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게으름은 열정이 싫다:
게으름과 선한 일을 행한 반응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19;24)
녹취자: 이 솔
사실 이러한 책의 코드가 사실 지금 오늘날의 사조와는 잘 안 맞습니다. 요즘은 ‘하기 싫으면 하지 마. 한번 밖에는 없는 인생이야. 너 좋은 대로 살아.’라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생각들도 이런 현대인들의 생각들도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로 산업사회의 길을 걸어오면서 사실 사람들은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지금 연세 드신 우리 교인들의 세대 60세 정도 기준으로 보면 힘에 넘치도록 일했습니다. 그리고 직장을 위해서는 무엇을 위해서든 기본적으로 헌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삶 속에서 지금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되고 살 수 있게 되니까 그런 산업사회의 비인간적인 요소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거기에는 우리에게 생각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세요. ‘욜로(YOLO)’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번밖에 없는 인생 이걸 외치는 사람은 대부분 살만한 사람입니다. 이미 경쟁사회에서 승자가 된 사람들이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으로 진짜 약자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만약에 그런 사람들의 구호를 그냥 그대로 따라간다고 생각 없이 따라가면 그러면 점점 더 이 사회에서 점점 더 약자가 되어 갈 것입니다. 이런 반성을 양쪽으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도 힘든 시대를 살아 왔던 한 사람으로써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일에 내몰리고 기계처럼 인간이 일하고 인간의 노동이 아주 값싸게 취급받고 그런 현실에 대해서 너무 맘 아프고 그런 한 시대를 전쟁이 끝나자마자 태어나서 해방은 못 겪었지만 격동하는 시대를 다 겪으면서 살았으니까 그런 것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삶의 방식의 태도에 대해서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가 우리들이 생각을 하면서 우리의 갈 길을 세상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한번 성경에 입각해서 우리의 갈 길을 정해보는 것입니다. 주제 성경구절입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게으른 자는 자기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그림이 나옵니다. 게으른 사람이 무언가 먹고 싶었습니다. 멍하게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었으면 안 그랬을 것입니다. 간식을 먹고 싶었을까 어째든 손을 음식 그릇에 넣었습니다. 손에 음식, 과자 무언가가 잡혔습니다. 이걸 올리기가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걸 시인은 살면서 생생하게 본 것입니다. 이 전체가 이야기하는 것은 게으른 사람은 결정이 없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1. 잠언 19:24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게으름의 모습은 어떠한 것입니까?
자 배고픔을 경험했는데 근데 음식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릇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이 없습니다. 입에 넣어야지만 허기진 것을 면하지만 시작은 했지만 끝을 맺지 못합니다. 무언가 결정이 부족함을 뜻합니다. 게으른 사람의 태도는 습관입니다. 이 태도가 습관이 굳어지면 그의 온 몸은 부지런히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저항하고 반항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게으름은 무엇을 보여주냐면 무언가 일을 시작하지만 끝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게으른 생활은 우리의 정신을 더욱 싫증에 빠지게 만들고 이 싫증은 더욱 더 게으름으로 인도합니다. 이게 계속 순환이 됩니다.
2. 영적인 게으름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들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가장 슬픈 것은 인생을 사는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왜 살아야하는지 목표가 없는 것. 그보다 더 불행한 것은 그릇된 목표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표가 설정되고 그것이 올바르게 설정이 되었고 그것을 향해서 가슴을 뛰는 것만큼 우리가 진짜 살아있음을 느끼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생생하게 가슴 뛰며 살아있게 하는 어떤 진리 하나님의 말씀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은 예전에 몰랐던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자기가 설정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 천지창조의 목적 혹은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 시리즈를 다시 한번 복습하면서 가르치는 것을 복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의 은혜로 우리를 깨우시고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면서 영적인 게으름을 떨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목표를 갖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제 목표가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여기서 여기를 가고자 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여기에 100의 힘이 들고 여기가 목표지점입니다. 정확하게 계산하면 100의 힘이 드는 것으로 계산됩니다. 그럼 문제가 무엇이냐면 실제로 이 길을 걸어가면 뜻하지 않은 사태를 만납니다. 분명히 시간 계산을 하고 갔는데 안개로 비행기가 뜨지 못하고 혹은 홍수가 나서 길이 떠내려가서 길을 한없이 돌아가야 했던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해야 하냐면 여기에서 여기로 도달하기 위해서 100의 힘이 든다면 사실 이사람 맘에는 120쯤 가야 되겠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그리고 도달해야 합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러면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도착하겠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미 이런 희생을 생각하고 빨리 달렸으니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필요한 것을 자로 잰 듯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상황이 일어날 수 있으니 좀 더 많은 것을 예비해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써야합니다.
영적인 게으름이 이런 식으로 반복이 됩니다. 은혜로운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러다가 은혜에서 미끄러집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미끄러집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지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6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를 경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 사랑 이것 때문에 총명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세 번째는 정욕에 이끌림. 이것은 보편적인 정욕이 아니라 개별적인 정욕입니다. 잘못된 특정한 것에 대한 욕심에 이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로가 되어서 몸과 맘 전체를 물들여서 결국에는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네 번째는 실천을 하지 않고 실천 없이 개념만 증거 하는 것입니다. 실천은 하지 않고 계속 지식적으로 생각만 계속 늘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혼자 산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은 아니다’라는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여섯 번째는 태만한 기도생활. 이런 것들이 은혜에서 미끄러지는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첫째 은혜에서 미끄러지게 되면 죄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집니다. 그래서 그 위험을 모릅니다. 세상사람 때문에 아주 밝은 총명이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정욕에 이끌립니다. 그리고 실천은 없고 지식만 늘어납니다.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없으니까 당연히 하나님 앞에 진정한 회개가 없습니다. 당연히 결국 기도 생활은 태만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은혜에서 물러나 부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시간이 되면서 완전히 미끄러집니다. 언젠가 다시 일어나겠지요.
3. 거룩한 삶은 결심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가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무엇으로 입증됩니까?
은혜에 감격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은혜를 받음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에 대한 멈추지 않는 끊임없는 갈망이 있기 위해서는 영은 당연히 성화 생활이 동반이 되어야 합니다. 현실성이 없습니다. 탱크가 비행기를 맞출 가능성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나오는 KT전차에서는 탱크로서는 유일하게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겨냥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기술적 결함으로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데 완성이 된다면 상당히 수준 높은 탱크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많은 포탄을 쏜다고 해도 맞추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대공포 같은 것이 있어서 비행기가 뜨면 하늘에 포탄으로 물샐 틈 없는 화망을 구성해서 비행기를 떨어뜨렸습니다. 지금은 미사일로 해결합니다. 어느 정도로 기술이 발달했는냐 하면 여기에서 쏘아서 그래서 평양에 있는 유리창 몇 번째까지 마칠 수 있다고 하니 굉장한 것입니다. 1994년도 걸프전이 일어날 때만 해도 미사일의 오차가 한 200미터 이상이였는데 4,5미터로 줄고 이제는 1,2미터로 거리를 낮추었으니 엄청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포탄을 쏴도 맞추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달려갈 때 그때 우리의 마음은 그 목표가 선하고 올바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기도하게 되고 그 목표가 이루어 졌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사람들의 맘속에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안타까운 목표가 없는 삶은 성취되었을 때 터져 나오는 기쁨이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는 눈물이 없습니다. 얼마나 무의미하고 건조한 삶이겠습니까? 아무리 편안하고 자신이 만족을 느끼는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행복한 삶이겠는냐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더욱이 ‘이 세상은 하나님도 없고 그리고 인생은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내생에 가장 좋은 가치는 내가 행복을 누리고 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히 이런 목표가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엾은 것일까요? 신령한 것에 대해 멈추지 않는 갈망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그때에 주님의 맘에 선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가 돌아가실 때가 되었는데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새로운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생의 전체가 바로 이 목표를 실천해가는 생이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죽을 때가 이른 줄 아셨을 때도 너무 힘들게 사셨으니 좀 쉬자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이 세상에 보내냄을 받았던 그 목표를 따라서 끝까지 진력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 일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핍박과 시련이 있고 배신이 있었는데 그런대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4.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안타까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한 것을 위해 분투하지 않는 사람은 악한 것과도 피나게 싸우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한 것을 위해 분투하지 않는 사람은 악과 싸워 이기기 위해 분투하지도 않습니다. 악과 싸워서 이기려고 분투하지 않는 사람은 선한 것을 위해서도 열심을 내지 않는다. 이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죄와 싸워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낙심하지 않기 위해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일을 생각하라. 내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은혜에서 물러갔습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해 갑니다. 여기서 바라보는 것은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리스도께서 견디고 참으신 것만큼 힘들지는 않다. 그 분을 생각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한번 자신의 인생이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한없는 자기 연민에 빠지고 반대로 자신의 인생이 살만하다고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면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둘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은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삶입니다. 사람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슴 뛸 이유가 없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때로는 자기를 비난하고 때로는 자신의 선의를 잘못 이해하고 악으로 자신에게 갚는다 할지라도 그런 것에 인간이니까 맘을 안쓸 수 없겠지만 그것을 이겨내어 생사 간에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며 가는 길입니다. 금방 끝납니다. 그리고 어둠의 시작이 내립니다. 설악산에서 어느 교단 총회에서 목회자들하고 많이 모였습니다. 거길 삼일동안 와서 집회를 해달라고 해서 갔습니다. 거기에 제가 눈이 좀 나쁜데 저 멀리서 머리가 하얀 원로 목사님이 세분이 걸어오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를 갖추어서 인사를 드려야 하겠구나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에게 오시는 것을 보니 나를 반가워하고 인사를 하려고 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는데 교수님 왜 이러세요. 저희들이예요. 하는 거예요 제가 가르친 제자들이였습니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교수님 그때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아직도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데 이렇게 보면서 내가 더 젊어보였습니다. 아 세월이 흘렀느냐 그대들을 만난지 엊그제 같은데 내가 막 교수 초년생이 되어 불같이 야단치고 그럴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나보다 먼저 늙어가는구나 그렇게 인생이 덧없는 것입니다. 잠깐 지나가요 젊은이들이 막 까불고 나쁜 짓 하는 것 보면 아 저거 아무것도 아닌데 근방 늙은데 늙지 않아도 어느 날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불치의 병입니다.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어떻게 칼날 위에 자기의 인생을 두고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까불수 있을까 하고 그 용기가 너무 슬픕니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8-39)
우리가 맘 깊이 ‘주님이 이제 정말 수고했다. 이 땅에 수고를 끝내고 오늘 저녁에 너는 내게로 오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셔도 오늘 오후에는 내가 여전히 하고 있을 그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쉽게 미워하지 말고 오늘도 오후에 이렇게 잠시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내가 정거장이 되고 정거장은 나를 거쳐서 또 어디로 가는 것이고 미움은 내가 종점이 되게 하리라. 나로써 내가 마지막 피해자가 되어서 미움을 끝내고 더 이상 또 다른 사람에게 원한이 되지 않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