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박힌 광경: 게으름으로부터의 교훈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24:32-34)
녹취자: 이 솔
참 예리하잖아요.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좀 누워있자’ 그러면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곤핍이 군사같이 이루리라’ 강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불시에’ 그리고 강압적으로 무언가를 빼앗아가는 사람이 강도입니다. 그 다음에 군사는 무엇입니까? 한두 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방비 되지 않은 사람은 그런 전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바로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1.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눈 먼 자라고 칭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에게 눈 먼 자라고 칭하시면서 ‘안약을 사서 바르라’라고 하시는데 공교롭게 라오디게아가 ‘개성은 인삼!’하면 알아주듯이 로마 전역에서 최고의 안약을 만드는 본산지가 라오디게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약간 조롱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지방에서 안약이 그렇게 좋다며. 그걸 바르면 못 보던 사람도 보게 된다며. 염증도 사라진다며. 굉장하구나. 그걸 사서 너희 눈에 발라라.’ 왜? ‘너희는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 그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자길 살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밭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지혜자에게 “내가 보고 생각이 깊어졌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그런데 ‘보고’ ‘보고’ 똑같이 번역이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다른 단어가 사용이 됩니다. 여기서 사용된 의미는 ‘and’라는 뜻으로 의미가 없습니다. ‘나’라는 1인칭이 붙은 거고 중요한 것은 ‘하자’라는 동사입니다. 그다음에 이것은 ‘라아’라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격변화를 하게 된 것인데 도대체 이것과 이것 하자라는 것인데 원래 ‘붙잡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보았다.’ ‘보았다.’ 둘 다 번역을 했는데 이것은 ‘붙잡다’ 입니다. ‘내가 붙잡다.’ 무슨 뜻이냐면 어느 광경이 선명하게 빡 하고 찍히는 것입니다. 어떤 광경이 빡 찍히면 우리 마음속에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도록 가슴에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남는 것처럼 충격적인 인상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훈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밭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게으른 자의 밭과 포도원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지혜자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잠언을 쓴 사람이 내가 보고 생각이 깊어졌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하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충격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게으른 자의 밭을 보면서 어떤 충격을 받았습니까? 게으른 자의 밭을 보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당연히 풀이 많고 씨 뿌려서 그냥 내버려 두었는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잡초하고 자라서 혹시 거기서 열매를 거둔다 해도 보잘 것 없는 열매입니다. 그런 것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게으른 자의 다 죽어가고 잡초가 잔득 나있는 황폐한 밭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이 사람들은 그걸 보고 충격을 받나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진짜 성실한 농부가 돌보고 가꾼 밭에 대한 그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과 둘을 비교해 볼 때 정말 엄청난 차이구나 하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똑같은 것을 봤지만 모두가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충격을 받지 못하는 것이 충격입니다.
이렇게 “나는 부자라” 이것도 조롱하는 말씀입니다. 그 안약을 팔아서 개성 사람들이 인삼을 팔아서 돈을 많이 받은 것처럼 성주에 가면 참외가 많은데 와 놀랍습니다. 그 집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골목마다 BMW입니다. 쫙 깔았습니다. 승용차만 있는 것이 아니라 BMW SUV 그 차들이 쫘악 깔렸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장로님에게 물어보니 “목사님. 여기는 아주 빈민이 연수익 1억 5천입니다.” 많이 버는 사람은 30억이 넘습니다. 그래서 가을걷이 다하고 성주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다 가서 cc해서 북유럽으로 여행을 갑니다. 그 모든 것이 카드도 아니고 수표도 아니고 완전 현찰 박치기로 수백억의 돈이 때가 되면 움직입니다. 동네가 어떻게 될까요? 한집 걸러 술집 한집 걸러 다방입니다. 성주 사람들이 참외를 팔아서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을 저는 거기서 알았습니다. 평균 3억에서 5억입니다. 이 사람들도 안약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래서 ‘난 부자다. 난 모자란 것이 없다. 그렇지만 네가 얼마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구나.’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기를 봐야 하는데 주관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제가 요새 작심하고 마지막까지 한 번도 빠지지 말고 모두 봐야겠다고 결심한 드라마가 있습니다. ‘sky캐슬’입니다. 제가 세상에 인터넷에다가 1,670원 내고 TV드라마를 본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밤늦게 하고, 출장가면 못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도 신문에 나왔는데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보면서 이렇게 느끼는데 그 캐슬이 사람 사는 캐슬 같지 않습니다. 인간 냄새가 저기서 날까 하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한국 사회의 입시 문제를 진단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많은 시사점들이 그 안에 깔려있습니다. 원래 16부작이면 끝날 것인데 20부작으로 늘리겠다고 합니다. JTBC 방송인데, 시청률이 16%라고 합니다.
‘차라리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서 보게 하라.’ 즉,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기를 봐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항상 위로를 받으면서 후퇴하고 자기보다 훌륭했던 사람을 봐야합니다. 그래서 전기를 읽은 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2. 자신의 게으름을 재는 시금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감화를 받고 그로 인하여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게으른 사람을 향해 거룩한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 자신이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면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라면 게으름을 향한 분노가 솟아납니다. 난 왜 이렇게 게으르게 살까 하는 분노를 느껴야 합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성격이 너무 완벽주의자이고 일생을 채찍질 하며 자신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 사람에게 부지런히 살아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달리고 있는 사람을 더 채찍질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그리고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을 혹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부지런하게 살라는 메시지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올바르게 깨닫는 자유를 줍니다. 제가 『게으름』 책을 썼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말을 못하겠습니다. 나의 양심에 손을 얹고 나는 거의 게으르게 살지 않았습니다. 특히 신학대학 야간 4년, 신학대학원 3년, 그리고 첫 학교에서 교수로 4년. 그 후에 살았지만 그 3-4년 교수로서의 기간은 솔직히 다시 한 번 그 체력을 주시고, 다시 한 번 그때로 돌아가라고 해도 그 이상은 못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서 게으름에 대한 도전을 받았고 그것이 저로 하여금 가혹하게 혹사하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진리에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들은 그 자유를 얻은 사람들에게는 그 목표를 자기를 자기가 세우는 어떤 목표를 향해서 자기를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것이 하나님이 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이상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의 육체가 감당을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쉽니다. 그리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제 마음을 아시지요. 더 하고 싶은데 육체가 감당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에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지런히 살면서도 방향이 잘못되거나 혹은 우월한 체력과 더 많은 시간 우월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많이 했지만 더 많이 할 수 있는데 못한 사람은 자신이 양심이 있으면 가책을 느낄 것입니다. 당연히 가책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최선을 다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마음속에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있지 않다면 그건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사는 사람은 자신의 깊은 본성에 있는 게으름에 대해서 자기 부정이 있습니다. 그런 자신을 싫어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다른 사람이 게으르게 살 때 이 사람이 미워서 분노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너무 안타깝다는 느낌을 드는 것입니다. 저 사람에게도 한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저시간이 나에게 옮겨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없이 게으르게 사는 사람 1도 부럽지 않습니다. 1도 부럽지 않습니다. 정말 부럽지 않습니다. 모든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시간을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3. 아무리 인생이 바쁘다 할지라도, 우리가 반드시 부여잡고 살아야 할 우리 삶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인생이 내가 본성을 게으르게 태어났을 수 있고 자연적인 본성을 부모님에게 물려받아서 부지런할 수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항상 새벽 4시에 일어나셨습니다. 4시에 일어나셔서 첫 번째 뉴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주변에 누가 자던지 말던지. 그리고 일어나셔서 마당이라도 쓰셨습니다. 그 인상이 항상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신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엄청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옛날 젊은 시절부터 배인 생활 습관입니다. 그리고 일찍 주무셨습니다. 이렇든지 저렇든지 어째든 우리가 붙잡고 살아야 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게으르게 살지마라 하십니다. 그러면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산 사람이 그 사람들만 하나님 안에서 휴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6개월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못 쉴 줄 알았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이야기 합니다. ‘교회는 당신이 없어도 1년을 버틸 거야. 그런데 당신이 교회 보고 싶어서 1년 못 있을 걸.’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진짜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해봤습니다. 그런데 되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데 집회 갈 때와 휴식을 취하러 갈 때의 그 느낌이 다른 것을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봤습니다. 인천 공항을 순수하게 휴가를 받아서 가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는데 벌써 자동차 소리가 틀리는 것 같았습니다. 비행기 타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좀 쉬라 그러셨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게으르다.’ ‘게으르지 않다.’ 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비춰주는 양심의 빛 앞에서 압니다. 그것을 알 수 없도록 방해를 받는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온천지 자기 주위에 모두 다 게으른 사람밖에 없으면 거기서 자기의 표준을 찾으려 하면 안 됩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황금알을 매일 하나씩 낳습니다. 주인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주인이 욕심이 많아졌습니다. 거위 뱃속에 가득 들었는데 한 개씩 내놓는 것이다. 이 녀석 배를 가르면 게를 타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갈랐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순간에 욕심을 위해서 꾸준히 나올 이익을 없애버린 거위의 주인처럼 우리가 세상에서의 성공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시간을 다 써버리고 진을 모두 쏟아 붓습니다. 기도할 시간도 없고 성경 읽을 시간도 없고 그건 삶의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삶 자체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옹달샘의 물을 고여야 퍼 먹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경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4. 열렬함을 가지고 순종하지 않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갈등은 무엇을 야기합니까?
게으른 사람은 대부분 불순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언가를 명령하실 때 아멘 하고 즉각 순종하는 것 자체가 충만한 에너지의 상태를 요구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이미 그 에너지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경우에는 속에서 계속 갈등이 일어납니다. 순종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소욕이 계속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게으름과 실증 게으름은 육체의 게으름이고 실증은 정신의 실증입니다. 영혼의 실증. 이두개가 만나서 결국 우리를 노예처럼 만듭니다. 죄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게으름은 실증을 가져오고 실증은 게으름을 증진시킵니다. 영혼이 실증을 느끼는 문제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을 해야 합니다. 열렬하게 순종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고 싶은 마음 넉넉히 순종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속에서 그런 작용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 안에서 치열한 전쟁터처럼 판세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마음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부지런하게 살아라 게으르게 살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향한 사람의 열심 속에서 최선을 살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삶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5. 기독교 신앙의 진수는 무엇을 통해서 맛볼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처럼 공부를 강조하는 교회도 없습니다. 이과를 나오는 사람은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기 힘들다면서요.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그리고 설교를 하면 기도 많이 한 사람을 불러다 간증을 시킵니다. ‘전도합시다.’ 전도 성공한 사람을 불러다 놓고 전도 강의를 듣습니다. 박수를 치고 감동을 받습니다. 대단한 삶이다. 요즘도 전도가 되는구나. 그리고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갑니다. 이렇게 해서는 신앙의 진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참된 신앙은 실천을 통해서 진수를 맛보게 됩니다. 기도에 대해서 배웠으면 가서 무릎을 꿇으면 됩니다.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전도를 실제로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이렇게 배운 내용의 진수가 무엇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남의 신앙을 즐기는 그런 생활은 우리들이 주된 신앙생활로 삼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마지막 강도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일생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십자가에서 서서히 죽어가면서 예수님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우리가 그렇게 구원받으면 신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는 반대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사는 지도 모르고 오늘 아침에 설교한 내용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만났기 때문에 좌표가 없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데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구조 요청을 해도 사람이 못 구하러 오고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는데 산의 이름도 모르겠습니다. 소나무만 가득 보입니다. 그랬다가 평생 강도짓을 하면서 먹고 살았고 이 사람들이 사형당할 정도가 되었으니까 그냥 단순히 돈을 몰래 훔쳐온 사람들은 이정도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당연히 인명을 살상했습니다. 그래서 엄중한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분을 믿었습니다. 이제 인생의 좌표가 나왔습니다. 살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죽습니다. 이 사람이 ‘야 신난다. 평생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다가 죽는 이 순간에 천국을 가는구나.’ 했을까요? 아닙니다. 얼마나 살아보고 싶었겠습니까? 못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교회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장로님들이 물러나면서 나이를 앞당기고 자신들이 물러나는 65세 되는 사람들을 교회 모든 직위에서 다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65세 아직 한창인데 성가대 지휘하신 분도 그만하라 교사하시는 분도 그만하라 그때가 우리는 65세에 내쫒지 않지만 명백한 것은 우리가 그만 해야 하는 날이 온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으나 섬길 시간이 없구나. 똑같이 아직은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일은 많은 이제 나는 더 이상 섬길 시간이 없구나 하는 시간이 옵니다. 열심히 사시길 바랍니다.