두 구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죄에 의해서 생각이 완전히 속고 나면 그 다음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신자는 확인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게 한번도 그런 때가 없다면 그럼 거듭난 신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그렇게 살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은혜를 받는다든지 생각의 변화가 오게 되면 마음속에서 감동이 일어나고 그리고 정말 자기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고 하는 소원이 이 속에서 일어납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어떤 때는 심지어는 짧은 순간이지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헛된 것 같고 그리고 정말 자기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생각이 나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 온전한 신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눈물이 뚝뚝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은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는 일으킵니다. 이 죄가 이것을 사용해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을 넣어주는가 하면 너는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다. 주위를 돌아봐도 너처럼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가 정말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정말 사랑하고 싶습니다. 이러는 사람이 많은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개개의 삶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야 할 많은 의무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다 순종하며 살지 못하는 것을 그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요? 피폐해집니다. 왜 피폐해질까요? 아니 구원받은 신자가 되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가끔 진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인간 같고 자기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정말 감사하고 그리고 정말 자기 마음속에서 주님만을 사랑하고 싶다고 하는 소원이 일어나는 것은 이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하나님 앞에 건강한 신자라면 그런 것들이 몇 달에 한번씩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있어야지 된다고? 매일매일,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런 고백이 있어야지만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집니다. 그래서 예수의 생명도 자기에게 나타나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교회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에 한번씩 그런 경험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진실하게 정말 주님만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이런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개별적인 의무에서 하나님께 좀 순종하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보시고 이것을 모두 문질러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죄의 속임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신 놀라운 사랑, 십자가에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이 원천적인 사랑이 개개의 의무에 높이 흘러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 청년이 하나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 나중에 고백하는 게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인데 대학에서 자연과학 개론이 계속 F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가 했더니 자기가 예전에는 교수가 원하는 답을 썼는데 그런데 문제가 나왔는데 천지창조의 기원에 대한 문제가 나왔습니다. 물질의 기원에 대한 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자기가 신앙이 들어가고 나니까 교수는 불신자이니까 당연히 진화론의 답을 요구하는데 자기는 그럴 수가 없어서 신앙이 시키는 대로 썼다고 합니다. 창세기에 이르기를, 그렇게 썼더니 교수가 미친놈의 답안이지 그러니까 그런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속의 사랑을 알고 나니까 그게 개개인의 의무에 흘러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의무를 적용하면서 살려고 하니까 고난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너무 고전적인 예화겠지만 그런 예화를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사모님과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인데 목사님이 설교를 너무 은혜롭게 하시니까 그날 밤에 사모님이 이불을 가지고 강단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왜 그러는가 하니까 나는 여기서 자야지 된다고 왜? 당신이 여기서 설교할 때 그 사람과 내려와서 안방에 있을 때의 사람이 너무 다르다고, 그러니까 여기를 그냥 우리 안방 겸 강대상으로 하자고. 이것에 대해서 칼빈이 아주 명료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약에 설교자가 자기가 전파하고자 하는 그 말씀을 가지고 자기가 그 뜻대로 살아야지 되겠다고 몸부림을 치지 않으면서 설교단에 올라간다면 목을 분질러버려야지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사지 중에 다리를 분질러도 되는데 목을 분지를까? 다리를 분지르면 말은 할 수 있습니다. 목을 부러트려야지 말을 못합니다. 거룩한 사람이 그렇게 격렬한 표현을 썼습니다. 아주 꼭 그렇게 말합니다. 브레이크 히드 넷크 그랬습니다. 그게 목을 부셔버려야지 된다고, 그러면 칼빈이 설교자는 완벽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그 사람이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자기는 그렇게 설교단에 올라갈 때 항상 기도한다고 그랬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이 성도들, 내 양떼들에게 설교하지만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목자이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이 성도들과 동일한 은혜와 사랑, 용서와 자비가 필요한 한 마리의 어린양이라고 저를 생각해주십시오. 그리고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참으로 진실한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이게 개개의 의무에 그 사랑이 스며들어서 그 사랑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안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고 이렇게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아까 강대상 이야기 나왔는데 그것도 목사만 일방적으로 하면 꿀리니까 그러니까 이제 성도들도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부부가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집에서 잘 못합니다. 가끔 폭력도 쓰고 폭력을 쓰는 것을 나는 제일 싫어합니다. 폭력 쓰면 내가 쫓아가서 혼을 내줄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합니다. 남편이 너무 못합니다. 그런데 둘이서 말씀을 들을 때는 남편이 눈물을 흐릅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우리교회에 가서 살자.
여러분, 개개의 의무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적용되지 않는 삶은 결코 이따금 경험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포괄적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의 교리에 의하면 이런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부패한 상태에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아주 재미있게 됩니다. 들어보십시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생각이 속임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 아까 총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생각이 적용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부패하니까 그것들을 이렇게 적용시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그리고 이 정신이 아주 쇠약하게 살아있으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마음속에서 막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자기에게 적용하면서 살아야지 될까? 이게 막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섬길 때도 예전에 이렇게 섬겼는데 이렇게 섬기면 안 되겠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내가 이렇게 봉사하는데 이러면 안 되고 자세를 바꾸어야지 되겠구나. 예전에 내가 이렇게 불순종하며 살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러면 안 되겠구나. 이런 것들이 자꾸 적용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적용이 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생각이 이 죄에 의해서 속임을 당하니까 그렇게 적용하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의 삶이 망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들려드린 이 항목이 사실은 전혀 회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적용이 되지 못하는 항목입니다. 대게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몇 달에 한번이라도 정말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야지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데, 이런 생각이 아예 들지를 않습니다. 은혜를 그래도 경험했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입니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은혜 체험의 근거로 미래를 안일하게 낙관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큰 영광의 구주 날 사랑하사 그 풍성한 은혜 더 하시리니
큰 면류관 쓰고 늘 찬송할 말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주님이 나를 사랑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내 가는 앞길에 풍성한 은혜를 주실 것이다. 결국은 금 면류관을 쓰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주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좋다 이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미래에 대해서 너무 낙관을 하는 것입니다. 뭐가 사라집니까? 복음적 긴장이 사라집니다. 그럼 복음적 긴장이란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진짜 하나님 앞에 흔들리지 않는 삶이었는데 그 속에 뭐가 있었는가 하면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그 다음에 복음적 긴장이 함께 공전했던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무엇인가 하면 주님이 나를 구워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끝까지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흔들릴 것 같은 복음적 긴장은 그러나 내가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난 다음에 버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양립되는가 하면 이것은 즉각적 구원에 관계된 것이고 이것은 성화를 통한 점진적 구원에 관계된 것입니다. 이 두개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구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화에 대한 내가 성화의 길에서 잘못하다가는 완전히 불순종하고 미끄러져서 그래서 이 성화의 도상에서 전혀 성화되지 못한 채 버려진 것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겠다. 혹은 내가 미끄러져서 배교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긴장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즉각적 구원이라고 하는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건강한 확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구속하셨고 이 놀라운 구원은 결코 취소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루어야 할 성화에 구원이 있는데 내가 사는 동안에 무지와 영혼의 어두움, 죄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지도 모르고 그러면 내가 완전히 미끄러져서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신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긴장이 그 사람에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는가 하면 미래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면서도 그 확신 때문에 오늘의 삶을 복음적인 긴장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뭐 굉장한 파멸로 몰고 가는 그런 긴장이 아니라 잘 살아야지 되겠다고 하는 복음적인 거룩한 긴장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은 갈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 혼자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어려우니까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야지 되겠다고 하는 사모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엔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도의 학교에서 라고 하는 그 책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구원받는 즉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기도의 학교에는 선생님이 있고 커류클렘이 있다고 선생님은 주님이시고 커류클렘은 기쁨과 슬픔, 고난과 역경, 그 다음에 위로와 사랑 이런 많은 인생의 엄청난 폭풍과 같은 이 변화에 자기의 백성들을 다 노출시켜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위로도 받게 하시지만 그 깊은 슬픔도 맛보게 하시고 거기에서 큰 환란을 만나게도 하시지만 거기서 놀랍게 승리하는 경험도 하게 하시고 거기서 커다란 성취도 맛보게도 하지만 거기에서 깊은 좌절을 경험하게도 하시는 이 모든 것들을 커류클럼으로 사용하셔서 그 사람에게 가르치시는데 그것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 학교의 특징 세 번째는 그 기도학교의 훈련의 과정이 엄청나게 고되고 죽는 것과 함께 그 학교를 졸업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 고단한 기도의 수업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특권이 따르는데 예수님이 항상 옆에 계시다. 할렐루야!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미래에 대해서 나의 구원은 빼앗을 자가 없다. 주께서 나는 택한 백성이다. 확신을 갖고 그러면서 거룩한 긴장을 가지고 걸어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하셔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고난과 슬픔, 기쁨과 성취, 좌절과 아픔 이 모든 것을 노출합니다. 거기서 흘러가는 강을 따라서 조용히 떠내려가는 유람선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 뒤웅치는 파도를 헤치고 지나가는 항해입니다. 그런 것을 많이 만나게 하십니다.
그때에 미래에 강력한 최종적 구원에 대한 확신과 함께 매 순간의 삶에 있어서 내 힘으로 부족하고 하나님이 붙들어주셔야지 된다고 하는 긴장감이 없으면 이것은 망가진 신자입니다. 이것은 고장 난 신자입니다. 배드 크리스천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매일 순종하며 살아갈 리가 있습니까? 또 그렇게 순종하고자 몸부림치지 않는 사람이 은혜가 필요하겠습니까?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마음을 다 바쳐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지식의 밝은 빛을 찾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겠습니까? 그 말씀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것과 더불어서 싸우겠습니까? 그러면 최종적으로 마지막에 잘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는 것도 알고 보면 오늘 자기가 적당히 살기 위한 핑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화의 긴장이 없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의 영향입니다. 죄가 생각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때에 아주 흔하게 사용하는 것은 과거의 은혜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금년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왕년을 이야기를 합니다. 옛날에 받은 은혜, 옛날에 받은 신앙의 경험 막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매일 우리 그렇게 말합니다. 첫사랑의 때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그러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첫사랑이 생각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좀 그러면 안 됩니까? 이럴 때 아멘 해야지 분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첫사랑이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로 그렇게, 새로운 첫사랑에 신기원을 이룩한 온갖 용어가 나옵니다. 첫사랑을 갱신한 그런 의미에서 더 큰 의미에서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각자 신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자기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좋습니다. 그래서 찬송도 그렇게 합니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재물 삼겠네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 이상하게 죄인은 이 생각의 기복이 너무 큽니다. 어떤 때는 또 갑자기 그러는 것입니다. 은혜에 멀어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하나도 사랑 안하시나봐.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요즘 나만 미워하셔. 그게 이 죄인들이 죄 가운데 살면서 느끼는 정죄의식입니다. 그것도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생각하면 정죄의식을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갑자기 몇 시간 만에 또 돌변해서 자기 매우 스페셜한 존재라고 합니다.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꿰맞추어보니까 자기가 태어난 것도 그렇고 태어나기 전에 엄마가 보름달을 본 그 태몽도 그렇고 그리고 또 태어나서 그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살아온 것도 그렇고 다 점선을 이어보니까 자기가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신자가 은혜 안에 있거나 혹은 은혜를 받을 때가 되면 그렇게 하나 하나 과거에 대해서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으로 자기를 인도해주셨다고 확인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은혜 아래 있거나 은혜를 받을 때쯤 되면 생각이 그렇게 때문에 ‘나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죄에 의해서 생각이 충분히 속임 당한 사람은 과거에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이렇게 특별하게 내 인생을 인도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결코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꿰어 맞추어져서 그래서 결국은 10년 후에 생각을 해도 쭉 꿰어 맞추어지듯이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그때도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걸어갔는데 거기 무슨 생명이 있겠습니까? 거기서 하나님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기보다는 영적 교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는 결국 이처럼 여기에 나열된 것은 죄가 속이는 무수하게 많은 방법 중에 가장 흔한 것 몇 가지만 들었을 뿐입니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방법으로 복음 교리를 혼잡하게 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오염시키고 그것을 적용시켜서 나타나는 총명이 흐려지게 만들고 그 적용된 것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게 하는 우리 마음을 더럽혀서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생각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몇 해 전에 긴 시간을 두고 마음지킴의 교리에 대해서 공부를 했지만 사실은 이 생각은 마음을 점령하기 위해서 죄가 최초로 여는 첫 번째 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먼저 생각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들을 모두가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빛바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여러분들을 붙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허물어트리려고 하는 이 죄의 간교한 속임들, 이것들과 더불어 분투하고 싸우고 그래서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기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피곤한 신앙생활을 이어갈 것이고 살아온 많은 인생의 날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죄에 휘청거리면서 산 궤적이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깊이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온전한 생각과 그리고 명증한 사고를 가지고 우리의 온 영혼과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이 생각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사로잡혀서 마땅히 생각하지 말아야 할 바를 생각하지 않고 생각해야 할 바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4. 생각을 이탈하게 하는 죄를 파괴하는 길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구체적으로 이 죄가 그렇게 우리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복음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게 만들어서 우리를 신앙의 틀은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죄의 의해서 충분히 속임을 받게 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죄가 생각의 의무를 떠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죄가 어떻게 생각의 의무를 신자들로 하여금 자기 본연의 의무를 떠나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는데 먼저 죄는 일단 우리를 공격할 때에 생각을 제일먼저 공격하고 들어오는데 사실 들어온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안에 이미 내제하는 죄가 어느 순간에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작용을 해서 제일먼저 우리의 생각을 공격하는 것인데 이때에 외부에 있는 어떤 환경이나 동기 같은 것을 사용해서 이렇게 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가 일단 우리의 생각을 공격하게 되면 먼저 자기를 보호한 다음에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모든 전투에 기본적인 수칙입니다. 내가 먼저 살고 난 후에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전쟁의 기본입니다. 죄도 똑같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각과 영혼을 공격하지만 그것과 함께 동일하게 자기 자신을 은혜의 공격으로부터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에 대한 유일한 공격은 하나님의 은혜가 공격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은혜도 우리들이 쉽게 말할 때는 객관적인 은혜와 주관적인 은혜가 있어서 객관적인 은혜는 구원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호의이고 주관적인 은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경험이 우리 안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간단하게 얘기하지만 수련회를 왔으니까 또 교회에서 못 받은 것을 받아가야지만 가서 또 수련회를 갔다가 왔다는 표를 낼 것입니다. 회비생각도 나고 말이지요. 그러면 여러분의 경험을 특별하게 교회에서 한 것은 초등학교 수준이고 고등학교 수준으로 다시 가르쳐주겠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이 은혜라고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속성적인 은혜입니다. 즉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관련된 은혜입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있는 ‘주 너의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누군가에게 거저 베풀고 주기를 좋아하는 그런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은혜의 첫 번째 종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은혜를 이야기할 때 여러 가지를 이야기 하는데 첫 번째 경험은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된 은혜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 그리고 그 구원 자체 이것을 가리켜서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난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으니 그래서 은혜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위해서 준비 되어지는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 독생 하신 하나님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때 이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하나님께서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이 구원적 호의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이 되어 있고 두 번째는 우리의 객관적인 구원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 그리고 은혜로운 구원 행위가 성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적용된 것,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또 은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우리에게 적용되어서 성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난 작용, 우리들이 흔히 요즘 은혜를 받았구나. 네가 은혜가 떨어졌구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자체가 바로 이런 은혜가 우리 안에 살아있는 주관적인 은혜 그것이 바로 세 번째 용례에 해당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조나단 에드워드 같은 사람은 이 은혜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하기를 성경에서 은혜라고 할 때 그 세 번째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적용되어서 나타나는 주관적인 은혜는 모두 성령 자신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 하는 이야기는 에드워드의 이야기에 의하면 성령 안에서 자라가는 이야기와 똑같은 것입니다. 너희가 은혜가 충만한 자가 되어라. 그 이야기는 성령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라 하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가만히 이렇게 살펴보니까 이 기가 막히게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까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우리에게 적용되었을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되어서 우리에게 미치게 된 인격적인 감화, 그리고 이 정서적인 감화, 하나님을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이라고 그랬는데 사실은 그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라고 제가 단서를 붙였습니다. 성령이 아니시고는 그렇게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실제로 영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만들어주시고, 성결을 사모하게 만들고, 진실한 신자가 되게 만들고 하는 이런 것들을 막 이렇게 하실 때 성령과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 나누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날카롭게 이 성경에서 은혜라고 하는 것은 성령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은혜로 충만한 자가 되어라. 그러면 성령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 그 이야기는 곧 성령 안에서 자라가라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베드로 서에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에 “너희가 그리스도를 아는 그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갈지어다.” 라고 할 때 그것은 당연히 성령과 진리 안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의 경륜에 있어서 두 개의 화두,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 이렇게 은혜와 지식으로 연결되어서 흘러오는 것입니다. 수련회에 온 보람을 조금 느끼셨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 다음입니다. 그런 성령, 혹은 성령의 은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역사가 아니면 우리 안에 들어온 죄는 무엇에 의해서도 공격당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죄에 대해서 항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무엇인가 하면 양심입니다. 양심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하나는 네가 한 그 일이 죄라고 우리에게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죄에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사실은 죄는 우리를 공격하는 죄에 대해서 죄가 있는데 그 죄에 대해서 우리의 양심이 이것은 죄다. 이렇게 말해주어도 죄가 그런 양심에 그런 고발에 대해서 전혀 겁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누가 이기고 지는가 하는 문제이지 에를 들자면 총을 들고 아주 최신식 무기를 들고 돌격! 그리고 들어갔는데 들켰습니다. 그런데 다 앉아서 장기를 두고 노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야, 적군이 들어왔다. 그래도 적군이 무섭겠습니까, 안 무섭겠습니까? 장기판을 들고 싸울 수도 없는 것이고 무섭지 않습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정확한 비유입니다.
또 하나는 죄가 죄 앞에서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보고 네가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너는 이제 하나님 앞에 국물도 없다. 그러고 딱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때 죄가 겁을 내겠습니까? 그러니까 양심은 죄에 대해서 강력하게 항거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실제로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 그 죄에서 우리를 건져주지 못합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은 것이 죄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지적해줍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이 죄에 대항하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죄를 이길 힘은 우리에게 공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율법이나 혹은 인간의 양심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심도 잠깐이지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양심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생각의 한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오염이 되어버리면 양심이 무디어집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죄를 지을 때는 두렵고 펑펑 울고 괴롭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지을 때는 아주 익숙해지고 그 다음에는 죄가 도망가도 자기가 쫒아가서 그 죄를 붙듭니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들어오게 되면 이미 죄가 외부에 자극을 받으면서 생각을 타고 죄가 역사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자기 보호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 자기를 보호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은혜가 들어오는 모든 길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와 유혹이라는 커다란 벌판으로 넘어가는데 거기까지 갈 시간이 없지만 우리 안에 있는 영혼과 이 기능으로 하여금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보내주시기로 마련해두신 방법을 타고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내가 그래서 늘 하는 이야기가 단란주점에서 술 먹다가 성령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우연히 있을 법도 한데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교회에서 말씀을 듣다가, 아니면 집안에서 기도하다가, 아니면 함께 모여서 전도하다가, 아니면 함께 모여서 열렬히 기도하다가 기도 모임에서 이렇게 성령이 임하는 것이지 생각도 없이 돌아다니면서 노는데 거기에 불이 떨어져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죄가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모든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통로, 그리고 신령한 영의 작용에 대해서 반감을 갖도록 만들어주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죄가 이 속에서 작용하고 역사하기 시작하면 제일 좋은 것은 한순간에 깊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함으로서 그것을 털어내고 그 죄의 힘을 이기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것을 하지 않고 미적거리면서 내버려두면 그 다음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점점 약해지고 할 수 없게 하는 죄의 힘은 점점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발견하는 그 순간이 가장 퇴치하기가 쉬운 때입니다. 그것을 떨쳐버려야지 되는데 그렇게 못합니다. 그 원인은 죄가 우리 속에 역사를 시작할 때 제일먼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신령한 은혜에 대해서 반감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이 죄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영혼이 충분히 싫증을 느끼는 그런 과정들이 그 이전에 미리 존재한 것입니다.
또 하나 고려해야지 될 것은 그렇게 해서 일단 자기를 보호한 죄는 이제 우리의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우리의 생각을 이렇게 이탈시킴으로 말미암아서 이탈시키고 나면 그 다음에 죄가 들어와서 우리 속에서 이 생각과 마음과 우리의 모든 총명을 흐리면서 막 돌아다녀도 생각이 이미 이탈했습니다. 파수병들이 탈영했습니다. 그러니까 적군이 들어와서 마음대로 돌아다녔는데 감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감시가 안 되어 있으면서도 기본적인 의무는 꼬박꼬박 수행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점잖게 앉아있고 그리고 예배 시간 내내 묵상하고 그리고 가고 그리고 헌금하고 또 교회 봉사도 하고 어떻든지 간에 이 성령의 은혜가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은 쉽게 다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죄에 의해서 침투가 되고 생각이 이탈되어서 죄가 막 돌아다니면서 작용을 일으켜도 그 죄를 이렇게 적발해낼 수 있는 그 능력이 이미 상실된 상태에서는 이제 서서히 그 죄가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돌아다니다가 궁극적으로 공격하고 싶은 것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은, 경비병을 처치하는 것은 성을 얻기 위함이지 경비병 몇 명을 죽이기 위해서 지금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이탈시킨 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진짜 원하는 것은 영혼을 직접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영혼에 죄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맹공격합니다. 영혼을 계속해서 맹공격을 하게 되면 신자는 계속 불순종하며 죄를 짓게 됩니다. 이미 벌써 생각이 이탈되어서 죄가 막 휘젓고 다니는데도 그것을 파악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총명이라는 것은 생각의 빛이 적용되어서 나타난 것이니까 적용할 빛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현저하게 눈에 총기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 또렷하게 판단한 사람이 이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명이 사라집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을 공격하는 것은 이제 쉽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벌써 두 개의 성벽을 다 뚫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속살을 드러냈습니다. 공격을 합니다. 죄가 마음을 공격하면 마음은 딱딱해지기 시작합니다. 찬송을 불러도 눈물이 안 나옵니다. 하품할 때는 눈물이 나는데 찬양할 때는 눈물이 안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냥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딱딱한 바닥에다가 단단한 공을 던지면 탁! 튀어 오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튀어 오르는 것입니다. 아주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뿌려도 그 마음이 길가와 같은 밭이 되어서 훅! 불면 모두 다 날아가 버립니다. 성을 진전이 없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마음이 강퍅해질 때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대해서는 강퍅해지는데 이 세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강퍅해지는 것과는 반대로 아주 부드러운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것들을 뿌리면 그냥 바로 심겨져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생활을 회고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굉장히 중요한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기만 하면 회고해보면 됩니다. 정말 예수님이 소중해보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놀라워 보일 때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나 이런 것들이 별로 없어집니다. 그런데 일단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 강력하게 세상 사랑의 욕구가 막 파고들어옵니다. 그래서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신령한 것에 대해서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이 아주 딱딱한 삶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낸 발자취입니다. 그 딱딱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걸어간 그 인생길이 패역의 길입니다. 이미 생각, 총명 다 불을 껐습니다. 생각은 이탈시켰고 그 다음에 총명은 어둡게 만들었고 마음은 굳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이제 죄가 정말로 죄가 정말로 공격하고 싶은 것은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는 길입니다. 마지막 빗장 마음을 열고나면 영혼의 속살이 드러납니다. 거기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고 영혼이 있습니다. 이게 죄가 생각 속에서 왔다갔다가 할 때는 탁탁 털어내기가 쉽습니다. 마음에 딱 자리를 잡아서 죄에 대한 깊은 사랑이 생길 때는 털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문까지 열고 영혼 속으로 쑥 들어가서 거기에 둥주리를 틀고 새끼를 치면서 거기 집을 짓기 시작하면 이게 웬만큼 마음이 흔들려도 그 죄가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죄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분명히 오늘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회개했는데도 이상하게 눈물을 닦고 나면 다시 원 이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지 된다고 그랬습니까?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죄의 세력을 약화시켜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게 죄와 은혜의 지배의 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혼을 이미 벌써, 마음을 점령하고 영혼을 공격할 때쯤 되면 예전에는 죄가 시비라는 힘을 들여야지만 이 사람을 불순종하게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 정도의 힘만 들여도 이제 불순종하도록 그 사람이 그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야, 이거 해. 하는데 못해. 왜 하래니까. 싫어. 가서 한번만 해. 부탁할게. 그래서 할 수 없지. 그럼 이번만 하는 거야. 그리고 하면 그것은 종이 아닙니다. 종은 딱 나타나면 벌써 일하는 척 하고 있어야 합니다. 맞아죽으려고. 그게 종입니다. 놀다가도 딱 나타나면 막 일하는 척 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손만 까딱하면 즉시 와서 일해야지 됩니다. 그게 결국은 종이 된 모습입니다. 거기로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어떻든지 간에 죄는 그렇게 영혼을 실제적으로 맹공격을 해서 신자로 하여금 불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죄가 생각을 공격해서 생각을 이탈시키는 것인데 이렇게 된 죄가 이렇게 생각을 공격해서 생각을 이탈시키려고 할 때 그런 죄를 파괴하는 길이 무엇인가? 그래서 우선 총론을 잠깐 말씀드리고 그 다음에 강론을 오늘 일부를 말씀을 드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이제 이렇게 생각을 이탈케 하는 죄의 능력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간접적으로도 노력해야지 되고 직접적으로도 노력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간접적으로는 무엇인가 하면 정욕을 자극하는 환경으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죄는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혹은 우리에게 죄를 집어넣지는 못하지만 유혹이 강력하면 그러면 정욕이 자극을 받게 됩니다. 정욕의 자극이 빈번해지게 되면 정욕이 강한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강한 힘을 얻게 된 그 정욕이 강하게 된 것만큼 이 죄의 양식을 공급해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욕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을 계속해서 방치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 안에서 내제하게 되는 죄가 아주 기가 막힌 때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계속해서 그 세력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당시에 가톨릭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 인간이 정욕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주 행동으로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한 아직 죄가 아니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제 칼빈은 맹공격을 했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에피듀미아, 희랍어로 “에피듀미아”라고 하는 이 정욕은 그 “정욕”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었지만 “음욕”이라는 말로 많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강력한 본성적 욕구, 그런데 그 본성은 새 본성에 어울리는 욕구가 아니라 옛 본성에 어울리는 욕구입니다. 옛 본성에 어울리는 강력한 욕구에 대명사가 에피듀미아인 동시에 또한 그것이 개별적으로 쓰일 때는 특별히 음란함을 가리켜서 에피듀미아 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용한 이유는 인간이 자기중심적인 욕망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이 최고봉이 무엇인가 하면 음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에피듀미아를 그런 용례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가 생각을 속이고 들어와서 그래서 우리의 총명을 흐리고 마음을 굳어지게 하고 급기야는 영혼을 향해 맹공격을 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에 익숙한 삶을 살아서 그런 식으로 해서 마지막에 죄가 우리를 데리고 가고 싶은 게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죄가 우리를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영적인 사망에 이르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가게 하는 것이 목표이고 그가 불신자라면 하나님을 끝까지 완강히 대적하다가 육체도 죽임을 당하고 영혼도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죄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렇게 끌고 가는 죄의 태도가 마치 도수장으로 슬피 우는 소를 끌고 가는 소장수처럼 냉혹하게 어떤 자비나 긍휼, 계획의 변경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냉혹하게 끌고 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정욕을 자극하는 환경에다가 자기를 내버려두면 이 생각을 공격하는 죄에 아주 유리한 위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유혹이 위험한 이유는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사실 죄가 아닙니다. 만약에 유혹을 받는 게 죄라면 예수님도 죄 없다고 말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으니까. 그런데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은 아무리 유혹을 해도 그 유혹의 기능 자체가 이미 유혹 받는 자 안에 죄를 밖에서 집어넣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끌어내려고 아무리 유혹을 해도 예수님 안에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러 일으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어떤가? 우리 인간은 반드시 우리 안에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혹을 하면 그러면 유혹이 계속 일어나면 저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던 정욕들이 자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유혹받는 환경에다가 자기를 가만히 내버려둡니다. 그러면 유혹이 계속 다가오면서 정욕을 자극을 합니다. 그러면 정욕이 자극이 되는데 정욕이 한번 자극이 되었다고 해서 이 사람이 곧바로 나가서 유혹이 시키는 대로 죄를 짓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선 죄를 지으려고 해도 생각을 하고 작전을 짜고 일을 꾸며야 하고 환경을 조성하고 준비를 해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즉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상상을 합니다. 이미지네이션, 상상을 하면서 그 속에서 계속해서 즐거움을 맛봅니다. 그 동안에 이미 그저께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벌써 이렇게 되면 날아가던 생각을 붙잡아서 태속에 집어넣고 착상을 시킨 것입니다. 이 속에서 계속해서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이 강한 욕망이 되고 욕망 전체가 그를 지배한 것입니다. 그 욕망이 강한 힘을 얻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이미 벌써 그 죄가 그 정욕을 먹고 그 죄가 강력한 힘을 얻어서 이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 속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상상하는 대로 죄를 짓게끔 강력하게 그 사람을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은 죄의 이런 특성을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면 ‘에지 테이트’한다고 그랬습니다. 그것은 죄가 안달복달하면서 그 사람을 달달 볶는 것입니다. 짓도록.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하게 만들어서 죄가 결국은 데리고 가고 싶은 한쪽 방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때 죄를 짓게 하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게 거짓 평화입니다. 투쟁하는 동안에는 긴장과 고통이 있는데 일단 죄를 짓고 나면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 평화는 죄에 항복함으로 말미암아 잠시 찾아오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그것보다도 훨씬 더 크고 강력한 쓰디쓴 죄의 고통과 양심의 가책,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다는 정죄 감, 그리고 영혼의 깊은 시면 같은 것들이 느껴지면서 하나님 앞에서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는 결과에 직면하면서 이제 이 죄가 실제로 자기를 속였다고 하는 것을 그때야 깨닫게 됩니다. 그때가 너무 늦은 것입니다. 물론 이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그러나 일단 때는 늦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정욕을 계속해서 자극받는 환경 속에다가 자기를 두게 되면 그러면 간접적으로 생각을 공격하면서 자신 속에 파고들어오려고 하는 그 죄에게 유리한 이점을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이 좀 단순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단순화되어서 그래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여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지 됩니다.
두 번째는 이것은 반대인데 신령한 자극이 있는 환경으로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아까는 정욕을 자극하는 환경으로부터 멀어져야지 된다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신령한 자극이 있는 환경으로 가까이 다가가야지 됩니다. 이유는 우리 안에 정욕은 외부에 이렇게 강력한 유혹이 없어도 보는 것, 들리는 것, 연상되는 생각, 이런 것들을 통해서 굉장히 쉽게 자극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자극을 받아서 정욕이 솟아납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을 죄가 공격을 하고 영혼이 위협을 받는 때가 되면 눈에 비추는 많은 것들, 귀로 듣는 많은 것들을 보면서 이렇게 신령한 것에 대해서 계속 자극을 받는 이런 신앙생활의 경험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으면 사춘기로 돌아갑니다. 동의를 거의 안 하시는데 사춘기 때 어떻게 됩니까?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이 납니다. 아, 가을이구나. 눈물이 납니다. 모든 자기 밖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변화들이 눈에 비치고 귀에 들리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고, 낙엽하고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붙어있을 때는 생물체고 떨어지면 쓰레기인데 그것을 보고 인생을 생각합니다. 사춘기가 지나가면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사춘기 때는 낙엽이 떨어지면 눈물이 핑 돌면서 ‘아, 내 인생은 저 낙엽과 같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고 밥 먹고 나서 이빨을 쑤셔야 하는 나이가 되면 낙엽이 떨어지면 ‘청소부 참 귀찮겠다. 우리 세금 내는 돈 또 들어가겠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니까 아주 어린청년들은 노란 나뭇잎을 모아서 만들려고 하는데 나이 드신 집사님은 목사님, 여기 은행이 몇 말이나 나옵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1봉지 주었습니다. 아니 그게 뭐 그렇게 궁금해, 그게 떨어지는 낙엽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은행이 몇 말 나오는가. 진짜 아주 정확한 비유입니다. 즉석에서 나왔습니다. 아주 기가 막힌 비유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사춘기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한동안 아침이 그렇게 신비했습니다. 간밤에 이 땅에 그 많은 죄악들이 행해졌고 그리고 아침에 도시를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죄악들이 행해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술 먹고 토해놓은 것, 뭐 쓰레기, 술병 이런 지저분한 것들이 막 있습니다. 정말 밤을 방탕하게 보낸 것들이 새벽시간에 쓰레기를 보면 압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는 것이 몇 달 동안 신기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세상에 하나님이 아침을 주실까? 그래서 몇 달 동안 그 찬송을 부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러면서 그 많은 죄악 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죄를 더하면서 어제를 산 이 더러운 인간에게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을 오늘 내게는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너무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냥 작은 사건하나만 봐도 인생이 무상하구나. 그랬는데 뭐 하나만 봐도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는구나.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래서 가끔 오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끔 오버를 하기는 해도 그래도 사춘기입니다.
제가 가르치던 학생이 하나 있는데 어느 날 무슨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교수실에 들어와서 상담을 하다가 자기 인생간증을 잠깐 하는데 자기가 신학교에 들어오려고 늦게 소명을 받고 입학원서를 집어넣고 그리고 그날 저녁에 가서 실력은 없고 내일 합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실력이 모자라니까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 백으로 들어가야지 되겠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막 기도를 하면서 성경을 펴서 마침 그날 요한복음 성경을 읽는데 38년 된 병자가 그 주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은 장면을 발견했는데 눈물이 쏟아지면서 그러면서 가족들은 단칸방에서 자고 있는데 깊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막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계속 그렇게 간증을 하는데 나는 왜 울었는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왜 울었는가 하니까 목사님, 그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가 요한복음 5장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제 수험번호가 538번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웃을 수가 없습니다. 눈물이 글썽글썽하는데. 이게 무엇인가 하면 지나친 사춘기입니다. 어째든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은 가끔 오버를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여튼 어떻든 사춘기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 막 보면서 어떤 사람은 집에 앉아서 크리넥스 티슈를 하나씩 빼서 장난을 하면서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그게 다 끝나고 나서 막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러는가 그랬더니 대게 재미있습니다. 크리넥스는 계속 뽑으니까 마지막에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사춘기 소녀가 말똥보고 우는 사연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신자도 역시 똑같습니다. 오늘 우리 너무 웃는 것이 아닙니까? 신자도 똑같이 그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을 때는 아직까지도 신학적인 균형 감각이 떨어져서 그래서 지나친 사춘기요. 그렇게 말하고 싶어도 오버를 해서 이 교리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실소하게 만드는 실수를 가끔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떻든지 간에 그렇게 모든 것들에 대해서 뭐가 일어나기만 하면 신령한 방향으로 계속 생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멀어져서 마음이 딱 굳어지게 되면 그런 것들을 보면서 신령한 생각을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고 직접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그나마 신령한 자극을 안 받고 정욕이 자극받기 쉬운 환경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죄의 부패하게 하는 작용이 가속화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은혜 많이 받고 그리고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게 될 때는 이게 자주 나와야 합니다. 이 마음속에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기도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섬기고 싶은 욕구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 봉사해야지만 그게 진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다 신령한 욕구가 사라질 때 그때는 교회를 더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이미 다 떨어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자기를 자극하기 위해서라도 와서 은혜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은혜 받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섬김의 모습을 보면서 그 밑에서라도 거들려고 할 때 그때 자기에게 계속해서 자극이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극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령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자기를 계속해서 두려고 노력을 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를 생각을 이탈케 하는 죄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파괴하는 것입니다. 도움이 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접적인 것이고 직접적인 것은 그런 종류의 환경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생각을 이탈케 하는 죄의 능력을 파괴하는 길은 오직 딱 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묵상하는 일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중에서도 특별히 은밀하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개인기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생각을 속이기 위해서 역사하는 죄의 능력을 파괴하는 이 길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둘 다 하려면 12시까지 해야지 되니까 한 가지만 오늘 하고 한 가지는 교회에 돌아가서 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묵상이라고 말을 했지만 이 묵상보다 폭이 훨씬 큽니다. 오늘날 묵상, 그러면 이렇게 묵상 책을 갖다놓고 읽거나 아니면 펴놓고 답을 달고 기도를 하는 것을 묵상이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묵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부분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서 그래서 그 감화의 상태를 신자가 이 내면 속에서 유지하고 있을 때 그때에 죄의 속이는 역사를 훌륭하게 파괴하게 됩니다. 그래서 몇 가지로 이 문제를 나누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생각으로 생각을 감시해야지 됩니다. 생각의 의무는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각 자체를 감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생각과 관련된 영혼을 비롯해서 영혼의 모든 기능을 감독하는 것이 이 생각의 기능입니다. 그렇게 비유를 하자면 생각은 감시탑위에 서서 성밖과 성안을 두루두루 감시해서 성을 공격할 외부적 조짐이나 내부의 침입자들이 있나 살피는 것이 자기의 사명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감시탑에 사다리를 놓고 감시탑을 향해 공격하는지도 당연히 감시를 해야지 됩니다. 그것도 감시하고 자기가 있는 감시탑이 공격받는지도 감시하고 그리고 자기와 같이 비번을 서는 사람이 혹시 스파이는 아닌지 그것도 확인을 해야지 됩니다.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는 성안과 밖도 감시하는 것이 파수꾼의 임무이듯이 생각의 의무도 역시 생각 자신을 감독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제 영혼의 모든 관련된 기능 전체, 또 외부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오는 유혹, 이런 모든 것들을 그것에 대한 내부의 반응, 이런 모든 것들을 함께 감시하는 것이 이게 생각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이제 생각으로 생각을 감시한다고 그럴 때 여기서 우려해야지 될 것이 있는데 첫째는 생각의 두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생각과 육적 생각입니다.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제 잠간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샘을 비유하면서 그래서 신령한 은혜의 샘이 있어서 여기서는 계속해서 신령한 생각, 즉 영적 생각들이 막 솟아나고 여기 또 육적 샘이 있어서 여기서는 육신적인 생각, 부패한 육신의 생각들이 막 솟아나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육적 생각의 샘이 거의 말라있고 이 은혜의 샘이 커져서 영적 생각, 신령한 생각을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생각되는 대로 생각을 해도 비교적 신령한 삶을 살 가능성이 많지만 은혜의 샘이 매우 없고 육적 샘이 매우 커서 떠오르는 생각의 대부분이 부패한 생각들인데 그때에 생각을 하려는 노력이 없이 생각이 되는 대로 생각을 하면서 살면 그 마지막은 영적으로 충만한 생명의 은혜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생각은 생명이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으로 생각을 감시한다는 것은 영적인 생각으로 신령한 은혜의 샘에서 솟아난 생각을 가지고 부패한 육적 샘에서 솟아난 육신의 부패한 많은 생각, 그것들을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육적인 생각이 육적의 샘에서 막 솟아나오면 그러면 그 생각은 오만가지 생각이 다 솟아나오는데 그런데 그것이 가고자 하는 것은 한 가지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허탄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그리고 영원한 세계에 비추어볼 때 하나님 앞에 별 의미도 없는 일에 미친 듯이 몰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결국은 생각이 허탄한 것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허탄할 뿐만 아니라 그런 허탄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죄짓는 것도 서슴지 않고 육적 생각이 계속 부패한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것들을 영적 생각이 감시해야지 됩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세계를 아는 빛이 현저하게 많으면 많을수록 이 육적 생각은 잘 감시당합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생각으로 육적 생각을 잘 분별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이 생각을 감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그럼 우리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일까? 나는 지금 이 속에서 신령한 영적 생각이 많이 나오는 은혜의 샘을 크게 가지고 있고 육적 샘은 작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반대로 은혜의 샘은 작고 육적 샘이 매우 큰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이것을 판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루를 살면서 마음속에서 계속 솟아나고 있는 생각되는 것들,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되어지는 것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되어지는 것들을 분류를 해서 육신적인 생각과 신령한 생각을 따로 모아놓고 비율을 따져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율이 신령한 생각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면 은혜의 샘이 훨씬 큰 상태입니다
그런데 육적인 부패한 생각이 훨씬 더 많고 나는 하루 종일 대부분의 시간을 실제로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불결하고 부패한 죄를 짓는 것에 대한 상상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은혜의 샘은 거의 없고 육적 샘이 굉장히 이미 크게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경우에는 죄가 훨씬 더 쉽게 그 사람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생각이 되는 것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통제를 해서 생각을 내 속에서 육적 샘이 훨씬 커서 나도 모르게 솟아나는 생각들이 악한 생각이고 부패한 생각이고 그 죄를 짓고 정욕에 굴복하는 온갖 상상들이 다 솟아납니다. 그리고 신령한 샘에서 솟아나는 영적인 사고들이 아주 부분적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생각이 되게끔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고 생각이 되는 것은 안 되게 하고 안 되는 것은 자꾸 자극해서 하게끔 생각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생각으로 하여금 마땅히 생각하여야 할 그것에 집중하도록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생각으로 생각을 감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스러운 삶을 산다고 하는 것, 그리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다는 이런 것들을 무슨 큰 순교의 위기나 우리 아까 부른 찬송처럼 그 순교자의 삶을 사는 그런 것만을 가지고 극단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런 것, 내가 어떻게 하다가 죄 가운데 빠져서 이 신령한 은혜의 샘보다는 육적 샘이 훨씬 커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러지 말았어야지 되는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비록 자기가 죄 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진실하다면 늦었지만 거기에서 자신의 의무를 실천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들이 생각될 때는 그 되는 생각을 떠오르지 못하게 싸우고 마땅히 생각해야지 될 것에 대해서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외부적으로 자극을 주어서라도 계속 생각을 하게끔 만들려고 애를 쓰면서 내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시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그게 늦게나마 그 신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최선의 길입니다. 그렇게 안 하고 되는 대로 살면 상황은 점점 악한 상황이 되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으로 생각을 감시한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자신의 대해서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써야지 됩니다. 우리들이 생각을 많이 하면 그것이 곧 마음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많이 되면 좋은 의미에서든지 나쁜 의미에서든지 그것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꾸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너무 뜨겁게 사랑하지만 오랫동안 보지 않았는데도 별로 보고 싶지 않다.
누가 그러더랍니다. 여보게, 자네가 오래 결혼 20주년이라면서, 그럼 20주년이지, 어떻게 벌써 그렇게 되었어. 자네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뭘 해주려는가. 나 호주 여행을 시켜줄거야. 너는 아내를 너무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30주년은 뭘 하려고? 가서 데려와야지, 그러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에 10년 동안 한번 떨어져 있어보려고, 사랑한다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그래서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매일 만나면서도 그 하나님을 계속 보고 싶어 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지극히 성화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게는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렇게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깎고 다듬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도록 노력을 하는 것은 이다음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런 소망 하나만을 가지고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그 길을 걸어가야지 됩니다.
그런 순종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니까 내 마음대로 막 살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난을 많이 겪게 됩니다. 그 속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그 고통이 막 깊어지면 결국은 그 고통 속에서 죽음의 맛을 봅니다.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하면 내가 이제 예수와 하나가 되었구나. 내가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니까 죽음을 맛보는구나. 그런데 예수님도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지.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과 하나 되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니까 예수님을 핍박한 세상이 나를 핍박하려고 하는구나. 예수님에게 고통을 준 세상이 나에게도 고통을 주는구나. 그리고 예수의 죽음의 맛을 보는 것입니다. 그 맛은 달콤한 것이 아니라 아주 쓰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보람이 있고 그런 것은 나중의 일이고 당장은 아주 쓰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식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때는 하나님이 그것만 쓰디쓴 맛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맛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맛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죽음의 맛을 보면서 그러면서 쓰디쓴 고통을 맛봅니다. 그러면 눈물을 흘리면서,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그리고 눈물이 흐르면서 정말 이 세상이 싫습니다. 지금이라도 이 죄와 슬픔이 많은 세상을 떠나서 주님과 그리던 성도들이 있는 그 하늘나라에서 주님을 찬송하고 그리고 영광 가운데 그분을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그 쓰디쓴 고통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맛보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막 눈물이 흐르고 이 세상에 있는 염려와 박해, 그리고 인생의 허무함을 인해서, 혹은 주님의 일을 인해서 막 고통을 당하면서 괴로워하면서 눈물로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났는데 하나님의 그 따뜻한 품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이 없어서 하나님, 죄 많은 이 세상은 제 집이 아닙니다. 주님께 가고 싶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능력으로 일으켜 세워줍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은혜가 확 밀려옵니다. 그러면서 어제 불렀던 찬송을 취소하고 새로운 찬송이 나옵니다.
눈물 흘리며 며칠 더 담고 행할 길을 다 가다가다
끝 날에 나를 오라하실 때 영광 중에 나아라가리
그때까지는 내가 끝내 싸워 이기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제 밤에 깊이 죽음을 맛보았던 연약한 자에서 능력 있는 자로 능력으로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줍니다. 예수의 능력으로 내가 다시 살았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것처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지금 말씀드린 예수와 함께 죽음의 맛을 보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경험을 반복할수록 증폭됩니다. 그게 어떤 경험인가 하면 멀어졌던 예수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그래서 그분과 급기야는 하나가 된 것이 느껴지기까지 증폭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자신을 생각하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사람이 하나님과 더욱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을 생각하기를 힘쓴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 그런 용어 많습니다. 우리가 밥술도 못 먹고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생을 살면서 어느 순간에 우리의 궁극적인 고통과 그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의 원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우리의 회개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형통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취직도 시켜주시고 사업도 되게 해주시고 좋은 사람도 만나서 함께 일하게 하시고 그래서 밥술이나 먹게끔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돈을 계속 벌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돈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없으면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있어요. 가 아니라 너무너무 많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많이 축복해주셨는데도 그 늘어나는 재물, 널리 알려지는 자신의 명성, 그리고 좋은 평판, 탁월한 재능 이런 것들을 자랑하고 사랑하지 아니하고 그 모든 것을 안개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 안개를 헤치면서 자신이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께로 날마다 날마다 가까이 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을 깊이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많이 마음을 빼앗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이런 것, 아닙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자신을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 자신은 영이시니까 이렇게 무슨 사진을 갖다놓고 묵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생각한다고 하는 그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성품을 우리들이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성품을 묵상하는 것이 곧 하나님 자신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많이 생각이 납니다. 아까 그 오버한 신학생 이야기도 나왔지만 궁극적으로 그 마음을 사로잡았던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538번이 되는 그 순간 자기는 붙을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든 붙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의로운 공의로운 성품, 그의 은혜, 자비, 긍휼, 선하심 이런 것을 계속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이렇게 자신의 인생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나. 그러면서 깊이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든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 생각으로 생각을 감시하고 하나님 자신을 생각하려고 애쓰는 이 모든 일들이 꼭 성경을 펼쳐놓지 않아도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설교하다가 보면 당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요절이 날거야. 이렇게 설교를 해도 까딱도 하지 않은 사람이 예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그리고 쭉 풀면 그 마음이 흔들리면서 막 눈물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그 성품, 특별히 그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의해서 인도되어왔다는 사실을 자기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굳어진 마음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제목을 잃어버리고 산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박격포를 쏘는 미사일 공격 같은 설교 같은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햇빛을 비쳐주는 것과 같은 설교도 필요합니다. 결국은 폭풍과 같은 바람도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못 벗겼듯이 햇님이 웃으면서 비추니까 자기가 더운데 별 수 있어. 다 벗는 것이지. 그렇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들이 아주 분명하게 가슴에 새겨져야 할 그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으로 비추어볼 때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가 자기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생각을 안 하면서 사는 것은 아주 나쁜 짓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탄핵하시면서 책망하시면서 계속 그들을 공격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나를 잊었고 너희가 나를 잊어버렸고 너희가 나를 잊었고 너희가 나를 잊어버렸고 계속 나옵니다. 그리고 또 똑같이 나오는 게 ‘돈 포겟 니’ 나를 잊어버리지 마라. 나 여호와를 기억하라. 나를 잊어버리지 마라. 제발 나를 잊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끼리 갈등이 생겼는데 너 미워. 이것은 헤어질 상황이 아직 안 된 것입니다. 너 미워. 너 나보고 지금 밉다고 그랬지. 그러니 이제 우리 헤어지는 거야, 그러지는 않는 것입니다. 지금 네 생각이 안나. 어느 게 더 무서운 말입니까? 생각이 안 나. 미워. 그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사랑하고 싶은데 자꾸 네가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안 나. 그 이야기는 이미 잊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각에서 당신이 잊혀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말할 수 없는 모욕입니다.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의 생각 속에서 잊혀지는 것, 그리고 거의 생각이 나지 않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불멸의 수치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매우 큰 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랬을 때 이것은 새로운 전통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 있는 전통입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가르쳤던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잊지 말라는 이야기는 계속 생각을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잊지 말아라. 율법을 잊지 말아라.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모세가 율법 속에서 무엇을 명했습니까? 문설주에도 붙이고, 옷에도 붙이고, 미간에도 붙이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늘 생각나게 하는 그것이 말씀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흔히 하나님 앞에 회개기도를 한다고 그러는데 하나님을 별로 생각하지 않으면 살았던 것에 대해서 회개한 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남편의 마음을 특수 사진기로 찍었는데 그래서 필름을 뽑아보니까 자기 생각한 날짜가 일년을 돌렸는데도 안 나옵니다. 그러면 그 분노가 어떻겠습니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모욕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면서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생각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올곧은 의무에 충실할 수 있다면 그러면 은혜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숙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숙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대충 알고 넘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이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이 머릿속에 있는 것인데 그런데 머릿속에 있을 뿐 또한 느낌도 받지 못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서 어떤 하나님의 말씀들이 쭉 들리거나 읽거나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스쳐지나갈 때 이 생각은 항상 우리에게 감정을 자극하면서 지나갑니다. 그것이 감정이 많을 수도 있고 별로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든지 간에 무슨 느낌은 주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분명히 무슨 느낌은 받기는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잊혀졌습니다.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석하는데 그 죄가 생각을 공격하고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영혼을 공격해서 결국은 심각한 불순종의 삶을 살게 하는데도 그것이 파악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하기는 하는데 심지어는 깨닫기도 하는데 그것이 여기에서 자신의 영혼을 깊이 적시면서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영어로 쎄츄레이트입니다. 그래서 뭔가 소금물 같은데다가 푹 잠겨서 깊이 스며들어서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깊이 스며들도록 쎄츄레이트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깊이 오이지를 깊이 담가져야 합니다. 소금물과 오이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나두면서 삭히면 거기에 소금물이 들어가서 그래서 오이를 발효시키면서 숙성시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물속에 오이 맛이 배고 그 소금물이 오이 속에 들어가서 그래서 동질화됩니다. 충분히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때 이것을 얼마나 소금물을 조절해서 물이 삼투압 현상에 의해서 두개가 딱 균형이 맞아서 오이지를 잘 담그면 아삭아삭한 오이지가 되고 균형을 못 맞추면 질깃질깃한 뱃가죽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스며드는 상태, 그것을 여기서 “숙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듣는다. 매일 성경을 읽는다. 규칙적으로 말씀 묵상을 펴놓고 진도대로 따라 나간다 하는 것은 숙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한순간에 살짝 성경을 읽었는데 그것이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깊이 우리의 영혼을 찌르고 들어와서 그래서 우리를 놀랍게 그 말씀에 젖어들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으로 날마다 일어나는 경험이 아닙니다.
저도 한참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고 은혜를 받았을 때 10시쯤 되어서 성경을 불과 한 5-7절밖에 안 되었는데 그것을 읽다가 은혜를 받아서 묵상을 모두 끝내고 나니까 아침 8시였던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간줄 몰랐습니다. 밤새도록 울면서 기도하고 묵상한 것을 정리했는데 시계를 보니까 아침 8시였습니다. 10시간 동안 그 5-7줄의 성경에 붙들려 매달려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만약에 일주일에 한번씩만 일어났다면 아마 굉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애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 깊이 내 마음을 움직인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그것을 숙고하려고 애를 썼을 때 펼쳐놓고 한번 읽고 끝내지 않고 2,3,4번을 읽고 그리고 심지어는 의미를 모를 때는 사전을 찾고 그 다음에 책을 찾고 신학서적을 찾고 그리고 의미를 파악할 때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렇게 고민을 했을 때 그것이 성경을 덮고도 계속 마음속에 살아서 생각이 계속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숙고입니다. 칸 시디어레이션 깊이 그것을 숙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의미를 깊이 숙고한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숙고는커녕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집에 들어가면 문 앞에 나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 설교를 구약을 했는지 신약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더군다나 지난주 설교, 우리 같은 경우는 좀 기억하기 쉽습니다. 시리즈로 계속 나가니까, 그런데 단발로 나가는 교회에서는 진짜 보통 노력하지 않으면 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정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을 안 읽습니다. 성경을 매일 읽으면서 규칙적으로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사람이 100명 중에 4명이라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작년에 우리가 통계를 냈을 때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서도 65%밖에 안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되면 읽고 안 되면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생각을 공격하는 죄의 속이는 능력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문제지 죄가 진짜 마음을 갖고 집요하게 시험의 때에 공격을 하면 그냥 썩은 옥수수자루 부러지듯이 부러집니다. 때를 못 만나서 다행히 형체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길들이 너무 힘드니까 책까지 만들어서 한 장씩 읽으면서 기도하고 하루에 두 번 정도 읽으면서 1-2분이라도 마음을 간절히 모아서 기도하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영향을 끼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숙고하기 위해서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동을 일으키는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교회에서 집사다. 장로다 아니면 목사다. 전도사다 하면서 덜렁덜렁 거리고 다니고 교회에서 이런 봉사도 하고 저런 것도 하고 그런데 실제로 손을 넣어서 가슴을 막 만져보면 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남이 볼 때는 정말 신실한 사람 같고 교회밖에 모르는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없기 때문에 이미 이 사람의 생각은 속이는 죄의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제 제가 설교했던 죄가 인간의 복음교리를 속이는 구체적인 6가지 경우들 말입니다. 그 중에서 교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속임수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속임수 해봐야 신자들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아니야. 목사집이야. 가지마. 죄가 그렇게 속여도 거기까지는 안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그 다음에 다 속에 들어가서 껍데기를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결국은 버티다 못하고 내적으로 번성하게 자란 죄가 쾅 하고 드러나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신실한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신실하기는 뭐 개코나 신실해. 처음서부터 썩었는데 뭘 신실해. 그냥 그렇게 보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쾅 하고 부딪혀서 예배 시간에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가슴에 섬유질이 찢어질 정도로 회개를 하고 뉘우쳐도 이게 1-2주면 말씀이 마음에서 사라지는데 예배를 그렇게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진짜 예배시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맹숭맹숭하게 걸어서 그것도 어떤 가슴아파하는 표정도 아니고 당당하게 걸어서 교회를 나가는 여러분들을 보면 정말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저렇게 살아서 앞으로 뭐가 될까? 결국은 너무나 뻔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 죄의 간교한 속임수가, 절대 죄의 꽁수가 절대 통하지 않고 죄가 까불면 까부는 게 전부 다 보일 정도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현명한 삶을 살던 때가 언제였는지 아십니까? 지금처럼 세련되게 교회생활을 못했어도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 그래서 그 말씀의 빛이 비추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죄인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예전에는 도저히 내가 깨달아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말씀을 보면서 정말 내가 얼마나 짐승같이 살았던 사람인가. 그리고 한없이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꺾어져서 괴로워하고 아파할 때 말씀이 계속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들은 말씀이 월요일 기도제목도 주장하고, 화요일 기도제목도 주장하고, 수요일 날 오면 또 새로운 말씀이 주어지니까 기도의 제목이 부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번째의 하나님의 말씀이 첫 번째의 기도제목을 흐리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렬한 빛을 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책을 주고 그래서 말씀과 말씀이 협력해서 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더러운 치부를 다 드러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아파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이메일 편지가 왔는데 제목을 썼는데 ‘잔인하신 목사님께’ 그리고 썼습니다. 그래서 내가 솔직히 자비롭지는 않지만 내가 사실은 잔인하지는 않는데 그래서 뭔가 하고 메일을 펴봤습니다. 그랬더니 저기 어느 나라라고까지 내가 이야기하지 않겠는데 유럽에서 온 편지입니다. 그래서 밤에 하도 잠이 안 와서 누가 서울에 있는 친구가 자기가 유럽에서 하도 곤고하게 사니까 결혼한 자매인데 열린 오알지로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가서 딱 찍었는데 자기가 몇 년 째 계속 짓고 있는 죄, 빠져 있는 죄, 그런 죄를 건드렸는데 하여튼 이렇게 건드렸는데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표현에 의하면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여튼 쑤시고 들어와서 다 후벼났는데 마지막에는 도저히 그것을 듣고 나서 일어설 기운도 없을 정도로, 그 다음에 들어갔더니 다른 것을 클릭 했는데 또 똑같이 그랬다며 편지가 두 번인가 왔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답장을 해달라고 해서 안 했습니다. 안한 이유는 있습니다. 그래서 안 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성의 창고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서 계속 숙고해야지 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계속 숙고하는 것의 목적은 진리에 의한 감화를 받고 두 번째는 받은 그 감화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요즘은 그런 것이 별로 없는데 옛날에는 밥을 꾸러 많이 다녔습니다. 특히 언제인가 하면 쌀이 없을 때도 물론 그렇지만 쌀이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손님이 오거나 예기치 않은 밥식구가 들어왔을 때 식사시간이 지나면 우리 엄마들이 황급히 옆집에 가서 물어봅니다. 아무개 엄마 혹시 저녁밥 남은 것 있어. 그러면 있지. 그리고 아직까지도 따끈따끈한 밥을 이렇게 퍼서 줍니다. 그것을 사발에 담아주면 다음 끼니때는 반드시 갚습니다. 그런데 이제 담아오면 추운 겨울에 누가 온다고 그러면 찬장에 넣어두면 금방 찬밥이 됩니다. 그런데 그때는 무슨 보온이나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사발을 솜으로 싸고 양발로 싸고 버선에다가 싸고 이렇게 해서 몇 겹을 싸서 이불에 싸고 해서 아랫목에다가 넣어두면 한두 시간이 지나서 꺼내도 밥뚜껑에 이슬에 맺혀있을 정도로 밥이 따끈따끈하게 있습니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교를 통해 강한 은혜의 도전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펄펄 굽는 장작을 받은 것에 비유한다면 그 불씨를 갖다가 재에 잘 묻어 넣고 보전을 해야지만 그래야지만 그게 그 다음날 일어나서 다시 펼쳐서 훅 하고 불면 불이 붙지, 아, 이 불은 굉장한 불이야. 펄펄 이글이글해서 끓는 강단에서 지금 방금 떠온 것이거든. 그리고 밖에다 내놓고 며칠 잡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습니까? 싸늘하게 꺼져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이상하다. 며칠 전에 엄청난 불을 받았는데 불발이 별것 아니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효력에 대해서 의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아봤자 그것 별로 오래 안 갑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로 받은 말씀의 은혜의 크기만 생각할 뿐 그것을 보존하면서 살아가는 경건한 노력에 마음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둘 다 잘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번쩍번쩍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래서 가끔은 성경을 펴놓고 펑펑 울어서 그래서 성경이 눈물에 젖고 설교를 들을 때 그냥 멀리서 과녁을 향해서 날아온 화살이 자신의 양심을 꿰뚫어서 거꾸러지게 만들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감미로운 음성이 결국은 완고하던 마음을 녹여서 그 세미한 음성이 오히려 천둥치는 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보다도 더 깊이 자기의 마음을 찔러서 그래서 잊혀질 수 없도록 깊은 감화를 받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의 현장, 성령의 역사하시는 조명이 있는 성경읽기, 하나님의 교리를 공부하고 말씀을 공부할 때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지성과 영성을 축복해주시는 성령의 강력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그 은혜, 필요합니다. 반드시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지 됩니다.
인간의 모든 인간적인 노력으로 지식을 가지고 몸부림쳐서 깨달은 열 가지의 깨달음보다는 성령께서 오셔서 눈을 열어서 깨닫게 해주신 그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가져다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성령님의 말씀을 깨닫는 현장에 임하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 이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강조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받은 말씀을 자기 마음의 재에 묻어놓고 그 불씨를 잘 보존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일날 와서 다리를 꼬고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돌아가서 다시는 그 설교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반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신명기가 무엇입니까? 다시 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소위 기독교를 지칭할 때 릴리전입니다. 신앙 혹은 종교를 가리킬 때 릴리전이라는 말이 레틴어 릴리가레에서 왔습니다. 반복하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서 또 와서 열심히 노트를 합니다. 노트하면 뭐 합니까? 집에 가서 한번도 안 열어보는데, 그러면 뭐하겠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제하는 죄는 집요하게 역사해서 쉬지 않고 생각을 공격하고 총명을 흐리고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어서 영혼을 파괴하고 결국은 우리를 불순종으로 이끌어가려고 집요하게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가지고 그것과 싸워야 하는데 아주 가끔 가뭄의 콩 나듯이 한번씩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내제하는 죄가 생각을 속이고 영혼을 공격하는 것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은혜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과 더불어서 싸워서 이기기에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절대로 좋은 신자가 안 되는데 그렇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성경도 매일 안 읽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예배시간에도 뭐라도 좀 떨어질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진리에 의한 감화도 드물어지고 감화가 주어져도 그 감화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마음과 총명, 생각 이 모든 것들이 죄에 방어기재 없이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일 심각한 것이 오늘 요즘 우리가 주제를 가지고 계속 살펴보는 생각을 속이는 죄의 강력한 역사가 아주 활개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진리에 의한 감화를 내 마음속에 유지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현재적으로 내가 유지하고 있을 때, 몇 달 전에 은혜 받은 그것 말고, 사람들이 만나면 매일 새가족반 때 이야기만 합니다. 아니 새가족반은 들어오는 출입구가 이제 본가족반에 들어왔을 때 거기서 받은 은혜를 이야기해야지 새가족반에서는 그때는 좋았는데, 죄인이 핑계가 한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새가족반은 본가족반을 잘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겨우 준비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새가족반 때는 계속 숙제하고 그 다음에 처음 왔으니까 말씀에 은혜 받고 그 다음에 성경을 읽고 전도를 실천하고 하니까 이게 마음속에서 잘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에 의한 감화가 유지가 됩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죄에 속지 않고 공격을 덜 받는 것입니다. 본가족보다 교리를 알고 그러는 것은 좀 작지만 수준은 낮아도 상태가 뛰어나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한 감화가 있어야 합니다. 아, 진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해주셨는데 정말 은혜롭다. 맞아. 내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 정말 내가 잘못 살았어,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내가 마음이 아프다. 내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을 때 살아온 많은 날들이 마치 도둑맞은 날처럼 느껴진다. 아, 너무 악하다. 이런 말씀에 의한 감화.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은혜, 이런 것들이 살아있는 상태에서만 첫째 마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고, 둘째 총명은 판단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고, 셋째 생각은 전 영혼을 기도할 수 있고 죄를 감시할 수 있는 기능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게 오늘 핵심입니다.
시간은 많이 갔지만 조금만 더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곧 끝나겠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생각이 죄에 의해서 속임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이유는 이 생각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뚫고 들어온 죄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않는 한 계속 진전해서 총명을 흐리고 마음을 굳게 하고 영혼을 공격하고 그리고 우리를 불순종하면서 죄의 노예가 된 삶을 살아가려고 계속 우리를 끝까지 끌고 가는 것입니다. 냉혹하게 끌고 갑니다. 마지막에 사망에 이를 때까지 계속 우리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죄가 냉혹하게 당신의 신자들을 끌고 가는 그 과정을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생각을 속이면서 공격하는 죄를 적발해내서 그래서 초기에 처단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이 아주 명료해야지 되는데 그 생각의 명료함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총명, 마음, 영혼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연결된 기능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죄가 이렇게 들어오고 생각이 흐트러질 때 이게 잘못했다는 것을 감시할 수 있도록 이 생각이 명료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생각하나만을 가지고 조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게 오늘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 하나만 가지고 조취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안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통일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입술 하나만 거룩하게 하려고 노력해서 입술 하나만 거룩해질 수 있겠습니까? 이 손 하나만 거룩하게 성화시키고 싶다고 해서 이 손 하나가 거룩해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과 심령이 거룩해지고 정결해져야지만 여러분들의 입술과 여러분들의 눈과, 여러분들의 모든 지체들이 성결해져서 그래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공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생각이 명료한 감시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 속에 살아야 합니다. 꾸준한 교회생활 같은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게 꾸준하게 교회에 출석하는 정도의 신앙생활 가지고는 안 됩니다. 판에 박힌 성경공부, 그저 형식적인 성경읽기, 예배 시간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끔 눈물을 흘리고 가는 것, 그리고 마음도 실리지 않은 기도를 그저 나와서 몇 마디하고 가는 그런 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더 깊은 기도생활과 은혜를 구하는 생활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일상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목사든지, 장로든지, 집사든지 누구든지 간에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사람을 보고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어서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들을 감화시키고 그리고 받은 바 그 감화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생각이 명료해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영혼 전체를 지배하는 지도적인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이탈되어버리고 총명은 흐려지고 그 마음은 굳어져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처음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잘 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새가족반, 본가족반 다 통과하면 이런 묵은 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자신들이 성숙해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하나님의 사랑에서 교회에 뿌리를 내린 사람으로 되어갑니다. 그것은 싫습니다. 정말 싫습니다. 그 끈끈한 혈연에 의해서 맺어져서 그래서 교회를 뿌리를 내린 그것은 싫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이런저런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뿌리를 내린 것이 싫습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피고 안 섞이고 살고 안 섞인 사람들이 이렇게 만나서 함께 형제라고 부르고 교회에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그리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십년이라는 세월 가까이 살아올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각 사람을 붙잡았고 우리 각자를 어두움과 죄악의 깊은 수렁에서 건지고 보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하셨고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걸어와서 하나님을 부르고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만약에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진다면 우리가 옛날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 그 사람과 다를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개가 토한 것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누운 결과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이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서 생활하는 모든 것이 남의 탓인 것처럼, 환경 탓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좋은 영향력을 받으면서 그래서 매일 살아있어서 어제 주일에 들은 말씀이 오늘 나를 움직이고 오늘 아침에 읽은 말씀이 오늘도 나를 움직여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주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비천한 죄인이고 그 간교한 죄의 마지막에 교활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분명한 통찰과 판단력을 유지하며 사는 동안에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고 총명은 정확한 판단력을 유지하고 생각은 올곧아서 생각 자체와 영혼 전체 안에 파고드는 움직이는 죄의 세력을 간파해서 온 영혼과 관련된 기관을 지도할 수 있는 감시력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신자가 아무리 교회생활을 성실하게 하고 무슨 새가족반, 본가족반 성경공부 성장반. 무슨 주제별 성경공부를 다 했다고 할지라도 오늘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가슴속에 살아서 자기의 마음을 녹이고 움직이지 않으면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나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과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것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는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한 감화가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한 감화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좋은 신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기도시간에 올라와서 성화의 길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면 그게 진짜 성화의 길로 가게 됩니까?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을 싫어해서 버렸는데,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깨달은 바를 실제의 생활에 적용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해야지 될 것은 자기 실제의 생활에 적용하고 그 적용이 끊임없이 계속 되어야 합니다. 주일날 와서 설교는 설교대로 듣고 일주일의 삶은 삶대로 계속 됩니다. 그리고 마치 오늘 듣고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수 있다고 계속 강조하는 것은 현실을 너무나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피가 흘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죽어야지 됩니다. 적어도 그런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해야지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해서 개개의 모든 의무에 있어서 개개의 모든 개별적인 의무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을 통해서 주신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대로 순종하면서 살아야지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끊임없이 자기생활에 적용해보려고 애를 쓸 때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분투하면서 사는 생활 속에서 체험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령과 함께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하는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에 깊이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10년 가까이 목회를 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 해도 되는 일은 모두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모든 설교들을 정리해놓았고 많은 책들을 구비하고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애쓰고 수고해서 손만 뻗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잘 요리되어서 정리된 상태로 여러분들에게 공급해주고자 했습니다. 한국교회 교인들 중에 대부분이 거의 누리지 못한 특권들을 여러분이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마음이 아픈 것은 물도 갖다 줄 수 있고 꼴도 갖다 줄 수 있고 그리고 모두 거기로 이끌 수 도 있는데 여러분들을 그것을 먹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일입니다.
여러분,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번 수련회에서 생애적으로 여러분들을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시면 뭘 하려고 합니까? 그 은혜를 가지고 어떻게 살려고 하십니까? 예전과 같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깊이 만나주셨는데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은 채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화력은 없고 허탄하고 거짓된 세상의 일들에 대한 관심사만 가득 차 있는 그런 신앙생활을 여러분 하시려고 합니까? 그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죄의 속임에서 그의 생각을 보호하고 흐려지는 총명에 총기를 더하시고 굳어지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죄의 집요한 공격으로부터 영혼을 보호하실 수 있겠습니까? 은혜 언약에는 그런 보증들이 없습니다.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만약에 주님이 오늘 오셔서 그렇게 성경을 안 읽으려면 내가 다 빼앗아버리겠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가죽성경, 비닐성경, 빨간 것, 누런 성경, 까만 성경 수없이 사들여서 집안에 쌓여 있습니다. 그 책을 봅니까? 자녀들이 성경을 읽은 아버지를 봅니까?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일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자녀들이 여러분이 죽으면 이 찬송을 부르면서 눈물을 흐리면서 여러분들을 생각할까요? 고난 속에서도 성경을 가까이 하고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하신 것을 생각하며 늘 안경을 벗으시면서 눈물을 닦으시던 어머니, 자녀들이 그렇게 생각할까요? 바쁜 중에서도 우리들이 늘 눈을 뜰 때면 책상머리 앞에서 성경을 읽고 계시던 아버지, 서재에 늘 조용한 시간에 성경을 펼치고 읽으시던 아버지,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렇게 기억할까요?
젊은 사람들은 또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하지 않습니까? 그 많은 시간을 쓸모도 없는 허탄한 일에 쓸어버리면서 살지 않습니까? 그 시간 중에 얼마를 쪼개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일에 바친 적이 있습니까? 아직까지도 기억력이 좋고 논리를 따라가는 추리력이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진지하게 단 하나의 교리라도 뛰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마음을 바치면서 읽은 성경도 없고 가슴이 찢어지듯이 가슴에 꽂힌 설교도 없고 그리고 매일 무릎을 꿇고 읽으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성경읽기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화가 어떻고 무슨 죄를 죽이는 삶이 어떻고 죄가 웃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너무 마음아파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지혜가 성경을 통해 성령의 조명을 받을 때는 죄보다도 탁월하게 지혜롭지 못합니다. 이런 빛이 사라지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지혜로는 간교한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면서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가 사라진 그것을 숙고하지 않은 것, 그래서 죄에 속고 마음은 굳어지고 총명이 흐려진 것에 대해서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회복의 은혜를 구해서 말씀의 미각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을 속이는 죄의 위대한 역사를 파멸하는 아주 중요한 방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5. 생각을 이탈하게 하는 죄를 파괴하는 길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저는 다섯 번째로 죄의 속이는 역사를 이기는 길에 대해서 본문으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에 이야기들을 다 반복할 수 없지만 죄가 제일먼저 신자들을 공격할 때는 생각부터 먼저 공격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속이고 총명을 흐려지게 만들고 마음은 굳어지게 만들어서 결국 우리의 영혼을 맹공격해서 자신의 지배력을 그 영혼 안에 확보하는 것이 죄의 계획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게 하고 그리고 우리들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게 하고 그 죄가 장성하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우리를 영적인 죽음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이 죄의 냉혹한 계획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 시간에는 이렇게 생각을 속이는 죄의 역사를 파괴하는 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생각을 파괴하는 죄의 역사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숙고가 필요하고 그래서 그 말씀이 적용되어서 우리 마음 가운데 은혜로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감화에 깊이 붙잡혀있을 때 비로소 우리들이 죄의 역사를 파하고 생각을 속이는 죄의 모든 계획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온 마음과 영혼과 삶을 지킬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진실한 감화.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이 깊이 깨트려지는 이런 은혜의 감화 없이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으려고 노력하려고 그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성애를 느낄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들이 죄의 속이는 역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숙고와 함께 생각을 속이는 죄의 강력한 역사를 파괴하는 또 하나의 무기가 있으니 이것은 기도입니다 기도 중에서도 특별히 은밀하게 드리는 개인기도, 이것이 갖는 중요성은 이루 강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예배 속에서 설교가 선포되어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고 은혜 받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어서 그 말씀을 붙잡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말할 수 없이 귀한 은혜의경험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자기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열렬한 기도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울리고 지나간 하나님의 말씀은 지속성 있게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서 우리의 마음과 삶을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와 함께 간절하고 진실한 그리고 열렬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 하나를 할 수 없는 사람이 다른 하나도 잘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릇된 방식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참된 은혜와 믿음의 원리를 따라서 이루어진 진실한 실천이라면 이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저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한 신자의 마음속에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그가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그 깨달은 많은 지식들은 그의 생각 속에서만 머무르게 될 것이고 결국은 객관적으로 개념적으로 진리를 알뿐이지 경험적으로 그 진리를 알아서 그 진리에 사로잡혀서 살아가게 되는 일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속이는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개념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 그들을 좋아하고 그리고 그들을 충분히 속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반드시 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자기를 바치는 진실하고 헌신되고 열렬한 기도를 필요로 하고 그렇게 자기를 바치는 진실하고 열렬한 헌신적인 기도 속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는 그의 영혼 속에 유지될 수 있습니다. 속인 죄의 능력을 파하기 위해서는 제일먼저 이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 모두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그 기도의 가치를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특별히 사도행전 이후에 일어났던 성령의 시대에 일어났던 많은 교회적인 성령의 역사가 기도하는 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가 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핍박의 칼날들이 거두어진 그리고 얼어붙은 동포의 땅에 빗장이 끌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고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던 많은 족속들이 참회함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는 위대하고 놀라운 회심의 역사들도 교회가 기도할 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함께 모여서 하나의 제목을 가지고 한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고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런 합심기도의 중요성은 절대로 과소평가될 수 없는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또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함께 이렇게 모두 모였을 때 우리들이 열렬하게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놀다온 사람들이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의 기도의 골방에서 은밀하게 드리는 기도생활, 개인적인 기도의 생활이 열렬하고 헌신되고 그리고 진실하고 하나님 앞에 정결할 때 그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 폭발적인 기도의 위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의 모여서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예배시간에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개인의 기도의 시간이 없고 혹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기도의 능력을 거의 상실한 채 중언부언하는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서 어떤 파괴적인 기도의 능력을 우리들이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특별히 개인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죄 죽임을 위해서는 먼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은밀하게 드리는 개인기도의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개인적이고 은밀한 기도의 생활 속에서 먼저 마음으로부터 깊이 우러나는 그런 진실한 기도가 실천될 때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협하는 죄의 능력을 파괴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열렬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하고도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 없이는 누구도 죄를 이길 수 없고, 이 기도 없이는 누구도 생각을 속이기 위해서 공격하는 죄의 파괴력 있는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되 건성으로 기도하고 그리고 생각 없이 중언부언하고 기도시간은 정해져있으나 엎드려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졸음으로 보내거나 기도의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 채 허우적거리면서 기도의 시간을 때우거나 혹은 아예 너무나 기도시간에 게으른 나머지 그런 기도시간조차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은 거의 하나님 앞에 이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의 신자의 사람됨은 그가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있을 때 얼마나 하나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하나님을 찾는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사람됨이 결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의 신앙이 외식적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피상적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를 쓰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함께 묻어서 비슷한 일을 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홀로 있는 고독한 시간을 그는 불안해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 고독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는 그 외로운 시간들을 은밀하게 주님을 찾는데 사용할 것이며 그 마음이 은밀하게 하나님을 찾을 때 그가 어찌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가도 언제나 하나님 앞에 넘어지는 지점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진실하고도 간절한 기도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할 우리의 실천이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나라에 간 뒤에도 이렇게 설교를 듣는 일은 없겠지만 기도하는 시간은 하늘나라에서도 계속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깊은 우물의 두레박을 던져서 물을 올리는 것처럼 이미 오랫동안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은혜의 수위가 저 마음 밑바닥으로 내려갔다고 하더라도 기도의 두레박을 마음의 우물에 깊이 던지며 애써서 그 물을 길어 올리려고 애쓰고 노력할 때 우리의 굳어진 마음들은 풀어지고 우리를 에워싸고 있던 죄의 세력들은 파해지고 그리고 마음을 바쳐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열렬한 기도가 흘러나오게 되고 그 열렬한 기도는 모두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 기도입니다. 기도는 마치 아이들이 접어놓은 종이배와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시내에 은혜의 사랑의 강물이 흐르면 그 접힌 종이배는 아주 재빠르게 물길을 따라서 흘러가지만 그러나 물이 없거나 혹은 물이 있어도 매우 작을 때는 종이로 만든 그 배가 가다가 자꾸 바닥에 걸립니다. 똑같습니다.
‘토마스 굳인’이라고 하는 17세기의 훌륭하고 박식한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막달린 대학의 총장이었는데 그 탁월한 청교도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야말로 신자를 하나님을 향한 모든 순종의 삶으로 인도하는 원천이며 원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놀라운 은혜, 그리고 그 은혜 속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깊은 사랑,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며 살수 있게 하는 모든 힘의 원천이고 또 순종의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 안에 은혜와 사랑의 물이 풍부하게 흐르면 기도라고 하는 종이배는 그 물길을 타고 아주 빠르게 아주 부드럽게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와 사랑의 물이 마르고 나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예전에는 그렇게 쉬웠는데 그 다음에 굉장히 힘들게 되고 그 다음에 눈을 감으면 헛된 생각, 공허한 일들이 떠오르고 그리고 육체의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쉽게 기도시간에 졸거나 잠들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나거나 묵상하는 많은 시간들을 헛된 시간들로 머리를 가득 채우거나 혹은 입술로 부르짖어 기도할 때 마음에는 울림이 없고 목에서만 우러나오는 기도의 시간을 갖게 되는데 이런 사람들은 이미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실제의 삶에 있어서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충분히 죄가 그를 공격하고 죄가 그를 속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흘러넘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기도의 은혜 가운데 있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산입니다. 금이나 은보다도 소중하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이나 큰 유산보다도 훨씬 소중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그 기도의 세계를 지키고 주님이 주신 그 기도의 은혜를 잘 파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을 잃어버린 성도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졌고 그리고 죄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생각이 충분히 속고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이어서 우리들이 살펴볼 것은 기도를 그렇게 실천할 때 이 기도가 영혼에 대한 죄의 속임을 파괴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 비로소 죄가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인식한다, 혹은 파악한다는 말은 몰랐었는데 그것을 새롭게 발견한다는 뜻도 물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지를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마음을 바쳐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보면 내가 평소에 알지 못했던 죄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그 죄를 파악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이미 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마음을 바치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이런 죄를 더 실감나게 그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된다고 말씀드리는 편이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 안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야 비로소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도 우리가 은혜가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성경에 관한 지식은 우리 안에 살아있기 때문에 아주 분명하게 이것이 죄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기억들이 우리에게 살아있기 때문에 이런 것은 죄라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냥 개념적으로 그것이 죄다. 하는 것을 아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와 더불어 싸우고 죄를 죽이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죄를 파악하기까지는 그런 인식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얼마 전에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이주일씨가 폐암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TV에 나와서 유언 비슷하게 늘 알리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삼십년을 담배를 피웠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미친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지금 너무 고통스럽고 이제 죽어 가는데 꼭 부탁인데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말라. 그 온 몸에 호수를 꽂고 그렇게 투병생활을 하다가 그 초췌한 얼굴로 나와서 인터뷰를 하고 광고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흡연이 나쁘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알고 있어도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흡연을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짧은 세상 뭐 못하는 것이 그렇게 많나. 피우고 싶을 때 피고 남들보다 한 2-3년 먼저 죽으면, 그런데 2-3년을 먼저 죽을지 20-30년을 먼저 죽을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아직 죽음에 도달하지 않았을 때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지 막상 죽음의 칼끝이 자기의 목을 겨누고 있을 때 그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그렇게 흡연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던 날들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담배를 피면서 누리게 된 그 즐거움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흡연이 나쁘다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그를 흡연의 습관에서 돌이켜 서지 못하게 합니다. 나쁘다는 사실을 알지만 나쁘다는 사실을 안 방식은 매우 연약한 방식으로 안 것이고 이미 담배가 인에 박혀서 담배를 요구하는 자신의 몸의 경향상은 매우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이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죄가 역사하는 것보다도 더 강력한 방식으로 죄가 죄라는 사실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신자라고 하더라도 그 죄를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는 죄를 이렇게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이것은 죄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을 예전과 같은 느낌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을 발견하는 그런 느낌으로 탁 들어오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가져다주는 첫 번째 효과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좋은 동리 사람이 이사를 왔습니다. 매일 어울려서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고, 그리고 같이 저녁도 먹고, 볼도 차고, 마실 도 오고가고 그렇게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우연히 새로 이사 온 사람의 과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요즘에 화제가 되고 있는 것처럼 연쇄 살인범입니다. 들켰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 사람은 평일처럼 똑같이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웃으면서 나타나서 장기나 한판 둡시다. 그러는데 그를 보는 순간 그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인식하고 그제도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인식했을 때 똑같은 모습으로 봤지만 오늘 보는 느낌은 어제, 그제, 그전 날 보던 그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효과가 어디서 나타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간절히 드릴 때 그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간절히 드릴 때 그때에 거기에서 비로소 죄라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그런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럼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안 하고 살면 어떻게 됩니까? 입 아프게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암 덩어리가 자라면서 살쪘다고 만지면서 자랑스러워하는 그렇게 살아가는 형극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얼마나 영적으로 깊은 사람이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남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죄를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미워하는가.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지속되면 두 번째는 죄에 대한 정당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단속적인데 무슨 뜻인가 하면 간헐적인 느낌을 갖다가 그것들이 계속 깊은 기도로 들어가면 그 다음에 지속성이 있게 됩니다. 지속적으로 죄에 대한 정당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신자가 이미 죄에 의해서 속고 있을 때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죄에 대한 부당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죄에 대해서 미워하게 되고 죄가 결국 몰고 올 파국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모두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이 죄가 우리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는가 하고 그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결정을 해야지 되는데 죄에 이미 속임을 당하고 있거나 혹은 죄의 지배아래 있을 때는 이런 정당한 판단을 못 내리고 죄에 대해서 부당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죄는 미워하고 오히려 의는 사랑하는 악을 멀리하고 참된 것에 속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죄에 대해서는 혐오하는 감정을 의에 대해서는 갈망하고 목마르고 주린 마음을 갖고 악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선에 대해서는 그것을 간절히 추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죄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정당한 감정입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기 전까지는 부당한 감정을 갖습니다. 죄를 사랑하는 감정을 곧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이라고 하는 청교도가 말하기를 신자가 양심에 꺼리 끼는 죄를 지을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을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다.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을 더 실감나는 표현으로 바꾸어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신자가 양심을 거슬려서라도 죄에 속은 상태에서라도 신자가 양심을 거슬려서 죄를 짓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침을 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정면도전입니다. 왜냐하면 그 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적의이고 그리고 반감이고 대적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적대하는 그 실체인 그 죄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가 죄와 한판이 되어서 하나님을 미워한다고 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죄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것입니까? 죄는 마지막에 무엇을 가져다줍니까? 잠시 그의 육체를 즐겁게 하지만 죄의 마지막은 우리를 끌고 가고자 하는 것은 욕심을 잉태케 해서 죄를 낳게 하고 죄를 장성하도록 성장시켜서 마지막에는 우리를 하나님이 없는 사망의 삶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것이 죄의 냉혹한 추이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 것이 죄인 반면에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얽매인 죄 가운데 용서하시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그 죄에서 건져주시고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억압과 죄의 궤계로부터 풀어주어서 그의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주고 신분의 자유를 주어서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과 영생을 누리며 생명의 빛 가운데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미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도 죄는 하나님에 대해서 부당한 감정을 갖게 하고 죄에 대해서 부당한 감정을 갖게 합니다. 그가 기도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는 이런 것들이 공평하게 그에게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교만하고 그리고 그의 삶은 마음에 깊은 실림이 없는 깨달음이 없는 영혼의 어두움 가운데서 묶인 삶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사회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저 혼자 조용히 있고 싶다고 말하지만 영원히 혼자 있으라고 그러면 그것은 휴식이 아니라 그것은 형벌입니다. 아무리 경치가 좋은 곳에서도 아무도 없이 혼자 외톨박이로 버려진다고 하는 것은 형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울려서 교회생활을 하다가 보면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 자기의 영혼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 그런 것들이 교회생활에 동기가 되었는데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면서 그러다가 보면 그런 것 없이도 교회생활을 재미있게 할 수 있습니다. 와서 매일 어울려 다니면서 밥 먹고, 공 차러 다니면서 여기서야 뭐 그런 일이 없겠지만 몰려 앉아서 심지어는 고스톱이나 치고 말이지 골프나 치러 함께 몰려다니고 그렇게 하면서 살면 그것도 재미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교회밖에 모릅니다. 그렇게 해야 사람이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교회밖에 모르고 형제자매가 더 어울려 잘하는데 그것은 좋은 표현이고 신앙 없이 개떼처럼 몰려다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거기 모여앉아서 사교집단처럼 거기서 노라리나 하라고 교회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의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자신이 너무나 부패하고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한곳에 모으시고 목자를 보내시고 그들에게 진리를 주시고 어두움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빛을 주시고 목양을 받게 하십니다. 그 속에서 진리를 알고 하나님 앞에 깊이 변화되어가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서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 죄와 더불어 싸우고 그리고 존재와 삶이 하나님 앞에 거룩해져서 그래서 우리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신령하고 영적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게 마음을 바치는 일이 없습니다.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말 심령을 다 바쳐서 매달리는 이런 기도가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마음을 바쳐서 기도하십니까?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십니까? 이런 기도 속에서 비로소 아주 분명하게 죄에 정당한 감정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렇게 마음을 드려서 기도할 때 비로소 죄의 비참한 결과와 그리고 그 죄를 떨쳐버리고 싶어도 떨쳐버릴 수 없도록 자기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는 죄의 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상한 공식이 성립하게 되는데 거룩하고 진실해지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일수록 죄의 힘을 강력하게 느끼고 그 죄의 비참한 결과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 죄의 힘을 강력하게 느낍니다.
자, 여름에 개울가에 가면 거의 흐르지 않는 것 같은 호수처럼 잔잔한 개울도 있지만 꽤 빨리 물살이 흘러내리는 그런 개울도 있습니다. 그런 개울에서는 수영하기가 참 좋습니다. 그냥 물위에 벌렁 누워서 두 손 두발을 버둥거리면 그러면 빨리 흐르는 물을 따라서 떠내려갑니다. 그렇게 떠내려가고 있는 동안에는 기분 좋게 흘러갈 뿐이지 이 시냇물이 얼마나 강한 힘으로 나를 하류 쪽으로 밀어낼까 하는 것을 느끼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하늘을 향해서 벌렁 누워있는 자세에서 뒤집어서 그래서 강물을 거슬려서 발을 물장구치며 손을 휘저으면서 그 강물을 거스르면서 올라가보려고 몸부림을 치면 온 힘을 다해서 몸부림을 치는데도 겨우 제 자리에 있고 조금만 힘이 들어서 물 젓기를 그치면 빠른 속도로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류 쪽으로 떠내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이 강물이 얼마나 커다란 힘으로 나를 밀어내는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죄와 더불어 먹고,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제 멋대로 살던 사람들은 죄의 힘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월요일 날도 행복하고, 화요일 날도 즐겁고, 수요일 날은 수수하게 신나고, 목요일 날은 목마르게 기분이 좋고, 금요일 날은 그저, 그러면서 매일 그냥, 그냥 살아갑니다. 그런 동안에 그의 영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마음에 깨어짐과 끊임없는 참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를 세우고 그 지식의 빛으로 자신의 온 영혼을 두루 비추는 참되고 진실한 이 인식, 이런 자기 부인과 철저하고 진실한 참회의 삶,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신 것처럼 그렇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아픔과 그 다음에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눈물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철저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정말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런 마음이 깨어짐도 없고 자기 부인도 없고 월요일 날은 월요일이라서 즐겁고, 화요일은 돈을 써서 즐겁고, 수요일 날은 맛있는 것을 먹어서 즐겁고, 목요일 날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신나고, 금요일 날은 교회에 와서 사람들과 교제하느라고 기쁘고 이렇게 거의 계속적인 만족으로 떠내려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서 영적인 참된 생명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죄와 더불어 싸우고 우리 안에 죄를 파하는 이런 능력은 신령한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해서 간절히,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를 계속 하는 동안에 비로소 전에는 죄가 주는 즐거움만 생각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죄를 따라서 순종할 때 다가오는 그 죄의 비참한 결과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해서 깊이 아파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 강력한 힘을 느끼게 됩니다. 왜 기도 자체가 자기 안에 이미 일정한 경향성이 되어서 강력하게 흐르고 있는 그 죄를 거스르면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렇게 거스르면서 살려고 몸부림친 이 사람 속에는 이미 그 죄의 힘이 강력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제 멋대로 살고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결하게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얼마나 소망이 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세상을 적절하게 미워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네 번째로는 그런 마음을 드리는 깊은 기도 속에서 결국 그런 죄의 비참과 죄의 위대한 힘을 경험했는데도 자기를 구할 수 없는 무능을 절대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 같은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은 내게 있으나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저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바울이 아주 특별하고 깜짝 놀란 죄에 빠졌기 때문에 이렇게 절망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깊이 마음을 바쳐서 기도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애쓰고 나니까 죄가 객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자기를 구원해놓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역사하고 있는데 자기 자신은 도저히 그 죄를 대항해서 이길 수 있는 힘은 엄청난 힘으로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고 그 세력이 매우 강력하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인식할 수없습니다. 개 줄에 매어있는 강아지가 주인이 가는 때 가까이서 주인을 졸졸 따라가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가 묶여 있다고 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시장으로 가고 있는데 자기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꺾어지듯이 낚아채어지는 자신의 고개의 목뼈를 생각할 때 그때 비로소 자신이 묶여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죄에 순종하고 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평화가 있습니다. 죄와 야합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결과로 오는 평화입니다. 그들에게는 핍박도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거나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해서 외톨이가 되거나 하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기준을 가지고 그들을 흉내 내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저히 줄 수 없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했던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향해 선포했던 베드로와 요한의 강력한 선포 같은 것들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우는 곳에서 자신도 웃고, 그들이 웃는 곳에서 자신도 웃고, 그들이 목숨을 거는 것에서 자신도 목숨을 걸고, 그들이 낙심하는 곳에서 그들이 낙심하면서 세상의 백성 중 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해서 알까요? 죄인들의 심령을 가르고 내려오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공로를 알까요? 자기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하나님의 참 사랑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 것이 있을까요? 오늘날 너무나 많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파렴치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파렴치함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구원의 공로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고 우리가 당할 형벌을 대신 당하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이 장난입니까? 이게 바겐세일의 마트에서 소비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사은품입니까? 만약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 피로 사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허탄한 것을 좇으며 이 세상 백성 중에 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없이 살다가 탐욕과 죄악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이 세상 한복판에서 죽을 것입니다. 벌래 한 마리가 밟혀죽은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인생은 허무하게 살고 죄 가운데 살면서 고통을 받겠지만 하나님 없이 살면서 당한 죄의 고통은 이후에 정하신 하나님의 심판에 비하면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구원이 장난입니까? 그러니 이 구원을 인하여 감사하지 않고 이 구원의 은혜를 마음속에 깊이 사무치게 느끼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서 안절부절 할 줄 모르면서 살아가는 뻔뻔스러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얼마나 파렴치한 존재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까?
존 플라벨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신자든지 참된 죄 죽임의 실천이 없이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왜 그럴까요? 이치를 설명할 테니까, 한동안 반복하지 않겠으니까 가슴에 잘 새기십시오. 죄는 우리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 가운에 있는 신자가 죄를 미워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설령 죄를 미워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일말에 죄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자기와 하나 된 죄를 보면서 그래서 그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몰고 올 결과를 생각하면서 죄를 죽일 때 그것은 사실은 죄를 사랑하는 자기의 옛 본성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아픕니다. 이 손이 나는 아니잖아요. 물론 남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손은 손이고 나는 아닙니다. 내 몸에 일부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칼로 찌르면 내 온 몸이 아픕니다. 똑같이 우리의 옛 본성을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죽이려고 할 때 그 아픔은 우리 온 몸에 전달됩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을 이 우두한 신자의 마음에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몸을 죽는데 내어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또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하신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누가 자신에게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기쁨으로 우리를 위한 구속의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길인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아버지께 피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을 때 그 고통은 고스란히 예수님의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존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따라서 살기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더불어 싸우고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공격하는 우리 안에 죄를 죽이려고 할 때 그 죽이는 모든 고통은 우리의 온몸과 마음에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때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 죄에 대해서 죽임을 당한 자기 자신의 고난을 보면서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당하신 그 고난의 깊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에 대한 고난의 경험이 사라진 신자의 마음 밭은 죄가 뿌려지기에 아주 좋은 마음의 밭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는 눈물이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늘 기도의 눈물과 땀 흘리는 수고가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눈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깊이, 그런데 도저히 자기를 스스로 그런 죄의 비참과 그리고 죄의 강력한 힘으로부터 자기를 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느낍니다. 왜 너무나 많이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길을 걸어 들어왔고 죄의 짐이 너무나 무겁고 그리고 죄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그래서 도저히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낼 수 없는 무능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에 이어서 신자는 자기 자신이 도저히 스스로를 구원해낼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진심으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됩니다. 가난한 마음도 이때에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그러면서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이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력으로 그 죄에서 건져낼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먼저 경험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다윗입니다.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한 다음에 그는 제사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가 없겠습니까, 양이 없겠습니까? 한 나라의 왕인데 그런데 몇 번 제사를 드려봤지만 모두 하나님이 냉정히 거절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위해서는 황소의 피와 염소와 양의 피, 그리고 그 살코기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이 기뻐하셨더라면 내가 이미 드렸을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재물을 하나님이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아니하시리라”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수천마리 황소, 피 흘리고 엎드려진 수많은 죄 없는 양보다는 죄로 가득 찬 자기의 심령을 깨트려서 하나님 앞에 깊이 통회하는 그것이 최고의 제사요, 예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령을 깨트려서 최고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할 때 기대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도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이것은 모든 짐 진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의 무거운 짐을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들만이 이 초청에 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가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비참한 죄의 결과와 그리고 이 커다란 죄의 힘으로부터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없게 만들고 그래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이제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기도를 통해서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뼈아픈 후회와 죄는 자기가 지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을 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적으로 회개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죄를 미워하고 그리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는 그런 분명한 과정이 이 회개를 구성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서도 연약해서 이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과거의 자기의 잘못한 행위에 대한 정직한 반성, 그것이 지금 미치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파괴적인 영향, 이렇게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참회하고 눈물을 흘린 다음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지 될 것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생각이 없이 모든 것을 자기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핑계되고 그리고 무조건 용서해달라고 빌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죄에서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하는 고백이 아니라 자신이 즐거워서 택한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덜어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늘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항상 자세가 거만하고 그리고 오만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정도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이키고 그리고 그 실패한 삶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정직한 결단이 현저히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가 토한 대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던 웅덩이로 다시 돌아가는 반복적인 실패가 재현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동안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가 없고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를 드리지 못한 가운데 그들이 아무리 참회의 모습을 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직한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세해진 죄의 세력도 꺾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실천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때 비로소 그는 발견된 자신의 죄에 대해서 뼈저리게 후회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생사 간에 나를 의지할 수 없고 그리고 우리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십자가의 은혜의 놀라운 감격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예수님께서 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래서 내가 마땅히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생명 버리신 예수님을 사랑해야지 되는데도 내가 이 죄를 사랑하며 살았구나. 그렇게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를 미워하고 그리고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의지하고 살아온 결과 마지막에 갖다 처박힌 곳이 죄에 지는 상황 속에 가서 자기 인생을 처박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자기를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예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싶을 때 그의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의지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늘 가깝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깊이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깊이 회개하게 될 때 그때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 답이 나왔습니다. 왜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없는지 이제 아실 것입니다. 죄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하나님에 은혜에 대한 목마름을 우리에게 가져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지금보다 먹고 살기 힘들고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난 속에 처해있을 때가 없었습니까? 왜 없었습니까?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못 나가게 만들었습니까? 고난 때문에 꺾였습니까? 고난 때문에 은혜가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은혜 아래 있을 때는 그 고난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그러면서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타는 것 같은 목마름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돈을 많이 주셔도, 좋은 집을 주시고 평화로운 환경을 주시고 그리고 나의 지위를 높이시고 육체의 건강을 주셔도 내가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시련의 풀무를 통과하고 흙탕물이 넘치는 것 같은 시험의 물 가운데로 지난다고 할지라도 은혜가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에 뭘 그렇게 많이 기대하겠습니까?
오늘 아침도 눈을 떠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이 아침이 천국에서 눈뜬 아침이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늘을 가르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타고 우리의 영혼은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음을 드려서 기도하기 전까지는 은혜가 그렇게 필요한줄 몰랐습니다. 물질이면 충분히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마음을 바치는 동안에 나로 하여금 정말 사람으로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는 자원은 세상에 속한 땅의 자원이 아니라 하늘의 자원이라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은혜와 그 사랑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면 그때 어떤 마음이 드는가 하면 전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안 들킬까? 그리고 죄를 지었어도 벌을 조금만 받고 그리고 죄의 즐거움은 많이 누려서 결국은 남는 장사를 할까? 이런 세속적인 생각을 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생기고 그 은혜를 간절히 구하다가 보면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정당하게 벌을 받고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은혜 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려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에 그 기도는 열렬해지기 시작하고 그 열렬한 기도로 죄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열렬한 기도 속에서 죄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재미있는 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죄가 우리의 생각을 먼저 속이려고 할지라도 단번에 한번 떠오르는 악한 생각이 우리의 영혼을 파고 들어와서 영혼을 초토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똑같이 한번 우리의 생각에 은혜가 스쳐간다고 할지라도 그 은혜가 단번에 영혼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를 죽여서 초토화시키고 은혜의 왕국을 재건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제 많은 죄의 속임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격렬하게 울부짖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다 해도 결국은 잠시 그런 경험이 있을 뿐이지 자신 안에 있는 죄는 여전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죽이는 진실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가공적으로나 존재하는 것이지 이미지 네이션 속에서나 있는 것이지 실제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소위 이야기하는 죄에 실패한 신자들이 신학적인 전환을 하는 것입니다. 보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제 그는 아주 비 영적인 틀에 갇혀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참다운 영혼의 회복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죽게 됩니다. 이러면서 이제 우리가 그렇게 많이 애를 쓰면서 여기까지 왔어도 결국은 마지막에 죄를 죽이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님이 하십니다. 여기서 세 가지 효과를 가져오는데 우선 첫째는 마음의 틀이 쇄신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마음이 은혜에 적합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에 적합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즐거워하고 그분을 찬송하기에 적합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이 틀들이 모두 흩어집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다시 조율됩니다. 잘 조율되었던 것들이 해체됩니다. 언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회개를 통해서 이 마음이 다시 튜닝 되는 것입니다. 잘 맞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쇄신하는 놀라운 역사가 이제 실제로 열렬한 기도 속에서 성령님이 죄를 죽이시는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총명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총명은 생각이 참된 진리와 은혜의 빛 가운데 있을 때에 총명도 그 깨끗한 생각을 사용해서 이렇게 할 때 그럴 때 참으로 올바른 총명이 되는 것입니다. 비유가 될는지 모르지만 이것입니다. 좋은 통으로 두부를 써야지만 두부가 맛있고 깨끗한 두부가 되는 것처럼 생각이라는 콩이 깨끗하게 잘 순결하게 다듬어져있을 때 그것을 가지고 두부라고 하는 총명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아주 깨끗하고 아주 먹기 좋은 두부가 되는 것처럼 이 총명은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이렇게 가지고 정리를 해서 적용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썩은 콩으로 두부를 쓰면 썩은 두부가 됩니다.
그런데 이미 생각이 부패해져 있으면 그것을 아무리 자기에게 적용하려고 해도 부패한 총명이 됩니다. 총명이 부패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판단을 못하는 것입니다. 판단이 흐려지게 됩니다. 선악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영혼이 변화를 받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신자의 의무입니다. 총명을 회복하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때 비로소 생각이 제 자리로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제일 마지막에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이것이 제일먼저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그런데 맨 먼저 안 하는가. 맨 먼저 이야기를 하면 답이 나오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죽어야지, 시작하자마자 죽으면 재미없습니다. 이게 제일먼저 그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려서 간절히 기도할 때 그때 이 생각에서부터 먼저 죄의 영향이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잠깐 정신을 잃었구나. 이것이 아니다. 생각이 정돈되는 것입니다. 총명을 회복하고 굳어진 마음들이 다시 풀어지면서 그러면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 좋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이런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기도가 지속적일 때 속인 죄의 역사를 파하고 생각은 보호됩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마음을 드리는 이런 기도가 지속적으로 실천되어서 그래서 언제 우리를 속이려고 하는 죄의 공격이 밀려온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을 능히 파악해내고 그리고 그것들을 여지없이 은혜의 능력으로 퇴치하고 그래서 마음을 보호하고 총명을 보호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쉽게 달라붙으려고 하는 이 죄의 유혹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배를 보면 배가 항해를 하는데 배에 칠하는 페인트는 매우 특수한 페인트입니다. 그 중에서도 물에 잠기는 부분을 칠하는 페인트는 더 특수한 페인트입니다. 어떤 점에서 특수한 페인트일까요? 만약에 보통 페인트로 칠하면 거기에 계속 한번 물속에 들어가면 해체될 때까지 계속 물속에 있는 것인데 그 배에 만약에 거기에 계속해서 해초 같은 것들이 달라붙는다고 할 것 같으면 속력에도 영향을 주고 안전에도 영향을 줄 것입니다. 거기에 특수한 보료를 칠해서 그런 것들이 도저히 붙어서 살 수 없도록 그렇게 칠해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더러운 죄의 수초들이 끊임없이 성화의 바다를 항해하고자 할 때 끊임없이 달라붙으려고 하는 지점이 생각이라는 뱃머리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특수 칠이 되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은 끊임없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림으로서 그 죄를 경험하게 하고 죄의 결과를 알고 죄를 미워하는 이런 모든 판단들이 선명하게 살아있을 때 그때에 들어온 죄는 파괴되고 들어오려고 하는 모든 죄들은 그 기도가 좌절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들이 지속적으로 속이는 죄의 역사를 파하고 성화의 항진을 계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이 큰사랑과 은혜를 우리가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늘 이 사랑에 빚진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주님 앞에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하고 열렬한 기도로 무장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6. 묵상과 기도의 유익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지난 시간에는 마음을 바치는 진실한 기도생활이 어떻게 죄에 속는 역사를 타파할 수 있는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전시간은 수련회 마지막 날 말씀 시간이었고 그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에 감화를 주고 우리의 마음에 있는 말씀의 감화를 통해서 어떻게 죄의 속임이 백일하에 드러내고 그 역사가 타파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런 묵상과 특별히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은밀한 개인기도 속에서 누리는 죄의 속임을 이기는 그 효과, 깊은 기도를 통해서 얻게 되는 그 유익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고 다음 시간이 될 것 같은데 다음 시간에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 대한 묵상과 기도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가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진심으로 기도할 때 얻는 첫 번째 유익은 자신과 죄를 정직하게 살피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효력이라고 하는 것은 첫 번째가 그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이 모든 것들을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면서 이 영혼의 모든 처지와 형편들을 탐사하는 것, 이것이 기도가 주는 첫 번째 유익이고 기도는 제일먼저 거기에 고정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먼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먼저 받아들여지기 전에 기도자인 우리 자신이 먼저 받아들여질 때 그때 우리 기도가 하나님 앞에 잘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의 존재와 삶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불평하기를 누구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누구 기도는 덜 들어주시고 마치 하나님 앞에 차별대우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사실입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도 하루 종일 설교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한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이스라엘에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한 사람이 기도했다고는 믿을 수는 없습니다. 농부들이 제일먼저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엘리야 한 사람이 기도했기 때문에 하늘은 닫혔고 한 사람이 기도했기 때문에 하늘이 열려서 어떤 주석가는 말하기를 하늘을 잠근 다음에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그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그 열쇠로 하늘을 연 사람이라고 엘리야의 별명을 붙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면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음이라.” 엘리야는 그 패역한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차별대우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 만한 기도자로 사는 삶 자체가 사실은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그 마지막 목표하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이 먼저 받아들여질 때 기도가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무슨 하나님이 무당도 아니고 말만 청산유수로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말에 속아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불쾌하면 그 사람의 말하는 것, 쓴 글, 그 사람의 하는 행동, 심지어는 귓가에 들리는 그 사람의 숨소리도 불쾌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기도할 때 제일먼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부복시키고 자기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는 가장 미천하고 더러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공로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진정한 기도의 정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가 시작되면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은 곰곰이 하나님 앞에 침묵 가운데 엎드려있는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질병, 그 다음에 위험과 고통을 쭉 살피면서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기도의 제목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게 첫 번째 기도입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기도할 때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어떨 때는 육신의 외적인 필요를 위해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젠가 누가 저에게 그랬습니다. 자기가 요즘 기도했는데 그동안에 내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서 살았으니까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헌신 좀 하시라고, 그러니까 귀엽습니다. 애교입니다.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망 말이지만 귀엽습니다. 그런데 그 귀여운 것도 아무나 따라한다고 귀여운 것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는 귀엽습니다.
아까도 예배가 끝나고 애들은 내가 자기 개개인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TV에서 보니까 꼭 탈렌트를 보는 눈빛입니다. 저기서 목사님, 그리고 막 달려옵니다. 한 아이를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더니 그 애가 계속 꽁무니를 따라오면서 목사님, 나 여기 있어요. 그런데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안아주면서 예쁘다, 그랬습니다. 만약에 한 50쯤 된 자매님이 목사님, 나 여기 있어요. 그러면 내가 그렇게 합니다. 침해 걸릴 나이는 아닌데 왜 저럴까? 어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째든 영혼의 상태를 쭉 살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을 농락하는 기도입니다.
시편 42편에서 시인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망명의 길에 올라서 제일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영혼이 곤궁한 형편을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내 영혼이 목마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기도는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가로막는 요인이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판에 박힌 어구의 의미 없는 반복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이미 그 앞에 것은 아무 생각이 없이 지나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참되고 살아있는 기도의 커다란 적입니다. 그렇게 해서 안 됩니다. 빨리 안 해도 괜찮습니다. 말을 많이 해야지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여야 합니다. 틀에 박힌 기도로 막 반복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학살을 많이 당하고 있는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기도할 때 그 기도자의 마음속에 있는 대부분의 소망은 영원히 있사옵니다. 까지 하고 빨리 집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말하기를 사도 시대 이례 최고의 순교자는 주기도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많은 순교자는 적의 손에 죽었지만 주기도문은 신자의 손에 의해서 살해당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중언부언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물리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중언부언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같은 말로 세 번 기도하십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기도를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 안에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기도, 그것이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깊이 실려 있지 않은 채 어떤 어휘들이 계속 만들어져서 나아갈 때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또 하나는 이런 기도도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에 마음이 실리기는 실리는데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실린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여 마음이 실렸을 때 그런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이 목소리를 들으시는 유일한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 이 기도를 봉헌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내 기도를 듣고 누가 깨달았고 누가 감동을 받고 심지어는 나 자신에 대해서 재평가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드린 기도는 모두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성찰하는 기도의 작용을 막는 또 하나의 잘못된 기도는 육적인 필요에만 과도하게 민감하고 영혼의 필요를 매우 과소평가하는 기도의 태도, 이런 것들은 기도 속에서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정직하게 살피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정신을 못 차리고 살다가 어느 순간에 커다란 육신적이 어려움을 만나서 주님 앞에 도움 좀 구하려고 갔다가 그렇게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영혼을 보게 되고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숙한 신자가 늘 자기가 그렇게 기도하면 결과적으로 저렇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스스로 무지함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우리들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육신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지만 그 기도가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우리 안에 우러나오는 기도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육신적인 필요만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행위는 사실은 믿음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인간적인 고집이고 그러다가 결국 호되게 맞아서 허리가 부러진 사람이 있는데 야곱이라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징계입니다.
우리들이 육신적인 모든 것들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든지 하나님은 필요 없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헤아리는 일도 필요 없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그것을 타내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식의 기도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살펴서 죄의 속이는 역사를 타파하게 하는 기도의 유익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때로는 외적으로 받는 고통이나 필요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열렬하고 간절하게 매달릴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기도일 수가 없고 단지 육적인 필요에 의한 간절한 심장의 필요가 만들어내는 외적인 열렬함일 뿐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의 영혼에 영향을 끼쳐서 그를 거룩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내리시는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심으로서 받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면서 내려주시는 영적 축복, 혹은 심령의 축복 spirit blessing은 모든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서 오는 모든 축복보다 탁월합니다. 우선 그 기원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터치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점에서 우월하고, 두 번째는 그것이 그의 영혼 속에 오래도록 남아서 그의 영혼의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우월하고, 세 번째는 그렇게 하나님이 어루만지시는 과정을 통해서 그에게 은혜와 능력이 부어진다는 점에서 일반 섭리를 통해서 내려오는 그 축복보다 탁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그런 영적 축복은 그를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일반섭리를 통해서 주어지는 그 축복보다 훨씬 탁월하다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커다란 요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영혼의 필요를 정직하게 살피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기도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먹고 입고 사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우리가 희망이 없는 존재들이며 주님의 전적인 도우심이 없으면 한순간도 살수 없는 존재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쌀이 떨어져도 그런 생각은 잘 안 듭니다. 솔직히 육적인 삶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 끼, 한 끼를 하나님을 의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가난하게 사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말 우리가 주 없이 살수 없는 존재이고 한순간도 하나님의 그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지탱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어디서 깨달을 수 있는가 하면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상태를 쭉 살피면서 거기 있는 것을 이렇게 헤아리면서 주님 앞에 기도할 때 깨닫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렇게 꼼꼼히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헤아렸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자신의 영혼의 중대한 질병이 있고 아픈 데가 있고 그리고 죄에 의해서 공격을 받는 것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영혼에 이런 상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의해서 이렇게 집요하게 공격을 받고 있고 제 영혼은 곤고합니다. 그게 사실 얼마나 웃기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하는 게, 왜? 그것을 모르면 하나님이실 수가 있습니까? 다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런데 성경의 여러 곳을 보면 항상 하나님이 영혼을 고치시는 놀라운 역사는 언제 일어나는가 하면 저희가 부르짖으매, 저희가 간구하여 이르기를, 저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이럴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이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영혼의 형편을 우리가 알기 전에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의 영혼의 모든 형편을 헤아린 다음에 발견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 영혼이 이렇게 죄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내 안에 많은 죄가 있고 나는 곤고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 자체가, 고백의 과정 안에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쇄신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모두 아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모두 알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아뢰는 과정, 그 고백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쇄신되는 작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기 전에도 원래 비참했습니다. 그 영혼이 그 영혼이니까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것을 자기가 봤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부복한 마음으로 하나님 내 영혼은 곤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자신의 곤고한 영혼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과 기도하지 않았을 때 자신의 마음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이미 벌써 그런 고백의 과정을 통해서 이 마음속에 쇄신의 작용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는 모두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성화되어야 할 당사자인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실어서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때에 우리의 영혼을 쭉 살핀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런 죄를 보게 만들어주시고 죄가 남긴 상처의 고통과 아픔들을 보게 해주셔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도움의 필요를 면밀하게 느끼게 해주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 그 빛을 쭉 비추셔서 그래서 우리를 각성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빛을 깨닫게 되고 그 빛을 통해서 그 빛에 비추는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만들어주십니다. 보게 만들어주셨을 때는 그 발견된 것을 따라서 기도하면 그 기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 하기를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조명이라고 부르는데 illumination입니다. 이런 그 빛을 비추셔서 우리를 보게 만들어주시는 이 illumination이 그 성령의 작용이기는 하지만 성령의 빛에 의해서 발견된 그 illumination 결과가 제일먼저 전달되는 것은 어딘가 하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이 사람이 물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좀 없어도 성령께서 밝히 비추어주셔서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헤아리게 만들어주시면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내면의 구조, 영혼의 작용, 그 영혼에 깃들어있는 은혜의 본질, 죄와의 관계에서 은혜의 작용과 역사, 죄의 성질과 그의 역사, 그리고 그의 본질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많은 정리된 지성적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성령이 번쩍 하고 비추어서 전송해주실 때 팍팍 하면서 수많은 깨달음들이 막 꼬리를 물고 떠오릅니다.
그런데 왜 공부를 안 하십니까? 진짜 웃으면서 듣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책도 안 읽고 테프도 안 듣고 달랑 주일날 와서 덜렁덜렁 거리고 듣고 가서 점심이나 한 끼 먹고 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부하지 않으면 기껏해야 하류대학에 들어가지만 신자가 되어서 공부를 안 하면 천국에 못갑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번쩍 보여주셔서 깨닫게 되었을 때 여기 아무것도 없이 생각이 하얀 사람은 겨우 한 가지도 깨달을까 말까인데 말씀이 정리된 사람은 하나 성령이 비추어주시면 전달이 되면서 그 사람 전체를 일으켜 세우는 엄청난 깨달음들이 옵니다.
이해를 못해서 눈만 껌벅이는 사람을 위해서 한 가지 더 비근한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우주 탐사선을 쏘아서 수성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가는 동안에 그리고 가서 어마어마한 수십만 장의 사진을 찍어서 전송합니다. 우리보고 읽어보라고 그러면 애들이 무슨 모래 장난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는 한 장 한 장의 그 사진이 놀라운 의미를 가진 것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우주의 비밀을 푸는 한 장 한 장이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의 능력은 사진을 전송해주는 우주선은 동일하지만 읽어내는 사람의 머릿속에 무슨 얼개가 있는가에 따라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계속 뜻을 세우고 집요하게 그래서 기독교 사상의 얼개가 확고하게 서야 합니다. 그것을 누구를 위해서 해야 하는가 하면 자기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도서관을 만들어나도 오지도 않고 말이지, 내가 연말에 가서 도서관 이용하지 않은 사람의 명단을 공개할 것입니다. 한번도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없게,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성령의 조명하심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럼 됐네. 그럼 성령님이 하시면 되겠네. 비추소서,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이 성령님이 우리에게 그 빛을 비추어서 우리를 보게 하시는 것이 무슨 성령님이 힘드시겠습니까, 피곤하시겠습니까? 영의 작용인데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령님이 아무에게나 그렇게 비추어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 살게 나두십니다. 그럼 언제 비추시는가? 마음을 다 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비추십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당연히 성화의 일반적인 원리가 나옵니다. god works not without us and against us but in us and with us 하나님이 역사하시되 우리 밖에서 우리를 거슬려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곤궁한 영혼의 상태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어느 날 단란주점에서 성령이 역사하셔서 자신의 연혼의 곤궁함을 확 보여주시는 경우가 없다고는 말할 수없지만 일반적으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비록 죄에 지고 실패하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엎드려 마음이 낮아질 대로 낮아졌습니다. 정말 티끌과 같은 피조물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사랑해주셔서 여기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 영혼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러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 내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십시오. 하나님, 왜 이렇게 곤고합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성령의 빛을 비추셔서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하는 일은 매우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언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안 일어나는 적이 별로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왜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수천 만분지의 일의 확률에 생명을 거는지, 그리고는 막 소설에서나 한번 과장되어서 나올까 말까한 회심의 경험이나 고대하고 사는지. 쓰레기와 같은 생각입니다. 그 원리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빛이 비춥니다. 그때 자기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자신의 안에 있는 죄를 보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자신의 참된 하나님과 자신과의 현주소가 어딘가를 보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거의 이런 생각을 안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단세포동물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뜨거우면 움츠리고, 좋으면 해해거리고, 슬프면 울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마음을 바치는 이 기도는 오래해야 합니다. 공중전화를 거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래 해야지 됩니다. 일단은 오래 하는 시간이 있고 그 다음에 짤막하게 하는 그런 시간은 부차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그렇게 실천할 때 이 죄가 어떻게 감염되었고 그리고 지금 죄가 내 마음 어디에 숨어있다고 하는 것들을 성령의 빛으로 찾아내게 만들어줍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단순히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앞에 얻어가지면서 사는 그런 식량배급티켓 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의 기도하지 않는 거의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나쁜 사람입니다. 베드 크리스천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베드 크리스천입니다. 그런 사람하고 사귀면 안 됩니다. 놀지도 마십시오. 기도는 이처럼 우리를 속이는 죄의 역사 앞에서 자신과 자신의 죄를 살피게 하는 놀라운 영적 능력입니다.
두 번째는 이런 기도는 죄를 깊이 혐오하게 만들어주는 탁월한 힘이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충분히 속이고 역사하는 이유는 우리가 죄와 친근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한 나라에서 어느 한 나라로 간첩을 파송했다면 제일먼저 파송된 간첩이 남의 나라에 가서 제일먼저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미사일을 수입하고 권총을 닦는 일을 먼저 하는 게 아니라 동리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친하게 사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흉금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을, 물론 자기는 안 터놓지만 흉금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놓고 그 인맥을 사람들을 포섭해서 간첩을 만들고 그 다음에 파송된 간첩을 그 인맥을 통해서 숨겨주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너무 단순한 짓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죄가 우리에게 하는 일이 똑같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나서 깊이 깨닫고 가슴을 치면서 아, 내가 이 말씀을 몰랐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는구나. 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합니다. 마음깊이 녹아지면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는 이 마음이 무엇을 인식하는 틀 자체가 아주 훌륭하게 정돈이 되어서 죄를 잘 발견할 수 있는 틀이 됩니다. 그런데 말씀의 그런 은혜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기도를 안 합니다. 이렇게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이 마음의 틀 자체가 죄를 인식하기 부적합한 틀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에 이미 벌써 그 말씀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동안 죄의 속이는 역사를 간파하지 못하게 되었고 마음을 쏟아 붓는 그 기도가 없기 때문에 이미 들어와서 내 안에 작용하고 있는 죄를 현실적으로 찾아내기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인식하기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으면서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마음을 쏟아놓는 과정을 통해서 이 마음의 틀들이 쇄신이 되는 것입니다. 쇄신이 되면서 인식할 수 없었던 사물들을 죄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식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성령이 역사하시게 되면 인식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죄를 미워하게 만드는 강한 역사를 불러일으켜주십니다. 그 방식이 무엇인가 하면 죄 자체는 사실 보이는 게 아닙니다. 진짜 패역하게 나쁜 짓 하면서 살던 사람을 죽은 다음에 해부해본다면 가슴에서 먹물이 쏟아집니까? 진짜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살고 은혜 받으면서 산 사람은 죽어서 가슴을 가르면 하얀 물이 나옵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는 영적인 것입니다. 실제 자체가 육신이 살아있는 그 안에 계속 깃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 죄가 다른 사람에게 전염병처럼 옮아가나. 작용하던 기관이 멈추면 아무리 후후 불어도 피리를 빼버리면 바람이 없어집니다. 소리가 안 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와 함께 살다가 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게 타락의 결과가 무서운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째든 그런데 무엇 때문인가 하면 성령이 죄를 조명해주시면죄만 조명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도 조명해주십니다.
셋집에서 죽어라고 고생하면서 살다가 24평 아파트 새것은 아니지만 꿈같이 하나 샀습니다. 대출도 얻고 그래서 사서 갔는데 이제 내일은 목사님이 심방도 오시기로 했고 생전 처음 집을 마련해보니까 이것저것 떼어내고 새것으로 했습니다. 싱크대도 주인이 들여 놓은 지 얼마 안 된 새것이어서 기분 좋게 썼습니다. 그래서 이제 막 쓸고 닦고 문지르고 꽃을 꽂아놓고 장만을 했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조금씩 나서 뭘까 그래도 찬송가 테프를 틀어놓고 열심히 닦고 노력했는데 그런데 청소기를 같고 막 돌리다가 싱크대 밑에 보면 판자대기 하나를 열었다 뗐다 하는 것을 툭 건드리니까 그게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냄새가 물씬 나는데 며칠동안 맡았던 그 냄새와 같은 냄새입니다. 보니까 이만한 쥐가 죽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지어낸 이야기인데 뭘 인상까지 쓰고 그러십니까? 사실 이야기를 할 때는 감동도 안 받고 그러면서, 쥐가 이만한 것이 죽어있고 언제 죽었는지 구더기가 하얗게 끼어있어 줄줄 기어 나옵니다. 그때 이 집에 대해서 좋았던 마음이 단번에 달아납니다. 어떻게 할까요?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발견을 했는데 바쁜데 그러면서 다시 뚜껑을 덮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은 우선 남편을 찾는 일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불러서 저것 좀 하라고 해서 그 쥐를 꺼내고 그 정도가지고 만족하겠습니까? 그 정도가 아니라 락스를 뿌려서 깨끗이 닦아내고 아마 제 성격 같으면 싱크대를 뜯어내서 다 들어내고 그 다음에 집안 전체를 다시 청소할 것입니다. 아니면 이참에 남이 쓰고 가던 것 더러우니까 갖다버리고 이것보다 품질이 안 좋아도 되니까 깨끗한 것 쓰자. 그리고 새것을 갖다가 놓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을 보면서 강한 혐오감을 생기기 때문입니다.
죄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뭐는 보이는가 하면 죄가 만들어낸 결과는 매일 보고 느끼고 만지고 심지어는 그 결과에 갇혀서 살아가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어떻게 봅니까? 바람을 볼 수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죄가 가만히 있지를 않고 작용을 합니다. 작용하는 것을 보면서 압니다. 바람이 보이지가 않는데 흔들립니다. 아, 바람이 있구나. 파악이 되고 느껴집니다. 서늘한 것이, 바람이 지나가는구나. 하고 느껴지듯이 죄는 가만히 있지 않고 작용을 합니다. 그 작용을 보면서 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죄와 정욕을 자꾸 혼돈합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명쾌하게 딱 한번만 가르쳐주고 넘어 갈 테니까 잘 메모해났다가 정신 차려서 도움을 받도록 하십시오.
이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영적인 것입니다. 이 죄 자체는 우리 영혼 안에 거합니다. 이 죄는 보편적 경향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슬려서 주님을 대적하며 그러면서 살고자 하는 보편적인 경향성입니다. 그리고 이 보편적인 경향성은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의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고, 마음을 갖고 먹고 마시는 이 모든 것이 다 이게 죄입니다. 죄는 전체적인, 총체적인 경향성입니다. 그런데 정욕은 총체적이지 않고 개별적입니다.
자.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에 대한 탐심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물질을 누려야겠다는 탐심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들 때문에 사람들과 부딪히고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성적으로 욕망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일에 있어서는 이것은 부도덕하다. 하나님이 이것은 싫어하신다. 그러면 돈을 조금 벌더라도 나쁜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해서라도 나는 만족을 해야지 되겠다는 강한 욕망을 갖습니다. 이게 정욕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에도 욕심이 없고 성적인데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뭐 그렇게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비정상적인 욕심을 갖고 그렇게 패가망신하고 그러는가 하면서 그것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게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일에는 강하게 탐심이 강하게 작용을 합니다. 그것도 정욕입니다. 세상 사랑의 정욕인데 그런데 이런 것들도 결국 무엇인가 하면 총체적이지 않고 개별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욕망이 있다. 정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면 모든 것에 대해서 다 똑같은 정욕으로 차 있는 것은 압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정욕은 항상 역사하시는 방식이 개별적으로 역사합니다. 케이스바이 케이스로 역사합니다. 거기에는 그 사람의 기질이나 이런 것들도 많이 작용합니다, 그런데 일단 어떻든지 간에 더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이런 것에 있어서 정욕을 느끼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것은 잘못이지, 그런데 이것을 개별적으로 정욕이 역사할 때는 이게 뒤에서 죄가 조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욕으로 역사할 때는 이거 하나만 눈에 가득 들어와서 마음을 꽉 채워버리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과일이 그것밖에 없었겠습니까? 선악과밖에, 하고 많은 게 다 과일인데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들어오고 딱 그것 하나만 먹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속에 꽉 차있는 것입니다. 소원이 강력하게 차니까 모든 정보가 왜곡되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먹을 수 있는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는 것입니다. 정욕입니다. 정욕이 그렇게 역사를 해서 딱 범죄를 하고 정욕을 꿀꺽 삼키면 개별적인 정욕에 있어서 실패를 합니다. 그러면 그 실패하는 즉시 이 속에 죄의 힘이 불끈하고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옛날에 두 얼굴의 사나이에 보면 열 받으면 헐크가 화나면 옷도 찢어지고 청바지는 절대 안 찢어지고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되듯이 개별적으로 역사하는 정욕을 통해서 성공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 불끈하고 이 죄가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저 사람을 더 조정하기 좋은 강한 힘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정욕에 계속 빠지거나 혹은 같은 죄를 계속 짓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계속해서 복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죄는 강한 힘을 점점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를 지으니까 결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은혜의 공급은 차단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전투상황에서 두 나라 군대가 싸웠는데 오천 명, 오천 명이 싸웁니다. 그런데 한 나라 군대는 달랑 그것입니다. 모든 보급로가 다 차단되었습니다. 육해공군 모두가 차단되었고 탄약도 이제 더 이상 안 오고 밥도 물도 모든 것과 인원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쪽 한 군대는 같은 오천 명이지만 무제한으로 열립니다. 심지어는 위문품까지 날라 옵니다. 공연단까지 옵니다. 군대가 모자란다고 그러니까 밥이 모자란다고 하니까 수없이 밥이며 고기며 날라 오고 물이 날라 오고 군인이 모자란다고 그러니까 막 하늘에서 새까맣게 낙하산을 타고 군인들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그 전쟁은 누가 이기겠습니까? 사기문제입니다. 새까맣게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쪽 군대는 하얗게 질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강물에 떠내려 오는 먹다버린 과자봉지를 수없이 보면서 이쪽 군대는 질리는 것입니다. 자기는 지금 밥도 없는데 여기는 먹다 남은 과자봉지며 심지어는 양치질한 가글 통까지 내려오면 졸도합니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설교할 때 시간이 없어서 다 못했지만 정욕이 죄의 먹이가 된다고 하는 의미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개별적으로 그렇게 죄가 역사합니다. 그러니까 죄는 죄고 정욕은 정욕입니다. 죄는 그렇게 역사합니다. 역사해서 그 다음에 이제 그를 죄로 하여금 불끈불끈 힘이 솟게 만듭니다. 그런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실감이 나시지 않으십니까? 아주 정확하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거기까지만 하고 이제 성령이 조명을 하시면 선명하게 죄를 보게 될 뿐만 아니라 죄를 본다는 말이 실제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역사하고 간 그 흔적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유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왜 못 봤는가. 그것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자체가 접근할 때 죄는 항상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심지어는 원죄의 경우에는 자연에 대해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는데 이것을 모두 다 소개하면서 그리고 죄가 다가오면 죄를 선택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 약 한 알만 드시면 놀라운 효과가 있습니다. 자매님, 75킬로가 45킬로로 짝 빠지고 체지방이 빠져나갑니다. 한 알만 먹고 일주일만 기다리시면 아무 운동이나 식이요법이 없이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속으로 막 계산을 할 것입니다. 저것 비쌀 것이야. 그런데 오백 원밖에 안 합니다. 그러면 당장 사고 싶은데 그런데 단 먹고 그 다음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산 사람도 더러는 있지만 대부분은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먹겠습니까, 안 먹겠습니까? 기가 막힌 비유입니다. 지금 막 생각이 났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안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을 사겠습니까, 안 사겠습니까? 절대 안 삽니다. 그러니까 죄는 그렇게 해서는 자기를 팔아먹을 수가 없으니까 숨기는 것입니다. 숨기고 죄를 선택하므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과대 포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불이익을 손해를 감출 수 있으면 완전히 감추고 저 사람이 이미 지성이 있기 때문에 감출 수 없을 때는 왜곡해서 여러 가지 증거를 들이밀어서 이 즐거움과 유익에 있어서는 경험해야 할 그 결과의 작용이 매우 작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이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파괴적인 결과가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데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자기를 살피면서 정직하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을 받을 기회가 없었고 그 결과에 대해서 정직하게 인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언제 한번 교통사고에 대해서 얘기가 나오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6살 된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는데 죽은 게 아니라 군인이었는데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10년 째 식물인간으로 있는데 이 여자 아이가 16살이 되었습니다. 기자가 와서 인터뷰를 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사고를 낸 사람이 자기가 사고를 낸 것을 정직하게 말하고 그리고 사고처리를 해서 우리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셔서 저렇게 치료를 받게 하고 보험에 모든 것을 처리해서 우리를 살게 했다면 나이는 어리지만 벌써 그 사람을 용서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그 사람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군대에서 퇴직금을 받아서 다 날린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지금은 피해자인 우리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셔서 그 사람을 용서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옆에 있는 나는 절대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 여자 아이는 아버지를 교통사고를 내고 도망간 그 범인을 본 적도 없고 어디 사는지 모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벌써 10년 동안 죽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데 계속 그 사람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기 때문입니까? 그 사람이 행한 악한 일에 결과를 보았기 때문에 적개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 작용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려서 기도할 때 성령님이 그런 작용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미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미움과 함께 그 죄에 대한 미움은 필연적으로 무엇에 대한 미움을 동반하는가 하면 그 죄에 순종했던 예전에 자신에 대한 미움을 동반합니다. 육적 자아에 대한 미움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육적 자아와의 갈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육적 자아의 실체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지만 나 자신이지만 그러나 나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자기 부인의 삶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 같은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단 그리스도인이 자기 사랑은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단 거기에서 말하는 자기라고 하는 것 중에서 육적 자아를 제해버려야 합니다. 육적 자아를 사랑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육신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몇 십 킬로짜리 고깃덩어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를 포함한 육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함으로서 그것이 영적인 결과까지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같은 청교도는 우리의 육체를 나눌 때 영적 육체와 육적 육체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spiritual flesh와 그 다음에 fleshly flesh로 나누었습니다. 영적인 육체와 육적인 육체로 나누었습니다. 이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설명하면 길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영적 육체, 육적 육체 하는 것은 우리가 불순종하는 육체를 포함한 이 자아가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신 그 성령의 성품에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부분이 있고 이 부패한 옛 자아에 굴복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들이 있을 때 이게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가에 따라서 이것이 spiritual flesh가 되고 또 fleshly flesh가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그 결과를 성령님이 보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강력한 혐오감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육적 자아를 안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워하게 되는데 마치 자신인데도 자신이 아닌 다른 원수인 것처럼 그 죄와 짝하고 그 죄에 쉽게 속고 그 죄에 굴복하고 그 죄에 순종함으로서 자신의 영혼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 그 주범인 자신의 육적 자아를 끌어내어서 하나님 앞에 세우고 그와 의절하게 됩니다. 의절해도 결국 같은 집에 살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의절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한번 찍혀서 수시로 감시하는 것입니다. 이게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 부인의 기본적인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이 언제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로 이런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인데 이렇게 죄에 대해서 강력한 혐오감이 생기고 육적 자아와 칸프리트를 느끼면서 육적 자아와 의절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만큼 그러면 외톨박이가 됩니다. 그것만큼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평화를 갈망하고 그분께 소속되고 싶은 연합이 욕구가 강력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발견하고 죄의 비참한 결과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신자의 경험이 있는 모든 곳에서는 육적 자아와에 대한 치열한 분노와 미움과 함께 다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속하고 싶다고 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뜨거운 갈망이 이 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할 때 생겨나는 작용입니다.
세 번째는, 죄와 싸울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이 마음을 바치는 기도 속에서 공급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또 우리들이 신학적으로 머리를 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죄를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은 어떤 신비적인 경험을 통해서 은사처럼 우리에게 임한다고 생각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강력한 회심의 경험이 있는 곳에 강력하게 일어나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내적 체험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그가 훌륭하게 이후에 죄를 이기며 살아갈 것이라고 하는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런 것들이 아무리 큰 능력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순종의 의무를 덜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런 식의 성화를 꿈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영향이 있지만 생략을 하고 이제 계속 진도를 나가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무엇인가? 그렇게 뭔가 엄청나게 쏟아 부어지는 그런 엄청난 경험을 통해서 자기는 마치 물위에 둥둥 떠 있기만 하면 성령님이 자기를 막 끌고 가셔서 죄를 이기게 만드시는 그런 삶이 도래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믿지 마십시오. 그렇게 성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성경이 여러 곳에서 우리가 직접 죄와 싸우고 만약에 싸우지 않으면 죄의 종이 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수많은 죄와의 분투의 촉구,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거룩해지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수많은 명령을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야지 되겠습니까? 그냥 앉아서 개인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만 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분명히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고 그 다음에 죄가 남겨놓은 혐오스러운 결과를 보면서 죄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갖게 될 때 그때 주님의 도우심을 열렬히 구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영적으로 막 들어오는 것입니다. 놀랍게 파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런데 목사님. 마음을 들여서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이해를 하겠고 두 번째로 성령님이 번쩍 하고 조명해주셔서 죄를 인식하게 하시고 죄를 혐오하게 하시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그 죄에 대해서 소스라칠 듯 미워하고 그리고 그래서 어쩔 수가 없어서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매달릴 때 진짜로 죄를 이길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부여되는 경험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대답을 해주겠습니다.
조금아까 말씀드린 죄와 정욕의 관계를 가지고 유비를 하십시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죄가 우리 안에 있는 총체적인 경향성입니다. 그래서 그 죄는 총체적인 경향성인데 정욕을 앞서 내보내서 역사하는데 죄의 영향은 총체적이고 그리고 정욕의 역사는 개별적입니다. 역사하면 성공하면 거기를 통해서 보편적인 세력인 죄가 힘을 얻게 되는데 그 원리를 계속 활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죄가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는데 은혜도 똑같습니다.
은혜도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보편적이고 정체적인 하나의 경향성입니다. 그래서 죄의 경향성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께 반감을 품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려는 경향성이라면 은혜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피조물의 위치를 지키고 하나님이 창조해놓으신 전체의 창조의 계획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은혜의 경향성입니다. 그래서 이 두개가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두개가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개가 쉬지 않고 하나를 압박해서 추방해서 자기가 거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은혜가 거의 힘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을 죄의 지배아래 있는 신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반대로 은혜가 강력하게 역사해서 죄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신자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완전히 킬드 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남아있기는 하지만 은혜가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주도권을 행사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신자라고 우리가 부릅니다. 이 두개가 치열하게 죽는 날까지 이 주도권을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쪽은 개별적인 정욕으로 계속 성공을 거둡니다. 그러면 계속 이 개별적인 정욕에서 성공을 거두니까 이쪽에서는 계속 죄의 경향성이 강력한 힘을 얻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은혜가 더 강화가 되는가 하면 개별적인 순종을 통해서 은혜가 강화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죄가 개별적인 정욕의 성공을 통해서 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하고 그래서 죄가 힘을 얻게 됩니다.
개별적인 순종을 통해서 은혜의 영향력이 강화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뭐 착한일 하면 은혜가 강화된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죄는 들어와서 경향성을 우리에게 가지고 있는 동안에 전체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모든 삶에 있어서 죄의 기운이 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미워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용은 육적인 작용이 아니라 영적인 작용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럼 만약에 한 사람이 그런 죄의 강력한 경향성에 거의 지배되었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면 어떻게 합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면 껍데기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내면의 세계 속에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대적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죄의 성격은 죄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 한 고통스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타협하는 죄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그래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죄가 싫어하는 것이지 마음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적이 없이 껍데기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오케입니다. 봐줍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들이 거짓 종교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서기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신자 안에 있으면 신자가 은혜에 가득 기대를 가지고 있을 때는 그 은혜가 많이 역사하는 힘이 클 것입니다. 적게 지배하고 있을 때는 적게 밖에 역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크든지 적든지 그것은 영향력의 문제이고 일단 신자의 마음속에 은혜가 들어오게 되면 들어온 그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은혜가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의 마음을 순종하기에 적합한 상태로 만들어줍니다. 그럼 그 은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에 대해서 개개의 것들에 순종할 때 은혜는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라는 명령이 있는데 기도는 안하고 말씀의 감화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요구가 있는데도 거절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야지 된다고 하는 모든 계명의 요구들이 있는데도 그것을 안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간절한 기도 속에서 자신의 죄를 파괴해주시기를 기도하는데 그런 믿음은 절대로 안 일어납니다. 그런 식으로 시도하는 사람은 당장은 기도할지 모르지만 얼마 안 가서 그 기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왜? 개별적인 순종을 통해서 은에 더 이상의 힘이 공급되지 않을 때 그 은혜는 마르고 죄는 번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기보다는 죄의 정욕에 순종하는 일들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쉬워집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전적으로 현전하게 기울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개별적으로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임하기를 원하시는 그 명령에 순종하면서 성령의 비추어주시는 도우심을 따라서 살 때 그때 놀랍게 이 죄를 충분히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새 언약 안에는 은혜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은혜 언약, 새 언약 안에는 무슨 죄를 짓더라도 그 많은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겠다는 보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언약에 무제한의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훌륭하게 입증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사도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의 용서뿐 아니라 무제한의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려고 약속하신 것인데 여기에 물질적인 모든 것이 포함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영생이라고 할 때 그것을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이해했겠지만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길게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안 죽고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전에는 유한한 이 땅의 자원에 갇혀서 살아갔었고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는 하늘에 속한 영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는 죄 가운데 있었더라면 없었을 하늘에 자원을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그 집에 자녀가 되어서 마음껏 그 자원을 얻어다 쓰면서 공급받으면서 사는 것 그것을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지 갖다가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새 언약 안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는 무제한으로 그 하늘자원을 공급해주시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공급하시고 죄를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의 공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꼭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로 약속하셨는데 그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으면 어떤 용서의 경험도 없이 정죄 받은 상태에서 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충분히 이미 죄를 이기셨고 이기게 하셨고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원리를 파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셨고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세력을 이기면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면, 그런 면에서 이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은 조건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깊이 눈을 떠야 합니다. 이것에 눈뜨지 않으면 일평생 동안 거짓된 신앙에 속아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열매가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공급해주십니다.
캄캄한 자신의 내면 속에 죄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어두워서 보지도 못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성령님이 짝 비쳐주셨습니다. 보니까 여러 가지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저놈을 끌어다가 죽여 버려라. 가보니까 저 뒤에 웅크리고 앉았는데 집채만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가서 뒷덜미를 잡았습니다. 끌고 나오는데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확 물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죄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서 그 품에 안기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죄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그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그를 하나님 앞에서 고발하면서 그의 뒷덜미를 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동안에 죄가 그렇게 물어서 신자를 파멸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미 하나님께서 그 죄의 세력들을 파괴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은혜의 놀라운 공급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무제한의 공급을,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 교인들 중 50%가 10분도 기도를 안 한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이미 신자로서 살기를 전심으로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베드 크리스천입니다. 아주 나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런 은혜의 원리를 모르고 살던 날은 몰랐으니까 방종하게 살았더라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어떻든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이 죄의 영향,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감은 어떤 식으로든지 활동을 해서 결국은 자신이 섬기는 모든 삶에 광채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하나님께 욕을 돌리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바쳐서 엎드려서 진실하고 간절히 기도할 때 그때 비로소 그 기도를 통해서 성령님이 신자로 하여금 죄의 속이는 의표를 찌르고 그리고 그것을 간파해서 마지막에 공격을 해서 그것들을 죽여 버리는 역사를 하나님이 가져다주십니다. 그런 역할을 합니다. 우선 이런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렇게 죄의 간교한 속임수를 간파하고 그리고 숨어서 침투하고 있는 죄의 세력을 공격해서 파멸해버리는 주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성령님입니다. 그러나 신자 자신이 죄에 대해서 죽임을 당하려고 하는 죄에 대해서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는 죄를 죽이시는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때까지니까? 어느 때까지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의 기도를 신원하지 않으시렵니까? 내 안에 있는 죄를 어느 때까지 죽이시지 않으시렵니까? 이런 흐느낌이 있는 곳에서 죄를 직접적으로 죽이시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죄를 아끼고 긍휼히 여기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일어나서 이 성령이 신자의 간구하는 기도를 통해 죄를 죽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신자의 마음이 확정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은혜 받은 사람 옆에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옛날에는 죄인이었는데 그 죄를 죽이고 은혜 안에 들어가니까 너무 행복해. 나도 저런 은혜 좀 받았으면 그리고 또 다른데 가서 성형수술해서 예뻐지고, 좋은데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벌고 출세하고 그러니까 아, 나도 좀 그랬으면, 세상이 배설물이라고 그러는데 그 배설물 나나주지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해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마음에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은혜에 쏠릴 때 막 결심을 난발합니다. 내가 이제 한번만 건져주시면 주님을 위해 선교도 하고 내 재산 다 팔아서 바치고 절대로 내가 잘난척하지 않고 이러다가 조금 가보면 다시 또 세상이 좋은 것입니다. 이러면서 막 오고갑니다.
그러나 이제 간절히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서 기도하고 반복해서 기도하고 그렇게 성령이 역사해서 죄를 죽이실 때가 되면 우리의 마음이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확정이 되면서 주께로 정해집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죄가 나에게 더 없이 화려한 것을 약속하고 주님이 나에게 피나는 고난의 길이 있을 것이라고 보여주신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죄와 결별하고 주님과 동행하리라 마음이 확정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랬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확 꼬여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거기에서 수없이 잠재되어 있는 더러운 욕망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 더러운 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를 철저히 속여서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만들어놓고 자기의 거룩한 삶을 완전히 초토화시켜서 은혜의 길에서 타락하게 만든 이 죄를 보면서 죄는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죄의 결과를 보면서 그 죄를 유출하고 성령의 비추어주심으로 그 죄가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집요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그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죄가 목덜미가 끌려 나와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신자가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내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끔찍하고 더러워서 주님 앞에 이전에 지은 죄를 고백하고 나를 용서해주시고 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이 비참한 운명으로부터 나를 구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통곡하는데 그게 곧 유출하자면 죄가 죽는 소리입니다.
어떤 죄를 짓고 그리고 남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죄 가운데서 밤마다 양심의 화살을 맞으며 고통하고 신음할지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또 여러분들이 너무나 크게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괴롭히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계곡에 내동댕이쳐버리시고 돌아보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은혜의 원리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돌아올 때 신속하게 우리의 지난 죄를 용서해주시고 죄를 실제적으로 죽이는 놀라운 역사를 성령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숨겨진 역사를 파하고 은밀한 공격을 드러내서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해서 그래서 그 죄의 공격을 끊어버리고 그래서 다시 번성한 은혜의 때가 되게끔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사실은 죄를 향해서 자신의 생명을 다 내어주고 사단에게 칼을 들려주고 자신의 목을 들이미는 것과 똑같은 자살행위입니다. 나는 정말 교회당이 사람으로 가득 차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정말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같은 인간에게 베푸시는 이 구속의 은혜의 가치를 깊이 깨닫고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나는 적어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에서 주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야 할 그런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환경의 핑계를 대고 여건에 이유를 대지만 모두 간교한 속임수입니다.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 영혼의 활개를 잃어버리고 죄 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고 감사를 잃어버린 삶을 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열매가 없는 이 핍절한 삶을 사는 모든 원인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이 역사하고 있는 이 내제하고 있는 죄를 죽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삽니까? 그렇게 해서 무슨 좋은 일이 마지막에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해서 죄가 던져주는 정욕에 미끼나 물면서 그러면서 결국 살아가는 결국은 그것이 노예 된 삶입니다. 정욕에 노예가 되어서 살아갑니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제 다시는 자신의 몸을 죄에게 바쳐서 죄의 종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께 드려서 의의 종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서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지 되겠습니까?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커다한 죄이고 하나님 앞에 살지 않으려고 하는 완고한 고집과 태만의 표현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 우리의 머리가 하야지고 기력이 진하여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눈은 흐려져서 성경을 볼 수 없고 손은 굽어져서 섬길 수 없게 될 때에도 그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들이 해야 될 것은 기도입니다. 품에 안기는 날까지, 우리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우리 안에서 죄가 역사합니다. 그래서 기도회로 모이고 그런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개인적인 성화의 삶에 있어서 더 중시되어야 할 것은 개인적인 기도입니다. 개인적으로 혼자 아무도 없이 하나님 한분을 의지해서 은밀하게 누구의 구속이나 제악도 받지 않고 은밀하게 일대일로 하나님 앞에 대면하여 드리는 기도생활이,
일주일동안 흩어져서 사니까 여러분들이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또 쪽지에 적어내도 그 기도로 앉아있던 시간인지 마음을 바친 시간인지 공상한 시간까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밖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째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속이는 죄의 이런 역사가 그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 먹이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에 게을렀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육신적인 편안함과 정신적인 나태에서 오는 해방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영혼의 손해를 보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합니까? 꼭 한번 남이 모르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리고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셔서 그래서 꼭 한번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데 이 기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이고 죄로 말미암아 신음하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아름다운 그 창조주의 그 아름다움과 선함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장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 시간들이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루 하루가 죄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면서 낭비하는 이 인생이 뼈저리게 후회가 됩니다. 이제껏 까지 그렇게 흘려버린 인생의 날들만 해도 너무 너무 아깝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남은 날까지 그렇게 살다가 아무 문제가 없이 죽는다고 한다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겠습니까?
그렇게 하고도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무엇이기에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고 죄 가운데 안락하게 사는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개인기도의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은밀하게 기도하십시오. 모여 다니면서 기도하는 것으로도 개인기도의 의무를 때우려고 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초막이나 궁궐이나 하나님의 집이나 어디서든지 엎드려서 장시간동안 자신의 영혼을 살피고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그 죄를 혐오하며 변화를 경험하고 죄를 죽이기 위한 은혜의 능력을 공급받고 그리고 마지막에 결국은 그 죄를 처참하게 처단하는 그런 은혜의 경험들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그것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두움의 일을 버리고 빛 가운데 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끝.
7. 말씀과 기도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사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감화를 받고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지하고 열렬한 기도를 드리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큰 유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별히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 기도의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죄와 정욕이 드러나고 우리의 영혼의 필요를 직시하게 되고 그래서 어떻게 그것들을 통해서 죄를 죽이고 승리하게 되는지를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드려서 기도하는 일이 죄와의 싸움에서 얼마나 필수적인지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그 전에 말씀드렸던 그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감화를 유지하는 의무와 또 마음을 쏟아 붓는 진실한 기도를 유지하는 그것, 이 두 의무에 충실하면서 살면 생각을 속이는 죄의 역사를 능히 물리칠 수 있는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아름다운 의무로부터 이탈해서 그래서 죄의 속이는 역사에 온전히 대치하지 못하게 만드는가. 이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죄의 역사에 대해서 오늘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일단 들어오자마자 우리의 생각을 부패시켜서 그래서 제대로 사물을 보고 특별히 죄 자체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강력한 마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드리기를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를 조명하시는데 이 조명을 통해서 우리는 죄에 속았던 생각이 열리면서 죄 자체와 죄가 가져다준 결과에 대해서 공정하게 진실하게 볼 수 있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이처럼 죄는 먼저 들어와서 우리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어둡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데 마치 이것은 비행기를 띄어서 적군을 마음 놓고 폭격하기 위해서 먼저 빠르고 강력한 화력을 지닌 전투기를 보내어서 레이더 기지를 폭발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생각을 흐리멍덩하게 만들어서 죄가 침투해도 그 죄의 역사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죄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일을 혼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 안에 있는 기능들과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육체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그래서 이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우리로부터 이 좋은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첫 번째 방식은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싫증이라고 하는 것을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싫증이라고 하는 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있었으니 이것은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이 생각하신 한 인간으로서는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만큼 무한히 완전히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던 한계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죄가 들어온 이후로부터는 인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존재적인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죄의 적극적이 영향 때문에 영혼이 싫증을 내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혼의 싫증이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 말하면 wear I ness 웨어리 니스입니다. 그래서 웨어리wear 피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피곤하다. 혹은 번태스럽다. 이런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싫증이라고 하는 것은 좀더 쉽게 이야기하면 권태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권태인가 하면 하나님의 본성과 또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권태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런 본성을 인간에게 실제적으로 느끼게 만들어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신적 본성을 우리 인간에게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시기 때문에 이 싫증이 있는 곳은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저항이 있고 또 성령님의 이런 영혼의 싫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즐겨 역사하시지를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 영혼의 싫증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대한 모든 신령한 것들에 대한 권태감입니다. 그리고 이 권태감은 이미 시작될 때부터 대부분이 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시작일 뿐이고 영혼이 가지고 있는 이런 싫증과 권태감은 반드시 죄의 보다 강력한 역사,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반감을 갖는 노골적인 활동으로 나아가는 시작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싫증을 내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일단 우리의 삶의 많은 방면에서 우리들이 죄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공정한 평가를 상실하고 그래서 우리가 정욕을 선택하게 되면 그 순간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현실적인 존재가 된다면 하나님이 그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누구도 비현실적으로 인식되는 존재를 위해서 현실적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죽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을 그리면서 그렇게 슬픈 사연들을 적어 내려가듯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에 접시꽃 당신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부인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존재입니다. 현실적으로 자기가 느끼니까 그 보이지 않는 비현실적인 존재인 이미 가고 없는 자기 아내를 위해서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그 진실한 사랑이라고 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은혜 충만한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현실적인 존재입니까, 비현실적인 존재입니까? 현실적인 존재입니다. 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고 그 진실한 사랑은 다시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정욕을 선택하고 죄에 대해서 관용을 취하게 되면 하나님이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비현실적인 존재가 되고나면 실제 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없으니까 그의 삶이 종교적인 모습을 가질 수는 있지만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온전히 섬기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칼로 찔림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톱을 켬을 당하고 환란과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 그리고 양의 가죽을 쓰고 토굴에서 거하고 그 고난의 과정을 겪었던 모든 사람들의 삶은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소명입니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싫증을 내는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이며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발전하고자 하는 그 목표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쯤은 하찮은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열렬한 기도의 은혜가 모두 사라져가고 마지막에는 그 영혼이 철저히 부패해서 죄의 나락에 떨어질 때까지 스스로 회개를 유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젖어서 살지 않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향한 그 미묘한 권태감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말씀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그 말씀이 모두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삶의 벼랑 끝에서 도저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그런 철저한 절망의 구렁이에 떨어질 때까지 자신의 죄를 깨닫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게 모두 다 정욕을 따라 살기 위해서 죄에 대한 공정한 견해를 포기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죄의 역사이고 여러분들의 무지가 그 죄의 속이는 역사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싫증뿐만이 아닙니다. 육체의 게으름도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육체에는 관상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합니다. 막 100미터를 한 12초쯤 뛰다가 탁 서면 서집니까? 안 서집니다. 마음은 섰는데 몸은 벌써 몇 미터 뛰어나갑니다. 똑같이 영혼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싫증을 간직하고 있어도 겉으로 드러나는 외부적인 의무는 신자가 계속 할 수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러 옵니까? 말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늦게 옵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오공 시절의 한 기업은 대통령이 오라고 하는 시간에 좀 늦게 오는 바람에 회사가 다 망해버렸습니다. 거덜 내었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데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늦게 옵니까?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다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것은 아닙니다. 만나러 오는 사람이 또 모두 만나고 돌아가는 것은 물로 아닙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진실한 소원을 안 가지고도 얼마든지 교회에 나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을 죄가 방해를 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해집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죄는 죄 죽임의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이치인데 죄는 자신을 직접 공격하지 않는 한 죄는 상당히 너그럽습니다. 죄는 자기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 한 문제를 삼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교회에 나오는 것이 자기에 대한 처절한 공격이 되려면 예배시간에 마음을 다 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 속에서 말씀을 내 영혼이 열렬하게 붙들어서 그래서 그것을 말씀을 듣는 내내 자기의 삶에 적용하고 이렇게 될 때 이 죄가 타격을 입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부복한 가운데 자신의 중심을 쏟아놓으면서 기도할 때 자기 안에 있는 죄는 타격을 입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러니까 와서 그냥 앉아서 꺼덕이며 쳐다보다가 아니면 졸다가 시간이 되면 가고 남들이 기도하면 눈감고 가만히 앉아서 예의를 지키고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니까 그 사람의 예배행위 속에 어떤 영적인 몸부림이나 투쟁이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죄는 안전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우리의 종교행위로 말미암은 효과는 극장에 가있든지 여기 있든지 죄는 안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굳이 죄가 그렇게 우리를 교회도 못 나오게 내버려두도록 그러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내면의 욕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정말 몸도 피곤하고 찌뿌듯하고 좀 드러누워서 한 시간 더 자고 그리고 세수하고 앉아서 비디오나 하나 빌려보다가 뒹굴뒹굴 거리다가 오후에 친구나 만났으면 좋겠는데 가만히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안 가면 오늘 저녁부터 일주일 내내 교구 목사님, 구역장, 그 다음에 권찰, 그 다음에 새 가족 위원, 헌 가족 위원 해서 계속 전화가 올 텐데 구역 식구 한 사람씩 전화하면 10통화가 오는데 가만히 보니까 차라리 일주일 내내 그 고통을 당하느니 예배에 가서 잠시 고통을 당하고 오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나오면 뭐 합니까?
그뿐만 아닙니다. 은혜가 좀 떨어져도 교회를 아주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왜 그것도 옮겨가서 다른 교회를 찾고 거기에 가서 새 가족반하고 이런 것이 너무 귀찮으니까, 그야말로 번폐스러우니까 뭘 또 귀찮게 옮기나. 새 가족 다 거쳐서 그래도 여기는 맴버쉽을 땄는데 그리고 주저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은혜가 좀 떨어지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어도 그래도 내가 새 가족위원이고 정문 앞에서 헌금봉투라도 나누어주게 되었는데 내가 안가고 그러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나를 얼마나 불성실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겠는가. 그러면 이후에 교회생활을 하는데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힘들 것이 아닌가. 이런 동기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안 나갈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남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자신만만하더라도 자신에 대해서는 약해지는 것입니다. 왜? 그냥 가서 졸다가 라도 오면 주일날 내 할일은 했다고 하는 마음은 드는데 그나마도 안 가면 주일날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일주일 내내 마음을 졸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다 내가 교회에 안 갔더니 결국은 이렇게 되었지’ 이런 생각을 하는 데서 자유롭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교회에 올 때 그를 교회에 오는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라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은혜를 받고 새로워져야지 되겠다는 이런 영적 생각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이 오해를 할지 모르지만 정욕을 따라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 얼마나 구원받는 사람이 있을지 나중에 가봐야 압니다. 그리고 어떤 싸구려 복음을 듣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는 이 모든 것들이 전부다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죄의 이런 특성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혹은 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없어도 이런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권태감으로 가득 찬 가운데 힘겹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권태감이라고 하는 것은 원한 맺힌 적대감정은 아니더라도 이미 권태감 그 자체가 관계가 깨트려지고 권태감 그 자체 안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 적대감이 배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 결혼을 안 해봤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결혼생활을 하면 권태기라고 하는 것이 옵니다. 그 권태기라고 하는 것은 이미 벌써 무엇인가 하면 상대방에 대한 애틋하고 이렇게 만나면 기쁘고 함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이런 것들이 즐겁고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이 있는가 하면 반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간의 감정에 있어서 회색지대라고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진공상태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인식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능력을 주셨는데 인식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는 사물을 보고 인식함으로서 옳다. 그르다. 이런 것들을 판단하는 능력이고 또 하나는 어느 사물을 볼 때 좋다. 나쁘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통해서 그것을 인식하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대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다 엮어져서 그 사람의 태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길게 엮어져서 그 사람의 습관과 인격이 되고 그것이 길게 이어져서 그 사람의 인생의 항로가 되는 것입니다. 권태감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반감을 배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끌고 가고자 하는 목표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보다 적극적인 적대감과 반감입니다. 거기로 우리를 데리고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육체라고 하는 것은 존 오웬의 설명에 의하면 이 육체는 다시 이렇게 영적인 육체와 육적인 육체로 나누어집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육체 안에도 구분이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우리의 육체가 거의 전체적으로 우리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선한 뜻에 복종하고 그리고 섬기면서 살아줍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이 육체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때에 영혼이 싫증을 느끼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을 가지고 있으면, 열렬함을 영원히 견제하고 있으면 육체가 어느 한구석에서 반란을 좀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그때 금방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기도를 하러 가야지 됩니다. 기도할 시간이다. 기도하러가자. 영혼이 그러는데 육체가 아, 싫어, 오늘은 안 되겠어. 일평생 안 갈 거야. 그렇게 육체가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너무 힘들고 피곤하고 그리고 비도 오잖아.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영혼이 열렬함이 없고 싫증에 차있으면 육체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래서 많이 힘들어, 응 너무 많이 힘들어, 그래. 그럼 어떻게 하나, 나 혼자 갈 수도 없고, 왜 둘이 서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떨어질 수가 없어. 항상 같이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힘들어, 어떻게 안 되겠어. 오늘은 진짜 살려줘.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어.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그럼 이제 기도를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에서 퇴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도 이 육체 안에는 그렇게 하나님을 거슬려 살려고 하는 본성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영혼이 열렬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이 일어나라. 기도하러가자. 먼저 좋은 말로 합니다. 그런데 이제 육체가 안 돼. 도저히 힘들어서 안 되겠어. 그런데 이렇게 항상 뺀질거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때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육체가 애원을 합니다. 아, 정말 그러지마. 나 너 거하는 집이잖아. 너 이 집 한번만 쓰고 말래. 나 도저히 힘들어서 못가. 제발 한번만 살려줘. 다음에는 갈게. 그때 영혼이 열렬히 깨어있으면 어떻게 하는가 하면 빨리 일어나지 못해. 망할 놈의 자식. 맞고 갈래. 그냥 갈래, 정신 차려 임마. 너 같은 놈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한번 생각해봐. 새카맣게 잊어버렸어. 너 가서 그 육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제는 내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친다고 그랬던 것을 잊어버렸어. 나쁜 녀석.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당장 일어나지 못해. 그렇게 되었는데도 나는 그래도 못가. 이러는 육체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이런 경험을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내가 나를 쳐서 복종케 함은 내가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나는 버림을 받을까 하노라” 거기에서 복종케 한다는 말이 희랍어로 “둘라 고고”입니다. 둘라 고고는 “둘로스”라고 하는 노예와 “아고”라고 하는 이끌다. 이 두개가 합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원뜻이 무엇인가 하면 노예가 아닌 사람의, 들어보십시오. 원래는 노예가 아닌 사람을 어떤 이유에서 그를 노예로 만드는 것입니다.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노예다 하고 법원에서 도장을 찍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가 되려면 의식구조가 모두 철저히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아주 엄격하고 무섭게 매질을 해서 거의 주인의 눈빛만 봐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둘라 고고라는 동사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신학적인 균형을 좀 잃어버린 해석이 아닐까요? 왜? 우리의 육체도 주님이 주신 선물이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이렇게 통합적으로 봐야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들어보십시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잘 돌보고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하나로 통일적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를 막 굴리고 그런 것은 죄입니다. 범죄입니다. 그래서 졸립다고 그러면 자게 해야 합니다. 뭐 먹고 싶다고 그러면 먹여주어야 합니다. 배고파. 육체가 잠이 많은데도 너는 좀더 맛을 봐야지 돼. 그리고 며칠씩 굶기고 그러면 육체가 죽어버립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먹고 싶다면 먹여주고, 마시고 싶다고 그러면 마시게 해주고, 그늘에 앉고 싶다고 그러면 그늘에 앉게 해주고 당연히 그렇게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미워하고 싶어. 그런 것은 봐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살라고 그러시는 대로 나는 싫어. 그러는데 어, 그래, 그럼 어떻게 하니, 이러면 안 됩니다. 그럴 때는 눈을 부릅뜨고 이 못된 놈의 자식, 망할 놈의 자식, 배은망덕한 자식, 거지같은 자식 막 욕을 하면서 후려쳐야합니다. 그게 바로 둘라 고고의 의미입니다.
여담인지는 모르지만 요즘은 예전에는 인신매매가 한참 행했습니다. 그 인신매매에 깊이 가담해서 악하게 살아온 사람이 나중에 참회를 하고 고백을 하는데 사람을 그렇게 납치해서 오면 약 두 달이 걸린다고 합니다. 약 두 달 동안에 올바르게 그 사람을 잡으면 풀어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6개월 만에, 그런데 집중적인 게 2개월이 걸린다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하는데 처참한 매질과 욕설, 발로 차는 것, 그리고 부당한 대접, 공포, 협박, 비열한 수치심 이런 것을 자극해서 완전히 인간성이 무너져야 하는데 그래야지만 자기들에게 굴복한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들으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이게 바로 고대에서 둘라 고고하던 방식이었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인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필이면 그 시대에 모든 문명 안에 살고 있던 사람이 그 단어를 채용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쳐서 복종시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에서 벗어나서 그것을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참된 의무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죄의 역사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부패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의 본성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가 하자는 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을 해야지 됩니다. 마치 하류로 떠내려가기 위해서는 그냥 스티로폼 같은 것 하나 붙들고 떠있으면 됩니다. 거슬러 오르기 위해서는 몸부림을 쳐야 되듯이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는 부패한 이성의 추론을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과 기도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여기에서 이성의 추론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누군가가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르쳐주는가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똑바로 신앙생활 해야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그런데 그렇게 똑바로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말씀의 은혜를 받는 거야. 그리고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서 아,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구나. 내가 그렇게 살아드려야지 하는 마음도 가져야 하고, 두 번째는 시시때때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을 찾아야지 되는 거야. 이렇게 가르쳤는데 어떤 사람이 그래. 너희 장로교회에서는 그렇게 해야지 된다고 가르치나. 우리 교단은 달라. 어떻게? 그냥 놀면 된다고 가르치거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디에 가도. 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은혜 받고 진실하고 열렬하게 기도를 해야지 되거든, 이렇게 가르치는데 그러니, 너 몰랐구나. 그것이 바뀌었어. 작년에 그렇게 했지만 올해부터 그렇게 하면 안 된데. 올해부터는 말씀은 건성으로 듣고 기도는 노랑이로 해야지 된데. 이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좀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과장을 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부패한 이성의 추론이 활동을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렇게 보편적으로 모두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기가 그렇게 살지 않을 때는 항상 살아야 한다는 기준이 자기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전에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은혜의 사로잡혀서 산 적이 있거나 마음을 쏟아 붓는 진실한 기도 속에서 날마다 죄를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그 생생한 교제의 경험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런 정죄가 더 강력합니다. 지금 내 상태가 잘못되어 있다고 하는 것. 지금 나의 상태가 그런 게 아니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아주 또렷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할 것, 그래야 하는 당위와 현재 내가 있는 이 격차를 계속 가지고는 계속 찔림을 받아서 살기가 힘든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해도 불편합니다. 그럼 이 두 사이에 이 기준이 내려올 수 없으니까 현실이 따라 올라가야지 되는데 이게 마저 회개하고 돌아가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이게 싫어.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사이에 있는 간격을 논리로 매워야 합니다. 그때 도움을 받는 게 무엇인가 하면 부패한 이성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달으면 신령한 일에 있어서는 아주 지혜롭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 되지만 죄에 대해서는 단순한 사람이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더 이해하기 쉽게 해주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순전한 사람이 있습니다. 뇌물을 안 받습니다. 딱 서 있습니다. 왜 내가 고생하지 않는데 받는가. 언제 한번 교수실에 앉아 있는데 책장사가 와서 좋아 보이는 책이었습니다. 한국철학전집이라는 책을 세권을 내놓고 나를 주겠다고 그래서 싫다고, 아무 조건이 없이 연구하시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필요하면 돈 주고 사지 내가 왜 사는가 하며 교수실에서 막 싸웠습니다. 그리고 내보냈습니다. 입장이 분명하면 단순합니다. 내가 그런 쓸데없는 것 안 받는다. 그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게 꼭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받을 수도 있고 안받을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럼 이제 이 사람의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액수를 얼마를 받을까? 빨간 봉투는 받을까, 파란봉투는 거절할까 이게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신자도 마찬가지로 은혜 가운데 죄에 대해서 생각이 단순합니다. 왜 죄는 다 밉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원인이고 그리고 그 죄는 결국은 무슨 사탕발림으로 어떤 옷을 입고 내게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그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감이니까 나는 싫다. 그게 다 나에게는 싫다. 단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타협을 하면 복잡해집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은혜가 떨어질 수록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잔머리를 많이 굴리는 것입니다. 사실 그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면 아마 더 놀라운 굵은 머리를 하나님이 주실 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계속 잔머리를 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혼의 순수함과 단순함을 잃어버립니다. 이런 부패한 이성의 추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오늘도 예배 시간에 설교가 들려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려면 마음을 다 쏟아 붓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중심을 드리면서 그렇게 열렬히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계속 들려옵니다. 나는 그렇게 안 살아. 여기서 이 부패한 이성의 추론의 작용이 잔머리를 계속 굴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결론을 내린 것이 이렇게 결론을 못 내립니다. ‘저것 요즘은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닌데.’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맞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예를 드는 것입니다. 수만 가지 예 중에서 시간이 없으니까 한두 가지만 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래.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목사님.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 몇 사람이 됩니까? 나는 아무리 주위를 봐도 목사님이 말하는 것처럼 막 마음을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드리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없던데. 남도 안 사는 삶을 왜 나만 자꾸 쳐다보면서 설교를 하면서 나보고만 살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 추론이라고 하지만 사실 어거지 추론입니다. 이 이성의 추론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 밝은 빛을 받을 때 제대로 추론이 되는 것이지, 잔 머리를 굴리는데 그게 변명을 위한 추론이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추론입니까?
자매. 요즘 왜 그렇게 기도도 안 하고 말씀에 은혜는 멀리 떠나가고 왜 그렇게 핍절한 삶을 그렇게 살아. 아. 목사님, 요즘 회사도 너무 바쁘고 집안에 어머니가 아프시고, 듣는 사람은 예의상 그래, 그렇게 회사가 어려워, 그렇게 바빠. 몇 시에 출근했는데 9시에 출근해서 6시 반이나 되어야 퇴근합니다. 그래. 정말 큰일 났네. 엄마 많이 아프셔? 네. 감기가 이틀째 안 떨어지시고 계십니다. 그래. 너무 힘들겠다. 예의상 이렇게 들어줍니다. 그리고 또 뭐 되는 일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뭐, 그럼 내가 묻고 싶습니다. 다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열렬한 기도도 못하고 말씀에 대한 감화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면 내가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회사가 한가해졌습니다. 그래서 10시쯤 출근해서 4시쯤 퇴근하는 환경이 되었다고 칩시다. 두 번째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넉넉해졌습니다. 집안에 아픈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건강합니다. 그러면 이제 비로소 열렬한 기도가 나오기 시작합니까? 그때 비로소 뜨거운 말씀에 대한 사랑이 샘솟기 시작합니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어디 있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지, 그런 머저리 같은 변명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마치 하와가 자기가 좋아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뱀한테 핑계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해석하면 우리의 삶에 죄는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없는 것과 싸우는 것입니까? 없는 것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습니까? 그 없는 것을 멸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의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까? 그런 식으로 자기를 부패한 이성의 추론을 사용해서 일평생 감싸는 동안에 그 사람이 무슨 삶을 살아가는지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왜 비껴가십니까? 남한테 예의상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본인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일 사용하는 말이 연약해서, 연약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영악한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신 안에 영혼의 싫증이 끊임없는 반감과 대적으로 그렇게 진전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고 그렇게 교묘하게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 요즘 육신이 약해서, 언제 강해집니까? 그런 식으로 하니까 죄에게 계속 속으면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내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직장도 어렵고 늦게 퇴근하고 그래서 그런지 기도도 잘 안되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논 보쎄’ 라틴어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그랬습니다. 인파서블,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좋은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열렬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이 기도를 잃어버리고 말씀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고난과 시련, 어려움, 연약함 이 모든 것들은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그 사람들의 길에 붙는 기름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열렬하게 주님을 찾았고 그리고 주님 안에서 강해지는 비결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시련을 통과했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더욱 뜨거웠고 냉랭하고 차가운 시대에 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지 않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지 않는 이 세상을 향해서 불같이 뜨거운 가슴이 되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화의 이치를 배운 사람들이 겨우 그런 초보적인 죄의 속임에 의해서 인생 전체가 휘둘리는 그런 비열한 삶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해서 누가 여러분들의 편을 들어줄 것 같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연민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 자비와 긍휼입니다. 우리에게 넘치도록 쏟아지는 것,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그러면서 이 부패한 이성이 계속 추론합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끊임없는 자기의 변명과 합리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침묵한 가운데 순종하지만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은 끊임없는 변명 속에서 하나님 앞에 반항하고 불순종합니다. 그 수많은 핑계와 이유,
여러분, 한번 우리가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어느 순간에 무릎을 꿇고 철저하게 엎드려서 모든 것이 나 때문이지 다른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 모든 실패는 전적으로 나 때문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그것을 고백하고 그래서 오직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때가 언제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영적으로 회복되기를 원하기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치 초등학교 때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애가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려고 꿈을 꾸다가 마는 것 같은 그런 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열망이 안 되고 그저 사치스러운 바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인생을 살겠습니까? 결단을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나띵, 그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고 한번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한번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내 인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분이시다. 그럼 그렇게 끊임없이 결단하고 살아야 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 속에서 부패한 이성이 계속 해서 협력해서 말도 되지 않는 엉터리 같은 변명과 그 엉성하기 이를 때 없는 그런 추론들을 사용해서 자기를 계속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면서 부패하고 방탕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모두 죄의 역사입니다.
세 번째는, 다른 의무를 통한 보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교묘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깨트려져서 그 은혜를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면서 기도하는 간절한 기도의 은혜를 간직하고 사는 것, 이게 성도의 필수적인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하지 않고는 죄 죽임이 있는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죽임이 없으면 결국은 우리의 온 삶은 어떻게 살든지 간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구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무를 이행하는데 약하니까, 약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영혼에 싫증과 반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말씀의 감화를 받고 그 다음에 기도할 때 마음에서 중심으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안 되는 것. 그게 평균이고 더 안 되면 그 다음에 더 개판으로 가고 그 다음에 거기서 조금 잘하면 잘되고 그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마음을 진심으로 드리고 말씀하시면 그 하나님의 인격을 느끼며 감동을 받는 것 자체가 출발선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신자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이 거의 없고 그리고 기도의 은혜도 거의 없다고 그럴 때 이미 그 사람은 질이 별로 안 좋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런 사람일수록 빨리 회개하고 그 본래의 의무로 돌아와야지만 그 의무가 기둥이 되어서 나머지 모든 의무들을 연관된 가운데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그 대치할 수 없는 두 의무를 다른 것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충하는 것입니다. 보상심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도 안 하고 탱탱히 놀면서 교회일은 열심히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감화는 전혀 없으면서 몸으로 때우고 그런 일은 열심히 합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갔더니 집사님 한분이 점심을 대접해서 맛있게 먹었는데 좀 부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차도 좋은 차를 타고 그래서 그 목사님께 누구냐고 그러니까 집사님이라고 그래서 다 먹고 가면서 목사님께 저 집사님 신앙생활을 잘 하십니까? 그러니까 말도 하지 말래. 왜 그러는가 하니까 저 분은 돈버는 게 사명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도도 안 하고, 말씀의 은혜, 무슨 회심, 그런 것 없고 아무튼 열심히 벌어서 꾸역꾸역 헌금하며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내가 그런 것이 어디 있나 하니까 저 사람에게는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외에 교회에 보면 그런 영적인 일, 기도를 간직하고 말씀의 은혜아래 살아가는 일은 거의 안 하면서 열렬하게 찬양을 한다든지, 교회봉사 궂은 일 가리지 않고 나선다든지 하여튼 그렇게 얼굴마담처럼 많이 드러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됩니다. 왜 안 되는가 설명을 하겠으니까 이성적으로 설득을 당하십시오.
지난 시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좀 신학적인 개념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을 한두 가지 가르쳐드렸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cordial beauty와 Natural beauty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충심적 아름다움, 혹은 충심미, 핵심미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의 총체적인 창조의 계획,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총체적인 디자인, 그것이 인간의 죄에 의해서 좌절되자 구속을 통해 그것을 다시 완성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이라고 하는 것도 그 큰 계획 속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하나님의 원래의 구속의 계획, 전체에 부합하는 아름다움이 바로 cordial beauty입니다. 충심적 아름다움입니다. 그게 또 충심적 선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Natural beauty 자연적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선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나 처신, 혹은 상태로 인해서 유익을 받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천지를 창조하신 원 주인이신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 때 그것이 Natural beauty가 되는 것입니다. 결함이 있는 아름다움, 내지는 육적 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한 사람이 기도할 때 자기가 막 부서집니다. 정체가 무엇입니까? 뭐가 부서지는 것입니까? Natural beauty 속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완고함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유영철인가 그 이상한 사람이 그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아무도 그것을 참 아름답다고 그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혼자는 좋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사실은 악이 없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좋으니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도 나좋은 게 있었습니다. 물어봅시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자아 중심적으로 살아가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합니까? 왜 대답을 못 합니까? 그래. 좀 오고 가는 게 있어야지 됩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고 우주의 왕인 것처럼 내가 살아간다고 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내 삶 때문에 고통을 받고 날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보편적 가치를 따라 그 사람을 살면 그 동의한 범위가 많아질 수 있고 그것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 동의하는 범위가 매우 작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웃기는 것입니다.
우리 초등학교 때 군인들이 전부 총을 메고 월남으로 전쟁하러 갔습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월남에 가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얼마 후에 미안하다고 그럴 것을 왜 가서 거기서 전쟁을 하고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때는 그게 선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초등학교 때 나타나서 만약에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면 아마 나는 벌써 누가 죽였는지도 모르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매우 악한 존재로 찍혔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Natural beauty의 한계입니다. 그런 기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할 때 자기가 깨트려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아픔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좋은 대로 살겠다는 그게 깨트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흘러들어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뭐가 흘러들어오는 것입니까? 그 하나님의 총체적인 구속의 계획을 따라서 살고 싶다. 그 계획을 다 받아들인다. 나 완전히 모르지만 다 받아들이고 싶고 무엇이든지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경에 대한 승복과 그 주님께 대한 사랑이 분리가 안 됩니다. 그것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존 오웬과 다른 청교도가 카날 프로페스라고 하는 육적으로 신앙고백 하는 신자들이라고 하는 작품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진실한 죄 죽임이 없다면 그가 도덕적으로 어떤 수준의 삶을 살든지 간에 본질적으로는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그랬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한 신자에게 진실한 죄 죽임이 없다면 그의 도덕적 수준은 어떠하든지 간에 본질적으로 그의 삶은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살아가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만족이 되니까 살아가는 삶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말씀에 깊이 깨트려지고 참회하는 그때에 깨트려지는 정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들을 고집하고 그 뜻대로 살려고 했던 것들이 깨트려지고 그 은혜가 밀려들어올 때 천지를 창조하고 그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선하신 계획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은혜를 받으려고 기도 안하고 그러면 나쁜 사람이라고 내가 말하는 것이 그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더한 것도 아니고 덜한 것도 아닌 정확한 것입니다. 선하다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악한 것입니다. 아름답다 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더러운 것입니다. 뛰어나다 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비천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주님이 이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아직까지도 이 죄 많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늘의 자원을 공급해주실 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계획과 구속의 위대한 목적을 우리의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기회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받아서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합니다. 그럼 나쁜 사람이 아닙니까? 그것을 하면 선한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선한 목적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하면 아름다운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하면 아주 더러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야비하고 아주 더러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추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행하면 이 세상에 아무리 별 볼일이 없고 지위와 높은 관직이 없어도 높은 명예가 없어도 그가 그렇게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 한 모퉁이에서 주님의 진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면서 말씀의 은혜 속에 자기를 꺾고 기도의 은혜 속에서 자신 속에 있는 죄를 죽이며 살아가는 그 사람이 excellent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뛰어나게 생각한 사람들,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 아닙니까? 그 높은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 사람이 비록 excellent한 사람이 된 게 아닙니다. 그는 이미 목동의 삶을 살고 비천한 목동의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살려고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탁월함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돈 많이 벌고 공부를 잘하고 남이 없는 특별한 재주는 가져야지 탁월하다고 그러는데 아닙니다. 원래 이 탁월함은 하나님의 이 창조의 목적을 얼마나 철저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가. 그런 탁월함이 뛰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임금이 되기 전에도 그는 탁월했고 그 탁월함에 어울리는 자리에 데려다 놓으신 것입니다. 그게 다윗의 삶입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그래서 내가 베드 크리스천이라고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 맨 입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더러운 사람, 이게 바로 다른 의무로는 보상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가지고 지금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이것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의무로 보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일단 그런 보상심리를 갖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양심의 무거운 부담을 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는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사는 길입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이게 너무 초보적이고 조금만 명상을 하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받아서 조금만 명상하면 알 수 있는 가장 초보적인 것인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그리스도인이 속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얼마나 우리가 무지한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전 최근 한 1년 동안에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또 연구하고 깨달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렇게 말해도 정말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은 돌대가리입니다. 어떻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자기가 실제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삶을 실천적으로는 못 사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도 이성적으로 거기에 굴복이 안 되는 것은 이것은 머리가 나쁜 것입니다. 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너무나 명백한데. 그런 보상이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했습니다. 마당만 밟으며 오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가지고 오는 수많은 번제물과 이런 것들이 다 싫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성경에 나오는 “번태스럽다.”는 말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짐승을 이고 제사를 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있습니다. 랍비들 가운데 지고 왔는데 이제 제사를 드리러올 때까지 이미 다 지친 것입니다. 내려놓으면서 아이고 힘들어. 거기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지고 왔는데 제사를 드리려고 제사장이 보니까 완전히 다 좋은 짐승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다 터지고 찢어지고 그래서 팔아먹지도 못한 놈들을 끌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것을 지고 오기에 피곤하기 전에 그들이 집을 떠나서 오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먼저 피곤하신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먼저 싫증이 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저항감을 가지십니다.
그게 오늘날의 종교생활이 아닙니까? 몇 천만이 예수를 믿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불까진 등불인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미래의 의무실천을 계획하는 것으로서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교묘한 것입니까? 무엇이라고 그러는가 하면 지금 안 합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이렇게 슬쩍슬쩍 하는 것보다는 이다음에 제대로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을,
어 그제도 우리아들이 며칠동안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하는 동안에 내가 내버려두었습니다. 다 끝난 다음에 내가 불렀습니다. 그리고 내가 얘기했습니다. 네가 뜻을 세우고 어린나이에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은 나무라지 않는다. 너무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수십 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금식할 때 하나님을 열렬히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찾으라. 그렇지 않는다면 너의 그 금식기도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냥 하나님도 안 찾고 그냥 살다가 너무 컬컬하고 답답하니까 또 며칠 금식하고 또 컬컬한 기가 가시면 또 기도도 안 하고 말씀도 묵살하고 그런 식의 금식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래서 한번 주를 위해서 장렬한 순교를 꿈꾸지 말고 매일매일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주님을 뵈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는 모든 괴롬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그것을 매일매일 간직하고 그래서 순 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실 죽었습니까? 살았습니다. 사는 게 죽는 것이고 죽는 게 사는 것입니다. 그 죽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자기 속에 실제화 되고 그 실제화 된 죽음이 그 쓰디쓴 체험 속에서 예수님이 다시 사는 그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날마다 죽노라. 그것이 그의 사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게 바로 그 의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아, 정말 어쩌면 이렇게 명백한 성경적 기독교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눈을 감고 보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어쩜 우리가 그럴 수 있을까? 그러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어제가 아닙니다. 어제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안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이미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데 오늘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제 일어난 일인데 그래서 어제는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내일을 이야기하는데 야고보 사도가 명백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오늘은 가서 장사를 하고 이익을 남기고 이 도시에서 돈벌고 어쩌고저쩌고 그런데 너희는 안개라. 그랬습니다. 언제 너희를 취할지 어떻게 아는가. 어리석은 부자가 추수를 많이 한 곡식을 보며 염려하며 곡간을 짓고 일년 내내 놀고먹을 궁리를 했지만 하나님이 그 영혼을 그날 밤에 취하시면 뉘 것이 되겠는가.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언젠가 내일이 끝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영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숲 속에 있는 새 20마리보다 손안에 있는 새 한 마리가 훨씬 낫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왕이신 하나님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제 인생, 제 모든 젊음, 제 모든 재산, 제 심장까지도 주님께 다 드립니다. 제가 가진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내일이요. 그것보다는 그렇게 토를 달 때 주님이 어떤 마음이신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은 왜 아닌가. 오시옵소서,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다스리시고 나를 다 주님의 것으로 삼으시옵소서. 젊은 날은 말고요. 실제로 그렇게 고백한 사람이 교회역사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너무 더러운 것입니다. 미래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미래는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명백한 하나님 앞에서의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이 길을 포기하면서 불순종하면서 미래의 일을 이야기합니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흔히 우리 그렇게 합니다. 기도 하나도 안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 다 아시지요. 그런 바보 같은 망발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면서도 그것이 기도로 고백되어 나오는 과정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 다 아시지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마치 낱낱이 구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고 자기는 모두 주님께 맡겼다고 생각하는 이게 주님께 맡긴 것이 아니라 운명에 맡긴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인격에 맡긴 것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비 인격에 맡긴 것입니다. 그런 것을 신앙으로 가장해서 속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그 계획이 있는 그곳에서는 반드시 소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명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까? 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죄에 매어 사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얽어맸던 사단의 모든 권세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셔서 우리를 예수님을 찬송하며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주셨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제 다시는 죄에 매어 종 된 삶을 살지 말고 자유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그 목적으로 돌아가서 왕이신 그 하나님을 높이고 높임을 받으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하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게 당신 자신을 알리는 빛을 지닌 자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지 되겠습니까? 어쩌면 이렇게 사람들이 냉랭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없이도 넉넉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늘어 가는지 모릅니다. 이것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찢어지시는 주님의 그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명백하게 우리는 그렇게 살 수없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는 빛 가운데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서 무시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내 영혼을 움직이는 말씀의 감화 속에서 매일매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 하나님께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기쁨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보고 기뻐하실 때 여러분들은 얼마나 행복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자신 때문에 행복해하는 여러분들을 볼 때 하나님은 얼마나 즐거우시겠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가 오늘도 참회하고 마음을 드리는 기도로 감화가 있는 말씀의 생활로 돌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죄의 모든 속임을 타파하고 우리는 오히려 그 죄 때문에 더욱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이 구속의 항로를 계속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8. 말씀과 기도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죄의 역사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4)
죄는 끊임없이 우리 생각에 관여해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발견할 수없도록 흐려지는 생각이 되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이런 일들을 위한 죄의 작용과 역사는 쉼 없이 계속됩니다, 여기에 맞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깊이 잠겨서 생각이 올곧게 되고 기도의 은혜를 통해서 생각이 자기의 자리를 찾을 때 우리의 생각은 충분히 우리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죄의 작용들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는 어떻게 하든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감화를 받고 기도를 통해서 기도를 유지하는 이 두 가지 의무로부터 우리를 이탈시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 죄의 작용입니다. 하나님 앞에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죄의 힘을 강력하게 느낄 것이고 또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그런 진실한 소원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죄의 힘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이끌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어떻게 이 기도와 말씀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 죄의 역사를 세 가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도 마지막으로 세 가지를 더 말씀을 드림으로서 일단 이 기도와 말씀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죄의 역사에 대해서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첫 번째 생각할 것은 이런 의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생각이 죄에게 속지 않도록 올바른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주는데 그래서 죄는 이 의무로부터 이탈하도록 우리에게 끊임없이 작용을 합니다. 그 네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따금 받는 은혜를 확대해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 가운데는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구원받지 못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거듭남의 어떤 확신도 없고 그래서 여러분들은 교회에 와서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들을 낯설게 생각하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말씀을 잘 깨달으면서 여러분이 죄인인 것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신 것과,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여러분들을 죄에서 사해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거듭나지 않는다면 오늘 여러분들의 귀에 들리는 이 죄와의 싸움을 다루고 있는 많은 설교들이 여러분들의 삶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못했으면 이런 죄와 싸울 수 있는 소원도 없고 또 소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소원을 계속 간직하고 실제로 죄와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속히 주님께 구원의 은혜를 구하고 회개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살은 적은 없습니다.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마음이 뜨거워지고, 혹은 눈물이 흐르고, 혹은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소원함이 생겨납니다. 늘 기도하지 않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에 기도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고 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은 착한 소원이 우러나와서 그의 마음이 움직이고 녹아내리는 은혜의 경험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경험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드물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경험을 가지고 그 경험의 가치를 매우 확대해석해서 내 주위에 보면 다른 사람들은 거의 은혜를 받는 적이 없는데 그래도 나는 이렇게 몇 달에 한번씩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이 있어서 눈물도 흘리고 마음속으로 결심도 할 수 있으니까 나는 아마 건강할거야. 내 주위에는 일년이 지나가도록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이렇게 오랜만이라도 한번씩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소원도 생겨나고 하니까 나는 아마 건강한 그리스도인일 것이야. 이렇다면 내가 결코 죄에게 속지 않을 것이야. 이렇게 자만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도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런 예화를 든 적이 있습니다만 한 여름날에 바짝 날이 가뭅니다. 그 가뭄이 두 달, 석 달 심지어는 육 개월씩 계속되면 가로수까지 모두 타들어갑니다. 지금이야 전부다 시멘트로 뒤덮고, 콘크리트로 뒤덮고, 아스팔트로 뒤덮어서 흙이라고 생긴 것을 어떻게 밟아보기도 힘들지만 옛날에는 모두 마른땅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면 바짝 땅이 마르다가 그러다 갑자기 비가 옵니다. 하늘에 캄캄해지면서 소나기가 막 쏟아집니다. 한 1-20분 막 쏟아집니다. 딱 그칩니다, 얼마나 갑자기 쏟아지는지 물이 막 도랑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햇빛이 반짝 납니다. 그러면 공사하던 사람들이 다시 가서 곡괭이를 가지고 땅을 팝니다. 겉이 질척질척 하니까 땅이 잘 파지겠구나. 하고 곡괭이를 쾅 내리치면 불이 번쩍 튑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비가 억수로 쏟아져 물이 콸콸 흘러가는데 실제로 땅이 젖은 것은 2-3센티 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바짝 마른 땅이 나옵니다.
그게 마치 이따금 한번씩 경험하는 말씀의 맛, 은혜, 이따금 한번씩 경험하는 기도의 은혜 이런 것들이 그런 것과 같습니다. 비가 막 쏟아지면 지면은 젖습니다. 그리고 땅이 습기가 차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하면 깊은 곳까지 그 물이 스며들기 위해서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소낙비는 아니더라도 비가 보슬보슬 내리더라도 계속 하루 종일 와야 합니다. 그러면 스며들어갑니다. 한 이틀 비가 오면 땅이 촉촉하면서 깊이 스며들어서 땅이 전부다 부드러운 땅이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일생동안 마음을 지키는 것이 어렵습니까, 안 어렵습니까? 대답을 해보십시오. 어렵습니까, 안 어렵습니까? 그럼 내가 묻겠습니다. 하루를 마음을 지키는 것, 이것은 진짜 마음을 지키려고 해본 사람들만이 깨닫습니다. 아무렇게나 살려면 일생도 안 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하루가 여삼추입니다. 삼년같이 깁니다. 그래도 아침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를 고백하고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기도했는데 정오에 태양이 머리에 빛나기 전에 새벽에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주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아침햇살을 받으면서 교회당을 나갔는데 그게 정오의 태양이 되어서 머리위에 뜨기 전에 교만해집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니 하루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해보십시오.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하루는 그만두고 한 시간을 유지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기도해야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변덕스러운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하루에 수 백 번씩 변하는데 은혜는 몇 달에 한번씩 받습니다. 그게 참 신자가 되겠습니까? 그게 진짜 그 사람이 죄의 속지 않고 정말 옳게 자신안과 밖에 있는 죄를 분별하면서 그렇게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몇 달에 한번 은혜 받은 것, 그것이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살아가는 그것은 경솔히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런 자부심이 있으니까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매일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기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제일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생애적인 은혜를 받았습니다. 혹은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는데 절대로 필요합니다. 왜? 그 생애가 서금서금 하니까 진짜 한번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서 방향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강릉으로 갈 사람인데 고속도로로 부산을 달립니다. 달리기는 달리는데 가끔 부산으로 안 가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가다가 가끔 멈추기도 하고 휴게소에서 늑장을 부리기도하고 그다음에 차가 망가졌다고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그래도 결국은 가는 것입니다. 그것 갖고 안 되고 과감하게 결단을 하고 그리고 진짜 돌이켜서 강릉 가는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게 생애적인 은혜라면 생애적인 은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강릉으로 가려고 이제 생애적인 은혜를 받고 어마어마한 결심을 하고 생명을 무릅쓰고 차를 돌려서 강릉을 가려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용인 휴게소에서 계속 자는 것입니다. 거기서 밥 먹고, 고스톱치고 놀고, 사우나하고 말이지 안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차까지 팔아서 엿 사먹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게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생애적인 은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적 은혜도 필요합니다. 생애적인 은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금일적 은혜도 필요한 것입니다. 매일매일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그 은혜도 생애적인 은혜만큼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생애적 은혜가 뭐 한 두 시간씩 필요한 것입니까? 그럼 그 생애 아마 어지러워서 못 살 것입니다. 두 시간에 한번씩 생애적인 은혜를 한번 받아보십시오. 어떻게 하겠습니까? 혼란스러워서. 은혜를 받았으면 그 다음에는 그 은혜로 가던 길의 방향을 바꾸고 올곧게 쭉 가야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내 안에 있고 매일매일 기도의 은혜가 내 안에 있을 때 그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은혜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 원동력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의 엔진이 계속 구동할 때 그때 마치 발전소에서 전기를 일으키면 그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를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빛을 밝히고, 어떤 사람들은 난로를 불을 붙여서 거기에 음식을 조리해먹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기계를 돌려서 제품을 생산해내고, 어떤 사람은 그 전기를 가지고 또 다른 일에 쓰는 다양한 원동력으로 삼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 우리의 마음의 엔진을 힘차게 구동하고 있을 때 생각에는 환한 불이 들어와서 죄를 탐지합니다. 가슴에는 뜨거운 난로가 들어와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찹니다. 우리의 의지는 뜨거운 불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담대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계속적으로 역사하면서 우리를 움직일 때 그때에 우리가 죄의 모든 속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미연에 모든 상황을 타고 들어오는 모든 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어떤 하나님을 만났든지 간에 필요한 것은 그 생애적인 은혜는 주님과 나만 아는 사연으로 가슴에 고이 접고 그리고 이제는 오늘을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마치 바보 같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면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기가 어려우니까 놀다가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자, 아마 그러는 모양입니다. 가던 길을 결단을 하고 생명을 걸고 돌이키는 것,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그러므로 불순종하는 길을 오늘은 계속 가자. 결단을 하고 멋있게 유턴할 그 날을 기다리면서 유턴한 사람도 있지만 곧장 가다가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바보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가 우리 안에 계속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로 하여금 정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버리게 만들고 그 주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주님을 섬기려고 할 때 이 세상에 있는 자원도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사람의 지혜, 노동력, 이런 것은 이 땅에 있는 자원들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아서 사람을 기뻐하는 일을 하고 죄를 짓는 일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런 세상에 자원들을 활용해서 주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갈 때 이 세상에 있는 자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자원만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원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들도 너무나 많고 때로는 그런 자원을 그런 자원이 아닌 하늘의 자원을 놓고 섞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 질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갈가지고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콘크리트를 가지고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시멘트를 가지고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이게 수도에서 펑펑 쏟아지는 물을 가지고 건축 자제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건축자제는 그 물이 들어가서 빚어지지 않으면 도저히 건물을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이 없이 그 콘크리트가 비벼지겠습니까? 물은 건축자제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모든 건축자제에 물이 부어질 때 비벼져서 건실한 건물이 올라가는 것처럼 그 하늘나라에 속한 자원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아닙니다. 보이는 자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하늘에 있는 자원을 섞어서 비빌 때 그때에 견고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섬기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무형의 하늘자원들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공급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식은 열심이 학교를 다니면서 얻고, 그리고 이세상의 지위는 출세를 해서 얻고, 돈은 열심히 벌어서 모으고, 건강은 운동을 하고 자기 습관을 잘 조절해서 축적한다고 하지만 하늘의 자원은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자원은 하나님께서 그 자원을 공급해주시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도 그런 하늘의 신령한 자원을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는 통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 공식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통해서 그 하늘의 자원이 신자들에게 이르고 기도의 은혜를 통해서 신령한 천상의 능력이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부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땅에서 기다랗게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시간적으로 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자원을 끊임없이 공급을 받으면서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하늘자원으로 해결해서 살아가는 삶이 영생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스스로 거듭났다고 믿으면서도 이런 하늘자원을 누리는 실제적인 영생의 삶을 못 누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통로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구원받았고 그러니까 자기가 죄 가운데 살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저항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져서 그래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심지어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늘의 자원 같은 것은 관심이 없고 주님의 그 크신 능력으로 이 땅에서 밥이나 잘 먹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 많은 물질이나 누리면서 육욕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의 은혜를 자신의 색욕거리로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수치스러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하늘의 자원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그런 통로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기도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몇 달에 한번씩 일어나는 일이 되어서는 우리가 진실로 우리 안팎에서 일어나는 죄의 놀라운 능력을 우리들이 극복해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는 쉬지 않고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하는데 우리는 가끔 은혜를 받습니다. 그게 참된 신자가 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못하게 할 정도로 괴로운 많은 인생의 문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기도의 은혜를 소유하게 되면 사실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어제도 새벽 1시가 거의 될 때까지 교육관에서 말씀을 연구하다가 밤중에 가방을 싸들고 긴 골목길을 걸어오면서 그렇게 슬플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어제 밤에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석 달 시리즈 할 것을 찾아내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만 더 탐구를 하려고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400년 전에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성경의 진리를 터득하고 이렇게 몸부림치면서 살았는데 400년 후에 태어난 내가 그것을 보면서 짐승과 방불한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을 하게 되니 어떻게 하나. 이제 이 세상에 우리들이 살아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때로는 무지로, 때로는 게으름으로 이렇게 어두움 속에서 산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슬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실컷 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또 자야지, 아침에 나와서 설교를 6시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절제를 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가슴에 확 밀려들어오면 근심이 없습니다. 세상에 큰일 났다. 이렇게 말할 게 없습니다. 뭐가 큰일이 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가장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죽는 것인데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평생을 바라던 일인데, 이 땅의 고단한 수고와 슬픔을 마치고 한 것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할 것 같으면 이 땅에서 주님을 많이 섬기지 못했다는 그 후회를 제외해놓고 모자라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나는 골목길을 걸어오면서 이제껏 내가 보지 못했던 그 신앙의 오묘한 진리의 세계가 쭉 열리면서 영혼에 한없는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염려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에 진실한 소원이 생깁니다. 그것은 더 많은 빛, 적어도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무지해서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될 것입니다. 더 많은 하나님의 지식이 빛, 그 은혜의 빛, 그것을 누리게 해달라는 기도가 간절히 나오고 또 이렇게 주신 은혜의 빛이 너무 크고 놀라운데 이 빛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지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깊이 받고 또 한편으로 그 말씀의 감화를 받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도를 통해 그 은혜와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자신 속에 이미 들어온 죄는 회개하여 토해내고 다시 용서받고 정결케 되어서 주님의 선한 목적을 사랑 가운데 받아들이고 하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이런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게 6개월이나 1년에 한번씩 살아야 할 삶입니까? 그것은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보고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부흥회가 자주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당신 사는 것 보면 그것도 너무 띄엄띄엄 있습니다. 내가 오죽했으면 그랬습니다. 왜 그렇게 사경회를 자주 하나. 사경회가 필요 없는 교회가 되기를 꿈꾸면서 사경회를 합니다. 그 필요 없는 교회가 되면 나는 춤을 추고 거리를 뛰어다니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경회가 필요 없는 교회가 되었다고 나는 춤을 추면서 거리를 뛰어다닐 것입니다. 매일매일 주일마다 나아올 때 여러분들이 정말 내 생애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나와야 합니다. 설교자는 그 순간에 죽어가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라고 생각하고 마치 우리가 한번 예배를 드리고 평생 다시 못 만날 사람처럼 그렇게 감격하며 예배를 드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사경회가 왜 필요합니까? 뭐 필요합니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사경회가 주일예배와 다른 것은 찬양 팀 서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헌금하는 것 하고, 주일날과 똑같습니다. 주일날 안 하는 것. 그것이 틀립니다. 마지막 날 헌금하는 것이, 예배고 뭐고 다 똑같습니다. 기도하는 것까지 다 똑같습니다. 사경회 때 제가 다른 옷을 입고 나옵니까? 사경회 할 때 말씀 준비는 제가 주일날 말씀 준비하는 것보다 특별히 무슨 피를 흘리면서 별도로 준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도대체,
그만큼 우리는 너무나 우리를 신뢰할 수없을 정도로 자주 변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은혜와 기도의 은혜가 이따금씩 주어지는데도 그것으로 자신이 영적으로 건강하다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매일매일 생애적인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이거니와 매일 오늘 아침 예배드리기 전에 일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셨습니까? 말씀을 펴고 이 주일 고요한 아침에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잔잔한 이슬비를 뿌리고 지나갔습니까? 혹은 폭풍과 같이 지나갔습니까? 매일매일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이런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죄의 역사는 의무의 형식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안 읽는 것은 아닙니다. 읽습니다. 또 묵상 집까지 만들어주었습니다. 그거 정말 힘들게 만든 것입니다. 전국을 다 뒤져도 그렇게 만들어서 주는 교회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정성껏 만들어서 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 그거 연초에 받았을 때 야, 신기하다.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었나. 아, 참 하나님 감사하다. 그리고 읽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몇 권 넘어갔습니다. 지금도 그러십니까? 또 처음 나온 것은 날짜가 적혔으니까 양심의 가책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것보다 아주 편하게 날짜도 안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못 읽으면 그 다음날 읽으면 됩니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성경을 매일 읽습니다. 묵상도 매일 합니다. 예배도 빠지지 않고 참여합니다. 설교시간에 가끔 조는 적은 있지만 하여튼 설교시간에 어째든 듣습니다. 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뿐입니다. 형식만 있습니다. 속에는 내용이 텅 비었습니다. 심지어 오래도록 은혜생활을 한 사람들은 새벽기도가 되면 저절로 깨어납니다. 제가 외국에 나가면 제일 괴로운 것이 그것입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시간에 깨어나는 것입니다. 보면 한국시간으로 6시입니다. 새벽 기도시간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기도시간에 깨지고 또 미국 새벽시간에 또 깹니다. 그러니까 아주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니 몸에 날짜선을 넘어왔는데 내 몸은 한국시간을 계속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새벽기도도 계속 나옵니다. 그리고 정해진 기도시간도 있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모양만 가질 뿐 그 속에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읽는다면 우리 안에 죄가 죽는 것이 성경만 펼치면 죄가 죽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이 귀신을 내쫒을 때 제일 좋은 것은 성경으로 머리를 치면 나간다고 합니다. 왜 이게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머리를 치라고 만든 책이 아니라 귀신을 쫒는 몽둥이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읽으라고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읽는데 읽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깨닫는 것도 없고 마음에 감동이 없이 성경을 계속 읽는데 그게 그 사람의 영적인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죄는 자기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 한 죽지 않고 죄가 죽는 일이 없이는 우리도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성경을 읽을 때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내려와서 수없이 읽은 성경이지만 오늘 읽을 때 새롭게 깨달은 말씀이 있고 예배시간에 와서 설교를 들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 생각과는 다른 그 무엇을 가르쳐주고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게 되는 그런 지적인 충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깨달음이오고 그런 깨달음이 자신 속에 감화를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자기를 뜨겁게 만들어서 그래서 주님께 복종하지 않는 마음을 복종하게 하고 사랑하지 않던 주님을 사랑하게 하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삶이 거룩해지고 변화가 되고 주님을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전진되어가는 사이클이 네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가 무엇인가 하면 노인입니다. 아는 것입니다. 먼저 알아.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러빙 사랑하게 됩니다. 누구를 주님을, 그 주님을 모르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정신병자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조용히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탐구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노인 클라이스트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정말 올바른 방식으로 알게 되면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묻게 됩니다. 그런데 목사님, 저는 안 그런 것 같습니다. 왜 주님에 대해서 열린 교회에 와서 많이 배웠는데 사랑이 점점 식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배우는 방식이 개념적 이해를 통해 배우는 방식이 있고 경험적인 이해를 통해서 배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험은 일어나지 않고 개념적으로 지식이 계속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노인 크라이스트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는 것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어서 속박되어 있던 상태에서 우리를 풀어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경험되지 않은 능력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경험되지 않고 어떻게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제일먼저는 주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러빙 사랑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진심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의심할 여지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니”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종의 과정이 지나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래서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으면 주님이 너무 기뻐하십니다. 기쁘니까 주님이 그 열매를 맺은 것을 보시면서 기뻐하시면서 그에게 당신 자신을 더 많이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열매 맺는 것이 다시 아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아는 것, 사랑하는 것, 순종하는 것, 열매 맺는 것. 그래서 다시 또 열매 맺는 것을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되고 사랑하고 그래서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다가 이게 점점 휘돌면서 이렇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게 영적인 성장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의 말씀에 나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나도 너희를 사랑하여 너희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나타내 보여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전에 몰랐던 예수님을 더 알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더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더 잘 순종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 더 많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래서 계속 순환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성장하는 영적 삶입니다.
아모스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내 사랑하는 종에게 숨기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누구일까요? 돈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재능이나 이런 것이 뛰어나서 수많은 사람의 박수갈채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역을 크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 교계에서 유명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런 그의 사역의 크기나 그의 지위나 이 세상의 자원을 소유한 그 부피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소유하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서 얘기하시고 싶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 끊임없는 마음의 갈망을 가진 사람, 하나님이 그를 부르셔서 그로 하여금 하게하시고 싶은 그 일을 하려는 열망을 끝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주님 자신이 이 내면의 성품이 신실하고 아름다우신 분이고 그 신실하고 아름다우신 주님이 그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성품을 밖으로 드러내셔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으로 가득하게 하시고 또 우리를 구원해내신 그 사역도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성품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외면적으로 무엇인가를 의무를 이행할 때 반드시 그것이 우리의 내면의 근거와 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일 때에 하나님 앞에 의미 있는 것이 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심으로 기뻐하시는 사람,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자, 성경을 읽고 예배에 꼬박꼬박 참여하고 그 다음에 구역공부에 늘 빠지지 않고 그리고 읽으라고 하는 대로 책사서 읽고 나쁜 것입니까, 좋은 것입니까? 나쁠 게 없습니다.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일 뿐입니다. 그 형식은 그릇입니다, 그 형식이 그릇과 같아서 그릇이 단단하게 잘 준비되어 있으면 많은 내용물을 담고 그 내용물을 충격과 여러 가지의 환경의 변화에도 내용물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그 내용물은 있는데 형식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야채나 과일 같은 것을 원적외선이 나오는 좋은 음식 담는 그릇에 담고 냉장고에 온도를 잘 맞추어서 넣어두면 오래도록 신선합니다. 그런데 좋은 과일이나 이런 것을 받았는데 찬장에다가 그냥 나둡니다. 밖의 기온이 영하 30-35도씩 올라갑니다. 이틀만 지나면 다 썩어서 먹을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형식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식이 갖는 가치는 내용이 그 안에 깃들었을 때 그 형식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통렬하게 탄핵하셨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들의 신앙의 형식은 오늘날 여러분들이 발 벗고 쫓아가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래에 두 번씩 금식하고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형식을 여러분들이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한번도 그 형식 자체를 비난하거나 탄핵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형식은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회칠한 무덤입니다. 형식은 잘 되어 있는데 속에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선한 것을 결핍했다기보다는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매우 더럽고 부패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통렬하게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비난한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이 현장에서도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에게 말하실 것입니다. ‘네가 여기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내 눈에 너무 가증하다. 네 마음에 내가 없는데 네가 어찌하여 이 예배에 자리에 나와 앉았는가. 화있을진저’ 그런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우리 중에 없다고 누가 단호하게 하나님 앞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껍데기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껍데기를 유지하면서 그릇된 안정감에 안주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기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늘 마음의 갈증을 느끼고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죄인들이 훨씬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 일년에 두 번 성경을 읽었으면 뭐합니까? 이렇게 얘기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것 뭐 깨닫는 것도 없이 계속 읽으면 뭐하나. 그만둡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뭐가 우습습니까? 그게 하나도 안 우스운데.
예배는 나오는 것은 의무입니다. 와서 졸고 다른 생각을 하고 통렬하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무슨 마음이 생겼는가 하면 목사님 말씀하는 이야기가 그럼 마음의 깨달음도 없고 진심도 없다면 예배를 와서 드리는 것이 오히려 주님을 놀리는 것이라고 그러더라. 그 말까지는 틀린 게 없습니다. 그러면 엎드려서 통회를 해야지. 어차피 가는 것이나 안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집에서 쉬지. 그것은 타락입니다. 담대하게 불순종을 택한 것입니다. 그런 껍데기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만족을 느낍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그게 능력이 있겠습니까?
기도 시간을 아무리 정해났으면 뭐합니까? 새벽기도에 와서 계속 코골고 자지 않으면 엎드려서 그냥 산란한 이 세상의 근심과 염려와 더불어 싸우다가 피곤한 몸이 되어서 일어서는데 죄는 그런 것,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죄는 성경을 펼 때 죽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 가슴속에 들어와서 뜨겁게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고 우리가 참여하고 그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할 때 그때 죄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새벽을 가르고 새벽기도에 참여한다고 해서 죄가 그것 때문에 겁먹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고 해서 죄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청산유수같이 그렇게 쏟아놓는다고 해서 죄가 죽는 것이면 죄가 앉아있는 자리가 우리의 입술이게, 그게 아닙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그 말씀의 빛 아래서 자신의 진심을 토하며 간절히 기도하며 거기서 성령의 비추심을 인해 자기의 참모습을 보면 진실하게 뉘우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할 때 죄가 객관화가 되고 그 죄가 죽는 경험을 합니다. 한마디로 신앙의 형식은 가지고 있어도 마음이 바쳐지지 않은 모든 것은 다 헛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죄의 속이는 이 놀라운 역사, 우리를 이 의무에서 이탈하게 하는 그 역사로부터 우리들이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여러분들에게 외치고 싶은 것은 진실해져야 합니다. 정직하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한번만이라도, 내가 오죽했으면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하도 답답해서 그랬습니다. 예배 시간에 와서 매일 졸기에 내가 불러서- 언제 여러분들도 부름을 당할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조는가. 그렇게 하려면 저 뒤에 가서 앉지 말이지 왜 앞에 앉아서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가. 왜 그러는가. 피곤하고 어쩌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게 좀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다 집어치워라. 수요예배도 나오지 말고 금요예배도 나오지 말고 주일 오후도 드리지 말고 집에 가서 자라. 한번이라도 좀 예배를 제대로 드려라. 그래야지 변화가 될 것이 아닌가. 마음을 드리지 않는 수천 번의 예배보다 진심을 드려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는 단 한번의 예배를 드려보라.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펼치면서 하나님 오늘 주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큽니다. 근심이 많고 마음이 산란하고 하여튼 고통이 너무 심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엎드려졌을 것이라고 했던 시인의 고백과 같이 주의 말씀이 진토에 떨어진 나의 영혼을 살려주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좀 간절히 기도한 다음에 성경을 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몇 장 읽을 것을 두장 읽으면 어떻습니까? 평생 읽을 성경인데 누가 쫓아옵니까? 그래야지 이게 되지 않습니까? 마음을 실어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마음이 전부다 스며들어서 배이게 해야 됩니다. 과장을 하자면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숨쉬는 데에도 우리의 마음이 배이게 할 정도로 그렇게 할 때 우리들의 외식하는 신앙생활이 물러가고 정직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그 형식도 제대로 유지하지 않고 그리고 기도하는 척 하고 그리고 덜렁덜렁 넘어가는 삶을 삽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들로 하여금 진정한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할 말씀과 기도의 의무로부터 멀어져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 죄의 속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죄의 역사입니다. 정말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불순종하는 삶의 영역이 있는데 해결하지 않은 채 방치하는 것입니다. 그 죄가 그 사람에게 불순종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을 태만하게 방치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캐내어서 육신의 좋은 것이 나오는 것이 되는 것에는 육신이 열심히 캐내지만 캐내봤자 좋은 것이 안 나올 것 같은 영역에 대해서는 육신이 그렇게 캐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번 실제로 경험을 돌아보면서 여러분 스스로 반문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냄새는 맡았습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혹은 말씀을 듣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런 나의 삶의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안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게 뭘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뭘까? 그리고 캐들어 갑니다. 이게 정체가 도대체 뭘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지금 말씀을 통해 이런 것들은 잘못했다고 그러는데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것을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이참에 진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사적으로 진짜 말씀이 그러한가 보자. 그리고 집중적으로 탐구해가서 확 벗겨내서 아, 이게 정체가 이런 것이었구나. 하나, 하나 가려내는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자주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진전이 무디어지는 것입니다. 성화의 진전이 무디어질 뿐만 아니라 그렇게 명백하게 불순종한 영역에도 모두 내버려두고 그러면서 기도한다고 그러고 말씀을 읽는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적을 사람은 적고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향한 당신의 유쾌함과 불쾌함을 보여주시는 가장 좋은 통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사랑을 많이 받고 내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때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나에게 끊임없이 말씀의 감화를 주심으로서 확인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루만져주실 때 우리의 호주머니나 은행계좌를 어루만져주시는 것으로 우리가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성령님이 우리의 영혼 깊은 곳을 어루만져주실 때 우리들이 주님의 그 사랑을 가장 뜨겁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뜨겁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저의 이 단언을 경솔하게 듣지 마십시오. 또 오늘 덮고 그렇게 넘어가지 마십시오. 저의 지금 이 단언을 여러분들이 그냥 가볍게 듣지 말고 좀 깊이 설교가 끝나도 고민을 해보십시오. 이 단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는데 아무 것도 깨달아지는 것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설교를 듣기는 듣는데 하나도 마음에 부딪히는 것이 없고 허공중에 흩어지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어도 묵상을 해도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치가 없습니까?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큰 죄를 짓지는 않았을 수가 있습니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큰 죄를 짓지는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그런 죄를 지은 사람만 싫어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은혜 가운데 살 때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생각을 잠깐만 품어도 하나님이 나를 안 기뻐하시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유는 난 모릅니다. 여러분이 알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모르면 성령님께 가르쳐달라고 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의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정말 교만이 충만합니다.
목사님, 저희는 요즘 위로의 관한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그럼 위로의 설교를 하는 곳으로 가십시오. 거기에 가서 들으십시오. 병원에 갔으면 아픈 곳만 이야기를 하십시오. 그런데 누워있습니다. 숙달된 의사가 이 칼, 저 칼, 이 약, 저 약을 주사약 갖고 와서 놓는 것입니다. 다 터져서 피가 철철 나는 환자가 들어와서 칼은 이것 쓰고 약은 저것으로 하고 간호사 못 생겼으니까 잘 생긴 사람으로 데려오고, 내가 의사면 당장 발길로 차서 쫓아낼 것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요리 집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병원에 들어온 것입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적마다 너무 가슴이 아픈 게 하니라 마음이 황량합니다. 십년을 목회한 목회지의 양떼들의 수준이 저 정도밖에 안 되나.
목회자로서 해야 할 그리고 하기에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교회의 건축이 아닙니다. 교회건축도 힘듭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다시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듣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많은 위협과 협박, 환경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질병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슨 약이 필요한지 어떻게 그렇게 알겠습니까? 성경을 읽는데도 깨닫는 것이 없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마음의 찔림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것은 하여튼 우리가 하나님을 안 좋아하는 뭔가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애기하면 내제하는 죄고 불순종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주님이 우리에게 밝은 성령의 빛으로 진리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셔서 우리의 죄를 보게 해주십니다. 그것을 깊이 회개합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지나간 모든 죄를 내가 너를 용서하고 내가 너를 다시 사랑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다시 사랑을 부어주실 때 나타나는 놀라운 은혜가 무엇입니까? 다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하고 설교를 들으면 깨달음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의 형식은 가지고 있는데도 장시간 엎드려 있는데도 아무런 울림이 없고 중언부언하거나 아니면 졸다가 많은 기도 시간을 허비하고 빈 가슴으로 일어난다거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런 날들이 여러 번 계속 반복된다면 빨리 눈치를 채십시오. 피곤해서. 뭐 아닙니다. 어떤 날은 토할 것 같이 죽어도 새벽기도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충성! 그러고 일어납니다. 토할 것 같아서 잠깐 엎드려 기도하다가 빨리 올라가서 자야지 그런데도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런가 하면 저녁 9시부터 자서 몸이 생생합니다. 오늘은 가서 기도 좀 할 수 있겠다. 정신은 말똥말똥한데 온갖 잡다한 생각만 스쳐지나갑니다. 몇 시간 동안을, 그런 일들을 반복해서 계속하면 하나님이 나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싶다고 그러는데 하나님은 나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그러십니다. 그렇게 눈치가 없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뭔가 불순종하는 영역이 있는데 은근슬쩍 덮고 넘어갑니다. 적당주의로, 그러니까 적당히 덮어놓은 그곳에 곰팡이 같이 더러운 확 드러나면 모두 다 소제해낼 수 있는 거기에 썩어서 죽은 쥐 같은 그런 죄악, 이런 것들이 다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다 덮어놓고 한쪽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지 정직하게 다 털어내지, 주님 앞에 자기를 들어내고 자신의 삶을 고치면서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지 거기에 진정한 기도의 힘이 실리고 말씀의 은혜의 힘이 실릴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서 우리를 이 말씀과 기도의 진정한 의무로부터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서 거기로부터 죄를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 그리고 어두운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진실한 소원 같은 것을 공급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며칠 전 밤중에 교육관에 책을 쓰느라고 쭈그리고 앉아서 한 10시간 넘게 있었습니다. 쪼가리, 쪼가리 해서 여러 시간이 되었는데 밤중인데 책을 보니까 1609년에 나온 책입니다. 지금은 안 나오는 책입니다. 안토니 버지스 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스코틀렌드에서 목회를 했던 사람인데 책을 썼는데 책도 온전하지 않고 다 너덜너덜하게 떨어져서 볼 수가 없는 영인본으로 화면상으로 보는데 정말 눈물이 한없이 나왔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이 사람이 자기가 발견하지 못한 죄 때문에 그렇게 통회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발견하지 못한 죄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도 통회를 하지만 그것을 아직까지도 발견이 안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통회를 합니다. 거기서 무릎이 꿇어졌습니다. 야, 어떻게 하나님이 만든 똑같은 지구상에 사는데 이런 거룩한 성도가 있는가 하면 나 같은 짐승과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발견된 죄인데도 그것을 버리려고 하지 않고 그리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합리화시키면서 넘어가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어쩜 자신 안에 자기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죄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고 회개하는가.
그 중에는 심금을 울리는 구절이 하나 있는데 지금 영어로는 외우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말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지금 외우는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구절이, ‘하나님 내 마음은 어두운 바다와 같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바다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커다란 바위와 같은 죄악들이 있사옵나이다. 물결 때문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고 나도 그 바닷물 속에 있는 그 큰 바위들을 확인할 수 없지만 주님은 모두 아십니다. 주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죄가 있다는 사실에 제 마음은 아프고 더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것이 죄고 그것이 내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내 죄를 새로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인하여 기뻐할 수 없는 것은 그 죄는 발견된 즉시 이미 주님께도 알려지고 저에게도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알려진 죄는 회개하였거니와 알려지지 않은 죄는 아직까지도 회개되지 않은 채 내 속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오! 주님 나를 용서하여주시옵소서.’
그러니 똑같은 지구상에 우리 같은 사람하고 그 사람이 둘이 살아있다고 그럴 때 누구에게 하나님이 성경을 펼쳐서 그 진리의 오묘한 것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돼지처럼 살아서 진주를 던져도 밟아버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것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에게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얼마나 그날 밤에 마음이 얼마나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았을까? 핍박과 고난으로 가득 찬 슬픔의 시기에 주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우리는 이 좋은 환경 속에서 이렇게 분명히 불순종한 영역들이 말씀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데도 그 경건한 음성을 귀로 막고 제 멋대로 살려고 날뛰는 이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도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은혜 안에서 거룩하고 진실한 성도가 되어가기를 위해서 힘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여튼 참 저의 지성을 찌르고 들어온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뭐 그런 경험이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지만 진짜 어쩜 그렇게 박식한 그 안토니 버지스 라고 하는 청교도가 아주 조잡한 책입니다. 책은 조잡해도 그 속에 피가 배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싶었으면 자신 안에 발견되지 못한 죄를 발견했는데 더 슬퍼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발견되었으니 얼마나 더 많은 것이 저 안에 있겠는가.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이 모든 것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나에게 내 마음속으로 발견할 수 없는 죄들이 내 안에 많이 있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가 보다 더 철저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다른 타협의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들이 비록 아프지만 뭔가 하나님의 말씀에 걸려 불순종하고 있는 분야가 있다고 생각되면 우리의 양심과 말씀의 빛, 지성, 하나님의 은혜를 사용해서 철저히 파헤쳐서 그래서 순종하지 않는 영역인데도 해결하지 않은 채 남겨두지 않을 때 그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추는 것입니다. ‘정결한 마음 그 속에서 신령한 빛 비추오니 이보다 더 원하는 것 정결한 마음 주옵소서.’ 그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빛이 비추면 그 행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침마다 날마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보지 못한 그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서 실제화 된 아침마다 저녁마다 기도 속에서 보지 못한 그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어두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9. 죄의 속이는 역사(1) 생각을 이탈시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4)
신자가 일생을 가는 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별 다른 가치를 갖지 않고 이 세상에 묻혀서 살던 사람들도 이 세상에 고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더욱이 거듭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어 하늘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 이 세상에서 평탄한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신자의 삶은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 찬 삶이지만 그러나 그의 진정한 대적은 환난이 많은 이 세상도 아니고 마귀도 아닙니다. 요한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며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신 안에 깃들어있는 옛사람의 성품입니다. 이것이 끊임없이 성화의 길에서 발목을 잡고 이것들이 끊임없이 신자의 온전한 삶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신자를 공격할 때 제일먼저 생각을 공격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죄는 신자를 공격할 때 가장 먼저 생각을 공격하는 것일까요? 죄가 무엇 때문에 생각을 가장 먼저 공격해서 신자를 죄 가운데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일까요? 죄가 제일먼저 다른 것보다 더 생각을 공격하는 이유는 첫째로는 그 생각이 갖는 중요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각은 생각 자신과 온 영혼을 지키는 파수대입니다. 그래서 이 생각이 자기의 마땅한 자리에서 이탈하게 되면 그 다음에 마치 감시탑이 점령당한 요새와 같아서 언덕을 기어오르는 적들의 침투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는 제일먼저 감시탑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생각을 공격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경계를 흩으러버리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격의 삼요소를 이야기할 때 여기에서 말하는 생각, 혹은 지성과 그리고 우리의 정서, 그리고 우리의 의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서를 먼저 공격한다고 하면 정서를 공격하게 되면 양심이 반항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실제로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여러분들이 악한 상상을 했다고 가장을 합시다. 그러면 그 악한 상상을 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이미 악한 상상이 끝나고 난 다음에도 양심은 강력하게 송사를 해서 여러분들을 정죄합니다. 양심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인데 여러분들을 송사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데리고 가서 이 사람이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고발을 하는 것과, 너는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기능을 통해서 양심은 끊임없이 송사를 하게 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정서에 죄가 들어온 것을 양심이 발견하게 됩니다.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가서 손을 뻗어서 뭔가 악한 일을 행했다고 할 경우에는 의지와 그 일을 수행을 했는데 이미 악한 일을 한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악한 일을 한 그 의지는 양심의 송사를 받게 됩니다. 죄가 의지를 파고 들어와서 제일먼저 공격을 한다고 하더라도 양심의 강력한 소동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의 강력한 소동을 불러일으키게 되면 양심 자체가 죄를 죽이는 효과는 없지만 죄가 우리 안에서 자기의 계획을 펼치기에 성가신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이제 이 죄는 그것보다도 생각을 파고 들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마치 우리의 영혼 깊이 꽂혀있는 밖으로 나온 깔때기와 같아서 그 긴 영혼 속에 깃들어진 깔때기와 같아서 거기에다가 죄를 흘려 넣으면 양심에 의해서 발견되지 않고 그 생각이라고 하는 그 긴 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깊은 곳으로 죄가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증명해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날 아주 악한 상상을 했습니다. 정욕에 의해서 음란을 생각을 했든지, 아니면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지겹게 미워했든지 그래서 이런 마음의 강한 욕망이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에 양심이 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침 그 날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제일먼저 그 죄가 생각이 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죄이지만 회개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혹시 물건을 훔치든지, 남에게 폭력을 가했다든지, 행동으로 죄를 짓게 되었으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혹은 기도시간에 제일먼저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행동으로 지은 죄를 회개하게 되고 때로는 이 회개가 매우 강렬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오열하면서 기도를 해서 자신이 지은 마음의 죄와 행동의 죄를 하나님 앞에 토설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두 양심에 의해서 감지된 죄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뜨거운 정서를 가지고 죄를 품었던 범죄도 아니고 의지적으로 행했던 행동의 범죄도 아니고 생각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미끄러진 것들을 미리 감지해내고 그것에 대해서 양심의 깊은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한다고 하는 것은 고도의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부분적으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죄가 생각을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보통 하나님의 선명한 말씀의 빛, 은혜의 빛을 받지 않으면 이 생각이 이탈되어서 제멋대로 생각을 마음대로 하게끔 내버려둔 것에 대해서 뼈저리게 회개하고 뉘우친 적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할 수 없게끔 그 죄가 숨기에 적합한 기능이 생각이라는 기능이기 때문에 거기를 먼저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할 수 있도록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적진을 행해서 침투하는 적들이 외부에 의해서 전혀 발견되지 않은 가운데 적진에 침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죄는 전쟁에 있어서 강력하고도 매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생각을 제일먼저 공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생각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시켜버리게 되면 그 다음에는 나머지 기관들 속에 아주 쉽게 파고들어서 죄 자체의 영향력을 확산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두 번째로 죄가 제일먼저 생각을 공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생각’이라고 하는 기능 차체가 매우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라는 기능이 영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영어성경의 spirit 이라고 번역된 단어들은 우리 말 성경에서 대부분 ‘영’이라고 번역되었고 soul 이라고 번역된 단어들은 대부분 ‘혼’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많은 성경의 경우에 오히려 이 spirit 은 생각을 뜻하고 soul 은 정서를 의미하는 적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 보면 영과 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생각과 정서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생각이라고 하는 그 기능 자체가 매우 영적인 기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 속에 일어나는 변화는 양심에 의해서 감지되지 않은 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생각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는 바로 그것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는 어떻게 하든지 신자의 사고의 기능에 관여해서 그것을 이탈시키는 것이 죄의 중요한 첫 번째 공격입니다.
그래서 한 신자가 밖으로 죄의 열매를 맺고 또 내면의 세계에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서 정욕에 불타고 그렇게 사로잡히기 전에 먼저 상당한 시간에 걸쳐서 생각이 올바른 자리에서 이탈해서 자기가 죄 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도 모르게 되는 긴 기간들이 있고난 후에 영혼에 그런 피해들을 입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볼 때 신자 안에 역사하는 죄의 수순을 우리들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단계별로 설명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가 제일먼저 하는 일이 생각을 이탈시키는 것입니다. 생각을 일단 이탈시키게 되면 그가 아무리 많은 성경의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일단 생각을 궤도에서 이탈시켜버리게 되면 그 많은 지식들이 그를 보호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마치 한 시간에 300킬로를 달릴 수 있는 강력한 엔진을 가진 초고속 열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선로에서 이탈되고 나면 그 강력한 엔진의 힘이 별로 쓸모가 없게 되는 것처럼 신자의 사고를 생각을 일단 마땅히 있어야 할 그 궤도에서 이탈시키고 나면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지식들이 그로 하여금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데 도움을 못 줍니다. 그래서 죄의 첫 번째 도전이 생각을 이탈시키는 것입니다.
생각이 이탈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지난 시간에 세세히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반복할 의사는 없지만 여러분들 중에 꽤 많은 분들이 아직까지도 이 설교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기 때문에 좀더 부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생각이 이탈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생각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면 이탈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생각이 제 자리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 생각의 기능이 유지된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계속 생각이라고 말씀드리는데 사실은 우리말의 적당한 번역이 없습니다. 영어에서 mind입니다. 여러분들이 mind를 마음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틀린 번역이고 mind 는 하트, 마음은 heart 고 그 heart인 마음이 생각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기능을 통틀어서 mind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affection이 있는 것입니다. mind 그러면 마음이 갖는 사고의 기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면 이 말이 갖는 (?)한계가 무엇인가 하면 생각, 그러면 여러분들 속에 떠오르는 불쑥불쑥 가리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도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더 정확한 의미는 마음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작용입니다. 느끼는 작용이나 의지의 작용 말고 사고의 작용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마음이 갖는 사고의 작용은 이 생각이 올바른 궤도에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가 하면 온 몸과 마음, 영혼의 목적, 존재하는 목적과 이것의 기능과 관련해서 제 자리가 무엇인지를 생각을 해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들이 사물을 본다고 하더라도 이 사물을 보는 것은 어떤 목적을 보는가에 의해서 그 보는 각각의 위치가 틀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식물학자와 미술가, 그리고 지질학자 세 사람이 산을 여행했다고 칩시다. 미술을 하는 사람의 눈에는 이 산의 곡선과 펼쳐진 색깔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고 그 다음에 식물학자는 지나가는 길가에 펴져서 자라고 있는 식물의 군들의 관심이 갈 것입니다. 광학자는 이 두 가지 아무런 관심이 없고 절벽이나 암벽이 갈라진 곳에 관심이 많을 것이고 거기에서 광물질을 조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세 사람의 각각의 생각의 위치는 각각 입각점이 다를 것입니다. 서 있는 지점이, 이제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는 가장 쉽게 설명을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로서 이렇게 서있을 때 생각의 입각점은 어딘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자가 됨으로서 참 사람이 되고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대의입니다. 그러면 생각의 입각점이 바로 거기라는 것입니다. 그때 생각이 그 입각점에 딱 서서 바로 그 일에 기여하도록 사고 기능을 하는 것, 거기가 입각점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았을 때는 생각이 그 입각점으로 딱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이 사고 기능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온 영혼과 관련된 기관에 죄가 침투해 들어오는 것들을 파악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입각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도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다듬어지고 기도의 은혜로 순전해질 때에 생각이 그 입각점에 똑바로 서있게 됩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이해하는 표정을 하면 설교자가 힘이 납니다. 이해하시지요? 그런 입각점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이탈하게 되면 첫째는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원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은혜의 상태에 그대로 있다면 이탈할리가 없으니까 이미 이탈되는 것 자체가 그 은혜를 소멸하는 죄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간파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생각을 이탈을 시킵니다. 그래서 아직 정서적으로 죄를 뜨겁게 사랑하거나 의지적으로 범죄를 하거나 그러지 않는데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지켜주기에 적합한 위치에서 이탈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죄의 첫 번째 역사입니다. 그것을 지금 9시간에 걸쳐서 계속 강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발전하는가 하면 정서를 뒤엉키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서라고 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사랑의 정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사랑의 정서를 설명하는 가운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정서를 둘로 나누어서 대비시켰습니다. 하나는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이 까리따스는 라틴어로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입니다. 그것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사랑은 꾸삐띠따스의 사랑입니다. 이 꾸삐띠따스의 사랑은 큐피트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랑은 사랑인데 이기적이고 자아 중심적이며 육욕적인 사랑입니다. 이 둘은 서로 화해하기가 어려운 사랑입니다. 하나의 사랑이 있으면 다른 하나의 사랑이 그것을 위해서 자꾸 파멸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신자 안에는 이 두 가지의 사랑이 공존합니다. 영원히 까리따스의 사랑만으로 가득 차고 꾸삐띠따스는 하나도 없는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랑이 한 신자 속에서 우세한 흐름을 형성하는가는 판가름 날 수 있습니다.
은혜 안에서 살게 되면 꾸삐띠따스의 사랑이 여전히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흐르는 사랑이 이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입니다. 이따금씩 꾸삐띠따스의 사랑이 그것을 방해하지만 아주 적은 영향력밖에는 행사를 못하기 때문에 삶 전체가 까리따스의 사랑의 물결에 떠밀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순종하시는 삶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뒤엉킨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런 까리따스의 사랑의 정서가 죄로 인해서 꾸삐띠따스의 사랑의 정서와 뒤엉켜서 두 가지가 혼재해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은혜가 없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일정한 상황에 들어가면 눈물도 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되겠다고 무수히 결심도 하지만 이미 실제에 있어서는 꾸삐띠따스의 사랑이 굉장히 우세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가 될 때의 신자는 영혼의 어떤 평화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여하거나 말씀의 은혜를 받거나 이렇게 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데 이미 꾸삐띠따스의 사랑이 아주 우세해지게 되면 그러면 은혜의 자리를 잠깐 이탈하게 되면 곧바로 정욕의 노예가 되는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둘이 뒤엉켜있게 되니까 까리따스의 사랑을 신자가 택하면 꾸삐띠따스가 계속 역사해서 그래서 도저히 어떻게 이 정욕을 해소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는 노예 된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만족시켜주면 해방감을 느끼는데 그 대신 까리따스의 사랑을 떠났기 때문에 자기 속에서 그 하나님을 향한 자유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들이 혼돈된 상태에서는 사물과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세계들이 정확하게 거울에 비추듯이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물결에 비추듯이 그렇게 비쳐서 무엇인가를 똑바로 인식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두 번째 공격입니다.
세 번째는 죄를 착상시키는 것입니다. 이 죄의 착상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의지를 가지고 그 어떤 특정한 죄를 자신의 마음속으로 급격히 끌어당겨서 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는 생각이나 정서가 공격을 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마지막 결단은 의지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까지는 죄 된 생각이 떠오르는데 계속 항거를 합니다. 그런데 드디어 벌써 이 생각이 이탈되어버리고 들어와서 정서까지 뒤엉켜버리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결국 점점 이 죄의 힘이 강해지고 이 죄에서 느끼는 기쁨이 정도를 더하게 됩니다. 그럴 때 신자는 마음속으로 적극적으로 그 죄를 선택하게 되고 가슴속에 품게 됩니다. 품게 되는 유익이 무엇인가 하면 이 죄가 자신 안에서 친숙해지게 되고 여기에서 아주 풍부한 imagination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생각이 스쳐갔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놀라운 죄의 즐거움들을 imagination 속에서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상상도 아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그 imagination 기능 자체가 어떤 특성을 갖는가 하면 현실화하려고 하는 구체적인 특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속에서 죄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것을 털어내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죄가 이제 잉태되게 되는데 그러면 점점 자라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성폭력에 의해서 잉태된 아이든지, 사랑하는 관계에서 잉태된 아이든지, 시험관을 통해서 잉태된 아이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아이가 배속에서 일정한 기간이 딱 차서 성장하게 되면 그 다음에 아이가 출산하게 되듯이 반드시 이렇게 품은 죄는 출산하게 됩니다. 오늘 나갈 진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얘기가 나온 김에 설명을 하자면 이렇게 잉태된 죄를 다 태어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신다면 아마 이 세상은 볼 수 없는 지옥을 방불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죄가 잉태되기는 했는데 못 태어나게 하시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첫째는 유산시키시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유산시키시는가 하면 이 속에서 아직 태어날 정도로 죄가 성장하지 않았는데 하나는 회개를 시켜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산시켜서 쏟아 내버리십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셔서 이 신자가 이것을 출생시키지 못하도록 억제하십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산모의 의지와 관계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이 죄는 마지막에 나올 때 반드시 신자의 의지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도저히 의지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을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못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해를 상당히 하시는 눈빛이시기에 하나만 더 예를 들겠습니다. 마음속에 돈을 훔치고 싶은 강력한 욕망이 일어났습니다. 용도까지 생각났고 가슴에까지 품었고 이 범죄가 점점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때에 어느 친구가 와서 돈 일억이 있는데 아무도 감시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훔치러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지가 너무 기뻐합니다. 가자, 어딘데? 에베르스트 산꼭대기에, 그러니 그렇게 훔치고자 하는 강력한 범죄의 의지는 있는데 환경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가려면 등산 배우는 것부터 연습을 해서 세계적 알피니스트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안 됩니다. 이 이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참된 회개 없이도 죄가 산출될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이정도로 유지되면서 일반적인 차원에서 불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 이제 우리들이 이 죄를 감시하는 생각의 의무를 개별적인 의무와 관련시켜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큰 제목 자체가 여러분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 갈 것 같아서 좀 쉽게 말씀을 드리고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죄를 죽인다. 그리고 죄와 싸운다고 하는 것을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거나 불 끄고 캄캄한 기도실에서 울부짖으면서 기도하거나 아니면 부흥회를 하는 시간만 죄가 죽는다고 생각을 하고 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만 죄가 발견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전 삶은 죄를 죽이는 과정이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애쓰는 모든 과정은 죄를 감시하는 과정이고, 죄와 싸우는 과정이며 죄를 죽이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여기에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의무라고 하는 것이 등장을 합니다.
의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도록 명령받은 특정한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의무는 총체적인 의무와 개별적인 의무로 구별되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총체적인 의무는 이런 것입니다.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총체적인 의무를 지고 하나님의 손으로 이 세상에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총체적입니다. 꼭 신앙고백이 아니더라도 여러분 자신이 생각하는 총체적인 의무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아무 아무개는 세례를 받는 이 순간부터 주님의 영광을 위해여 살기로 다짐합니다.’ 총체적인 의무 선언입니다. ‘나 아무 아무개는 이 순간부터 주님만을 사랑하며 살기로 한다.’ 스스로 총체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총체적인 선언만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총체적인 적대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고 실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우리들이 전투라고 말합니다. 그 개별적인 전투가 모두 합해져서 전쟁으로 불려지는 것입니다, 그 개별적인 전투에서는 패배했는데 전체적인 전쟁에서는 이겼다. 그런 상황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총체적으로 여러분들이 좋은 의무를 가지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깊이 동의하고 그렇게 살고자 하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매일매일 삶 속에서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상황 속에서 그 총체적인 의무를 구현해가면서 살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그 좋은 총체적인 바램들은 그야말로 바라는 소원으로 끝날 뿐이지 실제의 삶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 전체의 방향을 전환해서 총체적인 인생의 명제를 바꾸는 일도 필요합니다. ‘나 아무 아무개는 어제까지는 이 세상을 사랑했으나 이제 내가 회심하고 내 일생을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한다.’ 총체적인 방향전환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고 나머지는 없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그런 총체적인 명제를 실행해가기 위한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의 전투, 그것을 어떻게 하면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짜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총체적인 비전을 가진 사람의 오늘 하루의 삶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그러면 그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비전들이 모두 공염불에 지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별적인 의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개의 상황, 개별적인 의무에서 신자가 똑바로 살아가면 죄를 감지할 수 있고 생각이 거기에서 이탈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역할들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죄가 어느 정도 죽습니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말씀드리려고 하는 그 커다란 타이틀이 무엇인가 하면 개별적인 의무와 죄에 관한 생각의 의무입니다. 개별적인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역사하는 죄를 감시하는 생각이 의무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개별적인 의무와 죄에 관한 생각의 의무에서 이런 의무들을 이행하면서 생각이 따라야 할 지침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의무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의무의 내용에 관한 것인데 이 의무의 내용의 목표는 온전함입니다.
첫 번째로 의무의 내용인데 그것의 목표는 온전함입니다. 자,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들이 넓게 보면 매일매일 숨쉬고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이 전부다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경배입니다. 그리고 그 개개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리고 개개의 의무를 행하는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주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인가를 입증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총체적으로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너무나 주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는 개판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마음에는 너무나 그렇게 살고 싶은데 여러 가지 연약함으로 인해서 그런 총체적인 계획에 부합할 정도에 양질의 삶을 못 살게 되는 경우는 종종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다 더 많은 절대적인 경우에 있어서는 한 사람이 살고 있는 개별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총체적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의 방향의 부산물들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생각 속에 들어와서 속이는 작용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 그 분의 사랑,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이런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죄나 악으로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연약함이라고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아첨입니다. 셀프 플레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의 죄의 속임은 아주 극대화됩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개개의 의무에 이 의무를 이행하는 내용에 있어서 온전함을 추구하게 되면 죄를 감시하는 생각이 이탈하지 않고 그리고 죄 자체도 억제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 의무 이행을 통해서 죄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지금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좀더 상세하게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예를 들어드리는 것이 여러분들에 이해를 가장 도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것에 총체적인 여러분들의 바램이오, 의무라면 지금 여러분들은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개별적인 의무에 종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개별적인 의무에 종사하고 있는데 여기 모여 있는 여러분들 모두 똑같은 의무의 내용을 가지고 이 개별적인 예배의 의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 시계를 만지면서 끝날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1시 40분이 예배 시간인데 늦게 온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마음을 풀고 들리면 듣고 말면 말고, 그리고 번뇌가 떠오르면 번뇌가 미는 대로, 근심 걱정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이렇게 자기를 방치한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온전하고자 하는 목표를 안 가지고 예배를 드린다면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전혀 못 만나고 일어서서 돌아가면서도 여러분들은 의무이행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느낌은 받을지 모르지만 내가 이렇게 예배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졌을까? 이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추구하는 사람은 틀립니다. 왜 오늘 내가 이 예배에 참석했는데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안 베푸실까? 나는 오늘 예배의 준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축복을 받는 그 순서까지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예배 자였는가. 나의 정신과 집중은 하나님의 말씀과 경배를 향하여 모아졌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내가 드리는 이 예배자의 삶은 육일동안에 살았던 삶과 일치한 삶일까? 내가 정말 예배의 정신으로 일주일 동안 살았는가. 정말 내가 여기에 와서 주님의 은혜를 구할만한 삶을 살았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는 반론들이 제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치열한 자기 점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과정 자체가 정상의 과정입니다.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과 하나님 앞에 말씀의 자극을 받은 양심을 가지고 점검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없구나. 수요일 날 지은 자신의 잘못이 생각이 났습니다. 수요일 날 내가 그렇게 성령님을 근심시켜드리는 나쁜 죄를 저질렀는데 결국은 그것 때문이구나. 그리고 예배가 끝났는데도 못 돌아가고 참회하는 것입니다. 확장되어서 오늘 드려지는 이 모든 예배가 사실은 이보다 더 큰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은혜의 역사가 있을 수 있는 예배였는데 나 한 사람이 불결하고 더러웠기 때문에 이 예배 전체가 하나님 앞에 더렵혀졌다고 하는 생각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통회하게 됩니다.
그러면 의무를 이행하는 내용에 있어서 온전함을 추구하는 사람과 그런 의식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쪽은 그런 의무를 이행하면서 만족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의무를 이행하는 동안에 죄를 발견하거나, 생각이 제 자리를 찾아가거나, 죄와 싸우거나, 죄를 이기거나 이런 기능이 거의 없이 꾸역꾸역 자기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실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이 실려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의무를 감당해나가는데 이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절실하게 탄핵하셨던 바로 흠 있는 짐승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던 행위입니다. 그런 제사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아주 강력하게 탄핵하시는 것입니다.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사를 지냄으로 말미암아 그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더 폭발시킵니다. 모욕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무에 있어서 온전함을 추구하려고 애를 쓰게 되면 그 의무를 이행하는 개별적 의무의 과정을 통해서 성화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끄러지려고 했던 생각의 기능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회심하고 그 이듬해부터 교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교역자가 되기 전까지 계속 교사를 했는데 하여튼 그 과정이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 같습니다. 뭐 선한 목자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나 하여튼 이것은 완전히 코가 꿴 것입니다. 일주일동안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하나님이 주일날 생생하게 보여주십니다. 애들이 갑자기 많이 결석하거나, 아니면 왔는데도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잘 나오던 애들이 안 나옵니다. 그리고 마음이 강퍅하게 돌아섭니다. 그래서 다시 그것을 보면서 이게 내가 정말 잘못되었구나 하고 회개하고 일주일동안 은혜를 구하면 아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성경을 가르칠 때 아이들이 변화 받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내가 섬기는 의무의 이행과 나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하나가 되어서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계속해서 거기에 꼬리가 잡혀서 그래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에 있는 동안에 나를 가장 성화시키는 훌륭한 이 세상의 도구 중에 하나는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성화의 수단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화시켜나가십니다. 의무에 있어서 온전함을 추구하려고 할 때 개별적인 이행의 과정을 통해서 생각이 이탈되지 않고 자기를 딱 지키게 됩니다. 정신 차리고 살게 됩니다. 생각 없이 덜렁덜렁 와서 왜 그렇게 사는지 그것은 바보입니다. 머저리입니다. 그렇게 살면 뭐하겠습니까? 의미가 없습니다. 생존하는 것이, 생각을 가지고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고 그리고 어디로 가고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까 지금 어떻게 살아야지 되는가. 치열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 데는 간단한 지식이면 됩니다. 신자다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평생을 공부해도 다 공부할 수 없습니다. 사고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천국을 가는 것은 거의 기적입니다.
두 번째는, 의무의 원리에 관해서입니다. 이 의무는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믿음으로서 행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서 행하는 것입니다. 자.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의무라고 하는 것이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은혜 받은 대로 일을 맡기십니다. 일을 맡기실 때는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맡기시지 않으십니다. 너 은혜 받았으니까 가서 저기 토성의 위치를 변경시켜놓고 오너라. 그런 일을 맡기시지 않으십니다. 대부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다음에 맡기시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십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이 맡기신 일의 특징은 우리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시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 그 일을 훌륭하게 해내기를 원하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일로 따지자면 내가 늘 하는 말씀이 자기가 해놓은 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무신론자입니다. 실천적인 무신론자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온 세상을 Be there 딱 한 마디 “있으라.” 이 한마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여러분보고 너 은혜 받았으니까 일을 나를 위해 하라. 그러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못 해서 나에게 떼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내게 일어나기를 원하는 작용을 염두에 두시면서 내게 일을 맡기셨구나.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 정도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보같이 일을 많이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킹콩 앞에서 모래알을 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감동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친히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고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 일을 하고 의무를 맡기신 이유는 하나님이 혼자 도저히 하실 수 없어서 품앗이 하듯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게 될 어떤 작용을 통해서 우리의 변화를 도모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더욱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하심으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그런 방식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이 이루어질 때는 첫째로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한 가운데 그 일들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의무가. 이것은 첫 번째 의무의 내용에 있어서 온전함을 추구하게 되는 것과 결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예배, 온전함이 빠지고 나면 예배는 드리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와서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 예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그러면 오늘날 세상에서 야유회를 하고 세상일로 모인 사람을 누가 도와주는 것일까요? 자기네들이 좋아서 모이는 것입니다. 사교단체 모이듯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없어도 이렇게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형식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해야할 어떤 필요를 못 느낍니다. 그러나 만약에 모이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모이지만 성령님이 강력하게 임하셔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셔야지 된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한다고 하는 온전함을 추구하게 되면 우리가 모이기는 우리가 모이지만 그 다음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뭐가 필요한가 하면 성령님의 강력한 은혜가 필요한데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이렇게 주었다, 말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패역한 인간들이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의지해서 우리들이 기도하오니 모이는 것은 우리가 모이지만 모인 중에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주시는 것이 주님 자신이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을 끊임없이 의지하는 마음으로 개별적인 의무가 수행될 때 생각이 이탈되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고 죄를 억제하고 그 죄를 죽이는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신자 안에 역사하지 않으면 어떤 생명의 역사는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역사가 곧 생명의 역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누구도 그 생명의 역사를 체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개별적인 의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교사의 사명이 무엇인가? ‘교사의 사명은 한 영혼이라도 복음을 전해서 구원하고 구원받은 그 신자에게는 진실한 삶의 모본을 내가 보여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쳐서 그를 은혜 받게 해서 진실한 성도로 변해가도록 돕는 것, 그것이 교사의 하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이미 벌써 자기는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진술한 것입니다. 자기의 사명이라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누구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교사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고 물을 때 9시에 나와서 애들하고 잠깐 놀아주고 신발정리하고 집에 가는 것, 이렇게 정의를 하게 되면 주님의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근면과 성실함이 뒤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개개의 사람들에게 의무를 부여해주실 때 그렇게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삶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리매김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그 표준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지금 먹고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 모든 일들을 그렇게 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고 또 하나는 그분의 끊임없는 능력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내가 그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삶을 살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리스도로 충만케 되는 은혜가 내 안에 거할 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부터 멀어진다고 하는 일의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담겨진 개별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방식이 이런 원리로부터 이탈되어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식으로 의무를 감당해나가는 사람에게는 이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킬 수가 없고 죄는 이런 의무의 틀에는 매이지 않습니다. 감시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감시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 속에 나는, 다른 사람이 다 얘기합니다. 당신같이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자신이 할일은 다 해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자부심 속에서 죄는 아주 번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의무를 이행하고자 하면 그 주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능력이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직장 생활 속에서 빛 된 삶을 살면서 신앙의 본을 보이고 그리고 유능한 직장인으로 남기 위해서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은혜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양육의 목표가 그냥 아이를 한 7-80킬로 그렇게 살찌는 성인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밥만 먹이면 됩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정말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교육시키는 것이 부모인 나의 의무다 생각할 때는 내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도 내가 양육을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내 자식을 양육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울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고 내가 그에게 밥을 해주고 학비를 대주고 교육시키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도 그 영혼에 찾아가서 그를 어루만져서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자녀로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생각이 이탈되지 않고 자기 자리의 입각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죄를 억제하고 죄를 죽이는 성화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 번째는, 의무를 이행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가 거론될 수 있는데 첫째는 외적으로는 의무를 이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제멋대로 열정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제 멋대로 섬기는 것은 미치광이의 행동입니다. 성도의 행동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보고 박수를 칠지 모르지만 지금 그 사람은 그렇게 행동함으로서 하나님을 굉장히 불편하게 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교회를 진지 벌써 2년 반이 넘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돈도 줄일 겸 우리가 직접 짓자. 그리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이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불과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배는 떠났고 돌이킬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원래 하려면 한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짓고 싶다고 설계도를 그려서 주면 그 사람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을 다 불러서 그렇게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돈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띄어놓고 보니까 일주일 하고나니까 이게 보통 어마어마한 결정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일군들을 다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내가 공부하면서 내가 해나갈 테니까 그러니까 내 말에 따라달라고 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에 절대적으로 순종해달라고, 그리고 내가 뭔 이야기를 하면 최대한 나를 설득하고 끝까지 설득이 안 되면 여러분들의 주장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이 교회가 지어지기는커녕 개판이 된다. 그리고 모두 동의를 받아냈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저는 목사고 사람들은 건축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두 세주 지난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등산화를 신고 화이바를 쓰고 그리고 지휘봉을 들고 마당에서 아침 8시에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가 끝난 다음에 와서 이제 하는데 처음에는 기가 막혔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올 때는 80명의 사람이 여기에 와서 14 파트의 일을 한꺼번에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이 생각을 안 하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벽돌을 쌓는 사람은 여기서부터 저 끝에까지 벽돌을 쌓는다고 그러면 아무 생각 없이 빨리 쌓고 돈 받고 집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벽돌을 쌓는 것이 지금 내 목표가 아니라 벽돌을 쌓는다고 하는 개별적인 과업은 전체적으로 예배당을 만든다고 하는 계획 속에 있는 작은 과업입니다. 그러면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벽돌 쌓는 사람이든지, 창문을 만드는 사람이든지, 등을 다는 사람이든지, 내 머리 속에 예배당을 어떻게 지으려고 하는지를 잘 이해를 하고 그 전체적인 것에 부합하도록 개별적인 과업을 수행해나갈 때 만납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당에서 소리, 소리 지른 게 바로 그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쪽에서 일을 쭉 해나갔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나는 저기까지 가라고 그랬으니까 뭐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 어떻게 가라고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내 책임은 없다고 그러고 짝 쌓고 가는 것입니다. 봤는데 창문을 내는 구멍도 안 내고 저 끝에 가니까 이쪽에서 벽돌을 쌓은 사람도 쌓고 가면 된다고 와서 벽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쌓는데 닷 세가 걸렸는데 만나게 하는데 열흘이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이렇게 다루었다가는 교회가 큰일 나겠다. 그래서 시범을 보였습니다. 망치를 큰 것을 가지고 여기서부터 다 때려 부셨습니다. 이것을 일이라고 하는가. 뇌는 출장을 보냈는가. 이렇게 하니까 이 나라가 그렇게 부지런한 백성들이 사는 데도 이렇게 밖에 못 산다. 나는 진짜 당신들을 보면 이 민족의 앞날이 걱정된다. 다 때려 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잔뼈가 굵은 기술자들입니다.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목사가 와서 그것을 다 때려 부수면서 이것도 일이라고 했는가. 이것을 밥이라고 하는가. 다시 해라. 물론 다 때려 부순 것은 우리가 돈을 내는 것입니다. 자기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습니까? 내가 그것을 노린 것입니다. 내가 요만큼 화가 났는데 이만큼 화를 냈습니다.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이것을 일이라고 하는가. 그러면서 야단을 쳤습니다. 다 때려 부셨습니다. 다시,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서부터 어떻게 하는가 하면 가다가 막 가는 게 아니라 이게 그냥 가다가 또 때려 부수면 어떻게 하나. 그러다가 그 두려움 때문에 그러면 전체적으로 지금 이 공간을 지으려고 하는 계획이 뭘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면 물어보러 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목사님, 이거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묻습니다. 그러면 또 물어볼 때 그 자리에서 대답해줄 수 있는 실력이 되겠습니까? 아니 목회만 하던 사람이 어떻게, 아,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와요. 그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다시 전화 걸어서 아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그래서 잠깐 있다가 한참 있다가 다 모여. 그리고 설명을 합니다. 이렇게 가고 이렇게 하면 문제가 생기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가면 안 되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 딱 맞아떨어지잖아. 그러면 막 박수를 칩니다.
더군다나 그러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이 물어봤습니다. 우리 교회에 집사님께, 목사님은 목사가 되기 전에 뭘 하던 사람인데 저렇게 건축에 대해서 많이 압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 집사님이 교회하시기 전에 현대 건설에 오래 있었으니까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이지. 그 다음부터는 그 사실도 아닌 이야기에 권위가 서서 말을 잘 듣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는 말이 다 지어놓고 나서 입당하는 날인데 목수도 와서 쳐다보고 입을 벌리고 놀라고, 벽돌을 쌓은 사람도 와서 보고 놀라고, 의자를 갖다놓은 사람도 보고 놀랍니다. 왜 각자는 와서 자기 일만 했을 뿐입니다. 마지막에 청소를 다해놓고 껍데기를 다 벗겨놓고 나니까 전체적인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어주시는 개별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고생하는지 보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를 이루어 가시는데 있어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서 각자 각자를 섬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교회 구석구석에서 섬깁니다. 여러분들이 돌아가고 나면 주일날 밤 12시까지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능이 있습니까? 이 사람은 돌맹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딱 갖다놓습니다. 모래와 같은 사람의 재능을 얹어서 그 다음 벽돌을 얹습니다. 다 마감하고 나면 그 다음에 시멘과 같은 사람이 와서 싹 바르고 지나갑니다. 그 다음에는 벽지와 같은 사람이 와서 바르고 지나갑니다. 그러면 등불과 같은 사람이 와서 환하게 비추면서 교회를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 하면 개별적인 의무를 잘 완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내 인생 전체를 어떻게 이끌고 가시려고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나를 지금 학교에 다니게 하셨다. 그러면 내 인생을 앞으로 어떻게 끌고 가시려고 할까? 앞으로 내가 변호사가 될까, 의사가 될까, 아니면 풀빵장수가 될까? 그런 구체적인 직업에 대한 계획이 아니더라도 인생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셔서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을 이끄시려고 하는가 하는 전제적인 구원의 계획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면 얼마 하면 저는 떠나갈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안 무너지고 누군가가 와서 교회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세워놓으셨고, 지금 사는 세대는 어떠하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에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목사님이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 한다. 그것은 안 되잖아요. 그런 것들이 성경에 전체 속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기업을 하면 기업가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업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까? 다 나옵니다. 공부하면 공부하는 사람, 백수를 지낼 때는 어떻게 지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하면 모세와 같은 사람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백수 비슷하게 지냅니다. 그게 무슨 연봉을 받았겠습니까, 뭘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체가 미래를 위한 훌륭한 준비가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살게 하시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계획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개별적인 이해가 그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맞게끔 이렇게 이행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만이 아니라 인생 모두를 하나님 앞에 잘 살아서 내 인생이 주님의 뜻에 기여하고 싶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성경을 탐구해야 합니다.
왜 안 합니까? 나는 여러분들이 공부를 안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몇 십 년을 벌어먹기 위해서도 공부하는 것도 위장병이 생기고 눈에서 진물이 나도록 그렇게 공부를 하는데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그 공부인데 왜 안 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그 모든 계명에 외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내적으로는 사랑의 정서를 가지고 그 일을 행할 때 이 생각이 이탈되지 않고 올바른 입각점에 바로 서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서를 가지고 이행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는 다양한 섬김이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계기가 되어서 섬기는 일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가장 거룩해 보이는 일도 결국은 저 밥벌어먹기 위해서 하는 일이 될 수 있고, 가장 세속적으로 보이는 그 일도 사실은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긴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고 있는 그 사람과의 관계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성도는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화투비 어떤 존재가 된 사람, 그 됨됨이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아주 놀랍게 자기의 의무를 이탈하려고 하는 자기의 생각이 입각점을 바로 지키게 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죄의 세력들을 감지하고 그것들을 물리칠 수 있는 작용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사랑의 정서가 늘 이 속에 배어있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고 그 주님이 자신과 연합된 가운데 하나 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개별적인 의무들이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게 임한 은혜가 흘러넘쳐서 그 은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동반한다고 그랬는데 그 사랑 때문에 어떻게 그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 이것이 진실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그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자기의 모든 의무에 계속 배어있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이 견고하게 이루어진 상태 속에 살아갈 때 그는 범사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연결이 끊어진 사람들은 의무를 이행하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에이씨, 왜 나만 혼자 이렇게 힘들게 이렇게 하나. 그리고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자기만 부당한 대접을 하나님께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게 되는데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고난이 오고 이 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주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고난을 당할 때 주님도 이 땅에 계실 때 고난으로 가득 찬 생애를 사셨습니다. 주님도 아침마다 일어나실 때는 너무나 피곤하셨기 때문에 토할 것 같으셨지요? 깊은 밤에는 긴 먼 거리를 돌아다니시느라고 발이 부릅뜨시고 전도자의 삶을 사시느라고 아프셨지요? 주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당하신 고난과 박해는 제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핍박과는 비교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지요? 그러면서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모든 의무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에 배어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의무를 감당해나갈 때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고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생각이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입각점에서 이탈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억제하고 죄를 죽이는 효과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세인은 안 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런 묵상을 하게 되면 내가 막 의무를 이행하면서 견디기 힘든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죽었다는 그 사실이 내 안에서 실제화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내 안에서 강하게 사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을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기가 충분히 죽으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자신의 모든 의무 속에 배어들고 그 안에서 주님이 사셔서 그래서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무의 이행의 방식을 택할 때 생각이 마땅히 자기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 입각점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무의 마지막 궁극적 목적에 관해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 의무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런데 바보같이 일을 했는데 거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일을 해놓고 자기 과시를 하게 됩니다. 자기를 뻐기고 과시하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방식도 잘못되었거니와 그 결과를 놓고 자기 자신을 뻐기고 자기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의 영혼에 죄를 충분히 들어오게 하는 효과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게 되면 일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자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자랑은 어떤 측면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로 그 사람의 시선을 향하게 하기보다는 사람을 주목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을 주목하게 될 때 예견되는 반응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사람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도. 두 번째는 자기 비하에 빠지게 됩니다. 세 번째는 그 사람을 시기하게 만듭니다. 셋 다 악한 결과입니다. 좋은 결과는 하나도 안 가져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 보면 “누구든지 자랑하려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이것은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라면 자랑을 해도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가 자랑거리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를 말 했을 때 저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나를 주목하고 시기하거나 나를 열렬하게 숭배하게 되거나 자기 비하에 빠지게 될 것 같으면 나를 감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자랑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자기만족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향한 열렬한 숭배는 자기 자신이 숭배를 받고 싶은데 그것이 좌절되었을 때 반응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열렬히 숭배하는 것은 왜곡된 자기 숭배의 변형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렬히 스타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려고 하는 욕망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될 때 누군가를 숭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쪽이든지, 저쪽이든지 공통점은 하나님은 안중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이것을 개별적인 의무에 있어서 구현해가야 합니다. 진짜 지금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계신가. 그리고 정말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나는 사람들에게 가려지고 잊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 일을 수행함으로서 혹시 본이 아니게 나 자신이 높이 드러나면 어떻게 할까? 하고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그 의무를 감당해나가려고 하면 그러면 이 생각이 죄를 감시하는 올바른 입각점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를 억제하고 죽이는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저는 요즘 생각합니다. 정말 성화의 길은 너무 멉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점점 더 나는 나의 낯선 이방인이 되어집니다. 내가 내 안에서 살아왔고, 내가 내 안에서 친숙해졌고, 나는 나의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나는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이 벗겨지는 양파의 껍질과 같이 그리고 갈피갈피에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던 수많은 악과 부패들이 어쩌면 그렇게 교묘하게 숨어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이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절대로 생각이 없이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내 몸이 모두 장애가 되어서 그래서 휠체어에서 혹은 침대에 누워서 생활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까지 가장 사라지지 말아야 할 우리의 신체의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향해서 반짝이는 눈동자, 그 눈빛입니다. 전심으로,
신자 되기 원합니다 참 마음으로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서 마치 자신의 인생, 그 목적 자체가 참다운 신자가 되기 위한 것,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그리고 단 하루라도 그렇게 온전한 신자가 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두의 영광과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버릴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진리 안에서 참된 성화의 지혜를 터득하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그때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성도의 발자취는 얼마나 복된 발자취일까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 안에 하늘의 영광이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10. 죄의 속이는 역사: 생각을 이탈시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4)
오늘 이 시간에는 개별적인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죄의 속임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들이 총체적인 의무와 개별적인 의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총체적인 의무는 우리들에게 전반적으로 제시하는 삶의 방향입니다. “너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총체적인 명령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총체적인 명령입니다. 이 총체적인 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삶의 환경에서 그 총체적인 명령의 정신을 붙들고 그대로 그것을 적용하면서 살려고 하는 순간순간의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이것을 방해합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릴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죄가 이 개별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의무들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원리에 대해서만 많이 배우지 실제 의무에 대해서는 잘 배우려고 하지 않는데 의무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면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순종하는 삶이 없으면 사실은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원리도 실질적으로 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받을 수 있는 많은 축복들이 있지만 그 축복들 중에서 최상의 축복은 하나님이 영혼을 어루만져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영혼을 어루만져주실 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영혼의 축복과 함께 다른 것들도 그들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영혼을 어루만져주시는 축복, 이것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의 도움을, 이 세상의 현세적인 복을 하나님 앞에 받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인생관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복음을 들어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런 식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관과 가치관은 그대로 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인생관에 하나님이 도움을 주시는 방법으로 신앙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올바른 신앙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 앞에 많은 의무들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무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고 고통을 주기 위해서 허락하신 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가 자기 인생에 왕 노릇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의무가 주어질 때 그 의무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 의무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의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자신이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 보여드립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믿음의 사람들과 특별히 청교도들은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긍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긍지 속에서 살던 사람들을 우리들이 카빈니티얼 혹은 언약도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셨고 우리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특별한 언약을 맺었으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선택된 백성들이다. 하고 믿었습니다. 선택된 백성들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여하지 않은 특별한 의무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도 그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자신들에게 이 어두운 세상을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주신 의무들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의무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매우 중요한 사람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이런 의무감을 약화시켜서 그래서 그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죄가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은 개별적인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놀랍게 나타납니다.
한 신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는 주님만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감격이 날마다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은혜에서 많이 미끄러져서 그래서 눈물이 있는 기도생활도 사라지고 진실한 참회가 있는 예배생활도 사라져서 신앙생활의 감격에서 많이 물러나있습니다. 그때 죄가 다가와서 신자에게 말합니다. 야, 하나님만 사랑하면서 산다고? 집어치워. 뭐 그렇게 복잡하게 사니, 그냥 널 위해서 살아라.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말고 네 영광을 위해서 살아라. 죄가 이렇게 유혹할 때 신자가 맞아. 무엇 때문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가. 오늘로부터 나는 이제 나만 사랑할거야. 나는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기로 다짐한다. 그런 방식으로 총체적인 의무에서 이탈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죄가 그렇게 속삭일 때 맞아. 내가 미쳤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나. 나는 나만 위해 살 거야. 그리고 어느 날 돌아설 수 있습니까?
그런데 죄는 그렇게 해야 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거창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 그리고 나를 죽을 고비를 살려주셨으니까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아무리 거창한 구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한다면 껍질뿐인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그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죄는 그것을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죄가 계속해서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 방해하는 방식도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난을 계속 줍니다. 그래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마음이 흐트러져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끔 의무를 다할 수 없게끔 만듭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번영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번영 속에서 그 번영에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어떤 때는 세상의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히게 만들어서 자기 의무에서 이탈하게 만듭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죄는 신자를 개별적인 의무, 개별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뭐 하고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게 개별적인 의무입니다. 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왜 예배를 드리러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예배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지 하는 것이 총체적인 목표라면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개별적인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 개별적인 의무입니다. 개별적인 의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죄는 자꾸 이것을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일날 어디에 가는 것입니까? 도대체 이해할 수 없잖아요. 여러분들 생각에, 아니 주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예배하고 섬기라고주신 날인데 그날 예배를 안 지키고 다른 것을 합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무를 팽개친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대도 여러 가지 이유로 변명을 하지만 어떻든지 간에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죄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좋은 신앙의 의무들을 아예 행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이 오래 자리 잡혀서 어떤 일이 있어서 예배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죄는 다른 방법을 사용합니다. 여러분들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생활을 하지 않게 합니다. 기도의 의무를 무시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기도의 의무 자체를 무시해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뒤로 물러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긍휼에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항상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돕는 일에 자기 자신의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가 그들을 사용하게 되면 이기심에 가득 차게 만들어서 절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구제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이유로 변명합니다. 나도 먹고 살기 힘든데, 나도 가난한데 더 많은 사람도 안 하는데 이러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잊어버립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아예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생활이나 심지어는 십일조 생활도 무시해버릴 정도로 담대하게 의무를 저버립니다. 이렇게 하는 모든 것들이 죄의 작용입니다. 죄가 생각 속에 파고 들어와서 그 사람에게 속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의무를 회피합니다. 그러면서도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자기는 하나님이 없이도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게 죄의 아주 전형적인 속임의 방식입니다.
개별적인 의무를 이행하는데 있어서는 소월하거나 혹은 수시로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전체적으로는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사람이다.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에게는 가끔 기도를 하거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당신만 사랑하고 싶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순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이 고백이 얼마나 진실한가. 이렇게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나 말고 이 세상에 많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매우 특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나는 매우 특별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비록 몇 가지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내 중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런 논리로 자기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는 신자들이 사실은 그런 논리 자체가 죄의 속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증명해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자, 내가 이런 저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습니다. 내가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명백한 의무들을 회피하고 안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사람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살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속삭임이 아니라 죄의 속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명백한 의무를 회피합니다. 기도생활을 열심히 해야지 되는데 안 합니다. 심지어는 담대하게 십일조 생활도 안 합니다. 그렇게 의무를 이행하고 있을 때 신자의 마음에 자기가 총체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그때 불현듯 내가 지금 이행안하고 있는 의무에 대해서 회개를 해도 다시 순종할 마음이 생기게 됩니까, 아니면 그런 내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위로를 받게 됩니까?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명백한 의무들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성령이 주시는 생각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죄는 이처럼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생각을 설득하고 방해합니다. 교묘하게 속여서 그래서 의무를 이행해야지 하는데 그 의무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의무가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자신에게는 이 의무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래서 이 의무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속임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매일 매일의 삶이 엮어져서 일생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총체적인 고백, 내가 정말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고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그러면 그런 총체적인 고백이 오늘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의무를 게을리 하는데 도움을 주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은혜로 구원하셨다고 하는 총체적인 고백이 오늘 나로 하여금 의무에 충실하게 만들고 오늘 하루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정상적인 은혜의 방식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영적으로 깊이가 있다. 성숙하고 신령함에 있어서 진보가 있다. 라고 하는 말은 특별한 은사를 소유했다거나 혹은 남다른 도덕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한 사람의 신자가 신령하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만 아니라, 기도할 때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매 순간의 의무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바로 그 순간에 나로 하여금 되게 하고 싶은 존재가 되고 하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그 일을 최선을 다하면서 행하는 것, 그게 바로 영성입니다. 그런 의무감이 없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떠밀리듯이 산다. 그것은 자기 편의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삶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서 가끔 마음속에서 자신은 하나님밖에 사랑하는 분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그것은 모순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신앙의 고백을 절대로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될 때 혹은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야지 되겠다고 생각할 때 어느 한순간에 불현듯 용기가 솟아나기도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장렬하게 순교할 각오도 되어 있다고 그런 용기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그러는데 그런 사람의 목숨을 하나님이 받아서 뭐하시겠습니까? 더러운 목숨을 하나님이 받으셔서 그 때 묻은 피를 하나님이 어디에다 사용하시려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받으시겠습니까? 구약에서 드리던 제사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해서 피를 쏟고 그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피 흘리고 죽기 전에 먼저 그 짐승은 순결하고 흠이 없는 깨끗한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생명을 바쳤을 때 그 피가 정결한 피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순교의 정신으로 개별적인 의무에 있어서 한껏 주님을 높이고 순전함을 추구하면서 살아올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앞에 그 피가 바쳐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마땅한 의무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편의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주일날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환경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환경을 따라서 움직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환경적으로 여러 가지 여건들이 자기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면 그 환경 속에 깃들어서 자기를 이 의무의 수행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죄의 역사를 읽어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순응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연 고난이 있을까? 그것은 고생입니다. 그리고 그 고생은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고생이 아니라 모래와 같은 이 세상의 바다에 사는 모든 중생들이 다 경험하는 고생입니다. 무슨 핍박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박해와 고난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박해와 고난과 주를 위한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가야 할 올곧은 목표가 있고 거기로부터 이탈되게 만드는 집요한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며 의무를 수행하려고 할 때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시련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핍박이 있고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눈물이 있고 거기에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십자가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는 이처럼 신자 속에 들어와서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는 고백에 만족하면서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최근에 너무 너무 하기 싫은데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하면서 내가 아무리 하기 싫어도 이것은 나의 마땅한 의무야, 하고 하기 싫은 자기를 부정하고 하신 일이 있습니까? 너무나 하고 싶은 일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쳐보니까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안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니 이렇게 살수 없다. 하고 꼭 하고 싶은 것을 안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죄는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에서 이탈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안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그 의무를 저버리게끔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의무를 순간순간 개별적인 삶에 있어서 헌신짝처럼 내팽겨 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첫 사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바보입니다. 머저리입니다. 하나님이 왜 첫사랑으로 그를 돌아가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명백하게 우리들이 해야 할 의무를 포기하고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막보는 행동을 수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첫사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신뢰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절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기에 나 자신을 꺾어야 한다고 하는 절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이것이 행해야 할 의무이기 때문에 많은 환경이 나를 방해하고 이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나를 유혹하지만 그러나 나는 담대하게 이 모든 유혹과 환경적인 어려움을 뿌리치고 이 상황에서 내가 이 의무를 행하여야 한다. 이런 결심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끔 와서 예배시간에 와서 눈물을 질질 짜면서 내 연약함을 하나님이 다 아시지요. 그것도 가끔 와서 그렇게 기도해야지 매일 와서 일주일 내내 의무를 팽개치고 살다가 와서 눈물을 질질 짜면서 내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두 번 세 번 반복하면 하나님을 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그렇게 살수 있는 힘을 주셨고 없으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은혜를 구해서 온전한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환경과 여건이 가로막으면 간절히 기도해서 산 같은 어려움도 물러나가고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지, 아무렇게나 개떡같이 살고, 닥치는 대로 살고 그렇게 하고 와서 주일날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다 연약해서 그렇습니다. 하고 그러고 다음에 합리화를 시키고 자기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깁니다. 오늘 예배도 참회가 있는 예배를 드렸구나. 그래서 나아진 게 뭐가 있습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올곧음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up rightness 올곧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올곧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마음의 경향대로 똑바로 자기의 의무를 인식하고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올곧음의 seat 좌소는 인간의 의지입니다. 의지에 그 올곧음이 깃들어있어야 합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똑바로 내 의무를 인식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이 길을 가야지 되겠다고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게 정신력이 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는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이고 우리 자신 안에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열납 되게 할만한 자원이 없습니다. 정말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기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우리는 매일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개떡 같이 살던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됩니다. 이미 주신 은혜와 능력도 활용을 해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죄에 속아서 그렇게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이 흔하기 때문에 미끄러지듯이 아무렇게나 살다가 와서 우리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일주일 동안 제가 개떡같이 살았는데 결국은 내 책임이 아니라 당신이 은혜를 안 주셔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의 변형된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신령한 은혜의 생활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속고 있는 것입니다. 사악한 것입니다.
다니엘서 1장에 보면 다니엘이 친구들과 함께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가자마자 첫 번 큰 시련이 닥칩니다. 왕의 상에서 나오는 진미로 그들을 먹이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큰 영광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이 금하신 음식도 있고 어쩌면 우상에게 절한 음식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그 상을 거절한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위기 속에서 다니엘에 어떻게 했습니까? “다니엘이 뜻을 정하였다” 그랬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올곧게 살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그런 그 의무를 이행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 지혜를 활용해서 환경을 참고해서 하나님의 의무를 이행해가겠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의지는 딱 올곧게 확정이 된 것입니다. 시편에서 시인이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으니 비파야 깰지어다. 수금아 노래할지어다.” 올곧게 딱 확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생활을 보면 그것도 성경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잘못 배워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한다고 배웠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성경의 기록인데 그것만 배웠지 하나님은 당신의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주신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경향성과 그리고 능력을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주셨다고 하는 것, 그것은 또 안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순종하기 위해서 은혜와 능력을 구하면 하나님이 끊임없이 공급해주신다는 것도 안 배웠습니다.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순종할 의지가 모자라서 죄를 자꾸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여러분들이 아무데나 집어던져버린 의무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고 여러분들을 어두움 가운데 두지 않고 복음의 빛 가운데 살게 하시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만 믿는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심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스스로 싫어서 그래서 포기하고 팽개쳐버렸기 때문에 나뒹굴고 있는 여러분들의 수많은 헌신짝 같은 의무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게 순결한 신부와 같은 성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분투하며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신자의 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의무를 똑바로 올곧게 이행해야지 되겠다고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환경과 타협해서 그 의무를 포기하는 것은 그가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진실하고 확실한 사람들은 정말 자기가 그렇게 살아가려고 할 때 환경이 자기로 하여금 감당할 수없도록 방해할 때 환경을 타협하겠습니까? 환경으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와 능력을 하나님께 구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제발 함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한다는 고백이 너무 싸구려입니다. 마치 청소년들이 연예인을 보면서 오빠 사랑해. 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면 잊어버리는 그런 것입니다. 허긴 그 정도의 열정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가수 하나가 병상에 누었더니 500명이 몰려와서 병원이 도대체 생난리를 쳤다고 합니다. 쫓아내면 병원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밤을 새웠다고 하니까 그 정도의 열정이라도 갖는다면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죄는 신자로 하여금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오늘도 버려진 의무를 한번 보십시오.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그 의무를 보십시오. 그때에 팽개쳐진 그 의무가 곧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의무를 주셨습니다. 너 구역장이니까 영혼을 돌봐라. 주셨습니다. 그가 만약에 하나님을 계속 현재적으로 사랑하고 있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영혼들을 팽개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신의 의무를 팽개친 것은 하나님을 팽개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의 관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십일조 생활을 안 하시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얼마나 부자가 되려고 그렇게 사십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리고 주님이 축복하시든지 축복하시지 않으시든지 이것은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의 마땅한 의무다 생각하고 올곧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그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삶 속에서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개별적인 의무에 있어서 신자에게 순종하지 못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속임을 성취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지 않기 위해서 절대로 올곧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똑바로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그리고 의무는 있는데 마음이 그것을 따라오지 못할 때는 의무를 팽개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변화시켜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능력이 모자라서 의무를 감당해나가지 못하면 환경과 타협하려고 하지 말고 능력을 구해서 그 의무를 이행하고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 이런 모든 죄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의무를 맡겨주실 때 그 의무를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올라온 것은 성전을 짓기 위해서 올라왔는데 반대가 너무 심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성전을 짓다가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상당히 많이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잠깐 후에는 성전을 다시 지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흘러서 이제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여건이 생기게 되니까 성전을 지어야지 되겠다는 뜨거운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전을 짓기 위해서 텐트를 짓고 살던 사람들이 집을 제대로 짓고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아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아직은 성전을 지을 때를 하나님이 허락해주시지 않으셨다. 그리고 변명을 합니다. 그때 나타난 선지자가 학개입니다. 그러면서 천둥과 같은 소리를 그들에게 외칩니다. 하나님의 전은 이렇게 초라하게 내버려두고 너희는 판벽한 집에서 사는 것이 가하나. 그러면서 강력하게 탄핵합니다. 그들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죄는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아주 명백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계속 속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오늘날도 여러분들에게 내팽개쳐진 의무들, 가깝게는 예배와 기도의 의무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가정에서의 의무, 교회를 섬기는 의무에서부터 시작해서 물질생활과 여러분들의 그 모든 직장생활에서의 정직의 의무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다 팽개치고 아무렇게나 살고 그러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감격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감격을 주시고 당신이 만나주십니다.
두 번째는, 개별적인 의무의 이행에 있어서 죄의 속임에 두 번째는 신앙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 내가 행해야 할 명백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죄의 속임에 속아서 타협을 하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왜? 안 했으니까. 안 한 게 눈에 딱 보이니까. 가책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무를 수행하게 되면 이 양심의 가책이 사라집니다. 의무를 수행하면서도 뭔가 자신의 부족한 것을 보고 가책을 느끼는 것은 이것은 고도의 영적인 삶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아주 쉽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교회에 오다가 죄의 꼬임에 빠져서 놀러갔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범했습니다. 한 사람은 죄의 꼬임에 그렇게 빠지지 않고 타협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하면 열린 교회에 나오는 교인인데 놀러가야지 되겠는데 11시 예배를 드리고는 놀러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사이트를 다 뒤져서 동리에 있는 새벽 5시에 주일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아냈습니다.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고 어떤 바보 같은 교회는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주일날 바쁘신 분 우리는 수요일 날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수요일 날 어떻게 주일 예배를 드립니까? 그래서 주일날 어디에 가고 싶은 신자들은 수요일 날 자기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새벽 5시에 예배를 드리고 5시 45분에 예배를 마치고 그 다음에 하루를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충분히 달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날 못 나오셨네요. 그렇게 교역자가 이야기를 하면 아, 바빠서 동리에 있는 교회에서 주일을 지켰습니다. 거짓말이지 무슨 주일을 지켜, 새벽에 가서 잠깐 얼굴 드밀고는 하루 종일 놀러 다녔는데 그게 어떻게 주일을 지킨 것입니까? 주일이 예배 시간만 주일인가. 밤중까지 다 주일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양심에 가책을 덜어줍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예배를 드리러 나올까요?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개탄을 하면서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주일 오전에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몰려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목표 때문이다. 빨리 끝나고 집에 가는 것이다.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옵니다. 예배는 나옵니다. 그런데 안 나온 사람과 하나도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것 딱 한 가지 금주의 교회소식을 파악하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날까요? 그것은 바로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개별적인 의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목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서 상황이 끝나면 의무도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안 됩니다. 오늘 예배에 나왔습니다. 목표가 없습니다. 그 목표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냥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끝나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가 일찍 끝나면 굉장히 다행스럽다고 생각하고 길면 우울해집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목표가 없으면 반성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이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개별적인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목표가 있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만나야지 되겠다. 은혜를 받아야지 되겠다. 그리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주일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정말 주님을 만나야지 되겠습니다. 그리고 왔습니다. 그러면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늑장 부리다가 한 10분 쯤 늦게 왔습니다. 그러면 들어올 때부터 벌써 앉았을 때부터 벌써 마음이 괴로워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예배에 왔는데 이렇게 늑장을 부리다가 10분씩 지각한 것이 옳은 소위인가. 극장에 갈 때도 내가 지각을 안 하는 사람인데 예배당에 올 때에 이렇게 지각한 게 옳은가. 그리고 반성과 가책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집중을 안 하고 세상적인 생각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면 반성을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못 만나고 갑니다. 그러면 반성을 합니다. 예배 시간에 내가 예배를 드리는 태도가 틀렸다. 심지어는 내가 주일날 와서는 열심히 예배를 드렸지만 일주일동안 사는 게 과연 예배하기에 어울리는 예배자로서의 삶을 살았는가. 이런 반성들이 막 떠오르게 됩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무를 수행하는 것만으로 감격을 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런 죄에 빠지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초 신자들이 아니라 오래 교회에 다닌 사람들입니다. 오래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새 가족이 문제가 아니라 헌 가족이 문제입니다. 새 가족, 새 신자, 새 가족 헌 가족, 낡은 가족, 마지막에는 늙은 가족이 됩니다. 그런데 그 형식은 잘 이행합니다. 의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 이렇게 온전하게 의무를 수행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그 목표에 집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오늘 예배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을까? 생각을 안 합니다. 그냥 시작하니까 시작하고 진행되니까 진행되고 설교시간이니까 조용히 있고 그러다 침묵 속에서 예배가 끝나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은혜를 이행하는 가운데 점점 더 하나님은 없고 의무를 수행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만족하고 거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이런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항상 총체적인 신앙생활의 목표를 개별적인 상황으로 끌어와야 합니다. 총체적인 신앙생활의 목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했으니까 여러분들의 고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며, 그러면 그것을 총체적인 것으로 내버려두지 말고 개별적인 삶의 상황에 그것을 끌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뭘 묻는가 하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다면 지금 오늘 행하는 이 의무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가. 묻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오늘 드리는 이 예배를 통해서 내 마음 안에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니. 묻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며 그럼 지금 유혹받는 환경에서 내가 정말 사랑하는 분이, 내가 정말 사랑하는 대상이 이 세상이나 너 자신의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했어. 어떻게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사실을 내가 여기서 이 개별적인 상황에서 입증했는가. 이렇게 끊임없이 끌어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더 온전해져야지 되겠다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그래도 신앙이 좀 있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의 상황이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도 생각을 안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생각만으로 꽉 차있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거나 이런 흑백논리가 아닙니다. 자, 오늘도 보니까 몇 사람이 1부 예배에 나왔습니다. 왜 2-3부 예배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이 1부 예배에 나왔습니다. 왜? 주차정리를 하려고 1부 예배에 나온 것입니다. 오늘도 주차정리를 했습니다. 물어보는데 오늘도 당신이 1시간동안 주차정리를 했는데 그 의무를 행했는데 그 속에서 정말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내기 위해서 주차정리를 했는가? 그렇게 물어보면 그 사람이 아니, 나는 오직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주차정리를 했다. 이렇게 대답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흑백논리가 아니라 항상 중간 어스름한데 끼어있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해를 하는 것인지 못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해를 하십니까? 이게 흑백논리가 아니라 중간 어스름한데 끼어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어스름한데 끼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온전해지고자 노력하는데서 향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중간 어스름한데 아무렇게나 끼어 있는 것으로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이게 아직까지도 자신이 섬기는 의무를 행하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가운데 이 의무가 행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통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온전하게 가져가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온전하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주차정리를 하면서 보니까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말 안 듣는 교인보고 돌아서서 말도 더럽게 안 듣네. 이렇게 욕한 것도 가책이 되고 말 한마디를 해도 안녕하세요? 열린 교회 주차위원입니다. 불편을 드려서 죄송한데요. 이 골목은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돌아서서 저 뒷길로 돌아가셔주시겠습니까? 번거롭게 해드려서 너무 죄송합니다. 이게 온 몸에 겸손과 사랑이 꽉 차있으면 그러면 그 사람도 차를 몰고 들어 왔다가도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처음 와서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기분 좋게 가는데 차 빼요. 빼요.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데 왜 자꾸 들어오고 그래. 빼, 그러니 이 사람이 생각하기를 백화점에 가도 이렇게 대우를 하지 않는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돌아가서 저녁에 기도할 때도 자기가 그렇게 개떡같이 주차 관리한 것이 생각이 안 납니다. 그런데 온전함을 추구하려고 하면 다 생각이 납니다. 아, 주의 영광을 가렸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온유함과 사랑이다 넘친 가운데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예배 위원이 안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들어가십시오. 아, 좀 들어가요. 남의 교회에 와서 말이지 들어가요. 심지어는 엉덩이까지 툭툭 치면서 들어가요. 왜 그렇게 합니까? 온 몸에 다 넘쳐서,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gentle해야 합니다. 진짜입니다. 무례하고 예의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가립니다. gentle해야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 교회에 처음 오셨습니까? 아, 그렇습니다. 제가 예배위원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시니까 참 편하시지요? 너무 죄송합니다. 저 안쪽에 사람들이 더 앉아야 되는데 죄송하지만 좀 들어가 주시겠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양해해주십시오. 그때 못 들어갑니다. 이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집에 가서 생각을 합니다. 내가 참 부족하구나. 그래서 그렇게 온전함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을 때는 돌아와서 야, 예배당에 오는 사람이 어쩜 그렇게 예의도 없고 강퍅할까? 이렇게 생각하다가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생각을 바꿉니다. 내 안에 이렇게 주님의 그 온유함과 사랑이 안 흐르는가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전하게 하려고 하다보면 어떤 난관에 부딪히는가 하면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너무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열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 다음에 환경도 너무 열악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더 온전하게 행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온전하게 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의무가 이루어지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고 온전하게 하고 싶기 때문에 결국은 그런데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나간다고 할 때에 사실 기도를 안 한다고 주차정리를 못하겠습니까, 예배관리를 못하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하면 뭐 점심밥이 선이 됩니까, 탄됩니까? 뭐 눈물로 기도를 안 하면 열린 공간 커피가 변하여 맹물이 됩니까? 뭐 열심히 기도하지 않고 운행하면 출발하자마자 펑크가 납니까? 겉으로 볼 때는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온전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면 의무가 이행이 되고 교회가 굴러가는 것만으로는 만족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능력을 구하게 될 때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애달픈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 동안에 자기 안에 죄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점점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이 하는 일을 보면 그 사람의 인간성을 압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까지 일을 통해서 다 나타납니다. 일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변화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데 변화될 조짐을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의무를 수행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렇게 하면서 죄는 끊임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하거나 의무를 수행해도 그것이 건성으로 되도록 죄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모든 신앙의 의무를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이게 말하자면 climax입니다. 죄가 아주 훌륭하게 성공을 거두는 훌륭한 방법입니다. 사람이 생각을 많이 하면 마음의 소원이 생기게 됩니다. 마음에 소원이 계속 생기면 행동을 하게 됩니다. 행동을 계속 반복하면 그것이 습관이 됩니다. 습관이 반복되면 인격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경향성과 그 사람의 인격. 그의 삶, 그것이 이렇게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지니 밖에 나온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급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뭔가 이렇게 온유한 것처럼 행동할 때는 좀 어색합니다. 그 사람에게 제일 어울리는 것은 있는 그대로 살 때, 제가 시간이 없어서 TV를 그렇게 많이 못 봅니다만 드라마를 전 안 좋아합니다. 멜로드라마를 보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한번 가족들과 함께 볼 기회가 있으면 저는 배우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지만 한두 번 정도 보면 그 배우 성질이 어떤 성질을 가진 사람인지를 잘 압니다. 어떻게 파악하는가 하면 가장 잘 어울리는 연기가 그 사람의 인간성입니다. 그래서 요즘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어떤 여배우가 있는데 가정이 좀 깨트려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여배우는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짜증내고 성질부릴 때 딱 맞습니다. 그래서 아, 왜 그럴까?
우리 아들이 지금 고3인데 애가 못 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아주 신앙적으로 정직해서도 그렇지만 그것보다 하여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거짓말을 한다면 벌써 말부터 더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벌써 다 파악합니다. 뭐 좀 보태든지 아니면 뭐 다를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구나. 너 그거 정말이야. 그럼 그때부터 더듬기 시작해서 얼굴이 벌개입니다. 내가 그래서 그러지마. 너에게 전혀 안 어울리니까 생긴 대로 살아. 그러니까 자기 내면에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자연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잠깐 동안에 그것 사이에 불균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성질이 급한 사람도 잠깐 동안은 온유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 한분이 계셨는데 성격이 너무 급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다스리시면서 말을 천천히 하는 것을 터득하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주일입니다. 은혜생활을 잘 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다가 설교에 열을 받으시면 못 알아들을 정도로 빨라집니다. 옛날의 습관이 나오는 것입니다.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습관화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의무를 행하는데 의무가 하나하나 행하던 게 이게 생각 없이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몸에 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동입니다. 탁탁, 뭐 이렇게 일을 막 하고 예배도 규칙적으로 드리는데 문제는 모든 것들이 다 형식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을 따라 익숙해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마음의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기계들이 다해서 우편물을 부치면 우편물을 통에다 집어넣으면 기계가 돌아가면서 우편에 도장을 찍어주고 심지어는 우편물이 돌아가면서 거기 코드 번호를 다 읽어서 자동으로 다 구분해주는 그런 장치까지 나왔습니다. 그런데 옛날만 해도 우표가 이렇게 붙여있는 편지를 쭉 놓고 망치도장이 있어서 탕탕 때렸습니다. 여러분 아마 신문 같은 곳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때리는데 처음에는 후딱 하면 손을 때려서 피가 철철 납니다. 이게 얼마나 센지, 그런데 세게 때려야지만 날짜가 정확하게 찍히니까, 그러니까 우표 사각에서 우측하단부에 때리는 것이 정석인데 이렇게 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하나보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수시로 손에 맞습니다. 그러다가 익숙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여직원들이 얼마나 되는지 한 시간에 3600초인데 3천통을 찍습니다. 거의 손이 안 보입니다. 그런데 손이 안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 넘기면서 옆에 직원들과 수다를 떠는 것입니다. 어제 말이야. 그제 있지. 내가 다방에 갔는데 그 사람을 만났거든. 그런데 진짜 놀랍더라. 탕탕, 그게 진짜 불가사이입니다. TV에도 가끔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합니다.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익숙해지면 질수록 죄는 숨기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생각 없이 해도 되니까,
그러면 생각을 해보십시오. 예수 믿고 생전 처음으로 여기 많은 사람이 모인 곳 여기에 올라와서 기도하던 때가 생각나실 것입니다. 바들바들 떨립니다. 심지어는 온갖 친척들에게 다 전화를 걸어서 자기를 위해서 기도 좀 해달라고, 왜 그러는가 하면 다음주 헌신 예배 때 기도라고, 그러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참 하다가 보면 익숙해집니다. 기교도 부릴 줄 알고, 그런 가운데 죄는 그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 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내면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겉으로 많은 열매들이 있는 것처럼 이렇게 막 형식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진짜로 죄인이었을 때는 성경말씀이 죄인이지. 예수님이 바로 널 위해서 오셨다, 눈물이 펑펑 났었는데 너 죄인이지. 그러니까 아니 내가 죄인이라니 내가 얼마나 하는 게 많은데, 주일이면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데 그러니까 성경에서 죄인을 끊임없이 얘기해도 나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점점 죄의 속임으로부터 벗어나기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생명도 없고 빛도 없는 그런 위선자들이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이 형식화되게 되면 커다란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마음이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여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만지면 터질 것 같은 그런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도 그것이 북어처럼 딱딱한 마음이 되어서 두드려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 아프지도 않습니다. 그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을 그렇게 비난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앙의 형식이 가지고 있는 열심은 여러분들이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그리고 모든 십일조를 드리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고 그 열심을 여러분들이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없습니다. 진실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서 깨트려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자기 깨어짐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기 깨어짐,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의무만 열심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바쳐질 수 없을까요? 죄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속에서 형식적으로만 아주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사람을 일하지 말라고 하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일하면서 겨우 마음이 위안을 얻고 살아가는데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막 견디기 힘들게 불안한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 교회 저 교회에 옮겨 다니는데 일하러 옮겨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 교회에 가서 말씀을 잘 듣고 목양을 받고 참 신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게 무엇입니까? 이렇게 의무를 이행하는데 모든 것이 형식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죄가 이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산다고 그래도 죄는 겁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말씀하시니까. 죄의 지배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외식적인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 같은 진실함, 자기 깨트려짐,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자기희생과 하나님을 향한 은혜와 사랑, 감격,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과 함께 동행 하는 신령한 영적 생활에 진정한 승리,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그러나 자신의 영혼은 이미 죄에 의해서 모두 잠식당한 채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에 노예가 되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상황에 자기의 마음을 실고 그리고 개별적인 의무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일이 성취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신앙생활의 생명입니다. 내게 맡겨준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목표를 갖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희생이 가능하고 눈물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이 가능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신령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11. 죄의 속이는 역사: 생각을 이탈시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4)
생각은 자기 자신을 잘 지키고 또 영혼 속에 침범하는 죄들을 정확하게 간파해내서 그래서 온 마음과 뜻을 다해 그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살도록 돕는 것이 생각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죄는 생각 그 자체를 먼저 공격을 하게 됩니다. 생각이 죄에 의해서 공격을 받게 되면 죄를 감시할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래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모든 생각 자체는 죄에 노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더렵혀지게 되고 우리의 부패함이 촉진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 전체가 우리를 지배할 수 있도록 훌륭한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의해서 공격을 받을 때 이 죄를 강력하게 책망하고 다시 생각으로 하여금 본연의 의무로 돌아가게 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오늘과 다음주 두 주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공격 하는 죄의 속임을 견책하는 은혜의 방편들 중에 첫 번째는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주인이 되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모든 것은 대부분 사사로운 욕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들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을 쫓아내고 내가 하나님이 되고 싶다. 이런 용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니고 또 우리가 죄를 선택할 때도 이제껏 까지 내가 믿었던 하나님은 모두 가짜다. 내가 이제껏 까지 가졌던 이 기독교 신앙은 모두 헛것이다. 오늘부터 나는 이제 예수를 안 믿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우리가 죄에 굴복하는 많은 개별적인 사건들은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품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계획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사소한 필요에 따라서 죄를 짓게 됩니다. 유혹을 받을 때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 유혹에 저항하는 것보다 너무 힘들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들이 있을 때 정당한 방법으로 그것을 공급하지 않고 부정한 방법으로 경쟁에서 승리해서 사실상 그것을 훔치는 방법, 이런 모든 것들은 사실은 원대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물질에 대한 사랑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애착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고 그런 모든 범죄의 밑바닥에는 자기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부패한 욕심에 사로잡힌 자기를 향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죄를 짓도록 우리의 생각을 공격하는 죄의 속임수를 견책하고 은혜를 지키는 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는 요셉의 경우에 잘 나타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종살이를 할 때 그의 준수한 미모와 성실한 생활 태도에 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되었습니다. 그는 요셉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요셉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그를 내실로 끌어들여서 함께 동침하자고 유혹했을 때 청년, 이 요셉은 제일먼저 고백한 것이 “내가 이 큰 악을 행하여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겠는가.” 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여자의 마음에는 너와 나 둘밖에 없으니 아무도 우리가 행한 것을 알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요셉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를 보디발의 집에까지 인도하시고 지금도 자기를 지켜보고 계시는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의식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 요셉으로 하여금 범죄 할 생각을 갖지 못하게 했고 죄의 유혹을 물리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당연히 안 계신 곳이 없으시며, 보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며,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대낮에 거리를 활보할 때뿐만 아니라 은밀한 밤에 우리가 혼자 있을 때라도 주님은 우리를 알고 계시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도 아직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움직임까지도 하나님께는 모두 알려진바 되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온 세상을 돌보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생각을 공격하는 죄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되는 의무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주님이시라고 하는 것, 그리고 주님의 그 주권은 우리의 삶 어디에든지 모두 미치고 있으며 하나님의 그 눈을 벗어날 수가 없고, 하나님에게는 감추어진 것도 없고, 가려진 것도 없다고 하는 정직한 의식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 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남이 보는 앞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가를 가지고는 그의 신앙에 대해서 부분적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한 신자의 사람됨은 그가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때에 삶이 어떠하며 홀로 있을 때 그 마음에 오가는 생각들이 어떠한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신자 됨이 온전히 평가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신앙적이고 열심이 있고 죄를 삼가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보지 않은 곳에서는 담대하게 악을 저지르고 죄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는 전자, 곧 사람들 앞에 드러난 그의 모습이 그의 참 모습이 아니라 후자, 곧 그가 홀로 있을 때 나타난 그의 모습이 곧 그의 참 모습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자신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날마다 신앙의 세계 속에서 의식하며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많이 느낄수록 영적으로 성숙하고 깊은 사람이고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신앙이 얇고 박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이 주권은 단지 모든 것을 알고 게시고, 보고 계신다고만 하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주권을 숙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파악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이전에 그렇게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하나님을 우리의 왕이시라고 생각한다고 할 때 우리들이 생각하는 나라의 개념은 전쟁국가 시대의 왕입니다. 그때 왕, 혹은 황제는 그 모든 나라의 주인입니다. 그 위에 있는 모든 풀과 그 왕의 영토 위를 나르는 새들도 그 왕의 것이고 심지어는 그 위에 살고 있는 백성들도 사실은 왕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왕의 실제적인 주권은 그 모든 왕국에서 최고이고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 왕국 구석구석까지 모두 침투해있습니다. 그래서 그 왕이 가지고 있는 뜻이 법으로 표현이 되고 그리고 그 법의 시행되는 과정에서 왕이 나라를 다스려야지 되겠다고 하는 의지가 표출이 됩니다. 그 의지대로 백성들은 살아가고 온 땅은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왕이 맘먹은 나라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왕이 다스리고 있는 나라이며 혹은 황제가 다스리고 있는 제국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고 할 때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속해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최고의 황제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백성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법인 이 말씀을 통해서 왕이신 하나님의 의지가 표출이 되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의지라고 생각을 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고 애쓰게 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삶 깊이 파고들어오게 되고 하나님의 그 보이지 않는 주권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구체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예배하고 돌아가는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다스리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이 예배 속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잠잠히 복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이름이 선포될 때 온 마음으로 뜻을 모아서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그분을 경배하고 그가 축복하실 때 감사함으로 그 축복을 받으면서 드려지는 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우리가 의존되어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확인하게 되고 그리고 그 의지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받아서 주님의 의지대로 살기를 하나님 앞에 작정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임하시는 성령의 은혜는 이렇게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 살수 있는 실제적인 힘을 우리에게 공급해줍니다. 그럼으로 이 예배가 끝난 후에 이 세상에 돌아가서 더 분명하게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느끼고 주님을 사랑하는 은혜의 마음으로 그 의지에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날마다 성화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의지가 우리의 삶 깊은 구석에까지 적용되고 그리고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매우 사소한 마음의 작용에 이르기까지도 하나님의 의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런 소원에 대해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입술에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제일먼저 영광을 받으시고 싶어 하시는 우리의 외적인 생활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마음의 세계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우리의 모든 삶이 저절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은 속으로 하십시오. 그리고 현장에 나가서 삶으로 아멘 하십시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매우 분명하게 당신의 의지를 보여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은 이런 당신의 의지를 신자의 삶 구석구석에 적용함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주권적 의지가 찬란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가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한 신자라고 할 때 그것은 교회에 와서 눈물만 흘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한 사람의 신자가 참으로 진실 된 신자다 할 때 그것은 단지 감정적으로 하나님 앞에 늘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런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자가 참으로 진실 된 신자가 되면 그는 매우 강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올곧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지를 깨달으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의지를 깨달은 후에는 자기의 의지를 꺾어서 그 의지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이 자신의 삶과 마음 구석구석에까지 온전히 실행이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께 온전한 그 나라의 백성이 되려고 하는 올곧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실한 신자의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불타고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의지는 게시된 하나님의 의지에 전적으로 복종하고자 하는 순종의 자세로 가득 차 있는 상태가 바로 진실한 신자의 최종적 상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실현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왕이라고 할 때 그 왕은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은 고대의 전쟁국가에서의 왕이 있고 오늘날 발달한 민주국가에서의 또 왕이 있습니다. 입헌군주국의 왕입니다. 영국의 여왕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실제로 왕국으로서 존재하는 나라는 문명사회에서 거의 없습니다. 다만 입헌군주국이 있어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만 여전히 군주가 존재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런 나라들은 또 나름대로의 유리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날도 유가가 많이 오릅니다. 그런데 네덜란드 같은 곳은 거기도 여왕이 있습니다. 그러면 기름값이 막 오르면 정부에서 아껴 쓰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쓰던 가락이 있어서 펑펑 씁니다. 그때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여왕이 어느 날 자동차를 포기하고 자전거를 타고 왕궁으로 가는 사진이 신문에 나오면 온 백성이 폐하께서 기름을 아끼시는데 하면서 모두 그 본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왕이 그렇게 사람 깊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구현하는 것은 사실 입헌군주국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차피 주권이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있으니까 왕은 외국에서 사람들이 오면 인사하고 밥 먹고 잘한 사람은 상이나 주고 하는 그런 의례적인 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고 할 때 그것은 두 가지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입헌군주국의 왕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주권을 인정하는가. 그래서 주일날 와서 이렇게 예를 갖추고 주님을 한번 알현하고 물론 만나주시지도 않지만 알현을 한답시고 와서 인사를 하고 그리고 주님께 인사드렸다고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죄를 짓고 살아가는 모든 부담감을 털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런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있고, 그 왕을 예배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항상 의식하면서 그분께 모든 것이 복종되고 그분의 의지를 구현하면서 살아가야지 되겠다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전자가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이고 후자가 진실한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이런 주권은 그 왕의 위대함과 관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 앞에서 늘 우리의 일상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도와달라고 매달리고 그러다가 보면 이 하나님이 참으로 위대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질적인 격차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나 자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신앙생활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십자가로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모든 삶의 깊은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평화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 여러분의 마음의 평화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며, 이라크 전쟁에만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아이가 공립학교에 입학할 것인가, 사립학교에 입학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의 인민이 이 가을에 추수를 해서 그래서 전쟁 없는 평화의 삶을 사는 것도 관심을 갖고 계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오늘 여러분들이 마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진실한 예배를 드리는 것에 있어서도 관심을 갖고 계시고, 오늘 여러분들이 먹고 입고 쓰는 문제에 있어서도 고통이나 어려움을 느끼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쓸어버리면 모두 재가 되어서 없어지고 말 인간들 사이에 오고가는 다투는 미움과 사랑도 하나님에게는 관심거리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죄를 서로 고하라고 가르치셨고 우리가 우리에게 진 죄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사소한 문제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갑니다. 또 그것이 신자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들이 생활하는데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참으로 위대하심을 우리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일먼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와는 다르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위대함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과 그렇게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아주 연약한 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왕들의 권세와 위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위대한 왕 되심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같은 그림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임금들이 자신을 스스로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금과 은과 수많은 보석으로 치장하고 자기의 왕국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지존하신 그 영광에 비하면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 쓴 모든 영광의 장식품들은 그야말로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 그제도 보니까 신문에 화성으로 날아간 인공위성 하나가 250킬로미터 상공에서 정말 인류 역사 최초로 아주 상세하게 그 넓은 계곡을 찍어서 전송을 했는데 마치 바로 앞에 있는 민둥산을 보는 것 같은 그런 생생한 느낌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을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이 세상이 얼마나 조화롭고 질서 있으며 눈에 보이는 이 물질세계도 사실은 우리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한 세계로 우리 앞에 새겨져있습니다. 이런 모든 위대한 일들을 보면서 우리는 다만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주권을 생각하기 전에 전제되어야 할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주권은 엄청나게 놀라운 것이며 그리고 그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고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과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주권과 그분의 의지는 우리에 의해서 깊이 존중되어야 하고 우리의 인생의 참된 가치와 보람은 그분의 의지가 우리의 삶에 온전히 구현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깊이 터득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각을 위협하는 죄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훌륭한 수단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몇 해 전에 캐나다에 집회를 갔을 때 집회가 끝나고 이번과는 달리 한 하루 이틀 쉴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인도하시는 교역자가 절 데리고 케이블카를 탔는데 한번에 한 3천 미터까지 올라가고 거기에서 전망대에 올라보니까 3-4천 미터 이상 되는 록키산맥의 그 영봉들이 발 아래로 구름처럼 펼쳐진 것을 볼 수 있는 그 자리에 간 적이 있습니다. 때가 아직까지도 따뜻하던 때인데 눈을 모두 이고 9백 킬로나 끝이 없이 이어지는 넓은 벌판같이 3-4천 미터의 영봉들이 펼쳐지고 그 봉우리 끝에 구름이 마주 닿아있는 광경을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가 올라온다고 하더라도 저 찬란한 발아래에 있는 이 어마어마한 영봉들의 군락을 보는 동안에는 세상의 욕심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사소한 욕망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넘어트리기 위해서 다가오고 있는 죄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들이며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욕망도 사실은 잠시 사라질 이 흙덩어리와 같은 육체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하찮게 여기고 오히려 영원히 있는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는 이 정신 차리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두 번째는 율법으로 지정된 형벌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죄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고 그 연합을 깨트리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바로 죄의 공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진실하다고 하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에게는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감사한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그 다음에는 우리가 이런 놀라운 사랑을 입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이 무엇인지를 율법은 보여줍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율법은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로 표현된 삶의 방식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의 색욕거리로 바꾸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빌미 삼아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방종한 사람이라고 우리는 규정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이 받았고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도록 지시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참 너무 가벼운 의무이고 좋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많은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아주 매우 큰 사랑의 빚은 져서 정말 백골난망의 은혜를 입었다고 칩시다. 그렇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무엇인가 자기에게 특별한 은혜를 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안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지 되겠다고 하는 마음의 열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의무도 좋은 의무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깊이 깨닫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의 의무가 매우 무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짐을 지고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짐을 모두 내어놓고 예수님께 쉼을 얻는 구원의 장면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진정으로 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는데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럼으로 말미암아 쉼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기 위해서는 이전에 짐은 버리고 그리고 새로운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예전에 짐은 죄의 짐입니다. 그것은 버리고 새로운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경건한 의무라고 하는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쉬라고 하면 짐을 다 벗겨주어야지 짐 하나 내려놓고 또 다름 짐을 지라고 그러면 그게 어떻게 쉬는 것입니까? 무거운 것이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무거운 짐은 짐이 아니라 놀라운 특권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평생 외롭게 혼자 살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의무를 확인하게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이제 의무를 확인합니다. 그래서 불러서 확인하는데 너 진짜 결혼할거니? 네 결혼합니다. 그래, 결혼은 하겠다고만 하는 게 아니라 의무가 있다. 하겠니? 네, 의무가 무엇입니까? 둘이 계속 사랑해야지 된다. 그때 이 사람이 그것은 제게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야지 된다. 그게 무거운 짐일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자에게 묻는 것입니다. 너 이제 아내가 될 이 여자하고만 잠자리를 같이 해야지 된다. 그러니까 절대 못합니다. 그것은 너무 무거운 의무입니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떻게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또 제가 늘 보태는 말,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병들었을 때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야지 된다. 그렇습니다, 제가 기꺼이 하겠습니다. 이것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계속 사랑하는 것이 특권입니다. 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약할 때 그 사람 곁에서 그를 도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잠자리를 하고 그 사람과만 관계를 가지며 살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아내 된 여자에게서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정말 자기 인생의 최대 실수는 이 여자를 만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와 함께 사느니 차라리 헤어져서 죽고 싶다. 이럴 정도까지 극도로 결혼 생활의 혐오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사라진 사람에게 끝까지 사랑해야지 됩니다. 너무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여자하고만 잠자리를 같이 해야지 됩니다. 죽어도 싫은 것입니다. 돈을 주어도 나는 너와 자기 싫다. 이럴 정도로 반감을 갖게 됩니다. 그때 이 정절을 지키는 그 의무 자체도 즐거움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병들었을 때, 아니 건강했을 때 돈을 벌어 와도 데리고 살까 말까인데 아파서 누웠는데 내가 무슨 열부라고 가서 거기서 간호하고 사는가.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것을 적용해보십시오. 알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예수님이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니까 아, 그 멍에 무슨 멍에를 또 메. 이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곧 헤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부탁을 합니다. 내가 갈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꼭 있어, 그렇게 말할 때 지겨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특권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정말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그것을 행하는 의무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즐거운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하나로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모두 다 덮어버리신다고 하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입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서 모두 내어주셨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용서해주시지만 회개를 해야 용서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징벌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로마서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저희가 이런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는 바를 들었으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도 행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 일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행해야 할 의무를 하찮게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사는 것을 조금도 가책 받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많이 느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사랑의 고백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또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지만, 그리고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확신하지만 동시에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죄를 선택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버리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도 동시에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죄에 대해서 너무나 담대해져있습니다. 실제로 자기는 느끼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보로 아주 넉넉히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지 않는다고 하는 이런 사실을 우리들이 올바로 깨달았다면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지키시고 우리를 영원히 구속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바울이 고백했듯이 이런 소망을 우리가 가졌으니 더욱 우리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정결한 사람이 되자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고 우리를 지키실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렇게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면서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 적당히 살고 죄도 짓고 그러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회가 있습니까? 오늘날 참회가 사라져가고 있는 이유가 바로 무엇 때문입니까?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 죄에 반드시 하나님의 형벌이 따른다고 하는 공정한 성경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참회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대다수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일주일 이렇게 교회를 나오고 일주일 동안 단 한번도 예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살면서 단 한번도 마음을 온전히 쏟아 부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참회가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하며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고 다시 하나님이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갈망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교회를 보십시오. 주일날에는 그 알량한 예배로 양심의 가책을 면하기 위해서 미어지도록 교회에 들어오지만 그 사람들 중에 대다수가 다시는 일주일 동안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습니다. 주일 오후 예배는 물론이고 수요 예배는 다 옛날 유산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은 너무 현실을 모릅니다. 옛날에야 다 동리에 교회를 다녔지만 지금은 다 차타고 외곽에서 오고 그러는데 어떻게 지금 갔다가 또 수요 예배에 나옵니까?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옆에 있는 교회에 가면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교회는 옆에 있는 사람이 오니까 똑같이 가득 찰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안 하지 않습니까? 만족이 안 되면 이사 오면 됩니다.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정말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인 줄을 알고 있는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정말 죄에 대해서 엄격하신 분이시고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며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는 무서운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마음에 위로를 얻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단 한 사람도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불투명한 불신자와 신자의 삶을 불투명하게 살아가는 그런 삶을 통해서 받으실 불명예보다는 훨씬 더 영광스럽습니다.
침묵과 인내로 한 두 시간을 참고 양심의 가벼움을 얻고 돌아가는 주일 오후의 발걸음이 가벼우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도움이 됩니까? 도무지 현실이라는 미명하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지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진지한 생각이 없고 그 뜻대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지 되겠다고 하는 진지한 결단이나 그렇게 살지 못했을 때 흘리는 자기 깨어짐의 진실한 눈물은 하나도 없이 세상에 떠밀려 살아가는 그런 그리스도의 삶들이 이 세상에서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 가운데 절대 계실 리 없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교회를 다녀도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정부패하고 있는 정치가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신자의 미명하에 계속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그렇게 더럽게 살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하는 대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그렇게 살아가고 그런 것입니다
정말 오늘날 우리가 어디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은 여러분 주위에서 매일매일 진실한 참회로 깨트려지는 사람을 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약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은혜를 주셔도 때로는 우리의 악함과 내제하고 있는 이 악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범죄 합니다. 우리가 의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명백하게 알려주셔도 그 의무대로 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그렇게 살수 있다고 하는 때가 있어도 그렇게 안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전자의 사람과 후자의 사람은 현저히 다릅니다.
‘싸무엘 볼틴’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자기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짓는 죄는 악함이고, 그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짓게 되는 죄는 연약함 때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연약함이든지 악함이든지 간에 우리들이 어떻든 인간이니까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참회를 해야 합니다. 잘못했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자각을 해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를 창조하신 그 위대한 창조주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그렇게 타락하고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을 위해 자기의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구속해놓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뉘우쳐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정말 참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루함과 태만함 속에서 드리는 일주일의 한번의 예배로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때우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입니다. 진실한 참회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맺으신 언약관계 안에서 우리의 죄를 무제한 용서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사상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몇 번 용서해야지 되는가 하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답하신 말씀 중에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 490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언약의 본질입니다. 무한한 용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회하는 사람들만이 그런 용서를 실제로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율법의 지정된 벌에 대해서 하찮게 생각하면서 담대하게 자기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이런 용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기도해도 하나님과 무한한 거리감을 느낄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선포되어도 역시 그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되지 못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옆에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할지라도 자신에게는 차가운 거절감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참회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서 참회하는 그것가지고도 현저히 부족합니다. 우리의 죄는 매일 되풀이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마음의 미끄러짐은 매순간 반복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참회 속에서 살 때 그때에 예수와 함께 죽게 되고 그 예수와 함께 죽는 그 참회 속에서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소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실한 참회를 언제쯤 해보셨습니까? 정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한 존재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얼마나 잘못한 것인가를 깨닫고 자신의 악함과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용서를 진지하게 구하며 어린아이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진실한 참회의 방법이 없이는 여러분들이 결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로서 누릴 수 있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축복들도 여러분의 것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마음이 아픈 것은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이렇게 참회할 수 없도록 망가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참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참회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에게 참회가 없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형식화되고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시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마음은 도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수 없는 탐욕과 더러움으로 얼룩져있어서 어느 곳에서도 신자의 독특한 그 진실함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이 진실한 참회가 없이 마지막에 신자가 가는 길이 어딘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제멋대로 돌같이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자기 의를 쌓으면서 살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고 그리고 그 사랑에 매어서 사는 진실하고 충성된 신자의 삶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신앙의 진지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고민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생각하며 그리고 주님이 자신에게 향하신 그 진실하신 뜻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사는 것인가를 진지한 고민과 고뇌가 없는 모든 신자의 삶은 위선덩어리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율법에 나타난 공정한 심판을 우습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모든 신자는 바로 스스로 자신이 구원받지 못한 신자이며 하나님이 버리신 신자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실천적인 무신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완전한 자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멕스 루케이로’라고 하는 미국의 한 작자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자신은 성화를 위해서 거의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자아반성은 거의 없이 자기 멋대로 짐승 같은 삶을 살면서 언제든지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복음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상상해낸 복음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는 많은 사람들에게 방종하게 사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에 대한 그릇된 적용들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미리 생각하면서 오늘은 담대하게 자기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아버렸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오늘 이 시간에도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이 경험될 수 있겠으며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고 죽으신 주님의 그 사랑이 경험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율법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셨지만 여러분 모두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빛으로 비추니까 그분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벌은 사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 때문에 죄인으로 인정되시고 그래서 그 율법 때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율법의 요구를 담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피 흘려 죽으신 것이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하나님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기뻐하고 계신지를 생각해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좀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신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참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생명과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보다는 오히려 적당히 합리화시키고 위선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죄를 묻어버리고 교회당을 나가서는 배나 더 악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제껏 하나님 앞에 구원의 은혜를 받고 살아왔던 날들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순간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이기지 못하고 악을 행하고 그리고 범죄 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맞보았던 불결한 삶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즐거움들이 지금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안겨다주었습니까? 죄를 짓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며 산 상처는 아직까지도 치유되지 않고 골 깊게 파였지만 그때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누릴 수 있었던 기쁨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만족과 죄의 낙들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간다고 표현했습니다. 참회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 완전한 삶을 살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불순종과 죄가 있었습니까? 그러면 주일은 교회에 와서 진실하게 참회하고 그리고 우리의 죄의 용서를 빌 때 하나님은 무제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난 다음에는 항상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참회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만 있을 뿐 다시 살게 하는 은혜가 그 안에 없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숙고함으로서 속이는 죄의 역사를 우리는 견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 둘로 나누어서 설명이 될 수 있으니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특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참 신비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경험인데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한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두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러면 사랑받는 두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 네가 사랑을 더 많이 받는가, 내가 더 많이 받는가 하는 시기심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한 것은 우리 모두 우리를 사랑해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그런데 누가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그러면 밉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다고 그러더라. 그럼 우리는 기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나만 사랑해주시는 줄 알았더니 저놈도 사랑하시네. 그래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깎여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랑받는 것을 보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가 증폭됩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구원받은 신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자기는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이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에게는 모두 그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특권입니다.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생각을 미끄러지게 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이런 많은 죄들은 결국은 그런 특권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습니까?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무엇으로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든 경험을 우리에게서 사라지게 만듭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특별히 사랑해주셨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은 나의 특권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러면 자신을 유혹하는 모든 죄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의무에 헌신하는 것이 무거운 짐이라는 생각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대게 권태기라고 하는 것이 옵니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이지만, 제 경험에 의하면 직장생활하고 한 1년 동안은 정신없이 다니다가 한 2-3년쯤 되면 권태기가 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회사는 승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권태기가 올만하면 승진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새로운 희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평 직원이었을 때는 9시에 출근하라고 하면 9시 1분전에 정문을 통과하는데 그런데 승진하고 책임자가 되면 8시 20분쯤 나와서 막 챙깁니다. 그것도 또 한 2-3년 하고 나면 진력이 나서 싫증이 생깁니다. 그러면 또 한번 살짝 승진을 시켜줍니다. 그러면 부하직원도 많고 놓은 지위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하고도 훨씬 더 가깝게 관계를 갖게 됩니다.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도 받게 되고 그러면 그 다음에 의무가 가벼워집니다. 가볍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많이 받으면 우리의 의무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뭘 생각하게 되는가 하면 내가 지금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생각을 공격하는 죄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헌신해야 하는 이 의무를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쁘게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누가 여러분들을 죄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구원해주셨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죄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여러분들을 건져내신 다음에 그냥 내버려두셨습니까? 여러분들을 그렇게 죄의 어두움에서 건져내신 후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주시고 그리고 이제까지 인도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오늘도 신문에 보니까 여러 지체들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그런데 모두 간증이 무엇인가 하면 세상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간증이 아니라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신 하나님에 대한 간증입니다. 세상 사랑하신 하나님에 대한 것은 간증이 아닙니다. 역사책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입은 사람들의 간증은 언제나 간증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속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눈을 떠서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증거들을 봅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의 성실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사랑을 내가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죄에 미끄러지지 않고 자기를 지킬 수가 있게 됩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예전에 과거에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과 자비를 누렸던 경험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딱딱하게 굳어진 심령으로 주일 예배에 나와서 힘겹게 종교적 의무를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대부분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와 사랑을 입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를 생각해보면 여러분들이 모두 어린아이와 같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예수님이 아니면 무엇도 할 수 없을 것처럼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분께 사랑받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 전체의 목표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던 착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강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첫사랑의 때일 수도 있고, 두 번째 사랑의 때일 수도 있고, 며칠 전에 일어난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때이든지 간에 그것을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떠오르는가 하면 예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살았던 모습과 지금 하나님 앞에 비뚤어진 자신의 모습이 비교가 됩니다. 그러면 뭘 깨닫게 되는가 하면 지금 자신의 이 모습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얼마나 부족한 모습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서 참회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저에게도 회상을 하면 그런 때가 떠오릅니다. 객관적으로 저를 보더라도 너무 순전하려고 애를 썼던 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야망과 욕심이 없이 그리고 주님이 정말 나를 사랑해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었던 그런 때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면 우리의 개인적인 야망들이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거룩해지는 것, 그러나 이런 경향성은 결코 내면지향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동기가 되어서 자기만 거룩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인격도 거룩해지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상이 망가졌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서 다시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기를 원하는 갈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날 동안에 이 세상이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변화되기를 꿈꾸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이 사람의 가치이고 그게 바로 변화 받은 사람의 참된 모습입니다.
어제도 어떤 형제가 나에게 물어봤습니다. 목사님, 이 세상에서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어보는데 소원이라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데 다분히 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소원이 있다면 교인이 몇 만 명 모이는 것이 소원일까, 아니면 한번 그림 같은 집에서 살아보는 것이 소원일까? 뭐가 소원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목사님의 남은 인생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그래서 네가 변화되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너 변화되어서 새 사람 되는 것을 보는 것이 내 소원이라고 그랬습니다. 다른 소원은 아무 것도 없다. 또 아멘 하면 안 되지.자기는 또 어떻다고, 자네가 변화되어서 진실한 성도가 되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이 꿈이다. 물론 미래는 현재와는 좀 다를 것입니다. 좀 더 늙을 것이고, 힘도 없어질 것이고, 또 교회도 변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꽉 차서 없으니까 어떻게 하실지 모르지만 어떻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모이는 사람의 수가 많아질 것이고 아니면 또 교회가 은혜 가운데 나누어져서 또 새로운 교회가 설 수도 있고, 그 다음에 이렇게 나무로 만든 강대에서 설교하다가 유리로 만든 강대에서도 한번 설교할 수도 있는 것이고 뭐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고 큰 변화이겠습니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늙을 것이고 교회는 사람이 많이 모이면 커지게 되어 있는 것이고, 모여 있는 교인도 나이가 들면 다 주게 되어 있는 것이고, 아니 뭐 그렇게 되는 것이지 필요가 있으면 새로운 교회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고, 또 헤어지기도 하고 만나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지 그것은 모두 다 외적인 것이고 육신적인 것이고 진정한 가치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얼마나 착한 신자였습니까? 나는 여러분들 가운데 몇 사람들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은혜를 받으면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납니다. 요즘도 그런 사람을 몇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진짜 빛이 납니다. 그런데 본판은 못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빛이 납니다. 그러면 못 생길수록 유일한 얼굴이 됩니다. 비슷한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고 빛납니다. 그러면서 진짜 혼자 보기에 아까운 작품이 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모든 뜻을 받아들이고 싶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그런 마음, 그게 그를 너무 아름답게 만듭니다. 여러분들 모두에게 그런 때가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그런 뜻을 가질 때가 있었는데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자비를 입을 때를 생각하면 바로 죄가 지금 나를 공격하고 유혹하는 죄가 이런 은혜와 사랑에서 나를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죄를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우리를 공격하는 죄의 속임의 유혹에서 떨쳐나가서 그래서 빛 가운데 살고자 하는 강한 결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끝.
12. 죄의 속이는 역사: 생각을 이탈시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4)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 시간에도 죄의 속이는 역사를 견책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림으로 아쉽지만 이 시리즈를 종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의 속이는 역사를 견책하는 방법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주권을 가지고 게시다는 사실을 숙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율법에 의해서 우리들이 범죄 할 때 당하게 되는 징벌을 숙고하는 것과 그리고 세 번째는 그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깊이 숙고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죄의 속이는 역사를 견책하는 방법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네 번째는 자기 안에 죄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을 깊이 숙고하는 것, 그것이 죄의 속이는 역사를 견책하는 방법이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깨끗이 죄의 용서를 받아서 이제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성도의 뛰어난 신앙생활은 그가 얼마나 자기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셨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이 죄는 우리 안에 내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해놓으신 목적을 따라서 살지 못하도록 수시로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과 여전히 그 죄가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숙고할 때 우리는 죄의 속이는 역사를 견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바 그 은혜와 그리고 죄의 용서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시고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러주시는 그 사실을 우리들이 깊이 생각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의 넓이와 깊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잘 받아들여지게 된 흠 없고 티 없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택한 족속이라는 사실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제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의 수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왜 창조하셨는지도 알고 그리고 왜 우리들이 그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했는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형벌을 받으셨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거듭났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안에 죄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우리 자신을 겸비해지도록 도와주는지 모릅니다. 누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완전하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죄인들이었고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를 받았지만 여전히 자신 안에 더러운 죄들이 남아 있습니다. 예전보다는 훨씬 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강력한 소원이 생겨나게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 된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실제로 우리 안에 남아서 힘을 규합하고 보다 더 원대한 죄의 계획을 이루려고 우리 안에서 우리와는 또 다른 그 무엇이 되어서 역사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숙고함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교만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위선과 거짓, 자기기만과 자기 아첨, 교만 이런 모든 죄들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아십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기 매우 쉬운 존재이고 죄가 들어와서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이런 약점은 인간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가 누리고 있던 지위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온전한 세계였고 인간은 하나님처럼 무한히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려고 했던 이 계획에는 완전히 부합하도록 그렇게 온전하게 창조된 존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그 인간의 속에 당신 자신을 닮은 성품을 심으시고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특권, 곧 창조주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특권을 인간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이 아름다운 지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세상을 위탁하셨을 때 나타났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림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 더욱 영광이 가득하게 되도록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하나님이 인간을 지정하시고 부르셨으니 이것은 인간으로 감당할 수 없는 명예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상은 인간의 통치 아래 굴복되어있었고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고 있었고, 감정은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품고 있었으며, 의지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푸른 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과 그리고 그 태양 볕 아래 넘실대는 푸른 바다와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그 모든 수면 위에 아름다운 빛깔들 무한한 밤하늘의 별들과 아침에 피어나는 안개와 그리고 풀벌레 소리와 그리고 새소리들과 노래와 그리고 대지를 가르고 흐르는 바람소리와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의 위대한 능력을 노래하는 악기였고 인간은 그 앞에서 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였습니다. 인간의 휘젓는 지휘에 맞추어서 온 세상의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했고 그 노래 소리는 땅으로부터 허공을 가르고 천상에까지 도달했으니 주님이 만들어놓으신 세상을 보시며 주님은 만족해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왜 이 아름다운 지위를 버리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인간이 잊어버리는 인간의 습성이, 잊어버리는 그 인간의 불안전함이 이런 것을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이 지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고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게 그분의 손으로 창조되어 그분의 숨결로 빚어진바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는 범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도록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그 선악과를 하나님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 율법을 어기고 언약을 파기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인간의 이 건망증은 더 심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예 창조주 하나님을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자신의 근본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무지막지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없이 이 세상에 살다가 어느 날 어두운 영혼을 비추는 밝은 복음에 빛으로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구원의 햇살이 우리에게 비칠 때 제일먼저 일어난 일은 너무나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을 하나님이 다시 생각나게 해주시는 것이 제일먼저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복음의 그 밝은 빛 아래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났다는 사실과 그리고 우리가 죄인인 것을 잊고 살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도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들이 주님을 떠났었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하고 더러운 죄인이었는지를 잊어버리게 하는 일을 죄가 끊임없이 역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뒤에도 우리는 우리 안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잘 깨달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뒤에 분명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는데도 우리가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수시로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줄 때 예전에 보지 못했던 우리 안의 죄를 깨달았고 악한 욕망이 파악되었습니다. 기도 속에서 성령의 빛을 비추어주실 때 그 성령님의 빛을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안에 여전히 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우리가 그런 죄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슬퍼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우리를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구하며 기도했습니다. 은혜 안에 있는 동안에 내내 우리 안에 우리가 원하지 않은 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우리 안에 있는 죄, 우리 안에 그 죄의 실제를 발견하게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주님께 순종하며 아버지의 뜻대로 살려하면 살수록 우리 안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우리를 죄 아래로 사로잡아가는 그런 죄의 능력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겸비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는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할 수는 있지만 교만해질 이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 바로 신자입니다. 그에게 일어난 모든 좋은 일들은 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고 그에게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악한 일들은 모두 신자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을 찾아가고 주의 뜻대로 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안에 죄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자기의 혈과 육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한점의 죄도 없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깊이 묵상하고 숙고할수록 자기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숙고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많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당신을 깊이 의지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도 하나님은 그 은혜를 믿고 사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을 유능하게 섬기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은사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저런 은사를 주셔서 그런 은사가 없는 사람보다 더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구약의 인물 가운데 솔로몬을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탁월하고 놀라운 지혜는 일천번제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은사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솔로몬이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보다 자기의 지혜를 더 믿고 의지하게 되자 그는 하나님께 매우 슬픔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었고 주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도 그 지혜를 주신 목적에 기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신자의 아름다운 신앙의 자연적인 능력의 위대함이나 은사의 여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가 자기 자신의 부족을 알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신자가 죄를 깊이 숙고하고 자기 안에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죄가 내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아담과 같이 하와와 같이 교만하게 되고 그리고 자기의 본분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는 사실은 죄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죄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해야 하고 자기 안에 내제하고 있는 죄를 깊이 숙고함으로서 사랑이 촉진된다고 하는 사실을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서 죄를 깊이 생각함으로서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신 안에 있어서 촉진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이런 것입니다. 신자가 죄를 깊이 숙고합니다. 자신은 죄를 느낄 수없어도 성령이 우리 안에 죄가 있다고 말하니까 죄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자기의 죄를 깊이 숙고하고 그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게 될 때 이 죄를 인식하게 됩니다. 죄를 인식하게 될 때 신자는 그 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죄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거룩해질 때도 죄를 자주 생각하게 되고 타락할 때도 죄를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타락할 때 죄를 자주 생각하는 것은 죄에 대한 사랑이 촉진되는 가운데 자주 생각하는 것이고 거룩해질 때 죄를 자주 생각하는 것은 거룩해지고자 하는 성향 때문에 그 거룩해지고자 하는 길에 방해가 되는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올림픽 같은데 마라톤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이미 올림픽 마라톤이 시작되기 전에 여러 주 전에 현지에 도착해서 먼저 자기가 달려야 할 길을 꼼꼼히 살핀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가 거룩해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는 거룩보다 더 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죄가 거룩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죄에 대한 설교에 반감을 느낀다거나,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여러분들은 거룩에 대한 진정한 갈망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죄를 인식하되 친화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죄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을 인식할 때 신자들이 그 죄를 자기의 힘으로 죽여 보려고 애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언젠가 어느 형제가 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신이 이런 저런 죄에 빠져서 너무 괴롭고 말씀을 들으니까 한없이 눈물이 났는데 자기는 왜 이 눈물이 마르기 전에 또 똑같은 죄를 짓게 되는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강력한 죄의 지배 아래 놓여있는 위험한 징후입니다. 마음을 풀고 죄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면 마지막에 그런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죄에 대한 지식에 싫증을 내게 하는 일은 죄 이외에 아무 것도 그런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거룩에 대한 열망의 정도는 죄를 알고 싶어 하는 열망에 정도에 꼭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되는 대로 살고 그리고 무엇인가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모든 태도들은 생각의 의무를 이탈시키는 죄의 속임수에 의해서 이미 감염된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로서 이 시리즈를 끝을 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고 마지막 날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질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어두움의 일을 한 것이 덜 책망 받겠지만 빛 가운데 있을 때는 그 빛의 일을 행하며 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더 많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신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그 죄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 번째 단계에서는 신자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무능에 대한 깨달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동시에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사랑했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는 절대로 씩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늘 의지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혼자서는 걸어갈 수 없는 인생의 길이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어떻게 살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늘 의지하는 그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만이 자기의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다섯 번째로 자신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전적으로 받아들인 그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순종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향한 계획이 무엇이다. 그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계획을 수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계획대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향한 사랑을 순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여섯 번째로 그 하나님과 연합된 것을 느낍니다. 그 연합은 바로 실제적인 연합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그 실제적인 연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분의 구원의 계획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계획을 따라 충성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래서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결국은 죄의 모든 속임과 공격으로부터 훌륭하게 우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강퍅한 마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상한 마음은 자신의 죄를 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주님의 도움이 없이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깊이 숙고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들이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고 사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초대교회 시대에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에 그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 깊이 사로잡힌 존재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다른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제자들이 혼란에 빠진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정말로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려서 죽으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다시 살리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러면 다시 하나님이 살리실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분이 예수님이었다면 왜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지 되었을까? 이 두 가지 사실 사이에서 제자들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시자 그들은 아주 확연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랑해주셔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도 사실이고 저주를 받고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두 가지가 다 사실이라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 두 가지 모순 된 사실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 저주가 당신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구 때문에 예수님이 거기서 저주를 당하셨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매달려죽으셨다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그 십자가를 그토록 자랑했던 것입니다.
왜 사랑했습니까? 그분이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사실인데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볼 때 그분이 나무에 매달리신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 십자가는 죄 가운데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지금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그 모든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온전한 증거가 되었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원래 어떤 사람들인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하나님의 증언이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상을 두루 뛰어다니면서 이 창조한 세상은 하나님이 나에게 다 맡기셨고 이 창조된 세상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던 아담과 하와가 동산 중안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 앞에 와서는 비로소 우리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한 가지 이 선악과를 볼 때 아, 그렇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손에 의해서 지어졌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이 모든 창조의 세계를 돌보라고 위탁하셨다. 그것을 깨닫게 되듯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인생을 돌아다니면서 삽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곤고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십니다. 병들었을 때 치료와 곤고할 때, 위로와 그리고 상한 심령일 때 주님이 돌보심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어느 하나도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도 예수님께 빚지지 않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고 돌아다니며 사는 동안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너무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일을 일상화했고 사도바울이 바로 그런 일에 있어서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내 안에 나도 원하지 않는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을 배반하고 제 멋대로 방종하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든지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시고 은혜를 주셨든지 상관없이 어떤 사랑과 은혜도 하나님께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제 좋은 대로 살려고 하는 자아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가 어떻게 굴복시키셨습니까? 그를 데리고 주님 앞에 갑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편에 속한 또 다른 자아가 그에게 말합니다, 이놈아 봐라. 네가 지금 짓고 있는 죄, 그 죄에 대해서 품고 있는 욕망을 네가 가지고 있다만 눈을 들어서 십자가를 봐라. 누구 때문에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무엇 때문에 그분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고 사람들의 눈에 가려 싫어버린 바가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십자가 못 박히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봐라. 손과 발에 못은 유대인들이 박은 것이지만 그분의 가슴에 박혀있는 수많은 못들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슴에 박은 것이 아닌가.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 세상이 예수님을 못 박았고 네가 악수하려고 하는 세상의 손이 이분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었다. 네가 입 맞추는 세상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께 침 뱉고 네가 그렇게 달려가 안기는 이 세상의 품에는 지금도 예수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차있다. 봐라.
그때 죄를 지으려고 하는 우리의 옛 사랑은 그 십자가에 찬란한 은혜의 빛, 죄인들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은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면서 옛 사랑은 무릎을 꿇고 흐느끼게 됩니다. 어떤 강심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고, 왜 멸시와 천대를 받으셔야했고, 왜 그분이 우리를 섬기시던 그 손에 못 박히시고 찔려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지를 깨닫는다면 그 피가 떨어지는 십자가 아래서도 여전히 범죄 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가진 신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착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그분이 바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단 하루도 그 뺨에서 마르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 죽으셨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다. 나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주님을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습니다. 깊이 고백을 할 때 죄의 속임수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의 속임은 마치 양의 가죽을 뒤집어쓴 이리와 같아서 언제나 험상궂고 무서운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더 많은 때에 인간의 정서를 이용하고, 연민의 감정을 동원하고, 인간의 감성을 사용해서 그래서 자연적인 인식의 통로를 타고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우리를 더 크게 죄로 넘어트리고자 하는 강력하고 야비한 속임수가 깃들어있습니다.
아, 이 세상에 얼마나 불결하고 더러운지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서 자기가 그리스도와 정혼한 사실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인생을 주님보다 우리의 욕망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보다 우리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고 수없이 미끄러질 때 우리의 삶은 전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내실 때 의도하셨던 그 삶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분이 오실 날이 곧 가까이 왔고 우리가 그분께로 갈 날은 그보다 더 가까이에 있을 텐데 그렇게 마음도 지키지 않고 살다가 그 불결한 모습으로 우리 주님을 어떻게 뵈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곧 오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좀 더디 오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분 앞에 서게 되는 그 날은 여러분들이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시간에 다가옵니다. 그때에 죄 죽임도 없고 주님께 대한 순종도 없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진실하게 탐구하려고 하는 노력도 없는 사람들이 그 날에 하나님 앞에 나타날 그 불결한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등불은 꺼지고 예복은 벗어던지고 화장은 지워지고 머리는 헝클어진 창부와 같은 모습으로 어떻게 신랑 되신 그분 앞에 설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매일매일 고단한 인생길을 걸으며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에 빚진 부채의식을 가슴에 끌어안고 한순간을 이 세상에 존재하다가 죽어도 그분의 마음에 기쁨이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처럼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들을 활용하고 매순간 순결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인생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그날에 얼마나 행복할까요? 자신의 죄가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비함으로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눈물을 흘릴 때 그 흘렀던 눈물 자국들을 그분이 씻어주시며 그들의 애통은 그날에 기쁨이 될 것이고 은혜를 구하며 엎드려진 그들의 비굴함은 그날에 자랑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이 불결한 세상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정말 우리들이 자기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흘리신 그 보혈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도 사실은 우리가 예수 죽인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땅에 사는 모든 날 동안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을 더 많이 의지하고 자기를 신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죄는 우리를 속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우리가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숙고하는 것이 죄의 속임을 이기게 하는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그들이 행한 많은 악들을 지적했습니다. 음란함과 간음과 분쟁과 미워하는 것과 다툼과 파당을 만드는 것과 이 모든 것을 인해 가슴아파하면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집이다. 그것을 너희들이 모르는가.
(예화: 언젠가 영국에 가셨을 때 섹스피어 생가 근처의 어느 마을에 있는 깨끗한 여관의 정결한 모습을 말씀하시면서 오셔서 한동안 그곳을 생각하며 한번쯤 자고 올 것을 하고 여운이 남았다는 이야기)
성령님이 내 안에 역사해주시도록 아무리 기도해도 여러분들이 정결해진 마음이 아니면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성령님이 계속 내 안에 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그 성령님이 계시는 방에다가 쓰레기를 갖다 집어던지고 똥오줌을 갖다가 거기에 오강을 갖다 붓고 그렇게 해보십시오. 성령님이 거기에 거하실 수가 있습니까?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못 느낀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도해도 하나님께로부터 들리는 음성이 없고 말씀을 펴도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십자가의 은혜에 목매어하는데 그 사람들의 마음에는 얼음같이 차가운 기운이 감돌 따름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불결이 중요한 원인입니다. 마음의 불결이 문제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성령님이 내 안에 좌정해계시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내 안에 계심으로서 그분이 공급해주시는 하늘자원으로 내가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정말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가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고 욕망이 우리의 심령을 더럽힐 동안에 우리들이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난 한 주간 동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돌아보는 생활을 하셨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서 화장을 하고, 기도 속에서 성령의 은혜로 깨끗이 목욕을 하고, 선한 행실로 옷 입으면서 주님이 언제 오셔도 맞이하실만한 신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화장도 안 하고 옷은 언제 입었는지 다 찢어진 더러운 옷이고 회개의 눈물이 없으니 목욕 할리가 없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면서 두 눈은 세상에 대한 사랑에 이글거릴 때 그가 정말 어느 모습을 통해서 그가 예수님의 신부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이 여러분들 안에 계신 것을 깊이 숙고하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하늘자원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유한한 자원이 가득 찬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늘자원을 힘입어 영생을 누릴 수 있고 그래서 어두운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성령님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성령님이 우리 안에 편안히 계시도록 끊임없는 죄의 오염을 치우고 아름다운 찬양의 향기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 같은 믿음으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편안히 계실 수 있도록 그렇게 배려해드려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룩한 영으로서 영생을 주신 분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깊이 생각하게 하고 방심함으로 죄의 유혹의 속임을 당해 미끄러지지 아니하도록 우리를 붙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12주 동안을 계속되어온 이 시리즈를 여기서 마감합니다. 이것으로서 죄의 속이는 역사에 대해서 끝났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여러분 오해입니다. 이것은 그 장엄하고 위대한 교리에 앞마당을 지났을 뿐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 설교를 다시 목말라하게 되는 성숙한 때가 오리라고 생각하며 칼집에 칼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은 쉽게 참다운 신자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그 크신 사랑과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그 길을 기쁨으로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죄의 속임과 능력이 아무리 간교하고 위대하다고 할지라도 말씀의 칼 앞에 그 힘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도우시는 복음의 그 능력을 거스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실 때까지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죄의 모든 속임을 뛰어난 사랑과 탁월한 지혜로 분별하면서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죄의 속임을 이기는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