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하늘에 계신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中)
녹취자: 서재임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오늘서부터 꽤 여러 주에 걸쳐서 주기도문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들이 긴 주기도문을 듣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주기도문에 대해서 정리를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 인고 하니, 신약성경의 모든 부분의 이야기가 중요하지만, 이 주기도문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주기도문을 여러분들이 깊이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될 것인가를 알아서 우리의 기도생활이 성경에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하나는 기도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 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나태하게 사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기도생활이 부지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삶이 세속적인 사람들이 기도는 거룩하게 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언제나 살아가는 것만큼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만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재작년인가, 작년인가 주기도문을 보면서 양재동에서 강해설교를 한 학기 동안 했는데 다 못하고 2/3 정도하고 끝났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다시 시작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저는 이 주기도문을 보면서 주기도문만 몇 주가 될지 모르지만, 주기도문만 잘 들으십시오. 그럼 여러분들이 기독교신앙의 기초가 다시 잡힐 것입니다. 여러분 기초가 잘못 놓인 신앙은 아무리 쌓아 올려봐야 나중에 충격적으로 무너지는 일 밖에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신앙이 제법 있는 줄 알았는데, 자기도 놀랄 정도로 자기의 신앙이 이 험한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그런 비극을 경험 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 기초가 튼튼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으려니와 그러지 못한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큰물이 날 때에 무너짐이 심하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주기도문에 농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은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제자들이 부탁했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즉석해서 이런 저런 궁리를 짜내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평소 기도해 오신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기도를 잘 해부하면 그러면은 주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믿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이 주기도문을 들으면서 신앙의 기초가 새롭게 잡히는 것을 봤습니다. 여러분들이 깊이 집중하시고 이 주기도문을 잘 듣고 그리고 신앙의 기초를 다시 잡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에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는데, 주기도문이 성경에 보면 두 개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하나 나오고,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왜 이렇게 두 개가 나왔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누가복음에 있는 것을 마태복음으로 옮겨서 실을 때 다듬어서 실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에 있는 것을 누가복음으로 옮겨 실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두 번 가르쳐주셨다.’ 아무래도 별로 우리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내용도 대동소이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두 번 주님이 가르치셨느냐, 한번 가르치셨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있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기도 하실 때에, 예수그리스도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시다가 온 이후에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가르쳐주신 것은 누가복음 11장에 있고, 여기는 산상수훈을 가르쳐주시는 가운데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서 꽤 길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이 주기도문은, 성경자체 안에는 주기도문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기도하신 것이다’ 해서 주기도문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것은 요즘 우리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 없이, ‘예배 끝날 때나, 모임 끝날 때나, 마지막에 끝나는 순서가 적절치 못할 때는 주기도문으로 마칩시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그대로 사람들이 달달 외우는 그 일을 위해서 가르쳐주신 것은 아니고 기도의 패턴, 기도의 형태가 그런 형태로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말씀을 우리들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주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신 그 기도의 틀에 따라서 우리가 하는 기도 생활하고 틀을 맞춰보면 아마 여러분들은 엄청나게 우리가 하는 기도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는 기도와 차이가 난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며 여러분들은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차이가 어디에서 기인하게 되느냐 그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왜 우리의 기도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라고 가르쳐주신 기도와 차이가 많이 나느냐’입니다. 우선 사람들은 기도에 있어서만큼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별로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나님과 단순히 그저 마음 먹은대로 대화를 나누면 되는 것이지 굳이 무슨 형태를 따라가야 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기도를 하고 싶어도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은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냐면, 이런 기도를 하려고 할 때 이상하게 힘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 쉽게 얘기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내용들이 우리에게 마음에 다가오지 않고 내 마음이 이 기도를 쫒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는데,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쫒아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렇게 쫒아가지 못한다면, 그러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주님이 비현실적인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너무 수준이 높습니까?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네’ 라고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주님은 이것을 누구에게 가르쳐주셨는지 우리는 주목을 해야 됩니다. 산상에 올라서, 팔복산에 올라서 그래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예루살렘과 데가볼리와 갈릴리에서 병 고침을 받고자 와서 병 고침을 받았고, 그 병 고침을 받고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비범한 사람들에게 이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평범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 우리처럼 직장 다니고, 때로는 병나고, 때로는 사업하고, 혹은 장사하고, 혹은 공부하고, 아이들을 기르고, 그리고 이러한 평범한 일 속에 묻혀서 사는 갈릴리와 예루살렘과 데가볼리와 그리고 모든 원근각처에 흩어져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따르는 그런 평범한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신 기도였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우리의 마음에 뜨겁게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쉽게 얘기하면, 우리의 기도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이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이 기도에 대한 교훈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 안에서 참되게 변화되게 되면,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가 가장 훌륭한 기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부흥을 경험하게 되면, 그 사람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깊이 외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평소 올리는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던 기도가 너무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 같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그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기도도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열심히 기도할 수 있고, 열심히 기도하던 사람이 게을러질 수도 있고, 그리고 금식을 할 수도 있고, 철야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간구의 제목,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목적,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에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거는 기대,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내면속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다가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지 압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방인과 같이 너희들은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자기의 우상이 들을 줄 생각 하느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시느니라.’ 있어야 할 것을, 필요를 이야기하다가, 필요, 필요,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의 필요를 이야기 하는 가운데에 ‘그러므로 너희는 그 이방인들의 기도와는 틀려야 된다. 이렇게 기도해야 된다.’ 그러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서론을 더하고 싶지만 너무 길게 하면 여러분들이 지루하실까봐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주신 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흔히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물으며, 아주 어린 아이 때는 하늘 높은 곳에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아이가 자라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으면 교회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좀 더 성숙해지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으면 내안에 계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에 대해 말할 때 아주 다양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지니, 천국은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천국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통치입니다. 천국이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다스리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하나님이 어디계신지에 대해서 말하셨습니다. 때로 주님은 성전을 향하여 맹세하지 말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한 결 같이 성소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많은 여러 곳에 계신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때에는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굉장히 이상합니다. 시편 115편에 보면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말했지만, 역대기 2장에 가면은 ‘하늘과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가 없다.’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하늘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푸른 하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먼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분이다. 보십시오. 이 세상에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님이 있다, 없다’를 자기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있는 것 같이 살아가고, 그래서 주일날도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어떤 사람들은 없는 것 같이 생각되고 없다고 믿기 때문에 자기만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입을 빌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다수결 투표를 하고, 만장일치로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가편 투표를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시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땅에 있는 백성들이 말하기를, 이 땅에 있는 임금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매인 것을 풀고, 억매인 것을 끊자하나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라’ 세상에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은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인생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지 간에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성경에 접근하면, 성경이 제일 먼저 묻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당신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면 그건 접어놓고 그 다음에 대해서 이야기합시다.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합시다. 그럴 때, 성경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당신이 믿고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할 수 없으면, 그다음에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태도입니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것을 인정해야지만, 그다음에 성경은 그 사람과 인생을 이야기할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살아있는가 없는가 하는 이런 회의주의적인 사고가 유행하는 시기에 단적으로 간단하게 잘라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보다도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냐’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왜, 그 때 팔복산에 올랐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중에도 아무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입니까?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입니까? 성경은 오늘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로부터 인간은 언제나 하늘을 쳐다볼 때 겸비해졌습니다. ‘천지의 유유함을 생각하니 홀로 외로워져 눈물만 흘리노라’ 당나라 시인 진자앙이라는 사람이 지은 시입니다. 외로운 벌판에 마주 닿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들이 얼마나 외소하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는 하나님을 생각 할 적마다 하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뭐, 하나님을 뒷집 친구처럼 그렇게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그저 함께 놀고 어울릴 수 있는 친구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성경은 결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놀아주고 우리와 함께 뒹굴고 그리고 우리와 함께 농담이나 하고 그럴 수 있는 분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은 왜 우리들 가운데 그런 신앙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까?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런 일들이 생겨나게 되었냐면, 그것은 성경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이 세상의 풍조가 교회에도 들어오고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들어 온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보면 하나님을 소재로 해가지고 코미디 하는 것들이 가끔 나옵니다. 전부다 신성모독적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배워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화) 옛날에 국방부 장관을 지내던 김성은 장로, 그분이 간증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런 분의 간증은 좀 들을만합니다. 국방부 장관을 지내셨습니다. 하루는 비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그 비원 숲속에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새벽에 거기 못 들어가는데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는 장관이니까 산책을 삼아서 거길 들어갔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하필이면 자기네 교회 집사님이었답니다. 그 동네에 사는 모양이라 아마 어디 개구멍으로 들어왔는지 어디로 들어왔는데 하여튼 그 새벽에 거기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끝나고 새벽에 만났는데, “왜 그렇게 울면서 기도를 합니까?” 물었더니, 남편이 하도 못살게 핍박을 해서 이젠 도저히 배길 수가 없는 지경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뭘 도와주어야 되겠습니까?” 물었습니다. “장로님이 우리 남편을 만나서 예수를 믿어라 라고 얘기를 좀 해주십시오.” 이 사람은 자기도 신앙생활을 옳게 못하고 맨날 흔들흔들하는데, 아 그래도 어떻게 장로까지는 됐단 말입니다. 아, 집사시절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만나서 얘기를 해야 되니까, “당신같이 신앙이 좋은 사람 얘기를 안 듣는데, 나같이 예수를 옳게 안 믿는 사람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그랬더니, “그래도 집사님은 장관이 아닙니까? 우리 아빠는 높은 사람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인데, 장관 얘기는 아마 들을지는 모릅니다. 교회 집사 이야기는 안 들어도, 목사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장관이 불러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아마 믿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등 떠밀려서, “그러면 내가 저녁을 한번 살 테니까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야 장관이니까 돈도 좀 많겠습니까? 자기 말에 매주 50만원씩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러가지고 아주 근사한 호텔로 자기에게 예수를 잘 믿는 영적인 권위가 없으니까 기를 죽이기 위해서 최고급 호텔로 불러서 특실에다가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집사가 불렀으면 안 나갔을 텐데, 이 부인이 하는 말이 “내가 아는 예수 믿는 분 가운데에 국방부 장관을 지내는 아무개 씨가 있는데, 그 양반이 당신 저녁을 한번 내겠다고 그러더라고” 했습니다. 아, 이 사람은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갔습니다. 앉아 가지고 저녁을 잘 먹는데, 예수를 믿으라고 얘기를 해야 되겠는데 양심에 걸려가지고, ‘예수를 믿으십시오’ 얘기를 하려니까, ‘너는, 너는’ 그러는 것 같아 가지고, ‘너나 잘 믿어라’ 그러는 것 같아서, 도저히 걸려서 얘기가 안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만나가지고 저녁은 이제 잔뜩 먹여놓고 이 사람은 높은 사람 밑에 앉았으니까 어쩔 줄을 모릅니다. 다 먹은 다음에 “예수도 좀 믿어보라”고 아주 그냥 용기를 다해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했더니, 한마디 밖에 안했는데 이 사람이 그렇게 고분고분하든 사람이 그 소리가 딱 나오자마자 폭포수같이 쏟아지는데 예수를 자기가 왜 안 믿는지에 대해서 막 얘기를 하는데 청산유수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자기가 할 말을 잃어버렸는데, 옆에 있는 그 여자 집사님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응원을 하고 있는데 할 말이 없으니까, 자기는 고백하기를 성령이 주신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마지막까지 코너에 몰려서 할 말이 없게 되었는데, 그때 뭐라고 그러냐면 “이보게 젊은 양반, 그러지 말고 우선 성경을 읽어보게” 그랬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도 성경을 한 번도 안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세” 그랬답니다. 그러고 나오니까 그 말에 대해서는 반격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기를 모면하고 새로운 고민에 빠졌습니다. “다시 만나서 얘기하세”, 이제 분명히 다시 만나라고 그럴 것 같은데, 그때에 이 사람이 또 그러더랍니다. “좋습니다. 제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오겠습니다.”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읽고 와 가지고 여기저기 물어 보면 할 말이 없을 것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이 양반이 그다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아파가지고 휴직을 하고 있을 때 구약성경을 다 읽는데, 구약성경을 다 읽고 나면서 큰 심령에 부흥을 만났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전에 알고 있던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었다.” 구약을 넘겨보니까 제일 먼저 우렁찬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들리면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쭉 나오는데 백성들이 반역하니까 하나님이 단숨에 쓸어버리고, 그리고 왕이 잘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둬가지고, 주님 앞에 불순종하니까 불순종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제단에서 쏟아져 나온 불길이 삼켜서 죽여 버리고, 그러는 말하자면 끔찍한 하나님의 주권을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깊이 두려워 떨면서 목사님한테 찾아가서 “목사님 구약을 읽어보니까 그 하나님이 어쩜 이렇게 무서운 하나님이십니까?” “집사님 잘하셨습니다. 이번엔 신약을 읽어 보십시오.” 신약을 읽어보면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신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어울리고 놀고 그럴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변화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산에서 형체가 변화되시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눈이 부실정도로 희어진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며 놀랐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된 모습을 이 땅에 드러내실 때에 그 모습이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안 보일 때는 무슨 말이든지 못합니까? 다합니다. 임금도 욕하는데, 그러나 그 앞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꼼짝도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고 거룩한 분이고 존귀하신 분이신지를 안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는 것입니다. 밖에 나가서 한번 힘차게 뛰어올라보십시오. 1m를 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하늘 저 너머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나, 그것은 마치 하늘에 있는 구름을 잡고자 깡충거리고 뛰는 어린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철학과 사상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나, 그것은 멀리 보이는 달을 붙잡기 위해서 사다리를 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은 만질 수 없는 곳에, 우리가 감히 키를 댈 수 없는 그곳에 그렇게 초월해 계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이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이 땅에 재림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 주님이 오셨네, 온다고 그러더니 오셨네, 오늘 오셨네.’ 그럴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놀라워 충격 받을 것입니다. 아마 기절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기도하기 전에 먼저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의 기도와 틀린점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기도하러 나올 때 무엇을 주목합니까? 돈이 필요한 사람은 돈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식이 필요한 사람은 양식을 생각하며 신 앞에 나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나아오는 사람은 하나님 자신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얻을 것을 구하나,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성품을 주목하고, 이방인의 구함은 얻고자 함을 위함이나,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관계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우선 ‘하늘에 계시다’라고 하는 이 말은 인간을 완전히 초월해 계신 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화) 오늘밤, 내일 밤, 모래 밤, 19일까지라고 합니다. 19일까지, 목성과 혜성이 부딪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가 없고, 많은 과학자들이 이미 출장을 나갔습니다. 그 부딪치는 장면을 생생하게 찍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유성의 덩어리가 잘못해가지고 부딪치는데, 이런 장엄한 우주 쇼는 1000년에 한번 정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밖에 볼 수 없지만 그중에 제일 큰 것이 부딪힐 때 지름이 1.6km나 되는 하나의 커다란 이런 흙덩어리입니다. 그것이 목성하고 부딪친다고 합니다. 부딪치면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는데 그 폭발 시에 나타나는 폭발력이 히로시마에 터진 원자탄 십 만개 정도가 동시에 터지는 것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상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큰 것이 초속 30몇km로 달린다고 합니다. 1초 동안에, 상상할 수 없는 속도입니다. 그 속도로 날아가서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충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그것을 바라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감탄해하는 어마 어마한 광경도 우주 전체에 비하면 운동장에서 티끌이 조약돌에 부딪치는 것과 같은 그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모든 세상과 우주를 하나님이 홀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달나라를 여행한 에드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 닐 암스트롱, 세 사람이 달에 가서 착륙을 하고, 시편 121편을 새겨놓고 왔습니다. 여러분, 우주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예화) 인도를 한번 보여줬습니다, 옛날에. 그런데 절벽이 4km나 되는데, 그 절벽을 깎아 가지고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인간적으로 볼 때 인간의 그 집념이 얼마나 대단한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허무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서 4km가 넘는 그 절벽을 깎아가지고 말하자면은 우상을 새겨 넣어서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찬란한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얼마나 위대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주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하고 그렇게 크신 하나님, 모든 것을 뛰어넘어 초월해 계신 하나님입니다. 인간들 속에 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여 주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나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겸비해져야 됩니다. ‘그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이고 내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 그것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며 겸비해질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동시에 죽음으로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와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게 하실 수도 있고, 또 그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가져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늘 높이 계신 그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은 시편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늘 높은 곳에 계셔서 원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행하신다. 누구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말씀 속에서 누구도 하나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감찰하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무엇 때문에 즐거워하고 무엇 때문에 신나는지 주님은 다 헤아리고 아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지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크고 위대한 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작고 그리고 지극히 사소한 일까지도 모두 알고 계시고, 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그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세상대로 악을 행하고 그리고 잘못된 일을 행하면 벌을 받고, 심판을 받는 규칙이 세상에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마지막에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자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이 신앙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늘 높이 계시고 인간은 그 땅 아래 있는데, 그 땅 아래 살아가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인간들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알 수 없을 텐데, 그 연약한 인간들이 또 죄로 물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모든 눈이 전부다 다 깨진 것입니다.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대로 있으나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다스리고 그리고 우리가 영광을 돌려야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도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눈 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으셔야 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까? 누가 이일을 하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 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종교들은 욕심을 억제하고 수도를 하고 고행을 하고 해가지고 자기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죄인들이 그대로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찾아 오셔서 우리에게 깨우쳐주시는 것입니다. “얘야, 하늘에는 내가 있단다. 내가 너희의 아버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면서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사실은 또한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를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다 어디로부터 온 말씀입니까? 하늘로부터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인간이 어떻게 그 땅에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월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순종하며 이렇게 70-80년 살다 죽어갈 인생들이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가 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늘의 음성으로 기록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첫 번째 말씀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말할 때’ 이 세상에 인간들의 모든 성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그다음에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무슨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늘에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땅에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찌해야 이 질병이 나을까, 어찌해야 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날까.’ 이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까? 땅을 향하고 있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녀들도 대부분은 이 땅에 일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가 나오냐하면, 껍데기는 기독교 신앙인데 나오는 그 내용은 전부다 이방의 신에게 나아가는 그것을 그대로를 가지고 나아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고 하나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그 관계를 붙들고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이런 것들이 신앙의 초점이 되지를 않고, 세상에서 우상에게 빌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렇게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우상 앞에 나아가서 그렇게 돈 내고 그렇게 간구하고 합니다. 대학 입시 철쯤 되어 보십시오. 나는 그때만 교회에서 기도회 하는 것에 대해서 지극히 회의적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만 열심히 나옵니다. 가 가지고 돈을 내고 3000번을 절을 해야 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3000번을 어떻게 절합니까? 그리고 나가지고 병원에 입원해야 됩니다. 허리가 아파가지고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이방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방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신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과 너무나 유사하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마치 열심히 기도를 하면은 하나님도 할 수 없이 들어줘야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절대로 오해입니다. 안 되는 기도는 열심히 해도 안 됩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여러분들에게 칼을 달라고 하고 독약을 달라고 하는데, 울고 몸부림치면 줍니까? 그것이 바로 부모의 성품입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잘못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땀을 뻘뻘 흘리며 하는 대부분의 기도들이 천국에서는 전부다 잡동사니 우편물 취급을 받고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뜯어도 안보는 기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하나님이 누구시고,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됐는지를 알고 그것을 붙잡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무엇인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우리들이 빠질 위험이 이런 종류의 위험이 얼마나 많이 도사리고 있는가를 주님이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화) 부잣집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잘 자랐습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크면서 점점 철이 들기 시작합니다. 철이 들기 시작하면 시작할수록 이 아이가 영악해지면 되겠느냐 이것입니다. ‘아! 우리 아버지가 죽으면 저 유산은 전부다 다 내꺼다.’ 그런 마음을 갖는데 지혜로워져서야 되겠냐 말입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질수록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관계가 더 긴밀해지고, 그 아버지의 집에서 인자한 아버지와 그리고 바른 길로 이끄는 부모 밑에서 자라게 된 그러한 것들을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러한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간증을 많이 갖고 있다고 그래도 그 간증의 차원이 새마을 성공 수기 수준을 못 벗어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늘에 속한 모든 부요함,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기도문에 첫 번째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렇게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을 늘 대충 넘어갑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깊이 주목하고 그다음에 우리는 아버지를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높이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늘 높이 계시고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무도 그 통치를 벗어날 자가 없고 그리고 하나님은 신앙에 모든 출발을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계시로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 땅을 살아가지만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습니다. 위를 바라보며 살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얻었으면 이제는 땅에 것을 바라지 말고 위에 것을 사모하라.’ 위에 나라를 사모하고 위에 것을 바라보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에 들어가기 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고, 그러면서 이 우리에 인생의 목표 자체가 기도할 때마다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죄 많은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저 하늘나라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건 다 기초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우연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뒤에 있습니다. 어떤 훌륭한 일들을 훌륭한 결단을 하기 전에는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기초가 이 신앙 속에서 마련되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누적되어 온 결과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그렇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이 대목을 시작할 때, 우리가 정말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부패한 세상에서 소금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그 원동력이 땅에 있는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그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은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수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주는 그 은혜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주는 그 은총 없이는 우리들이 조금도 이 어두운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으며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처럼 주일날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은 주님께 징벌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그 신령한 은혜, 그것이 아니면 우리들이 살아갈 수가 없사옵나이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고 그 은혜를 힘입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이 말씀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만물 위에 초월해 계신 분이신 것입니다. ‘나라들 떠들고 이방들 요동하나 그러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이런 죄 많은 세상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서 비록 아무 말씀 없이 바라보는 것 같으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의 인생에 갚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늘 이렇게 하나님은 지극히 위대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비천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교만함은 어디서 우러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루 강아지가 호랑이 앞에서 재주부리며 까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호랑이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들이 교만하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예수 안 믿으려고 하는 모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안다면 그들은 감히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세상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우리들은 지난 한주일 동안도 하늘로부터 임하는 그 은혜와 하늘로부터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먼저 주목하게 하시고 싶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먼저 이번 한 주간 동안 깊이 묵상하십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분이시고, 하나님은 위대하고 거룩한 분이고, 나는 지극히 비천하고 연약한 인생에 불과함을 고백하며 깊이 하나님 앞에 복음을 묵상하십시다. 그 때 그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감격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사는 날 동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관계를 가지며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소유하며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그 힘을 덧입어서 어두운 세상을 초라하지만은 능력 있게 무명한 자 같으나 그러나 사실은 유명하게 폐하는 자 같으나 사실은 이기는 자처럼, 그렇게 살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시간 우리 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합시다. 주님은 하늘 높이 계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낮고 천한 인생들이오니 하나님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파하시고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하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살아가도록 열린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은혜를 부으시옵소서.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저희들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오늘도 불러주시고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간구하고 기도하게 하심을 감사드리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간구하고 기도하오니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나오고 어두운 세상을 이길 빛이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정말로 그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낮아지도록 은혜를 내려주시고, 지극히 높은 사랑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하고 기도할 수 있는 종들이 되도록 주여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옵시기만을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여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하오니, 주여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오니 주여 역사하여 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여, 신앙의 기원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는 것과 아버지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하늘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임을 아버지 하나님이여 깊이 고백하며 아버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