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녹취자: 김경애
지난 시간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할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그 말,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그 말이 우리가 높이 공경해드려야 할 하나님을 보여준다면 이 아버지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와는 질적으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높으신 분이시고 훌륭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어떻게 가까이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멀리 계신 분이고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능력이나 사람이나 지혜나 그 모든 자비나 그런 것에 있어서 무한하고 무궁하고 끝이 없고 한이 없으신 그런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대한 하나님을 우리들이 누구라고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큰 능력과 위대한 힘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 그 분을 그저 하나님이라고만 생각하고 신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늘 그분을 두려워하면서 그저 늘 전전긍긍해하는 혹시라도 우리가 그분을 진노케 하거나 혹시라도 우리가 그분을 화나게 하거나 그래서 우리에게 징벌이 내리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큰 권능을 가지신 분이 우리에게 징벌을 내리신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남아있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늘 전전긍긍해하고 두려움 속에서 지내고 불안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인식이 그런 인식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우리들이 여태까지 생활해오면서 고사를 지낸다든지 아니면 옛날에 그 어른들이 터줏대감한테 고사를 지낸다든지 정안수를 떠놓으면서 비는 그 모든 것들은 복을 달라고 비는 개념보다는 항상 사람들이 불안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신들이 어떤 심술을 부릴지 모르니까 늘 그 신들을 달래고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으로만 끝나서 그래서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르고 엄청나게 우리와는 다르신 분이라는 그런 질적인 차이로만 만약에 끝난다면 그러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늘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다리몽둥이를 분지르실 것이야!’ 아니면 ‘내가 오늘도 전도를 하지 않으면 아마 하나님께서 내 사업에 복을 주시지 않으실 거야! 오늘도 헌금을 하지 않으면 아마 질병이 생길 것이야!’ 이런 식으로 늘 두려움에 싸여서 그렇게 하나님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이런 신앙생활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하나님이 바로 너희의 아버지다. 기도할 때는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한없이 공경해야 할 우리가 결코 우리와는 친구처럼 놀아줄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것과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관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하기에 앞서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있는 모든 인생을 살아가는 곤고함, 고통 하는 많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쉽게 이런 것입니다. 자기를 한없이 사랑해줄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아니면 누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왜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를 용서하시는 크신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이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경건하고 정결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구원과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이 시간에도 열심을 품고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고 우리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우리가 보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생의 모든 곤고함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기도하고 있는 그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성품을 깊이 이해하고 그 성품의 지식 속에 우리 자신이 잠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까?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면서 그 아버지라는 대목에서 감격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우리 육신의 아버지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아버지가 경건하고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가정을 다스리는 한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의 그림자를 아이들의 마음속에 심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들의 아버지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고 그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야할 아이들의 가슴속에 아버지로 말미암는 깊은 상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할 때 아버지에 대한 그 한없는 그리움과 친밀함과 그 모든 자비로움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달콤함이 우리의 가슴속에 파도와 같이 밀려올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의 대목에서 깊이 감격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격해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나는 오늘날의 가정의 파괴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의 가슴속에 ‘아버지’ 그러면 그 엄위로우면서도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면서도 그러면서도 또 항상 그 안에 있고 그래서 너무 기쁘고 그리고 나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다 헤아려주고 그리고 나를 바른길로 인도해주는 그래서 그 아버지와 단절된 내 인생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관계가 되지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면 아버지라고 해봐야 매일 얻어맞은 기억밖에 없고 발길로 차고 요즘은 애들을 너무 두드려 패서 정신병에 걸리고 심지어는 죽기까지 하는데 시대가 타락하면 이렇게 아비의 마음이 자식에게서 멀어지고 자식의 마음이 아비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보냄을 받았을 때에 뭐라고 예언했느냐하면 그가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아가게 하겠고’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왜 드리느냐하면 그냥 ‘아버지’ 할 때 가슴에 밀려오지 않는 그 정도의 차원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관계를 그렇게 연속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들은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불완전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깊이 깨어진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면서도 완전한 성품, 그리고 완전한 은혜,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온전한 사랑으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너희들이 먼저 깊이 깨닫고 받아들일 때 우리들이 기도의 제목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것은 관계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어떤 관계이신가? 흔히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하고 고통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럽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그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ale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이 많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어느 한국인 의사가 간증을 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든지 의사인데 병원을 많이 하니까 소문이 나서 환자들이 엄청 몰려오니까 병원을 하나를 짓고, 둘을 짓고, 셋이나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돈이 들어오는데 어마어마한 수입인 들어오는 것입니다. 한 달에도 몇 억씩 들어오는데 그러니까 병원을 그렇게 하려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계속 바빠집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병원을 하나 늘렸는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이것을 늘려야겠습니까? 말아야겠습니까? 주님이 이것을 늘리면 한 달이면 육천만원인가 팔천만원이 더 들어오는데 그러면 그 돈을 전부 선교헌금으로 쓰면 하나님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사람이 한국말보다 미국말을 훨씬 더 잘하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러셨답니다. 여기에 적어왔습니다. 하나님이 한국에 있을 때는 한국말로 하시더니 미국으로 가니까 영어로 말씀하시더랍니다.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I want not you work but relationship.’ '얘야, 나는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원하노라.' 그래서 그 사람이 한 달에 팔천만원이 들어오는 수입을 포기했습니다. 왜? 기도를 한 시간 더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죄 가운데 빠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 때 그때에 자신 속에 있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밀려오는 허하고 공허한 마음을 부지런히 활동을 함으로써 채워보려고 하는 이러한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외형상으로 그것은 주의 일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주의 일을 하면 할수록 주님과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고 똑같은 주의 일인데도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일이 어떤 일이 그렇게 구분됩니까? 그렇게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의 성질에 따라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서 그 일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게 붙들면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하는 사람들은 일을 하면 할수록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견고해지고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를 더욱 사랑하고 붙들 수 있는 그런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생전에 찰스 스펄전 목사는 30살이 좀 넘으면서 큰 교회를 목회했지만 30살이 넘으면서 통풍에 시달렸습니다. 온몸이 저리면서 뼈마디가 쑤시는 그런 못된 병에 시달렸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자기의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는데 뭐라고 썼느냐하면 악마가 와서 칼로 뼈마디를 도려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 정도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엄청나게 많은 일에 관여했습니다. 고아를 위한 사업, 학교를 위한 사업, 전도, 할 것 없이 자기교회 일 하나뿐만 아니라 모든 말하자면 수많은 일들에 관여했습니다. 그러면서 신학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경험을 했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 때 관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알지도 못하는데 관계가 깊어지겠습니까? 아니 남녀가 둘이 있는데 요즘에는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쪽에 있는 사람하고 이쪽에 있는 사람하고 사진만 보고 미국에 사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일이 옛날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주민등록을 다 외우고 얼굴이 멀쩡해가지고 시집을 가고 보니까 상반신만 찍었는데 하반신 한쪽은 못쓰는 것입니다.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서로 서로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잘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을 이해하고 체험함으로 말미암아서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도저히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이 자기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셔서 자기를 많은 죄악 가운데서도 용서해주신다는 놀라운 신앙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 무엇을 깨닫게 되느냐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찬양)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그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부르짖고 기도하고 만날 엎드려서 소리친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선 신앙생활을 하면서 머리부터 위에서부터 아래로 정복되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머리부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정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하시는구나!’ 가슴으로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온 마음이 하나님의 성품을 향한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깊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깊어져감으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이 우리가 느끼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적에 아버지로 등록이 되어있는데 그것을 열어보면 아버지고 나는 아들인데 얼굴도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아버지와 돈이나 주고받는 관계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을 우리가 깊이 확신하고 느끼면서 그 하나님을 아버지와 같이 교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기도를 위한 삶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허하고 공허한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까? 몸은 바쁘게 움직이고 정말 모든 시간을 주님만을 위해서 사용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고하고 피곤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진정한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내 마음에 밀려오면서 그 관계를 굳게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이런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러니까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과 아들이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이내믹한 관계, 그래서 그 속에서 사랑과 기쁨과 공급함과 이런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생들이 아버지께서는 그런 관계를 원하시는데 이 자식들이라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 아버지와 그런 관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월말 되면 청구서를 들고 들어가서 돈을 타는 관계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원하는 관계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떻게 다가오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이 사실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깊은 은혜를 받으면서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나에게 커다란 은혜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에베소서에서 말하지 않습니까? 너희는 본질상으로 진노의 자식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고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고 멸망을 하고 그리고 심판을 받아야 마땅할 그 인생들이 변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를 말하는 헬라어 단어가 ‘파티아’입니다. 이것이 가족관계에서 부르는 명칭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아바마마, 부친 그런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아빠라고 부르듯이 말입니다. 식탁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가족공동체에서의 호칭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를 가지고 잊지 못하면 주기도문의 그 다음을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들이 때로는 집회를 하고 때로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기를 원하고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우리들이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실인가 하는 것이 내 마음깊이 밀려와서 그래서 내가 그 하나님을 앎으로 이전에 내가 알던 그 하나님을 이제는 더 신뢰하고 더 의뢰하고 그리고 그분과 늘 동행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존오웬이라는 영국의 유명한 목사님인데 한 삼백년 되었는데 그분이 글을 썼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뭐라고 글을 썼느냐하면 아주 유명한 석학입니다. 왕을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했느냐하면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고 또 우리가 그를 많이 사랑하므로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뜨거워지고 잠 못 이루고 그러다가 그 다음에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병이 날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알겠느냐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병이 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견딜 수 없고 멀리 출장 나가서 전화하는 목소리만 들으면 눈물이 핑 도는 그런 아버지가 여러분 생각나십니까? 세상에는 그런 부모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관계가 되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이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너희가 바로 이러한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있는 관계로 너희들이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먼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자꾸 과다한 것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최악으로 접어들면 어떤 관계가 됩니까? 자식이 도무지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가 자식에게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 돈을 펑펑 쓰는 것입니다. 적어도 돈을 줄때는 아부라도 하니까 그러나 그 권위는 그 순간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돈이 떨어지고 나면 아니 돈이 떨어질 필요도 없습니다. 돈을 들고 집을 나가면 그 다음에는 아버지의 권위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진실하고 참된 사랑과 그리고 그러한 교제를 누리면서 그 관계를 붙들면서 살아가지 못할 때 그것은 가장 비극적인 관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애비를 상대로 소송을 걸고 그러는 세상 아닙니까?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납니까? 관계를 굳게 붙들고 그 관계가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준다는 사실도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준다는 사실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시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분일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용납하고 그리고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부모들은 자식이 하도 마음에 안 들면 ‘위로 할 바에야 나는 너를 낳은 것을 후회한다. 호적을 파가거라.’ 아니 호적을 파간다고 자기 자식이 되지 않습니까? ‘호적을 파가라.’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도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용납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대견해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치유하심과 사랑과 그분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스스로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온 마음과 우리의 모든 신앙적인 기대가 그 아버지의 보살핌이 아니면 한시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가득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아버지의 사랑과 도우심과 은혜가 아니면 그러면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와의 관계가 하나님은 그런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아버지는 자녀를 방종에 흐르도록 내버려두시는 분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용납해주시고 그리고 받아주시고 이해하시고 그리고 자비로운 사랑으로 이 시간에도 우리를 치유하시고 우리를 고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만약에 징계를 받지 아니하면 너희는 사생자요.’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를 치시고 때리시고 고치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확인시킵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필요한 것들을 끊임없이 공급해줄 때에도 아버지와 우리와의 관계가 확인되지만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너를 자녀 삼을 것은 먹고 마시며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너를 지켜주기 위해서 그래서 내가 너를 자녀로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자녀로 택한 것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패고 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부모들은 아이들을 때리지 않습니다. 그냥 놔두고 기릅니다. 그러니까 때리지 말고 그냥 말로해서 길러보십시오. 여러분 마지막에 그 자녀들이 결코 부모를 대접하지 못하고 사회에 나가서 전부 자기중심적이 되어서 세상에서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직장도 다니지 못합니다. 들어가면 꼭 그 집단에 적응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죽이고 억제하고 그리고 모든 사회 환경이 자기중심적이 아니더라도 능히 그 전체적인 목적을 위해서 기여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훈련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경우데 따라서는 하나님께서 때리시는 것입니다.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특별한 목적이 있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내실 때 가나안에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그 심지 않은 포도나무와 그리고 짓지 않는 집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을 그렇게 거기에서 심지 않은 포도나무의 실과를 먹고 짓지 않는 집에서 살고 그곳에서 그렇게 정착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그 이방의 땅에서 빛으로 드러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하신 다음에 그 다음에는 먹고 마시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그 이름을 힘입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우리는 얻어내고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 어수룩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와 원하시는 관계는 날이 갈수록 더욱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깊어지고 견고해져서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이 와서 흔들어도 그 하나님과 함께 굳게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관계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집안이 환란을 만났을 때나 혹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나 혹은 가문이 파산선고를 받았을 때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비록 빚쟁이에 쫓겨서 도망가지만 그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사랑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하나님과 너희들과의 관계가 바로 그런 관계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애들이 놀면 살살 점잖게 놀면 좋겠는데 저도 어려서 그랬겠지만 왜 그렇게 날뜁니까? 그래서 엊그제도 공을 차면 운동장에 차든지 아니면 벽에 차면되는데 공을 힘차게 차서 빌라의 큰 유리창 하나를 왕창 깨뜨렸습니다. 그렇게 깨뜨려도 누가 와서 그 아이에게 왜 이것을 깼느냐고 무릎을 꿇고 손들고 있으라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점잖게 우리 집으로 통보하는 것입니다. ‘유리 한 장이 깨졌는데 가격이 얼마인데 새로 끼워놓으십시오.’ 그러는 것입니다. 집에서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장난하고 놀다가 귀하게 여기는 꽃병 하나를 깼다고 칩시다. 그놈을 불러다놓고 무릎을 꿇게 하고 패면서 ‘200,000원주고 산 것인데 물어내 인마!’ 그러면서 패는 부모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돈이 있어도 물어내라는 소리를 안 합니다. ‘신문이라도 팔아서 물어내 인마!’ 그럽니까? 안 그럽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가 아닌 사람들은 그 아이가 어떤 아이가 되느냐? 그 아이가 어떻게 해서 그런 실수를 했느냐?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깨뜨린 것만 그대로 갖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200,000짜리가 아니라 2,000,000원짜리가 깨져도 중요한 관심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깨졌다는 것보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왜 우리 집 아이는 이 모양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될까? 왜 이렇게 신중하지 못하고 날뛸까?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200,000짜리 10개가 깨져도 그 10개를 깨뜨리고 이 아이가 신중하고 차분해지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 신뢰를 줄 수 있는 그러한 태도를 지닌 아이가 된다면 그까짓 거 10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관계는 자녀들이 ‘오 주님, 주님밖에 없사옵나이다.’ 하면서 붙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TV에서 보니까 이민 2세들 이야기인데 부모가 하도 성질이 나서 ‘이놈의 자식!’ 그러면서 한 대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얘가 영어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한 대 맞고 나서 부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하는 말이 ‘아버님 법에 부모는 18세까지 양육할 의무만 있지 때릴 권리는 없습니다.’ 이런 관계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딱 때리면 어떻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어맞고도 그 품에 가서 안길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는 나를 버렸거니와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영접하리로다.’ 다윗의 시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징계를 많이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얻어맞기도 많이 하고 엎드려 뻗혀도 많이 했습니다. 볼기에 피가 나도록 터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은 무엇입니까?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와 그런 관계가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네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너도 한번 맞아봐라.’ 우리 부모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팰 때가 있는데 그때 잘못 맞으면 죽습니다. 손에 살이 낀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심호흡을 가다듬고 그 다음에 패야합니다. 그냥 화난다고 무조건 패면 큰일 납니다. 옛날에 고등학교 다닐 때 서울대 들어간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는 아버지를 무서워하는지 졸업을 다하고 하루는 내가 평생 아버지를 이렇게 무서워해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아버지는 옛날에 정치깡패였는데 친구와 어울려서 이번에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완전히 뒤집어야겠다고 술을 잔뜩 먹고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버지!’ 문을 열었더니 ‘그래!’ 그러면서 나오는데 ‘이놈의 자식!’ 그러면서 죽여 버린다고 도끼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술 먹고 비실비실하던 놈이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나오니까 어찌나 빨리 뛰던지 그 친구는 체육특기생이었는데 골목길을 쏜살같이 달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우리와의 관계가 이런 관계가 되서는 안 됩니다. 자식을 아버지가 때릴 때면 그 아버지는 그 동기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내가 때릴 때 네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만 얘야 내 마음에는 피가 흐른다.’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하나님이 피곤하게 몰아가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꼭 만드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래서 어디다 내놓아도 그 사람 얼굴을 딱 보면 천국의 가문의 자식이라고 소문난 아들을 한번 만드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훈련시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치 빠른 사람이 좋은 것입니다. 재빨리 신앙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를 채야합니다. 이것이 심심하면 하나님 앞에 가서 금식기도해서 돈이나 타서 쓰는 그런 관계가 아닌 것을 빨리 눈치 채야 합니다. 눈치를 채지 못하면 계속해서 고달픕니다. 하나님은 목적이 있어서 계속 패는데 인생은 도무지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꽃병을 깨뜨렸다고 얻어맞으면서도 이 아들의 생각에는 내가 이렇게 맞는 것은 다 돈이 없어서 맞는 것이라는 생각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은 얼마나 진지합니까? 그리고 마음의 결심은 얼마나 진지합니까? ‘그래 나는 돈을 벌고 말 것이야.’ 진지하고 열심히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신앙생활이 핀트가 맞지 않으니까 계속 성숙이 없는 것입니다.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그 관계의 장엄함 그리고 하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들,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싶어 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한집에서 동행하고 동거하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아버지가 누구네 아버지입니까? 우리 아버지입니다. 왜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을까를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통성기도 할 때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도 분명히 혼자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도 너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여!’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들도 나의 아버지라는 말을 많이 했는데 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때 ‘우리의 아버지여!’ 이렇게 기도하라는 것입니까? 그때마다 우리니까 나 한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그 하나님은 나 한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우리 아버지여’ 할 때 저 자매도 어느 구석에선가 기도하면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겠지 그러므로 한 아버지를 중심으로 그렇게 주기도문을 따라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이신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사람들은 관계가 우리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가 그러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 되게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조금 생각해봐야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그 교회를 우리라고 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모든 교회, 모든 구속받은 자녀들이 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동네에 서있는 교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모든 교회의 통일성입니다.
스펄전이 설교를 하는 가운데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여기에는 침례교인들이 들어오는군요?’ ‘아니오.’ ‘아, 그러면 박수 많이 치고 뜨겁기로 유명한 오늘로 말하자면 오순절교파 사람들이 들어오는군요?’ ‘아니오.’ ‘아 그렇다면 옛날에 우리들이 이단이라고 멸시해서 모조리 교회에서 몰아낸 제칠일교회 교파 교도들이 들어오는군요?’ ‘아니오.’ ‘아 그러면 교리에 있어서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칼빈주의자들만 들어오는군요?’ ‘아니오.’ ‘그러면 누가 들어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속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이 들어오는 곳입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야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처럼 기도에 앞서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신뢰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당신의 나라를 향해 가지고 계신 모든 소원과 꿈과 열망과 비전들을 가지고 계신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에 그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와 자녀와의 하나 된 관계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부흥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임을 알 뿐 아니라 동시에 나아가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고 그리하여 우리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어주심으로 우리 모든 한 지체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사건입니다. 부흥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 까지 상처받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다 강물과 함께 띄어 보내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얘야 세상에 있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완전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나는 온전한 하나님이란다. 나와 더불어 완전한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를 누리자.’ 하나님이 여기로 여러분들을 초청하시면서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