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녹취자: 김라영
어쩜 이렇게 기가 막힌 묘사를 할까하고 감탄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별로 감탄을 안 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잠언에 대해서 감탄을 하게 됩니다.
저는 6살 때 치과에 가고 56세까지 한 번도 치과를 안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치아에 대해서 무한한 긍지를 느끼고 있었고 치과의사를 하던 몇몇 집사님들이 “목사님 같은 분만 계셨으면 우리는 옛날에 문 닫았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작년부턴가요? 갑자기 어느 날 찬 것을 먹으면 자지러지게 시린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몇 가지를 해보더니 도저히 안 된다고 신경치료를 해야 되는데 거의 다 해야 된답니다. 그래서 일곱 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평범한 음식을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이가 시리고, 뜨거운 물에 과일을 집어넣어서 충분히 데워야만 먹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덕분에 느낀 것은 이에 식초 같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차가운 게 닿아도 자지러질 것 같은데 그 이에다 식초를 한 티스푼 부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묘사하는 바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아주 견딜 수 없이 괴로운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연기가 그런 것이지 않습니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데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게으른 자가 부리는 사람에게 이에 식초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충성된 사람의 반대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추수하는 날의 얼음냉수와 같다고 합니다. 추수해보셨습니까? 추수는 흐린 날 하는 게 아니라 햇빛이 쨍쨍한 날 합니다. 말려야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추수는 낫으로 베는 일을 일렬로 서서 가니까 꾀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모 심을 때처럼 똑같이 진도가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허리를 필 수도 없이 힘든데 딱 두 시간하고 휴식하고 있는 그 때 얼음냉수가 오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번 반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내려다보시면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거기에 두셔서 마음이 너무 시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기에 두어서 주님의 심정이 마치 상한 이에 식초를 부은 것 같고 눈에 연기가 들어가서 눈을 비비는 것 같을 때 그 때의 주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게으른 자에 대해서 이렇게 가슴 아픈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1. 잠언 10:26은 게으른 자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습니까?
부리는 사람이 사람을 시켜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의 가장 큰 고통은 땅을 파는 고통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술자의 기술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인데 그 기술은 아무나 타고 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제대로 된 지도자감은 수억, 수천만 중에서 한 둘 나오게 하십니다. 그래서 각 나라에 대통령이 있지만 절반 이상은 별로이지 않습니까. 몇 년 있다가 감옥에 들어가고 아니면 수배되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대통령들이 있고 나라의 통치자들이 있을 때 진짜 그 만하다 그런 사람은 그 중의 3분의 1도 안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몇 억에 한 두 사람 씩 하나님이 그런 특별한 재능을 주셔서 지도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십여 가지의 기술을 가진 사람 수 십명이 달라붙어 일을 해야 하지만 건물 하나를 짓기 위해서는 한사람의 설계자의 머릿속에서 디자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맡기시는 달란트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게으른 자는 부리는 자에게 이에 식초같고 눈에 연기같으니라. 여기서 게으른 자를 배신자로 바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찌르는 칼이나 창이 되는 것입니다. 사생결단을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 생각에는 그래도 배신자는 되지 않고 게으른 자만 돼도 좀 나은데 성경이 그리고 있는 것은 주님 앞에서 정말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충성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게으름이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남의 밑에도 있어봤고 우체국장할 때는 아래에 직원이 열 세명쯤 있었는데 그만두겠다고 할 때 붙잡게 되는 사람이 있고 아쉽다고 악수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게으른 사람이 바로 그렇게 고통스러운 사람입니다. 게으름이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2. 일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만이 게으름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이것보다 더 빈번하게 발견되는 게으름의 요소에는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내가 이래봬도 십 년째 주일학교 교사야’ 저는 그 연수를 기억하는 것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감당하고 거기에 있는 것도 물론 박수칠만한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열정을 가지고 분발해서 하는 것입니다. 정말 뜨겁게 감당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르다는 이 말 속에는 그냥 나태하게 사는 것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열정을 가지고 살지 않는 흩어진 마음으로 사는 게 모두 들어가는 것입니다.
3. 부지런한 사람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이것은 게으른 사람에게서 발견되지 않습니까?
부지런한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열정입니다. 더군다나 올바른 일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은 안에 열정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라는 제목입니다. 저는 솔직히 그 분을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읽으면서 참 마음에 다가왔던 게 있습니다. 그 분이 소를 하나 훔쳐서 북한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서 고대 쪽에 있는 쌀가게에 가서 자신을 좀 써달라고 했답니다. 쌀가게 주인이 보니 허우대도 멀쩡하고 힘 좀 쓰게 생겼으니까 “쌀 배달을 할 수 있겠냐?” 했더니 “그럼요” 했데요. 두 가마를 자전거에 싣고 달려야하는데 “자전거 탈 줄 알지?” 물으니 “못 탑니다.” 하니까 “넌 안 된다.” “잠깐만요. 제게 삼 일의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밤낮으로 연습을 해서 취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그 주인이 보고 이 친구는 참 대단한 청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쌀 한가마 싣고 달리는 거 절대 쉬운 것 아닙니다. 그런데 해낸 것입니다. 삼 일만에. 그러니까 “너는 뭘 해도 하겠구나.” 그렇게 칭찬을 하면서 결국은 그 아저씨가 쌀가게를 그 청년에게 넘겨줬답니다. 그래서 거기서 사업을 시작하는데, 거기서 새로운 느낌을 받았던 게 뭐냐면 그가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가게 문을 열기위해 새벽에 나올 때, 매일 아침마다 가슴이 설렜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열정입니다. 열정. 자기가 쌀가게를 해도 아침마다 나오면서 나무로 된 문짝을 열면서 가슴이 설레는 그 심정 이해가십니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열정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우리 사업하고 세상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인데 열정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에게서 열정은 잘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열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고 게으름은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고 두 개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렬하게 살지 않으면 다 허무한 것입니다. 잠시 있다 지나가지 않습니까.
이것은 저도 어디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아프리카로 신발을 보급하라고 신발이 너무 남아서 아프리카에 싸게 팔 수 없는지 가보라 했더니 두 사람이 와서 정탐꾼처럼 보고를 하는데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은 원래 신발을 안 신기 때문에 신발을 팔 수 없습니다.”라고 얘기했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신을 신은 사람이 없으니까 잠재적 수요가 무한합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삼성이 냉장고를 러시아에서 히트작으로 팔았던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누가 러시아에서 냉장고가 많이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삼성에서 만들어서 러시아를 집중적으로 공략해서 마케팅을 해서 최고의 매출을 올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사람의 마음에 열정의 여부에 따라서 같은 정보도 다른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자매를 심방했는데 자기 남편이 회심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자꾸 비관하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성격부터 시작해서 남편은 독특해서 예수 믿기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해봤습니까?” 제가 그 자매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얘기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남편에 대해 비관적으로 얘기합니까? 기도해봤습니까? 했겠지요. 금식해봤습니까? 안 했겠지요. 목숨을 걸어봤습니까? 했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도 안 된다고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최소한 사랑은 포기 안 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10인의 정탐꾼과 너무 흡사하지 않습니까? 불신앙의 대표자입니다. 그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신장이 장대하고 우리는 메뚜기 같으니 그들도 우리를 그렇게 봤을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옛날 성경에는 밥이라고 나옵니다. 더 실감나는 번역이자 않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요즘 젊은이들 언어로는 “그들은 우리의 껌이지.”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이것이 벌써 3500여 년 전의 이야기인데도 읽을 때 가슴이 뛰는 이유는 이들 안에 있는 열정이 우리 안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걔네들 이기는 것쯤은 껌이다. 왜? 그들은 보호자가 없고 우리는 여호와가 함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할 때에도 부정적인 언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쭉 얘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의 기운을 빼놓는 형입니다. 그런데 그거 별로 좋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십 인의 정탐꾼들이 보고하는 게 훨씬 체계적이고 논리 정연합니다. 그래서 결국 거기에 있는 수많은 정탐꾼의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사람들에 의해서 설득됐습니다. 그리고 꺼이꺼이 소리를 높여서 온 백성이 울었습니다. 최소한 2백만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목 놓아 울고 있는 광경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심각합니까? 그들은 논리 정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 편이 아니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다수가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주 유명한 말을 남기지요. “One man with God, he is majority.” 하나님이 함께하는 한 사람, 그가 바로 다수입니다. 결국은 이 사람들이 믿음으로 보고한 이것을 깨트려서 이 때 함께 울었던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불신앙이 얼마나 무서운지 한 번 보십시오.
열정이 게으른 자에게서 발견될 수 없지 않습니까? 자기사랑이 게으름인데 반대되는 일인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고백은 끊임없이 피곤한 것입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 그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4. 게으른 자들은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자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게으른 자들을 한 번에 내어 쫓으시면 우리 중 아무도 여기에 구역장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한 때는 게을렀으나 하나님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용주는 성과가 없으면 우리를 한 번에 잘라버리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사람이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때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면 보람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대부분 어립니다. 19살부터 시작해서 복학해서 늦게 들어온 학생들이라고 해봐야 26살 정도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주머니들이 많이 오십니다. 그래서 처음엔 교실을 잘못 들어갔나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 눈빛이 다릅니다. 배우고자 하는 눈빛이.. 그리고 젊은 애들은 연애하랴 뭐하랴 고민거리도 많지만 나이 드신 분들은 그런 거 없지 않습니까. 그걸 하고나서 전도사를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노년에 경로당보다는 대학이 훨씬 더 좋아 보이시니까 그 힘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열심히 공부하십니다.
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 편씩 제 설교를 들어야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배울 때는 기도에 대한 설교, 마음에 대해서 배울 때는 마음에 대한 설교를 듣는데 놀라운 것은 철딱서니 같았던 그 애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손목을 여러 번 긋고 한강에서 뛰어내려서 자살을 시도하던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누가 고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사람들을 고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다가도 주님 만나고 변화되면 하나님은 우리가 진짜 열렬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계륵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계는 닭 계 자고 륵은 갈비입니다. 삼계탕 해놓으면 몸에 안 좋다고 껍질 벗겨내고 다리 잘라내고 그럽니다. 그러면 뼈만 앙상하잖아요. 그래서 결국 취하고 싶지도 않지만 버릴 수 없는 것. 이것을 계륵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 앞에 계륵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추수철의 냉수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얼음냉수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5. 성화의 사람을 살기위해 우리가 추방해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 배어있는 게으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런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적은 일에 충성했으니 많은 것으로 맡기겠다.” 이렇게 주님께 인정을 받고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쓰는 말 가운데 ‘핵인싸’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인싸’는 ‘인사이더’입니다. ‘아웃사이더’의 반대말입니다. 밖으로 빠지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사람. 핵은 그 안에 있는 사람 중 중심인물이다 이것입니다. 모두 모인 사람들 중에 그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진 사람만이 핵인싸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띵작’의 삶을 산답니다. ‘띵작’은 ‘명작’을 뜻합니다. 그래서 띵작의 삶을 살려면 핵인싸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핵심적인 인사이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띵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게으름의 정신을 추방하기 위해. 절제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을 열정을 불태워 일해서 마지막 회고할 때에 ‘2019년도 구역장 시절은 시계를 거꾸로 돌려주셔도 그 이상은 못할 것 같다.’라고 하는 그런 삶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기 전보다 훨씬 부지런한 삶을 살아서 짧은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